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설명 용전기 인류 과학기술의 정수와 용족의 막강한 전투능력을 합쳐 만든 인류 최강의바이오 메카닉으로, 중량에 따라 L형과 M형,H형으로 나눈다. L형은 경량형의 스피드위주 기체로 정찰이나 고속기동전을 수행하며, M형은 표준형으로 일반무장을 장착한 주력용전기이다. H형은 헤비급기체로 화력지원용으로 설계되었으나 통칭 드래군으로 불리는 D형의 개발이후사라진다. 그 외에 M형과 F형으로 나두기도 하는데, 메카에 융합한 용족이 남성이면 M형, 여성이면 F형이 된다. 용신기 성룡이상의 용황급 드래곤이 융합한 용전기를 용신기라 한다. 자존심 강한 용족이 인간의 기계와 융합할리 만무했지만, 유신이용제인 카론을 설득해 그의 용전기로 두면서 다른 용왕급의 성룡들도 용신화랑의 용신기가 된다. 명왕계를 다스리는 30명의 용황중 12명이 용신기로 융합하였다. 용신기의 힘은 치천사가 모든 제약을 벗어나 최종전투형태인 메르카바로 현신한다해도 상대할 수 있을정도로 강력하다. 성수 주작, 용, 백호,현무,유니콘, 페가수스등 신력을 지녔으나 신이 아닌 존재를 성수라 한다. 그중에서도 주작, 용, 백호,현무를 4대성수라하여 신수라하고, 불의 주작을 봉황, 용황을 성룡이라 하여 초신수라한다. 초신수의 힘은 어지간한 1급투신이상인 걸로 알려져 있다. 헬마스터 지옥의 7대군주로 천족과 신족으로 대표되는 '빛' 에 반대되는 '어둠의 지배자들. 대마왕 루시퍼밑에 사탄, 벨제버브, 베리알, 아스모데우스, 메피스토, 디아블로, 바알이 이있다. 홀리크로스 루시펠이 반역하여 마왕군에 들어가자 이를 저지하기위해 결성된 전 우주적인 무력군사조직. 미카엘이 이끄는 천군, 토울의 아스가르드군, 제우스의 올림퍼스군, 유신의 실버스타군이 모인 엄청난 군세이지만 개성이 너무나 다른 군사조직이 연합한 형태이므로 지휘계통이 문란하고 , 토울의 아스가르드군은 1차아마게돈의 피해를 다 복구하지 못한상황인데다 비프로스트회전에서 전멸에가까운 타격을 입었기에 별 도움이 못 되었다. 또한천군은 루시펠와 함께 제1계급인 치천사 계급에서 대량의 이탈자가 나왔으므로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니다. 실버스타군도 개전초기에는 용신기가 등장하지 않았으므로 이들중 가장 약했고, 올림퍼스군만이 간신이 빛의 군대다운 위용을보일 수 있었다. 후에 용족의 참전과, 유신이 천군을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던 아스모데우스를 쓰러뜨림으로서 반격의 실마리를 잡게 될 때까지 참담한 패전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마나와 코어 마나는 우주를 구성하는 자연력의 기본 단위이고 코어는 정신적인 힘의 기본단위이다. 마법사는 외부의 힘, 즉 마나를 끌어서 쓰기 때문에 일반적인 전사보다 월등히 강하다. 그러나 3급신 이상의 존재들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정신적 힘이 주위의 자연력을 훨씬 상회하기 때문에 마나보다 코어의 힘이 훨씬 강하다. 마나는 모두 소모하면 탈진하는 정도로 끝이지만, 코어는 존재하는데 필요한 이상이 소모되면 존재자체가 소멸할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위험을 감수한다면 순간적으로 실력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시라스인 통칭 엘프. 마법계 엘프의 조상격으로 예술과 자연을 사랑하는 평화롭고 고아한 종족. 머리도 뛰어나고 마법에도 능숙하지만, 상상력이 부족하고 수동적이라 우주의 주도적 세력이 되진 못한다. 그 빼어난 미모로 타 종족의 노림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그들은 모두 마법에 익숙하기 때문에 잡기가 쉽진 않다. 크놈인 통칭 오크. 머리가 둔하지만, 저돌적인 추진력과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성향으로 인간과 비슷한 정도의 빌전을 이루었다. 돼지 같은 코와 굵고 짧은 털이 듬성듬성 박힌 근육질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늘상 시라스 행성에 시비를 걸어 이들을 지배할 야욕을 노골적으로 들어내지만, 인간들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한다. 마물 어둠에 속하는 괴물들. 벰파이어, 서큐버스, 좀비등이 있다. 마족 마물의 귀족. 데몬, 레서데몬, 데이모스등이 있다. 리치 고위의 마법사가 영원의 생명을 얻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다른 차원에 봉인시키고, 현세에는 육신만 남겨 죽지도 살아있지도 않은 반생의 몸이 된 것이다. 최 고위급 마법사가 된 리치를 에데.이.리치라고하며, 마족중에서도 상위 마족으로 여긴다. 해병대 실버스타군의전투프로페셔널. 보통 두랭크 이상차이가 나는 상대는 숫자로 이길 수 없다는 통념을 깼다. 화랑들처럼 선택받은 전사는 아니지만 10여명정도면 데몬두어마리는 우습게 때려잡는다. 집단전투를 위주로 훈련받기때문에 개개인이 강한것은 아니다. 화랑단 실버스타군을 이끄는 양대 무력조직의 하나. 12명의 용신화랑아래 각각의 화랑단이 존재하며, 하나의 화랑단이 백여명 내외로 구성된다. 그러나 그 개개의 무력은 일반인에 비할바가 아닐 정도로 강대하다. 인간 진화의 표본으로 근력, 반사신경, 동체시력등이 보통 인간의 10~20배정도 뛰어나 다. 그 숫자는 적으나 전원이 용전기의 마스터라는점을 감안한다면, 그 힘은 실버스타군의 핵심중에 핵심이다. 성계대전당시 기사단의 지휘권도 모두 넘겨 받았을 정도로 군부에서의 발언권도 상당하다. 삼강오륜과 세속오계를 목숨처럼 지키며, 반 인류(마족을 비롯한 크놈인이나 다른 외계 종족들)와의 싸움이 아니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기사단 화랑단과 함께 실버스타군의 최대 무력조직. 아리엘 직속의 나이트 템플러와 교회 소속의 성당기사단인 팰러딘, 그리고 국가 기사단으로 구분된다. 주로 수련에 의해 강해졌지 때문에 일반인 보단 뛰어나지만, 화랑단처럼 초월적인 무력을 갖고 있진 않다. 천인장 이상의 고위 기사에겐 용전기가 주어진다. 성계대전에선 화랑단의 백업, 함대전투, 각 콜로니의 치안유지 및 후방방어를 하였으며 실버스타군의 주력이었다. 지금도 그 전통이 이어저 인류간의 분쟁이나 치안유지는 기사단의 몫이다. 나이트 템플러 아리엘 개인의 기사단. 광적인 그녀의 추종자들로, 기사단이 친 교회적인데 비해 템플러들은 교회보다도 아리엘에게 충성한다. 그러나 그 정도가 지나처 다른 조직들과의 충돌도 잦고, 아리엘도 무척 곤란해 하고 있을 정도. 주로 높은집안의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어 열의는 앞서지만, 실제 전투력이 높진 않다. 아리엘이 확고한 황권을 쥐고 있는것도, 유신의 무력보단, 유력한 귀족이나 인사들이 대부분이 그녀의 광신도인 이 템플러 출신이기 때문이다. 팰러딘 교회소속의 이 성스러운 기사들은 단지 신의 뜻에 따라서만 사는 존재들이다. 교회의 힘이 강대해진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아리엘의 즉위 후 이지만, 템플러나 평범한 사람들 중에도 그녀를 우상화하는 일이 잦아지자, 그것을 우려해 지금은 템플러의 견제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신의 뜻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은 물론, 가족, 친구, 연인까지도 가차없이 내 칠 정도로 광신도들이기도 한 그들은, 성계대전에서 신형의 드래군에 탑승해 후퇴를 모르는 용맹함을 보여 주었다. 언제나 신실하고 고귀한 행동으로 타의 모범이 되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도 상당히 평판이 좋다. 국가 기사단 보통 기사단이라하면, 이들을 뜻한다. 실질적인 '군대'로 하나의 기사단이 4000여명 정도로 구성된다. 상비군은 1000개의 기사단을 유지하며, 비상시는 최대 그 30배까지 동원 할 수 있는 체제이다. 하나의 기사단에 5기의 용전기와 1척의 항모, 2척의 전투함이 지원된다. 전술 실버스타군 용신기를 중심으로한 원추형의 진형을 선호한다. 인류연합군은 처음 참전했을때부터 상당히 불리한 여건에서 싸울겄을 강요받은만큼, 일반병사들의 사기저하를 우려해 시계를 극도로 제한하여 눈앞의 적만 해치우는데 전념하도록 하기위해서이다. 마치 중세시대의 기사가 투구를 쓰고나면 정면만 보이는 것처럼 전장에서 필요이상의 정보를 주지 않음으로써, 실버스타군은 항상 유리하다는 착각하에 능력이상의 전투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따라서 위계질서가 엄정해야 하고, 지휘계통이 흔들리거나 지휘관의 사망시 지리멸렬할 수도 있다. 용신기들은 모 게임의 오버로드처럼 주변의 시야및 정보를 제공하며, 항상 선두에서 싸워야 하기때문에 용신화랑들은 개인적인 전투력뿐 아니라 전술및 싸움의 흐름파악에도 대단히 빨라야 한다. 실버스타군이 우주공간에서 원추형 진을치고 나는 모습은, 곳게 뻣은 수십개의 랜서가 우주를 찢는것처럼 장엄하다. 천군 천사 개개의 능력이 워낙 대단하기 때문에 특별한 전술보단 메르카바를 중심으로한 난전일 경우가 많다. 아마게돈 전까진 악마들은 감히 이러한 천군의 상대가 되지 못햇지만, 2200년 이후 악마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져, 서서히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아스가르드군 1차아마게돈의 피해로 거의 괴멸되어 지금은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1차 아마게돈후 수만년이 지났지만, 오딘을 비롯한 거의 모든 주신이 봉인되어 버렸기 때문에 신족들은 아직도 그 피해를 다 복구하지 못햇다. 토르와 하임달이 올림퍼스군에 객원 참모격으로 있는 정도이다. 올림퍼스군 올림퍼스의 신들은 특별히 많은 부하들을 두지 않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는것도 그들 자신이다. 신인 만큼 개개의 능력은 절대적이지만 한번 줄어든 병력은 다시 보충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전쟁이 본격적이 되자 전면전보단 후방지원이나 정보수집,병참의 관리같은 2차적인 일을 떠맡는다. 악마군 아마게돈전까진 빛에 눌려 꼼짝도 못했지만, 루시퍼의 제위후, 조직적인 무장과 지옥에 넘처나는 사악한 인간들의 영혼을 이용해 천군을 압도하는 세력이 된다. 많은 수를 바탕으로 상대를 포위한뒤 섬멸시키는 역 원추형 진형을 주로 쓴다. 빛은 이렇게 통일되지 않은 지휘부가 난립해 있는데 반해, 악마군은 니플헤임의 악신들을 끌어 들이고, 요툰하임의 거인들을 복종시켰으며, 사자의 땅에 있는 신도 상당수를 무력, 또는 회유로 끌어들여 단일화된 명령체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이제껏 군소난립으로 적당히 균형을 이루었던 빛과 어둠은 어둠의 통일로 극단적으로 빛이 불리해 진다. B&M 의 주요 연표 ....... 1차 아마게돈 언제 발발했는지는 인간의 역사서로 기록할 수 없다. 라그나로크라고도 하며 지옥으로 영구추방당해있던 펜리스펜릴이 풀려나, 오딘을 죽이면서 전쟁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진다. 최강의 투신인 토울이 분전하였으나 미드가르드의 뱀과 쌍방봉인된 후 전세가 급격히 기울어 한때 신족의 패배가 확실해진다. 그러나 루시펠이 이끄는 천족이 다른 신족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금제를 깨고 참전하여 이드그라실 최악의 마신인 수르투르를 제압함으로써 빛의 승리로 끝난다. ........ 창세전쟁 역시 인간의 역사서로는 기록할 수 없다. 라그나로크이후 빛과 어둠의 균형은 깨지고 타락한 빛은 어둠이상으로 잔혹하게 어둠의 세력을 탄압한다. 이에 루시펠은 자신을 따르는 천군을 이끌고 스스로 지옥의 권좌에 앉아 마신 수르투르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후 인간은 '악' 이라는걸 알게되고, 점점타락하게 된다. 창세서에서 말하는 선악과란 루시펠의 타락을 의미한다. 사실 이때부터 수만년에 걸친 2차 아마게돈은 시작된 셈이다. 2102년 1월 8일 블랙홀을 이용한 초 장거리 워프 이론 발표 2112년 6월 6일 인간의 타락으로 대표되는 빛 전체의 타락은 도를 넘어서 이날 죽은 모든 인간중 단 한 명도 천국에 가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넘처나는 지옥의 영혼을 이용해 이미 최강의 군단을 이루어 놓은 루시퍼는 이 날을 '신의 사랑이 빛을 떠난'날로 규정짓고 '검은 성전'을 일으켜 빛을 친다. 2112년 6월 6일 외우주 종족인 시라스인과의 접촉, 크놈인과의 적대적 조우 2220년 6월 5일 대대적인 악마군의 침략으로 천군이 아스가르드까지 밀린상황에서 인간계에서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인간사이에서 태어난 순수한 인간이처음으로 천사로 진화한것이다. 2227년12월15일 공식적으로 유신이란 이름이 인간의 역사서에 처음등장한다. 유신은 타락한 민주주이에 종지부를 찍기위해선 가장 순수한 인간인의사를 황제로 세워 정신적 진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며 인류통일전쟁을 벌인다. 2230년4월3일 지구연방정부의 항복으로 아리엘의 황제 등극 2231년 9월 21일 크놈의 시라스성에 대한 대대적 침공, 동년 12월31일 인류연합의 공식적인 참전 2240년 1월 1일 그동안 베일에 쌓여 있던 화랑단의 공식적인 발족, 유인행성으로 진출 2338년 2월 22일 신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마게돈을 인류도 알게됨 2339년 7월 17일 인류의 아마게돈 참전 2351년 3월3일 천국에 간 인간의 영혼이 절반을 넘는다. 그러나 전쟁은 이미 어둠으로 기울어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한 어둠의승리는 확실해 진다. 2352년 1월1일 용족이 빛의 편을 들어 참전할것임을 밝힌다. 2355년4월27일 용신기가 최초로 전쟁에 등장. 천족이나 신족은 물론 마족들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인간 특유의 빠른 전투전개로 전장의 주도권은 인간이 쥐게된다. 짧은 시간밖에 허락받지 못한 인간은 마족이나 신족은 생각지도 못할 빠른 전쟁을 수행하여 서서히 마족들을 몰아치기 시작한다 2359년8월15일 유신과 용제는 240년도 넘게 밀려오던 전세를 단 6년만에 뒤집어 루시퍼군을 아바돈까지 밀어 붙인다.결국이날 루시퍼는 유신의 코스믹 블래스터에 봉인되고 마왕군은 해체된다. 주요 등장 인물 유신 인간의 역사서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 이름은 놀랍게도 천사들의 가장 오래된 전승에서도 언급된다. 그 정체는 신을 본따 최초로 만들어진 인간. 따라서 육체는 불멸이다. 그러나 정신은 3대째 유신 이후 1000년을 주기로 바뀐다. 2000년대에 활동한 유신은 6대째이다. 카론 카이드리아 엘 엑시나에. 성수 용족의 용제. '강력'과 '난폭함의 대명사. 모든 용족의 지배자. 용족은 서로 간섭하는 일은 거의 없고, 심지어는 평생 마주치지도 않을 만큼 독립적이지만, 모든 용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카론이 용제임을 알고, 또 이를 인정하고 있다. 3.8Km에 이르는 거체, 그에 걸맏는 강대한 육체와 마나의 완벽한지배, 그리고 코어도 왠만한 1급 투신만큼 강력하다. 그럼에도 끝없이 강함을 추구하는 용족의 장답게 용신기로 융합하면 더 강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유신의 용신기가 될 것을 허락한다. 일반적인 용들이 하루 세번브레스를 쓰는것에 비해 무한정 사용한다. 본체는 청룡이다. 용신기 전장 : 16.5m 무게 : 엔진 제외시 128t 파워 : ?? 특수능력 : 브레스 염지명 불의 주작인 봉황. 성수 주작족의 수장. 카론이 파괴의 벼락이라면 염지명은 정화의 불꽃이다. 본체는 1Km정도로 작지만, 주작족은 용족처럼 크기와 파워가 비례하는것은 아니다. 카론조차 한수접는 최고의 초신수지만 굉장히 조용하고 중도적이라 그녀의 성역인 레인샤에 칩거한체 성계대전에도 참전하지 않는다. 주작족들은 용족이나 백호족과는 달리 레인샤에 무리지어 있으며, 염지명을 따른다. 우아하고 기품있는 그녀는, 육탄전보단 코어와 마나를 이용한 세련된 전투를 즐긴다. 초신기 전장 : 16.3m 무게 : 65t 특수능력 : 브레스, 코어 브레이크 광무 성수 백호일족의 전사. 난폭하기론 카론못지않다. 다른 성수들도 서로간에 간섭이 없지만, 백호족의 경우는 왕이란 개념조차 없을 정도로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백호족은 다른 성수들에 비해 개체는 많지만, 전혀 교류가 없기 때문에 조직적인면은 전혀 없다. 광무는 육탄전에선 강력하지만, 마나를 거의 다루지 못한다. 단, 코어는 초신수에 들어선 자답게 강력하다. 백호족은 개채가 많은 만큼 주작이나 용족에 비해 개개의 능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반사신경과 육탄전에는 워낙 뛰어나므로 초신기가 되었을때 가장 싸우기 골치아픈 상대이다. 후에 유신의 쌍둥이 누이인 유진의 초신기가 되며, 염지명과 질줄 뻔히 아는 싸움을 벌일 정도로 싸움을 좋아하고, 유진을 따른다. 초신기 전장 : 18m 무게 : 220t 특수능력 : 광아, 브레스 카린 카론의 이름을 따서 지은 유신의 양녀. 시피네란 이름이 있지만, 지금은 카린이란 애칭을 더 좋아한다. 시라스와 크놈의 전쟁중에, 크놈군에 잡혀 연구중이던 슈퍼브레인의 생존자이다. 유신에게 구출된뒤 그의 양녀가 된다. 카린 싸이언스퍼실러티의 연구소장겸 실버스타군의 과학부장직을 겸하고 있다. 용전기의 이론을 현실화하고, 카론을 기초로 최초의 용신기를 만들어내었다. 캄캄한 우주... 용신기의 신경조직과 연결된 중추는 우주의 작은 빛과 파동조차 마치 직접 느끼듯 그대로 전해준다. 메인 통신기와 서브통신기에선 쉴새없이 전황이 쏟아져 들어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다. 조용히 눈을 감아보고 싶지만 용신기의 8개의 눈과 동조된 유신의 시신경은 에너지파로 일그러진 우주를 사각도 없이 대뇌에 구겨 었다. '이제 제법 익숙해 졌다고 생각했는데..... 자그마한 뇌에 8개나 눈이 달려 있다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야......' 이제 마지막.... 정말 마지막 싸움이 남았다. 3기의 헬마스터전용 마신기를 완파시켰고, 질병과 기근의 헬마스터 사탄, 폭식과 색욕의 헬마스터 벨제버브, 그리고 최강의 전투력을 과시하던 파괴와 죽음의 아스모데우스를 봉인하였다. 절망과 공포의 헬마스터인 디아블로도 지금쯤 샤피에 의해 봉인되었을 것이다. 지옥의 7대군주중 직접 참전하지 않은 베리알과 메피스토를 빼면 사실 헬마스터는 전멸했다. '이제 루시펠님만 남았군....하긴 그분이 남았다면 적의 전력은 아직 절반이상 남은 셈이지...' 새벽을 여는 광명의 주인, 신을 찬양하는 첫 번째 목소리, 1차 아마게돈때 마신 수르투르를 해치운 천족 최고의 전사.... 이모든 영광과 빛을 버리고 그녀가 마신이 되어 버린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그녀가 사분오열하던 지옥을 통일하고, 빛에 선전포고를 한 후 비프로스트 회전에서 거의 모든 빛의 신을 봉인함으로써 사실 어둠의 승리는 확정적이었다. 용족의 참전과 인류연합의 분전이 없었다면 악마군을 아바돈까지 밀어붙이기는커녕 지금의 홀리크로스는 이미 붕괴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왕군을 막기 위해 싸워온 인류연합(실버스타군)의 피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12체의 용신기 중 6체를 잃었고, 8천만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으며 희생된 민간인 수는 그 10배를 넘어 선다. 용족도 용신기가 파괴되며 4명의 용황을 잃었고, 둘은 봉인되었다. 빛이든 어둠이든 양쪽 다 어떻게든 결론을 내야 할 때이다. -이제 마지막 싸움이군..... 루시펠님이 어째서 이런 무의미한 전쟁을 일으켰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더욱 이상한 건 니가 그분을 이렇게 철저하게 몰아붙인 거야. 정말 루시펠님을 봉인할 생각인가? 그분은 너에게 신 이상으로 중요하고, 또 사랑하는 존재였다.- 카론의 사념이 넘어오자 유신 역시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무거운 마음으로 싸우기에는 지금부터 싸워야할 상대가 너무 강대하다. '그런 고민은 이 전투가 끝나면 하겠어. 난 옳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행동했다. 이제 후회해봐야 사태가 더욱 악화될 뿐이야. 이젠 최선을 다 할 수밖에....' -결심이 섰다면 의식을 분리한다. 이제부턴 너의 싸움이야. 아무리 내가 용제라해도 루시펠님의 신성엔 대항할 수 없다. 무의 벽 너머에서 결계를 치고 너의 육신을 보호하는 것까지가 내가 도울 수 있는 한계이니....- 카론의 의식이 사라지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8개의 눈이 보여주던 입체적인 우주가 다시 친숙한 2개의 눈이 보여주는 평면적인 우주로 돌아오고, 용족 특유의 초감각이 사라지며 본래의 자기 몸으로 돌아온 것이지만, 기묘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아마 혼자가 된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무의 벽에 다가섬에 따라 점점 자신이 인지할 수 있는 세계와 단절된 채 암흑만이 남았다. 물질계에 익숙해져 있는 유신은 신차원에서 길을 잃고 당황해 하고 있다. 그 즈음 어디선가 흘러들어 온 어둠이 서서히 형체를 갖추어간다. 점점 뚜렸해지며......검은 '빛' 이 주변을 감싼다. 무의벽, 그 완벽한 암흑과 절망의 공간에서 어떻게 '빛'이 보이는지는 모른다. '희망?' 아니면 단지 의식이 그렇게 느끼는 걸까? 마침내 어둠의 빛 속에서 '그녀'가 나타났다. 처음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변함 없이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 12장의 아름다운 날개. 예전의 휘황한 광휘 대신 차분하고 격조 높은 검은빛을 은은히 띠는 치천사의 상징에 쌓여 '루시펠'이 강림한 것이다. -유신..... 역시 왔군요. 하긴 누군가 날 막기 위해 온다면 그대밖에 없겠지요.- 슬퍼보이는 얼굴, 지친 듯한 가는 미성..... 어둠의 제왕이며 '절대신'에 대항한 자라고는 보기는 너무 여려 보였다. '홀리크로스의 기전장군 유신더 실버스타가 이계의 마왕을 뵙습니다.' -마왕이라.... 신에 대항했으니 마왕이군요. 이제는 '루시펠' 이라고 불러주지 않는군요......아니, 엘의 칭호는 박탈당했으니 '루시퍼'인가요?- 아직도 카론이나 측근들끼리 대화할 때는 그녀에 대한 존경과, 빛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담아 루시펠이라 부르지만, 그녀에게 그런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대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군요. 나 역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전사에 대한 예의. 내 안의 마왕을 깨우겠습니다.- 순간 루시펠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힘이 쏟아져 나왔다. 상상할 수 없는 우주를 덮을만한 힘이 유신의 의식에 쏟아져 들어 왔다. 이미 그곳에는 마왕 '루시퍼'만이 있었다. 거기에 맞추어 유신 역시 코스믹블래스터에 정신을 집중하고 코어를 높여갔다. 영겁의 시간이 흐르고 조각난 의식이 모인 곳은 카론의 용심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지? 전황은? 루시퍼는?' '신력에 의한 무의벽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마왕의 본체도 무의 벽 밖으로 나오게 될테니 이제 육박전이다. 정신 바짝 차려 유신! 질문은 그 다음이다.' 눈앞에는 이미 완전한 마왕의 모습을 갖춘 루시퍼의 거체가 유신에 의해 파괴된 무의 벽의 파편을 마저 찢어발기며 나타나고 있었다. "각 부대에 전달, 마왕의 마성력에 대항할만한 장비가 없는 C랭크이하의 전사들은 즉시 전투 공역에서 벗어나도록. 전투에 참여 가능한 부대는 진형을 대 마신전 형태로 바꾸고 사용 가능한 결계는 모두 써서 함대가 직격당하지 않도록 하라." 단지 마왕이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근처에 있던 함대 중 루시퍼의 마성력에 대항할만한 장비가 없는 절반 가까이가 전투공역을 벗어나야 했다. 입이 바찍바짝 타들어 갔다. 물을 마시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치스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뒤틀린 각질과 기괴하게 밖으로 튀어나와 꿈틀대는 근육. 너무나 그로테스크하고 공포스러운 모습에, 보는 것만으로 왠만큼 단련된 전사라 해도영혼의 구성이 무너져 내린다는 마왕이 참모습을 드러냈다. '아바돈에서 루시퍼와의 장기전은 불리해! 아바돈 자체가 근처에서 죽은 영혼들에게서 계속 원념을 뽑아 루시퍼에게 공급할 테니....카론, 사용할 수 있는 최대의 브레스를 준비 해줘. 난 테라브레이크를 쓸 테니까...' - 미쳤는가 유신? 결계는 누가 치고? - '빛의 검이 있다. 결계는 그들에게 맡겨.' -웃기지 마라! 아스모데우스의 일격만으로도 12자루의 빛의 검 중 3자루나 부러졌다. 근데 겨우 9개의 빛의 검이 치는 결계로 루시펠님의 공격을 막겠다고?- '그렇다면 적당한 공격으로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거냐?' - ........... 좋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 해보자 - 카론이 브레스를 준비하자 카론의머리의 주변에 푸른색의 아지랑이가 일며 번개가 방전했다. 처음에는 카론의 머리만하던 번개구가 갑자기 커지더니 1km 이상의 크기가 되었다. 그러더니 다시 30m 정도로 줄어들었다.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 에너지를 압축한 것이다. 자그마한 혹성정도는 우습게 파괴하는 용황급브레스 중에서도 최강인 용제의 썬더브레스인 것이다. 카론이 준비를 끝내자 유신도 자신의 필살기를 준비했다. '간다 테라브레이크!!!' 유신이 테라브레이크를 쓰기위해 코어를 가속하자 주변의 모든 것이 매개체가 되는 코스믹 블레스터의 중심으로 에너지화하여 빨려 들어갔다. 테라브레이크는 시간과 공간의 고정을 위한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에너지까지 끌어들여 상대를 파괴시키는 영파로 바꾸는 유신 최고의 필살기이다. 이는 놀랍게도 물질계와, 마계, 그리고 신계에까지 뿌리를 내려 그 형체를 고정시켜둔 루시퍼의 본체까지 분해해 가며 그 파워를 모았다. 카론이 준비한 썬더브레스에서도 계속 코스믹 블래스터 쪽으로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너무나도 거대한 충격여파로 다른 차원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사용이 극히 제한되지만 마왕을 쓰러뜨리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유신의 테라브레이크는 마왕군의 힘의 상징이며, 전투력만으론 루시퍼를 능가한다는 마왕군의 기전장군인 아스모데우스를 쓰러뜨린 기술이다. 이에 대항해 루시퍼의 검은 몸체도 광채가 나며 머리끝으로 모든 코어가 집중되었다. 루시퍼 최고의 필살기인 혼돈의 브레스를 준비하는 것이다. 혼돈의 브레스는 루시퍼가 빛에 등을 돌릴때, 그를 추적하던 치천사와 수십명의 지천사, 메르카바등을 소멸시킨 기술이다. 실제 4명밖에 없던 치천사중 메타트론이 루시펠을 따라 반역하고, 나타나엘은 그 일격에 소멸하였다. 고위의 천사 다수가 반역하거나 소멸해 천계는 지휘계급을 다시 짜야 할 만큼 치명상을 입었다. 마침내 혼돈의 브레스가 뿜어져 나왔고, 유신의 코스믹블래스터에 모아진 극한의 힘도 카론의 브레스와 함께 광포한 푸른빛의 창이 되어 루시퍼에게 쏘아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충돌하는 두개의 거대한 힘.... 우주를 뒤 업을 듯이 에너지파가 들끓고, 전 우주가 비명을 지르는 듯 했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에너지의 파도가 잦아들기 시작하자 그 속엔 몸통의 용심의 일부만을 남기고 모두 소멸된 카론이 있었다. 루시퍼역시 계속 힘이 흩어지며 붕괴하고 있었다. 루시퍼는 아바돈에서 계속 에너지를 공급받지만, 시공간까지 뒤틀어버린 테라브레이크의 2차,3차 폭발로 마침내는 모든 힘을 잃고 코스믹 블래스터안으로 봉인되었다. 유신의 승리였다. .... 카론의 용심안, 모든 힘을 극한까지 쥐어 짜내고 미라와 같이 뼈 위에 가죽만 얇게 발라 논 모습으로 유신이 앉아 있다. 카론도 모든 힘을 잃고 유신을 지켜주기 위한 기본적인 생명유지장치조차 가동시키지 못하고 우주를 부유하고 있다. 당장 스러질 듯한 유신의 이마 위에서 흰 빛의 덩어리가 모이기 시작했다. 파괴된 육신의 빠른 재생을 위해 영혼을 잠시 몸밖으로 빼낸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 곳곳에서 빛이 나더니 3개의 빛이 빠져 나왔다. 유신의 몸에 봉인되었던 9개의 빛의 검 중 루시퍼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건 3개뿐이었다. '이제 끝났나..... 루시퍼는 코스믹 블래스터에 봉인되었어.....' 3개의 빛들이 하나 서서히 인간의 형상으로 갖추어져 갔다. 하나는 금발의 큰 외이브를 지닌 8등신 미녀로, 또 하나는 검은머리에 검은 눈의 14~15세 가량의 소녀로, 나머지 하나는 하얀 수염과 하얀 머리를 길게 기른 전형적인 마법사의 모습으로 변했다. 금발의 미녀가 말했다.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신성한 붉은 실의 맹약에 따라 마왕을 쓰러뜨릴 때까지 함께 했으니 저희는 그만 마법계로 떠나겠습니다. 유신의 용기와 힘, 그리고 결단력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마법계를 대표해 마왕을 물리쳐 드린 것을 감사 드립니다. 저희 역시 모든 힘은 소진해 유신님과 카론님의 육체를 복원하는데 힘을 빌려드릴 순 없지만, 근처의 홀리크로스군이나 실버스타군에 연락을 취하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위시마스터는 빠르게 자기 할말만을 하고는 작은 결계로 몸을 감싼 채 우주저편의 다른 공간인 마법계로 사라져 갔다. - 냉정하군. 일이 끝났으니 이제 별 볼일 없다 이건가? 지고한 용제와 홀리크로스의 기전장군께서 요 모양으로 망가졌는데..... - '그만둬 카론. 그들도 이번 전쟁으로 위시마스터를 아홉이나 잃었어. 이제 그 셋이서 마법계를 이끌어 가려면 날카로워 지는 게 당연하지... 게다가 마지막에 그들에게만 결계를 치게 한 건 죽으란 소리와 같았으니까...' '뭐 그건 그런대로 좋아. 하지만 이젠 대답을 들어야겠군. 어쩔 건가? 코스믹 블래스터에 마왕을 봉인한 건 좋지만 이제 루시펠님도 없다. 흥~ 이제 천족들의 세상이 되겠군.' . . . 에너지의 파도가 점차 가라앉고 그 경이적인 용족 특유의 회복력을 이용해 기체의 기본부위를 재생하기 시작할 즘 니케가 이끄는 제5 기동함대가 서서히 카론에게 접근해 오고 있었다. 이로써 전차원 성계대전이라 불리는 2차 아마게돈은 그 피비린내나는 막을 내렸다. 악마군은 지옥의 7대군주인 세븐 헬마스터중 셋이 소멸되었고, 둘이 봉인되어 우주의 가장 어둡고 타락한 게헨나까지 후퇴했으며, 무엇보다 마왕 루시퍼를 잃었다. 천군은 루시퍼의 반역으로 엉망이 된 지휘계통이 미카엘을 중심으로 통일되었으나, 용신기가 등장할 때까지 계속 전쟁의 주력으로 싸워왔기 때문에 전 병력의 60%이상을 잃었다. 특별히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별이 없는 천족으로선 총 인구수의 60%를 잃었다는 뜻이다. 마법계에서는 12명의 위시마스터가 모두가 빛의검으로 형태를 바꾸어 참전했으나 3명밖에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스가르드군은 1차아마게돈때 당한 피해를 복구하기도 전에 다시 전쟁에 휘말려 주신들이 다시 전생 할 때까진 거의 재기불능이라 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올림퍼스군은 아스모데우스와 부딫친 니케의 그리폰 전대를 제외하곤 거의 피해는 입지 않았으나 싸움에 적극 개입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피하기 힘들게 되었다. 인류연합 실버스타군은 12명의 용신화랑 중 세 명이 소멸하였고, 두 명이 그 능력을 완전히 봉인 당해 더이 상 그 직책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수많은 함선과6체의 용신기를 잃었으며,8억 이상의 인간이 죽었다. 결국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워낙 수가 많고 개개의 평균적인 능력이 뛰어난 천군이 우주의 중심이 된다. 신성력 원년의 시작이다. 니케의 제5 기동함대의 기함 트라이엄프의 함교. 회수한 카론은 외장의 수리에 들어갔고, 유신은 니케와 회담중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니케님. 제5기동함대가 마왕군의 보급로를 완벽하게 차단해준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유신은 진정으로 이 어린 올림퍼스의 투신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인간으로 치면 10살도 안된 어린 나이지만 기막힌 용병술과 함대의 운용, 그리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작전으로 마왕군의 보급을 붕괴시킨 그녀 덕분에 수적인 열세를 만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신족은 '느리다'는 일반론은 그녀에겐 통하지 않는다. 붉은 빛이 도는 갈색 머리를 등까지 길러 하나로 묶고, 고급스런 갈색의 여성용 경갑을 착용한 모습은 경쾌하고 대단히 빠른 어떤 속도감이 느껴졌다. "과찬입니다. 루시퍼 그 괴물을 봉인하다니.... 솔직히 믿을 수가 없군요. 주위에 흩어진 잔류 에너지를 조사중입니다만... 어떻게 이길 수가 있었지요? 유신이 방출한 총 에너지치 보단 루시퍼의 혼돈의 브레스의 에너지가 더 높았다는 건 굳이 정밀조사를 해볼 필요도 없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인데....전체 방출된 에너지에 비하면 작은 비율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승부의 갈림이 되었을 텐데요? 기술의 승부도 아니었고 이런 규모의 파워전 이었다면 다른 요소가 끼여들 틈이 없지 않습니까?" "역시 올림퍼스의 전술 사령관님 답군요. 그런 질문이라니....." 유신은 별 생각 없이 솔직한 감탄으로 한 말이지만 니케는 자존심이 꽤나 상했다. 명색이 신족임에도 눈앞의 작은 소년보다 (실제 나이는 많지만 신족의 기준으론 그렇게 많은편도 아니고, 외모는 더더욱 어려 보이니 말할 것도 없다.)전투력이나 전투경험등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고, 그것을 지적당한 것 같아 기분이 상한 것이다. 게다가 아직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올림퍼스를 대표하는 투신임에도 최전방이 아닌 보급선 차단 같은 후방지원을 맡은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는 벨제버브와의 싸움에서 봉인당한 선대의 니케를 구하지 못한 유신이 그 책임을 느끼고 그녀의 딸만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생각에서 취한 조치였지만, 그녀의 어머니를 이어 '승리의 여신'이라는 칭호까지 계승한 그녀로선 달가울 리 없었다. 선대의 니케는 무적의 그리폰전대를 이끌고 헬마스터중 하나인 벨제버브를 쓰러뜨린 올림퍼스 최고의 여전사라는 게 그녀를 더욱 조바심 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규모의 파워전에서 잔기술이 끼여들 여지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 도와주신 분이 많았습니다. 우선 카론의 브레스는 잔기술이라고 말할 수준은 결코 아니지요. 또 위시마스터께서도 아홉 분이나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루시퍼는..... 아니 루시펠님은 그다지 저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간단하게 말했지만 사실 그렇게 간단한 싸움은 아니었다. 카론은 무적의 육체에서 무한정 뽑아나오는 코어와 마나까지도 고갈될 정도의 브레스를 사용했고, 아홉명의 위시마스터는 그들의 뇌를 하나로 이어 정상적으로는 설혹 루시퍼라도 사용할 수 없는 12층의 적층형 입체구조 마법진을 만들어 궁극의 방어결계라는 신차원 결계보다도 3배는 더욱 견고한 허차원의 방어 결계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유신은 그녀의 신성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녀의 정신공간에 다이브한 후 정신력 싸움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카론은 두뇌체와 용심의 일부만을 제외하고는 3차장갑까지 완전 소멸하였고, 유신역시 육체를 구성하는 기본코어까지 끄집어 썼다. 이제 인간들의 힘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군요. 남은 올림퍼스의 A급 투신을 모두 모아봤자 유신과 용제를 쓰러뜨리지 못할 터이니....." "그럴리가요." 난처해진 유신이 얼버무려 봤지만, 뭔가 얼버무린 다든지, 딴청을 피우는 쪽으론 워낙 재주가 없는 그라 더욱 헤멜 뿐이었다. 그때 유신을 구한 것은 비상사태를 알리는 함 내 비상벨이었다. 약간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지나가자 입체스크린에 정비반의 모습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니케가 물어보자 황망한 표정의 한 정비원이 말했다. "그게 카론님이..... 직접스크린을 보시는게...." 잠시 후 스크린에 카론의 모습이 들어왔다. 카론은 어느새 건강해 졌는지 머리의 수염을 이용해 정비원 한명을 휘감아 올린체 희롱하고 있었다. 15~17세나 되었을까? 수염이라곤 해도 그 소녀의 허리둘레보다 두껍고, 용제의 힘을 생각한다면 그걸 그 소녀의 힘으로 푼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수염의 끝 부분을 얇게 펴 몇 개로 나눈 뒤 간지럼 피우거나 머리카락을 헤집기도 하고, 심지어 온 몸을 더듬는 등 음란한 짓거리도 서슴지 않았다. 짧게 자른 단발에 좀 커 보이는 헐렁한 작업복, 큰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은 소녀를 더욱 작고 애처롭게 보이게 했다. 소녀는 얼마나 울었는지 거의 탈진한 듯 반항도 못하고 있었다. "이야~~ 유신!! 등장했군. 어때 이 아이? 귀엽지? 예쁘지?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에 있지 뭐냐? 고것 참......맛있겠다. 프하하하" 유니콘은 처녀에게 순종하지만 용이 처녀를 좋아하는 건 그것과는 의미가 다르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며, 이 귀여운 소녀를 향해 군침을 흘리고 있는 게 난폭함과 욕망의 화신인 카론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걸 깨닫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소녀의 온 몸을 그 큰 혀로 다 핥아서 침칠을 한 것도 부족해 거의 입안에 넣고 있던 카론이 스크린에 나온 유신을 보자 신이 나서 놀려댔다. "웃기는 놈들이다. 용제의 몸을 수리하는데 이런 견습을 붙이다니.....계속 가 동면 상태로 있으려고 했는데 이놈이 수리한답시고 시신경을 자꾸 건드리잖아." "아.... 아니에요. 하..하악...신경위로 외부고정센서의 부.... 부품이 부서져 있어 떼어 내려면 .....아학...그...그 위를 들어내야 했다구요" 역시 올림퍼스의 엔지니어다. 나이도 어리고 뭐라 말할 상황이 아님에도 기술부분의 이야기가 나오자 할말은 한다. 하지만 이게 카론의 비위를 건드렸다. 만약 이 아이가 애처로울 정도로 조그마하지 않았다거나, 카론의 마음에 들만큼 예쁘지 않았다면 카론은 정말로 이 소녀를 '잡아먹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석을 좋아하는 용의 습성 때문인지 카론은 이상하리 만치 예쁘고 조그마한 것을 좋아한다. 문제는 나이가 너무 많아지고, 보물도 너무 많이 모아서 질려버린 카론은 그 관심을 편집증 적일 정도로 예쁜 인간, 또는 아인종에게 돌렸다는 것이다. "뭐야???? 이게 다치려고...(차마 조그만 계집애에게 죽이겠다는 협박을 하진 못했다.)벌로 이렇게 해줄까?" 강력한 브레스의 효율적인 집적과 사거리 향상을 위해 원래의 구조에서 상당히 개조되어 흉측한 모양으로 변한(그렇다고 개조 전에는 친근한 모양이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입안으로 그 정비원을 꿀꺽 집어삼켰다. 주변의 다른 정비사들과 연구원들은 거의 넋이 간 표정으로 감히 다가가지도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건 금발의 늘씬한 키에 사각안경이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의 여자였다. " 제린? ... 제린!.. 제리인!!!"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멍하니 보고만 있던 유신도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너.... 너...카론.... 이런 짓을 하다니 거기서 꼼짝 말고 있어라....텔레포트!!" 니케는 아직도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이 황당한 사건의 전개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사실 수많은 결계와 방어마법, 그리고 니케의 신성력이 구석구석 배어있는 이런 함내에서의 텔레포트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사념이 모이지 않을 뿐더러 좌표의 산출도 어렵고 텔레포트 방지용의 결계 때문에 공간이 미묘하게 비틀려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니케같은 1급투신의 경우 신성력이 워낙 강하여 다른 힘은 거부된다. 그러나 유신은 몇 번 와 본적조차 없는 이곳에서 탈진해 쓰러져 가는 몸으로 정확히 카론의 코앞에 텔레포트를 성공해 냈다. 물론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겠지만, 이런 위험을 감수해야 할 만큼 이번 사건은 외교적으로 커질 수 있는 문제이다. 국가 귀빈자격으로 다른 나라에 가서 그 주인 앞에서 하녀를 건드린 것보다 더한 꼴이다. 게다가 한참 승세인 유신이기에 더욱 조신할 필요가 있다. 이제 경쟁자가 없이 강해 졌다고 타 연합에 대해 건방져 졌다고 평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카론의 콧잔등에 선 유신이 주문 영창에 들어갔다. "새벽을 여는 희망의 빛이여. 내 남은 모든 희망을 바쳐 내 앞을 가로막는 적을 멸할 힘을 바라니....." 신성계열 최강의 주문인 자기희생주문이다. 애초 자존심이 강한 카론인지라 만약 유신이 다른 공격계 주문이나 코어를 이용한 공격을 하려 했다면 맏받아 쳤겠지만, 형체만 간신히 유지하는 몸으로 자기희생주문을 쓰는 유신을 보자 아주 이례적으로 한 걸음 후퇴했다. "우하핫.. 미안 미안 잡아먹지 않았으니 안심해" 뻔뻔스레 말하며 아가씨를 밷어 내는 카론이다. 소녀는 비록 침 범벅이 되고, 잡아먹힌 줄 안 쇼크로 의식이 없지만, 외상은 없었고 숨도 고르게 쉬었다. 슈퍼 스페셜 랭크의 유신, 용제, 1급투신인 니케에게 있어 코어와 마나의 힘을 느끼는 것은 숨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소녀가 무사하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텔레포트해온 니케역시 이 황당한 꼴을 보곤 그만 할말을 잃었다. 제린은 수석 연구원인 시리아의 양녀로, 어린 나이에 그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지금은 트라이엄프의 1급 정비사로 있었다. 천진하고 귀여운 용모와 늘 밝고 명랑한 분위기로 함 내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인 그녀가 이렇게 참담한 몰골로 뻗어 있자 가뜩이나 성질 급한 니케가 머리끝까지 열이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요......유신.....일단... 해명을 받아야.... 겠습니다." 당연히 말보다 주먹이 앞서고 싶은 니케지만, 이제 막 루시퍼와의 일전이 끝난 상태에서 또 다른 골칫거리를 만들 정도로 생각이 없는 그녀는 아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엉망진창의 성격파탄 용제라해도 1급신의 배에서 이런 추태라니... 하지만 카론은 뻔뻔스럽게 잘도 말했다. "됐다. 내가 해명하지. 이 웃기는 것들이 외장만 수리하랬더니 내 체세포까지 뜯어내 연구하려 들자나. 설마 용제 씩이나 되어서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도 모를 만큼 둔할 거라고 생각했나? 거기 네모 안경의 건방져 보이는 여자!!" 카론의 말에 일순 장내가 조용해 졌다. "그게 정말인가요 시리아? " 올림퍼스군의 핵심이던 그리폰전대 시절부터 수석 연구원이었던 시리아가 순간 움찔하며 변명했다. "아니.... 저는 다만 카론님의 빠른 치유와.... 혹시 루시퍼와의 싸움에서 뭔가에 오염되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집어치워라!! 난 용제다. 이미 육신의 재생은 끝났고, 설혹 루시펠님이었다 해도 내 몸에 무언가를 기생시키거나 오염시킬 수는 없어. 설마 올림퍼스의 연구원이란 게 용족에 대해 그 정도의 상식조차 없다고 변명할 셈인가?" "아니.... 저... 저는 다만... " 카론의 싸우는 모습이나 그가 여지것 저질러온 파멸의 역사를 알고 있는 올림퍼스인들로는 등골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앞뒤도 재지 않고, 무엇이든 마음내키는 대로 파괴하는 용족, 그것도 근 8000년간 용제로써 자신의 멋대로 살아온 카론의 공포는 악마군에게 뿐만 아니라 아군에게도 전설이다. 아마게돈이 일어나기 전에 이 건방진 용족을 토벌하기 위해 천사군은 몇 번의 토벌대를 조직했었지만, 그때마다 용족의 경이적인 전투능력과 투쟁력에 대해 데이타 베이스 작성을 새로 해야할 '정보'만을 얻었을 뿐, 용족에 대해선 거의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다행인 점은 그들은 명계에서 단지 자신들끼리 싸우거나 강해지기 위한 수련에만 전념할 뿐, 우주로의 진출은 꽤하지 않았다. 이들의 지상 최대의 과제는 강해지는 것뿐이며, 천족이 시비를 걸건, 마족이 시비를 걸건 상관치 않았다. 약하면 죽고 강하면 죽인다. 아주 단순 명쾌한 생활 원칙이다. 물론 쳐들어온 마족이나 신족이 터무니없이 강해서, 그들과 싸우는 것이 더욱 강해지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었다면, 우주의 역사는 용족의 우주 진출로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다들 그만둬 주세요. 아가씨는 무사하고, 카론의 세포는 카론의 사념에 직접 컨트롤 된는걸로 알고있는데.... 무슨 딴 마음으로 그랬다고는 생각할 수 없군요. 제가 정식으로 사과 드리겠습니다." 사실 그 아가씨는 어린 소녀 특유의 향기로운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기절에서 그대로 잠으로 이어진, 편안한 모습이었지만, 허연 카론의 침칠이 되어 있는 모습은 남자로 하여금 어떤 종류의 원초적인 분노를 끌어올리게 하는 것이라 유신으로선 사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신이 허리까지 숙여가며 깊이 사과를 해 일단 자리를 무마했다.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저 아가씨.... 많이 놀라셨을 텐데.... 그리고 카론! 니 몸의 모든 세포는 정신이 컨트롤하잖아. 떼어낸다 해도 니 허락이 없으면 연구조차 할 수 없다는 건 기술 쪽으로 문외한인 나조차 아는 사실이야." 정색을 하며 허리까지 굽혀가며 사과를 하는 유신을 보자 카론도 약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유신의 용신기가 되어 생각을 공유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둘은 이미 한몸(?)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의 생각을 잘 알 뿐 아니라, 둘도 없는 친구사이(물론 그 둘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간 브레스에 타죽거나, 코스믹 블래스터에 찢기겠지만...)이기 때문이다. "흥!! 그래!! 미안하다구!! 내가 잘못했어!!" 전혀 미안해 하는 태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용제의 사과를 받아 내었다. 아마 명왕계의 다른 용들이 본다면 입에 브레스를 물고 졸도할 일이지만 카론이 미안하다는 말을 한 것이다. 일이 이쯤 되니 니케도 더 할말이 없었다. 열 받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사과까지 들은 마당에 씨끄럽게 굴어봐야 자신만 바보가 될 뿐이란 건 아무리 어린 니케지만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어찌 되었던 실버스타군의 최대 군사비밀이자 힘의 상징인 카론을 혼란한 틈을 타 연구하려 했다는 건 신족의 프라이드에 굵은 줄이 세개쯤 가게 하기에 충분하리만큼 부끄런 일이다. 이 당혹스런 순간이 타개된 것은 실버스타군의 기함 디어사이더호의 갑작스런 출현 덕분이었다. 트라이엄프의 중력장 바로 옆에까지 배를 붙이는 갑작스런 급속 워프의 그 충격으로 디어사이더보다 약간 더 작은 크기의 트라이엄프는 5도가량 기울어져버릴 정도였다. 중력범위 넘어의 워프는 성계 연합법의 위반이다. 장거리 워프가 가능한 우주전함급의 대질량의 물체가 갑자기 주위에 나타나면 그 순간 주변 중력의 변화로 다른 함이 크게 흔들리거나 전자장비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다시 유신이 부하의 무례를 사과할 틈도 없이 용신화랑 No.5의 샤피가 단거리 워프로 카론이 난동을 부린 트라이엄프의 메인 팩토리로 들어 왔다. "유신전하, 카론폐하, 모두 무사하신 겁니까? 카론폐하의 코어반응이 급속도로 떨어진후 신호를 놓쳤는데..... ..... ..... 근데 ...... ..... ....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걸죽한 침범벅이 되어 기절해 있는 소녀와 험악한 분위기의 니케, 그리고 망연자실해 있는 주위사람들의 뭐라 형용하기 힘든 시선을 받으며 당혹스러움을 저만치 넘어서버린 침묵의 시간이 지나갔다. "........ 에........ 우선 사과부터 하는 게 어떤가? 여기는 1급신인 니케님의 기함인데 무단워프라니.... 그리고 나보다 니케님께 먼저 인사하는 것이 순서 아닌가?" 역시 이런 당황스런 상황에서도 먼저 이성을 찾고, 점잖게 꾸중을 하는 유신이다. 어쩌면 의외로 꽁하고 꽉막힌 성격일지도 모른다는.... "어??? 아!! 죄송합니다. 이런 결례를 ...... 상황이 너무 궁금해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예의를 중시하는 화랑단 중에서도 용신화랑의 칭호를 받은 샤란 페스비덴이지만, 놀라운 실력에 비해 경험이 적고, 유신을 너무 걱정한 나머지 황당한 추태를 보여버렸다. '유신이야 그렇다 쳐도.... 겨우 용신화랑중 5번째인 샤피까지 내 공간에서 이렇게 정확하게 워프해 내다니...... 과연 유신의 용신화랑.... 무시무시하구나.' 속으로는 식은땀이 다 날 정도로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 사과를 받았다. 사실 마왕군과의 전투가 사실상 종료된 상황에서 인류연합의 배가 아닌 신족의 배가 먼저 인류연합의 총 사령관을 발견하여 데려가 버렸으니 실버스타군의 입장으로썬, 충분히 난처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더구나 유신은 뒤에서 명령을 내리는 사령관이라기보단 선두에서 이끌어 가는 기전장군에 가까운 지휘를 해 왔고(실제로 홀리크로스의 기전장군이기도 하다) 인류연합으로썬 유신 자체가 그들의 무력을 대표한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한 유신이 타 군에 구출된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사태가 아니다. 어쨌든 우왕좌왕하며 어수선해지는 함내를 보자 짜증을 넘어서 어떤 무력감까지 밀려오는 니케다. 만신창이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유신이나 샤피를 보고 항의해봐야 짖어대느니만 못하다고 판단한 니케(카론에게 항의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비웃음 받아 마땅한 일이므로 고려대상에조차 들어가 잊지 않다.)는 이 달갑지 않은 손님들을 쫓아 냄으로써 이 사태를 해결하기로 맘을 먹었다. "괜.... 찮습니다. 유신의 소식이 궁금한건 당연했을 터이지요. 그럼 죄송하지만 다들 디어사이더호로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이곳의 상황수습도 해야 겠고.... 부하들이 카론님을 무서워 하고 있군요. 게다가..... 이정도의 코어스트림을 가진 분들이 함내에 많으면, 제 코어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익숙해져 있는 함내원들이나, 함 자체에도 좋지 않습니다. 무례하다 생각 마시고...."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카론의 외장수리나 제 기본코어를 모아주신 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한데..... 저희들도 부상이 심해서 코어의 컨트롤이 자꾸 흩어지는군요. 이만 저희 함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후에 정식으로 감사의 사절단과 오늘의 무례를 사과하는 사절을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오늘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찜찜한 기분을 어찌할 순 없었지만 끔찍스런 전쟁을 통해 배운 것이라면, 세상에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얘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그 해결책이 있다면 어떻게든 타개해 나가면 되고 없다면, 없다면 무시해 버리거나 포기해 버리는 것이 나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도 훨씬 좋다는 걸 깨달은 유신이다. 일종의 자포자기, 또는 무력감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태도를 놓고 그가 쌓아온 그 찬란한 승리의 역사에 비추어볼 때 지휘관으로써의 자질이 부족한 게 아니냐고 무책할 바보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고민을 하기보단 당장 해결해야할 훨씬 현실적이고도,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 홀리크로스의 총 사령관이자 바늘 들어갈 틈도 없이 깐깐하고 '완벽' 한 미카엘 총 사령관에게 전황보고를 해야 하고, 전쟁의 피해액과 유가족 보상문제부터, 부상이나 사망으로 공석이 되어버린 용신화랑의 편재, 함대의 재편과 남아있는 전력의 배치, 전쟁 전후로 신경을 전혀 못쓴 유인식민행성의 관리까지 생각만으로도 오한마저 일어나 버리는 일들이 쌓여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루시퍼와의 싸움으로 소모된 코어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기본적인 수련을 거를 수는 없었다. 전투이외에는 어설픈 점이 많고, 그런 주제에 남에게 자신의 일을 미루는 것도 싫어하는 유신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정말 곤란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힘든 전후 처리 문제가 남아 있다 해도 전쟁은 종결되었다. 루시펠을 자신의 손으로 봉인한 것이 못내 서운하기도 하지만 더 이상 아는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이런 골치 아픈 문제쯤 모두 잊어버릴 만큼 유신은 기뻤다. 천군의 사령부가 있는 아발론, 그 중에서도 1급 작전회의를 하거나 중요한 회의를 하는곳이 크로스 그랜디엄이다. 크로스 그랜디엄은 코어와 마나의 흐름을 억제하는 고정석을 쌓아서 만든 거대한 원형의 홀이다. 또한 다른 세계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하여 공간을 복잡하게 비틀어 놓았으며 십자가 같은 성물이 적절히 배치되어있어 영적으로 극도의 안정을 이룬 공간이다. 따라서 스파이를 투입하 는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고 탐지마법으로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는 건 불가능하다. 암습을 하려고 해도 억제된 마나나 코어를 강제로 돌리려면 그 주변 공간까지 말려 주변의 사람들도 크게 느낄수 있으므로, '몰래' 무언가를 작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 뜻이다. 대신 신차원의 가장 축복 받은 장소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신력은 크게 상승하고, 마나와 코어는 다운된다. 천족이 주축이된 성계대전의 작전회의를 진행한 곳이므로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안전한 장소인 것이다. 이러한 크로스 그랜디엄으로 미카엘 총 사령관의 소집명령이 떨어졌다. 인류연합 실버스타군의 대표인 유신, 천군의 대표인 4대 원소의 천사 중 성계대전에서 큰 부상을 입은 라파엘을 제외한 우리엘, 가브리엘, 미카엘이 참석하며, 올림퍼스에선 하데스와 니케, 아프로디테가 초대받았다. 미드갈드의 대표는 주신인 오딘이 직접 왔고, 미드갈드의 사령관인 토울과 참모인 프레야와 발키리의 대장인 하임달이 참석했다. 용족도 용제인 카론과 수행원 두명을 더 데려올 권한을 받았으나 귀찮다는 이유로,(물론 좋게 돌려서 표현했지만) 거절했고 마법계의 위시마스터 중에는 폴리나스와 샤를이 참가하는, 우주의 모든 지도자가 모인 프라임 미팅이 소집된 것이다. 사실 이번 전쟁의 주인공은 마왕 루시퍼를 쓰러뜨린 유신과 용제이지만, 아직 인류연합은 천족이나 신족에 비해 발언권도 작고, 신족이나 천족의 입장에서 본 인류는 그야말로 원시한 존재이기 때문에 유신만이 겨우 참가할 수 있었다. 프라임 미팅의 하루전, 이미 크로스그랜디엄에는 유신을 제외한 모든 멤버가 모여 있었다. 천족이나 신족들의 표정은 비교적 상쾌했지만, 위시마스터들에겐 그다지 유쾌한 자리가 아니었다. 모여있는 멤버들의 기운이 너무 강하였고, 크로스그랜디엄 자체가 마나를 억제하기에, 마나에 몸을 맡긴 위시마스터들이 달가울 리 없었다. "유신보다 하루 앞서 여러분을 소집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앞으로 유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하기 위해서입니다." 미카엘이 거두절미하고, 가장 피하고 싶은 화재이지만, 반드시 논의되어야 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 역시 이런 역할이 달가울 리 없지만, 홀리크로스의 총 사령관인 책임도 있고, 남에게 강요하기 싫은 일은 자신이 자진해서 하는 타입이라 이런 역할을 떠맡았다. 그러한 미카엘인 만큼, 남에게 희생을 강요할 때도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무리해서라도 얻어내는 것이다. 물론 그런 뒤론 혼자 괴로워하며 마음 아파 하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성격인 만큼, 오해를 사는 일도 종종 있다. "마왕이 없는 지금 명실공히 우주 최강은 유신과 용제인 카론입니다. 용족이야 수 차례의 토벌 전을 통해 얻은 결론으로 '건드리지 않으면'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유신의 위험성은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비록 용제와 위시마스터들이 도와주었다고는 해도 마왕을 쓰러뜨린 게 유신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천군의 천사장급이나 올림퍼스의 신족, 미드갈드의 신족전부가 해내지 못한 일을 인간은 단 20년만에 끝내버렸습니다." 인간은 번식력이 왕성하고 욕심과 야망이 큰 반면 정신적인 성숙은 더딘 종족이다. 우주의 창조이래 계속 이를 관리해 오던 신족들로선 이러한 위험한 종족이 우주의 중심으로 진출하는 게 달가울 리 없다. 이미 컨트롤이 불가능한 용족이 있는 상황에서 인류마저 그들의 손을 벗어나는 건 우주의 다른 종족을 위해서도 좋지 않기 때문이다. 용족은 우주로 진출하는데 관심이 없고, 주작이나 백호등 다른 초신수의 힘을 빌리면 어떻게든 통제가 가능하겠지만, 성계대전에서 보여준 인간의 폭발력을 보건데 컨트롤이나 통제 어쩌구 할 상황이 아니다. 단명하는 생명인 만큼 무엇이든 빨리빨리 해치우고, 무언가 살아있을 때 이루어내기 위해 악을 쓰는 인간의 치열함은 영생하는 신족이나 천족, 용족들로써는 따라가기 힘든 대단한 속도감이 있다. "유신이 그렇게 위험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계대전에서 그는 항상 희생적으로 싸웠고, 아리엘에게도 누구보다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욕심이 많은 것도 아니고 다른 신족들과도 우호적인 교류를 나누기 위해 애쓰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인류 연합은 유신과 아리엘을 중심으로 그 어느 때보다 단결한 상황인데 굳이 벌집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어쩌면 용족 토벌 때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지 모르니 좀더 두고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평소 유신과 사이가 좋을 뿐더러(사실 유신이 일방적으로 좋아한다. 아마 그가 인류를 대표하는 몸만 아니었다면 템플러들이 아리엘에게 맹신하듯 유신도 가브리엘 개인의 광신도가 되었을 것이다.) 창세전쟁때 벨제버브군에게 잡혀 온갖 차욕을 당하던 그녀를 게헨나까지 단신으로 돌입해 구해온 것이 2대째 유신이었다. 비록 지브릴이 유신에게 마음을 허락한 것은 아니지만, 친동생처럼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종족이 늘 올바르고 현명하게 행동하는 종족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신족은 인격이 한번 완성되면 후에 변하는 일이 없지만, 인간은 그 짧은 생애에도 몇 번씩이나 바뀌게 됩니다. 천족 만큼이나 순수한 영혼을 지닌 인간이 악마보다 더욱 사악해 지는 예를 수도 없이 봐 왔지 않습니까? 주위의 감언이설이나 사소한 오해로도 사리분별이 없어지는 인간은 너무 위험합니다. 특히 모호하고 불명확한 감성을 바탕으로 중요한 일마저 처리해 버리는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는 게 가장 큰 골칫거리입니다." 홀리크로스의 기전장군의 자리를 놓고 유신과 경쟁하다 결국 유신에게 기전장군의 자리를 내준 미드갈드의 토울이 유신과 인류의 문제점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했다. 유신과 용제의 등장전까진 홀리크로스 최강의 전력이었던 만큼 자신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잘 알고 있고, 그러한 자신보다도 강력한 유신의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지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 유신은 예의바르고 좋은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비록 유신의 구출과정에서 꽤나 험한 꼴을 당한 니케지만, 자신보다 홀리크로스에서의 지휘권은 위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깨끗이 예의를 지키고 거만해 하지 않는 유신에게서 호감과 약간의 감동마저 느꼈기에 미약하게나마 유신의 편을 들었다. 게다가 전대의 니케, 즉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유신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 어린 신족은 유신을 라이벌이자 자신이 뭔가 빚을 갚아야할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6대째 유신의 .......주기...... 끝나가고 있다......얼마 안 남은..... 100년도 채...편안한 삶을...창조의 힘이 없는 인간....한계가 있다 .... 전사에겐 약속된 휴식이.... 유신에겐 자격이....... 있다." 창조의 힘을 허락 받은 몇 안 되는 최 고위급신중 한 명인 미드가르드의 최 장로인 오딘이 힘겹게 말했다. 계속된 미드갈드군의 열세로 최고신인 오딘까지 전장에 나와야 했던 만큼 미드갈드는 이미 붕괴에 다름없는 타격을 입었다. 오딘은 창조신의 한 명이지만 투신계열은 아니기에 무리한 전투로 이미 큰 부상이 겹쳐 말하는 것도 힘에 겨울 정도이다. 그러한 오딘이 이런 회의에 참가한다는 것 자체가 이 회의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때 우주 최강의 세력 중 하나였던 미드갈드의 황혼을 보며 장내는 숙연해졌다. "비겁하지만 할 수 없습니다. 내일 유신이 이곳으로 오면 그의 모든 힘을 봉인하고 위시마스터들께서 관리하는 마법계로 보내겠습니다. 전 우주의 축소판이니 유신도 남은 생을 보내기에 불만은 없을 것입니다." 역시 괴로운 결정을 떠 맡은건 미카엘이다. 가브리엘과 하데스등이 강력히 반대하며 좀더 두고보자는 의견을 내었지만 결국 봉인시키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침울한 분위기로 가장 빛나야 할 장소인 크로스그랜디엄은 스멀스멀 기분 나쁜 배신이라는 이름의 늪 속으로 침전하였다. "이곳에 들어가기 전에 무장을 해재해 주십시오." 크로스그랜디엄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두명의 역천사가 유신의 앞을 가로막으며 약간 고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천족이란게 워낙 예쁘고 목소리도 미성이라 고압적인 목소리라고 해봐야 약간 톤이 높은 미성이지만, 어쨌든 가드를 하고 있는 이 역천사들은 상당히 위협적인 투로 우주 최강의 무사인 유신을 윽박질렀다는데서 만족감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절반이상 힘을 되찾은 유신이라면 허리에찬 평범한 칼을 무심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이 아름다운 생명체를 '아름다웠던' 생명체, 또는 시체라고 표현되는 고깃덩어리로 바꾸어 버릴 수 있겠지만, 약간 두려운 듯한 표정으로 무장을 해제함으로써 두 천사를 기쁘게 만들었다. 하지만 마왕이 봉인되어 있는, 최강의 빛의 검에서 이제는 최악의 마검이 되어버린 코스믹 블래스터를 건넬 때는 유신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장해제는 하겠지만...... 부탁컨대 이 검은 칼에는 손대지 말아 주십시오. 아직 루시퍼의 사기가 완전히 가라앉질 않아서 잘못하면 영혼을 빼앗깁니다." 간단한 부유마법으로 역천사들의 앞에 코스믹 블래스터를 띄어 놓은 뒤 유신이 말했다. 단지 유신의 손을 떠난 것만으로 가장 밝은 크로스 그랜디엄에서도 불길한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코스믹블래스터를 보며 그제야 역천사들도 창백한 표정이 되었다. 사실 유신의 외모로 보건데 워낙 귀여운 얼굴에 유약해 보이는 체구라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깔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외모는 유신의 컴플랙스이자 현실적으로도 남의 신용을 얻어내는데 상당한 문제점이 있으므로(특히 군인과 같은 경우에는 더욱더...) 사춘기때 이마에 보송보송 피어나는 여드름처럼 고민덩어리였다. 혹시 천계에서 유신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정보부의 조심스런 의견이 있었지만, 유신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우기며 변변한 무장조차 갖추지 않고 이곳까지 왔다. '첨예'라고 이름지은 화랑단 전원에게 지급되는 동방도 한자루와 아직 남의 손에 맡길 수가 없어서 직접 들고 다녀야만 하는 코스믹블래스터가 들고있는 무장의 전부였다. 물론 첨예도 보급품이라곤 해도 용신기의 외장갑을 만들 때 쓰는 강화 드래곤 본으로 만든, 대마족전용검이고, 코스믹블래스터의 위력은 루시퍼를 봉인한후 더욱 강대해진 것도 사실이다. 다만 마검이 된 것이 문제지만....... 하지만 유신은 기본적인 공간 바리어나 결계용 옵션도 지니지 않았다. '휘~~유~~ 역시 천사들...... 정말 예쁘구나.....틀림없이 눈 두개, 코는 하나, 입도 하나인데 왜 이렇게 다를까.... 약간의 배치와 크기의 조정만으로도 타 종족과는 이렇게 다르다니..... 우주의 신비는 천족의 얼굴을 고찰해보면 알 수 있을거야....' 별 시답지 않은 생각을 두서 없이 떠올리며 신차원을 통해 크로스그랜디엄에 도착했다. "인간연합 용신화랑단장 유신 더 실버스타가 미카엘님과 오딘님을 뵙습니다." 창조신의 한명인 오딘의 위치가 훨씬 높지만, 홀리크로스의 총사령관이었던 미카엘에게 먼저 예의를 표했다. "어서 오십시오. 몸은 다 회복되었는지요?" "예. 염려해 주신 덕분으로......" 사실 그동안의 밀린 일들을 처리하느라 아직 반도 채 회복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아직 피곤하니 귀찮게 굴지 마세요' 라고 할 수는 없는일 아닌가? "잠시 성계구위에 서 주시겠습니까? 알아볼 것이 있습니다." 홀의 중앙에 있는 은은한 푸른빛이 도는 2m 정도 크기의 원형돌을 가르키며 미카엘이 말했다. 그 원형 돌은 보통 결계용이나 신성력 증폭용으로 쓰는 성령석을 깎아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사용하기에 따라선 좋은 매직아이템이 될 수도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마나와 코어의 흐름이 고정되거나 최악의 경우 폭주하여 자폭할 수도 있는 위험한 물건이다. 계속 침통한 표정의 가브리엘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워낙 음모나 모략 쪽으론 둔한 유신이라 별 생각 없이 성계구 위에 섰다. 오랜만에 보는 아름다운 지브릴의 모습이 어두운 것이 섭섭할 뿐, 현재 유신의 머릿속은 마왕과의 싸움에서 마왕의 잔재가 자신에게 기생한 것은 아닌지 알아보려는 것이겠거니 라고만 생각하는, 비 구체적이고 모호한, 한마디로 흐리멍덩한 상태였다. 피곤이 쌓인 것도 그 원인이겠지만, 아마도 지브릴 앞이기 때문이리라. 별 의심 없이 성계구 위에 서자 그를 둘러싼 12명의 영압이 상승했다. 이쯤되면 아무리 둔한 유신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못챌리 없다. 막 지브릴에게 무슨 말이든 하려던 순간 미카엘의 신성주문의 영창이 끝났다. "자유를 구속하는 불꽃의 족쇄여. 영광스런 신의 의지에 따라 내 앞에선 자의 의지를 구속하라." 이어서 토울과 아프로디테등의 주문도 끝났다. "마나의 힘을 무디게, 고정된 코어는 육신의 짐이 될지어니......" "크...... 크아아악" 유신처럼 1급투신이상의 전투력을 가진 존재들은 코어의 흐름이 활발하다못해 매우 거칠고 거세다. 이것을 봉인이라는 형태로 강제로 막는다면 흐르는 강물을 강제로 막았을 때처럼 주위에 풍파를 일으키며 흘러 넘치게 된다. 이러한 풍파를 받아내는 것이 육체이고, 이 육체가 버텨내지 못할 경우 죽을수도 있으며, 버텨낸다 하더라도 그 고통은 일곱 번째 척추뼈를 생으로 빼내는 것보다 훨씬 처참할 것이다. 하지만 유신도 운으로 루시퍼를 쓰러뜨린 것은 아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억지로 고정된 코어를 가속시키며 대항하기 시작했다. 코어의 흐름이 막힌 곳에선 피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며 몸을 부셔버렸지만, 그럭저럭 간신히 육신을 컨트롤 할 수 있게 되었다. 크로스그랜디엄의 성계구 위에서 기선을 제압 당한데다, 힘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유신이 이정도로까지 반항을 하자 오히려 미카엘을 비롯한 다른 신족들이 질려버리고 말았다. 곳이어 주저하던 다른 신들도 각자 자신이 맡은 봉인의 역할에 따라 유신을 옥죄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유신을 너무 얕보았다. 용신기의 등장이후 고위 신족들은 하급 마족만 상대하고, 헬마스터와의 싸움은 용신기와 용신화랑에게 맡겨둔 채 전투에 대한 감각이 떨어졌기 때문일까? 마왕을 쓰러뜨렸을 때처럼 주위의 신력조차 흡수해 자신의 힘으로 바꾸어 나가는 유신에게 다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하나의 세계를 이끌어 나가는 신족들이 12명이나 모였음에도 유신하나와 팽팽한 대결이 되었다. 사실 루시퍼와의 싸움에서 유신의 전투력은 몇 단계나 상승해 있었기 때문에, 신들이 계산했던 전투능력의 산정치를 훨씬 웃돌고 있는 것도 팽팽한 대결이 되는 이유중 하나였다. '루시퍼 이상의 괴물이로구나...... 12명의 1급 신급의 신력을 대등하게 받아 내다니.....' 아직 이 싸움에 끼어 들지 않은 것은 가브리엘뿐이다. "유신...... 어떻게......" 엉망이된 몸과 마음 속에서도 지브릴의 한마디가 귀에 닿자 차츰 이성을 되찾아가는 유신이다. 그러자 조금씩 전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전투경험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절대 무리한 싸움은 벌여보지 않은 신족으로선 인간의 이러한 무시무시한 투쟁력에 대한 대책이 있을 리 없다. 늘 불리한 싸움을 강요받았고, 절대 질 수 없는 극한상황에서 작전을 전개하여 승리를 쌓아온 유신이다. 루시퍼의 12사도와도 싸워봤고, 카론의 용신화랑이 되기 위해 그와도 싸웠다. 아스모데우스와의 혈전도, 루시퍼의 봉인도 어느것 하나 유신에게 승산이 있었던 싸움 따윈 아니었다. 토울의 강한 신성력의 흐름을 교묘히 비틀어 상대적으로 상성이 안 좋고, 가장 약한 위시마스터들의 힘에 녹여버리자 신족들의 조임에 한순간의 틈이 났다. 정말 작은 틈이었지만 유신에겐 그 시간으로 충분했다. "영혼에 맺어진 푸른 운명의 실을 당겨 나의 반을 부르노니, 나의 곁에서 적을 쳐라 코스믹블래스터여!!" '크읔...... 너무 방심했구나...... 가브리엘이 망설이는 바람에....이젠 어쩐다.....' 미카엘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코스믹 블래스터를 든 유신은 설혹 미카엘이나 토울이라도 이길 수 없다. 게다가 이런 열명도 넘는 1급 투신이 크로스 그랜디엄에서 난동을 부리며 드잡이질(?)을 한다면, 천계에 전체에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 예측 불가능이다. "학..... 학..... 하악 지브릴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요?" 지브릴이란 애칭은 유신과 단 둘이 있을때나 아주 친한 측근끼리 있을 때 정감어리게 가브리엘을 부르는 호칭이다. 천계의 다른 신들이 있는 이곳에서 부를 수 있는 호칭은 아니지만, 제정신이 아닌 유신에겐 그런 것을 따질 여유따윈 없었다. "유신, 이제 당신의 존재는 너무 위험합니다. 실제로 우리 전부보다도 강하다는 것이 방금 증명 되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군요." 사실 니케나 하데스등은 유신에게 호의적이었지만, 방금의 싸움으로 그들 역시 유신의 위험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 루시펠이 마신 수르투르를 쓰러뜨린 뒤, 빛을 등지고 마신이 되었던 것처럼, 유신 역시 어둠에 떨어지는 일이 발생한다면, 아마게돈 이상의 힘든 싸움이 벌어질 것은 뻔한 일이다. "하..... 하지만 지브릴님은 힘을 쓰지 않았잖아요. 지브릴님께서 힘을 쓰셨다면 아무리 저라도 봉인당했을 텐데......" "글쎄요. 별로 자신이 없군요. 하지만 이곳에 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유신의 편은 아닌 겁니다.....편이라..... 글쎄요? 약간 다르지만...... 인간의 언어로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군요. 설득? 그래요, 미카엘님에게 설득당했다는 표현이 더 적당하겠군요." 가브리엘은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언어를 골라가며 정확한 표현을 하고자 애썼다. "유신. 어쩌면 이런 상황이 강제 봉인보다 나을 수도 있겠군요. 모두를 대신해서 제가 부탁드리겠습니다. 힘을 봉인해 주십시오. 그리고 마법계에서 남은 삶을 보내세요. 제발 검을 거두십시오. 미카엘님도 계시고, 오딘님도 있습니다. 유신이 지금 힘을 포기한다면 인류에겐 문화적으로나 과학 기술적인 면으로 지원해 줄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제 유신도 쉴 때가 되었습니다." "그...... 그런...... 왜 지브릴님이 그런 말씀을...... 전 잘못한 게 없어요. 아직 해야할 일도 많고...." 멍청한 대답이란 건 유신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가브리엘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또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 진심으로 충고하는 고마운 마음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여기서 반항을 해봐야 천족과 신족을 상대로 전면전이 남아있을 뿐이다. 또다시 전쟁을 벌여봐야 이번엔 무엇을 위해서란 말인가? 성계대전때처럼 전 인류와 우주의 생존을 위해서라는 대의 명분도 없이 단지 자신이 욕심을 위해서 전쟁을 택할 순 없는 노릇이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일까? 수많은 전우가, 친구가, 부하가 죽어갔다. 무엇보다 루시펠 님마저 자신의 손으로 봉인시켰다. 보다 발전된 미래를 위해, 인류를 위해 우주를 위해, 행복을 위해.......절대로 그 결과가 또다시 전쟁으로 이어지게 할 순 없다. 유신은 서서히 코스믹 블래스터를 떨구었다. 시간이 신보다 감히 공평하다 할 수 있는 점은, 싫은 일도, 기쁜 일도 그 속에서 점점 바래어져가 최종적으로는 추억이라는 형태로 가슴속에 남는 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간의 축복이자 저주를 받은 존재는 유한한 인간과 단명하는 다른 지성체들 뿐이지만...... 프람임 미팅이 끝나고 수일이 흘러갔다. 영원을 사는 신에게는 인간처럼 시간이라는 개념이 절박하지 않기 때문에 유신을 봉인했을뿐, 언제 마법계로 떠나라거나 하는등의 구체적인 지시는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뒷정리할 시간은 번 셈이다. 지구를 비롯해 인류연합의 지배권 내에선 아직도 산발적인 마족의 저항이 남아 있고, 전쟁이 끝난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화가 어지럽기 때문에 계엄령도 해지되지 않은 상태이다. 할 일은 말그대로 태산맣큼 쌓여 있는 것이다. 유신은 전쟁이 끝난뒤 처음으로 용신화랑과 기타 인류연합의 수뇌들을 집합시켰다. 중대발표가 있다고 해서 거동 가능한 용신화랑 전 멤버와 과학부장인 카린, 성기사단장(로드 오브 팰러딘), 아리엘 친위대장(로드 오브 나이트 템플러), 중앙기사단장까지 인류연합을 이끌어가고 있는 전 멤버가 모인 것이다. 비공식 모임이라 다들 간편한 복장으로 유신의 취향에 맞는, 결코 화려하지 않은 연회석으로 제 시간보다 다들 일찍 모였다. 견원지간으로 유명한 성기사단장과 친위대장까지 왁자하게 승리를 자축하는 말을 나눌만큼 좋은 분위기에서 유신이 단상위에 섰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이제 인류연합도 한걸음 더 내딛을 수 있게 되었군요. 하지만 좀 늦은감이 있는 파틴데요. 하하하" "훌륭한 작전 지휘였습니다. 유신사령관. 인류의 자랑입니다." 비공식적인 자리고, 다들 생사를 같이 하면서, 허물없이 친하게 지낸터라 유신이 단상위에 섰는데도 잡담이 오가며 떠들썩 한것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여러분을 소집한 것은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자축파티의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다 중대한 발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울리지 않게 굳은 얼굴을 한 유신을 보고 장내가 술렁였다. 특히 용신화랑처럼 한칼하는 멤버들은 처음 유신이 들어올때부터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유신의 기본코어의 흐름이 아주 미약하게 밖에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자리에서야 당연히 예의상 힘을 개방하진 않지만, 이렇게 기본 코어의 흐름까지 막지는 않는다. "저어.... 유신.... 무슨일이십니까? 굉장히 않 좋아 보이시는데..... 무슨 부상이라도......? 그리고 말씀 낮추어 주십시오. 공식석상도 아닌데...... 존대말이라니....... 유신오늘 좀 이상합니다." 과학부장인 카린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과학부장이자 최초의 용신기인 카론을 제작한 카린은, 유신의 양녀이기도 하다. 100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크놈의 시라스 행성 침공때, 시라스의 지원을 위해 해병대(그때까진 아직 기사단이나 화랑단이 정식으로 발족한 것이 아니었다.)의 기습적인 크놈행성 강습이 있었다. 처음에는 압도적인 과학력과 마법력으로 크놈의 침공쯤 별 대수롭니 않게 여긴 시라스측이었지만, 계속되는 물량공세와 마왕군으로부터 암암리에 지원을 받은 크놈앞에 마침내 행성내 전투까지 치닫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다. 특히 크놈에선 시라스의 어린 아이들을 납치해가 크놈을 위한 무기연구원으로 키울 계획을 세웠는데(우주전쟁은 1~2년에 결판나는 것이 아니라 100년이상가는 경우도 있으므로, 장기적인 계획도 필요한 것이다.), 해병대의 강습목표가 이 아이들의 구출이었다. 일명 슈퍼브레인이라고 칭해진 이 아이들중 유신의 지휘하에 있던 팀에서 구출해낸 것이 First라고 불릴 정도로 최고의 두뇌였던 시피네였다. 후에 시피네는 카론과 만난후 카론에게서 카린이라는 애칭을 받고, 카론은 시피네의 수호용이 된다. 욕망의 화신이자 제멋대로인 카론이 수호용인만큼 카린의 고생도 심했지만, 이런 엉망진창 용제를 수호용으로 둘 할 만큼, 아름답고 현명한 카린이다. 시라스인의 특성상 노화가 없기 때문에,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미모는 전혀 바라지 않아서 과학부의 꽃이자 유신의 즐거운 골칫거리기도 하다. 예뻐질 가능성이 있는 아이를 데려와 먹기좋게(?) 키운거라는, 좀 무례하고 음탕스런(?) 농담을 들을때마다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당황해 하는 유신은 정말 좋은 놀림거리이기 때문이다.(실제 카린은 유신이라면 그래도 좋다는 제스추어를 취해 유신을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었다.) 유신과는 오누이처럼 보일 정도로 다정하고 사이가 좋았지만, 카린이 성장함에 따라 점점 주위의 시선이 야릇해 지자 유신이 집을 나왔다.(카린에게 나가라고 할만한 배짱이 없는 유신.......자기가 나갔다......) 어쨌든 카린에게 유신은 연인이자 친구이자 부모였다. 어려워 하면서도 그를 따르고 걱정하는건 당연하다. "카린, 그리고 여기모인 여러분, 지금부터 설명할 터이니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역기모인 분들 정도라면 제 몸에 이상이 있다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요? 저는 이제 실버스타란 칭호와 전군총사령관직을 아리엘님께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모든 힘을 봉인당했습니다." "그런 도데체 누가...... " "잠시만.... 잠시만 조용히 해 주세요. 이제 설면할 터이니...... 우선 제 힘을 봉인한 것은 미카엘님을 비롯한......." 유신은 크로스그랜디엄에서 있던 일을 조용히 이어갔다. 용신화랑들은 침묵으로써 그들의 분노를 표했고, 그들만큼 감정의 제어가 완벽하지 못한 카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평소 그녀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거리며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렸다. "그런...... 도데체 누가..... " "카린, 잠시만 조용히 해 줄래?.......흠, 우리는 인류의 생존과 더 낳은 모습의 미래를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마왕군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 발전한 모습의 모델이 신족과 천족입니다. 마왕을 봉인한 지금 제 힘이 봉인당한 것에 대해선 특별히 미련 따위는 없습니다. 제 정신의 주기도 얼마 남지 않았고, 유신이란 이름값은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신족과 천족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래서 남는 것이 있을까요? 이미 계속된 마족과 크놈과의 전쟁으로 국민들의 생활은 피폐해져 있습니다. 인구도 많이 줄었고...... 저 하나 봉인당하면 끝날 것을 인류 전체를 끌어들이는 죄를 범하고 싶지는 않군요. 국민들에게도 저같이 싸움밖에 모르는 군인보다는 좀더 제대로 아리엘 님을 보좌할 수 있는 정치가가 필요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지금까진 전시라 제가 제법 쓸모가 있었겠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평화시기에 맞게 군인들은 일선에서 떠날때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그렇게 남의 일처럼 말하지요? 이건 남의 일이 아니라 유신의 일입니다. 유신은 인류 전체의 힘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모두를 대표하는......." 여기까진 말한 카린은 유신의 눈을 한번 처다보고, 다시 장내를 한번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떠들어 봐야 해결책이 없군요. 유신이 뭐라고 하시든 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과학부의, 아니 인류 전체의 명예를 걸고라도 반드시 유신의 몸에 걸린 봉인을 풀어낼 방법을 찾겠습니다." 그리고는 카린은 이야기들을 시간도 아깝다는 듯 벌떡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잠시 따라 나갈 듯 망설이던 유신이었지만, 포기하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미카엘님께서 앞으로 인간과의 문화적 교류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수준높은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류의 발전을 몇 배나 앞당길 것입니다. 당연히 인류의 자치와 독립도 약속해 주셨고......" "흥, 여럿이서 한명을, 그것도 무방비인 사람을 암습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약속을 지킬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군요." 용신화랑중 가장 나이가 어린 샤피도 더는 참지 못하고 발끈하며 말했다. "샤피...... 제발..... 그들을 인간의 기준으로 보진 말아. 너두 지브릴님을 뵌 적이 있잖아. 약속은 반드시 지키실 거야. 물론 용신기의 제작 같은 초 병기의 생산은 제약을 받겠지만, 마왕군이 없는 지금, 현재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용신기 만으로도 인류는 다른 어떤 연합보다도 강력한 무력을 지니고 있는게 사실이고, 용신기의 제작에 들어가는 돈과 인력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그 비용을 전쟁으로 황폐해진 민간부분으로 돌리는 것이 훨씬 나아." 개선 파티를 기대하며 즐거운 하루를 확신했던 모두는 뜻밖의 사태에 침울하고도 미래에 대한 의심을 부둥켜 않고 고민 해야하는 당혹스런 저녁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유신이 마법계로 떠나는 당일. 소지품으론 첨예와 친한 사람들의 소중한 영상이 담겨있는 메모리얼 팬던트(일종의 초소형 영상재생기)가 전부이다. 유신은 코스믹 브래스터를 쓰기 시작한 이후 검신만 2m가 넘는 대형 검에 익숙해져 버렸지만, 지금처럼 코어가 고정되어 버린 상태에선, 큰 칼은 오히려 빠른 스피드를 줄이는 약점이 될 뿐이다. 그럴바엔 차라리 가벼운 쌍검을 쓰는 것이 공격과 수비에서 훨씬 안정적이기 때문에 첨예만 두자루를 챙겼다. 봉인되었다고는 해도, 천재적인 전투센스나 발군의 검술로 볼 때 마법계에서 유신의 생명이 위협받을 일은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기에 특별한 무장은 하지 않았다. 코스믹 블래스터는 모든 힘을 봉인당한 유신이 만질수 있는 물건이 아니므로 샤피에게 맏겼다. 마법계로 가는 차원이동용의 게이트를 열기 위해 3명의 마스터급 마법사와 한명의 고위급 신관이 유신 일행을 따라 왔다. 마중나온 용신화랑들과 평소 친하게 지낸 얼굴들을 보자 정이 많은 유신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카린이 단단히 삐진 모양이군. 설마 마중도 않나올줄은......" "카린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건 아닙니다. 굳이 떠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가요? 이곳에서 살아도....... 시간의 개념이 없는 신족이 겨우 백년남아밖에 남아있지 않은 유신의 주기를 가지고 트집잡을 것 같지는 않은데..... 설마 시비를 건다고 해도 이야기가 본격화 되려면 최소 20-30년은 걸릴 것이고...... 그때까진 무슨 수가 나도 수 백번도 더 날 것인데......" "샤피...... 하지만 단순이 그런 문제는 아니야. 알잖아...... 머리가 두 개 일순 없다는 것.... 물러날 사람은 물러나야 다음 정권이 체제를 잡을 수 있어. 힘을 잃은 이상 난 화랑단에 있어봐야 짐이 될 뿐이야. 그리고 다른 기사단장이나 화랑단장도 곤란할 것이고..... 인류연합이 강력한건 명령체계가 확실하기 때문이 아닌가? 지금 나 때문에 그런 전통이 흔들린다면 내가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그나저나 카린녀석 끝까지 않오는군. 이래서 딸자식d은 키워봐야 소용이 없다니까. "유신 그말은 취소해야 겠는데요? 지금 오는 것 같습니다." 잠시후 멀리서 카린의 에어카가 날아오는게 어렴풋이 보였다. '에휴...... 에어카의 비행음은커녕 카린의 코어도 느낄수가 없구나......생각보다 많이 불편하군.... 불안하기도 하고.....' 유신정도의 능력자가 그 능력을 한꺼번에 잃어버린다면 그 불편함은 일반인이 장님에 귀머거리가 되는것보다 훨씬 더할 것이다. 오감 전체를 넓게 펼쳐서 주변의 세상을 파악하던 유신이었으니, 힘이 봉인당한 지금은 보이지 않는 유리벽속에 가친 것처럼 답답하고 불편했다. 추락하듯 착륙한 에어카에서 , 그보다 몇배나 거칠게 거의 굴러 떨어지듯 카린이 뛰어 내렸다. 단 한번도 이렇게 서두르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 카린이라, 유신을 제외하곤 모두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유신~~ 유신~~ 아직 않 갔지요? 다행이다아..." "그럼. 예쁜딸년 얼굴도 않 보구 어떻게 가겠니?" 아직도 자신을 '여자'가 아닌 딸로써 보는 유신을 볼때면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카린이지만 어떻게도 마음을 전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전하기는 했어도 그걸 유신이 제대로 이해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지브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으므로...... 단지 유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밖에...... "잠시만요, 여기에 준비해온 것이 있으니 가져가요. 이건 카론님의 본체에 있는 송곳니를 조금 떼어서 만든 용검(카론의 본체는 송곳니의 길이만 100m를 넘는다.). 가볍고 마력도 엄청나요. 카론님이 괜히 용제는 아니더라고요. 마법계에서 사용 가능한 평면 마법중 유용할만한 것들을 넣었으니 나중에 써 봐요. 이건 통신번역기. 여기를 누르면 콘트롤 창이 나오고, 이렇게 메뉴를 바꾸면 고대 엘프어부터 오우거의 언어까지 마법계에 있는 모든 지성체의 언어를 프로그램 했어요. 이건 중력캐논포. 별로 쓸일은 없겠지만, 일단 여기에 돌맹이나 아무 단단한 것을 넣고, 여길 누르면, 내용물을 초속 1200m정도의 속도로 발사해요. 마법계에서 광학병기의 사용은 성계법 위반일테고, 탄환을 발사하는건 탄약이 떨어지면 무용지물이니, 좀 조잡하더라도 중력 캐논포를 준비했습니다. 이건 고속이동용 부스터, 이건 마나 측정기, 그리구 아머형 안드로이드도 하나, 또........" 카린이 정신 없이 설명하며 요 며칠간 과학부의 불쌍한 연구원들을 밤샘시켜 만들었을것이 분명한 잡동사니(?)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가만히 듣고있던 유신은 조심스레 다가가 카린을 안았다. "카린...... 고마워. 하지만 이런건 됐어. 이제 싸움같은건 하지 않아." 일순 카린이 움찔 하더니 작게 떨었다. "..........이건 유신이 평소 즐겨듯던 음악을 녹음해 놓은 뮤직박스, 만능 공구 세트, 그리고 이건 제가 만든 도시락, 또........" 카린은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면서도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평소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던 그녀로선 눈물이 흐를만큼 흩트러진 자신이 낯설어, 지금 아무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무너질것만 같았다. 유신과 마지막이 될 순간에 그런 모습을 보여주긴 싫었다. 분가한 후론 단 한번도 카린을 안아주지 않은 유신이다. 여전히 변치 않고 따듯한 카린의 체온을 느껴졌다. '사실 변한 것은 별로 없구나. 나는 지금까지 무었을 한 것일까..... 거창하게 마왕군과 전쟁을 벌여 왔지만..... 그래도 이런 따뜻함을 지킨 것 만으로도 헛되지는 않았던 것일까.....' ".......이건 마나저장석이고 이건 정령의 반지, 이게 결계석, 이건 발화석이고.........." 카린의 설명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듯 싶었다. 아마 유신을 보내기 싫어서 이리라. 그러다 일순 설명이 멈추었다. 무언가 중요한 생각이라도 난 듯, 컵속의 물을 따라버리듯...... 그러더니 여지껏의 당황스럽던 모습과는 다른 평소의 카린으로 돌아와 작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 결국 봉인을 해재시키는 방법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한심하지요? 제가 조금만 더 똑똑했어도.......유신..... 가지마요. 꼭, 꼭 봉인프로그램을 해석해 낼 수 있을거에요.....예?" . . . . . . . 전 인류의 영웅은 이렇게 조촐한 배웅을 받으며 역사의 1면에서 퇴장하였다. 물론 세상에 공표된 것은 건강의 악화로 인한 명예제대였고, 그가 마법계로 봉인되어 떠났다는 내용은 비밀에 붙여진 채 어떠한 환송도 받지 못했다. 아스모데우스를 꺽고, 루시퍼의 12사도를 물리쳤으며, 용제를 설득해 용신기로 두고, 마왕 루시퍼를 쓰러뜨려 기나긴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신화의 주인공은 이렇게 인류를 떠나갔다. 전차원에 걸쳐 일어난 성계대전의 끝은 결국 루시퍼와 유신이라는 양측의 최고 영웅이자 힘의 상징이 사라지며 그 막을 완전히 내렸다. 마법 계는 다른 차원보다 비정상적으로 마나의 흐름이 활발한 곳이다. 신이 처음 우주를 창조할 때 미리 우주의 가능성을 점처보기 위해 선택한 실험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의 모든 종족이 모여 있고, 상당히 불안정한 곳이라 12명이나 위시마스터를 두어 그 관리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실험의 결과는 만족할만했기에 우주가 창조되었고, 이렇게 창조된 우주가 균형을 잡을만큼 오랜 시간이 흐른뒤 마법계에도 나름대로의 법칙과 질서가 생겼다. 그래서 성계대전에서 9명의 위시마스터가 사라졌음에도 세계가 붕괴되지 않고 질서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이제는 위시마스터가 없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다른 우주와는 다른 형태로 안정되었다.유신이 봉인되어 떨어진곳이 바로 이 마법계인 것이다. '머....머리가아.....아프군..... 속도 뒤집힌 것 같고...... 쓰읍......차원이동이 이렇게 기븐나쁜 것일줄은.....' 게이트가 열린곳은 마법계의 어느 울창한 숲속이었다. 이곳은 위시마스터중 여행과 행운을 담당하던 카린카가 담당하던 곳이었으나, 카린카가 성계대전에서 아스모데우스의 일격을 받고 소멸해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이다. 유신의 옆에는 필요없다고 했음에도 카린이 억지로 딸려 보내준 잡동사니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어디...... 이게 카론의 이빨로 만든 칼이라고? 과연 좋군. 이건 그냥두면 너무 위험하니 내가 가져가야겠다. 이게 번역기인가? 목에 걸면 불편할 것 같진 않으니 챙겨가자.' 카린의 취향인지 밤샘작업을 한 연구원들의 분노의 표현인지 꽤나 조잡스러운 모양의 번역기였지만, 언어소통의 불편함을 겪기는 싫은지라 목에다 걸었다. 유신은 머리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출발하기 몇일 전부터 수면학습으로 기본적인 언어는 억지로 머릿속에 구겨 넣었지만, 단지 거기까지일 뿐, 마법계의 역사나 현황까지 배우기에는 머리의 한계였다. 그나마도 오래 산만큼 유신도 고대 엘프어나 마법계에서 공용으로 쓰는 언어정도는 교양으로 알고 있었기에 단순히 대화가 가능한 정도까지 배울수 있었다. 하지만 문학적인 표현이나 전문적인 용어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번역기는 매우 소중한 아이템이다. 결국 폼잡으며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말했어도 주섬주섬 쓸만한걸 챙기기 시작했다. '카린 사이언스 퍼실러티의 메탈 퍼펫? 뭐야 이건? 왜 이런것까지 챙겨줬어? 중력캐논포까지? 여기서 내가 나라라도 하나 새로 세울 줄 알았나?' 결국 챙긴 것은 광검 하나, 카론의 송곳니로 만들었다는 용아검, 첨예 두 자루중 하나와 번역기, 메모리얼 팬던트, 뮤직박스 그리고 카린 특제의 도시락이 전부였다. 용아검은 오른쪽에 첨예는 왼쪽에 차고, 목에는 메모리얼 팬던트와 번역기를 목걸이처럼 걸었다. 광검과 뮤직박스는 벨트에 매달고 손엔 도시락을 드니 나름대로 출발준비가 끝난 것 같았다. 나머지 산처럼 쌓여있는 잡동사니들은 땅을 판뒤 묻어 버린후 나뭇잎으로 잘 가려놨다. 혹시 악인에게 잘못 발견되어 악용된다면 불안정한 마법계 전체에 악영향을 주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것들도 있었기 때문에 신중하고 꼼꼼하게 숨겨 놓았다. 하긴 이러한 숲속의 한 가운데 묻어 버린다면 지도라도 정확히 그려 놓지 않는 한 유신 자신이라도 다시 찾지 못할 것이지만...... 아주 오래전, 처음 지브릴을 만나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기 위한 수행을 떠났던 때와 같이 약간은 두렵고, 그렇지만 두려움이나 걱정보단 흥미진진한 미래가 펼쳐질것같은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계속된 전쟁 속에서 감동이란 단어를 잊어버렸던 유신이지만, 망가지지 않은 순수한 자연에 둘러 쌓인 마법계에선 예전의 열정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유신은 주위를 둘러보고 난 후 가만히 정신을 집중했다. 마법계는 코어와 마나의 흐름이 다른 세계보다 활발하기 때문에 정신을 집증하자 그 흐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람과 함께 춤추는 실피드, 땅의 고요한 노래를 자장가삼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드라이어드, 근처엔 시냇물도 있는지 운디네까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렇게 감각의 약간이나마 돌아오자 다소 안심이 되었다. 장님 상태에서 근시가 된 정도이지만 특별히 감각이 날카로워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느긋해 지기로 마음 먹었다. '우선 여기에 적응부터 해야 겠지?' 마음을 먹은 유신은 제자리에서 힘껏 뛰어올라 봤다. 예전 같으면 코어를 이용해 나는 것 정도는 마법 없이도 할 수 있었지만, 코어가 묶인 이상 2m 가량 점프하는게 고작이었다. '흠...... 중력은 이정도 인가.... 다음은 파워 테스트를......' 주변의 좀 무거워 보이는 돌을 들어 볼려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 하였다. 다음엔 좀 가벼워 보이는 돌에 도전했지만 무릅 정도까지 들었을 뿐 허리 이상도 들 수가 없었다. '흠냐.... 왠지 처량해 지는군..... 그래도 몸은 좀 빠른 것 같은데.....' 팔짝팔짝 뛰다가 돌맹일 들었다 놨다가 다시 발차기를 하는등 이리뛰고 저리 뛰는 유신.....영락없이 살짝 맛이 간 사람처럼 보였다. 물론 유신도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신했기에 한 행동이었지만, 한가지 잊은 것이 있었다. 몸을 움직이며 주변의 미세한 코어의 흐름이나 마나의 흐름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이 세계에 적응이 않되었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숲의 나무 위에서 귀여운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 뭐하는거니?" 자신이 기척도 느낄수 없었는데, 이정도 거리까지 접근할 수 있는 고수의 출현에 순간 당황했지만, 자세히 보니 상대는 살의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기척을 숨긴 것이 아니라 유신이 둔해진 것임을 깨닷곤 쓴 웃음이 났다. "안녕, 아무도 없는줄 알고...... 그냥 운동중이었어" 대답을 하자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무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유신의 앞에 섰다. 뾰족하고 긴 귀, 얇고 매끈한 팔과 다리, 작은 체구이지만 탄탄해 보이는 엘프였다. "아하하 안녕, 인간 소년? 여기는 너희가 말하는 소위 잃어버린 시간의 숲이야. 우리야 엘핀서스숲이라고 부르지만.......어쩌다 이렇게 깊숙이 까지 들어왔니?" 보통 엘프들은 활동적이기보단 조용하고 타 종족에 대해선 배타적인 경우가 많다. 어쨌든 장수하는 종족인 만큼 시간의 개념이나 문화도 단명하는 생명채와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도 이 아가씨는 청초, 우아, 기품등 일반적으로 엘프를 위해 만들어진 단어들에 대한 해당상황이 없어 보였다. 그보다는 발랄하고 귀여운 인간소녀 같았다. 천족 다음으로 아름답다는 엘프치고는 그리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짧은 머리와 풍부한 표정이 잘 어울려, 살아있는 생동감이 넘쳤다. "어, 난 유신이라고 해. 음~ 여행자라 이곳이 어떤 곳인줄 몰랐어. 여긴 엘프들의 성지니?" 잠시 이 귀여운 엘프는 눈을 동그랗게 뜬후 유신을 관찰하다가 좀 어의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인간 꼬마야. 엘프는 보기보단 나이가 무척 많단다. 니 또래로 보여도 난 니 할머니보다도 나이가 많아. 올해 126세시다. 넌 여행자라면서 그런 상식도 없니?" 엘프 소녀가 보기에 유신은 영락없는 평범한 인간 소년이다. 동그랗고 약간 짱구진 이마, 커다란 눈망울, 167cm 정도의 키에 크지 않은 손과 발, 아직 사춘기를 다 지나지 않은 듯한 중성적인 느낌의 외모이지만, 행동이 크고 어깨는 넓은 편이라 다행히도 소녀 같지는 않았다. 짧은 머리를 흩으러 뜨리고 있지만, 지저분하지 않게 잘 어울렸다. 잘생겼다고 까지 할만한 외모는 아니지만, 붙임성 있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인상이라 경계심 많은 엘프가 먼저 말을 건 것이다. 이런 18-19세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반말을 하자 엘프딴엔 기분이 나쁠수도 있는 일이다. 반면 유신이 보기에도 이 엘프가 이상했다. 엘프라면 좀 배타적이긴 하지만 우하하고 예절바른 종족의 대명사이다. 나무위에서 처음보는 타 종족 사람을 반말로 불러대는 종족은 결코 아니다. 그래도 숙녀에겐 워낙 약한데다,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화랑정신이 기본에 깔려 있는 유신인지라,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다. "............ 미안합니다. 낮선 곳이라 아직 경황이 없어서....... 제가 실례를 했군요." 그 말에 엘프는 살짝, 조금은 거만하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만 마치 무슨 물건을 감정하는 태도로 유신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발을 까딱거리기도 하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기도 하며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다. '뭐.....뭐야 이여자는???' 평소 이런 취급을 받아 보았을 리가 없는 유신은 당황할 밖에..... "에....... 저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는데....." "아하하 미안, 미안 좀 특이해서, 야~ 너 부끄럼쟁이구나. 생긴것도 여자애 같아서 볼도 빨개졌어. 아하하 뭐가 그렇게 부끄럽니?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넌 좀 이상하다. 마나의 흐름이 너무 미약해. 정신계 정령의 움직임도 없고, 마치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넌 누구니?" 뭔가 이 이상한 엘프의 빠른 패이스의 화술에 말려 자신이 할 말을 찾지 못하던 유신은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보고는 이 엘프가 대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프는 정령의 흐름이나 마나를 쉽게 느끼지만, 미묘한 정신계의 정령의 흐름을 느끼는 것은 엘프 정령사 중에서도 상당히 고위급 정령사가 아니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뭐니? 무례하게 빤히 처다보고는...... 질문에 대답을 하는게 예의가 아니니?" "저..... 어떤 질문이었지요? 너무 빨라서....." 어리숙하게 대답하는 유신을 좀 한심하단 표정으로 바라보던 엘프가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깊은 숲까지 들어왔는지가 첫 번째 질문이었고, 넌 누군데 정령이나 마나의 축복을 받지 못했는지를 물어본게 두 번째 질문이었어." '으...... 오자마자 꼬이네...... 뭐라고 하지?' 거짓말을 하거나 뭔가를 둘러데는데는 서투른 유신이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변명할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잘 모르겠는데요. 저쪽 멀리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늙으신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이렇게 저 혼자 여행을 나왔어요." 말도 않되는 이야기를 둘러대었지만, 엘프는 유신의 대답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흠, 그래? 일단 광전사는 아닌 것 같군. 특별히 어떤 하나의 정령에 사로잡혀 있는게 아닌 것 같으니...... 사실 이 주변에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서 혹시 너랑 관계가 없을까 의심해본거였어. 기분 나빴다면 미안." "과.....광전사요? 아하하하 광전사라..... 과연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면, 싸움으로 시작해 싸움으로 끝난 유신이다. 엘프의 이 말이 날카롭게 가슴에 꽂혔다. 울고 싶을 만큼....... "뭐가 그렇게 재미있니? 광전사는 분노의 정령왕에 사로잡히는, 아주 무서운 현상이야! 절대로 웃을 일이 아니라고." "아 죄송합니다. 그럴려고 한게 아닌데...... 근데 엘프님은 고명한 정령사인 모양이군요. 126세이면 엘프로는 많은 나이도 아닐 터인데 벌써 정신계 정령의 작용을 느끼시다니...." "하핫, 그래 꼬마야. 내가 그 유명한 '선택받은 정령사' 엘리시엘님이다." 엉망진창의 화법을 구사하는 걸로 보아 역시 아직 어린 엘프이다. 성격도 엘프의 그것보다는 인간의, 그것도 드센 성격의 여자이이와 비슷했다. 몇마디를 나누어 보고는 유신은 엘리시엘이라는 엘프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말하는 태도가 자신에 차있고 시원시원해서 호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엘리시엘도 떠들기를 좋아하는 엘프인지, 아니면 답답한 엘프들 사이에 있다가 오랜만에 만난 이야기 상대라 그런지 마법계에 대해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이곳에 대한 정보라곤 이곳의 위시마스터인 카린카가 아스모데우스와의 결전에서 무리한 결계 마법을 펼치다 소멸하였다는 것 정도였다. 따라서 엘리시엘이 가르쳐준 정보는 정말 소중한 것이 아닐수 없었다. "이 대륙은 인간들의 나라인 하누스왕국이 서쪽 지역의 거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어. 동쪽으로는 여기 엘핀서스숲하고 숲을 벗어나면 바로 사막이 나와. 니가 살던곳도 아마 엘핀서스 숲의 한 귀퉁이 일꺼야. 사막에는 인간이나 아인종이 살지 못해. 처음에는 조그마한 사막이었는데, 5년 전부터 갑자기 커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온갖 사막 몬스터들이 우글거려. 다행히 엘핀서스숲의 가호는 강력하니까 숲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의 사막화가 없어졌지만...... " '5년 전 이라면 카린카가 쓰러진 다음인가..... 역시 이 세계에도 악영향을 미치는군. 내 책임이 크다. 아스모데우스의 공격을 막지 못할걸 알면서도 위시마스터들에게 강요했으니......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요즘 흄 제국과의 사이도 긴장감이 돌고 있어. 흄은 바다건너에 있는 마물들의 대륙이야. 그전까진 개척되지 않은 미개한 대륙이라 그다지 인간이나 다른 아인종의 관심거리가 아니었지만, 내가 태어날 때 쯤에 흄이란 에데 이 리치가 나타나서 이 마물들을 통합한뒤 제국을 세웠어. 워낙 지옥같은 곳이라 하누스 왕국에서 몇 번의 기사단을 파견했지만, 성과를 거두진 못한 것 같아." '휴.....흄이라고? 위시마스터중 루시펠님께 제일먼저 투항한 위시마스터의 이름이 아닌가? 그자가 리치가 되어서 이곳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단 말인가?' "어? 왜 안색이 창백해지니? 아하하 겁이 많은가 보구나? 걱정하지마. 요즘 흄이 강해진건 사실이지만, 여차하면 우리 엘프들도 참전해서 싸울 테니까. 인간들과는 그럭저럭 같이 생활할 수 있겠지만, 오크나 오우거 따위와 이웃할 바엔 차라리 이 대륙에 발을 디디지 못하게 인간을 지원하는 쪽이 낳거든. 인간들의 마법사는 엘프의 정령마법사 만큼은 강하지 않으니 우리 마법사가 몇 명만 참전해도 전황은 많이 유리해질 거야. 나만해도 인간들 사이에선 꽤 유명한데...... 표정을 보아하니 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군. 선택받은 정령사 엘리시엘.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모험을 그만두고 이렇게 엘핀서스를 지키고 있지만, 나 이래뵈도 꽤 이름이 알려진 모험가 출신이야." 엘리시엘은 조잘조잘 잘도 떠들어 대었지만, 유신은 이미 흄에 대한 생각으로 골몰해 있었다. '흄이라...... 이 녀석의 헬 게이트 마법은 장난이 아닌데...... 설혹 엘프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위시마스터였던 흄이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이곳의 인간이 당해낼 리가 없다. 성계대전에서 보이질 않는다고 생각했더니 이런곳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루시펠님도, 헬마스터도 없는데 대체 무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벨제버브와 메피스토가 남아 있지만, 그들은 마왕군에 합류하길 거절했다. 이제 와서 그들에게 빌붙어 일을 벌여봐야 천족과 용신기의 상대가 될 리 없다는건 알고 있을 거고...... 모르겠군. 하긴, 이젠 내가 안다고 해서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군.' 흄이 위시마스터의 자리를 떠나며 많은 힘을 잃은 것은 사실이지만, 위시마스터가 않고 있는 수많은 제약을 벗어난 것도 사실이다. 거기다 리치까지 되었다면, 마력은 더욱 늘었을 것이다. 아직 혼란할 터인 인류연합을 생각하자 걱정이 되었다. "뭐야? 얘길 하면 얘길 들어. 니가 해 달래서 해주는 거잖아? 딴 생각하면 어떻게 해?" "어..... 미....미안합니다, 잠깐 이야기를 정리해 보느라고....." "흠...... 그래? 근데 넌 어디서 자랐길레 그런 것도 모르냐? 근처에 마을이나 다른 사람들도 없었어?" "아니, 할아버지랑 산에서 단 둘이 살았거든요. 마을에 가끔 내려가 봤지만,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마을도 산골 마을이라 이런 소식은 전혀 접할 수가 없었어요." 유신의 머리에서 순간적으로 나온 대답치곤 기적에 가까운 변명이었다. 만약 엘리시엘이 조금만 더 영악했더라면 유신의 복장이 숲에서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다가 나왔다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었을 터이지만, 엘프답게 의심이 적어서 금방 눈물을 글썽이며 사과를 했다. "미안, 안 좋은 일을 떠올리게 했구나." 이런저런 이야길 하다 엘리시엘도 유신이 마음에 들었는지 친구가 되기로 했다. 타 종족과 쉽게 우정을 나누지 않는 엘프로썬 파격적이지 않을수 없었다. 여지껏 유약한 용모로 고생한 보답을 한꺼번에 받는걸지도 모르는 일이다. 남에게 경계심을 주지 않는 용모인 만큼 군인으로선 상당한 핸디캡이 되어왔던 외모이다. "요즘 엘핀서스에서도 오크나 오우거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어. 오크 따위가 엘프의 숲에 들어 올 리가 없는데 말이야.... 하물며 오우거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엘프들이 사라지는 일도 있고, 정말 이상해. 숲에는 결계가 처져 있으니 만약 사악한 의도가 있다면 결계에 사로잡힐꺼야. 선량한 오크가 아닌 이상 이 숲에선 살아 갈 수가 없는데......그건 정말 말도 안 되지? 선량한 오크라니...... 못생긴 엘프가 더 설득력이 있겠다. 게다가 그렇게 마물을 본 엘프들이 많다면, 지금 그 마물들은 대채 어디에 있느냐고? 나도 혹시나 해서 이렇게 마을 주변을 순찰하고 있지만 마물의 그림자도 못 봤어. 아까 너한테 광전사가 아니냐고 물어본 것도 혹시나 해서 그런거야. 광전사는 마물 이상으로 위험하니까. 아마 너는 의지가 매우 강한 모양이구나. 정신계 정령의 작용이 없는걸 보니..... 보통 그런 사람들은 굉장히 냉정한 냉혈한이 되거나 미쳐서 자살하는데..... 정말 보면 볼수록 신기한 녀석이구나, 너는" '저.....정말 말 빠르다 벌써 처음에 말한 내용이 가물가물....여자란게 이렇게 씨끄러운 존재였던가?' 당연히 유신이 아는 여자라면 지브릴이나 미카엘등 고결함의 결정체인 분들이거나, 아니면 유신에게 말도 함부로 걸 수 없는 부하들이 전부였다. 대체 언제 여자의 수다를 들어본 적이 있었겠는가? "딱히 갈곳이 없으면 오늘은 우리 마을에서 쉬었다 가. 해가 질때까지 여기에서 숲 밖의 마을까진 가긴 힘들 것 같고..... 뭐 이방인을 반기는 곳은 아니지만 괜히 인간을 혼자 밤의 숲에 놓아두면 소란을 부리기 쉽거든. 나무를 꺾어서 불을 피운다거나, 함부로 사냥을 하기도 하고..... 그럼 자칫 숲의 결계에 사로잡혀 귀찮아 질수도 있느니.... 차라리 우리 마을에서 오늘은 쉬고, 내일 출발하는 것이 나을 거야." "그렇군요. 그럼 하루 신세지겠습니다." "이야!! 너 보기보다 배짱이 두둑한데? 엘프의 마을에서 자겠다고 선뜻 말하다니..... 혹시 시간의 미로에 가친 다거나 하루 밤 자고 나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된다거나 하는 걱정은 하지 않니?" "저..... 그건 요정의 이야기 아닌가요? 엘프는 요정과는 다르잖아요?" "아하하 그래. 하지만 인간중엔 의외로 무지한 자들이 많아서 엘프의 숲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야. 하긴, 엘프를 잡아서 한몫 챙기려는 나쁜 놈들이나 숲의 질서를 파괴하는 놈들에게 엘핀서스가 잔혹한 것도 사실이지만...." 언제 어느 시대라도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비단 인간뿐 아니라 유사인종이라도 욕망을 가진 존재라면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고 싶어한다. 다만 그러한 감정을 이성과 얼마만큼 조화시킬수 있는지가 다를뿐, 엘프든 인간이든 오크든 드워프든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은 본능이라 할 수있다. 드워프는 공예품이나 보석의 아름다움에 높은 가치를 두고, 엘프는 자연과의 조화를 아름다운 것으로 여긴다. 반면 정신적으로 비숙한 오크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그런 면에선 인간도 다를바가 없다. 가늘고 긴 탄력적인 팔다리, 부드럽고 깨끗한 피부, 자그마한 얼굴에 맞춤하게 자리잡은 눈과 입술, 그리고 오똑한 콧날....... 엘프는 천족이 없는 마법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물임에 틀림없다. 외적인 아름다움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엘프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 미모로 여러 가지 귀찮은 일에 말려드는 경우가 많다. 인간 중에는 엘프만 전문적으로 사냥하여 비싸게 파는 전문 사냥꾼도 있을 정도이다. 물론 하누스 왕국에서는 이러한 인신매매 행위를 금지하고 있지만, 왕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들은 여러 영주들의 자치령이나 다름없고, 왕권이 이들을 누를 만큼 강력하지는 않기 때문에 엘핀서스와 왕성 근처를 제외한 곳에선 엘프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힘들 정도이다. 물론 엘프들은 마법과 활에 익숙하므로 잡기가 쉽진 않지만, 영악하고 사악한 인간에게 번번히 속아서 잡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엘프를...... 잡아요?" "그래. 인간중엔 이상한 놈들이 많으니까. 별로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군." 둘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엘핀서스 숲의 중앙에 있을 엘프의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상당기간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듯, 나무들은 크고 화려해 보이기까지 했다. 숲 특유의 진한 나무 냄새와 풀냄새가 기분좋게 피어났다. 억지로 다듬지 않은, 자연스럽게 생긴 오솔길은 가벼운 엘프나 산짐승들만이 가끔 이용한 탓인지 푹신한 나뭇잎이 그 탄력을 잃지 않고 두텁게 깔려서 기분 좋은 쿠션 역할을 해 주었다. 짙은 나무그늘을 통해 조금씩 들어오는 햇살은, 나무에서 스며 나오는 시원한 기운과 어우러져 멋진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먹을수 있는 과일도 조금만 찾아보면 구할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어떤게 먹을 수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멋진 숲이군요. 일부로 다듬은 것도 아닐텐데, 정말 훌륭한 정원사가 손질해 놓은 것처럼 아름다워요. 아니, 인간의 정원사가 이렇게 크고 웅장한 정원을 가꾸기는 불가능하겠지요?" 하지만 언젠가부터 유신의 예민한 오감이 뭔지 모를 경고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이 숲에는 무언가가 빠져 있다. 이렇게 크고 울창한 숲에 무언가가..... 엘리시엘도 뭔가를 느꼈는지 서서히 걸음의 속도를 늦추더니 마침내는 완전히 멈추어 섰다. "뭔가..... 이상해. 소리가..... 전혀 없어. 새의 소리도, 벌레의 소리도.....이건...... 이상해" 풍경은 틀림없이 그대로였다. 푸른 물감을 쏟아 놓은 것처럼 온통 푸르르고, 숲의 향기가 물씬 풍겨나오는 ...... 하지만 지나치게 차분한 풍경이기도 했다. 보통의 자연이 그러하듯 새나 작은 벌래들의 소란스러움이나 생명력이 없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아름다움일 뿐이었다. '마나가..... 흐르질 않아? 설마 결계인가? 하지만 내가 느낄수 없을 정도의 결계를 다른곳도 아닌 엘핀서스에서 펼칠 수 있는 자가 있을 수는 없는데,,,,설마 마물이 이 안에 있다는 건가? 그래서 숲이 엘프들에게 알려 줄 수없었던 건가?' 엘리시엘 정도의 정령사가 언제 결계내로 들어왔는지도 모를 정도의 결계라면 보통 마법사가 쳤을리 없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결계라니...... 아무리 봉인당한 몸이고,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고 해도 마나가 고정된 것 조차도 몰랐다니......' 유신 역시 적지 않게 당황되었다. 아직 새로운 세계에 적응이 되지 못해 나름대로 긴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결계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되돌아 가거나 앞으로 무작정 나아갈수는 없는 일이다. 잠시 어떻게 할까를 망설이고 있을 때 굵고 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오호..... 또 엘프인가? 마법사놈 완벽한 결계라고 하더니만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군.저놈들은 대충 눈치를 챈거 같으니 말이야." 거의 3m 에 이르는 키, 터질 듯이 튀어나온 어깨와 허벅지의 근육은 기형적인 조화를 이룬다. 주벅과 발은 자신의 머리보다도 훨씬 커서 보통인간의 가슴팍 만큼 커다랬다. 비죽하고 날카로운 이빨들은 들쑥날쑥하게 자라나 있어 보는 이를 공포에 질리게 했다. 이 괴물의 수준을 뛰어넘는 거대한 오우거를 선두로 오크 5마리가 뒤에 있었다. 뒤의 오크들역시 180cm정도는 족히 넘어 보이는 돌연변이에 가까운 오크들이었다. 보통의 오크들이 160cm 전후인 것을 생각하면 살인적인 크기였다. 특이하게도 보통의 마물들이 벌거벗거나 얇은 가죽을 대충 두르고 다니는 것에 비해, 이들은 제대로된 검은빛의 갑옷을 갖추고 있었고, 무기도 도끼나 글레이브가 아닌 롱소드를 들고 있었다. 새카만 갑옷은 반들반들 윤이 나는 것이 나름대로 관리도 잘 되는 것 같이 보였고, 이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도 유신이 느낄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갑옷의 상부에는 핏빛의 해골이 그려져 있어서 이들이 인간의 군대처럼 위계 질서와 편재가 되어져 있는 군대란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유신과 엘리시엘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산개한뒤 포위하는 모습 역시 이들이 나름대로 군사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 있었다. '뭐지? 오크와 오우거의 혼성 부대라니? 게다가 갑주에 무장역시 제법 그럴 듯 하잖아?' 시라스분쟁에서 오우거는 중무장 된 뒤 후방에 떨어지는, 일종의 자살특공대로 많이 쓰여졌다. 크놈인(오크)에 비해 조직력과 지능이 떨어졌기에 결국 그들의 노예신세가 되어 한번 쓰고 버려지는 소모품으로 전락한 비운의 종족이기도 하다. 육체적인 강함을 숭상하고 저돌적인 오우거들은 사실 우주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거나 위험한 종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난폭하고 거칠기만 한 이들은 인간이나 다른 종족의 입장에선 그다지 호감을 끌만한 요소가 없는 종족이기도 하다. 때문에 오크들에게 비참하게 사역 당해도 그들을 해방하기 위해 군대까지 동원되진 않았다. 힘과 전투센스는 오우거가 크놈인보다 몇배나 뛰어났지만, 과학이 전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사로잡혀 소모품으로 쓰인 것이다. 단순히 힘으로만 치자면 오크따위보단 오우거가 몇배나 상위 랭크이고, 과학이 전혀 발달하지 않은 마법계에서는 오크보단 오우거가 훨씬 무서운 종족이기에 이 마물 부대의 지휘를 하는 것이 오우거인 것이다. 당연히 유신이 이러한 오우거 하나둘쯤 겁낼리 없지만, 힘이 봉인된 현재의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닿게 되자 조금씩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별로 예쁘진 않군. 너무 쬐끄마해서 별로 먹을 것도 없겠는데?" 오크에 비해선 언어구사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오우거를 대신해서 주변의 졸개 오크들이 왁자하게 떠들면서 엘리시엘을 놀려대기 시작했다. 옆에 유신이 칼을 차고 있었지만, 인간의 꼬마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크윽, 네놈들 도데체 뭐냐? 어째서 엘프의 숲에 마물 따위가 들어 온거지?" 엘리시엘이 나름대로 겁을 주겠다는 의도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높은 톤으로 말했지만, 상대 무리의 가장 작은 오크보다도 30Cm이상 작은 엘리시엘의 말이라 아주 약간의 위압감조차도 주지 못했다. "크크크 무지한 엘프여. 설마 검은 갑옷에 붉은 해골의 문양을 단 무리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할 셈인가?" '설마 흄의 다크블러드?' 불길한 예감이 엘리시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들이 입고 있는 검은 갑주. 흄의 직속부대로 다크블러드라고 하는 이 군대는 라일로스 대륙 전체에서 그 공포의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처음 흄 제국이 건국되었을 당시, 마물의 힘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 하누스 왕국에서는 몇 번의 대대적인 토벌대를 보냈다. 그러나 다크블러드라 불리우는 검은 갑주의 군대에 모조리 패배해 전멸당한뒤 감히 인간이 흄의 땅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되었다. 흄 대륙에도 적기는 하지만, 인간이나 다른 아인종이 있을 터이지만, 그들을 구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하려고 해도, 계속되는 패전으로 민심만 흉흉해 질 뿐 어떠한 성과도 올릴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왕가의 수호용이던 화이트 드래곤 라셀이 흄의 마룡인 그라테우스에게 패배한 뒤 지금은 오히려 흄의 무력앞에 하누스 왕국이 위험할 지경이 된 것이다. 엘리시엘은 얘기가 통할 것 같지 앉자 입술을 잘근 씹고는 정령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정령들은 엘리시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다. '이런!! 결계 때문인가? 정령만 부를수 있다면 어떻게 해보겠지만..... 정령이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니 이를 어쩐다......' 레이피어를 뽑아들긴 했지만, 힘이 약한 여자를 위해 제작된 가볍고 가는 레이피어는 저런 실용성만을 위해 제작된 중갑주에 비하면 그저 아름다운 장식품일 뿐이다. 손잡이 끝에 엘리시엘의 주먹만한 정령석이 붙어 있는 걸로 보아서 상당히 고가품이란건 알 수 있지만, 검이라기보단 마법력을 증폭시켜 주는 마법지팡이에 더 가까워 보이는 레이피어였다. "크하학 제법 배짱이 있는 계집이구나. 한번 해 보겠다고? 난 드센 여자도 좋아하지." 오크중 한 마리가 욕정으로 번들거리는 붉은 눈을 빛내며 롱소드를 뽑아들고 성큼 앞으로 나섰다. 오크치곤 엄청난 덩치인데다 인간보다 근육이 더욱 발달한 오크이기 때문에 실제 느껴지는 위압감은 대단했다. 롱소드는 살기를 뿜어내며 번쩍였고, 갑옷은 검은색의 광택이 번들거렸지만, 빛이 반사되지 않는 걸로 보아 이들이 결코 애송이 무리가 아님을 나타내고 있었다. 엘리시엘도 근육을 긴장시켜 전투테세를 취했지만, 앞의 오크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 뿐이었다. 무장이라곤 얇은 레이피어와 허리에 매달려 있는 단검뿐이고, 연한 초록빛의 가죽갑옷은 상반신만 겨우 가려줄 정도였다. 그나마 저 오크의 크고 거친 롱소드로부터 주인의 몸을 지킬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얇은 가죽갑옷이었고, 허벅지나 팔은 그냥 하얀 맨살이 보였다. 부츠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발목까지 오는 갈색의 여행용 부츠였다. 결코 전투용의 두툼한 물건은 아니었다. "유신!! 도망쳐. 내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볼테니." 엘리시엘이 레이피어를 앞으로 나선 오크에게 신중하게 겨누며 말했다. "켈켈켈. 시간을 끌다니? 설마 스트립쇼라도 해서 우리를 즐겁게 해줄테냐?" "이...... 이놈이!!" 흥분해서 달려나가려는 엘리시엘의 어깨를 잡아 멈추어 세운 다음 유신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크하 !! 뭐냐 인간 꼬마. 네놈이 대신 해볼테냐? 크하하 어린놈이 영웅심을 발휘하는구나. 이년과 논 다음 죽여 줄 테니 순서를...." 오크는 그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유신이 앞으로 한발 내딛는가 싶더니 어느새 지껄이고 있던 오크의 머리를 대각선으로 베어낸 것이다. 목 부위의 갑옷과 투구까지도 마치 처음부터 잘라져 있었던 것처럼 매끈하게 배어졌다. 목을 치지 않고 이렇게 힘들게 사선으로 그어서 뇌를 베는 것은 성계대전 당시의 강력한 마족들과 상대하면서 몸에 익은 습관이다. 마족의 경우 목만 쳐 버리면 잘려진 머리가 육체를 컨트롤해 끈질기게 반격을 가하거나 심한 경우 도로 붙어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뇌를 베이면 어지간한 상급 마족이라도 크게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비록 봉인된 몸이지만 이정도 까지는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을 정도로 검술 자체만으로도 경지에 들어선 유신이다. 물론 첨예의 날카로움과 강력함이 뒷받침이 되는 덕분이기도 하지만.....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잠시 정적이 흘렀다. 거리도 꽤 떨어져 있었고, 특별히 움직이는 기운도 없었다. 왼발을 축으로 오른발을 크게 내딪으며 원심력을 주어 오크의 머리를 쪼갠 뒤 어느새 그 반탄력으로 제자리로 돌아왔기 때문에 자세히 보았다 해도 어떻게 3m 가 넘는 거리를 단 한발 밟은 것 만으로 좁혀서 그만한 파괴력의 검술을 내었는지도 알기 힘들 정도였다. 코를 경계로 베어진 머리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겠다는 듯 여전히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 있었고, 입 역시 마지막으로 지껄이던 모양 그대로였다. 하지만 곳 피를 분수처럼 뿜으며 시체가 무너지고, 잘려진 머리의 눈에 피가 고이며 역한 냄새를 뿜으며 안의 내용물들이 흩어지자, 남아있던 오크들의 눈에 핏발이 곤두서면서 살기가 무럭무럭 피어났다. '오크는 넷, 오우거 하나인가..... 첨예라면 이까짓 조잡한 금속의 갑옷을 베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체력이 얼마나 버텨줄지가 승부의 관건이군.' 냉정하게 승률을 따저보며 가장 강해 보이는 오우거에게 일검을 날렸다. 상대의 솜씨를 알아보기 위한 탐색전 겸으로 가볍게 날린 검이었다. 하지만 거대한 오우거는 자신의 키보다도 더 커다란 언월도를 가볍게 휘둘러 유신의 일격을 처낼 뿐만 아니라 위협적인 반격타를 가슴부위로 날려 유신을 착잡하게 했다. 상대의 실력이 결코 만만한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야생에서 어중이 떠중이로 배운 병장기 다루는 솜씨가 아니었다. 이들은 틀림 없이 제대로 전투 훈련을 받은 전사들이다. 잠시 유신이 생각을 정리하느라 빈틈을 보이자 거대한 오우거의 언월도가 머리를 노리며 날아 들었다. 오크들은 오우거의 언월도에 맞지 않도록 협공을 하지는 않았지만, 유신을 포위하며 뒤로 돌아 갔기 때문에 싸움이 점점 더 힘들어 질 것 같았다. 차라리 한데 엉켜서 싸운다면 오우거의 언월도의 공격방향을 칼로 쳐내어 바꾸어 주면서 주변의 다른 오크들을 쓸어 버릴수 있겠지만, 이들은 유신을 포위할뿐 언월도의 공격범위내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언월도와 첨예는 리치의 차이가 너무 나기 때문에 난감하기 까지 했다. 하지만 전투경험으로 따지자면 근 900년의 경험치를 쌓은 유신이다. 재빠른 몸놀림을 이용해 오우거가 아닌, 포위하고 있던 오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실력차가 별로 안 난다면 이러한 포위진이 크게 효과를 보겠지만, 오크들이 비록 강하다고 해도 유신의 검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순식간에 포위에 구멍이 났다. 오우거를 정면에 두고 공격하기 쉬운 오른쪽의 오크에게 강한 공격을 날리자 오크는 처음의 검은 간신히 막았지만, 이격째에는 오른팔을 잃고 말았다. 오우거가 당황하여 언월도를 크게 휘둘렀지만, 유신은 언월도의 사이로 낮게 빠져 나가며 이번에는 왼쪽에 있던 오크의 다리를 쓸었다. 오우거의 큰 언월도가 방해가 되어 뒤에 있던 오크의 움직임이 흩어진 틈을 탄 절묘한 공격이었다. 유신의 몸놀림이 오크나 오우거의 예상보다 한템포 이상 빨랐기 때문에 타이밍을 놓친 오크들은 다시 진형을 갖출 새도 없이 하나둘 쓰러져 갔다. "쿠어어억, 여자를, 여자를 먼저 처라." 물흐르듯 언월도 사이로 빠져나가며 동료들을 베어 넘기자 광분한 오우거가 당황하여 멍하니 구경하고 있는 엘리시엘을 가리키며 말했다. 비록 모험가 출신이지만, 던전 탐험이나 유적 탐사등의 모험일뿐, 이런 난전은 격어 본적이 없는 엘리시엘이다. 첨예에 수없이 긁혀서 피투성이가 된 오우거가 집체만한 몸을 날려 오자 그만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이년, 죽어라" 거대한 언월도가 엘리시엘의 피를 받기 위해 높이 올려지는 순간 오우거의 이마를 뚥고 흑빛의 날카로운 것이 튀어 나왔다. 유신이 오크들을 상대하다가 이꼴을 보곤 할수없이 첨예를 던진 것이다. 순간 빈손이된 유신을 향해 남아있던 오크중 한 마리가 강력한 보디블로를 먹였다. 비록 양팔을 교차해 막고, 몸도 웅크려 충격을 최소화 했지만, 180cm 에 이르는 키에 중갑으로 몸을 감싼 오크의 죽기살기식의 몸통박치기다. 아무런 갑옷도 입고 있지 않은 유신은 2~3m를 날아가 걸레처럼 나무에 처박혔다. '이런, 빌어먹을..... 오른팔이 부러졌나?' 아찔한 통증이 밀려 왔지만, 지금 정신을 잃어버린다면, 엘리시엘이 남은 오크 둘을 이길수 있을꺼라곤 생각할 수 없기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오크들은 리더인 오우거가 죽자 함부로 달려들진 않았지만, 유신이 부상을 입고 칼까지 집어 던지자 달아나지 않고 서서히 거리를 좁혀 왔다. 물론 유신의 허리에는 카론의 송곳니로 만든 용검이 매달려 있었지만, 유신의 경우에는 겨우 오크따위를 상대로 이런 위험한 물건을 뽑고 싶지는 않았기에 맨손으로 싸울 태세를 취했고, 오크들은 유신이 검을 뽑기위해 틈을 들어 내는 순간 목을 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팽팽한 대치상태가 되었다. '시라스 행성 전투가 생각나는군. 그때도 오크들이 엘프에 눈독을 들여 전쟁이 벌어졌는데, 결국 박터지게 싸운 것은 시라스인과 크놈인이 아니라 인간과 크놈인들이 아닌가.....역시 마법계는 전 우주의 축소판인가....." 머리는 과거를 생각하고 있는 것에 비해 몸은 반사적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검을 뽑기를 기다리고 있던 오크는 유신이 맨손으로 소리없이 미끄러져 들어오자 당황하여 롱소드가 필요 이상으로 크게 나갔다. 이런 공격에 맞을 유신이 아니기에 첫 번째 녀석의 공격은 무시해 버리고, 첫 번째 오크를 공격하면 그 뒤를 칠 속셈으로 긴장하고 있던 두 번째 녀석을 급습했다. 정확하게 오크특유의 되지코 같은 부분에 발차기를 먹였지만, 오크란 종족이 워낙 터프한데다 체중차이가 심하게 나는지라 일격에 죽이지는 못했다. 이순간을 노칠새라 처음에 검을 크게 날렸던 오크가 이격째는 좀더 신중하고 정확하게 날렸다. 유신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살을 주고 뼈를 치겠다는 생각으로 부러진 오른팔로 오크의 롱소드를 막고 움직이는 왼팔로 공격을 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오크의 롱소드가 유신의 오른팔에 닿기 직전에 오크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갑옷으로 보호 받지 못한 목의 관절부위의 작은 틈으로 엘리시엘의 얇은 레이피어가 교묘하게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급소인 콧잔등을 채인 충격과 무거운 갑옷의 무게에 눌려 허우적대던 오크가 다시 롱소드를 들고 일어 났을때는 이미 모든 동료들이 쓰러지고, 자신만이 덩그라니 남은 상황이었다. 서서히 이 불쌍한 오크의 얼굴에 공포의 그림자가 스며들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유신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가 난.... 왜 이렇게 싸움을 몰고 다닐까...... 무슨 불행의 신이라도 붙어있나......' 설혹 행운과 불행을 담당하는 치천사 우리엘이라 해도, 유신처럼 강력하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간섭할 순 없고, 또 그럴리도 없겠지만, 유신은 기구한 자신의 운명에 작게 한탄했다. 전의를 상실한 오크를 보고 유신은 작은 고민에 쌓였다. 이 오크에게 알아내야 할 것은 산만큼이나 많은데, 과연 이 오크가 그냥 말을 할지, 아니면 맞아야 말을 할지, 혹은 맞아도 말을 안 할 지에 대한 판단을 해야 했다. 하지만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안았다. 다 죽어가는 오크의 전형적인 눈빛을 하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보자 조금만 협박을 하면 술술 다 불 것 같았은 확신이 들었다. 유신이 정이 많은 성격이라곤 해도 어쨌든 성계대전을 격은 몸이다. 마족들이 인간의 포로에게 어떠한 고문을 했는지 똑똑히 봐 왔고, 또 그역시 필요하다면 결코 어떤 잔인한 마족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고문을 해 왔다. 적의 결계내에서 정보를 캐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니 일단은 사로잡은 오크를 끌고 결계밖으로 벗어났다. 누군가 들어오거나 나가는 것을 막는 결계가 아니라 마나를 묵어두어 장소를 숨기는 결계이기 때문에 엘리시엘과 함께 왔던 반대 방향으로 한동안 걸어가자 결계를 벗어날 수 있었다. 막 엘리시엘에게는 결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끔찍한 짓을 오크에게 하려는 참에 엘리시엘이 먼저 나섰다. "춤추과 노래를 사랑하는 모두의 친구여. 여기 그대의 가장 신실한 벗이 그대의 힘을 빌어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 싶습니다. 드라이어드 소환" 공포에 질려있던 오크의 눈빛이 점점 풀려가더니 나중에는 헤벌죽하게 웃는 괴상한 표정이 되었다. 엘리시엘이 정령사답게 나무의 정령인 드라이어드를 소환해 이 오크를 홀려놓은 것이다. 드라이어드는 숲의 정령이지만, 정신계로도 작용을 한다. 상대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외모로 나타나는 이정령은, 때로는 마음에 드는 남자나 여자를 자신의 나무속으로 끌어들여 영원한 쾌락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짓도 할 만큼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다. 그만큼 아름답고 친화력이 강한 정령이기 때문에 매혹의 주문보다도 훨씬 상대방을 잘 세뇌시킬 수 있지만, 잘못하면 소환자의 정신도 같이 세뇌시켜 버리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한 정령이다. "안녕 내 이름은 엘리시엘이야. 넌 이름이 모니?" "우쿠우쿠 난 둥칸이야. 푸른 송곳니 부족의 최고의 전사지. 난 흄님의 다크블러드에 뽑혀갈 만큼 강하다. 우쿠우쿠" 기분이 좋은지 오크특유의 킁킁거리는 콧소리를 내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전부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누구누구랑 함께 왔어?" "우쿠쿠 서큐버스가 둘, 그리구 오우거가 넷이 왔어. 그리고 검은 마법사가 하나. 오크동료들은 서른이다. 그중에서 무스칼이 가장 강하다. 무스칼은 붉은 달의 밤에 태어난 최고의 전사야. 그와 함께 싸우는 것은 영광이다." "그럼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어?" "그건 나도 잘 몰라. 검은 마법사가 빛의 문을 열었다. 그곳을 통과해 보니 이곳이었어." '대체 마법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야? 마물들은 서로 단결하지 않는데.... 아까 오우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서큐버스라니? 지능이 높은 서큐버스가 오크따위와 함께 다닐리는 없는데..... 이 오크도 말하는 것이 또박또박한 것을 보니 결코 인간보다 멍청하지는 않은 것 같고.... 마물의 지능이 이정도라니.....대체 누가 마물들을 이정도까지 단결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일까?' 사실 마물들 개개의 전투 능력이 인간에 비해 결코 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다. 보통의 오크 조차도 왠만한 성인 남자 이상의 체력을 갖는데다, 오우거나 트롤등의 준대형 몬스터의 경우 인간 혼자선 1:1로 싸우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월등히 강력하다. 서큐버스들은 상당수준의 마법도 사용할 수 있고, 매혹과 같은 특수 능력이나 인간의 꿈에 침입하는 능력이 있다. 고위급 마족인 리치나 뱀파이어들은 인간마법사 이상의 마법을 구사하거나 불사의 육체를 지니고 있어, 군대를 동원한다고 해도 잡을수 없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마족과 경쟁을 하며 이처럼 번성할 수 있는 이유는 마물들은 전술이나 전법이 발달하지 않았고, 다른 종족끼리는 서로 단합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만큼 그 능력을 극대화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오크대군이 인간의 성을 공략하려면 성문을 뚫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만약 마법을 쓸 수 있는 리치가 하나만 섞여 있다면, 그런 희생 없이도 손쉽게 마법으로 성문을 뚫고 안의 인간들을 학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리치나 뱀파이어같은 고위 마족의 경우 인간과 드잡이질을 하기 보다는 자신의 영역에서 조용히 마법을 연구하거나 인간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을 만큼만 나쁜짓(?)을 하는 현명함을 갖추고 있기에, 인간들도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며 이들을 토벌할 생각을 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마족들이 그 능력을 극대화 하기 위해 혼성부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뱀파이어나 리치 정도는 아니어도 이미 서큐버스정도의 몬스터가 이렇게 작전에 투입된다는것은 어쩌면 이미 고위 마족들도 다수가 흄의 군대에 편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혹시 다른 엘프들을 보지 못했니?" "우크크 있다. 엘프셋, 나와 크랑이 붙잡아서 지금 결계 중앙에 있는 우리 막사에 있다. 쿠르르. 그 엘프 예쁘고 좋은 몸을 가졌다. 내가 본중 최고였다." 동료가 잡혀가 오크따위에게 치욕을 당했다는 말을 듣자 순간적으로 흥분한 엘리시엘의 정령술이 깨져 버렸다. 서서히 오크의 눈빛이 정상으로 돌아오려는 찰나 유신의 검이 하얀 호선을 그었다. "대충 알아낼건 알아 낸 것 같군요. 더 지껄여 봐야 듣기 곤욕스런 얘기만 할 것 같아서 베었습니다." 하급한 몬스터일수록 성욕이 강하다. 개채 수를 늘려서 많은 수의 병력으로 적을 압도하지 않는 한 다른 몬스터나 인간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놈들에게 가장 아름답다는 엘프가 잡혀갔으니 어떤 꼴을 당했을지는 너무나 뻔한 일이다. "저......유신.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이렇게 부상까지 입고..... 이런 부탁을 할만한 처지는 아니지만, 숲에서 동료들을 불러다 주지 않을래? 길은 윌 오스프가 안내해 줄거야." 동료의 안위가 걱정되는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엘리시엘이 말하며 작은 손짓을 몇 번 하자 엘리시엘의 주먹만한 하얀 빛덩어리 세 개가 날아 들었다. "실피드에게도 일단 마을로 가서 이 소식을 전해 달라고 부탁은 했지만, 혹시 숲에 다른 결계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누군가 직접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아직 한 낮이라 윌오스프의 모습은 뚜렷하게 잘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안보일 정도는 아니었고, 숲속인 만큼 나무의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진 곳이 많아서 푸른 빛을 뿜어내는 빛덩어리를 잃어버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윌 오스프를 세 개나 불러내고 실피드도 보낸 것을 보면 엘리시엘의 성격이 결코 덜렁대는 수다쟁이는 아니라는 뜻이다. 동료의 안위가 걱정된 엘리시엘은 유신의 검술솜씨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 의아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런걸 물어볼 정신적 여유도, 또 시간도 없었기에 일단 접어 두었다. "은혜는 꼭 갚을게. 난 아무래도 숲의 동료들을 버려두고 마을로 갈순 없어." 엘리시엘 혼자서 마물군단에 뛰어들어 봐야 희생자만 늘 뿐이다. 하지만 동료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떠한 고통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자기만 마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마물들이 자신들의 본거지로 가버리거나 다른 장소로 이동하여 결계를 새로 만든다면, 최악의 경우 동료들을 영영 마물들에게서 되찾지 못할 수도 있다. "저기..... 혼자서 30기도 넘는 마물들 틈에 난입해 봐야 똑같은 꼴을 당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데요? 게다가 여기처럼 결계 밖이라면 몰라도 마물들이 있는 결계 한 가운데선 정령술이나 간단한 마법도 쓸 수 업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 지금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내 동료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역시 아직 어린 엘프인 만큼 답답한 마음에 엉뚱한 유신에게 화풀이를 하는 엘리시엘이다. "휴..... 내가 같이 가줄게요. 좀 다쳤지만, 결계 내에선 아마 엘리시엘 보다 잘 싸울거에요. 마을에 연락하는건 실피드 만으로 충분할 겁니다. 아마 마물들은 자신들의 숙영지를 중심으로 결계를 펼쳤을 테니까 중간에 다른 결계때문에 실피드가 헤메는 일은 없을거에요." 엘리시엘이 감동반 미안함 반의 묘한 시선으로 처다보자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든 유신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지만 지원이 올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일이니, 무리한 전투보다는 엘프의 구출에 중점을 두어서 행동하기로 해요." '봉인당한데다 부러진 오른팔로 얼마나 싸울수 있을지...... 이럴 때 쓰기위해 배운 검술이 있었는데..... 유진 누님의 창시한 허무의 검인가.... 오랬동안 안 써서 초식의 세밀한 부분까진 기억이 안 나지만,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몸이 반응을 하겠지.' 유진은 유신의 쌍둥이 누이이다. 최초의 인간이 유신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유진이 먼저 만들어 졌다. 하지만 그녀는 대외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창세신의 곁에서 시중만 들었기에 최초의 인간으로 유명한 것은 유신이다. 물론 인간들이나 다른 유한 생명채들은 유신이나 유진에 대해 모르지만, 천사들이나 다른 신들 사이에선 꽤 유명하다. 그러나 유진은 루시펠이 반역을 하고 창세신이 그 모습을 감출 무렵 같이 행방불명 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다지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 어쨌든 유신보다 먼저 태어난 만큼 검술이건 마법이건 조금씩 유신 이상일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고, 유신 자신도 1:1전투로는 유진이 자신보다 앞선다고 인정했을 정도이다. 그만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다는 유진이 성계대전 직전에 모습을 감추자 루시퍼측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성계대전이 끝날때까지 그 모습을 들어내지 않음으로써 일단 그런 누명은 벗었다. 지금은 루시퍼측의 자객에게 죽은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만 나돌뿐이다. 유신이 머릿속으로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사용할만한 검술이나 초식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가는 사이, 어느새 다시 마물들의 결계내로 들어섰다. 조금 더 걸어가자 결계를 친 장본인임에 틀림없을 마법사의 강력한 마나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나를 고정시키는 결계내에서 이만한 기운을 뿜어 내는걸로 보아 그가 이 결계를 만든 장본인임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맙소사. 이정도의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라니.... 이정도라면 성계대전에도 참전했을법한데 어째서 마법계에 아직도 이런 마스터급 마법사 있는 걸까?' 바짝 긴장하며 조금씩 결계의 중앙으로 다가가고 있을 때 어슬렁 어슬렁 주변을 순찰하고 있는 오크 두 마리가 눈에 띠었다. 예의 검은 갑주와 오크 특유의 글레이브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엘리시엘과 유신이 숨어 있는 수풀옆을 지나 등을 보이는 순간 유신은 아무 망설임 없이 한놈의 머리를 비스듬히 베었다. 머리가 떨어지면 소리가 날까봐 너무 깊지 않게 베면서도 일격에 죽이기 위해 너무 얕지도 않게 베어 냈다. 결계 내부라 지나치게 방심하고 있던 탓인지 나머지 한 마리는 동료의 시신에서 피냄새가 퍼지기 시작할 쯤에야 막 돌아 보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유신의 첨예가 강화 드래곤 본 특유의 검푸른 기운을 띠며 눈앞에 들이 닥치고 있었다. 꽥꽥거릴 틈도 없이 옆의 놈과 비슷한 모양으로 나뒹군 시체를 조용히 풀숲으로 치워 놓고 포로를 가두어 놓았음직한 막사가 없나 찾기 시작했다. 7개의 막사가 두서없이 처져 있는걸로 보아 이들이 여기에서 오래도록 작전을 행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금방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본국으로 떠날 것 같아 보이는 숙영지였다. '흠..... 중앙에 있는 막사가 가장 그럴듯한 것으로 보아서 대장이 있는 곳이겠군. 포로는 달아나기 힘든곳에 두는 것이 정석이지만, 이곳 상태로 봐선 별로 그런 여건을 감안해서 제대로 만든 캠프는 아닌 것 같은데..... 저곳쯤에 있을려나?' 유신이 주의 깊게 본 막사는 다른 막사보다 좀 크고, 보초가 두명 지키고 있었다. 다른 막사는 천으로 대충 지은것에 비해 그곳은 인간이 만드는 통나무 집처럼 제법 견고하게 나무로 만든 막사였기 때문에 포로를 가둔다면 그곳에 가두는 편이 그나마 안전할 것 같았다. 목조건물은 가건물 답게 창문따위는 없었고, 정면의 출입구와 환풍을 위해 높다랗게 설치된 작은 통풍창 정도가 전부였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오크들의 표정을 자세히 알수는 없지만, 일단 긴장감이 느껴지지는 않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에 약간 안심이 되었다. '마물들은 대부분 야행성이니 지금은 잠을 자고 있나 보군. 서른 가량의 마물이 있다고 했는데 조용한걸 보면......지금이 구출하기 절호의 기회일 것 같다.' 졸린 눈을 꿈뻑이며 보초 교대를 기다리고 있던 오크에게는 정말 유감이지만, 교대오크 대신 날카롭고 아름다운 첨예란 이름의 죽음의 사신이 찾아왔다. 이 오크들은 모르겠지만, 이들과 교대를 하기 위해 투덜거리며 오고 있던 오크 둘도 이미 황천에서 그들이 살면서 저질러온 선행과 악행을 저울질 받고 있었다. '환풍용 창 까지의 높이는 대략 2m, 좀 좁지만 잘하면 저곳으로 들어갈 수 있겠군.' 호흡을 한번 가다듬은 후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몸을 날려 지붕 위에 착지했다. 지붕에 첨예를 꽂은 후 거기에 매달려 안을 들여다보자 안에는 이미 광란의 현장이었다. '맙소사 못 봐 주겠군...' 기절했는지 죽었는지 모르게 축 늘어진 황금빛 머리의 엘프 하나를 두고 일곱놈의 오크와 한 마리의 거대한 오우거가 희롱을 하고 있었다. 실내는 어두운 것을 좋아하는 마물들답게 어두컴컴했지만, 통풍용 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작은 빛과 안에서 스멀스멀 풍겨오는 역한 괴물들의 체액 냄새만으로도 대충 벌어지고 있는 일은 짐작할 수 있었다. 푸른 머리의 엘프는 손발이 묶인 채로 기둥에 묶여 있었지만, 금발의 엘프처럼 심한 꼴을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동료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상하네..... 분명이 셋이 잡혀 왔다고 했는데 둘밖에 안보이잖아? 일단 저 둘이라도 구해야 겠다.' 잠시 실내를 살펴본 유신은 오크와 오우거의 수를 확인하고, 그림자처럼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는 유연한 몸놀림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몸놀림에 비해 행동은 인정사정 없었다.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스프링처럼 튀어 나가 벌거벗고 있는 오크 둘의 머리를 비스듬히 베어 버리자 이빨과 혀바닥, 뇌수들이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며 주인의 몸과 이별을 고했다. 그 다음 먹이 감은 덩치가 커다래서 상대적으로 행동이 굼뜬 오우거였다. 착지한 후 튀어나가던 스피드에 원심력까지 더하여 몸을 한바퀴 회전한 후에 첨예의 손잡이만 겨우 보일 정도로 깊숙이 등을 갈랐다. 자그마한 유신에게는 오우거의 머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엘프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오우거의 등을 가른 것이다. V자 모양으로 베었기 때문에 내장이 와르르 쏟아지며 끔찍한 냄새를 풍겼지만, 척추까지 끊어져버린 오우거는 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절명했다. 여기까지가 착지한 후부터 한 동작으로 이루어진 공격이었다. 피와 내장이 사방으로 튀며 지옥도를 그렸지만, 침착하게 가라앉은 유신의 눈은 이미 다른 상대의 움직임을 좇고 있었다. 유신이 침입하는 것을 볼만도 했지만, 금발의 엘프를 희롱하는데 정신이 팔려있던 마물들은 그 대가를 비싸게 치르게 된 것이다. 허무하게 셋이 죽은 다음에야 놈들이 유신을 발견하고 꿱꿱거리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오크들이 무장을 챙겼다. 하지만 그런 사이에 또다시 둘이 생을 접었다. 혹시라도 엘프의 손에 무기가 닿을까봐 좀 멀리 무장을 둔 것이 그들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갑옷조차도 종이처럼 베어버리는 유신의 첨예 앞에선, 비록 오크의 가죽이 질기다고 해도 버텨낼 리 없다. 서걱서걱하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오우거와 7마리의 오크는 모두 죽어 자빠졌다. 오크나 오우거의 피와 내장은 검붉은 빛을 띠며 구불구불하고 허옇거나 기분 나쁜 회색 빛을 띤, 정말 내장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인간의 피와 내장은 핑크빛으로 어찌 보면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사이 엘리시엘은 묶여있던 동료를 풀어주고, 탈출하기 위해 쓰러진 엘프를 부축하던 참이었다. 싸움이 시작되자 마자 정문으로 들어와서 재빨리 자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해내는 엘리시엘을 보면, 그녀가 모험가 출신이라는 것이 납득이 되었다. 후각을 비롯한 오감이 모두 예민한 엘프들로썬 오크의 욕지기나는 체액 냄새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구역질이 날 터이지만, 망설임 없이 금발의 엘프를 부축한 뒤 밖의 동정을 살펴 보며 탈출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밖에는 이미 소란을 듣고 달려온 오우거를 선두로 10여 마리의 오크가 진을 치고 있었다. '벌써 모였나? 여지껏 죽인 오크가 16마리니까, 이제 14마리 남았군. 오우거는 4마리라고 했는데, 둘은 해치웠지만, 나머지 하나는 어디 있지? 야행성인 서큐버스는 아직 안 온 것 같지만, 여기서 시간을 끌면 다 모일텐데..... 큰일이군. 오른 팔이라도 움직인다면 좋으련만......소란이 일어났는데도 무턱대고 덤벼들지 않고 신중하게 포위를 하는걸 보면......힘들겠는걸......' 상황 판단아 빨라야 살 수 있다. 남은 적의 수를 세고, 죽인 숫자를 세어보고 승산을 가늠해 보는 일련의 과정이 순식간에 유신의 머릿속에서 이루어 졌다. 모두들 자다가 급하게 나왔을 것임에도 제대로 갑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잠을 잘 때도 갑옷을 입고 잘 만큼 전투 준비가 항상 되어있는 군대임을 뜻한다. 암담한 심정으로 밖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유신에게 뜻밖에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저..... 팔을 다치신 것 같은데, 저 탁자의 갈색 가죽 가방 안에 라이트 포션이 들어 있어요. 충분하지는 않아도 팔을 움직이게는 할 수 있을거에요."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푸른 머리의 엘프가 말했다. 연한 녹색의 짧은 치마와 비슷한 색의 바랜 듯 한 상의가 훤칠한 키에 잘 어울리는 엘프였다. 굉장히 아름다웠지만 중성적이고 강인해 보이는 외모였고,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가 전사 타입의 엘프인 것 같았다. 아직 창백한 표정이었지만, 금세 사태파악을 하고 유신의 상처를 알아본 걸로 보아 상당히 단련된 전사임이 확실했다. 포션을 자신이 쓸지 아니면 기절해 있는 금발 엘프를 줄지 잠시 고민하던 유신은 좀 뻔뻔스럽지만 자신이 회복하는데 쓰기로 했다. '미안하지만 내가 쓰는 것이 합리적이겠다. 다친 팔만 회복하면 어떻게 해서든 혈로 정도야 열 수 있겠지.' 부러진 상처 부위의 뼈를 잘 맞추고 포션을 골고루 바르자 부기가 서서히 가라 앉잤다. 워낙 기초체력이 강인하고 포션을 발랐다고는 해도 그런 팔로 전투까지는 바랄 수 없다. 단지 검을 휘두르는 왼팔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움직여 주면 되는 것이다. 유신의 진한 피에는 독약류는 물론 일반의 의약품도 통하지 않는다. 최초의 인간의 피는 워낙 진하기 때문에 그 속에 섞이면 독약이건 약물이건 모두 희석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상처를 치료하는 약의 개념이 아닌 다친 곳의 자연 회복력을 높이고 세포를 강제로 활성화 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엘프의 포션은 틀림없이 유신에게도 효과가 있다. 일반인이 지나치게 이러한 포션을 사용한다면, 포션을 바른 상처 부위가 노화하여 오히려 안 좋을 수도 있지만, 그러한 부작용은 유신에게는 별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어쨌든 포션은 효능이 뛰어나고, 과다하게 사용하지만 않으면 약효가 빠르고 노화이외에는 부작용도 없기 때문에 위험한 직업, 즉 모험가나 용병들은 필수품이었다. 죽는 것보다야 상처 부위의 피부가 좀 늙어 보이는 것이 훨씬 났지 않는가? 물론 일반인이 쉽게 살 수 있을 만큼 저가의 물건은 아니지만 돈보다 목숨이 중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기에 눈물을 머금고라도 한두 병의 포션은 준비하는 것이다. 포위진이 완성되자 대장인 듯한 오우거가 잠을 자다가 침입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무척 짜증이 났다는 것을 온 몸과 목소리로 표현하며 어설픈 마법계 공용어로 외쳤다. "쿠워우억 뭐하는 ... 놈들이냐. 다...당장 나오지 안으면.... 안으면 집채로 부셔 버리겠다." 아까의 오우거보다도 머리하나는 더 커다래 보이는 돌연변이급의 오우거였지만, 그 거대함 보다도 어설프게나마 마법계 공용어를 지껄일 수 있는 오우거의 지능이 더 놀라웠다. '이건 대체 무슨 돌연변이들이 이렇게 많지? 거의 사이크로톱스 만하잖아?' 속으로 투덜거리며 유신이 밖으로 나갔다. 잠시 오우거와 유신의 대치상황이 지속되자 주변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신의 황당하게 갸날퍼 보이는 외모(근육이 터저나갈 것 같이 붙어 있는 오우거나, 그만큼은 아니어도 바위같이 울퉁불퉁한 탄탄한 육체의 오크가 보기에는 그랬다.)는 아무래도 상상력이 부족한 마물들에게 침입자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기엔 상당한 무리가 따랐기 때문이다. '몸에 달라붙는 검정색 셔츠와 조금 통이 커 보이는 검정색의 바지, 무장은 쇠꼬챙이 같이 가는 검정색 칼과 오른쪽 허리에 매달려 있는 화려해 보이는, 하지만 역시 쇠꼬챙이 같아서 싸우기에는 부적절해 보이는 칼, 동그란 검은 눈과 흐트러져 있는 검은 머리카락, 자그마한 손발을 하고 있는 절대로 위험해 보이지 않는 인간' 여기까지가 마물들이 유신을 보고 느낀 공통적인 시선이다. 유신이 비록 인상을 쓰고 있다고 해도 웃고 있는 얼굴로도 수천 배는 더 험악한 인상을 가진 마물들의 입장에선 가소로울 뿐이었다. 이 사태에 대해 나름대로 모자란 생각을 쥐어짜 내던 오우거가 그 둔한 머리로 만족할 만한 결론을 내리고는 의기 양양하게 외쳤다. "쿠에엑 이 비겁한 놈아 애들 뒤에 숨지 말고 당당히 나와서 싸우자.!!" 굉장한 상상력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연약해 보이는 꼬마를 교활한 인간이 내세운 미끼로 간주한 것이다. 약간 둔감한 편에 속하는 유신이 잠시동안 오우거의 이 말뜻을 몰라서 멍하니 바라볼 정도였다. 잠시후 자신의 상상력이 오우거 만도 못함을 깨닫게 된 유신은 어떤 알 수 없는 미지의 원초적인 분노와 자신에 대한 실망에 몸을 떨며 쓰디쓴 좌절을 맛보지 안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자신으로 하여금 이러한 당혹스런 감정을 느끼게 한 이 돌연변이 오우거에게 무한한 분노를 담아서 강력한 일검을 선사했다. 천천히 한발을 내 딛는가 싶더니 급속도로 한바퀴 돌면서 첨예의 끝에 원심력과 가속도를 비롯한 유신이 구사할 수 있는 모든 물리적 힘과, 상처받은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까지 까지 싫은 일격필살 이었다. 좀 전에 엘프를 구하면서 오우거의 등을 베었던 그 기술의 강화판이라고 할 수 있다. 단 한발 밟는 것만으로 3m 이상의 간격을 좁힐 수 있는 이 검술은, 위력도 위력이지만 그보단 상대방이 타이밍을 잡기 힘들기 때문에 방심한 상대방에게 쓰면 거의 실패하는 일이 없는 필살기였다. 단, 원심력과 거리를 좁히기 위해 처음 발을 내딛으며 회전을 할 때에 등이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므로 긴장하고 있는 상대에게 잘못 썼다간 자살행위일 수도 있는 대담한 검술이다. 다행이도 이 오우거 역시 티이밍을 잡지 못해 뒤로 물러서다가 예상보다 훨씬 긴 첨예의 끝에 가슴팍에 손가락 세 마디 만한 깊이의 상처를 얻었다. 갑옷을 입었지만, 이런 공격을 막을만한 것은 이름난 드워프 장인이 만든 마법갑옷이라도 힘든 일이다. 보통의 철보다 조금 강해 보이는 검은 갑옷은 주인을 지키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뼈까지 상했을만한 깊은 상처였겠지만, 오우거의 가죽과 근육층은 인간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에 피를 뿜어대며 괴성을 지르긴 했어도 치명상을 주진 못했다. '쳇.... 손끝에 반응이 없다. 괜히 오우거를 더욱 경계하게 만들었군.' 이 일격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유신이라 약간의 밸런스가 흩어졌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오우거의 3m 는 족히 되어 보이는 검이 유신을 그대로 두토막 내겠다는 기세로 비스듬히 떨어졌다. 높은 곳에서 내리 찍듯이 떨어지는 공격이라 피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뒤에서 보고 있던 엘리시엘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으려는 찰나 유신의 몸이 허물어지듯 땅으로 주저앉으며 사각인 오우거의 다리를 베어버렸다. 왼발을 땅에 고정시키고 오른발을 앞으로 쭉 빼어 다리를 일자로 찢고 몸도 푹 숙이며 검을 날리자 거의 지면에 닿을 만큼 자세가 낮아저 옆에서 보기에는 꼭 무너지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하지만 이 일격으로 무너진 것은 다리뼈까지도 깊숙이 베어져 버린 오우거 였다. 쓰러지는 오우거의 목줄기는 이미 유신의 첨예가 스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다크블러드 역시 노름으로 그 명성을 얻은 것은 아니다. 처음 유신이 날린 일격을 보고 상대방이 강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훨씬 치밀한 공격이 들어 왔다. 오크 두 마리가 무너지는 거대한 오우거의 등 뒤쪽 사각으로 접근하여 동시에 양 옆에서 무식하게 생긴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첨예를 들고 있는 왼팔로 왼쪽의 글레이브는 간신히 퉁겨 냈지만, 오른쪽에서 날아오는 글레이브는 뒤로 물러서며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 밀리는 기색을 보이자 다음 녀석의 연계 공격이 쉴새 없이 들어 왔다. 왼쪽의 오크가 강한 일격으로 유신의 균형을 흩트러트리는 사이에 오른쪽의 녀석은 취약한 다리 쪽을 노리고 낮게 글레이브를 쓸어 내렸다. 하지만 유신 역시 적의 공격 패턴을 간파한 터라, 순간적으로 낮게 들어오는 오크의 머리위를 공중 턴으로 넘어가며 다리 쪽을 공격하느라고 숙여진 오크의 목 뒷부분을 사정없이 그어 버렸다. 하지만 이미 유신이 착지하는 곳에선 다른 오크의 기다란 롱소드가 날아들고 있었다. 착지하는 가속도 까지 사용하여 간신히 두 개의 롱소드를 쳐낸 후 상대방의 자세가 무너진 틈을 타서 두 오크의 배를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랐다. 워낙 날카로운 첨예인지라 갑옷은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 졌다는 듯이 살짝 금만 간것처럼 보였지만, 그 갑옷 속의 내장은 이미 엉망으로 피를 뿜고 있었다. 순식간에 오우거 하나와 오크 셋을 베는 것을 보면 유신이 압도적으로 유리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유신은 초조해 하고 있었다. 봉인되서 나약해져 버린 자신의 육체가 이미 비명을 지르며 힘겨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유신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만큼 적들은 풋내기가 아니었다. 숨 쉴틈 없는 연계 공격이 계속 이어져 들어왔다. 10~12합 가량 더 격돌이 있고 나자 오크 둘이 더 목숨을 잃었지만, 유신도 헉헉거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적의 지친 모습을 보고 무작정 덤벼들던 오크들이지만, 유신의 저항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고, 동료들이 하나 둘 줄어들자 신중하게 포위를 하기 시작했다. '헉...헉.... 이제 오크는 9마리 남았나? 조금만 더.... 힘을 내자!' 만약 마물들이 조금 더 밀어 붙였으면 유신을 잡을 수도 있었겠지만, 30기나 있던 오크들중 21마리나 죽은 상황에서 더 이상 무턱대고 수로 밀어붙이기에는 마물들도 겁이 났다. 유신으로선 첨만 다행으로 숨 고를 시간을 번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던 것도 잠시였고, 마지막 오우거가 나타나자 당혹스러움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뭐야? 이게 뭐냐고? 무슨 오우거가 4m 가 넘어? 이건 싸이크로톱스 만 하잖아? 반칙이야. 이럴 수는 없다고. 설마 누가 유전자 조작이라도 한건가?' 봉인당한 유신조차도 느낄수 있는 강력한 코어가 괴물 오우거의 전신에서 느껴졌다. 저 정도 코어를 다룰 수 있다면 아마 검기도 낼 수 있을 것이다. 코어를 봉인 당해 검기를 쓸 수 없는 유신으로선, 아무리 강력한 첨예가 뒷받침 해준다 해도 저 괴물의 검을 정면으로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첨예라도 저정도 크기의 검에 코어를 주입해서 내리 친다면 틀림없이 충격을 받을 것이고, 첨예의 연장선 상에 있는 유신역시 그 충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너는 인간인가? 정말 굉장하군. 다크블러드에서도 약하지 않은 녀석들을 뽑아서 데려 온 것인데 이 모양이라니... 내 이름은 무스칼이다. 전사여. 너의 이름은 무엇인가?" 제대로 된 마법계 공용어였다. 이놈은 절대 하급한 단순 몬스터가 아니다. 누군가 마법으로 정성 들여서 키운 뒤 지능을 부여한 것이다. "유신이라고 한다. 그러는 너야말로 무엇이지? 단순한 오우거는 아니군. 너의 주인은 누구냐? 누가 법칙을 깨며 너 같은 괴물을 만들었는가?" "인간이여 너는 알아서는 안될 지식을 가진 자 같구나. 이곳에서 죽는 것이 좋겠다." 무스칼이 마법계 공용어가 아닌 오우거 특유의 언어로 중얼거리듯 말했지만, 번역기를 가지고 있는 유신은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무스칼과 유신이 서로 무기를 겨눈채 찬찬히 상대방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어른과 아기의 싸움보다도 덩치 차이가 더 낳지만, 무스칼이란 오우거는 결코 경솔하게 먼저 덤벼들지 않았다. 5m 가량 되는 언월도를 들고 있는 자신으로썬, 공격해 들어오는 유신을 향해 반격타를 날려도 워낙 리치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늦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방이 내뿜는 기운이 이상하리 만치 미약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이정도로 강한 전사라면 틀림없이 투기(코어)가 몸이 떨려올 정도로 느껴져야 할 터인데 눈앞의 작은 소년에게선 거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투기가 전혀 없는 조그만 인간이 내 부하를 이렇게 많이 해치웠단 말인가? 틀림없이 어떤 사술을 쓸 것이다. 경솔하게 덤벼들지 말고 천천히 압박해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몇 번인가 돌진해 들어갈 타이밍을 노리던 유신이었지만, 오우거의 수비자세가 완벽한데다가 언월도의 거대함에 질려서 다가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일단 품안으로 파고드는 것까지가 승부의 관건인가? 후후 이건 정말 재미있군.' 유신역시 근 1000년을 싸워온 전사이다.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두려움이나 걱정보다도 강한 상대와 싸운다는 희열이 몸을 타고 흘렀다. 무스칼에게 집중하며 검을 몇 바퀴 돌리고는 신중하게 상단 겨누기 자세로 들어갔다. 상단을 겨눈다고 해봐야 무스칼의 배정도 높이도 공격하기 힘들겠지만, 상대방의 눈을 처다보며 움직임을 읽으려면 아무래도 상단 겨누기를 해야 했다. 좋은 찬스가 있을까 이리저리 유신이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 무스칼의 뒤쪽에서 두 개의 검은 기운이 뭉치더니 이윽고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무스칼 장군. 흄 폐하가 부르십니다. 이번의 무리한 작전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질책이 있을 듯 하군요. 호호홋 어서 가 보십시오." 놀랍게도 아직 해가 질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터질 듯이 풍만한 몸의 아름다운 몬스터인 서큐버스 두 마리가 나타났다. '쿠엑..... 서큐버스까지? 도대체 대낮에 돌아다니는 서큐버스가 어디 있단 말인가?' 유신이 자세히 서큐버스 둘을 관찰하자 그녀들의 주위에만 짇튼 어둠이 깔려 있었다. 아마도 결계의 일종인 것 같았지만, 아무리 강력한 결계내라고 해도 밤의 몬스터인 서큐버스가 어떻게 이런 시간에 돌아다닐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릴 곳만 겨우 가린 검정 색의 타이트한 옷에 나풀나풀한, 역시 검정색의 깃털모양의 장식이 잘 어울리는 서큐버스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마른 체형의 엘프와는 달리 터질 듯이 풍만한 아름다움을 지닌 이 몬스터는 인간 남자의 정념을 빨아먹는 요괴로써, 이 아름다운 외모에 홀려서 그녀들과 자게 된다면 골수까지 에너지를 빨려서 죽게 되는 것이다. 뱀파이어처럼 흡혈의 능력도 있지만, 그보다는 남자의 정기를 빼앗는것을 즐기는 잔혹한 괴물이 서큐버스이다. 특히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에 비해 한손에 잡힐 듯이 가는 허리가 압권이었다. 그런 몸매를 과시라도 하듯 딱 달라붙는 보일 듯 말 듯 한 옷을 입고 있어서 남자들을 더욱 흥분하게 하는 것이다. 차가와 보이는 은발의 긴 생머리 역시 검은색의 옷과 잘 어울렸다. "어머, 엉큼한 남자네요. 그렇게 뚫어지게 처다 보면 부끄러워요." 요염한 웃음을 띠며 별로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 않은 표정으로 유신에게 농을 걸자, 잠시 불만스런 표정으로 서큐버스를 바라보던 무스칼은 별 말없이 돌아서며 중앙에 있는 막사로 걸어갔다. 유신과 싸우지 못하게 된 것이 불만스런 모양이지만, 무스칼 정도나 되는 괴물이 간단한 명령 한마디로 별 말없이 물러서는 것을 보면 흄이라는 녀석의 카리스마가 대단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중앙의 막사에 흄과 이어져 있는 게이트 마법진이 있는 것 같군.' 무스칼이 사라진 쪽을 보며 유신이 작게 중얼거렸다.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티아라 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동생인 티스랍니다." 둘다 비슷한 용모였지만,티아라는 관능적인 매력이 철철 넘치는 전형적인 서큐버스였고, 동생인 티스는 차갑고 이지적인 느낌이 드는 특이한 서큐버스였다. 하지만 복장자체가 워낙 아슬아슬 해서 눈 둘 곳이 마땅치 않은 유신은 자세히 들여다 볼만한 여유가 없었다. 무스칼이 사라지자 다음에 벌어질 사태에 대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유신에게 티아라가 좀 화난듯한 목소리로 힐난했다. "굉장한 검사님인 것 같군요. 이 많은 마물을 혼자서 해치우다니...... 하지만 아름다운 숙녀가 먼저 이름을 말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걸 보니, 예절은 영 떨어지는군요." '서큐버스같은 마물 따위가 숙녀라니..... 당치않은 말을.......'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그걸 지적해서 무서운 두 몬스터를 화나게 할 만큼 바보 같은 유신은 아니다. "전 유신이라고 합니다. 여기 잡혀왔다는 엘프 셋을 무사히 보내준다면 더 이상 소란 피우지 않고 조용히 물러가겠습니다." 저런 어린 나이에 엄청난 검술을 구사하는 유신의 배후를 조금이라도 알아내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지만 너무 간단하게 유신이 대답해 버리자 티아라는 화가 났다. "호호호 그럴 순 없겠네요. 엘프들중 남자분은 이미 이 세상분이 아니거든요. 우리 자매와 좋은 시간을 보내다가 너무 좋았는지 영영 떠나 버리셨어요. 미라처럼 바싹 말라버려서 좀 보기 흉하지만.... 시신이라도 가져 갈래요? 저기 어디쯤에 버려 놨을 테니까요." '엘프들중 하나는 남자였나보군. 그나저나 순결과 조화의 엘프조차도 서큐버스의 마성에 넘어가 버릴 정도인가? 서큐버스란 정말 대단하군.' "그렇다면 죽은 엘프에 대해선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남은 이들만 보내 주시죠?" 쓸데없는 소리란 건 알지만 자꾸 서큐버스에게 말을 시켜서 호흡고를 시간을 버는 것이다. 지금 상태로도 거의 승산이 없는데 만약 서큐버스가 오크들에게 마법지원을 해 준다면 자칫 몸을 빼지도 못할 상황에 처할수도 있다. 게다가 시간을 끌다보면 혹시 실피드가 엘핀서스에 연락을 해서 지원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꾸 시간을 끄는 유신이다. 오크나 오우거라면 맞지 않고 잘 피하면서 싸울 수 있지만, 서큐버스라면 마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달라진다. 타격계 무기만큼 치명적이진 않더라도 매직에로우 같이 시전 시간이 짧고, 피하기 힘든 마법을 두 세대만 맞으면 지금의 유신으로썬 전투불능 상태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큐버스는 스피드가 상당하기 때문에 쉽게 공격하기도 힘들다. "언제까지 떠들기만 할거지요? 그쪽 검사님도 상당한 것 같으니 한번 덤벼 보시지요?" 티스란 서큐버스는 언니처럼 착착 감기는 요염함은 없었지만, 직설적이고 냉랭한 것이 나름대로 매력적이었다. 대충 호흡 고를 시간을 벌려고 했지만, 티스가 싸움을 재촉하자 유신이 검을 고쳐쥐며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정 밀린다면 결정적인 순간이 용아검을 쓸 생각이었기에 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서큐버스라니..... 싸우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비록 몬스터라 해도 여자와는 싸우지 않는 유신이다. 주위에 있던 유진이나 가브리엘, 루시펠등 그가 무서워 할만한 존재들이 모두 여성인 것이 정신적 스트레스가 될 뿐만 아니라, 아주 오래 전 힘의 각성을 위해 수련을 지도해준 상대가 가브리엘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유신에게 검술과 코어, 마나의 운용을 가르쳐 주면서, 남자는 여자를 보호하기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해 왔다. 4대째 유신부터 3000년 가까이 그의 교육을 담당해온 지브릴이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에까지도 구석구석 배어 있어서 그녀의 말은 거역하기 힘든 강력함이 있었다. "그만들 둬라. 티아라, 티스. 내가 직접 물어볼 것이 있다." 유신이 달려들려는 순간 무스칼이 사라진 막사안에서 이 결계를 펼친 장본인이라고 여겨지는 바로 그 마법사가 걸어 나왔다. '흐아아....역시 대단하군. 평범한 인간이 이런 경지의 마나를 다룰 수 있다니......마신들과 어둠의 계약을 맺은 것 같지도 않은데..... 대체 마법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마법계가 위시마스터의 관리 하에 있을 때는 무스칼같은 돌연변이 오우거나 이렇게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강력한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 따위는 없었다. 마스터들이 세계를 감시하며 위험 요소들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마법계가 올바르게 흘러가도록 뒤에서 손을 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무스칼같은 괴물 오우거를 배양한다면, 그 실험이 제대로 되지 않도록 방해를 가해서 결국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위시마스터의 역할중 한 부분이었다. "네놈.... 뭐하는 놈이냐? 특별히 마나나 코어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데 오우거를 이기다니....게다가 그칼! 어떤 금속을 쓴 것이지? 본적이 없는 금속이구나. 마법검도 아닌 것 같은데 다크블러드의 블루메탈 갑옷을 종이처럼 찢다니...... 정말 재미있는 놈이구나. 우리 다크블러드에 협력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아마 유신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검이 8000년도 넘게 살아온 용제의 송곳니로 만든 용아검인 것을 안다면 눈이 튀어나와서 빼앗으려고 덤벼들겠지만, 용제의 기운을 덮어주는 검집에 잠들어 있는 용아검의 존재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거절하지요." "후후후 당돌한 놈이구나. 네놈을 죽이고 머릿속에서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도 손쉬운 일이야. 솜씨가 아까워서 살려줄 기회를 주었는데 죽음을 재촉하는구나."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날 쉽게 이길 것 같나요?" "흐흐흐 재미있는 꼬마로군. 어디 덤벼보....." 마법사는 끝까지 말을 이을수 없었다. 유신과의 거리가 꽤 되었기 때문에, 검사는 접근전에만 강하다는 상식에 묶여있던 마법사는 그 많은 오크와 오우거의 시체에도 불구하고 방심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 바로 앞에 갑자기 첨예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유신이 한방 먹었다. 마법사 주위에 바리어가 쳐저 있었는지, 첨예가 엄청난 마찰음을 내다가 결국 유신과 함께 퉁겨져 나갔다. ".....덤벼보거라. 크하하 방금 무었을 한 것이냐? 겨우 그따위 힘으론 내게 접근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글쎄... 어떨까나? 음침한 로브를 써서 나이가 많을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리군. 나도 말 놓겠어. 불만은 없겠지?" 어느새 시커먼 마법사의 후드부분이 베어져 나가고 맨 얼굴이 들어나 있었다. 20세도 안되어 보이는 어려보이는 외모에 미소년까지는 아니어도, 깔끔하고 단정한, 하지만 조금은 평범해 보이는 얼굴이 들어 났다. 조금전의 일격으로 뺨에 가늘게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고 있어서 좀 험한 인상이 되었지만, 강력한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처럼 생기지 않은 평범한 얼굴이었다. 툴툴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유신의 빈정거림이 이어졌다. "멀쩡한 얼굴인데..... 왜 이런 음침한 패들하고 어울리......" 하지만 이번엔 유신이 말을 끝맺지 못했다. 티스와 티아라의 날카로운 손톱이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건방진놈 감히 딜트님에게 칼을 들이대다니....." 서큐버스의 작은 만큼 빠른 스피드는 이미 지쳐있는데다가 좀전의 충격으로 자세를 가다듬지 못한 유신으로선 버거운 것이다. 가슴과 팔에 길게 상처를 입으며 뒤로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산 넘어 산이라고 서큐버스 자매의 협공에 이어 딜트의 7연발 매직 애로우가 살벌한 푸른 호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매직애로우는 보통의 마법사라면 한번에 세 개정도 구사할 수 있는 초급 마법이지만, 7개를 구사한다는 것은 보통 수준의 마법사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기초적인 마법이라도 한꺼번에 몇 개를 동시에 시전하는 것은 그 만큼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매직애로우중 두 개를 간신히 피하고 세 개까지는 물러서면서 칼로 처 낼 수 있었지만, 두 방을 각각 배와 오른쪽 팔에 맞고 저만큼 구석에 처박히고 말았다. '이런, 또 오른팔인가?' 간신히 포션으로 뼈를 살짝 붙여 논 상태인데 다시 충격을 받자 여지없이 부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부러진 팔보다도 배에 맞은 한발이 훨씬 치명적인 것 같았다. 반격하기 위해 일어서려고 했지만, 배 아래쪽으론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내장이 토막 나는 듯한 고통이 몰려 왔다. '이런 위력의 매직 애로우라니? 철퇴에 맞은 것 같잖아?' 칼을 놓치진 않았지만, 제대로 쥐고 있는 건지 자신이 없을 정도로 감각이 가물가물해 졌다. 유신이 처박힌 채 끙끙거리며 일어서지 못하자 티아라가 먹음직 스런 먹이감을 노리는 고양이 같은 눈을 빛내며 다가 왔다. "호홋, 보기완 딴판으로 터프한 분이네요.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살아 있다니.....어머~ 제 취향에 맞게 얼굴도 아주 귀엽게 생겼고 ...... 그럼 맛 좀 볼까요?" 쓰러진 유신을 미술품 감정하듯 이리 저리 둘러보던 티아라의 눈이 붉게 충혈 되더니 송곳니가 비죽하게 길어졌다. 아름답던 얼굴이 몬스터답게 사악하고 무시무시하게 변했다. 티아라는 날카로운 이빨을 유신의 목에 들이대고 잠시 음미하듯 살 냄새를 맡아본 후 피를 빨기 시작했다. 서큐버스 특유의 스킬인 차밍(매혹마법의 일종)으로 홀려서 밤에 데리고 놀 수도 있겠지만, 딜트의 앞이라 그냥 피만으로 만족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러나 유신의 피가 입안에 고이는 순간 티아라는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일개 서큐버스 따위가 창세신의 피로 만들었다는 최초의 인간의 피를 마시고 무사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크아아악!! 아아악!!" 유신의 피가 닿았던 입 주위부터 까맣게 타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아름다운 얼굴부터 목으로점점 내려가며 온통 썩어 짓물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쉽게 죽지도 못하는 듯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를 뿐이었다. "언니!!, 대체 무슨?....." 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해 저서 티스가 언니에게 다가왔지만,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지 더욱 크게 비명을 급기야 동생에게 달려 들었다. 딜트도 크게 당황하여 마법으로라도 그녀를 재우거나 아니면 동결시켜버릴 생각으로다가 왔다. 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티아라는 인간인 딜트가 다가오자 그 피를 취해서 고통을 줄여 보겠다는 본능적인 생각밖에 없었다. 마구잡이식의 공격을 퍼부었지만, 상처 입기 전보다도 훨씬 빠른 몸놀림이었고 설마 그녀가 공격하리라곤 생각지 못한 딜트인지라 그만 한 팔을 잡히고 말았다. 놀란 티스가 이를 악물더니 딜트의 팔을 잡고 있는 언니의 손을 잘라내고는 그녀의 언니와 뒤엉켜 쓰러졌다. 혹시라도 꺼멓게 타 들어가는 것이 무슨 독의 일종이라면, 거기에 잡힌 자신의 주인도 해가 될지 모른다고 판단했기에 자신의 언니의 팔까지 잘라내며 주인과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몬스터로써는 대단한 충성심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결정적인 실수가 되었다. 서큐버스 자매가 딜트로부터 떨어진 순간 유신이 혼신의 일격을 날린 것이다. 인간보다 몇 배나 동체시력이 좋은 서큐버스라면 이 검을 볼 수도 있었겠지만, 마법사인 딜트로서는 무리였다. 유신이 쓰러진 후 방심하여 바리어 마법을 풀어 놓고 있었던 딜트는 왼쪽 어깨부위부터 오른쪽 골반에 이르기까지 길다란 검상을 입고 말았다. 첨예의 끝이 살짝 스친 정도이지만 상처 부위가 워낙 길어서 엄청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결정타를 날리지 못하고 유신도 허물어 졌다. 완전히 힘을 다한 것이다. 아니, 사실 이만큼 싸운것도 한계를 넘어서 싸워온지 한참 지났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이놈이!!" 격노한 딜트가 양 손을 휘저으며 뭐라고 중얼거리자 그 손에 오우거 머리 만한 거대한 불덩어리가 시뻘건 혓바닥을 널름거리며 나타났다. 초급의 매직애로우 따위의 공격마법이 아닌 5써클 후반의 범위 공격마법인 화이어 볼이다. 그것도 보통 화이어 볼처럼 사람의 머리 만한 크기가 아니라 그보다 두 배 이상 커 보이는 특대의 파이어볼이었다. 아마도 그것을 정면으로 맞으면 뼈까지 타 버릴 것이다. 주문을 다 외운 딜트의 손이 하늘을 향하자, 불덩어리도 딜트의 머리 위에서 당장이라도 쏘아져 나갈 듯 일렁였다. 딜트의 손이 유신을 가리킨다면, 시전자의 명을 받은 파이어볼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날아가서, 그 표적이 된 유신을 산산조각 내고 마지막 뼈 한 조각까지 태워버릴 것이다. 절대절명의 순간, 딜트 주위의 나무줄기와 뿌리가 마치 살아있는 동물의 촉수처럼 딜트의 다리 밑으로 휘감기더니 순식간에 하늘로 낚아 채 올렸다. 물론 딜트가 준비하던 파이어볼은 겨냥이 크게 빛나가 유신과 한참 떨어져 있는 곳에서 대 폭발을 일으켰다. 방금 유신이 가한 일격으로 딜트의 정신 밸런스가 무너져 버려, 숲에 처 두었던 결계에 한순간이지만 마나의 공급이 끊긴 것이다. 더욱이 과다 출혈로 인해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한번 파괴된 결계를 다시 치기는 아무리 딜트라도 무리였다. 결계가 사라지자마자 엘프에게 해를 가하거나, 자연을 파괴하는 자를 벌주는 숲의 혹독한 저주가 발동된 것이다. 마법사를 구하기 위해 글레이브와 롱소드를 치켜들고 오크들이 뛰어들었지만, 그들에겐 대기를 가르는 진공파가 된 실피드가 날아 들었다. 안에서 이 싸움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엘리시엘이 결계가 풀린 것을 알자 눈치 빠르게도 가장 빠른 바람의 정령을 소환한 것이다. "자유를 사랑하는 바람의 실피드여. 방랑자에겐 작은 웃음의 미풍을, 파괴자에겐 응징의 검이 내리는 죽음의 심판을...... 사막에 내리는 한줄기 빗방울은 바위도 뚫을지니, 정결한 물의 운디네여. 숲을 어지럽힌 자들에게 정화의 창을." 혹시 다시 결계가 발동될까봐 무리를 해서라도 연속적으로 정령을 소환하는 엘리시엘이다. 나무 줄기나 뿌리에 묶여버린 오크들은 별반 저항을 하지 못하고 정령술에 말려서 하나 둘 쓰러져 갔다. 딜트가 뒤늦게 마법으로 저항을 해 보려고 했지만, 이미 숲에 사로잡혀서 주문을 외울만한 여유가 없었다. 마법이란 고도의 정신 집중이 필요한 것인다. 하지만 딜트는 아직 나무에 묶여서 휘둘려 지는 상태로 주문을 외울 수 있을 정도의 경험은 없는 것 같았다.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강대한 마나와 마법 지식은 손에 넣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전투경험이라는 것은 절대로 하루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니다. 아직 20살도 되지 않은 딜트로서는 적절하게 마법을 조합하거나, 상황에 맞는 유연한 지휘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전에도 윈드커터같이 초급의 마법이었다면 쉽게 나무뿌리를 잘라 내고 도망친 후 큰 주문을 외울 시간을 벌 수 있었겠지만, 처음부터 노바스톰같이 대형 주문을 외우려다 타이밍을 못 잡은 것이다. 몇번 더 주문을 외워보려 했지만, 마나를 모을 때마다 나무의 흔들림이 거세어 저서 결국은 사로잡히고 말았다. 유신에게 너무 신경을 쓰느라고 엘리시엘을 방치해 둔 것이 치명적 실수가 된 것이다. 딜트가 잘못 시전한 파이어볼의 영향으로 숲의 일부가 완전히 재만 남기고 타 버려서, 미친 듯이 분노한 숲은 엘프를 제외하고는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이는 기절해 있는 유신도 예외가 아니어서 숲의 정령인 드라이어드가 공격을 가했다. 드라이어드는 화가나면 인간의 정신세계에 침입해서 그 사람이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악몽을 보여줌으로써 정신적 데미지를 주는 것이다. 기분이 좋을때는 아름다운 환영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잘못하면 홀려 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좋은 것이라곤 할 수 없다. 유신의 꿈속. 질척하게 감기는 검은 기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바돈의 대지에서 느껴졌던 죽음의 풍경과도 비슷했다.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독기로 바위마저 뒤틀려져 기괴한 모양을 하고 있었고, 드물게 보이는 식물들 조차도 적의를 가진 듯한 진득한 갈색의 촉수와 독을 품고 있었다. 유신은 이상하게 몸도 나른하고 정신도 몽롱한 것이 괜히 짜증스러웠다. 그때 농염한 어둠의 저편에서 친숙하고 그리운 아름다운 '빛'이 보였다. 휘황한 빛에 쌓인 12장의 크고 풍성한 아름다운 날개, 자그마한 얼굴에 호수처럼 빛나는 맑고 푸른 두 개의 눈, 맞춤하게 자리잡은 오똑한 코와 붉은 입술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모습이었다. 타천사의 낙인이 찍히기 전인 '신을 찬양하는 첫 번째 목소리'란 영광스런 칭호로 불릴때의 루시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름답고 강한 그녀가 무언가에 쫓기는 듯 엉망인 몰골로 달아나고 있었다. 12장의 날개는 찢기거나 부러진 채로 뒤엉켜 붉은 선혈이 군데군데 흐르며 땅에 끌리고 있었고, 언제나 당당하면서도 한없이 자비롭던 깊고 푸른 눈은 공포에 질린채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천사 특유의 하얀 옷은 어디에 글켰는지 군데군데 찢어져 하얀 맨살이 드러나 있었다. 달아나는 그녀의 맨발에는 괴기스러운 식물들이 엉켜 들면서 그녀를 방해 했다. 상상도 해 본적 없었던 루시펠의 애처로운 모습에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러 달려가고 싶지만, 유신을 둘러 싸고 있는 어둠은 너무나 무겁고, 움직이기에도 버거웠다. '무엇이 루시펠님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어떻게 해서든 내가 막아야 겠다.' 유신은 비몽사몽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그녀를 돕기 위해 한발한발 다가갔다. 점점 루시펠에게 다가갈수록 처음엔 희뿌옇게 어둠에 쌓여있던 루시펠을 쫓던 검은 괴물의 모습이 들어 났다. 끔찍하게 뒤틀린 각질과 살덩어리들은 더러운 악취를 풍기며 꿈틀대고 있었고, 우주의 어느 종족과도 완전히 다른 이 괴물의 모습은 무엇이라고 표현 할 수 없는 공포감을 주었다. 하지만 유신은 그 괴물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 존재가 온 몸으로 느껴졌다.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존재.......가장 두려운 적...... 그것은 유신 자신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정신계 정령의 공격이라는 것도 깨달은 유신이다.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접어두었던 죄책감과 아픔들이 겨우 드라이어드 따위에게 이용되어 눈앞에 펼쳐지자,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의 나약함에 대해 서글픔이 느껴졌다. 일개 정령 따위가 정령왕 조차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유신의 정신에 침입하여 가장 깊은곳에 숨겨두었던 약한 생각들을 끄집어 내어 보여줄 만큼 지금의 유신이 약해진 것이 사실이고, 또 이 싸움으로 지쳐 있던 것이다. '맙소사...... 겨우 오거 몇놈과 크놈인 조금을 상대했다고 정신오염이라니.... 봉인은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력까지 약하게 만드는 것인가?' 차분하게 유신이 마음을 가라 안치려 애쓰면서 이 환영을 깨버릴 궁리를 하고 있을 때도 드라이어드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마왕의 몸을 한 유신이 도망치는 루시펠을 잡아 올려 실컷 농락한 후 몸부림 치는 그녀의 날개를 하나씩 비틀어 떼어 내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해도 그녀에 대한 죄책감으로 시달리고 있던 유신으로썬 그런 잔인하고 저열한 환영에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정신이 흩트러지면 흩트러 질수록 환영은 더욱 집요하고 노골적으로 유신을 괴롭혔다. 이미 모든 날개를 잃고 반항할 힘조차 잃은 듯 가끔 가는 경련만을 일으키는 루시펠은, 피투성이 속에서조차도 섬짓 하고도 애처로운 아름다움을 잃지 않아서 더욱 유신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아무래도 이미 정신공격에 말려 버린 이상, 이 괴물을 쓰러뜨리지 안는 한 환영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공략해 들어가야 할지 암담했다. 싸워야 할 상대는 자기 자신이고, 비록 환영이라도 방심하다가 그 공격을 심하게 받으면, 자칫 쇼크사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 결정적인 반격찬스가 없다면 얼마나 힘든 싸움이 될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끔찍한 괴물은 이미 루시펠의 팔다리조차 뭉게버리고는 섬틋게 붉은 눈 비슷한 부위로 유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촉수인지 뼈인지 모를 틈에 껴 버렸던 루시펠의 환영은 이미 처참한 붉은 덩어리들이 되어 바스라져 있었다. 뭔가 저 괴물을 칠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며 서서히 호흡을 가다듬고 급소를 노리던 유신의 머리위로 기적과 같이 찬란한 빛의 기둥이 내려오더니, 그 속에서 코스믹 블래스터가 마왕을 봉인하기 전의 하얗고 푸른 검신을 뽐내며 나타났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거지? 이건 누군가 외부에서 마법으로 도움을 주는 걸까?' 깊이 생각할 틈이 없었다. 괴물은 이미 다리의 용도로 사용되는 듯한 기괴한 부분을 절뚝절뚝 움직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코스믹 블래스터의 익숙한 손잡이 부분의 까칠한 감촉을 느끼며 유신도 괴물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만지면 틀림없이 미끌거릴 것 같은 기분 나쁜 촉수와 뼈처럼 보이는 부분들이 죽죽 늘어나더니 유신에게 덮쳐 왔다. 아마 이런 괴물류와 싸워 보았던 전투경험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유신이라 해도 당황한 나머지 순식간에 말려서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계대전에서 수도 없이 이런 괴물들과 싸워본 유신으로선 이 괴물의 공격패턴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꿈속이니 만큼 봉인되기 전의 힘을 구사 할 수 있는 유신이다. 코스믹 블래스터를 이용해 4개의 검기를 날려 앞을 가로막는 촉수와 뼈들을 토막낸 후 부서져 나가는 괴물의 부스러기들을 밟고 단숨에 머리라고 추측되는 부분까지 날아 올랐다. 드라이어드 따위가 만드는 환영이 성계대전이라는 아수라장을 걸어온 유신의 상대가 될리 없다. 코스믹블래스터에서 푸른 빛 기둥이 작렬하자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괴물은 폭발해 버렸고 환영의 세계는 유리 파편처럼 깨지더니 무너저 내렸다. . . . . . ".....시.....신......유신.........유우신........정신차려" 멀리에서 낭랑하지만, 걱정에 빠진 듯 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에..... 오크들과 전투를 하고 있었는데.... 그다음엔...' 여기까지 생각한 유신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려다가 눈앞의 엘리시엘과 머리를 부딫치고는 둘 다 나동그라졌다. 아직 싸움의 결말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기절해 버렸던 유신이라, 혹시 주변에 적이 더 있을까봐 전투 태세를 갖추기 위해 벌떡 일어섰지만, 그의 눈앞에 있었던 건 걱정스런 표정의 엘리시엘이었다. 엘리시엘 역시 유신이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리라곤 생각지 못한 터라 정통으로 들이받은 후 쓰러진 것이다. "아야야... 아퍼......" 유신은 머리를 부여잡고 낑낑대는 엘리시엘과는 달리 혹시 적의 공격을 받은 건 아닌가 하는 걱정에 고양이처럼 몸을 긴장시키며 주변부터 살폈다. 잠시후 그의 시야에 쪼그려 앉은 채 머리를 쓰다듬는 엘리시엘이 들어 왔다. "어? 엘리시엘? 어떻게 된 거지요? 마물들은?" "우왕~ 정신차렸구나. 걱정했어. 드라이어드가 폭주하는 바람에 유신도 적으로 간주해서 공격했나봐. 꽤 깊은 심층의식까지 침투 당한 것 같아서 도와주기도 힘들었다고. 근데 용케도 드라이어드를 물리치고 나왔네? 쉽지 않았을 텐데...." "아... 예...... 도움을 준 것은 엘리시엘이었군요.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다른 마물들은..." "아하하 이제 유신도 말 놔. 생명의 은인이고 친구하기로 했잖아. "아...예.....그러니까 다른 마물들은 ......" "너 보기보다 되게 강하다. 호리호리해서 약한 줄 알았는데...... 칼도 강력한 것 같고....아마 엘핀서스에서 근사하게 대접해 줄 거야. 엘프는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는 종족이라고." "그러니까......" 숲의 결계가 풀리고 잠시 후에 실피드의 연락을 받은 엘프레인저들이 도착해서 싸움은 마무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엘리시엘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엘프를 통해서였다. 레인저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마물들이 쓰러진 후지만, 딜트와 서큐버스를 잡는데 꽤나 고생한 것 같았다. 나무에 묶인 채로도 상당히 강력한 마법을 구사한 딜트는 그 상황에서도 중앙의 막사에 있던 마법진에 공격마법을 걸어서 흔적도 없이 파괴시켜 버렸다. 하지만 큰 부상자는 나지 않은 채 마물들을 소탕하고 딜트와 서큐버스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다른 마물들의 시체는 대충 처리하였지만, 티아라의 사체에는 접근하기가 뭐해서 태워 버렸다. "이야..... 엘리시엘 보기보다 훨씬 강한가 보구나. 결계 내에선 꼼짝도 못하더니, 남은 오크들은 니가 전부 쓰러뜨린 거야?" "아까 너도 그랬잖아. 정신계 정령의 힘을 느끼는 건 대단한 정령사라고. 결계만 없다면 이까짓 오크쯤이야 가뿐하지." 약간 기분이 상했는지 뾰족한 목소리로 엘리시엘이 대답했다. 그녀의 표정 변화가 하도 다이나믹해서 자기도 모르게 노인네 같은 푸근한 미소를 짓는 유신이다. 그 표정을 본 엘리시엘의 눈 꼬리가 살짝 올라가자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 근데 결계가 왜 갑자기 깨졌지?" 다시 밝은 표정이 된 엘리시엘이 유신이 쓰러져 있던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조잘조잘 이야기 해 주었다. "그렇군. 숲이 도와준 거군." 무심코 던진 유신의 말에 엘리시엘이 도끼눈이 되었다. "그게 무슨 의미야 유신? 응? 숲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 따위는 아무것도 못했을 거란 뜻이야?" "아하하 아무 뜻도 없었어. 그냥 그렇다고." 엘핀서스는 어지간한 도시 이상의 규모였기 때문에 장로의 집 근처를 중심으로 조금 구경하자 저녁식사를 할 시간이 되었다. 신비로운 엘핀서스의 분위기에 취해서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슬슬 해도 져 가고 있어서 더 이상의 구경은 무리일 것 같았다. 장로의 집은 엘프의 우두머리답게 커다란 고목이 하나의 집이었다. 지름이 20여미터는 될 듯 했고, 높이는 그 세 배도 넘을 것 같았다. 도시처럼 높은 건물이 없는 숲 속이기 때문에 이 나무는 마치 높다란 첨탑처럼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안에는 엘프들이 살 수 있을만큼 충분히 넓었고, 계단이 죽 이어져 있는 걸로 보아 층수도 꽤 높을 것 같았다. 속이 이렇게 비어있고, 중간 중간에 채광을 위해서인지 창문처럼 구멍도 뚫려 있었지만, 이 고목은 아주 싱싱하게 살아 있었다. "유신 식사준비 되었어. 그만 둘러보고 나와. 거기보다 신기한 곳이 많으니까 내일 천천히 구경시켜 줄께." 마당은 엘프들의 토론장소나 회의장소로 이용되는 듯 곳곳에 앉아서 쉬기 쉽도록 나지막한 나무둥치나 돌들이 놓여 있었다. 설사 그런 곳에 앉지 못했다 해도 바닥은 푹신한 풀들로 덮여 있어서 불편함은 없을 것 같았다. "아, 엘핀서스의 은인께서 나오셨군요. 자리에 앉즙시다." 장로가 권하자 유신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있던 30명쯤 되는 엘프들이 조금씩 웅성거리며 편한 대로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식탁 없이 음식은 바닥에 놓고 먹었지만, 워낙 깨끗한 곳이라 그게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나왔다.... 시라스 성인 특제 푸성귀 요리.....천성이 이러니 카린이 고기류의 기름진 요리를 못할 수밖에......' 특별히 장로가 준비한 음식은 아니었고 저마다 먹을 음식들을 조금씩 싸 와서 서로 나누어 먹는 것 같았다. "유신은 인간이니까 우리의 식사 풍경이 무척 낯설겠구나. 우리는 보통 이렇게 야외에서 친한 엘프들끼리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사색을 해. 늘 파티를 한다고도 할 수 있지." 처음엔 좀 이상하게 여겨지던 유신도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음식을 집어먹는 엘프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여서 나중에는 무척 편한 마음으로 먹는데 전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엘프들 틈에 섞여 있으니 물질계에 있을 양녀인 카린이 생각이나 가슴 한구석이 아렸다. 헤어진지 아직 하루도 안 되었고, 성계대전 당시에도 서로 너무 바빠서 자주 본적 없었던 카린이다. 이곳에서 그녀의 동족들을 보니 그동안 잘 돌봐주지 못한 것이, 가슴속을 작은 돌덩이가 굴러다니는 것처럼 아릿해지며 무척 그리웠다. '휴~ 이게 무슨 어린애 같은 생각이람? 이젠 다시 만나지 못할텐데.....' 씁쓸하게 마음을 다잡아 봤지만 아직 자신이 처한 상황이 실감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정신적인 문제보다도 당장 유신을 괴롭히는 것은 눈앞의 음식들이었다. 격렬한 전투를 끝낸 뒤라 고기를 먹어서 기운을 보충하고 싶었지만, 엘프의 마을에서 그런걸 바란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부상은 괜찮으신 겁니까? 치유 마법은 걸었다고 해도 그렇게 금방 움직일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정말 굉장한 회복능력이군요." 아까의 전투에서 내상까지 입은 유신이었지만, 드라이어드와 싸우고 있을 때 다른 엘프들이 육신의 회복을 위해서 회복 마법을 걸어주었다. 장로의 말을 듣고야 자신이 팔만 부러진 게 아니라 내상도 입었다는 걸 기억해 낼만큼 둔감한 유신도 유신이지만, 그만큼 유신을 치료해준 마법사의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기에 엘핀서스의 미려한 경관도 유신의 넋을 빼 놓는데 한몫 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워낙에 자유로운 분위기라 한쪽에서는 노래를 부르는 엘프도 있었고, 그 옆에는 몇몇씩 짝을 지어 춤을 추는 엘프도 있었다. '평화라는 단어가 이처럼 어울리는 곳이 과연 있을까? 인간을 비롯해 모든 유사인종들이 엘프들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들의 빼어난 미모 때문만은 아닐 거야..... 아마도 이렇게 완벽한 평화를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조금이라도 같이 나누고 싶기 때문일 테지.' 이질적인 엘프들의 파티는 어떤 정제된 차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었고, 들뜨지도 침체되지도 않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편안함을 주었다. 적당히 음식과 과일로 만든 술이 돌고 파티가 무르익자 장로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흄의 정예부대인 다크블러드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엘핀서스에서 군사행동을 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선발대라고 생각되는 무리가 30기 이상이 오고, 서큐버스나 오우거까지 합세한 것으로 보아 다음에는 더 많은 병력이 오겠지요." "아마도 엘핀서스를 점령한 뒤 슐레인 산맥을 넘어 바로 하누스 왕국을 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슐레인 산맥을 넘으면 바로 곡창지대인 이리나 대평원이 나오고, 흄의 대군이 그곳을 유린한다면 인간들로썬 정말 큰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게다가 그런 개활지에서의 전투라면,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은 마물 쪽이 훨씬 유리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바다와 육지로 동시 공략해 온다면 군대를 양분할만한 병력이 안 되는 하누스로선 바다나 육지 둘 중 한곳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대규모 부대를 엘핀서스에 들여놓으려면 어느 정도의 결계가 필요할지 아십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무장 인원이라면 기껏 100여기 정도를 투입할 수 있을 정도겠지요." '아니, 흄이 직접 결계를 펼친다면 이곳에 대규모 부대가 통과할만한 결계를 펼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들은 위시마스터였던 흄의 진정한 무서움을 모르고 있어. 