옛날 옛날 한옛날에, 나쁜 마녀의 저주를 받은 가여운 공주님이 있었습니다. 외딴 성에서 홀로 지내는 공주님은 쓸쓸했지만, 공주님을 지켜주는 기사님 덕분에 무섭지 않았습니다. 하루 중, 이때가 제일 기다려진다. “사장님! 너구리 끓일게요!” 벌떡- 일어나자마자 진즉에 손에 움켜쥐고 있던 너구리 두 봉지를 허공에 달랑거렸다. 내 책상과 ㄱ자로 이어진 자리에서 설렁설렁 졸고 있던 최성수 사장이 침을 슥 닦으며 힘겹게 눈을 떴다. “혜성아.” “네?” 최사장이 요리조리 목운동을 하며 기지개를 켠다. 그리고 물 끓이기 전에 라면 봉지부터 뜯는 나를 반쯤 뜬 눈으로 멍하니 쳐다본다. “도저히 안되겠다. 맨날 라면만 먹었더니 이젠 냄새 맡기도 힘들다. 넌 안그러냐?” “그럼 어떡해요. 지난번에도 그래서 집에서 밥 말아먹을라고 밥 싸왔다가… …라면만 세 개 끓여먹었잖아요.” “나가서 김밥 사와.” “정말요?” 저인간이 왠일이지? 깜짝 놀라서 토끼눈이 된 나와 달리, 최성수가 히죽히죽 웃으며 또 하품질이다. “응. 니 월급에서 까자.” 너구리 집어던질뻔했다. “…라면 먹어요.” 톡 쏘는 내 말에 최사장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진작 저럴것이지. “알았어! 알았어! 새끼… 나 지난달 니 월급도 대출받은거에서 준거야!!” 손가락에 끼고 달랑달랑하는 이천원을 잽싸게 빼앗았다. “알거든요. 그래도 제가 의리가 있잖아요. 히히.” “…쯧. 빨리 나가서 김밥 두 줄 사 와, 임마!” “예썰!!” 최성수 맘 변하기 전에 빨리 나가야겠다. 2층 계단을 후다닥 내려와서야 깨달았다. 잠바 안 걸치고 나왔다는 것을… 2월의 혹독한 바람을 온 몸에 맞아가며, 나는 충무로 구석탱이에 박혀 있을 김밥집에 갔다. 온 몸을 웅크린 채 입밖으로 빠져나가는 솜털같은 입김을 헤치며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아, 진짜 춥다. 요즘 언론에서도 난리인, 러시아 동계올림픽… 거기서 김연아 선수가 두번째 금메달을 노린다는 둥 소식이 나열된 스포츠 신문만 줄창 읽었던 오전… 음… 어제랑 비슷하다. 쇼트 트랙 예선전이 오늘이랬나, 내일이랬나? “아줌마! 김밥 두 줄이요!” 단골 분식집에 들어가자마자 꽥 소리쳤다. 아줌마가 날 보고 그 꼴로 여기까지 왔냐면서 깜짝 놀란다. 남방에 털쪼끼만 껴입은 내가 신기한가보다. 하긴… 나도 내가 신기해… 김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천원들고 무작정 나온거니까. “김밥 말고 다른것도 좀 먹어! 그놈의 회사는 맨날 김밥이야? 내가 단골만 아니면 제 값 받아야 되는데, 쯧쯧.” 저소리 왜 안하나 했다… 속으로 우거지상을 쓰며, 겉으로는 활짝 웃었다. “에이, 이모~ 팔십살까지 보장된 김밥 보험 들었잖아요~!” “뭐래? 호호호. 하여간 넉살은 좋아가지고… 옛다. 한 줄 더 넣었어. 자주 와.” “예썰!” 역시 여자들은 애교에 약해… 푸짐한 몸매의 분식집 아주머니 덕분에 오늘도 진수성찬이다. “벌써 몇 년째 단골인데… 에이. 단무지 좀 더 줘요.” “허이구? 거기 김치도 싸줬는데?” “예? 정말요? …우리 이모밖에 없다니깐!!” 김밥 세줄에, 오뎅 국물, 단무지와 김치 특전이라… 나는 룰루랄라 거리며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골목길을 무섭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게… 내가 이 충무로 골목길에서 가끔 김밥 사러 뛰어다닌지도 꽤 됐네. 아줌마한테 인사치레로 몇 년째 라고 쫑알거린지가… …4년째다. 뭉클- 이유없이 가슴이 미어질때가 있다. 지금처럼… 나는 그때마다 계절에 상관없이 행동을 멈췄다. 멍하니 흐트러진 시선으로 세상과 마주한다. 요즘은 이런 적이 별로 없었는데… 4년째로 접어드는구나-라는 짧은 문장이 머릿속에 스치자마자 걸음이 멈췄다. 문정혁이 신기루처럼 내 앞에서 사라진지 벌써 4년이나 지났다. 문정혁과 전진. '그것들'이 내게 준 아픔이 깡그리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로 허무하게 4년이 지난 것이다. 전화 한 통, 소식 한 통, 편지 하나 없이 네 번째 겨울을 맞는다. 서러울만치 아름다워 가슴이 벅차오르게끔 만드는 비단결 눈송이… 세상이 비단옷을 입었다. 주변 사람들이 미친놈처럼 쳐다보는게 피부에 닿을 때 쯤, 나는 김밥을 품에 안고 열심히 달렸다. 발이 푹 들어갈 정도로 쌓인 하얀 눈 덕분에 온 몸이 얼얼하다. “완전 추워요!!”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마자 히터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덜덜 떨었다. “김밥은?” 저놈의 최성수가 진짜…! 테이블에 신문지좀 펴 놓고 있을 것이지, 내 머리털에 쌓인 눈덩이 보고 할 말이 김밥밖에 없나? 척- 허공에 김밥봉지 보여주자 최성수가 몇 년은 굶주린 표정으로 달려들었다. “사장님! 물 안 올려놨어요?” “깜빡했다. 임마. 빨리 물 끓여라.” “어휴….” 내가 왜 저인간 말에 혹해서 이 길을 선택했을까…! 오늘도 똑같은 문장을 머릿속에 빚으며 나는 뿔룩 입을 내밀었다. 오래 전, 엑스트라 아르바이트 할 때부터 안면이 텄던 최성수 조연출 기사. 박감독에게 나를 보여주려고 했던 최성수. 그는 내가 스무살 2월에 검정고시 시험 합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스카웃을 제안했다.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설립했다는 최성수 말에, 그때는 정말이지 당장 스타가 되거나 회사의 대단한 인물이 될 줄 알았드랬지… “오올! 얘 마스크 죽인다. 어떻게 이런 애를 픽업했지? 대단하다.” “…….” 저게 기획사 사장이란 인간이 할 소린가. 검색 사이트에서 온갖 기획사 소속 연예인들 구경하면서 감탄하기 바쁜 최성수를 보니 한숨만 나온다. 경영기획부, 관리부, 프로덕션 사업과 홍보 마케팅 사업… 이 모든걸 충무로의 13평 코딱지만한 사무실에서 사장님이랑 나랑 둘이 한 지 3년이 되어간다. 처음에는 직원도 있고, 그럭저럭 사무실처럼 생겼었는데, 최성수 사장이 제때 임금 지급을 못해서 하나 둘 퇴사하더니 결국 나만 남았다. “혜성아! 냉장고에 김치 남았냐?” “아줌마가 김치도 싸줬어요.” “오올!! 참, 내일부터 일주일간 나 삼영에서 추진하는 기획일 해주기로 해서, 너 혼자 사무실 지켜야 되는데, 괜찮지?” “…….” 믿어지지 않지만 서른다섯살의 평범하게 생긴 최성수는 보기와는 달리 중대에서 예술행정과 경영을 전공했다. 검정고시 패스가 학력의 전부인 내 눈에, 일 할 때의 사장님은 대단하게 느껴진다. 단 둘 뿐인 회사라지만, 일단 공연기획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하시기 때문이다. 조명부터 컨셉, 스폰, 마케팅까지… 지금도 개인 비지니스에 뛰어든 최성수를 스카웃 하려는 큰 회사들이 종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장님은 자기가 만든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 대학 나오고, 이 계통에서 오래 있어서 그런지 최성수는 인맥도 넓다. 그래서 적자생활 하다가도 종종 일이 들어오고 크고작은 스폰을 덥석 무는가 보다. 하지만… 공연 기획은 공연 기획이고, 우리 회사는 연예사업 기획사인데… 라면과 김밥으로 허기를 채우고 오후 시간이 되자, 최성수가 불현듯 나를 자기 쪽으로 부른다. 바퀴 의자를 굴려서 쭈르르- 최성수 자리로 갔다. 그는 두 장 짜리 서류를 펄럭이는 중이었다. 민망하게도 4년 전에 내가 작성했던 신상 정보 프로필이다. “프로필 새로 쓰자.” “바뀔 게 없는데요? 어디 봐요.” 새삼스럽게 왜 프로필을 새로 쓰자는 거지? 어차피 일이라봤자 엑스트라 아르바이트, 운 좋으면 대사 몇 줄 있는 조연 중의 조연… 이 정도 일만 하는 나인데… 최성수가 내민 프로필 용지를 샅샅이 훑는 나와 달리, 그는 내 얼굴을 면밀히 관찰했다. “신혜성. 너는 진짜… 열아홉살때랑 지금이랑 변한게 없다. 더 중성적으로 변했다고나 할까? 딱 너같이 생긴 놈들을 여자애들이 환장해서 좋아하는데…….” 울컥. “사장님. 저 스물세살의 대한의 건아거든요? 태권도 공인 4단이예요. 돈만 있으면 도장 개설할거거든요.” “나 믿어. 너 꼭 성공시킬거야.” 울컥 취소. 가끔 최성수는 나를 얼마나 믿는지 진심으로 표현해준다. 아마 내가 최성수를 배신하지 않고 이자리에 머물러 있는 이유를 꼽으라면… 사장님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아, 이거 바꿀게요.” “뭐?” 프로필의 끝 부분을 가리키며 내가 눈을 빛내자, 최성수가 고개를 쭉 내민다. “좋아하는 노래. 이 항목이요.” “거위의 꿈 이라면서?” “그건 2위 됐어요.” “2위? 야, 니가 무슨 노래 좋아하는지 아무도 안 궁금해 해. 프로필이라봤자 니 경력, 나이, 끼, 이런거 알아보려고 작성하는거지 뭐.” “그래두요. 저 좋아하는 곡 일순위 바꿨단 말이예요.” “뭔데?” “지난번에 새벽에 라디오 듣는데, 박정현이 나왔거든요? 새벽 두시에서 네시 사이에 하는건데, 글쎄. 박정현이 열일곱살땐가? 그때 직접 만든 곡이래요. 왠지 제 필과 잘 맞아요.” “…….” 최성수는 또 시작이냐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자기 피알에 능해야 살아남는 이 세계에서, 나는 말이 많아졌다. 다른 감독들이 가끔 나한테 '너 뭐하는 놈이냐?' 식으로 물을 때, 처음에는 버벅거렸지만, 지금은 제발 그만 말하라고 할때까지 떠든다. 처음 보는 감독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니, 최성수 앞이라고 오죽할까. 나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제목은… 믿어요.” 최성수가 벌써 질렸는지 허공에 손을 휘휘 젓는다. 내 자리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혜성아. 너 최근 살은 안쪘지? 그냥 프로필 그대로 하자.” “사장님! 이거 고쳐달라니깐요? 저 청취곡 1번 바꼈어요!” “알았다. 알았어.” “가사중에 이런게 있어요….” “뭔데?” “…….” 나는 진짜 이 노래가 좋아져서 제대로 설명해주고, 이 노래가 왜 나와 맞는지 피력하고 싶은데 사장님 표정 보니까 김이 팍 식는다. 딴 사람은 몰라도 사장님은 나에 대해서 다 알아야 되는거 아냐? “뭔데?” “됐어요.” 함박눈이 포근히 내리는 차창을 힐끗 쳐다보며 결국 내 자리로 돌아갔다. 박정현의 믿어요. 이 노래가 얼마나 좋은데… 결국 사장님이 그만 부르라고 하던지 말던지 내 입이 지 멋대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믿어요. 난… 돌아올 그댈… 믿어요. 난 사랑을… 이별에 가려져도 만나야 할 사람들은… 언젠간 만날 테니… “사람들은 쉽게 말하죠… 시간이 지울 거라고… 그 흔한 사랑 하나 잊지 못해 왜 바보처럼 사느냐고….” “혜성아. 너 지금 열 번째 부르는거야.” 히터 앞에 쪼그려 앉아서 위험하게 담배 피우기 시작하는 최성수의 중얼거림에, 내 목소리는 더 커졌다. 이별에 가려져도… 만나야 할 사람들은… 언젠간 만날 테니… “오늘은 뭐 했어?” “음… 사장님이랑….” 부드러웠던 민우의 미간에 줄이 그어졌다. “또 둘이 있었어?” “…….” 목소리도 험해졌다. “둘이 뭐했어?” “야… 이민우. 너 우리 사장님 별로 안 좋아하는건 알겠는데, 너무 티내는거 알아? 회사가 사정이 안좋으니까 아직 직원이 없어. 그래서 사장님이랑 나랑 한숨 푹푹 내쉬다가 하루 일 다~ 끝나는데….” 오후 세시에 퇴근하고 집에 오면, 늘 그렇듯 이민우가 쫓아다니면서 이것저것을 캐묻는다. 그는, 고삐리때 입버릇처럼 말했던 것을 진짜 실현시켰다. 수능 보면 나랑 산다는 건 농담이 아니라 진짜였다. 김동완이랑 붙어다니는지 어떤지 내가 알 바 아니지만, 군대 까지 착실하게 갔다 온 이민우. 올해 3월에 3학년으로 복학한다. 고모와 고모부를 안심시키기 위해 대학은 꼭 갈 거라고 했던 이민우는 현재 서울 중위권 대학에 다닌다. 태어나서 이민우가 이렇게 악착같이 계획 지키면서 사는거 처음 봤어… 이민우 덕분에 가뜩이나 좁은 집이 훨씬 작아졌다. 집에 오자마자 습관적으로 냉장고 문 부터 여는 내 뒤에서, 이민우가 자연스럽게 코트를 벗겨준다. “연극은.” 그가 내 코트를 벗기는걸 이젠 나도 그러려니 냅둔다. 오… 냉장고에 싱싱한 귤 군단이 있다. 재빨리 귤을 꺼내서 껍질 까자마자 한 입 깨물었다. 완전 맛있어… 하늘에서 눈 대신에 귤 떨어졌으면 좋겠다. “신혜성. 연극 어떻게 됐냐니까?” “연극? 아, 다음주 월요일에 대본이 온다는데… 회사에 대본 오기 전에, 내가 가서 직접 받을라구.” “너 연기 해 본 적 없잖아.” 울컥. 이민우는 자꾸 내 신경을 건드린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있어! 내가 4년동안 한 대사 다 모으면!!” “모으면, 모으면 뭐?” 제대하자마자 짧은 머리칼을 은색으로 염색한 이민우… 그가 팔짱 끼고 냉장고에 비스듬히 기대서 킥- 웃는다. 저럴 때의 이민우는 내 사촌이라는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근사하다. 군대 갔다오더니 얘도 옛날 문정혁처럼 리뉴얼 시스템을 부착했나봐… 이민우의 추궁에 나는 괜스레 벽 쳐다보면서 우물거렸다. “…그래도 대사 다 모으면 십분은 돼.” “일분 십초겠지.” “…….” 그의 눈동자는 잔잔한 수면 위로 초등달이 비치는 깊고 푸른 밤바다같다. 쳐다보고 있으면 불투명 수채화처럼 아련하다. 그래서, 가벼운 농담에 반응하려다가도 나는 그의 눈동자 앞에서 머뭇거린다. 언제나 나를 보면 눈동자가 젖어 있는 듯 한 착각을 주는 이민우… 갈수록 신기하다. “그래서. 오늘도 최사장이랑 농담 따먹기 하고, 테트리스 했냐? 점심에는 사무실에서 컵라면 먹을까, 귀찮지만 끓여먹을까- 십분 넘게 고민하다가 끓여먹고?” “와… 이민우. 너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알았어? 라면 끓여먹은것까지… 장난 아니다. 솔직히 말해봐. 너 맨날 나 따라다니지! 그치!” “바보냐? 너 맨날 하는 패턴 똑같잖아. 하루는 컵라면, 하루는 끓이는 라면. 이렇게 반복되잖아. 어제 컵라면 먹었다며? 그저께는 최사장 좋아하는 삼양라면 먹었으니까, 오늘은 너 좋아하는 너구리 먹었을거 아냐.” “…진짜 천재다. 이민우.” 천재 이민우에게 놀라서, 오늘은 김밥도 먹었다는 말 할 타이밍을 놓쳤다. “신혜성. 너랑 살면 일곱살짜리도 다 알아 맞출 만 한 상황이야.” “그런가? 아! 오늘, 신문 봤냐?” “뭐… 너 매일 보는 스포츠신문?” “응!!” “…….” 김연아가 트리플 악셀 어쩌구 저쩌구, 이번에도 독보적인 존재로서 어쩌구 저쩌구, 금메달 어쩌구 저쩌구. 온 국민이 열광하면서 동계올림픽 시청하는데, 그 소식을 안 봤다면 너는 대한의 건아가 아니야. “왜? 이민우! 봤냐니깐?” 좁은 거실 의자에 앉아서 흥분하는 내가 어이 없었는지 이민우가 혀를 차며 방에 들어간다. 순돌이가 자는 중이라서 그런지 이민우 행동이 굉장히 조심스럽다. “진짜… 신혜성. 저렇게 대책없이 말할때 옛날에는 귀여웠는데… 지금은 무식해 보여. 쯧쯧.” “!!” 뭐라고!! 방에서 나와 현관에서 운동화를 구겨신는 민우 뒤에서 두번째 귤을 까먹던 나는 그대로 굳었다. 저게…! “나 운동하러 간다. 오늘 니가 빨래 할 차례야. 깨끗하게 널어 놔. 내 와이셔츠 목 부분은 빨래 돌리기 전에 세제 묻혀서 한 번 비빈 후에 돌려야 되는거 알지?” “야! 이민우!!” 변했어… 변했어! 변했어! 목에 때 졸라 많은게! 처음 나랑 살기 시작할때만 해도, 말 수 없고 진짜 김동완인지 개새낀지 하여간 그놈 따라하는거 팍팍 티났었는데… 이민우가 내 앞에서 무게잡고 조용히 집안일 하면서 지내는거… 딱 일주일 갔었다. 처음 우리는 숨막히게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했었다. 내게 조심스러워진 이민우, 말 수 없던 이민우… 그런 이민우 눈치보고, 김동완과 엮여있는 그가 맘에 안들어서 종종 신경질부렸던 나. 4년을 지지고 볶고 살아본 결과, 어느새 우리 관계는 예전처럼 돌아갔다. 내게 톡톡 쏴대다가도 말도 못하게 친절해지는 이민우와, 그런 이민우 눈치 안 보고 대강대강 잘 지내는 나. 이민우가 나간 자리를 확 쏘아보고 있는데, 순돌이가 내 옆에 와서 다리를 끌어안는다. “삼촌….” 잠에서 덜 깬 우리 순돌이 보니까 짜증났던 기분이 확 풀렸다. 순돌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순돌아~ 우리 순돌이 뭐했어?” “꾸야.” “?” …꾸야가 뭐지? 꿈 꿨나? 어린게 몽유병 증세가 있어서 얼마 전부터 억지로 약 먹이긴 했는데… 나는 걱정스런 맘에 순돌이한테 그게 뭐냐고 한 번 더 물었다. 순돌이가 반쯤 풀린 눈으로 하품하며 뭐라고 쫑알거린다. “꾸꾸야네 알과자아~ 알과자~ 나~ 알과자~” “??” 음… 잠에서 깬건 확실한데… 꾸야가 뭐지? 한참을 고민하면서 머리굴려봤자, 나는 순돌이가 짜증내다가 울때까지 그게 뭔지 알아내지 못했다. 결국 칭얼거리는 순돌이 어부바 한 상태에서 이민우한테 전화했다. “민우야. 꾸꾸야 꾸야 알과자가 뭐야?” [헉, 허억, 뭐라고?] 런닝 머신에서 열심히 달리기질 중이었는지, 이민우 목소리가 굉장히 거칠다. 누가 보면 응응응 중인줄 알겠어… 몇 번을 말해도 못알아듣는 이민우 때문에 확 짜증이 난 나는, 등에서 칭얼대는 순돌이 엉덩이를 추스르며 꽥 소리쳤다. “꾸야!! 꾸꾸야!! 알과자!!” [!!!] 젖먹던 힘까지 다 해 소리친 결과, 우당탕!! 핸드폰 저 쪽에서 요란한 소음이 들렸다. 곧이어 사람들이 이민우에게 괜찮냐고 묻는 소리도 작게 들렸다. 넘어졌나? 조금 미안해지는데? “…그게 뭐냐구….” [너때문에 놀라서 넘어졌잖아. 졸라 쪽팔리게!!] “그랬어? 큭큭. 미안. 근데 꾸꾸야 알과자가 뭐야?” [순돌이가 아까 열심히 보던건데… 방에 있는 책 중 하나야.] “알았어.” 뭐라고 지랄해대는 이민우의 목소리를 사뿐히 닫았다. 갈수록 무거워지는 순돌이 들쳐업고 난장판이 된 방에 들어갔다. 동화책부터 장난감까지… 진짜 제 자리에 놓인게 하나도 없다. 순돌이 다칠까봐 곳곳에 보호대 설치한 내 방… 예전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순돌이가 혹시나 돌려서 입에 넣어버릴까봐, 혹은 잘못 부딪힐까봐 옷장 책장 손잡이까지 몽땅 뽑아버렸으니까… 요리조리 방을 뒤지다가 침대에 펼쳐진 동화책 발견. 잽싸게 읽었다. 유아용 동화책이라 그런지 거의 그림이고, 글자는 얼마 없다. 제목은 꾸야의 꾸꾸야 알과자.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지은이는 '로트'… 외국 사람이 쓴 책인가? 1분도 안 되서 책을 다 읽은 나는 절망에 빠졌다. 동화책에 나온 독수리처럼 생긴 꾸꾸야의 알과자는, 말 그대로 꾸야라는 새끼만 쳐먹어대는 동그란 모양의 알 이었다. 왜 이런걸 만들고 지랄이야. 저런게 세상에 판다고 보는건가! 속으로 부글부글 대다가, 불현듯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순돌이 옷입자~ 삼촌이랑 시장 가자~!” “삼~촌! 삼촌! 나 꾸꾸야는?” 순돌이 옷부터 챙겼다. 애가 발육상태가 너무 좋아서 큰일이다. 벌써 세 달전에 산 옷이 작아지고 있다. 이름을 순돌이로 짓지 말았어야 되는데… 애가 보통 애들보타 살집이 있다. 어쨌든 오늘 저녁 반찬은 메추리알이다. 난 천재일지도 몰라. 메추리알을 알과자라고 해서 우리 순돌이 먹여야겠다. “그래그래~ 삼촌이 알과자 만들어줄게~!” “진짜?” “응~ 옷 입자~ 아코~ 추워라~ 저기 봐, 순돌아. 밖에 바람소리 들리지? 쌩~ 쌩~ 아코! 추워라!” “안추운데….” “아니야. 여긴 안전한데, 밖에 나가면… 아코! 아코! 추워라! 순돌이 추워.” “…….” 순돌이 수준에 맞게 오버 액션을 취해주는데,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순돌이의 시큰둥한 눈빛… “순돌아, 왜?” “나 애기 아니야!!” “…….” 올해 들어 다섯살 된 순돌이는 자기를 애기 취급하는 걸 싫어한다. 어린게 정말 조숙하다. 다섯살이면 엄마 아빠 찾을 땐데… 일부러 안 찾는건가? 작년에 우리집 처음 왔을땐 누나랑 매형 진짜 많이 찾으면서 서럽게 울었었는데… 애기가 애기이길 거부하다니… “삼촌!! 빨리 가아!!” “어? 어, 그래.” 애기가 나를 챙기다니… 순돌이 손에 장갑만 두 겹이나 입혔다. 춤을 추듯 휘몰아치며 내리는 함박눈… 순돌이는 눈 온다고 신기해 하며 작은 다리로 깡총깡총 뛰었다. 아, 고모 전화왔다. 자꾸 도망가려는 순돌이 손을 꽉 잡고 겨우 플립 열었다. [시장 간다고? 혜성아. 조만간 고모가 순돌이 데리러 갈게. 아줌마 한 명 구했다.] “예? 괜찮은데….” [너도 회사 다니고 바쁜데 고모가 도저히 안되겠드라. 고생 많네, 우리 혜성이.] “아니에요. 고모… 저도 순돌이랑 있으면 좋아요.” [좋긴. 애가 나랑 민형아빠보다 이상하게 너랑 민우를 따라서 골치였지. 순돌이가 지 애미 애비 안 찾냐.] “예. 지금은 진짜 괜찮아요. 작년에만 그랬지… 지금은….” 고모는 혹시 내 상태를 다 알고 있는거 아닐까? 다음주부터 연극에 참여하는 덕분에 그렇잖아도 순돌이 봐 줄 사람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고모 덕분에 한 숨 돌리게 생겼다. [민경이 그년 그건 사람도 아니다. 내가 그생각만 하면 속상해서 원….] “에이, 고모. 누나가 회사 다녀서 그런거지, 종종 순돌이 잘 지내냐고 전화하고 그래요.” [진짜지.] “그럼요~!” 한숨 푹푹 내쉬는 고모를 겨우 달래고 끊었다. 사실 민경이 누나가 나나 민우한테 전화 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목동 아파트에서 살던 고모네 식구는, 현재 압구정동에 있는 더 좋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고모는 고모대로 사업 번창하는 고모부 내조하느라 정신없게 지내고, 민형이 형은 백수인데도 불구하고 순돌이를 봐주지 않았다. 오갈데 없어진 순돌이를 돌보겠다고 나선건, 가진 거 하나 없는 나였다. 물론, 애기 분유부터 옷, 돈 등등 여러가지를 고모부가 챙겨주긴 했지만… “삼촌! 삼촌! 눈사람 만들자!! 삼촌!!” “이따가, 이따가 하자. 지금 꾸꾸야 사러 가야지.” 저렇게 예쁜 애를… 그것도 자기 자식을 어떻게 모른 척 하고 지낼까. “꾸꾸야!!” “그래그래. 꾸꾸야. 그거 사러 삼촌하고 가자~!” 티없이 맑은 순돌이를 쳐다보고 있으면 가슴에 서러움이란 고드름이 맺힌다. 버림받은 순돌이를 보면… 4년 전, 막막한 세상에 혼자 남았던 내가 오버랩된다. 민경이 누나와 매형은 제작년에 이혼했다. 매형이 다른 여자랑 딴 살림 차린 것이다. 제대로 바람을 피운 사람 답지 않게 매형은 당당했다. 고모네 집이 한바탕 난리 났던 건 당연지사, 이혼 도장 찍자마자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 처럼 순돌이 못 키운다고 서로에게 넘겼다. 세상에 그런 부모 있다고 말로만 들어봤지, 민경이 누나가 그럴 줄이야. 덕분에 고모와 내가 번갈아 가면서 순돌이 봐주다가, 작년 중반부터는 순돌이를 우리집에서 키웠다. 왜냐면… 애가 슬슬 눈치 보고 말귀를 잘 알아들어서 이리 저리 옮기면 안될것 같아서… 민경이 누나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순돌이가 내 삶에 끼어줘서 나는 고마운게 많다. 잡생각 날 틈이 없으니까. 민우마저 입대했을때, 그땐 정말 집에서 미치는 줄 알았는데… 민우와 더불어 순돌이까지 우리집에서 지내다 보니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다. 내 척추를 부러뜨릴 듯 무겁게 내려앉던 공기도 어느새 가벼워졌고, 고통 또한 옅어졌다. 이젠 희미해져서 굳은 잔상만 남았다. '그것들'이 준 상처. 헐거운 내벽 마저 허물어뜨렸던 잔인한 기억들… 이젠 잔상만이 내 삶 속에 가볍게 유영한다. 미미한 통증으로 각인되는 굳은 잔상… 4년 전, 정혁이와의 이별은 전진과의 이별보다 두 배는 힘들었다. 열여덟에 내 삶을 꾸려준 전진, 그때 기억을 돌이켜보면 누군가와 통화하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싶을때마다 문정혁이 있어줬었다. 사실 전진과 행복했던 기억보다 슬프고 암담했던 기억이 더 많아서… 외로웠던 기억이 더 많아서… 전진은 단념하기가 수월했던 반면… 열아홉에 나를 일으켜준 문정혁… 그와의 이별은 받아들일 수 조차 없었다. 매일 매일 술 마시면서 문정혁만 찾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해줬던 문정혁이, 내게 남긴 상처는 그리움 뿐이었다. 그는 내게 아픔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사랑과 기다림. 오직 그것만 알려줬던 문정혁이었기에, 내가 문정혁에게 준 게 없다는 기억이 가슴을 도려낼 뿐이었다. 문정혁. 그가 없어서야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제대로 깨달아서 하루하루 말라갔다. 문정혁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졌다가, 그 없이 홀로서기란 생 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힘들었다. 그래서 검정고시 합격하던 스무살 2월, 나는 군대에 자원 입대했다. 연병장에서 구보 할 생각에 단단히 각오한 것과 달리, 나는 공익 판정 받았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1년 밖에 군생활을 못했다. 중간에 친해진 동사무소 누나들이, 어떻게 알아본건지 나의 고아 사유와 생계유지 등 이것저것 서류를 만들어서 병무청에 부친 것이다. 결국 나는 생계유지형면제 대상자로서 1년 군생활, 그것도 출퇴근만 했던 공익요원 생활을 마쳤다. “삼촌… 추워.” “버스가 왜이렇게 안 오지… 그냥 택시 타자. 안되겠다.” 우리 순돌이 얼음되겠다. 재빨리 택시 잡아 탔다. 진즉 이럴걸. 순돌이는 추운데도 눈이 와서 좋다고 웃는다. 귀여워서 볼 잡아당기니까 또 자기를 아기 취급한다면서 승질낸다. 짜식… 내가 너 똥기저귀 다 갈아주면서 업어 키웠어, 임마. 대형 마트, 백화점 지하 식품매장, 이런데 가야 따뜻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쇼핑 할 수 있다는거 잘 알지만, 나는 작년부터 동네 시장에 갔다. 택시로 기본요금 나오고, 마을버스로 세 정거장 밖에 안 되는 시장. 사람냄새 난다는 광고 여러번 나와 봤자 시장 골목은 한산했다. 정부에서 시장 골목마다 지붕도 만들어줬거늘, 주부들은 시장을 잘 찾지 않았다. 하긴, 나도 예전에는 마트에만 갔었으니까. “야, 오늘은 연근 조림이 대박 맛있게 됐어.” “호오~ 보기에도 맛있어 보인다, 양종호.” 양종호네 반찬 가게가 시장에 있다. 함께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양종호는 할머니가 하시던 반찬 가게를 물려 받았다. 양종호는 내가 그렇듯 대학이 아닌 사회생활을 선택했다. 여전히 다리 한쪽을 절고, 왼쪽 눈알은 회색 막이 덮인 채 동공이 전혀 다른 쪽을 보고 있어서 처음 보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지만… 양종호는 물 만난 생선마냥 제 역할을 톡톡히 하며 살고 있었다. 양종호한테 손맛이 있을 줄이야… 내가 배운 요리들도 전부 양종호가 가르쳐준거다. “메추리알 까 놓은거 혹시 있어?” “오늘 건 다 졸였는데… 왜. 메추리알 필요하냐?” 순돌이가 벌써 내 뒤에 숨었다. 순돌이는 보통 사람들이 그렇듯, 외형만 보면 좀 무서운 양종호를 두려워했다. 양종호는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순돌이를 잘 챙겨준다. 빽빽 울면서 자기 무섭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틈만 나면 장난감이랑 과자 사들고 놀러왔으니까. 순돌이 장난감 갖구 놀다가 망가뜨리고 순돌이 간식 뺏어먹는 공유 형사랑 완전 딴판이야… “우리 순돌이가 메추리알을….” “기다려.” “…….” 양종호는 애기들을 좋아한다. 내가 순돌이 라고 하자마자 말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후다닥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 정도면 될까? 근데, 삶은게 아니라서 좀 그렇다. 내가 삶아줄테니까 장 보고 와.” 아직 삶지 않아서 껍질 째 그대로인 메추리알을 무더기로 가져온 양종호가 순돌이와 나를 번갈아보며 흥분한다. 짜식. 맘같아선 양종호한테 순돌이 맡기고 좀 편하게 시장 보고 싶은데… “삼촌, 빨리 가. 삼초온!” 양종호 무서워하는 순돌이 때문에 작전 실패. 이 작전이 언제쯤 성공할까. 그대신 다른 작전이 있다. 양종호네 반찬 가게에서 턴 하자마자 보이는 떡볶이 집. 긴 의자만 덩그러니 길가에 있는 떡볶이 집 앞에서 순돌이가 비명을 지른다. “삼촌! 나 순대! 순대!” “순돌아. 삼촌이 금방 장 보고 올테니까, 순돌이 너는 여기서 순대 먹고 있어. 어디 가면 안돼? 알았지?” “응! 알았어!!!” 어차피 저녁 먹일 시간은 좀 남았고, 순돌이 식성이 워낙 좋아서 순대 정도야 먹여도 괜찮겠지. 나는 늘 그렇듯 순돌이를 분식집 순대에게 맡겼다. 이민우가 미쳤나봐. “이렇게 추운데 축구 시합을 해?” “별로 안 추워.”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됐나봐. 나는 상상만 해도 추워 죽겠는데, 이민우는 서늘하게 미소까지 지었다. 새벽부터 운동하러 밖에 나갔다 오더니, 느닷없이 내일 학부 별 축구시합 결승전이 있으니까 꼭 응원 나오란다. 그 말만 들어도 추워서 나는 오싹 소름끼친 팔을 문지르며 샤워하는 이민우 옆에 섰다. 쏴아-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이민우의 몸을, 따뜻한 물줄기가 감싼다. 혹한의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반드시 숨찰 때까지 운동해서 온 몸을 땀 범벅이로 만드는 이민우… 그는 어디서 운동하던지 간에 꼭 집에 와서 샤워한다. 뭐랄까.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운동했는지 나한테 부러 보여주듯이. 나는 이민우 앞에서 속옷 한 번 갈아 입은 적이 없는데, 이민우는 보란 듯이 문 열어놓고 샤워한다. 처음에는 미쳤냐고 물 튄다고 난리치던 나지만, 지금은… “완전 따뜻하다….” “하하하.” 민우가 뿜어대는 따뜻한 수증기열 속에 폭 들어가서 감탄사를 내뱉는다. 내가 따뜻하다고 좋아하자, 민우는 멍하니 나를 쳐다보다가 웃어버렸다. “이민우.” “왜.” “너 몸에 상처가 진짜 많다. 그동안 자세히 안봐서 몰랐는데….” 비누거품을 씻어내며 드러나는 민우의 단단한 근육들. 하얗기만 한 줄 알았는데, 군대 다녀온 민우는 구릿빛으로 그을어졌다. 얼굴은 아직 좀 하얗지만, 몸은 헐리우드 배우 저리가라 싶게 섹시하다. 겨드랑이하고 거기에 털도 진짜 많다. 흠… 너무 밑을 쳐다봤나? 싶어서 조용히 고개 올리다가 진즉부터 나를 쳐다보고 있던 이민우와 시선이 부딪혔다. “혜성이 니가 쳐다보니까 커졌어.” “!!!” 펑- 머릿속에 폭탄이 터졌다. “만져볼래?” “!!!!” 씨팔!! 욕 하면서 소리지를 뻔 했다. 나는 민우의 거기를 쳐다봤다는 사실로 괜히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했다. 민우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자기 것이 커졌다며 피식 웃었다. 그가 젖은 피부를 수건으로 닦고, 허리에 큰 타올을 둘렀다. “체대 다니면 원래 몸이 여기저기 다치고 그러는 거야.” “그, 그래?” 이민우는 자기 몸에 죽죽 그어진 흉터 자국을 대수롭지 않게 떠들며, 내 앞을 휙 스쳐 지나갔다. 모락모락 김이 풍기는 이민우 몸… 샴푸 냄새보다 진한 이민우 특유의 살냄새… 그가 냉장고 문 열고 쭉 관찰하다가 어제 먹고 남은 메추리알을 우악스레 주먹에 꽉 쥐고 꺼냈다. 어제 샐러드 만들고 남은 메추리알들이 이민우 주먹 속에 죽어가고 있다. “음… 맛있네?” 이민우는 언젠가부터 일부러 무게 잡지 않아도, 특유의 카리스마가 빛났다. 범접하기 힘든 무거움이랄까. 옆 태가 완전 죽인다. 타올 하나 두른 것 뿐인데 간지 작렬. 좁아 터진 집에서 이민우가 저렇게 젖은 머리칼 밖으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서 있으니까… 마치 태양이 떠오른 것 같다. “내일 축구 올거지?” 아 맞다. 축구. 나는 다시 추워지는 기분에 팔짱 끼고 툴툴거렸다. “야… 이민우. 영하 200도는 되겠다. 진짜 춥거든? 너 겨울에 찬바람 쐬면 맨날 감기 걸렸었잖아.” “…신혜성.” “응?” 꿀꺽, 나도 모르게 침 삼켰다. 저렇게 대책없이 무게 잡고 표정 굳히는 이민우는… 잘 모르겠어… “내가 너랑 살면서 감기 걸린거 본 적 있어?” “글쎄… 없었나?” 그가 이쪽으로 걸어오며 살벌한 눈을 빛낸다. 그럴수록 그의 단단한 가슴근육과, 물기로 반짝이는 쇄골 라인과, 젖은 머리칼이 시선에 잡힌다. 내 등이 벽에 닿기 무섭게 이민우가 껴안듯이 내 몸을 자기 팔 안에 가둬버렸다. 왜이래. 무섭게… “군시절에 두 번 몸살 걸렸던거 말고, 너랑 살면서 니 앞에서 감기 걸린적 없었어. 너랑 순돌이는 좀 많았지만.” “그랬나?” 뚝… 뚝… 이민우가 팔로 가둔 바람에 꼼짝없이 갇힌 나는, 그의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만 열심히 눈동자로 쫓았다. 여전히 샴푸 냄새, 비누 냄새보다 진한 이민우 살냄새… 물에 젖은 살냄새… 그의 음성보다 가까운 밀착도에 헛기침 하면서 살짝 이민우 가슴을 검지로 밀었다. 그가 나를 어떤 시선으로 내려보는지 모르겠다. 이민우는 종종 이런식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자기 안에 가둔다. 나보다 힘 세다고 재는 건가. “진짜 고정관념이라는거 무섭다.” “?” 그는 내가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뜻이야? 내가 표정으로 묻자, 이민우는 옷 갈아입다 말고 나를 쳐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수능 보기 전까지… 그때까지의 나란 인간이 신혜성, 니 머릿속에 어떻게 저장됐는지 잘 알겠다고.” “뭔 소리야?” “시합 보러 올거야?” “추운데….” “쿡….” “?” 고개를 갸웃거리며 최대한 이민우가 한 말 뜻을 알아듣고자 노력하는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든 건지 그가 갑자기 하하하! 허공에 대고 웃었다. 깜짝이야. 옷을 다 갈아입은 그가 침대에 앉아서 순돌이를 자기 허벅지에 앉혔다. 동화책 그림 보기에 열중하던 순돌이가 얌전히 안긴다. 순돌이는 나랑 이민우를 친엄마 아빠보다 잘 따르고 좋아한다. 쪼옥~ 순돌이 뺨에 길게 뽀뽀한 뒤, 이민우가 순돌이 볼에 부비부비 자기 볼을 비비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떠든다. “순돌아. 삼촌 내일 축구하는데 갈래?” “응!!” 이민우… 순돌이는 니가 자기에게 무슨 소릴 하는지 한 번에 이해 못하거든…? “그럼, 여기 혜성이 삼촌 잘 챙겨서 데려와. 알았지?” “응!! 걱정하지마!!” 헉… 알아듣나봐. 순돌이가 이민우 말에 잽싸게 반응하며 헤헤 웃는다. “야! 이민우!!” “애가 둘이야. 애가 둘.” 이민우 세상에서 제일 싫어! 짜증나!! …라고 떠들고 싶지만 순돌이 때문에 참는다. 이민우는 체대에 다닌다. 사실 이민우가 체육학과를 선택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고모랑 고모부는 의외로 예상했던 눈치였다. 이민우가 그렇게 운동을 잘했었나 보다. 나는 이민우와 같은 학교 다닌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꽤 놀랐었지만… 순돌이를 자상하게 잘 돌봐주는 이민우… 내 앞에서 가끔 멍한 시선을 흐트러뜨렸다가 호탕하게 웃는 이민우… 잔소리하는 이민우… 내 신경 건드리면서 자극하는 이민우… 같이 장 보러 가면 당연히 자기가 모든 짐을 다 드는 이민우… 매일 매일 운동하러 나가느라 바쁜 이민우… 가끔 나를 껴안고 통 모를 소리 하는 이민우… 문 열어놓고 샤워하는 이민우… 그런 이민우에게 익숙해져서 이제는 그가, 이 집을 나가버릴까봐, 그 생각만으로도 벌써 쓸쓸해져버린 바보같은 나… “삼촌~ 모해에?” 다음날, 식탁에 멍하니 앉아서 나도 모르게 이민우 생각하다가, 순돌이 덕분에 정신차렸다. 이게 다 이민우가 어제 이상한 말 하면서 샤워해서야… “우리 순돌이 인형같네?” 뒤뚱뒤뚱 걸어와서 식탁 의자에 기어 올라간 순돌이가 오늘따라 유독 예쁘다. 하긴, 고모가 보내준 새 옷 입혀서 더 예뻐 보이는 걸 수도 있지만… 곰돌이 옷 입은 순돌이가 눈을 말똥말똥 빛내며 내 손을 쳐다본다. “삼촌 모해?” “응. 삼촌 지금 김밥 싸.” “김밥?” “응. 보온 도시락에 미역국하고 김밥 싸서 민우 삼촌 갖다 줄라구. 이게 보온 도시락이야.” 순돌이는 김밥이 신기했는지, 분주하게 움직이는 내 팔을 열심히 관찰했다. 내가 뭘 하거나 살때마다 순돌이는 신기해 한다. 자기도 하겠다며 골치아프게 할 때도 많지만… 토요일인데 꼭두 새벽부터 김밥 싸서, 이민우네 학교까지 갔다. 도저히 발을 떼기 힘든 강추위에 덜덜 떨면서 택시 타는 바람에 돈이 왕창 나갔다. 집에 올때는 이민우한테 순돌이 업고 짐 다 들으라고 해야지. 민우네 학교는 산 중턱에 있다. 경사진 길이 죄다 빙판길이라서 차창 밖에 보이는 사람마다 종종걸음으로, 학교측에서 준비해준 밧줄 붙잡고 다녔다. 이민우가 저 밧줄 잡고 학교 다녔을 생각 하니까 웃긴다. “삼촌! 미누 삼촌 저깄어!! 미누 삼촌 저깄어!!” “응, 응.” 순돌아… 한 번 만 말해줬으면 해… “미누 삼촌 저깄어!!” “응.” 축구 시합이 시작하자마자 내 품 안에서 열심히 뺨을 움직이던 순돌이가, 작정이라도 했는지 벌써 스무번 넘게 이민우를 소리쳤다. 아마 자기 눈에 이민우가 비칠 때마다 내게 알려주려는 모양이다. “패스!!” “수비만 하지 마! 병신들아!!” “거기! 이민우한테 넘겨! 패스 해!!” 운동장은 벌써 열기로 가득하다. 군데군데 눈이 쌓여 있는 언 땅에서 건장한 남자들이 시퍼런 음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민우는 유독 튀었다. “그렇지~!” “이야~! 2대 0!! 무조건 이민우한테 패스~!!” “야!! 개새끼들아!! 이민우 막으랬지!!” 우왕좌왕 시끌시끌. 이민우가 두 번째 골 넣자마자 운동장이 난리났다. 이민우네 과 놈들은 이민우를 껴안고 세레모니 하는 반면, 상대팀은 무조건 이민우 막으라면서 지랄지랄이다. 확실히 이민우는 대단했다. 운동장을 혼자 제 집처럼 날라다닌다고나 할까. 굉장히 빠르고 정확했다. 상대팀이 머뭇거릴 찰나의 틈에 재빨리 태클 걸고 슬라이딩~ 세 놈이나 이민우를 방어했지만, 이민우는 보란듯이 뚫어버렸다. 두근두근, 이민우… 축구하는 모습 보니까 괜히 나도 들뜨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그의 눈빛이 운동장 위에서는 하늘의 새처럼 자유롭게 반짝였다. 굉장히 멋있고, 섹시하기까지 하다. 진짜… 강해 보인다. 전반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나도 이민우 응원하느라 목청 높여 구호를 외쳤다. 순돌이는 나 따라한답시고 우주의 언어를 꽥꽥거렸다. 하지만… 역시. 너무 추운 날씨라서 관중석은 휑~하니 텅 비어 있었다. 대체 이런 날씨에 왜 축구를 하는 거야… 순돌이가 추워 하는 것 같아서 아이의 몸을 더 세게 껴안고 등을 웅크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축구 시합은 둘째 치고, 산 바람까지 불어서 추워 죽겠다. 휘리리릭-! 작전타임 호각 소리에 발을 동동 굴리던 걸 잠깐 멈췄다. 순돌이가 내 품에서 보온병에 싸 온 베지밀을 마셨다. 그러다 우리쪽에 슬슬 달려오는 이민우를 보고 반가웠는지 '삼!!촌!!'하고 엄청 크게 외친다. 약간 거친 숨을 내쉬며 이민우가 우리 앞에 섰다. “왔어?” 중간 계단에 앉아서 오들오들 떨던 나는 엄지 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응. 너 되게 잘 뛴다, 이민우.” 내 말에 그가 생전 보여준 적 없는, 행복한 미소를 안면에 피운다. 와… 이민우. 너… 진짜 잘생겼구나. 종종 웃었으면 좋겠다. “나 멋있어?” “응. 장난 아니게 빠르구 멋있어.” 그때 이민우 팀에서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제자리 뛰기를 시작했다. 짜식… 간지난다. “나 저쪽에 가봐야 돼. 끝까지 볼거야?” “그러라고 오란 거 아니었어?” “아냐. 이제 그만 봐도 돼. 순돌이하고 따뜻한데 가 있어. 나 간다~!” “야! 이민…….” 뭐야. 전반전만 보라는 거였어? 이민우의 허망한 말에 망연자실 한 나는, 그가 자기 팀에 돌아가는 뒷모습을 멍청하게 쳐다봤다. 그래도 의리가 있지. 어떻게 여기서 돌아가냐. “추워… 삼촌….” “!!” 경기가 다시 시작하자마자 그럼 그렇지. 순돌이가 콧물 흘리기 시작했다! 아, 어뜩하지? 진짜 돌아갈까? 급한대로 내 코트랑 가디건을 몽땅 벗어서 순돌이 몸에 둘러줬다. 이민우 찾기 놀이에 싫증난 지 오래인 순돌이는 따뜻한 코트 속에서 이제 좀 살 만 했는지 하얗게 미소지었다. “…….” 진짜 춥다. 순돌이한테 겉옷 벗어주니까 혹한의 추위에 뼛속까지 어는 기분이다. 휘잉- 휘잉- 아까는 들리지 않던 바람 소리도 박자에 맞춰 귓속에 파고들었다. 손가락, 귀, 발가락, 뺨… 몸 구석구석 파고드는 추위에 이를 닥닥 부딪혔다. 반면,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도 끝까지 봐 줘야돼.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 안 돼. 순돌이 껴안고 몸을 잔뜩 웅크린 바람에, 또 추위가 너무 강해서 나는 경기를 제대로 관람하지 못했다. 이를 덜덜 부딪히며 어깨를 떨 뿐이었다. 아… 도저히 안되겠다. 일어서자. 경기 재시작 5분만에 일어나야지- 결심했는데, 갑자기 경기장이 소란스러워졌다. “?” 하얗게 질려서 덜덜 떨다가 운동장을 무심코 쳐다본 나는, 그야말로 경악해서 굳었다. 경기가 갑자기 멈췄다. 선수들이 뛰던 상태에서 멈추고 왁왁거리고 있었다. “!!” 이민우가 엄청나게 화 난 표정으로 이쪽에 걸어오고 있다. 두근, 두근. 이상하게 몸이 더 떨렸다. 왜, 왜저러지? 그는 많이 뛰어서 그런지 추운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약간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몸 전체에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마왕이 걸어오는것같잖아… 표정이 왜저렇게 살벌하지…? 입이 얼어붙어서 차마 못 물어보겠다. 운동장에서 선수들이 이민우를 부르며 욕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이 당황스런 상황에서… 이민우는, 언제 들고 온 건지, 팔에 꽉 쥐고 있던 선수용 파카를 내 어깨에 걸쳐줬다. “이민우?” 턱까지 딱 딱 부딪혀가며 추위에 떨면서도, 이민우의 돌출 행동에 당황한 내가 의아하게 묻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책어린 투를 내뱉었다. “바보같이. 가라니까.” 무슨 소리야… “야… 너 저쪽에서 막 불러. 너네 팀 사람들이 부르는데?” “나중에 뺑이 돌면 돼.” “뭐어?” 이민우는 뒤에서 자기 욕을 하면서 부르는 사람들 말을 완전히 무시하며, 순돌이를 한 팔로 안고, 다른팔로 내 몸을 일으켰다. “가자.” “어? 어- 이민우-!” “…….” 아직 전반전도 안 끝났잖아…! 그가 무작정 내 어깨를 꽉 끌어안고 걷는 바람에 바닥에 놔 뒀던 도시락통을 겨우 챙겼다. 물론, 이것마저 이민우가 빼앗아갔지만… “민우야… 안 추워?” “어.” 그가 내 어깨를 더 세게 잡는다. 민우의 커다란 파카 덕분에 따뜻해졌다. 갑자기 하얀 세상이 푸근해 보일 정도로… 다음날, 일요일 오전부터 낮까지 이민우랑 싸웠다. “꼭 가야 되냐? 나도 약속 있다니까?” “이민우! 너 진짜 이기적인 인간인거 알어? 너는 갑자기 생긴 약속이지만, 나는 며칠 전부터 알려줬잖아! 그럼 내가 먼저 아니야? 대학로에 두시까지 간다고 벌써 약속 다 정해놨는데, 이걸 내가 어떻게 취소해? 그냥 친구 만나는 거면 또 몰라. 나, 대본 받으러 가는 거거든?” “대본? 그거 신혜성 니가 받으러 굳이 갈 필요 없다며! 월요일에 배달 된다며!” “야!! 이민우!!” 사실 싸울 일 아니다. 순돌이만 없다면… “니가 포기해. 다른건 몰라도, 나 진짜 중요한 약속이야. 신혜성.” 정색하고 반응하는 이민우 덕분에 나는 배로 울컥해서 흥분했다. 평소의 이민우는, 내게 곧잘 져 주는 편이다. 그가 딱 하나, 내가 아무리 지랄해도 고집을 꺾지 않는 순간이 있다면… “왜!! 또 김동완 개새끼 만나러 가게?! 그새끼가 오래?!!” “…….” 김동완이 호출할 때 뿐이다. 몇 년이 지나도, 이민우가 김동완 얘기 하는거… 내게 상처다. 영원히 적응할 수 없는 상황, 풀 수 없는 숙제이다. 어쨌든 우리 둘이 동시에 집에서 나가버리면? 순돌이 봐 줄 사람이 없다. 순돌이 깰까봐 부러 빌라 옥상에 올라가서 목청높여 싸웠다. 그래도 혹시나 순돌이가 일어났나 싶어서 우리는 십분에 한 번씩 씩씩대는 와중에도 번갈아가며 집에 내려갔다 왔다. 짜증나… 이번에는 내가 내려갈 차례다. 일부러 옥상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가 열었다. “맘대로 해!! 씨발 새끼야!! 니가 짝사랑하는 년 실컷 지켜주고!! 김동완 그 개새끼 뒷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니다가 피말라 죽어버려!!” “…….” 나쁜새끼… 나쁜새끼. 울컥울컥울컥. 민우는 더이상 아무 말도 안 했다. 늘 이민우는 이 부분에서 대답을 멈췄다. 짝사랑 하는 년 실컷 지켜주라는 부분에서, 그는 세상을 다 살아버린 낯으로 멍해졌다. 고통의 한 부분처럼 서러운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서있을 뿐이다. 그렇게 울 것처럼 슬프게 쳐다보면… “…….” “…….” 더이상 아무 말도 못하겠잖아. 나쁜 새끼… 누구 짝사랑하는지 4년 내내 한 번도 안 알려주고, 김동완이 호출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나가버리고… 하지만 진짜 병신은 나다. 김동완 하면 그렇게 치 떨려 하면서, 혹시나 내가 소리친 바람에 이민우가 욱 하는 심정으로 집 나가버릴까봐 오분도 안 지나서 후회하니까… 오늘 저녁에 이민우 좋아하는 고등어 김치 찌개 해 놔야겠다. 결국 순돌이를 등에 들쳐 업고 나갔다. 물론, 고모네 가면 맡길 수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 목동에서 압구정까지 어느 세월에 가냐… 요즘 사람들 진짜 가관이다. 버스에 타서도 절대 바닥에 서기 싫다고 투정부리는 순돌이 때문에 진땀 빼는 나를 보고, 자리 양보하는 사람 하나 없다. 이민우랑 싸운 여파 때문인지, 사람들이 다 싫어진다. “눈 까지 오구 지랄이야….” 겨울 중 언제가 제일 춥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신있게 답할 것이다. 2월 대학로라고. 어제 추위는 쨉도 안되는 거였어… 포근하게 쌓이기 시작하는 함박눈 사이를 재빨리 걸었다. 순돌이가 자꾸 모자 벗을라고 해서 억지로 모자 쓰게 하고, 땅에 내려놓으면 오늘따라 자꾸 업어달라고 한다. 얘가 평소에는 애늙은이 흉내 내더니, 오늘은 이민우랑 짰나? 둘 다 애처럼 고집부리고 지랄이다. 최사장이 그려준 약도 대로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걸었다. 여기까지 연극 보러 오는 사람 있으면 오히려 돈 줘야겠다. 대학로 번화가에서 한참은 들어가야 조그맣게 보이는 연극 간판. 좁은 입구와 허름한 매표소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심화 소극장.” 심화? 이름이 이상하지만 맞게 찾아왔군. 입구가 워낙 좁아서 순돌이 머리 닿을까봐 미친듯이 허리 숙여서 계단을 내려갔다. 소극장 중에서도 지구에서 가장 좁은 소극장을 찾으라면, 여기가 아닐까. 계단 끝에 닿자마자 보이는 좁은 무대 덕분에 내가 민망할 지경이다. 한 뼘도 안되는 객석과 무대의 거리. “돌겠네….” 순돌이 엉덩이를 한 번 더 추스리며 한 눈에 다 들어오는 좁은 내부를 끊임없이 봤다.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여기에 사람이 온다는거, 여기서 공연을 한다는 거, 전부 다. 그때, 무대 뒤에서 요란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우와아아!!” “금메달!! 금메달!!” 금메달? “?” 무대 뒤에서 사람들이 텔레비전으로 동계올림픽 경기 생중계 시청 중인가보다. 앗, 설마 쇼트 트랙인가? 그제야 초조해진 나는 서둘러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빠르게 걸었다. 천정도 더럽게 낮네… 그나저나, 금메달! 금메달이라고? 낯선 곳에서의 이질적인 감정 따위는 깡그리 얼린 채, 나는 성급하게 낡은 천막을 걷었다. [금메달~ 금메달입니다! 자랑스러운 한국!] “우와아! 만세!!” “진짜! 대단하다!! 저새끼!! 우와!!” 쿵, 쿵, 쿵. 심장이 벌렁거린다. 어떤 경기지? 금메달이래! 오전나절 기분나쁜 것은 까맣게 잊고, 나는 사람들 뒤에서 발뒤꿈치를 올렸다. 낮은 테이블에 대강 올린 텔레비젼 앞에 모인 사람들은 아직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르는 모양이다. 그들이 흥분하며 외치는 통에,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텔레비전에서 아나운서가 떠드는 소리가 사람들 틈에서 크게 들렸다. [여기는 러시아 소치. 금메달이 탄생했습니다! 이 감격적인 순간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진짜 금메달이구나! 대단하다! 근데 어떤 경기지? 궁금한 맘에 나는 사람들 틈을 억지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무대 뒤에서 대본을 말아 쥐고 응원 중이던 사람들이 애 업고 나타난 나를 보고 놀랐는지 당황하면서도, 아직은 텔레비전에 시선을 둔다. 아, 보인다. 텔레비전에 펼쳐진 하얀 설원… [역사적인 순간을 다시 한 번 볼까요?] 아나운서의 들뜬 목소리… [자, 느린 화면으로 주요 장면이 다시 나오고 있습니다. 1200미터 경사진 얼음을 활주하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한국 선수! 스켈리톤이 국민 여러분께는 낯선 종목이니만큼, 이번 금메달 획득은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요!] 스켈리톤? 그게 뭐지? 매 번 동계 올림픽 때마다 내가 응원했던 종목은 뻔했다. 쇼트 트랙. 나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래 왔다. 하지만, 지금 아나운서는 전혀 다른 종목에서 우리나라가 금메달을 땄다고 외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 여기 모인 사람들처럼… 나는 어느새 텔레비전 제일 앞을 사수했다. “저기… 누구세요?” 그런 내가 수상했는지, 누가 말을 걸었다. “예. 안녕하세요. 저, 최성수 사장님 계시는 기획사에서 대본 받으러 온 신혜성 이라고 하는데요.” 그러자 사람들의 관심이 텔레비전에서 이쪽으로 잠깐 모였다. 이거. 기분 좀 우쭐해지는데? “아, 예. 직접 받으러 오셨나봐요? 신혜성씨. 근데… 저기….” “예?” “아드님… 인가요?” 아마 나보다, 내 등에 업혀 있는 순돌이가 의아했을 그들에게,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아니라고 손을 저었다. “아하하. 아니에요. 제 아들이 아니라, 조카인데요… 순돌아. 인사해야지.” 대답하면서 쑥스러운 나머지 무의식중에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 너무 귀엽다. 이름이 순돌이에요?” 사람들의 질문이 들리지 않는다. 내 귀는 정확히 아나운서의 음성만 들었다. 경악으로 물든 내 눈동자 또한, 여기 사람들이 아닌 하얀 설원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 위해 시상대로 걸어가는 한 남자에게 박혔다. 소극장 사람들 또한, 내 대답을 잠깐 기다려주다가 텔레비전으로 관심을 돌렸다. [자랑스러운 한국의 전진 선수!! 지금 막 시상대에 올라가서 소수의 한국 응원단 석에 손을 흔들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 폭설이 잦았던 2월 전체가 아득히 멀어지더니 제 몸을 터뜨리며 무너졌다. “와… 진짜 잘생겼다! 쟤 예전에 모델 하던 애라는데, 알아요?” “알지. 예선 통과하고 좁쌀만하게 기사 났었잖아. 어제였나? 사실 스켈리톤에서 금메달을 딸 거라곤 예상 못해서, 지금 언론 난리 났을 거야!” “이름이 전진이라는데, 진짜 멋있어요! 내가 본 모든 종목 선수 통틀어 저런 애가 없어!” 사람들이 흥분하며 외치고, 그를 축하하고, 온 나라가 기뻐하는 지금… 나는 어두컴컴한 방에 홀로 떨어져서 내면을 두드리는, 무차별하게 닥치는 온갖 감정과 조우했다. 4년만에 텔레비전에서 보는 '그것들'의 전진… 스켈리톤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전진이 텔레비전에서 환하게 미소 짓는다. 내 볼을 타고 나도 모르는 눈물이 뜨겁게 행진하고 있었다. 이별에 가려져도… 만나야 할 사람들은… 언젠간 만날 테니… 괜찮으세요? 라는 질문을 열 번 넘게 들어서야 눈물이 멎었다. 진정하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선수 보고 감격에 겨워 울었다고 핑계 댔지만, 내가 너무 심하게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한참을 울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놀라는 눈치다. 내가 우니까 순돌이까지 울었다. 나중에는 순돌이가 울음을 멈추지 않아서 소극장 관계자들이 애 앞에서 묘기까지 펼쳤다. 진짜 내가 미쳐. “어휴… 순돌아….” “흐윽! 흐윽! 흐윽!” “하하하하….” “흐윽! 흐윽!” 여기 사람들이랑 통성명 하기도 전에, 울면서 지랄지랄 해댔으니 원… 순돌이가 우는게 기가 막혀서 나중엔 웃음이 터졌다. 곰돌이 옷, 곰돌이 귀가 달랑이는 모자 쓴 순돌이와, 그런 순돌이 안고 텔레비전 앞에서 엉망으로 울던 나. 30분이나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텔레비전에서는 아직 전진의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온 국민이 얼마나 열광했는지도 세밀하게 보도했다. 또 눈물이 나올것 같아서 순돌이 꽉 끌어안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런 준비없이 죽음의 문턱에 닿았다가 돌아온 느낌이었다. 티비 화면에 비친 전진을 본 것 뿐인데, 4년만에 발견한 아픔이 나를 울렸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격렬하게 뛰는 심장…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이유조차 없었다. 그냥 눈물이 주륵주륵 흘렀다. 멈추고 싶을 때마다 불가항력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덕분에 낯선 사람들 틈에서 순돌이랑 실컷 울었다. 눈물이 멎을 때쯤 나는 내가 왜 울었는지 깨달았다. 전진이 금메달 딴 걸 봐서야, 나는 그와 헤어졌다는 걸 4년만에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전진과 헤어졌다고 인식했던 내 마음이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높게 비상하는 전진과 나의 갭이 처음으로 실감났다. 그는 너무 높았고, 너무 멋졌으며, 엄청난 갭이 나와 그 사이에 존재했다. 예전에 태풍고에서 똑같은 교복 입고 연예반에서 수업 듣던 전진과 나는… 더이상 같을 수가 없다는 것, 그 사실이 무의식중에 작용했나보다. 금메달을 목에 건 전진을 보면서도, 전진을 확인하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던 인상, 이목구비, 분위기. 모든데 전진인데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았다. 반가운 만큼 서러웠고, 예전에 헤어졌던 기억은 사실이라는게 선명히 각인될 뿐이었다. 짧은 시간 울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반갑다는것, 그가 대단하다는 것 외에도, 내가 초라해졌다는 것… 나도 열심히 살고 싶어서 오디션만 수 십 번 보고, 떨어졌다. 엑스트라 아르바이트 전전하면서 사무실 일 보면서 살았다. 그래도 열심히 살고 있다고 여겼던 지난 4년의 기억들이, 전진 앞에서 무너졌다. 금메달을 목에 건 전진을 보니, 나는 놀면서 지낸 기분이었다. 내 삶을 반성하기 앞서, 4년 만에 인정한 그와의 이별이 슬펐다. 모르겠다. 머릿속에 복잡해진다. 그러다가 또, 놀라웠다. 내가 아직 전진을 두고 눈물 흘릴 수 있다니… 신기했다. “이거… 대본이에요. 신혜성씨.” “아, 네. 고맙습니다.” 내가 멍한 표정으로 일관하자, 극장 관계자들이 머뭇머뭇 대본을 건네준다. 괜찮냐는 문구가 그들 표정에 써있어서 슬슬 민망해진다. 순돌이는 언제 울었냐는 듯 저쪽에 가서 혼자 뛰어다닌다. 아, 진짜… 왜 눈물은 흘려가지구… “흠… 연습은 언제부터 시작인가요?” 통성명이 끝난 즉시, 나는 주연 배우라는 여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당황하며 내게 반문했다. “알고 오신거 아니세요?” “예? 뭘…요?” “개막은 5일 뒤예요. 배우들 연습은 다 끝난 상태인데….” “네에?!” 터무니 없는 설명 덕분에, 전진에 대한 슬픔이며 반가움은 즉시 사라졌다. 뭐라고? 5일 뒤에 개막인데 지금 대본을 준다고?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배우들이 더 당황해 한다. “빠른 시간 안에 이 역할의 연기자 구할 데가 없어서요. 저희들끼리 연습하다가 작가님이랑 즉흥적으로 낀 장면이거든요. 보시다시피 환경이 열악하다 보니까 임금 지급도 어렵고… 사람 못 구하면 포기하려던 장면인데… …최사장님이 대뜸 해준다고 하셔서….” “!!” 최성수… 죽여버리겠어…!! 내가 맡은건, 무대에서 리허설 작업에 들어간 배우들이 연기할때, 연극이 끝날때까지 딱 세 번 노래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중요한 포인트에서 상황을 적절히 표현해주도록 노래를 하라는 거다. 미치겠다. 카메라 앞에서 노래 한 번 해 본 적 없는 내가, 연기의 모토인 연극 무대에서 노래 하라니. 기가 막히다. “최씨 아저씨. 저 진짜 어이 없거든요.” [임마. 그게 다 경험이야. 너 저번에 흥얼흥얼 노래하는거 보니까 잘 하든데 뭘?] 월요일, 출근하자마자 사장님한테 전화했다. 일요일 내내 전화해도 받지 않던 인간이 드디어 받아 준다. 열받을때마다 최시 아저씨라고 했던 습관대로 부르자, 최성수가 긴장했는지 억지로 껄껄 웃는게 수화기 너머에 들렸다. “최씨 아저씨. 저 아저씨 앞에서 노래 한 적 없거든요.” [신혜성. 니가 내 앞에서 노래 부른 적이 몇 번 있는데 맨날 거위의 꿈 이었다가, 저번에는 박정현 노래였잖냐.] “최씨 아저씨. 저 노래 못하거든요. 아니, 5일 만에 연습해서 어떻게 무대에 서요!!” [야, 그게 다 경험… 아, 혜성아. 나 바쁘다. 이만 끊는다?] “최씨 아저씨!! 최씨!! 최사장! 사장님!!” 짜증나…!! 밤새 대본 읽고, 극장 사람들이 준 녹음기 가져와서 끊임없이 들었다. 단숨에 극에 몰입하기도 어려운 판에, 노랫가사 외워서 무대에 서야 한다니. 아무리 내가 급해도 그렇지, 준비 없이 어떻게 하라는 건가. 연극 내용은 단순했다. 장례식장이 배경이었고,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망나니 아들이 아버지 주변 사람들과 이런 저런 대사 치다가, 막판에는 개과천선 한다는 건데… …장례식장에서 노래를 부르라니. 춤 추라는 것 보단 낫지만, 아니지. 차라리 춤 추는게 낫겠다. 단원들이 급하게 녹음해준 노래 듣고 흥얼흥얼 따라 부르는데, 최성수 이 인간이 바쁘다고 지랄할땐 언제고 전화왔다. “왜요.” [혜성아. 지금 삼영 애들이 KSS 0스튜디오에서 뭐 찍는데, 거기 가라.] “뭐라구요?” 틱. 녹음 테잎을 정지시켰다. 최성수는 늘 이런식이다.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일을 만들어서 내게 휙 던지는 것. 따라서 나는 늘 긴장했고, 긴장이 풀어질 때 쯤 던져진 먹이 보고 황당해 한다. [빨리 가~ 뒤에서 왔다 갔다만 하면 돼~ 야, 사만원 짜리야.] “…….” 전진 금메달 딴 거 본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울고 싶다. [여보세요? 신혜성!] “삼영에서 누가 가는데요? 같이 끼어서 가면 돼요? 삼영 쪽부터 가면 되는거죠?” [그래그래. 잘 아네~ 나도 지금 삼영에 있어.] “알았어요.” 어쩐지… 어제 대학로에서부터 일진이 안좋은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든다. 설마 머피의 법칙이 시작된다거나 이런건 아니겠지? 삼영에서 기획하는 공연일 맡아주느라 이번주는 삼영 기획에서 먹고 자고 하는 최성수. …그래도 나한테 뭐 하나 더 시켜줄라고 애쓰는게 눈에 선해서, 결국 투덜대다가도 코트 걸쳤다. 대낮부터 어둑어둑해지는 하늘빛, 무거운 눈송이가 시야를 가렸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만치 하염없이 내리는 차가운 눈송이… …전진도 러시아 하늘 아래서 눈 맞고 있겠지… 휘잉- 혹한에 몸을 움츠리며 걷다가 벙어리 장갑을 벗었다. 나는 4년 만에, 처음으로 이별을 실감한 다음날, 내 심장을 가만히 더듬었다. …심장이 뛰지 않는다. 머피의 법칙이라고 의심하는 것 자체가 '시작'이었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냐. 삼영 기획 들러서 최성수 만나고, 방송국 출발 인원끼리 브리핑, KSS 스튜디오에서 세트 스케줄 브리핑, 세트장에서 리허설… 리허설부터 문제였다. 벌써 한 시간이 넘는데 한 씬도 끝나지 않았다. 삼영 출신 신인 여자 탈렌트 이시영. 준비 과정 없이 얼굴 하나 믿고 이 계통 온게 틀림없었다. 어쩜 저렇게 연기를 못 할까. “너 진짜 못알아듣냐?!! 어? 골 비었어?”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참다 참다 촬영 감독과, 조명 감독이 합동 공격했다. 이쁘장하고 늘씬하게 생긴 이시영은 계속 죄송하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세트장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나도 놀랐다. 4년 넘게 영화며 드라마며 온갖 촬영팀 따라다녀봤지만, 저렇게 연기 못 하는 애 처음 봤다. 아니, 연기는 커녕 이시영은 대본조차 다 외워오지 않았다. 공주과인가…? 어쨌든 입 더럽기로 소문난 임수철 감독과 강진영 카메라 감독, 서지우 조명 감독까지 모였는데, 이시영은 세 명이 참다 참다 내뱉는 욕설을 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이시영을 동정하지 않았다. 명색이 주연인데 너무 준비가 안되어 있어서… 이시영은, 감독들이 사전에 조정해서 약속한 움직임을… 모두 분산시키고 있었다. 대사가 좀 길긴 하지만, 외우기만 했어도 버벅거릴 일은 없을텐데… 낯선 집에서 자다가 꿈 꾸는 장면 찍는 중인 이시영 때문에 모두 밤 새게 생겼다. 거의 울기 직전인 이시영이 감독에게 뭐라고 말한다. “카메라가… 너무 헤깔려서요….” 헉… 저런 말을 하면 어떡해. 이시영의 꿈 속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남자들 중 하나로 병풍처럼 서있으면 그만인 내가, 더 놀랐다. 쟤 진짜 미쳤어… “야!!!” 그럼 그렇지. 임수철 감독이 대본 집어던졌다. 찔끔 놀란 이시영이 한 발자국 물러났다. “니가 기본이 안 돼 있으니까!! 일일이 가르쳐준거잖아!! 뭘 알아들은거야!! 1번 카메라가 비출때, ~여기는 꿈인가요? 까지 하고, 3번 들이댈때! 씨발! 각도까지 설명해줬잖아! 5도 안배웠냐?! 정면만 미친듯이 쳐다보지 말고 눈알하고 몸 다 90도로 돌리라고!!” “죄송합니다….” 결국 이시영은 울면서 뛰쳐나갔다. “어휴! 뭐 저런 씨발 개같은 년을 데려온거야!!” 입 더러운 임감독은 걸레에 담배 물었다. 거실에서 꿈속의 남자 10번으로 중간쯤에 서 있던 나도 스르르 주저앉았다. 카메라가 많긴 많았다. 삼영기획에서 기대주인 완전 신인 이시영이 겁먹을 정도는… 됐다. 이엔지 카메라와 스튜디오 카메라 다섯 대까지 줄줄이 서있었으니까. 공간적으로 담을 게 많은가? 뭐 저렇게 많지? 나는 최사장 덕분에 삼영 기획에서 그쪽 애들이 연기 트레이닝과 발성 배울때 꼽사리로 일주일에 한 번씩 같이 받았었다. 물론, 그쪽 애들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시영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다. 그만큼 갑자기 뽑은 주연급 원톱 이라는 건데… …나처럼 수 십 번 쓴 고배 마셨던 유형은 이시영같은 애들을 부러워 하다가도 원망한다. 특히 오늘같은 날에는… “얼굴은 진짜 예쁜데… 연기는 완전 못한다.” “그러게. 사장님이 쟤한테 총력 기울이는것 같든데….” “이시영 뒷배경이 그렇게 좋다며?” “몰라, 씨발.” 삼영에서 함께 온 놈들이 궁시렁대고 있었다. 10분 휴식이라는 조연출의 말에, 나는 조용히 일어나서 스튜디오 밖으로 나갔다.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에서 손 씻고 나오는데, 이럴수가. 이시영도 여자 화장실에서 나랑 같은 순간에 나왔다. 내가 먼저 고개 숙이자, 이시영도 어색하게 고개를 까딱한다. 인사 한 번 해서 그런지, 문득, 이시영의 처참하게 구겨졌을 기분이 느껴졌다. 4년간 온갖 촬영장을 전전한 덕분이랄까. 엑스트라와 조연중의 초특급 조연만 맡았던 나도, 처음에는 카메라 어디 볼 지 몰라서 버벅댔으니까. 눈이 퉁퉁 부운 이시영이 천천히 스튜디오 쪽으로 걸었다. 나도 그녀 뒤에서 조심조심 걷다가, 자꾸 안쓰러운 기분에 이시영씨… 하고 작게 불렀다. “예?” 그녀가 돌아본다. 예쁘긴… 진짜 예쁘다. 쌍커풀진 커다란 눈, 연약해보이는 몸매… 인어공주처럼 하늘하늘한 세팅 머리. 다른 곳도 아니고, 최사장과 인연이 있는 삼영 기획 신인이라니… 조금 신경써주는 것도 괜찮겠지. “저기… 자연스럽게 대사 하면서 필대로 움직이면 돼요. 어차피 감독님이 원하는것도 자연스러움이거든요. 자연스럽게 대사에 집중하시고 어디 대사에서 살짝 액션만 취해주면 카메라 감독님이 손짓을….” “예?!” 이시영은 굉장히 짜증스럽게 반응했다. 니가 뭔데 나서냐는 듯, 매서운 눈초리… 어떡하지. 여기서 멈출까. “저도 예전에 카메라 잘 못 찾아서 힘들어 한 적 있어서요… 보통 대본을 숙지하지 못할 때, 감독님들이 지시한대로만 움직여도 그림이 나오거든요. 그러면서 3번 돌때는 재빨리 대본을… 그냥… 도움이 될까 싶어서….” 어색하게 웃고 낭패다, 낭패다, 속으로 생각하며 스튜디오에 들어가려는데… “야.” 이시영이 까칠한 투로 부른다. 나를…? 지금 야… 라고 한거야? “예…?” 얼떨결에 존댓말로 대답했더니, 이시영은 너 잘 만났다 식으로 팔짱까지 끼고 같잖다는 듯 쏘아붙였다. “씨발아. 니가 뭔데 가르쳐? 뒤에서 조용히 서있기나 해. 병신. 엑스트라 주제에.” “…….” “아 짜증나. 개나 소나 다 지랄이야. 지랄이.” “…….” 이시영은 아무도 안 보는 사이, 내 앞에서 바닥에 침 한 번 뱉고 스튜디오에 쏙 들어갔다. 뭐야 이거… 나도 짜증난다. 주먹이 꽉 그러쥐어졌다. 소리칠 뻔 했다. 너보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다고. 나는 니가 버벅거리는 한시간 동안 열 줄 대사 다 외웠다고. 사랑스러운 역할이 분명한데, 넌 왜 저렇게 밖에 못하냐고… 별 웃기는 여자 다보겠네. 제발 머피의 법칙이 끝나기를 기도했지만, 다음날에도 내 기분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네… 내일 모레요? 네… 그때 오세요. 네….” 핸드폰 폴더 닫자마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고모가 순돌이를 며칠만 더 봐달란다. 김동완이 호출했는지 이틀째 집에 들어오지 않는 이민우 때문에 가뜩이나 짜증나는 상황이라 그런지, 고모의 부탁이 야속하다. 그래서일까. 순돌이도 귀찮아졌다. 배우들과 맞춰보려고 대학로 갈 때마다 데려가서 가뜩이나 눈치보이는 상황인데…… 집에서도 순돌이는 천하무적이다. 연극 노래 외워야되는데 숨바꼭질 하자고, 놀자고 조르는 순돌이, 동화책 읽어달라는 순돌이,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와서 보란듯이 장난감 어지럽히는 순돌이… “어휴… 진짜 짜증나. 날씨는 또 왜이래.” “삼촌… 나 순대.” 순대 먹고 싶다고 지랄하는 순돌이… 오늘 저녁은 순대랑 김밥이랑 떡볶이로 떼워야겠다. 순돌이 생각하면 밥 먹여야 하지만, 나는 며칠째 반복되는 우울한 기분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머피의 법칙을 떠올릴 만큼 강렬하게 다가온 전진 소식… 이상하게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전진을 본 직후, 나는 하나씩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순돌이 데리고 추위로 꽁꽁 언 길을 걸었다. “삼촌… 다리아퍼… 다리아퍼….” “…….” 다리 아프다고 칭얼대는 애 데리고 마을버스로 세 정거장이나 되는 길을 걸었다. 결국 순돌이가 울었다. 애가 우는대도 짜증이 계속 났다. “진짜 머피의 법칙인가봐….” “응? 응?” “아니야.” 순돌이 업고 늘 그랬듯이 양종호네 반찬가게 갔다가, 나는 또 긴 숨을 내쉬었다. 왜 양종호는 이런 날 쉬는걸까. 맞아. 매주 화요일에 쉰댔지… 침울해지는 기분을 달랠 겸 순돌이 데리고 분식집 가서 이것저것 샀다. 집에가서 먹자고 했지만, 자꾸 우기는 순돌이 고집에 결국 분식집에서 순대 먹었다. 되는 일이 없네… 우울한 기분으로 마을 버스 정류장 앞에 갔다.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니 어둑어둑한게 또 눈이 내릴 기세다. 순돌이가 심심했는지 내 손을 잡고 붕붕 흔들다가 정류장 뒤 서점에 들어가자고 조른다. 그래그래. 니 맘대로 해라. “어서오세요~!” 순돌이 동화책 사느라 종종 왔던 단골 서점… 아저씨가 반갑게 맞아주신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 올렸다. 순돌이는 벌써 유아용 도서 코너로 달려가서 흥분하며 우주의 언어를 외쳤다. “삼!촌! 이거~ 이거~!” “응? 순돌아. 왜?” “나 이거~ 이거~!” “집에 동화책 많잖아. 순돌아.” “이거어~! 이거!!!!” 우리 순돌이는 장난감보다 동화책을 더 좋아한다. 네살에서 다섯살 된 지 얼마 안 되서 그런가? 색채가 예쁘고 아기자기한 동화책에 푹 빠진 갓 다섯살 아기… 반올림, 어린이. 순돌이가 눈을 반짝반짝이며 자기 몸 만한 동화책을 들고 왔다. 저 초롱초롱한 눈빛 공격… 뭐… 그냥 사줄까? 내일 모레 고모네 집 갈텐데… “어디 보자… 이거 갖고 싶었어?” “응! 응!” 순돌이가 갖고 싶다는 책을 무심코 보고, 나는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 했다. 시야가 까맣게 가려졌다. 순돌이가 가져온 책은 '엄마와 아기'라는 유아용 도서였다. 동화책이라고 하면 동화책이라 할 수 있는 유아용 그림책이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책을 들고 있는 내 손이 부르르 떨렸다. 엄마와 아기는, 엄마가 아기를 품에 소중히 안고 환하게 미소짓는 파스텔톤 그림이 표지에 크게 그려져 있었다. 순돌이는 아직 글자를 배우지 않았다. 따라서 이 책 제목이 '엄마와 아기'라는 것도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순돌이는 본능적으로 이 그림이 엄마 라는 걸 알았다는 것이다. “순…돌아… 너… 이 책… 꼭 사야겠어…?” “응?! 응! 응! 나 이거! 이거!” 엄마에게 안아달라고 하듯 허공에 양 팔을 뻗은 순돌이를 보자 내 삶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 앞에서는 제 나이보다 어리게 구는 아이들처럼, 순돌이는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나는 두려웠다. 이 책이 순돌이에게 상처가 될까봐 무서웠다. 어마어마한 위기감이 엄습했다. 빨리 서점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안 돼. 다른 책 골라.” 내가 차갑게 시선을 피하고 책을 내려놓으려고 하자, 순돌이가 필사적으로 반항하기 시작했다. “시러… 시러어!!” “삼촌이 안된댔지. 순돌이 여기 놔두고 삼촌 혼자 간다!!” “이거 사꺼야!! 이거 사꺼야!!” 순돌이 손을 죽 잡아 끌었다. 순돌이가 하얗게 질려서 바둥바둥 거렸다. 다른 책 위에 내려놓은 '엄마와 아기'를 향해, 엄마에게 안아달라고 애원하듯이… “이거!! 이거!!” “순돌아!! 맴매한다!!” 내 언성도 높아졌다. 서점 아저씨가 놀라서 쳐다보든 말든, 내겐 순돌이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 이거 사져!! 이거 사져!!” “안 돼!! 순돌이 혼난다!! 저기 아저씨한테 혼나! 얼른 제자리에 갖다 놔!!” “이거 사꺼야!! 이거 사꺼야!! 이거!!” 씨팔!! 다 지겨워…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울컥- 서러움이 밀려와서 나는 순돌이를 내팽겨치고 문쪽으로 걸어갔다. “삼촌 간다!! 순돌이 너 얼른 책 놔두고 따라 와!!” “!!” 출입문에 손을 대자마자, 등 뒤에서 순돌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우, 우, 우흐, 우흐!” “…….” 어떡해… 엄마… 어떡해… 내가 왜이러지… 나도 속으로 울었다. 그때, 내 가슴을 도려내는 울음소리가 청각에 파고들었다. “어, 어마아….” “!!” 엄마… 바닥에 주저앉아서 순돌이는 '엄마'를 찾으며 울었다. 주먹을 움켜쥐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코끝이 찡해졌다. 가슴이 타들어가는 소리… 엄마. 엄마. 순돌이는… 크게 울지 않는다. 갓난 아기때는 다른 애기들처럼 크게 울었었는데, 세 살때부터 자기 엄마랑 떨어져 지내면서… 울음소리가 다른 애기랑 다르다. 숨죽이듯이 운다. 다른 애들처럼 달래줄 엄마 아빠가 없다는 거, 우리 순돌이는 세 살때부터 알았던 거다. 몇 번을 크게 울어봤자 낯선 사람들이 달래줬으니까… 무엇보다, 순돌이는 엉엉 울었으면 울었지 나랑 민우 앞에서 엄마 아빠 찾으면서 운 적이 없었다. 그런 순돌이가 엄마를 찾는다. 서럽게… 가슴 찢어지게… “어, 어어마아… 우, 우흐, 우, 어엄마… 엄마아… 엄마… 어마아아아….” “…….” 내가 나빴어… 내가 진짜 나쁜 삼촌이야… 뒤돌았다. 내 눈 밖으로도 엄청난 양의 눈물이 터져나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에 다리 벌리고 앉아서 어깨 들썩이면서 우는 순돌이의 작은 모습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순돌아… 삼촌이… 미안해….” “우, 우흐, 우흐, 어, 어, 어마아아… 엄마아아… 어, 엄마….” 내가 안아주자, 순돌이가 순순히 안겼다. 아이는 서럽게 흐느꼈다. “삼촌이… 잘못했어… 흐으….” “어마아아….” 하느님… 이 아이는 너무 어리잖아요… 저같은 상처, 세상에 혼자 남는 상처, 그게 무엇인지 자각하지도 못하는 나이잖아요… 이러면… 안되잖아요… 엄마… 엄마… 나도 속으로 하늘에 계신 엄마를 찾으며 울었다. 눈물 콧물 흘리는 순돌이 닦아주면서 얼마나 울었을까. 순돌이 눈물이 멎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아이를 번쩍 안아들었다. “저기….” “?” 그런 우리를 곤란하게 쳐다보던 서점 아저씨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그는 우리가 울었던 원흉, 엄마와 아기를 봉지에 넣어서 내밀었다. “그냥 가져가세요. 자주 오시는 분인데 서비스로 드릴게요.” “아, 아니에요. 얼마죠? 살게요.” 내가 돈을 지불하기도 전에, 순돌이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행복하게 웃었다. 엄마와 아기를 꼭 껴안고, 자기 몸만한 책이 좋다며 헤헤 웃었다. 집에 오자마자 순돌이가 책 읽는거 곁눈질로 확인하며 좀 멀리 떨어져서 핸드폰부터 열었다. [무슨 일이니?] 저녁 일곱시인데 아직 회사에서 일하는 중인 민경이 누나. 누나의 날카롭고 예리한 목소리는 변함없구나. 민경이 누나는 내가 전화할때마다 신경질적이다. 나도 보통때는 누나에게 전화같은거 안 하지만, 오늘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누나… 순돌이… 안 궁금해?” 내 목소리에도 날이 섰다. 전진을 텔레비전에서 본 뒤로 쭉 이어진 우울증, 머피의 법칙… 끝내고 싶다. [나 지금 바쁘거든? 용건 있으면 빨리 말 해. …그 인간이 애새끼 데려간대?] “매형…? 아니. 누나… 애새끼라니. 누나 아들이잖아.” [니가 내 입장 돼 봐. 그인간 애 낳은거, 그렇게 내 인생 실패했다는거 티내고 싶지 않아. 너 알잖아? 그인간, 딴 살림 차린것도 모자라서 나랑 아버지한테 위자료까지 청구하려던 미친새끼야. …혹시 혜성이 너 지금 애 봐준다고 생색이야? 돈 필요해?] “그런거 아니야. 누나는 순돌이 안 보고싶냐 물어본거였어.” [네, 팀장님! 지금 갈게요! …끊어. 용건 없으면 괜히 전화하지 마. 골치아퍼.] 민경이 누나는 내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사납게 끊어버렸다. 하… 이마에 손을 짚으며 문정혁이 내게 줬던 의자에 주저앉았다. “미친년… 철 좀 들어라.” 하늘이 터졌다. 이틀에 한 번씩은 꼭 내리는 함박눈이, 이제는 내 가슴에도 차갑게 쌓이고 있었다. “왔어?” “이여… 우리 혜스이….” “뭐야… 이민우. 너 지금 새벽이니까, 삼일만에 온거야! 알아?” “우리 혜스이… 우리 혜스이….” “아! 술냄새!!” 새벽 세시, 요란하게 술냄새 풍기면서 집에 기어들어오는 이민우를 보자 신경이 폭팔할 지경이다. 하지만, 반대로 우울하고 초조했던 기분은 신기할 만치 가라앉고 있었다. 전진의 금메달 소식을 매일 매일 떠들어대는 텔레비전도 이틀동안 안 켰는데… 그정도로 우울한 기분과 머피의 법칙에 시달렸던 나는, 삼일만에 집에 온 이민우를 보자마자 차차 개운해지는 정신을 느꼈다. 이민우가 순돌이 자는 방에 들어가려고 해서, 억지로 거실의 좁은 의자에 앉혔다. “물… 무울-!!!” “어휴, 알았어. 조용히 좀 해. 애 깨겠다.” “아, 무울!!!” “내가 못살아.” 고래성을 지르는 이민우 꼬락서니 하고는…. 재빨리 물 갖다줬다. 이민우는 맥주처럼 원샷 하고 눈 감은채로 늘어져서 씨익 웃었다. 짜식이… 위태롭게 늘어진것 치곤… …왜이렇게 섹시해 보이는 거야… 김동완이랑 이박 삼일동안 뭘 하다 온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김동완과 만난 날의 민우는, 유독 피곤해 했다. 하루만 만나도 애가 파김치가 됐었는데, 거의 3일을 밖에서 지냈으니… 엄청 힘들어 보인다. 말끔했던 정장은 진흙 투성이로 변했고, 중간중간 찢겨져 있었다. 거칠게 놀았다고 해도 좀 심하다. 술집 여자들하고 난장판으로 논걸까? 학교 갈때마저 츄리닝 아니면 청바지 입는 놈이, 김동완이 호출만 했다 하면 무조건 블랙 수트라니… 꼬랑내 나는 양말 벗겨주고, 낑낑대면서 이민우 웃옷 벗기려다가 실패… “윽!!” 내가 자기옷 벗기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잠든 줄 알았던 이민우가 내 목 뒤에 팔을 두르더니 확 잡아당겼다. 얼떨결에 이민우 품에 안긴 나는 그의 가슴에 뺨을 묻은 채로 바둥거렸다. 내 등과 허리를 꽉 두른 이민우의 힘이 장난이 아니다. “신혜성….” “응?” 허스키하게 갈라진 음성… 눈 감은 채로 속삭이는 이민우의 은빛 머리칼이 달밤에 고요히 비쳤다. 불이라도 켰으면 좋겠는데… “너… 그럴 때 있냐.” “뭐? 야… 너 술냄새에… 구정물 냄새 같은것도 나. 어디서 놀다 왔길래 이모양이야?” “혜성아….” “왜에… 어어?” 이민우가 나를 더 세게 껴안는다. 얼결에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그는 내 몸을 으스러져라 안은 것도 모자라, 내 목덜미에 대고 흐느끼듯 속삭였다. “혜성아… 혜성아….” “왜그래… 이민우….” 얘가 오늘 좀 많이 취했구나… “혜성아….” “응… 말 해.” 잠깐 숨을 고른 뒤, 이민우는 긴 파도처럼 떠나가는 투를 내보냈다. “나… 행복하다.” “응?” “너랑… 순돌이랑 매일 매일 보고, 너랑 순돌이랑 매일 매일 밥 먹고, 같이 자고, 생활하고, 웃는거… 행복해.” “…나도 그래.” “혜성아….” “응?” “너… 잘 지내다가 갑자기 키스하고 싶어질 때 있냐.” 두근… 왠 키스? 우리 둘의 하나가 된 음영이 바닥에 길게 비쳤다. 선명하게 파고드는 테라스 달빛… 그윽한 이민우의 목소리… 분위기에 취해서 조심조심 물었다. “키스?” “아니면… 섹스 하고 싶을때 없냐.” 뭐? “야… 너 왜이래. 취했어.” “여기 만져봐.” “!!” 오 마이 갓. 이민우가 내 팔을 꽉 잡고 자기 거에 갖다 댄다. 이럴수가. 바지 위에서도 충분히 느껴지는 이민우의 그것. 완전히 커져서 딱딱해졌다. 터지겠다. 내 손바닥이 살짝 닿기 무섭게, 이민우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조금만 만져 줘.” “왜, 왜이래!!” “…….” 내가 뿌리치려 하자, 그는 내 허리를 더 세게 두르고, 내 팔목을 억지로 움직여서 자기 것을 만지게 했다. 정신이 번쩍 났다. 나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외쳤다. “야!! 이민우!!” “만지기 싫으면… 그냥… 뽀뽀나 해 주라.” “얘가 진짜 왜이래!! 너 죽는다?!!” 이민우가 팔목을 풀어줬다. 그대신 자기의 양 팔로 내 몸을 처음처럼 세게 껴안았다. “뽀뽀하기 싫으면… 십분만… 아니, 이십분만 안자.” “…이민우… 너… 울어?” “아니….” 정신없어서 잘 몰랐지만, 이민우는 처음부터 울고 있었던 것 같은데… 착각일까. 술 취해서 내가 여자로 보이나? 나도 조심조심 이민우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술에 취한 그를 위해 최대한 상냥한 투로 다그쳤다.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근데 왜그래… 아, 혹시 너… 짝사랑하는 상대… 만났어? 맨날 뒤에서 쳐다보기만 했대매….” 그가 허망한 숨을 토해낸다. “응… 만났어. 매일 만나. 언제나 뒤에서 쳐다보면서 살아….” “바보야… 고백 하라니깐… 벌써 몇 년 째야. 그러다 속 병 생기겠다.” 그가 왠일로 한글자 한글자 힘을 주며 분명하게 말했다. “절대. 고백하면 안 돼.” 마치, 그의 가슴에 반짝이는 별처럼, 고결한 신념처럼. “왜?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되잖아.” “고백하는 순간부터… 내 행복이 끝날거라는거 잘 알거든.” “야… 걔가 니 고백 받아 줄 지도 모르잖아.” “…….” “이민우….” “…….” 대답이 없다. 설마… 이 상태로 자는 건 아니겠지…? 이상하다… 옛날에 알던 이민우랑, 지금 이민우는 뭔가 다르다. 훨씬 섹시하고, 아찔하고, 아련한… 불투명 수채화 같아. 혹은, 세상을 지탱하는 단단하고 날이 선 기둥같다. “야… 너 씻지도 않고 이 상태에서 자면, 죽음이야.” “…….” “내가 못살아. 너 지금 자냐?” “…….” 이민우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요한 수면처럼 잔잔한 숨소리를 내뱉을 뿐이었다. 어쩐지 그 숨소리를 들으니까, 며칠간의 머피의 법칙과 우울한 두통이 말끔히 씻어지는 기분이다. “이민우… 김동완이 불러두… 너무 막… 늦게 들어오지 마… 알았지…?” 반 이상 벌려진 와이셔츠… 그을린 피부위에 휙휙 그어진 흉터들… 그 위에 뺨을 부볐다. 이민우의 숨결이 약간 거칠어진 것 같아서 뺨을 뗄까 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그는 내 머리통을 꽉 잡고 자기 가슴에 눌러버렸다. “알았어… 안 일어날게… 힘은 드럽게 세가지고… 바보야. 너 안 자지?” “…….” “이민우… 너… 막 집에 안 들어오구 그러면 안 돼… 내일 순돌이도 고모 집에 갈 텐데… 나 외롭잖아.” “…….” “어제 진짜 머피의 법칙이었다? 짜증나… 이시영 이라는 신인 배우가 한 씬 찍는데 얼마나 걸렸는지 알아? 다섯시간 걸렸다? 나 그렇게 돌머리 처음봤어. 나만 돌머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지. 야… 이민우. 자냐?” “…….” “너 한 번만 더 술 쳐마시고 들어오면 알아서 해. 알았어?” “…….” “그래두 니가 있으니까 머피의 법칙이 다 사라진 것 같다. 이민우….” “…….” 초승달이 가려지고 있다. 짙은 어두움의 지휘로 쏟아지는 함박눈 속에 사라지는 빛… 말도 안되는 자세에서, 이민우 가슴에 뺨 묻은 채로 스르르 잠이 들었다. 꿈과 현실의 중간에서, 막 꿈속으로 발을 디디려는 찰라의 순간… 젖은 물방울 같은 뜨거운게 피부를 적셨다. 그리고… 따뜻하고 축축한 무언가가 내 입술에서 닿았다가 떨어졌다. 꿈인가… 잠에서 깨기 귀찮았던 나는, 꿈과 현실의 중간에서, 결국 희미해지는 현실을 뒤로 하고 꿈을 택했다. 전진을 발견한 뒤, 꾸준히 우울하게 보냈다가, 술취한 이민우 보면서 고통을 씻어낸 덕분인지… 그 다음부터 내 인생에 말도 안되는 기적이 펼쳐졌다. 4년 동안 유지해온 초라한 생활, 그러나 언젠가는 될 거라는 알량한 믿음이 현실로 꽃처럼 피어난 것이다. 진짜. 기적이 일어났다. 첫번째 기적은, 최사장이 알려줬다. “혜성아. 너 저번에 봤던 오디션 두 개 있잖냐.” “예? 예.” 너구리를 먹을 것이냐, 삼양라면을 먹을 것이냐로 옥신각신하던 최사장과 나는 사이좋게 둘 다 끓이기로 합의 본 상태였다. 그런데 난데 없이 오디션이라니? 나는 그의 입에서 오디션 소리 나오자마자 시무룩해졌다. 그도 그럴듯이 지난 4년간 오디션에 붙어본 기억이 없어서다. 붙어 봤자 조연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의 엑스트라급이었다. 태권도 배운 다음에는 액션씬에 간당간당 붙는 정도…? “그 오디션들 다 떨어졌는데 어떡하냐.” “…….” 그럴 줄 알았다. 기획일 하느라 일주일동안 출근 못한다고 난리쳤던 인간이 왜 굳이 충무로 사무실까지 왔나 했다. 오디션 떨어진거 놀릴려고 왔나보다. 장난기 그득한 최성수 면상에 슬슬 끓기 시작하는 물 부어 버리고 싶다. “괜찮냐?” 나는 일부러 씩씩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죠! 늘 있던 일이잖아요!! 더 노력해야죠, 뭐.” 마음은 죽을 쓰고 있지만… “발성연습 매일 하지? 삼영에 가서 일주일에 한 번씩 트레이닝 받는거, 하고 있지?” “네….” 몇 번이나 마셔본 쓴 고배인데, 유난히 마음이 서럽다. 찬 바람 휘몰아치는 겨울이라서 그럴까. 낼 모레 시작하는 연극 무대에 온 신경을 기울여도 모자랄 판에, 이런 우울함은 빨리 떨쳐야겠다. 전진… 뉴스에서 하도 전진 소식 보다 보니까 이젠 감각도 무뎌졌다. 그와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구나- 하는 이질감이랄까. “혜성아.” “네?” 뭐. 김치 꺼내오라고? 내가 억지로 입꼬리 올리면서 표정으로 묻자, 최성수가 고개를 살레살레 저으며 갑자기 으하하하! 웃는다. 이 인간이… 드디어 미쳤구나. “사실… 뻥이야!!” “예?” 그가 내 어깨를 꽉 잡고 일으키더니 무작정 얼싸안는다. “너 임마, 영화 오디션 한 개 됐어!!” “…….” “왜, 안 믿어져?” “거…짓말 하는거 아니에요?” 내 목소리는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지난달에 봤던 오디션 두 개… 그거, 역할이 꽤 큰 거였어… 동공이 미친듯이 흔들렸다. 최성수가 흥분해서 날뛰었다. “아냐 임마! 조연이긴 하지만, 주연급이야! 주조연! '배역'이라는게 확실히 있어! 대사도 많아!!” “!!” 털썩. 나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다리고 뭐고 온 몸에 힘이 풀렸다. 기적같은 소식 앞에서, 내가 할 일은 눈물 흘리는 것, 벅차게 요동치는 심장 붙드는 것 밖에 없었다. 뼛속까지 다 녹아버릴 만치 행복한 소식을 꽉 쥐고, 나는 라면 먹기도 전에 압구정으로 향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가슴이… 마구마구…!!! “고모!!” 압구정역에서 가까운 아파트 7층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안 났다. 쿵, 쿵, 쿵, 요동치는 심장을 붙들며 마침 집에 계시는 고모를 얼싸안았다. “혜성아, 아이고, 왠일이야! 아니, 옷 이렇게 입고 온 거냐?!” “아아! 고모! 고모! 으, 으흑! 으흐윽.” 현관문 여는 즉시 내 품에 안긴 고모는, 나를 반가워하기도 잠시, 내 행색에 놀라셨다. 그도 그럴듯이 최성수에게 오디션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웃옷도 안 걸치고 사무실에서 뛰쳐 나갔기 때문이다. 엉망으로 울면서 고모 품에 매달렸다. 행복으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온 세상이 오로라빛이었다. “고모… 저요… 오디션… 흐으윽….” “아니 왜. 또 뭐 떨어졌다든? 괜찮다. 니 나이에는 뭐든 해본다는게….” “아니에요! 아니에요! 고모… 저요… 합격했대요!!” “!!” 신발 벗고 들어가자마자 찢어지게 외치는 내 소리에, 고모는 잠시 멍하게 서계셨다. 그리고 아까 내가 그랬듯이 이번에는 고모가 나를 억세게 끌어안고 오열하셨다. “아이고, 혜성아! 이놈아… 이놈아… 진짜 잘했다. 너무 잘했다. 그동안 고생했어… 혜성아… 으, 으흑.” “고모… 고모… 흑, 흐윽.” 넓고 근사한 고모와 고모부의 집. 따스한 거실에서 고모와 나는 한참을 울었다. 검정고시 보기 전부터 오늘날까지 조용히 나를 믿어주신 고모가 고마워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사업에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고모부가, 그동안 내게 연극이니 사업이니 팍팍 밀어주겠다고 할 때마다, 나는 극구 만류하며 4년동안 홀로서기 했다. 전진이 성공해서, 그와 텔레비전으로 재회한 뒤로는 내내 쓴물을 삼킨 기분이었다. 내 자신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이제는… “삼!!촌!!” “순돌아!!” 고모 방에서 낮잠 자던 순돌이가 내 울음소리에 벌떡 일어나서 달려왔다. 나는 순돌이를 번쩍 안고 허공에 빙글빙글 돌렸다. 까르르- 아이의 웃음 소리에 온 세상이 핑크빛 수채화로 물들었다. 하얀 겨울의 마법 가루가 내 세상에 뿌려졌다. 학교를 움직이던 '그것들'이 세상을 움직이기 위해 눈을 뜰 무렵, 내게도 기적이 하나 하나 펼쳐지기 시작했다. 가장 아름다운 젊은 날에… 오디션에 합격한 작품명은 T.O.P사의 야심작, '아가사(Agatha)'였다. 현재 시나리오와 스텝진 구성, 파이낸싱까지 거쳤다고 하니, 장소 헌팅만 완벽하게 이뤄지면 4월이나 5월, 영화 리허설과 제작발표회가 진행되고,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된다고 했다. 여기까지 설명을 듣다가 고모부가 내 등을 툭 치며 감동으로 얼룩진 낯을 그대로 보이셨다. “니가 진짜 영화배우가 되는구나!” 얼마나 좋아하는지 고모부의 목소리에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고모부와 고모는, 내 오디션 결과를 두고 혹시 이게 사기라던가 취소되는건 아닌지 걱정된 나머지 최성수 사장과 T.O.P사와도 통화하셨다. 고모는 당장 축하파티를 해야된다며, 온 가족을 호출했다. 덕분에 충무로 돌아갔다가, 대학로에서 최종 마무리 연습하고, 또 고모네 집에 갔다. 근사한 식탁이 차려졌고, 민경이 누나 빼고 민우까지 모여서 저녁식사하는 자리에서, 나는 열심히 오디션 결과에 대해 설명했다. “T.O.P사라면… 대형 프로덕션 아니냐?” 고모의 질문에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네. 파이낸싱에서 건진 배급사도 빵빵하다던데… 그런 세세한 것 까지는 잘 몰라요. 나중에 자세히 알아볼게요.” “그래그래. 니가 맡은 역할이 뭐라고?” “아, 유약하지만 신비로운 이미지의 청년이에요. 영화 제목처럼 영화 속에서도 제가 맡은 청년 이름이 '아가사'예요.” 이때, 넓은 식탁 구석진 자리에서 닭다리 물어뜯던 민형이 형이 비아냥스런 어조를 던지며 피식 웃었다. “근데 왜 주조연이래?” 서울대를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년째 집에 빌붙어서 고모부 돈 축내면서 사는 민형이 형의 짜증스런 투에, 잠깐 침묵이 맴돌았다. 나는 다부지게 말했다. “주조연이긴 하지만, 주연급이랬어.” “쳇. 그거 해봐야 아는거 아냐?” “시나리오도 오디션 볼 때 다 외웠는데?” “구라치시네.” “구라 아니야.” “출연료가 그게 뭐냐? 참나… 조연 확실하네~ 주조연은 무슨.” “…출연료는 중요하지 않아….” “야 신혜성. 구라 까지 말라고.” 진짠데… 나와 민형이 형의 대화가 기가 막혔는지 고모부가 민형이 형에게 무섭게 쏘아붙였다. “이민형. 너는 동생이 혼자 자립해서 고생하다가 좋은 소식 들고 왔는데, 형이란 놈이 고작 그딴 말밖에 못하냐.” “…친동생도 아니면서 뭘.” “이민형!!” “아이씨.” 민형이 형은 결국 밥 먹다 말고 벌떡 일어나서 자기 방에 들어가버렸다. 나는 역정내시는 고모부 만류하느라 진땀 뺐다. “저노무 자식이!!” “고모부~ 고모부우… 순돌이도 있는데, 참으세요….” 고모부는 그뒤로 많은 양의 술을 들이키셨다. 아마 민경이 누나 일과 민형이 형의 한심한 모습에 속이 상한 모양이다. 늘 바쁜 고모부가 몇 년 새 많이 늙으셨다. 외형적으로는 예전보다 근사해졌지만, 눈가에 맺힌 주름을 보자 가슴이 찡해졌다. 고모부와 고모는 일부러 내게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셨지만, 나는 보였다. 그분들의 씁쓸한 가슴앓이가… 내가 고모부와 고모와 대화 할 동안, 민우는 입을 꾹 다문 채 순돌이만 챙겼다. 순돌이는 내가 온 게 좋았는지 우리중 유일하게 식사를 말끔히 해치웠다. 우리 순돌이 키는 또래보다 작은데, 옆으로 퍼진 살은 또래를 능가하고 있어… 손님방에서 잘까, 이민우 방에서 잘까 고민하다가 그냥 이민우 방에 갔다. 달칵…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침대에 벌러덩 누워서 공허한 낯으로 천정 쳐다보면서 담배 피우고 있던 이민우가 나를 힐끔 쳐다봤다. “나 여기서 자도 돼?” “어….” 무슨 고민 있나? 이민우가 착찹한 낯으로 여러번 긴 숨을 내뱉는다. 담배 연기로 위장한 한 숨… 얘는 왜 갈수록 위태로워지는거야… 조용히 침대에 앉았다. 앗, 엉덩이 끝부분이, 누워있는 이민우 옆구리에 닿았다. 괜히 머쓱해서 엉덩이를 앞으로 10센티 이동했다. 하지만 민우가 내 허리를 두르고 도로 잡아당기는 바람에 다시 원 위치… 슬쩍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공허한 낯으로 우수에 찬 눈망울을 천정에 고정시킨 이민우가 보였다. 약간 거칠어진 피부, 수심 짙은 표정,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 시린 밤바다 같은 눈동자… 몇 년은 더 산 사람처럼 삶이 묻어나는 한 숨 소리… 각진 턱 끝에 까끌하게 튀어나온 수염… 남자답게 벌어진 어깨… 옅은 주홍빛을 띠는 입술과 탁한 담배연기… 이민우는 위태로운 만큼 근사했다. 보는 이를 흡수시키는 오묘한 눈빛을 지녔다. 그래서 이민우랑 시선을 부딪힐때 먼저 고개 돌리는 사람은 나였다. “왜?” “아니야.” 지금처럼… 이민우가 시선을 부딪히며 왜? 라고 건조한 투로 묻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틀었다. 옛날, 고등학교 시절에 내가 알던 이민우랑 지금의 이민우는 너무 다르다. 지금의 이민우는… 나보다 앞선 어른이다. 삶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영혼이 만져졌다. “이민우… 근데… 너, 진짜 말 수가 많이 줄어들었어. 그거 알어?” “…그래?” 그가 피식 웃는다. 입꼬리를 약간 올렸을 뿐인데 외국 모델처럼 근사하다. 나는 조심조심 이민우 옆에 누웠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내 머리에 부드러운 쿠션을 대 준다. 짜식… “후….” 벌써 몇 대를 태우는거냐… 담배 연기를 내보내는 민우 때문에 내 폐가 골골거리고있어… 나는 이민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옆으로 누우니까 이건 마치… 내가 이민우에게 안긴 꼴이다. 단단한 가슴이 코앞에 보인다. 조각같은 얼굴의 옆 라인도… 나는 이민우의 턱과 눈동자를 구경하며 궁시렁거렸다. “이민우 진짜 많이 변했어.” “후….” “옛날에는 중얼중얼 거리는 말도 잘 하고, 아니, 요즘에도 그건 하지만… 아 몰라~ 하여간, 너 진짜 옛날하고 달라. 말을 심하게 아낄 때가 많아.” “…….” “이것봐! 이것봐! 너 지금 입술 살짝 깨무는거! 옛날엔 안 이랬어! 너 지금 또 하고싶은 말 참았지! 참았지?” 그가 별안간 허공에 대고 하하하! 웃더니, 내 등을 감싼 손을 위로 올려서 내 머리칼을 우악스레 쓰다듬었다. “뭐야! 맞잖아! 하고 싶은 말 참은거 맞잖아! 이민우!” “…아냐, 임마.” “아니긴… 확실하게 꼬집을 순 없지만, 진짜 분위기부터 달라졌는데…….” 그가 잠깐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스르르 일어나서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이번에는 그가, 누워있는 나를 내려본다. 그 눈빛이 슬프도록 애틋해서 나는 시선을 피했다. “하고 싶은 말을 참고, 또 참고 살다 보면 그렇게 변하는 거야.” “하고 싶은 말?” 쿠션에 뺨을 파묻으며 내가 묻자, 이민우는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하듯 강하게 대꾸했다. “응.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말.” “?” “하하하. 혜성아. 너… 진짜… 그런 표정… 미치겠다. 귀여워. 순돌이 응가 할 때랑 똑같애.” “!!” 이자식. 같이 고민 좀 해보겠다는데 뭐라고? 자지러지게 웃는 이민우 면상에 쿠션 던졌다. 그가 나를 꽉 끌어안고 어서 자자며 억지로 내 눈 감게 한다. 우리 둘은 오랜만에 장난 치면서 쓸데없는 농담을 지껄였다. 그치만…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말… 그게 뭐야, 대체. 두번째 기적이 일어났다. 초라한 소극장에서 막을 올린 연극이, 대성공을 이룬 것이다. 처음 며칠은 관객이 한 명도 없어서 텅 빈 객석을 향해 혼신을 다 해 연기했었는데, 이럴수가. 하루 이틀 지날수록 사람이 늘어나더니, 나중에는 자석처럼 굉장한 인파가 몰려들었다. 개막 전까지 자는 시간 아껴 가면서 노래 연습하고, 매일 매일 대학로 와서 배우들이 리허설 끝난 다음에도 무대에 인형 앉혀놓고 연습했던 나는… 믿을 수 없는 사건에 '기적'이란 단어를 아낌없이 내주었다. 이건 누가 봐도 기적이었다. 시나리오마저 평범했는데 성공하다니. 무대와 객석 자리가 가깝다 못해 첫 줄은 붙어있는 거나 다름없는데, 이 작품이, 이 연극이, 대학로를 휩쓸었다. 결국 연극은 연장 공연에 돌입했다. 평일에도 사람이 꽉꽉 차다 못해 늘 객석이 모자랄 정도였다. 기이한 이 현상을 취재하러 오는 기자들도 많아졌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대 스타들도 종종 우리 연극 관람하러 왔다. 나는 매일 매일 소름끼치는 현상을 보고, 막을 내리는 순간마다 배우들과 얼싸안고 울었다. 처음에는 주연 배우들과 연극 시나리오만 취재하던 기자들이, 연장 공연 들어가면서부터는 나를 찾았다. “신혜성씨. 단독 인터뷰 시간 내주시겠습니까?” 왜 나를 찾지? 주인공이 아닌데? 하며 의아해 하던 나는, 최성수 사장과 인터뷰 부분에 말을 맞춘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연극이 폭팔적인 인기를 끌어내서 3월 중순까지 연장공연하던 어느날, 성공한 이유를 알아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 노래 때문이란다. 고작 세 곡 부르는 내가 등장할때마다 흡입력의 강도가 세져서 보는 사람들마다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결국 나는 인터뷰 한 번 하지 않고, 신문지면 연예란에 올랐다. 연극의 마지막 날, 배우, 스텝분들과 회식이 끝난 자리에서 그들은 내게 고맙다고 보너스까지 줬다. 방송국에서 취재 해 갈 정도로, 또, 방송국에서 나를 집중 인터뷰 하고 싶다고 요청할 정도로, 나로 인해 연극이 성공하다니. 회식이 끝나고서도 믿을 수 없었다. 대학로를 걸어갈때마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힐끔거렸고, 이제는 대놓고 싸인해달라고 한다. 꿈이 아닐까 싶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볼을 꼬집었다. 무대에서 노래 할 때마다 내 가슴은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노래 연습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는 내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 넘치는 희열을 감당하지 못 해 하루에 몇 차례나 머릿속에 만 송이의 꽃을 피웠다. 말도 안돼… 단 한 달 사이에 소극장에서 펼친 연극 하나가 내게 가져다 준 기적, 그것은 영화 캐스팅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세상이 내게 주목한다고 해도, 당사자인 나는 전부를 실감하지 못했다. 그냥, 연극이 성공했구나… 이 정도만 느낄 뿐이었다. 대 배우들이나 스타들이, 자기들이 인기있는 것을 실제로는 잘 실감하지 못한다고 인터뷰하듯, 나도 그랬다. 그러나, 분명히 내 이름이 빛나는 기사가 떴고, 연예 정보 프로그램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인터뷰 한 번 하지 않는 신비주의자가 되었다. 신비주의 전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는, 더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아니, 그렇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그저 어딜 가든지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늘었다는 것? 그것만 알겠다. 나를 표현한 기사 내용들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나와 직접 인터뷰를 하지 못 한 기자들은, 신혜성이라는 사람을 원석 이라고 표현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목소리라고, 사람을 홀리는 그윽한 보이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양한 표정을 지닌 배우, 몇 년간 무명으로 스스로를 다듬은 준비된 신인, 아름다운 외모… 실제보다 더 한 극찬을 퍼붓는 기사들… 내 존재는 대 배우들 못지 않게 압도적인 영향력이 있노라며 원톱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내가 갑작스러운 인기와 성공을 실감한 것은, 연극이 완전히 막을 내리고 충무로 기획사에 돌아와서였다. 3월 중순, 여전히 쌀쌀한 날씨에 몸을 움츠리며 출근하는데… 기획사 입구에 다닥다닥 모여있는 기자들이 후레시를 터뜨렸다. “신혜성씨! 본인의 이미지, 신비주의 전략에 대해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도 예상 못 한 연극 성공이, 무명인 신혜성씨 혼자만의 힘이라는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앞으로도 연극 무대에서만 볼 수 있는 건가요?” “T.O.P사가 추진하는 '아가사'에 주연으로 출연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한 말씀 부탁합니다!” 맙소사… 입구를 꽉 막은 기자들 덕분에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야구모자 쓴 채로 한 마디 대답을 못 했다. 그냥 연극이 성공했다-정도로 알았던 나의 영향력은, 내가 예상한 부분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그게 어느 정도 수치인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나란 존재가 세상의 이슈가 되었다. 내가 온 것을 알고, 최사장이 달려나왔다. 그는 내 얼굴을 잠바로 감싸며 기자들을 물리쳤다. “비켜주세요! 비켜주세요! 공식 홈페이지에서 스케줄로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뭐라고? 우리가 홈페이지가 어딨어…? 근데 이거… 최사장 잠바에서 김치냄새… 이 인간이, 냉장고에 김치 얼까봐 싸 둔 잠바로 내 얼굴 가린거야? “죄송합니다! 신혜성씨의 공식 인터뷰는 영화 제작 발표회때 할 것입니다! 기자 여러분들! 조금만 비켜주세요!” 사무실에 들어가는데만 삼십분 넘게 걸렸다. 오십명 넘게 모인 기자들은 천하무적이었으니까. 대체 밥먹고 방어 기술만 배운건지, 최사장과 내가 몸으로 밀어봤자 끄떡도 안 했다. 결국 최사장은 조만간 공식 인터뷰를 잡겠다고 허공에 대고 꽥 소리쳤고, 기자들은 아쉬워 하며 우릴 풀어줬다. 그야말로 전쟁 시작이었다. 행복하고 아찔한 전쟁의 시작. “완전!! 김치 냄새!! 뭐예요!!” 책상에 잠바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온 몸에 김치 냄새로 도배되겠어… “야, 장난 아니야. 지금 삼영에서 너 달라고 나한테 제시한 금액만 10억이다.” “예?” 그 콧대높은 기획사에서 뭐라고? 나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낯으로 멍청하게 섰다. 충무로의 13평 사무실, 꼬질꼬질하고 좁은 최사장과 나의 책상, 서랍에 들어있을 너구리와 삼양라면… 변한 게 하나도 없는 이 공간에서, 최사장과 나만 변했다. 최사장은 내가 연극에 신경쓰는 한 달 동안 온갖 곳을 뛰어다녔다고 한다. 예전처럼 우리 신인 써주십사- 부탁하러 뛰는게 아니라, 여기저기서 최사장을 직접 찾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무실에 직접 오겠다고 했으나, 돼지우리같은 사무실을 보여줄 수 없는 최사장은 근사하게 폼잡고 부르는 곳마다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 결과, 신혜성이란 원석의 값이 얼마나 대단해졌는지 소름끼치게 알았다고 한다. 게다가 웹 에이전시사의 협찬으로 공식 홈페이지까지 생겼다. 매일 라면먹던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티백 녹차를 두 잔이나 마셨다. 최사장과 나는 결국 동시에 울었다. 연극 내내 둘 다 바빠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우리는, 고단했던 지난 세월 만큼 단단해진 우정을 과시하며 한없이 울었다. 눈물을 다 닦아낼 때 즈음, 최사장이 붉어진 낯으로 말했다. “혜성아. 너, 가수도 해야겠다.” 그의 목소리처럼 나도 들떠 있었다. 하지만 가수라니? 나는 연기자가 꿈이었고, 당연히 연기자가 되려고 4년간 엑스트라 아르바이트에, 오디션에, 안 해 본 게 없는데… 내 표정을 다 알아본 최성수가 또 눈물을 펑펑 쏟으며 감동에 찬 음성을 열었다. “야. 지금 음반 안 내냐고 난리야. 내가 있지. 혜성아. 이 계통에서 십 년 넘게 있어봐서 아는데… 너같은 놈은 십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원석이야. 실감 안나지… 그치?” 뭉클… 내 눈도 금세 촉촉해졌다. “사장님….” “너 임마… 너야 말로 준비 된 완벽한 신인이자 스타라는 거야… 너….” 그가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울기 시작할 때, 나도 함께 울었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저 믿고… 이렇게….” 마치 내 길은 가수라고 누가 알려준 것 처럼 엉뚱한 곳에서 빛이 열렸다.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의 선물처럼… 모든 빛이 내게 모였다. 아무도 목소리를 궁금해 하지 않던 신혜성. 좋아하는 노래 18번을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던 신혜성. 단역으로 출연해봤자 알아주지 않던 신혜성. 신혜성 이라는 이름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나조차 놀랄 만큼, 사람들에게 '기억'으로서… 사람들은 내 식습관과, 좌우명, 별자리, 혈액형, 신발 사이즈, 좋아하는 음악, 이상형… 모든것을 알고 싶어했다. 그들의 '기억'에 나 라는 방을 만들었다. 세 번째 기적은 나 혼자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상상 이상으로 극성을 부리는 기자들을 물리치고, 사장님과 짜고 압구정동 고모네 집에 들렀다가 목동 내 집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한시. 공식적인 내 집 주소는 고모네 집, 압구정동이다. 최성수 사장과 고모부의 의견이었다. 나는 그분들 뜻에 따라 늘 압구정동에 들어가는 척 했다가- 고모부한테 인사하고, 기자들이 사라졌을 때 쯤, 조용히 목동으로 돌아갔다. 벌써 내 이름으로 팬클럽도 생겨서 고모네 집 밑에 나 보러 온 팬들도 종종 만났다. 내 생활은 한 순간에 바뀌었다. 바쁘고, 빠르게. 단 하나 바뀌지 않은 곳이 있다면, 내가 원래 살던 보금자리, 23평의 안락한 목동 빌라 1층이었다. 나는 여느때보다 편안한 내 집에서 노곤한 몸을 쉬어주었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거쳐간 내 집… 여기만은 포기할 수 없어. 사람들에게 들키기 싫다. 너무나 외롭고 쓸쓸해서 누구든 와주길 바랬던 목동 집, 이제 이곳은 나만의 휴식처가 되었다. 3월 마지막주 금요일, 공식 인터뷰까지 마치고, T.O.P 제작자들 저녁 회식에 불려갔다가, 앞으로 음반 녹음에 대한 간략 회의, 이 모든걸 하루만에 마친 나는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든 만큼 피곤한 상태였다. 그러나, 뼛속까지 쾌락을 느끼는 행복한 피곤함이라서 좋았다. 내일 하루는 무조건 쉬어도 좋다는 최성수 덕분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예전에는 하루종일 일이 없어서 마냥 시간 보낸 적이 허다했었는데… 바쁘다 보니, 전진이고 뭐고 생각할 틈이 없었다. 텔레비전 켤 시간도 없었어… 이민우는 예상대로 없었다. 그는 최근 자주 집을 비웠다. 그만큼 김동완이 부르는 횟수가 늘어난 것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민우한테 서운하다고 툴툴거렸겠지만, 지금은 너무 바빠서 신경쓸 겨를이 없다. 아, 순돌이는 고모랑 잘 지내고 있겠지…? 집 안에 굴러다니는 순돌이 장난감을 보니까 마음 한 켠이 무거워진다. 그러다가 내 눈에 띄는 낯선 박스 하나. “?” 뭐지? 선물인가? 우리 집 주소는 분명히 압구정으로 되어 있는데…? 조심조심 거실 불을 켰다. 해외에서 온 박스였다. 이민우가 받은 모양이다. 도착한 날짜는 며칠 전인데… 우와. 그동안 집에 들어오면 바로 쓰러져서 잤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 박스가 있는 줄도 몰랐을까. 40인치 텔레비전이 들어갈 정도로 큰 박스를 보며 나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쁘게 지냈는지 실감했다. 테라스 옆에 가지런히 놓여진 박스 테잎을 뜯었다. 발신인이 없는 걸로 봐선 팬이 보낸 것 같다. “으잉?” 포장을 풀자마자 보이는 수많은 동화책들… 파스텔톤의 예쁜 표지와, 아기자기한 제목이 좌라락- 30권 넘게 있었다. 왠 동화책? 그중에는 내가 아는 것도 몇 권 있다. 우리 순돌이가 좋아하던 꾸꾸야. 꾸꾸야의 알 찾아 먹인답시고 양종호네 반찬 가게 가서 메추리알 얻어왔었지… 동화책 종류가 굉장히 다양했다. 유아용부터 어린이용, 성인용 동화까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랄까. 어떤건 얇고, 어떤건 두꺼웠다. 하나씩 책을 꺼냈다. 왜 동화책이 왔는지 모르겠지만, 수신자 명은 분명히 내 이름이었다. 지은이는 세 사람이었다. 어떤 책의 지은이는 '로트' , 또 어떤 책의 지은이는 '트로'였다. 그리고 몇 권은 저자가 '메들리'라는 여자 이름이었다. 로트, 트로, 메들리. 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알고 책을 보냈지? 아니, 누가 이사람들걸 왕창 사서 나한테 보낸건가? 호기심에 동공이 반짝 빛났다. 한권 한권 책을 훑다가, 나도 모르게 번쩍 뺨을 쳐들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설마 설마 하는 생각을 안고 방에 뛰어들어가서 책꽂이에 꽂혀있는 '겁쟁이 크레용 공주의 모험'을 가져왔다. 그냥 그래야 될 것 같았다. 솜바람처럼 일어나는 상상 하나가 나를 부추겼다. 입 안에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겁쟁이 크레용 공주의 모험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점을 찾으려고 새 책들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비슷한 점이 없다. 그럼 그렇지. 나는 씁쓸한 숨을 내쉬며 박스에 책을 다시 담기 시작했다. “!!” 그러다 머릿속을 뚫는 벼락같은 생각이 휙 스쳐서 책을 도로 다 꺼냈다. 말도 안돼… 설마… 말도 안돼…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로트… 트로… 메들리… 로트… 트로… 메들리….” 쿵… 심장이 떨어졌다. 내 안의 별 하나가 번쩍이더니, 거침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트로트… 메들리…?” 암호가 풀렸다. “문정혁… 문정혁…!!” 트로트를 좋아하던 문정혁. 구교사동에서 트로트 메들리를 노상 틀어놓고 공부하던 문정혁…!!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아아 하느님. 나는 책을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가 내게 자기가 쓴 책을 보낸 것이다. 저 하늘 아래 어디선가 나처럼 눈물 흘릴 지도 모를 문정혁이… 문정혁이… 내게 4년 만에 처음으로 '소식'을 알렸다. 자기는 여전히 꿈을 실현하고 있노라며…! 당장은 아니더라도, 곧 만날 것을 열심히 암시하며…! “아침마당이요?” [그래. 오늘 하루 푹 쉬고~ 내일 일곱시에 데릴러 갈게.] “오늘 술 마실 것 같은데… 밤에 친구들 온댔어요.” [야!! 적당히 마셔!! 안되겠다. 내일 여섯시까지 갈게. 눈 부어 있으면 안된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모처럼 쉬는 날이라서, 늦잠 자려고 했더니, 최성수 이 인간이 오전 아홉시부터 전화질이다. 내가 처음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프로는 주부들이 많이 시청하는 아침마당이 좋을거라나 뭐라나. 하긴. 그 프로그램 정도면 진짜 대단하긴 하지. 사회 유망 인사들이 대거 출연하는 프로그램이니까.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프로. 시작을 알리기에 딱 좋다. 통화가 거의 끝날 무렵 이민우가 들어왔다. 왔어? 눈짓으로 인사하자, 이민우가 완전 피곤해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예. 그럼 내일 봐요, 사장님.” 플립 닫는 동시에 냉장고 문 열었다. 흠… 뭐 먹을만한거 있나? 대충 훑어보고 냉장고 문 닫으려다가, 실수로 문쪽에 걸쳐놨던 팔이 찍혔다. “아….” 작게 말했을 뿐인데, 식탁 의자에 앉아있던 이민우가 벌떡 일어났다. 그가 읽던 신문이 거센 동작으로 인해 바닥에 떨어졌다. “다쳤어?!” 금방 무슨 일이라도 날 것 처럼 눈을 크게 뜨고 달려온 이민우가 사색이 되서 내 손을 면밀히 살핀다. …이러면 차라리 다치는게 나을 것 같잖아… 냉장고 문에 살짝 닿은 것 뿐인데… “아니… 괜찮은데….” “쯧….” “…….” “바보야. 놀랐잖아.” “아야.” 그가 내 이마를 콩! 자기 이마로 찍는다. 이놈이…! 니가 방금 누른게 더 아프다! 라고 따지려 했지만, 이민우는 재빨리 옷 갈아입고 나갈 준비했다. 아쉬운 마음에 이민우가 현관에서 신발 신는거 팔짱 끼고 노려봤다. “벌써 나가? 이따 저녁때 양종호하고 공씨 오는데….” “그때까진 들어올거야.” “이민우. 너 또… 김동완이 호출한거지?” “…….” 화제 돌려야겠다. 이놈의 몹쓸 입버릇… “민우야, 나 앨범 나올거야. 아마 제작 발표회 직전에? 싱글앨범이라서 한 곡 밖에 안 들어가.” “응.” 뭐야. 고작 저게 대답 끝? “이민우! 이민우우!” “미안. 늦어서 너랑 못 놀아주겠다. 늦지 않게 들어올게.” “!!” 뭐? 내가 언제 놀아달랬어! 어이없어서 황당한 낯으로 쳐다봤더니, 이민우는 석고상이 된 나를 뒤로 하고 재빨리 나가버렸다. 기가 막혀!! 씩씩거리면서 베란다에 갔다. 웃겨! 웃겨! 웃겨! 아무도 듣지 않는데 혼자, 웃겨! 이민우! 라고 수 십번 중얼거리면서… 그러고보니, 벌써 3월이 끝나간다. 추웠던 계절이 옷을 벗고 있었다. 한결 따뜻해진 햇살… 만물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쉬는 김에 빨래나 해야겠다. 그동안 이민우 혼자서 빨래 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이것도 이민우 옷, 저것도 이민우 옷, 이민우 양말, 이민우 빤스… 빨래걸이에 널린 옷이 죄다 이민우거다. 그리고, 빨래통에 막 던져진 옷도 이민우 것. 아마 방금 들어와서 벗은 옷인가보다. 지저분한데다가 빨간색 물감 같은 것도 튄 남색 청바지… 세탁기에 청바지와 까만색 티를 넣었다. 그러다 아차 싶어서 청바지를 도로 꺼냈다. 빨래 하기 전에, 주머니에 뭐 있나 봐야지… 예전에 주머니에 만원 넣고 돌렸다가 낭패 봤던 뒤로, 다른 건 몰라도 이 습관만은 잘 지켜왔다. 빨래 돌리기 전에 주머니 살피기. 이민우 주머니에서 뭔가 만져진다. 냉큼 꺼내보니, 키홀더가 나왔다. 차도 없는 놈이 왠 키홀더냐. 키홀더 안에는, 우리집 열쇠와, 낯선 열쇠 몇 개가 매달려 있었다. 흠… 혹시 종이 쪼가리 같은거 있나 싶어서 키홀더 안쪽에 무심코 손가락 넣어봤다. 앗, 뭔가 잡힌다. 혹시, 돈?! 십만원짜리 수표이길 바라며 조심조심 꺼냈다. “?” 하지만 이민우의 키홀더 안주머니에서 나온 종이는 내 사진이었다. “뭐야… 내 사진을 왜 갖구 다니냐….” 사진만 다섯 장이었다. 한 장은 어렸을 때 사진, 세 장은 고등학교때 사진, 또 한 장은 이민우랑 살면서 이민우가 찍었던 내 사진… 사진속의 나는 투명하게 웃고 있었다. 그중 가장 잘 나온 고등학교때 사진을 오랫동안 쳐다봤다. 내 사진이지만 이건 진짜 잘 나왔어… 무심코 사진 뒷면을 봤다. 이민우가 네임펜으로 뭐라고 적어놨다. 한글자 한글자 천천히 읽었다. 읽을수록 내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읽을수록 내 동공에 격랑이 일었다. 읽을수록 내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너만 행복하면 돼… 신이시여. 우리 혜성이 행복하게 해주세요. 내 목숨과 바꿔도 좋은 내사랑…- 맙소사… “!!” 이민우의 글씨가 분명했다. 마치 주문처럼, 간절함을 담아서 한글자 한글자 정성스럽게 적은 흔적이 만연했다. “이게… 뭐야… 이게….” 이민우… 이민우…! 머리에 총이라도 맞은 양 몸이 흔들렸다. 충격 이상의 것, 나는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글씨를 믿을 수 없었다. 두근, 두근. 이민우가 그동안 내게 보여준 눈빛, 내게 했던 말… 모든게 필름처럼 한순간에 스쳤다. 아닐거야 하면서도 퍼지는 망상이 나를 짓눌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사진을 키홀더에 넣고, 키홀더를 원래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청바지도 빨래통에 다시 넣었다. 혹한에 발가벗고 서 있는 것 마냥 온 몸이 떨렸다. 내가 우왕좌왕 하다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거실 소파에 앉자마자, 찰나의 순간에 이민우가 집에 튀어들어왔다. “!!” “!!” 우리 둘 다 표정이 엉망이었다. 이민우는 오랫동안 뛰어왔는지 상기되어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굉장히 초조해 보였다. 그는 다짜고짜 신발 신은채로 베란다 빨래통까지 걸어갔다. 얼마나 빨리 걷는지 날아가는 것같다. 그가 식은땀까지 흘리며 빨래통 청바지에서 내가 방금까지 만졌던 키홀더를 꺼냈다. 그가 그제야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쉰다. “이민우….” “어… 왜?” “키홀더….”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민우가 부리부리해진 시선으로 집이 떠나가라 크게 외쳤다. “열어봤어?!” 두근, 두근. 이민우의 흥분한 모습에 나는 도리어 차분해졌다. “아니. 방금 빨래하려다가 있길래 살짝 열어봤다가 닫았어.” “…….” 우리 둘 사이에 뜻 모를 긴장감이 맴돌았다. 나는 침착하게 물었다. “거기 있는 열쇠, 무슨 열쇠야?” “아….” 그는 내 말에 비로소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사진이 아닌 열쇠를 묻자, 대놓고 안심했다. 내 가슴은 하늘이 무너져라 바닥 끝까지 떨어졌다. 바보야… 그런 표정 지으면… 니가 적은 글씨들이 진실이라는 거 증명하는 거잖아… 아니야… 아닐거야… 그냥… 우리 둘이 친하니까… 그냥… 민우가 나 아껴주는 마음에 적은 걸거야… 그치… 그치…? 내 표정이 복잡해지는 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몰라도, 이민우가 잠깐 골몰하다가 말했다. “그냥… 나 사실 바이크 동호회 들었어. 그래서….” “뭐?” 바이크? 왠 바이크? 옛날에 스쿠터 몰던 놈이 바이크라니. 순간 정신이 번쩍 났다. “나도 태워줘!!” “어?” 신혜성 병신아… 나가 죽어라… “나도 바이크 태워줘!!” “…알았어. 다음에 태워줄게.” 이민우는 나의 돌출 행동에 머뭇대다가, 어색하게 웃고 나갔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마비 걸리는 사람들, 왜 걸리는지 알겠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이민우… 설마… 아닐거야… 아닐거야… 몇 번이나 같은 생각을 하며 오래도록 앉아있었다. 밤 아홉시부터 난장판이 시작되었다. 공유 형사가 봄이 오는 기념으로 특별 발꼬랑내를 풍기며 안주거리와 술을 동네 편의점에서 쓸어왔다. “공형사!! 우리 순돌이 장난감 어지럽히지 마!!” “뭐 어떠냐? 집에 없는데!!” 저 인간이!! 공형사와 말 트고 지낸지 오래인 나는 공형사가 망가뜨리기 시작하는 순돌이 장난감 사수하느라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저 인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애가 되고 있어! 그는 순돌이가 있든 없든 순돌이 장난감 갖구 논다. 반면, 양종호는 순돌이가 고모네 집에 있다는 걸 굉장히 아쉬워했다. “순돌이 먹으라고 좋아하는 반찬 이것저것 만들어왔는데… 이거 느네 고모한테 보내주면 안되냐? 아, 건담도 사왔어. 얼마 전부터 건담 시리즈 티비에 나오잖아. 요즘 꼬마애들이 장난감 가게 가서 사달라고 하는 1순위가 건담이래. 이거 최신형이야. 순돌이 전해줘.” “나 먹을건 없냐?” “순돌이도 없고… 쐬주나 마셔야겠다.” “야! 양종호!” 오늘 모임은, 진즉에 했어야 할 신혜성 축하 파티였다. 여전히 강력 2팀 2반에서 일하는 공유 형사와, 반찬 가게 문을 일찍 닫고 이것 저것 바리바리 사 온 양종호. 그리고 열시 쯤에 합류하게 된 이민우까지. 우리 넷은 늘 그랬듯 식탁이 아니라 거실의 비좁은 바닥에 신문지 깔고 안주와 술을 올렸다. 부어라 마셔라- 신혜성 축하한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나도 금세 섞였다. 이민우와 나는 그때까지 한 마디도 안 했지만, 공유 형사와 양종호 덕분에 어색하지 않았다. 가끔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이민우가 나를 무섭게 쳐다보며 입모양으로 중얼거린다. '적당히 마셔.' “…….” 심장이 쿡쿡 찔린다. 이민우의 저런 행동 하나하나가 이젠…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어… 아닐거야 아닐거야 하면서도 아까의 충격이 나를 짓누른다. 이민우는 평소와 같은데, 나만 이런다. 한참을 놀다가, 양종호는 새벽 장사 준비해야 된다며 새벽 세시쯤 돌아갔다. 술에 취해 비틀대던 나는 거실 구석에서 깜빡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때는 새벽 다섯시… 이민우가 나를 옮긴건지, 내 몸은 딱딱한 바닥이 아닌, 포근한 침대에 뉘여 있었다. 두근… 이민우만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온 몸의 세포가 민감하게 반응한다. 공형사하고 이민우는 거실에서 자나…? 부스럭대며 일어나려다가 도로 누웠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열린 문 밖으로 생생히 전해져서… 왠지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잠든 척 했다. 집이 워낙 좁아터져서 그런지 코앞에 있는 것처럼 두사람의 음성이 생중계됐다. “이민우.” 공형사다… 평소와 다른 침착하고 낮은, 먹구름 같은 목소리톤… 왜 저러지? 이민우랑 싸웠나…? 곧 들리는 이민우 목소리도 가관이다. “말 해.” 이민우의 음성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었다. 내 앞에서는 들려준 적 없는, 무서운 톤… “이민우. 너… 지금이라도 발 빼. 아직 너는 괜찮아. 아니, 니가 무슨 짓을 했어도, 지금이라도 그쪽에서 발 빼면… …씨발! 모르는척 해 줄게.” “공형사님.” “왜 임마.” 공형사의 짜증스런 질문, 내가 도저히 알아듣기 힘든 질문 뒤에, 이민우가 씁쓸한 목소리로, 그러나 다부지게 대답했다. “…이미 늦었어.” 대체 무슨 소리일까. 나는 곧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새벽 여섯시, 우리집 문을 마구 두드리는 최성수 사장에게 끌려 나갔다. 난장판 술자리 흔적을 치우던 공유 형사와 이민우에게 짧게 인사하고 나갔지만… 이민우와 마주보자 마자, 나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민우에게 묻고 싶은게 너무 많다. 이민우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지던 것도 잠시, 차에 탄 최성수가 내 뺨을 툭툭 치며 절망어린 투를 내뱉는다. “이것봐!! 얼굴 부었잖아!! 이새끼!! 눈은 또 왜이래!! 눈도 부었냐?!” “조금 있으면 가라 앉거든요! 사장님?!” “내가 못살겠다!!” 그러나 따지는건 다음으로 미뤄야 할 판이다. 당장 스케줄이 생겼으니까. 방송국에 도착할때까지 나는 또 졸았다. 그러나 깨어났을 땐 최성수가 무슨 조치를 취한건지, 팅팅 부었던 얼굴이 말끔히 가라앉아 있었다. 주차장에 차 세워놓고, 녹차 팩 하고 마사지 했단다. 자느라고 전혀 몰랐던 나는, 마법이 풀린 공주마냥 신기해 하며 거울 쳐다봤다. “빨리 가자! 너 얼굴 붓기 빼느라 늦었어!” “그 프로 여덟시 반인가? 그때쯤 시작하는거 아니에요?” “야!! 너 아직도 이쪽 생리를 모르냐? 지금 리허설 할 타이밍이거든!!” “그럼 그냥 같이 끼면 되잖아요?” “신혜성. 임마! 너 시청자들한테 처음 선보이는 자리야! 주부들이 너 보고 어머! 꽃미남이다! 했으면 좋겠냐, 아니면, 저거 왠 평범한 시민 1 이야? 이랬음 좋겠냐! 빨리 가서 메이크업 해야지.” “죄송해요.” 최성수 말이 맞다. 녹화도 아닌, 생방인데 내가 어제는 너무 준비가 없었어… 그동안 최성수랑 사무실에서 질문예제 만들어서 연습했다고 해도… 나는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한 뒤, 사장님과 날아갈 듯 방송국 분장실로 올라갔다. 벌컥- 분장실 문 열고 들어가는 즉시, 최성수가 나를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방송 시작 15분 전…!! 벌써 엠씨들하고 대다수 사람들이 스튜디오로 가서, 분장실이 휑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방송국에 와서야 제대로 상황을 실감한 나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 전부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자, 자, 시간 없으니까 빨리 하자.” “네.” 환한 조명이 반짝이는 거울 앞에 앉았다. 최성수가 분장사에게 뭐라고 요구하느라 정신없다. 나도 정신없어 죽겠다. 그때, 내 옆자리에 누가 앉아있다는거 포착. 나는 자동으로 공손히 목례하며 안녕하세요- 했다. 죄송합니다 라고 할까, 안녕하세요 라고 할까 수도 없이 고민했는데, 역시 안녕하세요가 낫겠지. 내가 누군가에게 인사하는 걸 보고, 최성수가 아차 싶었는지 후다닥 내 뒤에 선다. “아참, 혜성아. 너랑 같이 아침마당에 나갈 분이다.” “아, 네….” 올해 유망주 신인이라는 소개로 아침마당에 나가게 될 나. 당연히 혼자 나갈 줄 알았는데, 프로 성격상 혼자가 아니라 함께 초대 된 사람이 있었나보다. 천천히 오른쪽에 앉아서 가볍게 분만 칠한 남자를 쳐다봤다. 그리고, 나는 경악하며 굳어버렸다. “인사해. 너도 알지? 이번 동계올림픽때 스켈리톤에서 금메달 딴, 영웅. 전진씨.” “!!” 눈앞이 아득해졌다. 나를 보고 무표정하게 고개만 까딱 하는 이 남자… 전진이 분명했다. 내 눈 앞에,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도록 나란히 앉아있는 이 사람, 전진이다. 