위시마스터에서 쫒겨났기 때문에 그전처럼 마법계에서 신과 같은 권능을 사용할 순 없겠지만, 그는 이미 마법사로도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다. 평면 마법진은 물론 입체 마법진도 사용 할 수 있을 것인데.....게다가 리치까지 되었다면 육체적으로도 거의 불사를 얻었을 것이고......어째서 다른 마스터들이 흄 제국을 저대로 방치하는지 모르겠군.' 엘프들의 토의를 들어 보면서 유신도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 봤지만, 그것을 입밖에 낼 수는 없었다. 물질계의 지식으로 마법계를 어지럽힌다면, 자칫 위시마스터의 부재로 불안정한 마법계 전체가 붕괴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런 결계를 칠 수 있다면, 굳이 위험한 엘핀서스를 중간 집결지로 할 필요가 있을까요? 바로 이리나 평원에 게이트를 열어서 침략해 들어가면 훨씬 빠를 터인데....." "그건 아마도 협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겁니다. 엘핀서스를 미리 깨 놓지 않으면, 자칫 하누스와 엘핀서스 틈에서 중간에 포위되어 전멸할 수도 있으니까요. 엘프들이 인간의 편을 들어 줄 것은 아무리 멍청한 마물들이라도 알겠지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사실을 빨리 인간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들과는 그럭저럭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마물이라면..... 오늘의 사건도 있고, 아무리 해도 좋은 관계를 이룰 수 없을 것 같군요." "그렇다면 소식을 전하는 역할은 엘리시엘이 적임일 것 같군요. 인간계에 나가본 경험도 많고, 요즘 심심해하는 것 같으니 그녀가 적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떠니 엘리시엘? 니가 하누스로 가 주겠니?" 대충 다른 엘프들의 의견을 들어본 엘시르가 결론짓듯이 엘리시엘의 의견을 물어 보았다. 그녀 역시 심심하던 차라 흔쾌히 승낙했다. "그리고...... 기사님께선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특별히 할 일은 없습니다. 천천히 라일로스 대륙을 돌아다닐 생각입니다. 괜찮다면 엘리시엘과 함께 하누스 왕국으로 가도록 하지요." "그것 정말 다행한 이야기군요. 엘리시엘이 정령술에는 뛰어나도 좀 맹한 편이라 걱정이 되었거든요." 엘리시엘은 마지막 장로의 말에 입술을 삐죽거리며 뭔가를 중얼거렸지만, 혹시 오랜만에 밖의 세상을 구경할 기회를 놓칠까봐 꼭꼭 눌러 참는 것 같았다. "잠깐만요. 저희도 가겠습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푸른 생 머리를 등까지 길게 기른 훤칠한 엘프였다. 그 옆에는 약간 주눅든 듯한 표정의 황금빛 머리의 자그마한 엘프가 있었다. 처음에는 훤칠하고 스타일 좋은 푸른 머리의 엘프에게 시선이 갔지만, 옆에 있는 금발머리의 엘프를 자세히 보자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운 모습에 넋이 나갈 정도였다. 황금빛의 약간 곱슬진 머리에 엘프 특유의 녹색의 짧은 튜닉을 입고 커다란 푸른 눈망울은 조금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 같아 보호본능을 일으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엘리시엘보다도 약간 더 작아 보이는 엘프였지만, 얼굴이나 손발도 대체적으로 다 작아서 나름대로 맞춤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푸른 눈은 별빛과 다른 엘프들이 불러낸 윌오스프의 약한 빛에도 반사되어 이리저리 반짝였다. 마치 하늘의 별들 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거기에 머무는 것 같았다.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성체라는 천족 이상이라 할만한 외모였기에, 흠이 될만한 좀 작은 키조차도 그 엘프의 아름다운을 치장해 주는 특이한 악세사리로 여겨질 정도였다. 옆에 있는 푸른 머리의 엘프나 장로인 엘시르의 미모도 굉장했지만, 이 황금빛 엘프의 아름다움에는 따라가지 못했다. '과연..... 대단하구나. 다른 종족들이 탐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전 우주에서 시라스 성인을 노리는 종족이 그렇게 많은 것은 어쩌면 세상을 불공평하게 창조하신 신에 대한 반항일지도 모르겠군.' "이런, 세라피, 이리엘, 벌써 움직여도 되는 건가? 조금 더 쉬지 않고......" 걱정스레 말하는 장로의 말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이 아가씨들이 아까 유신이 구해준 엘프들인 것 같았다. 경황이 없어서 자세히 보지는 못했었지만, 잠시 기억을 떠올리자 푸른 머리의 엘프가 유신에게 포션의 위치를 가르쳐준 날카로운 눈매의 엘프란 걸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부드러운 눈매에선 아까 전의 날카로움은 보이지 않아서 몰라본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황금빛 엘프가 오크들에게 굴욕을 당한 그녀였다 곤, 지금의 모습으론 상상할 수 없었다. 유신은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줄까 했지만, 몇 번 마른침만 삼킨 뒤 입을 다물었다. 대체 뭐라고 해야 좋단 말인가? 애꿎은 과실주만 벌컥벌컥 마실 뿐이었다. "명색이 엘핀서스를 지키는 레인저 중 최고라고 불렸던 저희입니다. 어린 엘리시엘과 외부인에게 그런 중요한 문제를 맡겨 두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리엘이란 엘프는 몰라도 직접 심한 일을 당한 세라피란 엘프는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리엘이 억지로 세라피를 끌고 나온 것은 그녀가 당분간 엘핀서스를 떠나 여행을 해 보는 것이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아서이다. 세라피 역시 친구인 이리엘의 그런 고마운 마음을 알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나온 것이다. 엘프는 현명한 종족이기에 흘러간 과거에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력이 인간보다 훨씬 좋은 만큼 아픈 과거를 쉽게 잊어릴 수도 없다. 게다가 섬세하고 프라이드가 높은 종족이라 마음의 상처도 클 것이다. 다만 장수하는 종족인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으로 미치거나 폐인이 되지 않고 버티는 걸지도 모른다. 다친 몸이야 약이나 마법으로 치료할 수 있다지만, 엉망으로 찢어진 마음은 쉽게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 '엘핀서스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지만, 매일 매일이 너무 단조롭고 똑같기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데는 좋지 않다. 무리를 해서라도 엘리시엘과 같이 보내려고 했는데 그녀가 스스로 간다고 하니 다행이군. 이리엘이 잘 설득한 것인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엘시르도 세라피의 동행을 허락했다. 다만 엘핀서스에 얼마 없는 검사인 이리엘도 떠나 버리면, 레인저를 지휘할 엘프가 없으므로 그녀는 남기로 하고 엘리시엘과 세라피만 가기로 했다. 정신적으로 의지하던 이리엘이 남게 되자 세라피도 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떠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기에 덜덜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각오를 다졌다. "저..... 아까는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함께 동행하게 될 세라피라고 합니다. 미약한 마법이지만 도움이 될 겁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예, 저야말로....... 전 유신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유신은 아름다운 세라피가 조금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인사하자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가브리엘이나 다른 천사들을 비롯해 예쁜 여자라면 수도 없이 봐 왔지만 세라피처럼 보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약하고 갸날픈 여자는 처음이었다. 유신의 주위에 있었던 여자들은 보호해 주어야 할 상대라기보다는 강력하고 든든한 동료였었지만, 눈앞의 작은 엘프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 구해준, 또 앞으로도 보호해 주어야할 약한 존재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드는 걸지도 모른다. 졸지에 엘프 둘을 떠맡은 유신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었다. 엘핀서스의 아침은 조금 늦게 시작된다. 워낙 아름드리 나무가 많이 있어서 햇살이 숲의 구석구석까지 스미기에는 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어느새 한두 마리 씩 귀여운 새들이 단순한 음색의 지저귐을 시작하고,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들이 살금살금 나무를 뛰어다니기 시작하자 숲 속의 아침이 밝아 왔다. 몇몇 친한 엘프들의 배웅을 받으며 여행용 짐을 챙긴 엘리시엘과 세라피가 느릿느릿 마을 앞으로 왔다. 유신은 장수하는 종족 특유의 느림보 정신을 걱정해서 오늘 내로 출발할 수 있을지 의심이 되었었지만, 엘리시엘이 세라피를 끌고 나오다 싶이 하여 생각보다도 출발은 훨씬 빨리 이루어졌다. 몇몇 나이 많은 엘프들은 너무 서두르면 일을 그르친다며 걱정하기도 했지만, 엘리시엘에게 그런 충고는 소용없는 듯 보였다. 토끼처럼 신이 나서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엘리시엘을 선두로 피크닉이라도 가듯이 별로 긴장감이 흐르지 않는 일행이 따라 갔다. 일행은 엘핀서스와 슐레인 산맥을 이어주는 미리네 계곡을 따라 점심때가 될 때까지 걸어가자 하르펠이라는 작은 마을이 아타났다. 엘핀서스와 하누스 왕국을 연결하는 관문 적인 역할을 하는 마을이기 때문에 엘프가 둘이나 있는 유신일행을 신기해하지는 않았지만, 세라피의 미모는 단연 돋보였기에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주점겸 여관은 마을의 외곽 쪽에 엘핀서스를 따서 지은 엘핀스라는 곳 하나 뿐이었다. 관문이 되는 마을이라고 해도, 워낙 엘프들이 폐쇄 적이고 자급자족하는 경제체제라 인간들과 무역이 발달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가끔 지나다니며 한 두번씩 자고 가는 작은 여관정도밖에는 없는 것이다. "안녕 돈. 여전히 손님이 없네...... 장사가 이렇게 안 돼서 괜찮아?" "으하하 따른 놈들이 그런 말을 한다면 턱주가리를 돌려 놓겠지만, 농담을 모르는 엘프가 진심으로 해 주는 충고이니 새겨듣기로 하지. 엘리 너는 인간 세상을 그렇게 많이 여행 했으면서 아직도 인간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구나." 여관에 들어선 엘리시엘이 30대 후반정도로 보이는 퉁퉁한 인상의 중년을 향해 아는 척을 했다. 어려 보이는 엘리시엘이 반말을 하는 것이 무척 이상해 보였지만, 돈이란 아저씨는 아주 반가운 기색으로 그녀를 맞았다. "이야 엘리시엘. 이게 얼마만이야? 마지막으로 여기 들른 게 다 죽어 가는 표정으로 마을로 돌아가던 5년 전 이었잖아. 다신 인간세계로 나오지 안을 것처럼 보이더니 이제 대충 떨쳐 낸 거야?" "흠..... 글쎄? 어떨까나? 하지만 별로 그때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군. 그보다 우린 수도까지 갈 거야. 말 세 마리만 알아 봐줘." "말이라.... 천천히 걸어다니는걸 좋아하는 엘프가 말을 찾는걸 보면 어지간히 급한 일인가 보군. 여전히 금전 감각은 없는 거야? 수도까지라면 마을 두어개는 더 거쳐가야 할텐데 너도 물건 사고 파는 법이나 돈에 대한 개념은 좀 배우는 게 좋을 것 같아. 특히 너처럼 인간세상을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엘프가 물건 사고 파는 것도 못해서야....." "됐어. 인간의 것을 나에게 강요하지 말아줘. 돈에 대한 엘프의 인식은 저번에 내가 이야기 한 것 같은데... 다시 듣길 원해? 굳이 돈이 싫다는 것이 아니라 금전거래를 하면서 아무래도 인간에 비해 금전 센스가 떨어지는 엘프들은 소위 인간이 말하는 사기란 걸 당하기 쉬워. 물건의 가치를 따지는 우리로선, 설혹 사기를 당한다 해도 그 물건에 그만큼의 가치만 있다면 상관없어. 하지만 그보다 속상한 것은 우리의 어리숙함 때문에, 만약 엘프와 거래하지 않았다면 사기라는 죄를 짖지 않았을 인간이 우리와 거래 하면서 돈 몇푼에 양심을 팔았다는 사실이야. 양심을 속이는 행위는 지성체로써 가장 슬프고......." 엘리시엘의 상업 정신과 도덕에 관한 강의가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자, 돈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주방으로 도망가 버렸고, 무례한 인간이라며 궁시렁 거리던 엘리시엘도 그런 그의 태도에는 이미 익숙하다는 듯 배낭을 뒤적이며 낡은 지도를 한 장 꺼냈다. 세 명이 자리를 잡고 앉자 열 네다섯살정도 먹어 보이는 자그마한 계집아이가 냉큼 뛰어오더니 식탁을 닦았다. "헤..... 빌리도 오랜만이네. 저번에 보았을때는 요만한 꼬마였는데, 이제는 나만큼 컷잔아? 역시 인간들은 빨리 자라는군." "예 안녕하세요. 엘리 언니. 정말 오랜만에 뵙는 건데도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엘리시엘의 미모를 부러운 듯 처다보던 소녀는 옆에 있는 세라피를 보고는 이제 자포자기한 심정이 된 것 같았다. 인간의 미모로는 아무리 뛰어나 봐야 엘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어쩌면 처음으로 알게된 불공평한 세상의 이치에 대해 분노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막 사춘기에 접어둔 소녀로선 그것 이상으로 불공평한 일이란 세상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빌리는 곁눈질로 흘낏흘낏 세라피를 훔쳐보다가 세라피와 눈이 마주치자 그만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았다. 하얀 피부, 여리고 가는 얼굴 선, 맑고 푸른 눈, 살풋한 머릿결..... 세라피는 아직 어린 인간 소녀의 행동이 귀여워서 부드러운 얼굴로 웃어주었다. 그러자 얼굴이 빨개진 소녀는 그대로 주방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곳부터는 평야지대니까 말로 달리면 일주일 정도면 하누스의 수도인 임페리얼 라이커스에 도착할 수 있어. 중간에 작은 마을이 몇 개 있지만 아마 노숙하는 일도 잦을꺼야. 내일부턴 좀 급하게 말을 몰아서 갈 테니까 오늘은 푹 쉬도록 해." 엘리시엘이 지도를 짚어가며 자세히 여정을 설명했지만, 세라피는 전혀 모른다는 표정이었고, 지도보기라면 이골이 난 유신은 잠깐 훓터 본 것만으로도 대충의 지형을 머리에 넣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둘 다 엘리시엘의 설명에 무관심했다는 뜻이다. 엘리시엘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 갔지만, 세라피는 자기보다 한참 나이 많은 왕언니였고, 유신은 잘 몰라서 그려려니 하고 넘어 갔다. 현재 유신이 직면한 가장 커다란 문제는 바로 음식이었다. 엘프들은 육식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돈이란 아저씨가 내온 음식도 모두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전부였다. 엘프의 동행이니 으레 것 식물성 음식만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지 주문도 받지 않고 푸성귀만 잔뜩 내온 것이다. 잠시 음식을 노려보던 유신은 기가 막힌 심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쩌면 저 아저씨는 호리호리한 유신을 엘프로 착각하고 있거나 하프엘프 정도로 생각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유신은 음식과 주인을 번갈아 보았지만, 노려본다고 사과가 통닭이 되거나, 신선한 오이가 잘 익혀진 스테이크가 될 리도 없다. 오히려 배만 더 고파졌다. 유신은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요리를 주문할지를 진지하게 고려해 보았지만, 결국 옆에 있는 세라피와 엘리시엘의 얼굴을 한번보고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냥 앞에 쌓인 푸성귀만 주섬주섬 씹어 먹었다. 야채와 원수진 듯 원망 가득한 표정으로 전투적으로 입안에 쑤셔 넣는 유신을 잠시 의아하게 쳐다보던 세라피와 엘리시엘은 인간이 식사습성이려니 하고 가볍게 여긴 뒤 엘프답게 우아하게 식사를 했다. 이렇게 일행이 즐겁게 식사를 하는 동안 엘핀스의 주인인 돈은 매매의 개념이 희박한 일행을 위해서 말과 여행에 필요한 도구들을 사례 없이 사다 주었다. 돈은 무식하고 거칠게 생긴 것과는 달리 엘프의 신용을 얻을 만큼 꼼꼼하고 정직한 사람이란 건, 그가 사온 물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엘리시엘이 건네준 포션의 가치만큼 훌륭한 말 세 마리와 비상용의 마른 과일(마른 고기는 없어서 하마터면 유신은 눈물을 찔끔거릴 뻔했다.), 부싯돌과 침낭, 램프, 간단한 조리도구 등을 구해주었다. 물론 밤에도 낮과 별반 다름없는 시력을 가진데다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엘프들에겐 필요 없는 물건들도 있었지만, 거기에 대해선 아무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만큼 돈이 챙겨준 물건들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엘프는 자급자족하기 때문에 매매란 개념, 특히 돈으로 하는 매매에 대한 개념은 아주 희박하다. 가끔 인간이나 드워프에게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약초나 포션등의 마법 물품을 팔아 돈으로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그 돈이란 것이 200년 전 화폐일수도 있고, 400년 전 화폐일 수도 있을 정도이다. 게다가 그나마도 넉넉하게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이렇게 믿을만한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물건을 대신 구하는 게 엘프들로선 훨씬 편했다. 엘핀스의 주인 덕분에 어설픈 세 여행자는 제법 여행자로써의 채비를 갖출 수 있었다. 그럭저럭 다음날이 밝기도 전 어슴푸레 깔린 어둠위로 두 엘프와 한 인간은 조금 졸린 눈을 하곤 출발을 했다. 거리는 한산했고, 지쳐 보이는 표정의 개들이 일행을 흘끗 쳐다봤을 뿐, 아직 일하러 나온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위시마스터들이 성계대전에서 대거 봉인된 후 게이트 마법은 정말 타고난, 예를 들어 딜트나 흄 정도의 마법사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공간의 좌표를 설정하고 관리하여 ,마법시동어와 반응하면 공간의 채널이 열리도록 하는 역할을 해 오던 위시마스터들의 부재로, 지금은 게이트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 시전하는 마법사가 이동할 공간의 좌표 값을 모두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복잡한 채널의 연결 직접 해야 하는 부담을 떠 안아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미리 마법진을 그려 두었던 곳이라면, 다른 곳에서도 그곳의 채널에 맞추어 마법진을 그림으로써 간단히 게이트를 열 수 있지만, 하누스와 엘핀서스를 이어주는 채널의 이동용 마법진은 없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흄의 침략의도를 하누스에 알리려면 부득이 말을 타고 달려야 했다. 다행이 모두들 잠에 대한 욕심은 없는 터라, 처음 일어났을 때만 약간 피곤해 했을 뿐 별 불평 없이 임페리얼 라이카스를 향해 말을 몰았다. 평야를 달리는 일이라 특별히 힘든 것은 없었지만, 똑같은 풍경이 계속되다 보니 지루해 지는 건 할 수 없었다. 말에게는 계속 회복 마법을 걸어주며 강행군을 했지만, 셋 다 별로 힘들어하진 안았다. 유신이야 워낙 말타는 기술이 훌륭했고, 엘프들도 동물과의 친화도가 높아서 보통인간이라면 엉덩이가 모두 망가질 정도의 강행군을 했지만, 그다지 타격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말들이 너무 지쳐 있어서 적당한 노숙 자리를 정해야 했다. "유신 도대체 정체가 뭐야? 검술이야 그렇다 쳐도 엘프만큼 말을 잘 타는 인간이라니.... 들어본 적도 없어. 특별히 인간을 무시하는 발언이 은 아니지만..... 이상하잖아. 인간은 엘프처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축복을 받지 못한 걸로 아는데....." "그..... 그러게....하.....하지만 연습을 많이 하면 가능해. 마을과 워낙 외진 곳에 살아서 마을까지 가려면 말을 타야 했거든. 산지에서 배운 말타기 솜씨라 평지에서는 훨씬 쉬워서......" 유신이 말도 안되는 변명을 떠듬떠듬 해대자, 거기에 비례해 엘리시엘의 눈초리가 더욱 가늘어졌다. "뭐....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겠지. 난 이미 유신을 친구로 인정했잖아? 인간들의 생각은 잘 모르겠으니......" 엘리시엘이 조금 섭섭한 눈치를 보이자 당황한 유신은 이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했다. "아하하 그.... 그래..... 인간은 좀 이상한 생물이야. 그보다 내가 노래 가르쳐 줄까?" 유신이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생각해 낸 것이 노래였다. 엘프들이 춤과 노래를 너무나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양녀였던 카린을 길러 보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임기 응변으로 떠오른 것이다. 여지 것 조용히 혼자서 시간을 보내며 일행과는 겉돌고 있던 세라피도 얇고 긴 귀를 조금씩 쫑긋거리며 노래란 말에 관심을 표했다. "내가 산에 혼자 있을 때 심심하면 부르던 노래야." 물론 유신이 직접 만든 노래가 아니라 물질계에 있을 때 자주 듣던 유행가를 몇 개 부른 것이지만, 두 엘프들로썬 당연히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종류의 음악이기 때문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처음에는 낮선 음률에 당혹스러워 했지만, 몇 번 유신이 부르는 것을 듣자 그 노래들이 상당히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어떤 세상이라도 좋은 노래는 통한다는 평범한 진리가 먹혀 든 것이다. 당장 엘리시엘은 기타와 비슷하게 생긴 엘프 특유의 튜트라는 악기를 가지고 와서 음을 조율해 보더니 멋지게 연주했다. 거기에 맞추어 세라피도 몇 번 노래를 불러 보고는 엘프들의 정서에 맞게 좀더 부드러운 음색으로 수정해 가며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었다. "유신, 우리가 노래를 좀 바꾸어도 괜찮겠지요? 그냥 부르기에는 거친 면이 있어서 그런 부분만 부드럽게 다듬을게요." 세라피는 그 노래들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볼까지 발갛게 상기될 만큼 흥분해서 그동안 별로 이야기하지 않던 유신에게 그 노래들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 보며 신이 나 했다. 영 침울해 보이던 세라피가 기운을 찾은 것 같자 유신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 졌다. 유신도 이 기회에 좀 내성적으로 보이는 세라피와 친해질 생각으로 물질계에서 가지고 온 오래되고 투박한 하모니카를 꺼내어 같이 연주했다. 세라피에 의해서 수정된 부분이 꽤 되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유신이 그녀에게서 배워야 했다. 하지만 엘프라는 좋은 스승을 둔덕에 둔한 그도 금새 많은 발전을 이루어 그녀들과도 호흡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다음날부터는 제법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여전히 낮에는 혹독한 강행군을 계속 했지만 세라피도 이제는 종종 부드러운 웃음을 짓게 되었고 밤이면 셋만의 작은 파티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에 피곤한 줄을 몰랐다. 강행군을 한 덕분에 예정보다 이틀이나 빠른 5일째 아침 무렵에는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외성문은 새벽부터 물건을 팔기 위해 들어오는 아침 상인을 위해 개방하므로 일행이 도착한 시간이 꽤 일렀음에도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의 간단한 심문만 받고는 통과할 수 있었다. 엘프가 섞인 일행은 악한 무리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형식적인 질문이 몇 개 오갔을 뿐이다. 하지만 성문을 통과한 일행은 곧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셋 모두 돈에 대한 관념이 없다보니 여행을 하던 도중 이미 돈은 모두 바닥이 난 것이다. 유신도 물질계에 있을 당시 직책이 직책이었던 많큼 무언가를 직접 사본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계획적으로 돈을 쓰는 것에는 서툴다. 게다가 마법계에서의 화폐단위나 물건 가치도 모르겠으니 돈이 떨어질 때까지 몰랐던 것이다. 당장 여관에 자리를 잡고 짐도 풀어야 할 터인데 암담한 상황이었다. "그래!!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저 앞의 광장에서 공연을 하자. 세라피와 엘리시엘의 노래 실력이라면 틀림없이 여관비 정도는 간단하게 마련할 수 있을 거야." "그럴까? 어때요 세라피 언니? 그동안 유신에게 배운 새 노래도 여러 곡이 되니까 잘 될 것 같은데? 또 재미있을 것 같고." "응,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재미있을 것 같구나." 세라피는 어려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이미 500살을 바라보는, 엘프중에서도 나이가 꽤 많은 중년의 엘프였다. 하지만 세라피와 엘리시엘은 어느새 꽤 친해져서 나이차이가 많이 남에도, 친자매처럼 말을 놓았다. 처음 세라피의 나이를 듣고 유신은 꽤 충격을 받았지만, 좀 같이 지내보자 엘리시엘과 별 다를 것도 없는 세라피를 보고, 이제는 그녀와도 편하게 지냈다. 게다가 밤마다 같이 노래하고 춤추며 보내왔기 때문에 자연히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 까지는 유신과 엘리시엘 모두 서로 존댓말을 했다.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간 셋은 광장의 중심에 있는 분수대 근처에 대충 자리를 잡았다. 여행자가 자주 드나드는 곳이라 그들에게 별반 관심이 없는 듯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갔다. 커다란 말이 조금 귀찮았지만, 세 마리 모두 얌전히 있어서 다행이었다. 고생만 시키는 주인이 원망스럽지도 않은지, 선한 눈망울만 꿈뻑대며 신용이 가득한 눈으로 주인의 옆에 서 있었다. 처음에 먼저 유신이 하모니카를 꺼내어 음을 고르자 사람들이 이 신기한 악기를 보고는 한 명 두 명 멈추어 섰다. 다음에 세라피와 엘리시엘이 준비를 하기 위해 여행용 후드를 걷어 맨 얼굴을 보여주자 멈추어 서는 사람들의 수가 훨씬 늘었다. 엘리시엘의 튜트가 조율이 끝나자 본격적인 즉석 콘서트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엘리시엘의 튜트가 애절하게 홀로 울리기 시작했다. 도입부는 이렇게 조용한 튜트만이 홀로 울었지만, 튜트의 음이 멎어들 때쯤 세라피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잠시 쉬던 엘리시엘의 튜트도 따라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신의 하모니카도 합세하였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약삭빠른 사람들은 어느새 좋은 자리를 잡고 편하게 앉아서 약삭빠르지 못한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엘프들은 남앞에서 춤추거나 노래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편이다. 노래와 춤이 생활의 일부인 종족이기 때문에 이렇게 거리에서 즉석의 콘서트를 여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유신도 워낙 철면피에 둔감한 편이므로 노는 일이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다. 그들의 노래에 맞추어 애달파지기도 하고, 때로는 신나고 경쾌해 지기도 하는 콘서트는 대성황이었다. 어느새 커다란 광장은 인파로 가득 찼고, 자리를 잡지 못한 이들은 주변 건물의 옥상이나 나무 위에까지 올라가서 이들을 구경할 정도였다. 평범한 서민들에게는 이렇다할 놀이거리가 없는 만큼 유신 일행은 굉장한 인기였다. 셋 모두 이쯤 되자 여관비를 벌겠다는 당초의 목적은 머릿속을 떠난지 오래고, 자신들의 노래에 취해 정말 열심히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었다. 하프엘프라고 착각할 만큼 귀여운 용모의 유신, 천족이상으로 아름다운 세라피, 경쾌하고 명랑한 엘리시엘, 아이돌 그룹으로 나서도 성공할만한 멤버이다. 두 번째 곡이 끝났을 때는 광장주변은 모여든 인파로 발 디딜 틈도 없었고, 무슨 일인지 조사하기 위해 출동한 치안 유지대 조차도 그들을 막아야 할지 놔두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다른 인파들 틈에 껴서 같이 구경하고 말았다. 한시간 정도의 공연이 끝나고 세 명이 끝을 알리는 인사를 하자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광장을 메웠다. 돈은 걷는 것은 유신의 몫이었다. 그녀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므로 유신이 자청한 것이다. 하지만 자청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잘 구경했다면 쥐어준 돈만으로도 여관비 정도는 충분히 해결될 만큼 많은 돈이 쌓였다.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고 접근한 인간도 부지기수였고, 언제 다시 공연하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끝이 없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급한 일이 있다며 얼버무리고 빠져나가는 것도 곤욕이었지만, 셋은 모두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간신히 광장을 빠져나온 일행이 간 곳은 광장에서 좀 멀리 떨어진 삶의 향기라는 철학적인 이름의 자그마한 여관이었다. 2층으로 된 하얀색 벽이 인상적인 이 여관은 중심가와는 떨어져 있어서 조용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정갈하고 깨끗한 여관은 창문틀마다 자그마한 화분에 꽃이 놓여져 있었고, 녹색의 커튼이 잘 묶여져 있었다. 무엇보다 일행을 붙잡은 것은 지하온천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중심가보다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어도 장사가 잘 되는지, 자그마한 규모에 비해 굉장히 고급스런 자제를 이용해 지어져 있었다.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세라피와 엘리시엘은 짐만 한 구석에 둔 채 온천으로 들어간 뒤 잠적해 버렸다. 그녀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유신은 기뻐서 눈물이 날것 같았다. 이곳은 정상적인 여관이고, 1층은 당연히 인간들이 먹는 것을 파는 식당이다. 아까의 분위기로 봐서 세라피와 엘리는 적어도 1시간 이상 올라오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여기 주문 좀 받아 주세요." 흥분에 겨워 좀 지나치게 큰 목소리가 나왔지만, 그런 것은 지금 유신의 머릿속에 들어올 여지가 없었다. 주변이 사람들이 살짝 눈을 찌푸린 것 역시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유신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동그래진 눈으로 달려온 17~18세 정도로 보이는 점원 아이에게 주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고기 주세요. 고기.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요." "예?" 점원아이가 어이없는 눈길로 유신을 바라보며 눈만 깜빡거리자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마음이 급했지만, 천천히 주문하는 것이 더 빨리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기에 필사적으로 급한 마음을 억누르며 천천히 또박또박 주문을 했다. "닭 요리 2인분하고 미트볼, 소고기 스테이크, 양고기 주세요." 주문을 다 들은 점원아이는 다시 의아스럽다는 시선으로 유신을 쳐다 보며 물었다. "혼자 드실 건가요? 양이 너무 많은데요?" 1분 1초가 아까운 유신이다. 무럭무럭 피어나는 살기를 억누르며 간신히 표정관리를 하며 빠르게 대답했다. "그.냥.가.져.다.주.세.요." 살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였지만, 둔감한건지, 유신을 우습게 보는건지, 아니면 여관에 찾아오는 수많은 이상한 사람들을 상대해 오다보니 이력이 난 건지, 점원 여자아이는 눈치도 없이 다시 질문을 하려 했다. "양념은......" 장황한 양념의 종류가 나올 것이라고 눈치챈 유신이 잽싸게 중간에 말을 끊었다. "최대한 빨리 나올 수 있는 것으로 주세요. 뭐든 상관없어요." 신경질이 묻어 나오는 유신의 목소리에 점원 아이의 눈이 가늘어 졌지만, 손님이 왕이니 어떻게 하랴. 한번 더 유신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더 이상의 군말 없이 주방으로 사라졌다. 먼저 나온 것은 요리하기 간편한 닭 요리였다. 양념 없이 훈제로 나온 것이지만, 점원아이가 테이블에 천천히 내려놓는 시간도 아까워 냉큼냉큼 자신도 요리 내리는걸 도와 주더니 그대로 음식 속으로 잠수라도 할 것처럼 코를 박으며 먹기 시작했다. 뼈를 발라내는 시간도 아까워 날카로운 닭뼈임에도 자그마한 뼈들은 살과 함께 빠득빠득 씹어 먹었다. '빨리...빨리....' 뼈째 먹는 소리로 유신 주변은 꽤 소란스러웠기에 주변이 다른 손님들은 눈을 찌푸리거나 자리를 옮기기도 했지만, 정작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뭐라고 하기도 미안할 만큼 맛있게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는 쓴 웃음을 삼킬 뿐이었다. 양고기까지 먹고 스테이크가 나왔을 때는 유신도 배가 불러서 약간 느긋해 졌지만, 언제 엘리시엘과 세라피가 올라 올지 모르니 빨리 먹어야 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나온 양념 찜 닭 요리가 나왔을 때 세라피와 엘리시엘이 오랜 목욕으로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올라 왔다. 세라피의 긴 머리는 아직 물기가 뭏어 있어서 반짝거렸고, 발갛게 물든 볼은 하얀 얼굴을 마치 부끄러워 하는 새색시처럼 보이게 했다. 세라피는 노출이 심한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고, 블라우스는 소매를 걷어서 하얀 팔이 다 들어 났다. 한마디로 겁나게 섹시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여관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좍 쏠렸지만, 단 한사람만은 도둑질하다 들킨 아이처럼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유.... 유신? 이게 대체....." "아니......그냥.... 기다리다 너무 늦길레...... 배도 고프고..... 그래서...." 유신은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횡설수설하며 우물쭈물 했지만 정작 세라피와 엘리시엘은 그다지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유신......고기 먹고 싶으면 먹어요. 인간은 엘프와 달리 잡식성인데, 저희 때문에 억지로 안 먹을 필요는 없어요." 그동안 유신이 먹고 쌓아 놓은 접시가 만만치 않게 많은걸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든 세라피가 말했다. 천사같은 세라피가 유신에게 말을 걸자, 그동안 유신을 불쌍하게, 혹은 천박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여관사람들의 눈초리가 시기와 질투의 눈초리로 확 바뀌었다. "근데 그동안 고기는 안 먹었잖아?" "그야 엘프와 여행하는 거니까....." 엘리시엘의 질문에 주눅든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어느새 손은 닭다리를 집을까 말까를 고민하는 듯 불안하게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엘리시엘은 어깨를 한번 으쓱 하더니 유신의 옆에 앉았고, 세라피도 그 옆에 앉았다. 그러자 주변의 시선이 둔감한 유신도 혹시 시선에 찔려 죽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날카롭게 날아와 온몸에 박혔다. 이런 시선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유신인지라 몹시 어색했지만, 그런 어색함 따위는 앞에 놓여있는 양념 찜 닭 요리가 줄 행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엘리시엘은 인간계에 많이 나와 봤으니 익숙한 식사 장면이었고, 세라피 역시 오래 산 엘프인 만큼 이해심이 크기에 비위가 좀 상하긴 했어도 옆에 못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점원 아이는 유신에게 주문을 받던 때 무례한 시선을 보냈던 것과는 달리 높은 신분의 귀족을 맞는 자세로 조심스럽게 주문을 받으며 살짝살짝 두 엘프를 훔쳐 보았다. 분명히 인간과는 다른 외모이다. 당나귀 귀처럼 길지만 결코 추하단 생각이 들지 않는 가늘고 섬세한 귀, 얇은 팔다리에 잡티하나 섞이지 않은 유리같은 피부, 여유로운 몸가짐과 차분한 눈동자 속에는 평화가 깃들어 있다. 그녀들은 늘 먹던 대로 푸성귀와 빵 종류, 그리고 포도주 정도를 시켰지만, 그들이 먹는 음식조차도 고귀해 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유신도 자신이 목이 마르다는 것을 깨닫고 뒤늦게 맥주를 시켰다. "하누스 왕국은 어떤 곳이야?" 좀처럼 매사에 관심이 없던 세라피가 목욕을 해서 기분이 좋은지 엘리시엘에게 하누스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현재 하누스의 왕인 듀크리온 하누스 3세는 인자하지만 좀 소심한 성격의 사람이다. 평화시라면 덕왕으로 이름을 떨칠지도 모르지만, 흄과 으르렁대고 있는 현 시점에선, 흄과의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있는 무능력한 왕으로 보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좋은 인재에 대한 욕심은 커서, 능력이 있는 인제는 평민이라 해도 어떤 방법을 써서든 자신의 곁에 두고 있기 때문에 왕권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카리스마가 부족하여 왕권을 휘드르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반면 장녀인 이자벨 하누스는 어려서부터 검과 병법에 능해 만일 남자로 태어났다면 훌륭한 무왕이 되었을 거라는 소문이 돌 정도의 여장부이다. 게다가 기품 있고 외모 또한 출중한지라 왕국의 기사들은 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공주를 위해 검을 휘두른다고 할 정도로 신망이 높고 인기도 많다. "........뭐 내가 하누스에 대해 아는 것은 그정도야. 이자벨 공주와 헤어진지도 벌써 5년이나 되었으니 이제는 많이 자랐겠지?" 처음에는 자신들의 왕에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엘리시엘을, 비록 아름답다고는 해도, 곱지 않게 노려보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자벨 공주와 아는 사이라는 마지막 말에서 주변은 다시 조용해 졌다. 이래저래 평화로운 여관의 분위기를 살피던 유신의 심정은 썩 좋지 안았다. 여관의 여유로운 분위기에선 결코 전쟁전이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크블러드라는 흄의 정예군과 검을 마주쳐본 유신으로썬 지금 하누스의 이러한 평화스런 분위기가 자칫 큰 비극을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전투능력이나 엘프의 성지를 짓밟고 바다와 육지 양쪽으로 협공할 정도의 작전을 구사할만한 풍부한 상상력의 지휘관이 있다면, 인간으로썬 쉽지 않은 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왕가에 대한 신뢰가 두텁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전쟁은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자아, 이제 하누스까지 왔으니 다음엔 뭘 해야해?" 꿀이 잔뜩 묻은 보기만 해도 너무 달아 혀가 마비될 것 같은 애플파이를 맛있다는 듯이 한 입 베어 물며 세라피가 질문했다. 세라피도 유신도 모두 인간세계에 무지했기 때문에 자연히 엘리시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기대문에 둘의 시선은 모두 엘리시엘에게 향했다. 단 것을 무척 좋아하는 세라피와 엘리시엘은 가끔 들리게 되는 마을에서 엘핀서스에서는 구하기 힘든 인간 특유의 단 군것질 거리를 먹는 것이 여행의 큰 낙중에 하나였다. 인간계에 나와본 적이 없는 세라피는 엘리시엘과 유신이 함께하는 여행이 무척 재미있었는지, 다음의 일정에 대해 굉장히 기대하는 것 같았다. "일단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하누스 국왕님께 알현을 요청할게." 엘프는 인간의 왕을 섬기지 않기 때문에 폐하나 전하란 말 대신 국왕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국왕님과 이자벨 공주하고는 안면이 있으니까 박대하진 않을거야." 나이는 어리지만, 엘리시엘은 인간계에서 꽤 유명하다. 인간의 용사일행과 여행을 하며 많은 모험담을 남겨서 하누스의 전 국민들을 열광하게 햇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룡 그라테우스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엘리시엘을 빼고 모두 전멸하였기 때문에 엘리시엘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엘핀서스로 돌아간게 5년 전의 이야기이다. 다은날 아침 엘리시엘이 왕궁에 찾아가 정문의 가드들에게 몇 마디 이야기를 하자 경비들은 금세 엘리시엘을 알아보며 접견 대기실로 안내하였다. "폐하께선 지금 아침 회의 중이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시녀장 하나가 일행을 안내하며 이야기 했다. 보통의 성의 하급시녀가 맡는 일일 터이지만, 노련한 시녀장급이 그들을 안내하는걸 보면 하누스에서 엘리시엘을 꽤 귀하게 여긴다는걸 알 수 있었다. 만약 유신이 보통의 시골뜨기였다면 으리으리한 왕궁의 규모에 기가 질려 버렸을 테지만, 여상 생활하던 공간, 하다 못해 그의 기함인 디어사이더 호 조차도 이곳보다 훨씬 웅장한 규모의 실내 장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만큼 내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이 좀 얄밉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노련한 시녀장인 만큼 대충 유신이 다른 나라의 어느 귀한 집 자제가 정체를 숨기고 여행하는 것일 거라고 마음대로 단정지어 버리고 조용히 시녀를 시켜 간단한 다과를 내오게 했다. 과일 주스를 홀짝이며 한시간여 정도를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자 왕의 알현이 허락 되었다. 예상대로 하누스 왕은 엘리시엘에게 잘 대해 주었고, 이야기는 쉽게 풀렸다. 왕과 그곳에 있던 신하들은 엘핀서스 숲에서 유신의 활약을 듣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엘리시엘을 상당히 신용하는 듯 무례하게 거짓말이 아니냐고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옆에서 조용히 엘리시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자벨 공주는 다크블러드의 침공보다도 당장 눈앞에 있는 작은 소년에게 더 흥미가 끌렸다. 아직 소년티도 안 벗은 자그마한 체구의 유신이 오우거 셋과 오크 수십마리를 베어넘겼다는 것이 흥미를 끈 것이다. 그정도의 검술 솜씨는 최강의 기사가 모여 있다는 로열가드중에서도 없다. 아니, 애초에 인간이 마법사의 지원없이 오우거 정도의 몬스터와 1:1로 싸운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그들이 싸웠다는 마물들은 야생의 평범한 마묻들이 아닌 흄의 최 정예인 다크 블러드가 아닌가? 이자벨의 시선을 느낀 유신도 그녀를 찬찬히, 무론 무례하지 않게 요령껏 훑어 보고는 그녀에게 호감이 갔다. 여자 치곤 큰 키지만, 등신비가 잘 맞아서 크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전신에서 풍겨져 나오는 왕족의 기품은 당당하면서도 온화해 보였다. 코어의 흐름도 유신이 느낄수 있을 만큼 활발한 것이 그녀가 일정수준 이상의 검사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주위의 로열가드들 역시 유신이 싸워본 다크블러드의 오우거에 못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갖추고 있었다. '과연! 이정도라면 다크블러드가 상대라 해도 일방적으로 밀리는 싸움은 되지 않겠구나.' 유신은 속으로 감탄하며 하누스 국왕과 엘리시엘의 면담이 빨리 끝나서 이 불편한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30분 가량을 지루한 이야기에 시달린 일행은 생각보다 빨리 끝난 알현에 기뻐하며 국왕의 배려로 특별히 배정 받은 손님 접대용의 방으로 들어간 뒤 앞으로의 일을 상의했다. "이걸로 다 끝난거야?" 뭔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시시하게 말 몇 마디에 알현이 끝나자 세라피는 좀 맥이 빠지는지 목소리에 투정이 묻어 났다. "뭐 그렇다는 거지. 훗~그나저나 유신을 보던 이자벨의 눈이 심상치 않던데....." "뭐..... 뭐야 그게? 이상한 소리 말아. 엘리" 엘리시엘의 당혹스런 말에 유신이 금방 당황하며 얼굴이 빨개 졌다. "글세? 후훗. 잘 봐........5. 4. 3 .2. 1. 지금!" 엘리의 말과 동시에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세라피가 예쁜귀를 갸웃거리며 대답하자 여성용의 중갑주를 착용한 이자벨 공주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큰 귀만큼이나 소리를 잘 듣는 엘프들 인지라 진작부터 누군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있었기 때문에 이자벨이 들어오는 타이밍을 정확히 잡은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었을 수도 있지만, 아까 유신을 소개할 때 날카롭게 눈을 빛내던 이자벨을 보고 엘리시엘은 그녀가 이렇게 방문할 것이란 걸 예감했었다. "에휴.... 이자벨..... 누가 말리겠어." 이상하게 전개되는 상황을 따라잡지 못하던 유신이 해명을 바라는 눈초리로 엘리시엘과 이자벨을 번갈아 쳐다 봤지만, 조각같이 단아한 이자벨의 입술에서 흘러 나온 말은 전혀 유신이 예상하지도, 바라지도 않던 말이었다. "꽤 고명한 검술 솜씨를 갖추신 것 같던데......한 수 부탁드려도 될까요?" "에? 무...무슨...." 공주마마께서 갑옷을 입고 길다란 롱소드 까지 찬 완전 무장을 한 상태로 찾아 왔다. 결코 싫다고 거절할만한 상황이 아니다. 하지만 유신은 쓸데없이(유신의 관점으론 공주에게 한 수 가르쳐 주는 것은 절대로 쓸데없는, 오히려 해가 될지도 모르는 행위이다.)칼 휘두르기가 싫었다. 게다가 그녀에 도전을 받아 들여서 이기던 지던 왕궁 내에서 유명해져 버린다면 더더욱 곤란해 질 것은 불을 보는 것 정도가 아니라 불 속에 기름을 들이붓고 뛰어드는 것보다 뻔한 일이다. 엘리시엘과 세라피에게 구원을 바라는 표정으로 무언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두 엘프들은 가볍게 유신을 배신했다. 세라피는 유신의 그런 표정이 영락없는 겁먹은 강아지 같아 보여서 '킥'하고 작게 웃었을 뿐이었고, 엘리시엘은 애절한 유신의 눈빛을 외면하면서 한마디했다. "한수 가르쳐 달라잖아. 평소엔 멀쩡하다가 칼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이 바뀐다니까." 엘리시엘의 말에 절망적으로 이자벨을 바라보던 유신은 작게 중얼거리며 첨예를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중얼중얼..... 이런 모험에 끼어 드는게 아니었어....중얼.... 자꾸 싸움만 하게 되고.....중얼......" 엘프들의 좋은 귀는 유신의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았지만, 타인의 일에 쉽게 관여하지 않는 엘프답게 깨끗한 태도로 무시해 버렸고, 유신의 첨예를 바라보느라 넋이 나간 이자벨 공주는 전혀 못 들은 것 같았다. 이자벨이 보기에 첨예는 무척 특이한 검이었다. 엘리시엘과 세라피는 원체 검에 무지하니 별 관심도 없었지만, 이자벨은 평소 검술을 즐기고 좋은 검이라면 꼭 가지고 싶어하는 만큼 첨예에 대단한 관심을 보인 것이다. "특이한 검이군요. 날카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실전에서 쓰기엔 너무 가볍고 잘 부러지지 안을까요?" 마법계에서 쓰는 검들중 가벼운 편에 속하는 롱소드라도 유신의 첨예보다 세배는 더 무거울 것이다. 또한 동방도처럼 외날검 스타일의 동양식 검은 전혀 없기 때문에 엘프들이 쓰는 얇은 레이피어 보다도 가벼워 보이는 자그마한 첨예가 장난감 칼처럼 보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가볍긴 하지만 절대 위력이 떨어지진 않아요. 오우거를 셋이나 벨 수 있었던 것도 이 검의 강력함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칼을 1/3 쯤 뽑은뒤 그 위로 머리카락 한올을 떨어 뜨리자 시리도록 푸른 날에 채 닫기도 전에 두 토막이 나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굉장한 예리함이었다. 그 위력에 잠시 질린 듯이 쳐다보던 이자벨 공주가 잠깐 첨예를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또하나의 목숨이나 다름없는 검을 보여 달라니? 유신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이곳은 물질계와는 예절이 다르니 할 수 없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고 마계에 가면 마왕의 법을 따라야 한다. 그게 싫다면 싸우거나 반항하면 되겠지만..... 정상적이고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진 자라면 결코 그런 식으로 문제를 풀어가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유신은 지극히 정상적인, 높은자리에 있었으면서 정상적인 것이 오히려 이상할 만큼 노멀한 성격이다. 타인의 손에 첨예를 맡기기는 싫었지만 엘리시엘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첨예를 집어 던진 적도 있으니 사실 예절이고 뭐고 갈 때까지 간 것도 사실이다. 짧은 한숨을 쉬고는 이자벨에게 첨예를 건네 주었다. 첨예를 들고 잠시 들여다보던 이자벨 공주는 순수한 무인이 완벽한 검을 접했을 때 보이는 일반적인 모습들을 그대로 보여줬다. 깔끔한 그녀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입까지 약간 벌리고 넋이 나간 듯 검을 바라보았다. 완벽한 밸런스 때문에 잡고있는 검이 마치 자신의 팔이 조금 더 길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몸의 일부인 듯 편안했다. 날에서 느껴지는 시린 기운에 홀려버린 듯이 첨예의 검신을 훑어 지나가는 이자벨 공주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황홀함에 떨렸다. "굉장한.....정말 굉장한 검이군요. 대체 이런걸 어디서 구했지요?" "그....그냥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보검이었습니다." 얼토당토 않은 거짓말을 하는 유신을 미심쩍은 눈으로 살펴 보았지만, 엘프들이 신용하는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비록 엘프들이 어수룩하긴 해도 절대로 사악하고 교활한 자와는 인연을 맺지 않는 다는 건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유리같이 투명하던 이자벨의 눈이 욕심과 부러움으로 잠시 흐려졌지만, 금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기품있는 눈빛으로 돌아 왔다. 유신은 이자벨 공주의 그러한 변화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무인으로서 훌륭한 무구에 관심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걸 인내하는 참을성을 갖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자벨은 그러한 순수한 욕심을 자제 할 줄 알고 있었다. 남부럽지 않은 공주라는 신분으로 자라온 만큼 인내심이란 것도 없기 쉬운 왕족으로썬 인내란 것이 정말 드문 미덕이었고, 유신은 인내의 미덕을 가진 이자벨 공주가 마음에 든 것이다. 잠시 후 왕궁의 뒤뜰에 있는 공주의 전용 검술 연습장에는 대무 준비가 되었다. 보통의 공주들이 개인 정원이나 꽃밭을 갖은 것에 비해 이자벨은 전용 검술 연습장을 가지고 있었다. 혹시 부상자가 나올까봐 치료마법사들이 대기했고, 정당한 대무임을 증명하기 위해 로열가드 3명이 참관인으로 나섰다. 오우거를 벤 검사의 솜씨를 보기 위해 견습기사들이 몰려 들었고, 이자벨 공주를 보기 위해 모인 젊은 기사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보통 공주의 연습장에 다른자들이 올 수는 없지만, 이자벨 공주는 관대하게도 다른 기사들이 구경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이자벨 공주는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롱소드와 라운드실드, 그리고 여성용의 갑옷을 착용했고, 투구는 호면이 없는 시야를 확보하기 좋은 것을 골랐다. 남자들의 중장갑옷에 비하면 가볍겠지만 그정도 만으로도 적어도 30kg 이상은 나갈 것 같았다. 반면 유신은 첨예를 비스듬히 차고 용아검은 등 뒤쪽으로 돌려 차서 걸리적 거리지 않게 했을 뿐이다. 실검으로 하는 시합이니 만큼, 견습기사나, 아직 작위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자벨의 검 솜씨를 보지 못한 자들은 걱정스러워 했지만, 오히려 로열가드들이나 좀 나이가 든 노련한 기사들은 이자벨 공주의 솜씨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느긋했다. 유신일행도 직접 유신이 칼 휘두르는 것을 본 엘리시엘은 느긋해 보였고, 기절해 있느라고 유신이 싸우는 것을 보지 못한 세라피는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아무리 비무라 해도 실검으로 하는겁니다. 안전을 위해서 최소한 방패 정도라도 착용 하는 것이 어떨까요?" 자신을 깔보는 것 같아서 속이 상한 이자벨이 은근한 압력을 넣어서 말했지만, 둔한 유신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요. 가볍게 하고 싸우는 편이 좋습니다. 어차피 방패 따위 있으나 마나일테고, 전 그다지 힘이 세진 않거든요." 유신은 무심히도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한 것이지만 이자벨은 속으로 부글부글 끓었다. 자신을 방패를 쓸 필요도 없는 상대일 뿐만 아니라 무식하게 힘만 센 여자라고 비꼬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잘 알겠습니다. 아무쪼록 조심하시길....." 시합 개시를 알리는 나팔소리와 함께 보득보득 이를 갈던 이자벨 공주의 롱소드가 하얗고 깔끔한 호선을 그리며 유신의 왼쪽 어깨로 떨어져 왔다. 혹시 화랑단에서처럼 시합전에 기수식(칼로 하는 인사)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해서 이자벨의 동작을 유심히 지켜보던 유신은 탐색전도 없이 들어온 강력한 일격에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인정사정없는 이자벨의 검에 유신이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자 세라피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와 했다. 상상한 것 보다 훨씬 빠르고 정교한 이자벨 공주의 검 끝에 당황해서 잠시 놀아나던 유신이었지만 곳 안정을 찾고 차분하게 방어하기 시작했다. 사실 유신이 힘들었던 것은 혹시 첨예에 이자벨의 검이 닿으면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검이 망가질까봐 신경 써 가면서 싸웠기 때문이다. 몇 번의 검격을 주고 받자 이자벨의 검 역시 첨예 못지 않은 좋은 칼이란걸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얇은 팔뚝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올까?' 유신 역시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커다란 롱소드와 라운드 실드를 들기에는 턱없이 가는 이자벨의 팔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일단 칼이 깨지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유신은 이자벨의 실력에 대한 경의로서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만약 유신이 살살 봐주면서 한다면 이자벨 공주의 성격에 무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상대는 가벼운 만큼 스피드에서 나보다 월등하다. 하지만 방어력은 없으니 공격과 수비의 전환이 빠른 찌르기 위주로 가야겠다.' 이자벨은 유신의 빠른 몸놀림을 본 후 반격 받을 위험이 적은 찌르기 위주의 공격을 가했다. 이자벨은 유신이 스피드를 살릴 수 있는 베기 위주로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이자벨의 찌르기를 검끝으로 건드려서 방향만 바꾸는 수비적인 형태를 취했다. 제대로 싸워도 중무장을 한 자신이 유신에 비해 체력 소모가 훨씬 클 터인데, 아주 작은 동작만으로 자신의 공격을 무마시켜 버린다면 체력소모의 차이가 너무 다르다. 이자벨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이자벨이 잠깐 공략 방법을 연구해 보기 위해 거리를 두려고 빠져 나오자 갑작스럽게 유신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방패를 들고있는 오른쪽으로 빠른 일격이 날아왔다. 첨예가 워낙 가볍고 유신도 힘이 센 편은 아니었지만, 제법 묵직한 충격이 전해져 왔다. 하지만 놀랄 일은 그 다음이었다. 방패에 튕겨나온 첨예가 방향을 바꾸더니 퉁겨나온 반탄력까지 이용해서 반대편으로 날아 들었기 때문이다. 엉겁결에 롱소드로 막긴 했지만 다시 그 반탄력을 이용해 오른쪽 방패를 노리고 검이 날아들었다. 이자벨은 4번쯤 막고 나자 양 팔에 감각이 마비되는 겉 같았고, 유신의 검끝은 계속 스피드를 더해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만약 유신이 검의 괴적을 약간만 바꾼다면 이자벨 공주는 첨예가 흐르는 방향에 따라 토막이 날 터이지만, 유신은 일부러 방패와 롱소드에 공격을 집중시켰다. 이 아름다운 공주의 근성이 얼마나 되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자벨 역시 유신과의 수준차이가 너무 난다는 것을 몇 번 검을 주고 받아본 후 진작에 알았지만, 오기로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역시 저 아가씨는 근성도 꽤 있구나. 이렇게 이겨버린다면 그건 훌륭한 공주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감탄한 유신이 슬쩍 검을 물리며 3M 가량의 간격을 두고 떨어졌다. 유신이 물러가는 순간에도 검을 뿌려볼 만큼 악착스런 이자벨이었지만, 엉망이된 팔에서 나오는 느린 공격은 헛되이 공기만 갈랐을 뿐이었다. "학....학...씩....씩....." 숨쉬기도 힘든 듯 새빨개진 얼굴로 유신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아직 전투의지를 접고 있지는 않은 듯 했다. 아니 이자벨의 눈에선 묘한 희열조차 흐르고 있었다. '타고난 전사로구나. 강한자와의 싸움을 즐기는 투쟁심은 용족의 그것과도 닮은 것 같아....만약 남자로 태어나서 근력이 조금더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훨씬 강해졌을텐데.....' "....학학.....쌕쌕.....역시 굉장하군요. 솔직히 반쯤은 오우거를 베었다는 것을 의심하고 있었는데....." 이자벨이 간신히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호흡을 가다듬자 힘들게 말했다. "이자벨 공주님도 대단합니다. 갑옷과 방패의 무게가 보통이 아닐텐데......그정도 무장으로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을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이번엔 제가 먼저 공격해 보지요." 유신은 비스듬히 칼을 눕혀 아래로 향했다가 다시 천천히 세워서 가슴 앞으로 모았다. 이상한 동작에 이자벨 공주가 고양이처럼 경계했지만, 사실 이 동작은 화랑단에서 검을 겨룰 때 쓰는 기수식이다. 그녀에 대한 경의로서 유신이 제대로 상대해 주겠다는 뜻이다. 다리를 넓게 벌려 공격하기 편하게 한 후 검을 머리 위로 세웠다. 이자벨도 긴장하며 검과 방패를 고추 세웠다. "자 ... 갑니닷!!" 짧은 기합과 함께 유신이 날아 오르자 순식간에 이자벨의 주변에 무수한 검광이 일었다. 물론 대부분이 허초이고 제대로 된 공격은 없었지만, 지금처럼 지친 상태에서 이자벨이 막을만한 검술은 아니었다. 마법계에서 검술이 발전해온 방향은, 물질계와는 달리 강력한 일격에 상대를 끝장내는 힘을 위주로 한 검술이었다. 두껍고 무거운 검에 체중을 실어서, 비록 상대방이 막더라도 그 충격을 막는 부위를 통해 신체까지 주는 것이 일반적인 싸움 방법이다. 따라서 화려한 허초나 속임수적인 공격은 그다지 발전해온 바가 없다. 두터운 갑옷이 약한 공격쯤은 무시해도 될 만큼 주인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유신이 펼치는 공격에 모두 넋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유신이 구사하는 검술은 가벼운 검을 이용해 상대를 현혹시키는 검법이기 때문이다. 공격을 가한지 20초도 지나지 않아서 이자벨의 가드가 무너지고, 그런 그녀의 목을 향해 첨예가 공기를 가르는 살벌한 소리를 내며 날아 들었다. "이.... 이런 공주님 !!" 너무 놀라 로열가드들이 검을 뽑아들고 말리려고 했지만, 유신이 휘두르는 첨예의 속도에 비하면 멈추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죽는......건가?'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느껴졌다. 가느다랗고 아름다운 첨예의 끝이 자신의 목줄기를 노리고 날아오는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팔에 매달려 있는 검과 방패는 이 공격을 막기에는 너무 멀리 있는 것 같다. '단순히 까만 뱀처럼 길죽하기만 한 물건이 어쩌자고 저렇게 아름다운 걸까.....' 죽게된 마당에도 엉뚱한 생각을 하는 이자벨 공주였다. "공주님.....멈춰......와글와글....$%&$#"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가 점점 희미해지고 멀게만 들렸다. 하지만 어느순간 주변의 소음이 멈추었다. 그리고 이자벨의 앞에는 좀 미안한 듯이 난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유신이 서 있었다. 그녀의 목에서 1cm 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첨예는 멈추어 섰고, 이자벨이 멍한 눈으로 유신을 바라 보자 그는 멋쩍게 웃으며 검을 회수 했다. "승부는 난 것 같네요. 공주님 수고하셨습니다." 유신은 가벼운 검 특유의 정밀함으로 기적같이 이자벨 공주의 목 바로 옆에서 첨예를 멈추었다. 무거운 검을 애용하는 마법계의 기사들로써는 그런 속도로 검을 휘두르다가 목 바로 옆에서 멈추어 세우는 묘기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봉인당한 상태라면 유신 역시도 무거운 롱소드나 바스타드 소드로는 이런 묘기를 부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첨예는 1kg 이 조금 넘을 뿐이고, 밸런스도 완벽하기 때문에 다루기가 아주 쉬웠다. "짝짝짝...." 썰렁한 분위기를 깬 것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대결을 지켜보던 엘리시엘이 친 작은 박수소리였다. 썰렁한 공기가 깨지자 모두들 마법에서 풀린 듯이 환호를 지르며 멋진 대결을 보여준 둘에게 열광했다. 로열가드들은 그때서야 식은땀을 흘리며 절반도 넘게 뽑은 자신의 검을 부끄러운 얼굴로 회수했다. 정신을 차린 이자벨 공주는 첨예와 유신의 검술에 감동한 나머지 밤에는 그들을 위한 작은 연회까지 준비한다고 했을 정도였다. 유신은 좀 과했구나 싶어서 아차 했지만, 자신에게 순수한 호의를 보여주는 이 강직하고 아리따운 공주님이 베풀어 준다는 연회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밤새도록 기사들과 술을 마시고 세라피나 엘리시엘에게 끌려 다니며 춤추고 놀던 유신은 다음날 해가 중천에 뜰때서야 시체놀이를 끝내고 침대에서 비비적 비비적 나올 수 있었다. '으윽..... 어제는 너무 마셨어...... 설마 술김에 무슨 실수를 한 것은 아니겠지? 마법계나 물질계나 사람들이 술을 좋아하는건 똑같군......코어를 조금만 더 회전시킬 수 있어도 숙취쯤은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껀데..... 에고 머리야....' 머릿속은 커다란 인도코끼리 세 마리를 앞세운 시끄러운 서커스가 지나가는 것처럼 징징 울렸고 뱃속은 보아뱀 열두마리가 꽈리를 틀고 있는 것처럼 거북했다. '그나저나 공주님은 괜찮으실까? 어제 연회때 보니 팔을 거의 못 쓰는 것 같던데.... 붕대라도 좀 감으시지..... 아무래도 내가 미안해 할까봐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신 것 같지만, 스푼 집을 때도 팔이 덜덜 떨리는 것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는데.... 그렇게나 무리를 하시니.....내가 너무한거였나?' 어제의 연회를 생각하자 숙취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가만히 있어도 미세하게 떨릴 정도로 엉망이된 팔로, 비단 팔뿐만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태연히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 받으며 연회를 즐기던 이자벨 공주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학예회에서 주연을 맡은 장한 딸을 보는 것 같아서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아하하 좋은 공주님이야. 장군감이라고 할만해. 어라 이건 아닌가? 어쨌든 기분은 좋구나.' 유신은 숙취에 시달리는 머리와 주린 배를 잡고 혹시 주방에 먹을게 남았을까 해서 식당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의 이런 즐거운 기분은 식당에 있는 이자벨 공주의 모습을 보면서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곤란한 일에 얼켜들 것 같은 불안감이 등덜미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좋은아침입니다. 유신" 깔끔한 하얀색의 실내용 드레스를 입고, 팔에는 결국 붕대를 감고 있었다.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일어나셨군요. 아 제 팔은 신경쓰지 마세요. 신경쓰실 것 같아서 어제는 일부러 붕대를 안 했더니 오늘 아침에는 멍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부끄럽군요. 그렇게 미안한 표정으로 쳐다 보시면 제가 더 부담스럽습니다. 유신은 좀더 표정 관리하는 법을 배우셔야 겠네요....." 이자벨의 말에 유신은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자신보다 1/50 정도밖에 나이를 안 먹은 이자벨에게 표정관리도 못한다는 말을 듣자 자신의 인생은 대체 뭐였을까 하는 허무감 마저 밀려 왔다. "근데 저를 기다리셨다고요?" 유신은 빨개진 얼굴 수습을 할겸 질문을 던져 보았지만 이자벨 공주는 다른 말을 했다. "아침도 안 드셨으니 배가 고프겠네요. 금방 음식이 나올 겁니다. 어제 보니 무척 많이 먹던 것 같은데, 특별히 많이 내오라고 하지요." 되도록 이자벨 공주와 이야기를 마치고 편안하고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분위기로 보아 유신이 밥먹는 것을 지켜보고 그 후에나 본론을 말할 것 같았다. 그래서 유신은 단념하고는 음식이 나오자 이자벨쯤은 무시하고 일단 먹고 보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엘프 옆에서도 기름기 뚝뚝 떨어지는 육류를 먹을 정도로 신경이 두꺼운 유신인 만큼 인간 여자애 하나쯤은 충분히 무시하고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식사하는 내내 단정한 자세로 앉아서 마치 진기한 애완동물에게 맛있는 사료를 준 후 먹는 모습을 뿌듯한 마음으로 관찰하는 듯한 이자벨의 시선에 유신도 슬슬 목구멍이 막혀서 음식이 안 넘어가기 시작했다. '맙소사. 종이하고 연필만 있으면 연구분석 논문이라도 쓸만한 진지한 자세로군. 논문 제목은 '최초의 인간, 그 진기한 식생활 습관과 좋아하는 음식분포 연구에 따른 창세신의 기호 유추와 이를 통한 우주 진리의 탐구' 정도면 딱 알맞을 것 같다.' 결국 유신은 평소 먹던 양의 반도 채 먹지 못하고 음식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어머, 벌써 그만 드시게요? 아직 더 드셔도 좋은데...." ".............아뇨. 그만 먹죠." 혹시 이자벨 공주가 자기를 놀리는 것은 아닌가 해서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왕족특유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유신이 상당히 불편해 하는 눈빛을 은근히 쏘아주며 이자벨 공주에게 자신을 기다린 이유를 물었다. "저를....... 기다리셨다고요? 무슨 일이신지....." "유신은 특별히 갈 곳이 없는 여행자라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왕궁에 머무르면서 저에게 검술을 지도해 줄 순 없을까요?" 입가심 용으로 나온 정체불명의 녹색 과일 주스를 마시며 대체 무슨 과일로 만들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유신은 하마터면 공주의 하얀 드레스에 녹색의 추상화를 그려 줄 뻔 했다. "켁,켁, 쿨럭, 대....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곳에야 당연히 저보다 강하고 훌륭한 기사님들이 훨씬 많을 텐데....." "그렇지 않아요. 대부분 이곳의 검들은 너무 무겁고 검술도 힘을 위주로 하는 강검 위주입니다...... 솔직히 제가 여자치고는 완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이 정도가 한계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신이 보여준 검술이라면 저도 조금 더 멀리 바라볼 수 있을 것 같군요. 빠르고 날카로운 유신의 검술..... 감동 받았습니다. 꼭 배우고 말거예요." 결연한 의지로 말하는 고지식해 보이는 이자벨의 얼굴을 보자 유신은 어제의 숙취가 한꺼번에 몰려오며 머릿속을 지나가던 서커스가 이제 본격적으로 손님을 끌어 모으며 쇼를 시작했다. 이때 마침 그를 구원해 줄지도 모르는, 하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그러한 믿음을 배신함으로써 이제는 별로 믿음직 스럽지 못한 여신이 나타났다. "유신, 이자벨 좋은 아침!" 엘리시엘이 밝게 웃으며, 도저히 밤새고 놀았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깔끔한 모습의 세라피와 함께 내려 왔다. "엘리, 마침 잘 왔어. 할 얘기가 있었는데...... 그리고 지금은 점심도 지났다고." "......할 얘기가....그거야?" "물론 아니지. 넌 좀더 인간 세상의 유머를 배우는게 좋겠다." "그렇게 깔끔한 얼굴로 농담하면 재미없어. 그리고 이자벨 넌 농담이라는게 안 어울리니까 다른 사람들한테 하지 않는게 좋겠다." "여전히 비수를 잘 꼽는군. 무례하긴...... 할 얘기는 유신에 관한 거야. 특별히 같이 모험하는게 아니라면 내가 좀 빌려도 될까? 아무래도 검술을 좀 배우고 싶어서....." 두 아리따운 처녀가 싸우는 건지 아니면 장난치는 건지를 가늠해 보고 있던 유신은 마지막 말에 다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아아 저기, 공주님하고 엘리는 친구인가요? 무척 사이가......좋아 보이네요." 어떻게 해서든 화재를 바꾸어 보려고 다른 말을 꺼내 보았지만, 세라피가 멍한 눈길로 잠시 처다 봤을 뿐 셋 중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늘 방실거리던 엘리시엘이 조금 진지해진 얼굴로 이자벨에게 다시 물었다. "검을 다루지 않는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지닌 완력으로는 더 이상 발전하기 힘들어. 그래서 요즘은 나도 좀 지쳐 있었는데...... 유신은 완력이 거의 나와 비슷한데도 압도적으로 강하잖아. 그래서 그에게 검을 배운다면 틀림없이 나도 지금의 벽을 넘을 수 있을거야." "완력도 제가 더 강해요." 어떻게든 방해 공작을 펼치는 유신이었지만 따가운 눈화살 세례만 맞았을 뿐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잠시 유신과 엘리시엘을 번갈아 쳐다보던 엘리시엘은 왠지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신경질이 나서 아무렇게나 말해 버렸다. "마음대로 해." 그 한마디에 덜컹하고 가슴이 내려앉은 것은 유신뿐만이 아니었다. 세라피 역시 어쩔줄 몰라 하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로 당황했다. "에? .... 유신이 남겠다면 할 수 없지만....." 세라피는 더 말하고 싶은게 많지만, 그게 무엇인지 딱 부러지게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저는 혼자서 왕궁에 남을 생각은 없는데....." 사실 유신은 엘리시엘을 만난 후의 요 몇일간이 너무 즐거웠다. 성계대전이 발발하고는 내내 전쟁터에 있었고, 성계대전이 끝나자 이번에는 전쟁 마무리를 위해 뛰어 다녔다. 그 다음엔 믿었던 동료들에게 배신당해서 힘을 봉인 당하고 마법계로 유폐되었으니 당연히 근래에 즐거운 추억따위는 없었다. 게다가 세라피와 엘리시엘하고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웠겠는가? 엘프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아름답고 조용한 성격의 세라피, 언제나 활기차고 명랑한 사슴같은 엘리시엘과 밤마다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여행을 해 왔으니 남자의 로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유신이 있던 곳의 여자들은 그를 대할 때 늘 격식을 차리기 때문에 이렇게 허물없이 여자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홀리크로스의 기전장군, 실버스타군 전군 총 사령관, 코스믹 블래스터의 주인, 최강 최악의 용제인 카이드리아 엘 엑시나에의 용신화랑, 그리고 아스모데우스를 쓰러뜨리고 결국은 마왕 루시퍼 조차도 물리쳐 전 우주를 구해낸 영웅.....이것이 모두 유신을 칭하던 말이다. 어느 여자가 편하게 유신을 대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성계대전 내내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 왔으므로 유신 역시도 지금보다 훨씬 날카롭고 대하기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유신이 여자라고 인식할 만한 존재들(미카엘이나 지브릴, 니케들은 여자라고 인식하기 힘든 존재들이었다.) 과 자연스러운 접촉이 없었던 만큼 그런 존재가 하는 부탁을 거절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유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자벨이나 세라피, 엘리시엘은 너무 연약하고 애처로워서 잘못 만지면 부서질 것처럼 보인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하누스 기사단의 선발대가 엘핀서스로 출발 할 때까지 만이라도 왕궁에 머무르며 이자벨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그의 누이인 유진이 사용하던 검술중에 이자벨이 쓸 수 있는 기초기술을 몇 가지 가르쳐 주었을 뿐이지만, 그녀는 굉장히 기뻐했다. 사실 그 이상의 정밀한 검술은 가르칠레야 가르칠 수가 없다. 어려서부터 기초를 쌓아 자기 몸을 기본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꾸준히 길러 와야 고급의 정밀한 검술을 쓸 수 있는데, 이제 20세가 넘은 그녀에게는 그러한 기초가 없었고, 지금부터 그런 기초를 배우기에도 이미 늦은 것이다. 다행이도 이자벨은 검술에 대한 재능이 상당했던 터라 실력이 금방금방 늘어 갔다. 그럴수록 이자벨이 유신과 붙어있는 시간은 점점 더 많아졌고, 엘리시엘과 세라피는 왠지 그게 못마땅 했다. 특히 세라피는 식욕도 없어져서 가뜩이나 조금 먹는 엘프가 더 안 먹게 되니 남들이 보기에는 이슬만 먹고 사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요즘 내가 왜 이럴까..... 이자벨과 유신이 같이 있는 것을 보면 왠지 기운이 없어....' 하지만 세라피나 엘리시엘보다도 훨씬 골치가 아픈 것은 유신이었다. 평소 공주를 흠모하던 수많은 왕국의 기사들이나, 완고한 귀족들이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뜨내기 검사가 공주와 매일 붙어 있는 것을 달갑게 여길 리가 없기 때문이다. 비록 둔감한 유신이라도 뒷통수에 날아와 박히는 시선이 좌측 뇌의 전두엽을 찌를 상황에 이르자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결국 3일째 밤에는 세라피와 엘리시엘에게 찾아가 의논을 하기에 이르렀다. 밤늦은 시간이라 비록 엘프라고는 해도 여자들끼리 있는 방에 들어가기가 왠지 서먹해서 문 앞에서 잠시 서성이던 유신은 심호흡을 하고는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흥...... 바쁘신 유신께서 왠일로 이 밤중에 찾아 오셨을까? 공주님과 검술연습 안해?" 엘프 특유의 뛰어난 청각으로 이미 유신이 밖에서 배회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문을 두드리자마자 엘리시엘의 삐진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 너까지 놀리지 마......안 그래도 힘든데......이 한밤중에 공주님과 함께 있다가는 누구 칼인지도 모를 칼에 맞고 죽을꺼야. " 문 꼬리를 잡고 벽에게 말하는 것 같아서 당혹스러웠지만 허락 없이는 차마 들어갈 수가 없어서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문을 열지도 못하고 문밖에서 불쌍하게 안절부절못하는 유신이 측은한 생각이 들었는지 세라피는 유신의 편을 들어 주었다. "엘리, 이제 그만해. 유신도 일단 들어와서 말해요." 셋을 자세히 보면 재미있게도 가위, 바위, 보 같은 관계였다. 유신은 엘리시엘에게 약하고 엘리시엘은 세라피 말이라면 고분고분해 진다. 그리고 세라피는 유신의 말이라면 잘 따르니까 이런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물론 유순한 세라피나 아직 마법계와 여자라는 생물체에 대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유신이 엘리시엘에게 밀리는 감이 있지만..... 나름대로 균형이 잡힌 것이다. "다들 이제 어떻게 할꺼야? 기사단이 출전식을 하고 보급등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선발대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우리라도 먼저 엘핀서스로 돌아가 볼까?" "어....그럼 나도 갈꺼에요. 나 혼자 이곳에 남아서 공주님 상대를 하면 음험한 시선을 감수하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야....." 유신이 함께 간다고 하자 세라피는 오랜만에 환한 표정이 되었다. 그간의 소식은 바람의 실피드에 여러번 날려 보냈으니, 비록 실피드가 기억력이 형편없이 나쁘고 종종 소식을 잘못 전한다고는 해도 최소한 인간연합의 힘을 빌리는데 성공했다는 소식 정도는 전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소식을 전하려면 아무래도 직접 가서 이야기 해야 할 것 같았다. 내일의 일정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엘리시엘의 옆으로 한줄기 바람이 스치더니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녀의 몸을 타고 돌았다. 코어가 묶여버린 유신으로썬 바람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그것이 실피드라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꺄드득....꺄르르르........ " 보통의 인간의 귀에는 희미한 바람소리, 또는 개구쟁이의 웃음 소리 정도로 들리는 소리지만 엘리시엘은 하얀 귀를 쫑긋쫑긋 하며 실피드의 얘기를 잘도 알아 들었다. 잠시 후 그녀의 몸을 감싸고 돌던 바람이 사라지자 엘리시엘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신, 세라피, 안 좋은 소식이야. 얼마전에 우리와 싸웠던 시커먼 마법사 있지? 딜트라고 했던..... 그 마법사가 서큐버스와 함께 도망친 모양이야. 그 서큐버스가 게이트 패더를 가지고 있었나봐. 실피드의 얘기 만으론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옷의 장식 같은 걸로 위장해 놔서 공간 이동용 마법 아이템인지를 몰랐나봐." 엘리시엘의 말에 세라피의 얼굴이 창백해 졌다. 세라피는 딜트와의 마법 싸움에서 너무나 쉽게 패하여 사로잡혔었고, 그 후에 오크와 오우거 같은 마물들의 노리개로 되었었으니 딜트가 두려운 것은 당연 했다. 게다가 그때의 악몽이 떠오르자 주체할 수 없이 몸이 덜덜 떨렸다. 안스러운 모습의 세라피에게 엘리시엘이 다가가 손을 잡아 주었지만, 창백해진 얼굴에서는 이제 식은땀까지 흘러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달아나는 도중에도 마법으로 엘프들을 꽤 많이 상하게 한 모양이야. 죽은 엘프는 없지만 이리엘을 비롯해서 몇 명이 크게 다친 모양이야. 역시 우리라도 먼저 엘핀서스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친한 친구인 이리엘까지 다쳤다는 말에 세라피는 본격적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여자가 우는 모습을 별로 본적이 없는 유신은 안절부절 못하다가 세라피의 옆으로 가서 가만히 어깨를 감싸주는 정도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다행히도 세라피는 그것 만으로도 꽤 안심이 되었는지 조금씩 떨림이 진정되었다.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왕에게 알리고 우리부터 먼저 출발하자." '상황이 좋지 않아.... 위시마스터인 카린카가 없는데도 이렇게 쉽게 게이트 마법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위시마스터 정도의 실력자가 있다는 것인데..... 3급신 이상이나 용신화랑 급의 코어를 다룰수 있는 자라면 의지의 힘으로 강제로 공간 게이트를 열 수 있을지 몰라도 마나의 힘만으로는 위시 마스터의 부재로 공간간의 좌표 값이 모두 사라진 지금, 쉽게 게이트 마법을 쓸 수는 없다....설마 흄이 직접 연 것일까? 그렇다면 대체 다른 위시 마스터들은 뭘 하고 있단 말인가?' "유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이 해?" "아.... 아무것도 아니야....." 다음날이 새벽 안개가 채 거치기도 전에 왕을 알현한 유신 일행은 엘핀서스의 사정이 좋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먼저 출발할 의사를 밝혔다. 하누스 왕은 우선 국왕 직속의 친위대인 로열가드 다섯을 일행의 호위로 붙여주고, 준비 되는 대로 선발대인 기마대 100기를 보내 주기로 약속했다. 숲속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기병 따위는 아무 도움이 안되지만, 기사란 말에서 내리면 훌륭한 보병이 될 정도의 전사들이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역할을 해 낼 것이다. 유신을 선두로 한 여덜명은 오후가 되기 전에 이미 외성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성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서려는데 뒤쪽에서 급하게 말 모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말을 세우고 뒤를 돌아본 유신은 머리가 징징 울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유신과 대무했을때와 마찬가지로 중무장을 한 이자벨 공주가 공주다운 하얀 백마와 화려한 장식이 들어간 마갑을 두른 말을 타고 따라오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맞아 떨어지는 법. 일행의 옆에 선 공주는 당연하다는 듯이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자~ 출발!" 기가막힌 심정으로 가만히 이자벨을 처다보던 유신이 간신히 더듬더듬 말했다. "무... 무슨 출발이지요? 설마 따라가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시겠지요?" 왕족 특유의 고집스런 눈매로 유신을 쳐다보던 이자벨도 기죽지 않고 말했다. "국운이 걸렸을지도 모를 중요한 일입니다. 아버님은 성을 비울수 없고, 왕자들은 해안 수비진지를 비울 수 없는 지금, 저라도 엘핀서스의 사정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당당하고 용감한 공주의 말에 로열가드들은 당장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은 감동에 찬 표정이었고, 유신은 성계대전때 혹시 머릿속에 북치는 원숭이가 돌아다게 하는 저주가 걸린 것이 아닌지를 의심해 봐야 했다. ".....공주님....... 소풍이나 사냥나가는게 아닙니다. 마물들과 싸우는 것은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에요." 간신히 고함을 지르지 않고 여상스런 말투로 말할 수 있었지만, 이미 마음속에선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치고 있었다. "이런 무례한 놈!! 천한 놈이 감히 어느 분 앞이라고....." 이 순간 유신은 머릿속의 이성을 붙잡고 있던 최후의 한 가닥이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유신 더 실버스타', 천사장들 조차도 말을 가려서 할 정도의 찬란한 명성에 대고 누가 감히 이런 폭언을 가한 적이 있겠는가? 눈을 질끈 감고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한 유신이 간신히 분을 삭이며 말했다. "귀한 태생이면 귀한 태생답게 말을 가려서 하십시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명을 재촉합니다." "뭐.... 뭣이라? 공주님이 아껴준다고 네놈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듯 하구나." 로열가드라면 귀족 집의 자제들이 대부분이다. 신분도 알 수 없는 유신에게 도발적인 말을 듣자 못 참는 것은 당연하다. 막 칼자루로 손이 가서 검을 뽑아 유신을 내리칠 기세였다. 칼자루에서 절반쯤 검을 뽑은 순간 유신이 조용히 감았던 눈을 떴다. 특별히 살기를 뿜은 것도 아니고 위협적인 행동을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로열가드, 아니, 주변에 있는 모든 생명체와 정령들은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이 자그마한 존재가 뿜어내고 있는 압박감은 가히 마법계 최강이라는 드래곤과 비등할 정도라는 것을..... "뭐... 뭐냐....." 로열가드는 도저히 더 이상 검을 뽑을 수 없었다. 코어가 모두 봉인된 유신으로선 강력한 기로 적을 제압할 수는 없지만, 용제와 오래 지내면서 드래곤 피어의 원리와 사용 방법을 본능적으로 배운 것이다. 봉인 당한 몸으로도 이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그의 수많은 전투 기술과 지옥의 수라장을 걸어온 경험 덕분이었다. 주변의 공기나 정령들조차도 유신의 옆으로 비켜서 흘러갔다. 말들은 공포로 미쳐 날뛰기 시작하고 정령들이 갑자기 흩어진 쇼크로 엘리시엘이나 세라피처럼 정령에 민감한 엘프는 당장 안색이 창백해 졌다. 사실 유신이 정말로 싸울 생각이었다면 기사가 검을 뽑아 덤비는 순간에 목을 베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싸울 생각이 있던 것이 아니라 겁만 줄 생각이었기 때문에 존재감만 발산시킨 것이다. '아무리 적은 인원이라 해도 머리가 두 개인것 만큼 피곤한 것은 없지! 누가 위인지 확실히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여행이 힘들어 질 거니까....' 아니나 다를까 모두 다들 슬금슬금 검에서 손을 놓았다. 아무리 대단한 솜씨를 지닌 로열가드들이라 해도 평범한 인간의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다. 애초에 검을 마주칠만한 상대가 아닌 것이다. "유.... 유신? 왜 그래요? 대체......" 세라피는 말하는 것조차 괴로운지 더듬더듬 메이는 소리로 유신을 말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흥분했군요. 무례를 용서하시길. 공주님이 가겠다고 하시면 저따위가 말릴 수야 없지요. 하지만 실전인 만큼 자신의 생명은 자신이 지키는 겁니다." 세라피의 말에 마지못해 살기를 거두는 척 했지만 사실 유신은 이미 마음속으로 후회를 하고 있었다. '에구... 세라피가 이 정도라면 엘리시엘은 기절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군. 마법계라 정령의 흐름이 생각보다 너무 활발해......' "흥, 너 따위의 도움은 바라지 않는다. 공주님은 우리 로열가드들이 알아서 지킬 것이다." 엄청난 중압감에서 풀려난 로열가드중 한명이 간신히 말했다. '호오... 생각보다 실력이 있는 모양이군. 금방 부활했는데.....' "물론 그러시겠지요." 싸늘한 대꾸와는 달리 유신은 이들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전쟁터에서 강한 동료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뼈져리게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유신이 다시 빈정거리자 로열가드가 좀 전의 일은 벌써 잊었다는 듯 거품을 뿜으며 달려드려 했지만 이자벨이 말렸다. "다들 그만 두세요. 하누스의 로열가드가 적을 앞에두고 같은 편과 다툰다는 것이 진정한 수치입니다. 남들이 봤을까봐 두려울 지경이군요." "고...공주님...." 공주의 꾸짖음은 로열가드들은 단숨에 풀이 죽어 버렸다. "어서 출발 합시다. 그리고 유신님, 저는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제 몸 정도는 제가 챙기지요." 그제야 유신도 예를 표하며 말을 말머리를 돌렸다. 슬쩍 옆을 처다보니 엘리시엘에게 다가가는 세라피가 보였다. "엘리 괜찮아?" 창백한 표정의 엘리시엘에게 세라피가 다가가 등을 토닥여 주며 물었다. "아....으...응...." '휴.... 내가 죽일놈이군....' 출발이 조금 삐걱거리긴 했지만 엘핀서스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왕도를 떠난지 4일째, 로열가드들과 공주는 완전히 지치고 말았다. 사태가 급박한 만큼 낮뿐 아니라 밤에도 말을 몰았기 때문이다. 바람의 실피드가 전해준 바에 따르면 오크와 오우거들이 계속 목격되고 있으며 아직 크게 맞부딫 치지는 않았지만 보고된 수만도 이미 50건을 넘고 있었다. "휴식의 샘물은 내 친구에게 깃들라. 아쿠아 힐" 세라피의 주문이 끝나자 손에 파란 물덩어리가 모이더니 말들의 머리 위로 흩어져 갔다. 말들이 너무 힘들어 할 까봐 이렇게 회복마법을 걸어주는 것이다. 왕도를 벗어나기 전까진 계속 말을 바꾸어 타고 달렸지만, 왕도를 벗어난 지금, 일행이 의지할 것은 세라피의 회복마법 뿐이었다. 하지만 강행군한 보람이 있어서 4일째 밤에는 엘핀서스의 끝자락에 위치한 하르펠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엘프들이란 정말 굉장하군요. 훈련받은 기사들도 녹초가 될 지경인데 회복마법까지 쓰면서도 그다지 지쳐 보이지 않다니...." 로열가드의 솔직한 감탄에 세라피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엘프들이라고 기초 체력이 인간보다 강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완력은 인간보다 떨어지지요. 하지만 동물과의 친화도가 높고 몸이 유연하기 때문에 말을 타는 것이나 평지를 걷는 것이나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답니다." 세라피가 웃으며 똑바로 쳐다보자 그 기사는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유신은 작게 키득거렸지만 기사는 그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하르펠 마을이군요. 오늘은 모두 푹 쉬고 내일부터 있을지도 모를 싸움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어요." 이제는 모두 유신과 친해져 처음의 삭막한 분위기는 남아있지 않았다. 몇일간의 여행으로 모두들 꽤 친해진데다 밤에도 말을 몬 만큼 이야기할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로열가드들도 모두 호탕한 성격인지라 첫날 조금 다투었다고 꽁해 있는 자는 없었다. 품속을 더듬거리던 유신이 하모니카를 꺼내들자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이 작게 환호하거나 휘파람을 불었다. 유신도 어색하게 웃으며 손으로 답례를 한 뒤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했다. "하하... 이래서 저 꼬마를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첫날 유신과 다투었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기사가 허허거리며 말했다. 유신의 하모니카카 울리자 마법을 쓰고 피곤했던지 말 위에서 까박까박 졸고 있던 세라피가 눈을 떴다. "흠...흐흠....." 세라피는 가사도 없는 허밍을 따라 했지만 워낙 고운 목소리라 모두들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자 다 왔네요. 모두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마을에 들어서자 아마도 가장 힘들었을 것인 이자벨 공주가 지친 음성으로 말했다. 하르펠 마을엔 여관이라곤 엘핀스 한 곳 뿐이니 일행은 모두 그곳으로 향했다. "안녕 돈, 나 또 왔어." 명랑한 엘리시엘이 늦은 밤임에도 거침없이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 갔다. "안녕하세요. 엘리언니. 뒤에 분들도 모두 일행인가요?" 식탁에 엎드려 졸고있던 빌 리가 여전히 졸린 눈으로 일행을 맞았다. "아, 빌리, 뒤쪽은 이 나라의 공주인 이자벨이고 기사들은 자색기사단의 최 정예인 로열가드들이야. 넌 하누스 국민이니 대하기가 좀 어렵겠구나." "아, 예, 엘리 언니 농담은 3년전과 같이 여전히 썰렁 해요. 좀더 인간 세계의 유머를 배우시는게....." 여기까지 말한 빌리는 로열가드들이 들어서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들이 두르고 있는 갑옷은 아무리 촌 동네에 살았던 빌리라 해도 알 수 있는 고급스런 것이었고, 무었보다도 보라색 망토에 수놓아져 있는 황금 독수리의 문장은 하누스 왕가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아.... 아.... 딸꾹... 딸딸국" 빌리는 황망히 예를 표하는 것도 잊고 딸국질을 시작했지만 공주도 기사들도 모두 기분이 좋았던 터라 크게 허물치 않았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요. 늦은 시간에 실례해도 괜찮다면 음식을 좀 내줄래요?" 이자벨은 빌리가 귀여웠는지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조금 굽혀서 빌리와 눈을 맞추더니 친절한 어투로 부탁했다. "아... 당연히 실례하셔도 되요... 아니... 그게 아니라....저....저...... 금방 내올께요." 울 듯한 목소리로 대답한 후 주방으로 구르듯 달아나 버리는 빌리의 뒷모습을 보며 모두들 작게 웃었다. 잠시 후 주인인 돈씨도 자다가 깬 부스스한 얼굴로 황망히 나와 공주에게 예를 표했지만, 이자벨은 난처하단 얼굴로 요란한 건 싫으니 음식만 빨리 부탁한다고 했을 뿐이다. 아마도 이날은 돈씨 사상 최고로 행복한 날이자 최고로 당혹스런 날이었을 것이다. '공주님이 묵었던 여관' 이라거나 '공주님이 드신 음식' 따위의 이름을 붙여 팔면 좋을 것이다. 아니 이런 상업적인 것보다도 적어도 10년은 울궈먹을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생긴 것이다. 최고의 요리를 대접하겠다는 일념으로 평소보다 배는 요리시간이 길어진 것이 배고픈 모두에게 얼마나 고통이 될 것인지는 돈씨의 머릿속 밖에 있는 문제였다. "이봐 돈....... 모두 배가 고프다고..... 대충이라도 좋으니까 음식부터 줘.... 하다못해 과일이라도 내와야 할 것 아냐?" 18살도 안되어 보이는 엘리시엘이 그보다 20살은 더먹은 것 같은 외모의 돈씨에게 막말하는 것은 매우 기묘해 보였는지 기사중 한명이 말했다. "역시 엘프와 같이 있으면 시간이라는 개념이 모호해 질 수밖에 없군요. 이곳의 마스터는 나이도 꽤 들어 보이는데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다니...." "흠... 그런가요? 하지만 돈은 아주 꼬마였을 때부터 봐 온걸요. 처음 봤을때가 빌리보다도 어린 돈이었으니까요. 그때는 누나누나 하면서 잘도 따라 다녔는데 지금은 저렇게 커버렸다니까요." 엘리시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방에선 격렬한 기침소리가 들렸다. 혹시라도 음식물에 파편이 튀지 않을까 심히 걱정스런 소리였기에 모두의 안색이 창백해 졌다. 하지만 음식이 나오기 시작하자 파편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만큼 음식은 대 만족이었다. 물론 일행이 시장한 것도 큰 역할을 했지만, 산골의 부족한 재료로 만 듯 것치고는 매우 훌륭한 맛이라 입맛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공주와 로열가드들도 행복한 심정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공주의 입맛도 만족시켰으니 돈씨는 이 이야기를 평생동안 해도 질리지 않으리라. 그중 가장 행복한 것은 물론 유신이었다. 혼자 닭을 두 마리나 먹고 스테이크와 미트볼, 케익류, 거기다 엘리시엘이나 세라피가 먹던 과일까지도 먹었지만 그의 위는 오우거 이상인지 아무리 먹어도 찰줄을 몰랐다. 나중에는 돈씨가 그렇게 먹다간 탈이 날 거라고 말렸고, 공주를 포함한 일행들은 포기해 버렸다. 사실 유신이 그렇게 많이 먹는 것은 성계대전에서 먹던 전투식량이 엄청난양의 영양분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가 길어지면 며칠씩 아무것도 못 먹는 경우가 허다했고, 용신기를 조종하면서 전황도 살피는 것은 엄청난 체력소모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거기에 맞추어 평범한 음식을 먹으려니 자연히 양이라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유신의 강함의 비결은 어쩌면 먹는 양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질린듯한 어투로 이자벨이 말했다. "아하하 설마요. 그보다 모두 피곤할 텐데 모두 올라가서 쉬시지요. 전 과일주를 조금만 더 마시고 잘꺼에요." "어....나도......" "세라피 언니는 그만 자요. 그렇게 졸면서 뭘 더 마시겠다는 거예요. 저랑 세라피 언니는 먼저 잘께요. 유신도 적당히 마시고 자. 내일부턴 힘들지도 모르잖아." "걱정마. 적당히 마실테니까. 근데 공주님은 안주무세요?" "저도 술을 좀더 마시고 싶군요. 신선한 과일도 입맛에 맏고. 기사여러분들은 먼저 가서 쉬세요. 저 때문에 그럴 수 없다면 이건 명령입니다. 가서 자도록 해요." 결국 홀에는 이자벨과 유신, 그리고 빌리만이 남았다. 빌리는 높으신 분들이 잔심부름이라도 더 시킬지도 모르기 때문에 차마 자지 못하고 옆 테이블에서 까박까박 졸고 있었다. 유신은 묵묵히 맥주를 마시며 빨리 자고 싶은 빌리를 괴롭히는 중이었고 이자벨 역시 옆에서 순한 와인을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여기 까지 오긴 왔는데..... 만약 적의 본격적인 침공이 진행되는 것이라면 공주님이나 기사들은 물론 나하나 껴 있다고 전황이 바뀌지는 않을 터.....적이 소수라 해도 만약 무스칼 같은 괴물 오우거가 있다면, 하누스의 기사들 역시 짐만 될 뿐인데....' 잠시 몇 번 싸워본 다크블러드의 정예병들과 딜트라는 마법사를 생각해 보자 마음이 무거워 지는 유신이다. 오크정도라면 이정도의 기사들이 다섯만 있어도 20여마리 이상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겠지만, 대규모의 침공이라면 시간끄는 역할도 하지 못할것이 뻔하다. 게다가 서큐버스같은 희귀한 몬스터가 껴 있다면 정말로 상황이 좋지 않다. '뭐 아직까지는 엘핀서스의 관문인 하르펠 마을이 조용한걸 보니 괜찮은 것 같지만..... 근데 이렇게 조용하다는 것은 그만큼 철저하게 준비한다는 뜻인데......' 유신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이자벨 공주는 와인을 마시는 척 하면서 유신을 잘 관찰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하는 남자일까? 사용하는 검, 검술, 악기, 모든 것이 너무 생소해. 잘 들어보면 억양이나 어투도 좀 이상하고......태도로 보아선 전쟁경험도 많은 것 같은데....... 다른 나라의 높은 신분의 자제가 여행하는 건가?' '근데 칼 참 멋지다....... 나도 저런칼이 하나 있다면......' '저런 날렵한 검술이라면 힘에만 의지하는 지금의 검술을 한차원 높일 수 있을꺼야. 마족보다 힘이 약한 인간에겐 저런 기술이 필요해. 내가 꼭 배워야지.' '저 칼을 팔라고 하면 팔까? 억지로라도 뺐을까?' . . . . . 처음에는 비교적 상식적이고 건전한 상상을 하던 이자벨이었으나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자 끝간데 없는 망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아침밥도 질릴만큼 먹고 도시락까지 받은 일행은 돈씨와 빌리의 배웅을 받으며 엘핀서스로 출발 했다. 다른 마을사람들에겐 공주마마의 행차를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히도 모두 조용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이자벨 공주가 밤 새도록 유신과 무리하게 술을 마신 덕에 조금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그것 외엔 다들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어두운 지하의 신전, 곳곳에 어슴푸레 횟불이 걸려 있지만 감기는 듯한 농염한 어둠에 삼켜져버린 주변을 밝히는데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단지 음산한 분위기를 살리는 장식품으로 전락해버린 횟불은 엄둠속에 잠겨있는 것이 괴로운지 계속 작게 꿈틀거리며 반항을 한다. 그리고 그 어둠의 중심에 다비드의 별 형상을 한 제단이 붉은 빛을 뿜고 있다. 그리고 그 제단의 앞에 신전의 모든 어둠을 만들어 내는 듯한 시커먼 마법사가 구부정하게 서 있다. 깊게 눌러 쓴 후드의 아래로 붉은 두눈만이 빛나고 있고, 썩어서 응고된 피덩어리를 연상시키는 빛깔의 로브를 걸치고 있는 마법사는 쉴새없이 음산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고 있다. 기분 나쁜 모습에 걸맞게 마법사를 중심으로 흐르는 마나의 폭풍은 마법계 최강의 전투생물이라 일컬어지는 용이 브레스를 쓸 때 몰아치는 광포한 마나의 폭풍에 비견될 만큼 강력했다. 제단의 위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소녀가 손발이 붉은색 천으로 묵이고, 입에도 역시 같은 색의 재갈이 채워진 채 공포에 떨고 있다. 금발의 외이브진 고운 머릿결, 에메럴드빛 눈동자,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는 그 실루엣 만으로도 대단한 미인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마법사의 주문이 점점 더 빨라지자 마나의 폭풍은 제단을 중심으로 휘몰아 쳐 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녀가 거의 까무라쳐 의식을 잃을 때 쯤, 제단속에서 거대한 붉은 손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여자의 나신을 감싸안고는 다시 제단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제단의 위로 적층형의 마법문자가 떠오르며 그 속에서 여섯장의 검은 날개를 가지런하게 늘어트린 아름다운 소년이 나타낫다. 완전한 소환이 이루어 지지는 않은 듯, 반투명한 형상에 모습도 희미했지만, 소년이 풍기는 기운은 그 마법사 이상이었다. 아니, 마법사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비참할 정도로 상식을 벗어난 존재였다. 마법사는 두려운 듯 허리를 숙이며 이 경이로운 존재에게 예를 표했다. "마법계의 미천한 마법사 흄이 고귀한 주인 베리알님을 뵙습니다." 그렇다. 이 검은 마법사가 마법계 최악의 괴물인 에데 이 리치 흄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단한 흄이 자신을 비천하다고 까지 낮추며 모시는 베리알이란 누구인가? 그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두렵다는 지옥의 7대군주, 세븐 헬마스터중 한명인 배신과 거짓의 헬마스터가 바로 베리알이다 빛나는 치천사중 한명이었으나 루시퍼의 마성에 홀려 빛을 포기하고 마왕이 된 치천사중 한명이다. "엘프의 숲은 얼마나 진행되었나요?" 유리알 구르듯 맑고 듣기 좋은 음성이다. 하지만 흄은 두터운 로브 위로도 떨리는 것이 보일 정도로 두려워 하며 대답했다. "예, 주인님, 다크블러드의 정예가 이미 300기 이상 잠입에 성공하였고, 추가로 계속 병력을 증강시키고 잇습니다. 명령만 내리신다면 엘프의 숲 따위는 지도상에서 없에 버리겟습니다." "이런 이런 흄님, 제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군요..... 난 엘프가 산채로 필요한 겁니다. 그것도 순결하고 때묻지 않은 고결한 여자 엘프가 말입니다. 지저분한 남자 엘프나 더러운 오크따위에게 깔린 엘프는 필요 없습니다. 제물은 순결하고 깨끗한 여자만이 그 효과가 있으니까요." 베리알의 말에 흄이 다시 엎드리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산채로 잡아 바치겠습니다." "믿도록 하지요. 엘핀서스 전역에 대규모의 마나 고정 결계를 펴 놓도록 하겠습니다. 마스터급의 마법사가 아니라면 마법을 쓸 수 없을겁니다. 설마하니 마법도 못 쓰는 엘프를 못 잡지는 않겠지요?" 여기까지 말한 베리알의 몸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이런 이런.... 벌써 시간이 끝났나..... 역시 인간 계집으론 제물이 너무 약하군." 혀를 차며 사라져 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던 베리알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벨제버브를 봉인한 니케의 마법진 해석이 끝났습니다. 이제 그에 상응하는 제물만 준비되면....." 여기까지 말한 베리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비로소 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제단에 잡혀들어갔던 소녀가 팽개쳐 지듯 튕겨 올라왔다. 손과 발은 풀려 있었지만, 눈을 허옇게 뒤집고 기절해 있었다. 아마도 베리알의 소환을 위해 악마들에게 바쳐졌으니 여자로썬 견디기 힘든 치욕을 당했으리라. 죽지야 않았지만 평생 정신적 장애와 함께 단지 남자밖에 모르는 음탕한 여자가 될 것이다. 소환 의식이 끝나자 제단 주위의 이상한 마기도 사라지고 비로소 횟불들도 어둠을 몰아내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시작했다. 흄은 잠시 기절한 소녀를 바라보다가 휘적휘적 신전을 나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마물들이 어둠속에서 나타나 쓰러져 있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휴...... 잃어버린 시간의 숲이라고 해서 좀더 음침하고 무서운 곳일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말 아름다운 곳이군요." 로열가드들의 리더격인 길리언이 솔직한 심정을 담아 감탄했다. "숲을 해친다면 길리언 경이 말한 경치를 볼 수 있을꺼에요." "하하 무섭군요. 하지만 결계가 그렇게 강력하다면 아무리 마물들이라 해도 힘을 쓸수 없지 않습니까? 굳이 공주님 까지 나서서 사건을 알아보기에는....." 공주를 경호하는 것은 크나큰 영광이지만, 경호의 제 1 원칙은 위험한 곳에 보내지 않는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길리언은 공주가 인간의 마을도 아닌 엘프의 숲, 그것도 마물이 돌아다니는 곳에 직접 온 것이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것이다. "적들은 어떤 특수한 결계를 쓰고 있습니다. 숲이 적의 침입을 알아 차리지 못하고 있어요. 직접 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으니 공주님이 보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헤에..... 유신이 왠일로 이자벨 편을 들어?" "굳이 편을 든다기 보다는 사실을 말한 것 뿐이야. 게다가 아까의 전투 흔적들을 보면.... 마물들의 움직임이 이상해. 발자국 만으론 정확히 모르겠지만 싸움을 피한 것 같아. 아마 엘프들에게 물어 보면 어떻게 된 것일지 알 수 있겠지." "발자국들이요? 하지만 거의 흔적을 지워 놔서 알아보기 힘들지 않던가요?" "예 공주님, 하지만.... 자세히 보면 몇 가지 정도는 알 수 있거든요. 흔적을 지운 것을 보면 놈들은 숫자나 자신들의 정보가 알려지는걸 꺼려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지운 솜씨가 어색해서 제가 알아봤을 정도니까 고도의 훈련을 반복해서 받았다기 보다는 누군가에게 교육을 통해 배운 정도란 걸 알 수 있지요." 유신 일행은 엘핀서스로 오면서 마물 무리들과 마주친건 아니지만, 엘프들과 교전한 흔적을 찾을 수는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마물들에게 전문적인 전투방식을 가르쳐 주는 자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것 같네요. 오크나 오우거 같은 육전형 몬스터는 태어나면서부터 투사라고는 해도 저돌적인 용맹성과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해서 싸우는 것이지, 이렇게 교활하게 싸우지는 않아요. 아마 누군가가 마족들에게 인간의 전투 법을 가르쳐 준 것 같아요. 마물들과 엘프들이 이미 몇 차례 전투를 치른 것 같으니 엘핀서스에 도착하게 되면 아마도 자세히 이야기를 들을수 있을 겁니다." 엘핀서스에 도착한 일행은 여전히 평화로운 마을의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아!!! 엘리시엘 돌아 왔구나. 잠시만 기다려줘. 장로님께 알릴테니까." 엘리시엘과 세라피를 알아본 한 엘프가 장로에게 그 소식을 알리기 위해 뛰어갔다. 일행이 장로의 집앞에 도착했을 때는 장로인 엘시르가 그들의 마중을 나오고 잇었다. "어서오게, 세라피, 엘리시엘, 그리고 인간의 공주님. 모두 무사히 와 주셔서 정말 다행이군요. 마론, 원로 엘프들을 소집해 주게. 그간의 이야기를 해야 할테니까" 장로의 말에 한 젊어 보이는, 사실 엘프는 모두 젊어 보이기 때문에 나이는 짐작할 수 없지만, 엘프가 뛰어 갔다. 인사할 틈도 주지 않고 마을의 광장으로 안내되어 간 일행은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하누스 국왕이 지원을 약속했다는 소식을 비롯해 공주님이 직접 상황을 알아보러 왔다는 것은 인간들에게 배타적인 엘프들에게도 인간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할 만큼 좋은 소식이었다. "........지금껏 오크와 같은 저급 마물이 발견된 보고는 100건이 넘고, 오우거나 서큐버스같은 중급 마물도 상당수 목격되었습니다. 하지만 발견된 후 어디로 모여있는 것인지 행방이 묘연합니다. 다행이 몇 번의 교전으로 오크 몇 마리를 사로잡을 수 있었는데 아주 이상한 마법 장치를 가지고 있어요." "마법장치라고요?" "예. 이것 때문에 숲의 결계에 잡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겟지만 그것을 지니고 있으면 살기나 마나의 흐름이 가려집니다. 덕분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마물의 존재를 느낄수가 없어요. 여기 이것입니다." 엘시르가 내민 마법 아이템은 검정색의 네모난 상자모양으로 팔이나 다리에 찰 수 있도록 끈이 메여져 있었다. '카린 사이언스 퍼실러티..... 왜 물질계의 .....그것도 실버스타군의 물건이 여기 있는 거지?' 카린 사이언스 퍼실러티는 실버스타군의 핵심 군사기술 연구소이다. 용신기를 비롯한 최신 군사장비가 연구되는 곳이니 만큼 이곳의 물건이 외부, 그것도 마법계까지 유출되어 마족의 손에 들어가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시라스행성 전쟁당시 해병대의 원활한 강습을 위해 카린이 만든 소형 결계장치를 그 후에 더욱 계량한 것이 이 네모난 모양의 고스트라는 장치이다. 기습적인 강습을 주로 맡는 해병대이기 때문에 일당백의 대단한 용사들로 편성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상륙직후에는 여러모로 약점이 많이 노출된다. 시라스 전쟁에서도 강습당시 수많은 더미 강하병과 채프까지 뿌려가며 상륙전을 벌였지만, 사람이 뿜어내는 미세한 마나와 코어의 흐름을 감지하고 공격해 대는 마물들의 감시 타워 때문에 상륙도 하기 전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결국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인적 물적 손실이 너무 크고, 힘들여 키운 베테랑급 전사들을 무의미하게 잃게 된다는 군 수뇌부의 판단에 따라 한때 해병대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카린이 만든 고스트라는 장치 덕분에 해병대는 기사단과는 다른 역할의 군대로 자리메김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마나와 코어의 흐름은 물론, 살기와 소음조차 감추어주는 고스트 덕분에 해병대의 강습이 훨씬 원활해 졌기 때문이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카린은 군사장비 부분의 연구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현재의 과학부장의 자리에 까지 오른 것이다. 어쨌든 우주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다른 세계의 간섭을 극도로 배제한 마법계에서 이런 물질계의, 그것도 군사장비가 들어오는 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마법계에서 뭔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만약 고스트 이외에 빔 병기 같은 공격장비도 흄에 들어와 있다면 이 싸움은 희망이 없는데.....' 유신이 고스트를 보며 뭔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생각에 잠겨 버리자 엘리시엘이 이상하게 여기고 심오한(?) 사색을 방해했다. "뭐야 유신? 이게 뭔지 아는거야?" "어..... 어!!.....어??? ..... 아니? 잘 모르는 거야......" 이상하게 얼버무렸지만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리고 마족들의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몇 번의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지만, 엘프들을 사로잡는데만 주력하고 있는 듯 해요. 여의치 않으면 도망갈지언정 함부로 엘프를 죽이지는 않는 것 같더군요. 덕분에 아직 피해는 없는 것이 다행이지만....." 사실 마물들은 엘프의 것모습만 보고 남성인지 여성인지를 구별할 수 없었다. 모두 호리호리한 체구에 긴 머리,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에 멍청한 마물들로선 어느게 여자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는 여자 엘프는 절대 다치지 말고 사로 잡으라는 명령을 받은 만큼 함부로 죽일수가 없던 것이다. 엘프와 공주 일행이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하고 있을 때 세라피는 뭔가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전에 한번 느껴본 조용하지만 뭔가 불길한....... "이런, 결계야. 마나가 고정되어 있어." 세라피의 외침에 놀라 엘프들이 마나를 회전시켜 보았지만 흐름이 막혀 버린 듯 마나는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 당황해서 우왕좌왕 할때 유신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모두 진정해요." 코어를 싫어서 낸 목소리가 아니기 때문에 멀리 까지 퍼질수는 없었지만 귀가 예민한 엘프들의 주목을 끌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일단 장내가 진정되자 유신이 빠르게 말했다. "이런 대규모의 결계가 쳐졌다는 것은 적의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마법을 쓸 수 없는 엘프들은 모두들 하르펠 마을까지 철수하세요. 발이 빠른 레인져 엘프들은 주변의 다른 마을에 이 사실을 알리고 대피하도록 일러요. 이자벨 공주님과 로열가드 여러분들은 엘프의 후퇴를 돕고 가로막는 적들을 없애 주세요. 그리고 엘리시엘과 세라피도 빨리 떠나." "그럼 유신은?" "글세.... 시간이라도 벌어야 겠지. 확인해 볼 것도 있고....." "안돼.... 그런게 어딨어.... 나도 같이 갈래." "엘리, 시간이 없어 떼쓰지 말고 어서 가. 어떤 상황이던 내몸 정도는 내가 뺄 수 있어. 그리고 마법도 못쓰는 상황이라면 있어봐야 짐만 될 뿐이야." 엘리시엘은 냉정한 유신의 말에 마지못해 다른 이들과 함께 철수를 시작했다. 엘프들은 집에서 뭔가를 들고 나오거나 우왕좌왕 하지는 않아서 철수는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될 것 같았다. '엘핀서스의 엘프들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1만은 넘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쳐들어온 마물들의 수도 최소한 3000기 이상은 될터..... 대체 누가 이만한 군대를 단지 공간이동만으로 옮긴걸까? 일단 한번 후퇴했다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야 승산이 있을터인데.... 다른 엘프들이 무모하게 덤벼들지 않으면 좋으련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틈에 어느새 마물들의 모습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결계가 쳐지자 마자 들이닥치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모두 고스트를 지니고 주변에 매복하고 있다가 덮쳐들은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칼을 쥔 엘프 레인져들이 마흔 명 정도, 궁수가 또 그 정도 되어 보였다. '오...... 오메 ..... 한심한 숫자군..... 마법을 못쓰는 엘프는 전부 인형들인가......' 다행인 점은 마을 자체가 워낙 나무들에 둘러 쌓여 있어서 포위 당해 섬멸 당할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우거급의 준 대형 몬스터라면 포위해서 공격해야 잡을 수 있는데 반대로 포위하기도 힘든 것이 사실이다. '뭐... 어쨌든 숲에서 싸우는 것이니 엘프들이 압도적으로 유리하겠지..... 하지만 숫자상의 열세나 고스트 때문에 생기는 핸디는 어쩔 수 없는 건가?' 일단 전투가 시작되자 생각한 것 보다 더욱 상황이 좋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의 난전인 만큼 엘프의 특기인 장궁이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물들은 제법 훌륭한 중갑주로 몸을 보호하고 있어서 화살이 미끄러지거나 검이 퉁겨나가기 일수였다. 상황이 이쯤 되자 엘프 궁수들 역시 퇴각해야 했다. 근거리 격투전에선 궁수가 있어봐야 같은편에게 맞을까봐 제대로 공격하기 힘들고, 공격후 약점이 너무 많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엘프 레인져들이 묵묵히 검을 뽑아 들었지만 경장갑의 그들로선 마법이나 화살지원도 없이 싸워봐야 자살행위밖에 안될 것이다. 하지만 경갑인 만큼 유리한 점이 있었다. "절대 포위되지 말고 나무 위로 도망치면서 싸워요. 무리해서 적을 죽이는것보다 시간을 끄는게 훨씬 중요합니다. 모두 적의 발목을 잡는데 주력합시다." 레인저들은 가족과 친구들의 안전한 후퇴를 위해 모두 죽을 각오로 싸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신의 말을 들어보니 궂이 그럴 필요가 없는게 아닌가? 모두 새로운 희망이 그들의 근육을 더욱 힘차게 하고 눈과 손을 더욱 예리하게 했다. 조금씩 싸우다가 불리해지면 나무위로 잽싸게 달아나는 엘프들을 상대하는 것은 중갑을 입은 마물들로서는 괴로운 일이었다. 무시하고 퇴각하는 엘프들을 쫒기에는 엘프의 장궁의 위력이 너무 대단했기 때문에 마물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지적으로 엘프들이 조금 유리해 졌다고 해서 전체적인 열세를 만회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물들도 엘프들을 해칠수 없지만, 엘프들 역시 마물들을 물리칠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곳 밤에 되면 마물들의 시간이 된다. 서큐버스나 뱀파이어같은 고급 몬스터가 한두 마리만 섞여 있어도 지금의 대치 상황은 단숨에 기울것이 뻔했다. "쿠워워워웍" 커다란 덩치의 오크 한 마리가 유신을 향해 정말 멧돼지처럼 돌진해 오고 있었다. 시커먼 글레이브가 눈앞의 작은 인간을 두쪽내고야 말리라는 결연한 의지를 안고 하늘 높이 쳐 올려진 순간 오크의 팔목이 사라졌다. 놀란 눈이 커질 새도 없이 이번에는 오크의 배에는 유신의 첨예가 깊이 파고들어 살며시 헤집어 놓고는 빠져 나왔다. '왜 오크들은 저렇게 침을 흘리면서 덤벼드는 것일까.... 지저분한놈들....' 하지만 뱃속에 30센티 가까이 되는 길이의, 그것도 무척이나 날카로운 이물질이 들어와 헤집어 놓고 간다면 누구나 침뿐 아니라 피 거품을 뿜는다 해도 할말 없는 일이다. 잠시 딴 생각하는 틈을 타 다른 오크의 글레이브가 찍혀 내려왔다. 아직 저항다운 저항을 만나보지 못한 오크들은 신이 나서 덤벼들었고, 자그마한 유신 역시 여지 것 그들이 상대해온 다른 적들처럼 당연히 오크들의 글레이브와 도끼아래 피 떡이 되리라고 확신하는 듯 가차없고 망설임 없는 자신감에 찬 일격이었다. '저번엔 아직 마법계의 중력과 봉인된 몸에 익숙하지 않아서 당했지만 이번엔 좀 틀릴 거다.' 오크의 몸쪽으로 바짝 붙어서 글레이브를 피한뒤 칼을 뒤집어 거꾸로 쥐고는 오크와 스쳐 지나가며 등 뒤쪽으로 첨예를 찔러 넣었다. 뒤를 돌아서 확인해 볼 필요도 없다. 손끝에 전해지는 느낌만으로도 상대에게 이미 죽음의 신이 내려 앉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방이 오크들을 비롯한 마물 투성이었지만 유신은 그틈에서도 무엇에 홀려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종횡으로 오크를 베어 넘겼다. 하지만 그렇게 한참을 날뛰어 봐도 마음 한구석으론 석연치가 않았다. 아무리 혼자 잘 싸워 봐야 국지적으로 유신이 있는 부분의 전력이 조금 앞설 뿐 대세는 이미 기울고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이미 엘프들의 모습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었다. '철수한 것일까? 나도 적당히 하고 포위되기 전에 빠져나가야겠군.' 도망갈 곳을 찾으며 혹시 구해주어야 할 고립된 엘프가 없는지를 찾아보던 유신의 눈에 트롤을 상대로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커다란 바스타드를 휘두르고 있는 이리엘의 모습이 보였다. '음 허허허 트롤과 힘싸움을 벌이는 엘프를 보았으니 난 이제 무엇을 봐도 놀라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대로 두면 포위될게 뻔하니까 같이 철수해야겠다.' "이리엘님 같이 빠져나가요. 더 오래 있으면 포위 당할거에요." 유신은 큰소리로 싸움에 몰두하고 있는 이리엘의 주위를 환기시키고 트롤이 유신의 출현에 당황해 하는 틈을 타서 옆구리를 길게 찢었다. 크롤은 괴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 섰지만, 다친 부분은 재생을 시작하는지 부글부글 끓어오를 뿐 치명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치명타를 날리기 위해 검을 고쳐 잡는 순간 이리엘의 비명소리가 들렷다. 이리엘은 유신이 트롤을 상대하는 사이, 지원을 위해 뛰어온 오우거와 싸우다가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이런 !! 이리엘" 유신이 등을 보이자 트롤이 뒤를 쳤지만 보지도 않고 검을 회전시켜 팔목을 베어버렸다. 하지만 유신의 앞을 또다시 오크 세 마리가 재빨리 가로막았다. 유신이 오크들을 따돌리기 위해 뛰어나갈 듯 잠시 허점을 보여주자 오크들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허초였고 재빨리 몸을 뒤로 뺀 뒤에 내려쳐진 글레이브의 칼등을 밟고는 공중제비로 오크를 뛰어 넘어 오우거의 앞을 가로 막았다. 오우거는 이제야 겨우 변변한 여자 엘프를 하나 사로잡을 판안데 난데없는 회방꾼이 끼여들자 무한한 분노와 원망을 담아 가 유신의 키만 한 워해머를 내리 찍었다. 유신은 혹시 자신이 피하면 뒤의 이리엘이 다칠까봐 입술을 꼭 깨물고는 워해머의 옆면을 사력을 다해 쳐냈다. 정통으로 막지 않고 비스듬히 옆으로 힘을 흘려버린 것이지만 애초에 힘과 몸무게의 차이가 너무 나는 상대였기 때문에 팔목이 떨어질 듯한 통증이 몰려들었다. "유신!! 괜찮아요?" 이리엘이 소리치며 균형이 잠시 무너진 오우거의 옆구리에 일검을 가했지만, 덩치에 비하면 워낙 경미한 상처라 오히려 오우거의 화만 돋구었을 뿐이다 "쿠워우어우어워워" 오우거가 알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어지간히 잘사는 집의 기둥만큼 커다란 다리를 휘둘러 발차기를 가하자, 유신은 이리엘을 감싸며 등으로 그 무지막지한 킥을 받아 내었다. 공깃돌 날아가듯 이리엘과 함께 4~5m를 날아간 유신은 커다란 나무에 부딫쳐서야 땅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유신이 감싼 덕에 이리엘은 무사했지만 유신은 똑바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꺄악, 유신!! 유신!!"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꼼짝도 할 수 없는 유신과 그의 옆에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이리엘에게 3m 도 넘을 것 같은 오우거가 쿵쿵거리며 뛰어 왔다. 오우거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듯 워해머가 높이 들고 눈앞의 인간과 엘프를 내려다 봤다. 엘프에게 상처를 입은 것이 열받기는 하지만 아마도 여자임에 틀림없는 이 엘프를 잡아가면 틀림없이 칭찬을 받을 것이다. 행복한 마음으로 잠시 후면 고기조각이 될 인간을 내려다 보며 워해머를 조준하였다. 힘들여 내려칠 필요도 없이 무거운 워해머가 떨어지는 관성만으로도 눈앞의 인간은 찌부러져 버릴 터이지만 오우거는 흩날리는 인간의 고깃조각을 보고 싶었다. 인간의 옆에는 쇠꼬챙이 같은 검은 칼이 놓여져 있었지만, 자신의 발 차기를 맞은 인간 꼬마는 그 자그마한 쇠꼬챙이조차 들 힘이 남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옆에있는 엘프를 밀어 내더니 자그마한 단도길이 정도의 막대기로 자신을 겨냥하는 것이 아닌가? 어찌되었든 오우거는 상관이 없었다. 인간의 앞에서 얼쩡대며 방해하던 엘프를 오히려 그 인간이 밀어냈으니 워해머를 내려 치기가 더욱 수월해 진 것이다. 내려치는 워해머의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인간의 손에 들린 작은 막대기가 순간적으로 흰 빛을 뿜는다 싶었더니 워해머의 목 부분이 잘려져 그가 휘두른 관성의 힘으로 인간 뒤편의 나무를 박살낸 채 날아가 버렸리는 것이 아닌가? 황당한 심정으로 손잡이만 남은 자신의 워해머를 바라도던 오우거는 다시 눈앞의 인간을 바라 보았다. '마법인가?' 둔한 머리로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오우거는 자신의 뱃속이 뭔가 시원한 듯 하다가 다시 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 옴을 느꼈다. . . . . . . 유신은 어떻게 하든 결단을 내려야 했다. 가벼운 첨예조차 무겁게 느껴지는 마당에 토울의 해머처럼 공포스럽게 치켜 올려진 오우거의 망아지 만한 워해머를 보며 다른 수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마법계에서 물질계의 무기를 쓰는 것은 싫었지만 첨예를 들 힘도 없는 지금 허리에 악세사리처럼 매달려있는 광검이나 용아검을 쓸 수밖에 없었다. 오우거의 워해머가 떨어지는 순간 자신을 감싸고 있던 이리엘을 밀쳐 낸 유신은 마침내 허리에 매여져 있던 광검을 사용하였다. 하얀 빛이 자그마한 단도길이 정도의 막대기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그대로 내려쳐오는 워해머의 목부분을 베어냈다. 다행이도 잘려진 머리 부분은 아슬아슬하게 유신의 머리위를 지나 등뒤쪽의 나무를 박살내 버리고는 땅속에 밖혔다. 오우거의 황망한 눈길을 받고 있을 틈이 없었다. 배에 한번 찔러 넣어 주고는 다시 위로 들어올려 상처가 크게 벌어지게 했다. 오우거는 대체 무슨일인지 모르겠다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서서히 무너졌다. 물론 유신이 첨예에 정상적으로 코어를 주입해 검기를 일으킨다면 광검따윈 비교도 안될정도로 강력하지만, 봉인된 몸으론 검기를 낼 수 없다. 이럴때는 차라리 광검을 쓰는 것이 더 강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유..... 유신? 그.... 그게 대체.....???" 뭐라 할 새도 없이 주변에 있던 오크들이 덤벼들었지만 이리엘의 바스타드와 유신의 첨예에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리엘 우리도 후퇴해요. 이제 저도 한계입니다." 가쁜숨을 몰아쉬던 유신이 들릴 듯 말듯한 작은 목소리말했다. 다행이 이리엘은 지리를 잘 알고 있으니 하르펠 마을까지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 것 같았다. 일어서려던 유신이 휘청대자 이리엘이 옆으로 다가와 유신을 부축했다. "아.... 괜찮아요. 금방 회복될꺼에요." "아니요. 유신은 너무 지쳐 있어요. 제가 부축할께요." 이리엘도 당장 어디에라도 몸을 누이고 싶을 정도로 지쳐 있었지만, 유신정도는 아니었기에 부축을 하고 하르펠 마을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유신은 이리엘에게 기대어 있자 올림퍼스의 기동대장이엇던 니케와 함께 전쟁터를 누비던 때가 생각 어쩐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우와..... 엘프인데도 가슴이 풍만하네..... 땀 냄새도 멋지고..... 좋구나.' 유신이 이렇게 헛생각하는지도 모르고 혹시 크게 다친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리엘은 마음이 초조해 졌다. 자기를 감싸며 기둥같은 오우거의 발차기를 맞았으니 미안한 마음에 생명이라도 나누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둘의 고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엘핀서스를 거의 빠져나왔을 즘 둘의 앞에 거대한 핼버드를 든 시커먼 갑옷의 오우거와 못지않게 커다란 배틀액스를 거머쥔 미노타우러스가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이런 빌어먹을.... 이럴 때 미노타우러스라니.....' 지치지 않은 상태였다 해도 미노타우러스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힘은 오우거 이상이고 트롤 정도는 아니어도 약간의 회복능력조차 있다. 게다가 같이 나타난 오우거도 분위기로 보아 장교급인 것 같았다. '이제 어쩐다.....' 도대체 달아날 만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리엘 혼자라면 날렵한 몸으로 벗어날 수도 있을 터.... 이리엘에게 먼저 도망가라고 말하려던 유신의 머리를 반짝 스치는 것이 있었다. 매우 낯이 익은 풍경.... '어라..... 이곳은 내가 처음 게이트를 열고 나왔던 곳이잖아?......그렇다면......' "이리엘, 잠깐.... 잠깐만 멈춰요." "이런.... 유신 조금만 더 참아요. 여기서 멈추면 죽어요. 내가 부축할테니 함께 가요." 울먹이는 이리엘을 멈추어 세우고 유신은 풀숲을 뒤지기 시작했다. 오우거와 미노타우러스는 인간과 엘프가 도망치길 포기하자 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다가왔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이리엘은 입술을 깨물더니 바스타드를 고쳐 잡았다. 순순히 잡혀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바스타드라곤 해도 오우거나 미노타우러스가 보기엔 자그마한 쇠꼬챙이다. 연약한 엘프가 그걸 잡고 자신을 겨누고 있지만 별반 위협을 느끼지는 않앗다. 그때 유신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듯하게 전해져 왔다. "방어 프로그램 온. 레드원 코드, 퍼펫 기동." 이리엘로서는 들어본 적 없는 이상한 언어였다. 하지만 다가오는 오우거와 미노타우러스를 보며 딴 생각을 할만한 여유는 없었다. 각오를 하고 있을 때 작게 땅이 울리는 것 같았다. 예민한 엘프만이 느낄 수 있는 작은 진동이었다. 그때 땅 속에서 강철로 된 손 하나가 쑥 올라왔다. 그러더니만 강철 갑옷을 온몸에 두른 기사가 마치 동면에서 깨어난 두꺼비처럼 꾸역꾸역 지상으로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무척 힘들어 보이는 모습을 보며 만약 위급한 순간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강철기사가 조금만 더 가벼워 보였더라면 도와주고 싶다고 이리엘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오우거와 미노타우러스도 이 꼴을 보고 잠시 다가오던걸 멈추었다. 새로운 적이 등장한 것 같지만, 인간치고는 덩치가 큰 기사라 해도 2m 도 채 안 되는 강철 기사는 전혀 위험스러워 보이지 안았다. 하지만 두 몬스터들은 곳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 강철기사야말로 카린 특제의 메탈퍼펫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타서 움직여야 제 성능을 발휘하는 아머형의 안드로이드지만, 유사 생체 인공지능을 탑재하고 있어 단독 전투 수행도 가능한 카린 특제의 공격형 아머가 이 메탈퍼펫이라 불리는 괴물이다. "임무는?" 볼품 없는 등장에 비해 목소리는 무겁고 간결해서 박력이 있었다. 하지만 온몸이 흙투성이라 그다지 믿음직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잠깐 주위를 둘러보던 유신이 말했다. "반경10m 이내, 3m 이상의 움직이는 모든 물체를 격멸시켜." 유신의 명령에 퍼펫의 눈이 붉은 빛을 내뿜었다. 퍼펫이 유신과 이리엘의 앞을 막아서자 미노타우러스와 오우거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거대한 미노타우러스의 배틀 엑스가 공기를 가르는 흉측한 파공음을 내며 퍼펫의 머리위로 떨어졌다. 이리엘이 보기에 비록 강철의 투구를 쓰고 있다 해도 저런 대형 배틀엑스를 맞으면 쪼개지기 보다는 산산조각이 날것 같았다. "꺄악" 끔찍한 모습을 보기 싫었는지 이리엘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들려야할 철제 투구가 박살나고 살점과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리엘이 용기를 내어 살짝 돌아보니 놀랍게도 자그마한(두 몬스터에 비하면 틀림없이 작은 크기이다.) 강철기사가 풀스윙으로 휘두르던 미노타우러스의 도끼를 무심히 받아낸 것이다. 비록 괴물이라 해도 뼈와 살로 이루어진 미노타우러스가 드래곤본을 가공한 복합 장갑과 온갖 최첨단 과학기술의 결정체이며, 유신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친 카린의 정성이 담긴 메탈 퍼펫의 상대가 될 리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몸무게의 차이로 배틀엑스의 날을 잡은 채 두발자국 정도 밀렸지만, 배틀엑스를 잡은 손을 당기자 이번에는 오히려 미노타우러스가 끌려오기 시작했다. 이 황당한 전개를 지켜보던 오우거는 혼란스런 마음을 추스르며 헬버드를 휘두르며 덤벼 들었다. 하지만 오우거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미노타우러스를 오우거에게 집어 던지는 퍼펫이다. 두 덩치가 흉하게 나동그라지자 땅이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방심하고 덤빈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던 미노타우러스와 오우거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을 때 그들이 본 것은 무지막지한 속도로 돌진해 오는 괴물같은 강철기사였다. 특별한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퍼펫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파괴적이라 할 수 있는 보디블로를 두 괴물에게 먹였다. 가벼운 드래곤 본의 복합장갑으로 이루어 졌다 해도 온 몸으로 달려드는 퍼펫의 몸무게와 스피드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놀랍게도 갑옷까지 입고 있던 오우거와 미노타우러스는 육편이 되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아마도 드래곤이 꼬리로 내려 치거나 거인족이 주먹으로 내치지 않는 한 질기고 강인한 육체를 가진 두 몬스터가 저런 꼴로 박살나지는 않으리라. 이 어이없는 광경에 놀란 이리엘이 작게 경련을 일으키다가 주저앉아 버렸다. "괜찮아 이리엘, 우리편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신역시 속으로는 꽤나 놀라고 있었다. '카린녀석, 도대체 무슨 엔진을 쓴거지? 정상적인 퍼펫이 아니잖아..... 엄청나군. 이 정도면 어지간한 레서데몬 정도는 우습게 때려 잡겠군.' 당연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그래서 그만큼 약할 수밖에 없는 퍼핏을 유신의 호위로 보낼 리가 없는 카린이다. 모든 힘을 봉인당한 것도 억울한데, 물질계에서 마법계로 좌천당한 것보다도 더한 유배나 다름없는 길을 가는 아버지 같은 존재에게 무리를 해서라도 좋은 보디가드를 붙여주고 싶었다. 다행이 두 괴물을 물리치고 나자 더 이상의 추적대는 없는 것 같았다. 너무나 지쳐버린 둘은 나무에 기대어 잠시 쉬기로 했다. 잠시 숨을 돌린 유신이 퍼펫에게 다가가더니 다시 물질계의 언어로 중얼거렸다. "레드원 경보 해제. 프로그램 아웃, 시스템 봉인 후 가동면에 들어가도록." 잠시후 붉은 눈빛이 점점 잦아들며 푸른색으로 변해가던 퍼펫에게선 뜻밖에도 엉뚱한 대답이 튀어 나왔다. "명령 거부. 카린님의 전언이 있습니다." 퍼펫의 가슴부위에 잇던 센서 비슷한 것에서 빛이 영사되더니 카린의 모습이 입체로 나타났다. "가능하면..... 이 영상을 보길 원치는 않았지만.....이 영상을 본다는 것은 미스티를 기동시켰다가 다시 동면시키려 했기 때문이지요? 어지간히 위급한 상황이었나 보군요. 완고한 유신이 마법계에서 퍼펫을 썼다는 것은......." "아아.... 뭐 그렇지....." 녹화된 영상이지만 오랜만에 본 카린의 모습이 너무나 반가와 마치 대화라도 나누듯 대답을 했다. "그런 위험한 곳에서 캐넌을 다시 봉인시키는 것은 허락할 수 없어요. 흠.... 제랄드? 녹화는 잘 되고 있는 거지?" "예, 잘 되고 있으니까 한눈팔지 말고 하고 싶은말 하세요...." 녹화하면서 다른 연구원과 주고 받는 이야기가 삭제되지 않고 있는걸 보니 녹화 내용을 재 검토할 틈도 없이 바빴나 보다. "흠, 아, 아..... 이 아이의 이름은 미스티에요. 꽤 애써서 만든거니까 저를 아껴주시듯 잘 대해 주세요." 이리엘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땅속에서 강철로된 사람(?)이 기어나오더니 무시무시한 힘으로 오우거와 미노타우러스를 피떡을 만들더니, 이번에는 빛으로 된 엘프가 나타나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언어로 유신과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카린은 시라스인이니 엘프와 같은 외모이다.) 마법이나 정령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으니 도대체 어떤 원리로 빛의 입자가 모여 엘프의 모습을 이루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카린. 건강하니? 아빠 없다고 나쁜 아이가 되면 안 된다." 마치 카린의 영상은 유신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 하얀 팔을 뻗어 정확히 유신의 뺨을 어루만지듯 쓰다듬었다. "유신.... 그렇게 슬픈 표정 하지 마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유신도 건강하지요? 이 아이는 제가 특별히 만든 거예요. 엔진은 마법계에서 최고의 파워를 낼 수 있게 마나 흡수식에 듀얼모드로 중차원 엔진도 넣었어요. 성단법 위반이지만.... 뭐 이정도 쯤이야 양심이 있다면 천족이나 신족들도 눈감아 주겠지요. 그쪽 세계에 대한 자료는 워낙 옛날 것이고, 양도 적어서 미스티의 사고 형태는 사전 프로그램 보다는 그곳에서 얻는 학습 지식을 우선하도록 했으니 유신이 그 아이에게 많이 가르쳐 주세요......그리고 또 뭘 해야하나...... 아!! 마지막으로 제가 노래한곡 불러 드릴께요.....랄라라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유신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카린.... 하나도 안 변했나보구나. 너다워서 좋다.' 노래가 끝나자 카린이 가볍게 윙크하는 것을 끝으로 영상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사라지는 영상뒤로 아까 카린과 대화하던 연구원이 닭살스럽게 뭐하는 짓이냐며 핀잔을 주는 소리가 들려 작은 웃음을 주었다. 잠시 옛 생각에 잠겨있던 유신은 이리엘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좀 늦게 알아차렸다. "설명해줄 수...... 있어요?" 기계라곤 본적이 없는 이리엘은 미스티도 인간이나 데민휴먼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카린이 한 물질계의 언어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였으니 유신에게 캐넌을 소개해 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곳은 위험하니 일단 다른 이들과 합류하고 그때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지요." 조금 더 쉬고싶었지만 더 쉬다간 캐넌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둘러댈 변명거리를 생각할 시간을 벌기위해 이리엘을 재촉하여 하르펠 마을로 달리기 시작했다. '휴.... 이번엔 뭐라고 한다.... ' 달리면서도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유신이다. 마물들의 기세로 보아 하르펠 마을까지 밀고 내려올 줄 알았으나 의외로 마물들은 숲에 머무른 채 더 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엘핀서스를 벗어나자 마나의 흐름은 다시 정상적으로 되어 엘프들에게도 좀더 여유가 생겼다. 이자벨 공주와 로열가드를 중심으로 하르펠 마을에 방어선을 구축한 엘프들의 방어선은 단단해 보였다. 하지만 하르펠 마을의 문제점도 있었다. 하르펠 마을에 모인 엘프들의 수는 대략 4천명 가량인데 천명도 안 되는 인구수를 가진 작은 마을에서 그들이 먹을만한 식량을 대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게다가 아직 엘핀서스에 흩어져 있는 엘프들의 수도 상당할 터였다. 마물들에게 어떤 해라도 입기전에 그들을 구해내야 했다. 유신과 이리엘이 마을에 도착했을때는 이런 회의가 한창 진행중일 때였다. "유신!! 무사했구나. 너무 늦어서 혹시 잡힌건 아닐까 걱정했어." 제일먼저 유신을 발견한 엘리시엘이 뛰어나가더니 답싹 안겼다. 반가와서 한 행동이었지만 당장 이자벨의 눈꼬리가 올라가고 세라피는 고개를 푹 숙였다. 유신 자신도 부상이 심한 상태였기 때문에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었다. "에...엘리 ... 자....잠깐만....." 휘청대는 유신을 보자 세라피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이......이런...... 유신!! 다쳤어요?" 얌전하기로 소문난 세라피가 이렇게 소리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엘프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하지만 세라피는 그런시선 쯤 상관도 없다는 듯 유신의 상처를 살펴보더니 춤추듯 손을 놀렸다. 허공에 작은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유신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세라피, 고마워." 순진한 표정으로 방긋 웃는 세라피를 보자 유신도 가슴이 두근 거렸다. "자, 여러분, 소개할께요. 이녀석은 미스티. 나와 같이 검술을 배운 할아버지의 제자에요." 여전히 전혀 어떤 개연성이나 근거조차 없는 거짓말을 둘러대는 유신이었지만, 다들 마족들의 갑작스런 습격에 놀라 있어서 차림이 조금 괴상한 기사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누구도 미스티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다만 한사람, 미스티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막 무어라 말하려 하였다. "이봐, 미스티...... 좋게 지내고 싶다면 당분간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너도 이곳에 빨리 적응하고 싶겠지?" 유신이 물질계의 공용어로 빠르게 말하자 잠시 망설이던 미스티는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미스티의 유사 생체인공지능이 마법계에서 처음 배운 것은 이렇게 얼토당토 않은 거짓말이 되었다. 결국 미스티는 유신과 같이 검을 배운 강력하고 과묵한 검사로 소개 되었다. 게다가 말 못할 사정으로 갑옷은 물론 투구 조차도 절대 벗을 수 없다고 하자 그 신비성이 더해저 감히 함부로 접근하지 못할만한 분위기를 풍겼다. 유신이 일행과 떨어진 후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마물들은 이미 엘핀서스를 빠져나가는 입구에 진을 치고 있어서 빠르게 철수한 것에 비하면 꽤나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엘핀서스 깊숙한 곳에 사는 엘프들은 마물에 대한 대응이 늦어 크게 당했다는 것이다. 다행이 숲을 벗어나자 마법도 다시 쓸 수 있게 되고, 마물들의 추격도 멈추어서 절반 정도라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래도 유신의 말대로 빠르게 철수해서 이 정도라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만약 후방에서 시간을 끌어주지 않았더라면 포위망이 완성되어 지금의 절반도 빠져 나오지 못했겠지요." 엘시르의 말에 유신은 입술을 꼭 깨물더니 다시 무장을 챙기기 시작했다. 부상이 심한걸 직접 본 이리엘과 세라피가 말렸지만 유신은 묵묵히 허리에 첨예를 찼다. "할수 있는데 까진 해 봐야죠. 그리고 세라피의 마법 덕분에 몸도 많이 좋아 졌어." "내일 낮에 엘프들 전체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것입니다. 밤은 마물들의 시간인데 궂이 지금 위험을 감수하며 싸우기엔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아요. 그러니 내일의 작전을 위해 유신도 좀 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적들은 게이트 마법을 쓰고 있으니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하다못해 동태 정도라도 살펴봐야 겠지요." 사실 믿는게 있으니 별 계획 없이도 이렇게 나서는 유신이이다. 딜트같은 고위 마법사만 없다면 미스티의 상대가 없을뿐더러, 설혹 딜트가 온다고 해도 유신이 직접 미스티에 싱크로 하면 이길 자신이 있는 것이다. 그만큼 미스티의 성능은 압도적으로 강력했다. "게다가 미스티가 있다면 안심할 수 있거든요. 이녀석이 얼마나 강한지는 이리엘에게 물어보세요." 여유있게 말하는 유신을 보자 이자벨 공주도 나섰다. "그렇다면 저도 가겠습니다." ".............." ".........................." "............예? 뭐라고요?" 황당한 심정으로 자신이 잘못들은 것이길 간절히 기도하면 다시 물어 보았지만 이자벨의 결심은 확고했다. "하누스와 별 상관도 없는 유신님이 이렇게 애써 싸우는데 제 1 왕녀인 제가 손놓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요. 함께 가겠어요." 여전히 감동스런 대사를 하는 공주였지만 이번에는 공주 옆에 부복하는 기사의 수가 둘밖에 없었다. 아까의 싸움에서 포위된 입구를 뚫다가 두명이 죽고 한명은 크게 다쳐서 지금은 거동할 수 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자벨의 고집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유신은 이번에도 그녀의 고집을 꺽지 못했다. 그러자 여기 저기서 같이 가겠다는 엘프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너무 많은 수는 오히려 행동하는데 불편하기 때문에 유신과 미스티, 이자벨과 로열가드 둘, 그리고 엘프레인저 10명만 가기로 했다. 혹시 사로잡힌 이들에게 마물들이 몹쓸 짓을 하거나 최악의 경우 게이트를 통해 흄으로 납치해갈 수도 있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기습에 참여하는 분들은 모두 고스트를 팔이나 목에 걸어 주세요. 기습이 효과적이려면 적의 물건이라도 사용하는 것이 났겠지요." 다행이 고스트는 20여개 정도가 있어서 숫자가 모자르지는 않았다. 게다가 유신이 처음 마법계로 올 때 가지고 왔던 물질계의 무기들을 미스티가 챙겨왔기 때문에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마물들의 수는 적게 잡아도 3000 이상입니다. 아까의 전투에서도 싸웠다기 보다는 시간만 끈 것이니까 적의 수가 줄었다고는 보기 어렵지요. 문제는 마물들을 전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로잡힌 엘프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유신의 말에 엘프중 하나가 걱정스런 투로 말했다. "하.... 하지만 사로잡힌 엘프의 수가 얼마나 될지.... 적어도 2000명 이상은 될 터인데 마물들의 눈을 피해서 이들만 구출해 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한테 작전이 있습니다. 엘프 마법사 분들 중에서 혹시 게이트 마법을 쓸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유신의 말에 몇몇 엘프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쓸 수는 있지만.... 언젠가부터 게이트 마법을 쓸 수가 없어졌습니다. 공간의 문이 열려도 그전처럼 정확한 위치로 전송이 안돼요. 혹시 마법진이라도 그려져 있는 곳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게다가 결계내에선 마나가 고정되어 있으니 더욱 힘들겁니다." "마물들의 손만 벗어나면 되요. 굳이 이곳으로 도망갈 필요는 없으니까 마법진이 그려진 곳이라면 어디든 워프 시켜요. 나중에 천천히 합류하더라도 마물들에게 잡혀가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을 겁니다." 엘프들을 탈출시켜 워프시킬 곳은 엘프들과 친한 그린드래곤 케이브라의 레어로 했다. 케이브라는 엘프들을 무척 사랑해서 마법진 까지 자신의 레어에 두어 엘프들과 교류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케이브라는 4년쯤 전에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에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이 엘프들의 설명이다. 하지만 케이브라가 떠나기 전에 자신의 레어에 수호 마법을 걸어 놔서 엘프나 드래곤 이외의 존재가 들어오면 공격하도록 해 두었기 때문에 피신하기엔 좋은 장소였다. 게다가 결계밖으로만 나갈 수 있다면 재빠른 엘프들에게 달아나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결계 밖에까지 나가는 것이 승패의 갈림길이 될 것이다. "케이브라라면 국가기사단 소속 용전기입니다. 1800살 정도밖에 안된 어린 용인데, 개전 초에 워낙 용전기의 숫자가 모자라 거점 방어용 용전기로 쓰기위해 스카웃 해 온 걸로 되어 있습니다. 파괴되었다는 보고는 없으니 아마도 물질계에 남는 쪽을 택한 모양이군요." 미스티가 자신의 데이터 베이스에 들어있는 자료를 검색하여 그린드래곤 케이브라에 대해 알아 낸 후 유신에게 작게 말했다. "그래. 케이브라란 말이지..... 그리고 참, 미스티 너도 무기를 쓸 때 가급적 이곳이 마법계라는 점을 고려해서 너무 눈에 띄는 무기는 사용하지 말아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유신은 마음속으로 어느정도 포기하고 있었다. 마법계에서 퍼펫까지 돌아다니는 마당에 어떤 무기가 나온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미스티의 등에는 중력 캐논포(주먹만한 크기의 것은 무었이든 초속 1200m 정도의 속도로 날려 보내는 소형 대포. 우주에서 쓰는 대규모의 반중력 병기는 물론 아니다.)가 비죽하게 메어져 있고, 자신의 허리에는 광검이 장식품처럼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니 사실상 갈대까지 간 것이다. 유신은 마나 저장석과 결계석, 첨예 두자루와 광검 하나, 그리고 등에 메여있는 용아검까지 합쳐져 꽤 부담스러운 차림새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 작전을 위해선 모두 필요한 것이니 빼놓을 수가 없었다. 첨예가 두자루인 것을 본 이자벨의 눈은 이제 푸른색의 불꽃을 피어 올렸고, 위험한 곳에 가겠다는 공주의 고집을 꺽지 못한 로열가드들은 하얗게 재가 되어 버렸다. 엘프들의 장로인 하이엘프 엘시르가 머무르던 아름다운 빛의 나무는 지금 2000여명 정도의 엘프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지름이 20m도 넘고, 높이는 60m에 달해 7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나무지만, 2000명의 엘프가 들어차니 발디딜틈도 없이 빽빽했다. 이렇게 많이 한자리에 모이는 경우가 별로 없는 엘프들로선 이야기 꽃을 피우며 친목을 다지고 싶을터이지만, 주변에는 마물들이 시뻘건 눈을 빛내며 감시하고 있었다. 사실 사방이 커다란 나무 투성이인 엘핀서스 숲은 포로를 감시하기에 결코 좋은 곳은 아니다. 자칫 힘들게 잡은 엘프들이 달아날 수도 있고, 엘프들을 여러 곳에 나누어 두면 그만큼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고작 3000정도의 병력밖에 없는 마물들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엘핀서스에서 한꺼번에 2000명 이상을 집어 넣을 수 있는 곳이라면 빛의 나무 속 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마물들도 잘 알고 있었고, 지금 이 마물들의 눈을 피해 엘프들을 구출하려는 하나의 무리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빛의 나무 근처의 커다란 나무 가지의 위, 나뭇가지의 푸른 그림자 속에서 고스트를 장치한 엘프 넷과 인간 하나가 침통한 표정으로 빛의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스티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너무 위험합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미스티라면 잘 해낼겁니다." 게이트 마법을 아는 엘프중에 검술도 어느정도 익히고 있는 엘프들과 유신이 바로 그림자의 주인공이었다. 빛의 나무를 둘러 싸고 있는 오크들의 수가 대략 30여 마리고, 대장으로 보이는 오우거도 하나 보였다. 교대인원도 있을 테고, 빛의 나무 안에도 마물들이 어느정도 있을 터이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마리 이상의 마물들이 있는 셈이다. 아마도 나머지 마물들은 엘프들의 반격을 저지하기 위해 엘핀서스의 길목부분에 집결해 있을 것이다. 초조한 마음으로 빛의 나무를 바라보고 있을 때 오크하나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잠시 대장오크와 이야기를 나누자 곳이어 마물들 한 무리가 무장을 챙기고 뛰어갔다. 하지만 교대 병력까지 모두 빛의 나무를 지키기 위해 깨웠는지 경계오크의 수는 더욱 많아졌다. "시작되었군요. 미스티가 난동을 부릴 동안 우리도 작전대로 합시다." "자....잠깐만요. 오히려 마물들의 수가 늘었지 않습니까?" 마물의 수가 늘어난 것을 본 엘프 하나가 걱정스러웠는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경비하는 마물의 수가 늘어났다는건 예비병력까지 모두 나왔다는 뜻입니다. 즉 저들만 다 잡으면 당분간 적의 증원이 없다는 뜻이지요." 엘프의 말을 뒤로 흘린 유신이 가볍게 나무위에서 뛰어 내렸다. 유신이 세운 작전은 이러했다. 우선 엘프들이 하르펠 마을에서 나와 엘핀서스 주위를 포위하는 듯한 형세를 취하면 마물들은 그와 대치하기 위해 병력을 그쪽으로 돌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절대 본격적으로 붙지 말고 무력 시위만 벌인다. 결계내에서 싸워봐야 불리할 뿐이니 결계 밖에서 계속 시위하여 마물들이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요지이다. 그때에 미스티는 빛의 나무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아주 멀지도 않아서 무슨일이 생기면 병력이 갈 수밖에 없을 정도의 곳에서 난동을 부린다. 그러면 빛의 나무를 지키는 마물중에서도 예비병력은 그쪽으로 투입될 것이다. 양동작전을 이렇게 2중으로 걸어두면 마물들은 틀림없이 큰 혼란에 빠질 것이고, 그 틈에 엘프들을 구한다는 것이 작전의 요지였다. 2000 여명에 이르는 엘프들을 모두 데리고 움직일 수는 없으니 유신이 지닌 결계석으로 엘핀서스의 결계내에 또하나의 결계를 만들고, 그 결계내에서 게이트 마법을 시전하면, 잘만 하면 마물들 모르게 엘프 전체를 케이브라의 레어로 워프시키는 일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방대한 양의 마나는 유신이 지닌 마나 저장석에 엘프들이 미리 마나를 모아서 저장시켜 둔 것으로 쓰면 된다. 만약 들킨다 해도, 마물들이 들어올 수 있는 숫자가 제한되어 있는 빛의 나무 속에서 싸운다면 유신 혼자서도 어느 정도 시간 끄는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여기까지는 작전이 좋았는데 생각보다 빛의 나무를 지키는 마물들의 수가 너무 많앗다. 하지만 이미 작전이 시작되었는데 망설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시간 싸움인 것이다. 빛의 나무 주변은 넓은 공터이므로 아무리 고스트를 지녔다 해도 들키지 않고 마물들에게 접근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몰래 접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요란하게 해주지.' 나무에서 뛰어내린 유신은 발이 땅에 닿기가 무섭게 대장인 듯한 오우거에게 일직선으로 달려갔다. 자그마한 인간이 혼자서 커다란 기합 소리와 함께 달려들자 오크들과 오우거는 얼떨떨했다. 곳 둔한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적의 지원이 있나를 살펴본 것은 가히 천재적이라 할 수 잇는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말라깽이 엘프한마리 조차 지원으로 없다는 것을 알자 처음엔 안도의 한숨을, 다음에는 머리가 살짝 돈 것이 틀림없는 인간 꼬마에 대한 애도를, 그리고 인간 꼬마에게 조차 우습게 보인 자신들의 신세에 대해 한탄을 해야 했다. 유신의 첨예가 대장인 오우거에게 날아들자 오우거는 헬버드를 반바퀴 돌려 별 힘들이지 않고 튕겨 냈다. 단순히 살짝 부딫친 것만으로 뒤로 한참을 물러난 유신의 얼굴에 공포의 표정이 떠올랐다. 오크들의 눈에는 약한자를 괴롭히는게 너무나 즐겁다는 광적인 살기가 흘러 넘쳤고, 주변에 있던 다른 오크들까지 이 재미있는 살인을 즐기기 위해 모여 들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인간 꼬마에게 집중한 나머지 엘프 넷이 빛의 나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본 마물들은 없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적들을 너무 많이 죽이면 지원군을 부를 것이고, 숫자를 너무 적게 줄여놓으면 탈출할 때 애먹을 테니까......' 밖에서 유신이 고생하고 있을 때에 엘프들의 리더인 마노의 고생도 만만치 않았다. 빛의 나무 속에도 간간이 마물들이 감시 역할로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노는 자신의 동료 엘프 둘이 다른 엘프들의 틈에 섞여서 빛의 나무 입구로 가는 것을 확인 하고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마물의 옆으로 다가갔다. 무기를 모두 뺐은 줄 알고 방심하고 있던 오크는 마노의 숏소드에 목이 찔려 어이없이 죽고 말았다. 갑작스런 돌발사태에 당황한 오크 한 마리가 이 사태를 알리기 위해 뛰어 나가려는 순간 미리 입구에 가 있던 마노의 동료엘프 둘에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다른 오크들이 저항하려 칼을 빼들었지만, 워낙 엘프들이 빽빽하게 있어서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무슨 일이 있어도 여자 엘프는 죽이지 말라는 명을 받았으니 함부로 주변의 엘프들을 다 죽일 수도 없었다. 마노는 영리하게도 다른 엘프들의 틈에 섞여서 자그마한 숏 소드만 오크 근처의 엘프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러면 오크 주위의 칼을 좀 쓸줄 아는 엘프가 스리슬쩍 죽여버리면 되는 것이다. 하나 둘 죽어가는 오크들의 수가 늘어나자 그들도 더 이상 명령 따위에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다. 일단 살고 봐야 겠기에 남은 오크들은 모두 입구 쪽으로 칼을 휘두르며 나아갔다. 하지만 이미 죽은 오크들의 무장까지 손에 넣은 엘프들이 입구 근처를 사수하고 있어서 잠시 후 모든 마물들은 외부에 어떤 도움도 청하지 못한 채 조용히 처리되었다. 마노의 동료들이 결계석을 이용해 마물들의 결계속에 다시 작은 결계를 치자 마노는 그 속에서 게이트 마법을 시전했다. 게이트 마법은 공간을 간섭하는 마법인 만큼 굉장한 마나를 필요로 하지만 미리 준비해온 마나 저장석 속에는 많은 엘프 마법사들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쏟아 넣은 풍부한 마나가 있어서 그럭저럭 가능했다. 게이트 마법이 완성되자 엘프들은 한명씩 탈출하기 시작했다. 이제 30분 정도만 더 버텨주면 대충 다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제발 마물들이 눈치체지 못하기를....' 마노는 간절한 마음으로 게이트 마법에 집중했다. 유신과 엘프들이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을 때 미스티는 무인지경이었다. 은회색 금속의 장갑은 피나 물이 흘러내리도록 코팅이 되어 있는데도 온통 검붉은 빛을 띨 정도로 마물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애초 강화 유전자 조작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처럼 무예를 익힌 것도 아닌 마물들, 그것도 몸으로 때우는 육전형 마물들이 강화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퍼펫에게 상처를 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미노타우러스나 오우거 정도라면 비슷하게 싸울지도 모르지만, 이런 중형 마물들은 전부 엘핀서스의 입구에서 엘프들을 견제하느라 빠졌기 때문에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다크블러드. 몬스터 중에도 최강의 정예들만 뽑아서 만든 영광스런 군대이다. 전 대륙의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들 역시 자신의 강함을 자랑스러워했다. 흄의 명령이라면 상대가 드래곤이라 해도 돌진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자그마한 괴물에게는 그런 용맹함도 소용없었다. 마법사나 용처럼 불가해한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마물들도 잘 이해할 수 있는 강철로 된 무기, 그것도 방금 전까진 자신들의 동료의 손에 들려져 있던 무기를 사용하여 인정사정 없이 피바람을 일으키는 미스티는 그야말로 현실적인 공포를 선사했다. "퍼퍽!!" 살벌한 소리를 내며 동료의 몸이 부서져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은 공포스런 일이었다. 굉장한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강철 괴물이 휘두르던 무기는 오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쿠어어어억" 저 괴물에게 달려들면 자신도 곳 고깃덩이가 된 동료와 비슷한 꼴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하얗게 변한 머릿속에는 공포도, 분노도,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차례를 기다려 식량 배급을 받는 것처럼 죽을 순서를 기다린 것 뿐이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오크의 눈에는 강철기사의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보이는 듯 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미스티는 손에 들고 있는 무기가 부서지자 가장 강력한 무기라 할 수 있는 주먹을 달려드는 오크의 머리를 향해 날렸을 뿐이다. 썩은 감이 터지듯 붉고 회색의 내용물을 잔뜩 쏟아내며 방금 전까지 오크의 '머리였던 것'은 산산조각이 났다. 주변의 다른 마물들은 무기만 꽉 움켜쥔 채 더는 다가가지 못하고, 그렇다고 달아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형국으로 미스티를 포위하고 있었다. 주변을 한번 휘둘러본 미스티는 별 부담 없이 방금 죽인 두 마물의 무기를 주어 들었다. 용감한 오크 하나가 미스티가 무기를 줍기 위해 몸을 숙인 틈을 타서 덤벼들었지만, 천천히 몸을 숙이던 동작과는 반대로 무서운 속도로 몸을 일으키며 두꺼운 글레이브를 옆으로 휘둘렀다. 날이 선 무기가 아님에도 오크는 강철갑옷 채로 두동강이 나며 바닥을 굴렀다. 벌써 '파괴'된 오크들의 수는 40여 마리에 이르렀다. 활 같은 레인지 무기를 쓰지 않는 오크들로썬 돌격하는 수 밖에 없었는데, 이건 숫자로 밀어붙여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한편 미스티는 미스티 나름대로 답답했다. 언제까지 난동을 부리라는 것인가..... 빛의 나무쪽 상황을 알 수 없으니 계속 한자리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었지만, 오크들을 쓸데없이 학살하는 것이 미스티도 달가울 리는 없는 것이다. 30분 정도면 탈출이 완료 될 거라 했으니 그 정도만 난동을 부리고 철수하면 임무 완료다. 15분 정도 난동을 부렸으니 천천히 빛의 나무쪽으로 이동해 가면서 싸운다면 시간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스티가 바라본 빛의 나무는 빽빽한 나무사이로 보이는 부분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의 동료들을 무참히 해채하던 학살자가 빛의 나무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자 포위하고 있던 오크들은 안도감과 당혹감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미스티가 발걸음을 돌려 빛의 나무 방향으로 천천히 이동하자 오크들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달려들었고, 수많은 동료가 그러했듯이 고기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한편 빛의 나무 속에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게이트 마법은 성공적으로 시전 되었고, 엘프들은 하나하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큐버스 하나가 어둠과 동화되어 이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관찰하고 있는 것을 알아 차린 엘프는 없었다. 간신히 엘프들의 날카로운 눈을 피해 빛의 나무 밖으로 빠져나온 서큐버스는 참으로 어이없는 광경을 보고 말았다. 빛의 나무 속에선 오크들이 다 죽어 자빠졌는데 멍청한 오크들은 밖에서 인간 꼬마를 둘러 싸고는 천천히 데리고 놀로 있는 것이 아닌가? 화가 난 서큐버스가 안의 소식을 전하자 비로소 오크들의 눈에 진지한 살기가 돌았다. 하지만 진지한 살기가 돈 것은 비단 오크들 뿐만이 아니었다. 여지것 간신히 방어만 하며 공포에 떨던 인간의 새카만 검이 흑빛의 무지개를 뿌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서큐버스를 두쪽내 버린 것이다. 깜짝 놀란 오우거가 핼버드를 휘둘러 유신을 내리 찍었지만 방금 전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빠르기로 대형 무기의 사각이라 할 수 있는 품안으로 파고 들어가 깊숙이 첨예를 밖아 넣었다. 놀란 오우거가 마지막 사력을 다해 떨쳐 내려 하였지만 첨예는 이미 오우거의 척추까지 헤집어 놓은 후 안개처럼 빠져나간 후였다. 너무 심한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오우거가 천천히 무너지자 다른 오크들도 비로소 긴장하기 시작했다. 언제 마물들의 지원군이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노닥거릴 수 없는 없었다. 벌써 오크 하나가 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따라가서 쳐 없애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현실적으로 유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오크 부대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포위된 채 싸우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유신은 망설임 없이 오크 둘을 훌쩍 뛰어넘어 빛의 나무로 도망쳤다. 빛의 나무를 등지고 입구를 지키며 싸우면 어느 정도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오크들은 문 앞을 막고 있는 유신쯤 무시해 버리고 단숨에 돌파할 생각이었는지 오크 넷이 몸통박치기를 하듯 돌진해 왔다. 정면의 두 놈 사이로 가볍게 몸을 틀며 빠져나가던 유신은 몸의 회전에 첨예를 맡겼다. 유신과 오크가 스치는 순간 넷 중 첨예의 회전 반경에 들어있던 오크 둘이 소리 없이 쓰러졋다. 깜짝 놀란 오크가 뒤돌아보는 순간 똑같은 방법으로 둘의 사이를 다시 스치고 지나간 유신의 옆에는 오크 네 마리의 시체가 사이좋게 나뒹굴었다. 하지만 마물들도 결사적이었다. 설혹 이곳에서 돌아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엘프들 만큼은 본국으로 송환시켜야 하는 것이다. 설마 습격 받고 바로 그 다음날로 반격을 해 올 줄은 생각도 못했던 터라 마물들의 대장인 무스칼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엘프들이 계속 치고 빠지면서 전선이 교착된 상황에서 자신이 직접 빛의 나무로 가 볼수는 없었다. 이미 상당수의 피해가 보고되었으니 적의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데 자신이 자리를 비운 새에 엘프들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한다면 자칫 전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흄 직속의 특급 마법사이자 참모겸 감시격으로 따라 붙은 딜트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그 정도도 처리하지 못하는 무스칼을 비웃어줄 딜트였지만, 자신도 한번 쓰게 당했던 터라 군말 없이 빛의 나무쪽으로 향했다. 마나가 고정된 결계 속에서도 별 부담 없이 마나를 회전시켜 비행마법을 시전하는 딜트는 그야말로 마스터 급이라 할만했다. 빛의 나무에 도착한 딜트가 본 것은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준 꼬마와 주변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오크들의 시체였다. 빛의 나무 입구를 저 꼬마가 지키고 있는 한 마물들이 쉽게 뚫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망할 자식, 잘 만났다. 죽어라.'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던 딜트는 윈드커터를 한꺼번에 네 개나 만들어 유신을 향해 날렸다. 마법이 봉인된 줄 알고 있던 유신은 윈드커터의 기운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오랜 전쟁을 통해 쌓인 본능적인 감으로 간발의 차이로 피할 수 있었다. 뒤는 빛의 나무로 막혀 있으니 앞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는데, 덕분에 완전히 마물들의 한 가운데로 떨어지고 말았다. 체력도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는데 강력한 위력의 마법사까지 나타나자 유신은 눈앞이 깜깜해 지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딜트가 나타난 것을 본 오크들이 혹시라도 딜트의 마법에 휘말릴까봐 감히 유신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다는 점이다. "여, 딜트, 또 만났구나." 친한 척 해 봤자 돌아오는 대꾸는 냉담했다. "또 만나서 반갑군. 그럼 이제 그만 죽어 주시게." 몇 번이나 자신의 마법을 별 힘들이지 않고 피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딜트도 방심할 수 없었다. 혹시 무슨 재주를 가졌을지 모를 일이니 확실히 방어마법으로 자신의 몸을 지키고, 아무리 빨라도 조준만 정확하다면 피하는게 불가능한 않은 전격계 주문을 준비했다. "몸이 무척 빠르더군. 어디, 번개보다도 빠른지 볼까?" 딜트의 몸이 방전하더니 커다란 바위만한 푸른색 전격이 맻쳤다. 파이어 볼처럼 던지는게 아니라 전위차를 이용해 전기가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눈으로 보고 피할 수는 없는 공격이다. 차라리 검을 앞에 꽂아서 피뢰침처럼 땅으로 흘리거나 용아검으로 막아야 했다. 하지만 용아검이라면 몰라도 첨예로는 확실하게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혹시 막더라도 전격 주문의 추가 효과인 마비효과가 오면 저 흉측한 오크들에게 시체조차 남지 않고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다. '용아검을 써야 하나......' 망설이는 순간 갑자기 '펑' 하는 파공음과 함께 하늘에 떠 있던 딜트가 휘청 했다. 빛의 나무쪽으로 오고 있던 미스티가 마법을 쓰려는 딜트를 발견하고 중력캐논포를 한방 쏘아 준 것이다. 시전되던 마법은 취소되었고, 딜트는 이성을 잃을 만큼 분노했다. "이런 망할 놈들, 이번엔 또 뭐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딜트가 파이어볼을 세 개나 만들어내어 미스티 쪽으로 집어 던졌다. 주문도 없는 엄청나게 빠른 공격이었다. 마스터급 마법사가 만든 파이어볼, 그것도 한꺼번에 세 개나 뭉쳐서 날아가는 파이어볼의 위력은 7써클의 주문인 번플레어에 필적할 것 같았다. 미스티가 있던 곳의 반경 8m 정도는 숲과 함께 불바다 되어 버렸고, 딜트는 누군지 몰라도 그곳에 있던 자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미스티에게서는 마나나 코어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죽었다고 생각하는게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마법에 그만큼 자신이 있던 것이다. 분노한 딜트는 눈앞의 꼬마를 죽일 생각에 몰두하여 이미 머릿속에선 엘프에 대한 생각은 한편으로 치워져 있었다. 딜트가 빛의 나무를 직접 공격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노심초사하던 유신이었지만, 공격목표가 자신으로 정해진 것 같아 안도감과 난감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확실하게 죽여주마. 재수 좋은 놈아. 살아있는 지옥의 불길이여. 지옥의 권세를 나에게 내려....." 번 플레어의 확장판인 궁극의 화염주문 시즈플레어였다. '마....맙소사 인간이 저 마법을 구사한다고?' 놀란 유신이 용아검을 뽑으려는 순간 다시 '퍼펑'하는 소리가 났다. 공기 찢는 소리가 이렇게까지 반갑게 들린 적은 없으리라. 미스티가 온 몸에 대 마법 방어용의 신성문자를 빛내며 폭염 속에서 나타났다. 주문은 또다시 깨져 버린 딜트는 분노보다도 마법사 특유의 집요한 호기심으로 자신의 마법에 적중하고도 살아남은 이 신기한 존재를 바라보았다. '뭐지? 저 이상한 문자가 마법을 상쇠시킨 것인가?' 물질계의 마법체계는 마법계보다 조금 더 발달해 있기 때문에 물질계의 신성문자를 이용한 마법 방어는 딜트로서도 본적이 없는 신기한 것이다. 하지만 신기하다고 해서 마냥 관찰 할 수는 없었다. 캐넌이 두 번, 세 번 캐논포로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비록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맹이를 가속하여 발사하는 장치지만, 음속에 이르는 속도로 날아가는 돌맹이의 위력은 딜트로서도 부담스러운 것이다. 게다가 마법도 아닌 순수 물리력의 공격이었기 때문에 마나로 이룬 방어 마법도 약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견디지 못한 딜트가 블링크 마법으로 피해다니며 공격 찬스를 만들려고 했지만, 블링크하는 위치를 몇 번보고는 다음 블링크 할 곳에 예측사격을 가하는 미스티 때문에 딜트도 결국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딜트의 마법이 얼마나 강했는지, 미스티의 대 마법문자는 딜트가 물러간 후에도 계속 황금빛을 내며 마법 효과를 중화시키고 있었고, 드래곤본을 주원료로 만들어진 몸이 벌겋게 달구어졌을 정도다. 처음에 미스티가 기습적으로 딜트를 제압하지 못했다면, 지금쯤 유신일행은 잘 구어진 채 엘핀서스 숲의 비료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딜트는 나이가 어린 만큼 전투 경험이 적었기에 압도적인 마법실력이 있음에도 유신에게 두 번이나 패해 달아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대륙의 북동쪽 끝, 암흑의 골짜기라 부르며 지도에소 자세히 표시되어 있지 않은 땅이 있다.험한 산맥과 울창한 숲에 가려져 계발하기가 쉽지 않다는 않은 이유도 있지만, 그 흔한 야생 오크들 조차 보이지 않는 것은 대륙 최악의 마룡인 그라테우스가 살기 때문이다. 100m 가 넘는 거대한 체구, 검붉은 각질의 비늘과 세 개의 화염구 같은 눈, 칠흙같이 어두운 네장의 날개와 여섯 개의 뿔은 보는 이의 심장을 오그라트릴 만큼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 워낙 흉폭하여 인간이나 오크들은 물로 엘프조차도 그의 영역에는 들어올 수가 없었다. 1000살이 갓 넘은 어린 용이지만, 마법계에 있던 1500살 이상의 용들은 대부분 성계대전에 참가하였고, 살아남은 용들 마법계로 돌아오는 것보다는 물질계에 남는걸 택하였기 때문에, 현재는 마법계에서 톱클래스에 들어가는 생명체이다. 성계대전에 참전했던 성룡들은 전투생물 특유의 본능으로, 싸울 상대가 없는 마법계 보다는 용족만큼이나 강한 상대들이 수두룩하고 훨씬 넓은 물질계에 남는 것을 택하엿다. 그라테우스가 공포스런 이유는 그가 아직 어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린 용 특유의 활동성으로 인간 세상에 자주 출몰했기 때문이다.. 활동하는 용이란 인간에겐 재앙 그 자체이다. 그런 무시무시한 그라테우스의 레어에 한명의 손님이 찾아왔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검고 긴 머리, 우아한 여섯장의 묵빛 날개를 가지런히 접고있는 방문객은 이 무시무시한 레어의 주인 앞에서도 방글방글 웃을 뿐이다. 타락한 치천사, 헬마스터 베리알이 직접 찾아온 것이다. 그라테우스는 30여 미터에 이르는 고개를 숙이고 이 경이로운 존재에게 예를 표하고 있었다. " '어둠을 부르는 마신의 창'이라 불리는 그라테우스님이지요?" 그라테우스는 고개를 숙였음에도, 그 눈높이는 지상에서 거의 7~8m 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베리알은 그만큼 떠 있어야 했다. 날개를 펄럭이면 소란스러울 것 같아서 가만히 접어두고 의지의 힘만으로 떠 있는 것이다. "제가 그라테우스지만...... 위대한 존재께서는 무슨 연유로 마법계의 흔한 용중 하나에 불과한 저를 방문하신 건지요?" 누구에게 배운적도, 들은 적도 없었지만, 용인 이상 눈앞의 존재가 지닌 힘이 이미 신에 필적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존재 중에 어둠에 속한 마룡을 찾아올 존재라면 지옥의 칠군주 중 하나인 헬마스터 밖에 없는 것이다. "들어주셨으면 하는 간단한 부탁이 있거든요......" 물론 간단하지 않은 부탁이라 해도 들어줄 수 밖에 없다. 거절을 허락할 만한 존재가 하는 부탁이 아니다. 강요보다도 훨씬 더한 절대의 명령이나 다름 없다. "헬마스터께서....부탁이라고요?" "별로 어려운 건 아니고, 인간 하나를 죽여줬으면 해서요." "인간.....말입니까? 인간 전체를 말살시키라는 것입니까?" 분명히 베리알은 인간 하나라고 말했지만, 그라테우스는 차마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나라니? 마법계 최강의 생물인 자신에게 인간 하나를 죽이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헬마스터가 직접 찾아 왔다는 말인가? 차라리 마법계의 인류 전채를 죽여달라고 하는 것이 덜 황당할 것이다. 그라테우스가 혼란한 머리를 부여잡고 베리알의 진의를 몰라서 당황하고 있을 때 다시 베리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인간 전채를 말살할 능력은 마법계의 일개 용에 불과한 당신에게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명 정도라면 가능하겠지요." 아마도 다른존 재, 설혹 고룡이라 해도 이렇게 모욕적인 말을 그라테우스에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베리알은 여상스럽게 이야기 하였다. "명예로운 싸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속으로 이를 부드득 갈았지만 거절하거나 싫은 표정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죽여야 할 존재는 유신 더 실버스타. 이름 정도는 들어 봤겠지요? 2년전에 용제와 함께 마룡족 전체를 쓸어버렸던 장본인이니까요." 그 이름을 들은 그라테우스가 포효하자 100m 에 달하는 용이 살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거대한 레어가 무너질 듯 흔들렸다. "유신!! 유신이라 하셨습니다? 그 찢어 죽일 일족의 원수가 이곳에 왔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저는 제 이름을 걸고 용족의 신성한 맹세로써 그놈이 죽거나 제가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을 다짐합니다." 용족의 맹세는 절대적이다. 만약 용족의 이름을 건 신성한 맹세를 한 용이 이 맹세를 어긴다면, 마나가 봉인되어 그냥 힘만 센 커다란 공룡정도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어린 용들의 경우 자그마한 거짓말로도 치명적이 될 수도 있을 정도로 용족은 약속을 신성시하며 이에 대한 제약 또한 많다. 이는 어려서부터 마력과 지능을 부여받는 대신 가해지는 일종의 제약마법 때문이다. 물론 고룡이상의 존재가 되면 이런 것쯤 무시해 버릴 수도 있을 만큼 자체 마나와 코어의 힘이 강대해지지만, 그럼에도 이 제약 마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힘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모든 용들은 약속을 소중히 여긴다. 그라테우스가 용의 맹세까지 들먹거리며 난리를 치자 베리안은 얇고 둥근 눈썹을 모으며 날리는 먼지로부터 더러워지는걸 막기 위하여 날개를 펄럭였다. "진정하세요. 이래서야 더러워 지잖아요." 신경질이 다분히 묻어나는 베리알의 목소리에 그라테우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변덕스런 헬마스터라면 날개가 조금 더러워 진 걸로도 용 한 두 마리쯤 쉽게 갈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이런.....너무 흥분해서 실례를 범했습니다." "뭐, 상관없어요. 그리고 그라테우스님이 죽을 일은 없을 것 같군요. 유신은 모든 힘을 봉인 당한데다 코스믹 블레스터도 없으니까요. 기껏해야 골렘 비슷한 호위병이 붙어 있지만, 그라테우스님의 블레스면 까맣게 재가 되어 버릴겁니다." 베리알의 목소리는 상큼했지만, 그라테우스의 표정은, 용의 표정이야 알기 힘들지만, 팍 찌그러졌다. "모든 힘을....봉인 당했다고요? 대체 왜..... 그리고 그런 상태라면 결코 명예로운 싸움이 되지 못합니다." "후훗, 당신은 유신이란 존재를 너무 깔보고 있군요. 만약 그가 정상적인 상태라면 겨우 1000살 밖에 되지 않은 마룡이 상대가 될 것 될 것 같습니까? 실제로 특급의 마법사인 딜트가 두 번이나 패했으니 그라테우스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껄요?" 만약 베리알이 내뿜고 있는 존재감이 조금만 더 약했더라면 그리테우스가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전투생물이고 무한한 투쟁본능을 갖춘 용족이라 해도 눈앞의 상대는 너무나 차원을 달리하는 존재였기에 감히 어찌할 생각이 들지 못했다. 게다가 딜트라면 그라테우스도 알고 있는 흄의 마법사다. "흄의 직속 마법병단 닐 케니언의 딜트를 말씀하신 겁니까? 그가 패하였다면 확실히 싸워 볼만한 상대로군요." "그러셔야지요. 흄이 자꾸 실망을 시켜서 기분이 몹시 언짢았던 참입니다. 그리고 유신 옆의 강철 고램을 더욱 조심하는게 좋을 겁니다. 5서클 이하의 마법은 아예 통하지 않고, 힘은 미노타우러스 이상이고 상당히 이상한 마법을 쓸 것이니까요. 뭐 그래봐야 용족의 상대는 아니지만..... 그럼 할말은 다 했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지요. 너무 오래 있으면 위시마스터들이 눈치 채거든요." 베리알이 손을 가볍게 흔들자 발 밑과 머리위에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붉은 빛의 마법진이 포개어지자 그 안에 있던 베리알의 모습도 사라져 버렸다. "크크큭...... 나에게도 이런 기회가 오는구나. 기다리고 있거라. 크하하하하" 드래곤의 포효는 저 멀리 레어밖의 숲에까지 퍼져나갔다. 검붉은 빛을 마지막으로 사그러트리며 내리는 석양은 그라테우스의 폭염 블레스처럼 마법계의 모든 것을 태울 듯이 불길한 모습을 보여줬다. "실피드의 분노는 강철도 베는 대기의 날이 될지니, 나의 부름에 응해 적을 베어라. 윈드 커터." 세라피의 주문이 끝나자 '파팟' 하는 공기의 진동과 함께 세갈래의 진공파가 날아가 오크 네 마리를 무 썰 듯 갈라버리고 지나갔다. "이쪽은 이제 정리되었어요. 아직 남아있는 마물들이 많을까요?" "대충 끝난 것 같군요. 근데 굉장한 위력의 윈드커터네요. 4서클 중반 정도의 중반정도의 주문으로 알고 있는데 위력은 5써클의 파이어볼 수준인데요?" 유신의 칭찬에 세라피가 살짝 볼을 붏히며 대답했다. "바람의 정령을 이용한 마법은 제 특기인걸요. 하지만 유신이나 미스티의 활약에 비하면 저는 한 일이 없어 보이네요. 엘리시엘도 상당한 것 같고....." 3000에 달하는 마물들을 토벌하는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신 일행이 엘프들을 빼가 버리자 화가 난 베리알은 결계를 거두어 버렸고, 숲의 결계가 사라진 틈을 타 엘프들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비록 엘프들의 수비 결계는 베리알의 결계와 충돌하여 소멸해 버렸기 때문에 숲의 도움을 받지는 못했지만, 때맞추어 도착한 하누스의 자색기사단 1000기가 합세하여 마물들을 쓸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거의 대부분이 아주 우수한 마법사인 엘프들이 기사들에게 마법 지원을 해주기 시작하자 마물들을 손쉽게 소탕할 수 있었다. 미노타우러스나 오우거 같은 손쓰기 곤란한 괴물들은 미스티가 걸래짝처럼 찢어버리니 마물들은 저항다운 저항 한번 변변히 못해보고 지리멸렬하게 되었다. 사실 미스티와 유신만 없었다면 미노타우러스와 뱀파이어같은 고급 몬스터까지 섞여 있는 다크블러드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를들어 뱀파이어의 특수능력중 하나인 어둠의 망토에 가려진 마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상대하려면 필연적으로 많은 사상자를 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스티가 그런 마물들까지 정확하게 찾아내어 중력캐논포로 뱀파이어부터 박살내 버리기 시작하자 대책이 없었다. 물론 불사의 뱀파이어가 단지 무지하게 빠르기만 한 돌맹이를 쏘아대는 것에 불과한 공격으로 죽을 리는 없지만, 마법이 흩어지는 것까진 막진 못했다. 서큐버스같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물들이 연합하여 마법을 퍼부어 봤지만, 딜트의 수퍼 트리플 파이어볼도 막아낸 신성문자 앞에선 맥을 추지 못했다. 용맹한 오크와 오우거들도 미스티의 배틀엑스나 핼버드에 맞고 폭발하듯 육편조각이 되어 흩어지는 동료들을 보며 공포라는 괴물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결국 어떤 보급이나 지원도 받지 못한 다크블러드는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다 일정 시간이 지나자 한꺼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공포에 빠진 군대는 제 힘을 못 발휘하게 마련인지라 결국 엘프나 인간들에게 별반 피해도 주지 못하고 모두 전멸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공주님과 자색기사단이 없었다면 이렇게 쉽게 마물들은 몰아내지 못했을 겁니다." 첨예에 묻은 끈적한 오크의 피를 털어 내던 유신은 이자벨 공주를 발견하곤 다가가 말을 걸었다. "천만에요. 엘프들과의 동맹은 하누스로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니 저희도 무척 감사히 여기고 있어요. 그보단 저쪽에 계신 기사분이 정말 엄청나군요. 대형 몬스터들을 거의 혼자 쓸다시피 해치워 줘서 소탕작전의 피해가 경미했습니다. 정말 인간인지가 의심스럽군요. 데미휴먼이라 해도 저런 힘을 갖는 종족은 없는데...." 이자벨 공주가 미스티를 경계하자 유신은 재빨리 말을 돌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그보다 저것들은 어떻게 할 것이지요?" 유신이 가리킨 곳에는 사로잡힌 서큐버스 넷이 엘프들이 만든 마법의 밧줄에 꽁꽁 묶여 있었다. 죽이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놔주기에는 너무 위험한 마물인지라 골치 아픈 뜨거운 감자가 된 것이다. 그중 한 마리는 오른팔 어깨부터 날개까지 완전히 찢겨져 나가있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인간이라면 즉사할 상처지만 상급 마물인 서큐버스는 그 정도로 죽지 않는다. 멍하니 피 묻은 칼을 들고 서 있던 유신이 검집에 도로 꽂아 넣으며 서큐버스들에게 다가가자 곳 죽을 듯한 상처에도 무시무시한 눈길로 유신을 쏘아 보았다. 여자의 한 서린 눈빛 공격을 받아본 적이 없는 유신은 하마터면 뒤로 한발 물러설 뻔 했다. "언니의.....언니의 원수를 갚고 죽으려 했는데...... 이렇게 원수의 손에 잡히다니......" 자세히 들여다 보니 유신의 피를 빨다가 죽어버린 티아라의 동생 티스였다. '마물들에게 가족애가 있다고? 도대체 마법계는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거야?' 유신이 혼란에 빠진 틈에 티스가 그녀의 긴 손톱을 돌려 자신의 배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너만은.....너만은.... 반드시 내 생명을 걸고라도...." 놀란 유신이 말리려 했을때는 이미 피거품을 뿜으며 내장까지 흘러 내리고 있었다. 데미휴먼이라면 치유의 마법이 통하겠지만, 어둠에 속한 전통 마족인 서큐버스에겐 치유 마법은 오히려 독이다. 서큐버스에겐 처녀나 동정인 남자의 생피가 최대의 약인데 어느 미친놈이 마물따위에게 자신의 피를나누어 준단 말인가? "깨질수 없는 마의 계약, 절대의 어둠의 힘을 빌려 여기 내 생명과 모든 피를 바치니...." 티스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유신이 첨예를 빼들었지만, 피 웅덩이 속에서 긴 은발을 헝클어뜨린 티스에게 차마 일검을 꽂아 넣지는 못했다. 아주 순간의 망설임이었지만 티스의 몸에서 흘러 나오니 피는 이미 둥그런 소환 마법진을 완성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 만약 유신이 코어를 조금이라도 회전시킬 수 있다면 마법원의 중심에 검을 꽂아 넣어 소환 의식을 중지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무리였다. 마법원 안의 티스가 까맣게 재가되어 사라지자 그 속에선 지옥에서 들려오는듯한 괴수의 포효소리가 들렸다. 잠시후 그 안에서 6m 는 되 보임직한 키메라가 붉은 빛에 쌓여 나타났다. 키메라는 합성수로 합성한 재료에 따라 다양한 능력을 보이는데, 지금 나타난 키메라는 한눈에 봐도 전투목적으로 만들어진 괴물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해 보였다. 왼쪽은 용의 머리를, 중앙엔 사자의 머리를, 그리고 오른 쪽에는 양의 머리를 달고, 꼬리는 독사머리가 붙어 있었다. 전형적인 모양의 키메라였지만, 전형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효과가 좋다고 입증되었기에 전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설픈 다른 합성보다 훨씬 효과가 좋고 강한 마수의 결합 방식이 용, 사자, 양, 독사의 조합이다. 용은 지혜와 블레스를, 사자는 용맹함과 기동성을, 양은 주인에 대한 충성과 인내심을, 독사는 교활함과 맹독을 키메라에게 주는 것이다. 아마도 어설픈 데몬보다도 훨씬 강할 것이다. 절대 보통의 군사들로는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한 유신은 키메라의 옆으로 돌며 마수의 눈을 자기에게 돌렸다. 미스티는 유신의 반대쪽으로 돌며 키메라가 다른 방향으로 튀어 오르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함께 싸운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미스티는 유신의 데이터를 기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호흡이 잘 맞았다. 먼저 미스티의 초대형 헬버드가 키메라의 왼쪽 다리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동시에 유신도 오른쪽으로 찔러 들어갔다. 어깨 높이가 높은 만큼 낮게 베는 공격에 약할 줄 알았으나 미스티의 핼버드는 용의 머리에 붙은 날카로운 이빨로, 유신의 첨예는 발톱을 세워 별로 어렵지 않게 막아내었다. "어랏!! 제법!!" 키메라도 유신과 미스티의 공격이 만만치 않자 뻣뻣하게 온몸의 털들을 곤두세우며 펄쩍 뛰어 뒤로 물러섰다. 핼버드를 막은 이빨은 흔들거렸고, 발톱은 절반이나 잘려져 나갔으니 충분히 경계할만하다. 눈앞의 작은 적을 만만치 않다고 판단한 키메라의 머리중 용의 머리가 하늘로 치켜 올라 갔다. "브....블레스!!!! 모두 피햇!!" 세라피가 소리치며 일행의 앞에 아이스 월 마법을 쳐 방어 했다. 하지만 용 정도는 아니어도 용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만든 키메라가 쏘는 브레스다. 순식간에 아이스월은 녹아 내리고, 키메라의 블레스는 밀집해 있는 부대 쪽으로 날아갔다. 다행이 블레스가 아이스월에 잠시 주춤하는 사이 엘리시엘의 눈의 중급 정령인 보탐을 두 마리나 연속으로 소환하여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엘리시엘은 무리한 정령소환으로 새빨간 피를 토하며 쓰러져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보탐이 키메라의 브레스에 모두 녹아버린 점이다. 만약 정령을 소환한 뒤 소한자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하거나 제어가 흩어지면 정령은 마음대로 날뛰거나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소환자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키메라는 쓰러진 엘리시엘을 습격하려 했지만, 미스티가 견제하는 사이에 유신이 엘리시엘을 부축하고 저만치 떨어졌다. 힘과 스피드는 둘 다 백중세였지만, 몸무게에서 차이가 너무 나기 때문에 미스티가 조금 밀리는 것 같아 보였다. 물론 시간을 끈다면 무한한 스테미너를 가진 미스티가 승리하겠지만, 보는 사람들은 모두 손에 땀을 쥐었다. 몇몇의 용감한 기사가 후방에서 공격을 해 봤지만, 꼬리의 독사가 뿜어대는 독 안개에 휩쌓여 순식간에 살점이 푸르게 변하며 녹아 버렸다. "모두 숨을 멈춰요. 독안개가 내장으로 침투하면 살아날 수가 없어요." 피부까지 침식해 가는 독안개는 가공할만한 위력을 발휘해서 주변에 기사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나마 엘프들이 강궁과 마법으로 견제를 했기에 아직까진 큰 피해가 없었지만, 계속 이상태라면 이 괴물에게 얼마나 더 큰 피해를 입을지 알 수 없었다. "크와앙" 다시 키메라가 포효하며 블레스를 준비하자 미스티가 재빨리 중력 캐논포로 한방 쏘았다. 처음에는 그런 공격쯤 무시하려던 키메라였지만, 날아오는 속도가 무시무시한걸 보고 급히 몸을 틀었다. 하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해서 중앙의 사자머리의 코잔등이 깨져 나갔다. "캐애앵....." 개짖는 소리 비슷한 소음을 내며 물러난 덕에 블레스는 뿜어지지 않았지만, 전세가 낳아진 것은 없었다. 아직도 키메라는 두방의 블레스를 뿜을 수 있을 것이다. 엘리시엘이 기절한 지금, 그 공격을 막을만한 대책이 없었다. '맙소사.... 음속이 넘는 미스티의 캐논포를 눈으로 보면서 피하다니......이제 어쩐다....' 8개의 눈을 번뜩이며 다음 먹이 감을 찾던 키메라의 눈이 이자벨 공주에게 고정되었다. 여러 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있는 순백색의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는 그녀가 눈에 확 띈 것이다. '망할.....' 유신이 먼저 눈치채고 이자벨의 앞을 막는 순간 키메라의 작은 동산만한 거구가 날아 올랐다. "우아아악" 기사들이 이자벨 공주를 애워 쌓으며 방어를 해 보았지만, 황소머리도 일격에 부술 수 있는 키메라의 힘에 당할 리가 없다. 기사들은 칼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이 끔찍스런 광경에 이자벨 공주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말과 함께 얼어붙어 버렸다. 마수가 뿜어내는 위용에 이자벨의 말도 본능적으로 얼어 버려 움직이지 못했다. 맨 왼쪽의 용의 머리가 시뻘건 아가리를 벌리며 이자벨의 갸날픈 몸으로 덮쳐오는 순간 유신의 첨예가 막아섰다. '차아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송곳니를 꽤 뚫은 첨예는 그대로 용의 머릿속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키메라는 무식스런 돌격속도가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물러서며 날카로운 이물질이 자신의 뇌속을 휘젓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유신도 속도라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이 찬스를 놓치지 않고 키메라에 바짝 붙은 뒤 첨예를 휘둘렀다. 키메라가 돌진하던 중이라면 유신이 튕겨져 나갔을 터이지만 후퇴하던 중이라 계속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4~5초 사이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키메라와 유신은 거의 40여 미터를 질주하며 믿을 수 없는 쾌속전을 벌였고, 마침내 유신의 첨예는 용의 머리의 두개골을 갈랐다. 좀더 몰아치면 확실히 끝장 낼 수 있었지만, 키메라의 머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피하기 위해 유신은 할 수 없이 후퇴해야 했다. 어떤 독이 들어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키메라가 후퇴하며 휩쓸고 간 자리는 나무가 뿌리 채 뽑혀 버리는 등 대 파괴의 흔적을 보여 주었다. 마침내 머리 한 개가 완전히 죽어서 늘어지자 키메라의 위세도 많이 줄어들었다. "어둠을 가르는 파괴의 벼락이여, 내 의지에 따라 눈앞의 적을 쳐라. 라이트닝 볼트" 너무 빠른 키메라의 움직임에 감히 마법지원 조차도 못해주고 있었지만, 마수의 움직임이 잠깐 멈추자 세라피가 전격 마법으로 유신을 지원했다. 워낙 마법 저항력이 강한 괴물이라 치명타가 되진 못하지만, 전격계 마법의 부수 효과로 키메라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하지만 유신이 키메라를 죽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이겼다.'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달려들려는 찰나 유신은 본의 아니게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알고 당황했다. 봉인당한 몸으로 키메라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며 싸운 것이 몸에 너무 많은 부담을 준 것이다. 이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만 다리가 풀려 버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키메라는 자신을 괴롭히던 자그마한 인간이 갑자기 자신의 아가리 앞에서 쓰러져 버리자 이게 왠 떡인가 하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미스티가 이를 가만히 지켜볼 리 없다. 키메라가 유신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미스티가 키메라의 등에 올라탔다. 놀란 키메라가 미스티를 떨구기 위해 바닥을 뒹굴고 날뛰었지만, 미스티는 두꺼운 키메라의 등 가죽을 뚫고 무릎정도까지 질기고 단단한 근육 속으로 밖아 넣었다. 떼어내는 것이 여의치 않자 꼬리의 독사로 공격해 보았지만, 독을 제외하곤 별 공격능력이 없는 독사의 머리 따위론 미스티를 어찌 할 수 없었다. 독을 뿜어대며 달려드는 독사머리를 향해 가볍게 핼버드를 휘두르자 독사 머리는 단숨에 박살이 나 버렸다. 생명체가 아닌 미스티에겐 독은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미스티는 독안개에 휩쌓인체 묵묵히 다시 핼버드를 크게 휘둘러 키메라의 등을 내려 찍기 시작했다. "퍽퍽" 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살점과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키멜라의 피는 맹독성이기 때문에 다른 기사들은 감히 미스티를 도와주지 못했다. 마침내 키메라의 척추부근의 뼈까지 다 들어날 정도로 등 근육을 파해치자 키메라도 점점 힘이 빠져가기 시작했다. 피가 튀는 양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자 어느새 유신이 사자 머리부분을 스치듯 지나갔다. 물론 유신의 그림자 뒤로 따라오던 첨예는 사자의 목 부분을 40cm 정도 베고 난 후였다. 마지막 남은 양의 머리가 긴 포효를 하며 동진어귀라도 하겠다는 듯 인간들에게 돌진자 마침내 미스티의 핼버드가 두개골을 뚫고 턱 밑으로도 비죽이 나올 만큼 강력한 일격을 먹였다. 키메라의 마지막 포효는 피거품에 묻혀 그렁그렁 하는 소리로 잦아들다가 마침내 작은 경련마저 멈추었다. "하악......하악...... 이제 끝난 것 같군요." 여기 까지 말한 유신은 무너지듯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얼굴도 창백하고 호흡도 불규칙 한게 영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유신.... 괜찮은 건가요?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역시 따라와서 폐만 끼치는군요." 이자벨이 진심으로 사과하며 유신을 부축해 주었다. "하악하악 아니요.....제가 망설이는 바람에...... 저는 괜찬....." 곳 죽을 것 같은 안색이었지만 이자벨이 부축하자 풍만한 가슴에 기대고 보는 유신...... 어쩌면 의외로 엉큼할지도 모르겠다. 이자벨의 가슴에 기댄 유신과 땀 범벅이 된 그의 머리를 애처롭다는 듯 소중히 끌어안고 있는 이자벨의 모습은 그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공주와 그녀를 사랑하는 견습기사의 모습처럼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당장 엘리시엘의 눈 꼬리가 사납게 올라가고, 세라피의 눈 꼬리는 반대로 축 쳐졌다. 엘프답지 않게 성질 급한 엘리시엘이 막 뭐라고 한 마디 하려 했지만, 주위에 아직도 악취를 풍기며 뒹굴고 있는 마물들의 시체와 작은 동산만큼 거대한 키메라의 시체를 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신의 얼굴이 핏기하나 없이 창백하고 손이나 발이 조금씩 경련을 일으키는게 위험해 보였다. '이런..... 너무 무리한건가....... 봉인이 발동한 것 같은데, 괜찮을까? 하지만 지브릴님의 봉인은 다른 신들의 봉인처럼 지독스럽진 않으니 상당히 많이 약해졌겠구나. 이번 고비만 잘 넘기면 어쩌면 지브릴님의 봉인 정도는 풀릴지도......' 점점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하자 유신은 손짓으로 엘리시엘을 불렀다. 말을 하는 건 고사하고 자신의 손이 제대로 엘리시엘을 가리키고 있는 건지도 모를 만큼 비몽사몽이었지만, 다행이 엘리시엘이 가까이 다가 왔다. "지금부터 몸을 추스르려면 잠을 좀 자야할 것 같아. 주위에 아무도 못오게 하고, 치유마법이나 약물도 절대 안돼. 그냥 내가 땀을 너무 흘린다 싶으면 닦아주고, 몸부림치지 못하게 꽉 잡아주면 그걸로 좋아. 난 신체구조가 좀 특이하니까......부탁.....그리고 미스티에게도 내 말을 전해 주고....." 간신히 여기까지 말한 유신은 잠든 건지 기절한 건지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가 이렇게 뻗어버리자 당장 곤란해 진 것은 이자벨의 호위기사들이었다. 유신의 말이 있었기에 엘리시엘에게 유신을 건네 주었지만, 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곁에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자벨 공주 때문에 호위기사 전체가 발이 묶인 것이다. 시체들을 정리하고 싸움의 뒷정리를 위해서는 힘좋은 남자들이 많이 필요하니 엘프들이야 좋았지만, 1000기에 달하는 최 정예기사단이 성을 오래 비워두는 것은 그 모양새가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결국 공주의 호위기사 다섯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기사단은 철수하기로 했다. 시체를 태우고, 엘프들에겐 전혀 필요없는 오크와 다른 마물들의 무기를 전리품으로 챙기고, 부상자를 호송할 계획을 세워야 하고 유해가 남은 사망자는 본국으로 시체라도 옮겨야 했다. 부상자의 치료는 뛰어난 치유마법사가 많은 엘프들이 많았기에 다행이 아주 큰 중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금세 건강해 졌다. 마물들의 시체를 태우고, 물론 엘프들은 아주 싫어 했지만, 전리품과 부상자를 싫어갈 수레를 만드는 등(이것 역시 나무를 베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엘프들이 치를 떨었다.) 바쁘게 움직인 결과 저녁 무렵에는 대충 마무리가 되었다. 5000이상의 군대가 격돌한 제법 큰 규모의 전투의 마무리치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뒷마무리가 된 것은 엘프들의 힘이 컸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번 보면 꿈에서도 잊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엘프들이, 그것도 수천명이 떼거지로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쳐다보자 인간들은 기사건 기사의 종자건, 아니면 일반 병졸이건 앞을 다투어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이런 궂은 일을 할 리 없는 귀족들도 유신과 미스티의 몸을 아끼지 않는 전투에서 느낀 것이 있었는지 모두 발벗고 나서서 열심이었다. 게다가 이자벨 공주도 갑옷조차 벗지 않은 채로 열심히 뛰어다니는데 아무리 로열가드같이 명문 귀족의 자제들이라 해도 구경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로서 하누스, 엘프 동맹과 흄의 첫 번째 전투는 하누스, 엘프동맹의 압승으로 끝났다. 하지만 아직 흄에는 키메라보다도 훨씬 가공스러울 마수들과 마족, 그리고 마법사들이 있을 터였다.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다음날, 새벽은 여느 때의 엘핀서스의 아침보다 훨씬 활기 찾다. 하얗게 깔린 새벽안개위로 인간들의 기사단과 보급부대가 줄을 지어 출발하는 일은 보통의 엘핀서스의 아침에는 없는 메뉴이기 때문이다. 몇몇 엘프들이 나와서 배웅하기도 했고, 단순히 구경하러 나오기도 했지만, 크게 소란스럽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인간들로선 조금 실망스럽기도 했다. 어쨌든 그들은 엘핀서스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환송식 정도는 해줘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단체행동에 익숙치 않은 엘프들이 환송식을 해줄 리도 없고, 부상자나 기타 전리품을 호송하기 위해 마차를 만든다고 나무를 마구 베어내서 구해준 공이 많이 바랜 것도 있다. 그래도 몇몇 마중 나온 엘프들이 보여주는 미소는 결코 엘프를 지원하여 마물들과 목숨걸고 싸운 것이 헛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가치 있었다. 엘프의 미소를 본 병사들은 아마도 평생동안 자랑할 수 있으리라. "내가 말이야.... 위험에 빠진 엘프들을 구하기 위해 잃어버린 시간의 숲으로 갔거든. 황소보다 훨씬 큰 오우거 수 십마리를 베고, 미노타우러스도 몇 마리 죽였지.....마지막에는 왕성만큼 커다란 마수도 해치웠는데 그 마수는 용, 사자, 양, 독사의 머리를 달고 있었는데, 용보다도 훨씬 강력했다니까......" 병사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부풀려진 무용담이 이미 진실이 되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밤새워 유신을 간호한 세라피와 엘리시엘이 거의 녹초가 될 때쯤, 기사단의 배웅을 해주던 이자벨 공주가 교대를 해 주기 위해 돌아왔다. 기사단장인 로엘이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공주를 붙잡고 성으로 돌아가자고 간청하는 바람에 피곤함이 훨씬 더 쌓인 것 같았다. 생명의 은인을 두고 떠난다면 왕가의 수치라며 끝내 이곳에 남았지만, 노련한 기사단장과의 신경전은 아무리 강단있는 그녀라도 힘든 일이었다. "좀 쉬도록 해요. 밤새 간호한 것 같은데...... 제가 해야할 일이었는데 어제밤에 깜밖 잠이 들고 말았군요." 이자벨이 민망하다는 투로 이야기하자 세라피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뭘요...... 공주님도 애쓰셨는데요..... 전후 마무리를 위해 뛰어다니는 공주님의 모습은 저희도 보고 있었답니다. 엘프들을 위해 애써 주셔서 정말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저야 한일도 없는데요.... 뭐, 그보다 어서 가서 좀 씻고 쉬도록 하세요. 밤새 간호한 것 같은데....." "그래. 그럼 우리도 좀 쉬고 올게. 유신 옷은 여기에 있고, 검과 소지품은 저쪽에 모아 두었어. 땀을 너무 흘린다 싶으면 닦아주면 되고, 닦은 후엔 다시 이불을 꼭 덮어 줘. 체온이 금방 내려가니까....... 어제 밤에는 발작을 자주 일으켜서 곤란했는데 아침부터는 저렇게 얌전히 잘 자네." 엘리시엘은 이자벨에게 별 거리낌 없이 알려줄 것을 알려준 후 아직 유신의 곁을 떠나는게 못내 불안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세라피를 잡아끌었다. 이자벨은 막 문을 나가려는 두 엘프를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불러 세웠다. "잠깐, 잠깐만!! 그럼.....그럼..... 지금 유신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거야?" 이제벨이 좀 심하게 큰 목소리로, 소리치다와 고함 지르다의 중간정도 사이즈의 소음으로 말했기에 세라피는 좀 멍한 표정으로 한참만에 대답할 수 있었다. "예..... 이렇게 땀을 많이 흘리는걸요. 옷도 더럽고.......그게 왜........." 세라피보다는 조금더 눈치도 빠르고 인간의 습성도 알고 있는 엘리시엘이 이자벨이 생각하는 것을 대충 눈치채고 말했다. "아.....세라피 언니, 인간들은 이성간에 알몸을 보여주는 것을 굉장한 실례로 여겨. 이성끼리 같은 방안에 단 둘이 있는 것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좋지 않게 여기고. 성욕이 강한 반면 지성도 높기 때문에 여러 가지 규율을 세워서 성욕을 통제하기 때문인가봐." "엘리, 어디서 또 이상한 말을 주워 듣고....." 엘리시엘의 말에 얼굴을 새빨갛게 빨갛게 물들인 이자벨이 반박했지만, 딱히 다른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종족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자 마치 인간이란 종 자체가 성욕뿐이 없는 하등한 종족으로 평가되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을 가리켜서 하는 말처럼도 느껴져 속상했지만 어쩌랴? 엘프란게 워낙 그런 쪽으론 둔감하고 담담한 종족이라 더 이상 화를 내봐야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오랜 진리를 실천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 분하지만 입을 다물 수밖에. "하지만.....설혹 그렇다 해도 유신은 다쳤는걸? 다친 유신하고 이자벨 공주님간에 무슨 일이 있을 리 없잖아. 그리고 정말 서로 좋아해서 하는 성교라면 그게 뭐가 나빠....." 세라피의 어리숙한말에 이자벨 공주는 화내야하는 건지, 아니면 이 순진하기만 한 엘프 아가씨에게 웃어주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무어라 말할만한 타이밍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엘리시엘이 조금 높은 톤으로 말했다. "그게 우리와 인간의 다른 점이라니까. 실제로 성교를 했건 안했건 그건 중요하지 않아. 문제는 그런 것을 주변의 시선이 어떻게 받아들여 체면이 유지되느냐 않되느냐 하는 것이지. 억지부리기를 잘하는 인간이라면 단순히 남녀가 한방에 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애가 생겨 버린다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특이해서 자기가 억지부린다는걸 알면서도, 어느새 자기 자신까지도 자기가 한 억지를 믿어버린다는 거야.....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는 내가 모험할 당시 인간 동료에게 들은 이야기야......" 엘리시엘의 말에 이자벨은 온 몸의 혈액이 얼굴로 다 몰린 것 같은 상태가 되었고, 세라피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단지 동료의 말을 주어 들은 것 뿐인 엘리시엘 역시 인간의 일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리 없다. 이렇게 세명은 방금의 대화를 정리하기 위해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썰렁해진 방안의 공기가 풀린 것은 때맞추어 몸을 뒤척여준 유신 덕분이었다. 아직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자벨이 멍하니 이런 유신을 바라보고 있을 때 세라피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불을 걷어 내고, 엘리시엘과 함께 능숙하게 유신의 땀을 닦아 주었다. 알몸의 남자를 보자 이자벨 공주는 '윽' 하는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렸지만, 흘끔흘끔 곁눈질 하는 것도 결코 잊지 않았다. 공주라는 직책 때문에 남자에 대해서라면 '칼을 휘두르길 좋아하는 힘이 세고 친절한 존재'라는 추상적인 개념밖에는 없는 이자벨이다. 그녀 주변의 남자들은 대부분 기사들이니 당연히 힘이 셀 것이고, 아름답고 총명하며, 신분도 공주인 그녀에게 친절하지 않을 남자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여자인데 왜 남자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겠는가? 흔치 않은 이런 기회를 쉬 흘려 버릴 만큼 그녀는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다. 두 미녀가 온몸을 닦아주는 호강에 겨워서 그런지, 좀 시간이 지나자 다시 유신의 표정이 평화로워 지며 호홉도 고르게 돌아왔다. "그래도 이제 발작은 일으키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어제 밤에만 해도 굉장했었거든요. 작은 몸집인데 왠 힘이 그렇게 센지, 엘리와 무척 고생을......공주님?" 세라피의 말에 이자벨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예? 예에........그렇군요......." 횡설수설 는 공주를 보자 세라피가 불안하다는 듯 말했다. "불편하시다면 제가 계속 남아 있어도 좋아요......피곤해지면 엘리와 교대로 돌봐 주어도 좋으니까....." 사실 세라피는 쉬는 것보다도 유신의 곁에 남고 싶었다. 하지만 이자벨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이 돌보겠다고 우기며 두 엘프를 밖으로 내몰았다. "아니.....아니요..... 제가 남아 있을께요. 생명의 은인인걸요. 저도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요." 결국 두 엘프는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유신을 건네준 후 집 밖으로 나갔다. '어디 보자.....이게 남자의 몸이렸다?' 얇은 이불 위로 드러난 몸의 굴곡은 자신의 그것과 달리 밋밋했지만, 묘하게 가슴이 뛰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살며시 침대 옆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앉자 무엇을 해야할지 막막했다. 그 높은 신분에 누굴 병간호 해 봤겠는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유신의 머리를 살살 쓸어 주었다. 아주 어렸을 적에 어마마마가 이렇게 해주면 무척 기분이 좋았던걸 기억해 낸 건 굉장한 순발력이었다. 그러자 그녀의 예상대로 기분이 좋아졌는지 킁킁거리는 유신...... 어쩌면 깨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자벨은 이런 유신이 마치 친동생처럼 귀엽게 느껴져 볼을 당겨 보기도 하고, 코를 퉁겨보기도 하면서 장난치기 시작했다. '오호......병간호라는 것 생각보다 재미있군.' 그녀가 이상한 결론에 도착할 즘 유신이 조금 뒤척거려 이불이 가슴께 까지 내려 왔다. 다시 올려 주려고 이불에 손을 대자 뭔가 야릇한 기분이 드는 이자벨......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이불을 살짝 들어 보았다가 누가 볼 새라 재빨리 다시 내렸다. 심장은 튀어나올 듯 쿵쾅거리고 뺨은 물론 목덜미까지 새빨개져 버렸다. 누가 들어오면 수습이 안되겠다 싶어 호흡을 고르며 진정하기 시작했다. "하....후.....하.......후........." 조금 진정이 되자 새록새록 새로운 용기가 전신에 스며들었다. 그녀는 지금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모험가인 것이다. 가슴팍쯤까지 이불을 내린 이자벨은 힘들게 얻은 전리품을, 이미 그녀의 사고 체계는 유신의 몸을 모험의 댓가로 얻은 전리품으로 분류시켜 놓았다,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갈색으로 살짝 탄 피부, 약간 말라 보이는 체형임에도 바늘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게 꽉 조여진 근육질의 몸.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가 다시 '남자'의 몸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길 몇 번하며 비교를 해보자 조금씩 더 용기가 생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드워프가 보석 감정하듯 여기저기 꾹꾹 찔러보며 '남자'라는 생물에 대한 지식 수준을 높여갔다. 마치 따뜻한 돌덩어리처럼 전혀 들어가지 않자 솔직히 이자벨도 좀 놀라고 말았다. '왜 이렇게 다른거야......'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자신의 몸과 비교를 해보며 약간 의기소침해 지고 말았다. 신체구조뿐 아니라 근육 자체가 이렇게 다르다면 그녀가 유신의 검술을 배우는게 힘들 것이라는 것이 자명해 지기 때문이다. 이재 드디어 남자 최후의 요새만이 남았다. 이기회에 확실히 성교육까지 완료하리라 마음먹은 것인지 이자벨의 얼굴은 결연한 의지로 굳어졌다. 이 기회를 놓치면 결혼하는 첫날밤까지 남자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를 것이란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의식적으로 '꿀꺽' 하며 마른침까지 삼켰다. 자신의 심장소리에 유신이 깨면 어쩌나 할 만큼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렸다. '자...... 갑니다!!' "세라피, 엘리시에, 교대하자~~" "와......와아아앗" "쿠당탕" 밤새 고생했을 세라피, 엘리시엘과 교대하기 위해 들어오던 이리엘은 문을 열자마자 들려온 비명소리에 번개같은 솜씨로 검을 꺼내며 단숨에 이자벨 공주의 옆까지 뛰어와 사방을 경계했다. 엘핀서스 레인저다운 재빠르고 훌륭한 대처였다. 적의 침입이 분명했다. 이자벨 공주는 침대 옆에 쓰러져 있고, 의자는 넘어져 있었다. 불의의 기습인 듯 싶었다. '증원을 요청해야 하나? 하지만 적이 아직 근처에 있다면, 이 둘을 내가 보호해야 하는데..... 엘프의 감각에 걸리지 않고 침입한 상대라면 .....강하다.....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이자벨 공주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마도 그녀의 천연 피 색깔 그대로일터인데 어찌 일어나겠는가? 숨쉬기가 힘든 것은 아마도 아까부터 튀어나올 듯 요동치던 심장이 목구멍에 걸려서일 것이다. 강하게 기침 한번만 해도 심장이 몸밖으로 뛰쳐나가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상태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하얗게 질려 있다는 것을...... 결국 좀 진정되었다 싶어서 일어난 이자벨 공주는 침입자 따위는 없었고 갑자기 들어와서 놀랐을 뿐이라고 어렵게 해명했다. 이리엘은 뭔가 석연치 않았지만 인간이 엘프만큼 감각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기척 없이 들어온 것을 사과했다. 다른 엘프들이 안에 있었다면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벌써 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별 부담 없이 문을 연 것이 이자벨을 거의 실신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놀란 것일까?' 의문이 든 이리엘이 막 물어보기 위해 입을 벙긋거렸다. 이자벨 위기의 순간, 그녀를 구한 것은 기절해서까지 기사도를 지키는 유신이다. 둘이서 부린 소동에 그만 잠이 깬 것이다. 유신이 끙끙거리며 눈을 뜨자 이리엘의 주의가 단숨에 유신에게 돌아갔다. "끙.....여기가 ........ 어디지.......... 공주님? 이리엘? 뭐하고 있어요?" 유신은 머리가 좀 띵한 듯 이마를 잠시 짚으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이리엘은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지만, 이자벨은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 다 낳은 것 같아요. 머리가 좀 띵하지만.....그건 잠을 너무 마니 자서 그런 걸 꺼에요. 근데 공주님은 무슨 화나는 일 있어요? 왜 고개를 돌리고......." 여기까지 말하던 유신은 육체가 호소하는 허전함에 자신의 몸을 내려다 봤다. 중요한 곳이 거의 보일 정도로 이불이 내려가 있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황인데다 이리엘은 몸이 닿을 만큼 바짝 붙어서 손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잠깐 생각하다 말고 비명을 지르며 이불을 끌어 당겼다. "우....우와와왁" 깜짝 놀란 이리엘이 한발 떨어지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유신? 왜그래요? 아직 몸이 않좋은 거에요?" "아..... 아니요.......저.....그보다 제 옷은........" "여기 있어요. 세라피가 잘 빨아서 말려 놨으니 깨끗할 거예요" "예.....감사합니다." 이렇게 대답한 유신이 얼굴이 빨개진 채 옷을 들고 머뭇거렸다. "왜요? 옷 안 입을 거예요?" "물론 입어야죠...... 하지만 두 숙녀 분이 여기 계시면......" 평범한 아침보단 조금 더 활기찬 엘핀서스의 아침, 따뜻한 햇살이 숲 구석까지 퍼지기 시작하자 신비롭던 물안개도 어느새 사라지고 기분 좋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늦은 아침과 이른 점심의 중간쯤이 되는 시간. 자그마한 동물들이 뛰어 다니고 새들이 날아다니는 엘핀서스는 언제 큰일이 있었냐는 듯 평화롭기만 했다. 간간이 보이는 부러진 나무나 핏자국이 전쟁의 잔해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워낙 넓은 곳이라 마물들이 발도 디뎌 보지 못한 곳이 더 많을 터였다. 세라피와 엘리시엘은 엘프다운 느긋함으로 도시락을 싸서 야외에서 먹기로 했다. 도시락이라고 해 봐야 빵 조금과 야채 샌드위치, 과일 약간, 포도주 한 병이 전부이지만, 큰 패해 없이 그 많은 마물들을 막아낸 후라 감정의 기복이 적은 그녀들도 조금 흥분한 상태로 기분이 몹시 좋았다. 발걸음도 가볍게 양지 바른 냇가를 찾아낸 둘은 들고 온 음식들을 풀밭에 올려 두기 시작했다. 미끄러질 듯 파란 잔디는 그녀들에겐 어떤 고급 양탄자보다도 보드랍고 포근한 카펫이였고, 새들의 지저귐이나 바람 소리, 냇물이 흘러가는 소리는 식욕을 돋아주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나 같았다. 지나치게 무성한 잔디는 아직 이슬기를 조금 머금고 있었지만, 그녀들에겐 크게 상관없었다. 시냇물 너머에는 엘핀서스에서는 보기 드물게 공터가 있었는데, 여러 가지 꽃들이 만발해 후각이 예민한 그녀들에겐 취할 만큼 진한 꽃향기가 몰려 왔다. "우~~와~~ 엘핀서스에 이런 곳이 있었네......난 몰랐는데......" 엘리시엘이 감탄하자 세라피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내가 자주 명상하던 곳이야. 아름답지? 엘리는 엘핀서스 외각에만 있었으니까 여기는 모를꺼야." 나이 차가 꽤 많이 남에도 벌써 둘은 사이가 아주 좋아져서 말을 트고 친자매처럼 지냈다. 나무 잔에 포도주를 따르고 하누스에 머물 때 배운 건배라는 것을 해 보았다. "건~배 .....아하하..." 왠지 기분이 좋아진 둘은 한동안 속 시원하게 웃었다. 한참을 웃고 나자 세라피가 문득 생각난 듯 진지한 얼굴로 엘리시엘에게 질문했다. "저....엘리, 아까 한 이야기 말인데....... 인간은 피치 못할 경우라도 알몸을 보여주는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했잖아. 그게 성욕이 강한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야?" 세라피의 질문에 엘리시엘은 고운 눈썹을 모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인간들 사이라면 무척 어색하고 이끌어 나가기 힘든 주제를 대화 내용으로 삼았지만, 엘프들인 만큼 지극히 학술적인 자세로 접근하는 그녀들에겐 여상스런 대화와 별 차이점이 없었다. "음......인간은 정조라는 걸 중요시 여겨. 남권 위주의 사회체제인 만큼.....에..... 여성을 얽매고 사회 진출을 막기 위해 심리적 부담을 주려면 한번도 성교를 하지 않은 처녀를 귀하게 여기는 것도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거든. 하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제재를 가하지 않으면........그들의 생활습관이나 성욕을 봤을 때 굉장히 문란한 성생활을 하게 될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이를테면..... 인간들은 사랑과 성욕을 별개로 생각해. 단순히 육체적 쾌락만을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도 잠을 잔다는 거지. 게다가 도가 심해지면 동성간이나 여러 명이 성교를 하기도 하고, 가학적인 짓에서도 쾌감을 얻는 이상한 종족이기도 하거든.......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워야 할 사랑이라는 행위가 굉장히 난잡하고 추잡해 지는 거지." 엘리시엘의 말에 세라피는 푸른빛의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상해 보려고 애써 봤지만,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엘리시엘도 주워들은 게 많으니 이야기는 했지만, 전혀 모르는 외국어를 발음만 따라한 것과 같은 상태였다. 즉 그녀 역시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거다. "저기.....그렇다면 유신도 처녀만을 좋아하는 걸까? 인간 같지는 않지만..... 생긴 건 일단 인간이니까......"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겉모습은 인간 같지만,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렇게 강할 수는 없잖아." "그런 뜻이 아니라....... 설마 세라피 언니? 유신을 좋아하는 거야?" 경악에 가까운 엘리시엘의 말에 세라피가 볼을 약간 붏히며 대답했다. "으....응..... 다른 종족과 사랑에 빠져 봐야 불행에 빠질 뿐이란 건 알고 있지만......" "있지만?" 엘리시엘의 추궁에 세라피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져 갔고, 얼굴은 그에 비례해 빨개져 갔다. 워낙 하얀 피부라 세라피의 볼이 빨개지기 시작하자 더욱 눈에 띄었다. 고개까지 움츠리던 세라피가 그럼에도 꿋꿋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유신은 좀 다르지 않을까? 참 다정하고....엘프들과는 다르게 늘 바쁘고, 정열적이야......무엇보다도 같이 있으면 안심이 되고...... 하지만 인간은 엘프와 다르니까....이런 마음을 표현한다면 폐가 되진 않을까? 게다가 난.... 니 말대로라면 자격 미달일지도 모르잖아..... 그때 오크들에게 잡혀서....." 여기까지 말한 세라피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않는다고는 해도 그런 과거가 현재까지 올가맨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이런 고민에 빠진 자신이 한심스럽고 분하기도 해서 눈물이 나는 것이다. 엘프들의 사랑은 수십년에 걸쳐 천천히 키워지는 정답고 포근한, 서로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유신을 만나고 겨우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마치 인간처럼 사랑이란 감정에 휩쓸리게 된 세라피는 얼마나 당황 스럽겠는가?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 서로 사랑하게 된 엘프들은 서로의 감정을 손바닥 보듯이 알 수 있기에 불같은 정렬이나 스릴은 없지만, 인간의 사랑처럼 상대방의 진심을 알지 못해 오해하거나 가슴이 새까맣게 타는 고통 또한 없다. 그러니 헤어질 때도 충분한 대화를 한 후 상처받는 일 없이 헤어지기 때문에 여전히 특별한 친구로 남는 경우가 더 많다. "세라피 언니, 울지마...... 유신은 다른 인간들과는 상당히 틀리니까 아마 잘 이야기 해보면 될거야. 그리고 언니는 예쁘잖아. 정말 언니만큼 예쁜 엘프는 본적이 없어. 눈도 신비한 물빛이고...... 머리카락도 너무 가늘고 예뻐." "하지만 예쁜게 다 무슨 소용이야." 잠시 입을 모으고 하늘을 처다보며 할 말을 정리해 보던 엘리시엘이 대답했다. "인간은 애정을 키워 나갈 때 외모를 상당히 중요시 해. 얼굴만 보고 결혼하는 사람들도 많은걸. 아마 그것도 왕성한 성욕 덕분이겠지만......" 엘리시엘의 말에 세라피가 울음을 그치고 커다란 눈망울을 깜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흑....그게 뭐야..... 그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내 외모만을 사랑한다는 건, 단지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를 필요로 할 뿐이잖아." 도대체 누가 연장자인지 모를 대화가 오고 갔다. "사실 나도 유신이 꽤 마음에 들어. 단지 이런 감정이 사랑인지, 아니면 엘프들과는 다른 낮설음에 느끼는 두근거림인지 판단을 못할 뿐이지만....." 엘리시엘이 포기한 듯 말하자 대번에 세라피의 표정이 밝아 졌다. "그렇지? 너도 유신이 좋지?" "그게 그렇게 좋아할 일이야? 인간은 우리처럼 오래사는 종족이 아니잖아. 정신 세계도 우리만큼 탄력적이고 넓지 못해. 과연 유신이 우리 둘을 모두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건 상관 없어. 난 나 혼자만 이상한 엘프인 줄 알고 계속 고민했잖아? 그냥 지그금처럼 모두 함께 행복하게 지내면 난 그걸로 족해." "글세, 언니....... 그건 우리들 생각이고..... 인간은 소유욕이 강한 만큼 한꺼번에 진심으로 둘을 사랑할 순 없다니까......." "아니야. 유신이라면 다를 거야. 이제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어서 먹고 온천에라도 가자. 싸움으로 많이 더러워 졌는데 아직 제대로 씯지도 못했잖아." 엘리시엘도 유신이 좋다는 말에 용기 백배해진 세라피는 바쁘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소유욕이란 것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남이 좋아하면 가치 기뻐지는 것이다. 대충 배가 불러진 세라피는 엘리시엘의 손을 잡고 온천으로 향했다. "어.....난 아직 더 먹고 싶은데......" 아직 조금 남은 빵을 조금 아쉽게 바라보던 엘리시엘은 결국 체념하고 세라피에 끌려 온천으로 향했다. 빵은 아마도 새들이나 엘핀서스의 작은 동물들의 특별한 간식이 될 것이다. 한편 유신은 이자벨, 이리엘과 함께 밥을 먹기 위해 이리엘의 집으로 향했다. 레인저 출신인 이리엘의 요리 솜씨는 제법 훌륭해서 유신은 만족하며 먹을 수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버섯 요리는 그럭저럭 고기 맛이 나기에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유신이었다. 끝도 없이 먹어대던 유신을 보고, 대체 인간이 얼마나 먹을 수 있는지를 관찰해 보던 이자벨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식탁에 엎드린 채 곤히 잠이 들고 말았다. 이리엘 역시 집에 있는 모든 재료를 다 털어서 음식을 만들어 둔 후 녹초가 되어 침대로 기어들어가 버렸다. '위험한 아가씨들이네...... 난 남자로 안보인다는 건가.....' '나는 신뢰받고 있는거야' 라고 애써 위로해 봤지만 묘하게 섭섭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리엘의 요리를 단호하게 끝장내버린 유신은 이자벨을 조심스럽게 않아 엘리느의 옆에 눞힌 후 이불을 덮어 주었다. 기지개를 한번 길게 편 후 밖으로 나가자 그를 알아본 엘프들이 인사를 건네 왔다. 엘핀서스는 마물들이 주둔해 있으면서도 그다지 망가트릴 시간이 없었기에 다행이 미려한 경관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물론 유신이 키메라와 전투를 벌인곳 같이 난장판이 된 곳도 있지만, 엘프들의 숲인 만큼 금방 본래의 모습을 찾을 것이다. 유신이 이렇게 경치를 구경하며 돌아다니자 엘프들은 온천에 가 볼 것을 권유했다. 유신도 피로해진 몸을 풀기에 온천이 좋다고 생각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온천은 상당히 커다래서 꽤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였지만, 자연을 해치지 않는 엘프들의 온천답게 수용 인원을 늘리기 위해 바닥을 깍거나 여기저기 있는 돌 섬들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이런 자연스러운 모습이 굉장히 운치가 있어서 유신은 보는 것 만으로도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살짝 발을 담궈 물의 온도를 재 보고는, 간단한 타월 하나만을 두른 채 '첨벙'뛰어 들어 물장구 치며 놀기 시작했다. 온천 특유의 짙은 수증기가 피어 올라 앞이 잘 안보였지만,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마음도 무척 편했다. '벌써 마법계에 온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구나. 그새 참 많은 일이 있었네..... 난 농사나 지으며 평범하게 살줄 알았는데......새로운 친구들....전쟁.... 하지만 재미있었어. 뭐 두어번 정도 죽을뻔 했지만......' 그간의 일을 생각하자 피식 웃음이 흘러 나왔다. '뭐....이것도 나쁘지 않구나.' 그동안의 일을 곱씹어보던 유신은 어느 샌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쯤 온천으로 향했던 세라피와 엘리시엘이 도착했다. 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온천에 들어가 참방참방 물장구도 치고, 서로 등도 밀어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했지만, 아쉽게도 기절과 깊은 잠의 중간쯤 상태에 빠진 유신은 알지 못했다. 둘이 이렇게 즐겁게 놀고 있자, 어느샌가 물의 정령인 운디네 몇몇이 그 즐거운 소리에 이끌려 함께 어울렸다. "어머, 세라피, 엘리시엘, 먼저 와 있었네?" 어느새 깨어 났는지 이자벨과 이리엘도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세라피와 엘리시엘은 자그마하고 날씬한 귀여운 스타일의 미인이었고, 이리엘과 이자벨은 여신같이 훤칠하고 풍만한 미인인지라 두 그룹은 무척 대조적이면서도 퇴폐적이지 않은 순수한 아름다운 그림이 되었다. 이자벨은 인간임에도 공주라 귀하게 자란 탓인지 엘프못지 않게 아름다운 피부와 몸매를 과시했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마른 체형인 엘프에 비해 나올 때 나오고, 들어갈 때 들어간 풍만함으로는 단연 이자벨이 으뜸이었다. 아름답기론 세라피가 제일이지만, 유아체형인 탓에 몸매는 귀엽다고 평할 순 있어도 멋지다고 평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모두 굉장한 미인들이라 주관적으로 누가 더 예쁘다고 한다면 그것은 취향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딱히 반론을 제시할 수 없을 만큼, 모두 독특한 개성미가 넘쳤다. "우와.....이게 물의 정령인 운디네로군요. 소환하지 않아도 이렇게 자주 나타나나요?" 이자벨이 놀라 관심을 보이자 아름다운 몰의 처녀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자벨의 몸을 빙 둘러 감싸 안으며 그녀의 뺨에 손을 대었다. 그래봐야 물로 이루어진 손이기 때문에 손 모양이 조금 손상될 뿐이지만...... "네. 엘 리가 있을때는 정령들이 모여 들어요. 선택받은 정령사니까요." 세라피가 자랑스럽다는 듯 이야기하자 그녀의 표정이 하도 천진하고 귀여워서 이자벨 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세라피와 비슷한 미소가 입에 걸렸다. 한참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수다를 떨던 네 여자는 피해갈 수 없는 주제인 유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믿음직하지요. 당당하고..... 게다가 잘 보면 너무 순진해서 귀여운 구석도 있어요." 일단 눈에 콩깍지가 씌인 세라피가 먼저 말했다. "역시 검술이죠. 살인 기술이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검에 목숨거는 이자벨의 말이다. "어머? 이자벨도 유신한테 관심있는거야? 하지만 너무 비밀이 많은 것 같아...... 출신 배경이나 사용하는 장비, 악기, 노래, 검, 검술, 모든게 너무 생소해.....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하다가도 의외로 박식한 점도 많고.....뭐 나쁜 사람이 아니란건 확실한 것 같지만....." 역시 유신을 가장 먼저 발견한 만큼 예리하게 유신의 이상한 점을 지적하는건 엘리시엘이다. "하지만 좀 엉큼한 점도 있다고...... 저번에 유신이 다쳐서 부축해 준 일이 있는데....." 네명의 여자에게 도마위에 오른 뒤 난자당하기 시작하는 유신.....행복과 불행의 절반정도의 위치에 있을 것이다. 물의 정령인 운디네는 이들이 말하는 인물이 저쪽에서 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같은 온천 안에 있는 만큼 물의 정령이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그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다가가 그곳의 물과 함께 유신을 가만히 들어 올렸다. 특별히 무슨 충격을 받은 것도 아니고 살기가 느껴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둔감한 유신은 운디네가 살며시 옮겨가자 전혀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운디네는 유신을 들고 엘리시엘에게 다가갔다. 모두가 이야기 하던 사람을 데려 왔으니 당연히 칭찬받으리라 생각한 운디네는 기분이 좋아저 인간의 귀에도 들릴 만큼 '꺄르륵' 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투명한 물 속에, 그것도 나체나 다름 없는 차림새로 들어있는 모습을 본 이자벨 공주는 어떠했겠는가? "끼야아악" 찢어지는 비명 소리와 함께 운디네는 놀라서 달아나고, 유신에게 걸려있던 물의 마법이 사라지자 1m 정도의 높이에서 온천으로 쳐박힌 유신도 깜짝 놀라서 잠이 깼다. "우와아앗.........어푸푸 무......뭐야!!"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써 봤지만, 눈 앞의 광경은 도대체 이해 할 수 가 없었다. 씯기 위해 왔으면 옷벗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엘프들로선 이자벨이 왜 소란을 부린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가릴곳도 전혀 가리지 않은 그녀들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이자벨은 자그마한 손으로 가릴곳만 겨우 가린체 물속으로 주저앉아 버렸고, 세 엘프들은 멀뚱멀뚱 유신과 이자벨을 번갈아가며 쳐다볼 뿐이었다. 여신처럼 아름다운 네 미녀의 나신에 둘러 쌓여 꿈인지 생신지를 구별하지 못해 갈팡질팡 하던 유신도 점점 피가 인체의 어느 부분으로 몰림을 느꼈다. 잠시 후 떨어질때의 충격으로 최후의 요새를 지켜주던 자그마한 수건마저 어디론가 떠내려 간 것을 깨달은 유신도 이자벨과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우.....우아아악" 점심을 먹으며 인간의 성욕에 대해 모종의 결론을 내린 세라피와 엘리시엘도 조금씩 왠지 모를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어설프게 가릴 곳만 겨우 가린게 오히려 당당하게 허리에 손을 짚고 있는 이리엘보다 훨씬 선정적이었다. 어느새 해는 산 넘어로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였고, 멀리서 새가 푸드덕 거리며 자신의 둥지로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곱게 물든 노을은 온천 전체를 붉게 물들여 홍시가 된 세 엘프와 한 인간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그러니까 저는 유신이 하누스 왕국에서 정식으로 제 검술사범겸 견습기사들의 교육단장이 되어 주길 바라는 겁니다. 작위와 기사의 칭호도 내려 드리겠습니다." 다시 끈질긴 이자벨의 설득이 시작되었다. 어제 충분히 서로간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기에 당분간 여자인 이자벨 공주가 유신을 피해 다니리라 예상했었지만, 그 가증스런 예상은 단 하루, 정확히 16시간만에 깨지고 말았다. "글세 저는 그럴만한 자격이....." 왕궁에서 충분히 쓴맛을 봤던 유신이 쩔쩔매며 둘러대어 봤지만, 이자벨의 고집이야 원체 유명하지 않은가? 유신이 헬프를 바라는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지원사격을 해 주어야할 세라피와 엘리시엘도 눈을 피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자벨 공주는 엘핀서스의 은인이기 때문이다. 하누스의 자색 기사단이 없었다면, 악착같이 발악하는 마물들에게 얼마나 많은 엘프들이 상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대체 유신에게 자격이 없다면 누구한테 자격이 있다는 겁니까? 키메라 같은 마수와 싸울 수 있는 기사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정 싫다고 하신다면......." 드디어 포기하는건가? 유신이 속으로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자벨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이번 일로 흄과의 전면전이 예상되니 왕국에 힘이 되어 주세요. 세라피님과 엘리도 좀 도와주고....... 이 정도면 됐지요?" 역시 귀하게 자라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릴 줄도 아는 공주님이다. 유신이 하누스로 오기 싫다고 하는 이유가 세라피와 엘리시엘 때문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짚어낸 뛰어난 심리분석능력, 그리고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가장 알맞은 대처 방안을 내놓을 수 있는 결단력, 국제 정세를 읽을 수 있는 넓은 시야, 엘프들을 아무 말 못하게 만든 외교적 능력......다 좋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대의명분' 이라든가 '남을 배려하는 상냥한 마음' 또는 모두가 납득할만한 '인과관계'같은 썩 중요한 몇 가지가 빠져버린 리더쉽이다. 그래서 모두는 입을 쩍 벌리고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도대체 되긴 뭐가 되었단 말이야?' "잘 생각해 봐요 유신. 어차피 엘핀서스에서 인간이 살기엔 무리가 있잖아요? 엘프들과 인간은 주어진 시간이 다르다고요. 그럴바엔 왕국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왕궁내에서 귀족들과 실랑이를 벌이며 공주님께 검술 지도를 해 주는 것은 유신의 성격상 너무 잔혹한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해요. 저는 찬성입니다." 의외로 찬성하고 나선 것은 세라피였다. 어차피 유신과 힘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100년도 안 된다. 세라피는 유신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100년정도 인간계에 나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말한 것이다. "저......저는 생각 좀 하다 올께요." 두통에 시달리며 도망치듯 방에서 나온 유신은 인적이 없는 숲 속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등에 흥건했던 식은땀이 시원한 숲 속의 바람에 증발하면서 소름이 약간 돋았다. '에고..... 나도 여난이로구나.... 어쩌면 행복한 걸지도...... 이제 어쩌면 좋담.....' 바위 위에 걸터앉은 유신은 습관적으로 첨예의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눈을 감고 가만히 첨예를 뽑아 보았다. '스르릉' 시린 소리를 내며 첨예가 뽑혀 나오는 소리를 듣자 조금은 안심이 되는 듯 했다. 첨예를 가슴 앞으로 모으고 대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가만히 명상을 시작하자 처음 마법계에 왔을 때와는 비교가 안되게 모든 사물이 뚜렷이 파악되었다. 계속된 싸움으로 육체적으로도 상당히 강해졌고, 마법계에도 완전히 적응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키메라와의 일전에서 가브리엘의 봉인이 절반쯤은 풀렸기 때문에 몸 속의 코어가 아주 미약하게나마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파창' 유신이 첨예에 코어를 집중하자 묵빛의 날이 점점 하얀 광채를 뿌리기 시작했다. 검기가 나오는 것이다. '뭐.....이 정도인가? 뿌려댈 순 없어도 검에 입힐 정도는 되는구나......' 키메라와 싸울 때 이 정도라도 검기를 맺을 수 있었다면, 보다 쉽게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굉장하군요. 그런 몸으로 검기를 맺을 수 있다니......" 목소리의 주인공은 미스티였다. 고스트가 자체 내장되어 있는 미스티의 기척은 알아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유신은 조금 놀랐다. "응, 키메라와의 전투에서 봉인중에 한 개가 약해졌어. 넌 요즘 뭐하고 다니길레 안보이냐?" "저도 유신 곁에서 지키고 싶었지만 곁에 가기가 겁나더군요. 세상에 그 많은 미녀, 그것도 엘프들한테 둘러 쌓여 있다니...... 카린님이 보시면 퍽이나 즐거워 하실만한......" "...................그만............. 도대체 겨우 한 달도 못 살은 놈이 빈정거리는 건 누구한테 배운거야?" "뭐 여러 가지로 힘든 삶을 살았으니......." ".......그만 하자...... 머리가 이상해 질 것 같아." 바위 위로 몸을 훌쩍 날린 유신이 6~7m 정도 떨어져 있는 다른 바위를 향해 '차핫' 하는 기합과 함께 길게 일검을 그었다. 첨예의 끝이 음속을 넘어서면서 그 충격파와 함께 검기가 발사되자 제법 큰 바위가 그대로 두동강 나버렸다. "카핫!! 어때!! 이렇게 호흡조절만 잘 하면 이 정도까지도 할 수 있다고." 거기까지 말한 유신은 힘이 다 빠져버렸다는 듯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괴.....굉장하군요. 하지만 지금 유신의 상태로 볼 때 검기를 뿌리는 것은 불가능 한데 대체 어떻게 한 거지요?" 미스티의 푸른색으로 빛나는 눈이 커지는 것은 매우 귀여운 느낌이었다. "하하 연구 좀 했지. 검 끝이 음속을 넘을 때 나오는 충격파 끝에 검기만 살짝 얹은 거야. 굉장히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지만, 위력은 그냥 검기를 뿌리는 것과 거의 비슷하면서 코어는 절반도 들지 않아. 저런 바위쯤이야 우습게 쪼갤 수 있지." "흐흠....그렇군요." 원리를 알자 별 신기할 것도 없다는 듯 커졌던 푸른 눈이 다시 작아졌다. 미스티가 유신이 쪼개놓은 바위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절단면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러더니 별 관심도 없다는 투로 무심히 주먹을 휘두르자 그 바위는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러니까 불만이 뭐야?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별로 없습니다. 단지 카린님을 생각해서라도..... 너무 이 여자 저 여자와 난잡하게 생활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하는 정당하고 건전한 '부탁' 이 있는 정도지요." '그....그게 부탁하는 태도냐!! 망할.....저건 보디가드가 아니라 감시역 이었군..... 으으으...... 카린!!! 두고보자!!!' "내....내가 언제 난잡하게....." 유신이 막 변명하려 하자 예의 미스티의 가슴 부분에 있는 영사기에서 입체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유신이 네 미녀들에게 둘러 쌓여서 온천을 즐기던....... 틀림없이 그냥 보기로는 '즐거워 보이는' 장면이었다. "....생활을....... 했다고....." 목소리가 점점 잦아드는 유신..... 커다란 다리미가 머릿속의 뇌 주름을 펴면서 다니는 것 같았다. "카린님과 통신을 하고 오는 길에 우연히 봤습니다. 초 장거리 통신은 아무리 중차원 엔진을 풀로 가동시킨다 해도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물질계와 연락이 가능해?" "예. 일단은 가능하긴 하죠. 주변 행성의 위치나 우주에 흐르는 마나스트림의 방향을 계산하고, 카린님의 위치와 마법게에서 마나의 흐름이 원활한 곳을 잘 고르면 2~3분 정도 가능합니다. 비록 전 에너지를 다 소진해서 한동안 힘을 쓰지 못하겠지만요." '오는 길에 봤다면 카린에게 고자질하진 못했겠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면 다음 통신 때는 마법계가 이상해 졌다고 카린에게 전해 줘. 마물들이 마치 인간처럼 단합하기도 하고, 가족 애를 보이기도 했어. 언니를 위해 목숨걸고 복수하는 서큐버스라니..... 무슨 오래된 코메디프로 같아. 게다가 오우거 하나가..... 거의 화랑 정도의 코어를 지니고 있는걸 봤거든. 그 정도라면 용전기 정도는 컨트롤 할 수 있을 거야. 위시마스터들이 아무리 셋밖에 안 남았다 해도 마법계는 지금 절대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야." "오우거 건은 잘 모르겠지만, 서큐버스 건은 보고했습니다. 카린님이 알아보신다고 했지만, 통신 시간이 길지 못해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었어요." '말을 돌리는데 성공했닷!! 좋았어!! 이 녀석도 다루기 쉽군' 속으로 쾌재를 부리는 유신.....점점 비겁한 성격이 되가는 지도 모르겠다. "카린은 좀 어때 보여? 건강하지?" "예. 조금 야위셨지만, 건강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쩔 생각이지요? 하누스로 갈 건가요?" 유신은 좋게 생각해서 그런지 미스티의 푸른 눈까지도 정말 순진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아아.... 글쎄.... 잘 모르겠어. 평범하게 농사나 짓다가 이번 정신주기가 다하면 얌전히 신계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권력이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친해질 수 없거든. 근데 왕국으로 가면 아무래도 말려들건 뻔한 일이니까. 게다가 수명은 100년 남짓 남았다 해도 육체는 불멸이잖아. 늙지 않는 몸으로 인간들과 섞여 사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그럼 엘핀서스에 계실 건가요?" "아니.... 뭐라고 해도 일단은 흄에 대해 알아봐야 할 것 같아. 미스티는 어쩔 거지? 카린에게 따로 받은 명령이라도 있어?" "설마요. 저는 단지 유신의 그림자로 이곳에 온 것입니다." "그거 정말 고맙군. 그럼 이제 그만 일행에게 돌아가자. 움직이기로 했으면 후딱 움직이는 게 좋다고. 느그적 거려 봐야 미련만 쌓일 뿐이니까." 유신 일행이 하누스 왕국에 오지도 어느덧 두달여가 되어갔다. 그동안 흄에서 엘핀서스나 다른 곳으로 우회하여 침공해 온 적은 없었지만, 바다를 건너 공격하려는 상륙작전 시도가 세 번이나 있었다. 20일에 한번 꼴로 괴물들이 무력 시위를 벌이니 나라안은 뒤숭숭해지고, 민심은 흉흉해 졌다. 다행이 엘프 마법사들이 강력한 마법 지원으로 적의 상륙은 저지되었지만,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는 적에게 이렇다할 피해를 주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몇 가지의 성과도 있었다. 첫째로 엘핀서스의 빛의 나무와 하누스 왕궁을 있는 대규모의 게이트 마법진이 완성되어 동맹간의 소통이 더욱 원활해 졌다는 것이다. 흄의 침공이 노골적이 되어 가면서 군대의 빠른 이동이 매우 중요해 졌는데, 마법진을 통해서 이러한 유동적인 이동이 용이해 졌다. 또 하나의 큰 성과는 북서쪽 끝에 위치한 후길 산맥의 드워프와 동맹을 맺었다는 것이다. 둘째 왕자인 율리안 하누스가 뛰어난 외교적 능력을 발휘하여 완고한 드워프의 왕을 설득한 덕분에 드워프 특제의 드워프 캐논 2개 병단을 지원 받았다. 덕분에 해안 방어는 마법사들이 없어도 그럭저럭 갖추어 저서 마법병단은 다른 곳으로 돌릴만한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문제점도 많았다. 인간처럼 '국가' 란 개념이 없는 엘프나 드워프들에게 인간식의 동맹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동 작전을 펴는 것도 지휘체계가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때문에 적에게 먼저 공격을 가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고 해안에서 방어하는 것이 고작인 교착상태에 빠져 버렸다. 그동안 유신은 작위를 받지 않은 일종의 손님 자격으로 하누스에 머물렀으며, 세라피와 엘리시엘은 동맹국의 대사 자격으로 왕궁에 머무르게 되었다. 명색이 실버스타군의 전군 총 사령관이었던 유신이 아무리 유배되었다고는 해도 마법계의 작은 나라중 하나인 하누스의 신하로 들어갈 수 없기에 그냥 손님자격으로만 머문다고 했다. 체면 따윈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유신이지만, 이는 그동안 유신을 믿고 따라준 용신화랑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함이다. 용신화랑이라 불리는, 유신이 생각해도 정말 대단한 인간들의 정점에 서 있던 자신이 아리엘 이외의 '인간'에게 머리를 숙인다면, 그건 용신화랑 전체의 자존심이 곤두박질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다른 귀족들이 보기에는 작위를 거절하는 유신의 태도가 결코 곱게 보일 리는 없었다. 왕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런 주제에 왕궁에 머물면서 객원 참모라는 직책 하에 견습기사들의 교육까지 맡아버렸기 때문이다. 작위를 거절했기 때문에 다른 귀족들도 유신을 대하기가 매우 껄끄러운 것도 귀족들이 유신을 싫어하는 한가지 이유였다. 유신이 자기 입으로 '나는 하누스의 국민은 아니다.' 라고 했으니 귀족들이라 해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다른 대륙에서 온 귀족이나 왕족이 신분을 숨기고 여행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설혹 평범한 국민이라 해도, 다른 나라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작위라도 받았으면 이를 빌미로 그보다 높은 서열의 귀족이라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겠지만, 그것조차 깨끗하게 거절해 버렸으니 난감한 노릇이었다. 덕분에 이래저래 눈칫밥을 얻어먹으며 고생을 했던 유신이지만, 특유의 둔감함으로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게다가 이자벨 공주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유신을 싸고돌았고, 그 자신도 왕국에 있기 보다는 견습 기사들의 훈련을 핑계로 야외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좀 지나자 귀족들도 잠잠해 지기 시작했다. 또한 유신이 교육을 담당했던 견습기사들의 솜씨가 눈에 띄게 늘어서 한 달여 만에 정규 기사단에 필적할 만한 수준에 이르자 흄과의 전쟁을 목전에 둔 하누스에서는 귀중한 전력이 될 수 있는 유신을 더 이상 구박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유신은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권력이나 정치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에 귀족들의 뇌리에서는 더 이상 '위험인물'로 분류되지 않았다. 유신은 오늘도 머리 아픈 궁을 벗어나 견습기사들을 이끌고 야외 기동훈련 중이었다. 흄의 무력시위가 잦아지면서 훈련의 강도와 빈도는 더욱 더 늘어서 비상 대기 시를 제외하고는 매일매일이 실전을 방불케 하는 혹독한 훈련의 연속이었다. 유신이 맡은 건 1600 여명뿐인 견습기사들이었지만, 두 달간 유신에게 혹독하게 훈련을 받은 이들은 이미 정규 기사의 실력을 능가하고 있었다. 800명씩 두 팀으로 나누어져 벌써 일주일째 전술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왕궁에서 20km쯤 떨어진 곳의 야외 훈련장에는 이런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땀과 함성으로 초가을에 살며시 찾아드는 추위를 무색케 했다. 전쟁이 목전에 다가오자 평민 중에서 실력 위주로 뽑은, 용병단에 가까운 견습기사들인지라 보급이나 지원은 형편없었지만, 사기만큼은 당장 전쟁터에 끌고 가도 될 정도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편의상 한쪽은 유신이, 다른 한쪽은 미스티가 맡아서 지휘하고 있었지만, 둘 다 직접적으로 훈련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고, 양 팀의 지휘관들에게 조언만 취하는 형태로 훈련하고 있었다. "......이렇게 목진지를 점령하면 싸움이 벌어져도 지형상의 유리한 점을 이용해 적은 숫자로 비슷하게 싸울 수 있습니다. 카뮤조가 우회기동에 성공할 정도만 시간을 끌어주면 앞뒤로 포위하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적들의 지원군이 오는 곳에선 신시아 조가 매복으로 시간을 끌어 두 부대가 합쳐지지 못하게 한 후 각개 격파합니다. 이상 전술 브리핑을 마칩니다." 아직 정식으로 작위를 받지는 않았다 해도, 지휘관급의 견습기사들은 다들 명문 가문의 영애들이다. 그럼에도 유신에게 깍듯이 대하는 것은 그만큼 존경하고 있다는 뜻이다. '키메라를 벤 전사' 라 하여 이들에게 유신은 이미 영웅이었다. "굉장히 잘 짜여진 작전이군요. 하지만 차선책이 조금 부족하군요. 최소한 1개조 정도는 별동대로 빼서 돌발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좋아요. 몇 번 싸워봐서 알겠지만, 적들은 결코 녹녹치 않으니까요. 신시아조의 기동 속도가 빠르니 그쪽을 별동대로 돌리고, 제록스가 차분하니 그에게 매복을 맡겨 두는 편이 낳을 것 같군요. 전쟁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사람만 제대로 배치한다면 반은 이기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뭐 이 정도면 만족할만한 성과가 기대되는군요." "감사합니다." 유신의 말이 끝나자 모두 기립 자세로 일어나면서 감사를 표했다. "질문 있습니다." 고된 훈련으로 허스키하게 쉰 목소리지만, 아마도 목이 쉬지 않았다면 듣기 좋았을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지요? 신시아?" 신시아라고 불린 유일하게 지휘관의 대열에 낀 여자 견습 기사가 손을 번쩍 들었다. "미스티님은 뷰비트랩이나 야간 기습 같은 특수 기술도 가르쳐 준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그런 것 안 가르쳐 주시나요?" 생각하기에 따라선 건방져 보이는 질문이라 남자 견습기사가 했다면 눈총을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홍일점인 신시아의 질문이니 다들 얌전히 경청했다. 그리고 1차 전술 훈련때 미스티의 뷰비트랩은 그만큼 무서웠기 때문에 모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차마 총대를 메고 질문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미적미적 하다가 용감하게도 신시아가 물어 봤다. ".......으음...... 글쎄요? 뷰비트랩이란건..... 상대가 몰라야 효과가 있습니다. 물론 존재 자체가 적의 섣부른 돌격을 막아주고 기동성을 저하시키는 장점도 있지만,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아군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요." 설명이 시작되자 모두들 초롱초롱 눈빛을 빛내며 집중했다. 모두 제대로 씼지도 못해서 꾀죄죄한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열심히 배우려는 자세는 매우 감동적이라 퍽 귀엽게 느껴졌다. 젊은이들 특유의 열성적인 모습을 보자 유신도 기분이 좋았다. "확실히 소규모의 게릴라 전에서는 효과가 있지만, 대규모의 전투를 상정하고 가르치고 있는 여러분들이 배우거나 쓰기에는 부적합하군요. 아마 전쟁이 본격적이 되고, 특수부대의 발족이 필요해 지면 교육하겠지만, 지금 지휘관급이 될 여러분들이 배워야 할 것은 그런 것보다 부대 운용과 작전 수립을 위한 독도법, 지형 관찰법 등이라 생각합니다." 유신의 말에 다들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옳은 말인지라 더 이상 가르쳐 달라고 조르지는 않았다. 다음날 새벽, 가장 피곤하고 힘들어 기습을 하기엔 더 없이 좋을 타이밍이 해가 뜨기 직후이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미스티 팀의 기습으로 다시 훈련이 재계되었다. 유신팀은 다행이 척후병이 졸지 않고 있어서 커다란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보급품의 일부를 빼앗겨서 다들 눈이 뒤집혀져 버렸다. 아침 먹을 시간쯤이 되자 보급품을 빼앗겨 굶게 되어버린 유신 팀이 분노와 경악으로 벌겋게 변한 악귀 같은 눈으로 반격에 나섰다. 보급품을 빼앗긴 상태에서 장기전은 어차피 무리였기 때문에 열 받아서 사기가 오른 상태일 때 끝장을 보려는 것이다. 하룻밤 새에 두 번이나 전투를 치루어도 지치지 않을 만큼 정말로 대단한 체력들이었다. 그만큼 요 두 달간 유신과 미스티에게 닦달 당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늘 배가 고픈 견습기사들인지라 상대의 보급품이라도 빼앗아 먹어야 체력 유지가 되는 것도 목숨 걸고 싸우는 이유가 되었다. 제랄딘의 주공을 맡은 조가 적과 싸우다가 서서히 후퇴하기 시작하자 승기를 잡은 미스티 팀의 대장인 세이람은 총 공세를 취하였다. 배가 고파 전의를 상실한 거라 판단한 세이람은 끝장을 보겠다는 듯 전 병력을 다해 몰아 붙였다. 지형이 좁은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제랄딘의 병력만 돌파하고 나면 설혹 앞뒤로 포위 당한다 해도 각개 격파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협소한 계곡 지형에 이르자 제랄딘팀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계곡 위에 궁병을 배치하고 사격했으면 더 좋았을 터였지만, 워낙 가파른 곳이라 그곳에는 병력을 배치할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제랄딘은 궁수 부대를 자신의 부대 뒤로 배치해 두었다가 전투가 시작되자 후방을 향해 포물선을 그리도록 화살을 날리게 했다. 조준사격이 아니라 명중도는 떨어졌지만, 워낙 병력들이 밀집해 있던 터라 후방의 병력은 적과 검을 대보기도 전에 화살 세례부터 받게 되었다. 가까이에서 난전을 벌이고 있는 세이람 조에겐 아군이 맞을까봐 화살 공격을 하지 못했지만 후방에는 그야말로 적밖에 없었기 때문에 무작정 쏘기만 해도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록 화살촉은 제거했지만 눈이나 급소에 잘못 맞으면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장난 같은 훈련은 무의미한 것이기다. 날을 없엔 철검이나 맞으면 결코 무사할 리 없는 워해머 같은 무기도 사용하는 혹독한 훈련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자 세이람은 부대를 돌리려 하였지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매복해 있던 캬뮤 팀이 후방을 치며 나타났다. 세이람은 입술을 깨물고 죽기 살기로 정면 돌파를 시도했지만, 별동대로 빼 두었던 신시아 팀까지 급히 돌려 방어진을 악착같이 유지하자 결국 항복 할 수밖에 없었다. "와~~~"합세하여 악착같이 방어선을 유지하자 결국 항복 할 수밖에 없었다. 유신팀의 함성이 계곡을 메아리 쳤다. 미스티는 비록 이번 전술훈련에선 졌지만 특별한 불만은 없었다. 세이람이 지휘한 자신의 팀 역시 만족할 만하게 움직여 줬기 때문이다. 1600명 정도의 적다면 적은 수의 훈련이었지만, 넓은 안목으로 본다면 이들이 모두 지휘관급으로 성장했을 때는 틀림없이 흄과의 전면전에서 대군을 이끌어 줄 훌륭한 고급 장교가 될 것이다. 새벽 때부터 시작한 훈련은 해가 산 끝에 걸려 노을을 뿌려대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끝났다. 오늘부터는 '푸른달의 날'이 시작되니까 강행군을 한다면 성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만장일치로 야외 숙영을 택했다. 아직 나이 어린 견습기사들인 만큼 딱딱한 궁에서 기사수업을 받는 것 보다 이렇게 하루라도 밖에 더 나와있는 것이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벌써 두 개의 달이 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면 두 개가 더 떠올라 대낮처럼 밝은 장관을 연출하는 '푸른 달의 날'이 앞으로 일주일간 계속된다. 평소에는 2개가 떠 있지만, 일년 중 이맘때면 달이 네 개나 보이는 것이다. 마법계의 사람들이야 모르겠지만, 이 네 개의 달에는 각기 다른 위시마스터가 다스리는 또 다른 마법계가 존재한다. 전 우주의 가능성을 미리 점쳐보기 위한 여섯 개의 실험장이 이렇게 붙어서 존재하면서 서로 달처럼 비추어지는 것이다. 숙영이 결정되자 모두 환호를 지르며 텐트를 치거나 물을 구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개중 몇 명은 사냥을 해 와서 주린 배를 채우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지만, 일주일째 전쟁연습을 한답시고 뒤집어엎다 시피 소란을 피운 이 근처에 제대로 된 사냥감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물고기 정도야 잡아올지도 모르는 일이라 기대 반 체념 반의 심정으로 사냥조를 보냈다. 지휘관급 견습기사들은 한 막사에 모여서 오늘 있었던 훈련에 대해 토의하고 있었다. 모두들 이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은 어떤 거대한 생명체가 살아서 꿈틀대는 것처럼 기운찬, 생명력 넘치는 감동을 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유신이 숙영지 주위를 돌며 모두를 격려하고 있을 때 미스티가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좋은 녀석들입니다. 순수하고...... 뭐든 열심히 배우는 군요." "응, 보고 있으면 나도 기운이 절로 난다니까. 근데 미스티, 무슨 생각으로 뷰비트랩이나 야간 특수전 같은걸 교육 한 거야? 저 녀석들은 모두 지휘관 급이 될 거라고. 게다가 아직 전쟁 기술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마법계에서 그런걸 잘못 가르치면 앞으로의 마법계에 어떤 나쁜 영향을 줄지도 몰라." "고급 지휘관이 된다 해도 그런 기본적인 것을 알고 있으면, 적의 함정에도 쉽게 빠지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였습니다. 적과의 싸움에서 써먹으란 의도가 아니라 적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는 취지로 교육한 것인데 조금 전달이 잘못된 것 같군요." "흐흠.....그럴 수도 있군....." "낮의 제랄딘이 썼던 전술은 정말 재미있더군요. 2진이 우회기동을 성공할 때까지 본진이 버티면 이기는 것이고, 무너지면 각개격파 당한다는 죽기살기 식의 전법. 지휘관으로서는 그다지 칭찬할 수 없는 방식이지만...... 자세히 보면 유신이 제녹스 방어선을 완성하기 위해 썼던 전술의 축소판이더군요." "알고 있었어?" "뭐, 제 데이타 뱅크에는 여러 가지 전사가 저장되어 있으니까요. 성계대전에서 아스모데우스군이 공세를 펼칠 때 발목을 잡기 위해 썼던 전법은 전술 교과서에 실려도 좋을 만큼 깔끔했습니다. 실패했다면 비프로스트까지 각개격파 당하면서 계속 밀렸을 테지만......" 둘이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한가하게 거닐고 있을 때 아래쪽 숙영지에서 '와~아' 하는 환호성이 들렸다. 보급 마차가 도착한 것이다. 맨 앞에는 왕실의 문장이 새겨진 왕가 전용 마차가 있었고, 그 뒤로는 짐 마차가 세대나 따라 오고 있었다. 미스티와 마주보고 씨익 웃은 유신은 마차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유신~~" 선두 마차의 마부석 옆에 앉아 있던 세라피가 멀리에서도 유신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고 있는게 보였다. 안에서 있던 엘리시엘도 창문을 통해 지붕 위로 올라가더니 손을 흔들었다. 마차는 느릿느릿 덜컹거리며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작은 사슴처럼 가벼워서 꽤나 위험한 동작으로 지붕위로 올라갔음에도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누가 왔나 봐요, 모두들 놀랄 껄요?" 엘리시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자벨 공주가 머리를 마차 밖으로 내밀었다. 모두들 동작을 멈추고 공주에게 예를 표하자 이자벨 공주도 손을 들어 답해 주었다. "모두들 수고하시는군요. 여러분들을 보니 하누스의 미래가 정말 밝을 것 같군요. 감사의 표시로 먹을 것을 좀 준비했습니다." "와아~~ 공주님 만세~~" 늘 배가고픈 이들에게 이것 이상의 큰 선물은 없을 것이다. 세라피와 엘리시엘이 가끔 먹을 것을 싸 들고 오기도 했지만, 1600여명이 되는 이들이 나누어 먹기엔 턱도 없이 부족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짐마차 세 대 분량의 음식이라면 아무리 뱃속에 아귀가 든 이들이라 해도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훈련에 참관한 공주답게 완전 무장을 갖춘 이자벨 공주가 유신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려서자 견습기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마차에 아귀아귀 달라 붙어 음식물을 내리기 시작했다. "휴~~ 언제 봐도 건강하네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묘한 뉘앙스의 말이었지만, 기분이 좋은 유신은 칭찬으로 받아 들였다. "하핫. 모두들 젊으니까요." "참, 이번 전술 훈련은 언제 끝나나요?" "예, 오늘로 사실상 끝났고, 내일은 복귀할 생각이었습니다." "잘 되었군요. 그럼 내일모래는 성에 좀 들러 주세요." "성에..... 말입니까? 그....글쎄요? 전 성은 별로.....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유신의 말에 공주는 조금 삐진 건지 실망한 건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 생일입니다. 정 싫으시다면 할 수 없지만....." 당연히 거절 못하리란 걸 이 교활한 공주가 모를 리 없지만, 그녀의 고양이 같은 프라이드는 '빈말' 이라도 거절의 여지를 주었다. "어머....무슨 얘기가 그렇게 재미있어? 보나마나 이자벨이 또 유신에게 뭔가 곤란한 부탁을 하는 거 아냐? 저렇게 유신이 쩔쩔 매는걸 보면....." 엘리시엘이 웃으며 다가와 이렇게 농담을 건네 보았다. 인간계에 오래 나와 있던 엘프인 만큼, 제법 인간 비슷한 농담도 할수 있었지만, 그녀가 이 농담을 제대로 이해하고 쓰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농담을 이해할 정도로 인간화되지 못한 엘프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 왔다. "에......? 공주님이 그렇게 유신을 곤란하게 해요?" 순진한 세라피의 난처한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그만 모두들 웃고 말았다. "히잉..... 모두 이상해.... 왜 내가 이야기 하면 자꾸 웃지? 이래뵈도 내가 제일 연장자라고......" 언젠가 인간은 연장자를 우대한다는 이야기를 엘리시엘에게 들었던 것을 기억해 낸 세라피가 당장 써먹어 봤지만 워낙 귀엽고 목소리까지 투정부리는 아이처럼 어려 보이는 그녀라 별 효과 없이 주변의 웃음만 자아 낼 뿐이었다. "아니에요 세라피. 세라피가 너무 귀여워서 그래요." 세라피가 계속 불퉁거리자 유신은 마치 귀여운 동생 대하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니 번쩍 안아 일으켰다. "꺄악" 세라피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바동거렸지만 유신은 아랑곳 않고 그녀를 잡고 빙빙 돌면서 말했다. "우~~와!! 세라피, 이렇게 가벼워서 어떻게 해요? 바람에 날려 가겠네......" "에?...... 하지만 바람의 정령이 절 다치게 할 리 없는걸요...... ?" "하하 그냥 인간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농담이에요. 우리 춤춰요." 역시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멍한 표정의 세라피지만 춤추자는 말에 당장 기쁜 표정이 되어 유신과 즐겁게 춤추기 시작했다. 유신과 세라피가 춤추기 시작하자 몇몇 견습기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노래를 하거나 우울하게도 남자들끼리 춤을 추기도 했다. 하지만 다들 흥에 겨워 있으니 여자가 적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보기 흉하지는 않은 즉석의 파티가 시작되었다. 이런 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엘리시엘에게 이자벨이 말을 걸었다. "참 즐거워 보이네..... 하지만 요새들어 세라피의 어리광이 부쩍 늘은 것 같지 않아? 나이도 500살 가까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꼭 사이좋은 오누이 같아......엘리??" "아!...응?....뭐라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해? 말을 걸어도 모르게...... 무엄하긴......" 이자벨 공주가 어이없다는 듯 눈살을 조금 찌푸리고 물었다. "이자벨, 인간이 엘프보다 우월한 종이라고 생각해?" "그게 무슨 소리야?" "엘프가 인간과 함께 있으면 인간화 된다는 것은 종으로써 엘프가 인간보다 못하다는 뜻일까?" "무슨 소리야? 엘프는 인간보다 마나를 다루는 능력도 탁월하고 훨씬 오래 살고 용모도 아름답잖아. 번식력이 좀 약하고 완력이 떨어지는 것 외엔 엘프가 지상의 모든 지성체 중에 가장 완벽에 가깝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라고." "하지만 이자벨의 말처럼 세라피 언니는 엘프중에서도 어리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야. 게다가 숲에서만 살아온 전형 적인 엘프지. 하지만 인간계에 나오고 단 두 달여 만에 너무 많이 변했어." "변하다니? 내가 보기엔 그대로 인데?" "이를테면..... 그래, 어리광을 부리는 거. 엘프는 모든 일을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해. 근데 세라피 언니를 보면 가금 떼를 쓰거나 투정을 부려. 마치 인간 소녀처럼....." "글세? 하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좋지 않아? 누군가에게 투정이 받아 들여 지는 것만큼 신나는 일도 없지. 그만큼 소중하게 여겨진다는.... 일종의 확신을 얻을 수 있잖아." "그럴.....까?" "하긴, 유신은 성격 자체가 무른 것도 있지만....그래도 세라피에게 너무 약한 것도 사실이야. 견습기사들은 그렇게 혹독하게 다루면서....." "견습기사들과 비교할만한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이자벨이 어처구니없게도 산 고릴라 같은 견습기사들과 유리인형 같은 세라피를 비교하자 관점이 자신과는 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 엘리시엘은 황당한 심정으로 무릎을 모아 끌어안고는 혼자만의 세계로 침전해 버렸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당혹스러운 감정이 혹시 질투라면 나 역시 세라피언니 만큼 심하게 인간화 된 것일지도 몰라..... 안 그런 척 꾸미고 있는 것은 가식일까? 아니면 엘프로서의 자존심? 하지만 그것 역시 인간에 가까운 감정이잖아....' 이런 복잡한 엘리시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한밤의 작은 축제는 점점 더 열기를 더해갔다. 화려하게 빛의 춤을 추는 샹들리에, 그리고 그 샹들리에에 광원의 요정을 공급해 주는 것은 황송스럽게도 빛의 마법인 컨티뉴얼 라이트였다. 파티장은 '빛의 홀'이란 별명처럼 너무 밝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적당한 양의 빛을 내어 주는 마법의 빛과 아름답게 차려 입은 귀부인들, 멋지게 정복을 갖추어 입은 기사들, 그리고 지체높은 귀족들이 어우러져 그 화려함이 더해졌다. 공주의 24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인간들은 물론 엘핀서스에서도 두 명, 물론 세라피와 엘리시엘이다, 이 참가했고, 후길산맥의 드워프도 네 명이나 참가했다. 드워프들이 공주의 생일 파티를 위해 짧은 다리로 그 먼 후길산맥에서 내려 온 것은 물론 아니고, 드워프 캐논의 교육과 수리를 맡기 위해 머물고 있던 드워프들을 초대한 것이지만, 인간의 생일파티에 무뚝뚝한 드워프가 참석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 외에도 주변 군소왕국의 유력한 인사들까지 참석했기 때문에 '대 흄 방어전선'을 구축하는 동맹간의 회동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실제 하누스 왕국에서 노린 것도 그런 선전 효과이기 때문에 뒤숭숭한 나라의 분위기에도 이런 화려한 파티를 준비한 것이다. 유신에겐 이런 파티가 생소한 것은 아니었지만, 경험이 많다는 것과 익숙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이다. 그래서 어설픈 얼굴로 '움직이는' 보릿자루가 되어 넓은 홀을 배회하고 있었다. 갑옷을 벗을 수 없는, 아니 갑옷을 벗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미스티야 당연히 파티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신은 혼자 서성대었다. 세라피와 엘리시엘은 옛날의 기사 문학의 폐단으로 엘프와 사랑에 빠지는 로맨틱한 환상에 사로잡힌 젊은 기사들에게 둘러 쌓여 있었고, 이자벨은 파티의 주인공인 만큼, 각국의 중요 인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유신도 나름대로 파티를 잘 즐기고 있었다. 혼자 있어도 그다지 외로움을 타지 않는 성격인데다 재미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 속에 어색하게 끼어드는 것보단 차라리 이렇게 홀로 구경하는 게 맘 편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파티장 안에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생소한 음식들이 많았고, 유신은 드워프들 틈에 슬쩍 껴서 그것들을 집어먹는데 여념이 없었다.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 하는 그이지만, 가끔 미지에의 도전이 두려울 때도 있다. 지금 유신의 눈 앞에 있는 요리처럼..... 흐물텅 흐물텅 해 보이는 해물로 추정되는 요리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양념과 어쩌면 캐비어 일지도 모르는 검고 동글동글한 알이 얹어져 있는 그로테스크한 요리를 보며 과연 도전할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목을 살짝 덮는 짧고 강렬한 느낌의 붉은 머리를 한 여자가 유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는 눈이 마주치자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숙녀가 먼저 인사를 하게 하다니...... 아무리 제가 남자 같다고 해도 좀 너무하네요." 허스키한 목소리지만 단정한 이목구비나 커다란 눈동자는 결코 남자 같은 외모는 아니었고, 더욱이 기억 속에도 없는 얼굴이라 그만 유신은 혼란에 빠졌다. "에.....죄송합니다. 제가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닌데..... 실례지만 누구신지....." 여자는 잠시 어처구니없다는 듯 단아한 눈썹의 한쪽 끝을 말아 올리고 가만히 유신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신시아, 여기서 뭐하는거야? 카뮤랑 모두가 저쪽에서 기다린다고. 어? 유신 선생님도 오셨군요." 견습기사의 정복을 입은 제랄딘이 아는 척을 하자 유신은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이 숙녀분이 말괄량이 신시아라고?" 너무 큰 충격 때문일까? 마음속으로만 해야 했을 말이 그만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것도 꽤 큰 목소리로...... 신시아는 단숨에 사탕을 세 개쯤 문 것만큼 볼을 부풀렸고 제랄딘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샹들리에에 박힌 보석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두손, 왕사탕을 두 개쯤 물고 있는 것만큼 부푼 볼, 빨개진 얼굴, 그야말로 삐진 소녀의 모든 아이템을 두루 갖춘 신시아가 이 엄청난 수모를 어떻게 해야 다시 말로써 갚아줄 수 있을지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였다. "꺄~~악~~" 긴 비명소리가 파티장의 즐거운 분위기를 단숨에 깨뜨리고 말았다. 강대한 마나의 흐름을 느낀 유신이 재빨리 식탁 위에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잡히는 대로 뒷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비명소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비명의 중심에는 다섯 명의 벌거벗은 건장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발 밑에는 당연하다는 듯 조각난 '인간이었던 것'의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뭐....뭐야?' 용제와 오랜 시간 일심동체나 다름없는 파트너로 지내온 유신은 눈앞의 남자들이 뿜어내는 익숙한 기운에 아연해 버렸다. '이럴 수가.......이 기운은 드래곤?' 아무런 표정도 없는 마치 시체처럼 보이는, 하지만 시체라고 보기엔 붙어 있는 근육이 너무 무지막지한 '남자처럼 보이는 것'의 입술이 움직이자 도저히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위엄과 공포가 섞인 소리가 빛의 홀을 울렸다. "처음 뵙겠소. 유신 더 실버스타." 마법계의 언어가 아닌 고대 용언이었기 때문에 유신 밖에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 '낯 설은 존재들' 이 결코 호의를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곳에 있는 모두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마룡인가? 나에게 적의를 품은걸 보니 정상적인 용은 아닌 것 같군. 하지만 어떻게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았지?"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기에 소란스런 파티장 안에선 아무도 들을 수 없었을 터이지만 이 다섯 존재는 확실히 알아들은 것 같았다. "내 이름은 그라테우스. 고귀하신 분께서 당신의 목숨을 원하오, 한달 주겠소. 그 안에 나의 레어로 찾아오시오." "거절한다면?" "그렇다면 용아병 들이나 다른 마수들과 레어의 가디언들을 무차별 적으로 하누스 왕국에 풀어놓겠소. 게이트 마법을 쓸 수 있는 나로서는 너무나 손쉬운 일이지." 용아병들이 갑자기 파티장 한 가운데 나타난 것만 봐도 그라테우스가 게이트 마법을 쉽게 쓸 수 있다는 건 뻔한 일이다. 아무리 위시마스터가 없다 해도 마법의 생명체인 용이라면 그 정도쯤은 손바닥 뒤집기보다도 쉬울 것이다. 따라서 지금 그라테우스가 하고 있는 협박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 날 수도 있는 '현실'인 것이다. "용아병들은 내 작은 선물이오. 그 정도도 쓰러뜨릴 수 없다면 나와 싸울 자격도 없는 것이니 지금 죽는 편이 나을 거요. 내 레어까지 찾아온다면 결코 편히 죽지는 못할 테니까. 그럼 즐거운 마음으로 '우주 최강이었던' 존재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겠소." 말을 마친 용아병의 몸에서 그라테우스의 기운이 사라지자 파티장에 있던 사람들은 드래곤 피어에서 벗어나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었다. 여자들이나 노인같이 싸울 수 없는 사람들은 파티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기사들도 무장이 없으니 달아나지도 못하고 덤벼들지도 못한 형태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왕실 수비대가 곳 출동하여 다섯 명의 용아병을 포위하였고, 로열가드들도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용아병은 수십 명에게 포위 당한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유신만을 노려보고 있었고, 그건 유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놈들 무기를 즉각 버리고 투항하라!" 병사들을 이끄는 책임자인 듯한 기사가 멋진 바스타드를 뽑아들며 외쳐 보았지만 홀 안의 누구도, 심지어는 그의 부하들까지도 저 침입자들이 그 말에 귀기울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용이병이라면 용이 자신의 이빨 뼈로 만드는 골렘 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고렘보다 지능이 훨씬 높고, 움직임 역시 야수만큼이나 빨라서 골렘따위와 비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취향에 따라 오크나 엘프의 모습으로 만들 수도 있을 터이지만 주로 근육질의 인간의 형상일 경우가 많다. 그래야 이간세상에서도, 예를 들면 지금 같은 경우, 쓰기가 편리하기 때문이다. 용이 수면중이거나 오랜 시간 레어를 비워 둘 때 자신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 풀어두는 경우가 많다. 용의 투쟁력의 상징인 이빨 뼈로 만든 만큼 용아병 역시 무시무시한 투쟁력과 자의식 역시 엄청나게 강하다. 이런 특성 때문에 자신 이외의 다른 용아병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틈만 나면 서로 죽이려 들 정도이지만, 공통의 임무가 있다면 서로 협력하기도 한다. 마법을 부리거나 트롤처럼 부서진 육체를 재생하지는 못하지만, 힘은 오우거에 필적하고, 용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은 발군의 전투센스로 모든 전투기술을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다. 용이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이리저리 습득한 검술을 마법으로 주입시키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100%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기 때문에, 그 전투 기술은 수십 년 간 외길인생으로 검만을 고집해온 늙은 기사 못지 않게 노련하다. 극한까지 검술을 익힌 오우거와 싸운다고 생각해 보라. 키메라와 싸우는 것 이상으로 암담한 일이다. 지금 그런 무시무시한 용아병이 다섯이나 난입해 온 것이다. '미스티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유신이 어찌 싸울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견습기사나 하인들이 파티장에 들어가기 전에 맡겨 두었던 기사들의 검을 재빠르게 나누어주는 것이 보였다. 화려한 다른 대형 검들 속에서 좀 초라해 보이지만, 잘 보면 심플하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풍기고 있는 유신의 첨예도 보였다. 하지만 유신의 첨예는 저 괴물들의 반대편에 있었다. 용아병들이 얌전히 보내줄 리 만무한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유신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장창을 앞으로 내민 병사들이 다섯 명의 용아병을 포위한 채 서서히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용아병의 눈은 유신을 떠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첨예 쪽으로 다가가며 함부로 허점을 보여줄 수 없었다. 사실 용아병이 이렇게 유신만 노려보고 있는 것은 특별히 유신을 보고 긴장해서나, 아니면 딴 짓을 못하게 감시하려는 의도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황당함 때문에 좀 멍청해진 상태로 '그냥'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용아병의 관점으로는 마나와 코어의 흐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유신은 그야말로 죽일 가치조차 없어 보이는 연약한 꼬맹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고한 주인의 명이 있었으니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다섯의 용아병은 천천히 자신들의 병기를 세웠다. 이를 저항의 의사로 판단한 경비대장이 노호성을 지르며 돌격 명령을 내렸지만, 용아병의 눈에도, 그리고 유신의 눈에도 지금 돌격하는 병사들은 '없는 것', 과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의 창 끝이 마치 사나운 야수의 이빨처럼 용아병을 향해 덮쳐 가는 순간 가장 선두에 있던 용아병의 참마도가 한바퀴 회전했다. 그러자 수수깡 부러지듯 창들은 손잡이 부분만을 남겨둔 채 하늘로 날아 올랐고, 병사들이 사태를 채 파악하기도 전에 참마도는 두 번째 죽음의 회전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에 수수깡 신세가 되는 것은 방금 공격을 감행했던 용감한 병사들의 육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를 놓치지 않고 유신이 재빨리 주머니 속에서 아까 챙겨 두었던 나이프를 용아병의 눈을 향해서 집어 던졌다. 그러나 용아병 역시 발군의 실력자답게 휘두르던 검은 회수하지 않고 왼손만 들어 나이프를 받아 내었다. 그때 유신은 이미 참마도의 회전 범위에 들어가게 될 병사를 차서 넘어뜨린 뒤 그 반동으로 날아 오르고 있었다. 만약 유신이 던진 나이프에 그 용아병의 균형이 흩어지지 않았더라면 검의 괴적을 살짝 바꾸어 주는 정도만으로 다른 병사들을 노렸거나 넘어진 병사를 추적해 두 쪽 내버렸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주인의 명령을 따라 유신을 참살하기 위해 하늘에 떠 있는 사이에 공격을 가하였을 것이다. 첫 번째 용아병을 봉쇄했지만, 용아병은 다섯이나 있었다. 남은 네 명이 휘두르는 참마도가 유신을 향해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공중에 떠 있는 유신으로썬 피하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날아 오른 유신은 동강나서 하늘에 흩어진 채 낙하 준비를 시작하던 병사들의 창 중 두 개를 각각 손에 들고 참마도 사이에서 그야말로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창 토막을 마치 단검처럼 짧게 잡고는 참마도의 넓은 검신을 밭침삼아, 부러진 창대 부분은 지팡이처럼 쓰면서 몸을 밀어내는 방법으로 칼의 산을 빠져나간 것이다. 이런 서커스 같은 공방전이 부러졌던 창이 땅에 떨어지는 짧은 시간동안 일어난 일이니, 보통 사람의 눈에는 툭탁투닥 하는 소리만 겨우 들렸을 뿐, 보이지도 않았다. '후두둑.....챙그랑' 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용아병들과는 조금 더 멀찍이 떨어진 곳에 유신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한아름 칼을 안고 있는 견습 기사가 있었다. "고마워요." 유신이 인사하며 여유 있는 동작으로 그 중에서 자신의 첨예를 골라 허리에 찼다. 한아름 안고 있던 칼 중에서 한 자루가 빠지자 다른 칼들이 주르륵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지만, 넋이 나간 그 견습기사는 알지 못했다. '챙그랑' 금속성의 검들이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적에 빠진 홀 안을 울렸다. 두 번째 생명으로 여겨지는 칼을 떨어뜨린다면 유신이 있던 물질계에서는 군법회의 감이다. 이곳 마법계에서도 귀족의 물건을 떨어뜨린 것이니, 만약 그 칼의 주인이 성질 더러운, 그리고 높은 신분의 귀족이라면 견습기사의 목을 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방금 전의 격전에 모두 넋이 나가 있는 상태라 사색이 된 얼굴로 떨어진 검을 허겁지겁 줍고 있는 그 견습기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신과 용아병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솔직히 용아병들은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아무 힘도 없어 보이고, 실제로 코어나 마나의 흐름도 미약한 자그마한 인간이 보여준 지금의 묘기는 자신들의 천부적인 전투센스 보다도 훨씬 윗줄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지금까지의 무성의하고 시큰둥한 태도와는 달리 용아병의 무표정한 얼굴에 악마와 같은 광소가 떠올랐다. '강한 상대다.', '가치 있는 싸움이다.' '죽일 테다.' '내가 더 강하다.' '슈칵' 참마도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유신에게 날아들었다. 검의 크기와 중량을 생각한다면 '붕붕'하는 소리가 나야 할 테지만, 워낙 빠른 공격이라 레이피어가 공기를 찢을 때 나는 가벼운 바람소리만이 들렸다. 유신은 용아병의 검 끝이 그의 몸을 갈라지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상체만을 살짝 비틀어 피하며 선두의 용아병에게 바짝 붙었다. 창 10여자루를 수수깡 부러뜨리듯 날려버리는 용아병의 힘을 보았기 때문에 어설프게 너무 일찍 피하다가는 용아병이 무식스런 완력으로 강제로 검의 괴적을 바꾼다면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콰쾅' 참마도는 워해머로 내리 찍었을 때야 들을 수 있을법한 소리를 내며 대리석 바닥에 30cm 가까이 파고들었다. 용아병은 가슴에 바짝 붙은 유신이 명치를 향해 무릎 찍기를 시도하자 왼손을 들어 방어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속임수였고 용아병이 방어를 위해 들어 올린 팔을 짚은 채 그대로 공중 턴으로 그 용아병의 머리 위로 넘어가 버렸다. 유신이 좋은 찬스를 살리지 못하고 피하자 용아병은 어리둥절해 하며 검을 뽑아내려 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시원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용아병은 눈꺼풀이 무거워 지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면서 지면이 가까워졌다. 그에게 달라붙어 있던 유신을 베기 위해 다른 두 용아병이 왼쪽과 오른쪽에서 각각 참마도를 휘둘렀기 때문이다. 허리 위로 X 자 모양으로 네토막이 난 용아병이 무너져 내렸다. 비스듬하게 빛의 홀 바닥에 박힌 참마도의 손잡이에는 주인을 잃은 한 손이 그 어깨 부분까지 매달린 채 꼭 붙어 있었고, 새하얀 빛의 홀의 대리석 바닥은 피의 추상화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노련한 왕궁기사들이라면 몰라도 풋내기 견습기사들은 이렇게 까지 참혹한 광경을 보았을 리 없다. 견습기사들조차 하얗게 질리는데,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귀부인들은 토악질을 하거나 그대로 실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 유신의 눈에는 이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생사의 기로에 선 것이다. 한가지 다행한 점이라면 용아병들은 유신을 칠 기회가 있다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른 용아병을 무시하고 덤벼든다는 점이었다. 남아있는 네 명의 용아병들이 컴비네이션 공격으로 공격한다면 잠시도 버티기 힘들겠지만, 이렇게 따로 따로, 아니 오히려 서로를 방해하며 덤벼들고 있으니 오히려 1:1로 상대하는 것 보다 편했다. 용아병들도 서로의 거대한 참마도가 한 명을 집중공격하기에는 적합한 무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파상공격을 하여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보다는 서로를 처 죽일 기회가 있다면 사양치 않는 방향으로 전투의 흐름을 잡았다. 결국 5분 정도 검격을 주고받자 용아병의 수는 둘밖에 남지 않았다. 그중에 유신의 첨예에 목숨을 잃은 것은 한기밖에 없었다. 하지만 용아병의 숫자가 줄자 이때부터가 문제였다. 방해하는 다른 용아병들의 참마도가 없어지자 공격이 몇 배나 날카로워 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우거 같은 괴력의 검을 막느라 이미 유신은 뼈마디가 삐걱거리고 숨은 턱까지 차 올라 있었다. 용아병들도 서서히 나름대로의 공격 규칙을 가지고 번갈아 가며 파상 공격을 해 왔기 때문에 당장 목이 굴러 떨어져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다. 장기인 근접전을 벌이기에는 체력이 너무 떨어져 워해머나 다름없는 용아병의 발차기나 주먹을 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계속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공격과 수비를 취하는 손발이 어지러워지면서 일방적으로 밀리던 유신은 어느새 홀의 한쪽 벽까지 내 몰리고 말았다. 용아병들은 그 거대한 참마도를 높이 치켜들며 서로 경쟁하듯 자신의 검을 자그마한 유신의 몸에 쑤셔 박기 위해 일갈성을 내질렀다. 그때 석궁 하나가 날아와 넓은 용아병의 등판에 박혔다. 기사의 갑옷도 뚫을 수 있는 것이 석궁인데도, 용아병의 등 근육이 얼마나 단단한지 겨우 5cm 가량밖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용아병은 잠시 움찔했지만, 그까짓 것 상관없다는 듯 올려진 검을 내려치려고 했다. "백설조차 얼리는 빙계의 정령이여, 지금 내 손에 깃들어 나를 가로막는 자의 자유를 구속하라. 아이스 제일" 세라피가 그 순간을 노치지 않고 용아병에게 빙계 바법을 걸었다. 하지만 워낙 마법 내성이 높은 존재라 검을 들고 있던 오른쪽 몸통의 절반만이 겨우 얼어 붙었을 뿐이다. 그러자 용아병은 별 관심도 없다는 듯 참마도를 왼손으로 고쳐 잡고는 다시 내리 찍으려 하였다. 그때 얼어버린 그의 몸을 향해 병사들의 석궁 세례가 쏟아졌다. 이 공격으로 얼어버린 오른쪽 몸이 완전히 산산조각 나자 용아병도 서서히 무너지고 말았다. '마지막 용아병은?' 유신이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최후의 용아병을 찾았지만, 커다란 그 덩치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 따위는 돌보지 않으면서도 강한자와 싸우고 싶어하는 용아병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지금쯤 유신의 몸에 마지막 용아병이 내지른 참마도가 들어와 있어야 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 주위를 둘러보던 사람 중 하나가 빛의 홀에는 어울리지 않는 그로테스크한 조각이 새로 생긴 것을 보고는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렸다. 150kg 이상 나갈 것 같은 덩치의 용아병이 거대한 배틀엑스에 꿰어 진 채로 유신이 있던 곳에서 6~7m는 떨어진 벽 위에 장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빛의 홀 입구에는 어느새 유신의 위험을 알아 차렸는지 미스티가 와 있었다. "마....맙소사...미스티가 한거야?" 예의 엘핀서스에서 전투에서 미노타우러스에게서 빼앗은 저 배틀액스는 무게만도 40kg 이상 나가는 엽기적인 물건이다. 그걸 빛의 홀 입구에서 던져서 150kg의 용아병을 꿰어 다시 6~7m를 날려버릴 만한 괴력.....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배틀엑스라면 머리 부분이 무거워서 똑바로 날아가지 않는다. 회전하면서 점점 위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기에 맞은 용아병은 저렇게나 높은 곳에 매달려 마치 인간을 우롱하는 듯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런 다루기 어려운 물건을 사용해 '용아병과 도끼'라는 제목의 조각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아무리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과 그것을 바쳐줄 신경구조를 가진 퍼펫이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단순한 힘의 문제가 아니라 도끼를 다루는 미세한 컨트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곧이어 병사들과 로열가드들을 비롯한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더욱 난장판이 된 빛의 홀을 뒤로하고 유신은 슬금슬금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유신.....그게 무슨 말이에요?" 밖에는 어느 샌가 따라 온 세라피와 엘리시엘, 그리고 미스티까지 어미 닭 쫒아가는 병아리처럼 줄줄이 따라 나왔다. 방금전의 사태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엘리시엘이 물었다. "아까 그건 용아병 아니야?" 용족의 기운을 모를 리 없는 엘프다. 더욱이 그라테우스라면 5년전 엘리시엘이 몸담고 있던 모험가 파티를 산산조각 낸 장본인이기에 더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으...응, 용아병.....이야....." "자세히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유신을 오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대체 그 용과는 무슨 관계가 있지요?" 고대 용언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는 세라피........나이를 헛 먹은 게 아니다. "그래서.....한번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아." "마룡의 산으로? 제정신이야?" 엘리시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녀는 그라테우스와 한번 싸워 본 적도 있었고, 용의 공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유신이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라테우스는 강하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용은 일반적인 생물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강하고 자시고를 떠나 용을 제외하고는 어떤 '생물'도, 용을 이긴다는 건 불가능하다. 일반적인 검은 물론 어지간한 좋은 마법검이나 미스릴로 만든 검으로도 용의 비늘에는 상처를 줄 수가 없다. 육체적으로도 강력해서 그 힘은 지상의 어떤 생물보다도 강하다. 근육 자체가 질기고 단단해서 비슷한 덩치의 다른 몬스터보다도 월등히 힘이 세다. 또 천부적인 마법적 재능과 무한이나 다름없는 마나의 지배력으로 9써클 궁극의 마법을 펑펑 써댈 수 있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전투에 대한 열망과 끈임 없이 강한 것을 추구하는 성질이다. 한 예로 성계대전에서 용의 유전자를 복사한 후 배양하여 개체 수를 늘리려는 실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배양된 용은 아무리 기본적인 마력이나 힘이 모체와 같다 하더라도 본체인 용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모체가 되었던 용이 자신의 클론 12마리와 싸워서 이겨 버리는 괴력을 발휘하자 이 실험은 중지되고 말았다. 투쟁력이나 전투센스가 본체만큼 안 되는 클론은 그 정도 밖에 힘밖에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용의 전투센스는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뜻이다. 끝으로 블레스. 하루에 세 번 밖에 쓸 수 없다는 용의 필살기인 이 브레스는 마법계에 현존하는 어떤 마법이나 물리적 도구로도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온순하고 어린 용이라 해도, 해츨링 상태만 벗어나면 이런 기본적인 최강의 생물로서의 여건은 모두 갖추기 때문에 고대에 존재했다는 거인족이나 이계의 마족 중에서도 최상급 마족이 아니라면, 용과 싸우는 것은 가장 확실한 자살 방법이다. "제발 다시 생각해 유신...... 나 다시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라테우스에게 죽는 사람이 나오는 것을 원치 않아......" 5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나며 엘리시엘의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엘리시엘이 속해 있던 모험가 파티는 정말 뛰어난 실력자들만 모여 있는, 그야말로 대륙의 전설이 될만한 파티였다. 실제로 수많은 모험을 하며 대륙 전체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고대의 던전을 탐험하여 많은 마법 무구와 선조들의 지혜가 적힌 마법서를 발견했고, 감히 인간이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몬스터들의 서식지를 포함해 아직 알려지지 않은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라일로스대륙 지도의 공백 부분을 없애는 데도 일조 했다. 수많은 모험담을 남기며, 음유시인들을 열광케 한 이들은, 어쩌면 그 때문에 조금 교만해 진 건지도 모르겠다. 파티의 리더 메티스는 운이 좋게도 던전 탐험 중에 용의 뼈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용의 뼈로 드래곤 슬레이어를 만들어 그 당시 인간의 마을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드워프와 인간에게 도저히 마련할 수 없을만한 양의 보물을 요구하던 최악의 마룡 그라테우스를 치기로 했다. 7서클의 마스터 마도사이자 8서클 유져인 현자 카이런, 검기를 낼 수 있는 전 대륙에서 다섯밖에 되지 않는다는 소드마스터이자 팀의 리더인 메티스, 상급정령까지 소환 할 수 있는 선택받은 정령사 엘리시엘, 그리고 드워프 산에서 마룡의 퇴치를 도와주겠다고 찾아온 드워프캐논의 마스터 우스벡, 백마법의 8서클 마스터이자 궁정의사인 로므로까지 더해져 최강의 파티라 할만했다. 마법게에선 신이란 개념이 없기 때문에 신관은 없었지만, 이 정도면 최고의 조합이었다. 실제로 마룡의 산까지 찾아가면서 수많은 몬스터나 그라테우스가 보낸 강력한 가디언들과 싸워 봤지만 이들은 여유 있게 상대할 수 있었고, 그라테우스의 레어에 이르러서도 마룡에게 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계속 그라테우스가 보내온 마물들을 손쉽게 쓰러뜨렸기 때문에 그라테우스 역시 그 정도 수준의 몬스터려니 하는 안일한 생각이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탓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만의 대가는 컸다. 그라테우스는 카이런이 듣는 현자라는 칭호가 무색해 지게도 9서클 궁극의 마법을 난사하였고, 엘리시엘이 소환한 상급 정령을 명령 한마디로 자신의 지배로 되돌리는, 정령에게 친구로서 싸워달라고 부탁하는 게 아니라 주인으로서 명령해 버리는 차원이 다른 정령술을 보여 주었다.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인간보다도 빠른 스피드로 움직이는 거체, 어쩌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비늘에 닿아도 순간적으로 그곳에 마나를 집중하여 튕겨내 버리는 천부적인 전투 센스.....엘리시엘 일행은 그라테우스의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그나마 그라테우스는 오랜만에 만난 재미있는 장난감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는지 쉽게 죽이지 않고 그들을 가지고 놀았기 때문에 엘리시엘만이라도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사실 탈출 했다기 보다는 로므로가 혼신의 힘을 다해 게이트 마법을 시전하는 동안 우스벡과 메티스가 그라테우스에게 온 몸이 갈갈이 찢기며 시간을 벌었고, 카이런이 집어 던지다 싶이 엘리시엘을 게이트로 밀어 넣어 도망치게 해 준 것이다. 엘리시엘을 놓친 그라테우스가 얼마나 분노했을 지는 그라테우스와 그곳에서 그 분노를 모조리 받아 내었을 그 모험가 파티만이 알 일이다. 나이가 많은 용도 아니었다. 겨우 용의 나이로 치자면 갓 성인식을 치루었을 정도의 나이인 1000살 정도의 어린 용이다. 하지만 그 싸움의 성과라고는 용이란 존재는 신과 다를 바가 없는, 지상의 생물에게는 싸울 방법이 전무한 최강의 존재라는 걸 도서관의 관한 백과 사전에 적게 해준 것뿐이다. 그렇게 전 파티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엘리시엘은 석 달간을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소환한 정령을 강제로 빼앗겨 몸속의 마나의 흐름이 엉망진창이 되었고, 그런 육체적인 상처를 떠나 용과 조우한 공포로 반쯤 미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엘프특유의 강력한 정신력으로 다시 일어서긴 했지만, 그녀는 인간의 세상을 떠나 엘핀서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그라테우스라면 엘리시엘 최악의 악몽이었다. 용과의 싸움에 비하면 엘핀서스에서 오크나 오우거들과 싸운 것은 장난이라고 여겨질 정도이다. 그런 최악의 악몽 속으로 엘리시엘이 알게된 두 번째 인간 '남자'가 가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 엘리시엘은 알 수 있었다. 그라테우스와의 전투에서 어째서 메티스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엘리시엘만큼은 탈출시키려 했는지를..... 그리고 그런 메티스의 마음을 전혀 몰라주었던 자신이 얼마나 잔인했었는지를....... 말려야 했다. 유신이 그라테우스에게 가 보아야 이길 방법은 만에 하나, 천에 하나라도 없다는 건 그 끔찍한 경험이 그녀에게 각인시켜준 예언이나 다름없다. "안 되!! 못 가!!" 엘프답지 않게 귀를 째는 듯한 높고 갈라진 목소리가 엘리시엘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설마 엘리시엘이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유신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에....엘리?" "절대 못 가. 절대........" 툭툭 한 방울 두 방울 커다란 보석이 그녀의 뺨을 굴러 떨어져 왕궁의 하얀 대리석 복도에 점점이 얼룩무늬를 그렸다. 평소에도 하얀 피부였지만, 지금은 하얗다 못해 푸르게 보일 정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엘리시엘의 꽉 깨물어 터질 듯 새빨개진 입술이 요염하다고 문득 생각했다. "엘리.....가고 안가고의 그런 문제가 아니야.... 용이 오라고 한 거야. 선택의 여지 따위는 없어. 그리고 꼭 알아봐야 할 것도 있고....." "가면 죽어. 그라테우스는 유신에게 호의를 품고 있지 않았다고!! 나....나 그라테우스와 싸워 봤어. 그가 얼마나 강한지....또 얼마나 우습게 생명체를 죽이는지 알고 있다고!!" '엘리는 용과 싸워 봤구나. 그렇다면 저렇게 무서워 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지.....' 누구보다 용에 대해 잘 아는 유신이라 엘리시엘의 저런 태도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이보게 인간 젊은이. 아까 그라테우스가 자네를 오라고 한 것 같던데 맞나?" 걸걸하지만 어떤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인간의 그것과는 좀 종류를 달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150cm정도의 키, 그러면서도 딱 벌어진 어깨 때문에 거의 정사각형을 이루는 체형, 깊고 진지한 눈동자,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는 목을 덮은 짧고 강인해 보이는 하얀 수염이 무성했다. "네...... 드워프캐논의 기술교육 담당인 노툰님이시죠?" "그렇다네. 그 저주받을 그라테우스 #$%$%@*가 어째서 자네를 오라고 하는 겐가? 아니, 그보다도 정말로 그라테우스를 잡으러 암흑의 골짜기에 있는 마룡의 산까지 갈 겐가?" 초면에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인간식의 예절로는 좀 무례하지만, 드워프는 인간과는 다른 종류의 문화를 가지고 있으니 이 정도는 이해해 줘야 한다. 공주의 생일이라고 저렇게 어색하게 나마 정장이나마 입고 온 것을 보면 이 드워프가 나름대로 배려있는 성격임을 알 수 있다. "그럴....생각입니다....." 말꼬리를 흐림으로써 많은 의미를 함축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인간 특유의 대화법이다. 드워프라는 정직한 종족은 그 정직함 때문에 고지식한 면도 많다. 즉 말로 일일이 해야 알아듣는 것이다. 드워프가 다음에 할 말을 열심히 기다리고 있자 유신은 포기하고 말을 이었다. "노툰님께서는 그라테우스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요? 어째서 제가 거길 찾아가는 것에 관심을 갖는 거지요?" "물론 볼일은 많지. 그 망할 녀석, 당치않은 양의 보석을 요구해 놓고 보물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 동족들을 해치기 일쑤네. 아까 자네의 실력은 잘 보았으니 만약 자네가 싸우러 가겠다면 나도 데려가 주게. 드워프 캐논의 위력은 시연회때 자네도 보았겠지?" 유신은 머리가 아팠다. 드워프 캐논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용의 비늘을 뚫을 정도는 당연히 아니다. 가봐야 방해만 될 것이 뻔했다. "아아 너무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은 하지 말게. 우리도 일반의 캐논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어. 그래서 마법탄을 쓸 예정이야. 엘프 마법사들에게 공격마법을 잔뜩 넣어둔 스크롤을 대포알 속에 넣어 두라고 하면 그라테우스도 타격을 입겠지." "다들 미쳤어? 노툰님은 대포를 조준하기도 전에 그라테우스에게 살해당할 꺼에요. 그라테우스가 설마 커다란 도마뱀처럼 느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엘리시엘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졌다. 저 작은 체구에서 도대체 그렇게 큰 소리가 어떻게 나오는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유신은 포기하고 그라테우스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해 주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라테우스는 유신이 죽길 원한다. 만약 한달 안에 마룡의 산까지 찾아가지 않으면 수많은 마수들을 하누스에 풀어놓겠다. 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유신이 한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라 엘리시엘과 세라피는 그대로 얼어붙어 왜 유신을 죽이려 하는지는 조차 물어보지 못했다. "에......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그리고 나한테도 비장의 무기는 있으니까. 내가 들고 다니지만 쓰지 않는 하얀 칼 있지? 그게 사실은....." "그만 둬요. 그 칼이 용의 뼈로 만든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할 셈인가요?" "어? 어떻게 알았어?" "드래곤 슬레이어에 검기까지 입혀 사용했던 소드마스터도 그라테우스에겐 작은 상처조차 입히지 못했어요. 드래곤 슬레이어는 환상이라고요." 엘리시엘의 머릿속에는 메티스가 목숨을 버려가며 검기를 입힌 드래곤 슬레이어를 휘둘러 그라테우스의 목에 공격을 적중시키던 모습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라테우스는 오만하게도 메티스가 휘두르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피하지도 않고 온 몸에 넘쳐나는 거대한 마나를 타격점으로 집중시킴으로써 혼신의 일격을 허무하게 퉁겨내 버렸다. 그리고 이제 메티스의 얼굴에는 유신의 얼굴이 겹쳐지고 있었다. "안 되!!" 엘리시엘도 유신의 성격상 자신이 아무리 말려봐야 마룡의 산으로 떠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바보 같을 정도로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다.....엘리시엘은 이제 하얗다 보다는 파랗다에 가까운 얼굴색으로 쌕쌕 거친 숨을 몰아 쉬다가는 빙글 뒤로 돌더니 그대로 달려가 버리고 말았다. 세라피는 그라테우스와 직접 싸워보거나 본적조차 없으니 그런 공포를 이해 할 수는 없었다. 단지 유신이 위험한 상대와 싸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고, 단 한번도 싸움에서 진 적이 없는 그가 어쩌면 이번에도 기적을 보여줄지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 같은 것도 마음 한구석에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까지 걱정하는 엘리시엘을 보자 세라피도 불안해 져서 잠시 망설이다가 엘리시엘을 부르며 뒤따라갔다. "자넨 결심을 굳힌 것 같군. 그럼 나도 준비를 하기 위해 가보겠네. 적어도 마룡의 산에서 마주칠 가디언들을 상대하는데는 도움이 될 것이니 떼어놓고 갈 생각은 하지 말게."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뜨끔했지만, 노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닌지라 그를 데려 가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용아병 따위에게 싸워서 이겼다고 용과 싸울 수 있는건 아닙니다. 노툰님은 어째서 제게 기대를 거는 거지요?" 시험삼아 곤란한 질문을 해 보았지만, 노튼은 드워프답게 완고한 대답을 하였다. "기회가 필요했을 뿐이네. 드워프는 긍지 높은 종족. 1000살짜리 어린 용에게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는 건 드워프의 수치지. 죽고 사는 건 그다지 큰 의미가 없어. 얼마나 긍지 높은 삶을 살았는가가 중요한 거다." 말을 마친 이 멋진 드워프는 짧은 다리를 움직여 드워프들이 머물고 있는 드워프 공방 쪽으로 사라졌다. '하긴......그라테우스와 싸울 때 떼어놓으면 그만이지. 같이 싸우겠다고 우기면 기절을 시켜서라도.....' 싸움은 이겨야 의미가 있는 것이고, 무엇보다 목숨이 붙어 있어야 미래를 꿈꿀 희망이 최소한의 자격이 있는 거다. 그런 면에서 저 드워프의 생각은 유신과는 좀 맞지 않았지만, 각자 나름의 신념이란 것이 있으니 자기의 신념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그라테우스의 레어에 도착하기 전에 마주칠 가디언들을 막아줄 동료들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라테우스와 싸우기도 전에 가디언들과의 싸움에서 너무 체력을 소모하면 자칫 비장의 카드를 쓰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유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유신과 홀로 남게된 미스티가 참을성 있게 꾹 눌러 두었던 질문을 했다. "마룡이 고귀한 분이라고 할 정도면...... 아마도 헬마스터가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아." "헬마스터라고요?" "봉인되지 않은 헬마스터는 베리알과 메피스토 뿐이니까.....설마 게헨나 복구에 정신 없을 메피스토일리는 없고, 음모와 거짓의 헬마스터 베리알일테지." 천천히 유신과 미스티가 머물고 있는 손님용의 별관으로 걸어가면서 둘은 이 사건을 해결할 방법에 대해 상의했다. "그렇다면 위험한 것 아닙니까? 헬마스터라면 용황급의 용신기가 온다고 해도 상대할까 말까할 터인데.... 봉인 당한 몸으로 헬마스터와 싸우는 건 가망이 없습니다. 베리알이 손가락 하나만 퉁겨도 유신은 세포하나 남지 않을 거예요. 저 같은 퍼펫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을 거고...." "망할 베리알 자식..... 비프로스트 회전에서 끝장을 냈어야 했는데.....그래도 베리알이 직접 손쓰지는 못 할거야." "직접 나서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지요?" "그랬다가는 위시마스터를 통해 미카엘님의 귀에 들어갈 테니까. 그렇게 되면 게헨나까지 끝장나리란 걸 그 약은 놈이 모를 리는 없거든." "그렇다면 그라테우스가 문제로군요. 봉인 중에 하나가 약해진 정도로는 용과 싸울 수 없습니다. 물론 제가 보좌한다해도......용의 브레스에 맞게되면 아무리 저라도 일격에 파괴될 겁니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나요?" 어느새 유신의 방 앞에 도착하자 유신은 결계석으로 만든 결계마법 속에 잘 숨겨두었던 용아검을 꺼냈다. "이게 있거든." "하지만 아까 엘리시엘님의 말로는 용의 뼈로 만든 드래곤 슬레이어에 검기까지 입혀도 통하지 않았다고...." "이건 특별해. 그런 싸구려 드래곤 슬레이어와 똑같이 취급하면 카론에게 미안하지. 솔직히 그라테우스정도는 문제가 아니야." 자신감에 찬 유신의 말에 미스티는 그만 놀라고 말았다. "아무리 카론님의 이빨 뼈로 만든 용아검이라 해도..... 그거 하나 믿고 용과 싸운다는 건 좀 무모하지 않을까요? 다른 드래곤 슬레이어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데......." "후훗, 그렇게 생각해?" 용아검의 검집과 손잡이를 쓸어내리며 유신이 말을 이었다. "아마도 그 모험가 일행이 얻은 용의 뼈는 운 좋게도 죽은 용의 시체에서 발견한 것이겠지. 그리고 용의 이빨 뼈 일리도 없고. 하지만 이 검은.... 살아있는, 그것도 태고 적부터 모든 용족의 수장이었던 카론이 자신의 어금니를 사용해 만든 용아검이야. 1급 투신보다도 훨씬 강한 카론의 힘을 고려한다면.... 이 검이 가진 파괴력이 얼마나 될지 두려울 정도라고." 아직까지 한번도 검집에서 뽑혀본 적도 없는 용아병은 하얗고 아름다운 손잡이와 푸른색이 감도는 회색의 검집 안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라고 하기도 이른 시간. 보급품을 저장하는 곳을 지키고 있던 병사 둘은 조금 짜증이 났다. 이런 시간에 찾아와서 훈련을 핑계로 필요한 것이 있으니 내달라고 하면 누구나 짜증이 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영웅 대접을 받고 있는 유신과 미스티가 직접 찾아와 훈려에 필요한 물품을 챙긴다고 하는데 감히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사용하신 물품 목록은 나오시면서 대여 장부에 적어 주십시오." "아아 밤 늦게 미안합니다." 유신은 싱긋 친근게 웃으며 병사를 달랜 후 창고로 들어갔다.. 창고 특유의 메케한 먼지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며 벽에 붙어 있는 횟불에 불을 붙였다. 유신은 넓게 펼쳐진 창고와 차곡차곡 쌓여진 여러 가지 군수물자들을 보면서 좀 답답한 기분이 들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 그리고는 필요한 것을 챙기기 시작했다. "............램프하고, 밧줄 챙겨. 그리고 삽이랑 방수천도. 미스티는 기운이 세니까 이것저것 챙겨도 된다고." 유신의 말에 미스티의 눈이 위치할 곳에서 녹색으로 빛나고 있는 광구가 가느다랗게 되었다. "그런 표정 하지 말라고. 어차피 암흑의 골짜기까지는 마차를 타고 갈 거니까."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단지 푸른색의 빛 덩어리만으로도 참 다양한 표정을 연출한단 말이야........' 유신은 이미 미스티를 짐꾼으로 정한 것 같았다. 일단 암흑의 골짜기까지는 세라피도 동행하기로 했다. 골짜기를 지나 마룡의 산에 이르게 되면 세라피와 노튼은 마차를 지키면서 대기하고 유신과 미스티만 들어가서 마룡과 싸우겠지만, 그라테우스가 보낼지도 모르는 가디언이나 몬스터들과 싸우기 위해선 둘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암흑의 골짜기까지는 함께 가기로 헸다. 만약 유신과 미스티가 지게 된다면 남은 일행이 하늘을 날며 게이트 마법을 자유 자재로 사용하는 그라테우스에게서 도망칠 가능성은 전혀 없을 것이니 마룡의 산 가까이는 갈 수가 없다. 유감스럽게도 엘리시엘은 방에 틀어박힌 채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어서 유신은 좀 속이 쓰렸지만, 차라리 따라 오지 않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기 때문에 잘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이자벨 공주가 따라 간다고 할까봐 공주에게 소식을 전할 가능성이 있는 성안의 누구에게도 마룡의 산으로 가는걸 이야기하지 않았다. 암흑 골짜기 주변부터는 인가가 전혀 없다. 그래서 수도에서 준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챙겼기 때문에 이렇게나 짐이 많아지고 말았지만, 마차를 타고 갈 것이니 별 문제는 없을 듯 했다. "공주님한테 말하지 않고 가서 괜찮을까요?" "그...글세? 좀 불안하지만......설명하기 힘들잖아. 그래서 편지로 써 놨어. 제랄딘하고 세이람에게도 한달 후에 올 거라고 편지 써서 붙여놨고...... 그러니까 후딱 해치우고 돌아오자고." 견습기사들의 훈련 때 쓰는 마차 중에 하나를 내어 온 미스티와 유신은 천천히 왕궁을 빠져나갔다. 유신과 미스티는 왕궁의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튼과 세라피를 태우고, 용과의 결전에 대한 각오를 각자 다지며 마룡의 산으로 출발했다. '베리알이라...... 헬마스타가 껴 있는데 나 혼자 해결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는 세라피나 노튼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을 데려가도 괜찮을까.....' 희뿌옇게 밝아오는 아침해가 마차의 정면을 비추어 눈이 따가웠지만, 깊은 생각에 빠진 유신은 알지 못했다. '따각따각'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새벽녘의 가장 달콤한 꿈에 빠져있는 수도의 길을 울렸다. 이제 한시간 정도만 더 있으면 시장의 가게들이 문을 열기 시작하면서 활기찬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늙수그레한 개 한 마리가 쓰레기통을 뒤지다 일행의 마차를 무심하게 흘긋 쳐다보고는 생계에 관련된 자신의 일에 다시 매진하기 시작했다. 외성을 빠져나갈 무렵 희뿌연 새벽안개 속에서 말 한 마리가 일행의 앞을 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구지?' 마차의 속력을 천천히 줄여 가며 확인을 하려할 때 눈이 좋은 세라피가 먼저 알아보고 소리쳤다. "엘리!! 왔구나!!" 하지만 마차가 그녀가 탄 말의 가까이 가도록 엘리시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에.......엘리...." 유신은 뭔가 더 말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딱하게도 그의 머리 속은 텅텅 비어 있었다. 엘리시엘은 아무 말도 없이 말을 몰아 일행의 마차 옆에서 따라 갔다. 묵묵히 아래만 바라보며, 아무 표정조차 없는 엘리시엘 때문에 유신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지만, 말 걸기가 무서운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마차 위에서 불편한 듯 몸을 비틀 뿐이었다. "내가....... 만약 유신보다 조금이라도 더 강했더라면, 아니 비슷하게라도 싸울 수 있었다면......목숨을 걸고라도, 유신의 팔이나 다리를 잘라서라도 막았을 거야. 하지만.... 내 힘으론 말릴 수가 없군. 그러니.... 꼭 살아서 돌아오겠다고.....불리하면 도망치겠다고 약속해 줘." 농담을 모르는 엘프가, 그것도 얼음장같은 표정으로 하는 말이다. 유신은 등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아...알았어..... 약속할게." '난 선택받은 정령사 엘리시엘....내 생명과 바꾼다면 빙설의 최상급 정령 유실리스를 한번 정도는 소환 할 수 있을 거야. 만약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면 내가 죽더라도.....다시는....나만 살아남는 것은 싫어!' 각오를 다진 그녀는 어느새 평상시의 명랑한 엘리시엘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서글픈 명랑함인지 둔감한 유신은 알지 못했다. "노튼!! 그쪽으로 갔다고!! 놓치지 말고 잡아!!" 토끼는 속으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할 것이다. 토끼 같은, 아니 정말로 새끼 토끼 다섯 마리는 집에서 엄마가 어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거다. 자기밖에 모르는 남편의 사랑스런 모습이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다. '얘들아..... 미안하구나.... 엄마는 이제 틀렸다....여보.....한번만 더.....' 토끼 아줌마의 마지막 생에 대한 정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퍼퍽' 살벌한 소리가 나며 토끼의 작은 가슴속에 시리도록 차가운 쇠뭉치가 원래부터 자신이 있던 자리인양 비집고 들어갔다. "허....그놈 참 토끼처럼 빠르다는 말의 표본이로군. 이렇게나 애먹이다니...." 노튼은 투덜거리며 엄마토끼보다 4배는 더 크고, 10배이상 무거울 배틀엑스를 그녀의 몸에서 뽑아 내었다. "맙소사.....토끼한테 배틀액스를 집어던져서 잡은 거에요? 미스티 만큼 무식한 분이 또 있다니...." 이미 삼 주 가까이 여행한 이들은 별 격식 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 결과 멋쟁이 드워프 노튼도 유신 일행과 어울리면서 망가져 버렸다. 어쩌면 천성이 망가져 있던 것인데 처음에만 완고한 척 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이 파티에 어울리는 인물이 된 것이다. "허....그놈 말버릇 참..... 그럼 드워프 캐논으로 쏴서 잡으랴?" "또 싸워요? 정말로 어린애 같다니까....." 새벽의 여신같이 아름다운 세라피가 한심하단 듯 허리에 손을 얹고 나무라자 둘은 멋쩍어 져서 말다툼을 멈추었다. 드워프 노툰과 유신..... 그리고 민가가 보이지 않게 된지 3일이나 지난 상황..... 충분히 으르렁거릴 만 하다. 문제는 음식이다. 당연히 많이 먹는 유신과 드워프 노튼은 먹는 걸로 경쟁하는 한심한 사이고, 마룡의 산에 다가갈수록 사냥감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사람 구경을 한 것이 3일전이다. 슬슬 음식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세라피 언니, 이쪽에 먹을만한 과일이 있어!! 이리 와요!!" 유신이야 워낙 빠르니까 그렇다 쳐도 몸이 날랜 엘프보다도 드워프가 빠른 이례적인 경우라면 먹는 것에 관한 문제가 얽혀 있을 때뿐일 거다. 먹는 과일이란 말에 세라피보다 먼저 나타난 노튼과 유신을 보자 방금 전 세라피가 지었던 표정을 엘리시엘이 지었다. 최악의 마룡과 싸우러 가는 모험가 파티 치고 너무나 명랑한...... 일행이었다. 3일 전에 들른 마을을 마지막으로 마차가 다닐만한 길은 끊겼기 때문에 일행은 각자의 짐을 메고 있었다. 물론 두 숙녀의 짐은 미스티가 들고 있었지만, 그 덕분에 미스티는 먹거리 준비나 잠자리 준비 같은 잡일에서 빠질 수 있었다. 유신이 불을 집히고 오늘 묵을 잠자리를 준비하는 동안 노튼은 그 커다란 도끼로 능숙하게 토끼의 가죽을 벗겨내고 내장을 골라내 음식 준비를 하였다. 세라피와 엘리시엘은 이미 그런 광경엔 익숙해 졌다는 듯 엘프답지 않은 담담한 태도로 과일을 깍고 식기들을 준비했다. 대충 먹거리가 준비될 때쯤 일행보다 좀 쳐져있던 미스티가 도착했다. 짐이 무거운 건 아니지만, 없는 길을 만들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짐이 많은 미스티는 아무래도 좀 쳐질 수밖에 없다. "미스티님은 참 친절하네요. 나무들이 다칠까봐 일부러 조심해서 오시느라 늦은 거지요? 아마 드라이어드들도 감사해 할 거에요." 세라피가 방긋 웃으며 말하자 미스티의 광구가 둥글게 호선을 그렸다. 이런 모습을 보면 유신이 틀림없이 딴지를 걸 법 한데 어쩐 일인지 그의 표정이 진지하게 굳어 있었다. "이제 마룡산 입구에 들어왔군." "그러게요.....여지 것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더 불안할 정도네요." 세라피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지 사과를 베어 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좋지 않군요. 가디언이나 다른 마물들의 수를 줄여 놓지 않으면.... 자칫 그라테우스의 레어에서 협공 당할 수도 있습니다." 신중한 미스티의 의견에 모두의 얼굴이 단숨에 침울해 졌다. "그건 별로 문제가 아닌데.... 이제 슬슬 헤어지는 게 좋지 않을까? 자칫 더 들어가다가 탈출 못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고....." "미쳤어 유신? 방금 그랬잖아. 가디언들은 그라테우스의 레어에 안에 있다고..... 설마 미스티님과 둘이 싸우면 이긴다는 거야? 그라테우스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여지 것의 평화롭고 명랑하던 것과는 다르게 엘리시엘의 목소리가 단숨에 높아졌다. 은근히 광기까지 보이는 엘리시엘의 분위기를 봐서는 마치 지금까지의 그녀가 거짓말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불안한 심리상태를 가리고 있던 유리가면이 깨지자 그대로 폭발해 버린 것이다. "오로로로로로......." 엘리시엘이 폭발하려는 순간 살금살금 내리기 시작한 밤의 정적을 깨고 구슬픈 듯 호소하는 가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별로 위험할 것 같지 않은 소리였지만 유신은 등에 소름이 돋고 잔털이 모두 일어서는 것이 본능적으로 강력한 적임을 느낄 수 있었다. '스르릉'.... 하얗게 시린 소리를 내며 유신의 첨예가 오랜만에 검집을 떠나 시원한 바람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와 비슷하게 모두들 자신의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배틀엑스를 오른손에 들고 등에는 커다란 드워프캐논을 등에 메고 있는 노튼은 무장의 무게에 짜부러 들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별로 불편한 것 같지 않았다. "우루루루루루" 두 번째 알 수 없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노튼은 자신의 배틀 엑스를 발아래 꽂고 그쪽을 향해 몸을 거칠게 숙였다. 그러자 드워프 캐논이 등을 타고 앞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대포가 떨어지기 직전, 노튼은 익숙한 동작으로 캐논의 삼각대를 발로 차자 단숨에 삼각대가 밭침대 형태로 펴지면서 캐논이 고정되었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한 동작에 이루어지는 캐논의 발사 준비에 모두들 감탄하고 말았다. 그리고..... "콰쾅!!" 아무 예고도 없이 소리가 나던 쪽으로 한방 먹여버렸다. 노튼의 멋진 동작을 무방비 한 상태로 바라보고 있던 엘리시엘과 세라피는 귀를 막으며 주저앉았고, 유신은 낮은 목소리로 물질계의 욕설을 퍼부었다. 이제 해는 산자락으로 사라지면서 붉은 노을을 뿌려대고 있었고, 주위는 12월의 공동묘지만큼이나 조용했다. 그 평화로운 정적위로 발사된 캐논의 소리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비교될 바가 아니었다. 충격이 가라앉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자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소리가 잦아들고 사방은 다시 불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고요 속에 녹아 있던 살기만큼은 갑자기 수십 배나 높아졌다. "좋아. 반응이 있다. 최소한 직격 당한 놈은 가루가 된 것 같군." 노튼은 주위의 원망스런 눈초리에도 히죽 웃으며 빠른 손놀림으로 대포 구멍을 청소했다. '사사삭....스르르륵' 뭔가 빠른 것이 지나가는 소리가 숲을 울리다 갑자기 그것이 나타났다. 6개의 팔, 뱀의 꼬리, 여자의 상반신. "나가닷"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네 개의 팔에 쥐어져 있던 칼과 도끼, 몽둥이가 노툰을 향해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터프한 노튼은 어지간한 카이트실드 만큼 터다란 캐논을 방패삼아 네 개의 공격을 막아내고 발 아래에 있던 배틀 엑스를 휘둘러 나가를 후려쳤다. 하지만 네 개의 팔을 제외하고도 두 개의 손에 각각 방패를 들고 있던 나가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노툰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그때 다시 천지를 찢는 소리가 나며 노툰의 앞에 있던 나가의 상반신은 걸레짝처럼 박살이 나 버렸다. 커다란 드워프캐논을 무슨 권총 다루듯 하는 노툰을 보며 유신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꿈틀거리는 꼬리를 보며 징그럽다는 듯 눈살을 찡그리며 다시 도끼를 휘두르자 나가는 완전히 움직임을 멎었다. ".......나가라면서?" 유신이 황당한 심정으로 누구에게 랄 것도 없는 공허한 질문을 던졌다. 사실 나가라면 절대 이렇게 쉽게 없엘 수 있는 생물이 아니다. 일부 미개한 지역에서는 신으로 추앙 받을 만큼 강력한 존재가 이 나가이다. 5서클 이하의 마법을 무시하는 강력한 마법 저항, 네 개의 팔은 각기 다른 병장기를 능숙하게 다루며 6서클 정도 수준의 나가 특유의 신성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뱀처럼 생긴 몸통은 금속제 무기를 거부하며 빠르기 역시 개구리 쫓는 물뱀만큼이나 빠르다. 아마도 나가가 노툰이 아닌 엘리시엘이나 세라피에게 덤벼들었다면, 둘은 크게 다쳤거나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을 터이지만, 운이 나쁜 나가는 첫 번째 상대를 잘못 골랐다. 순수 물리공격인 드워프 캐논은 마법 내성과도 상관없고, 발사하기가 까다로워서 그렇지, 일단 캐논을 떠난 대포알은 미스티의 중력 캐논포 못지 않게 빠르고 강력하다. 오랜 세월 그라테우스 레어의 수호자로 살아온 나가로서도 이런 신기한 물건은 본 적이 없는 터라 어처구니없이 둘이나 당한 것이다. "뭐? 나가가 뭔데? 뱀처럼 생겨서 허약한 것 같은데?" 무식한 노튼의 말에 모두들 경악해서 쳐다봤다. ".......뭐.....어쨌든 잘 되었군요. 아직 끝난 것 같지는 않으니 모두 조심하세요." 미스티의 센서에 감지되는 마물들의 수는 40마리를 넘어서고 있었다. 아마도 이렇게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은 유신을 기다리다 지친 그라테우스가 심심풀이로 게이트 마법을 시전 해 레어의 마물들을 이곳으로 옮긴 탓일 거다. 일행의 주변에는 어느새 그라테우스의 마성에 이끌린 온갖 종류의 괴물들이 포위하듯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런 공포스런 괴물들 틈에서도 유신은 침착했다. '과연.... 5년 전에 엘리시엘이 이곳을 통과하면서 많은 마물들을 죽였다는 게 사실이로구나. 얼핏 보면 강해 보이지만, 모두 태어난 지 얼마 안된 미숙한 녀석들이다. 이 정도라면 미스티의 상대가 아니지.' 유신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가장 앞에서 돌진해 오는 기형의 괴생물체에게 첨예를 날렸다. 이제 주변에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지만, 특별히 불편을 느끼는 파티원은 없었다. 어두운 동굴에서 보석을 캐는 드워프, 작은 별빛에 의지해 깨알같은 마법서도 읽을 수 있는 엘프, 적외선 센서부터 온갖 감지기가 달린 미스티, 봉인 하나가 약해지면서 코어를 돌릴 수 있게 된 유신...... 애써 일몰시간, 눈이 가장 적응하기 힘든 시간을 골라 기습한 보람도 없이 마물들은 하나 둘 죽어 나갔다. 게다가 해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엘리시엘과 세라피가 사방에서 터트리는 공격마법으로 해가 지기 전과 별 차이 없이 사방은 환하기만 했다. 하지만 최후의 괴물이 남자 그 괴물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풍겼다. "여어....그라테우스..... 이제 장난은 끝났나?" 어찌 나오는 지를 보기 위해 유신이 슬쩍 도발해 봤다. "흐흐흐 역시 그 정도라도 하지 않으면 재미없지. 옆의 엘프 꼬마는 얼마 전에 본 기억이 있군. 매가 모자랐나?" 괴물의 눈도 틀림없이 끔찍하고 무섭지만, 지금 엘리시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이런 싸구려 합성 괴물이 아니라 그라테우스의 시선이다. 하얗게 질려버린 얼굴로 굳어버린 세라피는 주저앉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다. "오호.... 그렇게 무서워 할 거면서 뭐 하러 찾아 왔는지 모르겠군. 또 친구들 전부의 목숨을 방패삼아 혼자 달아나려고 왔나?" '지금 발끈하면 그라테우스의 도발에 넘어가는 꼴이란 건 잘 알지만.....도저히 못참겠다.' 유신이 한걸음 앞으로 내 딛었을 때 엘리시엘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유신을 제지했다. 엘리시엘은 이빨끼리 딱딱 부디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떨고 있으면서도 주문을 외워 그 괴물의 모습을 빌린 그라테우스를 공격했다. 급조된 조잡한 몸에 그라테우스가 강림하였고, 거기에 다시 엘리시엘의 아쿠아 미사일을 맞자 만신창이가 된 괴물은 별 저항도 못해보고 몸에 구멍이 숭숭 뚫려 버렸다. "가.....각오라...면..... 나....나름대로 ...... 하고 왔다고요....... 절대 ....로 절대로 지지 않앗!!!!" 엘리시엘의 떨리던 목소리는 마지막에 가서는 거의 비명에 가까울 정도로 찢어지는 고함소리가 되었다. "크크큭..... 좋은 패기로군.... 내 앞에서도 그런 패기를 가질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엘프 꼬마야....." 완전히 바스라지는 괴물의 몸에서 빠져나가면서도 최후에 악당이 하는 대사는 잊지 않는 그라테우스다. 괴물들의 시체 틈에서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없다는 건 상식이다. 일행은 묵묵히 짐을 싸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망할자식.... 힘들게 잠자리를 마련했는데, 또 옮겨야 한다니...." 투덜거리는 노튼을 보며 일행들은 드워프란 존재들의 무신경함과 용맹과 만용의 사이에 있는 종족 특유의 기질에 대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마룡의 산은 지척이었다. 그리고, 어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유신은 다른 일행을 떨궈 내는데 실패하였다. 어느 정도 과거를 떨쳐낸, 아니 떨쳐 냈다기 보단 체념해버린 엘리시엘과 드워프 캐논의 마법탄을 한발이라도 써 봐야 돌아가겠다는 노튼이 부득불 따라 온 것이다. 당연히 세라피 혼자서 돌아갈 리도 없고, 미스티는 떠나서는 안 되는, 그야말로 가장 믿음직한 전력이었기에 간다고 해도 유신이 잡았을 것이다. 결국 출발할 때의 일행은 모두 그대로라는 말이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 유신은 마법계에 온 후로 물질계에 있을 때처럼 냉정한 판단력은 간데 없고, 첨예 끝처럼 날카롭던 성격은 부엌칼만큼이나 무뎌져 버린 것이 걱정스러웠다. 어쩌면...... 나태해진 자신이 일을 대충대충 처리하는 것은 아닐지.... 그래서 혹시 눈앞의 작은 정에 이끌리다가 나중에 큰 후회를 하게 되지 않을지 불안하기만 했다. '뭐.... 지금 이런 생각을 떠올리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군..... 불길하게....'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첨예를 쓰다듬었다. 검의 손잡이에 감아둔 가죽 너머에서 올라오는 강화드래곤 본의 서늘함이 그의 불안함을 조금 식혀 주었다. 다음날 새벽부터 일행은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이나 어떤 아인종도 이곳까지 왔을 리 없다. 게다가 이렇게 울창하게 산림이 우거졌음에도 산토끼나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을 제외하고는 감히 그라테우스의 영역에서 살지 못한다. 결국 동물들이 사용하는 작은 오솔길조차도 없기에 일행은 길을 만들면서 가야했다. 어느정도 올라가서 시야가 트이자 드디어 마룡의 산이라 불리우는 봉우리가 나타났다. 마룡의 산. 정말 딱 맡는 이름이었다. 주변의 산림은 울창한데 비해 마룡이 뿜어내는 강력한 사기로 인해 마룡의 산에는 그야말로 풀한 포기 자라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산의 중턱쯤에 떡 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거대한 동굴. 멀리서도 한눈에 보일 만큼 커다랬다.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이라면 너무 큰 크기 때문에 자체 붕괴할 것 같이 보일만한 대단한 크기였다. '과연..... 용의 레어로구나...... 마법으로 붕괴를 막고 있는 걸까?' 레어까지 가기 위해선 절벽이나 다름없는 암벽을 등반해야 하는데도 일행은 모두 별 부담이 없었다. 비행마법 에어 윙을 쓸 수 있는 마법사가 둘이나 있고, 유신이나 미스티는 이런 산을 오르면서 체력이 깍일만한 위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드워프 노튼이 걱정이었만, 돌에 익숙한 종족답게 산을 오르는데도 느리긴 하지만 끈기 있고 차분해서 별 문제는 없었다. 가끔 그의 무거운 장비에 세라피가 경량화 마법을 걸어주는 친절함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만약 이런 지형에서 싸우다간 불리해 져도 달아나기가 정말 막막해 진다는 것이다. 산의 아래에 있던 일행은 레어의 코앞에까지 왔으니 혹시 넓은 곳으로 그라테우스가 마중나와서 싸움이 유리해지지 않을까 하는 헛된 생각을 해 봤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헛된 생각이었다. 만약 드워프 캐논의 사정거리가 더 길었더라면 아래에서 동굴을 향해 난사해서 그라테우스를 끌어내는 것이 좋은 방법이었을 테지만, 휴대용이니 만큼 사정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기에 이 작전은 포기해야 했다. 결국 위험하기는 해도 레어까지 등산을 해야 했다. 다행이 절벽에 매달려 있을 때는 그라테우스가 공격하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올라 선 것은 놀랍게도 미스티였다. 체력안배를 하며 올라오는 유신이야 미스티보다 느리다 쳐도 간간히 비행 마법까지 쓰면서 올라오는 엘프들보다 빠르다는 건 놀라울 따름이었다. "저놈은 정말 괴물이로군..... 내 캐논보다도 훨씬 무거워 보이는 갑옷과 무기를 들고도 저리 기운이 넘치다니....." 씩씩거리는 거친 숨을 내쉬면서도 노튼은 솔직하게 감탄해 버렸다. 미스티는 레어에 올라서자 자신에게 설치되어 있는 모든 감지기의 기능을 풀로 사용하여 레어의 이상을 살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미스티의 초 감지기에 아주 조금이지만 이상한 것이 걸렸다. '뭐지? 공간단열? 결계? 이....이런....' 유신이 올라올 때쯤 갑자기 미스티가 몸을 날리며 두 엘프를 끌어안고는 유신을 발로 걷어 차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두 엘프를 끌어안은 미스티도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아직 다 올라오지 못했던 노튼은 갑자기 유신이 떨어져 내리자 그라테우스의 습격인줄 알고 당황했다. 곧이어 떨어지던 미스티가 노튼의 뒷덜미까지 잡고는 가치 떨어져 버리자 애써 올라온 것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란 걸 느꼈다. 그리고는 될대로 되란 심정이 되었다. 그라테우스는 5년 만에 다시 한번 등을 타고 흐르는 전율이 퍼지는 짜릿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자기를 잡기 위한 용사 일행이 찾아온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 드래곤 슬레이어를 꿈꾸는 바보들이 모인 엉성한 모험가 집단이 아니라 실제 바로 얼마 전까지 전 우주 최강이라 칭해지던 바로 그 유신 더 실버스타가 참가해 있는 파티다. 비록 모든 힘을 봉인 당했다고는 하지만,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든 다섯 마리의 용아병을 별 상처도 없이 해치운걸 보면 이 싸움은 틀림없이 너무나 재미있는 빅 이벤트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가 눈을 뜨고 자아를 느끼기 시작한 후로 가장 재미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라테우스는 흥분했다. 너무나 흥분이 되어서 잠도 오지 않았고, 용족 특유의 초감각이 더더욱 예민해 져서 신경은 끊어질 듯 날카로워 져 있었다. 하지만 유신 일행은 너무나 느렸다. 비젼 마법으로 그들이 오는걸 처음부터 전부 지켜보았지만, 너무 느려서 할말이 없을 정도였다. 차라리 마법으로 이곳에 옮겨버릴 까도 생각했지만, 그러면 재미가 떨어진다. 자신은 관여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공평하고, 또 유신이 자신의 힘으로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그를 죽이는 기쁨이 더욱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행이 암흑의 골짜기에 들어서자 그라테우스의 인내심이 그 바닥까지 모두 핥아서 끝장나고 말았다. 유신 일행은 자신의 이런 애타는 마음도 모르고 느긋하게 산토끼나 잡아먹으며 피크닉 온 것처럼 미적거렸기 때문이다. 천하에 둘도 없이 강한 생명체인 드래곤인 자신이 이렇게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는데, 이 건방진 일행에게선 일말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는 것도 그라테우스의 비위를 건드린 커다란 요소였다. 결국 분노한 마룡은 5년 전의 전투에서 파괴된 가디언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하여 급조된 허약한 가디언들까지 전부 끌어 모았다. 그리고 이들의 지휘관으로 자신이 가장 아끼는 최강의 몬스터 나가 두 마리를 임명했다. 몬스터들에겐 별로 기대하지 않았지만, 나가라면 틀림없이 재미있는 대결을 보여 줄 것이다. 물론 유신이 나가 정도에게 지지는 않겠지만, 충분히 고생하며 싸워야 할 것이고, 어쩌면 저 일행중 한 둘은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더더욱 분노한 유신이 자신을 향해 이를 갈며 덤벼 올 것이다. 그건 좋다. 아주 흥분되는 일이다. 하지만 나가는 그 뛰어난 능력의 1/10도 발휘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었다. 털복숭이 드워프 따위가 그라테우스의 심혈을 기울인 무대를 박살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한번 된통 당해서 목소리만 듣고도 벌벌 떨던 엘프 꼬마까지 겁을 상실하고 다시 덤벼들었다. 이제 재미있는 놀이고 뭐고 없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그라테우스는 유신 일행을 보는 순간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려 왔던 그 일행이 마룡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죽여야 한번에 깨끗하고 우아하게 죽여 버릴까?' 처음에는 그놈들이 산을 오를 때 공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엘프 둘이 비행마법을 쓰는 걸보고 꾹 참기로 했다. 만약 첫 번째 공격이 빗나가면 저것들이 도망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나의 흐름을 느낄 수 없도록 자신의 주위에 결계마법을 몇 겹으로 쳐 놓고 가만히 체내의 모든 코어와 마나를 드래곤 하트로 집중시켰다. 하루 세 번 밖에 쓸 수 없는 용족 최고의 필살기. 브레스. 절대 피할 수 없도록 일행이 등산을 막 끝내는 순간 발사할 예정이다. 제일 처음으로 강철로 된 유신의 가디언이 올라서는 게 보였다. 그리고 엘프가 둘이 가볍게 올라섰고, 막 유신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망설일 필요는 없다. 이 거리라면, 절대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자신의 드래곤 하트에서 몰아치던 광포한 힘의 덩어리를 뿜어내었다. 몸속의 모든 마나와 코어가 극한까지 빠져나가면서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그라테우스의 눈에는 그가 뿜어내고 있는 시뻘건 화염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 절대의 죽음 앞에서 유신일행이 도망칠 방법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후하하하하 죽어라!! 죽어 버리라고!!' '콰콰콰쾅!!!' 천지가 찢어지는 굉음이 온 계곡을 뒤덮으며 지나갔다. 그리고 절대의 사형선고라 할 수 있는 붉다 못해 푸른 화염이 그라테우스의 레어 깊숙한 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라테우스는 영리하게도 브레스를 약간 아래쪽으로 조준하여 쏘았고, 덕분에 미스티가 일찍 알아차리고 일행을 피신 시켰음에도 가장 늦어져 버린 노튼은 불행히 화염의 가장 가장자리에 휘말려 버렸다. 뼛조각 하나 남지 않고 증발했을 터이니 특별히 고통스럽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스릴제 드워프 캐논만이 시뻘것게 달구어 진 채 산의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나마도 브레스의 가장자리에 말려서 미스릴 대포라도 남았지만, 아마도 중심부에 휘말렸다면 최강의 금속이라는 미스릴 역시 흔적도 남지 않고 증발해 버렸을 거다. 자신과의 싸움을 그토록 기대하고 있던 그라테우스가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 곤 유신으로서도 생각조차 못한 일이었다. 갑작스럽고 너무나 엄청난 기습에 아직 정신을 차리지도 못한 일행의 위로 그리테우스의 거체가 그 거대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속도로 날아 올랐다. "후하하 기쁘구나!! 아직 살아남은 녀석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자 덤벼 보거랏!!" 발 디딜 곳도 마땅치 않은 가파른 산허리에 매달린 일행에겐 그리테우스가 비행하면서 일으키는 바람과 마나의 폭풍도 버거운 것이다. 그 위로 그라테우스의 마법이 무더기로 쏟아져 왔다. "모두 레어쪽으로 가!! 여기서 싸우는 건 자살 행위얏!!" 그냥 기쁨에 겨워 넘쳐나는 마나를 소진하기 위한 공격이라 특별히 조준되어있지는 않았다. 덕분에 간신히 몸을 피한 일행은 레어쪽으로 도망 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라테우스의 브레스가 훑으며 지나간 자리는 아직 용암처럼 녹은 바위들이 끓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이기에 쉽지 않았다. 벌써 레어 주변의 식은 부분은 마치 핵병기나 고열의 레이저 병기를 사용하였을 때처럼 유리화 되고 있었다. '역시 용의 브레스..... 어리다고는 해도 정말 엄청나구나!' 엘리시엘이 걱정되어 흘긋 바라보니 그녀는 창백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뭔가를 각오한 듯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좋은 표정이다. 저 정도면 죽지는 않겠군.' 유신의 걱정과는 달리 엘리시엘은 오히려 처음 보는 용의 브레스에 압도되어 반쯤 넋이 나간 세라피를 보살펴 주고 있었다. '휘휘휘휘휭~~' 거친 바람소리와 함께 드디어 그라테우스가 선회를 마치고 레어 앞에 당도했다. 아직도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용암이나 다름없는 곳에 착지했지만, 별 감흥도 없는 것 같았다. 내려서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미스티가 중력 캐논포를 그라테우스의 눈을 향해 쏘았지만 그토록 강력하던 캐논포도 용 앞에선 땅콩 던지는 수준이었다. 드래곤의 비늘은 눈꺼풀에도 빼곡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거기에 막힌 캐논포는 안구에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건방지다...." 미스티의 공격쯤은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는 듯 짧게 말한 그라테우스의 가슴부분에 40여개에 이르는 매직미사일이 만들어 졌다. 그리고 그대로 푸른 호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콰쾅!! 콰콰쾅!!' 굉음이 레어를 울리며 미스티는 저만큼 날아가 별의 한 구석을 3m 가량 깎아내며 파묻혀 버렸다. 그 위로 다시 10여 개의 매직미사일이 더 내리 꽂혔다. "오호.... 과연 5서클 이하의 마법은 효과가 없다더니 정말인 듯 하군. 그 정도 공격이면 어지간한 키메라도 즉사할 것인데....." 마법 문자가 새하얗게 빛을 내며 매직미사일로부터는 미스티를 보호했지만, 벽에 처박힌 물리적 충격까진 어쩔 수 없는 듯 그 강하기만 하던 미스티가 휘청거렸다. "기다리다 지쳤소. 덕분에 본의 아니게 좀 무례를 범했으니 용서하시구려. 하지만 이렇게 약해서야 기다린 보람이 있을지 모르겠군......." "지나치게 지껄이는 건 패배의 첫걸음이야." 그라테우스의 도발에 드디어 유신이 잠들어 있던 용아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부우웅' 기묘한 이질감이 주병의 공간을 휘감으며 용아검이 자신의 집을 떠나 처음으로 마법계를 구경했다. 그리고 용아검이 눈을 뜨는 순간 세계가 멈추었다. 그라테우스는 파괴의 욕망에 번쩍이는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는 무시무시한 형상 그대로였고, 세라피와 엘리시엘의 긴장한 얼굴에도 기묘한 이질감이 서린 채 굳어 있었다.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 겨우 1년도 안 되는 시간을 못 보았을 뿐인데..... 나 역시 인간의 성급함이 옮은 건지도 모르겠군." 깊고 푸른 눈, 그리고 길고 푸른 풍성한 머리카락, 강인해 보인다기보다는 중성적인 아름다움을 띤 미묘한 턱선.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자. 우주 최강의 존재. 용제 카이드리아 엘 엑시나에. 그 가 '이곳'에 강림하였다. "아아......그렇군. 이건 시간 정지인가? 창조신급 이상만이 구현할 수 있다는 평상공간의 완전 시간 정지......그 만큼의 신력이 생긴 거야?" "루시펠님과의 전투로 강해진 건 너 만이 아니야." 그녀의 이름이 거론되자 어쩔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듯한 아쉬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래서 이곳엔 뭐 하러 온 거야? 설마 네가 여기서 난동을 부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건 아니겠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이곳에' 없다고." "..........." "시간정지인가......." "그래. 난 여기에 존재하지 않아. 널 도와 줄 수도 없고. 솔직히 도와줄 마음도 없다." "......나도 기대하지 않으니까 그건 됐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두 번째 봉인 해제다. 용아검을 쓰는 순간 풀리게 되어 있지." ".......어째서 네가 나의 봉인에 관련되어 있는 거지? 그건 천사들과 신족들의 일이 아니었나?" 유신의 멍청한 질문에 카론은 다혈질인 그의 성격을 대변하듯 육두문자부터 튀어 나왔다. "#$%#@*넌 바보냐? 아무리 천족이나 신들이라 해도 용제의 용신화랑을 봉인하면서 내 허락도 안 받았을 것 같아?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인단 말야? 으으으으" 카론은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눈치 없는 유신과 이야기하려니 자신까지 그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 드래곤 하트가 콱 막히는 게 너무 답답했다. 할말만 빨리 하고 사라지는 것이 상책이다. 나이에 걸맞게 현명한 판단을 정말 '오랜만에' 내린 카론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지브릴님의 봉인은 니가 생명의 기로에 설만큼 극한의 힘을 사용하면 풀리게 되어있고, 니케의 봉인은 용아검을 뽑는 순간 풀리게 되어 있었지. 마법계에서 그 이상의 봉인이 풀리게 될 일은 없을 터이지만...... 더 이상은 가르쳐 줄 수 없고......." "대체 왜 이런 일을 벌리는 것이지? 마법계가 이상해 진 것과 관련이 있는 거야?" 꼭두각시처럼 남의 손에 놀아나는 것 같은 예감에 유신의 목소리가 추궁하듯 날카로와 졌다. 무엇이 부족해서 아직도 자신이 신들의 장난감 취급을 당해야 하는지 너무 분했다. "너무 화내지 말라고. 성계대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너도 알고 있잖아. 헬마스터중 둘이나 살아 남았다고. 게다가 게헨나는 빠르게 복구되고 있어, 판데모니엄은 어디로 이동했는지 위치파악조차 안되고 있으니 마신왕급들의 부활만 이루어 지면 다시 전쟁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야."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난 이미 모든 힘을 잃었다고. 봉인 한 두개 풀린 걸로는 일반 화랑만큼의 전투력도 낼 수 없어. 용신기 컨트롤도 불가능하고. 그런 내게 대체 뭘 더 바라는 거지?"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할 뻔했군. 지금 '거기' 있는 것이 유신인가? 홀리크로스의 기전장군, 용제의 용신화랑, 마왕을 봉인한 용사가 맞는가? 어린애만도 못한 신세한탄을 푸념처럼 늘어놓으며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있는 것이 유신 더 실버스타라고 불리웠던 바로 그 남자가 맞는가?" 카론의 질책에 유신이 한순간 굳어졌다. '그런....건가? 마법계에 오면서 난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약해졌던 것일까?' '내 이름은 유신 더 실버스타. 첫 번째 인간. 창세신의 클론. 아무리 봉인을 당하고 모든 힘을 잃어도..... 나는 강해야만 한다......아니, 나는 강하다!!' "미안하군.... 그리고 고맙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넌 내 가장 친한 친구인 모양이다...." 평소라면 절대 할 리도 없고, 듣는 쪽도 달갑지 않은 닭살스런 대사를 뱉어내자 카론은 질겁을 하며 도망쳤다. "역시 넌 유신이 아니야. 아니라고...... 나....난 가버릴꺼다. 이제 갈꺼야. 니 마음대로 살라고." 정말 질려 버렸다는 듯 카론은 정지공간에서 완전히 벗어나 물질계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며 신과 같은 권능이 사라지자 기적의 순간은 끝나고 시간은 언제나와 같이 정상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파칭' 봉인이 두 개나 풀렸다. 주변의 마나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고 용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코어와 가공스러울 마나의 폭풍이 찌르는 듯 유신의 온 몸에 전해졌다. 장님이 눈을 뜨는 쾌감. 귀머거리가 소리를 듣는 쾌감. 시원하면서도 갑작스런 봉인 해제에 따른 오감의 개방에 약간의 두려움 마저 느껴지는 유신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에 유신보다 오히려 그라테우스가 더 놀랐다. 평범한 사람보다도 코어의 흐름이 미약하던 사냥감의 전투력이 갑자기 크게 상승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도 두려운 건 유신이 들고 있는 새하얗고 화려한 검. 용의 뼈로 만든 드래곤 슬레이어의 일종이란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지금 느껴지는 힘은 단순한 드래곤 슬레이어의 느낌이 아니었다. '뭐....뭐냐?? 대체 어떤 미친 용이 저런 물건을 만들었단 말인가? 저런 건 인간 마법사가 만들 수 있는 검이 아니다!! 용이....그것도 고룡 이상의 존재나 신이 만든 검이다. 저건 위험해!!' 그라테우스는 일단 뒤로 물러나며 두 번째 브레스를 준비했다. 아무리 용아검이 대단해도 브레스를 막을 수는 없다. 레어 안에서 사용하면 레어가 다 녹아버리겠지만, 그라테우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명의 위협이란 걸 느끼고 있었다. 레어 따위는 문제가 아닌 상황이다. 레어의 입구는 자신이 차지하고 있고, 레어의 뒤쪽은 막혀 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브레스를 뿜는다면 절대 피할 수 없다. 게다가 가장 걱정되는 자신의 보물 창고는 레어보다 낮은 지하의 깊숙한 곳에 있으니 블레스를 써도 안전할 것이다. "쿠와아아아" 주변의 공기가 그라테우스를 중심으로 확 빨려 들어갔다. "운명보다 더 차가운 자여, 시간조차 얼리는 빙계의 주인이여, 여기 선택받은 정령사, 정령왕의 가장 진실한 벗이 미래의 희망과 바꾸어 그대의 힘을 빌릴 것을 원하니........" "콰콰콰쾅" 동굴이 무너질 듯한 굉음과 함께 그라테우스의 두 번째 블레스가 발사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 블레스를 발사했을 때처럼 온통 화염만이 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라테우스도 자신의 블레스를 막고 있는 얼음의 거인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웜급의 용도 함부로 소한 할 수 없는 얼음의 정령왕 비시엔을 고작 엘프 정령사 따위가 소환했다고? 큭!!' 그라테우스는 까짓 거 막으려면 막아 보라는 생각으로 드래곤 하트에 더욱 마나와 코어를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옥의 가장 밑바닥을 열어놓은 듯 한 염화의 시간이 지나갔다. 찌는 듯한 열기와 솟아오르는 수증기 사이로 유신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미라쥐, 파워 업, 스피드 업, 에어 윙" 주문도 없는 시동어 영창만으로 카론의 용아검은 마법을 마구 뿜어내었다. 유신의 모습은 순식간에 다섯 명으로 불어나 각자 그라테우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미라쥬 마법은 분신이나 환영마법처럼 단순히 하나의 이미지를 여러 개로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법 시전자의 사념을 비추어 주는 것이므로 유신이 낸 4개의 환영은 각자 다른 공격을 퍼붓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론 이런 환영 여러 개를 각자 컨트롤하려면 왼손으로 삼각형을 그리며 오른손으로 원을 그리는 유치한 수준의 기술이 아니라 말 그대로 환영 전체에 전부 의식을 분리해 각자 컨트롤 해 주는 놀라운 재주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유신은 그런 놀라운 재주가 있는 드문 사람 중에 하나이다. "썬 라이트" 하지만 그라테우스도 싸움에 둘째가라면 서운해하는 용족이다. 레어에 강력한 마법의 빛을 여러 개 띄어 두고 그림자가 없는 공격은 무시해 버렸다. 그 큰 덩치에도 예의 키메라 만큼이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그라테우스였지만, 동굴 속이란 핸디캡은 어쩔 수가 없었다. 레어를 다 부실 듯 거칠게 날뛰어도 아무래도 여기저기 걸리적거리는 게 많아서 그라테우스는 만족스럽게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용아검의 끝이 그라테우스의 오른쪽 겨드랑이에 닿았다. 그라테우스는 마나를 집중하여 퉁겨내려 하였지만, 용아검은 마치 달팽이 속살이라도 베는 것처럼 마나까지 집중한 그라테우스의 비늘을 별 힘도 들이지 않고 헤집고 들어갔다. 덩치에 비하면 워낙 경미한 상처이니 무시할 법도 하지만, 용족의 하늘 끝에 닿아있는 프라이드를 끝장내 버린 정신적 타격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어린 용에게 있어 육체적 고통이란 것은 너무나 생소한 것이다. 하지만 그라테우스는 자신에게 이토록 불쾌한 감각을 느끼게 한 이 재수 없는 인간을 죽일 수만 있다면, 지금 느끼는 고통은 오히려 유신을 죽인 후에 더욱 큰 쾌감을 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그라테우스는 근육에 힘을 꽉 주어 용아검이 빠지지 못하게 한 후 왼쪽 팔로 그대로 유신을 뭉게버릴 참이었다. 비록 봉인이 두 개나 풀렸다해도 용의 근육 사이에 끼어 있는 용아검을 완력으로 도로 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신의 자그마한 몸뚱이를 향해 어지간한 준 대형 몬스터 보다도 커다란 그라테우스의 손바닥이 덮쳐 왔다. "안티 매직 쉴드, 시즈 플레어" 광기 어린 그라테우스의 울부짖음에 묻힌 주문의 시동어는 잘 들리도 않았지만, 그라테우스의 겨드랑이 속에서 폭발하는 지옥의 불길을 보면 유신이 어떤 끔찍한 마법을 썼는지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쿠와와와와" 아무리 용이라 해도 8서클 궁극의 마법이라 불리우는 시즈플레어를 맞고 무사할 리 없다. 그것도 강력한 방어막 역할을 하는 드래곤의 비늘을 째고 그 안에서 폭발시킨 것이라 그라테우스는 오른쪽 어깨부터 날개까지 완전히 찢겨져 나갔다. 그런 폭발 속에서 유신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미리 안티 매직 쉴드를 치고 폭발하는 순간 최대한 빠른 속도로 폭심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금의 일격으로 용아검도 마나를 모두 소진한 듯 검신에 아름다운 무늬를 수놓으며 환하게 빛나던 마법 문자의 빛이 모두 죽었다. 그라테우스는 물러서면서 힐링 마법을 계속 걸었지만, 완전히 재가 되어버린 오른쪽 팔과 날개가 재생할 리 없다. "쿠와아아아아 이 망할 자식아!!!" 분노로 이미 이성의 찌꺼기조차 남아있지 않은 그라테우스는 마구잡이로 레어를 부시며 유신을 잡기 위해 날뛰었다. 하지만 찢겨진 날개와 팔 때문에 제대로 균형을 잡을 수 없는지 처음의 날카로운 기세는 어디에도 없었다. "흥! 겨우 그 정도 상처를 가지고 선불 맞은 고릴라새끼처럼 날뛰지 마라. 최강의 생물이란 칭호가 부끄럽지도 않냐?" 유신은 계속 빈정거리며 그라테우스가 더욱 날뛰게 하여 체력을 소진 시켰다. 이미 레어 안의 기둥이나 지지대들은 거의 다 무너졌지만, 아직 그라테우스의 마나가 끊기지 않았기 때문에 폭삭 내려앉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동굴 안을 더욱 파괴시켜 그라테우스의 마력으로 형체만 유지하고 있는 지지점에 부담을 주게 되면, 이에 마나를 공급하고 있는 그라테우스의 힘은 훨씬 빨리 고갈될 거라는 계산에서 이렇게 마룡을 놀려대는 것이다. 다행이 시즈플레어는 화염의 속성이 많은 마법이라 상처 부위는 모두 다 지져져서 피가 사방으로 날리지는 않았다. 용의 피는 상당히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만약 그 피를 뒤집어쓴다면 엘리시엘이나 세라피는 위험할 수도 있다. 용아검의 마나가 완전히 다 떨어지자 근력 마법과 속도증가 마법, 그리고 공중 부양 마법의 효과가 모두 사라졌다. "모두 레어 밖으로 일단 후퇴하자! 이제 그라테우스도 날 수 없으니까 넓은 곳에서 싸우는 것이 더 유리해." "누구 마음대로 나간다는 거냐?" 지름만 10m 가 넘는 그라테우스의 꼬리가 세라피와 엘리시엘을 향해 휘둘러졌다. 하지만 미스티가 한발 빨라서 겨우 둘을 끌어안고 피할 수 있었다. 꼬리가 가격한 지면은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엄청난 굉음을 내면서 파였고, 거기에 휘말린 미스티와 두 엘프는 저만치 나가 떨어져 버렸다. 그라테우스가 입구를 막고 있는 한 유신이나 미스티라면 몰라도 세라피나 엘리시엘이 무사히 탈출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지치지 않는 강철같은 힘의 축복을..... 파워 업, 축복 받은 바람의 힘을 빌어 찰나를 넘는 빠르기를..... 스피드 업, 창공을 가르는 하늘의 영광을..... 에어 윙" 그 와중에 어떻게 정신을 수습했는지, 그동안 별 도움도 안되고 짐만 되어 왔던 세라피가 드디어 한 건했다. 유신이 쓰던 보조 마법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자신이 아니라 유신에게 그대로 걸어 준 것이다. 엘리시엘의 수준으로는 용아검처럼 시동어 만으로 주문 바로 쓸 수 없지만, 보조마법은 그다지 높은 서클의 주문이 아니기 때문에 시전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로 한 것은 아니다. 미라쥬같은 마법은 잘 모르니 쓸 수 없지만, 다른 보조마법 정도라면 세라피도 별 무리 없이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마법이 승패를 가를 만큼 도움이 되었다. 사실 100m 에 달하는 그라테우스의 크기를 생각한다면 에어윙 마법 없이는 아무리 유신이라도 무릎 이상을 공격하기는 매우 힘들다. 용의 거내한 덩치를 보건데 무릎 이하에는 아무리 검상을 남겨 봐야 그다지 큰 타격을 줄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비행 마법으로 하늘을 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신이 건 마법이 아니므로 비행 중에는 몸을 컨트롤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하늘에 떠서 매서운 공격 할 수는 없었지만, 빠른 스피드와 순간순간 몸을 가볍게 하여 비약적으로 높이 점프하면 하늘을 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다. "하~앗" 유신이 코어를 가속하자 용아검에 새하얀 백금색의 검기가 4m 가량이나 뻗어 나왔다. 보통의 검기가 푸른색인데 비해 유신이 사용하는 것은 새하얀 백금색이다. 그만큼 정순한 코어를 가진데다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 얻은 최강의 검기이기 때문에 백금색을 띠는 것이다. "카가가가각" 검기를 머금은 용아검은 듣기 싫은 금속 긁는 소리를 내며 그라테우스의 가슴에 5m 정도의 검상을 주었다. 어떻게든 하나 남은 팔로 유신을 붙잡기 위해 발버둥쳐봤지만 유신은 그라테우스의 무릎을 밟고 다시 날아 오르며 왼쪽 날개의 뼈와 신경다발이 지나가는 부분을 깊숙이 도려내었다. 용의 약점이라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신이다. 만일 그라테우스가 냉정한 정신을 유지한 채 용아검의 마나가 다 떨어진 것을 이용하여 침착하게 싸움을 풀어 갔다면, 아무리 봉인이 두 개나 풀린 유신이라 해도 쉬운 싸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승패야 어찌 되었든 세라피와 엘리시엘은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라테우스는 난생 처음 겪어 보는 육체적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평소의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망할자식...... 이정도나 당했으면 이제 그만 죽어랏!!'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계속 급소라 부를만한 부위에 치명적인 검상을 주었지만, 그라테우스는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라테우스의 넓은 레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레어를 지탱해 주던 그라테우스의 마나가 마침내 끊긴 것이다. "미스티!! 모두 와 먼저 탈출햇" 유신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스티는 두 엘프를 양 옆구리에 끼고 전속력으로 레어의 입구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천장에선 그라테우스의 앞발 만한 바위나 기사의 마상용 랜스 만한 크기의 종슈석 비슷한 것도 떨어져 내렸지만, 그 정도는 미스티가 부셔버리거나 충분히 피할 수 있었기에 탈출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유신!! 이거 놔!! 뭐하는 짓이야!! 유신이...유신이 저기 있다고!!!!!" 엘리시엘이 거칠게 몸부림치며 미스티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자, 무너지는 돌덩어리를 피하거나 부수는 것도 버겁던 미스티는 그만 엘리시엘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퍼억" 미스티는 막 뒤로 돌아 다시 동굴로 뛰어가려는 엘리시엘의 뒷덜미를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세게 쳐서 기절시켜 들쳐업고는 마침내 레어 밖으로 도망 쳤다. "쿠쿠쿠쿠쿵" 암흑의 골짜기가 다 울릴 정도로 엄청난 굉음과 진동 속에 마룡의 산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쿠콰콰콰콰쾅" 미스티와 세라피가 황망한 심정으로 뿌연 흙먼지에 휩쌓여 희미하게 실루엣만 보이는 마룡의 산을 바라볼 때, 산이 붕괴하는 소리가 무색해 질 정도로 귀청을 찢는 소리와 함께 새빨간 불기둥이 붕괴되는 산을 뚫고 하늘로 치솟았다. 그라테우스가 쓴 최후의 브레스일 것이다. "맙소사..... 유신......" 간신히 정신을 차린 세라피가 그 광경을 보고 넋이 나간 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 날을 기해서 마룡산의 악몽이라 불리우는 공포스러운 그라테우스의 전설은 끝장났다. 대신 대륙에는 드래곤슬레이어의 새로운 영웅 전설이 시작되었다. '더......' '더.......' '나는 더욱더.......' '강해질 것이다........' . . . . '그로서 모든 걸 버려도 좋은가? 너의 동족을.....너의 존재 이유를...... 그리고 기억의 일부조차도.....' . . . . . 하누스 왕국은 지금 축제 분위기다. 바다 위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던 흄의 함대도 완전히 본국으로 철수하였고, 무엇보다도 그라테우스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 왕국에 퍼졌기 때문이다. 물론 유신이나 그의 일행들은 자신들이 그라테우스를 쓰러뜨렸다는 소문이 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소문이란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라테우스의 브레스가 하루에 세 번이나 사용되었는데 하누스의 마법사들이 이 기운을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당장 마룡의 산 근처로 모든 탐지 마법이 집중되었고, 마침내 그라테우스의 마나의 힘이 완전히 소실되자 무모하리 만치 용감한 한 마법사가 과감하게도 비젼마법으로 그라테우스의 레어를 살펴 보고야 말았다. 만약 그라테우스가 무사하다면 자신의 레어를 누군가가 비젼마법으로 비추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무례하게도 용의 사생활을 캐려고 하는 그 누군가를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을 것이다. 마법사도 그것을 모를 리 없고 그라테우스가 두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훌륭한 마법사란 호기심의 충족을 모든 세상만사의 위에 두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그 마법사는 정말 훌륭한 마법사였다. 그 훌륭한 마법사가 목숨을 건 비젼마법으로 본 것은 다 무너진 그라테우스의 레어와 그라테우스의 마지막 블레스가 할퀴고 지나가며 생긴, 하늘을 향해 유리질의 입을 벌린 동굴,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조금 피곤한 듯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검은머리의 18~19세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마법사처럼 보이지 않는 외모였지만, 비젼마법을 느꼈는지 그 훌륭한 마법사를 잠시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고, 소년은 쉬는 것이 더 급하다는 듯 그대로 바닥에 누운 채 눈을 감았다. 곧이어 그 소년주위로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운 엘프 둘과 안에 들어있는 종족이 무엇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거워 보이는 강철 갑옷을 입고도 경쾌하게 움직이는 기사가 몰려들었다. 비록 그라테우스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하루에 브레스가 세 번이나 사용되었고, 그럼에도 그의 레어에 살아있는 인간이 있는 것을 보면 그라테우스가 쓰러졌다는 것은 마법사만큼 머리가 좋지 않아도 평범할 정도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정도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가 죽지 않았자면 자신의 레어에 들어온 다른 지성체를 그 난폭한 마룡이 살려둘 리 없기 때문이다. 이 훌륭한 마법사가 마법의 연구만을 해 대며 주위의 소문이나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해도, 유신이나 미스티를 모를 만큼은 아니었다. 신이 만든 최강의 전투생물이 용이라면 마법사가 만든 최강의 전투생물은 키메라다. 그런 키메라를 넉 다운 시킨 유신과 미스티는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제법 유명했기에 이 훌륭한 마법사도 유신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키메라가 검사에게 패했다는 것은 마법사가 검사에게 패했다는 의식을 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고, 그래서 왕국의 마법사들은 어느 정도 기분이 나빠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의 걸작인 키메라를 쓰러뜨린 이 놀라운 존재가 신의 역작인 드래곤까지 쓰러뜨리자 모두 할말을 잃고야 말았다. 그리고 소문은 바람처럼 빠르게 퍼져 갔다. 사실 유신 일행이 사라지고 난 후 하누스는 발칵 뒤집혔었다. 유신을 하누스의 병력과 지휘체계를 정탐하려는 스파이로 매도하는 설부터 흄의 마물이 모습을 감추고 나라를 혼란시키기 위해 투입된 설이라는 것까지 정말 다양한 소문이 돌았다. 용아병에게 습격을 받고 바로 유신 일행이 전부 사라졌으니 그런 흉측한 소문이 돌아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다행이 이자벨 공주가 끝까지 싸고돌았기에 유신이 돌아오겠다고 편지에 남긴 한달 간은 모두 그냥 기다려 보기로 했지만, 만약 그라테우스의 레어를 그 마법사가 비젼마법으로 보지 못했다면, 유신 일행은 정말 지명수배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실제 수도에 다시 돌아온 것은 약속한 한달 보다 나흘이나 늦어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온 수도는 난리가 났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듣기만 해도 가슴 설래이는 그 명성에 온 왕궁의 모든 관심이 집중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유신 일행이 돌아와야 할 날짜보다 하루 이틀 늦어지기 시작하자 마법사들을 선두로 하나 둘 미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 싸움의 전말이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자벨 공주는 사흘째가 되자 발작을 일으킬 정도였다. 요약하자면 '나를 따돌리고 용을 잡으러 갔다는 것이 너무나 분해 죽겠다'는 내용의 말을 하루 종일 중얼거리며 온 궁안을 서성이는 공주를 보며 궁정의사는 진지하게 정신과 진단을 권고했을 정도이다. "으아아앗 이것들!! 돌아오기만 해봐랏!! 모두 지하 감옥에 처넣어 버릴테야!!" 나흘째 아침, 평소 차분하고 기품 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하고 강직했던 공주가 급기야 소리까지 지르며 발광하자 성안의 모두는 절반쯤 얼이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점심때 즘, 모두의 애간장을 바짝 바짝 까맣게 잘도 구워 논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이 마침내 입성하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좋은 날씨지요?" 어디 잠시 산책이라도 다녀온 듯한 편한 말투로 몇 번 본 적이 있는 성문을 지키는 병사에게 유신이 슬쩍 말을 걸어 보았다. 워낙 자연스러운 말투라 하마터면 그 병사는 "예, 그렇군요" 하고 맞장구 쳐 줄뻔 하였다. 약속일보다 늦어졌으니 이자벨이 길길이 날뛰고 있을 것이란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고, 그녀가 화가 났다면 왕궁의 분위기는 최악일 것은 뻔한 일이다. 유신은 그러한 왕궁의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병사에게 먼저 말을 걸어 본 것이다. 하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에 유신을 알아 본 병사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상관에게 일행의 도착 소식을 알리기 위해 성안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어찌 보면 상당히 무례한 태도라 할 수 있지만, 그런 경비병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이자벨이 꽤나 몸이 달아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상관은 다시 왕궁으로 뛰어 들어가 가장 먼저 눈에 잘 띄면서도 공주를 쉽게 알현할 수 있는 신분의 사람, 즉 로열가드에게 유신 일행의 도착을 알렸고 로열가드 역시 구르듯 달려가 공주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그래서 사흘째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은 공주를 간신히 달래어 막 포크를 잡게 했던 시녀장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자벨 공주가 그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총총걸음으로 위장한 뜀박질로 유신일행을 맞이하러 왔을 때는 황망한 표정의 병사만 멀뚱히 서 있었을 뿐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왕족에 걸맞는 놀라운 인내심으로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한쪽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약간 말까지 더듬거리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대.....대체 다들 어디로 갔지요? 서....설마 모두 도망간.....것은 아니겠지요?" 공주를 우상처럼 떠받드는 그녀의 광신도중 하나인 젊은 로열가드는 마치 유신 일행이 사라진 것이 그 병사의 탓인 양 죽일 듯이 노려보았고, 덕분에 그 병사는 너무 떨려서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어...버버.... 어버버....." "뭐!!!! 라고요?" 마침내 이자벨의 언성이 높아지자 병사는 기적처럼 한꺼번에 말을 쏟아 내었다. "옛! 그분들은 드워프 공방에 급한 볼일이 있다면서 가셨습니다." 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주는 이미 드워프 공방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자벨 공주가 공방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그곳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노튼은 별 고통 없이 죽었을 테군........ 용의 브레스에 죽은 드워프라..... 허헛, 군대가 병단 단위규모로 괴멸되는 브레스로 겨우 드워프 하나 잡다니....... 노튼으로선 영광일지도 모르겠군." 공방의 최고책임자중 하나인 드워프 겔파가 벌게진 눈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활활 타오르는 화덕을 응시하며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힘이 없어서......" 드래곤을 상대로 싸워서 아무 희생이 없을 리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유신은 무책임하게 노튼을 일행에 집어넣었고, 게다가 마룡산의 입구에서 그를 돌려보낼 기회가 있었음에도 안일한 마음에 그냥 그라테우스의 레어까지 따라 오는 것을 허락했다. 노튼은 유신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마법계에는 신이란 개념이 없다. 물질계에서처럼 신앙을 가지고 나름대로 죽음에 대해 준비하거나 내세를 기원 할 수가 없다. 유신은 진정으로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죽은 노튼을...... 드워프를 모욕하지 말게 젊은이. 드워프라는 종족이 자네의 도움을 받아야만 뭔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우습게 보이나?" "......죄송합니다........" "아니.... 자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야...... 이렇게 노튼의 유품인 드워프캐논이라도 챙겨와 주었으니..... 그리고 그의 복수를 해 주었으니 오히려 우리는 감사해야 할 입장이지." "..........." "자, 자, 일하는데 방해가 되는데 그만 나가주겠나?" 겔파는 큼지막하고 주름이 가득한 손을 휘두르며 일행을 내 몰았다. 드워프는 고집이 센 만큼 정이 많고 솔직한 종족이다. 아마 이들은 노튼의 마지막을 봐 주고, 유품까지 챙겨온 유신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강인한 종족은 자신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이방인이 보기를 원치 않는다. 유신 일행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 . . . . . . 드디어 리얼판타에 연재하던 모든 분량을 조아라로 옮겼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루에 한편.... 또는 이틀에 한편정도 올리게 되겠네요.....ㅜㅜ 그동안 연재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신 분들도 있을건데....... 사실 리얼판타에서 연재하던것의 1차 수정을 조아라에서 연재한거거든요. 생각했던것 보다 너무 많은 분들이 사랑해 주셔서 진작부터 감사하다는 말을 했어야 하는데..... 글올리는데 바빠서 그러질 못했습니다. 오늘로 연재시작한지 딱 10일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B&M많이 사랑해 주시고요, 따가운 질책이나 격려의 말씀도 부탁드릴께요..^0^ 그럼 오늘도 조아라에 오신 모든 분들 정말 좋은 하루 되시길...... "공주님 오셨군요. 말없이 떠나서 정말 죄송합니다." 공방앞에서 멍하니 일행을 바라보고 있던 이자벨 공주에게 유신이 먼저 인사를 건냈다. "......노튼님이......돌아가셨군요......." 이제 이자벨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는 사람의 죽음을 지켜본다는 것, 그리고 남겨진다는 것, 어째서 유신이 자기에게 아무말 안하고 떠났는지.........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이 고집을 피우고 따라갔다면, 그라테우스의 브레스에 재가 되어 버린 것은 그 강직한 드워프만이 아닐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가 죽었다면......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그 이야기는 그만 하도록 하지요. 그보다 어째서 그라테우스를 친 것이지요? 설마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명예가 탐이 난 것은 아니겠지요?" "......마룡이 인간들과 드워프들을 괴롭힌다고 해서요....드래곤 슬레이어의 명예도 탐이 났고......" ".........." "..............." "뭐....... 이야기하기 싫으면 싫다고 하세요. 그런 거짓말은 듣는 쪽도 무척 거북스럽군요." "죄송합니다." "죄송한 줄 안다면 내일 연회에는 참석해 주세요. 명색이 드래곤 슬레이어가 탄생했는데 왕궁에서 파티 정도는 해야겠지요?"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이자벨 공주는 뒤돌아 서서 가 버렸다. 아마도 유신이 그라테우스와 싸운 이유를 진지하게 말해 주지 않아서 화가 난 모양이다. 마룡 그라테우스의 소멸. 전 대륙의 축복이었다. 그라테우스는 부지런하기도 해서 라일로스 전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국가'라고 칭해질 만한 규모의 단체가 있으면, 어김없이 나타나 보석을 요구했다. 엘프들이야 보석을 모으지 않으니 그라테우스도 포기했지만, 보석종류를 열심히도 모으는 인간들과 드워프들에겐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라일로스 대륙의 작은 나라에서는 이를 위한 특별세를 따로 두었을 정도였다. 그런 그라테우스가 사라졌으니 전 대륙의 축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라테우스가 쓰러진지 두 달 후, 대륙 전체라고까지 말하긴 뭐해도 하누스 왕국에 두 번째 축복이 있었다. "아빠!! 아빠!! 이거 봐요!! 내 칼 좀 봐봐!!" 유수의 명문 무가인 커티스 백작가의 영애 신시아 커티스양이 이제 다 커서 처녀티가 남에도 '아빠'란 칭호로 백작을 부르며 온 집안을 뛰어 다녀 백작을 한숨짓게 만들었다. '휴.....저게 대체 시집을 어찌 가려고 저러노.....견습기사의 백부장이 되었다고 좋아했더니 이젠 골치 덩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해야겠군.....' 무가인 커티스가에 기사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하나뿐이 없는 아들이 마법사 나부랭이가 된다고 집안을 나가서 선조들에게 죄송스러울 따름이었는데, 느즈막하게 낳은 막내딸 기사단에 들어가서 커티스 백작은 그것으로 위로를 삼았다. 막둥이에 위의 형제들과는 나이차이가 많아서 온 집안의 귀여움을 받고 자란 응석꾸러기라 기사학교에 넣어두면 한달 안에 포기하리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천부적인 검술솜씨와 그 지독한 승부욕으로 왕립 기사학교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우수한 성적으로 기사학교를 졸업을 하고, 견습기사가 되었을 때가 그녀 나이 15세. 그때까지만 해도 별 걱정 없었다. 그저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딸이 한없이 귀여울 뿐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점점 차고 이제 18살이 되었음에도 검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그대로였고, 그래서 이 훌륭한 백작가의 영애에겐 아직까지 혼담이 단 한 건도 오지 않았다. 머리도 짧게 자르고 늘 따가운 햇살 아래서 강훈련을 해온 그녀에겐 미소년이라는 칭호가 더 어울렸다. 딸의 말에 따르면 자기가 기사학교의 퀸이며 자기를 짝사랑하는 남자가 줄을 섰다고 하지만, 남자뿐인 기사학교에서 어쨌든 성별상 여자인 그녀가 다르게 보이리란 건 아무리 팔불출인 커티스 백작이라도 쉬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도 몸매가 다 들어나는 타이트한 검술 연습복 차림 그대로 온 집안을 헤집어 놓으며 백작이 편히 쉬고 있었던 서재로 돌진해 오고 있는 중이리다. "아빠!! 여기 있었군요!!" 이제 활짝 피기 시작한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가리기엔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완고한 커티스 백작은 비록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칭송 받는다고는 해도 아직 애송이 티도 벗지 못한 근본도 모르는 검사 하나가 왕궁의 견습기사들을 가르치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애송이는 그동안 기사들의 연습방법이던 '두꺼운 중갑주에 무거운 칼'을 버리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검술'로 교육방침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덕분에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은 '자연을 느끼기 위해서'란 핑계로 이미 환갑에 이른 자신이 봐도 얼굴이 벌게지는 야시시한 옷을 입고 저렇게 부서질 듯 힘차게 서재의 문을 열고 있는 게 아닌가? "신시아.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정식 기사 칭호를 받을 나이가 아니냐? 이제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게 어떻겠니? 그리고 복장은 그게 무엇이냐? 하인들이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객관적으로 봐도 틀림없이 예쁜 외모이다. 타오르듯 한 커티스가 특유의 붉은 머리카락, 커다랗고 장난기 가득한 생기 있는 눈망울, 운동으로 다져져 군살 하나 없으면서도 풍만한 몸매...... 그런 딸의 무방비 한 모습에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 많았지만, 무례하게도 자신의 딸은 하나도 듣고 있지 않았다. "네, 네, 그보다 아빠 이거 봐요!!" 건성으로 대답하며 전혀 바뀐 것이 없는 그녀의 예쁜 딸을 보며 백작은 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녀의 칼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커!! 컥!!" "어때요? 굉장하지요? 아하하 이게 검기라고요!! 전 대륙에서 여섯 번째, 아니 유신 선생님이 있으니까 이제 일곱 번째네요. 그래도 어쨌든 최초의 여자 소드마스터라고요!!" 왕가의 상징인 황금독수리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신시아의 검은 '부웅'하는 공기의 진동음을 내며 희미하긴 하지만 푸른색의 검기에 쌓여 있었다. 현재 전 대륙에 여섯 명밖에 없다고 전해지는 소드마스터. 마법계는 마나의 흐름이 워낙 활발하여 마법이 발달한 대신 물질계처럼 체계적인 검술과 코어를 단련하는 방법은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다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사람이 나와도 그 확률은 천문학 적인 수치이며 검기를 뿜게된다 해도 그 방법은 후세에 전해지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본인 스스로가 정확한 수련 방법은 알 수가 없으니 남을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 스승도 없이 검기를 뿜을 경지에 오른 자는 가히 검에 대해선 천재란 칭호를 들어도 좋을만한 사람이다. 어떠한 스승도 없이 코어가 몸을 흐르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그것을 제대로 컨트롤 해서 검기까지 맺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른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기 위해선 얼마나 많이 검을 휘둘러야 할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재능이 따라 주어야 할 지를...... 하지만 신시아에게는 유신이라는 최고라고 칭해도 좋을만한 제대로 된 스승이 있었다. 유신은 봉인이 두 개 풀리면서 몸 속의 코어를 회전시킬 수 있게 되자 당장 자신이 알고 있는 수련 방법을 견습기사들에게 제대로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까진 그의 제자 중에 검기를 낸 견습기사는 신시아 뿐 이지만, 그녀에겐 그녀 나름으로의 사정이 있었다. 신시아 역시 이자벨 공주가 그러했듯 남자와의 체력차이에 의한 한계를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체력 차를 인정하고 포기하는 대신, 남자들보다 두 배 세 배 더 열심히 연습했다. 처음에는 호흡법이나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명상 수련이 너무 답답하고, 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초조하기만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신시아는 유신을 완전히 믿기로 했다. 완력도 자기보다 아주 조금 더 강할 뿐 인대도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유신을 보면 자신도 얼마든지 더 강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성으로서 완전한 성장기가 끝난 그녀는 더 이상 체력적인 진보가 없었기 때문에 더 강해지기 위해선 선택의 여지 따위는 없었다. 남자들의 엄청난 체력에 어느 정도 주눅이 들어있었고, 그런 남자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한 고된 수련이 일상이 되어 있던 그녀는 새 수련 방식에서도 남들보다 몇 배나 더 열심히였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대륙 최초의 여자 소드마스터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갖게 되었다. 이제 겨우 검에 푸른색만 감돌게 할 정도의 보잘것없는(유신이 보기에는......)검기였지만, 신시아는 태어나서 가장 기뻤던 날을 말해보라면 주저 없이 오늘이라고 할 것이다. "아빠, 아빠 이거보라고요. 검기라니까요? 그냥 살짝만 휘둘러도......" 번쩍번쩍 빛나다 못해 광선이라도 뿜을 것 같던 눈으로 서재 안을 둘러보던 신시아의 눈에 한 구석에 세워져 있는 풀 플레이트 메일세트가 보였다. 커티스 백작이 뭔가 불길함을 느끼고 말리려는 찰나 이미 신시아의 검은 우렁찬 고함소리와 함께 그 비싼 풀 플레이트 메일을 그대로 세로 방향으로 쪼개버리고 말았다. 선조 때부터 수십 년 동안 주인의 서재를 지켜오던 공허한 눈이 매력이라면 매력인 그 갑옷은 쿠당탕하는 원망 섞인 비명을 지르며 그 생을 접었다. 커티스 백작은 잠시 그 갑옷 때문에 화가 났지만, 방금 자신의 딸이 한 일이 뜻하는 바를 알게 되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었다. "내..... 딸이......대륙 최초의 여자.......소드.....마스터.........." 중얼거리는 아버지는 이미 안중에도 없다는 듯 신시아는 서재를 빠져 나가고 있었다. "아빠, 아빠 나 제랄딘한테 자랑하고 올께요!! 내일부터는 또 훈련이 시작되니까 오늘 가봐야 해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폭풍처럼 빠져나가는 자신의 딸아이를 보며 백작은 쪼개져 버린 풀 플레이트 메일을 대신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날을 기해 적어도 하누스 왕국에는 소드마스터가 그전처럼 귀한 것이 되지는 못했다. 일주일 정도의 간격으로 제랄딘과 세이람이 검기를 낼 수 있게 되었고, 견습기사 중에서도 하나 둘 검기를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사 서임식 날이 되었을 때는 무려 8명의 소드마스터가 빛나는 검을 세우고 그들의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을 정도이다. 왕은 검기를 낼 수 있는 이들에겐 더 높은 작위를 줄 생각이었지만, 그러면 앞으로 나올 수많은 소드마스터들에게 줄 작위를 감당할 수 없다고 유신이 결사반대를 해서 이 건은 접어 두었다. 자신이 교육한 기사들 중에선 더욱 많은 소드마스터가 나올 것이라는 절대적인 자신감. 국왕과 유신을 시기하던 수많은 귀족들까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미스티, 나 없는 동안 녀석들의 교육을 부탁해." 비록 해상무력 시위 중이던 흄의 대군이 자신들의 대륙으로 뱃머리를 돌렸다고는 해도, 아직 전쟁의 위협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다. 헬마스터가 껴 있는 이상 뭐든 이렇게 일이 좋게 풀릴 리가 없다는 것은 그간의 경험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신이다. 게다가 상대가 배신과 거짓의 헬마스터인 베리알 이라면 어떤 흉악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모자란 유신의 상상력으론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다행한 점이라면, 유신이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고, 막상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그에 대응하기 위한 비밀 무기가 하나쯤은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유신은 가장 강력한 비밀무기인 인재를 구하기 위해 여행 준비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유신의 봉인이 풀렸다고는 해도 정말 제가 따라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네가 동행한다면 물론 나도 좋지....... 하지만 체계적으로 코어를 쌓는 수련 방법을 알고 있는 건 나를 제외하고는 너뿐이잖아. 그리고 머지않아 흄과의 일전이 있을 거야. 그전에 적어도 지휘관 급들은 전원 검기 정도는 뿜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해" "베리알.....때문입니까?" "그래. 니케가 무엇에 걸고 벨제버브를 봉인한 줄 알아?" "순결에 걸고 봉인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폭식과 색욕의 헬마스터이니까요. 하지만 그게 왜....." "엘프의 숲에서 일을 생각해 봐. 마물들은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여자' 엘프는 죽이지 않았어." "서....설마......" "베리알놈, 니케의 봉인마법 해석을 완료했나봐. 그렇다면 벨제버브의 봉인 해제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백만명의 순결한 처녀. 하지만 엘프 하나는 백 명분의 인간처녀의 제물 역할을 할 수 있지. 게다가 처녀 엘프는 천 명분이야." "엄청....나군요." "왜 진작 눈치채지 못한 걸까..... 다음에 카린에게 통신할 기회가 있으면 이 사실부터 알려. 난 소드마스터란 자들을 한시라도 빨리 찾을 테니까." "그럼 전 돌아오실 동안 기사들의 양성에 힘쓰겠습니다. 달리 시키실 일은......" "아아 하나만 더. 사냥개를 길러줘." "사냥개....말입니까?" "검기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해도......솔직히 그 정도로 소드마스터라고는 할 수 없지. 화랑급의 전투력을 낼 수 있는 전사들을 양성해 줘. 전쟁이 아닌 다른 부분에도 쓸 수 있을만한 융통성 있는 부대를......무슨 말인지 알겠지?" "평민이나 부랑자 중에서 특수전을 수행할만한 자질이 있는 인원들을 추려 놓겠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물론 특별히 교육도 시킬 것이고요." "좋았어. 얘기가 빠르군. 그럼 난 국왕을 알현하고 출발할게." 마법계에서 아무 스승도 없이 자력으로 검기를 맺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자들. 어쩌면 이들은 용신화랑이 될 정도의 자질을 갖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모두들 중년을 넘은 나이일 테지만, 만나봐서 나쁠 것은 없다. 정말로 이들 중에 용신화랑이 될 정도의 자질을 갖춘 자가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물질계로 빼돌려 성계대전에서 전사하거나 봉인 당한 용신화랑의 자리를 대신할 인재로 키워 내야 한다. 육체적으로 늙은 거야 물질계의 뛰어난 과학력 이면 어떻게 해서든 해결할 수 있으니 상관 없지만, 문제는 그들을 찾아서 어떻게 물질계로 보내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만나고 난 후에 고민해도 되는 일이고, 일단은 그 소드마스터란 자들부터 찾아야 한다.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전 국민적 영웅인 유신이 잠시 여행을 간다는데 감히 막을 사람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적어도 따라 가겠다고 고집부릴 만한, 그리고 그 고집을 절대로 꺾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한 명 정도 있다. 유신이 소드마스터를 찾아 여행을 갈 것이라고 하자 이자벨 공주는 자기를 죽이고 혼자 가든지, 아니면 데리고 가든지 양자택일하라고 협박을 하였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신은 부담스런 짐 덩어리를 끌어안게 되었다. 그리고...... "저도요. 저도 가겠어요.!!" 초롱초롱하고 호기심이 철철 흘러 넘치는 갈색의 눈동자가 이 말괄량이를 데리고 다니면 얼마나 고생하게 될지를 예언하는 듯 했다. "정식 기사 작위를 받았으니 수련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저도 선생님과 함께 가고 싶군요." 차분하고 냉정한, 그래서 무척이나 믿음직한 목소리의 주인은 세이람이다. 이건 마음에 든다. "신시아하고 세이람도 가겠다고?" 세이람은 마음에 들지만, 솔직히 신시아는 부담스럽다. 유신은 혹시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되물었다. "제랄딘도 함께 간다면 좋겠지만, 그 녀석은 아버지의 영지에 급한 일이 있다며 어제 먼저 떠났습니다." 삼총사 중 또 하나의 믿음직한 인재인 제랄딘은 그런 이유로 빠졌고, 말괄량이 신시아와 그녀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 다녀 그림자 경호원이라고 동료들 사이에서 놀림 받는 세이람만이 동행을 요청했다. 신시아, 세이람, 제랄딘은 하누스의 삼총사라 불리 울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는 기사들이다. 견습기사 중에서 가장 먼저 검기를 터득했을 만큼 검에 대한 재능도 풍부하고 노력 역시 엄청나게 하는 녀석들이다. 집안 모두 백작가 이상이기에 전술훈련 때마다 언제나 고급 장교의 역할을 했었고, 특히 제랄딘은 공작가의 장남이었다. 세이람과 제랄딘이 어디 파티에라도 뜨면 그 날 파티에는 평소보다 세배의 처녀들이 참석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준수한 외모에 훌륭한 화술과 매너로 사교계에서도 인기가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한사람의 역할(유신이 보기에)을 할 만한 수준은 결코 아니다. 검기를 낼 수 있다고는 해도 실전 경험이 워낙 떨어지기 때문에 엘핀서스 전투에서 유신과 함께 싸웠던 로열가드들의 절반의 실력도 가지지 못했다는 게 유신의 솔직한 평이었다. 게다가 저 신시아가 문제다. 뭐든 차분히 스스로 알아내는 세이람이나 제랄딘에 비해 신시아는 남에게 물어보고 귀찮게 하여 지식을 쌓는다. 왜 견습기사들은 검기를 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서 자신에게는 안 가르쳐 주냐고 달달볶고 있는 이자벨 공주만 해도 유신은 너무 버거운데 거기에 신시아까지 더해지면...... 하지만 떼어놓을 만한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이자벨 공주가 세이람이나 신시아가 검기를 쓸 수 있다는 걸 핑계로 경호원 자격으로 동행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시아와 공주는 오누이처럼 금세 친해져 버렸다. 같은 여자이면서 검에 대한 열정도 비슷하고, 무엇보다 신시아가 여자의 몸으로 가장 먼저 검기를 낸 것이 이자벨의 마음에 든 것이다. 신시아를 여행에 동참시켜 하루에 수련하는 양 정도를 본다면 이자벨공주 자신도 배울점이 많을 것이란 생각도 깔려 있으리라. 그리고 언제나 따라 다니는 두 엘프. 