진짜, 전진이다. “안녕하세요. 전진 입니다.” 감춰진 동화속 이야기 첫번째. 이웃나라 왕자님은 나쁜 마녀의 행복한 저주로 공주님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뭐…라고? 공간과 기억이 다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공들여 쌓아올린 존재감이 모조리 휩쓸린 충격, 아니. 그 이상. 전진… 전진? “신혜성. 신혜성!” 멍하니 시선을 흐트린 내가 정신차린건, 최성수가 여러번 어깨를 흔들어서였다. 그때까지 전진은, 내가 기억하던 얼굴, 표정, 말투 그대로 예의상 미소 짓고 있었다. 근사한 수트 차림인 전진이 낯선 타인처럼 시선을 맞추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야, 신혜성. 올림픽 영웅이 니 앞에 있는게 안 믿어져? 빨리 인사해라, 임마.” 사람이 너무 놀라면 오히려 침착해진다더니, 내가 그랬다. 떨리는 팔을 가까스로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신혜성 입니다.” 우리 둘은 4년 만에 손을 잡았다. 내가 기억하는 전진의 따뜻한 손바닥은 여전했지만, 그는 4년 전처럼 나를 본 것만으로도 좋아하며 눈을 빛내지 않았다. 설마, 내 얼굴마저 잊어버린걸까? 격동의 파노라마에 선 것 마냥 온 몸과 영혼이 흔들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짧게 자른 스포츠형 머리카락, 전보다 늠름해진 외형의 전진. 그는 초면인 사람을 대하듯, 나를 보았다. “엄~청 예쁘게 생기셨네요.” “…네?” 일부러 시선을 피한 내게, 전진이 일어서며 지나치듯 말했다.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내 몸 안의 모든것이 빠져나가더니, 앙상하게 남은 가벼운 뼈가 철로가 되고, 무거운 기차가 바퀴 소리 요란하게 기적을 울리며 밟고 지나가는 충격. 고요한 수면이 할퀴듯 일어났다. 모든게 빠르고 잔인한데, 나만 병신같이 앉아있다. “신혜성씨가 너무 예뻐서 순간 깜짝 놀랐거든요. 우와. 내가 여태까지 봤던 연예인 중 베스트?!!” “…….” “어디 아프신것 같은데 괜찮아요?” “네….” 전진… 나야. 나라고. 갈망어린 내 시선을 읽지 못하는 걸까. “신혜성씨 맞죠? 저, 최근에 연극하신거 연예정보프로에서 봤는데… 아!! 제가 아는 동생놈이 팬인데, 나중에 싸인 부탁합니다.” “…네….” 전진… 무슨 소릴 하는거야… 나야… 나… “아, 그럼 먼저 실례.” “…….” 그가 일어서는 도중 뭐가 생각났는지 나를 보고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신혜성씨. 근데… 이런 말 제 입으로 하긴 뭐 하지만… 저 모르세요?” “네?” “올림픽 안 보셨나봐요?” 솔직한 거 여전하구나. 예전처럼 활기찬 말투가 묻어난다. 근사한 모습이 눈부셔서 쳐다보기 시릴 정도로…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모른다. “아, 코치님이 불러서요, 이따가 스튜디오에서 봐요, 신혜성씨.” “네….” 그가 나를 스칠때 희미하게 풍기는 체리향… 나는 체리향을 확인하자마자 밑도 끝도 없이 떨어지는 눈물에 당황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나보다 먼저 분장을 끝낸 그는 스튜디오로 사라졌다. 심장이 바닥을 긁었다. 아프고 저린 이 기분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전진을 만났다는 것, 그것보다 놀라운건, 전진의 태도였다. 타인을 보는 심드렁하면서 날카로운 눈빛. 4년 전의 전진은, 단 한 번도 나를 저렇게 쳐다본 적이 없었다. 그가 나를 무시하는 것 보다 더 한 형벌은, 잊혀짐 이라는 사슬이었다. 내 심장을 움켜쥔 굵은 사슬… 최성수 사장을 비롯 주변 스탭들은 내가 방송 울렁증을 겪는 줄 아는 모양이다. 누군가 내게 청심환을 건넸다. 그것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배우야. 나도 떨지 않을거야. 전진은 전진이고 오늘은 내게 아주 중요한 날이야. 고모와 고모부가 티비 시청하고 계실거야. 양종호도 보고 있을거야. 우리 순돌이도… 스튜디오의 뜨거운 조명에 눈이 부실 지경이다. 나는 어느새 정신차렸다. 내 몸은 기계처럼 세트 의자에 앉아서 사회자의 질문에 천진하게 웃으며 대꾸하고 있었다. 없는 정신력이 발휘한 것이다. 올해 유망주 신인 신혜성, 금메달리스트 전진. 우리 둘이 같이 초대됐다는 건, 사람들이 주는 관심이 비슷하게 높다는 증거였다. 물론 전진을 영웅화하는 사람들은 왜 전진이 단독으로 출연하지 않느냐 따지겠지만… …여기까지 생각한다는게 신기하다. 그럼, 정말 집중해야돼. “두 분, 같은 고등학교 나오셨던데요.” 사회자의 질문에, 나는 온 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힐끔- 나와 나란히 앉은 전진을 보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고민하는 눈치다. “두 분 다 근사하고 학창시절에 눈에 띄었을 것 같은데, 서로에 대해 혹시 알고 있었나요? 혹시, 친구사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라는 고민 할 시간조차 없었다. 전진이 당당하게 대답했으니까. “아니오. 같은 학교라지만 서로의 존재는 몰랐습니다. 하하하. 진즉 알고 친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 이럴수가… 전진… 너 정말… 나를 몰라…? 그게… 가능해? 가슴이 죽을 듯이 아팠다. 심장이 파괴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나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카메라 앞에서 되지도 않는 입술을 떠들었다. 사회자가 나를 쳐다본다. “신혜성씨. 신혜성씨도 전진씨를 학창시절에 몰랐나요?” “아니요. 저는 알았습니다. 당시 저는 평범한 학생 중 하나였지만, 전진씨는 꽤 유명했거든요. 보시다시피 외모가 근사하잖아요.” 전진이 나를 힐끔 쳐다보는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신혜성씨. 신혜성씨 덕분에 연극계가 부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런 말씀은 과분하고요, 저는 아직 많이 배우는 단계라서, 굳이 따지자면 운이 좋았다고 봅니다. 함께 무대에 선 다른 배우 분들의 공이 컸던 거죠.” “아유, 잘생긴 분이 겸손하기까지 하네요.” “아하하… 감사합니다.” 나는 뭐라고 떠드는 걸까. 저 쪽에서 최성수가 입 찢어지게 좋아하는 거 보니까, 연습한대로 대답하긴 한 것 같은데… 어지럽다. “잠깐 로비에서 기다려, 알았지? 감독님 몇 분 하고 인사만 하고, 금방 차 빼올게.” “…….” “신혜성!” “네? 아, 네.” “정신차려, 임마. 방송 잘 해 놓고 왜그래? 이제, 니 시대다, 임마.” “…….” 최성수가 하는 말이 한 번에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내 발끝부터 머리 끝까지 충격이란 놈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전진과 내가 아침마당에서 인터뷰 한 시간은 17분 이었다. 굉장히 간략한 질문들… 나는 기계적으로 웃으면서 최성수와 연습한 대로 대답했었다. 그래서, 지금 머릿속에 남는게 없다. 가파르게 뛰는 심장 소리만 청각을 도려낼 뿐… 전진은 방송이 끝나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졌다. 내게 따뜻한 눈인사 한 번, 반갑다는 말 하나 없이 타인을 스치듯 살벌하게 사라졌다. 무거운 체증이 목 아래 얹혀졌다. 마음이… 이상하다. 아프다는게 이런걸까. 눈이 맵다. 울고 싶다. 축하한다, 방송 잘 봤다- 고모와, 고모부, 연극에 함께 섰던 배우들과, 삼영에서 종종 알고 지낸 연습생들, 이민우, 양종호, 공유 형사, 하물며 민형이 형과 민경이 누나한테서까지 문자가 왔다. 로비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주시하는 수많은 눈빛이 느껴졌다. 나는 억지로 어깨를 폈다. 평온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몇 번이나 주먹을 꽉 쥐었다. 최성수로부터 밖으로 나오라고 전화왔다. 나는 느릿느릿 걸었다. 손에 쥐고 있던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긴 줄 끝의 가방이 허리춤에 찰랑였다. 그러고보니 벤치를 앞에 두고, 내내 서있기만 했구나… 열심히 앞만 보고 걷다가 실수로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 “이런.” 달랑이던 가방이 바닥에 떨어졌다. 내 몸도 가볍게 흔들렸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나와 어깨만 살짝 부딪힌 누군가가 내 팔을 단단히 붙잡아줬다. “괜찮아요?” “네… 감사하….”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상대를 쳐다보다가, 나는 그대로 경악했다. “이거, 신혜성씨 거 아니에요?” “!!” 전진…! 쿵, 쿵, 쿵, 쿵. 그를 코앞에 두고 내 심장은 달아날 듯 뛰기 시작했다. 생방 끝나자마자 홀연히 사라졌던 그가, 또 내 앞에 나타났다니. 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느라, 그가 내미는 가방을 받지 못했다. 전진이 그런 나를 수상하게 응시하다가 내 어깨에 아까처럼 가방끈을 걸쳐줬다. 묻고 싶다. 나 몰라 보냐고, 나를 정말 모르냐고, 너… 왜 그러냐고… 일부러 이러는 거냐고… 묻고 싶은데,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지 않는다. 내가 멍하니 서있기만 하자, 그가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뭔가를 꺼낸다. “아까부터 신혜성씨 찾았잖아요.” “…….” 나를 보고 웃는다. 여전히 잘생겼구나, 전진. 여전히 근사하구나, 여전히 건강하고… “자, 여기 싸인해 주세요.” “…….” “신혜성씨? 아니, 왜 울어요?!” “…….” “싸인 해 주기 싫음 싫다고 말로 해도 알아 듣는데!!” 바보야… 나라고… “아니, 괜찮아요. 저기… 여기에 싸인 해드리면 되나요?” “아!! 왜울지?!! 내가 또 뭐 실수했나?!! 잠깐만요!” “…….”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예전과 똑같은, 내가 기억하는 말투를 들려주는 전진이 기특해서… 반가워서… 서러워서…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쓱쓱 손등으로 닦았다. 전진이 허둥지둥 하다가, 갑자기 바지를 종아리까지 걷는다. 발목에 걸쳐진 모래주머니… …왠 모래주머니? 그리고, 모래주머니와 함께 달려 있는 일반 주머니. 그는 주머니에 손가락 넣고 뒤지다가, 낭패의 빛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내가 분명히 여기에 손수건 넣고 다니는데 없네요.” 진짜 미치겠다. 전진. 어떻게 옛날하고 지금하고 변한게 없니.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과 별개로, 그의 우스운 행동 덕분에 쿡- 하고 웃음이 나왔다. “어… 웃으니까 더 예쁘다.” “네?” “신혜성씨. 아까 생방때 웃는건 마론인형 같았는데, 지금은 인간 같네요?” 그의 자연스러운 넉살에, 나도 모르게 용기가 났다. “전진….” “네.” 그에게서 나를 찾고자 하는 용기. “나… 신혜성이야… 전진. 기억 안 나?” 그는 내 말에 흠칫 놀라며 잠깐이지만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듯 했다. 나는 씁쓸하게 웃고,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더이상 전진을 눈앞에 두고, 타인인 척 대화 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돌아서자마자, 갑자기 전진이 내 팔목을 세게 움켜잡았다. 반사적으로 돌아봤다. “신혜성씨. 나 알아?” “…….” 그의 확장된 동공… 내게서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고민하느라 괴롭게 일그러진 안면… 하느님… 나를 기억하는 눈빛이 전혀 아니다. 그가 나를 잊은 걸까. 아니면, 잊은 척 하는 걸까. 정답은 여전히 모르겠다. 늘 내게 공주야 공주야- 불러주던 입술이, 세상에서 가장 차가움으로 변했다. “만약, 모르는 사인데 괜히 아는 척 하는거면, 적당히 까불어라.” “…….” 나를 노려보는 전진… 나를 재수없어하는 저 눈빛… 표정… 날이 선 말투… “예뻐서 넘어갈 뻔 했네. 씨팔.” “…….” 탁- 그가 밀어내듯 내 팔목을 풀어줬다. 전진이 나를 스쳐 저 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현관쪽에서 그를 기다리던 누군가와 깎지 끼는게 포착되었다. 누구지…? “많이 기다렸어?” 전진이 자기 손과 깎지 낀 누군가에게 따뜻한 시선을 던지며 묻는다. 쾌활하고, 반갑게… “아니아니. 나도 방금 왔어.” “춥겠다. 옷은 왜 그렇게 입고 왔어.” “응~ 괜찮아, 진아.”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진과 깎지 낀 손을 허공에 붕붕 돌리며 까르르 웃는 사람은, 이선호였다. 둘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4년 만에 보는 전진 만큼 놀라운 이선호의 발견… 예전의 독기는 모두 사라지고, 사랑스러움만 남은 듯 화사해 보이는 이선호가 전진의 품에 꼭 끼어서 마치 하나인 것처럼 걷는다. 어떻게 된거야… 어떻게…? 아무도 없는 목동 집에 도착해서야, 나는 울었다. 가슴을 주먹으로 치고 나사 빠진 미친년처럼 웃어가며 울었다. 전진이 나를 몰라 본다는 것, 전진이 이선호와 자연스러운 연인 사이처럼 보인다는 것, 4년이란 긴 시간이 무용지물 됐다는 것. 이 모든게 활화산처럼 뿜어졌다. 오전 열한시부터 밤 아홉시까지, 그야말로 쉬지 않고 울었다. 나중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대체 왜이렇게 많이 울었을까. 답은 간단했다. 전진과의 이별을 4년 만에 실감한 나는, 늦깎이 이별쟁이였던 것이다. 이선호와 전진이 4년간 꾸렸을 연인 관계가 한 번에 인정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진이 나를 전혀 몰라본다는 게 기가 막혔다. 아홉시 반, 가볍게 세수하고 노곤한 몸을 쉬어주는데, 공유 형사가 꽃다발 들고 찾아왔다. “왠 꽃이야?” “너 눈탱이 장난 아니다!! 완전!! 푸하하하!” “…….” 짜증나… 인생에 별 도움 안되는 공유 형사라니. 차라리 잘 됐다. 술이나 마셔야겠다. 꽃향기와 발꼬랑내를 믹스시켜서 찾아온 공유 형사는, 어쩐지 지쳐 보였다. 형사 일이 꽤 힘든가보지? 500cc컵에 소주 한 병을 다 따라서 빨대 꽂았다. “어…? 진짜 뭔 일 있었나보네? 괜찮냐? 꼬맹?” “닥치고 드셈.” “나!! 너 주려고 꽃 사왔잖냐!! 방송 출연 기념 꽃!! 플라워!!” “공. 쌰럽 플리즈.” 남자 둘이서 식탁에 앉아, 각각 500cc 소주 마셨다. 내가 빨대 꽂아서 이렇게 마실 때는, 굉장히 기분이 안좋다는 걸 몇 번 경험한 공유 형사가 슬슬 내 눈치 보다가 취기가 올랐는지 혼자 씨부렁거리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 꽃샀는데, 이게 뭐냐? 그것도 천송이나 사왔다!!” “공씨. 이게 꽃이야? 천송이 같은 소리하시네! 안개꽃 세면서 샀냐?” “응.” “…….” 진짜 짜증난다. 그러다 어이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나도 취했나보다. 안개꽃 천송이 사들고 자랑하는 공유한테 기가 막혀서… 그나저나 공유 형사가 우리집에 웬일이지… 내 표정 변화를 면밀히 살피던 공유 형사가, 나름대로 타이밍을 계산했는지 슬슬 본론을 꺼냈다. “내가 부탁할게 있어서 찾아왔는데….” 저 심각한 표정… 안 봐도 뻔하지. 쪼로록- 컵 바닥에 고인 소주를 스트로우로 쪽~ 빨아올리며 식탁을 탁! 쳤다. “순돌이의 꼬꼬마 동산은 양보할 수 없어.” “제길. 고고 블록은 안되냐?” “절대 안되거든?!” 공유… 이 미친 형사는 꼬맹이들 장난감을 좋아한다. 뭐, 자기는 어린 시절 장난감 갖고 놀아본 기억이 없다나? 뭐 하면서 놀았었는데? 물어보면, 물총싸움, 돌 던지기 사격… 이따위 대답만 한다. 다 큰게 왜 이 지랄이야… “아… 취한다. 공. 적당히 놀다 기어 들어가.” “잠깐만 앉아봐. 진짜 부탁 할 게 있어서 찾아온거야.” “뭔데… 나 오늘은 좀 컨디션 안 좋아. 눈 부은거 보여? 졸라 울었거든?” “담배 있냐?” 이 상태에서 담배 피우면 골로 가는데… 취기가 한 번에 밀려올텐데… 에라 모르겠다. 담배 달라는 공형사에게 비틀비틀 한 까치 건네줬다. 우리 둘은 사이좋게 맞담배 피우며 마약 환자마냥 피식피식 웃었다. 반쯤 타들어가는 담배 연기… 희미한 시선으로 쳐다보는데, 공형사가 나직한 투로 입을 뗀다. “신혜성.” “왜….” “니가 이민우를 막아라.” 두근… 이민우라는 이름에 술기운이 반 정도 가셨다. “뭐? 공형사… 똑바로 말 해. 지금 말 무슨 뜻이야.” 공형사는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저새끼가!! 팔을 쭉 내밀어서 공형사 턱을 세게 쥐고 나와 마주보게 억지로 돌렸다. 평소 같으면 아프다고 지랄했을 공유 형사가, 웬일인지 진지하다. 그가 훨씬 또렷해진 억양을 구사했다. “이민우… 지금 정식 절차 밟기 직전이야. 하긴, 절차라는게 우습지. 아마 지금은 빠져나오기 힘들 거야.” “무슨… 무슨 뜻이냐고!!” 머리가 어지럽다. 전진 때문에 술 마신건데, 이민우라니… 이민우가 뭘…? “내 추측이긴 하지만, 만약 이 추측이 맞다면. 조만간 이민우는 신혜성. 니 눈 앞에서 사라질거야. 어쩌면 벌써 사라졌을지도 모르지.” “!!” 쿵… 심장이 절로 떨어지는 소리…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껐다. 내 동공은 공유 형사를 단숨에 부셔 버릴 것처럼 노려보기만 했다. 그가 다시 내 시선을 피했다. “나도 추측에서 끝났으면 좋겠다. 이민우가 나한테 제대로 얘기해준 적 없으니까.” “뭐… 뭐를? 뭘?” “그새끼… 김동완 수하에 있는거 알지?” “그냥… 그냥 아는 형이라고 했어. 그냥… 민우는… 그 형에게서 인생을 배운다고 했어.” “그래. 그 인생이라는게, 법 없이 사는 새끼들의 진흙더미야.” “!!” 우리 둘 다 술이 깼다. 그러나 깨지 않는 편이 좋을 뻔 했다. 공유 형사가 두 개피 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담담해 하는 공유 형사와 달리, 내 팔은 눈에 띌 만치 덜덜 떨리고 있었다. “더 자세히 얘기해 줄까?” “…….” 잠깐 숨을 고른 뒤, 공유 형사가 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가시같은 언어를 내게 찔렀다. “킬러는, 영화에서만 있는게 아니야.” “!!” 맙소사… 공유 형사는 범인 취조하듯 강한 톤으로 내게 밀어붙이기 식 설명을 해줬다. 나는 단답형 대답만 간신히 내뱉을 뿐, 또렷한 정신을 원망하며 그의 얘기를 속수 무책으로 받아들였다. 지난 4년간 공유는, 대외적으로는 자잘한 동네 깡패 새끼들 범죄 쫓아다니면서, 뒤로는 직계 검사와 함께 팀을 짰었다고 한다. 그는 김동완을 꾸준히 쫓아다녔으며, 이민우가 김동완이 속한 한명 그룹, 이철호 사장의 수하에 소속된 것을 알았다고 한다. 만약, 이민우가 짐을 싸고 나갈 것처럼 굴면, 자신이 추측한 심증이 백프로 확실할 거란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내가 따지듯 물었을 때, 공유 형사는 십분 정도 망설이다가 비밀을 지켜달라는 말과 함께 대답했다. 공유 형사가 소속된 팀으로 최근 기용된 해커가, 한명그룹의 이철호 서버를 가까스로 뚫었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한명 측에서 차단하기 직전, 고작 2분 남짓 밖에 해킹에 성공하지 않았지만, 2분 동안 건져낸 정보는… 영화에서나 간혹 들어봤던 '제거 명단'이라는 것이다. 파일 저장 날짜가 어제인 걸로 봐서, 제거 명단에 적힌 인물은 조만간 사고사로 위장되서 운명을 달리할 거란다. 나는 그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다. 공유 형사는 제거 인물이 누구인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공유 형사가 내게 알려준 것은, 한명의 이철호가 작성한 제거 명단. 그 명단에 적힌 인물이 엄청난 놈인데, 아마 그놈이 제거되면 저격수가 책임을 지게 될 거라는 것, 그것이었다. “이민우가… 저격수…라고?” 공유 형사는 내 질문에 침묵으로 대답했다. 그의 소름끼치는 침묵에서, 이민우의 슬픈 미소가 엿보였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물었다. “만약, 공형사… 공형사 말대로, 이민우가 저격수라고 해도… 김동완… 아니, 이철호 수하에 있는 처지라면, 괜… 괜찮은거 아니야?” 내 병신같은 질문에 공유 형사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이철호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란다, 아가야.” “뭐…?” “친아들 빼고, 이철호는, 자기가 거둔 짐승이라 할 지라도, 한 번에 뒤돌아서 버릴 인물이라고.” “!!” “이민우… 그 놈 참 큰일이야. 그 세계 어떤 놈도 믿으면 안되는데, 내가 봐도 김동완을 믿는게 눈에 보이거든. 내 앞에서는 뭐… 이런 자세한 얘기 단 한 번도 해 준 적 없지만.” “…….”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한시간이 지나도록,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했다. 어지러운 머리를 움켜쥐고 공유 형사가 내뱉은 믿기지 않은 이야기들을 삼키고 또 삼킬 뿐이었다. 공유 형사는 내게 거듭 부탁했다. 이민우를 막아달라고… 자기도 심증이지만 거의 확실한 이 일들을 믿기 싫으니까, 지금이라도 이민우를 꼭 막아달라고… 준비 없이 쓰러지기 바쁜 내게 부탁했다. “신혜성… 내가 추측하는 최후의 것은 이거야. 이민우 그새끼가 죽도록 사랑하는 년인지 놈인지 있다는건 너도 알지? 아마 그 사랑인지 지랄인지 지켜준답시고, 이민우… 무모하게 여기까지 온 것 같다.” “…….” 공유 형사는, 내게 거기까지만 말했다. 하지만 그는 다 아는 눈빛이었다. 그의 행동, 말투에서 이민우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추측하는 듯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공유 형사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밤 열두시…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서 문정혁이 내게 보낸 동화책을 아련히 응시했다. 달빛조차 없는 칠흑같은 밤… 웅크릴수록 눈물이 나왔다. 이제는 내가 왜 우는지 모르겠다. 내일부터 싱글 앨범 녹음과 동시에 홍보 들어가는 마당에, 내 머릿속에서 전쟁이 발발했어… 이민우에게 나를 사랑하냐고, 키홀더에 있는 내 사진에 대해 물어볼 것도 있는데… 더 큰 회오리가 내 몸을 강타했다. 준비 없이 맞은 일련의 사건들은 나를 짓누르기만 했다. 전진… 이민우… 아니, 전진 일은 지금 일도 아니다. 이민우가 저격수라고? 말도 안 돼. 진짜 구라야. 어떻게 요즘 세상에 그런 일이 있어? 멍하니 앉아서 훌쩍거리기를 몇 시간… 새벽 두시가 되어서야 현관문 따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끼이익.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쿵- 투두두두. 술에 취한 이민우가 현관문에 꽂힌 열쇠 뽑으려다가 신발장에 세게 부딪혔다. 신발들이 와르르 쏟아지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이민우!!” 나는 이미 술이 다 깬 상태였다. 그러나, 취기보다 진한 잔해가 내 몸 세포를 터뜨리고 있었다. “이여… 우리 혜스이….” “빨리 들어와 봐. 어디서 이렇게 또 쳐마신거야?” “우리 혜스이… 우리… 혜스이… 오늘 녹화 잘 했어?” “…생방이었거든? 빨리 들어와!!” 술에 취한 사람은 보통 때보다 두 배는 무겁고, 다루기 힘들다. 이민우가 취해서 비틀거리는 거, 지구가 움직이는 것같다. 내 맘대로 자전 공전이 안되네… 몇 걸음 걷나 싶더니, 이민우가 내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콰당- 바닥에 넘어진다. “내가 못살아….” 그가 바닥에 주저앉아서 고개를 푹 숙였다. 오늘따라 이민우의 등이 외로워 보인다. 어디서 뭔 짓을 한 건지, 말끔했던 수트 여기저기에 흙이 묻어있다. 보통 때 같으면 잔소리 퍼붓고 방에 가서 자라고 소리쳤을 나지만, 오늘의 나는… 공유 형사에게서 믿기지 않는 얘기를 들었다. 한꺼번에 이룬 행복 만큼이나, 견디기 어려운 충격이 하루 종일 작정한 것처럼 내게 덤볐다. “물… 갖다 줄게.” “혜성아….” “왜….” 앉아있는 민우 곁을 스쳐 지나가려던 내 몸이 멈췄다. 그가 내 팔목을 꽉 잡았다. 희미한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민우의 은빛 머리칼… 푹 숙인 고개가 안쓰럽다. 공유 형사에게 이상한 소리만 안 들었어도… 그래. 사실이 아닐거야… 사실이 아닐거야… 무조건 아닐 거라고 스스로에게 강조했다. 그런 나를 비웃듯, 이민우가 말했다. “나… 당분간… 출장 가….” “뭐…?” 아닐 거야. 아닐 거야. “그래서… 짐… 싸러 왔어….” “!!” 벼락처럼 꽂히는 공유 형사의 말… 소스라치게 놀란 내 심장 만큼이나, 나의 동공은 거센 폭풍 한가운데서 비바람을 맞았다. '만약 이 추측이 맞다면. 조만간 이민우는, 신혜성. 니 눈 앞에서 사라질거야.' 아니야… 아니야… “이민우, 너 술취해서 좀 돌았냐? 너 이번달에 복학 한 새끼가, 무슨 출장이야? 너네 과에서는 엠티 오티 가는거 출장이라고 하냐?” “…….” 말도 안돼… 이민우는 내 질문에 갑자기 정신을 차리더니 벌떡 일어났다. 방금까지 취해 있던 사람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확한 걸음걸이로 방 안에 들어갔다.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분명히 술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한번에 정신을 차렸지? “한… 몇 달 걸릴거야.” “이민우… 너… 못 가.” “…….” “이민우… 나 쳐다봐! 쳐다보고 말 해!!”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어떡해… 어떡해… 공유 형사 얘기 안 믿을거야. 그래도… 그래도 그렇지. 한 순간에 니가 또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말도 안 돼. 여행용 가방에 아무렇게나 옷이며 속옷을 구겨 넣은 이민우가 현관 문앞에 가서야, 나는 그가 진심으로 나갈 것임을 깨달았다. 충격은 충격이고, 일단은 그를 막아야 한다.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생각만 휘몰아쳤다. 이민우 앞에 달려가서 양 팔을 벌렸다. 그가 나를 측은히 쳐다본다. 내 모든 것을 담고 싶다는 강렬한 시선… 다른 때 같으면, 이민우의 시선을 피했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죽을 것처럼 고동치는 심장을 부여쥐고, 이민우를 묶어둘 만한 가장 잔인한 부분을 토해냈다. “이민우! 너… 나 사랑해?” “!!” 쓸쓸한 가을 낙엽처럼 나를 응시하던 이민우의 동공에, 격랑이 일었다. 그의 손에 꽉 잡혀있던 가방이 툭, 바닥에 떨어졌다. “말 해! 나 봤어! 키홀더에 있는 내 사진이랑, 니가 쓴 글씨!!” “…….” “이민우!! 너 나 사랑하냐구!!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 때문에 나가는 거냐구!!” “하….” 작정하고 소리치는 내 행동에 크게 상처입은 눈동자… 일그러진 표정… 이민우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충격 이었는지, 한동안 어이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다가 등을 돌렸다. 쾅-!! 그가 주먹으로 벽을 쳤다. 나는 여전히 팔을 벌린 상태에서 닫힌 현관문을 막고 있었다. “신혜성. 넌 좋겠다.” “…뭐?” 그가 피식 웃으며 돌아본다. “사랑이라는 말… 그렇게, 가볍게 할 수 있어서… 누군가에겐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힘든 말, 가볍게 물어 볼 수 있어서.” “무슨… 뜻이야.” 싸늘하고, 애절하고, 아니. 세상의 모든 감정을 자기 것처럼 묵혀놨다가 한번에 끄집어내는 목소리 톤… 이민우는 기가 막히다는 듯 황량한 어절을 씹었다. “이렇게 가볍게 표현하고 끝날 수 있는 거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너한테 속삭였어!!” “이민우…!!” 그가 한 발, 한 발 내게 다가오며 소리쳤다. “사랑하냐고? 너는 세상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허무한지 모르지? 그 두글자에 사람의 마음이 다 표현된다고 생각해? 사랑하냐고? 신혜성. 내가 너 사랑하냐고?” “…….” “내게 사랑이란 단어는 부질없어. 표현하고 싶은데, 표현할 단어가 이 세상에 없어!! 너를 보는 내 마음을 담아낼 만 한 글자가 이세상에 없어!!” “너… 미쳤어? 이민우… 너랑 나… 사촌 지간이야… 너….” 사촌 지간이라는 나의 말에, 이민우가 걸어오던 것을 멈췄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후- 긴 연기를 한숨과 섞어 내보내는 이민우, 그가 나타나서야 우리집 테라스 창 밖에 외로운 초승달이 비쳤다. 옅은 수채화처럼 하늘하늘 사라질 것 마냥 위태로운 이민우의 전체가 반짝였다. “그만 하자.” “이민우. 너….” 후… 몇 번이나 담배연기를 내뱉은 뒤, 재떨이에 비벼 끄고, 그가 다시 가방을 쥐었다. 그는 인생을 다 산 사람 마냥 송장같이 죽은 투로 낮게 말했다. “언젠가 니가, 혹시라도 내 마음 알게 되는 날이 온다고 해도… 설사 허무한 기분 느끼겠지 예상은 했어도… 사랑이란 단어의 깊이의 가벼움에 죽고 싶을 줄은 몰랐다.” “이민우….” 내 어깨를 거의 스치기 직전, 이민우가 폭팔하듯 소리쳤다. “그냥 평소처럼 지내주면 안 돼?” “…….” 그리고 그가 내 어깨를 꽉 쥐고, 자기 안면을 들이댈 때, 이번에는 내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너무나 애절하고, 숨막히게 그리운 이민우의 표정을 볼 수 없어서… 말도 안되는 그의 감정이 충격적이라서… 내가 피하자, 그가 내 어깨를 쥐고 마구 흔들었다. “신혜성. 나랑 평소처럼 지낼 자신 있어? 그럼 안 나갈게. 여기서 멈출게.” “…….” “그래! 나 너 좋아해! 나, 유치하고 뻔한 말이지만 너 사랑해! 신혜성. 너 지금 내가 얼마나 절망적인지 모르지? 온 몸이 발가벗겨진 기분이야.” “…….” “평생 너랑 나, 안된다는거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좋아해서는 안된다는거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그 가벼움이 너를 얼마나 흔들어 놓을지도 잘 알아. 그래서, 부질없는 한낱 단어 따위 니 앞에서 얘기 할 생각 영원히 없었어. 사랑하냐고? 사랑해!” “…민우야….” “말 해! 신혜성. 나랑 평소처럼 지내 줄 거야? 우리집에 가면, 내 방에 와서 전처럼 같이 자자고 말 할 거야? 어? 나랑 투닥거리면서 시장 보러 가고, 빨래 거리로 싸우고, 예전처럼 평범하게 지내 줄 거야?” “…….” “그럼 멈출게. 그럼 나, 안 나갈게. 니가 뭘 상상하는지 모르겠지만, 다 멈출게.” “…….” 이민우… 그가 진심으로 애원하고 있다. 자기를 막아 달라고, 이왕 다 알았으면 진짜 막아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그의 절규. 나는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네가 원하는대로 평소처럼 지내겠노라- 이 말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밀랍 인형처럼 그의 손아귀에서 흔들릴 뿐이었다. “혜성아.” “…….” “신혜성… 신혜성!!” “너… 정말 이기적이야. 이민우.” “뭐?” 나는 울고 있었다. 오늘 하루 받은 충격의 끝에서, 결국 무너졌다. 이민우가 내게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 이러면 안되잖아…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지금 내 머릿속에는 이민우를 막아야 한다는 절실함보다, 내게 모든것을 전과하는 듯한 이민우가 훨씬 해석이 쉬웠다. 그가 야속했다. “나는 니가 사랑한다는거, 좋아한다는 거,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워. 어떻게 이와중에 예전처럼 지낼 자신 있냐고 물어봐?”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나 내 말을 되뇌이며 굳었다. 그러다 시퍼런 어절을 끄집어냈다. 상처받은 영혼은 과연 누구의 것일까. 너일까. 나일까. “내가 이기적이라고? 신혜성. 널 사랑한다는거, 니가 알아낸 다음, 내게 할 말은 겨우 그거지…? 이기적이라고…?” “그래… 그래! 너… 내 기분이 어떤지 알기나 해?” “…….” 이민우는 한계 끝에 다달은 듯 했다. 나도 그랬다. 그는 내가 서러웠겠지만, 나도 그가 서러웠다. 왜 잘 지낼 수 있는 평화를 제 멋대로 으깬 것인지, 한탄스러웠다. 이민우의 눈빛에 잔인한 날이 장착됐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살벌한 낯으로 변한 이민우가 별안간 내 뒷목에 팔을 뻗어서 자기쪽에 무지막지하게 잡아당겼다. “왜, 왜이래!” “…….” “우, 우읍!” “…….” 밀어낼 틈도 없었다. 우당탕- 그가 미는 대로 바닥에 쓰러진 나는 이민우가 한 팔로, 내 양 손목을 결박하는 것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가 다짜고짜 입술을 부딪혔다. 내가 입을 벌리지 않자, 나머지 팔을 들어 손으로 내 턱을 꽉 움켜쥐었다. “아!!” “하아….” 절로 터지는 나의 비명에, 이민우는 반쯤 풀린 눈으로 들이대더니, 단번에 내 입 안에 혀를 집어넣었다. 사납게 요동치는 그의 혀 덕분에 나는 헐떡이는 숨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제발… 제발…! 내 온 몸을 결박한 이민우의 힘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꿈틀 댈 기미를 주지 않았다. 그가 마침내 내 티셔츠를 위로 올리고 젖꼭지를 매만지다가, 거친 손가락을 아래로 내려갈때, 나는 있는 힘껏 발악했다. “민우야! 이, 이민우! 우, 우읍!” “하아, 하아.” 내 아래를 더듬으며, 격렬한 호흡을 내뱉는 이민우… 그의 전체가 달빛에 반사되서 암흑으로 도배됐다. 이러면 안돼… 이러면 안돼!! “미, 민우야, 민우야!” “가만 있어!!” 이성을 잃은 눈동자가 내 입술을 지나, 광폭한 호흡을 내 몸에 뿌린다. 세포 전체가 발악하는 현재, 나는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흐, 흐으윽! 민우야! 제, 제발! 이러지 마! 어? 너, 너!” “하아, 내가 이기적이라고?” 그가 천천히 내 몸에서 일어난다. 내 입가에 묻은 그의 타액, 욱신대는 손목… 나는 쓰러진 모습 그대로 굳어 있다가, 조금씩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서 울었다. “잘 들어, 신혜성.” “흐, 흐으, 흐으윽.” “내가 이런짓 하면 이기적인 놈이 되는 거야. 알아?” “무, 무서워… 너… 너… 이민우… 너… 흐, 흐으윽.” “내가!! 여기서 너한테! 뺨 갈기고! 니 몸 가져버리면 개새끼가 되는 거고!!” “으, 으흑, 으흑, 민, 민우야. 민우야….” 그가 두려운 나머지, 나는 쳐다보지도 못 한 채, 부르르 떨었다. 쩌렁쩌렁 울리는 이민우의 목소리가 귓청을 도려낼 뿐이었다. “알았어?! 이기적인 새끼는 그런 새끼야!! 원한다고 다 가지려고 덤비는 씨팔 새끼들이라고!! 그러면서! 하는 짓은 개새끼면서! 병신 짓 다 해놓고 사랑해주지 않으면 같이 죽자고 협박하는 미친놈이! 이기적인 새끼인거라고! 니가 뭘 알아! 처음부터 포기하고! 사랑한다는거 깨닫자마자 심장이 뛸때마다 억지로 억지로 참고 굳은 척 했던 거 니가 어떻게 알아!” “우, 우흑, 흑, 으흑.” “너 울때마다 안아주고 싶고! 너 무거운거 들면 들어주고 싶고! 너 추우면 따뜻하게 해주고 싶고! 너 속상한거 싫고… 지금 니가 우니까 내 숨이 다 멈출것 같고 괴로운거… 미안한 만큼 서러운거… 니가… 신혜성 니가… 어떻게 알겠어….” 점점 차분해지는 이민우의 목소리에, 나는 팔에 묻었던 고개를 조금 움직였다. 이민우는 상체만 앉은 상태에서 나를 아련히 내려보고 있었다. 일그러진 이민우의 안면… 그리고, 나를 내려보는 이민우의 원망어린 시선… 왜 모든 걸 이렇게 허물어뜨리냐는 듯, 괴로워하는 이민우의 시선과 숨결…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은 나는 휙- 아까처럼 고개를 팔에 감추고 흐느꼈다. 히지만 뺨을 돌리기 직전, 보았다. 이민우의 뺨을 적시고 있는 한 방울의 굵은 눈물을… “신혜성.” “흑, 흐윽, 흑….” “니 대답… 잘 들었다.” “우, 우흑. 흐으….” “미안하다.” 한참이나 내 곁에서 앉아있던 이민우는,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나가버렸다. 서러운 달 밤… 나는 온 세상이 무너진 듯 한 괴로움을 호소하며 외로운 바닥에서 여명이 밀려올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새벽이 지나, 아침 햇살이 머리 위에 오를 무렵에야 조금씩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한기가 맴도는 팔을 겨우 움직여서 텔레비전 리모컨을 잡았다. 사람 소리라도 들려야지, 휑한 집안에서 숨이라도 쉴 것 같아서… 그래서 억지로 움직여서 텔레비전을 켰다. 뉴스 할 시간이 아닌데, 뉴스 특보가 나오고 있었다. […해서, …소식에 온 국민이 놀란 가운데….] 처음에는 뉴스 앵커가 말 하는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기어가듯 움직여서 부엌에서 물 한 잔 마시고 돌아와서야, 뉴스에서 떠드는 소리가 조금씩 귀에 안착되었다. […주주 총회 만장일치… 그룹 회장직… 이철호 회장….] 이철호…? 납덩어리가 목에 찔리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목을 움켜쥐며 그제야 텔레비전에 집중했다. 어제 봤던 전진과 이선호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공유 형사의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과, 어제 내게 상처를 남기고 떠난 이민우… 사나운 회오리 속에, 침착하게 떠들어대는 뉴스 앵커의 지저귐 […문도천 회장의 자살 소식을 두고, 현재 그의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의견이 줄을 잇는 가운데 해외 유학 중이던 차남 문정혁군의 귀국….] “!!!” 거기까지가 내 정신력의 끝이었다. 나는 눈이 까뒤집히는 것도 모른 채, 바닥을 뒹굴었다. 감춰진 동화속 이야기 두번째. 동화는 거짓의 연속이다. 누구도 진실을 알지 못한다. 흉한 사물은 파스텔톤 예쁜 색채로, 등장인물의 위선마저 동화라는 환상으로 가린다. 그렇게 잔인하다. 난잡한 꿈을 꿨다. 1초에 한 번씩 미사일이 터지고, 파스텔톤 날개를 펄럭이는 나비가 수 만 마리 날라다니는 장면이 요란하게 스쳤다. 눈 코 입이 없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나비와 미사일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빗줄기처럼 촘촘한 틈이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미사일을 맞아가며 섹스도 했다. 이상했다. 저렇게 좁고, 위험한 상황인데 예쁜 나비가 날라다니는 것이 이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공간을 자연스러워했다. 꿈의 막바지에 나는 깨달았다. 꿈 속에 펼쳐진 공간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나비처럼 예쁘고 애틋하면서, 미사일이 수도 없이 발사되는 전쟁. 사람들의 자연스러움. 이 모든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혜성아. 괜찮니?” 꿈의 끝자락에서 최성수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눈꺼플을 올렸다. 목동의 내 침대… 벽에 걸려있는 문정혁의 퍼즐… 아, 내 방이 확실하구나. “저…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되긴. 임마. 하도 연락이 안되서 문 따고 들어왔다. 혜성이 너, 파랗게 질려서 바닥에 쓰러진 폼이 완전 약먹고 뒤지는 폼이라서 경찰에 신고할 뻔 했어.” “…몇시예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최성수가 만류했다. “더 자. 오늘 스케줄하고 내일 스케줄은 모레부터 주말까지로 조정했어.” “오늘 녹음 시작하잖아요. 홍보 필름도 찍는댔는데….” “야, 신혜성. 이 상태로 밖에 나가면 더 큰일나!” “사장님.” “왜.” “저 오늘만 쉬면 되요. 내일부터 스케줄 잡아주세요.” “얘가 자꾸 큰일 날 소리 하네. 아까 내 동생 왔다 갔었어. 너 며칠 쉬어야 된대.” 최성수가 자꾸 눕히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그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 최성수 사장의 여동생 최정수는 내과 의사다. 집안이 사 자 돌림인가본데, 그 집안에서 최성수가 어떻게 비쳐질까. 예전에 최성수 사장은 명절날에도 출근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정수가 너한테 싸인 받아 달라는데, 이따 좀 해주라.” “하하… 네.” 내 덕분에 최성수가 요즘 집에서도 기를 펴고 사나 보다. 다행이다. 내게 이것저것 챙겨주고 돌아간 최성수 사장 덕분에 잠깐 동안 딴생각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혼자 된 시각은 밤 아홉시. 어젯밤 아홉시 반에 공유 형사가 찾아왔던 것부터, 민우의 이야기, 모든것이 떠올랐다. 나는 괴로운 숨을 토해내며 머리를 부여쥐었다. 이대로 모든 기억이 썰물처럼 떠내려갔으면 좋겠다. 나를 사랑한다는 이민우. 나를 위해 다른 곳도 아닌 한명 그룹의 이철호 사장, 이철호 사장이 키운 김동완 밑에 들어간 이민우. 대체 무엇이 나를 위한다는 것일까. 나는 이민우의 모든 것을 이해 할 수 없었다. 마지막에 떠오른 건, 문도천 회장의 죽음이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뉴스 앵커의 차분한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생생했다. 그의 죽음이 예사롭지 않다. 아마 공유 형사의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이민우가 걱정되서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이민우와 다시 만난다 한 들, 나는 어제처럼 울부짖으며 한 마디 제대로 된 이야기를 꺼내지 못 할 것이다. 단순하고, 어리석은 나. 그러다 혹시 민우가 고모네 집에 가지 않았을까- 하는 작은 희망이 생겼다. 당장 휴대폰을 켰다. 엄청난 문자와 콜키퍼. 마른침을 삼키고 또 삼켰다. 몇 번 신호가 울렸다. 여느때처럼 활기찬 고모의 목소리에 작은 기대를 걸었다. “고모. 민우 혹시 그쪽에 갔나요?” [민우? 아니? 민우가 그제 그러던데. 학교에서 단체로 지방에 훈련인지 학습인지 간다고. 프로그램 표까지 보여주드라. 체대는 다 그런다니?] “아… 네….” [바빠서 연락은 잘 못 할 거라든데, 왜. 너한테는 말 안했어?] “아뇨. 생각해보니까 저한테도 얘기 했어요. 한 몇 달 걸린다던데요.” [아이고… 그렇게 오래 걸린대? 하긴, 교수님들도 간다고는 하는데, 민우 이놈 말 믿어야 되는 거냐, 혜성아?] “그럼요, 고모. 아마 지방에서… 아, 자매 학교? 그런데서 배우나봐요.” [민형이는 그런게 없었는데 이상하네.] “민형이 형은 체대가 아니었잖아요.” 고모는 그때부터 민우 얘기가 아닌 내 얘기를 물으셨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하면서도 내가 어떻게 대답하는지 몰랐다. 이민우가 정말 사라졌다. 오직 그 사실만 뇌리에 차올라서 세상이 하얗게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고모는 즐겁게 떠들었다. 일하는 아주머니와 순돌이가 잘 놀고 있다는 둥, 민형이 형을 고모부 회사에 취직 시킬 계획이라는 것 등등. 고모와 통화가 끝나자 마자 나는 한 풀 꺾인 기대 끝으머리에 반짝이는 어리석은 '희망'을 쥐었다. 믿자. 그냥… 내 맘대로 믿자. 믿을 수밖에 없다. 만에 하나 이민우가 저격수라 할 지라도, 문도천을 죽이지는 않았을 거라고. 문도천은, 뉴스에서 떠드는대로 술에 취해서, 기사나 보디가드 없이 혼자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로 즉사했을거라고. 그렇게 믿자. 주주총회 만장일치로 이철호 사장이, 그룹 총괄 회장직에 오르게 될 거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고요히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하얀 도화지같은 세상만 눈 앞에 나타나기를 바라며… 다음날부터 나는 잡생각이 파고들 틈 조차 생기지 않을 만큼 바빠졌다. 최사장이 잡아놓은 방대한 스케줄을 따라 다니느라 스물네시간이 모자랄 정도였으니까. 화보 촬영, 녹음실에서 트레이닝과 회의, 그리고 이어지는 녹음, 영화 제작 발표회, 20분 마다 한 번씩 인터뷰 하는 잡지사들, 가는 곳마다 따라붙는 극성팬, 팬클럽 창단식, 팬싸인회, 아침마당을 시작으로 줄줄이 잡힌 공중파와 케이블 방송들. 지면 광고, CF촬영… 살인적인 스케줄 덕분에 하루에 밥 먹는 시간, 잠 자는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갰다. 이 와중에 회사도 충무로에서 청담동으로 이사했다. 매니저와 경리부 직원과 차도 생겼다. 텔레비전 광고, 연예 프로그램, 버스 정류장 포스터, 잡지… 어딜 봐도 내가 있었다. 어느덧 세상은 신혜성 이란 글자에 기대를 품고 열광했다. 눈을 뜨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었다는 기존 스타들처럼, 나도 기이한 이 현상을 온 몸으로 실감했다. 대체 내가 왜 좋을까요? 라고 최성수에게 물으면, 그는 가볍게 대답해 주었다. 내 스타일이 전형적인 꽃미남이란다. 소녀들이 열광하는 꽃미남. 게다가 재능과 실력이 갖춰진 원석. 기이할 정도로 내게 몰리는 관심과 인기에, 나는 이게 혹시 꿈은 아닐까- 하루에도 몇 번씩 볼을 꼬집었다. 나를 본 척도 안 하던 감독님들이 이젠 내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가수들이나 배우들 모두 나와 마주칠 때마다 눈을 빛냈다. 나는 아직 신인인데도 불구하고, 최성수의 의도대로 신비주의 전략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엄청난 성공이 우리를 붙잡았다. 그러나 내 가슴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결과 머릿속은 편했지만, 가슴은 싸늘해졌다. 의무적으로 웃고 말하는 생활… 4월 셋째 주, 나는 오랜만에 생각 이란 것을 했다. 이민우가 어디로 갔을까. 왜 돌아오지 않을까. 내가 나빴어… 확실히 잡았어야 되는 건데… 따위를 곱씹었다. -다음주에 강원도에서 크랭크 인 하는 거 알지. 내일하고 모레만 휴가다.- 거의 한 달 만에 닥친 휴가 덕분에, 생각 할 여유가 생긴 것이다. 최성수의 문자를 보자마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죽어라 일 해서 그런지 하루 쯤은 늦잠 자고 싶었다. 온 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피곤했다. 이민우가 어디 갔을까. 찾아야 돼… 반드시 찾아야 돼… 지금 안 찾으면, 영원히 못 찾을 것 같다는 압박감이 목을 조였다. 이민우에 대한 막연한 추측을 홀로 더듬거리던 나는, 결국 단순하게 움직였다. 진짜 이 방법밖에 없을까? 수도 없이 내 자신에게 물었다. 그러나, 이게 최선이라는 선택이 머릿속에 반짝일 뿐이었다. “여기로 가면 된다고? 이 길 맞아?” “네. 저기 끝까지 쭉 올라가요.” 최성수 사장이 바쁜 관계로, 매니저를 대동했다. 최성수는 내가 혼자 운전하는 것을 아직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한남동 초입에서 매니저가 눈을 크게 뜬다. “이 동네 장난 아니다. 무슨 담벼락이 저렇게 길고 높냐.” “…….” “몇 시간 걸려? 나도 같이 들어가?” “아뇨. 형은 여기서 한… 두시간? 아니. 한시간 정도만 기다려 줘요.” “알았어.” 차가 멈춘 곳은, 이선호네 집 앞이었다. 만약 이사가지 않았다면, 이 으리으리한 집에 아직 이선호가 살고 있을 것이다. 쿵, 쿵, 쿵, 인정사정 없이 뛰는 심장 소리, 긴장해서 흐르는 식은땀… 이선호네 대문을 보자마자 절로 주먹이 그러쥐어졌다. 누가 나타난것도 아닌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 방법밖에 없어… “혜성아. 이 앞에 차 세워도 괜찮을까? 안될것 같은데….” “그럼, 우선 여기서 기다리다가, 누가 뭐라고 하면, 내리막 초입에 있는 편의점 근처에서 기다리세요.” “음… 그래.” “아, 형.” “?” 차에서 내리기 직전, 발바닥 끝에서부터 밀려오는 속절없는 두려움에, 다급하게 매니저 형을 불렀다. 그가 왜그러냐며 표정으로 묻는다. “제가 한시간 뒤에도 나오지 않으면, 저 찾으러 왔다고 하면서 들어오세요.” “한시간?” “네. 한시간이요.” “알았어, 임마. 너 근데 표정이 왜그러냐? 하얗게 질린게 쓰러질 것 같다. 어디 아픈거면 약이라도 먹고 가자. 너 어떻게 되면 나 사장님한테 죽어.” “하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차 문을 닫고, 천천히 걸었다. 사자 우리에 내 발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팽팽해진 긴장감에 몸이 다 터져버릴 것 같다. 죽어도 연락 안 하고, 안 찾으려 했던 이선호. 아니, 찾기는 커녕 내 기억속에서 완전히 잊으려 했던 이선호. 이선호네 집에 내 발로 찾아오다니, 어이 없어서 몇 번이나 헛웃음이 뱉어졌다. 막 초인종을 누르던 찰라, 마침 대문이 열렸다. 오후 네시, 이선호네 집에 있던 누군가가 외출하는 모양이다. 부드럽게 열리는 대문… 그리고, 나를 보고 조금도 놀라지 않는 사람은, 김동완이었다. “…….” “…….” 내 표정도 김동완 못지않게 서늘했다. 김동완을 보자마자 내 기억이 옛날로 거슬러가서 피를 흘릴 지라도, 단단해진 자존심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게끔 조종했다. 내가 전혀 주눅들거나 놀라지 않자, 김동완이 의외였는지 약간 휘파람소리를 냈다. 그와 코앞에서 재회한다는 거… 죽을 만큼 힘들다. 그래도, 이민우가 어떻게 되었는지만 안다면… 차라리 잘됐어. 김동완이라면 알거 아냐. 4년… 어쩌면 5년 만에 다시 보는 김동완. 그는 예전과 달리 근사한 수트 차림이었다. 왁스로 멋을 낸 머리카락, 차분한 분위기… 허름한 방에서 잡탕 찌개 끓여먹던 김동완은 찾을 수가 없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김동완에게 뭐라고 입을 벙긋 하려는 순간, 그가 갑자기 내 팔목을 그러쥐었다. “!!” 나는 본능적으로 겁에 질려서 그의 팔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완강하게 나를 잡아당길 뿐이었다. 안돼, 안돼. 철퍽거리는 심장 만큼, 나는 이선호의 집 앞에 온 것을 후회했다. “놔!! 놓고 말 해!!” 질질 끌려가면서 나는 하얗게 질려 소리쳤다. 미쳤어. 괜히 왔어. 내가 돌았나봐. 이민우 개새끼, 만나면 죽일거야. 끝도 없이 넓은 정원 중간쯤에서 김동완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우선 나랑 얘기해.” “김동완! 이 손 놔!! 놔!!” 내가 아무리 소리쳐봤자, 김동완 외에 누구도 내 비명을 듣지 못했다. 이대로 또 당하는거야? 라는 엄청난 공포가 밀려왔다. 김동완. 그는 오래전 내게 가면을 쓰고 접근해서 배신한 전적이 있는 만큼, 존재만으로도 상처를 줬다. 공포의 절정이었다. 그가 편한 낯으로 나를 대한다 해도, 내게 있어 김동완은 이선호처럼 악마일 뿐이다. “아무 짓도 안 해. 왜 왔는지 감이 와서 그러니까, 나랑 얘기하자는 거야. 신혜성.” “놔!! 놔!!” “아 씨팔….” “아악!! 놔!! 김동완!! 놔!! 사, 살려줘!! 아악!!” “…….” 젖먹던 힘을 다 해 소리쳤다. 온 몸을 비틀어가며 그를 뿌리쳤다. 몇 번이나 잔디에서 넘어지고 그에게 끌려가는 바람에 옷이 더러워졌다. 동공이 좁아지며 급기야 과거와 현재가 맞물린 충격으로 실신하기 직전, 김동완의 힘이 풀렸다. 그가 작게 욕을 지껄이며 내 손목을 풀어줬다. 저택 테라스 창이 활짝 열리더니, 누군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테라스의 마루 정원부터 이곳, 김동완과 내가 밀고 당기는 잔디까지 뛰어오는 사람은 전진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식은땀 범벅이가 된 나는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환각처럼 비치는 전진을 봤다. 김동완이 내 곁을 스쳐 저택 옆의 낮은 숲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신혜성. 나는 그냥. 진짜 대화만 하려는 거였어.” “하아, 하아, 하아….” “…당황했다면, 미안하다.” “하아….” 소름끼치는 목소리… 김동완은 내게 그 말만 내뱉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대신, 주저앉아서 심장을 부여쥐는 내 앞에, 전진이 섰다. 얼마나 빨리 달려온건지, 전진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주렁주렁 맺혔다. “우와. 진짜 신혜성씨네?” “아… 안녕하세요.” 하얀 햇살을 등에 이고 근사하게 웃는 전진… 왜 여기에 전진이 있을까- 라는 생각에 앞서, 그의 눈부신 존재에 가슴이 타들어갔다. 조금만 움직이면 눈물이 맺힐 만큼. 전진이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어린 아이처럼 천진하게 미소 지으며 내 앞에서 눈망울을 빛냈다. “괜찮아요? 동완이형이 설마 신혜성씨 못 알아보고 나가래요?” “아… 아니에요.” “지금 한명그룹 우두머리들 바짝 긴장해서, 경계 태세거든요. 아, 여기 누구네 집인 줄 알고 왔어요? 진짜 웬일이지? 촬영 있어요?” “그게….” “일어나 봐요.” “…….” 전진이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팔을 내민다. 한 달 전에, 방송국에서 헤어질땐 또 보면 죽일 것처럼 사납게 굴더니… 얼떨결에 전진 손 잡고 일어났다. 과연, 그의 말마따나 대문에서부터 저택 입구까지 보디가드가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아까는 김동완 때문에 정신없어서 보이지 않던 여러가지가 포착되었다. 예전처럼 근사한 궁전같은 집… “선호야! 선호야!!” “!!” 저택 현관에 들어가자마자 우렁차게 외치는 전진의 목소리에 내 몸이 굳었다. 누가 봐도 자연스럽게 이선호를 찾는 전진… 온 몸의 실핏줄이 다 터지는 충격… 10초도 안 되서 윗층 계단부터 쿵쾅대는 발소리가 들렸다. “응? 진아!! 왜에?!” 이선호 목소리다… 쿵쾅, 쿵쾅, 쿵쾅, 이선호의 발 소리 만큼 내 심장도 격렬하게 뛰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전진은 계단 쪽을 향해 들뜬 투를 내뱉었다. “선호야! 선호야! 여기 나랑 아침마당 방송했던 신혜성씨 왔다?” “뭐라구?!” “나랑 방송했던 신혜성씨 왔어!!” 예전처럼 우렁찬 목소리의 전진, 나는 떨리는 몸을 겨우 움직였다. 집 안에 어른들은 안 계신 모양이었다. 하긴. 보디가드 숫자 늘어난 것도 그렇고, 뉴스에 나오는 이철호 회장 소식… 이 집안이 바쁜 게 당연했다. 내가 내 삶에 충실하느라 바쁠 동안, 문도천 공화국은 이철호 공화국으로 바뀐 게 틀림없었다. 1층 손님용 응접실에 들어선 이선호. 그는 나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 아니, 그가 약간 당혹스러워 하는 표정은, 연예인 신혜성이 찾아와서 조금 들떠하는 그것이었다. 한때는 함께 공부하고, 태양 아래서 미래를 소리치며 즐거워했던 우리는, 이렇게 재회했다. 내가 변했듯, 이선호도 예전과 달랐다. 공부와 외사랑으로 지쳤던 예전의 이선호는 증발하고 없었다. 그는 누가 봐도 달콤한 사랑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낯이었다. 투명한 피부, 결 좋은 머리카락, 약간 통통해진 볼이 귀엽게 느껴진다. 이선호… 굉장히 사랑스러워졌구나. 연분홍색 남방에 아이보리 면바지를 입고 나타난 이선호 전체에서 빛이 났다. “안녕하세요? 어쩐 일로 저희 집에….” 나야. 이선호. 전진은 몰라도, 너는 나를 알아봐야지. “앉으세요. 신혜성씨. 와, 실물이 훨~씬 예쁘고 멋있네요? 그치, 진아.” 이선호가 티없이 맑게 웃으며 내게 차를 권했다. 나는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대답하며, 전진을 흘깃 쳐다봤다. 전진… 그는 현재 이선호 옆에 단단한 바위처럼 앉아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닌 이선호를 사랑스럽다는 듯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엔 내 것이었던 전진 특유의 빛나는 시선이 이선호에게 머물러 있다. 둘의 모습을 코앞에서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으니, 이민우 일을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 이민우. 그 이름 석자에 힘을 냈다. 나는 최대한 편하게 다리를 꼬아 앉았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실은, 이선호씨한테 여쭐 게 있어서요.” “아, 그래요?” “네. 단 둘이서 대화했으면 좋겠는데…….” 그때, 보디가드 한 명이 응접실에 들어와서, 이선호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이선호가 나를 보며 미안해 하는 낯으로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잠깐 전화 통화 좀 하고 와야겠는데….” “괜찮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한, 5분? 10분? 그정도면 될거예요. 아, 진이랑 대화 하고 계세요. 우리 진이가 굉장히 재밌거든요!” “아… 네….” 미친새끼… 절로 욕이 튀어나올 뻔 했다. 전진이 니 곡예사냐. 하! 나는 여러번 괜찮다고 웃어줬다. 씁쓸함이 파도쳤다. 그러고보니, 이선호는 나와 전진을 둘이 있게 놔둔다. 예전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전진에게 나를 던진다. 그만큼 자신있다는 증거이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시퍼런 표정 밖으로 잿더미같은 눈물이 쏟아질까봐 몇 번이나 고개를 쳐들었다. “신혜성씨.” “?” 전진이 일어선다. “내가 뭐 재밌는 거 보여줄까요? 아니지. 신기한거 보여줄게요!!” “…….” 신기한 거…? 재미있는 거…? 지금 상황만큼 신기하고 재밌는게 또 있을까. 나도 일어났다. 화장실 가서 내 표정 좀 살피고 와야겠다. 아무리 연기자 라고 해도, 감정 조절이 쉽지 않으니까. 벽난로 옆에서 뭔가를 찾는 전진의 등을 스치며, 나는 말했다. “잠깐 화장실 좀….” 어지럽다. 이민우는 어딨는거야… 공유 형사부터 찾아 갈 걸 그랬어… 무조건 직진하며 다섯 걸음쯤 걸었을까. 벽난로에 있는 전진이 갑자기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덤벙거리네.” “?” 나한테 하는 소린 아니겠지? 무전기인가? 나는 다시 걸었다. 그때 전진의 보다 또렷해진 목소리가 귀를 뚫었다. “…공주야. 화장실 그 쪽 아니잖아.” 너무나 자연스러운 말투에, 나도 모르게 반응했다. “아 맞다. 반대 쪽이었… …!!” 그렇게 얼어붙었다. 병신처럼 헤헤 웃으며 뒤돌아서는 즉시, 전진이 내게 던진 방금 말이 믿기지 않아서 입 벌린채 굳었다. 심장이 멎는 충격이 싸하게 스쳤다. 테라스의 환한 태양을 일직선으로 받으며 황금처럼 빛나는 전진. 그가 벽난로 옆 기둥에 등을 기대고 팔짱 낀 채 나를 보았다. 심장이 터져 버릴 만치 환하게 미소지으며… “많이 예뻐졌다. 우리 혜성 공주.” “너… 너…!!” 맙소사… “놀란 티 내지 마. 이선호는 내가 기억 상실증인 줄 알아. 아니. 나 말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알지만.” “저… 전진….” 그가 아까처럼 벽난로 쪽으로 등을 돌렸다. “혜성씨. 화장실은 반대쪽으로 걸어가면 나와요.” “진아….”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몇 번이나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우리 공주는 배우 해도 잘 할 거야. 대단해.” “너….” “공주야. 나는 내 삶 속에서 연기하면서 살 거야. 너를 찾을 때까지.” “!!” “그러니까. 우리 공주는 스크린 속에서 연기 해.” “!!” 등으로 말하는 전진, 그의 목소리는 소름끼칠 만큼 차분했다. 연기자인 나 마저도 감히 따라할 수 없는 '삶'의 연기. 온 몸에 퍼지는 전율을 껴안고 화장실로 빠르게 걸어갔다. 탕- 화장실 문을 닫자마자, 주저앉아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그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 “흡, 흐흑. 흐윽.” 사정없이 떨어지는 눈물들이 내 손등을 적셨다. 전진… 전진… 방송국에서 봤을때 나를 몰라봤던 전진… 내가 불러도 시선 하나 바뀌지 않던 전진… 그 모든게 철저한 '연기'라는 것이다. 하느님… 그는… 완벽하다. 나 마저도 속인 전진이라니. 그는 영화배우 전서희의 아들이라는걸, 살면서 증명하고 있었다. 하물며 정신과 의사까지 속인 것이다. 연기자의 피를 물려받아서 엑스트라 아르바이트 했던 전진. 그가 지금은 세상이란 무대에서 연기하고 있다. 아주 긴 시간동안 스켈리톤 선수라는 배역으로…! 나는 재빨리 눈물을 닦았다. 갑자기 흘린 눈물이라 그런지 코 끝이 빨개지지 않았다. 다행이다. 마음을 다 잡고 응접실로 돌아가니, 나보다 약간 빨리 도착한 이선호가 천진하게 웃으며 맞아준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나요, 신혜성씨? 아, 저랑 볼 일 있으시댔죠? 진아.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 이제는 느껴진다. 어쩌면 나만 알 수 있는 이선호 목소리의 미세한 차이. 톡 쏘듯 약간 힘이 들어간 이선호의 어투를 들으며 나는 제대로 깨달았다. 아직 우리들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음을… 공주님은 건망증이 심하고 둔했습니다. 기사님이 눈앞에 있을때만, 사랑을 실감했으니까요. 전진이 자리를 비켜줬음에도 불구하고, 이선호는 응접실 옆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드레스 룸인가? 복도식으로 생긴 작은 방 문을 닫으며, 무의식중에 황금색 바닥과 옅은 조명을 살폈다. 이선호가 안쪽 문을 하나 더 열었다.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신혜성씨.” “그냥 여기서 말 하죠.” 복도에서요? 이선호가 난감한 듯 묻는다. 나는 대답 대신 막 닫힌 도어에 등을 기댔다. 방과 응접실 사이의 통로, 약 5평의 공간에서 우리는 마주섰다. 사각형 박스에 갇힌 장난감이 된 기분이었다. 좁은 통로 복도에 있는 것이라곤 양 옆의 거울과, 황금색 조명 뿐이었다. 창문 조차 없는 어둠. 마치 블랙홀같다. 조명 저편에서 나를 보는 이선호가 황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그만 쑈 해.” 이선호가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은 여전히 나를 할퀸다. “그럴까? 오랜만이다. 신혜성.” 4년 만에 들어도 어제 들은 것 마냥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이선호 특유의 가느다란 목소리. 그러나 지금의 나는, 예전의 신혜성이 아니다. 이선호가 어떻게 살던지 관심 없다. 내가 관심있는건 이민우의 소식이니까. “이선호. 너는 알고 있을 것같아서 말이지.” “뭘 말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4년 만에 만나서, 내게 알고 싶은게 있다고? 보아하니 탄탄한 성공대로를 달리고 있던데… 신혜성. 대단한데?” “…….” “요즘에는 개나 소나 연예계 진출한다더니, 중졸 학력인 신혜성이 말이야… 대단해. 하하.” “…….” 참 신기했다. 이선호가 뭐라고 이빨을 까든지 말든지 감정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선호의 변하지 않은 모습이 신기할 뿐이었다. 전진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자신감에 찬 부분만 약간 바뀌었을 뿐, 나를 자극시키는 이선호의 유치한 말투는 4년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내가 표정 변화 없이 똑바로 시선을 부딪히자, 이선호가 입을 다물었다. 아마, 자신이 성급하게 감정적으로 군 것을 후회하는 모양이다. 그의 안면에 낭패의 빛이 스쳤다. “이선호.” “…….” “나한테 하고 싶은 말 끝났지?” “…….” “너 찾아온 이유는….”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선호가 또 성급하게 끼어들었다. “보다시피, 전진은 지금, 나밖에 못 봐.” 사랑. 소유할수록 모자란 깊이를 실감하는 눈동자를 드리우며, 이선호가 또 제 멋대로 떠든다. 나는 또 들어줬다. “전진이 아플때, 전진이 회복하려고 노력할 때, 선수생활 하면서 좌절할 때, 그러다가 또 일어설 때, 늘 전진에겐 내가 있었어. 이제 전진은 나를 사랑해. 신혜성. 니가 4년 만에 전진하고 방송 한 번 했다고 해서….” 참 이상하지. 나는 이선호의 악착같은 방어에 전의를 상실했다. 전진에 대한 전의를. 전진이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 물론 그 부분을 두고 내 심장에 회오리가 쳤던 건 사실이었지만… 이선호와 전진이 나란히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전진과 나의 오래 전 이별을 차근차근 받아들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너랑 전진이 어떻게 지내든 상관 없어. 내가 찾아 온 이유는, 전진 때문이 아니니까.” “!” 이선호가 사색이 된 낯으로 나를 죽일 듯 노려본다. 이선호의 가시 돋힌 말에 상처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지난 날 이선호로부터 받은 상처들은, 나를 단련시켰다. 무뎌질 수 있도록. 어쩌면 내가 연기자가 될 수 있던 원동력도 이선호가 아니었을까. 이선호 덕분에 나는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감정의 밑바닥까지 전부 경험했었다. “너랑 전진이랑 사랑을 하든, 섹스를 하든, 내가 만약 '예전의 너처럼' 일일이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비겁하게 뒷통수 치는 스타일이었다면, 진즉 찾아왔겠지.” “하… 진짜 어이 없다, 신혜성. 너 아까 우리 진이가 나랑 잘 지내는 거 보구 신경 거슬려서 툭툭대나본데….” “이선호. 너는 진짜… 옛날하고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뭐?” “세상 모든것, 사람마저도, 니 주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거.” 그리고 정확히 2분 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의 차분한 대응에 당황해 하는 이선호, 그는 이민우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선호가 모르쇠로 일관하는 걸 봐서야 깨달았다. 이선호는 알아도 모른다고 하는 새끼였다는 걸. 이민우가 어디 있느냐고 묻자마자 후회했다. 기다렸다는 듯 피식 웃으면서 가소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는 이선호. 너는 아직 멀었어- 이선호의 표정에서 그가 하고 싶어하는 말이 모두 보였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가 할퀴는대로 당하기 싫어서, 무작정 닫힌 도어를 열었다. 그리고 얼어붙었다. “얘기가 금방 끝났나봐요?” “!!” 전진이 문 앞에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조금도 동요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를 보고 경악해서 멈칫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내가 이선호에게 한 말을 들었을까? 휙- 뒤돌아보니 선호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전진이 나를 스쳐 선호 쪽에 걸어갔다. “선호야. 표정이 왜그래. 어디 아파?” “아, 아니야. 진아. 너 방 문 앞에 있었어?” “아니. 응접실에 있다가 그냥 너 찾으러 돌아다녔지. 안 보여서 걱정했잖아.” “아… 그랬구나.” 전진이 이선호를 품에 안는게 양 옆에 잔인하게 매달려있는 거울을 통해 모두 비쳤다. 울컥- 짜증이 솟구쳤다. 전진과 이별을 인정하자마자, 둘을 목격했다. 전진은 나를 찾기 위해 삶 속에서 연기한다고 했지만… 아무리 연기라고 해도 이선호를 품에 안고 달래주는 전진은… 참기 힘들다. 누가 심장을 바늘로 찌르는 기분이었다. 전진. 그는 천재다. 연기자가 된다면 대성할 것이다. 어쩌면 나보다 높이. 이선호의 뺨을 감싸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전진의 모습에, 나는 그가 '연기'한다는 걸 알면서도 상처 받았으니까. 매니저형에게 부탁해서 도착한 두 번째 장소는, 의정부에 있는 타이거JK 연습실이었다. 음반 녹음과 발성 트레이닝 하다가 최성수를 통해 알게 된 그는, 말 수 적은 남자 중의 남자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분위기, 존재만으로도 상대를 압도하는 사람이었다. 최성수 사장이 배고픈 시절부터 쭉 알고 지냈었다는 타이거JK는 그래서인지 내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훗날 태권도장 차리는게 꿈이라는 타이거 JK는, 내가 태권도 공인 3단이라는 걸 안 다음부터, 자기의 허름한 연습실에 종종 초대해줬다. 그래봤자 두 번 밖에 가보지 못했지만, 나는 그와 제법 친해졌다. '힘들때, 죽도록 짜증나서 노래고 뭐고 생각조차 안 날 때, 대련하고 싶으면 와.' 선호네 집 밖에 나오자마자, 일주일 전, 타이거 JK가 해 준 얘기가 퍼뜩 떠올랐다. 이민우 찾기는 고사하고 기분만 더러워졌던 나는, 당장 의정부로 향했다. 연락 없이 찾아온 게 마음에 걸렸지만, 타이거JK는 다행이 연습실에 있었다. 우리는 반지하 공간에서 말 한 마디 없이 라면 끓여먹었다. 그는 내가 왜 왔는지 아는 눈치였다. 뭐… 내 영혼이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온다나? 타이거JK가 아는 근처 도장에 갔다. 한 사람도 없는데다가 먼지까지 폴폴 날리는 공간이 수상해서 여기는 누구네 도장이냐고 묻자, 그가 말했다. “나도 몰라. 망한 도장인가봐. 얼마 전에 우연히 들렀는데, 사람이 없더라고.” 우리의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간단한 준비운동조차 생략하고 그에게 덤볐다. 내 장기는 돌려차기였다. 공격보다는 방어를 하면서 상대를 제압해야 하는 운동이 태권도인데, 나는 작정한 사람처럼 타이거JK에게 덤볐다. 전진, 이선호, 이민우, 김동완. 심장이 한 번 뛸때마다 넷의 이름이 혈관을 터뜨렸다. “오늘 장난 아니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잠깐만.” “?” 대련이 끝나는 즉시 늘어졌다. 먹먹했던 기분이 약간 가셨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나와 나란히 누워있던 타이거JK가 갑자기 밖에 나가서 뭔가를 사온다. “이게 뭐예요?” “박카스.” “네?” “지금 담배 빨고 싶잖아. 그러니까 박카스 마시라고.” 타이거JK는 천재일지도 몰라… 땀을 흠뻑 빼고 나니까, 진짜 담배 생각났는데… 벌컥 벌컥- 시원한 박카스 마시다가, 내 옆에 앉아있는 그를 힐끗 쳐다봤다. 아직 추운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민소매 나시 차림인 타이거JK. 그의 팔 여기저기에 그을린 흉터에 처음으로 호기심이 일었다. “형. 이 상처들 다 뭐예요?” “아…….” 말의 시작이 약간 느린 타이거JK가 자기 팔을 남의 팔인 양 훑으며 피식 웃었다. 이 형도 멋있긴 진짜 멋있어… 인생 자체가 간지난다고나 할까. 최성수가 타이거JK 소개시켜줬을때, 나는 연예인 본다고 신났었다. 하지만 타이거JK형이야 말로, 요즘 세상을 슬슬 휩쓸고 있다는 원석, 유망주라는 나를 보고 많이 놀라워 했었다. 연예인이 나를 보고 놀라다니, 내가 진짜 연예인이 됐나봐… 어쨌든 타이거JK의 팔에는, 칼에 그어진 자국이 흉칙하게 퍼져 있었다. 그가 아대를 팔 윗부분까지 죽 올리며 말했다. “예전에… 한… 3~4년 전? 5년 전? 그때 내가 잠깐 날라리였어. 날K.” “날라리? 그때 생긴 상처예요? 하하하. 날K가 뭐예요. 큭큭큭큭.” “응… 태어나서 안 해 본 주먹질 싸움질이 없는데… 그때 나 그은 새끼는, 싸움에 미친 놈이었거든. 그새끼한테 당하고 신문에 실릴 뻔 했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왔지.” “왜 그랬어요? 왠 싸움?” “반항을 찾기 위하여.” “??” 가끔 이 형도 참 모를 소릴 한단 말이야… “아참. 형. 저 싸인 해 주세요.” “싸인?” “네. 제 친구가 형 팬이예요.” “…….” 내 부탁에 잠깐 골몰하던 타이거JK가 흔쾌히 자기 씨디에 사인해 줬다. 그 댓가로 나는, 그에게 부탁한 사람들을 위해 스무 장이나 싸인해줬다. “우와!!!” “그렇게 좋냐?” 타이거JK의 싸인 씨디 받자마자 입 찢어지게 좋아하는 양종호의 반응에 조금 뿌듯해졌다. 양종호는 내가 자기랑 친구라는걸 시장 바닥에 다 소문냈다. 덕분에 양종호네 반찬가게에 못 간다.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가 봤자, 모든 사람들이 알아보니까. “공유형은 오늘 못 온대. 문도천이 죽고 난 다음부터 강력계에 비상인가봐.” “…….” “야. 문도천 있잖냐. 교통사고가 아니라, 타살일 가능성이 높대.” “…….” 식탁 의자에 앉자마자 씨디 껴안고 문도천 얘기부터 하다니. 내가 대답하지 않자 양종호가 자기 말 씹는다고 짜증낸다. 그런 양종호를 끌고 거실로 갔다. 그리고 녀석이 만들어 온 닭도리탕을 데워 왔다. 우리 둘은 익숙하게 소주와 막걸리 잔을 부딪혔다. “양종호… 장사 파하기 전인데… 와 줘서 고맙다.” “새끼… 깐다. 마시기나 해라.” 다리도 저는 놈이, 나 준답시고 반찬가게에 쪼그려 앉아서 닭도리탕 만들고, 또 그거 보자기에 싸서 우리집까지 들고 왔다니. 코 끝이 찡하다. 양종호는 순돌이를 대신 해서, 순돌이와 닮은… …돼지 인형을 끌어안고 있었다. “우리 순돌이도 한잔~ 아이고, 귀여버라. 우리 쑨돌이!” “…….” 양종호가 미쳐가고 있어… 영화 촬영 중간 어떻게든 짬 내서 순돌이 데리고 반찬 가게 놀러가야겠다. 내게 제대로 된 친구가 양종호밖에 없듯이, 양종호도 마찬가지다. 고삐리때 양종호랑 놀던 껄렁패 새끼들은, 양종호가 다친 다음부터 그의 주변에서 사라졌다.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죽고 싶을 만큼 고독했을 것이다. 단순하고 솔직한, 양종호의 주먹 하나 믿고 겉으로 친한 척 굴던 양아치 새끼들은 양종호의 진가를 몰랐던 게 틀림없었다. 양종호는 자기도 배신 당한 전적이 있는 만큼, 나를 좋아했다. 우리 둘은 닮은 데가 많았다. 둘 다 이선호에게 입은 피해가 상당했고, 둘 다 김동완에게 당했다. 둘 다 친구들의 배신을 겪었고, 둘 다 '우정'이란 외로움에 배가 고팠다. 그래서 우리는 끈끈이처럼 친해 질 수밖에 없었다. 가끔, 양종호가 집에 돌아갈 때, 다리를 절룩대며 천천히 걷는 뒷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다. 나 때문에 양종호가 저렇게 된 것 같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소주 세 병에 막걸리 두 병을 비우자 취기가 올라왔다. 돼지 인형 끌어안고 뽀뽀질하는 양종호를 보고 배 잡고 웃다가, 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내일까지 쉬고, 모레부터 강원도에서 장기간 촬영 있거든. 그래서 당분간 서울에 못 올 거야.” “새끼… 당분간이 얼마나 되는데?” “자세히는 몰라. 대략 잡힌 것 만 봐도, 네 달? 종종 음반 스케줄 때문에 올라오긴 하겠지만, 집에 들릴 시간도 없을 거래.” “음….” “왜?” 양종호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 골몰한다. 왜 저러지? 한 참 뒤에야 양종호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야, 신혜성. 뭘 걱정하고 그러냐? 내가 강원도에 놀러가서 너 보면 되는거지.” “!!” 맙소사… 나는 단순히 양종호한테 당분간 못 볼 거다- 알려 준 것 뿐인데, 녀석은, 내가 서운해 할까봐 해결책을 고민했었나보다. 술기운 때문일까. 콧잔등이 맵다. “야… 신혜성. 또 짜냐? 이새끼는 하여간 고추를 몇 번 떼는 거야?” “양종호… 내가 오늘 좀 많이 짜증났었걸랑… 봐주라.” 눈을 쓱쓱 비볐다. 우리 둘은 부어라 마셔라 하며 식어가는 닭도리탕 앞에서 술을 들이켰다. 내가 짜증났었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는지 양종호가 눈알을 부라린다. “왜. 누가 뭐라 그래? 그런 씨발년 있음 나한테 말 하라니까.” “아니야… 아니야… 참, 혹시 이민우가 시장에 오진 않았지?” “어. 안 왔어. 걱정 마. 혹시 나타나면 즉각 연락해줄게.” 이선호를 만난 날이라서 그런가. 오늘따라 양종호가 절실하다. 내 우정이 아직 건재하다는 걸 증명해주는 양종호가, 고맙고 감사하다. 양종호는 늘 그랬듯이 새벽 장사 나가기 직전, 우리가 함께 먹은 술자리를 같이 치웠다. “넌 들어가서 쉬어라. 임마… 휴가람서. 내가 치울게.” “양종호. 너 장사 나가야 되잖아. 됐어. 그냥 가!!” “놀래라… 왜 소리지르는데! 들어가서 쳐 자라 새끼야!!” 물론 절대 조용히 치우진 않았지만… 하루 남은 휴가. 나는 종일 집에서 지냈다. 순돌이랑 전화통화 하다가 결국 나 보고싶다고 우는 순돌이 달래느라 진땀 빼고, 양종호가 냉장고에 꽉 채워 놓은 반찬으로 밥 먹고, 저녁무렵부터 커다란 가방에 짐 챙겼다. 다음날, 나는 양종호와 공유 형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게 연락할 수 있는 번호를… 전진, 어쩌면 이선호, 이민우까지 알고 있는 휴대폰은 집에 놔두기로 했다. 이민우가 내 곁을 떠났듯이, 나도 촬영 할때는 촬영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고모와 고모부에게도 새 휴대폰 번호를 알려드렸다. 전진과 이선호… 전진이 삶 속에서 연기 하며 산다는 것, 그 자체는 충격이었지만, 나는 전진과 떨어져서 지낸 시간이 4년이나 되었다. 그와 이별을 받아들였던 내가, 새삼스레 전진과 연락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내가 오랫동안 쓰던 번호는 긴 휴식기에 들어섰다. “아 맞다.” 최성수가 밖에서 빨리 나오라고 지랄하는 통에 정신없이 가방 챙겨서 현관문 열다가 도로 튀어들어갔다. 침대방 책꽂이를 열심히 뒤적였다. 모처럼 눈이 반짝 빛났다. “크레용 공주….” 갑자기 이게 생각났다. 겁쟁이 크레용 공주의 모험. 문정혁이 내게 준, 나를 위한 동화. 어쩐지 이 책이 있으면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영화 촬영을 무사히 마치기를 기도하며 책을 가슴에 껴안았다. 이때, 나를 기다리던 최성수 사장이 씩씩대며 들어왔다. 크랭크 인 이라서 그런지, 나보다 최성수가 백 배는 더 긴장한 낯이었다. “야!! 신혜성!! 대체 언제까지 준비하는 거야!! 이러다가 너 꼴찌로 도착하겠다!!” “헤헤. 가요~ 가자구요~!” “어휴!!” “죄송해요~ 아, 빨리 가요~!” 잠깐만 나를 옥죄는 모든 사슬을 잊자. 영화에만 충실하며, 잊어버리자. 설마 설마 했는데… “내일 다시 시작해!! 이시영씨!! 대체 언제까지 국어책 읽을 겁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주연 배우 중에 이시영이 끼어 있을 줄이야. 하루 종일 같은 장면만 오십번 넘게 찍었다. 결국 김감독이 확성기에 대고 승질냈다. 이시영은 또 울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에이 씨팔!!” 김경우 감독은, 이름처럼 경우 바르기로 소문난 감독인데, 그런 그가 이시영이 사라지자 마자 확성기랑 대본을 한꺼번에 모래 사장에 집어 던졌다. 조감독이 쩔쩔매면서 김경우 감독을 따라갔다. 나도 짜증나 죽겠다. 영화 '아가사'가 크랭크 인 한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시영이 제 역할을 못 하는 바람에, 이시영 씬을 최대한 뒤로 미루다가, 그저께부터 김감독이 폭팔한 것이다. 강원도 삼척. 강과 산, 바다를 오가다가, 가끔 읍상동에 지은 세트장에서 촬영하기를 한 달. 예정대로라면 앞으로 남은 세 달은 읍상동에서 촬영해야 되는데, 촬영팀과 배우들은 아직도 바닷가에서 머물고 있다. 처음에는 삼영기획 기대주인 이시영 원톱 주연 영화 라고 소개되었던 '아가사'는, 중간에 내가 연극에서부터 대박을 터뜨리는 바람에 '신혜성, 이시영' 투톱으로 소개되었다. 물론, 나와 이시영 말고도 배우 한 명이 더 있다. 아마 내가 연극을 시작으로 연예계에 폭풍같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신혜성 이시영 투톱이 아니라, 윤계상 이시영 투톱 이라고 소개됐겠지. 주조연 역할에 지나지 않던 나는, 언론에서 떠드는대로 어느새 영화 주인공이 되었다. 물론, 시나리오는 바뀌지 않았지만… 영화 내용은 단순하면서 특별했다. 이시영이 맡은 여자 주인공 영희와, 윤계상이 맡은 남자 주인공 서후가, 자유로운 영혼 아가사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 영희와 서후는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아가사를 사이에 두고 교묘한 신경전을 벌인다는 것. 영화는, 사랑했던 남녀가 적이 되는 관계를 스릴있게 풀어놨다. 어쨌든 졸지에 남자 여자에게 사랑받다가 나중엔 바닷물속에 사라지는 역할을 맡은 나. 우연히 합격한 오디션이라지만, 내 이미지랑 맞아도 너무 잘 맞는다며 기획사 식구들이 좋아한다. 철썩~ 쏴아아. 5월의 푸른 바닷물이 연녹으로 반짝였다. 파도가 칠때마다 일어나는 하얀 응어리들이 수면 위에서 자글거렸다. 수평선 너머에서 슬슬 바다를 밀어내는 주황빛 노을. 동해의 바닷물이 붉은 수염을 으스대고 있었다. “혜성아. 너도 읍상동으로 갈거야?” 가만히 바다를 쳐다보는데, 윤계상이 말을 걸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일도 여기서 촬영하잖아. 아닌가? 형은 왜 읍상동 가는데?” “몰라. 씨발.” “?” “아, 욕해서 미안. 아가사.” “…….” 윤계상이 내 허리에 팔을 두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영화 내용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윤계상은 가끔 나를 대할 때 여자 대하듯 한다. 웃기고 있어… 뒷발 돌려차기 한 대 날릴까. “이시영 저 개년이, 또 돈 쳐발랐나봐. 읍상동에서 스태프들 모아놓고 거하게 쏜대. 너도 알지? 읍상동부터 월계동 땅이 이시영네거 라잖냐. 감독님이 미칠라고 한다. 때려 죽이고 싶은데 심한 말도 못하고.” “아… 하하.” 귀여우면서도 남자답게 생긴 계상이 형이 욕 하면서 인상 찌푸리는거, 은근히 잘 어울려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영화 촬영은 호흡이 길어서 좋다. 하아~!” “맞아.” 드라마나 영화에 주연급으로 많이 출연했던 계상이 형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촬영은 드라마 촬영보다 한결 수월하다. 뭐랄까. 배우의 컨디션을 최대한 고려해준다고나 할까. 극에 몰입하기가 쉽다. 드라마라봤자 엑스트라로 출연한게 전부인 나지만, 영화와 드라마가 얼마나 차이나는지는 대강 안다. “그럼, 내일 보자~!” “응.” 계상이 형이 내 어깨를 두 번 툭툭 치고 로드가 부르는 쪽으로 달려갔다. 혼자 남은 나는 퍼석대는 해변을 하염없이 걸었다. 잠시후, 매니저 형에게서 전화 왔다. “어. 형, 왜?” [너 어디야! 읍상동 가는거 아니었어?] “아닌데? 나 아직 촬영장인데?” [헉!! 알았어. 다시 그쪽으로 돌아갈게.] 그럼 그렇지. 먹을거 좋아하는 매니저같으니라고. 내가 당연히 읍상동에 갈 줄 알았나보다. “됐어. 형. 코앞이 숙소인데, 거기서 뭐 시켜먹을게. 놀다 와.” [혜성아. 그러지 말고 너도 와라. 이시영이 2차, 3차도 쏜대. 이따 나이트에도 갈….] “끊는다!!” 먹을거 플러스 여자 밝히는 매니저 형. 킥킥 웃으면서 휴대폰 플립을 닫았다. 한숨이 푹~ 나왔다. 예정대로라면 3~4달 안에 촬영이 끝나야 되는데, 근사하게 제작 발표회 했던 게 무색할 만치 촬영이 길어질 것같다. 이시영 때문에… 어쨌든 바닷가와 산을 오가며 매일 매일 영화 촬영에 임하다 보니, 서울에서의 찌든 기억이 옅어졌다. 사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민우. 전진. 이선호. 김동완. 넷 중 누구든 생각날 것 같으면 대본 연습했다. 그래도 생각날 것같으면 운동을 하거나 순돌이하고 전화통화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생각나는 날도 있었다. 이민우가 걱정되고, 전진이 속절없이 야속해지는 밤에는, 잘 자고 있는 양종호에게 전화해서 무지막지한 욕을 들었다. 자는거 깨웠다고… 짜식.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서서히 따뜻해지는 태양처럼 내 마음에도 푸른 봄이 기지개를 켰다. 강원도에 오기 전에 가까스로 녹음과 쟈켓 촬영을 마쳤던 첫 번째 싱글 앨범 반응이 굉장히 좋다고 한다. 최성수 사장은 내게 침울한 발라드를 부르라고 했지만, 내가 선택한 곡은 발랄하고 경쾌한 '그대는 예뻐요'라는 곡이었다. 벌써 이 곡을 앞으로 방영할 드라마ost에 수록하고 싶다며 문의가 들어온다고 했다. 참 이상하지. 복잡한 현실과 달리, 나는 하는 일마다 날개라도 달린 양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내 가슴은 점점 싸늘해지는 기분인데… 한참동안 넋을 읽고 모래사장에 앉아서 발목까지 부비대는 바닷물과 파도, 저물어가는 태양을 응시했다. 슬슬 일어나서 숙소로 돌아가야겠다. 돌아가서 샤워하고, 우리두리가 지은 동화책이나 읽어야지. 바지에 묻은 모래를 탁탁 털며 일어났다. 진즉에 협조를 구한 장소라서 그런지, 내가 앉은 주변에 사람 한 명 지나다니지 않았다. 고독한 바다 냄새만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백사장 저 편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 누구지? 아직은 작게 보이는 사람이 궁금해서 눈을 흐릿하게 뜨고 고개를 쭉 내밀었다. 두근, 두근, 두근,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 그 사람이 걷는 속도가 빨라졌다. 동시에 내 표정도 경악으로 물들었다. 설마… 설마…!! 처음에는 방어적으로 낯선 사람을 응시하던 나는, 어느새 달려가다시피 빠르게 걸었다. 내 맞은편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한 남자를 향하여. 20미터 거리를 사이에 두고, 나는 소리쳤다. “문… 정혁… 문정혁!!!” 거짓말 아니지? 꿈 꾸는 거 아니지? 착각 하는 거 아니지? 그가 더 빨리 걸어오면서 환하게 미소짓는다. “이여… 신고양이!” “!!” 어떡해… 어떡해…!! 거침없이 눈물이 흘렀다. 철퍽대는 심장이 내 숨마저 막아버렸다. 눈을 깜빡이면 문정혁이 사라질 것같아서 나는 억지로 눈에 힘을 주며 달려갔다. 그도 달려온다. 황금색으로 물든 저녁 하늘, 검붉은 옷을 입은 바닷가, 투명한 백사장에서, 문정혁이 걸어오다니. 이럴수가. 이럴수가. 두근, 두근, 두근, 두근, 4년 만에 들어보는 신고양이 라는 말에 나는 울음을 터뜨리며 문정혁에게 안기듯 섰다. 얼마나 세게 뛰었는지 도중에 한 번 넘어지기 까지 했다. 아, 정말 나는 병신인가봐. “으, 으흑, 으, 으흐으윽. 으, 으윽.” “우리 신고양이 잘 지냈어?” “저엉혀가아, 으, 으흐, 으흐으. 으흑.” “여전히 울보네….” 거짓말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진짜 문정혁이다. 예전에 기억했던 문정혁보다 훨씬 리뉴얼된 초특급 문정혁이 코앞에 섰다. 말도 안돼… 말도 안 돼…! 그가 나를 쭉 쳐다보다가 견디기 힘들었는지, 큰 숨을 토해내며 억세게 껴안았다. 내가 기억하는 따뜻하고 넓은 품, 조금 긴 문정혁 머리카락, 문정혁의 다정한 목소리, 내게 항상 전화하던 목소리, 웃음소리, 아아. 문정혁… 문정혁…! 그에게 안기자, 내가 잃어버렸던 사랑이 무엇인지 기억했다. 내가 얼마나 그를 그리워했는지 가슴이 터질 만치 알아버렸다. 그가 꿈처럼 사라질 게 두려워서 나도 문정혁의 등에 팔을 꼬옥 둘렀다. 다시 마주본 문정혁, 그의 시선도 붉게 차올라 있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문정혁… 너… 어떻게….” 그가 내 뺨에 묻은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주며 눈망울을 빛낸다. “몰랐어?” “뭐… 뭘….” “신혜성. 너 있는 곳은 어디든지 그냥 다 알게 된다는 거.” “!!” 쿵, 쿵, 쿵, 죽은 것으로 위장했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여전히 잘생긴 문정혁. 조각같은 안면을 내게 드리우며 그가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속삭였다.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선물 받은 것같다. 아니, 이건… 기적이었다. “진짜 문정혁이야? 어? 어? 문정혁이야? 으, 으흑. 문정혁이야?” “응….” “진짜 진짜 문정혁이야? 으, 으흐흑. 문정혁이야?” “그래. 그래….” “또… 또 나 버리고 떠날거야? 어? 문정혁! 또… 또….” “!!” 정신없이 울부짖는 나를 차분하게 내려보던 문정혁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가 괴로운 숨을 토해내다가, 내 뒷통수를 꽉 잡고 자기 가슴에 묻었다. 문정혁의 숨결… 문정혁의 떨림… 그가 내 목과 귀 사이에 입술을 묻고, 간절한 투를 빚었다. “바보야… 방금까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한테 그게 무슨 끔찍한 소리야….” 기억하고 있다. 열여덟의 어느날, 구교사동과 본관 사이 현관에서, 계단 밑에서 웅크리고 있던 나를 찾아낸 문정혁. 그는 그때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문정혁. 나… 여기 있는거 어떻게 알았어?” “몰라. 그냥 알게 돼. 너 있는 곳은.” “좀비였다고?” 근사하게 폼잡고 가슴떨리는 말을 속삭이는 문정혁… 그의 전체가 황금색으로 빛났다. 구릿빛 피부, 예전보다 뺨은 해쓱해졌지만 그만큼 깊어진 눈동자… 나를 보고 방금까지 죽었다가 살아났다며 시 같은 말을 서슴없이 하는 문정혁에게 내가 한 대답은 그거였다. 좀비였다고? 나는 병신일지도 몰라… 4년 만에 재회해서, 나를 억세게 껴안고 귓가에 속삭이던 문정혁이, 너 좀비였다는 거니? 라는 나의 반응에 멈칫 하며 굳었다. 그가 천천히 포옹을 풀며 시선을 부딪혔다. “…뭐?” “…….” 4년 만에 들어본다. 내 말에 황당하다는 듯 눈을 꿈뻑이며, …뭐? 하는 문정혁. “왠 좀비? 신혜성. 너 버리는 일 절대 없을거라고 하는데, 좀비라니?” “아 그냥 좀 넘겨~! 니가 방금 그랬잖아.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좀비 생각나는데 어떡하라구.” “신혜성….” “응?” “우리 4년 만에 겨우 만난 거거든? 나, 좀비라는 말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어.” “그냥 좀 넘기랬지.” “진짜… 미치겠다. 어떻게 하나도 안 변했냐, 우리 신고양이는.” 그가 장난꾸러기처럼 눈을 빛내며 안면을 바짝 들이대더니, 내게 두근- 할 시간도 안 주고 재빨리 양 볼을 쭉 잡아당겼다. “야! 문정혁!! 내가! 아! 볼 잡아당기지 말랬잖아!!” “큭큭큭큭. 좀…비… 큭크큭….” 그 뒤로, 문정혁은 모래 사장에 주저앉아서 킥킥대며 1분 넘게 웃었다. 나는 볼 문지르면서 문정혁 등을 발로 찼다. 감격적인 재회고 뭐고, 눈물도 다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4년이란 공백을 단숨에 불에 태웠다. 다른 연인들도 그럴까. 아니, 그래도 무려 4년인데, 처음에는 좀 어색해줘야되는거 아니야? “문정혁. 그만 좀 웃으라고!!” “큭큭큭….” 미쳤나봐… “문정혁. 너 좀비라고 불리는게 좋냐? 언어 학대 받는데서 쾌락을 느끼나봐….” “하하하하! 언어학대!!” 돌았어… 4년 만에 근사하게 포옹하고 재회한 우리는, 좀비라는 내 대답과, 언어학대라는 문정혁의 표효로서 재회의 막을 내렸다. 그래도 기분 좋다. 이것 마저 오랜만이다. 내가 하는 별 것도 아닌 말에 문정혁이 신선해 하며 발작하듯이 웃는거. 그는 내게 희한한 행복을 안겨준다. 미지근했던 가슴에 시원하고 달콤한 바람을 던졌다. 솜사탕처럼 보롱보롱한 색채도… 눈물까지 흘려가며 자기 혼자 끅끅 웃던 문정혁이 감동에 찬 낯으로 일어나서 나를 내려본다. “진짜. 우리 신혜성이. 진짜 예뻐졌다. 여전히 귀엽고.” “문정혁.” “?” “아, 아니야.” 너도 정말 멋있어… 라는 말, 나도 모르게 속으로 삼켜버렸다. 그뒤로 문정혁은 해변가에서 '사람들 눈총 맞아가며' 연인이 할 수 있는 짓꺼리를 내게 시도했다. 내 허리를 꽉 껴안고 허공에 번쩍 들어서 빙글빙글 돌기. 어지럽다고 욕하는 내 입술에 기습 뽀뽀하기, 내 무릎 뒤와 등 뒤에 팔 두르고 번쩍- 일명 공주님 안기 해서 아무도 없는 백사장을 달려가기. 물론, 문정혁이 중간에 넘어져서 나는 다섯 바퀴 정도 굴렀지만… 문정혁은 작정 한 것처럼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에 나왔던 연인들처럼 촌스럽게 굴었다. 미치겠다.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지, 누가 봤으면 혀 깨물고 죽고 싶었을 것이다. 예전의 문정혁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인데… 아마 4년간 나와의 연애 공백에 정말 많이 굶주렸었나보다. 그리고 문정혁의 행동들, 그의 등장, 그의 존재, 그의 웃음소리… 그의 모든 것은 다시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그를 보고 두근거리게끔 심장이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펜션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문정혁에게 4년간 다진, 돌려차기를 선보였다. 문정혁은 무방비 상태였다가 내게 그윽한 시선을 던진 낯짝 그대로, 돌려차기 맞고 쇼파에 자빠졌다. “이게 뭐야.” “샤워는 나 혼자 할거야. 어딜 같이 하자는 거야?” 바닷가가 한 눈에 들어오는 1층 펜션. 모래사장 끝에 지어진 버섯지붕모양의 펜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문정혁이 짐승처럼 나를 끌어안고 같이 샤워하자고 했다. 그리고 나는 보란듯이 뒷발 돌려차기로 문정혁을 보내버렸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 벌떡 일어나서 복부를 문지른다. “이게 뭐냐고!!?” “이게 뭐냐니. 문정혁. 나 태권도 공인 3단이야.” “!!” “그러니까 샤워 할 때 쳐들어온다거나, 건드리면… 알지?” “애기야. 오빠는 무술까지 배웠거든? 아니. 이 오빠 싸우는거… 너도 각이 얼만지 알면서 그런 소릴 하냐?” “문정혁. 지금 나랑 대련하자는 거야?” “…뭐?” 재회 이후, 문정혁이 멍한 낯으로 두 번째의 '뭐?'하는거 보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욕실 문을 쾅- 닫고 들어갈때까지 문정혁이 충격에 휩싸인 낯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역시 태권도를 배워두길 잘했어… 샤워하면서 나는 혼자 울었다. 가슴이 터질 만큼 행복해서 자꾸 눈물이 흘렀다. 문정혁이 혹시 사라지지 않을까 겁이 나서 알몸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하지만, 지금의 재회, 가벼운 말장난을 두고, 나보다 문정혁이 더 믿어지지 않았나보다. 쾅! 콰쾅! 욕실 문을 발로 차는 문정혁… “신혜성!! 너 안에 있는 거 맞지? 맞지?! 문 좀 열어봐!! 어?!” 쾅! 콰쾅!! 이제는 바락바락 소리치며 몸으로 민다. 욕실 문이라봤자 얇은 나무재질인데, 그걸 몸으로 밀면 어떡하냐. 게다가 잠금 장치라봤자 손잡이에 튀어나온 부분을 꾹 누르는 것밖에 없는데… “혜성아! 씨팔!! 신고양이!!” “야! 문정혁! 나 어디 안 가!! 샤워 하잖아…….” 콰아앙--!!! 내 대답이 끝나기 전에, 문짝 부서졌다. 이럴수가. 우리 진짜 미쳤나봐… 돌았나봐… 반가워서, 반가운 만큼 재회가 믿어지지 않았나봐… “아… 있네.” “바보야….” 샤워 물줄기 맞으면서 눈물 콧물 흘리는 나를 보고, 문정혁이 멍하니 '있구나… 있군.' 하고 혼자 중얼거린다. 문정혁이 사라지지 않을까, 우리가 방금 재회한게 사실일까, 꿈은 아닐까- 언제나 꿈속에서 봤던 것처럼 없어지지 않을까- 내가 우려했듯이, 문정혁도 그랬나보다. 그가 진심으로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야… 문정혁. 문짝 엎어졌잖아. 빨리 저거 치우고, 저리 가. 빨리 가.” “…….” “문정혁. 어딜 보는 거야. 빨리 가.” “…….”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실 안. 나는 온 몸이 붉어진 채로 수건으로 앞을 가렸다. 하얗게 젖은 내 피부를 촛점 마저 풀린 눈으로 멍하니 쳐다보던 문정혁이, 천천히 다가왔다. 화들짝 놀란 나는 비누와 샴푸, 바닥에 굴러다니던 분홍색 바가지까지 던지며 소리쳤다. “야. 어딜 들어와! 안 나가? 안 나가? 너 뒷발 돌려차기 3연타 맞고 싶어?” …알몸인 상태에서 돌려차기 해야 되는거니… 엉덩이 다 보이는데… 터미네이터같은 자식. 내가 던진거 맞아봤자 느낌도 없나보다. 그의 동공은 점점 더 강하게 나를 담아낼 뿐이었다. “문정혁!! 빨리 나가! 빨리 나가!! 빨리 나가란 말양!!” “싫은데.” “죽었어!! 아! 안 놔?! 죽었어! 죽었어!” “죽이시던지.” “문정혁!!” 그가 단숨에 내 젖은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그리고 자기 가슴과 내 가슴이 맞닿아 찢어질만치 틈 하나 없이 당겨 안았다. 어지럽다. 아, 어떡해. 어떡해… 초점 풀린 문정혁의 시선, 표정. 모든게 섹시해서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그는 아직 옷을 입은 상태였다. 샤워 물줄기에 전부 젖은 상태… 비싼 수트일텐데… 와이셔츠하고 바지가 전부 젖어서 그의 몸에 달라붙었다. 구릿빛 라인과, 단단한 근육이 와이셔츠에 비친다. 시선을 돌려야지- 하는 순간, 문정혁이 작게 읊조리며 내 입술에 자기 입술을 눌러버렸다. “나 진짜 돌려차기 한다!!” “씨발. 돌려차기 하던지 말던지….” “야! 무….” 달콤한 향기… 우리 둘 다 젖은 상태인데, 어디선가 봄냄새 같은게 밀려왔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내 허리를 감았던 문정혁의 양 손이 어느새 내 양 볼을 소중하게 감싸고 있었다. 얼마나 소중히 감싸주는지, 오싹할 정도의 전율이 밀려와서 솜털이 곤두섰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문정혁이 내 몸을 더듬는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당겨서, 자기 옷을 벗기게끔 유도한다. 이새끼… 왕자병 여전하구나. 나는 전라의 상태였다. 앞을 가리던 손수건은 진즉에 바닥에 떨어뜨린 상태였다. 덜덜 떨리는 팔을 겨우 움직여서 문정혁의 옷을 전부 벗겼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자꾸 내 몸을 괴롭혔다. “아… 문정혁….” “애기야. 니것도 섰고, 내것도 섰다.” …그런거 안 알려줘도 되거든… 문정혁은 내가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욕조 끝부분에 수건을 두 겹이나 깔아줬다. 내가 앉자마자, 그는 내가 부끄러워 할 틈도 주지 않고 당당하게 내 무릎을 꽉 쥐고 넓게 벌렸다. 수치심이 밀려올 틈 조차 없었다. 어느새 내 입은 히스테리칼한 쾌락을 토해냈으니까. 그가 내 앞에서 무릎꿇고 입 벌리고 혀를 내미는 걸 보자마자, 정신이 나가버렸다. 잠시 후, 내 몸이 격하게 꿈틀대더니 심장이 터질 때 쯤 정액이 나왔다. 문정혁이 그것을 삼키는걸 보면서도 기진맥진해서 돌려차기는 커녕 욕 한 번 못 했다. “하아, 하아, 들어간다….” “으, 으응.” 뿌연 물안개 사이로, 우리 둘은 젖은 호흡을 서로에게 적시며, 4년 만에 하나가 된 신음을 내뱉었다. “애기야. 나, 보고싶었어? 하, 하아.” 야하게 허리를 돌리던 문정혁이 자꾸 묻는다. 나는 괜히 오기가 생겨서 입을 꾹 다물었다. “대답 안 해?” “으, 으으….” “안 해? 나 보고싶었어? 하아.” 문정혁은 보고싶었던 만큼 짓궂음으로 리뉴얼해서 돌아왔다. 인정 사정 없이 허리를 움직이며, 내게 반쯤 풀린 시선으로 묻고 또 묻는다. 애기야. 나 보고싶었어? 애기야. 오빠 사랑해? 아아. 나는 끝까지 고집부리다가, 나중에는 폭팔하듯 울면서 그가 원하는 대답을 전부 토해냈다. 격렬한 통증처럼 닥친 전율이 발끝부터 가슴까지 짜라라 밀린 것도 모자라 머리를 폭팔시켰으니까. 관계가 끝난 다음에도 우리는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타일 바닥에 앉아서 끌어안았다. 동시에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진짜 만났구나. 우리가… 근사하게 저녁식사 하고 싶다는 문정혁 때문에 매니저 형에게 부탁해서 스테이크 요리를 배달시켰다. 이시영과 스태프와 배우들이 현재 3차로 룸살롱 갔는데, 거기에 스테이크가 있다는 모양이다. 내가 통화하는 동안, 문정혁은 잠깐 밖에 나가더니 커다란 짐가방을 가져왔다. 그리고 제일 근사한 짙은 회색 수트를 꺼내 입었다. 수트 입기 전까지 문정혁은 알몸이었는데… …문정혁… 알몸으로 밖에 나갔다 온 모양이다. “혜성아.” “?” “나 졸라 간지나지 않냐.” “…….” 4년 지났다고 지랄병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어… 하여간 '처음'으로 뭘 하는 자리에서 문정혁은 정통 턱시도 아니면 수트다. 나도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 입고 식탁에 앉았다. “고기 맛이 이상해.” “닥쳐. 니 입이 너무 고급이었던 거야, 문정혁.” 스테이크 한 입 먹자마자 이맛살을 찌푸려도 멋있는 문정혁… 내 눈이 미쳤는가보다. 어쨌든,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대화하니까 지난 4년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거짓말같다. 우리, 어제 만나고 오늘 만난 사이같다. 문정혁이 갑자기 야릇하게 동공을 반짝인다. 왜저러지? “고기 맛도 이상한데, 한 판 더 할까?” 포크로 주둥아리 찌를 뻔 했다. “문정혁. 너 고기로 맞아봤냐?” “하하하하하.” 내가 식탁을 탁탁 치며 짜증내는걸 보고, 문정혁이 큰 소리로 웃는다.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니까 정말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다. 가슴 속까지 상쾌해지는 박하향. 문정혁의 웃음소리는 박하향기같다. 하지만, 대화가 깊어질수록 우리 둘은 지난 4년의 공백을 실감했다. 처음에는 재회 한 것만으로도 신이 나서 예전처럼 아무 말이나 툭툭 내뱉었지만, 문정혁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나- 부터 시작해서 터진 이야기들은 차츰 차츰 우리를 진지하게 바꾸었다. 레드 와인을 한 병 다 비울때쯤이니까, 어쩌면 술기운 덕분에 말문이 열렸는지도 모르겠다. “여기 찾기 쉽던데? …는 거짓말이고, 이 영화 극비라며. 시사회 전까지 어떤 정보도 안 새게 하려고 여기저기 잘 막아놨더라.” “그랬어?” “엄~청 힘들게 찾았다.” 그는 말 하는 중간중간, 내가 스타가 된 게 믿기지 않는다고, 스타가 되면 어떡하냐고, 애새끼들이 다 날 보고 환장하고 지랄한다면서 짜증냈다. “문정혁. 그만 좀 투덜대고… 그래서. 힘들게 찾아왔던거야?” “응. 신혜성 찾기 게임하는 기분이었어. 그래도 이틀만에 위치 알아내서 다행이었지.” “이틀? 이틀 전까지는 뭐했는데?” 이 질문을 내뱉은 나는, 문정혁의 씁쓸해지는 표정을 보고 아차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왜이렇게 눈치가 없을까. “한국 오자마자 혜성이 너 찾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더라.” “…….” 문정혁 아버지… 그러니까 문도천씨의 사망 소식… …문정혁은 귀국한 뒤, 자기 앞에 벌어진 일을 수습하느라, 한달이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나를 찾았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에게 따질 자격이 당연히 없다. 나도 내 생활에 바빠서 문정혁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그동안 이민우에게 신경쓰다가, 전진하고 재회하는 바람에, 문도천과 문정혁을 연관시켜서 고민한 적이 없었다. 나는 일반 사람들의 시각에서 문도천을 봤는지도 모른다. 그냥 대단한 기업가의 죽음으로. 게다가 문도천의 사망보다, 이민우가 저격수라는 사실이 크게 와닿는 상황이라서 차마 문정혁까지 고려하지 못했다. “혜성아. 나….” “응.” 그가 신경질적으로 고기를 썰어댄다. 표정처럼 말투도 차츰 사나워졌다. “나 최근 1년은 캐나다에서 형하고 지냈었어. 그 전까지는 미국에서 경영학 배웠고.” “응….” “그런데 있잖냐. …혜성아….” “응… 말 해….” 만나자마자 지나치게 밝았던 문정혁이 지금에서야 수상하게 여겨졌다. 그는, 가족상을 치른 장본인이다. 나는 왜이렇게 병신같을까. 해변에서 문정혁을 보고, 문도천과 연결지어서 생각할 틈이 없었어… “혜성아.” “응….” 자꾸 내 이름만 부르던 문정혁이, 새 와인 마개를 열고 병째 벌컥벌컥 마셨다. “나 있지. 우리 형을 항상 이해하며 살아왔었고, 계속 그럴 거라 여겼어.” “응….” “형이 아버지 욕하는거 형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이해했었어.” “…….” “그런데 말야… 그게 아니더라고.” “…….” “내가 가장 이해 할 수 없던 인간이 형이더라고. …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내 피는 아버지와 닮았나봐.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나는 형이 세상에서 제일 한심해 보이는 거야.” “문정혁….” 어떡하지… 어떡하지… 문정혁이 신경질적으로 고기를 썬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양의 눈물을 흘린다. “나란 인간이 하루아침에 바뀐 것도 아닌데 이상하지, 그치. 나는 아버지를 평생 가도 이해 할 수 없을거라 여겼는데, 나는 지금… 아버지를 이해 하고 있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눈물은 커녕 그럴 줄 알았다는 소리나 해 대는 형을, 순간 죽이고 싶었다…?” “정혁아… 그만 말 해….” “내 눈과 내 심장과 내 모든게 아버지가 된 것처럼, 형이 한심해보이는거야. 아버지가 힘겹게 이끌어오신 세계를, 덤벼보지도 않고, 맏아들이라는 굴레가 힘겹다는 둥 온갖 핑계 다 갖다 붙인 끝에 도망친 형이…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욕하는 형이… 진~짜 한심해 보이는 거야.” “…….” “그리고… 형이 미웠어. 내게도 소박하게 살고 싶은 꿈 이라는게 있는데, 형이란 새끼는 내가 기댈 구석이 없으니까. 도리어 형이 내게 묻더라. 자기 생활비 지금처럼 쭉 들어오냐면서. 아 씨팔. 나한테 묻는거야.” “그만… 그만 해. 정혁아.” 벌떡- 일어나서 그의 옆에 다가섰다. 그가 무의식중에 스테이크를 썰어대는 팔을 멈췄다. 한기가 스민 문정혁의 음성이 서글프게 파도쳤다. “나 한국에 와서 제일 처음 들은 소식이 뭔 줄 알아? 기자들이 뭐라는 줄 알아? 내 아버지란 인간이 죽었는데, 나는 아들인데, 거기다 대고 뭐랬게? 하! 주주총회 만장일치로 이철호 사장이 그룹 총수가 될 분위기를 예감했냐는 거야. 우리 아버지 유언장대로 이철호 사장이 회장이 될거라나? 나한테 그거 알고 있었냐고 여기저기서 묻고….” “제발… 제발 정혁아. 그만.” 나는 그의 눈동자에 친 격랑을 목격했다. 그의 인생에 미친 회오리를 목격했다. 그가 아픈 만큼 나도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그의 머리를 무조건 내 가슴에 잡아당겼다. 문정혁은 순순히 내 가슴에 뺨을 묻었다. “흐, 흐어억, 으, 으훅.” “…….” 장례식장에서부터 오늘까지, 한 번도 제대로 울지 못했다는 문정혁. 그는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참았던 분노와 서글픔, 고통의 군더더기마저 토해냈다. 문정혁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어느새 내 눈도 촉촉히 젖어들었다. 그 뒤로 한시간 동안 문정혁은 정신없이 울었다. 나도 울었다. 중간중간 문정혁은, 현재 자기 위치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회사 얘기를 해 주었다. 문도천 회장이 사고로 죽은 다음, 말도 안되는 문도천의 유언대로, 또, 주주총회 만장일치로 그룹 총수가 된 이철호. 문정혁은 이철호의 모든 것을 의심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문정혁이 아닌 누구라도 의심할 상황이었다. “이철호… 개새끼. 내가 가만 놔둘 것 같냐고….” “…….” “반드시 매장시켜버릴거야.” “…….” “그리고 이철호 숨통도 내 손으로 끊어 버릴거야. 우리 아버지 죽인 새끼하고 같이, 묻어야지.” “…….” 으르렁거리는 문정혁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가슴이 철렁 떨어졌다. 문정혁이 '우리 아버지 죽인 새끼'라고 언급할 때,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은 이민우였다. “나, 예전에 이철호가 맡았던 자리로 임명받았다? 한명건설. 그것도 부사장. 우리 집안 사람들 다 난리 났잖냐… 살던 집도 옮겼어. 이철호가 계획적으로 우리 아버지 주식부터 재산까지 다 손을 써 놔서. 뭐… 그렇다고 궁핍한 건 아닌데, 집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거의 다 내보냈지.” “…….” 차츰 눈물이 멎은 문정혁의 동공이 희망과 열정으로 번뜩였다. 그는 내게서 희망을 찾은 눈치였다. 아니, 사실이 그랬다. “신혜성. 너를 보니까, 나. 앞으로 잘 해낼 수 있을거란 믿음이 생겼어.” “…….” 문정혁이 자기 입으로 고백했으니까. 나는 여전히 이민우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꺼낼 수 없다… 문정혁에게도, 고모와 고모부에게도… 어느덧 눈물이 멎은 우리 둘은 무거웠던 분위기를 훌훌 털어내며 최대한 가벼운 말투를 구사했다. 문정혁이 자기 허벅지에 나를 앉히더니 내 볼에 쪼~옥. 길게 뽀뽀했다. 확 그냥! 볼에 자국 남을까봐 째려봤더니, 귀엽다고 피식 웃는다. “당분간 돈지랄 안 할 계획이야.” “헤에. 문정혁이 돈지랄 안 한다니까 웃긴다.” “신고양이.” “우리두리. 왜?” “어쭈?” “아, 넌 트로, 로트, 메들리였지?” 문정혁에게 괜히 장난쳤다가, 말 끝나는 즉시 후회했다. 문정혁이 나를 꼭 껴안고 있는 상태라는 거 잠깐 잊었나봐… 그가 내 몸을 한 팔로 도망가지 못하게 안은 상태에서, 다른 팔로 미친듯이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결국 내 입에서 항복 선언이 나와서야, 그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이겼다고 좋아한다. 재수없다. 그래도… 분위기가 좋아져서 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문정혁의 등에 편하게 기댔다. 내 어깨에 자기 턱을 올린 문정혁이 꿍얼거린다. “돈지랄 안 하니까 뭘 해야 할 지 모르겠네.” 흠… 그러게. 문정혁 하면 돈지랄이었는데… 내 배를 감싼 문정혁의 팔을 억지로 풀어내며, 활기차게 물었다. “문정혁. 내가 돈지랄 해줄까?” “…오빠 갑빠가 있지, 그런 말 하지 마.” “…….” 밤 열두시… 5월의 푸른 바닷가에서 재회 한 우리 둘. 지금도 꿈 같은데, 대체 무슨 돈지랄을 하고 싶다는 걸까. 나는 이대로도 좋은데… 문정혁은 내게 뭘 해주지 못해서 안달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별안간 벌떡 일어난다. 덕분에 나도 일으켜졌다. “달리기 하자.” “뭐?” 문정혁이 미쳤나봐… 나는 그가 내뱉은 말이 믿어지지 않아서 한동안 되물었다. 뭐라고? “달리기 하자고.” “야… 문정혁.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랑 나랑 지금 수트 차림이야.” “벗고 달릴까?” “!!!” 절대 벗고 달리면 안된다고 꽥꽥대는 나를 이끌고 문정혁은 기어이 밖으로 나갔다. 밤하늘이 덮인 모래 사장… 여전히 사람 한 명 없었다. 마치 무인도같다. 어쨌든, 맨발에 수트 차림으로 달리기 하자는 문정혁 때문에 돌겠다. 가끔 4차원인 문정혁… 역시 변하지 않았어. “자, 준비….” “문정혁. 너 실수하는거 알지? 나, 달리기 좀 잘 해. 학교다닐때 백미터 달리기 했다 하면 1드….” “출발!!” “!!” 이게! 아직 말 다 안 끝났는데!! 문정혁이 자기 맘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힘껏 발돋움 했지만, 문정혁이 훨씬 앞서가고 있었다. 절대 질 수는 없지!! 악착같이 달렸다. 이래봐도 왕년에 내가 달리기로 날렸어…! 숨이 턱에 찰 때 쯤, 문정혁을 따라잡았다. 따라잡다 못 해 아슬아슬하게 추월하기 직전, 갑자기 문정혁이 우뚝 서 버렸다. 나는 헥헥대며 왜 그러냐고 표정으로 물었다. 그가 당연하다는 투로 가슴을 펴고 말한다. “여기까지가 백미터야. 내가 이겼어.” “!!” 돈지랄 안 한다고 지랄증이 사라지는게 아니었어… 퍼석대는 파돗소리, 하얗게 어그러지는 물거품. 수평선 끝에 아롱이는 찬란한 별빛… 온화한 초승달 세례에 금가루 같은 빛이 아지랑이처럼 여기 저기에 피었다. 나는 문정혁에게 달리기 다시 하자고 짜증내다가 아랫입술을 뿔룩 내밀고 씩씩대며 걸었다. 그가 내 뒤에서 하하하! 큰 소리로 웃다가, 별안간 어깨를 꽉 쥐고 내 몸을 돌렸다. “혜성아.” “왜.” 우리가 아까 재회했던 장소에서, 잔잔한 파돗소리를 들으며… 문정혁이 잘생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댄다. “혜성아.” “그러니까 왜.” “나 앞으로 굉장히 바빠질거야. 혜성이 너처럼….” “으응….” 이유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가 한층 진지해진 낯으로, 단호하게 한글자 한글자 정확하게 꺼낸다. “사랑해… 울보.” “뭐야….” 두근… 저렇게 갑자기 사랑해 공격하면 어떡해. 가슴에 화약이 터졌다. “내가 사랑한다는거,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돼. 알았지?” “…….” 이와 비슷한 말을, 어쩌면 똑같은 말을, 과거에 들어봤었다. 문정혁이 아닌 전진에게서… 사람 마음이란거 참 우습다. 같은 얘기인데도 불구하고, 내 심장이 이번에는 문정혁을 향해서 뛰고 있으니까… 상처에 상처가 아닌, 상처에 위로로서 다가왔던 문정혁… 나는 팔을 뻗어서 그의 목을 힘껏 둘렀다. 그가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껴안아준다. “혜성아. 너랑, 나랑, 우리 둘이 행복하게 사는 날… 꼭 올거야. 알았지?” “흐, 흐윽. 아알았어….” “사랑한다고 자주 얘기 못해줘서 미안해….” “지그음, 끅, 했잖아. 흐윽.” “아니… 예전에….” “흐윽, 흐윽, 괘, 괜찮….” “연락 한 번도 못해서 미안해… 너랑 연락 닿는게…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 것같았어… 거기서 나 감시하는 새끼들이 있었거든.” “…흐으윽. 문정혁….” “그리고… 고마워… 나… 기다려줘서….” 나는 어쩌면 문정혁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힘겨운 4년… 연락두절에 감감 무소식인 문정혁을, 포기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얘기한대로, 그를 기다렸었다는 부분에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나는 그저 아프기 싫어서, 더는 울기 싫어서 전진과 문정혁을 잊으려고 발버둥 쳤었다. 그게 나의 4년 기억이었다. 그러나… 문정혁의 주문같은 간절한 어투는, 내 안의 기억을 허물어뜨렸다. 나는 그의 말대로 4년 내내 문정혁을 기다리며 살았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래서 대답할 수 있었다. “…나… 정말… 문정혁… 너… 많이 많이 그리웠어….” “!!” 적어도 사실은 대답할 수 있었다. 그리웠다는 건, 사실이니까… 문정혁이 나의 표현에 감동받았는지 잠깐 몸을 떼서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다시 껴안았다. “아….” “?” “졸라… 씨발… 신혜성 니가 날… 아… 미치게 행복하다.” “뭐야… 하하하.” 영원히 나를 안고 싶다는 듯, 오래오래 껴안는 문정혁의 품에서 나는 웃었다. 쏴아-추르르르. 짙은 밤… 모래사장의 정겨운 음률 속에… 아까 문정혁이 한 얘기 때문에 전진이 오버랩 될 때마다, 나는 일부러 더 세게 문정혁을 끌어안았다. 5월 마지막주, 전체 촬영 중 1/3이 끝난 오후 두시. “거기 와이어 줄 날아가잖아! 빨리 당겨!” “소품팀이 후발대죠? 남는건 3번 차에 실으세요!” “빨리 빨리 움직여! 땅주인이 또 와서 지랄하겠다! 야 개새끼야! 마이크를 방치하면 어떡하냐!” 읍상동 세트장으로 출발하기 앞서, 카메라와 촬용 도구들 정리하는 함성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시영이 수많은 NG를 낸 덕분에 바닷가에서 촬영하는 날짜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긴 전선들과 조명, 카메라, 온갖 소품들, 모래사장에 굴러다니는 패트병까지… 100여명 스탭들과 배우들까지 짐 챙기느라 바쁘다. 나도 마찬가지다. 지난번에 문정혁이 부셔버린 펜션의 문짝 수리하고, 온 방에 널려진 내 옷을 코디 누나와 챙기느라 진땀을 뺐다. “혜성아. 너 땀 흘리면 옷 갈아입고 분 다시 찍어야 되는거 알지? 에어컨 앞에 앉아있어.” “괜찮은데… 옷만 가방에 넣을게, 누나.” “야, 얼른 가. 너 읍상동 가자마자 촬영해야되잖아. 어휴, 차라리 세트장 가서 시작할걸. 오늘까지 해변 씬 아니었어?” “몰라. 김감독 맘이야.” 코디 누나는 결국 나를 질질 끌어서 에어컨 앞에 앉혀줬다. 내일부터 6월 시작이라 그런지, 혹은 오늘만 이런 건지 몰라도 햇살이 굉장히 뜨겁다. 아니, 내 옷 때문인가? 약간 두꺼운 면 소재의 긴 티셔츠와 바지. 아가사 이미지에 맞게 하얀색 아니면 아이보리색이다. 내 피부는 하얀 편인데도 불구하고 분장을 창백하게 했다. 피부가 조금이라도 햇볕에 그을린다- 싶으면, 코디들이 마사지 팩에 썬크림까지 바르느라 그동안 난리도 아니었다. 어쨌든, 드디어 읍상동으로 옮기는구나! 바닷가 앞에서 두 달 가까이 지내서 그런지 빨리 새로운 환경에서 촬영하고 싶다. 그때, 김감독님이 내 펜션까지 찾아왔다. 소파에 늘어졌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안녕하세요- 의례적으로 고개 숙이는 나를 새삼스레 위 아래로 응시하는 김감독… 그가 갑자기 오케이. 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그리고, 짐을 거의 다 싼 코디 누나에게 손짓했다. 코디 누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후다닥 감독님 앞에 섰다. 김감독이 내 머리칼을 가리키며 진지하게 입을 뗐다. “혜성이 말이야. 머리를 염색하는게 좋겠어.” “머리카락을요?” “응. 내가 곰곰 생각해보고, 방금도 몇 컷 돌려봤다가, 특수팀 시켜서 서울에서 파일 받은 게 있었거든. 야! 가져와 봐!” “예! 여기요!” 김감독을 뒤따라온 조감독이 에이포 용지를 내밀었다. 에이포 용지에는 내 사진이 있었다. 아가사로 분장해서 바닷가에서 이시영과 대화하는 장면이 크로즈업 캡쳐된 것. 게다가, 까만색이었던 내 머리카락이 노란색보다 반짝이는 황금색으로 반짝였다. 우와… 이미지가 확 달라지네? 사진을 보고 놀라는 내 표정이 맘에 들었는지 김감독이 흡족한 미소를 띠웠다. “어때. 끝내주지? 왜 이걸 생각 못했나 몰라. 이게 더 신비로울 거야. 단, 노란색이라고 해서 절대로 촌스럽고 흔하면 안되고… 이 사진처럼 말이야. 황금처럼 보이게.” “하지만 읍상동 세트장 촬영분이라봤자, 영화 내용상 바닷가와 겹치는게 많은데… 괜찮나요? 감독님?” “아, 그래서 말인데….” “?” “일단 땅 주인부터 만나야겠다. 제길, 왜이렇게 날씨가 더워? 여름이 빨리 온다더니, 이젠 봄이 없네, 봄이 없어.” “감독님…?” “아, 혜성아. 넌 빨리 가서 머리 염색해라. 좋은 색깔 찾아서.” “아니, 감독님. 읍상동 씬하고 겹치는건 어떻게….” “임마. 당연히 재촬영해야지.” “네에?!!” 툭. 코디 누나가 가방을 놓치며 하얗게 질렸다. 나도 놀랐다. 재촬영이라니? 두 달이나 바닷가에서 고생했는데? “빨리 움직여! 자, 자, 최소 두시간 안에 준비 끝내자고!” 맙소사… 김감독은 흥분해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대어를 낚았다는 듯, 확신에 찬 눈을 빛냈다. 아마, 연기 실력이 개발괴발인 이시영 때문에 영화 망하겠구나- 절망하다가, 한가닥 빛을 찾아낸 모양이다. 그게 연기가 아닌 내 머리카락이란다. “신혜성. 너 연기력 충분하다 못 해 넘쳐. 감정 연기부터 동작 표현, 발성까지. 무명이 긴 녀석들의 주된 공통점인데, 넌 더 해. 그러니까, 아가사 이미지 제대로 성공하면, 아마… 원석에서 다듬어진 다이아몬드로. 그러니까 마모 된 다이아몬드가 될 거야. 최성수 사장이 진짜 대어를 낚인 낚았어. 하하.” 빨리 염색해야겠다. 그래봤자 머리카락 염색 뿐인데, 그게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김감독이 저렇게 좋아할까? 스탭들은 감독님의 뜻을 존중했다. 자신들도 이 영화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입장이라서일까. 아니면, 영화 촬영하다 보면 비일비재 하는 재촬영에 익숙해서일까. 하긴. 몇 년 전에 내가 엑스트라로 일했던 어떤 영화는 반 이상 찍어놓은 상태에서 재촬영만 세 번 했었어… 그러나, 무명은 커녕 초짜 신인인 이시영은, 이때다 싶었는지 내게 대놓고 시비를 걸었다. “이게 뭐예요? 신혜성씨 때문에 기껏 열심히 찍은거 재촬영한대잖아?” “그러게요.” “그러게요? 일일이 죄송하다고 말하지는 못 할 망정, 지금 나한테 시비거는 거예요?” “아닌데….” 아 짜증나. 시비는 지가 걸어놓고, 나한테 시비건다고 지랄이다. 염색하러 가려고 코디 누나랑 매니저 형이 먼저 탑승한 차 쪽으로 걸어가다가 이시영에게 돌려차기 할 뻔 했다. 다들 이시영 눈치 보느라 입으로 내 편은 못 들어줬지만, 스탭들 표정은 이시영을 한심해 하고 있었다. 나처럼. “신혜성씨. 제 얘기 안 들려요? 귀 먹었어요? 두 달 이나 찍은 분량, 어쩔거예요?” 이시영. 니년이 제대로 찍었으면 아마 반 이상 촬영 끝났을거거든? 대답 할 가치조차 느껴지지 않아서 아, 네. 네. 하면서 빨리 걸었다. “야!! 너 왜이렇게 건방져?!!” 이시영이 폭팔했다. 이시영 매니저가 홍당무가 된 채로 달려와서 씩씩대는 이시영을 어르기 시작했다. “시영아. 이리 와 봐. 응? 너 왜그러냐. 진짜. 이거 감독님이 정한 거야. 여기 생리 모르냐?” “나 생리 날짜 지났거든요? 이거 놔요! 쟤 신혜성 건방지잖아! 나, 쟤 알아! 예전에 나 드라마 촬영할때 엑스트라였어!” “시영아. 진짜 너 왜그러냐. 니 이미지대로 순수하고 곱게 좀 말 해라. 야, 감독님이랑 스탭들도 그러려니 하는데….” “아, 놔봐! 오빠! 오빠도 봤지? 신혜성이 나한테 시비거는거!!” 나한테 아는척 하려고 괜히 이쪽에 나타난 윤계상이, 이시영의 찢어지는 목소리톤에 미간을 찌푸렸다. “보긴 뭘 보냐? 이시영. 이 바닥 원래 다 그런거야. 너야말로 신인이라 모르는 거지. 영화 대박나고 싶지 않아?” “계상 오빠까지 이러는거야? 신혜성이 나한테 시비 거는거 봤잖아! 야! 신혜성! 너 나한테 사과 안 해?” 진짜 속터지는 상황… 아마 이시영 성격이라면, 다 때려치고 서울로 올라갈 확률이 좀 된다. 예전의 나 였다면 억울한 맘에 눈물이 핑 돌았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4년 전까지 온갖 감정을 다 경험해 봐서 그런지, 무작정 울컥해 대는 류를 보면… 측은하다는 생각부터 든다. “이시영씨.” 결국 내가 나섰다. 스탭들과 감독님까지 나서서 이시영을 말리는 중이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진정하고 잘 해 봅시다.” 씨익, 씨익, 거친 호흡을 내뱉는 이시영. 그녀는 자기 혼자 이겼다는 표정으로, 휙- 뒤돌아서 갔다. 미친년… 방송에서 승부욕 장난 아니라는 둥 그런 이미지로 밀고 나가던게 진짜 성격이었어… “혜성아. 니가 참아라. 쟤가 좀 모자라잖냐.” “하하하. 네. 저 괜찮아요. 빨리 염색하고 올게요.” 원래 너무 어이 없으면 화가 나다가도 사라지는 법이거든. 조명 감독님과, 하물며 이시영 담당 코디와 여러 스탭들까지 내게 독려를 아끼지 않았다. 다들 이시영이 쐈던 회식 자리에 참석했던 걸 죽도록 후회하는 낯이었다. 코디 누나가 고른 시내의 헤어샵에서 염색하고 바닷가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여섯시였다. 얼마나 빨리 움직였는지 그러고보니 식사 한 번 제대로 못 했다. 초조하게 나를 기다리던 스탭들과 감독들이, 두 달 전 첫 촬영했던 분위기를 연출하다 말고 제자리에 멈췄다. 다들 나를 보고 놀란다. 왜그러지? 합성 사진보다 못해서 그러나? 코디 누나랑 매니저형 말로는 굉장하다고 했는데… 백여명의 사람들이 나를 가운데 두고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다홍색으로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 파도 소리만 잔잔히 울리는 백사장… 나는 멀뚱히 차렷 자세로 섰다. 아이보리색 면바지와, 흰색 셔츠. 가느다랗고 하얀 끈팔찌. 푸른색 쪼리 차림인 나.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황금색으로 찰랑거리는 머리카락과, 감독님의 주문대로 약간 불그스럼해진 입술인데… 그동안 내가 찍었던 아가사는 굉장히 창백한 이미지라서, 입술도 피부처럼 허여멀건했었다. 그러니까 네시간 사이에 바뀐 것이라곤 머리카락과 입술 뿐이다. 한동안 멍하니 나를 쳐다보던 스탭들이 하나 둘 감동에 찬 투로 입을 열었다. “진짜… 아가사예요. 맙소사.” “완전… 너무너무 아름다워요. 아가사… 아니, 신혜성씨.” “아가사. 아가사다. 맙소사….” “천사가 걸어오는줄 알았네… 이럴 수가.” 다들 내 근처에 다가오지도 못했다. 멀찍이 떨어져서 그림 감상하듯 황홀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이다. 왜저러지? 그냥 머리카락 염색한 것 뿐인데… “혜성아. 너… 진짜… 엄~청 예쁘다. 아니, 신비롭다.” 계상이 형은 자기 가슴을 부여쥐기까지 했다. 감독님도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툭, 떨어뜨렸다. “저게 뭐야! 