엘리시엘은 무리한 정령왕의 소환으로 한달 가까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가 유신과 세라피의 극진한 간호 덕택에 겨우 회복하게 되었다. 정령왕에과 목숨을 건 계약을 했으니 사실 정상적으로는 엘리시엘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유신이 용아검을 들고 은근히 얼음의 정령왕 시비엔을 협박한 것은 시비엔과 유신만이 아는 비밀이며, 시비엔이 그 협박에 넘어가 주는 척 한 것은 용제인 카론의 노골적인 협박 덕분이라는 것은 시비엔과 카론만이 아는 비밀이다. 유신과 함께 다니면 목숨이 몇 개 있어도 모자라다는 것을 알면서도 끈질기게 따라 다니는 것을 보면 세라피와 엘리시엘은 정말 특이한 엘프인 것 같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흥미무쌍한 새 파티가 결성되자 드디어 소드마스터를 찾기 위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소드마스터중 그나마 가장 나이가 젊은 리터마인 자작은 하누스 옆의 작은 나라인 카마론공화국의 귀족이다. 가장 행방이 확실한 사람이기에 일행은 우선 그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카마론 공화국은 다른 군주제의 나라와는 달리 공화정을 펴고 있는 나라로, 일단 왕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유수의 귀족가문들이 모여 5년에 한번씩 최고대표를 뽑고, 그 아래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을 두어 일인 독재를 막는다는 방침이었다. 하지만 절대적인 권력자가 없는 만큼 백성들의 부담은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카마론 공화국에서는 나라에 세금을 내야하고, 그 지방의 영주에도 세금을 내야하며 얼마 전까진 그라테우스에게 바치는 보석을 위한 특별세까지 있었고 그 외에도 이런저런 자잘한 명목으로 엄청나게 세금이 많았다. 특별히 국토가 비옥한 것도 아닌데 이런 수탈을 당하니 백성들이 만족하고 살 리 없다. 중앙군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사병 형식으로 귀족 아래에 모여 있는 군대가 전부이니 산적이나 강도가 횡행하고 노예로 부리기 위한 인신 매매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진다. 몇몇 뜻이 있는 젊은 귀족들이 모여서 이렇게 타락한 나라를 어떻게 해서든 개혁해 보려고 했지만, 워낙 귀족의 수탈이 뿌리깊게 자리 잡은 나라라 아직 이렇다 할만한 성과는 없었다. 게다가 처음에는 좋은 취지로 개혁을 실행하던 젊은 귀족들도 나이를 먹고 권력과 돈이라는 달콤하지만 치명적인 열매의 맛을 보게되면 타락하기 일쑤였다. 그러한 나라이니 치안이 제대로 이루어 질 리 없고, 솔직히 '미인밖에' 없는 유신일행은 꽤 위험할 수도...... 아니 위험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귀찮은 일에 말릴 가능성은 너무나 농후한 것이다.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이자벨 공주는 당연히 이 나라에 가는 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리 없었다. "그래서 그 리터마인 자작은 어떤 사람이지요?" 이자벨에게 대략적인 카마론 공화국의 사정을 들은 유신이 좀 걱정스러운 어투로 물어 보았다. "이렇다 저렇다 할 것도 없군요. 단지 검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정치에도 관심이 없고 자신의 영지에도 관심이 없어서..... 영지는 일반적인 다른 영지들만큼 수탈 당하지만, 그 돈들은 전부 자작가의 다른 사람들끼리 제 배 불리는데 사용되어지고 정작 리터마인 자작 자신이 사치한다거나 하는 소문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유신도 잘 알고 있는 케이스다. 어떤 일이든 '일가를 이루었다.'란 말을 듣기 위해선 다른 곳에 관심을 쏟을 틈 따윈 없다. 하다 못해 사치할 시간도 없는 것이다. 아마도 자작의 이런 무심함을 이용해 집안의 다른 사람들이 그저 다른 귀족들이 하는 것을 흉내내어 적당히 수탈하고 적당히 제 배를 불리는 중일 것이다. 물질계에서도 화랑급 이상의 실력자들은 강해지는 것을 제외하면 세상 만사에 무관심했던 경우가 많았다. 진정으로 어느 정도 이상의 경지를 넘어선 자들, 이를테면 용신화랑급에 이르면 자신의 주변을 둘러 볼 여유가 생기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갈고 닦기에도 하루 하루가 모자란 것이다. 이를테면 옆에서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는 세이람이나 신시아처럼 말이다. 둘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몸을 혹사시키는 수준으로 말 위에서까지 수련을 하고 있었다. 신시아에 비해 코어를 다루는 솜씨가 좀 떨어지는 세이람은 검기를 낸 채 말을 몰고 있었고, 여자의 몸인지라 자연히 근력이 떨어지는 신시아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대형의 바스타드를 휘두르며 거기에 검기까지 입혀서 근력증가를 위한 수련과 코어를 다루는 연습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솔직히 유신이 보기에는 전부 몸만 괴롭힐 뿐 수련 효과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아주아주 비능률적인 수련법 이었지만, 잠시라도 가만히 있으면 상대에게 뒤쳐진다고 생각하는지, 둘은 잠시도 쉬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몇 번 말려 보았지만, 저렇게 몸을 혹사시키면서 수련하는 것도 나름대로 얻는 교훈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유신도 포기했다. 두시간 정도 말을 몰자 신시아가 심심했는지 세이람의 말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코어를 회전시키는 방법을 머릿속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던 세이람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신시아는 그 커다란 바스타드의 면 부분으로 세이람의 등허리를 후려치고는 그대로 말을 달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찌나 호된 일격이었는지 세이람은 거의 낙마할 뻔하였고, 금방 대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뭐랄까.....건강하다고나 할까....." 남은 일행은 모두 넋이 나가 버렸고 특히 세라피와 엘리시엘은 이런 장난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사람이야 어쨌든 말도 생명체이다. 드센 주인을 태우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일행의 말보다 배는 힘들 것인데 저렇게 장난치며 앞으로 한참을 뛰어갔다가 다시 돌아와 일행과 함께 가기를 계속 반복하니 두 필의 말은 금방 지쳐버렸다. 결국 점심식사를 하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었지만, 일행은 쉬기도 할 겸 일찍 밥을 먹기로 했다. 마침 국경도시인 테르아닌시에 도착했기 때문에 일행은 그곳에서 머물기로 했다. 별로 눈에 띄고 싶지 않은 일행이었지만,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다. 엘프가 둘, 미소년 셋(?), 그리고 미숙녀가 하나인 일행...... 눈에 띈다. 너무 띈다. 나름대로 화려하게 꾸민 사람들은 많이 오가지만 일행처럼 '아름다운'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끔 보이는 호사스러운 차림의 사람들도 대부분이 다른 나라의 여행객이거나 귀족들일 것이다. 하지만 별 볼일 없는 이 작은 나라에 저렇게 호사스러운 다른 나라의 귀족들이 뭐 볼게 있다고 올까? "그래도 공주님께 들은 것보단 생활 수준이 높은데요? 잘 모르는 제가 보기에도 꽤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아요." 순진하게도 세라피가 물어 보았다. 세라피만큼 순진하지 못한 유신은 이미 테르아닌 시에 들어 왔을 때부터 이 이상한 활기참에 슬슬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노예매매.....때문이군요." 국경 도시기 때문에 무역이 발달했으려니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거리에서 보이는 소위 돈 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은 상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귀족의, 그것도 꽤나 돈이 많고 한가할 것 같아 보이는 고급 귀족의 모습이었다. "대륙 전체에서 노예제도가 남아 있는 곳은 이곳과 북쪽의 군사강국인 예메른 밖에 없으니까요." 그렇다. 이곳에 모여있는 돈만은 이들은 노예를 사기 위해서 모인 한가한 귀족치들이다. 이런 돈 많은 이들을 위한 고급 식당가와 숙박시설이 즐비해 있어 화려해 보이지만, 그 화려함의 뒤에는 이렇게 더러운 노예매매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지성체를 사고 판다는 말이 세라피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엘리시엘은 이미 이런 것을 본 적이 있는지 담담하기만 했다. "인간이란 엘프도 사고 파는 종족인걸....." 엘리시엘의 말에 세라피의 하얀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감정의 기복이 적은 엘프가 저렇게 까지 얼굴색이 변한걸 보면 어지간히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엘프도 사고 판다니? 하지만 엘프는 그런 존재가 아닌걸? 자유롭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 자신의 일은 스스로 책임지는 종족인데 어째서 인간의 노예가 되야 하지?" 세라피의 원론적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일행 중에 있을 리 없다. 일행은 거리를 좀 둘러보고 그나마 좀 수수해 보이는 여관에 묵기로 했다. 비싼 곳은 노예 관광을 온 혐오스런 귀족들이 득시글 거릴 테니 차라리 좀 불편할지라도 한 급 아래의 여관에 묶기로 한 것이다. 공주의 신분이라도 이자벨은 자신도 모험가 파티의 일원이라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승낙했다. 어쩌면 서민의 삶이라는 걸 알아보기 위해서 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일행이 들어간 여관은 화려하지는 않아도 깨끗하고 정갈한 꽤 괜찮은 곳이었다. 여섯 명이 앉을만한 커다란 테이블은 창가 쪽에 있는 것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일행은 홀의 중앙을 차지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시선을 잡아끄는 일행인데 중앙을 차지하고 앉자 여관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자벨은 공주라는 신분 덕에 어느 곳을 가던 늘 주인공이었다. 그래서 이런 시선에는 너무나 익숙했고, 세라피와 엘리시엘은 시선을 받던 말던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 종족이라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신시아는 피곤한지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세이람은 그런 신시아가 걱정스럽다는 듯 얌전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어깨라도 주물러 주지 그래......." "예? 유신선생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야.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보다 공주님 리터마인 자작의 영지는 얼마나 더 가야 하지요?" 뜨겁게 불타는 두 젊은 청춘남녀를 살짝 비꼬아 봤지만, 저렇게 진지하게 나오면 어색해 진다. 유신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변방에 있는 작은 영지라, 말로 간다고 해도 열흘 정도는 더 가야 할 듯 하군요." 일행이 앞으로의 일정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특급의 미녀 엘프 둘이 들어 왔을 때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30대 초반의 건장한 남자 다섯이 유신 일행에게 다가 왔다. "여어~~ 예쁜 숙녀님들이네. 이런 비리비리한 녀석들하고 어울리지 말고 우리랑 같이 노는게 어때?" "............." ".........." "기왕이면 좀 멀더라도 바닷가 쪽으로 돌아서 가는 게 낳을 것 같군요. 그편이 길도 더 좋을 것 같고......" 유신은 별 소용없을 것 같았지만, 주위를 돌리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으로 딴 얘기를 꺼내어 보았다. 즉 우습지도 안은 이 깡패 무리를 무시하기로 한 것이다. '생각보다 치안이 엉망이군. 고급의 여관이 아니라고는 해도 이렇게 대놓고 시비를 거는 깡패들이 활보를 하다니......' 이자벨은 속으로 좀 화가 났지만, 타국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안았다. 하지만...... "뭐야!! 사람이 좋게 말하니까 무시하는 거야? 이따위로 얼굴만 예쁘장한 남자가 좋다는 거야?" 불행히도 그 깡패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신시아였고, 그 소란에 부스스 일어난 신시아가 그 손가락질과 욕설을 듣고 말았다. "뭐.....뭐야? 이 예쁜 내가 왜 남자라는 거야?" 신시아도 나름대로 예쁘긴 하지만, 엘프와 공주의 틈에 섞여 있으니 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머리도 짧게 잘랐고, 피부는 까무잡잡하며 갑옷은 없지만 커다란 여행용 망토를 두르고 있으니 몸매도 전혀 들어 나지 않는다. 테이블 옆에는 어울리지 않게 바스타드까지 기대어 놨으니 남자라고 오해받아도 할 말은 없다. 견습기사들 틈에서 여왕처럼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인기 만점이었던 신시아였지만 이 일행과 어울리면서 은근히 컴플랙스를 느낀 게 사실이다. 그런 모든 분노가 이 불량배의 한마디로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빠각'하는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남자의 무릎을 걷어 차 버리고는, 무릎이 꺾여 머리 높이가 낮아 진 틈을 타서 그대로 그 불량배의 코뼈를 머리로 들이받았다. 다시 '푸헉' 하는 삭막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남자가 채 나동그라질 새도 없이 명치에는 무릎 찍기를 먹이고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그리고는 끔찍하게도 남자라면 절대 맞고 싶지 않은 곳을 걷어 차버리자 그 불량배는 게거품을 부글부글 뿜으며 기절해 버렸다. "바.....박치기에 급소차기......" 황망한 심정에 유신이 중얼거렸다. "...... 대체 저런......싸움은 누가 가르친 거지요?" 정식 기사의 칭호까지도 받은 신시아인데도 싸움 방식은 완전히 거리의 불량배들 스타일이었기에 공주 역시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왜 날 쳐다봐요? 난 저렇게 싸우라고 가르쳐 준 적 없어요." 당연히 견습기사들의 훈련 담당이었던 유신이 사색이 되어 변명을 했지만, 이자벨의 시선은 더욱 의혹에 찰 뿐이었다. 구경꾼들은 더욱 모여들었지만, 신시아와 세이람은 오히려 그게 더 즐거운 것 같았다. 이제 불량배들뿐만 아니라 힘깨나 쓰는 놈들이면 너나 할 것 없이 주먹질을 하며 난투극을 벌였기 때문에 여관 겸 주점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다. 마치 이 여관의 축소판처럼 좀 낡기는 했지만, 깨끗하게 관리되어 왔던 청동제 술잔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다니고 사람이 앉아 있어야 할 의자들이 오히려 사람을 깔고 앉았다. 화려한 고급의 호텔들에 비하면 좀 쳐지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정갈하고 깨끗하게 운영해서 단골손님도 꽤 많았던 여관이다. 수완이 좋은 주인장은 가끔 귀찮게 하는 불량배들에게도 돈 몇 푼 쥐어 주거나 음식을 줘서 큰 사고 없이 운영할 수 있었다. 아마도 오늘이 이곳의 주인장에게는 여관 경영하면서 맞는 최악의 위기일 것이다. "포근한 밤의 정령이여, 어둠의 가장 진솔한 벗이여 내 부름에 대답해 줘요." 보다못한 엘리시엘의 잠의 정령 뉴이스를 소환하였다. 싸움 때문에 신경이 바짝 곤두 서 있는 사람들을 잠들게 할 수는 없지만, 참을 수 없는 무기력 감을 주어서 필요 이상으로 들뜬 감정들을 차분하게 가라 안치게 하기에는 충분하였다. 하지만 신시아와 세이람은 아직 끄떡없이 날뛰고 있었다. "하아압" 목소리의 주인을 닮은 앙칼진 기합소리가 여관을 메아리 칠 때마다 신시아의 작지만 매서운 주먹에 불량배들이 피를 토했다. 누구도 손쓸 수 없을 것 같은 폭풍의 중심에 있는 신시아와 세이람을 잠재우는 것은 유신의 몫이었다. 우아하게 뒤통수를 한 대씩 내려치자 세이람과 신시아는 사이좋게 기절하였고, 그 틈에 불량배들은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최후의 마무리는 이자벨의 몫이었다. 공주는 피해액보다 두 배 이상의 돈을 지불하여 주인장을 달래어 주었고, 그날 마신 모든 술값을 계산하겠다고 해서 싸움에 참가한 주당들을 침묵시켰다. 여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끝나자 일행은 기절한 둘을 들쳐업고는 방으로 도망치듯 올라갔다. 여자용과 남자용의 두 개를 빌렸기 때문에 여섯 명이 한방에 모두 모이자 방안이 좁았지만, 다행이 덩치가 큰 일행은 없어서 그럭저럭 모두 둘러앉을 수 있었다. "어휴......이 골칫거리들을 그냥!!" 유신이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아주 아주 이례적인 경우지만, 신시아는 그 이례적인 케이스에 들어갈 만한 자격을 충분하고도 넘치게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이 두 골칫거리를 이곳에 버려 두고 몰래 떠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누가 오는데?" 귀가 좋은 엘리시엘이 밖에서 나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말했다. 일행의 방은 여관 복도의 맨 끝에 있었기 때문에 문 앞에까지 왔다면 다른 방으로 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똑똑똑" 경쾌한 노크소리와 함께 우렁차다 할만한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여기가 아까 소란 부렸던 분들이 묶는 방이 맞지요?" '경비대인가......' 유신은 일이 귀찮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쉬고는 문을 열었다. 하지만 밖에 있는 남자는 경비대 차림이 아니었고, 떼로몰려 다니는 경비대나 치안대와는 달리 혼자였다. 탄탄한 근육질에 간편한 여행복 차림. 무인이라면 한풀 꺾이기 시작할 나이인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지만,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적당하게 잘 다듬어진 근육이나 날카로운 인상을 보면, 아직도 한칼 할 것 같은 인상이었다. 특별한 갑옷을 입지는 않았지만, 허리에 매달려 있는 롱소드는 한눈에 봐도 대단한 명품인 것 같았다. '강하다...... 설마 이런 곳에서 이 정도의 검사를 보게 될 줄은.....' 유신은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봉인이 두 개나 풀린 그가 특별한 코어를 느끼지 못한 걸로 봐서 눈앞의 이 사내는 코어를 컨트롤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 정도로 훌륭한 몸을 유지하려면 매일매일 일정시간 이상을 할애하여 수련을 해야 하고, 그렇게 규칙적으로 수련을 한다면 유신처럼 힘을 봉인 당하는 특별한 케이스가 아닌 이상 자연히 코어가 쌓이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이 남자가 문 앞에서 노크를 할 때까지 유신이 몰랐다는 건 코어를 컨트롤하여 자신의 힘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시지요?" 이 남자의 두 번째로 놀라운 점은 세라피의 미모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라피와 함께 길을 걸어가면 행인들이 그녀를 쳐다보다 종종 넘어지거나 어디 부딛히는 광경이 결코 낯설지 않다. 그녀가 무슨 물건(주로 노점에서 파는 군것질거리지만)을 사려고 하면, 그 가게의 주인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상기시키고 현실세계로 끌어오는 작업부터 해야 할 정도다. 게다가 세라피 본인은 그녀의 미모에 대한 별다른 자각이 없기 때문에 가끔 던지는 그녀의 백치 같은 미소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모르고 기분 좋을 때마다 방글방글 잘도 웃어서 일행을 난감하게 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런 세라피를 보고도 레이디에게 표하는 경의로서 살짝 인사를 했을 뿐 관심을 전혀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관심은 유신에게 향해 있었다. "초면에 실례인 건 알지만 나와 비무를 해 줄 수 없겠소?" 황당한 남자다. 40대 중반. 날카로운 눈. 팽팽한 근육. 회색의 눈동자. 연한 갈색의 머리. 178정도의 알맞은 체구와 덩치. 노련해 보이는 인상과 잘생겼다고 할 만한 깨끗한 얼굴. 하지만 황당하다. "에......실례인데요....." "........" ".........." 방안에는 썰렁한 공기가 휘몰아 쳤다. ".....일단 제 소개부터 하지요. 전 로이드 리터마인이라고 하오. 그냥 로이라고 불러도 좋소이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일행은 모두 바보가 되어 버렸지만, 이 남자는 날카로운 외모와는 달리 주변 공기의 흐름에는 둔감한지 자기 할말만 계속 하였다.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강한 검술 하나만을 추구하며 일생을 보내온 사람이오. 그리고 아까 젊은이의 솜씨를 언뜻 보았을 때 정말로 강한 자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소이다. 솔직히 이 나이에 이를 때까지 검만을 휘둘러 왔지만, 아까의 상황에서 내가 나섰다 해도 저 젊은이만큼 깔끔하게 그 소동을 재울 수 있었을지 의문이 되더군요. 근데 이름이......." "아, 전 유신. 유신이라고 합니다. 이쪽의 레이디는 이자벨님 이고......" "전 엘리시엘이라고 해요. 이쪽은 세라피언니고요." 유신이 흘끗 침대에 기절해 있는 두 사람을 바라 봤지만, 리터마인이란 자도 그 둘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했고, 유신도 그다지 소개하고 싶지는 않은 녀석들이라 각자의 소개는 일단 거기서 마쳤다. . . . . 후기 후기라고까진 뭐하지만...^-^;; 요즘 글이 조금 늦어 졌지요? 외전편을 쓰느라고 좀 저인이 없었거든요. 외전편은 한꺼번에 좍 올릴꺼니까 기대해 주세요^^;; 기대 안하셔도 할 수 없지만...ㅠ.ㅜ 그럼 오늘도 찾아주신 모든 분들 좋은 하루 되시고요^^ B&M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그럼 유신이 세이람과 신시아를 기절시키는걸 보고....유신이 강해 보이니까 겨루어 보기 위해 찾아 왔다는 이야기에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듯 세라피가 다시 한번 천천히 물어 보았다. "아가씨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강함을 추구한다는 건 그런 거요. 마법사만이 마법을 위해 목숨을 걸고 평생을 거는 것은 아닐게요. 오히려 어느 정도 이상의 검기를 낼 수 있는 수준에 이른 검사라면, 아마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보다도 더더욱 힘에 대한 갈망이 클 것이외다. " '과연..... 저 정도 검에 대한 애착이면 이자벨 이상이겠는데?' 유신이 이자벨을 흘끗 바라보자 그녀 역시 동감한다는 눈빛으로 리터마인 자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비무를 하기는 좀 뭣하군요. 한적한 곳에서 차분하게 리터마인 자작님의 실력을 보고 싶군요." 아직 자신이 귀족이란 것을 밝히지 않았는데 유신이 먼저 자작님이라고 칭하자 그도 좀 몰란 것 같았다. "호오....나를 알고있었소?" "소드마스터는 흔한 게 아니니까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자작님을 찾아가고 있던 중입니다." "허헛 역시 그렇군. 당신 정도의 실력자라면 보다 강한 상대와의 싸움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지. 그렇다면 나도 당신의 이름쯤은 맏출 수 있을 것 같군. 여섯 번째 소드마스터, 요즘 드래곤 슬레이어로 한참 유명한 하누스의 용사 유신경이 아니요? " "아.....네.....벌써 이곳까지 소문이 났군요. 그나저나 하마터면 못 만날 뻔했습니다. 저희는 자작님의 영지로 가고 있던 참이었거든요. 자작님은 어째서 이곳까지 왔지요?" "비슷한 이유에서요. 나도 여섯 번째 소드마스터를 보러 가던 중이었소. 가는 길에 옛 친구들도 만날 겸해서 말이오. 마침 잘 된 것 같소. 그 친구들도 모두 여섯 번째 소드마스터를 궁금해하고 있던 참이었소." "아마도 다른 소드마스터 분들이겠지요?" "하핫. 역시 이야기가 잘 통해서 좋소. 예메른제국의 뮬테인 백작가에서 소드마스터들의 모임이 있소. 그렇지 않아도 유신경에게도 정식으로 초대장이 갔을 것이오. 하지만 길이 엇갈렸으니 초대장을 받지는 못했겠소이다?" "작위는 받지 않았으니 경이란 호칭은 빼고 그냥 유신이라고 불러 주세요." "허? 소드마스터라면 어느 나라에 가든 백작 정도의 작위까지도 쉽게 받을 텐데, 하누스는 무인에게는 박한 모양이오? 혹시 그런 쪽으로 욕심이 있다면 우리나라로 오셔도 좋소이다. 내 국왕전하께 잘 말씀드릴 수 있소." 이자벨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본 유신이 재빨리 말했다. "그렇진 않습니다. 제가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작위를 거절했습니다," "하핫 정말 마음에 드는군. 하긴 귀족이니 지휘니 하는 그런 시시한 것에 신경 쓰다 보면 언제 강해지기 위한 수련을 하겠소이까. 진정 자신을 갈고 닦는데는 모두 불필요한 것이라는 데 나도 찬성이요." "아......네.....그....그렇군요." "하핫 하지만 정말 아쉽소이다. 만약 우리나라에 온다면 나와도 자주 비무를 할 수 있을 테고, 그럼 서로간에 검술도 훨씬 빨리 늘지 않겠소." 일행이 생각했던 대로 리터마인이란 남자는 오직 검밖에 모르는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말하는 스타일이 호방하고 신념이 있는 정직한 사람이었지만, 검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답답한 사람이기도 했다. 자기네 나라로 유신을 꾀어 가려고 하는 리터마인 자작을 괘씸히 여긴 이자벨 공주가 이리저리 돌려서 뇌물이 횡행하고 노예제도가 남아있는 카마론 공국의 미개한 점을 꼬집어 욕하여 봤지만, 이 남자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자벨의 말에 맞장구까지 쳐대자 그녀도 포기해 버렸다. "그렇다면 일단 예메른 국으로 가도록 하지요. 혹시 자작님은 이곳에 무슨 볼일이 있었나요?" "아, 난 노예를 하나 살 일이 있어서 왔던 거요. 딸 아이의 시중을 들어줄 참한 여자아이 하나가 필요해서 말이요." 노예를 샀다는 말에 두 엘프의 아름다운 눈썹이 당장 사납게 올라갔다. "노....예 라고요?" 평소 차분하고 그렇게 착하기만 하던 세라피의 음성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자 다시 유신이 이 사태를 막아야 했다. "자....자작님 이렇게 하도록 하지요. 저와 비무를 해서 만약 제가 이긴다면 그 노예를 풀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러자 유신의 말을 들은 리터마인 자작의 얼굴이 이상해 졌다. 이번엔 유신의 말을 들은 리터마인 자작의 얼굴이 이상해 졌다. ".......지금 한말 진심인가? 소드마스터간에 검을 주고받는데 무언가를 걸고 하겠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군. 난 자네가 이 비무를 좀더 가치 있게 여길 줄 알았네." 하지만 유신도 정의와 자유라는 신념 하나에 기대어 그 지옥 같던 성계대전을 해쳐온 남자다. 그리고 '노예'란 것은 그의 신념에 반대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다릅니다. 자작님의 신념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에겐 비무의 신성함보다도 한 '인간'의 자유가 훨씬 소중합니다." 지긋이 유신을 바라보던 자작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마음대로 하게. 하지만 그런 정신상태라면 결코 나를 이길 수 없을 것이네." "인간이 진정으로 강해지는 때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을 때입니다." "겨우 노예소녀 따위가 자네의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는 겐가?" "글쎄요? 하지만 제 손이 닿는 곳에 있는 무력한 소녀조차 외면한다면 저에겐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하나도 없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3일 뒤, 테르아닌 시의 연병장을 빌려 놓도록 하겠네. 아마 소드마스터끼리의 비무라면 테르아닌시에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겠지." "그때 보도록 하지요." "서로간에 실망하는 일은 없으면 좋겠군.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명성. 헛된 것이 아닌지 보겠네."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한번 더 유신 일행을 천천히 둘러본 리터마인 자작은 별 말 없이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휴.....유신......평소랑 달라....그건 네가 사람 사귀는 방법이 아니잖아..... 인간들끼리의 감정 교류는 잘 모르겠지만, 방금 전까지 이 방안에 있었던 건 분노의 정령이었다고. 너답지 않게 왜그래?" 엘리시엘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어 보았다. "글세? 하지만 인간은 저마다 소중히 여기는 것이 달라. 엘프들이야 조화의 혜택을 받았으니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지만, 인간은 저마다의 신념, 가치관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가 다르기 때문에 각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달라." "흠....어떻게 보면 축복이고 어떻게 보면 불행이구나." "음. 아마도. 인간이 다른 몬스터나 아인종에 비해 체력도, 두뇌도, 그렇다고 협동심이나 정신력조차도 뛰어나달 것이 없지만, 전 대륙에 거쳐 인간이 가장 널리 퍼진 이유는 아마도 한 명 한 명이 모두 다른 개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 일거야." 엘프와 인간의 대화를 흥미있게 지켜보던 이자벨 공주가 한마디 했다. "아까 유신은 노예를 반대한다고 했지요? 인간 하나하나는 모두가 똑같이 소중하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만...... 그럼 계급제도 자체를 반대하는 겁니까? 잘 생각해 보고 진지하게 대답해 주세요. 그건 왕가에 대한 반역의 말일 수도 있습니다." 반역이란 말에 깜짝 놀란 세라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신과 이자벨을 바라보았다. 세라피가 비록 인간사의 일은 잘 모르지만, '반역'이란 단어가 얼마나 무서운 단어인지도 모를 만큼 둔한 것은 아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그것은 저의 신념입니다. 평등한 인간, 똑같은 사람,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존엄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에요. 반역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왕족과 노예가 벼랑 끝에 매달려서 도와달라고 손을 내민다면 아마도 왕족을 먼저 도와주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왕족이 더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 왕족을 살림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진다고 판단한다면 구해주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유신..... 생명은 모두가 똑같이 소중한거에요. 유신의 말은 틀려요." 원리원칙에 충실한 세라피가 유신의 말에 반대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그렇게 해서 발전해 온 존재인걸요.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로운 사회......그것을 이룩한 지성체는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 강대하고 고귀한 신족이나 천사들 중에서도......' 유신이 지금 하는 말은 마법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활동했던 물질계의 이야기이다. 끔찍한 성계대전의 한 가운데를 걸어온 남자가 한 말은 그런 만큼의 비장함이 포함되어 있었고, 당연히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 앉았다. 그때 막 세이람과 신시아가 저인을 차리려는지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포근한 밤의 정령이여, 어둠의 가장 진솔한 벗이여 내 부름에 대답해 줘요." 좀더 인간과 엘프에 대해 차분한 사색의 시간을 갖고 싶은 세라피가 다시 잠의 정령을 소환하자 막 일어나려던 두 골칫거리는 꾸던 꿈을 마저 꾸게 되었다. . . . . . . 흠....이번에는 철학적인 내용을 담느라 고생했습니다. 실제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저게 아닌데..ㅜ_ㅜ 미력한 제 글솜씨로는 정확하게 하고 싶은 말조차 하지 못하겠군요... 이럴때가 글쓰면서 가장 힘들때가 아닐지 생각합니다. 모두가 행복하고 평등한 사회.... 가능할까요? 수천년이 지난 후 인간이 그 진화의 정점에 서게되는 순간....기대해도 좋을까요? 흙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적당히 물을 뿌려둔 연병장 위에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창검을 세워 둔 기사들이 도열해 있다. 기사들이라면 자신의 목숨을 5년쯤 악마에게 팔아서라도 보고 싶을 소드마스터끼리의 진검 승부이다. 만약 홍보가 좀더 되었더라면 테르아닌시에서는 이 비무를 보러 오는 기사들을 상대로 한 숙박, 요식업만으로도 상당한 재미를 보았을 것이다. 거기다 주로 귀족이나 기사층일 그들이 쓰고 갈 돈을 생각하면 홍보할 시간도 없이 갑작스럽게 그런 부탁을 한 리터마인 자작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유신은 그야말로 전 대륙의 화재의 중심이었기에 그 관심은 더욱 비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세기의 승부가 노예매매로 악명 높은 테르아닌시에서 있다는 것은 도시의 이미지를 쇠신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 그 자체로도 굉장한 영광이기 때문에 테르아닌시의 시장은 연병장을 내 주고, 비무를 위한 편의를 여러 가지로 봐 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보너스로 기사들을 사열시키고 병사들까지 동원여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애쓴 흔적이 사방에 보였다. 하지만 그런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려던 계획은 실패했다. 병사들보다도 훨씬 눈길을 끄는 소녀, 아니 여자 엘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신이 방패를 안 쓴다고 해도 소드스토퍼 정도는 차요. 보고 있으면 조마조마 하단 말이에요." 세라피는 꼼질꼼질 유신의 무장을 챙겨주며 혹여 유신이 다칠까봐 이리저리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귀여운 유신과 아름다운 세라피..... 이제 곳 있을 비무를 위해 무장을 점검하고 있는 유신과 그를 도와주고 있는 자그마하고 아름다운 엘프처녀. 동화책속의 한 장면을 현실로 끌어내면 이런 모습이 될까? 삭막하고 웅장해야 할 비무장은 순식간에 동화 속의 한 장면으로 그 의미가 변질되고 말았다. 여자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천하의 소드마스터 리터마인 자작조차 부럽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당연히 테르아닌 시에 머물고 있던 귀족들 중 파워가 있는 고급 귀족들은 이 비무의 참관인 자격으로 구경을 하게 되었고, 그들 중 몇몇 귀족 레이디들은 요즘 한창 유명한 드레곤 슬레이어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썸씽을 위해 한껏 멋을 내고 왔다. 그리고 유신의 앞에 있는 세라피를 보고는 절망했다. 세라피뿐만 아니라 엘리시엘이나 이자벨의 미모도 결코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자그마한 유신과 세라피는 인형가게의 진열장에 진열해 놓고 싶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그런 모습을 보며 마치 동내의 개구쟁이처럼 휙휙 휘파람을 불어대던 신시아는 세이람이 옆구리를 꼬집자 불만스런 표정으로 그를 한껏 노려보았다. 하지만 엘리시엘의 표정을 보고는 눈치 없는 신시아조차도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늘 명랑하기만 한 그녀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 건..... "허헛 젊은 게 정말 부럽구료. 아니, 엘프 레이디 분들은 젊다고 할 수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부럽소이다." 눈치 없는 유신이라도 이게 빨리 비무를 시작하자는 재촉의 말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비무이기는 하지만 엘프의 시점으로 봤을 때는 별 이유 없이 검을 마주치는 것이 다 쓸데 없는 짓이었고 마음에 안드는 일이다. 그래서 세라피는 유신의 무장을 챙겨주는 척 하며 우물 주물 시간을 끌었고, 결국 리터마인 자작이 저렇게 몸이 달아 재촉을 하는 것이다. 리터마인 자작의 무장은 검 한 자루를 들고 있을 뿐 갑옷이나 방패는 없었고, 특이하게도 어깨에 보호대를 장착하고 있었다. 낡아 보이는 보호대였지만 미스릴 재질의 보호대는 아름다운 광택이 고급스러워 보였고, 무엇보다 팔을 움직이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되어 있는 훌륭한 물건이었다. 움직이기 편하도록 부츠가 아닌 단화를 신고 있었고 팽팽하게 긴장된 근육은 흥분과 긴장감으로 인해 엷게 떨리고 있었다. 이미 중년의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흥분하는 모습이 어찌 보면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유신도 차림은 비슷했다. 무장은 양 허리에 첨예를 각각 차고 왼팔의 소드스토퍼만 장비 했을 뿐 무거워 보이는 어떤 다른 무장도 없었다. "이도류라.....특이하군. 가벼워 보이는 칼이기는 하지만 똑같은 길이와 모양의 검을 두 자루나 쓰는 것이 그다지 능률적으로 보이지는 안네만.... 어쨌든 기대해 보겠네." 리터마인 자작의 말에 유신은 고개만 살짝 숙였을 뿐 별 말을 하지는 않았다. 드디어 둘이 연병장 한 가운데에 대치하고 서자 소란스럽던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해 졌다. 모두 높은 신분의 귀족들이나 기사들인 만큼 경박하게 환호성을 지르거나 하지는 안았기 때문에 분위기는 자못 진지하고 무거웠다. 유신은 오른쪽의 첨예를 등 뒤로 돌려서 찬 후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였다. 손잡이가 왼쪽 등 아래로 내려오도록 차는 것은 사각지대에서 검을 뽑는 스피드위주의 허를 찌르는 공격을 하겠다는 의도다. 만약 손잡이를 위로 가게 찬다면 내려찍는 위치 에너지와 수월하게 뽑는 이점을 살릴 수 있지만, 발검 동작이 눈에 훤히 보이기 때문에 별 효과가 없다. 첨예자체가 워낙 가볍게 때문에 파괴력보다는 예리함이 더 잘 어울리기 때문에 그러한 장점을 살리기 위해선 기습적으로 거꾸로 뽑는 것이 더 낳기 때문이다. 준비가 끝나자 비무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지자 유신은 비스듬히 칼을 눕혀 아래로 향했다가 다시 천천히 세워서 가슴 앞으로 모았다. 특별한 스승도 없이 자력으로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남자에 대한 예의로 화랑단의 기수식을 보여 준 것이다. 리터마인 자작도 대충 그것이 검으로 하는 인사라는 것을 알아보았는지 살짝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그리고 첫 번째 격돌! . . . . . . . 엄...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총 조회수 3만을 넘어서 감격하고 있다는...ㅜ_ㅜ 오늘부터 아셈하비에서 있을 모형 전시준비를 하게 될것 같군요.... 으윽...연참이 깨지려나....ㅜ_ㅜ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요^^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세여~~ 리터마인은 혼자서 터득한 검술답게 가장 기본에 충실한 검술이었다. 공격과 수비가 안정적이고 적당한 무게의 검을 사용하면서 소드마스터에 어울리는 보통 이상의 스피드. 거기에 비해 유신은 파워전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로 스피드 위주의 쾌검과 현란한 허초를 섞어서 싸우는, 리터마인의 정통검술에 비하면 사악해 보이기까지 하는 검술이었다. 두세 합의 격돌이 이루어지자 서로 상대방의 역량에 대해 솔직히 감탄하게 되었다. 유신의 허초에 전혀 넘어가지 않는 흔들림 없는 리터마인의 뚝심도 놀라웠고, 저렇게까지 다양하고 현란한 검술을 구사하는 유신도 놀라웠다. 구경꾼들 중에서 이 검격을 언뜻이라도 볼 수 있는 자들은 기사단장급들의 실력을 가진 자들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사실 유신이 제대로 싸운다면 이렇게 싸구려 허초를 남발할 리는 없지만, 유신은 리터마인 자작을 테스트 겸 한 수 가르쳐 주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정도의 전투센스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과연 용신화랑에 추천할만한 가능성을 가진 자인지를 테스트하면서, 여러 가지 검술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뭔가 배우는 것이 많기를 바란 것이다. 검술을 전혀 모르는 문외한, 예를 들면 관중석 한쪽에서 삭막한 연무장과는 어울리지 안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있는, 대륙 초유의 관심사인 드래곤 슬레이어를 보기 위해 아마도 귀족인 아빠나 친척을 졸라서 비무 구경을 왔을, 그리고는 유신의 귀여운 외모에 끌려 정신 못 차리다가 그의 옆에 있는 세라피에게 주눅이 들어 좌절했다가는 다시 유신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검술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버린 평범한 레이디들 같은 그런 문외한들은 당연히 시종일관 유리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저 귀여운 왕자님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보는 눈이 좀 있는 기사들은 그런 자잘한 공격에 전혀 흔들림이 없는 리터마인이 좀더 시간을 끌게 되면 유리해 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체력소모도 유신 쪽이 훨씬 클 것이고, 저렇게 무차별적인 공격이 전부 막히면 심리적 부담감도 크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고급의 기사들, 예를 들면 리터마인 본인 같은 자들은 유신에 대한 공포로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화려한 검술의 정교함이나 다양함도 리터마인 이상이었고, 심리적으로도 유신이 훨씬 우위에 있었다. 이도류를 준비해왔으면서도 아직 그것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리터마인에게 커다란 심리적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즉 쓰던 안 쓰던 두 자루의 검을 준비한 유신이 노련함에서도 앞선다는 것이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공격 같아 보이지만, 상대방의 공격을 사전에 봉쇄하는 유신의 공포는 직접 칼을 마주쳐 보지 못한 자는 모를 것이다. 하지만 아직 리터마인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공격찬스가 없었던 만큼 아직 그의 검술은 전혀 노출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체력적으론 그가 훨씬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유신의 체격을 보면 스피드는 빠를지 몰라도, 저 호리호리한 몸매에 지구력이나 파워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반드시 한번은 자신에게 찬스가 온다는 것이 리터마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처럼 일방적으로 밀어 부치던 유신이 체력이 다 떨어졌는지 왼쪽 옆구리에 작은 틈이 생겼다. "하앗!" 리터마인은 그런 틈을 놓칠만한 푼내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수비위주에서 갑자기 그동안 모아두었던 모든 힘을 폭발시키듯 공격 일변도로 몰아 쳤다. 함정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빈틈은 빈틈이었고 더 이상 망설이다가는 패배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은 잘 맞아 떨어져서 그 유신 더 실버스타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유신은 리터마인에게 공격찬스를 주기 위해 일부러 허점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나 빨리 공수의 전환이 이루어져서 몰아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적지않게 당황하였다. '자 이쯤 되었으면 신경 쓰이는 다른 칼도 마저 뽑으라고!!' 리터마인은 승세를 잡았지만, 아직 미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유신의 손발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신은 얄밉게도 끝까지 다른 검을 뽑지 않았고, 이제는 외려 리터마인 자작이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한번에 몰아치겠다는 각오로 체력안배를 하지 않은 맹공을 펼쳤고, 당연히 그의 체력이 급속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의 공격 밑천도 곧 바닥을 보일 터인데 저 얄미운 녀석은 마치 좀 전에 자신이 그러했든 껍질 속에 꽁꽁 숨어서 방어만 할 뿐 필살기를 보여 주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선택을 하란 말인가......' 리터마인은 속으로 피식 웃고는 몸속의 코어를 가속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아진 힘을 검끝으로 보내자 그의 애검은 점점 푸른빛을 띄기 시작하더니 좀더 시간이 지나자 새파란 불꽃의 검이 되었다. 그러자 거기에 맞추어 유신의 검도 비슷한 상태가 되었고 좀더 시간이 지나자 첨예는 서서히 황금빛을 띄기 시작했다. 그라테우스를 갈라버린 바로 그 검기였다. 굉장한 장관 이었다. 새파란 불의 검과 태양을 연상시키는 황금빛 검의 대결. '멋지구나. 이것이 드래곤 슬레이어!' 리터마인 자작은 유신의 검기가 황금빛을 발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자신의 패배를 예감했다. 황금빛을 뿜는 순간 마주쳐 오던 첨예의 검압 차원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리터마인은 이 황홀한 검기를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모여있는 사람들의 경악 속에 불 칼의 춤은 더욱 화려해져 가기만 했다. 마침내 양쪽 모두 승부를 보려는 듯 거세게 서로를 밀쳐낸 후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 . . . . . . 으윽....연재가 늦어지고 있습니다..ㅡ_ㅜ 거기에 맟추어 떨어진 조회수를 보면서 게으름이 얼마나 무서운 적인지를 실감하게 되는군요...ㅜ_ㅜ 으으 ...... 이달 말까지 모형 만들것이 있어서 지금 제정신을 챙길수가 없답니다..ㅜ_ㅜ 그...그래도 열심히 해야 겠지요... 그럼 오늘도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자작님께서는 이미 한계이상의 검기를 뿜고 있습니다. 더 한다면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계속 하실 건가요?" 연병장은 검풍도 아닌 검압만으로도 주위의 흙먼지들은 물론 자그마한 동맹이들 까지 날아 올라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자네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나." "그렇군요." "그리고 나에게는 아직 비장의 필살기가 있다네." "그렇다면 기대해 보지요." 강한 자와의 싸움이다. 목숨이 끊어지거나 완전히 항복할 상황이 아니라면 결코 포기할 리 없는 것이다. 유신이 비스듬히 검을 세워 리터마인의 마지막 공격을 받아 주겠다는 자세를 취하였다. "하압" 짧은 기합과 함께 리터마인의 검이 지면을 훑자 검풍에 휘말린 먼지들을 뚫고 강력한 검기가 다발로 쏟아져 들어 왔다. "흐음....." 하지만 그 정도는 눈속임에 불과하단 건 유신도 알고 있는 일이고, 리터마인도 알고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진짜는?' 오른쪽 옆구리에서 강렬한 기운을 느낀 유신이 첨예를 크게 회전시켜 방어를 하자 리터마인의 푸른색 검이 퉁겨져 나가는 게 보였다. '먼지를 일으켜 시야를 가리고, 그 뒤로 검기를 날린 뒤 본 공격은 옆에서 한다? 좋긴 하지만 너무 평범한 콤비네이션이군.' "좋은 공격이지만 이 정도는 안 통합니다." "그럴까?" 뜻밖에도 리터마인의 목소리가 들려 온 쪽은 반대편이었다. 첨예를 미쳐 회수하기도 전에 리터마인의 작은 단도가 유신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승부!!" 단도라고는 해도 검기를 품고 있다면, 장검이나 단검이나 그 위력에는 별 차이가 없다. 급히 몸을 푹 꺾어서 그 공격을 간신히 피했지만 리터마인은 어느새 집어 던졌던 자신의 롱소드를 집어 들고 있었다. '칫' 속으로 옅은 신음을 뱉으며 몸을 가다듬으려 할 때였다. "쐐애액" 하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다시 리터마인의 단도가 날아들어 유신을 당황하게 했다. 몸통에 박히기 직전, 간신히 퉁겨낸 단도의 뒤를 따라 숨 쉴틈 없는 리터마인의 맹공이 쏟아졌다. 훌륭한 연계기, 좋은 판단력, 승부에 대한 집착, 강해지겠다는 의지, 모두 좋다. 하지만 유신이 보기에는 무모해 보였다. 이미 리터마인의 몸은 오래 전에 한계를 넘어섰고, 지금 하고 있는 공격은 빠르기는 하지만, 처음처럼 강맹한 기세는 없었다. 게다가 이대로 두면 몸안의 코어가 모두 소진되어 병신이 되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굉장하군. 대련 중에 이렇게나 놀라본 게 얼마 만일까....... 하지만 이제는 저 젊은 검사를 위해서도 승부를 내야겠지.' 마음을 정한 유신은 드디어 두 번째 첨예를 하늘 높이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그대로 리터마인에게 돌진해 들어가 지금까지의 얄미운 검술과는 다른 본격적인 파워전을 벌였다. 검과 검이 너무 빨리 부디치기 때문에 '카카카캉' 하는 연속적인 충격음만 들릴 뿐, 일반적인 비무 때처럼 터엉 터엉 하는 둔탁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동안 검격을 주고받던 유신은 갑자기 리터마인과 칼을 엉킨 채 잠시 대치했다. 그리고는 '핫' 하는 짧은 기합과 함께 첨예에 더욱 힘을 가해 리터마인을 멀리 퉁겨냈다. 이를 사려 문 리터마인이 다시 돌진하려는 순간 그가 좀 전까지 유신과 대치하고 있던 자리에 묵 빛의 첨예가 손잡이 부분만을 남겨두고 땅속에 밖혀 들어갔다. 아까 유신이 하늘로 던졌던 두 번째의 첨예이다. "허......허헛........과연...... 내가 졌소이다......" 마침내 리터마인이 패배를 인정하고 검기를 거두자 연병장은 환호성으로 메아리쳤다. 그 콧대 높은 귀족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흥분할 만큼 둘의 대결은 정말 일품이었다. 그동안의 긴장감을 이기지 못한 연약한 레이디들 중에는 기절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고, 지금의 대결을 지켜본 기사들은 평생 이 명 승부를 가슴속에 기억해 두고 자신들도 그 수준에 이르기 위해 정진할 것이다. "우왓!! 선생님 역시 굉장해욧!! 근데 왜 저나 리터마인 자작님의 검기는 푸른색인데 선생님의 검기는 황금색이지요?" "허....헉 까...깜짝이야!!" 벌써 비무가 끝 난지 3일이나 지났음에도 그때의 생각이 날 때마다 고함 소리에 가까운 감탄사를 지르며 달려드는 신시아 때문에 귀가 예민한 세라피와 엘리시엘은 무척 피곤한 상태였다. 차분한 세이람도 신시아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한 상태는 아니었기에 두 엘프는 더욱 힘들었다. 하지만 둘이 그렇게 흥분하는 것이 이해될 만큼 그 대결은 배울 점이 많았고, 인상적인 비무였다. 이제 막 검에 눈을 뜨기 시작한 신시아와 세이람이니 만큼 두 소드마스터의 대결이 얼마나 인상적이었겠는가? "선생님 그냥 속 시원히 말해 주시면 안될까요?" 사실 이 질문은 비무가 끝난 다음 날부터 끈질기게 받아온 질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딱히 설명하기가 곤란했던 유신은 이 문제를 계속 얼버무리던 중이었다. 황금의 검기는 용신화랑급은 되어야 이를 수 있는 경지이고, 굉장히 오랜 기간동안 정순한 코어만을 모아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신시아나 세이람이 이제와서 배우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것을 설명하면 저 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눈에 선히 보이는 일이고, 지친 유신은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신시아나 세이람도 검에 대한 재능은 있지만 용신화랑이 될 정도는 아니기에 설혹 좋은 스승을 만나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배워 왔다고 해도 사실상 황금의 검기, 천상신검이라고까지 칭송 받는 경지에 오를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니 유신이 이 이야기만 나오면 피해왔던 것이다. 일행은 지금 리터마인 자작의 마차를 타고 소드마스터의 회합에 참여하기 위해 예메른 제국으로 가는 중이다. 엘리시엘과 세라피는 시원한 마차 밖에 더 좋다는 핑계를 대고 세이람과 신시아를 피해 마차 지붕 위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고, 리터마인 자작은 말 위에서 검을 휘둘러 가며 유신이 썼던 검술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그것을 흉내내고 있었다. 비무가 끝난 후 무리하게 검기를 뿜어대던 유신과 리터마인 자작은 사이좋게 함께 앓아 누웠고, 덕분에 출발하는데 삼일이나 걸려버렸다. 게다가 리터마인이 딸아이의 시종으로 쓰기 위해 구했던 노예의 처리에도 시간이 꽤나 걸렸다. 노예를 풀어주는 것은 절차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난한 집으로 돌아가 봐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굶주린 동생들과 힘들어하는 부모님의 얼굴뿐인 소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자유인의 신분으로 리터마인 자작의 집에서 그의 딸아이와 친구로 지내기로 하고 유신 일행과 동행하게 되었다. 테르아닌 시에서 주최한 파티에도 참석해야 했고, 그 외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정신 없이 바빴기 때문에 차분히 그 비무에 대해 이야기 해볼 틈이 없었던 혈기 왕성한 두 기사는 더욱 몸이 달아서 마차 안에서 시간이 나자마자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다. "저도 무척 궁금하군요. 어쩨서 저는 검기를 만들지 못하는 건지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고요." 이자벨까지 가세하자 유신의 대 핀치다. 이건 절대 그냥 넘어 갈만한 분위기가 아니다. "어..... 저..... 호...혹시 배고프지 않아요?" 말을 돌리기 위해 몸부림을 쳐봤지만, 그야말로 안타까운 몸부림일 뿐이다. 보통 호기심에 빛나는 아이의 눈을 보통 초롱초롱하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지금 유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섯 개의 눈동자는 초롱초롱 하기 보다는 슬며시 비춰지는 광기 때문에 두려울 정도였다. 마차 지붕 위에서 실프들을 소환하여 재미있게 놀고 있을 세라피와 엘리시엘이 부러워 지는 순간이었다. "음......우선 검기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보통 검기를 내는 원천적인 힘을 마나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요. 하지만 검기는 마나로 구현되는 게 아닙니다." "엑? 마나가 아니라고요? 하지만 검기가 마나와 같은 성질이란 것은 오래 전에 마법사들이 밝혀 낸 사실인데요?" "물론 기본적인 성질은 같다고 할 수 있지만, 근본적인 원리는 전혀 다릅니다. 마나가 대자연의 힘을 빌리는 것이라면 코어는 자신의 내적인 힘, 그것도 정신적인 힘에 많이 좌우되는 것이지요. 마나는 어디에나 있고, 결코 소멸하거나 사라지지 않으며 단지 그 배열과 구성순서만을 바꾸어서 여러 가지 형태의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하지만, 코어는 그것과는 달라요. 코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정신상태나 활용방법에 따라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며 마나보다는 그 사용 방법이 훨씬 제한적이지요. 그 대신 마나보다 힘을 집중시키기가 편하기 때문에 극소부위의 단위파괴력은 마나를 이용한 그 어떤 마법보다도 강력하지요." 여기까지 와르르 뱉어낸 유신이 힘들다는 듯 핵핵 거렸다. 마나도 그렇지만 코어도 직접 느끼고 온 몸으로 겪어 봐야 하는 것이다. 말로 설명한다고 쉽게 알아들을 수도 없거니와 유신이 잘 설명한 것도 아니므로 설명을 다 들은 세 명이 어디까지 알아들은 건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알아듣지 못한 자가 보이는 당연한 반응들...... "그렇다면 마나와 검기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인가요?" "정신의 힘으로 코어가 발현되는 것이라면 육체적인 수련은 무의미하단 말인가요?" "코어가 정신적에 관계된 것이라면 어째서 저는 배울 수 없다는 거지요?" "극소부위의 파괴력이 높다는 것은 그 힘을 보다 넓게 펼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인가요?" "$%#$^$&%^*%^@$%*" . . . . . . 안녕하세요 suckjins 입니다. 요즘 연재 속도가 느려지고 있지요....ㅜ_ㅜ 너무 많이 사랑해 주시는데 글도 제때 못올려서 정말 죄송할 뿐입니다... 2월 2일부터는 늦지 않고 제때 올리도록 할께요... 양도 조금 더 늘리도록 해보고.... 쿨럭 어....어쨌든 최선을 다하는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유신이 마차안에서 곤욕을 치루고 있을 때 마차 지붕 위는 그야말로 화기 애애했다. 노예로 팔려왔던 사라 라는 아이는 고양이 같이 눈치가 빠르고 말재주가 있는 아이라 두 순진한 엘프를 금세 사로잡아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저는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지요. 늘 배가 고파하던 동생들 얼굴보기도 괴롭고...... 혹시라도 좋은 집안에 간다면 고달픈 평민보다도 훨씬 낳거든요." 지금도 지붕위에서 세 여자는 오순도순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노예라니..... 이성을 가진 지성체가 다른 자의 말에 복종하는 노예가 된다는 건 잘못된 일이야." 세라피는 그 소녀가 안쓰러운 듯 팔려오게 된 이야기를 듣고는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그렇게 어려운 말해도 저는 잘 몰라요...... 그래도 다른 귀족들의 노리개로 팔린 아이들보다는 행운이지요. 그냥 높은 집 아가씨의 친구 겸 시종이라면 먹는 것도 잘 먹을 수 있고 좋겠다 싶었거든요." 아직 어린 사라가 말했기 때문에 노리게라는 말이 더욱 잔혹스럽게 들렸다. 그리고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그녀를 보면 평민들의 삶이 얼마나 고된지를 알 수 있다. "응, 사라는 착하고 씩씩한 아이니까 어딜 가든지 잘 해낼 거야." 갈색의 단발머리, 같은 색의 눈동자, 남루한 옷차림에 바짝 마른 몸, 그리고 주근깨가 촘촘히 있는 두 뺨.....예쁘지 않은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구김살 없는 태도는 이 아이를 보석처럼 빛나게 했다. 그리고 엘리시엘도 그런 이 아이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눈가를 닦으면서도 사라를 칭찬했다. 엘리시엘의 주위에 모여있던 실프들은 그녀의 복잡한 감정상태가 평소와는 다른 것을 느끼고 걱정스럽게 주위를 날고 있었다. 엘프들은 늘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의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소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대견히 여기는 마음, 흥미롭게 여기는 마음과 동정하는 마음이 복잡하게 어우러져 있는 상태는 매우 드문 경우다. 그래서 저렇게 걱정스럽다는 듯 엘리시엘의 주위를 날고 있는 것이다. "응? 아니야. 걱정하지 않아도 되. 자 이제 자유롭게 날아가렴" 엘리시엘이 손을 뻗자 그녀의 자그마한 손위로 역시 자그마한 바람이 빙글빙글 돌더니 흩어졌다. "와......방금 저건 바람이 정령이에요?" "응. 엘리는 정령과의 친화도가 높아서 저렇게 소환 없이도 정령들이 모여들어. 지금 모여 있는 정령들은 바람의 정령인 실프야." 세라피는 엘리시엘의 이야기라면 마치 자신의 일처럼 자랑스러워하며 대신 이야기하곤 한다. 그만큼 세라피는 엘리시엘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와!! 그럼 지금 주위에 정령들이 몇이나 있지요?" "몇이나? 숫자의 개념으로? 글쎄? 정령은 숫자의 개념으로 나타낼 수 없는 존재니까 그건 뭐라고 말하기 힘들고.....많다와 적다의 개념으로 말하는 게 더 적당하겠다. 그런 의미라면 지금 우리 주변에는 정령들이 많아." 엘리시엘이 사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다정하게 말하자 사라는 무척 기분이 좋은 듯 그녀의 하얀 손을 잡고 볼에 비볐다. 언제나 제일 큰언니로 지내오며 동생들을 돌봐오던 그녀에게 언니가 있다면 아마 이런 느낌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엘리시엘도 나이가 아주아주 어린 축에 들어가는 엘프인지라 동생이라곤 없었다. 그래서 이 소녀가 더욱 마음에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차 위에서는 아마도 마차 안에서 실컷 당하고 있을 유신이 본다면 퍽이나 부러워 할만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배경으로는 꽃잎이 훨훨 날려도 어색하지 않은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이렇게 즐거운 일행은 테르아닌 시를 벗어나 예메른 제국으로 마차 여행을 시작했다. 그 흔한 야생 몬스터들의 습격한번 받지 않은 순탄한 여행이었다. 당연히 마차는 길을 따라 가는 것이니 몬스터가 대로에 튀어나와 일행을 덮칠 리도 없고, 산적들이 함부로 덮치기에는 마차가 너무 으리으리해서 귀족 티가 났다. 꼭 한번 야생의 오크 40여 마리가 숫자를 믿고 덤벼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유신이나 리터마인이 나설 것도 없이 신시아와 세이람에게 깨끗이 정리되고 말았다. 오크들이 출현했을 때 신시아와 세이람은 흥분으로 몸이 떨릴 정도였다. 첫 번째 실전인데다 자신들의 검기가 생물체에게 얼마나 통할 수 있을지를 양심에 꺼리길 것 없는 방법으로 알아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기 때문이다. 사실 너무 순탄한 여행에 지루하다 못해 억울한 감정까지 느끼고 있던 둘은 그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었기 때문에 오크들의 출현은 차라리 축복이었다. 신시아야 세이람에게 장난을 거는 것으로 나름대로 지루함을 달래고 있었지만, 세이람은 고스란히 당하기만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 스트레스가 더욱 심했다. 오크들과 싸움이 시작되자 유신은 오크들 틈에서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광전사가 과연 그 냉철한 세이람이 맞는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놀란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단순히 놀란 것이 아니라 낙마해서 굴러 떨어질 만큼 놀란 것은 리터마인 자작이었다. 검술 하나로 외길인생을 걸어온 자신도 검기를 쓸 수 있게 된 나이는 서른이 넘어서였다. 유신이야 열외로 쳐도 견습기사 티를 막 벗은 애송이들까지 그렇게 이르기 힘든 경지인 검기를 마구 난사하며 오크들을 도륙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상한 광경이었다. 유신의 어려 보이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와 비무를 하면서 유신이 검기를 맺은 것에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 것은, 그만큼 유신이 그에 걸맏는 전투경험과 높은 수준의 검술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두 기사의 칼놀림이나 스텝을 보면 절대로 검기를 맺을만한 수준이 아님에도 오크를 별 힘들이지 않고 절단하는 푸른빛의 검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소드마스터라면 겨우 야생오크와의 싸움에서 헉헉거리는 거친 숨을 쉬거나 옷깃이라도 스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저 둘은 비록 40여 마리의 많은 오크를 밀어붙이고는 입지만, 자잘한 상처도 많이 입고 있었고, 싸우는 방법 역시 검기를 이용한 검술을 극대화시키기보다는 단순히 검기의 막강한 파워만으로 오크를 상대하고 있었다. 오크가 절반 정도로 줄었을 때 신시아와 세이람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무시무시한 살기를 느끼고 흠칫 했다. "큭!! 새로운 적인가?" 하지만 그 살기가 느껴지는 방향에서 달려오고 있는 것은 리터마인 자작이었다. 그 기세가 얼마나 흉흉한지 성질 급한 신시아는 하마터면 검으로 내려 칠 뻔하였다. 다행히도 멍청한 오크 하나가 신시아에게 그 타이밍에 덤벼들어서 치켜올려졌던 검은 그 오크를 동강내는데 쓰였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오크들은 뒤로 돌아 달아나기 시작했고, 미쳐 피하지 못한 오크들은 리터마인의 검기에 갈기갈기 찢겨졌다. "와왓!! 다...다가오지 말고 거기서 멈춰욧!!" 미친 사람의 몰골로 검을 휘둘러 오크 육편의 폭풍을 만들며 다가오는 리터마인을 보며 신시아가 한 말이다. 피를 뒤집어 쓴 몰골은 셋 다 비슷비슷했지만, 리터마인이 내뿜고 있는 압도적인 광기에 비하면 세이람과 신시아의 광기는 그야말로 귀여운 수준 이였기에 일단 주의를 환기시켜 리터마인을 스톱시킨 것이다. "자네!! 자네들 어떻게 검기를 쓰나? 지금 보여 준 것은 검기가 맞지?" 마차에서 싸움터까지 말을 달려서 오는 그 잠깐의 사이에 오크 10여마리를 해체해 놓은 리터마인의 모습은 지옥의 뚜껑을 열고 막 올라온 악귀 같았기에 세이람 조차도 손이 자꾸 검 쪽으로 가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세이람과 신시아는 이자를 빨리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검기를 다루는 법은 유신에게 배운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고, 리터마인 자작은 달려올 때와 비슷한, 아니 그보다 두 배쯤 흉흉한 기세로 마차로 되돌아갔다. 둘이 얼이 빠져 버린 틈을 타서 십여 마리밖에 남지 않게 된 오크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리터마인 자작은 신시아나 세이람이 유신을 조르는 것은 애교로 보일 정도로 그야말로 파워풀하게 닦달을 해서 검기를 다루는 기초적인 방법에 대해 배워내고야 말았다. 덕분에 리터마인은 마차 밖에서 저렇게 코어를 다루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두두두두" 여러마리의 말이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리는 모습은 굉장히 박력 있고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전율을 느끼게 한다. 더구나 말 위에 탄 사람들이 통일된 무장을 하고 있다면 더더욱. 여행을 시작한지 일주일째, 마침내 예메른의 국경도시인 에슐린시가 지척으로 다가왔을 때 일행은 한 무리의 기마대를 만나게 되었다. 라일로스 대륙이 몇 개의 국가로 갈라져 있다고는 해도 인간이 대륙 전체에 빽빽하게 들어차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아직까지 미개척지로 버려진 토지가 사람이 살고 있는 곳보다 훨씬 많다. 위시마스터들에 의해 과학의 발전은 통제되었고, 검과 마법밖에 없는 마법계이니 만큼 몬스터들이나 야생동물들과 싸워 가며 인간이 대륙을 개척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나 많은 미개척지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국경이라고는 해도 지도에만 표시되어 있는 굵은 선일 뿐, 국경이란 건 광활한 대지가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곳일 수도 있고,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숲일 수도 있다. 그래서 국경도시라고 불리 울만한 커다란 도시들을 몇 개쯤 세워서 국가 간의 경계를 삼고 또 그곳을 중심으로 몇 개의 작은 마을을 만들어 국경을 지키는가 하면, 국가간의 왕래를 하기도 한다. 다른 루트를 통해 국경을 넘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미개척지에선 어떤 몬스터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고, 길을 잃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왕래하던 길로만 계속 왕래를 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인간의 길이란 것이 생기게 되어 길이 통하는 국경 도시는 번창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미개척지를 함부로 개척 못하게 하는 또 하나의 두려운 이유가 바로 대륙의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깡패 같은 드래곤이다. 예를 들어 레드 드래곤 한 마리가 평야 한가운데에서 지맥을 조금 건드려 화산이 솟아나게 하고 레어를 틀어버려도 인간들은 아무 불평도 할 수가 없다. 또 그린드래곤이 인간의 평야 한 귀퉁이를 차지하면 그곳은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원시림처럼 변해 버린다. 단지 지도 작성을 새로 해야 할 뿐 드래곤에게 무슨 불평을 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그곳을 지나가던 인간이 생존해서 용의 존재를 알리기만 해도 다행이다. 라일로스 대륙에선 인간들의 국가 간에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의 발전이 더뎠다. 위시마스터가 그만큼 잘 관리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전쟁만큼 인간의 역사를 빨리 발전시키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전쟁이 없는 마법계는 발전이 더딘 것이다. 하지만 성계대전에서 위시마스터의 대부분이 전사하였고, 드래곤들 역시 성룡급들은 마법계를 떠나 물질계로 갔다. 인간의 가장 커다란 벽이었던 두 개의 축이 무너지자 서서히 마법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샜다. 국가간에 자그마한 분쟁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가 하면, 흄 대륙의 마물들이 라일로스 대륙의 방패 역할을 하고 있는 하누스 왕국을 끊임없이 괴롭히기 시작했다. 부쩍 늘어난 몬스터들이나 엘핀서스 숲 남서쪽부분의 사막화도 심각한 문젯거리다. 하지만 평화에 너무 길이 든 이곳의 인간들은 아직 대륙 전체에 점점이 번져 오는 이러한 적신호를 별로 대단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인 점은 인간들의 나라 중 가장 강대한 두 나라, 즉 하누스와 예메른은 이런 위험에 나름대로 대처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누스는 흄과의 신경전 때문에 병력을 돌릴만한 여유가 없었지만, 예메른에서는 대륙 곳곳으로 탐험대를 조직하여 파견하였고, 레인져 부대를 늘려 국경주위를 순찰하는 일도 하고 있었다. 유신 일행이 마주친 기마대는 예메른의 레인져 부대였다. . . . . . . . . 으윽....느......늦고야 말았습니다..ㅡ_ㅜ 마법계의 무대가 되고 있는 라일로스 대륙의 지도를 그리느라 글을 쓰지 못했어여 ㅜ_ㅜ 처음 구상에서는 이렇게 까지 이야기가 커져버릴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이야기가 너무 방대해지고, 나중에 헤깔리지 않기 위해서 미리 지도를 작성해 두느라고.... 아직 볼펜으로 슥슥 그린 한심한 지도지만 출판하게 되면 보다 잘 꾸며서 지도다운 지도로 만들 생각입니다. 그럼 B&M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시고요^^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대단하네요. 멀리서 보고는 기사단인줄 알았습니다. 군사강국이라고는 하지만 레인져부대까지 전원 말을 지급할 정도라니....." 유신은 그들을 보면서 감탄했다. 예메른의 레인져들은 카마론 공화국의 기사단보다도 무장이 좋을 것 같았고, 뿜어져 나오는 기운도 하누스의 로열가드들 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실례지만 신분과 여행 목적을 말해 주시겠습니까?" 레인져들은 하드레더에 롱소드, 등에는 석궁을 메고있었기 때문에 레인저라기 보다는 전쟁에 나가는 기사나 병사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카마론 공화국의 리터마인 자작이요. 이들은 내 일행들이고." 리터마인이 자기 소개를 하자 대장인 듯한 사내는 마차 안을 흘끗 들여다보고는 무례를 사과했다. "레이디들이시군요. 정말 실례했습니다. 길을 따라 반나절정도 죽 가면 국경도시인 에슐린시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레인져라고 해도 이렇게 멀리까지 나오다니....." "요즘 들어 오크들의 극성이 심해졌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멀리까지 순찰을 나오게 되었지요. 돌아가시는 길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곳까지 오면서 오크들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으니 에슐린시까지 가면서 다른 몬스터들을 만날 일은 없을 겁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요. 쓸 때 없는 참견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소드마스터 리터마인 자작님의 호위라면 야생오크쯤은 전혀 문제가 안되겠지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멀어지는 레인져들을 보고 유신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소드마스터란 결코 흔한 존재가 아니다. 칼 잡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이야기 해 보고 싶은 존재일 것인데도 레인져들이 리터마인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여상스러웠다. 소드마스터 따위는 눈에도 안 찰 만큼 자신들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너무 바빠서 경황이 없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얼핏보기에도 그들의 실력은 대단해 보였고, 틀림없이 강한 것을 동경할 것 같은데도 별 반응이 없기 때문에 이상했던 것이다. "제노비스 기사단이군." 리터마인이 무심한 어투로 한마디 툭 던지자 세이람이 놀랐다는 듯 반문했다. "기사단이라고요?" "그럴걸세. 아무리 강한 기사가 많은 예메른이라 해도 저정도의 기운을 일반 레인져들이 뿜어 낼 리 없지. 어째서 레인져로 위장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체를 밝히기 싫다면 모른 척 해 줘야지." 제노비스 기사단. 예메른의 건국을 도왔다고 하는 대 마녀 제노비아의 이름을 따서 지은 예메른의 최정예 기사단이다. 하누스의 자색기사단과 함께 대륙의 최강이라 칭송 받으며 저돌적인 돌격전과 쾌속전은 따라 올 상대가 없다는 무적의 기사단이다. 신시아와 세이람은 이미 까만 점으로 보이는 제노비스 기사들을 바라보며 호승심을 불태워 봤지만, 그런다고 그들이 돌아올 리 없다. 해가 질 때 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노숙을 하기보다는 부지런히 달려서 에슐린시에서 저녁을 보내기로 한 일행은 부지런히 마차를 몰았다. 부지런히 달린 보람이 있어서 일행은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에 에슐린시에 도착할 수 있었고, 제일 먼저 지친 몸을 쉬게 해줄 여관부터 찾았다. 엘리시엘과 세라피가 기왕 늦은거 온천이나 적어도 커다란 목욕탕이 있는 여관을 찾자고 우겼기 때문에 아무 여관에나 들어가 잠부터 자자는 유신의 말은 깨끗하게 무시되었고, 두 엘프의 입맛에 맞는 여관을 찾기 위해 일행은 조금 더 고생을 해야 했다. 하지만 목욕탕이나 온천이 있는 여관은 있어도, 이 늦은 시간에 그것을 개방하는 여관은 없어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렇게 고생해서 에슐린까지 온 보람도 없이 여관을 잡기가 힘들 것 같자 유신은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두 엘프의 미인계로 여관의 주인을 구워삶아서 온천 사용을 허락 받아 내고야 만 것이다. 그렇다고 이상한 짓거리를 시킨 것은 아니고 다른 일행은 마차에서 기다리게 하고, 세라피와 엘리시엘을 먼저 여관에 들가게 했다. 그리고 매우매우 지친 듯한 가는 미성으로 최대한 애처롭게 꼭 목욕을 하고 싶다고 말하라고만 시켰다. 한 밤중에 찾아 온 너무나 지친 초특급의 미녀 엘프 둘. 덮치지는 못하더라도 엿볼 수는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주인장은 냉큼 허락해 버렸고, 허락 하기가 무섭게 그 뒤를 따라 나머지 일행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이자벨이야 비록 공주의 신분을 감춘 채 여행하고 있다고는 해도 애교부리는 역할을 할 수는 없었고, 신시아는 꼭 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 봤지만, 나머지 일행 모두가 다된 밥에 코 빠뜨리지 말라고 말려서 삐져 있는 상태다. 엘리시엘이나 세라피도 애교따위는 부릴 줄 몰랐지만, 있는 모습그대로 부탁을 해도 충분히 애교 덩어리였고, 지쳐있는 그녀들의 목소리는 보호본능 자극 1000% 였기 때문에 손쉽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뭔가 속은 것 같아서 억울해 하던 주인장은 이 시끄러운 일행을 내쫒을 지를 진지지게 고려해 봤지만, 척 봐도 귀족티가 줄줄 흐르는 이자벨 때문에 잠자코 받아 들였다. 애초 방이 없다거나 온천을 쓸 수 없다고 했으면 몰라도 이미 온천을 써도 좋고 방도 있다고 하였는데 이제 와서 번복하면 저 기품 있어 보이는 귀족 아가씨가 기품 없는 귀족 아가씨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 . . . . . . 에구 몇칠 못올려서 오늘 연참 합니다^^;; 아침에 올렸는데 바득 바득 한편 더 올리네요^^ 많이 사랑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저도 열심히 할께욥^^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특급의 호텔도 아닌 중상급의 여관이었지만, 이렇게 고급스러운 곳에 들어 와 본적이 없는 사라는 쭈빛쭈빛 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한번도 와본 적도 없고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 혹시 무슨 실수라도 하면 일행들에게 폐가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 사라의 손을 잡고 세라피와 엘리시엘, 그리고 이자벨 공주는 다정하게 온천으로 사라져 버렸다. "칫, 온천 따위 뭐가 좋다는 거야. 난 배고파. 밥이나 먹을 거야." 두 엘프와 두 여자가 목욕하러 간다는 말에 세 남자의 표정이 홀린 듯 멍해지자 신시아가 삐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게 좋겠다. 신시아는 온천보다 먹는 게 어울려." 세이람은 건강한 신시아가 좋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신시아에게 발등을 찍혀 울상이 되었고, 신시아는 투덜거리면서 여자들을 따라 온천으로 사라졌다. "저....저기 제가 무슨 이상한 말을 했나요? 왜 화를 내는 거죠?" 멍청한 세이람의 질문에 리터마인 자작조차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신시아는 그녀들과 함께 온천하는 것이 싫었다. 공주 이자벨. 완벽한 몸매와 잡티하나 없는 피부. 엘프 엘리시엘. 발육이 덜 된 것 같지만 귀엽고 하얀 소녀 같은 몸매. 엘프 세라피. ........... 사라. 평범한 몸매. 예쁘지 않은 얼굴. 마음에 든다. 사라가 있었기에 신시아는 위안을 삼으며 함께 온천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사라는 그렇지 않았다. 온천장 안에는 사라가 팔릴 때 그들의 부모에게 주어진 푼돈보다도 훨씬 비싸 보이는 조각들이 널려 있었고, 바닥은 발이 다치지 않도록 둥글둥글한 옥돌이었다. 자신의 초라한 모습은 이런 사치스러운 곳과 너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기에 사라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혹시라도 실수로 저런 조각중 하나라도 망가트리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게다가 자신과 함께 있는 일행들. 귀족이나 엘프다. 게다가 누구하나 빠질 것 없이 너무 아름답다. 사라의 눈에는 신시아조차도 여신처럼 보였다. 갈색으로 살짝 탄 피부. 시원시원한 몸매. 적당히 붙은 탄력 있어 보이는 근육. 새카만 표범을 연상시키는 신시아도 사라의 눈에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세라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숨이 막힐 정도로 예쁘다고는 생각했지만, 요즘들어 그녀의 미모는 겉잡을 수 없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엘프중에도 성장기가 끝난 중년의 나이지만 이상하게 키도 조금 자라서 엘리시엘 만해졌고 옥구슬 같던 눈빛은 이제 저 하늘의 가장 아름다운 별중 하나라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을 만큼 빛났다. 무엇보다도 인간 세상에 나온 후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입가는 무방비한 미소가 떠날 줄을 몰라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일수였다. 하지만 사라의 이런 주눅 든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엘리시엘의 주위로 운디네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소녀다운 호기심으로 운디네에게 모든 집중하였기 때문에 다른 잡생각들은 머릿속을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운디네도 장난을 좋아하는 요정이라 사라와 노는 것이 재미있는지 금세 그녀와 붙어서 장난을 쳤다. "아하하 사라도 정령사의 자질이 있나봐. 운디네는 변덕이 심한데 사라는 정말 잘 따르네." 엘리시엘의 말처럼 정령들은 사라를 무척 잘 따랐다. "에? 저....정말요?" "리터마인 자작님께 잘 이야기 해서 정령사로의 교육을 받아 보는 게 좋겠다. 정령사는 마법사보다도 귀하니까." "하...하지만 저같이 천한게 어떻게....." "생명체는 모두 다 똑같이 귀한 거야. 천하다느니 그런 생각하지마." 깔깔거리며 수다를 떠는 여자들도 틀림없이 즐거웠을 터이지만, 그녀들보다 더 즐거운 것은 산같이 쌓인 밥부터 먹고 있는 남자들일 것이다. 검을 쓰는 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체력을 소모하는 것이기 때문에 칼잡이들은 모두 대식가이다. 용신화랑정도의 수준에 오르면 식량 없이 주변의 마나를 흡수하여 자신의 코어로 돌릴 수 있지만, 역시 먹어서 힘을 축적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능률도 좋기에 비상시를 제외하고는 마나를 흡수하여 체력을 유지시키는 짓은 하지 않는다. 주방장은 식사시간이 끝나서 음식을 시켰다고 투덜거렸지만, 너무나 맛있게 먹는 일행을 보자 요리사로서의 보람을 느꼈는지 조금만 투덜거리고 계속 음식을 내왔다. 그리고 다음날. 일행은 두 번째 소드마스터이자 대륙최강의 검사라 불리는 뮬테인 백작의 저택으로 향하였다. 국경도시까지 왔다고는 해도, 뮬테인 백작의 영지까지는 마차로 이틀은 더 가야 할 거리다. 다행이 드문드문 인가가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일행은 별 어려움 없이 뮬테인 백작령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뮬테인 백작은 어떤 사람이지요?" 유신도 그가 대륙 최강의 검호라고 불린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다른 것은 전혀 모른다. "에엑!! 뮬테인 백작에 대해 모른단 말이에요? 그 남자도 선생님만큼 많은 이야깃거리를 몰고 다니는 사람인데......" 유신의 무지함이 의외라는 듯 신시아가 감탄했다. "그래? 무슨 이야기 거린데?" "어디 보자..... 가장 유명한 게 이리나 대평원의 오크들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수백 마리의 오크를 베고 고립된 부대를 구원했다는 이야기고요, 슐레인 산맥 북부의 오거 마을을 혼자서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전설도 있어요. 하누스의 용사 메티스 이후 가장 뛰어난 검호라 칭송받는 남자에요." 눈치 없는 신시아가 메티스에 대해 언급하자 유신은 불편한 표정으로 엘리시엘의 표정을 살폈지만, 유신이 그라테우스를 쓰러뜨렸기 때문일까? 그녀의 표정은 평화로워 보였다. "오크 수백 마리는 과장일 터이지만 뮬테인 백작은 확실히 강한 남자요. 만약 유신경이 나와의 대결에서 모든 실력을 다 발휘했던 것이라면, 그에겐 이기기 힘들 것이오." "자작님은 뮬테인 백작님과도 비무를 해 본 적이 있나요?" "물론이오. 소드마스터들끼리 모이면 비무 이외에 할 것이 무엇이 있겠소. 일년에 한번씩 이렇게 모임을 갖고 그간의 발전을 겨루어 보는 것은 정말로 즐거운 일이요. 다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이 날만큼은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오." 뮬테인 백작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백작의 저택 쪽으로 마차를 몰고 있을 때 멀리서 한 무리의 기마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하드레더를 착용하고 카이트 실드를 말 등에 올려 놓고, 바스타드와 롱소드는 허리에 찼으며, 핼버드를 손에 들고 있는 무시무시한 중무장이었다. 모두가 통일된 복장과 장비였기에 그 모습은 더욱 위압적이었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 선 기사의 망토의 브로치는 뮬테인 백작가의 상징인 장미문양이었고, 검의 폼멜에는 제노비스 기사단의 상징인 여인의 옆얼굴이 조각되어 있었다. 엘리시엘은 제노비스기사단의 문양을 알고 있었는지 멀리서도 그들을 알아 보았다. "굉장한 중무장..... 대체 무슨 일일까요? 국가 기사단인 제노비스 기사단이 이런 곳까지 와 있다니......" 멀리 떨어져 있는, 게다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 기사의 보일 듯 말 듯한 검의 폼멜 문양까지 알아보는 엘프의 경이적인 시력은 그저 감탄스러울뿐이다. "워~~워" 일행은 기사단이 급한 일이 있나보다 하고 마차를 비켜 길을 내 주었지만, 기사들은 마차 쪽으로 다가왔다. "이런....리터마인 자작님이시군요. 제노비스 기사단 돌격대 소속 기사인 하렌이라고 합니다. 뮬테인 백작님께서는 황제폐하의 명으로 죽음의 사막으로 떠나셨습니다. 소드마스터들의 회합 날인 건 알았지만, 상황이 급하여 일정을 바꾸지 못하였습니다." "죽음의 사막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사막의 몬스터가 국경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뮬테인 백작님과 하이몬 백잠님은 이미 출발 하셨고, 다른 소드마스터 분들도 도착하면 도우러 와 주십사 하는 부탁이 있었습니다. 저택에 가 보시면 집사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이곳으로 올 때 레인져로 위장한 제노비스 기사단의 다른 부대도 보았소. 기사단 전체가 출동해야 할 만큼 사태가 심각한 것이오?" 리터마인의 질문에 그 기사의 얼굴이 어두워 졌다. "솔직히 좋지 않습니다. 국민들이 불안해 할까봐 기사단의 출전은 비밀이었는데 이젠 더 감출 것도 없을 정도로 사막과 마주하고 있는 국경 지역은 난리가 난 것 같습니다." "허헛....대체 무슨 일인지..... 어쨌든 알겠소이다. 서두르는 편이 좋을 것 같군. 우리도 저택에 가보고 가능한 한 빨리 죽음의 사막으로 떠나겠소." 짤막하게 인사한 후 제노비스 기사단과 헤어진 일행은 백작의 저택에 도착했다. 마차가 들어서기가 무섭게 집사와 뮬테인 백작부인이 마중을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먼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는데 남편께서는 칙명을 받들기 위해 죽음의 사막으로 가셨습니다." 깨끗하게 늙은 뮬테인 백작 부인은 예순을 넘은 나이에도 처녀시절의 꼿꼿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부인은 여전하시군요. 다른 소드마스터들도 모두 죽음의 사막으로 떠났나요?" 리터마인 자작의 인사에 뮬테인 백작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하이몬 백작님은 마침 먼저 도착하셔서 남편과 함께 떠났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은 아직 소식이 없군요. 아직 약속 기일까지 나흘정도 남았으니 거기에 맞추어서 올 모양입니다. 근데 저 분들은....." "이쪽은 요즘 드래곤 슬레이어로 유명한 유신경입니다. 저분은 검호 메티스님과 함께 여행하셨던 선택받은 정령사 엘리시엘 님이고, 이쪽은 세라피님, 그리고........" 아직 이자벨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리터마인 자작은 이자벨을 보고 머뭇머뭇 했다. "이자벨 하누스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군요." "......." 그녀의 인사에 리터마인 자작은 그만 얼이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리터마인이 조각이 되어 버린 덕분에 소개받을 기회를 놓친 신시아와 세이람도 멀뚱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느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도도하지만 따스한 기품에 그녀가 보통의 잡스러운 귀족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하누스의 자랑인 그 이자벨 공주일줄은 생각도 못했다. "고....공주님이 셨군요. 이런 실례를......"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말도 안한 제가 죄송하지요.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저도 알아야겠군요. 대체 무슨 일이지요? " "제가 말씀드리는 것 보다 남편께서 편지를 남기셨습니다. 여기...." [존경하는 나의 친구들 먼저 무엇보다 소중한 약속인 소드마스터의 회합의 주최자로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사과하겠네. 변명을 하는 것은 내 성격에 맞지 않지만, 그대들의 도움을 청하려면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겠군. 5년전부터 엘핀서스와 우리나라의 사이에 있는 죽음의 사막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 것은 경들도 모두 알고 있을 걸세. 다행이 엘핀서스로 번져가던 사막화는 요정 숲의 힘인지 더 이상의 진출은 없었지. 하지만 그 사막화가 방향을 바꿔 우리나라의 국경지방까지 번져와 그 사태가 자못 심각해 졌네. 그래서 황제페하께선 이를 조사해 볼 것을 소드마스터 율리안경에게 명하셨지. 하지만 율리안 경의 부대는 이미 한달 전의 연락을 마지막으로 소식이이 두절되었네. 그리고 그 부대의 유일한 생존자가 돌아 온 것이 이주일 전이네. 그의 말로는 사막 전체는 이미 몬스터들의 소굴이 되었고, 그 숫자는 사막 깊숙이 들어간 것이 아닌데도 이미 만 단위를 넘어서고 있다고 하네. 두 번에 걸쳐 레인져들을 파견하였지만, 정확한 숫자를 보고해 오기는커녕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돌아오지 못한 상황일세. 게다가 본격적으로 몬스터들이 국경을 침범하고 있어서 더 이상 쉬쉬할 수 없을 만큼 사태가 심각해졌네. 레인져로 위장시켜 사방에 흩어 두었던 제노비스 기사단 전체를 소집하고 있는 실정일세. 아무래도 전쟁을 방불케 할 대규모의 몬스터 토벌이 있을 것 같네. 하누스왕국에도 도움을 청하면 좋겠지만, 흄과 대치하고 있는 그들의 병력을 섣불리 뺐다가 흄이 상륙을 성공시키기라도 한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걸세. 궁정마법사들의 의견도 흄이 흉계가 확실하다고 하네. 마법사들의 비젼마법으로 마물들을 비출 수 없는 것을 보면 마물들의 주변에는 뛰어난 마법사도 있는 것 같고. 상황이 그러하니 경들의 도움을 바라는 것일세. 이 편지를 읽는 즉시 죽음의 사막으로 와 주게. 이번의 비무의 우승자는 마물들의 머리를 많이 벤 자에게 주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이런 부탁을 하게 돼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네. 급하게 출발하게 되어서 두서 없는 글이 되었군. 부디 허물치 말아 주게. 그럼 전쟁터에서 그대들의 용맹한 모습을 다시 보게 되기를 빌며 이만 줄이겠네. 진실한 벗이.] "........만 단위의 몬스터 대군이라....생각보다 사태가 더 심각하군요." 질린 듯 이자벨이 가볍게 떨며 말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아무래도 흄에선 오래 동안 준비를 해 온 듯 합니다. 게다가 국경지방을 침공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그 준비가 충분히 끝났다는 뜻일 것이고....공주님은 어서 하누스로 돌아가셔서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그럼 모두 다시 돌아가는 거야?" "일단 엘리시엘과 세라피는 엘핀서스로 돌아가서 장로님들과 상의해 봐. 그리고 신시아와 세이람은 공주님을 호위해서 하누스로 돌아가고. 난 리터마인 자작님과 죽음의 사막으로 가겠어." "어, 나도 죽음의 사막으로 갈래요. 대체 무슨 일인지....." "세라피, 마물들과의 전쟁이에요. 고집 부리지 말고 엘리시엘과 돌아가요." "싫어요. 절대로 싫어요." 이상하리 만치 세라피 답지 않게 강하게 나오자 마음약한 유신 또 어쩔 줄을 모른다. "유신, 세라피 언니랑 함께 가도록 해. 엘핀서스까지는 나 혼자서도 갈 수 있어." "하지만...." "아냐. 너도 마법사가 필요하잖아. 그리고 언니와 나는 실피드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 소식 전하기도 편하고." "그....그래도...." "자자 여러분. 정해졌으면 빨리 움직여요. 전 먼저 엘핀서스로 가보겠습니다." "에...엘리...." "언니 힘내. 아마 유신이 잘 지켜 줄 거야. 그럼 나중에 또 봐."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기도 전에 엘리시엘은 재빠르게 저택을 빠져나갔다. 유신이 따라나가 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에 언뜻 본 것은 엘리시엘의 눈물이었을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엘리......" 유신이 저택으로 돌아오자 다들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도 하누스까지는 혼자서 가도록 하겠습니다. 예메른의 수도인 제노아까지만 가면 하누스와 연결된 비상용 마법진이 있어요. 그곳까지만 가면 되니까 호위 따위는 필요 없어요. 그보다 신시아와 세이람도 죽음의 사막으로 가는 편이 낳을 것 같군요." "하지만 호위도 없이 공주님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절대 안돼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죽음의 사막으로 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지만.....단순히 전령을 보내는 것과 공주인 제가 직접 왕궁으로 가서 전하는 것의 차이를 알기에 저도 왕궁으로 가는 겁니다. 지금은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에요. 해야만 할 일을 할 때입니다." "그...그런...." 이자벨의 말에 유신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과연..... 하누스의 보물이란 말이 틀리지 않구나. 고귀하신 공주님이야.' 뮬테인 백작부인도 이자벨의 기개에 감탄을 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공주님의 호위는 제가 지원하도록 하지요. 물론 여러분들만큼이나 강한 실력자들은 아니지만, 수도까지 가는 길 정도는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백작부인의 말에 유신도 할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할 일이 모두 결정되자 다시 출발 준비를 하였다. 계속 여행을 해 왔기 때문에 모두가 지쳤지만, 감히 쉬고싶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세라피는 엘리시엘만 떠나 보낸 것이 미안하고 섭섭하여 몹시 혼란스러웠다. 이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기에 그녀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평소라면 일행 중에 거북이처럼 제일 느린 그녀였지만, 혼란스런 마음을 잊기 위하여 바삐 움직였다. '혼란스럽다고? 내가? 엘프인 내가? 이상해...... 정말로 뭔가 이상해......혼란스럽다면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데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세라피의 머릿속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 졌지만, 지금 그런 내색은 할수 없기에 꾹 참고 출발준비를 도왔다. "대열을 유지해. 검사대는 궁병대가 휘말리지 않게 지켜라!! 마법병단은 뒤로 더 물러 서!!" 이미 난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 전쟁터에서 아무리 코어를 섞어서 소리쳐 댄다고 해도 그 목소리가 부대 전체에 울려 퍼질 만큼 클 수는 없다. 명령에 따라 그의 목소리를 들은 병사들은 큰 소리로 그것을 복창하여 주위 병사들에게 알려야 하겠지만, 적의 칼과 몽둥이에 가까운 흉기를 막는 것도 버거운 병사들에겐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 군대가 그의 뜻대로 움직일 리는 더더욱 없다. '빌어먹을....' 뮬테인 백작이 생각하기에도 상황은 보기보다 훨씬 심각할 것 같았다. 운 좋게 이번의 공세를 막아낸다고 해도 다음 번에 또 다시 적들이 밀고 들어온다면...... 처음의 전투는 강력한 제노비스 기사단을 선두로 세운 예메른 국의 승승장구였다. 마물들의 기세가 대단하고 숫자가 많다고 하여도 정규 기사단과 그 뒤를 받쳐주는 든든한 보병과 궁병들을 상대로 버텨낼 리가 없었다. 두세 번의 승리로 사기는 오를 대로 올라 있었고, 이대로 승리해 간다면 두 달 안에 승전보를 황제폐하에게 올릴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마물들의 숫자는 많았고 사막이란 악조건은 인간에겐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기사단의 경미한 피해에 전쟁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줄어들기 시작한 그 자리를 메울 방법이 없었다. 지원군이 도착했지만, 그들은 처음 토벌대에 포함되었던 제노비스 기사단처럼 일당백의 노련한 전사가 아니었다. 게다가 적의 별동대가 마법병단에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예비병력을 빼야 했고, 그만큼 전방부대에 허점이 생기게 되었다. 한발한발 죽음의 사막으로 나아가고 있던 토벌군은 이제 진열을 갖추어 후퇴하는 것도 버거울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밤이 되면 오히려 전투력이 올라가는 마물들은 야밤에 공격하는 것을 더 좋아 하였고, 밤낮 없는 고된 전투로 사기는 급격히 떨어갔다. 마법사들 역시 계속된 전투로 마나가 소진되기 시작하자 더 이상의 위력적인 마법 지원을 해주지 못하고 기사단과 보병대의 짐이 되었다. 밤에는 적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고, 낮에는 후퇴해야 했으니 피로도는 점점 쌓여만 갔으니 체력이 약한 마법사들은 이미 아무 쓸모도 없게 된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낮에 이동하지 않으면 이곳에서 고립된 채 전멸하리란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에 휴식조차 변변히 취할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그의 생각을 대변해 주기라도 하는 듯 비상나팔이 불길한 저음을 내며 울려 퍼졌다. 또다시 마법병단을 노린 기습이 가해진 것 같다. "맙소사. 그렇다면 양동작전이란 말인가?" 절망적인 목소리가 뮬테인 백작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맨스콜피온과 오크, 트롤의 연합공격에 주 전선도 위태위태한 상태에서 마법병단을 살리기 위한 예비대까지 뺄 여력은 도저히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마법병단이 무너지고 기습에 투입되었던 적군이 앞뒤에서 협공을 가한다면 더 이상 막아낼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이제.....끝장인가?' 절망적이었지만 이왕 죽을 목숨이라면 끝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눈앞의 적의 주공을 빨리 괴멸시키면 적을 각개격파 시켜 잘만하면 이번 공세를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3m 에 달하는 맨스콜피온과 오우거, 트롤등의 대형 몬스터를 앞세운 적의 선봉대는 쉽사리 깨뜨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하이몬 백작이라도 있었다면 마법병단을 살릴 수 있을 터인데.....' 전쟁터에서 소드마스터 한사람의 힘은 보잘것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적재적소에 배치하기만 하면 그 위력은 일개 대대이상이다. 지금처럼 적이 소수로 게릴라 전을 벌일 때 그 소탕을 맡겨두거나 기마대가 중앙 돌파를 시도할 때 그 선두에 세우면 효과가 확실하다. 퇴각할때 한사람이라도 소드마스터가 든든히 후방을 지키면 훨씬 질서 정연하게 퇴각할 수 있고, 코어를 실은 큰 목소리는 군령을 전달하기도 쉽다. 하지만 나흘전의 전투에서 본대의 퇴각을 위해 후미를 지키던 그는 너무 지쳐버린 말이 쓰러지면서 적들에게 둘러 쌓이고 말았다. 그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후퇴 명령을 내려야만 했던 뮬테인 백작은 자신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병사들 때문에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제노비아 기사단이 선전하고 있지만 무거운 갑옷을 입고 열사의 사막 위에서 몇일째 계속 전투를 벌여온 그들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나팔소리는 급박하게 계속 울려 퍼졌지만, 뮬테인 백작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전군 진격!! 눈앞의 적을 물리치고 최대한 빨리 반전하여 마법 병단을 구하러 간다!!" 눈앞의 적을 물리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마법병단을 구할 수 없으리란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예순을 훌쩍 넘어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그의 체구는 젊은이의 그것보다 훨씬 단단해 보였다. 하지만 고된 전투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과 마음은 요 이주일 새에 30년 정도는 더 늙어 버린 것 같았다. 깊게 패인 주름과 은색이었을 머리카락은 사막의 모래먼지로 무슨 색인지 알아 볼 수도 없게 엉망이 되었지만 흉흉한 눈빛은 최후의 순간까지 하나의 마물이라도 더 지옥의 길동무로 삼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품고 있었다. "카핫" 눈앞의 거대한 맨스콜피온을 향해 새빨간 검기를 뿜어 올리고 있는 검을 겨누고 달려드는 모습은 전설속에 나오는 용사처럼 비장한 모습이다. 하지만 살겠다는 의지보다는 의지로 드는 검이 아닌 한 놈이라도 더 많은 적을 지옥의 길동무로 삼기 위해 든 검이었기에 그 모습은 처연했다. 사그러 들기 전의 불꽃이 더 화려한 것처럼 뮬테인 백작의 붉은색 검기는 그의 주인조차 태워 버릴 것 같은 기세로 마물들을 베어 넘겼다. 맨스콜피온 하나가 그를 막기 위해 단단한 각질을 방패삼아 달려들었다. 하지만 뮬테인의 검기는 유신의 천상신검의 경지는 아니더라도 리터마인이나 신시아의 푸른색의 검기보다는 훨씬 고강한 검기다. 맨스콜피온의 갑주가 아무리 단단하다고 해도 제 주인의 몸을 저 검기로부터 지켜주지는 지켜주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뮬테인의 검이 맨스콜피온의 정수리를 내리 치자 시퍼러 죽죽한 느끼한 액체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살덩어리들, 그리고 끔찍스런 냄새를 퍼트리며 펑크난 타이어처럼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뮬테인의 선전에 힘입었는지 병사들도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오우거 하나가 투박스런 몽둥이를 거칠게 휘둘러 기사 하나를 말 위에서 날려 버리자 그 주변에 있던 보병들 대여섯이 악착같이 달려들어 그 기사의 복수라도 하겠다는 듯 그 오우거에게 칼을 쑤셔 넣었다. 오우거는 괴성을 지르며 몽둥이를 휘둘러 병사들을 떼어 내려고 하였지만, 낙마했던 기사는 피를 토하면서도 검을 고쳐 잡고 일어서서 끝끝내 그 오우거의 머리를 쪼개 놓았다. 하지만 뒤이어 달려드는 맨스콜피온의 맹독성 꼬리에 가슴갑옷을 관통 당하고 눈조차 감지 못한 채 절명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자신의 팔을 검으로 꿰어 맨스콜피온의 꼬리에 찔러 넣어 자신의 몸무게와 갑옷의 무게로 맨스콜피온의 기동력을 최대한 줄여 놓았다. 맨스콜피온은 그 기사를 떨궈내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흔드었지만, 갑옷의 틈새로 질러 넣은 검은 기사의 팔을 관통하여 꼬리의 단단한 껍질을 깊숙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그 틈에 병사들은 승냥이떼처럼 맨스콜피온에게 다닥다닥 엉겨붙어 관절부위나 머리 부분 같이 바늘이라도 들어갈 만한 틈이 있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병장기들을 구겨 넣었다. 처음에는 그런 인간들을 우습게 봤지만, 아무리 떼어내려고 몸부림쳐 봤도 악착같이 급소만 파고드는 인간의 원념 섞인 검에는 견디지 못하고 황소보다도 거대한 맨스콜피온도 주저앉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혈전이었다. 병사들은 모두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지, 부상이나 죽음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최후의 힘까지 짜내어 덤벼들어 마물군단들을 주춤주춤 후퇴하게 만들었다. 몬스터들의 지휘를 하고 있는 오크 듀레한은 초조해 졌다. 지금쯤이면 마법병단을 끝장낸 부대가 인간부대의 후미에서 덜미를 쳐서 앞뒤로 협공을 해야 할 타이밍인데도 그 부대는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소식이 없었다. 모습은 오크였지만 그 속은 흄이 소환한 중급 악마인 레서데몬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복잡한 작전을 구사할 수 있었고, 자신의 작전에 맞추어 꼭두각시 인형처럼 놀아나는 인간들을 보며 몬스터군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듀레한은 조금씩 미끼들을 던져주어 적들을 사막 깊숙이 까지 유인하고, 밤낮으로 파상공격을 가해 마물들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법병단만 노리는 별동대도 따로 편성하고 적당히 치고빠지는 전술을 구사해 인간들의 넋을 완전히 빼놓은 레서데몬은 틀림없이 훌륭한 지휘관이라 할만했고, 그의 작전도 사막에서 싸우기에 최적화된 교본 같은 전술이었다. 하지만 인간들의 반항은 생각보다 훨씬 거세었고, 협공해야 할 부대는 소식이 없었다. 이대로 계속 마물군이 밀린다면 자칫 부대가 전멸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영리한 이 마계의 주민이 모를 리 없다. 하지만 함부로 후퇴했다가는 흄에게 대체 뭐라고 변명한단 말인가? 듀레한은 어디서부터 계획이 이 지경으로 틀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본체만 소환된다면 이까짓 인간 군대쯤 간단히 쓸어 보릴 수 있겠지만, 위시마스터의 개입을 두려워한 흄은 본체를 꺼내는 것을 엄하게 막았기 때문에 저런 인간나부랭이들과 엉망으로 드잡이질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몬스터들을 더 지원 받을 수 있었음에도 이번 공세로 완전히 인간의 군대를 완전히 끝장낼 것이라고 확신한 듀레한은 더 이상의 지원조차 요청해 두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 이 인간들을 놓치게 되면 다시 추적할 길이 없을뿐더러 흄에게 할 변명도 없다. 만약 인간들이 돌아가게 된다면 다음 번에는 더더욱 대규모의 토벌대가 올 것이고, 자칫 힘들게 닦아놓은 대륙 침략의 발판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그는 아마도 흄에게 마계로 강제송환 당하는 것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의식을 제어 당한 채 단순한 소환수로 전락하거나 최악의 경우 존재자체를 소멸 당할 수도 있다. 전장터를 바라보던 그의 눈이 한 남자에게 고정되었다. 그 인간은 인간 주제에 제법 강렬한 기운을 뿜으며 자신의 부하들을 박살내고 있었다. 여지껏 함부로 나서서 싸우지 말라는 흄의 경고를 의식해서 전선에 나서기를 꺼려했던 듀레한이지만 더 이상 저 인간을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더욱 일이 커지리란 것을 모를 만큼 멍청이는 아니었다. 오크의 몸을 빌렸기 때문에 만족스럽게 움직일 수는 없을 터이지만, 설마 인간을 상대로 레서데몬인 자신이 질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에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다. 그가 들고 있는 글레이브에 코어를 집중하자 시커먼 검기가 뿜어져 올라 왔다. 오크로 위장한 자신이 검기를 뿜었기 때문에 만약 저 인간들중 하나라도 살아 돌아가 이 사실을 알린다면 일이 정말 귀찮아 질 것이지만, 그는 이곳에 있는 인간들 중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죽일 자신이 있었다. 요행이 이번 전투에서 살아 남는 녀석이 있더라고 사막을 벗어나기 전에 죽이기만 하면 된다. 마법사들도 전부 끝장났을 터이니 마법으로도 알릴 수도 없을 것이다. 단독으로 맨스콜피온이나 오우거같은 준대형 몬스터를 때려잡는 저 노기사만 없다면 인간들의 부대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듀레한은 글레이브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고 뮬테인 백작에게 달려 들었다. "콰쾅" 엄청난 충격과 함께 뮬테인 백작은 뒤로 일곱 발자국이나 물러섰다. 입에서는 가느다란 선혈이 흘러 나왔다. 오우거의 풀스윙으로 휘두른 배틀액스를 받았을 때 보다 저 자그마한 오크가 휘두르는 글레이브의 충격이 훨씬 큰 것 같았다. 너무 지치고 힘든 상태라 아직 사태 파악도 못하고 있는 뮬테인 백작에게 재차 오크의 글레이브가 날아 들었다. 백작이 휘청이는 것을 본 기사 둘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막아섰지만 검기를 다룰 수 있는 경지에까진 이르지 못한 그 둘은 듀레한의 사악한 마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시커먼 글레이브에 검과 갑옷 채로 썰어지고 말았다. 여지껏 살아 남았다는 것은 그 두 기사의 실력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뜻이며 뛰어난 인제는 상관에게 사랑 받게 마련이다. 아껴오던 두 젊은 기사가 허무하게 죽어버리자 리터마인의 눈에도 불똥이 튀었다. 하지만 그는 검을 움켜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지쳐 있었고, 자잘한 상처 역시 수없이 입은 상태였다. 게다가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부대의 뒤쪽에서 모래가 날리며 한 무리의 부대가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마법병단을 끝장내 버린 적의 별동대일 것이다. 앞뒤로 포위 당하는 상황이 되면 간신히 잡은 이 승기도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병사들은 이미 한계를 넘어서 분투해 주고 있었지만, 그것은 죽음을 전제로 한 광기와 같은 폭발력이다. 적의 증원을 보는 순간 전의를 상실하게 되면 그것으로 바로 지리멸렬할 것은 뻔한 일이다. '아마도 이 녀석이 나의 마지막 길동무가 되겠구나. 괴물같은 놈. 사악한 오크 주제에 검기 흉내를 내다니...... 죽어버려랏!' "하앗" 검에 더한층 강력하게 코어를 주입하여 오크의 글레이브를 후려 쳤다. 글래이브와 오크를 함께 박살내리라고 생각했던 공격이었지만, 오크는 글레이브의 방향만을 살짝 바꿔 별 힘들이지 않고 이 공격을 막아내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뮬테인 백작도 더 이상 상대를 약한 오크라고 얕잡아 볼 수가 없었다. 죽음을 각오한 그는 방어를 무시한 완전 공격스타일의 검술을 펼쳤다. 하지만 듀레한은 얄밉게도 철저하게 방어만을 하며 증원군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릴 뿐 그의 도발에 넘어가 같이 검격을 주고받지는 않았다. 이 건방진 인간의 얼굴이 절망과 체념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캬캬캬 마지막까지 네놈을 죽이진 않으마. 네놈의 모든 부하가 갈기갈기 찢어져 마물들의 먹이가 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죽을 수 있을 것이다." '빌어먹을..... 지치지만 않았다면 이따위 녀석쯤은.....' 절망적인 전쟁터의 상황에서도 강한 상대와 제대로 싸울 수 없다는 아쉬운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가오는 새로운 적들을 보고 인간 병사들도 한순간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눈앞의 마물들을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끝나는 참에 새로운 적이라니..... "슈슈슈슉" 활살들이 하늘을 가르는 흉측한 파공음을 내며 하늘을 가득 메웠다. "화살....이라고? 지원군이다!! 마물들은 화살을 쓰지 않아!!" 과연 낙하운동을 하기 시작한 화살들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이제 인간들을 전부 처 죽여버릴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마물들의 군대였다. "텅텅텅" "퍼퍼퍽" 맨스콜피온 같이 두꺼운 갑각에 보호받는 마물들은 잔뜩 웅크린채 이 공격을 막아 내었지만, 방패나 갑옷같은 무장을 변변히 갖추지 못한 오크나 오우거들은 화살의 먹이가 되었다. 비록 마물들의 가죽이 워낙 질기고 두껍기 때문에 치명적인 피해는 주지 못했지만, 질겁을 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우와아아아" 함성소리가 메아리치며 사기 백배해진 인간들의 공격이 더욱 거세어 졌다. "키에에엑!! 이...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듀레한은 이 황당한 사태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법병단을 주살하기 위해 보낸 별동대에는 나가나 키메라같은 고급의 몬스터가 섞여 있었다. 마법사들이 비록 지쳐있다고는 해도, 그동안의 전투에서 몬스터군에 입힌 피해가 워낙 컸기 때문에 방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별동대가 전멸했다는 것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말인가? 듀레한은 이를 부드득 갈며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뮬테인 백작이라는 듯 모든 힘을 쏟아 부어 공격을 가했다. 오크가 강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뮬테인 백작은 하마터면 낙마할 뻔하였다. 다행이 이 지옥 같은 사막에서 주인을 지켜온 명마답게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검압이 얼마나 센지 순간적으로 무릎을 꿇을 만큼 휘청거렸다. 재차 공격을 가하려던 듀레한은 옆에서 느껴지는 강맹한 살기에 검을 회수할 수 밖에 없었다. "리터마인 자작! 정말 좋은 타이밍에 와 주었오." "전쟁터라 말 위에서 인사드립니다. 일단 저 괴물같은 오크부터 처리하도록 하지요." 만약 듀레한이 분노로 이성을 잃은 상태가 아니라면 새로 나타난 상대의 차림새를 보고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사막을 달려 왔으니 모래먼지로 갑옷이 엉망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의 몸에는 마물들의 피가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별동대를 해치운 놈들은 지금 도착한 부대가 아니라는 뜻이고, 별동대를 괴멸시킨 무시무시한 병력은 우회기동으로 포위 준비를 하고 있거나 마물들의 퇴각로를 차단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짐작했어야만 했다. 무장 역시 사막에서 싸우기 쉽도록 무거운 철제의 갑옷이 아닌 하드레더를 입고 있으니 어느정도 장기전을 각오하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볼 상황일 것인데도 듀레한은 이런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찮은 인간 놈이 머릿수가 늘었다고 나에게 이길 것 같으냐?" 듀레한은 눈에 가시 같은 뮬테인 백작을 먼저 쳐 없애기 위해 그의 말부터 공격을 했다. 말과 주인이 모두 너무나 지쳐 있는 상태라 말 위라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임에도 그 공격을 피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마기가 잔뜩 실린 검을 막아 낸 것은 뮬테인백작이 아닌 리터마인 자작이었다. "큭!! 네놈도 소드마스터 나부랭이냐?" "흥, 그 나부랭이의 검에 죽어 봐라. 더러운 오크놈아!!" 검기를 최대한 주입한 검으로 오크를 후려쳤지만, 그놈은 정면으로 리터마인이 혼신의 힘을 기울인 검을 퉁겨냈다. '큭!! 분하지만 저놈이 파워는 나보다 위로구나. 하지만 인간에겐 인간만의 기술이 있다.' 파워의 차이가 확연했기 때문에 리터마인은 정면으로 검을 맏대어 검과 자심의 몸, 그리고 말에게 부담을 주기보다는 비스듬히 흘리는 방식으로 싸웠다. 예전 같았으면 정면승부를 보았겠지만, 유신과의 비무로 깨달은 바가 있었기에 이런 약은 검술도 쓸 수 있는 것이다. '강하기는 하지만 유신경이나 뮬테인백작과의 비무에서처럼 절망적이지는 않다. 이길 수 있어.' 몇 번 검을 섞어 보자 오크놈의 파워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지만, 검술은 평범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기술로 승부를 건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것이다. 한편 우습게 생각했던 인간의 공격이 만만치 않자 듀레한도 초조해 졌다. 저 인간이 내뿜는 기운 정도로는 막을 수 없는 강력한 공격을 몇 번이나 퍼부어 봤지만, 약올리듯 슬슬 피하며 체력을 비축하는 상대를 보자 이 싸움이 쉽게 결판이 나지 않으리란 걸 알수 있었다. 그러자 듀레한은 단숨에 끝장을 보겠다는 듯 검에 사악한 기운을 더욱 증가시켰다. 이리저리 피하고 있다고는 해도 검이 완전히 부딪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잠깐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리터마인은 상대의 글레이브에서 전해져 오는 사악한 마기 때문에 정신이 다 혼미해 질 지경이었다. "이...이놈 평범한 오크가 아니구나! 어떤 사악한 마법사가 만든 마법생물이냐?" "핫!! 건방진 인간 애송이야. 겨우 인간 마법사 따위가 위대하신 이 몸을 만들었을 것 같냐? 어리석긴....." "뭣이라고? 그럼 네놈은 대체 누구냐?" "케케켁 알려 줄 것 같으냐? 죽어랏!!" 몬스터들의 배후를 캐기 위해 아직 제 실력을 다 발휘하니 않은 리터마인이였지만, 상대가 이렇게 나오자 더 이상 봐 줄 이유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수비적인 입장과는 다른 강맹한 공세에 듀레한은 일이 점점 더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만약 인간에게 이 오크의 육체가 파괴되어 지옥으로 강제송환 된다면 다른 데몬들이 그렇게 나약한 그를 가만히 놔 둘 리 없다. 인간 따위에게 패한 마족의 수치덩어리로 간주하고 뼈까지 갉아먹어 버릴 것이다. 레서데빌 특유의 초감각으로 리터마인의 공격을 읽을 수는 있었지만, 오크의 몸을 뒤집어 쓰고 있으니 반응할 수가 없었다. 동체시력도 본체에 비해 형편없이 떨어지고, 근육이나 골격도 그가 제 실력을 발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이 건방진 인간놈들이!!" 그가 사방으로 마기를 흩뿌리며 미친 듯이 날뛰어 봤지만, 리터마인과 뮬테인은 마치 바람처럼 요리조리 잘도 피했다. "이제 그만 포기하시지. 주위를 봐라." 그가 두 인간에게 묶여 본대의 지시를 못하고 있는 동안 그 많던 몬스터 대군들은 어느새 모두 죽었거나 달아났는지, 움직이는 마물은 듀레한 하나 뿐이었다. 듀레한은 리터마인과 싸우느라 보지 못했지만, 이미 달아나던 마물들까지 마법병단을 구해주었던 부대에게 모두 척살된 후였다. "어...어느새....." 인간들의 군대는 듀레한을 겹겹이 포위한 채 창이나 검을 겨누고 있었고, 그 뒤로는 궁수부대가 화살을 조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약한 오크의 몸으로는 탈출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멍하게 얼빠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듀레한의 얼굴이 묘하게 씰룩거리더니 갑자기 큭큭거리는 쇠를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로 웃었다. "크.....크흐흐흐흐흐......크하하하하핫" 웃음은 미칠 듯한 광소로 바뀌었고 그 소리를 들은 평범한 인간 병사들은 검을 놓칠 만큼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천사들의 노래에 거역할 수 없는 성력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고급 마족의 포효 속에도 그와 비슷한 사악한 마력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미천한 인간들아. 몬스터들에게 편하게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제 편히 죽게 하진 않겠다. 지옥에서 모두 나의 노예로 삼아 영.원.한. 고통을 주마." 듀레한을 중심으로 모래폭풍이 거세게 몰아치더니 붉은색 입체 마법진 12개가 원형 모양으로 그를 둘러쌓다. 마법진이 회전하기 시작하며 그 위의 글씨들이 실타레에서 풀리듯 마법진을 빠져 나와 듀레한의 몸을 타고 회전하자 오크의 몸이 산산히 분해되며 피보라를 휘날렸다. 푸른색 오크의 피와 살점들, 그리고 새빨간 소환마법문자가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피의 폭풍은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끔찍한 피보라와 불길한 마력에 압도되어 아름답다는 생각은 감히 할 수 없었다. 오크의 육체가 분해된 것은 본체의 소환때문이지, 영체가 상처 입었기 때문은 아니다. 피보라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하자 모두들 주저 않고 싶을 만큼 공포에 질렸다. 마법계의 마법지식으로는 본적조차 없는 고도의 소환마법이 시행되자 마법을 모르는 칼잡이들까지도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옥의 저편에 있던 레서데몬의 본체가 소환되기 시작했다. "꾸에에엑" 과연 지옥의 밑바닥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포효와 함께 권천사에 필적하는 마력체가 소환되면서 마나의 폭풍이 대기를 뒤흔들었다. "크하하핫 공포 속에서 죽어가라! 여기 있는 놈들 모두 가장 끔찍한 지옥으로 이끌어 주마." 강력한 브레스를 뿜는 레서데몬의 구강구조는 보통의 생물체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언어를 구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지는 마성의 소리는 지친 인간들을 공포 속에 몰아 넣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3.5m 에 이르는 키, 마족의 상징인 우람한 두 개의 뿔, 피막의 날개, 검붉은 근육질의 몸과 참마도 만한 칼을 들고 인간들을 내려다 보는 그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대.... 대체 저게 무슨 괴물이지? 저런 생물체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없어!!" 창세신의 신성한 실험장인 마법계에 마족 따위가 올 수 있었을 리도 없고 올 이이유도 없었으니 병사들이 데몬이라는 사악한 종족을 보았을 리도 없다. 사막에서 수많은 몬스터와 싸워 봤지만, 저렇게 위압스러운 녀석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공포가 전염병처럼 번저 나가며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저....저게 대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리터마인이나 뮬테인조차도 검을 잡은 두 손이 떨려 왔다. 지치지 않은 상태라면 몰라도, 지금같이 서있는 것이 고작인 몸으로 저런 무시무시한 괴물과 싸우려니 정신이 다 아찔해 졌다. 긴장한 병사들이 각자의 병장기를 자신의 목숨줄인양 움켜쥐고 괴물을 향한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허풍떨지 마라. 고작 레서데몬 주제에 소드마스터 둘, 아니 셋을 상대로 이길 것 같으냐?" 긴장된 순간, 모래폭풍소리를 제외하고는 정적이 감도는 전장터에 비웃음을 잔뜩 품은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 도발을 얌전히 참아 넘길 만큼 냉정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듀레한이 아니다. "크아아악 비천한 악마의 먹이 주제에 감히 데몬인 나에게 덤비겠다는 것이냐?" 마기를 한껏 머금은 포효에 병사들 중에는 눈이나 코의 실핏줄이 터져서 피가 나오는 이들도 생길 정도였다. 듀레한이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하얀색 터번을 얼굴에 두르고, 가느다란 흑검을 든 자그마한 체구의 전사가 보였다. 갑옷을 입지 않아서 실제보다 더 작아 보였지만, 그 목소리는 모래바람과 레서데몬 때문에 생긴 마나의 폭풍 속에서도 시원시원하게 잘 들렸다. 마법계에서 데몬을 알고 있는 자가 있을 리 없다. 그런데도 듀레한의 모습만 보고도 그 정체를 알고 있는 자라면 당연히 경계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휘하던 군대가 패퇴하고, 장난감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는 인간에게 비웃음까지 당하자 듀레한은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그런 점을 간과해 버렸다. 이미 자신이 살 방법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기에 모든 희망은 단념해 버리고, 레서데몬인 자신을 이지경까지 몰아붙인 이 인간들을 모두 죽일 생각밖에 없는 것이다. 패배한 후 흄에게 돌아가봐야 죽거나 의지를 빼앗긴 노예가 될 것이고, 오크의 몸으로 끝까지 반항하다가 오크의 육체가 파괴되어 지옥으로 강제 송환되어도 다른 데몬이나 데빌에게 갈기갈기 찢겨져 죽을 것이다. 그럴 바에야 본체를 소환하여 이 인간들을 모두 죽여 원수라도 갚고 흄에게 죽는 편이 낳을 것이다. 이곳의 모든 인간병사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모두 해치우기만 한다면, 어쩌면 흄이 살려 줄지도 모르기 때문에 듀레한에게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꾸에에에에엑" 다시 한번 긴 포효가 사막의 건조한 공기를 찢어발기며 레서대몬은 이미 유신을 향해 그 거대하고 불길한 몸체를 돌진시키고 있었다. . . . . . . 으윽.....느....늦고야 말았습니다.....ㅜ.ㅡ 이틀이나 올리지 않았는데도 찾아 주시는 님이 많아서 감격 또 감격...ㅜ_ㅜ 그럼 오늘은 하루종일 열심히 써서 내일이 오기 전에 연참을 하도록 해 볼께엽^^ 이제 진정한 새해가 밝았군요.^^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엽 부우~~~ 우~~ 자 되세요^0^ 스피드나 파워가 메탈퍼펫 이상인 레서데몬의 일격을 그대로 받았다가는 유신이야 어떨지 몰라도 그가 타고 있는 말은 견딜 수 없다. 아마 일격도 받지 못하고 주저앉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유신은 말 위에서 뛰어 올라 레서 대몬에게 몸을 날렸다. 가소롭다는 듯 거대한 검을 휘두르자 유신은 그 힘에 거스르지 않고 반탄력을 이용해 몸을 날려 멀리 거리를 벌였다. 만약 레서데몬이 본진에 돌진해 버린다면 피해가 얼마나 커질지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멀리 유인해 낸 것이다. 역시나 유신의 생각처럼 듀레한은 시뻘건 눈에 불똥을 툭툭 떨어뜨리며 그에게 돌진해 왔다. "매직 미사일" 6서클 후반의 마법까지도 별 무리 없이 사용하는 레서데몬 쯤 되면 매직미사일 같은 하급의 마법쯤은 시동어 만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레서데몬이 돌격해 들어가면서 검을 크게 휘두르자 검풍에 휘말린 모래폭풍 때문에 유신의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듀레한의 시야도 가려졌지만, 녹색으로 밝게 빛나는 매직미사일은 모래폭풍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며 목표물에게로 길 안내를 해줄 것이다. 그리고 매직미사일이 날아가는 괴적의 끝은 당연히 유신이다. 레서데몬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매직미사일과 비슷한 속도로 매직미사일이 향하는 곳으로 달려들었다. "크하핫 죽어라!! 벌레같은 놈아!!" 유신은 첨예를 기울여 그 공격을 흘릴 생각이었지만, 사막의 모래에 발이 빠져서 움직임이 여의치 않았다. 비록 모래폭풍에 시야가 가려 졌다고는 해도, 레서대몬이 내뿜고 있는 마나와 코어를 느끼지 못할 유신이 아니었기에 충분히 대비를 하고 있었지만, 매직미사일 뒤에 날아오는 듀레한의 파워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위력적이었다. 간신히 막아내기는 했지만, 5~6m를 날아가 모래바닥을 굴렀다. 터번을 둘러썼음에도 눈, 코, 입 할 것 없이 온통 모래가 들어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법계에 온 후로 바닥 구를 일이 많다고 투덜거리며 혹시 있을지 모를 2차 공격에 대비하여 몸을 몇 바퀴 더 굴려 그 자리를 멀찍이 벗어난 후 튕기듯 몸을 날려 자세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듀레한의 2차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확실히 승기를 잡은 지금 밀어붙이지 않는 것이 이상하여 더욱 긴장이 되었지만, 곳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리터마인과 뮬테인이 저 괴물을 상대로 잘 싸워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신은 그들과 합세하여 듀레한을 밀어붙일까 하다가 방향을 바꿔 궁수부대쪽으로 달려가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다시 두 소드마스터를 도와 듀레한과 싸우기 시작했다. 듀레한은 답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하나씩이라면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겠지만, 셋이나 덤벼대니 도통 좋은 찬스를 잡을 수 없었다. 몸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계속 생기는 데다가 검기에 입은 상처는 회복속도도 상당히 느렸기 때문에 체력이 점점 깎여 가는 것이 느껴졌다. 게다가 나중에 나타난 조그마한 인간이 가세하자 싸움은 더욱 힘들어 졌다. 불길한 것은 자신을 도발했던 저 꼬마가 아직 제 실력을 다 발휘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게냐? 설마 내가 힘이 떨어지면 사로 잡을 생각을 하는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듀레한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그러자 지금껏 흥분해서 눈에 보이지 않던 상황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 왔다. '가만....저놈은 그러고 보니 아까 내가 레서데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잖아? 마법계에서 데몬의 존재를 아는 자는 위시마스터를 제외하고는 없는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레서데몬의 머리를 퍼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흄에게 경고 받은 한 남자의 이름. 레서데몬 수십마리가 달려들어도 이길 수 없는 마룡을 해치워 버린 인간. "케에에엑 유신 더 실버스타!!!" 평범한 인간이 듣기에는 단순한 괴물의 포효로 들렸지만, 유신은 저 녀석이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유신의 정체를 눈치챈 순간 듀레한은 크게 날개를 퍼덕여 모래폭풍을 만들고는 하늘로 날아 올랐다. 듀레한이 마법어를 중얼거리자 그를 중심으로 거대한 마나의 기류가 생겼다. 대형의 공격 마법을 쓰려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저 정도의 기운이라면 상당한 규모의 범위공격 마법일 것인데...... "지금이다!! 궁수대 화살 발사!!" 마법이 완성되기 직전, 유신의 목소리가 마나의 폭풍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수백개의 화살이 레서데몬이 주문을 외우는 틈에 하늘을 빽빽이 메우며 날아들었다. 듀레한은 마력으로 보호를 받는 자신의 단단한 피부를 믿고 무시하려 하였으나 화살에 밖히자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꾸에에에에에엑" 마력방어가 전혀 통하지 않고 화살은 그대로 듀레한의 몸에 하나 하나 밖혀 들어갔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정화 마법이 걸린 화살인가?" . . . . . . . 설에 푹 쉬고 연참 했습니다....ㅡ_ㅡv 그래봐야 2연참이지만 ...... 장하다 suckjins...T^T 그럼 앞으로도 B&M많이 사랑해 주시고엽~~ 모두 새로운 기분으로 새해 시작하세요오~~ 레서데몬과 궁병간의 거리도 상당하였기 때문에빛나간 화살이 대부분이었고, 마력방어가 통하지 않는다고 해도, 피부가 워낙 단단하여 레서데몬에게 상처를 주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2파, 3파 계속 날아오는 수백 개의 화살세례에 레서데몬도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유신이 속해있던 부대에게 도움을 받은 백마법사들이 마지막 마나까지 짜내어 정화 마법을 걸어 둔 화살덕분에 듀레한은 천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잠시 전쟁터를 이탈했던 그가 궁수부대에게 부탁했던 것이 이것이었다. 땅에 처박힌 듀레한은 더 이상 반항할 기운이 없었는지 두세 번 정도 요동친 뒤 조용해 졌다. 그런 듀레한을 향해 비스듬히 검을 옆으로 내린 유신이 다가 갔다. 화살꽂이가 되어 모래바닥을 구르고 있는 데몬의 모습은 처참했다. "레서데몬 씩이나 되는 녀석이 마법계까지 와서 인간에게 사냥 당하다니......네놈도 참 한심한 인생이구나." 유신은 둘의 대화를 다른 사람들이 듣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나직하게 물질계의 언어로 말했지만, 원수가 잘되는 꼴을 얌전히 볼 리가 없는 듀레한은 마법계의 언어로 대답했다. "흥, 조롱하는 것이냐? 어째서 아리엘을 지켜야 할 네 녀석이 여기에 와 있는 것이냐?" "그분의 이름을 더러운 입에 함부로 올리지 마라. 건방진 놈. 그런 것까진 네놈이 알 필요가 없겠지. 그럼 다음 순서를 진행해 보자." 유신은 첨예를 세워 듀레한의 머리를 겨냥했다. "크크크큭..... 나를 죽일 셈인가? 하지만 내게서 묻고 싶은 것이 많을 것인데......" 어차피 흄에게 가건, 아니면 지옥으로 송환되건 살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듀레한은 유신의 편에 붙어서 이 사태를 모면할만한 시간을 벌 셈이었다. "악마가 하는 말에 진실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희들이 거짓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 유신이 살려줄 것 같지 않자 듀레한은 당황했다. "자...잠깐 설마 용신화랑씩이나 되는 녀석이 무저항인 나를 죽이겠다는 것이냐? 난 네놈들에게 쓸만한 정보도 많이 알고 있다고!!" 듀레한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도 유신은 별 동요 없이 나직하게 그에게 죽음의 선고를 내렸다. "그것이 싫은 거다. 멍청한 놈. 물질계의 지식으로 마법계를 어지럽히지 말아라." 첨예가 푸른 불꽃을 피워 내더니 듀레한의 머릿속으로 절반쯤 파고들었다. "키에에에엑" 듀레한이 죽어 가면서 지른 마지막 괴성에 병사들은 귀를 틀어막으며 주저 앉아버렸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유신의 첨예가 황금빛을 뿜는 것을 본 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소드마스터인 리터마인 자작과 뮬테인 백작은 첨예가 황금빛을 뿜는 순간 듀레한의 머리가 폭발해 버리며 시커먼 무엇인가가 서서히 흩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푸른색의 검기가 날카로움과 힘을 더하는 것이라면, 붉은색의 검기는 거기에 폭발하는 힘까지 더하여 준다. 하지만 천상신검의 경지에 이르면, 검기를 사용하기에 따라 주변의 마나를 강제로 무력화시키거나, 사악한 마기를 정화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가장 정순한 코어를 사용하는 검기인 만큼, 사악한 마기와 정면으로 대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 코어의 소비가 심하고 다루기가 어렵기 때문에 천하의 유신도 지금의 몸 상태로는 길어야 2분 정도 쓰는 것이 고작이다. 리터마인 자작과의 비무에서도 막판에 천상신검을 남발했다가 몇 일 동안 알아 누워야 했을 만큼 고생해야 했다. 그런 절정의 검기인 천상신검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첨예가 두개골 속을 헤집어 놓는다면 레서데빌이 아니라 마신왕급의 데몬이라 해도 견뎌 낼 리가 없다. 서서히 사악한 기운이 정화되어 가면서 레서데빌의 형체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에는 푸석푸석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몸체를 이루고 있던 파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시커먼 재로 화하였다. "이런..... 유신경, 지능이 있는 마물 같던데 어째서 죽인 것이요? 그를 신문해 본다면 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소?" 예상했던 질문이라 유신은 별로 당황하지 않고 대답 할 수 있었다. "저놈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자칫 거짓 정보를 듣고 사분오열 하는 것보다는 죽여 없애는 것이 화근을 줄이는 일이에요. 그보다 어서 전열을 재정비하도록 하지요. 병사들이 다들 너무 지쳐 있으니 무엇보다 휴식이 필요합니다." 석연치 않았지만 그와 그가 데리고 온 두 젊은 기사 덕분에 별 피해 없이 마법병단을 구할 수 있었으니 함부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신시아와 세이람은 아직 전쟁터에서 난전을 벌이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들도 검기를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준대형의 몬스터를 잡는데는 큰 도움이 되었다. 맨스콜피온 같이 일반 병사들의 창칼이 들어가지 않는 녀석들도 신시아나 세이람의 검기 정도면 한두 번 후려치는 것만으로 껍질을 깨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마법병단을 습격한 녀석들이 소수 정예의 고급 몬스터가 아닌 다수의 오크들이었다면, 피해는 굉장히 컷을 것이다. 소드마스터가 아무리 잘 싸운다고 해도, 칼을 한번 휘둘러서 죽일 수 있는 숫자는 한 마리, 많아야 두세 마리기 때문이다. 오크 수십마리가 달라붙어 시간을 끄는 동안 나머지들이 마법병단을 쓸어버리면 마법병단은 파멸된다. . . . . . 연재 속도가 떨어지고 있습니다...ㅜ_ㅜ 개학이 다가오고... 슬럼프라면 슬럼프 일까요.... 그래도 선호 찍어주시는 분들도 있고, 평가수 높여 주시는 분들도 있고...ㅜ_ㅜ 무엇보다 제 글을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늦지 않도록 열심히 할께요...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마법사란 한번 줄어들면 보충 받기가 정말 어려운 병력이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가장 아껴야 하는 귀중한 전력이다. 제노비스 기사단이 이정도로 강력한 마물들을 쉽게 몰아 붙여 왔던 것도 마법병단이 그만큼 보조를 잘 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나가 고갈된 마법사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덩이 밖에 안되기 때문에, 만약 이번 전투에서 마법병단을 모두 잃었다면 마법사들이 마나를 모을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고 너무 빨리 몰아 붙인 뮬테인 백작에게 그 책임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간신히 이번 전투는 승리하였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휴식이 절실할 때라는 것을 모를 만큼 뮬테인 백작이 바보는 아니었다. 승리하였다고는 해도, 기사단이나 병사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전투가 있었던 곳을 이탈하여 가장 가까운 오아시스가 있는 곳까지 무려 10km 정도나 후퇴하여야 했다. 그곳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다시 짰지만, 지형을 살릴 이점이라곤 전혀 없는 사막이라 방어 선이라는 개념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리터마인 자작 늦지 않고 잘 와주었소. 설마 토벌대가 밀릴 만큼 마물들의 저항이 거셀 줄은 몰랐소. 그런데 뒤의 분들은...." 뮬테인 백작은 잠시 세라피를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건 정말 잠시였을 뿐이고 시선은 유신에게 고정되었다. 그가 몬스터들을 이끌던 우두머리를 해치웠을 때 보여 주었던 기술은 전 대륙 최강이라 자부하고 있었던 자신도 흉내낼 수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쪽이 요즘 드래곤슬레이어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유신경입니다. 저쪽 둘은 하누스의 기사분들이고..... 셋 모두 소드마스터입니다." 리터마인의 소개에 날카로운 뮬테인의 눈매가 더욱 날카로워 졌다. 아직 20살도 되어 보이지 않는 젊은이가 소드마스터라니.... 유신도 절대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은 아닌지라 사실 겉보기로는 신시아나 세이람과 같은 고만고만한 나이 또래로 보였다. "만나게 돼서 영광이요. 드래곤슬레이어라니.... 반쯤은 믿지 않았지만 직접 보니 과연 명불허전이오." 드래곤슬레이어란 말이 거론될 때마다 유신은 무척 당혹스러웠지만 벌써 온 대륙이 다 알 만큼 유명해져 버렸기에 할 수 없었다. 형식적인 간단한 인사가 오가고 작전 회의가 시작되었다. 병사에 대한 지휘권이 없는 유신이 낄 자리가 아니었지만, 소드마스터를 박대할 나라는 적어도 라일로스 대륙에는 없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로 유능한 기사가 모자란 지금, 유신은 그야말로 하늘이 주신 선물이었다. 어려 보이는 외모 때문에 병사들이나 다른 기사들이 반발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듀레한과의 전투에서 보여준 발군의 전투력이나 부대운용 능력을 봤으니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무작정 움직이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적의 규모를 파악해 놓고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일단 마법사들의 마나가 회복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회군하든, 아니면 진군하든 결정을 하는게 좋을 것 같소." 무모하게 서두른 덕분에 하마타면 부대 전체를 잃을 뻔한 뮬테인 백작은 아무래도 신중해 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신의 생각은 달랐다. "제가 나설 자리가 아니란 것은 알지만.... 의견을 내도 좋을까요?" "말해 보시오. 경은 어느 정도 저 마물들에 대해 아는 것 같으니 받아들일 수 있는 의견이라면 참고하는 게 옳지 안겠소?" "감사합니다. 우선 적들은 리더가 죽었으니 당분간 조직적인 활동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까의 그 괴물은 상당히 높은 지능을 가졌지만 매우 희귀한 것입니다." 사실 레서데몬은 몬스터가 아니라 지옥의 악마지만, 저들에게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는 유신은 적당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즉 저런 괴물이 몇 마리씩 이곳에 와 있지는 않다는 뜻이지요. 마물들이ㅡ 지휘체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이 적들에게 피해를 줄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또 이번처럼 포위되거나 양동작전에 당한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하지만 지금 기회를 놓치면 더욱 힘들어 집니다. 어떻게 해서든 적에 대한 자세한 정보 만이라도 얻어 두어야 앞으로의 전쟁에 승산이 있습니다." 한참 다음 작전에 대해 상의를 하고 있을 때 경계병중 하나가 멀리에서 인간으로 보이는 '것'이 주둔지 쪽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를 해 왔다. 사막인 만큼 평평한 모래 뿐이라 꽤 멀리 있는 물체도 보인다고는 해도 7~8km 쯤 떨어져 있으면 두발로 걷는다는 특징 정도로는 그게 인간인지, 아니면 인간으로 변장한 마물인지 알 수가 없다. 혹시 그들을 유인해 내거나 정탐을 위해 마물들이 보낸 스파이거나 함정일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전투 중에 낙오된 병사들은 몬스터들에게 잔인하게 뜯어 먹히는 것을 여러 번 봤기 때문에 낙오병이 살아 남을 가능성은 제로란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운 좋게 살아 남았다고 해도 개인에게 소지가 허락되는 소량의 물에 의지해, 모래바람 한번에 발자국이나 이동한 부대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는 최악의 여건인 사막에서 떨어져 버린 부대를 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는 병사는 없었다. 때문에 '저것'이 반겨줘야 할 낙오병이라고 도저히 생각 할 수가 없었다. 마법사를 시키면 간단히 알아 볼 수 있겠지만, 지금 마법사들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마나를 아껴야 하는 상태다. "제가 가보지요." . . . . . . 우헐.....연참 했습니다...늦었다고 너무 미워하지 마세여^^;; 그럼 또 열심히 쓰러 물러 갑니다..... 모두 좋은 주말 되시고엽^^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아무리 인간일 가능성이 적다고 해도, 혹시라도 살아남은 병사라면 절대 버릴 수 없다. 마물들이 득시글 거리는 곳을 탈것도 없이 걸어서 오고 있으니 모래 속에 움츠리고 있을 맨스콜피온이나 샌드웜에게 습격 받으면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유신은 조금 힘이 들고 귀찮더라도 마중을 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사막전의 경험이 없었던 예메른의 병사들은 그에 적합한 무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피로도도 훨씬 컸고, 계속된 전투로 체력적인 한계상황을 넘어 버린지 오래다. 기사들도 상태는 비슷했다. 뜨거운 사막에서 철제 갑옷을 입었으니 갑옷과 살이 맡다은 곳은 화상을 입었을 정도다. 그렇다고 육체적으로 훨씬 강력한 마물들과의 싸움에서 갑옷도 없이 싸울 수는 없었기에 억지로 갑옷을 입고 지금까지 간신히 버텨 온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갑옷도 입지 않았고, 체력도 별로 떨어지지 않았으며, 적의 함정이라 해도 빠져나올 수 있을만한 실력자는 자신밖에 없으니 유신이 나선 것이다. 신시아와 세이람은 처음으로 겪은 실전이 최악의 사막전이었으니 너무 지쳐서 배당된 막사에서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어.... 그럼 저도 같이 갈래요....." 엘프인 세라피도 풀한 포기 없는 메마른 사막에서는 상당히 힘이 들었지만, 유신이 간다는데 빠질 그녀가 아니다. 날씨가 더운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숲의 혜택을 받지 못하니 엘프가 힘들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다른 마법사들이나 병사들보다는 상태가 훨씬 좋았기 때문에 자기도 따라 가겠다고 우기는 것이다. 유신은 세라피를 떼어두고 갈까 생각했다가 전쟁터에서까지 그녀를 너무 싸고도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데려 가기로 했다. 엘프의 시력이면 1km 쯤의 거리에선 아무리 위장을 잘 해 놨다고 해도 마물인지 인간인지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의 함정이라고 해도 그 정도 거리에서 발견한다면 가벼운 세라피를 안고서도 주둔지까지 충분히 도망쳐 올 자신이 있었다. 유신과 세라피는 간단한 물과 음식을 조금 챙기고 터번과 망토를 두른 여행자 같은 차림으로 그 의문의 인물을 조사하기 위해 출발했다. 말을 타고 갈까 생각해 봤지만, 사막에서는 말도 그렇게 빠르지 않기 때문에 그냥 걸어서 가기로 했다. 말도 쉬어야 하고, 돌발사태가 벌어져도 사막의 모래에 발이 빠지지 않는 세라피나 유신이라면 충분히 달려서도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인물도 느린 속도기는 했지만, 주둔지 쪽으로 주욱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삼십분 정도 걸어가자 세라피의 눈에 그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때요 세라피? 위험할 것 같은가요?" "아니요. 겉으로 보기에는 틀림없이 인간 남자에요. 금발머리, 파란색 눈, 칼은 바스타드인 것 같고.... 갑옷은 입지 않았어요. 방패도 안보이고요." 유신은 1km 이상 떨어져 있는 사람의 눈동자 색깔까지 알아보는 엘프의 경의적인 시력에 다시 한번 탄복했다. 점점 더 거리가 가까워 질수록 세라피가 긴장하는지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느껴졌다. 하지만 몬스터가 숨어있는 기척도 느낄 수가 없었고, 바람의 정령도 아무런 위험을 알리지 않았다. 안전하다고 판단되자 유신은 만일을 위해 세라피를 조금 멀리 떨어져서 기다리게 하고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다가갈수록 묘하게 뭔가가 틀렸다. 마나의 기척도, 코어의 흐름도 눈앞의 사내가 보통의 인간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지만, 마물의 기운이나 사악한 느낌은 주지 안았다. 유신이 느끼는 미묘한 느낌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뭔가 익숙하지만 흔하지 않은 존재.....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요? 2년도 채 안되었지만.... 마법계에서 보니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요. 유신 더 실버스타 장군." 인사를 건넨 '존재'가 살짝 그의 기운을 비추자 유신은 그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설마 이 느낌은 유메네스? 골드드래곤 유메네스 프라임?" 순간 놀라울 정도로 청각이 좋은 세라피 생각이 나자 아차 하여 바라 봤지만 그녀는 멍하게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트랜스 상태에요. 설마 제가 엘프도 고려하지 않을 정도도 멍청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요?" 엘프를 고려하지 못한 멍청이가 된 유신은 발끈했지만, 유메네스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보자 그런 생각은 사라지고 말았다. 골드드래곤 유메네스 프라임. 4500살의 웜급에 이른 용으로 마법을 전문으로 사용하는 골드 일족 중에서도 발군의 마법실력을 자랑하는, 최강의 클레스에 들어가던 용이었다. 용전기가 된 후 그의 화랑이었던 카이와 함께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마신왕급의 데빌도 수없이 쓰러뜨렸을 정도였다. 아마도 유메네스가 에이션트급에 이를 나이가 된다면 용황급에 이르는 파워를 보여 줄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용이다. 무엇보다도 인간들이 유메네스를 좋아한 이유는 용족 답지 않게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싸움보다는 마법연구나 사색을 즐겼기 때문이다. 다른 용들간의 다툼을 중재해주는 역할도 그가 맡았고, 인간들과의 의견조율도 그의 몫이었다. 즉 말썽부리지 않는 착한 아이였으며 학급의 반장간은 존재였다. 그래서 성계대전이 끝나고 유메네스가 마법계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아쉬워했다. 특히 용족들과 교류를 담당하던 기관에선 그가 떠난다는 말에 발광하며 말렸을 정도로 '말이 통하는' 용이 유네메스였다. 카론이 사고를 치면 유메네스나 유신이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유신과는 서로를 깊이 동정하는 사이였으며, 거기서 생긴 끈끈한 연대감으로 사이도 매우 좋았다. "하하 정말 반갑군요. 유네메스. 그런데 여기는 왠일이지요? 마법연구하거나 푹 잘거라며 마법계로 떠났잖아요? 이종족 연합외교부(용족을 포함한 시라스인이나 크놈인같은 타종족과의 문제 발생시 그 해결을 하는 부서)의장이 유메네스가 떠난다고 하니까 얼마나 길길이 날뛰었는 줄 알아요? 지금도 고생하고 있을 모습이 선하지만...." "뭐.... 저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요. 여기서의 제 이름은 하이몬입니다. 인간들의 지휘로는 백작을 하고 있지요." 잠시 하이몬이라는 이름을 더듬어 보던 유신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우엑!! 대륙에서 5명밖에 없었다는 소드마스터 중에 한 명이 유네메스였어요? 하...하지만 유메네스가 마법계로 온 것은 2년 정도 밖에 안 되었잖아요? 하이몬이란 남자가 소드마스터로 유명해 진 것은 훨씬 오래전일텐데...." "유명한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그것도 어느 정도 강력한 무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유명한 사람으로....." 유메네스의 말에 유신이 입을 딱 벌렸다. "그.... 그럼 진짜 하이몬 백작은 어떻게 되었지요?" 유신의 질문에 유메네스의 싱글싱글 웃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가 다시 이채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변했다. "흠.... 마법계로 오더니 유신도 조금 변한 것 같군요. 나쁜 현상인지 좋은 현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니면 원래 그렇게 무른 성격이었던가요?" 차분하고 고요한 눈빛, 서글서글한 성격, 용족답지 않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두뇌의 소유자. 하지만 유메네스는 틀림없는 용족이다. 그것도 최강 클레스의 골드드래곤으로 실버스타군의 기전부대에 편성되어 언제나 가장 치열한 전투의 선봉에서 수많은 마족과 마물들을 죽여 없애온 역전의 용사다. 즉 그만큼 인정사정 없으며 목적을 위해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얼마든지 잔인해 질 수 있다는 뜻이다. "죽였다는 뜻이군..... 유메네스는 용족이었지....." "2년새에 정말 많이 변했군요. 그전이라면 절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인데.....어쨌든 저도 본질은 용입니다. 필요하다면 인간 한둘쯤은 죽일 수 있지요. 그건 유신도 마찬가진 걸로 알고 있는데요.... 솔직히 당신정도 되는 분이 겨우 2년 사이에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변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유메네스는 다시 평소의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돌아 왔지만 유신은 그가 방금 전처럼 따듯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여기서는....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사람만 지켜도 충분하니까.... 잠시만 한눈팔아도 몇 만 명씩 죽어 나가는 전쟁은 없으니까....." 마치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기라도 하겠다는 듯 천천히 중얼거리며 유신이 말했다. "그보다 유신은 지금 '친구'를 사귀려고 하는 거 같군요. 자신의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친구를....." 유메네스의 말에 유신의 표정은 더욱 혼란스러워 졌다. "하지만 그건 틀려요. 진실한 친구란 지켜주어야 하는 자가 아닌 대등한 존재. 물리적으로 지켜 주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하...하지만 인간이 모두 용족처럼 강한 것은 아니야. 지켜줘야 할 존재들도 있다고.... 그런 것을...." "물론 든 인간이 친구가 되기 위해선 전투력이 높아야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인간인 만큼 뭔가 하나라도 강한 구석이 있을 겁니다. 그것을 살리느냐 못 살리느냐가 그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지요." "그...그런....." "그보다 친구를 원하는 것이라면 나랑 친구가 되지 않을래요?" "뭐? 하지만 나는 유메네스의 친구 아니였어요?" 유신의 간단한 대답에 유메네스의 표정이 정말 놀랐다는 듯 또 한번 크게 달라졌다. "하핫 그렇군요. 어쩌면 벽을 쌓고 있었던건 저 혼자였을지도 모르겠군요.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 우리 둘은 친구다." 유메네스가 시원하게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자 유신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 손을 잡았다. "하핫 친구라!! 정말 기분 좋군. 이렇게 마음것 웃어 본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카이와 만났을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아." 한동안 배를 잡고 웃던 유메네스는 유신과 어깨동무를 하고 주둔지 쪽으로 걸어갔다. "어...저기 그런데 세라피의 트랜스는 언제 풀어 줄 거야?" "아하핫 우선 둘이 말부터 맏춰 놔야지. 주둔지에 가기 전에 먼저 알아 두어야 할 일도 있고..." 유메네스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한참을 더 웃었고, 그런 둘의 뒤를 세라피가 시체처럼 따라서 걸어갔다. 유신과 세라피가 '인간으로 보이는 물체'를 확인하러 간 후 뮬테인과 리터마인은 초조한 마음으로 감시용 망루 위에서 이를 감시하고 있었다. 오아시스라고는 해도 야자수 몇 그루 있는 것이 전부라 급조하여 세운 망루는 둘이 올라가서 서 있기에 버거웠고 관측하기 좋은 것도 아니었다. 다행이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라 그런 허술한 망루 정도로도 쓸모가 있었다. 둘 다 귀족이라는 체면쯤이야 개나 줘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아무 곳에나 쓰러져서 자고 싶었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 망루에 선 것은 유신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적의 낌새가 있나 주위를 살피는 것도 일반 병사들보다는 소드마스터인 둘이 훨씬 꼼꼼히 잘 해낼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뛰어난 소드마스터와 엘프 정령사를 이런 시시한 정찰 임무에서 잃는다면 가뜩이나 저하된 사기가 완전히 밑바닥까지 곤두박질 칠 것은 뻔한 일이고, 다음의 전투는 더더욱 힘들어 질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행이도 유신과 엘리시엘은 목표와 별 문제 없이 조우하였고, 몇 마디를 나눈 뒤에 손을 흔들어 안전을 표한 뒤 주둔지 쪽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안심이 된 두 소드마스터는 지휘관 용으로 만들어진 막사에 가서 잠시라도 쉴 수 있게 되었다.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마을이 있었는지, 여기저기에는 꽤 커다랬을법한 마을의 흔적이 있었다. 몬스터의 습격으로 파괴되어버린 마을의 모습은 을씨년스러웠지만, 숙영지를 만들기는 오히려 더 편했다. 돌담이나 무너진 집들이 있어서 맨땅에 숙영지를 만드는 것보다는 수월했다. 돌담의 끄트머리에 못이나 고정할 것을 만들어 두고 천막을 걸쳐두거나, 지붕이 무너진 집의 지붕을 천막으로 대신 덮어 주기만 해도 좁고 더운 텐트를 치는 것보다 훨씬 넓고 시원한 쉴 자리를 마련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에서 마음 편히 쉰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모두들 워낙 지쳐서 이곳에 임시로 머물고는 있지만, 보급부대까지 합치면 일만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 있으니, 제대로 이곳을 요새화 하여 전진기지로 삼거나, 아니면 방어하거나 공격하기에 더 유리한 곳으로 이동하여 진지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사막으로 전진하면 전진할수록 보급물자의 소비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고, 보급 받기는 더더욱 힘들어 진다. 모래사막에서는 마차를 이용할 수도 없기 때문에 모래 썰매를 이용한다고는 해도, 군수물자를 이동시키기는 쉽지 않다. 즉 장기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몇 번의 전투에서 보급품의 상당수를 잃은 뮬테인은 때맞춰 도착한 리터마인의 원군 덕분에 약간의 여유가 생기기는 했지만, 돌아갈 때 사용할 식량까지 감안한다면, 진격할 수 있는 여유분의 보급품은 아무리 많게 잡아도 일주일치가 고작이다. 적의 주력을 한번 격파하였다고는 해도, 만약 이대로 물러난다면, 금세 마물들의 수는 지금보다 더욱 불어 날 것이다. 완전히 뿌리를 뽑지 못하면 지금껏 피해를 입으며 진격해 온 일이 전부 허사가 되고 만다. '하다 못해 저하된 사기만이라도 끌어 올려 진다면.....' 뮬테인은 답답한 마음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마치 그의 한숨소리에 호응하여 신이 축복을 내려준 것처럼 병사들의 함성 소리가 들린 것이다. 막사 치는 것도 귀찮아 움직이려고 하지 않던 녀석들이 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 좋아하는 걸까? 뮬테인과 리터마인은 기쁨 반, 의아함 반의 심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에는 환호하는 병사들의 너머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두사람이 보였다. 유신과 죽은 줄 알았던 하이몬 백작. 그리고 그 둘의 검은 저 높은 하늘을 향한 채 하늘을 찢어 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타오르는 새빨간 검기와 찬란하게 불붙는 황금색의 검기를 뿜어 올리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6~7m 를 솟아올라 마치 쌍용이 승천하며 서로를 애무하는 듯한 모습으로 지친 병사들의 가슴을 뜨겁게 타오르게 만들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서 절대로 승리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새로이 다지게 만들어 주었다. 잠시 얼빠져서 병사들과 함께 바라보던 리터마인과 뮬테인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둘이 보기에는 저들이 보여주고 있는 검기는 결코 코어를 주입하여 만든 진짜 검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런 정도 위력의 검기를 내뿜으며 저렇게나 천천히 걸어온다면, 드래곤정도의 코어를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 금세 코어가 전부 고갈되어 미라처럼 바짝 말라비틀어진 채로 죽거나, 몸 안의 코어스트림이 엉망으로 엉켜서 폐인이 될 것이다. "세라피라는 엘프 아가씨가 환영 마법을 걸어 준 것일까? 하지만 정말 고마운 일이군. 이제 병사들의 사기는 다시 올라갔으니 제일 큰 걱정거리가 하나 줄었어....." 뮬테인이 감탄하여 리터마인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핫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 둘에게 저런 센스가 있을 줄은 몰랐군요." 두 소드마스터는 다른 병사들이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작게 웃었다. 유신과 하이몬의 작지만 큰 의미를 가진 배려가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와아아아" 병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유신과 하이몬이 도착하자 뮬테인 백작이 병사들 틈을 헤치고 다가가 둘을 반겼다. 뮬테인은 가볍게 유신에게 목레를 하여 인사한 뒤, 하이몬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걱정 많이 했네. 자네를 구하러 가지 못해서 정말 미안허이. 하지만 그 많은 마물들을 뚫고 살아서 돌아 오다니..... 자네의 친구란 것이 정말 자랑스럽군......" 뮬테인의 주름진 눈이 벌겋게 변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는지 그는 하이몬을 좀 쉬게 해 주자는 핑계를 대며 주위의 병사들을 물리쳤다. 정말 오랜만에 이 삭막한 사막에 인간들의 웃음소리가 멀리 멀리 울려 퍼졌다. 작전 지휘용의 천막안은 지금 하이몬이 가지고 온 소식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대대장급 이상의 고급장교만 작전 회의를 위해 소집시켰는데도 30명 이상이었기 때문에 몹시 덥고 짜증이 났다. 하지만 하이몬이 구해온 정보는 이런 더위와 짜증을 묻어버릴 만큼 신선한 것이었다. ".......여기부터 대략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몬스터들을 조종하는 마녀의 소굴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놈들은 어떤 특별한 장치를 사용하여 몬스터의 수를 마구 늘리고 있더군요. 그 시설만 때려부순다면 아마도 지금과 같은 몬스터의 이상증가는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사막화의 확산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더군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공격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적 병력은 대략 얼마나 됩니까?" "오크들의 수가 3000 정도였습니다. 문제는 맨스콜피온이나 오우거 같은 준대형 몬스터들이지요. 우리는 보급부대 까지 전부 전투원으로 돌린다고 하여도 8000정도 밖에 없으니 빠듯합니다." 오크들이야 문제가 아니지만, 준대형 몬스터 하나를 잡기 위해선 병사들의 희생이 너무 크다. 회의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소드마스터가 무려 다섯이나 있습니다." 리터마인이 자랑스럽다는 듯 말하자 다른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다섯.... 이라고요? 유신경이야 알고 있지만 나머지 둘은 누구입니까?" "유신경의 제자 둘도 소드마스터 입니다. 하이몬 백작님이나 뮬테인 백작님처럼 절정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병사들이 조금만 지원을 해 주면 맨스콜피온 정도는 검기를 실은 칼질 한두 번에 없애 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소드마스터를 적재 적소에 배치하였는가가 승부의 관건이 되겠군요." 강력한 준대형의 몬스터를 상대로는 소드마스터가 강력하지만, 오크나 놈 같은 소형 몬스터의 물량전에는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소드마스터를 흩어 놓기도 애매한 것이 듀레한 같은 상식을 초월한 강적이 상대적으로 약한 신시아와 세이람부터 하나 하나 죽여 나간다면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는 마녀라고 하지 않았는가? 마녀라면 당연히 마법을 쓸 것이고, 전쟁터의 난전에 섞여 있다간 아무리 날고기는 소드마스터라도 범위 마법 한방에 갈 수도 있다. 결국 모자란 병력을 가지고 작전을 짜려니 힘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이몬 백작은 적들에 대해 어떻게 그런 세세한 것까지 정찰하고 올 수가 있었소?" "하핫 운이 좋았습니다. 그 마녀가 비젼마법으로 제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검기를 쓰는 것을 보고 사로잡으라고 한 모양이에요. 덕분에 그 마녀한테 끌려가 몇 가지 고문을 당했지만, 결국에는 탈출 할 수 있었지요." 당연히 하이몬의 이 말은 거짓말이다. 그가 후미를 맡았던 부대가 따라 잡히자 일부러 낙마한 유메네스는, 그 순간부터 인간의 군대에 더 이상의 기대를 갖지 않았다. 그보다는 혼자서 적의 소굴까지 잠입하여 주력병력을 깨 부실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부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는 몬스터들과 비슷하게 싸워 주다가, 부대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곳의 몬스터들을 모두 도륙해 버렸다. 그리고 몬스터중 하나로 폴리모프하여 기다렸다. 잠시 후, 죽은 척 하고 모래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웅크리고 있던 오크와 놈들이 슬슬 일어나 달아나기 시작하자 그 녀석들과 합류하여 그들의 본거지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메네스는 그 마녀를 만났다. 대 마녀 제노비아. 그녀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그리고 진정한 종족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는 4500살이나 먹은 골드드래곤 유메네스조차도 모른다. 그녀에 대한 유명한 일화 중 하나가 예메른의 건국 당시 북쪽 해안가로 자주 노략질을 하러 오던 시서펜트 무리를 일소에 날려버렸던 것이다. 시서펜트들은 드래곤처럼 마법을 쓰지는 못하지만, 단순한 완력은 드래곤 정도 되는 바다의 폭군이다. 인간정도의 지능이 있고, 흉폭하기는 오우거 이상이며 집단 행동을 할 때가 많기 때문에 그들에게 한번 찍힌 바닷가는 그야말로 초토화된다. 덩치가 덩치인 만큼 먹는 양이 엄청나기 때문에 먹을 것이 별로 없는 해안가에는 자주 나타나지 않지만, 가끔 인간의 어촌을 습격하면 꽤나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영리한 괴물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건국 초, 아직 나라의 기틀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도 않고, 이리나 평원의 오크들과 싸우는 것도 벅찼던 예메른에게 시서펜트의 공세는 사형선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직 이리나 평원에서 제대로 곡식을 수확하지도 못하고 있을 시점에서 어업까지 막혀 버리자 자칫 굶어 죽게 생긴 것이다. 그때 홀연 나타난 한 여자 마법사가 그 시서펜스들을 몰아 내었다. 그녀는 시서펜트들이 육지에 올라와 날뛰고 있을 때 시서펜트의 몸체에 마찰계수를 0으로 만드는 그리드마법을 시전하여 시서펜트가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찰력이 있어야 무엇인가를 집거나 반동을 주어 앞으로 나갈 수가 있는데,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마법을 쓸 수 없는 시서펜트로서는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어떠한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기만 했다. 그러자 인간들까지 가세하여 우물쭈물하는 시서펜트의 몸 위로 수많은 그물을 뿌리고, 거대한 구덩이까지 파서 마침내 시서펜트를 구덩이 속으로 빠뜨리는데 성공했다. 일주일쯤 지나자 아무런 수분도 공급받지 못하고 서서히 말라죽어 가던 시서펜트는 마침내 항복하였고, 그녀의 노예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그 외에도 예메른에 여러 가지 도움을 주어서 성녀라고 추앙 받았지만, 제노비아는 끝까지 자신을 성녀라 부르지 못하게 하고, 마녀라고 불리길 원하였다. 덕분에 예메른에선 마녀를 천하게 여기지 않고 무척 잘 대해주는 전통이 생겼을 정도이다. 그런 제노비아가 적들의 총 대장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제노비아를 만난 유메네스는 그녀의 힘이 자신이 본체로 현신한다 해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제노비아도 유메네스가 한눈에 골드드레곤인 것을 알아 본 것 같았지만, 특별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즉 골드드래곤에게도 쫄지 않을 만큼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서로의 정체를 들어내지 않는 선에서 전력을 다해서 붙어보자.' 이것이 제노비아와 유메네스의 암묵적인 계약이었다. 그리고 유메네스는 그런 제노비아의 오랜 산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무관심하면서도 세련된 여유가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사막의 전투는 인간들이 관여 할 여지가 생긴 상식전인 수준의 것이 되었지만, 상식전인 전투를 이끌기에도 뮬테인 백작은 난감했다. 대 마녀 제노비아가 마물들의 손을 들어주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전후 사정도 모르면서 국가의 은인인 그녀에게 칼을 겨누기가 껄끄러운 것이다. 망설이던 그에게 판단을 내리게 해 준 것은 유신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노비아야 어떻든 마물들의 소굴은 때려부수어야 할겁니다. 더 이상 마물들이 늘어나 감당 할 수 없을 뿐더러 그런 상태에서 남쪽의 흄까지 밀고 들어온다면 대륙 전체가 위험에 빠집니다. 무언가 사정이 있다고 해도, 무력으로 그녀를 제압해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군요." 힘의 논리. 위험한 이야기지만 검과 마법이 난무하는 봉건제 사회체제 속에서 이 이상의 정의는 없다. 최소한의 정의라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단 강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 이를테면 뮬테인이나 리터마인이 저 강대한 제노비아를 힘으로 굴복시키고 다음 일을 상의하자는 식으로 말했다면 유메네스는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유신의 입에서 나왔고, 그는 그런 건방진 소리를 할 만한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 유메네스는 찬성했다. "저도 찬성하죠. 대 마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것은 아니라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마물들의 본거지를 일소하자는 의견은 찬성입니다." 사실 회의의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국가의 은인이건 뭐건 마물들을 규합하여 국경을 침범하였는데, 대체 거기서 무슨 대화가 필요하겠는가? 그런 도덕적인 문제를 고민할 시간이 있다면, 모자란 병력을 어떻게든 잘 쪼개서 최소한의 피해로 이길지를 고민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 본격적인 토벌전에 대비한 부대의 배치, 보급, 인원의 배치, 지형 등등 전쟁에 관한 회의가 시작되자, 병권이 없는 유신은 슬며시 막사를 나왔다. '제노비아라....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 역시 우주는 넓구나. 유메네스의 말처럼 그 마녀의 힘이 유메네스에 필적할 정도라면 군대를 동원한 물량전은 의미가 없을 터..... 하지만 그녀가 인간의 군대에 파괴적인 마법을 남발할 정도로 막나간다면 위시마스터들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고, 그 지경이 되면 유메네스도 본 실력을 다 발휘하겠지.' 그의 발걸음은 자연히 가장 강한 전력이 되어줄 마법병단이 쉬고 있을 곳으로 향했다. '대체 누굴까? 그정도의 실력자라면 성계대전에 어떠한 형태로든 참전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미스티에게 물어 보면 아려나? 흐흠....' 마법사들은 다들 나름의 방법으로 고갈된 마나를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마법진 안에 들어가 명상하고 있는 이들도 있고, 만사 제쳐두고 잠자고 있는 패들도 있었다. 통일성을 중시하는 군대라고는 해도 마법사처럼 개성이 강한 존재에게까지 통일성을 강요할 수는 없다. 마법이란 자유로운 사고의 전환에서 그 깨달음을 얻어야 비로소 그 강력한 위력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토벌군에 참여한 것은 400 여명이었지만 그간의 전투로 3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비록 숫자는 좀 줄었어도 300명의 마법사가 발휘하는 마법의 위력은 전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강력하다. 밀집부대에 한방 먹여 수십마리의 몬스터를 한꺼번에 소멸시키거나, 기사 4~5명에 필적하는 준대형 몬스터를 일격에 침묵시킬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이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복장은 마법사란 것을 쉽게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일반 병사들과 비슷한 차림이었지만, 검은 형식적인 가벼운 롱소드 정도고, 모두 큼직한 마법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마법사들은 병사들의 틈에 섞여 마법 지원을 해 주며 마법사들끼리만 따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뮬테인이 마법병단을 따로 빼 두었다가 위험에 처했던 것은, 마법사들이 지쳐서 마법을 사용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난전에 휘말려 어이없이 죽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지, 결코 뭉쳐 두는 것이 더 효율적이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물론 부대의 규모가 지금보다도 더 커져서 따로 관리해야 하거나, 단체 마법을 사용할 정도면 부대를 따로 편성하겠지만, 지금 같은 난전이 예상되는 경우라면 병사들 틈에서 스스로의 판단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 상태라면 적어도 사흘은 출발하지 못하겠구나. 식량은 일주일치, 적진까지는 30km... 사막에서라면 이틀거리다. 보급을 고려하면 일주일 이내에 전투를 끝내야 할터..... 빠듯하구나. 첫 번째 격돌에서 적에게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주지 못하면 힘들어 진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힘든 싸움이 될 것 같았다. "유신? 여기서 뭐해요? 작전회의중이 아니었나요?" 고민거리를 끌어안은 유신이 끙끙거리고 있을 때 그런 고민쯤은 다 날려 줄 듯한 상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라피도 좀 쉬지 그래요..... 앞으로 더욱 힘들어 질 것 같아요." . . . . . 요즘은 좋은 글들이 너무 많이 올라와서 저도 반성을 참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은 참 좋으네요^^ 슬럼프인지 글쓰는 것이 무척 힘들게 느껴 집니다.... 워낙 쉽게 쓰는 것이 아니냐는 비평을 많이 들어서.^^;; 나름대로 머리를 쥐어짜다보니 힘들어 지는것 같아요..ㅜ_ㅜ 그래도 힘들게 쓰는 만큼 많은 분들이 사랑해 주시고 점점 좋아지는 제 글들을 읽으면서 행복한 기분이 들기도 한답니다. 오랜만에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았네요. 모두 좋은 하루 되시고요^^ 앞으로도 B&M에 많은 관심 부탁드릴께요^^ 아무리 마법계가 마나의 흐름이 활발하여 마법사의 수가 상대적으로 많다고 해도, 마법사란 그렇게 흔한 존재가 아니다. 마물과의 전투를 휘해 착출되어 온 마법병단의 마법사 중에는 머릿수를 맏추기 위해 징집된, 소년 티도 벗지 못한 솜털 보송보송한 애송이도 많았다. 약한 마법사들은 마물들과의 숨쉴 틈 없이 계속된 전투에서 모두 죽었고, 그나마 강한 자들만 남은 것인데도 이지경이다. 마법사를 양성하기가 매우 힘든 것을 감안한다면 유신일행이 마법병단을 제때에 구출하지 못하였다면, 예메른의 마법은 최소 10년은 후퇴하였을 것이다. 성계대전까지 끝난 마당에 왜 평화로워야할 마법계가 이 꼴이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귀한 마법사이니 만큼 대우는 제일 좋은 편이어서, 보급품도 제일 우선으로 지급되고, 다쳤을 시에는 치료도 제일 먼저 받는다. 그럼에도 소독약이나 붕대 같은 소모품의 물자는 예전에 바닥나서 지속적인 위생관리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세라피는 다친 마법사중에 얼굴의 절반을 붕대로 감싸고, 왼쪽 팔이 팔목부분서부터 없는 한 소년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치료가 늦어서 상처 부위가 곪았는지, 대충 감아 놓은 붕대위로 피고름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처참하여 세라피가 그 소년 마법사에게 치료마법을 걸어 주었다. "치유의 빛이여, 내 손에 머물러 가련한 자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소서." 만약 마법계에도 신이라는 개념이 있어서 신성주문을 사용한다면, 신의 힘을 빌려서 사용하는 치료주문을 쓰기가 훨씬 쉬울 것이지만, 그런 개념이 없는 이곳에선 간단한 치유주문을 행하기 위해서도 마나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 작은 상처를 치유하는 회복주문이 마나를 많이 소모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힐링 마법도 5서클 중반의 주문이기 때문에 배우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소년은 얼마나 지쳤는지, 세라피가 상처를 보살펴 주는데도 제대로 감사조차 표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년은 그 순간 고향에 두고 온 여자친구를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마법학교에서의 즐거웠던 추억을 생각하는지 순간적으로 표정이 평온해 졌다. "그다지 큰 상처가 아니었어요....하다 못해 소독약과 제대로 휴식만 제대로 취했으면 죽을만한 상처가 아닌데...." 허무한 한 인간의 죽음에 세라피는 잠시 고개를 숙여 조의를 표했다. "엘프들이야 죽으면 요정계로 되돌아 가지만, 인간이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존재의 소멸... 완전한 무로 돌아가는 걸까요?" 이런 질문을 하는 세라피의 눈빛에 평소와는 다른 기묘한 빛이 서렸다. 하지만 유신은 그런 사소한 변화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는 것은 마법계에서 금지된 일이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의문은 필연적으로 신앙의 생성과 연결되게 마련이고, 이는 신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시킨 마법계에서 허락되지 않는 일이다. 등뒤로 식은땀이 흥건할 정도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유신은 망토 안의 오른손으로 첨예의 손잡이에서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꽉 잡고 있었다. 세라피의 눈이, 아니 세라피의 '눈이었던 것'이 유신에게 향해졌다. "옳다고 생각하나요? 유신 더 실.버.스.타." "누구냐? 어째서 세라피의 몸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냐?"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위협해 보았지만, 그 정도에 겁먹을 상대가 아니다. "천국은 커녕 지옥에 가는 것조차 허락 받지 못한 가련한 존재들... 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니 신을 찬양할 수도 없지요. 덕분에 지옥에 떨어지지도 않지만, 천국에 가거나 다시 환생할 수도 없습니다. 비어버린 영혼..... 아무리 다른 우주 전체를 위해서라 곤해도 마법계의 희생은 너무나 크군요." "네놈이 제노비아냐? 세라피의 몸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냐?" "깨끗하고 의심 없는 영혼.... 차지하고 있다기보다는 잠시 빌린 것입니다. 빌렸다? 아니, 그보다는 동화되었다가 더 비슷하겠군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설명하기 힘들군요. 이 엘프에게 동화한 것은 그래야 당신과 쉽게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몸으로 나타났다가는 천상신검에 단숨에 쪼개질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것에 당하면 정신체까지도 파손되니까 그런 모험을 할 수야 없지요."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는 것이지? 이 자식..... 강하다!' 지금 쳐버린다면 골드드래곤 유메네스까지 한 수 접어주는 적의 총대장인 제노비아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세라피는 틀림없이 죽게 된다. 정신체까지 파괴시킬 강력한 일격을 엘프의 육신이라는 나약한 껍데기가 견뎌 낼리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설픈 공격을 가한다면, 제노비아에게 상처를 주기는커녕 세라피만 크게 다칠 것이다. "그렇게 무섭게 노려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몇가지 해야만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제 성에서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군요." "웃기지 마라! 정체도 밝히지 않고 남의 몸을 빌려서 이야기하는 네놈을 어떻게 믿으라는 것이냐? 다음 번 네놈과 이야기하게 될 때는 네놈의 성을 쑥대밭으로 만든 후일 것이다." "훗.... 대단한 자신감....그런 몸으로도 당당한 드높은 긍지.... 과연 그분의 동생이군요." . . . . 스토리의 커다란 분기점이라 올리는데 조금(?) 늦었습니다... 조금씩 스토리가 복잡해 지기 시작하면서 유신이 마법계까지 귀양 오게된 배경이 풀리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내용상 종교에 관한 내용을 피해 갈 수가 없어서 올릴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판타지하고는 다르게 성경에 나오는 천사와 악마를 그대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읽어 보고 기분 나빠하시는 분들도 많을지 모르니까 조심스러워 지더군요. 두세번 정도 썼다가 지웠다 올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올리고야 말았습니다..... 진정한 마법계의 스토리는 지금부터 겠군요..... 그럼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시고요^^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그리고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뭐....뭣이라고? 네놈 설마 유진을 아는 거야? 대체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나?" "성에서 천천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싫다고 하셔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면 되니까요." "건방진!! 가능할 성싶으냐?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자신부터 밝혀라!!" 고함지르듯 다그쳐 봤지만 제노비아는 그런 유신의 질문에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지친 표정으로 조용히 숨을 거둔 그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천천히 식어 가고 있을 소년의 작은 손을 잡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이란 ... 아니 생명체란 이처럼 힘없고 보잘것없는 존재.... 그럼에도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죽는 것이 두려워서 살아가는 것은 아닐터.....이런 어이없는 죽음에도 최소한의 보상이 깃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소년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쓸어 주고 두 손을 가슴으로 모아준 그녀가 조용히 일어서서 유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다시 천진하고 무방비한 세라피의 눈으로 돌아와 있었다. "세라피? 세라피에요?" 의심스럽다는 듯 유신이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네? 유신 왜요?" 어디부터가 세라피였고 어디부터가 제노비아였을까? 유신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방금전의 대화를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돼서 그녀에게 물어 보았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방금의 대화를 부분적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의식을 지배당하고 있던 때의 기억이 본래의 기억과 별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동화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기억을 지웠다면 이해하기 쉽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엘프의 복잡한 정신세계에 자연스럽게 침투하여 의식을 지배했다가 다시 돌려놓았다고? 기억도 필요한 부분만 골라 세밀하게 삭제하다니....' 상대는 보통이 아니다. 저 정도의 정밀한 기억 조작이나 의식의 동화는 설령 마법계 최악의 난적인 흄이라 해도 불가능하다. 신성력으로 치면 2급신 이상이라야 겨우 가능할 것이다. 물론 그것과 공격마법을 다루는 전투능력과는 별개의 것이지만, 제노비아가 신성력 뿐만 아니라 그 정도의 전투력을 갖추고 있다면..... 적의 정체에 대해 이리저리 궁리해 봤지만, 저녁 무렵이 될 때까지도 아무런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서성거리며 안절부절못하는 유신의 주위에는 접근금지를 뜻하는 무언의 오라가 강력한 방어막을 펼치고있었다. 아무리 병권이 없다고 해도 유신은 일개 중대 이상의 귀중한 전력이다. 작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그렇다 쳐도, 뮬테인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소드마스터인 그에게 할말이 참으로 많을 것이다. 그런데 유신이 저렇게 무게를 잡고 있으니 도통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뮬테인은 그런 유신을 현실로 끌고 오는 역할을 세라피에게 맡기기 위해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멍한 아름다움은 야무짐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백치미에 가까운 것이다. 깊은 한숨을 내쉰 뮬테인이 포기하고 직접 말을 걸려고 했다. "선생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요? 저녁 먹어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말투가 완전히 사내녀석이다. 푹 자다가 이제야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모습의 신시아가 멀리서 유신을 알아보고 털레털레 걸어오며 말을 걸었다. 그녀는 뮬테인을 비롯한 다른 기라성 같은 소드마스터들 조차 어쩌지 못했던 유신의 접근금지 오라를 일격에 찢어발기며 그를 현실로 끌고 왔다. "신시아구나... 그래 일단 저녁부터 먹자." 생각의 전환을 위해선 휴식이 필요하다. 유신도 그녀의 말처럼 잠시 머리를 비우고 식사부터 하기로 했다. 보급품을 최대한 아껴야 하기 때문에 최고급의 장교라 해도, 병사보다 그다지 낳을 것 없는 단촐한 것이다. 물이 모자라기 때문에 국 같은 것을 끓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고, 음식도 최대한 싱겁게 하였다. 작은 오아시스가 있다고는 해도, 일만에 달하는 인간이 마구 마셔대면 언제 바닥을 보일지 모르기 때문에 아껴야 한다. 하지만 음식의 양만큼은 풍족하게 나왔다. 지금부터 체력을 비축하지 않으면, 곧 있을 전투에서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신경, 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이 하는 것이오? 말 걸기가 무섭소이다." 리터마인이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지만, 유신은 듣지 못했다. '그녀의 성에서 이야기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고?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뜻일까? 그녀가 세라피에게 사용한 능력이라면 뮬테인 백작의 정신에 동조하여 군대를 물리는 것도 가능할 터.... 아니면 의지가 강한 인간에겐 안 통하는 것일까? 하지만 엘프이 정신은 인간의 그것보다 다루기가 훨씬 힘들것인데.... 세라피가 너무 헐렁한 것이었을까? 그녀가 원하는 대로 차라리 혼자서 찾아가 볼걸 그랬나.....' . . . . . . 재미있는 부분을 쓰는건데 이상하게 힘이듭니다..ㅜ_ㅜ 작가로서 부담을 느끼는 것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겠지요... 좋게 생각하고 또 열심히 쓰겠습니다. 그럼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워낙 제노비아가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졌기 때문에, 그녀의 말 몇 마디만 가지고 머리를 쥐어 짜 봐야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뮬테인이나 리터마인에게 아까 제노비아가 찾아 왔었으니 모두 조심하시오 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유메네스라도 있다면 같이 이야기 해 볼 수 있겠지만, 그는 정찰을 핑계로 자리에 없었다. 그의 본체가 골드드래곤인 만큼 별 걱정은 없지만, 대화할 상대가 없다는 것은 답답한 일이다. 상황이 이러니 미스티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결국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고민하던 유신은 생각하는 것을 단념하고 체력의 회복을 위해 푹 쉬기로 했다. 사막의 밤은 춥다. 낮의 찌는 듯한 더위가 마치 거짓말처럼 영하까지 떨어지기 때문에 병사들은 모포 속 깊숙이 까지 기어 들어가서 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위생상 별로 좋지 않기 때문에 코는 내놓고 자는 것이 좋겠지만, 사막의 추위는 폐에 먼지가 조금 차는 정도의 희생은 감수하게 만들었다. 유신은 별로 추위를 타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똑바로 누워서 모포는 가슴까지만 덮고, 손은 배 위에 올려놓은 자세로 잠을 자고 있었다. 아니, 유신뿐 아니라 신시아와 세이람도 같은 자세로 자고 있었다. 잠자는 동안 코어가 제멋대로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양손을 포개어 배 위에 올려놓는 자세가 가장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의외로 신시아도 잠버릇은 얌전한 건지, 아니면 얌전히 자는 것이 코어를 모으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얌전히 자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얌전히 자고 있었다. 세라피는 사막에 있는 것이 무척이나 피곤했는지 평소의 단정하게 자는 모습과는 달리 옆으로 누워서 모포를 둘둘 말아 꼭 끌어않은 웅크린 자세로 자고 있었다. 엘프기 때문에 추위를 느끼지는 않는지 모포를 덮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뮬테인의 배려로 유신과 세라피, 신시아, 세이람은 같은 막사를 사용했기 때문에 특별한 경계병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세라피와 유신의 청각과 감을 피해서 침투할 만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뒤척뒤척 잠을 못 이루다 간신히 잠든 유신은 새벽녘이 되자 다시 일어나고 말았다. 제노비아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세라피의 모포를 다시 잘 덮어 준 유신은 길게 기지개를 펴며 밖으로 나갔다. 아무리 유연하게 단련이 잘 된 몸이라 해도, 딱딱한 침상 위에서 추위로 뻣뻣하게 굳은 몸의 뼈마디는 드드득 드드득 듣기 싫은 투정을 부렸다. 잠시 심호흡을 한 유신은 불안할 때는 늘 그렇듯, 첨예를 뽑아 달빛에 비춰 보았다. 마법계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한 첨예...... 그 많은 마물들을 베어 넘겼음에도 어디 하나 망가지지 않은 첨예를 보면 물질계의 과학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다. '조용하구나.... 사막이라 그런지 그 흔한 짐승이나 새 소리도 전혀 없고....' 날씨가 추었기 때문에 잠시 부르르 몸을 떤 유신이 막사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우와악!! 기습이다!!" 한밤의 고요함을 찢는 처절한 외침이 마법병단이 주둔하고 있는 쪽에서 들렸다. '빌어먹을!! 하필 이럴 때!!' 지금까지의 전투를 보면, 적의 야습은 흔한 것이었기 때문에 대비는 잘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보통 준대형 몬스터를 앞세우고 그 뒤를 오크와 놈들이 받쳐주는 정석적인 공격이 아니라 맨스콜피온과 샌드웜처럼 사막의 모래 속으로 이동할 수 있는 몬스터만으로 편성된 부대를 모래 속으로 이동시켜 후방을 치는 변칙적인 강습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낮에 그 정도의 피해를 입고 후퇴한 마물들이 다음날 새벽부터 다시 기습을 걸어 올 줄은 상상하지 못한 일이라 대처가 늦었다. 마법병단은 이미 상당한 피해를 입고 있을 것이다. 입술을 사려 문 유신이 몸 속을 흐르던 코어를 가속하여 첨예로 돌리자 은은한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총 길이는 4m에 이르고 두께도 유신의 허리보다 훨씬 두꺼운 샌드웜 두 마리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모래 속에서 불쑥 솟아올라 유신을 덮쳤다. 강한 산성의 체액을 이용해 인간을 녹여서 죽인 후 양분을 흡수하거나 그 두툼하고 질긴 몸통으로 휘감기라도 하면 갑옷 입은 기사까지 으스러뜨릴 수 있는 샌드웜은 일반 병사들이 상대하기는 상당히 버거운 것이다. 지능이 낮고, 상대가 많으면 쉽게 도망가기 때문에 병사들이 모여 있으면 그다지 두려운 적은 아니지만, 낙오된 병사는 발 밑에서 불쑥 솟아나는 샌드웜에게 잡혀 몬스터의 양분이 되어 버리기 일수다. 유신도 혼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샌드웜의 표적이 된 것이다. "방해하지 말고 저리 꺼져!!" 지금 마법병단을 잃을 수는 없다. 달려드는 샌드웜을 피하지도 않고 그래도 첨예를 긋자 샌드웜은 두 마리가 동시에 녹갈색의 비릿한 체액을 한참동안 뿜어내더니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산성의 체액이 튀기도 전에 유신은 저만치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머리를 잃고서도 한동안 괴롭게 꿈틀대던 샌드웜은 천천히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마법병단이 주둔하고 있던 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아비규환이었다. 아직 마나를 회복하지 못한 마법사들은 별 저항도 못해보고 맨스콜피온이나 샌드웜의 먹이가 되고 있었다. 하다 못해 병사들처럼 검이나 창이라도 다룰 수 있다면, 최소한의 저항이라도 해 볼 수 있겠지만, 마법사가 검까지 잘 다룬다면 그게 마검사지, 마법사겠는가? 잘 단련된 기사들의 검도 들어가지 않는 맨스콜피온에게 엉성한 자세로 몽둥이 휘두르듯 롱소드를 내려쳐 봐야 속수무책으로 도륙 당할 뿐이다. 유신은 사방에 널린 마법사들의 육편 조각을 보자 눈앞이 깜깜해 지는 것 같았다. 이곳의 인간은 약하다고 판단한 마물들의 공격이 더욱 극성스럽고 흉악해졌다.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마법사 하나를 걸레처럼 찢으며 가지고 놀던 맨스콜피온의 눈에 새로운 장난감이 보였다. 질긴 쇠붙이를 걸치지 않은 손쉬워 보이는 사냥감이었다. 맨스콜피온은 여덜개의 다리를 바쁘게 움직여 그 사냥감에게 덮쳐 갔다. 두 개의 거대한 집게발을 이용해 이 인간을 찢어버릴 생각이었던 맨스콜피온의 시야게서 순간적으로 상대방이 사라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둔한 머리가 판단을 하기도 전에 등쪽에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집게발 못지 않게 커다란 맹독을 머금고 있는 꼬리로 등위의 적을 떨궈 내려 했지만, 꼬리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비로소 공포를 느낀 맨스콜피온은 도망치려 했지만, 강건하던 여덜 개의 다리는 자신의 몸을 지탱하기도 힘에 겨웠다. '다음은?' 맨스콜피온 하나를 순식간에 침묵시킨 유신의 눈이 다음 사냥감을 찾기 위해 푸른 섬광을 뿌렸다. 그리고 눈은 첨예와 하나가 되어 다음의 사냥감을 찾아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여든은 족히 되어 보이는 마법사 하나가 맨스콜피온 셋과 대치하고 있었다. 마법사는 어느 정도 마나가 회복되었었는지, 방어마법을 펴서 맨스콜피온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멍청하긴!! 저정도의 힘이 남아 있다면 도망가면 되잖아?' 뒤로 몸을 크게 당긴 유신이 첨예를 집어 던지자, 검기가 입혀진 첨예는 그 남자를 위협하고 있던 맨스콜피온중 하나를 그대로 꽤뚫어 버리고 손잡이 부분만 남긴 채 뒤쪽의 벽으로 박혀 들어갔다. 몸을 관통 당한 맨스콜피온은 휘적휘적 힘없이 집게발을 내젓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러자 그 노인의 모습이 자세히 보였는데, 그 노인의 뒤에는 두 명의 다른 마법사가 있었다. 이 노인은 그 둘을 지키기 위해 도망치지도 못하고 방어마법만으로 맨스콜피온의 무식스런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구원병이 왔다고 생각하자 그 노마법사는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렸는지 마법방어막에 순간적으로 빈틈이 생겼다. 그 틈을 노치지 않고 맨스콜피온의 흉측한 집게발이 방어막을 깨버리고 그 마법사를 덮쳐갔다. "퍼억" 굉장한 소리를 내면서 그 마법사가 있던 땅의 모래가 확 일어났다. 다행히도 그에게 보호를 받던 두 명중에 한 명이 그 마법사를 밀쳐서 목숨은 건졌지만, 오른쪽 다리가 말려 들어가 완전히 뭉게지고 말았다. 마법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젠장!!" 첨예를 한 자루만 차고 나온 것에 속이 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신은 주먹에 코어를 가득 싫어 넣고 맨스콜피온의 얼굴부분을 찔러 넣은 후 한꺼번에 뿜어내었다. 얼굴부분이 완전히 폭발하며 사라져 버린 맨스콜피온은 녹색의 체액과 살점을 하나 가득 사방으로 튀기며 주저앉았다. 세 번째 녀석의 집게발 공격을 굴러서 피한 유신은 첨예의 손잡이를 잡고 다시 한번 코어를 집중했다. 그러자 첨예가 박혀 있던 벽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빌어먹을..이런식으로 체력을 낭비하면 안되는데....' 막 첨예를 맨스콜피온에게 조준했을 때 비명소리가 들렸다. "우아아악" 노마법사에게서 보호를 받고 있던 마법사중 하나가 샌드웜에게 몸이 칭칭 감긴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눈앞에까지 덮쳐온 맨스콜피온의 꼬리를 살짝 몸을 틀어 피한 유신이 그 샌드웜에게 달려가 마법사의 몸을 휘감고 있는 몸통을 찢었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늦고 말아서 우드득 하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그 마법사는 길게 혀를 빼며 죽어 버렸다. 압사하여 죽은 사람은 사람의 모습은 끔찍하다. 눈알은 튀어나오고, 입에서는 피거품이 쉼없이 뿜어져 나온다. 그 마법사를 죽인 샌드웜은 죽였지만, 그것은 원수를 갚은 것도 뭣도 아니다. 단지 수많은 몬스터중 숫자 하나가 줄어들었을 뿐이다. 그때쯤 도착한 지원병들에 의해 본격적인 소탕전이 이루어 졌지만, 이미 마법병단은 괴멸된 상태였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마법사들과 죽은 마물들의 시체가 끔찍한 지옥도를 보여 주었다. "키에에엑" 마지막 맨스콜피온이 세이람의 검에 쓰러지는 것을 끝으로 새벽의 악몽은 끝났다. "맙소사...." 허탈한 심정에 유신이 중얼거리며 첨예를 내렸다. 마법병단의 파멸..... 이로서 예메른의 군대는 마물들에게 반격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을 잃어버린 것이다. "빌어먹을....제노비아놈..... 네몸이 말한 것이 이런 뜻이냐...." 첨예에 묻은 마물들의 피를 털어 낸 유신이 절망적으로 중얼거리며 제노비아의 성이 있다는 방향을 살기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 . . . . . 요즘 정말 많은 분들이 사랑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보답하는 방법은 좋은 글을 빨리 올리는 것이겠지요^^ 각오를 새롭게 하고 오랜만에 연참했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시고요^^ 더욱 열심히 하는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우울한 아침이 시작되었다. 계속된 패전으로 간신히 유신과 유메네스가 올려놓은 사기도 엉망이 되었다. 강렬한 태양 빛으로 시체는 순식간에 미라처럼 바짝 말라갔다. 유일하게 사막의 태양이 고마울 때는 아마 이때뿐일 것이다. 시체가 썩기 시작하면 전염병이 돌게 되고, 고약한 죽음의 냄새는 병사들에게 절망감만을 주기 때문이다. 사체를 본국으로 송환할 여력도 없다. 사실 사체랄 것도 없다. 마물에게 당한 인간들은 갈기갈기 찢어져 고기조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어느 조각이 살아생전 누구의 어느 부분이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조각난 부분들을 모으는 것도 힘에 부칠 정도다. 그냥 한곳에 모두 모아서 태울 뿐이다. 내세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무덤을 복잡하고 화려하게 꾸미는 관습은 없다. 살아 생전의 그 또는 그녀를 '기억'할만한 자그마한 유품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제 병사들은 포기하는 것 같았다. 마물들이 동료를 죽였다는 분노보다도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절망이 병사들을 지배했다. 기계적으로 동료의 시체를 태우고, 마물의 껍질을 가공해 부서진 갑옷과 방패를 대신하는 병사들의 모습에선 어떠한 희망도 볼 수 없었다. 이로써 예메른의 군대가 취할 수 있는 전술은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소수 정예가 침투하여 적의 대장을 해치우는 것. 결국 좋건 싫건 제노비아의 뜻대로 된 것이다. 제노비아는 유신과 전쟁터에서의 만남이 아닌 조용한 만남을 원했고, 전면전을 할 수 없도록 예메른 군대의 최강의 전력과 마물들 최강의 전력을 서로 맏바꿈으로서 대장끼리의 승부를 유도한 것이다. 적이지만 대단한 존재다. 다루기 힘든 마물들을 이용해 군더더기 없는 기습을 가하는 솜씨나 목적을 위해 거침없이 희생을 감수하는 냉정한 판단력....굉장한 자신감과 그에 걸맞는 실력을 모두 겸비하고 있다. 대충 수습이 되자 다시 작전회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고급장교들은 선뜻 무슨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지금껏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이정도라도 예메른의 군대가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마물들보다는 수뇌부가 우수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에게도 이런 과감한 작전을 쓸만한 두뇌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물들은 병력을 희생시키며 과감한 작전을 구사할 수 있지만, 인간은 안된다. 마물들처럼 자폭 부대를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방법이 없군요. 전면전이 무리인 이상, 기습하여 제노비아를 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병사들에게 마물들과 자폭을 강요할 수는 없어도 고급 지휘관이라면 강요할 수 있다. 귀족이라는 칭호를 받고 평민보다 좋은 대우를 받았던 것은 바로 이런 날 써먹기 위함이었으니까.... "뭐, 많이 가봐야 적의 눈만 끌뿐이니 저하고 유신경 둘이서만 가도록 하지요." 유메네스는 무거운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잠시 산책이라도 다녀오겠다는 듯한 장난스러운 말투라 그 뜻을 모두에게 전달될 때까지 잠시 시간이 걸렸다. "말도 안되오. 그런 것을 허락 할 것 같소?" 총사령관인 뮬테인 백작이 펄쩍 뛰며 반대했다. "확실히 둘이서만 가는 것은 자살행위요. 나도 가겠소. 소드마스터가 셋이면 일이 잘못되어도 도망정도는 칠 수 있을 것 아니겠소?" "리터마인!! 자네까지 왜그러나? 마법사들도 없는 지금, 소드마스터들까지 잃어버린다면 남은 병사들은 어찌 되겠는가? 본국으로 도망조차 치지 못하고 마물들에게 전부 학살당할 것이네. 정 그렇다면 나도 가겠네. 소드마스터가 넷이면 성공할 가능성이 더욱 크겠지." "백작님은 부대를 지휘해야 합니다. 이번 작전은 저희에게만 맏겨주십시오." "웃기지 말게 장교들도 전부 제 멋대로인데...@#%$%%#$%" . . . . . 한참을 의미 없는 설전이 오갔다. 유신은 팔장을 끼고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천장을 쳐다보았다. 모두들 지쳐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일반 병사들보다 3배는 더 지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라테우스와 싸웠을 때......" 작은 목소리였지만, 유신의 목소리는 거역하기 힘든 파워로 모두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모두들 말다툼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보다 더 상황이 좋지 않았지요. 인간이 어떻게 용에게 이길 수 있을까요? 하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면..... 신념이 있다면 기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잠시 모두를 죽 둘러본 유신이 말을 이었다. "지금 이곳의 모습을 밖의 병사들이 본다면 탈영한다고 해도 할말이 없을 겁니다. 목숨을 걸고 자신의 고향과 부모, 친구들을 위해 검을 잡은 자랑스런 부하들이 아닙니까? 적어도 긍지있게 싸웠다는 자랑은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우리의 몫이 아니겠습니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합시다." '과연.... 유신 더 실버스타.... 허명이 아니로구나. 카론님이 인간에게 반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면 믿을 수밖에 없겠군.' 유메네스는 새로 사귄 인간 친구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성계대전에서도 친하게 지내기는 했지만, 친구라는 개념은 아니었다. 하지만 친구라는 기준으로 바라본 유신은 정말 자랑스러울 만치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다. "경의 말이 옳소. 할 일을 해야겠지. 위험한 임무지만, 경과 하이몬백작이라면 잘 해내리라 믿소." 리터마인도 가고 싶었지만 뮬테인 백작 혼자서 일만에 달하는 병사를 전부 책임지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같이 죽어서라도 책임을 나눌 믿음직한 기사 하나쯤은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뒤를 받쳐줄 든든한 동료가 있어야 과감한 작전을 구사할 수도 있고, 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힘든 역할은 싸우고 싶을 때 싸우지 못하는 것.....뮬테인 백작님과 리터마인 자작님께 그 역할을 맡겨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승리만 할 수만 있다면 어떠한 굴욕이라도 참을 수 있소.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다 해도, 유신경과 하이몬경만을 위험에 내몬 내 명령이 비겁한 일이었다고 비난받는다 해도, 그로서 승리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요." "필승의 각오로...." 가볍게 목례한 유신이 일어섰다. 밤이 오면 마물들의 세력이 더욱 강해지니, 기습을 하려면 차라리 지금 하는 편이 낳다. 유메네스도 강하다고 인정한 제노비아와의 싸움인 만큼 사실 그라테우스 때보다 훨씬 힘들 것이다. 어영부영 무른 마음가짐으론 절대 이길 수 없다. 회의용 막사 밖으로 나온 유신의 눈에 낯설은 마법사 한 명이 비췄다. 보통의 마법사가 병사들과 비슷한 차림인데 비해 이 마법사는 마법사용의 로브를 두르고 후드까지 쓴 전형적인 마법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런 차림새면 전투가 시작되면 마물들의 첫 번째 공격 목표가 될 것인데....' 유신은 그냥 지나칠까 했지만, 귀중한 마법사이니 싫은 소리를 해서라도 복장을 바꾸게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가 다가가자 의외로 마법사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하시오..... 아까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리오." 자세히 살펴보니 아까 전투에서 유신이 구해 주었던 노마법사였다. "아니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마법병단을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래곤슬레이어 유신경에 대한 소문은 나도 들었소. 인사가 늦었군. 난 예메른의 궁정수석마법사 엘노운이라 하오. 아까 둘은 내 손자와 손녀였소. 손녀를 구해 주어서 정말 고맙단 인사를 하러 왔소." "아!... 정말 죄송합니다....." 아까의 전투에서 한 명은 샌드웜에게 처참하게 살해 당했고, 또 한명은 다리가 완전히 뭉게 졌으니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할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유감스럽다기 보다는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씀을...경이 싸우는 모습은 나도 잘 보았소. 손자녀석이야 할 수 없지만, 손녀라도 구해주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오...." 노인은 태연한 척 말했지만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 손자를 잃은 노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유신은 조용히 침묵했다. "어쩔 수가 없었오. 토벌대에 마법사는 필수적으로 필요하고.... 국내에 있는 마법사들은 각지에 흩어져 있으니 급히 소집할 수가 없었소이다. 할 수 없이 견습마법사를 막 벗어난 소년소녀들까지 모두 끌어 모은 것이라오. 그런데 궁정마법사의 손녀와 손자가 참가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서려고 하겠소이까? 아직 어린 것들이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늙으면 말이 많아진다니까... 주책을 부려 미안하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 줄 수 있겠소?" "..... 가능한 일이라면 당연히....." "원수를 갚아 주시오." 결국 노마법사의 눈에 굵은 눈물이 맻혔다. "목숨을 걸고라도 반드시......" 유신이 노마법사의 두 손을 꽉 잡고 약속하자 거대한 고목이 천천히 스러지듯 노인은 오열하기 시작했다. 노마법사와 헤어진 유신은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장비도 챙겨야 하고 세라피와 신시아, 세이람에게도 이야기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데 설마 따라가겠다고 어린애처럼 조르지는 않겠지......' 뭐라고 해서 세라피를 잘 달래서 떼어놓고 갈지를 고민하며 막사에 들어섰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흠... 차라리 잘된 것일까?' 섭섭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망토와 터번을 두른 유신은 잠시 망설이다가 용아검도 챙겼다. '쓰지 않게 되기를 바라지만.... 제노비아를 상대로 안 쓰고 이길 수는 없겠지.....' 배낭 속에는 건육과 마른과일, 그리고 물을 조금 넣었다. 건육과 마른 과일은 지긋지긋했지만, 배가 고프면 그것도 맛있게 느껴지는 법이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도 아니고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일단 챙기기로 했다. 지도나 나침반 같은 것은 유메네스가 함께 가니까 필요 없을 것이다. 드래곤의 초감각은 미세한 자장의 변화도 노치지 않을 만큼 예민하기 때문에 어설픈 나침반 따위보다 훨씬 정확하다. 지도 역시 허허벌판 모래뿐인 사막에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유메네스가 그곳을 한번 가 보았다고 했으니 그를 따라서 가기만 하면 될 것이다. 밖은 한낮의 태양 덕분에 백열하고 있었지만, 막사 안은 그 때문에 더욱 어둠침침해 보였다. 막사 안을 한번 더 휘돌아보고 혹시 빠뜨린 것이 없나 잠시 생각해본 유신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밖으로 나왔다. "어? 선생님, 이시간에 왠일이세요?" 막사를 막 나선 유신은 막사로 들어오던 세이람과 딱 마주쳤다. "정찰이라도 가나요? 차림이...." "아아... 한 이삼일 정도 장거리 정찰을 갈 것 같아. 그동안 세라피하고 신시아를 잘 부탁해." "뭐, 그 두 숙녀분들은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데요? 그보다 저도 따라가면 안될까요? 아무래도 검을 쓰고 싶군요." 세이람이 또래들에 비해 침착하고 냉정하다고는 해도, 아직 애송이 티도 벗지 못한 젊은 기사다. 마물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아니, 많은 인원이 움직이는 것은 좋지 않아서. 나하고 하이몬 백작님만 가기로 했어." "최고의 소드마스터 둘만 가는 것을 보니 중요한 임무인가 보군요. 적의 대장이라도 치러 가는 건가요?" 세이람의 눈치 빠름에 유신의 눈이 둥그래 졌다. "하아.... 저는 세라피님이나 신시아처럼 둔하지는 않다고요. 신시아에게라면 몰라도, 세라피님께는 선생님 혼자서 적의 대장을 치러 갔다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세라피님의 실망한 표정을 보면 저까지 흐물흐물 해진다니까요." 딱 부러지게 말하는 세이람이 믿음직스럽기도 하지만, 얄미운 것도 사실이다. 평소 유신에게 깍듯한 세이람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세라피의 실망한 표정이 두려울 만치 안쓰러워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눈꼬리와 눈썹이 먼저 아래로 축 처지고, 다음에는 하얀 귀가 축 쳐진다. 무엇보다 압권은 그 가늘고 긴 귀가 아래로 축 쳐졌을 때 맺히는 눈물이다. 그야말로 사람, 특히 남자, 그것도 젊은 남자라면 단숨에 흐물흐물하게 만드는 세라피의 슈퍼 필살기이다. "됐다. 그 이야기는 하지말고, 그냥 장거리 패트롤이라고 해둬. 넌 영리한 녀석이니까 적당히 둘러대는 것쯤은 할 수 있겠지." "그보다 선생님, 저도 가면 안될까요?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방해가 된다면 사막에 버려 두고 가셔도 좋아요." "....너는 누구지?" "네? 선생님 무슨...." 유신은 평소의 다정하고 긴장감 없는 목소리가 아닌, 딱딱하고 사무적인 저음의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묻겠다. 제군은 누구인가?" 비로소 세이람은 부동자세를 취하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자랑스런 하누스왕국의 자색기사단 돌격기사 세이람 체스페어입니다." "지금의 상황은?" "마물들의 최강의 전력인 준대형 몬스터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지만, 마법병단도 모두 잃은 상황입니다. 마물들의 병력 보충이 훨씬 빠른 것을 고려한다면, 지금 이기지 못하면 2~3년 후의 전황은 극단적으로 불리해 질 것입니다." "자네가 할 일은?" "....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가장 근접해 있는 준대형 몬스터부터 격파해 나가며, 적의 밀집대형을 격파하거나 돌파전 수행시 선두에 서서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합니다." 잠시 망설이던 세이람은 역시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나가던 병사들이 무슨 일인가 하여 흘끗흘끗 쳐다봤지만 그런 것쯤은 전혀 상관없는 듯 했다. 세이람도 자신이 나설 자리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답지 않게 유신을 졸라서라도 마물들을 처 없애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영리하고 마음에 드는 아이다.....' 세이람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유신은 평소의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믿음직하군. 신시아와 세라피를 잘 부탁해. 기사수행을 나온 것이 이런 처참한 전쟁터가 되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지만....살아 돌아 가기만 한다면 기사로서 성장하는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아직 중요한 작전에 참여할 실력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했는지 세이람은 주먹을 꽉 쥐고 발 밑을 노려보았다. "허헛 좋은 표정이군.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자라면 쉽게 죽지 않지. 자네는 이곳에서 살아 남아서 틀림없이 하누스에 커다란 힘이 될걸세. 자자 그건 그렇고 유신경, 우리는 시간이 많지 않네. 어서 가도록 하지." 유메네스는 벌써 출발 준비를 마쳤는지, 유신을 부르기 위해 그의 막사로 찾아 왔다가 세이람과 유신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다. 능청스럽게 하이몬 백작의 연기를 하는 유메네스를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던 유신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세이람과 인사를 마쳤다. 둘 다 차림이 간편하였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도저히 중요한 임무를 띄고 비밀리에 움직이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긴 지금처럼 지쳐버린 병사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선 속이 훤히 비추는 옷을 입은 무희라도 불러오지 않는 한 힘들 것이다. 간간히 인사하는 병사들을 뒤로 하고 유신과 유메네스는 사막으로 나섰다. "후아.... 덥군. 자, 이제부터 어디로 가면 되지?"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사막을 보자 유신은 기가 질리는 것 같았다. "일단 예메른의 감시타워 밖으로 나가야지. 우리 걸음이면 2시간이면 벗어 날거야. 그 다음엔 워프로 가면 되고. 한번 가 봤던 곳이니까 워프 하는 것쯤은 쉽거든." 유메네스는 마치 소풍이라도 놀러 가는 것처럼 태평했다. "함부로 워프해도 괜찮아? 워프를 위해 사용되는 대량의 마나를 제노비아가 눈치 못챌 리가 없잖아. 차라리 걸어서 가는 것이 어때?" "제노비아는 너하고 대화하기를 원했다며? 그렇다면 빨리 가는 것이 낳겠지." 선인장하나 없는 삭막한 풍경이었다. 5~6년 전만 해도 이런 사막은 아니었다. 비옥한 토양은 아니었지만, 작은 토끼나 쥐정도는 살 수 있는 환경이었고, 나무나 풀들도 제법 우거진 곳이 있을 정도였다. 단 5년, 위시마스터의 부재 후 겨우 5년 만에 이렇게 황량한 풍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5년전 위시마스터 카린카가 아스모데우스에게 쓰러진 후부터 예메른의 동쪽을 중심으로 사막화가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지금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렸다. '그렇다면 제노비아는 위시마스터가 아스모데우스에게 살해당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단 뜻인가? 그 타이밍에 정확히 맞추어 이곳에서 마물들을 양성하고 있었다면 성계대전에서 빛의 군대가 이길 거라는 결말도 어느 정도 예측했다는 뜻이다.... 흄도 그렇고 제노비아도 그렇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마법계에서 아무리 세력을 키워봐야 실버스타군의 1개 함대와 용신기 두 대 정도만 와도 상대가 되지 않을터....' "유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유메네스는 제노비아나 흄의 속셈이 뭐라고 생각해?" "엉? 무슨 얘기야?" "마법계에서 아무리 세력을 키워봐야 물질계의 초과학에는 대적할 수 없잖아. 세력을 키우려면 지옥의 아바돈이나 판데모니엄에서 키우는 편이 훨씬 유리할텐데 굳이 마법계를 택한 이유를 모르겠어." "글세? 아마도 그건 제노비아를 만나면 들을 수 있겠지. 한가지 확실한 것은 흄과 제노비아가 공동 전선을 구축하고 있지는 않다는 거야." "뭐? 그걸 어떻게 알아?" "당연하지. 만약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있다면 흄이 하누스 앞에서 해상 무력시위를 할 때나, 엘핀서스 침공 때 사막의 마물들도 같이 일어났을 거야. 하지만 시간차가 있었다고. 즉 흄이 하누스를 상대로 혼란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그 후에 허겁지겁 제노비아도 마물들로 난동을 부린 것이지. 둘이 짜고서 동시에 했다면, 혼란은 지금보다 훨씬 컷을 거야." "하지만 레서데몬이 출현했었다고. 그럼 제노비아가 물질계도 아닌 마법계에서 지옥의 레서데몬을 강제 소환했다는 말이야? 그건 이상한데? 데몬을 부릴 수 있는 것은 데빌급 이상의 상위 마족이야. 제노비아에게선 마족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고. 그보다는 베리알이 흄의 편을 들어 주고 있으니 레서데몬을 이끈 것은 역시 흄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아." "두개의 정황을 종합해 본다면 처음에는 제노비아와 흄이 따로 행동했지만, 이해 부분이 일치하는 점이 많아서 서로 협력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군. 이미 두 세력이 연합하기 시작했다면.... 지금 제노비아쪽이라도 확실히 깨놓지 않으면 앞으로 힘들어 지겠는데?" "헤....놀라운데?" 유신은 유메네스의 설명을 들으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가?" 기분 나쁜 이야기를 들을 것 같은 예감에 유메네스는 반 협박 조의 어투에, 표정도 적당히 구기고 드래곤 피어까지 살짝 섞어서 짧게 물었다. "용이 지혜롭다는 것. 유메네스 만큼 차분하고 지혜로운 드래곤은 본적이 없는 것 같아." 유메네스가 그런 노력을 한 보람도 없이 유신은 용이 지혜롭지 못하다며 깔아뭉게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에게 드래곤 피어는 익숙한 것이었고, 특유의 둔감함으로 진실을 말하는데 한치의 망설임도 없기 때문이다. "이봐!! 모든 용이 카론님처럼 무대포에 매사를 힘으로 해결하는 깡패는 아니라고. 원래 용은 지혜로운 종족.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배우는 지식과 지혜는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깊고 심오하다고." "맞아. 그래서 지독한 고집불통이기도 하지." "끙......" 천지한 표정으로 새파란 비수를 날리는 유신을 보자 유메네스는 앓는 소리를 할 뿐이다. 사막이라고는 해도 유신과 유메네스의 걸음 속도는 그런 핸디캡에 장애를 느끼는 수준은 아니기 때문에, 두시간 정도 빠르게 걷자 예메른군이 주둔하고 있는 마을은 벌써 까만 점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 이쯤이면 되겠다. 게이트 오픈." 웜급에 이른 골드드래곤답게 간단한 시동어 만으로 게이트 마법이 시전 되었다. 카론이 대단한 주문을 별 힘들이지 않고 펑펑 써대는 것을 많이 봐 왔지만, 초신수들의 이런 능력은 보면 볼수록 정말 놀라운 것이다. 신은 이미 저렇게 강력하고 완벽한 생명체를 창조했으면서,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인간을 창조한 이유가 무엇일까? "어이, 잠깐만 기다려 봐. 이게 어디로 열리는 건데? 설마 적진 한가운데 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유신이 뭐라 더 말을 잇기도 전에 유메네스는 이미 게이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유메네스가 아무 사전 지식도 주지 않고 사라져 버리자 잠시 황망한 눈길로 게이트를 바라보던 유신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첨예를 꽉 움켜쥔 채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슈슈슉" "우아아앗" 어느 정도 마음의 각오를 하고 들어서지 않았다면 게이트에서 나오는 순간 그대로 두 쪽이 났을 것이다. 반사적으로 피하기는 했지만, 그를 향해 날아온 것이 무엇인지도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기습을 벗어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 즉 뒤로 후퇴하며 높이 점프하여 자리를 벗어 난 유신은 일단 주변의 상황부터 파악하기 위해 빠르게 눈을 움직였다. 유메네스는 게이트 주변에서 오크와 고블린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고, 방금 유신을 공격한 것은 오크중에 한 놈이 유메네스를 공격하려다 빗나간 것이었다. "망할!! 유메네스 너 일부러 내가 나올 타이밍에 게이트 근처에서 싸운....." 유신은 그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천장은 높았지만, 뒤쪽의 벽에서 상당히 가까운 곳에 게이트가 열렸기 때문에 점프하면서 뒤로 피하자 그만 벽에 부딧쳐 버린 것이다. 워낙 유연한 유신인지라 보기 흉하게 나동그라지지는 않았지만, 제법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허....그 유명한 유신 더 실.버.스.타. 님께서 그런 꼴이라니...." 오크들의 칼 숲에서도 전혀 여유를 잃지 않으며 빈정대는 얄미운 유메네스에게 유신도 마주 고함을 질렀다. "뭐야? 왜 삐진거야? 화내야 할건 나라고 생각하지 않아?" 유신이 당황해 하는 꼴을 보기 위해 일부로 게이트 근처에서 천천히 싸우던 유메네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자 마물들은 그야말로 쓰레기 치우듯 없애버렸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유신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마물들의 요새답게 어둠침침하여 보통의 인간이라면 책을 읽기에 무리가 따를 정도의 빛밖에 없었다. 벽은 생물체의 몸 속처럼 구불텅 거리는 징그러운 모습이었고, 푸른색이 도는 야광주가 군데군데 밖혀 있어서 기괴한 느낌을 더하였다. 무엇보다도 앞군은 천장에 매달려 있는 녹색의 반투명 주머니 속에서 배양되고 있는 기괴한 몬스터 군단이었는데, 그 중에는 맨스콜피온같은 준대형 몬스터는 물론이고, 바실리스크 코카트라이스같은 대형의 강력한 몬스터도 있었다. 만약 1년 정도만 더 시간이 있어서 이것들의 숙성이 끝났다면, 예메른을 함락시키는 것도 순식간이었을 것이다. "마....맙소사.... 이것들이 대체 다 뭐야? 이런 괴물이 한두 마리만 섞여 있었어도 예메른 군은 전멸했을 것 아니야? 정말 기막힌 타이밍에 이곳을 알았군." . . . . 휴....방학이 끝나버리는 군요..... 이럴수가.... 앞으로 학교 다니면서 글써야 한다는...ㅠ_ㅜ 그래도 사랑해 주시는 여러분들이 있으니 열심히 할께요^^ "이곳뿐이 아니야. 지하에는 이런 방이 40개 이상 있다고. 전부 파괴하지 않으면, 제노비아는 흄따위보다 훨씬 무서운 적이 될거야." 이 방만 해도 대형의 몬스터만 20여마리 이상 배양되고 있다. 그런 방이 40개라면 800 마리의 대형 몬스터.... 이정도 숫자라면 군단을 조직해 군사작전을 펼칠 필요도 없다. 그냥 라일로스 대륙 각지에 풀어 놓기만 해도 대륙 전체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다. 유신은 첨예를 뽑아들긴 했지만 막상 어디서부터 파괴시켜 나가야 할지 암담했다. "유신? 그칼은 왜 뽑은거야? 설마 그걸로 전부 때려부술 생각은 아니겠지? 봉인이 네 개쯤 풀린 거야?" "설마....그나저나 정말 이걸 다 어떻게 부수지? 유메네스가 마법으로 부셔주면 안될까?" "나야 상관없지만, 그랬다가는 제노비아도 체면 안차리고 덤벼들걸? 그럼 너는 틀림없이 죽을거야." 원망스럽다는 듯 유메네스를 노려봤지만, 확실히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흠... 이 정도 괴물을 한꺼번에 배양하려면 양분을 공급해 주는 곳이 있겠지? 그럼 그곳을 찾아서 파괴시키면 되겠군." 괴물들의 배양 주머니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천장을 잘 살펴보자 과연 배양액을 공급받는 관들은 하나의 다발을 이루어 밖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녹색의 불길한 액체가 반투명의 거대한 관을 통해 끊임없이 괴물들의 배양조로 옮겨가고 있었다. "좋았어. 저 관을 따라 가 보자." 입구에는 오크 몇놈과 놈, 고블린같은 잡다한 몬스터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그다지 문제 거리는 아니었다. 다크블러드처럼 고도로 집단전투를 훈련받은 녀석들도 아니었고, 요새의 관리만 해 왔던 녀석들이라 야생의 몬스터정도의 체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유신과 유메네스를 막기위해 배치되었다기 보다는 침입자에 대한 형식적인 예의로 그냥 앞을 '서있을' 뿐이었다. 좁은 곳에서의 수비위치를 잡은 다수의 적과 난전을 벌이기는 스피드형 검술 위주의 유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유신보다는 유메네스가 앞장서서 몬스터들을 쓸어버리며 나아갔다. 20~30마리 정도를 쓸어버리자 더 이상 덤벼드는 적들은 없었다. "아무래도 경계가 너무 허술한데? 뭔가 이상하지 않아?" 게이트가 열린 순간 제노비아는 유신과 유메네스가 침입한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의도한 바이기도 하니까 뭔가 대비를 해 놓았을 것인데도 별다른 저항이 없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했다. "제노비아는 아무래도 어서 너를 만나고 싶은가봐. 아마도 배양액을 공급해 주는 중추 시설에서 기다리고 있겠지." 중간에 몇 번의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이었다. 유메네스의 요새는 밖의 모래가 유입되지 않도록 관리가 잘 되었는지, 바닥에 굴러다니는 모래 따위는 없었다. 요새 자체가 거대한 몬스터 배양 공장인지, 바닥도 기괴한 형상의 유기질이었기 때문에 발자국 소리도 크게 울리지는 않았다. 배양액이 관을 따라 이동하는 음침한 소리가 어디서든 들렸기 때문에 귀가 몹시 괴로웠다. 유신이 시험삼아서 첨예로 벽을 조금 긁어 보자 녹갈색의 액체가 새어 나오며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유신은 후각이 예민한 유메네스의 불평을 한동안들은 후 다시는 벽에 함부로 상처를 내지 않기로 했다. 머리가 나쁜 몬스터들을 위한 배려였는지, 길이 복잡한 미로의 형태로 꼬여 있지는 않았다. 중추가 되는 관도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점점 더 커다란 다발로 모여들어 20분 정도 헤메고 나자 지름만 4m가 넘는 거대한 형태가 되었다. "저기쯤인 것 같군." 유메네스가 가리킨 곳은 은은한 황금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커다란 입구였다. 커다란 홀의 너머에서 복도를 한참 더 지나서 오른쪽 벽으로 비스듬히 꺾여서 있었기 때문에 은은한 빛만 볼 수 있을 뿐, 내부를 볼 수는 없었다. 포위 당한다면 빠져나가기 더러운 지형이었다. 좁은 입구야 돌파할 수 있겠지만, 뒤의 광장에 적이 포위진을 짠다면 상당히 곤란해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입구가 정면을 뚫려 있지 않고 비스듬히 뚫려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밖에서 안을 볼 수도 없고, 안에서 밖을 볼 수도 없기 때문에 비상사태시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망설여 봐야 소용없겠지. 여기까지 왔으니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자! 힘내자고." 유신은 애써 불안감을 떨구며 명랑하게 말했다. 유메네스도 싱긋 웃으며 황금빛의 입구로 향했다. '이런 곳에 황금빛의 조명이라니... 악취미군. 차라리 질퍽한 녹색 야광주가 덜 기분 나쁘겠다.' 긴장된 순간이었지만 문뜩 그런 생각이 들은 것은 아직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뜻일까? 유신과 유메네스는 나름대로 각오를 한 후 황금빛의 입구로 들어섰다. . . . . . 성실연재 중입니다. 연참도 종종 하고.... 요즘 기분 좋은 일이 많아서 글쓰기도 신나는군요.^^ B&M 사랑해 주시는 모든 분들도 항상 기분 좋고 기쁜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안쪽의 모습은 유신이나 유메네스가 보기에도 놀라운 것이었다. 일단 내부의 규모가 웬만큼 커다란 연병장보다도 컸고, 그 중앙에 위치한, 온천 8개쯤 합쳐 논 것보다도 큰 크기의 수조 안에서는 괴물들을 배양하기 위한 액체가 부글부글 거품을 뿜어 올리고 있었다. 사방으로 연결된 반투명 점막 같은 관을 통해 다른 방에 있는 몬스터의 배양조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유신과 유메네스가 따라온 관도 그중 하나에 불과했다. 벽에는 만들다 실패한 괴물들의 샘플이 녹색의 액체 속에서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 커다란 홀의 벽 전체가 가득 찰 만큼 엄청난 숫자였다. 방 자체가 살아서 숨쉬는 듯 씩씩거리는 기분 나쁜 숨소리가 배양액이 관을 통과하면서 나는 울림과 더해져 최악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것은 천장의 황금빛을 뿜는 수정이었다. 방하나 정도의 크기 밖에 안되기 때문에 거대한 홀의 규모에 비하면 자그마해 보였지만, 거기에서 나오는 빛이 홀 전체를 황금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밝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그 빛은 홀의 구석구석까지 손길을 미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느껴지는 슬픈 기운.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서는 슬프고 우울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혼의 빛이군. 이곳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사악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성스러운 것에 가깝다." "뭐? 유메네스 저게 무엇인지 알아?" "그래. 너야 봉인 당했으니 이곳의 미묘한 기운을 잘 못 느끼겠지만, 저 수정은 인간의 영혼이 결집되어 있는 영혼체야. 그 때문에 이 방 전체가 황금빛에 쌓여 있는 것이고....그것도 사악한 영혼이 아니라 평범한 영혼이야. 어째서 이런 곳에 잡혀 있는 것일까?" 주변에는 시설을 관리하는 다크엘프들이 있었지만, 유신과 유메네스를 보고도 달려들지 않았다. 인간 이상으로 지능이 높은 종족인 만큼 그들이 떼로 달려들어 봐야 유메네스와 유신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아니, 그보다도 자신들의 역할인 시설 관리이기 때문에 침입자 저지에는 손을 빌려줄 필요가 전혀 없다는 태도였다. 즉 유신과 유메네스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해 버렸다는 뜻이다. "그럼 저것을 때려부수면 이곳의 시설도 멈추는 거야?" "아마도 멈추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놔두진 않을 겁니다." 유신의 질문에 대답해 준 것은 유네메스가 아니였다. 엉덩이까지 내려 오는 새하얀 백발에 줄무늬처럼 들어간 검은 머리카락, 그것도 머리카락 한올 전체가 검거나 하얀 것이 아니라 길다란 머리카락 중 대부분이 흰색이고 중간에 검은 부분이 들어가 있는 형태였다. 키는 175정도로 보였는데, 늘씬한 체격 때문에 더 커보였다. 눈이 부리부리하게 큰게 호탕할 것 같아 보였지만, 날카롭게 보이기 위해서인지 일부러 눈을 가늘게 뜨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눈썹은 가늘었지만, 상당히 길어서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귀 뒤로 넘겨져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눈처럼 하얀 바탕에 점점히 들어간 검고 긴 줄무늬가 있는 통이 큰 바지와 재킷이었다. "보아하니 네놈이 제노비아로구나.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이냐?"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이군요. 제 이름은...." "우왓!! 유신 저거봐!! 정말 귀엽게 생겼다!! 달마시안같아!!" '빠직' 제노비아는 유신과 만남을 나름대로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녀의 주인과 같은 외모, 같은 기운, 그리고 강함과 하늘을 찌르는 프라이드와 긍지까지..... 제노비아는 오랜만에 가장 잘 어울릴만한 옷을 찾아서 입고, 머리도 손질했다. 거울에 비춰보지 않아도 충분히 자신의 아름다움과 세련됨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기대해온 역사적인 만남을 저 덩치만 커다랗고 미련한 도마뱀 놈이 망쳐 놓은 것이다. 그것도 하필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개에 비유하다니.... 넓직해서 시원한 느낌이 드는 이마위로 굵은 핏줄이 일어섰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감추어 넣었다. "무슨 말이야? 정말 용족의 미적 센스는 전 우주 최악이라니까...." 유신이 그렇게 말하자 제노비아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도마뱀 따위에게 예쁘게 보일 이유도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다. 유신에게 멋지게 보이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달마시안은 동그란 점박이잖아. 저 무늬는 길다란 줄무늬 형식이고. 저렇게 다른데 무슨 달마시안이야? 척 봐도 얼룩말이잖아. 키도 크고 체형도 훌륭하니까 정말 잘 어울린다. 보통 말이면 건강하고 멋지게 생겼다는 이미지인데 저렇게 꾸며 놓으니까 섹시한 것 같기도 하군." 뒤쪽의 칭찬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얼룩말이란 말을 들었을 때부터 제노비아의 이성은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유메네스와 유신이 들어왔을 때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만 하던 다크엘프들이 슬슬 눈치를 보며 홀의 밖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지만, 유신이나 유메네스나 둔감하기론 오십보 백보다. 둘은 죽이 맞아서 감 못 잡고 제노비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풍기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이야깃거리가 될 만큼 대단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달마시안과 얼룩말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다른 이야기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은 제노비아다. . . . . . 개학에 맞추어 이번 장이 끝나 가는 군요... 근래에는 너무 딱딱한 내용만 계속되어서 어줍잖은 개그를 약간 넣어 봤습니다.... ㅡ.ㅡ;; 원래 제노비아(광무)는 그런 개그 캐릭터가 아닌데.... 당분간 글올리는것 보단 리뉴얼에 신경쓰도록 할께요. 어차피 수업시간에 수업은 안듣고 글 쓸거니 연제가 늦지는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분량은 좀 줄지도 모른다는....^^;;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시고욤^^ 4월초에 출판되면 많이 사.서. 봐 주세욤^^;; 그럼 좋은 주말 되셨기를 바라며 이만 물러 감니다^^ 그녀는 잠시라도 자신의 주인과 같은 외모에 혹해서 유신을 좋게 보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했다. 참는다, 또는 인내한다는 미덕은 백호족인 그녀에겐 너무나 멀고 먼 다른 나라의 이야기이다. 종족특유의 기질을 살려서 말보다는 주먹이 앞섰다. "카오스레이" 그녀의 몸 앞에 다섯 개의 시커먼 구체가 육망성의 배열에 따라 자리를 잡은 후 유신과 유메네스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폭발형 마법이 아닌 관통형 마법이라 피하기만 한다면 별 피해는 없지만, 카오스레이는 마법계에서 쓸 수 있는 마법이 아니다. 써클마법이 아니라 입체마법인 스피어 마법이기 때문이다. "이런이런, 이렇게까지 체면 안 차리고 덤벼든다면 나도 참지 않겠어." 간신히 피한 유메네스가 질렸다는 듯 말했다. 폭발하지는 않지만 그 관통력은 용의 비늘 수십장을 한꺼번에 관통할 만큼 무시무시하다. 카오스레이가 훑고 지나간 지면은 전부 시커멓게 타 들어갔으며, 벽을 뚫고도 한없이 더 나아가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큭큭큭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노랑 도마뱀. 내가 정말로 체면 안 차리고 덤벼들면 네까짓게 잠시라도 버틸 것 같으냐? 검이 아닌 마법으로 상대해 주는 것을 감사하게 여겨라." 그녀는 한바탕 시원하게 큰 마법을 써서 적들의 당황한 모습을 보게 되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성질 급하고 단순하면서도 쉽게 흥분하고 쉽게 식어버리는 백호족의 대표적인 케이스라 할만하다. '주특기가 마법이 아닌 검이란 말인가? 설마 백호족? 맙소사. 저 얼룩무늬는 얼룩말을 형상화 한 것이 아니라 백호의 무늬를 형상화한 거였군.' 상대방의 정체가 대충 짐작이 가자 등뒤로 옅게 소름이 돋았다. 백호족이라면 4대성수 중에서도 1:1전투에선 가장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는 무투파이다. 용의 브레스 같은 말도 안 되는 필살기도 없고, 주작족처럼 화려한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1:1최강이라고 불리는 것은, 타 성수들은 비교조차 안 되는 엄청난 체력과 스피드, 그리고 마나를 이용한 '전투' 보다는 코어를 이용한 '싸움'에 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스피어급의 마법인 카오스레이를 주문조차 없이 시동어만으로 사용했다. 마법으로서도 저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면, 최소한 용황급의 전투력을 보유했을 것이다. 유메네스보다도 훨씬 강하다는 뜻이다. 초신수끼리 싸운다면 아무리 용아검을 들고 있다고는 해도, 봉인이 전부 풀리지 않은 유신이 끼여들 여지는 없다. '대체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비록 상대방이 상대도 안될 정도로 강하다고는 해도, 거기에 겁먹을 유신이나 유메네스가 아니다. "파이어 블레스트, 에어 윙, 노이지," 백호족의 초감각은 용족의 그것보다도 뛰어나다. 유메네스는 육탄전으로 제대로 붙으면 더욱 상대가 안될 것을 알기 때문에 화염의 폭발로 제노비아의 눈을 가리고 시끄러운 소음으로 귀를 순간적으로 막았다. 그 틈에 유신은 첨예를 빼들고 제노비아의 코앞까지 육박해 들어갔다. 제노비아는 블링크 마법으로 몇 번을 피했지만, 그녀도 무투파인 만큼 마법전투는 용족만큼 능하지 않다. 블링크하는 곳마다 유메네스가 파이어 블레스트나 파이어 버스트 같은 화염계 마법으로 불바다를 만들고, 잠시라도 허점을 보이면 유신의 첨예가 귀신처럼 파고 들으니 그녀로서도 괴로웠다. 더 싸우려면 더 싸울 수도 있겠지만, 성질 급한 백호족답게 그녀도 결국 검을 뽑았다. "차앙" 첨예가 그녀의 다리 쪽을 노리고 낮게 쓸어올 때 그녀는 그녀의 애검인 볼츠를 소환하여 그 공격을 퉁겨냈다. "쿡, 과연 유신과 영리한 골드드래곤.... 나름대로 죽이 잘 맞는군요. 이 나에게 검을 들게 만들다니...." 검을 든 그녀는 자신감부터가 달랐다. 어깨를 내리 누르는 엄청난 중압감..... 유메네스도 함부로 마법을 난사할 수가 없었다. 잠시라도 틈을 보였다간 볼츠에 두 쪽 날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격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지.....' 첨예를 고쳐 잡은 유신이 신중하게 제노비아를 겨냥했다. 순간 볼츠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낀 유신이 반사적으로 첨예를 들어 올려 정면을 막으며 몸을 틀었다. "챙그랑"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상대의 공격을 파악하기도 전에 마법계에서 동거동락을 해 온 첨예가 반토막 나며 부러진 부분이 높이 떠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조금만 늦었으면 첨예대신 유신의 머리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두려운 것은 예비동작조차 제대로 파악 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다. . . . . 자아...무적을 자랑하던 유신이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습니다. 더욱더 고생을.....우꺄~~ 학교에 가 봤습니다. 변함없는 학교, 친구들.... 좋긴 하지만.... 고...공부는 친해지지 않을것 같군요..ㅜ_ㅜ 그럼 모두 좋은 하루 되시고욤^^ 내일 뵙도록 할께요^^ 폴리모프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용의 필살기인 브레스를 쓸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어설프게 변신하다가는 1000% 볼츠에 살해당할 것이다. "자, 이제 어느 쪽이 힘의 우위에 있는지 알겠지요? 그럼 천천히 얘기를 해 볼까요?" 그녀는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굉장히 여유가 있었다. 천천히 팔장을 끼며 턱을 높이 세운 그녀의 얼굴엔 승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여유를 부려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실력 면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나는 것도 사실이다. "제 소개부터 하지요. 광무라고 합니다. 제노비아는..... 유감스럽게도 저에게 협조할 의사가 없더군요. 그러니 그냥 광무라고 불러주는 게 기쁘겠군요. 짐작 하셨겠지만 전 백호족입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유진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유신의 누님이지요." "그러니까 쌍둥이인데 왜 누나냐고....." 작게 말했지만, 초감각을 지닌 유메네스나 광무라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깨끗하게 무시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유신은 유진님의 오른팔이 되어 주실 수 없을까요?" "....." "잘 생각해 보세요. 창세신은 이미 그 공평성을 포기했습니다. 빛에게만 아낌없는 사랑을 주고있지요. 이곳만 해도 그렇지요. 사람들을 봐요. 죽어서 천국도, 그렇다고 지옥도 가지 못하고 윤회의 사슬에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한없는 기다림, 마법계가 물질계와 완전히 떨어져 독립되는 그때까지 한없이 기다릴 뿐이지요. 그럴 바엔 몬스터로 전생하는 편이 낳지 않을까요?" "그래서 영혼을 저렇게 모아두고 있는 것이냐? 저렇게 모아서 몬스터 따위로 만드는 것이냐고!! 반신반의했지만 이곳의 시설과 네 말을 종합해 보니 확실해 지는군. 사이버네스틱 장치로 인공의 영혼을 만들 수 없는 마법계에서 몬스터를 마구 찍어낸다고는 것이 이상했다. 영혼도 없는 허약한 몬스터따위 아무리 많이 찍어낸다 해도 머릿수만 많을 뿐 별 의미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들에게 인간의 영혼이 융합된다면....이제 확실히 알 것 같다. 유진은 미쳤어. 이따위 짓거리를 하는 유진은 미쳤다고." "피잉" 미세하게 공기가 떨리는가 싶더니 부러진 첨예를 잡고 있던 유신의 오른팔이 팔둑 부분부터 높이 떠올랐다가는 바닥을 굴렀다. 첨예를 어찌나 세게 잡고 있었는지, 주인의 몸을 떠나 바닥을 구르면서도 첨예를 움켜쥔 손가락은 풀리지 않았다. "말을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목숨만 붙어 있다면 팔다리 한두 개쯤 잘라 내어도 우리편으로 '만든' 후 천천히 다시 붙여도 되거든요." 유진에 대해 욕하기가 무섭게 보인 광무의 반응은 무서울 만치 격렬한 것이었다. 그녀가 유진을 얼마나 좋아하고 따르는 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광신도로군.' 물질계에서 광신도라면 수도 없이 봐 왔다. 아리엘의 친위대인 템플러들이나 교회소속의 팰러딘을 봐 왔기 때문에 광신도가 얼마나 무서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초신수, 그것도 성질 급하고 난폭하기론 용족 이상이라고까지 평가되는 백호족이 누군가에게 '님'자를 붙인다거나 주인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 유신은 떨어져 나간 자신의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첨예를 꽉 움켜쥐고 있는 유신의 팔은 녹색의 유기질 바닥에서 자라난 불쌍하고 연약한 식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고통에 겨워 날뛰거나 분노로 미쳐서 덤벼들기보다는 별 표정 없이 자신의 '팔이었던 것'을 주워 들었다. 아찔한 통증이 오른팔을 통해 전신으로 퍼져 갔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만한 여유 따위는 없었다. 멍한 표정으로 팔을 주워 들고 서 있는 유신을 보자 광무는 '약한자'를 너무 괴롭힌 것 같다는, 정말 백호족 답지 않은 후회라는 감정이 생겼다. 그러자 조금 부드러워진 말투로 말했다. "마물들이...몬스터들이 인간을 비롯한 빛의 축복을 받은 다른 종족에 비해서 잔혹하고 교활하며 머리도 모자란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비참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왜 몰라주는 겁니까? 도움이 필요한 것은 지금도 충분히 강하고, 강한 만큼 거만한 빛이 아니라 비참하고 나약한 어둠입니다. 루시퍼님은 빛의 종족을 우주에서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억압받는 약자를 지키기 위해서 일어나셨죠. 유진님도 그런 루시퍼님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분의 편에 선 것이고요. 천사나 신족들이 어둠에 대해 얼마나 가차없고 잔혹한지는 홀리크로스의 기전장군이었던 당신이 더 잘 알겠지요? 티클 만큼이라도 신의 축복을 나누어 주기는커녕, 그게 무엇인지 알 기회조차 주지 않았으면서, 단지 마족이 모여 산다는 이유만으로 행성 전체를 통으로 태워 버렸던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고는 못하겠지요?" ".....알고 있다. 나 역시 그런 명령을 받은 적이 있으니까. 그래서... 날 끌어들이겠다는 말은 유진이 한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분께서 가끔 동생을 생각하면서 쓸쓸해 할 때가 계십니다. 당신의 능력이 탐난 것도 사실이고....." . . . . . . 흠.... 영원한 악당도,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선하기만 한 존재도 없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루시펠도 그녀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반역했고, 그런 그녀를 막은 유신이나 천사들도 우주를 지키겠다는 사명감이 있었지요. 천명의 사람이 있으면 천명의 정의가 있다..... 이것을 표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루시퍼는 못말리는 악당이지만, 루시펠은 악마들조차 가엽게 여기고, 도와주려고 하는 착한 마음의 소유자지요. 그러면서도 루시펠과 루시퍼는 동일한 인물입니다. 이처럼 모순된 세상사를 그려 보고 싶었습니다. 아직 글쓰는 재주가 미력하여 제대로 표현하진 못했지만... 꼭 써보고 싶은 내용이라 감히 쓰고야 말았습니다. 어둠이 말하는 정의... 악마라고 잔인하고 냉정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나름대로의 규칙이나 정의가 없었다면 전 우주를 위협할 만큼 발전하지도 못했겠지요. 그런 규칙이나 정의가 천족의 그것과는 내용을 달리하기 때문에 전쟁이란 형태로 그 갈등이 폭발한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쪽이 옳다 그르다 할 수 없겠지요. 사담이 길었는데.....2권의 클라이 막스 부분이 끝났기 때문에 할말이 많았던것 같네요..^^;; 앞으로도 B&M 많이 사랑해 주시고요^^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이런 몸인데도?" "유진님은 당신과 같은, 아니 그 이상으로 강합니다. 약해빠진 신족 몇이 걸어 놓은 봉인 쯤은 단숨에 깨주실 겁니다. 광무의 말을 차분히 듣던 유신이 긴 한숨을 쉬어 "역시.....유진은 그런 생각이었나... 성계대전때 모습을 들어내지 않은 것은 루시펠님의 편에 섰기 때문인가?" "사실 유진님이 루시퍼님의 편에 선 것은 당신이 빛의 편에 선 순간 정해진 결과입니다. 유진과 유신은 신의 클론이자 비상시를 위한 안전장치. 언제나 중도를 지키며 우주의 균형을 유지해야 할 두분 중에 한 명인 당신이 빛의 편을 들었을 때부터 유진님은 어둠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지요. 둘이 함께 중도를 지키거나, 한쪽이 빛이면 한쪽이 어둠일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걸 안다면 이야기는 빠르겠군. 유진이 어둠에 섰다면 나는 빛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것 아닌가?"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당신은 '인간'입니다.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존재. '의지'가 있다면 반드시 운명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만약 당신이 내 주인의 반쪽이라면, 그런 운명조차 뒤집을 정도로 강하리라 믿습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선택은 유신의 몫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유메네스나 광무는 끼여들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너는 창세신이 불공평하다고 했지만....과연 그럴까? 만약 그분이 정말 빛에게만 일방적인 사랑을 베푸는 거라면 루시펠임이 반역하지도 않았겠지. 자신의 신념을 믿고 그것을 밀고 나갈 긍지를 주셨다는 점에서 창세신은 공평하다. 불공평하지 못한 것은 신의 뜻을 잘못 해석하고 교만에 빠져버린 천족이나, 그것을 빌미로 어둠에 떨어져 버린.... 루시펠님을 비롯한 너희 악마들이겠지." 유신의 말이 끝나자 광무의 볼츠가 서서히 황금빛을 띄기 시작했다.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대답은?" 유신은 대답 대신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던 부러진 첨예의 조각을 발로 차서 광무에게 날려보냈다. 한 팔이 없기 때문에 미세한 밸런스가 흩으러져 생각만큼 빠르게 날아 가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그 정도 공격으론 아주 자그마한 상처라도 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기에 별 미련은 없었다. 대신 왼쪽으로 크게 돌아서 잘린 팔에 들려져 있던 첨예의 손잡이 부분을 눈을 향해 던졌다. 거의 동시에 유메네스도 오른 편으로 돌아서 볼츠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하지만 광무는 그녀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코어스트림 만으로 유신이 코어를 가득 싫어 던진 첨예의 조각 두 개를 모두 퉁겨내고 볼츠를 절반만 뽑아 유메네스의 롱소드를 막아내었다. 유메네스가 들고 있던 검은 보검이나 명검이 아닌 평범한 마법계의 롱소드였기 때문에 볼츠와 부딫치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며 유메네스는 10여 미터 이상을 퉁겨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유신의 용아검이 찬란한 천상신검의 검기를 뿜어내며 광무에게 떨어져 내려갔다. 광무는 코어를 집중해 막을 생각이었지만, 유신의 용아검은 그 굉장한 초신수의 코어 장벽 앞에서도 아주 잠시 움찔거렸을 뿐, 거침없이 코어의 장벽을 찢어내며 광무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 잠시의 틈 동안 유메네스의 장검을 산산조각낸 볼츠는 광무의 자그마한 머리와 용아검 사이에 끼어 들었다. 유신이 사용하는 천상신검이 더 정순하고, 연륜이 높다고는 해도, 주입되어 있는 코어의 양이 워낙 다르다.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유신은 용아검과 함께 유메네스보다 5m 정도 더 날아가 처밖혔다. 만약 용아검이 아닌 다른 롱소드나 첨예정도였어도 유신은 칼과 함께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고집불통들.... 아무리 덤벼 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런 어중간한 공격으로는 ....." 강하다. 차분하고 흩으러짐 없는 동작, 절대적인 자신감. 용아검에 기대어 간신히 일어 선 유신은 용아검에 엷게 금이 간 것을 보고 아연하고 말았다. 이 정도야 절정의 초신수인 카론의 어금니로 마법검이니 잠시만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회복하겠지만, 상대방은 그 절정의 마법검을 한번의 충돌로 금까지 가게 만든 엄청난 괴물이다. 그것도 유신이 검기까지 주입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유신도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위인은 아니다. "꼭 그렇지도 않을걸?" "무슨?" "여기 시설은 끝났어" 유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림과 동시에 괴물들을 배양하고 있던 용기들이 부글부글 심하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 광무가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벽에 있던 샘플들부터 퍼석퍼석 폭발하기 시작했다. 아직 죽지 않고 동면 상태로 잠들어 있던 괴물들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바둥거렸지만, 곳 온몸에서 체액을 뿜어대더니 처참하게 분해되어 갔다. "어떻게 이런 일이.. 마법으로 배양액을 오염시키는 기운은 느끼지 못했는데...." 광무는 당황하여 몇 가지 조절 장치들을 만져 보았지만, 이미 몬스터들은 손쓸 수도 없을 만큼 오염되었고, 시설들도 엉망이 된 것 같았다. "킥, 내 팔이 어디 있게?" "서...설마....." 배양수조의 한가운데서 검붉은 불길한 거품을 뿜고 있는 것은 바로 잘려진 유신의 팔이었다. 허탈한 심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광무는 이미 이 시설이 틀렸다는 것을 예감하고 다른 조취를 취하는 것조차 포기해 버렸다. 아마 배양되고 있던 몬스터들은 유신의 진한 피에 견디지 못하고 모두 파괴되었을 것이다. "창세신의 클론..... 첫 번째 인간...... 그 진한 피는 다른 생명체에겐 차라리 맹독에 가깝지....." 유메네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이 정도 거리라면 광무가 달려들기 전에 유신을 데리고 텔레포트하여 도망칠 수 있다. 그래서 일부러 이렇게 멀리 퉁겨지면서 광무와의 거리를 벌여 놓은 것이다. 또 다른 선택은 싸우는 것이다. 그는 용족이고, 강한 상대와 싸우는 것은 너무나 즐거운 일이다. 설혹 죽는다 해도.... '크흐흐... 나를 죽일 정도로 강한 상대다...고민할 필요도 없지. 싸우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최강의 전투생물이라 칭송 받는 용족의 피가 심장을 돌고 있는 한 유메네스가 택할 선택은 하나다. 살을 주고 뼈를 친다. 분노에 미친 광무가 이성을 잃고 달려들 때 카운터로 반격타를 날리는 것이 희박하긴 하지만 이길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일 것이다. 유신과 유메네스는 최대한 힘을 끌어 모아 단번에 승부를 낼 준비를 했다. 하지만 광무는 달려들지 않고 조용히 유신과 유메네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쿠쿠쿵...." 시설물이 파괴되면서 요새의 붕괴가 시작되었는지, 홀 안이 흔들리며 육중하고 불길한 소리가 죽음을 알리는 장송곡처럼 들려 왔다. 괴물들의 샘플이 저장되어 있던 시설물도 벽에서 떨어져 나와 내용물이 쏟아지자 홀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오염된 배양액이 사방으로 넘치면서 끔찍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이번에는 유메네스도 불평하지 않았다. 이런 지옥 같은 난장판 속에서 검을 늘어뜨리고 차분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새하얀 광무는 내용을 해석 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후우..... 과연 굉장하군요. 제가 인정한 분의 동생인데 얕잡아 본 저의 실수입니다." 생명력 없는 조각 같던 그녀의 입술이 열리자 그녀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아하지만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곳 영력로가 폭주하면서 이곳은 대폭발을 일으키게 될 겁니다. 그러니 어서 피하세요." 그녀의 뜻밖의 태도에 유신이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왜 우리를 살려서 보내려고 하지? 언제 폭발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면 유메네스라면 몰라도 나 정도는 확실하게 끝낼 수 있을 텐데...." "어떨까요? 하지만 저로서도 확신 할 수 없군요. 제 주인께서 유신의 죽음을 바라시는지... 아니면 전쟁터에서 검을 나누고 싶어하시는 건지....뭐, 이곳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이 시설들은 포기하고 있었으니까 유메네스나 유신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닙니다. 당신들이 실패했다면 위시마스터라도 직접 왔겠지요. 마법계에서 위시마스터를 상대로 싸워서는 아무리 저라도 승산이 없으니까요." "....." "후훗, 그렇게 미심쩍은 얼굴 하지 마세요. 이미 이곳에서 모아야 할 양 만큼의 몬스터는 충분히 모았으니까, 더 이상의 이용가치도 없답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더 넓은 우주에서였으면 좋겠군요. 거기 노랑 도마뱀도 그렇고. 그럼 이만 안녕히." 유메네스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린 그녀가 잠시 주문을 외우자 그녀의 발과 머리 위로 복잡한 적층형의 마법 문자가 떠오르더니, 어지럽게 돌아가며 그녀의 몸을 감쌌다. 초 장거리 워프용의 게이트마법은 초신수인 그녀도 주문을 외워야 할 만큼 고난이도의 것이기 때문에 주문에 약간의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이윽고 그녀의 몸이 완전히 마법문자 안에서 사라지자 유신과 유메네스도 긴장을 조금 풀 수 있었다. "끝난 건가?"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 드는 것 같았다. 잘린 오른팔의 통증도 심해졌고, 가벼운 용아검조차 무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 . . . 이번화는 많이 가는군요.... 15화가 넘었다는...... 비축분은 17화 정도로 이번 스토리도 끝이 납니다.....17화분이 조금 안되지만 수정좀 하고 묘사 약간 더해서 마무리하면 17화 될것 같네여.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퇴장했군요. 광무는 아주 한참 후에 물질계편이 시작되면 또 등장할겁니다. 알바를 해서 프린터를 한대 샀습니다. hp870k .... 옥션에서 10마넌 이상으로 거래되는 물건이라는데.... 알바비 대신 챙겨 왔습니다. 그래서 무척 기분이 좋다는.... 후후 모두 좋은 하루 되시고욤^^ 앞으로도 사랑해 주세요^^ "뭐.... 그런 것 같군. 이곳을 더 조사해 볼까?" 골드드래곤답게 호기심이 많은 유메네스는 영력로를 연구해 보고 싶은 것 같았다. "관두자고. 저걸 봐. 지금 당장 폭발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모양이잖아." 유신의 말처럼 영력로는 시리도록 하얀빛을 사방으로 뿜고 있었고, 크리스탈에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느껴지던 슬픈 기운도 분노나 두려움의 감정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 영혼들 역시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부러진 첨예의 조각을 주섬주섬 챙기는 유신을 보며 유메네스가 투덜거렸지만, 결국은 그도 조각난 파편을 찾는 것을 도와 주었다. "여기선 이만큼 강한 재질을 구할 수 없으니까.... 수리라도 하려면 조각이라도 있어야 하거든. 드워프 들이라면 고쳐 줄 수 있을 거야." "그보다 저것들은 어떻게 할거야?" 유메네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다크엘프 20여명이 불안한 듯 커다란 눈을 굴리며 유신과 유메네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의 시설을 관리하던 녀석들이었으니까, 영력로가 폭주하게 되면 모두 죽으리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광무녀석, 멀쩡한 척 했지만, 우리에게 패해서 어지간히 정신이 없었나보다. 설마 다크엘프처럼 귀한 것을 흘리고 가다니...." 다크엘프는 흔한 존재가 아니다. 물질계에서는 시라스인들 중에 크놈인들에게 끌려가서 악마의 제물이 되어 버린 자들이나 그 후손들이 다크엘프가 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마법계에선 악마가 출현하는 일 자체가 없으니 더더욱 그 존재가 희귀하다. 다크엘프라고는 해도, 피부가 검고 머리카락이 백금발일 뿐이므로 그 미모는 절대 엘프들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고, 엘프보다 마법 내성이 더욱 뛰어나고 마력도 강력하다. 하지만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으므로 성격은 몹시 차고 삐뚤어진 경우가 많다. "뭐야? 설마 다크엘프라는 것들이 적에게 도움을 받겠다고?" 유메네스가 몹시 의심스런 눈길로 그 무리를 훑어보자 그들도 못지 않게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메네스를 마주 쏘아보았다. "참내.... 기가 막혀서.... 허연 줄무늬 고양이 새끼가 날뛰더니 이제는 깜둥이 엘프까지 맏먹으려고 드는군. 이것들을 전부 홀랑 구워 버릴까?" 그렇지 않아도 광무에게 밀려서 심기가 몹시나 불편한 유메네스다. 엘프들은 나름대로 혹시 구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성의를 담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본 것이었지만, 유메네스는 완전히 오해하여... 아니 제멋대로 나쁜 쪽으로 해석하여 열 받고 말았다. "그만둬. 다크엘프들은 원래 시선이 날카롭다고. 그보다 어서 게이트나 준비 해. 영력로가 폭발하면 아무리 대단한 궁극의 마법방어를 한다고 해도 흔적도 없이 소멸될 거야. 일단 살고 봐야 할거 아냐." 보다못한 유신이 한마디 했다. "눈알이 저렇게 큰데 날카롭긴 뭐가 날카롭냐? 그렇게 급하다는 놈이 칼 조각은 뭐 하러 챙겨?" 유메네스는 불평은 했지만, 게이트를 여는데는 망설이지 않았다. 게이트가 열리자 다크엘프들은 멀뚱히 서서 유신과 유메네스의 눈치를 살폈다. "뭘해! 전부 터져 죽을 거야? 빨리 들어가." 유메네스가 고함을 빽 지르자 다크엘프들은 허둥지둥 게이트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그 모습을 보자 왠지 다시 조금씩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과정이야 어쨌든, 잘난척하던 백호족의 암고양이에게 한방 먹여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몇몇의 용감한 오크들이 배양액을 뒤집어 쓴 지저분한 몰골로 혹시나 해서 다가왔다. '감히 위대하신 골드드래곤에게 오크 따위까지도 살려달라고 나서다니.....; 유메네스는 기가 막힌 심정이 되었지만, 왠지 모르게 통쾌한 생각이 들어 한없이 너그러워 지기로 했다. "야! 니들도 나 맘 변하기 전에 어서 들어가. 이런 곳에서 개죽음 할 수는 없잖아." 설마 유메네스가 오크들에게까지 자비를 베풀 줄은 유신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뭘 웃어! 보기 싫으니까 너도 어서 들어 가." '골드드래곤이나 블루드래곤이나 투정부리는 것은 똑같이 귀엽군' 문득 카론의 생각이 나자 장난기가 동한 유신은 유메네스가 오크들이 게이트로 들어가는 것을 도와주는 동안 바닥에 손을 식 문질러 썩은 내가 진동하는 끈적한 녹색의 액체를 잔뜩 발랐다. "고마워. 유메네스." 마지막 오크가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자 그 뒤를 따라 가던 유신은 인사를 하면서 유메네스의 볼을 꾸욱 꼬집었다. 예상치 못한 습격에 유메네스는 순간적으로 멍했지만, 곳 그의 뺨에서 진득한 액체가 툭툭 어깨로 떨어지자 정말 드래곤다운 포효를 내지르며 유신을 쫒차 게이트 안으로 뛰어 들었다. . . . . 감기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중요한 전공 설계가 있는 날인데 그만 늦잠을 자버렸다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욤^^ 오늘은 연참 할께요^^ 예메른 군대가 주둔하는 곳과는 10km 쯤 떨어진 곳, 새하얀 빛의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한 무리의 인영이 차례로 나왔다. 급하게 나오는 듯, 질서 있게 나온다기보다는 한 덩어리로 서로 밀치면서 나왔기 때문에 몹시 어수선해 보였다. 뾰족하고 긴 귀, 갈색의 피부, 백금실을 풀어놓은 듯한 머리카락, 늘씬한 체격까지 비슷비슷한 외모의 다크엘프들은 그들이 위치한 곳이 어디쯤인지 알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온통 모래뿐인 그곳에서 어떠한 희미한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뒤를 이어 3년쯤 정화조에서 아무렇게나 자라난 수초를 온몸에 두른 것 같은 몰골의 오크들이 엘프들보다 3배쯤 더 허겁지겁 튀어 나왔다. 오크들은 게이트에서 나온 뒤에도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서로 냄새나는 몸을 찰싹 붙이고 게이트에서 멀찌감치 물러섰다. 감히 뒤돌아서 달아나지는 못했지만, 용감한 누군가가 먼저 도망가기만 한다면 모두 그 뒤를 따라서 도망칠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뒤를 이어 날렵하게 생긴 소년이라 하기도 뭐하고 청년이라 하기도 뭐한 애매한 나이의 인간이 그 전에 나온 종족보다 다섯배쯤 빠른 동작으로 게이트를 빠져 나왔다. 그는 나오자마자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고는 오크들의 뒤에 숨을까 하다가 겁에 질린 오크의 표정을 보고는 포기해 버리고 조금은 더 똘똘해 보이는 다크엘프의 뒤로 숨었다. 그러자 대지를 뒤흔드는 드래곤의 포효가 속에서 무시무시한 살기와 함께 30대 초 중반의 사내가 게이트에서 빠져 나왔다. 죽일 듯이 유신을 노려보며 포효하던 유메네스가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눈을 둥그렇게 뜨며 사막의 먼 한 지점을 바라 보았다. '뭐야? 대체 왜 저러지?' 엉겁결에 유메네스가 쳐다본 곳을 보는 순간 유신은 그의 눈을 파고드는 강렬한 빛 때문에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반대편으로 몸을 날리며 엎드리자 잠시 후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충격파가 덮쳐 왔다. '빌어먹을....' 땅에 업드릴 때는 충격파로부터 내장을 보호하기 위해서 무릎과 팔꿈치 같은 최소한의 부분만을 지면에 대야 한다. 아니면 몸을 타고 고스란히 그 충격파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당황한 유신은 정말로 그답지 않게 그만 땅에 엎드릴 때 실수로 배가 닿은 모양이다. 유메네스의 훼이크에 속은 상태였고, 팔도 하나밖에 없어서 순간적으로 균형을 못 잡은 것이다. 충격파가 땅을 타고 배로 전달되자 내장이 뒤집어 질 것 같은 충격에 욕설을 퍼부으며 몸을 뒤틀었다. 충격이 다른 곳으로 흘러 나가도록 재빨리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러자 잘린 오른팔로 충격이 몰려 피가 울컥 쏟아졌다. "망할자식.... 그래서 시원하냐?" 영력로가 완전히 폭발하였는지 어두운 하늘을 새하얗게 물들이던 서글프고 두려운 영혼의 빛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유신이 이를 부드득 갈면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굵은 모래가 입 안 몸 할 것 없이 따갑게 굴러다니고, 팔은 한쪽밖에 안 남았고, 유메네스에게까지 당해서 기분이 참으로 더러웠다. "팔도 없는 놈하고 싸워봐야 재미없으니 그 정도로 그친 거다. 빌어먹을 놈... 운 좋은 줄 알아." 뺨에 묻은 배양액이 넌더리난다는 듯, 손으로 슥슥 닦아 보았지만 걸죽한 액체는 여기저기 더 묻을 뿐이었다. 모래를 한움큼 집어서 닦아 보았지만 별 소용이 없자 유메네스가 다시 발작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마법으로 해." 불똥이 튈 것을 예감한 유신이 재빠르게 말했고, 마법으로 정화한 유메네스는 비로소 만족한 표정이 되었다. 오크들은 멍청하니 엎드리지도 않고 있다가 충격파에 휘말려 저 만큼씩 날아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고, 다크엘프들은 오감이 예민한 만큼 오크들보다도 더 괴로운 듯, 단정치 못하게 눈물, 콧물, 침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모래에 파묻고 있었다. 오크야 어쨌든 다크엘프들은 충분히 동정을 살만한 모습이었다. 유신이 도와주려고 다가가자 다크엘프들은 우르르 그를 피해 유메네스의 등뒤로 숨었다. "뭐....뭐지? 대체 뭐 하자는 플레이야?" "푸하하 강한 자를 알아 모신다는 거 아니겠어?"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었지만, 유메네스의 말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물질계에서 악마의 소환을 위해 사용되고 버려진 시라스인의 후손인 만큼,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한자에게 복종하며 매달리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다른 엘프들 틈에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단지 복종하도록 '사육'된 그들에게 지성체로서의 존엄성이나 자긍심을 바라는 것은 무리한 주문일게다. 제물이 된 후에는 크놈의 돼지들의 노리개가 되었다가 운이 좋아서 광무의 눈에 띄어서 몇가지 교육을 받고 마법계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을 그들의 모습은 괘씸하기보다는 불쌍하게 느껴졌다. . . . . 연참성공..ㅡ_ㅡv 다음화로 이번 어둠이.... 편이 끝납니다.. 그럼 전체적인 수정 들어 갈께욤^^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휴.... 이 정도 폭발이면 예메른 군대가 있는 곳에서도 잘 보였겠군. 우리가 오늘 점심때 출발했지? 근데 하루만에 해결해 버렸다고 하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거리도 꽤 되는데....." "흠... 그것도 그렇겠군. 그럼 오늘은 사막에서 보내고 내일정도쯤에 천천히 돌아가도록 하자. 할 일도 있고." "할 일? 또 뭐가 남았는데?" "일단 다크엘프들의 기억을 지워야겠지? 세세하게는 지우기 힘드니까 4년전 정도로 돌려 놓을 생각이야." 유메네스가 다크엘프들의 기억을 지운다고 하자 흠칫 하며 뒤로 물러섰다. "뭐야? 살려준 것만 해도 고맙게 여기라고. 겨우 기억 조금 지우는 것조차 싫다고 했다가는.... 더 이상의 자비를 바라지 마라." 사실이 그렇다. 아무리 지혜롭고 현명한 골드드래곤이라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이다. 살려준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운 아량을 베푼 것이다. 하지만 다크엘프들이 드래곤에 대해 배울 기회가 언제 있었겠는가? "저... 살려주신 것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하지만 4년 전에 저희들은 크놈의 노예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끔찍한 일인지.... 광무님을 만난지 겨우 2년.... 비로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찾았는데, 그것을 지우시면... 부탁컨대 차라리 기억 전부를 지워 주십시오." 잠시 얼이 빠진 표정으로 하늘의 별자리를 살펴보던 유메네스의 입이 열렸다. "미쳤구나. 아주 죽으려고 용을 써라." 무시무시한 드래곤 피어가 쏟아져 나오며 분노한 유메네스가 포효하자 오크들은 모래속에 얼굴을 파묻고 오줌을 지렸지만, 다크엘프들은 죽음을 각오하였는지 벌벌 떨면서도 눈을 꼭 감은 채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았다. 정말 말도 안될 정도로 건방진 다크엘프다. 용족이라면 다크엘프 따위의 귀찮은 부탁을 들어 주느니 차라리 죽여서 조용히 만드는 것을 택할 것이고, 그것이 당연한 일이다. "......" '휘이잉' 급격히 추워지면서 사막의 밤이 찾아오기 시작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유메네스는 아직 손을 쓰지 않고 있었다. "..... 좋다. 너희가 이곳에서 살아가면서 과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기억을 지우지 않으마." 유메네스의 온건한 태도 유신이 다크엘프들보다도 훨씬 놀랐다. 말려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제정신이야? 아까의 싸움에서 머리라도 맞은 거 아냐?" "..... 다크엘프들이 교활하고 비겁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광무는 그런 다크엘프들에게 저 정도로까지 신용을 받고 있어. 과연 어둠이 말하는 정의는 무엇일까? 난 보고 싶다. 빛의 편 최강의 전사라 칭송 받던 너조차 다크엘프들을 믿을 바엔 차라리 죽이는 게 낳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것이 당연하고, 나 역시도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광무는.... 아니 어둠은 다크엘프들을 손쉽게 죽이는 대신 그보다 훨씬 어려운 '신뢰'를 얻어내었다. 생각해 볼 일이야. 광무를 진정 이기고 싶다면 적어도 다크엘프들이 나를... 아니 빛을 신뢰하도록 만들어야겠지. 그러려면 최소한 나부터 그들을 믿어주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면 안된다." 유메네스의 충격적인 말에 유신은 모래가 입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넋이 나간 채 그를 바라보았다. '과.....과연...!! 루시펠님의 반역은 가치가 있었습니다. 저 오만한 용족을 저 정도로 변화시키다니.....또 다크엘프들에게 충성이란 개념을 줄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으니 어둠에 속한 어떤 생물체라도 신이 만든 이유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네요.... 전 우주의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저는 신의 손길이 가장 닫지 않는 이곳 마법계에서 신이 보여주는 최고의 기적에 감동하게 되는군요. 빛도 어둠에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으니 우주는 앞으로 크게 변화할 것입니다.' 비록 유신과 빛의 군대에 패하기는 했지만, 루시펠의 싸움도 헛된 것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물질계로 되돌아 갈 수만 있다면.... 아니, 굳이 그가 가지 않아도 언젠가는 천사들이, 신족들이, 빛이, 전 우주가 루시펠의 뜻을 알아 줄 날이 있을 것이다. 비록 큰 희생을 통해 내딛은 힘든 일보였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4장이 끝났습니다^^ 생각보다 마지막 내용이 마음에 들게 끝나서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엄... 묘사나 문체가 빨리 쓰려다 보니 어색한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ㅜ.ㅡ 수정하면서 천천히 고쳐 나갈 생각입니다... 4장이 끝났으니 오늘부터는 출판준비 수정을 해야 겠네요... 사랑해 주셔서 감사하구욤^^ 출판되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열을 맞추어 군사훈련을 하고 있는 오크무리가 있다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웃을 것이다. 짧은 다리, 통통한 배, 미련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킁킁거리는 것 밖에 할 줄 모는 오크들이 질서정연하게 열을 맞추어 분열을 연습하거나 집단 검술 훈련을 한다고 생각해 보라. 하지만 흄의 요새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다크블러드의 정예 오크들을 보면서 웃을 만큼 담이 큰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새카만 갑옷 위에 조각된 핏빛의 해골이 불길하게 잔인한 웃음을 짓고 있는 듯 하다. 허리에는 같은 규격과 모양의 통일된 롱소드가 매달려 있고, 왼팔에는 원형의 방패가 매달려 있다. 정면만 바라보게 시야가 제한된 투구는 오크들의 자신감을 나타내는 듯 하다. 신장이 평균의 오크보다 두뺨 이상 크고, 무장역시 잘 관리되어있었다. 자신감이 가득한 흉흉한 눈빛을 빛내며 드래곤의 고기라도 씹어 삼키겠다는 듯,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쩍거린다. 흄은 궁성의 높은 발코니에서 다크블러드의 위용을 만족스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라일로스 대륙에 상륙하기 위해 번번히 시도해 봤지만, 인간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벌써 몇 번이나 배를 돌려야 했다. 인간의 군대에 비해 마법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만큼, 무리하게 상륙전을 감행하다가는 해안선에 접근도 하기 전에 배들이 모두 마법에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시퍼의 가호인지 뜻밖의 조력자가 나타났다. 자신을 제노비아라고 소개한 마녀가 자신도 루시퍼님을 위해 싸우겠다는 뜻을 전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인간 마법사쯤 간단히 죽여 없애 버리려고 하였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흄이 구사한 스피어급의 입체 마법을 너무나 쉽게 막아내었다. 그정도의 실력이라면 뭘 해도 도움이 되겠다 싶어 동맹을 맺었는데, 그녀의 요새에서 준비중인 몬스터의 질과 양을 보고는 더더욱 놀라게 되었다. 저 정도의 몬스터라면, 굳이 흄의 지원이 없어도 라일로스 대륙 전체를 갈아엎기에 충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흄이 몇 번에 걸친 상륙 시도가 물거품이 되자, 그녀는 몬스터의 아주 일부만을 이용하여 인간국가들 중 최강이라 평가받는 예메른의 국경지방을 뒤흔들어 놓았다. 아직 대형의 강력한 몬스터가 숙성되지 않은 것이 아쉬웠지만, 그 정도로 충분하였다. '마법계의 영적인 해방을 위해 손을 잡자니....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계집이다..... 하지만 이용가치는 충분하겠지. 이 틈에 상륙해 버리면 더 이상 정체도 알 수 없는 계집따위는 필요 없으니까..... 아니지, 계집은 다크블러드의 베개로 쓰고 몬스터들은 내가 루시퍼님을 위해 잘 사용해 주면 되겠구나. 크흐흐흐' 사실 흄은 마법계의 영적인 해방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단 두 개뿐이다. 첫째가 루시퍼의 해방, 둘째가 자신의 마법적 완성이다. 어둠이 우주 패권을 장악하든, 아니면 빛을 전부 몰아내고 천사들과 신족들을 노예로 삼던 사실 흄은 별 관심이 없었다. 그건 루시퍼님과 세븐 헬마스터들이 할 일이지, 자신이 상관할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흄이 원하는 것은 마법적 연구를 계속 하여 마법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이르지 못한 어떤 깨달음을 것이고, 그 결과가 아주 조금이라도 루시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면 만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소박하다 할 수 있지만, 원래 마법사란 존재가 마법적 열망 이외에는 그다지 욕심이 많을 이유도, 필요도 없는 존재이다. 헬마스터인 베리알이 전해준 지령도 단순했다. '마법계를 혼란에 빠뜨려라.' 마법계는 전 우주의 가능성을 미리 알아보기 위해 만들어진 시험장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마법계가 혼란에 빠지면, 그 가능성은 전 우주로 확산되어 물질계를 비롯한 전 우주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뜻이다. 마법계와 물질계는 단순히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마주보고 있는 쌍둥이처럼 서로를 만질 수 있는 관계란 것을 근래에 알게된 베리알이 취한 조치이다. 이미 루시퍼가 봉인되었고, 헬마스터중 다섯이나 봉인된 상태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빛에 대항할 방법이 없다. 베리알로서는 도박에 가까운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제노비아가 사막에서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자 흄도 다시 출병하였고, 오늘이나 내일이면 하누스의 남서쪽 끝의 해안쪽으로 상륙이 시작될 것이다. 하누스쪽으로 진출하려면 마룡의 산을 지나야 하지만, 그라테우스는 이미 유신에게 쓰러졌고, 그 일대에 다른 드래곤은 없다. 부대를 크게 우회시켜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보급도 여의치 않겠지만, 하누스도 해안선에 배치된 병력을 다시 돌려 흄을 막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노비아의 군대가 사막을 벗어나기만 하면 하누스 역시 자국의 곳곳에 일정 수 이상의 군대를 흩어서 지켜야 하기 때문에 무리하게 상륙을 시도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우회상륙을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할 것이다. 작전은 계획대로 잘 돌아가고 있었고, 기분이 좋아진 흄이 그의 주위로 마나를 돌리자 어두운 마나가 발코니 위를 휘몰아 쳤다. "똑똑똑" 흄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방해를 받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만약 지금 그의 사색을 방해한 전령이 가지고 온 소식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거나, 흄이 듣기에 불쾌한 내용이라면, 흄의 방을 청소하는 마물들은 무척 바빠질 것이다. 흄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발코니가 피와 살로 범벅이 되어 있는 상태를 오랫동안 참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랬다가는 아마 청소하는 마물들까지 흄의 사색을 방해한 방해한 불우한 전령과 같은 꼴이 될 것이다. "무슨일이냐?" . . . . 오랜만에 한편 올라왔습니다...휴....수정은 아직 물질계편도 안끝났다는...ㅜ.ㅡ 대체 이래서 출판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ㅜ_ㅠ 어쨌든 5장이 시작되었습니다. 내일부터는 또 늦지 않도록 부지런 연제를 해야 하는데,,, 가능 할러지.....ㅡ.ㅡ;;; 이제 흄 대륙에도 진출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군대도 만들어야 하고 믿음직한 동료도 모아야 하고... 유신이 또 바빠지겠네요. 되도록이면 갤러리를 쭉 올리고 다시 연재 시작하려고 했는데... 갤러리는 담에 또 연제속도가 떨어지는 불상사가 생기면 올려야 겠군요....ㅡ.ㅡ;;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고요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발코니로 들어 선 것은 뜻밖에도 전령이 아닌 마법병단 닐케니언의 통신, 첩보 담당의 마법사 다크엘프 후루엘이었다. "폐하, 황송하오나 큰 문제가 생겼사옵니다. 후루엘은 황송스럽다는 듯, 제대로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업드린 채 보고를 하였다. "유메네스의 사막요새가 완전히 소실되었습니다." 후루엘의 보고에 흄의 주변을 회전하고 있던 마나의 흐름이 점차로 살벌해 지기 시작하자 후루엘은 몰려드는 공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흄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선 요점만 이야기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기에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요점만 간단하게 찍어서 이야기했다. "제노비아의 요새에 있던 영력로가 폭발했습니다. 워낙 먼 거리라 정확히 분석하는 대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지만, 폐하께서 파견하신 듀레한의 마기가 완전히 소실되었고, 연락도 두절된 걸로 보아 인간의 공격에 무너진 것 같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아무리 덜떨어진 놈이었다고는 해도, 듀레한은 레서대몬이다. 인간 중에 그를 소멸시킬 존재가 있다는 것은 말도 안된....." 흥분하여 지껄이던 흄의 말이 딱 끊기자 발코니에는 칙칙한 고요가 찾아들었다. "유신 더 실버스타!! 그 빌어먹을 자식이로구나!!" 갑자기 생각 난 듯, 흄은 포효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사악한 마나를 마구 분출했다. 마나 자체는 무속성이지만, 그 마나의 주체가 되는 자가 워낙 악에 물든 자라, 그것까지도 사악한 것처럼 느껴졌다. 시커먼 마나로 몸을 감싸고 공중을 서성이는 해골의 모습은 보는 이의 심장을 쥐어 짤 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게다가 해골의 뒤쪽 발코니 넘어로 보이는 성의 모습도 결코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전투적인 형태라 더욱 두려움을 주었다. 비죽하게 솟은 감시용 망루가 불규칙하게 나 있었기 때문에 마치 괴물의 뿔이나 촉수처럼 보였다. 당연히 마물들에게는 쾌적한 생활을 위해 대장간을 성밖으로 두어야 한다는 개념은 없었고, 대장간은 무기의 수효가 가장 수요가 많은 성안에 만들었다. 병장기를 제작하기 위해 화로에 쓰는 기름은 그 재질이 별로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의 곳곳에는 시커먼 그을음이 묻어 있었고, 담쟁이 덩굴이나 작은 식물들조차 모두 말라죽어서 성의 황폐함은 절정을 이루었다. 사실 성이라기 보다는 요새에 가까운 형태였다. "역시 제노비아 따위를 믿은 것이 실수구나. 상륙준비중인 함대에 알려서 당장 돌아오라고 해. 제노비아가 예메른과 이리나 대평원 쪽을 흔들어 주지 않는다면, 장기전을 수행할 수 없다. 인간 놈들이 작정하고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보급이 곤란한 우리 군대는 말라죽고 말 것이야." 흄이 미친 듯 서성이며 쾡한 눈으로 사방을 노려보며 욕설을 퍼붓자 후루엘은 감히 어떤 의견도 내지 못하고 조용히 발코니에서 물러났다. 그가 나가자 안쪽의 마나의 폭풍은 더욱 거세어 졌고, 곳이어 무언가 부서지고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후루엘은 더욱 발걸음을 빨리하여 그 무시무시한 장소를 벗어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 * * * 흄의 상륙함대의 기함은 다크스톰의 갑판 위, 아직 한낮의 해가 하늘을 점유하고 있음에도 유독 그곳만은 어두컴컴한 어둠에 쌓여 있었다. 뱀파이어 로드 젤더가인은 통신마법사가 전한 갑작스런 철군 명령에 분통을 터트리는 중이었다. 뱀파이어로드의 경지에 들어선 그에게도 태양빛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의 힘이 강대해질수록 그가 낮에 움직여야 할 귀찮은 일을 해줄 자신의 권족이 더더욱 늘어났음으로 오히려 빛에 대한 면역성이 떨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한낮의, 그것도 참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바다의 태양 아래서 고생한 이유는 어서 상륙해서 부대를 전개시키라는 흄의 재촉 때문이었다. 새벽부터 시작한 상륙작전은 점심 먹을 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한 병력과 군수물자를 내린 정도였다. 필요한 보급품은 진군해 나가면서 약탈로 얻으면 되기 때문에 가지고 온 양은 겨우 일주일치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오만에 달하는 병사가 소비할 일주일치는 보급함만 15척이 되어야 할 만큼 많은 양이었다. 상륙하기 적합한 모래 해안이었다고는 해도 이런 대규모의 상륙작전은 두 번 다시 하기 싫을 정도로 힘든 것이다. 흄과 라일로스 대륙은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곳도 쾌속선으로 일주일 이상 걸린다. 인간의 눈을 피해 마룡의 산 쪽까지 우회하여 상륙하였기 때문에 거의 한달간 배여행을 해야 했고, 젤더가인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라고 있을 무렵 겨우 상륙하기 시작했다. 물위를 건너지 못하는 뱀파이어에게 상륙전을 주문하는 것은 확실히 어리석은 명령이었지만 흄에는 몬스터들을 지휘할 뛰어난 지능을 가진 고급 마족이 없었고, 또 그런 무리한 주문을 해도 무리 없이 소화해낼 만큼 뱀파이어 로드 젤더가인의 능력은 뛰어났다. 그 기대에 부응하여 젤더가인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상륙을 시작하였고, 상륙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철군하라니.... 울화가 치밀었지다. 하지만 흄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뱀파이어라면 리치와 비슷한 정도의 고급 마족이고, 뱀파이어로드라면 에데 이 리치보다 훨씬 강하다는 게 정설이지만, 이 흄이라는 괴물은 대체 어떻게 된 괴물인지 젤더가인이 전혀 상대가 안될 만큼 강했다. 힘이 곳 정의인 마족이니 흄이 그보다 강한 동안은 그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 철군하는 것은 상륙하는 것만큼 짜증나는 것은 아니고, 위험도 적으니 젤더가인은 화를 식히기 위해 자신의 관으로 돌아가 뚜껑을 덮었다. . . . . 으으... 방심하다가 감기에 걸렸습니다. 그핑계대고 내일은 학교점 늦게 가고 푹 자야 겠다는...ㅡ.ㅡ;;;; 정신없이 써서 제대로 썼는지 모르겠군요.ㅜ_ㅜ 새로운 장의 처음이라 배경을 깔기 위해 좀 더디게 진도가 나갑니다... 이번화는 좀 지루할지도.... 그래도 많이 사랑해 주세효...^^;; 뻔뻔스런 suckjins 는 이만 물러 갑니다. 그가 뱀파이어가 된지 벌써 400년.....뱀파이어는 매우 독립적인 몬스터다. 뱀파이어는 하인으로 부리는 소수의 저급 모스터와 몇몇의 인간만을 트랜스하여 자신의 권족으로 삼고, 그 외에는 다른 지성체와는 어떤 교류도 없이 평생을 홀로 지내는, 어찌 보면 무척 외로운 존재다. 젤더가인 역시 그렇게 살아왔지만, 흄에게 굴복한 후 지금은 수만의 군세를 지휘하는 대장군격의 몬스터가 되었다. 그의 짧지 않은 생에에서 근래만큼 바빴던 적이 있었을까? 흄의 밑으로 들어간 후 귀찮은 일이 대부분이지만, 아주 가끔은 차가운 그의 심장이 거칠게 요동칠 만큼 신나는 일도 있었다. 최강의 무력 집단의 정점에 선다는 것은 소름끼치도록 멋진 일이다. 차가운 심장을 가진 뱀파이어라 해도 어찌 신나지 않겠는가? '마치 인간 같은 생각 아닌가....크크큭 어쨌든 상관없겠지.' 편안한 관속에 몸을 누이자 짜증스런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고향의 흙이 가득 차 있는 관은 세상의 어떤 침대보다도 포근하고 달콤한 휴식을 주었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잠깐 눈을 감았다고 생각하는데 밖이 소란스러워 진 것이다. 출항준비가 되었나 싶어서 몸을 일으키자, 그의 옆에 검은 안개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더니 인간의 형상을 갖추었다. "밖이 소란스럽구나. 출항 준비가 된 것이냐?" 젤더가인은 그의 옆에 나타난 뱀파이어를 돌아보지도 않고 무심한 어투로 물었다. 그러자 창백한 얼굴이 더욱 창백해진 뱀파이어가 대답했다. "로드, 죄송합니다. 노역을 위해 데려온 인간들이 도망쳤습니다." "뭣이 어쩌고 어째? 겨우 인간 따위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해서 놓쳤다고?" 인간이란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노역을 하는데도 멍청한 오크를 시키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고 섬세한 인간이 났고, 유사시엔 신선한 식량으로 쓰기에도 다른 어떤 생물보다 인간의 고기가 훨씬 부드럽고 영양분도 많다. 그래서 병력만 실키에도 모자란 배에 인간까지 실코 온 것이다. 아마도 무사히 마물들의 군대가 상륙하였다면, 그들은 마물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파티의 메인 디쉬가 되었을 것이다. "로드, 철군 준비를 서두르느라 인간들을 감시하던 병력이 적었습니다. 설마 도망치리라곤...." "그걸 변명일고 하는 게냐?" 젤더가인의 주변에 검붉은 안개가 짙게 모이는 걸로 봐서 그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를 쉽게 짐작 할 수 있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뱀파이어가 즉시 말을 이었다. "아직 탈출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즉시 잡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꺼져라. 이 쓸모 없는 놈, 빈손으로 돌아오면 대신 네놈을 죽이겠다." 젤더가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뱀파이어는 안개로 변해 흩어져 버렸다. "머저리 같은 놈들......" 다시 관속에 들어갈까 했지만, 젤더간인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결국 넌더리 난다는 듯, 관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오후의 뜨거운 바다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선상으로 나갔다. * * * * 그의 불길한 생각대로 다시 그에게 보고를 했던 뱀파이어는 오크들을 육지로 내려 본격적인 수색을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이 멍청한 것들아. 지금 병력을 다시 내리면 그동안 인간들은 다 도망갈 것 아니냐. 그럼 대체 언제 수색을 하겠다는 것이냐!" 젤더가인은 부하들의 멍청함에 치가 떨렸다. 이래서야 아무리 병력에서 우위를 점해봐야 전쟁은 힘들 것이다. 그는 목소리에 마나를 섞어 멀리까지 퍼져 나가게 한 뒤 대장다운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달아난 인간들은 들어라. 어차피 근처에 숨어 있는 것을 안다. 만약 나오지 않는다면 이곳에 남아 있는 인간들을 지금 당장 '먹어'버리겠다." 바다는 뱀파이어의 힘을 막는다. 만약 젤더가인이 육지에 있었다면, d런 번거로운 짓을 할 필요도 없이 그 인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테지만, 배 위에선 바다의 힘에 막혀 뱀파이어의 초감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안개나 박쥐로 변해 대낮의 바다를 건너가기는 더욱 귀찮고 피곤한 일이라 이렇게 협박을 하는 것이다. 사실 도망친 놈들이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상노예들은 배아래서 죽어라 노만 저었을 테니 몬스터군의 숫자나 편제, 기타 정보가 될만한 것들은 거의 알고 있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쥐새끼 두 마리가 도망갔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나마 탈출한 인간들이 그라테우스가 쓰러진 뒤, 마물들의 천국이 되어버린 마룡산 주변을 통과해 인간들의 나라까지 갈 확률도 거의 없다. "30분 기다리마. 그 안에 나타난다면, 목숨만은 살려줄 것을 약속한다." 젤더가인이 손짓을 하자 갑판위로 인간들 수십 명이 끌려 올라왔다. 대부분 손질하지 않은 수염이 무성히 자란 40대 중년의 아저씨들이었지만, 체격은 젊은이의 그것 못지 않게 좋았다. 아마 힘든 노역을 계속 해서 단련되었으리라. 하지만 영양상태는 그리 좋지 않은 듯, 뺨은 쑥들어가고 눈은 쾡했다. 그중 강건한 체격에 눈빛이 살아있는 한 중년인이 말했다. "도망친 자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남자의 곁에 있던 오크가 발길질을 해 대자 그 남자가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하지만 젤더가인은 흥미있다는 듯, 더욱 매질을 하려는 오크를 제지하고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조용히 몸을 숙여 그 남자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민 젤더가인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왜냐?" "흥, 더러운 마물놈. 도망친 둘은 하누스의 영광스런 자색 기사단의 정예다." 그 말에 젤더가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참을 수 없다는 듯, 몸까지 떨면서 웃고 말았다. "후하핫 15년쯤 전이었나? 비참할 정도로 약한 주제에 겁 모르고 흄을 침공했던 인간 군대가 있었지. 그 생존자였단 말이냐? 기사라면 전쟁터에서 죽지 못한걸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 아닌가? 구차하게 살아 남아서 개처럼 노예가 되더니, 이제는 동료들까지 버린단 말이냐? 하누스도 끝장이로구나. 크하핫" "흥, 그러니 네놈들이 한심하다는 것이다. 죽음은 쉬운 선택. 그 둘은 죽음보다 더 치욕스런 삶을 선택하셨다. 바로 지금 같은 기회가 언젠가 오리란 믿음 하나로 그 치욕의 세월동안 비참한 노예생활을 견뎌낸 것이다. 그들은 반드시 하누스로 돌아가 흄에서 고통받는 인간들을 위한 군대를 모아 줄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난 젤더가인의 표정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크큭.... 재미있구나 인간. 기대해 보도록 하지." 싸늘한 냉소를 흘리며 젤더가인이 돌아섰다. 그러자 그것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오크들이 인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살이 뭉게지고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한 처참한 비명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 위에 연주되었다. . . . . 휴~~ 겨우 세입~~ 그럼 모두 좋은 주말 되세요^^ 하얀 모래만이 가득한 사막. 모래에 반사되는 백열의 햇살은 사막의 나신을 오래도록 훔쳐보는 무례한 사람의 시력을 빼앗아 버린다. 숲의 종족인 엘프도 사막이라는 악조건은 견디기 힘든 환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벌써 삼일째 예메른 주둔군의 망루 중 가장 높은 것 하나를 차지하고 사막의 한 부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대나 휴식을 취하라는 권유도 거절하고 폭발이 일어났던 곳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야윈 뺨을 사막의 메마른 모래바람이 어루만졌다. 하지만 사막의 거친 손길은 지친 세라피를 더욱 초최하게 만들뿐이었고, 바람은 부끄럽다는 듯, 재빨리 그녀의 주위를 떠나갔다. 언제나 윤기있고 탐스럽던 황금빛의 머리카락은 먼지와 모래로 엉켜 있었고, 연분홍의 입술도 그녀의 마음처럼 여기저기 갈라져 있었다. 아무도 유신이 무슨 임무를 띠고 예메른 군을 빠져나갔는지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알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세이람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내내 세라피를 피해 다녔고, 유신이 사라지자 세라피도 세이람에게 말을 걸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유신이 사라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안절부절 가만히 있지를 못하던 세라피는, 영력로가 폭발하는 섬광을 보고 그게 유신이 한 짓이란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워낙 어마어마한 폭발이었기 때문에, 뮬테인 백작을 비롯한 모두는 유신과 하이몬 백작이 살아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다만 세라피는 유신이 마룡 그라테우스를 쓰러뜨리는 기적을 바로 옆에서 보았기 때문에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리라 믿었지만 그녀의 곁에는 이야기를 하거나 의지할만한 존재가 아무도 없었다. 엘리시엘이라도 있었다면 서로 이야기를 하거나 위로라도 하면서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유신을 기다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모두가 죽었다고 절망하는 가운데 그녀 혼자 제정신을 유지한 상태로 그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너무 일찍 돌아가면 의심받을 거라 생각한 유신과 유메네스는 느긋하게 사막에서 쉬며 다크엘프들을 처리하며 늦장을 부리는 중이란 것을 상상력 빈곤한 엘프인 세라피가 알리 없다. 유메네스는 다크엘프들은 자신의 레어로 워프 시켰고, 오크들은 마룡산 근처 어딘 가로 워프 시켰다. 다크엘프들은 유메네스의 레어에서 평안히 지내거나 다른 곳으로 도망갈 것이고, 오크들은 시간이 흐르면 야생의 오크로 돌아갈 것이다. "세라피, 좀 쉬고 밥 먹어요." 밥이라기 보다는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취해야 하는 영양분에 가까운 먹거리를 들고 신시아와 세이람이 그녀가 있는 망루 위로 올라왔다. 셋이서 앉아 있기에는 비좁았지만 신시아와 세이람은 덩치가 큰 편은 아니고 세라피는 거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체구이니 그럭저럭 모두 앉질 수 있었다. 죽 비슷한 것이 든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그릇 하나가 한 사람 당 한 그릇이다. 힘없이 그 그릇을 바라보던 세라피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러지 말고 먹어요. 자꾸 아무것도 안 먹으면 몸이 버티질 못한다고요. 고집부리면 강제로라도 망루에서 끌어내릴 거에요." 그릇에서 눈을 돌려 신시아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세라피는 의아함을 느꼈다. 강제로 자기를 끌어내린다면 자기가 슬퍼할 것을 알면서도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서 거짓을 읽을 수는 없었고, 오히려 세라피를 걱정하는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 왔다. "선생님은 금방 오실거에요. 강한 분이시니 별 문제 없을 겁니다." 세이람과 신시아의 진실한 눈빛을 보자 세라피도 마음이 조금쯤은 따듯해지는 것 같았다. 그릇을 집어 든 세라피는 간신히 조금씩 먹기 시작했고, 세이람과 신시아는 속으로 긴 한숨을 삼키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벌써 사흘째다.... 아무리 자연과 조화의 혜택을 입은 엘프라 해도 영양상태도 부실한데 이 뜨거운 사막의 한 가운데서 망루만 지키고 있다가는 병이 날건데..... 선생님은 날 믿고 신시아와 세라피님을 부탁하고 가셨는데 실망시켜드릴 수는 없다. 오늘은 어떻게 해서라도 좀 쉬게 해 드려야지.' 신시아는 조잘조잘 예메른의 지금 상황과 앞으로 선택 가능한 전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세라피는 멍하니 있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래 사는 종족인 만큼, 혼자서 사색하는 것에 익숙하고, 혼자라는 것에서 그다지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혼자 있는 것이 더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였기 때문에 세이람은 더 가슴이 아팠다. 결국 신시아도 그녀에게 말 거는 것을 포기하고 묵묵히 맛없는 죽 비슷한 것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수색대파견은 아직도 계획에 없다고 하나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먼 곳만 바라보고 있던 세라피의 입이 갑자기 열리자 마치 유리인형이 이야기하는 것을 본 것 같이 깜짝 놀랐다.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폭발지점까진 하루거리도 넘어 보이고, 맨스콜피온이나 샌드웜의 습격을 피해 그곳까지 갈만한 전사가 없습니다. 저와 신시아를 포함한 소드마스터들은 지금 남아있는 병력을 지휘하고 지키기에도 빠듯해서 도저히 뺄 수 없어요." "그렇다면 어째서 유신은 간 거지요? 단순한 정찰보다 훨씬 위험한 임무를 단 둘이서 가다니요....." "글쎄요? 선생님이야 워낙 특별하니까....."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우리는 특별한 존재가 아닌 그렇고 그런 존재인걸요...." . . . . . 몇일간 잠수했으니 오늘은 연참으로.... 190화에 약간의 수정이 있었습니다. 190화 뒤에 나오던얘기를 삭재하고 4장의 마지막으로 붙여서 어색함을 줄인 정도의 수정이이지만.... 그럼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시고욤^^ 조금 더 다듬어서 다음편 금방 올릴께욤^^ 한사람의 목숨은 단지 그 사람 하나만의 것은 아니다. 세라피야 그럴 의도로 한 말은 아니지만, 나 하나 죽어서 뭔가를 해 보겠다고 하는 생각이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비꼬는 말이 되어 버렸다. 남은 사람들은 대체 어쩌란 말인가? 말문이 막힌 세이람이 헬프를 청하기 위해 신시아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대체 무슨 말인지도 이해 못하겠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세라피와 세이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현명하게도 그녀는 곳 자신이 대답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먹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결국 포기하고 세이람이 말을 이었다. "오늘쯤이면 대충 결정이 날겁니다. 진군하거나 회군하거나.... 회군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되지만...." 세이람의 말에 가뜩이나 창백한 세라피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회군이라니요? 설마......" '사막에서 어찌 얼굴이 하나도 타지 않는 걸까..... 신기한 종족이야....' 헛생각을 하느라 말하는 타이밍이 약간 늦어진 세이람이 허겁지겁 말했다. "보급도 식량도, 병사들의 사기도 한계입니다. 지원군이 온다고 해결될만한 문제가 아니에요. 지원군이 와봐야 지금의 지친 병사들은 오히려 발목을 잡을 겁니다. 차라리 원정대를 새로 조직해서 다시 오는 것이 더 나을 거에요." "그럼 유신은요?" "맨스콜피온과 샌드웜을 돌파할 만큼의 숫자를 떼어서 부대를 편성하여 수색한다면 모를까, 그 외에는 대책이 없군요." 세이람은 차분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목소리에 묻어 나오는 옅은 떨림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하면 되잖아요?" 세라피의 목소리에 원성이 묻어나면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병력을 그렇게 나누었다가는 각개격파 당할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냉정하지요? 그는 우리를 위해서......" "저는!!! 만약 회군한다면 혼자서라도 선생님을 찾아 볼 생각입니다." 세라피가 소리지르기 시작하자 세이람이 재빨리 그녀의 말허리를 자르며 말했다. "그리고 믿음직한 마법사가 있다면 저도 무척 좋을 것 같은데요?" 그의 말에 세라피는 소리치던 것을 멈추고 멍하니 세이람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세이람 역시 목숨을 바쳐서라도 유신을 찾을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세이람의 진실 된 마음이 느껴지자 한방울 두방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만....나만 걱정하는 것이 아니구나.......' 작게 흐느끼던 세라피는 마침내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신시아가 조용히 세라피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잠시 흩으러진 모습을 보여주던 세라피는 어느새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와 다시 지평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까처럼 생기 없는 모습이 아닌 좀더 기운차 보이는 평소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 세라피를 바라보던 세이람이 어깨를 한번 으쓱 하고는 망루 아래로 내려 가려고 할 때였다. 가만히 웅크린 자세로 망루를 받치고 있는 나무에 기대어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던 세라피가 벌떡 일어났다. "에?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망루의 난간을 잡고 몸을 쭉 빼어 먼 지평선의 한 점을 바라 보았다. 자칫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위험한 자세였지만, 그녀의 그런 자세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를 만큼 신시아나 세이람이 둔한 것은 아니다. 아니, 적어도 세이람 만은 그렇게 둔하지 않다.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빼고 바라보았지만 겨우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정확히는 아직 그 경지에 올랐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세라피와 신시아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막의 모래에 반사되는 강한 햇빛 때문에 눈이 아팠다. "뭐가 보여요? 설마 선생님인가요?" 세라피는 대답하지 않고 크게 웃더니 망루에서 뛰어 내렸다. 깜짝 놀란 신시아가 잡으려 했지만, 지금껏 기운 없었던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모래바닥에 착지한 세라피는 그녀가 바라보던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주둔지를 벗어나면 어떤 마물들이 모래 속에 숨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신시아와 세이람도 기겁을 하며 따라갔다. 하지만 평지가 아닌 사막에서 조화의 혜택을 입은 엘프를 따라가는 것은 아무리 소드마스터라 해도 무리한 일이다. 사막에서는 발이 모래에 빠지기 때문에 제 속도를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풀잎을 밟고도 달릴 수 있는 경지에 오른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 둘에게 그런 절정의 경지는 아직도 멀고 먼 이야기이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엘프인지라, 만일 그녀를 시야에서 놓치게 되면 이 넓고 모든 풍경이 비슷비슷한 사막에서 정말 대책 없어진다. 둘은 심장이 튀어나오도록 달릴 수밖에 없었다. . . . . . 잠수뒤 연참..... 겨우 해냈습니다.....ㅡ▽ㅡv;;; 마이너스 받은 편 뒷부분을 잘라서 4장의 마지막에 붙여서 어색함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좀더 세밀하게 늘려서 두회 분량으로.... 계속 수정수정 수정에 치여서 ......ㅜ_ㅠ 3월말 출판을 목표로 열심히 수정중입니다. 그럼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세욤^^ "유신!!~~ 우와아아앙~~ 엉엉" 거의 몸을 날리다 싶이 안겨드는 기세를 보고 뒤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무게중심을 급속히 앞으로 이동한 유신은 하마타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엘프는 뼈 자체가 인간보다 훨씬 가볍기 때문에 세라피 정도의 체구면 20kg 이 나갈까 말까하다. 때문에 무게 계산을 잘못 한 유신이 휘청한 것이다. 큰 소리로 울며 덥썩 안겨든 세라피를 안은 유신은 어쩔줄을 몰랐다. "대체 어디를 다녀 온거에요.... 엉엉" 외모야 어찌 되었든, 세라피는 500년 이상을 살아온 중년의 엘프다. 그런데 이렇게 어린애처럼 큰 소리로 울며 안겨드니 당황할만하다 "좋겠다..... 반겨주는 미인도 있고......" 유메네스가 눈꼴 시리다는 듯 빈정거렸지만 세라피는 이런 빈정거림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고, 유신은 한번 무섭게 째려 봤을 뿐, 그의 품에서 작게 떨고 있는 가녀린 새 같은 세라피를 달래느라 다른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놀려도 아무 반응이 없자 머쓱해진 유메네스는 먼 지평선을 바라보다가 모래를 발로 차서 날리는 등, 의미 없는 행동으로 무언의 시위를 벌였다. 유메네스가 시위를 하건 물구나무서서 뒤돌려차기를 하건 관심 없는 세라피는 유신의 품에서 마음껏 울고 난 후 고개를 들어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듯 유신의 얼굴을 작은 두 손으로 찬찬히 만져 보았다. 눈을 확인하고, 볼을 쓰다듬고 귀를 만져보고 머리카락도 쓸어본 다음에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는 듯 긴 한숨을 쉬었다. 어찌 보면 무척 에로틱한 장면이라 그녀가 한숨을 쉬며 유신의 얼굴에서 손을 치우자 다른 사람들도 세라피와는 좀 다른 의미의 긴 한숨을 내쉬며 안심할 수 있었다. 그녀의 여린 숨결이 얼굴에 정면으로 닫자 유신은 오히려 숨이 더 막히는 것 같았다. "우......부....부럽다....." 세라피를 놓칠까봐 허겁지겁 달려 온 신시아와 세이람이 막 유신을 발견하고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 순간에 세라피의 애무가 시작되었으니 둘은 그대로 굳어 버린 채 다가가지도 못하고 돌아가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자세로 멈추고 말았다. 세이람은 신시아를 데리고 자리를 피해주고 싶었지만, 사막 한 가운데서 대체 어디로 피한단 말인가? 그런데 이 눈치 없는 신시아가 '부럽다'는 야유에 가까운 감탄사를 내뱉자 세이람은 모래라도 파야 할 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한참 후 세라피가 유신의 품에서 떨어지자 간신히 고개만 꾸벅 숙여서 아는 채를 할 수 있었지만, 유신은 그보다 더해서 눈으로만 간신히 인사밖에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그의 몸을 빙 둘러보며 이상이 없는지 살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유신이 걸치고 있는 커다란 망토 때문에 살펴 보는 것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듯, 세라피는 그 망토를 뒤로 확 젖쳤다. 그리고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는 유신의 오른팔에 그대로 고정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오른쪽 팔뚝이 붙어 있어야 할 '공간'에 고정되었다. "어...세라피 이거는....." 유신이 급히 변명을 하며 망토로 다시 가렸지만, 그녀는 방해라는 듯 다시 망토를 치우고 잘려진 팔을 이리저리 만져보며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직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았으니 만약 보통 사람이었다면 사막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신도 꽤 고통스러웠지만 멍한 세라피의 황금빛 눈이 젖먹이 강아지의 무방비한 눈처럼 너무 귀여워서 하마타면 이 심각한 분위기에서 웃을 뻔하였다. 세라피가 유신의 팔을 잡은 채 그의 얼굴과 팔을 번갈아 쳐다보며 할말을 잃자 유신은 그녀의 주위를 환기시켜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야야.... 아파요. 세라피....."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엄살을 부리자 세라피의 눈동자가 하늘로 향했다. 무슨 일인가 하여 유신과 유메네스의 시선도 그녀가 향한 곳을 향하는 순간. "풀썩" 건초더미 위에 새끼양을 집어 던지면 날것 같은 소리를 내며 세라피는 새하얀 모래 위에 모로 쓰러지며 기절해 버렸다. . . . . . 네..... 짧지요...... 짧습니다..... 저도 잘 알고 있어요.... 돌던지지 마세염.. ㅜ_ㅠ 내용이 짤리는 부분이라 할 수 없이 좀 짧지만 이렇게 올렸습니다..... 이제 하누스로 돌아가서 흄에서 탈출한 두 기사도 만나야 하고, 전쟁준비도 해야 하고, 엘리시엘도 만나야 하고, 기타등등기타등등 할일이 너무나 많은 유신입니다. 저도 유신만큼이나 바쁩니다...... 출석은 친구들이 대출해 주고....ㅡ.ㅡ;; .....대지조사는 못가고.... 출판수정을 해야 하고, 일러스트하는 친구를 닥달해야 하고, 지도를 그려야 하고, 술을 마셔야 하고 마님과 놀아줘야 하고 숙제를 해야 하고 기타등등 기타등등..... 후기로 모자란 부분을 다 채웠다는.......ㅡ.ㅡ;;; 그럼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시고욤......저도 뻔뻔스럽게 이런말 하는 제 자신이 싫어져염... ㅠ_ㅠ 모두 좋은하루 되세요...... 죽음의 사막에서 전투가 끝난지 한달 하고 나흘이 더 지났다. 단 둘이서 적의 요새에 잠입하여 적의 대장을 제압하여 마물들과의 사막전을 승리로 이끈 유신과 유메네스의 영웅담은 다시 한번 전 대륙을 들끓게 했다. 하지만 유신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유명해 지는 것은 그가 바랬던 일도 아니고, 세라피는 팔을 잘라먹었다고 구박하고, 용신화랑 후보생은 찾지 못했으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여행을 한 것인지 답답하기만 했다. 소드마스터 중에서도 최강이라 칭송 받았던 뮬테인 백작도 용신화랑이 되기에는 어림도 없었고, 그 다음으로 강하다던 하이몬 백작은 유메네스의 뱃속에 들어가 있을 것이니 할 말이 없었다. 요 한달 간 궁정수석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서 팔은 재생했지만, 아직도 세라피는 유신을 볼 때면 팔부터 확인한다. 그것이 부담스러워 유신이 피하는 눈치를 보이자 세라피도 대놓고 팔 상태를 확인 하지 못하고 흘끔흘끔 눈치를 보면서 얼마나 나았는지를 체크했다. 근데 세라피는 엘프인지라, 인간처럼 체크하고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감출 재주가 없으니 그런 모습이 더욱 어색했다. 그래서 유신은 세라피를 대하기가 부담스러웠고, 유신이 세라피를 피해 다니니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주변 사람들에게 유신이 왜 그녀를 피하는지 물어보고, 인간의 감정에 대해 배우고, 고민하고, 여하튼 무지 고생을 해 겨우 유신이 세라피를 피해다니는 이유를 깨닫게 되자 나름대로 유신을 배려하여 팔의 문제는 건드리지 않기로 한 것인데 그게 오히려 더 부담스러운 것이다. 세라피가 여기저기 고생을 하며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배운다는 것을 전해들은 유신은 그녀가 자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이 더 미안하여 팔이 완전히 다 낳을 때까지는 세라피를 피해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아무리 궁정수석의사의 치료마법술과 의료술이 뛰어나다 해도 완전히 잘린 팔을 다시 재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기에 가깝게 그의 팔이 다시 자란 것은 유신의 몸이 창세신의 클론이기 때문이다. 사흘정도 지나자 조금씩 팔이 자라나기 시작했고, 거기에 마법적으로는 최고라 평가받는 골드드래곤 유메네스가 궁정수석 마법사는 발끝에도 따라오지 못할 최고의 치료마법을 걸어 주어 기본적인 재생은 순식간에 끝내 버렸다. 하지만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여길까봐 생각해낸 것이 이름이 있는 궁정의사를 끌어드리는 것이었다. 유신의 상처를 보러 온 그 의사를 트랜스상태로 만든 유메네스는 그가 유신을 치료했다는 강력한 암시를 준 후 트랜스를 풀었다. 이 기적적인 치료 덕분에 의료계와 마법계에서는 난리가 나서, 그 의사만 불쌍해 졌다. 어떻게 치료하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그를 보는 사람마다 대체 그 기적의 소생술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닦달하니 참으로 딱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의사가 고생하건 말건 이는 유신이나 유메네스에게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어쨌는 이제 유신은 하누스, 아니 전 대륙 최고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가 또 어떤 기적적인 모험을 할지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어버렸기 때문에 복잡한 그의 머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좋은 점이라면, 더 이상 귀족들이 유신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의 명성은 너무 찬란해 저서 함부로 모함할 수도 없을 정도가 되었고, 예메른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그를 빼가기 위한 물밑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특히 무를 숭상하는 나라인 예메른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유신에게 선물을 싸들고 찾아왔다. 뮬테인 백작이 완전히 유신에게 반해서 어떻게 해서든 꼭 그의 나라로 데려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유신이 머물고 있는 하누스 왕궁 구석의 작은 별궁, 별 장식이 없는 간편한 외출용 드레스차림의 이자벨 공주가 오랜만에 놀러왔다. "맙소사.... 요즘은 정말 얼굴 보기 힘들군요. 대체 뭐가 그렇게 바빠요?" 갑작스런 유신의 방문에 더욱 놀란 것은 유신이었다. "공주님, 이런 곳까지 왠일로......" "그다지 바쁜 것 같아 보이지도 않네요. 한가하게 집에 계실거면 가끔은 궁에도 얼굴을 비추는게 어떨까요?" "아...하하.... 야외 유격훈련이 어제 끝나서 오늘은 견습기사들에게 쉬라고 했거든요. 저도 할 일이 있고....." 사실 요즘 유신이 바쁜 이유는 그동안 미스티가 교육시켜 놓은 살육부대의 마무리 훈련을 봐 주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지만, 그런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흐음.... 요즘은 훈련도 미스티님에게 거의 맡겨놓는다는데.... 또 무슨 모험을 계획하고 있는건 아니겠지요?" 이자벨이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자 유신은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하기 바빴다. "그...그럴리가요. 요즘은 팔 치료를 다니느라..... 아참, 내정신좀 봐, 별것 없지만 차라도 내 오도록 하지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재빨리 유신이 딴청을 부렸다. 이미 움직이는데는 아무 불편 없을 정도로 근육도 어느 정도 붙기 시작했지만, 너무 빠르게 회복되었다고 하면 쓸데없는 의심을 살까봐 팔뚝에 감아놓은 붕대는 아직 풀지 않고 있었다. 이자벨은 잠시 더 그의 팔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팔도 불편한데 차라니요. 그냥 오랜만에 이곳을 구경하러 온 것이니 신경쓰지 마세요." 이제는 완전히 유신의 집이 되었지만, 왕궁 내에 있는 손님 접대용의 별궁 중 하나이기 때문에 장식이나 건축 재료는 모두 최상급의 것이었다. 그도 가능하다면 마음 편하게 왕궁을 벗어나 살고 싶었지만, 이자벨 공주가 누구도 함부로 간섭하지 못하게 할 테니 성에만 머물러 있으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결국 이곳에 눌러 앉게 된 것이다. 세라피와 엘리시엘도 함께 머무르려면 아무래도 궁쪽이 좋을 것 같아서, 별궁 중 가장 후미지고, 자그마한 것 한 채를 얻어 거기서 생활하기로 했다. 처음엔 귀족들이 반대하였지만, 그의 첫 등장이 워낙 강렬했던 터라 결국은 조금 더 두고보자는 의견으로 기울었다. 귀족들은 그에 대한 공주의 관심이 시들해 지면 내 칠 생각이었지만, 나날이 찬란한 명성을 쌓아가는 그를 이제는 성의 한 식구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유신의 집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엘리시엘은 값진 물건들이 잔뜩 쌓여있는 방을 발견하고 그 앞에 멈춰 섰다. 갑옷, 칼, 방패 같은 무구가 주를 이루었고, 보석이나 황금, 비단등 꽤 많은 양의 보물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방이었다. ".... 이게 대체 다 뭐지요?" . . . . 으윽....너무 늦었네요. 지금은 새벽 3시.... 헐... 내일도 첫교시부터 섭있는데.....ㅜ_ㅠ 오늘, 정확히는 어제 밤이군요. 출판수정을 대략 서른장 정도 하느라 늦었습니다. 덕분에 양은 아주 조금 더 많이 올렸다는..... 어제.... 아니 그제 잘라먹은 양만큼 더 올렸어염...ㅜ_ㅠ 그럼 모두 좋은 하루 됫고요..... 연참을 할 수 있을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그럼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작위를 받지 않은 객원참모라고는 해도 견습기사들을 가리키고 있으니 나라에서 월급이 나온다. 자세한 금액까지 이자벨 공주가 알리는 없지만, 여기에 쌓여 있는 물건들이 그런 박봉으로 구입 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는 은색으로 잘 손질되어 반짝반짝 광이 나는 풀플레이트메일 한 세트만 해도 유신이 받는 봉급으로 사려면 몇 년이나 걸릴 것이다. "아.... 저거요? 사막에서 싸웠을 때 예메른의 뮬테인 백작님하고 친해 졌거든요. 그분이 그때 정말 고마웠다고 보내 준 선물이에요. 하지만 저한텐 특별히 필요 없는 물건들이라 지금은 이렇게 쌓아 두고 있답니다." 단순한 선물을 저렇게나 많이 해줄 수는 없다. 사실 유신의 활약에 비하면 저 정도는 정말 약소한 선물이겠지만, 뮬테인 백작에게 작전 결과를 보고 할 때도 유메네스와 입을 잘 맞추어서 굉장히 축소하여 보고하였기 때문에 저렇게까지 엄청난 선물을 받을 정도는 아닌 걸로 되어 있다. 이자벨도 그렇게 전해들었으니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 잠시 할말을 잃었다는 듯 살짝 입까지 벌리고 보물들을 바라보던 이자벨 공주는 현기증이 난다는 듯 머리를 집으며 말했다. "저 선물을 주면서 아무 말도 안 하던가요?" 물론 아무 말도 안 했을 리 없다는 걸 모를 이자벨이 아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 보았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 하누스의 신하가 아니라면 예메른의 황제를 위해 일할 생각은 없냐고 물어 보더군요. 하지만 공주님도 아시다시피 전 그런걸 무척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거절했어요." 유신의 어리숙한 대답에 이자벨은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어리숙함을 워해머로 내리쳐서라도 깨닫게 해 주지 않으면 이런 뇌물성의 선물도 덥석덥석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골치가 지끈거렸다. 결국 좀 피곤한 일이기는 해도 뇌물과 선물의 차이에 대해 차근차근 가르쳐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거절했더니 저것들을 두고 갔어요?" "부담 갖지 말고 한번 놀러 오라고 했습니다. 집도 마련해 줄 테니 얼마든지 오래 와서 머물러도 좋다고.....저 보물들은 사막에서의 은혀를 갚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더군요. 아니면 예메른으로 올 때 여행 경비로 쓰거나....." 지금의 하누스에서 대해주는 것과 같은, 아니 더 편하고 자유로운 대우를 해 줄테니 하누스를 떠나 예메른으로 오라는 제안이 아닌가? 하지만 저 멍청한 남자는 그런 자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이...이남자 혹시 백치 아니야?' 차라리 뇌물을 준 예메른의 사신이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가르쳐 주기로 마음을 먹긴 했지만, 막상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드워프의 미로 속에 들어온 것처럼 답이 보이지 않았다. ".....공주님? 무슨 생각을 하세요?" 질문해 놓고 멍하니 딴 생각에 빠져 있는 공주를 보자 유신도 약간은 어이가 없어서 그녀의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다. "무슨 생각 하느냐구요? 유신이 하두 멍......" 그녀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멍청이란 말을 꾹꾹 눌러 담았다. 저 순진무구하다 못해 백치미가 줄줄 흐르는 눈동자에대고 이야기 해 봐야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싶어서였다. "멍? 멍이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하아.....멍하니 기운이 없어 보인다고요."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고 있는 것이 한심하게 느껴진 이자벨은 폐가 쪼그라 들 정도로 깊은 한숨을 내쉬곤, 빨리 이야기를 진행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선물은 받지 않는 게 좋겠어요. 이렇게 큰 선물을 그냥 받는 것은 아무래도 예의가 아닙니다. 자꾸 받다보면 어느새 그것이 구속이 되어서 거기에 휘둘리게 되거든요. 제 생각에는... 그래요, 일단 이 선물들을 예메른으로 돌려보내는 게 좋겠어요. 돈이 필요하다면 제가 이만큼의 가치가 있는 보물들을 드릴게요. 알겠죠?" "아....아니요. 저도 돈은 필요 없어요. 다만 예메른에 찾아가지도 못하는데 선물을 준 성의까지 무시해 버리는 건 너무 하는 것 같아서 받은 거거든요." 사실 유신이 실버스타군의 사령관으로 있을 때 받았던 선물은 이런 자잘한 것들이 아니었다. 이곳보다 경제규모가 수백, 수천 배나 큰 만큼, 뇌물이 아닌 단순한 예물이나 선물도 엄청났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선물 받는 것에 대해 별 거부감도 없었고, 그렇게까지 큰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다. 한창 이문제로 씨름을 하고 있을 때 마침 예메른의 사자가 또 찾아 왔다. . . . . 네...그렇습니다.... 늦고야 말았습니다.... 연참한다고 큰소리뻥뻥 쳐놓고 연참은 커녕 잠수를 하다 겨우 일어났습니다...ㅜ_ㅠ 돌에 맞기 전에 변명을 하자면.... 출판 수정이 힘듭니다....짱돌 내려 놓으세염.. ㅜ_ㅠ 하루 평균 40장의 수정을 봐서 그저께 1권 분량을 넘겼습니다.... 2권도 절반정도 수정 했으니 화요일 이후에는 다시 부지런히 올릴 수 있을것 같어염....^^;; 수정은 무척 잘 되었습니다. 제가봐도 재미있어염..^^;; 헤헥 저쪽에서 바위를을 집어드는건 파여냠?....ㅡ▽ㅡ;; 여지껏 쓴 분량이 두권 반이 조금 안되더군요. 으윽.... 너무 느리죠? 그래도 정말 좋은 글을 선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니 많이 기대해 주세욤. 그럼 좋은 주말 되셨기를 바랍니다^^ '정말 질리지도 않고 잘도 찾아오는구나. 감히 내 소유의 것을 빼갈려고? 어림도 없지.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 겠어.' 이자벨의 일반인과는 많이 다른 특수한 사고체계는 이미 유신을 그녀의 베스트콜랙션 중에서도 최고의 상품으로 등록하고 있었다. 그녀는 외교용의 화사한 미소를 입에 걸고 직접 그 사신을 맞이하였다. 눈치는 없어도 주변의 미묘한 살기를 읽는 것은 귀신같은 유신이다.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기 시작하며 뭔가 일이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본능적인 경보가 그의 머릿속을 울렸다. 이자벨 공주는 국제적으로도 워낙 유명한 터라, 그 사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선물을 보낼 때마다 실은 내색하지 않고 넙죽넙죽 잘 받는 유신을 보고 일이 거의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사신은 난대 없는 이자벨의 출현에 하얗게 재가 되어 버렸다. "안녕하세요. 아도키 외교관님, 대체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걸까요?" 그는 절망했다. 이자벨 공주는 그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아....하하 이자벨 공주님,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유신경이 이번 사막의 전투에서 예메른 제국을 위해 힘써주신 것이 너무 감사해서 작전의 책임자였던 뮬테인 백작님이 선물을 보낸 겁니다. 아....하하하" 그의 변명에 이자벨의 눈꼬리가 가늘어지면서 왼쪽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감히 변명을 한다 이거지?' 그의 콜랙션을 몰래 빼가려고 한 주제에 되도 않는 변명까지 하고 있으니 이자벨은 더욱 화가 났다. "오호....그렇군요. 전 보물의 양이 하도 많아서 혹시 예메른의 황제께서 보내신 건 아닌가하고 생각했거든요." 외교관의 제 일 원칙은 철면피, 두 번째는 포커페이스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딱 걸렸다고 밖에 표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체 무엇이 통하겠는가? "아...하하 물론 황제폐하께서도 유신경에게 감사를 표하셨고....." 거기까지 들은 이자벨의 입가에 고양이같은 미소가 번졌다. 단순히 감사를 표하기 위해 보낸 선물이라고 분명히 말했으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변명의 폭이 대단히 좁아졌기 때문이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하나하나 예메른의 외교관이 빠져나갈 구멍을 막은 후 천천히 조여서 말려도 되는 일이다. "응? 이자벨 공주님 오셨어요?" 뜻밖에도 예메른의 외교관을 구한 것은 세라피였다. 2층에 있었는지 갈색의 푹신한 카펫이 깔린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던 세라피는 난간의 끝에 기대어 이자벨에게 조금은 피곤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이자벨은 그녀가 평소에도 하얀 그녀지만, 오늘따라 더더욱 하얘서 창백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세라피 님이군요. 계셨는지 몰랐네요. 그런데 안색이 별로 안 좋은데요? 어디 아픈거 아니에요?" 세라피가 너무 기운 없어 보이는 게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자 이자벨은 예메른의 외교관은 잠시 내버려두고 세라피에게 집중했다. 유신은 근래 그녀를 피해 다녔기 때문에 뻘줌한 상태로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이자벨이 보기에 세라피의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요... 별 일 없어요. 조금 어지러워서 집에서 쉬던....." 거기까지 겨우 말한 세라피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우왓!! 세라피 왜그래요?" 계단까지의 거리도 꽤 되었고, 세라피가 쓰러질 기미를 보인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기 전에 유신은 벌써 세라피를 부축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자벨과 아도키는 세라피가 쓰러진 것보다 유신의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버린 무지막지한 스피드에 더 놀랐다. "세라피!! 세라피!! 괜찮아요?" 근래에 기운이 없어 보이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쓰러진 그녀를 부축한 유신은 어쩔 줄을 모르며 세라피의 이름만 불렀다. "이.....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요?" 이자벨도 당황하여 세라피의 곁에 왔지만,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만 흘릴 뿐 눈을 뜨지 못했다. "의사를..... 공주님 의사를 불러 주세요."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일국의 공주에게 명령하다니.....' 아도키는 유신의 그런 안하무인 적인 태도도, 그에 따르는 이자벨 공주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자벨 공주는 체면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의사를 부르기 위해 뛰어 나갔다. '맙소사.... 이렇게 될 때까지 몰랐단 말인가? 왜 이렇게 몸 안의 코어의 흐름이 엉망인거야? 여지껏 별다른 조짐이 없었는데....' . . . . . 새벽 5시가 다 되어 가네요..... 으윽... 이렇게나 늦다니...ㅠ.ㅜ 의자를 샀습니다. 무려 16마넌이나 하는 듀오백.... 편하긴 정말 편하네요....　　;; 오랜만에 컴터 게임도 하나 사고, 서점에 가서 책도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문화생활을 한것 같아 기분이 좋으네요^^ 특히 무라카미하루키의 소설이 많이 보여서 매우 기뻤습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 이후로는 읽지 못했거든요. 다음편이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스푸트..... 의 다음편은 아직 안나온것 같고, 대신 내겐 천사같은 그녀나 언더그라운드같은 소설이 보이더군요. 으음..... 꼭 보고 싶은데 볼 시간이.... 겜은 건담 지 제네레이션을 샀는데... 겨우 오프닝만 봤습니다. 오늘까지 2권 수정을 완료하해야 하니.... 하지만 저같은 경우는 피곤하거나 멍하면 결코 좋은 내용을 쓸 수 없기 때문에 밥을 굶더라도 잠은 자야 해요...ㅜㅜ 으윽 주절주절 말이 많았네여.... 그럼 좋은 하루 되시고욤^^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와당탕거리는 소란과 함께 궁정수석의사인 백마법사 알버트가 뛰어들어왔다. 무슨 마법 연구를 하다 왔는지, 녹색의 마법 연구복은 시약이 튀는 것을 방지해 주는 앞치마 부분에 얼룩이 가득했고, 부분적으로는 탄 곳도 있었다. "공주님, 대체 어디를 다친 겁니까? 제발 늙은이 좀 놀래지 않게 조심해 주세요!" 세라피가 아프다고 하면 늦장 부릴까봐, 이자벨은 자신이 아프다고 거짓 전령을 보냈었기 때문에 겨우 10분만에 궁정수석의사가 뛰어 온 것이다.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 본 알버트는 쓰러져 있는 세라피와 그녀의 옆에서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이자벨 공주를 보고 나서야 아픈 것이 공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허억, 허억, 후우......" 숨을 가다듬으며 크게 한숨을 내쉰 알버트는 괜히 뛰어 왔다는 듯, 툴툴거리며 천천히 세라피의 주위를 돌면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런, 공주님이 아픈 게 아니로군요. 아무리 급한 환자가 있다고 해도 그런 거짓말을 하면 안됩니다. 어디 보자..... 엘프가 아프다니... 정말로 드문 경우로군요." 특별히 진맥을 살펴보는 것도 아니고, 마법적으로 뭔가를 알아보는 것도 아니니 유신이 보기에는 그냥 딴청을 부리는 걸로 보였다. 알버트가 도착할 때까지 10분 정도를 기다린 것도 유신으로썬 몇 시간을 기다린 것처럼 길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의사가 늦장까지 부리니 눈에서 살기가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도 바보는 아닌지라 의사를 닦달하지는 않았다. 저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대해 대단히 높은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싫은 소리를 했다가는 본전도 못 건지리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법사가 시간 끄는 것이 너무 길어진다고 생각하자 그도 어쩔 수 없이 뼈마디에서 우드득거리는 살벌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유신의 표정은 냉정하게 보일 정도로 무표정했지만, 꽉 쥔 주먹에서 한방울 두방울 피가 배어 나올 만큼 열 받아 있는 상태였다. 마침내 유신이 실력행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갑작스럽게 알버트의 입이 열렸다. "설마 설마 했는데....지금 이엘프 아가씨는 마나 카오스상태로군요. 흐흠... 설마 이런 상태에 빠진 엘프를 보게 될 줄이야....." "무슨 병인지 알고 있습니까?" 유신은 알버트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거칠게 물었다. "좀 진정하게나. 이런 늙은이한테 그렇게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서 뭘 하겠나? 환자에게 안 좋을 뿐이야." 험악한 분위기의 유신쯤은 가소롭다는 듯, 노 마법사는 나이를 제대로 먹은 자 특유의 마이페이스 적인 분위기로 유신을 떼어놓았다. "마법이나 의술로는 고칠 수가 없네. 이상하게 마나브레이크에 걸리면 마나를 통한 치료가 통하지 않는단 말이야....." 아마도 이 마법사도 마나와 코어의 구별을 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마나의 소진은 마나로 치료할 수 있지만, 그보다 훨씬 미묘한 코어에 이상이 생기면 비슷한 성질의 코어를 주입해 주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마법계에선 마나와 코어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마나브레이크에 대한 대책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마법계에선 물질계처럼 코어를 팍팍 소진하는 사람이 극소수의 소드마스터를 제외하곤 없었으니 그런 연구가 적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럼 세라피는 어떻게 되는 거지요?" "어떻게 되다니? 당연하지 안는가? 죽는 거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알버트의 무성의한 태도에 유신과 이자벨은 모두 돌이되고 말았다. "이익" 굳어있던 유신이 정신을 차리고 달려들려는 찰나, 다행이도 이자벨이 나서 주었다. :알버트님, 그만 놀리고 제대로 말해 주세요. 그렇게 여유있게 말씀하시는 것 보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군요. 점점 심술만 느는 것 같아요." 공주의 핀잔에 노 마법사는 음흉하게 씩 웃으며 대답했다. "허헛, 공주님도 정말 많이 느셨군요. 겨우 몇 년 전만 해도 조금만 놀리면 눈물을 뚝뚝...." "자, 자 쓸데없는 말은 그만 하도록 하지요. 나참, 마지막으로 운 것이 6년전이라고요. 그 어린 소녀를 놀려서 울린게 그리 즐거우셨을 줄은 몰랐네요." 이자벨이 한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허리를 끊자 알버트는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흰 수염이 무성한 얼굴을 조금 씰룩이더니 조금은 진지한 태도로 돌아왔다. "허헛 저 젊은이가 하도 귀여워서 조금 놀려준 것뿐입니다.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고칠 수 없는 것은 사실인데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요?" . . . . . . 정말 오랜만에 한편 올렸군요..이제 오랜만에 올린다느 이야기 하기도 죄송스럽다는....ㅡ_ㅡ;; 오늘은 연참 하도록 할께염......;; 조알이 업뎃이 됬다는데.... 머가 바뀌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군요... 낼부터는 정말로 정상연제 합니다. 연참 광참 기대하셔도 좋아염!! 그럼 모두 좋은 하루 되시고욤^^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요?" 방법이 있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짝 옆으로 다가와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쳐다보는 유신의 가증스런 태도에 질렸다는 듯, 헛웃음을 삼켰다. "허헛, 뻔한 것 아닌가. 엘핀서스로 가면 되지." "엘핀서스로요?" "그렇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몰라도, 저 아가씨의 몸에 흐르고 있는 기본적인 마나가 엉망으로 꼬여 있네. 조화의 혜택을 입은 엘프가 마나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다니.....엘핀서스는 엘프에게 최적화된 가장 축복 받은 장소이니 거기로 가야 할걸세" "그....그럼 엘핀서스에 데려가기만 하면 나을 수 있는 건가요?" 초롱초롱 두 눈을 빛내며 물어보는 유치한 질문에 알버트는 한편으론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론 이 빈곤한 상상력을 가진 인간이 불쌍하기도 했다. "자넨 음식점에만 가면 배가 부르나?" "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죠?" 난데없는 음식점 얘기에 유신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의 센스 없음이 놀랍다는 듯, 한심하단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젖던 알버트가 다시 물어보았다. "자넨 침실에 들어가면 피로가 풀리나?" 점점 뜬금 없는 소리만 해대는 알버트의 말에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쳐 봤지만, 유신의 날개는 병아리 날개만큼이나 작았다. 기껏 생각해낸 것이 침실이라면 엉큼한 짓을 하여 피로가 풀리지 않고 피곤해 질 수도 있다는 것 정도였지만, 대체 그것이 엘핀서스하고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자네는 지능이 떨어지는 것 같군. 식당에 갔으면 음식을 먹어야 배가 부르고, 침실에 들어갔으면 잠을 자야 피로가 풀릴 것 아닌가? 엘핀서스에 간다고 어찌 낳겠나. 엘핀서스에서 치료를 받아야 낳지." 겨우 침실에서 낮 뜨거운 장면을 생각한 게 전부인 유신은 정말 오랜만에 자신의 눈치 없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사실 그 정도 농담도 이해 못할 만큼 멍청한 유신은 아니지만, 세라피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이상한 쪽으로 상상을 한 것이리라. "맙소사.... 실험에 쓰는 원숭이도 자네보단 상상력이 뛰어날 것이야." 분하긴 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없는 조용히 있었다. "잘 알겠으니 그만 하시죠." 볼멘 소리로 툴툴대 봤지만, 알버트는 별로 미안해하는 기색은 아니었고, 유신도 그가 미안해 하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그냥 이야기를 돌리기 위해 말허리를 자른 것이었고, 그런 그의 의도는 성공했다. "그건 그렇고, 대체 어쩌다 저리 된겐가?" 유신은 그녀가 이렇게까지 갑자기 아플만한 이유를 생각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사막에서 그녀가 무리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건 벌써 한 달도 더 된 이야기이다. 사막에서 돌아올 때도 꽤 먼 거리를 여행한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처럼 아파할 만한 조짐을 보이진 않았기 때문에 사막에서 때문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으니 사막에서의 전투를 간단하게 말해 주었다. "한달쯤 전에 사막에서 굉장히 고생하기는 했지만, 그건 벌써 오래전 이야기고, 그동안 별 탈도 없었는데요?" "흐흠.... 인간에겐 한달이나 전의 이야기지만, 엘프에겐 겨우 한달전의 이야기라네. 아마도 사막에서의 후유증 때문인 것 같군. 그래도 두달정도 푹 쉬었으면 마나브레이크에 걸릴 정도는 아닐 건데....." 그 대답을 해준 것은 제법 날카로운 가시가 들어가 있는 어투의 이자벨이었다. ".... 푹 쉬질 못했거든요." 세라피가 유신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는, 그런 쪽으로는 유신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문외한인 이자벨까지 알 정도였다. 유신은 이자벨의 한마디에 날카로운 화살에 맞은 작은 산짐승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성에 있는 마법진을 사용하면 금방 엘핀서스로 갈 수 있을 겁니다. 세라피는 엘프들의 중요 대사 자격으로 하누스에 있는 것이니 마법진을 써도 되겠지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예의바르게도 꾸벅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한 유신은 세라피를 성으로 데려가기 위해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도 체구가 작은 편이라 세라피의 무릎과 목을 받쳐들고 가슴 깊숙이 안았지만, 그녀의 고개가 자꾸 아래로 꺾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유신은 상체를 뒤로 크게 져쳐 그녀의 몸이 유신의 위에 기대지도록 하고, 팔꿈치를 머리 쪽으로 빼서 고개가 떨어지지 않게 할 수밖에 없었다. 굉장히 불편하고 불안해 보이는 자세였지만, 유신 본인은 정작 불편한 것 같지 않았다. 세라피가 워낙 가벼운데다 살 닫는 부분이 많으니 즐거울 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을 부를까요? 아니면 직접 옮기시게요?" 이자벨이 친절하게 사람을 불러준다고 했지만, 유신이 그걸 반길리 없다. "아..... 아니요. 제가 옮기는 것이 안정하고 빠를 겁니다." "물론 그렇겠지요." 얄밉게 한쪽 입술 끝만 말아 올려 웃어준 이자벨은 항복한다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세라피와 유신은 하누스 궁내에서 닭살 커플로 꽤나 유명하다. 사실 세라피가 유신을 일방적으로 따라 다니는 것이지만, 어쨌든 거의 공개커플로 인정받고 있을 정도다. 유신도 그럭저럭 귀엽게 생긴 편이고, 세라피야 말할 필요도 없으니 틀림없이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특별히 공공장소에서 애정행위(?)를 심각하게 하는 편도 아니고, 남들이 듣기 괴로운 사랑의 밀어를 눈치 없이 속삭이며 다니는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쿨해 보일 정도로 그런 쪽으론 담백함에도 닭살 커플로 분류되는 이유는 너무 쿨하다 못해 앙큼스러워 보일 정도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라. 세라피처럼 아름다운 엘프에게 한눈에 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늙지도 않고, 심성도 착하며 목소리도 예쁘고, 늘 무방비하게 방실방실 웃고있기 때문에 다가가기가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녀가 한가롭게 정원이라도 산책하고 있으면 새들이 날아들고,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들이 그녀의 어깨나 머리 위를 뛰어 다니며, 어떤 화가가 그린 것보다도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그럼에도 누구도 감히 세라피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장애물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유신이다. 오크 수십마리와 오우거까지 베어버리고 세라피를 구출해 낸 그는 키메라를 죽여서 공주를 구하는 위용을 보여 주었다. 미스티처럼 무시무시한 기사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고, 엘핀서스 전투에서는 뛰어난 작전수립 능력과 전투지휘능력, 그리고 작전을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추진력까지 보여 주었다. 마침내는 대륙의 비극이라 불리는 마룡 그라테우스를 쓰러뜨려 드래곤슬레이어라는 찬란한 칭호를 얻었고, 죽음의 사막에서도 큰공을 세워 예메른에까지 그 무용담을 떨쳐 하누스의 위상을 높였다. 즉 하누스 역사상 최고의 영웅인 것이다. 왕궁의 잡일을 하는 시녀부터 대 귀족 집안의 금쪽 같은 여식까지 '유신'이라는 이름에 설레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 둘이니 만큼 정식으로 교제를 한다면 차라리 모두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저 둘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니까.....' 혹은 '끼여들 여지가 없을 만큼 잘 어울리니까....'라는 생각으로 평범한 사람들은 동화 속에서 나와 현실에서 부대끼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가증스런 커플은 마치 둘은 친구 이상은 절대로 아니라는 듯, 그 이상의 진도를 나가지 않고 있었다. 세라피야 유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지만, 유신은 세라피를 지켜야 할 레이디, 또는 친한 벗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단지 가증스런 내숭일 뿐이었고, 그럼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그 둘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동화와 현실의 괴리 속에서 괴로워해야 했다. 그런 괴리감이 점점 커지면서 질투가 되었고, 미움이 되었고, 그런 온갖 종류의 우울한 정념이 응축된 단어가 '공인 닭살 커플'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했다. 그런 초유의 관심을 받고 있는 유신이 세라피를 안고 달려가고 있으니 틀림없이 관심을 받아야 될 것 같은데, 궁 안의 사람들은 모두 다른 일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잘된 일인가? 이틈에 엘핀서스로 가면 되겠군. 미스티에겐 공주님이 잘 말해 주겠지.'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며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지하로 내려가려고 할 때였다. "유신,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저 멀리서 유신을 발견한 미스티가 헐레벌떡 뛰어 오고 있었다. 망토가 휘날리는 모양이 거의 지면과 수평이 될 정도였지만, 전혀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강철로 된 덩치가 아무소리도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은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허어....과연 카린.... 저런 쇳덩어리가 달리는데 아무 소리도 안 나다니....'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우리편이니 믿음직하다. "무슨 일인데 그래?" "성의 알현실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흄 대륙에서 탈출한 생존자가 왔어요. 이야기를 들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흄에서의 생존자라고?" "예, 기사대장들을 비롯한 고급 귀족들 전부에게 소집 명령이 떨어졌어요. 참석 할 수 있는 동맹의 대사들도 참석해 달라고 한 모양입니다. 세라피님도 마침 함께 있군요. 잘되었습니다. 같이 가면 되겠네요. 근데 왜 대낮부터 낮 뜨겁게 안고 있는 거예요?" 미스티의 상식으로는 엘프가 아픈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둘이서 이제 남들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로 했나보다고 생각했다. ".......아파서 그래." "예? 아프다고요? 세라피님은 엘프 아닌가요?" "아아 그것보단 난 엘핀서스로 가야 해. 미스티가 얘기를 듣고 녹화해 줘. 엘핀서스에 다녀와서 천천히 들을게." 유신이 생존자의 이야기를 팽개치고 엘핀서스로 가겠다고 하자 미스티의 푸른 눈이 놀랍다는 듯 둥그렇게 커졌다. "당장 죽을 정도가 아니라면 이야기를 듣고 움직이는 편이 낳을 것 같은데요? 세라피님을 옮기는 것 정도라면 다른 사람을 시켜도 좋고....." 흄 대륙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미스티로서는 그런 기회를 차버리겠다는 유신이 이해가 되질 안았다. 유신 더 실버스타. 그가 지휘해 왔던 많은 전쟁기록을 살펴보건대, 결코 소를 위해 대를 희생했던 전례가 없었다. 아무리 친하다고는 해도 겨우 일개 엘프 때문에 앞으로의 대 흄 작전 전체를 좌우하게될 중요한 이야기를 놓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는 비단 마법계의 문제만이 아니다. 헬마스터 베리알이나 그녀의 누이인 유진의 심복, 백호 광무까지 관련된 일이니 물질계에도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잘은 모르겠지만.... 세라피를 지켜야 한다고 내 안의 무언가가 말하고 있어. 그녀를 지키는 것이 앞으로의 싸움에서 중요한 변수가 될 것 같은 무언가가...." "..... 카린님은요?" 귀후비게처럼 가느다랗게 변한 미스티의 광구를 보면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세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 이건 예감이야. 이봐 미스티!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잘 설명할 순 없지만, 세라피는 나와 어떤 운명적인 실로 연결되어 있어. 제발 이상한 상상은 하지 말아 줘. 좋아한다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 예감.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면 웃어넘기거나 미친놈이란 소리를 할 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신이 그런 얘기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굳이 변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신은 그런 문제로 거짓말하는 분이 아니니까요. 대충 알겠습니다. 성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분의 예감이니 틀림없이 뭔가가 있겠지요." "후우.... 고마워." 미스티는 어떻든 지간에 이해시켰지만, 유신은 어지간한 중상급 마물들과 싸운 후 보다도 훨씬 피곤함이 느껴졌다. 미스티를 이해시키는 것이 힘든 게 아니라 유신 자신을 납득시키는 게 힘들었기 때문이다. 왼쪽으로는 잘 손질된 나무들과 장미들이 만발한 정원이 보였고, 정원을 손질하던 하녀가 미스티와 유신을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하녀는 오늘도 어제와 같은 평범한 날을 살고 있는 것이겠지라는 생각이 들자 자신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기묘한 생각이 언뜻 스쳤다. 유신은 다 부질없다는 듯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눈을 감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내 선택은 옳다. 망설이지 않아.' 마음을 다잡은 그는 아무 미련 없다는 동작으로 몸을 돌려 게이트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지하의 홀로 향했다. 비상시 대규모의 군대를 이동하게 될 것을 상정하여 만든 홀이라 둘만 옮기기에는 큰 규모의 게이트 마법진이 있었다. 아치형의 기둥들이 실내를 넓게 확보하면서도 적의 공격에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아름다움보다는 실용성을 목표로 설계된 듯 기둥에는 별다른 장식이 되어 있지 않았고, 지하라고는 해도 왕궁 안에 있는 시설물치고는 초라해 보였다. 사방에는 야광석이 밖혀 있어서 횟불이 없이도 그럭저럭 글자는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밝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입구부분은 무장한 병력6명 정도가 한꺼번에 통과 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는데, 게이트를 통해 한꺼번에 빠져나갈 수 있는 인원이 6명 정도이기 때문이다. 엘핀서스 전투에서 부대의 빠른 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하게 된 하누스는 이런 지하 게이트 시설물을 성의 곳곳에 12개정도 만들었다. 엘핀서스의 빛의 나무 주변에 하나, 후길산맥 안에 있는 지하의 드워프 왕국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하나, 예메른에도 하나, 기타 흄이 침공 가능한 해안선이나 중요 곡창지대인 이리나대평원과 각 중요 군사거점에 게이트마법진을 그려 두었다. 라일로스 대륙의 군사거점뿐만 아니라 동맹간에도 원활한 이동을 할 수 있도록 게이트 시설을 늘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대륙의 발전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될 것이다. 흄에서 탈출한 생존자가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 12개의 게이트는 지금까지 계속 가동 중이었다. 근래에는 흄의 침공이 뜸해서 동맹간의 군사적 이동이 잦지 않았기 때문에 게이트를 담당 마법사는 별로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근데 갑자기 게이트 사용이 늘었으니 꽤나 짜증스러웠는지 유신이 게이트를 이용하겠다고 하자 잠시 툴툴거리고는 엘핀서스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어 주었다. 별다른 게이트 이용 허가서도 없이 극비중의 극비인 게이트 마법을 이용할 수 있을 만큼 하누스에서 유신의 입지는 많이 좋아졌다. 파격적일 만큼, 군사적인 문제에선 유신이 신뢰받고 있다는 뜻이다. 마법사의 음울한 주문이 시작되자 바닥에 그려진 마법원의 마법문자가 하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환한 빛 속에서 왠만한 성의 정문만큼이나 커다란 빛의 문이 열렸다. '으아...... 역시 대규모 군사이동용 게이트......겨우 둘이 쓰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군.' 둘만 통과하면 되니 잠시만 열었다 닫으면 되겠지만, 규모가 규모인 만큼 그 마법사는 굉장히 힘이 들었을 것이다. 유신은 세라피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마법을 시전 해준 마법사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게이트 속으로 들어갔다. . . . . . 오늘은 연참이네요...　　 그럼 많이 사랑해 주세욤^^ 잠시 후 보라색 망토에 간단한 월계수 모양이 장식되어 있는 약식의 왕관을 쓴 하누스의 국왕 듀크리온 하누스3세가 왕자 둘과 함께 들어왔다. 마른 체격을 커버하기 위해서인지 갈색의 굵은 수염을 턱 전체에 길렀지만, 그다지 강인해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눈은 총명해 보였고, 두 왕자 역시 왕족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모두가 일어나서 예를 표하자 가볍게 목례로 인사한 그는 그의 체구에 비해 지나치게 커 보이는 황금색의 화려한 의자에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그가 앉고 나자 다른 사람들도 자리에 앉았다. 형식적인 인사는 이미 왕과 만나서 다 한 듯, 듀크리온이 작게 눈짓을 하자 그 기사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제 소개부터 간단히 하겠습니다. 저는........" 그 기사의 보고는 놀라운 것이었다. 완전히 암흑의 대륙이 되어 버린 줄 알았던 흄에도 인간을 비롯해 몇몇 아인종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놀랍군요. 그럼 생존자들은 얼마나 되지요?" 언제 왔는지, 듀크리온의 옆에 선 이자벨이 물어 보았다. "마물들은.... 인간들끼리 인간의 마을을 이루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 마을이 몇 개나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있던 마을에는 대략 2000명 가량이 모여 살았습니다. 혹독하게 수탈 당하기는 했지만, 근근히 살아갈 정도로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 추악한 놈들은 인간과 다른 아인종을 이용해 무기를 만들거나 광산일 같은 힘든 노동을 시켰습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다크블러드의 무장만 봐도 절대 하급의 몬스터가 만들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잡혀있는 다른 아인종이 있다고 했지요? 무슨 무슨 종족이 있습니까?" "인간들이 주를 이룹니다. 저는 사로잡힌 후 계속 광산 노동을 했으니 다른 아인종을 만나볼 기회는 없었지만, 다른 포로들 중에서 드워프와 엘프, 수인족을 본 사례가 있습니다. 드워프들은 공방에서 흄을 위한 갑옷의 원형 제작이나 장교급의 마물들이 사용할 고급 무구를 생산하고, 수인족들의 경우는 마물들에게 길들여져 마물화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인간들은 그곳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솔직히 지금은 흄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흄과의 전면전을 벌일만한 여력이 없다는 게 정확한 말이겠지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냐구요?" 지금껏 차분히 이야기 하던 기사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마물들은 귀중한 노동력인 인간을 함부로 죽이진 않지요." 그곳에 모인 대 흄 동맹의 일원들을 죽 돌아본 그 기사가 말을 이었다. "저에겐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벌써 15년 전의 이야기로군요. 그녀는 원정군 소속 마법병단의 백마법사였습니다. 언제나 낙천적이고 남을 위해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 여자였습니다. 전쟁에서 패해 마물들에게 사로잡혀서도 그녀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지요. 위험한 광산 일을 하는 만큼 부상자가 꽤 많이 나왔습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아무리 지쳐 있어도 다친 사람을 위해 기꺼이 그녀의 마나를 사용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기사는 힘들다는 듯 그의 앞에 있던 꽤 큰 물컵에 들어 있던 물을 한번에 들이켰다. "몇 년... 아마 포로가 된지 3년 정도 지났을 때라고 생각되는군요. 마물들은 인간들만의 마을을 이루게 해 주어서 처음에는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고된 노동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살아는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그녀와 결혼했습니다. 솔직히... 행복했지요. 아무것도 없는 곳이니 만큼 욕심도 없었습니다. 배가 고프고, 육체적으로 힘들었어도..... 그냥 그뿐이니까요. 하나, 둘 결혼하는 커플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마을도 활기차졌습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적응하고 있었던 거지요.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래 갈 수가 없었지요. 놈들은....놈들은 우리를 사육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이가 젖을 뗄 때쯤 되자 모두 데려가 버렸지요. 두 번째 아이까지 그렇게 빼앗기고 나자 제 아내는... 그레이스는 거의 미쳐서 폐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더는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지요. 상처뿐이 남는 게 없으니까요." 남자는 조금씩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멈추진 않았다. "여기까지라면 어떻게든 극복 해 낼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마물들은 우리가 아이를 만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자 다른 방법을 썼습니다. 여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이용한 겁니다. 사실 남자 20명당 한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마법사를 제외하고 원정군에 여자가 낄 일은 없었으니까요. 그나마 전투에서 남자들 대부분이 전사했으니 그 정도이지 아니면 더 했을 겁니다. 모두들 혈기 왕성한.... 그런 나이의 남자들이었습니다. 기사나 전사가 대부분이었으니까요. 그런 그들에게 결혼한 남자들 극소수만이 보여주는 행복한 모습은... 사치였겠지요. 분했을 겁니다. 알고 있었지만.... 거기까지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하루 하루가 힘들었으니까요. 마물들은... 여자와 남자를 한 방에 가두어 두고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함께 잠을 잘 때까지 내버려두는 것이었어요. 인간의 고귀함 따윈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인간이란 신념으로 버텼지만... 그건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 많은 남자들 중 단 한 명만, 단 한 명만 인간의 도리를 저버려도 마물들이 원하는 아이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되자 모두 앞을 다투어 여자들을 안기를 원했습니다. 어차피 자기혼자 깨끗한 척 해봐야 아무것도 안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죠..... 15년 간 그레이스는 12명의 인간의 아이와 4명의 오크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폐인이 되어서 마물들에게 끌려갔으니, 아마도 생체 실험이라도 당했겠지요. 저는.... 차라리 그녀가 죽었기를 바랍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듣고 있던 사람들 중 누구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흄에 대한 몇차례에 걸친 대규모 원정이 실패하였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투입된 병력 모두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구출작전은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던 상태였다. 솔직히 흄이 쳐들어 올까봐 근심하고 있던 처지다. 하지만 생존자들은 분명히 있고, 살아남았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닌 상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구해 주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끔찍스런 사태보다도 미스티의 머리를 울린 것은 그 남자의 마지막 말이었다. '죽었기를 바란다? 신앙이 없는 마법계의 인간이 죽기를 바란다고?' 불길한 생각이 미스티의 머리를 스쳤다. "그 어둠 속에서 단 하나의 구원이 있었습니다. 마법사 도무르님은 인간의 고귀함에 대해 많은 이들에게 깨달음을 주셨지요. 인간은.....인간의 정신처럼 고귀한 것이 100년도 안 되는 짧은 몇 년을 보내고 소멸할 리 없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이곳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도, 고귀함을 잃지 않고 죽은 인간의 영혼은 반드시 더 좋은 모습으로 새로 태어날 것이라고....그것이 단 하나, 그 어둠 속에서 붙잡을 수 있었던, 단 하나의 빛이자 구원이었습니다." 종교... 인가? 미스티의 주먹이 작게 떨렸다. 더 좋은 세계로의 전이, 즉 천국의 이야기까지는 아직 진행된 것 같지 않지만, 아슬아슬 하다. 새로운 삶을 얻는 것까지 사고가 발전했다면 다음 단계는 영혼이 죽어서 더 좋은 곳, 즉 천국으로 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신의 존재를 탐구하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모두들 이 비장한 이야기에 압도되어 남자가 말한 종교적 발언엔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는 않았지만, 미스티는 그런 비장한 이야기보다도 이 남자를 죽여서 입을 막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야 그렇다 쳐도, 흄에 있는 사람들 중 탈주자가 나오면? 아니면 원정군에 구출된 사람 중에 종교에 대한 개념을 퍼트리는 사람이 나오면 어찌 해야 할까?' 미스티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 남자는 말을 이었다. "원정대를 빨리 파견해 달라고 조르지는 않겠습니다. 엉성하게 준비된 병력으로는 흄의 다크블러드와 몬스터군단에게 상대도 안될 것이니까요. 하지만 시간을 낭비하진 말아 주십시오. 흄에는 아직도 살아 있는 인간들이 남아 있으니까요." '하필 이럴 때 유신님이 안 계시다니.... 정리해 보자. 우선 고스트 같은 물질계의, 그것도 실버스타군의 병기가 적의 손에서 이용되고 있다. 서큐버스 같은 완전 어둠에 속한 생명체가 가족애나 충성심 등 '빛'에 속한 마음을 지니고 있고, 무스칼 같은 화랑급의 코어를 지닌 몬스터가 있다. 또 백호족 중에서도 최상급의 전사인 광무가 등장했고, 그의 주인은 첫 번째 신의 클론, 유신님의 누이인 유진님이다. 그리고 흄의 배후에는 헬마스터 베리알이 있다...... 하긴 헬마스터가 관련되어 있다면 무엇이 나타나도 이상하진 않겠지만..... 광무가 모아둔 몬스터는 아바돈이나 판데모니엄으로 옮겨져 개조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이상한 것은 위시마스터의 침묵이다. 어째서.... 마법계에 이 정도의 난리가 났는데 위시마스터가 개입하지 않는 것일까? 다른 건 몰라도 흄에 잡힌 인간들이 종교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면 어떻게 해서든 막았을 것인데.... 아무리 셋밖에 안 남았다고 해도 그 정도의 여력도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데....' 미스티는 머리를 쥐어 짜 봤지만, 딱히 어떤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 엉망으로 꼬여 있어서 어디서부터 얽혀있는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나....' 결론을 내린 미스티의 녹색의 광구가 유메네스에게 고정되었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예메른도 하누스의 동맹국인 만큼, 이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역할을 맡은 것이 소드마스터 하이몬 백작이었기에 유메네스가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미스티는 물질계의 전투병기인 만큼, 용족에 대한 데이터는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즉, 아무리 막나가는 미스티라도 유메네스에겐 함부로 말을 걸 수가 없다는 뜻이다. 미스티가 녹색의 광구를 이리저리 굴리며 유메네스를 바라보고 있자 그의 음성이 전자주파수를 이용한 채널로 들어왔다. '뭐야? 왜 쳐다보는 거야?' 마나를 이용한 전음으로 말을 걸면 마법사가 많은 마법계에선 누군가 엿들을 수도 있지만, 과학은 전혀 발전하지 않은 곳이니 이런 방법으로 말을 거는 것이다. 확실히 용족은 경이로운 존재다. 아무런 과학 도구도 없이 너무나 간단하게 전자의 흐름까지 조정한 유메네스는 미스티에게 무선으로 연락을 한 것이다. '저... 유메네스님, 저 기사의 이야기를 들으셨다면.... 뭔가 조취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흐흠....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좀 귀찮기는 해도 종교에 대한 개념이 퍼지지 않도록 부분적으로 기억을 지워야겠지.' '부분적으로 기억을 지우는게 가능 할까요?' '귀찮긴 해도 가능하다.' 사실 유메네스가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였다면 미스티는 그에게 기억을 조작해 달라고 부탁하는 대신 저 불쌍한 기사를 죽였을 것이다. 미스티는 유신을 모셔야 하는 몸이기에 함부로 죽을 수는 없다. 그러니 용족에게 뭔가를 부탁할 바엔 차라리 그 기사를 죽이는 편이 낳기 때문이다. 그의 데이터 베이스 속에 있는 용족과는 유메네스의 이미지가 너무 많이 달랐기에 미스티는 한편으론 안심이 되면서도 너무 얌전하고 사려 깊은 그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런 지옥 같은 어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빛이라면 그건 종교겠지. 그것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가련하지만 아름다운 신의 아이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한다면..... 어째서 창세신은 마법계에서 그분의 권능이 보여지는 것을 꺼리는 것일까....' '유메네스님... 그런 생각을 너무 깊이 하시면 자칫 타락하여 마룡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응? 하핫 걱정해 주는 것이냐? 고맙군. 하지만 난 그 정도로 약하지 않아. 그보다 빨리 유신이 돌아오면 좋겠군. 그와 상의해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쿡, 놀라운 일이야. 그토록 독립적이고 무엇이든 혼자 해내는 용족인 내가 의존하고 싶어할 만한 존재가 있다니....어둠 속의 빛이라.... 가능하다면 유신은 신의 뜻을 따르면서도 그 작고 아름다운 빛을 지킬 수 있으면 좋겠다....' '솨아아.....' 인간이 사는 곳과는 냄새자체가 다른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하누스 궁도 잘 가꿔진 정원의 사방에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곳이지만, 감히 신의 정원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엘피서스에 비교할 수는 없다. 마법진의 왼쪽으로는 까마득하게 높은 빛의 나무가 진녹색의 하늘을 만들고 있었고, 마법진이 발동하자 호기심에 겨운 토끼 두 마리가 숲의 덤불 속에서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얼굴을 내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엘프와 함께 지내서인지, 엘프와 비슷한 용모의 인간을 보고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마법진 옆에서 조는 것인지 명상을 하는 것인지 눈을 꼭 감고 있던 연녹색 머리의 엘프는 유신이 다가가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세라피처럼 절정의 미모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갸름한 턱선과 평화로워 보이는 표정이 예쁘다고 느껴졌다. "......" "...... 저 이봐요.... 일어나 보세요." 평소라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거나 다른 엘프를 찾겠지만, 세라피를 아픈데 그렇게 여유부릴 수는 없었다. 유신은 그 엘프를 작게 불러서 깨웠다. "하암.....네? 무슨 일이시죠?" 생긴 것과 잘 어울리는 가는 미성으로 대답한 엘프는 길게 기지개를 펴며 눈을 비볐다. 목소리도 예쁘고, 얼굴도 곱고 몸매도 날씬했지만 그 엘프는 가슴이 없었다. '...... 남자군. 발로 차서 깨울걸 그랬나....' 황망한 심정으로 엘프를 바라보던 유신이 물었다. "저.... 이 마법진을 지키고 있던 것 아닌가요?" "맞아요. 명상을 한다는 것이 깜빡 졸았나보네요" 귀엽게 혀를 낼름 내밀며 웃는 모습은 즉석 카메라로 찍어 보관하고 싶을 정도였지만, 세상에는 예쁘다고 용서되지 않는 종류의 일이란 게 있는 것이다. "....대....대체 마법진을 지키면서 졸면 어떻게 해요? 혹시 저기를 통해서 적들이 습격해 올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나요?" "흐흠....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살짝 존 것뿐이니까 뭔가 이상하면 바로 일어났을 거예요." 태평하게 말하는 엘프와 이야기를 하려니 가슴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아예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이....이봐요. 방금 마법진이 발동해서 마나의 흐름이 활발했잖아요. 저길 보라고요. 토끼까지 뭔가 이상한걸 느끼고 구경하러 왔단 말이에요. 사람이 다가가서 말을 걸때까지도 모르다니....." 멍한 표정으로 유신을 바라보던 엘프는 다시 수줍게 웃으며 귀를 쫑긋거렸다. "어, 정말이네요. 깜박 졸다가 그냥 잠이 들었나봐요. 헤헷."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이라도 내쉬면 답답한 속이 풀릴까 하여 고개를 들어봤지만, 빛의 나무의 빽빽하고 짙은 나무그늘에 가려 손바닥만큼의 하늘도 보이질 않았다. 덕분에 들이쉰 숨을 내 뱉을 찬스가 약간 꼬여버린 유신은 두어번 정도 캑캑거려야 했다. '관두자.....관둬.... 지금은 세라피가 먼저다. 엘프들의 안일한 태도를 고칠 방법은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보자.' 흄에게 한번 당했으면서도 워낙 싸움을 모르는 평화로운 종족인 만큼, 왜 보초를 서야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한 듯 했다. 이것을 고치려면 단순히 말 몇 마디로는 힘들다. "세라피님이 아파요. 누구에게 가야 치료를 받을 수 있지요? 엘프도 인간처럼 치료 백마술사나 의사란 것이 있나요?" 그제야 진지한 눈빛이 된 녹색 머리의 엘프는 이리저리 세라피를 살펴 보았다. "세라피님이군요. 하누스에 가 계시다고 들었는데... 그럼 당신이 드래곤 슬레이어 유신님? 와!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반가워요. 전 시누타라고 해요. 특이한 이름이죠? 이 이름의 유래는....." "그건 천천히 들을께요. 그보다 세라피를...." 엘프들은 수다스런 종족은 아니어도, 오래 사는 종족인 만큼, 뭔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자연히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기 전에 좀 무례하더라도 말을 끊는 것이 상책이다. "아참, 세라피 님이 아프지! 잠시만요. 장로님을 불러올게요." "아니, 이봐요....." 시누타라고 자신을 소개한 엘프는 벌써 빛의 나무로 뛰어들어가고 있었다. '장로에게 가면 된다고 말해주면 되잖아. 왜 직접 부르러 가는 거지? 그럼 마법진은 누가 지키고? 설마 나보고 지키라는 거야? 정말로 기본도 안되어 있군.....' 한심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쩌랴. 시누타는 이미 빛의 나무 속으로 들어가서 보이지도 않았다. 덕분에 할 일이 없어진 유신은 그때까지도 안고 있던 세라피를 혹시 어디 망가지지라도 않을까 조심조심하며 녹색의 융단처럼 부드러운 풀 위에 내려놓았다. '6서클급 평면 게이트 마법인가? 양자간 동시 채널 오픈 방식이군. 다른 마법에 간섭받을 일은 적으니 안전하겠지만... 호환성이 전혀 없으니 쓰기에는 불편할 텐데.....' 잠시 마법진을 바라보던 유신은 곳 흥미를 잃고 세라피를 바라 보았다. 단지 엘핀서스에 돌아 온 것만으로도 그녀의 상태는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 얼굴에 조금이지만 혈색도 돌아왔고, 표정도 훨씬 편안해 보였다. 몸 안의 코어는 여전히 엉켜 있는 것 같았지만, 일단 몸의 신진대사가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고르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가슴을 보니 숨쉬는 것도 정상적인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 손으로 잡으려고 하자 마치 모래가 손 틈으로 빠져 나가듯, 그녀의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사르르 손 사이로 빠져 나갔다. 손을 간질이며 살며시 빠져 나가는 느낌이 부드럽고 좋아서 유신은 몇 세라피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쳤다. '와... 예쁘다....' 솔직한 감탄이었다. 늘 방실방실 웃고, 뛰어다니고, 노래하는 그녀도 아름다웠지만, 인형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는 그녀도 아름다웠다. 세라피는 종족의 특성상 잠도 별로 없고, 귀가 워낙 예민하여 그녀와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음에도 그녀의 자는 모습을 차분히 지켜 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처음 그녀가 쓰러졌을 때는 곳 죽을 것 같이 위태위태한 모습에 가슴을 졸였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니 그리 심각한 것 같지는 않아서 다소 안심이 되었다. 평화로운 엘핀서스의 분위기에 취한 유신이 길게 하품을 할때였다. "이야! 유신. 오랜만이야. 왔다는 이야기 듣고 뛰어 왔어. 근데 세라피 언니가 아프다며?" 언제 나타났는지 사슴같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엘리시엘이 다가왔다. "야, 엘리 오랜만이야. 여전히 시원시원하구나. 처음에는 많이 안 좋아 보였는데, 엘핀서스에 오니까 많이 낳아진 것 같아. 내가 너무 호들갑을 떤 건 아닌지 모르겠다." 유신의 말에 엘리시엘도 안심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세라피에게 다가갔다. "어디보자.... 어디가 아픈가...." 엘리시엘도 엘프가 쉽게 아프지 않는 다는걸 알기 때문에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태어난 이후로 물리적인 외부의 충격으로 입은 상처 때문에 아픈 엘프를 제외하고는 병이나 과로로 아픈 엘프는 본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세라피를 살펴보던 엘리시엘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가더니 급기야는 빠르게 핏기가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유...유신... 서...설마 세라피 언니가 마나 브레이크 상태야?" 엘리시엘의 얼굴이 창백해 짐에 따라 유신의 얼굴도 점점 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으...응 처음에는 많이 않좋아 보였는데.... 엘핀서스로 오자 마자 많이 좋아 졌거든. 어... 저... 혹시 많이 안 좋은 거야?" 질문하기가 두려울 정도로 엘리시엘의 얼굴이 창백해 졌기 때문에 유신은 간절한 마음으로 셀라피의 상태를 물어 보아야 했다. 불길한 예감에 입이 바짝바짝 말랐지만, 엘리시엘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어... 저기... 그렇게 안 좋은 거야?" 다시 한번 유신이 재촉하자 엘리시엘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좋지 않아.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나빠.... 엘프는 조화의 종족. 그런 엘프의 조화가 무너지면, 몸 안의 마나가 지금의 세라피 언니처럼 정지해 버려. 그것이 마나 브레이크지. 인간이야 어떨지 몰라도 엘프는 반은 정령이란 말이야. 그런데 마나가 멈추게 되면 자칫 영원히 깨어나지 못해." 세라피의 말에 유신은 하늘이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그래도 엘핀서스에 들어오니까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많이 좋아 졌는걸. 혹시 이대로 있다가 점점 낳아 지지는 않을까?" 혹시나 하는 생각에 기대를 걸어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절망적인 것이었다. "저런 상태라면 불가능해. 처음에 상태가 안 좋아 보였던 건 세라피 언니가 나름대로 그렇게 무너져 가는 몸 안의 마나를 바로잡기 위해 애썼기 때문이지만, 지금처럼 고요해 졌다는 것은 그런 최소한의 노력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쁘다는 뜻이야." '맙소사.... 이런 빌어먹을 경우가 있단 말인가.... 세라피가 나빠진 것은 전부 내 책임이다. 광무를 해치우고 하루만 더 빨리 돌아왔어도... 아니, 하누스에 돌아와서 내가 그녀를 피해 다니지만 안았어도 그녀의 상태가 이렇게 까지 나빠지지는 않았을 거야....' "어떻게 해야 되지? 무슨 방법이 있을 것 아냐?" 마치 엘리시엘의 잘못으로 세라피가 아프기라도 한 것인 양 유신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잡으며 따지듯 물어 보았다. 엘리시엘 역시 너무 큰 충격에 다리가 풀렸는지, 유신이 거칠게 흔들자 너무나 쉽게 한번 휘청거리고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사기꾼 같은 마법사 놈, 엘핀서스에만 가면 다 낳을 것처럼 얘기하더니.... 아니, 누굴 원망하겠는가? 내 잘못이다. 어떻게 해서든.....' "이....이봐, 엘리, 어떻게든 방법이 없는 거야?" 유신의 재촉에 멍한 표정으로 세라피를 바라보고 있던 엘리시엘이 힘겹게 말했다. "방법.... 방법이라고? 없는 건 아니지만..." 완전히 풀려버린 눈을 보면 엘리시엘의 충격도 대단한 것 같았지만, 지금은 엘리시엘보다는 세라피가 급하다. 유신은 평소 그답지 않게 강하게 엘리시엘을 다그쳤다. "뭔데? 뭐든 해 봐야 할 것 아냐?" "아니, 아니야... 없어. 그건 안돼. 없다고 보는 게 낳아...." "이런 빌어먹을! 엘리, 정신차려! 알아듣게 말하라고!" 중얼거리는 그녀가 답답했는지 평소의 유신이라면 절대 사용할 리 없는 거친 말까지 튀어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완전히 나사가 풀려 버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 유신이 돌아버리기 직전, 다행이 시누타란 조금 얼빠져 보이던 엘프가 엘핀서스 엘프들의 장로인 엘시르를 불러 왔다. 엘시르도 엘프가 아프다는 것을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는지 그리 서두르는 기색 없이 빛의 나무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걸 본 유신은 분통이 터져서 마침내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세라피님이 아프다고 합니다! 대체 어째서 그렇게 여유가 넘치는 거지요?" 그의 고함 소리 보다도 세라피의 옆에 주저앉아 있는 엘리시엘의 멍청한 표정을 보고야 엘시르는 세라피의 상태가 많이 좋지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이게 대체.... 세라피 같이 느긋한 성격의 엘프가 마나브레이크라니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요?" 점잖고 느긋한 엘프 족의 수장답지 않게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온 엘시르는 오래 산 엘프 답게 한번에 세라피의 상태가 마나브레이크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것보다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지요? 방법이 있는 것 같은데 엘리가 말을 안 해요. 장로님이라면 뭔가 알고 계실 테지요? 말해 주세요!" "방법이라면 알고 있지만....." 엘시르는 말하기가 껄끄럽다는 듯 엘리시엘을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엘리시엘이 그의 말 허리를 끊었다. "장로님!" 어떻게 해야 세라피를 구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지도 않으면서, 방해까지 하자 유신도 약이 올랐다.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엘리시엘은 유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제가.... 제가 가겠어요. 유신이 강하기는 해도, 저는 선택받은 정령사. 아마도 유신보다는 제가 낳을 거예요." "뭐?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엘리시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유신이 무슨 말인지를 물어 보았지만, 엘리시엘은 그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엘리시엘... 네가 선택받은 정령사이니 만큼, 원소의 정령왕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잘 알 것 아니냐? 네가 얼음의 정령왕 시비엔을 소환했을 때도.... 사실 죽었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어. 어째서 시비엔이 너를 얼음의 정령으로 바꾸어 그의 곁에 두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원소의 정령왕은 모든 정령을 총괄하는 존재.... 그가 선택한 정령사가 아무리 너라고 해도, 그에게 뭔가를 부탁하려면 지금의 육신을 버리고 그의 곁으로 가야만해.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는 일이겠지." "예? 그게 무슨 뜻이지요? 원소의 정령왕이라면 보르부스 아닌가요? 그를 만나다니요? 육신이 있는 엘프가 정령왕을 만나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물질계에서 마법계에 대한 상식이 없는 상태로 귀양온 유신이라 해도, 정령왕도 모를 정도는 아니다. 정령왕이라면 지식을 쌓고 억지로 그것을 끄집어내야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존재가 아니라 성계대전의 참모급 이상이었다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이기 때문이다. 숟가락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정령왕이라는 단어는 몰라서는 안될 단어이다. 정령왕은 위시마스터와 함께 마법계를 지배하는 가장 신에 가까운 존재다. 바람, 물, 불, 대지 등을 관리하는 물질계의 4대 원소천사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인 만큼, 성계대전에도 정령왕은 참가할 수가 없었다. 위시마스터는 12명 전원이 참가했는데도 정령왕은 참가하지 못했을 정도로 마법계에선 중요한 존재란 뜻이다. 그런 대단한 존재를 육체란 틀에 얽매여 있는 엘프가 만나겠다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엘리시엘이 유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포기한 그는 다시 엘시르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엘시르 역시 대답해 주는 대신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렸다. 유신이 막 발작을 일으키려 할 때, 이야기를 정리한 엘시르의 단정한 입술이 움직였다. "유신님의 말이 맞습니다. 정령왕은 육체를 지니고는 만날 수 없지요. 그러니 육체를 버리고 만나야 합니다. 그것도 아무나 가능한 건 아니지요. 그나마 엘리시엘이 선택받은 정령사니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완전히 정령 상태로 되면 다시 자신의 육신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잖아요. 그건 죽는다는 뜻 아닌가요? 그게 세라피를 고치는 것이랑 무슨 상관이 있지요?" "엘프는 정령에 생명체와 정령의 중간에 있는 존재... 그런 존재가 마나브레이크 상태에 빠져 버리면 육체적 치료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치료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걸 할 수 있는 존재는 정령왕 뿐이고...그러니 누군가가 정령왕과 만나 세라피를 구해 달라고 부탁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엘시르의 말에 유신은 온 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럼 세라피를 살리기 위해선 엘프 중 누군가 한명이 그 생명을 버려서 정령왕을 만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성공할지 실패할지 불확실하다고 하니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시엘은 자기가 하겠다고 했지만, 세라피를 위해서 엘리시엘을 희생시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제가 정령왕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있지요? 그래서 엘리가 저 대신 가겠다고 한 것이고...." "아니야. 아무리 유신이라도 인간이 정령왕을 만날 수는 없어. 내가 해 볼게." 엘리시엘이 끼어 들었지만, 유신은 그런 엘리시엘을 무시하고 재촉하듯 엘시르를 바라 보았다. "있긴 있지만... 그건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입니다. 괜히 목숨만 일을 뿐입이에요. 인간은 죽게 되면 엘프처럼 정령계로 가는 것이 아니니 당신에게 그런 위험 부담을 떠맡게 할 순 없어요. 운 좋게 정령왕을 만난다 해도 그가 당신의 말을 들어 줄지도 의문이고.... 그래도 만나겠다는 겁니까?" "당연하지요. 만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든 정령왕이 제 부탁을 들어 주도록 만들겠어요." 아마도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엘시르는 그 사람의 정신 상태를 의심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이 인간은 그런 기적을 여상스럽게 이루어낸 인물이다. 유신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엘시르는 결단을 내렸다. "정령의 성지로 가면 됩니다." "장로님!" 엘리시엘이 고함을 질렀지만, 엘시르는 가만히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라테우스를 쓰러뜨린 분이네. 무슨 방법이 있겠지. 그 정도라면 원소의 정령왕을 만날 자격이 있을 거야." 나이든 엘프의 무거운 말은 어린 엘리시엘이 반박하기에는 너무 굉장한 무게감을 싣고 있었다. 엘리시엘을 침묵시킨 장로는 차분한, 그렇지만 신뢰를 가득 담은 눈으로 유신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몸으로 원소의 정령왕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정령의 성지로 찾아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정령의 성지라고요? 그게 어디에 있지요?" "슐레인 산맥의 어딘가에 있긴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정령의 성지... 말처럼 정령들이 정령의 세계를 떠나 이쪽의 세계로 오는 관문 같은 곳이지요. 그래서 정령의 기운을 가장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고, 그러니 정령의 왕도 만날 수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슐레인 산맥의 어딘가에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데, 어째서 발견하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정령의 기운을 쉽게 느끼는 엘프 레인저들을 한 부대만 파견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유신의 질문에는 엘시르 대신 엘리시엘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정령의 성지는 고정되어 있는 장소가 아니라고. 