여자 주인공보다 예쁘면 안되는거 아니에요?” 물론, 이시영은 마지막까지 꽥꽥거렸지만…… 재촬영은 순주롭게 이어졌다. 6월부터 7월까지. 바닷가 촬영과 읍상동 세트장 촬영을 약간 마친 나는, 8월 첫째 주 월요일. 싱글 앨범 활동 때문에 결국 서울로 올라왔다. 최성수 사장과 김경우 감독이 진즉 말을 맞춘 부분이라서, 2주일을 뺄 수 있었다. 서울에 오면 그동안 매일 매일 전화통화만 했던 문정혁과 당장 만날 수 있을거라 기대했던 나는 적잖이 실망했다. 뙤약볕에 숨통 막히는 서울 하늘 아래, 문정혁은 나보다 더 바쁘게 지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뭐 했다고?] “문정혁. 나 지금 또 설명하면 세 번째야. 음악중심에 나갈 거 미리 녹화 하고 왔다구….” [미안, 미안. 회의 끝나자마자 보고서 검토하느라 정신없어서 그래.] “…문정혁. 너 그거 알아? 내가 바쁠 때 니가 삐치면, 나는 늘 너한테 잘 맞춰주거든? 근데 너는, 맨날 나한테 이해하래.” [뭐라고? 아, 이해? 나도 신고양이 이해 하니까 미안하다고 하지.] “…….” 차라리 강원도에 있을 때가 나았어… 같은 서울 하늘 아래 바빠서 눈 코 뜰 새 없는 문정혁 목소리 들으니까 힘이 쭉 빠졌다. “알았어. 일 해.” [다음 스케줄은 없나봐?] “오늘은 음중이 끝이었고, 내일은 인터뷰 밀린거랑…….” […….] “여보세요?” […….] “문정혁! 문정혁!” […해서, 검토 다시 해봐야겠으니까, 최소장 있는 곳에 연결해서 가능하면 빨리 만나자고 해 보세요. 네. …여보세요? 혜성아?] “끊는다.” [어, 그래. 오빠가 이따가 전화 할게.] “…….” 내가 먼저 끊어버려야지- 했는데, 벌써 문정혁이 끊어버렸다. 울컥- 짜증이 밀려왔다. 나랑 통화하는 중간에 다른 사람과도 전화 통화를 하다니… 바쁜 거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기분이 별로다. 4년 전의 문정혁은 무조건 내게 올인이었는데… 그땐 학창시절이라서 가능했던 일이, 지금은 사치가 되어버렸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 하던 문정혁, 언제나 내 스케줄 알려고 덤비던 문정혁, 내가 뭐 먹고 싶다고 하면 득달같이 달려왔던 문정혁… 왜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가슴은 그게 아닐 때가 많을까. 왜 머리로 이해할수록, 가슴은 차가워질까. 오히려 그의 비명같은 사랑을 이해 하지 못 하던 시절, 내 가슴은 뜨거웠었다. 지만 바뻐? 나도 바뻐. 하면서 심통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강원도에서 올라오자마자 당연히 반가워 해 줄 거라 여겼던 문정혁의 변화가 조금 섭섭해졌다. 목동 집은 변함 없었다. 약간 먼지가 쌓인 편안한 내 집. 고모가 중간 중간 찾아와서 냉장고 청소를 해 주셨는지, 음식들이 싱싱한 상태였다. 양종호와 공유 형사에게 서울 올라왔다고 문자 보냈다. 다들 빨리 만나자고 반가워했다. 문정혁 외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문정혁이 해 주길 바랬던 반응을 던졌다. 어서와, 혜성아. 보고싶었어, 잘 지냈어? …내가 문정혁에게 바란 것은 평범한 안부 인사였는데, 그는 늘 그렇듯 내가 어디에 있는지만 간신히 확인했다. 고모하고는 직접 통화하는게 좋을 것같아서 여러 번 전화해봤지만, 바쁘신지 받지 않았다. 고모부도 마찬가지였다. 민경이 누나한테 전화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관뒀다. 숨막히는 열기가 가라앉는 밤 열한시. 운동할 겸 종일 청소해서 그런지 온 몸이 끈적끈적해졌다. 차가운 물로 샤워하고 나와서 자연스럽게 리모컨 쥐고 침대에 누웠다. 그때, 초인벨 소리가 울리더니, 공유 형사가 들이닥쳤다. 현관문까지 걸어가는데, 공유 형사는 빨리 문 열라고 열 번은 소리쳤다. 왜 저러냐. 설마… 오늘 새벽에 서울 올라오자마자 음악 방송 녹화하고, 지금에서야 쉬려는데, 술파티 하자는 건 아니겠지… “오늘은 술파티 곤란해. 왜냐면….” 문 열자마자 나는 일부러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공유가 내 말허리를 자른다. “우와… 꼬맹이. 너 장난 아니다. 나 방금 심장이 두근두근거렸어.” “?” “머리카락… 염색했냐?” “아…….” 황금색 머리카락. 강원도에서 두 달 내내 촬영하다 보니 익숙해진 머리카락이, 공유 형사는 신기했나보다. 하긴. 스탭들도 처음 봤을때 저 표정이었지…. 오늘 음악중심 녹화 할 때도, 그래서, 나는 까만색 가발 쓰고 노래 불렀다. 영화 개봉하기 전까지는 절대 노출하면 안된다고 김경우 감독이 난리치는 바람에… “으욱. 공형사! 빨리 가서 발 씻고 와!” “어, 그, 그럴까?” “?” 공유 형사가 처음으로, 우리집에 오자마자 발 씼었다. 왠일이지? 라고 갸웃갸웃대던 나는, 그가 발 씻는 내내 나를 힐끔거리는 꼬라지를 봐서야 이해했다. 내 머리카락 변화 때문이구나… 영화 촬영 할 때도 사람들이 나를 무슨 여자, 혹은 중성 인간 취급했었는데… 발을 다 씻고 나서도 얼떨떨한 낯을 어쩌지 못 하는 공유가 끊임없이 나를 쳐다본다. “그만 쳐다봐. 참, 오늘은 술파티 못 해. 라면 끓여줄까?” “…….” 공유 형사의 코앞에서 설명하던 나는, 자꾸 끈적한 시선을 빛내는 공유 때문에 슬슬 뒷걸음질쳤다. “공유 형사!! 라면 먹을거냐고!!” “어? 어. 아니.” “그럼 왜 왔어?” “아, 그게… …맞다!!! 빨리 와 봐!!” “왜, 왜이래?” 나를 찾아온 이유가 이제야 생각났는지, 공유의 표정이 납처럼 차가워졌다. 그가 무조건 내 팔을 이끌고 침대 방에 데려갔다. 아니, 이놈이 설마… 뒷발 돌려차기 날릴 준비 하는 나와는 달리, 공유는 즉각 리모컨부터 쥐었다. “왜? 공씨. 집에 티비 고장났어?” “가만 있어봐… 아! 오늘 텔레비전 한 번도 안 틀었냐?” “응. 녹화 끝나고 집에 와서 쭉~ 음악 들으면서 청소하고….” “아, 나온다. 저것 봐.” 침대에 나란히 앉아서 텔레비전을 켠 공유 형사가, 대뜸 팔을 뻗었다. 어서 화면을 보라는 것이다. 공유 형사의 눈동자가 불꽃에 맞은 양 이글대고 있었다. “계속 뉴스 속보로 나오다가, 지금은 KBS 뉴스에만 보도되고 있네? 케이블 뉴스 채널 틀을까 했지만… 이게 확실하지.” “무슨 소리야? 공씨. 뉴스에 공씨 얼굴 나왔어?” “아니. 그게 아니라….” 공유 형사의 뜻모를 행동에 이유 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텔레비전 화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1분도 안되서 경악하며 굳어버렸다. 두근거리던 심장은 파도에 밀려 떠내려 간 지 오래였다. 공유 형사가 착찹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알아 보겠어? 저거. 이민우야.” “알아… 아니, 어떻게…!!” […벤츠의 찌그러진 형상과, **에서 오늘 새벽 발견된 트럭의 찌그러진 부분이 일치하며… …범인 이모씨의 진술에 따르면 몇 달 전 이모씨는 야심한 시각 트럭을 몰고 4차선 도로에서… …범인 이모씨는 한명그룹 건설부 하청업체인 동화엔지니어링의 이현호 대표 자제이며….] 기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윙윙 울린다. 기자의 차분한 설명이, 내겐 전부 끊겨서 전해졌다. 이모씨 라며 종종 화면에 비치는 사람은 이민우가 틀림없었다. 잠바로 머리를 뒤집어쓴 채 경찰서에서 카메라 세례를 받는 사람. 이민우가 분명했다. 까무라치듯 발작하는 심장을 부여쥐고, 열심히 눈알을 움직였다. 봐도 봐도 믿어지지 않는 소식… 곧 화면이 바뀌더니 뉴스 앵커가 나타났다. 그는 기자의 설명을 간추려서 설명해줬다. 뺑소니 교통사고로 즉사한 고 문도천 회장. 그는 야심한 시각에 보디가드 동행 없이, 텅 빈 4차선 도로에서 2차선 도로로 진입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트럭에 차 체가 튕겨 나간 것도 모자라 가드레일에 받았다는 것이다. 깨진 앞유리창 밖으로 문도천은 튕겨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바닥에 쓰러지기 무섭게, 가드레일에 기울어졌던 차가 우지끈 내려앉아서 문도천의 몸을 으깼다는 것… 문도천이 교통사고로 즉사했다는 것만 알고 있던 나는, 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된 충격에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충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하루 종일 이 소식을 집중 보도했을 뉴스 앵커는 훨씬 구체적인 사안들을 정리해줬다. 바로, 한명 그룹과 이민우에 대해서. 한명 그룹 하청업체인 동화엔지니어링 대표, 이현호. 고모부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어쨌든 한명 그룹 총수였던 문도천을 죽음으로 몰고 간 뺑소니 범인이, 하청업체 사장 아들이었다는 소식에 많은 국민이 놀라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민우 덕분에 동화 엔지니어링이 타격을 입고 회사 문을 닫아야 할 판에, 이철호 회장이 나섰다는 것이다. 화면에 고모부와 이철호 회장이 비쳤다. 한명 그룹의 로비에서, 고모부는 울면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고, 이철호 회장은 우리 고모부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있었다. 이철호 회장은, 지난 몇 년간 업체와 지켜온 의리 때문에 이번 일을 힘겹게 눈감아 주었다는 것이다. 뉴스 앵커는 그 부분을 특히 강조했다. 이철호 회장이 한명 그룹 총수를 죽인 범인이, 한명그룹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회사를 위해, 의리를 위해 어려운 선택을 해줬다고 말이다. 그러나, 검찰에서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지 아직 알 수 없다고, 앵커는 말했다. 또 화면이 바뀌더니 사람들의 인터뷰가 나왔다. 이 경악스런 소식을 접한 일반 사람들에게 길거리 인터뷰를 한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이철호 회장에 대해 한결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철호 회장의 성품이 굉장히 온화하고 단단한데다가 의리까지 있다고. 표용력이 대단하다며 극찬을 하였다. 틱. 공유 형사가 텔레비젼을 껐다. 한동안 어지러운 침묵이 공유 형사와 내 주변을 돌아다녔다. 내 몸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 한 상태였다. 내 머리는 이민우만 인식하고 있었다. 열심히 찾아다녔던 이민우, 그가 경찰서에서 잠바 뒤집어 쓰고 있다는 것… 트럭 운전수로… 뺑소니 사고범으로…. 째깍. 째깍. 초침이 지나는 소리가 고요히 전해졌다. 삼십분 동안 멍하니 앉아있던 내 머리에 생각이란 놈이 조심스레 찾아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저격수라던 이민우가, 뺑소니 사고범이었다니… 그게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내 생각을 비웃듯, 공유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너는 진짜 이민우가 트럭을 몰았다고 생각하냐?” “뉴스에 그렇게 나왔잖아.” “…그게 다 조작이라는 생각 안 들어?” “!!” 공유가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공허한 담배연기가 우리 둘을 비웃는다. “이철호 사장이, 회장직으로 올라간 걸, 사람들이 의심하고 있었어. 문도천이 죽은 거, 타살이라면, 이철호가 한 짓이 아닐까 하고 말이지. 그런데, 엉뚱한 데서 범인이 나타났고, 이철호는 범인을 감싸줬어. 이게 뭘 거 같아?” “설…마….” “이 모든게 이철호 작품이야. 자기 이미지와 회사 이미지를, 자기가 한 짓을 역으로 이용해서 바꾼 것이지.” “!!” 동공에 격랑이 일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쥐고 탁한 숨을 내쉬었다. 이철호… 그의 작품이라는 공유 형사의 설명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놀란 만큼, 공유 형사의 말투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사체 부검 했을것 같냐, 안 했을 것 같냐?” “모… 몰라. 뉴스에서 예전에 했다고 말 한 것 같은데….” “씨팔. 하긴 뭘 해? 총 맞고 노인네가 뒤졌는데….” “!!” “이거 완전히 극비인데, 우리 검사님이 알아냈나봐. 야, 꼬맹아. 어디 가서 함부로 누설하면 우리 다 끝장나는 거다. 알지.” “어떻게… 어떻게…!!” 민우야…!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담배를 쥐었다. 공유 형사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낮게 욕을 지껄이며, 불을 붙여줬다. 그가 허탈한 투로 읊조린다. “이쯤 되면, 나도 고민된다. 진짜 이민우가 저격수였을지,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뭐?”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담배 연기가 중간에 목에 걸려서 콜록거리는 와중에도 눈을 부릎떴다. “공형사! 아니면, 뭐냐구! 이민우가 아니면….” 그가 나를 측은하게 응시하며 쥐어 짜듯 말했다. “아니면, 더 실력이 나은 다른 새끼일지. 가령… 김동완 같은 놈….” “!!” “나도, 저격수라면 당연히 이민우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 왜냐면, 이민우로 추측되는 작품이 최근 좀 많았거든. 경찰로서는 당연히 이번 일에 이민우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어. 이철호가 경찰도 조종한거지. 만약, 진짜 범인이 이민우가 아니라면 말이야.” “…….” “이런 비리 부분은, 경찰 대다수도 사실 몰라. 뉴스에 나오는대로 믿는 놈이 태반이지. 내가 '이민우를 의심하고 있을거다.'라고 꼬집은 경찰하고 검사들은 얼마 안 돼. 한명그룹과 연관된 검사들이지.” “…이민우가… 대외적으로 잘 알려진 문도천을 죽인 범인이라고, 경찰들이 한 번에 인식할 수 있게끔, 그동안… …해친 사람이 많았어?” “…….” “그런거…야? 말 해 봐. 공씨. 그동안 이민우가 해친 사람이… 그렇게 많았어?” “…나도 이민우가 한 짓들이 아닐 거라고 쭉 믿었었다니까.” 말도 안돼… 사실이 아닐거야. 세상이 모두 거짓말일거야. 이민우는… 그냥 체대 학생이야. 이민우는… 이민우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쳐서야,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공유 형사가 착찹한 낯으로 몇마디 말을 건네다가,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는 바람에 욕을 지껄이며 나가버렸다. “꼬맹아. 니가 경찰서 나타날까봐 찾아온 거였어. 절대로 나서지 마. 알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앞에, 바리게이트를 친 채로…. 당장 문정혁에게 전화했다. 그러나 문정혁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아마, 하루종일 일 하느라 정신없던 문정혁도 뉴스 확인이 늦었나보다. 어떡해… 어떡해… 이 모든 사실을 텔레비전에서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고모와 고모부, 문정혁, 이제는 공유 형사까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 뉴스와 담 싸고 사는 양종호에게서 전화가 안 온 걸 보면, 양종호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답답했다. 유명인이 된 나는 경찰서에 갈 수도 없었다. 아마, 경찰서에 간다면 내가 이민우와 사촌이라는게 쉽게 밝혀지고, 나 뿐 아니라 기획사도 타격을 입을 것이다. 새벽이 올때까지 좁은 집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었다. 민우야… 민우야… 계속 그 이름만 중얼거렸다. 그러다 발견한 건, 책꽂이 맨 밑의 서랍에 있는 휴대폰이었다. 크랭크인 직전, 강원도로 출발하기 전에 쳐박아놨던 휴대폰… 집구석을 돌아다니다 못 해 이것저것 괜히 서랍 열어보고 불안정하게 움직이던 나는, 조심조심 휴대폰 배터리를 연결시켰다. 설마… 하는 생각 하나가 나를 호되게 꾸짖었다. 왜 그때는 이민우를 괘씸하게만 여겼을까. 왜 나는 촬영에 신경쓴답시고, 이민우 찾기를 소홀히 했을까. 황금색 머리칼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휴대폰을 켰다. 잠시후, 엄청난 진동이 울렸다. 수 십 개의 문자와, 콜키퍼, 그리고… 음성메세지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이민우가 내게 전화하거나 문자 보낸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하나도 없었다. 나는 허탈한 숨을 내쉬며, '그럼 그렇지.' 중얼거렸다. 말과는 다르게 약간의 안도감이 들었다. 만약, 이민우가 이 휴대폰으로 내게 전화한 흔적이 있다면… 죽고 싶었을테니까. 그러다가, 낯선 번호들로 도착한 음성 메세지가 시선에 잡혔다. 번호를 알아 낸 팬일거라는 판단에 플립을 닫던 나는, 무서운 속도로 음성 메세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혜성오빠, 저 예지인데요. 오빠 사랑해요! 오빠 화이팅!] [혜성오빠, 사랑해요. 저 연극에도 갔었는데 기억하세요? 오빠가 마지막에 던진 장미꽃 받았었는데….] [혜성오빠, 그대는 예뻐요 노래 너무 좋아요! 오빠, 한 번만 전화 해 주시면 안되요? 아님… 한 번만 받아주세요. 이 번호 혜성오빠 번호 맞죠? 그쵸?] 역시 팬들이구나… 달콤하게 속삭이는 팬들의 목소리에 차츰 안정을 찾기도 잠시, 내 안색이 급격히 나빠진 것은, 일곱번째 저장된 음성을 들었을때였다. [혜성아….] 이민우다…! 늘어지게 앉았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쿵. 쿵. 쿵. 심장이 미친듯이 발작한다. [나야… 전화… 꺼놨네.] 굉장히 지치고 탁한 목소리… 민우야. 민우야. 부를 수도 없었다. 내가 부르는 목소리에 이민우의 음성이 가려질까봐. [그때… 미안했어.] 사정없이 떨어지는 눈물에,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내 숨소리조차 거치적거렸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했고… 너를 끝까지 못 지켜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안했고… 그때… 너를 이기적이라고 해서 미안했고….] 입을 틀어막은 채로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너는 내 목소리 들을 수 있을까.] 민우야… 민우야… [혜성아…… 보고싶다.] 이민우…!! 심장을 터뜨리는 음성에 나는 온 몸을 떨면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눈물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가 울고 있었다. 이민우의 음성이, 울고 있다. 예전 휴대폰에 저장된 이민우의 음성메세지를 계속 들었다. 새벽 세시 반. 감성의 끝에서 나는 여러번 무너졌다. 지옥 끝에서 희미하게 미소 짓는 듯 한 이민우의 목소리는 들을 수록 내 영혼에 생채기를 냈다. 앞으로 이민우는 어떻게 되는 걸까. 문정혁은 이민우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나는 어떡해야 되는 걸까. 끊임없는 질문이 메아리쳤다. 그때, 내가 강원도에서부터 지니고 다닌 휴대폰이 울렸다. 새벽 세시에 휴대폰이 울리다니…? 설마, 문정혁? 아니면, 고모? 고모부? 공유 형사? 뒤늦게 소식을 접한 양종호? 온갖 인물이 다 떠올랐다. 예전 휴대폰을 내려놓고, 당장 최근 휴대폰 플립을 열었다. “문정혁! 문정혁이야? 고모?” 떠오르는 사람들을 무작정 불렀다. 휴대폰 저 쪽에서 침착하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전해졌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보네?] “!!” 이선호…!!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이러할까. 준비 없이 나간 전쟁터에서 수 백 만의 화살을 맞은 것같았다. 기습적으로 닥친 이민우 소식은 고사하고, 이선호라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게 전화 한 이선호. [뉴스 보고 많이 놀랐어?] “…다 알면서 왜 묻는거야. 이선호.” [이민우가 어떻게 될 것 같아?] “지금… 나한테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했냐?” 진정하자. 진정하자. 수 십 번 마음으로 중얼거렸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한계 끝에서 인간은 제어 키를 상실했다. 침착하고 차분한 이선호와 달리, 나는 해일 속에 떠다니는 작은 배처럼 이리 저리 흔들리는 꼴이었다. 목에 핏대까지 세우는 내 모습이 훤했는지, 이선호가 여유 있게 휘파람 소리까지 냈다. [이민우? 물론 몇 년 형 살게 해 주고 끝날 수도 있지. 하지만, 출소한 다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 살지는 모를 일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이선호!! 똑바로 말 해!!” [징역형은 면할 수 없어. 온국민이 다 아는데, 안 그래?] “알았어. 알았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지도 모른다는거, 그게 무슨 소리냐고!” [흥분하지 마. 말 그대로야.] “이선호… 너… 나한테 왜그래… 너…!!” 우리 민우 살려 내… 구해 내… 우리 민우 원래 자리로 돌려줘…!! 폭풍우에 뒤집어지고 부러지는 작은 배… 가까스로 판자 하나를 움켜쥔 나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상태에서 피를 토하듯 외쳤다. 나한테 딱 맞게 전화 한 이선호가 소름끼쳤다. 우리는 한순간에 4년 전, 5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렀다. 나는 이선호가 무서웠고,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지날 때마다 피를 흘리듯 괴로워했다. 두 달 전, 한남동에서 봤던 이선호는 사라지고 없었다. 여느때처럼 여유있게 목소리로 나를 죽이는 이선호. 한계의 끝에 다다른 나를 조종하는 유일한은, 예나 지금이나 이선호였다. 가슴이 아파서 죽을 것같아도 나는… 결국, 이선호가 시키는대로 따를 것이다. 천불이 일고, 홧병에 죽을 지라도, 결국 이선호가 하자는대로 따를 것이다. 만약 내가 미치는 한이 있어도, 우리의 굴레는 영원할 것이다. 한참후, 이선호가 비꼬듯 말했다. [착각하지 마. 도와주려는 거니까.] “니가… 나를 도와준다고?” [당연하지. 너, 꽤 유명하더라? 이리 와서 재롱 좀 떨어 봐.] “뭐…?” 생각지도 못한 이선호의 말에, 나는 한동안 그가 한 말을 곱씹느라 팽글거리는 두뇌를 겨우 쥐었다. 이선호는 거침없이 요구했다. [여기, 내 친구들이 모였거든. 파티중인데, 장소를 옮겼어. 근데, 괜찮은 애들이 없더라고. 니가 와서 재롱 좀 떨어주면, 이민우 일은 내가 아버지한테 잘 얘기해 볼게. 아, 내 친구들 모르지? 하긴. 너 따위는 꿈도 못 꿀 레벨들이니까.] 안 봐도 뻔한 곳. 재벌 자제들이 연예인들 따 먹는 곳이겠지. [올 때 예쁘게 하고 와, 알았지? 큭.] 연예계와 방송가에는 말 못할 비리들이 굉장히 많다. 누가 누구를 사귀었네가 아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더러운 속사정들. 한명 그룹이 뒤로는 사람을 죽이고 법 없이도 살듯이. 연예계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동안 무사했던 이유는, 최성수가 나를 지켜줬기 때문이다. 최성수는 단 한 번도 나를 더러운 물에 던지지 않았다. 지저분한 연예계에서 고결하게 클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했었다. 만약, 연극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최성수 사장과 나는 지금도 충무로의 작은 사무실에서 라면이나 끓여 먹으면서 엑스트라니 조연 따위를 전전했을 것이다. 곡 하나 얻고 텔레비전 출연하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몸을 파는 신인 가수들, 이미 뜬 스타라고 해도 재벌 자제들이 비싸게 노는 바에 불려가서 그들이 원하는대로 쑈를 하는 대스타들. 하룻밤 몸값이 어마어마하다는 이유로 노리개가 되는 무수한 연예인들. 해외를 넘나드는 대스타라고 해도, 예외는 없었다. 방송국, 감독들과 기자들까지 포함, 그들이 나를 '원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내 사생활이 굉장히 깨끗한데서 비롯되었다. 일반인들이 야기하는 '원석'의 의미와, 연예계 사람들이 나를 보고 얘기하는 '원석'은 천지차이였다.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선호의 제안을 거절하는게 옳았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내게 선택의 기로 따위는 없었다. 내게 망설임은 사치였다. 나를 사랑한 죄로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을 벌인 이민우가 무사히 살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내 인생에 잊을만하면 몰아쳤던 회오리… 그것은 늘 한꺼번에 터졌다. 하나씩 하나씩 순서에 맞춰진 적이 없었다. 이 일 저 일이 한꺼번에 터져서, 나는 대책없이 말려들었다. …지금처럼. “야. 저건 뭐냐?” 그들이 나를 보고 던진 첫 마디다. 음악중심 녹화 할 때 썼던 가발을 착용하고 나왔어야 하는데… 나는 집에서 입고 있던 편한 면티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존나 예쁘다. 남자야, 여자야? 완전 보석인데?” “모르냐? 신혜성이잖아. 요즘 좀 잘 나가는 새끼야.” “그래? 옷은 뭐 저렇게 입고 왔지? 야! 위에는 벗고 노래나 해.” 청담동 뒷골목, 불빛 하나 없는 2층 짜리 사무실… 외관이 유리창으로 건축된 근사한 2층 건물의 지하, 그곳이 이선호가 알려준 장소였다. 지하는 지상과 단절된 세계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즉시, 웨이터들이 나를 알아봤다. 옷을 거의 벗은 남자들, 혹은 여자들이 룸에 불려다녔다. 나이트클럽에서 흔히 보는 휘영찬란한 조명 대신, 붉은 융단과 은은한 조명이 고풍스럽게 빛나는 곳. 룸에 들어가는 남자 여자 중에는, 내가 텔레비전에서 봤던 연예인들도 섞여 있었다. 항공사 사장의 자제, 어느 명망높은 기업의 자제 등, 상류층 중에서도 내로라 하는 1%들이 찾는 곳. 간판조차 없는 곳. 나도 소문으로만 들었던 곳이다. 하물며, 드라마나 영화에서조차, 주인공이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이런 장소는 비춘 적이 없었다. 이선호는 VIP룸, 제일 끝 방에 있었다. 스무명 가량이 넓은 룸에서 악사들을 시켜 연주와 노래를 울리며 난잡한 파티를 벌이다가, 막 들어온 나를 보고 조용히 하던 일을 멈췄다. 여기까지 오는데만 해도, 몇 대의 리무진을 끌고 왔을 엄청난 재력가의 자제들이, 하나같이 이선호 눈치를 보았다. 대단하다. 이선호. 너네 아버지처럼 너도 대단하다. “내가 말한 애야. 아까 걔보다 낫지?” 값비싼 샹들리에와 조명 아래, 정 중앙의 가죽 소파에 다리를 꼬아 앉은 이선호가 입을 열자, 너도 나도 맞장구쳤다. “야, 이쁘긴 졸라 이쁘다. 일단, 춤 추면서 옷이나 벗어봐.” 춤 추면서 옷을 벗으라고? 덜덜 떨리는 몸에 억지로 힘을 줬다. 멀찍이 떨어져서 가소롭다는 듯 나를 보는 이선호. 이선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때, 누가 내게 양주를 끼얹었다. 촤악- 안면에 뿌려진 양주… 쓰린 눈을 감고, 다시 썼다. 곱상하게 생긴 여자가, 마약에 취한 건지 비틀대며 빈 잔을 들고 킥킥 웃고 있었다. “야, 왔으면 빨리 시작하라고. 키키키킥.” 음악 없이 춤을 췄다. 삼영 기획에서 간혹 배웠던 재즈 댄스를 추다가, 결국 내 몸은 아무렇게나 흐느적거렸다. 다시 양주세례가 이어졌다. 이민우… 이민우… 조금만 참으면 이민우를 구할 수 있어… 내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 뿐이었다. 이민우라는 이름이 나를 움직였고, 이민우라는 이름이 디딤대가 되었다. “이새끼 뜬거 순 구라 아니야? 생긴거로 먹힌건가? 야! 선호야! 일류만 데려온다더니, 얘 영~ 아니다.” 뚝… 뚝… 나는 술방울이 떨어지는 머리카락만 쳐다봤다. 이 모든게 꿈이었으면…… 누군가 나를 비웃었고, 이어서 이선호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가? 진아. 니가 보기엔 어때?” “!!” 뭐라고…!! 죽고 싶을 만큼의 수치심이 확 밀려들었다. 여기에 전진이 있다니…!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이선호의 질문이 한 번 더 나왔지만, 전진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왜, 언제나, 충격은 한꺼번에 올까. 시련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그때, 술과 마약에 취한 놈이 비틀비틀 내가 서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살집이 두둑한데다가 기름냄새를 풍기는 남자가, 내 팔목을 잡고 휙 들어서야, 나는 고개를 올렸다. 멍하니 초점이 풀린 놈이 침을 질질 흘리며 나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이새끼 몸이 제법 야들야들한데? 맛있게 생겼어….” “왜, 왜이래!!” 몸부림을 치며 팔을 뿌리치려는 나를, 남자가 단번에 제압했다. 술과 마약에 취한 인간의 힘은 엄청났다. 느린 만큼 무거웠고, 무거운 만큼 결박력이 대단했다. 남자의 거대한 살집이 나를 푹 눌렀다. 우당탕! 바닥에 쓰러져서도 반항하는 내 배 위에 푹- 앉은 남자가 다짜고짜 손을 올렸다. 짜악!! 잔인한 살 소리와 함께 내 뺨이 돌아갔다. 숨이 아예 쉬어지지 않았다. 뺨의 고통보다 괴로운건, 내 배를 깔고 앉은 남자의 살집이었다. “허, 허억, 헉.” “좀 놀아주겠다는데 말이야. 너도 돈 필요해서 굴러 온 거 아냐? 연예인이라고 별 거 있냐? 내 말 한마디면 너 매장돼. 그러고 싶냐? 새꺄.” “으, 으헉, 으허헉!” “이거… 진짜 귀엽네? 크하하하!” 폐가 눌렸다. 가슴까지 올라오는 놈의 허벅지에 내 피부는 파랗게 질렸다. 놈은 그러거나 말거나 내 뺨을 젖은 혀로 스윽 훑었다.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자, 몸이 축 늘어졌다. 내가 조용해지니, 주변에서 자지러지는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야~ 잘됐다. 너 졸라 굴리는거 간만에 보고 싶었는데, 해 봐! 해 봐! 구경할래!” “그럴까? 큭. 큭. 이새끼 진짜 맛있게 생겼어.” 민우야… 정혁아… 엄마… 엄마… 의식이 멀어지고 있었다. 내 배 위에 앉아서 가슴까지 올라온 남자가, 무슨 짓을 하는건지, 부욱- 찢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내 옷이 찢어지는 소리라는 걸, 옷이 벗겨져서야 알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끊어진 의식이 돌아오나 싶더니- 배와 가슴이 가벼워졌다. 산소를 필요로하는 나의 뇌로, 엄청난 양의 공기가 들어왔다. “쿨럭! 쿨럭쿨럭! 켁! 케켁!” 몸을 새우처럼 구부리며, 토하듯이 기침소리를 냈다. 하지만, 나를 덮쳤던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팔꿈치에 힘을 주고,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켰다. “하아… 하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바닥에 앉은 상태에서 뒷걸음질 쳤다. “꺄아아악!!!” 한 계집애의 이빨이 전부 나갔다. 그리고 입 전체에서 피를 뿜어내더니 붕~ 떠서 날아갔다. 와장창!! 테이블에 떨어진 계집애 덕분에 고급스러운 술병과 잔이 바닥에 떨어지고 깨졌다. 내게 양주 세례 했던 년이다… “으아악! 까아악!!” 그리고, 나를 덮쳤던 살집 좋은 남자는 엄청난 구둣발에 밟히고 있었다. 거품처럼 모인 피를 토해내며, 남자는 괴로워했다. 푹! 푸푹! 고기덩어리같은 배의 살집에 구둣발이 눌릴 때마다 남자는 짐승이 죽는 소리를 냈다. 단 1분 만에, VIP룸에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했다. 나는 조용히 벽에 기댄채 바닥에 앉아서 눈꺼풀을 닫았다. 한 가닥의 눈물이 천천히 볼을 타고 떨어졌다. 전진… 전진이 미친 것이다. 전진… 그가 참고 또 참다가, 지난 4년을 으깬 것이다. 나를 찾기 위해 이선호 옆에 있었다던 전진이, 나 때문에 미친개처럼 날뛰고 있었다. 탕!! 우장창!! 테이블을 던지는건지, 가구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몸을 으깨는 것인지 사람같지 않은 비명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깨진 병으로 무슨 짓을 했는지 부욱- 푸욱- 살 찢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전진.” 그러다 이선호가 싸늘하고 중압적인 톤으로, 전진을 불렀다. 이름이 아닌 물체를 부르듯이. 2분 40초. 혹은 3분. 전진이 약 3분 만에 빠르고 강하게 몸을 날려서 초토화 시킨 VIP룸. 이선호가 전진을 부르기 전에, 나는 눈을 떴다. 어느새 내 앞에 쪼그려 앉은 것도 모자라 내 몸을 꽉 껴안은 전진 때문에… “공주야… 괜찮아…?” “…….” 바보같은 남자… 바보같은 전진… 미친개처럼 날뛰면서 돌아갔던 동공이, 나를 꼭 껴안는 즉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한 팔로 나를 꽉 끌어안고, 다른 팔에는 여전히 무기처럼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들고 있는 전진… 나는 사색이 된 채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우리를 보고, '전진.' 이라고 물체 부르듯 음성을 던졌던 이선호가, 천천히 다가왔다.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스무명 가량이 비명을 지르며 룸 밖으로 도망쳤다. 그중에는 오줌을 지리며 기어가는 놈들도 있었다. 우리 셋만 남은 지옥같은 공간에서, 이선호가 말했다. “전진.” “…….” 전진은 이선호를 쳐다보지 않았다. 나를 보호해주듯이 꽉 껴안고 웅크릴 뿐이었다. 덕분에, 전진의 어깨 너머로 이선호를 보는 것은, 나였다. 벽에 기댄채 주저앉은 나. 나를 껴안은 전진. 전진을 노려보고 서있는 이선호. 아이러니하게도 이선호는 전진을 불렀지만, 정작 이선호를 쳐다볼 수 있는건 나밖에 없었다. “전진. 언제부터 기억력이 돌아왔지?” “…….” “질문이 틀렸나? 좋아. 다시하지.” “…….” “전진.” “…….” “너 설마 여태까지 내 앞에서 쑈했니?” “…….” 전진은 못 보는 이선호의 무표정한 모습. 싸늘한 말투. 그리고, 이선호의 붉은 눈동자 밖으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 그 눈물은 곧 사라졌지만, 나는 똑똑히 목격했다. 한동안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이 우리 셋의 목을 비틀어버릴듯 돌아다녔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를 껴안고 있던 전진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전진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많이 놀랬지… 우리 공주.” 그의 다정한 시선… 내가 기억하는, 나를 바라보는 전진 특유의 또렷한 눈빛…!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고개 숙였다. 전진의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여태까지 평정을 유지했던 이선호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왔다. “전진!! 거짓말… 거짓말이잖아!! 너, 지금 나 놀리는거지? 그치?! 전진!! 너! 나 사랑한다고 했잖아!!” “일어나자, 공주야.” “전진!! 나 봐! 나 보고 말 해!!” 이선호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전진은 나를 번쩍 안아서 들어올릴 뿐, 이선호 쪽으로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나를 안고 적당한 걸음걸이로 가볍게 걷기 시작하는 전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시니컬한 투로 읊조렸다. “쑈했냐고?” 굉장히 무서운 얼굴…! 전진의 품에 안겨서 허공에 떠있는 나는, 이선호에게 차가운 투로 반문하는 전진의 표정을 읽고, 표정만으로도 겁에 질렸다. 전진이 다시 걸으며 말했다. “이제 알았냐?” “전진…!!” “알았으면 됐네.” “진아!! 전진!! 거기 서!!” 이선호의 절망과 충격, 그것은 어쩌면 내가 오늘 받은 충격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우위를 점친다는게 웃기지만, 그냥 그럴 것같았다. 이선호는… 바닥에 꿇어 앉아서 자기 가슴을 부여쥔 채 엉망으로 우는 몰골로, 전진을, 그리고 나를 노려보았다. 우리 모습이 아주 작아져서 안 보일때까지…. “4년이면 충분했어.” “뭐?” 차에 올라 탈 때까지 말 한 마디 없던 전진이, 청담동을 벗어나는 즉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우리가 탄 차는, 고급스러운 로터스. 텔레비전에서나 봤던 로터스가 주행하는게 신기했는지, 어느 도로를 지나든지 주변 차들 움직임이 느렸다. 어쨌든,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전진이 내뱉은 말에 나는 무슨 소리냐고 거듭 물었다. “공주야.” “…….” 그가 운전중에 오른팔을 내밀더니, 내 왼 손을 꽉 잡는다. 나는 아직 충격에 휩싸인 표정으로 차창에 시선을 고정시킨채 몇 방울의 눈물을 닦는 중이었다. “적에 대해 자세히 알기 위해선 어떻게 하는게 제일 좋은 방법 인 줄 알아?” “…….” “적진에 뛰어드는거야. 스파이처럼.” “!!” 뭐라고…?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내가 자기를 쳐다보는 걸 알았는지, 전진도 운전중에 잠깐 시선을 내게 부딪히며 가볍게 윙크까지 했다. “4년 전에는, 어떻게든 이선호를 설득시키려고, 애원해보고, 협박도 해 보고, 안 해 본 방법 없었잖아. 그래서 터득했지. 완전히 이선호의 편에 서야겠다고.” “전진…!” “시작은 너 때문이었어. 너를 갖기 위해서. 그러다가 이철호의 비리를 알게 됐지. 이선호는 나를 사랑했거든. 제작년부터 자기가 곧 들어갈 회사에 대해 공부할 때, 내게도 이것저것 알려줬어. 내가 4년동안 한 짓은, 이선호가 4년 전, 우리에게 했던 방법과 똑같은 거야.” 맙소사… 전진의 고백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가 4년동안 연기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사연까지 접한 현재,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내 손등을 자기 입술에 가져가서 수도 없이 입을 맞춘다. 애틋한 훈풍이 손등을 간질일때마다 나는 움찔거렸다. 그러다가 순간, 머릿속에 문정혁이 떠올랐다. 나는 즉시 손을 뿌리쳤다. 전진이 잠깐 놀랐는지 멈칫하더니, 억지로 내 손을 다시 가져갔다. 예전에는 어려서 여기저기 잘 휩쓸렸지만… 지금도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머릿속이 어지럽지만, 적어도 '사랑'만큼은 확실해야 된다는 것. 그건 알고 있다.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 문정혁하고 사귀는 중이야. 진아….” “…….” “전진… 들었어? 나… 4년 전부터 문정혁하고 사귄다고. 너랑 헤어지고 난 다음부터….” “사랑해?” “…….” “문정혁을 사랑해?” “응. 사랑해.” 끼익-!! 바퀴가 들릴 정도로, 전진이 무식하게 핸들을 꺾더니 갓길에 차를 세웠다. 청담동을 빠져나오면서 되찾음직한 평정이 모조리 으깨졌다. 전진은 내 양 어깨를 쥐고, 호소하듯, 격렬한 투로 말했다. “문정혁을 사랑한다고? 나랑 사랑했던 것처럼? 그때 문정혁이 너 노리는거 알았지만, 그래도 신혜성. 니가 나랑 사귄다는 점에 안심했었는데… 지금은… 내가, 옛날의 문정혁 입장이라고?” “…….” 그의 시선을 피했다. 전진이 내 어깨를 세게 흔들었다. “공주야… 대답 해 봐.” “…….” “어떻게 그래?” “…….” “어떻게… 어?! 어떻게 그래?” “…….” “대답 해 보라고!!!” “…….” 여전히 큰 목소리. 야생마처럼 날뛰는 억양… 그의 절규 만큼이나 답답해진 세상이 조금씩 젖어 들어간다. 툭, 투툭. 차창 밖에 부딪히는 굵은 빗방울. 곧이어 쏴아- 하며 한여름의 새벽, 굵고 촘촘한 소나기가 가열차게 퍼부어 내렸다. 전진의 목소리에도 태풍이 일었다. “나는 너랑 심장을 바꾼 다음부터, 단 한번도! 신혜성! 널 잊은 적이 없었어! 어떻게 그러냐고!” 하루 종일의 충격에서 한계 끝, 그 이상까지 갔던 나는, 무너지듯이 받아쳤다. “니가 꼭꼭 숨기면서 살았으니까!!” “!!” 전진의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었다. 상처와 충격, 아픈 단어란 단어는 모두 전진의 눈동자에 별이 되어 떨어졌다. “어떻게 그러냐고? 전진. 그건 너 혼자만의 착각이야! 나는 너랑 4년이나 떨어졌었고, 이별할때 죽도록 아팠었어!!” “그럼 내가 매달렸던 건 기억나냐?” “!!” “조까! 신혜성! 너 혼자 정한 이별이었어!! 엄연히 따지자면 니가 날 버린거였다고!!” “나 혼자 정한 이별이라고? 전진… 너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내가 얼마나 아팠었는지, 힘들었는지, 다 알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몰라서 이러는거야? 나는 흥분해서 눈을 부릎뜨고 온 힘을 다 해 소리쳤다. 그건 전진도 마찬가지였다. “신혜성. 니가 나만큼 힘들었어? 기억 안 나? 내가 너한테 매달렸던거, 무릎 꿇었던거! 씨팔! 나, 하다하다 안되서, 전화까지 했었어! 기억해? 나, 전화통화 하면 발작하는 미친새끼라는거!! 내 치부까지 드러냈던 놈이, 나였어!!” “너만 치부 드러냈어?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너랑 헤어지고 싶었는 줄 알아? 그만큼 상황이 지쳤잖아! 너랑 헤어지고 나 정말 많이 힘들었었어! 왜 나한테 소리질러! 1년도 2년도 아닌 4년… 아니, 너랑 떨어져 있던거 다 따지면 5년은 돼! 그 사이에 내가 문정혁에게 기댄 거, 그게 그렇게 죽을죄라고?” “닥쳐!! 신혜성. 말 잘 했네. 5년? 너, 내가 그 시간동안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알아?” “비꼬지 마!! 전진!! 너 그런 말투 딴 사람같아!!” “니가 비꼬게 했잖아!!” “그래, 그렇겠지. 전진. 넌 옛날에도 싸울때 내 탓이라고 하면서 목소리 높이더니, 지금도 똑같애!! 진짜 쪼잔하고 울컥대기만 하잖아!!!” “!!” 전진이 눈을 부릎뜨더니, 한 팔을 허공에 올렸다가, 겨우 내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전진은 쉽게 흥분했다. …나처럼… “아우… 씨팔!! 아!! 씨팔!!!!” “전진!! 내 앞에서 욕 하지마!!” “혼잣말이야!!” “나 들으라고 욕하는 거잖아!!” “너한테 한 말 아니라고!!” 우리는 서로에게 서운한게 많았다. 그만큼 서로 힘들었던 시간이, 행복한 기억보다 많았다. 즐거움보다 아픔이 생생한 연인이었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은 잠깐이었고, 응고된 서러움이 녹는 즉시 서로를 죽일 듯이 덤볐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아픔'을 간직한 채 마냥 그리워하며 떨어져 있던 탓이다. 그리움이 상처가 되고, 상처가 막연한 상상을 거쳐 고름이 되었던 탓이다. 반가운 만큼, 잊었던 옛 일과, 최근의 상처까지 동시에 피어올랐다. 시작은 나였지만, 문정혁을 사랑한다는 내 고백에 폭팔한 전진도 만만치 않았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도로 갓길에서.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 만큼이나 우리의 비명도 짙어졌다. 나는 전진이 내 사정을 이해해 주기를 바랬다. 그와의 이별을 결심했을 당시의 나를, 생 살을 도려내듯 이별 할 수 밖에 없었던 나를… 제발 이해해 주기를 바랬다. 아니, 이해를 넘어서 지금 당장은 포근히 안아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닮아 있었다. 만약 문정혁이었다면, 나를 안아줬을지도 모른다. 문정혁과 싸워보지 않은 이상 모를 일이지만… 그래. 그러고보니 나는 문정혁과 싸워 본 적도 없었다. 평상시에 틱틱대는 문정혁은, 내가 예민하게 굴 땐 오히려 덤덤하게 받아줬으니까. 또… 문정혁과 내 사이에는 전진과 같은 아픔이 많지 않았으니까. “전진. 너 진짜 유치하다. 너만 힘들었니? 왜 너는, 내가 흥분하면 같이 흥분해? 조금 참고 물러나주면 안 돼? 가뜩이나 힘든데… 그러면 안되는거야?” “니 입에서 문정혁을 사랑한다는 소리 듣고, 내가 제정신이기를 바라냐?” “우리가 떨어져있던 공백기는 생각 안 해? 니가 단 한 번이라도 내게 소식을 전해줬으면….” “소식 전해줬으면, 뭐? 문정혁하고 안 사귀었을 거라고?” “…….” “봐! 아니잖아! 신혜성! 너는 니말대로 힘들고 지쳤으니까, 너 좋다는 개새끼한테 간 거잖아! 아 씨팔!!” “그래도 전진 너처럼! 몇 년 내내 붙어있는 짓은 안 했어!!” “뭐…?” 전진이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나를 돌아본다. 막 입에 물었던 담배를 퉷- 하고 뱉어내더니, 당장 나를 죽일 것처럼 아주 무섭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기만 바랄 뿐,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 전진과 나의 다툼은 늘 이런식이었어… 나는 충혈된 눈에 억지로 힘을 줬다. “말로는 이선호랑 쑈한 것처럼 굴지만, 너 어쨌든 4년 내내 이선호하고 붙어 살았을거 아냐!!” “…지금 같이 죽자고 말하는 거로 밖에 안 들리니까 입 닥쳐라.”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데… 어떻게 나한테 그런 소릴 해… 아까는 왕자님처럼 구해줬으면서…!! “전진! 이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투야? 닥치라고? 나는, 문정혁이랑 사귄다고 해도, 몇 번 만나지도 못했어! 내가 너랑 같은 줄 알어?” “닥치랬다.” “전진!! 그런 말투 쓰지 말라고!!” 있는 힘껏 소리치는 내게 완전히 질린 낯으로, 전진이 황당하다는 투로 받아쳤다. “조까!! 니가 나한테 하는 말투도 마찬가지야!!” 맞는 소리다. 전진이 치사한 만큼, 나도 치사했다. 전진이 심하게 몰이부치는 만큼, 나도 몰아부쳤다. 우리 둘은, 예전에 이선호가 비꼰 표현대로, 비슷한게 많았다. 그래서, 행복했던 시절에는 다른 연인들보다 두 배로 쿵짝이 잘 맞았고, 잘 맞은 만큼 상처받았을 때 보듬는게 서툴렀다. 사랑했는데, 죽도록 사랑했었는데… 그 기억이 행복해서, 문정혁을 선택한 현재 마저도, 미련의 엉겅퀴가 뇌리에 잠식했는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텐데, 우리는 왜이러는거야… “전진… 너 진짜 최악이야…!!” “마찬가지거든?” 한 마디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잖아…! 아마 내가 이 생각 할 때, 전진도 나를 보며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한 마디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고. “으, 으흑!!” “…….” 결국 울음이 터졌다. 감정이 폭팔하면 늘 이런식이다. 치사한 부분까지 북북 긁어서 토해낸 다음, 죽을 것처럼 울기. 전진은 내가 우는데도 눈 하나 꿈쩍 안 했다. 그게 더 서러워서 내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어허어엉. 어허, 어허, 어허어어어어.” “…짜증나….” 뭐? 짜증난다고? 믿을 수 없는 전진의 표현에, 나는 서럽게 울면서 차 밖으로 나갔다. 쏴아아- 구색에 맞게 빗줄기도 엄청 굵어졌다. 영화를 찍어라, 찍어… 라고 누가 머릿속에서 비웃는 기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휑한 도로를 걸었다. “어허, 어허어, 어허어엉. 어허어어엉.” 쪽팔릴 것도 없었다. 온 몸이 다 젖는 것쯤이야 의식도 안 되었다. 눈물 콧물 흘리며 열 걸음쯤 걸었을까. 운전석에서 꼼짝도 안 하고 욕만 중얼거리던 전진이 언제 튀어나온건지 내 팔목을 꽉 잡았다. “놔, 놔아, 어허엉, 어허어어엉.” “여기 올림픽대로야. 빨리 타.” 아까보다는 조금 차분해진 전진 목소리… 올림픽대로라면서 내 팔을 질질 끄는 전진에게 약이 올랐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만… …뒷발 돌려차기 해버렸다. “!!!” 퍽- 무방비 상태였던 전진이 내 발차기로 복부를 맞았다. 그가 깜짝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물웅덩이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허어엉. 어허, 어허, 어허어어엉.” “…아야… 씨팔.” 나한테 돌려차기 맞은게 믿어지지 않았는지 전진이 한동안 멍하니 서있는다. 내가 다시 앞으로 씩씩하게 비를 헤치며 걷자, 그가 또 내 팔목을 잡는다. “말 좀 들으라고!! 나는 뭐!! 너 태워주고 싶은 줄 알어?!!” …진짜 사람 서럽게 하는 말만 골라서 하네. 나쁜 새끼. 어쩜 옛날하고 변한게 없니. 잘 해 줄 땐 하늘의 달도 따 줄 것처럼 헤헤 거리다가, 싸울때는 인간폭탄이 되는 나쁜 새끼. “태, 흑, 워, 어엉, 태워주지 마!! 어허어엉. 개새끼야!!!” 있는 힘껏 뿌리쳐봤지만, 전진은 죽어도 내 팔목을 풀어주지 않았다. 상냥하게 말 해 주면 탔을지도 모르지만, 전진 말투 보니까 오만 정이 떨어졌다. 그건 전진도 마찬가지였나보다. “개새끼이? 하! 말하는 꼬라지 봐라… 빨리 타!! 죽고 싶어?!” “죽든 살든 놓으라고!! 어허, 어허, 어허어엉.” “신혜… 헉!!” 또 돌려차기 해서 전진을 보내버렸다. 이쯤 되니 상황이 조금 웃겨졌다. “아야… 이거 진짜 어이없네… 야!! 신공주!! 너 자꾸 오빠한테 발차기 할래!!” “어허어어엉. 으흑, 으흑, 으흑, 으흑.” “큭큭큭.” “? 으흑, 으흑, 으흑, 으흑.” 미친놈. 왜 갑자기 웃고 지랄이야… 나는 더 서럽게 울면서 빗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더 다가오면 죽여버리겠다는 뜻을 품어서… 전진이 또 내 팔목을 잡았다. 나는 세번째 돌려차기를 했다. 전진은 충분히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돌려차기 하는 걸 이후 네 번이나 다 받아줬다. 퍽- 퍽- 퍽--! 아, 아야, 으으윽. 전진이 점점 오버 액션 하면서 배를 부여쥐고 아픈척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녀석에게 돌려차기 하면서 기분이 약간 나아지는 걸 느꼈다. 개새끼… 말다툼 할때는 절대 안 받아주면서, 몸으로 하는 건 잘도 받아준다. 새벽의 올림픽대로… 시야가 불분명할 정도로 내리는 폭우 속에서 우리 둘이 대체 뭐하는건가. 나는 결국 전진 손에 이끌려서 아까처럼 차에 탔다. “어휴… 몸에서 김 나는거 봐라.” “시, 흐윽, 끄러. 흐윽, 흐윽.” “나 히터 틀었는데! 추워? 추워?” “흐윽, 흐윽. 닥쳐!!!” “…조용~” “…!!” 조용? 세상에서, 조용히 하란다고 자기 입으로 '조용~'하고 입 다무는 새끼는 전진밖에 없을거야… 순간, 웃음이 터질 것같아서 미친듯이 입술 깨물고 허벅지 꼬집었다. 아직 열불나 죽겠는데 웃으면 지는거다. 전진이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조용~'하는 거, 사람 돌게 한다. 웃겨서… “춥지. 기다려봐. …이거 덮어!!” “…….” “아, 맞다. …다시, 조용~” “…끅, …끅, …끅, …끅, 끅, 끅, 끅.” “!!!” 전진 때문에 미치겠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자꾸 웃기는 전진 때문에, 웃음 참다가 부작용이 시작되었다. 일명, 끅질. 한 번 끅! 할 때마다 눈이 두번씩 파다닥 감기고, 어깨가 움찔거리는 현상. 딸꾹질과는 다른, 눈물을 징하게 쏟아낼때만 나오는 지랄 현상. 내 끅질에 내가 당황하기도 전에, 전진이 더 놀랐다. 5년 전이었나, 4년 전이었나? 그때 내가 끅질했던 기억으로는… 전진이 계속 등 문질러주고, 약국까지 다녀왔었다. 한시간 사십분동안 끅질이 멈추지 않아서… 당시 기억이 떠올랐는지 전진이 나보다 하얗게 질려서 차를 움직였다. “빨리 약국부터 가자. 안되겠다.” “다, 닥쳐. 끅, 끅, 끅, 끅, 끅.” “잠깐이지만 화해 해서 다행이다. 그치.” “웃기, 끅, 시네. 끅, 끅, 끅, 끅, 끅, 끅, 끅.” “아!! 맞다!!” “? 끅, 끅, 끅, 끅, 끅, 끅, 끅.” 미끄러지듯 출발하던 차가 도로 멈췄다. 올림픽대로 한복판에서, 전진이 상기된 낯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저게 왜저러지? 라고 시선으로 따라가던 나는 전진의 행동에 놀라서 차 문 열고 뛰쳐나가려고 했다. “놔! 끅! 놔! 끅, 끅, 끅, 끅, 끅.” “가만 있어봐. 조금만 찍을게.” “시러!! 끅, 끅, 끅, 끅, 끅. 끅끅끅끅끅끅.” “아주 좋아.” 미치겠다… 전진은 내가 끅질하는 것을, 휴대폰 동영상으로 찍었다. 내가 화를 내도 소용없었다. 화가 난 건 화 난거고, 내가 끅질하는 게 종종 생각날때마다 보고싶었는데, 이 기회에 좀 찍어놔야겠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옛날에 내가 우리집에서 끅질했을때, 전진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다음에는 동영상으로 촬영해야겠다느니, 고양이같다느니…. 이번에도 우리의 싸움은 어이 없게 끝났다. 풀리지 않는 앙금은 여전히 남긴 채, 격렬하게 싸운 만큼 쉽게 풀렸다. 아니, 전진 기준으로는 다 풀린거고, 내 기준으로는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한바탕 싸우고 나니까 약간은 속이 시원해졌다. “우리 혜성공주는… 머리카락도 예쁘고, 발꼬락도 예쁘고, 가지가지 한다. 도대체 안 예쁜데가 어디야? 어?” “…….” 집 앞에 거의 도착할 때쯤, 전진은 언제 소리질렀냐는 듯 나를 향해 온갖 찬미를 갖다 붙였다. 한 손으로 운전하고, 한 팔로는 내 등을 마사지 해 준 전진 덕분에, 끅질은 멎은 지 오래였다. 그나저나 전진… 진짜 단순하다. 아까 까지만 해도 살인 날 분위기였는데… “공주야. 볼이 조금 부었네? 집에 연고 있어?” “전진. 나 아직 초절정 화가 난 상태거든? 너 혼자 풀린 거거든?”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근데 나도 안 풀린 상태야.” 짜증나… 차가 서는 즉시, 후다닥 내렸다. 전진이 당연하다는 듯 따라서 내린다. “너, 가!!” “나, 갈 데 없어. 공주야. 나 책임져.” “지랄하고 자빠졌네. 내가 말했지. 나 문정혁하고 사귄다고.” 말하자마자 아차 싶었다. 또 전쟁같은 다툼이 시작되는 건가… 하지만, 전진은 심통난 아이처럼 아랫입술을 뿔룩 내민 채… “몰라. 배 째.” “뭐?” 진짜 아이처럼 굴었다. “배 째라고!! 난 공주 너랑 안 헤어진거라고!!” “야… 전진….” 저렇게 당당하게 배 째라고 하는 전진 앞에서, 왜 나는 웃음을 참는건가. 나 아직 화났는데. 확실히 전진은 문정혁하고 다르다. 내가 전진과 사귈때의 문정혁은, 내게 접근하면서도 계획적으로 차근차근 수순을 밟고, 욕정을 참고, 매너있게 굴었으니까. “배 째!! 배 째!! 난 안헤어졌다!! 난 혜성공주랑 안 헤어졌다!!! 안 헤어졌다!!” 광화문에서 대한 독립 만세 외치냐고… “야! 고막 터지겠어!! 좀 작게 말해!!” “그럼 빨리 나랑 안헤어진거라고 말 해.” “…….” 내가 대답하지 않자, 전진이 또 울컥 달아오른 낯으로 아까보다 더 크게 소리쳤다. “배 째! 배 째!! 난 혜성공주랑 안 헤어졌다!! 안 헤어졌다!!!” “!!” 전진의 함성에 결국, 골목에 주렁주렁 이어진 주택 창문가에서 '어떤 새끼야!! 시끄러!!'라는 아저씨들의 고함이 터져나왔다. 전진을 현관에 버려놓고 나는, 후다닥- 집 안에 쏙 들어갔다. “전진. 나 분명히 말했다. 문정혁하고 사귄다고.” “배 째라고!!!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까지 그런 말 안 들어!” 왠 계약서? 저 무식한 야생마가 진짜…!! 마지막까지 자기 배를 찢어달라고 요구하는 전진의 배를, 쪼리에 식칼 달아서 진짜 돌려차기 하려다가, 꾹 참았다. 몇 번 더 광화문 연설 같은 전진의 절규가 들리는 듯 싶더니 차가 떠나는 소리가 고요히 울렸다. 하아~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의자에 주저앉았다. 혼자가 되서야 긴장감이 풀려서 두근 두근 심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날 오후, 나는 최성수 사장에게 죽도록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선호 친구라는 돼지 새끼한테 얻어 터진 뺨이 심하게 부어올랐기 때문이다. 덕분에 앞으로 삼일간 집에서 쉬라는 특명을 받았다. 가뜩이나 연기된 스케줄이 또 연기됐다. 아마, 삼일 후에는 잠 자는 시간도 없을 것이다. 고모네 집에 가 봐야겠다- 생각하기도 잠시, 나는 침대에 도로 누워버렸다. 지금, 고모를 만난다면… 이민우의 '진실'을 다 말 해 버릴 것같아서… 잠깐 생각 할 시간이 필요했다. 오싹- 이유없이 소름이 끼쳤다. 오돌도돌 돋아난 닭살…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선호의 모습. 마치 전진을 시험한 것처럼 아귀에 맞게끔 행동했던 이선호… 어쨌든 전진이 확 돌아서 난장판을 만든 덕분에, 이선호의 지시는 무산되었다. 과연, 이민우는 어떻게 되는걸까. 설마 나때문에… 나때문에 안 좋은 꼴 당하면… 벌떡- 일어나서 공유 형사에게 전화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받는다. 나는 이민우가 어찌 되느냐고 물었다. 피로가 누적된게 훤히 보이는 공유 형사의 낮은 목소리톤이 무겁게 전해졌다. [한명 측에서 소송을 취하 해 줄 것같긴 한데… 그래도 5년 형이야. 중간에 보석으로 풀려날 가능성도 있지만… 최소 2년 3년은 콩밥 먹어야 돼.] “…….” 예상 했던 부분이다. 온 국민이 다 아는 사건인데, 이철호가 고모부와 이민우를 용서해줬다고 해도, 그는 죄값을 치러야 한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이민우가 출소한 이후였다. 아니, 출소 전에 감옥에서 사고사로 죽는 건 아닌지, 걱정되서 마음이 타들어갔다. [꼬맹아. 왜 대답 안 하냐? 징역은 면할 수 없어.] “알아. 아는데….” [왜. 이민우가 출소한 다음에 또 사고칠까봐? 아니면, 어떻게 될까봐?] “…….” 이선호네 집과 내가 얽힌 사연을 알고 있는 공유는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니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당장은 방법이 없어. '당장'은, 대외적 이미지 때문에라도 이철호건, 이선호건, 김동완이건… 한명 측에서 이민우에게 뭔 짓을 할 상황이 아니다~ 이 말이지.] “출소 한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공형사… 우리 민우는….” [일단, 그새끼 콩밥 먹을때 내가 잘 설득해야지. 무엇보다….] “무엇보다, 뭐?” 잠깐 말을 끊은 뒤, 공유가 말했다. 강인한 포부를 내리꽂듯. [이민우가 출소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한명그룹 이철호를 해결해야겠지. 나, 이 일에만 벌써 7년째, 김검사 밑에서 팀 짜서 있잖아.] “김검사?” [어. 김명민 검사. 강력계에서 알아주는 검사님이고, 그동안 모은 자료가 꽤 되니까, 시기를 노리는 중이야. 나중에 상황이 좀 조용해지면 꼬맹이 너도 김검사 만나 봐라. 지금 이민우 사건도 김검사가 맡고 있거든.] “아… 응….” [그리고 또… 이런 말 하긴 뭐한데, 문도천도 비리가 상당했었어.] “…….” [문도천이 회장이 된 것도, 다 이철호 덕이었거든. 둘이서 짜고 죽인 사람 숫자만 해도- …어쨌든, 이철호는 문도천보다 악질이야. 만만치 않을 거야. 당장 어떻게 되기를 바라지는 마. 알았냐? 그동안 문도천이니 이철호니 비리를 터뜨릴 수 없었던 건… 공화국이나 다름없는 한명을 건드리면 나라가 휘청일 정도여서 그런거거든. 이철호를 건드리려면, 일단, 그새끼 지위가 바닥에서 헤엄쳐야 돼. 하아~ 누가 좀 이철호를 배신 하고 맨 땅에 헤딩좀 시켜줬음 좋겠다!!! 아!! 짜증나!! 속옷 갈아입은지 삼일 넘었어….] 공유 형사의 투덜거림 시작됐다… 나는 뒷부분은 대강 흘려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김검사님한테 잘 부탁한다고 꼭 전해줘… 공씨….” [내가 입은 속옷이 정열의 빨간색인데 글쎄-] 틱… 힘없이 휴대폰 플립을 닫았다. 미친. 지가 빨간색 속옷을 입든 말든 나랑 뭔 상관이래. 어쨌든, 마음이 어제보다 약간 가벼워졌다. 적어도 이민우가 당장 어떻게 되는게 아니라는 확신이 생겨서였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대체…. …라고 고민한 지 이십분도 안 되서, 할 일 생겼다. “순돌이를요?” “그래. 혜성아. 너 바쁜거 아는데, 최성수 사장님하고도 통화 했거든. 진짜 너 말고 믿을 사람이 없어서 그런다. 삼일 휴가라면서, 그때까지만 우리 순돌이좀 봐 주라.” 이민우를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 첫번째. 순돌이 돌봐주기. 내게 많이 미안해 하는 고모 때문에 심장이 욱신거렸다. 내가 이정도 밖에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당장 경찰서에 찾아가고, 이민우 멱살을 쥐고 흔들면서 정신 차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내가 영화배우만 아니었다면… 정말 그랬다면… “혜성아. 너 볼은 왜 쥐 터졌냐… 응? 누가 그런 짓 했어.” “아, 저 괜찮아요. 고모. 저기… 이민우는… 어떻게 됐어요?” 며칠 사이 부쩍 늙으신 고모가, 내 말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혜성이 너는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 우리 민우가 니 앞길에 방해 될까봐 그렇잖아도 여기 저기에 알 만한 사람들한테는 부탁하고 있거든.” “고모….” 눈물이 핑 돌아서 주먹을 꽉 쥐었다. 고모가 그런 내 손등을 포근히 덮어주셨다. 토닥. 토닥. 토닥. 따뜻한 고모의 손바닥이 내 손등을 두드려준다. “미안하다. 혜성아. 고모가 해 준 것도 없이, 혜성이 너 곤란하게만 하네….” “아니에요. 아니에요.” 고모 미안해요… “너 밥은 먹었냐. 있어 봐. 경찰서 가기 전에, 고모가 너 먹을 거 좀 해놓고 가야겠다.” “안그러셔도 되요. 양종호가 이것저것 많이 갖다 줘요.” 고모의 아들이 나를 사랑한대요… 그래서 지금 철창에 갇혀서 재판 기다려요… “됐다. 밖에서 파는 거랑, 엄마들 손 맛이 같냐. 순돌이도 있고… 내가 후딱 해 줄게. 고모가 뭐 만들어줄까?” “…된장찌개요.” “그거 말고 또 뭐.” “그거면 되요. 삼일만 집에 있는걸요.” “그래… 알았다. 된장으로 또 뭘 만들지… 내가 저번에 보낸 씨래기 냉동실에 있지?!!” “네….” “잘됐네. 그거 된장으로 나물 해 놓고 찌개 하면 되겠다.” 고모… 죄송해요… 다 저 때문이에요… 고모는 나와 순돌이를 위해 마른 반찬만 다섯 가지나 해 주고 나가셨다. 물론 정신없이 만드신 거라서 평소보다 간이 덜 되었지만, 내겐 눈물겹게 맛있는 반찬이었다. 방에서 잠든 순돌이 쳐다보다가, 볼에 얼음찜질했다. 문정혁과는 여전히 전화가 불통이다. 일이 바쁜걸까? 아니면… 일부러 내 전화를 피하는 걸까? 이민우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하다. 이선호의 뒷통수를 제대로 친 전진에게, 문정혁에게 했던 습관대로 전화 할 뻔 했다. 휴대폰을 내 몸에서 멀리 떼어놨다. 그러고보니 전진은 문자 한 통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수도 없이 문자 보냈을 녀석이… 하긴. 갑자기 문자를 주고 받을 사이는 아니잖아. 전진이 왜 문자 안 보낼까-로 시작된 고민이, 나중에는 문정혁으로 도배됐다. 그가 전화하지 않는것, 아예 통화 자체가 안 된다는게 자꾸 내 숨통을 조였다. 나를 원망할까? 내게 배신감을 느낄까? 어느덧 내 상상은 문정혁이 나를 원망하는 쪽으로 맞춰졌다. 저녁 일곱시. 퀵서비스가 도착했다. 왠 퀵이지? 하면서, 부랴부랴 모자쓰고 마스크까지 착용해서 퀵 아저씨에게 수취인 싸인해줬다. 황금색 머리카락 가릴 겸, 나 못 알아보게 할 겸 마스크 착용한건데, 퀵 아저씨는 일 하느라 바빠서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괜히 나 혼자 유난이다. 순돌이가 깰까봐 푸석대는 포장지에 싸인 것을 조심조심 풀었다. 내 몸집만한게 도착했다. 팬이 보낸건가? 발송인이 누군지 물어보지 않은 나의 실수여… “어? 카드다….” 푹신푹신한 내용물을 확인하기 직전, 맨 위 포장을 뜯자마자 분홍색 카드봉투가 살며시 뺨을 내밀었다. 뭐지? 뭐지? 봉투를 열었다. “!!” 예쁜 하트로 꾸며진 카드… 자필로 써진 내용을 읽자마자,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퐁퐁 솟았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전화 못해서 미안해.- 문정혁이 급하게 휘갈겨 쓴 흔적… 어느 때보다 나를 안심시키는 편안함과 자상함에, 나는 한참을 울었다. 역시 문정혁을 과소평가 해서는 안되는 거였어… 그는 내가 이민우 때문에 자기를 두고 어떤 걱정을 할 지 벌써 꿰고 있었다. 하긴. 똑똑한 놈이니 그정도 추측은 가능했겠지. 그래도 그렇지… “곰탱이다….” 카드에 이어서 보이는 문정혁의 선물. 참 오랜만에 내게 돈지랄 해주는 문정혁의 선물은, 돈지랄을 줄일 거라는 문정혁 답게, 대왕 곰인형이었다. 하얀 북극곰이 하트 털 쿠션을 껴안고 있었다. 바보. 그래도 한 번은 직접 찾아오거나, 연락 해 주지… 그를 이해하면서도 서러워지고, 고맙고, 미안하고, 또 서러운 마음이 교차되었다. 불안했던 마음이 사라져서 그런가. 나는 어느새 '당연히'바쁜 문정혁을 야속해 하며, 곰인형에게 돌려차기를 시작했다. 다음날, 느즈막히 일어나자마자 순돌이랑 밖에 나갔다. 나랑 만난 것만으로도 좋아하는 순돌이… 그동안 살이 더 쪘다. 하얗고 토실토실한게, 문정혁이 준 곰탱이랑 닮았다. “삼촌! 어디가?” “응. 양종호 삼촌네.” “삼촌! 어디가?” “…….” 안 본 사이에 순돌이한테 나쁜 습관이 생겼다. 자기가 원하는 대답 들을 때까지 계속 같은 질문하기… 으이그. 순돌이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순대 먹으러 가.” “우와!!” 하여간 자기 멋대로 구는건 전진이나 순돌이나 똑같다. …갑자기 왜 전진이 생각났을까. 전진이고 문정혁이고 둘이 서로 사랑에라도 빠진건지, 나한테 연락이 없다. 그저께는 시원하게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8월 답게 더위가 작렬한다. 아줌마들이나 사람들이 알아볼까봐 일부러 오전 11시에, 그것도 모자에 마스크까지 하고 밖에 나왔는데… 사람들이 알아보기 전에 일사병으로 죽을 판이다. 시장골목에 들어가니, 내 예상대로 한산한 풍경이 시선에 잡혔다. 모자를 더 깊이 눌러쓰고 순돌이 손을 꼭 잡았다. 아장아장 걷던 순돌이가 습관처럼 내 뒤에 숨는다. “어? 오랜만이네?” “응. 답답해서 시장 나왔어. 너도 볼 겸.” 양종호네 반찬 가게라는 걸 기가 막히게 눈치 챈 순돌이… 그런 순돌이가 반가웠는지 양종호가 눈을 빛낸다. “순돌아!! 잘 있었어?!!” “히익!” “하하하. 짜식이 부끄럼이 많다!!” 순돌이를 업고, 순돌이가 부끄러움이 많은 줄로 오해하는 양종호와 삼십분 넘게 수다 떨었다. 양종호는 이른 시간부터 반찬 진열하느라 손이 바빴다. 멀뚱히 서서 이민우 얘기하던 나도 함께 도왔다. 진열이 거의 끝나자, 양종호가 시원한 생수를 준다. 순돌이는 내 등에서 잠들어 있었다. “새벽 장사할때가 희한하게 손님이 많아.” “근데 이렇게 자주 음식 교체해야돼?” “날이 더워서 잘 상하잖냐.” “아….” 이 반찬 저 반찬 구경하는 나를 두고, 한참을 골몰하던 양종호가 어렵게 질문을 던졌다. “저기… 그럼. 이민우는 출소 한 다음이 문제인거냐?” “어? 어… 추측이긴 하지만… 안심할 상황은 아니지.” “하필이면 이선호네 집에서… 쯧쯧.” 이때 순돌이가 깨는 바람에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삼촌. 나 순대.” “…….” 내가 오만 인상을 쓰자, 양종호가 킥킥 웃으면서 절룩대는 다리로 냉장고 쪽에 걸어간다. “양종호! 나 갈게!” “잠깐만!” “?” 반찬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낸 양종호가 우렁차게 외친다. “너 주려고 사골 우렸어! 한 번 뎁혀 줄테니까, 집에 가서 또 뎁혀라!” “응. 알았어.” “십분 있다가 와! 가서 순대 먹고 있어. 이따가 잠깐만 가지러 와.” “그래… 고맙다. 양종호, 사골 값도 쳐 줘. 돈 줄게.” “깐다! 새끼야! 꺼져!!” “하하하하….” 예전에 나와 순돌이가 단골로 자주 찾던 분식 리어카는, 양종호네 반찬 가게에서 턴 하면 나온다. 걸어서 열 걸음. 시장 중간의 삼각 길에서 양종호네 반찬가게는 오른쪽, 분식 리어카는 반찬가게에서 턴 하자마자, 왼쪽 길을 마주보며 서있다. 소박하니 긴 나무 의자에 순돌이를 앉혔다. 분식집 아줌마가 오랜만에 왔다며 나를 보고 반가워한다. 아마, 내가 마스크 쓰고 모자 써서 그런지 신혜성이라는 걸 모르나보다.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척 하는 건가? “순돌아, 순대 먹을거지?” “응!! 응!!” “아줌마. 여기 순대 1인분이요.” 아줌마가 주는 순대를 진짜 맛있게 먹는 우리 순돌이… 한가하고 평화로운 시장골목. 어쩐지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순돌이가 순대를 반쯤 비운 것을 보다가, 무심코 시계를 보니 아차, 15분이 지났다. “순돌아. 잠깐만 이거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어?” “엉!!” 내가 아닌 순대 쳐다보면서 씩씩하게 대답하는 순돌이를 보니, 얄밉다. 재빨리 턴 해서, 양종호네 반찬가게로 갔다. 과연, 사골 국물을 봉지에 세 겹으로 싼 것도 모자라, 들고 가기 편하게끔 종이 봉투에 담은 양종호가 나를 보고 씩 웃는다. “양이 장난 아니네? 야. 그냥 돈 받아라, 양종호. 번번히 받아 가기 미안하잖냐.” “아 빨리 가져가!! 바뻐!!” “어휴….” 괜히 성질은… 내가 고마워 할 때마다 양종호는 저런식이다. 승질내면서 얼굴 붉어지기… 두둑한 쇼핑백을 들고 열 걸음도 안 되는 분식 리어카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줌마, 우리 순돌이 어딨어요?!” 순돌이가 보이지 않았다. 순대도 약간 남은 상태인데, 내가 사라진 1분 남짓 사이에, 애가 없어진 것이다. 내 말에 아줌마도 당황한 낯으로 얼버무렸다. “아… 그게… 왠 깡패 같은 새끼들이….” “뭐라고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백짓장같이 새하얘진 난,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말도 안 돼. 무슨 소리야. 그때, 멀리서 '우아앙-' 하는 순돌이 울음 소리가 들렸다. “순돌아!!! 순돌아!!!!” 정신없이 달려갔다. 심장이 턱까지 뛰었다. 내 평생 이렇게 빨리 달려 본 적은 처음이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온 혈관과 심장이 요동치는 만큼 동공도 좁아졌다. 시장 끝에 있는 좁고 어두운 골목. 거기에 순돌이가 있었다. 내가 다가서자, 순돌이가 내 품에 와락 안기며 엉엉 울었다. “삼,촌, 우헤엥-” “어, 어어. 그래. 순돌아. 너 대체….” 그리고,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나는 벌떡 일어나서 뒤를 돌았다. 서늘한 그림자가 하나 둘 엄습하는게 느껴진 것이다. 순돌이도 놀라서 울던 것을 멈추고 내 뒤에 숨어서 훌쩍였다. “누구…세요…?” 방어 자세로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분식집 아줌마 말대로, 깡패 같은 새끼 두 놈이 어슬렁거리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하지만, 보통 깡패라고 하기엔 분위기부터 달랐다. 껄렁대는 눈빛이 아니라, 차분하고 단정한 표정부터, 우람한 덩치, 어두운 계열의 수트… 마치, 이선호네 집을 지키고 있던 보디가드들처럼…. “저기요. 갑자기 왜 애를 데리고 여기에….” 내 말은 그게 끝이었다. 엄청난 힘이 복부를 가격했기 때문이다. 말 한 마디 없이, 이렇다 할 설명조차 없이 무조건 나를 유인해서 폭행하는 두 사내. 태권도 공인 3단인 나라고 해도, '실제 주먹질'에 능한 사내들의 몸놀림에는 속수 무책으로 무너졌다. “삼촌!! 삼촌!! 우, 우흐, 우흐!! 삼!!촌!!” “헉! 허억! 왜, 왜이러- 어헉!” 퍽- 퍼퍽-! 잘도 보이지 않는 데만 골라서 치는 새끼들. 입 밖으로 위액이 쏟아질때까지, 놈들은 인정사정 없이 내 복부와 가슴을 공격했다. 눈앞이 핑글 돌아갔다. 그때, 한적한 골목 입구에 누군가 나타났다.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정의의 용사처럼 나타난 낯선 남자.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인데…? 그 남자는 무조건 당하기만 하는 내 앞에 서서 두 사내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벽에 손을 얹고, 내 뒤에서 여전히 울고 있는 순돌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내가 맞았던 것처럼 흠씬 얻어 터지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이럴수가. “선생님!!” 강봉팔. 강봉팔 체육이 틀림없다. 내 기억속에서는 노상 실연당했던 인물로 각인된, 강봉팔이 여기서 왜? 이 동네에 사는 강봉팔이, 오랜만에 보는 강봉팔이… …먼지나게 맞고 있었다. “응? 혜, 혜성이냐? 어헉! 우욱!!” “!!” 어떡해… 어떡해…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뒷발 돌려차기 자세를 잡는데, 갑자기 먼 거리에서부터 호각 신호가 울렸다. 휘리릭!! 휘리리릭!!!! “!” “!” 아무리 좁고 어두운 골목길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오가는 시장이 코 옆이었고, 대낮이었다. 따지고 보면 파출소도 굉장히 가까운 거리. 미친놈 아니면 대낮부터 사람 패는 게 비정상인 상황. 차차 가까워지는 호각 소리에, 사내 두 놈이 여전히 차분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이정도면 됐겠지?” “응. 이 정도면 된댔어.” 한 번에 알아듣기 어려운 말만 짧게 내뱉은 후, 두 놈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골목 반대편으로… 두 놈이 도망친 즉시, 골목길 입구에서 양종호가 다리를 절룩대며 빠르게 다가왔다. 입가에는 호루라기를 문 채로… “야!! 괜찮냐?!! 아줌마가 너 이쪽으로 갔다잖아!!” “양종호… 으윽. 어떻게….” “신혜성. 니가 김치 빼놓고 가서, 그거 주려고 했다가… 많이 다쳤어?” “아, 아니 괜찮아. 아앗.” “삼촌! 삼촌!! 흐윽! 흐윽! 삼촌!! 흐아아아앙!! 삼촌!!” “안되겠다. 업혀라. …근데, 이 사람은 누구야?” 양종호가 부축해주는 대로 배를 부여쥐고 일어선 나는, 졸도해버린 한 남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서 허둥지둥 다가갔다. “종호야!! 어떡하지? 강봉팔이야!!” “강봉팔? 흠… 누구지?” “미친!! 우리 고삐리때 체육!!” “!!!” 정의의 기사처럼 나타났던 강봉팔 체육. 몇 년 만에 다시 보는 선생님… …기절한건지 깨어나지 않는다. 양종호는 재빨리 떡집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봉팔이를 떡집 아저씨 등에 업혔다. 인근 개인 병원 치료실에서 봉팔이를 치료 받게 한 뒤, 나도 병원 밑에 있는 약국에서 파스를 왕창 샀다. 집에 가서 배하고 가슴에 붙여야겠다. 삼십분 뒤, 강봉팔이 깨어났다. 선생님- 하고 부르자마자, 봉팔이가 한 대답이 가관이다. “혜성아. 싸인 하나만 해 주라.” “네에?” 알고보니, 시장에 생수 사러 왔다가, 멀리서 나를 보고 긴가 민가 해서 계속 곁눈질 했다던 강봉팔 체육… 어쨌든 강봉팔 덕분에 몇 대는 더 맞을 뻔 했던 내가 그나마 살았다. 그런데… 대체 어떤 새끼들이었을까. 대체… 대체… 설마, 이선호가 푼 새끼들일까. 머릿속이 복잡하다. 오랜만에 만난 강봉팔과 짧은 대화를 마치고, 나는 순돌이 업고 집으로 돌아갔다. 마을 버스로 세 정거장 밖에 안 되는 길이지만, 결국 택시를 잡아 탔다. 허리를 펼 수 없을 만큼 극심한 고통이 뇌에 쳐들어왔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강봉팔이 쓰러진 덕분에 놀라서, 다친 직후에는 내가 얼마나 아픈지 인식이 안 됐었는데… 지금은… 죽을 지경이다. “삼촌. 괜찮아? 삼촌!!!” “으… 으으….” 가까스로 택시값을 지불했다. 휘청휘청- 어떻게 집 앞에 왔는지 모르겠다. 집에 들어가서도 내가 계속 아파하니까, 순돌이가 또 운다. 나는 순돌이를 달래주지도 못했다. 너무 아파서 손가락도 까딱 할 수 없었다. 아까 맞은 직후에 통증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 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와… 그새끼들 진짜 대단하다. 과학적으로 사람 친건가… 한시간이 넘도록, 거실 바닥에서 뒹굴었다. 식은땀을 쏟아내느라 바닥이 흥건히 젖었다. 온 몸에 열꽃이 피었다. 가슴이… 너무 아프다. 어떻게 이렇게 아플 수가… 혹시 갈비뼈가 잘못됐나? 상황이 안심되면 될수록, 가슴팍에 누가 식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파고들었다. 그때, 순돌이가 쪼로로 달려와서 내게 소리쳤다. “삼촌!! 초인종! 누가 초인종 눌러!!” “으… 응?” 사물이 흐릿해지는 찰나에, 누가 우리집 벨을 무식하게 눌러댔다. 혹시, 아까 그놈들인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어떡해… 어떡해… 나는 쥐어 짜듯, 간신히 말했다. “수… 순돌아. 문… 열어주지 마… 알았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순돌이가 겁에 질려서 알았다고 대답하며 내 이마에 고인 땀을 고사리 손으로 닦아 줬다. “하아… 하아… 하아….” 시간이 지날수록 아프다. 나도 병원에서 진료 좀 받을걸. 그때, 순돌이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삼!!!!!!촌!!!!!!! 도둑!!!!!! 도둑!!!!!!!” “하아… 뭐…?” “삼촌!!! 삼촌!! 도둑 들어와써!!! 삼촌!!!” “!!!” 뭐라고? 가물가물해진 의식 끝에서, 어떻게든 순돌이를 지켜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어금니에 힘을 줬다. 허리를 구부린 상태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다가 콰당!! 하고 쓰러졌다. 순돌이가 덜덜 떨면서 내 옷 옆구리를 꽉 잡았다. 순돌이 말마따나, 우리집 1층 베란다 창을 통해서 시커먼 사람 그림자가 들어왔다. 아아, 이대로 죽는구나- 싶을때, 용감하게 쳐들어온 도둑이 괴성을 질렀다. “공주야!!!” “삼촌!!! 삼촌!!!!” 전진…? 전진이 어떻게… “공주야!!! 공주야!!! 공주야!!!!” “삼촌!!! 삼촌!!! 삼!!!촌!!!!” 내 귓가에 대고 젖먹던 힘까지 다 해서 외치는, 두 아기의 비명 속에… 나는 스르르 의식을 놓았다. 배와 가슴이 터지기 전에, 청각이 아작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프다. 아프다. 하지만… 푹신하고, 편하다… 잠에서 깨기 직전, 피부에 닿는 여러 느낌이 내 인상을 찡그렸다가 미소짓게 했다. “으윽.” 눈을 떴다. 절로 신음이 빠져나갔다. 병원인가? 아니면, 내 집? “?” 천정이 낯설다. 약간 고개를 돌렸다. 푹신하고 편한 퀸사이즈 침대와 장밋빛 시트와 이불. 침실 특유의 분위기… 병원도 아니다. 누가 내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자동으로 손을 시작으로 시선을 따라가다가,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전진….” 내 손을 꼬옥 쥔 전진이 바닥에 앉아서, 고개는 시트에 파묻고, 잠들어 있었다. 끼익…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타난 사람은… 맙소사. 문정혁이었다. “깼어?” “문정혁… 여기… 어디야?” “내 집.” “아….” 참 오랜만에 머릿속을 스치는 단어가 있다. '그것들.' 둘이 함께 있을때만 연상되는 힘의 단어. 왜 이 순간 '그것들'이라는 단어가 회오리처럼 영혼을 스쳤을까. “갈비뼈 하나 나갔대. …이선호가 심은 새끼들일거야. …고개 들지 말고 누워.” “…….” 왜 내가 문정혁 집, 문정혁 침대에서 가슴에 붕대 감고 누워있지…? 눈을 말똥말똥 뜬 채 골몰하는 내게, 문정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건 전진 침대야.” “?” “야!! 일어나!!” 문정혁이 전진의 등을 발로 차 댄다. 굉장히 시니컬한 목소리… 은테 안경까지 쓴 문정혁은 어딘지 예민하고 사나워 보였다. 아, 그건 그렇고… “우리 순돌이는?! 순돌이는 어딨어?!” 목청 높여 순돌이부터 찾았다. 우리 순돌이는 어딨지? 내가 당장 울 것처럼 굴자, 문정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내 오른편에 푹~ 눌러 앉아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다. “…걔 이름이 순돌이야? 계속 울다가, 먹을거 쥐어 주니까 지금은 만화 영화 보면서 끊임없이 먹고 있어. 걱정하지 마.” “…….” 문정혁이 나와 스킨쉽 하고 있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 챈, 전진이 벌떡 일어났다. 전진은,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침대 왼쪽에 앉아서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 “꺼져. 문곤. 공주한테서 손 떼. 여기 내 침대야.” “지랄하네. 이틀 전부터 얹혀 살겠다고 지 맘대로 정해 놓고.”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내 양 옆에 앉은 문정혁과 전진. 그리고 문정혁의 집. 상황 정리가 안 된다. “신혜성.” “응?”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걸 충분히 아는 문정혁이, 침착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일이 좀 해결될때까지 여기서 살아. 너 집에 혼자 있는거… 도저히 안되겠어.” 나 다음주부터 다시 강원도에 가는데… 라고 말하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짓눌려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전진이 우리집 베란다 창문 넘어서 쳐들어왔고, 여기까지 데려온 모양이다. 잠깐. 문정혁네 집에서 생활한다는건… 보아하니, 여기는 전진 방이라는데… 전진이랑, 문정혁이랑, 나랑. 셋이서 생활하게 된다는 건가? “대책을 세워야겠더라고.” 전진이 내 어깨를 편하게 안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근데, 제일 좋은 방법이 함께 지내는 거였어.” 전진의 말에 문정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진이랑 나랑, 사실… 몇 년 간 서로 연락도 안 했다가, 얼마 전부터 연락이 닿았는데… 계기가, 아버지의 죽음 이었어. 씁쓸하지?” 문정혁… 그는 웃고 있지만 그의 눈동자는 슬픔에 파도치는 것을. 잠시후, 문정혁인지 전진인지, 하여간 둘 중 한 명이 다부지게 말했다. “우리 둘 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어.” 전진과 문정혁. 오랜만에 함께 보는 '그것들'은 묘한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다는 것. 그리고, 신혜성을 사랑한다는 것… “너희 아버지라면… 문도천 회장님?” 문도천 이라는 이름을 귀로 듣는것과 내뱉는 것은 차이가 대단했다. 누구나 그렇듯 듣는 것은 뉴스나 신문의 글자처럼 익숙했다. 그러나 내 입으로 문도천 이라는 이름을 내뱉는 순간, 그 이름이 과거에 지녔던 대단한 힘이 모조리 쏟아지는 듯 굉장한 압력이 밀려왔다. 문도천 회장의 공식 아들 문정혁, 혼외 자식인 전진. 그래서 둘은 누구나 돌아볼 수 밖에 없는 마력을 지닌 '그것들'일 수밖에 없다. 내 중얼거림에 문정혁이 대답했다. “그래. 문도천 회장. 지금쯤 하늘에서 '고것들 봐라?'식으로 지켜보고 있겠지.” 저 말에 그럴싸하게 대답해 줄 게 떠오르지 않아서 고심하는 나와 달리, 전진이 받아쳤다. “응. 하늘에서 죠낸 후회하고 있을거야.” 후회 라는 단어에 문정혁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올라갔다. “왠 후회?” “전진한테 더 잘해줄걸, 우리 진이를 진즉에 제대로 키워줄걸, 우리 진이가 저렇게 잘생겼다니, 우리 진이가….” “미친새끼. 놀고 자빠졌네.” “…뭐야 개새끼야? 너 지금 우리 공주 앞에서 뭐라고 했어.” “지랄한다고 했다. 왜. 공주같은 소리 하네. 씨발. 몇 년이나 다른새끼랑 콩이나 까댔으면서.” “!! 내가 그 말 하지 말랬지!! 씹새끼야!!” “그만 해!! 문정혁!! 전진!! 당장 양 팔을 뻗어서 둘을 말렸다. 짐승같은 놈들. “너 우리 공주 아니었으면 뒤졌어, 고맙다고 밤새 기도나 해라. 개새끼야.” “무식한 새끼. 사람이랍시고 달린 아가리로 잘도 떠드네.” “그만 하라니까!! 문정혁!! 전진!!” 나를 사이에 두고 침대 양 옆에 앉은 두 놈이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는 꼴이라니. 잘생기긴 진짜 잘생긴 녀석들이 이렇게 유치할 줄이야. 내가 과연 여기서 살 수 있을까. 문정혁과 전진이 함께 살고 있는 집은 아파트형 오피스텔이었다. 그것도 태풍고에서 가까운 목동에 위치한 오피스텔. 17층 꼭대기에 있는 50평형. 방이 세 개 였는데 굉장히 넓었다. 문정혁은 집이 좁다고 난리였고, 전진은 냉장고에 음식이 없다고 짜증내기 일수였다. 그러나 입으로는 투덜대고 친근한 말 한 마디 안 하는 사이였어도, '사무실'용도로 사용하는 서재에 둘이 들어갔다 하면, 굉장한 집중력을 보였다. 문정혁과 전진. 둘은 마치 문도천 회장을 반으로 나눈 작품같았다. 완벽하고, 압도적이며, 카리스마가 넘쳤다. 다음날, 내가 다쳤다는 소식이 톱뉴스로 기사에 실렸다. 오전에 오피스텔로 찾아온 최성수 사장과 매니저 형에게 두시간 넘게 잔소리를 들었고, 기획사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신혜성 사고 소식이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켰다. 울먹이는 팬들의 응원 메시지까지 연예프로그램에 나왔으니까. 기사 내용은 단순했다. 아니, 쪽팔려서 누구한테 알려주기도 뭐 했다. 내가 계단에서 굴러서 갈비뼈가 나갔다는 것이다. 어쨌든 신문에서 내 소식을 접한 고모는, 이민우 일로 정신없는 와중에도 오피스텔까지 찾아오셨다. “죄송해요….” 착찹한 낯으로 떠듬떠듬 말하는 내가 가여웠는지, 고모는 바리바리 싸 온 여러가지를 풀어주며 손사래를 치셨다. “돌아다니지 말고 누워라.” “괜찮아요.” 집안에서는 적당히 움직이는게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고모는 기어코 나를 침대에 눕혔다. “몇 주 쉰다고 했지?” “네. 총 3주요. 음반 일은 어떻게 스케줄 빼는게 가능한데, 영화 촬영은 가뜩이나 늦어 있어서… 강원도에서 통원 치료 받으면서 촬영 하면 된대요.” “에그… 몸 다 나을 때까지 애를 쉬게 해야지. 고모는 맘에 안 든다.” “아니에요! 3주면 괜찮댔어요. 의사 쌤이….” “됐고, 이거나 마셔봐. 혜성아.” “…이게… 뭐예요, 고모?”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한약 봉다리가 무더기로 나타났다. 나는 인상을 팍 쓰면서 코를 막았다. 웬만한 보약은 다 먹겠는데, 이건 좀 이상하다. “몸에 좋다는 동물 피랑, 여러 좋은 한약재 섞은 거야. 요즘 혜성이 니가 살도 많이 빠졌고 해서, 고모가 후다닥 지어 왔다. 마셔.” “윽….” 사약같은 거무죽죽한 물을 한 모금 마시다가, 고모 뒤에 멀뚱히 서 있는 두 남자를 쳐다봤다. “고모… 저기. 제 친구들도 같이 마시면 안될까요?” “!!” “!!” 내 말에 문정혁과 전진의 눈동자가 엄청 커졌다. 고모에게 깍듯이 인사했던 문정혁과 전진. 둘은 지금 어색하게 고모 뒤에 서서 나랑 똑같은 표정으로 쓴 약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고모가 그럴까? 하며 뒤돌아보는 즉시, 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저, 진짜 괜찮습니다. 고모님.” 문정혁이 최대한 인내하며 사양하다가, 결국 고모가 내민 한약을 삼켰다. 그리고 전진은… “아줌마. 저는 선수이기 때문에, 이거 마시면 약물검사에서 걸려요!!” 스켈리톤 선수임을 강조하며, 뜨거운 한여름에 보약을 피해갔다. 웃기고 있어. 내가 말했다. “아니에요. 고모. 전진도 보약 먹어도 돼요. 어차피 올해 말까지는 훈련 없댔어요.” “!!” 결국 전진도 우리 고모가 내민 보약을 꾸역꾸역 삼켰다. 둘 다 눈동자로는 나를 죽일 듯이 원망하며… 고모는 순돌이를 데려가셨다. 내게 삼일만 맡기겠노라 열심히 부탁하셨었는데, 코 끝이 찡해질 만큼 죄송하다. 고모와 고모부는 이민우 일 때문에 정신없는 와중에도, 늘 내게 미안하다고 뜻을 전하셨으니까. 김명민 검사와 재판 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 공유 형사가 문자로 짧게 알려줬다. 형이 예상보다 짧아질 모양이란다. 나는 겁이 났다. 징역 형이 짧아지는 만큼, 이민우가 출소한 뒤에 다칠 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이 1분에 한 번씩 뇌를 짓눌렀다. 매니저 형이 목동에 있는 내 집에서 간단한 옷가지들을 챙겨 왔다. 전진과 문정혁이 한 방을 쓰고, 나는 전진 방에서 당분간 생활하기로 했다. 그래서 문정혁 방에 들어가면, 침대밖에 없다. 킹사이즈 침대 두 개. 둘 다 미쳤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선호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민우를 미끼로 나를 불러서 곤욕을 겪게 했던 이선호. 순돌이를 미끼로 내 갈비뼈를 부러뜨린 이선호. 다음은 뭘까…? 나는 이선호의 침묵이 어느 때보다 두려웠다. 그러나 이선호에게 전화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찾아갈 용기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선호를 생각하면 전진이 자동으로 떠올라서 괴로웠다. 어쩌면 후자의 이유로 나는 이선호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전진과 이선호가, 4년간 섹스를 하고 함께 지냈다는 것. 물론 전진의 계획으로 연기 된 일상이었겠지만, 나는 그 점이 가슴 터지게끔 괴로웠다. 한때 내가 죽도록 사랑하던 전진이, 내가 죽도록 싫어하는 이선호와 함께 지냈다는 것. 그 점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상상만으로도 괴로운데, 사실이라니, 문득 문득 떠오를 때마다 가슴을 부여쥐었다. 오피스텔에서 지낸지 삼일. 첫 날과 둘째날에는 고모부와 기획사 식구들이 차례로 들락날락 거리는 바람에, 문정혁과 전진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당히 어색해진 공기가 우리 셋을 조이기 시작했다. 공기를 어색하게 만든 원흉은, 바로, 나였다. 처음에는 장난도 잘 치고, 이런저런 말도 잘 하던 문정혁과 전진은,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다물고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말 한 마디 없이 하루종일 지냈으니까. 전진 얼굴 보면 이선호가 떠올라서, 그게 괴로워서, 무조건 전진과 말 한 마디도 안 했다. 만약 전진과 나, 단 둘만 있는 공간이라면 한바탕 큰 싸움이 났겠지만, 문정혁이 함께 있는 관계로 우리 사이는 침묵으로 어색하게 도배되었다. 회사에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는 문정혁도 마찬가지였다. “식사 하세요….” “…….” “…….” “…….” 한남동에 있던 문정혁의, 아니, 문도천의 집에서 일했던 아줌마가 식사하라는 소리에, 우리 셋은 각자 하던 일을 멈추고 식탁에 모였다. 전진은 아직 화장실에서 안 나왔지만, 하루종일 유지한 어색한 분위기는, 문정혁과 단 둘임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았다. 첫날, 내게 죽을 만들어줬던 아줌마는 급격히 변한 우리의 분위기가 이상했는지 나갈 채비를 꾸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유. 왜이렇게 삭막해요? 도련님. 괜찮아요?” “아, 네. 괜찮습니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식탁의 상석은 문정혁 자리였다. 서재에 짱박혀 있다가 저녁 식사 하러 나온 문정혁은 오만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일이 잘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나 때문인가… “신고양이.” “응?” “빨리 우리 둘이 살아야 될텐데….” “…….” 나 때문이구나… 내가 전진 신경쓰느라 문정혁에게 살갑게 접근 못하듯, 그건 문정혁도 마찬가지였나보다. 전진은 나한테 문정혁과 왜 사귀었어- 라고 계속 따지고 싶은 것을 참았고, 문정혁은 자기도 전진을 신경쓰면서, 내가 자기에게 특별하게 대해주지 않아서 서운한 듯 했다. 나도 돌겠다. 전진 얼굴보면 이선호랑 섹스 몇 번이나 했냐고 따지고 싶고, 문정혁 얼굴 보면 껴안고 쉬고 싶다. 누가 보면 유치하다고 할 만한 신경전이었지만, 우리는 심각했다. 문도천과 이철호. 이민우 일이 걸려 있으니 망정이지, 누구 하나 폭팔해서 사랑을 거들먹거리며 따지다간… …우리의 관계는 단숨에 무너질 것이다. 해결해야 할 사안이 뫼비우스의 띠 처럼 기이하게 얽힌 와중에, 감정적 체력적으로 소모할 시간은 없으니까. 전진도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나랑 둘이 있을 때처럼 문정혁한테 갔네 마네 식으로 덤비지 않았다. 아니, 욱하는 성질을 겨우겨우 참고 있었다. 그때 욕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전진이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나타났다. 호랑이도 지 생각하면 나온다더니… 아, 이건 아닌가. “냄새 죽인다.” 당연하다는 듯 내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맞은편에 앉은 전진… 마주보기 민망할 만치 섹시하다. 골반을 두른 흰 타올… 말끔한 와이셔츠 정장 차림인 문정혁도 코피나게 근사한데, 전진은 반대의 섹시함으로 나를 공격한다. 두 놈 다 화보 찍냐고…. 앗. 전진이 볼 꼬집은 덕분에 볼에 물이 맺혔다. 물기를 손바닥으로 닦으며 무의식중에 전진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 내가 지 피하니까 녀석이 금방 우거지상을 쓰면서 노려본다. 그래도 깜짝 놀랐다. 갑자기 눈 마주치자마자 윙크 할 줄이야… 잘생기긴 진짜 숨막히게 잘생겼어… 전진의 노골적인 시선을 받자니 엉덩이가 따끔거린다. 조용히 숨을 내쉬며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는데, 아줌마가 내게 말했다. “신혜성씨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도련님들은 날 것처럼 싱싱한 상태로 무친 반찬을 좋아해서….” 문도천이 싱싱한 반찬을 좋아했나보다… “아니에요. 저 아무거나 잘 먹어요, 아줌마. 잘 먹겠습니다.” “작은 도련님, 그저께 냉면 맛있게 드시길래 작은 도련님거 냉면도 따로 만들었어요.” “공주야. 몸은 좀 어때?” 저 싸가지 없는 새끼… 전진은 여전히 남한테 불친절하다. 자기 입맛에 맞는 냉면 만들었다고 친절하게 말을 붙이는 아줌마한테 눈길 한 번 안 줬으니까.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다. 상석에 앉은 문정혁, 왼쪽에는 나. 오른쪽에는 전진이 앉았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줌마는 전진이 무시하는 거야 대수롭지 않았는지, 혹은 문도천의 집에서 늘 있던 일이었는지, 공손히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오후에 와서 저녁때까지 일하고 퇴근하는 아줌마가 사라지자 마자, 나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문정혁이 내 팔목을 꽉 잡았다. “왜.” 두근… 문정혁과 가벼운 스킨십… 참 오랜만이다. …나는 이와중에 이딴 생각이나 하다니…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밥 생각이 별로 없어. 하루종일 누워 있었더니….” “그래도 먹어. 아줌마가 버섯죽 끓였잖아.” …그게 문제거든. 나는 왜 죽만 먹냐. 벌써 삼일째 죽만 퍼먹었어… 내가 문정혁 옆에서 발그래진 볼을 푹 숙이는 걸 똑똑히 목격한 전진의 안면이 싹 굳었다. 전진이 냉면 먹던 젓가락을 탁! 소리나게 식탁에 내려놨다. “그 손 놔. 문정혁.” “혜성아. 그래도 조금만 먹어. 앉아.” “문곤. 우리 공주한테 명령하지 마.” 삽시간에 분위기가 험해졌다. 내가 집에 있어서 그런지 오후 네시에 퇴근하고 집에 일찍 돌아왔던 문정혁… 작정한 것처럼 나를 살피면서 집에 붙어있던 전진… 저녁 식탁 자리에서 처음 입을 뗀 우리들은 아슬아슬한 줄 위에 선 것처럼 위태로웠다. 나는 조용히 앉아서 죽을 퍼먹었다. 그러나 숨막히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결국, 참을성 제로인 전진이 재빨리 밥을 해치우고 먼저 일어나서 베란다로 가버렸다. 작게 욕을 지껄이며 담배 피우는 전진의 등이 어딘지 외로워 보였다. 근데 옷이라도 좀 걸치지… 허리에 타올만 두른채로 저렇게 베란다에 있으면… 모기 물릴텐데… “…….” “…….” 식탁에 남은 사람은 문정혁과 나. 문정혁은 여러 번 나와 시선을 부딪혔다. 그리고 속삭여 주었다. 사랑한다고.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아달라고. 꼭, 우리 행복해지자고… 일할 때는 굉장히 무서운 얼굴인데,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나를 대한다. “내일은 아줌마한테 신고양이 좋아하는거 만들라고 할게. 뭐 먹고 싶어?” “진짜?! 진짜?! 나 아구찜!!” “…그거 빼고.” “왜? 매콤한게 땡기는데….” “위 버려. 안 돼. …너… 아픈거 싫어.” “아~ 네. 그러세요? 지는 그냥 쌀밥이면 됩니다요.” “…하하하.” “왜 웃냐? 짜증나….”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웃는 문정혁이, 오랜만에 단 둘이 있어서 그런지 행복하게 미소짓는다. 내가 자기를 비꼬는 줄도 모르나보다. 나도 덩달아 웃었다. 물론, 우리의 화목한 모습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전진이 씩씩대며 다시 식탁에 나타나는 바람에 웃던 것도 멈춰야 했지만… 문정혁하고 전진. 둘은 서로에게 말도 잘 안하고, 특히 내가 있을땐 건조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첫 날 내가 이 집에 실려왔을땐 잘만 떠들더니… 하긴. 그땐 나도 경황이 없어서 잘 얘기했었지… 문정혁. 그리고 전진. 혹은 그것들. 둘은 신기할 정도로 닮지 않았고, 신기할 만큼 닮은 부분이 있다. 그것들이 함께 있을때 퍼지는 오라는 그래서 어마어마하다. 나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시선을 흐트리며 멍하니 생각에 빠진 나를 깨운건, 문정혁의 다정한 목소리였다. “다 먹었어?” “응….” 나를 챙겨줄때의 문정혁은 굉장히 자상하다. 목소리만 들어도 온 몸이 녹을 만큼… “잘했어.” “…….” 문정혁이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동시에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가슴에 짜릿한 별이 반짝였다. 문정혁. 그는 존재만으로도 나를 지탱해줬다. 그리고 나를 설레이게 한다. 전진을 보며 아파하는 가슴처럼, 문정혁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그리운 느낌에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문정혁이 설겆이하는거 구경하다가 살을 북북 긁는 소리에 전진에게 내 시선이 돌아갔다. 팔이고 다리고 할 것 없이 미친듯이 손톱으로 살을 긁던 전진이, 내가 자기 쳐다보는 거 알고 행동을 멈춘다. “왜 그렇게 긁어?” 약 삼일만에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전진이 좀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면서 반가워하기도 잠시, 다시 긁기 작업을 시작했다. “모기 백 대 물렸다! 아! 졸라 간지러… 나 불쌍하지….” “쿡….”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동정표를 구하고자 하는 전진. 그러게 누가 타올만 걸치고 베란다에서 폼 잡으래? 올록볼록 튀어나온 모기 물린 자국과 전진 표정이 우스워서 나는 결국 작게 웃었다. 그는 여전히 나를 웃게 한다. 별 것도 아닌 일로… 내가 웃는 소리에 문정혁이 힐끔 설겆이 하다 말고 돌아본다. 아… 웃지도 못하겠네. 어쨌든, 우리 셋이 함께 지낸다는 건… 이런 거구나. 침묵과 긴장감. 한 명이 제대로 뚜껑 열리면 사단 날 분위기… 숨막히게 어색했던 분위기가 팍! 터진 것은 우리가 함께 산지 다섯째 날이 되던 밤이었다. 나 원… 진짜 기가 막혀서…. 만약, 스물 셋 먹은 남자가 얼마나 유치해질 수 있는지 누가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대답하겠다. “지랄 쌈 싸먹고 변기통에 쳐 자빠져서 아구창 좆물에 찢어지는 소리 하시네!!” “주둥아리에서 오장육부 토하게 해주기 전에 안 닥치지!!” 그것들이라고… 벌써 다섯 시간째 전쟁이 벌어졌다. 처음 시작은 문정혁이었다. 내가 전진과 신경전 벌이느라 자기에게 신경 못써주고 말 한 마디 없이 뚱하게 지내는 걸 보고도 애써 평정을 유지했던 문정혁이, 전진이 나한테 죽을 한 입씩 떠 주는거 보고 울컥한 게 화근이었다. 문정혁은 밤 아홉시에 느닷없이 회사에 다녀오겠다며 나가버렸었다. 그리고 그는, 목동의 내 집에 있던 '자기 흔적'들을 모조리 쓸어 왔다. 나를 위해 제작했던 의자, 곰탱이, 곰탱이의 하트 쿠션, 문정혁과 내가 첫눈 보고 좋아하는 사진이 맞춰진 퍼즐 액자, 다 시들다 못해 말라버린 꽃바구니, 지가 녹음한 '사랑해도 될까요'가 있는 엠피쓰리 플레이어, 우리집을 통째로 뒤진건지 귀신같이 찾아낸 편지들까지… …하다못해 분홍색 냄비까지 가져왔다. 은테 안경쓰고 우아한 척 질투는 커녕 감정기라곤 전혀 없는 인간처럼 굴던 문정혁이 쓸어 온 흔적에, 전진은 당연히 자극받았다. 야생마 전진은 문정혁이 거실 벽에 건 액자를 깨 부셨고, 그렇게 다섯시간이란, 경이로운, 그것들의 유치찬란 싸움이 시작되었다. 한 시간은 주먹질, 한 시간은 이빨 까기. 또 주먹질, 그러다 또 씩씩대면서 입으로 지랄해대기… 문을 닫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실에서 뭐가 또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입으로 지랄하기 타임이 또 끝난 건가. 이젠 부실 것도 없잖아…. “저거 안 치워?! 빨리 치워!! 씹새끼!! 문곤, 니가 그렇게 돈으로 쳐발랐어도!! 우리 공주는 나 사랑했었어!!” “아~ 어디서 병아리가 삐약거리네. 나랑 신혜성은 바닷가에서 졸라 찐하게 키스했다. 왜?” “니 똥꼬나 핥아라 그지새끼야. 나랑 우리 공주는 니가 질질 짜던 시절에, 심장 바꿨다!! 나는! 우리 이름 별똥별에 새겨서 집 전체에 박았었다!!” …유치해서 진짜 못 들어주겠다. 닷새동안 잘 참았다 싶었지… “언제까지 싸울거야!! 그만 좀 해!!” 내가 몸소 거실로 나가서 한 마디 하자, 둘이 동시에 잡아 먹을 것처럼 노려본다. “넌 들어가 있어!!!” “지금 이게 누구 때문인데 눈을 부라려?!! 가서 잠이나 자!!” 뭐? 둘이 지금 나한테 소리친거야? 울컥. 둘을 말리러 나왔다가, 내 표정도 사나워졌다. “…나 짐 싸서 나갈거야. 진짜 너네랑 못 살겠어.” “!!” “!!” 내 선언에 깜짝 놀란 문정혁과 전진. 식은땀이라도 흘리는지 꿀먹은 사람 마냥 입을 꾹 다물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다. 그러다가 한 놈은 난장판이 된 거실에서, 다른 놈은 서재에 들어가서 담배 피우기 시작했다. 나는 도로 방에 들어와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셋 다 스트레스가 폭팔할 만 했다. 나는 나대로 스케줄이 밀린데다가 민우 신경쓰랴, 문정혁은 문정혁대로 회사 일과 이민우 사건 알아보는 중간중간 전진 견제하면서 나 살피랴, 전진은 또 전진대로 자기를 피하는 내 눈치 살피면서 억울해 하랴… 마지막까지 내가 참지 않았다면, 우리 셋 중 한 명 이상은 죽었을 것이다. 왜냐면, 거실 물건이 다 부서져서 남은 물건이라봤자 부엌 식기들 뿐이었으니까. 나라고 뭐 따지고 싶은게 없는 줄 알어? 전진에겐 이선호 일 따지고 싶고, 문정혁에겐 너 몇년간 그래도 그렇지 연락 한 번을 안했냐? 식으로 머리카락 잡아 뜯으면서 소리치고 싶다. 하지만, 참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참으리라. “여길 왜 오자는 거야?” “글쎄 조용히 하고 따라 들어와.” 자꾸 궁시렁대는 문정혁의 팔 잡고 질질 끌었다. 전진은 조용히 잘 따라오는데, 문정혁이 말썽이다. 우리 셋의 화합을 다지기 위하여 내가 선택한 첫번째는 술이었다. 그러나 우리 셋은 각자 소주 한 병에 맥주 한 캔씩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취하지 않았다. 비극이었다. 하는 수 없이 죽어도 나가기 싫다고 아우성치는 문정혁과 전진을 이끌고, 안 따라오면 집 나가버리겠다고 협박해가며 오피스텔 옆 건물 지하 노래방에 갔다. 둘 다 몰골이 엉망이었다. 갈비뼈 한 대 나간 내 걸음걸이보다 느린 새끼들. 움직일때마다 갈비뼈 통증이 느껴진다. 둘이 싸워서 더 아픈것 같다. “자, 나는 아프니까 너네 둘이 노래 해.” “…뭐?” “조까!” 이새끼들이…!! 문정혁은 늘 그렇듯 멈칫 하면서 눈 크게 뜨고, '뭐?' 했고, 전진은 지구를 부셔버릴 듯 큰 목소리로 지랄했다. 노래 안하면 짐 싸서 나갈 거라고 단단히 일렀다. 그런데도 노래를 안 한다. 짜증나서 못살겠네… “너네 이래가지고, 어떻게 합심해서 이철호를 무찔러?” “…….” “…….” 미미한 통증이 규칙적으로 스치는 가슴팍에 손바닥을 대고, 내가 꽥꽥거리는데도 놈들은 멀리 떨어져 앉은 채, 미동 조차 없다. 개새끼… 개새끼들이야!! “나 집에 간다?!” 이때만 잠깐 움찔… 그리고 또 조용… “나 진짜 집에 간다?!!” 또 잠깐 움찔… 그리고 또 조용… “앗! 내 노래 나왔다! 내 노래 나왔어 진아!!” “뭐? 진짜야?!!” 혀를 차면서 벽 쳐다보다가, 벽에 붙여진 신곡 소개에 끼어 있는 내 노래를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전진 이름 부르면서 반가워했다. 전진은 기다렸다는 듯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여서 좋아했고, 문정혁은 울컥 달아오른 낯으로 나를 노려봤다. “정혁아. 같이 부르자. 응?” “…난 이따가 주현미의 잠깐만 부를거야. 클레식 버젼으로.” “공주야. 오빠랑 부르자. 문곤. 개새끼야. 넌 죽으나 사나 트로트냐?” “…….” 헉… 문정혁이 진짜 삐졌나보다. 주먹을 움켜쥔 채로, 이번에는 내가 아니라 전진을 노려본다. 노래방에서 사단 나겠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전진이 자꾸 옆에 앉을려고 해서 결국 갈비뼈 붙잡고 일어났어… “뭐야? 이건? 우리 공주… 미공개 수록곡이야?” “아니야.” 내 싱글앨범에 수록된 '그대는 예뻐요'를 부르고 싶었으나… 그럼 전진이 같이 부를까봐, 하는 수 없이 다른 노래 번호를 눌렀다. 전진이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노래 제목이 좀 이상하다.” “그냥 닥치고 들어!!” 앗 반주 끝나간다. 흠흠. 마이크 테스트. 맥주 캔을 홀짝이면서 앞에 나간 나를 쳐다보는 문정혁과 전진. 무대에 선 것처럼 떨린다. 화면이 앞 뒤로 설치된 노래방이라서, 나는 그것들과 마주 보도록 서있는 상태였다. 멜랑꼴랑한 반주가 돋보이는, 아이에스의 '나는 너의 고양이다.' 오래 전, 이민우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 부르지 말라고 지랄했던 곡. 왜 갑자기 이게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한낮의 어지러운 잠을 깨며… 투명한 달빛에 얼굴을 씻고, 한없이 가벼운 하품을 하~” “…….” “…….” 아이에스처럼 나긋나긋한 톤으로, 마이크 안 쥔 손으로는 고양이 발 흉내내듯 웅크리며 열심히 노래를 시작했다. “화려한 고독속의 여왕처럼~ 별빛에 점을 치는 마녀처럼~ 신비한 이야기의 주인공 빛나는 윗도리~” “…!” “…!” 어느새 노래에 흠뻑 몰입한 나는, 나도 모르게, 가사 중 윗도리 부분에서 그만… 반팔 티 아랫부분을 잡고 위로 살짝 올렸다. “나는 너의 고오양이다~ 야옹~” “!!!!!!” “!!!!!!” 옵션으로 고양이 소리도 냈다. 그러다가 흘깃- 문정혁과 전진이 또 싸우고 있나- 걱정스런 맘에 녀석들을 쳐다봤다가… 마이크 놓칠 뻔 했다. 눈이 동그래진 채, 나를 보고 입을 쩍 벌린 문정혁. 그리고 전진. 둘 다 쇼킹한 표정이었다. 툭. 전진은 그 와중에 마시던 맥주와 탬버린을 놓쳤다. “도옹그랗고 밝은 눈동자~ 우~ 부~드러운 웃음속에 반!짝! 미야옹~” “!!!!!” “!!!!!” 나는 너어의 너어의 고오양이다~ 너의 고양이다~ 하는김에 최선을 다 해 부르다가, 나는 혼자 남아버렸다. 멍~한 낯으로 나를 열심히 쳐다보던 두 사람… 만약 나랑 단 둘이었으면 노래방에서 옷 벗고 일 낼 게 틀림없을 표정 지으면서 앉아있던 두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송이 송이 무궁화~! 우리의 소년들~ 피어라 이 강산에~ 겨레 위하여~!!” 전진은 조금 급했는지 다른 때보다 빠른 리듬으로 보이스카웃 연맹가를 부르며 달려나갔고, “예. 김부장님. 나 문정혁입니다. 예? 아, 예. 지금 새벽 두시인거 나도 아는데요. 그만큼 7차 보고서 회의때 말하지 못한 중요 포인트가 떠오른걸 어쩌란 말입니까!! 지금 김부장은 잠이 문제입니까?!” 문정혁은 새벽 두시에, 잘 자는 김부장님에게 전화통화 하며 회사 일을 거론했다. 물론, 식은땀을 흘리면서 재빨리 내가 안 보이는 쪽으로 나갔다. 그뒤로,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그것들은 내가 원한 것보다 훨~씬 나아진 상태로 노래부르기에 임했다. 약 10분간 자리를 떠나있던 둘은, 방에 돌아오자마자 작정한 사람처럼 노래를 질러댔으니까. 내가 마이크 잡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문정혁이 노래 부르면, 내가 예약하기도 전에 전진이 자기 노래를 줄줄이 예약. 만약 내가 노래를 예약하면 문정혁이 골라서 취소버튼 눌러버렸다. 이것들이 왜이래? “메칸더! 메칸더! 메칸더! 브이! 랄라라라라라라라라 공격발진! 메칸더! 메칸더! 메칸더! 브이! 랄라라라라라라라라라 메칸더!” “잠깐만~ 잠깐만~ 그 발길을 다시 멈춰요~ 잇제는 냇가 싫허~ 잇제는 냇가 미훠~ 간다!! 간다!! 앗주우 가아~!” “하하하하하! 너네 뭐하는거야!!” 미쳤나봐… 락, 발라드, 팝송, 가리지 않고 다 불러대던 둘은, 마지막 1분을 남겨놓고 아예 듀엣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뭐랄까. 어떻게든 다른 쪽에 신경 안쓰려고 발악하듯 노랫가사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두사람이 마지막으로 고른 곡명은 드렁큰타이거의 몬스터였다. 괴물 둘로 변한 것처럼 헉헉대면서 괴물 노래 부르는 그것들… 뭐, 망가져도 멋있는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웃기다. “밤 밤바밤 밤!!!” “발라버려!!” “밤 밤바밤 밤!!!” “발라버려!!!” 오… 좀 멋있다. 나는 웃던 것을 멈추고, 드렁큰 타이거보다 훨씬 맛깔나게 부르는 문정혁과 전진 구경하느라 정신없었다. 특히, 문정혁의 영어 랩… 본토인같다. “All my drunkens in the place!” “hey!!” “make ya feet stomp!” “woo!!” “all my drunken in the back get ready to react….” 영어 랩 할때도 둘이 죽이 잘 맞는구나… “마른 입술에 침을!” “발라! 버려~!” “떡볶이에 고추장을!” “발라! 버려~!” 마지막 부분에서는 나도 일어나서 래퍼처럼 양 손을 머리 위에 올려 살짝 살짝 흔들면서 '발라 버려'를 함께 했다. 그런 내가 웃겼는지 전진이 풉!! 하고 웃고, 문정혁이 큭큭거린다. “진짜 죽을뻔 했어….” “그러게.” “?” 노래방을 나오면서 둘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내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 봤지만… 문정혁과 전진은 서로 어깨동무 한 상태에서 죽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어쨌든 다행이다. 잠깐이라도 뜻을 모을 수 있어서… “아, 잠깐만.” 오피스텔 입구에 다다를 때 쯤, 나는 가슴을 부여쥐며 멈춰 섰다. 문정혁과 전진이 화들짝 놀라서 내 양 팔을 부축했다. “많이 아파?” “괜찮아? 우리 공주.” 나는 약간만 인상을 쓴 채로 괜찮다고 하며, 슬쩍 뒤를 돌았다. 누가 쳐다보는것 같았는데… 아닌가? 가슴 아픈건 둘째 치고, 묘한 시선이 느껴져서 뒤돌아봤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빨리 들어가자고 앞장섰다. 어쨌든, 그것들과의 분위기가 상당히 좋아졌다. 왠지 가슴 한구석에 답답했던 먼지가 싹~ 사라진 기분이다. '사랑'을 제외하고, 일단 합심한 그것들과 함께 앞으로의 아득함을 헤쳐 나갈 용기가 생겼으니까. 8월의 막바지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문정혁과 전진은 계절을 잊고 사는 사람처럼 굴었다. 새벽에 출근하는 문정혁이 오후 다섯시에 집에 돌아오면, 전진이 운동하러 헬스장에 간다. 물론 문정혁이 없는 동안 전진은 꼼짝않고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노래방에 다녀온 뒤부터 그것들은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 마주칠 시간 없이 바쁘게 지낼 뿐이었다. 반대로 나는 한가해졌다. 대본 연습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최성수 사장이 보낸 의사샘이 올 때를 제외하면 삼일 내내 먹고 자고 거울만 봤어… “전진… 뭐해?” 오후 두시. 꽉 닫혀 있는 서재 도어를 노크했다. 대답이 없길래 문을 조금 열었다. “전진….” 그러다 다시 닫아버렸다.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서 온갖 서류에 파묻혀 있는 전진의 뒷모습이 낯설게 느껴져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한 걸음 떼기 무섭게 서재 문이 벌컥 열렸다. “왜?” “어?” 전진이 내 팔목을 잡고 고개를 쭉 내민다. 깜짝이야… “나 불렀잖아. 아니야?” 두근… 되게 오랜만에 가까이 서서 보는 것같다. 칠부 면반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만 입었을 뿐인데, 전진은 폭염을 해치우는 칼바람처럼 존재감이 상당했다. 단 둘임에도 느껴지는 거친 야생의 기운… 얘는 인생이 화보야… 그치만, 문정혁이 서재에 있을때랑 포즈는 똑같은데, 왜 전진은 느낌이 다를까. 까맣고 깊은 눈동자… 우주같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전진에게 잡히지 않은 팔을 올려서 살레살레 저었다. “아니. 맞는데… 너 바쁜거 같아서.” “…….” 왜 저런 표정을 지을까 싶을 정도로, 나를 내려보는 전진의 동공이 멍하게 풀려있다. “전진…?” “황금바다같다. 우리 공주.” “응? 아… 머리카락 때문이구나.” “이리 들어와 봐.” “?” 거절할 틈도 없이, 전진이 내 팔을 휙 잡아당겼다. 여전히 조심성 없는 전진 덕분에, 내 갈비뼈만 고생이다. 나 환자야!! 살살 잡아당겨!! 라고 꽥 소리치는 나를 보고도 전진은 실실 웃음을 쪼갰으니까. 컴퓨터 책상 의자에 내가 앉자, 전진이 내 어깨부터 머리까지 꼭 감싸며 뒤에 섰다. 답답하다고 꿈틀대면 꿈틀댈수록 전진은 팔을 세게 조였다. 그러다 문득 내 시선에 잡히는 모니터 화면…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양복 입은 중년 아저씨들 사진과 이름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이게 뭐야?” 내 질문에 전진이 잠깐 골몰하다가, 별안간 내 머리에 자기 턱을 눌렀다. 더 세게 나를 껴안는다. 장난하기 딱 좋은 자세지만, 의자에 앉은 내가 움직이지 못할 만치 뒤에서 꽉 끌어안은 전진은, 굉장히 진지한 톤으로 운을 뗐다. “이철호가 그동안 제거한 명단이야.” “!!” “봐. 제일 밑에는….” “…….” 그가 마우스로 스크롤바를 쭉 밑으로 내렸다. 제일 마지막에 나타난 사람은…. “문도천.” “…….” “4년간 이선호네 집에서 알아낸 정보라봤자, 제대로 정리할 시간이 없어서 엉망으로 쌓아 놓기만 했었거든. 오늘 밤에 김명민 검사에게 전해주려고.” “김명민 검사?! 그 검사님이 오늘 여기에 와?” “응. 양종호도 올 거야.” “양종호도?” “응.” 그럼 공유 이 인간도 올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전진이 말했다. “아 참. 그 더티한 형사도 검사랑 같이 올걸.” “…….” 여전히 공형사를 달가워하지 않는구나. 나는 속으로 킥킥 웃었다. 그러다가 한편으로는 씁쓸해지는 기분을 어쩌지 못 한 채, 서재 밖으로 나갔다. 전진도 나랑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아까처럼 눈을 빛내며 내 팔목을 잡지 않았다. 내가 문정혁을 선택한 현재, 그것들이 줄창 싸우다가 최근 휴전을 했다손 쳐도,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란, 존재했다. 바로, 내가 전진과 사귀었던 과거. 그것이었다. 고삐리 시절, 목동 내 집 거실 바닥에서 함께 팩 하고 장난쳤던 전진… 그때 나는 전진에게 '너 닮은 형사님 알게 됐어.'라고 즐겁게 떠들었었다. 그것도 전진의 배 위에 엎드려서… 그때는 당연히 사랑하던 사이였으니까. 아마 전진도 방금 과거의 '우리'가 떠올랐을 것이다. 자기의 어느 부분이 공형사랑 닮았냐며 나를 간지럽히고 장난쳤던 그 시절이… 가만히 심장을 더듬었다. 약하게 뛰는 심장소리가 오늘따라 슬프게 전해진다. 기분탓이겠지… 넘기고 싶어도, 갈수록 아련해지는 전진의 시선이 마음에 걸린다. 저녁 일곱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여러명이 동시에 오피스텔에 들이닥쳤다. 전진이 문 열어주자마자 총알같이 튀어들어온 문정혁이 내 머리칼을 북북 쓰다듬는다. “잘 놀았어? 우리 신고양이.” “응? 응.” 밖에서 일에 시달리느라 피곤했던 낯이, 나를 보면 사랑스럽게 풀린다. 문정혁. 그는 여전히 나를 보고 행복하게 웃는다. 내 존재 만으로도 이제, 문정혁은 웃는다. “밥 안 먹었지? 뭐 시켜줄까? 오늘 아줌마도 오지 말라고 했는데.” “진짜? 나 아구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좋아하는 나와 달리, 문정혁이 잘생긴 코에 주름까지 잡아가며 팍 싫은 티를 낸다. “…그거 빼고. 매운 음식은 안된댔다.” “야. 문정혁. 나 진짜 다 낫어. 지금은 밥 먹고 살잖아. 아구찜! 나 아구찜!” “안 돼.” 재수없다. 문정혁. 나한테 되게 잘하는 것같다가도, 한 번도 져주는 법이 없다. 예전에 전진은 나랑 사귈때 무조건 나한테 맞춰 줬었는데… 라고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내 뒤에서 못마땅한 낯으로 팔짱 끼고 있는 전진 쳐다봤다. 벌써 자기 방에 들어가서 넥타이 푸는 동시에 누군가랑 휴대폰으로 전화통화 하는 재수 없는 문정혁과 달리, 전진은… “개새끼야!! 한 번 먹는다고 어떻게 되냐!!” 가뜩이나 큰 목청을 문정혁쪽에 터뜨리더니… “여보세요? 아, 여기 아구찜 대자 졸라 맛있게 해서 갖다 주세요!!” …완전 흥분해서, 주소도 말하지 않고 씩씩하게 배달 주문해버렸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우리 셋의 일상… 이제 밥먹고 전진은 운동하러 나가면 어제와 딱 떨어지는 일상이지만, 오늘은 다르다. “왠 아구찜?” “쐬주하고 막걸리 사왔는데, 야. 말복이라고 장어도 재워 왔어.” “안녕하십니까.” 문정혁과 '함께' 온 손님들이 있었으니까. 맙소사. 문정혁과 전진은 그렇다고 치고, 나라도 손님들이 왔음을 알았어야 하는데, 문정혁과 전진 페이스에 휘말려서 함께 들어온 사람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전진은 늘 그랬듯 고개만 까딱 하고 거실 쇼파에 앉아서 텔레비전 리모컨을 잡았다. 전진이 낮에 예고한 대로 오피스텔에 온 손님은, 양종호와 공유 형사, 그리고… 김명민 검사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신혜성 입니다.” 김명민 검사 앞에서는 절로 허리가 숙여졌다. 이민우 일은 둘째 치고, 김명민 검사가 지닌 압도적인 분위기가 그랬다. 초면인 사람도 굴복시킬만한 무엇이 있었다. 쌍커풀이 없는대도 적당히 큰 눈, 고압적으로 꽉 닫힌 입술, 냉혹한 카리스마가 폴폴 풍기는 안면. 까만 수트가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김명민 검사… 게다가 목소리도 예술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굵은 목소리… 서른 중반으로 보이는 김명민 검사는 나를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짓다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굉장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근사하게 미소 짓는 남자였다. 30분 후, 넓은 식탁에 여섯명의 남자가 마주보고 앉았다. 30분 내내 양종호는 부엌에서 머슴처럼 일하며 반찬을 준비했고, 전진과 문정혁은 김명민 검사와 서재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었다. 그리고 공유 형사는 30분동안 발만 씻었다. 어떻게 인간이 씻어도 씻어도 냄새가 가시지 않을까? 나는 화장실 문에 기대 서서 공유 형사 발검사 역할을 맡았다. “공형사. 한 번 더 씻구 와. 냄새가 계속 난다.” “야!! 나 열 번도 넘게 씻었어!! 내가 태어나서 이렇게 씻어본 거 처음이야!!” “아, 환기 시켜볼까?” 왜 창문 열고 환기 시키는건 생각하지 못했을까. 베란다 창문까지 몽땅 열고, 공기청정기를 작동시키자, 거짓말처럼 꼬랑내가 사라졌다. “완전 푸짐한데?” 식탁이 휘어져라 차려진 음식을 보고 놀란 문정혁이 웬일로 입맛을 다셨다. “식사 전이라고 하셨죠? 일단 먹고 얘기 나누죠, 검사님.” 물론 정중한 톤으로 손님을 상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정혁은 낯선 사람들을 다루는데 능숙하다. 아니, 우월한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느긋하게 구는 데 능했다. 문정혁의 천성일까. “졸라 맛있지. 공주야.” “어….” 남 의식 안하고 제 멋대로 할 거 다 하는 전진 성격도 천성이라면 천성이겠지. 김명민 검사는 반듯하게 허리까지 펴고 앉아서 무표정으로 식사에 임했다. 아구찜 대자, 양종호가 구운 장어 열 마리, 온갖 마른 반찬과 알탕. 오늘은 바다 음식 축제다. 식사가 끝날 무렵 다들 술을 한 잔씩 기울이며 본격적인 이야기들을 꺼냈다. 물 흐르듯 상황을 지켜보던 나도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를 제외한 다섯명은 필시 이민우와 문도천의 일로 모인게 틀림없었기에. 제일 먼저 운을 뗀 건 전진과 공유 형사였다. 둘은 양종호에게 무언가를 부탁했다. 아마 사전에 얘기가 되어 있었는지, 양종호는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무슨 일인데 양종호가 알았다고 하는거야?” 다섯 남자의 긴밀한 투를 참고 지켜보던 내가 기어이 폭팔했다. 이것들이 지금 무슨 일을 어떻게 진행시키는거야? 나의 못마땅한 낯을 쭉 지켜보던 전진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강순만하고 양종호가 어렸을때부터 친구라잖아. 강순만을 시작으로, 과거 이선호가 했던 짓을 세밀하게 조사하자는 거지. 공주… 아니, 혜성이 너와 관계된 거랑 그 외의 거 다 포함해서.” “강순만? 강순만이 누군데?” “목동에서 노는 양아치 새끼.” “그래?” 이때 전진이 피식 웃으면서 씁쓸한 연기를 내뱉었다. “바보야. 예전에 내가 너한테도 알려 준 적 있잖아.” “웃기시네. 전진. 너 지금 처음 말한 건데? 강순만이 누구야?” “…너네 집 거울 처음 깼을때 내가 알려줬잖아.” “뭐? …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강순만. 그 이름이 기억난게 아니라, 전진이 당시 했던 말이 어렴풋이 기억나서… 학교에서 뒤지게 얻어 터진 나를 보고 확 돌아버렸던 전진. 그때 전진은 우리집 거울을 깬 뒤, 내가 동네 깡패 새끼한테 맞았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다. 목동 양아치 대장 격인 순만인지 순대인지 하여간 그놈한테 나를 부탁했었다는 말을 했었지… …의도하지 않아도 과거의 추억이 하나씩 꺼내질 때가 있다. 내 가슴이 다른 사람을 볼 때라고 해도, 과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에, 내 목을 조른다. 가끔은 기쁘게, 가끔은 슬프게… 내 표정이 흔들리는 것을 뚫어지게 관찰하던 문정혁이 식탁 밑으로 팔을 내리더니, 힘없이 늘어진 내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내가 있잖아… 라고 말을 하듯이. 나도 문정혁의 손에 깊게 깍지를 꼈다. 문정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낮에 재판이 있었어.” “!!”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민우… 재판. 너한테는 전화 할 시간이 없어서….” “어떻게… 어떻게 됐어?! 우리 고모두 거기 있었어?!” “응.” “!!” 어떡해… 어떡해… 철퍽거리는 심장 만치 내 숨소리도 고르지 않았다. 이민우를 빌미로 내가 곤욕을 치루게 했던 이선호. 이선호의 눈물이 선명하게 뇌리에 스쳐 지났다. 내 손을 잡은 문정혁의 힘이 더 세어졌다. “걱정하지 마. 1심에서 확정 된 대로 갈 거야.” “어떻게… 어떻게 확정됐는데?”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지금 내 머릿속은 1초에도 천 번의 폭탄이 터졌다. 이민우가 사형당하는 그림도 그려졌다. 회오리 속에 춤을 추는 하얀 도화지처럼 힘없이 휩쓸릴 뿐이었다. “2년 형에 집행유예 3년…인데….” “2년? 그렇게 많이?” 1년도 아닌, 2년이라고? 이민우는 문도천을 죽인 범인이 아닐 가능성도 있는데? 1심에서 끝이라고? 이렇게 허무하게? 아니, 이게 형이 짧은거야 긴거야? 아니, 이민우가 감옥에 가는게 맞다는 거야? 말도 안돼. 말도 안돼. 그때, 묵묵히 팔짱 끼고 앉아서 우리의 대화를 듣던 김명민 검사가 나를 쳐다봤다. “신혜성씨.” “…네… 네.” 낮고 침착한 목소리톤… 김명민 검사는 세련된 입술을 움직이며 차마 피할 수 없는 단어들을 던졌다. “형은 바꿀 수 없습니다. 문도천 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출두한 이민우씨는 어차피 기결수였으니까요. 확실한 형이 확정되지 않았을 뿐.” “기결수요?” “아, 네. 그렇습니다. 판결이 확정된 사람을 기결수라고 합니다. 어쨌든, 이번 재판은 형사 재판 사상 가장 재미있는 코미디였어요.” “코미디?” 내가 김명민 검사의 말에 갈피를 잡지 못하자, 정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살을 덧붙였다. “검사나 변호사나 할 것 없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어.” “저기… 김명민 검사님. 검사님이 우리 민우 변호하시는거 아니었어요?” “…….” 몇마디 말을 더 잇기 위해 입술을 움직이는 문정혁의 말허리를 잘랐다. 나는 김명민 검사에게 애원하듯 눈을 빛내며 다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제가 법을 잘 몰라서….” 문정혁이 다시 끼어들었다. “공무원이 피고인을 변호 할 수는 없는거잖아.” “그럼 이민우는 누가 변호한거야?” “무슨 인권 변호사라든데, 처음 보는 변호사였어.” “김명민 검사님은 그럼….” “…저도 문정혁군과 나란히 앉아서 방청했을 뿐입니다.” “네? 공형사는 김검사님이 변호를 맡을 거란 식으로 얘기했었는데….” 평정을 유지했던 김명민 검사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제가요?” “네… 공형사. 공형사가 그랬잖아. 김명민 검사님이 이민우 사건 맡고 있다고….” 내 말에 김검사는 자기 옆에 앉아서 새우 튀김 먹느라 정신 없는 공유의 뒷통수를 무시무시하게 쏘아보았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한 시선을 내게 던졌다. “나는 피고인을 변호 할 수 없어요, 신혜성씨. 그리고, 이민우 사건을 맡은게 아니라, 지금까지 해 온 것과 연결지어서 조사 부분에 착수했던 겁니다.” 나는 법을 모른다. 법을 알아야 할 만한 상황에 처한 적이 없었다. 서민들이 억울해 하는 일이 비일 비재하다는 법이 무엇인지 모르는게 당연한 삶을 살았었다. 만약 문정혁이 부자가 아니었다면, 김명민 검사같은 대단한 사람을 알았을까. 아니, 거기까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지. 당장은 이민우가 2년 형을 선고받았다는 것, 그게 중요하다. 내가 착찹한 낯으로 고개를 푹 숙이자, 전진이 무서운 표정으로 김명민 검사를 보았다. “우리 공주한테 너무 뭐라고 그러지 마. 재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인간들 수두룩하거든?” “그럼 어떻게, 형이 2년 형으로 확정되었지? 공형사! 살인죄가 관련되면 기본 5년이라며?” “어?! 어… 그게….” “7년입니다. 공형사가 똑똑한 척 했나 보네요.” 공형사 말만 듣고 상황을 짐작해왔던 나는, 딱딱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김명민 검사의 말에 한기 마저 느꼈다. 공유 형사는 새빨개진 낯으로 죄없는 새우만 미친듯이 씹어 삼켰다. 내가 조용해지자 문정혁과 양종호가 시끌시끌 푸념에 열을 올렸다. 너도 갔었어? 내가 양종호에게 시선으로 묻자, 양종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타까운 낯을 지었다. “그러니까 코미디라는 거야. 누가 봐도 합의부 재판이어야 될 상황인데, 단독 재판에다가, 한명 측 변호사의 주장도 뭔가 흐지부지했고, 최민수 검사의 2년 구형도 그렇고. 다들 짜고 치는 고스톱 한 판 벌인거라고나 할까?” “진짜 코미디였지. 1심에서 모든게 게임 오버. 한명 측에서 항소가 나와야 할 상황인데, 2년 형에서 끝. 한명이 대단한 기업인 줄은 알았지만… 참… 뭐라 말하기 씁쓸하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다들 현실을 제대로 간파하는 것으로, 또, 이 일에 관련된 모두가 합심하자는 뜻으로 잔을 부딪혔다. 그날밤 나는 새벽 내내 악몽을 꾸었다. 다음주에 강원도로 내려갈때까지 끊임없이… 꿈 속에서 이민우는 나를 겁탈하려고 했고, 내게 미안하다고 했으며, 나를 보고 하염없이 울다가, 나중에는 미소지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꿈 속에서 고모와 고모부, 민형이 형과 민경이 누나가 나를 원망하며 통곡을 반복했다. 순돌이마저 나를 원망했다. 꿈 속에서 고모네 식구들은 이민우가 나를 사랑한 죄값을 받게 되었음을 다 알고 있었다. 두려웠다. 무서웠다. 꿈이 곧 현실로 나타날 것 같아서, 나는 악몽에서 깨어날 때마다 가파른 숨을 내쉬며 억척스런 땀방울을 흘렸다. “혜성씨. 괜찮아요?” “네… 죄송합니다.” 또 NG다. 8월 말부터 재촬영에 들어간 아가사. 강원도 읍상동 세트장에서 나는 며칠째 NG만 내고 있었다. 나 답지 않은 짓이었다. 이시영의 노골적인 핀잔이 귀에 딱지가 얹히도록 터져나왔다. 며칠째 내가 버벅거리자 감독님도 슬슬 짜증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쉽게 집중할 수 없었다. 이민우와 문도천. 이철호. 이선호. 네 사람의 이름이 내 숨통을 자꾸 조였다. “혜성아. 너 몸이 다 낫지 않아서 그런거 아냐?” “아… 계상이형. 괜찮아.” 차가운 생수를 내밀며 내 등을 토닥여주는 계상이 형 덕분에 혼돈으로 빠져들 뻔 했던 동공이 제자리를 찾았다. 영화에 흠뻑 빠진 윤계상. 그는 영화 속 아가사를 바라보듯, 촬영 틈틈히 쉴 때마다 나를 챙겨주었다. 다른 스탭들도 나를 아가사 대하듯 조심스럽게 대하는데, 계상이 형은 돌쇠 수준이다. 마님 챙겨주는 돌쇠랄까. “서울에서 무슨 일 있었어? 예전보다 더 창백해졌다, 너.” “아무것도 아니야. 요즘 체력이 좀 약해졌나 봐.” 계상이 형이 챙겨주는 모습은, 내게 희미해진 추억 하나를 연상시킨다. 아주 오래 전, 엑스트라 아르바이트 하던 시절, 박충재형이랍시고 내 앞에 나타나서 이것저것 챙겨주던 전진. 전진을 연상시켰다. 그래서 하마터면 계상형에게 다 말 할 뻔했다. 내가 괴로운 이유를… 타이거JK형이었으면 속 시원하게 얘기했을지도 모르지만… 타이거JK형은 아무래도 입이 무거우니까… 이민우가 면회를 거부해요, 형. 박충재형, 윤계상형, 타이거JK형… 누구한테 하소연하는 건지 모를 말들을, 나는 또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떨치려고 노력했다. 이민우에 대한 잔상들을… “신혜성씨. 좀 제대로 해야 되는거 아냐?” “죄송합니다.” 계상이 형과 몇 마디 나누는 걸 끈질기게 째려보던 이시영이 톡 쏘아붙이고 감독님 쪽으로 걸어갔다. “씨발 저 개년이….” “혀엉~!” 의외로 욱한 면이 있는 계상형이 주먹 쥐고 일어나려고 한다. 화들짝 놀란 나는 무조건 형을 말렸다. 영화 촬영이 진행될수록 계상이 형은 이시영을 대놓고 싫어했다. 마치 영화 아가사의 남자 주인공이 아가사를 사랑하면 할수록 여자 주인공에게 매몰차게 대하듯이. 문정혁과 전진. 그것들은 아마 서울에서 김명민 검사와 함께, 내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일을 추진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옆에서 지켜보고 내 한 몸 건사하는게 도움이라면 도움이 될 것이다. 태권도 배워봤자 소용없다 이건가. 그나저나 재촬영 시작한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데, 문정혁에게서 한 통도 전화가 오지 않았다. 어쩌면 내 몸이 쇠약해 진 이유에 문정혁도 포함되지 않았을까. 나는 시도 때도 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한 번은 전화하겠지- 싶어서… 촬영 중간중간 휴대폰을 열어보고, 밥 먹을때는 아예 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래도 문정혁은 전화 한 통, 문자 하나 보내지 않았다. …이게 사귀는거야?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이게 나를 사랑하는거야?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너만 피곤해? 나도 피곤하게 힘들게 촬영하고 있어… 아무리 텔레파시를 보내도 소용없었다. 일주일이 더 지나서 9월 첫째 주 월요일이 되었을땐, 자포자기해버렸다. 내가 먼저 그에게 전화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회사에 전화하면 문정혁의 비서가, 핸드폰으로 전화하면 -회의중 메세지- , -출장 메세지- 따위가 뜰 뿐이었다. [문정혁 한 번은 전화해야 되는거 아니야? 변했어] 보낼까 말까 고민하다가 삭제… [잘 지내? 예전에는 맨날 내 스케줄 묻더니… 나도 잘 지내] 이번에는 진짜 보내야지… 결심하다가, 마지막에 문자 전송 취소… [나 사랑하지? 그치?] 신혜성 대 참패… 사랑을 구걸하다니. 스스로 비참해지는 무덤을 판 꼴이라서, 마지막것은 더더욱 보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실수로 그만 전송 확인 버튼을 눌러버렸다. “으아아악!!!” “왜, 왜그래?” “문자를 보내버렸어!!! 어떡해!!!” “?” 계상이 형이 놀라서 캐묻던 말던, 나는 하얗게 질려서 핸드폰을 양 손으로 쥐고 절규했다. 하필이면 마지막에 '나 사랑하지? 그치?' 이게 갈 건 뭐야? 쪽팔리게…!! 그리고, 내 자존심을 완전히 구기기로 작정했는지, 바쁘신 문정혁은 밤이 새도록 답장 하나 보내지 않았다. 문정혁 뿐만 아니었다. 양종호도, 공유 형사도, 전진도, 소식 하나 없이 나를 내버려뒀다. 물론 촬영으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라고 한 들, 그들의 무소식은 나를 향한 배려라고 할 수 없었다. 다들 문도천 자살을 시작으로 뭉쳐서 합심하는 가운데, 나만 아무것도 모르는 꼴이라니. 고모와 고모부조차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먼저 전화하지 않으셨다. 고모네 식구들이 연락하지 않는 것은 당연히 이해 할 수 있다. 이민우 일로 속이 터질 지경이실테니… 하지만, 그 외의 인물들은 나를 외롭게 한다. 이런 내가 싫다. 나도 충분히 바쁜데, 나도 그들에게 외로움을 선사하고 싶은데, 나도 아무렇지 않은척 지내고 싶은데, 없는 외로움을 쥐어 짜내며 만들어내잖아… 10월. 가을 향기가 솔솔 묻어나는 짙푸른 계절에, 나는 재촬영 초기때 버벅거렸던 모습은 완전히 지우고 새롭게 촬영에 임했다. 한 달 내내 나를 괴롭혔던 망상은 많이 흐려졌다. 덕분에 크랭크인 당시처럼 나는 NG없이 감독님이 흡족해 하는 장면을 뽑아냈다. 연기에 혼을 실는다는 기분으로 매일 매일 임하다 보니, 어느새 기자들이 강원도까지 찾아와서 내년이면 있을 시사회 대비 취재파일을 잡아갔다. 영화의 마지막 촬영일은 12월 초순, 혹은 11월 말경이다. 아가사가 차가운 바닷물에 천천히 걸어가는 것. 머리 꼭대기까지 물에 잠길 만큼 걸어가야 한다니… 여러 각도로 촬영한다고 하는 걸로 봐선, 수면에 머리가 가라앉을 때도 나는 표정연기를 해야 할 것이다.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기대 속에 10월 읍상동 촬영에 집중했다. 이시영의 연기력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감독과 스탭들은 이시영을 완전히 포기한 눈치였다. 더욱 불행한 사태는, 이시영은 자기의 연기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2/3 정도 마친 촬영 덕분에 숙소에서 보내는 밤이 편해지고 있었다. 내게 편해진다는 의미는, 일이 한가하다는게 아니라, 일이 바쁜 상태였다. 연락 없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없앤 상태, 내가 마음이 편한 기준은 오직 그것 하나 였다. 어떻게 다들 짠 것처럼 두 달 내내 전화 한 통 안 할까. 텅 빈 가슴을 무시하며 연기에 집중하던 내게, 드디어 소식이라는게 찾아들었다. 그것도 10월 셋째 주, 이시영이 감기몸살에 단단히 걸렸을 때. 이시영과 키스신을 찐하게 했던 윤계상 형도 독감에 걸렸다. 둘이 입원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단다. 예전에는 내가 아픈 덕분에 촬영이 한 달 가까이 지연되었는데, 이번에는 두 배우가 아파서 일주일이 지연되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예전보다 빡센 촬영을 소화했던 스탭들은 의외로 일주일 휴가를 반기는 눈치였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숙소에서 자는 시간보다 촬영장 차 안에서 자는 시간이 더 많았기에, 이번 휴가는 굉장히 달콤하게 느껴졌다. “어디로 갈까?” “그냥… 바닷가에 가요.” “바닷가?” 매니저 형이 우거지상을 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조수석에 길게 누웠다. “9월 초까지 있던 숙소, 펜션 있잖아. 거기로 가요. 나, 거기서 계속 있을테니까, 형은 며칠 놀다가 와요.” “진짜? 너 혼자 있어도 괜찮겠냐?” “괜찮아요. 뭐… 혹시 급한 일 생기면 전화 할 사람 많은데 뭘. 감독님도 바닷가 펜션쪽에서 일주일 쉰다든데?” “맞다. 사모님하고 식구들이 이번에 내려온댔지.” 휴가 다운 휴가를 보낼 수 있을거라는 생각에 신이 났는지 매니저 형은 선물 사오겠다는 약속까지 하고 나를 바닷가 펜션에 내려줬다. 읍상동에 있는 숙소에는 촬영이 빠듯해서 몇 번 들어가 보지도 못했지만, 바닷가 숙소는 그렇지 않다. 매일 매일 여기서 잠들었었다. 게다가 문정혁이 욕실 문짝을 부셨던 추억도 있었으니, 나는 이곳이 편했다. 최성수 사장은 당장 서울로 올라오라고 성화였지만, 나는 죽어라 고집부리며 강원도에서 머물기를 희망했다. 그때, 소식이라는 놈이 내 공허한 가슴을 노크했다. 드르륵- 두 달 만에 핸드폰이 진동 소리를 낸 것이다. 최성수 사장과 진즉에 통화를 끝냈던 나는, 본능적으로 지금 진동 소리가 문정혁임을 직감했다. 두근, 두근, 두근. 천천히 핸드폰 플립을 열었다.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어디야? 나 지금 강원도야] 문정혁. 문정혁. 오직 그 이름만 메아리쳐서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 [그때 그 펜션이야. 빨리 와… 멍청아!!!] 보고싶어. 보고싶어서 미치겠어. 사랑한다고 해줄게. 빨리 와. 빨리 와. 문정혁… 나… 외로워서 죽을것같아… 빨리 와서, 그동안 나한테 왜 연락 못했는지 변명이라도 해… 바보야. 나는 진짜 병신일지도 몰라. “찾는데 다섯 시간 넘게 걸렸어.” “어? 어어….” “최성수 사장? 그사람 맞지? 최성수 사장한테 가까스로 연락이 닿아서 여기 알았지 뭐냐.” “그, 그래.” 새벽 세시에 펜션에 찾아온 사람은, 전진이었다. 문자를 보내는 중에도 나는 병신같이 발신인 수신인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당연히 문정혁일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병신짓만 골라서 했다. 샤워하고, 옷 예쁘게 입고, 문정혁이 좋아하는 스테이크를 예전에 주문했던 나이트에서 배달시키기. “왠 스테이크야?” “그냥… 전진. 너 먹으라고.” “공주야.” “어…어?” “나 안 보구싶었어?” “아… 보구싶었지….” 내가 지금 뭐라고 대답하는걸까. 가벼운 점퍼에 청바지를 입고 나타난 전진. 몇 달 새 자란 머리칼에 근사하게 왁스질까지 하고 왔는데, 나를 보고 저렇게 반가워하는데, 나를 보고 행복해서 눈을 빛내는데… 문정혁이 아니라는 실망감에 목이 메여버렸다. 문정혁이 정말 나를 잊었다는 끔찍한 상상이 휘몰아쳐서 괴로웠다. 내 표정을 보고, 내 기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당연히 간파했을 전진은, 조용히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 나도 그의 앞에 앉아서 멍하니 앞만 쳐다봤다. 전진이 가끔씩 나를 아련히 쳐다보는게 느껴졌다. 그는 내게 예뻐졌다고 말하며 종종 볼을 꼬집었다. “공주야.” “…….” “앞으로 좀 바쁠것 같아.” “바빠?” “응.” “그거 말해줄라고 여기까지 왔어?” “그냥… 너 보고싶어서.” “…….” 두근- 가슴떨리게 근사한 동공으로 오직 나 한사람을 담고 있다. 전진의 보고싶다는 한 마디에 나는 정신차렸다. 그리고, 두 달 사이 전진이 예전과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음을 간파했다. “전진. 너… 추워? 아직 그정도 날씨 아닌데, 왜그렇게 온 몸을 꽁꽁 싸매고 왔어?” “춥긴. 우리 공주한테 잘 보일라고 두 시간동안 옷만 골랐었어. 왜. 별로야?” “아니. 근사하긴 근사한데….” “…….” 희미하게 웃는 저 미소, 그래. 전진의 지친 눈동자가 수상하다. 야생마 특유의 분위기가 사라졌다. 두 달 동안, 나와 연락 없이 지내면서 어떤 일을 겪었기에 저럴까.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전진. 너 좀 이상하다? 왜그래? 나 이제 서울 올라가면 또 셋이서 살텐데… 폼 잡지 마!” “내가 언제 폼잡았냐. 원래 이 오빠는 갑빠가 있어.” “입만 살았어. 전진은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거야.” “…공주야.” “응?” 이상하다. 일부러 장난을 걸려고 해도, 먹히지 않는다. 전진은 마치, 작정한 사람처럼 진지하게만 굴었다. 두려워질 정도로… 그리고, 그는 내가 두려워 하는 부분을 침착하게 꺼냈다. “너. 문정혁이 정말 좋아?” “…….” 그의 침착함이 나를 얼렸다. 밑도 끝도 없는 긴장감이 식도를 꽉 눌렀다. “괜찮아. 말 해 봐.” “전진….” “문정혁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갑자기 그런건 왜 물어봐.” 벌떡- 전진이 식탁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도 일어났다. 그가 시원한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 나도 따라 나갔다. 멀고도 가까운 바닷물과 백사장이 우리 옆에 있었다. 검붉은 수면 위로 떠오르는 푸른 별빛. 물안개처럼 고요하게 스며드는 차가운 밤의 기운. 가녀리게 부서지는 파돗소리… 전진은 드넓은 풍광을 쳐다보다가, 자기 옆에 선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깊고 그윽한 전진의 음성이 매달려온다. “공주야. 마음속으로 나를 못 잊었으면서 문정혁 사랑한다고 우기는거 아니지?” “뭐, 뭐? 야. 전진. 너 자신감 조금 심하다?” “나 지금 진지해.” 왜 그래… 전진. 너 오늘 조금 이상해… 나는 예전처럼, 우리가 재회했을 때처럼, 변함없는 마음을 움켜쥐고 대답했다. 밤바다를 나란히 응시하며, 그에게 뾰족한 창을 던졌다. “…문정혁… 사랑해….” “…알았어.” “진아….” 이상하다. 두 달 만에 나를 찾아온 전진이 내뱉은 한 마디가 자꾸만 내 심장을 쥐락펴락했다. 내 말에 상처받을 사람은 전진인데, 어느새 눈물 흘리는 사람은 나였다. “우리 울보 혜성 공주. 우는 건 또 왜이렇게 예뻐?” “미안해… 진아….” “뭐가 미안하냐… 오빠가 말했잖아. 인감 도장 안 찍으면 무효라고.” “뭐, 뭐야~!” 희미하게 웃는 전진이 영원히 사라질 것처럼 멀어 보인다. 다음날, 전진은 불현듯 나타난 것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마치, 꿈 속에서 만난 것처럼 흔적없이… 누군가는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신의 저주라고 하는 '길들여짐'. 나는 시간에 길들여졌다. 느닷없이 나타났던 전진이 다음날 사라진 뒤에는 더 그랬다. 전진은 내게 다른 녀석들이 그러하듯 연락하지 않았다. 강원도에서 재촬영에 임했던 초기때만 해도, 나는 핸드폰을 쥐고 살았지만 시간 속에 길들여진 나의 습관은, 어느새 내게 자유로운 감정을 선물했다. 문정혁과 전진. 그것들은 물론이거니와 공형사와 양종호, 이민우… 서울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들을 굳이 궁금해 하지 않았다. 아가사 역할에 충실하면 할수록 길들여짐의 강도는 세졌다. 11월의 촬영 막바지에, 나는 진짜 영화 속 아가사가 된 기분이었다. 자유롭고 방탕한 아가사, 고결한 아가사, 번잡한 고민 따위는 품지 않는 생명력 넘치는 아가사가 된 것이다. 캐릭터에 몰입할수록 나는 스스로 연약하지만 강인하다고, 또 아름답다는 자기 주문을 외웠다. 이 주문은 소름끼칠 정도로 나와 하나가 되었다. 스탭들이나 감독님들도 나를 대할 때는 전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굴었다. 그리고 마지막 촬영이 있던 날, 나는 하루종일 혼자 지냈다. 누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가사가 차가운 바닷물 속에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장면. 혹자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컷이었지만, 나는 극중 아가사가 그렇듯, 죽음이 아닌 자유라고 연상했다. 자연에서 살아가던 아가사가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회귀. 찬란한 자유를 맞기 위해 세포마다 물이 차오르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사람들은 내가 예민해진 것을 당연하게 인식했다. 이시영 마저도 내게 함부로 굴지 않았다. “컷!! 완벽해!! 혜성이 올려봐!! 어디까지 가라앉은거야!!” 머리 위에 바닷물이 덮여졌을때도, 나는 계속 걸었었다. 어느 순간 의식을 놓아버렸는지 모를 정도로, 나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내 미소에 소름끼쳐하는 촬영 감독님의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젖은 모래를 밟았었다. 자유를 느끼는 아가사… 나는 아가사가 되었고, 자유롭고, 행복해졌다. “혜성아!! 신혜성!! 야!! 내려가 봐!!” 대기중이던 잠수팀이 나를 갓 잡은 생선마냥 건져 올렸다. 그때도 나는 평화로웠다. 나는 죽은 듯이 미소까지 엷게 띠우며 잠들어 있었다. 아니, 내 의식은 그렇노라고 촬영이 끝난 다음에도 '아가사'에 몰입했다. 구명 보트에 오른 내 몸이 환하게 빛나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내게 인공호흡을 시도 하려는 순간,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혜성아. 괜찮은거야?” “맙소사….” “기절 한 줄 알았는데… 세상에….” 진짜 아가사였나봐. 이럴 수가. 여기 저기서 나를 향한 소리들이 들렸다. 어떻게 물 속에 죽음으로 회귀하는 순간마저 너는 행복하게 웃을 수가 있니. 그들의 오싹해 하는 생각마저 들렸다. 뭍에 도착한 구명 보트 밖으로, 나는 자연스럽게 걸어나갔다. 감독님은 울고 계셨다. 마지막 촬영을 숨 죽이고 지켜보던 스탭들과 계상이형. 그들의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서 그제야 조금씩 당황했다. 감독님이 나를 끌어안았다. “이 놈 진짜 보석이다! 보석이야! 최성수가 대어를 낚았어!!” “감독님…?” 마지막 촬영이 끝난 현재, 사람들은 나를 진짜 아가사로 보았다. 물 속에서 편안하게 아가사에 임한 나를, 물 밖으로 건져 냈을때도 편안했던 나를, 아가사로 읽었다.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머리카락… 감독님의 흥분한 목소리 만큼, 모두들 소름끼쳐 하는 표정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나를 방치하는 그것들에게 길들여진게 아니라, 잠깐이지만 아가사가 되었다는 것을. 자유롭고 속세에 찌들지 않은 아가사가 되었기 때문에 번잡한 고민에서 해방될 수 있었음을. 그러자 두려워졌다. 이제 아가사 촬영이 끝났으니, 짧게 누린 해방기도 끝난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촬영이 끝난 다음날, 최성수 사장이 나를 데리러 강원도에 왔다. 그는 초연한 낯으로 자신을 반기는 나를 보고 굉장히 많이 놀랐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는 기분이란다. 아가사의 혼령이 내 안에 있는 기분이라서 나도 이상했다. “김경우가 너 진짜 대단하다고 칭찬 많이 하더라, 혜성아?” “감독님이요? 진짜에요?” “엉. 마지막 컷 할때는 온 몸에 소름이 좍~ 끼쳤대. 그렇게 대단했냐? 너 죽을 뻔 했다면서?” “죽을 뻔 한 거 아닌데요. 아가사가 천천히 물에 들어가는 장면인데… 하긴. 옷이 젖는 기분이나, 추운 느낌조차 들지 않더라.” “한 번에 오케이 사인 났대매. 나도 시나리오에서 봤지만, 그거 힘들것같던데…?” “모르겠어요. 바로 어제 촬영한건데, 어떻게 찍었는지 가물가물하네….” “어제 쫑파티 하는데도 불참했다더니, 진짜 몸 괜찮냐?” “네. 아무렇지도 않아요. 어제는… 그냥… 혼자 있는게 나을 것 같아서….” “참. 아가사 촬영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져서, 편집이 빠듯할거래.” “그래요?” 서울로 올라가는 차에 편하게 기대 앉아서 나는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지금 기분은 그냥… 영화 촬영이 아니라, 내가 아가사 라는 사람으로 잠깐 살았던 것같다. 스크린으로 확인하면 어떨까. 내가 아닌 타인을 보는 기분일 것같은데… “원래 기자 시사회가 12월 7일로 잡혔었잖냐. 근데 중간 중간 텀이 길어져서 시사회를 늦췄어. T.O.P사가 어찌나 지랄해대든지, 김감독이 틈틈히 배급사로 사람 보내고, 투자자들한테 일일이 전화하고 그랬다더라.” “헤에….” “성냥팔이 소녀 재림 알지? 옛~날에 망한 영화. 그때도 대박 신인이 주연이라서 성공 할 줄 알고 투자자가 대거 몰렸었는데, 망했잖아. 제작발표회때 편집본 시사회도 겸했다가, 결국 재촬영하고, 재촬영 아니어도 촬영 기간은 계속 길어지고… 영화 망하고. 혜성이 너도 그 짝 나는거 아닌가 싶어서 노심초사 했었댄다.” “재촬영? 재촬영 하면 어떡하죠? 또 찍어요? 8월부터 재촬영 했었는데?!” 재촬영 또 하면… 이시영이 지랄지랄 할 게 벌써부터 눈에 선하다. “설마 또 하겠냐? 김경우 말로는 그럴 리 없대. 아, 시사회 날짜 24일로 잡혔어.” “그렇게 빨리요?” “이것도 겨우 잡은거야. 크리스마스 이브잖냐. 이때를 노리는 영화들이 얼마나 많은데, 니 명함 들이밀어서, T.O.P 사 덕분에 가까스로 잡은 거야. 아, 삼영기획에서도 날짜 잡느라고 힘 좀 썼지. 히히히. 이시영이 주연이라서 그건 다행이지 않냐? 그러니까 김경우 감독만 편집하느라 그때까지 죽어라~ 고생하겠지. 큭큭큭큭.” “웃음이 나와요? 사장님! 편집 엉망으로 되면 어쩔라고!!” “잘 할거야 임마. 걱정하지 마.” “…….” “왜?” 내가 갑자기 조용해지자, 최성수가 운전하다 말고 옆구리를 툭 친다. 창밖을 아련히 응시하던 내 동공이 하늘하늘 날리는 민들레 꽃잎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신혜성. 왜그래??” “그냥….” “?” “오랜만에 누군가랑 말을 오래 한 거라서요.” “??” 이유 없이 눈물이 나는 날, 그런 날도 있나 보다. 강원도의 해변가와 읍상동에서의 신혜성이 '아가사'였다면, 서울 목동 내 집에 도착한 다음부터는 완전한 신혜성으로 돌아왔다. 일주일 쉬고, 크리스마스 이브까지는 홍보팀이 계획한대로 이리 저리 스케줄에 끌려 다녀야 된다는 최성수의 말에, 나는 기계처럼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문정혁의 오피스텔로 돌아갈까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먼지가 수북히 쌓인 내 집. 여기가 편했다. 아니, 사실은 문정혁이 괘씸했다. 완전한 나로 돌아와서 그럴까. 어떻게 내게 연락 한 번 안 할 수 있는건지, 문정혁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연락 못 할 수 있다고 쳐도, 문정혁은 그러면 안된다는 생각이 꽉 들이찼다. 일주일 내내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고 멍하니 혼자 집에서 보냈다. 공기만 들이마셨던 일주일이 지나자, 영화 홍보 겸 잡힌 온갖 인터뷰가 걱정됐는지 매니저 형이 아닌, 최성수가 직접 우리집에 찾아왔다. 최성수가 혀를 끌끌 차며 괜히 집에 혼자 있게 했다는 둥 중얼거렸다. “영화 걱정되서 그러냐? 김경우가 그러는데, 이시영 건 편집할 게 넘치는데, 넌 반대라니까, 걱정 하지 마. 혜성아.” “…….” 문정혁이 전화를 안 해… “신혜성. 빨리 옷 갈아입고 와, 임마. 오늘 인터뷰만 다섯 개 잡힌거 알지? 오늘은 신문 잡지사, 내일은 방송 인터뷰. 이따 밤에는 홍보팀이랑 스튜디오에서 포스터 3차 촬영.” “…….” 어떻게 고개를 끄덕였는지도 모르겠다. 코디 누나가 가져온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계속 문정혁이라는 세 글자만 뇌를 짓눌렀다. 이쯤 되니, 문정혁이 어떤 유형인지 알 것같았다. 초반에는 열정적으로 잘 해주다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상대를 방치하는 스타일임을. 아무리 바빠도 전화 한 통 없이 몇 달을 보낸 문정혁. 나는 당연히 문정혁을 그렇게 판단 할 수밖에 없었다. 베이지색 바탕에 은은하게 퍼지는 파스텔톤 그라데이션이 인상적인 긴팔 티셔츠, 진베이지의 스트레이트 팬츠, 내츄럴함과 옴므스타일의 조화. 옷만 갈아입었을 뿐인데도, 거울 속에 비치는 내모습은 코디 누나의 감탄 만큼이나 그럴싸했다. 면 소재는 겨울로 넘어가는 지금 시점에 맞지 않게 약간 얇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황금색으로 한 번 더 염색한 머리칼과 잘 어울렸다. “아, 가면서 졸지 말고 이거 훑어 봐.” “이게 뭐예요?” “시나리오들.” “?” 차에 타자마자 목배게를 둘렀지만, 곧 빼앗겼다. 그대신 최성수가 내민 두툼한 시나리오들이 품에 안겨졌다. 보자마자 윽 하는 신음이 절로 나왔다. 두툼하게 쌓인 시나리오들… 그중에는 대본 제본도 안 된 에이포 용지 묶음도 수두룩했다. “아, 그건 줄거리 요약만 나온 본이야.” 에이포 용지를 하나 하나 넘기는 내게, 최성수가 헤벌쭉 웃으며 설명해줬다. “투톱보다 원톱으로만 골라봤어. 나머지는 집으로 보내줄게.” “또 있어요? 장난 아니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방대한 양에, 나는 내가 어느 위치인지 비로소 실감했다. 실감하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영화 촬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룻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갖가지 시나리오를 훑어보느라 졸렸던 눈이 맑게 돌아왔다. “회사에서 공개 오디션 봤었잖냐.” “언제요?” 휙~ 종이를 넘기며 시선은 글자들에 고정시킨채, 나는 말했다. 최성수의 들뜬 목소리가 기분좋게 전해진다. “너 없는 동안. 많지는 않지만, 연습생이 좀 생겼어. 걔들 트레이닝 시키느라 내가 아주 똥줄 탔었다. 하나같이 너 언제 사무실 들리냐고 지랄 옘병을 해 대서.” “아직 연습생 키우고 직원 월급 다 댈 만큼 자금이 안 될 텐데요, 사장님?!!” “…….” 순간 번쩍! 뇌에 전기가 쳐들어왔다. 최성수가 조용해진 덕분에…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최성수를 쳐다보며 언성을 높였다. “최씨 아쟈씨!!! 또 대출받았구나?!!” “임마. 내가 이번에 뽑은 애들 너처럼 가능성 있는 녀석들이야. 긴장해.” “하…….” 시나리오고 뭐고 미치겠네 진짜. 충무로 사무실에 있을때, 경리 일까지 도맡아서 했던 나는, 최성수가 어떻게 자금을 융통하고 회사를 꾸리는지 훤히 보였다. 그래도 막가파 식으로 위험하게 돈을 끌어모으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그래도 그렇지. “원래 이 세계가 도박의 연속이야. 승승장구 하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쫄딱 망하는거 비일비재해.” “사장님도 도박했어요?” “나? 아냐. 그정도는 아니야. 지금 니 싱글앨범 수익금하고… 아. 배분율 조정은 안 했다. 예전처럼 니 몫은 고대로 니 통장에 들어갔어. 그밖에 니가 찍은 씨에프, 네임 벨류 덕분에 이익이 솟는 중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여간 혜성이 니 덕분에 내가 살겠다.” “제가 뭘요… 참, 시사회 전인데, 이렇게 시나리오 받아도 되나요?” “너 임마. 아직 모르겠냐?” 최성수의 답답해 하는 표정을 똑같이 따라했다. 그가 쿡 웃으면서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한글자 한글자 힘을 주어 말한다. “신혜성. 너. 스타라고.” “…진짜. 솔까. 안믿어진다.” 내가 엄청 황당하다는 듯 대꾸하자, 최성수가 하하하하! 크게 웃었다. “시간 날때마다 틈틈히 봐바. 이번 영화 솔직히 중박 정도만 해도 너한테 손해 볼 거 없어. 너 임마, 연극에서부터 뜬 거였잖냐. 요즘 관객이 얼마나 똑똑한지 모르지? 적어도 두 세 편까지는 배우에게 기회를 준다고. 마음으로.” “…완전 못믿겠다.” 12월의 둘째주, 또 한 번의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다. 하얀 바람과 이슬같은 서러움들이… 혹은, 순백의 기쁨들이… 대체, 언제 겨울이 온걸까. 탕… 나도 모르게 플라스틱 컵을 떨어뜨렸다. “잠깐 시간 괜찮나요?” “아… 안녕하세요.” 물을 다 마셨기에 망정이지… 주섬주섬 플라스틱 컵을 주워서 테이블 위에 올렸다. 간 떨어질 뻔 했네… “놀랐나봐요?” “아, 아니에요.” 사실 졸라 놀랐어… “이지영 기자가… 내 인터뷰 다음이, 신혜성씨라고 언질해줘서, 일부러 기다리고 있었어요.” “네, 네에….” 전서희가 나타났다. 순백의 눈처럼, 12월의 바람처럼 나타난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 세상 사람같지 않게 예쁘고 멋스러워서, 주변 모든게 숨을 죽이게 되는… 그런, 전서희를 몇 년 만에 코앞에서 보았다. 여의도에 있는 '한명'그룹의 종합컨벤션 센타, 외관이 강화 유리로 된 27층 건물. 화이트와 블루가 어우러진 천정과 대리석과 뻥 뚫린 내부, 조각같은 외형만 봐도 일반 사람들은 기가 죽는 곳. 이 건물 2층에 있는 세련된 카페가 인터뷰 장소였다. 물론, 이름만 카페지 '한명'이라는 이름답게, 복도식으로 동그랗고 길게 이어진 2층 내부는 유럽의 호텔처럼 아름다웠다. 바닥부터 벽까지 유리재질이다…라고 감탄하기 바쁜 내 앞에, 당연히 예상 한 적 없는 인물이 나타났다. 전서희… 그녀는, 내가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이 끝날 때까지 일부러 원형 카페 반대편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최성수 사장은 컨벤션 센터에서 만난 어떤 기자와 친분이 있었는지 1층에서 기다리겠다는 말만 남기고 인터뷰 끝무렵에 내려갔었다. 당연히 1층으로 내려가려던 나는, 조각인형처럼 나타난 전서희 앞에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잠깐… 시간 괜찮을까요?” 여전히 부드럽고 조용조용한 목소리 톤의 그녀. 티없이 맑은 피부와 섬세한 표정. 그러나, 그 안에 있는 품위와 고압적인 분위기는,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긴장하게끔 유도한다. 나는 겨우 입을 뗐다. “네. 그런데, 말씀 놓으세요.” “사석에서는 그럴게요.” “아… 네….” 우리 둘 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밖이기 때문에… 여기는 사석이 아니라는 건가. 말 하는 족족 심장이 미친 망아지처럼 펄쩍 펄쩍 뛰었다.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까지 했던 인터뷰 내용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안내하는 인적 드문 창가 자리로 갔다. 전서희가 진즉에 부탁을 한 건지, 우리가 마주 앉은 테이블 20미터 반경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뻥 뚫린 높고 넓은 내부… 겨울을 심어 놓은 것처럼 시리도록 차갑게 아름다운 건물. 그리고, 이 건물과 참 잘 어울리는 전서희… 유리 테이블에 카페라떼가 와서야, 나는 말했다. “저기… 그런데… 무슨 일로… 그… 아줌….” “신혜성씨도 선배님이라고 불러요. 아줌마라고 하지 말고.” “네. 하하… 선배님.” “시간이 얼마나 있나요? 나는 곧 괌으로 가거든요. 촬영 때문에….” “저… 잠시만요.” 부랴부랴 핸드폰을 꺼내서 최성수에게 전화했다. 화장실에서 볼 일 보고 내려간다고 말하는데, 전서희가 의식되서 양 볼이 붉어졌다. 물론 전서희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미동 없이 바른 자세로 앉아있을 뿐이지만. 통화가 끝나고,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십분 뒤에 잡지사 인터뷰가 있어서 이동해야 된다는데… 어떡하죠?” “그정도면 괜찮아요.” “…….” “영화… 벌써부터 파급력이 대단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특히 마지막씬 촬영이 인상적이었다면서요.” “어떻게 아셨어요?” “원래 이쪽은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소문이 빨라요. 신혜성씨는 기대주인 만큼, 여기 저기서 작은 거라도 알아 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잖아요.” “…….” 예의상 꺼낸 식상한 멘트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는 잠깐 텀을 준 뒤 긴 숨을 내쉬었다. 삶의 고락을 몽땅 쏟아내듯이. “하아….” “…….” “우리 진이….” “네?”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가슴에 파도가 쳤다. 전서희 하면 당연히 전진이 떠올라야 하는데, 참 이상하지. 문도천… 문도천 이라는 이름이 먼저 생각났었나보다. 나는 그녀가 '우리 진이'라고 말을 해서야, 전진이 그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서희가 고통으로 일그러질뻔 한 표정을 가까스로 가린 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우리 진이를 부탁하고 싶어요. 신혜성씨.” “!!” “문도천 전 회장이 어찌 되었는지 알죠? 우리 진이는 문도천 전 회장의 혼외 자식이지만, 핏줄이라 그런지 문도천과 닮은 부분이 군데 군데 있어요. 그래서… 무모한 일에 끼어들라고 해요.” “무모한 일이라뇨?” “이철호를 건드리려는 것. 그보다 무모한 일이 있을까요.” “…….” 전서희. 그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를 주눅들게 한다. “예전의 나는, 그리고 지금의 나도, 진이가 차라리 이선호와 잘 되는게 낫다는 주의지만, 진이가 그렇게 할 게 아님을 충분히 깨달았어요.” “제가…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저, 지금 진이랑 사귀지 않아요.” “사귀라는 게 아니에요.” “…….” 한글자 한글자 부드럽게 얘기하지만, 그 안에 박힌 가시를 반드시 내게 찌르는 그녀. 예전과 똑같다. “지금은 더욱 사귀면 안되는 입장이라는 거, 신혜성씨도 잘 알지 않나요? 이런거 저런거 다 배제하고 봤을 때, 두 사람은 모두 공인이예요. 스켈리톤 금메달리스트와 영화 배우이자 가수의 사랑. 게다가 동성끼리. 기자들이 가만 있을 것 같나요?” “…….” “안 사귄다니 다행이네요. 어쨌든, 우리 진이가 위험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어요. 진이에게, 제발 몸을 사리면서 살아달라고, 전해주세요.” 그녀는 정확히 십분이 되는 시점에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녀가 일어나서야, 그녀 뒤에 있던 벽시계 초침이 10분 지나 있음을 깨달았다. 굉장히 정확한 사람이구나… “그럼….” 전서희는 조용히 목례를 하더니, 앉아있는 내 옆을 스쳐서 걸었다. 또각, 또각, 구둣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또각… “저기요.” “…….” 뚝. 내 말의 시작과 동시에, 전서희의 규칙적인 구둣소리가 멈췄다. 나는 앉은 자세 그대로 조금 분한 투를 떠들었다. “직접… 전진한테 방금 저한테 한 말들… 전하셔도 되잖아요, 선배님.” 일부러 '선배님' 이라는 호칭을 힘 주어 말했다. 하지만, 내가 어떤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는 여자, 전서희. 그녀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또각, 또각… “전진에 대해서 잘 알텐데요…?” “네?” “그 애는 자기가 원하는 한 사람의 말만 귀 기울여서 들을 줄 알아요. …나처럼.” “!!” 심장이 칼에 찔리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섰다. 뒤돌아서 그녀를 보았다. 우아하게 걷는 그녀의 모습이 동그란 내부 덕분에, 기둥에 벌써 가려져서 사라져 있었다. 그녀가 사라져서야 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못 했음을 깨달았다. 10월, 찬란한 어느날 전진이 강원도까지 찾아왔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진 적이 있었노라고… 크리스마스 이브. 12월 24일의 공개 시사회를 앞두고 삼일 연속 함박눈이 내렸다. 그리고, 당일에는 잔잔한 싸리눈이 세상을 덮었다. 촬영 감독님들과 투자자 대표들이 관람했던 기술 시사회와, 22일의 기자 시사회. 두 시사회를 무사히 마친 뒤, 공개적으로 열리는 시사회에서 나는 처음으로 관객과 마주봤다. 최성수 사장과 김경우 감독은 내게 기자 시사회 때 오지 말라고 했었다. 영화의 순제작비와 총제작비 관련 예민한 질답이 오고가는 살벌한 분위기라는 것이다. 기자 시사회 효과는 일반인들을 위한 공개 시사회 때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초대권이 있어야 들어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인파가 영화관을 찾았기 때문이다. 기자 시사회를 통해, 대중매체에 제대로 알리기 시작한 '아가사'. 기자들의 평은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10점 만점에 10점을 주고 싶지만 마이너스 몇 점을 줬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시영의 서툰 연기가 몰입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스탭과 배우, 감독 할 것 없이 전원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자, 올라가자.” “네.” 김경우 감독님의 말에, 나를 포함 주연 배우들이 무대에 올랐다. 객석을 꽉 채운 사람들의 갈채가 터져나왔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스포트라이트를 맞으며 관객과 마주 봐서야, 내가 영화를 찍었다는게, 내가 배우라는게, 내가 해 냈다는게 실감났다. 가슴이 터질 것같았다. 주연 배우 중 홍일점인 이시영이 가운데 섰고, 나와 계상이형이 이시영의 양 옆에 나란히 섰다. 갈채가 끝날 무렵, 김경우 감독이 내게 나직이 귓속말을 건넸다. “너 팬클럽에서도 왔대.” “네?” “쉿.” 맙소사…! 영화 시작 전에 졸도하겠다… 어디에 앉아있을지 모를 팬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세게 뛰었다. 나를 보려고 여기에 와줬다고…? 나를…? 김경우 감독의 간단한 인삿말과 영화 소개, 그리고 주연 배우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여기 저기서 핸드폰 사진기로 우리를 찍었다. 흥분인지 전율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어진 눈동자로 객석을 꼼꼼히 살폈다. 이럴수가. 중간쯤에 앉아있는 고모와 고모부. 스크린 앞에서 근사하게 수트를 입고 나타난 나를 보고, 두 분은 울고 계셨다.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참아 보려고… 고모의 앞자리에는 양종호가 와 있었다. 거짓말… 거짓말… 김명민 검사와 공유 형사까지 와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같다. 시사회 전까지, 몇 달이나 못 만났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 안에 돌아와 준 기분이었다. 그리고, 내 시선이 발견한 마지막은… “!!” 문정혁…!!! 앞에서 세 번째 줄에 앉은 문정혁. 언제 와 있었던 걸까. 싱그러운 장미꽃다발을 품에 안고 있는 사람. 문정혁이 분명했다. “혜성아. 내려가자.” “네? 네….” 계상이형의 말에 겨우 정신차리고 무대를 내려가면서도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나의 황금빛 머리칼과 나의 존재에 감탄할 때, 나는 문정혁만 읽었다. 전진을 제외한 내 주변 인물들이 시사회에 와 준 것이다. 머리 끝까지 희열이 차올랐다. 손 끝이 저릿해질 정도의 쾌락. 문정혁을 보자마자, 그를 중심으로 새까맣게 사라지는 주변…! 그 뒤로 영화를 어떻게 봤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닌 '아가사'가 실제보다 신비롭게 스크린을 누비고 다녔으니까. 어두운 조명 속에서도 나는 눈물을 참았다. 사방에서 나를 주시하는게 느껴져서, 감동에 숨이 끊어질 것같아도 세포 마디마디를 진정시켜야 했다. 짝짝짝짝-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오르자, 사람들은 처음보다 크게 갈채를 퍼부었다. 온 몸이 녹아내리는 듯 한 기쁨이 끊임없이 회오리쳤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에 익은 배우들도 객석 중간 중간 보였다. 조명이 켜졌다. 납처럼 굳은 이시영의 표정을 제외하면, 전원이 기뻐하고 있었다. 영화는, 대 성공이었다. 하나님… 부처님… 교회도 절에도 가지 않는 내가, 하나님과 부처님을 찾으며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시사회가 끝나자마자 기자들의 질문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며 장소를 이동했다. 고모와 고모부, 양종호와 문정혁이 대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모!! 고모부!!” “아이고, 혜성아!!” “장하다. 정말 장하다. 얼마나 고생했냐.” 고모와 고모부는 나를 보자마자 얼싸 안고 우셨다. 이민우 일로 속상하셨을 두분은, 나를 통해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는 듯 하셨다. 양종호가 다리를 절룩이며 내게 다가왔다. “야. 졸라 멋지더라. 처음엔 예쁘게만 봤는데… 영화 중반부터는 막, 이 세상 사람같지 않게 근사하고… 이 영화 대박이야!” “고마워… 양종호….” 소식 없이 살다가, 문득 만나도, 바로 어제 만난 것처럼 허물없는 우리들. 양종호의 눈시울도 붉어져 있었다. 그동안 바쁘게 살았는지 양종호의 살이 많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문정혁은 내게 조용히 꽃다발만 건넸다. 안 본 사이 초특급 리뉴얼이 된 문정혁… 하지만, 예전과 다르게 다크써클이 진하게 깔려 있다. 볼도 쑥 파졌고… 보고싶었던 만큼 야속한 사람… 나는 문정혁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도 내게 이렇다 할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다같이 연회장에 가서 샴페인을 터뜨리며 근사하게 저녁 식사를 할 때도, 문정혁과 나는 조금 떨어져 앉아서 가끔 눈만 마주쳤다. 문정혁은 줄곧 나를 쳐다봤다. 밥도 거의 먹지 않고 칼날같은 시선을 내게 던졌다. 나는 양종호와 떠드는 척, 뒤늦게 도착한 공유 형사와 떠드는 척 하며 문정혁의 시선을 피했다. 회오리처럼 몰아치는 스탭들의 축하인사, 꿈같은 파노라마 속에 두둥실 떠 다니면서도 나는 문정혁의 시선을 느꼈다. 그는 시선으로 내 전부를 삼키고 있었으니까… …보고싶은 만큼 미웠다. 사랑하는 만큼 서러웠다. 그래서 내 가슴은 이미 터지고 없었다. 문정혁 이라는 존재 앞에서….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문정혁과 단 둘이 되었다. 목동 집으로 가겠다는 내 고집에 절대 져 줄 리 없는 문정혁은, 당연하다는 듯 자기 오피스텔로 차를 몰았다. 나와 둘이라는게 좋았는지, 그의 뺨이 놀라울 만큼 상기되어 있었다. 운전 도중, 내 손을 잡으려는 문정혁을 뿌리쳤다. 그가 억지로 내 손에 깍지 끼웠다. 문정혁. 그는 전진과 다르다. 과묵한 입술을 함부로 열지 않았다. 만약 전진이었다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싸움이 시작되었을텐데, 문정혁은 내게 할 말을 고민하는 듯 보였다. 조각처럼 예리하게 다져진 얼굴. 그의 옆모습에 가슴이 아프다. 세월이 지날수록 근사해지는 모습에, 이제는 가슴이 아프다. “말 해 줬으면 좋겠어.” 오피스텔 내부에 들어가서 신발을 벗자마자 따지듯이 말했다. 문정혁은 습관처럼 자기 방에 들어가서 타이를 풀렀다. 울컥- 오기가 발동한 나는 그의 방에 따라 들어갔다. “말 하라고.” “…….” “왜 연락 안했는지, 왜 소식이 없었는지, 뭐 하고 지냈는지, 말 좀 하라고!!” “…….” “문정혁!!!” “…….” “씨팔!! 맘대로 해!!!” 문정혁의 등에 대고 바락바락 소리지르다가, 제 풀에 지쳐서 휙 돌아섰다. 재수없어. 끝낼 거야. 이게 뭐야? 제일 행복해야 될 날에… 게다가 오늘은 시사회도 시사회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일부러 쿵쿵대며 세 걸음쯤 걸었을까. 어느새 다가온 문정혁이 내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약한 숨소리를 내뱉을 틈도 없이, 나는 단숨에 문정혁의 품에 안겼다. “야!! 문정혁!! 문정혁!!” “…….” “안 놔?! 안 놔?! 개새끼!! 시사회에는 왜 왔어?! 나쁜 새끼!! 너랑은 끝이야!! 끝이라고!!” “…….” 만약 전진이었으면, 전진이라면… 아마 나처럼 소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문정혁은 그러지 않았다. 내가 도망갈 게 두려웠는지 억세게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을 뿐이었다. 어느새 나는 씩씩거리며 그의 품에 조용히 안겼다. 그러자 그의 심장이 얼마나 세게 뛰는지, 그가 얼마나 가파른 호흡을 내쉬는지, 알게 되었다. “문정혁… 너… 울어?” “…….” “울어?” “…아니거든.” …드디어 말 하는구나… 근데, 몇 달 만에 들어보는 문정혁의 첫 마디가, '아니거든.' 이라니… 안 들은걸로 치겠어… 사실 우는 것은 나였다. 엉망으로 울면서 문정혁의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언제부터 그를 쳤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문정혁이 입을 뗀 것을 시작으로, 나는 참았던 눈물을 폭발해냈으니까. 그는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뒀다. 한참을 시끄럽게 울면서 문정혁의 가슴팍을 치다가 그도 나처럼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 둘은 정지된 흑백 필름처럼 멈춰서서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약속 한 것처럼 끌어안았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입을 맞췄다. 서로의 타액이 얽히는 도중 내 몸이 침대에 눕혀졌다. 가파른 신음소리가 넓은 방에 찢어지게 울렸다. 서로의 옷을 벗겨주고, 서로가 한 몸이 되었을 때 찢어짐의 강도는 세어졌다. 밉고 야속한 사람이지만, 내 본능은 그를 원했다. 이성보다 감성이, 본능이 먼저였다. 문정혁도 나와 비슷한 감정이었는지, 우리는 서로를 확인하느라 급급했다. 더운 숨이 빠져나가고 집 안의 차가운 공기가 열대야로 뒤덮였다. 하지만, 내 저주받을 머리는, 문정혁과 섹스가 끝나자마자 전진을 불쑥 꺼내버렸다. 이유도 없다. 어느 때보다 문정혁을 간절히 원하는 이때, 나는 깨달아 버렸다. 전진과는 단 한 번도 육체적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음을… 안 본 사이에, 문정혁의 요리 실력이 늘었다. 아니, 그가 요리를 할 줄 알았던가? 절대 아니었는데? 크리스마스 파티랍시고 문정혁이 만든 요리는 스파게티였다. 화이트 와인과 스파게티. 조개 관자인지 연어인지 모를 것들이 스파게티 면에 섞여 있었다. 새벽 세시의 크리스마스 파티라니. …마리 앙투와네트가 썼을것같은 촛대도 있어… 식탁 의자에 마주 앉아서, 가볍게 잔을 부딪히며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었다. 문정혁은 여전히 말을 아끼는지,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대답해주는 식이었다. “정혁아.” “응?” 하지 말까. 하지 말까. 몇 번이나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말해버렸다. “전진은… 어떻게 지내?” “…….” 문정혁과 사랑을 나눈 다음, 전진을 묻기. “그냥… 궁금해서. 아까 시사회때 전진 빼고 다 왔잖아. 다들 바쁘게 지냈다는 건 알겠지만… 원래 자주 연락하던 사이는 아니었고… …너랑 전진은 다르잖아. 문정혁. 너, 바쁘답시고 나한테 전화도 안하고… 전진도 그렇고…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전진은 어디있는지… 이런거 알려주면 안되는거야?” “안되는건 아닌데….” “…….”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될 지를 모르겠다.” “?” 그가 나직이 숨을 내쉰다. 그리고 이마를 꾹 꾹 누르며 미간을 찌푸린다. 넓은 거실로 자리를 옮긴 문정혁을 따라서 나도 쫄레쫄레 쫓아갔다. 쇼파 상석에 앉은 문정혁의 무릎에 앉을까- 하다가, 고압적인 분위기에 밀려서… …긴 쇼파로 찌그러져 앉았다. 문정혁은 몇 달 전부터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다수 내용은 내가 예상했거나 이미 아는 것들이었다. 한명그룹 건설부 부사장을 역임중인 문정혁. 그는 이철호의 의도라는게 뻔~히 티가 나는 잡다한 일만 처리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 잡다한 일이라는게 워낙 골치아픈 사안들이라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는 것이다. 수주건이 맞물린 타사와의 불협화음 해결, 기획팀에서 처리 못 한 일들을 떠안고 공사판까지 나갔던 일. 명색이 부사장인데 임원들의 견제가 만만치 않아서 이철호와 일대 일로 만나는건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것. 김명민 검사는 김명민 검사대로 이철호 비리를 조사하는 것과 별개로, 다른 재판들 때문에 정신없었다는 것. 양종호와 공유도 심증을 가지고 여기 저기 후비고 다녔지만, 이철호와 이선호가 그리 만만한 인물이 아님을 확인한 결과만 얻었다는 것… 얘기를 들을 수록 한 숨이 계속 빠져나갔다. 그만 말하라고 할까… 하다가, 순간 정신이 번쩍 났다. 새벽 네시. 문정혁이 방금 어렵게 얘기를 시작한 '전진'의 소식에, 나는 그야말로 눈이 까뒤집히는 충격을 받았으니까. “뭐…라고? 문정혁. 지금 한 설명 다시 해 줘.” “…말 그대로야.” 믿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물어봤다. 전진이… 전진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다고…? “문정혁. 전진이 그럼, 한명과 관련된 비밀 조직들을 직접 정리할거라고?” “직접은 아니야.” 부사장직에서 대외적인 일을 처리하며, 이철호를 노리는 문정혁. 그런 문정혁과 비슷하게 지내겠거니 예상했던 전진이… 전진이… 한명 그룹이, 나아가 문도천부터 이어져왔던 조직 폭력배놈들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니가 방금 그랬잖아!!! 법 없이도 사는 기업의 뒷구멍 개새끼들을 전진이 맡는다는데!!” 화가 났다. 이유 없이 속이 쓰렸다. 기가 막혔다. 왜, 왜 전진이 그런 일을 해야 되는데? 억울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쇼파에서 일어났다. 문정혁을 쏘아보았다. “왜, 전진이 그런 일을 해?!! 말이 안되잖아!!” 다 갈라진 소리로 외치고 흥분하는 나를 쭉 참아주던 문정혁도 일어났다. 서늘한 낯으로 나를 보는 문정혁. 그가 의심 가득한 시선을 던지며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그런 일?” “그래! 왜 전진이….” “…그럼 내가 해야 되는건가?” “!!” “우리 둘이 김명민 검사와 내린 최종 결론이 이건데, 어떡하라는 거지? 게다가 전진 그새끼가 자발적으로 자기가 한댔어. 내 맘은 편했을것같냐?” “그러다가 전진 죽으면 어떡해!! 어떡할거야!!” “신혜성….” “너랑 형제잖아!! 문정혁!! 너 전진한테 큰 일 나면 어떡할거야!!” “신혜성. 정신차려. 너 지금 놀라는건 이해하지만, 정도 이상으로 반응하는거같아.” “닥쳐!! 니가 이상한거야!! 문정혁!! 전진이 자발적으로 위험한 불구덩이에 뛰어든다고 하는걸 그냥 냅둬?!” “전서희도 찬성한 부분이야. 누군가는 맡아야 돼. 비밀 조직도 기업이라고!” “왜 전진이 희생해야되는데!! 왜!!”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다. 눈앞이 캄캄했다. 오래 전, 학교를 피바다로 만들었던 전진이 뇌를 점령했다. 나는 광분하며 소리쳤고, 문정혁도 만만치 않았다. “희생 아니야!! 따까리 노릇 하러 들어간게 아니라고!! 이철호를 공개적으로 끌어내리지 못 할 시에, 최후 방법을 쓰자는 방편으로 이철호가 조종하는 조직들을, 이철호가 했던 방법대로 전진이 끌어들이는거야!!” “어쨌든 칼부림이 빈번한 세계잖아!! 그걸 왜 전진이 해!!” “…전진은 이미 간부니까.” “뭐?” “몰랐어? 김명민 검사에게 얘기 들었었잖아.” “김명민 검사?! 내가 듣긴 뭘 들어!! 김명민 검사도 오늘 두 번째 본 거였는데!!” “!!” 내 말에 문정혁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의 안면으로 후회의 빛이 차곡차곡 쌓였다. “씨팔… 조만간 김검사가 너한테 직접 얘기할거라고 했었다… 맞어….” “그래? 그럼 니가 말 해. 문정혁. 전진이 대체 무슨 조직에서 있다는 건지!!” 문정혁은 잠깐 혼란스런 낯으로 거실을 빙글빙글 돌다가, 한참이나 같은 자리에서 골몰했다.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나를 돌아본다. “후…….” “…….” “혜성아.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 “…….” “전국적으로 흩어져있던 한명 그룹 소속 비밀 조직들이, 10년 전부터 하나로 통합되고 있어. 이철호의 작품이지. 덕분에 나가 떨어져간 조직이 꽤 되었어. 기존의 조직중에 제일 잘 나가던게 김동완이 행동대장으로 4년간 활동했던 청랑단인데… …이런 얘기 들어도 괜찮아?” “…괜찮아.” 풀썩- 쇼파에 주저앉으며 나는 겨우 대답해줬다. 사실 괜찮지 않다. 쿵쿵대며 뛰는 심장,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얼마 전에, 전서희가 내 앞에서 전진을 부탁한다고 했던 문장이 한없이 메아리쳤다. 문정혁이 잠깐 텀을 주고 말을 이었다. “니가 촬영할 때 나도 자세히 알았었어. 전진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 “비밀 조직이 여러 파로 나뉘다가, 최근들어 두 개 파로 거대하게 모였어. 하나는, 이철호와 우리 아버지가 이끌어오던 청랑단(청랑靑狼:푸른 늑대)이고. 또 하나는 청랑단이 내 친 따까리들이 뭉치며 움직이는 혈랑(血狼:피로 물든 늑대)단.” “…….” “걱정할 건 없어. 보통 기업가에는 조직폭력단이 개입되어 있으니까. 이민우는 청랑단에서 따까리 생활부터 시작했었어. 출소한 다음에는 아마 청랑단에서 이민우를 칠 거야. 그 전에 혈랑단이 보호할 거고.” “…….” 전진… 이민우… 상상하기 싫은 죽음같은 장면이 내 목을 조인다… 침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나는 대답할 타이밍을 번번히 놓쳤다. 문정혁이 담뱃불을 끄고, 성큼성큼 다가와서 허리를 숙인다.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눌렀다가 천천히 뗀 문정혁이, 걱정스런 낯으로 묻는다. “왜그래?” 나는 웅크리며 다리를 모아 가슴에 포개었다. 진정해… 진정하자, 신혜성. “그냥… 놀라워서. 민주주의 국가에 이런 일이 난무하다는게 안 믿어져.” 문정혁이 옆에 앉아서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꽉 끌어안았다. 그의 목소리도 지쳐 있었다. 충격에 흔들리는 내 동공처럼… “경찰에서 대기업과 조직폭력이 연계된 사건을 수사하다가 조용히 내리는 경우, 흔해. 뉴스에 보도되는 내용 중, 별 것 아닌 실랑이를 벌이던 시민 누구누구가 다쳤다는 둥의 이런 기사도, 재벌 총수의 보복 폭행인 경우가 상당하고.” “…….” “기업 이미지가 아무리 깨끗해도, 이 부분은 뗄 수 없을 거다. 그러니까….” “그래도 안 돼!! 이민우는 내가 꼭!! 반드시 설득할거야!! 이민우는 빼 줘… 이민우는… 그리고, 전진은… 전진도 안 돼.” 나는 흥분 할 수밖에 없었다. 문정혁의 몸을 밀어내며,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그 세계를 이해하라고 강요하는 문정혁이 싫었다. 전진과 이민우가 죽음의 바다에 발을 디디는 것으로 해석되는 내가, 무엇을 이해하라는 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문정혁은 그런 나를 쭉 응시하다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럼 누가 해?” “그야--” “내가?” “…….” “신혜성. 말 해. 전진만 걱정돼? 나도 당연히 연관되어 있어. 이게 맹수들의 세계야. 나는 걱정 안 돼?” “!!” 달칵- 지퍼라이터를 켜던 그가,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 “씨발!! 나는!! 걱정 안 돼?!! 신혜성!! 사랑한다고 말 한 건 다 거짓말이었어?!!” 원망 가득한 음성을 찌르고, 나를 노려보는 문정혁을, 차마 쳐다볼 수 없다.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태평양 한 가운데 떠 있는 종이배처럼, 하나씩 젖어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어떡해… 어떡하면 되는거야… 전진… 전진을 너에게 어떻게 이해시키면 되는거야… 이런 나를… 어떻게 이해시키면 되는거야… 내 앞에서 웬만하면 폭팔하지 않는 문정혁이지만, 예외는 있었다. 문정혁 앞에서 전진이 거론되면, 그는 가차없었다. 이성이 아닌 본능으로 세상을 소리치는 사람이었다. 나는 무조건 문정혁 앞에서 전진 얘기를 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래. 그것만 생각하자. 그것만… “사랑하는 거 알잖아.” 문정혁의 가까이에 앉아서, 떨리는 팔로 그의 어깨를 쥐었다. “문…정혁… 내가 너… 사랑하는 거… 알잖아… 알잖아….” “아는데 그래?” 그가 내 팔을 뿌리쳤다. 숨이 막혀온다. 눈물이 흐른다. 무조건 문정혁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나 좀… 이해해 줘. 문정혁. 그냥 예전의 사랑이라서 그래. 한 번 했던 사랑이라서 차마, 쉽게 무시 하는게 안 되서 그래. 게다가 너와 형제잖아!!” “씨팔!! 나도 한때는 그새끼랑 형제라는게 자랑스러웠었어!! 널 만나기 전까지는!!” “!!” 죽음같은 시선으로, 원망과 사랑과 배신과 한을 담아서 나를 본다. 문정혁. 그의 눈망울도 처참한 적빛을 띠고 있었다. “널 만난 다음부터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수 십 수 백! 수 천 번씩! 마음이 오락가락해!! 전진을 죽이고 싶다가! 전진이 가엾다가!! 그지같은 내 형보다 훨씬 형제같은 전진이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가!! 다시 너를 보면 그새끼를 전서희 뱃속에 집어 넣고 싶어진다고!!” “문정혁… 너…! 어떻게 그런 말을…!!” “나만 이랬겠어? 그새낀 더 해!! 나나 전진이나, 누굴 위해 뭘 참는 종족같냐? 조까!! 둘 다 참을성 제로야!! 우리 둘 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눈에 보이는거 다 짓밟아가면서 갖고 싶은거 차지하면 된다는 교육 받으면서 자랐어! 그런데! 우리 둘이, 전진이랑 내가, 너를 보면서 참는게 넘쳐!!” “그만… 그만해!!” “날 사랑한다고? 그럼 행동 똑바로 해. 신혜성.” “문정혁… 그만 해!!” 양 손으로 귀를 막았다. 거침없이 흐르는 눈물처럼 심장은 터지고 없었다. 문정혁은 내 양 손목을 꽉 잡고 억지로 손을 귀에서 떼어 냈다. 그의 흥분한 목소리, 그의… …눈물.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 더 처참하게 짓이겨졌을 심장.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똑똑히 느껴 봐. 내가 너때문에 얼마나 죽고 싶어하는지 느껴보고!! 니가 날 사랑한다는 소리 듣고 무슨 생각 들었었는줄 알어? 차라리 누가 죽여줬으면 싶더라. 가장 행복할때 죽는게 낫겠으니까.” “정혁아… 정혁아아….” 사랑해… 어떡해… 어떡하면 되는거야… 사랑해… 사랑한다고… 나도… 나도 너를… “신혜성. 내가 공모전 준비 할 때, 니가 동화 부문이 좋다고 했지?” “…….” 조각같은 그의 피부를 덮는 뜨거운 눈물… 가슴이 찢어질 것같다. “매일 매일, 신혜성. 너를 보면… 내 머릿속에 동화책이 펼쳐져.” “…!!” 하나님…. “거기서 너는 공주님이고, 나는 너를 지켜주는 기사였다가, 왕자님이었다가….” “…….” “너를 볼때마다, 나는 몇 번씩 죽고, 몇 번씩 되살아나. 죽을때도 행복하고, 살아날때도 행복한 병신이 돼.” “!!” “전진처럼 안 해 주면, 내가 널 사랑하는게 아니라고? 그새끼가 몸으로 부딪히며 싸울때, 나는 머리가 터질 만큼 쉬지 않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되는 위치에 있어. 속을 알 수 없는 늙은 간부들도 하나 하나 간파해야 되고! 너랑 다시 만나면 조금이라도 더 붙어 있고 싶어서, 하루에 두 시간도 못 잤었어!” “…….” 그의 괴로움을 보았다. 어쩌면, 아직도 전진에게 크게 흔들리고 있을, 전진에게 나도 모를 미련을 남겨두고 있을, 이런 나를 보고 매일 매일 괴로워했을 문정혁이 보였다. 가쁜 숨을 내쉬며 한참을 소리쳤던 문정혁이, 순간 제정신을 차렸는지 그의 동공에 한줄기 빛이 스쳤다. 그리고 무너지듯 말한다. “…미안해….” “문정혁…!!” 쇼파에 앉아서 약간 상체를 숙인 그가, 자기 머리를 양 팔로 감싸며 자책의 숨을 토해냈다. 뚝… 뚝… 바닥에 떨어지는 그의 눈물을 믿을 수가 없다. “소리… 질러서… 미안…해… 파티… 해줄라고 했는데… 우훅….” “!!!” 내가 자기를 버릴까봐 눈물흘리며, 먼저 미안하다고 하는 문정혁의 모습에… 그를 당장 껴안고 뺨을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꽉 막힌 목 밖으로 언어가 터지지 않아서, 나는 쉬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나보다 더 많이 울면서 괴로워하는 문정혁의 머리를 꽉 끌어안은 채로… 12월의 아침햇살은 굉장히 따스하고 반갑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두 배는 달갑다. 한여름의 햇살은 새벽에도 습기가 차있으니까. 번쩍! 눈을 뜨려고 했지만, 입이 먼저 떠졌다. 움찔 몸이 떨렸다. 입이 먼저 떠졌다는 건 즉, 어젯밤부터 새벽까지 너무 많이 울었다는 증거인데… 귀찮은 팔을 억지로 움직여서 눈두덩이를 매만졌다. “!!” 눈이 금붕어가 되고 얼굴은 보톡스 주사 다섯 대 맞은 것처럼 팅팅 부었어… 사태가 얼마나 참혹한지 거울로 확인할 겸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키다가 내 의도와 상관없이 몸이 도로 눕혀졌다. “더 자.” “…나… 괴물됐나봐.” 옆으로 누운 내 몸을 뒤에서 바짝 끌어안고 결박한 문정혁… 그의 졸린 목소리 만큼이나 내 목소리도 갈라지고 장난 아니다. 여전히 눈을 못 뜬 상태에서 나는 계속 꿈틀거렸다. “애기야.” “왜….” “자꾸 움직이면, 하자는 걸로 안다. 오빠 아직 잠 덜 깼는데도 커졌어.” “…….” 문정혁이 잠들면 다시 꿈틀거려야겠다. “이대로 넣고싶다.” “자세 바꿔. 내 엉덩이에 대지 마. 문정혁.” “…넣을게. 안되겠어.” “아… 안돼.” 우리 둘 다 알몸이다. 새벽 다섯시까지 껴안고 울다가, 그 새벽에 거실에서 한 번 하고, 샤워하다가 또 하고, 둘 다 기절할것처럼 피곤한 상태에서 방에서 잠들었다. 넓은 침대까지 밀려오는 햇살에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포근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문정혁의 아래가 완전히 커져서, 내 뒤를 문지른다. “신고양이….” “…….” 내 등에 자기 가슴을 꽉 붙이고, 넙적다리를 내 허리에 감아버린 문정혁. 목소리가 갈라진게 심상치 않다. 요상한 기운을 감지한 나는 잠든 척 했지만… “나 잠 다 깼어. 책임져.” “야!! 문정혁!! 나 지금 눈도 안떠져!!” 괴물같은 새끼. 오전 열시에 몸을 꿈틀대면서 잠을 깬 죄로, 나는 노곤한 몸을 또 한 번 움직여야만 했다. 몇개월간 나랑 못만난 덕분에 장시간 욕구를 참았던 문정혁은 초사이어인이 되어 있었다. 옆으로 누운 내 몸을 돌려서 눕히더니, 문정혁은 1초 만에 내 위에 올라왔다. “눈 안 떠도 돼, 애기야. 부은것도 엄청 귀여워.” “야… 문정….” 아직 잠이 덜 깼는데… 분명히 그런데… 잠 깨기 전부터 심장 터지게 생겼다. 두근, 두근, 두근… 정면으로 누운 내 입술부터 쇄골까지 천천히 입술과 혀를 움직이는 문정혁 덕분에 단계별로 잠이 깼다. 문정혁이 조금 변한게 느껴졌다. 아니, 확실히 변했다. 그는 어젯밤, 혹은 새벽. 내게 사랑을 소리친 다음부터 나를 향한 자신감을 충족한 듯 싶었으니까. 그의 눈빛과 행동에 강한 의지가 매달렸다. 의지는 곧 믿음이란 이름표를 달고 내게 돌아왔다. 한바탕 소리쳐서일까. 문정혁은 내게 전보다 두 배는 섬세하게 신경써주고 자상하게 대해줬다. 물론 새벽부터 오전 열시까지 짧게 느낀 문정혁 감상문이지만. 오후 두시. 침대에서 뒹굴다가 샤워한 뒤, 진한 커피 한 잔 타갖고 서재에 들어간 문정혁은 습관처럼 바퀴의자에 앉아서 신문만 읽었다. 일반 신문, 헤럴드 경제… 그가 오전에 읽는 신문 숫자만 해도 다섯 부나 되었다. 아니지. 방금 그의 비서가 회사에서 오피스텔까지 갖다준 정오 신문까지 합치면 여섯 부. 문정혁이 언제 서재에서 나오나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나는, 꾸루룩- 뱃속에서 전쟁이 일어나서야 씩씩대며 서재 문을 벌컥 열었다. 재수없어. 문정혁 감상문 취소. 변하긴 개뿔. 저새끼는 나를 방치하기 위해 태어난거야. “문정혁!! 신문 그만 보면 안돼?” “플레이 스테이션 새 버젼 사 놨댔지.” 이럴수가. 내가 아닌 신문 보면서 대답하는 문정혁이라니. 저렇게 쌀쌀맞은 투로 말하다니. 녹차 팩으로 눈두덩이를 비비던 나는, 녹차 팩 두 개를 휙~ 문정혁이 읽는 신문 위에 던졌다. 흠칫 놀란 문정혁이 그제야 내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다리를 꼬아 앉는다. “왜그래. 애기야. 오빠가 신문 볼 때는 방해하지 말랬잖아.” “야. 너는 무슨 신문을 한시간이나 보냐? 완전 짜증나.” “심심해서 그래? 게임기 사 놨댔잖아.” 조금 자존심 상한다. 만약 전진이었으면 조금은 만만하게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할 텐데, 고압적인 분위기의 문정혁이란… 건드리면 절대 안될 것같다. 그는 지나치게 섹시하고, 지나치게 근사했다. 가벼운 바지에 티 하나만 입었다손 쳐도, 건설부 부사장답게 농축된 우아함이 넘쳤다. “나 매콤한 거 먹구 싶어.” “매콤한 거?” 꼬르륵- 뱃속의 반주에 맞춰서 결국 말했다. 문정혁이 킥- 웃으며 시치미 뚝 떼는 낯으로 나를 본다. “어제 니가 스파게티 만들어줬잖아. 맛있긴 했는데… 연회장에서부터 느끼한것만 줄창 먹어서 그런지, 막! 매콤한 거 먹구 싶다구.” “흠….” “배고프단 말야… 이것 봐… 배하고 등하고 붙었어.” “하하하하.” 최대한 불쌍하게 표정을 짓는 나를 보고 문정혁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근사하게 웃는다. “알았어. 애기 좋아하는 매콤한거 먹자.” “진짜?!” “응. 매콤한거 시키던가, 만들던가 할테니까 이리 와서 뽀뽀나 해 봐.” “알았어!!!” 문정혁 감상문 부활. 나를 보고 자신있어하는, 내 사랑에 드디어 자신감을 갖게 된 문정혁이 뿅 가는 미소로 손가락을 까딱까딱한다. 당장 달려가서 그의 허벅지에 앉아서 목에 팔을 두르고 정신없이 뽀뽀해줬다. 문정혁이 만든 요리는 생태 찌개였다. 냉동실에 있는 생선들 중, 문정혁이 고른 게 생태였다. 만드는 법을 아냐고 물어봤더니, 그렇잖아도 뭐 해먹을까 고민하다가 아까 인터넷으로 만드는 법을 검색했었단다. 나는 문정혁이 신문만 읽는 줄 알았는데… 역시, 섬세해졌다. 그는 어제 이후로 내게 이것저것을 주문했다. 오빠 칼질하는거 옆에서 쳐다보고 있어. 오빠 등 껴안는다 실시. 맛있으면 뽀뽀한다 실시. …사실 주문이 아니라 명령이었지만. 내가 시키는대로 잘 따라줄때마다 문정혁이 대놓고 웃으면서 좋아한다. “이제 일하러 가는거야?” “응. 좀… 늦을지도 몰라. 우리 신고양이는 스케줄이 어떻게 돼?” 야. 신고양이면 신고양이, 애기면 애기. 하나만 불러. …라고 말하려다가 관뒀다. 사실 둘 다 듣는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저녁에 라디오 생방 하나 있고, 아. 섹션에서 다섯시부터 열두시까지 밀착 취재한댔다… 어뜩하지? 나 눈 많이 부었어?” “좀 가라앉아서 괜찮은데… 가까이 와 봐.” “?” 또 뽀뽀하려는 건가 싶어서 쇼파에 나란히 앉아있는 문정혁 옆에 바짝 붙었다. 그가 안경을 쓰더니 내 뒷통수를 꽉 잡고 더 가까이 잡아당긴다. 카리스마 뽀뽀라도 하려는건가? “애기야. 이~ 해봐.” “이~” “고춧가루 꼈다. 가만 있어봐.” “응? 나 양치질 했는데?” “이.” “…이~” 자기 손톱으로 조심조심 내 이빨에 낀 고춧가루를 빼는 문정혁. 예전에는 이런 행동 절대 안했었는데… 새삼 뭉클한 감정이 치솟는다. …그치만 뭉클한건 뭉클한거고, 이런 행동은 낭만적이지 않잖아. “열두시에는 집에 와? 우리 신고양이 하루종일 힘들겠네.” “어? 엉. 한시 전에는 올꺼야. 나 계속 이 해?” “아니. 다 뺐어. 세 개나 껴있었어.” “…스케일링 해야겠다.”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문정혁… 가슴까지 짜릿해지는 풍부한 느낌이 좋아서, 나도 몸을 웅크리고 그의 겨드랑이에 파고들어서 기댔다. 그러다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 내가 없을때, 나랑 최대한 오래 붙어있고 싶어서 하루에 두시간도 못 잤었다는 문정혁. 그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기 무섭게 떠오른 것. “문정혁!!” “?”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무작정 문정혁의 팔을 잡아끌었다. “내가 두피 마사지 해 줄게!!” “…뭐?” 문정혁은 샤워실에 갈때까지, 문정혁 특유의 '…뭐?'만 열 번 넘게 했다. 평정을 유지했던 페이스는 온데 간데 없이, 그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내가 이럴 줄은 예상 못했나보다. 짜식이. 사랑한다니까 그러네. 우리는 잠깐이지만 일상적인 행복을 누리며 과거와 미래의 참담함에서 벗어났다. 현실이지만 현실을 탈피하는 중이었다. 전진과 이민우. 복잡한 사슬을 집어 던지고 잠깐이라도 자유롭고 싶었다. 문정혁도 나와 똑같은 마음이었는지 뭐? 하면서도 잘 따라왔다. 절대로 싫다고 짜증내는 문정혁의 몸을 밀다시피 해서, 원형 욕조에 앉혔다. 딱딱하고 물기없는 욕조 바닥에 앉는 내내 문정혁이 옷 젖으면 알아서 하라고 협박한다. 머리 감은지 몇시간 안됐다고 지랄하는 문정혁에게, 자꾸 지랄하면 옷 적신다고 역으로 협박했다. 나이스. 촤아아- 샤워기 물을 틀고, 욕조 가장자리에 목을 걸친 문정혁의 머리카락을 적셨다. 콩닥콩닥 가슴이 뛴다.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 감겨주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손바닥에 샴푸를 묻혀서 거품내고, 그의 머리카락에 조심조심 발랐다. 관자놀이부터 이마까지 지압을 시작하자, 문정혁이 나른한 숨을 내쉬며 편하게 눈을 감는다. 위에서 내려보는 문정혁은 눈물이 날 만치 아름답다… “정혁아… 너 진짜 잘생겼다? 그거 알지?” “음…….” 꾹꾹 두피 마사지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칭찬해줬건만, 욕조에 앉아서 팔짱 낀 문정혁은 재수없게 입꼬리만 올린다. “안겸손쟁이.” “…뭐?” 황당하다는 듯 잠깐 멈칫하다가, …뭐? 하는 문정혁. 너는 지금 내손안에 있소이다. “야. 보통 누가 자기한테 잘생겼다고 하면, 속으로는 맞다고 생각해도, 겉으로는 아니야~ 이러잖아.” “하하하하!” “왜 웃냐? 정혁아. 넌 근데 진짜진짜 인생이 화보야. 어디에 앉아있어도 막 빛이 난다? 참. 내가 이것까진 말 안하려고 했는데, 너 있잖아. 솔까 졸라맨일때도 캡 멋있어.” “졸라맨?” “엉. 다크서클이 땅을 뚫을 때도 간지나.” “하하하하하!” “그리고 있잖아. 니가 막 내가 무슨 말 할때마다, …뭐? 하면서 눈 크게 뜨고 멍~하게 나 쳐다볼때 있잖아.” “응.” “그때 최고로 귀여워.” 그가 행복하게 미소짓는다. 마사지 하던 강도를 약간 줄였다. 문정혁의 목소리를 좀 더 자세히 들으려고… 그가 흐뭇한 표정으로 쑥스럽다는 듯 말한다. “…나 귀엽다는 말 처음 들어봤는데, 니가 말해줘서 그런지 기분 좋다.” “그리고 있잖아…” “?” “돈지랄 할때는 재수없었는데, 돈지랄 안할때는 어떤 줄 알어?” “어떤데?” 문정혁의 눈썹이 꿈틀 올라가는게 웃겨서 풉! 하고 허공에 웃었다. 그가 조금 긴장한게 마사지 하던 손끝에 훤히 느껴졌다. 아… 문정혁. 너무너무 좋아. 완전 사랑해. 눈을 감고 있는 문정혁을 넋놓고 내려보다가, 허리를 숙였다. 내 뺨에 문정혁 머리카락에 묻은 거품이 닿았다. 나는 그의 귓가에 입술을 거의 붙이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럴때의 문정혁은… 죽이게 섹시해.” “!!” 순간 문정혁의 큰 눈이 번쩍 떠졌다. 그가 불현듯 벌떡 일어나더니 바닥에 떨어진 샤워줄을 위에 고정시키고, 뜨거운 물을 틀었다. 쏴아아- 짙은 수증기와 물폭포. 안마용 물까지 전부 가동되었다. 동그란 욕조에 조금씩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몇 초만에 벌어진 사태에 멍하니 놀란 나는 한 마디도 못했다. 문정혁이 내 팔을 휙 잡아당겨서 욕조 안에 세울 때가 되어서야 퍼뜩 정신차린 나는 꽥 소리쳤다. “어? 다 젖잖아!! 문정혁!! 젖으면 안된대매!!” “그러라고 틀었어. 같이 씻자.” “왜, 왜이래?!” “…니가 유혹했잖아.” “아니야!! 저질!! 저어질!!” 사실 맞아. 유혹한거… “씨팔. 니가 마사지 하는데…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 나 저질 맞아.” “아… 앗… 잠깐마…….” 하루에 몇 번을 씻는거냐… 둘 다 옷이 젖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1분도 안되서 욕조 밖으로 속옷까지 내던져졌으니까… 뇌에 마비가 올 정도로 차오르는 아찔한 물안개 속에서 우리 둘의 신음소리가 겨울을 태우고 있었다. 영화가 성공했다. 아가사 라는 캐릭터가 지닌 판타지틱한 면이 소녀와 여자를 열광시켰고, 극중 윤계상이 그러했듯 남자들마저 내게 신비한 감정을 품었다고 소식지들은 말했다. 주조연으로서 오디션에 붙었던 작품 아가사는 나를 스타덤에 확고히 자리하게끔 만들었다. 아가사는 곧 신혜성이었고, 신혜성은 아가사였다. 사람들의 뇌리에 잠식한 아가사는 실존 인물이었으며, 만나고 싶은 소망이 되었다. 아가사 덕분에 활동이 끝난 1집 싱글 앨범이 처음보다 유명해졌고, 텔레비전을 틀었다 하면 내 얼굴이 몇분에 한 번 꼴로 비쳤다. 티비 씨에프, 각종 화보 촬영, 초청 시사회 관람, 인터뷰, 토크쇼.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원하는 만큼, 세상은 좁아졌다. 나는 혼자 아무렇게나 차려입고 슈퍼에 갈 수도 없었다. 조금만 어딜 돌아다녀도 파파라치가 따라붙었다. 오백만 관객의 여세를 몰아 천만 관객까지 도전하자는 기사가 연일 머릿글에 올랐다. 내가 차기 작품을 무엇을 선택할 지, 사람들은 언제나 궁금해 했다. 문정혁과 사랑을 나누거나 얼굴 볼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문정혁이 바쁜 만큼, 나도 두 배 세 배로 바빠졌다. 이제는 그가 내게 닥달하며 얼굴 좀 보자고 신경질을 부렸다. 그러나 비명이 나올 만큼 빠듯한 스케줄을 소화하는 나는 언제나 문정혁에게 미안하다는 말로 사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월의 막바지. 새 해가 지난 얼마 후, 스물넷이라는 뜨거운 나이를 입은 내 앞에, '미안하다.'라고 수 십 수 백 번 말해줘야 할 인물의 소식이 천둥 번개처럼 꽂혔다. 이민우. 바쁜 생활 속에 하마터면 잊혀질 뻔 한 틈을 놓치지 않고, 이민우라는 칼바람이 내가슴에 꽂혔다. 내 입밖으로 진짜 비명이 터져나오도록. '어떤 말부터 해야 할까.' 의정부교도소 접견실의 벽걸이 시계가 오전 여덟시 삼십분을 가리키자마자, 방송이 나왔다. 1월 중순이 지나서야, 나는 수감중인 이민우와 만나도 좋다는 통보를 받았다. 소식을 들은 날부터 다음날인 오늘까지, 내 스케줄은 모조리 펑크. 내 속사정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최성수가 오만 인상을 쓰면서도 흔쾌히 허락해줘서, 여기까지 왔다. 물론, 혹시 누가 알아볼 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까만 가발과 모자까지 썼다. 하다못해 뿔테 안경까지 썼다. 한 달에 네 번만 면회가 가능한데다가, 면회 시간도 7분밖에 안된단다. 그동안 고모를 통해서 민우가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만 들었던 나는, 전날 밤잠을 설치며 울었다. 대체 몇개월만에 이민우와 다시 보는 건지, 달력을 보고 날짜를 세다가 기가 막혀서 울었다. 교도관들은 내 신분증을 보고, 이름이 신혜성 이라는 것에 깜짝 놀랐지만,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코디 누나가 어두운 톤으로 피부색을 맞춰준데다가 뿔테 안경에 까만 머리칼에, 모자까지 푹 눌러썼으니까. 나는 가족이 아닌 친구라고, 이민우와의 관계를 설명했고, 그들이 내미는 종이에 적었다. 7분… 7분이라니. 고작 7분밖에 볼 수 없다니.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말부터 할까. 쿵쿵 뛰는 심장 소리만 들려주다가 7분이 끝날 것같은데… 유리 저편에 문이 열리더니, 드디어 이민우가 나타났다. 숫자가 적힌 죄수복을 입고, 1대 1로 붙어다니는 교도관과 함께 나타난 이민우. 나는 벌떡 일어나서 유리에 손바닥을 붙였다. “민우야…!” 그의 표정은 지나치게 편안해 보였다. 벌써부터 눈시울이 붉어진 나와 백팔십도로 다른 이민우의 평화. 소름끼쳤다. 구치소에서 재판 이후 교도소에 수감되기까지, 아니, 오늘까지 머리카락은 마냥 내버려뒀는지 그의 앞머리칼이 눈두덩이를 덮고 있었다. 교도관이 그의 뒤에 서있다가 의자에 앉는다. 유리를 사이에 두고, 민우와 나도 마주보고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1분… 2분… “많이….” “응?” “많이 예뻐졌네….” “이민우….” 긴 앞머리칼 안에서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을, 그의 동공이 가까스로 비쳤다. 입술을 깨물자 거친 숨이 틈새로 빠져나갔다. “나, 여기서 매일 운동해. 살도 쪘어.” “응… 응….” “왜 울어. 바보같이.” “흑… 미안해… 민우야….” 접견실에서 방송을 기다릴때, 나는 그에게 잘 지내냐고 묻겠노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민우를 본다는 것 자체가 내겐 고통이었다. 내겐 아픔이었다. 금같은 시간이 흘러흘러 벌써 5분이 지났다. 조금 있으면 6분… 나는 바보같이 한 마디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영화에 대한 것도, 나의 일상도… 하지만 이민우는 다 아는 눈치였다. 고모와 고모부를 통해서 내 소식을 들었는지, 내가 일부러 변장하고 온것조차 꿰고 있었다. 째깍… 째깍… 몇십초의 카운트다운. 멍하니 나만 쳐다보고 앉아있던 이민우가, 갑자기 눈에 힘을 주고 유리에 바짝 다가왔다. 멀리서 교도관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목을 빼고 이쪽을 쳐다봤다. “혜성아.” “응….” 그가 힘겹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순돌이한테… 사랑한다고 전해줘….” “응… 알았어….” 잠깐 숨을 고른 이민우가, 고개를 푸르르 흔든다. 그의 앞머리가 옆으로 흐트러졌다. 깊고 아련한 이민우의 눈동자가 처음보다 자세히 보였다. 붉게 차오른 습기마저도… “그리고… 누나한테도… 사랑한다고 전해줘.” “으응.” “엄마한테도… 사랑한다고 전해줘….” “…….” 어느 순간, 나는 '사랑한다고 전해줘.'라고 반복하는 이민우의 말에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쌀쌀한 겨울 바람이 차츰 더워졌다. 이민우의 뺨을 타고 동그랗고 굵은 눈물이 흘렀다. “아빠한테도… 사랑한다고 전해줘….” “…….” “형한테도… 사랑한다고 전해줘….” “…….” 이민우는 내게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전해줘.'를 속삭였다. '사랑한다.'라는 부분에는 유독 힘을 주며 말하는 이민우. 나는 아이처럼 울어버렸다. “출소할때까지… 혜성이 너는 바빠서 못 올거잖아.” “으흑….” “그러니까 니가 다 전해줘.” “끅… 끄윽… 흐으….” “사랑한다고.” “!!” 이제 자기가 출소할때까지 찾아오지 말라는 뜻을, 이민우는 내게 분명히 전했다. 그리고 시간이 끝날때까지 쉬지 않고 사랑을 전해달라고, 사랑한다고, 쓸개를 토해내듯 내게 말했다. “영식이한테도 사랑한다고 전해줘….” “민정이한테도 사랑한다고 전해줘….” “정미한테도 사랑한다고 전해줘….” “현우한테도 사랑한다고 전해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을 부여쥐었다. 그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유일한은, 나 하나였으니까. 교도관이 감시하는 현재, 이민우가 나를 위한 배려로, 그의 뜨거운 마음을 이렇게 터뜨렸으니까. 그는 아무 이름이나 갖다 붙이면서,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나를 강하게, 애절하게 쳐다보면서, 선명한 글자들을 하염없이, 행복하게 던졌다. 사랑한다고 전해줘… 사랑한다고… 사랑한다… 혜성아. 사랑한다… 사랑한다… 너의 심장에게 전해줘. 사랑한다고… 혜성아. 사랑한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이민우의 이름을 부르며 가슴에 시퍼런 멍이 생기도록 주먹을 쳤다. 미안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는게 오히려 죄가 되어서, 무엇도 선택할 수 없는 언어에 황망한 가슴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다. 면회가 끝나고 집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열시.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펑크 낸 스케줄에 이제 와서 달려들고 싶은 마음은 눈꼽 만치도 없었다. 쉬지 않고 울리는 휴대폰을 껐다. 멍한 표정으로 샤워하고, 쇼파에 앉자마자 긴 숨이 터져나왔다. 길고 지루한 전쟁… 문정혁과 전진, 이민우와… …나아가 공유 형사와 김명민 검사, 양종호, 전서희, 이선호, 이철호… 죽은 문도천까지. 모든 사람이 얽혀있는 이 전쟁이 언제쯤 끝날까, 눈앞이 캄캄했다. 어두운 터널 속을 아무리 뛰어도 동전만한 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 빛이 보여야만 희망이 생기는데… 전쟁을 잊기 위해 나는 이기적으로 그간 지냈었다. 문정혁과 사랑하고, 토할 것처럼 겹친 스케줄들을 소화하며, 현실에서 도망쳤다. 전쟁이 현실인지, 사랑과 스케줄이 현실인지, 지금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갑갑한 마음을 어쩌지 못 한 채, 맥주 한 캔을 원샷했다. 뜨거운 가슴이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민우와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 재회한 직후라서 그럴까. 그에게 제대로 된 말 한 마디 못한 내가 병신같았다. 갑자기 모든게 짜증이 났다. 염증. 진짜 현실과 가짜 현실, 모든것에서 염증을 느꼈다. 모든 이들이 내게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강요했다. 불붙는 가슴을 쥐고 집안에서 우두커니 있어야 하다니. 나는 두꺼운 파카만 달랑 걸치고 차키를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운전석에 앉아서 키를 꽂고 시동을 걸어서야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지금 내게 필요한건 일탈이었다. 문정혁으로도 안된다면, 나 혼자만의 해방이 필요했다. 한때 '아가사'에 빠졌듯이. 또 다른 내가 절실했다. 핸들을 돌리며 될 대로 되라 식으로 액셀을 밟았다. 끼익- 한강 둔치에서 차를 세우자마자 바퀴에서 흙바람이 일어났다. 한강물이 코앞에 보였다. 평일 오전의 추운 날씨…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아가사가 되고 싶다는 간절함이 들끓었다. 푸른 바다에 몸을 적시며 해방감을 느꼈듯이, 사이다 기포같은 투명함이 내 피부를 뚫고 들어왔으면 싶었다. 바다가 안된다면, 조각 조각 살얼음이 낀 한강 물이라도… 내 뜨거움을 식혀줬으면… “씨팔….” 담배 떨어졌다. 목 아낀답시고 담배 마지막으로 피운게 언제인지 생각도 안 나네… 슬쩍 주변을 돌아보니 50미터 떨어진 지점에 지어진 콘테이너 매점이 시선에 잡혔다. 귀찮지만 걸어갔다와야겠다. 발이 왜이렇게 시려울까… 몇 걸음 걷다가 도저히 견디기 힘든 칼바람에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런… 제정신이 아니었나보다. 신발도 안 신고 튀어나왔어… 쯧쯧. 혀를 차며 차로 되돌아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때, 갑자기 시야가 깜깜해지더니 누군가가 내 몸을 결박했다. “!!!” 나는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혼절해버렸다. 엄청난 힘이 내 전신을 포박한 건 둘째치고, 누군가 내 입을 막은 손수건에서 풍기는 지독한 약냄새에 취해서… 똑… 똑… 수도꼭지에 매달린 물방울이 한 방울씩 낙하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으윽….” 눈을 뜨자마자 밀려오는 엄청난 두통에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잡았다. 사방이 동그랗게 휘였다. 어지럽고 메스껍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동그란 원반 위에 굴러가듯 멀게 들려왔다. “…니까….” “?” 내가 갈피를 못잡고 앉은 상태에서 상체를 휘청이자 누군가가 이번에는, 내 머리 위에 젖은 수건을 짰다. 투두둑. 소름끼치게 차가운 물방울들이 머리부터 뺨까지 미끄러졌다. 한순간에 정신이 돌아왔다. 한강 둔치…! 차로 돌아가려고 등을 돌리자마자 정신을 잃었었던게 몽땅 생각났다. 여기는…! “약이 독해서, 조금 어지러울거야. 그래도 깰 때만 구역질 나는 거니까, 참아.” “누…구….” 어지러운 동공이 천천히 진정되었다. 관자놀이를 꾹 꾹 누르며 입술을 움직였다. 사지가 멀쩡한 걸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옷도 그대로였다. 때가 꼬질꼬질 낀 매트리스. 조금만 움직여도 끼걱대는 스프링소리가 들렸다. 희미했던 시야가 밝아졌다. 매트리스 밖으로 양 다리를 내렸다. 누군가 내 앞에 서서 한 번 더 젖은 수건을 비틀어 짰다. “정신이 드냐?” “!!” 뚝… 투둑… 물방울이 떨어지는 쪽으로 천천히 뺨을 올렸다. 그대로 경직되었다. 온 몸에 한기가 치솟았다. 세포 전체가 확장되는 듯한 살벌한 공포가 치고 들어왔다. 한겨울에도 습기가 느껴졌다. 잠깐이지만 분명히 굳었던 심장. “아무 짓도 안 하니까, 걱정하지 마.” “김…동완…!!” 무심한 낯으로 나를 내려보는 자는, 김동완이 분명했다. 도대체 왜…! 어떻게…?! 한때, 김동완의 정체를 몰랐던 시절, 나는 김동완에게서 단단한 신념과 강인한 긍지를 엿보았었다. 그러나, 지금의 김동완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지대, 하얀 알갱이가 빽빽하게 찬 도화지. 그것이 김동완의 인상이었다. 예측할 수 없기에 상상조차 불가능한 인물. 내가 노려보자, 김동완은 내 의식이 제대로 돌아왔음을 확인하고,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어두운 분위기… 뻥뻥 뚫린 굵은 철골조 바닥… 더러운 공기… “화성 공장 창고야.” “?” 그가 담배를 건넨다. 그는 벌써 한개피 담배를 반쯤 태우고 있었다. 꿀꺽 침을 삼키며, 그가 내민 담배를 받았다. 치칵- 불을 붙이는 동시에 그의 다음말이 귀를 뚫었다. “경기도에 있는 공장이라고. 한명 건설에서 8년 전까지 하청업체에 줬다가, 지금은 버려진 폐공장이지만.” “…….” “허튼 수작은 부리지 않는게 좋아. 말했다시피 신혜성.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할 거니까. 단, 서툴게 움직였을땐 장담 할 수 없지. 창고 1층에, 애들이 대기중이거든.” “!!” 사람 발만한 구멍이 듬성듬성 난, 철골조 바닥. 어둡게만 봤던 1층이 제대로 보였다. 과연, 김동완의 위협대로, 1층에서 시시덕거리는 양복 입은 따까리들 머리통이 보였다. 골조 사이로 보이는 숫자만 해도 어림잡아 스무명이 넘었다. 구멍이 큼직한 바닥과 달리, 벽의 골조들은 틈이 촘촘했다. “잘못 움직이면 넘어지니까 조심해. 여기 창고는 예전에 짓다 만 거거든. 특히, 2층 부분은 완공 후에 추가로 내부에 짓다 만 거야. 까딱하면 골조 사이에 가랑이가 껴서 불알 터진다.” “하…….” 김동완. 그는 사람같지 않았다. 옛날보다 노련해진 눈매, 중후해진 분위기, 상대를 압도하는 차분한 말투. 모든것이 나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가 말을 한다는 자체가 내겐 절망이며 공포였다. 쿵, 쿵, 쿵, 쿵. 쉬지 않고 심장이 뛰었다. 두려워서, 억울해서. 김동완 이라는 이름이 내 심장을 쥐락펴락했다. 예전의 나였으면 동완이형- 하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매달렸을지도 모른다. 해명이라도 해달라고 애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청랑단의 행동대장이었던 김동완. 이선호를 사랑하는 김동완. 이선호 라는 이름까지 생각하자, 내 안에 숨죽여있던 독기가 되살아났다. 나는 어깨에 힘을 주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표독스럽게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 “왜 나를 잡아왔지?” “…….” “김동완. 설마 나한테 푼돈이나 뜯어먹을 생각은 아니겠고, 아무 짓 안 한다는걸 보면,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나 따려는 것도 아닐 테고.” “…….” 목소리 끝이 떨릴 때마다 주먹 끝의 손톱으로 살을 찔렀다. 다부지게 말하는 내가 의외였는지 김동완이 휘파람 소리를 낸다. 철컹대는 심장 소리가 강해졌다. “김동완. 대체 왜 나를….” 그에게 따지던 도중, 내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누군가 망치로 뒷통수를 후려 갈기는 듯한 충격적인 생각이 솟구쳤다. 설마… “혹시… 나… 미행했냐?”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설마 했던 생각 하나를 내뱉자, 김동완이 피식 웃는다. 심장이 떨어졌다. “혹시… 이번 만이 아니라, 그동안 나를… 미행했었냐고!!” 설마… 설마… 아닐거라고 믿으면서 그를 쳐다봤던것 같다. 김동완이 담배를 허공에 튕기며 말한다. “그걸 이제 알았나?” “!!” 방금 내가 오싹해 하며 충격받았던 생각은, 몇 달 전의 것이었다. 흐릿해지다 못해 망각한 기억. 작년 여름에 그것들과 노래방에 갔다가 나왔을때 느꼈던 시선이 생각난 것이었다. 당시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시선의 정체가, 김동완이었던 것이다. “신혜성. 너는 그냥 가만히 쉬다가 돌아가면 돼.” “그, 그게 무슨 뜻이야!! 왜, 왜 나를 잡아 온 거야!!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이유?” 그가 피식 웃으면서 일어났다. 동시에 내 몸이 자동으로 움츠러들었다. 김동완은 나를 위 아래로 벌레보듯 훑으며 중얼거렸다. “이유는 곧 알게 돼.” “?” “넌 미끼일 뿐이니까.” “뭐…?” 미끼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영문을 알 수 없는 김동완의 말에, 나는 주머니부터 뒤졌다. 아뿔싸. 휴대폰을 집에 놓고 온 게 이제야 생각났다. 하긴, 휴대폰을 갖고 왔어도 김동완이 통화 하게 내버려 뒀을 리가 없다. 과연 김동완은 내게 손 끝 하나 안 대고 10평 남짓된 방 입구로 걸어갔다. “미끼라니. 내가 왜 미끼지? 혹시, 우리 고모부한테 헛지꺼리 할 수작이라면….”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일어났다. 하지만, 채 1분도 안되서 나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쳤다. “이 개새끼야!!!” “!!!” 1층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싶더니, 별안간 전진의 우렁찬 목소리가 2층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 전진…!! 김동완이 기다렸다는 듯 피식 웃으며 문 앞에 서있던 놈들에게 손짓 했다. “내보내.” “예! 형님!!” 우루루루- 그의 짧은 명령이 끝나기 무섭게 복도에 대기중이었던 수십명이 1층으로 튀어 내려갔다. 이게 무슨 일이야…!! “혜성아!!! 혜성아!!! 씹팔새끼들아!! 우리!! 혜성이!! 어딨냐고!!!” 전진의 함성이 지붕을 무너뜨릴듯 울려퍼졌다. 다당! 다당! 다당! 다당! 몇 십명이 움직일때마다, 공사장에서나 봤던 구멍 난 철판들이 비명을 질렀다. 캉- 카캉!! 우르르르- 무언가 부서지고 쏟아지는 소리, 각목이 살을 스치는 소리, 비명 소리, 온갖 잔인한 소음이 퍼져왔다. 겁에 질린 나와 달리, 김동완은 느긋하고 시니컬한 투로 중얼거렸다. “간부 주제에, 몸소 움직이는건 죽도록 피하더라고. 저새끼가.” “뭐…?” “전진 말이야. 손에 피 안묻히기로 작정했는지 죽어도 나타나지 않고 따까리들만 내보냈었거든.” “!!” 골조 바닥이 흔들릴 만큼 잔인하게 채색되는 발 밑 세상. 나는 두려움에 밑을 쳐다보지 못했다. 내가 있는 2층의 기둥이 수도 없이 흔들거렸다. 혈전이 벌어지는 아래 풍경을, 아예 쭈그려 앉아서 편하게 쳐다보던 김동완이 허리를 쭉 펴며 일어섰다. “그래서.” “…….” 얇은 기둥 하나를 잡고 부르르 떨기 바쁜 나를 힐끗 쳐다본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미끼가 필요했었어.” “김동완…!!” 내 안에 이런 용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대담하게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헛스윙질만 하고 골조 바닥에 엎어졌다. 으윽!! 뼈대만 앙상한 바닥. 절로 신음이 터져나왔다. 그때 김동완이 지시했는지 누군가 달려와서 내 등을 구둣발로 눌렀다. “아아악!!!” “묶어.” “이거 놔!!! 아아악!!!” “그리고 계속 엎어놔. 돈 주고도 볼 수 없는 광경인데 말이야.” “놔!! 이거 놔!! 으, 으흑! 김동완!! 이거 풀어!! 아아아악!!!” 나는 바닥에 엎드린 상태에서 밧줄로 묶였다. 절대 일어날 수 없게끔, 2층 바닥 철골조에 내 몸을 묶은 것이다. 덕분에 죽어도 쳐다보지 않으려던 1층이 내 얼굴만한 골조 틈에 훤히 비쳤다. 두근, 두근, 두근- 여기 저기 널려진 피… 깨지고 터지는 남자들. 그리고… 눈에 익은, 한 남자… “전진 저새끼가 한 번에 돌아서 달려올 줄은 몰랐지만.” “이거 풀어… 이거 풀어!! 당장!!” 눈물조차 제대로 흐르지 않았다. 2층 바닥에 사지가 묶인 상태에서, 나는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오래 전 나와 심장을 바꿨던 전진. 그의 심장이 얼마나 격렬하게 뛰는지만 생생히 느껴졌다. “공주야!!! 공주야!!! 씨팔!!!” 어두운 회색 수트를 입고 나타난 전진. 그는 충격적일만큼 잔인하게 싸우고 있었다. 혈랑단의 간부라더니,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빠르고 강했다. 태풍고 시절에는 사람을 패더라도, 한 번에 요절을 내진 않았었는데, 지금의 전진은… 단칼에 놈들을 찌르고 파괴시켰다. 양 손에 쇠파이프를 들고 휘두르다가, 나중에는 쇠파이프 하나와 칼 하나를 양 손에 잡고 한번에 몇 놈씩 잔인하게 찔렀다. 물건도 아닌 사람을. “김동완!!! 좆같은 새끼야!!! 숨어서 대가리 비비지 말고 기어 나와!!!” 2층 골조가 마구 흔들릴때마다 1층 바닥에 시체가 나뒹굴었다. 눈가가 흐릿해진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굵은 눈물 한방울이 1층으로 떨어졌다. 내 이름 하나에, 전진이 미쳐서 달려왔다. 전진이… 전진이… 어쩌면 내 머리는 문정혁을 불렀던 찰나에… 자신을 잊지 말라며, 운명이 상황을 만들었다. 빌어먹을 운명이, 또 나를 짙은 아픔과 그리움의 홍수에 놓아버렸다. 항상 이런식이야… 언제나 어긋나… 어떤 상황이라도, 그것들과 나의 운명이 허무하게 빚어져… 나를 사랑한다는 그것들… 우리는 늘 어긋나기만 해… 늘 죽음같은 상황으로… 누구와도 제대로 사랑하고, 사랑받지를 못 해… 언제나 다른 줄이 얽히고 섥혀… 누구 한 명 제대로 볼라고 치면, 다른 한쪽이 무섭게 치고 올라와… 그러면서 나한테 서로를 보라고 강요하잖아…! 그게 어떤 상황이 되었든지간에, 상황만 다를 뿐, 과정과 결과는 이런식이야… 전진을 사랑해도 사랑 할 수 없었듯이, 문정혁을 사랑해도 사랑 할 수 없었듯이, 전진과 사랑해도 방해가 많았듯이, 문정혁과 사랑해도 그가 떠나갔듯이… 두려움에 질린 내가 문정혁을 생각하기도 전에, 전진이 나타나듯이…! 왜… 왜…? 탕… 전진의 발작이 멈췄다. 그가 쇠파이프를 힘없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의 옷에 튄 피처럼 붉게 차오른 전진의 동공. “공… 주야….” 나를 본 것이다. 처참하게 묶여서 1층의 난도질을 모조리 감상하던 나를, 우연히 고개를 올렸던 전진이 본 것이다. “너… 너… 우리 공주….” 뻥 뚫린 철골들 덕분에, 내가 전진을 내려보듯, 전진도 나를 볼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붉게 차오름과 동시에 무기가 땅에 떨어졌다. 사납고 잔인했던 전진의 안면이, 단숨에 겁먹은 어린아이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온 몸을 부르르 떨면서 전진은 진짜 아이처럼 주먹쥔 팔로 자기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멍하니 천정을 쳐다보며, 2층 바닥에서 반쯤 정신을 놓은 나를 올려보는 것이다. 전진이 살육을 멈추자, 거짓말처럼 다른 놈들이 동작을 멈췄다. “김…동완… 개…새끼야… 니가 감히… 우리 공주한테… 우리… 공주한테….” 피범벅이로 변한 전진이 으르렁거린다. 내 등에 여유있게 한쪽 발을 올리고 비스듬히 선 김동완. 안 봐도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김동완이 내 머리통에 총구를 겨누고 있다는 것을. 김동완은 소름끼치는 어투로 낮게 지시했다. “포박해.” “예!!” “공주야… 공주야….” 전진은 자기 몸이 묶일 때도, 시선을 내게 고정시킨 채 멍하니 서있었다. 전진이 이끌고 온 혈랑단 인원은 총 다섯이었다. 그나마도 따까리들뿐이라서, 다섯놈들은 창고에 들어와서 무기를 사용하기도 전에 쓰러졌다. 다시 말해 전진 혼자서만 무수한 놈들을 상대했던 것이다. 죽어도 싸움 안하겠다고 결심했음직한 전진을, 김동완이 건드렸다. 맹렬한 독을 지닌 벌집을 쑤신 것이다. “다섯 놈밖에 안된다고? 혈랑단에서 온 새끼가?” “예. 어떻게 처리할까요? 이미 뒤졌는데…. 분쇄… 할까요, 형님?” “아니. 머리가 다섯밖에 안되는데 굳이 시체 끌고 멀리 갈 건 없지. 대충 사고사 처리 해.” “예. 알겠습니다.” “나도 곧 따라갈테니까, 전원 철수 시키고.” “하지만… 저새끼들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출발해라.” “예. 형님.” 나는 1층 바닥, 넓은 지름의 기둥에 묶인 채로 멍하니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김동완의 목소리톤은 처음부터 이제까지 평행선을 이뤘다. 내가 아까 묶였던 골조식 2층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아마 계속 저기 묶여 있었으면 나도 골로 갔을 것이다. 그리고 전진은, 내 반대편에 묶여 있었다. 전진의 숨소리가 굉장히 거칠다. 묶이기 전까지 김동완에게 구둣발로 몇 번 얻어 터졌는데, 나는 소리만 들었을 뿐, 전진이 얼마나 다쳤는지 못 봤다. 김동완은 전진을 몇 번만 세게 까고, 더이상 건드리지 않았다. 아마, 오늘의 목적중에 전진과 나를 죽이려는 건 없었나보다. 청랑단 새끼들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기둥 근처에서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김동완 목소리도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깜깜한 세상, 비릿한 피의 향기, 뼛속까지 얼리는 강추위… 그리고, 잔인한 침묵. 기둥 반대편에 묶인 전진 쪽으로 낑낑대며 몸을 틀다가 포기했다. 가슴부터 배까지 꽉 묶인 밧줄 때문에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다. “나….” “!!” 단 둘이 되고 얼마 안 가서 전진이 먼저 입을 뗐다. 철렁- 심장이 내려갔다. “하나도 안 다쳤어. 공주야….” “우흑….” 서러움에 눈물이 터져나왔다. 기가 막힌 현재에 가슴이 아팠다. 김동완은 물론이거니와, 도가 넘을 만큼 사람을 죽였던 전진도 무서웠다. “공주야….” “으흑, 으흑, 으흑.” “괜…찮아…?” “으흐으, 으흐, 으흐, 으흑.” 저렇게 선한 목소리를 지닌 녀석이, 어떻게… 어떻게… 활달하고 명랑했던 전진은 사라지고, 폭풍우처럼 세상과 사람을 갈았던 전진의 인상이 부각된다. 내가 울자, 전진도 울었다. 내가 크게 울면 전진도 크게 울고, 내가 작게 울면 전진도 작게 울었다. 그는 어찌 할 줄을 모르며 나한테 울지 말라고 거듭 말했다. 자기가 죽일 놈이라면서 끊임없이 자책했다. “공주야….” “끄흑, 끄흑, 으흑, 으흑, 끅, 끅, 끅.” “끅질 해서 어떡해… 공주야… 공주야….” “끅, 끄흑, 끅, 끅, 끅, 끅.” “나… 너한테 발차기 백대 맞을게… 공주야… 울지마… 공주야아….” “으, 으흑, 으흑, 끅, 끅, 끅, 끅.” 어떻게 이 와중에 나의 끅질을 걱정하고, 심각한 목소리로 발차기를 맞겠노라 결심할까. 기가 막혔다. 전진에게 이정도 패싸움은 싸움도 아닌가보다. 나만 병신같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때, 나의 끅질이 멈추는 일이 발생했다. “!!!” “공주야… 아무 말이나 좀 해 봐… 흑… 공주야….” 이선호가 나타난 것이다. 기둥 반대편에 묶여있는 전진은 아직 이선호가 나타난 줄 몰랐는지, 여전히 울기만 했다. 이선호는 표정 없이 앞에 섰다. 그리고… 짜악-!! 내 뺨에 불꽃이 일었다. “공주야!!!” 나보다 더 놀란 전진이 반대편에서 찢어져라 외쳤다. 나를 친 뒤, 이선호는 기둥 중간에 섰다. 그제야 이선호를 알아봤는지, 전진이 침 뱉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전진은 이선호를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전진.” 오싹- 이선호의 안정된 목소리톤을 듣자마자 온 몸이 경직되었다. 이선호는 전진을 내려보며 억지로 눈물을 참는 듯했다. “지금이라도 내게 와.” 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선호가 한 번 더 힘을 주며 말했다. “니가 이런다고 득이 될 거 없어.” 서럽게 긴장된 공기가 우리 셋을 옥죄였다. 어디선가 이선호를 안쓰럽게 지켜보고 있을 김동완까지… “전진. 건설부에 최근 산화물산 하청업체 명진건설과 수주건이 맞물린 걸 시작으로, 일이 꼬여가고 있다는거 아니?” “…….”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이선호가 하는 얘기를 최대한 알아듣기 위해 집중했다. 전진도 마찬가지일거다. “나, 다음주부터, 한명그룹 건설부 사장으로 임명되서, 출근해.” “!!!” “니가 나한테 한 짓. 다 눈감아 줄게. 마지막 기회야.” “!!” 김동완이 왜 나를 미끼로 선택했는지, 전진이 왜 오늘 화성 창고까지 와야 했는지, 이유를 알았다. 이선호 때문이었다. 전진과 만나기 위해 이선호는 이런 방법을 택한 것이다. 혈랑단 다섯 명이 죽어 나가도 아무렇지 않게 전진을 협박하는 이선호는… 한명그룹 건설부 부사장에 재임중인 문정혁… 그 이름이 심장을 세게 찔렀다. 이선호가 말 한 부분 중에 내가 알아들은 것은, 다음주부터 이선호가 그룹 파트 중 건설부에 사장이 된다는 것이다. 저렇게 어린 나이에 사장직으로, 자기 아버지 힘을 이용해서…! 내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동시에 기둥 반대편에서 전진 목소리가 들렸다. “이선호.” 내가 아닌 이선호를 부르지만, 그의 목소리는 아까 전에 나를 불렀을때와는 백팔십도 달라져 있었다. 이선호가 전진을 향한 시선에 불을 장착할 만치 살벌하고 메마른 목소리톤. 그냥 듣기만 해도 상처받을 만한 전진의 냉정한 목소리… “말이지. 아버지라고 제대로 불러보지도 못 한 남자가, 죽었어.” 이선호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전진의 목소리에 증오가 실렸음에도, 이선호는 억울하다는 듯 전진을 마냥 내려 볼 뿐이었다. “이선호. 너는 니 인생만 인생이고, 남의 인생은 어떤지, 남이 무슨 일을 할때 어떤 동기가 발생했는지는 관심도 없냐? 아니, 그런건 기본 아니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혜성이 때문에 이러는거잖아. 전진. 아니야?” “이선호. 정신차려라.” “뭐라고?” “나 혜성이한테 차였거든.” “!” 이선호의 시선이 당장 내게로 꽂혔다. 이선호는 시선으로 내게 물었다. 진짜야? 진짜 니가 전진을 찼어? 나는 이선호의 시선을 피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그 부분에서는 이상하게 이선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이선호의 평화가 깨어졌다. 그가 전진의 멱살을 붙드는지, 옷이 움켜쥐는 소리가 들렸다. “선호야!!” 그리고 이선호가 하염없이 눈물 흘리기 시작할 때, 멀리서 김동완이 달려왔다. 김동완이 이선호의 양 팔을 꽉 잡고 이끌었다. “놔!! 이거 놔!! 김동완!!”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선호야. 지금 나가야 돼.” “흐, 흐윽! 놔!! 놔!! 전진!! 전진!!” “도망치지 않게 마지막까지 잘 지켜. 곧 돌아올테니.” “예. 형님. 걱정하지 마십쇼.” “김동완!! 이거 놔!! 신혜성!! 죽여 버릴거야!!!” “선호야… 제발…!!” 요란하게 울부짖으며 미친놈마냥 광분하던 이선호가, 결국은 김동완의 힘에 이끌려 사라졌다. 주변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제 놀랄 기운도 없었다. 멀리 떨어진 창고 입구에, 김동완이 지시한 따까리 두 놈이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멍하니 녀석들의 담배 연기를 응시하는데, 전진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하지마, 공주야.” “…….” “왕자님이 너를 구하러 올거잖아.” “뭐…라고?” “올때가 다 됐는데… 이것들이 길을 잘못 찾았나….” “전진… 너 지금 무슨 소리를….” 왕자님…? 순간, 전진이 '왕자님'이라고 물 흐르듯 말하는 부분에서, 심장이 철퍽거렸다. 동공이 급격히 좁아졌다가 넓어졌다. 내게 왕자님은 전진이었다. 늘 그랬었다. 어쩌면 문정혁의 강조 덕분에 더 그렇게 인식했는지도 모른다. 문정혁은 자기가 지은 동화처럼, 자신은 기사라고 했으니까. 문정혁이 기사라면, 내게 왕자님은, 나쁜마녀의 주문에 걸린 전진. 전진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전진의 말은…? “전진… 무슨 소리야. 왕자님은 너였잖아….” 기둥 저 편에서 전진이 허망하게 웃음을 띠웠다. 그리고, 아주 씁쓸한 투가 들렸다. 내 전체가 산산히 부서질 만치 여린 박자가 겨울 바람을 뚫었다. “내가 너의 왕자님이었던 적이 있었냐. 바보야. 왕자들은 위에서 호령하거나, 굴러들어온 공주님하고 결혼하면 장땡인거야.” “!!” 그게… 무슨… 쿵쿵대는 심장 만큼 혼돈으로 가득찬 머리를 부여쥐고 전진 쪽을 쳐다보려고 안간 힘을 썼다. 그때였다. “아악!!” “씨팔!!” 창고 입구쪽이 시끄러워졌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탕--!! 3층 높이 문이 대번에 열리더니, 엄청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신혜성!!! 전진!!!” “!!” 이럴수가. 창고 밖으로 보이는 경찰차 몇 대. 그리고 총알같이 달려오는 공유 형사와 처음 보는 경찰들. 공유 형사는 나와 전진이 묶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른 경찰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들이 달려와서 우리 둘을 풀어주었다. 아마 전진이, 공유 형사에게 만약을 위해 미리 얘기 하고 여기까지 왔나보다. “아니, 저 소대가리는…!!” 소대가리? 공형사가 '물건'을 만났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전진과 나를 지키던 두 놈 중 한 놈을 죽어라 쫓기 시작했다. 아마 따까리가 아니라, 행동대장격인 놈이었나 보다. “개새끼들! 이젠 아주 대놓고 활보하는구만?!! 너 이 씨팔!! 소대가리!! 접때도 졸라 튀어서!! 나 물먹이더니!! 영창 가기 전에 너는 내가 주둥아리부터 조질테니까!! 지금부터 사도신경이나 읊어라!! 개새끼야!!” 형사로서 범인을 검거하는 공유는, 난생 처음 봤다. 당연한 일이지만… 약 1분만의 사투 끝에 공유 손에 잡힌 소대가리가 철골에 이마를 문댔다. 캉!! 캉!! 공유의 손에 이마가 벌써 부어오른 소대가리의 팔이 뒤로 꺾였다. “소대가리!! 많이 들어봐서 알지?!! 씹새끼야 너는!! 형법 제 250조!! 살인혐의 용의자로 체포될꺼고!! 묵비권을! 행사 할 수 있으며!! 니새끼의 모든 발언이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고!! 씨발새끼!! 변호사를 선임 받을 수 있다!! 야!! 저기 말대가리도 잡아!!” “으아아악!!” 공유 형사의 엄청난 함성과 움직임에, 두 놈이 금방 잡혔다. “전진….” 밧줄을 풀어주는 경찰의 부축에 몸을 일으키며 전진부터 찾았다. 함께 묶여 있는 와중에도 내 걱정하느라 지쳤던 전진을… “들것 가져와!! 씨팔!! 아… 아… 씹새끼야!! 뭐 해!! 빨리 가져와!!” “전진씨!! 전진씨!! 정신 차리세요! 전진씨!!”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사방 팔방에서 사람들이 전진을 소리치고 있었다. 전진… 전진…? 공포에 질린 눈망울로 전진이 묶여있던 자리를 돌아봤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다른 놈들의 혈유를 뒤집어 쓴 전진이, 언젠가부터 입 밖으로 피를 토해내며 창백하게 쓰러져 있었다. 작년 10월, 바닷가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전진의 미소가 아련하게 멀어진다… 어린시절 기억을 더듬어보면… 동화에도 반전은 있었다. 기사이거나 거지였던 남자가, 개구리거나 백성 중 한명이었던 남자가, 알고보니 이웃나라 왕자님이었더래요… …진짜 왕자님은 누구일까요. 아무런 고통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자다가도 몇 번씩 뜨거운 피가 혈관을 태우듯이 흐르는게 느껴졌다. 헉! 소리내며 깼을땐 최성수 사장과 매니저형, 그리고 고모가 보였다. 익숙한 오피스텔 천정… 최성수 사장은 착찹한 낯으로 내게 안부를 물었다. 괜찮다고 대답하자마자, 최사장은 주가 폭락이나 다름없는 소식을 전했다. “기자들하고 피디들 사이에서 혜성이 너 이미지가 안좋아지고 있어.” “…….” “아픈 사람한테 쓴소리 하기 나도 싫지만… 이거 참. 데뷔때부터 쌓아 온 신비주의 전략이, 슬슬 건방지다는 쪽으로 몰아세워지고 있다. 아무리 톱스타 반열에 끼었다고 해도, 신인이나 다름없는 놈이 툭하면 펑크질이니까.” 이민우가 수감된 교도소에 면회 다녀온 것 포함, 연속 삼일째 펑크. 할 말이 없다. “죄송…해요.” “그게 어디 혜성이 잘못이래요?! 이봐요 사장 양반! 애 꼬라지를 보고서도 그런 소리가 나온답니까?! 해쓱해진 꼬라지를 보라고!!” “…그러니까 저희도 난감하다잖습니까.” 고모가 최사장에게 삿대질을 하자, 매니저형이 억울하다며 나섰다. “혜성이 배경이 너무 복잡해요. 이 사실을 누가 알까봐 겁날 정도로. 아마 기자들 중 하나가 캐기 시작하면, 얄짤 없을거예요. 우리가 보호해 주는것도 한계가 있지. 한명 그룹과 혜성이가 관련이 있다는 것만 누가 알게 되도, 사람들은 분명히 몸 대주는 줄 알거란 말이죠.” “아니 지금 그렇게 일이 커지길 바라고 헛소리 지껄이는겁니까?!! 몸을 대줘?!! 누가 그딴 헛소리를 지껄여!!” “고모님. 누가 그런 말을 했다는게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앞으로 생길지도 모른다고요!” “글쎄!! 애가 쓰러졌다가 겨우 눈떴는데, 고작 그딴 말이나 해 대?!!” “고모님!! 우리도 혜성이가 걱정되니까 이런 소릴 하는거죠!! 무작정 감싸기만 할 때가 아니라구요!!” “그럼 우리 혜성이는 누가 감싸!! 나가!! 나가라고요!!” “허, 참….” 매니저형이 흥분하는 강도가 세어지자, 결국 최사장이 나섰다. “차원형. 그만해라. 고모님. 실례 많았습니다. 혜성아. 니가 자꾸 다치고 부득이한 사정으로 스케줄 펑크나는게 한 둘이 아니라서… 회사에서 난감해져서 걱정스런 맘에 했던 말이니까, 크게 맘에 담아두진 마.” 씩씩대는 매니저형과 최성수는 내게 몸을 추스리라는 말을 거듭 강조하고 밖으로 나갔다. 오피스텔에 나와 고모만 남았다. 고모는 현관문을 꼭 걸어 잠그고 방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지듯 바닥에 앉아서 우셨다. “고모….” 고모의 울음소리에 내 가슴도 미어졌다. 고모부 사업이 번창한 다음부터는 늘 곱게 화장하고 옷도 차려 입으셨던 고모. 요즘의 고모는,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묶고 정신없이 뛰어다닌 몰골 그대로이다. 고모부 내조 일은 뒷전인 채, 이민우 신경쓰느라. 오늘은, 청천벽력같은 내 소식에 헐레벌떡… “이게 다 우리 민우 때문이다. 우리 민우가 혜성이 니 앞길 막으려고 작정을 했네, 작정 했어. 아이고….” “아니에요. 고모… 민우 때문이 아니에요….” 예나 지금이나, 고모는 내가 망가지는 이유를 자기 가족 탓으로 여겼다. 오래 전, 위조 성적표 일이 터졌을 때는 내 탓이 아닌 고모부 탓. 고모부 회사가 망할 위기에 처했을때도 내 탓이 아닌 고모부 탓. 지금도 고모는 이민우 탓을 하고 있다. 톱스타 계열에 선 신혜성이라는 별이 단숨에 추락할 지도 모른다는 점을 두고, 이민우를 탓했다. “그놈이 왜 쓰잘데 없이 트럭은 몰아갖고 허고 많은 사람중에 한명그룹 문도천 양반을 쳤다니. 뭔 일인지 몰라도 혜성이 니가 험한 일 겪는거, 다 민우 탓이다. 고모가… 대신 미안해. 혜성아.” 이민우 탓이 아니에요. 다 제탓이에요. 저를 사랑하는 죄로, 이민우는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넜어요. 라고 말을 해야된다고 마음은 늘 시켰었다. 고모부 일이 터졌을때도, 내 마음은 고모에게 메아리쳤었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사실대로 얘기하지 못했다. 비겁자가 되어 고모의 한 많은 눈물을 위로할 뿐이었다. 지금처럼… 고모는,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를 어린 시절에 박대했다고 한다. 어린시절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시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찌기 세상을 뜨신 뒤, 열네살부터 공장일을 하셨다는 고모. 고모는 한이 많다. 공부욕심이 특히 그렇다. '우리 아들', '우리 아들' 하며, 시골집 어르신들이 아들 귀하게 여기는 꼴이 싫었다며 어린 시절 우리 아버지를 홀대했던 고모는, 정작 자기 부모가 돌아가신 다음부터는 누구보다 귀하게 남동생을 키웠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를. 때문에 고모는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팔 한쪽 잘라진것처럼, 자기 애 잃은 것처럼 우셨었다. 그런 고모였기에, 어쩌면 다른집 애들 고모들보다 유난히 내 편이셨는지도 모른다. 고모가 나를 아끼고 무조건 내 편에서 생각해주시는 만큼… …내 죄값도 커지고 있다. 고모가 나가신 뒤, 나는 헐레벌떡 문정혁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받지 않는다. 몇 번이나 다시 했다. 한시간쯤 전화 걸다 보니 기가 막혔다. 폐공장 창고에 문정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전진이 나를 구하러 온 것. 내 등에 입은 타박상. 지랄같은 현실. 전부 기가 막혔다. 울음이 터질 때마다 입술을 깨물었다. 밤 열두시가 넘어서야 문정혁이 내게 전화했다. 나쁜 새끼. “어떻게 됐어?” [진이?] “그래!! 전진 어떻게 됐어?! 거기 어디야?! 어느 병원이야!!” [피곤하다. 너까지 떽떽거리지 마, 혜성아.] 전화기 저편의 문정혁은 굉장히 피로해 보였다. 목소리 톤이 다운되다 못해 땅으로 꺼질 것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하루종일 마음에 걸렸던 인물, 고모 때문에 정신없어서 차마 생각할 틈조차 없었던 인물, 전진을 캐물었다. 고모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신 즉시, 전진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마지막이 쇠줄처럼 내 목을 조였기 때문이다. 미칠 것같았다. 이대로 혀를 깨물고 죽어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심장이 지쳐 있었다. “전진 어떻게 됐냐고!!!!” [어제 응급처지 받고, 실려오자마자 수술 받았어. 장파열이래. 어젯밤엔 조금 위급했다가, 지금은 괜찮대. 아니, 확실히 괜찮아.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겼으니까. 2주 정도 있으면 퇴원 할 수 있고, 한달만 통원치료 하면… …혜성아? 여보세요?] “흑… 으흑….” […….] 전진이 살아 있다는 것. 공주야 공주야 불러주던 입술이 살아 있다는 것. 하나님 감사합니다. “으흐. 으흐윽. 흐으으윽.” [후… 혜성아….] 바보같은 전진. 바보같은 전진. 내가 있다는 소리만 듣고 눈 뒤집혀서 날아온 전진. 급한 김에 따까리 다섯 명만 대충 데리고 창고에 달려왔던 전진. …그가 죽는 줄 알았다. 그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아서, 나는 눈을 뜨고 고모가 곁에 있을 때까지는 일부러 전진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진이 무사하다니. 갑자기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더니 긴장이 풀어졌다. 무의식중에도 나는 전진을 걱정하고 있었나보다. 한참을 울었다. 문정혁은 내가 우는 것을 조용히 경청했다. 괜찮냐고 묻는게 미안했는지, 아니면 내가 괜찮은거 알아서 패스하는건지 몰라도, 문정혁은 내게 별다른 것을 묻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이럴때는 달갑지 않다. 내가 울던지 말던지 그가 소리치면서 흥분했으면 좋겠다. 많이 무서웠냐고, 괜찮냐고, 나를 걱정해줬으면 좋겠다. 오늘, 문정혁의 침묵은, 평소와 달리 쓸모 없게 여겨진다. 서러울만큼… 사막의 밤같은 지독한 추위와 깜깜한 어두움이 오그라든 내 몸을 파랗게 감쌌다. 하늘의 별빛이 땅에 펼쳐졌다. 도시의 가로등과 빌딩숲의 형광등. 찬란한 땅의 별빛 속에서, 나는 무사하다는 전진의 소식을, 문정혁이 소리지르며 짜증낼때까지 묻고 또 물었다. 그뒤 일주일간 자잘한 인터뷰 빼고, 큰 스케줄이 없었다. 다시 말 해 방송국 관련 스케줄이 없어진 것이다. 삼일 연속 펑크 낸 결과치고는 조금 이상했다. 방송국 3사는 물론이거니와 케이블 마저도 나와의 스케줄을 취소했다. 매일 매일 배달되던 시나리오 숫자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무리 내가 괘씸하기로서니 이건 좀 이상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자연히 그려지는 인물… 아하, 하고 허공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선호. 혹은 이철호. 아니면, 한명 그룹. 대기업이 방송사를 움직인다는 건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막대한 투자량을 무기로, 그들에겐 애송이나 다름없는 신혜성을 거들먹거렸을것이다. 그덕에 나는 작은 잡지사 인터뷰만 줄창 했다. 일주일간 거의 쉬다시피 지내면서, 나는 몇가지 사실을 전해들었다. 공유 형사가 검거한 청랑단 두 놈이 어이없게 벌금형으로 풀려났다는 것. 당췌 말이 안되는 이 일로, 공유 형사는 이박 삼일동안 쉬지 않고 술만 쳐마셨다. “개 씨벌놈의 새끼!! 씨발놈!! 소대가리!!!!!!!” “…….” 그것도 우리집, 아니 주인 없는 문정혁의 오피스텔에서. “씨발 소대가리!! 말대가리!! 운 좋은 줄 알아라 개새야!!” “공형사.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좀 해. 벌써 삼일째 여기서 왜 꼬장이야!!” “내가 꼬장 안부리게 생겼냐? 졸라게 벼르던 놈들인데, 잡자마자 벌금형?!! 씨발 조까!! 내가 동네 양아치 잡았냐고!!” “알겠는데, 왜 나한테 와서 맨날 승질이야!!”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도 한두번이지. 짜증나서 못살겠다. 발꼬랑내 폴폴 풍기는 공유 형사가 밤만 되면 찾아와서 쇠주 마셔댄다. 