이쪽의 세계와 정령계가 가장 근접하여 만나는 곳을 뜻하는 말이야. 정령은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손에 잡히는 세계에 대한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돼. 음.... 그러니까 인간들이 이용하는 배를 생각하면 되겠다. 배는 바다위를 떠 다니잖아. 어느 특별한 곳에 있다고는 할 수 없지. 그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글세.... 엘리시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엘리시엘의 황당한 설명에 엘시르가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엘리시엘은 어깨를 한번 으쓱 했을 뿐이었다. "그냥 비슷하잖아요. 물질밖에 보지 못하는 인간에게 더 이상의 설명을 할 수 없다고요. $#%@#$^%*&^#$ 는 #%$#$^^$%@& 인데, 그걸 어떻게 인간이 말로 설명해요?" 엘리시엘이 중간 중간 엘프어를 섞어서 말했다. 유신은 목에 걸려 있는 번역기를 바라 보았다. 하지만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하기 힘든 무엇인 모양이다. 유신은 복잡한 생각을 하는 대신, 정령의 성지는 '배' 로 간주할 만한 어떤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 버렸다. 배가 됐든 우주 순양함이 되었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 . . . . 으윽...늦었습니다아^^;; 연참 하고 잠수라니.... 이따가 새벽에 한편 더 올리도록 할께염^^;;; 그럼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좋아요. 그럼 정령의 성지를 발견할만한 어떠한 단서나 도움을 줄 만한 분은 없나요?" "그런게 있으면 좋게... 정령의 성지는 그리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엘프들도 일부러 그곳을 찾아 갈 일은 없었으니 정령의 성지에 대한 무슨 연구나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거든." 혹시나 하는 심정에 물어 보았지만, 엘리시엘의 대답은 신통치 않았다. "그럼 무작위로 슐레인 산맥을 뒤져야 한다는 이야기야?" "슐레인 산맥뿐이 아닙니다. 엘핀서스 남쪽의 평야지대를 포함해서 최소한 빛의 나무의 영향을 받는 곳이라면.....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슐레인 산맥만 해도 엄청난 크기이다. 그곳을 조사할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은데, 남쪽의 평야지대에 까지라니.... 유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라피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지요?" 유신은 계속 삐딱하게 나오는 엘리시엘 대신 엘시르에게 질문했지만, 어쩐 일인지 세라피가 대답해 주었다. "시간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아. 아마도 저 상태로 1년이고 10년이고 있겠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유신은 오랜만에 엘리시엘의 입에서 마음에 드는 긍정적인 말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시간에 쫒기지 않는다면 1년이고 10년이고 슐레인 산맥을 샅샅이 조사하면 된다. "그럼 제가 돌아올 때까지 세라피를 잘 부탁해요. 1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정령의 성지를 찾아내어 마나브레이크를 고칠 방법을 알아 오겠습니다." 마치 잠시 이웃집에 빵이라도 나누어주고 오겠다는 듯한 평온한 말투였기 때문에 엘시르는 뭐라고 대답할만한 찬스를 놓쳐 버렸다. 마음을 정했으니 안달하지 않는 것이다. 유신은 별 미련도 없다는 듯, 너무나 쉽게 일어섰다. 할 일이 결정되었으니 망설일 수도, 필요도 없다. '일단 가능성이 가장 높은 빛의 나무 근처의 산들부터 찾아야 하나? 아니면 슐레인 산맥 최 북단서부터 아래로 훑어 내려가야 하나....' 미스티가 있다면 그의 초감각 센서가 크게 도움이 될 테지만, 미스티까지 하누스를 비우게 할 수는 없었다. 소드마스터의 양성이나 살육부대의 양성도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았는데 미스티를 함부로 뺄 수는 없었다. 한번 훑어보고도 정 성과가 없다면 그때는 미스티는 물론 이자벨에게도 도움을 청할 각오였지만, 일단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해볼 생각이었다. 산을 뒤지기 위해 특별히 장비들을 준비할 필요도 없다. 유신은 야생에서 사는 지혜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잠깐만, 유신 나한테 더 좋은 생각이 있어." 떠나려는 그를 세운 것은 엘리시엘이었다. "뭔데?" 계속 부정적인 엘리시엘이었기 때문에 유신도 뚱한 목소리로 물어 보았다. 하지만 엘리시엘은 그런 유신의 태도 따위는 별로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리폰을 이용하자. 아무래도 공중에서 수색하는 편이 낳지 않을까?" "그리폰이라고? 엘핀서스에 그리폰 라이더가 있어?" "아니. 지금까지는 필요가 없었으니까..... 흉폭한 그리폰과 친구가 되려고 하는 엘프는 없었어. 하지만.... 하지만 그리폰과 친구가 되는 것도 가능하긴 해. 친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슐레인 산맥을 걸어서 찾는 것보다는 그리폰과 친구가 되어 그 힘을 빌리는 편이 더 빠를 거야." 확실히 올은 말이다. 하늘에서 날아다니면서 찾는 것이 열배 스무배 더 빠를 것이다. 엘리시엘은 유신이 걱정이 되어 정령의 성지로 가는 것을 말렸지만, 그가 이미 마음을 정했으면 반듯이 이루어 낸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말릴 수 없다면 도와주고 싶었다. 게다가 다른 일도 아니고 세라피를 위해서 인데, 엘리시엘도 돕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나도 세라피 언니가 걱정된다고. 그리고 그리폰과 친해 질 수 있는 건 엘프 밖에 없으니까 나도 가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그리고 유신은 정령의 성지에 가까이 가도 모를 수도 있고.... 하지만 선택받은 정령사인 나라면 그럴 일은 없을 거니까.....그러니까 나도 갈래." "좋아. 하나만 약속하면." "뭔대?" "정령의 성지에 도착해도 정령왕과 만나는 건 나야." "........" "싫다고 하면 안 데리고 갈 거야. 그럼 약속?" "알았어. 알았다고. 그대신 유신도 조심하겠다고 약속." 아마도 신시아나 미스티나 유메네스가 있었다면 닭이 되어 비행 연습을 하겠지만,유신도 엘리시엘도 장로인 엘시르도 그런 쪽으로는 무지했기 때문에 다행이 분위기가 썰렁해 지지는 않았다. 그리폰을 길들여서 타고 다니기로 했지만 유신이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대책 없고 난감한 계획이었다. 그리폰. 독수리의 머리에 앞발도 독수리의 발, 몸통과 뒷발은 사자의 그것이다. 다 큰 숫말을 하늘로 채갈 수 있을 만큼 엄청난 힘을 지닌 그리폰은 맹수라기 보다는 괴수에 가깝다. 날개를 활짝 펴면 6m에 이르고, 몸통의 크기도 황소보다 크다. 그런 것보다도 더욱 두려운 것은 교활한 머리와 그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페가수스를 제외한 어떤 생명체보다도 빠른 스피드다. 먹이를 발견하고 달려들때의 최고 속도는 음속에 이를 정도이며, 그런 스피드 속에서도 전혀 균형이 무너지거나 집중력이 흩으러 지지 않는 대단한 괴수다. 상당히 잘생겼으며 힘도 강한 몬스터기 때문에 각국의 기사단의 심벌로 쓰는 경우가 많으며 성계대전에서도 올림퍼스의 전술사령관이었던 1급투신 니케의 주력부대가 그 심벌로 썼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이 그리폰이란 녀석을 감히 길들여서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그 난폭함과 맹수치고는 지나치게 강한 정신력 때문이다. 마법사들이 차밍 마법 같은 정신계 마법을 걸어도 그리폰에게는 거의 효과가 없고, 조련사가 길들인다고 해도, 잠시만 빈틈을 보이면 갈기갈기 찢겨진다. 그리고 그리폰이 좋아하는 것은 말이다. 말의 천적, 아니 불행이자 저주라고 해도 좋다. 숫말은 잡아먹고 암말은 둥지로 채가 번식에 쓰기 때문에 길들이는 과정에서도 말을 보면 배가 고프건 그렇지 않건 일단 덤벼들고 보기가 일수다. 대부분의 교통 수단을 말에 의존하고 있는 마법계에서 그리폰을 길들이면서 말로부터 완전히 격리시킬 수는 없다. 비행연습 중이나 기타 이런 저런 이유로 말을 발견한 그리폰은 주인의 명령을 무시한 채 말에게 달려들게 되고, 한번 그렇게 말고기 맛을 본 그리폰은 다시 야생의 상태나 다름없어 지기 때문에 그때까지 공들여 길들여 두었던 게 모두 소용없어 진다. 즉 강하고 아름다운 만큼 길들이기 까다롭다는 뜻이다. 그런 그리폰을 잡아서 길들여 타는 것도 아니고 친구로 삼아서 도움을 받자니, 황당해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 그럼 어디로 가면 되지?" "그리폰의 서식지라면 아무래도 슐레인 산맥 남쪽 지방이 많을 겁니다. 후길산맥에도 많이 살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시간이 너무 걸리고..... 슐레인 산맥 중턱 부분에 많이 서식하고 있을 겁니다. 정상쪽은 하피들이 살고 있으니까요." "그리폰이 하피보다 훨씬 강하지 않나요?" "당연히 그리폰이 훨씬 강하지요. 하지만 그리폰은 집단 생활을 하지 않는데 비해 하피들은 집단으로 생활하거든요. 아무리 그리폰 한 마리가 하피 다섯 마리 이상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고 해도 하피는 보통 천여마리 가까이가 모여서 삽니다. 하나의 무리가 천여마리 쯤이니 총 수는 얼마나 될지....." "그리폰이라.... 그럼 그리폰의 숫자는 얼마나 되지요?" "글세요... 자세히 조사된 적은 없지만, 슐레인 산맥에만 적어도 500~600 마리 정도 살고 있으니 발견하는데 그리 힘들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리폰과 친구가 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라...." "그리폰은 말고기를 좋아하지요? 하누스에서 말을 좀 지원 받는다면...." 답답한 마음에 유신이 생각한 것이 말고기를 조금씩 주면서 길들여 보자는 것이었지만 엘리시엘이 찬성할 리 없다. "안되. 그리폰이라는 친구를 사귀는 거야. 노예를 만드는 게 아니라고. 그런 방법으로는 친구를 사귈 수 없어. 마음이 통해야 한다고." "하...하지만 엘리... 그리폰하고 어떻게...." "그런 마음가짐이니까 친구가 될 수 없는 거야.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친구로 사귀어야 해." '엘프란.... 대체 어쩌자는 거야? 그리폰과 친구라니... 그랬다가는 대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순간적으로 유신은 다리가 풀릴 정도로 황당한 생각이 들었지만, 광무와의 싸움에서 다크엘프가 보여 주었던 광무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런 다크엘프를 살려 주면서 유메네스가 했던 말이 강하게 그의 머리를 때렸다. "믿음...인가?" "응? 뭐라고?"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뭔가 소중한 것을.... 그런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일까? 믿음이니 사랑이니 희망이니 했던...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꼭 필요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을.... 전쟁터에서 생각하기에는 사치스럽다는 이유로 포기했던.... 그런 수많은 것들... 하지만 그것을 포기한 대가가 언젠가는 얼마나 크게 돌아오게 될지....비록 이번 전쟁에서 어둠이 패했다고는 해도, 루시펠님은 그런 것들을 포기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잘 지켜 내었다. 그 결과가 보이기 시작한다면 아마도 다음 전쟁에서 당하는 것은 빛일 테지. 지금부터라도... 조금씩이라도 준비를 해야 한다....' "아니야. 엘리 네 말이 옳다. 그리폰은 친구로 사귀기로 하자." 유신의 말에 엘리시엘은 정말 오랜만에 빛이 날 정도의 환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응!!" . . . . 으윽... 요즘 글 내용이 좀 부실하지요...ㅜㅜ 슬럼프인것 같습니다....제가 읽어 봐도 예전만큼 재미가 없네요.... 누구누구는 속썩이고 글은 슬럼프고 .... 으음..... 힘드네요.... 지금 쓰는 부분 나중에 출판 수정 하려면 고생 좀 하겠네요...ㅜㅜ 그럼 내일 찾아 뵙겠습니다^^ '휘히이이~~' 키 작은 관목들은 고산지대의 매서운 산바람을 피해 서로의 체온으로 덥혀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옹기종기 모여 작은 등을 맞대고 있었다. 엘리시엘이 가는 곳만 나무와 풀이 비켜 주는 건지, 아니면 그녀는 문어 같은 연체동물이라 동전하나 만한 크기의 틈만 있으면 몸을 뺄 수 있는 건지,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이나 힘든 기색조차 없이 녹색 벽의 작은 균열 사이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잔뜩 웅크린 채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관목들은 엘리시엘은 통과시켰어도 유신은 그렇게 쉽게 보내주지 않았다. '내가 몸이 둔해 진 건가? 봉인이 두 개나 풀렸는데도 산에서는 도저히 엘프의 걸음걸이를 따라 갈 수가 없군.' 막무가내로 길을 내면서 엘리시엘을 따라 가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신은 최대한 나무나 풀들이 다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그녀의 뒤를 따라 가려니 그 놀라운 체력에도 불구하고 호흡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신 빨리 와. 저 만큼만 더 가면 된다고. 그럼 공터가 나와." 높아 봐야 유신의 키보다 조금 더 큰 나무들이 뿐이었지만, 그런 나무들의 틈새로 덤불까지 가세해 빽빽하게 들어 차 있으니 한걸음 내듣는 것이 쉽지 않았다. 유신도 군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방향 감각은 아주 좋은 편이지만, 나침반조차 없는 상태라 도대체 한치 앞도 알 수가 없었다. '엘프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될대로 되란 심정이 된 유신은 엘리시엘에게 억지로 손을 흔들어 주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신이 처음 산을 오를 때만 해도 지형이 궁금하면 관목 위로 올라가 주변을 살펴보기도 했지만, 벌써 일주일째 산 속을 헤매다 보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엘리시엘이 앞에 냇물이 있다고 하면 틀림없이 냇물이 있었고, 벼랑이 있다고 하면 벼랑이 있었고, 쉬기 좋은 공터가 있다고 하면 쉬기 좋은 공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괜히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며 체력을 낭비하여 엘프아가씨에게 짐이 되는 것 보다 얌전히 그녀의 인도를 받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라는 것을 일주일 간의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리폰은 보통 높은 곳을 좋아하며 고산지대에 그 둥지를 튼다. 그런데 그들의 어미이자 아내이자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야생마는 당연히 풀이 많은 초원 지대에 산다. 그래서 그리폰은 이리나 대평원을 바라보는 슐레인 산맥의 고산지방이고 둥지를 트는 것이 일반적이다. 낮에는 이리나 대평원으로 사냥을 나가고, 밤에는 슐레인 산맥의 보금자리로 돌아와 내일의 사냥을 준비하거나 사냥해온 말을 뜯어 먹거나 번식 행위를 하는 게 보통 그리폰의 하루의 일과다. 슐레인 산맥에 그리폰이 300마리 정도 살고 있다고는 해도, 저 넓은 슐레인 산맥과 이리나 대평원까지 합친 숫자가 300 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쉽게 발견할 리가 없다. 엘시르 장로의 말로는 금방 찾는다고 했지만 유신은 한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다. 급한 마음에 엘프의 잠깐은 인간의 잠깐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잠깐이라....개념의 차이인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도대체 300 마리나 되는 그리폰은 전부 어디에 가 있는 거야? 벌써 일주일이나 그리폰의 깃털하나 보지 못했잖아?' 같은 슐레인 산맥이라고는 해도, 그동안은 엘핀서스 방면에서 이리나 대평원을 방면으로 넘어왔을 뿐이니 그리폰을 볼 일이 없는 것이 당연하고, 유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홧김에 괜히 투덜거려 본 것이다. 괜히 투덜거린 벌인지, 땅을 보며 걸어가던 유신은 그만 거미줄에 얼굴을 들이밀고 말았다. "이익" 만약 그게 뷰비트랩이었으면 단숨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다. 아무리 긴장하지 않고 있었다고는 해도 너무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한 것 같아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화가 난 유신이 애꿎은 거미줄을 잡아뜯으며 스트레스를 해소 하려 하는데 엘리세엘의 기운찬 목소리가 들렸다. "유신 여기야. 저기 좀 보라고 그리폰이야." 유신은 그녀가 안보는 틈을 타 거미를 눌러버리려던 참이었지만, 그리폰을 발견했다는 말에 움켜쥐고 있던 거미를 나무 잎사귀 위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응. 갈께." "휘이잉~~" 유신이 막 풀숲을 해치고 나오자 굉장한 바람이 몰아쳐 잠시 눈을 가려야 했다. 바람이 진정되자 눈을 뜬 유신 앞에는 굉장한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2인용 침대를 세 개정도 합쳐 놓은 크기의 공터가 있었고, 그 공터의 양옆으로는 슐레인 산맥의 산자락이 병풍같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정면은 지평선 끝에까지 이르는 평야가 거침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리나 대평원에는 군데군데 인간의 마을이 있는지, 밀과 쌀이 재배되는 곳도 어렴풋이 보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냥 녹색 물감을 쏟아놓은 듯 푸르기만 하였고, 인간이 이루어 놓은 작은 마을쯤은 그 푸르름에 파묻혀 작은 점들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슐레인 산맥의 정상 부분들은 안개 때문에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하얀 눈과 얼음에 덮여 있을 것이다. 아래쪽으로 유신의 눈에 보이는 부분은 온통 녹색이었지만, 단순한 녹색이 아닌 살아있는 녹색이었다. 녹색과 연두, 파랑, 그리고 인간의 언어로 표현 할 수 없는 온갖 색상들이 모여 거대한 슐레인 산맥 전체가 조금씩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을 주었다. . . . . 으윽....약간 늦었네요...^^;; 약간인가....20분.... 아까버라...ㅜㅜ 간만에 묘사를 좀 넣어 봤습니다. 덕분에 진도는 거의 안나갔구요...^^;; 음..... 연제실을 보니 제 글보다 남의 글이 더 많군요... 이게 어찌된 일인지...ㅡㅡ　 책은 금욜날 출판 시작되서 대형 서점에 들어 간다고 하는군요^^ 아마 제 손에 책이 들어 올려면 토욜은 되야 할듯 하네요.... 모두 좋은 하루 되시고요^^ 내일 찾아 뵙겠습니다^^ 엘리시엘은 공터의 가장 끝 부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바위 위에서 양팔을 활짝 벌리고 한껏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1시간 정도는 굴러 떨어져야 할 것 같은 가파른 곳인데도 전혀 두려워하거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었다. 엘리시엘은 온 몸으로 경치를 바라보기 위해서인지 눈을 감고, 불어오는 바람에 춤을 추듯 천천히 나부끼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말할 수 없이 신비로워서 유신은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응? 유신. 올라왔네?" 그렇게 바람을 닮은 춤을 추던 그녀는 유신을 보자 방긋 웃으며 바위 위에서 뛰어 내려왔다. 엘리시엘은 거친 산바람에 망가진 옷 매무새를 다듬고, 하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녀의 춤이 끝난 것을 아쉬워하던 유신은 한 호흡 늦게 그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아!" 워낙 높이 날고 있었기 때문에 새끼손톱 크기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떠한 종류의 새나 짐승과도 다른 우아하고 당당한 모습. 틀림없는 하늘의 제왕 그리폰이었다. 공중에 멈추어 있는 그리폰은 그 엄청난 덩치에도 불구하고 날개를 펄럭이고 있지 않았다. 단지 그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바람의 정령을 내리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실피드는 감히 이 하늘의 제왕에게 반항 할 수 없다는 듯, 제왕이 그의 옥좌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시중을 들고 있었다. "어때? 아름답지? 나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리폰을 본 것은 처음이야. 저것봐. 눈이 파란 색이라고. 정말 예쁘다..." "킥" 유신이 보기에는 양손을 기도하듯 모아 쥐고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엘리시엘의 모습이 잘 보이지도 않는 흉측한 괴수보다 훨씬 귀여웠기 때문에 작게 웃었다. "이 거리에서 그리폰의 눈 색깔이 보여?" "응. 유신이 오기 전에 한동안 나랑 눈을 마주치고 있었어. 어쩌면 저 아이도 내가 마음에 든 것일지도 몰라." '먹음직스런 먹이로 본 것은 아닐까?' 유신은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을 애써 털어 내었다. 만약 저 괴수가 독한 마음을 품고 달려든다면, 괴수와 떨어져 있는 거리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저 무지막지한 하늘의 폭군은 먹이를 채가는 속도가 거의 음속에 달하기 때문에 그 정도의 속도에 반응할만한 동체시력이나 반사신경이 없다면 도망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높고 굵은 나무들이 많은 숲 속이라면 나무 아래로 숨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작은 관목쯤은 그리폰 같은 괴수가 돌진하는데는 아무런 방패 역할도 해주지 못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한동안 엘리시엘의 머리 위를 비행하던 그리폰은 흥미를 잃었는지 커다란 날개를 약간 움직여 그 곳을 벗어나는 바람에 올라탔다. 엘리시엘은 그 그리폰이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떠나가는 게 아쉽다는 듯, 사라진 방향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멋지다.... 나 저 아이하고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 엘리... 그러다 혹시 잡아 먹히는 것 아냐?" 걱정이 된 유신이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엘리시엘은 태평스럽게 대답했다. "응, 그럴지도 모르지. 그리폰은 맹수고, 난 아직 저 아이의 친구가 아니니까. 하지만 친구가 되기만 하면 괜찮아." "그....그럼 친구가 되기 전에 '저 귀여운 아이'가 달려들면 어쩌려고?" "응? 그럼 당연히 유신이 보호해 줘야지." 유신은 이 태평스런 엘프 아기씨의 어처구니없는 말이 혹시 농담은 아닐까 하여 가만히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그녀의 갈색 눈은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눈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진지했다. "휴우...그래." 어깨를 가볍게 으쓱 한 유신은 엘리시엘의 말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었고, 엘리시엘도 장난삼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세라피가 아픈데 장난을 칠 리가 없는 것이다. 다음날부터는 더 이상 슐레인 산맥을 헤메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잠자리는 그 공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적당한 곳을 찾아 캠프를 만들어 해결했고, 먹을 것도 주변의 나무 열매나 작은 동물들을 사냥해 해결했다. 엘리시엘은 날이 밝으면 처음 그리폰과 마주 보았던 바위 위에 올라가 태양이 완전히 이리나 대평원의 지평선 뒤로 숨을 때까지 그 그리폰을 기다렸다. 하지만 열흘을 넘게 기다렸는데도 그리폰을 다시 볼 수가 없었다. 하늘을 환하게 물들이는 두 개의 달을 바라보던 유신은 길게 기지개를 펴 굳은 몸을 풀어 주고는 상체만 약간 일으켰다. '이놈의 벌레들은 다 나한테만 덤벼드는 건가?' 넝쿨 식물을 이용해 그물 침대를 만든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물 침대는 좁은 캠프 안에 설치할 수가 없으니 자연 벌래들이 달려 들 수밖에 없다. 창세신의 진한 피 덕분에 그의 피를 빤 모기나 벌레들은 모두 죽었지만, 물릴 때 다 따갑고 귀찮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유신은 넌더리나는 표정으로 그의 팔에서 피를 빨다가 그대로 죽어버린 모기들을 털어 내었다. "엘리. 자?" 혹시라도 자고 있다면 깨울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아니...." 하지만 자고 있었다고 해도 귀가 좋은 엘프가 못 들을 리 없다. 엘리시엘도 캠프 밖에서 명상을 하다가 그대로 잠들었기 때문에 고개만 약간 돌리자 유신을를 바라볼 수 있었다. 엘리시엘이 잠들었을 때 캠프 속으로 데려가 뉘어줄까 생각했지만, 좁은 캠프 안에서 자기엔 너무 좋은 날씨였고, 벌레들은 엘프에겐 달려들지 않으니 그냥 얇은 모포만 하나 덮어 주었을 뿐이었다. 바람을 막기 쉬운 푹 들어간 지형에 캠프를 만들었지만, 두 개의 달은 워낙 환하게 슐레인 산맥 전체를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시엘의 얼굴이 환하다 싶을 정도로 잘 보였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벌레에게 물린 자리를 긁던 유신은 그냥 지나가는 듯한 가벼운 어투로 물어 보았다. 엘리시엘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이제 금방." "난 엘프의 금방이 얼마나 금방인지 잘 모르겠어..." 오랜만에 대화하는 것 같았다. 즐거운 목적으로 시작한 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벌써 열흘 가까이 붙어 다녔는데도 별로 이야기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든 감정의 교류가 있어야 이런 침울한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 터였지만, 지금은 침울하다기보다 차라리 차분해져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를 바꾸기가 더욱 힘들었다. 엘리시엘이 많이 인간화되었다고는 해도 엘프는 엘프다. 대자연의 품에 안겨있는 그녀는 하염없이 그리폰을 기다리는 것을 지루하게 여기지도, 힘들어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유신도 나이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엘리시엘보다 훨씬 어른이다. 엘리시엘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명상을 하거나 코어를 축적하는 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열흘가까이 그리폰이 보이지도 않았으니, 그냥 시간을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음... 아마도 한달 정도는 더 지나야 히야누도 내 얼굴을 익히지 않을까?" 엘리시엘의 말에 유신은 의외라는 듯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다. "히야누라고? 이름까지 붙여놓고 있었던 거야?" "응. 히야누 메이 데 사피르. 고대 엘프어로 '사랑스런 나의 벗' 이란 뜻이야." '....괴수한테 저런 이름이라니.... 엘프란....' 유신은 한심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좋으니 상관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 그래. 다 좋은데, 히야누인지 뭔지가 깃털조각이라도 보여야 얼굴을 익히든 친구가 되는 할 서 아냐?" "응?" 유신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엘리시엘이 되물었다. "차라리 그 그리폰이 사라졌던 방향으로 자리를 옮겨서 찾아보자.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는 건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아, 유신은 엘프가 아니니까 히야누를 보지 못하겠구나. 난 네가 아무 말도 안 해서 너도 보고 있는 줄 알았어. 너랑 있으면 엘프랑 있는 것 같다니까." 전혀 뜻밖의 대답이었다. 다른 인간들처럼 안달복달하거나 서두르지는 않지만 설마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다. 인간을 엘프같다고 하면 차분하다는 칭찬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수동적이고 매사에 관심이 없다는 비난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엘리시엘이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닐 테지만....게다가 저 말대로라면 엘리시엘은 그리폰과 계속 마주하고 있었다는 뜻이니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히야누는 2~3일에 한번정도 만나고 있어. 유신의 눈으로는 히야누를 볼 수 없겠지만, 나랑 히야누는 조금씩 얼굴을 익히고 있다고. 아직은 나나 유신을 경계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처음 보았을 때만큼 심하게 경계하고 있지는 않아." "뭐? 그러면 벌써 몇 번이나 만났다는 말이야?" "응. 난 유신도 아는 줄 알았어. 몰랐으면 진작 설명해 줄걸 그랬구나." "전혀 몰랐어. 그냥 무작정 기다리는 줄만 알았다고. 그러니까 그 '사랑스런 히야누'에 대해 얘기 좀 해줘." 유신은 괴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빈정거린 것이지만, 엘리시엘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음.... 뭣부터 얘기해야 하나... 이야기할게 많은 아이라서...." "위험할 것 같아?" "....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 않지만... 적어도 날 적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아." "그거 정말 다행이다. 그래서 히야누는 어떤 아이야?" 가장 궁금한 것이자 중요한 질문의 대답이 만족할 만 했기에 유신은 크게 안심할 수 있었다. 유신은 그의 시야 밖에서 저 강력한 그리폰이 그와 엘리시엘을 맹수의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옅게 소름이 돋았다. 만약 그 사랑스런 친구가 유신이 명상을 하거나 수련을 하느라고 엘리시엘과 떨어져 있는 사이에 그녀를 채갔다면, 아마 손도 써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좀더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켜야겠어.' 그리폰이라면 엘리시엘처럼 작고 마른 엘프따위는 한끼에 먹어 치울 것이다. 긴장감 없는 생활을 계속하다보니 감각이 무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요즘처럼 너무 나사가 풀리면 나중에 다시 조일 때 고생하게 된다. 어느정도 풀려있는 나사를 조이는 것은 쉽지만, 완전히 빠져버린 나사를 다시 맞추어서 조이는 것은 몇배나 힘들기 때문이다. '난 예전의 내가 아니니까... 더욱 조심하고 신경 쓰는 수밖에....' 엘리시엘의 말로는 안전할 것 같다고 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자칫 방심하다가는, 아무리 물질계에 비하면 만만한 마법계라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음.... 히야누는 다른 그리폰들보다 덩치가 커. 그리고 호기심도 무척 많은 것 같고. 몇 번 친구들하고 같이 하늘을 나는 것을 보았지만, 히야누 만큼 큰 아이는 없었어." '그럼 아이라고 하질 말던가... 단순한 괴수 아니야?' 하지만 유신의 그런 생각을 알리 없는 엘리시엘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목하고 정수리 부분에 있는 흰 깃털이 다른 그리폰들에 비해 많아. 특히 가슴의 브이자 모양으로 된 하얀 깃털이 멋지다고. 덩치도 크고 그런 특징도 있으니까 다른 그리폰 사이에 섞여 있어도 쉽게 알아 볼 수 있어." 확실히 가까이에서 본다면 쉽게 구별할만한 특징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보통 사람에 비하면 두 배 이상 시력이 좋은 유신의 눈에도 작은 점으로조차 보이지 않는 먼 곳에 떠 있는 그리폰을 저만큼이나 자세히 관찰한 것이다. 유신은 그녀의 경이적인 시력보다도 그런 집중력이 놀라웠다. '정령사라서 그런가? 거의 화랑 수준의 집중력이잖아....' 그날 이후 유신도 좀 더 차분한 기분으로 그리폰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열흘정도가 더 지나자 그리폰도 유신과 엘리시엘이 많이 익숙해 졌는지 가끔은 유신의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이에서 날기도 했다. "오늘은 이상하게 가까이에서 나네....볼 수 있으니까 좋긴 좋은데 불안하기도 하다...." 유신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평소보다 가까이에서 난다고는 해도, 첫 날 만큼의 거리는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유신은 그 히야누라는 괴수가 먹이를 발견하고 떨어져 내려가는 낙하 속도를 두세번 정도 본 후기 때문에, 이 정도 거리도 불안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야 어떻게 해서든 그리폰의 공격을 피할 수 있겠지만, 엘리시엘은 무리다. 아무리 엘프가 재빠르고 몸이 가볍다 해도, 저 사랑스런 녀석이 작정하고 덤벼들면 그 빠르기는 감히 땅의 종족이 반응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엘리시엘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그리폰을 관찰하고 있었다. "오늘은 히야누의 기분이 좋아 보이네? 이제 나는 거의 경계하지 않고 있어. 유신을 좀 경계하는 것 같지만... 아! 사냥을 할 것 같아. 목의 깃털을 잔뜩 부풀렸어." 유신이 히야누를 지나치게 경계하는 눈치를 보이면, 엘리시엘은 그의 걱정을 풀어주기 위해서 히야누의 상태에 대해 가끔씩 이야기를 해 준다. 유신이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영악한 그리폰이 모를 리 없다. 살기에 민감한 맹수기 때문에, 경계하는 모습을 자꾸 보여주면 친구가 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도를 조금 더 높인 그리폰은 천천히 공중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음의 선회가 끝나자 기가 막히게 아름다울 정도로 깔끔한 가속을 시작했다. 히야누가 노리는 것은 유신이 있는 곳에서 6km 쯤 떨어져 있는 곳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던 야생마 무리 중에 가장 불행한 누군가일 것이다. 말들이 그리폰의 존재를 눈치채고 달아나려고 했을 때는 이미 히야누의 거체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유신의 눈에는 녹색의 캠버스 위에서 까만 점들이 난리를 치는 것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히야누는 사냥을 성공한 것 같았다. 잠시 후 까만 점이 두 배쯤 더 커져서 다시 하늘로 날아 올랐기 때문이다. "어! 히야누!! 안돼!!" 유신의 시야에서 그 점이 완전히 사라질 때쯤, 다급한 엘리시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저놈이 덮쳐?" 긴장한 유신이 엘리시엘의 앞을 막아서며 첨예를 빼 들었다.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달려들기 시작하면 손쓸 수도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덮쳐 들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야. 히야누가 잡은 말을 노리고 하피들이 달려들었어. 숫자가 너무 많다. 9마리야. 히야누!! 말은 포기하고 싸워! 사냥은 나중에 해도 되잖아!" 엘리시엘은 당하기만 하는 히야누가 안타까운지 발을 동동 굴렀다. 유신도 애써 친해지기 시작한 그리폰이 혹시라도 하피따위에게 죽을까봐 엘리시엘을 따라 발을 동동 굴렀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피들은 숫자를 믿고 감히 그리폰에게 덤벼들었다. 덩치도, 최고 속도도, 회전반경이나 급강하, 급상승 능력도 모두 그리폰이 훨씬 위지만, 숫자 차이가 너무 난다. 게다가 가장 강력한 무기인 앞발은 사냥감을 들고 있으니 너무나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엘리시엘의 걱정과는 달리 히야누는 육탄전의 황제였다. 처음에는 어지럽게 포위하며 달려드는 하피들이 유리해 보였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히야누의 강함이 조금씩 증명되기 시작했다. 히야누는 방어는 완전히 포기하고 달려드는 하피들을 한 마리 한 마리 확실하게 떨궈내는 쪽으로 싸움의 방향을 정했다. 하피들은 두 마리는 왼쪽과 오른쪽 날개로, 한 마리는 정면에서, 또 두 마리는 뒷다리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집단적인 사냥이 능숙한 녀석들인지 호흡이 척척 맞았다. 세 마리는 혹시 히야누가 싸움을 위해 말을 팽개치면 그걸 낚아채서 달아날 생각인지, 그의 바로 아래쪽에서 날면서 말에 그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무리한 싸움은 그들로서도 피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히야누는 정면과 날개 쪽으로 공격해 오는 녀석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아무리 터프해도 그리폰도 맞으면 아프고, 찔리면 피나는 생명체이다. 히야누는 하피의 날카로운 발톱에 정수리 부근이 길게 찢어지고, 날개에도 상처를 입어 순간적으로 휘청댔다. 하지만 뒷다리 쪽으로 달려들던 두 마리 중 하나는 그 강력한 뒷발질에 채여 완전히 균형을 잃고 추락하기 시작해 벼렸다. 처음 싸움이 시작됐을 때부터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그 한 마리만 노린 것 같았다. 채인 하피는 날아오르려고 몸부림조차 치지 않는 걸로 보아 일격에 죽었거나 기절한 것 같았다. 다시 진형을 갖춘 하피들이 처음과 같은 패턴으로 공격을 해 오자 또다시 히야누는 심하게 휘청댔다. 하지만 이번에는 휘청대는 히야누의 뒤로 두 마리의 하피가 더 추락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말을 왼쪽 앞다리만으로 움켜쥐고 고도를 약간 상승해, 그의 눈을 쪼기 위해 달려들던 하피 한 마리를 움켜쥐는데 성공했다. 거의 하피의 머리만큼 커다란 부리로 그 하피의 머리를 내려치자 뭉그러진 케익처럼 되었고, 말도 들어올리는 앞발에 끼인 몸통은 뼈가 바스러졌다. 점차로 시간이 지나자 엘리시엘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세 번째 충돌에서 또 한 마리가 떨어지고, 한 마리는 크게 부상을 당하자 하피들은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대...대단해.... 말을 놓치지 않고도 하피 여덜 마리를 전부 쫒차냈어. 약간 다치기는 했지만, 기운차게 나는걸 보니 그리 큰 부상도 아닌 것 같아." "말을 들고 여덜마리의 하피를 이겼다고?" 유신은 엘리시엘 만큼 눈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그 싸움을 볼 수 없었다. 그냥도 아니고 말을 매단 채 하피 8마리를 물리치는 괴물 같은 그리폰이라니.... 유신은 기가 막혔다. '사랑스런 나의 벗이 아니라 내 친구는 대 괴수... 뭐 이런 이름이 더 잘 어울리겠다...' 엘리시엘은 그 그리폰이 걱정되는지 한동안 히야누가 사라진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지만 유신은 황당한 심정에 눈을 때지 못했다. '터프한게 꼭 카론 같은 녀석이네. 성격도 그 녀석처럼 엉망이면 안되는데....' 유신은 문득 그라테우스와의 싸움을 마지막으로 전혀 얼굴을 내 비추지 않는 가장 친한 벗이 생각났다. 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애써 머리를 털며 그런 생각은 떨쳐 내었다. 그의 자존심도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보고싶어 해 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히야누를 알게 되고 한달 정도가 지났다. 이제 그 괴수 그리폰은 그의 영역에 있는 두 이방인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눈치였다. 특별히 경계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처음처럼 멀리 피해서 사냥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어찌 보면 무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 태도였다. 그래서 종종 유신도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하늘을 날고 있는 히야누를 볼 수 있었다. "보통 말 한 마리 잡으면 나흘은 먹지 않나?" 어제도 사냥을 성공했는데 또 하늘에서 서성대고 있는 히야누를 보며 유신은 질렸다는 듯 말했다. "응. 보통 그리폰은 말 정도의 큰 먹이를 잡으면 나흘정도 먹는 것 같지만, 히야누는 빠르면 이틀, 길어야 사흘 가는 것 같더라." "먹보네...." 유신이 히야누를 먹보라고 부르자 엘리시엘은 기묘한 추상화를 보는 것 같은 말끔한 눈으로 유신을 바라봤다. "유신이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 농담을 모르는 종족이 한 말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듣는 것 보다 두 배쯤 더 민망스러웠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니까 하는 말일 것이기 때문이다. "알아. 나도 많이 먹는 거 안다고." "뭐야? 왜 삐진 거야?" "먹보라며?" "먹보 맞잖아." "......" "......" 엘리시엘은 깨끗한 눈으로 가만히 유신을 바라보았다. "관두자. 나 먹보 맞아." 유신은 깔끔하게 포기했다는 듯, 양손을 들었다. 엘리시엘은 유신의 그런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뭔가 더 물어볼 참이었다. 어째서 그가 이렇게 뜨악한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후드득" 아주 잠깐 이었다. 유신이 엘리시엘과 이야기를 하는 아주 잠깐의 시간일 뿐이었다. 그 잠깐의 시간동안 히야누는 유신과 엘리시엘이 그를 관찰하는 바로 그 공터 위에 착지해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서 있었다는 듯, 여유 있고 자연스런 모습이었다. 3m 도 떨어져 있지 않은, 코앞이라고 해도 좋을 거리에서 보는 히야누의 크기는 압도적일 만큼 위압적인 것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모습을 보는 것과는 박력이 완전히 달랐다. 위압적인 덩치, 강인해 보이는 날개와 다리, 날렵하면서도 아름다운 연갈색의 몸체, 특히 카리스마가 가득 담긴 파란색의 눈이 압권이었다. "대...대체 언제...." 히야누는 이미 공터에 내려섰으니, 공격을 해 온다 해도 못피 할 정도로 빠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워낙 알 수 없는 녀석이고, 위험해 보이는 맹수라 자꾸 첨예 쪽으로 손이 가는 것을 막기가 힘들었다. '검을 .... 뽑아야 하나...' 유신은 일단 엘리시엘의 앞을 막아서기는 했지만, 딱히 어떤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키메라와도 싸워서 이긴 그이니 만큼, 그리폰과 싸운다 해도 지지는 않겠지만, 이 녀석은 싸워야 하는 상대가 아니라 친구가 되야 하는 녀석이다. 히야누는 유신과 엘리시엘은 별 관심도 없다는 듯, 커다란 부리로 날개 깃을 정리했다. "깍.깍." 높낮이도 없는 투박한 소리로 몇 번 깍깍거린 그리폰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 않았다. 그러더니 사자의 그것인 뒷다리로 마치 개가 옆구리 긁듯 '탁탁탁'소리를 내며 날개 아래부터 옆구리까지 긁었다. 워낙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는 동작이었기 때문에 유신과 엘리시엘은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깍.깍." 다시 새의 아름다운 노래와는 전혀 다른 소리를 낸 그리폰은 부리를 약간 벌리고 유신과 엘리시엘을 바라보았다. 멍해 보이는 그 푸른 누에서는 적의를 느낄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호의를 느낄수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 생각도 없는 멍해 보이는 눈이었다. 유신의 뒤쪽에 있던 엘리세엘은 이때가 히야누와 친해 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막 유신을 옆으로 밀치고 히야누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히야누가 벌떡 일어나더니 제자리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워낙 예비동작이 없는 극단적인 동작이었기 때문에 유신은 하마타면 첨예를 뽑을 뻔했다. 하지만 히야누는 단지 자리를 고르려던 것 뿐으로, 햇살이 오는 동쪽으로 머리를 향한 후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 아침이라 해가 동쪽에 걸려 있다. 덕분에 유신과 엘리시엘은, 몹시 불편하게도, 히야누와 얼굴을 마주 보고 있어야 했다. "깍.깍." 그런 유신의 불편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히야누는 한가한 소리를 내었다. "저것 봐. 저 아이, 오늘은 기분이 좋은가봐." 그리폰이 좋아할 만한 높은 곳에 있으면서 사방이 트여 주변을 살펴보기 쉽고, 햇볓이 잘 들며 그리폰 같은 덩치가 편히 쉴 수 있는 넓직한 장소는 그리 많지 않다. 유신과 엘리시엘이 히야누를 바라보던 바위는 그런 요건을 모두 갖춘 최고의 휴식처였다. 사실 히야누는 둘이 그곳을 차지해 버리자 한동안 눈치를 보며 휴식처를 옮겼었다. 하지만 그 유신과 엘리시엘이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자 다시 자기의 자리를 찾은 것이다. 아마도 그의 자리에 나타난 이 이방인이 왠만한 정도였다면, 히야누는 싸워서라도 그곳을 지켰을 것이다. 하지만 유신의 몸에서 은은히 풍기는 기운은 드래곤의 그것이다. 물론 히야누가 드래곤을 보았을 리는 없다. 하지만 맹수의 본능은 그의 영역에 침범한 상대가 결코 쉽게 이길 수 없는 무지막지한 존재라는 걸 끈임 없이 알리고 있었다. 그래서 히야누도 한동안 멀리 떨어져서 유신과 엘리시엘을 관찰 한 것이다. 엘리시엘은 히야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다행이 히야누는 엘리시엘이 다가가도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커다란 머리는, 부리의 크기만 해도 거의 엘리시엘의 몸통 만하다. 하지만 그녀가 4m 정도로 접근하자 홱 하는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가며 그 크고 날카로운 눈으로 엘리시엘을 노려보았다. 유신이 막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엘리시엘은 하얀 손을 들어 유신을 막았다. "깍.깍." 뚝배기그릇 깨지는 듯한 소리를 낸 히야누는 불안하다는 듯, 머리를 흔들거나 말도 들어 올릴 수 있는 무지막지한 발톱으로 바위를 긁었다. "안녕. 내 이름은 엘리시엘이야. 너는 히누야라고 부를게. 좋지?" "깍.깍." "응? 너도 좋지? 자아. 불안해하지 말고... 천천히...." 엘리시엘은 정말로 엘프 다운 편안한 목소리로 말을 걸며 히야누에게 다가갔다. "깍.깍." 히야누가 엘리시엘을 피하려는 듯 엉거주춤 일어서려고 하자 엘리시엘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팔과 손만으로 아름다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순진한 그리폰 쯤은 단숨에 넋이 빠져 버릴 정도로 환하게 웃어 주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던 히야누는 그 신비한 춤과 엘리시엘의 미소가 마음에 들었는지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내며 다시 주저앉았다. "응. 그래. 착하다." 잠시동안 더 춤을 보여주자 그리폰은 완전히 긴장이 풀렸는지, 부리를 땅에 비비거나 앞발로 머리를 긁는 등 귀여운 행동을 취했다. '무슨 서큐버스냐? 유혹의 춤 같은 걸 추게... 아니면 최면술인가?' 유신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얌전해진 하늘의 제왕을 보며 황당한 생각을 해봤지만, 엘프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은 그가 더 잘 알고 있는 일이다. 엘프는 그런 방법으로 친구를 사귀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친해진 엘리시엘은 그 날은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 욕심내지 않고, 밤이 돼서 히야누가 떠날 때까지 그가 경계하는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 본 것뿐이었다. 유신은 지나치게 신중한 그녀가 답답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확실히 성과를 보여 주고 있으니 만족해하고 있었다. 한달.... 긴 시간이었지만, 만약 이 그리폰과 친구가 될 수만 있다면 결코 그 시간은 아깝지 않을 것이다. 엘리시엘은 서두르지도 않고, 하루에 꼭 한 걸음씩만 더 다가갔다. 그리폰이 일광욕을 즐기는 자리는 그 바위위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엘리시엘이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도 뒤로 물러서지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리고 엘리시엘이 조금씩 다가감에 따라 히야누와의 마음의 거리도 그 만큼씩 좁혀지기 시작했다. 히야누도 다시 자신의 휴식처를 찾은 것이 만족스러웠는지, 엘리시엘이 조금씩 다가 오는 것을 경계하지 않는 듯 했다. 엘리시엘은 하루 종일 작지만 듣기 좋은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주기도 하고, 격렬하지 않은 고요한 춤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럴때면 기분이 좋아진 히야누가 그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회를 치거나 깍깍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엘리. 노래를 불러주면 히야누가 그걸 알아? 엘 리가 춤추거나 노래 부르면 나야 좋지만.... 과연 그리폰도 그런 ‘문화’란 것을 알 수 있을까?” “노래와 춤은 문화라기 보다는 가장 본능적이고 알기 쉬운 호의의 표시야. 새들이 짝짓기를 할 때면 화려한 모습을 뽐내며 춤을 추거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잖아.” “그런가?” “응. 굳이 그런 짝짖기 같은 목적이 아니더라도.... 유신은 작은 짐승이나 새들이 꼬물꼬물 움직이고, 노래 부르는 걸 보면 기분 좋지 않아?” “응. 물론 귀엽고 좋지.” “맞아. 그런 모습이 아름다운 것은, 그런 행위가 순수하기 때문이야. 그리폰과는 언어같은 구체적인 방법으로 감정이나 생각을 전할 수 없으니까, 춤이나 노래로 가장 순수한 나의 모습을... 그리고 꾸미지 않은 진심을 보여 주는 거야.” “그렇구나...” 엘프와 대화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평소 무심히 지나쳐 가기 쉬운, 작지만 소중한 삶의 진실을 발견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마치 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놓은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살짝 엿보는 기분이 들었다. 사소한 듯해도 그런 대화 하나 하나가 유신에겐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8일이 더 지나자 마침내 엘리시엘은 손을 뻗으면 히야누의 부리를 쓰다듬을 수 있을 만큼 다가갈 수 있었다. 의외로 먼저 스킨쉽을 시도한 것은 히야누였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 커다란 머리를 엘리시엘에게 쑥 들이밀었다. 엘리시엘이 히야누를 무서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덩치가 덩치인지라 갑자기 그 머리를 들이밀자 몸을 움추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쯤에는 이럴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엘리시엘도 오늘쯤이면 스킨쉽을 시도해 볼 생각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각오를 다지고 있었지다. 하지만 워낙 히누야란 녀석이 알기 힘든 의뭉스런 성격이었고, 조류의 특징인 극단적인 재빠름 때문에 당황한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뒷걸음질치거나 물러섰다면, 저 그리폰은 엘리시엘을 ‘대등한 존재’ 즉 친구로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부하, 또는 자신보다 약한 존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엘리시엘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꼴깍하고 들렸다. "후우~~" 엘리시엘은 긴장을 풀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가만히 그녀의 작은 얼굴을 내밀어 그리폰의 부리에 뺨을 대었다. “깍.깍.” 그리폰의 울음소리가 딱딱한 부리를 통해 엘리시엘의 부드러운 뺨으로 전해졌다. “킥” 울림 때문에 뺨이 간지러웠는지, 엘리시엘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응. 내 이름은 엘리시엘이야. 사랑스런 나의 친.구. 히야누.” 목을 끌어안고 싶었지만, 엘리시엘의 팔 길이로는 무리다. 할 수 없이 딱딱한 부리를 안았다. “깍.깍” 마치 그녀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히야누가 부리를 부딫치자 엘리시엘은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첫 번째 그리폰 친구가 생긴 것이다. 우주의 중심은 지구다. 물론 물리적으로 지구가 우주의 한 가운데를 떡 하니 차지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고, 영적으로 우주의 중심이란 뜻이다. 우주의 모든 혼이 흘러드는 곳이 지구고, 설혹 그 혼들이 지구에 머물지 않는다 하더라고 한번쯤 거쳐가는 곳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우주도 마치 살아있는 하나의 생물처럼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있는데, 그 흐름의 중심이 되는 곳도 지구다. 그래서 신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정하고, 그렇게나 많은 사랑을 베푼 것이다. 마법계는 지구보다 먼저 만들어 진 곳으로, 지구의 프로트타입이라 해도 좋은 곳이다. 지구는 마법계를 거의 그대로 따라서 만든 곳이므로 마법계와 지구의 시간의 개념은 같다. 비단 마법계 뿐만 아니라 창세신이 창조한 세계면, 천계나 신계, 명황계 할 것 없이 어떠한 형태로든 지구와 비슷한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법계의 1년도 365일이고, 24시간을 주기로 해가 뜨고 지며,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남극이 있고, 북극이 있으며 적도가 존재한다. 물론 마법계의 인간들의 지식 수준이나 과학 수준으로는 남극이나 북극 같은 오지를 탐험할 수 없었다. 마법사중 몇몇이 어렴풋이 그런 곳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고, 자세한 연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런 모든 조건이 지구와 거의 흡사한 것이다. 하지만 몇 가지 마법계가 지구와는 다른 점도 있는데, 우선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지구에 비해 훨씬 다양한 종족과 생명체들이 혼합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보다 눈에 덜 띄지만, 그것만큼 큰 의미가 있는 차이점이 있다. 바로 계절의 구분에서 겨울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겨울은 죽음과 재생의 계절이다. 즉 가장 신에 가까운 계절이라는 뜻이다. 신의 존재가 가리워진 마법계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계절이기 때문에 마법계에 겨울은 없는 것이다. 물론 눈이 내리고, 두꺼운 털 코트를 펭귄처럼 뚱뚱하게 껴입어야만 하는 추운 지방은 있지만, '규칙적'으로 찾아오는 겨울이란 '계절'은 없다. 그래서 가을이 지나가면 다시 봄이 오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만큼 아슬아슬하게 예민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곳이 마법계다. 이런 균형은 위시마스터들의 피나는 노력과, 다른 세계의 간섭을 완벽하게 억제한 덕분에 이루어 질 수 있었다. 그리데 바로 여기! 그런 마법계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 원리를 모조리 부정하는 한 불쌍한 청춘이 있었다. '참나.... 사라졌으면 연락을 하던가... 감지기에 별 이상은 없는걸 보면 죽은 것 같지는 않지만....' 투덜거려봤자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다. '엘핀서스에만 가면 세라피님의 병이 다 낳을 것처럼 말하더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네. 또 무슨 위험한 일에 말려들진 않을지...' 유신이 사라지고 겨우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지만, 미스티에게는 1년도 넘는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벌써 내 나이 반올림하면 한 살... 마법계에서 눈을 뜨고 정말 많은 세월이 흘렀구나...' 건방진 생각을 해 봤지만, 공허할 뿐이었다. 유신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사막에서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렇고, 대책 없이 답답할 뿐이다. 혹시나 그가 지키지 못하는 동안 위험한 일에 휘말리게 될까봐 걱정이 돼서 도통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미스티는 찜찜한 기분을 전환해 보기 위해 갈색의 비단 같은 낙엽이 두텁게 깔린 늦가을의 산을 바라보았다. 하누스 왕국 전체에 산불처럼 빠르게 번져 나갔던 단풍들은 떨어질 때도 그만큼이나 빠르게 떨어져, 어느새 모두 낙엽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낙엽이 모두 졌으니 이제 곳 새싹이 나기 시작할 것이다. 5년 만에 대풍년이라 할 만큼 작황도 좋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얼굴도 밝았다. 먹을 걱정으로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서민들에겐 무엇보다도 행복한 일이자 축복일 것이다. 제법 매서운 바람이 불기도 했지만, 늦가을의 하늘은 높다랗고 티 없이 맑았다. 감수성 예민한 소녀라면 그런 하늘을 한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날만한 멋진 하늘이었다. 그런 좋은 날에 미스티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견습기사들은 죽으라면 죽는 신융이라도 할 정도로 충성을 다하고 있었고, 하누스 궁내에서 나이 찬 아가씨들의 호감 대상 제 1호였으며, 하누스의 귀족들은 물론 왕실에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거물이 되었으니, 남들이 보면 미스티는 그야말로 복에 겨운 놈이다. 하지만 미스티에게 그따위 것들은 다 필요 없는 부질없는 것이다. 그의 존재 이유는 유신이기 때문이다. 그 존재 이유가 속을 썩이니 풍년이 들면 뭐하고, 여자한테 인기가 많으면 뭐하며, 날씨가 좋은 것은 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위치만 정확히 파악되어도 이렇게 까지 걱정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라테우스와의 싸움에서 유신의 봉인이 풀리면서 그의 위치를 파악하기가 더욱 힘들어져 버렸기 때문에 미스티가 이렇게나 골치를 썩는 것이다. 봉인이 풀리기 전에는 유신이 라일로스 대륙 안에 있는 한 어디를 가도 미스티의 감지기의 범위를 벗어 날 수 없었다. 유신을 제외하고는 마법계 어디를 뒤져봐도 코어와 마나의 흐름이 그런 식으로 막혀 있는 인간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특이한 반응의 사람만 검색하면 되었기 때문에 미스티는 유신이 어디에 있건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봉인이 풀리고서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유신은 코어를 어느 정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게 되자마자 평소에는 그 기척을 얄미울 정도로 완전히 감추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유신이 미스티를 전혀 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유신은 기특하게도 밤11시에서 12시 사이에 한번은 코어를 개방해 그의 위치를 알려 주는 친절함을 잊지 않았다. 만약 이런 반응마저 끊겼다면, 미스티는 아마도 슐레인 산맥 전체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유신을 찾아냈을 것이고, 유신 역시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 그가 있는 위치만큼은 알리는 것이다. 하지만 낮 시간에는 완전히 기척을 감추었기 때문에, 미스티로서는 유신이 오늘 하루도 무사하길 바라는 기도나 할 수밖에 없으니 오죽 답답하겠는가? 말 안 듣는 주인을 생각하며 길게 한숨을 내쉰 미스티는 황금빛 양탄자가 멋지게 깔린 초원 위로 시선을 돌렸다. 미끄러질 듯 온통 황금빛인 초원 위에서는 2기 째 견습기사들이 미스티가 짜 놓은 지옥같은 훈련 프로그램에 따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정규 가사들도 혀를 내두르며 갈 정도로 치열한 훈련에 모두들 거품을 뿜을 정도로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살기 등등한 것이 전혀 죽지 않았다. 유신과 함께 처음으로 맡았던 1기 견습기사들 때 럼 눈에 띌 정도로 두드러진 실력자는 없었지만, 평균의 능력은 결코 1기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미스티의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눈이다. 남들이 보기엔 대단한 훈련을 군말 없이 받아 내는 훌륭한 병사로 보인다 해도, 그들의 교육 담당인 미스티의 눈에 차지 않으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문제는 탑클래스인가...' 미스티의 불만은 그거다. 그렇고 그런 병사들은 조금 더 강해져봐야 그 정도일 뿐이다. 집단전투에서 한두 명이 조금 더 강해봐야 그다지 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전체적으로 병사들의 질이 높다면 전면전에서 훨씬 유리하겠지만, 흄은 전면전만으로 이기기에는 너무 버거운 상대다. 양질의 병사와 마법병단 이외에도 최고라 부를만한 특수부대가 필요하다. 장거리 정찰이나 적의 보급부대를 혼란시킬 부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이 있지만, 마법사들은 육체적으로 너무 허약하기 때문에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장거리 정찰이라도 갈라 치면, 적의 진형을 관찰하고 그 내용을 마법으로 전하기도 전에 잡혀 죽을게 뻔하니, 그게 무슨 낭비란 말인가? 장거리 저격이 가능한 무기가 있다면, 그것을 집중적으로 교육해서 저격병을 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법계에는 엘프 장궁병이 쓰는 무식하게 큰 장궁 이외에 그런 고도의 무기가 있을 리 없고, 인간은 엘프의 장궁을 컨트롤 할 수가 없으니 그런 부대를 만드는 것도 현실 가능성이 없다. 엘프는 단지 화살만 쏘는 것이 아니라, 발사된 화살에 실피드의 힘을 싣기 때문에 그토록 강력하고 정확한 위력의 활을 쏠 수 있는 것이다. 이도 저도 다 안되니 미스티가 원하는 것은 특수전이 가능한 인재들, 즉 특별히 관리해서 키울만한 가치가 있는 자질이 뛰어난 녀석이다. 귀족집 자제나 귀하게 자란 녀석들은 그런 자질이 있어봐야 소용없다. 평민, 그것도 연고자가 없어서 불의한 사고로 죽어도, 훈련중의 불행한 사고로 그럭저럭 무마시킬 수 있는 만만한 녀석이 제일 좋다. 지금도 유신의 주문으로 '사냥개'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단련된 특수부대를 교육 중에 있지만, 워낙 그 수가 모자라다. 게다가 어렸을 때서부터 교육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검기를 내거나 코어를 운용할 수준의 강자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나름대로 애써서 훈련시켰고, 일반인에 비해선 비할 수 없이 강한 '완성된' 병사들이긴 하지만 소모품 이상의 의미는 없다. 흄에서 탈출한 이야기를 정리해 보니 흄은 이미 전시체제인 것 같다. 인간 아이들을 이용해 인체실험을 하거나, 인간을 짐승처럼 사육하는 걸로 보아 단기전이 아닌 중장기전을 준비하는 것이다. '칫.... 마물 주제에 중장기전을 바라고 작전을 세우다니...' 이를 갈아 봐야 그건 의미 없는 투정일 뿐이다. 마물을 지휘하고 있는 에데 이 리치 흄은 위시마스터였던 녀석이고, 그 밑에는 무스칼같은 대단한 카리스마와 전투력을 갖춘 괴물이나 뱀파이어 같은 고급의 마물들이 지휘관으로 다수 포진해 있다. 게다가 다크엘프 같은 인간 이상의 지능을 갖춘 마물이나, 레서데몬 같은 마족까지 흄의 밑에 있다. 그러니 라일로스 대륙 전체가 연합하여 흄에 저항한다 해도, 흄의 전력에 비하면 초라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흄의 뒤에 있는, 어둠의 절정에 있는 존재! 헬마스터 베리알이다. 설혹 마법계에 직접 그 힘을 들어 낼 수는 없다 하여도, 베리알은 배신과 거짓의 헬마스터다. 가장 영리한 헬마스터란 뜻이다. 그 교활한 지혜를 마법계의 어리숙한 인간들이 파악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성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유신이 군대를 지휘하고, 수많은 전사가 저장되어 있는 미스티가 유신의 뒤를 받쳐준다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는데, 평범한 인간이 군대를 운용해 봐야 베리알의 손에 놀아날 뿐이라는 건 뻔한 일이다. 위시마스터의 꼼꼼한 관리 덕분에 라일로스 대륙, 아니 마법계 전체에 걸쳐 대규모의 전쟁 따위는 없었다. 그것이 라일로스 군대의 발목을 잡고 있으니 정말 아이러니 한 일이다. 지금껏 모은 대 흄 동맹군의 군사만 해도 2만이 넘어서고 있다. 보급부대까지 편성하고 나면 그 인원은 3만에 육박할 터인데, 이를 이끌어야 할 지휘관들의 경험이란 것이 너무 비천했다. 아무리 이름난 소드마스터나 각 국가의 유명한 지휘관이라 해도, 이런 엄청난 인원에 대한 보급, 부대의 편재, 진형에 대한 지식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3만이란 숫자에 대해 개념 자체를 잡을 수 없으니, 다른 문제는 말해 무엇 한단 말인가? 미스티가 고민하는 사이 조금씩 눈높이를 낮추어 가던 태양은, 어느새 온 대륙을 불게 물들이며 노을을 뿌려 대기 시작했다. 훈련을 마쳐야 할 시간이다. 잠시 딴 생각에 빠져 있던 미스티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각 부대의 중대장급 이상의 견습기사들을 소집하였다. 미스티가 중대장급 이상의 견습기사들에게 오늘 훈련에서 미흡했던 점과 내일 훈련에 대한 전달 사항을 말해 주고, 그것을 각 중대장들이 소대장에게 전달하고, 거기에 대한 토론과 오늘 훈련의 좋은 점과 잘못된 점을 토론하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끝나야 비로소 오늘의 훈련이 종료되고, 견습기사들은 지친 몸을 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두들 이제야 끝났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쉴 때, 하루 중 가장 피곤하고 행복한 절정을 파괴하는 방해자가 나타났다. 하누스궁 방향에서 왕가의 상징인 황금독수리가 새겨진 깃발을 높이 세워든 전령 하나가 그들의 훈련장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보나마나 골치 아픈 일거리를 알리기 위해 뛰어 오는 전령일 테니 미스티로서는 반가울 리 없다. 하지만 그 전령이 미스티보다 더더욱 반갑지 않은 것은 견습기사들일 것이다.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두더라도 눈만 감으면 잠들 정도로 피곤한데, 하필 훈련이 끝날 타이밍에 전령이 도착했으니 얼마나 원망스럽겠는가? 하지만 워낙 미스티가 엄하게 교육시켜 둔 터라 감히 싫은 기생 하나 내지 못하고, 이백 년 묵은 조개처럼 굳어버린 열중쉬어 상태로 그 전령의 볼일이 끝날 때까지 대기해야 할 것이다. 사나운 눈빛이 인상적인 흑마에서 내린 전령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왕실의 문장이 찍혀 있는 서찰을 내밀었다. "성에서 긴급 작전 회의가 있습니다. 미스티님도 참석했으면 하는 율리안 왕자님의 서찰입니다." 전령이라고는 해도, 그 기사 역시 귀족일 것이다. 왕자의 서찰을 전하는 것을 일반 병사가 할 리 없기 때문이다. 미스티는 손님이기는 해도, 귀족은 아니다. 그러니 인사조차 하지 않는 그 전령의 태도가 건방지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귀족들이 미스티와 유신을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그 둘은 규칙을 깨고 있기 때문이다. '계급제도'라는 틀에 얽매여 있는 귀족들에게는 그 틀 밖에 있는 존재가 너무 낮설고 당혹스러운 것이다. 더더욱 약오른 것은 유신이나 미스티나 귀족들이 껄끄럽게 여긴다는 것조차 그다지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율리안 왕자면 제 2왕자 아닌가? 어째서 그가 나한테 서찰을....' 전령이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다시 말에 오르는 것을 확인한 미스티는 천천히 서찰을 열어 보았다. [바쁠 텐데 불러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얼마 전 흄에서 탈출했던 그 기사가 오늘 자살해 버렸습니다. 마법사들의 이야기로는 그 기사의 정신에 마법적으로 무언가가 침입한 흔적이 있다고 하니 사태가 자못 심각하군요. 거기에 대한 대책 회의가 내일 오전 10시에 열리니 미스티님도 가능한 한 참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간결한 내용의 서찰이었지만, 친필이었다. 일국의 왕자인데도 깍듯한 말투를 사용한걸 보면 그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미스티는 이 서찰에서 율리안 하누스에 대해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우선 미스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성격이라는 것과 허례허식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성격이라는 것, 그리고 뭐든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하는 적극적인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율리안 왕자라... 그에 대한 무용담은 들어 본 적이 없지만... 후길 산맥의 드워프들의 왕을 설득하여 대 흄 동맹군에 끌어들인 게 율리안이란 얘긴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외교적 수완이 뛰어난 남자인가...' 율리안 하누스. 장녀인 이자벨 하누스와 장남인 카이론 하누스가 전통적인 무인인데 비하여 율리안 하누스는 무인이라기보다는 학자 타입의 남자다. 왕비를 닮아 깨끗하고 고운 얼굴에 가는 체형을 가진 그로서는, 검에 전심전력을 다해 봐야 그다지 큰 발전을 이루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니 차라리 머리로 하는 다른 재능에 눈을 돌린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미스티의 데이터 속에 있는 율리안은 그다지 눈에 띄는 인물은 아니었다. 연한 가늘고 고운 황금빛 머리카락, 짧게 잘라 앞이마만 살짝 가리는 머리가 푸른 눈과 잘 어울리는 단정한 얼굴의 미청년이다. 보통의 키에 조금은 외소한 체격을 가진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21살 이니 미소년이라 할만한 나이는 아니지만 예쁘장한 얼굴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왕족, 그것도 마물과의 전쟁을 목전에 둔 왕국의 왕자의 얼굴로 적합한 얼굴은 아니었다. '크큭...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 더 있지...' 유신이 생각나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저... 선생님?" 전령이 돌아가고도 한동안 멍하니 서 있는 미스티 때문에 견습기사들은 해산도 하지 못하고 열중쉬어 자세로 대기하던 참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두터운 갑옷으로 둘러 쌓여 있는 미스티의 위압적인 모습에선 어떠한 표정이나 낌새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만약 왕자가 보낸 서찰 안에 안 좋은 소식만 가득하다면, 길고 힘들었던 견습기사들의 하루는 이제 끝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 시작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그 쓸데없는 전령을 속으로만 원망하고 있는 상태지만, 일이 그 지경이 되면 꽤나 지독한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 하누스궁에 일이 있다고 하니 내일은 개인 훈련을 하도록 한다. 각 중대장들이 알아서 훈련 과목을 정하고 보고하도록. 자, 오늘은 이만 해산." 고생 끝에 낙이 오는 법이다. 전령 때문에 평소보다 15분 정도 늦게 끝나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내일은 개별훈련이다. 내일 하루뿐인 작은 휴가지만, 그 정도만 해도 어디인가? 미스티의 공포스런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오늘밤은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쿠궁쿠궁쿠궁" 육중한 발소리가 커다란 회랑을 가득 메웠다. 고스트를 가동하면 발소리가 전혀 나지 않지만, 그러고 다니면 다른 사람들이 너무 부담스러워 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이렇게 발소리를 내고 다니기로 했다. 미스티와 마주친 몇몇의 시녀들이 황급히 고개를 급히 숙이며 길을 비켜 주었다. 그의 위압스런 모습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지만, 몰래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감지하지 못할 미스티가 아니다. 시녀는 고개를 푹 숙임으로서 그의 두근거리는 마음을 미스티가 모를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불행하게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미스티의 감지기에는 그 시녀의 높아진 체온이나 빨라진 심장박동 수까지 모두 감지고 있었다. 하지만 미스티에게는 여자란 별 관심 없는 존재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런 시녀들을 무심히 지나쳤다. 오히려 그런 냉정하고 두려울 정도로 당당한 모습이 더더욱 소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군사작전회의실로 가고 있는 귀족들이나 장군들의 모습이 가끔 보였지만, 아무도 미스티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또 함께 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우연히라도 함께 걷게 되면, 한발 물러서 정원을 구경하거나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를 걸면서 미스티와 거리를 두었다. 미스티로서도 누군가와 친해지는 것은 귀찮은 일일뿐이기에 그런 귀족들의 배타적인 태도는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회의장 앞은 두 명의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그가 다가서자 핼버드를 세워 예를 표한 두 병사는 회의장의 문을 열어 주었다. 일반인이라면 입고 움직이지도 못할 중갑주를 입고도 저렇게나 경쾌하게 움직이는 미스티를 보는 병사의 눈에 존경의 빛이 서렸다. 조금 일찍 왔기 때문에 회의 시작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유메네스에게 가볍게 목례한 미스티는, 한눈에 봐도 남들이 앉아 있는 의자와는 전혀 다른 자신의 의자를 바라보았다. ‘쿡... 마치 나와 같은 신세로구나.’ 미스티의 의자는 특별하다. 일반 사이즈의 의자라면 팔걸이 때문에 앉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체구에 맞는 의자를 준비했다가는 왕의 의자보다 더 커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형평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내의 잡다한 일을 담당하는 시녀장이 생각해 낸 것이 팔걸이나 등받이가 없는 크기만 커다란 의자다. 어차피 미스티가 기대면 등받이가 견뎌 낼 리 없기 때문에 그 편이 훨씬 났다. 시녀장 마음대로 아무런 등받이나 팔걸이가 없는 의자를 내주었다가는 자칫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꽤나 높은 사람의 허가까지 얻어서야 결정된, 사연이 많은 의자다. 사실 미스티는 의자나 침대에 앉을 때도 발과 허리에 힘을 주어야 했다. 그냥 그의 체중을 모두 실었다가는 의자건 침대건 나무로 만든 가구가 버텨 낼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스티로서는 서 있는 것이 제일 편하다. 의자에 살짝 엉덩이를 대고 몇 시간씩 앉아 있는 척 하는 것은 보통의 인간에겐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퍼펫인 미스티에게는 앉아 있으나 앉아 있는 척을 하나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서 있는 것이 편하지만...’ 가뜩이나 위압스런 모습인데 서 있기 까지 하면, 다른 사람들이 너무 부담스러워 할 것이기에 미스티는 마지못해 그의 전용 의자에 살짝 엉덩이만 대었다. 다른 의자들 틈에서 홀로 거대하기만 하고 어울리지 못하는 미스티의 전용 의자를 보자 마치 자신의 처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강한 자는 외로운 법이지.’ 기분 전환을 위해 건방진 생각을 해 봤지만, 앞에 있는 유메네스를 보니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 건방진 존재. 하지만 건방지게 굴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대의 존재. 웜급의 골드드래곤을 보자 왠지 초라해 지는 것 같았다. '정밀하게 지운다고 지웠는데... 안된 모양이군. 하긴, 내가 지운 부분은 그 인간이 지금껏 살아 있을 수 있었던 삶의 희망이었을 것인데.... 그 부분을 지워버렸으니 어찌 살아갈 수 있겠나. 미치는 것이 당연하지.' 쓸 대 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유메네스의 음성이 머리 속을 울렸다. ‘그....그럼 그 기사가 자살한 것이 유메네스님 때문이란 말인가요?’ 혹시라도 마음속을 들킨 것이 아닐까 싶어 같아 깜짝 놀라서 말을 조금 더듬었다. ‘뭐... 그렇다는 거지. 이곳의 인간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이곳 마법사들의 수준도 상당한 것 같더군. 만족할 만한 정도야. 마법적 흔적이 남지 않도록 주의했는데도 귀신처럼 알아내다니... 내가 너무 우습게 본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법사들의 수준이 높다는 것은 나쁘지 않군.’ ‘그렇다면 혹시 유메네스님이 지웠다는 것까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미스티는 말해 놓고 아차 했다. 유메네스가 워낙 편하게 대해 주어서 무심결에 그의 본심이 튀어 나왔기 때문이다. 저 강대하고 교만한 종족은 미스티의 이 말을 기분 나쁘게 여길 수도 있는 일이고, 만약 기분 나쁘게 여긴다면, 미스티는 죽을 것이다. 용족이 열 받았다면 장소나 상황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금 즉시 미스티를 죽여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미스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모든 감지장치를 총 동원하여 유메네스의 코어와 마나의 흐름을 감지했다. 물론 유메네스가 정말 죽일 생각으로 마법을 쓰면 이런 노력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헛된 몸부림일 것이지만, 미스티로서도 절대 지금은 죽을 수는 없으니 나름대로 발버둥치는 것이다. ‘큭큭.... 그리 긴장할 필요 없어. 난 화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다른 용들에게도 그런 태도라면 틀림없이 죽을 거니 조심 해.’ 미스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에 왕과 율리안 왕자, 그리고 이자벨 공주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모든 신경과 감지장치를 전부 유메네스에게 집중하고 있던 터라 미스티는 회의가 왕이 들어오는 것조차 몰랐을 정도다. 덕분에 다들 일어서서 예를 표하는데 미스티만 조금 늦게 일어나고 말았다. 건방진 놈이라고 귓속말을 주고받는 귀족들의 소리가 들렸지만, 그다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유메네스가 얌전히 있어 준 것만으로도 한 달 치의 행운은 모두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의의 시작을 알리는 지루한 말이 한참동안 이어지고, 현식적인 인사말이 한참을 더 오가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정작 회의가 시작되자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드워프들이 인간들의 마법사 중에 흄과 내통하는 마법사가 그런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했기 때문이다. 궁정 수석 마법사 세레니아는 왕 앞에서 심한 모욕을 들었다고 생각하여 노발대발 하였고, 드워프는 드워프 나름대로 그런 침입자 하나 막지 못한 인간 마법사들에게 화가 났다. 덕분에 서로 간에 언성은 점점 높아지고, 회의장 안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왕권은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니고, 그에 비해 마법사들의 힘은 지나치게 강하다. 백성들을 이끌어야 할 귀족들은 경험이 부족하고, 지금이 어떤 상황이라는 자각도 없다. 아무런 사전 조사나 준비도 없이 일단 회의부터 한답시고 동맹군 전부를 소집시킨 것만 봐도 지휘부가 얼마나 미숙한지 알 수 있다. 한심한 꼴을 보며 미스티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런데 도대체 나는 왜 부른 걸까?’ 의아한 생각에 율리안 왕자를 바라보았다. 이자벨 공주는 드워프들의 화를 풀어 주며, 마법사들의 체면도 세워 주는 중재 역할을 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고, 1왕자인 카이론 하누스는 자색기사단과 함께 성 밖으로 전술훈련을 나가서 참석하지 못했다. 적극적인 그의 누나와는 달리 냉정해 보일 정도로 조용한 태도로 회의가 진행되는 꼴을 바라보고 있던 율리안 왕자는 미스티와 눈이 마주치자 뺨을 살짝 붉게 물들였다. 아마도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게 되서 부끄러운 모양이다. 하지만 미스티의 눈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응시했다. 왕족을 노려보는 것은 무례한 일이므로 미스티는 조금만 더 바라보다가 눈을 돌렸다. ‘뭐야... 저렇게 빤히 쳐다보다니... 계집에처럼 얼굴은 왜 빨개지누... 심장박동도 빨라졌잖아? 혹시 위험한 녀석 아냐?’ 왕자님 답게 예쁘장한 얼굴을 한 율리안을 바라보며 미스티는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뭐 왕족으로서 저런 모습을 부끄러워 한다는 건, 적어도 저런 식으로 회의가 진행되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군.’ 결국 회의는 아무런 결론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유메네스가 그 기사의 기억을 지워서 자살한 것이니, 대체 무슨 결론을 낼 수가 있겠는가? 하누스의 가장 뛰어난 마법사는 궁정수석마법사인 8서클 마스터 세레니아 조차도 그 기사의 정신에 마법적 작용이 있었다는 것을 아주 희미하게만 느꼈을 뿐, 어떤 마법을 쓴 것인지, 그리고 그 마법사의 수준이 얼마나 되는지 등의 정보는 하나도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녀 이상의 마법사가 개입되어 있다는 뜻인데, 그 정도의 실력자가 라일로스 대륙 전체에 얼마나 되며, 그런 수준의 마법사가 뭐가 아쉬워서 마물들의 편을 든단 말인가? 확실히 내린 결론이라면, 적어도 하누스의 마법사 중 배신자는 없다는 것 정도다. 세레니아 이상의 실력자는 하누스에 없기 때문이다. 모처럼 동맹의 수뇌가 모두 모였는데도 싸움만 하다 헤어지게 되었으니 표정이 밝을 리 없다. 모두가 일어서서 회의실 안을 빠져 나가기 시작하자 미스티도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스티님?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져 나가자 율리안 왕자가 미스티에게 말을 걸었다. 미스티는 그의 가슴팍 까지 밖에 안 오는 작은 왕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물론이지요. 왕자님 무슨 일입니까?” “가능하다면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 하고 싶군요.” 주변살피며 다른 귀족들이 빠져나가길 기다리는 것을 보면, 율리안은 되도록이면 미스티와 둘이서만 이야기 하고 싶은 눈치다. 미스티와 함께 회의장을 빠져 나온 율리안은 왕궁의 뒤뜰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미스티는 하얀 셔츠와 흑갈색의 바지가 여려 보이는 율리안의 외모와는 잘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한가하게 거닐던 율리안이 문득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유신님을 무척 존경합니다. 그분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자벨 누님이나 성안의 다른 누구보다도 그분에 대해 잘 안다고 해도 거짓이 아닐 겁니다.” 믿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갑자기 시작하자 미스티는 적잖게 당황하였다. ‘스토커인가... 남자한테 관심이 있다니... 이사람, 혹시 이상한 사람 아냐?’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설마 그럴 리야 있겠는가? 미스티는 잡생각을 떨치고 진지하게 율리안 왕자를 바라보았다. “예? 무슨....” “저도 강해지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런 약한 몸으론 금방 한계에 부딛치리한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누님만큼 검술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왕가의 사람인데, 아니 남자인데 형님처럼 기사단을 이끌면서 초원을 달리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요.“ 미스티은 이 귀여운 왕자님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가만히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율리안은 미소년에 어울리는 작지만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미스티님도 그렇고 유신님도 그렇고... 정말 부럽네요.” “설마요. 왕자님이 부러워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강하다는 것. 그리고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쓰지도 않고, 애쓸 필요도 없다는 것. 당연히 부러울 수밖에요.” 율리안의 화술은 정말 교묘해서 미스티가 보기에도 정말 굉장한 것이었다. 아부를 늘어놓는 것도 아니고, 일부로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적절하게 한번씩 칭찬을 하거나 슬쩍 돌려서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충고하는 말솜씨는 정말 일품이었다. 작은 손짓이나 미소, 감탄사를 섞어서 대화를 이끌었기 때문에 지루해질 틈이 없었다. 그 완고한 드워프의 왕을 설득하여 동맹으로 끌어 들인 남자니 오죽 하겠는가? 하지만 이렇게나 끌리는 것은 단지 그의 화술이 뛰어나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마도 진심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말 한마디, 작은 손짓 하나에 거짓 없는 솔직함이 배여 있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이 가게 만들었다. 그의 부드러운 말투와 목소리는 화사한 외모와 잘 어울려 듣는 사람을 빨아 들였다. “미스티님은 유신님을 잘 알지요? 무슨 사이지요?” “이렇다 저렇다 할 것도 없군요. 전 그분의 그림자일 뿐...” “...정말 대단하군요. 미스티님 정도의 기사가 그렇게까지 말하다니... 대체 어떤 분이지요?” 미스티는 걸음을 멈추고 율리안을 바라보았다. 율리안 역시 걸음을 멈추고 미스티를 바라보았다. ‘금기나 다름없었던 이야기를 꺼내다니... 이 왕자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단순한 호기심? 아니면 귀족들에게 따돌림 당하는 나와 유신님을 그의 밑으로 끌어 들일 생각인 걸까? 하지만 왜...’ 미스티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자, 율리안은 빙긋 웃으며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침의 회의... 어떻게 생각하죠?” 미스티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 율리안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 하지만 미스티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낮의 회의는 한심 그 자체였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무조건 비판을 하기엔 미스티의 입장이 애매했다. 귀족도, 그렇다고 하누스의 국민도, 아무것도 아닌 그가 나서서 뭐라고 하기에는 너무 예민한 문제기 때문이다. 어느새 미스티는 율리안 왕자에게 홀린 듯 이끌려 율리안 왕자의 방까지 가게 되었다. 방 안에 있는 테이블 앞에는 미스티가 앉기 편하도록 등받이 없는 의자가 있었다. 미스티를 불러서 함께 이야기를 하려고 미리 준비를 해 둔 듯 했다. 간단한 다과를 직접 내온 율리안 왕자는 찻잔도 그냥 들고 마시는 단순한 걸로 내 오는 등 미스티가 편하도록 여러 모로 배려를 해 주었다. 남들 앞에서 무언가를 먹는 모습은 보여 주지 않는 미스티지만, 왕자의 성의를 봐서 그가 애용하는 커다란 전용 빨대를 꺼냈다. 투구 사이로 뭔가를 먹으려면 이런 특별한 도구가 필요한 것이다. 조그마한 빨대 안에는 무슨 장치가 들어 있는지, 꽤 커다란 과자 정도도 금세 바스라 져서 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미스티가 먹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율리안 왕자가 ‘킥킥’ 작게 웃었다. 그 커다란 덩치가 율리안의 얼굴만한 손으로 자그마한 빨대를 꼬물꼬물 뽑아 차를 마시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율리안이 그만 웃어 버리고 말자 미스티는 빨대를 문 상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미스티의 표정이 굳어버리자 율리안은 황급히 변명을 했다. “아... 놀릴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냥 생각했던 거랑은 이미지가 많이 달라서 그런 건데... 좀 더 무서운 분일 줄 알았는데 솔직하고 귀여운 분 같군요.”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대했다면 미스티는 화냈을 것이다. 하지만 율리안 왕자는 그럼에도 밉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견습기사들에겐 미스티는 하늘같은 스승이었기 때문에 감히 쉽게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러니 유신 이외에 이렇게나 편하게 말을 걸어 준 것은 율리안이 처음이었다. 덕분에 미스티도 율리안에게 호감이 갔다. 율리안이 자신이 손수 내온 다과에 손도 대지 않고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도 꾸역꾸역 먹어 대는 것을 보면 미스티도 과히 싫지 않다는 뜻이다. “형님은 훌륭한 무인이자 장군감이지요.” 미스티가 먹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한참을 바라보던 율리안 왕자가 문득 입을 열었다. 율리안이 이야기를 시작하긴 했지만, 턱까지 탁자에 괴고 있는 편안한 자세 그대로였기 때문에 미스티는 한 호흡 늦게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만의 대군을 이끌만한 정도는 아닙니다. 지금 같은 난세를 이끌만한 정도는... 솔직히 아니지요. 차라리 이자벨 누님이라면 모를까...” 귀여운 얼굴에 야심가 같은 타입은 아니었기에 미스티는 적지 않게 당황하였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설마 차기 왕권을 노리는데 나와 유신님을 끌어 들이고 싶어 하는 건가? 그렇다면 완전히 상대를 잘못 짚은 건데...’ 미스티의 이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율리안 왕자는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는... 아니 비단 우리나라 뿐 아니라 라일로스 대륙 전체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너무나 제각각입니다. 왕권은 미약하고, 귀족들은 수도만 벗어나도 자기가 왕인 줄 압니다. 마법사들의 힘은 기사단 이상으로 강하고...또 제멋대로지요. 이래서는 흄과 전쟁을 할 수 없어요. 지휘체계가 통일되어 있지 않다면 오늘같은 사소한 오해나 적의 이간질로도 연합군 자체가 붕괴되고 말겁니다.” 전쟁을 겪어 보지 않은 온실속의 왕자님이 이정도 까지 앞을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틀린 이야긴 아니지만, 그렇다고 미스티가 찬성 할 수 있는 이야기 역시 아니다. 미스티가 과자를 움켜 쥔 상태로 굳어 버리자 율리안은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에요. 전 그리 욕심이 많지도 않고, 남을 부리는 일에도 익숙하지 않아요. 왕이 될 분은 제가 아닌 카이론 형님입니다. 단지...단지 제가 참을 수 없는 것은 흄입니다. 흄만 칠 수 있다면... 그런다면 저는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유감스런 이야기지만, 카이론 형님 역시 흄을 칠 정도의 기량은 안될 테지요.” “조금... 뜻밖이군요. 어째서 그렇게 흄에 집착을 하지요? 왕자님은... 흄에 대해 잘 모르지 않습니까?” 설마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기에 미스티는 더듬더듬 말했다. “... 제가 6살 때까지 저에게 교양 수준의 기초 마법이론과 궁중 예절을 가르쳐 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스승 겸 보모였지요. 하지만 어머님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저에게는 그분은 어머니였어요. 한없이 여리지만... 그만큼 강하고, 당당하지만 자상한... 그런 분이었지요. 저를 사랑해 주시고, 꾸중해 주시고, 아껴주셨던...하지만 그분은 제가 6살 되던 해에... 저에게 부끄럽지 않은 스승이 되기 위해 싸우러 가신다고 하시고는 떠났습니다. 어렸던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분은... 흄 대륙에 가장 마지막으로 파병된3차 원정대에 지원하신 겁니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어요. 생사조차 확인이 안 되었지만, 하지만 그분의 모습은 제 속에서 조금도 바라지 않고 살아 계십니다.” 추억이 되어 버린 이야기라는 듯, 율리안 왕자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의 푸른 눈 속에는 꺾일 수 없는 의지가 보였다. 갑자기 부담스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이 미안했는지, 율리안 왕자는 다 식어버린 차를 마시는 척 하며 미적거렸다. “저는 율리안 왕자님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군요. 아마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급조된 원정군을 보내 봐야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을 겁니다. 오히려 원정군이 전멸한다면 역습을 당하게 되겠지요. 설혹 율리안 왕자님이 병권을 잡고 총 사령관으로 참전한다 해도 그 사실은 변치 않을 겁니다. 마음은 잘 알겠지만.... 그런 각오만으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어요.” 미스티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율리안의 속도 떠 볼겸, 일반론을 말해 보았다. “알고 있습니다. 비단 저뿐만이 아니지요, 카이론 형님이 지휘하시건, 그 유명한 예메른의 소드마스터 뮬테인 백작이 지휘를 하건 그건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걸 알고 계시다면 왜...” “하지만! 유신님이 지휘하신다면 어떨까요? 아니면 미스티 님이나...그래도 마찬가질까요?” 미스티는 순간 한방 먹었다는 심정이 되었다. 이 예쁘장한 왕자님의 사고 체계가 남들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설마 유신이나 미스티에게 군대를 이끌게 할 생각을 가질 정도로 막무가내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미스티가 그 무지막지한 손으로 조물거리던 과자는 완전히 가루가 되서 하얀 식탁보를 더럽히고 있었지만, 미스티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와...왕자님... 남들이 들을까 두렵군요. 견습기사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유신님이나 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닐지...” “그럼 물어 보겠습니다. 유신님이나 미스티님이 연합군을 지휘해도 흄에게 질 거란 말입니까?” “......” 미스티는 왕자의 진심을 알 수가 없어 한동안 아무 말도 안하고 그의 푸른 눈만 들여다봤다. 미스티의 덩치나 위압적인 분위기로 보아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 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율리안 왕자는 지지 않고 꿋꿋이 마주 노려보았다. 미스티는 단념하고 대답을 했다. “저는 힘들겠지만... 유신님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이기겠지요. 하지만...” 미스티 자신이야 어찌 되었든 상관 없지만, 유신의 이름을 걸고 전쟁에 패한다는 말은, 설혹 거짓말이라도 할 수 없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 말이 듣고 싶었어요.” 율리안 왕자는 무거웠던 분위기를 단숨에 풀어버리는 명랑하고 밝은 목소리로 미스티의 말 허리를 끊었다. 쥐뿔도 없으면서 막무가내 무대포고, 그런 주제에 정확히 핵심을 찝어 내는 능력은 유신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랬기에 미스티도 이 예쁘장한 왕자에게 끌려 이렇게나 황당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버린 것이리라. 이야기가 통한다고 생각하자 율리안 왕자닌 미스티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귀족들이 미스티님과 유신님을 실어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죠? 그래서는 군사들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귀족들에 대한 명령은 제가 내리면 됩니다. 미스티님과 유신님이 저를 조종하기만 하면 되요.” “조종.... 한다고요?” 황당한 이야기에 미스티는 자기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그래요. 마치 꼭두각시 조종하듯 조종하면 되요. 저는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러기 위해선 우선 명령체계를 단일화 돼야 합니다. 지금처럼 귀족들의 힘이 강대해서는 힘들어요. 그러니 저를 이용하세요. 저를 통해 명령을 내리면 귀족들이 따를만한 형식은 갖추어 지는 겁니다. 어찌되었든 형식만 갖추어 지면 귀족들도 아무것도 모르는 저 보다는 유신님의 지휘를 따를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니 저를 도와주십시오!” 미스티가 반응을 보이자 왕자는 신이 났는지 누가 들을 지도 모르는데도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어리숙하긴....’ 물론 미스티는 그의 감지기로 주변에 어떤 생물체나 마법적 반응이 없는 지를 체크하고 있었으니 이 미숙한 왕자님이 떠드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아무리 그러셔도 지금 당장 뭘 어쩔 수 있다는 겁니까?” “지금 당장 뭘 어쩌자는 게 아닙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될 일도 안된다고요!! 제가 못 미덥기 때문입니까? 3년!! 3년이면 됩니다. 그 안에 원정군을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형님은 왕국을 비울 수 없으니 제가 아마도 원정대의 지휘를 맡게 되겠지요. 그때까지는... 그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전쟁 준비를 이루어 놓겠습니다!!” 미스티가 삐딱하게 나오자 율리안 왕자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크게 고함을 질러 버렸다. 흥분하였는지 뺨까지 붉게 상기되어 쌕쌕거리는 거친 숨을 토해 놓았다. 화를 내고 있는 율리안 왕자는 갈기를 잔뜩 세운 어린 사자 같아 보였다. “마법사들은요? 그들은 너무 독립적이고 개개인 모두가 강대합니다.” 사실 귀족들보다도 마법사가 문제다. 마법계인 만큼 마법사들의 수도 많고, 그 위력은 기사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법사들과는 친분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될 거에요.” 미스티가 쉽게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 얼마나 분했는지, 율리안 왕자는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유신님이 반대하면 저는 그분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미스티는 드래곤본을 가공하여 만든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설득하도록 최선을 다해보죠.” 미스티의 대답에 율리안 왕자는 사춘기 소녀나 소년(?)이 봐도 숨넘어가 버릴 정도의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네!!”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건지, 흥분해서 그런 건지 빨개진 얼굴을 주체하지 못하던 왕자는 과자를 집어 들며 얼굴 수습을 했다. 하지만 막상 먹지는 않고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율리안 왕자는 너무 연약하여 조금만 만져 주어도 금방 바스러져 버리는 과자를 괴롭히기 미안했는지, 이번에는 애꿎은 찻잔을 만지작거리기 시작 했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가 싫은 미스티는 먹을 것도 얻어먹었고, 뭔가 발전적인 이야기도 충분히 했으니 돌아갈 생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 벌써 가시게요?” “예? 이제 이야기를 다 한 것 아닌가요? 아니면 더 하실 이야기라도....?” “아니요... 그보다 꼭 소개시켜 줄 아이가 있었는데...” “예? 그럼 만나고 가야죠. 어디에 있지요?” “그러게요... 어딜 갔을까요? 오늘은 방에 있으라고 했는데...” 왕자는 소개시켜 주기로 한 사람이 안보여서 속이 상했는지 어쩔줄 모르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는 말이 있다. 미스티의 초감각 감지기에 급한 발걸음으로 왕자의 방을 향해 뛰어 오고 있는 자그마한 생명체가 감지되었다. ‘거리 31m, 5.166초 후 도달. 135cm, 32kg. 인간아이 인가? 하지만 아이치고는 뛰는 속도가 지나치리만큼 규칙적이다.’ 정확하게 초속 6m로 이동하고 있다. 이정도로 정확하게 움직인 다는 것은 그런 움직임이 가능한 기본적인 틀이 잡혀 있을 만큼 단련된 전사거나, 아니면 정말로 아주아주 우연히 잠시 동안만 그렇게 움직였다는 뜻이다. 그렇긴 해도, 특별히 위협적인 기운은 감지되지 않았기에 약간 이상한 정도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그 생명체가 다가옴에 따라 미스티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뭘까? 감지기에 특별한 이상은 걸리지 않는데? 인간? 12~14세 정도인 것 같고... 근데 이 불안감은 대체 뭐지?’ 그의 감지기에는 여전히 아무런 위협적인 표시가 없었다. 하지만 그 존재가 문 앞에까지 다가왔을 때 이미 미스티는 온 몸을 긴장시킨 채 전투태세에 돌입하고 있었고, 방문이 열렸을 때는 미스티 전용의 투핸디드소드를 절반쯤 뽑은 채 왕자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율리안 이거 봐!!” 미스티가 이렇게 긴장하고 있던 것이 무색해 질 정도로 거침없이 문을 연 침입자는 아무런 부담 없이 미스티를 살짝 피해 율리안에게 돌진해 갔다. 그러더니 어떻게 손 쓸 새도 없이 그대로 안겨 들었다. 틀림없이 그냥 보기에는 12~14살 정도로 보이는, 새하얀 케익 위에 새까만 잉크를 쏟은 듯한 머리카락이 잘 어울리는 미소녀, 또는 미소년이다. 하지만 미스티에게는 단지 성별불명, 종족불명,정체불명의 위험한 생명체로 보일 뿐이었다. 미스티가 율리안의 앞을 막아 선 동작이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그 아이가 율리안에게 달려들 때 까지 율리안은 미스티의 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미스티의 넓은 등에 둘러진 커다란 망토에 가려 율리안 왕자는 미스티가 칼을 빼 든 걸 보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유신이 쓰는 용아검 같은 절정의 마법검도 아닌 이렇게 커다랗고 무겁기만 한 칼 따위는 뽑아 봐야 어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아니, 미스티로서는 설혹 용아검을 쓴다 해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미스티는 천천히 검을 집어넣으며 율리안과 그 ‘존재’를 향해 돌아 섰다. “이것 봐. 율리안. 내가 잡았어. 길러도 되지? 우리를 만들어야 할까? 이름은 뭐라고 하지?” 새까만 검은 단발 머리카락이 크림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얼굴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12살? 많아봐야 14살 정도로 보이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존재다. 율리안도 대단한 미모지만, 이 아이는 율리안 이상이었다. 아이는 그의 가슴팍만한 정도로 작은 어린 매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있었다. 율리안은 천천히 그 아이를 그의 품에서 떼어 놓으며 말했다. “그래. 하지만 생명체를 기르는 건책임이 따르는 일이야. 제때 먹을 걸 줘야 하고, 사랑해 줘야 해. 그럴 수 있어?” “응!! 난 그럴 수 있어. 이 아이, 이름은 율리안이라고 할까?” 순진한 그의 말에 율리안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뭐? 하핫, 나야 영광이지만, 그랬다간 네가 싫어하는 궁내 부원들이나 시녀장이 잡아먹으려고 들걸? 만약 네가 율리안이란 이름을 크게 부르며 성안을 뛰어 다니면... 생각하기도 싫다. 아마 시녀장은 널 창고에 가두어 두려고 할지도 몰라.” 물론 마지막 말은 거짓말이었지만, 아이는 그 말에 찔끔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나이많고 권위적인 사람이 아주 싫은 것 같았다. “정말? 흠...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게 뭐가 나쁘다고... 그 노인네들은 나만 싫어해. 율리안한테는 꼼짝도 못하면서...”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일단 율리안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은 포기한 것 같았다. “하...하하 나야 왕자니까... 그리고 노인네라니! 그런 말을 쓰면 못써.” “칫... 뭐야...나이 많으면 노인이지... 알았어. 안 쓸게.” 율리안이 아이를 떼어 놓았지만, 그 아이는 다시 율리안에게 달라붙으며 어리광을 부렸다. “그런데 매는 어떻게 잡은 거야? 아직 어린 것 같아도... 쉽게 잡을 수는 없었을 건데...” 미스티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율리안은 아이를 다시 때어 놓으려 애썼지만, 아이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응? 몰라? 이 아이가 하늘을 날고 있었는데, 내가 오라고 했어. 자유롭게 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부럽기도 하고... 그래서 불렀어. 그랬더니 내 옆으로 오더라.” “하핫. 그럴 리가 있니? 어디를 다쳤거나 그랬겠지. 발톱에 할퀴지 않게 조심하고, 의사한테 한번 보여 줘 보자.” 율리안은 이 아이를 미스티에게 소개시켜 주기 위해 몇 번이나 말을 돌리려 했지만, 아이는 쉽사리 기회를 내 주지 않았다. 아이가 또 뭔가를 말하기 전에 간신히 미스티를 소개 해 줄 수 있었다. “자, 자 저번에 네가 얘기했던 유신님의 가장 친한 친구 분이셔. 미스티님이라고 해. 미스티님, 이 아이는 아이린이라고 해요. 아이린도 인사해야지.” 유신이란 이름을 듣고서야 아이린은 비로소 미스티에게 관심을 보였다. 흑진주를 연상시키는 동그랗고 검은 눈동자가 미스티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그 눈매는 지금까지의 순진하고 귀여운 것이 아닌 손대면 베일 듯 날카로운 것이었다. “... 율리안, 나 얘랑 얘기하다 올래. 금방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줘.” 아이린은 율리안의 품에서 떨어지며 미스티의 앞에 섰다. 매를 놓고 있는 손을 놓고 있음에도, 그 매는 감히 아이린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그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다. “아이린!!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얘라니? 미스티님은 너보다 나이가 많잖아!” 율리안 왕자가 화냈지만, 아이린은 그런 율리안을 향해 싱긋 웃어 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미스티를 바라보았을 때는 율리안을 바라볼 때처럼 친근한 것이 아닌 기묘한 것을 보는 듯 한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었다. 아이린은 별 말 없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따라 오라는 뜻이리라. 율리안 왕자도 막 따라가려던 참이었는데, 미스티가 큰 손을 들어 율리안 왕자를 막았다. 그리고는 별 말 없이 아이린의 뒤를 따라 나갔다. 아이린은 걸음걸이가 꽤 빠른지, 벌써 저만큼이나 멀리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미스티와는 보폭의 차이가 너무 컸기에 미스티는 금방 아이린의 옆에서 걸어 갈 수 있었다. 미스티가 아이린의 옆에 서자 아이린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미스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이린은 미스티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 볼 수가 없었다. 미스티와는 키 차이가 반미터 이상 났고, 넘겨서 보기에는 어깨의 넓이도 너무 넓었기 때문이다. “...저...” 미스티가 말을 하려고 하자 아이린은 날렵한 육식동물처럼 뛰어 올라 미스티의 어깨 위에 앉았다. “이러고 있으면 율리안이 예의 없이 군다고 화낼거지만... 설마 고자질 하진 않겠지?” “물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뭘 하는 거지요? 아니,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지요? 마.룡. 그라테우스님?” 미스티의 말에 아이린은 고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라테우스라고 부르지 마. 난 아이린이야. 그라테우스라는 이름은 잘 기억도 안 난다고.” 뜻밖의 말에 미스티는 혼란스러웠다. 자존심의 결정체라 해도 좋을 용이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좋습니다. 아이린님.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지요?” 그라테우스가 다른 이름을 쓴다고 해서 미스티가 따질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따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기에 일단 아이린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주기로 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기억이 별로 없어. ‘유신’이란 이름만 어렴풋이 기억이 날 뿐이야. 딴 건 잘 모르겠고...” “율리안 왕자와는 어떻게... ” “응!! 율리안 좋아. 나 아주 무서웠어. 깜깜한 곳에서... 오랬 동안...오랬 동안 아주 먼 여행을 한 것 같아. 그런데 율리안이 날 발견했어. 그래서 함께 지내자고... 어? 그런데 어떻게 율리안과 만났지? 잘... 모르겠어. 기억이 안나.” 아이린은 율리안이 정말 좋은지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좋다는 이야기부터 했다. 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하려니 아이린은 뭔가 잘 기억이 연결되지 않는 듯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머리를 굴려봐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자 짜증이 났는지, 미스티의 머리를 툭툭 치면서 화풀이를 했다. 궁을 오가는 시녀들이나 궁을 관리하는 궁내부원들은, 아이린이 누군가의 어깨위에 올라타서 무례하게 굴자 못마땅한 듯 노려봤다.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은 당연히 높은 신분의 귀족일 테니 신경 쓰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 상대가 미스티인 것을 보고는 10만년 된 공룡 화석처럼 완벽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이 사건은 한가하고 지루한 하누스왕궁에 새로운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다. 엘리시엘과 히야누가 친구가 된지 벌써 3개월이 지났다. 가슴까지 시릴 정도의 푸른 창공. 히야누를 선두로 세 마리의 거대한 그리폰이 슐레인 산맥의 넓디넓은 창공을 마음껏 누비고 있었다. 감히 하늘의 제왕이 비행하는 곳에 다른 새들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구름에 섞여 하늘 위까지 끌려 올라와 당황해 하고 있던 운디네는 이 아름답고 두려운 생명체가 활개를 치자 두렵다는 듯 흩어졌다. “히야누. 조금 더 낮게 날아야지. 이래서는 정령의 성지를 찾을 수 없잖아.” 가장 선두에 선 거대한 그리폰의 위에 있던 자그마한 소녀가 그녀의 그리폰을 목깃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리폰은 마치 소녀의 말을 알아듣기라고 했다는 듯, 굵은 목을 돌려 그의 등에 타고 있는 작은 친구를 바라보았다. 엘리시엘이 히야누의 이마 부분을 쓰다듬어 주자 히야누는 기분 좋다는 듯 부리를 약간 벌리고 차가운 바람을 한껏 들이마셨다. 그리고 활짝 펼쳐졌던 날개가 좁게 접혀지며 아찔한 활강을 시작했다. 놀란 실피드들이 불평 섞인 콧소리를 내며 흩어진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급격히 다가오는 지상의 모습은 엘프인 엘리시엘이 보기에도 현기증이 날 만큼 아찔한 것이었다. 하늘의 폭군, 최강의 맹수 그리폰이 활강하는 것을 발견한 지상의 동물들은 질겁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만약 이 그리폰이 사냥할 목적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라면 지상의 동물들이 도망치는 것은 헛된 몸부림일 뿐이었을 거다. 하지만 지상에서 30미터 정도의 높이에 이르자, 지금까지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오던 관성의 법칙이 무색해 지게도 거짓말처럼 멈추어 섰다. “휘휘휘휘.... 펄럭펄럭” 그 정도 높이에선 기류를 탈 수가 없었는지, 히야누는 거칠게 날개를 펄럭였다. 그런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기 위해선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될 것임에도 히야누는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곳이어 그의 옆으로 히야누보다는 조금 더 작은 덩치의 그리폰 둘이 더 따라 왔다. “유신. 고도를 조금 더 올려야겠어. 이 고도에선 바람을 탈 수가 없다구.” 말을 마친 엘리시엘은 유신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히야누에게 뭐라고 작게 속삭였다. 히야누가 날기 편한 고도까지 단숨에 상승하자 유신의 그리폰 니케와 시누타의 그리폰 옐리마도 히야누를 따라서 상승을 시작했다. 엘리시엘이 히야누와 친구가 되고도 일주일 정도 더 시간이 지나서야 히야누의 등에 탈 수 있었다. 애완동물도 아닌 맹수가 자신의 약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목 뒤쪽에 누군가를 태워 준다는 것은 아무리 완전한 신뢰를 얻었다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엘리시엘이 히야누의 친구가 되고도 타고 다니기 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린 것이다. 하지만 일단 히야누가 엘리시엘을 그의 등에 태울 정도로 신용하게 되자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히야누는 주변 그리폰들 사이에서는 대장 격이었는지, 히야누가 친구라고 인정한 엘리시엘과 유신은 다른 그리폰들 사이에 별 무리 없이 낄 수 있었다. 아직까지 히야누가 그의 등에 타게 해 주는 것은 엘리시엘 뿐이지만, 유신에게도 다가오는 것 정도는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히야누에 이어 두 번째로 유신과 친해진 그리폰이 니케라고 이름 붙인 정말로 재미있는 녀석이다. 다른 그리폰보다 덩치도 조금 더 작고, 날렵하게 생긴 녀석인데, 생긴 것 답지 않게 무척이나 호전적인 녀석이다. 작은 덩치인 만큼, 힘은 조금 약한 것 같지만 스피드와 가속능력, 선회능력은 다른 그리폰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히야누 조차 유신에겐 두려움을 느끼며 싸움 걸기를 꺼릴 정도였는데, 이 니케라는 녀석은 겁이 없는 건지, 아니면 맹수로서의 원초적인 감이 없는 것인지, 처음 유신을 보자마자 도전했다. 그리폰답게 높은 하늘에서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떨어져 내린 니케는 단 일격에 이 자그마한 생명체를 뭉개놓겠다는 듯 돌진해 왔다. 만약 유신이 그리폰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간단하다. 그의 앞에 약간의 검기를 주입해 검막을 형성해 놓기만 해도, 그 그리폰은 자기가 돌진하던 속도 때문에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폰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되는 것이 문제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인데, 공격을 할 수가 없으면 방어조차 제대로 안 되기 때문이다. 세 번 정도 니케가 덮치는 타이밍을 이리저리 피하기만 하면서 지켜 본 유신은, 네 번째에는 간신히 니케의 꼬리를 붙잡는데 성공했다. 당황한 니케가 품위 없는 닭이 회치는 것처럼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아올랐을 때는 이미 유신이 니케의 목까지 기어 올라간 후였다. 니케는 하늘에서 유신을 떨쳐 내기 위해 거의 30여 분을 요동쳤지만, 그리폰의 목에 달라붙은 유신은 마치 니케의 일부인양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니케는 땅으로 곤두박질 쳐서 굴러도 보기도 하고, 관목 사이로 돌진 하는 등 난리를 쳐 봤지만 결국 유신을 떨궈 내지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거의 6시간에 걸친 혈투였다. 이 싸움을 지켜 본 엘리시엘은 기가 막힌 심정이 되었다. “유신... 친구를 사귈 생각이 있는 거야? 싸움을 하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는 그리폰과 친구가 될 수 없어. 대체 무슨 생각이야?” “알아. 하지만... 인간에겐 인간의 방법이 있어. 사실 엘프의 방법은 인간에겐 무리야. 반드시 친구라야만 서로의 마음이 통하고 진심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래서 히야누는 엘리시엘의 친구가 되었고, 유신은 니케의 주인이 되었다. 엘리시엘은 처음에는 이런 관계를 질색했지만, 사나흘 정도 유신과 니케를 관찰하고 나자 그 둘의 관계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유신과 니케의 사이에는 엘프가 이해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생각하는 친구라는 개념하고는 약간 달랐지만, 틀림없이 나름대로 우정과 감정의 교류가 있었다. 니케는 유신을 따랐고, 유신은 그런 니케를 끔찍하게 사랑해 주며 잘 돌봐 주었다. 그건 엘리시엘이 생각하는, 서로 대등한 관계의 친구라는 개념보다는 오히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가 부모를 따르는 그런 관계처럼 보였다. 아무리 그리폰이 높이, 멀리 날 수 있다고 해도, 단 두 마리의 그리폰 만으로 슐레인 산맥을 무작정 뒤지기는 무리다. 두 마리의 그리폰 만으론 슐레인 산맥을 뒤지기엔 슐리에니 산맥은 너무 넓었고, 게다가 가끔 하피들 까지 무리지어 달려들어 피곤하게 했다. “엘핀서스에 가서 도움을 청하자. 엘핀서스에는 동물들과 친화력이 높은 엘프들이 많아.” 15마리의 하피와 힘들게 싸우고 난 후 완전히 질려버린 엘리시엘이 낸 의견이다. 하피들은 보통 열 마리, 많으면 스무 마리까지 무리를 지어 사냥을 하기 때문에 그리폰이 한두 마리 정도 그들의 영역에 침범하면 덤벼들기도 한다. 물론 유신과 엘리시엘같은 우수한 그리폰라이더가 받쳐주고 있는 이상, 만에 하나라도 히야누와 니케가 질리는 없다. 하지만 귀찮게 덤벼드는 하피와 싸우는 것도 지겨운 일이고, 엘리시엘은 혹시라도 히야누가 다칠까봐 노심초사 하는 것이다. 게다가 정령의 성지를 찾기 위해 무리하게 하피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도 사실인데, 그런 침입자 주제에 하피의 영공에서 그 주인까지 상하게 하는 것은 평화로운 종족인 엘프에겐 정말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결국 엘리시엘과 유신은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빛의 나무로 갔다. 엘핀서스는 정령왕의 축복을 받은 땅이라 늘 봄이다. 그래서 하늘 위에서 보는 빛의 나무는 온통 짙은 녹색의 작은 산처럼 보였다. 빛의 나무 주이를 한바퀴 선회한 히야누가 하강 준비를 시작했다. “엘리시엘!! 히야누를 선회시키면 어떻게 해! 그건 사냥 동작이잖아. 아래 엘프들이 놀라겠다. 공격받을 수도 있다고!!” 바람 소리에 묻혀 말이 잘 들리지 않기 때문에 하늘 위에선 고함을 질러야 한다. 물론 유신이 속삭이듯 작게 말한다고 해서 못 들을 엘리시엘이 아니지만, 기분학상 소리를 지르게 되는 것이다. “응? 무슨 말이야. 장로님하고 시누타오빠가 아래서 손 흔들고 있잖아.” “......” 온통 녹색 속에서 자그마한 엘프를 발견하는 것은 건초더미에서 바늘 찾기보다 훨씬 힘들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엘리시엘은 별 부담 없이 그녀의 동료들을 발견하고 히야누를 선회 시켜 인사까지 나눈 것이다. 빛의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스럽고 신비한 기운 때문에 의뭉스런 히야누는 물론 그 겁 없는 니케도 감히 함부로 고도를 낮추지 못했다. “자자 괜찮아. 저기에 있는 무서운 아저씨하고, 명랑하게 생긴 오빠는 내 친구야. 히야누가 가도 환영해 줄 거야.” ‘... 뭐가 무서운 아저씨고 명랑하게 생긴 오빠냐...다들 똑같은 나이 또래로 보이는데...’ 유신도 혹시 볼 수 있을까 하여 눈에 힘을 주고 아래를 내려다 봤지만, 온통 녹색이 빙글빙글 하는 것이 멀미가 날 뿐이다. “자, 히야누. 겁내지 말고, 천천히 내려 가자. 내가 지켜 줄께.” 엘리시엘이 히야누의 두꺼운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말하자 엘리시엘의 애무에 히야누는 안심했다는 듯,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유신은 ‘내려가자.’ 한 마디 했을 뿐이다. 그러자 니케는 아무런 의심이나 망설임 없이 히야누의 뒤를 따라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가끔 있었던 하피들과의 싸움에서 보여준 유신의 위력은 그의 그리폰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강요해도 좋을 만큼 굉장한 것이었다. 유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것은 니케에겐 하나의 신앙이었다. 엘핀서스는 워낙 아름드리 나무가 빽빽하게 자란 곳이라 그리폰 같은 덩치가 내려앉을 곳은 많지 않다. 천천히 내려온 히야누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사뿐한 동작으로 빛의 나무 옆에 있는 게이트 옆에 내려섰다. 곧이어 유신의 니케도 거친 바람소리를 내며 내려섰다. “깍.깍.” 엘프들이 갑자기 나타난 이 아름다운 맹수를 보기 위해 모여들자 히야누는 불안하다는 듯, 목깃을 부풀리며 방패를 두들길 때나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내었다. 반면 니케는 고개를 획획 젓고 날개 짓을 크게 한 번 하였을 뿐이고 그 다음에는 얌전히 유신의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모여든 엘프들은 그리폰이 그들 때문에 불안해하자 엘리시엘과 유신에게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는 흩어졌다. 그들에겐 그리폰도 그다지 큰 흥미거리가 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장로님 오랜만입니다.” 가벼운 동작으로 니케의 등에서 뛰어 내린 유신이 장로 엘시르에게 인사했다. 아직 두달도 안 되었으니 엘프에게 오랜만일 리는 없다. 하지만 엘시르는 부드럽게 웃었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생각보다 훨씬 빨리 그리폰을 친구로 사귀었군요. 그런데 무슨 일로...” 사실 친구로 사귄 것은 아니기에 유신은 약간 애매한 표정을 지었지만 별다른 토를 달지는 않았다. “도움을 구하러 왔습니다. 슐레인 산맥에는 그리폰 못지않게 강력한 하늘의 난폭자가 있잖아요.” “하피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긴... 정령의 성지가 어디 있는지 모르니 하피들의 영역도 뒤져봐야 겠지요.” “네. 그러니 가능하면 정령의 성지 수색에 참여하는 그리폰의 수를 늘리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그리폰을 타고 저희를 도와줄 엘프가 더 많아야 하거든요. 동물과의 친화도가 높은 엘프들의 도움을 빌릴 수 있을까요?” “세라피의 일이니 당연히 할 수 있는 만큼 해야지요. 흠... 일단 한명은 확정이군요. 저 아이를 데려 가세요. 벌써 그리폰에게 반해버린 것 같으니...” 엘시르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한 엘프가 넋을 잃고 히야누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신이 쓰러진 세라피를 안고 왔을 때 마법진을 지키고 있던 그 엘프였다. “우와... 엘리 네 친구야? 너무 멋지다... 나도 소개 시켜 줘.” 시누타는 완전히 히야누에게 반해버렸는지 입까지 살짝 벌리고 히야누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누타가 다가오자 히야누는 날개를 크게 퍼덕이며 위협적인 동작을 취해 했지만, 시누타는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무섭지만 매력적인 광경이다. 사자보다 훨씬 크고, 두려울 만치 예리하도록 아름다운 맹수. 그리고 그 맹수에게 다가가는 가냘프고 아름다운 엘프. 만약 유신에게 물어 본다면 ‘괴수지 맹수냐...’라고 대답할 테지만 객관적인 시선으론 분명 아름다운 장관이었다. 이상하게도 히야누는 엘리시엘이나 유신을 친구로 받아 들였을 때 보다 훨씬 쉽게 시누타를 받아 들였다. “아마도 시누타 오빠는 마음이 순수해서 그럴 거야. 동물들과의 친화도가 제일 높은 엘프니까. 내가 선택받은 정령사인 것처럼 시누타 오빠도 특별하게 동물들과의 친화도가 높은 엘프야.” . . . . 흄과의 전쟁을 위한 재료가 하나하나 갖추어 지기 시작합니다. 하누스 군대의 지휘체계 단일화, 엘프 궁병, 그리폰 라이더, 마법병단, 라일로스 대륙의 동맹, 마룡 그라테우스, 드워프군대.... 또 무엇이 있을까요? 아마 4권쯤서부터는 화끈한 전쟁이 시작되지 않을지.... 그럼 모두 좋은 하루 되시고욤^^ 내일 찾아 뵙겠습니다. ‘이 엘프는 전에 마법진을 지키던 그 멍해 보이던 엘프 아냐? 그럼 멍청함과 순수함이 일맥상통 한다는 뜻일까?’ 유신은 만약 입 밖에 내었다면, 아무리 평화로운 엘프들이라 하더라도 화낼만한 무례한 결론을 내렸다. “이리엘도 오면 데려가도록 하세요. 지금은 세라피에게 줄 약초를 구하러 엘핀서스 숲 깊숙이 갔으니 돌아오려면 며칠 걸릴 겁니다. 아마 이리엘도 꼭 가고 싶어 할 거예요.” “그럼 먼저 시누타님이 친구가 될 그리폰부터 알아보도록 할게요.” 히야누는 엘리시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의 등에 태워 주지 않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시누타만은 별 불만 없이 태워 주었다. ‘과연 엘프... 혹시 히야누놈 얼굴 보고 가리는 것 아냐?’ 유신은 아직도 태워주지 않는데, 엘프는 금세 태워주는걸 보자 유신은 은근히 화가 났다. 세라피가 쓰러진지 벌써 석 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이제부터는 성과가 보이기 시작할 차례다. ‘조급해 하지 말자... 이제 시작이다.’ 거의 두달 가까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리폰만 길들이기 위해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엘프와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 해도, 세라피는 이미 두달 이상을 죽은 듯이 누워만 있었다. 그걸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 유신이 초조해 하는 것도 당연하다. 다시 슐레인 산맥으로 출발하기 전, 유신은 세라피가 잠들어 있는 이리엘의 집에 들렀다. 세라피는 유신이 부르기만 하면 당장 일어 날 것 같은 평온한 얼굴로 가만히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리엘은 세라피에게 줄 약초를 구하기 위해 벌써 며칠째 집을 비웠다고 들었지만, 다른 엘프들이 세라피를 잘 돌봐 주었는지, 세라피의 침대 커버나 이불 등은 깨끗했다. 침대 머리맡에는 나무둥치를 그대로 이용한 화분에 이름모를 꽃이 심어져 있었고, 베이지색커튼은 깨끗하게 묶어져 한쪽 벽으로 모아져 있었다. 아름드리 나무가 가득한 엘핀서스에서는 집안 깊숙이까지 햇빛이 들어오는 곳이 드문데도, 세라피가 누워 있는 침대는 빛으로 충만했다. 하얀 침대 위에 하얀 햇살을 받으며 하얀 얼굴로 잠들어 있는 세라피는 새하얀 새벽의 여신처럼 신비해 보였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반듯!! 반듯이!! 정령왕을 찾아내고야 말 거에요.’ 유신은 그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혹시라도 세라피의 신비함이 바랠까봐, 감히 그녀의 침대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했다. 하지만 뭔가 결심을 한 듯,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세라피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어 주었다. 유신과 세라피, 그리고 시누타가 엘핀서스를 떠난지 일주일도 채 안 되서 시누타는 자신만의 그리폰을 만날 수 있었다. 유신은 조심스레 세라피의 머리카락 한 올을 끊어 첨예의 손잡에 깊숙이에 감았다. 시누타는 유신이나 엘리세엘이 두달에 걸쳐 그리폰과 친해진 것에 비해 단 일주일 만에 그리폰을 친구로 사귈 수 있었다. ‘동물과의 친화도가 가장 높은 엘프라는 말은 거짓이 아닌 모양이네... 선택받은 정령사인 엘리시엘보다도 훨씬 빨리 그리폰 친구를 사귀다니...’ 유신은 다시한번 엘프에게 감탄했다. 옐리마라고 이름 지은 그 그리폰은 히야누와 엘리시엘이 잘 어울리는 것 이상으로 시누타와 잘 어울렸다. 다른 그리폰들은 머리 부분이 보통 갈색인데 비해 옐리마는 온통 하얀색이라 눈에 확 띄는 그리폰이었다. 이로써 세 쌍의 그리폰 라이더가 탄생하였다. 도든 준비는 갓추어 졌으니 이제는 뿌린 씨를 걷기만 하면 된다. 유신은 그의 그리폰을 쓰다듬으며 각오를 다졌다. 그리폰이 세 마리가 된 후 부터는 수색이 훨씬 쉬워졌다. 그동안 접근하지 못했던 하피들 고유의 영역에서도 어느 정도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반면 하피들에겐 악몽의 시작이었다. 그리폰이 세 마리 정도 모여 있으면 하피들로썬 쫒아 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한 녀석들이 뭉쳐 있으면 그 힘은 단순 수치상으로 두 배, 세배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그리폰 한 마리라면 하피 다섯 마리 정도면 쫒차 낼 수 있지만, 세 마리의 그리폰을 쫒아 내려면 적어도 20여 마리 이상이 무리지어 덤벼들어야 했다. 그렇게 한번 싸울 때마다 그 대가로 다친 하피의 수는 손가락으론 꼽을 수 없을 정도고 죽어 나가는 하피의 수도 상당후 되었다. 게다가 가장 맥 빠지는 것은 그 많은 희생을 내어 쫒아내어도, 사실 하피만 많이 상할 뿐, 그리폰 에게는 거의 아무런 상처나 위협도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폰은 원래 독립적인 맹수라 이렇게 몰려다니는 경우는 없다. 몰려다니지 않아도 충분히 강하기 때문에 몰려다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피들도 그럭저럭 그리폰들과 균형을 이룰 수 있었는데, 그리폰이 몰려다니기 시작하자 하피들은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유신이나 엘리시엘이 하피들을 함부로 상하게 하거나, 그들의 사냥터에서 마음대로 사냥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하피들은 영역을 침범 당했을 때부터 그리폰과 유신, 엘리시엘은 그들과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공동의 적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그리폰을 잡기위해 덤벼들기도 무모한 일이다. 그린폰은 하피에 비해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스피드와 지구력, 순간가속능력 등 모든 비행 기술이 월등했기 때문이다. 싸움이 벌어져도 불리해 지면 달아나면 그만이니 하피들로서는 대책이 없었다. 하피보다 두 배 가까이 빠른 그리폰을 추적하여 잡기는 불가능한 일이니 추격은 소용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그리폰이 그들의 영지를 활개치고 다니게 하기엔 맹수로서의 본능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대로 내버려 두기엔 그리폰은 너무나 두려운 존재였다. 그래서 하피들은 교활하고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방법으로 그리폰들에게 복수를 했다. “구구구구구구” 히야누는 마치 상처입은 비둘기 같은 소리를 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커다란 푸른 눈을 깜빡거렸다. “툭, 툭” 건드리면 다시 움직이리라 생각하는 걸까? 히야누는 그의 커다란 부리와 강인한 앞발로 이제는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린 그의 새끼를 건드려 보았다. 너무나 생소한 죽음. 히야누의 새끼는 이제 다시는 깍깍거리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사냥터에서 돌아오는 그의 아비를 기다리지 못할 것이다. 아직 히포그리프의 상태도 벗어나지 못한 어린 새끼의 주검 옆에는 두 마리의 하피가 죽어 있었고, 그리폰의 둥지는 온통 하피와 히포그리프의 털로 엉망이었다. 저 정도로 자랐으면 이제 1년 반 정도면 완전한 그리폰으로 자랐을 것이다. 아직 히포그리프 상태라고는 해도, 저 정도 크기면 다 자란 표범 따윈 상대도 안 될 정도로 강하다. 강인한 체력과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맹수의 본능은 날개가 없어도 그리폰을 최강의 생명체로 군림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지금은 단지 차갑게 식은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이제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하던 작은 날개는 완전히 찢겨져 있었고, 아비를 닮아 푸른색일 눈은 단지 검붉은 구멍이 뚫려 있을 뿐이었다. 내장을 뜯어 먹혔는지, 가슴팍은 갈기갈기 찢겨져 갈비뼈가 튀어나와 있었다. 히포그리프는 그 지경이 되어서도 끝까지 싸웠는지, 그의 발톱에는 원수의 깃털과 살점이 가득했다. 그 참혹한 광경에 엘리시엘은 실 끊어진 꼭두각시인형처럼 주저앉고 말았다. “... 우리... 잘못이야. 하피들의 영역을 마음대로 누비고 다녔으니...” 엘리시엘은 거의 울듯한 목소리로 자책하듯 중얼거렸다. 실제로 그렇다. 그리폰과 싸워봐야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하피들은 그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그리폰의 새끼들을 사냥한 것이다. 하피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로서도 생존권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먼저 하피들의 영역을 침범한 유신과 엘리시엘의 잘못이다. “이제 어떻게 하지? 세라피 언니도 나의 소중한 친구야... 하지만 히야누도 같은 친구라고. 세라피언니를 위해 히야누나 다른 그리폰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어.” 하피들이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취할 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엘리시엘은 그래서 오히려 더 가슴이 아팠다. 히야누와 함께 푸른 창공을 마음껏 누빌 때, 하피들은 그녀와 히야누를 두려워하며 그리폰이 떠날 때까지 감히 사냥조차 나가지 못 했을 것이다. “...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인간은 이럴 때 보통 복수란 걸 하지.” 유신은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복수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래봐야 일이 더 커질 뿐이잖아. 그건 문제를 해결 하는 방법이 아니야!! 게다가 먼저 잘못한건 우리라고!!” 엘리시엘이 반대했지만 유신의 태도는 강경했다. “네 말이 맞아. 히야누는 엘리시엘의 친구고, 친구를 도와주는 중에 희생이 생긴 거야. 먼저 잘못한 것도 우리고, 욕심을 부렸다는 것도 알아.” “그럼 왜!!” 엘리시엘의 추궁에 유신은 눈을 감은 채 깊은 한숨을 들이 쉬었다. 하지만 눈을 뜬 유신의 입에서 나온 것은 무서울 만치 냉정한 것이었다. “설혹 그 때문에 하피 전체가 죽는다고 해도, 아니면 그리폰 새끼들 전부가 죽는다고 해도, 그리폰과 하피들이 싸워서 이곳 생태계가 엉망이 된다고 해도, 그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난 정령의 성지를 찾을 수밖에 없어.” “유.... 유신....” 엘리시엘은 질려버렸다는 듯, 넋이 빠진 표정으로 유신의 이름만 작게 불렀다. “모든 잘못은 나한테 있다. 그러니 하나하나 풀어 가야 할 것도 내 몫일 테지. 우선은 세라피가 먼저야.” “....” “... 그 정도로 언니를... 사랑하는 거야?” 전혀 예상하지도, 뜻하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엘리시엘은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유신은 그만 맥이 풀려버리는 것 같았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왜 다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지?” 기가 막힌 심정에 되물어 봤지만, 엘리시엘도 결사적이었다. “그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언니를 동정해서 그런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거야!? 유신에게 언니는 뭐지!? 그리고....” “...” ‘그리고 나는 뭐냐고...’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켰지만, 그녀의 진심이기도 했다. 그리고 엘리시엘의 말을 듣은 유신 자신도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세라피에게만 이토록 집착 하는가? 사랑을 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동정을 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결코 버릴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유신이 생각하기에는 단순히 세라피는 그와 어떤 큰 인연으로 묶여 있고, 그래서 그녀를 구하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움직이자. 혼란스런 생각으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지금은 눈앞의 일을 해야만 할 때...’ 히야누의 새끼뿐만이 아니라 주위에 애비 그리폰이 없었던 많은 히포그리프가 사냥 당했다. 하피들은 그리폰들이 쉽게 뭉쳐 다니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하여 하나씩 사냥한 것이다. 그 후로도 몇 일간 하피들의 그리폰 사냥은 계속 되었다. 히포그리프는 하늘을 날수 없기 때문에 하피들의 공격을 피할 수가 없다. 한두마리라면 히포그리포 혼자라도 어떻게 할 수 있겠지만, 하피들은 최소 열 마리 이상 몰려다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아비 그리폰이 주위에 있었다고 해도 한 마리의 그리폰이 하피와 싸울 수 있는 숫자는 뻔하다. 그런 그리폰들은 그들의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 도망치지도 못하고 하나 둘 하피에게 당하게 되었다. 하피들은 이제 히포그리프 뿐만 아니라 따로 떨어져 있는 그리폰도 습격하기 시작했다. 유신이 하피 사냥을 시작한지 이틀째, 그의 눈에 마침 열댓마리의 하피가 히포그리프와 히포그리프를 지키고 있는 그리폰을 습격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폰에게도, 하피에게도...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유신은 각오를 다지겠다는 듯, 작게 중얼거리며 히포그리프를 습격하는 하피들의 무리를 향해 니케를 돌진시켰다. 그정도 숫자의 하피를 보면 보통의 그리폰은 싸우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그리폰이 강하다 해도, 포위당하기라도 하면 자칫 도망치지도 못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케는 두려움이라는 감각 자체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 절대적으로 유신을 신뢰하는 것인지,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기습을 가했다면 좋았을 것이지만....’ 유신의 생각과는 달리 니케는 잔수 따위는 쓰지 않았고 “꽤에엑”하는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하피들의 한 가운데로 뛰어 들었다. 보통 다대일의 싸움에선 중앙에 포위되지 않고 싸우는 것이 정석이다.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 가장 약한 녀석부터 하나하나 숫자를 줄여 나가는 것이 다대일 싸움의 정석인데, 니케는 그런 것 쯤 상관없다는 듯, 열다섯 마리나 되는 하피들에게 둘러 쌓여있던 히포그리프의 위를 막아섰다. “니케. 저쪽의 그리폰을 도와.” 마치 유신의 명령을 알아듣기라도 했다는 듯, 니케는 다른 그리폰의 뒤를 지키며 날았다. 하피들은 뭉쳐있는 그리폰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다. 그동안 히야누와 니케 두 그리폰에게 꽤나 많이 당했기 때문이다. 니케와 다른 그리폰이 서로의 뒤를 봐주며 전투태세에 들어가자 하피들은 작전을 바꿨다. 열 마리의 하피가 그리폰의 주위를 맴돌며 견제하는 사이, 나머지 하피들이 히포그리프에게 돌진했다. “큭, 좋은 작전이다. 하지만....” 가소롭다는 듯 하피들을 비웃어 준 유신은 니케가 꽤 높이 날고 있었음에도 별 망설임 없이 뛰어 내렸다. “퍼억” 뛰어 내릴 때부터 공격하기로 찍어 놓았던 하피 한 마리를 걷어차며 떨어질 때의 충격을 줄인 유신은 재빨리 첨예를 뽑으며 히포그리프의 앞을 막아섰다. “파악”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유신의 첨예가 두 번째 하피의 날개를 갈랐다. 하지만 하피도 워낙 재빠른지라 굴러 떨어지는 와중에도 유신의 오른쪽 어깨의 살점을 한 움큼 떼어 갔다. 화끈한 통증이 상처부위로부터 퍼져갔지만 차라리 그 통증만큼 마음은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 용서해 달라고는 안하겠어. 하지만... 하지만 너희를 살려 줄 수는 없어!!’ 유신 스스로가 생각해 봐도 비겁할 만치 가식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우주는 비참할 만큼 냉정한 약육강식으로만 이루어지는 세계고, 위시마스터를 잃는 순간 마법계도 예외는 아니게 되었다. 그동안 위시마스터들의 철저한 관리로 그런 점이 가려져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마법계도 다른 우주처럼 더 성장해 그런 비정함을 받아 들여야 할 때이다. 목숨을 건 사투에서 어설픈 동정은 베풀 필요도, 구할 필요도 없는 쓸데없는 감정의 낭비일 뿐이다. 날개를 잘린 채 괴롭게 발버둥치는 하피의 숨 줄기를 끊기 위해 첨예를 겨누었다. 하지만 그 하피를 처리한 것은 히포그리프였다. 독수리의 발과 같은 날카로운 앞발로 하피의 목줄기를 움켜쥐고는 곡괭이 보다 훨씬 단단하고 날카로운 부리로 그 두개골을 내리 쪼기 시작했다. 하피는 거의 몸을 90도로 꺾으며 괴롭게 몸부림 쳤지만, 겨우 인간만한 크기의 작그마한 하피가 망아지 보다 커다란 히포그리프의 힘을 당해낼 리 없다. 세 번 정도 머리를 쪼이자 두개골은 완전히 으깨져 내던진 파이처럼 되었고, 근육은 뇌의 통제를 떠나 제 멋대로 경련을 일으켰다. 남은 세 마리의 하피는 공격해 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날아올라서 도망칠 준비를 했다. “니케!! 이리 와!!” 유신의 부름에 니케는 실랑이를 버리던 하피들을 내팽개치고 유신에게 날아갔다. 유신이 두 마리를 해치울 동안 니케와 또 다른 그리폰도 각각 두 마리씩 잡아 죽인 상태였다. 니케는 갑자기 싸움터를 후퇴를 하면서 약점이 많이 노출되었기에 날개와 등에 길게 상처를 입었지만, 그다지 상관하지 않았다. 전투 중에 지상에 착지하게 되면 그 순간 너무 많은 빈틈이 노출된다. 유신은 니케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하자 땅에 오른쪽 무릎이 닿을 만큼 몸을 낮추었다가 그대도 튕기듯 몸을 날렸다. 날리는 동시에 지면으로 검기를 날려 그 반탄력까지 이용하자 거의 10m를 뛰어 오를 수 있었다. “깍. 깍.” 유신이 등에 올라타면서 상처를 건드렸는지, 니케는 잠시 휘청했다. 하지만 금세 다시 균형을 잡고 날아올랐다. 유신과 니케, 그리고 또 한마리의 그리폰에게 절반 이상의 하피가 죽자 하피들은 이미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도망치는 상대까지 추적해 죽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하피들에게 이렇게 적당히 위협만 준 상태에서 그만두면 그 후의 상황이 더 끔찍해 지리란 건 뻔한 일이다. “추적하자.” 하피들과의 거리는 이미 상당히 멀어져 유신의 눈에는 까만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니케는 유신의 단 한마디에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하피들과의 거리를 좁혀 가기 시작했다. 따로 흩어져 피하면 쉬울 것을, 녀석들은 멍청하게도 선두의 하피만을 따라서 죽어라 도망쳤다. 하지만 하피가 어떻게 그리폰을 따돌릴 수 있겠는가?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져 하피들은 그리폰의 영역을 벗어나기 전에 이미 니케와의 전투거리가 되어 버렸다. 그러자 하피들도 눈이 뒤집힌 것인지, 아니면 숫자를 믿고 한판 붙어보겠다는 무모한 생각을 한 것인지 반전하여 덤벼들었다. 아직 하피들은 여덜 마리나 남아 있었고, 니케와 유신 모두 상처를 입었다. 게다가 히포그리프를 지키고 있던 그 그리폰은 따라오지 않았으니 충분히 해볼만 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두 마리는 니케의 눈 아래의 사각으로 파고들었고, 세 마리는 눈을 어지럽히며 진로를 막았다. 또 각각 좌측과 우측, 그리고 뒤쪽까지 포위한 채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하피들은 자신들의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일단 그리폰과 서로 엉겨 붙어 빠른 스피드를 줄여 보자는 생각인 듯 했다. 하피들은 그리폰과의 집단 전투 경험이 많았는지, 타이밍도 완벽했고, 작전 역시 나무랄 대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좋은 판단이지만... 난 장식품이 아니라고.’ 등에 타고 있는 그리폰 라이더가 유신이 아닌 보통 기사 정도만 되었어도 하피들의 이 사냥 방법은 확실히 유효했을 것이다. 두 마리가 그리폰라이더의 양 팔을 묶어 놓는 동안 다른 한 마리가 공격하면 쉽게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폰의 등 위라 피할 곳도 마땅치 않고, 피해봐야 타고 있는 그리폰이 다치게 된다. 게다가 공중에서의 전투가 일반인에게 익숙할 리가 없으니 공중전에서는 제 실력을 다 발휘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니케의 등에 타고 있는 그리폰 라이더는 유신이다. 유감스럽게도 하피들은 무덤을 파서 관 뚜껑 까지 닫은 꼴이 되었다. “슈슉” 하늘 위는 하피들과 그리폰의 날갯짓 소리, 그리고 바람 소리로 시끄러웠지만, 그 속에서도 첨예가 내는 날카로운 파공음은 주위의 소음을 압도했다. 니케의 날개 쪽으로 덤벼들어 오던 하피들은 제대로 접근해 보지도 못하고 조각이 나서 떨어져 버렸다. 체계적으로 검술을 배운 노련한 기사도 유신의 일격을 받기가 힘든데, 하피들이 막는다면 넌센스다. 차라리 멀리 떨어져서 첨예의 사정거리 밖에서 파상공격을 했다면 약간이라도 승산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하피들은 불행하게도 유신이 타고 있는 니케에게 한꺼번에 난전 형태로 접근전을 건 것이다. “슈칵” 그다지 커다랗지도 않고, 번쩍번쩍 빛나지도 않는 투박한 모양의 묵빛 첨예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하피들은 유신이 휘두른 단 일격에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의 치명상을 입었다. 다섯 개의 날카로운 손톱, 단지 그 하찮은 각질에 의존해서 첨예를 막으려 했던 하피는 손톱과 오른팔, 그리고 오른쪽 날개까지 깨끗이 잘려졌다. “끼에에엑” 드래곤을 제외한 어떤 맹수의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도 첨예보다 강할 수는 없다. 하피는 쇠를 긁는 듯한 듣기 싫은 소음을 내며 추락했다. 검기를 살짝 주입한 상태에서 니케의 날개 위로 작은 검막을 형성하자 세 마리의 하피가 순식간에 조각이 나 버렸다. ‘칫... 날개 때문에 칼 쓰기가 불편하잖아....“ 그렇게 압도적인 위력으로 하피들을 쓸어 내면서도 유신은 니케의 커다란 날개가 불만인지 투덜거렸다. 유신의 첨예가 막는다고 막아지는 물건도 아니고, 그렇다고 달아나 피하기에는 그리폰의 속도는 너무나 빨랐다. 여덜 마리의 하피가 창공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한편 유신이 마주치는 하피들의 씨를 말려 가면서 슐레인 산맥을 뒤지고 있을 때 엘리시엘은 히야누, 시누타, 옐리마와 함께 정령의 성지를 찾고 있었다. 결국 엘프인 엘리시엘과 시누타는 유신을 도와 하피들을 사냥하는데 찬성하지 않았고, 그녀 나름대로 슐레인 산맥을 찾는 것이다. ‘내가 잘못하는 걸까...’ 하피들의 영공을 수색할 수 없으니, 사실 이런 수색은 무의미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엘리시엘도 알고 있었다. 이제 와서 하피들과의 싸움을 피한다는 건 이미 늦은 것은 아닐지, 또 유신과 니케만 위험에 빠뜨리고 자기는 안전한 곳에서 세라피를 도와주고 있는 ‘척’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구정물을 뒤집어 써야 하는 괴로운 역할은 전부 유신에게 맡겨두고 자신만 착한 척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여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엘프야. 인간이 아니라고. 그렇게 인간화된 생각을 하거나 억지로 인간에게 맞출 필요는 없어. 난 엘리시엘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해.” 엘리시엘의 생각을 읽었는지, 시누타가 천천히 타일러 주었다. “응. 고마워요. 오빠. 하지만... 역시 세라피 언니를 위한 일인데 유신혼자에게 짐을 떠넘길 수는 없어. 조금 더 깊이 찾아봐요. 하피들이 덤벼들 것 같으면 바로 도망치고.” 엘리시엘은 그녀의 그리폰의 단단한 목덜미를 꼭 끌어안았다. “히야누... 정말 미안해. 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구나. 그래도 세라피 언니를 위해 정령의 성지를 찾는 걸 도와줘. 언니를.... 저대로 둘 순 없어.” 엘리시엘은 히야누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마치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듯, 히야누에게 속삭였다. “쌔에에엑” 히야누는 엘리시엘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높은 소리를 내며 하피의 영공을 넘어섰다. 방금의 포효로 하피들은 그리폰이 그들의 영역을 침범한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감히 덤벼드는 무리는 없었다. “엘리시엘! 천천히 날아. 히야누는 너무 빨라서 옐리마가 힘들어한단 말이야.” 시누타는 비상식적으로 크고 빠른 히야누를 따라 잡느라 힘들게 날개 짓 하는 그의 옐리마가 걱정되었는지 엘리시엘에게 불평했다. ‘아무리 슐레인 산맥이 넓다고 해도 그리폰으로 한달이나 뒤졌는데도 찾을 수가 없다니...역시 정령의 성지는 하피들의 영역에 있는 걸까...’ 그리폰이 하루 비행할 수 있는 거리는 그리폰의 둥지를 중심으로 반경 400km 정도다. 단순히 비행만 한다면 1000km 이상을 날 수 있겠지만, 중간 중간 사냥도 해야 하고, 휴식도 해야 한다. 엘리시엘이나 시누타는 히야누와 옐리마에게 유신이 니케에게 하는 것처럼 명령하는 게 아니라 부탁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리한 수색을 강요할 수는 없는 입장이다. 게다가 그냥 높은 곳에서 비행하는 것이 아니라 저공비행으로 날면서 정령의 기운이 강한 곳을 찾는 곳이기 때문에 수색은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다. 그렇다고는 해도, 정령의 기운을 예민하게 느끼는 엘프 둘이서 벌써 한달도 슐레인 산맥을 뒤졌다. 아무리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해도 벌써 발견 되었어야 한다. ‘유신...’ 착잡한 마음에 가장 사모하는 ‘인간’의 이름을 작게 불러봤다. 아주 멀리서 유신의 그리폰이 비행하는 것을 보았을 뿐, 엘리시엘은 거의 삼주가까이 유신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색 구역이 완전히 다른 만큼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시원하고 신선한 창공의 공기를 그녀의 작은 가슴이 터질 만큼 가득 담아 봤지만, 그다지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아....” 엘리시엘은 속상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엘리시엘. 뭔가 이상해. 이쯤 들어왔으면 하피들이 경계를 하며 나와야 하는데, 어째 너무 조용한 것 같지 않아?” 시누타가 그의 옐리마를 히야누의 옆으로 바짝 붙이며 물었다. 뭔가 이상한 것이다. 시누타의 말에 엘리시엘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고도로 날고 있다고는 해도 하피들이 그리폰의 침입을 모를 리 없다. 그리폰이 뭘 하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한 하피들의 정찰대가 그들의 머리위로 한두 마리쯤은 보여야 정상인데도 푸른 하늘에는 작은 새조차 없었다. “시누타 오빠.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아요. 빠져 나가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깨닫는게 너무 늦었다. 막 고도를 상승시키려는 참에 지상으로부터 셀수도 없이 많은 하피가 갑자기 날아올랐다. 아무리 숲 속에 숨어 있었다고 해도 그토록 눈이 좋은 엘프가 이정도 숫자의 하피가 숨어 있었던 것을 모를 리 없다. “어떻게 이럴 수가... 설마 결계 속에 숨어 있던 것인가?” “마흔? 아니 쉰 마리 이상이야.” “칫, 몰라!! 일단 빠져 나가요.” 그리폰이 워낙 저고도로 날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상승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덩치가 큰 만큼, 낮은 곳에서는 바람의 정령을 타지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만큼 둔할 수밖에 없다. “꾸에에엑” 간신히 상승을 시작하던 히야누가 갑자기 뭔가를 발견했는지, 고도를 높이는 것을 멈추고 하피 한 마리에게 돌진해 가기 시작했다. “이런, 히야누!! 왜그래?” 아직 낮은 고도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속도였다. “퍼억” 끔찍한 소리를 내며 그 하피의 머리통을 움켜쥔 히야누는 추락하듯 지면으로 떨어져 갔다. 그 뒤를 따라 쉰 마리의 하피가 아무렇게나 엉켜서 히야누와 그 하피를 따라 하강하기 시작했다. 지면에 처박히기 직전, 히야누는 간신히 다시 날아올랐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날개 힘이었다. 물로 움켜쥐고 있던 하피의 머리통은 산산조각이 난 후였고, 날카로운 발톱에 꾀어진 하피는 머리통도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히야누의 발에 걸려 너덜너덜 흔들리고 있었다. 지면에 거의 5m 정도까지 다가갔다가 간신히 다시 날아 오른 것이다. “가장 빠른 바람의 친구. 찰나를 가르는 진공의 날. 나의 친구 히야누를 도와 줘요.” 실피드가 소환되어 윈드커터 정도가 되는 위력의 날카로운 진공파를 하피들에게 날렸다. 하지만 하피 역시 바람의 축복을 받은 존재다. 실피드는 바람의 정령인지라 하피들은 별로 어렵지 않게 엘리시엘의 공격을 피해 낼 수 있었다. ‘순간적이었지만.... 분명히 뭔가를 보았어. 설마 저 아래가 정령의 성지인가?’ 히야누가 하강하여 지면에 부디칠 만큼 내려갔을 때 엘리시엘은 뭔가를 느꼈다. 워낙 순간적이라 무언가 자세히 느끼기에는 무리였지만, 경치가 바뀐 것 같기도 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질감이 들었다. ‘하지만... 정령의 성지가 저렇게 불길한 기운을 뿜고 있을 리는 없는데... 뭔가 잘못된 것일까?’ 하피들이 나타났던 아래쪽의 계곡에서는 굉장히 불길한 뭔가가 있었고, 그 불길한 기운을 가려주는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던 것이다. 그 결계 덕택에 하피들은 엘프와 그리폰의 날카로운 눈을 피해 숨어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깊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하피들의 공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어찌된 일인지 히야누는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하피들과 뒤엉켜 싸웠다. 아무리 엘리시엘이 마법지원을 해 준다 해도, 그 많은 수의 하피와 싸운다는 것은 무리다. 게다가 공중에서는 마법의 조준도 정확하지 않고, 접근전 양상이 되어 버리면 마법 공격은 그 위력을 발휘 할 수가 없다. 시누타도 열심히 마법을 쓰거나 화살을 쓰면서 그의 옐리마가 싸우는 것을 도왔지만, 숫자상의 차이가 너무 났다. 금세 두 그리폰은 하피들과 그리폰의 피로 새빨갛게 변했다. 한두번 마법을 맞아 본 하피들은 그리폰 보다도 그리폰 위에 있는 자그마한 엘프가 더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엘리시엘과 시누타에게 집중적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리폰은 두 앞발과 무시무시한 부리를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만한 공격 능력은 없다. 하지만 엘프들의 마법은 한방만 잘못 맞아도 하피들같이 작은 비행 몬스터는 일격에 가루가 되기 때문에 훨씬 두려운 것이다. “꺄악” 엘리시엘은 하피의 날카로운 발톱에 긁혀 오른쪽 팔에 긴 상처를 입었다. ‘이럴 때 유신이 있었으면....’ 히야누가 무거워 할 까봐 얇은 가죽 갑옷조차 입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히야누는 그의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 봤지만, 이미 포위된 상태라 빠져나가기가 여의치 않았다. 생고기를 뜯어 먹는 하피의 발톱은 매우 더럽다. 덕분에 거기에는 각종 병균이 우글우글 하고, 그 발톱에 상처를 입으면 나쁜 병원균에 감염되기 일쑤다. 엘리시엘은 출혈로 정신도 가물가물한데다 히야누가 하피를 떨쳐내기 위해 계속 고도를 바꾸며 이리저리 움직였기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쐐에에엑” 팔에 입은 상처에 독성이 퍼지자 엘리시엘은 휘청댈 수 밖에 없었다. 그 순간 나타난 약점을 놓치지 않고 하피 한 마리가 엘리시엘에게 달려 들었다. “끝인가...” 그녀가 막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하피 한 마리가 그 더러운 숨결을 얼굴에 할 정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푸욱” 끔찍한 소리와 함께 엘프의 장궁을 얼굴 한 가운데 맞은 그 하피는 빙글빙글 돌면서 천천히 추락했다. 시누타가 엘리시엘의 위기를 보고 자기의 몸은 돌보지도 않고 엘프의 특기인 장궁을 날려 그 하피를 막아준 것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너무 약점이 많이 노출되어, 하피들의 접근을 허락하고 말았다. 옐리마는 덕지덕지 엉겨 붙은 하피들을 떨궈내지 못하고 천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시누타 오빠!!” 엘리시엘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시누타를 불렀지만, 시누타의 그리폰은 다시 날아오르지 못했다. 절망적인 그 순간, 추락하는 옐리마를 향해 갈색의 번개가 떨어졌다. “큰 마법을 쓰지 말고 매직 애로우로 시간만 벌어!!” 푸른 창공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인간. “유신! 왔구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리는 그리폰의 속도는 음속에 육박한다. 옐리마에게 달라붙어 있던 하피들은 니케가 그 무지막지한 속도로 휩쓸고 지나가며 발톱과 부리를 휘두르자, 무엇에 당했는지도 모르고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니케, 엘리시엘에게 가!” 명령을 내린 유신은 니케의 등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래... 유신이 있었어... 언제나 위험할 때마다... 나를 지켜 주었던... 누구보다 강하고,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엘리시엘의 눈에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가장 확실한 믿음. 그런 믿음을 주는 ‘인간’에 대한 감동으로 흐르는 눈물이었다. “날개가 있어야 공중에서 강한 것은 아니라고!” 유신은 자신에게 주문을 걸듯, 크게 소리치면서 하피들에게 돌진했다. 유신은 하피나 그리폰처럼 날개가 없음에도 그들 못지않게 하늘에 있는 모습이 아름답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난전이라면 하피 따위, 아무리 많아봐야 유신을 상대할 수 없다. 나선 모양을 그리며 니케의 등을 차고 날아오른 유신은, 날아 오른 순간 그를 향해 덮쳐 오는 하피들을 그가 만드는 나선의 소용돌이로 끌어 들였다. 물론 그 소용돌이 속에는 첨예라는 끔찍한 죽음의 파도가 치고 있었다. 하피들은 그들의 학습 능력을 저주해야 할 것이다. 좀 전의 싸움에서 그리폰 라이더들은 접근전에 약하다는 것을 배운 하피들은 유신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첨예가 회전하는 단 몇 초의 짧은 시간동안, 그 속에 휘말렸던 하피 예닐곱 마리가 순식간에 치명상을 입고 추락했다. “푸욱” 유신은 간신히 그 죽음의 폭풍을 벗어나 한숨을 돌리고 있던 하피의 배에 첨예를 깊숙이 밖아 넣었다. 첨예가 워낙 예리한지라 하피의 배를 뚫고 등으로 빠져 나갔음에도 피조차 나지 않았다. 갑자기 무게가 늘어나자 휘청대던 하피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배속에 가로로 박힌 낯설은 이물질을 바라았다, 그리고는 잊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 생각났다는 듯,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끼에에엑” 하피는 유신을 떨궈내기 위해 날개를 버둥거렸지만, 오히려 좌우로 흔들리면서 상처가 더 벌어졌다. 피분수가 뿜어져 나오자 하피는 날개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천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하앗” 하피가 추락하기 시작하자, 그 하피에게 더 이상 볼일이 없어진 유신은 짧은 기합과 함께 몸을 90도로 꺾어 그 하피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다시 날아올라 다른 하피에게 쏘아져 갔다. 유신의 무시무시함을 본 다른 하피들은 유신이 다음 목표를 찾아 몸을 날리자 질겁하며 피하려 했다. 하지만 상대는 너무나 빨랐다. 마치 바람의 정령이 전력을 다해 돌봐 주는 듯, 유신이 검술을 펼치는데 있어 하늘이라서 불리한 점은 없었다. ‘서거걱’ 숨 막히는 소리와 함께 또 한 마리의 하피가 마지막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소중한 머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일이 이쯤 되자 유신의 주위에 있던 하피들은 모두 그를 피해 멀찌감치 벗어나 주변을 날면서 눈치를 살폈다. 하나하나 파상공격을 퍼부으며 체력 소모를 유도하거나, 남은 하피들을 모두 집중하여 엘리시엘과 히야누부터 쳤다면, 하피들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피들은 숫자를 믿고 방심한 건지, 아니면 유신에게 너무 질려버려서 미처 그 생각을 못한 건지, 그다지 능률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유신에게 절반, 엘리시엘에게 절반씩 각개 격파 당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파상공격을 하지 않아 다행이다. 소모전으로 나왔다면 큰일 날 뻔 했어.’ 사실 유신은 그 많은 수의 하피를 보고 아무 희생 없이 이길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초반부터 하피들의 기를 죽여 놀 속셈으로 체력안배를 하지 않고 맹공을 펼친 것이다. 그의 작전은 잘 맞아 떨어져서, 하피들은 절대의 죽음을 의미하는 저 강대한 존재에게 먼저 싸움을 걸 수 없었다. 그때부터 싸움은 유신이 그려놓은 그림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유신은 주변에 다른 하피가 없자, 추락을 시작하는 하피의 몸을 발판으로 공중에서 방향을 틀어 옐리마와 시누타가 추락한 방향으로 떨어졌다. 유신은 공중에서의 전투가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듯, 오히려 지상에서 보다도 얄미울 정도로 흔들림이 없었다. 옐리마와 시누타를 쫒던 하피들은 승리에 취해 하늘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덕분에 이 하피들은 끔찍한 재난을 만났다. “뻐거걱” 유신은 아직 떨어질 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버둥거리는 옐리마에게 공격을 가하려던 하피의 두개골을 깊숙이 쪼갰다. 떨어지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깊숙이 벤 것이다 . 거의 20여 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던 운동에너지를 고스란히 받았으니, 하피는 단숨에 세로로 두 쪽이 나 버렸고, 유신도 힘을 집중한 오른쪽 손바닥이 찢어졌다. 그렇게 충격을 줄였음에도 발목을 타고 올라온 충격에 뒷머리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상에 내려선 유신은 그런 육체적인 충격보다도 정신적인 충격이 훨씬 컸다. ‘이게 대체...’ 유신이 착지한 곳은 하늘에서 내려다 본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나무들. 아니, 나무라 부르기도 뭣한 기괴한 것이었다. 나무의 줄기는 뱀의 비늘 같은 것으로 덮여 있었고, 그 끝에는 사람 머리 모양의 열매가 열려 있었다. 그런 흉측한 과일이, 만약 먹을 수 있는 과일이었다면 ‘탐스럽다’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열려 있는 그 ‘무언가’는 어쩌면 식물이 아니라 동물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건 별로 중요 사항이 아닐 것이다. 곱슬 머리카락을 한 얼굴이나 긴 머리를 땅까지 드리운 것 등, 형태에 통일성이 없어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특히 행복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유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열매와 눈이 마주치자 두통이 날 것 같았다. 또 어떤 나무에는 눈알이나 뇌, 심장 같은 장기들이 열려 있었고, 그 크기나 모양도 각양 각색이었다. 하늘은 연보라색으로 보였고, 바닥은 체스판처럼 흰색과 검은색의 격자무늬였다. ‘그래도 바닥이 딱딱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뭐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유신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범함이 깨어지는 순간에 그나마 현실을 끝트머리를 붙잡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한눈을 팔면 죽는다. 생각은 조금 있다가 하자.’ 정신을 가다듬은 유신은 일단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시누타는 정신을 잃었는지, 한쪽 구석에 처박힌 채 미동도 못하고 있었고, 옐리마는 그에게 들러붙어 있던 지겨운 하피들이 떨어져 나가자 거세게 몸을 털며 일어섰다. “쌔에에엑” 옐리마는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목의 깃을 잔뜩 부풀리고는, 잔뜩 웅크린 자세로 주변을 경계했다. ‘터프한데!! 기가 죽은 것 같지는 않군. 좋았어! 그럼 해 볼만 하지!’ 피투성이가 된 옐리마의 꼴도 말이 아니었지만, 그 많던 하피들의 수도 거의 절반가까이 줄어 있었다. 공중에선 히야누와 니케, 그리고 엘리시엘이 하피들과 얽혀 싸우고 있는 모습이, 불투명 유리 너머로 보이는 풍격처럼 외곡 된 채 보였다. 히야누와 엘리시엘도 니케가 그들의 뒤를 봐주기 시작하자 싸우기가 무척 편해진 것 같았다. 공중에선 지상보다 공격할 방향이 많기 때문에 사각지대가 역시 많다. 그래서 다대일의 전투가 힘든 것인데, 지금처럼 든든한 아군이 한쪽 방향을 확실히 맡아 주면 그 부담이 훨씬 줄어드는 것이다. “매직 미사일!!” 매직 미사일 정도의 기초 마법은 엘리시엘도 주문 없이 쓸 수 있다. 하지만 세 개나 나가는 것을 보아 유신과 여러 모험을 하면서 실력이 많이 는 것 같았다. 그녀가 시동어를 외우자 세 개의 매직 미사일이 하피를 향해 날아갔다. 니케가 가세한 덕분에 마법을 쓸만한 여유가 생겼다. 하피들은 그리폰과 거리를 두자니 엘리시엘의 쓰는 마법이 두렵고, 접근하여 싸우기에는 두 마리의 그리폰은 너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하피들은 포기하지 않고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저 정도면 위험하진 않겠군.’ 엘리시엘이 싸우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유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금은 여유있는 마음이 되었다. 하지만 마음이 여유가 생겼다고 해서 행동까지 여유 있게 하면 죽기 십상이다. 이런 종류의 싸움은 리베르타의 법칙(주1)을 따르게 된다. 양쪽 모두 지원 받을 예비 병력도 없고, 결전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약간만 밀리기 시작하면, 무너지는 쪽은 완전히 박살이 나고, 이기는 쪽은 거의 피해가 없을 정도로 일방적인 싸움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유신과 니케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하피들은 거의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엘프와 그리폰을 사냥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회방꾼이, 그것도 너무나 엄청난 회방꾼이 추가되면서 전멸의 위기를 맞게 된 건 하피들이였다. 유신은 재빨리 시누타에게 달려가 그를 보호하면서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 ‘이상한데? 어째서 이지경이 되었는데도 하피들이 계속 덤비는 걸까? 이정도면 후퇴하는 것이 정상일건데...’ 느낌이 이상했다. 이 보라색이 나는 이상스런 결계도 본적이 없는 것이었고, 이런 종류의 나무들, 아니 나무라기도 뭐한 생명체 역시 본적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 우주를 싸움터로 발할라부터 게헨나의 판데모니엄까지 누비고 다녔던 유신이 본 적 없는 생물체가 있을 리 없다. 잊어 버렸을 리도 없는 게, 이런 특이한 모양의 나무를 잊어버릴 리가 없기 때문이다. ‘설마... 이곳 전체가 환영 결계 속인가? 그렇다면 마령결계?’ 그렇다면 저렇게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하피들이 덤벼드는 게 이해가 갔다. 마령결계는 환영결계 중엔 중간 정도의 위력을 지닌 결계이지만, 유신이 느끼기에 중간 정도의 결계라는 말이다. 마령결계 정도의 위력이면, 일반인보다 웬만큼 단련된 전사라 하더라도 말려들지 않고 버티기가 쉽지 않은 강력한 정신 결계이다. 그러니 맹수라고는 해도, 야생동물 수준의 정신력 밖에 없는 하피나 그리폰은 이미 결계에 사로 잡혔을 것이다. 마령결계에 빠지면 순간적으로 온 몸에 힘이 넘치고 적의와 살의가 증폭된다.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흥분 상태가 심해지게 되고, 완전히 마령결계에 사로잡히게 되면, 환영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주변의 모든 움직이는 생명체가 적으로 보이게 된다. 이런 격자무늬의 바닥이나 요상한 모양의 나무들은 이런 착시효과와 최면효과를 주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문제는 옐리마다. 하피는 공중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면서 결계를 들락날락하니 마령결계의 영향을 덜 받겠지만, 옐리마는 지금처럼 결계내에서 오래 있다간, 자칫 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1)리베르타의 법칙 : 전력이 약간 처지는 쪽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우세한 쪽은 거의 손상을 입지 않는 싸움. 주로 해전이나 우주전에서 이 법칙을 많이 따르는데, 우주나 바다 속 같은 곳에서는 지형의 이점을 살릴 수가 없고, 도망친다 해도 제2, 제3의 전선을 새로 구축할만한 병력의 지원이 용이치 않기 때문이다. 유신의 착잡한 심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까부터 거슬리던 열매중 하나가 켈켈거리는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와 동시에 결계 전체가 낯설은 신음 같은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켈켈켈.. 웅성웅성.... 유.....신....유...우...신.... 유..신....더 ...실..버 ..스타....” 환영 결계가 본격적으로 가동하는 것이다. ‘어쩐다... 나나 엘프야 상관없겠지만, 옐리마에겐 치명적일 것인데...’ 유신은 처음 마법계에 왔었을 때 잠시나마 드라이어드의 정신 공격에 당할 뻔 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공격형 환영마법이나 결계가 얼마나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엘리, 니케, 이리와!!” 상당히 떨어진 거리였지만, 엘프의 청력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다. 엘리시엘은 유신의 목소리를 듣자 히야누와 니케에게 밀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던 하피들을 단숨에 뚫어 버리고 유신이 부른 쪽으로 하강했다. 그리폰이 등을 보이자 하피들이 달려들었지만, 하피들의 느린 하강속도로는 도저히 그리폰을 따라 잡을 수 없다. “일단 옐리마와 시누타를 안전한 곳으로 먼저 데려가. 결계속에선 위험하다고.” 유신은 엘리시엘과 니케가 내려오는 것을 보며 크게 외쳤다. 그리고 첨예를 상단으로 겨누며 하피들의 앞을 막아섰다. 이미 유신에게 쓴맛을 본 하피들은 그가 앞을 막아서자 급격히 방향을 틀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단지 몇 번 싸워 본 것뿐이지만, 그 짧은 순간에 그렇게 동료를 잃으면서 배운 것이 있다. 그것은 저 조그만 인간이 날개가 달린 자신들 못지않게 하늘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물론 유신은 하늘을 날지 못하지만, 하피들로서는 10m 이상을 점프하는 유신을 하늘의 생물과 구분할 수가 없었다. 환영결계는 드라이어드가 만드는 환영마법하고는 차원이 다른 위력의 결계였지만, 유신 역시 봉인이 두개나 풀려 있었고, 마법계에도 완전히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웃기지 마라. 설마 이 정도에 내가 타격을 입으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겠지?” 유신은 가소롭다는 듯 첨예를 반 바퀴 회전시켜 아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해맑은 미소의 열매를 눈 부분쯤 해서 비스듬히 베었다. “끼에에엑” 그러자 마령결계 전체가 귀청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러대더니, 순간적으로 결계의 힘이 강해졌다. 그러자 옐리마는 버티지 못하고 결계에 사로 잡혀 버렸다. 그리고 결계에 잡힌 옐리마는 막 그를 들어 올리려던 히야누를 향해 갑자기 공격을 가했다. 하피가 하는 앙증스런 발톱 공격이 아니다. 덩치는 히야누가 훨씬 컸지만, 옐리마 역시 만만치 않은 덩치다. 히야누는 생각지 못한 묵직한 일격에 3m 이상을 던져졌다. “캬아아악” 히야누도 결계의 영향을 받아 난폭해 진 상태인데, 이런 공격까지 받았으니 참을 이유가 없다. 히야누는 단숨에 날아올라 다 기진맥진한 상태의 옐리마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고 했다. “니케!! 히야누를 막아!!” 유신의 명령이 떨어지자 니케는 겁도 없이 히야누의 앞을 막아섰다. “쌔에에엑” 히야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는지, 갈기를 있는 대로 곤두세우며 니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니케도 배짱이라면 지지 않는다. “크르르릉” 니케는 히야누 못지않게 큰 목청을 자랑하며,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마주 쏘아 보았다. 상황이 이지경인데, 옐리마는 완전히 마령결계에 사로잡혀 천천히 기절해 있는 시누타에게 다가갔다. 유신은 하피들과 대치중이고, 니케는 히야누와 대치중인 상황이라 도와줄 수가 없었다. “멈춰!!” 유신이 멈추란다고 멈출 리가 없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옐리마는 시누타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혼란스럽다는 듯 머리를 털다가, 다시 바닥을 긁어 보고는 멍한 눈으로 엘리시엘을 한번 쳐다보았다. 마치 도움을 구하듯 한 구슬픈 눈빛이었다. “구구구구구” 하늘을 향해 구슬픈 소리로 울던 옐리마는 조용히 시누타의 옆으로 다가가, 마치 그를 이 끔찍한 결계로부터 지키겠다는 듯 조용히 앉았다. “대...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옐리마는 야생동물보다 정신력이 훨씬 강한 인간도 견디기 힘든 마령결계에 사로잡혔으면서도 시누타를 알아 본 것일까? 아니면 마령결계 속에서 뭔가 가슴 아픈 환영을 본 것일까? 유신은 어느 쪽이라고도 단정 지을 수 없었다. “포근한 밤의 정령이여, 어둠의 가장 진솔한 벗이여 내 부름에 대답해 줘요.” 정말 좋은 타이밍이었다. 엘리시엘은 눈치 빠르게도 잠의 정령을 소환하여 같은 편 끼리 다투는 최악의 사태를 막았다. 덕분에 히야누와 니케도 조금은 진정 되었고, 과다 출혈과 결계에 사로잡힌 혼란함으로 엉망이 된 옐리마는 ‘그렁그렁’ 하는 낮은 숨소리를 내며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그렇다고 유신 측에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하피들이 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시누타와 옐리마를 결계 밖으로 빼 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해볼까?’ 유신은 한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마법계에 와서 딱 한번 써봤던 그것. ‘어차피 하피들이 이렇게 악착스럽게 덤벼드는 것은 반듯이 우리를 죽이겠다는 목적보다는 마령결계의 영향이다. 벌써 절반 이상으로 숫자가 줄었으니 단 한순간이라도 마령결계 이상의 충격을 주어 정신이 돌아오면 전부 달아날 거야...’ 유신은 천천히 첨예를 검집에 집어넣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법계에 처음 왔을 때처럼 주변에 흐르는 마나와 코어의 기운을 꼼꼼히 읽어 들였다. 마령결계의 영향으로 마나나 코어의 흐름을 읽는 게 쉽지 않았지만, 봉인이 두개나 풀린 몸이니 잠시만 집중을 하자 그 흐름이 느껴졌다. 어지럽게 하늘을 날며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빈틈을 찾으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하피들의 살의, 결계에서 느껴지는 뒤틀린 듯한 원념 등이 뒤섞여 구토가 날만큼 어지러웠다. 이미 많은 하피들이 죽어 갔지만, 남은 하피들은 강력한 마령결계의 영향으로, 공포보다는 분노에 휩싸여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달려드는 것이다. 지금까진 압도적인 힘의 차이 때문에 감히 덤비지 못했지만, 시커멓고 무시무시한 발톱을 휘둘러 대던 인간이 그 끔찍한 발톱을 집어넣은 상태다. 그러자 잘만하면 이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끼에에엑” 결정을 내린 하피들이 한 서린 여자의 비명소리 같은 날카로운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유신은 그의 몸속에 있던 모든 힘을 개방했다. “솨아아아아” 유신이 힘을 개방하자 그를 중심으로 강력한 마령결계까지 흔들렸다. 유신이 뿜어내는 그 힘, 그것은 드래곤 피어였다. 아직 그가 쓸 수 있는 코어는 감히 드래곤에 비교할 수는 없는 양이지만, 드래곤 피어는 코어와는 상관없이 주변의 자연에 동화하여 정신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경외감을 주어 덤벼들지 못하게 한는 기술이다. 유신이 처음 마법계에 왔을 때, 봉인이 하나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이 기술만을 사용해 유신에게 무례하게 굴던 로열가드들을 침묵시킨 적이 있었다. 만약 하피들에게 이정도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까지 싸워야 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면 유신의 드래곤피어를 견뎌 내면서 덤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피들은 단지 마령결계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증오를 불태웠을 뿐, 이렇게까지 큰 피해를 입으며 싸워야 할 이유가 없었다. 유신은 아주 한순간 이었지만, 하피들에게 마령결계 이상의 공포를 주었고, 제정신으로 돌아온 하피들은 혼비백산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물론 그리폰들이 그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건 화가 나는 일일 테지만, 그 때문에 죽을 것이 뻔한 싸움을 걸만큼 하피들은 터프한 몬스터가 아니다. 도망치는 하피들은 어째서 그리폰이나 유신 같은 괴수들과 싸웠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휴우... 이제야 끝난 건가...”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며 유신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히야누는 도망치는 하피들을 추적하려 했지만, 엘리시엘은 그녀의 그리폰을 달래서 유신에게 가도록 했다. 히야누가 유신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면서 천천히 내려왔다. “유신~~” 엘리시엘은 히야누가 내려앉을 때 까지 기다리는 것도 못 참겠다는 듯, 큰소리로 유신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 내렸다. “우왓... 위험하게 뭐하는 거야!” 유신은 질겁하며 엘리시엘을 안았다. “쿠당탕” 간신히 한숨 돌리고 있는데, 갑자기 엘리시엘이 뛰어 내리자 유신은 그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가치 나뒹굴었다. “아하하. 응... 미안...”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유신의 얼굴에서 새끼손가락 하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엘리시엘의 얼굴이 있었다. “아...” 그녀의 새빨간 입술이 유신눈앞에서 어른거리자 가뜩이나 혼란스러운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내쉬는 색색거리는 숨이 여과 없이 유신의 코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엘리시엘의 자그맣고 부드러운 가슴이 그의 가슴 부근에서 느껴지자 얼굴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빨개졌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유신이 말을 이었다. “후아...엘리? 왜 그래?” “되게 오랜만에 얘기해본다...” 유신의 질문에 엘리시엘은 다른 말을 했다. “응?” “유신하고 얘기하는 거 무척 오랜만이라고.” “응...” 유신은 사태 파악이 안 되었기에 눈만 크게 뜰 뿐, 별다른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엘리시엘은 빙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자, 옐리마와 히야누 오빠 상태가 걱정이야. 어서 결계 밖으로 옮기자.” “응. 엘리가 히야누하고 니케한테 부탁해서 결계 밖으로 옮겨. 난 여기를 조금 더 조사해 볼께.” “......” 유신의 말에 엘리시엘은 굳어 버린 채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후우...응. 그럼 좀 있다가 보자.” 잠시 후, 깊은 한숨을 내쉰 엘리시엘이 명랑하게 대꾸했다. “어? 그런데...” 유신이 더 이상 말을 잇기 전에 엘리시엘은 이미 히야누의 등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이야...’ 유신이 할 말을 예상 했다는 듯, 엘리시엘은 급하게 히야누와 함께 날아올랐다. “엘리...” 한동안 엘리시엘이 사라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유신은 머리를 털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뺨까지 두들기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하압!!” 기합까지 넣어 각오를 새롭게 다진 유신은 천천히 결계의 중심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무작정 걸음을 옮긴다고 결계의 중심에 닿을 리가 없다. ‘이런 방법으론 안 되나... 그럼...’ 유신은 눈을 감고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단지 미혹의 허상. 진실을 찾는 것은 마음의 눈, 심안이다. 지금의 나라면 심안을 뜰 수 있을 터...’ 사물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보는 것이다. 온 몸 뿐 아니라 6감, 즉 마음으로도 보는 심안을 이용해야 이런 환영결계 속에서도 진실을 찾을 수 있다. “쏴아아아아” 심안이 떠지기 시작하자 우선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마나의 흐름이다. 결계 속에서 자연스럽지 못하게 엉켜서 흐르는 마나의 흐름이 어지럽게 보였다. 마치 투명한 물줄기가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다음에는 정령의 모습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정령들은 결계 속에서 두렵다는 듯, 숨을 죽인 채 웅크리고 있었다. 심안을 쓰는 것은 일반 사물을 보는 것하고는 완전히 다르다. 눈으로 보는, 그런 구체적인 것과는 다른, 어떤 ‘흐름’을 느끼는 것이다. 만약 일반인들이 심안을 뜬다면 혼란스럽기만 할 뿐, 눈으로 보는 것 만 못할 것이다. 하지만 유신에게는 눈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익숙한 것이었다. 조금 더 정신을 집중하자 코어의 흐름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느낌이었다. 위험하고, 불길하고 그러면서도 절대 피해갈 수 없을 것 같은 절대의 예언과도 같은 느낌. 유신은 그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꾸르르륵... 키에엑....” 주변의 나무들이 꾸물꾸물 덮쳐 오거나 기괴한 목소리로 말을 걸며 그의 앞을 막았지만, 유신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힘의 근원을 향해 걸어갔다. ‘이곳이 정령의 성지일까? 하지만 이렇게 불길하고 비상식적인 곳이 신성해야 할 정령의 성지라니...’ 계속 다가가면서도 유신은 이상했다. 얼마나 걸어간 것일까? 심안의 상태에서 움직였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은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목적지는 제대로 찾은 것 같았다. 유신의 눈앞에는 시커먼 각질과 곰 털 같이 뻑뻑한 털로 뒤덮인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주변의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그 나뭇가지에는 아무런 열매도 없었고 바짝 말라 있었지만, 유신은 그 나무가 이 결계에 힘을 공급해 주고 있는 에너지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에는 자그마한 소년이 첨예 정도 크기의 작지만 화려한 검에 어깨를 찔린 채 꾀어져 있었다. 배꼽 아래로는 나무와 동화 된 것인지, 아니면 그 괴상한 나무한테 먹힌 것인지 나무 동치와 연결되어 있었다. 유신은 천천히 걸어가 그 앞에 섰다. “유신 더 실버스타... 전 우주 최고의 용장을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소년은 힘없이 인사했다. “나를 알고 있다니... 대체 누구지? 이 결계는 네가 친 것이냐?” “후훗... 설마 그럴 리가요. 전 보다시피 아무런 힘도 없고, 이렇게 반쯤은 봉인되어 있는걸요.” “... 그럼 대체 네놈 정체가 뭐냐?” 이 불길한 기운은 끊임없이 저 기괴한 나무를 중심으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유신은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적의 함정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핫, 당신 정도 되는 분이 몰라보다니... 확실히 제가 많이 약해졌나 보군요. 정식으로 인사하지요. 마법계의 모든 원소를 관장하는 원소의 정령왕 바르부스 입니다.” “에엑!! 바르부스님 이라고요? 이런... 무례를 용서하세요. 적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대체 이런 모습으로 뭘 하는 거지요?” 유신이 알고 있는 정령왕은 대단히 강한 존재다. 그래서 이런 모습으로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하마터면 들고 있던 첨예를 떨어뜨릴 정도로 놀랐다. “부끄럽군요. 제가 너무 자만했나 봅니다. 이 검의 주인에게 패하여 이렇게 에너지를 빨리고 있는 중이지요. 자기반성의 계기가 되었네요...” 마법계에서라면 원소의 정령왕은 거의 에이션트드래곤에 필적하는 힘을 지닌다. 얼음의 정령왕 비시엔도 그라테우스의 브레스를 정면으로 막았을 만큼 강하니, 모든 정령왕을 총괄하는 바르부스라면 그라테우스정도는 우습게 때려잡을 정도로 강력할 것이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바르부스를 이렇게나 만들 정도의 강적이 마법계에 있는 것이다. “유신님 정도라면 이 검의 주인도 알겠군요.” 그의 말에 유신은 자세히 검을 살피기 시작했다. “설마!! 환마검 쥬펜델? 대체 왜 이 검이 여기에!!” “그러게나 말입니다. 대체 이런 무서운 검이 왜 제 몸을 침식하고 있는 걸까요? 덕분에 전 원래의 형상을 유지하는 것도 힘에 겨워서 이렇게나 작은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이런 모습도 겨우 유지하고 있는 거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바르부스는 그 꼴이 되어서도 전혀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말투에 여유가 넘쳤고, 어찌 보면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아무리 둔한 유신이라 해도, 뭔가가 이상하지 않을 리 없다. 환마검 쥬펜델. 코스믹블래스터처럼 무지막지한 최강 클래스에 들어가는 검은 아니지만, 검에 관심이 있는 인물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검이다. 성검이나 마검도 아니고, 토울의 해머나 신창 궁그닐, 코스믹블래스터나 롱기누스의 창 같은 최강 클래스의 무구도 아니면서 쥬펜델이 유명한 이유는 무속성이기 때문이다. 일단 적의 몸에 박히게 되면, 속성에 상관없이 적의 에너지를 무한정 끄집어낸다. 게다가 한번 박힌 쥬펜델은 적의 코어가 완전히 바닥 날 때 까지 결코 뽑히지 않는다. 심지어 천사들의 신성력이나 악마들의 마성력도 쥬펜델에겐 단지 먹이감일 뿐이다. 쥬펜델을 억지로 뽑아내려고 마나나 코어를 돌려 봐야 쥬펜델에게 힘을 보태줄 뿐이라 쉽게 반항 할 수도 없다. 게다가 주펜델은 빨아들인 상대의 힘을 이용해 그 주변에 강력한 환영 결계를 만든다. 쥬펜델을 쥐고 있는 자가 적의 우두머리나 강력한 코어를 지닌 적의 몸에 이 검을 쑤셔 넣기만 하면, 그 주변에 있는 졸개들까지 환영 결계에 사로 잡혀 버리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마주치면 가장 골치 아픈 검으로 평가되는 녀석이다. 야금야금 힘을 빼내면서 환영을 결계를 만들고, 환영 결계에 저항하려고 코어나 마나를 사용하면, 그 힘은 고스란히 쥬펜델에게 빼앗기니 얼마나 싸우기 귀찮겠는가? 꼭 쥬펜델에 박히지 않더라도 베인 정도로도 상당량의 코어를 빼앗기게 되니 정말 싸우기 까다롭다. 좋은 검이란 이거저거 난잡한 기능이 많은 검이 아니다. 이 쥬펜델처럼 하나의 확실한 필살기만 있으면, 그것이 가장 좋은 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쥬펜델이 두려운 것은 검의 성능 보다는 그 검을 쓰는 검의 주인 때문이다. 환마검 쥬펜델의 주인 해모수. 진실의 열두 기사, 또는 역천의 12사도로 불리는 루시퍼 직속의 친위대 소속이자 용신화랑 No3였던 전설적인 남자다. 그는 태고 적, 루시펠이 타락하기 전부터 그녀를 섬겼으며, 루시펠이 반역할 때 그녀의 호위를 담당하여 무사히 아바돈까지 안내한 걸로 유명하다. 루시퍼가 타락하고, 신에게 엘이란 칭호를 박탈당했어도 끝까지 그녀를 따랐지만, 진정으로 루시퍼를 구하고 싶다면 그녀를 코스믹블래스터에 봉인하여 사악한 마기를 정화하고, 다시 빛으로 돌려야 한다는 유신의 말에 속아 마왕군을 배신하고 유신의 용신화랑이 되었던 남자다. 순수한 인간이면서도 치천사 이상의 경지에 오른 만큼, 어떤 면에선 유신 이상으로 대단하다고 평가된다. “어째서 주펜델이 여기에... 설마 해모수가 반역이라도 한 건가요?” “큭...반역이라... 반역이 아니라 원래 그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간 거지요. 당연한 것 아닌가요? 해모수는 원래 루시퍼를 섬기던 역천의 12사도 출신입니다. 유신장군이 그를 빛의 편으로 끌어 들였을 때 했던 약속이 뭔가요?” “아!!” “루시펠님을 봉인하여 다시 빛으로 돌려준 후 풀어 준다는 약속 아니었나요? 그런데 천사들과 신들이 장군을 봉인하고, 이런 구석에 처박아 버렸으니, 사실상 루시펠님의 부활은 글렀지요. 그럼 루시펠님을 봉인하는데 일등 공신이 되어버린 셈이니 해모수가 열 받을 만도 하지요. 그로써 정말 배신자가 된 것 아닙니까.” 유신은 해모수를 생각하자 괘씸한 마음 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어찌되었든 유신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덕분에 해모수는 진짜 배신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빼더라도 루시펠을 구하지 못한 게 너무나 미안했다. “그런대 대체 왜 바르부스님께 화풀이를 한 거지요?” “쿡... 이건 함정입니다. 해모수는 영리합니다. 장군이 나에게 찾아 올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리고 이 쥬펜델을 뽑기 위해 손을 댈 거라는 것도요.” “그럼 설마?” “예. 바로 제가 함정 그 자체입니다. 일부러 저를 소멸시키지 않고 이렇게 살려둔 것도 유신이 쥬펜델을 만지게 하기 위해서지요.” “이런...” 유신은 선택을 해야 했다. 목숨을 걸고 쥬펜델을 뽑을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좀 더 힘을 되찾거든 도전해 볼 것인지를.... 하지만 선택에 앞서 궁금한, 아니, 궁금하다기보다는 이상한 것이 있었다. “저... 바르부스님,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생각 하실지 모르겠지만, 어째 즐거워 보이시네요. 해모수에게 패해서 분해 하는 표정이 아니군요.” 유신의 질문에 바르부스는 의외라는 듯, 한동안 웃었다. “하하핫. 사실 그렇습니다. 솔직히 저는 성계대전에서 루시펠님이 이겼으면 했지요. 광무의 말이 옳습니다. 이곳에서 죽은 영혼은 윤회조차 하지 못하고 있어요. 아무리 다른 우주를 위해서 라지만, 마법계의 희생은 너무나 큽니다. 그러니 해모수가 저를 찾아 왔었을 때 오히려 기뻤습니다.” “... 대체 어떻게 광무의 일도 알고 있지요?” “전 원소의 정령왕입니다. 모르는 게 오히려 이상하겠지요.” “그럼 위시마스터들도 바르부스님과 같은 의견입니까? 그래서 흄이 그토록 날뛰고 있는데도 내버려 두는 것인가요?” “글쎄요? 위시마스터들의 생각까지는 알 수는 없군요. 하지만 위시마스터들의 불만도 대단할 것입니다. 그토록 큰 피해를 입으며 성계대전에 참전했는데도 사실상 마법계에는 아무런 혜택이 없으니...최소한 신을 믿을 자유 정도는 주었으면 하는 바람일 겁니다. 그래야 윤회를 하든, 전생을 하든, 지옥에 떨어지든 할 테니까요.” “...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어떻게 해모수는 제가 바르부스님을 찾아 올 것이란 걸 알았을까요?” 마지막 질문에 바르부스는 조금 의외라는 듯 유신을 들여다 보았다. 기괴한 나무에 꾀어진 신비로운 소년이 던지는 시선은 정말 기묘한 것이었다. “정말 모르겠나요?” 바르부스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예? 무슨 뜻이지요? 제가 알만한 이유가 있는 건가요?” “하아... 정말 모르신다면 그건 그걸로 좋은 겁니다. 아직 알 때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러지 말고 속 시원히 말해 주세요.” “......” “설마 또 천사들이나 신들의 손에 놀아나는 건가요?” 유신은 답답했다. 힘을 잃은 것도 서러운데, 잘 모르는 일에 꼭두각시처럼 끌려 다니는 것도 지겨운 일이다. ‘부려먹으려면 힘이나 돌려주던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 쉬었지만 답이 있을 리 없다. “그럼 묻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세라피는 포기할 건가요?” “... 포기할 리 없죠.” “그럼 된 겁니다. 결과가 바뀌지 않을 질문은 의미가 없다고 보는데요? “......” 유신이 침묵하자 바르부스는 아직 움직이는 왼쪽 팔로 쥬펜델을 살살 건드렸다. 하지만 쥬펜델이 그런 작은 힘조차 빼가자 질렸다는 듯, 힘없이 팔을 떨궜다. “그보다 이 괴물 같은 칼은 어쩔 거지요? 함부로 손댔다가는 장군도 저와 같은 꼴이 될 겁니다.” “환마검 쥬펜델... 전쟁터에서 마주치면 가장 암담한 무구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검이지요...하지만 사실 쥬펜델 자체는 그리 무서운 검이 아닙니다. 1:1 전용이라기 보다는 혼자서 여럿을 상대할 때 편한 검이지요. 그럼에도 쥬펜델이 그렇게 유명해 진 것은 해모수가 들고 싸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요? 유신 장군이라면 뽑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설마요. 바르부스님도 못 뺀 검을... 지금의 제 상태로는 무리지요. 하지만...” “에?” “부술 수는 있지요.” 유신은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주섬주섬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 저... 뭘 하시는 걸지 여쭤 봐도 될까요?” 뭔가 멋진 모습을 기대했던 바르부스는, 유신의 궁상맞은 모습에 어이없어 하며 물었다. “아, 소환 마법진을 그리는 겁니다. 코어는 어느 정도 개방 되었지만, 마나는 전혀 사용할 수 없거든요.” “... 그래서 뭘 소환 하려고 하지요?” 아무리 봐도 대단할 것 없는 평범한 소환 마법진이다. 저 정도 규모의 자그마한 마법진으로는 쥬펜델을 깨부술만한 마수는커녕, 사람 정도 크기의 고블린, 또는 오크 정도의 소형 몬스터나 겨우 소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용아검입니다. 용아검 정도라면 쥬펜델과 비슷한 위력이겠지요. 약간 모자라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 정도는 제가 커버해야지요.” “... 써 봐야 힘을 빨린다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환마검 쥬펜델... 가장 정순하고, 신의 기전력을 직접 빌려 쓴다는 천사들의 신성력까지 빨아들이는 검이지요. 그러니 아무리 제가 천상신검을 쓴다 해도 그 앞에서 무사하리란 보장은 없지요.” “그럼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 뭘 하려는 거지요?” “쿡, 저도 비밀 입니다.” 한동안 머리를 긁적이며 마법진을 그리느라 끙끙대던 유신은 마침내 바르부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바르부스님도 마법에는 상당한 조예가 있지요? 이쪽에서 마나의 회전이 율의 법칙을 따라 다음 단계로 넘어 가는 과정을 잘 모르겠어요. 좀 도와주실래요?” 유신이 그리는 마법진은 바르부스가 보기에는 조잡하기 그지 없는 한심한 수준의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바르부스도 어느 샌가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마법진 자체는 그리 어려운 것도 없는 평범한 것이었지만, 그 조합이 제법 그럴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르부스도 어느샌가 관심을 기울이고 열심히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아, 저쪽은 그렇게 그리면 안 되지요. 