처음에는 내 눈치 봐서 조용히 술만 쳐마시다가, 이젠 방에서 게임하는 내 팔 질질 끌고 거실에 데려와서 하소연질이다. “혼자 술마시고 가!! 왜 자꾸 나한테 들으래!!” “꼬맹아. 같이 마시자.” “싫어. 나 술 끊었어.” “왜에?!” 졸라 불쌍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공유… 커다란 두 눈이 마치 논에서 음메하는 누렁이 소 같다. 내 팔을 붙들고 왜에? 왜에? 하는건 음메 음메 소리같네. 짜증나서 싸대기 갈기려다가 참았다. “당분간은 안 마실거야. 그러니까 이거 좀 놔아!!” “왜에?! 왜에?! 왜에 술 끄너써?! 왜에?! 왜에?!” “어휴. 이놈의 공씨가 또 술주정이네….” “왜에? 어? 왜에? 왜에에?” “…….” 왜타령 하는 공유 형사의 가슴팍을 팔꿈치로 찍어버렸다. 컥!! 하고 뒤로 밀려난 공유 형사가, 기어이 내 팔목을 꽉 잡은 채로 거실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술에 진짜 취한건지 쿨쩍쿨쩍 짜기 시작했다. 하긴… 가까스로 운좋게 검거한 범인인데, 눈앞에서 풀어주다니 속 좀 쓰렸을거다. 그래도 그렇지. 왜 하필 내앞에서 주정이야. 넓은 거실 바닥에 신문지 펴고 김치찌개 안주 삼아서 술 퍼마시는 공유… 사실 나도 마시고 싶긴 한데… 술 취하면 내 자신을 감당하지 못할 것같았다. 문정혁과 전진. 그것들과 이민우 이름 부르다가 칼로 내 몸을 찌르지 않을까. 피폐해진 내 정신이 그러지 않을까. 공형사가 술 마시다가 저절로 술이 조금 깼는지 멍했던 눈에 촛점이 돌아왔다. 나는 공형사 맞은편에 다리를 모아 앉아서 구경만 했다. 무릎에 턱을 붙인 채로 공유 형사에게 물었다. “공형사. 근데 전진은 어때… 괜찮아?” “엉. 괜찮아. 참. 맨날 쳐울고 지랄한다 그새끼!!” “운다구? 왜…!!” 철렁…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공유 형사가 별안간 킥킥 웃다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니가 옆에서 봐야돼. …공주야~ 공주야~ 으흑흑흑!! 공주야!!! 공주야!!! 이지랄한다니까.” “…….” “옆에서 내가 시끄럽다고 해도 공주야~ 우리 공주가 어쩌구 저쩌구. 문정혁이 전진 머리통 후려 차도 공주야!! 으흑흑흑!! …나는 전진 대갈통이 돌아버린 줄 알았으니까.” “…….” “전진한테 안 가볼거냐?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내일 가볼거야. 어차피 내일부터는 스케줄도 없어.” “왜 그동안은 안 갔는데? 그새끼 공주쑈 하는거 가관이던데.” “아 몰라. 쌰럽. 님. 술이나 마시셈.” 피한게 아니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문정혁을 원망했고, 전진을 걱정했다. 둘을 동시에 생각한다는 자체가, 나를 제자리에 묶었을 뿐이다. 전진… 그와 기둥에 묶여 있었을 때, 암담한 그 때, 그가 했던 얘기들이 생각났다. 왕자님이 구하러 올거잖아. 공주야… 내게 왕자님은 당연히 전진이었는데… 그랬는데… 왕자님과 공주님이 나쁜 마녀에게 붙잡혔었다. 기사님이 구하러 올 줄 알았는데, 문정혁은 창고에 오지 못했었다. 아니, 그가 과연 기사가 맞긴 했을까. “나도 한 잔 줘.” 가만히 있어도 눈물나는 이름들을 떨치기 위해, 결국 나도 술잔에 넋을 기울였다.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얼큰한 기운이 올라왔다. 열을 식힐 겸 테라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서울의 밤 풍경. 을씨년스러우면서도 고독한 잔해가 오피스텔을 하나씩 얼렸다. 공유 형사가 춥다고 지랄하는거 듣기 싫어서 뒷통수를 후려 갈겼더니 으허허- 미친놈처럼 웃는다. 진짜 취했나봐… “공형사. 공형사는 누구 사랑하는 사람 없어?” “나? 엄떠. 엄떠.” 술에 장난 아니게 취한 공형사가 혀꼬부라진 소리로 허공에 팔을 휘저어가며 오버 액션을 취했다. 피부가 하얀 편인 공형사 얼굴이 시뻘건 고추장 됐다. 그래도 참 잘생기고 키도 커서 딱 보면 킹카급인데… 발냄새가 좀 나고 말투가 억세긴 하지만… “공형사. 술 마시자면서 먼저 이렇게 취하면 어떡해?” “나. 안치해써.” 공유가 취한 상태에서 합석하니까 재미없다. 내가 좀 취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공씨. 그러고보니까 진짜 간지나게 생겼다.” “…….” 내가 무슨 말실수했나? 쇠주 잔을 털어 넣던 공형사 눈빛이 느닷없이 또렷해졌다. 쾅!! 소리나게 딱딱한 바닥에 술잔을 내려놓은 공유가 갑자기 내 양 어깨를 꽉 그러쥔다. “왜이래? 좋은말로 할 때 놔라?” “나 장생겨찌….” “응. 공씨 발냄새하고 지랄할때 빼고 보면 킹카야.” “그렁 울이 뽀… 히히힛! 뽀… 그거… 뽀….” “!!!” 뽀… 하다가 히힛 웃고, 또 뽀… 하다가 간지러운지 배를 북북 긁으면서 웃는 미친 공형사. 진짜 취했구나… “우거걱!!” 흐리멍텅한 눈으로 안면을 들이대는 공형사에게, 나도 모르게 그만 펀치를 날려버렸다. 그것도, 앉은 상태에서 발로… 한번 짧게 비명을 지른 공형사가 아픈것도 모르는지 씩씩 웃으면서 평화롭게 잠들어버렸다. 다음날 오전 여덟시. 나는 양갈래 길에서 멈춰선 어린아이처럼 당황했다. 어느 길로 찾아가는게 옳을지 몰라서 방황하는 눈동자를 한없이 일그러뜨렸다. [민우가 너 한 번 더 와도 된대. 지금 출발하면 될것 같은데, 혜성아.] 아침 일찍 전화하는 고모의 음성은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선뜻 그러겠노라 대답하지 못했다. 이민우가 걱정되는 것보다 더, 전진이 염려되서 멍하니 선 채로 왼 발로 오른발등을 꾹 꾹 누르기만 했다. 전진을 보기로 결심했을때, 가야돼니까. 결국, 내 장기나 다름없는 치사한 거짓말을 꺼냈다. “스케줄이… 갑자기 잡혀서 안될것 같아요. 고모.” [그러냐. 그럼 오늘은 고모가 가서 민우한테 말 할게. 당연히 스케줄이 먼저지!! 신경쓰지 말고. 알았지?] “죄송해요….” [됐다! 뭐가 죄송하다고… 혜성이 너한테 우리 민우가 미안하지. 다음주에는 시간 괜찮지?] “아니, 당장 내일이라도 괜찮아요. 민우 오해하지 않게 잘 말 해 주세요, 고모.” [오냐, 걱정하지 말고. 밥 꼭 챙겨묵고.] “네… 고모.” 힘없이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부모님 돌아가신 다음부터, 죽어도 거짓말은 안 하면서 살려고 했는데 뜻대로 안 된다. 나는 무수한 거짓말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전진과 헤어졌던 오래전에도 거짓말을 했었고, 오늘도 마찬가지다.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고 서있는데 갑자기 발에 묵직한게 닿았다. 깜짝 놀라서 뒤로 폴짝 뛰었다. 뭐지? 싶어서 내려보는 즉시 싸늘히 식어버리는 내 와일드 아이즈. “공형사. 눈 떴으면 빨리 출근해!!” 거실에서 여름이불 덮고 잠들었던 공형사. 언제 눈을 뜬건지 김밥처럼 이불을 몸에 둘둘 만 채로 부엌까지 굴러왔다. 그것도 내 발등 위에. 뻥~ 차버렸다. 공형사가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거실 쪽으로 똘레똘레 굴러간다. 좀비처럼 천천히 일어나는 공형사의 안면이 예사롭지 않다. 백지장처럼 허연게 아무래도… “나… 좀 이상하다. 꼬맹… 오옥. 쏠려.” “삼일 연짱 술 쳐마시니까 그렇지!!” 술독 오른 공형사가 입을 부여쥔다. 그러다 멈칫. “턱주가리가 좀 이상해. 아!! 왜, 왜이러지?” “…….” 어젯밤 나의 하이킥으로 부어오른 턱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더니 기가 막힌 비명을 지른 공형사. 그가 후다닥 화장실로 달려간다. 매니저형에게 부탁해서 꽃다발을 샀다. 병원에 도착해서도 나는 쉽사리 차 밖에 내리지 못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응집해 있어서, 병원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멍하니 뒷자석에 앉아 있었다. 누구 한 명이라도 나를 발견하는게 싫었다. 누군가 오빠- 신혜성이다- 하면서 달려들게 싫었다. 귀찮았다. 웃으면서 아는척 해 줄 자신이 없었다. “하아….” 마냥 한숨만 내쉰지 두시간. 아까 병원 주차장에 도착한게 열시. 벌써 열두시가 된 것이다. 점심때라 그런지 밖에 사람들이 두 배는 바글거렸다. 매니저 형이 내 눈치를 살피다가, 뭐 좀 사올까? 한다. 형이나 먹고 와요- 나는 여기 있을게. 원형이 형이 내 눈치 살피다가 잽싸게 병원 옆 편의점에 쏙 들어갔다. 문득 전서희가 떠올랐다. 오래 전, 내가 병원에 입원했을때, 그녀는 야심한 시각에 선글라스 쓰고 병실에 찾아왔었다. 그때 그녀가 왜 그랬는지, 당시에는 너무 오버가 심하다고 여겼던 그녀의 일상이, 전부 이해됐다. 병원 주차장이 건물 뒤도 아닌 앞에 있을건 뭔가. 병원에 오가는 사람들이며, 주차장 옆의 편의점 오가는 사람들까지 다 알아보겠다. 밤 열한시가 되어서야 나는 부스럭대며 차문을 열었다. 그러다 아차 하며 원형이형에게 팔을 쑥 내밀었다. “형. 선글라스좀 줘 봐.” “드디어 들어가는 거냐?” “응. 근데 형… 미안한데… 나… 들어가서 얼마 안 있을거거든….”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기다릴게.” “응. 미안.” 오래 전 전서희가 그러했듯, 나도 선글라스 끼고 약간 시든 꽃다발을 들고 조용히 건물로 향했다. 나를 알아본 당직 간호사들이 수근대는게 훤히 들렸다. 그러나 감히 내게 접근하지는 못했다. 면회 금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당하게 엘리베이터 복도 쪽으로 걸었다. 버튼을 꾹 눌렀다. 옆 엘리베이터도 작동 중이었다. 이 시간에 누가 윗층에서 내려오나보다. 나는 옆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기 전에 막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맨 꼭대기층. '특'1일용 병실로. 혹시 전서희도 그때, 나를 찾아왔던 날, 사실은 오전부터 와서 초조하게 밤이 되기를 기다리지 않았을까. 원래는 찾아온 즉시 나와 만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서, 밤까지 주차장 차 안에서 기다리지 않았을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병실이 가까워질수록 호흡이 거칠어졌다. 상기된 뺨이 긴장감에 부르르 떨렸다. 전진이 사람들을 죽였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가 나를 구하려고 무작정 달려왔던것까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내 근처에 얼씬도 안 하고, 전화해봤자 피곤하다고 하는 문정혁에게 서운해질수록, 전진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크게 다가왔다. 달칵… 병실 문을 열고 숨소리 발소리마저 죽이고 들어갔다. “전진….” 새색시처럼 부끄러워하는 목소리톤이 절로 나왔다. “?” 그런데 전진이 안 보인다. 어딨지? 전진! 전진! 허공에 전진을 불러가며 넓은 병실에 들어갔다. 선글라스를 벗었다.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누가 보면 특급 호텔에 투숙하는 줄 알겠다. 근사한 쇼파와 테이블, 벽걸이 텔레비전. 소파 뒤쪽에 있는 큰 침대. 개인용 냉장고… 예전에 문정혁이 입원했던 병실과 흡사했다. 화장실 안에도, 냉장고 안에도 전진은 없었다. 설마, 어디가 갑자기 안좋아져서 중환자실로 옮겨진게 아닐까?! 콩닥콩닥 불안함에 심장이 뛰었다. 전진이 죽으면… 죽으면… 안돼. 안돼! 전진이 방 안에 없다는 이유 하나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문정혁도 없는 걸로 봐선 전진이 중환자실에 옮겨진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중환자실로 내려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병실 중간에서 손등으로 눈물 닦아가며 망연자실 서있기를 십여분. 환청이 들렸다. “어? 공주야.” “?” “공주야!” “!!” 환청이 아니다! 철퍽대는 심장보다 빠르게, 뒤돌아섰다. 전진, 전진이다. 개새끼. 야밤에 어딜 싸돌아다니는거야! 방금까지 내 머릿속에서 인공호흡기 끼고 생사를 오가던 전진이, 야생마처럼 나타나더니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가워하고 있었다. 매점에 다녀온건지 그의 팔 한쪽에 달랑거리는 검은 봉지. 빵을 씹어먹으면서 올라왔나보다. 전진의 환자복에 빵가루가 별처럼 반짝반짝거렸다. 전진이 상기된 낯으로 당장 이쪽에 걸어왔다. 나를 꼭 끌어안고, 끌어안아서 내가 안보여지니까 저 혼자 화들짝 놀라서 상체를 떼어내더니, 내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본다. 그리고 한꺼번에 많은 말을 터뜨렸다. “우리 공주가 나 보러 온거야?! 아 맞다. 공주야!! 괜찮아?!! 너… 너 괜찮은거야?! 미안해. 우리 공주. 많이 무서웠지. 오빠가 우리 공주 괜찮은지 보러 탈출하려고 할때마다 꼴아박혔었거든. 존나!” “전지인….” 전진의 표정이 갑자기 험악해진다. 그가 내 어깨를 꽉 잡은 상태에서 상체를 복도쪽에 내밀고 무시무시하게 소리쳤다. “왜, 왜울어!! 누가 쫓아왔어?! 썅! 죽여버린다!! 개새끼야!!” 병신아… 바보야… “야! 어휴. 복도 울리잖아. 소리지르면 어떡해! 가뜩이나 목소리두 커가지구.” 병원이 부서져라 울리는 전진 목소리에 내가 더 놀라서, 재빨리 병실 도어를 닫았다. 전진이 엄마한테 벌받는 애처럼 쭈뼛대며 궁시렁거린다. “…누가 쫓아온 줄 알았지.” “그러니까… 헉! 깜짝이야. 뭐야….” “아니. 나는! 공주 니가 도로 나가버리는 줄 알고….” 어느새 내 등뒤로 바짝 따라붙은 전진을 보고 히끅 놀라기도 잠시. 도어에 등을 기댄채로 전진 손아귀에 반 이상 뭉게진 것을 쏘아보았다. “그건… 뭐야?” “어? 아~ 이거? 빵.” “빵?” 환자복을 입어도 근사하게 빛나는 전진. 쾌활한 분위기를 보니까 불사조같다. “팥빵. 먹고 싶어서 사왔어. 우리 공주 엘리베이터 탈때, 내가 내려가고 있었나보다.” “아… 아까 그게 너였구나.” “응?” “아냐. 팥빵 아직도 좋아하네? 맛있어?” 전진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느닷없이 팔을 불쑥 내 코앞까지 올렸다. “응! 쫌 주까?” “아니… 아니….” 자기가 반쯤 먹던 팥빵을 거리낌없이 내미는 전진… 오래 전의 전진이 현재와 하나가 되었다. 나는 그자리에 주저앉아서 서럽게 울어버렸다. “왜 울어. 공주야… 미안해. 내가 새거 사올게. 응? 울지 마… 울지 마… 너 울면… 흑….” “바, 바보. 큭큭.” “?” 울다가 나를 웃기는 심각한 표정의 전진 보고 웃었다. 그러다가 또 울었다. 환자복 차림새로 내 앞에 쪼그려 앉아서 어쩔 줄 모르는 전진을 보는데, 그냥 이상하게 눈물이 자꾸 흘렀다. 지금 기분을 말로 설명한다는건 불가능했다. 서러운 도시 지붕을 하얗게 덮는 함박 눈송이가, 지금만큼은 따스하게 느껴진다. “진짜 안 아픈거야?” “응.” “진짜 진짜 괜찮은거야?” “그렇다니까.” 전진이 자꾸 옷 벗어보라고 애원해서 등만 보여줬다. 전진은 내 등에 멍자국 보고 큽! 하고 콧물 뭉치는 소리 내더니 장시간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계속 묻는다. 괜찮아? 안아파? 거짓말이지? 괜찮은거야? 어후, 이거 뽀얀 피부에 멍들어서 어떡해. 아프겠다. 괜찮아? “아플까봐 손가락도 못 대겠네….” “전진. 나 추워….” 환한 형광등 아래, 노란 니트를 목끝까지 올렸다. 훌러덩 벗는것만은 용납할 수 없어… 목끝까지만 옷 말아 올리는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예요… 혼자 생각하기 쑈 하면서 니트 올리자마자 전진이 초조한 낯으로 내 등을 관찰한다. 춥다고 칭얼거리니까 병실 침대 머리맡에 있던 히터를 무식하게 끌고 왔다. 아니,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길고 무거운 히터를 거의 뽑아 왔다. 그냥 나한터 저기 가서 서라고 하면 될것을. “아픈지 안아픈지 한 번 살짝 눌러볼까? 여기 멍 장난 아닌데….” “앗, 안돼. 누르지 마. 웬지 아플것 같은 예감이야.” “그래?” “…전진?” 내 말에 등뒤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하는가 싶던 전진이, 잠깐 골몰하더니… “아야!!!” “…역시. 진짜 아픈거였어. 공주는 거짓말쟁이….” 손가락 두 개로 등의 멍자국을 무지막지하게 눌러버렸다. 개새끼!! 그러면서 진지하게 아픈게 맞다며 중얼거린다. 죽여버리겠어… “야!! 정말 누르면 어떡해!! 아… 아프다.” “고, 공주야!!” 후딱 니트 내리고 전진 보고 따지려다가 주저앉았다. 찌릿찌릿 밀려오는 등의 통증 때문에… 눈물 콧물 훌쩍이며 내 뒤에 서있던 전진이 화들짝 놀라서 내 팔을 부축한다. “우리 혜성공주… 많이 아팠어?” “몰라. 묻지마.” 뒷발 돌려차기 하려다가 관뒀다. 나를 보고 쩔쩔매는 전진의 커다란 두 눈이 심각하게 애절해보여서… 사실 나보다 전진이 더 아플 것이다. 장파열에 수술하고, 중환자실 신세까지 졌던 몸이니까. 하지만 기본 맷짐이 좀 있었는지 혹은 회복력이 남다른건지 전진은 예전과 똑같아보였다. “공주야. 오빠 쉬 하고 올게.” 넓은 소파에 앉아서 전진이 사 온 음료수를 홀짝이는데, 녀석이 팅팅 부은 눈을 매만지며 일어났다. 어, 가~ 하고 빠이빠이 손 흔들어주자, 귀엽다면서 자기 혼자 웃고 좋아 죽는다. 화장실이라봤자 병실에 붙어있어서 다섯 걸음도 안 되는데… 전진이 화장실 간 사이에, 요리조리 병실 둘러보다가 1인용 침대 옆에 있는 근사한 협탁에 눈이 갔다. 일반 병실의 협탁이 아니라, 무슨 궁전에서 뽑아 온 것처럼 생긴 협탁.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주변을 휙휙 살피며 경계했다. 조심스레 다가가 협탁 서랍을 열었다. 전진이 입원한 병실에는 사실 볼 게 별로 없었으니까… 옛날에 문정혁이 입원했던 병실에는 볼 게 많았었다. 내가 볼게 많다는 기준은 냉장고인데, 냉장고가 꽉 찼었으니까. 전진의 병실 냉장고에는 생수하고 팥빵밖에 없어… 그나마 전진이 방금 사 온 음료수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초록매실이잖아… “?” 당연히 아무것도 없을거라 여겼던 협탁 서랍. 두툼한 포장지가 '안녕?'하며 나를 본다. 뭐지? 호기심에 살금살금 금빛 포장지를 열어보았다. 문방구에서 흔히 파는 금색 포장지. 대충 싸매두기만 해서 풀기도 쉬웠다. 그리고, 내용물을 확인하는 즉시 내 눈에 별 하나가 급격히 반짝이더니 쓸쓸하게 떨어졌다. “!!” 부서진 야광별들이 금색 포장지 안에서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오래 전, 목동 내 집 침실 천정에 전진이 만들었던 작품, 신효썽과 전전. 나의 이별통보에 전진이 짐승처럼 울다가 천정에 있는 야광별을 몽땅 찢어갔던게 생각났다. 핑 눈물이 돌았다. 부서진 그대로 소중하게 담겨 있는 잔해들… 전진은 긴 시간동안 나와의 추억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바보같이… 눈물이 흐를 것같아서 재빨리 턱을 쳐들었다. 달칵, 화장실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후다닥 포장지를 대충 여미고 협탁 서랍을 닫았다. 미친듯이 소파로 날아갔다. 내평생 이렇게 빨리 행동한 건 처음이지 않나 싶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텔레비전 리모컨을 꾹 눌렀다. “뭐 재밌는거 해?” 전진이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묻는다. 아직도 심장이 터질 것같아서 나는 되는 대로 말했다. “완전 재밌어!! 나 맨날 이거 보잖아!!” “…그래?” 심하게 오버했는데 티 안나겠지? 텔레비전 화면과 나를 번갈아보며 미심쩍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전진. 나는 소파 옆자리를 탁탁치며 흥분했다. “너도 봐!! 전진!! 완전 잼있어!! 어?!” “그러지 뭐.” 전진이 근사하게 미소지으며 나와 약간 떨어져서 앉는다. 휴… 들키는 줄 알았네… 안도의 숨을 내쉬며 텔레비전을 쳐다봤다. 내가 방금 뭘 틀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공주… 바둑 좋아했구나.” “…….” “난 바둑 별론데. 문곤이라면 모를까. 아, 오목은 자신있다! 알까기하고!!” “…….” 바둑… 왜 하필 바둑 채널이 튀어나올까. 전진은 여기서 텔레비전을 한 번도 안 본게 분명했다. 왜냐면, 넓은 소파에 앉자마자, 의자 푹신푹신하고 좋다고 신기해 했으니까. 저 채널 주인은 틀림없이 전진 이전에 이 병실에 입원했던 아저씨였겠지… “공주야. 재미있어?” “어? 어….” 차라리 피카츄를 보는게 낫겠어… 전진과 나는 전혀 이해 안되는 바둑 채널을 두시간이나 봤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시선은 전진을 힐끗힐끗 향했다. 커다란 눈, 잘생긴 코, 조각같은 턱, 반듯한 입술… 내가 알게 모르게 경계하듯, 적당히 거리를 두는 전진의 행동들… 전진은 나를 반가워했지만, 내게 적당한 거리를 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전진과 전처럼 허물없이 대화하는 듯 했지만, 나 또한 그에게 보이지 않는 벽을 세웠다. 우리는 '이미 헤어진 연인'인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래 전에. 나와 재회했던 당시의 전진은,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죽어도 헤어진 게 아니라고 우겼었지만, 지금은… 순순히 받아들인 분위기였다. 소파 상석에 앉은 나. 긴 의자에 앉아서 텔레비전 보면서 하품하는 전진. 전진의 옆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화려하고 멋지다. 나는 어느새 텔레비전 화면이 아닌, 전진만 아련히 응시했다. 상석에 앉아서 다행이었다. 전진은 나를 볼 수 없을테니… 전진과 내가 푸르렀던 시절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있기는 했을까. 열여덟의 내게 다가왔던 박충재형. 전진. 위조 성적표 일로 문정혁에게 구타 당했던 나를 구했던 전진. 내 입맛대로 좋다고 따랐던 전진. 무조건 내가 최고라고 떠받들어줬던 전진. 소박했던 월미도 데이트에서 하루종일 나를 기쁘게 해줬던 전진. 내게 자기 심장을 거리낌없이 줬던 전진. 자신을 배신하고 문정혁과 자버린 나를 그래도 사랑했던 전진. 전서희가 눈앞에서 죽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도망가자고 했던 전진. 나를 되찾기 위해 이선호네 집에서 세상을 속이고 스켈리톤 선수라는 배역에 충실하며 연기했던 전진… 나는… 그런 전진을 완전히 버렸다. 어떻게 보면, 문정혁은 전진과 내 사이를, 이선호의 꼬임에 넘어가서 비열한 수법으로 갈라놓은 장본인인데… 나는 현재 문정혁을 선택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당장은 문정혁이 미워도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중이고, 문정혁의 연인이라는 부분에 충실할 생각이다. 그래서… 전진을 보면 마음이 아련해지다가 종종 아프다. 곁에 있어도 내사람같지 않게 그리운 문정혁을 생각하면 비슷하게 아파오듯이… “전진… 너… 괜찮아?” 무엇이 괜찮냐고 묻는건지, 내 목소리 톤만 들어도 그는 안다. “나? 응.” “…….” 내가 더이상 말이 없자 전진이 싱긋 웃으며 내가 앉아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우와… 우리 공주가 나 괜찮은지 걱정도 해 주고, 포기하길 잘 했네.” “…….” “어차피 나같이 쉽게 욱하고 짐승같은 새끼보다는 문정혁이 너한테 어울릴거야.” “…….” “다 내려놓으면 쉽더라고. …그래도 누가 우리 공주한테 뻘짓하면 가만 안있지!” “…….” 그는 옛날에도 그랬었다. 이선호와 억지로 사귀는 척 할때도, 비록 진심은 아니지만 그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내 곁에 얼씬도 하지 않았었다. 표면적으로는 이선호 애인 역할에 충실했었다. 지금처럼… 그래서 나는 그를 사랑했던것 같다. 하나를 보려고 마음 먹으면 억울하고 분해도, 그게 잠시일지언정, 반드시 포기하고 내려놓을 줄 아는 단순함, 혹은 용기. 전진의 그런 면을 사랑했던것같다. “문정혁이 안 미워?” 문정혁은… 가끔 전진 볼때마다 화가 끓어올라서 주체 못한다고 내게 소리쳤었는데… “밉지. 그래도 공주 니가 좋다는데 어쩔 수 없잖아. 그리고… 내가 하는 일… 공주 너도 봤잖아.” “…….” 할 말 없다. 전진이 그부분에 머뭇거리듯 나도 도라질치며 시선을 피했다. 지금도 믿을 수 없다. 꿈처럼 여기기로 작정했다. 그만큼, 전진이 사람 죽이는 장면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이었으니까. “우리 사이에서 불나방은 한 마리면 족해.” “불나방? 전진. 니가?” 바둑 해설이 줄줄이 튀어나오는 재미없는 화면. 우리는 어느새 텔레비전 화면이 아닌 서로를 보았다. 무릎을 모아서 가슴에 붙이고 웅크려 앉은 나와, 약간 벌린 다리에 양 팔꿈치를 얹고 깎지 낀 손등에 턱을 얹은 전진. 그나저나 불나방이라니… 그건 좀 아니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전진이 화들짝 놀란다. “응. 왜, 이상해?” “불나방이 뭐냐? 촌스럽게. 불사조가 훨~씬 낫다. 전진! 불사조라고 해!” 신경질적으로 대충 던진 말에, 전진이 진짜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박수까지 친다. “불사…조? 역시 우리 공주는 천재다! 대체 못하는게 뭐야? 이쁘지~ 귀엽지~ 착하지~ 그럼 나 오늘부터 혈랑단의 불사조 전진이다!!” “하하하하. 뭐야~!” 평범한 대화와 웃음 속에서, 우리는 깨달아간다. 우리는 사실 오래전에 끝났었다는 것을. 전진 때문이 아니라, 이기적인 '나' 때문에. 우리는 여느 때보다 자연스러웠다. 익숙해진 거리감이 서글퍼질만큼. 한때 열렬히 사랑을 표현했던 사람이 편하고 자연스러운 타인이 된다는 거. 그점은 나를 슬프게 했다. 과거의 화려함이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언제 잠이 들었던걸까. 뽀샤시한 햇살이 말랑말랑하게 뺨에 닿았다. 아, 원형이형한테 먼저 집에 가라고 연락이라도 해줄껄… 나도 모르게 소파에서 잠들었었나보다. 대포가 날아가는 꿈을 마지막으로 꾼 것 같은데… 잠든 나를 전진이 옮겨놨는지 따뜻하고 포근한 침대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진짜 대포 소리가 들렸다. “넌 왜그렇게 생각이 없냐? 하마터면 위험해질뻔 한 거 아직도 모르겠냐!! 전진?!” “또 시작이지! 어? 그만 좀 빈정거려라!! 문곤!! 지겹지도 않냐?” 문정혁과 전진. 그것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대포를 연상시키니까. 왜 아침 댓바람부터 대포질이야…! 부스럭대며 눈을 뜨자, 소파 상석에 배 째 포즈로 앉아있을 전진 뒷머리통과, 그런 전진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는 문정혁이 포착되었다. 문정혁…! 그를 보자마자 무지막지하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적어도 내가 선택한 최후의 사람이니까. 그는 굉장히 피곤한 낯이었다. 아니, 며칠밤을 지샌 건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농축된 스트레스가 많아 보였다. 그래도 옷상태는 말끔했다. 단정하고 우아한 까만 수트… 전진은 문정혁에게 요 며칠간 했을 법한 짜증내기식 대답을 하며 손사레를 쳤다. 또 시작이냐면서 잔소리좀 그만하라고 문정혁에게 욕질이다. 아마, 내가 김동완에게 납치됐을 때, 전진이 혈랑단 따까리들을 끌고 왔던, 그때 일을 끄집어 내는 중인가보다. 문정혁이 한 팔은 허리에 얹은 채 골치아프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급해도 그렇지. 죽으려고 환장했냐고! 거기가 어딘데, 무작정 돌진하냐? 아니, 반응 왜그렇게 썩었냐? 씨발아! 다섯 놈이 죽었다고! 식솔 다섯이! 지금 시신도 못 찾았잖아!” “조까. 청랑단 수법대로 했을거야. 갈아서 분쇄해버리던지, 어디 묻어버리던지.” 문정혁은 어쩌면,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일부러 전진을 심하게 추궁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저런 대화는 며칠 전에 전진이 마취가 깬 직후에 했을 법 한 내용들이니까.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잠든척했다. 문정혁이 계속 사납게 몰아부치자 한계에 다달았는지 전진이 폭팔하듯 말했다. “신혜성이 잡혀있댔었어!” “야. 전진.” 아차, 하며 후회하는 듯한 문정혁의 목소리. 하지만 전진은 이미 한계에서 소리친 직후였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 공주가 잡혀있다는데!! 내가 정신을 차리겠냐?!!” “씨발 입 안 닥치지!” “그래! 나 무식한 새끼다!! 왜!! 나 등신이다!!” “전진!!” 나를 위해서 문정혁의 말도 안되는 공격을 참아주던 전진이 진짜 폭팔했다. “개새끼야! 우리 공주만 아니었으면 나는 니놈 못지않게 머리써서 구출했어!! 이생활 한두번 해보냐? 우리 공주가 아니라 다른 새끼 구하라고 했으면!! 하던거 멈추고 생각없이 바로 튀어나가는 일도 없었다고!!” “…….” 쿵. 쿵. 쿵. 쿵… 전진이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을때마다 내 심장은 벽에 닿을 듯 튀었다. 숨막히는 긴장감이 뾰족하게 찔려왔다. 문정혁이 왜 저러는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잘 모르겠다. 설마 그동안 나를 못찾아온 미안함에 죄책감이 터진건 아닐까. 괜히 엄한 전진에게 화풀이식으로 잔소리 하는건 아닐까… 얼마 후, 전진의 진정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우리 공주한테 잘 해주라고, 씨발놈아.” 째깍… 째깍… 셋 중 누구도 말을 하지 않을때조차 초침 소리는 분명하게 들렸다. “나… 안 보구 싶었어?” 문정혁의 황당해 하는 표정 보자마자 이 얘기 꺼낸 거 후회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종이컵을 구겼다. 황량하고 쌀쌀한 벤치. 뼛속까지 얼리는 차가운 겨울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왔다. 그는 내가 자는척 하는 것을 꿰고 있었다.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내 팔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당겨서 끌고 나갔으니까. 당황할 틈조차 없었다. 문정혁은 무작정 내 팔목을 움켜쥐고 도망치듯 건물 밖으로 나갔다. 병원 건물 뒤에 있는 벤치 행렬… 아침부터 건물 뒤를 산책하는 골빈 놈은 보이지 않았다. 1분만 앉아있어도 이가 닥닥 부딪힐 만큼 추웠다. 문정혁은 나를 앉히고 꼼짝말고 있으라고 한마디 하더니, 자판기에서 커피 두 잔을 뽑아왔다. 아무 말 없이 커피만 홀짝이던 내가 먼저 물었다. 나 안 보구 싶었어? 라는 바보같은 질문을… 종이컵을 멀리 던진 문정혁이 숨도 안쉬고 말한다. “혜성아.” “응.” “오해하지 말고 들어.” “…….” 나와 나란히 앉아있는 문정혁이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불안함에 문정혁의 팔에 팔짱을 꼈다. 춥다 그치? 빙구처럼 웃으면서 매달렸다. 문정혁은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냉정하게 내 팔을 뿌리치며 시선을 병원 담벼락에 고정시켰다. “지금 우리에게 사랑은 사치인것 같아.” “!” 쿵… 정말로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청각을 스쳤다. 휭휭대는 바람소리보다 크게… “놀라지 마. 진이도 저렇고… 나도 그렇고. 삼일 전에, 이선호가 내 윗대가리로 왔어. 정말이지… …쉬고 싶다.” “이선호가…?” 나 아프다는 소리를 시작조차 할 수 없게, 문정혁은 자기 아프다는 소리로, 막아 버렸다. 역시 문정혁은 똑똑했다. 나는 단숨에 죄인처럼 일그러진 낯으로 이선호만 생각했으니까. 창고에서 봤던 이선호의 독설이 사실로 증명됐다니… “그래. 이선호 뿐만 아니라, 임원 거의 다가 인사이동이 있었어. 퇴직자도 상당했지. 이철호에게 샤바샤바하던 새끼들 중 300명 정도가 승진한거야. 한명 전자, 건설, 기술, 연구개발… 해외까지 다 합치면 더 될 거야. 국내 계열사만 해도 70개가 넘으니까. 지금의 나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야.” “…….” “이선호가 사장으로 임명되고 내가 일주일간 깨달은건 하나밖에 없었어.” “…….” 약간 격앙된 문정혁의 음성에, 나는 입술만 깨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단기간 내 승부할 게 못되는구나. 어떻게든, 몇달 안에 끝장 보려고 했지만, 이철호가 바리게이트를 쳐 버렸구나.” “…….” “최소 1년. 아니 1년 6개월. 아니 2년? 그정도는 노려야 돼. 씨발…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까 모르겠다.” “…….” “죽자살자 잠도 안자고 머리 썼던 이유는… 너 때문이었어. 혜성아.” “…….” “그래.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 아버지의 명예와 나의 명예, 그리고 너와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서.” “…….” “이철호가 했던 방법대로, 나는 앞으로 밀고 갈거야. 이철호가 20년동안 한명에서 치고 올라왔던 짓을, 나는 1년 혹은 2년 만에 해 내야 돼. 똑같이 비열해 질거거든. 이 세계에선 정직하게 살면 그즉시 끝이야.” “…….” “근데… 다 아는데… 당장은… 쉬고 싶다. …혜성이 너도 당장은….” 문정혁의 말은 거기서 잠깐 끊겼다. 내 눈물 때문이었다. 속사포처럼 몰아치는 문정혁의 음성에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의 모든게 염려되고, 이 와중에도 그가 원망스러워서, 눈물이 마구 떨어졌다. 어깨를 움찔대며 우는 내 소리에 문정혁이 담배를 입에 물며 고독한 숨을 내뱉었다. 사랑이 사치라는 구절에서 가슴이 찢어졌는데… 그런 너에게, 왜 나를 걱정하지 않았냐는 말을 어떻게 해… 나도 내 일로 벅찬데… 하지만 내가 후회 없이 선택한 사람은 문정혁이었다. 적어도 지금 순간은 그랬다. 나는 문정혁의 팔에 다시 팔짱을 꼈다. 그는 또 세게 뿌리치며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떡해… 어떡해… “문정혁… 왜그래… 너… 내가 쉬게 해줄게….” “널 사랑하지 않는다는게 아니야. 하지만 챙겨주고 사랑해 줄 자신이 없어. 지금의 나는….” “문정혁…!!” “너에게 사랑한다고 소리쳤을때, 내 마음 군더더기 감정까지 다 퍼부었을때, 사실 그때 절정에 올랐던것같아. 아니, 한계에 달했던것 같다. 평소의 나 답지 않았던것 만큼.” “…….” “널 지켜주지 않겠다는 게 아니야.” “그래서. 도망치려는 거야? 웃기지 마. 너, 나한테 사랑한다고 소리친 다음에! 그 다음에… 흐윽, 우리 더 예쁘게 잘 지냈었어….” “…….” 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이제 팔짱 낄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다행히 문정혁은 내가 흔드는 팔은 내버려뒀다. 왜, 얼마나 힘들었기에, 내게 이렇게 잔인해졌을까. 머릿속이 복잡하다. 아니, 우선은 너무 아프다. “말 해 봐. 문정혁. 도망치려는 거잖아. 힘드니까 도망치려는 거잖아.” “…….” “문정혁… 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랑 껴안고 사랑한다고 하고 행복하게 웃었었잖아! 왜! 내가 완전히 니 게 되니까 정 떨어졌어? 내가 너만 좋다고 너만 바라보니까 재미 없어졌어?!” “그런거 아니라는거 알잖아.” “몰라!! 너만 힘들어? 난 안 힘들것 같아? 힘들때 서로 위안이 되어주면 안 돼?” “지금은 서로 힘든것만 우선이라서, 보듬어주기 어려울거야. 각자 힘든것만 호소할테니까.” “문정혁…!! 제발… 제발 이러지마….” 엉엉 울면서 소리쳤다. 그래도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개새끼… 나쁜새끼… 문정혁이 담담하게 대꾸한다. “사랑하니까 놓아준다는 말, 나… 조금은 이해해.” “나 그 말 안 믿어. 문정혁. 너 옛날에 나한테 뭐라고 했어!! 너만은, 사랑하니까 놓아준다는 거 안 믿는다고 했잖아!!” “…….” “진이가, 선호 때문에 나 놓아주려고 했을 때도, 너 그랬잖아!! 죽고 다치더라도 내가 곁에 있는게 낫다고 했잖아!! 니가 전진이었다면 절대 안 놔줄거라고 했었잖아!!” “…….” “정혁아… 문정혁….” 그는 흔들림없이 글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의 신념처럼 잔인하게 반짝이는 글자들이 내 심장에 박힌다. “…너한테 기대는거 내 자존심이 용납 못 해.” “뭐…?” “너 당분간 돌봐줄 자신이 없어.” “정혁아. 나 너만 있으면 돼. 어? 우리 떨어져 지내자는거, 헤어지자는거나 다름없잖아. 너도 알잖아. 너도 나 어떻게든 사랑하려고 죽자살자 쫓아왔었잖아… 정혁아. 정혁아아…!!” 있는 힘껏 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제발 나 좀 한 번 쳐다봐바… 이럴 수는 없는 거잖아. 너 왜그래. 응? 일주일만에 대체 왜…! 턱밑으로 쉬지 않고 눈물이 떨어졌다. 문정혁은 결국 내가 잡고 흔드는 팔마저 세게 뿌리쳤다. 덕분에 내 몸이 한 번 기우뚱하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가슴에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나도 내가 이런 남자라는게 싫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혜성아.” “정혁아아…” “내 기반이 제대로 잡혀야지 너를 완전히 사랑해 줄 수 있어. 조금만… 기다려 줘.” “…….” “이렇게 결심하기까지, 나도 많이 힘들었어. 이대로 어영부영 있다가, 다 놓치고 빼앗길거야.” 그는 거짓말같은 말을 주저없이 다 꺼내버리고, 내게 시선 한 번 던지지 않고, 싸늘함만 남긴채 일어섰다. 말도 안돼… 말도 안돼… 나 안아줘야 되는거 아니야? 너만… 너만 힘들었어? 너,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 줄 알아? 내 눈 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갔었어…! 적어도 괜찮냐고 한 번은 물어봐야 되는거 아니야? 문정혁은 단 한 번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잔인할 만치 근사한 그의 뒷모습에 대고 나는 말했다. “문정혁. 하나만 물을게.” “…….” 너덜너덜해진 심장이 그래도 아프다며 피를 흘렸다. 사랑하고 있는데… 너를 미워하고 그리워 하면서도 열심히 사랑하는데…! “만약 너의 모든게 다 빼앗겼다고 쳐. 문정혁. 대신, 니 옆에 내가 남았다면. 그건 싫은거니?” “…….” “모든게 다 사라져도, 내가 있으면 괜찮은거 아니었어?!” “…….” 그의 걸음이 잠깐 멈칫했지만,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문정혁은 냉정하게 '짧은' 동안 나란 인간을 잘라내기로 확실히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는 처음보다 빠르게 걸었다. 나는 무너지듯 허리를 숙였다. 가슴팍을 부여쥐며 눈물을 쏟아냈다. “나 바보같다… 참… 자존심 상하는 질문이구나, 이거….” 아픔과 상처.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되돌아오는 화살이었다. 오래전 내가 전진에게 줬던 상처의 화살이, 문정혁이 내게 꽂는 것으로 돌아온다. 내게 무릎꿇고 매달렸던 전진이 이런 기분이었구나. 모든걸 다 버리고 도망치자던 전진의 눈물이 이런 아픔이었구나. 다른 거 다 없어도 나 하나면 충분하다던 전진의 절실함이, 이런 거였구나. 나. 정말 나쁜놈이었구나. 죽일놈이었구나. 문정혁. 너 하나면 다 된다는 나한테, 한때 내가 전진에게 던졌던 화살을 던지는구나… 한참동안 벤치에 홀로 앉아서 통곡했다. 뼈와 살을 잘라내도 이보다 아프지는 않을 성 싶었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이보다 참담하지는 않을 것같았다. 추위 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세시간이나 울었다. 눈물이 멎을 때쯤, 멍하니 앉아서 문정혁이 버린 종이컵을 한참동안 쳐다봤다. 구겨진 종이컵이 마치 나인 것처럼 온 몸이 아팠다. 그리고, 문정혁과 나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뇌에 스며들었다. 비단 방금 일 뿐만이 아닌, 그동안 나와 문정혁이 사랑하던 방식, 전체가 거대하게 떠오른 것이다. 어떻게 나와 헤어질 생각을 하냐고 서러워하던 흐느낌은 어느덧, 그와 내가 이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들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표면에 드러난 '일'을 제외한 감춰진 부분들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쳐들었다. 문정혁… 나는 그를 이해하지만, 그를 감싸줄 표용력이 부족했었고. 그는 나를 감싸줄 표용력이 넘쳤지만, 내 심정을 알아주는 이해력과 표현력이 부족했었다. 돌이켜보면 그가 침묵하는 순간순간이 그랬다. 그의 침묵은 나를 이해하는게 아니라, 마냥 표용하고픈, 대충 넘어가고픈 욕구일 뿐이었으니까. 이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이별'과 별개의 것으로 불행해졌다. 내 머리는 어느덧 문정혁의 이별에 분개하다 못 해, 그와 어긋났던 단편적인 부분이 전부인 양 짜맞춰지기 시작했다. 가끔 어린애처럼 참지 못하고 나와 똑같이 싸웠던 전진에게 느꼈던 단점이, 비록 색깔은 다르지만 문정혁에게서도 보였다는 것… 문정혁과 내 사이만큼은 단점 없이 서로에게 충족되는 줄 알았었다. 그의 침묵과 표용력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의미 인 줄 알았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게 포용력이 부족하듯, 문정혁은 내 감성을 이해할 능력이 부족했었다. 표현력 또한 부족하기에, 느닷없이 제 멋대로 결정내리거나 폭팔시키는 사람. 그게 문정혁이었다. 완벽한 그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그는 어찌보면 전진과 똑같았다. 상대와 맞물릴 순간에 전진이 목청을 높인다면, 문정혁은 침묵하는 식으로 방법만 달랐다. 아니, 어쩌면 문정혁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상대를 향한 이해심이 부족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문정혁보다는 전진이 그래도 감성적인 면이 풍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이별 때문에 세시간을 울었던 나는, 그동안 문정혁과 내가 사랑했던 방식을 깨닫고 한시간을 더 울었다. 문정혁이 지닌 이면의 재해석. 나는 그게 서러웠다. 세상 누구에게나 단점이 있다는게 확실시되서 괴로웠다. 아니, 누군가의 눈에는 장점으로 비칠 문정혁의 부분이, 내겐 단점이라는게 고통스러웠다. 문정혁과 내 사이 만큼은 완벽하다는 믿음이 파괴되었다. 이별이란, 이런식으로 이별이 오기까지의 '이유'들을 낱낱이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를 가장 서럽게 하는 부분은 뭐니뭐니해도, 문정혁이 선택한 건 내가 아닌 야망이라는 점이었다. 그가 내게 이별선언을 하지 않았다면, 사실 그의 침묵이니 단점이니 따위는 굳이 짜맞추지 않아도 좋을 부분이니까. 나는 이별을 통해서 문정혁의 본모습을 알았음을 끝내 부정하지 못했다. 그렇게, 차가운 눈이 다 녹기도 전에 우리는 또 헤어졌다. 아니, 그것들과 나는 또다시 떨어졌다. 배우이자 가수로서 입지를 충분히 다졌다고 여겼던 내가 맞은 파장. 김명민 검사와 손을 잡은 것만으로도 당장 뭔가를 해낼거라 믿었던 그것들의 풋풋한 기대. 결국 스물넷의 우리들은 현실을 자각하고 떨어졌다. 사회를 움직이기 위해, 스물넷이라는 아직 어린 나이를 원망하며, 현실을 자각하는 것으로, 사랑의 휴식기를 선언했다. 암담한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상상 이상 긴 시간동안… -전진 외전- 갑자기 문자가 왔다. [고객님의 27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SJ텔레콤] 씨발… 오늘이 내 생일이었냐. 아, 맞네. 8월 19일. 니미… 그럼 좀 일찍 알려줬으면 팥빙수에 양초 꽂고 생일축하 노래라도 불렀을거아냐. 다저녁에 왠 축하? “형님. 지금 치라고 할까요?” “어? 아니.” 속으로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 불렀다. 덤으로 우리 공주 볼에 생크림 묻히는 상상도 했다. 인천 부두가 근처의 비밀 도박장. 리무진 안에서 창문 닫고 에어컨을 작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선 비린내가 밀려왔다. 손목시계가 밤 열시를 가리켰다. 시간을 확인하는 즉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선글라스를 벗었다. 음… 대형 컨테이너 박스가 무더기로 있는데… “…저기다.” “예?” “저거 컨테이너 박스 아니야. 애들한테 무전 해. 1분 후에 여섯 번째 컨테이너 진입한다.” “예! 형님!” 개새끼들… 다 죽었어. 양복 주머니 안쪽에 조용히 숨쉬고 있는 회칼을 더듬었다. 살짝 풀어놨던 쇠파이프를 꽉 그러쥐었다. 정확히 1분 후, 잠복중이던 혈랑단 40여명이 튀어나왔다. 우와아아!! 당황하는 쪽 놈들의 괴성이 퍼졌다. 나는 조용히 담배를 입에 물었다. 웬만한 일에 처음부터 직접 움직일 만큼 머저리는 아니니까… 치고 받는 소리가 들렸다. 갈매기 도망가는 소리도 작게 들렸다. 인적 없는 부두가에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음이 음울한 밤 바다에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퉷.” 아직 동식이를 잡았다는 무전이 안 온다. 씨벌… 어떻게 된거지? 차 문을 열고 나가자 대기 중이었던 따까리 새끼들이 쩔쩔매며 고개를 푹 숙인다. “애기들.” “…? 예.” “너네는 차에서 대기만 해라. 오면 알지.” “예? 예! 형님!” 3년 전에, 우리 공주 구하러 간답시고 좆도 안되는 따까리 다섯 놈을 끌고 갔다가 골로 보낸 뒤부터 나는 절대 젖비린내 나는 새끼들을 끌고 가지 않았다. 누군가는 죽어야 할 장소에… 습격은 성공했다. 아니, 거의 모든 새끼들이 튄 상태라서 컨테이너 지하는 휑하기만 했다. 쓰러져서 골골대는 새끼들은 몇 안 되었다. 팔을 걷어부치고 걷는 족족 내새끼들만 멀쩡하게 서서 나를 안내했으니까. 컨테이너 지하에 교묘하게 만들어놓은 도박장. 여기서 동식이가 노는구나…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를 잠시, 쾅- 복도 끝방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갔다. 생포된 새끼 한 놈이 바닥에 무릎꿇은 채로 나를 노려본다. 이마짝에 피를 줄줄 흘리면서 양 팔이 결박된 녀석은 아직 앳돼 보였다. 어린것이 벌써부터 이쪽 물만 시퍼렇게 들어가지고… “야. 너네 회장 어따 감췄어?” “…….” 말도 한 번에 못 알아듣네… “동식이 말이야. 느네 두목 어딨어?” “모릅니다.” 어린것을 결박한 놈들이 '불라고 씨발새꺄-' 허공에 팔을 올린다. 나는 녀석들에게 물러나라고 지시했다. 더는 팰 것도 없다. 최후에 잡힌 이 놈은 누가 포박하지 않아도 겁에 질려서 바지에 오줌을 지렸으니까. 기껏해야 스무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녀석이… 오기는 있어가지고 쓸데 없이 나만 디립다 노려본다. “새끼… 너 의리 찾냐?” “…….” 녀석과 안면이 닿을 만큼 나는 허리를 숙였다. 녀석이 흠칫 놀라더니 시선을 피한다. “조폭영화를 너무 많이 봤구만? 쯧. 아가야. 니네 두목은 너한테 번지르르하게 이빨 까고 토깐 거거든. 의리는 지랄. 내가 뭐 하나 가르쳐 줄까?” “……?” 이러기 싫은데… 왜 피를 부르게 만들어… “이 걸레장에서!” “흐헉!!” 내 눈빛이 달라진 순간부터 숨을 참던 놈이, 구둣발에 나가 떨어졌다. 가슴팍 한 번 친 것 뿐인데 부글부글한 거품을 토해낸다. 나는 거기서 약간 머리가 돌았던 것 같다. “의리 찾는 놈은!!” “욱!!” “제일 먼저 뒤지는 거야. 씨발아.” 발길질 몇 번에 코피를 주룩 흘리며 바닥에 이마를 박아버린 녀석을 봐서야, 나는 정지했다. 간만에 의리파인척 나대는 새끼를 봐서 기분이 복잡미묘하다. 주먹질 할때의 나는 평상시와 다르다. 사실 내 자신은 잘 모르는데, 내 주변 인간들이 알려줬다. 표정부터 행동, 모든게 미친개와 똑같다고 한다. 그럴리가 없는데… 9년 전 고삐리때 우리 공주가 했던 말이 아직도 가슴을 후벼 판다. 싸우지 말라고, 주먹질 하지 말라고… 또 싸웠냐고, 또 다쳤냐고… 울먹이던 목소리가 요즘따라 자주 들린다. 괴롭다. 혜성아… “야. 동식이 이 안에 있을거다. 벽 뜯어.”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 챈 녀석들이 후다닥 망치로 벽을 쳤다. 캉-!! 캉-!! 한동안 시멘트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사각형 내부 가장자리에 진즉부터 있었을 문을 발견했다. 안쪽에서 열지 않는 이상 절대 발견 할 수 없는 위장 출입구. 덩치 좋은 새끼들이 무식하게 몸으로 밀자, 세 번만에 꽈당!! 하고 안쪽으로 쓰러졌다. 자욱한 먼지가 매연처럼 올라왔다. 당연히 바깥 출구가 나올 거라 예상했던 거와 달리, 그 안에는 오늘의 먹이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언제고 경찰이 들이닥칠것을 대비해서 만든 방인가보다. 작은 소파와 나무 테이블, 냉장고가 전부인 좁은 방에 다른 출구는 없었으니까. 오늘 여기 온 목적이나 다름없는 녀석을 보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여~ 염동식이. 여기 숨어 있었냐? 너네 애들 많이 쭐었다?” 척척 걸어가서 염동식이 코앞에 갖고 온 서류를 들이밀었다. 60대 후반의 태실산업 회장 겸 태실파 명예회장 염동식. 태실산업은 몇 년 전부터 주가 폭락 사태를 맞아 여기 저기 자금을 융통해서 억지로 막는 식으로 아슬아슬하게 운용되고 있었다. 그나마 망해가는 선박업에서 손을 떼면서 건설과 도박으로 회사를 버티고 있었다. 내가 서류를 들이대자 염동식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마 경찰이 들이닥친 줄 오해했었나보다. 그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위 아래로 쳐다보며 말한다. “…한명 건설 법무팀장하고 얘기 끝났는데. 태실 산업은 대주단협약에도 가입된 상태라고. 채무 이행 의무는 유예됐어.” “팀장이고 나발이고. 싸인해. 아니, 지장 찍어라, 동식아.” “…….” 쥐구멍도 없는 공간에서 염동식이 비지땀을 흘리며 초조해 한다. 이런 경우는 예상하지 못했나보다. “버틸 걸 버티셔야지. 윗대가리들 머리 쓰는건 난 모르겠네. 뭐가 유예됐다고 지랄이야? 보증의무는 수행하셔야지?” “…아니. 갑자기 이런식으로 나오면…!!” 우리 동식이 화났네. “나오면 뭐? 머리쓰지 말고 지장 찍어. 쉽게 살자, 동식아. 그러기에 망해가는 기업에 보증은 왜 섰어.” “이봐! 난 분명히 이팀장하고 얘기가 끝났다고! 9개월 내에 500억만 상환하면 되는거잖아!!” “응. 그건 니가 9개월동안 알아서 하고, 우선 니 소유 영업소랑 니가 빼돌린 것들 합치면 대충 각이 나오거든. 내가 생각해봤는데 그래도 돈이 모잘라. 너 요번에 경기도 부천에 웅진그룹 계열에서 짓는 레저시설에도 참여했다며.” “!!” 동식이가 눈에 띄게 놀라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돈 없다고 배 째라고 기자 꼬셔서 신문에도 하소연했더라?” “…!!!” “한명에서 자산매각해도 할 말 없지?” “…….” “지금 너네 애들 다 튀었어. 아, 딱 한 새끼가 버티고 있던데 안됐더라.” “알겠소.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응. 어떻게 하면 되냐면…” “!!” 놈을 소파에 앉혔다. 동시에 안주머니에 있던 회칼을 잽싸게 꺼내서 녀석의 왼손등을 찍었다. “여기 앉아서, 서류 잘 읽어.” “아아아아악!!!” 시퍼런 비명을 토해내며 아둥거리는 염동식. 그가 발버둥칠수록 그의 손을 관통한 칼은 점점 테이블을 흔들어서 상처를 자극할 뿐이었다. “이새끼 지장 찍어서 가져와.” “예! 형님!!” “아아아악!! 이힉! 이히익!” “참, 내 칼 잘 씻어서 나와라, 이따가. 알았지?” “이힉! 이히힉!” “예! 걱정하지 마십쇼!!” 배고프다… 밤의 습기가 내려앉은 부두가의 비린내에 코를 막은채 후다닥 달려갔다. 간지 따위 필요없다. 에어컨! 에어컨! 리무진에 타자마자 숨을 푹 내쉬었다. 어떻게 여기서 도박질을 할까. 아니, 숨어도 어떻게 비린내 틈에서 숨을까. “졸라 시원하다.” 정장 바지를 무릎까지 올리고, 종아리에 묶어놨던 생수병을 꺼냈다. 출발하기 직전까지 얼려놨던 거라 그런지 반 정도 물이 녹았다. 벌컥벌컥 마시니 속이 확 트인다. 그리고 인천 오는 길에 잠깐 수퍼에 들러서 샀던 팥빵을 두 입에 털어넣었다. 약 1분 만에 주린 배를 채우고 나서야, 문정혁에게 문자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진짜 짐승인가봐… -해결했어. 차창 밖 컨테이너 쪽에서 따까리 새끼들이 서류를 휙휙 흔드는게 보였다. 나는 보다 편한 기분으로 늘어지게 앉아서 막 도착한 문정혁의 답문자를 확인했다. 동식이는 어떻게 됐냐, 진짜 누구 죽인거 아니냐- 꼼꼼하게 따지는 문곤 자식.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그럴까. 아니면 배가 채워져서 그럴까. 졸립다. 천천히 문자를 눌렀다. -아마 내일쯤 법무팀장하고 이선호가 좀 곤란해질거야. 동식이는 애들이 처리하고 있고. 니가 내일 이쪽 주주들 만나면 돼. 문자 보내자마자 또 답문 왔다. -몇 명 죽였냐 이새끼가..!! -안 죽였어. -진짜냐 -그래! 김검사가 조건 걸었다며! 너 내일 태실 산업 주주들이나 만나면 된다고!! 문자로 소리지르기 권법을 보낸 효과가 좀 있는지, 문정혁의 문자 공격이 잠깐 멈췄다. 문정혁은 틀림없이 태실 산업 주주들을 설득해서, 경영권을 자기 손에 쥘 것이다. 매우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서. 느긋하게 눈을 감고 쉬어주려는데, 문정혁이 또 문자보냈다. 아, 한군데 더 해결해야 된다고 했지? -이번에는 부산으로 가. 태준이한테 약도 보냈어. “씨발. 부산? 야!! 나 지금 인천이야!!” 개새끼가 죽을라고!! 너무 당황스럽고 황당해서 핸드폰에 대고 고함쳤다. 내가 아무리 꽥꽥거려봤자, 문정혁은 부산을 고집할것이고, 나도 결국 졸라 욕질하면서 부산에 갈 것이다. 올해부터 일이 많아졌고, 일이 많아졌다는 건 이철호를 아작낼 출구가 넓어졌다는 증거니까. 우리가 하는 일은, 한명그룹 내분을 도모하는 동시에, 사방에 뻗어있는 지분을 문정혁 앞으로 확보하는 것이다. 방금 내가 한 일은, 한명 그룹이 유예 기간을 준 대주단협약 이행 기업체 우두머리들의 뒷통수를, 한명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치는 것. 처음 2년 동안은 작은 업체부터 영역을 잡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일이 경영권을 쥔 놈의 항복을 받는 거라면, 문정혁은 처음부터 기업의 주식을 때를 봐서 헐값에 매각한다. 그러니까 문정혁이 손을 쓴 다음, 내가 몸으로 부딪혀서 거두는 식이다. 물론 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기업 대다수는 건설, 중공업계다. 이철호는 올해 초부터 우리의 작당을 눈치 채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합법 절차를 거쳤기에, 그는 자신에게 유리한 뚜렷한 증거를 잡지 못했다. 자신이 20년간 했던 짓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넘겨 받을 뿐이다. 반응은 서서히 나타난다. 좌불안석이 된 한명 주주들이 가만 있을 리 없으니까.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투쟁하고 부딪히는 회사들이 거의 다 한명 그룹의 계열사라는 점이다. 공화국이나 다름없는 한명의 맹수들의 세상. 이철호는 이 짓을 20년에 걸쳐서 했었다. 경영 손실의 탓을 기업 총수에게 돌리게끔. 문도천이 자기 형제를 밀어내고 회장이 될 때까지. 하지만 문정혁은 이철호보다 앞서 나갔다. 건설시행쪽 말고 다른 계열사 관련해서도 일을 도모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단순한 내 머리로 봤을때 이철호를 내려앉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건설사다. 전자사업쪽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생긴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서 살련다. 김명민 검사는 이런 우리들에게 조건을 걸었다. 첫째. 훗날 내가 위험해 질 수도 있다는 것. 우리 일을 눈감아 주는 대신, 내가 불리해질 때는 도와 줄 수 없다는 것. 둘째. 이철호와 같은 방식으로 치고 올라가되, 사람을 웬만하면 죽이지는 말 것. 나도 그에게 조건을 걸었다. 위험해지는건 상관없다. 다만, 우리쪽에서 공격할때는 사람을 죽이지 않겠지만, 반대로 청랑단이나 기타 조직이 기습할땐 우리가 살기 위해 죽이겠다고. 문정혁은 이제 곧, 한명SDS와 한명랜드도 건드릴 것이다. 몸으로 치고받는 나와 달리 머리를 쓰는 놈인지라, 문정혁이 건드리는 부분은 '불법 경영권 승계'. 문도천 공화국 시절, 이철호는 감히 시도하지 않았던 부분을, 문정혁이 건드리는 것이다. 한명랜드의 지분 51%가 이선호의 소유이기 때문에, 경영권은 사실상 이선호에게 있다. SDS까지. 한명 주주들은 쉬쉬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문제가 되는 항목이었다. 무조건 이선호에게 한명랜드 경영권이 위임되다니? 어쨌든 한명SDS의 손해 규모가 50억원 이상이 되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이 적용되서 이철호는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한명랜드와 SDS. 둘 다. 현재 법원은 이철호와 이선호의 불합리한 경영권 편법 승계를 눈감아 주고 있지만, 김명민 검사는 이 부분을 비밀 수사 중이다. 그리고, 이철호와 이선호를 최종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결정적인 방법은 그들의 '비리'다. 이철호가 회장직에 오를 수 있었던 숱한 비리들이 최후에는 그를 죽일 것이다. 이철호가 오래 전부터 취한 거대 비자금. 사실 큰 해결책은 이것밖에 없다. 내분 조성과 조세 포탈과 불법 경영권 승계. 이 세 개 죄목은 이철호 부자를 한명 공화국 최고 자리에 오르게 했지만, 결국 그것으로 인해 추락할 것이다. 반드시. 그러기 위해 나는 열심히 내가 맡은 기업 내분 조성을 위해 허벌나게 날라다녀야겠지. 한명을 믿고 자금 융통한 기업들 뒷통수치러… “형님… 다 도착했는데요.” “어… 그래.” 졸려 뒤지겠다. 씨발. 억지로 눈을 떴다. 하루에 두 탕 뛴 적은 아직 없었는데, 문정혁이 지랄해서 결국 부산까지 와버렸다. 새벽 다섯시. 찌뿌둥한 몸에 기지개를 켜고 차창 밖을 주시했다. 인천 부두가와 거의 똑같이 생겼다. 연속으로 생선 비린내를 맡자니 골이 울릴 지경이다. 컨테이너 박스 대신, 새벽 여명에 타들어가는 낡은 4층 건물 포착. “저기 맞냐?” “예. 부사장님이 알려주신대로 온건데요.” “다른 애들은.” “대기중입니다.” 몸을 별로 안 쓴 내가 피곤할 정도면, 다른 새끼들도 하품하고 있을텐데… 아무래도 안되겠다. 급한 불은 꺼야 옳지만, 성급하게 부산까지 내려온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좋은 방법이 아니다. “태준아. 차 돌려. 일단 다시 모였다가….” 연속 하품을 하며 느릿느릿 말하는데, 갑자기 무전이 왔다. 문곤인가? 태준이가 무전을 켜자마자, 저쪽에서 헐떡대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 어서 피하십쇼!! 역습입니다!! 태실 쪽에서 정보를 흘렸나봐요!!! “!!!” 무전이 끝나기도 전에 태준이 새끼가 급히 차를 유턴했다. 새벽 공기보다 서늘한 그림자가 어둡게 밀려왔다. 쿠르릉… 텁텁했던 서울 하늘과 달리, 부산의 여명은 먹구름의 비명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물안개 위로 파도가 요동치더니 부두가에 부딪혔다. 당장 철수해!! 라고 무전을 보내라 지시했고, 태준은 시키는대로 했다. 그러나 더는 무전이 오지 않았다. 지지직 거리는 불협화음만 신음소리처럼 소름끼치게 전달 될 뿐이었다. 리무진 뒷자석에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 세계에서는 의리를 찾는 놈이 먼저 뒤진다. 의리는 영화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이권이 개입되는 놈들만 형식상 갖추는 의리. 때문에 나는 제일 먼저 피신하는게 옳았다. 생태파 놈들이 역습으로 노린 것도 그것일테니. 내가 있고 없고는 싸움판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나도, 놈들도 알고 있다. “태준아.” “예, 형님. 아직 쫓아오는 새끼들은 없습니다.” “차 돌려.” “!!!” 끼익-!! 태준은 차를 세웠다. 녀석의 뒷모습만 봐도, 나는 알았다. 얼마나 혼란스러워하는지를. “황태준.” “예….” “황태.” “예… 형님.” “넌 먼저 서울 올라가라.” “형님!!” 녀석은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목숨바쳐 충성할 것처럼 구는 새끼들의 특징이다. 자기가 살아야 할 순간에 놈들은 도망칠 구석을 찾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의리를 찾는 건 어리석다. 내 운전수로, 내 따까리로 잘 따르던 황태준. 나는 녀석을 버리지 않기 위해, 녀석에게 배신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놈을 밀어내고 운전석에 앉았다. “먼저 올라가라고, 씨발아. 내 말 안들려?! 부산까지 온 게 있는데, 역습은 역습이고, 일은 해결하고 가야지. 조까. 절대 못 튀어. 배 째라 그래!!” “…….” “그렇잖아도 손이 근질근질했어.” 내 눈빛이 바뀌자 태준이 비로소 포기했는지 한 걸음 물러났다. “형님….” “왜 임마.” “몸… 조심하십시오.” 태준이 우는 꼴이 보기 싫어서 무작정 달렸다. 미친듯이 엑셀을 밟았다. 고작 4층 건물이다. 인천에서 아작냈던 태실파 새끼들이 정보를 흘렸던 말던, 4층 건물 근처에서 잠복 중이었던 혈랑단 숫자는 40이라고. 역습에 쉽게 뒤질 새끼들이 아니야. 밖에서 보기만 해도 4층 건물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추적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 비 오면 옷 젖는데… 양복 상의를 퍼뜩 벗어서 차에 걸어놓고, 와이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올렸다. 차문을 열고 양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끼웠다. 휙휙 둘러보며 건물 입구쪽으로 걸어갔다. 우리 새끼들만 디립다 쓰러지고 지랄… 아, 쪽수 너무 딸리면 짜증나는데… 우당탕탕!! 2층에서 요란한 발소리와 고함소리가 뒤섞여 울렸다. 천천히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회칼을 가볍게 쥐었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서 허공에 회칼을 휘리릭~ 손가락으로 돌렸다. 어디 사시미 좀 떠 볼까. 2층 복도, 계단 끝에 엉겨있는 다섯 놈 포착. 살집 많은 새끼들이 무식하게 주먹질을 하느라 정신없다. 내 새끼들 거의 다를 건물 밖에 자빠뜨려 놓고, 재밌냐? “넌 뭐야?! 새꺄!!” 다섯 중 한 새끼가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다가 나를 봤다. 휙~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나? 나 몰라?” “!!” “염병. 3년을 쉬지 않고 굴렀는데 나를 모른다냐, 아가야.” “저, 전진!!” 다섯이 동시에 돌아본다. 그중 혈랑단 새끼는 한 놈. 뒤지게 얻어 터진데다가 녀석들이 뭔 지랄을 해놨는지 양 팔이 너덜거린다. 내가 되돌아 울 줄은 '당연히' 몰랐을 생태파 놈들. 네 놈이 멈칫하는 찰라의 틈에, 나는 붕 뛰어올랐다. 가볍게 착지하기 직전의 짧은 사이, 허공에서 내려오며 회칼을 빠르게 움직였다. 큰 각도로 두 번 돌렸을 뿐인데, 네 놈중 세 놈이 피를 뿜어냈다. “히이익! 히익!” “아아아아악!!” 탁.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하며 물었다. “니네 형님 어딨어. 아니, 경태, 아니, 오사장 개새끼 어딨냐?” 한 놈은 목젖 부분이 깊게 스쳐서 너덜거렸고, 다른 두 놈은 어깨와 가슴이 찔리고 스쳐 있었다. 흰자위가 까뒤집힐 정도로 달달거리며 바닥에서 헤엄친다. 회칼이 스치지 않은 한 놈이 벌벌 기는 몰골로 뒷걸음질 치다가 내가 조금 움직이자 빽 소리친다. “4층! 4, 4층!! 아 씨발!!!” “니미. 4층? 허벌나게 올라가야되잖아…?” 내게 4층을 외친 생태파 쪼가리 새끼는 그 길로 튀어버렸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의리는 개뿔. 지 살기 바쁘다. 그뒤로 2층 3층에 있던 생태파놈들이 쉬지 않고 덤볐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던것 같다. 쓰러진 놈 중 하나가 놓친 쇠파이프를 양 손에 들고 휘두른 것만 약간씩 감각에 전해질 뿐이었다. 연두빛 와이셔츠가 녀석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갔다. 심장이 떨어지는 느낌조차 없었다. 공포심이란게 무엇일까. 아니, 생각이 불투명해진다. 역습을 핑계삼아 마음껏 싸움판에서 휘두를때의 난… 정신을 차렸을땐, 내 주변에 살아남은 혈랑단 인원 열셋이 나를 따르고 있었고, 그런 우리를 무섭게 공격하는 생태파도 비슷한 숫자가 되어 있었다. 내가 몇 놈을 죽인거냐? 무심코 묻자, 나와 등을 맞대고 놈들과 대치 중이던 녀석이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씨발, 정신이 돌아와도 문제네… 절대로 피하면 안 돼. 믿을 놈 하나 없거든. 내가 살면 내새끼들도 살고, 내가 조금만 흐트러지면, 내새끼들은 다 튀어버린다. “오경태!! 씨발 안 나타나지!! 너는 나타나면 무조건 내 손에 죽었어!!” 쾅--!!! 흔들, 흔들. 4층에 올라오자마자 거구 두 놈의 대갈빡를 쇠파이프로 찍었다. 놈들이 흔들거리다가 계단 밑으로 푹석! 쓰러지더니 포대자루마냥 굴러내려갔다. 우와아아-!! 4층에 있던 생태파 쪼가리들이 무작정 공격해온다. 3층 놈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조금만 흐트러지면, 내새끼들은 다 튀어버린다. “씨발 잡것들이!! 단체로 개사료 쳐먹었나!! 살탱이들만 있어?!!” 주사를 맞은건지, 아니면 죽사발짓을 한건지, 생태파 새끼들은 하나같이 다른 조직보다 몸집이 기이할 만큼 거대했다. 때문에 무기를 쓸 때 살집을 눌러봤자 앵앵거리며 신음소리만 낼 뿐 다시 덤비는 것이다. 이놈들 쓰러뜨릴려면 머리하고 목 따는 수밖에 없다. “다 발라버려!! 개새끼들!! 역습? 씨발! 겁도 없이 혈랑단에게 역습을 해?! 다 갈아버려 개새들아!!” “예!!!” 누구보다 빠르게, 강하게, 내가 원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짐승처럼. 캉-- 쇠파이프를 내리 칠때마다 생태 새끼들의 뼈가 부러졌고, 그 진동이 쇠파이프를 통해 내게도 전해졌다. 나의 무식한 방법은 반쯤 성공했다. 나부터 당연히 피신했을거라 여겼던 놈들의 역습에 역습을 한 꼴이니까. 맥을 못추고 나가 떨어지는 따까리 새끼들의 시체를 하나씩 밟으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형광등이 깜빡이듯이 동공이 풀렸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조금 어지럽다. “하아, 하아. 야. 니가 경태냐…?” “으아아악!!” 쏴아아아아-- 투둑투둑투둑, 투둑투둑투둑, 무섭게 쏟아지는 빗방울 소리, 시커먼 하늘, 두 배로 울리는 고함에 절로 미간이 찌푸러들었다. “아이 씨발놈의새끼… 고막 찢어지겠네. 가뜩이나 정신 혼미한데….” 오경태 사장이 붙잡혔다. 4층도 모자라 옥상까지 튀었던 오경태는 피범벅이가 된 내가 나타나자 옥상 밑으로 뛰어내릴 태세였다. 혈랑단 두 놈이 오경태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왔다. 백키로는 족히 넘어 보이는 50대 중반의 오경태. 키 작고 살집많은 오경태의 백키로는 전부 지방인가보다. 저 살은 찔러봤자 죽지도 않겠네. “경태야. 긴 말 할 것 없이 지장 찍어라. 너한테는 설명 해 줄 시간조차 아까우니까.” “뭐, 뭐, 뭘.” “아 새끼… 대화하기도 싫으네. 혀부터 뽑아줄까, 경태야?” “!!” 내 앞에 무릎꿇고 앉아서 포박된 오경태가 눈물을 질질 흘리며 도리도리 고개를 흔든다. 귀엽게 봐주고 싶지만 짜증나서 못살겠다. 어느새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방울도 맘에 안 든다. 게다가 왜이렇게 호흡 하기가 힘든걸까. “형님!! 여, 옆구리에…!!” “어…?” 오경태 머리채를 쥐고 잠깐 고민하는 사이, 아까 튀라고 했던 태준이 목소리가 들렸다. 녀석이 왜 되돌아왔지? 하고 느릿하게 돌아보다가 언젠가부터 내 옆구리에서 나와 함께했던 회칼 하나를 발견했다. 어떤 새낀지 무식하게도 찔러놨다. “으윽.” “혀, 형님!!!!” “아… 씨발….” 정신없이 몇 명씩 상대하느라 이게 찔린 줄도 몰랐나보다. 아무리 짐승이라도 그렇지. 아니, 짐승이라고 해도 자기 아플때는 아는 법인데, 나도 참… “후우, 후우… 으읍!!!” “!!!” 동공이 확장되다 못해 터질 지경이다. 옆구리에 팔을 얹고 최대한 숨을 몰아쉬었다. 깊이 숨을 참을 무렵, 칼을 뽑아냈다. 푸두둑. 붉은 혈유와 얇은 살점이 함께 떨어져 나갔다. “하아, 하아, 하아, 졸라, 아프, 다, 하아, 씨발,“ 내 황당한 행동에 당황한 태준이 서둘러 이쪽에 다가왔다. 오경태는 내 무식함에 반쯤 정신이 나갔는지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리고, 쿵-- 하고 빗물에 젖은 옥상 바닥에 거대한 몸집을 쓰러뜨렸다. 옆구리에 찔려있던 회칼을 빼 내는 즉시, 내가 오경태의 목을 빠르게 그어 버렸기 때문에… “야, 이새끼 지장 찍어서 가져와.” “예!!” 목 밖으로 거품같은 피를 퐁퐁 터뜨리는 오경태의 시체가 대 자로 너부러져 있었다. 혈랑단 세 놈이 질질 끌어서 건물 안으로 데려갔다. 자꾸 눈이 찔리는 듯 해서 빗속을 헤치며 오만 인상을 찡그렸다. 눈에 뭐가 들어갔나… “태준이 너는 남은 애들 정리 하….” “!!!!” 콰당…. 옆구리를 꽉 붙들고 몇 걸음 걷던 몸이 느닷없이 쓰러졌다. 온 몸에 현기증이 나는 듯 불꽃이 튀더니, 머리속이 하얗게 만개 되었다. 여기저기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전해지다가, 아예 사라졌다. “짐승같은 새끼.” “야… 문곤. 사랑과 정의의 용사에게 그게 할 말이냐.” 마취에서 깨자마자 갓 잡은 생선처럼 팔딱대며 아프다고 지랄하기를 한시간. 병원 천정이 겨우 시선에 잡혔다. 또 신경 건드리기 시작하는 문정혁의 피곤해 하는 표정도 포착되었다. 부산 병원에서 수술받고, 서울에 이송됐다가 마취에서 깨는 즉시 눈앞에 알랑댔던 문정혁에게 주먹 날렸다가 옆구리 실밥 터져서 2차 수술 했다. “또 실밥 터지고 싶냐? 아주 아가리도 꼬매야지. 전진.” “왜 왔어.” 아직 살아있다는 기분좋은 느낌에 편하게 물었다. 녀석의 몸이 흠칫 떨리더니 내 시선을 피한다. 남남처럼 살다가, 중학시절부터 배다른 형제라는 거 알고 미친놈처럼 주먹질 한 판 하고, 그뒤로 죽마고우로 지냈던 문정혁. 나는 문정혁에게 미안하다고 말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건 문정혁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이에는 단단한 신뢰 같은 무언가가 있다. 아니, 신뢰 그 이상의 무엇. 그런 우리 둘이 가장 위태로워지는 순간은, 이철호를 쓰러뜨리기 위해 싸울 때가 아니다. '그것들'이라고 불리는 우리들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마음을 품었을 때는, 혜성이 생각할 때다. 어쨌든 지금의 문정혁이 어떤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겠다. 녀석은 나를 부산에 보낸 점을 후회하고 있었다. 눈빛만 봐도 보여요~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욕만 디립다 퍼대는 새끼. 할 말 있을때는 빙빙 돌리다 못해 사람 환장하게 하는 새끼. 지가 미안해지는 순간이 오면 더 화내고 지 맘대로 아무거나 결정해버리는 새끼. 그게 문정혁이다. 우리 공주는 저새끼의 어떤 점이 좋다고 환장할까. 저새끼의 본성을 모르는게 틀림없어. 나랑 비슷한 종족인데 말이야. 나같은 순정파가 더 낫지. 우리 공주… 우리 공주… “야.” “왜 임마.” “혜성이 생각하지 마.” 내가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듯이, 녀석도 마찬가지다. 문정혁은 내 눈빛만 봐도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안다. “왜. 나의 뇌는 내 소유, 니 뇌는 니 소유, 우리는 졸라리 멋진 뇌새끼들.” “씨팔… 헛소리 작작 해라. 전진. 어?!!” 문정혁은 별 시덥지도 않은 잡소리만 몇 번 하다가 나갔다. 아마 녀석은 꽤 놀랐을 것이다. 나도 놀랐다. 이렇게 다쳐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다쳐봤자 살짝 긁히는 수준이었는데, 이번에는… 어쨌든 당분간은 병원 신세 좀 지게 생겼다. 따지고 보면 근 3년만의 휴가다. …이게 휴가라고 한다면 휴가 맞겠지…? “형님.” “어… 태준이냐?” “예. 저기… 심심하실까봐 만화책 좀 가져왔습니다.” 병실 밖에서 지키고 서 있던 태준이놈이 동네 만화책방을 쓸어 왔는지 두툼한 쇼핑백을 쉼없이 날랐다. 녀석이 쓸어온 만화책을 읽다보니 아, 이게 진짜 여름휴가구나- 싶어져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생태파 일도 해결했겠다- 남은 것은 휴식이다. 물론, 내 자리가 조금이라도 공석이 되면 곤란하겠지만… 우선은 만화책을 읽자. 독서를 해야 머리가 튼튼해지지… 입안에 가시가 돋는 그날까지… 만화책을 하나씩 훑다보니 시간이 빨리 갔다. 부산 부두가에서 맞았던 소나기가, 서울 하늘에서도 내리고 있었다. 쏴아아아-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건지 많은 양의 물이, 변기 물 내리는 소리마냥 엄청 짖어대며 쏟아진다. 창밖에 부딪히는 여름의 폭우, 쳐다보기만 해도, 아니,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뻥 뚫리는 것처럼 시원해졌다.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고 얼마 안가서, 이민우가 찾아왔다. 녀석은 들어오자마자 넙죽 인사하고 내 머리맡에 바짝 긴장해서 섰다. 만화책에 고수했던 눈을 슬쩍 올려보니, 이민우는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쭈뼛거렸다. 무슨 할 말이 있는거냐고 묻자, 놈이 대답한다. 내가 하던 일을, 몸이 나을 때까지 당분간 자기에게 맡겨달라는 것이다. 뭐라고? 기가 막혀서 하마터면 주둥아리 날릴 뻔 했다. 실밥 또 터지게스리… “너 임마. 안 돼. 니가 움직이면 청랑단도 가만 안 있을거야. 니 몸이나 잘 건사하고 살아. 게다가 집행유예도 안 끝났잖아.” “저, 시켜주십시오.” 이민우는 뒤지게 터질 것을 각오하고 온 모양이다. 꽉 다문 입술이며 전에 봤던 것보다 하얘진 몰골이 부들부들 떠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문득 그가 측은해졌다. 만화책을 덮으며 말했다. “너 하는 거 봐서.” “…어떻게요?” 그러게. 나는 당분간 꼼짝없이 병원침대신세인데… “그냥. 지금부터 한 몇시간동안 너 하는 거 봐서.” “?” 이민우가 황당하다는 듯 낯을 붉히며 내 바지춤에 손을 댄다. 뭐하는거야? 짜증스럽게 물어보니, 딸딸이 쳐드릴려구요. 라는 미친 대답이 돌아왔다. 만화책을 직각으로 해서 이민우 대가리에 꽂아버렸다. 어디 내 아들놈을 건드려?! 우리 공주도 아직 만지지 못한 곳인데!! 작년에 출소한 이민우는 예정보다 하루 일찍 출소하는 바람에(그 자신도 모르게 날짜가 조정되서) 청랑단에서 잡아갔었다. 그를 구출해낸게 나다. 혈랑단과 청랑단이 맞붙을 뻔 했지만, 나는 교묘히 머리를 써서 사람 하나 안 다치게끔 이민우를 구출했다. 그리고 오늘에 오기까지 여러 사실을 알았다. 이민우가 신혜성의 친척이라는 점. 이민우가 청랑단에 들어가서 따까리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이유. 그의 이유는 나와 닮은 점이 많았다. 신혜성이라는 이름에서 나는 울었고, 당시 술에 취했던 이민우도 울었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던것같다. 다른 새끼들, 태준이마저도 쉽게 배신할 수 있는게 이 세계인데, 적어도 이민우는 배신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신혜성'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는 우리이기에. “혜성이는 잘 지내냐?” 3년 동안 텔레비전에서 봤던 우리 혜성이. 혈랑단 일에 집중하면서, 나또한 이 모습 보여주기 싫어서 혜성이를 만나지 않았다. 만날 시간도 없었지만… 내 질문에 이민우가 자조적인 미소를 짓는다. “예. 잘 지냅니다.” “영화… 언제 개봉해?” 우리 공주가 또 무슨 영화 찍는다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왔던거 봤었는데… 나는 공주 사진 보느라고 신문에 적힌 기삿글은 하나도 못읽었었다. “형님, 모르셨어요?” “뭘?” “형님 어머니도 출연하시잖습니까.” “전서희씨?!!” 강시처럼 튕겨져서 일어날 뻔 했다. 입이 쩍 벌어졌다. 이민우가 그런 나를 보고 킥킥 웃는다. 씨발. “예. 연상의 여자와의 사랑이 영화 주젭니다.” “……씨발… 왜 연상의 여자랑… 잠깐. 우리 엄마랑 공주랑?” “…예… 왜…?” 아… 졸라… “으하하하하하하!!!!” “형님…?” 팔짝 뛰고 디져버리겠네… “내가! 아하하하하! 어이가 없어서!! 큭큭큭큭!! 큭! 미치겠다!! 하하하하하하!!” 우리 혜성공주는 얼마나 황당해 할까? 고양이같은 눈이 동그랗게 커졌을거야. 깜짝 놀라서 떽떽거리는것도 억수로 귀여운데… 우리 혜성공주는 뭘 해도 귀여워서 참 큰일이다… 밤 열한시가 지나자 입안에 가시가 돋는 기분이 들어서 만화책 읽기를 접었다. 우르르쾅! 쏴아아- 밤이 짙어지는 만큼 하늘의 지랄도 짙어져갔다. 서울을 쓸어버리려나보다. 내 옆에 앉아서 핸드폰만 눌러대는 이민우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말동무 없이 입원해 있는건 굉장히 지루하니까. 내가 자기를 쳐다본다는 걸 잽사게 눈치챈 이민우가 바짝 허리를 세운다. 피식- 입가에 미소가 절로 그려진다. “민우야… 우리같은 사람들을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우리…같은 사람들이요? 조폭이죠. 깍두기?” “야. 난 반찬중에 깍두기를 제일 싫어해. 이렇게 잘생기고 잘 빠진 깍두기가 어딨냐?” “그럼… 뭔데요?” “일곱 난장이.” “…예?” “백설공주를 사랑하는 난장이.” “…….” 이민우는 그제야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소주 사올까요?' 한다. 됐다고 손을 휘저으며 나는 멍하니 천정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한글자 한글자 말할 때마다 인어공주의 물거품 처럼 글자들이 공기중에 몸을 터뜨린다. “문정혁은 말이야. 자기가 기사래. 그새끼 동화책도 졸라 썼었잖아. 근데 젤 첨에 써서 대상 받은게 있는데, 거기서 나온 기사가 자긴 줄 알어. 뭐… 내 눈엔 기사인척 하는 왕자인데 말이지.” “아….” “민우야.” “예?” “공주님을 지켜주는 기사가 더 슬펐을까, 아니면 공주님을 처음부터 포기하고 멀리서 바라봤던 난장이가 더 슬펐을까?” “…….” 이런 질문… 맘에 안 든다. 심장이 꽉 오그라들었다가 펼쳐지고, 전기 줄에 확 데인 것처럼 발끝까지 저리고, 시리니까. 이민우의 표정도 나랑 비슷하게 우울한 걸 보니, 녀석도 할 말을 찾지 못했나보다. 나는 일부러 놈이 곤란하게끔 엄포를 놓았다. “대답 안하면 너한테 일 안 준다.” 내 말에 울컥 표정부터 달아오른 녀석. 하지만 이민우의 대답은 좀 의외의 것이었다. “저 키 작다는 말 제일 싫어 합니다. 형님.” “잉? 싫어했었냐?” “예.” 저렇게 비장한 톤으로 대답하면, 내 얘기 중에 키만 염두했다는 것같잖아. “그래서 대답 안한다고?” “예. 형님은 난장이 하세요. 전 딴거 할거예요.” “딴거? 뭐 할건데?”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묻자, 이민우가 자랑스럽게 어깨를 펴며 글자에 힘을 주어 대답한다. “왕자요.” “왕자?” “예. 부사장님이 기사님이면, 세상에 기사는 하나밖에 없는 겁니다.” “!!” “대신 공주님을 사랑하는 이웃나라 왕자님이 많아지는거죠.” “하….” “형님. 왜그러십니까?” “너….” “예? 예.” “…천재다.” “…….” 나도 모르게 멍하니 감탄사를 내뱉자 이민우가 흡족한 낯으로 흐뭇하게 미소짓는다. 화제 돌릴 겸, 슬슬 반응을 보이는 배도 채울 겸, 목소리톤부터 밝게 바꿨다. 디립다 청승맞은건 나랑 안 맞는다. “비가 졸라 많이 온다. 꿀막걸리 생각나네, 쓰벌….” “뭐… 사 올까요?” 민우가 기다렸다는 듯 반가워한다. “굿 아이디어. 종이 줘 봐.” 녀석이 내민 수첩을 북 찢어서 볼펜을 굴리기 시작했다. 내가 뭘 쓰는지 심오하게 지켜보던 이민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심줄 터지는 톤을 내뱉는다. “형님.” “어?” “팥빵하고 생수는 넘칠만큼 아까 사왔어요.” 제일 처음 쓴게 팥빵이었다. 하긴, 아까 녀석이 팥빵 종류별로 다 사왔댔지… 팥빵에 엑스자를 그었다. “꿀막걸리, 곱창… 민봉아. 넌 뭐 먹고 싶냐?” “저요? 형님 드세요. 전 됐습니다.” “야, 니것도 사와. 너 맨날 됐다고 말만 그러고, 먹을때는 꼭 끼잖아. 접때 애들이 짜장면 시킬때 다 봤어. 태준이거 뺏어 먹어서 졸라 싸웠었잖아, 니네.” “제, 제가 언제 그랬다고. 형님 별걸 다 기억하시네요.” “쯧. 내새끼들 일거수 일투족인데 당근 빠따지. 아, 오뎅. 오뎅 사와라.” “오뎅이요?” “어. 고추장이랑 케찹도 사와.” “왜요?” “발라먹게.” 밖에 나가려고 우산을 챙기던 이민우가 한숨을 푹 내쉰다. “…혜성이 식성인데.” 그거 꼭 그렇게 티내야겠어요? 나도 왕자인데. 이민우 표정만 봐도 놈이 무슨 생각하는지 다 들려서, 죄없는 만화책을 와르르 던져버렸다. “빨리 안 가냐, 안?!” 의외로 몸이 빠른 이민우가 만화책을 요리조리 피해서 나가버렸다. 아 씨발… 빨리 몸이 나아야지 이놈이고 저놈이고 조져버릴텐데…. 우리같은 사람들을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일곱 난장이. 세상에 기사는 하나밖에 없는 겁니다. 대신 공주님을 사랑하는 이웃나라 왕자님이 많아지는거죠. …그럼 이제, 현실 속에 감춰진 동화속 이야기는 어떻게 끝날까…? -전진 외전 끝- 문정혁 외전(We will be victorious) 음악 : Uprising/Muse ※뮤즈의 Uprising을 들으면서 읽으셔야 합니다. The paranoia is in bloom, the PR 여론조작을 하려는 망상이 피어나고 있어 The transmissions will resume 전염이 시작될꺼야 [얼마 전 문도천 전 회장의 기일을 맞이하여, 한명그룹 이철호 회장은 사내 방송에 직접 출현하여, 애도의 뜻을 전했다고 합니다. 고인께 충성을 다짐하는 이철호 회장의 모습에 한명의 전 계열사 상무 이상 임원들도 동참했습니다. 화면에 보이는 고인을 추모하는 이철호 회장. 문도천 전 회장의 자리를 언제든 내 줄 준비가 되어 있노라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분에 대하여, 문화방송에서 집중 취재해 보았습니다.] [예. 여기는 한명그룹 주주총회가 열리는 국제회관인데요, 방금 참석했던 한명자동차 배한식 사장과 짧게 인터뷰를 해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인터뷰에 응해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이회장님은 굳이 본인의 충심과 애사심을 공공연하게 밝히고 싶지 않아하시지만, 이정도야 괜찮겠지요.” 예. 외람된 질문이지만, 문도천 전 회장님의 소식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숱한 음모론이 나돌고 있다는 걸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믿어지지 않는 부분이니까요.” 이철호 회장은 이점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지난번에 뵈었을때도 하신 말씀이, 당연히 국민들 사이에서 조작된 음모론이 나돌 수도 있다고 보십니다. 갑작스런 사건에는 늘 음모론이 나도니까요. 사실, 이회장님도 그 음모론을 때때로 믿고 싶어 하십니다.” 예. 그러시군요.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명그룹 총괄 회장직을 역임중인, 이철호 회장은, 서울대를 졸업하자마자 한명건설에 입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최단 기간내 '실력'으로서 고속 승진, 현재는 회장직에 오른 젊은 대표입니다. 내후년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거라는 속설이 나도는 요즘….] 틱- 텔레비전을 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7개월 만에, 제대로 정신차렸다. 이철호 덕분에… 한명그룹 공화국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온갖 비리와 악행을 저질러서 이젠 나라를 잡수시겠다? 그것만은 안되지. 혜성이와 헤어진 뒤에, 사실 나는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었다. 아니, 내가 맡은 건설부 부사장이 할 수 있는 회사 내 최소한의 일만 하면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혜성이에게 말로는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당분간 떨어져있자- 했지만, 나는 잘 지내지 못했다. 괴롭고, 보고싶고, 내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라고 여겨져서…… 그러다가 내 안에 시들어있던 맹수의 눈이 확 뜨였다. 으르렁- 도시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비로소 세상과 마주봤다. 이철호. 놈을 부셔버리고, 빨리 혜성이랑 살아야 하니까. 혜성이와 헤어진지 7개월. 나는 무심코 틀었던 뉴스를 시청하다가 미친놈처럼 허공에 대고 웃었다. 이철호가 바리게이트를 심하게 쳐놨다는 둥,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둥, 그동안 김검사와 전진 앞에서 피곤한 투로 내뱉었던 변명이 하나씩 떠올랐다. 인정하자, 문정혁. 너는 그동안 병신이었어. The paranoia is in bloom, the PR 여론조작을 하려는 망상이 피어나고 있어 The transmissions will resume 전염이 시작될꺼야 They'll try to push drugs 그들은 마약을 투여시킬꺼야 Keep us all dumbed down and hope that 우리의 수준을 낮추고 We will never see the truth around 우리가 진실을 볼 수 없길 기대하지 “일이 많아질거야.” “좆까고 있네. 너 그 소리 한 게 벌써 몇개월이거든, 문곤?” 전진은 7개월 내내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녀석은 단순한 만큼 저돌적으로 부딪히며 살았다. 머리쓰다가 쉽게 지치고 포기했던 나와는 달랐다. 전진은, 전국에 흩어져 있던 혈랑단 따까리들을 서울과 경기도에 집결시킨것도 모자라, 철저히 교육시켰으니까.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전진같은 새끼를 아들로 두셨을까. 아니, 전진과 나같은 미친놈들을. “야, 전진. 너 YT산업 알지.” “이름은 들어봤어.” “YT산업하고 한명그룹하고 3년째 질질 끌고 있는 계약건 하나 있는거 아냐?”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아마, 이철호가 일부러 눈감아 주려는게 틀림없는 회사들이 몇 개 있는데… YT산업도 포함되어 있고, 좀 된다.” “아, 그러셔?” 역시 전진 개새끼는 한 번에 말을 못 알아듣는다. 아니, 우리집에 있는 술만 거덜내고 있다. 아마 내가 지금까지 지냈던 것처럼, 별다른 수확 없이 지냈던 것처럼, 오늘도 술만 디립다 퍼마시자는 건 줄 아나보다. 그게 아니거든. 방에 들어가서 화이트 보드를 끌고 왔다. 전진! 하고 불러봤자 쳐다도 안보는 개새끼. 지우개를 던져서 놈의 뒤통수에 맞췄다. “아!!! 뭐야아!!!” “칠판 봐.” “왜!!! 나 어제도 창원에서 죽쒔어!!!!” “보라고 이새꺄!!!!” “아 씨팔!!! 봤다!!! 왜!!!!” 짐승같은 새끼… 화이트보드에, 까만색 펜으로 여러 개의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 붉은색 펜으로 YT산업 이라고 썼다. 전진은 아직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반쯤 감고 보는 척 마는 척 한다. 나는 침착하게 YT산업의 대가리 라고 쓰고, 엑스자를 그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명을 물먹이려면, 공존 관계로 눈감아주는 기업들을 하나씩 치는 거야.” “!!!!” “왜냐면, 나도 한명그룹 임원이니까.” “설마… 너…….” “맞아. 이철호가 했던 짓 어떡하면 똑같이 되돌려 줄 수 있을까- 고민하느라 거의 1년 보냈는데, 말 그대로 똑같이 갚아주면 돼.” 전진의 눈빛이 달라졌다. 나처럼. Another promise, another scene, another 엉터리 계약, 엉터리같은 광경, 말되 안되는 A package not to keep us trapped in greed 포장으로는 우리를 탐욕의 늪에 빠지게 하지 못하지 With all the green belts wrapped around our minds 그럴듯한 이유로 우리의 마음을 가두어 버리고 있고 and endless red tape to keep the truth confined 그리고 끝없는 관료주의는 진실을 가두어 버릴꺼야 전진과 나의 짓을 이철호가 눈치 챈 것은 올해 초부터이다. 혜성이와 헤어진지 3년이나 되어서야, 이철호가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다시 말해, 늘 나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바리게이트를 쳤던 이철호가, 자기가 나서서 나와 마주칠 기회를 많이 만들었다. 일이 제대로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문정혁 부사장. 잘 지내고 있나?” “예. 덕분에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이 넘어서야, 나는 회사 복도에서 여러 임원이 보는 앞에서 이철호와 당당하게 악수했다. 그는 나를 노려보았고, 나 또한 짧은 순간 노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지난 번에 LK 수주 건은 잘 마무리 되었나?” “예.” “…….”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회장님.” 앞으로를……. They will not force us 그들은 우리에게 권력을 휘두를수 없어! They will stop degrading us 그들은 우리를 무시하지 못하지! They will not control us 그들은 우리를 지배할 수 없어! We will be victorious 우리가 승자가 된다! 이선호가 어떤 마음으로 사장직에서 활동하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이선호가 전진을 사랑하다가 미쳤다는 것, 그것만 인지할 뿐이다. 이선호가 내 윗대가리로 왔을때, 사실 나는 떨었었다. 온갖 불안함이 영혼까지 휩쓸었었다. 그래서 혜성이에게 헤어지자고 했었다. 내 일도 제대로 안 풀리는데, 이와중에 이철호 판박이인 이선호가 내 머리에 온다니? 내가 미치기 전에 혜성이를 풀어주자. 딱 그 마음이었으나…… 이선호는 사업에 소질이 없었다. 아직 이선호 본인은 잘 모르는 눈치였지만, 자기 아버지 힘에 무조건 기대서, 경영수업을 받았다손 쳐도, 이선호는 사업가적 기질이 전혀 없었다. 만약 내가 이선호였다면, 적어도 자기 바로 밑에 있는 놈이 관계사의 주식을 헐값에 매각하고, 경영권을 빠른 시간안에 취득하는 나의 행태를, 바로 잡았을테니. 만약 내게 실수가 있다면, 초기에 이선호를 이철호와 똑같은 레벨로 봤다는 것이다. Interchanging mind-control come let the 마음을 추스려서 서로 교감하며 Revolution take its toll if you could 혁명을 알리자! Flick the switch and open your third eye, you'd see that 스위치를 누르고 마음의 문을 열면 혁명을 볼 수 있을 꺼야 We should never be afraid to die 우리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아 그러니까 혜성아. 조금만 기다려줘. Rise up and take the power back, it's time that 들고 일어나 우리의 힘을 다시 찾아오자! The fat cats had a heart attack, you know that 부패한 녀석들의 심장을 따버릴때다! Their time is coming to and end, we have to 이제 끝장을 낼때야! Unify and watch our flag ascend 우리는 하나가 되고 우리의 깃발이 오르는 것을 보자! 거의 다 되었어. 그러니까 혜성아. 조금만 기다려 줘. They will not force us 그들은 우리에게 권력을 휘두를수 없어! They will stop degrading us 그들은 우리를 무시하지 못하지! They will not control us 그들은 우리를 지배할 수 없어! We will be victorious 우리가 승자가 된다! (문정혁 외전 끝) 이제는 미안하다는 말도 안나온다. “삼촌은 바보 멍청이 똥개!!! 해삼탱이야!!!” “피자 사왔다? 피자 먹자, 순돌아?” “됐어!! 내 친구들 다 데려왔었는데!! 삼촌 거지 똥개야!!” “삼촌이 순돌이 주려고 선물 사왔어. 대빵 많이~ 백화점 쓸어왔다니까. 안 뜯어볼거야?” “내가 애야?!! 다 필요없어!! 삼촌 거짓말쟁이야!!” 내 앞에서 유독 어리광이 심한 우리 순돌이. 허둥지둥 압구정 고모네 집에 들어온 시각은 밤 열두시를 훌쩍 넘은 새벽 한시였다. 큰일났다, 큰일났다, 초조하게 식은땀 흘리면서 들어왔건만 순돌이는 입이 뿔룩 튀어나온 채로 자지도 않고 나를 기다렸다. 그리고 보자마자 다다다다 하면서 울어버렸다. 또 놓쳤다. 우리 순돌이 생일파티. 아홉살 생일파티에는 무조건 참석하겠다고 예전부터 약속했었는데… “순돌이 네이놈!! 삼촌이 아까 미안하다고 전화도 해줬고, 할머니가 설명도 해줬는데, 자꾸 떼쓸래?” 보다못해 안방에 있던 고모가 나오셨다. 내가 몇분째 현관에 서서 신발도 못벗는게 속이 상하셨나보다. 원래대로라면 고모도 나한테 한소리 하셔야 되는데 웬일이지? “할머니!! 나 오늘 민지도 데려왔었는데, 흐아아앙-!!” 꿀떡 꿀떡 분한 숨소리를 내고 어깨를 오르락 내리락, 씩씩대던 순돌이가 기어이 빽 울어버렸다. “순돌이 너 얼른 가서 자!! 삼촌 보고싶다고 했으면서, 왜 보자마자 화만 내!! 삼촌이 미안하다잖아… 그러니까 얼른 가서 씻고 자자.” “순돌아. 삼촌이 진짜 잘못했어. 갑자기 스케줄이 두 개나 잡혔는데, 빼도 박도 못하는 거라서….” “애한테 일 얘기 하면서 달래봤자, 서럽기밖에 더하겠냐. 혜성이 너도 그만하고 안에 들어와라. 순돌이 얼른 가서 씻어!!” “흐으윽, 아흑, 아흑, 아흐윽.” “쿡….”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순돌이 우는게 어째 갓난 애기처럼 보여서… 내가 쿡 하고 신발 벗다가 웃는 소리에, 자극을 받은 순돌이는 잉잉 대며 방 안에 들어가버렸다. 고모가 혀를 차며 방에 들어간 순돌이 팔목을 꽉 잡고 질질 끌어 나온다. 왜에!! 아까 씼었어!! 땍땍거리는 순돌이를 억지로 욕실에 밀어넣은 고모가 힘겨운 숨을 내쉰다. “많이 힘드시죠.” “아냐. 애가 섭섭할 만도 했지. 혜성이 너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은 진짜 못 빠지는 거였냐?” “예. 죄송해요.” 몇마디 덧붙이려고 했는데, 고모가 손사래를 치신다. “됐다. 볼이 해쓱한게 아주 못봐주겠네… 좀 쉬엄쉬엄 할 수는 없는거라니?” “바쁜게 좋아요.” “하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혜성이 너 갑자기 스케줄이 다 끊겨서 빈둥거리는거 보기에도 안쓰럽드라. 밥은 먹었어? 고모가 뭐 좀 간단한거 해 줄까?” “아녜요… 아, 순돌이 생일파티때 먹고 남은 케익 있으면 그거나 조금 주세요.” “그럴래? 잠깐만 기다려.” “내 케익 주지 마!!!” 욕실 문을 살짝 열어놓고 세숫물과 눈싸움 중이던 순돌이가 꽥 소리지른다. 고모가 욕실 문을 쾅!! 닫고 무시하자 욕실 안에서 빼액-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욕실 앞 복도에 있는 대왕 쿠션에 주저앉아서 순돌이 기다렸다. 과연, 30초도 안 지나서 문이 빼꼼 열리더니 왕방울만한 우리 순돌이 눈동자 등장. 흐윽, 흐윽, 어깨를 움찔거리면서 우는 순돌이에게 나름 멋지게 윙크해줬다. “다 울었어?” “나 세수.” “알았어.” 벌떡 일어나자 순돌이가 히… 하고 웃는다. 귀여운 녀석. 볼을 살짝 꼬집어줬더니 아프다고 징징징. 귀여워서 엉덩이 토닥토닥 해줬더니 애 취급 좀 그만하라면서 왈왈왈. “삼촌 먼저 씼어도 돼?” “엉.” 순돌이는 나랑 씼는걸 좋아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씻겨주는 걸 좋아한다. 일곱살때까지는 그러려니 했는데, 아홉살이 되서도 응석이 심한 순돌이를 보고, 고모는 애 버릇 나빠진다면서 걱정하신다. 아마 애기때부터 내가 많이 돌봐줘서, 순돌이는 내게 편안함을 느끼나보다. 사실 나도 좋다. 누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느낌이. 어푸어푸 씼는데 순돌이가 수건을 건네주며 황홀하다는 투로 말한다. “삼촌은 씼는것도 되게 멋지고 예쁘다?” “그래?” “엉!! 평소엔 말도 없는데, 삼촌 맨날 화난 사람처럼 이런 표정이잖아.” “내가?” 내 옆에 찰싹 붙어 선 순돌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양쪽 눈을 검지로 잡아당기며, 그게 나라고 가리킨다. 저게 뭐야… 족발 먹다 체한 가재미같이… 내가 저렇다고? “난 그래도 삼촌이 좋아~ 나 막 이뻐해주니깐~ 히히히히.” 내 허리를 와락 끌어안고 배부분에 뺨을 푹 묻은 순돌이. 그냥 내가 온게 좋았는지 연신 싱글벙글이다. 언제 울었냐는 듯 금방 나 좋다고 헤헤거리는 녀석. …그러니까 더 미안해지잖아… “삼촌.” “어?” “나 민지 또 데려올건데, 그땐 꼭 집에 와야돼?” “알았어. 눈 감아. 물 들어가잖아.” 순돌이 목에 타올 둘러주고, 세수부터 시켰다. 가끔, 순돌이를 돌봐주고, 순돌이가 떼부리는거 받아주다 보면 나도 모르게 멍해질때가 있다. 지금처럼… “삼촌!! 아!! 삼촌!!! 삼초온!!!” “…….” “삼촌!!!” “어? 어….” 얼굴에 비누 거품 묻혀놓고 멍하니 딴생각 하던 나를 기다리다가, 순돌이가 또 소리쳤다. 밖에서는 고모가 '삼촌 부려먹지 말랬지!!!' 하면서 소리치고.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치솟는 소음에, 정신차리고 순돌이 얼굴 씻겨줬다. 이것도 가끔이니까 해 주지… “삼촌. 맛있어?” “응. 맛있다. 아, 삼촌도 떡케익 사왔는데… 순돌아, 먹을래?” “으응. 싫어.” 다 씻고 나와서 딸기 케익을 반쯤 먹는데, 순돌이는 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서 이러쿵 저러쿵 떠들고 있었다. 순돌이가 하는 말을 하나도 못들었네… 그러고보니 뭐라고 열심히 떠들었나본데… 늘 이런식이다. 가끔 멍-해지면, 쉽게 정신차릴 수가 없다. 시원한 홍차 한 잔을 타 온 고모가 테이블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 나를 안쓰럽게 본다. “혜성이 너도 그렇고… 순돌이도 그렇고… 뭘 먹여야 살이 찔까 모르겠네. 민형이 살 좀 떼 줬으면 좋겠는데.” 시골 내려가 뱀집 들려서 두어마리 사와서 과줄까? 하는 고모… 순돌이와 나는 동시에 윽,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민형이 형은 자요?” “아니. 뭔 게임방 차린다고 방에 틀어박혀서 안 나오는데, 민형아-!!” “고모!! 됐어요. 민형이 형은 제가 나중에 볼게요.” “어휴, 책상에 맨날 붙어있어서 살만 디룩디룩 찌고, 민형이 저 썅놈의 새끼 하여간 뭐가 되려고.” “…….” 형이 살이 더 쪘나보다. 딱 10년 전까지만 해도, 민형이 형은 고모네 집의 든든한 기대주였다. 당시 서울대 법학과에 차석으로 들어가서 고모는 고향집에 떡도 돌렸으니까. 하지만, 그런 민형이 형이 벌써 몇년째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한다. 요즘에는 피시방을 창업할 계획인지 방에서 안 나온다고 한다. “그래도 쟤가 뭘 하려고 하면, 악착같이 잘 해 내는 애니까… 지 애비처럼….” “맞아요! 민형이 형, 사업하면 진짜 잘 할 거예요.” “그치? 아, 순돌아, 얼른 들어가서 자. 아니면, 저기 삼촌이 사 온 떡케익 한 입 줄까?” “으으응. 싫어….” 순돌이는 어느새 내 허벅지에 머리 비고 잠들었다. 고모가 자기 팔목 잡고 끌어당길까봐 양 팔을 내 다리 밑에 쑤셔 넣은채… 덕분에 나만 순돌이 주먹 깔고 앉은 꼴 됐다. 애기때만 해도 또래들보다 토실토실해서 이름처럼 동글동글했던 순돌이는, 작년부터 살이 쏙 빠지면서 또래들과 체형이 비슷해지더니, 지금은… 좀 말랐다. 많이… “작년부터 애가 키가 쭉 자라지 않든? 그래서 살이 죄다 키로 가나봐. 저맘때 애들 평균키라곤 하는데, 애가 워낙 애기때 살이 많이 쪘어서, 지금은 말라 보여.” “그러네요… 아, 민지는 누구예요? 순돌이가 얼마 전부터 민지 민지, 저만 보면 민지 타령하던데.” 내 얘기에 고모는 별안간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못살겠다며 나를 치면서 웃으셨다. “이 쪼매난 게 글쎄, 아이고… 꼴에 눈은 있다고, 지네 반에서 젤 인기 많은 애를 찍었다더라! 하하하!” “그럼 우리 순돌이 여자친구예요?” “아니. 나도 아까 봤는데, 순돌이 맘을 민지가 잘 안 받아주나봐. 민지는 너 보러 하는 수 없이 순돌이 생일파티에 와 줬다고 말하던데? 아주, 맹랑한 애야. 호호호호.” “아아~” 그래서 그렇게 목을 놓아 울었던거군. 잘 보여야 되는 여자애 앞에서 꼴사나워졌다 이거지…? 다른때는 몇 번 퉁퉁거리고 끝났을 순돌이의 투정이, 오늘은 어째 좀 심하다 싶었다. “참, 혜성아.” “예?” 손님방에 들어가서 막 쉬려는데, 고모가 부른다. 문고리 돌리던 자세 그대로 방향만 틀었다. 고모가 길게 하품하시면서 느릿느릿 설명하신다. “아까 니앞으로 뭐 왔드라? 니네 팬들은 여기 주소 모른다더니, 요즘 인터넷이 발달했네 어쩌네 하더만… 용케 찾아냈나봐.” “선물이 고모집 앞으로 왔어요?” “그래. 얼른 들어가 봐. 민우 이자식은 오늘도 늦네.” “예. 주무세요.” 민우가 오늘 집에 온다고 했었구나… 고모에게 어색하게 웃어주고 방에 들어갔다. 불을 켜자마자 보이는 건… “!!” 요즘 시대에도 저런 선물을 주는 팬이 있나? 그것 참 신기하네. 왕 리본으로 묶인 대왕 별 모양 유리병. 그 안에 천마리쯤, 아니 그 이상 되어 보이는 종이학이 나를 반겨주었다. 알록달록 파스텔톤의 종이학. 이런 선물은 참 오랜만이다. 보통 팬들이 준 종이학이나 거북이알은 목동 집 주소로 배달이 될 텐데… 아니, 그런 걸 떠나서 이렇게 무식하게 큰 유리병은 처음이었다. 넓은 방 중간을 지 방인 양 으스대며 앉아있는 종이학 병. 병을 쓱쓱 쓰다듬고, 쉬어 주려는데 문자가 왔다. 설마, 이시간에 또 스케줄 있다는 건 아니겠지? 매니저형이면 문자 못 본 척 해야지… 맘 먹었다. 하긴, 스케줄 문제면 문자가 아니라 전화를 했을 것이다. [집이야?] 두근… 매니저 형이 아니다. 서둘러 얇은 가디건을 꺼내 입었다. [나 여기 어디게.] 어디긴 어디야. 내가 설마 너 있는데 모를까봐? [지금부터 초 센다. 1초. 2초. 3초….] 문자 한 번 기가 막히게 보낸다. 진짜. 거실의 벽시계가 새벽 두시 반을 알렸다. 나는 뒷발꿈치 올리고 살금대면서 현관까지 갔다가, 문자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아파트 1층 현관 밖에 나갔을 때쯤 문자가 또 왔다. [빨리 와] 새벽 두시 반의 아파트 단지 내 미니 공원. 상아색 가로등과 동글동글한 벤치가 전부인 미니 숲.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맛깔스런 바람이 시원하게 이마에 닿았다. 그저께 비가 와서 그런지 날씨가 후덥지근 하지는 않았다. 흰 벤치 행렬 끝에 외로운 그림자 하나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선형 가로등불에 밀려난 긴 그림자가 내 발끝에 닿았다. 인기척을 느낀 녀석이 퍼뜩 고개를 들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이민우.” “…….” 팔짱 끼고 종종걸음으로 빨리 걷는 나를 보고, 이민우가 피식 웃는다. “왔으면 집으로 오지 않고, 왜?” “그냥.” 내가 압구정 집에 오는 날에는 귀신같이 알아내고, 반드시 밖으로 불러내는 이민우. 처음에는 귀찮게 부르지 말고 집에 오라고 승질내던 나였지만, 지금은 그의 행동방식에 익숙해졌다. 작년 중반에 출소한 이민우. 수감되기 전까지 지녔던 위태로운 분위기가 많이 가셨다. 오히려 편하고 안정적으로 보인다. 아니, 그를 보는 내 시선이 편하게 바뀐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거기 있다가 왔어?” “어.” 민우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우리 둘은 서로의 일상을 물으며 작은 공원 길가를 산책했다. 내가 '거기'라고 칭하는 곳이 어디인지, 나도 민우도 알고 있다. “더워?” “괜찮아.” 끝도 없이 같은 길만 뱅뱅 돌다 보니 약간의 구슬땀이 송송 맺혔다. 나보다 먼저 내 상태를 눈치 챈 이민우가 피식 웃으며 동그란 1인용 흰색 벤치에 앉혔다. “땀 좀 봐. 예전에는 몰랐는데, 혜성이 너는 손 잡고 있으면 땀이 잘 나네.” “…….” 이민우는 내 손을 종종 잡는다. 그의 스킨쉽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진즉부터 포기한 색을 띠고 있었다. 불현듯 내 입술에 입맞춤을 하거나, 술마시다가 내 몸을 더듬을 때 마저, 이민우는 사랑하는 사람의 스킨십이 아니라, 포기한 자의 스킨십임을 드러냈다. 적당한 선에서 몸을 뗀다. 지금처럼… 앉을때도 꼭 1인용 공원 벤치에 떨어져서 앉기. 손 잡은 다음에는, 내 팔목만 살짝 잡고, 땀에 젖은 내 손바닥에 손부채질 해주기. 손을 잡았으니 다음에는 포옹하고 달콤한 말 속삭이기- 이게 없다. 아니, 달콤한 말을 속삭인 들, 그 안에 숨겨진 '포기'의 숨결이 내 피부에 와닿는다. 마치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의 난장이처럼. 나는 이민우가 하는 대로 내버려둔다. 굳이 말리지 않는다. 어쩌면, 지난 3년간 '사랑'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내가 말이 없어졌다는 것, 잘 웃지 않는다는 것, 감정적인 표현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이민우도 알고, 나도 알고, 사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안다. 내 손바닥에 시원한 바람을 불어주던 이민우가 조용히 다리를 꼬아 앉아서 담배를 문다. “옛날에는 귀여웠는데… 요즘에는 애늙은이 신혜성이네.” “…….” “너. 다다다다 거리면서 반응하는게 어울려. 이렇게… 말 없이 방어적인 표정 짓는거, 하나도 안 어울린다고.” “그런 적 없어.”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더니 민우가 혀를 쯧쯧 찬다. “되게 차가워졌어.” “…….” “혜성아.” “?” “나 일하는데… 한 번 와볼래?” “뭐? 민우 너 일하는데라면… 그… 혈랑단…?” “응.” “…….”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나보다. 민우가 입에 담배를 문 상태에서 양 팔을 쭉 뻗었다. 그리고 주름진 내 미간을 양 손 검지로 꾹꾹 누른다. 푸른 담배 연기 사이로 비치는 이민우의 안면…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노련해지는 눈매를 자랑했다. 담배 연기 때문에 반쯤 감은 눈동자. 각진 턱 끝에 뾰족하게 돋은 수염. 허스키해진 목소리와 잘 어울리는 짙은 눈썹과 붉은 입술. 긴 음영을 드리우는 속눈썹까지 참 자세히 보인다. 양복 겉옷은 어디다 벗어놓은건지, 반쯤 땀에 젖은 이민우의 흰 셔츠가 오늘따라 시선에 밟힌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혈랑단에 내가 왜 가냐. 이민우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안다는 표정으로 긴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그렇게 나쁘지 않아. 일반 회사하고 똑같이 생겼어.” “왜 오라고 하는데?” “부장님이 너 보고싶대.” “부장님이 누군데?” “전진 부장님.” “!!” 심장의 혈관을 터뜨리는 소리. 그 소리가 너무 뜻밖이라서 무조건 귀를 막고 싶은, 참 오랜만의 심장의 비명. “갈래?” “…안 갈래.” …전진을 보게 되면, 또 내 인생은 복잡한 사슬에 엉키게 될 거라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전진과 이선호. 이철호와 문정혁. 모든 것을 알기가 겁이 났다. 지금처럼 없는 척, 사라진 척, 내 일에 충실하게 내가 빚은 삶이 전부인 양 그렇게 살고 싶다. “왜… 왜 갑자기 내가 보고싶대? 문정혁과 내가 헤어지면서, 사실 전진이랑도 인연은 끝난거였어. 나. 나….” “혜성아.” “…….” “괜찮아.” “…….” 민우는 내게 당장 안 가도 괜찮다며 한 번 웃어주고, 두 번 짧게 입을 맞췄다. 내 안에 죽여놨던 외로움을, 불안정한 감정 하나를, 그가 달래준다. 이래서 나는 그의 '세상에 허락되지 않은' 스킨십을 거부할 수가 없다.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달래듯 조심스레 빨아들이던 이민우가 입술 전체를 기분좋게 눌러준다. 사랑한다는 고백 없이, 푸른 달 아래, 아무도 없을때만 행해지는 이민우만의 의식. 그의 입김은 굉장히 달콤하면서 쓰라리다. 그의 심장처럼. “들어가.” “이민우. 너는? 안 들어가?” “너 보고싶어서 잠깐 들른 거였어.” “고모 기다릴텐데….” 함께 집에 들어가는 줄 알았던 이민우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았다. 내 손을 꼭 잡고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풀어 줄 뿐이었다. 언제나 나를 보면 희미하게 미소짓는데, 요즘은 유난히 슬퍼보인다. 가끔, 이민우가 내 손을 잡고 있거나 저런 표정을 보여주면, 울고 싶어진다. “혜성아!” “?” 엘리베이터가 닫히는가 싶어서 현관문에 비밀번호 누르다가, 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뒤돌아섰다. 휙~ 뭔가가 날아와서 반사적으로 팔을 위로 올려서 낚아챘다. “앤돌핀 섭취 하라고.” “앤돌핀?” “간다~!” “…….” 내가 조용해진 대신, 내 앞에서의 이민우가 활발해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손바닥을 펴 보니, 이민우가 던진 앤돌핀, 딸기맛 미니쉘이 맛깔스런 포장지에 쌓여 있었다. 아, 그걸 못 물어봤네. 종이학을 네가 보낸 거냐고… 팟. 조명이 켜지고, 큐사인이 들어왔다. 리포터가 숨을 참고 싱긋 웃으며 질문을 시작했다. “네~ 오늘은, 이번주 500만 관객 돌파를 목전에 둔 두 주인공을 모셨습니다.” 커다란 영화 포스터 앞에 나란히 앉은 전서희와 나는 익숙하게 고개짓 했다. 시청자들에게 인사해 달라는 리포터의 요구에 따라 적당한 말을 내뱉었다. 벌써 오늘만 해도 세 번째 인터뷰다. 세 달간 나와 영화촬영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짓-키스, 포옹, 섹스-을 했던 전서희씨. 그녀는 전혀 부끄러움 없이 연하의 남자를 사랑했다. 나또한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던 그녀와의 애정씬을 소화해 냈었다. 전서희는 전지현이다 전서희는 전지현이다- 라고 자기 주문 외우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캐릭터에 몰입도가 심해져서, 내가 진짜 전서희를 사랑하는게 아닐까? 착각했을 정도였다. 흥행 대표 여배우 전서희와, 데뷔 전부터 원석으로 소문난 나. 두 배우 투톱으로 찍은 영화 'True, Pure Love'는 크랭크 인 당시부터 전문가들이 흥행을 점쳤었다. “머리를 30cm이상 잘랐는데, 서운하거나 속상하지는 않았나요?” 리포터의 질문에 전서희는 엷게 웃었다. 투명한 진주빛 화장, 가벼워보이는 흰색 주름치마와, 몇년간 고수했던 긴 머리가 댕강 잘린 단발머리.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 흡사 이자벨 아자니를 연상시키는 그녀, 전서희. 그녀는 지나치게 아름답고 우아했다. “아뇨. 한번쯤 머리카락을 잘라보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가 아주 좋았어요. 다행히 주변 사람들도 잘 어울린다고 해줬구요.” “네. 정말 잘 어울려요. 벌써 영화를 본 여자 관객들이 헤어샵에 가서 전서희씨 스타일대로 해달라고 한다던데요? 또 한 번 우리나라에 단발머리가 유행할거라던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머… 정말 그런 소리가 있나요? 호호호. 그렇다면 감사하죠.” 영화 속에서 그녀는, 연하 남자의 사랑을 거부하고, 또 거부하다가, 막판에는 자신도 모르게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스스로의 그런 마음을 용서할 수 없어서, 그녀는 스스로 머리칼을 자르는 씬이 나온다. 그 장면은 굉장히 느리고, 슬프다. 덜덜 떨면서 우는 그녀가 아끼던 머리카락을 잘랐을때, 촬영을 지켜보던 나도 울었을 정도니까. 그래. 촬영 내내 나는, 캐릭터에 몰입되서 그녀를 사랑했었다. “신혜성씨는 어떠세요? 실제로 이런 사랑의 기회가 온다면, 하실 생각인가요?” “예?” 아차. 잠깐 딴생각 하는 바람에 이전 질문과 답을 놓쳤다. 전서희가 먼저 대답하고 내게 같은 것을 묻는 듯 한데… 그녀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실제로도 이런 사랑을 할거예요. 이랬을까? 위험한 사랑을? 나는 천천히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라면, 아무리 위험한 사랑이라고 한 들, 당연히 해 봐야죠.” 리포터가 감탄하며 손뼉 치면서 좋아한다. “역시~! 영화같은 사랑을 하실 것 같은 두 분은, 같은 작품을 찍으셔서 그런지 대답도 똑같네요!” 전서희도 나와 똑같은 대답을 했구나. 저렇게 차가워 보이는 인상인데, 그녀의 일상은 지루하고 답답할 만큼 재미없어 보이는데… 실제로 함께 영화 촬영 할때의 전서희는 스탭들한테도 필요한 말만 하고, 사적으로 친해질 틈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었는데… …라고 생각하던 나는 온 몸이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방금 생각했던 전서희의 일상은, 요즘의 내 일상과 너무 닮아 있었다는게 인식되어서였다. 전서희의 전체가 메마른 인조꽃처럼 느껴졌듯, 남들이 보는 신혜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젊은 시절, 문도천과 불같은 사랑에 빠져서 한 달만에 전진을 가졌던 전서희. 십대 시절, 전진과 사랑에 빠져서 걷잡을 수 없는 회오리에 말려들었던 나. 그녀와 나는 닮은 데가 너무 많았다. 둘 다 위험한 사랑을 불같이 경험했다는, 지워지지 않을 상흔이 영혼에 발라져 있다. 처절하게 으깨져서 가루가 되어버린 심장까지도. 사랑의 실패자에게 주어지는 메마른 동공. 우리는 그 동공에 억지 활력을 불어넣고 스크린에서 키스하고, 사랑하고, 사랑에 따른 고통을 애절하게 호소했었다.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스크린 매거진'과 인터뷰 후 15분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전서희와 나, 둘 다에게. 그녀와 나는 하루종일 커플로서 영화를 홍보하기 때문에 스케줄이 같다. 앞으로 두 번 더 인터뷰를 하면 오늘 하루 스케줄은 끝난다. “혜성아.” “?” 대기실의 에어컨 앞에 서서 조용히 바람을 쐬는데, 매니저 형이 들어왔다. 그리고, 매니저 형 뒤에 따라 들어온 사람은, 이민우였다. “이민우. 너 여기까지 웬일이야?” 국제 회관 2층. 한명 그룹 계열의 어떤 회사에서 투자 자금이 많이 들어왔던 관계로, 인터뷰 장소도 한명 그룹의 국제 회관이었다. 그래서 이민우가 온 걸까. 나는 어리둥절해 하며 그를 보았다. “배달하러 왔어.” “배달? 나 지금 또 빨리 가 봐야 되는데….” “이것만 가져가.” 짙은 회색 양복을 입고 온 이민우. 그가 푹신한 무언가를 무작정 내 품에 덥석 안겼다. “이게 뭐야? …포장 참….” “어? 아… 포장? 직접 한 거라서 그래.” 그가 내게 준 것은 은색 포장지로 포장된 커다란 선물이었다. 조금만 눌러도 푹 들어가는걸 보니 쿠션인 듯했다. 그건 그렇다치고, 포장 상태가 엉망이다. 지문 흔적이 요란한 스카치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여져 있었으니까. …강아지가 포장해도 이것보단 잘 하겠어… “니가 했어?” “아니. 선물 주라는 사람이 직접.” “?” 팬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심드렁한 낯으로 포장지를 뜯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 나타나는 노란색 별 모양 쿠션. “부장님이 전해주래.” “…도로 가져가.” 불에 데인 듯 놀라며 쿠션을 던졌다. 잠깐이지만 내 심장이 바닥에서부터 천정까지 뛰었다. 참 오랜만의 감각이었다. 내가 쿠션을 쳐다보지도 않자, 이민우가 떨어진 쿠션을 들고 탁탁 털었다. “3년 동안 부장님이 너 피하고 싶어서 피한게 아니었어.” “알게 뭐야. 필요 없어. 전진하고… 아니, 너네 부장님하고 나하고는 오래전에 끝난 사이야.” 내 동공은 미친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이런 꼴 들키고 싶지 않다. 재빨리 가슴에 달려있던 선글라스를 썼다. 이민우는 함께 준비해온 쇼핑백에 별모양 쿠션과 포장지를 넣고, 내 가방과 옷들 옆에 얌전히 내려놨다. “부사장님, 아니, 문정혁 얼굴 안 보려는 건 이해하지만, 부장님한테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혜성아.” “…….” “안 그래?” 이민우의 차분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내 입에서는 나조차 소름끼칠만치 차가운 어절이 불쑥 튀어나왔다. “둘 다 똑같애.”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매니저 형이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보다가, 슬슬 인터뷰 하러 가자고 귓속말을 건넸다. 나는 이민우를 본 척도 안하고 등을 돌렸다. “혜성아.” “…….” 두근. 두근. 두근. 내색하진 않았지만 급격히 좁아졌던 내 동공만치 내 심장은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3년만에 자꾸 내 앞에 나타나려는 '그것들'에게. 전진을 보게 되면, 문정혁도 어떻게든 보게 될 것이다. 싫다. 내 자존심이 '그것들'을 삶에 개입시키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기대하는 게 좋을거야.” “?” 크리스마스?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살짝 민우를 돌아봤다. 그는 근사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이제껏 보여준 적 없는 차가운 줄을 눈가에 매달았다. “조만간에… 이철호가 검거될거거든.” “!!!” 선글라스를 써서 다행이었다. 격랑에 이는 내 동공을 들키지 않았을테니. “이선호랑 이철호는 아마….” “이민우.” “…….” “나랑 상관없는 얘기, 하지 마. 듣고 싶지 않아.” 주먹을 꽉 쥐고 나갔다. 온 몸에 가시같은 소름이 돋아났다. 이철호와 이선호. 둘의 이름만 들어도 시신경이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대기실 밖에 나가자마자 나는 한 번 더 철렁 하고 내려앉는 심장을 느꼈다. “우연히 엿듣게 되었어요.” “…….” 언제부터 있었던건지, 전서희가 대기실 앞에서 조용히 서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짧게 고개짓만 하고, 인터뷰가 시작될 장소로 빠르게 이동했다. 또각. 또각. 또각. 내 뒤에서 따라오는 전서희의 규칙적인 구둣발소리… “우리 진이는… 내 자식이지만, 내 심장만 닮았어요.” “…일 얘기만 하죠. 선배님.” 아무도 없는 좁은 복도. 문 하나만 열면 확 트인 실내가 나오고, 스탭들과 취재 리포터가 전서희와 나를 반겨줄 것이다. 나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휙 돌아섰다. 일 얘기만 하자는 나의 가시돋힌 제안에도 불구하고, 전서희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살짝 입꼬리만 올렸을 뿐이다. “많이 변했네요, 신혜성씨.” “그런가요.” “처음 봤을때와 확실히 달라요. 하지만, 달라지는게 좋은 것만은 아닌데….” 후~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 담배가 피우고 싶다. 나와 비슷하게 딱딱한 사람이지만, 이상하게도 전서희 앞에서는 솔직하게 몇마디를 꺼낼 수 있을 것같다. “가슴이 점점 딱딱해지는 것같아요. 그게 달라진거라면, 달라진거겠죠.”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특유의 나긋나긋한 톤으로 무섭게 찔렀다. “지금이 고비겠네요.” “…고비…요?” “그래요. 고비. 그 감정이 앞으로 더 딱딱해지면, 나처럼 되는 거예요. 평생 사랑이라는 거 모르고, 세상 모든 일에 평행선에 떨어져 서서 대처하는, 재미없는 사람.” “…….” “고비라는 건, 어떻게 보면 기회예요. 신혜성씨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감정기 없는 재미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탁- 문을 열었다. 환한 조명 쪽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등 뒤에서 그녀가 작게 속삭인다. “맞아요. 나쁘지는 않아요.” “…….” “다만 사람들이 나를 죽은 사람 보듯 볼 뿐.” “…….” 처음으로 전서희의 목을 조르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지금'의 나를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녀를. 이민우는 그뒤 한동안 부장님을 만나라는 얘기를 종종 꺼냈다. 나는 그때마다 딱 잘라 거절했다.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11월이 마지막 주, 과도한 스케줄에 맞춰 움직이던 나는 사무실 흔들의자에서 일어나다가 머리를 붙잡고 쓰러졌다. 최성수 사장이 놀란 것은 당연지사, 고모는 회사까지 찾아와서 난리를 치셨다. 애좀 그만 굴리라고 말이다. 사실 내가 원한 스케줄들이었는데… 어쨌든 한 번 쓰러져서 그런지 내년 1월까지는 시나리오들 검토하며 다음 작품을 느긋하게 골라보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겨울 중간에 있는 스케줄이라봤자 진즉에 계약했던 음료와 가전제품 씨에프밖에 없다. 이민우는 내가 쉬는 동시에 바빠졌는지, 12월 첫째주부터, 내게 따로 연락하거나, 내게 자기 부장님을 만나보라는 둥의 소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민우가 조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전진이 신경쓰였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줘.” “춥고 으스스한데 꼭 이래야 되냐?” “…오늘이 마지막이야.” “진짜지.” “응.” 국화꽃다발을 샀다. 12월의 국화꽃 향기가 벤 안에 가득찼다. 그 향기는 서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나의 마른 귓가를 적시는 듯했다. 매니저 형은 툴툴대면서도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폈다. 3년간 종종 했던 짓이라 이골이 난 모양이다. 오늘이야말로 이 짓도 마지막이라는 내 선언이 반가웠는지 매니저 형은 주변을 살피는 와중에도 콧노래를 불렀다. “잘 넘어가. 다치지 않게.” “알았어.” 태풍남자고등학교. 후문에서 담을 넘었다. 들고양이처럼 얌전히 땅에 착지했다. 던져, 형! 하고 말하자 국화꽃다발이 힘없이 담 넘어 날아왔다. 품 안에 고이고이 꽃다발을 안았다. “3시까지는 꼭 나와.” “응.” 새벽 두시. 아무도 없는 학교. 하도 많이 와봐서 그런가 무섭기 보다는 정겨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옛날과 똑같이 낡은 건물, 꽁꽁 얼어버린 개수대, 바람이 스칠 때마다 비명을 토해내는 그을어진 벽줄기. 그리고, 당장 부실 것처럼 교감이 난리쳤었던 구교사동. 3년이 지났음에도 내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문정혁과 이별하기 위해, 나는 구교사동으로 왔다. 그동안 구교사동에 와서 새벽마다 청승맞게 문정혁을 그리워 했었다면, 오늘의 목적은 그를 잘라내기 위함이다. 본관과 달리 구교사동 입구는 언제나 열려 있었다. 삐걱이는 나뭇바닥을 조심조심 걸으며 손전등을 켰다. 2층 음악실에는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다. 한때, 문정혁과 나란히 앉아서 공부했던 음악실 의자에 국화꽃다발을 내려놨다. “마지막… 마지막 눈물이야.” 콧전등이 시큰해지더니, 내 의도와 상관없이 눈물이 주룩 흘렀다. 입술을 깨물수록 눈물의 양은 방대해졌다. 나는 코트를 움켜쥐며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반대의 생각을 하면서 숨을 쉴때가 있어. 함박눈이 부딪히는 차창이 빗물에 젖었으면 싶고, 어두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 하나가 태양으로 바뀌어서 밤 열두시가 대낮처럼 환해졌으면 싶은, 그런때. 네가 보고싶어 미쳐버릴 것같지만, 네가 싫다고, 네가 밉다고, 네가 그립지 않다며, 다 잊어버린척 숨을 쉬어. 반대의 생각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 사막의 낙타가 춥다고 투정부리며 털옷을 입듯이, 별빛을 태양으로, 달빛을 수면으로 여기고 살아가. 너 없이도 잘 살거라고,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어. 내 가슴이 이렇게 너를 잊은척 살아가고 있어. 만약 너를 다시 보면 말해주겠지. 사랑하지 않는다고. 보고싶지 않았다고. 나를 생각하지 말라고. 나를 더이상 아프게 하지 말라고. 이제는 너를 믿지 않는다고. 나는 반대로 생각하는 법에 익숙해졌으니까. 문정혁. 너를 잊을 거야. 내 가슴에 있는 너를 죽였어. 그래서, 국화꽃을 가져왔어. 가끔 뉴스에 나오는 너는, 내가 알던 너가 아닌 거야. 내가 알던 문정혁은, 죽었어. 앞으로는 국화꽃도 안 가져올거야. 아예 안 올거야. 매니저 형과 약속한 대로 세시까지 후문에 나갔다. 내가 담을 넘고 나타나자 설렁설렁 벤 안에서 졸던 매니저 형이 튀어나온다. 언 손을 비비며 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갈까? 하는 형에게 주저없이 목동 집에 가자고 했다. “야. 혜성아. 이제 좀 이사 가자, 응? 너정도 레벨이 이런 집에 산다는게 말이 안되거든?” 최성수가 나 꼬시라고 시켰구나. “왜 말이 안돼. 공식 프로필 주소는, 고모네 압구정 아파트로 되어 있는데.” “그럼, 목동 집은 그대로 놔두고, 집 하나 더 얻자. 이미지 관리 해야지.” “어차피 팬들도 이 집 주소 모르잖아. 싫어.” “하여간 똥고집이야.” 지난 3년간 내가 벌어들인 수익금은 어마어마했다. 그 돈들은 고모가 관리하신다. 따라서 내 생활은 변한게 없다. 매니저 형 말대로 쓸데 없는 고집을 부리는 중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고집이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은, 목동의 낡은 빌라, 1층, 내 집이었으니까. 부모님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좁은 내 집. 들어가자마자 불을 켜고 보일러를 가동시켰다. 그래도 싸늘한 기운이 가시지 않아서 코트 입은 채로 히터를 낑낑대며 날랐다. 앞으로 겨울 동안은 목동 집에서 시나리오만 읽으면서 지낼 생각이니까. 침대방에 들어가서 차가운 시트에 앉자, 절로 안도의 숨이 나왔다. 비록 춥지만 진짜 와야 할 곳에 온 기분이랄까. 침대 방 구석구석, 그동안 고모가 옮겨 준 팬들의 선물이며 편지 따위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제작년부터 안 뜯어 본 봉투가 상당하다. 그중에는 민경이 누나 재혼 청첩장도 있었으니까. 수북하게 쌓여 있는 선물들 중, 유독 시선에 잡히는 커다란 물체. 여름날, 고모집에서 받았던 종이학병 마냥 큰 포장지가 눈에 띄었다. 보낸 사람 주소와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순간, 이민우가 줬던 별모양 쿠션이 떠올랐다. 설마- 하는 생각에 후다닥 포장지를 뜯었다. 역시나. 품에 안기도 버거운 커다란 별 모양 유리병. 그리고, 안에 담긴 종이별들. 색색가지 종이별들이 별모양 유리병에 곱게 담겨 있었다. 누가 접었는지 정성이 대단했다. 아마, 글 쓰기에 자신없는 팬이 자기 마음을 표현한답시고 일일이 천 개가 넘는 숫자를 접은 모양이었다. 종이학. 종이별. 별모양 쿠션…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인물 하나. 멍하니 앉아서 종이별만 쳐다봤다. 왜 다시 내 앞에 나타나려고 하느냐, 꾸짖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다. 새벽 다섯시 경, 흠칫 몸이 떨렸다. 미세하게 느껴졌던 소음이 점점 커지더니 신경을 자극했다. 띵동- 띵동- 띵동- 누군가 무식하게 우리집 초인종을 누르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간에 누구지? 목동 집에 있을 때는, 누가 초인종을 눌러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둘러 집안 불을 껐다. 대답하지 않으면 사람 없는 줄 알고 돌아가겠지… 띵동- 띵띵띵--동! 띵동! 띵동! 띵--동!! 안 간다. 해보자 이건가. 띵띵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아아, 시끄러.” 양 쪽 귀를 쿠션으로 꽉 막았다. 그래도 초인종 소리는 거침없이 들렸다. 벌써 삼십분째다. 고모네 집 식구들은 아닐 텐데… 왜냐면, 고모네 식구들은 초인종을 안 누르고 열쇠로 따니까. 괴한인가? 괴한 이라는 글자만 연상해도 등골이 쭈뼛 섰다. 윗층이며 앞집 사람들이 문을 열고 시끄럽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초인종 소리가 잠깐 멎는 듯싶었지만… 띵동- 띵동!! 띵동!! 대체 현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는 빌라 주민들의 함성만 사라졌을 뿐, 우리집 벨을 누르는 무지막지함은 계속되었다. 설마, 괴한이 주민들을 다 죽인거 아냐? 핸드폰을 들고 경찰에 신고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를 고민하다가, 나는 이 와중에도 하루종일 쌓인 피곤함에 못이겨 잠들어버렸다. 그래봤자 두어시간. 스르르- 눈이 떠진 시각은 오전 일곱시. “…….” 아주 조용하다. 짙은 어두움은 여전했지만… 초인종을 누르던 괴한이 지쳤는지 돌아갔나보다. 밖에서는 더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현관 밖에 늘어져 있을 주민들의 시체를 상상하며, 꿀꺽 침을 삼켰다. 조심조심 현관문을 열었다. “!!!!” 그대로 놀라서 주저앉았다. 진짜 괴한이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입 밖으로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쿵덕! 소리내며 뛴 심장마저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가버렸다. 하지만 괴한은 1층 우리집 현관 밖에서 몸을 새우처럼 웅크린채 바닥에 신문지 깔고 잠들어 있었다. 팬인가? 무슨 팬이 겨울 양복 입고 거지처럼 신문지 깔고 자? 조심조심 문을 도로 닫으려는 순간, 1층 현관 밖에서 웅성대는 남자들 목소리가 들렸다. 조폭 같은 남자들이 담배 피우며 수다 떨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서 후다닥 계단에 올라왔다. 나는 너무 놀라서 문을 닫아야 된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부장님!” 조폭 같은 새끼들이 우리집 문 앞에 웅크리고 잠든 괴한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부장님. 부장님. 형수님 나오셨습니다!” …뭐라고…? 감춰진 동화속의 불편한 진실 두번째 이야기. 그들이 미쳤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순진한 독자들은 공주님의 예쁜 드레스와 파스텔톤 풍경에 홀려서, 그들이 사랑한다는건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미쳤기에 가능했음을 마지막까지 모른다. “부장님! 일어나 보시라니까요?” 부장님이라면… 설마… “부장님. 부장니임~!” 기가 막혀서 팔짱 낀채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덩치 좋은 두 놈이 새우처럼 웅크리고 잠든 부장님이란 자를 마구 흔들었다. 신문지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사람은 예상대로 전진이었다. 그는 잠이 덜 깬 와중에도 팔을 휘저으며 덩치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반쯤 뜬 멍한 눈을 초인종에 바짝 들이대더니 띵-동! 하고 누르는 것이다. 기가 막혀서 진짜. 내가 문 열고 나와서 지 쳐다보는 줄도 모르나보다. “이리 들어와 봐.” “?” 윗집 주민들이 출근할 시간이라는게 퍼뜩 떠올랐다. 무작정 전진 팔을 꽉 잡고 집 안에 끌고왔다. 전진은 뒤늦게야 내가 지 앞에 나타났다는 걸 알고 대뜸 팔부터 벌렸다. 당장 안기라는 뜻이다. 지랄하네. 탁!! 전진의 팔을 뿌리치고 후다닥 방 안에 들어갔다. 전진이 느릿느릿 따라 들어온다. 3년 만에 보는 전진… 3년… 3년 만에…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언뜻 봤지만, 조금 긴 머리칼을 왁스로 뒤로 넘겼고, 그리고… 스치듯 살펴도 눈에 띄던 흉터들… 억척스러울 만큼 뛰어대는 심장소리를 무시하며, 대충 눈에 보이는 가방에 필요한 짐만 쌌다. 필요한 물품이라봤자 고모네 집 손님방에 거의 다 옮겨놨다. 가방에 넣을 게 없어서 속옷만 대충 구겨 넣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등이 따뜻해졌다. “꿈 꾸는 줄 알았어….” “…….” 웅크리고 앉아있는 내 등을, 그가 송두리째 끌어안았다. “어딜 도망갈라고 그래… 공주야….” “…….” 굉장히 가라앉은 목소리… 밤새 추위에 떨었는지 따뜻한 온기보다 냉랭한 바람냄새가 먼저 나는 전진. 그는 나를 껴안은 채로 또 졸았다. 서둘러 뿌리치면서 선글라스를 썼다. 코트를 입고 가방을 짊어지고 현관쪽에 걸어가자, 전진이 뒤늦게 잠에서 깬 낯으로 쫓아와서 내 팔목을 꽉 잡는다. “어디 가게?” 전진의 얼굴을 쳐다보기가 불편했다. 갑작스러운 출현이 반갑지 않았다. 어제 학교에 다녀와서 그런가… 나는 앞만 쳐다보며 최대한 쌀쌀맞게 대꾸했다. “동네 시끄러워서 집에서 못 쉬니까, 나가려고.” “어디? 호텔?” “…….” 그런 나를 꽉 잡고 전진은 허공에 대고 하품까지 했다. 하긴. 전진은 고삐리때도 아침잠이 많아서 쉽게 못 깨어났었다. “내가 데려다줄게! 어? 공주야!” “됐어. 따라오지 마.” 그리고 목소리도 디립다 컸었다. “싫어! 징징징징. 공주 너 따라갈거야! 징징징징.” “…….” 시종일간 나를 웃겼던,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처럼… 생활 자체가 활기차고, 유머러스한 사람. 전진이 내 팔을 잡고 아이처럼 흔들면서 조르다가, 내가 웃지 않자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한다. “…안 웃네? 이상하다.” “…….” “우리 공주가 확실한데, 왜 안웃지.” 뿌리치자. “전진. 긴 말 할 것 없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쉬고 싶다.”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전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얼떨떨한 낯으로 나를 요리조리 살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되는 대로 대답했다. “그래. 어젯밤에 계속 초인종 누른 것도, 너잖아. 주민들한테 조용히 하라고 협박했지? 그렇잖고서 몇시간이나 벨 눌렀을 리가 없잖아. 가뜩이나 목동집에 잘 오지도 못하는데, 너때문에 더 못 오게 생겼어.” “왜 못 와? 우리 공주, 아니, 너네 집이잖아.” “…고모부 명의로 바꿔놨어. 어쨌든. 빨리 나가자.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 “참. 저기, 너한테 부장님이라고 부르는 시끄러운 사람들 좀 가라고 해. 너도 빨리 가고.” “…….” “전진. 말 안들을거야?” “…….” 하고 싶은 말을 대충 다 꺼냈으니 이제 됐다. 나는 전진이 서있음직한 쪽에 예의상 고개만 까딱 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나 전진이 더 빨랐다. 그는 내 팔을 잡고 뒤로 잡아당김과 동시에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왜?” 그를 뿌리치며 징그럽다는 듯 돌아보았다. 짜증스런 내 반응에도 불구하고 전진은 팔짱 낀 채 여유로운 상태였다. 아니, 나를 심오하게 관찰하는 듯 했다. “말투 하며, 표정 하며….” “?” “울 엄마랑 똑같아졌다. 공주야.” “!!” 얼굴 할퀼 뻔 했다. “뭐, 상관 없지.” 예나 지금이나 근사한 전진. 대체 나이는 어디로 먹었는지 펄펄 끓는 야생마 기운을 고스란히 담고 나타난 전진. 3년 만에 만나봤자 어제 만난 것처럼 제 멋대로 구는 전진. 양복이 더러워졌는데도 불구하고 개의치 않고 똥폼 잡는 전진… 그가 상관 없다며 저 혼자 중얼거리고, 별안간 내 앞에 등을 내밀었다. “업혀.” “뭐? 업혀?” “엉. 공주야. 빨리 업혀. 어부바.” 내가 미쳤냐. 너한테 업히게. 웃기지 말라는 대답 대신, 전진 등을 발로 세게 깠다. 당연히 내가 업힐 줄 알고 방심했던 전진이 쪼그려 앉은 자세에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 씨!! 진짜 말 안듣네….” “왜, 왜이래!!” 현관문을 열었다. 싸늘한 바람이 피부에 닿는 것보다 빠르게, 전진이 나를 안고 허공에 들어버렸다. 일명 공주님 안기. 맙소사. 나 그러고보니까 맨발인데… 아니, 신발도 못 신었는데…! 거침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전진 등을 주먹으로 팼다. “내려 줘!!” “오빠 아프다. 그만 때려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말 안듣는 공주….” “야!! 전진!! 내 신발!! 나 신발!! 신발!!” “느네 형수님 신발 챙겨라 아가들아~!” “예! 형니… 아니, 부장님!” “야!! 전진! 너 죽을래!!” “죽여 죽여~ 신발 신겨주면 도망갈거잖아~!” 집 앞에 주차된, 무식하게 큰 벤 안에 굴러들어갔다. 아니, 던져졌다. 우당탕! 차창에 목이 부딪혀서 까딱하면 생사람 잡을 뻔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진은 차에 시동걸기 바쁘다. “부장님!! 형수님!! 좋은 시간 보내십시요~!” “어, 그래~ 너네는 사무실에 가있어라!!” “아 진짜!!!!” 내가 아무리 난리 버거지를 피워봤자, 전진은… …맞아가면서 지 할 짓 다 했다. 정신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나 챙겨서 안고 납치하기. 어이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조수석 바닥에 굴러다니는 담배 한 갑을 거의 다 피웠다. 목이 갈라지던지 말던지, 너무 기가 막힌 상황에서 담배 만이 내 속을 알아줬다. 답답하고 터질 것 같은 이 기분을. “아흐윽. 크흑.” “…….” 당장 별나라로 날아갈것처럼 나를 차에 태웠던 전진. 말 한마디 없이 부리부리하게 뜬 눈에 힘을 주며 악셀을 밟던 전진. 그런 전진이 향한 곳은 강변북로에 있는 한강둔치였다. 이른 시간이라 차가 조금 막혀서, 전진은 더이상 악셀을 밟을 수 없음을 캐치하고 무작정 한강둔치에 내려온 것이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차는 듬성듬성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전진은… 한시간 넘게 계속 울기만 했다. 아주 통곡 수준으로 울면서 지 가슴을 빵빵 치고, 감정조절이 잘 안된다 싶을땐 핸들에 엎어져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내가 차 문 열고 나가려고 할때마다 귀신같이 알고 손목을 세게 잡았다. 덕분에 전진이 우는 포즈대로 내 왼 팔이 딸려가서 우스꽝스럽게 움직였다. 내가 차 문을 열려고 할때마다, 전진은 문을 도로 잠궜다. 내가 잠금장치를 열고, 전진이 닫고, 열고, 닫고를 오십번쯤 반복하다가, 나는 끊임없이 줄담배만 피우는 중이었다. 전진이 왜 우는지, 나는 서서히 깨달았다. 가끔씩 내가 진짜 자기 옆에 있는지 울면서도 확인하는 전진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나랑 단 둘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감격에 겨워서 전진이 울고 있다는 것을. 눈물 콧물 흘리며 어린애처럼 우는 전진의 오른팔에는 내 손목이 잡혀있다. 그리고 전진의 왼손은 콧물을 닦는게 아니라, 내 신발을 꽉 잡고 있다. 내 신발을 지가 갖고 있으면 도망 못 갈 줄 알았나보다. “전진….” 콧물이 길게 늘어지는거 보고 더이상 못참겠어서, 차에 굴러다니던 휴지 뽑아서 전진의 콧물을 닦아줬다. 그랬더니 잠깐 울음을 멈춘 전진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약간 미소를 지었다. “나 신발 줘.” 신발 달라는 말에, 전진의 얼굴에 꽃처럼 피었던 미소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녀석이 처음보다 세게 통곡을 재시작했다. 아! 미치겠다!! 대체 언제까지 울겠다는 거야… 한시간이나 더 지나서야, 전진은 가까스로 눈물을 멈췄다. 내가 잘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며, 전진은 자기 양복 안주머니에서 조그만 반지 케이스를 꺼내서 내밀었다. “이건 뭐야?” “크흥-” 대답 대신 들려오는 콧물 삼키는 소리… 으윽. 금빛 케이스를 열었다. 얇은 순금반지가 보드라운 케이스 안에서 반짝였다. “반지네? 나 주는거야?” 내 물음에 전진은 조금 상기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기가 막히다. “짜증나….” 반지 케이스를 닫으며 입에 담배를 물었다. 전진은 내 반응에 흠칫 하고 떨면서 어깨를 움찔하더니 뚝… 뚝… 구슬같은 눈물만 줄창 흘렸다. 후욱~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전진을 구경했다. 갑자기 나타났다지만, 변함없는 그가 신기하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도 여전한 전진 특유의 분위기… 귀엽다. “몇년 만에 나타나서, 초인종 눌러대고, 사람 납치해서 신발 뺏어가고, 갑자기 왠 반지?” …프러포즈하면 죽여버리겠어… “겨, 결혼할려구… 으흑. 으흑.” 죽어줘야겠어… “너나 끼워. 좀 황당하다. 내가 왜 이 반지를 끼워야 되냐? 너 모르나본데, 나. 반지 끼우고 다니면 당장 신문에 실려. 신혜성의 손가락에 갑자기 생긴 반지, 과연 누구와의 커플링일까. 이런식으로 나온단 말이야.” “으허어어엉.” 제발 그만 좀 울어라… 무슨 조폭이 이러냐. “아니, 그런 문제를 떠나서, 내가 왜 니 반지를 받냐.” “으헉, 으헉, 으허어어어엉-” 미치겠다. 하는 수 없이 톡톡 쏘아붙이던 내 말투부터 고쳤다. 조금은 부드럽게… 달래듯이… “진아. 반지 주면 내가 좋다고 껴안을 줄 알았어?” “아흑….” 내 목소리톤에 살랑이는 봄바람을 캐치한 전진이 그제야 눈물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진짜 바본가봐….” 정확히 30분 후. 콧물이 목에 걸린 소리가 아닌, 제대로 된 전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사이 담배 떨어졌다고 중얼거리는 내 말에, 전진은 오백번쯤 뒤돌아보면서 매점까지 뛰어갔다왔었다. 물론, 내 신발을 든 채로. “3년 동안 쉬지 않고 일했어.” “…….” 전진은 자기가 3년간 무슨 일을 했는지 설명해줬다. 혈랑단에서, 한명 그룹이란 이름표를 달고 기업을 돌면서 수금했다는 것이다. 진짜 조폭다운 짓이었다. “그러다 이제 조금 쉴 틈이 생긴거야. 사실… 워낙 골때리는 일들이라서… 공주 생각하면, 내가 지금까지처럼 떨어져 있어주는게 맞는데….” “…….” “보고싶어서 못 참겠더라고. 약간 틈 생기니까 보고싶어서.” “…….” 내 눈치를 살피며 열심히 설명하던 전진이 느닷없이 자기 가슴에 손바닥을 얹고 춤을 추듯 허공에 붙였다가 떼었다가 한다. “이것 봐. 심장이 펄쩍! 펄쩍! 펄쩍!!” “…풋.” 놀라움을 넘어서면, 놀라움도 현실이 된다. 나는 긴장이 풀렸다는 증거로, 혹은 포기했다는 항복의 표시로 웃음소리를 냈다. 전진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드디어 웃었네.” “…아니고든.” “귀여워라. 우리 공주는 쌀쌀맞은것도 겁나게 귀엽다!!” “야… 전진. 심장이 무슨 펄쩍거리냐. 우리가 심장 바꾸네 어쩌네 한 지도 벌써… 몇년이지?” “9년.” “!!” 나는 한 번에 떠올리기 힘든, 옛 기억이. 그 숫자가, 전진에게는 일상처럼 당연하게 튀어나온다. “9년 됐어. 고2 때였잖아. 공주가 내 심장 가져간 거.” “한 번에 기억하네….” 내 말 한마디에 칭찬받은 초등학생처럼 좋아하는 전진. 그의 기쁨이 왜 나는 슬픈지 모르겠다. 그의 기쁨이 나는 왜… 무감각한지 모르겠다. 그는 그대로인데, 나만 변한 듯, 세상이 회색빛깔이다. 처음보다 확실히 편해진 말투로, 나는 물었다. “너 진짜… 왜 갑자기 나타난거야?” “…….” “아무리 보고싶었어도, 지난 3년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으면서! 코빼기도 안비쳤으면서!” “…….” “무슨 일 있어?” “그건….” “있구나? 무슨 일인데?” 순간 울컥대는 미묘한 심리. 진짜 일이 있어서 나를 찾은거구나- 라는 허무한 기분. 서운하기까지 한 이 기분의 정체는 뭘까. 전진이 몇 번 망설이는지 침을 삼키다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이선호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니 옆에 붙어있을라고….” “하… 갑자기 이선호가 왜?” “다음주에 이철호하고 이선호 둘 다 검거될거야. 근데 김검사 말로는 이선호는 무사할 거래.” “그래서.” “어?” “그래서 나 찾아왔어? 어디 다칠까봐?” “…응….”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난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었다. 나는 전진의 쭈뼛대는 대답, 그 숨결이 다 끝나기도 전에 차 문을 활짝 열고 튀어나가버렸다. 맨발바닥에 닿는 차가운 눈의 감촉이 시리기는 커녕 뜨겁다. 내가 조금 편하게 굴자 방심했던건지 팔목을 느슨하게 잡고 있던 전진이 아차 하며 후다닥 따라나왔다. 휘익~ 반원을 그리며 몸이 돌아갔다. 무작정 내 팔목을 꽉 잡고 돌린 전진의 표정이 정면으로 시선에 들어왔다. 그는 내가 아닌, 한겨울에 쌓인 눈을 밟고 있는 나의 맨발을 보고 있었다. 끔찍하다는 듯이. 내 앞에서 훌쩍이고 통곡하고 눈치보며 조심스레 말하던 전진은 온데간데 없이, 그가 기차화통 삶아먹은 것마냥 바락바락 고함부터 친다. “야!! 미쳤어?!! 너 맨발이야!!! 동상 걸려 죽으려고 작정했어?!” “이거 놔!! 남이사 동상 걸리든 말든 니가 무슨 상관이야!!” “왜 상관없어!! 너는 내껀데!! 일단 알았으니까, 내 발 위에 서서 말 해. 어?” “뭐? 닥쳐!! 느닷없이 나타나서!! 그것도 이선호 때문에!! 너는 늘 이선호 때문에 움직이잖아!!” “씨발!!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야!! 내 구두 위에 서라니까!! 여튼, 문곤이 선수칠것 같아서 내가 작정하고 너 찾아온건데!!!” “뭐야? 그러니까, 지금 둘이 가위 바위 보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누가 신혜성 찾아갈까- 이랬다는 거 아냐!!” 나는 전진을 보며 소리쳤지만, 그는 내 맨발이 추위에 붉어지는 것만 내려보고 있었다. 아주 미치겠다는 듯이. 그는 내 발이 어떻게 될까봐 겁먹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자기가 더 돌겠다며 괴성을 지를 뿐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구!! 미치겠네!! 나 설명 잘 못하는거 알잖아!!” “아니면 뭐야!! 전진!! 너 이선호 때문에 나타난거 맞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너 지켜주려고 왔다고!!!” “에이 씨!! 이거 놔!!” “신혜성!! 이런 지랄같은 기회라고 해도!! 코앞에서 너 만질 수 있게 되서 나는 겁나게 좋다고!!” “뭐라는 거야!!!” “아!! 씨발!! 졸라 잘못했어!!” “…….” 보란듯이 쌓인 눈을 발로 밟아대던 내 동작이 멈췄다. 전진의 괴성이 내 귀를 뚫어버렸다. “내가 다 잘못했다!! 어?!! 내가 뭘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겠는데!! 씨발 그래!! 내가 다 잘못했다!!” 하지만 전진의 등장은, 전진의 이유는, 나를 여전히 복잡하게 했다. 이상하게 화가 났다. “셋 셀 동안 안 놓으면, 나 강물에 뛰어들거야.” “!!!!” “하나….” “야아… 혜성아아~!!!” “둘셋.” 전진의 눈동자가 무지막지하게 커졌다. “!! 둘셋을 왜이렇게 빨리 해!! 랩하냐고!!!” “잘 살아라. 싸요나라!! 나는 간다.” “!!!” 순간, 전진이 방심하는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팔을 탁!! 쳐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다다다 한강물 쪽으로 달렸다. 몇 걸음만 더 뛰면 살얼음이 베어있는 한강물이 닿는다. “에, 에라이~ 모르겠다!” 하지만 전진이 더 빨랐다. 당장 내 뒤에 쫓아와서 어깨에 손을 얹는 듯 싶던 전진은, 아까처럼 팔목을 잡고 끌어당기는게 아니라… 내 허리를 꽉 껴안고 단숨에 자기 어깨에 짊어버렸다. “야!! 안 놔?!! 죽을래!!!” 허리가 끊어질 듯한 통증에 가쁜 숨을 토해내봤자, 전진은 들은 척도 안했다. 결국 나는 허공에서 난리치다가 조수석에 앉혀졌다. 울컥, 울컥,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속사포처럼 펼쳐졌다. “왜 나타나!! 개새끼야!! 씨발새끼!! 왜 갑자기 나타나서 반지는 주고 지랄이야!! 지켜주긴 뭐… 뭘 지켜준다고!! 으, 으흑!!” “공주야아….” 그의 '공주야' 라는 부름에, 내 심장은 터져버렸다. 그동안 쌓아왔던 농축된 감정이 기다렸다는 듯 내 어깨 위로 폭팔해버렸다. “어허, 어허어어어. 어흐으으윽! 어허, 어허, 어허엉.” 얼마만에 이렇게 울어보는 걸까. 영화가 아닌 내 삶 속에서. 눈물콧물로 엉망이 되는 안면 따위를 생각할 틈도 없이, 나는 발버둥을 치면서 울었다. 온 몸을 떨어가며 바락바락 소리지르고 울었다. 그래서 전진이 나와 함께 울었다는 것을 제대로 몰랐다. 그저 가쁜 호흡이, 나와 비슷한 결정체가 그의 주변에도 맴돌았음을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다. 오랜시간 검은옷을 입고 매연처럼 내가슴을 꽉 덮었던 굵직한 덩어리가 빠져나갔다. 얼마나 울었을까. 눈이 퉁퉁 부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눈물을 멎으며 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전진은 중간부터 울기를 멈추고 내 발을 양 손바닥으로 비비며 열을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큭-치!!” “!!” 허리 숙여 내 발바닥을 열심히 비비던 전진이 더 놀랐다. 밖에서 장시간 맨발로 찬바람을 맞았던 몸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코가 간질간질하더니 기침이 불쑥 튀어나왔다. 동시에 콧물이 주룩… 콧물 닦을 새도 없이 나는 어깨와 몸을 들썩여가며 굿거리장단 하듯 제체기쑈를 시작했다. “크에치!! 엑치!! 나… 나으… 크에치!!” 덩 기덕 쿵 더러러러 쿵 기덕 쿵 더러러러 “휴지! 휴지 여깄어!” “아흑, 나… 크엑치!! 크엑치!! 치!! 에치! 학!! 크치!!” “요란하게도 하네… 괜찮아?” “뭐라고했!억!치!! 크이치!!” “안되겠다. 약 먹어.” “시러!! 억치!! 아흐… 어흐… 흐에치!!” 덩 기덕 쿵 더러러러 쿵 기덕 쿵 더러러러 덩~ 따쿵따 쿵~ 따쿵따 굿거리장단과 자진모리 장단까지, 제대로 풍악을 울렸다. 전진이 헐레벌떡 내미는 상비약도 삼키고, 전진이 덮어주는 냄새나는 담요를 몸에 둘렀다. 히터를 이빠이 틀어버린 전진 덕분에 내 몸은 차츰 원래대로 돌아왔다. “진짜 괜찮아?” “응… 코엑.” “자꾸 콧물 삼키지 마. 차라리 침 뱉어. 공주야.” “큭….” “?” “하하하하하.” 원래대로 돌아오다 못 해 웃음이 터졌다. 기가 막힌 상황의 끝에서는 왜 항상 웃음일까. 이건 전진만이 할 수 있는 마법이다. 내가 웃자 전진도 어리둥절해 하다가, 나 따라서 마냥 웃었다. 이유도 모르는채 그냥 내가 웃는게 좋다면서 웃는 것이다. 어느새 정오가 되었다. 열두시가 될때까지 서로 울고 콧물흘리고 소리지르면서 난리쳤다니. 배고프다고 하는 즉시 전진은 매점에서 오뎅하고 컵라면을 사왔다. 주린 배를 채우고 나자, 방금까지 울었던 일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정도였다. 온온한 히터 열기, 빵빵해진 배… 폭 쌓인 담요… 굉장히 포근하다. 의자를 뒤로 제끼고 누웠다. 전진도 나를 따라서 운전석 의자를 뒤로 젖혔다. 그는 나를 한없이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었다. “공주야… 너는… 얼굴 붓고 눈탱이가 붕어 된것도 졸라게 예쁘당….” “죽는다. 전진. 입닥쳐.” “조용….” “큭큭큭큭.” 그가 내 앞에 나타난 이유는, 그의 존재처럼 단순했다. 이철호가 검거되기 직전이니, 일이 거의 해결될 즈음이니, 당연한 순서처럼 나를 만나겠다는 것. 하지만 나는…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가슴에 문정혁이라는 세 글자를 품었었다. 아직도 폭풍같은 세글자를 완전히 떠나보내진 못했는데… “진아… 나… 정혁이… 못잊을지도 몰라.” “…….” 차마 전진을 쳐다볼 수 없어서 허공에 대고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 “응.”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대꾸하는 전진 때문에 피식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이 나왔다. “바보야… 그런거 쉽게 대답하면 어뜩하냐?” “몰라. 난 공주 너만 있으면 돼.” “내가 너 막 싫다고 해도?” “신발 안줄거야.” “바보야… 내가 뭐가 좋냐…?” “몰라. 복잡한 거 묻지 마.” 옆으로 돌아누워서 전진을 똑바로 쳐다봤다. 전진은 애당초 내쪽으로 누워있는 상태였다. 그가 긴 팔을 뻗어서 내 뺨을 조심조심 만진다. 눈, 코, 이마, 뺨, 그리고 입술… 입술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아쉬운 손가락을 턱으로 내린다. “이젠 나… 밉지도 않아? 옛날에는 너 나한테 화냈었잖아… 우리 4년동안 헤어지다가 다시 만났을때, 너 나한테 화냈었잖아. 어떻게 문정혁한테 마음을 줄 수 있었냐고… 그땐 그랬잖아. 이젠 화도 안 내는거야?” “응.” “나… 안 미워?” “응.” “내가 지난 3년 동안 문정혁만 생각했었는데도? 지금도 문정혁 생각에 힘이 들어도?” 그가 글자들에 힘을 주며 확신에 찬 투로 말했다. “응. 나는 공주 너만 있으면 돼.” 전진은 굉장히 행복하게 웃었다. 어제까지 못 만난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편하고 아늑한 미소를… 저렇게 순박하게 웃는 사람이, 해맑은 눈동자를 지닌 사람이, 지난 3년간 광폭하게 굴면서 여러 사람 해쳤다는게 사실 믿어지지 않는다. 집 근처 호텔들을 빙 돌다가, 결국 강남까지 왔다. 팔레스 호텔 10층. 로비에서부터 나를 알아본 인파가 상당했지만, 누구도 아는척 하지 않았다. 역시 강남까지 달리길 잘했다. 젠체하는 사람들이 그러듯 나도 선글라스 끼고 무뚝뚝한 몇마디만 던지고 체크인했다. 전진은 내가 몇호에 묵는지 확인하고 어디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잠깐 나갔다오겠다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전진 아니었으면 지금쯤 목동 내 집에서 너구리 끓여먹었을텐데… 아무래도 당분간 목동집에서 쉬기는 곤란하겠다 싶어서 고민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휴대폰 번호를 꾹꾹 눌렀다. 신호가 몇 번 울리고, 귀에 익숙한 고모 목소리가 들렸다. “고모, 전데요. 지난번에 알아보셨다는데 있잖아요. 그… 제가 기억이 잘 안나서요. 아파트랬나요?” 고모는 틈만 나면 좋은 집 있다며 내게 팜플렛을 보내셨었다. 나는 그때마다 거절했었다. 하지만, 목동 빌라 주민들을 놀라게 한 이상 내집에 있을 수 없지 않던가. 고모는 내 질문을 아주 반가워하며 후다닥 설명해줬다. “현대 3차 아파트요?” 청담동 현대 3차 아파트라… 2차 아파트에는 영화배우 이정재가 산다고, 예전에 윤계상형이 알려줬는데, 뭔가 기분이 묘하다. 나도 영화배우인데… 실제로 현대 2차 아파트에는 스타급 연예인들이 몇명 살고 있다. 나도 그 계열에 속하게 되는구나 싶어서 머쓱해진다. 아, 그렇지. 이정재는 2차 아파트고 나는 3차 아파트면 위치가 다른건가? “그 아파트 앞에 무슨 호텔 있지 않나요? 리버사이드? 아… 거긴 2차 아파트… 3차 목련아파트요?” 뭐가 이렇게 복잡한거야… 고모는 쇳불도 당김에 빼랬다고 내게 위치를 물으셨다. 한 20분 위치에 있다니까 빨리 보자고 난리시다. 결국 체크인 한지 십오분만에 코트 걸치고 콜택시 호출해버렸다. 그리고 진짜 20분만에 고모와 아파트 단지 앞에서 만났다. “아니! 혜성이 너 얼굴 왜이러냐!” “예? 아… 괜찮아요.” 전진 멱살 붙잡고 우느라 엉망이 된 몰골인데 깜빡했다. 고모가 펄쩍 뛰는 것도 당연했다. 시나리오 보다가 슬픈 장면에 몰입되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고 대충 둘러댔다. 진짜 거짓말 하나는 잘 한다. 신혜성… 그래서 영화배우 하는 건가. 진짜 삶이 아닌 거짓 삶을 진짜처럼 보이게 표현하는 나. 어쩌면 세상 모든 배우들은 천부적인 거짓말쟁이일지도 모른다. “내가 여기 오면서 부동산 정씨하고 통화해봤는데, 고새 23층이 빠졌댄다.” “정말요? 그럼, 부동산부터 가볼까요? 집이 나갔으면… 어차피 올라가봤자 소용 없잖아요.” “아니야. 그래도 워낙 집이 괜찮아서, 내가 너한테 팜플렛 보냈을때, 민형이 앞으로 한 채 샀었거든. 그녀석 장가가면 살라고.” “아….” “같은 단지 20층이야. 여기다. 올라가자.” “네….” 하마터면 민형이 형이랑 같은 단지에서 살 뻔 했네… 고모가 나 사라고 봐뒀다는 23층을 누군지 몰라도 매수해줬다니 다행이다. 집 안은 굉장히 근사했다. 거실과 주방에 있는 기본 가구들, 고풍스러워보이는 원목 바닥. 그리고, 영동대교와 한강, 강북까지 보이는 베란다 창가. 조망권이 기가 막힐 정도로 멋졌다. 당분간 이런 집에서 살게 될 거라는게 설레였지만, 한편으로는 입이 적 벌어질 정도의 어마어마한 집값에 놀랐다. 또, 내가 그정도의 수익을 충분히 냈다는게 처음으로 실감났다. 이런 근사한 집은 압구정에 있는 고모네 아파트밖에 없노라 인식하고 있었기에, 온전히 내 것이 된다는게 신기했다. 나. 진짜 성공한 거였구나… “가구는 고모랑 고모부가 사줄게. 혜성이 너는 돌아다니지 못하잖냐.” “네? 아니에요. 아… 그럼, 고모. 영수증은 저한테 주세요.” “무슨 소리냐. 어른이 그렇게 하겠다- 하면, 알았습니다- 해야지.” 고모는 늘 내게 미안해 하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고모와 고모부에게 빚을 진 건, 오히려 나인데… “고모… 민형이 형은 피시방 개업한다더니, 어떻게 됐어요?” “아, 그거?” 민형이 형 얘기에, 묵직하게 가라앉았던 고모의 표정이 화사하게 밝아졌다. 고모의 저런 편안한 표정은 참 오랜만이다. 자기 자식이 제 밥벌이 하면서 제대로 사는 게 최고 소원이 되어버린 고모는 이제야 한시름 놨다며 호호 웃으셨다. “그녀석이 글쎄. 순돌이가 컴퓨터 게임 좋아하는거 알고, 피시방에 순돌이 전용 방도 따로 만들겠다지 뭐냐! 호호호.” “그래도 괜찮을까요? 순돌이가 게임 많이 하면….” 고모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설명을 덧붙이셨다. “그게 다 민형이 아이디어야. 나도 첨엔 언짢아했는데, 순돌이가 매연 가득한 피시방 가서 있는걸 보느니, 차라리 눈 앞에서 노는거 보는게 낫겠다- 해서 뭐, 따로 지정석을 만들어준다나? 피시방 위치도 아파트 단지 상가 4층이야. 아, 혜성이 너한테 싸인 한 장 부탁하던데, 괜찮겠냐?” “당연하죠. 개업식 즈음해서, 피시방에서 사진도 찍죠, 뭐.” “아이고, 고맙다. 혜성아. 착한 것.” 별 것 아닌 말에도 두 배로 고마워 하는 고모 때문에, 나는 늘 미안해진다. 나를 사랑하는, 나를 아껴주는 이민우가 불같이 떠올라서, 고모의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다. “혜성아. 고모는 시장 가야 되겠는데, 어떻게. 호텔로 갈거면 고모 차 타고 가자. 데려다 줄게.” “아니에요. 저는 좀 더 있다가 갈게요.” 앞으로 살 집이 상상 이상으로 근사해서, 나는 넋이 나간 상태였다. 학창 시절에는, 이런 집에서 누가 살까. 아, 선호 정도면 살겠구나… 싶었던 집에 내가 서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다. 고모는 그러마 하며 내 옷을 한 번 추스러주고 나가셨다. 고모가 나가서야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아무것도 없이 넓기만 한 거실 끝 베란다 창을 매만졌다. 반짝이는 한강물을 보고, 깔끔한 베란다와 원목 바닥에 발을 비볐다. 비록 민형이형 집이지만, 이와 동등한 레벨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여기까지 성공했구나… 내가… 이 내가… 청승맞게 울면서 나도 모를 감동에 떨기 바쁜데, 눈치코치 없이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하고 방금 통화했어.] 이민우다. 하여간 내가 청승맞아 할때만 골라서 전화한다니깐… [지금 부장님이랑 같이 있어. 그쪽으로 갈게.] 부장님이라면… 전진이랑? 덜컹. 이유없이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를 사랑하는 이민우가, 역시 나를 사랑해주는 전진과 함께 있다는 점이 조심스러웠다. “호텔로 와. 지금 나갈거야.” 바깥 바람 쐬면서 눈물 흔적을 날려야겠다. 이민우와 전진은 나와 비슷한 시각에 호텔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옆 엘리베이터가 10층에 도착했는데 그게 전진과 이민우였다. “공주야!!” 전진은 나를 보자마자 와락 껴안고 반가워했다. 몇시간만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천만년은 떨어졌던 것 마냥 찰싹 달라붙고 뺨을 부빈다. 그와 단 둘이었다면 모를까, 이민우가 쳐다보고 있는데… 나는 불에 데인듯 전진을 떼어내며 등을 찰싹 찰싹 쳤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여기 복도야.” “보라그래~!” 이민우가 보잖아… 초조해 하는 나와는 달리, 민우는 대수롭지 않게 전진과 내 뒤를 따라왔다. 룸에 들어가자마자 전진은 내 볼에 쪽~ 하고 용기있게 뽀뽀를 한 뒤, 오줌 마렵다며 화장실로 튀어 들어갔다. 덕분에 이민우와 나만 어색한 공기를 내쉬며 약간 떨어져서 섰다. 이민우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다. 짙은 죄의식에 말라 죽을 것처럼 비튼 신음을 내뱉는 심장. 사막의 오하시스를 일부러 지나친 것 마냥 텁텁해지는 입술. 시원한 물조차 마실 수 없는 죄값에 답답해졌다. 이런 내 마음을 충분히 잘 아는 이민우가 싱긋 웃는다. “귀여워라… 나 보고 긴장한거야? 신혜성.” “뭐어?” 그가 방을 쭉 둘러보더니 등을 돌렸다. 내 앞에서는 언제나 시니컬한 저 입술, 갈수록 짙어지는 그림자색. 어두운 수트가 꽉 조일 만치 단단한 등… 하지만 오늘은 익숙함이 아닌 낯설음으로 다가오는 이민우의 등. “역시 부장님을 만나라고 조르길 잘 했네.” “그게 무슨 소리야?” “죽은 사람처럼 살지 말라고 처방할 약이, 부장님 밖에 없더라고.” “!!” “너를 웃게 해줄 사람… 아니, 하다못해 울려 줄 사람. 그게 나는 아니었잖아. 부장님이라면 틀림없이 혜성이 너를 자극시켜 줄 줄 알았어. 뭐… 어차피 부장님도 때마침 너랑 연락하려고 전전긍긍이었고.” “야… 이민우….” 너 지금 등돌리고 웃고 있는거야, 아니면 울고 있는거야…? 한 번 더 그를 불러야겠다고 여겼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민우가 '나 괜찮아!' 하면서 씩씩하게 말하고 나가는 마지막까지, 붙잡지 못했다. 같은 자리에 서서 얼어붙은 채 박제가 되었을 뿐이다. 이민우가 나간 뒤, 마침 화장실에서 볼 일 보고 나온 전진이 등을 꼬옥 끌어안을 때까지 한 방향만 봤다. “전진… 나… 진짜 나쁜 사람이야.” “…….” 그는 대답없이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내가 하는 말 뜻을 다 안다는 듯이… “지옥에 갈지도 몰라….” “…지옥이라도 따라 갈거야.”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서 울었다. 전진도 함께 주저앉아서 내 등을 포개어 안아주며 붉은 동공 밖으로 아찔한 것들을 흘렸다. 어쩐지 전진의 표정에도 나와 비슷한 색의 죄의식이 덮여 있는 듯했다. 혹시, 내 눈동자에 덮여있는 이민우 라는 글자를 본 걸까. 전진은 왜 우냐고 처음으로 내게 묻지 않았다. 대체, 빌어먹을 사랑이 무엇이길래. -얼마나 있을건데? -한… 두시간? -그렇게 오랫동안? 공주야 나도 갈까? -해 볼 수 있으면 해보셔. 지금 군산에 있다면서, 어떻게 올라고 그래? 한동안 문자를 주고받던 중, 마지막에 톡 쏘는 내 질문에 전진은 1분 넘게 답문을 보내지 않았다. 삐진건가?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안 삐졌다네~ 노래하듯 전진의 답문이 도착했다. -십분만 있다가 나오면 안돼? 십분이라… 연회장 들어가서 '나 신혜성인데, 와서 발도장 눈도장 찍었으니까 도로 나갈게요~' 하면 시간 맞겠다. 들어가는 시간 나오는 시간까지 다 계산하면… 킥킥 웃으면서 문자 버튼을 눌렀다. -알았어. 그럼 딱 한시간만 있다가 나갈게. 누가 나를 간섭하고 챙겨준다는 것, 특히, 사랑이란 이름표를 달고 행동하는 것은 은근히 기분이 좋다. 사랑받고 있구나- 라는 햇빛같은 생각이 들어서 별 것 아닌 챙겨줌에도 뿌듯해진다. 사실 온전히 전진을 받아들인게 아닌데, 실제로 전진과 단 둘일때의 나는 쌀쌀하기만 한데… 그는 자꾸 내 안의 얼음을 녹이려고 한다. 아, 전진한테 답문자 왔다. -오케이. 협상 타결. 도장 뽀뽀 쪽쪽쪽쪽쪽쪽쪽 “누구랑 그렇게 문자를 주고 받냐?” “아, 아무것도 아냐.” “아니긴. 실실 웃는거 보니까 신기한데. 혜성이 너 부처님처럼 미소짓는거 오랜만에 본다, 야.” 왠 부처님… 매니저형의 장난스런 눈초리를 피해 일부러 무뚝뚝하게 한일자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간지럽게 자꾸 문자 보내는 전진 때문에 쿡! 하고 의도하지 않은 웃음이 툭툭 튀어나왔다. 별안간 코앞에 나타났던 전진은, 오래전 고삐리때처럼 딱 전진스러운 연애질을 시도하고 있었다. 문자보내면서 자기 뭐하는지 알려주기. 사랑한다고 표현하기. 답문 안보내면 화내기. 어린애같은 전진식 연애… 사실 이건 연애라고 하기엔 2프로 부족한데… 내 기준에서 전진의 행동은 귀여운 장난이지만, 전진의 입장에서는 연애일 것이다. “누구 문잔데 그래? 거의 다 왔어.” “어? 어어…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벌써 다 왔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청담동에서 여의도까지 고작 30분밖에 안 걸렸다니. 연말이라 차도 막힐 법 한데, 매니저 형은 이 도로 저 도로를 후비더니 제 시간에 맞춰서 여의도에 있는 한명그룹의 칼리아 호텔에 도착해버렸다. “늬 고모네 손님방에 쌓아놨던 짐은 그럼, 언제 옮기냐?” “글쎄… 어제 아파트 봤으니까, 내일 저녁때쯤?” “알았어.” “아, 모레가 좋겠다.” 내일 저녁때는 왠지 전진이 서울 올라올 것 같으니까… “모레? 알았어. 그때까진 팔레스 호텔에 있을 거지? 사장님이 전화해달라든데….” “아… 내가 이따가 할게.” 매니저 형과 몇마디를 나누다 보니, 칼리아 호텔 앞 분수대를 전부 돌아버렸다. 도어맨이 문을 열었다. 나를 알아보고 짧게 눈을 깜빡이며 놀라고, 급하게 인사한다. 오늘의 나는 제법 근사했다. 코디 누나들이 협찬사에서 받아온 화이트 턱시도를 입었으니까. 연분홍색 나비넥타이와 흰색 면장갑까지 착용하니, 마치 결혼식장의 신부가 된 기분이다. 굳이 화이트 턱시도일건 뭐야? 하고 따져봤자, 최성수 사장은 막무가내였다. 몇년이 지나도 내 첫번째 이미지는 아가사, 신비로운 원석 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흰 턱시도 때문에 가뜩이나 까만 머리칼이 더욱 돋보이는 듯하다. 오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스케줄이 끼어 있던, TR 컬렉션 기념 파티. 한명 그룹 계열사중 명망높은 패션 브랜드 Free Style의 컬렉션 기념 파티였다. 때문에, 초대장이 없으면 입구에서 망신당하고 돌아가야 되는 것이다. 재벌가들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을 찾은 해외 배우들부터 한국의 내로라하는 톱스타들까지 참석한다. 어쩐지 어제 오늘 한국에 내한한 외국 스타들이 좀 있다 싶었다. 황금 궁전같은 넓은 로비를 지나, 형식상 복도에 늘어놓은 스토어를 지나치면, 굴지의 기업가들과 톱스타들이 샴페인잔을 부딪히고 있을 연회장이 나타난다. 1월까지 거의 모든 스케줄을 비워놓은 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여긴 꼭 가야 한다는 최성수의 극성에 밀려 결국 와버렸다. 칸 영화제에서 수상한 감독들도 줄줄이 참석한다고 하니, 확실히 보통 파티는 아니다. 사실, 아무리 대단한 파티라 한 들, 나는 마지막까지 고집부리고 안 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모르는척 최성수의 등살에 못이기는척 와버렸다. '한명그룹'이라는 이름에 홀려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혹시 문정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기대 때문에… 문정혁 때문에 온게 아니다- 라고 수도 없이 내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그러나 진실 또한 내 안에 존재했다. 바보같다. 신혜성. 내 안에 문정혁을 죽이기로 결심 한 지 고작 삼일 지났는데… 아니라고 부정할수록, 확실해지는구나. 너는 문정혁을 보러 온거야… 은은한 재즈 4중주가 연주중인 연회장 입구. 한 층의 반 이상이 연회장인 관계로 경비가 삼엄했다. 멀리서 까만 수트를 입은 법조인 무리들 중 한 사람이 내가 있는 상아색 독수리 장식 쪽으로 다가왔다. 김명민 검사였다. “혼자 오셨습니까.” 둘다 짧게 목례만 한 직후, 김검사는 특유의 딱딱한 투로 질문했다.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네. 초대장 받은 친구를 못 찾아서요.” “뭐랄까. 정말 눈에 띄네요. 멀리서 봐도 신혜성씨라는 거 알겠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나를 위 아래로 쳐다봤다. 물론 눈동자만 짧게 움직인거지만, 김명민 검사가 내 앞에서 이토록 놀라는 건 나또한 처음이다. “월요일에, 소환장이 발부될 겁니다.” “아… 네.” 그쪽 일 얘기라면, 사양하고 싶다. 그러나 김명민 검사는 반듯하게 차려 입은 까만 수트처럼 거리낌없이 던지듯 말하기 시작했다. “한명 그룹에서도 이미 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지요. 주주들이 하나 둘 등을 돌리는걸, 죄다 죽여봤자 이철호 입장에서는 불리하거든요.” “김 검사님. 프리 스타일 컬렉션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도 모르게 차가운 투가 튀어나왔다. 김검사는 흔들림없이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이 자리의 진짜 취지를 모르는군요. 있는 자들의 허세의 장 입니다.” “…….” “누구보다 신혜성씨가 궁금해 하실 거라 여겼습니다. 아닙니까.” “…….” 검사들은 다 이럴까. 사람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고, 진실을 내뱉는다. 내 눈동자가 약간만 흔들려도, 김명민은 다 안다는 듯 굴었다. “그럼.” “…….” 노련한 몸짓으로 유유히 턴 해버리는 김명민. 나는 그에게 이렇다 할 반박의 한마디를 찾지 못했다. 문정혁과 전진이 과연 3년간 뭔가를 해 내긴 했구나- 하는 용광로 같은 뜨거운 생각이 몸 안 구석구석을 헤집었다. 연회장을 천천히 거닐었다. 가만히 돌아다니기만 해도 여기저기서 눈에 익은 사람들이 아는척을 해왔다. 가끔 내가 먼저 인사할 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먼저 말을 걸었다. 그래봤자 내가 인사하는 류는 광고주나 광고회사 팀장들, 혹은 초대받은 연예인 중 안면있는 사람들이 전부였다. 초청 연예인 숫자만 해도 열 명이 넘었다. 그들은 나처럼 톱스타 반열에 오른 이들이었다. 또, 연예인 반 이상은 한명그룹 계열 모델들이었다. 모델 중에서도 유독 빛이 나는 사람을 찾으라면, 주저없이 대답하리다. 김명민 검사가 내게 했던 말이 정확하게 이해됐다. 멀리서 봐도 누군지 알 것 같은, 눈에 띄는 사람이 포착되었으니까. 내가 그녀를 알아봤듯이, 그녀도 나를 한 눈에 알아봤다. 19년째 20대의 외모로 한명그룹을 빛내주는 전속모델 전서희. “오랜만이예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화이트 실크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전서희. 깔끔하게 올린 머리를 한 그녀는 수수한 화장을 한 상태였다. 마치 그녀가 찍은 광고가 눈 앞에서 돌아다니는 기분이다. 혹은, 나와 찍었던 영화 속의 그녀같다. 올린 머리를 한 걸 보니, 단발머리에 머리카락을 붙인 모양이다. 전서희와 내가 나란히 서서 샴페인잔을 들고 대화를 시작하자, 주변에서 우리 둘을 힐끔거렸다. 신랑 신부 보듯, 혹은 영화를 구경하듯 보는 적나라한 동경의 시선들. 열여덟살 당시의 나는, 전서희와 내가 이런 날이 올 줄 전혀 몰랐었다. 그녀도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평소보다 환하게 미소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안 본 사이에 더 예뻐졌어요. 신혜성씨.” “제가 해야 할 인사인 것 같은데요.” 예의상 웃는건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예쁜 미소를 띠운 그녀가, 샴페인을 한모금 마셨다. 그리고 약간 단호한 투를 건넨다. “내 다음 전속모델을 물색중이라는 소식, 들었나요?” “금시초문인데요. 한명 산업. 아니, 래미안 아파트 하면 전서희. 이거 공식 아닌가요?” “영원한 모델은 없는 법이지요. 세월에 장사 없듯이.” “…….” 찰라의 순간이지만 나는 보았다. 조금 떨리는 듯한 그녀의 눈동자 안에 서린 깊은 슬픔을. 아득한 한숨을. “그동안 주로 여자 모델들이 아파트 광고를 도맡아 했었지만… 나 다음 전속모델은 아마, 신혜성씨가 될 거예요.” “네?” 벙찐 낯으로 전서희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럴 줄 알았다는 전서희의 표정이 어느때보다 내 머리 위에 앉아있는 듯 하다. “내가 추천했어요. 한명의 현직모델이라서가 아니라, 그 이유가 아니어도, 아직 내 입김은 센 편이거든요.” “하…….” “신혜성씨는 아파트 광고 하나만 찍는게 아니에요. 신혜성 자체가 브랜드가 되는 거예요. 모르겠어요?” “…….” 그녀의 말투에는 여러가지가 섞여 있는 듯했다. 자신의 자리를 내 준다는 점이 불쾌하다는, 금이 간 여배우의 자존심. 그리고… 꼭 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빚는 근본적인 이유까지. “딱 몇년만 단기 식으로 계약을 해 봐요.” “…….” “그렇게만 계약해도, 몇 년 후쯤 되면, 신혜성씨는 평생 돈 없이도 살 만큼 될 테니까요.” “…….” “평생 돈 없이도 살 만큼 된다는 부분. 잘 생각해 봐요.” “뭐…라구요?” “그럼, 나는 다른 쪽에 가볼게요.” “잠깐만요. 선배님. 평생 써도 남을 돈을, 몇년동안 모은 다음에… 은퇴라도 하라는 건가요?” 나의 다급한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전서희는 반쯤 틀었던 몸을 사뿐히 원래대로 돌렸다. 정면으로 마주보는 당당하고 메마른 낯에 당황해서 시선을 피한건 오히려 나였다. 전서희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예쁜 인형같은 표정 속에서 그녀 특유의 독을 아무렇지 않게 꺼냈다. “…문도천 그 양반이 살아 있었으면 어땠을까요.” “?” “자기 자식들이 좋아한다고 난리치는게 연예인, 그것도 사내새끼인데. 가만 있었을것 같나요.” “…….” “하긴, 문도천이 세상에 없다고 해도, 신혜성씨는 그리 편하게 살아온 것 같진 않지만.” “…하고 싶으신 말씀이 대체 뭔가요.”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최후의 독을 내게 바른다. “너는 나를 닮아가고 있어.” “!!” 샴페인잔을 놓칠 뻔 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내게 말을 낮추지 않았다. 아니, 연예 활동을 하면서 전서희는 텅 빈 공간에서도 내게 말을 높였었다. 그런 그녀가, 날카롭게 눈을 반짝이며 사람 많은 장소에서 진지하게 쏘아붙이는 것이다. “그러지 마.” “…….” 잠깐 숨을 고르고 샴페인을 끝까지 마신 전서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세상에 전서희는 하나밖에 없는 거에요. 불행이라도 나를 닮지 말아요. 이건 내 자존심도 포함되는 부탁이니까요. 그리고… 옛날에 신혜성씨를 처음 봤을때도 느낀 감정이지만… 신혜성씨를 보면 안쓰러운 감정도 생겨요.” 그녀의 말은 언제나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안쓰럽다. 돈 벌어라. 그리고 은퇴해라. 그리고, 일전에 내게 말했던, 전진을 부탁한다… 나는 모든 것을 함축한 질문을 던졌다. “…전진과 저를… 허락… 하신다는 건가요?” “이정도로 얘기했는데, 못 알아들을 만큼 바보는 아닐거라고 여길게요.” “저 바보 맞아요. 확실하게 말씀해주지 않으심, 저 몰라요.” “우리 진이를 구출 해 줄 사람은, 신혜성씨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 “그애가 얼마나 위험하게 몇년이나 살았는지, 신혜성씨도 알지요? 아, 모르나요? 진이는….” “알아요.” “알면 됐어요. 나는 박감독님 계신 쪽으로 가봐야겠는데, 신혜성씨는 어떡할래요.” “저는… 그냥 바람 좀 쐬려구요. 가세요.” “그래요. 또 봐요.” 말하고 싶다. 당신 아들이 다시 내게 다가왔다고. 어쩌면 전서희는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전진이 내 앞에 나타났다는 것을. 전진이 나를 따라서 지옥까지 가겠노라 결심했다는 것도 알까. 나는 몇 번 더 주먹을 움켜쥐다가 쓸쓸하게 등을 돌렸다. 답답한 가슴에 찬 바람을 쐬어주고 호텔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연회장 가장자리에 2층 높이 테라스 창이 규칙적으로 늘어져 있었다. 그중 한개 테라스 문을 열고 나갔다. 차가운 밤바람이 뺨에 부딪혔다. 갑갑함이 조금씩 가셨다. 추운 날씨 탓에 테라스로 나와서 잔을 부딪히는 골빈 허세족은 없었다. 테라스의 우아한 대리석 난간에 기댔다. 그러다 나와 몇 칸 떨어진 테라스에도 한 사람이 나와 있다는게 포착되었다. 누군지 몰라도 되게 답답했던 모양이다. 멀리서 봐도 한숨을 푹푹 내쉬고 타이를 벗는게 관찰되었으니까. 달밤에 무척 잘 어울리는 늘씬한 옆모습… 까만 턱시도와 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모델같은 몸매와 각진 어깨를 지닌 남자… “!!” 눈이 번쩍 뜨였다. 테라스 오른쪽 끝에 바짝 붙어서 그 남자를 죽어라 노려봤다. 아니, 이건 노려보는게 아니라 충격으로 떨린다는 표현이 맞았다. 쿵. 쿵. 쿵. 쿵. 거칠게 요동치는 심장이 먼저 알아차렸다. 문정혁…!!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뇌가 명령했지만, 나는 양 손으로 입을 가린채, 두 칸 떨어진 테라스의 문정혁의 옆모습만 한없이 쫓았다. 숨이 턱 막혔다. 온온한 실내보다 싸늘한 바람이 휭휭대는 바깥이 훨씬 뜨거웠다. 문정혁이 무의식중에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가, 나를 발견했다. 한번에 나를 나인 줄 발견하지 못한 그가, 도로 연회장에 들어가려다가, 불에 데인듯 놀란 몸짓과 함께, 우뚝 서서 이쪽을 응시한다. “!” “!” 달이 서럽다. 저 달을 등에 매단 문정혁. 덕분에, 그의 앞모습이 그림자에 가려져서 관찰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어떤 표정으로, 아니, 적어도 어떤 포즈로 자기를 쳐다보는지 알았을텐데. “정…혁아….” 부르지 마. 부르면 안 돼. 국화꽃과 함께 그를 죽였잖아. “정혁아… 정혁아!!!” 부르고 싶지 않아. 부르면 안된다는 것도 알아. “문정혁!!!” 이건 내가 아니야. 그래. 이건 내가 아닌 거야. 그래서 괜찮아. 잠깐 미쳤어. 그를 불렀다. 문정혁은 멍하니 내가 서있는 쪽을 쳐다보다가,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잠깐의 몇 초가, 그 찰라의 마주침이 내겐 생명수처럼 짜릿하게 느껴졌다. “정혁아!!!” 그가 무작정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말도 안돼… 말도 안돼…!! 우장창 무너지는 자존심을 뒤로 한 채, 나도 테라스 문을 열고 실내로 뛰어 들어갔다. 붉어진 눈동자 밖으로 당장이라도 눈물이 한무더기 나올 태세였다. “문정혁!!!” 나도 모르게 사람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소리쳤다. 수많은 인파들 틈 어딘가에 끼어 있을 문정혁을. 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잠깐의 꿈처럼 생생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졌을 뿐이다. 확 트인 내 목청에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불규칙적으로 옷깃에 닿았다. 그래도 나는 정신없이 여러 사람들을 헤치며 문정혁을 찾을 뿐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문정혁… 나를 버렸던 문정혁… 억지로 잊으려던 문정혁… 아니, 잊었어. 잊었지만, 잊으려고 하지만, 그렇지만… “문정혁… 어딨어… 문정혁…!” 어떡하지… 어떡하지? 사람들의 묘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나는 촉촉한 땀방울이 맺히는 것도 모르는 채 주변을 뒤졌다. 어떡하지… 어떡하면 되는 거야…! 그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소유하고 싶은 감정이, 그를 확인하고 싶은 감정 하나가 나를 괴롭힌다. 자세히 관찰하진 못했지만, 그의 느낌은 충분히 보았다. 그는 여전히 눈부시고, 날카롭고, 이지적이며, 잔인할 만치 아름다웠다. “신혜성씨.” “…검사님.” 미친놈처럼 연회장을 돌아다니던 내 팔을 확 낚아 챈 것은, 김명민이었다. 김명민 검사와 나란히 섰다. 그제야 나를 수상하게 여기던 시선들이 원래대로 흩어졌다. “놔 주세요….” 김명민은 내 팔을 잡은 채로,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문정혁 부사장을 주목하는 동시에 노리는 사람들, 아직 많습니다.” “…….” “신혜성씨를 예의주시하는 시선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 “왼쪽. 십미터 떨어진 지점에. …이선호.” “!!” 벼락처럼 꽂히는 이름이 있다. 이선호. 한명그룹이라면 당연히 이선호가 있을 것이다. 이럴수가. 나는 충격에 번쩍이는 뇌를 가까스로 부여쥐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잠깐이었지만, 멀리 떨어진 사람들 중, 이선호를 보았기 때문이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이선호는 익숙한 시선으로 힐끔거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억척스러운 땀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등골이 쭈뼛 섰다. 뜨악스런 비명같은 긴장감이 세포 마디마디를 얼렸다. 이선호를 염두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연회장에 들어와서 단 한 번도 선호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었다. 병신같은 신혜성… 미친 신혜성… 김명민 검사는 한심하다는 듯 나만 들을 수 있게끔 따끔한 충고를 계속했다. “초청된 기자분들도 왔구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신혜성씨는 공인이라는 말입니다.” “…예.”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이선호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꿈처럼 사라졌던 문정혁을 자꾸만 찾으려 했으니까. 김명민의 손을 뿌리쳤다. 어떻게든 문정혁을 찾기 위해 이리 저리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김명민 검사의 목소리가 한 템포 굵어졌다. 그의 무서워진 표정처럼. “신혜성씨.” 내 말투도 날카로와졌다. “그냥 확인만 하겠다는 거예요. 아무 짓도 안하고, 지금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얼굴만 보려는 거라구요. 예. 헤어졌어요. 헤어졌는데도 이래야 되요. 왜냐구요? 나두 모르겠어요.” “신혜성씨!” “…….” 김명민 검사는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내게 화를 냈다. 아니, 화인지 질문인지 모를 말을 꺼냈다. “당신은 사랑에 미쳤습니까?” 나는 웃지도 울지도 않는 기묘한 낯으로 대답했다. “…미친 사람은 미쳤다는걸 모르는데, 질문이 틀렸네요.” 문정혁을 찾을 것이다. 그 뒤는 모르겠다. 뺨을 때릴까. 칼로 찌를까. 아니면, 얼굴만 확인하고 지나칠까. 머릿속에 온통 문정혁 이라는 글자만 도배되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지난 3년간 자존심 때문에라도 잘 참았던 것이 파도에 부서지는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연회장 중간에서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한참을 돌아다녔다. 김명민 검사는 진즉에 나를 포기하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상관없다. 문정혁 얼굴 한 번만 보고… 아아, 내가 정말 제정신이 아닌가보다. 정말 이렇게만 생각했다. 갑자기 시야가 깜깜해졌으니까. “꺄아아악!!!” “!!” 하지만,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서야, 나는 내 시야만 까맣게 변한게 아니라, 연회장의 불이 모두 꺼졌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문정혁을 찾던 시선이 황급히 현실로 돌아왔다. 탕--!!!! “꺄아아아악!!” “으아악!!!” 난데없이 총소리가 들렸다. 삽시간에 연회장이 어수선해졌다. 와장창!! 장식들과 술병, 테이블이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시끄럽게 퍼졌다. 작은 조명까지 모두 꺼진 암흑 속에서, 달빛에 의지한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입구쪽으로 몸을 밀기 시작했다. 비명을 토해내는 연회장은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람들로 난리가 났다. 나도 이리저리 치이며 얼떨결에 입구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누가 내 팔목을 꽉 잡은 것이다. 설마, 혹시, 문정혁일까. 하는 어리석은 기대를 품었지만, 기대는 1초도 안되서 어긋났다. “가만히 있는게 좋을거야.” “!!!” 혼잡한 틈을 타서, 어두움 속에서 누군가 내 입을 뒤에서 꽉 막고 포박한 것이다. 귓가에 속삭이는 낯선 음성. 주인이 누군지 모르겠다. 단숨에 나를 포박한 괴한이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안돼… 안돼…!! 괴한은 단숨에 내 눈을 까만 끈으로 가렸다. 단 몇 분 만에, 내 몸을 봉고형 차에 태웠다. 벤…인가? 모르겠다. 시큼하게 쩔은내가 나는 차 안에 던져졌다는 것만 가까스로 확인됐다. 차 안에는 몇 명 더 있었다. 그들은 내 팔을 뒤로 꺾어서 밧줄같이 질긴 줄로 묶었다. 문정혁… 이 와중에도 문정혁을 생각할 수 있다는게 놀랍다. 나는 모든 것을 초탈한 낯으로 공허하게 읊조렸다. “김동완….” 암호식으로 대화하던 놈들이 흠칫 하며 말을 멈췄다. “혹시 이 안에 김동완도 있나요.”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를 패지도 않는다. 그냥 묶었을 뿐이다. 눈을 가리고, 차에 시동을 걸 뿐이었다. 문정혁을 본 충격이 가시지 않은 덕분에, 나는 괴한들에게 붙잡힌 현재 마저도 현실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현실을 약간 자각했을때 떠오른 인물은 단연 이선호였다. 그래서 물었다. 김동완이 있느냐고. 적막한 메아리만 돌아올 뿐, 누구도 내게 입을 열지 않았다. 부르릉- 차가 출발했다. 나는 미친년처럼 피식피식 웃으며 될 대로 되라 식으로 떠들었다. “없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김동완이 시킨거잖아. 이선호가 김동완한테 시키면, 김동완이 당신들한테 지시한대로 움직였을거 아냐.” 왜 내 인생은 이런 식일까.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문정혁이고 이철호고 전진이고 간에, 다 모른척 살았을때는 괜찮았는데… '그것들' 중 한 명이라도 나와 개입되면, 내 인생은 꼭 이런식으로 거지처럼 변하기 시작해. “만약 김동완이 이 차에 타지 않았으면, 전해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거칠게 인생이란 바퀴가 돌아가는 거야.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제대로 죽여달라고. 그런데, 내 몸이 죽어봤자… 내 심장, 내 뿌리는 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김동완. 당신처럼.” “입 막어.” “예!” 역시 김동완도 있었구나… 나는 피식 웃었다. 입에 재갈이 물리는 순간까지. 입을 막으라고 말 한 것은 분명히 김동완이었다. 다른 목소리는 다 잊어도, 하물며 '그것들'의 목소리를 잊는 날이 온다고 해도, 내 영혼은 김동완을 기억할 것이다.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줬던 김동완형. 그 끔찍한 목소리를 잊는 날은 아마 없을 것이다. 호텔 밖으로 빠져나가던 차가 잠깐 멈췄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렸다. “화성으로 끌고 가.” “형님. 같이 안움직이십니까?” 김동완이 내린 모양이다. “뒷처리좀 하고 갈거니까, 너희들끼리 우선 가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내리는 걸로 봐선 아직 호텔 주변인가본데… “신혜성.” 딱딱하고 메마른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김동완은 비웃는 듯 한 톤으로 내 전부를 으깼다. “소원대로 죽여주지.” 그는 나를 충분히 죽였었다. 지난 날 집단 강간당했을 시절부터 조금씩 조금씩 내 영혼을 갉아 먹었으니까. 차가 다시 출발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저희들끼리 떠들지도 않았다. 김동완의 지시가 있었나보다. 신혜성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나보다. 역시 김동완은 대단해. 나는 급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터지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옷깃을 다 벌린 기분이었다. 마지막에 심장에 꽂힐 칼을 기다리며. 5분 가량 유유히 달리던 차가, 갑자기 급커브를 돌았다. 끼이익-! 기우뚱 하며 내 몸이 차창에 세게 부딪혔다. “왜그래?” 침묵으로 일관하던 놈들이 당황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 섰다. “씨팔!!” “이 차들은 다 뭐야…!!” 카캉-!! 놈들이 몇마디 떠들며 당황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누군가 밖에서 차창을 때렸다. 와장창 부서지는 유리창. 다행히 내가 앉아있는 쪽은 비껴갔다. “혈랑단이다!! 씨팔!! 개새끼들!” “우와아악!!” 놈들은 혈랑단이라고 외치는 동시에 차 안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쇠파이프가 마찰되는 소리, 문이 벌컥 열리고 우루루 내리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김동완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나를 지키고 앉거나 나를 인질 삼으려는 대가리들은 한 놈도 없었다. 다들 겁에 질려서 무작정 무기를 들고 차 밖으로 달려간 모양이었다. 한동안 비명 소리와, 터지고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혈랑단이라면… 전진이 부장님으로 있다는 곳이다. 이민우도 있는 곳…!! 그러나 둘을 생각할 틈이 내겐 없었다. 밖에서 비져오는 남자들의 신음소리와 거친 욕설, 그리고 뇌가 깨지는 듯한 파열음에 질려서 벌벌 떨기만 했다. 차라리 앞이라도 볼 수 있으면 괜찮을텐데, 놈들이 시야를 가려서 두려움은 두 배로 커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주변이 고요해졌다는게 확인되었다. 얼마 안 가 누군가 내 몸을 안아서 차 밖으로 꺼냈다. 땅에 내려주나 싶었지만, 나를 안은 남자는 그대로 쭉 안고 어딘가로 걸었다. 이번에도 내 몸은 어떤 차에 태워졌다. “잠깐만요.” “……?” 나를 차 안에 내려주고, 안심하라는 듯 차분하게 입을 연 남자가, 후다닥 입에 물린 재갈을 빼 냈다. 프허- 뱃속부터 참았던 거친 숨이 빠져나갔다. 남자는 내 눈을 가린 까만 천쪼가리도 풀어줬다. 썬텐 된 차 밖으로, 시체처럼 널려진 청랑단 새끼들을 치우는 혈랑단원들이 보였다. 등 뒤에 묶인 밧줄까지 풀려서야, 나는 안심했다. 승용차 조수석에 무사히 앉아있다는걸 확인하자, 참았던 흥분이 되살아났다. 흥분이라는 이름표를 단 떨림. 정말 죽을 지도 모른다는 속절없는 두려움이 이제서야 피어난 것이다. 아까까지는 넋 놓고 있던 감각들이 '정말 무서웠어요.'하며 바들대는 것이다. “예. 형님. 예상대로, 청랑단이었습니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나를 꼼꼼히 눈으로 살피며 휴대폰에 대고 말한다. 상대쪽에서는 굉장히 흥분한 목소리들이 터져나왔다. 나는 그 목소리 중 하나가 전진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 옆에 앉아있는 남자와 통화하는 사람은 이민우라는 것도. “형수님은 무사합니다. 예.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누, 누구야.”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한 글자를 내뱉을 때마다 열 번은 몸이 떨렸다. “안심하십시오. 부장님 지시로, 저희들이 연회장에서부터 형수님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제 이름은 황태준 입니다.” “총소리… 아까… 연회장에서 총소리도 나던데, 어떻게 된거죠?” 황태준은 차를 출발하며, 내게 음료수를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해줄 것을 요구했다. 모든 것이 정신없었다. 철퍽철퍽 뛰어대는 심장은, 아직도 충격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황태준이 착찹한 낯으로 운전중에도 나를 봤다. “문정혁 부사장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알린 겁니다. 청랑단 새끼들이.” “청랑단이라면… 문정혁이 한명그룹 부사장인데… 왜… 어째서….” “이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직 잘 모르시나 봅니다.” “…….” “어제는 동지였던 사람들이, 내일은 적이 되는, 그런 곳입니다. 형수님.” “…….” “원래는 적이지만, 웃으면서 가끔 악수도 하는 곳이라고요.” “…….” “공포탄이었으면 좋겠지만… 만약… 사상자가 있다면….” “정혁이… 정혁이가 죽었나요?” “아뇨. 문정혁 부사장의 측근이 맞았을 확률이 좀 됩니다만….” “!!” 김검사님…? 김명민 검사가 제일 먼저 생각났다. 나는 그들도 알 수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누가 죽었어요? 누가 죽었냐구요!! 당신들은 알 거 아냐!! 황태준은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몇마디 말로 나를 안심시키려 할 수록 내가 발광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호텔방까지 함께 들어온 황태준과 혈랑단 몇 놈들 덕분에, 나는 밤새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새벽빛이 말려들어올 무렵, 나는 힘없이 속삭였다. “신문 좀… 누가… 사 와요… 될 수 있으면 종류별로 전부 다….” “예. 형수님.” 신문이 도착하기까지 짧은 사이에, 나는 깨달았다. 거부하고 싶은 운명이 다시 내게 찾아왔음을. 나는 거부하려고 할수록 '그것들'의 폭풍같은 거센 운명과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을. “저기… 태준씨… 진이는… 언제 와요…?” 내 가슴은 비열했다. 당장 눈 앞에서 볼 가능성이 높은 전진을 그리워했다. 문정혁이라는 비현실에서 벗어나니, 전진을 찾았다. 적어도 메마른 심장에 조금씩 활력을 불어주는 전진을 찾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예. 지금쯤 군산에서 일 처리 하시고… 오늘밤에는 도착하실 듯 합니다.” “네에….” “형수님. 저기 뭐… 마실 것 좀 사오라고 할까요?” “…2층에 가면 카페가 있는데, 진한 에스프레소 좀….” “예. 알겠습니다.” 그들은 나를 부를때마다 형수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천연덕스러울 만치 자연스러운 부름에, 나도 모르게 그때그때마다 대답했다. 신문을 쭉 넘기던 나는, 어떤 기사를 목격하고 발작하듯 웃었다. 하하하하하!! 하!! 하하하하!! 내 웃음소리에 놀란 황태준이 괜찮냐고 여러번 묻는다. 와자작. 신문을 구겼다. 마치 예고된 것처럼 재빨리 실린 기사 내용에 총이라도 맞은 기분이다. 신문에 실린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한명그룹 연회장에서 갑자기 정전이 일어났는데, 때마침 폭죽이 잘못 터져서 소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여러 신문사 중 한 곳에만 실렸다. “조재현이 누구지…?” 여러 번 머리를 굴렸지만 답은 오리무중이었다. 신문에 적힌대로라면, 한명그룹 건설부 BG장(이사급 임원) 조재현 BG장만 폭죽근처에 서 있다가, 큰 화상을 입어서 중환자실에 실려갔다고 짧게 한 줄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김명민 검사가 다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한편으론, 조재현 이사가 궁금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다쳤다는 걸로 봐서는 틀림없이 문정혁 측근일 것이다. 다음날 저녁까지, 나는 괜찮냐는 전화만 삼십 통 넘게 받았다. 최성수 사장은 아예 직접 호텔로 찾아왔고, 공유와 양종호는 이삿짐 옮기는거 도와주겠다는 명목으로 쭐레쭐레 나타났다. “공형사. 나 안 도와줘도 된다니까. 고모가 주문한 가구들이며 살림들은 내일 모레나 되서 도착해.” “양념치킨 사왔어!!” 그게 대답이냐고… 호텔에 계속 있자니, 조폭들이 내 방까지 돌아다니는 꼴이 걸리적거려서, 하는 수 없이 예정보다 빨리 아파트로 장소를 옮겼다. 급한대로 황태준이 이불이며 배게를 사왔다. 여전히 집 앞을 지키는 그들을 내버려뒀다. 예전의 나였으면 바쁜 스케줄을 탓하며 누가 곁에 따라붙는 것을 귀찮게 여겼겠지만, 현재는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누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이것은 겪어보지 않은 자는 모를 것이다. 숨을 들이쉴때마다 뼛속까지 얼리는 살벌한 공포가 몸 안에 침범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나는 전진이 내 곁에 억지로라도 우기면서 돌아온 것이 처음으로 고마워졌다. “쫑! 쫑! 이리 와 봐!” “응! 알았어~! 금방 갈게! 쫑!” 양종호한테 결혼 할 사람이 생겼다. 반찬가게 옆에 있는 화장품 가게 아가씨란다. 다리를 저는 양종호를 세상 누구보다 늠름한 왕자님으로 보는 여자. 평범한 생김새지만 깔끔한 옷차림이나 귀여운 말씨를 보면 양종호하고 참 잘 어울린다. 성이 조금 특이하긴 하지만… “우리나라에 팽씨가 있다는거 처음 알았어.” “야. 우리 쫑 앞에서 그런 소리 하면 죽는다.” “큭큭큭.” 양종호와 팽종희. 음… 계속 연상하다 보면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둘 다 가운데 이름이 '종' 이라서 서로를 부를때는 쫑! 쫑! 거린다. 아주 그냥… …눈꼴셔서 못봐주겠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팔랑거리며 우리집을 뛰어다니는 쫑양. 그런 쫑양이 귀엽다고 틈만 나면 웃는 쫑오. 쫑양과 쫑오의 결혼식이 기대된다. “옵빠! 싸인 해 주세여!!” 말투도 완전 애기같다. 내가 싸인해주자, 나 싸인받았다! 싸인받았다! 이러면서 좋아한다. 양종호는 마냥 좋았는지 우리 쫑 좋아? 좋아? 이러면서 난생 처음 보는 닭살 멘트를 줄줄이 내뱉었다. 공유 형사가 괜히 울컥하며 나선다. “쫑. 나도 싸인 있어! 나도 해줄까?” “싫은데요. 형사님은 그 발냄새좀 어케 해봐여!!” “아, 형~! 우리 쫑한테 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형은 그냥 종희라고 불러!” 순간 울컥한 공형사가, 미친듯이 '쫑,쫑,쫑,쫑,쫑.' 따발쫑을 발사했다. 뒤이어 두 쫑의 구타가 이어졌다. 예상된 참극이었다. 세사람의 옥신각신을 지켜보며,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이 사람들 덕분에 두려움을 잊을 수 있었다. “야. 시니컬한 버젼. 한 잔 받어.” “…….” 언젠가부터, 공형사와 양종호는 내게 시니컬한 버젼 이라고 불렀다. 아마 전서희를 닮아가면서부터,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밤 여덟시에 팽종희양이 집에 돌아가고, 양종호가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온 다음부터, 본격적인 술파티가 벌어졌다. 그동안 '그것들'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단 한 마디도 허락하지 않던 내가 서슴없이 어제 일부터 줄줄이 이야기를 꺼내자, 양종호와 공형사가 물 만난 생선마냥 열심히 화제에 동참했다. “그러니까, 순만이때부터 거슬러 가서, 이선호가 했던 짓들을 모으면, 그새끼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다는 증거가 된다더라고.” 몇 년간 목동 뒷골목에서 이선호가 고삐리때부터 했던 짓들을 조사했던 양종호가 소주를 한 입에 마시며 말했다. 나를 괴롭힌 것 말고도, 이선호는 이상한 짓을 종종 해왔었다고 한다. 전진과 약간만 스캔들이 나거나, 입소문이 나는 여자가 생기면, 그 여자를 반병신 만들거나 하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을 그 어린 시절에도 했다는 것이다. 한참 이선호에 대해 얘기하던 중, 나는 막 생각난 것을 물었다. “공형사. 그런데… 조재현 BG장이 누구야?” 공형사는 잠깐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천천히 설명해줬다. “문정혁 부사장의 든든한 심복이나 다름없던 사람이지 뭐. 요 근래에는 당연히 문정혁 편에 선 사람들이 대다수지만, 문도천이 사망한 당시만 해도 거의 모든 임원들이 이철호한테 붙었었거든. 근데, 조재현은 처음부터 문정혁의 편에 섰었어. 이철호에게는 당연히 눈엣가시였겠지. 아, 조재현 BG장은 문도천이 살아있을 때도, 문도천의 측근이었어.” “…….” “어제 일은 진짜 쇼크였어. 다들 그렇게 생각할거다.” “…….” “그 정도로 큰 연회장일 경우에는… 서로를 건드리지 말자는 불가침조약이 쭉 지켜져 왔었걸랑. 혈랑단이나 청랑단 할 것 없이. …이철호가 급하긴 했나보다. 검거될 예정이잖아. 그새끼 이번에 검찰에 출두되는거, 절대 못 막어. 막판에 발광했던거지.” “…….” 그뒤로 우리 셋은, 말 한 마디 하지 않고도 마치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술잔을 비워나갔다. 새벽동이 틀때까지…. 내가 진짜 부장님때문에 못살겠다. “유한락스 사왔어.” “하….” “내 따까리 중에 태준이라고 있는데, 걔가 알려줬어. 이사한 집에 갈때는 이런거 사가는거래.” “야… 전진….” “어?” 이마를 탁 치며 한숨을 내쉬는 내 눈치 살피다가, 이유없이 낯이 확 붉어지는 전진. 잘은 모르겠지만 자기가 실수한 거냐며 강아지같은 표정으로 나를 본다. “어휴… 그래도 그렇지….” “이따가 퐁퐁도 올거야.” “미치겠다… 큭… 큭큭….” “??” “하하하하하!” 진짜 배를 잡고 웃었다. 현관 문 밖에 있을 황태준한테도 웃음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세상에… 아무리 몰라도 그렇지. 전진은 내가 잠깐 이사 한 기념으로, 새집에 올때는 이런거 사오는게 맞다고 배웠다면서… 유한락스 400통과 퐁퐁 300개를 사왔다. 전진의 예고대로 오후 두시쯤에는 퐁퐁들이 쉴 새 없이 배달됐다. 작은 방 하나에 유한락스와 퐁퐁이 가득 찼다. 사은품으로 샴푸와 린스 세트 10개가 딸려왔다. “하하하하! 야! 그래도 그렇지! 합이 칠백!! 크크크크크큭.” “…….” 한참을 웃다보니, 전진의 시선이 한가득 느껴졌다. 눈물까지 맺혀서 웃던 나는, 천천히 웃음기를 거두며 허리를 들었다. 웃다가 쓰러지는 줄 알았어… “왜… 그렇게 쳐다봐?” “…….” 내가 웃는 걸 멍하니 내려보는 전진… 청바지에 가죽잠바만 입었는데도 근사한 태가 나는 전진이건만, 저 멍한 표정은 대체 뭔가. “전진…?” “…….” “왜?” “아니야.” 저녁식사 할 무렵에는, 전진이 주문했음직한 텔레비전이 도착했다. 앗, 내일 고모가 보낼 살림들 중에도 텔레비전이 있을텐데… 하긴. 한 집에 텔레비전이 한 대여야만 한다는 법은 없어. 텔레비젼 보면서 마냥 시간을 보냈다. 우리 둘 다, 연회장 사건에 대해서나 문정혁의 일과 관련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서로의 무의식이 서로에게 비수를 꽂을 언행은 조금도 하지 말라며 아우성쳤기 때문이다. 전진의 유쾌한 행동 하나하나에 나도 공포와 한기로 뒤덮였던 기억을 차차 지워나갔다. 아니, 잠깐이라도 잊을 수 있었다. 어둑어둑 해가 질 무렵, 꼬르륵- 배에서 신호가 왔다. 배고프다고 말 하기 무섭게 전진이 황태준을 시켜서 요리 재료를 준비했다. “공주야. 맛있어? 맛있어?” “응.” 사각형 두부가 동동 떠있는 구수한 된장찌개와, 겉절이. 그리고 따끈따끈한 햇반. 어린이용 수저세트. “글쎄, 여기 슈퍼에 어른용 숟가락이 다 떨어졌대. 지금이라도 다시 시킬까? 응? 그럴까?” “아냐. 이것도 나름대로 편리하고 좋아.” “…진짜 귀엽다. 공주야. 숟가락 들고 포즈 좀 잡아봐.” “그만 좀 찍어. 너 핸드폰에 저장 공간도 부족하잖아.” 나는 태어나서 남자가 김치담그는거 처음 봤지만, 이렇게 맛있게 요리하는 사람도 처음봤다. 배추를 30분만 절여서 좀 심하게 아삭거리긴 했지만…… 겉절이에는 보쌈이 딱인데!! 고기 사올게!! 라며 눈을 빛내는 전진을 억지로 바닥에 앉혔다. 아직 집에 식탁이 없어서 바닥에 신문지 깔고 앉았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마치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다. 목동 내 집의 좁은 거실 바닥에 신문지 깔고 앉아서, 전진이 요리한 여러가지를 먹었던 고삐리때로… “전진.” “엉?” “나 사랑해?” “당근이지!!” 뭐 그런 말이 되는 질문을 하냐며 뜨거운 된장찌개를 푹푹 잘도 떠먹는 전진 구경하다가,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전진.” “어엉.” “나랑 섹스하고 싶어?” “!!!” 컥!! 내 질문에 당황한 나머지 뜨거운 두부와 호박을 통째로 삼킨 전진이 바닥을 구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빨리 물 갖다 달라는 전진의 비명에 놀라서, 앉은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그러다 발견한건 소주병. 급한대로 소주병 내밀었다. 뜨거운 목에 소주를 들이킨 전진이 더 큰 비명을 토해내며 헥헥거렸다. “아주 나를 죽이려고 작정했지! 어?!” “하하하하하!” 식은땀마저 흘리는 전진. 완전 귀엽다. 나는 언제 전진에게 쌀쌀맞게 굴었냐는 듯 깔깔대며 바닥을 쳤다. 웃기거나 누구에게 따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습관이다. 양 손바닥을 바닥에 탁탁 치면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하하하하하! 큭! 크큭! 으하하하! 전진 완전 욱겨! 하하하하!” “…….” 그런데 전진이 또 조용해졌다. 한참을 웃다가, 나를 멍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전진 때문에 머쓱하게 머리카락을 북북 긁었다. 전진이 무릎발로 다가온다. 양반다리를 한 상태에서 바닥에 웃던 포즈 그대로 양 손바닥을 붙이고 있던 나는… 내 앞에 바짝 와서 소중하게 뺨을 그러쥔 전진을 떨리는 시선으로 올려봤다. 베란다의 달빛 아래, 불도 켜지 않고 낭만에 젖어 저녁식사를 하던 우리들… 영동대교 불빛이 찬란하게 비추고, 겨울 바람마저 촉촉한 빗물처럼 옷깃을 스치는 가운데… 전진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나도 눈을 감았다. 입술이 닿았다. 잠깐 떨어졌다. 그러다 내 입술을 다시 깊게 빨아들이는 전진의 숨결이 뜨겁게 다가왔다. 된장찌개 냄새 날텐데… 라는 생각도 잠시, 내 몸이 떨리는 만치 전진 몸도 떨리고 있음이 확인되자, 세상에 없는 달콤한 향기가 입안에 피어났다. 조심조심 입 안을 훑던 그의 혀가, 내 혀를 단단하게 빨아들이고, 비튼 숨결을 내뱉자니, 언제 그랬냐는 듯, 전신이 짜릿해질 정도로 사뿐사뿐, 천천히, 입천장과 혀끝, 치아를 건드려준다. 아… 전진… 사랑인지 아닌지, 옳은 행동인지 아닌지 따질 겨를이 없었다. 나는 어딘지 지쳐 있었고, 곪아 터질 만큼 심장이 외로웠다. 한때는 전진이 사랑이고 미련이었던 사람이라는 이유로, 내 비열한 심장은 문정혁 때문에 공허해 하면서도 전진을 향해 뜀박질을 했으니까. 나를 지켜주고, 나를 사랑해주는 전진이 차차 내 시선에, 내 영혼에 스며들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본능적으로 그의 몸을 거부하려고, 그의 가슴을 밀던 손바닥의 힘을 뺐다. 전진이 키스를 한 상태에서 내 등을 가볍게 팔로 두르고 천천히 바닥에 눕혔다. 차갑고 밋밋한 바닥이 전신에 닿았다. “아, 딱딱해….” “자, 잠깐만….” 지나치듯 흘리는 투정어린 말에, 전진이 화들짝 놀라서 쿵쾅대며 자기 가죽잠바를 바닥에 깔았다. 그것으로 부족해 보였는지, 현관문을 열고 나가서 밖에 있을 부하들 코트를 몽땅 빼았아왔다. 바닥에 널려진 코트들 위에 나를 조심조심 눕혀준다. 그리고, 자기 티셔츠를 후다닥 벗어서 돌돌 말아 배게를 만들어서 내 머리에 끼워준다. …큰방에 이불하고 요하고 배게 있는데… …나도, 전진도, 거기까지 생각을 못했다. 전진이 떠는 것 이상으로 나도 떨었다. 순간, 내가 왜 이렇게 떠는 걸까 고민했고, 고민과 동시에 해답을 얻었다. 문정혁과는 숱하게 섹스를 했었지만, 전진과는 단 한 번도 섹스 해 본 적이 없다는게 생각난 것이다. 그 생각 만으로도 이상하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전진과의 섹스. 마치 동정딱지를 떼는 것 마냥 내 심장도 쉴 세 없이 쿵쾅거렸다. 전진과의 행위. 그 느낌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강렬하고 시원했다. 아니다. 처절했던 만큼 허무하다는게 옳았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서투른 전진의 손길, 나를 만질 때마다 나보다 더 깊게 신음하며, 행위 도중 자기가 누굴 안고 있는지 멍하니 확인하다가 껴안는 전진.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가 나를 얼마나 안고 싶어했는지 입술과 혀가 닿을 때마다 깨달았다. 그와 내가 처음 만난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정사를 나눈 적이 없다는 것까지도. 절정도 낭만도 아닌 순수, 짙은 사막의 끝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모래태풍에 휩싸인 것마냥 비명을 삼키며, 깨달았다. “왜, 왜그래에.” “아, 아니야.” 행위 도중 그는, 자꾸만 나를 뚫어져라 내려봤다. 내 안에 자기를 끼운 채로, 내가 신혜성이 맞는지, 어디 도망가지 않았는지, 진짜 신혜성인지 확인한 다음, 처음보다 강하게 껴안아주었다. 그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미치도록 섹시하다. 전신이 감전된 것처럼 내 몸이 1초에 천번씩 터져나가… 그가 사정을 한 다음에야, 나는 내 머리에 혹이 백개쯤 났을 것을 직감했다. 바닥에 코트 깔아놓은 채로 행위를 하다 보니, 전진이 세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바닥에 누운 내 몸은 자꾸 뒤로 밀려났고, 절정의 순간에는 쉴 새 없이 벽에 머리를 찍어댔기 때문이다. 벽과 나, 그리고 전진. 셋의 섹스였다고나 할까. “내 머리….” “아, 안아파? 괘, 괜찮아? 혜성아! 공주야!” “귀아퍼엉….” 머리 부여쥐고 괴로워하다가, 전진의 괴성에 귀를 막아버렸다. 전진은 행위 도중부터 울더니, 지금도 왕방울만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아흑. 죽은 줄 알았어. 내께 너무 커서 공주 니가… 어흐윽.” 조금 부끄럽다. 전진과 거의 동시에 사정했었는데, 그때 나는 진짜 온 몸을 부르르 떨어가며 축 늘어졌었기 때문이다. 전진은 내가 잠깐 죽은 줄 알고 뺨도 살짝 때렸었다. 아직 내 위에서 불규칙한 숨을 내쉬며 상기된 뺨과 턱 밑에 땀방울을 떨어뜨리는 전진을 보자, 장난기가 발동했다. “나 죽었어. 꼴까닥.” “!!!” “뚜… 뚜… 뚜… 뚜… 뚜… 뚜….” “뭐야!? 여보세요? 여보세요? 모시모시? 헬로우?” “뚜… 뚜… 뚜… 뚜… 뚜… 삐이---” 냉큼 눈을 감고 죽은척 했다. 뒤이어 아파트가 부서져라 어마어마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아!! 공주야!! 공주야!! 죽으면 안돼!!! 죽으면 안 돼!!!! 공주!! 공주!!!” “윽!! 목소리 너무 커!! 전진!! 가뜩이나 아픈데….” “아파서 어뜩해. 우리 공주. 아까 보니까 되게 좁고 귀엽던데, 다 찢어졌겠다.” “야!! 그렇게 노골적으로 설명하지 마!! 아, 아프단 말야.” “…….” “왜?” 전진이 자꾸 내 알몸을 훑어보는게 창피해졌다. 주섬주섬 주변에 있는 코트로 밑을 가렸더니, 전진이 그것으로도 감동에 찬 어절을 빚는다. “진짜 섹시하다.” “뭐어?” “하아… 조금 가린게 더 섹시하다더니, 그 이론이 맞는 거였어.” “전진…? 전진.” 전진 눈빛이 이상해졌다. 설마… 말도 안돼. 사정 한 지 10분도 안됐는데… 전진이 허스키한 숨을 토해내며 상체를 숙인다. “응. 오빠 또 전진한다. 하아… 이렇게 일어 서 봐. 이번엔 욕실에서 샤워해요 자세로 해보자.” “!!!!” 이 짐승이 지금 뭐라는 거야!!? 하긴 뭘 해!! 뭐? 욕실에서 샤워해요?! 변태!!! 온 몸으로 발버둥 쳐봤자, 전진의 애무 앞에서 나는 속절없이 야릇한 비명을 토해 낼 뿐이었다. 물론, 간간히 웃긴 말을 하는 전진 때문에 분위기를 깨뜨리며 웃기도 많이 웃었다. “우리 혜성공주, 정말 예쁘다. 쪽~ 쪽~ 쪽~” “간지러워….” “움~하! 쪽~ 쪽~ 쪼옥~!” “…….” 내 볼에 바람을 크게 담고 꾹 눌러서 터뜨리는 전진. 행위가 끝나자마자 쭉 끌어안고 쉴 새 없이 뽀뽀하는 전진. 이마와 볼, 코, 입술, 몇 십 번, 몇 백 번이 되도록 멈추지 않고 예쁘다며 뽀뽀하는 전진. 그런 전진에게 간지럽다고 그만하라고 투덜대던 나는… 결국 큰소리로 울어버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 때문에…? 안도감에 밀려서…? 오랫동안 지켜온 냉정한 가슴이 소리없이 증발해버려서…? 그렇게, 두 번 다시 열지 않으려던 마음의 문을, 그가 모조리 다 열어버렸다. 문정혁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이것도 고맙다고 해야 할까… 현실에서 나를 완전한 나로 만들어 준 네 덕분에, 심장이 조금씩 뛰기 시작해… 제대로 사귀는거야. 알았지? 라고 설명해도 전진은 잘 못 알아듣는다. “공주야. 나는 진짜 신기해. 너를 보고 첫눈에 빠진것도 신기하고, 몇년씩 못봤을때도 니가 옆에 있는것처럼 나는 든든했었거든. 위급한 순간에도 은근히 몸을 사리게 되고 그랬어. 우리 공주랑 이렇게 만날 때를 대비해서.” 사귀다 보면 서로에게 실망할 때가 오고, 싸우기도 많이 싸울거야. 우리가 지금까지 싸웠던 것처럼 큰 일들 말고, 사소한 습관이나 가치관 따위로 말이야. 라고 해봤자 전진은 이해하지 못한다. “공주야. 나는 그냥 니가 하는 방식이 내가 하는 방식이야. 왜 자꾸 그런 소릴 해? 우리 공주는 나의 충성심을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밥도 해줄거고, 씻겨줄거고, 어디 갈때마다 가급적 데려다주고 데릴러 갈거야. 혜성공주가 좋아하는 티비 프로그램이 나도 좋을 거고. 왜 자꾸 나한테 앞으로 싸우게 될거라고 예고해?” 어쨌든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지다가 싸우는 순간이 오면, 이해와 타협으로 잘 이겨내보자고 진지하게 제안해봤자, 전진은 들은 척도 안한다. “그런 일 없어. 우리가 싸울 일은 없을거야. 왜냐면 내 의견은 무조건 공주의 뜻에 따라갈 테니까.” 왜 이렇게 말귀를 못알아들어!! 라고 나는 소리쳤다. 어제 먹다 남은 겉절이와 된장찌개로 대충 아침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좋은 마음으로 좋게좋게 이야기하던 나는 흥분했고, 전진이 인상을 팍 썼다. 나를 위하는게 자기 뜻이라고 우기는 식으로 전진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신공주!! 왜 자꾸 아침부터 이상한 소릴 해!! 그냥 잘 지내면 되는거지!! 우리가 왜 싸울거 걱정하냐고!! 나 공주 너랑 싸울 일 없을거고!! 다 니뜻에 맞춰줄거라고!!!” “말 잘했네. 이런식으로 의견불일치 되는 상황을 싸우는 거라고 하는거야!!” 내 말에 전진이 황당하다는 듯 가뜩이나 큰 목소리로 다다다 쏘아붙인다. “이게 뭐가 싸우는거야!! 아니, 그래!! 존나!! 너는 왜 싸우게 만드는건데!!” “전진… 씻다운.” “아까 너랑 씻었잖아!!” “…앉으라고!!!” 부글부글대는 화를 참으려 했지만, 벌떡 일어나서 담배를 입에 무는 전진 보고 꼭지가 돌았다. 뭐야 진짜. 초장부터 이래가지고 제대로 사귀겠냐고… “야. 전진. 나한테 잘 맞춰준다고 큰소리 뻥뻥치더니, 이게 뭐냐?” “내가 아침 차렸잖아.” “하…….” “?” 짜증난다. 어디서부터 교육시켜야 되는거지? 아니, 전진에게 교육이 가능한건가?? 아침 차리는거 말고, 씻겨주는거 말고, 내가 뭐뭐 하자~ 어때? 할때, 응 좋아- 라고 한번에 대답할 순 없는거냐고. 내가 기억하는 전진은 내가 하는 말을 잘 따라줬던것 같은데… …아닌가보다. 사실 전진과 내 사이에는 옛날부터 우여곡절이 많아서 단 둘만의 문제에 직면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혹시 내 마음대로 전진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던게 아닐까. 누군가와 사귀는 초창기때는 무조건 설렌다. 상대의 단점이 안 보이니까. 상대와 나의 공통점만 자꾸 보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차이점이 발견된다. 오래전 문정혁과 사귀었을때 깨달은 점이다. 반면 전진과 나는 기묘한 상황에서 사귀게 되었다. 아직도 그의 출현이 믿어지지 않는 현재. 우리는 오래전에 잠깐 사귀었다가 헤어졌던 옛날 연인이며, 사실 설레임같은 푸릇한 감정은 고교 시절에 충분히 경험했었다. 그래서, 섹스까지 한 지금은, 그와 알고 지낸 시간만큼 장시간 사귄 연인 같은 분위기가 난다. 그게 문제였다. 제대로 사귀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는 잘 모른다는 것. 각자 서로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부분이 전부인 양 구는 것. 전진이 자신있어하는 '맞춰주는' 부분은 그러고보니 문정혁이 잘 하는 거였다. 적어도 문정혁은 자신이 내게 잘 맞춰준다고 자신있어하지 않았다. 만약 나와 마찰이 생길 때의 문정혁은, 섣불리 떠들지 않고 입을 다물거나, 상황을 가볍게 넘겨주거나, 아예 마찰이 생길 일을 만들지 않았으니까. 전진과 사귀기로 결심하고 섹스한지 하루도 안 지나서, 나는 벌써부터 문정혁과 전진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우리 잘 지내보자 진아. 제대로 사귀는거야. 알았지? 라고 상큼하게 말 한 번 꺼냈다가, 괜히 서로 소리만 질렀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공주야! 공주야!” “아… 왜.” “이거 봐바!” “응?” 그래도 전진의 최대 장점을 찾으라면… 문정혁처럼 오랫동안 삐져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쀼루충한 낯으로, 흥분해서 나타난 전진의 팔을 밀쳤다. 전진이 내 반응에 엥? 하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방금까지 서로 큰소리쳤던게 이제야 떠올랐는지 미안~ 하면서 꼭 껴안는다. 확실히 전진은 지 멋대로 흥분하고 소리 지르는 만큼, 풀리기도 금방 풀린다. 언제 방에 들어갔던건지 유한락스들 틈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갖고 나온 전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니까 계속 화도 못내겠다. 전진이 가져온 물건은, 유한락스인지 퐁퐁인지, 하여간 둘 중 하나에 붙어있던 사은품이었다. 어린이용 조립식 장난감. 혹은 플라스틱 컵. 사각형 케이스마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사은품들. 이런게 붙어있었다니. 나도 금방 흥분해버렸다. 어제 자세히 관찰하지 않아서 이런게 뒤에 붙여있는지 몰랐나보다. “아니, 뭐야뭐야? 하나씩 다 붙어있네?!!” “선우용여같다. 뭐야뭐야? 귀여운 우리 공주.” “시끄렁. 비켜바바.” “뭐야뭐야~ 오빠는 찬밥인거야 뭐야뭐야~” “야… 전진… 큭큭큭….” 전진이 내 귀에 대고 선우용여 흉내를 낸다. 뭐야뭐야~ 자기자기~ 좋아좋아~? 뜬금없는 전진의 성대모사에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표정까지 선우용여하고 똑같은 전진 때문에. 하여간 이 짐승은 단순한 만큼 때를 놓치지 않고 웃길 줄도 안다. 어쨌든 작은 방에 가득찬 유한락스 상자. 상자 뒷부분에 접착 테이프로 납작하게 붙어있는 사은품들을 발견했던 전진은, 내가 마구 좋아하자, 마치 자기 덕분이라는 듯 칭찬해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귀여운것. 전진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전진은 '뭐야뭐야~ 이게 다야?' 하면서 마지막까지 선우용여 흉내 내는 것으로 나를 웃음바다에 쓰러뜨렸다. 전진 못지않게 나도 엄청 단순하구나… 이럴때의 우리는 참 닮았다. 그래서 좋을때는 쿵짝이 잘 맞는건가… “공주야! 이거 만들어보자! 어?” “그래? 그래!” “다 조립하면 헬리콥터가 되는건가…?” “진아! 진아! 이것봐!” 퐁퐁 사은품 중 하나인, 시리얼 샘플을 북 뜯었다. 흥분한 나머지 내 목소리 만큼이나 콧김이 쉭쉭 나왔다. 헬리콥터 조립을 뜯기 시작하던 전진이 내 옆에 냉큼 다가와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 “우리 공주는 천잰가봐. 암만 봐도 먹을건 없던데!!” “락스 같은거 보통 엄마들이 많이 사잖아~ 그래서, 애기들 장난감이나 주방용품 샘플이 사은품으로 붙어 있나봐. 나는 좀 소중하니까 이걸 먹어야겠어.” “나도나도.” “싫어. 나만 먹을거야.” 시리얼 봉지를 품에 안고 샥 돌아서자, 전진이 큰 소리로 웃으면서 내 머리칼을 푸스스 쓰다듬는다. 그냥 이런저런 유치한 말 하는 지금이 좋은가보다. 두근… 가벼운 티에 청바지 차림인데도 불구하고, 아침햇살을 담뿍 받은 전진은 굉장히 근사하다. “사은품만 싹 다 뜯어서 팔아버릴까? 그 돈으로 우리 공주 옷 사줘야지.” “진짜?! 진짜?!! 진아!! 나 옷 사줘!!” “말 나온 김에 지금 옷 사러 갈까?” “엉!! 구두도 사주고!! 이따가 맛있는것도 사줘!!” 언제 다퉜냐는 듯, 나는 전진 허리에 팔을 두르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전진이 흐뭇한 낯으로 나를 내려보며 내 어깨에 단단하게 팔을 두른다. 사랑스러운 눈으로 나를 내려보는 전진. 행복하다. “가자. 오빠가 공주를 위해 세상을 다 쓸어버린다!” 내 행복이 자기 행복이라는 전진. 삼년이나 유지해온 메마른 가슴을 완전히 녹여버린 전진. 오늘따라 늠름하고 멋있어 보이는 전진. 즉흥적이고 아이같은 면이 조금은 나와 닮은 전진. 우리는 당장 밖으로 나갔다. 집 앞에서 대기중인 황태준과 부하들이 콧물을 훌쩍이고 있었다. 전진이 아차 하며 집 안 거실에 내팽겨쳤던 코트를 수거해줬다. 그는 황태준에게 사무실로 먼저 가있으라는 말만 휙 던지고 내 어깨를 꽉 끌어안은채 엘리베이터에 탔다. 예나 지금이나 전진은 남한테 그리 친절하지 않다. 전진과 나는 현재에 집착했다. 나는 메마름이 사라졌음에도 가슴을 적시는 뜻모를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로움 속의 또다른 외로움에 의문을 자아내며, 그것이 사라지길 빌면서 전진과 웃고 또 웃었다. 전진 또한 일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즉흥광시곡처럼 현란하게 펼쳐진 짜릿한 행복을 음료수처럼 끊임없이 빨아들일 뿐이었다. 우리의 행복은 좁은 스트로우 구멍같았다. 힘껏 빨아들일수록 부족함을 느꼈다. 음료수 안에서 버석대는 커다란 얼음알갱이들의 방해가 걸리적거렸으니까. 그래서 우리의 행복은 갑자기 피어난 만치, 불완전했다. 이 점을 나나 전진이나 둘 다 느끼고 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냥 잘 사귀면 되는 건데 대체 왜…? “완전 힘들다.” “힘들어?” “응.” “우리 공주… 힘들면 안되는데… 힘들지마라~ 힘들지 마라~” “하하하하. 뭐야~” 패밀리 레스토랑 창가에 앉자마자 볼멘소리를 냈다. 전진이 요술을 부린답시고 바람을 훅~ 불면서 장난친다. 힘들지 마라~ 우리 공주 힘들지 마라~ 볼을 부풀리고 훅~ 하는 전진의 표정이 워낙 웃겨서 나는 탁자를 치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 나를 알아본 레스토랑 지배인과 알바생들이 우리쪽 테이블을 자주 돌아다녔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시간 넘게 쇼핑한 흔적들을 쓰다듬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전진은 그동안 내게 못해준게 한이 되었는지 백화점에서 걷는 족족 사재기 해버렸다. 저거 괜찮다- 라고 은연중에 말만 꺼내도 전진은 자동으로 카드를 직원에게 쓱 내밀었으니까. 어두운 수트차림에 선글라스를 셔츠 주머니에 낀 전진. 굉장히 근사하다. 사실 내가 지불해도 괜찮은 가격들이었지만, 전진은 한사코 고집부리며 자기가 다 사버렸다. 덕분에 재벌들만 갖고 있다는 아멕스 골드 카드 구경 실컷 했다. 고삐리때의 우리들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전진이야 그때도 가능한 데이트일지 몰라도, 나는 가난했으니까. “왜?” “아, 아냐….” 고삐리때의 전진을 떠올리느라 내 표정이 멍해졌나보다. 전진이 왜 그러냐고 묻는 소리에 퍼뜩 정신 차렸다. 그러고보니, 전진은 언제나 '내 상황'에 잘 맞춰줬구나… 내가 돈이 없던 시절에는 월미도 데이트. 내가 여유로워진 현재에는 거리낌없이 백화점으로 돌진… 문득, 칠천원짜리 쪼리를 신고 머뭇거리던 나를 보고, 쪼리가 환상적으로 잘 어울린다고 칭찬했던 열 여덟의 전진이 생각났다. 그것으로도 가슴 한 켠이 뭉클하게 달아올랐다. “우리 크리스마스때 뭐 할까.” “음… 글쎄?” “공주야. 그때 스케줄 없지?” “아마 없을거야. 잠깐. 진짜 며칠 안 남았네?” “해외로 뜰까?” “왠 해외? 싫어. 새집에서 크리스마스 트리 만들고 놀거야. 딴 때라면 몰라도 크리스마슨데!” 전진은 내 말에 깜짝 놀라며 칼질을 멈췄다. 유연하게 스테이크를 자르던 그의 손이 굳는 것을 보고 나도 샐러드를 뒤적이던 포크를 내려놨다. 왜? 하고 표정으로 물었다. 전진이 머쓱하게 웃는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 쿵…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공주하고 크리스마스 트리 만들거 생각하니까, 일곱살 꼬마가 된 기분이다. 이거… 설레는데?” “…….” 이상하게 눈물이 나올것 같다. 서둘러서 샐러드를 우걱우걱 삼켰다. 전진도 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고기를 씹었다. “새아빠가 나한테 잘해주긴 했어도 크리스마스때는 바빴었거든. 영업일을 하셨어서….” “으응….” 대체 '무엇'이 전진과 나를 그토록 이어주고 있었나- 내심 궁금했었다. 문정혁이 내 영혼을 차지한 시절이 훨씬 길었던 인생이고, 전진과는 어긋나고 헤어졌던 기간이 대다수였던 나로서는 언제나 의문이었다. 어째서 전진과 나는 끊어질 듯 짧게 짧게 이어졌을까. “가끔 한명그룹에서 임원 이상 가족들을 불러서 연회장에서 근사하게 파티 할 때… 문도천… 아니… 친아버지 등 뒤에서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본 적이 있어. 아주 어렸을때 가끔 연말 파티때 갔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는데… 아마 그때 본 트리가 전부였을거야. 내 기억에서는….” “…부모님이랑 크리스마스 트리 만들어 본 적은 없었어?” “한 번도 없었어. 공주는?” “…나도… 뭐…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같이 만들었지. 그 뒤에는 그냥… 혼자….” 우리가 왜 이어졌을까. 긴 시간 헤어졌다가 만나도 왜 어색하지 않을까. 답은 하나였다. 전진과 나의 과거 상처가 닮아 있다는 것. 우리 둘은 과거의 상처를 서로가 보듬어주는 위치였다는 것.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우리의 끈은 질기게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한가로운 일요일. 평범한 사람들처럼 전진과 데이트했다. 비록 사람 많은 영화관에는 못 갔지만, 겔러리아 쇼핑, 드라이브,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기.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신이 났다. 전진은 3년 만의 평화를, 나는 3년만의 자유를 만끽했다. 누구도 우리를 방해 할 수 없을 것같았다. 우리 자신 외에는… 어두운 이야기가 나올 조짐이 보이는 즉시 우리는 신나게 가요를 불렀다. 둘 중 한 명이 먼저 부르면 다른 사람이 아무렇게나 따라 부르는 식이었다. 저녁 일곱시 무렵, 웬일로 말없이 운전에 열중하던 전진이 차창 밖 어딘가를 턱짓으로 가리킨다. “저기 들어가서 잠깐만 쉬었다 가자.” 두근… 전진의 담담한 표정과 상반될 만치 내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점점 가까워지는 호텔… “왜… 하고 싶어졌어?” “응. 아님 차에서 할까?” 크리스마스 트리 얘기 이후로, 우리는 서로를 단단하게 연결해준 고리를 깨달았고, 새삼스러운 확인을 필요로 했다. 침대에 발가벗고 누워서 서로를 탐하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호텔이 가까워진다… 전진은 차에서 할까? 정말 그럴까? 말하며 눈을 번쩍였다. 나는 휙 고개를 틀며 뿔룩 입술을 내밀었다. “싫어. 가뜩이나 파파라치가 따라붙을지도 모르는데….” “파파라치?” 전진이 귀엽다고 혼자 웃으며,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누른다. 전진의 팔을 탁! 치워내며 나는 짜증스레 말했다. “그래. 너 막 누가 나보고 멀리서 '신혜성이다. 신혜성.' 이렇게만 속삭여도 발끈해서 따지려고 했었잖아.” “기분 나쁘니까 그렇지. 어딜 가도 우리 공주보고 신혜성이다. 신혜성이다. 아가사다. 아가사다. 이 지랄 해대는데! 오빠가 가만 있냐!” …너보고 사람들이 겁먹어서 싸인해달라고도 못했어… 한낮의 짐승쑈였다고나 할까. 누가 조금만 나 쳐다봐도 전진은 워억- 워억- 서울에 사는 고질라같았어… “쌰럽. 목소리는 댑따 커가지구!! 전진! 그리구 욕하지 마! 지랄이 입에 붙었어.” “아, 다 와 간다.” “…….” 데이트를 잘 하다가 느닷없이 호텔에 들어간 적… 한 번도 없다. 그러니까, 문정혁하고 사귈때, 충동적으로 호텔 간 적이 없었는데… 전진은 진짜 짐승인가봐… 내가 꼬물거리자 전진이 피식 웃으며 호텔 쪽으로 차를 턴한다. 새삼 근사하다. 전진이 유연하게 핸들을 꺾는 동작이… “그리고 내일은… 텔레비전도 보지 말고, 하루종일 옷 다 벗고, 집에서 놀자.” 내일이라면… 월요일이 아닌가. 이철호가 검거되는… 분명히, 뉴스에 보도되고 난리 날텐데…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일부러 유쾌하게 전진에게 물었다. “옷 다 벗고?” 그가 호텔 정문에 차를 세우는 즉시 근사하게 한쪽 눈을 감고 윙크한다. “어. 우리 공주는 특별히 앞치마만 하고 있어.” “변~태.” 도어맨이 문을 여는 동시에 선글라스를 썼다. 전진이 나를 배려하는 차원으로 먼저 호텔에 들어갔다. 곧 도착한 호텔 15층 룸…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복도를 걸었었는데, 탁… 문을 닫는 즉시, 우리 둘은 기다렸다는 듯 세게 끌어안고 엉겨붙어서 방 입구에서부터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쪽, 쪽, 쪽, 쪽, 쪽, 쪽, 쪽… 뺨, 입술, 코, 이마, 목 할 것 없이 내 몸, 옷 밖에 약간이라도 살이 비치는 곳에 전진의 입술이 빠르게 닿았다. 그리고 그의 손이 향하는 곳은… “전진… 전지인… 내 옷… 찢지 마….” 찰싹- 전진의 손짓이 조금 과격하다 느껴지는 걸 캐치하자마자 쳐 냈다. 그제야 미친 입맞춤을 중단한 전진이 몽롱하게 풀린 시선으로 나를 내려본다. “하아… 너도 속으로 좋으면서.” “으씽.” 맞는 소리다. 내 안에 이런 저질이 있었다니. 전진은 어제 섹스도중 갑자기 속에 껴입기용 반팔 흰색 티셔츠를 내게 입혔었다. 그리고 입히자마자 짐승같은 신음소리를 내며 북- 찢어버렸다. 어찌나 황당하던지… “찢지마… 응?” 전진의 어깨에 입술을 묻은 상태에서 매달리듯 물었다. 나를 꽉 껴안고 하나씩 옷을 벗기며 침대쪽으로 향하던 전진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오싹한 한기와 쾌락이 번갈아가며 심장을 터뜨렸다. “그럼 공주도 내 옷 찢어.” 참 좋은 생각이다. 나는 더이상 찢지 말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뭐 가끔 옷도 찢어주고 그래야 경제가 사는 거야… 침대에 누울 때의 우리는 맨몸이었다. 그는 손가락에 타액을 묻히고 내 아래를 더듬고, 곧장 삽입했다. 흐읏, 허리가 들리고 촉촉하고 뜨거운 내 안이 그의 것으로 꽉 찼다. 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전진의 플레이는 진짜 짐승의 섹스같았다. 잘 누워있는 나를 번쩍 들어올려서 체위를 희귀하게 바꾸질 않나, 절정의 순간이 코앞인데 욕실에 달려가서 물줄기를 맞으며 사정하질 않나… 옷 찢는 기술도 전진에게 배웠다. 아니 왜 나한테 이런걸 알려주는거냐. “보지 마아… 바보야.” “안 보여….” 다 보이는거 알거든…!! 나는 모른척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내게 삽입한 상태에서 허리를 야하게 돌릴 때도, 전진은 내 아래에 자기 것이 왕복운동하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곤 한다. 뭐랄까. 진짜 본능적이다. 그러나 행위는 과격할지 몰라도 나를 배려해주는 건 잊지 않는다. “아… 아퍼.” “아… 알았어.” 조금만 아프다고 하면 천천히 조심조심 애무하고 움직여주니까. 내 것을 살짝 쥐고 부드럽고 빠르게 마스터베이션을 해 주는 동시에 허리를 빨리 움직이던 전진의 동작이 개미 똥만큼 느슨해졌다. “쎄… 쎄게 해도 돼….” “아프다며.” “…….” 그렇게 무심한 눈으로 내 안에 너를 끼운 상태에서 내려보면… 미칠것 같잖아… “앙탈쟁이.” “아… 진아….” “니 몸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야아… 그런 말 좀 하지 마앙….” “좋으면서.” 이게 진짜!! 그의 몸에 주렁주렁 맺힌 땀방울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그가 희미한 신음을 토해내며 와락 껴안아준다. 점점 거세어지는 그의 동작. 실눈으로 살짝 확인해도 안면이 붉어질만치 야하고 섹스러운 전진의 움직임. 하나가 될 때 터지는 우리의 교성. 그의 잔근육이 좋다. 나와 하나가 될 때 터뜨리는 허스키한 음성이 좋다. 그의 불규칙한 호흡 속에 발광하는 내 몸짓이 좋다. 그가… 나를 사랑해주는게 좋다. 그것들을 통해 배운 사랑, 그리고 외로움. 외로움이 무엇인지 알아버린건 내 인생의 치명적인 실수이자, 운명이었다. 외로움을 채워주는 전진을 도저히 놓을 수 없다. 그가 나를 놓지 못하듯이… 정사가 끝난 뒤, 어젯밤처럼 내 안면에 한참이나 뽀뽀하는 전진… 신이 허락한 '사랑'의 양을 한번에 폭팔하듯 내게 퍼붓고 있었다. 나는 전진의 풍부한 애정공세가 문득 불안해졌다. 천천히 스무스하게 다가왔다가 나중에는 잊기 힘든 바람이 되었던 문정혁과 전혀 반대인 전진이 불안해진 것이다. 열정을 한번에 폭팔한 전진이 쉽게 그 열기를 꺼뜨릴까봐… “진아… 넌… 두렵지 않아?” “뭐가?” 전진의 품에 푹 안긴 상태에서 어지러운 질문을 던졌다. 전진이 무슨 소리냐며 어깨를 으쓱한다. 나는 잠깐이지만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아니야.” “뭔데. 궁금하게 해 놓고, 말 안 할 거냐.” 그가 내 턱을 살짝 쥐고 자기와 마주보게 한다. 내 어깨를 꽉 그러쥐고 약간 상체를 올려서 나를 내려보는 전진… 그의 눈동자에 별 같은게 반짝거린다. “그냥… 우리는 늘 한참 설레이던 시절까지밖에 안 겪었잖아. 그런데… 사람이 사귀다보면 못 볼 꼴도 보고, 밑바닥까지 싸우기도 하고 그러잖아. 서로 진짜 성격도 보게 되고….” “우리 많이 싸워봤잖아.” “그건 주로 외부적 요인들 때문이었잖아. 그냥… 그냥 우리 둘만 보고 하는 소리야.” “잘… 이해가 안 된다.” “전진. 너… 애인하고 제일 오래 사귄게 얼마나 돼? 누구랑 제일 오래 사귀었어?” “너.” “어휴… 나랑은 제대로 사귄 게 아니지… 바보야….” “몰라. 아침에 했던 말 또 리바이벌하는거야? 우리 공주. 뭐가 두려운데?” “아니… 내 말은… 사귀다보면 분명히 서로의 가치관이나 성격이나 뭐 그런걸로 싸울 날도 있을테고, 싸우다가 누군가는 꾹 참고 넘어갈 때도 있을 거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에 쌓이는 불만이라는 게 생길지도 모르고….” “밥 시킬까?” “야. 말 돌리지 마.” 내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전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비슷하게 흥분하고 비슷하게 즐거워한다는 단점이 있다. 나는 우리의 장점이자 단점이 훤히 보이는데 전진은 아닌가보다. “걱정을 왜 사서 하냐. 공주야. 우리는 절대 싸울 일 없어.” “…나는… 너의 그런 확신이 걱정돼. 설레임만 영원할 순 없는거잖아.” “…….” 전진이 입을 꾹 다물고 갑자기 일어나서 옷을 입는다. 울컥. 그모습에 나도 이상하게 화가 치밀어서 상체를 일으켜서 앉았다. “전진. 너는 늘 내게 맞춰준다고 하지만, 그게 영원할 순 없는 거야. 나… 니가 나한테 맞춰주는거에 익숙해졌다가, 언젠가 니가 막 폭팔하거나 그러면 감당 못할 거야. 상처가 클 것 같거든.” “어후!! 좀!! 이 오빠를 믿어 봐라!! 어? 상처 안 받게 할게!!” “…그럼 그런거지 왜 소릴 질러!! 말투도 짜증스럽고 난리야!!” “자꾸 짜증나는 말을 하니까 그렇지!!” 말 몇 마디 크게 한 것만으로도 나는 심장이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내게 잘 하는 전진인 만큼, 내게 조금만 서운하게 하는 전진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울먹거리며 한 방울의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전진이 화들짝 놀라서 다가오더니 나를 억세게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준다. “알았어. 알았어.” “저리 가. 뽀뽀하는 식으로 대충 넘기지 말란 말양.” “알았어. 알았어. 알았어.”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내가 서운해하거나 울면, 이렇게 달래줄거지… 그렇지? 외로움을 벗겨도 외로움이 나오는 이상한 내 심장… 어쩌면 3년 전, 문정혁에게 받은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음을 온 몸으로 증명하는 나. 전진은 쉼없이 나를 토닥여주며 변치 않을 것임을 누차 강조했다. 호텔에서 체크아웃 한 시각은 밤 열한시였다. 회사에 가봐야겠다며 서두르는 전진을 말똥말똥 구경하다가 자고 가야겠다- 생각했는데… 전진은 나를 번쩍 안고 욕실에 데려가서 씻겨줬다. 물론, 샤워물줄기 속에서 한 번 더 섹스했다. 짐승… 왜 또 나가냐고 징징대는 내 입술에 꾹~ 입술도장을 찍은 전진은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떨어져 있으면 안 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자기 일하는 사무실까지 나를 데려갈까. 차라리 고모집에 가서 하루 잘테니까 내일 데릴러 오라고 설득해도 소용없었다. 전진은 기어이 자기 사무실까지 나를 데려갔다. “형수님 나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태준씨.” 삼성동 코엑스를 스치고 빌딩숲 중간 골목을 들어서면, 한명 그룹 소유의 건물이 나타난다. 천하의 혈랑단이 빌딩숲 한복판에 있다니? 눈이 띠용- 나올 만치 놀랍다. 22층 건물의 21층과 22층만 전진의 사무실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황태준과 부하 몇 명이 구십도로 허리를 숙이며 나와 전진을 맞아 주었다. 그나저나 삐까뻔쩍해 보이는 사무실인데… 여기서 싸움질 연구라도 하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벽을 주먹으로 톡톡 두드렸다. 전진이 그런 내 팔을 확 잡아당긴다. “대책 회의 같은거만 여기서 해.” “아….” 내 표정에 질문이 써있나…? “황태. 뭐 마실거 있냐?” “예. 부장님 좋아하시는 생수하고 팥빵은 냉장고에 있고요, 밑에 자판기에서 뭐 좀 뽑아 오겠습니다.” “공주야. 뭐 마실래?” 카라멜 마끼아또- 라고 신나게 말하려 했는데… 꾸르륵- 하고 예고 없이 뱃속에서 종이 울렸다. 단정한 낯으로 서있던 혈랑단원들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붉어졌다. “쿡… 형수님. 시장하신가본데, 햄버거라도 사올까요.” “괜찮아요….” “이새끼들 지금 니네 형수 비웃냐!! 씨발 잡것들이. 다 머리 박어!!” “!!!” “전진!! 나 햄버거 먹을래!!!” 신호등에 녹색불이 켜지면 오른팔을 번쩍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갑니다. 라고 설명해주는 선생님의 말대로 실천하는 1학년 3반 어린이처럼 나는 주먹쥔 오른손을 허공에 올리며 말했다. 나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전진의 웃음을 시작으로 갑자기 사무실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손 내려, 어? 큭큭. 전진이 내 팔을 내려주며 귀여워 미치겠다고 혼자 웅변하면서 볼에 딮뽀뽀를 한다. “야!! 자국 생겨!!” “히히히히히.” 그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꽉 잡고 복도를 걸었다. 내 손을 알아서 잘 챙겨주는 전진이 새삼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22층 끝에 있는 방에 막 들어가려는데 황태준이 급히 다가왔다. “부장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급한 일인가?” “예. 그게….” 황태준은 나를 힐끗 쳐다보고 조금 곤란했는지 전진에게 빠르게 귓속말을 건넸다. 순간 전진의 표정이 파랗게 굳었다. “공주야. 저기 가면 만화책 있거든. 그거 보고 있어.” 워낙 심각한 표정이라서, 나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전진은 신경질적인 걸음걸이로 '대책회의실'이라는 팻말이 걸린 방에 들어갔다. 스무명 가량이 전진을 따라 후다닥 들어갔다. 꼬르르르륵. 꾸르르르륵. 내 뱃속 시계 소리는 왜이렇게 큰걸까. 옛날에 고삐리때도 시험보다가 꼬르륵 소리 나서 졸라 쪽팔린 적 있었는데… 22층의 넓다 못해 휑한 사무실 구석에 있는 회의용 방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만화책장을 넘겼다. 7평 가량 공간 전체가 책꽂이와 만화책밖에 없었다. 밖에서 흔히 보는 만화책 대여점처럼 생겼다. 추억의 드래곤볼을 휙휙 넘겨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배고파. 배고파… 드래곤볼에서 베지터와 마인 부우가 싸우는 장면에서 잠깐 몰입하는 바람에 긴장이 풀렸다. 꾸르롸라라락!! 아까보다 다섯배는 큰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아. 창피하다… “소리가 밖에서도 들린다.” “!!” 꾸르락 소리가 끝날 때를 잘 맞춰서 회의실 문이 열렸다. 햄버거 세트를 바리바리 사들고 나타난 사람은 이민우였다. 나는 홍시처럼 붉어진 낯을 어쩌지 못 한 채 이민우가 들고 온 종이 백 안에서 감자칩을 꺼내서 와구와구 씹어 삼켰다. “어떤거부터 먹을래. 치킨버거하고 불고기버거 있는데.” “불고기!!” “알았어.” 회색 수트를 입고 나타난 이민우… 어울리지 않게 햄버거 포장을 까주고 있다. “천천히 먹어.” “엉.” 쩝쩝대며 먹는 내가 신기한건지, 이민우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서 턱을 괴고 구경질이다. 뭘 보냐? 식으로 눈을 부라려봤자 이민우는 촘촘하게 가린 앞머리카락 사이로 희미하게 웃을 뿐이다. 짜식이… 간지나게 생기긴 했어… “형이….” “응?” “이번주 금요일인가에 오픈한대.” 아… 피시방. “혜성이 너 올 수 있냐던데.” “당근 가야지.” “순돌이가 삐졌드라. 너한테 연락 안 온다고.” “할꺼야.” “니가 순돌이 이해해 줘. 누나가 재혼한 집… 그러니까 누나네 시댁에서는 순돌이 존재를 모른다잖냐. 순돌이가 내색은 안 해도 외로움 많이 탈 거야.” “어엉….” 민경이 누나는 재혼과 동시에, 순돌이를 확실히 버렸다. 그래서 명절때 매형이 처가에 올 때면, 순돌이는 우리집이나 최성수 사장 집, 혹은 매니저형네 집에 맡겨진다. 민경이 누나를 욕하는 고모 마저도 그것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는지 민경이 누나네 시댁 눈치를 본다. 그놈의 결혼이 뭔지… 사랑이 뭔지… 그래도 집 얘기 하다 보니까 이민우와 어색했던 공기가 차츰 완화되는 기분이다. 아니, 이민우는 그대로인데 나만 오락가락이다. 햄버거를 거의 해치웠을 무렵, 이민우에게 무전이 왔다. 그가 후다닥 밖에 나갔다가 돌아왔다. 뭔데? 라고 시선으로 물었지만 이민우는 피식 웃기만 할 뿐, 조용히 자기가 앉았던 맞은편 의자에 주저앉았다. 한동안 끈적한 침묵이 돌아다녔다. 이민우와 친하게 지낸 지 굉장히 오래 된 기분이다. 적어도 전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민우와 스킨쉽 하면서 지냈었는데… 지금은… 이민우 얼굴을 보기가 미안하다. 어색하고…. “나 보는거 불편해?” “아니….” 순간 정곡을 찌르는 이민우의 질문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세게 저었다. 이민우가 담배를 입에 문다. 치칵. 불을 붙인다. 그의 회색 수트보다 여린 담배 연기가 하늘하늘 흩날린다. “나는 혜성이 니가 조금은 불편한게 좋아.” “어…?” “니가 진짜 아무렇지 않게 지내면, 정말 나 따위는 니 생활에 한 부분도 안 끼어있다는것 같잖아. 그러니까 나를 보고 조금씩 움츠러드는 어깨, 시선, 표정… 그런게 안심이 돼.” “…….” “그냥 그 정도면 좋다고.” “…….”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지금 표정… 계속 보여 줄 거지?” “……으응…….” “나는 니가 계속 행복했으면 좋겠어.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바람이지. 하지만, 나도 사랑의 약자이면서, 적당히 이기적인 면이 있는 새끼인가봐. 니가 나를 보고 놀라는 게 마음에 들어. 이 정도는 바래도 되는 거지?” “…….” 나는 대답 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 할 수 없었다. 이민우가 하는 말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으로 예스라고 대답해 줄 수 없었다. 그의 표용 범위가 위대해 보여서… 갑자기 천하의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조아리며 손톱을 깨물었다. 이민우가 미간을 구기며 담배를 바닥에 비벼끈다. 당장 내 앞에 다가와서 손톱을 깨물던 손을 탁! 쳐낸다. 나쁜짓 하지 말라는 듯이. “가자. 부장님이 부르신다.” “민우야.” “?” “너… 괜찮아?” 복도를 나란히 걸어갈 때의 이민우는 내 손을 잡지 않았다. 그래서 물어봤다. 신기할 만치 괜찮아 보이는 이민우가 대단해 보여서… 너… 괜찮아? “백프로 괜찮을 리 없잖아. 혜성이 너도 부장님과 있으면서 백프로 괜찮지 않듯이.” “…….” 이번에도 그는 등으로 대답했다. 자기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사랑이란게 이런 건가 봐. 불완전하기 때문에 오히려 놓을 수 없는 집착의 연속… 뭐 그런?” “…….” “사랑 참 신기하다. 그치. 혜성아. 나같이 말주변 없는 새끼도 철학자로 만들잖냐. 큭큭.” “아… 하하….” 인간은 겉으로만 봤을때 완전한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인간을 감정적인 부분으로 시험한다. 인간만이 사랑에 빠져서 불완전한 감정을 경험한다. 불완전과 완전이 공존해야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잔인한 신이 정한 게 틀림없다. 이민우의 속내가 무엇인지 안다. 나를 사랑해 줄 수 없으면, 나를 보고 약간의 고동이라도 표현해 줘. 그는 장황한 말로 간단한 한 줄 문장을 알려줬으니까. 이민우의 요구 아닌 요구. 이민우의 이기 아닌 이기. 이민우의 최후 욕망. 나는 그의 심정을 이해 한다. 만약, 혹시 아주 만약에라도 문정혁이 나와 재회했을때, 문정혁이 나를 보고 약간의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크게 상처받을테니까… 나는 진짜 이기적인 놈이다. 어떻게… 전진과 살을 섞고 이민우의 사랑을 꿰뚫는 와중에, 모든 비유를 문정혁에게 해 댈까. “우리 공주 왔어?” “응….” 전진의 집무실에는 전진 혼자만 달랑 있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만화책이 잔뜩 있을 회의실이 아닌 자기 집무실로 나를 부른 전진. 그는 일부러 데릴러 오지 않은 이유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포도주병 마개를 열고 늘씬한 글라스에 적빛 액채를 따르며 나를 보고 미소짓는다. 그의 집무실은 그의 존재보다 낯설었다. 소파와 테이블, 집무용 책상이라기엔 어색할 만큼 휑한 책상과 가죽 회전 의자. 깔끔한 책장과, 창가쪽에 널려진 운동기구들. 가장 가벼워보이는 아령을 발로 툭 찼다. 전진이 와인잔을 내민다. 새침한 표정으로 잔을 받았다. “우와… 진아. 여기가 니 자리야?” 전진의 책상을 손바닥으로 쓸다가 회전의자에 앉았다. 