마나 흐름을 잡아 주는 각의 룬문자는 옆에 있는 다른 변의 문자들을 방해 합니다. 그러니 그쪽은 안쪽 원으로 돌리고, 연결은 쥬델 문자로 하세요. 의외로 마법적 지식은 없군요.” “... 그다지 마법은 쓸 일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많이 까먹었네요.” “하지만 발상은 정말 기발하군요. 마나를 모으는 마법진을 따로 그리고 저런 식으로 연동하여 쓰다니...아주 기본적이긴 하지만 입체 마법의 효과를 볼 수 있겠군요.” “하아...예. 물질계에선 이런 2중 마법진은 같은 평면상이 아닌 공간에 입체적으로 그리지요. 하지만 보통의 마법사라면 쓸 일이 없죠. 마나를 컨트롤 하는 법부터 배우니까요. 하지만 저는 봉인 때문에 마나를 컨트롤 할 수 없으니 이렇게 마법진으로 대체하는 겁니다.” 유신은 자신의 신세가 참 처량 맞아 졌다는 듯,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마법이란 그리 쉽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마법진을 꼼꼼히 그린다 해도, 마나도 쓸 수 없는 주제에, 소환마법을 단지 마법진 만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보라색의 마령결계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해서야 마법진이 그럭저럭 모습을 갖추어 갔다. ‘휴우... 엘리라도 빨리 왔다면, 마나를 빌려서 썼을 텐데... 옐리마하고 시누타님의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보다. 아직도 소식이 없다니...’ 길고 지루한 작업이 끝나자 커다란 방만큼 넓은 공터에는 마법문자와 마법진이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다. 잠시 아쉬운 듯, 엘리시엘이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던 유신은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마법 시동어를 외었다. 이런 식의 소환마법은 그도 처음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무척 궁금헸다. “용아검 소환” 복잡한 수식 계산이나 주문은 마법진이 다 해줄 것이니, 간단하게 시동어만 외쳐 소환이라고 하면 된다. 첫 번째 마법진이 밝은 빛을 내며 주변의 마나를 끌어 들이자 두 번째 마법진이 발동되면서 끌어 모은 마나를 세 번째 마법진으로 보냈다. 세 번째 마법진에는 유신이 서 있었는데, 용아검을 소환한 주체게 맞는지를 확인 하는 과정이었다. 공간을 여는 방법은 이곳의 좌표 값을 모르기 때문에 이용할 수가 없어서, 유신은 마법진에 그의 특색을 입력시키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소환 장소를 지정한 것이다. 이미 해는 졌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붉은 빛이 감도는 마법문자들이 빛을 내기 시작하자 우울하면서도 한편으론 아름다웠다. 단순한 소환 마법일 뿐이지만, 워낙 많은 마법진을 그려 놓은 터라, 그것이 일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하자, 마치 음울한 초승달에 있는 마녀들의 집회를 연상시켰다. 마침내 모든 과정이 끝나고, 마지막 네 번째 마법진에선 그토록 고대하던 용아검이 천천히 소환되었다. “으왓!! 성공이다!!” 3서클 정도의 마법사만 되어도, 소환품으로 지정해 두기만 하면, 그것을 소환하는 것에는 별 어려움을 느끼지는 못한다. 하지만 유신은 그 정도의 마나조차도 사용할 수가 없으니, 이처럼 고생고생 하여 용아검을 소환한 것이다. 어찌나 기뻐했는지, 보고 있는 바르부스도 즐거워 질 정도였다. “자,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요? 아무리 용아검이라고 해도 쥬펜델을 깰 수 있을까요?” 유신은 바르부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용아검을 든 채 몇 가지 기본적인 수식을 펼치며 몸을 풀었다. 아직 검집에서 뽑지는 않았기 때문에 용아검의 무시무시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마령결계라... 이정도면 용아검을 뽑아도 그 기운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는 않겠지요?” “아마도 그렇겠지요. 쥬펜델의 기운까지 감춰질 정도면... 용아검이 대단하다는 건 그라테우스와의 싸움에서 봤지만... 어떨까요? 쥬펜델을 깰 수 있을까요?” “...잠깐만요. 그라테우스와 싸우는 것도 봤다구요? 그럼 바르부스님이 제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알 정도였다면 위시마스터들도 제가 마법계에서 뭐하고 다니는지 다 안다는 말입니까?” “부분적으로만 알겁니다. 사실 유신장군한테는 강력한 수호천사가 붙어 거든요. 그래서 지금처럼 단독행동을 할 때 이외에는 위시마스터들은 알 수 없을 거예요. 물론 지금도 모를 겁니다. 쥬펜델의 결계 안이니까. 하지만 위시마스터는 영리합니다. 장군이 생각하는 것 정도는 그들도 알거라고 보는데요.” “잠깐만요, 잠깐만요. 수호... 천사라니요?” “하핫. 거기까지만 이야기 하죠. 그보다는 어서 이 끔찍스런 칼 좀 뽑아 주세요.” “... 하나만 더요. 그럼 바르부스님은 어떻게 그렇게 저에 대해 잘 아는 거죠? 혹시 그 수호천사란 존재와 연관이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위시마스터들은 이 마법계를 관리하는 관리직이지만, 저는 관리직이라기 보단 관찰자거든요. 모든 원소, 즉 물, 불, 바람, 흙, 그 모든 것이 저에게 마법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르쳐 줍니다. 하지만 전 그런 일에 상관하지 않아요. 아니, 상관할 수가 없죠. 원소의 정령왕이 마법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간섭했다간 마법계 전체가 붕괴할 겁니다. 쥬펜델에 찔려서 모든 힘을 잃었어도 바람은 불고, 불은 타오르고 물은 흐르는 것처럼... 사실 저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어렵군요. 하지만 말하는 바는 대충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시작하도록 하지요.” 유신은 살며시 용아검을 뽑았다. 살며시 뽑는다고 용아검도 덩달아 살며시 눈 뜰 리는 없지만, 어쨌든 살며시 뽑았다. “우우웅” 용아검은 지루한 잠에서 깨어 난 것이 기쁘다는 듯, 낮은 울림을 내며 마음껏 기지개를 켰다. “윙윙윙” 하지만 곳 결계 속에 있는 것을 깨닫자 기분이 나빴는지, 싫은 소리를 내며 투정부렸다. “투덜거리지 말고 성질 좀 죽여. 어째 카론하고 성질머리가 똑 같냐...” 용아검도 성질머리를 가지고 카론과 비교하자 기분이 나빴는지 한동안 더 울었다. “너... 너도 카론하고 비교하니까 찜찜하냐?” 유신은 황당했지만, 어쨌든 용아검이 필요한 것을 어쩌랴? 한동안 용아검을 달래고 비위를 맞추느라 진땀을 빼었다. 그래도 노력한 보람이 있었는지, 이제 용아검은 처음처럼 ‘웅웅’ 낮은 신음 소리만 내며 얌전히 주인이 휘두르기를 기다렸다. 유신은 용아검이 진정되자 쥬펜델의 옆으로 섰다. 흑빛의 늘씬한 검신에 유신의 얼굴이 비쳐졌다. 쥬펜델의 손잡이 끝에 있는 폼멜이 유신이 다가오자 불만스러운 듯, 아니면 불안한 듯, 혹은 유혹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영겁의 길을 걷는 자, 끝나지 않을 전쟁에 발을 들여 놓은 전사여. 자, 어서 나를 잡으라고... 그리고 당신에게 걸맞는 강력한 힘을 얻도록 해요.’ 검의 의지가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만사 다 제쳐두고 잡고 싶은 욕망. 무인이라면 누구나 탐낼만한 명검 쥬펜델이 코앞에 있는 것이다. 가능성.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유신이라면 쥬펜델이 인정할 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령결계 따위보다도 훨씬 뇌살적인 유혹이었다. “훌륭한 검사는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하지요. 첫 번째가 정순한 마음. 두 번째가 기술. 그리고 세 번째가 힘입니다. 인간이 코어를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코어를 사용하는 것을 기술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지요. 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코어는 기술보단 순수한 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르부스는 마법에는 능통해도 검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 때문에 유신의 말을 경청했다. 지금이야 봉인당한 몸이지만, 어쨌든 우주 최강의 검사가 하는 말이니, 들어서 손해날 것은 없을 것이다. “코어를 이용한 전투가 일반화 되면서 검기는 그런 것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요. 그래서 기술을 연마하기 보다는 코어를 이용한 힘을 늘리기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습니다.” 유신은 상단 찌르기 형태로 용아검을 들어 올려 쥬펜델의 옆구리를 겨냥했다. 힘의 축이 되는 팔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리고, 왼손은 정확한 조준을 위해 검지와 중지로 용아검의 검 끝을 잡았다. 하지만 그는 용아검에 검기조차 입히지 않은 상태였다. “쥬펜델... 네 주인이 날 얼마나 우습게 본 건진 잘 모르겠지만, 죽게 되면 건방진 해모수나 원망해라.” 오른발을 살짝 드는가 싶더니 ‘콰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지면을 밟았다. 동시에 살짝 흔들리는가 싶던 용아검의 검 끝이 무서운 속도로 뻗어 나갔다. “하아앗” 짧은 기합과 함께 유신이 내지른 용아검이 쥬펜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채애애앵”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불똥이 튀어 올랐다. 쥬펜델은 용아검과 충돌하는 즉시 유신의 코어를 뺏어내기 위해 마령결계를 발동시켰지만, 봉인된 그의 몸에서 뽑아 낼 수 있는 코어의 양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유신은 용아검에 검기조차 주입하지 않았으니 쥬펜델로선 속수무책이었다. 찔린 쥬펜델이나, 공격한 용아검이나 모두 흔들리지 조차 않았다. 그만큼 완벽한 일격이라는 뜻이다. “키키키키키키” 쥬펜델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무시무시한 소리로 울었다. 용아검이 그 날카로운 끝으로 날이나 등도 아닌 옆구리를 찔렀으니 무사할 리가 없다. 보통 검을 깨기 위해선 내려치는 베기를 쓰는 것이 정석이지만, 사실 그건 검이 얇고 미끄러지기 쉽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파괴력에서는 선보단 점으로 타점을 집중시키는 찌르기가 훨씬 강한 것이 당연한 일이다. 잠시 동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유신은 천천히 용아검을 회수했다. “쩌적.... 쩌저적” 마침내 용아검과 맏다은 그 작은 점을 중심으로 쥬펜델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위위위위윙” 그리고 쥬펜델은 구슬픈 신음소리를 내며 천천히 죽어갔다. 수많은 마족과 마왕, 요툰하임의 거인들, 그리고 천사나 신들조차 베어 넘긴 해모수의 환마검이 이렇게 그 긴 생에를 접게 되었다. 쥬펜델이 힘을 잃어 가자 마령결계 전체가 울리는 공명음이 귓속을 후벼 팠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 유신은 말을 이었다. “이것이 기술입니다. 코어를 쓰지 않아도, 주인도 없는 검을 깨는 것은, 사실 일도 아니지요. 해모수는 너무 코어에 의한 싸움에만 익숙해 진 것 같군요. 그 정도나 되는 녀석이 설마 자신의 검을 미끼로 쓰다니...” 정령왕은 지겹다는 듯, 그의 몸에서 쥬펜델을 빼 내었다. 이미 모든 힘을 잃은 환마검 쥬펜델은 아무런 저항 없이 정령왕의 몸에서 빠져 나왔다. 그러자 바르부스는 작은 소년의 모습에서 어른의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데 반드시 코어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급소를 보는 눈과 이를 받쳐줄 기술이 있다면,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것쯤은 우스운 일이지요.” 조용히 용아검을 회수한 유신은, 깨어진 명검이 안타깝다는 듯 쥬펜델을 쓰다듬었다. 정령왕이 힘을 되찾자 그를 중심으로 엉망이 되었던 마나가 제자리를 찾아 갔다. 괴상하게 뒤틀려 있던 마령결계의 숲은 조금씩 새싹이 나기 시작하는 봄의 산으로 제자리 찾아 갔다. 마령결계의 힘이 사라져 가자 유신은 용아검의 힘이 밖으로 퍼는 것을 염려하여 도로 검집에 집어넣었다. “윙윙윙” 오랜만의 외출이 시시하게 끝나자 용아검은 불만인 듯,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투정을 받아 주기에는 용아검의 힘은 너무나 강대하다. 이미 용아검의 힘을 가려 주던 마령결계도 깨졌는데, 그냥 놔두었다가는, 또 어떤 혼란이 올지 모르기에 유신은 미안하긴 하지만 용아검을 집어넣었다. “자자 울지 마렴. 나중에 또 기회가 있겠지.” 용아검은 일단 검집 안으로 들어가자 거짓말처럼 조용해 졌다. 아마 잠이 들었으리라. “... 정말 감동적이군요. 인간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의 강함을 체험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다시 찾은 자유가 기뻤는지, 바르부스는 길게 기지개를 켜며 땅에서 조금 날아 올랐다. 그러자 정령왕의 복귀가 반가와 하며 주변의 정령들이 우글우글 모여 들었다. 1m 정도 허공에 뜬 채, 가만히 주변의 마나와 정령의 흐름을 즐기던 바르부스는, 정령계로 돌아가려는 것인지 점점 투명해 지기 시작했다. “과찬입니다. 그보다 돌아가기 전에 들어 주셨으면 하는 부탁이 있습니다.” “세라피 양 때문이지요? 그녀는 이미 다 낳았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아!! 벌써 다 고쳐 주신 건가요? 과연 정령왕이군요.” “후훗, 그건 제가 한 일이 아니니 인사받기가 뭐하군요.” “예? 하지만 마나브레이크 상태를 고칠 수 있는 건 바르부스님 뿐이라고...” “이 정도는 말씀드려도 되겠군요. 잘 보세요. 세라피가 누굴 닮았나...” “에?” “아, 너무 많이 말했나? 자,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무리 마법계라고는 해도, 정령왕이 이렇게 오랫동안 현신하고 있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을 겁니다.” “잠깐만요. 하던 얘긴 마저 해 주셔야죠!!” “유신 더 실버스타. 당신은 당신의 가치를 증명했습니다. 그러니 저도 당신에게 걸겠습니다. ” “잠깐...세라피라니...세라피가 뭘 어쨌다고...” 유신은 다급한 마음에 바르부스를 붙잡으려 했지만, 점점 투명화 되면서 정령계로 넘어 가기 시작한 바르부스의 몸은 완전히 마법계에 고정되어 있는 유신의 손으로는 잡을 수가 없었다. 정령계로 완전히 돌아가기 전, 바르부스는 마지막 말과 함께 엄청난 선물 남겼다. “3번째 봉인 해제입니다. 이제 마법계에서 당신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겠군요... 마법계는 이미 너무 많이 망가졌어요. 그러니 그 강력한 힘, 부디 올바른 곳에 쓰시길...” 여운처럼, 메아리처럼, 바르부스의 마지막 말은 유신의 머릿속을 울렸다. . . . . 드디어 3권이 끝났습니다. 음냥 이제 또 4권을 써야 겠네요;;; 내일은 오랜만에(?) 학교도 나가 봐야 할 것 같고... 모형도 하나 새로 만들 생각입니다. 드디어 그동안 고생만 해 왔던 불쌍한 유신군의 봉인이 또 한개 풀렸습니다. 이정도만 되어도 정말 상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겠지요. 3권이 끝났는데 이제사 겨우 3개 풀리다니...사실 풀어주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요즘 나오는 화려하고 강한 다른 판타지 주인공들에 비하니 너무 불쌍하더라고요. http://myhome.naver.com/madalice/main.htm 여기가 제 일러 해 주시는 분 홈피입니다. 방명록은 게스트로 들어가서 맨 오른쪽에 잘 보셔야 하니 작은 발자취 남겨 주세요^^ ‘설마... 쥬펜델이... 깨졌나...?’ 실버스타군 제 3군단, 헬크로아 함대의 기함 네오코스모스의 함교. 쥬펜델의 주인 해모수는 방금 그의 애검이 지른 최후의 비명을 들으며 안타까움에 몸을 떨었다. 검과 그 주인은 하나다. 명검일수록 그 주인과의 교감은 더더욱 강해서, 쥬펜델 정도 되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검이 주인의 이상을 알 수 있고, 주인 역시 검의 이상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해모수는 그의 검이 소멸하는 기운을 느꼈음에도, 그 어떤 도움도 줄 수가 없었다. ‘유신 더 실버스타... 운도 좋구나. 하필 이럴 때 쥬펜델을 부수다니...’ 해모수의 교만 이었을까? 그는 쥬펜델을 미끼로 감히 유신 더 실버스타라는 대어를 낚을 생각이었다. 마법계에서 환마검 쥬펜델을 깨거나 복종시킬만한 실력자는 유신 밖에 없다. 물론 봉인당한 유신보다 강한 존재는 몇몇 있겠지만, 마나나 코어를 흡수하는 쥬펜델의 특성상, 드래곤이나 위시마스터들은 쥬펜델을 뽑거나 부수지 못할 것이다. 실제 마법계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정령왕 바르부스 조차도 쥬펜델에 찔려 꼼짝도 못하고 늘어져 있었다. 유신이 쥬펜델에 손을 대는 순간, 해모수는 유신의 위치를 알 수 있을 테니,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장거리 워프로 그곳에 가서 유신을 잡을 생각이었다.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은 4대천사중 한명인 가브리엘이었다. 그녀는 유신이 바르부스를 찾아 갈 것이라고 살짝 귀뜸 해 주었고, 그를 잡을 방법가지 가르쳐 주었다. 유신과 가장 친하다는 가브리엘이 해모수의 편을 들어 주었기에 해모수도 의심을 했었다. 하지만 해모수는 그런 함정쯤은 상관없이 유신을 잡을 자신이 있었기에 그 함정에 빠져 준 것이다. 전 우주 최강이라 칭송받는 유신 더 실버스타를 상대로 그런 과감한 도박을 할 만큼 쥬펜델과 함께 싸워 온 영겁의 시간동안, 해모수는 패배란 것을 몰랐다. 지옥의 마신부터 천계의 치천사, 요툰하임의 거인까지 그의 쥬펜델 앞에선 모두 무릎을 꿇었고, 실제 그와 쥬펜델은 최고의 콤비였으며 무적이었다. 하지만 유신은 그 괴물 같은 검을 봉인 당해서 제대로 싸울 수도 없는 몸으로 단 일격에 깨버린 것이다. 손써볼 새도 없었다. 해모수는 당혹스럽다 못해 황당함을 느껴야 했다. ‘어째 가브리엘 그 빌어먹을 년이 유신의 위치를 파악할 방법을 술술 가르쳐 준다 싶었다... 암퇴지 같은 년. 설마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열 받은 해모수가 벽을 후려치자 초합금으로 이루어진 벽이 깨져 나갔다. 실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해결해야 할 것은 유신이 아니라 그의 함대를 가로 막고 있는 은하수호함대다. 해모수는 당연히 쥬펜델에 이상이 생기는 순간, 그의 헬크로아 함대를 출동시켜 유신이 있는 마법계의 위성괴도로 돌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하필 그때 홀리크로스의 총 사령관인 미카엘 직속의 은하수호함대 소속, 제 1 정찰 함대와 마주치고 말았다. 이미 해모수의 반역은 소문이 퍼졌는지, 은하수호함대는 헬크로아 함대와 마주치자마자 어떠한 선전포고도 없이 전투준비에 돌입해 버렸다. ‘결국 가브리엘년의 장단에 놀아난 것인가? 쥬펜델은 깨졌고, 마법계에는 미리 함대를 준비시켜 두다니...’ “우우우우웅” 1급 전투태세에 돌입할 것을 알리는 낮고 장엄한 사이렌 소리가 함 내를 울렸다. 실탄이 장전되는 소리와 군인들이 뛰어 다니는 소리로 함 내는 단숨에 어수선해 졌다. 우주전에선 단 한번의 실수가 부대의 전멸로 직결 될 수 있다. 해모수는 도저히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전 함대 급속 전개. 신의 개들에게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싸움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자!!” 헬크로아 함대는 실버스타군의 주특기인 돌격전을 감행하기 위해 원추형으로 진을 짜기 시작했다. 저 공포스러운 요툰하임의 거인들의 방어선을 돌파한 그 진형이다. 전함의 전방에 있는 아홉 개의 주포가 적의 전함을 향해 조준되었다. “적 감마급 항모 두 척, 베타급 순양함 다섯 척 입니다. 거리 일만 팔천!, 15분 후 전투거리에 도착합니다.” 오퍼레이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싸울 생각이십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저 정도 전력이면 우리 함대의 상대도 되지 않아. 아무 피해 없이 잡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루시펠님의 원수를 갚는다.” “함정입니다. 전하. 겨우 저 정도 수로 우리 함대에 싸움을 걸 리가 없습니다. 전투공역까지 유인한 후 포위할 것이 뻔합니다. 이 근처에는 마젤란 장군의 제 5 함대도 포진해 있습니다.” “...크윽... 이런 빌어먹을...” “전하! 분한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아바돈에 합류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것 같습니다. 루시펠님을 구하기 위해서도, 지금 우리의 병력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은하수호함대 기함, 크리오테테스의 함교. “메기우스님. 헬크로아 함대가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거리 1만 칠천. 기타 함선을 빼더라도 알파급 항모만 4척입니다. 싸울 겁니까?” “당연하다. 신의 영광을 모르는 무지한 것들. 우리에겐 승리 아니면 순교가 있을 뿐. 패배나 후퇴는 없다.” 메기우스는 부하들을 독려했지만, 적의 위용을 보자 심장이 싸늘해지는 것 같았다. ‘후우... 과연 해모수의 헬크로아 함대... 지원도 없이 요툰하임을 전멸시켰다는 것은 거짓이 아닌 모양이군. 함대의 전개 속도, 진형, 조합, 모든 것이 완벽하다.’ 은빛의 랜서가 천사군의 숨통을 끊기 위해 그 날카로운 끝을 겨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진정 두려운 것은 그런 함대 따위가 아니다. 해모수의 용신기 제노하임 리케르트. 그 괴물이 있는 한, 정찰함대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전멸할 것이다. 하지만 천사들은 질줄 뻔히 알면서도 후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신의 적과의 싸움에서 죽는 것은 순교이기 때문이다. “실버스타군 마젤란 장군의 5함대가 올 때 까지 어떻게 해서든 병력을 유지해야 한다. 마잘란 장군의 용신기라면 제노하임과 싸울 수 있을 터...” 하지만 함대의 지휘를 맡고 있는 지천사 메기우스는 마젤란 함대가 도착할 때 까지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용신기의 힘은 그만큼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뒤를 부탁한다. 메르카바로 변환 할 수 있는 천사들은 모두 전투 준비하라. 적의 용신기와 용전기로부터 최대한 함대를 보호한다.” 각오를 한 메기우스가 최후의 명령이라 해도 좋을 명령을 내렸다. “메기우스님, 적 함대가 물러섭니다. 추적할까요?” “뭐? 왜 물러 서는 거지...” 메기우스는 당황했다. 전력적으로 사자와 토끼보다도 더 차이가 나는데 물러 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함정인가? 전 함, 전투태세로 대기. 추적하진 않는다.” 메기우스는 알 수가 없었다. 해모수가 반역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갑자기 마법계에 나타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전투 대형으로 함대를 전개시켜 놓고 갑자기 후퇴하는 것도 이상했다. ‘어쨌든 다행인가...’ 메기우스는 당혹 반, 안도 반의 깊은 한숨을 쉬었다. . . . . 음... 갑자기 우주전이 나와서 당황하실지도...;;; 책에는 해모수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어서 어색하지 않은데, 갑자기 이걸 보시는 분들은 당혹스러울수도 있겠네요...;;; 출판전에 외전 형식으로라도 올려야....;;; 담편서 부터는 다시 마법계의 이야기로 갑니다. 아직 우주전 이야기는 이른것 같군요... 몸을 감아 도는 마나의 흐름 새우잠을 자다 깼을 때, 기지개를 활짝 펴면 몰려오는 쾌감과 고통의 저릿한 느낌하고도 비슷했다. 얼마나 더 강해 진 걸까? 유신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세 번째 봉인 해제. 그로써 마나의 봉인이 풀렸다. 유신은 그의 몸에 흐르는 마나를 신기한 듯,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정령왕은 이미 떠났지만, 아직까지 남아 있는 잔류 마나만 해도 엄청난 양이었다. 유신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그 방대한 마나를 그의 몸 안으로 받아 들였다. “휘이잉” 그를 중심으로 작은 마나의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이내 그 규모는 점점 더 커져서 이제는 거대한 마나의 폭풍을 이루기 시작했다. 마나의 흐름을 제어하는 기본 원리는 코어를 제어하는 것과 같기에 별 어려움 없이 그의 몸을 통과하는 마나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남의 코어를 이런 식으로 무차별로 받아들였다간, 몸의 코어와 엉켜 큰일 나겠지만, 마나는 특별한 속성이 없기 때문에 이런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마나... 마나에 몸을 기대 본 것이 얼마만일까...’ 유신정도 됐으면, 당연히 마나보다는 코어를 위주로 힘을 쌓게 된다. 집중적인 파괴력도 코어가 훨씬 높고, 무엇보다 코어를 이용한 공격은 직접 물리 방어와 코어를 이용한 방어 이외에는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족이나 마신과 싸우려면 사실 코어로 공격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마법으로도 공격할 수는 있지만, 마나를 이용한 공격은 대부분 마나를 이용하여 막을 수 있다. 대자연에 무궁무진하게 깔려 있는 마나를 이용하면 그만큼 강력한 공격을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그만큼 강력한 방어 결계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3급신 이상의 전투력을 지닌 존재라면, 그 안에 내제되어 있는 코어의 양이 주변 마나의 양보다도 훨씬 많기 때문에, 그런 존재들이 전력을 다하면 어떠한 마법보다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마나는 코어를 보조해 주는 정도로만 사용하게 되었고, 그나마 주문의 영창부터 마법진을 그리는 것 까지 대부분 하이테크놀러지가 대신 해 줄 수 있을 정도로 마도과학이 발전했기에, 굳이 마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전투적인 목적으로는 코어를 수련하는 것이 훨씬 낳았고, 그래서 유신 정도나 되는 녀석이 기초적인 마법도 모르는 것이다. 교양 수준으로 마나의 기본적인 이론이나 자주 사용하는 마법 한두개는 어렴풋이 기억이 났지만, 이것도 사용하려면 나름대로 수련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적이 사용할 마법의 파해법 같은 것은 상당한 수준으로 배웠지만, 지금 당장 쓸모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유신과 같은 상황에선 마나를 쓰는 것이 코어를 쓰는 것 보다 훨씬 유리하다. 마법계에 있는 적들이 물질계에서 싸웠던 적들처럼 몇 십 겹의 영구 마법 겹계를 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유신이 사용할 수 있는 코어의 양도 매우 적기 때문이다. 용신화랑처럼 신선 정도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아니라면, 코어보다는 마나에 익숙해지는 것이 더 좋다. 마나는 대자연의 힘이고, 일반 사람이라면 아무리 수련을 쌓고 코어를 모아 봐야 일반 마법사가 다루는 마나만큼의 코어도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마법이라... 쓸 수 있는 마법이 뭐가 있었더라...” 유신은 이리저리 마나를 배치해 봤지만, 그런다고 마법이 시전될 리가 없다. 마나의 흐름을 컨트롤 할 수 있게 되었다 해도 당장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마법이란 마나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나의 배치를 위한 복잡한 계산과 주문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물질계에선 이런 것은 컴퓨터가 해 주거나 사이버네스틱으로 이식된 보조 뇌가 맡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장치가 없는 마법계에선, 마법을 구사하기 위해선 마법사의 머리가 엄청나게 좋아야 한다. ‘음... 한번만 써 보면, 확실히 기억이 날건대...’ 마법계에 온지 벌써 일년이 다 되어 간다. 그동안 마법은 전혀 쓰지 않았으니 까먹는 것이 당연하다. 별 뾰족한 수가 없자 유신은 강제로 제어하던 마나를 놓아 주었다. 마법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이를테면 수학과 비슷한 것이다. 간단한 매직미사일의 생성 원리와 구동 이론도 그 수식을 증명한 것은 두꺼운 책 세권 분량이다. 마법사가 괜히 머리가 좋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나의 배치만 할 수 있으면, 그런 이론은 몰라도 사용할 수 있다고는 해도, 기본 원리는 그렇게 어렵다는 뜻이다. 비행마법을 예로 들어 보자. 비행마법 에어윙을 쓰기 위해선, 일단 올바르게 마나를 배열해야 한다. 어떤 마법사가 ‘이러이러한게 마나를 배치하면 하늘을 날 것이다.’ 란 이론을 마치 수학자처럼 인과관계에 맞게 증명했다고 하자. 이를 증명하기 위해선 실제 그 마나를 그 이론에 맞게 배열하여 비행을 해 내야 한다. 비행마법에 적합한 순서로 마나를 배열하기 위해 마나를 제어할 주문이나 마법진, 또는 각종 시약 같은 촉매를 이용한다. 요는 마나를 배열하는 것이다. 마나를 얼마나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배열하는가에 따라 마법의 위력, 시전 속도, 정확도 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정확한 마나의 배열을 위해 마나의 좌표값이라는 것을 쓰는데, 이걸 배우는 것이 또 장난 아니게 어렵다. 능숙한 마법사는 이런 과정 없이도 어느 정도의 마나를 제어 할 수 있기 때문에 마법의 주문 시간을 단축시키거나 심지어는 시동어 만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신의 경우는 이와 반대다. 봉인이 풀리면서 마나를 강제 제어할 힘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주문이나 마법진 따위 없이도 마나를 지배할 수는 있지만, 어떻게 배치를 해야 어떤 마법이 발동되는지를 모르는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유신 자신은 모르겠지만, 이렇게 아무렇게나 마나를 배치해 보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다. 자칫 마나의 흐름이 엉켜 폭주할 수도 있고, 대체 뭐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마나의 흐름과 코어의 흐름은 그 기본 원리가 같으니 유신 정도나 되는 녀석이 마나를 폭주시킬리야 없다. 마나의 폭주상태는 코어의 폭주 상태와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적은 가능성이라고 무시해 버리기엔, 마나를 아무렇게나 배치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그래서 마법사들끼리도 마법 주문을 교류하는 일이 적고, 함부로 마법을 전수하거나 연구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는 것이다. ‘어떻게 썼더라...’ 에어윙 마법을 쓰기 위해 몇 번 더 노력해 보던 유신은 포기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뭐, 천천히 엘핀서스 쪽으로 가다보면 되겠지. 엘프나 그리폰이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좋으니 알아서 찾을 거야.’ 5분 정도 걸었을까? 엘리시엘의 ‘기운’이 느껴졌다. ‘와... 과연 봉인이 풀리니까 좋구나.’ 지금까지의 유신이라면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구체적인 형태로 엘리시엘의 존재가 느껴졌다. “읏차” 그는 눈에 보이는 가장 높은 나무 위에 올라섰다. 가지 끝에 엄지발가락만으로 살짝 걸쳐 서 있을 뿐이지만, 나뭇가지는 전혀 휘어지지 않았다. “하핫, 엘리 여기야!!” 오랜 세월, 지독한 감옥에 갇쳐 있다가 자유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두개의 달이 밤하늘에 떠 있다고는 해도 밤은 밤이다. 하지만 유신은 주변의 사물을 보는데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엘리시엘이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뚜렸하게 보였다. 그리폰을 타고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이 하늘에서 메르카바를 타고 강림하는 천사처럼 아름답고 멋지다고 느껴졌다. “왜 이리 늦었어?” “응, 이쪽에서 굉장한 마나가 느껴졌거든. 드래곤 같았는데... 그리폰들이 겁에 질려서 이쪽으로 다가 오려고 하지를 않았어. 혹시 정령왕을 만난 거야?” 그 마나를 운용했던 것은 유신이었다. 하지만 엘리시엘은 유신이 마나를 쓰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설마 그였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고, 상식적으로 그런 방대한 마나를 인간이 운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응. 그 일은 끝났어. 그보다 어서 엘핀서스로 돌아가자. 세라피가 걱정이야.” “왜? 정령왕을 만났는데도 잘 안 된 거야?” “아니... 그냥 세라피가 보고 싶어서.” 정령왕이 마지막에 한 의심스런 말은 아직 엘리시엘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별 생각 없이 둘러 댄 유신의 말에 엘리시엘은 화살 맞은 사슴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미련하게도 보지 못했다. “... 응. 어서 가자. 그보다 정령왕과 만난 일은 잘 된 거야?” “잘 모르겠어. 잘 된건지 잘 안 된건지... 일단 세라피는 다 낳았다고 했지만...” “그럼 잘 된 거네. 어서 가자. 나머지 이야기는 엘핀서스에서 해도 되고...” 힘을 되찾아 흥분한 상태에 있었던 유신은 엘리시엘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가는 떨림을 듣지 못했다. 그녀는 ‘질투’라는 그녀 자신에게도 낮설은 감정을 들키기 싫었는지 히야누를 평소보다 빠르게 날게 했다. “이봐, 엘리! 같이 가자구. 니케! 우리도 달리자.” “께에에엑” 유신의 명령에 니케도 용맹한 소리를 지르며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엘핀서스의 상공에 도착한 것은 거의 새벽 무렵이었다. 유신이나 엘리시엘이야 그렇다 쳐도, 그리폰들 역시 대단한 체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아마 주인을 닮아 가는 것이리라. 엘리시엘이 가끔 회복 마법을 걸어 주고 있다고는 해도, 그 많은 하피들과 싸우고, 잠 한숨 자지 않고 날아다녔다. 부상 역시 만만치 않게 입었음에도 그리폰의 날개는 아직까지도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유신은 흥분되었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밤의 세계가 보였다. 주변에는 간간히 장난치며 그리폰의 날개 사이를 날아다니는 변덕쟁이 바람의 정령도 보였고, 밤 사냥을 하기 위해 날아오르는 부엉이의 모습도 보였다. ‘역시 마법계... 이렇게나 많은 마나가 흐르는구나. 멋지다...’ 유신은 팔을 활짝 벌리고 그의 몸을 통과하는 마나의 기운을 느꼈다. 그런 유신을 지켜보던 엘리시엘은 히야누를 니케와 나란히 날게 했다. “뭐야? 기분 좋은가보네? 그런데 바르부스는 어떻게 설득한거야? 설마 ‘세라피언니를 치료해 주세요.’ 하니까 치료해 준거야?” 엘리시엘은 문뜩 기억났다는 듯 물어 보았다. 그녀는 마령결계를 바르부스가 친 걸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령왕이 유신에게 적대적이라고 생각했다. 유신이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정령왕을 힘으로 굴복시키고 세라피의 치료를 약속받았다고는 생각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라피가 낳았는지 궁금해 하는 것이 당연하다. “어... 그... 그냥... 그보다 시누타님은 어때? 꽤 심하게 다친 것 같아 보이던데...” 미처 변명거리를 준비해 두지 못했던 유신은, 재빨리 다른 질문으로 화재를 돌렸다. “응, 정신은 차렸어. 옐리마도 생각보다 많이 나쁘지는 않고. 시누타 오빠는 준비성이 많아. 다행이 포션이 있어서 별 문제 없는 것 같아.” 역시 순진한 엘프다. 엘리시엘은 유신의 어설픈 화술에도 넘어가 버렸다. “다행이다... 그럼 엘핀서스로 돌아 간거야?” “아니. 아까 실피드로 연락이 왔는데, 며칠 더 옐리마를 돌봐 주다 돌아올 거래. 일이 잘 해결 되서 다행이라고 하네.” “응. 정말 다행이다...” 바르부스의 마지막 말이 걸렸기에 유신은 그다지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일단 세라피가 일어서 주기만 하면, 나머지는 또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힘내자. 봉인도 하나 더 풀렸으니, 문제없을 거야.’ 유신은 마음을 다잡으며 거대한 녹색의 벽으로 보이는 빛의 나무로 니케를 몰아갔다. 이름:suckjins (suckjins@dreamwiz.com) 평가:29 B&M 제 5 장 천공의 기사4화 “유신!! 유우~~ 신~ 어서 와요.~” 그가 오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는지, 빛의 나무 아래에 있는 공터에는 세라피가 벌써 마중 나와 있었다. ‘어...어메... 세라피 목소리 크네...’ 아마 이른 새벽부터 들려온 커다란 목소리에 짜증이 나서 정령계로 돌아가는 잠의 정령이 꽤 많을 것이다. 유신의 그리폰이 내려앉기도 전에, 세라피는 어떻게 알았는지 온 빛의 나무가 짜랑짜랑 울리도록 큰 소리로 유신을 불렀다. “휘휘휘휘” 니케의 그 육중한 몸을 사뿐히 내려앉자 그렇게 거칠게 휘몰아치던 바람이 마치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유신이 니케의 등에서 뛰어 내리자 세라피가 와락 달려들었다. 덕분에 깜짝 놀란 니케가 회를 치며 큰 소리로 깍깍거렸지만, 세라피는 무서워하기는 커녕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니케도 한동안 난리를 치다 상대방의 반응이 없자 썰렁 했는지, 다시 조용해 졌다. 언제나와 같은 미소, 변함없는 따듯함. 유신은 마치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한참 유신의 볼에 얼굴을 비비며 그의 존재를 확인 한 세라피가 그제야 그리폰이 보인다는 듯, 인사를 했다. “착한 아이구나. 네가 유신을 지켜 준 거니?” 세라피는 하얀 손을 뻗어 겁도 없이 니케의 부리를 쓰다듬었다. 유신은 혹시 물리지나 않을까 하여 조마조마 했지만, 니케는 그 파란 눈으로 세라피의 녹색 눈동자를 얌전히 들여다 볼 뿐이었다. “그렁그렁” 세라피가 활짝 웃어 주자 이내 기분이 좋아졌는지 니케는 고양이 같은 소리를 내었다. 그간의 고생이 모두 날아갈 만큼 멋진 미소였다. 하지만 유신은 뭔가가 이상했다. ‘뭐지? 뭐지 이건? 어떻게 된 거야?’ 언제나와 변함없는 그녀였지만, 그건 아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니,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것 같았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세라피의 얼굴... 지브릴님하고 똑같지 않은가...’ 유신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처음 세라피와 여행했을 때보다 키도 조금 더 자랐고, 얼굴도 어른스러워 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필 그 변한 얼굴이 가브리엘과 똑같다니. 이상한 일이다.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몇 달 동안 천천히 변한 얼굴이라고는 해도, 아무리 유신이 둔하다 해도, 거의 천년에 거쳐 사모해 온 가브리엘의 모습을 몰라볼 리가 없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몰랐다는 건 뭔가 다른 ‘간섭’이 있었다는 뜻이다. ‘힘이... 봉인이 풀렸기 때문에 이제야 알아 본 것일까? 설마 최면이나 암시?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가 지브릴님을 몰라보다니...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이지?’ 유신의 표정이 이상하자 세라피도 그만큼 당황하였다. 세라피가 기억하는 마지막 유신의 모습은 매우 서먹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세라피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돌아다녔는지는 장로에게 들었지만, 직접 보질 못했으니 실감할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그녀가 느낀 시간이라고 해 봐야 한숨 푹 자고 일어난 것일 뿐이니 실감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저... 유신... 제가 잘못했어요. 다친 팔... 신경 쓰였을 텐데... 제가 엘프라... 인간과 많이 달라서... 그래서 인간의 생각은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그러니 화내지 마요. 가르쳐 주면 금방 배울 수 있을 거예요. 엘프는 인간이 보기엔 한없이 느리고 답답해 보일지 몰라도 저 열심히 할께요. 워든 확실히 배울 수 있어요. 그러니 제발... 유신이 계속 화내면 전... 전...” 긴 귀를 축 늘어뜨린 세라피가 울먹이며 겨우 말했다. 유신은 혼란스러웠다. 가브리엘과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 하지만 다른 존재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데 세라피가 울먹이기까지 하니 머리 속에 터진 스팀이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수호천사라... 바르부스가 말하던 수호천사가 지브릴님이란 말인가? 하지만 의식은 세라피인 것 같은데... 설마 서서히 의식을 침식당하는 것일까? 살아있는 육신에 지브릴님 같은 강력한 영격체가 강림하면 세라피 본래 영혼은 윤회의 고리에서 조차 완전히 소멸하여 원래부터 없던 존재로 될 것이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니요... 전 화나지 않았어요.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피곤해서 그래요.” 유신은 가만히 세라피의 두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세라피는 의식을 잃었던 두 달 동안 키가 더 컸는지, 그녀의 얼굴 높이는 유신의 얼굴높이와 비슷했다. 뭔가 말을 해야 했지만,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주먹을 두세번 꽉 움켜줬다가 풀어준 유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세라피? 세라피 맞아요? 아니면 지브릴님?” 그가 다시 입을 열자 세라피가 와락 안겼다. “네. 맞아요. 저 세라피 맞아요...” 마침내 그녀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세라피에게 이토록 집착했던 것일까? 그분과 같은 외모라? 지브릴님 대체... 대체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해답이 있을 리 없다. 유신은 가만히 세라피를 안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어두컴컴한 자그마한 홀에 50여명의 무장 인원이 등받이조차 없는 초라한 의자에 매우 불편해 보이는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기립. 일동 차렷!!” 막 변성기를 지난 듯, 아직은 앳돼 보이는 목소리였지만, 기특하게도 제법 진지한 구석이 있는 목소리였다. 무장한 인원들은 그 소리에 맞추어 일사분란하게 일어섰다. 좁고 밀폐된 공간이었지만, 의자 끄는 소리 같은건 들리지도 않는다. 굉장히 숙련된 전사라는 뜻이다. 서랍도 없는 사각의 편편한 책상 위에는 아무런 특징도 없는 평범한 펜 하나와 종이 한 장만이 달랑 놓여 있었다. 홀 벽의 중앙마다 자그마한 호롱불 한 개씩이 걸려서 주변의 어둠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검은 복면을 쓰고, 검은 색의 타이트한 도복을 입고, 무장은 120cm쯤 되는 외날의 검으로 통일하고 있었다. 아직 어린 것 같았지만, 이들의 심상치 않은 눈매는 어중간한 수련으로는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드르륵” 잠시 어둠 속에 파묻힌 공간을 지배했던 정적을 깨지며 홀의 미닫이 문이 열리자 한 남자가 들어섰다. 남자치고는 약간 작다 싶은 키, 호리호리한 몸매, 귀엽성 있게 생긴 얼굴. 이런 음침하고 무서운 장소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남자였지만, 묘하게도 잘 어울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 남자에게선 이런 어둠조차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어떤 준엄한 기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제 집에 온 듯 편안하고 여유 있어 보이는 얼굴. 하지만 흔히 약한 자들이 자신의 나약함을 가리기 위해 보이는 허세가 아니다. 그렇다고 어중간한 교만도 아니다. 진정 내면에 꽉 들어차 있는 자신감과 그에 걸맞는 실력이 있어야 보여 줄 수 있는 그런 칼날 같은 기백이 엿보였다. “자, 모두 편안히 앉도록.” 유신은 단상에 선채 근 1년간 고생해서 키운 그만의 직속부대원들을 바라보았다. 처음 출발은 300여명이었지만, 거르고 걸러져 끝까지 남은 진짜배기들이다. “지난 1년간 정말 고생 많았다. 부귀도, 영화도, 권력도 아무것도 약속 할 것이 없는 이곳에서 이만큼이나 잘 따라와 준 제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나라도 여러분들에게 약속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긍지다. 자존심이다. 명예다. 지상 최강의 부대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 되어줄 여러분들은 그 시작을 맡았다는 긍지를, 자존심을, 그리고 앞으로 계승될 화랑이라는 이름의 제1기라는 칭호를 얻었다.” 여기까지 말한 유신은 그 얼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겨우 1년이었다. 너무나 짧은 시간. 아직 제군들에게 가르쳐 줘야 할 것도 많고, 제군들 또한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역사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미래를 위해 여러분의 조국은, 대륙은, 그리고 나는 제군들의 힘을 필요로 한다. 지금부터 제군들은 내 추천 하에 여러 나라로 따로따로 파견되어 그곳의 기사학교에 입교하게 된다. 이미 여러분들은 기사학교에서 배울 것은 다 배웠다. 검술, 창술, 봉술, 체술, 전술, 전법, 독도법, 기초 마법이론, 몬스터일람, 마상전, 육탄전, 대 인간전, 대 몬스터전, 상륙전, 돌격전, 섬멸전, 전격전, 포위전, 돌파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전쟁의 형태와 필요한 지식을 배웠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지식일 뿐이다. 빠른 시간 내에 무리하게 교육시키느라 그것이 여러분들의 일부가 될 정도로 숙련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제군들에겐 지식이 있다. 그러니 그 지식을 활용하라. 어느 곳에 가든, 2등은 용서 못한다. 톱이 되어라. 그리고 실전을 배워라. 정치를, 인간을, 전쟁을 배워라. 그리고 제군들의 뒤를 이어줄 2기 째의 화랑들을 위한 길잡이가 되어라. 할 수 있겠지?” “넷!!” “나는 제군들이 전방에서 싸울 소모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참모나 지휘관이 되어라. 그것을 위한 기초이론을 교육한 것이니까.” “넷!!” “제군들의 건승을 빌며, 앞으로 3년 뒤, 단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다시 볼 수 있기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상.” “일동 기립.” 어떤 형태가 되었든 스승과 제자의 관계란 각별할 수밖에 없다. 특히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을 함께 헤쳐 나가며 생기는 전우애는, 세상의 어떤 우정이나 사랑 못지않은 강력한 결속력을 준다. 그 지옥 같은 훈련을 하고, 강제주입식 교육을 받으며 인간이 견딜 수 없는 혹독한 시련을 헤쳐 나왔다는 자신감. 이들은 그런 시련과 그 시련을 헤쳐 나갈 능력을 준 그들의 스승을 사랑하고 존경했으며 일말의 의심조차 갖지 않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고아나 부랑자, 또는 평민들 중에서도 미래가 없는 세 번째나 네 번째 아이들만을 구해 만든 부대. 이들에게 유신은 미래를, 그리고 자신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을만한 긍지를 주었다. 그것은 일종의 세뇌다. 어떤 마법이나 최면보다도 달콤하고 강한 세뇌. 훗날 이들은 각 국가의 수뇌부에 들어가 대 흄 전선에서 맹활약 하게 된다. 7월. 오븐 속에 들어와 있는 뚱뚱한 소세지의 기분을 알 것 같은 무더위다. 유신은 더위를 피해 잡다한 일거리는 모두 미스티에게 떠넘긴 채 순찰을 핑계로 니케와 함께 하늘로 도망가기 위해 니케의 우리로 찾아 갔다. “휴우... 살 것 같다... 오늘은 조금 멀리까지 순찰을 나가 볼까?” “께에엑” 니케도 우리 속이 답답했는지, 큰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우리 문을 박박 긁었다. 주인과 함께 하늘을 날 생각을 하자 니케도 어지간히 흥분한 모양이다. 니케가 그 큰 부리로 한번씩 들이받을 때마다 강철로 만들어진 쇠창살의 문이 언제 뽑혀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을 만큼 덜컹거렸다. “그래. 그래. 너도 답답했지? 나도 답답했어.” 유신이 니케의 우리 문을 열어 젖치자 기다렸다는 듯, 후다닥 뛰어 나왔다. 먹이를 보고 달려드는 야수의 움직임만큼이나 재빨랐기 때문에 근처에 있던 병사들은 오줌을 지릴 만치 무서웠을 것이다. 니케는 몸을 부르르 털고는, 그 커다란 유신에게 부리를 들이밀어 부비부비 하면서 한동안 주인에게 재롱을 떨었다. “구구구구” 니케는 유신에게 덤벼들다 싶이 안겨들었기 때문에 주변의 병사들은 하마터면 유신을 구하기 위해 그 갸날픈 창 쪼가리를 들고 하늘의 제왕에게 돌진할 뻔 했다. 하지만 다행이도 유신은 그런 니케의 격렬한 애무를 받으면서도 별로 힘들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 착하다.” 굉장한 힘이었다. 황소보다 커다란 그리폰이 두 앞다리를 다 들어 거의 모든 체중을 다 싣다 시피 유신의 어깨에 올려놓고 있었는데도, 유신은 별로 힘들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마 일반인이라면 짜부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봉인이 세게나 풀린 유신에게는 그리폰 정도는 그다지 부담스런 무게가 아니었다. 우리를 돌보던 병사들이나 먹이를 주는 하인들은 저 공포스런 괴수가 아무런 구속구도 없이 우리에서 나오자 모두 질겁하여 도망갔다. 그리폰이 그 질긴 말고기를 마치 예리한 검으로 썰 듯 갈기갈기 썰거나, 단단한 뼈를 부리로 몇 번 쪼아주는 것만으로 바수어 내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어디든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와우, 멋진데요? 천공의 기사님.” 어깨선이 훤히 들어나는 화사한 여름 정장을 입은 이자벨 공주가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머리에는 왠일인지 약식 왕관까지 차고 있었다. 도대체 이 아가씨는 무서운 것이 없는지, 저 두려운 그리폰을 보고도 조금도 무서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공주님. 그... 그런데 천공의 기사라니...” “어머, 몰랐어요? 요즘은 다 그렇게 불러요. 얼마나 멋져요? 그리폰을 타고 푸른창공을 누비는 드래곤 슬레이어...” “그만 놀려주셨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는데요...” “설마요. 이렇게 재미있는 놀림 거리를...” “......” “농담이에요. 설마 삐졌어요?” “... 아... 네...아니...요.” 이자벨은 간신히 대답하는 유신을 보며 만족한 듯한 웃음을 지었다. 한동안 니케를 바라보던 이자벨은 천천히 니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멈추어 섰다. 낮선 인간이 다가오자 니케는 목의 깃을 부풀리며 경계했지만, 이자벨도, 유신도 그런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묘한 신뢰관계이다. 이자벨은 설혹 저 괴수가 덤벼들어도 유신이 지켜 주리라는 믿음, 그리고 유신은 절대 니케가 그의 명령 없이 사람을 공격할 리 없다는 믿음, 니케는 그의 주인이 공격하기 전에는 공격해선 안 된다는 믿음.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는 신뢰관계였지만, 어쨌든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오오 착하구나. 그런데 왜 이렇게 이 귀여운 녀석들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그건 이자벨이 니케에게 밥 주는 것이 얼마나 공포스런 작업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다. 성에 있는 하인 중 그날 가장 재수가 나쁜 누군가가 니케에게 밥을 줘야 한다. 먹는 양도 엄청나기 때문에, 보통 손수레에 말고기를 가득 실어 날라야 한다. 그러면 니케는 벌써 말의 피냄새를 맡고 흥분하기 시작한다. 그리폰의 우리는 성의 외진 곳에 있기 때문에 사람의 인적이 많은 곳은 아니다. 게다가 니케가 밥먹을 시간이 되면 더더욱 사람들이 그 근처에 가길 꺼린다. 말고기를 가지고 가다 보면, 그리폰의 우리는 보이지 않아도 그리폰이 소란을 피우는 소리는 벌써 들려오기 시작한다. 쿵쿵 거리며 우리를 들이 받는 소리나, 강철보다 단단한 그 발톱으로 뿌드득 뿌드득 창살을 긁어 대는 소리를 듣다 보면 모골이 송연해 진다. 그리고 먹이라도 주려고 하면, 뭣이 그리도 급한지, 창살 틈으로 얼굴을 들이 밀거나, 앞발을 빼내어 빨리 내 놓으라고 난리가 난다. 그리폰의 빠르기를 생각해 보라. 비록 우리 속에 들어가 있다고는 해도, 창살 밖으로 앞발을 내밀어 휘젓는 속도는 일반인이 반응 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잠시만 한눈을 팔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는 작업이다. 결국 견디다 못해 2m 에 이르는 긴 관 모양의 통을 만들어 거기에 말고기를 부어서 우리로 들어가게 하는 방법을 택해야 했을 정도다. 이자벨은 니케의 부리를 쓰다듬으려고 하다가 어떤 살기를 느꼈는지 손을 거두었다. ‘다행이다. 아무리 배짱 좋다고는 해도, 일국의 공주나 되는 여장부가 용기와 만용을 구별하지 못해서는 안 되지.’ 유신은 크게 안심했다. 하지만. “지금 니케와 놀러 나가려고 하는 거죠?” “예. 일단은 휴일이고... 니케도 날개 운동을 시켜 주지 않으면 않되거든요. 자칫 야생의 감이 떨어 질 수도 있고... 하늘의 제왕에게 날 자유를 빼앗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거든요.” “과연...” 한동안 니케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던 이자벨은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니케 못지않게 푸른 눈을 빛내며 유신을 바라보았다. 굉장한 불안감을 느낀 유신은 즉시 니케에 올라타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유신이라도, 감히 공주가, 아니 아름다운 레이디가 얘기하는 중에 내뺄 만큼 막나가지는 않았다. “결심했어요.” “... 뭐를요? 유신은 대충 그녀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가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그가 결코 바라는 것이 아닐 것이기에 마지못해 되물어 본 것이다. “저도 태워 주세요. 하늘을 날고 싶어요.” “......” 막 그리폰을 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해 설명하려던 유신은 이자벨의 우수에 찬 푸른 눈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강했기에 근심이나 고민 따위는 없어 보였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유신이 더 잘 아는 일이다. 높은 신분의 사람이란 그런 것이다. 아주 자그마한 자유도 없다. 물론 이자벨이 좀 막나가는 고집 센 면이 있었지만, 점점 나이를 먹고 결혼해야 될 나이가 되면서 예전처럼 자유를 누리지는 못할 것이다. 이자벨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껏 하늘을 날 수 있는 그리폰과 유신이 부러운 것이다. 저런 눈빛은 본 일이 있다. ‘아리엘 황제폐하...’ 자유를 갈망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눈빛. 갖을 수 없는 것을 단지 바라볼 뿐인 동경의 눈빛. ‘후...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조금쯤은 치기어린 귀여운 공주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자의 1년은 무섭도록 빠르구나. 아니면 흄과의 사이가 악화되면서 근심이 는 것일까?’ “니케 앉아.” 유신의 명령에 니케는 마치 개가 엎드리듯 땅바닥에 풀썩 주저 앉았다. “자, 그럼 공주님.” 엎드려 있다고는 해도, 그리폰의 등 높이는 안장 없이 오를 수 있을만한 높이가 아니다. 그래서 유신은 이자벨의 다리와 목을 받쳐 안고는 니케의 위에 뛰어 올랐다. 만약 로열가드나 다른 기사들이 봤다면 거품을 뿜으며 달려들 만큼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이자벨은 과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킥킥... 아하핫” 오히려 가슴이 두근거리며 알 수 없는 흥분에 웃음까지 나왔다. 원래 레이디는 말의 뒤에 태우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유신은 이자벨을 그의 앞에 태워 주었다. “에... 좀 무례해도 용서해 주시길...” “후훗, 무례라니요. 그러고 보면 유신도 은근히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군요. 제가 앞에 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그런 거잖아요.” 이자벨의 칭찬에 유신의 볼이 빨개졌지만, 다행이 이자벨이 앞에 있으니 그 모습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남자들은 여자의 자유를 구속하면서, 그것이 레이디를 위한 길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자벨의 주위에 있는 기사나 로열가드들은 모두 훌륭하고 멋진 기사들이지만, 그런 면에선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다. 늘상 격식에 얽메여 숨이 막힐 것 같았던 이자벨이었기에, 유신의 이런 작은 배려가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다. “자, 니케!! 고향으로 돌아가자” “께에에에엑” 유신의 말에 니케의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가만히 있어도 커보이는 그리폰이다. 날개까지 활짝 펼치자 그 대담한 이자벨 조차 입이 벌어질 정도의 위용을 뽐냈다. “휘이이잉” 엄청난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그리폰의 거대한 덩치가 마치 거짓말처럼 공중에 두둥실 떴다. “화아... 대단 하군요. 그리폰이란 생명체는...” 이자벨의 솔직한 감탄에 유신도 기분이 좋았다. “지금부터 더 대단할 거예요. 가자 니케!” 그리폰이 가속하며 하늘로 치솟자 이자벨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갑작스런 기압 변화나 하늘의 바람은 아직 하늘을 날아 본 적이 없는 이자벨에겐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유신의 사정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내가 앞에 앉을 걸 그랬나?’ 이자벨의 길고 가는 금발 머리가 뒤에 앉은 유신의 얼굴을 사정없이 간질이자, 좋기도 하고 곤욕스럽기도 했다. 다행이 니케가 마음에 드는 바람을 탔는지 공중에 가만히 멈춰 섰다. “자, 공주님 이제 저 아래를 봐요.” “아!!” 커다랗기만 하던 하누스 성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성의 뒤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마르힐 산이 한여름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녹색 치마를 입은 자태를 뽐냈다. 이자벨은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시원한 창공의 공기가 가슴속 깊이 스며들고, 바람의 정령이 그녀의 몸을 끊임없이 애무해 줘서 한낮의 태양에 뜨거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자, 니케! 공주님을 조금 더 놀라게 해 드리자. 달려!” “끼에에엑” “꺄아아악” 첫 번째 괴성은 니케가 오랜만에 하늘을 마음껏 나는 것이 기뻐서 지른 소리고, 두 번째 비명은 갑자기 가속하는 그리폰에 놀라 공주님이 지른 소리다. ‘거의 비슷한 수준의 소음인데?’ 이자벨은 유신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니케의 목에 찰싹 감겨 있었다. 잠시 후, 그리폰의 비행에 익숙해진 공주도 점점 하늘을 누비는 자유에 취하기 시작했다. 구름에 닿을 만큼 높게도 날아 보고, 머리 속이 하얘질 정도로 아찔한 급강하도 해 보았다. “과연 멋지네요. 천공의 기사라 불릴 만 해요.” 솔직한 감탄이고 부러움이었다. 아무것에도 얽메이지 않고, 한없이 자유롭고 강한 유신과 그의 그리폰이 너무나 부러웠다. 그녀의 말 속에 들어 있는 어떤 비장함을 느꼈기에 유신도 아무 말 할 수가 없었다. 한 시간 정도 전속력으로 비행하자 하누스 성에서 꽤 멀리까지 날아갔다. “순찰 나온 것 아니에요? 조금 더 낮게 날아 봐요.” 너무 높이 날자 아래쪽 경치를 제대로 볼 수 없었는지 이자벨 공주가 찡찡거렸다. 유신은 그 정도 높이에서는 지상을 내려다보는데 별 지장이 없었지만, 이자벨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유신은 모시고 있는 레이디를 위해 그리폰의 고도를 조금 더 낮추었다. ‘순찰은 무슨... 핑계 대지 말고 잘 안보이니까 좀 아래로 내려가 달라고 하면 어련히 알아서 내려가 줄 텐데...’ 복잡 미묘한 여심을 알리 없는 유신은 한심하단 생각을 했지만, 그걸 입 밖에 낼 만큼 바보는 아니다. 몇몇 마을에서 그리폰을 발견하고 난리가 난 모습이 보였지만, 그런 것쯤은 별일 아니리라. 또 다시 한참을 더 날아 완전히 인가를 벗어나자 유신도 한시름 놓았다. 이런 곳에는 사람의 인적이 없으니 무슨 위험한 일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긴장을 조금 늦추고 그리폰의 등에 기대 여유롭게 마나를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응? 저게 뭐지요?” “네? 뭐가 보이나요? 앗!!” 이자벨이 가리킨 곳에서는 누군가 싸우고 있는지, 병장기들의 흉흉한 검광이 보였다. 꽤 먼 거리였기에 만약 빛에 반사되어 번쩍거리지 않았다면, 자칫 못 보고 지나갈 수도 있었다. “와우! 공주님도 가끔은 도움이 되는 데요?” “......” 이자벨은 무섭게 한번 째려봤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한서린 여자의 눈빛 공격은 효과는 충분한 듯싶다. “자자 어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가요. 니케! 전속으로 가자!” 유신은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 같아 아차 하는 마음에 급하게 니케를 출발 시켰다. “하핫 날씨 참 좋지요?” 딴청을 부려 봤지만, 이자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 화난건가?’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이자벨이 마지막으로 모험을 한 것이 유신과 함께 소드마스터를 찾는 여행이었다. 그것도 중간에 돌아가야 했으니 결말 없는, 모험이라기보다는 여행이었다. 그 왈가닥 성격에 얼마나 심심했겠는가? 그러니 뭔가 신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온 신경을 전투지역으로 집중하고 있어서 유신의 말을 듣지 못한 것뿐이다. “니케!! 가자!!” “끼에에엑” 아래에서 검을 든 채 대치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리폰의 포효 소리를 듣고, 그 순간 얼이 빠졌다. 그리고 그리폰이 그들을 향해 덮쳐 온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이미 니케는 그들의 바로 위까지 활강을 한 뒤였다. “우...우와오아왁” 대치하고 있던 사람들 중, 포위당해서 수세에 몰려 있는 쪽은 드워프 둘에 인간 셋, 포위한 쪽은 인간 스무명 정도였다. 하지만 그리폰의 출현에 모두들 너, 나 할 것 없이 땅에 엎드리며 제발 그리폰이 그냥 지나쳐주기만을 바랬다. “휘휘휘이이이잉” 그리폰이 그들의 머리 위를 스쳐서 날아오르자 그때서야 하나 둘, 무장을 챙기며 살금살금 다시 일어섰다. 모두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저 공포스러운 맹수가 떠나간 것만으로도 한시름 논 것 같았다. “저...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죠? 드워프는 인간과 적대 관계가 아닌 걸로 아는데, 습격 받는 이유를 잘 모르겠군요.” “뭐... 뭐냣, 네놈은?” 설마 그리폰에서 사람이 뛰어 내렸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들은 유신을 보고 깜짝 놀랐다. “흐흐 뭐가 되었든 상관없지. 우리를 보았으니 살려둘 수 없다. 모두 죽여라!!” 지휘관인 듯 한 험상궂은 표정의 남자가 명령하자 사내들의 눈에 다시금 흉흉한 살기가 돌았다. 그리폰과 유신을 연관지어 생각할 만큼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한 이들은, 유신을 우연치 않게 지나가던 회방꾼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대체적으로 하드레더에 롱소드, 라운드 실드를 들고 있는 모습이 용병인 듯 했다. 무장에 통일성도 없었고, 장식적인 무장 보다는 완전히 실용성만을 고려하여 챙긴 무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게다가 발놀림이나 검을 쥐고 있는 자세만 봐도, 정식으로 검술을 배웠다기보다는 실전에서 배운 티가 확 났기 때문이다. “이런, 젊은이는 왜 이런 일에 끼어들어서... 그냥 지나쳤으면 목숨은 건졌을 것 아니오?” 포위당한 쪽의 리더인 듯한 중년인이 안타깝다는 중얼거렸다. “에... 그래서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을까요?” “크하핫, 사태 파악을 못하는 놈이구나. 죽을 놈이 그딴 걸 알아서 뭐하냐?” 갑옷도 없고, 검도 도저히 전투용이라곤 생각 할 수 없는 애들 작대기 수준의 얇은 것이 전부다. 도적들이 방심하고 달려들어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어디든 똑똑한 녀석이 하나쯤은 있다. “대장, 대장, 뭔가 이상해요. 저런 무장으로는 인가도 없는 이곳까지 수많은 몬스터를 피해 올 수가 없다고요. 뭔가 대단한 실력자나 마법사가 아닐까요?” ‘흐음... 대장이라... 그럼 용병 나부랭이쯤이겠군. 도적들이면 두목이라고 부르겠지.’ 용병이라면 다루기 쉽다. 용병 제 1원칙이 자기의 생명이고, 그 다음이 의뢰주와의 신용이기 때문이다. 몸으로 먹고 사는 녀석들이니 만큼 동료애나 신용보다는 몸이 최우선이다. “에잇!! 마법사라면 마법을 쓰기 전에 끝장내면 되지!!”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다. 그 무리중 하나가 유신이 마법을 쓰기 전에 치겠다는 생각인 듯, 달려들었다. 무식한 머리에 비해 일격에 급소를 노리는 꽤 단련된 검이었다. “이야기도 하기 전에 상대를 죽일 생각으로 검을 휘두르다니... 대체 뭐하는 놈들이냐?!” 유신도 화가나서 달려드는 녀석의 검을 살짝 피하고는 꽤나 강력한 주먹을 복부에 먹였다. “푸욱” 꽤나 강력하다기 보다는 겨우 죽지 않을 정도의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뒤로 튕겨 날아가며 반동으로 충격을 줄일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덤벼들던 남자는 그대로 눈을 까뒤집으며 제자리에 주저 않았다. “이놈이!!” 그와 동시에 용병들이 한꺼번에 덤벼들자 난전이 벌어졌다. 아니, 난전이 벌어질 뻔 하였다. “흥” 유신은 기합도 없이 한심하단 콧소리와 함께 가장 선두에서 달려드는 녀석의 검을 엄지와 검지를 사용해 잡았다. 그리고 아주 약간만 힘을 주어 당기자 그 남자는 마치 코끼리에게 끌려가든 전혀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왼팔로 남자의 가드를 무력화 시킨 유신은 그 남자를 몸 앞까지 바짝 끌어당겨 무릎으로 명치를 찍었다. “케엑”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푹 꺽은 그 남자의 머리를 잡고 다른 남자에게 확 밀어 버렸다. 동시에 뒤에서 달려들던 녀석에게는 멋진 돌려차기를 선사했다. “퍼억, 쿠당탕” 동료의 몸을 받는라 잠시 휘청댔던 용병의 목으로 유신의 날카로운 발 끝이 날아들었다. “끼르륵”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남자가 주저앉자 양 옆에서 다른 용병들이 거칠게 검을 휘두르며 달려 들었다. 오른쪽 남자의 손목을 비틀어 끌어당긴 후. 왼쪽에서 달려들던 남자의 검을 막았다. 별로 힘들지도 않고 재미있다는 표정도 아니었다. 단지 약간 화난 듯한 무표정으로 팔꿈치를 돌려 오른쪽의 남자의 턱을 후려치고는 왼쪽 남자에게 떠밀었다. 그가 안간힘을 써서 쓰러지지 않고 균형을 잡았지만, 유신이 낮은 발차기로 복숭아뼈를 걷어차자 휘청 하며 쓰러졌다. 다시 몸을 일으키기위해 바둥거렸지만, 남자의 가장 중요한 급소를 한번 더 걷어차 주자 조용히, 하지만 게거품을 뿜는 더러운 몰골로 기절했다. 유신의 뒤를 노리며 또 한 놈이 검을 휘둘렀지만, 가볍게 업어치기로 넘겨 버린 후, 머리부터 떨어지는 적의 목에 다시 한번 강력한 발차기를 선사했다. 도대체 무슨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새에 여덜 명이나 당했다. 용병들이 감히 달려들지 못하고 망설이자 이번에는 유신이 움직였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녀석에게 달려든 것이 아니라 5명쯤 뭉쳐 있던 녀석들의 한 가운데에 갑자기 나타났다. 마치 텔레포트 마법이라도 쓴 듯, 일반인은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앞에 있던 남자의 배에 주먹을 내지르자 남자의 두꺼운 하드레더가 움푹 들어가며 동시에 입에선 더러운 토사물이 울컥울컥 나왔다. “이익!! 이놈이!!” 옆에 있던 동료들이 각자 검을 휘둘렀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고 서로의 몸이 방해가 되어 제대로 휘두를 수가 없었다. “휘익”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높이로 도약한 유신은 떨어지는 낙하 에너지까지 모두 모아 발뒤꿈치로 다음 제물의 정수리를 내려 쳤다. 그리고 땅에 내려서는 동시에 몸을 확 낮추며 왼발을 축으로 오른발을 회전시켜 나머지 세명의 다리를 걸었다. “와당탕” 넘어진 셋에게 기절할 만큼 강한 일격을 먹이는 것은 결코 힘든 일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도 아니다. 여기까지 열세명이 쓰러지는 데에 30초 정도도 걸리지 않았다. “괴...괴물같은놈...” 다른 드워프들과 엉켜서 싸우던 나머지 용병들도 모두 굳어 버리고 말았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20명의 동료 중, 절반도 넘는 수가 땅바닥에 굴러 다니니 싸울 생각이 안나는 것이 당연하다. “히...히에엑... 살려....”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대장인 듯한 남자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도망이 오히려 불행이었다. 까마득한 높이에서 그의 주인을 바라보고 있는 날카로운 두개의 눈동자. 유신처럼 인정사정을 봐주는 것도 아니고, 그 강력한 힘을 완벽하게 조절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창공의 최강 최악의 무법자! “니케! 잡아와!” 유신은 니케가 워낙 똑똑하여 잡아오라면 잡아 올 줄 알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똑똑해 봐야 맹수다. 제대로 말귀를 알아들을 리 없는 것이다. 물론 니케는 달아나는 인간을 잡아 오긴 했다 하지만 그 인간을, 아니 인간이었던 것을 ‘꽉’ 움켜쥐고 유신 앞으로 데려 왔다. 니케는 “우지직”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가슴팍 있는 곳이 완전히 뭉개져 터진 감처럼 되어 버린 시체를 들고 왔다. “아차... 차라리 내가 잡아 올걸...” 유신은 후회를 했지만, 어쨌든 엎질러진 물이다. 그 남자는 이미 완전히 숨이 끊어졌기 때문에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 듯 했다. 니케의 등 뒤에 타고 있던 이자벨 공주는 그 광경에 비로소 니케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지, 파랗게 질려 버렸다. 니케는 착한 일을 해서 칭찬을 받을 줄 알았는지 팽개친 시체를 우직우직 밝고 유신에게 다가가 얼굴을 내밀며 쓰다듬어 달라고 재롱을 부렸다. 니케가 앞발을 들며 재롱을 부리자 뒷발에 깔린 그 남자의 시체는 점점 끔찍한 꼴이 되었고, 그 시체에서 그들의 미래를 본 다른 용병들은 감히 도망칠 생각도 못하고 굳어 버렸다. “니케... 그러면 털이 더러워지잖아...” “......” 유신의 말에 썰렁한 침묵이 감돌았다. “자아, 아직 자신 있는 녀석들은 덤벼 봐라.” 사태를 마무리 짖겠다는 듯, 그리폰의 등에서 뛰어 내린 이자벨이 목소리도 당당히 소리쳤다. 허리에 손까지 척 얹고 멋진 말투와 위엄이 가득 담긴 공주다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다지 설득력이 있지는 않았다. 어깨선이 다 드러난, 조금 야해 보이는 하얀 여름 정장에 예쁘장하게 보일 정도로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그런 말을 해 봐야 설득력이 있을 리 없다. “......” “쿠핫! 젊은이 정말 시원스럽게 잘 싸우는데? 도와줘서 정말 감사하네. 안 그랬으면 큰일 날 뻔 했어...” 이야기의 실마리가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자 드워프 중 리더인 듯 보이는 남자가 드워프 특유의 과장된 큰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용감한 드워프라도 그리폰은 부담스러웠는지, 니케에게선 상당히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 소리치듯 감사를 전했다. “천만에요. 드워프와 하누스왕국은 동맹관계인데, 어려울 때 돕는 것이 당연하지요.” 여전히 이자벨이 나서며 이야기를 했다. 피를 보고 아무렇게나 날뛰던 심장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전투에 대한 흥분이 몰려 온 모양이다. 보통 여자라면 그리폰에 깔린 남자의 시체 옆에서 기절하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이자벨도 로열가드 정도의 실력을 가진 강자다. 니케가 워낙 높이 날고 있어서 유신이 싸우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그런 싸움을 보고 흥분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사이 기절한 용병들과 항복한 용병들을 포박한 나머지 드워프들과 드워프의 일행으로 보이는 세 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도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폰을 타고 다니시는 것을 보니... 혹시 천공의 기사, 드래곤슬레이어 유신 경이 아닌 가요?” 벌써 이런 변두리까지 알아보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소문이 퍼진 모양이다. “쿨럭, 제 이름이 유신인 것은 맞지만...” “오오 만나서 영광군. 난 헤카이론 광산의 책임자인 둔켈이라 하네. 자네가 그라테우스를 쓰러뜨린 그 유명한 드래곤 슬레이어인가?” “아...하...하... 그렇긴 그렇지만...” 유신은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늘 짓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정도라면 우리 광산의 문제를 해결 해 줄 수 있겠군.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겠나?” “글쎄요... 저는 공주...” 당연히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기 전에 이자벨 공주부터 왕궁으로 돌려보내고 싶은 유신이다. 이자벨도 그런 낌새를 차렸는지, 유신이 뭐라 하기 전에 냉큼 대답했다. “그럼요! 어려움에 빠진 사람, 아니 드워프를 돕는 것은 기사의 의무!! 당연히 도와야지요.” “고...공주...” 다시 무언가를 말하려던 유신의 발등을 지긋이 찍어준 이자벨은 재빨리 그를 끌어당겨 니케의 뒤로 데려갔다. “공주라고 하지 말아욧!! 그리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위험한 냄새가 난다고요. 지금 당장 저들을 도와주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그러니까 공주님은 돌아가셔야죠. 저랑 둘이 놀러 나온 것도 불만스럽게 여길 귀족들이 얼마나 많을 텐데요. 괜히 위험한 일에라도 휘말렸다간...” 유신이 쩔쩔매며 이자벨을 돌려보내기 위해 이리저리 달래 보았지만, 단 한번도 그녀의 고집을 꺽어 본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금방 해결하고 가면 되잖아요.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못 본척 하는 것은 왕족의 수치입니다. 유신이 저들을 내버려두고 간다 해도, 저 혼자라도 도와주러 가겠어요. 그리고 유신 정도의 실력이면 아까같은 산적나부랭이쯤은 수백 명이 달려들어도 저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잖아요. 게다가 정 위험해지면 니케가 있으니 위험해 지면 하늘로 도망가면 되요.” 그는 이 공주가 얼마나 진지한지 알아보기 위해 그녀의 눈을 가만히 살폈다. 하지만 도도한 푸른 눈 속에선 왕족의 고집과 모험에 대한 호기심밖에 없었다. 유신 더 실버스타. 그 찬란한 명성도 다 필요 없는 일이다. 이번에도 결국 이자벨의 막무가내 고집에 무릎 꿇고 말았다. “그렇게 풀죽은 얼굴 하지 말라고요. 누가 보면 제가 괴롭힌 줄 알겠네요. 그보다 어서 가서 무슨 일인지 들어 보도록 해요.” ‘괴롭힌 게 맞는데...’ 뭐라 하기도 전에 이자벨은 벌써 유신을 질질 끌다시피 하여 다시 그리폰의 앞으로 나섰다. ‘행동력 하난 끝내주는 공주님이라니까...’ “자, 그럼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저... 그런데 저 레이디는 누구입니까?” 이자벨이 당당히 앞에 나섰지만, 드워프나 그 동료들은 당연히 이자벨보단 유신과 이야기 하고 싶어 했다. 도저히 차림으로 보아 기사나 마법사 같지 않은 이자벨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에... 그러니까 이분은 제가 호위중인 레이...” 이자벨은 혹시라도 유신이 레이디라고 소개하면 활약할 기회가 없어질 까봐 중간에 말을 끊었다. “기삽니다. 하누스의 로열가드중 한명입니다. 잠시 파티가 있어서 이런 복장이었지만, 전 기사입니다.” 이자벨의 말은 무시하기로 했는지, 드워프의 일행 중 남자 하나는 애써 그녀를 외면하며 유신에게 말을 걸었다. “음... 유신 경, 사실 우리는 엎드려서 빌기라도 해야 할 입장입니다. 저는 헤카이론 광산에 있는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는 스와튼이라고 합니다.” “잠깐만요! 왜 저는 무시하는 거예요?” 당연히 공주라는 신분에 따돌림 따위를 당해 본 적 없는 이자벨이다. 이야기의 주도권을 빼앗기니 발끈 하는 게 당연하다. 모두들 잠시 이자벨에게 시선을 모았지만, 별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유신에게로 집중했다. 드래곤슬레이어 유신과 함께 다닐 정도니, 어느 높은 귀족 집의 말괄량이 레이디거나 유신의 연인 정도로 생각한 모양이다. “으이익!” 그녀가 흥분하려 하자, 평소 그녀 성격을 잘 아는 유신이 나서야 했다. “저... 레이디 이자벨? 그런 차림으론 아무리 기사라고 해 봐야 설득력이 없어요.” “그냥 이자벨이라고 해요. 레이디 이자벨이라니... 그보다 차림이 어때서요?” 잠시 그녀의 옷차림을 살피던 이자벨도 그녀의 차림 상 저 드워프 일행에게 믿음을 주기는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원하게 들어난 어깨선, 활동하기 좋은 짧은 치마 형의 정장 스타일, 기사의 필수품인 칼조차 없다. 약식의 왕관은 머리장식처럼 보이니 문제없지만, 아무리 좋게 봐 줘도 검을 휘두르는 기사라고 하기엔 무리가 따르는 복장이었다. 정식 기사라면 아무리 파티 장소라 해도 저런 복장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복장이 문제로군요. 좋아요. 그렇다면 갈아입어야죠.” 이자벨은 대담하게도 기절해 있는 용병 중 가장 체구가 작아 보이는 남자의 무장을 벗기기 시작했다. 대충 하드레더와 하드레더 아래로 연결된 스커트 형식의 보호대, 부츠, 가죽 장갑까지 벗겨내었다. 하드레더에서 나는 남자의 땀 냄새에 잠시 눈살을 찌푸리던 그녀였지만, 모험을 위해서는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그러자 유신이 질겁하며 말렸다. “이자벨 고....님!! 설마 여기서 갈아입으시려고요?” 공주라는 말은 간신히 목 아래로 쑤셔 넣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복장 때문에 신용을 줄 수 없다면, 갈아입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복장에 연연하는 저분들도 우습지만, 그걸 알면서도 갈아입을 용기조차 없다면 저 역시 똑같이 우스운 사람이 되겠지요.” ‘정말 이 공주님의 사고 체계는... 옳은 말이긴 하지만, 어쨌든 결코 정상은 아니야...’ “후우우우우우... 니케 이리 와!” 질렸다는 듯, 저 깊은 심연 속에서 올라오는 듯한 한숨을 내쉰 유신은 니케를 불렀다. 한쪽 구석에서 얌전히 앉아서 깃털을 정리하던 니케는, 주인이 부르자 마지막으로 몸을 한번 부르르 털고는 털레털레 걸어 왔다. “니케 일어서!” 니케는 순간적으로 유신의 명령을 못 알아들었는지 딴청을 부렸다. 하지만 유신이 손짓까지 해 가며 일어서라는 시늉을 하자 결국 뒷다리로 일어섰다. “니케 날개!” 잠시 그런 니케를 바라보던 유신이 팔을 활짝 벌리자 니케도 유신을 따라서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래. 잠시만 그러고 있어 봐.” 엄청난 크기였다. 3미터에 이르는 덩치가 앞발을 들고 선 채로 날개까지 활짝 펼치자 눈앞에 작은 산이 솟아난 것 같았다. 그리폰은 가만히만 있어도 무시무시한데, 이런 자세로 있자 그야말로 보는 이의 심장을 쥐어 짤만한 대단한 박력이 느껴졌다. “이자벨님, 정 갈아입으실 거면 저 뒤로 가서 갈아입으세요.” “훗, 정말 유신 경은 볼수록 재미있어요. 설마 저 위험한 그리폰 뒤에 가서 갈아입으라니... 그래도 알몸을 보이는 것보다는 났겠지요. 그럼 잠시 실례할게요.” 이자벨이 총총 걸음으로 니케의 뒤로 돌아 가려고 하자 니케도 그녀를 따라서 몸을 틀려고 하였다. 니케가 아무리 유신에게 길들여져 있다 해도, 그리폰이라고 하는 최강의 맹수임은 변함이 없다. 맹수가 자신의 눈이 닿지 않는 뒤쪽으로 다른 생명체가 움직이는 것을 달가워 할 리 없기 때문이다. “니케!! 가만히 있어!!” 다시 유신이 고함을 지르자 니케는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그 자세를 유지했다. “구구구구구” 니케는 이런 난감한 상황이 답답했는지 구슬픈 신음소리 같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감히 날개를 접거나 일어선 자세를 무너뜨리지는 않았다. 덕분에 이자벨이 옷을 갈아입을 때 까지 남자 인간들과 남자 드워프들, 그리고 남자 그리폰은 우울한 시선으로 끝없이 펼쳐진 이리나 대평원의 지평선만 하염없이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자, 다 되었어요. 그러니 이 귀여운 그리폰군도 편히 쉬라고 해요.” 이자벨은 다 갈아입고도 그런 남자들의 불쌍한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었는지 한참을 더 늦장 부리다 겨우 나왔다. “으윽...” 처음 이자벨의 갈아 입은 모습을 본 유신이 흘린 신음 소리다. 나름대로 꽤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하고 나왔는데, 이런 반응을 보이자 이자벨도 화가 났다. “뭐에욧! 그 이상한 반응은...!!” “저... 이자벨님, 복장이...” 짧은 치마 덕분에 허벅지는 다 들어 났는데, 그 위로 약간 헐렁한 하드레더와 그에 연결된 스커트 형식의 보호대가 내려와 있으니, 그 가늘고 고운 허벅지 선이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 원래 벗은 것 보다 이런 차림새가 훨씬 섹시한 법이다. 게다가 매니아틱한 성향의 갑옷이라니... 꽁꽁 묶여 있는 용병 중에선 칠칠치 못하게 코피를 흘리는 녀석까지 있었다. “후우... 공주님, 아무래도 그런 차림을 하시려면 바지까지 입는 것이 더 낳을 것 같아요. 그런 차림새는... 여러모로 위험하다고요.” 유신은 그런 이자벨에게 완전히 질렸다는 듯,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힘들게 말했다. “흐음... 그런가요? 하지만 저로서도 저런 바지는 입고 싶지 않네요.” 땀 냄새와 남자 특유의 냄새로 범벅이 된 하드레더를 입은 것만 해도 사실 이자벨의 입장에선 나름대로 최선의 성의를 다한 것이다. 거기에 기분 나쁜 ‘수컷’의 바지까지 입으라 하면 이자벨에 좋다고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런 사소한 문제는 넘어 가고, 이야기부터 들어 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군요.” ‘수컷’들 이 눈 둘 곳이 없어서 방황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자벨은 당당히 말했다. “그... 그래야 겠군요.” 결코 사소한 문제는 아닐 것이지만, 이자벨의 기세에 눌린 나머지 사람들과 드워프들은 아무렇게나 대답하고 말았다. 이자벨의 막무가내적인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했는지 포기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주일 쯤 전부터 광산에서 이상한 몬스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한 몬스터라고요?” 몬스터라면 보통 죽을 만큼 배가 고픈 상황이 되면 인가에 내려와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있어도, 보석이나 다른 물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는 극히 적다. 인간이 몬스터에 비해 약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몬스터가 인간과 싸워서 승산이 높은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은 몬스터에 비해 작전구사 능력이 뛰어나고, 단결력이나 정신력도 강하기 때문에 집단전에선 몬스터 따위는 상대도 안될 만큼 능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강력한 몬스터라 해도 생계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면 결코 인간과 싸우는 상황을 달가워 할리 없는 것이다. 그런대 대체 몬스터가 광산에 나타나 무엇을 한단 말인가? 이상하게 여긴 유신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보통의 검이나 드워프들의 대포도 통하지도 않더군요. 투명하고 흐늘흐늘 한 것이, 검으로 내려치면, 그냥 통과해 버립니다. 대포도 마찬가지고요. 다행이 몬스터들의 속도가 빠른 것은 아니지만, 그 숫자가 꾸준히 늘어나서 현재는 광산을 폐쇄한 상태입니다.” “빠르지도 않은 몬스터들이 그렇게 위험합니까? 수백, 수천명씩 싸우는 군대 단위의 전투가 아니면, 파워 보다는 스피드가 훨씬 중요하다. 레이피어에 찔리나 바스타드에 찔리나 치명상을 입는 것은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자벨은 느린 적을 해치우지 못해 그 강력하고 고집 센 드워프들이 삶의 터전이 되는 광산까지 빼앗겼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랄까요... 생명력을 빼앗기는 것 같다고 할까요? 사람이고 동물이고 드워프고 할 것 없이 그 몬스터들에게 살짝 스치기만 해도 온 몸에 힘이 쭉 빠져버립니다. 접촉 시간이 길거나 심하게 접촉하면 목숨을 잃기도 하고요.” “단지 닿는 것 만으로요?” “예... 일단 확인된 것은 그렇습니다. 몬스터들이 무기나 마법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해치울 방법이 없으니 광산은 폐쇠한 상태가 되어 버렸지요.” “마법은 사용해 봤나요?” 검이나 대포등의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몬스터들은 어떤 특별한 마법적 지원을 받는 것이라 판단한 유신이 물었다. “광산 마을에 마법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법을 써보지는 못했습니다. 드워프 왕국에는 드워프 캐논에 쓸 수 있는 마법탄이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드워프 왕국까지는 너무 멀어서 갈 수 없고, 대신 하누스 왕국에서 마법탄과 가능하다면 마법사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을 습격한 저 용병들은 뭐지요?” 유신의 말에 잡혀 있는 용병들의 얼굴이 팍 찌그러졌다. “예? 용병이라고요? 도적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도적치곤 무장이나 솜씨가 너무 좋군요.” 유신은 드워프들을 바라보며 말을 했다. “드워프 전사와 비슷하게 싸울 수 있는 수준이라면, 웬만큼 단련된 기사급의 전투력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일개 산적이 그런 수준에 이르렀을 리 없지요. 저들은 프포 용병입니다. 그것도 제법 솜씨가 뛰어난... ” 여기까지 말한 유신은 도망치다가 니케에게 피떡이 되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뭐, 저 녀석은 단지 지휘만 내리는 녀석인 듯하지만... 아마 저들의 고용주에게 용병들의 상황을 알리며 명령 상황을 전달하는 중계인 정도 되겠지요.” 전투가 불리해 지자 아무 미련 없이 동료들을 내팽개치고 도망간걸 보면, 아무래도 용병들의 무리인 것 같지는 않았다. “뭐, 어찌 되었든 상관없겠지요. 사실 여부는 저 녀석들에게 물어 보면 되니까요.” 유신은 꽁꽁 묶여 있는 용병들에게 슬쩍 사악한 시선을 던졌다. “......” 용병들도 용병으로서의 프라이다가 있는 것인지, 유신의 시선을 묵묵히 받았다. “자자, 서로 편하게 가자고. 어차피 너희들은 항복 했으니 지금 와서 의뢰주를 위한답시고 버텨 봐야 서로 피곤해질 뿐이야. 용병인 만큼, 몸뚱어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겠지?” “......” 유신이 점잖게 협박해 봤지만, 표현이 너무 점잖았는지, 용병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사실 유신의 외모가 누구를 협박하기 적당한 외모는 아니니 거칠기만 한 용병들이 한번쯤 튕겨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흐흠... 말을 안 하시겠다? 서로간의 신회감이 그렇게 강한 거야? 아무리 네놈들이 만년 묵은 조개 화석처럼 버텨 봐야 여기 있는 20명 중 단 한명만 입을 열어도 다 소용 없어지거든?” “......” “좋아. 아주 좋아. 나름대로 의리가 있군. 일단 다섯 명만 죽이고 시작해 보자. 물론 최후에 남은 다섯은 차라리 먼저 죽은 ‘동료’들이 부러워질 만큼 고문당할 거야.” 유신은 양 손을 깍지 끼어 앞으로 쭉 내밀며 몸을 풀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어떤 형식이 되었든, 저런 애송이 용병에게서 정보를 빼 내는 것은 일도 아니기 때문에 여유가 넘쳤다. 유신은 드워프중 하나가 모아온 용병들의 무기들 중 투박하고 특징 없는 롱소드 하나를 집어 들었다. “관리도 잘했는데? 제법 날카로워.” 과장된 동작으로 검 날을 살펴본 유신은 검을 장난스럽게 몇 바퀴 돌리며 용병들에게 시간을 조금 더 주었다. 하지만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자, 별수 없다는 듯 롱소드를 높이 들었다. “불쌍하긴 하지만...” 유신의 롱소드가 그의 발치에 기절해 있는 사내를 향해 겨눠졌다. “멈춰!! 이 지독한 놈 의식도 없는 사람을 벨 생각이냐! 그러고도 기사냐? 드래곤 슬레이어란 칭호가 부끄럽지도 않은 거냐고!!” 용병 중 리더인 듯한 남자는 땅바닥을 기면서도 악에 바쳐 발버둥쳤다. 하지만 유신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미안하지만 난 기사가 아니거든.” “푹” 유신은 롱소드를 정확하게 기절한 남자의 목에 밖아 넣었다. 일격에 급소를 찢은 것인지 작은 경련조차 일으키지 못했다. “으으... 빼면 피가 튈 것 같으니까 나머지는 다른 칼로 해야겠다.” 유신은 장난스럽게 그 시체를 살짝 비켜가 다른 무기를 골랐다. “음... 도끼가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용병들의 무장에선 도끼가 없었기 때문에 아쉬운 대로 거대한 바스타드를 하나 빼들었다. “이 미친놈!! 그만 둬!! 이봐 드워프! 거기 여자!! 저 미친놈을 말려!!” 하지만 이자벨과 드워프들은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이번에는 바스타드의 싸늘한 칼끝이 그 남자에게 겨눠졌다. “다음은 네 차례로 하자. 부하들 죽는 것 보지 않아도 되니까 좋지?” “큭...” 비로소 그 남자도 창백한 표정이 되었다. “알았소! 말 하겠소! 그러니 그만 두시오!!” 결국 용병중 하나가 못 견대겠다는 듯 유신을 말렸다. 용병은 항상 죽음과 등을 마주대고 사는 만큼, 삶에 대한 집착이 크다. 사실 이제까지 버틴 게 용한 것이다. “해리!! 의뢰인을 팔 생각이냐?!” “대장, 상대는 살인귀야. 우리는 지금이야 이 모양이지만, 어쨌든 용병이라고. 목숨이 젤 중하다는 건 대장이 늘 강조해온 거잖아. 게다가 의뢰내용 중에 드래곤슬레이어와 싸우라는 내용은 없었어. 그랬다면 누가 이런 일 하겠어?” “하지만 이건 돌발 사태고...” 남자는 더 이상 말을 있지 못했다. 유신의 바스타드가 목젖을 살짝살짝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빨간 피가 남자의 목에 엉켜 있는 때와 엉켜 검붉은 색이 되어 목 아래로 흘렀다. “저 친구가 말 하겠다잖아. 집안싸움은 나중에 하라고. 아니면 내가 직접 조용히 만들어 줄까?” 저 무거운 바스타드의 폼멜 끝을 한손으로 살짝 잡고 정확히 목젖을 겨누는 묘기다. ‘뭐... 뭐냐, 이 남자는? 저 가는 팔목에서 오우거 정도의 힘이라도 낼 수 있다는 건가?’ 목젖을 긁어대는 바스타드의 공포보다도 유신의 힘에 질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말 하겠다고 했잖소! 어서 검을 치우시오!” 해리라고 불린 남자가 소리치자 유신도 만족한다는 듯, 바스타드를 어깨에 걸치며 한 발 물러섰다. “후우... 우리는 도적길드 전투부 소속의 전사요. 원래는 용병이었지만 현재는 도둑길드에 흡수되어 이런 일을 하고 있소.”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도적 길드라니? 왜 도둑들이 이정도의 무력을 지녀야 하는 거지?’ 유신이 놀란 표정을 짓자 용병의 표정이 약간은 거만해 졌다. 길드란 말에 유신이 겁먹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흐흐 겁먹은 것 같군. 그렇다면 우리를 그만 풀어 주는 게 어떻겠소? 사실 우리로서도 그 유명한 천공의 기사와 나쁜 관계를 쌓고 싶지는 않거든. 저 드워프들과 인간들을 넘겨주면 조용히 물러가겠소.”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유신은 긴 한숨과 함께 바스타드의 옆면으로 남자의 뺨을 후려 갈겼다. “짜악” 엄청난 소리가 나면서 이빨이 몇 개나 튀어 나갔고, 턱뼈도 부서졌는지 남자는 땅바닥을 구르며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까불지 마라. 어딜 도둑놈 따위가...” 해리라는 남자가 말을 하지 못하게 되자 이번에는 바스타드로 리더를 가리켰다. “다음은 네가 말해.” “잠깐, 도둑 길드가 뭐지요? 마법사 길드 같은 건가요?” 도둑길드란 말에 얌전히 구경하고 있던 이자벨이 갑자기 끼여 들었다. “에? 이자벨...고...님, 설마 도둑 길드가 뭔지도 몰라요?” “그럼 유신 경은 알아요?” “네... 그냥 상식 수준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일정 금액을 길드에 내면, 길드에서는 그 도둑의 뒤를 봐 주는 거지요. 정보를 사고파는 것부터 도둑들의 복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를 할걸요? 하지만 이정도의 무장을 갖춘 집단을 유지할 필요는 없을 것인데... 오히려 치안대에게 발각되기도 쉽고요. 그게 좀 이상하네요. 뭐, 곳 알게 되겠지요.” 물질계에도 도둑 길드는 있다. 군대는 물론 화랑들까지 투입되어 몇 번에 거친 범죄와의 전쟁을 치러도 도둑길드만은 어느 샌가 나타나 있다. 악마들과 전쟁 중인 극한 상황에서도 도둑길드만큼은 언제나 꿋꿋하게 살아남아 무기를 팔고, 정보를 팔고, 마약을 팔고, 여자를 팔고, 어쨌든 제 역할을 한다. 도둑이란 아무리 퇴치하고 박멸해도 어디선가 나타나는 바퀴벌레보다도 더 질긴, 그런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공주가 곱게 자랐다 해도 도둑길드를 모른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마법계라는 특수한 상황을 생각하면 공주가 모르는 것이 이해가 된다. 사실 도둑길드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4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마법계를 관리하던 카린가 성계대전에서 아스모데우스에게 소멸당하기 전까진 라일로스대륙은 평화로웠고, 도둑이 있기는 있어도 길드를 만들 만큼 활성화 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신의 도둑 길드가 무엇인지 아는 듯 말하자 오히려 도적길드원 들이 더 놀라고 말았다. 이제 막 본격적으로 길드가 활동을 시작하려는 참인데, 벌써부터 베일에 쌓여 있어야 할 도적길드에 대해 잘 아는 듯이 말하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놀라는 것이 당연하다. “그...그렇소. 그럼 다 아는 것 같은데 대체 궁금한 것이 무엇이오?” “아까도 말했잖아. 어째서 드워프들을 노린 거지? 광산에 나타났다는 몬스터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냐? 그리고 어째서 도둑길드에서 용병단 수준의 무장 집단을 운용하는 거지?” “으윽... 헤카이론 광산에 있는 몬스터는 잘 모르겠소. 단지 헤카이론마을을 오가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오.” “흐음... 그럼 일단은 광산부터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들을 말을 다 들었다는 듯, 유신은 위협적으로 휘두르던 바스타드를 집어 던졌다. “이 살인귀 자식! 언젠가 반드시 이 원수를 갚겠다. 잠 잘때는 항상 조심 하는 게 좋을 거야.” 도적들의 리더는 아직도 기가 죽지 않았는지 큰소리 쳤다. 하지만 유신은 관심 없다는 듯 처음에 롱소드를 목에 밖아 넣었던 녀석에게 다가갔다. “이... 이놈!! 설마 시체를 건드릴 셈이냐? 이 빌어먹을 자식아!! 그만 둬!!” 유신은 그의 말은 완전히 무시하고 시체를 발로 툭툭 찼다. “얌마! 일어나. 언제까지 기절해 있을 거야?” “꿈틀꿈틀” 시체는 팔다리가 움직였다. “우와아악!!” 도적들은 얼마나 놀랐는지 밧줄로 꽁꽁 묶여 쓰러져 있는데도 바닥을 기면서로 도망가기 위해 애썼다. 그런 광경이 재미있다는 듯 이자벨이 쿡쿡 웃었다. “아하하핫. 유신 경이 여러분들과 싸울때 맨손으로 싸운 것 보면 몰라요? 함부로 살생하기 싫어서 검도 안 쓰는 분이, 기절해 있는 사람에게 칼을 쓸 리 없잖아요. 그냥 목옆에 칼을 꽂은 것뿐이라고요.” “크하하핫” 드워프들과 드워프들의 일행도 참느라고 혼났다는 듯, 한참을 웃었다. “에... 일단 기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살인광도 아니거든.” 유신은 멋쩍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도적들은 꽁꽁 묶여진 채 바닥에 엎드려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겠지만, 유신 쪽에 서 있던 이자벨과 드워프 일행들은 처음부터 유신이 칼을 땅에 박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유신을 말리지 않은 것이다. “솜씨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그리 순진해서 도적일 하겠어? 그냥 천직이려니 하고 용병으로 살거나, 아니면 군대에라도 입대하는 게 어때?” 유신은 놀릴 생각으로 빈정거렸지만, 리더인 남자는 의외로 진지하게 감사를 표했다. “죽이지 않아서 정말 고맙소. 정말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는데... 살인귀라 해서 미안하오.” ‘호오... 제법인데?’ 부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과히 밉지 않았기에 유신이나 이자벨도 그냥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비록 우리가 배운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어서 용병으로 떠돌다가 도적길드에까지 흘러들어 가게 되었지만, 역시 당신 말처럼 우린 용병이나 해야겠소. 부하를 죽이지 않아서 정말 고맙소.” 용병이라고는 해도, 라일로스 대륙에선 국가간에 분쟁이 없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인간과 싸울 일이 드물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기껏해야 몬스터 토벌에 고용되거나 몬스터가 많은 지역을 통과하는 중요 화물의 보호, 미개척지 탐험을 위한 호위등의 일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도둑질은 어찌 되었든 인간과 상대해야 한다. 물건을 훔치는 것도 인간의 물건을 훔쳐야 하고, 정보를 사고 파는 것도, 복수를 하는 것도 모든 대상이 인간이다. 그러니 도적길드의 일이 마음에 들 리가 없는 것이다. “음... 반성한 것 같군요. 그럼 잡아가 봐야 의미가 없으니 풀어 주도록 하겠습니다. 심하게 다뤄서 미안합니다.” 유신도 깨끗하게 사과 하고 그들의 밧줄을 풀어 주었다. 어쨌든 천년가까이 살아온 유신이다. 나름대로 사람 보는 눈도 있고, 저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설혹 다시 도적길드로 돌아간다 해도, 정보가 빠른 도적길드와 미리 연줄을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고맙소. 천공의 기사라는 말이 과연 허명은 아니구려. 우리 같은 놈들한테도 잘해 주다니...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도적들, 아니 용병들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그곳을 떠났다. 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어 나중에는 차라리 빨리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B&M 제 5 장 장인의 광산 4화 “저 사람들, 너무 순진하네요... 저래서 용병일이라도 제대로 할까요?” 그들이 다 떠나가고 나자 이자벨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보통 용병이라면 생명을 파리처럼 여기는 거친 남자들뿐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뭐, 나름대로 실력은 좋은 것 같았으니까요. 그리고 서로를 저렇게 신뢰하는 집단이라면 어쨌든 나쁘지 않아요. 특히나 목숨을 함께 나누는 용병이라면... 저들의 리더도 대단한 사람인 것 같군요.” 사실 유신이 워낙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에 용병들이 순식간에 쓰러진 것처럼 보인 것이지, 결코 그들이 약했던 것이 아니다. 숫자가 제법 많았다고는 해도, 드워프가 넷이나 있는 무리에 싸움을 건 것만 봐도 그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작은 전투가 끝난 후, 유신은 니케를 돌려보내고 헤카이론 광산으로 향했다. 아마도 하루나 이틀정도 주변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을 사냥하다가, 다시 유신에게 돌아 올 것이다. “와... 이건 마을이 아니라 무슨 요새 같네요.” 헤카이론 마을 앞에 선 유신의 평이다. 마을은 꽤 깊은 깊이의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개교는 정면과 마을 왼편에 하나 더 있었다. 도개교에는 망루가 좌우에 각각 두개씩이나 있어, 돌파하려면 해자를 시체로 메우고 돌파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돌로 쌓은 성벽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빽빽한 나무 방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거의 요새 수준의 방어준비가 된 마을이었다. “왜 마을을 이렇게까지 전투적으로 만들었지요?” 이자벨은 군사요충지도 아니고, 인구수도 많지 않은 마을이 이런 수준의 중무장을 하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스와튼에게 물어 보았다. 도시도 아닌 마을이 황당하게 보일 정도로 꼼꼼하게 무장을 하고 있으니 이상할 만도 하다. “요즘 들어 몬스터들이 부쩍 늘었거든요. 근처의 다른 도시하고는 거리도 꽤 멀리 떨어져 있어서 군대를 지원 받기도 쉽지 않고, 식량의 대부분을 외부에서 들여오기 때문에 조금만 방심하면 몬스터들이 달려듭니다. 예전에는 오크가 말썽이었는데, 3~4년 새에 놈의 수가 부쩍 늘었어요. 요새는 놈과 오크들이 번갈아 달려들어서 정말 큰일입니다. 그래서 드워프들은 그들의 자랑인 캐논도 들여왔지요.” 스와튼이 설명하는 사이, 둔켈은 해자 앞에 서서 다리를 내리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렇게 고함지르지 않아도 잘 들린다고요! 정말 목청은...” 망루 위에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잠시 들린 후, 드륵드륵 하는 소리를 내며 도개교가 내려 왔다. 드워프들이 만든 것인지, 모루와 망치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고, 내려 오는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부드럽게 움직였다. “굉장히 견고해 보이는 도개교로군요. 드워프들이 만든 건가요?” “쿠헐. 역시 보는 눈이 있군. 당연히 저런 걸작을 만들 수 있는 종족은 드워프 밖에 없지.” 둔켈은 다리를 칭찬하자 신이 났는지 큼지막한 입에서 파편을 쏟아내며 드워프들의 장인정신과 훌륭한 다리에 대해 자랑을 했다. 드워프들의 호감을 사려면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들이 만든 작품에 대한 바른 평가를 내리면 된다. “마에스트로 둔켈, 어떻게 벌써 오셨지요? 하누스까지는 적어도 열흘은 걸릴....” 망루를 지키던 남자는 둔켈에게 말을 걸다가 이자벨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런 시골구석에서 이자벨 정도의 도시형 미인을 본 적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런 뇌살적인 복장이니 굳어 버리는 게 당연하다. 일행은 굳어버린 남자를 무시한 채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일단 바지부터 사는 것이 좋겠군요. 아마 성의 로열가드들이나 고귀하신 귀족나리들이 공주님의 이런 복장을 보면 제 심장을 산채로 씹으려 들 거라고요.” 유신은 혹시라도 다른 귀족들에게 공주의 이 발칙한 외출이 들킬까봐 조마조마 했다.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그랬다가는 귀찮아 질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흐음... 제 다리 예쁜가요?” 그런 유신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자벨은 계속 긁어대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 “안 예뻐요? 정말 안 예뻐요?” 그가 아무 말도 안하자 이자벨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예쁩니다. 아주 예뻐요. 그러니까 다들 쳐다보잖아요. 그러니 부탁컨대 바지부터 사요.” 대꾸해 봐야 공주의 장난감이 될 뿐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버텨봐야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유신은 항복하는 심정으로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말았다. “그렇게 예뻐요?” “...저 놀리는 게 재밌죠?” “네!!” “이익!!” 마침내 유신이 발광할고 하자 공주가 한발 물러섰다. “보통 드워프들의 마을이라면 활기차다 못해 짜증스러울 만큼 시끄럽잖아요. 그런데 이상할 만치 조용하네요. 마치 죽은 마을 같아요.” 유신을 데리고 논 것이 충분히 재미있었는지, 이자벨은 여우같이 말꼬리를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이미 승리했는데 더 이상 긁을 필요는 없다. 장난감을 너무 심하게 가지고 놀면 망가지게 마련이니 아낄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다. 보통 드워프들이 일하는 마을이라면, 밤낮 할 것 없이 망치질 소리와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 땅파는 소리로 매우 시끄러워야 하는데 너무나 조용했다. 광산이 스톱되어 버리자 드워프들은 할일이 없는지, 마을의 여기저기 앉아서 파이프 담배를 피워 대거나 자그마한 나이프로 장신구 따위를 깎으며 한가롭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 “커험. 그렇게 되었소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광산의 괴물들을 몰아 낼 것이오.” 둔켈은 드워프 말일이 침체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는지, 망치 같이 단단해 보이는 주먹을 흔들며 말했다. “일단 이야기는 어디 주점에라도 가서 하지요. 뭐 주점이라 봐야 한곳 밖에 없지만, 꽤 좋은 곳입니다. 특히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양하게 만들어진 맥주는 일품이지요.” 일행은 스와튼의 안내로 불의 노래라는 드워프 다운 이름의 주점으로 향했다. B&M 제 5 장 장인의 광산 5화 주점 앞에 도착하자 스와튼은 일단 인원 정리를 했다. “자, 그럼 마에스트로 둔켈이 드워프의 대표로, 저는 인간의 대표로써 일단 유신 경과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주점에 이렇게 많이 들어가 봐야 혼란스러울 뿐이니 다른 분들은 내일 아침에 있을 마을회의에서 토의 사항을 전달 받아 주세요. 기타 의견은 그때 듣도록 하겠습니다.” 스와튼이란 남자는 일처리 하는 것이 날렵하고 효율적인 것으로 보아 이런 시골구석에서 썩을만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삼십대 초반으로 보였지만, 나름대로 신용을 얻고 있었는지, 나머지 드워프와 인간들은 조금만 투덜거리고는 돌아갔다. 주점 안은 막 점심이 지난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인간들과 드워프들로 북적거렸다. 광산의 출입이 금지되고, 드워프들은 할 일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대낮부터 술을 마셔대는 것이다. 덕분에 드워프들에게 물건을 팔거나 2차 가공을 해서 생계를 꾸려 가는 마을의 사람들도 할 일이 없어져서 주점은 반갑지 않은 호황을 맞고 있었다. 마을 전체가 어쩔 수 없는 무기력감에 푹 잠겨 버린 것 같았다. 드워프들은 우울한 얼굴로, 사실 그 빨간 뺨과 무성한 수염 때문에 정말 우울해 보이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런 우울하고 무기력한 모습이로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드워프의 음주문화는 결코 조용한 편이 아닌데도 모두 기운이 빠져서 시끄럽게 떠들 기운조차 없었나보다. 주점 안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음에도 벽에 걸려있는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하기만 했다. 일행은 간단한 양고기 요리와 흑맥주를 주문했다. “보시다 시피 그리 큰 마을은 아닙니다. 인간과 드워프가 주를 이루지만 하플링이나 호비트도 살지요. 하지만 다 합쳐 봐야 인구수가 오백을 넘지 않아요.” 스와튼은 맥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모두의 잔에 가득 술을 따라 주며 헤카이론 마을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했다. 드워프를 상대로 하는 주점답게 나무잔이 아닌 정밀한 장식이 새겨진 청동제 잔이었고, 벽에는 원시적인 형태이긴 했지만, 톱니바퀴로 움직이는 시계도 있었다. “와... 그런데도 이정도의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말이에요? 게다가 잔이나 의자, 식탁 할 것 없이 모두 너무 훌륭한 명품이네요. 광산에서 금이라도 쏟아져 나오나요?” 왕실에서 쓰는 잔들 못지않을 정도로 화려하게 조각된 컵을 살펴보며 이자벨이 감탄한 듯 말했다. 보통 광산이라면 산지에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이리나 대평원에 광산이 있다는 것도 이상했다. “금보다 훨씬 더 귀한 것이지! 여기서는 미스릴이 생산되거든. 많은 양은 아니지만, 이정도의 마을쯤은 충분히 자족할만한 양이야.” 둔켈은 미스릴 광산을 발견한 장본인이다. 여전히 맥주를 절반은 마시고, 절반은 뿜어대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충분히 그럴 만 하다. 사실 미스릴 광산이 있다면 이런 작은 마을쯤은 열개라도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돈이 될 것이다. 미스릴 자체로는 별로 강하지 않지만, 약간만 가공을 하면 드래곤 비늘에 필적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매우 가벼워서 미스릴로 만든 무구는 마법계에선 최고의 명품으로 쳐준다. 게다가 가공 방식에 따라 여러가지 신기하고 고운 빛깔을 내기 때문에, 장식품으로 써도 무척 아름답다. 때문에 미스릴이라면 여자들이 더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미스릴의 진정한 가치는 이런 무구나 장신구에서 보다는 마법의 촉매로 쓰일 때 그 진가가 들어난다. 그래서 마법사들 역시 미스릴을 구하기 위해 안달한다. 물질계에서도 미스릴은 매우 귀한 금속이라 미스릴 광산을 발견하기 위한 전문 부서를 군대에서 운용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미스릴 광산을 워낙 발견하기 어렵다. 마법으로 탐지가 되는 것도 아니고, 물질계의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로도 미스릴을 탐지할 뾰족한 방법이 없어서 미스릴 광산의 개척은 드워프들의 ‘감’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물질계에서도 그럴 정도니 마법계에서는 미스릴 광산은 완전히 드워프들의 독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기술로는 파낼 수 없는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아서 미스릴 광산이 어디 있는지 안다고 해도, 파낼 수가 없는 것이다. “우와! 미스릴이 나온다고요? 그래서 광산이 이런 평야에 위치하고 있었군요. 이상하게 미스릴 광산은 평야 쪽에 많은 것 같아요. 마에스트로란 칭호는 드워프 기술자 중에서도 최고라는 칭호지요? 그럼 나중에 저한테 검 하나 만들어 줄래요?” 이자벨도 여자인지라 미스릴이란 말에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검밖에 모르는 공주지만, 어쨌든 미스릴로 만든 검이나 방어구는 최고의 명품이기 때문에 공주의 흥미를 끌었나보다. 공주는 미스릴이란 말에 완전히 흥분해 버려서 둔켈 만큼이나 반쯤은 맥주를 흘리고, 반쯤은 마시면서 열심히 떠들었다. 덕분에 술집의 거의 모든 시선이 이자벨에게, 정확히는 이자벨의 늘씬한 다리에 향했고, 유신은 두통이 날 것 같았다. ‘에휴... 내 바지라도 벗어 줬어야 했나...’ “크하핫 재미있는 아가씨로군! 좋아! 우리 광산에 나타난 몬스터들을 퇴치해 주면 최고의 검을 만들어 주지!” “우왓!! 둔켈님 멋쟁이!! 유신, 들었어요? 드워프 마에스트로가 저한테 일생에 한번 만들까 말까한 ‘미스릴’ 검을 혼신의 힘을 불어 넣어서 만들어서 준데요!!” 둔켈은 미스릴 검을 준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물론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이자벨은 둔켈의 약속을 아주 약간 각색해서 마에스트로 둔켈이 혼신의 힘을 기울인 인생의 역작 미스릴 검을 만들어 준다는 내용으로 바꾸고 말았다. ‘여... 여우다... 여우였어. 저 공주님의 정체는 인간의 탈을 쓴 여우였어!!’ 둔켈은 약속 내용이 교묘하게 바뀌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주와 죽이 맞아서 맥주를 들이 붓고 있었고, 유신은 불쌍한 드워프 마에스트로를 위해 묵념했다. B&M 제 5 장 장인의 광산 6화 신이 난 둔텔이 미스릴의 효용성과 아름다움에 대해 한참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였다. 주점의 자그마한 무대 위로 땅에 끌리는 긴 치마와 초록색의 초라한 복장을 한 여자 한명이 올라갔다. 꽤 긴 머리카락은 제대로 손질이 되지 않은 듯, 아름답다고 표현하기는 뭣한 상태였다. “오오, 드디어 시작 되는군. 저 아가씨 덕택에 여기 광산이 폐쇄되었어도 마을은 폐쇄되지 않고 있어.” 지금껏 조용히 술만 들이붓던 드워프들은 맥주잔으로 테이블을 두들기며 열광하기 시작했다. “쿵쾅! 쿵쾅!” 드워프들의 빨간 얼굴이 맥주에 쩔어 더더욱 빨개졌기 때문에 공포스럽게 까지 보이는 장면이었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환대가 부담스럽다는 듯, 음유시인 아가씨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무대에 올라섰다. 왼쪽 다리가 불편한지, 살짝 절고 있는 모습이 더욱 애처로워 보였다. “휴우... 난리네요. 이제야 드워프 마을에 온 것 같군요.” 이자벨은 질렸다는 듯, 그 아가씨보다도 열광하고 있는 드워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굉장히 자그마한 소녀였다. 소녀보다도 들고 있는 튜트가 더 커 보일 정도의 체구였다. 게다가 고개까지 푹 숙여서 옷 안에 파묻힌 것 같아 보일정도였다. 하지만 꽤나 고생을 하며 살았는지, 꽤 예쁘장하게 생긴 외모임에도 어려 보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신비한 눈이군요. 뭔가 묘하게 허무해 보이고, 인생경험이 풍부해 보이는 그런 눈이에요.” 음유시인이란 원래 가만히 있어도 뭔가 있어 보이는 분위기가 나는 법이다. 그런 것도 없다면 어떻게 먹고 살겠는가? 게다가 음유시인이란 가장 천한 계층의 사람이다. 공주로서 고귀하게 자란 이자벨이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언제 있었겠는가? 그래서 이자벨은 그 아가씨가 풍기는 공허하고 초연한 듯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눈이라...그렇게 느껴지나요? 사실 저 아가씨는 앞이 안보이거든요. 그래서 레이디께서 그런 느낌을 받은 걸 겁니다.” 스와튼은 도저히 이자벨을 기사라고 인정할 수가 없었는지, 레이디라고 칭했지만, 이자벨은 그 음유시인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흐음... 하프엘프에 장님이라...저 아가씨도 힘들겠네요.” 드워프들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방해 되는지, 한동안 낑낑거리며 튜트를 조율하던 음유시인을 바라보던 유신이 한마디 했다. “엇? 유신 경은 어떻게 하프엘프인지 알았지요?” 스와튼은 놀랐다는 듯, 유신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인간과는 틀리잖아요. 조용하고 정제된... 인간보다는 오히려 엘프에 가까운 느낌이군요.” “그럼 유신 경은 엘프도 많이 아나요? 과연 드래곤슬레이어...” 순간 유신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이자벨이 이 좋은 놀림거리를 놓칠 리가 없는 것이다. “호오... 과연 그렇군요. 엘프라!! 사실 유신 경만큼 엘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혹시 여우가 씨익 웃는다면 저런 표정일 것이다. “오오... 과연 천공의 기사!! 가장 고귀한 종족이라는 엘프와도 친분이 있다니... 무슨 인연이라도 있나요?” “아니요... 그... 그게 아니라...” 유신이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을 늘어놓기 위해 애썼지만, 이자벨은 쉽사리 이야기의 주도권을 내주지 않았다. “그 유명한 엘핀서스 전투를 모르세요? 흄의 마물들이 엘프 숲에 쳐들어 왔을 때 유신 경 혼자서 수백에 달하는 오크들을 베고 엘프들을 구했거든요. 그때 유신경이 구해주었던 엘핀서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엘프가 지금은 유신 경의 연인이 되었답니다.” “그...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공..!!” 말까지 버벅이는 유신이 불쌍하지도 않은지, 공주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전에 살짝 옆구리를 꼬집는 것도 잊지 않는 이자벨이다. “오오!! 과연!! 엘프는 모두 아름답다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엘프라면 정말 굉장하겠군요.” “그러니까 연인이 아니라...” “그럼요. 세상에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한동안 이자벨과 스와튼은 종족을 뛰어넘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에 대해 떠들어 댔고, 유신은 포기하는 심정으로 그 하프엘프의 노래에 집중했다. 드워프들도 시끄럽게 난동 부리는 것을 관두고, 파이프를 물거나 조용히 맥주를 음미하며 음유시인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엘프들의 노래에 비하면 투박하고 거친 면이 많은 노래였지만, 나름대로 괜찮았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좋았다. 세라피나 엘리시엘처럼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정리되지 않은 면이 오히려 매력적이라 할 수 있는, 보다 ‘인간’다운 노래였다. 한동안 씩둑깍둑 떠들어 대던 이자벨과 스와튼도 어느새 조용해져 있었다. 하프엘프의 목소리나 튜트소리는 매우 작아서, 만약 계속 떠들었다가는 드워프들의 눈총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고난이 느껴지는 노래네요. 마치 그녀의 인생이 녹아 있는 듯해요. 거칠지만 부드럽고... 고난의 길을 걸었지만, 나름대로 행복을 표현한... 강한 아가씨군요.” 하프엘프. 인간에게도, 엘프에게도, 그 어느 쪽에도 환영받지 못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하프엘프라면 뻔하다. 인간 엘프 사냥꾼에게 사냥당한 후, 변태 귀족이나 돈만은 상인의 노리개가 된 엘프의 2세일 것이다. 당연히 정식 자식으로 인정될 리는 없고, 버려졌거나 여기저기로 팔리는 신세라는 것은 안봐도 뻔한 일이다. “예메른에서 노예로 부려지던 아이요. 이 주점의 마스터가 예메른을 여행하던 중 사왔다지. 다리도 불편하고 눈도 안보이니 그간의 고생은 말해 무엇 하겠소. 저런 불쌍한 아이를 사고 팔다니... 하여튼 인간이란 종족은...” B&M 제 5 장 장인의 광산 7화 둔켈의 비수 같은 말에, 이자벨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속은 참담하게 망가져 버렸다. 사실 변방 지역은 지방 귀족의 관할이고, 왕권이 약한 하누스로서는 이런 먼 지방까지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곳은 엄연히 하누스의 영토로 되어 있는 곳이다. 노예제도를 금하는 법이 존재함에도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아예 그런 자각조차 없는 것 같으니 공주로서는 씁쓸한 것이 당연하다. ‘국경이란 단지 지도에 그어놓은 선일뿐인가? 아니면 왕가가 너무 무력해서 그런 것일까? 쯧쯧... 이자벨, 너도 공주라고 잘난 척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귀족들의 불쌍할 꼭두각시일 뿐일지도 모르겠구나. 이래서야 중앙의 조금 세력이 큰 귀족집 딸과 다를 것이 무어란 말인가?’ 우울한 생각이 들어 이자벨은 답답하다는 듯, 그녀의 잔속에 아직 절반도 넘게 남아 있던 맥주를 한번에 들이켰다. 마법계의 이런 혼란은 위시마스터라는 강력한 보호막이 사라졌기 때문에 오는 혼란일 것이다. 아니, 혼란이라기보다는 새끼 새가 어미 새의 품을 떠나 홀로 독립할 때가 되면 겪을 수밖에 없는 너무나 두렵고 어려운 첫 번째 날개 짓과 비슷할 것이다. 위시마스터란 강력하고 자상한 어머니의 비호 아래에서 어떻한 괴로움도 없었고, 그런 만큼 아무런 발전도 없었던 마법계였다. 이제 위시마스터의 수호는 사라졌고, 라일로스 대륙은 서서히 그들만의 역사를 써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봉건제에서 전제왕권으로 이행되는 단계에 있는 하누스로서는, 당연히 겪어야 하는 체제의 변화의 진통을 겪는 중이다. 유신은 조용히 이자벨의 술잔에 맥주를 가득 부어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곪은 상처는 안에서 썩는 것 보다는 차라리 일찍 들어나는 것이 낳으니까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았다면, 그 다음엔 천천히 바꿔 나가면 됩니다. 이자벨님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어요.”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조용히 노래에만 집중하고 있던 유신이 이자벨을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이자벨이 아무말도 없자, 유신은 머리를 벅벅 긁고는 일 이야기로 화재를 돌렸다. “자! 노래도 좋고, 술도 적당히 들어 왔으니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보지요. 여기 있는 레이디도 어서 성으로 돌아가 봐야 하니, 되도록 빨리 끝냈으면 하는군요. 우선 광산은 어떤 구조로 되어 있지요? 내부 지도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는데요? 샛길 같은 것이 표시된 되도록이면 자세한 걸로요.” “허헛, 그런 것이 있을 턱이 없지 않나. 우리는 드워프라네. 미궁도 아니고 평범한 광산을 판 것뿐인데, 무에 그리 찾기 복잡하다고 지도까지 그렸겠나? 그러니 그냥 길 따라 죽 다니면 7시간 정도면 전부 돌아 볼 수 있을 걸세.” “흐음... 얼마 전에 엘프가 말한 ‘금방’이란 단어의 뜻을 인간 식으로 풀이해서 황당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드워프가 말하는 복잡하지 않은 길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군요.” “딴은 또 그렇군. 좋아. 그렇다면 내가 함께 가도록 하지!!” 둔켈은 이제는 완전히 시뻘개진 얼굴로 맥주를 뱉다와 마시다의 중간 정도로 맥주를 튀겨대며 호기롭게 말했다. “마에스트로 둔켈, 안됩니다.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헤카이론의 드워프 전체를 책임지는 최고의 대장장이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스와튼은 둔켈이 직접 간다는 말에 기겁을 하며 말렸다. “외부인인 저 사람들도 간다는데, 내가 겁먹고 물러설 것 같나? 더구나 그런 위험한 곳에 내가 아닌 다른 드워프를 밀어 넣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 자네는 드워프와 그리 오래 살았으면서 대체 뭘 배운 겐가?” 강단 있는 드워프의 말에 유신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자벨이 술이 올라 약간 발개진 얼굴로 자기도 따라 가겠다고 생 때를 쓰기 시작하자, 유신은 스와튼보다도 세배쯤 더 구겨진 인상이 되었다. “자, 그럼 오늘 밤은 푹 쉬고, 광산은 내일 아침에 돌아보도록 하지요.” “하지만 적의 정체도 알 수 없는데, 무작정 들어가다니요? 대체 어쩌려고 하는 거지요? 차라리 정보를 더 모아 보심이 어떨지...” 스와튼은 유신이 별다른 작전도 없이 광산에 가겠다고 하자 몹시 불안한지. 신중한 일반론을 내었다. 하지만 유신은 광산에서 나타나는 몬스터들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충 집작은 갑니다. 그리고 몬들은 느리다고 했으니, 여의치 않으면 도망쳐도 되고요.” “네? 적의 정체가 짐작 간다고요?” “흐음...뭐라 설명하기 곤란하군요. 하지만 그런 종류의 적들에겐 미스릴 무기나 은제 무기가 잘 통합니다. 하지만 공격받게 되면 대단히 난폭해 져서 지금보다 훨씬 위험해 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내일 상태가 어떤지, 제가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종류의 몬스터라면, 몬스터라기 보다는 사령으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아직 마법계에선 이런 어둠에 속한 것들에 대한 체계가 정확히 잡혀 있지 않기 때문에 전부 몬스터로 분류된 것이지만, 사령은 정신체로 육체적 제약이 없기 때문에 몬스터로 분류될 수는 없다. 보통 지독한 냉기를 동반하며, 지능은 높지만, 이성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몬스터보다 훨씬 위험하다. 그냥 배회만하고 있다면 별 문제없겠지만, 정신체인 만큼 살아있는 생명체의 살의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잘못 공격했다가는 폭주하는 유령을 보게 될 것이다. 게다가 사령이라면 어둠에 속한 존재기는 하지만, 어쨌든 영격체다. 물질화하여 현세에 강림한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 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은제의 무기가 아니면 물리적 타격은 받지 않는다. 하지만 육체가 없기 때문에 코어는 다룰 수 없고, 단지 마법을 쓰거나 그 강력한 어둠의 힘으로 인간이나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해를 가하는 것이므로 진짜 강한 강자, 즉 검기를 자유자제로 다룰 수 있는 유신 정도의 실력자를 만나 버리면, 별반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곳에 나타나는 사령이라고 해 봐야 저급의 고스트나 기껏 해 봐야 조금 더 상급의 스펙터가 있을 것이다. 물론 스펙터 정도 되면, 성직자가 없는 마법계에서는 마법사를 중대규모로 파견해야 잡을 수 있는 괴물이지만, 유신이 쓰는 천상신검이라면 스펙터나 그보다 하급인 고스트나 별 차이 없다. 덩치 큰 코뿔소든 갓 태어난 강아지 새끼든 드워프캐논에 맞으면 가루가 되는 것처럼, 유신의 천상신검에 맞으면 강력한 스펙터든 삐리리한 고스트든 똑같이 일격에 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B&M 제 5 장 장인의 광산 8화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둔켈님도 내일 유신 경의 짐이 되고 싶지 않으면 오늘은 이만 마시세요.” 유신의 자신감이 근거 있는 것인지, 아니면 술 마시고 부리는 객기인지를 살피던 스와튼은, 유신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만 단념해 버리고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어쨌든 그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드래곤슬레이어인 것이다. “크하핫 웃기지 마라!! 드워프라면 내일의 전투를 위해 밤새도록 승리의 축배를 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나? 오늘은 밤새 마시고, 내일 저 저주스러운 몬스터들을 전부 도륙해 버릴 거야!! 게다가 유신 경의 말처럼 은제 무기가 통한다면 더 이상 두려워 할 것이 무에 있겠나? 내일로 헤카이론 광산은 영업 재계닷!! 크하하하하” 스와튼은 약간 무례해 보일 정도의 한심하다는 표정을 둔켈에게 노골적으로 쏘아 주었다. “후우... 그럼 레이디께서 더 취하시기 전에 옷가지라도 사는 게 좋겠군요.” 대충 자리가 정리되자 유신은 아까붙어 하고 싶던 말을 꺼냈다. 이자벨은 의외로 고분고분 술자리를 접고 유신과 함께 옷을 사러 나갔다. 그녀도 바보는 아니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싸우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는 찬스를 겨우 잡았는데, 굳이 유신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유신이 키메라와 싸우는 것을 바로 옆에서 본 적이 있지만, 솔직히 그때는 첫 실전이라 너무 무서웠고, 로열가드들이 그녀를 둘러쌓아서 강철로 된 성을 만들다 시피 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후후훗 이번에야 말로 소드마스터 중에서도 최강이라는 유신의 검기를 볼 수 있겠구나! 좋았어! 그렇다면 당분간은 얌전히 말 잘 들어 줘야지. 혹시 나 때문에 위험해 지면 안 되니까. 싸움이 시작돼도 어설프게 돕겠다고 설쳐대는 것 보다는 얌전히 내 몸만 지키자. 적어도 방해가 안 된다는 것을 알면 다음 모험 때는 대려가 줄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쨌든 영리한 공주다. 상황 판단도 빠르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골치 아픈 것이다. 이자벨도 유신도, 그냥 산책만 할 생각으로 나왔기 때문에 그다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덕분에 이자벨에게 어울릴만한 고급의 옷을 사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별 불평 없이 헐렁한 남자용 바지와 셔츠를 골라 입었다. 모험을 하는 데는 오히려 이런 차림이 낳은 것이고, 복장 따위는 전혀 중요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녀가 입고 있던 하늘하늘한 원래의 여름 정장은, 거친 갑옷 아래에 입었었기 때문에 완전히 구겨져 못 쓰게 되었다. “휴... 이정도가 될 때까지 아프지 않았어요? 옷이 얇아서 갑옷과 맞닿는 곳의 살이 많이 쓸렸을 건데... ” 어깨선이 들어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갑옷과 닿은 맨 어깨는 아마 빨갛게 쓸렸거나 물집이 잡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국의 공주라는 분이 그런 것까지 감수하면서 모험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어찌 생각해 보면 가슴아픈 일이다. “후훗, 유신은 자상하네요. 그 고귀한 엘프가 반하는 이유가 있다니까요.” 이자벨이 마치 귀여운 동생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듯 유신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평소라면 화냈겠지만, 이번에는 아무 말도 없이 이자벨이 장난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불쌍하신 분이다. 푸른 매의 영혼을 갖고 계신 분이 어쩌다 저리 큰 새장에 가치셔서... 하지만 강한 분. 동정을 바라지는 않는구나. 뭐, 하루나 이틀 정도는 귀여운 공주님의 투정 정도는 받아 주는 것도 괜찮겠지.’ 하지만 이자벨이 머리카락 까지 뽑으며 장난치자 결국 화를 내었고, 그제야 이자벨도 대만족한 표정이 되었다. 밤이란 묘한 시간이다. 특히 유신 같은 능력자가 보는 밤이란 시간은 일반인에 비해 더더욱 기묘하게 느껴진다. 낮에 보이는 정령하고는 전혀 다른 정령들이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물론 주로 잠의 정령이 돌아다니지만, 정신계 정령의 활동이 활발하다는 것도 큰 특징이다. 그래서 밤이 되면 감수성이 예민해지는 것이다. 물론 정신계 정령의 활동을 느끼는 것은 아주 숙련된 정령사라도 쉬운 일은 아니니, 유신도 정확하게 정신계 정령이 활동하는 모습은 볼 수 없다. 하지만 어렴풋한 느낌만으로도 낮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바람의 냄새라든가, 마나가 흐르는 느낌, 정령들이 사부작거리며 돌아다니는 그런 것들이 햇빛이라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상징보다도 훨씬 더 리얼하게 밤이란 느낌을 전해 주는 것이다. 그런 밤의 야릇함을 즐기며 조용히 잠을 청하던 유신의 육감에 이상한 것이 포착 되었다. ‘응? 뭐지? 정령? 엘프? 아니, 요정인가? 하지만 왜 요정이...’ 가만히 정신을 집중하자 요정의 모습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평범한 방 안의 모습 너머로 요란한 색채의 요정계가 어렴풋이 보이는 것은 신비한 느낌이었다. 유신이 있는 3차원의 공간이 요정계와 겹쳐지면서, 그가 있던 방 안의 풍경이 꿈속의 그것처럼 흐릿하고 불투명하게 보이며 요정계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화려한 꽃들이 만발한 것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흐릿하게 찌그러져 보이기 때문에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 중에도 요정의 모습은 비교적 또렷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 크기는 정확히 알 수없었다. 보통 손바닥 만하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워낙 요정이란 것은 종류도 많고 크기도 각양각색이라 확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요정계의 일부를 억지로 끌어와 붙여 버리면, 그 두 세계의 경계에서 원근감이나 입체감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요정이 완전히 이쪽 세계로 넘어오기 전에는 그 크기는 알 수 없다. “#@%$#$^” 요정은 무슨 다급한 일이 있는지 뭐라고 빠르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요정이 말하는 소리는 방음 유리 뒤에서 떠드는 것을 보는 것처럼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B&M 제 5 장 장인의 광산 9화 “뭐라고? 잘 안 들려.” “#$%^@$%&^#$^&!!!!!!” 아무리 천하의 유신이라도 저렇게 빨리 말하는 것을 입 모양만 보고 알아 맞추는 것은 불가능 하다. 게다가 요정계의 언어인지, 마법계의 언어인지도 모르는 언어를 저렇게 작은 입으로 조물조물 말하는데 어떻게 안단 말인가? 유신이 멍한 표정으로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자 그 요정은 잠시 골이 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마법계와 요정계의 경계를 허물어 마법계 쪽으로 완전히 넘어와 버렸다. “으이구!! 멍청한 인간앗!! 왜 말을 해도 몰라? 내가 요정계 언어로 말했어? 아니면 오크어로 떠들었어? 그것도 아니면 귀먹었어?!! 왜 모르냐구웃!!” 요정은 화가 난다는 듯, 큰 소리로 떠들며 떽떽 거렸다. “......” “얼레? 말 못하나? 그럴 리가 없는데? 바르부스님이 마법계에서 제일 강한 인간이라고 했는데? 설마 말도 못하는 인간을 소개해 줬을 리는...” 유신이 놀란 표정으로 아무 말도 안하자, 요정은 의심스럽다는 듯 그의 앞에서 손을 휙휙 휘저었다. “우와아아아!! 무슨 요정이 이렇게 커? 내 무릎 너머까지 오겠다.” 그의 말에 요정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솟아 나는 것이 보였다. “우씨!! 그래!! 나 크다!! 요정답지 않게 크다!! 그래서 뭐 보태준거 있어? 남이사 크던 말던!! 쪼끄마한 주제에!!” 요정은 콤플렉스인 곳을 찔리자 눈물까지 글썽이며 화를 내었다. “어, 괜찮아. 좀 크긴 해도 되게 귀엽게 생겼다.” 전혀 위로라고 할 수 없는 말을 하며 유신은 요정을 움켜잡았다. “아악!! 아파!! 이 야만인!! 왜 잡는 거야? 숙녀 몸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이 야만인아!! 어째서 바르부스님이 너 같은 인간을 추천했는지 모르겠다.” 유신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잡은 거지만, 요정의 입장에선 결코 달가울 리 없다. “신기하다... 정말 매미 날개 같잖아? 근데 저런 날개로 어떻게 나는 거지?” “말을 하면 말을 들어! 아프다는 말의 뜻이 뭔지 몰라? 놔 달란 말이잖아!! 일단 놓고 얘기 하자고!!” “어? 아팠어? 나는 게 힘들어 보여서 도와 준건데... 아팠으면 미안.” 유신이 놔 주자 비로소 요정은 그의 침대 발치쯤에 내려앉았다. “이 무례한 인간아!! 감히 요정이 부탁을 하기 위해 몸소 찾아 왔는데, 이따위로 대접 하다니!! 결코 잊지 않겠다.” “원소의 정령왕인 바르부스 님이랑 아는 사이야?” 유신은 요정의 투덜거림 쯤은 완벽하게 무시하고 하고 싶은 질문을 했다. “응. 요정계랑 정령계는 서로 친분이 있으니까. 마법계에서 요정계를 간섭하는 마법사가 나타났다고 하니까, 바르부스님이 너한테 부탁하래. 흐음... 근데 별로 신용이 가질 않는군. 정말 강한 것 맞아?” 요정은 유신을 위 하래로 훑어보며 미덥지 못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부탁이라... 내가 알기론 부탁이란 건 좀더 고분고분한 태도로 해야 하는 것인데...” 요정의 거만한 태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유신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너 바보 아냐? 요정의 부탁을 들어 주면 3년간 재수가 좋다는 말도 몰라? 안 들어 주면 물론 저주지. 끔찍한 저주. 맘에 드는 아가씨를 3년 만에 꼬셔서 겨우 데이트 약속을 잡았는데, 약속 장소로 가다가 똥을 밟았다고 생각해봐. 그것도 막 싸 놓은 신선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 너는 어쩌면 그 일로 아가씨에게 채일지도 모르고, 너무나 낙담한 나머지 그만 길거리를 배회하는 부랑자가 되고 말거야. 그리고 인생을 저주하며 날강도가 된 후에 도시의 치안 유지군에게 쫒기다 결정적인 순간에 역시 똥을 밟고 미끄러져 잡히는 거지. 그때 튄 똥이 마침 지나가던 높은 귀족의 얼굴에 튀어서 교수형 당하는 그런 비참한 인생을 살고 싶어?” 이제 요정아가씨는 너무 무시무시해서 웃음이 나올 정도로 협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 리...리얼하다... 근데 요정이 그 정도의 일을 해낼 수 있는 거야?” 요정 아가씨의 말은 너무 빠르고 두서도 없어서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어쨌든 뭔가 끔찍한 저주인 것 같았다. 하지만 유신이 아는 한 요정의 힘이란 것은 대단히 미약한 것이라 그다지 무섭지는 않았다. “물론 없지.” “... 그럼 대체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뭐지?” “쩨쩨하게 그런 거 따지지 말라고. 난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한거니까.” “그래, 그래. 가능성 말이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한심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대로 이야기를 하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고, 어쨌든 도와 달라는데 이야기 정도는 들어 줘야 할 것 같아서 대충 맞장구를 쳐 줬다. “아차, 흥분해서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샜다. 도와줘.” “......!” 유신은 그의 머리 맡에 있던 첨예를 조용히 빼 들었다. “뭐지? 저것들도 네 친구들이야?” 정신없는 요정 덕에 주위가 잠시 흩어져 있었지만, 그의 감각에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뭔가가 잡혔다. “우우우우우우” 어느새 그의 방 에는 이상한 모습의 요정들이 벽이고 바닥이고 할 것 없이 하나 둘 천천히 스며져 나오기 시작해서 온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괴기스러운 모습이었다. 괴기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보통의 사람이 보았다면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 온통 회색 투성이에 아름다운 나신의 소년, 소녀들이 여기저기서 솟아나는 모습은 흉악한 오크나 오우거들이 떼로 달려드는 것보다도 훨씬 섬칫한 광경일 것이다. 보통 요정이라면 그의 발치에 있는 녀석처럼 말 많고 좀 곤란하다 싶을 정도로 생기발랄한 녀석들이 대부분인데, 그의 방 안에 나타난 것들은 마치 유령처럼 우울하고 텅 빈 것 같은 회색의 존재였다. “응. 이 아이들은 내 친구들이야. 그런데 어느 미친 마법사가 요정을 강제 소환해서 마구잡이로 합성해서 인공의 요정을 만들고 있어. 그래서 이 아이들은 영혼을 빼앗기고 이런 모습이 되어 버렸지.” B&M 제 5 장 장인의 광산 10화 “우우우우우우” 요정들은 슬픈 소리를 내면서 역시 회색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호문크루스...인가? 아무리 육체적 껍질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해도, 영혼을 창조할 수 없는 인간이 생명체를 만들 수는 없지. 하지만 요정같이 특별히 자아가 강하지 않은 영혼을 소환하여 육신에 강제로 합성 시키면, 호문크루스를 합성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마법계에 이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한 마법사가 있을 줄이야...’ 생명 창조의 마법은 신중에서도 창조의 권능을 부여 받은 아주 극소수의 신들만이 가능한 것이다. 비록 영혼은 요정의 그것을 썼지만, 어쨌든 생명 창조의 마법을 마법계의 누군가가 해 내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 마법사가 어디에 있는데? 일단 헤카이론 광산을 어지럽힌다는 사령들을 해치우고, 이자벨님을 하누스로 돌려보내 준 후에 도와줄게. 일 이란 건 순서가 있는 법이니까.” 요정 쪽의 일도 급해 보였지만, 어쨌든 드워프들과 먼저 약속을 했으니 그들부터 도와 주는 게 순서일 것이다. “그럴 필요 없어. 그 나쁜 마법사는 있는 곳이 저 광산 안이니까.” 뜻밖에도 요정 역시 그 광산에 있는 마물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요정과 드워프라... 대체 무슨 일일까...’ “그래? 그거 잘 되었네. 그럼 정보 좀 줘. 대체 마법사가 광산을 차지하고 앉아서 뭘 하는 거야?” 유신은 일단 생각은 접어 두고 정보를 모으기로 했다. “미스릴 때문이야. 헤카이론 광산에서 나는 것은 신의 금속이라는 미스릴이잖아. 호문크루스 합성에는 다량의 미스릴이 들어가는 것 같아. 나도 그 마법사에게 강제 소환되어 갔다가 자의식이 너무 강해서 합성에 사용되지 않고 버려 졌거든. 주변에는 고스트나 스펙터도 많았고, 너무 무서워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제대로 보진 못했어. 아무리 요정이라도 스펙터에게 공격 받으면 타격을 받으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둘러보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고...” ‘요정이 자의식이 강하다니... 이상한 녀석이네. 그래서 저렇게 덩치가 커져 버린 것일까?’ 일단 귀여운 요정양이 덩치 얘기를 싫어하는 것 같아서 일단 이 이야기는 빼고 넘어갔다. 하지만 다른 쪽으로 갈구는 것은 잊지 않았다. “별로 도움이 못된다는 거네?” “... 미안. 그런데 도움이 안 된다고 그걸 꼭 꼬집어서 말해야 해? 어쨌든 나 덕분에 적이 스펙터인건 알았잖아?” “응. 그건 드워프들에게 들었어.” “......” ‘에헤! 제법 놀리는 보람이 있는 요정이네? 요즘 공주님께 당하기만 해서 쌓인 게 많았는데, 마침 잘 됐다.’ 반박할 말이 없는 것이 분했는지, 요정 아가씨는 새빨개진 눈에는 하나 가득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하지만 유신이 요정을 놀리는 것은 오래 가지 않았다. “꺄아악!!” 이자벨이 자고 있는 옆방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런!!” 유신은 문으로 돌아들어 갈 시간도 아깝다는 듯, 반사적으로 벽을 깨버리고는 이자벨의 방으로 돌진했다. 혹시라도 있을 적의 급습에 대비해 몸에는 코어를 두르고, 한바퀴 몸을 굴리며 근처를 경계를 했다. 방 안에는 유신의 방에 있던 영혼을 빼앗긴 요정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꺄아악!!” 다시 한번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렸고, 유신은 재빨리 공주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이 치한!! 변태!! 이쪽을 보면 어떻게 해욧!!” 이자벨은 잠을 자던 중이었는지, 얇은 속옷 하나만 있고 있었다. 잘 자고 있던 참에 갑자기 알 수 없는 회색의 것들이 들이 닥치자 옷도 걸치지 못한 채 검만을 들고 침대에 서서 그것들과 대치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문도 아니고 벽을 깨며 유신이 들이 닥치자 알몸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우...우와악 죄...죄송합니다. 일부로 그런 것은 물로 아니고, 저기, 그러니까... 요정이... 그래요. 영혼을 빼앗긴 요정이 나타나서, 그리고... 그리고 비명 소리가, 비명이... 공주님의 비명 소리가 들려서 무슨 일인가하고... 그리고... 그리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영혼’ 이라는 해서는 안 될 말까지 지껄이며 횡설수설 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불쌍했는지 공주가 한마디 했다. “코피나 닦아요.” “커허억” 당황하여 코 주위를 문지르는 그에게 비수 같은 한마디를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농담이에요.” “......” 어느새 이불로 몸을 가린 공주는 침대에서 뛰어 내려 유신의 옆에 섰다. 어쨌든 그가 있으니 어떤 녀석이 덤벼들던 지켜 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별로 긴장하지 않는 듯 했다. “우우우우우” 요정들은 다시 한번 신음 소리를 흘리며 천천히 방향을 바꿨 광산 쪽을 향해 날아갔다.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지만, 그들의 육체에 스민 본능에 따라 영혼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다. 벽을 그냥 투과하는 걸로 보아 육신은 마법계에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요정계에서 강제로 소환되었으니 육신 자체는 요정계와 마법계의 중간에 낀 상태일 것이다. “칫, 따라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공주님은 위험하니...” “설마 이곳에 있으라고 하면, 제가 얌전히 이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공주는 이미 유신이 무슨 말을 할줄 알고 있었다는 듯, 재빨리 말허리를 끊는 것을 잊지 않았다. “... 따라오면 위험하단 말이에요.” 힘없이 말해 보았지만, 효과가 있을 리 없다. “몰래 따라가면 훨씬 더 위험 할걸요?” “......” “얌전히 굴게요. 절대 위험한 짓 하지 않고,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유신의 옆에만 찰싹 붙어 있을게요.” “하아... 그럼 어서 옷부터 입으세요.” 이번에도 졌다. 유신은 단념하고 공주가 하자는 대로 하기로 했다. 워낙 풍만한 몸이라 얇은 이불로 가린다고 가려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유신은 짜면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의 얼굴을 해서, 공주가 옷을 갖춰 입을 때 까지 처량하게 면벽하고 있었다. B&M 제 5 장 장인의 광산 11화 이자벨은 자기 전에 깨끗하게 씻었는데, 다시 그 냄새나는 가죽 갑옷을 입기는 싫었는지 잠시 불퉁거렸다. “안 입으면 두고 갈 거에요.” “어머, 드래곤 슬레이어 유신경이 힘없고 가련한 프린세스를 협박하는 거예요?” 이자벨이 슬쩍 긁어 봤지만, 이번에는 유신도 맘을 단단히 먹었는지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뭐라고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무장 제대로 안하면 두고 갈 겁니다.” “네. 네.” 정말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유신의 승리다. ‘뭐... 일단은 필요한 것이기도 하니까 입고 가도록 할까?’ 이자벨은 부츠는 가 너무 크다고 한 번 더 찡찡거렸지만, 서두르지 않으면 두고 간다는 말에 손수건을 발 뒷금치에 대고 부츠도 마저 신었다. “얼마나 좋아요. 그런 차림이면.” “네이~” 이자벨은 유신의 말을 장난스럽게 받아 넘기고 어서 헤카이론 광산으로 요정들을 쫒차 가자고 유신을 재촉했다. 그 커다란 요정은 벌써 다른 요정들을 쫒차서 헤카이론 광산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요정과 제대로 이야기 해 보지 못했던 이자벨은 다른 종족과 대화해 보는 색다른 경험을 혹시라도 놓치게 될까봐 조바심이 나는 것이다. 드워프들은 이자벨의 비명 소리를 듣고 몰려오긴 했지만, 아직 무장을 갖추진 못한 상태였다. 유신은 드워프들이 무장할 때 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갈까 했지만, 광산내부란 특수한 상황에 미리 적응도 할 겸, 그들이 준비를 갖추고 오기 전에 이자벨과 함께 한발 먼저 헤카이론 광산으로 가기로 했다. “드워프의 광산이라면, 아무리 평범하다 해도, 함부로 돌아다니는 건 삼가야 해요.절대 멀리 가지 말고 광산의 분위기만 느끼도록 하세요.” 혹시라도 이자벨이 천방지축으로 날뛰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정말 곤란해 진다. 그녀의 성격이 치밀하긴 하지만, 앞뒤 안 가리는 점도 있으니 유신이 걱정스러운 것이 당연하다. 말 두 마리가 겨우 지나갈만한 외길을 따라서 100미터 정도 가니, 꽤 넓은 홀이 나오면서 갈림길이 나오기 시작했다. 유신은 일단 갈림길이 나오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자벨을 멈춰 세웠다. 드워프의 광산답게 벽에는 횃불 대신 커다란 야광석이 달려 있었고, 광산의 바닥도 통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잘 정비되어 있었다. 천정 높이가 7~8미터 정도 되어서 땅 속이라는 답답함을 조금 덜어 주었다. 모아온 광물을 종합하여 밖으로 옮기거나 휴식을 취하는 공간인 것 같았다. 녹색의 야광석이 유신과 이자벨에게 엷게 그림자가 질 정도로 환한 빛을 내고 있었다. ‘스펙터나 고스트가 돌아다니는 곳에 녹색의 야광석이라니... 최악이군.’ 유신은 암담한 심정으로 최악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내부를 불만스럽게 쳐다봤지만, 오히려 이자벨은 별로 그런 것에 감흥이 없다는 듯, 신기한 드워프의 광산을 둘러보기에 정신이 없었다. 녹색의 불에 비추어 일렁일렁 춤을 추는 그림자나 야광석에 새겨져 있는 문양 등은 이자벨의 주위를 끌기에 충분했다. 이곳에서 일하던 드워프들은 갑작스런 사령들의 출현으로 급하게 철수한 듯, 사방에 곡괭이나 삽, 광석을 나르는 운반차들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다. 갈림길은 정면으로 약간 오른편으로 치우쳐서 길 두개가 보였고, 왼쪽으로 한 개가 있었다. ‘흠... 이 근처에는 아직 별다른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군.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야 하려나? 하지만 냄새가 별로 좋지 않아...’ 어떤 전장에서건 그곳이 분위기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형이나 지반의 상태 뿐 아니라 정령의 상태나 마나의 흐름까지 승패를 가르는 요소가 되기 때문에, 화랑 정도의 호칭을 받은 자라면, 그런 것에도 매우 민감하다. 그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 같은 것을 보통 ‘냄새’ 라고 하며 냄새가 좋지 않은 곳에서 전투하는 것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싸움의 정석이다. 이자벨은 유신의 옆에서 드워프들에게 맞도록 길이가 조금 짧게 제작된 곡괭이가 신기했는지, 그것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자세를 잡아 보고는 제법 진지한 모습으로 살짝 바닥을 내찍었다. “쿠콰콰콰쾅” 그러자 엄청난 소리가 그들이 들어 왔던 입구 쪽에서 들렸다. 유신은 재빨리 이자벨을 덮으며 온 몸의 코어를 돌려 충격에 대비했다. “쿠구구구궁” 다행이 입구 쪽만 무너졌는지, 유신의 머리 위로는 자그마한 돌맹이가 한두 개 떨어졌을 뿐이다. 어디서 붙어 무너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홀 앞에까지 무너진 걸로 보아 입구에서 붙어 무너지기 시작했다면, 거의 100 미터 가량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큰일인데? 저걸 대체 어떻게 뚫지?’ 유신은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정령왕과의 싸움이 끝나고 몇 가지 마법을 배우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쓸만한 마법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마법이란 것이 워낙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마나를 강제 지배할 수 있다고 해도, 한두 달 만에 높은 수준까지는 배울 수 없다. 오히려 처음 마나의 지배력이 생겼을 때보다 마나를 다루는 것이 더 어려웠다. 원래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이다. 처음 마법을 배울 때는 마나의 강제지배력을 믿고 이리저리 응용하여 마나 배치를 해 보기도 해서 굉장히 빨리 늘었지만, 3서클 정도에 이르자 이런 방법은 한계에 달했다. 마나의 특성에 배우게 되면서 마나를 마음대로 이리 저리 배치해 보는 짓이 얼마나 위험한 바보짓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유신은 수도에 있는 마법학교에서 소환 마법을 배우던 중, 마나를 잘못 배치하여 이계의 중하급 마물을 잘못 소환한 적이 있었다. 거의 드래곤에 필적하는 마나의 지배력을 갖춘 유신이 소환한 마물이니 약할 리가 없다. 덕분에 마법학교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괴물을 퇴치한 후로도 유신의 마나 응용 방식에 대해 끈질기게 물어 대는 마법사들에게 매일매일 질릴 만큼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유신은 되도록이면 제대로 마법을 배울 때 까지 직접 마법을 쓰는 것은 관두기로 했다. 이걸 검기로 뚫고 나가려면...어휴... 불가능 하진 않겠지만, 그러다 그 충격으로 다시 무너지겠지? 나는 몰라도 공주님은 절대 무사하지 못할 터. 드워프들을 기다려야 하나? 그런데 갑자기 왜 무너진 거지?’ 유신은 혹시라도 이자벨 공주가 다친 곳은 없나 그녀를 살펴보며 이 황당한 사태에 대해 고민했다. 어쨌든 짐 덩어리다. 아무리 공주가 말썽 안 부리고 그의 곁에 착 달라붙어 있는 다 해도 짐 덩어리는 짐 덩어리다. “아니에요.” 유신의 생각을 눈치 챈 건지, 그의 몸 아래서 작게 웅크리고 있던 이자벨이 유신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네? 뭐가 아니에요?” 유신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이자벨은 진지했다. “동굴이 무너진 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 설마 곡굉이질 한번 했다고 동굴이 무너질 리 없잖아요?” 유신이 깊은 한숨을 쉬자 이자벨이 뾰족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하아... 물론 공주님 잘못이 아니란 건저도 알고 있어요.” “... 아니에요.” 이자벨은 무시당하는 것이 너무 분해서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네? 또 뭐가 아니에요?” “전 그렇게 짐이 되지만은 않을 테니 그런 표정 하지 말라고요.” 녹색의 야광석 덕문에 얼굴색을 살피기는 불가능 했지만, 평소보다 훨씬 반짝이는 커다란 눈을 보면 공주의 상태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마 분해서 울기 직전일 것이다. ‘과연 공주님... 대체 무슨 교육을 받았길레 저리 눈치가 빠를까...’ 유신은 황당한 심정으로 이자벨을 바라 봤다. “무거워요. 이제 폭발은 멈춘 것 같으니 비켜 줄래요?” 감정을 수습하겠다는 듯, 이자벨이 고개를 돌리며 유신을 밀쳐냈다. 녹색의 야광주가 비춰지는 동굴, 언제 적들이 들이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 그리고 꽤 괜찮은 남자와 단 둘만 있다. 두근두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친 곳은 없지요?” 유신이 내민 손을 잠시 바라보던 공주는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네. 덕분에요. 그나저나 어떻게 하지요?” “흐음... 일단 적부터 처리하고 보지요.” “적... 이라고요?” 미처 이자벨이 반응하기도 전에 유신은 예를 빼 들으며 이자벨의 앞을 막아섰다. “옵니다!!” 이자벨도 롱소드로 정면을 겨누며 되도록이면 유신의 뒤쪽으로는 가지 않기 위해 애썼다. “얌전히 있는 다고 했지요?” 유신은 그런 공주가 걱정스러웠는지 다시 한 번 다짐을 받았다. “......” “했지요?” “네에, 네.” 결국 이자벨은 유신의 뒤쪽에 숨은 형국으로 그들의 정면으로 흐늘흐늘 다가오는 그림자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응? 저 녀석들은 설마!!” 흐느적 흐느적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 빛과는 적이라는 듯, 꽤 밝은 야광석 아래서도 온통 불길한 어둠 속에 쌓여 있었다. 하얗게 탈색된 동공에는 살아있는 것에 대한 끝없는 적개심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완전히 죽어있으면서도 죽어 있지 않은 존재. 좀비, 또는 굴이라고 불리는 이 몬스터들은 사실 그다지 강한 축에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의 입장에선 생과 사의 경계를 엉망으로 만드는 그 존재 자체가 다른 어떤 마물들보다도 용서가 안 되는 것이다. 사령으로 분류되는 뱀파이어, 리치, 좀비 등은 신의 섭리에 가장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들이다. “뭐...뭐지요? 낮에 우리를 습격했던 그 순진한 용병들이잖아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인간이 아니란 것쯤은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죽은 자가 움직이는 공포는 오크나 트롤, 오우거 같은 ‘살아있는’ 것들이 주는 공포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불가해한 것에 대한 공포. 이자벨은 검을 움켜쥐고 있는 팔이 긴장으로 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아니요. 용병이었던 존재죠. 지금은 단순히 걸어 다니는 시체일 뿐입니다. 사령술이라니... 이렇게 지독한 짓을!” 은이나 미스릴로 된 무기가 아니면 반생의 존재들에겐 타격을 줄 수 없다. 물론 육신을 파괴시킬 수는 있지만, 팔이 잘리고 머리가 떨어져도 덤벼들기 때문에, 자칫 잘못 해체 시켰다간 적의 수만 늘어나는 꼴이 된다. “제 검을 쓰세요. 공주님의 검은 은도금이 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검기도 쓸 수 없으니 저것들에게 타격을 줄 수 없습니다.” 첨예는 화랑단의 주력 검인 대 마족 전용 검이다. 마법검은 아니지만, 마족에게도 타격을 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처리가 되어 있으니 저런 좀비쯤은 쉽게 벨 수 있을 것이다. 이자벨은 별 군소리 안하고 첨예를 받아 들고 그녀의 롱소드를 넘겼다. ‘과연!! 이것이 드래곤슬레이어가 애용하는 검!! 멋지다... 따라 온 보람이 있어!’ 눈앞의 좀비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이자벨은 첨예를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이 더 욱 클 것이다. 그녀가 첨예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유신은 천천히 롱소드를 몇 번 휘둘러 무게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좀비들에게 다가갔다. “당신을 따르는 첫 번째 양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영원하신 분이여. 가장 고귀하신 당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존재를 정화시킬 힘을 원합니다...” 유신은구마기도문을 외우며 롱소드의 손잡이 부분에 키스했다. 그리고 가장 정면에서 다가오던 좀비를 향해 몸을 날렸다. “퍼억” 호박 깨지는 소리가 나며 인간의 머리였던 것이 파괴 되었다. 좀비 화 되면서 육신은 굳기 시작했는지, 쏟아진 내용물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고, 피도 조금밖에 나지 않았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거룩한 사랑을 주시는 분의 이름으로...” 구마기도문의 힘까지 실은 유신의 롱소드는 좀비들에게 대포 이상의 파괴력을 발휘한다. 검기를 쓴 것도 아닌데, 유신의 롱소드가 스치는 곳마다 좀비들은 산산 조각이 나며 부서져 나갔다. 끔찍스런 광경이었다. 녹색의 조명 아래 검붉은 살점들이 널어져 있는 모습은 너무 참혹해서 오히려 현실감 없어 보일 정도였다. “하압!!” 느릿느릿 움직이는 좀비들이 우스워 보였는지, 유신의 눈치를 살피던 이자벨도 슬쩍 싸움에 끼어들었다. 원래 대 마족과의 전투를 상정하여 만든 첨예인 만큼, 좀비들에게도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유신이 휘두르는 공격만큼 막강한 파괴력을 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자벨이 휘두르는 공격에 맞은 좀비들도 하나 둘 쓰러져 갔다. 좀비들의 느린 공격은 유신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이자벨에게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3분 정도 지나자 움직이는 좀비의 수는 없었다. “휴우... 끔찍하네요. 설마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이자벨은 그녀의 주변에 널려 있는 좀비들의 파편에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사실 그녀에겐 겨우 두 번째 실전이었다. 그나마 엘핀서스 전투에서는 단지 군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단지 검을 치켜세웠을 뿐이었고, 그녀의 손으로 움직이는 무언가와 뒤엉켜 난전을 벌여 본 것은 처음이었다. 온 몸에 튄 좀비들의 살점들과 피, 내장으로 이자벨은 기절할 지경이었다. 검을 잡은 손이 덜덜 떨렸지만,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 덕분에 쉽게 정신을 놓지는 않았다. “공주님, 무리하지 않아도 되요. 이 정도는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아니요. 제가 무리하게 따라 온 것이니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실전을 통해 배우는 것이 있으면 좋겠군요.” 그녀는 얼굴에 묻은 피를 거칠게 털어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강력한 첨예 덕분에 전투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끔찍한 살덩어리들을 보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다. 이자벨은 어깨까지 들썩일 정도로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래도 근처에는 사령을 조정하는 마법사가 있는 것 같군요. 우리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동굴도 그 마법사가 무너뜨린 것 같아요.” 아직 스펙터나 고스트는 등장하지도 않았고, 좀비들을 이용할 수 있는 마법사도 있을 것이다.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 유신은 온 신경을 곤두 세워서 혹시 다른 적이 주변에 있는지를 살폈다. ‘스펙터와 좀비라... 적은 뱀파이어나 리치 같은 시체들을 일으킬 수 있는 고급 마족 일까? 뱀파이어라면 목 부분에 물린 자국이 있을 터... 아무래도 뱀파이어 보다는 리치가 있는 것 같아. 이거 골치 아프게 됬는데...’ 유신은 대충 적의 정체를 감 잡게 되자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흄 대륙 전체를 이끌고 있는 것도 에데 이 리치다. 마신으로 분류될만한 상위마족이 없는 마법계에서 볼 수 있는 최종의 적이란 뜻이다. “하아... 그런데 좀 춥지 않나요? 아무리 지하라고 해도 이렇게 추울 리가 없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별로 안 추었잖아요. 입김까지 나오네요...” 이자벨은 한번 부르르 떨어 주고는, 검을 잡은 손이 얼지 않도록 입김을 불었다. 그녀의 말처럼 주변의 공기 온도가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강력한 마기를 가진 존재는 근처의 온기를 빼앗기 때문에, 조금만 예민한 사람이라면 그런 사령들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금처럼 순식간에 입김이 나올 정도로 온도가 내려가는 것을 보면, 근처에 있는 사령들의 숫자나 힘이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다. “조심하세요. 지금부터 나타날 적들은 좀비보다 훨씬 빠르고 빙계 마법도 쓸 겁니다. 주문 없이 쓰니까 방심하면 안 돼요.” 물론 스펙터들이 쓰는 것은 마법이라기보다는 마이너스 생명체가 내뿜는 극도의 사악한 기운이겠지만, 이자벨에게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마법이라고 한 것이다. “잠시만 줘 보세요.” 스펙터라면 아무리 첨예가 강하다 해도 검기를 다룰 수 없는 공주가 사용해서는 별 효과를 볼 수가 없다. 유신은 이자벨에게서 첨예를 돌려받았다. 이자벨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간신히 휘두르게 된 첨예를 빼앗겨서 속으로는 거의 울상이 되어 있을 것이다. 묵 빛을 띄는 검신과 어두컴컴한 조명 덕분에 이자벨은 보지 못했지만, 유신은 첨예를 점검하는 척 하면서 슬쩍 검신에 피를 발랐다. “흠, 흠, 물론 유신 경하고는 비교할 수 없어도, 저도 나름대로 검술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날이 상하게 휘두르지는 않았어요.” 공주는 신뢰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는지, 약간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변명을 했다. “네. 과연 그렇군요. 그럼 지금부터 나타날 적들에겐 절대 먼저 도발하지 말고 몸만 지키세요. 스펙터는 강합니다.” 다시 첨예를 돌려받자 강아지처럼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우우우우우” 이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야광석 덕분에 대충의 위치를 식별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것 같았지만, 스펙터들에겐 특별한 형태도 없고, 워낙 흐릿하기 때문에 싸우기 쉬울 것 같지 않았다. ‘생각보다 사태가 훨씬 좋지 않군. 나야 눈으로 보고 싸우는 것이 아니니 상관없지만, 공주님이 저런 녀석들과 전투하는 것은 무리다. 차라리 녀석들을 도발해서 나한테로 덤비게 하는 편이 공주님을 지키면서 싸우는 것 보다 쉽겠다.’ 다행한 점이라면 스펙터는 지능은 높지만, 이성은 없다는 점이다. 싸움을 도발하면 이자벨은 놔두고 유신에게 덤벼들 것이다. “공주님, 절대로 제 근처에 오지 마세요. 저 녀석들에겐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입니다. 말 잘 듣겠다고 약속 했지요?” “그럼 전 뭘 해야 하지요?” “되도록이면 저 검은 그림자들을 피해 다니세요. 정 싸워야 될 상황이면, 깊게 베지 말고 옅게 여러 번 베세요. 저것들에겐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체온을 빼앗기고, 잘못하면 생명력까지 뺐기니까 깊게 베려다가는 당해요.” 스펙터들은 숫자가 모이자 굉장한 속도로 유신과 이자벨의 주위를 돌며 사냥감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시커먼 그림자가 휙휙 움직이는 것으로 보일 뿐이지만, 살아 있는 존재라면 반생의 존재가 뿜어내는 사악한 기운에 숨쉬기 조차 힘들 것이다. 계속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른다면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할 것 같았다. “어디, 붙어 보자!!” 롱소드를 몇 번 돌리며 스펙터들과의 거리를 재던 유신은, 대충 타이밍이 잡히자 쏜살가치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인간의 ‘감정’변화에 예민한 스펙터들은 살기를 띄고 있는 존재가 움직이자 당장 반응을 보였다. “꼐에에에에엑” 스펙터에게 성대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공기를 진동시키는 초음파에 가까운 쇠 긁는 소리를 내며 냉기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숫자가 많아!! 시간을 끌면 이 근처가 전부 얼어 버리겠다. 스피드가 떨어지면 이길 수 없어!!’ 위험하긴 했지만, 유신은 그와 이자벨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스펙터들의 허리를 자르며 돌진했다. “우주를 덮는 드넓은 사랑으로 나를 지켜 주시니, 어둠은 나를 침범치 못하고...” 구마기도문으로 사악한 기운이 침범하는 것을 막았지만, 그럼에도 유신의 다리 위로 하얗게 서리가 앉기 시작했다. 유신은 본격적으로 싸움이 시작되자 롱소드에 검기를 쏟아 넣었다. “우우우웅” 그러자 유신이 움직이는 코어가 주변 마나와 공명하는 소리를 내며 롱소드를 찬란한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최강의 검기, 천상신검이 발동되는 것이다. 검기가 입혀지자 유신은 그의 앞에서 달려들던 스펙터를 향해 주저 없이 일검을 날렸다. “콰콰쾅” 신의 섭리를 벗어난 곳에서 존재하는 마이너스 생명체가 내뿜는 극도의 사악한 기운과 가장 정순한 코어의 결정체인 천상신검의 검기가 부딪치자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스펙터는 완전히 소멸 하였고, 유신 역시 4m 가량을 튕겨져 나갔다. 봉인이 세 개나 풀린 상태에서 사용하는 검기다. 그전까지의 검 위에 검기만 살짝 입혀 사용하던 초라한 검기와는 차원이 다른 무시무시한 파괴력이었다. 스펙터라면 단 한 마리만으로도 6서클 마법사에 필적하는 괴물이다. 본체는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에 강력한 마법 내성을 지니며, 고위급 신관에게 축복받은 검이나 검기를 불어 넣은 검이 아니면 상처조차 줄 수 없다는 최강의 스펙터가 단 일격에 파괴된 것이다. “크윽...” 하지만 유신 역시 구마기도문으로 몸을 보호하며 코어를 사용해 최대한 충격을 줄였음에도 타격이 상당했다. 검을 쥔 오른 손은 스펙터가 폭발하면서 내뿜은 냉기로 완전히 검과 붙어 버렸을 정도로 얼어 버렸고, 팔위로도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았다. “치잇, 이 정도라니! 차라리 이럴 바엔!!” 유신은 스펙터들과 거리를 떨어뜨린 후, 검기를 쏘았다. 천상신검은 워낙 코어의 사용이 심하니 뿌려댈 정도로는 쓸 수 없어도 이 정도는 가능하다. 어차피 원샷, 원킬이라면 조금 무리를 해서 검기로 해치우는 편이 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콰콰쾅” 두 번째 스팩터가 폭발을 일으키고 나자 스펙터들도 공격 패턴을 바꿨다. 무조건 돌진 하지 않고 거리를 둔 상태에서 냉기를 퍼붓거나 빙계의 주문을 외워 동굴 전체를 얼려 버리려고 하였다. “어딜!!” 두 번째 검기가 발사 되었고, 첫 번째 스펙터를 광통한 검기는 그 여세를 줄이지 않고 뒤에 있던 녀석 둘을 더 베고 지나갔다. 다시 한번 엄청난 폭발음이 동굴 전체를 뒤덮으며, 세 마리의 스펙터가 한꺼번에 폭발한 충격 여파로 동굴 벽이나 천정 할 것 없이 온통 서리와 얼음으로 뒤덮여 녹색의 야광석이 어지럽게 반짝 거렸다. “공주님, 괜찮아요?” 이런 폭발이니 이자벨이 걱정 되는 것이 당연하다. 유신은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가서 상태를 살폈다. “네, 그럭저럭...”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좁은 곳에서 스펙터와 싸우는데 평범한 인간이 괜찮을 리가 없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얼어 버린 입술은 잘 익은 포도색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신이 잘 싸워준 덕분에 이제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사악한 그림자는 둘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스펙터들은 유신이 강하다는 것을 느낀 것인지 함부로 달려들지 않고 멀리서 그의 주위를 돌며 공격 찬스를 살폈다. “끼이이이익” 전력을 다시 한번 가다듬은 것인지, 스펙터들은 쇠 긁는 듯한 소리를 지르며 유신의 양 옆에서 동시에 달려들었다. ‘피했다가는 공주님이...’ 하지만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공격했다간 스펙터가 폭발하면서 내는 사악한 기운에 말려들 것이다. “칫” 유신은 잇소리를 내며 이자벨에게서 첨예를 빼앗아 왼쪽의 스펙터에게 집어 던졌다. 제 5 장 장인의 광산 15화 “푸욱” 첨예가 지나간 자리에 둥그렇게 구멍이 뚫리며 스펙터가 주춤했다. 함부로 힘을 낭비할 수 없어서 검기를 넣지 않고 그냥 던진 것이었지만, 첨예 자체가 워낙 강하고, 유신이 피를 바랄 두었기 때문에 그 굉장한 스펙터도 크게 상처를 입은 것이다. 유신은 그 틈에 반대쪽의 스펙터의 오른쪽 부분을 비스듬히 베면서 이자벨에게서 멀리 떼어 놓았다. 흥분한 스펙터가 달려들자, 유신은 스펙터에게 밀리는 척 하며 살짝 싸우기 편한 곳으로 유인했다. 아차 한 스펙터가 후퇴하려는 했을 때는, 이미 유신이 롱소드를 좌우로 길게 휘둘러 스펙터를 완전히 찢어 버린 후였다. “끼에게겍” 네토막이 난 스펙터는 날카로운 비명소리 같은 공명음을 울리며 폭발해 버렸다. 하지만 첨예에 맞아 잠시 주춤했던 마지막 스펙터가 대충 구멍 난 몸을 추스르고는 자벨에게 향하고 있었다. 첨예는 이미 유신이 빼앗아서 던져 버렸기 때문에 이자벨은 몸을 지킬 무기조차 없었다. “공주님, 피해요!!” “우어어어어” 스펙터가 일반적인 마법 체계를 따르지 않는 이상한 외침으로 주문을 외우자 네 개의 아이스 미사일이 이자벨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꺄악” 비명을 지르기는 했지만, 다행이 그녀도 꽤 재빠른 편이라 바닥을 구르며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급속도로 얼어버린 광산 바닥은 드라이아이스와 비슷했다. 그녀는 그런 얼음 바닥을 구르자 옷가지가 바닥에 달라붙어 북북 찢겨져 나갔다. 만약 긴팔과 긴 바지를 입지 않았으면, 찢겨져 나간 것은 살점이었을 것이다. “망할 자식이 어딜!!” 이정도 거리에서 자칫 강한 공격으로 스펙터를 폭발 시켰다가는 이자벨까지 휘말릴 것이다. 유신은 짧은 공격으로 스펙터에게 자잘한 상처를 계속 주었다. “퍼억, 퍼억, 퍽퍽 퍼어억” 여기 저기 박살나며 스펙터의 몸이 사라져 갔지만, 다행이 크게 폭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스펙터를 조금씩 계속 베면서 받은 냉기 때문에 유신은, 검을 쥐고 있는 오른쪽 손이 완전히 얼어 버려서 검을 쓰기 위해 움직일 때마다 얼음 덩어리가 와수수 떨어질 정도였다. 유신이 그렇게까지 엉망이 되면서도 계속 공격을 가하자, 마침내 최후의 스펙터도 자그마한 조각으로 분해 되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허억, 허억” ‘설마 물질계도 아닌 마법계에서 봉인이 세 개나 풀린 상태로 이렇게 힘든 전투를 하게 될 줄이야...’ 이자벨은 얼굴에도 하얗게 서리가 앉을 정도로 냉기에 침식당해 있었지만, 유신은 얼마나 힘들게 싸웠는지 온 몸에선 하얀 수증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하악, 하악 정말 큰일 날 뻔 했네요. 무슨 몬스터가 죽으려면 곱게 죽지, 얼음 폭발을 일으키며 죽는 걸까요?” 이자벨은 완전히 질려 버렸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닥에 널려 있던 좀비들의 파편은 냉기에 휘말려 퍼석퍼석 부셔지거나, 푸줏간의 냉동 고기처럼 검붉은 얼음 살덩이가 되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아마 질퍽질퍽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하면 지금보다 훨씬 끔찍한 꼴이 될 것이다. “과연 유신 경, 대단하네요. 저도 나름대로 검술을 열심히 수련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들고 있던 검을 빼앗길 줄은...” 이자벨은 우울하게 그런 파편들을 바라보다가 완전히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추위 때문인지 덜덜 떨리는 목소리는 애처롭다 못해 불쌍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워낙 상황이 좋지 못해서... 자칫 공주님이 스펙터를 공격했다간 냉기에 당할 수도 있고 또...” “됐어요. 유신 경한테 화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 생명을 구해주셨으니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런 상황에서 짐만 되는 제 자신이 한심해서 그러는 겁니다.” 이자벨은 추위와 주변의 끔찍스런 풍경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건지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약한 소리를 했다. “공주님...” “이렇게까지... ” 이자벨은 엉망이 된 유신의 손을 보며 미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손이라도 녹여 드리고 싶은데, 제 손도 차가워서 별로 도움이 못될 것 같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자벨은 완전히 얼어버린 유신의 손을 꼭 잡았다. “무슨 말씀을...” “후우... 죄송합니다. 약한 모습을 보여 드려서. 이런 소리 하면 오히려 유신 경의 부담만 커질 건데... 이제 괜찮습니다. 하압!! 힘내야죠.” 이자벨은 귀엽게 기합까지 넣으며 얼어서 여기저기 삐걱거리는 몸을 풀었다. “네. 그게 공주님 다우네요. 그나저나 이곳에 있다가는 계속 체온이 낮아질 것 같아요. 위험하긴 하지만, 조금 더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서 이 냉기라도 피해야 할 것 같군요.” 유신의 말처럼 이자벨의 떨림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고, 옷이 많이 찢어져서 맨 살이 노출된 부분은 보라색으로 보일 정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다행이 하드레더를 입고 있어서 몸통 쪽은 괜찮은 것 같았지만, 팔이나 다리에는 오돌토돌 소름이 돋아 있었다. “후훗, 그렇지요? 그나저나 유신 경, 손이 그래서 어떻게 하지요? 흐음... 제 손도 얼어서 손으로는 녹일 수 없을 것 같고... 제 가슴에라도 넣고 녹여 볼래요?” “... 후우... 이제 정상으로 돌아 왔군요.” 이자벨의 농담에 유신은 길게 한숨을 쉬며 힘없이 대꾸했다. “추우니까 웃자고 한 말이죠. 하지만 손가락이 얼어서 검을 쓸 수 없을 정도라면 가슴이 아니라 허벅지 사이에라도 넣어서...” “공주님, 제발... 여기는 어두운 광산이고, 저도 남자에요. 단 둘 밖에 없는 상황이고, 그리고 매우매!우!매우! 춥다고요. 대충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죠?” “흐음... 그런가요? 하긴, 마지막 말은 제가 생각해도 좀 심했네요. 그래서 천박해 보였어요? 값싼 여자 같아 보였어요? 그래서 막 흥분 됐어요?” “......” “여기까지만 하죠. 더 놀리면 삐질 것 같으니...” 제 5 장 장인의 광산 16화 “...충분히 삐졌습니다.” “아, 제가 그 얘기를 안 해 드렸었군요. 엘핀서스 전투에서 유신 경이 키메라와 싸우고 나서 혼수상태에 빠진 적이 있었죠? 그때 제가 간병을 했거든요. 그런데 유신 경이 알몸으로 누워 있었는데...” “안 삐졌어요!! 안 삐졌다고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거기까지만 하세요!!” 마침내 유신이 항복 선언을 하자 이자벨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에휴... 어쨌든 당찬 공주님이야. 이렇게 끔찍한 싸움을 하고도 금세 회복하다니... 트롤 같은 재생력이군.’ 하지만 그건 유신이 여자를 몰라서 하는 생각이다. 사실 이자벨은 몸의 떨림보다도 마음의 떨림이 진정되지 않아서 아무 말이나 막한 것이다. 더 이상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일부러 유신을 놀린 것이지만, 그런 장난이라도 치지 않았으면 당장 기절하거나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을 정도로 지치고 무서웠다. “여기서 좀 쉬고 가지요?” 너무 깊숙이 들어가면 또 어떤 적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쉬면서 체력을 회복하기로 했다. 아직까지 오른손에는 감각이 전혀 없었고, 잘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그나마 창세신의 클론이기 때문에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지 않고 이만큼 버텨 준 것이다. 만약 이자벨이 유신처럼 싸웠다가는 팔뚝까지 모두 얼어서 조각조각 깨져 나갔을 것이다. ‘좋지 않아... 손이 이래서야 다음 싸움에 틀림없이 지장이 있을 터. 하지만 설마하니 스펙터 같은 고급 마물이 또 나오지는 않겠지? 문제는 리치 인가?’ 유신은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덥히면서 돌파구를 찾을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스펙터 같은 괴물이 설마 때지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예비 검을 몇 자루 더 가져 왔어야 하는 건데...’ 이자벨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었지만, 가늘게 떨리는 손을 보면 그녀 역시 억지로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아까 싸우면서 중얼거렸던 말은 뭐지요? 무슨 마법어인가요?” 이자벨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유신이 싸우면서 중얼중얼 외우고 있었던 구마기도문에 대해 물어 보았다. “아, 그냥 자기 최면이에요. 강한 적들과 싸울 때면 전투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혼자 중얼거리는 거죠.” “흐음... 재미있네요. 저도 가르쳐 줄래요? 뭐라고 해야 하지요?” “그... 글쎄요?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럼 유신 경은 뭐라고 하는데요?” “......” “가르쳐 줘요. 가르쳐 준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그... 그냥 나는 강하다, 나는 이긴다,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뭐.” “흐음... 효과는 있나요?” 틀림없이 유치한 주문이라고 놀릴 줄 알았는데, 이자벨은 의외로 진지하게 물어 보았다. ‘이 공주님, 멀쩡해 보였어도 사실 많이 지쳐 있었나 보구나. 설마 이런 것에 의지하고 싶어 할 줄은...’ 이자벨이 진지하게 나오자 성의 없이 대답한 유신은, 좀 미안한 감이 느껴졌다. 그런 유치한 주문에라도 의지하고 싶을 만큼 지쳐 있다는 뜻일 것이기 때문이다. “네. 자기최면은 틀림없이 효과가 있습니다. 공주님도 힘들 때면 꼭 써 보세요.” 주문이란 믿음에서 나오는 힘이다. 뭐가 되었든, 정신을 집중할만한 그런 것이 있다면 나쁠 리가 없는 것이다. “후훗, 고마워요. 저도 종종 써먹어 봐야겠군요.” 웃고는 있었지만 목소리 깊이에 스며 있는 피곤함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잠시 눈 좀 부치도록 하세요. 적들이 오는 것은 제가 감시할게요. 추운 곳에서 오래 싸워서 체력이 많이 떨어졌을 거예요.” “... 다음번 전투를 위해서도 그게 옳을 것 같네요. 뭐, 유신 경이 있으니 자다가 당할 일은 없겠지요. 뻔뻔하지만 좀 자도록 할게요.” 말 끝나기가 무섭게 이자벨은 모로 쓰러지며 기절하듯 잠들었다. ‘후우... 정말 대단한 공주님이야. 하긴, 보통 사람이 좀비나 스펙터와 싸우고 이만큼이나 버티는 것이 이상하지.’ 공주는 바닥이 울퉁불퉁하고 딱딱한데도, 쓰러지자마자 쌔근쌔근 귀여운 숨소리까지 내면서 잘도 자고 있었다. 하지만 추위만큼은 어쩔 수 없었는지, 가끔 옅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런 이자벨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유신은 그녀의 부츠를 벗겨내고는, 다리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이 정도는... 괜찮으려나...’ 상의야 갑옷 덕분에 약간은 보온이 되겠지만, 다리 쪽은 옷이 찢어지면서 거의 다 노출되다 싶이 했기 때문에 체온을 많이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다. 하얗고 얇은 다리였다. 그런 가는 다리로 스펙터나 좀비와 싸웠다고 생각하니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네... 쩝, 나보다 훨씬 길겠다.’ 천천히 이자벨의 발과 종아리를 주물러 주며 유신도 휴식을 취했다. ‘드워프들이 광산 입구를 뚫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드워프들이 온다고 해도 무슨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차라리 두 시간 정도만 쉰 다음에 끝장을 보는 게 좋겠다. 음식도 없고.’ 잠시 쉬고 나자 차차 얼어 있던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두 시간 정도 지나자 손가락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지친것도 많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워낙 심하게 얼어 있던 터라 동상에 걸렸는지, 손가락과 팔 전체가 간질간질 하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젠장... 이정도 인가? 이런 손으로는 정밀한 검술을 펼칠 수 없을건데...’ 꽤 오래 동안 쉬었음에도 손이 풀리지 않는 걸로 보아 당분간 제 실력을 발휘하긴 힘들 것 같았다. 이자벨은 세상모르고 기절한 것처럼 자고 있었다. 하지만 추위는 많이 가셨는지, 경련은 없었고 뺨도 얼어 있다가 완전히 풀리면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쿡, 귀여운 면도 있네. 그나저나 배가 고파지면 체력이 더 떨어질 건데... 그러기 전에 깨워야 하는데 어쩌지...” 유신이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천정위에서 황금색의 빛 하나가 나타났다. 제 5 장 장인의 광산 17화 “이봐요, 드래곤슬레이어씨!!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빨리 와서 악당들을 물리치고 어여쁜 요정들을 구해 줘야 할 것 아냐?” 어디에 있다가 나타난 것인지, 예의 덩치 큰 요정이 천정의 벽에서 스며 나오듯 쑥 나타났다. 녹색의 야광석과 요정의 주위에 감도는 나비 가루 같은 느낌의 은은한 금색 빛이 어우러져 신비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유신은 너무 지친 상태라 그런 모습에 눈길을 줄 여유가 없었다. “어이, 난 정의의 용사도 아니고, 무적의 불사신도 아니라고. 지금 싸움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죽다가 살아났단 말이야.” “거짓말 마! 드래곤슬레이어가 겨우 스펙터랑 싸우면서 죽을 뻔 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거야?” “하아... 싸움이 그렇게 단순한 건줄 알아? 드래곤 브레스에 맞으나 스펙터의 냉기에 당하나 죽는건 같다고... 아니, 관두자. 요정에게 싸움의 기본에 대해 설명해 봐야 알아들을 리도 없으니...” “그래.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거니까, 설명은 관둬. 그보다는 어서 도와줘. 영혼을 잃은 요정들의 몸이 그 미친 마법사에게 가고 있어. 그 마법사 녀석, 요정들의 몸까지 뺐어서 무슨 실험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아.” “그거 심각하군. 하지만 손이 이래서야...” 동상으로 벌겋게 부어 오른 손가락으로는 칼을 쥐기도 힘들 것 같았다. 요정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통통하다 못해 누르면 터질 것 같이 되어 버린 유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후훗, 좋아! 이 몸께서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주지.” 요정 아가씨는 거만하게 말하며 유신의 오른손 쪽으로 날아갔다. ‘정말 신기하네... 저 덩치가 어떻게 저런 잠자리 날개 같은 걸로 날지?’ 물론 요정이 큰 것은 아니다. 몸매도 날씬하고 얼굴도 조막만하고 대단히 예쁘다. 하지만 잠자리 날개 같은 얇고 작은 날개로 날아다니는 것으 보고 있으면,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유신이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새에 요정이 등을 돌려 날개에서 요정 가루를 그의 손 위로 떨어뜨렸다. “샤라라락” 요정가루가 묻자 가렵던 손가락에 시원한 느낌이 퍼지며 부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오오 과연 요정의 가루! 최고다. 포션보다도 훨씬 효과가 빠른 것 같아.” “응. 하지만 그런 만큼 부작용도 심해. 보통 사람이 사용하면 그곳의 피부 노화가 눈에 보일 정도로 일어나거든.” “그럼 공주님께는 쓸 수 없겠군.” “뭐, 생명이 위험할 정도라면 쓰는 게 좋겠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쓰지 않는 게 좋지.” “... 뭐든 하나씩 빠지는군.” “... 사소한 것 하나까지 꼬투리를 노치는 법이 없군.” 허리에 손을 척 얹고 끝까지 말대답 하는 요정양이다. 그럼 모습이 귀여웠는지, 유신은 갑자기 요정을 확 움켜잡았다. “꺄악!! 놔, 이 변태 악당아!!” “어쩜 이리 귀여운 말만 할까!! 응? 요정들을 보면 용들이 귀여운 인간 처녀를 좋아하다 못해 ‘잡아먹는 게’ 이해가 된다니까...” “너... 너, 설마...” 요정의 하얀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것을 즐겁게 보면서 유신은 입맛을 쩍쩍 다셨다. 하지만 이 소란에 이자벨이 깼는지, 부스럭 부스럭 일어섰다. “유신... 경? 아! 아까 그 요정이군요. 와... 요정을 보는 건 처음이네요. 저도 좀 줘 보세요.” 유신이 요정을 건네자 이자벨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얼굴에 부볐다. “이익!! 기억해 두겠다!! 이 무례한 인간들!!” 이자벨에게 잡혀 유신 때보다도 훨씬 엉망으로 구겨진 채 얼굴 부비부비를 당하면서도 요정 아가씨는 옹골차게 말했다. “응, 그래 오래도록 기억해. 내 이름은 이자벨. 이자벨 하누스야. 친하게 지내자. 네 이름은 뭐야?” 언제나 마이페이스인 이자벨 공주는 요정의 툴툴거림 쯤은 가뿐히 무시했다. “켈룩 켈룩. 흐음... 요정의 이름을 묻다니 이상한 인간이구나. 요정에겐 특별한 이름이 없어. 모두다 요정이야.” 이자벨이 질문을 위해 약간 숨통을 튀어 주자 요정은 녹색의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 이상한 존재구나?” “내 입장에선 그렇게나 다른 존재와 구별하지 못해 안달하는 인간들이 더 이상해. 하긴, 인간은 개인차도 심하고 요정에 비해선 각 개채의 개성도 강한 것 같더라.” “자,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되도록이면 빨리 그 미친 마법사씨를 없애고 따듯한 햇살 아래서 점심이라도 먹자고. 넌 그 녀석이 어디에 있는지 알겠지?” 여자들의 수다가 시작되려 하자 유신은 재빨리 끊었다. “응, 내가 안내 할께. 따라 와.” 유신과 이자벨은 상당히 길을 잘못 들었는지, 아까의 싸움이 있던 곳까지 나가서 다른 쪽 동굴로 들어가야 했다. 이자벨은 아끼 살덩어리가 된 좀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려고 했지만, 멀리에서 사방에 퍼져 있는 피와 살점들의 역한 냄새를 맡고 포기했다. “휴우... 이제 아침 먹을 시간도 훨씬 지났겠네요. 배가 고픈데...” 이자벨과 요정이 좀비들의 시체들 틈에서도 먹을 것을 생각하는 유신을 질린 듯이 쳐다봤지만, 배가 고픈 것은 고픈 것이다. 다시 한 시간 정도를 더 걷자 유신의 감각에도 불쾌한 무엇인가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이 근처야. 지금부터는 길 따라서 죽 가면 돼. 난 근처에 숨어 있을 테니까 꼭 이겨야 해!” 유신과 이자벨의 표정이 찌그러지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요정양은 손까지 흔들며 격려를 했다. “어이, 넌 안 갈거야?” 유신이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난 가봐야 짐만 되는 걸?” 요정은 긴 귀를 늘어뜨리며 조금은 미안한 표정을 지어 주었다. “하아... 그 얘기는 다른 사람 입에서 들었으면 훨씬 반가웠을 텐데...” “......” 유신이 슬적 이자벨을 쳐다보며 말하자 이자벨은 녹색의 야광석 아래서 더더욱 푸르게 빛나는 눈을 치켜뜨며 노려보았다. “예이, 예이. 하지만 위험해 지면 도망쳐야 해요.” 제 5 장 장인의 광산 18화 이자벨은 원망 가득한 눈초리로 노려 볼 뿐,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 “도망쳐야 해요!!” 이자벨이 야광석애 반사되어 더욱 푸게 빛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지만, 스펙터와의 싸움에서 고전 해 본 유신으로서도 결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으니까, 어서 가요.” 이자벨은 삐진 듯한 말투로 아무렇게나 대답하고는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다. 5분 정도 더 걸어가자 불길한 붉은 빛의 모닥불 같은 게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야광석이 제법 환하게 비춰주고 있으니, 주위를 환하게 하기 위해 피우는 불은 아닐 것이다. ‘마법적 의식을 행하고 있는 건가?’ 그곳 까지는 직선이었고, 특별한 엄폐물이나 은폐물이 없었기 때문에 터덜터덜 그 빛을 향해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 통로는 가장 최근까지 미스릴을 캐는 작업을 하던 곳이었는지, 아직 다른 곳처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붉은 빛은 동굴의 끝에 있는 마법진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마법사는 이곳을 무슨 마법으로 녹여서 크게 만들었는지 벽면은 유리질화 되어 전부 녹아 있었고, 그 크기는 왠만한 고급여관만큼 커다랬다. 야광석도 원형의 벽면에 2 미터 간격으로 하나씩 있어 다른 곳 보다 훨씬 환했다. 벽에는 몇 가지 원시적인 마법 생물을 배양하는 배양수조와 그것을 관리하는 도구들, 그리고 마법진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미 배양이 끝났는지,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중앙의 커다란 마법진이 규모나 모양으로 보아 스펙터와 요정들을 강제 소환한 그 마법진인 것 같았다. 안쪽으로 연결된 동굴은 크기도 작고 입구부터 조잡한 걸로 보아 드워프들이 판 것이 아니라 이 광산을 장악한 무리들이 나중에 파낸 것 같았다. “호오... 손님이 오셨군. 동굴 입구에 있는 마물들은 내가 소환한 마물들 중에서도 결코 약하지 않은 몬스터인데 어떻게 해치우고 온 것인지 모르겠군. 마스터급의 마법사인가?” 칙칙한 검붉은 색의 로브를 뒤집어 쓴 마법사가 천천히 동굴 입구에서 나왔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로브 속에서 사악하게 빛나는 두개의 붉은 광채는 또렷이 보였다. 그 사악한 눈빛은 결코 살아있는 생명체가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역시 리치군. 살아있는 인간을 좀비 화 시키다니... 네놈이 한 짓이 얼마나 끔찍한 짓인지 알고나 있나?” 꽤 실력도 좋았고 마음도 착했던 용병들이었다. 잘만 훈련시켰으면 정규병 이상의 실력을 발휘했을 정도의 실력이었고, 의리도 있고 자기 분수도 아는, 인간적으로도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좀비가 되어 신의 미움을 받을 인생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끔찍한 마족에게 잡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도 못하는 새에 좀비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살아있는 채로 좀비가 되면서 썩어 문드러져가는 자신의 살점들을 보며 절규했을지도 모른다. 둔해져 가는 감각, 멍해져 가는 머리를 움켜잡고 완전히 좀비 화 됄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모른 채 공포와 불안함으로 괴로워했을 것이다. 죽었다고 할 수도, 그렇다고 살았다고 하기는 더더욱 무리인 상태가 되어버린, 생의 마지막이라는 관점에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최악의 방법으로 맞는 최후일 것이다. 유신의 검이 어느새 은은한 푸른빛을 뿜고 있었다. 검기를 발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분노한 나머지 검에 조금씩 검기가 들어가는 것이다. “이건 매우 특이한 손님이군. 소드마스터인가? 하긴, 마법사라면 아무리 놀라운 재주를 가졌어도 그 많은 스펙터를 물리 칠 수 없었겠지.” “그럼 죽을 각오도 되어 있겠지? 아무리 리치가 마법사의 정점이라 해도, 이 거리에서 소드마스터의 검은 피할 수 없지.” 유신이 그의 발 아래로 슬쩍 검을 긋자 검기가 발사 되면서 먼지가 훅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리치의 코앞까지 쇄도해 갔다. 저 마법사가 왜 리치가 되었는지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물론 동정은 가지만, 단지 그뿐이다. 저런 사악한 존재와 대화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리치. 마법사의 정점에 선 자는 악의 길로 빠지기가 쉽다. 마법사들이 마법에 대해 갖는 열망은 너무나 굉장한 것이어서 현자의 칭호를 받을 정도로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도 리치가 되는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 7서클 정도의 마법을 익히게 되면, 대충 죽기 전까지 자신이 이룰 수 있는 마법적인 경지가 보인다. 나이를 먹고 한계가 보이기 시작하면, 마법을 더 배우고 싶다는 열망, 어떻게 해서든 생명을 더 연장시켜서라도 눈에 보이는 한계를 넘는 마법적 완성을 이루고 싶다는 유혹은 뿌리치기 힘들게 된다. 높은 마법의 경지에 오른 사람일수록, 재능이 뛰어나면 뛰어난 마법사일수록 유혹은 훨씬 치열하게 마련이다. 리치라고 해서 천성이 악하다거나 악의에 가득 차서 리치가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법 하나밖에 모르는 정순하고 욕심 없는 성실한 마법사가 리치가 되는 경우가 많다. 단지 하나 욕심이라면 마법, 그 미치도록 좋은 마법에 집중한 것 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욕심이 나도 결코 손대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마법을 더 공부하고 싶고, 지식에 대한 욕심 때문에 죽고 싶지 않다고 해도 반생의 길을 택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생과 사의 경계를 가르는 것은 신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고, 신의 노여움을 사면 타락할 수밖에 없다. ‘당신의 마법에 대한 정열과 노력에는 경의를 표하오. 하지만 당신은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이오. 점점 더 타락하여 완전히 마왕으로 되기 전에 순리로 돌려주는 것이 대마법사에 대한 예의!!’ 제 5 장 장인의 광산 19화 유신의 검이 일반인이라면 보지도 못할 정도의 빠르기로 리치의 코앞까지 쇄도해 갔다. “차앙” 하지만 유신이 리치의 두개골을 가르기 직전, 엄청난 속도로 유신의 롱소드를 막아서는 검이 있었다. “카가가가각” 잠시 귀를 찢는 듯한 쇠 긁는 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검이 힘을 겨루었다. 하지만 튕겨 날아간 것은 유신이었다. 이미 봉인이 세 개나 풀려 오우거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는 유신이 튕겨져 날아간 것이다. “뭐...뭐지?” 유신이 바닥에 검기를 뿌려 만든 먼지들이 가라앉으면서 나타난 것은 흉측하게 생긴 인간형의 몬스터와 엘프를 닮은 아주 아름답게 생긴 몬스터가 였다. ‘뭐지? 방금 내 공격을 막은 것이 이 녀석들이란 말인가? 겨우 저런 체격으로?’ 둘 다 무심해 보이는 눈초리로 리치의 옆에 비스듬히 서 있었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도 리치의 주변에는 도저히 파고들만한 공간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뭐냐? 화랑급의 전투력을 가진 존재인가? 이건, 소드마스터 이상의 압박감이잖아!’ 하나는 살덩어리가 여기저기 뭉그러져 흘러내리고 있는 흉측한 모습의 여성형 몬스터였고, 또 한 마리는 푸른색의 긴 머리를 종아리 까지 기르고 황금빛의 눈동자를 하고 있는 아주 아름다운 모습의 남성형 몬스터였다. 두 마리 모두 얼굴 몸 할 것 없이 복잡한 마법문자가 그려져 있었고 하얗고 통이 큰 옷에도 역시 마법문자와 부적 같은 것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둘 다 겨우 유신만한 체격이었지만, 그가 마법계에 처음 왔을 때 오우거에게서 받았던 압박감 이상의 압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후후, 소개하지. 내가 만든 생명체라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설혹 드래곤이라도 해내지 못한 생명창조의 마법을 내가 해냈어!! 후하하, 인간을 버려 가면서까지 연구한 보람이 있지 않나? 이렇게 강하고 아름다운 새로운 생명체이니 말이야. 소드마스터라면 이 녀석들의 최종 전투력 테스트를 하는데 부족함이 없겠지.” 리치는 사랑스럽다는 듯, 두 생명체를 해골만 앙상하게 남은 손으로 쓰다듬었다. “후후, 거짓말 하지 마라. 정신체를 만들 수 없어서 요정을 강제 소환하여 합성했으니 완전히 창조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유신은 비웃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마법사를 도발했다. “허억!! 네놈, 어떻게 그런 것 까지 아는 것이냐?” “흥, 더 놀라게 해줄까? 너처럼 인공의 생명을 창조하는 방법은 이미 많은 마법사들이 성공한 일이니 네가 처음인 것이 아니야.” 호문크루스의 합성이라면 이 리치가 마법계의 마법사중엔 최초일지 몰라도, 물질계에선 매우 흔한 기술이었고 위시마스터들도 그들의 수하로 호문크루스를 쓴 적이 있었다. 천사들이 생명 창조의 마법을 너무나 질색하기 때문에 지금은 쓰지 않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꽤 높은 수준까지 이루어져 있었다. “거짓말 하지 마라! 