푹신하고 고압적인 느낌의 가죽 의자… 새것 같은 느낌이 묻어난다. 역시나, 전진은 예상대로의 대답을 하며 쑥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응… 근데 별로 앉아있을 때는 많지 않아.” “되게 근사하다. 사장님같애.” “사장님?” 휘릭~ 회전의자를 한바퀴 돌며 나는 장난스레 말했다. “엉. 미쓰김~ 커피 가져와요. 이러면 될 것 같은데?” 내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이 났는지, 전진이 와인잔을 책상에 내려놓는다. 왜? 하고 표정으로 물었다. 그가 '비켜봐.'하더니 내가 싫다고 우길 새도 없이 팔을 죽 잡아당겨서 일으킨다. 그가 당장 회전의자에 앉는다. 내가 황당하다는 듯 팔짱 끼고 째려보는데도 히죽히죽 웃으면서 허공에 볼을 쭉 내민다. “미쓰신~ 이리 와서 뽀뽀 해 봐요.” “뭐어?” “미쓰신~ 한 걸음 걸을때마다 옷 하나씩 벗으세요.” “하하하하하!!!” 전진때문에 나는 언젠가 웃다가 죽을지도 몰라… “미쓰신~ 오늘 미니스커트 죽이는데?” “으하하하하하!!” “사장 말 안 들으면 짤리는거 알죠? 내가 왕이야.” “킥킥킥.” 웃으면서 비틀비틀 걸어갔다. 전진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그가 한 팔로 내 허리를 두르고, 다른 팔은 허벅지 안쪽을 더듬는다. “미쓰 신. 오늘 팬티도 망사인가?” “야!! 그만해!! 진짜 변태같애!! 큭큭큭.” 전진의 팔을 탁! 탁! 쳐냈다. 그가 능청스런 말투를 구사하며, 이번에는 내 뺨을 손바닥으로 죽 쓸어버린다. “오우예. 미쓰 신. 오늘 전신 진흙팩이라도 했나? 피부 죽이는데.” “전사장. 나 사실 회장일세. 그나저나 부하직원에게 이런 말 하는거 성희롱인거 모르나?” “어이쿠. 회장님이셨군요. 회장님 오늘 겁나게 섹시하십니다? 제스타일이세요. 바지 불편해 보이는데 벗겨드리겠습니다. 잉차. 잉차.” “하하하하! 그만 좀 하라구! 큭큭. 누가 듣겠다!” “들으라 그래.” 그의 집무실에서 장난치고 웃으면서 시간을 죽였다. 새벽 두시가 될때까지 포도주 두 병을 거덜냈고, 황태준과 이민우가 사 온 과일치즈안주와 탕수육을 묵사발시켰다. 술에 취한 전진과 나는 성격대로 놀았다. 나는 전진이 무슨 행동만 하면 자지러지게 웃었고, 전진은 나 웃는거에 탄력받아서 점점 과감한 시도를 보였다. 막판에는 차력쑈를 보여주겠다며 보이는 물건마다 박치기를 해버리는 것이다. 책상, 명패, 하다못해 벽에도 박치기하는 우리의 야생마여… “어? 진아. 여기 오디오 있다. 코드에 끼워줘.” “응.” 집무실 창고에서 발견한 미니 오디오를 보고 흥분한 나는, 아직도 박치기 하느라 벽과 대결중인 전진을 질질 끌고 왔다. 이마가 벌겋게 부어오른 전진이 딸꾹질을 하는 와중에도 오디오 상자를 번쩍 들고 소파 테이블까지 걸었다. 혹시 음악 씨디가 있을까 싶어서 오디오가 있던 자리를 훑어봤는데, 씨디 케이스가 딱 하나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게 무슨 씨디지? 영어도 아니고… 불언가? 진아. 이거 무슨 씨디야?” “몰라. 한글도 못읽겠어. 딸꾹.” 자꾸 키스하려고 덤비는 전진을 억지로 떼어내며 씨디를 재생시켰다. 클레식 씨디인가보다. 느린 박자의 탱고 선율이 촉촉한 밤을 적셔주기 시작했다. 새벽 두시. 사람의 감수성이 처절함의 끝까지 간다는 감성의 시간. 달빛과 함박눈이 반짝이는 창 밖의 도시풍경이 음악과 어울려서, 모든 것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음악의 힘일까. 갑자기 포도주병을 들고 꿀꺽꿀꺽 삼키는 전진. 그가 일어서서 탱고 선율에 맞춰서 천천히 양복 재킷을 벗는다. 춤을 추듯 느릿느릿… 나는 탕수육을 찌르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멍하니 전진을 구경했다. 환한 백열등 밑에서 긴 팔로 넥타이를 푸르는 전진이 굉장히 섹시했다.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해 못밖혀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술을 삼키듯 나를 보는 뜨거운 시선… 심장마비 걸릴 것처럼 아찔한 동작들… 백열등을 조명으로 둔갑해버린 새벽의 마법… 서울하늘을 뒤덮은 캄캄한 어두움 속에 우리 둘이 마주 보는 사무실만 환한 조명이 되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천천히 움직이던 전진이 마침내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씩 푸르며 내가 앉아있는 쪽으로 걸어온다. 춤을 추듯 우아하게, 그러나 강렬하게… 나비처럼… 우주처럼… “저…전진. 뭐…하는거야… 야하다.” “야해?” “응.” 그가 피식 웃는다. 그러면서도 내게 한 발짝씩 다가오고, 자기 시선 안에 나란 존재를 삼킨다. “공주야. 오빠가 너무 섹시해서 미치겠지.” “우, 웃기시네.” 전진의 눈이 풀려있다. 내 영혼의 나사를 풀어내고 있다. “이리 와 봐.” “왜그래… 부장님. 취했어?” “응.” “…….” “너한테.” “!” 별안간 나를 일으켜세운 전진이 내 허리에 단단하게 팔을 감아버렸다. 아! 닿기만 해도 이상하게 감전되는 듯 하다. 감미롭고 느릿느릿한 탱고 리듬에 맞춰서 전진이 스텝을 뗀다. 수줍은 팔을 올려서 그의 목에 감았다. 새벽 두시의 블루스. 우리는 서로에게 취해, 술에 취해, 지리멸렬한 세상을 잊었다. 전진의 눈빛만 봐도 온 몸이 녹아내린다. 강렬하고, 자유로운 눈동자… 춤 추는 중간에 전진이 자연스럽게 오른팔을 내리더니, 책상 위에 있던 잔을 든다. 마실래? 눈짓으로 묻는 전진에게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전진은 그러마 하며 자기 혼자 붉은 액채를 한모금 삼키는가 싶더니… “!!” 입술을 부딪혔다. 내 허리를 두르던 왼 손을 올린다. 그의 손가락이 내 턱을 세게 움켜쥔다. 고통에 못이겨 입이 벌어졌다. 전진의 입 안에 있던 지독한 액채가 내 입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혀에 감기는 즉시 식도를 태우는 포도주… 전진은 내가 삼키는 걸 기다려주며, 천천히 혀를 움직였다. 살짝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진득하니 감긴 눈두덩이를 보고 가파른 숨을 내쉬며 나도 눈을 감았다. 심장이 터질것 같다. 술을 다 삼켰다고 여겼는데, 한 줄기 액채가 턱을 타고 흘렀다. 전진이 나보다 빨리 그사실을 알고 엄지 손가락으로 닦아준다. 전신이 짜릿해진다. “사랑해.” “…….” “사랑해. 혜성 공주야.” “…….” “엄.청. 행복하다. 공주야. 너도 행복하지?” “으응….” 하루에도 열 개의 추억을 만들어. 하지만 자꾸 부족한것 같아서 어떻게든 특별한 상황을 찾아 헤매는 거야… 밤이 모자랄 만큼… 월요일에는 전진이 고집부리는대로 집 안에서 짱박혀서 지냈다. 맨 몸에 앞치마만 입고 집안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자꾸 엉덩이를 찰싹 때리고 주무르는 전진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옷을 챙겨입었다. 내가 옷을 하나씩 껴입을 때마다 전진이 신경질 부리다가 바닥에 주저앉아서 어린애처럼 다리 벌리고 떼를 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몸으로 떼쓰는 전진에게 옷 안 입으면 텔레비전 틀 거라고 협박해서 옷 입혔다. 애 키우는 기분이다. 전진은 내가 텔레비전 근처에 못 가도록 항상 따라다녔다. 휴대폰도 압수했다. 다른때라면 그러지 말라고 따졌겠지만, 나는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뒀다. 이철호 검거… 이철호… 이철호… 자꾸 신경쓰여서 텔레비전 리모컨을 힐끗거릴 뿐… 공유 형사가 최근에 해 준 말이 머릿속에 빙빙 돈다. 검찰 소환에 불응한 이철호가 강압적으로 검거되는게 오늘이란 것이다. 파티장에서 만났던 김명민 검사도 확실하게 알려줬던 부분이다. 이철호가 월요일, 그러니까 오늘 검거될 거라고. 텔레비전을 틀면 이철호가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무거운 표정으로 검찰청에 들어설 것이고, 잘하면 김명민 검사와 문정혁도 비칠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토악질이 나올 만큼 온 몸이 떨렸다. 텔레비전을 틀어야 한다는 생각과, 전진이 시키는대로 마냥 피하자는 두 개의 생각이 뇌를 짓눌렀다. 어젯밤에 마신 술 때문에 숙취가 올라올 법 했지만, 이철호 검거일이라는 충격이 모든 것을 이겼다.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해서 자선 복지회에 기부하기로 한 유한락스와 퐁퐁들 사이에 주저앉아서 손톱을 물어뜯었다. 곧 까만 그림자가 전신을 뒤덮었다. 고개를 드니 전진이 못마땅한 낯으로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가 팔을 내민다. 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가 웅크려 앉아있는 내 앞에 똑같은 포즈로 앉는다. 가슴에 무릎을 붙이고 턱을 괸 상태에서 즐거운 투로 입을 연다. “여행가자.” “여…행? 갑자기?” “내일 모레가 크리스마스잖아. 크리스마스 다음날 바로 떠나는 거야. 우리 공주 가보고 싶었던 데 있어?” “난 그런 질문이 제일 싫드라.” “왜?” “딱 정해주고 알아서 데려가면 안돼? 어디 갈 건지 말 하라는거 좀 막막해. 딱히 생각나는데두 없고.” “그래도 생각해봐.” “싫어. 전진. 니가 가는데 갈게. 옛날에 나 데리구 월미도두 잘 데려갔었잖아.” “그땐 그때고.” 문정혁은 자기가 알아서 나 데려갔었는데… 언제나… 까지 생각하다가 푸르르 뺨을 흔들었다. 또 문정혁하고 비교했어… 나쁜 버릇이야… “진아. 그럼… 외국 가도 돼?” “외국? 어디?” “음~ 아프리카! 한국은 너무 춥잖아.” “오빠도 아프리카 가고 싶다. 역시 공주는 천재라니까.” “근데 언제 출발해?” “크리스마스 지나서. 아, 다음주가 좋겠다.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새해를 맞이하는거야.” “레모네이드로 짠~ 하면서 해피뉴이어! 이러는거야?” “응. 좋아?” “짱이야!!” “하하하하… 알았어. 다음주에는 무조건 아프리카다. 거기서 결혼식도 하자.” “결혼식?” “응. 왜. 싫어?” “아니… 근데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니까 좀 이상하다. 큭큭.” “…….” 한참 농담하느라 나는 기분이 산뜻해진 반면, 전진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똑같이 무릎모으고 마주 앉아서 한 명은 좋아라~ 하고, 한 명은 복잡한 낯으로 한숨을 쉬면 이상하잖아. 나는 발로 전진을 툭툭 치며 밝게 물었다. “전진. 갑자기 왜그래~ 무게잡지 마. 큭큭큭.” “…….” 전진은 침울한 낯을 들어서 내 눈을 강하게 마주쳤다. 두근…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 한 전진의 눈동자가 새삼 겁이 난다. “왜…그래? 진아… 아프리카 별로야?” “공주야.” “응?” 그가 오른팔을 길게 뻗어서 내 뺨을 쓰다듬는다. “아프리카에서 예쁜 호텔 짓고 살자.” “으응?” “거기서 우리 둘이 걱정 없이 영원히 따뜻하게 사는 거야.” “야아… 뭐야아.” 뺨을 지나 턱까지 내려온 그의 따뜻한 손길이 간지러워서 목을 움츠렸다. 그러나 전진은 확실한 투로 다가올 뿐이었다. “아프리카 가기 전까지, 우리 공주는 무조건 내 옆에 붙어있어. 알았지?” “나 내년 1월까지만 스케줄 비어있는데….” “…….” “진짜 거기서 눌러 산다고? 응?” “…….” “야아~ 전지인!!” 전진은 글자들에 힘을 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응. 거기서 너랑 둘이서 아무도 모르게 살거야.” “뭐어?” “…내가 다음주까지 무사히 널 지켜주게 된다면.” “뭐야… 김명민 검사가 월요일에… 그러니까 오늘 이철호 검거한다는데, 너 그거랑 관련있는거야?” “아 몰라. 일 얘기 안 할거야.” “전진….” “튜브 사러 가자. 아. 아프리카에도 물놀이 하는 데는 있겠지? 더운 나라니까. 아차. 크리스마스 트리 먼저 사야겠다. 황태한테 시킬까?” “…….” 내가 과연 전진을 따라서 한국을 떠날 수 있을까. 내 자신에게 묻는 즉시, 답은 돌아왔다. 전진에게 직접 대답해주지 못했지만, 나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나는 절대 떠날 수 없을 것이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일과 가족… 그리고… 지금은 전진과 새출발한 연애 자체가 즐겁고 신선하지만… 사귀다 보면 서로의 몰랐던 이면에 질리는 때가 반드시 닥칠 것이다. 문정혁과 헤어지던 날 나는 '공포'와 직면했었다. 그와의 이별보다 큰 공포. 그것은 문정혁의 이면이 던진 상처였다. 그 상처를 전진에게서 또 받는다는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나는 떠날 수 없다. 내 가슴이 그렇게 정해버렸으니까. 전진은…? 전진은… 모르겠다. 내가 지금 전진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내 심장은 지금도 문정혁 이라는 이름을 떠올리기가 괴롭다. 설마 두사람을 동시에 사랑이라도 하는 것일까. 만약 내 심장이 두 개가 되었다면… 남들보다 두 배의 눈물을 흘리고 언제고 파멸해버릴지도 모른다. 이철호에 대한 소식을 제대로 접한 것은 금요일이었다. “진짜 일찍 올게. 응?” “내일 나랑 같이 가자. 공주야. 응?” “안돼. 오늘이 개업식인데 가봐야돼… 벌써 다 약속해놨단 말야. 안 가면 안 돼. 응?” “공주야. 제발 부탁이다. 너 혼자 돌아다니는거 나 불안해. 응?” “전지인. 나 이민우랑 같이 가잖아. 걱정하지 마. 응?” “그래서 더 불안해. 오빠 맘 모르겠어? 응?” 둘이 응쑈만 한시간 넘게 했다. 갑작스레 어디 가야 한다는 전진은 내가 얌전히 집에 있을 것을 요구했고, 나는 민형이 형 피시방 오픈일이라서 나가겠다고 했다. 닷새동안 집에 붙어서 크리스마스 파티도 하고, 성탄 트리도 만들고, 고모가 보낸 가구들도 배치하고, 청소도 하고, 오손도손 잘 지내다가, 처음으로 떨어지게 됐다. 다른 때 같으면 나를 자기가 일하는 데까지 데려갔을 전진이, 오늘따라 혼자 갈 채비를 꾸렸고, 나는 나대로 약속이 있었다. 서로 다른 일상을 보내야 해서 그럴까. 이상하게 불안한 오전이다. “가지 마. 응? 응? 응?” “걱정하지 마. 응? 응? 응? 응? 응?” “고집쟁이.” “사돈 남 말 하시네.” 둘 다 삐졌다. 이러면 좀 곤란한데… 우리는 동시에 삐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는 서로 상대가 풀어주기를 기다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전진은 나한테 풀어달라는 듯 일부러 거칠게 겉옷을 입었고, 나도 쾅!! 소리내서 방 문들을 닫았다. 닷새동안 이런 경우, 우리들은 동시에 서로에게 장난치면서 삐짐을 풀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다르다. 밖에 나가느냐 안 나가느냐의 문제인 만큼 전진이나 나나 둘 다 풀 기미가 안 보였다. “그래서. 안 풀었냐? 부장님하고?” “어. 완전 성격 그지야. 전진.” “부장님도 그러더라. 우리 공주는 다 좋은데 성격이 까탈스러워서 좀 짜증난다고.” “뭐야?!!!” “큭큭큭.” 운전중인 이민우의 목을 졸라버렸다. 이민우는 킥킥 웃으면서 사고 난다는 말과 함께 가볍게 내 팔을 거두었다. 청담 현대 아파트에서 고모네 아파트 단지까지는 거리가 굉장히 가깝다. 게다가 이민우도 동행한다. 이렇게 안전한 상황에서 전진은 괜한 걱정질이다. 그나저나 도로상 거리도 얼마 안 되는데, 이민우가 엉뚱한 길로 자꾸 접어드는 식으로 멀리 돌아간다. “야. 왜 자꾸 다른 길로 새냐? 쫌만 가면 도착할텐데.” “간만에 드라이브나 하려고. 둘이 차에 탄 적 없었잖아.” “어휴….” 낯선 골목들과 도로들을 유유히 헤치며 운전하는 이민우에게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민우가 그런 나를 힐끔 쳐다보며 약올리듯 말한다. “이야~ 신혜성. 나 보고 애절한 표정 한 번 짓는거 오늘은 안 하냐?” “아! 그건….” “하하하하. 너 그 표정 완전 귀여워. 큭….” “이민우!!!” 씩씩대면서 차창에 턱을 괴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이민우는 나와 단 둘이 잠깐의 드라이브 하는게 좋았는지 연신 히죽거리기만 한다. 그런 이민우의 모습이 측은하기도 하고, 나 약올리는 이민우가 얄밉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미묘한 찰라에, 휴대폰이 울렸다. 사장님인가? 하고 발신인을 보자, 우리 순돌이다. [삼촌!! 언제 와?] “아… 삼촌 오늘 못갈것 같은데….” [진짜야? 왜! 왜에~!] 놀리고 싶어진다. 우리 순돌이. 이따가 가서 깜짝 놀래켜줘야지. 누구야? 라고 묻는 이민우에게 순돌이~ 라고 킥킥대며 설명해줬다. 이민우가 뭐 먹을거좀 사 가자고 혼자 정해버리더니, 거의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를 도로쪽 골목으로 우회전한다. 음… 순돌이 놀릴 시간이 더 생겼군. “순돌이 노래 해 봐. 그럼 갈게.” [대써. 노래 해도 안 올 거 알고 있어. 애 취급 하지 말라니깐!!] “삼촌 진짜 안 간다?” [협박 작전 쓰지 마! 삼촌 저번에도 막 나 약올리다가 안왔잖아.] “야. 그땐 진짜 사정이 생긴거였구….” [지금은?] “지금도 사정이 생긴거구….” [삼촌은 맨날 사정만 생겨!! 나 이제 민형이 삼촌하고만 놀아 줄거야. 혜성이삼촌은 이제 나 보기 힘들어질껄?] “이야~ 우리 순돌이. 민형이 삼촌이 피시방에 특별석 만들어줬다고 변심했네?” [변심 아니야. 글구 특별석이 아니라 특별 방! 유리같은걸루 벽 만들어졌구~] “응. 그리고 또? 어떤데?” [대써… 설명 안 해 줄 거야.] 앗. 순돌이가 콧물 훌쩍이면서 울기 시작했다. 조금 미안해지는데… “순돌아. 삼촌이 사실은-” [전화하지 마!!!] 이크. 순돌이가 단단히 화가 났는지 전화를 끊어버렸다. 부랴부랴 통화 버튼을 길게 눌렀지만, 배터리를 빼버렸는지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이민우. 어떻게… 나 순돌이 울렸어.” “보쌈 사가자. 혜성이 넌 뭐 먹을래?” “야. 나 순돌이 울렸다니깐?” “알았어. 이따 가서 달래줘. 보쌈하고 뭐 살까?” “음… 초밥?” 마침 시선에 잡힌 횟집 앞에 이민우가 유유히 차를 주차하며 내 볼을 살짝 꼬집는다. 애를 왜 울리냐? 애가 애를 울려요. 농담하면서 희미하게 웃는 이민우 때문에 진짜 나도 울고 싶어진다. 내가 왜 순돌이를 놀렸을꼬. …하지만 재미있었어. 사까나야에서 초밥을 종류별로, 후식까지 주문했다. 이민우는 사까나야 옆에 옆에 있는 보쌈집에서 포장 해 오겠다며 나갔다. 직원이 건네준 녹차를 마셨다. 내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사장님이 직접 와서 싸인을 부탁했다. “신혜성씨. 저희 가게에 와 주셔서 영광입니다.” “하하… 예. 아닙니다.” “지난번에 영화도 잘 봤습니다. 실물이 훨씬 멋지네요!” “예. 고맙습니다.” 녹차를 마실 새도 없이 싸인해주고, 사장님이 쉴 새 없이 던지는 말에 억지로 대답해줬다. 그러다 내 시선이 우연히 향한 곳은 텔레비전. 이철호가 검거된지 닷새만에 텔레비전을 봤다. 심장이 세게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일까, 희망일까. 정체를 모르는 박동 소리가 거세게 울렸다. 마침 뉴스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신혜성씨. 죄송하지만 싸인 한 장 만 더 해주시면 안될까요.” “예… 예….” 멍하니 대답하며 기계적으로 팔을 움직였다. 식당 벽에 걸려진 커다란 화면. 내 동공은 불규칙한 박자로 흔들리고 있었다. [한명그룹 비자금 의혹을 수사 중인 김명민 특별검사팀이 27일 오전부터 9시간여에 걸쳐, 이철호 한명 회장의 집무실 등 11곳에 대해 전격적으로 압수 수색을 실시했습니다.] 아나운서의 또렷한 발음이 느릿느릿 귓속에 안착되었다. 곧이어 화면이 바뀌더니 한명그룹 비서실에서 직원들이 항의하는 장면과, 속수무책으로 파해쳐지는 집무실 책상과 한명그룹 로고가 어지럽게 나타났다. [특검은, 한명 본관이나 한명물산 등 핵심 계열사 등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뤄질 것이라던 당초 예상과 달리 이 회장의 집무실과 이선호 건설부 사장, 최하영 사장, 김인우 부사장 등, 그룹 핵심 임원들의 자택을 압수 수색해, 한명측을 압박했습니다. 특검에 허를 찔린 한명 측도 변호인단을 강화하는 등 대응책 마련에 나섰으나, 특별검사팀이 사전에 준비한 증거들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법원에 출두하는 모습들입니다.] [이철호 회장은 압수수색과 관련, “특별히 할 말이 없다.” 는 말로 함축된 뜻만 전했습니다.] 그동안 소환장을 발부했지만, 해외로 나가는 식으로 교묘하게 피해갔던 이철호. 그가 마침내 검거되서 법원에 서는 것까지 실랄하게 보도되었다. 동공이 좁아졌다. 온 몸에 한기가 엄습했다. 머리속에 이철호라는 글자만 산산히 부서졌다. 뉴스 화면에 가끔 비치는 김명민 검사. 그리고… 문정혁… 끝까지 청렴 결백한 척 하는 이철호… “요즘 저 사건으로 나라가 들썩이잖아요. 신혜성씨. 볼륨 높여드릴까요?” “예? 예… 아니… 괜찮습니다.” 가슴에 비가 내린다. 아니, 가슴이 뻥 뚫렸다. 이렇게… 이런 식으로 전부 해결되는걸까. 문정혁과 전진. '그것들'이 지난 세월동안 학수고대하던 요즘이 아닌가. 한명특검 수사기간인 요즘, 횟집 사장 말마따나 온 나라가 집중하고 있었다. 수사가 공식적으로 마감되는 날은 다음주이다. 10년 넘게 비리를 캐온 김명민 검사의 수사팀이 비공식과 공식적으로 캐 낸 증거들이 적나라하게 지상파 방송으로 보여질테다. 지금처럼. [갈수록 수사의 강도를 높이는 특검에 맞서는 한명측 변호인단의 모습입니다. 벌써 두 차례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으나, 한명그룹의 의혹은 국민들 사이에서 이슈로 자리매김이 된 만큼, 한명 변호인단으로서는 구석에 몰린 꼴인데요.] [이철호 회장은 한명의 지분을 작게 소유한 것에 반해, 한명의 계열사가 독립적으로 일을 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모두 이회장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바, 모든 정황이 주주들의 증언에 따라 불법으로 판명났습니다.] [이철호 회장은 현재 '금융산업조정법' 위반으로 검거되었으나, 속속들이 밝혀지는 특검의 수사 결과를 인정하였으며, 이회장의 죄몫은 상상 이상으로 불어나는 실정입니다. 경영권 불법 승계, 비자금 조성, 정관계 로비 등, 한명 기획실 측에서 인멸한 증거들을 확보한 검찰 측의 대응에 이회장과 관련 임원들은 당혹감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네. 여기는 한명그룹의 머리라 할 수 있는 기획실입니다. 불법을 보란듯이 자행하던 이회장의 행적이 하나씩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회사가 계열사의 주식을 5% 이상 갖는 것은 금지임에도 불구하고, 금융산업조정법을 위반한 행태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는데요.] [경제 전문가 김희수 박사님을 자리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현재 온 나라가 한명그룹과 이철호 회장의 압수 수색에 집중하고 있는데요. 이철호 회장의 감춰진 비리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문가들은, 이철호 한명그룹 회장을 검거했지만, 그에 대한 위법성을 입증해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으나, 현재 밝혀진 상황은 반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차명계좌 비자금이 공식적으로 밝혀진 가운데, 한명생명의 차명주식에 대해서도 한명측은 선대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회장의 개인 돈이어서 비자금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검찰측의 증거에 따르면 한명생명의 주장은 면죄부를 요구하는 행위라고 일축하고 있습니다.] [수조원이 입금된 1,700 여개 차명계좌가 확인되었습니다. 이철호 회장이 실제 비자금으로 밝힌 것은 20억원에 불과해서, 잠깐 수사 부실 논란이 야기되었으나, 한명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김명민 검사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뚜렷한 상황이라, 횡령죄가 주어질 거라고, 법조계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발발된 불법 경영권 승계와 관련하여, 한명건설 이선호 사장이 기소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으나, 검찰의 수사 결과이지 특검의 수사 결과는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명랜드 CB 저가발행과 관련해 이철호 회장의 책임이 공공론화 되고 있습니다. 해당 계열사 주주들의 법원 증언이 검찰의 조사를 확실시 하는 토대가 되고 있기에, 한명SDS BW저가 발행과 인수 관련 사항은 피해 갈 수 없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속이 후련해야 할텐데… 뭔가 허무한 기분이다. 이 기분… 설명하기 힘들다. [긴급속보입니다. 최근 특검의 새로운 수사 결과 중 하나인, 문도천 전 한명그룹 회장의 의문사에 대해 보도해 드리겠습니다. 장시간 비리를 도모해 회장직에 오른 것으로 판명난 이철호 회장이 벌인 자작극이라는 결과로서, 소식을 접한 국민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취재진 연결해보겠습니다.] [예. 여기는 서울시청역에 위치한 한명그룹사 앞입니다. 이른 시각부터 모인 대모 행렬 숫자가 3만명을 넘어서는 가운데,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대표 기업의 불법 청산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특히, 서울시장에 출범할 것으로 알려진 이철호 회장을 지지하던 시민들의 배신감은 이루 말 할 수 없는데요. 시민 몇 분과 인터뷰를 나눠보겠습니다.] [“어떻게 사람을 죽이고, 멀쩡한 생사람을 범인이라고 몰았대요? 그게 사람입니까?” “나라가 어찌 될런지, 이 기회에 확실히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런 인간이 우리나라 대표 기업인지 공화국인지를 이끌어갔다니 소름끼치네요!!” “어떤 회사든지 비리는 있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다른 부분은, 제가 경제상식도 부족하고 해서 대충 넘길 수 있는데요, 진짜, 사람이 사람 죽이고 위에 서는 건, 짐승만도 못한 짓 아닙니까?” “문도천 회장이 갑자기 죽은거 자체가 이상했어요!! 아유 소름끼쳐라. 불법 기업은 물러나라!! 물러나라!!”] 고개를 숙였다. 더이상 듣기 괴로웠다. 눈물이 흘렀다. 오한이 일어서 턱이 덜덜 떨렸다. 제발… 누가 텔레비전을 꺼 줘… 그때 갑자기 귀가 따뜻해지더니 세상의 모든 소리가 차단되었다. 천천히 떨리는 뺨을 올렸다. 보쌈 봉지를 잔뜩 들고 나타난 이민우가, 창백한 낯으로 나를 내려보며, 내 귀를 양 손으로 꽉 막고 있었다. 이민우도 울고 싶어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나를 대신해서 포장된 초밥들을 한 팔에 들고, 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덜덜 떨기만 하는 내 팔목을 꽉 잡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전진과 뒹굴고 지낸 동안, 세상이 변했다. 아니,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학교를 움직였던 '그것들'이 사회를 움직이는 것이었다. “괜찮아?” 차에 타자마자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마냥 내버려뒀다. 이민우가 붉어진 동공을 가까이 들이대며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민우가 문도천 사장을 죽인 범인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소리칠 날이 온 것이다. 다른 경제 상황은 잘 모르겠다. 나는, 이민우가 무죄였다는 사실로 행복했고, 그가 징역살이 했던 과거가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울지마… 혜성아… 괜찮아… 괜찮아….” “어, 어허, 어허어, 미, 민우, 어허어어.” 바보같은 신혜성… 바보같은… 신혜성… 그를 위로해줘야 하는데, 너는 죄가 없었다고 그것보라고 웃어줘야 되는데… 나를 보고 억지로 눈물을 참는 이민우가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는 꼴이라니…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우리는 결국 서로를 꽉 끌어안고, 한이 서린 지난 세월을 녹아내리며 한없이 울었다. 이철호 회장은 현재, 벌금 7000억과 징역 30년이라는 특검 구형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다음주에는 선고 공판에서 형이 확정될 것이다. 김명민 특별검사팀이 한명그룹에서 이철호 말고도 20명을 불구속 기소한 상황에서, 세상은 '그것들'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김명민 검사의 예고대로 이선호는 검거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아들 사랑이 끔찍한 이철호다운 짓이었다. 모든 수사망이 교묘하게 이선호에게 면죄부를 얹어주었다. 둘 다 눈이 퉁퉁 부은 상태에서 피시방에 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근처 빌딩 화장실에 들어가서 세수하고 얼굴을 식혔다. 싸늘한 바람이 젖은 뺨에 파고들었다. 12월의 끝무렵이라 그런지 겨울의 힘이 강해지고 있었다. 이민우와 나는 결국, 코앞에 피시방을 두고, 도착한지 두시간만에 들어갔다. 깔끔하고 넓은 70평 실내에서 꽃향기가 살랑살랑 풍겼다. 방향제인가…?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천정을 보는데 푹-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공기청정제하고 방향제 설치했어.” “아아….” 10분에 한 번씩 푹- 하고 천정에 설치된 방향제에서 향기가 발사되었다. 들꽃향기 같은게 기분좋게 풍겼다. 민형이 형은 카운터에 있는 컴퓨터를 보고 고모에게 이것저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민우와 내가 먹거리를 잔뜩 사들고 나타났을땐 뭐 이런걸 사왔냐며 머쓱하게 웃었다. 개업식을 맞이하여 오전에 일찍 고사를 지냈고, 지금은 컴퓨터를 하나씩 점검하는 중이란다. “우리 민형이가 잘 해낼 줄 알았다!!” “엄마는… 이제 시작인데 뭘.” 늘 예민하게 굴고 짜증내기 일쑤였던 민형이 형이 굉장히 밝고 자신감있게 변했다. “아냐. 니가 머리가 좀 똘똘하냐. 틀림없이 성공할거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지. 엄마… 이제 엄마 아들이 호강시켜줄게.” 민형이 형의 부끄러운 고백에, 고모는 손수건이 흠뻑 젖을 때까지 우셨다. 민형이 형이 집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백수 생활 한 게 몇년이던가… 그간 속앓이를 하셨던 고모로선 오늘만큼 행복한 날이 또 없을 것이다. “우리 민우가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지. 엄마는 민우도 믿었어.” 이철호 사건과 관련, 속속들이 보도되는 내용 중에, 문도천 자살 관련 소식도 있었다. 고모는 이민우의 무혐의가 보도된 걸 보고, 아까 나절에도 한참을 우셨다고 했다. 내가 이민우랑 차 안에서 울때, 고모는 민형이 형 붙잡고 우셨다. 오늘처럼 고모와 고모부가 행복한 날은 또 없을 것이다. “고모부는 안 오셨어요?” “응. 이따 저녁때 오실 거야. 회사 일이 바쁘니까… 그래도 아들이 개업식 하는데 어떻게든 빨리 오고 싶어서 늬 고모부 똥줄 탈거다. 하하하.” 울고, 웃고. 행복한 고모 덕분에 내 가슴도 따뜻해졌다. 미리 뽑아놨던 알바생들이 내게 싸인해달라며 조심스럽게 수첩이며 종이를 내민다. 민형이 형이 아차 하며 다같이 사진이나 찍자고 한다. 그때 내 시선에 잡힌 것은, 카운터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유리칸이었다. 천정까지 유리로 닫혀 있는 특별 룸. 룸 안에는 컴퓨터와 컴퓨터 책상, 의자, 공기 청정기와 방향제까지 따로 설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비흡연석과 가까웠다. 보자마자 저기가 순돌이 전용석이구나! 하고 알았다. “고모. 형. 순돌이는 어딨어요?” 피시방 들어오자마자 알바생들이 넙죽 인사하고 고모가 우는 바람에 정신없어서 순돌이를 생각하지 못했다. 내 질문에, 고모가 화들짝 놀라며 디카를 꺼내다가 핸드폰부터 여신다. 순돌이에게 전화하는 모양인데… 이윽고 고모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이노무새끼가 또 뭐에 삐져서 핸드폰 꺼놨네.” 아 맞다. 아까 내가 전화했을때부터 순돌이가 휴대폰 꺼놨지… “고모. 그게… 제가 순돌이한테 안 갈거라고 놀렸었거든요. 그래서 삐져서 핸드폰 꺼놨었어요. 어떡하죠. 지금 순돌이 어딨어요?” “아, 그랬냐? 아까 씩씩대면서 나간게 그래서였나? 하하하. 신경쓰지 마라. 혜성아. 순돌이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온대. 그래서 나간거야.” “옷을 왜 갈아입어요?” “응. 너 여기 온다니까 민지도 오겠다고 했나봐. 그래서 순돌이가 민지 데려온다고, 옷 갈아입는다더라. 민지한테 잘 보이려고 갈아입는거지 뭐.” “풋….” 귀여워라. 우리 순돌이. 오면 민지라는 애 얼굴도 보고, 순돌이 꼭~ 끌어안아야지. 아, 그럼 또 애 취급한다고 신경질낼까? 순돌이 오면 깜짝 놀래켜주려고 일부러 카운터 안쪽에 쪼그려 앉았다. 내가 추하게 앉아서 킥킥대는 동안, 알바생들은 몰래몰래 내 모습을 핸드폰 사진기로 찍었고, 고모와 민형이형은 이민우가 차린 먹을것들을 맛있게 드셨다. “야!! 신혜성!! 그만 청승떨고 이리 와서 먹어!!” “청승이 아니라 서프라이즈거든? 이제 순돌이 올 때 다 된 것 같은데 뭘.” 이민우에게 그만 좀 불러달라고 꽥 소리치고 더더욱 등을 웅크렸다. 과연, 1분 정도 지나자 쨍- 하며 종소리가 들리고 피시방 문이 열렸다. 벌떡 일어서서 양팔을 하늘에 만세하며 올렸다. “서프라이즈~!!” “엄마야~!!” 왠 꼬마 여자애가 발랑 넘어졌다. 헉. 순돌이가 아니잖아? 허둥지둥 카운터 밖에 나와서 아이를 일으켜줬다. “혜, 혜, 혜성오빠.” “응? 응.” “아, 안녕하세요.” 엉덩방아를 세게 찧으며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레이스 달린 원피스에 분홍색 코트를 걸친 아이가 벌떡 일어나서 볼을 붉힌다. 멀리서 보쌈을 삼키던 민형이 형과 고모가 박장대소를 하며 이쪽을 쳐다본다. “아이고~ 민지 왔냐?” “하하하하! 혜성이 보고싶어하더니, 넘어져서 어쩐대야! 하하하하하!” 민지? 아, 얘가 민지구나. “안녕. 민지야.” 허리를 숙여서 민지의 안면에 가까이 다가갔다. 눈이 동그랗게 커진 민지가 어쩔 줄 몰라하며 시선을 피한다. 내가 자기 앞에 있는게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다람쥐처럼 귀여운 아이였다. 오밀조밀한 눈 코 입은 말 할 것도 없고… 양 갈래로 앙증맞게 묶은 머리카락 하며… 순돌이가 첫 눈에 반할 만 했다. 짜식이… 보는 눈이 있군. “근데 순돌이는 어쩌고 너 혼자 왔냐, 민지야.” 고모가 이쪽으로 다가와서 민지의 엉덩이 부근을 탁탁 치며 먼지를 털었다. 민지가 화들짝 놀라며 고모의 손길을 피했다. “혜성이 오빠두 있는데….” “아이고~ 여시같은게 벌써 누구 좋아할 줄도 알고… 호호호호.” “민지야. 순돌이랑 같이 안 왔어?” 내가 묻자 민지의 볼이 발그레해진다. 와… 진짜 귀엽다. 세상의 모든 민지들은 이렇게 깜찍하고 예쁠까. 이다음에 딸 생기면 민지라고 이름 지어야지. 신민지. 좋네. 민지가 잠깐 수줍어하던 것을 관두고, 자기가 더 황당하다는 듯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말한다. “순돌이가 데리러 오기로 했는데, 안 와서요. 제가 그냥 찾아왔어요. 순돌이가 하도 자랑해서 피시방이 어딘지 알고 있었거든요.” “뭐? 순돌이랑 안 만났어?” “네에. 혜성이 오빠. 저 싸인해주세요. 그리구 포옹하고 사진두 찍어주세요. 참, 오빠 1집 싱글앨범도 가져왔는데, 여기두 싸인해주세요. 그리구… 립스틱 가져왔는데 립스틱 발라서 뽀뽀 자국도 요기 싸인 하신 옆에 찍어주심 안되요?” 맹랑한 여자아이로다. 나는 민지가 요구하는대로 후다닥 해 줬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순돌이하고 같이 온 게 아니라고? “네. 진짜 계속계속 기다리다가 저 혼자 찾아온건데요.” “이상하네… 옷 괜찮은 거 못 골랐나? 내가 함 가봐야겠다. 혜성이 너는 여기서 초밥이랑 먹고 있어라. 알았지?” 고모가 나가시고, 나는 여러 사람들 틈에 앉아서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경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즐거운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순돌이는 집에도 없었다. 게다가 밤 아홉시에 가까스로 퇴근한 고모부가 피시방에 올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가족들이 불안해 하는 것은 당연지사, 이민우는 순돌이를 찾아보겠다며 나갔고, 민형이 형은 늦은 시간까지 피시방에 붙어 있으려는 민지를 가까스로 달래서 집에 데려다주기 위해 나갔다. 알바생들도 할 일이 없어서 돌아갔고, 고모부 마저 파출소에 신고해야겠다며 나가셨다. 덕분에 나 혼자만 덩그러니 피시방에 남았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다. 내가 순돌이한테 장난치지 않았다면, 순돌이는 휴대폰을 쭉 켜 놨을 테니까. 아니, 휴대폰을 순돌이가 자의적으로 끈 게 아니라, 설마 괴한이 억지로 끈 거였으면… 아니야. 이런 생각 하면 안돼… 초조하게 내부를 걸어다니던 중,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냉큼 받자마자 소리쳤다. “순돌아!!!” […….] 하지만 대답이 없다. 서둘러 발신 번호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다. “누구… 누구세요?” [갑자기 전화해서 놀랐겠지만….] “!!” 심장이 천정까지 튕겨 올라갔다. 얼마나 놀랐는지 잠깐이지만 숨이 쉬어지지않았다. 문정혁이다. 3년 만에 들어도 한 번에 알 것 같은 느낌. 다 잊어버려서 평상시에 떠올려 보려고 애를 써도 생각나지 않았던 음성. 눈동자에 격랑이 일었다. 그의 음성은 나와 대비될 만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혜성아.] “…….” 3년… 3년 더 된 것 같은데… 대체 얼마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일까. 순돌이 걱정에 열중하던 뇌가, 단숨에 문정혁이란 폭풍속에 젖어들어간다. 블랙홀마냥 그의 전체에 빨려들어간다. [지금부터 어떤 전화도 받지 마.] “…뭐어?” [그 말 하려고 전화했어. 나랑 통화한 뒤에는 내 전화 말고 다른 전화는 받지 말라고.] “야… 문… 정혁… 우리… 3년 만에 말… 하는 거야….” [그런 얘긴 나중에 하자. 지금 내 말 잘 알아들었지?] 분노가 치솟았다. 나는 이렇게 너의 목소리가 당혹스럽고, 설명하기 힘든데, 너는 예전처럼 본론만 딱 꺼내고 끊으려는 거야…? 적어도, 잘 지냈냐는 인사는 해야 되는거 아니야…? 사무적인 말투로 중무장한 문정혁. 뉴스에서 잠깐 봤던 문정혁. 그의 모든 부분에 화가 났다. “문정혁. 하! 너… 진짜 알 수 없는 인간이다. 갑자기 전화해서 뭐? 전화로 사귀자는 거야 뭐야? 니 전화 말고 딴 전화는 받지 말라니? 나랑 장난치고 싶어? 왜? 얼굴 보고 말 할 용기는 없냐?” 거친 말투만큼 부글부글대는 속내가 아무렇게나 꺼내졌다. 문정혁은 흔들림없이 대꾸했다. [그런 얘기도 나중에 하자.] “야!!!” […….] “우리 3년 만에 전화 통화 하는거라고!!! 너… 너… 진짜 기가 막히다. 문정혁… 하… 차라리 지난 번에 파티장에서 봤던 때가 훨씬 낫지. 이게… 이게 뭐야?!!” [혜성아.] “왜… 왜!! 내가 너한테 그정도밖에 안됐어?!! 너 예전에 헤어질때도 재수없었지만, 지금은 인간 말종이야!!!” 내가 무슨 소릴 하는걸까. 3년간 지켜온 내 자존심은… 내 이성은… 감정선에 무너지고 함몰되었다. [부탁한다. 내가 다시 전화할게. 그때까지, 이 번호 저장해놓고, 다른 전화는 받지 마.] “문정혁!!!” 뚝. 상대쪽에서 끊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내 정신이 옳게 돌아왔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문정혁… 정말 문정혁 맞아? 파티장 테라스에서 나를 보고 피했던, 그 문정혁이 맞다고? 아까 뉴스에서 봤던 문정혁이라고…? 그는 내게 3년 만에 전화해서, 자기 전화 말고는 어떤 전화도 받지 말라고 강하게 뜻을 전하고, 그냥 끊어버렸다. 하… 어이가 없다는 낯으로 한참이나 휴대폰을 노려봤다. 카운터로 씩씩대며 걸어가서, 민형이 형의 담배곽에서 던힐을 꺼냈다. 치칵. 불을 붙이고 뿌연 연기를 내뱉었다. 두 번째 연기가 입 밖으로 탈출하는 순간, 휴대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문정혁과 순돌이의 이름이 동시에 생각났다. 이번에는 발신자 번호부터 확인했다. 또 모르는 번호다. 순간, 문정혁의 '전화 받지 마'라는 말이 뱅뱅 돌아서 고민하다가, 순돌이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후다닥 버튼을 눌렀다. “순돌이니?” 대답이 없다.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물었다. “문…정혁?” 상대쪽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철렁- 심장이 떨어졌다. 작은 웃음소리지만, 구분할 수 있다. 문정혁이 아니라는 것을. [이름이 강순돌이라며. 애가 귀엽게 생겼네.] “!!!!!” 푹- 방향제가 머리 위에 뿜어지고 사방에 꽃향기가 돌아다녔다. 담배를 떨어뜨렸다. 무의식중에 담뱃불을 구둣발로 꺼뜨렸다. 내 정신도 미친년처럼 줄 하나를 놓기 직전이었다. 등줄기가 바짝 섰다. 문정혁의 전화를 끊자마자, 거짓말처럼 걸려온 전화의 발신자는… 이선호였다. 정신차려. 정신차려야 돼. 신혜성. 지금 니 옆에는 아무도 없어. 너 정신 바짝 차려야 된다고.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살기마저 느껴지는 이선호의 여유있는 목소리톤… 지난번에 공유 형사와 양종호가 알려준 내용들이 머릿속에 휙휙 스쳤다. 정신병이 의심된다는 이선호가 과거에 저지른 미친 짓거리들이… “우리 순돌이… 어딨어.” 침착하게 말하자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내 목소리는 눈에 띄게 갈라지고 흔들렸다. 이선호가 깔깔대며 웃는 소리가 핸드폰 저편에서 들린다. 발끝부터 머리꼭대기까지 훑고 지나가는 오싹한 한기에 몸을 와락 껴안았다. [지금 혼자 있어?] “우리 순돌이 어딨냐고!!!!” [아야… 고막 터지겠다. 전진이랑 붙어살더니, 목청까지 닮았나봐?] “헛소리 그만 하고, 본론이나 말 해… 이선호. 순돌이 어떻게 된거냐고!!!” 죽여버릴거야… 순돌이 잘못되면, 이선호. 너 죽여버릴거야…!! [전진이랑 재미 좋았냐? 씨발년아. 큭큭.] “이선호!!!!” [대놓고 소리치는거 보면 밖은 아닌것같고… 너네집 근처에 심어놓은 애들이 너 집에 없다고 하니까… 아, 참… 이민우 그새끼 대단하데? 우리 애들이 미행하는 것도 용케 따돌리고 말이야.] “뭐…?” 깜깜해진 시야를 뚫고 어렴풋이 이민우의 행동이 떠올랐다. 나와 단 둘이 드라이브 하려고 이 길 저 길 헤집고 다닌 줄 알았는데, 이민우의 돌발 운전의 원인이, 청랑단의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니… 나는… 진짜 병신인가봐… [놀랄 거 없어. 실력 좋은 저격수 위치까지 가려면, 청랑단에서 기본 실력은 쌓아야 됐었거든.] “…….” 청랑단에서 이 생활을 시작했던 이민우… 울컥 목울대가 떨리더니 예고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분노라는 단어에 가까운 색이었다. [뉴스 봤겠지만, 이 몸이 좀 억울해서 말이야. 혈랑단인지 지랄인지를 대대적으로 쓸어버릴려고 이쪽에서도 계획했었거든. 아마 청랑단에서도 예감은 했겠지만, 정확한 날짜를 몰라서 허둥댔을거야. 맨날 이쪽일거다 저쪽에서 터질거다- 회의나 해댔을껄? 쿡.] “…….” 이선호의 날카로운 설명이 지날 때마다, 이번에는 전진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삼성동에 있는 혈랑단 건물에서, 전진은 최근에 대책 회의를 자주 한다고 했었다. 설마… 설마… [청랑단이 물 불 안가리고 쓸어버릴려고 계획한 날짜가 오늘이란 거, 뭐… 대충은 예감한 것 같지만.] “이선호…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분노의 눈물이 시야를 가렸다. 내 영혼마저 가렸다. 전진이 오늘 집 밖에, 나와 '따로' 나간 이유가, '전쟁' 때문이었다는 결론이 허무하게 빚어졌다. 이선호의 목소리에 잔인한 날이 장착되었다. [니 위치부터 불어. 우리 애들이 공손히 모시러 갈 거야.] “닥쳐.” 문정혁이 전화 받지 말라고 했을때, 받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것으로 순돌이의 위치를 파악 할 수 있었다. 만약 전화를 받지 않았어도 나는 후회했을 것이다. [데려와.] “?” 내가 아닌 근처 누군가에게 지시하는 듯 이선호가 말했다. 뒤이어 순돌이의 비명소리가 끔찍하게 울려퍼졌다. [꺄아아아악!!! 히, 히익! 히익! 아, 아저씨, 사, 살려주세… 하아아악!!!] “수, 순돌아-!!!!!! 순돌아!!!!! 아!!!! 씨팔!!!!! 순돌아!!!!!” [들었지? 애는 잘 있어.] “으… 으흑. 순돌아아… 순돌아….” [위치, 불어.] “순돌아… 순돌아… 흐으… 이선호. 너… 순돌이한테…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선호 목소리에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그러고보니 간간히 아이의 거친 비명이 휴대폰 저 쪽에서 얕게 섞여 들어왔다. 신음소리도 애원소리도 아닌, '비명소리'였다. 누군가에게 맞았을때나 내는 비명 소리. 이선호… 니가… 인간이야? [애 팔 다리라도 잘라서 사진으로 전송해줘야, 불을래?] “아… 안돼!!! 제, 제발. 우리 순돌이 건드리지 마. 어? 이선호. 제발… 제발… 말할게… 나 어딨는지 말할게… 제발… 제발….” [지금 우는거야? 하하하하하! 신혜성. 너는 예나 지금이나 쉽게 노출하는구나? 니 약점이 무엇인지, 설마설마 했었는데 이렇게 쉽게 드러내면 어쩌자는 거지? 재미없게스리.] “순돌이 건드리지 마… 제발 빌게… 니 앞에서 빌게… 이선호… 나… 여기… 압구정동….” [너네 고모네 집 근처?] “어… 어어… 2단지 상가 건물이야… 새로 생긴 피시방인데… 내가 밖에 나가 있을게… 어?” [그 안에 그대로 있어. 내 전화 말고 다른 전화는 받지 마. 알았어?] “응… 응… 그럴게. 그럴게. 흐윽. 이선호. 우리 순돌이… 우리 순돌이 다치면 안 돼… 우리 순돌이… 어헉….” [니 아들도 아닌데 뭘 그렇게 신경써? 남 생각해주는 척, 불쌍한 척 해 대는 건 여전하네.] “내 아들같은 애야… 어…? 어? 선호야… 내가 다 잘못했어. 으흐… 선호야아… 선호야아…!!! 순돌이 잘못되면 안돼… 제발….” [경고했어. 다른 전화 받지 마. 10분 안에 우리 애들 갈거야.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잠깐만!! 선호야!! 우리 순돌이 괜찮은거지?!! 어?!! 그것만 대답해줘!! 선호야 제발!!” [경고 했다.] “이선호!!!!” 뚝. 전화가 끊겼다. 선호의 무시무시한 음성이 더이상 들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휴대폰을 쥐고 선호에게 계속 빌었다.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어. 선호야. 선호야. 그러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쉬지 않고 흘렀다. 가슴이 터질 것같다. “순돌아아… 순돌아아아!!!!!” 허공에 대고 순돌이를 불렀다. 진짜 미친년이 된 기분이었다. 바락바락 소리치면서 양 발을 어린아이처럼 바닥에 굴렀다. 가슴팍을 부여쥐고, 주먹으로 쳤다. 탁!! 탁탁!! 가슴팍에 시퍼런 멍이 생겨도 주먹질은 멈출 줄 몰랐다. 숨이 막혔다. 죄없는 어린 아이가 어떤 학대를 받고 있을지, 약간만 상상해도 토악질이 날 만큼 온 몸이 떨려왔다. 무섭고 두렵지만 순돌이가 받을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전화가 또 울린다. 나는 선호의 경고를 상기하며 휴대폰에 찍힌 '문정혁'의 번호를 낯설게 응시했다.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받지 말라는 이선호의 말이 나를 가로막았다. 거미줄처럼 칭칭 감긴 이선호의 음성이 청각을 하얗게 말아버렸다. 한동안 울리던 전화가 끊겼다. 3분 정도 지나자 문자가 도착했다. -공주야. 너 어디야.- 전진이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순돌이 걱정에 미쳐버릴 지경인데… 내가 답문을 보내지 않자, 전진에게서 또 한 번의 문자가 왔다. -이민우에게 무전이 닿지 않아. 공주야. 이민우랑 같이 있는거 맞지?- 30초도 안 지나서 세 번째 문자가 왔다. -혼자 있는 거면 어디든 숨어!! 알았지?!! 공주야!! 오빠 말 들어!!- “흐윽… 흐윽… 흐윽….” 어떡해… 어떡하면 되는거야… 어떡하면…. 축축하고 시린 물안개가 낀 머릿속에, 뿌연 공기를 괴롭게 들이마시며 나를 부르는 순돌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착각이라지만 지나치게 생생한 아이의 목소리가 지날 때마다 나는 귀를 틀어막고 괴성을 질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약한 내 힘과, 속수무책 당할 줄 만 아는 미련함이 서러웠다. 누군가 총구를 들이댄 것 마냥 겁에 질려 뛰는 심장 소리. 침과 눈물이 망자의 그것마냥 절제 없이 떨어졌고, 까딱하면 죽겠구나- 싶을 만치 정신이 오려지고 없었다. 시장에 함께 갔던 순돌이. 순대를 좋아하던 순돌이. 엄마와 아기 책을 사달라고 떼쓰고 울던 순돌이. 내 등에 업혀있길 좋아하던 순돌이. 투정부리다가도 내가 달래주면 기다렸다는 듯 안기던 순돌이. 친부모에게 버림받고 나를 부모인 양 따르고 울기도 잘 울던 내 아기. 내 아기…!! “순돌아아… 흐… 흐으윽… 미…안해… 어… 어허….” 나는 벌을 받는 것이다. 신이 내린 형벌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괴한에게 납치되었다는 거짓말로 부모를 협박하고, 부모를 숨지게 했던 나는, 인과응보라는 말마따나 뫼비우스의 띠가 되어 돌아온 벌을 받는 중이다. 장난스런 거짓말로 순돌이를 약 올렸고, 아이가 전화 배터리를 빼놓게 했으며, 결국 순돌이가 '진짜' 납치되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순돌이를 무사히 구하게 된다면 내 혀를 뽑아버리자. 지긋지긋한 내 인생의 악순환을, 거짓말 하기 좋아하는 내 혀를. 탕- 피시방 문이 세게 열렸다. 문 위에 달려있던 종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푹- 방향제가 뿜어졌다. 나는 귀를 틀어막고 웅크려 앉은 자세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청랑단이 들어올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었지만, 막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이 이민우라는 걸 알고, 나는 안도감에 일그러지는 낯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혜성아.” “으흐… 으흑.”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으로 흠뻑 젖은 이민우. 그의 입술이 내 이름 석자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나는 처음보다 심하게 눈물을 떨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 밖으로 아무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민우가 당장 내 몸을 와락 껴안는다. 뜨거운 그의 열기가 내 영혼을 감싸주었다. “무서웠지….” “민, 우우, 으흑. 으흐으윽.”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백 번을 설명해도 너는 모르겠지… “혼자 놔둬서 미안해.” “어허, 어허, 어허어엉.” “부장님하고 연락이 늦게 닿았어. 순돌이 찾느라 정신이 없었어서… 놈들이 납치해 간 것 같아.” “민, 우야….” 조용하면서도, 한이 서린 너의 눈빛. 편안하지만 비장함이 묻어나는 네 영혼. “괜찮아…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민, 우우, 야아. 나, 어허어어.”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착하지….” “어허어어엉. 어헝, 어헝, 어허어어.” 왜 나는 이렇게 어른스럽지 못할까. 우리 순돌이 어떡해… 민우야… 어? 우리 순돌이 잘못되면 나 못 살아… 나같은거… 나같은거… “울면 못생겨져서 안되는데….” “어허, 어헝… 못… …….” 못생겨진다는 민우의 말에, 기가 막힌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이민우가 나를 꽉 끌어안고 어깨를 꿈틀대며 미친듯이 웃는다. “하하하하하.” “어허어어어엉-” “우리 큰애기. 언제까지 우냐? 아 지겨워.” 내 등을 꼭 껴안고 진짜 갓난 아기를 달래주듯 요리조리 흔들던 그가, 천천히 품에서 나를 떼어낸다. “못생겨진거 봐라… 쯧.” 내가 진짜 괜찮은지 오목조목 살피다가, 천천히 떨리는 입술을 내 이마에 붙인다. 춥… 짧게 붙였다가 떨어지는 민우의 입술… 순간 당황해서 진짜 눈물이 멎었다. 이민우가 붉어진 동공을 감추려는지 긴 앞머리카락 사이로 눈꼬리를 초생달 모양으로 만들었다. “나가자. 부장님이 어디 계시는지 연락해봐야겠다. 지금 너는 어딜 가도 위험할 것 같으니까, 부장님 지시대로 그쪽으로 움직이는게 나을 거야.” 그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제대로 알아들을 경황도 없었다. 그저 시키는대로 하리라. 전진이 있는 곳에 이선호가 있을 것이고, 이선호가 있다면, 우리 순돌이도 있을 테니까. 피시방 구석에서 막 한 걸음 뗄 무렵, 이번엔 밖에서부터 수많은 구둣발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이민우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청랑단이 벌써 여기까지 온 것이다. 몸집이 큰 청랑단 너다섯이 피시방 안에 들어서며 휘파람을 분다. “이여~ 이게 누구신가.” “박정철….” “따까리 짓 하면서 내 밑에서 형님~ 형님~ 하던 놈이, 허허. 이민우. 마~이 컷네.” “입 닥쳐.” 야비하게 생긴 행동 대장격인 놈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이민우는 재빨리 자기 등 뒤로 나를 숨겼다. 간담이 서늘할 만치 위협적인 이민우의 목소리…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즌진이 밑에서 시다바리 노릇 하기 좋제?” “김동완이 시켰냐. 여전히 더럽게 노나 보군.” “비키라, 임마야. 니 새끼한텐 볼 일 없으시다. 저~기 예쁜이만 쪼까 내 놔라. 실지로 보니까니 졸~라게 미인이네.” “민우야….” 이민우의 등, 와이셔츠 부분을 꽉 쥐었다. 그가 내 부름을 듣고, 시선은 여전히 박정철과 청랑단 새끼들을 향한 채, 등으로 팔 하나를 가져와서 내 손을 꽉 움켜쥔다. “걱정하지 마. 누구도, 너한테, 감히, 손 못 대.” 너의 신념같은 한 마디들이 얼마나 내 가슴을 타들어가게 하는지… 박정철이 껌을 짝짝 씹던 것을 퉤- 뱉어내며 피식 웃는다. “야~ 야, 총대 없이 덤빌 줄도 모르는 아새끼가 뭐라 씨부러쌌노?” 나는 흔히들 말하는, 깡패에게 삥 뜯긴 적도 없었다. 이런 직접적인 공포는 실로 오랜만이지만,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처음'같은 공포이기도 했다. 겁에 질린 내 숨소리와 상반될 만치, 이민우는 침착하게 놈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놈들이 쇠파이프를 착- 착- 손바닥에 치며 위협스레 다가왔다. 그때마다 이민우는 한 걸음씩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혜성아. 내가 신호 보내면, 무조건 밖으로 튀어서 택시 잡아 타. 알았지.” “미… 민우…!!” 그는 이번에도 등으로 말했다. 간절하고 정확해서 슬프도록… “나 믿어. 너한테는 손 하나 까딱 못하게 한다.” “!!” “내 눈과 귀는, 예전부터, 지금도, 앞으로도. 너 하나야.” “민우야…!!” 마지막으로 내 손을 꽉 잡는 너의 불꽃같은 신념 하나… 바보같이 겁에 질린 내 어리석은 눈물. 내가 민우에게 몇마디 건내려던 찰라, 박정철이 허공에 손을 까딱했다. 박정철 뒤에 서있던 두 놈이 무섭게 달려와서 이민우를 공격했다. 민우는 나를 최대한 뒤 쪽으로 팟- 밀어냄과 동시에, 한 놈의 복부를 주먹으로 강타했다. 나머지 한 놈의 쇠파이프가 이민우의 이마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우욱!!” 민우의 방어에 잠깐 몸을 구부린 놈이 쇠파이프를 놓쳤다. 이민우는 재빨리 놈이 놓친 쇠파이프를 집어 들고 나머지 놈을 상대했다. 누가 봐도 노련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이민우. 그는 내가 알던 이민우가 아니었다. 한때 싸움판의 전진을 보고 받았던 충격이, 이민우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는 살인귀처럼 움직였다. 강하고, 정확하게. 내가 자기 등 뒤에 있다는 것마저 잊을 만큼. “이 씨팔!!! 다 덤벼!!!” “신혜성!! 가--!!!” “!!!” 전원이 이민우를 향해 돌진한다. 이민우는 이때다 싶어서 내게 신호를 보냈다. 나는 엉거주춤 서있는 상태에서 겨우겨우 피시방 문 앞까지 달려갔다. 이민우… 이민우… 이민우…!!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입구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세게 그러쥐었다. 청랑단인가…!! 하얗게 질린 몰골 그대로 턱을 올렸다. “형수님!! 괜찮으십니까!!” “태, 태준씨.” 황태준이었다. 청랑단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한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치 앞에서, 홀로 싸움중인 이민우. 벌써 수 십 대의 컴퓨터가 와르르 쓰러졌고, 두 놈 이상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자빠져 있었다. 황태준이 재빨리 강목을 쥐고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씨발!! 개새끼들 마약 처먹었냐!!! 어따 족을 들이대!! 형수님!! 이리 오십시요!!” 그가 따까리 한 놈에게 나를 맡기고, 다짜고짜 싸움판에 끼어들었다. 캉--!!! 황태준의 쇠파이프질에 청랑단 한 놈의 어깨가 바스라졌다. 컴퓨터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세 놈을 동시에 상대하던 이민우가 황태준을 알아보고 짧게 눈을 빛냈다. “형님!! 개새끼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형수님 모시고 가십시요!!” 퍽- 파팍-!! 집단으로 엉겨붙어 피를 토해내고 살을 찢는 그들. 나는 덜덜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혈랑단 한 명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이민우가 멀리서 나를 힐끗 쳐다본 뒤, 황태준에게 소리쳤다. “아니야. 너 부장님 위치 알지. 급하니까, 우선 니가 혜성이 데리고 가!! 어서!!” “하, 하지만, 형님.” 당황하는 황태준이 반항할 찰라도 주지 않고, 이민우가 불처럼 고함을 토해냈다. “빨리 가라고!!! 씨발!!!” 싸움터에서의 이민우는 한 마리 외로운 늑대같았다. 그간 먹이를 찾지 못해 외로운 울음을 삼키던 흰 털을 지닌 늑대. 온 몸의 혈유를 뿜어내듯 외치는 민우의 함성이 70평 내부를 흔들었다. 나조차 멍해질 만큼, 이민우는 거대하게 피어올랐다. “빨리 가!!! 박정철이!! 오래 살았지!!! 퉷!! 골 빈 새끼가 아가리로 숨 쉬느라 욕봤다 씨발!” “저 개씨부랄!! 뭐라!!” “황태!! 늬 형수 챙겨서 꺼져!!! 방해 된다고!!!” 민우는 나를 보며 방해가 된다고 했다. 피비린내 나는 현장에서, 이 지옥의 홍수에서 나를 신경쓰느라 그는 겁에 질리다 못해 파랗게 얼어버렸다. 황태준이 민우의 뜻을 뒤늦게 감지하고 후다닥 물러섰다. “예, 예. 알겠습니다!!” “아… 안돼… 이민우… 이민우…!!!!” 이민우가 건재하듯, 박정철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부하들이 쓰러졌어도 박정철은 노련한 솜씨로 이민우에게 파고들었다. 황태준은 곧, 모든 부하들에게 이민우를 도우라고 지시한 뒤, 울부짖는 내 몸을 어깨에 걸쳐매고 밖으로 피했다. “내려줘요!! 아악!! 이민우!! 이민우!!” 황태준의 어깨에 걸린 채로, 나는 양 팔을 허공에 쭉 뻗고 이민우를 소리쳤다. 거품처럼 빠져나가는 나의 비명과 눈물 세례 속에 이민우가 죽어 나갈 것 같았다. “형수님! 진정하십쇼!! 형님 괜찮으십니다!! 지금은 형수님이 먼저예요!!” “민우야… 으흑… 으흑… 이민우….” 나를 위하는 이민우… 언제나 나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바보같은 이민우… 어린시절부터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나를 보고 기집애처럼 생겼다고 놀리는 동네 놈들에게 무작정 몸으로 덤볐던 이민우… '미누야. 미누야. 괜찮아? 흐윽.' '아야… 나 괜찮아.' 왜 하필 이런때 생각날까. 일곱살, 그 어린 시절부터 이민우는 늘 내 곁에 있었다. 나를 지켜줬었다. 놀이터에서 이민우와 소꿉장난 치면서 놀다가, 나를 기집애라고 놀렸던 동네 꼬마들에게 흙을 던지며 덤볐던 그를 기억한다. 당시 이민우는 나보다 키만 약간 컸지, 덩치는 또래들보다 조금 외소한 편이었다. 그는 꼬마들 세명이 동시에 상대하는 바람에 바닥을 굴러다니며 맞았었다. '으뜩해… 으뜩해… 흐으윽. 꼬모한테 홍나게따… 아흐윽. 어마아… 아하앙-' '울지 마… 혜성아아….' '어마아… 어마아… 으하아앙-' '내가 꼭… 내가 어른이 되면 더 힘이 쎄져서 너 지켜줄거야.' 너는 기억하고 있을까. 나조차도 다 망각했던 어린 날의 기억을. 이순간의 너는, 오래 전의 약속대로 죽음조차 두렵지 않다며 나를 지켜주고 있어… 그 예쁜 시절의 기억들, 나는 다 잊고 살았었어… 미안해… 너는 늘 신념처럼 각인하며 살았던 나와의 부질없는 기억들이, 네 인생의 전부였을텐데… '내가 어른이 되면, 더 힘이 쎄져서 너 지켜줄거야.' 일곱살의 너는, 스물일곱에도 같은 소릴 터뜨리며 내 영혼을 움켜쥐었다. '내 눈과 귀는, 예전부터, 지금도, 앞으로도. 너 하나야.' 너 하나야… 신혜성. 너 하나야… 황태준이 몰고 온 차는 택시였다. 청랑단이 따라붙을 때를 대비해서 요즘은 택시니 버스를 몰고 서울시내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내가 전진과 다닐 때는 벤을 이용했는데, 오늘처럼 위급할 때는 종종 이용한단다. 그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황태준이 손수 매 준 안전벨트를 꽉 움켜쥐고 나는 정신없이 눈물만 흘러내렸다. 이민우가 무사하기를, 순돌이가 무사하기를, 그리고 전진… 전진은 어떻게 된 걸까. 한명씩 이름을 떠올리다가 동공에 빛이 스쳤다. “태준씨.” “예, 형수님. 말씀하십쇼.” 악셀을 밟는 와중에도 백미러를 힐끔대던 황태준이, 내가 부르자 시속을 줄였다. “문정혁… 아까 문정혁이 전화 했었어요.” “…….” 150키로… 90키로… 80키로… 시속을 정상 속도로 맞춘 황태준이 잠자코 듣기만 할 뿐 가타부타 대답이 없다. 덕분에 내 입술과 어리석은 심장만 다급해졌다. “나한테 그랬어요. 전화 받지 말라고… 전화… 왜 전화를 받지 말라고 했을까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이상해요. 아니, 아귀가 들어맞아요. 문정혁이 전화 받지 말라고 강조한 직후에, 이선호에게 전화가 왔거든요.” “…….” 두근, 두근, 두근, 두근… “태준씨… 태준씨는 알 거 아니에요. 뭐라고 말 좀 해줘요!!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요?” “형수님… 그게….” “우리 순돌이는 갑자기 어떻게 된 거고, 문정혁이 왜 알고 있는 거예요!!!” “우선 진정하시는게 좋겠습니다. 형수님. 침착하시고….” “내가 지금 침착하게 생겼어요?!!! 우리 순돌이가, 우리 민우가…!!! 아아악!!!” “형수님!!!” “히익- 히이익- 히익- 히이이익-!” “!!!!”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누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혀를 내밀고 산소를 달라는 듯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눈알이 튀어나올 만치 커지고, 피부가 팽팽해졌다. 끼익- 차가 갓길에 섰다. 황태준이 내 가슴을 쓸어주며 차분한 목소리로 숫자를 셌다. “형수님. 괜찮아요. 괜찮아요. 자… 제가 말하는 숫자만 연상하세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시고요. 하나… 둘… 셋… 예. 그리고 숨을 조금씩 내쉬는 거예요. 예. 잘 하셨어요. 다시, 하나… 둘… 셋… 숨 내쉬고… 들이마시고….” “후우… 후우… 후우….” 갑작스런 상황이 준 충격 때문에, 뇌에 공황상태가 온 것이었다. 황태준은 차에 걸려있던 와이셔츠를 손에 쥐었다. 밖에 있는 편의점에 후다닥 달려가서 생수를 사오더니, 와이셔츠를 생수로 적셔서 내 이마에 갖다 댄다. 차갑고 짜릿한 느낌이 이마에서부터 발 끝까지 혈관을 자극했다. 그제야 숨이 고르게 돌아왔다. “자요. 물 마시세요. 형수님.” “하아… 하아… 하아….” “많이 놀래셨나 봅니다.” “하아… 하아….” 황태준은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 방금 했던 동작을 여러 번 반복했다. 내 귀에 숫자를 세주고, 숨을 쉬게 한 뒤, 차가운 감각을 피부에 닿게 하고, 물을 마시게 했다. 과연, 몇 분이 지나자 내 몸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더는 까무러치지 않는 내 몸이 아직 살아 있구나- 뇌가 인식한 것이다. 나는 택시가 고속도로에 진입할 때까지 죽은 듯이 숨만 쉬었다. 어떤 말도 입에 담지 않았다. 내 몸이 발작하는 자체가 두려웠던 것이다. 스스로가 한심해서 눈물만 가끔 뺨을 적셨다. 황태준도 내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가 라디오를 켠다. 에프엠에서 디제이들의 재미있는 농담이 튀어나왔지만 우리중 누구도 웃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국도로 가는게 좋겠습니다.” “…….” 황태준이 오랜만에 입을 떼더니, 딱 그 말만 하고, 고속도로 중간에서 국도로 택시를 몰았다. 시멘트 바닥과 휑한 하늘만 차창에 부딪혔던 고속도로와 달리, 국도에 들어서자 아름드리 자연이 햇살처럼 부산스럽게 시야에 닿았다. 마치 음악처럼 노래하듯이 자연이 살랑살랑 움직인다. 해가 질 무렵, 택시가 숯불구이 식당 앞에 섰다. 나는 허망한 웃음소리를 냈다. 지금처럼 내 자신이 병신같다고 느낀 적이 또 없었다. 꾸르륵- 빈 뱃속에서 엄청난 신호가 울렸으니까. 우리 순돌이가 살아 있을지, 죽어 있을지 모르는 와중에, 나도 사람이라고 밥 달라는 소리가 나오다니. “태준씨… 그냥 가요. 부탁이에요….” “안됩니다.” “태준씨이… 나… 순돌이 봐야되요….” “부장님을 믿으세요. 형수님.” “내 몸이 배고프다고 해도, 내 정신은 하나도 배 고프지 않아요. 지금 뭐 먹으면, 나는 다 토 해요. 진짜예요. 태준씨….” 나는 황태준의 옷깃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는 내 손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전진이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황태준은 순간 갈등하는 듯 했다. 그가 갑자기 정중하게 내 떨리는 팔을 뿌리치고, 차 밖으로 내렸다. 나는 그를 부를 힘도 없어서 축 늘어졌다. 하지만 늘어질 새도 없이 조수석 문이 열렸다. 천천히 시선을 돌린 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황태준은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있었다. “그럼… 조금이라도 쉬시다 가세요… 도착하자마자 쓰러지실까봐 겁나요. 형수님… 저도 부탁합니다.” 전진이 나를 보는 안쓰러움을, 전진 대신 실천해주는 든든한 부하 황태준… 그래. 그에게서 일단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그가 아는 대로라도 들어야겠다. 나는 알았노라 대답했다. 황태준이 붉어진 눈을 든다. “부서지실 것 같습니다. 형수님… 가서 고깃국물이라도 드세요.” “네… 그래요.” 순돌이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하지만, 순돌이를 위해서라도 나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황태준의 말마따나 이를 악 물어야 한다. “어머나!! 신혜성이다 신혜성!” “신혜성씨 맞죠!! 우와!! 우와!! 싸인 한 장 만 해주세요!! 엄마아- 신혜성이야! 신혜성!!” 숯불고기 집에 들어가자마자, 카운터에 있던 통통한 여자가 부리나케 달려와서 내 팔에 매달렸다. 내 몸도 덩달아 기우뚱했다. 이어서 주방에 있던 사장되는 아줌마도 달려와서 내 몸을 껴안으며 반가워한다. 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웃었다. 그들이 사진 찍자고 부탁하는 것에도 순순히 응해줬다. 정말이지 이럴 때는 내가 연예인이라는게 싫다. 울고 싶을때, 웃어야 한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건 또 없으니까. “신혜성씨!! 소머리국밥만 드신다고요? 아이고, 서비스로 갈빗살도 드릴테니까 드셔보세요!!” “괜찮습니다….” “아이고!! 텔레비전보다 이쁘장~하긴 한데, 뼈만 남았네! 쯧쯧쯧. 야!! 성자야!! 양념한거 3인분 갖고 와라!!!” “아니… 저기….” 내가 거절하려고 하자, 황태준이 나선다. “예. 그럼 잘 먹겠습니다.” “태준씨.” 그가 내 귀에 대고 나직이 말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 먹을게요, 형수님.” “…….” “아이고, 이분이 그… 연예인들하고 같이 다닌다는 매니저? 매니저인가봐요?” “하하. 예. 제가 신혜성씨 매니저 입니다. 근데, 조용한 방은 없습니까. 사장님?” “조용한 방이요?” “예. 신혜성씨가 아무래도 좀 주목을 받다 보니… 식당에 폐가 될것 같아서요.” “아아~ 예. 이쪽으로 오셔요. 식당 뒤가 우리 집인데, 방에서 드시면 되겠네~!” “고맙습니다.” 20분 후. 국도의 아름드리 산맥 중간에 위치한 숯불구이 식당 뒤의, 기와지붕 집의 방 안에, 거대한 시골식 밥상이 도착했다. 나는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고, 황태준은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형수님이 유명한 분이라는 거 깜빡했습니다.” “거 봐요. 내가 그냥 가자고 했잖아요.” “그, 그러게요.” “큭….”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다. 바람빠지고 허무한 웃음소리였지만, 황태준은 내가 약간 미소짓자 안심한 눈치였다. “드시고 가는게 좋아요. 국물이라도 떠 먹어 보세요. 어차피 우리가 가는 지역은 위험하니까요.” “태준씨 다 먹어요… 근데, 위험한데 나를 데려가도 되는 거예요?” 방해될텐데… “형수님이 서울에서 조무래기들 보호 아래 있는게 더 위험하다고, 부장님이 모셔 오라고 하더라고요.” “네에….” “어서 좀 드세요. 형수님 쓰러지시면, 저 부장님한테 터집니다.” “하하… 네에….” 어쩌다 보니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그것도 옛날식 기왓집 창호지방, 따끈한 아랫목에서 식사하게 되었다. 황태준은 내가 수저로 국물을 조금씩 떠 먹는걸 봐서야, 지글지글 타오르는 갈빗살을 우적대며 씹어먹었다. 입 안에 삼켜지는 국물이 어떤 맛인지 모르겠다. 차라리 술이나 마셨으면…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식당 사장님이 수정과와 과일을 갖고 오셨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했고, 사장님은 떡도 갖다드릴까? 식으로 자꾸 방에 들어오려고 했다. 황태준이 말리지 않았다면 처음 보는 식당 사장님하고 떡 먹다가 체할 뻔 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국물만 겨우 삼켰고, 황태준은 갈비 3인분과 내 몫의 소머리국밥 건더기를 해치워줬다. 그도 먹는게 고역일텐데… 황태준의 기분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순돌이와 이민우. 이름만 떠올려도 괴로워져서… “문회장님은….” 담배를 입에 무는 내 곁에 무릎발로 다가온 황태준이 불을 붙여주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입을 뗀다. 그런데, 문회장이라고? 내가 놀라서 되물었다. 문회장이라뇨? 황태준이 머리를 북북 긁으며 대답한다. “요새 저희들끼리는 문회장님이라고 호칭을 부릅니다. 이철호가 콩밥 먹기 직전이라서요.” “네에….” 문정혁이, 한명 그룹 총수가 되는 거구나… “문회장님은, 형수님도 아시다시피 그룹 총괄…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부분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뉴스에 나오는 부분이라던가, 회사 돌아가는 일 처리들이요.” “…….” “반면, 회사 뒷부분 일들은, 안 보이는 쪽 일은, 우리 부장님이 하시는 거구요.” “…….” “그러니까, 보이는 쪽 안 보이는 쪽 일을, 두 분은 다 알고 계십니다.” “…….” 서로 하는 일은 극과 극으로 다르지만, 서로의 일을 잘 알고 있다는 '그것들'. 그렇기 때문에 이철호를 쓰러뜨릴 수 있었을테지… 서로 하나가 되어 일을 추진했었으니까…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문회장님이 형수님한테 전화했다는 건, 청랑단이 혈랑단을 치기 시작한 뒤, 그러니까… 형수님 조카분이 납치된 사실을 알자마자, 전화 하신 걸 거예요.” “그렇군요.” “뭐… 저의 짧은 머리로 굴려 본 거지만… 그럴 것 같다는 거죠. 형수님이 궁금해 하시기에….” “아뇨. 태준씨 설명대로, 문정혁은, 우리 순돌이가 납치된 거 알자마자 나한테 급하게 전화한 것 같아요. 그만큼… 목소리가 다급했거든요.” “예. 아마 맞을 겁니다. 회장님도 현장쪽에 출발하신다고 들었거든요.” “정혁이도요…?!!!” 맙소사… 나는 입가에 손을 가져가며 파랗게 질린 채로 물었다. 황태준이 비장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정혁이 직접 움직일 정도면… 대체 이 싸움은…!! “이철호가 무너지면서, 청랑단이 폭팔한 겁니다. 형수님.” “그럼… 어떻게… 어떻게….” “단 몇시간 만에 끝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 “국민들이 다 아는 전쟁은 '뉴스'에서 거의 끝나가고 있지만… 진짜 전쟁은 이제 시작이거든요.” “!!!!” 내 눈이 경악으로 물든 것을 보고 황태준은 잠깐 말을 끊었다. 아까처럼 발작하는 건 아닌지 염려된 모양이다. 나는 괜찮다고 거듭 말하며, 계속 설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 “지방에 흩어져있던 애들이 모일 겁니다. 청랑단이 혈랑단을 전멸시키려고 계획을 길게 잡았거든요. 지방쪽에는 선박과 도박, 유흥계쪽으로 흩어진 혈랑단 숫자가 꽤 됩니다. 청랑단 못지않게요.” “그러니까… 한 쪽이 사라질 때까지… 싸운다는 건가요…? 경찰은…? 특공대… 기동대가 말리지 않고요?” “형수님.” 내 바보같은 질문에, 황태준이 진지하게 낮은 음성을 묵직하게 깔았다. 마른 입술을 적시며, 그는 말했다. “백골단(사복경찰관으로 구성된 다중범죄 진압 임무를 수행하는 경찰부대)은 일반 시민들이나 말리는 새끼들이고요. 가끔 꼴같지도 않은 조직들 수거하러 갈 때도 동원되긴 하지만….” “…….” “이 사태가… 경찰들도 묵인하는 '전쟁'이라면… 이해 하시겠습니까?” “!!!” “물론, 일이 커져서 일반인에게도 피해가 갈 경우에는, 누군가 책임은 져야 할 테지만, 현재 상황이 그렇습니다.” “나는….” “예?” 촛점이 흐려진다. 나는 허무한 바람빠지는 소리를 웃음 소리인 양 조용조용 흘리며 말했다. “나는… 참… 무서운 나라에서 살고 있었네요. 태준씨….” “…….” 그뒤 우리는 조용히 담뱃불만 태웠다. 불씨가 다섯 번 넘게 사그러들때가 되어서야, 창호지 문을 열고 차가운 바람에 이마를 적셨다. 가슴 속이 뻥 뚫릴 만치 시니컬한 겨울 바람이 흉측한 소음을 내뱉고 있었다. 안 추우세요? 라고 황태준이 여러 번 물었지만,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출발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든게 멀어보이고, 하룻밤의 꿈처럼 믿어지지 않아서… 내가 말이 없자, 황태준이 아무 말이나 꺼내기 시작했다. “제 고향은 제주도예요. 그래봤자 다섯살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고아로 큰 거나 마찬가지였죠.” 그런 그가 고맙다. 왜 전진이 황태준을 가까이에 두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생김새처럼 행동도 듬직하고, 말씨도 강직한 황태준… 나는 잠깐이나마 두려운 현실을 잊으려고 황태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쳤다. “그럼… 친척분들이 태준씨를 키워준거예요?” “아뇨. 제 친척이란 어른들은… 살기가 참 빠듯했었나봐요. 정부에서 키워준다는 시설이 있다는 소리 듣고 냉큼 서류에 도장 찍고, 다섯살 코흘리개를 경기도로 보냈습니다.” “저런….” “초등학교 5학년때 퇴학당하고, 인생을 막 굴리면서 살았습죠… 안 해 본 거 없습니다. 죄다 인간말종이란 말 들을 짓이었지만… 그런 저를 구해주신게 부장님이셨어요.” “전진이요?” “예. 부장님도 그땐 저랑 비슷하게 어리셨는데… 아마 스무살? 그때쯤이었을 겁니다. 제가 삐끼 생활 하면서 간당간당 놀면서 지낼 땐데, 한번은 제가 나이트에 놀러 왔던 부장님 옆에서 서빙하다가 양주를 쏟아… 형수님. 왜그러십니까?” 내 미간이 구겨진 걸 보고 황태준이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툴툴대듯 대답했다. “…전진이 나이트에서 놀았을 줄은 몰랐어요.” 황태준이 뭔 소린가 했다며 웃는다. “하하하하… 혈랑단이고 청랑단이고, 취미로 지역 관할하면서 지내는 따까리들이 좀 있거든요. 주먹질에 소질이 거의 없고 덩치만 좋은 새끼들이죠. 그자식들한텐 푼돈이나 모으면서 살라고 나이트나 텐프로 정도를 지정해줘요. 부장님은 그런데 잘 안가세요. 가끔 한바퀴 도는 정도…?” “네에…” 이제 진짜 출발해야겠다 싶어서, 우리는 처음보다 편해진 분위기로 외투를 껴입었다. 그때, 내 휴대폰이 발작하듯 울렸다. 두근, 두근, 두근. 침을 꿀꺽 삼키며 발신인 번호를 확인하자마자, 안면에 더운 습기가 차올랐다. 이선호… 자기 전화만 받으라고 협박하던, 이선호였다. 나는 황태준에게 어쩔까요? 표정으로 물었다. 벌써 이선호가 우리 소리를 엿듣는 것마냥 초조해 하며. 황태준 역시, 잠깐 고민하다가 받으세요- 라고 작게 말했다. 떨리는 손가락을 겨우 움직여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붉은 장미의 가시같은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온다. [잘도 피하셨겠다?] “이선호….” 쿵, 쿵, 쿵, 쿵, 쿵. 두려움과 절박함, 분노와 쓰라림. 세상의 어두운 감정이 모두 내게 쳐들어왔다. 눈앞이 깜깜해져서 아무 말도 못하는 내 앞에 황태준이 다가왔다. 그가 방 안에 있던 꼬마애들용 종합장 뒷 면에 연필로 글자를 썼다. 뭐지…? 하고 황태준이 급하게 쓴 글자들을 읽었다. -침착하십시오. 형수님. 절대 감정적으로 굴면 안됩니다.- [옆에 누구 있어.] “너…야말로, 먼저 말 해. 청랑단이 혈랑단을 밟는데, 왜 순돌이를 납치한거야.” 황태준이 이번에도 뭐라고 재빨리 적어서 보여준다. -잘 하고 계십니다. 형수님. 차분하게 대응하세요.- 차분하게… 차분하게… 나는 황태준에게 눈짓으로 알았다는 뜻을 전하고, 이선호의 표독스러운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어디서 교육 좀 받으셨나? 아니면, 진짜 돌았나? 신혜성.] “어차피 너 있는 곳으로 갈거야. 거기에 진이도 있을 거 아냐.” [!!!] “소원대로 가 줄테니, 우리 순돌이 바꿔.” [하… 머리 쓰시겠다…?] “아니. 난 너랑 달라서 머리 쓰는 법 따위 몰라. 너도 옛날에 인정했잖아. 전진과 나는 닮았다고.” [뭐…?] 이때 황태준이 또 뭔가를 급하게 휘갈겨 쓴다. -함부로 자극하면 안됩니다. 형수님. 부장님 얘기는 삼가하시는게 좋아요.- 심장이 터질 것처럼 긴박한 순간이지만, 나는 황태준에게 심적으로나마 의지하며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순돌이 바꿔. 두시간 안에 도착할 거야. 내가 두시간 안에 도착 못하면 그때 가서 애를….” 아아 순돌아… 내 아기… 눈을 질끈 감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연기자로 살았던 인생이 헛되지 않았는지, 지금 내 입 밖으로는 나조차도 놀랄 날카로운 어투가 휙휙 튀어나왔다. “애를 니 맘대로 해도 늦지 않잖아? 그러니까, 애부터 바꿔.” [좋아.] 잠시 후, 순돌이의 울음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삼촌….] 하나님… 내 거짓 연기는 거기서 무너졌다. “순돌아!!! 순돌아!! 우리 순돌이. 괜찮은거야? 응?” [삼촌… 나… 아퍼… 으흑, 으흑.] “뭐!!! 어디가!!! 왜!!! 왜!!! 어디, 어디가 아픈데 순돌아!!! 응? 거기서 아저씨들이 순돌이 때렸어?!!” [삼초온… 삼초온….] “그, 그래!! 순돌아! 조금만 기다려. 삼촌이 금방 갈게!! 어?!! 순돌아!! 순돌아!! 너 목소리 왜그렇게 힘이 없어!! 순돌아!!!” 옆에서 황태준이 제발 진정하라고 말 할 정도로 나는 흥분했다.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콧김이 쉭쉭 나왔다. 순돌이가 아프다는 소리에 이성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애 살아있는거 확인 됐지?] “순돌아!!! 순돌아!!!!” [딱 두 시간만 기다린다.] “뭐…뭐?!! 이선호!! 우리 순돌이 다시 바꿔!!! 너 애한테 무슨 짓했어!! 개새끼야!!!” 뚝. 이선호는 이번에도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버렸다. 머리 꼭대기까지 흥분한 내가 이선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자, 황태준이 재빨리 내 손을 막았다. “어서 출발해요, 형수님. 진정하세요. 이선호는 싸움 구역에서 좀 떨어져 있나 봅니다. 거기에 조카분이 계시나 본데….” “그래요… 빨리… 빨리 가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제발… 제발…!!! 내가 대신 죽을 테니, 죄 없는 우리 아기 살려주세요…!! 저 불쌍한 것,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가혹한 짓을 하십니까…!!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순돌이 이름과 이민우를 번갈아가면서 불렀다. 황태준이 나보다 더 놀라서 어깨를 움찔하며 괜찮냐고 묻는다. “어디… 어디예요… 다 온 건가요?” “예. 형수님. 부장님 계신 곳에 도착했습니다.” 전진이 있는 곳. 그 말만 들어도 안심하는 심장을 느끼며 주룩 눈물을 흘렸다. 전진과 굉장히 오랫동안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 봤는데도 불구하고, 몇 년은 떨어진 것 같다. 그를 만나면 당장 순돌이부터 구해내라고 따질 것이다. 내 성질대로 우겨대겠지. 그럼 전진은 나를 감싸주고, 내 눈물을 닦아주며 늘 하던대로 공주야… 우리 공주… 미안해… 미안해… 잠깐의 상상 뿐인데도 나는 억척스러울 만치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그래도 이 상상이 도움은 되었다. 적어도 전진을 보고 어린애처럼 굴지 말아야겠다는 판단이 섰으니까. 택시가 도착한 곳은 어딘지 한 번에 알아 보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듯이 가로등도 없는 시골 하늘 아래, 사방이 암흑지대였기 때문이다. “저… 제 팔 잡고 걸으세요, 형수님.” “네… 고마워요.” 황태준의 팔에 팔짱을 꼈다. 든든한 그가 있어서 그나마 진정할 수 있었다. 낡고 오래되어 보이는 공장이 시선에 잡혔다. 아니, 공장 하나만 있는게 아니라, 여기는 그야말로 대규모 공장 단지였다. 운동장만한 터를 가운데 두고 ㄷ자 형태로 지어진 거대한 공장 건물. 쌀쌀한 바람에 몸을 움츠리며 황태준이 안내하는대로 내부에 들어갔다. 윗층에 사람 소리가 들린다. 전진…!! 보석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는 주홍빛 전구불을 따라서 한계단씩 올라갔다. 계단이 워낙 좁아서 황태준이 앞에 섰고, 나는 뒤에서 그의 팔에 의지해서 걸었다. “다 왔습니다. 형수님.” “네에.” 전진…!! 자연스럽게 전진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입 모양을 만들던 나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놀라서 굳어버렸다. 황태준의 여유있는 목소리톤이 느리게 전달된다. “형수님. 제가 말한 부장님이십니다.” “태준씨… 그게 무슨 소리에요….” 말도 안돼… 태준씨. 지금 잘못 찾아와서 미쳤어요…? 쿵… 쿵… 쿵… 경악으로 물든 내 눈동자까지 튀어오르는 심장소리. 혈관이 꿈틀대며 온 몸을 자극한다. 황태준은 대체 왜 그러냐는 듯 한 표정으로 척척 걸어갔다. 부장님 쪽으로… “열다섯살때 저 구제해 주신 분이시죠. 지금 오년째 스파이짓 하는 법도 꼼꼼하게 알려 주셨었고요.” “!!!!” 황태준이 자기의 부장님 앞에서 꾸벅 구십도로 허리를 숙인다. 그리고, 황태준에게 눈짓으로만 수고했다는 뜻을 전하는 남자는, 김동완이었다. “참 대단한 분입니다. 김부장님은, 청랑단이 아무리 위급할 때라고 해도, 무조건 전부장 개새끼 말대로 하라고, 그렇게 지시했었으니까요.” 맙소사…!! 하얗게 밀려오는 충격의 파도 속에서, 모래알같은 기포를 터뜨리며 내 영혼은 산산히 무너져 내렸다. 황태준이 전진의 편이 아닌, 김동완, 청랑단 소속이었다니…!!! 머릿속에 대포가 터지고 징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까 식당에서 황태준이 과거 얘기를 해줬던 부분은, 자기를 거둬줬다는 은인은, 전진이 아니라 김동완이라는 소리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은 이런 때 쓰는 것이었다. 내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김동완. 그를 보며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황태준의 배신에 대한 분노도, 방금 일에 대한 경악도 아닌, 전진. 전진이 위험하다는 것…!! “신혜성.” 김동완의 음성은 예나 지금이나 살벌하고 위협적이다. 그리 크지 않은 톤인데도 불구하고 듣는 즉시 '김동완'이라는 걸 알아챌 만한 무엇이 그에겐 존재했다. '그것들' 못지 않은 장벽 같은 압도감에 질식사 할 만치, 김동완은 눈빛 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했다. 그의 조각같은 이목구비가, 서늘한 달빛 음영에 하나씩 비친다. “김…동완.” 나는 억지로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가 피식 웃는다. 달빛에 은은하게 반사되는 와인색 수트. 붉은 피를 칠한 것처럼 그의 몸에 달라붙어있다. 녹색 칠이 된 시멘트 바닥에 그의 그림자가 길게 밀려왔다. 넓은 벽에 나열된 사무용 책상, 왼편에는 녹슨 기계들이 덜덜덜 소리내며 움직였다. 지이잉… 철컥! 지이잉… 철컥! 사람 다섯 배 만한 컷팅 기계가 우지끈 하며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을 무섭게 찍었다. 컷팅 기기 옆의 건조시설에서도 핏물 같은 것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저 피가 무슨 피일까.” “뭐…?” 지잉… 철컥! 지이잉… 철컥! 투두두두두. 투두두두두. 컷팅기와 건조대 소리. 그리고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펌프 소리… 건조대에 흐르는 핏물을 턱으로 가리키던 김동완이 멋지게 미소지으며 내게 물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가 건조대에 묻은 혈유를 손가락으로 쓱 훔치더니 내 앞으로 다가온다. 대기중이었던 황태준이 내 복부를 주먹으로 친다. “앉아!! 새꺄!!” “윽!!!” 힘겨운 숨을 토해내며 무릎을 꿇었다. “쿨럭! 쿨럭! 쿨럭!” 기침이 다 빠져나가지도 못했는데, 황태준은 내 뒤에서 머리칼을 세게 움켜쥐고 위로 올렸다. 아악!! 아픔에 못이겨 비명을 소리쳤다. 코앞까지 걸어온 김동완이 허리를 숙이더니 손가락에 묻힌 피를 보여준다. “짐승의 피일까.” “쿨럭! 쿨럭!” “아니면… 사람의 피일까?” “!!!” “컷팅기로 조각내고, 건조시설로 직행하면 귀찮게 피가 묻어나더라고. 살점은 굳어버리고.” “!!!” “그래서 요즘에는 펌프질을 주로 해. 이 밑에는 저장용 펌프가 있거든. 썩은 동물을 갈아낼 때나 쓰는 거지만… 아, 여긴 식품공장이라서 그런 일도 종종 해.” “서… 설마….” 공포에 질린 내 표정이 마음에 든다는 듯, 김동완이 히죽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비린내 나는 핏방울을 내 뺨에 가볍게 긋는다. “지방 쪽 혈랑단 새끼들을 분산시킨 다음 골로 보내고, 시체들을 수거한 뒤에… 경기도나 인천으로 싣고 가서 분쇄해버리거나… 아니면, 아쉬운대로 여기서 처리하지. 확실히 여기가 낫긴 해. 폐수 처리 시설이 아주 잘 되어 있어서 말이야.” “우, 우욱!!” 저녁때 먹은 소머리국밥 국물이 주룩 식도 밖으로 튀어나왔다. 사람의 시체를 본 것보다 진한 충격이 뇌를 갉아먹었다. 위액까지 전부 토해냈다. 황태준이 더럽다며 내 등을 발로 찼다. “죽이진 말고, 가볍게 분풀이나 해라, 태준아.” “예. 형님! 일어서 새꺄!!” 토삿물 위에 엎어진 내 몸이 벌떡 일으켜졌다. 그리고 내 정신은 날아갔다. 그토록 믿었던 황태준이, 내 몸을 짓밟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를 믿은 내가 병신이었다. 전진 마저도 내가 밖에 돌아다닐때는 이민우 외의 사람은 붙이지 않았으니까. 나도 전진처럼 이민우만 믿었어야 하는데… 피시방에서 상황이 워낙 다급하다 보니, 이민우는 나를 피신시키는데 급급해서… 퍽- 턱이 심하게 부어오를 정도로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바르르 떨리는 몸을 황태준이 밟는다. “우훅!!” “전진 개새끼 밑에서 다리 벌리니까 좋았냐? 씨발년아! 니 년 나타나기 전까지는 일이 한결 편했었는데 말야!” 팍!!! 푹!!! 푹!!! 몸을 웅크릴 새도 없이 황태준은 무식하다 싶을 만치 아무렇게나 내 몸을 밟았다. “아학!! 으헉!!” “엄동설한에 떨질 않나, 시덥잖은 심부름이나 하질 않나! 이 몸이 여간 가오 떨어진 게 아니었어!” “아아악!!” 잠시 후, 김동완의 지시에 황태준이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아… 아하아… 아… 쿨럭! 쿨럭!” 피 냄새… 입 안이 터져서 침을 삼켰다 하면, 몇 배의 피를 토해냈다. 코피까지 뺨에 덕지덕지 묻었다. 큰 기침을 할 때마다 온 몸이 감전된 것처럼 떨렸다. 두 동강이 난 것 마냥 끔찍한 고통을 호소하는 육신… “순… 돌아… 순돌아….” 다 죽은 몸을 내버려 두고, 순돌이를 불렀다. 멍하니 떨어지는 눈물처럼, 혀 끝이 간신히 움직여지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우다다다- 발소리가 들리더니, “삼촌--!!!” “!!!” 작은 아이가 내 몸을 끌어안았다. 거기서 없는 힘이 발휘되었다. 나도 모르는 초인적 힘에 지탱해서 있는 힘껏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얻어 터지는 바람에 한 쪽 눈은 잘 떠지지 않았지만, 나머지 눈으로 확인하니, 순돌이가 맞았다. “순돌아… 순돌아!!” “흐아아앙- 삼촌… 삼촌!!” “어… 어디 봐바… 순돌아… 우리 순돌이… 우리 아기….” “삼촌… 삼촌!! 으흑!! 으흑!!” 손에 붕대를 감고 있는 순돌이가 내 품에 딱 달라붙어서 자지러지듯 울었다. 나 또한 순돌이를 세게 껴안으며 아이의 몸을 살폈다. 다른데는 타박상 정도로만 보이는데, 오른손 전체가 붕대로 대충 감아져 있었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직도 핏물이 스멀스멀 베어나오는 붕대…!! 어떻게… 어떻게 된 거야!! 놀라서 입 밖으로 비명이 터지지도 않았다. 그때, 내 앞에 긴 그림자가 하나 다가왔다. “놀랄 것 없어.” “!!” 이선호…!! 흰색 겨울코트를 입은 이선호가 천사처럼 웃으며 나를 내려보았다. “애가 하도 울어대길래, 겁 만 준다는게, 손가락을 하나 컷팅해버렸거든.” “뭐… 뭐…!!!!” “네 번째던가… 세 번째 손가락이던가…?” “너… 너… 너… 미… 미쳤어? 미쳤어!!!!” 아이의 손가락을 자르다니… 우리 순돌이를 니가 감히…!! “손가락 어딨어… 우리 순돌이 손가락… 손가락 어딨냐고!!!” “글쎄… 건조기에 넣었나, 펌프에 버렸나, 까먹었네.” “!!!” 내 품에 안겨서 오들오들 떠는 순돌이가 아니었다면, 당장 미친년처럼 몸을 날렸을지도 모르겠다. 이선호… 사람같지 않은 이선호… 죽여버릴 거야… 죽일 거야…!!! “삼촌… 삼초온….” “수, 순돌아! 착하지… 흐윽. 순돌아… 삼촌 여깄잖아. 눈 떠 봐. 응?” 아이를 얼마나 팬 걸까. 이 작고 여린 아이를… 순돌이는 내가 있다는 사실로 안심했는지, 내 품에 안기자마자 오줌을 지렸다. 그리고 보라색으로 부은 눈을 감고 잠이 들 것 처럼 느릿하게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온 몸이 멍투성이로 변한 순돌이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아이를 품에 껴안았다. 겉에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서 순돌이 몸에 돌돌 감았다. 그래도 아이는 추워 했다. 아이의 멍든 이마에 내 이마를 살짝 붙였다 뗐다. 오한을 느끼는지 바들바들 떠는 순돌이의 몸에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우선 아이를 살려야 된다는 생각에, 나는 이선호에게 애원했다. “제발… 시키는대로 다 할 테니까… 해열제라도 줘… 제발….” “그런 약 없어.” “그럼… 그럼… 물수건이라도 줘… 열이라도 내리게… 선호야… 제발… 부탁해… 어? 우리 순돌이 죽을 것 같아… 선호야아….” “그래?” “어… 어어… 선호야아아… 어? 우리 순돌이 살려줘… 내가 빌게… 앞으로… 니가 시키는대로 다 할게… 우리 순돌이 무사히 서울에 고모네 집에 가는 것만 확인되면, 니 앞에서 죽으라면 죽을게… 어?” 이선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깐 고민하더니 피식 웃으면서 말한다. “우리 내기할까? 꼬마애가 죽으면 내가 이기는거, 꼬마애가 살면 니가 이기는거.” “!!!!” “재밌겠지. 요이 땅~!” “이선호…!!!” “음… 내가 보기엔, 두시간? 두시간 쯤 있다가 애새끼 숨통이 끊어질 것 같아. 깔깔깔깔!” “!!!”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의 소리를 들었다. 사람도 귀신도 아닌 것이, 어찌 혀를 놀리는가.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때부터는 순돌이만 껴안았다. 자꾸 눈물이 나올 것같아서 순돌이의 뺨에 볼을 부비며 이름을 불렀다. 순돌아… 착하지… 자면 안돼… 자면 안돼… 삼촌이 맛있는거 사주고, 순돌이 데리고, 순돌이가 그렇게 삼촌이랑 가고 싶어하던 놀이동산도 데려가줄게… 삼촌이 그동안 바쁘다고, 놀이동산도 안 데려가서 미안해… 다 삼촌 잘못이야…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순돌이가 고르진 않지만 숨소리를 내보내며 잠이 들었다. 아니, 내가 보기엔 기절 한 것 같지만… 멀리서 김동완과 몇마디를 나눈 이선호가,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며 종이컵을 내민다. “커피야. 마실래?”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선호가 피식 웃으면서 내게 내밀던 커피를 자기가 한모금씩 마신다. 그는 황태준에게 의자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내 앞에 나타난 푹신한 1인용 소파에 다리를 꼬아 앉았다. 적막한 어두움과 군데군데 반짝이는 주홍 불빛. 날카로운 컷팅기 소음 속에, 이선호가 천천히 입을 뗀다. “심심해져서… 잠깐 얘기나 하려고. 아마 지금쯤 혈랑단은 헤매고 있을 거야. 청랑단이 이 공장에 죄다 집결한 줄 모르고 말야. 그동안 거짓 정보를 꽤 흘렸거든. 오늘까지. 정식으로 싸우자- 라고 유치하게 선전포고를 오늘 새벽에 해 줬는데, 병신같이 단순한 것들이 그대로 믿더라? 하하하하.” “너랑 할 얘기 없어.” 이선호는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한 채 제 멋대로 말을 이었다. “혈랑단을 왜 쓸어버릴려고 하게?” “…….” “우리 아빠를 놈들이 무너뜨렸거든. 이세상이 깨끗해 보이지? 근데, 진짜 전쟁은 늘 어두운 곳에서 발발해.” “…….” 우리 아빠. 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이선호는 분노를 참지 못해 종이컵을 내 안면에 집어 던졌다. 뜨거운 커피가 순돌이 몸에 닿을까봐 반사적으로 아이의 몸을 가렸다. 뜨끈한 액채가 내 등을 적셨다. 이선호가 조금씩 진정하며 다시 말했다. “우리 아빠를 쓰러뜨린 건, 공식적인 비자금이니 어쩌니가 아니야. 빛이고 어두움이고, 세력 전부를 야금야금 흡수한, '그것들' 이지.” “…….” 이선호를 천천히 올려봤다. 아니, 노려봤다. 그는 퉷! 하고 내 안면에 가래침을 뱉었다. “왜. 오랜만에 '그것들'이라고 부르니까 신기해?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 넷. 지긋지긋하다.” “…….” “처음 등을 돌린건 주주들이었어. 그때까진 나나 우리 아빠도 상황 돌아가는 걸 몰라서 난처했었지. 임원진을 갈아 치우려고 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범인은 가까운 곳에 있더라? '그것들'이 한명그룹 계열사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그동안 뒷통수를 쳤을 줄이야.” “…….” 자기가 피해자인 것 처럼 구는 건 여전하구나… 나는 순돌이의 얼굴을 잠바로 열심히 가려주며 이선호의 주저리를 들었다. “'그것들'은 우리 아빠가 했던 방법대로, 우리 아빠가 문도천을 밟았을 때와 똑같은 절차를 거쳤어. 그러니까, '그것들'도 똑같이 비겁한 놈들이라는 거야. 정의? 그건 서로 갖다 붙이기 나름이야.” “…….” “언젠가는 녀석들도 당할 테지. 그 언젠가를 내가 시작한 것 뿐이야. 나는 정당하거든. 지금 그것들은 폭력으로 쟁취한 지분이 상당하지… 법을 위반할 만큼.” “이선호.” “응?” 가증스러울 정도로 귀여운 표정으로 나를 보는 이선호… 잡아 먹을 듯 내가 노려보는데도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눈을 반짝인다. “다른 건 관심없어.” “그래?” 이선호의 즐거운 눈빛이 차츰 식어내린다. “어린 애한테, 못 할 짓 하고도 죄의식 하나 없이 구는거… 역겹다.” “뭐라고 했어.” 그의 격앙된 말투를 즐기듯, 나 또한 차분하게 이어나갔다. “뭐라고 했냐니. 너는 사람이 아니라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거야.” “이 씨팔!!!” 철썩-! 뺨에 불꽃이 일었다. 나는 한 번 더 핏물을 내뱉었다. 목 아래 부글대던 거품까지. “이것 봐. 니가 하는 짓들은… 사람의 탈을 쓰고는 할 수 없다고!!!” 내 분노 못지않게, 이선호도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신혜성!! 니가 뭘 알아!! 우리 집이 하루아침에 망했어!!!” “아~ 그러세요?” “선호야!!” 선호가 정신 못차리고 내게 덤비려 하자, 멀리서 숨을 죽이고 선호를 지켜보던 김동완이 황급히 달려왔다. 그는 선호의 어깨를 감싸며 뭐라고 속삭였다. 저런 김동완은 굉장히 낯설다. 소중하게 달래주는 김동완의 애절한 눈빛… 마치 '그것들'이 나를 볼 때나 발견할 수 있는… …김동완이 이선호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그도 사랑에 미쳐버렸구나. 김동완이 뭐라고 속삭였는지 몰라도, 잠깐 이성을 잃을 뻔 했던 이선호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내 뺨을 몇 번 더 친 뒤, 깨끗하게 손을 씻고 돌아와서 소파에 앉았다. 지긋지긋한 입술을 또 한 번 놀린다. “참. 아까 물어봤었지? 청랑단과 혈랑단의 전쟁일 뿐인데, 한명 우두머리란 자리를 놓고 벌이는 복수와 복수일 뿐인데, 왜 애새끼를 끌어들였냐고.” “!!” 듣지 않겠노라 시선을 피하던 내 상체가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이선호가 흡족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유가 뭘 것 같아?” “몰라… 내가 그딴 이유를 어떻게 알아. 우리 순돌이는 적어도 이 판에 끼어들 이유 없어.” 이선호가 피식 웃는다. 그리고 왜 정말 모르냐는 듯 눈동자를 굴리며 히죽히죽 웃는다. “신혜성. 너란 존재만 없었어도 '그것들'은 이정도로 일어서지 못했어.” “뭐…?” “너는, '그것들'의 원천이잖아?” “그게… 그게 무슨 소리야…!!” “너는 늘… 피해자인척 가증스러운 입장을 취하고 있어. 돈으로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소유했으면서!!!” “!!!” 이선호가 다시 흥분했다. 아니, 내 심장도 만만치 않게 뛰기 시작했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실타래의 끝에서 우리 둘 다 격노했다. 이선호가 붉은 눈동자를 들이대며, 긴 세월 참았던 한을 터뜨린다. “내 기준에서 너는!! 처음부터 성공한 사람인데!! 늘 피해자인 척 굴었다고!!!” “!” 기억하고 있다. 이선호와 내가 파란 하늘 아래 어깨동무 하며 친하게 지냈던 시절… 누구든지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선호의 외침이… 청아한 청춘의 꿈이… 엷여덜살 당시의 내 눈에 비친 이선호는, 이미 성공한 사람이었다. 돈이 많은 부자였으니까. 공부도 잘 했으니까. 하지만, 이선호의 눈에도 엷여덜살의 신혜성은 '이미 성공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한때 우리는 서로 다른 꿈을 쫓았었다. 나의 꿈은 돈이었고, 너의 꿈은 사랑이었지. 서로 가질 수 없는 것을 향해 아둥거렸던 시절이,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 어리석은 과거가 오늘을 빚었으니까. 째깍… 째깍… 낡은 벽시계의 초침소리. 지이잉… 철컥. 지이잉… 철컥. 소름끼치게 울려 퍼지는 컷팅기 소리. 투두두두두… 투두두두두… 사람의 심장을 갉아 먹을 것처럼 공기를 파괴하는 건조기의 소음… 눈을 질끈 감고 깜빡하면 정신을 잃을 뻔 했다. 가쁜 숨을 내쉬며 품에 안겨있던 순돌이가 멀건 죽 같은 것들을 토해냈다. 그 안에는 피도 섞여 있었다. 식겁한 내가 순돌이 몸을 흔들자, 멀리서 우리를 구경하던 이선호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제 재미없어졌어.” “뭐…?” “우리의 지긋지긋한 운명, 내가 끝내줄게. 고맙지?” 이선호의 손에 들린 것은 회칼이었다. 날카로운 은색 회칼 끝이 뾰족하게 빛났다. “몇 번을 찔러야지 내 분이 풀릴까.” 죽음의 그림자가 눈 앞에 다가왔다. 참 이상하지. 이 짧은 찰라의 틈에 유년 시절부터, 지금 순간까지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거구나. 사람이 죽기 전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더니, 이거였구나. 칼에 찔려서 숨이 끊어질 때는 훨씬 찬란하게 지난 인생들이 보이겠지…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까지 살아있는게 신기했다. 그래서 이런 부탁도 할 수 있었다. “순돌이는… 살려 준다고 약속해. 아이는 죄가 없잖아.” “그렇게 나를 몰아 가지 마, 혜성아. 나. 착한 사람이야.” “그래… 너… 착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우리 순돌이… 병원에 데려다 줘… 지금….” “응. 그럴게. 일단 너를 죽인 다음에.” 뼛속까지 얼리는 공포심에 나는 덜덜 떨면서, 순돌이를 멀찍이 떨어져서 내려놨다. 이 순간만큼은 순돌이가 기절한 상태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꿀꺽. 침을 삼키며 눈을 감고 바른 자세로 앉았다. 이선호가 찌르는대로 죽을 생각이다. 더는 살 욕심도 생기지 않았다. 다만, 순돌이가 마지막까지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죽는다면, 순돌이가 살 확률이 높아지니까,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내게 선택권이란 없는 것같지만… “동완아. 나 어디부터 찌르는게 좋을까?” 선호의 끔찍한 질문에, 김동완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다리부터 하나씩 찔러.” “그럼 쉽게 안 죽는거 맞지? 아, 맞다. 중간에 혜성이가 반항하면서 덤비면 어떡해?” “신혜성 뒤에 태준이가 지키고 있잖아. 니 뒤에는 내가 있고. 걱정하지 마. 저새끼도 포기한 것처럼 보이니까.” “맞다~! 역시 동완이는 진~짜 똑똑해. 협박하면 되는구나? …신혜성. 니가 찔리는 도중에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저 애새끼는 단 칼에 죽는 거야. 알았어?” 눈을 감은 상태에서, 어찌어찌 고개를 끄덕였다. 흡족해 하는 이선호의 음성이 가시처럼 찔려왔다. 몇 방울의 눈물이 뜨겁게 뺨을 적셨다. “자아, 준비하시고오….” “…….” 팟!! 인생의 여러 순간이 1초에 백 개의 그림을 펼쳤다. 이거구나. 이거였어… 나는 허무한 소리를 머릿속에 빚으며 이빨을 꽉 깨물었다. 선호의 팔이 휙- 머리 위로 움직이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허벅지부터 찔리겠지… 각오하는데… 타앙--!!! 귓청을 도려낼 만큼 아찔한 총소리가 들렸다. 설마, 벌써 죽은 걸까. 칼로 찌르는 척 하다가, 사실은 총을 쏜 걸까. 탕--!! 1초도 안 지나서, 연달아 총 소리가 울렸다.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동완아!!!!” 하지만, 선호의 비명이 터지는 바람에 감았던 눈이 번쩍 떠졌다. 내 몸은 아직 다치지 않은 상태였다. 회칼을 땅에 떨어뜨린 이선호가, 뒤돌아서 무릎발로 기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콰당- 하고 내 뒤에서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떨리는 뺨을 돌아보니, 황태준이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 단 몇초만에 나타난 사람은 이민우였다. “고맙다. 황태준이. 겨우 따돌리고 미행 한 보람이 있네. 막판엔 놓쳐서 좀 헤맸지만….” “미… 민우…!!” 내 입이 그를 부른다고 여겼지만, 민우를 보고 놀라서 입술을 움직인 것은, 김동완이었다.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진 김동완이 있는 쪽으로 후다닥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이민우가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우리 혜성이는, 부장님 말고, 믿고 맡길 데가 없어서 말이야.” “민우야…!!” 경악으로 물든 내 동공이 처음 발견한 것은, 이민우의 옆구리였다. 그는 칼에 찔린 채로 서있었다.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면서, 정신력으로…!! 이민우는, 생전 내게 들려주지 않았던 허스키하게 깔린 무서운 목소리톤으로 총구를 겨누며 말했다. “김동완.” 서늘한 긴장감이 공기를 압박하고 있었다. 김동완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고, 이선호는 울음을 터뜨리며 김동완이 흘린 입가의 피를 미친듯이 닦아주고 있었다. 이민우가 가소롭다는 듯 말한다. “니가 예전에 말했지.” “크으….”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김동완의 머리쪽에 정확하게 조준한 이민우의 등이 어느 때보다 강해 보였다. “저격수로 큰 놈들 중에서, 나만큼 실력 좋은 새끼가 이제껏 없었다고.” “하지 마!! 개새끼야!! 김동완!! 김동완!! 으흐으!!” “선…호야… 비…켜….” 김동완이 선호의 몸을 떼어내기 위해 팔을 휘휘 젓는다. 이민우는 바닥에서 가쁜 숨을 내쉬는 순돌이와, 피와 상처투성이로 변한 내 모습을 힐끗 관찰한 뒤, 싸늘한 투로 말했다. “실력행사 제대로 할 날을 만들어줘서 고맙다. 개새끼야.” 안 된다고 발악하는 이선호. 그런 선호를 보고 죽음을 감지한 김동완. 둘을 동시에 조준하는 이민우. “내 실력 니가 더 잘 알지.” 이민우가 천천히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지옥에서 만나자. 김동완.” 탕--!! 살벌한 총소리가 터짐과 동시에 김동완은 젖먹던 힘까지 모아서, 이선호를 밀쳐냈다. 선호가 나뒹군다. 그리고, 민우가 쏜 총알이 김동완의 이마를 헤집었다. 이민우는 애당초 이선호가 아닌, 김동완을 노렸던 것이다. 자신을 이 세계로 유인하고, 자신을 믿게 하고, 자신을 배신했던 김동완을. “동완아!!!! 아악!!!!” 이선호의 짐승같은 비명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시체가 된 김동완의 몸을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만지다가, 와락 껴안은 이선호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재빨리 순돌이를 품에 안으며 이민우를 확인했다. “미… 민우야. 너 괜찮아? 이… 이 피 어떻게….” 이민우는 눈물보다 진한 식은땀을 온 몸에 흘리고 있었다. 그의 옆구리에 찔린 칼 밖으로도 비질비질 세어나오는 붉은 혈유… 그의 상태도 순돌이 못지 않게 심각해 보여서 나는 하얗게 질린 채로 묻고 또 물었다. 내 앞에서 최대한 괜찮은 척 하고 싶어하는 이민우였지만, 그는 눈에 띄게 가쁜 숨을 토해내며 지친 눈동자를 빛낼 뿐이었다. “아, 아마. 지금 총소리는 혜성이 니가 죽은 건 줄 알거야. 밑에 대기중인 청랑단 새끼들이….” 이민우가 휘청하는 틈에, 나는 이성을 놓았다. 내 심장이 이민우를 향해 격렬하게 뛰는 것이었다. 심장이 두 개인줄 알았는데, 너도 내 안에 있었구나…! 내 어리석은 심장은, 내 외로운 심장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역으로 사랑하는 거였어…! 그것으로 나는 미쳤다. 이민우의 설명을 들을 새도 없이 몸을 날려서 이선호를 덮쳤다. “아하아아아!!” “!!!” 김동완의 시신을 붙잡고 멍하니 오열하던 이선호가 퍼뜩 정신차리고 방어하려 했지만, 내가 훨씬 빨랐다. 퍽- 퍼퍽-!! 온 힘을 주먹에 실어서 내리꽂았다. 이선호의 아구를 수 십번 후려 갈겼다. 퍽- 이선호의 콧뼈가 내려앉는 느낌이 손가락 끝에 묻어난다. 퍽- 이선호의 입 안이 터져서 그의 피가 내 손에 묻는다. 퍽- 이선호의 턱이 나가서 너덜거린다.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이선호의 몸이 축 늘어졌다. “히익. 히익. 히익.” “혜성아….” 이민우의 부름에도 아랑곳않고, 나는 화를 못이겨서 몇 번이나 이선호의 몸을 발로 찼다. 그리고, 이선호가 나를 죽이려고 위협하던 회칼을 집어들었다. 이선호의 배 위에 앉았다. 양 손으로 꼭 쥔 회칼을 머리 위로 들었다. 휙- 망설임없이 이선호의 목에 꽂으려는 순간, 이민우가 재빨리 내 팔목을 잡고 제지했다. “히익, 히익, 놔, 놔아!!!” “안 돼!! 너는 살인자가 되는거야!!” “상관 없어!! 놔!! 이거 놔!!!” “신혜성!!” 민우는 내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회칼을 쥔 팔목을 으스러지게 세게 잡는 바람에, 나는 허공에서 칼을 놓쳤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민우의 안면과 마주쳤다. 그가 이번에는 등이 아닌 내 눈을 보고 말한다. “너만은!! 너만은!! 살인자가 되면 안돼!!!” “!!!” 언제나 내게 등으로 말하던 이민우. 정면에서 분수처럼 음성을 토해내는 이민우를 통해, 나는 보고야 말았다. 나를 담아내는 그의 눈동자가 얼마나 떨리는지, 그가 얼마나 많이 울고 있는지를. “신혜성!! 알았어?!! 죽여도!! 내가 죽여!! 너는!! 안된다고!!!” “이…민우….” 이민우의 간절한 시선을 마주보는 틈에, 이선호가 천천히 발 밑에서 쓰러진 동공을 열었다. 그가 어딘가로 기어간다. 하지만 민우와 내가 이선호를 눈치챘을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요… 용서… 못… 해….” “!” “!” 이선호가 붉은색 버튼을 쥐고 민우와 나를 보고 씨익 웃는다. 그리고 재빨리 버튼을 세게 누른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머리가 아플 정도의 신호음이 공장 전체에 울려퍼졌다. 이선호가 발악하듯 괴성을 질렀다. “다 찢어 죽여버려--!!!!” “!!!” 심장이 얼어붙을 만치 충격적인 비명에, 나는 멍하니 서있었다. 잠시후 우와아아- 하는 남자들의 고함소리가 땅이 들썩일만치 울렸다. 이민우가 내 팔목을 세게 잡아당긴다. “꺄하하하하하하!!!!” 이선호가 미친년처럼 바닥을 기어다니며 웃었다.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대는 이선호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이민우가 이끄는대로 순돌이를 품에 안고 비상구가 아닌, 아까 올라왔던 좁은 계단 쪽으로 달려갔다. 전신 타박상을 입은 나나, 칼에 찔린 민우, 우리 둘은 정신력으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중간에 한 번 넘어졌다가 일어나며 철계단을 내려갔다. 이민우는 뛰는 와중에도 뒷주머니에 넣어놨던 무전기를 꺼냈다. “씨발. 어디에 숨어있나 했더니 여기였어….” 치지직- 신호가 잡히는 즉시, 민우가 잠깐 안도의 숨을 토해내며 무전기에 대고 외쳤다. “한명실업 단지입니다!! 형수님도 아직 무사하십니다. 그런데 놈들 숫자가 어마어마합니다!!” 허억, 허억- 나는 가쁜 숨을 토해내며 어지러운 상황을 뛰어다닐 뿐,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지잉- 지잉-- 아직도 울리는 신호음에 뇌가 도려나가는 기분이었다. 투다다다다- 공장 1층의 펌프기 옆에서 잠깐 숨을 고르는 중, 멀리서 후레시가 비쳤다. “저기다!!!” “!!” 스무명도 넘는 청랑단이 우리를 발견하고 무서운 속도로 달려왔다. 이민우가 내 팔목을 다시 세게 잡고 어디론가 달려간다. 놈들이 추격하는 가운데, 비명처럼 터지는 심장박동. 나는 살려달라는 말도 감히 생각해내지 못했다. 미친듯이 달음질치는 와중에, 이민우의 무전기로 신호가 왔다. 민우는 곧장 답을 보냈다. “예! 여기가 바로. 부장님과 혈랑단이 찾던, 최후 전쟁터였습니다. 일부러 저희 애들을 죄다 흩어지게 한 거라구요!!” 곧, 이쪽으로 오겠다는 무전이 도착했다. 이민우는 한참을 뛰어다닌 끝에 발견한, 어두운 창고 앞에서 멈춰 섰다. “하악, 하악, 혜성아. 저기, 보이지. 저거.” “어? 어?” 둘 다 가쁜 숨을 토해내느라 정신없었다. 이민우는 창고 구석에 쌓인 나무 상자들을 가리키며 자꾸 복도 앞으로 향했다. 내 손을 놓고… “피, 하악, 자국, 하아, 여기서 뭉쳐 있으면, 하아, 하아, 창고에 숨었다고, 하아, 발각 돼, 하아, 그러니까 너 얼른 저 안에 들어가 있어.” “뭐… 뭐? 싫어!! 왜 나만!! 가, 같이 숨어!!” “다들, 하아, 금방 올 거야. 무전이 된다는 건, 하아, 15키로 내에 혈랑단이 흩어져 있다는, 하아, 거거든.”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서 인상을 찌푸리는 이민우를 보며 내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멀리서 우다다다 하는 남자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도라질을 치며 민우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는, 창고 앞에서 피가 많이 떨어져 있으면 안된다며 벌써 몇 발자국이나 멀어졌다. “너… 너는!! 너는!! 가, 같이 숨어!! 어?” “아, 안돼. 하아, 하악. 신호가, 울, 렸, 다는 건, 일이, 하아, 꼬였다는 증, 거, 라서, 하아, 하아, 청랑단이 뒤지기 시작, 할, 거야, 하아, 너, 찾는 거, 나만, 하아, 막을, 수, 있, 어. 당, 장은.”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일 틈 따위는 없었다. 나는 충분히 느꼈으니까. 나의 망설임이, 이민우에게 방해가 된다는 것을. 그의 눈빛만 봐도 알았다. 내 실력 알잖아. 아까 봤지? 나는 쉽게 안 쓰러져. 나 믿어. 혜성아. 순돌이를 꽉 껴안고 상자들 중 하나를 열고 그 안에 들어갔다. 조심조심 뚜껑을 닫았다. 이민우가 도망가는 발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창고 앞을 지나가는 남자들의 커다란 발소리도 들렸다. 그때마다 심장이 철렁거리며 숨결을 앗아갈 것처럼 천정까지 뛰었다. 숨소리도 못 낸 채, 와들와들 떨면서 웅크리고 앉아서 순돌이를 껴안았다. 밖에서는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비명소리와, 고함소리, 살이 찢어지는 소리, 그리고 총소리까지 들렸다. 내 귀를 막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순돌이가 들을까봐 순돌이의 귀만 꽉 눌러버렸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남자들의 입 밖으로 터지는 짐승의 소리를 얼마나 들었을까.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공장 전체가 폭팔 할 것 마냥 시끄럽던 소리들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빨까지 덜덜 떨면서 숨을 참는데, 어디선가 또각대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 들킨건가…!! 마른침을 삼켰다. 동공이 좁아졌다. 덜덜 떨리는 몸 때문에라도 이미 들킨 거라고 생각했다. 휙- 탁. 휙- 탁. 나무 상자 뚜껑을 하나씩 열어보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누군지 몰라도 상자 안에 내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뚜껑을 바닥에 던지는 모양이다. 아아 제발… 하나님… 살려주세요… 마음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외쳐 봤지만, 여지없이 내가 숨어있는 나무 상자 뚜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으, 으흑, 으흑.” 거친 숨과 함께 울음이 터졌다. 이제… 죽는 것이다. 여린 빛이 머리카락과 뺨에 닿았다. 눈을 질끈 감은 내 귀로, 믿을 수 없는 음성이 들렸다. “혜성아!!!” “!!!” 설마- 하고 심장이 먼저 발작했다. 어두운 음영 사이로, 하나씩 비치는 이목구비. 간절함을 담아 외치는 내 이름… 말도 안돼… 말도 안돼… 문정혁, 문정혁이다. 상자 안에서 바들바들 떨기 바쁜 나를 보고 노여운 숨과 안도의 눈빛을 동시에 자아내는 사람은, 문정혁이 틀림없었다. 기사의 옷을 입고 살던 왕자님은,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 검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눈부시게 나타나서 공주님을 구해줬습니다.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우는 기사들 중, 왕자님만이 공주님의 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어린시절 읽었던 동화책이 떠올랐다. 나쁜 괴물들을 물리친 왕자님이 공주님을 구해주는 장면이 글자도 아닌 파스텔톤 그림으로 선명하게 눈가에 스치는 것이다. 그게 그렇게 가슴아프고 눈물나던 장면이었을까- 의아했다. 슬프고 어처구니 없는 장면조차 여유롭고 발랄하게 묘사되었던 동화책이 현실의 삶과 비유하면, 너무나 아프고 쓰라렸다. 진짜 괴로움을 감춘 텅 빈 공간이야말로 동화가 아닐까. 내 어깨를 움켜쥐고 일으켜주는 문정혁을 보며, 약 3초간 떠올린 것은 갑옷을 벗은 왕자님으로 변한 기사였다. 어떻게 문정혁이 내 앞에 나타났을까. 나를 보고 안도하는 동시에 분노를 참지 못해 일그러진 동공. 흙투성이에 핏물이 튀어 있는 까만 수트.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게 빛나는 손목시계. 여기까지 급하게 왔는지 왁스질이 안 되어서, 마치 고삐리때처럼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나마도 땀 덕분에 이마에 달라붙어 있다. 산 하나를 심어놓은 것 마냥 흔들림없이 우직한 그의 동공에 에베레스트산맥이 찬란하게 펼쳐져 있었다. 하늘높은 줄 모르고 멀리 떨어져 있던 세 글자, 문정혁. 죽음을 연상하는 이때, 거짓말처럼 나타난 것이다. “괜찮아?” “정혁아….” “얼굴이 대체… 이게 뭐야. 빨리 나가자.” 순간 정신이 번쩍 났다. 나는 품에 안고 있던 순돌이를 정혁이 앞에 내보였다. “우리 순돌이 좀 살려줘. 정혁아!!” “…뭐?” 예전과 똑같이, 아무리 급한 순간이라도 한 템포 쉰 다음에 '뭐?'라고 하는 문정혁. 밖에서는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비명소리가 번갈아서 들리는데도 불구하고, 진짜 문정혁이 맞구나- 싶은 마음에 주저앉아서 미친년처럼 웃을 뻔했다. “우리 순돌이가… 조금 이상해. 우리 순돌이 어떡해… 정혁아… 우리 순돌이… 어?” “이리 줘 봐.” “어? 어어.” 그가 순돌이를 품에 안는다. 순돌이의 몸이 자꾸 축 늘어지는게 안타까워서 나는 순돌이를 부르며 살짝 살짝 아이의 뺨을 쳤다. 그래도 반응이 없다. 순돌이를 안고 잠깐 살핀 문정혁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마치 울음을 억지로 참듯이. 하지만 곧 나를 보고 싱긋 웃어준다. “잠깐 잠들었나봐. 차라리 잘됐어. 빨리 나가자.” “진짜 괜찮겠지? 우리 순돌이? 응?” “바보야….” “어? 우리 순돌이….” 문정혁이 내 팔목을 꽉 잡고 허스키한 숨을 내뱉는다. “신혜성. 넌 괜찮냐고.” 그가 내 시선을 피한다. 까만 천정을 올려본 다음에야 나를 휙 돌아본다. 문정혁의 동공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 괜찮아. 정혁아. 우리 순돌이 좀 살려줘… 응?” 마치 의사라도 만난 것 마냥, 나는 문정혁의 모든 것에 매달렸다. 그는 잠깐 무슨 말을 하려고 망설이다가 내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알았어. 내가 살려 줄게.” “정말…? 정말? 정혁아. 우리 순돌이 안 죽지? 응?” 그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꽉 누른다. “안 죽어.” “…….” 기억난다. 너는 언제나 강철같은 사람이었어… 누구보다 믿음직했던… 그래서 한때 너의 배신은 보통 사람들보다 몇 배의 상처와 충격을 줬었는데… “가자. 뛸 수 있지?” “응? 응.” 그는 내 팔목을 세게 쥐고,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콰당- 문정혁이 발로 차서 어떤 문을 쓰러뜨렸다. 녹슨 철문이 자빠지며 뿌연 먼지를 토해냈다. 정혁이 잡아 당기는대로 멍청하게 달렸다. 발 아래 가끔 밟히는 핏물과 청랑단인지 혈랑단인지 모를 사람의 시체들. 시간이 느려지고 귓속이 멍멍해진다. 발 밑에 물컹한게 닿을 때마다 나는 자지러지듯 놀랐고, 문정혁은 한번씩 나를 돌아보며 괜찮다고 말 해 주었다. 페인트 냄새와 피냄새가 즐비한 어두운 복도를 지났다. 엉겨붙은 살 덩어리들이 가끔 시선에 확인됐고, 나는 게울 것도 없는 속을 탁탁 치며 멀건 죽 같은 것을 토해냈다. 기이이잉-- 기이이잉---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공장의 모든 기기가 작동되고 있었다. 고속으로 돌아가는 녹슨 기기들이 한꺼번에 움직이자 혐오스러울 만치 끔찍한 소음이 천지에 울려퍼졌다. 까딱 실수해서 넘어지면 어둠 어딘가에 있을 기계에 몸이 찍힐 위험이 도사렸다. 이선호가 경고 버튼을 눌렀을때 공장 기기가 과열될 만치 작동된 모양이다. A단지 1층을 쭉 달렸다. 문정혁이 나를 구해준 것만으로도 전쟁이 다 끝났을거라 여겼다. 그러나 나의 얄팍한 상상을 비웃듯, 직원 휴게실용 식당칸에서 잠복 중이던 청랑단 몇 명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길을 막았다. “어딜 그렇게 바삐 가시나.” “!!!” 청랑단일까. 혈랑단? “씨발. 밖에는 특공대가 대기중이고, 갈 데가 있어야 말이지.” “저… 정혁아….” 청랑단인지, 혈랑단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나는 정혁의 옷깃을 잡고 덜덜 떨면서 그의 이름만 불렀다. 문정혁은 주변을 재빨리 눈으로 살피더니, 내 품에 순돌이를 안겨주었다. 철렁- 심장이 천정까지 뛴다. 나는 벌써부터 싫다고 도라질을 쳤다. “혜성아. 잘 봐. 아주 쉬워. 이렇게 휙~ 돌렸잖아. 그럼 여기 보이지. 잡아 당기기만 하면 돼.” “뭐… 뭐? 문정혁. 같이 가… 어? 같이 가!!!” 그가 안주머니에 있던 권총의 해머를 세우고 내 손에 끼워준다. 이민우가 나를 숨겨주고 사라졌을때와 똑같은 눈빛과 표정을, 문정혁이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도라질 치며 거절해도, 문정혁은 막무가내였다. “나가면 바로 밖이야!! 알았지 혜성아!!” “문정혁… 문정혁--!!” 그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바닥에 있는 쇠파이프 두 개를 집었다. “아악!!! 정혁아!!!” 내 비명에도 아랑곳않은 문정혁이 용수철처럼 바닥에서 튕기듯 날아올라서 동시에 두 놈의 머리를 찍었다. 쓰러지는 건 놈들인데, 나는 문정혁이 죽을 것처럼 불안해져서 그를 소리쳤다. 거칠게 운동하던 심장이 마구잡이로 오그라들었다. 문정혁. 그는 전진 못지않게 강했다. 아니, 우위를 점친다는게 우스웠다. 권총을 든 손가락에 힘을 줬지만 내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품에 고이 안긴 순돌이가 아니었다면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몇 놈씩 빠르게 상대하는 문정혁의 뒷모습은 짐승처럼 본능밖에 남지 않은 듯했다. 그를 몇 초간 쳐다보는 틈에, 나를 알아본 한 놈이 '이야아악!!'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이 놈도 저 놈도 제정신인 놈이 없었다. 권총을 들고 놈을 향해 가까스로 조준했다. 하지만 직각으로 강목을 든 놈이 나보다 빨랐다. 놈이 나를 덮치기 직전, 누군가 나타나서 미친놈마냥 발광하는 등을 찍었다. “히이힉!!” “하아, 개새끼. 죽을 날 되서 겁먹고 주사 좀 맞았나본데! 하아, 하아.” 엄청난 스피드로 달려와서 문정혁과 나를 공격하던 놈들을 단숨에 제압한 사람은, 공유 형사였다. “나이스 타이밍~!” “공형사…?” 공형사 특유의 발랄하고도 진지한 톤에 물음표를 그리자마자, 이번에는 척척척척-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렸다. 환한 빛을 등에 이고 나타난 사람은, 김명민 검사였다. “숨 붙어있는 놈들부터 연행해.” “예! 알겠습니다!” 그의 지시가 떨어지자 마자 복면을 쓴 남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공유!! 해치진 말랬지.” “안 죽였어요!! 아 씨발!! 급소만 쳤다구요!!” “내가 다음부터 너랑 팀 짜면 인간이 아니다.” “나도 김검사네 팀 안 들어갈거야!! 해고 시키라거!!” “저새끼가…!!” 바닥에 널려진 시체들 중 숨이 붙어있는 사람들 우선으로 밖으로 질질 끌려나갔다. 멍청하게 권총을 잡고 서있던 나는 문정혁이 꼭 끌어안아서야 탁. 하고 총을 놓치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괜찮아? 어?” “…….” 괜찮다고 대답해줘야 하는데, 충격의 바다에서 나의 뇌는 언어 능력을 상실했는지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한채 눈만 꿈뻑였다. 투두두두- 헬리콥터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김명민 검사와 공유 형사, 그리고 경찰 특공대가 출동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특공대의 호위 속에 무사히 바깥으로 나갔다. 의료진이 달려와서 순돌이의 얼굴에 산소호흡기를 씌운다. 나는 그제야 한시름 놨다는 몸의 신호를 받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세요!” “아뇨… 저… 괜찮아요.” 워낙 심하게 얻어 터지고, 한 쪽 뺨과 눈이 부어올라서인지, 의료진은 내가 신혜성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상황이 빠르면서도 느렸다. 한 쪽 귀가 쇼크로 잘 들리지 않았다. 복면을 쓰고 긴 총을 들고 있는 남자들. 저 사람들이 특공대원이구나… 나는 멍하니 바닥에 앉은 몸을 일으켰다. 아니, 자의로 일어난 줄 알았던 내 몸은 이제보니 문정혁이 억지로 일으켜 준 꼴이었다. “차에 타자.” “싫어.” 나를 붙잡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려는 문정혁에게 거세게 반항했다. 전진과 이민우가 안 보이는게 여간 수상한게 아니었다. 나는 몸부림을 치며 문정혁에게, 대체 이게 어찌 된 상황이냐고 따졌다. 그는 피곤한 낯으로, 뺨에 묻은 피를 무의식중에 손바닥으로 닦으며 말했다. “청랑단하고 혈랑단이 집결했어. 누가 누구네 편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인원이 어마어마해.” “어디에? 어디에 집결했는데? 어? 진이는 어딨어?” 현재, 한명실업단지 밖에 있는 사람들 중에 이민우와 전진이 빠져 있었다. 그것으로도 공포에 질린 나는 문정혁에게 애원했다. “이민우가 나 구해줬어!! 어? 정혁아!! 이민우가! 이민우가 나를!” “알아. 민우가 나한테 무전해 줘서, 너 구해줬던 거야.” “어? 어? 정혁아!! 진이는 한 번도 못봤어!! 어? 정혁아!!” “혜성아….” “여기 막 경찰들 있잖아!! 빨리 들어가서 구하라고 해줘!! 어?! 정혁아!! 어?!!” 문정혁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내 몸을 세게 껴안았다. 나는 울고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오금이 저릴 만치 무서웠다. 내 몸 하나 죽을 지도 모른다는게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나무 상자 안에서 속절없이 숨어 있으면서 느꼈었다. 그런데, 이민우와 전진은 공장 단지 안 어디선가 피를 흘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약 십분 후, 조금씩 진정한 나는 주변에 서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쳐다봤다. 특공대원들이 건물 밖으로 도망치듯 나오는게 포착되었다.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저 사람들 왜 다시 나와? 나는 표정으로 다급하게 문정혁을 붙들고 물었다. 문정혁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특공대는… 인질 구출에 동원된 거야.” “그, 그럼… 전쟁 진압은? 진압도 시켜줘야 되는거 아니야?” 이때, 우리 근처에 서있던 김명민 검사가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거기까진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습니다.” “!!!” 하나님… 가슴팍을 부여쥐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문정혁이 내 몸을 더 세게 껴안으며 말한다. “우리를 여기까지 부른 건, 믿어지지 않겠지만… …김동완이다.” “!!!” “김동완의 시신은 확인했어. 아마 우리에게 신고한 직후에 죽은 모양이야. 혹시, 신고하는 걸 봤어?” “아니… 나는 못봤어. 나는 우리 순돌이만 껴안고….” “폭팔물처리반에 신고가 접수됐어. 하지만 어딘지 못 찾고 있는 중이야. 단지가 워낙 넓어서 씨팔.” “이선호… 이선호는 안 죽었잖아!! 그새끼한테 불라고 해!!” “그새끼는… 지금 정상이 아니야.” “뭐…?” 다들 참혹한 낯빛이었다. 나는 상황을 이해 하기 버거워서 막연히 눈물만 흘리며 문정혁을 애타게 쳐다볼 뿐이었다. 구급 요원들 틈에서 전신이 묶인 이선호가 깔깔대며 웃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폭팔물처리반… 폭팔물 이라는 단어가 유독 선명하게 뇌에 파고들었다. 이때 특공대원 중 한 사람이 다급히 달려와서 김명민 검사에게 무전기를 건넸다. 치지직- 상대편에서 고함소리가 들린다. 김검사가 예민한 낯으로 차갑게 반문했다. “어디라고?” -C단지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치지직. “근데 왜 수색을 중단했나!! 얼른 접근해!!” -C단지에서 난동중인 폭력단 인원만 1천여명 추산, 입구란 입구는 다 잠궈져 있습니다. 치지직. “!!!!” -3층 유리창 쪽으로 접근하기 위해 벽을 탈 계획입니다. 치지직. 나 뿐만이 아니다. 무전 내용에 놀란 김검사와 공형사, 그리고 나와 문정혁은 서로가 서로를 급하게 쳐다봤다. 나는 그들의 표정에서, 짧은 순간이지만 절망을 읽었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듯 창백한 낯. 혈랑단과 청랑단이 모든 입구를 차단한 채, 무자비한 살생질을 하고 있다는 C단지. 특공대에서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폭팔물'이라는 단어가 상황을 막아버렸다. 우리들 중 가장 이성적인 김명민 검사가 재빨리 무전을 보냈다. “특검사단 김명민이다. 전원 Z지역으로 철수한다.” -알겠습니다. 우리들 중 가장 감성에 미친 나는, 김검사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었다. “철수한다구요? 왜? 빨리 진압하고, 폭탄인지 지랄인지 제거해야 되는거 아니에요?!!” 우리 진이가 거기 있다잖아…!!! 김명민 검사는 내 행동을 막지 않았다. 그저 침통한 낯으로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총장하고 말을 맞춘 부분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특공 쪽에 피해 규모가 커질게 확실할 경우, 진압 의무는 유예되는게 맞습니다.” “그, 그럼!! 그럼 전진은… 전진은 어떡하라고!!” “…….” 끝까지 입을 다물어버리는 김검사의 뺨을 쳤다. 그러자 공유가 나를 막는다. “공형사!! 진이가 저기 안에 있다는 거잖아!! 어?!! 내가 말하면 들을 거야!! 우리 진이는 내 말이면 잘 들어!!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는데!! 내가 말하면 들을거야!! 어? 어허어, 공형사아… 제발 나 좀 안에 들여보내줘!! 어?!!” “…….” 김검사처럼 한일자로 입을 다무는 공형사의 행동에서 나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었다. 그때였다. “들것 가져와!!!” “응급팀 지원 바랍니다!!” B단지 출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진 것이다. 멀리서 의료진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비틀 걸어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사람들 틈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지만, 남자의 허리춤에 반짝이는 희미한 빛이, 주인을 알려준다. “이민우--!!!” 젖먹던 힘까지 다 하여 그를 불렀다. 백미터는 족히 떨어진 지점이건만, 그가 이민우라는 것을, 그의 허리에 꽃힌 회칼 덕분에 알았다. 살았구나. 민우야. 죽지 않았구나…!! 정신없이 민우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이쪽으로 잘 걸어오던 민우가 중간에 멈칫 한다. 그러더니 사람들에게 뭔가를 급하게 묻는 것이다. 아니, 강하게 따지는 듯 백지장처럼 흰 낯이 여기서도 잘 보였다. 이민우에게 거의 도착할 무렵, 그는 사람들의 강경한 만류를 세게 뿌리치기 시작했다. 그것도 자기 뒷 허리에 꼽힌 회칼을 뽑아서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이다. “비켜!!! 죽고싶어?!! 다 비켜!!! 꺼져!!!” “민우야!!! 왜그래!!!” 가까스로 이민우 쪽에 도착한 내가 비명처럼 물었다. 그는 찰라의 순간, 나를 보고 동공을 반짝였다. 내가 무사한 것을 보고 진심으로 안도하는 민우의 눈빛. 그는 나를 확인하자마자 더 세게 사람들을 위협하며 허공에 칼을 휘둘렀다. “비켜… 막으면, 다 죽인다.” “이민우!!!” 특공대 몇 명이 덤비려고 하자, 이민우가 서둘러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김명민 검사가 특공대원들에게 제지할 것을 명령했다. 이민우는 고맙다는 뜻으로 김명민 검사에게 푹 고개를 숙였다. 나는 문정혁에게 양 팔이 잡힌 채 바락바락 소리칠 뿐이었다. “이민우!!! 너 왜그래!!! 이민우!!! 어딜 가려고 그래!!!” 가까스로 살아서 빠져나왔던 공장 단지 안으로 무섭게 달려가던 민우가, 나의 비명에 딱 한 번 뒤돌아본다. 피와 상처 투성이로 걸어다니는게 신기해 보이는 이민우.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한다. “부장님을 구해야 돼.” “민우야--!!!!” 특공대원들이 하나 둘 단지에서 빠져나오는 걸 수상하게 여긴 이민우가, 자신을 부축하던 사람들에게 상황을 묻고, 최후로 선택한 행동이었다. 나는 양 팔을 뻗어서 이민우를 말리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불꽃처럼 강렬한 기운만 남긴채 전쟁터로 사라져버렸으니까. 청랑단과 혈랑단이 공장 내부에서 서로 서로를 죽이고 있다니. 폭팔물제거반조차 포기하고 돌아올 정도의 규모라니. 말도 안돼… 말도 안돼…!! “정혁아… 정혁아… 나도… 나도 들어가야겠어… 어? 정혁….” “…….” 내 팔을 꽉 잡고 있는 문정혁을 습관처럼 불렀다. 그를 천천히 올려보던 중, 내 입술은 거짓말처럼 닫혔다. “정혁아….” “…….” 그는 울고 있었다. 뺨 전체가 더운 눈물로 흥건해질 만치, 문정혁은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팔 한쪽이 잘라진 것처럼 고통스러운 숨을 내뱉으며… 김명민 검사가 최후 결단을 내렸는지, 특공대원들을 불러모았다. C단지 옥상에서부터 밑으로 진입할 계획을 빠르게 세웠다. 그때, 문정혁의 무전기가 울린다. 정혁아. 정혁아. 나 또한 울면서 그의 팔을 흔들었다. 문정혁이 떨리는 팔로 무전 버튼을 눌렀다. 기계음에 섞인 한 남자의 음성과, 사지가 찢겨질 때나 내뱉는 남자들의 비명 소리가 요란하게 전해진다. -대피해. 지금 당장. 치지직. “!!!” “!!!” 듣는 즉시 무전을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우리 둘은 동시에 알았다. 전진…!! 문정혁과 나를 비롯 공형사와 김검사도 당황했다. 전진. 전진이 확실한데…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전진은 휴대폰 통화는 물론이거니와, 누군가와 무전조차 못 한다. 그나마 혈랑단이 무전기를 소지한 이유는, 단 둘이 아니면 통화가 불가능한 휴대폰과 달리, 무전기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목소리가 전달된다는 것 때문인데… 전진의 부하들이 무전기를 갖고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전진의 병적 발작 증상이 호전되었다고는 짐작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병이 다 나은 것은 아니었다. 전진. 그는 기계를 통해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 자체를 못 한다. 한마디만 해도 정신적인 이유로, 사지가 끊어지는 고통을 겪는 놈이다. 그런 전진이 직접 무전을 보냈다니…? 이렇게 차분한 목소리로…? 내 앞에서 단 한 번도 흥분한 모습을 보여준 적 없었던 문정혁이 발작한 건 이때였다. “씨발아!!! 너!! 너는 어디 쳐박혀 있는거야!! 개새끼야!! 당장 나와!!!” “!!!” 문정혁의 붉은 동공이 튀어 나올 만치 커졌다. 그는 참았던 광분을 터뜨리며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잠시후 한 번 더 무전이 도착했다. -어. 지금 빠져나가고 있어. 전진의 느긋한 말씨에도 불구하고 문정혁은 수 십 명이 피투성이가 되서 가까스로 빠져나오는 입구쪽을 훔쳐보며 말했다. “애들이 뒤섞여서 누가 누군지 분간도 안 돼!!” 너 말 하는거 괜찮아? 병신아… 누구랑 전화통화만 하면 거품뱉는 새끼가… 문정혁은 말을 하는건지 오열하는 건지 모를 투로 세게 몰아붙였다. 이번에도 전진의 무전이 빨리 도착했다. -알아. 혈랑단이고, 청랑단이고, 원래 하나였잖아. 구분짓는게 우습지. 악행을 저지르면서 사는 놈들이 각자 정의를 따진다는거. 내가 이끌어왔던 '악'을, 전멸시켜버릴거야. 뭐라고…?!! 충격받아서 하얗게 질린 문정혁이 무전기를 놓치려던 찰라, 나는 그의 손에서 무전기를 빼앗아서 소리쳤다. “전진… 너 괜찮아? 전진. 전진이 맞는거야? 무전 할 수 있어? 전진… 너 전진 아니지!!” 전진이 아닐거야. 누가 거짓말 하고 있는 걸 거야. 전멸이니 뭐니 헛소리나 지껄이는 개새끼일거야. “이, 이것봐. 더이상 무전이 안 오잖아. 봤지? 어? 봤지? 이거, 저, 전진 아니야!!” 답이 없는 무전기를 허공에 달랑이며 소리쳤다. 문정혁의 눈빛은 굉장히 혼란스러워보였다. 그는 이민우처럼 물 불 안가리고 단지 안에 돌진하고 싶어했으며, 곁에 있는 나를 지켜주고 싶어했고, 특공대까지 출동한 현재 상황을 책임져야 했다. 그러나, 그도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어서 전진 한 사람만 떠올리는 듯 했다. 나는 무전기를 땅에 집어 던졌다. 방금 무전은 전진이 아닐거라고 무조건 믿었다. 하지만, 신의 장난처럼, 혹은 신이 정해버린 운명처럼, 순서에 맞게, 내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 번호를 확인하자마자 나는 까무라치듯 놀랐다. 벌린 입 밖으로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지만 나의 성대는 충격에 울부짖고 있었다. ----------------- 발신인 전 진 010 - **** - **** ----------------- 액정에 비치는 글자는 틀림없이 전진이었다. 방금까지, 무전했던 사람은 자기가 확실하다고 증명하듯 그가 내게 전화 한 것이다. 떨리는 팔을 겨우 올려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공주야… 나야.] “!!!” [무전이 되길래, 전화도 가능할 것 같아서… 해 봤어. 그런데… 되네?] “진아…!!” [되…네? 나… 핸드폰으로 누군가랑 전화 통화하는거… 되네…? 이렇게… 편하게… 말하는게… 되네?] “우흑… 진아… 전진….” [새아빠가 죽은 다음부터 핸드폰이 울리기만 해도 사지를 떨었었는데… 공주야… 공주야… 내 목소리 들려…?] 목소리만 들어도 알았다. 전진이 울고 있다는 것을. 내 옆에서 바닥에 무릎을 찍고 송장처럼 멍한 낯으로 공장 단지를 바라보는 문정혁 못지 않게, 전진도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내게 전화 하는게 가능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정말이지 처음으로 전진과 전화 통화를 할 수 있게 됐다. 눈물처럼 삼켜지는 그의 음성이, 지금 순간을 얼마나 놀라워하는지, 얼마나 기가 막혀 하는지 모조리 전해졌다. [이렇게…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한다는거… 이렇게 쉬운 거라는거… 왜 몰랐을까. 나는 뭐가 두려웠을까. 언제나 궁금했었는데… 편안하게 전화통화할때의 우리 공주 목소리….] “!!!” [공주야. 김명민 검사 좀 바꿔줘.] “어? 어…? 어….” 다 식은 가슴 위로 서러운 바람이 분다. 나는 전진의 부탁에 허둥지둥 김명민 검사에게 달려가서 휴대폰을 내밀었다. 김검사가 침착하게 휴대폰을 받는다. “김명민 입니다. 예. 지금 막 출동… …예? 하지만….” 뭐라고 하는 걸까? 응? 응? 발을 굴리며 김명민 검사의 식어가는 표정을 봤다. 김명민 검사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한숨을 길게 내쉰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검사는 그렇게만 말하고, 헬리콥터 쪽으로 걸어가서 뭐라고 명령했다. 대기 중이었던 특공대원들의 진열이 넓어졌다. 설마…! 자기쪽에 오지 말라는 건가…!! 쿵쾅대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김검사에게 휴대폰을 건네 받은 문정혁을 돌아봤다. 문정혁은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처절한 낯으로 비명을 토해내고 있었다. “씨발!!! 뭐라고?!! 닥쳐!! 개새끼야!! 내 얼굴보고!! 직접!! 눈 마주치고!! 니 아가리로 말 해!!” 땅이 흔들릴 만치 분노에 찬 함성 소리. 문정혁은 시퍼렇게 뜬 달 아래 저 혼자 있는 것마냥 짐승같은 울음을 토해냈다. 문정혁이 화를 내다가 분에 못이겨 휴대폰을 집어 던지려고 한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가서 그를 제지하며 휴대폰을 빼앗았다. “진아… 진아? 어딨어? 응? 나 갈래. 너 있는데로 갈래.” [우리 공주는 전화 목소리도 엄청 예쁘다.] “전진… 전진… 어? 너 어딨어? 어?” 어떡해… 어떡해… [공주야.] “진아… 너 왜그래… 어? 진아… 어?” 휴대폰이 눈물로 젖어들었다. 상처를 따끔따끔 건드리는 눈물보다 방해되는건, 내 울음소리였다. 전진이 쾌활하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아프리카에서 레모네이드 마시고 있을게.] “어? 아프리카? 전진… 전진…!!” 하나님… 안되요… 안되요…!! [미리 해피 뉴이어. 아담한 호텔 짓고 오빠가 먼저 살고 있을게.] “싫어… 싫어!! 전진!! 너 왜그래!! 전진!! 죽지 마!! 어?!! 죽으면 안 돼!!” [무슨 소리야… 이 오빠 갑빠가 있지. 절대 안 죽어. 우리 공주가 그랬잖아. 전진은 불사조라고.] “진아. 너 내가 하는 말 잘 듣잖아. 어? 지금 나와. 나와!!!! 전진!!! 나와!!!!” 사람이 죽기 전에는 의학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잠깐의 회복기가 돌아온다고 했다. 이건 불치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통용된 미스테리이다. 그러나 전진은… 자신의 죽음을 감지하고, 최후 순간에 자신의 평생 불치병이었던 정신병을 이겨낸 것이다. 휴대폰으로 그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우리들처럼, 그 또한 스스로를 놀라워한다. 이렇게 슬프도록 암담하게…! 공장 단지에서 100미터 이상 떨어진 우리들 중 문정혁이 돌연 소리쳤다. “진아!!!” “?” 단지 밖으로 걸어나오는 한 남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내 촉각도 곤두세워졌다. 하지만 비틀비틀 걸어나와서 특공대원들과 의료진에게 후송되는 남자는, 전진이 아닌, 이민우였다. 전진을 구하겠다고 달려들던 이민우가 비장한 각오를 안면에 덮어쓰고 눈물을 흘리면서 되돌아온것이다. 제정신으로 서있는게 불가능한 현재, 이번에는 특공대원들 쪽에서 한가닥 비명이 터져나왔다. “5층 창문입니다!! 창가쪽에 있어요!!” 뭐라고? 나는 핸드폰을 소중하게 꼭 쥔 채로, 사람들 틈을 파해쳤다. 그들에게서 망원경을 빼앗았다. 언덕 부근에 집결해있는 터라 공장 단지의 ㄷ자 형태가 훤히 보였다. 대체 어디 5층 창가라는 거야…!! 당황하는 내 뜻을 알아챈 대원 한 명이 망원경을 조절하고 위치를 알려줬다. “하악!! 전진!!!” 망원경 밖으로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미명 하나. 외롭게 서있는 인물 하나. 달빛에 반사되서 까맣게 흩어지는 전진. 창가에서 작은 점처럼 붙여져서 표정조차 확인이 불가능한 바보같은 너…!!! “누, 누가 우리 진이좀 구해줘요!! 진아!! 진아!! 빨리 나와!! 어?!! 거기서 뭐 해!! 빨리 나와!!! 안 보이잖아. 저거… 저 사람 너 아니지? 어? 진아… 전진-!!!” 특공대원들의 단단하게 무장된 옷을 붙잡고 소리치다가 휴대폰에 대고 전진을 크게 불렀다. 그의 웃음이 보인다. 아니, 들린다. [사랑해.] “진아… 전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사혜성공주.] “안돼… 안돼… 안돼….” 한 번만 얼굴 보는 것도 안되는거야…? 네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상하게 생각이 안 나… 그러면 안되는거야? 땅이 한 번 꿈틀한다. 멀리서부터 진동이 바람처럼 몰아오는가 싶더니… “엎드려!!!” 꽈광-- 펑--!!!! 퍼펑--!!! 우지끈- 하고 세상이 무너지는 소음과, 사람들의 다급한 비명소리, 그리고 거대한 불꽃이 용솟음치는 장면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투두두두두- 파편을 토해내는 불길 사이에서 적막했던 공장이 핏물보다 진한 혀를 낼름거렸다. “전진--!!!!!” 거짓말… 거짓말일 거야… 이 모든게… 다… 거짓말일 거야… 사랑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사혜성공주.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전진의 생사를 확인하자며 울부짖던 나는, 상태가 위급하다는 의사의 호통에 정신없이 구급차로 달려갔으니까. 파랗게 질린 이민우의 피부가 사후 경직이 시작된 것 마냥 작은 숨결도 내뱉지 못했다. 나는 거기서 경악하며 함께 달려와준 문정혁에게, 그리고 의사 선생님과 구급요원, 하다못해 김명민 검사에게도 매달렸다. 민우가 죽으면, 민우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나는 평생 고모에게 속죄해도 이 생에 죄값을 다 치루지 못할 것이다. CPR!! 의사의 호통과 간호사들의 움직임에 애간장이 다 녹았다. 철퍽! 철퍽! 심폐소생술을 할때마다 이민우의 가슴이 번쩍 번쩍 들렸다. 내 심장과 내 혈관도 그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가느다란 줄이 될 뻔 했던 이민우의 심장박동숫자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거기서 안도하고 주저앉기 전에, 이번에는 순돌이를 싣고 간 구급대로부터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정혁아… 정혁아… 나… 나….” “괜찮아. 괜찮을 거야.” 울지도 못했다. 울 수도 없었다. 전진의 뼛가루가 어디로 흩어졌는지, 아니, 그가 진짜 죽었는지 믿어지지도 않는 판에, 이민우의 손 한 번 제대로 못 잡아줬으니까. 이민우에 이어서 순돌이까지 위급하다는 소리를 들었을땐, 내 정신이 반쯤 미치기를 소원했다. 미친년마냥 머리에 꽃이라도 달고 헤벌쭉 웃는게 차라리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건 내 생에 치러야 할 죄값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따뜻한 코트를 어깨에 걸쳐주는 문정혁의 품에 간신히 안겼다. 그가 시키는대로 승용차 뒷자석에 올라탔다. 다급한 마음에 상체를 쭉 내밀고 안절부절 못하는 내 어깨를 그가 강하게 잡아당긴다. 문정혁 또한 제정신이 아닐 텐데도, 그는 나의 존재로 하여금 이성 끈을 부여쥐고 있음이 선명하게 확인되었다. 울고 싶었다. 그러나 울 수 없었다. 어처구니 없이 바람빠진 웃음소리가 피식 튀어나왔다. 문정혁이 의아한 낯으로 나를 내려본다. 나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스스로도 모를 낯으로 중얼거렸다. “정혁아….” “?” “우리… 3년만에 보는거야… 아니면… 4년만에 보는 거야…?” “…….”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이름들이 찢어지고 할퀴어지는 순간임에도, 이 말을 내뱉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내 입술은 움직였고, 음성은 공기를 핥았다. 젖은 소리들이 문정혁의 귓가에 닿았다. 그는 내 어깨를 처음보다 세게 움켜 쥐며 짐승같은 신음소리를 사방에 던졌다. 우리 둘 다 지옥이었다. 폭파해서 산산히 재가 되어가는 공장단지, 널려진 시체들 어딘가에 숨어있을 전진의 잔해… 병원에 도착했다. 부산 병원이라는 간판을 읽어서야, 내가 있던 지역이 경상도라는 것을 알았다. 나와 문정혁이 응급실로 들어가자, 의사 간호사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내 몰골도 워낙 다쳐있는 상태라서 아마 치료받으러 온 줄 알았나보다. 사람들을 헤치며 되는 대로 소리쳤다. 순돌아-!! 순돌아!!! 멈춰진 그림 속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것처럼, 나 혼자만 빠르고, 세상은 느렸다. 아무도 내게 순돌이가 누구인지, 순돌이가 어디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문정혁이 직접 나서서 차근차근 간호사에게 순돌이에 대해 물었고, 우리는 순돌이가 수술중인 3층 수술실로 달려갈 수 있었다. 집도의를 대신하여, 수술실에서 막 나온 의사 한 명을 붙잡고 캐물었다. 우리 순돌이 어떻게 됐어요? 예? 선생님!! 제발… 살려주세요… 후들거리는 다리에 악으로 깡으로 그야말로 정신력으로 힘을 주어 섰다. 내가 나인것 같지 않은 이질적인 상태… 절망도 희망도 없는 무중력에서, 영혼만이 희희낙락 날아다니는 기분… 우리 앞에 나타난 의사는 마취의였다. 그는 진정하라는 말을 시작으로 차분한 투를 이어갔다. “수술은 금방 끝날 겁니다. 봉합만 하면 되니까요. 까딱하면 염증이 심해져서 패혈증으로 번질 뻔 했습니다만 응급처치를 아주 잘 하셨더군요. 아, 타박상의 정도가 꽤 심하지만, 다행이 뼈가 부러지진 않았습니다. 외상으로는 이 정도구요, 환자가 쇼크상태라서 체온이….” “예? 선생님. 잠깐만요. 수술이 금방 끝나다뇨? 손가락 잘린것도 아직 못 찾았는데… 이게 그렇게 간단한 수술인가요?” 내 말에 마취의는 깜짝 놀라며 오히려 반문했다. “손가락이 잘리다니, 말도 안 됩니다. 환자는 현재 극도로 심약해져서 쇼크로 인해….” “그러니까, 선생님. 손가락이 잘린게 아니라구요?” “예. 오른손 중지부터 손바닥까지 약 12센티 칼로 베인 상처만 있었습니다.” “!!!” 털썩- 수술실 복도 불이 깜빡이는 걸 멍하니 쳐다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마구 흘렀다. 뇌가 시키기도 전에 죄 많은 입술이 기계처럼 움직여졌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아… 고맙습니다….” 처음 순돌이를 발견했을 당시, 붕대 밖으로 보인 피와, 이선호의 위협적인 말만 듣고 얼마나 노심초사 했던가…!! 하늘이 몇 번씩 무너지고, 오장육부를 토해내도 이것보단 아프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었다. “흐윽… 으흑… 흐으윽….” 눈물 콧물을 마구 흘리며 엉망으로 울었다. 나중에는 내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흐어어… 흐어어엉… 어허, 어허어엉.” 문정혁이 내 앞에 주저앉아서 포근하게 어깨를 감싸 안아주는 것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소름끼쳤던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감보다, 전진이 죽었다는 거짓말같은 진실보다, 이민우가 무사하다는 생명수같은 소식과, 순돌이가 무사하다는 단 한 줄만이 짧은 순간 강하게 빛처럼 내 몸에 파고들었다. 고모가 부산 병원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열한시였다. 그제야 나는 잠들수 있었고, 전쟁을 지휘했던 어둠이 분해 되었음을 알았다. 찬란한 햇빛을 온 몸으로 받으며 고모의 눈물을 아련히 응시했다. 천천히 눈을 감았을때 고모는 비명인지 고통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셨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나는 잠들기 직전까지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고모는 내 얼굴의 멍이 심하게 부풀어오르고 전신에 타박상을 입은 것을 또 자기 탓인 양 미안해 하셨다. 이민우가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기고, 순돌이도 어린이용 일반 병실로 옮겼다는 소리를 들은 직후라서 다행이었다. 아직 전진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고모의 통곡 소리가 잦아들때까지 고모를 위로해야 된다고 열심히 의식을 깨웠다. 그러나 지친 육신은 쉽게 잠들었다. 차라리 이대로 숨이 끊어지기를 소원했다. 열 시간이나 지나서야 눈이 뜨였다. 적막한 밤공기가 온온한 병실 내부에 확 느껴졌다. 나를 보고 우셨던 고모는 순돌이 병실, 혹은 이민우 병실에 간 건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대신 찬란한 달빛을 온 몸으로 맞는 문정혁이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왜… 자꾸 봐….” 그리고 그는 울고 있었다. 나를 보며 언제부터 흘렸는지 알 수 없는 눈물을 하염없이 보였다. 내가 눈을 뜬 걸 알자마자 황급히 닦아내긴 했지만, 그의 붉은 눈매만큼은 닦을수록 진해졌다. 그가 떨리는 손을 내려서 조심조심 내 이마를 매만진다. “많이 아퍼?” “아니….” “아프면 아프다고 해.” “안 아퍼.” 사실은 많이 아픈데… 너무 많이 아파서 감각을 잃었나봐. “혜성아….” “응….” 문정혁… 여전히 잘생겼네… “신고양이….” “…응….” “애기야….” “……응…….”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멋진 문정혁이네… “귀염둥이야….” “…그건 처음 들어보는데….” “…좀… 개발해봤어. 뉴네임.” “별로야. 뉴네임은 부르지 마.” “신혜성. 내가 언제 니 허락 받고 부르는 거 봤어?” 세월이 흘러도 너의 지랄은 계속되는구나… “미친. …지는 우리두리 트로트 메들리면서.” “하하…….” 작게 웃다가도 심장을 찌르는 아찔함이 스치고, 허무하게 부서져내리는 우리 둘. 문정혁의 눈물이 내 뺨에 떨어졌다. 그는 자기 눈물이 떨어진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그가 편히 울 수 있도록 눈꺼풀을 닫았다. 그가 내 왼손을 살며시 두 손으로 잡고 이마를 붙인다. 가파른 호흡이 느껴진다. 젖은 눈물까지도… “부르고 싶었어… 많이 많이….” “…….”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것 같다. 혜성아… 신고양이… 애기야… 뉴네임 귀염둥이야… 라고 많이 부르고 싶었는데, 그게 오늘이 될 줄 몰랐노라고. 삼켜도 삼켜도 터져나오는 눈물과 함께 쏟아지는 음성. 전진은 어떻게 됐어? 라고 물어보라며 뇌가 지시한다. 하지만 고집스런 내 입술은 숨 조차 흘리지 않았다. 문정혁도 전진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겁이 났다. 그의 죽음을 내 귀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건 문정혁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믿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전진의 죽음을…. 새벽의 푸르름이 다 가시기 직전… 조용한 틈을 타서 링겔병을 끌고 순돌이가 입원해 있다는 병실로 찾아갔다. 2인용 병실에서 얕게 호흡중인 우리 순돌이가 보인다. 고모가 금방 왔다 간 흔적이 보인다. 푹 들어간 의자 자국과, 따뜻한 온기… 아이의 퉁퉁 부은 손과, 꼼꼼하게 묶인 붕대를 바라보다가 맥없이 울어버렸다. 이게 뭐야… 하얗고 보드라웠던 볼에는 상처자국, 입도 터졌고, 눈두덩이도 시퍼렇게 부었잖아… 못난 삼촌의 울음소리 때문에 순돌이가 잠에서 깼다. “삼… 촌….” “순돌아… 으흑… 순돌아… 삼촌이 미안해… 순돌아….” 이 가여운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엄마를 부르고 싶은 욕망을 참고, 또래들에게는 없는 상처를 줄줄이 매단 너를… “삼촌… 삼촌… 삼촌 눈 왜그래?” “순돌아… 순돌아… 으흑….” 참 지독한 세상이지, 순돌아. 그래도 삼촌은 니가 살아줘서 고마워…. “삼촌… 나… 눈하구 팔 아퍼….” “어어? 어디… 여기? 여, 여기? 으흐으… 순돌아… 여기? 호… 순돌이 호….” “이이… 나 애기 취급 하지 말라니깐. 내년에 떡국 먹으면 열살된다니깐.” 하지만 너는 내 눈에 영원히 애기인걸… 왜그런진 나도 잘 모르겠어… “어어. 알았…어… 으흑… 호오… 호오오….” 아이가 부서질까봐 차마 끌어안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울었다. 순돌이는 나를 보며 안심하는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눈동자를 경직하며 자지러지듯 울었다. 화장실에 잠깐 가셨던 고모가 병실에 들어오시다가 순돌이의 울음소리에 놀라서 의사를 불렀다. 의사가 황급히 달려왔을 무렵, 순돌이는 자기 울음에 취한 양 잠들어버렸다. “얘가 또 발작이네… 휴우….” “발작이요? 자주 했어요?” 고모가 힘겹게 숨을 내쉬며 도라질 친다. “아까 마취에서 깬 다음부터 한시간에 한 번은 저런다. 갑자기 헉 하면서 울고, 일분도 안되서 축 늘어지고.” “…….” “혜성아. 얼른 가서 후딱 자버려라. 다 잊어버리고, 응? 뭔 조폭인지 뭐시깽인지 싸움에 휘말렸다고 검사 양반이 그러던데… 이젠 괜찮다며. 몸 상한 거 봐라… 얼른 올라가. 응? 고모가 데려다줄게.” “아, 아니에요. 고모. 저… 근데 제 핸드폰 어딨어요?” “핸드폰? 아! 니꺼랑 민우꺼랑 나한테 있다. 기다려 봐. …순돌이건 어따 잊어버린건지 보이지두 않네. 쯧쯧쯧.” 며칠 사이 몇 년은 늙으신 것 마냥 초췌한 고모의 낯을 보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짙은 죄의식이 밀려왔다. 참참한 어두움보다 짙은 회색빛이 내 이마를 감싸고 돌았다. 고모가 휴대폰을 꺼내주는걸 받고, 데려다 주겠다는 걸 한사코 사양한 뒤 천천히 링겔병을 들고 움직였다. 계단 복도로 몸을 틀어서야 나는 입을 틀어막고 한참을 울었다. 우리 순돌이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아….” 한기가 엄습했다. 온풍기가 작동되는 병원이라고 해도, 계단쪽 복도는 추웠다. 몸을 웅크린채 계단에 앉아서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휴대폰 버튼을 눌렀다. 외워지지도 않는 민경이 누나의 번호를 찾았다. 최신 유행곡 컬러링이 흐른다. “받어… 받어… 니가 애 엄마라면 받으라고….” 환자복 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으며 중얼거렸다. 한참 후에야 민경이 누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받는다. […무슨 일이야. 지금 집 식구들 다 자는데.] “누나….” [용건 있으면 빨리 말 해. 애 아빠 깨겠어.] 흐읍- 눈물을 크게 한 번 삼켰다. 홀아비에 준재벌쯤 되는 남자와 재혼한 민경이 누나. 새 매형에겐 세 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민경이 누나는 친아들처럼 새 매형의 자식을 키우며 사는 중이란다. 친정에 자기 친아들이 있다는 건 시댁쪽에 철저히 비밀로 부치고… 내가 흐느끼는 이유를 알면서도, 민경이 누나는 조용조용하지만 짜증스런 투로 다그쳤다. 집 구석에서 조용히 전화를 받는 모양이다. “누나… 흐윽… 순돌이… 우리 순돌이… 누나 아들… 다쳤어… 죽을 뻔 했어….” [나도 들었어. 안 죽었다며. 그냥 조금 다친거라던데? 얘. 그 소리 하려고 전화한거면 나도 엄마한테 얘기 들었으니까 끊는다.] “누나….” [얘가 진짜 왜이렇게 말귀를 못알아들어? 늬 매형 알면 난리 나. 누나 또 파토나는 꼴 보고 싶니?] “순돌이가… 진짜 많이 다쳤다구… 순돌이가… 엄마 찾는다구….” […….] “한 번만 와 줘… 누나 어차피 일도 관뒀잖아. 어? 부산 와서, 한 번만 우리 순돌이 안아주고 가… 어? 누나. 그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어? 다시는 이런 부탁 안 할게… 누나… 제발….” [내일 애 아빠 동문회 부부동반 모임 가야 돼.] “!!!!” 하염없이 눈물흘리던 눈동자에 불꽃이 일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라서 턱이 덜덜 떨렸다. [할 말 없지? 얘, 혜성아. 참. 늬 매형네 회사 직원들이 너 싸인 좀 받아 달라는데, 언제 시간내서 매형네 회사 놀러와라. 아님 집으로 와도 좋구. 넌 어떻게 된 애가 똑같은 조칸데 순돌이만 챙기니? 영석이도 니 조카야. 새 매형 아들이라고 따돌리는거니? 그럼 못써. 어머, 애아빠 진짜 깨겠다. 나 끊는다?] “미친년아….” […뭐라구?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야, 씨발년아… 니가 그러고도 애 엄마냐? 개새끼도 너보단 낫겠다.” 참을 만큼 참았다. 순돌이가 갓난 아기였을때부터, 그녀는 이런 식이었고 나는 항상 속으로 참아 왔으니까. 순돌이를 위해서라도 민경이 누나에게 쓴소리 한 번 못했다. 그래도 자식인데, 친자식인데, 자기 배 아파서 난 자식인데, 한 번은 돌아보겠지. …그랬었다. 하지만 순돌이가 이 지경인데 본 척도 안하다니. 순간 이성끈이 뚝 끊어지는게 정말로 느껴졌다. 복도가 쩌렁쩌렁 울릴 만치 성대가 트였다. “새 매형 아들은 왜 따돌리냐고? 니가 인간이면 머리로 생각을 해 봐!!! 순돌이 누나 자식이야!!! 누나가 힘들게 낳은 자식이라고!!! 애가 사경을 헤매다가 깨어났다는데!! 고작 그딴 말 밖에 못 해?!! 니가 그러고도 애엄마야?!!!” […할 말 다 했니?] “하…….” [연예인 되더니 갈 데 까지 갔구나? 내가 오래 통화 못한다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넌 니생각밖에 못하니? 니가 내 친동생이야 뭐야? 아까 엄마, 그러니까 늬 고모도 나랑 한 판 했는데 넌 또 왜 엄한데 끼어드니? 철 좀 들어라, 신혜성. 쯧쯧쯧. 내가 이런 말 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니가 성격이 그거밖에 안되니까 너희 부모도--] 툭. 휴대폰 플립을 닫았다. 얼마 안 가서 휴대폰이 세게 울린다. 발신 번호는 화가 단단히 난, 민경이 누나였다. 휴대폰 배터리를 분리했다. 이런 엄마도 세상에는 있는 거구나… 이런 거지같은 년도 엄마랍시고 깝치고 다니는게 이 세상이구나… 하… 하하… 일그러진 낯으로 조용히 흐느끼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발소리 숨소리를 죽이고 내 병실로 돌아갔다. 문정혁이 멍하니 앉아있다.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내가 순돌이 병실에서 꽤 일찍 돌아온게 의아했는지 눈을 꿈뻑인다. “벌써 왔어?” “응….” “자구 온다며.” “고모 있어서….” “잘 왔어.” “응….” 그는 내가 없는 내내 공허한 낯으로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공허함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내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과 비슷한 이유일테니. 아니다. 비슷하지만 다르구나. 아픔이란 단어는 비슷할지라도, 아픔의 이유는 제각각일테니… 우리는 비슷한 아픔을 주렁주렁 가슴에 매달고 서로를 포개어 안았다. 말 한 마디 없이 몇시간이나… 그뒤 수개월동안 문정혁과 나는 서로 연락을 하지도, 만나지도 않았다. 우리의 잠깐의 이별은 무언의 약속 혹은 다짐과도 같았다. 서로를 보면 팔 한 쪽이 잘려진 것같은 고통에 사무쳐야 했으니까. 전진을 물어야 하고, 입으로 묻지 않더라도 타들어가는 가슴을 달래야 했으니까. 적어도 떨어져서 지내면, 전진이 죽지 않았다는 헛된 희망에 기댈 수 있었다. 언제고 이 희망마저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 사그라들겠지만, 그날까진 문정혁과 떨어져 지내는게 옳았다. 혼자가 된 나는 전진이 내게 남긴 엄청난 흔적을 되짚어봤다. 그리고 놀랐다. 그는 3년 만에 내 앞에 나타나서 단지 몇 주만 함께 했을 뿐이니까. 채 한 달도 안 되는 시간동안, 전진은 내게 평생인것 처럼 붙어다니며 추억을 만들어줬었다. 그러나 내 심장은 그가 내게 준 것의 반의 반 만큼도 활발하게 뛰어 주질 못했었다. 언제나 문정혁과 전진을 비교했으며, 문정혁이 3년 전에 내게 준 상처를 전진에게서 불안해 했었다. 단 몇주였지만, 나는 전진을 완벽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자각했다. 그러나 내 몸과 마음은 전진 이라는 두글자 앞에서 언제나 무너졌다. 방 한 켠에 고스란히 쌓여있는 퐁퐁과 유한락스, 사은품들을 볼때마다 울었다. 전진과 함께 날랐던 가구들을 만지면서 울었고, 전진이 내게 사 준 옷을 멍청하게 쳐다보면서 울었다. 그가 담궜던 김치가 푹 쉰 것을 한 입 먹으면서 입가에 고춧가루 듬뿍 묻힌 채로 울었다. 테라스에서 함께 마주 앉아있어야 할 전진이 없어서 흠칫 어깨를 떨다가 울었으며, 최근의 추억으로 시작된 전진과의 긴 줄기가 10 여년 전으로 거슬러 가서 눈물의 양은 늘어나기만 했다. 긴 시간 떨어지기만 했고, 붙어있어 봤자 이선호의 악랄한 행동 때문에 아프기만 했던 사람. 깨알같은 기쁨의 시간은 따지고 보면, 전진과 내가 처음 만난 열 여덟살 초창기 두 달이 전부인 사람. 그와 알고 지낸 세월이 허무해서 터진 눈물이, 그의 가련함이 자꾸 떠올라서 가슴을 치게 했고, 문정혁과 함께 한 반의 반 만큼도 추억을 못 빚은 사람이라는게 어이 없어서 가쁜 숨소리는 늘어났다. 전진은 나와 재회한 직후, 4주가 못 되는 시간동안, 진짜 연인처럼 지내려고 최선을 다 했었다. 데이트하고, 섹스하고, 농담하면서, 거의 10여 년간 함께 누리지 못 한 '연인의 감정'을 찾아보려고 했었다. 어쩌면 그는 나와 헤어질 것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악착같이 나를 지켜주려 하고,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 후회하지 않으려고… 그래서 그는 애닲아 했으리라. 내가 문정혁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앞으로 우리가 싸우게 되면 어떻게 하자는 둥- 이상한 소리만 해 대는 나를 애닲아 했을 것이다. 모르겠다. 내가 전진을 두고 생각할 수 있는 상자의 크기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하지만… 꼭 그렇게…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운명을 달리 해야 했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나를 사랑한다고, 나와 있어서 행복하다고 노래하듯 매일 매일 속삭였으면서… 왜… 3월의 마지막 날, 나는 최성수 사장과 장시간 논쟁을 벌이다가 마침내 합의 한 것을 터뜨리기 위해, 가지런히 옷을 차려입었다. “진짜 괜찮겠어?” “응.” 우리 집까지 데릴러 온 사람은 매니저 형이 아니라, 이민우였다. 두달 입원하고 한달간 통원 치료를 한 이민우의 몸상태가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리고 그는… 단 몇 달 사이, 몇십년은 먹은 것처럼 성숙한 눈매를 빛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농축된 빛깔… “혜성아.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당근이지. 두 달 넘게 최성수 설득했는데… 나 후회 안 해.” 차에 타자마자 안전벨트를 매 주던 민우가, 나의 다부진 말투에 피식 웃는다. 왜 웃어? 표정으로 묻자, 이민우가 설레설레 고개를 젖는다. “진짜 뭘 해도 귀엽고 야단이야.” “뭐야?” “큭큭큭큭.” “야. 이민우. 나 심각하고 중후한 분위기란 말이야.” “하하하하하!” 그가 차에 시동을 걸다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다. 문득, 내 앞에 건강하게 앉아있는 이민우가 믿어지지 않는다. 그도 가끔 나를 보며 내가 방금 한 생각과 비슷한 줄기를 눈동자에 그린다. 투명한 햇살이 찬란하게 부서져 내렸다. 차가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출발한다. 어디선가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3월의 마지막날. 겨울의 잔해가 모조리 사라졌으면 좋겠다. “참. 순돌이….” “어? 어어….” 이민우가 내 눈치를 보다가 슬쩍 순돌이 얘기를 꺼낸다. 3개월 내내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유지한 나였지만, 순돌이 말만 나오면 백팔십도 달라진다는 걸, 이민우는 너무 잘 안다. “일주일에 두 번만 가면 된대.” “진!!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삽살개마냥 헥헥대면서 좋아했다. 두 번!! 두번이라고? “뭐라드라? 뭔 망각을 건드리고 반응 테스트? 이건 앞으로 안 해도 된다든데… 아, 이 테스트가 아니라 딴 거였나? 설명이 어려워서 좀 길게 얘기해달랐더니 더 못알아듣겠더라.” “진!!짜? 진짜 두 번만 병원에 가면 된대?!!!” “어휴. 귀아퍼라. 예. 그렇습니다요.” “완!!전!! 잘됐다!!!!!” 내가 고삐리때 다녔던 신경정신과 연정훈 선생님에게 치료 받는 중인 순돌이가, 일주일에 두 번만 가면 된다니. 오전부터 긴장했던 몸이 순간 나른해졌다. 기쁨의 별 하나가 반짝였다. 순돌이가 다쳤을 당시만 하더라도 외상이 심해서 정신과 쪽은 생각을 못했었다. 그러다 애가 잘 때마다 까무러치듯 발작을 하는 바람에 고모와 나는 이리 저리 병원을 알아보다가, 연정훈 선생님을 찾게 되었다. 세월이 세월인 만큼 과장으로 승진한 연정훈쌤은 순돌이를 따스하게 잘 치료해 주셨다. 부디… 우리 순돌이가 언제고 꼭 쾌차하기를… “다 와 가는데….” “응….” “꼭 해야 되는 거야?” “응. 꼭 할 거야.” 제법 다부지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민우는 꼭 할 거라며 주먹을 그러쥔 나를 보고 또 피식피식 웃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내 손을 잡는다거나, 가벼운 스킨쉽은 하지 않는다. 그는 작년의 끔찍했던 사건 이후, 내 앞에서 그날 일과 관련된 이야기는 일체 꺼내지 않았다. 마치 문정혁과 내가 연락을 끊고 지내듯이. “신혜성!!” “어?” 차에서 내리기 직전, 벌떼같이 몰려드는 취재진을 보고 뜨악스런 표정을 짓던 이민우가 살며시 내 옷깃을 잡는다. 차 문고리를 쥔 채로 살짝 턱만 돌렸다. 이민우가 근사하게 윙크한다. “화이팅!!” “응!!!” 화이팅. 3월의 마지막 날. 스타급 연예인 신혜성은, 기자회견을 치룬다. 연예계 공식 은퇴 선언을 하기 위하여. 나의 은퇴 소식은,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파장을 일으켰다. 스포츠 신문 1면은 말 할 것도 없고, 아홉시 뉴스에 보도되었을 정도니까. 온갖 곳에서 사실 확인을 위해 전화를 해 댔다. 최성수 사장은 끝까지 나를 설득시키려고 했지만, 나 또한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획사가 제법 커져서 스타급 연예인들을 스카웃 하기도 하고, 역량 있는 신인을 대거 배출했다는 것이다. 지난 날, 충무로의 좁은 사무실에서 라면 끓여먹던 최사장과 나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최사장은 끝까지 나를 기다리겠다며 의리를 다짐했고,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인터넷 싸이트마다 내 얘기가 도배됐고, 악성 루머가 활개쳤다. 남자인 내가 임신했다는 설까지 돌아다녔다. 고모와 고모부는 내 편에서 끝까지 응원해 주셨다.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두 분은 충분히 절감하고 계셨다. 이민우가 그날 일을 언급하지 않듯, 고모부와 고모도 굳이 꺼내지 않았다. 어쩌면 고모는 자기 아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대충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끝까지 아닐거라 믿고 계시고, 실제로 이민우는 고모부 회사에서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홍역같은 은퇴선언이 지나고, 6월 중순이 되었다. 헐거웠던 나뭇가지에 푸른 잎사귀가 무성하고, 가끔 새벽을 두드리는 젖은 빗소리가 익숙하게 다가오는 초여름의 문턱. 세상은 아직도 신혜성의 소식을 캐고 다녔다. 나는 은퇴했음에도 불구하고 밖에 나갈때는 전보다 두 배 세 배 중무장을 했으며, 파파라치를 피해 다녀야만 했다. 언젠가는 사그라질 열기를 기대하며… 은퇴와 동시에 신문이고 인터넷이고 소식을 일체 끊었다. 일부러 안 보며 살았다. 기자들이 쓴 기사 내용은 그럭저럭 읽어 주겠지만, 인터넷마다 달린 위로 댓글과 악성 댓글은 두 눈 뜨고 보기 힘들어서. 도대체 내가 언제 400억 빚을 져서 앙드레 김한테 몸을 팔았다는 거냐. 댓글 수준하고는… 은퇴 선언 덕분에, 내 생활은 조금 달라졌다. 전보다 여유로워진 반면, 숨도 못쉬게 괴로우면 어쩌지-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차차 옅어진 것이다. 전진 생각만 매일 나면 어떡하나- 했던 고민이 우스워질 정도로, 나는 괜찮아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시간의 마법이었다. 아직도 전진을 떠올리긴 괴롭지만, 처음보다는 나아졌다는 증거로, 나는 웃는 날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매일 매일 순돌이 만나고, 순돌이 병원가는 날에는 꼭 함께 가고…… -혜성아. 가지 김치 담궜는데, 고모가 가져갈까? 아니면, 민형이 피시방 냉장고에 놔둘까? “아, 피시방이 낫겠어요. 아니다. 제가 고모집으로 갈게요.” -지금 밖에 보니까 기자들 두엇 와있더라. 피시방에 놔둘게. 가져가. 알았지? 갑작스레 울리는 휴대폰을 받자마자, 고모는 김치 가져가라고 성화시다. 또 마스크에 모자 눌러쓰고 잽싸게 다녀와야겠군.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우리집에 양종호와 팽종희양이 찾아왔다. 뭘 또 바리바리 싸들고 온 걸 보니, 반찬거리와 국인가보다. “다 못 먹을것같은데…?” “억지로 다 먹어. 새끼가… 말라가지고.” “양종호. 니가 가져온거 100 명은 먹겠다. 제수씨 홀 몸도 아닌데, 이런거 들게 하면 안되잖아.” 결혼한 새색시 특유의 분위기는 고사하고, 여전히 팔렐레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쫑양을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2월에 결혼식 올리고, 신혼여행지에서 덜컥 임신해버린 쫑양. 아직 임신 4개월이라 그런지 배가 납작하다. 그래도 임신하면 여자들이 죄다 조심하던데…? 내 말에 양종호가 머리를 북북 긁적였고, 쫑양이 통통 뛰면서 발랄하게 대꾸한다. “옵빠~ 저 괜찮아여~ 그리구~ 우리 쫑 트럭 타구 왔잖아여~ 엘리베이터까진 우리 쫑이 다 들었어여~” “어 그래.” 괜히 걱정했어… “참~ 옵빠~” “왜? 종희야. 난 니가 부를 때마다 긴장되거든.” “뭐예여? 옵빠는~ 저 남편 있는 여자에요~ 옵빠두 참 용감하시네요? 우리 쫑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절 보고 긴장하시다녀~ 딴 건 아니구요~ 이따가 발냄새형사님이 꽁치 김치찌개 해준데요~” 참을 인… 참을 인… 참을 인… “어 그… 잠깐. 꽁치 김치찌개를 어디서 하는데?” “옵빠두 참~ 어디서 하긴 어디서 하겠어여? 그런 퀴즈는 우리 뭉치도 다 때려맞추거든여~ 수준 좀 레벨 업 하셔야겠어요~ 옵빠 집이지 어디에여~” 이것들이…!! 이젠 뱃속에 애기까지 한통속이 되서 우리집을 난장판을 만들려는건가…!! 쫑양의 당연하다는 듯 한 말투에 양종호를 휙 노려봤다. “어, 어디 가는 길이야? 내가 데려다 줄게.” “야. 약속 정하기 전에, 나한테도 좀 먼저 물어보랬지.” “고모네 가냐? 민형이 형 피시방? 어디?” “으… 짜증나!!!!” 쫑양인지 팽종희인지에게 꽉 잡혀서 헬렐레 거리는 양종호. 천하의 양종호가 이렇게 살게 될 줄 누가 알았는가. 그래도 고마운 녀석… 고삐리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믿음을 선사해 준 소중한 친구. 이러니 저러니 입은 투덜거려도 나는 양종호의 트럭에 함께 올라타서 민형이 형 피시방에 갔다. 확실히 사업에 수완이 좋은 민형이 형의 피시방에는 언제나 손님들로 북새통이다. 덕분에 양종호만 피시방에 쏙 들어가서 김치통을 가져왔다. 그리고 다시 도착한 우리집 앞.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양종호가 흠칫 놀라며 살벌하게 앞을 노려본다. 웬 수상한 그림자 하나가 우리집 문 앞에 서있었다. 덜컥- 내 심장도 천정까지 뛰었다. '그날' 이후, 순돌이 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낯선 사람만 보면 경계심부터 들었다. “누구야.” 양종호가 날이 선 투로 물었다. 괴한이 천천히 등을 돌린다. 우리는 아직 엘리베이터 안에서 버튼을 누른채로 서있는 중이었다. 여차 하면 재빨리 엘리베이터 문 닫고 1층까지 내려갈 태세였다. 그러나 괴한의 정체를 알아본 나는 믿을 수 없어하는 눈동자를 연신 깜빡이며 한 발자국 복도에 발을 내딛었다. 양종호도 입을 쩍 벌리고 내 뒤에서 절룩절룩 따라서 내린다. “문정혁….” “그것들….” 내가 문정혁이라고 이름을 부르듯, 양종호의 입 밖으로 '그것들'이라는 글자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아마 태풍고 녀석들에게는 둘 중 한명만 보여도 '그것들'이라고 부르는게 습관화 되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들어본다.” 문정혁… 정말 문정혁이다… 그가 말을 한다. 조금 쑥쓰러운 표정으로 양종호와 나를 보며… “그것들 이라는 말….” 6월의 녹색 향기가 가슴까지 차오른다. 너부터 말 해. 싫어. 너부터 말 해. 왜. 그냥 너부터 말 해. 아 싫다니깐!! 또 옛날습관 나오냐?!! 강요하지 말고 너가 먼저 말해!! 니가 먼저 말 하라고 배려하는거거든?!! 싫어 너부터 말 해!! 라고 서로 떠넘기다가 둘이 동시에 피식 웃어버렸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하고싶은 말 있으면 먼저 해… 하던게, 금방 꽥꽥모드로 들어섰던 것이다. 너부터 말하세요 모드가 지나자 또 어색한 침묵이 차 안에 가득하다. 슬그머니, 운전석에 앉아서 무슨 말을 할까 골몰하는 문정혁 옆모습 구경했다. 전보다 약간 볼이 해쓱해지긴 했지만… 간지나는건 여전하다. 나를 배려하는 차원으로 알아서 한강으로 차를 몬 문정혁. 행동은 신사다웠지만, 옷차림이 달라졌다. 몇 년 전부터 지긋지긋하게 봤던 문정혁의 수트차림이 마법처럼 사라진 것이다. 마치, 동화속의 기사가 갑옷을 벗고 왕자님 옷으로 갈아 입듯이… 그치만 왕자님 옷은 아닌걸. “왜… 이상해?” 어색해 하는 내 표정이 신경쓰였는지 문정혁이 자기 옷을 죽 잡아당기며 묻는다.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졸라 잘 어울리지.” 사실은 잘 어울려- 라고 대답해주기도 전에, 문정혁이 습관대로 지랄해버려서, 또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이구.” 그런 나를 보고 못 말리겠다는 듯 살짝 볼을 잡고 꼬집는 문정혁. 약간 느슨한 그레이 스키니진에 노멀한 느낌의 얇은 브이넥 니트차림의 문정혁. 초여름의 날씨인데 문정혁의 옷은 봄의 절정이다. 네이비 브이넥 니트… 부드럽게 흐트러진 그의 긴 앞머리칼과 굉장히 잘 어울렸다. “나 앞머리 길렀어.” 내가 지 앞머리 쳐다보는건 또 어떻게 알고… 휙- 시선을 피하며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그러네. 빈라덴 같애.” “…뭐?” “거기서 머리 더 기르면 빈라덴 같다고. 빈라덴 모르냐? 부시의 공공의 적.” “풉….” “?” 문정혁이 핸들을 잡고 어깨를 꿈틀꿈틀하더니… “아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 빈라덴!!!! 미치겠다!! 빈라덴!! 크크크크크!! 처음 들어봤어!! 하하하하하!!” “야. 다 너한테 잘보일라고 일부러 말 안 한 거지. 너 입내밀고 심각한 표정 지으면 딱이야. 빈라덴.” “하하하하하!!!” 진짜 발작하듯 웃는다. 옆에 있는 내가 깜짝 놀라서 차창에 바짝 몸을 붙일 정도로, 문정혁은 뻥 소리내듯 웃었다. 나중에는 눈물까지 흘렸다. “하하하하… 나 진짜… 몇개월 만에 웃어본다… 크큭… 크크크큭… 큭. 큭.” 그는 헤어졌던 세월을 다 잊고, 내 앞에서 옛날처럼 웃었다. 내가 하는 말에 기절초풍하겠다는 듯이. 덕분에 한강 주차장의 차 안에서 한동안 어색했던 분위기가 약간은 편하게 풀렸다. “하아~” 가까스로 웃음이 멎은 문정혁이 간혹 큭… 큭… 하고 웃음 잔여를 흘린다. 몇 개월간의 공백… 이번 공백 만큼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다. 정확한 이유를 누가 캐묻는다면 글쎄… 딱히 해 줄 대답이 없다. 만약 한쪽만 슬픔이 있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둘에게 적당한 슬픔만 있었다면 차라리 함께 있는게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지독하게 앓아야 했다. 피를 토하듯 괴로워했고, 서로를 못 보는게 나을 만치 아팠다. 사실 지금도 아프지만, 처음의 지옥보다는 나아졌다. “마실 것 좀 가져왔어. 과일 종류별로 다 갈아왔는데… 뭐 마실래?” “음… 딸기.” “알았어.” “…….” 한강둔치 매점을 코앞에 두고, 그는 역시 성격대로 행동했다. 휴게소 우동이니 길거리 음식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문정혁 다운 짓. 나랑 먹을거 집에서 싸오기. 순간 찌릿하고 심장이 찔렸다. 작년 11월에 재회했던 전진이, 내가 도망갈까봐 신발 들고 매점에 다녀왔던게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눈가가 흐릿해졌나보다. 문정혁이 딸기주스를 지 혼자서 홀딱홀딱 마신다. 냉큼 뺏어왔다. 하여간 문정혁은 이런식으로 나를 정신차리게 한다. 딸기 주스가 반쯤 사라졌을 무렵, 문정혁이 천천히 그간의 이야기를 꺼냈다. 진지하게 듣고 나중에 내 얘기 꺼내야지 했지만… “나 작가 됐잖아.” “뭔 소리야?!!” 꽥. 워낙 놀라운 얘기라서 초반부터 끼어들고야 말았다. 문정혁은 자기가 더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뭔 소리냐니. 그동안 신문 안 봤어?” “어. 안 봤는데? 왜? 뭐? 왜?” “씨팔… 그럼 나만 맨날 니 소식 스크랩 하고 캡쳐하고, 기사마다 댓글로 열폭한거야? 졸라 짜증나.” “어? 열폭? 열폭?” 문정혁이 툴툴대며 내 딸기주스를 빼앗는다. 이자식이…!! 딸기 내놔 임마. 확 째려봤다. 문정혁은 내 행동에 도리어 울컥한 낯으로 반만 남은 딸기주스를 원샷해버렸다. 둘 다 유치해서 봐 줄 수 없는 행동이지만… 생각해보면 문정혁과 나는 늘 그랬다. 결국 문정혁은 딸기의 친척이라고 지 혼자 우기면서 키위주스를 내 앞에 대령했다. 스트로우로 쪽쪽 빨아들이면서 아까 하던 열폭 얘기나 해 달라고 졸랐다. 문정혁이 죽어도 얘기 안 할 거라고 툴툴대다가, 던지듯이 내뱉는다. “아니 뭐… 신고양이 기사에, 가끔 미친 새끼들이 이상한 댓글 달아놓으면….” “놓으면?” 문정혁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완전 딸긴데…? 빨대 꽂으면 딱이겠어. 그리고 딸기 속에 박힌 씨가 터져 나올때쯤, 문정혁은 괜히 음료수병을 정리하며 말했다. “…싸웠다고….” “어?” 키위주스를 쭈욱 빨아들이며 크게 말하라고 재촉했다. 미니 냉장고에 음료수병을 구겨넣던 문정혁이 마지막까지 안 들어가는 작은 플라스틱 병을 괜히 창문 열고 세게 던지며 소리친다. “아!!! 싸웠다고!!! 신고양이보고 400억 빚이 있어서 몸을 판다느니 헛소문 있는 거 보구, 지랄하지 마라 씹쌔야- 댓글 달면서 살았다고!!!! 아!!!” “풉-” 문정혁은 도저히 못참겠다며 차를 박차고 나가버렸고, 나는 입가에 튀어나온 키위 잔해를 닦을 생각도 못 한 채 배를 잡고 미친듯이 웃었다. “하하하하하!!! 씹, 씹새!! 크크크크크!! 졸라!!! 아!! 씹쌔래!! 크하하하하하!!” 천하의 문정혁이, 우리나라를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한명그룹 우두머리 문정혁이, 기업 총수가, 연예인 기사 댓글에 씹새야- 하면서 댓글을 달았었다니!! 기절하시겠다. “꼴 좀 봐라… 으이구 드러워.” “씹쌔!!! 푸하하하하!!!” “가, 가만히 좀 있어봐. 씹쌔야. 번지잖아.” “하하하하하하!!!” 문정혁이 나를 웃길 줄도 알다니… 지구가 헤라클라스 빔에 맞아서 반쪽 됐다고 하는 걸 믿겠다. 물티슈로 내 입가에 묻은 키위들을 닦아내던 중, 문정혁이 아차 하며 눈을 빛낸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와서 턱에 묻은 키위 잔해를 살포시 입술로 누른다. 하지만, 스킨쉽과 동시에 우리둘은 동시에 번쩍 놀라서 허둥대며 떨어졌다. “…미안.” “아, 아냐.” 급격하게 자연스러워진 분위기에 휩쓸려서……. 지나치게 어색한 공기가 또다시 침묵이란 풍선을 옹기종기 띠운다. 문정혁이 헛기침을 하며 하던 말을 마저 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왜 작가가 됐냐면….” “응….” “그룹 경영권을 정식 절차를 거쳐서, 조재현 이사에게 넘겼어.” “…….” 함부로 끼어들 수 없는, 문정혁 특유의 진지한 분위기 앞에서 나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나는 그냥 명예 회장직으로, 이름만 있는 거야. 회사에.” “…….” “만약에, 내가 기업 총수를 역임하게 되면… 지금껏 해 온 모든 일이 무용지물이 되는 거거든.” “…….” “아버지와 너를 위해 잠깐이지만 내 삶 전부를, 나는 오직 야망밖에 없는 놈이다-라는 공식에 끼워 맞췄어.” “!!!” 내 눈빛이 흔들리는 걸 확인한 그가, 잠깐 텀을 둔 뒤 훨씬 다부진 투로 말을 잇는다. “몇 년이나 긴 싸움이었지… 정말 힘들더라. 사랑이고 뭐고… 복수고 자시고 간에 다 때려치우고 캐나다에 있는 형처럼 도망가고 싶을 만큼….” “…….” “그러다 이철호가 거짓 가면을 쓰고 뉴스와 신문에서 활개치는 거 보면서 정신차리고, 이 악 물었어.” “…….” “지금 이철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몰라? 하며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 “징역 35년에 집행유예 7년. 벌금 1조 9000억원인데… 이철호 인생은 끝난 거라고 볼 수 있어.” “…….” 침통한 숨이 우리 둘의 입 밖으로 동시에 빠져나갔다. 그는 계속 말했다. “사람들은 전부 내가 아버지 뒤를 이어서 그룹 총수가 될 줄 알았지만… …그러기엔 나는 너무 젊었고, 아니, 어렸고, 적이 많았어.” “…….” “혜성이 너는 알지 모르겠지만, 나와 전진…은, 깨끗한 방법으로 이철호를 쓰러뜨린게 아니야. 이철호가 했던 짓과 똑같은 수법으로 몇년간 행동했던거지.” “…….” “내가 복수와 명예를 위해 다년간 벌인 짓들이, 언젠가는 내게 되돌아 올 거라는거, 나는 알아. 형제를 누르고 회장직에 올랐던 문도천 회장… 우리 아버지가 이철호에게 밀려났던 것처럼. 또, 이철호가 나랑 전진에게 밀려났듯이. 세월이 지나면 그 화살은 비슷하게라도 내게 업보가 되어 돌아올거야.” “…….” “지겨운 반복을 되풀이하는 맹수들의 세계에서 과감하게 사표 썼다.” “…….” “또… 전진의 뜻대로… 혈랑단과 청랑단이 없어져야, 제대로 된 세상이 펼쳐지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지…….” 문정혁은 거기서부터 담배를 피웠다. 나도 담배를 조용히 입에 물었다. 희뿌연 먼지같은 담배연기 사이로, 우리의 고통이 함께 섞여서 날아갔으면… “어쨌든, 그래서 물러난 거야. 지금은 조재현 이사, 아니, 조재현 회장이 청렴결백해 보이지만… 혹시라도 언젠가 조재현도 변할 수 있는거고, 굳이 조재현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비리는 저지를 테니까. 온갖 악행이란게 또다시 되풀이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숱한 악연을 만들겠지…….” “후회… 하지 않아?” 그는 내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당당한 신념을 반짝이며 말했다. “절대 안 해. 이게 인생이구나-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난 충분해. 손 뗐어.” “그래…….”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나만이 빚을 수 있는 결론을 조용히 매듭지었다. 여러 이야기가 들려왔지만, 참 이상하지. 결과적으로 봤을 때,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야망과 명예를 위해, 사랑을 포기한 건 전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한때는 나를 버린 문정혁이야말로, 사랑을 위해서 야망과 명예를 자기 인생에서 완전히 내려놨다는 것. 지금껏 둘을 반대로 봤었는데, 전진은 마지막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희생을 자처해서 끝까지 갔고, 문정혁은 손을 놔버렸으니까. “듣기 힘들지?” “아냐. 괜찮아.” “눈… 이제 괜찮네? 그땐 아주 눈탱이가 밤탱이 되더니.” “야. 문정혁. 니 눈깔은 울프였어.” “어디 가까이 좀 봐바. 진짜 괜찮은 지 좀 보게.” “…….” 그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싶었는지, 대뜸 상체를 바짝 가져온다. 스무스한 담배연기 냄새… 그리고, 조각같이 섬세한 안면… 뺨이 뜨겁다. 사람의 심장이란 어쩌면 이리도 야속하고, 이기적이란 말인가. 전진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픈 통증을 자아내는 내 못난 심장이, 문정혁의 눈빛에, 문정혁의 존재에 화려하게 뜀박질을 시작한다. 분위기 이상해지기 전에 말을 돌려야겠다. “나도… 은퇴했어.” “알어.” 맞다. 안댔지… 할 말을 찾지 못해서 괜히 딴 곳을 쳐다보는데, 문정혁이 내 턱을 세게 쥐고 자기와 마주보게 한다. 한없이 일렁이는 문정혁의 눈동자가 나 하나만 진득하게 쳐다보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따져야 할 부분을 상실했다. 지난 세월 나를 왜 버렸느냐- 따지려던 생각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사실, 그가 조목조목 최근 근황과 담담한 심정을 야기할 때 다 사라져 버렸다. 그에겐, 나와 떨어져서 지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이러면… 나도 성장한걸까. 예전의 나였으면, 아무리 그래도 내게 헤어지자고 선언한 건 상처였다고 따졌을텐데… “왜 은퇴했어? 기사를 암만 뒤져봐도, 확실한 이유가 안 나와 있어서.” “응?” “신고양이. 니가 자유롭고 싶어서 은퇴한다는 말- 사람들이 억측하기 쉬운 부분이거든?” “아…….” 맞다. 나는 연예계 은퇴의 이유를 꼬집어 말 할 '공식적인' 이유를 찾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 문정혁 앞에서는 말 할 수 있다. “별 거 아니야. 우리 순돌이 잘 키울려구.” “…뭐?” “왜. 너는 작가 한답시고 그 대단한 회사 때려 치웠잖아. 나랑 비교가 되냐?” “뉴스 좀 보세요, 아가씨. 신문이고 연예 프로그램이고 간에 다 신혜성 신혜성 거리거든?” “아!! 턱 아퍼!!!” 내 턱을 쥐고 도리도리 흔들던 문정혁이 자기 혼자 킥- 허공에 대고 웃는다. 재수없다고 욕할려다가 관뒀다. 순간 내 몸을 뜨거운 열기로 활활 태우는, 문정혁의 입술 때문에… 조용히 눈을 감고 그가 몇 년 만에 부딪히는 입맞춤에 영혼을 맡겼다. 이러면 안 된다는 죄의식이 밀려와서 입맞춤은 싱겁게 짧게 부딪히고 끝났지만…. 연예계 은퇴… 누군가는 이런 나를 바보같다고 손가락질 할지도 모른다. 부와 명예를 제 손으로 버린, 쓸모없는 놈이라고 혀를 찰 것이다. 그래도… 내가 문정혁을 이해하듯, 문정혁도 나를 이해해주는 눈빛을 짓고 있으니까… 나… 참 잘 선택한 것 같다. 나… 잘 선택한 거 아닌가봐. “잠깐 시간내서 온 건데, 괜찮나요?” “네? 네… 안녕하세요, 선배님.” 머릿속에 운명 교향곡이 울렸다. 빠바바밤- 빠바바밤. “이제 선배가 아니지 않나요? 남들은 올라가기 힘든 자리를 지 발로 걷어 찬 사람 따위, 나는 후배로 둔 적 없는데.” “…….” 8월 초에 오픈한 청담동 카페. 인적드문 곳에 일부러 도서관식 카페 건물을 세웠는데, 전서희가 어떻게 알고 찾아왔다. 하긴. 모르는게 이상했다. 웬만한 연예인들이나 기자들과 부유층은 이곳을 꿰뚫고 있으니까. “카페 명이 특이하네? they?” “…….” “이제 후배도 아닌 사람한테, 굳이 말 높일 이유를 못 찾겠는데, 실례되는 건 아니겠지.” “앉으세요.” 역시 전서희 다웠다. 카페 문 닫을 시간에도 사람이 많은 건 어떻게 알고, 사람 없을 오픈 시간에 딱 맞춰서, 그것도 오전 9시에 찾아온 것이다. 아니면 내가 오전 9시에 와서 알바생들 도착하는 11시까지 혼자 죽치고 앉아있는거 알고 온 건가. 폭염에 혹사당하는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전서희는 말끔한 블랙 정장에, 까만색 벙거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모자의 동그란 가장자리가 만든 그늘 덕분인지 그녀의 눈빛이 가려져서 표정을 자세히 관찰하기 힘들다. 어쨌든 찜통같은 열기에 찜통스런 옷을 입은 그녀이지만, 신기할 만큼 땀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목덜미에 닿은 머리카락도 뽀송뽀송 윤기있어서, 단 한 올도 땀에 젖지 않았다. 가볍게 아메리카노 한 잔 달라고 하는 그녀에게 뜨거운거요? 차가운거요? 라고 괜히 물어봤다가, 레몬 띠운 얼음 생수. 라는 얼음스런 대답만 들었다. 지시한대로 한 번에 행동하지 않으면 용납하지 않는 유형인가보다. 한 쪽 벽면 전체가 유리로 된 자리에 앉은 그녀의 맞은편에 조심스레 앉았다. 레몬 띠운 얼음 생수를 예의상 한 모금 마신 전서희는 약간의 숨을 내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많이 밝아졌네.” “예… 덕분에요.” “나는 니가 처음부터 싫었어.” “…….” 역시 전서희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려다가 관뒀다. 그녀 특유의 억양일 뿐, 이렇다 할 공격이나 분노는 담겨 있지 않다. 이건… 전서희를 알아온 시간만큼,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제스쳐였다. “그런데, 우리 아들은 신혜성이가 좋았다지.” “…….” “문도천 그 양반이 죽기 전까지는 그래도 내심 안심하면서 살았었지. 문정혁 때문에라도, 문도천이 너를 가만 놔두지 않을거라 여겼으니까. 하지만 인생이란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예상을 비껴가며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잖니.” “…….” 하아- 길게 숨을 내쉰 그녀가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며 약간 고개를 올린다. 모자의 그늘에 가려졌던 그녀의 표정이 한결 가깝게 포착된다. “너는 지금 살아있지만.” “…….” “문도천은 죽었고, 우리 아들도 죽었어. 모르지. 어디서 살아서 돌아다닐지도. 지 애비 쏙 빼닮은 문정혁이 황소 고집 부리는 바람에 버젓한 장례식도 못 치렀으니까.” “…….” 전서희의 안면에 잠깐이지만 슬픈 노을이 잠식했다. “젊은 시절 문도천네 댁 어른들이 나만 보면 죽었으면 싶었을텐데… 나는 살았고, 나는 너만 보면 신혜성이라는 존재가 사라졌으면 싶었었는데… 너도 살았어.” “그러…네요.” 그렇지? 하고 허탈하게 웃은 그녀가 침착한 투로 말을 잇는다. “세상은 참 나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지 않니.” “잘… 모르겠어요. 아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너를 마지막까지 좋아할 수는 없을 거야.” “…….” “나는… 다른 어머니들과 방식만 달랐을 뿐, 삶의 모양이 달랐을 뿐, 우리 아들을 사랑했었으니까.” “!!” 철렁- 심장이 떨어졌다. 당장 그녀를 쳐다봤다. 아주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전서희는 모자 그늘에 표정을 감췄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른다. 그녀는 이런 나를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훨씬 부드러워진 투로 말했다. “새삼스럽게 너에게 뭘 어쩌라고 찾아온 건 아니야.” “…….” “…살다보면 누구나 다 그렇듯, 몇 번의 굴곡을 경험하지. 나는 굳이 너의 굴곡을 바라거나 빌진 않겠지만, 어쩌다 네가 힘들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그것 참 잘됐다- 생각할거야.” “…….”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는 내 자신을 또 씁쓸하게 돌아보겠지.” 그녀는 자기의 속마음을 꺼낼 상대가 없었던 거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짜 자기 속'을 그나마 꺼낸 상대는 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전서희는 내게 심한말을 할때도 이상하게 동정어린 말을 함께 꺼냈으니까. 그녀는… 차분하고 나긋나긋한 말투를 지녔지만, 자신의 억양 속에 숨어있는 독기를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남들 앞에서는 말을 아낀다. 그런 그녀이기에, 갑갑하고 외로운 통증을, 나 같은 새끼한테라도 푸는 것이다. 전서희… 그녀는 세상 누구보다 처절하게 외로웠던 것이다…!! 울컥- 뜨거운 것이 목울대에 솟았다. 콧잔등이 짠하다. 전서희가 핸드백을 챙기며 일어섰다. 나도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전서희는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 잠자코 제자리에 서있기만 했다. 나는 떠듬떠듬 입술을 움직였다. “용서를… 따로 빌지는 않을게요. 저… 정말 힘들었거든요.” “그러니.” “네.” 후- 그녀의 낮은 웃음소리가, 아니면 한숨소리 같은게 매끄럽게 들려온다. 적의는… 없다. “네 맘대로 해. 어차피 니 감정에는 관심 없단다. 너도 내 감정에 관심 없잖아. 사람은 어차피 다 제각각이야.” “…관심 없지 않아요.” “아니야. 관심 없어. 왜냐면, 지금 잠깐만 신경쓰이고 돌아서서 네 생활에 돌아가면 차츰 잊어버릴테니까. 내가 한 말들을.” “…….” 이제는 그녀의 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렇게 사방에 벽을 치면서 살아왔어. 내 인생은 스스로 설계하기도 전에 차단하는 법부터 배웠어… “그래도… 마지막까지 너와 이렇게 이야기라도 나눠주는 이유는, 열정적인… 아니, 미친 사랑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구경하고 싶어서야.” “?” “당사자들은 모르겠지.” “무엇을요?” “너희들의 사랑은, 개인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사랑에 미친 사랑이었다고.” “!!!” 그녀의 영혼이 약하게 떨리는게 보인다. 사랑하고 싶다고. 한번쯤 다시, 꼭, 사랑하며 살고 싶다고. “남자와 남자의 사랑이라서 그럴까. 처음에는 그렇게 고민했지만, 지켜볼수록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네가 밉지만, 너를 내버려뒀던 이유는 그거 하나였어.” “…….” “나도 한때 짜릿하게 사랑에 미쳤던 소녀였음을, 너와 우리 아들, 문정혁, 이선호를 보며 새록새록 깨달았으니까.” “!!!” 정말이지 사랑하고 싶어서 심장이 터져버릴 지경이라고… “너를 볼때마다, 네가 겪는 사랑의 고통과 어쩔줄 모르는 미성숙함과 기쁨의 감정이 내게도 전이되는게 좋았어. 당사자들은 그게 뭔 줄 모르겠지만.” “…….” 그녀가 사뿐한 걸음걸이로 나를 스쳐 지난다. 순간, 무슨 용기가 난 건지, 내 입에서 가슴 깊숙한 곳의 이야기가 솔직하게 터져나왔다. “아줌마.” “…….” “저도 이제 아줌마라고 불러도 되는거죠.” “편할대로 하렴.” “…종종… 놀러오세요. 차 마시러… 여기… 책도 많아요….” 또각 또각 걷던 소리가 멈췄다. 그녀가 숨을 크게 내쉬며 말한다. “너… 이상한 소릴 하는구나.” 전서희의 음성 끝이 약간 떨리는 걸, 나는 분명히 느꼈다. 그녀는 끝까지 오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허공에 대고 하하 웃으며 붉은 동공 밖으로 흘러나오는 굵은 줄기를 슥- 닦았다. 인천 공항으로 오라는 이민우의 연락을 받은 직후, 정신없이 차에 키를 꼽고 악셀을 미친듯이 밟았다. 휴대폰을 꾹꾹 눌러서 양종호에게 순돌이가 집에 혼자 있으니까 잠깐만 와서 봐 달라고 부탁했다. 목동에서 청담동까지 언제 가냐고 꽥꽥대면서도 양종호는 벌써 차키를 찾느라 핸드폰 저편에서 바쁜 소리를 냈다. 끊자마자 곧장 고모에게 전화했고, 고모가 통화중인 관계로 고모부 회사에 전화했다. “고모부. 예. 저 혜성인데요… 아뇨. 순돌이 괜찮아요. 그게 아니라… 이민우가 어딜 간다구요?” 그저께만 해도, 압구정에 있는 고모부 집에 민경이 누나네 식구만 빼고 온 가족이 모여서 즐겁게 식사했는데…!! 말도 안돼… 말도 안돼… 심장이 철퍽거린다. 고모부가 미안해 하며 어렵게 말을 잇는다. [민우가 혜성이 너한테 마지막까지 얘기 하지 말라고, 자기가 말 할 거라고 하는 바람에 여직 얘기를 못 했지 뭐냐. 아니, 넌 지금 안 거야?] “고모부… 저 지금 공항 가구 있어요. 그럼 민형이 형이랑 고모랑은 다 알고 계셨던 거예요?” [아니 민우 그놈이 왜 너만 쏙 빼놓고 말을 안 했대냐. 우린 알고 있었지. 그놈이 뭔 생각인지 평화 봉사단? 세계 무슨 봉사단? 거기 참여한다고 아프리카엘 간댄다. 나 참….] “예. 고모부. 저 나중에 다시 전화드릴게요.” [오냐. 운전 중인가본데, 조심하고.] 이민우… 이민우… 이민우…!! 대체 무슨 소리야…!!! 갑갑한 마음에 때마침 끼어들기 한 카니발에 대고 클락션을 빵빵 울렸다. 동시에 휴대폰이 울린다. 이민우인가? 하고 급하게 받자마자, 문정혁의 헛소리가 들린다. [오늘 저녁은 클레식 틀어놓고… 졸면서 스파게티 한 입 씹어볼까?] “아 씨발!!!” [그런 종류의 파스타는 없거든.] 카페 they를 오픈한 뒤, 은근히 자주 만나게 되는 문정혁이, 최근에는 우리집에 거의 저녁마다 요리한답시고 쳐들어온다. 오늘 메뉴는 파스타인가? 아, 모르겠다. 지금 내 심정은 공항으로 공간이동 해도 속이 안 풀릴 지경인데…!! “라, 라자냐!! 라자냐!! 그거 먹을게!!” [너 그거 싫어하잖아.] “정혁아!! 나 어떡해!!!” […라자냐 하면 될 거 아냐!!!] “아니 그게 아니라, 이민우가… 이민우가….” [이민우? 왜. 이민우는 오늘 데려오지 마.] “그게 아니라… 이민우가… 아프리카에 간대. 하… 미치겠어!!!” […….] “여보세요? 야!! 문정혁!! 하아… 너도 쇼크받았지. 나 진짜 지금 심장이 눈깔 밖으로 튀어나오겠어!!” […….] “여보세요? 끊어졌나? 정혁아!!” [운전 조심해서 갔다 와.] “어휴… 알았어. 끊어.” 문정혁의 심각해진 목소리가 수상했지만, 현재 급한 건 이민우였다. 이민우… 대체 어떻게 된거야…!!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주차를 하는 둥 마는 둥, 미친듯이 달려갔다. 공항 내 여기저기를 둘러봐도 이민우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줘야지 무턱대고 인천 공항에 오라고 하면 어딘 줄 알고 찾아?? 한참을 인파속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돌아다니는데 마침 이민우에게 문자가 왔다. -스카이호텔. 샤인. 창가 제일 끝 자리- 샤인? 스카이호텔? 잠깐. 그럼 공항이 아니잖아? 아아… 미치겠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워낙 정신 없다보니 아는 길도 헤맬 판이다. 공항 고속도로에서 지하차로로 빠져서 길을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스카이빌을 호텔로 착각해서 들어갔을 정도니까. 가까스로 이민우가 문자로 알려준 창가 제일 끝자리에 도착했을땐, 티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한적한 주변을 눈으로 훑은 뒤, 이민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구석 자리라서 공항보다는 확실히 마주보기가 괜찮았다. “너…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이민우 옆에 함께 앉아있는 여행 가방을 보고 나는 굳은 낯으로 물었다. 자연스럽게 기른 턱수염이 이민우의 풀어헤친 베니지색 남방과 유난히 잘 어울린다. 햇살이 강해서 그런걸까. “야. 무슨 아프리카야? 어?” “물 좀 마셔. 시원한 거 시킬까?” “아 됐어!! 내가 물 마시자고 온 줄 알어? 야!! 갑자기 어딜 간다고? 아니, 너 지금 떠나기 직전에 나한테 말 한 거야?” “시간 아직 널널해. 세시간 남았어.” “야!!!!” “소리 지르면 사람들 쳐다본대요.” “으이씨….” “하하하하.” 하얗게 사라질 것처럼 지나치게 여유롭고 즐거워 보이는 이민우… 한치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닿는 즉시 뿌연 기체로 승화될 것처럼 멀게 느껴진다. 나는 그가 내미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빨리 말하라고 재촉했다. 그는 내 얼굴을 오목조목 살피며, 마치 내 전부를 담아가고 싶다는 듯 한동안 입을 열지 않고 시선만 부딪혔다. “혜성아.” “왜… 왜. 어?” “나 진짜 아프리카 가.” “그러니까 왜… 어? 왜….” “너 부장님한테 예전에 그랬다며? 부장님 살아계실때 나한테 그런 말 했었거든. 우리 공주가 아프리카 가자고 한다고. 일심동체래나 뭐래나.” “!!!” 그가 차분하게 굴수록 내 동공은 격렬하게 흔들렸다. “나. 그동안 사람 많이 죽였어… 혜성아.” “모, 몰라. 그런 말 하지 마. 민우야. 너… 지금 가면 언제 와? 어?” “혜성아. 나는 비록 예전에 콩밥 먹긴 했지만… 내가 저지른 죄값 치룰려면… 아직 멀었어. 나… 알잖아. 사람 대가리 총으로 쏴 죽이던 놈이었어.” “그런 말 하지 마… 어? 민우야. 집에 가자.” 그가 내 손을 꼭 잡고 절레절레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 동작이 너무 느리고 애틋해서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울지 마. 혜성아. 평생 봉사하면서 살겠다고 결심했을 뿐이야. 시작은 아프리카지만… 아마 세계 여러 곳을 살면서 두루두루 다니겠지. 바람처럼… 물결처럼….” “왜… 왜 갑자기 그런 결심 했는데? 왜?” “갑자기가 아니야. 몇 달은 고민했어.” “흐으윽… 민우야….” “아마… 부장님도 옛날에 아프리카행을 결심했을때, 나와 비슷한 맘이었지 않나 싶다.” “으흐…흡… 민우야… 민우야….” 그가 묻는다. 내가 사랑해서 많이 힘들었지? 나는 고개를 세게 저으며 부정했다. 그는 내 맘을 다 안다고 부드럽게 말하며, 그래도 내 속에 자기의 존재가 약하게나마 남아 있기를 바란다고, 작은 고백을 던졌다. 그래서 절감했다. 이민우는 기필코 먼 곳으로 떠날 것임을. “아프리카 가면… 나한테 편지 쓰고, 메일도 보내고, 주소, 주소 제일 먼저 알려주고, 연락처….” “알았어. 알았어. 자리 잡는대로 바로 알려줄게.” 믿기지 않아서 멍하니 이민우를 쳐다봤다. 그가 볼을 살짝 꼬집고 잡아당겨도 내버려둔채, 멍하니… 나를 사랑하는 죄값을 혹독하게 받은 외로운 남자의 안면이 저토록 화사할수가… 나는 민우가 요구한 대로, 잔잔한 발라드가 흐르는 카페 구석에서 허무한 이별을 맞이했다. 그러나 언제고 만날 수 있는 이별이라서, 그나마 침착 할 수 있었다. “아, 참. 이거.” “?” 그는 떠나기 직전, 내게 두 번 세 번 접힌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뭐냐고 묻자 민우는 희미하게 웃으며 내 자리로 건너오더니 마지막으로 세게 포옹했다. 얼마나 세게 껴안는지 아픔마저 부서질만큼… “민우야… 민우야… 너… 괜찮은거지? 응?” “하하하… 당연하지. 니가 행복하면, 나는 행복해.” “그, 그런 말 말구… 너… 진짜….” “그럼. 그럼.” 내 등을 부드럽게 매만져 준 이민우가 천천히 상체를 떼어낸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틈에 살짝 내 입술에 자기 입술을 누른다. 그의 턱에 자란 까실한 턱수염이 느껴짐과 동시에 떨어졌다. “여기… 한 번은 가 봐.” “?” 그의 젖은 눈빛을 열심히 올려봤다. 하지만 이민우는 내 이마에 길게 입맞춤을 하더니, 딱 그 말만 남기고 뒤돌아섰다. 황야 가득한 땡볓의 세상으로…. 누군가에게 망치로 세게 얻어 맞은 것 마냥 멍한 낯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이민우가 떠난다고…? 이렇게 갑자기…? 고모부 밑에서 일 배우는거 아니었어…? 두근, 두근, 두근. 아프리카 라는 단어에서 까무라칠 뻔 했던 심장이 가까스로 진정되었다. 인천쪽에 왔을때와 달리, 서울로 돌아가는 고속도로에서는 뒷차가 빵빵거릴 만큼 시속을 느리게 유지했다. 모든 것이 멍했다. 아주 꼬마였던 시절부터 내 곁에 항상 있었던 이민우가 없다는 것. 든든한 안식처가 뿌리채 뽑히는 기분이었다. 황량한 대지 위에 맨 몸에 선 것 마냥 막연하고, 쓸쓸하고, 믿어지지 않았다. 이런 내 기분을 어찌 알았는지, 문정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힘없이 대꾸하는 나와 달리, 문정혁은 지나치게 씩씩했다. [빨리 와. 애기야. 파스타가 맛있게 됐어.] “…라자냐 한댔잖아….” [주는대로 처먹어.] “하…하하….” 눈물을 글썽이며 허탈한 웃음소리를 냈다. 문정혁이 있구나… 문정혁이 있구나… 그 생각만이 간절했다. 작년 겨울, 전진과 재회해서 짧게 사귀는 와중에도 내 가슴을 절대 떠나지 않던 문정혁… 국화꽃으로 이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영혼에 이름을 새겼던 문정혁… 문정혁이 있는 거구나… 고삐리 시절, 문정혁에게 수능 응원 초콜렛 사주겠노라며 청담동을 돌아다녔던게 새삼 떠올랐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을 문정혁이 고스란히 따라한다. 주는대로 처먹으라니… 은근히 기분 상하는데 이거. “지금 열심히 가고 있어.” 천하의 문정혁이 요리하며 내게 조심스레 접근하듯, 나도 그에게 대하는 태도를 하나씩 바꾸고 있다. 아니, 나도 모르게 변화되는 기분이다. 사소한 일에도 떽떽거렸던 내모습이, 조금씩 참고, 그를 이해하는 쪽으로… 그가 나를 이해하려고 애쓰듯이… [그래도 운전 조심해.] “응… 라자냐도 하면 빨리 갈게.” 문정혁이 지랄 지랄 하는 소릴 들으며 유유히 휴대폰 플립을 닫았다. 하긴. 신혜성 승질이 다 죽는다면 말이 안 되지… 라자냐 안 해 놓기만 해봐라. 휴대폰을 조수석에 댕강 던지다가, 무심코 손 안에 쥐고 있던 종이를 펼쳤다. 이민우가 마지막으로 준 메모… 설마 시 같은거라도 적어놨나? 다 펼친 종이를 졸린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내 동공에 격랑이 일었다. 아프리카로 떠나는 이민우가 내게 던진 최후의 메모는, 이선호가 있는 요양소 주소였다. 강원도 삼척. 매미 소리가 구색에 맞게 울리는 푸른 초원. 산들거리는 바람 한 점 없는 8월의 끝자락에서, 나는 끊임없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간호사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갔다. 문정혁에게 집에 가겠다고 약속한 것도 까맣게 잊은 상태였다. 어쩌면 일부러 잊었던 이름을 찾아서, 나는 인천 공항에 갔을 때보다 몇 배는 내 자신에게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악셀을 밟았다. 네 시간만에 도착했지만, 언제 여기까지 왔나 싶을 정도로 정신이 흐릿한 상태였다. 요양원의 담은 의외로 낮았다. 정신질환자 쪽 환자들이 주로 오는 곳이라는데, 상상과 달리 주변이 굉장히 예뻤다. 언뜻 지나치면 동화책 그림속에 있는 커다란 집이 한 채 지어져 있는 듯, 초록 경관과 잘 어울렸다. “이제 나오실 거예요.” “예? 예….” 환자용 면회실 중에서도 탁 트인 공간으로 나를 안내해 준 간호사가 생긋 웃는다. 신혜성씨 맞죠? 하며 반가워하길래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흰 테이블이 놓인 테라스. 수평선 끝이 한 눈에 닿았다. 비록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초록 들판 끝, 햇살에 투명하게 반짝이는 푸른 바닷물과, 시원한 하늘, 맑은 공기… 이제 여기가 어딘지 약간씩 인식이 된다. “되도록 질문은 하지 않으시는게 좋아요.” “예….” “처음 오신거니까, 이선호씨가 무슨 말을 하면 그냥 들어주세요. 안 그러면….” “예?” 간호사가 곤란한 낯으로 헛기침을 하며 부드럽게 설명을 잇는다. “발작이 좀 심해서요… 절대로 추궁하듯 따지지도 마시구요.” “네… 알겠습니다.” 이선호가 이런곳에 있다니… '그날'의 이선호가 제정신인것 같진 않았지만, 내 주변인과, 내 사람들과, 내 생활에 치여서, 또, 이선호란 존재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은 욕망에 밀려서, 나는 과감하게 그를 삭제했었다. 이민우는 내 발로 직접 여기에 찾아 올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을 지긋지긋하게 엮은 장본인을 만나러 왔다. 이것은 자의일까, 타의일까. 휴대폰은 진즉에 꺼 놓은 상태지만, 나는 손바닥에 고인 땀을 털어내며 무의식중에도 휴대폰을 꼭 쥐고 앉아있었다. 멀리서 이선호가 느릿느릿 걸어온다. “이선호….” “…….” 꿀꺽. 침을 삼켰다. 긴장되서 터질 것 같은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선호의 얼굴을 마주봤다. 하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선하고 고운 얼굴, 고등학교 중학교때 봤던 이선호 특유의 명랑한 표정만 내게 비칠 뿐이다. 가슴에 움켜쥔 바람 하나가 거센 풍랑을 뚫고 힘없이 빠져나간다. 이선호는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내 앞자리에 앉아서 히죽히죽 웃었다. 그의 표정은 화사했지만, 그의 손목은 표정과 반대로 상처 투성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목이 왜 그러냐고 물을 뻔 했지만, 간호사가 눈치껏 제지해준 덕분에 입을 다물었다. 선호의 얇은 손목에 쇠처럼 단단하고 넓은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팔찌 사이로 선명하게 보이는 흰 붕대… 저 붕대는 뭐지…? 한동안 말없이 어린 아이처럼 의자 난간에 팔을 붙이고, 양 다리를 모아서 위 아래로 팔랑거리던 이선호가 나를 위 아래로 천천히 응시한다. 알아본걸까. 나를. 선호야… 나… 아직 너를 용서할 수 없는데… 이 기분은 뭔지… 설명하기 힘들다… 선호가 만난지 삼십분만에 드디어 입을 연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길 원했어.” “어… 어…?” “사랑받는 사람들은 언제나 빛나 보였으니까. 나도… 빛나고 싶었어.” “…….” 그가 나를 알아본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더 먼 것을,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허무맹랑한 것을 쫓고 있었다. “그래서 몰랐어. 나는 항상 몰랐어.” “…….”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고 싫어하더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주고 아껴주고 사랑해주는거… 그것이 진짜 성공이라는 것을.” “…….” “한번쯤 뒤돌아보면, 나는 깨달았을텐데… 조금은… 일찍 깨달았을텐데….” “…….” “김동완을 생명처럼 사랑했다는걸….” “!!!” 철렁- 떨어지는 심장의 반응 만큼 전신이 떨렸다. 양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덜덜 떨면서 선호를 시선으로 쫓았다. 하지만 선호는 불투명한 시선으로 내가 아닌 빈 허공을 세게 노려보다가 느닷없이 괴성을 지르며 자기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하아아아악!!!!! 꺄아아아악!!!!” “!!!!” “이선호씨!! 안되요!!!” 선호의 잇몸이 찢어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선호는, 자기 손목을 물어 뜯으려고 했다. 몇 번 이런 일이 있었는지 간호사는 익숙하게 선호를 제지하며 벽에 걸린 줄을 잡아당겼다. 나는 그제서야 선호의 손목에 묶인 붕대의 연유를 알았다. 선호는 때때로 심하게 발작하며 자기 손목을 물어 뜯으려 했던 것이다. 미치광이 상태에서… 단 몇 초 만에 흰 옷을 입은 덩치 좋은 남자 두 명이 달려와서 선호의 양 팔을 포박했다. “꺄아아아악!! 히이익! 히이이이익!!” 발광하며 몸부림치는 이선호가 흰자위를 드리우며 허공에 붕붕 떴다. 그리고, 남자들이 끌고 가는대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침통한 낯으로 요양원 복도 계단을 내려갔다. 이선호를 담당하는 간호사가 계단 끝까지 나를 안내해줬다. 그녀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위를 힐끗거리며 작게 말했다. “매일 저 얘기를 해요.” “…예?” “이선호씨가 방금 혜성씨한테 한 말이요.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해요. 일상적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자기가 깨달았다는 내용만 말해요.” “!!” 맙소사… 그녀의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나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한동안 입을 벌린채 선호가 있을 윗층 어딘가를 올려봤다. “배고프다는 말도, 누군가에게 잘 지냈냐는 인사도 안하고, 항상 김동완을 생명처럼 사랑했다는 걸 깨달았다고… 저 말 만 해요.” “…….” 그를 사랑했니… 바보야… 조금만… 조금만 일찍 깨닫지 그랬어… 머리도 좋은 녀석이, 왜 항상 전진을 차지하지 못 해 안달이었던 거야… 김동완을 그토록 사랑했다면… “혜성씨. 괜찮으세요?” “아… 예. 괜찮습니다.” 눈물이 흐르는줄도 몰랐다. 턱부터 천천히 위로 올리며 눈물을 눈 안에 삼키듯 닦아냈다. 이빨 사이로 쉰 신음소리가 빠져나갔다. 이선호를 증오한다. 아니, 원없이 증오했었다. 차라리 내 기억에서 삭제시키는게 사는데 편할 정도로…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결과는 이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철호가 무너지고, 김동완이 죽고, 이선호가 정신이 나간 상태이지만… 나는 자꾸 이게 아니라는 서러운 글자만 되뇌었다. 아주 오래 전, 이선호는 나와 둘 도 없는 친구였다. 그는 나를 좋아하다 못 해, 새학기마다 내 교복까지 마련했고,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셨을때는 자기 일처럼 슬퍼했던… 그런 친구였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서울로 향하는 걸음 걸음… 이선호의 처절한 비명이 떠올라서 귓가를 적신다. 문정혁은 물론이고, 순돌이까지 단단히 토라졌다.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라도 하던가!!” “전화기 꺼져 있으면 식겁하는거 잘 알면서!! 문자라도 보내던가!!” 양종호는 갔어? 라고 물었더니 시계를 봐!!! 라는 동시합창이 집안에 울려퍼졌다. 피곤해 죽겠다고 괜히 한 마디 더 했다가 두 인간으로부터 못 들을 소리 다 들었다. 이것들이 진짜…!! “잘못했어. 다신 안그럴게. 경황이 없었어. 엉?” 뭐… 이번 일은 내가 잘못한게 확실하니까… 다른 건 몰라도, 전화기를 꺼 논건 내 잘못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상황일지 몰라도, 우리는… 쉽게 넘어가자니 그럴 수 없는 과거가 묶여 있으니까. “파스타는? 응? 라자냐 했어?” “삼촌 진짜 바보 똥개야!!!” 순돌이가 쿵쿵거리며 지 방으로 들어간다. 돌겠네… 한 번 삐지면 풀릴때까지 밥 안 먹는데… “정혁아. 순돌이 어뜩해? 많이 삐졌을까?” “신고양이. 나 요리하는데 네시간 걸렸어.” “…….” 결국 순돌이와 문정혁, 두사람에게 동시에 각서 쓰고 지장까지 찍어줬다. 그걸로도 분이 안 풀리는지 앞으로는 위치 추적기를 달겠다고 협박한다. 어쭈. 순돌이 머리에서 위치 추적기가 나왔을리는 없고… 껀수 잡았다 이거지, 문정혁. “순돌아. 들어가서 잘 시간이다. 자자.” “아 또 애취급 해!!!” “삼촌이 아까 잘못했댔지. 일요일에 놀이동산 가기로 했잖아. 그거 취소한다.” 내 말에 순돌이의 표정이 급격히 창백해진다. 그리고 울먹거리며 문정혁 뒤에 쌱 숨어버린다. 문정혁이 분하다는 듯 나한테 따지기 시작한다. “야!! 신혜성!! 왜 괜히 애한테 화풀이야?!! 놀이동산을 왜 취소해!! 나 날짜 맞추려고 원고 마감 날짜도 조정했는데!!!” “문정혁. 너랑 같이 간다는 소린 안했거든?” 흠칫. 문정혁의 표정이 순간 복잡해진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자기 뒤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순돌이의 어깨를 토닥인다. “…순돌아. 정혁 삼촌이 재워줄게. 착한 어린이는 빨리 자야돼.” “뭐야!! 정혁 삼촌!! 삼촌이 혜성이 삼촌 좆밥이라며!!” 좆밥… 좆밥?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 문정혁!! 너 애한테 무슨 말을 가르친거야!! 좆밥!! 지금 좆밥이라고 했어!! 둘 다 이리와.” “정혁이 삼촌. 나 재워줘. 오늘까지는 애기 해야겠어.” “굿 아이디어. 안기셈.” “야!!! 둘 다 이리 안 와?!!! 죽었어!!!” “저것 봐라~ 저것 봐라~죽었어!! 막 이런다~ 자기는 더 심한 말 하면서~!” “문정혁!!!!” 한때 한명그룹 총수로서 위엄을 떨치던 문정혁은 온데간데 없이, 귀에 볼펜 꽂고 트레이닝 복 입은 맨발의 사나이가 순돌이를 번쩍 안고 후다닥 방에 뛰어가서 문을 잠궈버린다. 밤 열두시. 순돌이가 잠든 것을 다섯 번 넘게 확인한 다음에서야 문정혁과 나는 식탁에 마주앉았다. 다 식은 라자냐 안주에 참이슬. 내가 술 마시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문정혁이지만, 오늘 낮에 이민우와 헤어지고, 이선호까지 보고 왔다는 소리에, 자기도 한 잔 달란다. 우리는 오랫동안 침묵하며 술잔만 기울였다. 내 집에서 살다시피 하는 문정혁 덕분에 그의 살림이 부쩍 많아졌다. 가끔 자기 집에 와서 사는게 어떠냐고 찌르긴 하지만… …나중에 민형이 형이 장가갈 때나 생각해 볼 문제다. “내일이면… 9월이네….” “그러네….” 입을 열자마자 문정혁의 긴 팔이 쓱 넘어왔다. 탁!! 쳐냈다. 문정혁은 두고보자는 식으로 팔짱 끼며 의자를 뒤로 왔다갔다 흔들었다. 집안의 불을 다 끄고, 주방쪽 조명만 켜놔서 그런가… 살구빛 조명에 비친 문정혁이 굉장히 근사하다. 내 눈이 미친걸까. 새삼 눈물이 나올 만치 그가 잘생기고 늠름해 보여서, 짜릿한 감정 하나를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동을 비집고 흐르는 눈물을 그가 섬세한 손길로 닦아준다. 전진이 죽은 뒤, 몇 달 만에 재회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정혁과 나는 작은 스킨쉽에도 놀라서 금방 떨어졌다. 죄의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 심장은 예나 지금이나 문정혁을 담기 바쁘다. 내 인생에서 기사가 되기를 자처했던 유일한 왕자님… 이리저리 휩쓸리기 바쁜 내 심장이 선택한 최후는 너였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만약… 그날 네가 잘못 되었으면… 나는 살 수 없었을테니… 얼마나 마셨는지 모를 정도가 되어서야 술에 취한 기분이 들었다. 발음이 약간씩 꼬이더니, 일전에 카페에 들린 전서희가 했던 이야기가 새삼 머릿속을 휘젓는다. “정혁아….” “?” 왼 팔꿈치를 식탁에 찍고, 오른 손을 휘청휘청 흔들었다. 손에 잡혀있는 투명한 술잔의 수면이 아슬하게 출렁인다. “나는… 나쁜 사람이고, 너도 나쁜 사람이야.” “왜?” 나쁜 사람이란 소리에 문정혁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나는 킥킥 웃으며 술을 약간 마셨다. 문정혁은 나발 불기 직전이다. “왜냐면… 좋은 사람들은… 일찍 세상을 뜨니까.” “…….” 장난스레 나발 불려고 포즈를 취하던 문정혁의 동작이 멈췄다. “나쁜 사람들은 오랫동안 살면서 죄값을 치루는거야. 인생이란게 가만~히 살펴보면 기쁠때보다 지루할때가 더 많고, 지루할때보다 슬프고 잘 안 될 때가 더 많잖아. 역경을 견뎌야만 가끔 행복해서, 오죽하면 최후의 기쁨을 위해 열심히 길게 노력합시다- 이 생각이 사람들 뇌리에 틀어박혀 있겠어.” “그러냐.” “응. 그러니까 우리는 나쁜사람들이니까 오래오래 살면서 죄값을 치뤄야 돼. 착한 사람들하고 불쌍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오래 못살게 하잖아. 착한 사람들은… 지옥에서 살면 안되니까… 지옥은… 현실이니까.” 그가 피식 웃는다. 나도 웃었다. 하지만 눈물이 먼저 나왔다. 그래서 내 속의 아우성들이 마구잡이로 꺼내졌다. “나는 그래도 니가 있는게 좋다? 정혁아… 참 가슴아프고, 너랑 내가 나쁜 사람이라서 괴로울때가 많은데, 너와 있으니까… 내가 죽는 날까지 나쁜 사람이면 좋겠어….” “으이구. 울보. 눈물이나 닦고 말 해.” “그러니까 정혁아… 너는… 앞으로 더 예쁘게 동화를 써야 돼… 알았지?” “단단히 취하셨구만? 애기야. 너 완전 귀엽다. 하하하하.” 아 뭐야. 진지하게 말하는데…!! 발끈해서 술을 두 잔 연속 마셨다. 문정혁이 화들짝 놀라며 내 손에서 술잔을 빼았는다. 제법 취했는지 내 몸이 흔들린다. 아니, 세상이 흔들리고 있다. “인생의 주인공은 나잖아… 어? 나잖아!!” 어. 그래. 너야. 너야. 너야. 문정혁이 귀찮다는 듯 말하는 거 보고 열받아서 라자냐 덩어리를 꽉꽉 씹었다. 문정혁이 아까보다 더 놀라서 아예 내 옆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포크를 빼았는다. “애기야. 내가 너 애기라고 하지만 너는 진짜 애기가 아니거든? 오빠 미치겠다. 조금씩 먹으라고!!” “그러니까 내 말은!! 인생의 주인공은 난데….” “그래그래. 알았어.” 포근한 느낌이 내 몸을 덮는게 느껴진다. 굉장히 따뜻하고… 부드럽고… 단단하다. 그 품이 아늑하고 좋아서 한없이 파고들면서 나는 취한 입술을 아무렇게나 흥얼거렸다. “근데에… 내가 내 몸의 주인이 아니라, 이선호의 몸 주인이었거나 김동완의 몸 주인이었으면… 인생의 주인이 신혜성이 아니라 이선호, 이철호, 김동완… 전서희… 이런 사람들이었으면… 나는 참 나쁜 사람이잖아. 내 몸의 주인이 그사람들이었다면, 신혜성이라는 인간을 증오했겠지.” “…….” 잠깐이지만, 문정혁의 몸이 경직됐다가 풀렸다. 더이상 내게 장난치지 않고, 내 말을 대충 넘기지 않는다. 그저… 내 눈에 속절없이 맺히는 눈물을 닦아주고, 내 영혼을 따스히 덮어줄 뿐…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거, 그 말처럼 이기적인 문장이 또 어디 있을까. 죽는 순간까지 이기적으로 살라는 거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싸우고, 헐뜯어… 그래서… 가장 나쁜 사람들이 최후에 남는 것 같아. 너랑 나 처럼.” “…….” “정혁아… 우리가 왜 나쁜 사람인지 알아?”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 두개를 붙이더니, 처음보다 편하게 내 몸을 자기 다리 사이에 당겨서 꼭 끌어안는다. “신고양이. 방금 니가 다 얘기 해 줬잖아.” “야! 딸꾹… 하나만 불러… 신고양이면 신고양이! 애기면 애기. 아 맞다. 우리가 왜 나쁜사람인 지 알어?” “응. 애기야. 니가 방금 다 얘기 했다고.” 나는 허공에 팔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그건 통속적인 이유고,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 아니, 결론은 따로 있어.” “뭔데?” 허공에 내버려뒀던 손가락 끝에 따뜻한 바람이 분다. 슬쩍 눈을 떴다. 어느새 내 뒤에서부터 꽉 껴안고 앉은 문정혁이, 휘휘 젓는 내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가져가서 촉촉하게 누른다. 아찔한 감각이 전신에 퍼진다. 아 맞다. 결론 말해야지… “뭐냐면… 나쁜 사람들은… 말만 이렇게 하지 사실은 이기적인 습관이 몸에 배어서, 자기가 얼마나 나쁜지 모른다는 거… 그래서… 막… 행복해 할 때 행복해 하고… 살아 숨쉬는 걸 고맙게 여긴다는 거… 내가 진짜 나쁜 사람인데… 문정혁… 니가 곁에 있어서… 행복해….” “…….” “흐윽… 나… 진짜… 흐윽… 개새끼지… 어허엉….” “아니야.” “어허어, 어허어엉.” “내가 사랑하니까, 세상에서 제일 예쁜이야.” “그, 그게 뭐야… 어허어어… 어…….” 콧물 나오는 중인데… 라고 자각하자마자 에라 모르겠다- 눈을 꽉 감았다. 문정혁의 혀가 입 안을 부드럽게 돌아다닌다. 발 끝까지 짜릿해진다. 그가 번쩍 허공에 나를 안고 방으로 걸어간다. 가슴 아플만큼 행복해진다. 아니… 행복해지려고 한다. 내 자신이 미울만큼… 옷을 벗기는 그의 손가락이 얼마나 떨리는지, 침대 시트 위에서 가쁜 숨을 토해내는 와중에도 전부 느껴진다. 그의 몸이 만져진다. 문정혁의 눈물이 보인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신음소리조차 아쉬워서 서로의 손가락에 깎지 낀 채로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서로가 서로를 원한다는 것.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 또 한 번 죽음같은 순간이 우릴 기다린다고 해도, 지금은 사랑을 확인하는 것보다 중요한게 없었다. 행위가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동시에 울었다. 우리 둘의 몸 밖으로 정액이 나왔을땐, 서럽던 응어리까지 모두 토해낸 기분이라서 눈물 범벅인채로 와락 껴안고 한참을 멈춰 있었다. 문정혁은 그동안 무려 몇 년이나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는 뜻을 몸으로 실천했다. 술에서 깰 겸 샤워하고 오자마자 덮치고, 잠깐 잠들었다가 눈 떠서 '뭐해?' 한마디 한 게 오금이 저릴만치 섹시하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덮치고, 오전에 다시 눈 떴을때, 순돌이 학교 데려다줘야지… 부스럭대며 괜히 또 한 마디 했다가… 눈을 반짝이며 덤비는 문정혁에게 뒷발 돌려차기 해버렸다. 괴성을 지르며 엄살을 피우는 문정혁 보니까 아, 내가 살아있구나. 살아가고 있구나- 라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카페 안 가?” “내 몸을 보고 말 해. 허리가 끊어지겠어….” “하하하하하.” “문정혁.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웃드라.” 순돌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당연하다는 듯 제 집처럼 우리집에 들어오는 문정혁. 그가 있어서 든든하다. 그가 나갔다가 돌아올때까지 침대에 바짝 엎드려 있었는데도 삭식이 다 쑤신다. 안 본 사이에 외모만 리뉴얼 된 게 아니라, 힘도 리뉴얼됐어… 엎어진채로 설렁설렁 졸고 있는데… 나를 깨우는 문정혁 특유의 괴롭힘이 시작됐다. “…옥상 문이 열리네요… 신고양이가 들어오죠… 첫눈에 난….” “야!! 그 노래 하지 말라니깐!!” 고삐리때 문정혁이 개사한 '사랑해도 될까요.' 이상하게 문정혁이 저 노래만 부르면 볼이 화끈거린다. 선물받은 당사자는 나인데, 왜 내가 부끄러운걸까. 책상에 앉아서 작업에 열중하던 문정혁이 잠깐 뜸들이다가 다시 괴롭힘을 시작한다. “할건데. …내 사람인걸 알았죠….” “문정혁!!!” 씩씩대며 일어나서 허리를 베고 있던 쿠션으로 문정혁의 뒷통수를 후려갈겼다. 그가 하나도 안 아프다고 외려 약을 올리며 목청높여 웃는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쿠션 구타를 멈췄다. 나도 시치미 뚝 떼는 낯으로 문정혁의 등에 매달려서 그의 귓가에 그윽하게 속삭였다. “우리두리 트로트 메들리. 뭐해?” “야.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다.” 역시… 우리두리 트로트 메들리 라고 부르면 문정혁은 영락없이 머리 꼭대기까지 딸기가 된다. 한동안 옥신각신하며 서로 괴롭히다가, 장난이 심해져서 잠깐 말다툼까지 한 우리는, 결국 휴전 상태에 돌입했다. 마감 날짜가 촉박하다며 책상 의자에 앉은 문정혁의 등근육이, 그가 움직일때마다 약간씩 씰룩이는게 굉장히 근사하다. 나도 언제 싸웠냐는 듯 그의 등에 폴짝 매달렸다. “새로 쓰는 동화야?” “응.” 내 시선이 노트북 모니터에 닿은 것을 눈치 챈 그가 은근히 인터넷 창을 띄우며 한글파일을 감춘다. 문정혁은 자기 작업이 완성될때까지 보여주지 않는 편이다. 이상한 습관이야… 그래도 용케 파일 머릿부분의 대문짝만한 글자는 가려지지 않았다. “이게 제목인가보네? 감춰진 동화속 이야기?” “응. 첫부분만 읽어줄까? 오빠 볼에 뽀뽀해 봐. 신고양이. 읽어줄게.” 호… 탈고하기 전에는 읽어 준 적 없는데, 웬일이지? 문정혁의 볼에 착하다는 뜻으로 뽀뽀까지 해줬다. 절대로 시켜서 한 게 아니다. “됐지? 읽어줘! 나 눈감구 감상할게.” “옥상 문이 열리네요… 신고양이가 들어오죠… 첫눈에 난… 내 사람인걸….” “문정혁!!! 죽을래!!!” “하하하하하.” 그가 앉은 채로 뒤로 팔을 뻗어서 내 목을 감싸더니 순식간에 잡아당긴다. 얼떨결에 문정혁의 무릎에 앉혀졌다.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번에는 진짜 '감춰진 동화속 이야기'를 읽어준다. 참 신선한 내용이다! 라고 즐거워하는 내 볼에 꾹- 입술을 누르며, 그는 행복하게 웃었다. 그의 동화는 이상하게 현실을 연상케한다. 감춰진 동화속 이야기를 중간 정도 읽었을때, 나는 문정혁의 귓가에 떨리는 음성을 빚었다. “전진은… 죽지 않은 거지…? 그치… 정혁아…?” 누구도 전진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처럼, 나는 당연히 그렇지 않느냐 물었고, 문정혁은 나의 불안한 현실을 오케이란 단어로 해방시켜줬다. “당연하지. 그것들은 둘이 있어야지 완성되잖아.” “뭐야… 기계로봇도 아니고, 왠 완성?” 탁. 탁탁. 키보드를 누르던 문정혁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의 시선이 내게 와닿는다. 설레임이란 감정은 오래 전에 경험했기에, 다 잊혀진 추억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닌가보다. 설레임은, 익숙함 속에서도 희미하게 재발견 되는 것이었다. 나는, 이순간 나를 향해 근사하게 미소짓는 문정혁을 보고, 그와 옥상에서 만났던 오래전으로 돌아간 것 마냥 달콤한 기분에 빠졌다. “정혁아. 우리 순돌이 오기 전에 부르마블 할까?” “예. 예. 우리 애기 슬슬 앙탈 시작합니다. 오빠는 겁나게 바쁜데. 부르마블도 맨날 지면서.” “우리두리 트로트메들리같으니라고.” “아. 막 이젠 놀아달라고 떼쓰네.” “내, 내가 언제!” 아마 여기서 더 떼쓰면 문정혁과 또 싸우게 될 것이다. 예전의 문정혁이라면, 자기가 신문 보는거 조금만 방해해도 성질냈었으니까. 지금의 그는… 내가 그를 이해하듯, 나를 배려하는 식으로 서툴지만 조금씩 바뀌고 있다. 커피 타줄까? 하면서 슬쩍 비켜줄 요량으로 일어나는 내 팔목을, 그가 휙- 잡아챈다. “부르마블 다시 하잔 소리 못 하게 눌러주지.” “뭐야? 큭큭큭.” 햇살이 따스하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가을옷으로 갈아입은걸까. 순돌이를 위해 연예계를 은퇴한 나는, 연예계에 몸담았을 때와는 극과 극인, 흔히들 말하는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바보같다고 손가락질 하겠지만, 상관없다. 내 자신이 정당하다면, 내가 행복하다면, 사람들의 입방아는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돌봐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으며 인생이란 거친 해협을 건너는 것. 그것이 사랑이며 삶이니까. 나는 부와 명예를 경험해봤고, 그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데는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감정 없이 돈을 찍어대는 무미건조한 기계처럼 살아가느냐, 감정을 찾느냐의 기로에서 나는 후자를 선택했으니까. 이 선택에 도움을 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이선호다. 그를 지켜보며, 나를 되돌아봤다. 그가 나를 통해 스스로 놓친 게 무엇인지 깨달았듯이. 나는 부와 명예의 허무한 이면을, 따라서 이선호가 느꼈을 공허함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꼈으니까. 내 사람을 지켜줄 수 없다면,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 수 없다면, 부와 명예는 쓸모없는 짧은 글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다. 사랑에 미친 자들은 영원히 미쳤음을 자각하지 못 할 테니, 이선호는 불행한 것이 아니다, 이선호를 위해 목숨을 바친 김동완도 불행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 허락된 사랑은 아니지만 불보다 뜨거움을 경험했으니, 이민우도 불행하지 않다. 어디선가 살아 있을거라 확신하게 된 전진도 불행한 것이 아니다. 곧 다가올 사랑을 고대하며 하나씩 하나씩 스스로를 깨뜨리려는 전서희도 불행하지 않다. 사랑 없이 건조한 삶을 영위하느니, 사랑을 겪으며, 사랑에 미쳐서, 처절한 외로움과 눈물나는 기쁨을 겪는 것이야말로 행복일테니. 우리들은 모두 행복한 사람들이다. 다툼과 시기, 질투, 잠깐의 이별과 그리움이 두 번 다시 없을 거라고 장담 할 수는 없지만, 사소한 어긋남이야말로 사랑의 증거라는 걸 이제는 안다. 우리는 오해하고 싸울 것이며, 싸울때보다 배는 사랑할 것이다. 치열하지만 아름다운 세상을 눈부시게 살아갈 것이다. 전진과 내가 겪었던 시기가, 서로에게 콩깎지가 씌인다는 설레임까지라면, 문정혁은 그 이상을 함께 해 줬고, 앞으로도 어깨를 나란히 해 줄테니, 영원이란 글자로 선택했으니, 이제는 후회도 미련도 아쉬움도 슬픔도 없다. 그렇게, 왕자님과 공주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행복하게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으며, 죄없는 기사들이 숱한 가시밭길을 걸었고, 당사자인 왕자님과 공주님마저 겨울보다 추운 감정과 싸워나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어여쁜 동화책 어떤 글귀에서도, 감춰진 이야기들은 공개하지 않았으니까요. 슬프도록 기쁘게, 두사람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요. 영원을 약속하면서도 사실은 그 안의 농축된 불안함은 무시하고, 사랑의 결실을 이루기까지 흘려진 사람들의 피와 눈물 또한 무시되었습니다. 그것이 감춰진 동화속 이야기의 슬픈 비밀 중 커다란 하나였습니다. -그것들 完- -외전- 감춰진 동화속 이야기 아주 먼 옛날 옛날에… 나쁜 마녀가 살았습니다. 나쁜 마녀는 성격이 포악하고 남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외딴 성에 살고 있는 아름다운 공주님과, 공주님을 사랑하는 왕자님이 맺어지지 못하도록, 나쁜 마녀는 늘 시기 질투하여 방해하였습니다. 착한 공주님과 용감한 왕자님은 나쁜 마녀가 던진 수많은 난관을 지혜롭게 헤쳐나갔습니다. 하지만 공주님과 왕자님의 힘만으로 나쁜 마녀를 무찌르기엔 힘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공주님을 사랑하지만 마음을 고백할 수 없었던 낮은 계급의 기사들은, 공주님을 위해 혼신을 다 하여 나쁜 마녀를 상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쁜 마녀와의 싸움이 길어질수록, 기사들은 밀려오는 죄의식을 감당하지 못하고 괴로워했습니다. 마침내 나쁜 마녀가 쓰러지고, 평화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백성들은 풍요를 상징하는 민요를 울러뜨렸고, 모두 즐거운 파티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왕자님과 공주님이 혼례를 치루던 날, 기사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고통을 호소하였습니다. “나쁜 마녀를 물리친 건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전쟁 속에 죄없이 쓰러진 자연은….” “나무도 죽이고, 동물을 죽였어. 나쁜 마녀의 덫을 피하다가 어쩔 수 없이 죄없는 것들을 죽이고야 만 거야.” “우리들은 사람도 헤쳤지. 이 죄를 어떻게 감당할까.” 공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아낌없이 바칠 수 있는 기사들이지만, 본심은 상냥했기에, 기사들은 하루하루 끙끙 앓았습니다. 예쁜 새가 위로해주고, 성의 연못 아래 투명하게 반사되는 물고기가 예쁜 춤을 춰 줘도 기사들의 근심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기사들을 잠자코 지켜보던 왕자님이 어느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선택을 하거라. 지금까지처럼 공주님을 앞으로 회위하던지, 아니면 너희가 그렇게 괴롭다고 하니… 자유를 줄 테니 스스로 여긴 죄를 세상에 속죄하면서 살 것인지를.” 지혜로운 왕자님의 제안을 듣고 기사들은 한 번 더 깊게 고민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사들은 반으로 나눠서 집결하였습니다. 왕자님과 공주님은 성 밖에 집결한 기사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주 놀라운 결과가 만들어졌으니까요. 나쁜 마녀의 괴롭힘에 맞서던 시절, 대강대강 공주님과 왕자님을 지켜주던 기사들은 전자를 택하고, 목숨바쳐 공주님과 왕자님을 지켜주던 기사들은 후자를 택했습니다. 왕자님과 공주님은 아쉽고 쓰린 맘을 달래가며, 후자를 택한 기사들이 멀리 떠나는 길을 배웅해줬습니다. 후자를 택한 기사들의 마음이 처음으로 들뜨기 시작했습니다. 목숨을 바쳐 그동안 충성했던 만큼, 평화로운 시대가 열리자마자 밀려왔던 죄책감이 하나씩 풀리는 기분이었으니까요. 가장 열심히 싸워왔던 기사들은, 자기들이 전쟁중에 쓰러뜨린 꽃과 나무가 있던 자리를 깨끗하게 정돈하고, 부모를 잃은 어린 아이들을 돌봐 주었습니다. 전쟁 중 화살에 잘못 맞아서 다친 짐승들도 찾아다니며 모두 보살펴주었습니다. 그렇게 기사들은 자신들의 죄의식을 사랑으로 베풀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불쌍하다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 누구보다 용맹하고, 충만한 사랑과 당당함으로 똘똘 뭉쳐있는 기사들입니다. 후자를 택한 기사들은 어떤 일을 해도 최선을 다 했었기 때문에 작은 후회도 하지 않고, 드넓은 미래를 기약하며 행복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지프차 한 대가 희뿌연 흙먼지를 토해내며 달렸다. 케냐 동북부 다다아브의 다가할리 난민 캠프를 한바퀴 빙 돌고 본부로 돌아가던 참이었다. 본부라봤자 아직 짓다 만 뼈대 형상의 호텔이었다. 아니, 호텔이라기도 뭐한게, 완공되면 사람 열 명 정도가 복작대고 살 만한 2층 집이 될 것이었다. 국가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난민촌들을 돌고 돌아 황야에 들어서면 왜이렇게 한숨부터 나오는지… 지난번에는 만데라 국경 검문소에서 열 다섯번이나 퇴짜 맞았다. 열 다섯번이나!! 다친 사람은 있는지, 배곫는 사람은 얼마나 있는지 통역인에게 그것만 물어보라고 했더니 아무래도 얘기가 잘못됐나보다. 모래 먼지가 쉬지 않고 날렸다. 가끔씩 시선을 마주치는 유목민들이 양 팔을 내밀며 자기가 몰고 온 양이나 낙타를 사라고 뭐라고 소리쳤다. “양 한 마리 살까요?” 민우가 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옆에 앉아서 근사하게 운전중인 사내에게 물었다. 민소매 티에 면바지만 걸쳐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폼 잡은 사내가 혀를 쯧쯧 찬다. “산다고 다 해결되면, 넌 양만 키우고 살래. 임마. 저번에 산 다섯마리가 공사판에서 놀고 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나미비아 사막에서 야영이나 하면서 지냈던 민우는 좀 불만이었다. 적당히 돌아다녔으면 좋겠는데 소말리아에서 위험천만한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무정부지역 중에서도 대치중인 데만 골라서 다니냐… 문이 없는 오픈 랜드로버. 달릴때마다 모래 먼지를 삼키기 바쁜 지프의 덜컹거림에 신경질내기도 잠시. 민우가 막 생각났다는 듯 또 따진다. “부장님. 그땐 암만 그래도 진짜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또 시작이냐.” 구릿빛으로 그을린 뺨을 씰룩이며 전진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그렇지… 아니 공장 창문에 마네킹 세워놓고 혼자 멋지게 뒤지는거 하면 속이 편해요?” “그래야 다 속지.” “대단하십니다.” “응. 내가 전서희 아들이야~!” 덜컹. 지프가 크게 흔들렸다. 민우가 자기가 운전하겠다고 꽥꽥댈수록 전진의 눈빛은 야생마처럼 빛날 뿐이었다. 두사람은 현재 무작정 아프리카까지 날아와서 해외 각국에서 날아온 자원 봉사단체에 합류하는 식으로 곳곳을 돌아다녔다. 어떤 나라는 그럭저럭 사람 사는 곳 같고, 소말리아 같은 경우는 인간이 도저히 살 수 없는 환경이었다. 하루에도 몇 명씩 말라 죽는 아이들을 보며 전진은 엉엉 울기도 많이 울었다. “저 그때, 부장님 구하러 들어갔다가, 부장님이 밖에 안전하게 있다는 무전 받고 진짜 황당했던거 아시죠?” “알지. 잘 참았어. 혜성이한테 말했으면 여기서 폭탄 발사하려고 했거든.” 민우가 혀를 쯧쯧 차며 또 생각난 것을 물었다. “문회장님한텐 언제 말씀하셨어요?” “아~ 문곤? 얼마 안됐어. 졸라 지랄하더라. 나 있는데 쫓아와서 족치겠다는거 배째!! 이랬더니 두고보자… 하고. 큭큭. 아마 혜성이랑 신나게 지지고 볶고 살거다.” 전진은 말하는 중간 중간 혜성의 이름이 섞이면 즐거워했다. 그러면서 행복해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다 하고 왔다는 듯. 실제로 전진은 한국에서 겪었던 사랑을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이 빌어준 사랑도 자신있어했다. 그는 알았던 것이다. 혜성과 재회했을때부터 혜성이 자신을 보며 은연중에 문정혁을 찾는다는 것을. 물론 혜성이 입으로 직접 말한 부분은 아니었고, 행동하는 것만 봐선 누가 봐도 사귀는 사람들이었지만, 육감이 뛰어난 전진은 자신이 알던 혜성은 많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목숨바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주겠다는 용기도, 오늘날의 선택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진이 혜성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었던 마지막 이유는, 자신이 해 줄 수 없는 생활의 사소한 부분들을 문정혁은 해 줄 수 있었고, 또 자기가 없던 시절에 두사람이 서로 잊을 수 없는 단단함을 쌓았음을 분명하게 깨달아서였다. “야. 민우야 호텔 다 와 간다.” “저게 호텔인가요. 공사 빨리 마무리 해야 살 집이 생기는데… 부장님. 풀 좀 있는 곳에 집 지으면 안되요? 순 풀 몇 개랑 선인장 몇 개가 전부인데….” “놀러 왔냐.” “하아~ 아니죠. 봉사하러 왔습니다!” 민우는 자신과 동갑인 전진에게 예나 지금이나 깎듯이 존댓말을 하며 대우했다. 처음 사막의 땅 끝에서 번지는, 사방을 압도하는 수려한 노을 앞에서 해후했을 때만 해도, 전진은 이민우에게 말을 낮추라고 여러 번 요구했다. 그래도 이민우는 전진에게 부장님이라는 호칭을 늘 붙였고, 한국에서 하던 대로 굴었다. 지푸라기같은 사막에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인거나 다름없는 봉사 계획을 전격 지원해주겠다며 나선 것은 전서희와 문정혁이었다. 조만간 두사람의 물적 인적 지원이 조달되면, 호텔도 완공되고, 구체적으로 봉사 단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전진과 민우는 그 생각만 하면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로 행복했다. “문회장님이… 진짜 혜성이에게 우리 얘기 안 해줄까요?” “아직은 안 할거야. 혜성이가 괜찮아지면 하겠지. 어떤 방식으로든.” “방식…이요?” “문곤 취미가 글쓰는거잖아. 그새끼는 몇년 전부터 지가 기사라면서 깝쳤었어.” “…….” “어쨌든, 혜성이한테 문곤이 얘길 하든 안 하든 상관 없어.” 전진은 황야를 물들이는 붉은 석양을 바라보며 새삼 감동에 젖어 지프를 멈췄다. 그리고 느릿느릿 하던 말을 잇는다. “왜냐면…우리들은 모두, 혜성이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너랑 나도 행복하기를 문곤도, 혜성이도 바랄 테니까.” 그들에겐 아직 패기와 열정이 넘쳐났다. 그리고 그 열정을 주어진 삶 속에서, 아름드리 황혼녘에 취한 오늘도 충실히 발산하고 있다. 언제고 닥칠 찬란한 사랑을 고대하며… -감춰진 동화속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