어느 마법서에서도 마법사가 생명을 창조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리치는 해골이 보여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당혹스럽고 실망한 표정을 보여주며 발악하듯 외쳤다. 인간을 버려가면서 까지 연구해온 것이 기껏 남의 뒤나 쫒는 연구였다고 생각하니 절망하는 것이 당연하다. “짧은 지식이군. 난 저 생명체를 분류하는 이름도 알고 있어. 호문크루스라고 하지. 연금술과 마법으로 만든 생물. 하지만 네가 만든 것은 호문크루스의 축에도 낄 수 없다. 단지 4대원소만을 이용해 육체를 만들고, 거기에 다른 정신체를 소환하여 꾀 맞추는 것은 단지 약간 수준이 높은 골램마법이나 키마라합성 마법의 응용에 지나지 않아. 호문크루스라고 하기도 모자란 조잡한 수준이지.” 사실 그렇게 형편없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떤 마법생물이건 봉인이 세 개나 풀린 유신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는 것은 레서데몬 이상의 파워라는 뜻이다. 두 호문크루스가 싸우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했기 때문에 유신은 리치를 도발하며 빈틈을 찾았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거짓말 장이인 네놈을 죽이겠다.” 리치 정도 되면 인간적인 희노애락의 감정은 거의 느끼지 못하고, 정신적인 동요 역시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인간을 포기하면서까지 모든 것을 바친 연구가 남의 것을 베낀 삼류 연구가 되어 버리자 리치는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날뛰었다. “진정한 창조마법은 인공적으로 만든 육체에 저절로 정신체가 깃들게 하는 것이지, 이미 있는 정신을 끌어 드려 억지로 융합하는 것이 아니야!!” 정신체라기 보다는 영혼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겠지만, ‘영혼’이라는 단어는 마법계에서, 그것도 창조마법을 연구하고 있는 위험한 녀석 앞에서 사용하기엔 너무나 예민한 단어라 감히 쓰지 못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육신을 지배하는 정신은 나조차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 그것을 만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리치도 마법계에서만 살았으니 영혼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정확하지 않았고, 제대로 연구 해 본적도 없는 것이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유신의 말에 제대로 응수하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물론 ‘인간이었던’ 마법사가 만드는 것은 불가능 하지.” 유신이 결론짓듯 그 호문크루스 연구는 성과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하자 리치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뭣들 하느냐? 저 건방진 인간을 찢어 죽여라!!” 마법사의 명령이 떨어지자 무심히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만 있던 예쁘게 생긴 몬스터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났을 때는 이미 유신의 바로 왼편에서 검을 뿌리고 있었다. 간신히 막기는 했지만, 뒷걸음질치면서 방어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카앙, 카앙” 숨쉴 틈 없는 연계 공격에 검을 쥐고 있는 손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강하다!! 요정을 융합하여 만든 호문크루스가 이렇게 강하다니! 이건 전투용 키메라 이상이지 않은가?’ 몇 번의 검격을 주고받자 뼈마디가 삐걱거리고, 손아귀는 다 찢어져 피가 났다. 그런 것보다도 충격인 것은 호문크루스의 스피드가 유신을 압도한다는 것이었다. 제 5 장 장인의 광산 20화 유신이 지금껏 그보다 강한 상대와의 사움에서 이겨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압도적인 스피드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워에서 밀리는 것보다도 적의 스피드가 한수 위라는 것이 충격이었다. 분명 전투기술 면에서는 유신이 상대도 안될 만큼 위였지만, 상대는 둘이었고 스피드도 파워도 유신 이상이었다. 당연히 괴로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채앵” 유신이 들고 있던 롱소드는 이런 괴물들끼리의 전투를 상정해서 만든 것이 아닌 평범한 물건이다. 결국 롱소드가 버티지 못하고 부러지면서 유신은 5미터 가량을 날아가 처박히고 말았다. 스펙터와의 싸움에서 너무 많은 체력을 소모한 탓도 있겠지만, 그런 것 보다는 호문크루스의 파워가 대형 몬스터급이었기 때문이다. “이익!! 검 없이도 싸울 수 있는지 어디 해 보자!” 충격을 받긴 했지만, 기죽을 정도는 아니다. 유신은 상대의 검을 부러뜨릴 생각으로 검기를 끌어 올려 주먹에 모은 후 호문크루스의 검을 내려 쳤다. 하지만 놀랍게도 호문크루스도 약간이나마 검기를 사용 할 수 있었다. 엷게 푸른빛을 발하며 검을 보호하자 유신의 주먹에서 작열하는 황금색을 내고 있는 기운을 막아 내었다. 하지만 천상신검의 공격은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다. 검기의 급수가 너무 달랐기 때문에 호문크루스는 휘청거리며 뒤로 밀렸다. 유신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끝장을 내기 위해 밀어 붙였다. 힘과 스피드에선 호문크루스가 앞선다 해도 전투경험이나 기술 차이가 너무 났다. 호문크루스는 좌우에서 변화무쌍하게 공격하는 유신에게 순식간에 밀려 휘청거렸다. “불행한 생명체여. 흙으로 돌아가라!” 유신의 절반만 남은 롱소드가 그 아름답게 생긴 호문크루스의 머리를 가르기 직전,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흉측한 녀석이 공격에 가세했다. 천상신검을 계속 남발하며 싸웠다가는 체력소모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유신은 일단 거리를 두며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죽을 뻔 했던 아름답게 생긴 호문크루스가 크게 화를 내며 흉측하게 생긴 녀석에게 공격을 가했다. “왜 끼어드는 거야, 페르소나!! 난 아직 지지 않았다고!!” “씨익...씨익...저... 인간은 강해, 페이얀. 너...보다 훨씬... 후욱....후욱... 우리 둘이 싸워도... 이길 수 있다고 장담 할 수 없어...” 흉측한 모습의 호문크루스는 입 안쪽도 엉망인지, 말하는 것도 아주 힘겹게 한마디씩 했고, 목소리도 듣기 거슬리는 소음 수준이었다. “닥쳐! 못생긴 게! 저리 꺼져!! 나 혼자서 이겨 보이겠다.” 페이얀은 아름다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황금빛의 눈동자를 타오를 듯 빛내며 유신을 노려보았다. “큭, 우습군. 뭐가 페르소나고 뭐가 페이얀이냐? 몸이야 새 육체를 얻었을지 몰라도 영혼은 요정의 그것이잖아. 이름 없는 요정이 인간 흉내 내지 말라고!” “크아악!! 이놈, 죽이겠다. 난 페이얀이야. 난 이름이 있어. 독립되고 이성적인 본성을 가진 개별적 존재이다. 요정 따위가 아니야!” 호문크루스는 발작을 일으키며 다시 유신에게 덤벼들었다. 마법사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정을 단지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는 조금 예쁘게 생긴 곤충 정도로 생각하지만, 사실 요정의 진가는 그 방대한 지식에 있다. 요정이라면 차원을 넘나드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마법계는 물론이고 물질계의 사정까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물론 요정은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고 머리도 똑똑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떤 세계에 관해서든 상식 정도의 수준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약 요정을 소환한 사람이 다른 세계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요정 자체가 거짓말을 잘하는 종족이기 때문에 그 말을 전부 신뢰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또 신이 허락 치 않는 금지된 말이나 우주의 균형을 어지럽히는 말은 함부로 옮길 수는 없기 때문에 첩보용이나 정찰용으로는 쓸 수 없다. “난 살아있는 존재다. 내 몸에 뿌려질 너의 피가 나의 증거! 네놈을 죽이겠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인가?’ 대부분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육체는 생물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요소이고, 아무리 정신이 육체를 조정하는 것이라 해도 그 정신도 육체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인 만큼, 그 그릇의 모양에 따라 영혼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양은 변하게 된다. 요정의 상태에서 새로이 얻은 저 강력한 육체는 이 호문크루스들에게 생명을, 그리고 이름은 그들이 존재한다는 정당성과 신념을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나 소중한 이름인데, 유신이 이름이 없는 존재라고 하자 마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완전히 흥분해 버린 페이얀의 거센 공격에 유신은 휘청거렸다. ‘연약한 요정의 육체를 버리고 강력한 새 육체를 얻으며 정신력도 강력해 진 것인가?’ 간신히 목이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싸움에 유리해 진 것은 아니었다. “유신, 이 검을 써요!” 이자벨이 유신이 밀리는 것을 보고 첨예를 던졌다. “끼어들지...마라... 인간...” 페르소나는 유신에게 날아가는 첨예를 중간에 쳐 내려 했지만, 유신은 반 토막 남은 롱소드를 던져 페르소나를 저지했다. 하지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페이온이 유신의 등을 노리며 공격을 가했다. “카앙, 카앙” 간신히 한타이밍 빨리 첨예를 잡은 유신은 페르소나를 쳐내 멀리 밀어 버리고, 그 여세를 이용해 뒤쪽에서 날아드는 페이온의 공격을 막았다. “건방떨지 마라! 난 강하다!” 겨우 호문크루스 따위에게 밀린 유신이 순간적으로 검기를 주입하여 몰 붙이자,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숨은 턱까지 올라왔고, 두 호문크루스는 상대의 체력이 급속히 떨어지는 것을 보고 결코 무리해서 덤벼들지 않고 슬슬 도망 다니면서 반격할 찬스를 기다렸다. 제 5 장 장인의 광산 21화 노련함으론 유신이 호문크루스 따위보다 몇 배나 위다. 상대방이 시간을 끈다는 것을 못 읽어 낼 리 없다. ‘큭, 잔재주를! 그럼 어디 버텨 봐라. 내가 먼저 지치는지, 아니면 네놈이 먼저 두 쪽 나는지 해 보자고!’ 갑자기 공격이 더욱 예리해 지자 비로소 페이온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첨예의 강력함에 유신이 천상신검의 검기까지 넣어 내려치자 호문크루스는 당장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이 충격을 받았다. 팔 뿐 아니라 온 몸 전체가 삐걱거렸지만, 어서 빨리 상대방의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앞도적인 파괴력 앞에 적의 체력이 떨어지기 보다는 자신이 먼저 죽을 것이란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일이 이쯤 되자 페르소나도 안 끼어 들 수가 없었다. “카앙” 페르소나는 유신이 페이욘에게 집중할 때 뒤에서 쳤지만, 유신은 귀신같이 그 공격을 막아냈다. 사실 유신은 페르소나가 계속 신경 쓰였기 때문에, 그녀가 공격하도록 빈틈을 두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검을 박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쓰는 검 역시 보통의 검이 아니었다. 검신에 새겨진 마법문자가 새하얀 빛을 뿜어내자 굉장한 파괴력을 내었다. 마법으로는 코어를 이길 수 없다고 해도, 검 자체도 미스릴로 만든 대단한 위력의 검이었고, 페르소나 역시 페이온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력한 검기를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천상신검에도 부러지지 않고 버텼다. ‘이 자식, 강하다. 여자라고 얕볼 수 없어.’ 처음에는 힘으로 밀어 붙여 검과 함께 날려 버릴 생각이었지만, 상대방은 그렇게 녹녹치 않았다. 체력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고, 페르소나는 페이욘처럼 멍청하게 무작정 덤벼드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이면 멀리 떨어져 있다가 견제만 하면서 유신의 힘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싸움에는 아무런 재능도 없는 요정이 아무리 강력한 육체를 얻었다고 해도 이정도로까지 싸우다니... 육체가 이정도로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일까?’ 그때 유신은 문득 요정들의 상황이 누군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가 강해지면 정신도 강해진다는 것은 반대로 육체가 약해지면 정신력도 약해진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그건 내 얘기잖아!’ 유신은 강하게 페이욘을 밀쳐 내고는 일단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닥치는 대로의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면서 싸우기로 했다. ‘나의 전투 방식은 이런 것이 아니다! 왜 지금껏 생각을 못한 것일까. 봉인으로 약해진 몸. 그것이 정신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페르소나와 페이얀은 유신이 거리를 두자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호흡을 골랐다. 천상신검은 쓰는 쪽도 부담스럽지만, 받아내는 쪽은 그보다 몇 배나 더 부담스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하자. 지금의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입장에서 나를 보자. 예전의 나라면 이런 상대와는 어떻게 싸웠을까?’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유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페이욘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덤벼들려고 했다. “푸우... 후우... 그만..둬... 페이욘...” 페르소나는 힘겹게 말하며 페이욘을 말렸다. 눈을 감고 있지만 저 정도의 상대가 시각에 의지해서 싸울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눈을 감고는 있지만, 그의 주위에는 바늘하나 들어갈 만한 틈도 보이지 않았다. “이익! 놔! 상대는 지쳐 있다고. 우리처럼 강한 육체를 갖고 있지 못한 인간이야. 저런 힘을 내면 그 육체가 무사할 리가 없잖아!” 페이온은 거칠게 페르소나를 밀치고 유신에게 달려들었다. “슈카악” 지금까지의 유신이었다면 그 공격을 강하게 쳐내고 상대가 휘청대는 틈을 타 반격을 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기 가르는 소리만 들렸을 뿐, 검이 충돌하는 소음은 없었다. ‘싸움에 미쳐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강함을 제압하는 것은 힘이 아니다. 그렇다고 빠른 속도도 아니다.’ “이놈! 도망치지 말고 똑바로 싸워라!!” 유신이 제대로 상대해 주지 않자 페이욘은 죄우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하지만 유신은 검을 마주치지도, 그렇다고 페이욘의 공격에 말려들지도 않았다. ‘루시펠님과의 싸움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가? 그 강력한 허무의 결계를 깰 수 있었던 것은 내 힘이 루시펠님 이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슈슉, 휘휘휙” 페이욘의 롱소드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이 공허하게 들렸다. “왜!! 왜, 맞지 않는 거냐? 파워도, 스피드도 내가 위인데, 왜 맞지 않는 것이냐!” 분노한 페이욘은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체력안배 따위는 하지 않고 달려들었지만, 효과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무의 마음. 때로는 바람처럼, 때로는 물처럼, 가볍게 흘리는 작은 웃음처럼, 자유롭게 흘러가는 구름처럼,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저 넓은 우주처럼! 나를 비우고 상대와 하나가 된다.’ 페르소나는 이 꼴을 보고 싸움이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싸움은 완전히 유신의 페이스로 넘어와 있었고, 아무리 자신이 가세해 봐야 뒤집기는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페이욘을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페르소나는 거대한 산처럼 느껴지는 유신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덤벼들었다. 유신은 검도 뽑지 않고 페르소나에게 바짝 붙어 접근전으로 끌고 갔다. 거의 끌어안다 시피 한 짧은 거리였다. 페르소나도 파워와 스피드에서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접근정르 사양하지 않았지만, 그건 유신을 몰라서 내린 완전한 판단 미스다. 팔이 잠시 엉키는가 싶더니 페르소나는 도저히 유신을 공격할 수가 없도록 양 팔이 봉쇄되었다. 하지만 유신은 팔꿈치와 무릎을 이용해 목과 명치 등의 급소를 사정없이 가격했다. 할 수 없이 파워가 위인 점을 이용해 유신을 끌어안은 후, 뼈라도 부러뜨릴 생각으로 몇 방 맞는 것은 감수하면 팔을 유신의 등 뒤로 돌렸다. 그러자 유신은 페르소나의 팔이 풀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슬쩍 밀어 버리고는 강력한 뒤돌려 차기를 먹여 저만큼 날려 버렸다. 제 5 장 장인의 광산 22화 “페르소나를 건드리지 마라!!” 페이욘은 이미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필사적으로 페르소나를 구하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호오... 못생겼다고 구박하더니, 사실은 친한가보군. 하지만...’ 페이욘은 그가 강하게 덤비면 강하게 덤벼들수록 상대방이 그 힘을 이용해 반격을 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페르소나가 살해당할 판이다. “약해!!” 갑자기 유신이 천상신검을 사용해 내려치자 목숨을 걸고라도 접근하려던 페이욘은 첨예에 목이 굴러 떨어질 뻔 하고는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유신은 페이욘이 아예 근처에 오지 못하도록 막아 버리거나, 교묘하게 페르소나를 방패막이로 쓰면서 결코 싸움의 주도권을 내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두 호문크루스가 유리하게 전개했던 싸움이지만, 이제는 완전히 유신에게 상대가 안 되고 있었다. “에잇 쓸모없는 녀석들! 겨우 인간 하나에게 그토록 고전한단 말이냐? 전부 죽어버려라!” 도저히 두 호문크루스가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자 마침내 그 리치가 나섰다. “지잉지잉” 리치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징그럽게 생긴 곤충이 죽기 전에 마지막 사력을 다해 우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성대가 없기 때문에 주문 소리가 이런 식으로 나는 것이다. 리치가 마법을 시전하자 땅바닥에서 조금씩 수증기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크흐흐. 멍청한 마법사들은 파이어볼이나 매직미사일 같은 직접적인 마법 공격밖에 생각하지 못하지. 상상력들이 부족해. 하지만 진짜 마법사의 싸움이란 그런 야만적인 것이 아니야. 마법의 진짜 무서움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마.” 미세하게 떠오른 수증기들이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마...마스터, 저희들도 죽일 생각입니까?” 놀란 페이욘이 리치에게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담한 것이었다. “더 이상 네놈들은 내 자식이 아니다. 호문크루스라니... 새로운 창조물이 아닌 이상, 너희들은 지금껏 너희들을 만들기 위해 소모했던 소모품들과 똑 같아.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 이름은 회수하겠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폐기한다. 사라져라 쓰레기들아.” “푸우우우우” 수증기가 가열되기 시작하면 불보다 더욱 뜨겁다. 하지만 이름을 빼앗긴 페이욘은 제자리에 주저 않은 채 뜨거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정신이 나간 것 같이 보였다. 이름을 빼앗긴다는 것은 정체성을 빼앗긴 것과 같다.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는 것이다. 페르소나는 그런 페이욘을 부둥켜안고 수증기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려고 했지만, 페르소나의 피부에서도 조금씩 물집이 생기더니 진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후하하 누구도 도망 칠 수없다. 동굴 전체를 1000도의 고열로 만들어 주마. 전부 재가 되어 버려라!” “꾸르르륵” 페르소나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괴로워하자 멍하게 넋이 나가있던 페이욘이 페르소나를 밀쳐 내더니 리치에게 공격을 가했다. “우아아악, 페르소나를 건드리지 마!!” 빠르고 정확한 일검이 리치의 머리부분을 베고 지나갔다. “부우웅” 하지만 페이욘의 롱소드는 허공을 갈랐을 뿐이다. “흐흐흐, 감히 부모에게 이빨을 들이대다니. 정말로 아무 가치도 없는 놈이구나. 그래봐야 네놈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얌전히 모두 죽어라.” 수증기 속에서 리치의 모습은 6개로 늘어나 있었다. “우아아” 페이욘은 육체적 고통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적 고통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리치의 모습이 보이는 대로 무턱대고 공격했다. 하지만 모습이 투영되는 수증기를 이용하여 환영 마법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하나를 베면 두개의 리치가 나타났다. “커억, 커억” 뜨거운 수증기가 페이욘의 식도를 태우기 시작한 것인지, 점점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유... 유신 어떻게 하지요? 이대로는 우리들도...” 천천히 수증기가 번지기 시작했고, 유신과 이자벨의 발 아래서도 수증기가 올라오기 시작하자 이자벨은 유신에게 바짝 붙으며 수증기를 피했다. 리치의 주변은 이미 수백도의 고온일 것이고, 보이는 것이 정말 본체라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도망갈곳 하나 없는 상황임에도 유신은 여유만만이었다. “그래서, 재주는 다 부린 거냐?” “뭐... 뭣이라고? 어린놈이 무서운 게 없는 모양이구나. 그 나이에 어떻게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는지는 몰라도 어디, 동굴 전체가 고열지옥이 되어도 지껄일 수 있나 보겠다!” “치이익” 마침내 유신의 발밑에서도 폭발하듯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싸움을 할줄 아는 녀석이구나. 가장 동굴이라는 지형에서 쓰기 가장 좋은 마법 조합이다. 공격마법이 아니라 부수마법을 조합하녀 가장 확실한 범위용 살상마법으로 응용한 것은 칭찬해주마. 하지만 아직 상상력이 모자라. 나라면 힘들게 수증기를 가열하는데 마나를 소비하기 보다는 차라리 산성을 섞어서 독 안개를 만들겠다.” “이놈! 조롱하는 것이냐? 죽어서도 그 입은 나불거리나 보겠다.” “아아... 죽지 않을 테니까.” 유신이 말을 마치자 무서운 위력으로 수증기를 가열하던 마나의 움직임이 멎었다. “뭐? 뭐냐?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리치는 크게 당황하여 다시 마법을 쓰려고 했지만, 마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나의 강제지배라는 것이다. 드래곤의 용언마법과 비슷한 것이지.” “불가능하다.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이런 것이 가능한 존재는...네놈, 설마...” 리치는 팔까지 늘어뜨리고 리치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허탈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경이로운 존재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인가...” 상대가 마법사인이상 드래곤에게 승산은 없다. 제 5 장 장인의 광산 23화 마법사의 정점인 리치가 브레스를 제외하고도 최강의 마법생물인 드래곤에게 마법으로 싸움을 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를 리가 없다. 유신은 잠자코 팔짱을 낀 채 리치를 노려보았다. 리치는 수증기가 점차 가라앉기 시작하면서 희미하게 보이는 유신의 실루엣을 보며 죽음, 아니 존재의 소멸을 예감했다. “육체란 소중한 것이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 해도, 마법적 지식의 성취를 소중히 여긴다 해도,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심지어는 인간이었다는 긍지조차 버릴 수 있다고 해도, 아무리 다른 중요한 일이 있다고는 해도... 영혼을 담는 그릇이 붕괴되면 그 영혼 역시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은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리치가 영혼이란 말을 알아들을 리 없지만, 유신은 마치 혼잣말을 하듯 작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리치에게 다가갔다. 이미 잔상을 보이게 하는 미러 이미지 마법도 깨졌기 때문에 리치는 불쌍한 표정으로 한쪽 구석에서 떨고 있을 뿐이었다. 설혹 마법이 남아있다 해도, 눈에 의지하여 사물을 파악하지 않는 유신에겐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것이다. “히에에엑 다가오지 마라!!” 유신을 드래곤이라고 단정 지은 리치 역시 마법으로 잔재주를 피울 생각은 하지 못하고 본능적인 공포로 뒷걸음질치며 아무 소용도 없는 의미 없는 단어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영격체로 진화하지 못한 인간이 바라볼 수 있는 한계는 뻔하다. 정신의 타락이 육체를 좀먹는 것처럼 육체의 타락은 정신을 붕괴시킨다. 생각해보라. 네가 처음 리치가 될 결심을 했을 때. 새로운 마법생물을 창조하겠다던 열정으로 몸을 떨던, 순수하게, 아름다울 만치 마법에 미쳐있던 그때. 지금의 너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흐아아아 몰라! 저리 가라!!” “그때와 같다고 할 수 있는가? 그때의 너라면 아무리 다른 마법사가 먼저 이루어 놓은 업적이라 하더라도 네가 지금껏 존재했다는 증거, 너라는 ‘인간’의 최후의 결실인 호문크루스를 내치지 않았을 것이다. 호문크루스는 너의 자식이 아닌가? 네가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면서까지 얻었던 영원한 시간은 이미 네 것이 아니다. 넌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네놈에겐 마법에 대한 열정조차 남아있지 않아. 단지 어둠에 먹힌 타락한 정신과 사악한 광기의 덩어리이다. 그것이 리치다.” 벽에 막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진 리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나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늘게 붙어 있던 리치의 뼛조각 중 몇 개가 바닥에 떨어지며 덜그럭거리는 흉한 소리를 내었다. 광기에 빛나 사악한 붉은 빛을 뿜어내던 리치의 눈은 이제 시커먼 동공으로 보일 뿐이었다. “사형이다.” 첨예가 높이 들려졌다. 잠시 황금빛으로 물드는가 싶던 첨예는 어느 새 리치의 회색빛 두개골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었다. “끄오오오오” 동굴 전체를 울리는 소음과 함께 리치는 서서히 소멸해 갔다. 불사의 몸을 가진 리치지만, 사악한 힘에 의지하는 불사 따위는 천상신검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다. ‘퍼석퍼석’ 연탄 깨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온몸의 뼈가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다. 유신은 천천히 검기를 거두고 첨예를 빼내었다. 이미 천상신검이 리치의 육체를 구성하는 사악한 기운을 비틀어 버렸기 때문에 검을 회수했음에도 리치의 붕괴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하얀 뼛가루가 되었고, 그것조차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정말로 마족에게는 지옥 같은 위력의 검기가 아닐 수 없다. “후아... 이제 끝난 건가요?” 질렸다는 듯, 바위 뒤에 숨어 있던 이자벨이 나왔다. “그런 것 같군요. 그런데 갑자기 왜 마법이 사라진 걸까요?” 수증기가 피어오르면서 내는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유신과 리치가 대화하는 것을 제대로 듣지 못한 이자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나가 다 떨어진 모양입니다. 요정을 소환하고 스펙터를 소환하면서 너무 많은 마나를 낭비한 탓이겠지요. 어쨌든 운이 좋았습니다.” 이자벨은 뭔가 미심쩍기는 했지만, 달리 설명할 방도도 없었기 때문에 넘어가기로 했다. 동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수증기가 내려앉기 시작하자 동굴 여기저기에 이슬이 맻치기 시작했다. 마치 비가 온 후처럼 축축한 이슬 때문에 괘 춥게 느껴졌다. “응? 저게 뭐지요?” 이자벨이 가리킨 곳에는 서로 엉켜서 제대로 형태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어 있는 살덩어리가 보였다. “아까 유신 경과 싸웠던 몬스터인가 보네요. 처참하군요.” 둘은 서로를 지켜주려는 듯, 별로 크지 않은 몸으로 상대의 몸을 덮어주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녹아서 붙은 살덩어리들이 팔다리조차 제대로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역겹다기보다는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아!! 과연 바르부스님이 추천해 준 인간 다우네. 정말 수고했어. 요정 전체를 대표해서 정말로 감하해. 지금까지의 무례는 용서해 줄께.” 리치가 쓰러지자 어느 샌가 덩치 큰 요정이 나타나 감사를 표했다. “아니... 난 이 녀석들도 구하지 못했는데.” 유신은 무거운 시선으로 살덩어리들을 바라보았다. “흐음... 저 아이들이라면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으니 어떻게든 되살릴 수 있을 거야. 요정은 쉽게 죽는 존재가 아니라고.” “설마...” 죽지는 않았다고 해도, 단지 숨이 붙어 있을 뿐이다. 아무리 요정의 가루가 훌륭한 치료약이라고는 해도, 저 꼴이 된 두 호문크루스를 살려 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휘리리리리” 요정이 휘파람소리 같은 노래를 부르자 영혼을 빼앗겼던 회색의 요정의 육체들이 그녀의 주위로 모여 들었다. “우우우우” 슬픈 소리를 내면서 흘리는 피눈물은 생기 없는 회색의 몸에 대조되어 더욱 붉게 보였다. 그 모습이 살덩어리가 되어 굴러다니는 호문크루스보다 훨씬 섬칫해 보였다. 요정의 몸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오며 천천히 두 살덩어리의 주변을 원을 그리며 날기 시작했다. 제 5 장 장인의 광산 24화 황금빛으로 빛나는 요정에게 호응하며 다른 회색의 요정들도 같이 살덩어리 위를 날기 시작했고, 두 살덩어리에서도 ‘기잉기잉’하는 공명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회색의 요정들의 껍질도 점점 황금빛을 띄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완전히 황금색의 고리처럼 보이게 되었다. 요정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환하게 빛나며 바라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아름답다... 마치 천사의 고리 같아.’ 불새가 그의 새끼를 위해 최후로 몸을 불사르듯, 환한 빛을 발한 요정들의 무리는 완전히 그 살덩어리 속으로 흡수되었고, 마침내 빛이 잦아 들은 그곳에는 두개의 코쿤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은은한 빛과 함께 손바닥만한 크기에 여섯 장의 얇은 날개를 단 아름다운 여인이 편안한 자세로 다리를 꼰 채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중심으로 마법계와 요정계의 경계가 합쳐지며 시간의 흐름이 멈추었다. “유신 더 실버스타 장군. 장군께 요정들의 대표하는 페어리퀸으로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물질계의 언어로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공기의 진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머릿속에 직접 울렸다. 하지만 정말로 대화하듯 자연스럽게 오밀조밀하게 섬세한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어색하지 않았다. “페어리퀸이시군요. 그냥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지킨 요정도 없군요. 모두 이 코쿤 안에 흡수된 것 같으니...” 유신은 안타까운 눈길로 거대한 누에고치가 되어 잠들어 있는 두 호문크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요정은 인간처럼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니까요. 숫자의 개념으로 셀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마 이 코쿤이 열리게 되면, 요정이지만 요정이 아닌 새로운 존재가 태어나겠지요. 하지만 새로 태어나는 그 존재가 바로 여기 흡수된 모든 요정들 하나하나 입니다. 결코 다른 존재가 아니에요.” 퀸은 사랑스럽다는 듯, 따듯한 손길로 코쿤을 쓰다듬었다. “그래봐야 코쿤은 겨우 둘인데요... ” 유신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코쿤 속으로 흡수된 요정의 수는 그 커다란 요정을 비롯해 적게 잡아도 20마리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후훗, 숫자상으로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줄어들었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흐음...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개념은 요정의 그것과는 너무나 달라서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군요. 이렇게 생각하면 될 겁니다. 만약 A이라는 인간과 B라는 인간이 융합하여 하나의 인간이 된다면, 보통 인간들은 그 존재를 A나 B가 아닌 C라는 인간으로 보지요? 하지만 요정은 다릅니다. A라는 요정도 없고, B라는 요정도 없고, 둘을 융합하여 만든 C이란 요정도 없는 겁니다. A라는 요정도 요정이고, B라는 요정도 요정이지요. 물론 C이라는 요정도 요정이고, 저 역시 페이리퀸이면서 ‘요정’입니다.” 페어리퀸은 유신이 부담 갖는 것이 싫었는지 필요 이상으로 애써서 설명했다. 모든 것을 공유하는 요정들에게 있어 ‘설명’이란 행위는 불필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페어리퀸 역시 유신에게 그들의 삶과 죽음의 방식을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자식들을 위해 이렇게나 애써준 우주 최고의 용사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주고 싶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대충 알겠습니다. 퀸께서 직접 마법계에 현신할 정도의 일. 이 두 아이는 제가 잘 보살피겠습니다.” “부디 그렇게 해 주세요. 요정들을 위해 애써주신 점, 모든 요정들이 감사해 할 것입니다. 부디 다시 한번 저 넓은 우주에서 비상하는 당신의 모습을 수 있기를...” 페어리퀸은 환한 미소와 함께 천천히 요정계와 마법계의 경계를 갈랐다. 잠시 주위의 모습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유신은 마법계로 돌아왔다. 시간의 흐름이 비틀어 졌었기 때문에 이자벨은 페어리퀸을 보지 못한 듯 했다. 그녀는 여전히 코쿤을 향해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내고 있을 뿐, 방금 일어난 일은 알지 못했다. “흐음... 쉽게 변태를 마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코쿤이 문제가 아니라 동굴을 빠져나갈 방법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코쿤 주위를 빙빙 돌다가 큰 결심을 한 듯 슬쩍 만져보는 공주를 바라보니, 방금 전까지 힘든 전투를 하고 있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야 할 것 같군요. 배도 고파졌고...” 유신 역시 배가 고파지기 시작하자 그런 감상적인 생각 보나는 어서 이 동굴을 빠져나가서 맛있는 것을 실컷 먹고 싶은 생각만이 간절했다. “무슨 뾰족한 수가 있나요?” 이자벨은 조금은 피로한 목소리로 물어 보았다. 몇 번이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며 싸운 것이, 이 당찬 공주님에게도 피로를 준 것이다. “일단 입구 쪽으로 가보도록 하지요. 드워프들이 입구를 뚫고 있다면 소리가 들릴 겁니다.” 다시 움직여야 한다는 말에 이자벨은 기운 빠진 표정을 지었지만, 곳 털어버리고 일어섰다. 그녀보다는 유신이 훨씬 고생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입구 쪽으로 가려던 유신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코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을 버리지 않으마. 제대로 된 이름을 주고, 앞으로도 계속 보살펴 주겠다.” 유신은 코쿤에게 다가가더니 양 어깨에 하나씩 짊어졌다. 언뜻 보기에는 들고 가지도 못할 만큼 무거워 보였지만, 사실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다. “마법사들이 발견하면 이 불쌍한 것들을 또 무슨 이상한 실험에 쓰려고 할 겁니다. 그러니 제가 맡아두도록 할게요. 이자벨님도 이 녀석들의 이야기는 비밀로 해 주세요.” 호문크루스는 창조마법의 일종이고, 이것을 연구하는 것은 마법계에선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 일단 유신은 불쌍하다는 필계를 대어 호문크루스의 일이 다른 마법사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았다. “그럼 전 모른 척 할게요. 저 몬스터는 유신 경이 알아서 잘 처리하세요.” 이자벨도 그것들을 불쌍히 여겼는지, 더 이상 저 불쌍한 것들이 마법사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제 5 장 장인의 광산 25화 광산이 무너졌던 곳까지 도착한 유신은 가만히 정신을 집중하고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를 살폈다. 이자벨은 완전히 지쳐 버렸는지 바위에 기대어 부츠는 저만큼 던져버리고 발을 주물렀다. “광산을 복구하는 것 같군요. 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워낙 많이 무너졌기 때문에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가 없어요. 그래도 드워프들은 뛰어난 광부니, 어떻게 해서든 굶어죽기 전에는 구출이 될 겁니다.” 그 말에 이자벨은 잠시 입술을 삐죽였지만, 투덜거리지는 않았다. 드워프들이 만든 광산이라고 해도 여기저기 비죽한 돌들이 많아 잠시였지만, 누워 있자니 공주는 온 몸이 쑤셨다. “후우... 힘드네요.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흐음...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편히 쉴 자리부터 마련해야 할 것 같군요.” 유신은 제법 커다란 바위 쪽으로 가더니 그 앞에서 오른쪽 무릎을 바닥에 댄 상태로 한동안 바위를 노려보았다. “하압” 그리고 짧은 기합과 함께 첨예를 가로로 그었다. 바위에는 별 변화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유신이 그 바위의 윗부분을 밀자 놀랍게도 조금씩 밀리더니 결국에는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단번에 서민들이 쓸만한 크기의 자그마한 돌 침대가 완성되었다. 검기조차 쓰지 않고 저만한 바위를 단 일검에 잘라버린 것이다. 그 말도 안 되는 위력에 이자벨은 공주답지 않게 입까지 헤 벌리고 유신을 바라보았다. ‘뭐, 쥬펜델을 깬 것에 비하면 이정도야...’ 잠시 발검동작 상태로 있던 유신은 작게 한숨쉬듯 호흡을 고른 후 천천히 일어섰다. 평범한 바위였지만, 절단면은 잘 손질해둔 대리석처럼 매끈했다. 유신은 그것도 모자라 광물들을 나르는 운반차들을 뜯어서 거기서 나온 나무를 돌 위에 깔아 주었다. “자, 이곳에서 한숨 푹 자도록 하세요. 식량을 구할 방법이 없으니... 전 리치가 있던 곳에 가서 혹시 무언가 도움 될만한 것이 있는지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아직 어떤 괴물이 있을지도 모르니 부디 조심하세요.” 공주도 따라가고 싶었지만, 너무 지쳐 있었다. 게다가 식량도 없는데 체력소모를 하는 것은 너무 무모한 짓이라 차마 따라가지 못하고 유신이 만들어준 침대에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유신은 그런 공주가 귀엽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여 웃어주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동굴 안으로 사라졌다. ‘...고맙습니다. 아마 이것이 제 마지막 외출이 되겠지요. 경과의 이 짧았지만 신기하고 신나는 모험, 평생 동안 제 마음속에 소중한 추억으로 남겠지요. 보다 멀리, 그리고 보다 높은 창공을 누빌 당신께 비록 작은 힘이지만 보태드릴 것을 맹세합니다. 당신이 보기에는 힘없고 어리석은 여자일지 모르지만, 이런 저라도 당신께 도움을 드릴 방법 한두 개 쯤은 있겠지요. 언제나 충성의 맹세를 받기만 해온 저이지만, 이젠 저도 충성을 바칠 상대를 찾았습니다. 일국의 공주가 기사가 생각하는 충성의 맹세를 생각하다니 이상하군요. 하지만 이제는 어째서 그 많은 능력 있고 뛰어난 기사들이 굳이 주인을 찾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도... 이제 저도 강해지겠습니다. 일국의 공주로서, 그리고 뛰어난 정치인으로서 경이 무슨 일을 하건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보낼 것을 맹세합니다.’ . . . . 드워프들은 그 명성이 헛되지 않게 굉장한 속도로 무너진 굉도를 복구시켰고, 유신과 이자벨은 겨우 이틀째 새벽 즘에는 구출될 수 있었다. 광산은 정상화 되었고, 헤카이론 마을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마에스트로 둔켈은 이자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미스릴로 만든 최강의 검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자벨 공주가 드래곤 슬레이어 유신과 사랑의 도피를 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 즈음, 유신과 이자벨은 무사히 왕궁으로 돌아왔고, 그들과 함께 온 드워프의 대표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알려지며 이런 오해는 풀렸다. 덕분에 흄에서 탈출한 기사가 죽은 사건 때 드워프들과 마법사들의 싸움으로 서먹해졌던 인간과 드워프간의 사이도 다시 좋아졌다. 그리고 이번 일에는 이자벨도 껴 있었기 때문에, 공주의 영웅적 행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사건은 더욱 부풀려져서 필요 이상으로 널리 퍼졌다. 공주에게 흑심을 품은 것이 아니냐며 유신의 입지를 줄이기 위해 제멋대로 떠들어대던 귀족들도, 이런 분위기에서 더 이상 떠들 수가 없었다. 만약 정말로 유신과 공주사이에 염문설이라도 났다가는 공주의 열렬한 추종자인 로열가드들뿐만 아니라 유신을 따르는 수많은 젊은 기사들이나 견습기사들도 적으로 돌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자벨도 불만이 많은 귀족들을 달래기 위해 직접 연회를 마련하고, 미스릴광산의 중요성에서부터 시작해서 드워프들의 동맹을 공고히 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논리 정연하게 이야기며 귀족들을 설득했다. 그것을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선 것이고, 유신은 그런 그녀를 보좌한 것이라고 하여 자연스럽게 불만에 쌓여 있는 귀족들의 입을 막았다. 그런 덕분에 위험한 곳에 공주를 데려간 유신에 대한 처벌도 근신정도의 가벼운 선에서 마무리 되었다. 물론 근신은 형식적인 것이었고, 드워프들의 미스릴 광산을 구하고, 공주를 호위하여 무사히 왕궁으로 복귀시킨 공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근신이 풀린 후에는 여러 가지 포상이 내려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몇 가지 잡음이 더 있었지만, 그것은 한달 정도 지나고 나자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명성에 가려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이로서 드워프들과 인간의 연합군은 천공의 기사 유신을 중심으로 더욱 공고해져 갔다. 제 5 장 작은추억 1화 한 달간의 근신을 마친 유신, 드디어 자유를 되찾았다. “하~암~”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머리맡에 있는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한잔 마시고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멍한 정신을 수습했다.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도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하긴, 왕궁의 구석에 있는 내 집이 평화롭지 않으면 그것은 정말 큰일이지.’ 부지런한 그의 아침은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시작되기 때문에 해는 아직도 그 커다란 얼굴을 내밀고 있지 않았다. ‘노인이라 잠이 적은 것이다.’ 미스티는 쓸데없는 말을 했다가 유신의 무력이 이미 자신을 훨씬 상회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녕, 미키, 너도 잘 잤니? 미니?” 유신은 그의 침대 반대편의 커다란 침대 위에 놓여져 있는 두개의 코쿤을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아직 깨어날 기미를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쿵쿵’ 심장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껍질을 깨고 나올지는 짐작도 할 수 없지만, 멀지 않은 시일에 나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릴지 안 들릴지조차 모르지만, 유신은 이렇게 말도 걸어주고 두드려 주거나 쓰다듬어 주는 것이다. 그는 요 한 달간 단지 조용히 명상을 하거나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계획을 세웠을 뿐, 육체적인 수련은 전혀 하지 않았다. 호문크루스와의 싸움에서 무엇인가 깨달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마법계에서 상대가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고 방심했다가 호문크루스에게 혼났었다. 성계대전 내내 늘 불리한 싸움을 강요받아온 그였기 때문에 항상 최소의 힘으로 최대의 성과를 내는 싸움방식을 택해 왔었다. 그것이 진정한 유신의 힘이었고, 무서운 점이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마법계에 와서는 물질계에서에 비하면 최악의 상황은 없었다. 그러니 봉인이 3개풀리고 나서는 뭐든 힘으로 밀어 붙이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이 들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덕분에 별것도 아닌 호문크루스와의 싸움에서 고전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신은 명상을 하면서 지금 그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률적인 전투가 무엇일지 고민했고, 어떻게 하면 그 힘을 적절히 다룰 수 있을지, 그리고 봉인이 풀린 그의 힘이 정확하게는 어느 만큼인지를 연구했다. 한달이라는 시간은 자신의 힘과 그것을 가장 적절하게 쓰는 전투방식에 대해 충분히 생각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봉인이 3개풀린 상태에서의 최고의 파괴력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강대한 미스티조차 상대가 안될 만큼. 유신은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근신도 풀렸으니 오늘쯤엔 니케의 날개도 풀어줄 겸, 함께 견습기사들을 봐 주러 갈 생각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두 엘프는 아마도 아직까지는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엘프들은 무슨 꿈을 꿀까? 오색 찬연한 꽃밭에서 나비와 춤을 추는 꿈을 꿀까?’ 잠시 그런 모습을 상상해 보았지만, 자신의 빈곤한 상상력에 가슴이 아플 뿐이다. ‘뭐, 사람이 뭐든 다 잘할 수는 없지.’ 애써 자신을 위로하며 주방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자랑스런 기분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그렇다! 이 놀라운 발명품을 보라! 이것은 유신이 생각해 낸 것이다. 우선 네모난 상자의 천정에 정령석을 매달아 둔다. 그리고 빙설의 정령들이 좋아하는 마법의 노래를 엘리시엘과 세라피가 부른 후, 그것을 마법으로 저장하여 영구적으로 반복하도록 해 놓은 것이다. 덕분에 이 노래에 이끌린 빙설의 정령들은 그 주변에 바글바글 모여 들었고, 꽤 쓸만한 냉장고가 완성되었다. 처음에는 냉장고의 효용을 이해하지 못했던 세라피와 엘리시엘이었지만, 유신이 우유와 꿀, 생과일을 이용해 만들어준 아이스크림을 먹어 본 후로는 한동안 냉장고를 붙잡고 살았다. 그녀들은 단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족을 못 쓴다. 처음 냉장고를 만든 이유는 아침에 먹을 간단한 요리를 밤에 미리 만들어 뒀다가 아침에 부담 없이 먹기 위해서였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완전히 아이스크림으로 가득 차버렸다. 잠시 한심한 기분으로 냉장고를 바라보던 유신은 포기하고 냉장고를 닫았다. 하지만 두 엘프아가씨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와 버린다. 엘리시엘은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면 얼굴가득 웃음을 짓고 고개를 흔들거나 발을 구르는 등 어쩔 줄을 몰라 할 정도로 좋아한다. 한입 베어 물기라도 하면 눈을 꼭 감고는, 발까지 동동 구른다. 이 모습이 참을 수 없이 귀여운 것이다. 반면 세라피는 입 안에 든 그 달콤한 맛을 음미하며 눈을 반쯤 뜨고는 완전히 멍한 표정이 되어 버린다. 아이스크림이 정말로 그녀 마음에 들 정도로 맛있게 되면, 그 맛에 취해 깊은 신음소리 같은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평상시의 단정한 그녀답지 않게 ‘퇴폐적이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굉장히 요염해져 버리기 때문에 만약 집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이것을 먹었다가는 난리가 날 것이다. 그 증상이 마약 먹은 인간하고 비슷했기에, 유신은 혹시 엘프들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정도다. 평소 답답해 보일만치 느리고 느긋한 두 아가씨였지만, 아이스크림 만드는 일에는 항상 열심히였고, 덕분에 냉장고는 늘 아이스크림이 가득했다. 이제 제법 그 종류도 다양해져서 입맛대로 골라 먹을 수도 있었고, 나름대로 1급 아이스크림 전문 요리사라고 해도 좋을 정도가 되었다. 유신은 마침내 선반 위에 있던 길죽한 보리빵을 발견하고 쾌재를 부르며 엘리시엘이 가져온 엘핀서스 특제의 꿀을 발랐다. “응? 이게 뭐지?” 제 5 장 작은추억 2화 막 행복한 기분으로 보리빵을 베어 무려 던 유신의 초감각에 집 밖에 이상하리만치 많은 사람이 서성되는 것이 감지되었다. ‘그러니까 성에서 가장 평화로워야 하는 내 집 앞이 소란스러운 이유가 뭐냐고...’ 먹고 나갈까를 생각해 봤지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일어섰다. ‘좀 있다가 오면 꿀이 빵 깊숙히 까지 배어들어 더 맛있겠지...’ 유신은 애써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며 아쉽게 빵을 한번 바라보고는 집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문 밖에 나서고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 “일동 차렷!” 어느새 그의 집 앞에는 수많은 견습기사들과 그의 밑에서 교육을 받았던 정기사 1기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에??” 일사분란하게 유신의 집 앞에서 일렬로 늘어선 그들은 검을 머리위로 높이 들었다. “축하드립니다! 유신경!!” 미스티가 그들의 대표로 나와 인사를 하자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와아!!!!!” 왕궁의 매우 후미진 곳에 있는 별궁이라고는 해도, 아직 이른 새벽이었으니 이 소란 덕분에 잠을 깬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근신 처분이 끝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요.” 무슨 일인지 어리벙벙하게 있는 그에게 세라피와 엘리시엘이 각각 뺨에 키스해 주는 것으로 환호는 절정에 놀랐다. “와아!!!” 새빨개진 그의 뺨을 보며 사방에서 야유와 부러움에 가득 찬 감탄사가 날아들었다. “삐익, 삐이익” “모두들 정말 고맙기는 한데... 근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아무리 근신 명령이라고는 해도 두문불출 방에만 처박혀서 있었다면서요? 저 아릿따운 두 엘프들이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요.” 유신은 명상하느라 두문불출 한 것이었지만, 세라피와 엘리시엘은 유신이 의기소침해져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하...하하... 그런건 아닌데...” 두 엘프가 유신을 걱정하느라 마음고생 했다는 것을 알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비록 유신이 둔하기는 해도, 인간이 아닌 엘프가 인간인 유신이 모르도록 세밀한 베려를 하여 걱정하고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게 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선생님, 그러니까 오늘은 모두 축하 파티겸 어디 놀러 가요. 그렇지 애들아? 오늘은 놀자!!” “와아!!!!!!” 사실은 이게 목적이었을 것이다. 미스티에게 죽을 만치 괴로운 훈련을 받아온 견습기사들에겐 눈치 보지 않고 당당히 ‘놀 거리’가 생긴 것이다. 생각같아선 모두 볼기짝을 때려 준 후 훈련장으로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미스티도 함께였고, 신시아와 세이람을 비롯한 1기 멤버들도 와 있으니 그럴 수는 없다. 군대에서 사기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고, 만약 이런 자리에서 미스티나 세이람들에게 무안을 준다면 앞으로 좋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미스티도 그런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깜짝 파티를 준비한 것이다. “하아... 그래. 그럼 오늘은 소풍이나 가자. 전원 완전무장하고 신나는 소풍을...” “우에에에에” 그 말과 동시에 야유가 터져 나왔다. “자, 소란 피우는 것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될 것 같으니 모두 이동하자. 그런데 왕궁에 허가를 내야...” 근신처분이 풀리자마자 부대의 사사로운 이동으로 다시 시끄러운 일에 휘말리는 건 당연히 사양이다. “그건 제가 했습니다. 삼박사일간 야외기동 훈련을...” 눈치 빠른 미스티. 당연히 허가서는 미스티가 진작에 신청해 두었다. 하지만 겨우 소풍날짜 치고는 너무 길었다. “삼박사일이라고?!!” 유신은 입이 떡 벌어 졌지만, 치밀한 미스티가 아무생각 없이 이렇게 길게 소풍 날짜를 잡았을 리 없는 것이다. “으으... 좋아 나중에 확실히 설명해 줘.” 유신도 미스티를 믿었기에 별수 없이 허락하고 말았다. “물론입니다.” “참, 니케도 함께 가는 게 어떨까요? 그 녀석, 거의 한 달간 우리에만 있었으니 어쩌면 주인의 얼굴을 까먹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위험하지 않을까? 자칫... 흐음... 니케라... 좋아. 알아들었다. 데려가자.” 바로 그거다. 이미 유신의 니케와 엘리시엘의 히야누를 보고 반해버린 엘프들은 앞 다투어 그리폰과 친구가 되기를 원했다. 엘프들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한 종족이라고는 해도, 자연이나 정령과 하나가 되는 일에까지 수동적이지는 않다. 창공을 누비며 바람의 정령과 더욱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노칠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시누타나 히야누가 보여준 그 거대하고 아름다운 야수적 매력과 때때로 보여주는 너무나 귀여운 재롱, 그리고 제 주인들을 끔찍하게 위하는 모습은 엘핀서스의 순진한 엘프들을 매료시켜 버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미 엘핀서스에서는 그리폰을 친구로 사귀고 있는 엘프들이 유행처럼 번져가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인간과 엘프들이 연합군을 형성하게 되었을 때, 어떤 형태로든 그리폰을 써먹어야 한다. 이런 지형에 상관없이 적진을 정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리폰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니 적어도 공동작전을 구사하려면 기사급의 지휘관들이 그리폰을 무서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니케의 주인인 유신조차 그리폰을 인간 부대에 섞어 두는 것을 두려워했을 정도다. 당연히 연합작전을 벌이게 될 때 잡음이 많을 것이다. 지금 미리 이 괴수가 결코 적이 아님을 각인시켜두지 않는다면, 나중에 그리폰은 단지 쓸모없는 말만 축내는 식충이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제 5 장 작은추억 3화 “좋아. 그럼 미스티가 인솔해서 먼저 마르힐 산으로 출발해. 난 니케랑 뒤따라갈게. 엘리도 히야누를 부를 수 있으면 불러봐.” “응. 실피드에 내 냄새를 실어서 보내면 아마 히야누가 곳 발견할거야.” 엘리시엘도 히야누를 본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찬성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다른 견습기사의 눈에는 슬며시 공포가 떠올랐다. “에엑? 그리폰도 함께 가나요?” 유신이 니케를 데려간다고 하자 모두들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리폰이라니, 차라리 사자나 호랑이랑 함께 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왜? 설마, 다들 겁나서 그러는 거야?” 유신은 심각한 얼굴로 슬쩍 도발을 했다. “설마요! 대체 우리를 몰로 보고!! 우리는 자랑스런 하누스의 기사입니다.” 도발은 제대로 먹혀 들어가 모두들 그걸 리 없다고 난리를 피웠다. “아아... 기사란 말 앞에 견습이란 말을 빼먹었어.” 견습기사라고는 해도 이제 겨우 15~18살 정도의 애송이들이다. 유신의 도발에 넘어와 그리폰 따위는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치기를 부렸다. 어쨌든 모두들 혈기가 왕성한 나이니까 말이다. 그 모습을 보고 신시아나 세이람 같은 1기 기사들은 그만 웃어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후... 이봐 세이람, 나도 예전에 저렇게 천방지축이었어?” 신시아는 후배들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팔짱을 끼며 킥킥거렸다. 하지만 세이람의 반응은 무안할 만치 정직한 것이었다. “하아... 아무 말도 안하겠어. 왕립기사학교 최강 최악의 말썽꾸러기 신시아 커티스...” “이익” 세이람이 놀리자 신시아는 재빨리 그의 뺨을 꼬집었다. “우우우우우우... 에에에에에” 그런 다시 두 커플을 향해 질시와 시샘으로 가득 찬 야유가 쏟아졌고, 미스티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부대를 출발시켰다. “자, 잡담은 그만하고 출발하자. 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성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실례라고.” ‘같은 나이또래인데도 어쩌면 이렇게 다들까... 역시 세상이 공평하다는 것은 헛소리일까?’ 미스티는 그가 교육중인 사냥개부대를 생각하자 마음이 무거웠다. 여기 있는 아이들과 같은 나이또래이거나 더 어린 아이들이지만, 그 아이들에겐 이런 밝은 웃음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살육부대가 눈을 빛낼 때는 단지 상대방의 급소를 찾을 때 분이다.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냉정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상대를 죽일 생각만 하는 산양개부대의 광기어린 시선은 두렵다기 보다는 차라리 동정이 가는 것이었다. 물론 그 자신이 인간의 모든 감정을 버리도록 교육시켰지만,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아이들처럼 빛나는 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지휘관으로 쓰여지기 보다는 아마도 돌아올 수 없는 임무에 소모되는 소모품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직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보지도 못한 아이들의 운명이 갈리는 모습을 보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하물며 그런 인생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미스티가 인솔한 4개중대규모의 부대가 떠나가자 유신도 천천히 니케의 우리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생님! 전 그리폰 따위는 무섭지 않다고요!” 지나가는 견습기사 중 몇몇은 호기롭게 말하며 주먹을 흔들기도 했다. ‘큭, 어디 지금은 그래도 니케를 실제 보고도 그럴 수 있나 보자.’ 유신은 슬쩍 웃었지만, 어찌되었든 그리폰도 가게 되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저... 유신, 저도 태워 주세요.” 모두가 떠나간 후, 홀로 남아있던 세라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폰, 타 보고 싶으세요?” “네. 엘리야 히야누가 있지만, 저는 아직 그리폰을 사귀지 못했거든요. 헤헷, 사귀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다가가기 두려워서... 하지만 유신님이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엘핀서스에서는 유행처럼 모두가 그리폰을 타고 다니는데, 세라피는 그런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것이 어쩐지 부끄러웠다. “니케는 이자벨 공주님도 별 무리 없이 태워줬다고 하니 성격도 좋은 것 같고...” 세라피는 어쩐지 얼굴이 빨개져서 발끝만 바라보며 겨우겨우 말했다. “그렇게 하세요. 음... 하늘을 나는 것도 무척 재미있으니 분명히 색다른 경험이 될 겁니다. 우리까지는 꽤 멀지만... 함께 갈까요?” “네!!” 유신의 시원한 대답에 세라피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좋아했다. 그런 세라피를 보자 유신도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웃고 있으면 지옥의 한가운데라도 꽃이 필 것만 같았다. 미인과 함께 걷는 것은 어찌되었든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새벽안개가 걷치기 시작하며 향기로운 이슬냄새와 풀냄새가 코끝을 간지럽게 했다. 그런 분위기가 그의 옆에서 것고 있는 숙녀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것이다. 유신과 세라피는가끔 궁내를 순찰하는 경비들의 부러움에 가득 찬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니케의 우리 쪽으로 갔다. 회랑의 기둥이 이제 막 솟아오를 준비를 하는 게으른 해의 미소를 받아 길게 그림자를 내었다. 세라피의 얼굴에 한쪽에도 말할 수 없이 신비로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이 평화는 니케의 우리 근처에 도착하자 엄청난 소음과 함께 깨지고 말았다. “콰앙!! 콰앙!!” 벌써 유신이 오는 것을 아는 니케가 우리를 들이받는 소리다. “... 거...건강하네요.” 그 무시무시한 소리에 세라피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잠시 후, 밑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마침내 니케는 쇠창살로 만든 우리를 박살내고 뛰쳐나왔다. 그리고 그 덩치가 날 듯 뛰듯 사뿐한 걸음 거리로 유신에게 달려들 듯 안겼다. “꺄악” 그 흉흉한 기세에 놀란 세라피가 얼굴을 가리고 바닥에 주저 않았다. 제 5 장 작은추억 4화 용기를 낸 세라피가 살며시 눈을 뜨자 그녀의 얼굴 바로 앞에 거대한 그리폰의 부리가 있었다. “하악!!!” 덩치가 워낙 커서 유신의 어깨에 앞발을 짚고도 고개가 땅까지 쳐져 주저앉은 세라피와 얼굴을 마주한 것이다. “깍.깍.” 거기에 더해 니케가 그 큰 입을 벌리고 깍각 거리는 소리를 내자 세라피는 정말로 기절할 뻔 하였다. “휴우... 이런 일을 겪으면 인간들의 말로는 간 떨어질 뻔 했다고 하지요? 간보다는 심장이 떨어질 뻔 했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 같아요. 정말 놀랐어요.” 한참동안 숨도 못 쉬고 호흡을 다듬은 세라피가 겨우 말했다. 하지만 다리가 풀렸는지 일어서지 못하고 잠시 동안 그 자세로 그리폰과 얼굴을 마주한 채 앉아 있었다. 니케는 여전히 유신의 어깨 위에 앞발을 얹은 뻔뻔스런 자세로 고개를 길게 빼어 이리저리 돌리며 세라피를 살펴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세라피는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움츠러들면 움츠러들수록 니케의 얼굴은 더욱 다가왔다. “하하, 그렇게 두려워 할 필요 없어요. 생긴 게 험해서 그렇지, 그렇게 위험한 녀석은 아니에요.” “깍.깍” 니케는 유신의 말에 찬성이라도 하듯, 탁한 소리를 내었다. “후우... 이제 진정되었어요. 하지만 이런 생물하고 친구가 될 생각을 하다니... 엘리도 별나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정신을 차린 세라피는 가늘고 하얀 손을 뻗어 조심조심 니케의 부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줬다. 혹시 물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약간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니케는 그 손길이 좋았는지 그렁그렁 하는 소리를 내었다. “인마, 무거워. 인사 했으니까 이제 내려가라.” 유신이 밀치자 그제서야 니케는 한껏 홰를 치고는 그 거구를 유신의 어깨 위에서 내렸다. 그 엄청난 크기에 세라피는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자, 그럼 날아 볼까요? 니케 앉아.” 그 커다란 몸이 뒤뚱뒤뚱 움직여 타기 쉽도록 몸을 돌리는 모습은 어찌 보면 귀여워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어떤 맹수보다도 훨씬 두렵고 커다란 니케를 보며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니케는 우리를 깨고 나왔기 때문에 안장이 없었지만, 유신이나 세라피나 안장 따위는 없는 것이 더 편하다. “자, 그럼 앞에 태워 드릴게요.” 유신은 이자벨 때처럼 그녀를 앞에 태우려고 안아들었다. “아니요. 뒤에 탈래요. 혹시 비행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뒤에 타게 해 주세요.” ‘후아... 아무리 엘프라도 이렇게 가벼워도 되는 건가...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닐까... 이렇게 부드럽다니... 느낌 정말 좋다...’ 세라피를 안아들고 헤벌쩍 헤벌쩍 잠시 딴생각을 하던 유신은 세라피의 말에 반응하는 게 좀 늦었다. “아, 물론 뒤에 타는 것은 상관없어요. 하지만 그래선 잘 안 보일 텐데...” “후훗, 엘프는 인간처럼 눈으로 경치를 보는 데는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아요. 하늘의 바람을 느끼고 싶은 겁니다. 앞에서는 무서워서 집중하기 힘들지도 모르니까 뒤가 더 좋아요.” “흐으... 그렇군요. 좋아요. 하지만 뒤라고 해도 덜 무섭지는 않을 거예요.” 가볍게 뛰어 올라 세라피가 앉을 자리의 깃털을 골라 주었다. 별 의미 없는 행동일 테지만, 지브릴을 닮은 그녀에게 이 정도는 당연히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자, 니케 날자!” 니케는 한 달간 비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거짓말 같이 단 두 번의 날개 짓만으로 그 거체를 공중으로 띄어 올렸다. “휘휘휘휘휘휘” 니케가 떠오른 바닥에는 돌맹이가 날아다닐 만큼 엄청난 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마침내 니케는 제왕의 왕좌로 날아올랐다. 잠깐 동안 날아오른 것 같은데, 벌써 저 앞에서 이동하고 있는 기사들의 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니케, 저 위로 날자. 사냥감이 아니니까 덮치면 안돼!” “끼에엑” 니케는 유신의 명령을 듣고 고도를 낮추었다. 니케의 아래쪽에서는 큰소리 쳤던 보람도 없이 대열이 엉망이 되고 있는 견습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러니...” 하지만 미스티가 나설 것도 없이 1기 선배들의 무서운 호령으로 다시 대열이 정리되었다. 그 속에는 신시아와 세이람을 비롯해 소드마스터가 셋이나 있는 것이다. “이 자식들아, 창피하게 이럴 거야? 아까의 큰소리 친 기세는 어디로 갔어? 이 모양이면 마르힐산 정상까지 선착순 시켜 버린다!” 고함치는 신시아의 허스키하면서도 앙칼진 목소리가 귓속에 파고들었다. “고생하겠군. 저런 선배 밑이라니...” 결국 토끼뜀과 오리걸음이 시작되었고, 비로소 견습기사들은 소풍으로 포장된 유격훈련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500명에 달하는 인간들이 바글바글 땅을 기어 다니자 세라피는 그만 ‘킥’하고 작게 웃고 말았다. “어때요? 많이 무섭나요?” “아니요. 생각만큼은 아니에요. 무척 재미있어요. 모두들 그리폰을 사귀려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B&M 제 5 장 작은추억 5화 세라피는 편안한 표정으로 살며시 눈을 감은 채 가슴가득 시원한 바람을 받아들였다. “그렇단 말이지요?” 여유 있어 보이는 세라피의 모습을 보자 유신은 슬쩍 장난기가 동했다. “니케! 달려!” “께에에엑” “꺄아아악” 역시나 이자벨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흐... 흐억, 세...세라피님 저기...저기... 가... 가슴이...” 니케가 가속하자 뒤에 타고 있던 세라피는 유신의 등을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아 버린 것이다. 유신이 당황하여 굳어 버리자 니케는 계속 하라는 뜻인 줄 알고 더더욱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상승과 활강을 계속했고, 그럴수록 세라피는 사력을 다해 유신의 등을 끌어안았다. 니케도 한 달 만에 하늘을 나는 것이니 흥분할 만도 하다. “쎄에에에엑” 한동안 날뛰던 니케가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히고 나자 단숨에 고도를 높여 창공 위에서 가만히 바람 정령의 부축을 받으며 떠 있었다. 그제야 살며시 눈을 뜬 세라피는 그녀의 발아래에 펼쳐진 경치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와아... 굉장해요. 설마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녀의 작은 손바닥에 다 가려질 것 같이 보이는 하누스왕궁을 보며 완전히 감탄하고 말았다. 하지만 유신은 그녀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굉장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예...예... 정말 굉장한...” 등 뒤로 느껴지는 두개의 부드러운 감촉 때문에 튀어나올 듯 쿵쾅거리는 심장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코...코피가... ’ 다행이 코피는 나지 않았지만, 온 몸의 혈액이 머리 위로 몰려들어 그 답지 않게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유신이 무서운 번뇌에 휩싸여 있을 무렵, 세라피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하늘에 있다는 것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멋져요. 엘핀서스가 난리가 난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세라피는 기지개를 펴듯 길게 팔을 죽 펴고 바람의 정령을 온몸으로 느꼈다. 평소에도 친했던 바람의 정령들이 마치 그녀 자신과 하나가 된 것 같았다. 그날 점심시간까지 강행군을 하여 오후에는 산 중턱에 있는 구릉지에서 점심을 먹고 캠프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비록 롱소드와 캠프에 쓰는 무장이 전부였다고는 해도 산악을 행군한 것이다. 마르힐 산이 험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동속도가 꽤 빨랐기 때문에 결코 편안하지는 않았다. 모두들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며 땀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지옥 같은 전투훈련에 비하면 훨씬 즐거웠기 때문에 어쨌든 즐거워 보였다. “세라피님, 우리도 점심 먹으러 내려가요. 그 다음에 다시 놀던가 해요. 니케도 배가 고플 것 같고...” 세라피는 니케의 넓은 등판이 마음에 들었는지, 좀체 지상으로 내려가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가 고프면 꼼짝 못하는 유신은 세라피를 설득하여 그리폰의 고도를 낮추었다. “의샤, 꽉 잡아요.” 니케가 지상에서 5미터 정도의 높이까지 내려가자 유신은 세라피의 종아리와 등을 받쳐 들고는 그대로 뛰어 내렸다. “꺄악” 세라피가 작게 비명을 질렀지만, 몸부림치거나 반항하지는 않아서 별 문제 없이 내려 설 수 있었다. “우우우우우” 내려서기가 무섭게 당연하다는 듯 야유가 쏟아졌다. “시끄러워, 이 자식들아.” 유신은 그렇지 않아도 방금 전의 일로 적잖이 당황했는데, 견습기사들까지 놀리자 사납게 노려봐 주었다. “니케, 너도 가서 밥 먹고 와. 그리고 사냥 끝나면 다시 이리로 돌아와.” 다행이 저 괴물딱지같은 생명체가 하늘을 배회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유는 오래 가지 않았다. “께에엑” 또 어느 불쌍한 야생말 한 마리가 희생당하겠지만, 세상은 다 그런 것이다. 점심 준비가 끝났을 무렵 엘리시엘의 히야누가 나타났다. 니케보다 더 커다란 히야누의 출현으로 다시 소동이 있었지만, 유신을 비롯한 쟁쟁한 선배들 덕분에 소동은 금세 가라앉았다. 히야누는 무장한 인간들이 많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목의 깃털을 부풀려 커다란 덩치를 더 커보이게 만들었다. “어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충분히 커 보인다고. 그나저나 연합작전을 위해선 인간만 그리폰에 익숙해 져야 하는 게 아니라 그리폰도 인간에게 익숙해 져야겠군.” 결국 그날부터 3일간 엘핀서스 근처에 있던 그리폰과 그리폰라이더인 엘프들을 다 끌어 모아서 인간과의 연합 훈련이 시작되었다. 훈련이라고는 해도 단지 그리폰라이더의 뒤에 타서 하늘을 날아 보는 것뿐이다. 그리폰의 등 뒤에 직접 타 봄으로서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야를 익히고, 어떻게 하면 그리폰과의 공조 효과를 극대화 시키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견습기사들은 처음에는 덜덜 떨면서 죽는 심정으로 그리폰 등 뒤에 탔지만, 한두 번 비행하고 나자 서로 타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어린 만큼 뭐든 빨리 배우고, 도전정신 또한 강한 것이다. 성과는 만족 할만 했고, 그리폰과 인간은 적어도 서로를 경계하지는 않게 되었다. B&M 제 5 장 도적길드1화 늦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9월, 유신은 다시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유신의 침대 위에는 커다란 여행 가방이 하나 있었고, 이제 막 챙기기 시작한 여행용 짐들이 방바닥 여기저기에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다. 결코 작은 방이 아니었지만, 그런 짐들과 방 한쪽에 서 있는 흉측한 강철의 기사 때문에 방 안은 발딛을 틈도 없어 꽉 차보였다. “꼭 엘카드라인 왕국까지 가야 하나요? 하누스에도 우수한 마법사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세라피님이나 엘리시엘님도 대단한 마법사고...” 또다시 주인이 그의 곁을 떠난다는 말에 미스티는 완전히 풀이 죽고 말았다. 혼자서 애송이 견습기사들과 뒹구를 생각을 하니 우울해 지는 것이 당연하다. “아니, 인간은 인간에게 배워야 해. 특히 나 같은 경우는... 마나는 강제로 지배할 수 있지만, 마법의 구동 법칙을 모르는 거잖아. 그런 건 엘프보다 인간 마법사에게 속성으로 배우는 게 빨라. 엘프의 방식으로 배웠다간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고.” 자연의 마나를 다루는 법은 인간 마법사 보다는 엘프에게 배우는 것이 정확하겠지만, 드래곤 이상의 마나강제지배력이 있는 유신에겐 마나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그보다는 마법을 구동시키는 이론을 배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무리 그래도 우수한 마법사가 이렇게 많은데...” 미스티도 알고는 있었지만, 또다시 혼자서 멀리 가버린다는 말에 쉽게 포기하지 않고 졸랐다. “알아. 그리고 다른 나라도 돌아다니면서 각국의 문화를 느낄 필요가 있다고. 어차피 흄과의 일전은 라일로스 전 대륙의 총력전이 될 테니까, 다른 나라의 문화도 대략은 알아야 제대로 된 작전 수립이 가능하다고.” “거기까지 바라보고 계시다면야 할말 없지만...” 이렇게까지 얘기하면 유신의 그림자인 미스티는 주인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래. 엘카드라인으로 가는 길에 드워프왕국에도 들려야 할 일이 있으니 서둘러야겠다.” “그럼 이것을 가지고 가세요.” 미스티가 내민 것은 둥그런 공 모양의 주먹만한 금속이었다. “어, 이것은...” “저랑 통신이 되는 장비입니다.” 미스티가 금속구의 덮개를 벗겨내고 몇 가지 버튼을 누르자 그것은 하늘로 날아올라 유신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제 예비부품하고 물질계에서 가지고 왔던 것 장비 중에 별로 쓰지 않는 것들을 긁어모아 만든 것입니다. 최소한 통신이라도 돼야 덜 답답할 것 같아서요.” 미스티는 녹색의 광구가 우울한 빛을 내며 쳐져 있는 딱한 모습이 되어 버렸다. “정말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좀 어지럽지 않아? 이렇게 날아다니면...” 그러자 구체는 얌전히 유신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런데 어떤 원리야?” 유신은 그런 구체가 신기하다는 듯 이리저리 주물럭거리며 물었다. “어차피 설명해도 모를 거잖아요.” “......” “그냥 좀 작은 크기의 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차피 저걸 컨트롤 하고 있는 것도 제가 직접 하고 있고, 센서를 통해 저 구체가 보는 것은 제가 보고 있으니까요.” 이런 원리라면 완전히 몸을 두개로 가르는 것과 똑 같다. 몸의 한쪽은 하누스에서 견습기사들을 가르치고, 또 한쪽은 유신을 따라다니면서 보좌 한다는 뜻이다. “그럼 항상 두개의 완전히 다른 경치를 보며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판단을 해야 한다는 뜻이잖아? 어지럽지 않아? 그런 게 가능한가?” “전 생물이 아닙니다.” “마자. 그랬지. 유사생체인공지능이란 무섭군.” 유신은 신기하다는 듯 그 구체를 들여다보았다. “흐음... 좋아. 진작 만들지 그랬냐? 편한 물건이네.” 유신은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미스티는 웃을 수 없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바빴는데 그런 말을!! 견습기사들의 훈련은 전부 맡겨 놓고, 사냥개 훈련도, 화랑들의 교육도 전부 제게 맡겼잖아요! 낮에는 견습기사들 상대하고 밤에는 화랑부대나 사냥개 부대를 상대해야 하는 제 입장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 겁니까? 아무리 기계라 해도 가끔은 쉬게 해 줘야 망가지지 않고 오래 쓸 수 있는 법인데 저처럼 예민한...” 미스티는 완전히 흥분해 버려서 그동안의 쌓아둔 한을 전부 토해 내겠다는 듯 왁왁거리며 짖어대었다. “미안.” 유신의 성의 없는 대답에 미스티는 발작상태가 되어 달려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때마침 엘리시엘이 들어왔다. “유신, 마법학교에 입학했다며?” 그녀의 목소리에는 가는 떨림이 묻어 있었지만 미스티와 실랑이를 벌이던 유신은 눈치 채지 못했다. “응. 새 학기가 9월 말부터니까 가 보려고.” 유신은 미스티를 피해 슬쩍 엘리시엘의 뒤에 숨었다. “왜?! 하누스에서 배우지 않고? 아니면 나나 세라피 언니에게 배워도 되고...” “아아... 이제 하누스에도 오래 있었으니까 다른 곳도 가보고 싶어. “... 싫증 난거야?” 세라피와 자기가 싫증난 것이 아니냐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유신은 그 안에 깔린 그런 뜻을 읽지 못했다. “실증이라니. 무슨 말이야. 하누스는 좋은 곳이지만, 마법만큼은 꼭 다른 나라에서 배우고 싶어.” “왜? 나도 이해할 수 있게 이유를 가르쳐 줘.” 역시나 유신이 알아듣지 못하자 엘리시엘이 발끈하며 물었다. “제일 큰 이유는 하누스에서는 내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거지. 난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야. 되도록이면 조용히 집중해서 마법을 배우고 싶어. 하지만 여기서는 자잘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서 집중하고 마법을 배울 수 없거든.” 제 5 장 도적길드2화 한동안 유신을 바라보던 엘리시엘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바닥을 쳤다. “그래!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엘핀서스로 가자. 거기만큼 조용하고 마법을 배우기에 좋은 곳이 어디 있어?” 물론 유신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식 마법학교에서 제대로 배우는 것에 비하면 늦을 것 같았기에 찬성할 수가 없었다. “안돼. 그것 말고도 헤카이론 광산에 다시 가봐야 할 일이 있거든. 도둑길드란 것이 있는데, 여기서 정보를 얻어야 해. 헤카이론 광산에 있는 하프엘프에게 물어보면 뭔가 알 수 있을 거야. 도둑길드에서 잡혀서 헤카이론 광산의 술집으로 팔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 “그건 니케를 타고 다녀오면 금방이잖아.” “응. 하지만 어쩌면 도둑길드하고 한판 붙을지도 몰라. 게다가 드워프 왕국에도 가볼 일이 있어.” “거긴 또 왜?” “배 때문이야.” “배라고? 대체 뭐가 그렇게 바쁜 거야?” “어차피 흄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어. 수비야 마법사들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해왔지만, 공격하려면 아무래도 배가 있어야지. 인간이 만든 배로는 제대로 된 상륙전을 감행할 수 없다고. 드워프들이 만든 배가 필요해.” “전...쟁?” “그래. 배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지.” “......” 전쟁이라는 말에 엘리시엘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난 잘 모르겠어. 전쟁이라니... 그럼 세라피 언니한테는 뭐라고 하고 떠날 거야?” “... 그... 글쎄? 뭐라고 하면 좋을까?” “... 바보!!” 마침내 엘리시엘은 고함을 지르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뭐...뭐지?” “... 바보라는데요?” “......” 엘리시엘은 그길로 이자벨에게 뛰어갔다. 고집이 센 이자벨이라면 유신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신이 없다면 엘리시엘이나 세라피나 하누스에 머무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엘리시엘은 로열가드들에게 이자벨이 그녀의 전용 비무장에서 검술 연습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이자벨은 천천히 검을 움직이며 유신에게 배웠던 검술 중 몇 가지를 연습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치 아름답고 완만한 춤처럼 천천히 움직이던 롱소드가 점점 속도가 더해지며 번쩍거리는 검광이 비무장을 가득 메웠다. 단순히 좌우를 훑던 검이 기묘한 곡선을 그리며 초식을 변화시키자 공주의 검술을 지도해주고 있던 로열가드들도 그 날카로운 검 끝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아니, 그보다도 로열가드들은 그 황홀한 춤에 모두 넋이 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검무의 끝은 볼 수가 없었다. 엘리시엘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이자벨! 이자벨! 유신이 엘카드리안 왕국의 마법학교에 입학한데. 이자벨이 가서 말려봐.” 공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엘리시엘 때문에 잠시 로열가드들은 눈썹을 찌푸렸지만, 공주가 그녀를 특별한 친구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어린 엘프라고는 해도, 로열가드들의 할머니보다도 나이가 많은 것이다. “응? 왜?” 검을 회수하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은 이자벨이 천천히 엘리시엘을 돌아보았다. “왜라니? 마법은 이곳에서도 배울 수 있고, 나나 세라피 언니가 가르쳐 줘도...” “하지만 유신 경은 엘카드리안으로 가서 배워야 한다고 했어. 그래서 추천서를 써준 것도 나고.” “뭐라...고?” “어찌되었든 난 유신 경을 믿어. 유신 경이 왜 엘카드리안까지 가서 마법을 배워야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유신 경이 그곳에 가서 배워야 한다면 그래야 되는 거겠지.” 물론 이자벨도 유신이 하누스를 떠나는 것이 마음에 들 리 없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유신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기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바보!!” 엘리시엘은 그녀가 할 줄 아는 최고로 심한 욕을 하루에 무려 두 번이나 했다. “이잇, 저게...” 이자벨이 화냈을 때는 이미 엘리시엘은 바람같이 사라진 후였다. ‘후우... 아무도 없네... 세라피 언니는 이럴때 어딜 간 거야... 미스티님에게 부탁해도 소용없겠지?’ 결국 엘리시엘은 풀죽은 얼굴로 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신의 이 계획은 전혀 뜻밖의 일로 늦추어 지고 말았다. “응? 이게 뭐지?” 집 안은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두근두근 하는 생명체의 심장 뛰는 소리가 집안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놀란 엘리시엘은 소리가 들리고 있는 유신의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아!!” 유신이 주워온 호문크루스의 코쿤이 깨어나려고 하는지, 코쿤 전체가 환한 빛을 내며 쿵쿵 심장 뛰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침대 위에 놓여있는 두개의 코쿤에서 나는 황금색의 빛은 사람이건 벽이건 그냥 투과해서 그림자를 만들지 않았다. 영혼이 내는 빛이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유신과 미스티, 그리고 엘리시엘이 그토록 찾아다니던 세라피도 있었다. 그림자가 생기지 않아 기이한 모습이었지만, 모두들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와! 이 아이들, 이제 일어나는 거야? 대체 어떤 아이들이 나올까?” 동생이 없었던 엘리시엘은 그녀 이후로 엘프가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처음 보는 그녀는 완전히 흥분해 버렸다. “글쎄... 혹시 위험한 녀석들이 나오면 큰일인데...” 유신은 이 호문크루스들과 싸워봤기 때문에 이 녀석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다. 호문크루스 둘이면 미스티도 버거운 전력인 것이다. 제 5 장 도적길드3화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이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포근하고 따듯한 것이에요. 아마 착한 아이들이 태어날 거예요.” 평소 늘 차분하고 침착한 세라피 조차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흩어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이스크림을 먹을때를 제외하고는 없는 것 같았다. 세라피는 마치 자기의 아이라도 되는 양, 두개의 코쿤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마침내 빛이 점점 사라지며 코쿤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는 이미 깨어난 호문크루스가 움직이는 것인지 코쿤의 껍질이 움찔거렸다. “와아아아, 이제 나오나 봐요!” 하지만 모두의 기대와는 다르게 아직 호문크루스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우적우적, 쩝쩝쩝” 대신 안에서부터 코쿤을 갉아먹어가며 나오는 것인지, 무언가를 뜯어 먹는 소리가 꽤나 시끄럽게 들렸다. 뭔가 아름답고 신비로운 생명의 탄생을 기대했던 유신이나 미스티에게는 이런 소란스런 모습은 대단히 실망스런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생명에 대해 차별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은 세라피와 엘리시엘은 여전히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코쿤 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코쿤의 중앙 부분에서 손 하나가 쑥 올라왔다. 온통 퍼런 핏줄이 곤두선 흉측스런 손이었다. “솔직히... 예쁘게 생긴 손이라고는 농담이라도 할 수 없는 모습이군요.” 미스티는 신기하다는 듯,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그 손을 살펴보았다. 그의 센서를 이용해 호문크루스의 상태를 분석하는 것이다. 손톱은 끝이 말려있을 정도로 길게 자라 있었고, 죽어가는 지네를 형상화 해놓은 것 같은 마법문자의 마킹은 지워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미스티님은 저쪽에 가 있어요. 새로 태어나는 아기에게는 좋지 않아요.” 세라피는 냉정한 말을 하며 미스티를 밀어냈다. 그 무섭게 생긴 모습이라면 평범한 아기에게는 틀림없이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스티는 그만 의기소침한 얼굴로 저만큼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유신님도 가서 손 씻고 와요. 새로 태어나는 아이에게는 청결히 대해야 한다고요!” “응...” 세라피는 유신까지도 쫒차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유신이 부랴부랴 손을 씻고 돌아왔을 때, 마침내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우직, 우직” 마침내 코쿤이 깨지면서 두 호문크루스가 나왔다. “우와아아아” 결코 아름다운 것을 봤을 때의 감탄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괴물을 봤을 때 지르는 비명에 가까웠다. 쭈글쭈글한 몸, 그리고 그 주름을 따라 흐르는 녹색의 끈끈하고 기분 나빠 보이는 액체. 아직 눈조차 뜨지 못한 주제에 갈쿠리 같은 손톱이 달려있는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끝내주는군요.” 미스티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세라피는 이 흉측한 괴물들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꼭 끌어안아 주었다. 엘리시엘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수건으로 정성껏 두 호문크루스의 몸을 닦아 주었다. “꾸륵꾸륵” 호문크루스들은 기이한 소리를 내면서 강아지가 몸을 핥아주는 어미에게 기대듯 두 엘프에게 몸을 맡겼다. “유신, 멍하니 보고 있지 말고 가서 수건이라도 빨아와!” 엘리시엘의 말에 유신은 엉겁결에 수건을 들고 방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미스티도 뒤따라 나갔다. 우주 최강의 군대를 이끌던 장군과 물질계 초마도과학의 결정체인 메탈퍼펫은 수건이나 빠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휴우... ” 유신이나 미스티나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수건을 빨아서 다시 방으로 돌아갔을 때는 호문크루스는 침대에 앉아 있었고, 두 엘프는 호문크루스의 머리에 엉켜있는 녹색의 액체들을 닦아주고 있었다. 호문크루스들이 살기를 내뿜고 있지는 않지만, 워낙 흉측한 생김새라 세라피와 엘리시엘이 걱정되었다. 저 날카로운 손톱을 한번 휘젓기만 하면 엘프의 가는 허리정도는 일격에 절단날 것이기 때문이다. ‘생긴 걸로 판단해서는 안 되지. 난 페어리퀸과도 약속했으니까, 이 아이들을 끝까지 잘 돌봐주어야 해.’ 유신이 마음을 다잡고 다가가자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던 호문크루스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결코 호의적이지는 않은 반응이었다. 그 둘은 잘 움직이지도 않는 몸으로 되도록이면 유신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발버둥 쳤다. 새로 태어나면서 기억은 완전히 잃은 것 같아 보였지만, 유신과의 싸움에서 몸에 각인되었던 본능적인 공포는 남아있는 모양이다. “푸후욱, 푸후욱”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침대 반대편으로 움직이기 위해 팔을 휘젖자 그 날카로운 손톱에 걸린 침대 시트가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어졌다. “이런...” 유신은 더 다가가지 못하고 멈췄다. “괜찮아. 괜찮아. 널 해치지 않아. 그러니 이리오렴...” 세라피는 그 무시무시한 위력의 손톱을 보았으면서도 겁내지 않고 다가갔다. “파앗” 하지만 호문크루스가 무심코 휘두른 손톱에 팔뚝이 길게 찢어지고 말았다.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자 호문크루스는 더욱 흥분해서 날뛰려고 하였다. ‘이거, 위험하군.’ 유신이 나서려고 했지만, 세라피는 손을 들어 유신을 저지했다. 자칫 그녀가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유신은 무시하고 호문크루스를 상대하려 했다. 하지만 세라피의 모습에서는 저 유신조차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성스러운 기상이 엿보였다. 유신은 완전히 굳어버리고 말았다. 지금의 그녀에게서는 가브리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제 5 장 도적길드4화 ‘이... 이게 대체...’ 엘리시엘이나 미스티는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지만 두 호문크루스를 달래고 있는 것은 세라피라고 하기에는 성스러운 기운이 터무니없이 강했다. ‘그...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유신의 눈에는 세라피의 등 뒤로 비추는 영격체 특유의 찬란한 후광이 똑똑히 보였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지브릴의 후광인지, 아니면 세라피 자신의 후광인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흥분해서 씩씩거리던 호문크루스도 그 범접할 수 없는 후광을 느낀 것인지, 세라피에게 완전히 압도되어 서서히 조용해 졌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녀의 품으로 파고 들어갔다. “언니, 괜찮아요?” 엘리시엘은 피가 흐르는 세라피의 팔이 걱정스럽다는 듯, 붕대로 감아주기 위해 세라피의 팔을 들었다. “왜 애들을 겁주고 그래? 언니가 다쳤잖아!” 아직 안정되지 않은 호문크루스에게 다가간 것은 틀림없이 유신의 잘못이니 할말이 있을 리 없다. “어? 미... 미안...” 완전히 정신이 빠져버린 유신은 얼결에 아무렇게나 대답하고 말았다. 호무크루스야 어찌되었든,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유신은 세라피와 가브리엘이 겹쳐서 보이기 시작하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괜찮아 엘리. 나 아무렇지도 않아.” 세라피는 환한 얼굴로 상처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녀의 품에 안겨있는 두 호문크루스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호문크루스들도 꿈틀꿈틀 움직이며 세라피의 팔에 난 상처를 정성껏 핥아 주었다. “하하 간지러워. 착한 아이구나.” 성녀란 이런 모습일 것이다. 추하고 약하고 난폭하고 비참한 존재를 위해 희생하는... “괜찮을까요? 혹시 독이라도 들어 있는 건...” 미스티는 두꺼비 같이 흉측한 호문크루스의 외모로 보건대 당장 입에서 독거품이라도 부글부글 뿜어져 나올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잠시 동안 호문크루스들이 핥아주자 놀랍게도 세라피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엘리시엘은 놀랍다는 듯, 세라피의 상처를 확인했다. 그렇게 길게 찢어져 있었는데, 다친 적이 언제였냐는 듯, 자그마한 흉터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낳아 있었다. “어쨌든 본체는 요정이니까. 요정의 가루는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지. 아마도 그 효과인 것 같은데...” 혹시라도 가브리엘의 힘일지도 모르지만, 유신은 그렇게 생각하기 싫었다. 이제 세라피는 완전히 평소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지만, 방금 전의 모습은 도저히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설마... 지브릴님이 마법계에 직접 강림하지는 않겠지...’ 설마 그럴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방금전의 모습이 마음에 걸려 자꾸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자, 이리오렴...” 호문크루스들이 조금 안정된 것 같아 보이자, 유신은 다가가는 대신 오도록 불렀다. 아무리 호문크루스들이 방금 태어났다고는 해도, 이 안에 있는 존재들 중 유신이 가장 강하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직 육체에 남아있는 유신에 대한 공포로 벌벌 떨고는 있었지만,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비척비척 가까이 왔다. “뭘 그리 무서워하는 게냐? 내 목소리를 잘 들어 보라고. 너희들이 코쿤 속에 잠들어 있을 때 이런 저런 이야기도 많이 했잖아? 쓰다듬어 주기도 했고...” 유신이 점잖게 말을 걸어주자 호문크루스도 기억이 난다는 듯, 비로소 유신에게 아양을 부리기 시작했다. “흐음... 무슨 애완동물 같군요.” 비록 호문크루스가 생긴 건 흉악했지만, 하는 짓이 귀여워 보여서 미스티도 슬슬 다가갔다. “카악” 하지만 아무리 호의적으로 생각해봐도 미스티는 너무너무 무시무시하게 생겼다. 덩치도 두 호문크루스를 합쳐 논 것보다도 크기 때문에 경계를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미스티는 세라피를 흉내내서 호문크루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호문크루스는 매몰차게 그 손을 쳐냈다. “이...이게!!” 화가 난 미스티가 눈을 부릅뜨자 당장 난리가 났다. “바보!! 대체 아이에게 뭘 하는 거예요!!” 엘리시엘은 일년에 한번 할까 말까한 가장 심한 욕을 하루에 세 번이나 했다. “미스티님 실망했어요... 설마 그런 분이실 줄은...” 세라피는 긴 귀를 축 늘어뜨리고 눈물까지 글썽글썽하며 미스티를 책망했다. “적당히 하지 그래? 아니면 그런 취미가 있는 거야?” 유신은 빈정거리며 약올렸다. “...모... 모두들 정말 너무해!” 미스티는 세상에 어울릴 수 없는 우울한 유령처럼 방 한쪽 구석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궁상까지 떨 필요는 뭐가 있냐?” 결국 유신은 호문크루스중 하나를 번쩍 들어 미스티의 품에 안겨 줬다. 호문크루스는 버둥거렸지만, 일단 잡힌 상태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미스티도 비로소 만족스런 표정으로 호문크루스를 안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얼럴럴럴럴러” 의외로 미스티는 애기 다루는 재주도 있는 것인지, 호문크루스를 안고 이리저리 얼렀다. “잠시만 들고 있어봐.” 유신은 미스티가 호문크루스를 들고 있는 동안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첨예를 뽑아들었다. “스르릉” 시원한 소리가 나며 첨예가 검고 날씬한 몸매를 뽐내자 이 검에 호되게 당한 적이 있는 두 호문크루스는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에? 유신? 뭐하려고?” 엘리시엘이 놀라서 물어보았지만, 유신은 별 표정 없이 호문크루스에게 다가갔다. “손톱 깍아주게...” 제 5 장 도적길드5화 호문크루스가 태어나는 바람에 유신 굉장히 바쁘게 되었다. 새 학기는 9월 말에 시작하는데, 헤카이론 광산에 갔다가 드워프 왕국에 갔다가 학교로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빠듯했다. 아무리 니케가 있다고 해도, 일이 일사천리로 잘 해결되지 않으면 시간 내에 못 댈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페어리퀸에게 그가 호문크루스를 돌봐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당분간은 곁에 있어줘야 할 것 같았다. “유신, 유신, 이리와라. 저녁밥 먹어라. 세라피님이 부른다.” 갓 태어났을 때는 쭈글쭈글 그렇게 흉측하게 생겼던 호문크루스들은 이틀정도 지나고 나자 주름이 펴지고, 골격이 조금씩 잡혀 가면서 몰라보게 예뻐져 버렸다. 아직 푸르게 보이는 핏줄이 비쳐 보이는 지나치게 투명한 피부나 제자리를 찾지 못한 불완전한 골격 때문에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제 곳 굉장한 미인이 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언어구사능력이 많이 미흡해서 짧게 밖에 말하지 못할뿐더러 저렇게 반말과 존대말을 아무렇게나 섞어서 쓰는 것이다. 지금 유신을 불러대고 있는 것은 페르소나다. 퉁퉁 불어있던 몸의 부기가 빠지면서 제법 아름다운 몸매가 되어 있었고, 코쿤 상태에서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는지 보라색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종아리까지 흘러내려와 있었다. “빨리 와라! 나 배고파.” 페이욘도 그렇지만 페르소나는 특히 유신을 굉장히 무서워하기 때문에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지금도 멀리에 떨어져서 큰 소리로 부를 뿐, 유신이 다가가면 저만치 달아나 버린다. “하아... 알았어, 미키.” 페르소나란 이름 대신 유신이 지어준 이름이 미키다. 혹시라도 주인에게 버림받은 상처가 남아 있을까봐 페이욘에게는 마키, 페르소나가 미키라는 새로운 이름을 준 것이다. 유신은 길게 한숨을 쉬고 미키의 뒤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그래도 기특한 것은, 유신이 돌아올 시간이 되면 이렇게 마중을 나와 준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세라피나 엘리시엘이 마중 나와 줬지만, 요즘은 둘은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마키나 미키가 마중을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미스티가 투덜거릴 만도 하다. 미스티는 이 시간부터 또 화랑들의 교육과 사냥개들의 교육을 봐줘야 하는데 유신은 스위트홈으로 가버리기 때문이다. 집 안에 들어오니 집안도 난리다. 미키와 마키는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온 집안에 예메른의 사자가 보냈던 예물들을 흩어놓기 일쑤고, 장난도 무척 심하게 친다. 오늘도 어김없이 엘리시엘이 마키를 잡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었고, 온 집안은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엘리시엘이 마키를 간신히 구석으로 몰아넣었지만, 마키는 그 날카로운 손톱을 이용해 바퀴벌레처럼 벽을 타고 올라가 천정으로 도망쳐 버렸다. 다시 찬장을 짚고 뛰어내려 식탁 위로 올라가자 찬장 안에 있는 식기들과 술병들이 위험하게 흔들렸다. 벽과 천정에는 마키의 작은 손바닥 모양으로 구멍이 슝슝 뚫렸고, 엘리시엘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으으 마키!! 당장 이리오지 못해!” 그렇게 심하게 장난치던 마키지만, 유신이 들어왔을 때부터 빌빌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유신이 고함을 지르자 그동안 그렇게 놀리면서 도망 다녔던 엘리시엘의 등 뒤로 숨어서 보호해 달라는 듯, 재롱을 부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그만 엘리시엘은 그동안 화냈던 것을 모두 잊고 말았다. 마키도 미키와 비슷한 상태였지만, 사내 녀석이라 그런지 골격이 제자리를 찾는 것이 훨씬 빨랐다. 그래서 푸르게 비춰지는 실핏줄을 제외하고는 엘프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유신, 화내지 마. 아직 어려서 그렇잖아.” 어린 건 엘리시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말썽꾸러기 동생이 생긴 것이 과히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하아... 엘리, 그렇게 너무 감싸주기만 하면 버릇 나빠진다고...” 마키는 엘리시엘이 그의 편을 들어주자 그녀의 손을 싹싹 핥아 주었다. “응, 그래. 앞으로 말 잘 들어야 한다.” 엘리시엘도 그런 마키가 사랑스러운지,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볼을 부볐다. 두 선남선녀가 서로를 작게 애무하는 광경은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무척 애로틱 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 유신도 호뭍크루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질투했을 정도로 예쁘고 야시시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유신에겐 단지 애완동물과 그것을 예뻐해 주는 주인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마키, 말 안 들으면 나쁜 아이다. 엘리언니 속 썩이지 마라!” 미키는 마치 자신이 누나인양 마키를 타일렀다. 그러자 마키도 별 군소리 안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아!! 우리 미키는 이제 어른이네! 예쁘기도 해라.” 엘리시엘은 그런 둘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끌어안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흐으... 팔불출... 집안이 이 꼴인데...” 유신이 엉망으로 어질러진 집안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리 와서 모두 식사 하세요.” 세라피는 저녁식사준비가 끝나자 모두를 불렀다. 그녀는 오래 산 엘프답게 음식도 다양하게 만들 줄 알았다. 비록 고기요리는 못하지만, 버섯을 이용해 제법 육류음식과 비슷한 맛을 내는 요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저녁 식사준비는 세라피의 몫이다. 두 호문크루스는 질세라 경쟁하듯 주방으로 뛰어갔고, 유신은 엉망이 된 집안을 잠시 둘러보고는 그 뒤를 따랐다. ‘어쨌든 집안이 활기차서 좋아할 일인가...’ 유신은 애써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제 5 장 도적길드6화 일주일후, 호문크루스들이 미스티와 세라피, 엘리시엘 잘 따르게 되자 유신은 예정대로 헤카이론 광산으로 떠나기로 했다. 미스티는 또 짐덩이를 자기한테 던져주고 도망간다고 왁왁거렸지만, 결국 호문크루스를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미스티로서도 이 귀여운 두 호문크루스를 돌보는 것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삭막한 견습기사들이나 화랑들, 그리고 살수부대인 사냥개부대와 뒹굴다가 가끔은 이런 예쁘게 생긴 호문크루스와 노는 것도 결코 나쁘지 않으리라. ‘후우... 시간 낭비가 너무 심했어. 계획을 너무 빠듯하게 잡았나보다. 이래서야 9월 말에 있는 개학식까지 맞출 수 있을까...’ 유신은 헤카이론 광산으로 향하는 니케의 등 위에 편하게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 세라피와 엘리시엘은 따라가겠다고 조르지 않고 순순히 물러섰다.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였지만, 시간도 없는데 거기까지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헤카이론 광산 근처의 공터에 내려 선 유신은 니케를 돌려보냈다. “내일 이 시간 정도에 여기로 와. 밥 많이 먹고, 하피들 하고 쓸데없이 싸우지 말고.” “께에에엑” 니케는 유신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크게 회를 치며 대답을 했다. “자, 어서 가.” 유신이 손을 흔들어 주자 니케의 거체가 둥실 떠올랐다. “휘휘휘휘휘” 거친 바람이 휘몰아 쳤지만, 유신은 얼굴을 가리거나 피하지 않고 그의 그리폰이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니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신은 천천히 헤카이론 마을로 향했다. 여전히 육중해 보이는 마을이었다. 빈틈없어 보이는 해자와 마을 입구를 지키는 네 개의 망루, 도개교는 당연히 올라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을에 들어가고 싶은데 다리 좀 내려 주세요.” 유신은 드워프가 도개교의 보초를 부를 때 고함소리로 불렀던 것을 기억하고, 꽤 큰 목소리로 먼저 인사를 했다. 아직 마을 안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쿵쾅거리는 드워프마을 다운 망치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잠시 후, 망루 위에서 사람 하나가 고개를 삐죽이 내밀었다. “헉! 설마 드래곤슬레이어 유신 경입니까? 역시 목소리도 우렁차군요!” ‘크으... 너무 컸나? 드워프 흉내내는게 아닌데...’ 망루를 지키던 병사는 헤카이론 광산의 전투 때 유신을 본 모양이다. 병사는 영광이라는 듯 별다른 까다로운 질문 없이 도개교를 내렸다. 마을 여기저기서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고, 대장간에서 울리는 소리가 온 마을 들썩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활기차다고 하기에는 조금 지나친 감이 있군요.” 그 시끄러운 소리에 청각이 예민한 유신은 귀를 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핫, 한동안 일을 하지 못했으니 모두들 열심입니다. 유신 경은 이 마을이 이렇게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겠군요.” 병사는 자랑스럽다는 듯, 역시 고함보다는 작고 소리치는 것 보다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죠? 스와튼님이나 둔켈님을 불러 드릴까요?” 가뜩이나 시끄러운데 그 병사까지 바로 옆에서 떽떽거리자 머리가 징징 울렸다. “아닙니다. 오늘은 그 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서요.” “하지만 안 만나고 가시면 나중에 그 감당을 어떻게 하실 겁니까? 스와튼님은 몰라도 둔켈님은 아마 유신 경을 잡아먹으려고 할 겁니다. 마을의 은인에게 진심으로 충고하건데, 만나고 가세요.” “...그래야겠군요.” 둔켈을 부르지 않았다가는 뒷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일단 불러달라고 했다. “금방 불러올께요. 드워프는 그런 쪽으로 이상하리만치 집착이 강하니까요.” “그럼 저번의 그 술집에서 기다린다고 전해 주세요. 아직 그 하프엘프 음유시인 아가씨 있지요?” “있기는 하지만... 설마 유신 경, 저번의 그 끝내주는 미인 아가씨하고 다퉜어요? 새 여자를...” “이... 이봐요.” “아, 아니면 됐고요. 설마 그런 미인을 두고 한눈 팔 리 없겠지요.” 이자벨을 보고 완전히 반해버렸던 그 병사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얼굴을 붉혔다. “그 아가씨 어느 귀족집안의 영애지요? 각선미 정말 끝내주던데...” 이자벨이 공주란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유신은 어처구니없는 심정이었다. ‘왕족 성희롱은 사형이려나...’ 하지만 병사는 무슨 음심을 품고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란 것을 그 순진한 표정을 보면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기에 화를 내지는 않았다. “하... 하하... 정말 귀한 집 영애인 것은 맞지요...” 유신은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바쁜 분 시간을 너무 많이 뺐은 것 같군요. 그럼 주점에서 기다리세요. 마에스트로는 아마 마을 북쪽 끝에 있는 대장간에 있을 겁니다. 벌써 한 달째 두문불출 하고 있어요. 무슨 대단한 검을 만드는 모양입니다.” ‘으윽... 정말 공주님께 줄 검을 만드나본데...’ 유신은 그 병사와 헤어지고 불의 노래로 향했다. 아직 일이 끝나기까지는 많이 남았는지, 주점 안은 한가했다. 저번에 왔을 때는 대낮부터 북적거렸었기 때문에 혹시나 다른 가게에 잘못 온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을 정도였다. “계세요?” 테이블 위에 의자들이 전부 올라가 있는 걸로 보아 아직 오픈조차 하지 않은 모양이다. ‘드워프들... 역시 근면한가보군. 아무리 낮이라고 해도 설마 이렇게까지 썰렁할 줄은...’ 어쩔 가를 잠시 생각하다가 제일 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를 내리고 짐도 한쪽 구석에 내려놨다. “아무도 안계세요?” 유신은 아까보다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주인장을 찾았다. “뉘시우? 영업은 7시부터요.” 제 5 장 도적길드7화 주인장은 면으로 보이는 얇은 바지 하나만을 덜렁 걸쳐 입고 웃통은 벌거벗은 채로 카운터에 연결된 방에서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드워프들은 근면 성실하게 일하지만, 일단 일이 끝나고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대책 없이 들이 붇는다. 그래서 이곳도 다음날 새벽녘이나 되어야 가게 문을 닫을 수 있고, 주인도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저... 여기서 일하는 음유시인 아가씨한테 물어볼게 있어서 왔거든요. 혹시 만나 볼 수 있을까요?” 남자는 그가 나온 방으로 흘끗 눈길을 줬다가 다시 유신을 바라보았다. ‘역시... 잘 대해줘 봐야 노예라는 건가...’ 이미 유신의 초감각에는 그 하프엘프 아가씨의 기운이 감지되고 있었다. 아마도 그 음유시인 하프엘프는 이 술집 주인장의 애인이 되었거나, 어쩌면 노리개 정도로 취급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인데 그러슈?” 성의 없이 말하며 아무렇게나 하품을 하는걸로 보아 가게 열기 전에 찾아온 불청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주인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유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흐억!! 천공의 기사 유신 경!!” “그러니까 그 이상한 칭호는 좀...” 이제는 천공의 기사나 드래곤슬레이어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지만, 아직은 그런 칭호가 어색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실버스타란 칭호에 더 익숙해져서 그런가...’ 생각해보면 드래곤슬레이어나 천공의 기사쯤은 ‘실버스타 장군’이나 홀리크로스 기전장군이란 엄청난 칭호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것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남자는 그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유신인 것을 알고 허둥거렸다. “이봐, 레이. 이리 나와. 굉장한 분이 볼일이 있다고 하신다.” 그 남자가 방을 향해 소리치자 예의 그 자그마한 하프엘프가 나왔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사를 초탈한 듯한 허무한 눈동자로 유신을 바라보았다. “옷 똑바로 입고 나와. 대체 그게 무슨 꼴이야?” 하프엘프는 자다가 나온 모습 그대로였다. 이불로 대충 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말 그대로 대충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다지 요염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는 몸매였지만, 어쨌든 얇은 이불 밖으로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들어났다. 주인장이 고함을 치자 유신은 슬쩍 얼굴을 돌려 점잖게 외면해 주었다. ‘엘프를 닮아서 그런가...’ 세라피와 엘리시엘도 자연 그대로의 알몸을 그다지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 하누스에서 별궁을 얻어 같이 살게 되었을 때는 종종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고는 했었다. 그때의 기억이 나자 슬며시 웃음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흐음... 드래곤슬레이어도 남자는 남자 인가봅니다. 저런 빈약한 몸매의 아이가 뭐가 좋다고 그리 좋아하슈?” 주인장은 유신이 자기의 여자를 향해 침을 흘리는 줄 알았는지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 유신은 잠시 변명해 볼까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 구차해 보일 것 같아 관두기로 했다. “저쪽 테이블에 가 있겠습니다. 괜찮다면 시원한 맥주하고 닭요리를 주문하고 싶군요.” 주인장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어쨌든 그는 마을의 은인이자 드래곤슬레이어를 적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은 듯, 군소리 없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그 레이라는 하프엘프가 5000cc 는 되어 보이는 통에 맥주를 담아서 위태위태해 보이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가게 안의 테이블의 배치는 완전히 몸으로 외워버린 것인지, 걸음걸이가 흔들리지는 않았다. 다만 왼쪽 다리가 불편했기 때문에 살짝 절고 있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이는 것이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하프엘프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유신은 그녀에게서 술통을 받고, 그녀가 앉기 편하도록 그의 반대편에 의자를 빼 주었다. 레이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유신을 잠시 바라보고는, 그 의자에 앉았다. “무슨 맥주를 이렇게나 많이...” “아, 드워프 분들을 주 고객으로 하다보니 기본이 그 정도거든요.” 레이의 목소리는 노래 부를 때의 슬픈 듯한 가는 미성이 아니라 텅 빈 공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관심 한 듯 성의 없이 들리는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옅은 물색의 눈동자와 너무 잘 어울려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 우선 제 소개부터 하지요. 전 유신 이라고 합니다.” “전 레이니아... 그냥 레이라고 불러 주세요.” 유신이 존대 말로 대하자 약간 의외라는 듯, 눈빛이 조금 흔들렸지만, 금세 조금 전과 같은 텅 빈 표정으로 돌아갔다. “예. 그럼 레이님, 언뜻 듣기로는 예메른에서 노예로 있다가...” 여기까지 이야기 한 유신은 잠시 말을 끊었다. “흠, 듣기 불편한 이야기를 하게 되서 정말 죄송합니다.” 어쨌든 노예시절의 추억이 좋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어쩌면 무척 괴로운 상처일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후벼 파게 되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요. 옛날 일인걸요. 지금은 다 잊었답니다.” “예. 그럼 다행이군요. 어쨌든 예메른에 있었으면... 혹시 그곳에 도적 길드란 것에 대해 아나요? 예메른에서 팔렸다면 도적길드 쪽 루트로 팔린 것 같아서요.” “......” “이야기 해 주세요. 중요한 일입니다. 아무거나 아는 것만 이야기 해 주면 되요.” “... 엘프... 냄새가 나네요.” “네?” “엘프를 노예로 부리는 사람에게 해줄 이야기는 없습니다.” “에??” 제 5 장 도적길드8화 레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옆도, 그렇다고 위를 보는 것도 아닌 묘한 각도로 돌렸다. 대화할 의사가 없다는 표시인 듯싶었다. “아, 엘프랑 함께 사는 건 사실이지만, 엘프를 노예로 부리고 있지는 않아요. 그냥 친구로 지내고 있을 뿐입니다.” “... 인간은 거짓말에 능한 종족이죠.” “......” 아무래도 이 하프엘프는 심각한 인간불신 증에 걸린 것 같았다. 그간의 고생이 심했을 테니 그녀의 배타적인 태도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유신 역시 얌전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믿어 주시겠습니까?” “......” 이 하프엘프는 말을 많이 하는 타입이 아니라 이야기를 끌어가기가 더욱 힘들었다. 유신과 레이 사이에 썰렁한 침묵이 감돌고 있을 때 주점의 문이 벌컥 열리며 때마침 노튼이 들이닥쳤다. “여어! 유신, 오래간만이야! 왜 그동안 한번도 안 놀러 왔나? 자네만큼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라면 드워프의 친구가 될 자격이 있지.!!” 마에스트로 둔켈은 여전히 큰 목소리를 자랑하며 유신의 옆에 턱 하니 앉았다. “아, 레이양. 나도 내 잔 좀 내 주게. 주인장은 아직 자나?” 둔켈은 레이와도 잘 아는지 허물없이 이야기 했다. “주방에 계십니다.” “허헛 드래곤슬레이어께서 오시니까 그 게으른 양반도 일어 나셨군.” “마스터는 게으르지 않아요.” 뜻밖에도 그 인형같이 표정이 없던 레이니아의 얼굴에 살짝 분노의 표정이 떠올랐다. “흥, 게으른 사람이 점심때까지 가게 문을 안 여는 게 어디 있나?” 그런 레이를 놀리는 것이 재미있는지, 둔켈은 빙글거리며 말꼬투리를 놓지 않았다. “드워프 분들이 밤새고 술 마시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레이니아는 제법 화가 났는지 목소리가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허허 그래. 알았으니까 내 잔 부탁해.” 레이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잠시 동안 노튼을 노려보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하하 평소에는 늘 멍하게 있는 아가씨가 이곳 주인장 욕을 조금만 하면 안색이 바뀐다니까. 재미있지 않나?” 노튼은 충분히 놀린 것에 만족했는지 기분 좋게 허허 거렸다. “사이가 좋은 모양이군요.” 유신은 레이가 그렇게까지 인간을 싫어하면서, 그녀를 노리개처럼 가지고 노는 이곳 주인 편을 드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아... 저 요령 없는 놈이 저번 일이 있고 나서 청혼을 한 모양이야. 뭐, 이곳도 언제든 위험해 질 수 있으니 죽기 전에 결혼하고 싶다나? 인간 주제에 저렇게 예쁘고 착한 하프엘프를 반려로 맞았으니 행운일수도 있지. 몸이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레이는 좋은 아이니까 그런 건 별 장애가 안 될 거야.” 인간과 하프엘프. 매우 흥미 있는 연애담이었기 때문에 유신도 더 듣고 싶었지만, 이야기가 더 진행되기 전에 레이가 노튼의 잔과 음식을 들고 나왔다. 그녀는 다리와 눈이 불편하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제대로 균형을 잡고 잔과 음식을 내려 놓았다. 잔의 크기는 5000cc 통의 두 배에 달했기 때문에 그녀가 술까지 넣어서 올 수 없었는지, 잔만을 내 주었다. “여어. 고맙군. 잠시 실례.” 둔켈은 잔을 들고 주방 옆에 있는 맥주통 쪽으로 가서 그 잔이라고 하기도 뭣한 통 안에 맥주를 가득 채웠다. 그는 마에스트로란 칭호에 어울리는 놀라운 솜씨로 맥주에서 거품은 하나도 나지 않도록 하여 마지막 한 방울까지 꽉꽉 눌러 담았다. “볼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드워프들의 주량은 굉장하네요. 그거 치사량 아닌가요?” 저 정도면 무게로 치자면 10kg이라는 얘기다. 보통 드워프의 키는 150 센티 정도로 인간보다 작지만, 그 몸무게는 오히려 더 무거워서 75~80키로그램 정도 나간다. 하지만 10키로그램의 술이라면 몸무게의 1/8 이라는 뜻이다. 물을 그만큼 마셔도 배터져 죽을 것이다. “음하하하. 자네도 마시는 것 보니 만만치 않더구만. 오늘 또 신나게 마셔 봐야지!” “아니요, 오늘은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안돼! 오늘은 마셔야 해. 저번에 같이 왔던 레이디에게 줄 검이 완성되었거든.” “에엑? 벌써 완성했다고요?” “사실 10여 년 전부터 만들고 있는 내 인생의 역작이었거든. 일정을 서둘러서 그걸 완성시켰지. 그 아가씨라면 좋은 주인이 될 것 같더군.” “그... 그런 검을 정말 주시려고요?” “드워프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하...하지만...” “하핫. 난 그걸 만드는 과정에서 충분히 만족을 얻었어. 좋은 검이라면 좋은 장인의 밑에 있을 때 보다 좋은 주인의 밑에 있는 것이 행복이지. 기왕이면 자네가 썼으면 더 좋겠지만, 그 아가씨도 검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니 나쁘지 않아.” 드워프는 인간처럼 무언가를 소유했을 때 만족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무언가를 만들 때 만족을 느끼는 종족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선뜻 그런 검을 단 한번 본 여자에게 준다는 것이 유신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후우... 역시 종족의 벽은 크구나. 내가 드워프를 이해하기 힘든 만큼 드워프도 나를... 아니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힘든 일일까...’ 유신이 생각에 잠겨 버리려고 하자 드워프는 맥주통을 내밀며 건배를 청했다. “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술 앞에서 한눈파는 것은 술에 대한 모욕이지. 오늘은 기쁜 날이니 실컷 마셔 보세.” ‘어차피 코어가 개방되었으니 깨고 싶으면 강제 해독하면 되겠지.’ 내일 니케가 오면 잠시 하누스로 가서 세라피나 엘리시엘을 불러 올 생각이었던 유신은 덜미가 잡혔다는 것을 예감하며 들이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검이 완성된걸 알고 왔을리는 없고... 대체 무슨 일로 온 것인가?” 제 5 장 도적길드9화 술이 거나하게 취하고 나자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노튼이 물어 보았다. “일찍도 물어 보는군요.” “으하하 사소한 것은 넘어가자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면 뭐든 말해보게. 드워프는 친구를 소중히 하지!” “사실은....” 유신은 도적길드와 접촉하기 위해 하프엘프에게 그 루트를 알고 있는지를 물어보러 왔다는 이야기,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레이는 엘프 냄새가 베어있는 유신을 무척 혐오스럽게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다지 오래 걸리는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둔켈의 맥주는 벌써 절반도 남아있지 않았다.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의사소통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인지, 별 내용도 아닌데 둔켈을 이해시키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드워프의 입장에서는 도적길드를 통해 정보루트를 잡는 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나보다. “그러니까 요는 레이가 자네를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이군!” 이야기가 끝나자 둔켈은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을 요약하여 결론을 내렸고,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과연 드워프네요. 그렇게 못 알아듣는 것 같아 보여도 정확하게 핵심을 찝는군요. 드워프는 진실을 보는 종족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허허 진실은 어디서나 통하지. 진실이 통하지 않는 종족은 인간밖에 없어.” “크으... 인간이 그렇게까지 최악의 종족은 아닙니다. 개인차라는 것이 심해서 그럴 뿐이에요.” 유신은 인간의 한명으로서 궁색한 변명을 하며 술잔을 내밀었다. 둔켈은 유신이 내민 잔에 그의 맥주 통을 부딫치고는 또다시 그의 작달막한 몸 안으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부었다. “꺼억, 잠깐 몸 안의 물 좀 버리고 오겠네. 헐헐 나이를 먹다보니 화장실도 자주 간단 말이야...” 둔켈은 품위 없이 크게 트림을 해 주고는 빵빵하게 불러온 듬직한 배를 두드렸다. 두드리면 살을 때리는 찰싹찰싹 하는 소리가 들리는게 아니라 둥둥 북소리가 날것 같아 보였다. “그런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둔켈이 몸을 일으키자 유신은 질렸다는 듯, 바닥을 보이고 만 노튼의 일만씨씨에 달하는 통을 보며 말했다. 둔켈은 만족스럽다는 듯, 껄껄거리며 휘적휘적 화장실로 갔다. 둔켈이 화장실에 간 사이, 유신은 코어를 회전시켜 몸 안의 알콜을 강제해독 시키기 시작했다.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는 좋았지만, 아직 술 만드는 기술이 그렇게까지 뛰어나지 않은 이곳의 술을 대책 없이 마셨다가는 다음날 머릿속에 요란한 써커스단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대충 몸 안의 해독을 끝내고 안주로 나왔던 닭요리도 단호하게 끝장을 보았지만, 둔켈은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화장실에 빠진 건가?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 똥통에 빠진 드워프의 모습을 상상하자 처음에는 웃음이 나왔지만, 상상이 점점 리얼해 져서 그 무성한 수염 사이에 똥이 잔뜩 낀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기 시작하자 더 이상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으윽... 쏠린다. 찾아봐야 할 것 같아.’ 막 유신이 몸을 일으키려는데, 둔켈이 앉아 있던 자리에 하프엘프 아가씨가 앉았다. “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물빛의 눈으로 무언가를 보기 위해 애쓰는 듯, 유신을 살폈다. “저... 거기는 둔켈님의 자리인데요?” 일단 그녀가 앉아 준 것은 고마웠지만, 둔켈도 식사를 얌전히 하는 편은 아니라 흘린 맥주서부터 바스러진 닭 뼈다귀까지 사방에 흩어져 있어서 그녀가 앉은 자리의 테이블 앞은 엉망이었다. 유신은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자리를 잘못 앉았다고 생각해서 옆의 의자를 빼주려고 하였다. “둔켈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에?” “피곤하시다고 하네요.” 검 만드는 작업이 오늘 끝났다면 피곤한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말도 없이 돌아갔다는 것은 이상했다. “죄송합니다.” “에?” 번번히 느끼는 것이지만, 엘프와, 특히나 말을 아끼는 엘프와 이야기 하는 것은 상상력 결핍의 유신으로서는 매우 힘든 일이다. “저기, 레이님? 아까 전부터 대화를 따라가기가 힘드네요. 뭔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주시겠어요?” “둔켈님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엘프를 위해 싸웠다는 엘핀서스 전투나 대륙의 악몽이라 불리는 그라테우스를 물리치신 이야기나...” “아...” 둔켈은 드워프답지 않은 빠른 눈치고 물을 버리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레이니아에게 유신에 대해 말해준 모양이다. 게다가 자리도 비켜주는 놀라울 만키 상냥한 모습도 보여 주었다. ‘가끔은 내가 이루어 놓은 선행에 대해 보상을 받나 보구나.’ 사려 깊은 드워프는 있을 수 있지만, 눈치빠른 드워프는 대단히 특이한 것이기 때문에 유신은 둔켈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럼 유신 님의 몸에서 나는 엘프의 내음은 세라피님의 것인가요?” “네... 세라피님이나 엘리시엘의 것이겠지요. 둔켈님이 이름까지 말해 주던가요?” 드래곤슬레이어의 소문이 퍼진 것을 그다지 달갑게 생각하지 않은 유신이었지만, 가끔 이렇게 도움을 받을 때도 있다고 생각하니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레이니아의 다음 이야기를 듣고는 방금 한 생각은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였어요. 노래로 만들고 싶을 만큼... 마물들에게 잡혀간 착하고 아름다운 엘프를 구하기 위해 수천의 오크들을 베고, 오우거의 시체로 산을 만들고 미노타우러스의 피로 강을 이루어 엘프의 순결을 지켜준...” 유신은 미리 해독해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제 5 장 도적길드10화 유신은 그 전투에서 겨우 오크 수십마리와 오우거 몇 마리를 베었을 뿐이었고, 세라피를 구하는 전투에서는 미노타우러스 같은 괴물은 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세라피의 순결도 지켜 주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샌가 이야기는 부풀려져 빈틈없이 완벽한 해피앤딩으로 널리널리 퍼져가는 것이다. 세라피의 명예가 지켜진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책임질 수 없을 만큼 이야기가 부풀어지는 것은 정말 원치 않은 상황이었다. “하아... 어쩌다 저런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레이님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많이 부풀려진 것 같다는 의심이 들지 않던가요?” “상관없어요. 영웅담이 부풀려 진다는 것은 음유시인인 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실 입니다.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고, 또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이야기라면 비록 진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상관없겠지요. 그것은 노래... 음유시인이 하는 아름다운 거짓말이지요.” “음유시인들이 거짓말을 한다고요?” “수많은 음유시인들이 전부 진실만을 노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래의 대부분은 아름답게 꾸며진 거짓. 하지만 듣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삶에 활력을 주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음유시인이 있는 것이겠지요.”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노래, 소설, 영화, 그 많은 것들의 내용은 실제에는 없는 일들. 즉 ‘거짓말’이다. 이런 오락거리가 많지 않은 마법계에서 음유시인이란 존재는 가장 능란한 거짓말쟁이라는 뜻이다. “어쨌든 상관없겠지요. 그래서 이제 도적길드에 대해 이야기 해줄 마음이 생겼나요?” 이제야 조금씩 도적길드에 대한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할 것이라 생각하자 마음이 들떳지만, 그녀가 하게 될 이야기는 적어도 남에게 하고 싶지는 않은 이야기일 것임을 알기에 되도록 차분하게 행동하려고 하였다. “물론이지요. 잘 알지도 못하고 무례하게 굴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별로 해줄 이야기가 없군요. 전 눈이 안보입니다. 단편적으로 여기저기서 귀동냥한 것 이외에는 아는 것도 별로 없어요.” “상관없습니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네?” “아니요. 그냥 별 뜻 없는 말입니다. 도적길드건 뭐건 도움 될만한 것은 아무거나 이야기 해 주세요.” “별 이야기는 없고... 제가 도적길드에 잡혀갈 때까지의 이야기라도 좋은가요?” “네. 그걸로 충분할 것 같군요.” “음... 제가 잡힌 곳은 예메른의 변방도시에 있는 미케드리안이라는 곳에서였습니다. 전 눈도 보이지 않고... 다리도 성치 않아요. 여기저기 주점을 전전하면서... 노래를 팔고... 때로는 웃음도 팔고... 먹고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했지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유신이 사과하자, 그 속에서 진심을 느낀 레이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이야깃거리가 떨어지면 도시를 옮겨야 했어요. 음유시인이라고는 해도 노래거리가 끝없이 나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손님들이 실증내기 시작하면 쫒겨나는 것은 필연이랍니다. 음유시인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 “그러다보니 어느새 예메른 근처의 도시까지 간 모양입니다. 아직 노예제도가 남아있고, 거친 나라라고 들었기 때문에 되도록 피해가고 싶었지만, 며칠째 먹지도 못하고... 이런 몸으로 먼 여행을 하는 것은 무리기 때문에 피해갈 수가 없었어요. 근처에 있는 도시라고는 미케드리안 뿐이었거든요. 사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어요. 노예가 된다 해도, 최소한 굶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았거든요.” 레이가 긴 이야기를 하느라 숨을 고르는 동안 유신은 잔 하나와 둔켈의 잔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술통에 절반 정도 술을 더 담아서 가지고 왔다. “자요. 이런 이야기에 술이 빠지면 안 되지요. 혹시 술 마시면 목소리에 지장이 있나요?” “후훗, 당신에게 반했다는 엘프아가씨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군요. 친절한 분.” 레이는 정말로 감동했다. 술을 권하는 거야 드워프건 인간이건 늘 상 권하지만, 술을 권하면서 음유시인인 그녀의 목소리까지 걱정해 주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쿨럭, 벼...별로 그 정도는 아닌데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손님하고는 마시지 않아요. 그래도 유신님에게는 제가 실례한 것도 있으니 조금만 마시도록 할게요.” 역시 사람이건 엘프건 하프엘프건 이야기를 해야 친해지는 것이다. 한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나자 레이니아의 마음이 많이 열렸는지 공허하기만 하던 눈에도 약간이나마 생기가 돌았다. “전 얼마 지나지 않아 노예사냥꾼에게 잡혔답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친 방법으로 잡힌 것은 아니었어요. 달콤한 유혹이었죠. 굶지 않게 해 주겠다. 그 한마디에 전 제 모든 걸 팔았습니다.” “......” “나쁘지 않았어요. 가끔 노래를 부르고, 모르는 남자들에게 몸을 맡겼지만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아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가끔 저와 자는 남자들 중에는 노래거리가 될만한 모험담을 해주는 사람도 있었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가고프지 않았어요.” 여기까지 말한 레이는 맥주로 살며시 입술만 축였다. 시원한 맥주잔을 그 작은 손의 온기로 덥혀서 따듯한 맥주를 마시겠다는 것인지, 하얀 두 손에 푸른 핏줄이 보일 정도로 맥주잔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많은 곳에 가 봤습니다. 카마론, 예메른은 물론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엘카드리안이나 하누스까지... ” 그녀는 그렇게 천천히, 천천히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했고, 유신은 그 속에서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도적길드의 세력은 생각보다 넓구나. 이 정도라면 라일로스 대륙 전역에 퍼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위시마스터가 사라진지 겨우 삼년 남짓... 대체 도적길드를 이끌고 있는 것이 어떤 사람이기에 겨우 그동안에 이만큼 넓은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저번의 리치가 이곳 광산을 장악한 것을 도적길드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용병들을 마을을 오가는 길목에 두어 소식이 밖으로 새나가는 것을 막은 것일 테지. 그럼 그 리치와도 알고 있었다는 뜻. 마물들과도 손을 잡다니... 이해관계가 얽히면 손잡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대체 도둑길드에서는 애초에 어떻게 리치 같은 마물도 아닌 고급의 마족을 알 수 있었을까?’ 유신은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도적길드에 대한 호기심이 커져갔다. 제 5 장 도적길드11화 “그럼 음유시인의 대부분은 도적길드에 손이 닿아 있다는 뜻인가요?” “그것까진 저도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적어도 제가 있었던 ‘장미의 화원’이란 주점은 도적길드의 손이 닿아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더 이상의 쓸만한 정보는 나온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장미의 화원이란 곳이 도적길드와 줄이 닿아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나머지는 직접 부딫치면서 해결하면 된다. 유신은 충분히 그럴 자신이 있었고, 능력 또한 충분했다. 다음날부터 바빠질 것을 예감한 유신은 자기 전에 충분히 코어를 돌려서 머리를 말끔히 비웠다. “자, 이것이 내 역작인 미스릴 검이네. 이름은 리켈리아스. 그 아가씨에게 잘 전해주게.” 마을을 떠나기 전, 둔켈은 이자벨에게 전해주라고 하면서 완성된 검을 내밀었다. 유신도 이자벨도, 그녀가 공주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유신이 전해준다고 하여 받은 것이다. “스르릉” 유신이 살짝 검을 뽑아보자 미스릴 특유의 시린 은빛이 사방에 뿌려졌다. “식전용 검인가요?” 비반사 처리를 하지 않은 이런 번쩍거리는 검은 실전에서 쓰기는 부담스럽다. 그렇게 눈에 띄면, 실전에서는 곳 바로 공격 제1번 순위가 되기 때문이다. “허허 그래. 이 아름다운 미스릴의 광택을 보라고. 일부러 죽이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나? 아무리 봐도 그 아가씨도 용병이나 기사인 것 같지는 않고... 그래서 일부러 이 상태로 주는 것이네.” 둔켈은 자신이 만든 검임에도 불구하고 침이라도 질질 흘릴 것 같은 황홀한 얼굴로 리켈리아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이 이해가 갈만큼 대단한 검이었다. 첨예만큼 가볍고 예리하며, 검을 잡았을 때의 균형은 첨예 이상인 것 같았다. 리켈리아스는 용아검처럼 검신과 가드가 하나로 되어 있었고, 폼멜 끝에는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얼굴이 이자벨하고 똑같이 생겼다. “와아... 대단한 검이군요. 이 정도라니...” 굳이 휘둘러보지 않아도, 이 검이 보여주는 잔인해 보일만치 시린 광택만으로도 그 예리함을 느낄 수 있었다. “허헛 드래곤슬레이어에게 그런 칭찬을 들으니 과히 나쁘지 않군. 아참, 그리고 이것도 가지고 가게.” 둔켈은 두 자루의 미스릴 검을 더 주었다. “엇? 왜 이리 많이 주지요?” 두 자루 모두 검신은 1미터 정도였고, 가벼운 미스릴의 특성상 폼멜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장식을 위해 달려 있는 듯 보였다. 하나는 보라색, 또 하나는 붉은색의 보석이 박혀 있는 것 외에는 똑같이 생긴 쌍둥이 검이었다. “아아, 저번 자네를 구출하고 광산 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검이네. 그 고치로 변해버렸다는 몬스터가 쓰던 검이 아닐까 싶네만... 만든 솜씨는 자체는 조잡하지만, 어쨌든 이것도 미스릴 검이고, 마법문자도 있는 것을 보니 마법검인 듯싶네. 뭐, 내가 만든 검에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자네의 전리품이니 가져가도록 해. 미스릴 검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는 알고 있겠지?” 유신은 그가 천상신검의 검기까지 넣어 첨예로 공격했을 때 그 무시무시한 일격을 막아내던 호문크루스의 미스릴 검이 생각났다. “아아... 이건 미키와 마키가 쓰던 검이군요.” “그게 그 몬스터들의 이름인가?” 드워프인 둔켈의 생각에는 적이었던 몬스터를 죽이지 않은 것도 모자라 이름까지 붙여서 기른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특별히 참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냥 적이었던 몬스터를 기른다고 해서 작은 호기심이 일은 것뿐이다. “네. 지금은 깨어났습니다. 세라피와 엘리가 잘 돌보고 있어요.” “흐음... 위험하지는 않은 겐가? 이 검... 살펴봤더니 자네도 자네지만, 그 몬스터역시 대단한 힘을 지닌 것 같았는데.... 대체 어떻게 싸우면 미스릴 검에 이정도의 상처를 주는 겐가? 이것도 고치는데 시간이 꽤나 들었다고.” 지금은 새것처럼 말짱해 보였지만, 유신이 천상신검을 불어넣어서 휘두르는 첨예를 막았던 검이다. 아무리 미스릴 재질이고, 두 호문크루스도 약간의 검기를 다룰 수 있었다고는 해도 무사할 리가 없는 것이다. “아... 둔켈님이 고쳐주신 거군요. 두 몬스터는...별 문제는 없습니다. 말썽이 좀 심하기는 하지만, 기억도 전부 잃어버린 것 같고... 근본은 착한 아이니까 엘프들과는 잘 어울릴 수 있겠지요. 다음에 한번 데리고 놀러 올게요.” “허허 그거 좋은 생각이군. 대체 어떻게 생긴 녀석들인지 궁금했거든. 흐음... 하지만 엘프가 길렀다가는 느림보가 되고 말게야.” 둔켈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제법 진지한 얼굴로 충고했다. “하핫, 상관없어요. 그저 건강하기만 하면 되겠지요.” 차라리 그 말썽꾸러기들이 정말 엘프를 닮아버려서 얌전해 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유신이다. “허허 정말 애 아빠 같은 말을 하는군.” 둔켈은 정말로 그 무성한 수염에 잘 어울리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른 드워프분들께도 안부 전해 두세요.” “그래.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네도 몸 조심하게. 그리고 저번의 그 아가씨에게도 안부 전해주고. 아, 그 귀엽다는 몬스터에게도 말일세.” “후훗,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또...” 유신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 헤카이론 마을 밖으로 나왔다. 첨예는 왼쪽 허리에, 리켈리아스는 오른쪽 허리에 차고, 남은 두 미스릴 검은 등 뒤로 메었다. ‘흐으... 엄청나군. 이건 전쟁터에 나가는 것보다 더한 무장이잖아.’ 유신은 졸지에 네 자루, 그것도 미스릴검이나 첨예같은 엄청난 검으로 무장을 하게 되었다. “께에에에엑” 저 높은 하늘에서 유신을 발견하고 고도를 낮추고 있는 니케의 모습이 보였다. 제 5 장 도적길드12화 유신은 니케를 타고 미케드리안 시 근처의 산까지 날아갔다. “흐음... 생각보다 정교한 지도인데? 어떻게 생각해 미스티?” 유신은 그리폰의 등에 책상다리의 한 편안한 자세로 앉아 군용의 지도를 꺼내두고 아래에 보이는 지형과 비교해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도 위에는 지도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주먹만한 크기의 둥그런 미니 미스티로 눌러 놓았다. 미니 미스티한테는 고급의 토끼가죽옷을 입혀주었기 때문에 언뜻 보면 니케의 등에 난 하얀 솜털 같아 보였다. “확실히 마법계에서는 측량술이 발달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거의정확하군요. 이정도의 군사지도라면 신용할 수 있습니다. 저 아래쪽의 도시가 미케드리안이군요. 인구는 대략 칠천내외. 특별한 이상은 감지되지 않고 있습니다.” 본체가 아닌 만큼 도시 내의 세밀한 정보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미니 미스티에도 기본적인 감지기는 달려 있었기 때문에 도시의 대강은 살펴볼 수 있었다. “그나저나 그 칼들은 다 어떻게 하실 거지요? 설마 전부 들고 다닐 겁니까?” 전쟁터에서라면 검이 부러질 때를 대비해서 몇 자루의 예비 검을 챙겨서 다니는 경우도 있다. 또 상대의 몸에 박힌 검을 뺄 시간이 없을 때는 그 검을 버리고 다른 검을 쓰기도 하고, 검이 엉키게 되면 바로 다른 검을 빼서 허를 찌르는 공격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두 자루 이상은 들고 다니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유신 정도의 수준이면 그런 일반적인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다. 만일을 위해 두 자루 정도 들고 다닌다면 몰라도 네 자루는 확실히 버거운 것이다. “응. 좀 불편하겠지만 일단은 쓸모도 있을 것 같고... 기본에 충실해지기로 했거든.” 하지만 유신은 전부 들고 다니기로 결정을 한 듯, 미스릴 검을 몸에서 풀어두지 않았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미스릴 검이란 걸 알면 탐내는 놈들이 많을 텐데...” 물론 실력으로 유신에게서 검을 훔쳐가거나 빼앗아 갈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마법계 내에서는 없다. 사람 뿐 아니라 웜급 이상의 드래곤 정도라도 오지 않는다면 그의 손에서 칼을 뺏어갈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도둑질은 꼭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스티는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걸 노리는 거야. 모험가 한명이 미스릴검을 세 자루나 들고 다닌다고 하면 도둑길드에도 소문이 나겠지.” 유신은 미스릴 소드를 보고 꾸역꾸역 모여들 도둑들을 족치다 보면 도적길드에 닿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보물을 다 드러내놓고 다니는 것이다. “확실히 그렇기는 하겠지만... 그러다가 공주님한테 줄 리켈리아스를 도둑맞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게다가 도적길드 전체를 적으로 만들면 피곤해질수도 있다고요.” “어이, 난 봉인이 세 개나 풀렸다고. 설마 도둑맞기야 하겠어? 그리고 도둑놈들하고 협상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 강요하면 그만이야.” 미스티의 말에 유신은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유신 더 실버스타. 그 경천동지할 칭호를 얻었다는 것은 만만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결국 미스티가 물러섰다. “그것도 그렇군요. 하지만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도둑들은 교활한 꾀가 무서운 것입니다. 추적마법 정도는 걸어 두세요. 저급 마법이니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요?” 확실히 유신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법계에 오고 나서 나사가 많이 풀린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미스티는 여러모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거야 걸어 뒀지. 그보다 집안은 어때? 미키랑 마키는 말 잘 듣고 있어?” “다음에 또 아무거나 주워오면 화낼 겁니다.” “잘 있는 모양이군. 참, 엘리하고 세라피님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던데... 미스티는 아는 것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유신님께서 떠나신 후, 물질계랑 연락을 취하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어? 그거 반가운 소식이군. 그래서 이번엔 연락이 됐어?” “역시나입니다. 무슨 방해가 있는 것인지 쉽지 않은데요.” “아직도 안 되는 건가... 어떤 것 같아? 엘핀서스에서 때 이후로는 전혀 연락이 안 되는 거지?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근처에 실버스타군의 함대가 있다면 군용채널로 연락이 가능하겠지만...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막힌다는 것은 방해가 있다는 걸로 해석하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흐음... 나름대로 대비를 해야 한다는 건가...” 그간 마법계의 이상을 보고하기 위해 몇 번에 거쳐 연락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마나스트림의 흐름이나 행성의 위치가 방해되지 않는 때를 골라 몇 번이나 연락을 시도해 봤지만, 엘핀서스에서 키메라와의 전투가 끝난 직후 했던 첫 번째 연락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흄일까? 아니면 베리알? 설마... 위시마스터일리는 없겠지.’ 마법계 내에서 미스티의 통신을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는 존재라면 지금 유신의 머릿속에 그려진 존재들을 제외하고는 있을 수 없다. “당분간 연락하는 건 그만둬. 어차피 베리알이나 흄이 막고 있는 것이겠지. 괜히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인재들의 육성에 전념해줘.” 초조하긴 하지만, 안되는 것을 붙잡고 늘어져 봐야 시간낭비일 뿐이다. ‘어차피 흄을 치고 나면 어떠한 형태로든 물질계와 연락이 되겠지.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일부터 해결해 가자.’ 생각을 정리한 유신은 니케의 고도를 낮추었다. 도시 근처에 그리폰이 나타나면 난리가 날 것이기 때문에 미케드리안시에서 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야산 근처에서 내렸다. 9월. 애매한 계절이다. 완전한 녹색도, 그렇다고 타는듯한 붉은색도 아닌 어정쩡한 산에 내려선 유신은 니케를 돌려보내고 미케드리안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제 5 장 도적길드13화 미케드리안시는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곳과는 거리가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곽은 그다지 높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를 숭상하는 나라답게 돌로 만든 높은 성벽을 자랑했고, 해자 역시 굉장히 깊은 편이었다. 미케드리안 시는 이리나평원의 중앙부위에 있었기 때문에 성 밖에는 경작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사람들의 교류 역시 활발한 곳이었다. 도시로 드나드는 입구에는 감시용 망루가 하나 세워져 있었고, 입구를 지키는 병사의 수는 넷이나 되었다. 하지만 드나드는 사람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검문검색이 까다롭지는 않았다. 유신은 칼을 네자루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검문에 걸렸지만, 이자벨공주가 내준 하누스 외교관용의 증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사통과할 수 있었다. ‘평범하군.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 도둑길드라니...’ 돌로 포장되어 있는 도로의 좌우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에는 으레 것 있게 마련인 군것질거리를 파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가게의 주인들을 침 흘리는 동내 꼬마들을 내쫒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하나라도 더 팔기위해 목청 것 자기 가게의 맛있는 음식을 선전하는 등, 모두가 바빠 보였다. 동내 꼬마들이 꽥꽥거리며 덩치 큰 회색의 개를 쫓차가느라 하마터면 유신과 부딫칠뻔 했다. “으차차” 가볍게 피하기는 했지만, 꼬마들은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없이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멀어져 갔다. ‘무례한 아이들의 전형이군. 아이들다워서 좋긴 하지만...’ 활기찬 사람들을 보는 것은 나쁜 기분이 아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물론 모르겠지만, 이곳 역시 유신이 지킨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모습을 볼 때면 성계대전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에 저절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여관이 밀집해 있는 곳은 조금 더 안쪽에 있었다. 여관의 선택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 너무 고급스러운 곳이면 도둑들이 접근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너무 싸구려에 묵으면 털 가치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대충 적당하다 싶은 곳을 골라 짐을 푼 후, 일단은 레이니아가 가르쳐 준 장미의 화원을 찾기로 했다. 여관의 아래층은 주점 겸 식당이었기 때문에 유신은 간단한 요리와 과일주스를 주문하면서 그곳의 주인에게 장미의 화원이란 주점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풀어 가면 편하겠지만, 오늘부터 활동을 시작해야 하니 과일주스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일단 유명한 곳이긴 하지만... 손님 정말 그곳에 가려고 하시우?”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후덕해 보이는 인상의 여주인이 의심스럽다는 듯 물어보았다. “네. 꼭 알아봐야 할 것이 있거든요.” ‘제대로군. 주인장의 반응으로 보아 도적길드와 연관이 있는 곳인가 보다. 깡패나 용병같이 거친 녀석들이 다니는 곳이니까 말리려고 하는 거겠지.’ 유신은 속으로 쾌제를 부르며 머릿속으로 작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요란하게 할까? 아주 요란하게? 술 취한 척 하고 미스릴 소드를 뽑아서 마구 자랑을 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깡패들에게 시비를 걸까? 아니면 조용하게 할까? 도적길드의 마스터를 만나 팔 물건이 있다고 분위기 있게 나가 볼까? 아아아 뭘 해도 자신 있어! 하지만 날뛰고 싶으니 요란한 방향으로 가자. 그간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 하지만 이번 일은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 아아 너무 좋다아...’ 아무래도 유신은 그간 견습기사들이나 두 호문크루스에게 받았던 스트레스를 몽창 풀어버릴 계획인 듯싶다. 저절로 얼굴에 벌쭉벌쭉 미소가 꽃피웠다. 하지만... “손님 나이가 몇 이슈?” 주인은 카운터에 앉아 턱을 괴고는, 어째서인지 한심하단 얼굴로 유신의 나이를 물어 보았다. “에? 스... 스물 하나요.” 절대 스무살 넘어 보이는 외모는 아니었기 때문에 겨우겨우 우겨봐야 그 정도가 한계라는 것은 알고 있다. “......” 역시나 주인장은 쉽게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런대 대체 나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흐음... 혹시 위험한 곳이라 걱정이 되서 그러나? 친절한 분이네. 하지만 칼을 네 자루나 차고 있는 것을 보면 전사인 것을 알지 못하나?’ 물론 알지 못한다. 칼을 네 자루를 가지고 있건 스무자루를 가지고 있건 갑옷조차 입지 않은 유신은, 안된 이야기이지만 칼을 들고 다닌다고 해서 용병이나 기사로는 보이는 행색도, 외모도 아니다. “뭐, 그런 곳에 갈 생각이라면 나이를 밝히기 싫다는 건 알겠지만, 어린 나이에 그런 곳에 가버릇 하면 못씁니다. 얼굴을 보아하니 꽤 반반하게 생겼는데 차라리 참한 여자친구라도 사귀는 게 어떻수?” “에?” “어디서 그곳 아가씨들이 예쁘다는 이야기는 주워들었는 모양인데...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줄 아슈? 손님 같은 애.송.이.가 가봐야 예쁜 여자는 단지 먼발치에서 잠시 구경만 해볼 뿐이고, 정작은 나 같은 아줌마밖에 안지 못할 거유.” 제 5 장 도적길드14화 유신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결국 그 주인장에게 장미의 화원 위치를 알아내어 찾아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렇다. 이곳이 바로 빨간 집. 그 유명한 홍등가인 것이다. 장미의 화원은 홍등가 중에서도 제법 깊숙한 곳에 있었는데, 그럼에도 장사가 잘 되는 이유는 뻔하다. 이곳의 아가씨들이 예쁘고 재치 있어서 그만큼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이다. 가게가 이렇게 깊숙한 곳에 있으면 왠만한 배짱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그곳까지 가기도 힘들다. 깊숙이 있는 가게까지 가기 전에 수많은 다른 가게들을 거쳐야 하고, 그것은 여러 의미에서 보통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손님을 끌어오는 얼굴마담들은 일국의 공주 못지않게 아름답고, 그런 여자들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행인’을 막무가네로 잡아끌어 ‘손님’으로 만드는 것은 보통이고 심한 경우는 물건을 뺏어서 가게로 달아나 버리기도 한다. 유신은 고개를 푹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어찌어찌 이곳까지 올 수는 있었다. 하지만 ‘장미의 화원’이라고 쓴 간판을 보자 깊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유신이 막막한 얼굴로 가게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자 사방에서 야유와 조롱이 쏟아졌다. “꺄아!! 귀여운 오빠네. 누나라도 찾아 왔어?” 이건 비교적 양호하다. “이리 와서 여기 누나랑 놀다 가! 서비스 잘 해줄게.” 이게 가장 많이 듣는 얘기다. “그 집 별로야! 우리 집에 와. 훨씬 좋은 여자들이 많아.” “정말 맘에 들게 생긴 오빠다. 오빠 공자로 해줄게. 놀다가요.” 등등등... 하지만 가장 참을 수 없는 얘기가 있다. “잰 누구야? 새로 온 애가 손님 잡으려고 쇼 하는 것 아냐?” “크윽...” 시작하기도 전부터 기가 죽는 것 같았다. 오래 살았다고는 해도, 유신이 이런 곳에 와 본 것은 특별한 임무를 띠고 잠입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한번도 없었다. 그것도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유신은 창세신의 클론인 만큼, 나름대로 독실한 신자이니 이런 곳에 올 일도 없었고, 이런 곳에 쫒차다닐 만큼 한가한 삶을 살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아...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옷은 부끄러운 곳을 감추기 위해 입기도 하지만, 때로는 더욱 강조하기 위해 입기도 한다. 지금 이 거리의 여자들은 알몸으로 다니는 것보다 훨씬 선정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에 유신으로선 마땅히 눈 둘 데가 없어 어질어질 했다. 하지만 일은 일이다. 어물거려봐야 이 난감한 시간이 길어지기만 할 뿐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유신은 결단을 내렸다. “하압” 크게 기합을 넣고 씩씩한 걸음걸이에 어깨도 당당히 펴고 ‘장미의 화원’으로 들어가는 그를 보고 다시 한번 웃음과 야유가 쏟아졌다. 다행이 가게 안은 의외로 조용했다. 무대위에선 아름다운 여자 한명이 피아노 비슷한 악기에 맞춰 느리고 슬픈 곡조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테이블에는 듬성듬성 우울한 얼굴의 덩치들이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스트립 댄서들과 난잡한 분위기의 시끄러운 곳을 생각했던 유신으로선 안도의 한숨이 나올 만큼 다행이었다. 호객꾼도 없었고, 자리를 안내해주는 살살 녹을 것 같은 아가씨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덕분에 머리가 조금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구석 쪽에 있는 테이블들은 이미 술집의 일부처럼 보이는 주정뱅이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리를 잡고 아무리 기다려도 주문을 받기 위한 사람이 오질 않았다. ‘에... 설마 셀프는 아니겠지?’ 카운터에도 사람이 없어서 도대체 누구한테 주문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한참동안을 뻘줌이 앉아 노래를 감상하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이런 분위기가 싫어서 초조해 지기도 했지만, 일단 신경을 끄고 노래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마음에 점점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만큼 분위기에 적응도 빠른 것이다. “어이, 형씨. 언제까지 버티고 있을 거야?” 삼십분 정도를 듣고 있었을까? 가수의 노래는 꽤 훌륭한 것이라 유신은 거기에 집중한 나머지 지금 시비의 대상이 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눈치 채는데 시간이 좀 걸리고 말았다. “이런 널어버릴 자식!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냐?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이런 곳이나 드나들고...” 기뻤다. 기쁜 정도가 아니라 고맙기까지 했다. 이제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유신은 일단 거만한 눈매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기 싸움에서 져서는 다음 이야기의 진행에 애로사항이 만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유 잇게 피식 웃어주고는 남자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아니 던지려고 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털이 무성한 넓은 가슴팍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얼레?” 당황한 유신은 고개를 한참 뒤로 더 꺽어서야 험악하게 생긴 남자의 눈을 바라 볼 수 있었다. “크... 크다...” 거의 미스티만한 덩치, 게다가 생긴 것도 만만치 않았다. “어이, 꼬마. 오늘은 영업 안해. 얌전히 돌아가지?” 유신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남자는 아무렇게나 구겨진 얼굴을 더욱 구기며 우쭐거렸다. “훗, 제법 신사적인데? 하지만 나도 중요한 일이 있어서 왔거든. 더우니까 저리로 가 줄래? 덩.어.리.” 제 5 장 도적길드 15화 유신은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멍한 표정을 지어버린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금세 얼굴표정을 싹 바꿔서 밤새도록 연습했던 상대가 가장 열 받을 만한 말을 해댔다. 주점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싸움이 나자 흘긋 눈길을 보냈지만, 그뿐이었다. 아마도 유신이 금세 도망가거나, 아니면 사내의 손에 피떡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일방적인 싸움은 재미없다는 건방진 태도였다. “어쭈... 꼬마...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남자의 이마 위에 굵은 핏줄이 서는 것이 보였지만, 아직 모자라다. 조금 더 놀려주어야 본격적으로 최선을 다해 덤벼들 것 같았다. “저리 꺼져 잔챙이!” 유신이 상대도 안하고 무시해 버리자 여기저기서 킥킥거리며 그 남자를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크아악” 그리고 그 남자는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부우웅” 거의 유신의 얼굴만한 주먹이 바람을 가르는 흉측한 소리와 함께 날아들었다. 정말 죽일 생각이었는지, 체구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손속에 조금도 사정이 없었다. ‘괘씸한데? 정말 죽일 생각으로 주먹을 휘두르다니...’ 유신은 가볍게 왼손을 내밀어 남자의 그 주먹을 잡았다. “빠악” 보통 사람끼리 치고받을 때 나는 소리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들리면서 유신의 손바닥과 마주친 남자의 주먹은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완전히 멈춰 버렸다. “크윽...” 유신의 손은 남자의 주먹에 비하면 그 크기가 워낙 작기 때문에 손바닥으로 막았음에도 주먹 전체를 감싸진 못하고 겨우 중지의 정권 부분만 움켜쥐듯 한 모양으로 잡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남자는 마치 돌 벽을 친 듯한 둔탁한 충격에 자기도 모르게 옅은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우드득” 오우거 이상의 악력을 지닌 유신이 본격적으로 힘을 가하기 시작하자 그 남자의 정권 뼈는 시든 오이처럼 힘없이 부러지고 말았다. “크아아아악” 그리고 남자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주점 안을 울리고 나서야 다른 사내들은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애송이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들은 모두 품에서 나이프나 대거를 꺼내며 천천히 유신을 포위했다. 딱 좋았다. 도둑들이 쓰는 전형적인 무기인 것이다. “오호, 여기가 어딘데 그래? 술파는 곳 아니야? 응? 쫄지 말고 덤벼. 삼류들아.” “우어어억” 그 도발에 넘어간 또 한명의 남자가 마치 자신이 오우거인양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이쯤에서 미스릴 검을 살짝 보여주고 후퇴하는 게 좋을까? 너무 겁줘버리면 도둑길드에서도 꼬리를 말아버릴지 모르는데...’ 그 남자의 주먹은 느리고도 느려서 유신이 다음 작전을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을 때까지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느려서야...’ 남자의 주먹을 기다리다 지친 유신은 슬쩍 손을 뻗어 날아오는 그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몸쪽으로 당겨서 그 남자의 힘까지 이용해 벽 뒤로 날려버렸다. “쿠웅, 쿠당탕” 당기는 힘을 살짝 조절해 주는 것만으로도, 달려드는 남자의 방향을 틀어 머리부터 벽에 부딪치도록 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 남자는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널부러졌다. 상황이 이쯤 되자 다른 남자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는지 쉽게 달려들지 않았다.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괴물딱지는 아직 의자에서 일어서지도 않은 것이다. 유신은 감히 덤벼들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는 적들을 보자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한마디 빈정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힌트를 줄까? 한꺼번에 덤비면 이길지도 몰라.” “비웃는 것이냐!!” 다시 한번 유신이 도발하자 남자들의 살기가 주점 안을 가득 메웠다. “입구에 아이들 배치하고 사람들 드나들지 못하게 해. 그리고 애들 더 불러. 저놈을 죽여야겠다.” 리더인 듯한 탄탄해 보이는 남자가 명령을 하자 사내 중 한명이 주방 뒤편으로 사라졌다. 유신이 강하다는 것을 알아본 안목은 알아줄만 하지만, 결코 그들이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잠시 후,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주점의 2층까지 무장한 남자들로 메워지다 시피 했다. 모두들 무장도 제대로 갖추고 있어서, 숏소드나 석궁 정도는 기본이었다. ‘대체 어디서 이만한 인원과 무기들을 끌어 모았을까?’ 헤카이론 광산에서 좀비가 되어 버린 무리들도 그렇고, 이 녀석들도 그렇고, 무장뿐 아니라 솜씨도 제법이었다. ‘뭐, 상관없겠지. 전부 두들겨 패서 말하게 만들면 되니까.’ 제법이라고는 해도 인간수준에서 제법이다. 유신을 상대할 정도는 아니다. “멈춰라. 오늘이 어떤 날인데 소란스럽게 군단 말이냐!” 유신이 다시 한번 신나게 날뛰려는 참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주점 안을 찢었다. ‘어쩌면 저렇게 잘 어울릴까...’ 목소리의 주인공을 본 유신의 평이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등까지 내려와 있었고, 강렬한 붉은 눈 역시 그녀의 머리카락과 너무나 잘 어울려서 척 보는 순간 ‘여왕님’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대략 이십대 후반에서 서른 살 전후로 보였지만,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풍만한 몸매나 서릿발같이 당당한 표정의 얼굴은 젊은 아가씨들이 내는 풋풋한 매력과는 비교도 안 되는 요염함을 내뿜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검은 상복을 입고 있었다. 타이트하게 몸매가 들어나는 옷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상복이었다. 제 5 장 도적길드16화 그녀는 얼음장 같은 표정과 주변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주점 안에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을 전부 조용하게 만들고 유신을 바라보았다. “뉘 신지는 모르겠으나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시지요. 아직 남편의 상복조차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며칠 후에 찾아와 주셨으면 합니다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네 여왕님’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가게 할 정도의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말이다. “급한 일이거든요. 오늘 꼭 볼일을 봐야 겠는데요.” 하지만 평범하지 않는 유신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여자의 말을 무시했다. 짜면 그 오만함이 뚝뚝 흘러넘칠 것 같은 유신을 향해 매서운 시선을 던지던 여자는 별 표정 없이 한마디를 하고는 돌아섰다. “그럼 죽도록 해요.” 그와 동시에 수십 개의 석궁이 유신을 향해 비 오듯 쏟아졌다. 하지만 화살세례에 화난 복어 같은 모습으로 나뒹굴어야 할 유신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Rm아악” 그리고 그녀의 호위를 하고 있던 네 명의 건장한 남자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계집애같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설마, 검은 속임수? 마법사인가?” 유신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던 여자는 마법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다른 남자들이 재빨리 두 번째 석궁을 발사 준비를 할 동안 유신은 이미 그 여여자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었다. “커컥, 이...이놈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직은. 하지만 곳 내가 이길 것 같은데...“ "흥, 난 상관하지 말고 놈을 쏴!” 여자는 숨이 막혀 말을 더듬으면서도 화난 독사처럼 쉭쉭거렸다. “하...하지만 누님...” 아무리 명령이라고 해도, 저 무례한 침입자보다 ‘누님’이 맞을 확률이 훨씬 크다는 것은 아무리 막 굴러먹던 무식한 녀석들이라도 알 수 있는 일인지라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이 비겁한 놈!! 여자를 인질로 잡다니! 용기가 있다면 나랑 1:1로 붙자!” 남자들 중 리더인 듯한 녀석이 검을 빼들며 앞으로 나섰다. 그 남자도 유신이 응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시간이라도 끌어보면서 어떻게 해서든 빈틈을 찾자는 의도였다. “하? 비겁? 도둑놈들에게 그런 말 듣고 싶지는 않군.” “뭣이? 설마, 네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왔단 말이냐? 왕궁에서 보낸 첩자인가?” 유신은 대답 대신 여자를 집어 던지듯 근처에 있던 다른 남자에게 밀어버렸다. “재밌군. 덤벼.” 하지만 약속을 지키면 그게 기사지 도둑놈이겠는가? “크흐흐 순진한 놈. 쏴라!” 다시 한번 석궁세례가 쏟아졌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 자리에는 잔상만이 있을 뿐이었다. 유신은 제자리에서 5미터 이상을 점프하여 곧바로 2층에서 석궁을 쏘아대던 녀석들의 앞에 나타났다. 그 스피드도 눈으로 쫒기에는 너무나 빠른 것이었고, 설마 인간이 그런 식으로 움직일 수 있으리라곤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당하는 입장에선 마법으로 텔레포트해서 나타나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네 따위 놈들이 약속을 지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거든?” 유신은 덤덤한 말투로 석궁병들을 후려쳐 아래층으로 던져버렸다. ‘가만... 이 녀석들도 도적길드 녀석들이면 굳이 미스릴 검을 사용해 덫을 놓을 필요도 없잖아? 여기서 끝장을 보면 되겠다.’ 주점 안은 비명과 물건 깨지는 소리로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제는 굳이 함정을 파고 번거롭게 일을 진행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 유신은 천천히 첨예의 손잡이를 잡았다. 좁은 곳에서의 난전은 유신의 주특기이다. 도둑길드의 전사들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새에 급소를 채이거나 아래층으로 던져졌다. 숫자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유신은 첨예를 뽑아 숫자를 좀 줄여 놓을까 생각해 봤지만, 그랬다가는 완전히 도살장이 될 것 같아 관뒀다. 뽑는 것은 관두고, 대신 칼집채로 가끔 휘둘러 줄 뿐이었다. 그것 보다는 오히려 주변에 넘쳐나는 적들의 몸을 이용했다. 일단 유신의 손에 닿으면 인간의 몸은 때로는 방패가, 때로는 성능 좋은 무기가 되기도 하였다. 도둑길드의 전사들은 유신과 싸웠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홍차에 케익을 곁들여 먹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일어서서 움직이는 사람이라곤 유신밖에 없었다. “자, 이제 정리된 것 같군.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볼 준비가 되셨나?” 유신은 바닥에 쓰러진 남자들을 자근자근 밟아주며 이 녀석들이 죽자 살자 따르는 그 오만한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녀 역시 그 난리 통 속에 다른 남자들과 섞여서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퓨욱, 텅” 누군가가 유신의 뒤에서 석궁을 날렸지만, 그때까지 얌전히 유신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미니미스티가 튕겨 내었다. “미스티 대활약!!” “웃겨. 옷 찢어졌잖아. 그냥 얌전히 있어.” 유신은 토끼털로 만든 미니미스티의 겉옷에 상처가 나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으윽, 생명의 은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자, 이제 정리가 된 것 같으니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지요.” 유신은 미스티를 깨끗하게 무시하고, 쓰러진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제 5 장 도적길드17화 “이...이놈, 대체 정체가...” “아아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고...” 사방이 온통 널부러져 버린 근육질의 덩어리들 투성이라 이야기 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유신은 테이블 하나를 들어 비스듬히 뉘인 후, 마치 비질하듯 홀의 중앙 부분의 인간들을 슥슥 홀의 가로 밀어내었다. 그리고 성한 의자를 찾아 그 테이블 옆에 두개를 놓았다. 싸움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의자도 거의 성한 것이 없었다. 유신이 구해온 의자도 두 개 중 한개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지만, 나머지 하나는 등받이 부분이 부서져 있었다. “자, 일단 레이디 퍼스트입니다.” 비교적 멀쩡한 의자에 그 여자를 앉게 하고, 유신은 삐그덕삐그덕 금세 주저앉을 것 같은 반대편의자에 앉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 여자는 싸움 중에 여기저서 치였는지, 풍성하고 아름답던 머리카락은 온통 엉켜 있었고, 팔은 여기저기 긁혀서 빨갛게 부어 있었다. “간단한 규칙을 알려주지. 내가 질문하고, 네가 대답하는 거야. 말을 하지 않으면 저쪽에 있는 덩어리 중 하나를 죽이고, 거짓말을 하면 다섯을 죽인다. 이해했지?” 유신은 그의 외모가 워낙 만만하기 때문에 혹시라도 여자가 거짓말을 할까봐 말 속에 슬쩍 드래곤 피어를 섞어 엄청난 살기를 뿜어냈다. 로열가드들의 검을 집어넣게 하고, 마령결계에 빠진 하피들을 달아나게 했던 그 기운이다. 그 무시무시함에 다시 한번 몰래 석궁을 쏠 준비를 하고 있던 얼빠진 녀석들부터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이 요염한 미녀까지 모두 얼어붙고 말았다. “좋아. 이해한 것 같군. 첫 번째 질문. 이름이 뭐지?” “... 모니카.” “그럼 레이디 모니카, 도적 길드를 이끌고 있는 사람은 누구지요?” 매와 사탕을 번갈아가며 주는 것은 이야기의 기본이다. 유신은 일단 이야기가 통하기 시작하자 다시 부드러운 얼굴로 존대말을 썼다. “......” 하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고 황당하다는 얼굴로 날카로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바라만 볼 뿐이었다. 매섭게 생긴 얼굴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유신은 근처에 기절해 있던 남자중 하나의 팔목을 잡고 테이블로 질질 끌고 왔다. “이야기 할 생각이 없다면, 규칙대로 하겠습니다.” “우두두둑” 유신이 남자를 잡은 팔에 힘을 가하자 무언가가 어그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쓰러지고 난 후, 주점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기 때문에 그 소리는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크게 들렸다. “끄아아악”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 남자의 팔은 썩은 나뭇가지처럼 너무나 쉽게 부러졌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인지한 것은 찢어지는 듯한 남자의 비명소리가 홀 안을 메우고 난 후였다. 뼈가 뭉개지는 처참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팔은 힘없이 꺾였다. 그는 팔을 빼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아무리 몸을 비틀고 악을 써 봐야 소용없었다. 유신은 별다른 힘을 들이지도 않고 이번에는 목줄기를 잡았다. 아직 움직일 수 있는 다른 전사들은 다시 한번 무기를 챙겨들기 시작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아무리 덤벼봐야 저 마법사 꼬마에게 당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도, 그리고 이성적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만. 아무래도 우리가 기다리던 손님은 아니로군요. 제가 도적 길드의 길드마스터인 모니카 미즈워프입니다.” “에? 레이디 모니카가... 길드마스터라고요?” 전혀 뜻밖의 대답이었다. 이정도의 실력 있는 인재들을 순식간에 동원한 것으로 보아 간부급이란 것을 짐작 못한 것은 아니지만, 설마 대륙 전체에 퍼져 있다는 도적길드의 길드마스터를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니카는 모니카 나름대로 황당했다. 그녀가 풋내기 소매치기였던 시절부터 거의 15년 간을 끝없이 구애하던 작은 용병단의 두목을 남편으로 맞아 신혼의 재미가 꽃피려던 참에 흉측하게 생긴 망할 리치가 나타나 돈 한푼 내지 않고 헤카이론 광산을 고립시키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더니, 이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꼬마 마법사가 나타나 협박 질이다. 모니카는 마법사라면 이제 이가 갈렸다. 남편은 리치의 명령 때문에 광산을 고립시키다 드래곤 슬레이어로 명성이 자자한 하누스의 기사에게 갈기갈기 찢어져 시체도 건질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살해당했고, 그의 부하도 단 한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그녀가 혹시나 하여 밀정으로 붙여 두었던 남자조차 어떤 맹수에게 당한 것인지 온 몸의 뼈가 부숴진 채 헤카이론 마을 근처의 공터에서 발견되었다. 그녀가 도둑길드의 사람을 풀어 얻은 정보라고는 남편의 시체가 갈기갈기 찢어진 채 광산 안에서 발견되었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이틀 전에야 겨우 남편의 조각이라고 추측되는 것들을 어떻게 어떻게 하여 얻을 수 있었지만, 그녀로서도 그 조각이 남편의 어느 부분이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제 5 장 도적길드18화 어려서부터 체계화 된 도적 길드를 만들어 보겠다던 꿈이 결실을 맺기 시작하고, 이제 겨우 결혼도 하여 인생의 재미란 것을 알기 시작할 즈음, 그녀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낙심하여 정신이 없는 틈을 타, 그녀의 지휘를 뺏으려는 엘카드리안 지부의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녀의 오른팔이었고, 가장 신뢰했던 남자가 배신한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많은 무장인원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반란한 녀석들이 그녀의 암살을 시도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안 좋은 일만 연달아 일어나 정신이 없는데, 이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꼬마 마법사가 나타나 협박 질이다. 모니카는 마법사라면 이제 이가 갈렸다. 그녀는 유신이 처음 왔을 때 까지만 해도 그녀와의 협상을 위해 엘카드리안 지부에서 보낸 전령인줄 알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조각난 시체를 모아 남편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 협상은 차차 할 생각으로 일단은 전령을 곱게 돌려보낼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전령이 건방지게 나온 것이다. 그녀는 완전히 잘못 짚은 것도 모르고 함부로 공격명령을 내렸다가 된통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단 길드마스터는 제가 맞습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무리도 있지만, 그 무리들은 곳 제거될 것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혹시 이상한 말을 듣더라도 제 부하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말아줬으면 합니다만.” 마법사라는게 워낙 신출귀몰하고,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진 것이 없는 자들이라 모니카로서는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그녀가 이야기를 들어온 마법사의 이미지하고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더더욱 경계가 되는 것이다. 백발을 성성하게 기른 것도 아니고, 싸움을 할 때 불이나 번개를 뿜어내는 것도 아니다. 단지 힘을 세게 하는 근력강화마법과 텔레포트마법만으로도 고르고 골라 편성한 그녀의 직속 호위대를 괴멸시킨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그런 것보다는 아직까지 단 한명의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이, 그것도 많은 숫자로 적은 숫지를 제압하는 것도 아니고, 단 혼자서 오십 명도 넘는 무장인원을 상대하면서 기절시키거나 전투불능 만으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 줄 알기 때문이다. 이 사내가 정말 그 정도 수준의 마법사라면, 여기 있는 인원 전부를 몰살시키는 것쯤은 너무나 쉽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조... 좋습니다. 그럼 ... 모니카님이 길드마스터님이고...” 유신은 너무 황당한 말을 들어서 순간적으로 그 다음에 할말을 까먹고 말았다. “그러니까 다음으로 물어볼 것은 왜 리치 같은 마물하고 손을 잡았지요? 아니, 그보다 대체 어떻게 그런 고급의 몬스터를 알게 된 것입니까?”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모니카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리치가 찾아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죽은 그녀의 남편과 그녀 밖에는 모르는 일이다. 저 놀라운 싸움 솜씨나 리치의 일을 알고 있는 자라면 짐작 가는 이름이 있다. “천공의 기사... 유신...” “에? 어떻게 알았지요?” 그녀와 리치의 사정을 모르는 유신으로선 그녀가 어떻게 그의 정체를 알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호홋, 왜 모르겠습니까. 그렇게 유명한...” 모니카는 서큐버스라고 착각할만한 무섭도록 관능적인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유신이 잠시 어떻게 된 일인지를 몰라 당황하는 순간 허벅지 안쪽에 숨겨두었던 단검으로 전광석화처럼 찔러갔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란 말이 있다. 유신은 간단하게 모니카의 팔목을 나까 채 바닥에 패대기쳤다. “아직 정신 못 차렸군!!” 유신은 모니카의 팔이라도 하나 부러뜨리고 차분해 지면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몸을 가눌 수 있게 된 도적들이 동시에 석궁 세례를 퍼부었다. 피하는 것은 쉽지만, 그랬다가는 모니카가 그 석궁 세례를 받을 판이다. ‘생각 없는 녀석들이네...’ 별수 없이 첨예로 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한번 미스티 대 활약!!” 하지만 이번에도 미스티가 재빠르게 움직여 석궁을 튕겨냈다. 그 많은 석궁을 전부 막을 수는 없기에 유신의 사각지대로 날아오는 것만 잡아준 것이다. 미스티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온 나머지 석궁은 물론 유신이 손으로 쳐냈다. “도적 길드에 원한을 산적은 없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 죽어도 좋다는 말이냐?” 제 1파의 석궁 세례가 지나가고 나자 여유가 생긴 유신은 그대로 모니카의 목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또 쏴보려면 쏴봐! 이번에는 나도 사양 안하고 이 여자를 방패로 써 주지!” 생각 같아선 도적 길드 따위 씨도 안 남게 전부 쳐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애써 구축된 정보망이 사라질뿐더러 어차피 몇 년 뒤에는 다른 녀석들이 도적길드를 만들겠다고 설칠 것이 뻔하다. 신이 금한 행위인 도둑질로 먹고 사는 놈들 따위 죽이는 것은 그다지 양심에 거리낄게 없었지만, 흄과의 일전을 앞둔 상황에서 기껏 구축된 전 대륙적인 정보망을 버릴 수는 없었다. “죽여라. 하지만 아무리 드래곤 슬레이어라 해도 이곳을 무사히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모니카는 남편의 원수에게 죽는 것이 한스러웠는지 한줄기 원통함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유신은 그녀의 협박보다는 태도가 훨씬 마음에 걸렸다. ‘죽음... 내세에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마법계에서 죽음에 대해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마법계의 변화를 막는 것은 이미 불가능 한 것일까? 위시마스터는 대체...’ 이미 위시마스터는 마법계의 관리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무슨 사고를 당해서 관리할 능력이 없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최악의 경우 어둠에 섰다는 뜻이다. 어둠을 직접적으로 지원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신에게 받은 신성한 의무인 마법계의 관리를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곳 반역이란 뜻이다. 빛과 어둠의 전쟁에 있어 중립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좋다.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째서 날 그렇게 미워하는 것이지?” 유신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모니카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제 5 장 도적길드19화 “하? 시침 떼시겠다? 헤카이론 광산의 일을 모른단 말이냐?” 모니카는 기막히다는 듯,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나 사람을 많이 죽였으면 그가 죽인 사람들도 기억하지 못한단 말인가? “헤카이론 광산? 몬스터와 손잡고 미스릴을 빼돌리려 했으니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애초 몬스터와 손을 잡은 순간 그들의 운명은 결정된 거야.” 유신도 도적길드의 전사들이 리치에게 좀비가 되어 그에게 조각조각 났던 도적길드의 전사들이 생각났지만, 설마 그것 때문에 욕을 먹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유신은 좀비를 정화시킨 것이지,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녀가 자신에게 화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그따위로 죽였단 말이냐? 아는 거라곤 도둑질과 싸움질 밖에 없는 하찮은 인생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시체를 도살장의 고기처럼 찢어발겨야 속이 시원했는가?” “아!” 그제서야 이해했다. ‘이... 이 자식들, 내가 죽인 걸로 오해하고 있잖아?’ “그래! 우리는 세상에서 멸시받는 도둑놈이다. 편하게 살고 싶어서 일도 안하는 쓰레기 같은 놈들의 집합이라고 해도 할말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시체를 그렇게까지 능욕해야 하는 거냐? 살인광 주제에 세상에서 제일 잘난 영웅인양 으스대지 말란 말이다!” “......” 유신은 하도 기막혀서 잠시 동안 할 말을 잊었다. “왜? 그때처럼 우리도 전부 찢어발겨서 죽이지 그래? 용도 잡는 괴물한테 이정도 인간쯤 죽이는 것은 쉬울 것 아닌가?” 모니카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있는 말 없는 말 마구 떠들어 댔다. 용을 잡은 사람을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쉽지.” 유신의 말에 모니카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에서 빠르게 핏기가 빠져 나갔다. 상대는 드래곤 슬레이어. 숫자로 이길 수 없다는 뜻이다. “뭐...뭣이라고?” 냉정한 유신의 말에 모니카는 이제 자기가 결단을 내릴 일만 남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유신과 동진어귀 할 생각으로 그의 허리를 꽉 잡았다. 기왕 이렇게 된 것, 함께 죽을 속셈이다. “뭐해! 이 자식들아 석궁을 쏴!!” “하...하지만 누님... 지금 쏘면 누님이 맞아요.” “상관 말고 쏴!” 동시에 삼십 여개의 석궁이 유신에게 겨냥되었지만, 그는 눈도 깜짝이지 않았다. “두 달하고.... 조금 더 남았나?” 삭막한 살기가 가득 차서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주점 안에서 유신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런 분위기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게 조용하고, 무섭도록 차분한 목소리였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한 단어 한 단어가 오히려 훨씬 더 자극적으로 모두의 귀 안에 파고들었다. 그는 별 힘들이지 않고, 그의 허리에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모니카의 팔을 풀고는 반걸음 정도 때어 놓았다. 그리고 모니카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올해가 가기 전까지, 네놈들이 나를 찾아 와라.” 모니카가 유신에게서 떨어지자 당장 석궁을 발사하고 싶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호랑이가 눈앞에 있으면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유신의 내뿜는 압도적인 기운은 감히 호랑이 따위가 내뿜는 것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네놈들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제대로 조사를 하고, 그리고 정식으로 사과해라.” “웃기지 마라!! 이 살인자야!!” 모니카는 공포보다 분노가 훨씬 더 컸기에 그런 와중에서도 악을 쓸 수 있었지만, 다른 녀석들에겐 무리였다. “쏴!! 뭣 하는 게냐!! 저놈을 쏴버리라고!!” 유신과 모니카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유신은 마치 아무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무방비해 보일 정도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무립니다. 부하들을 사랑하는 마음. 당신은 저들의 리더가 될 자격이 있군요. 하지만 이길 수 없는 싸움은 피해 갈 줄 아는 것도 리더의 요건. 드워프는 진실을 말하는 종족이니 그들에게 사건의 전말을 듣도록 하세요. 이야기는 그 다음입니다.” 유신은 좀비가 되어 처참하게 죽은 남자 중에 그녀의 남편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기 때문에, 단순히 그녀가 부하들을 너무나 아껴서 원수를 갚으려고 저렇게까지 날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용병단의 리더 역시 끔찍하게 부하를 아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어쩐지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정도 인물이 왜 도둑질 따위로 먹고 사는 방법을 택했을까... 유신은 장미의 화원을 나와 다시 홍등가에 섰다. 늘 조용하고 차분하던 장미의 화원이 쿵쾅거리는 소리로 난리가 났기 때문에, 주변에는 구경꾼들이 가득했다. “어이, 꼬마!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마치 안에서의 난리가 거짓말처럼 그 밖은 아무런 위협도 없어 보였고, 여전히 퇴폐적인 홍등가일 뿐이었다. “꺄아! 아까 그 귀여운 오빠네? 안에서 난리가 나서 즐기지도 못하고 쫓겨 났나봐!” 처음으로 그 안에서 사람이 나왔기 때문에 모두 유신의 주위로 몰려들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안하고 묵묵히 걸어갔다. ‘도둑놈이라고 인간으로서의 장점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다. 도둑질로 살아가는 것은 변명할 수 없는 악한 짓이지만, 저들에게도 동료를 사랑하는 마음이나, 자기를 희생할줄 아는 선한 마음도 있다. 빛과 어둠을 함께 포용할 수 있는 인간의 특권. 한번 악행을 하여도 나중에 선행을 하면 그 선행과 악행이 서로 상쇄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선행과 악행은 완전히 분리되어 선행에는 축복이, 악행에는 대가가 따르는 것일까? 유신이 충분히 놀다 오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 여자들이 여기저기서 콧소리를 내며 엉켜 들었지만, 더 이상은 아까 전처럼 얼굴이 빨개지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축제는 끝난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악행을 하던 선행을 하던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일까...’ 유신은 마지막 생각을 빠르게 머릿속에서 지웠다. 제 5 장 드워프 왕국 그레이트하사둠1화 드워프의 왕국은 인간들의 나라처럼 지도에 보이는 선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라일로스 대륙의 서쪽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후길산맥의 지하 전체가 드워프의 왕국인 그레이트 하사둠인 것이다. 라일로스 대륙 전체에 거쳐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엉켜있는 지하도 하나하나가 모두 드워프의 왕국 일부이다. 그 지하도의 미궁은 끝없이 새로 생성되고, 오래된 곳은 폐쇄되기 때문에, 거기에 무슨 국경선을 그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냥 라일로스 대륙의 지하 전체가 드워프의 왕국 그레이트 하사둠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드워프 이외의 종족이 그 입구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고, 설혹 찾는다 해도, 그 미로에서 길을 헤매지 않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림없는 일이다. 게다가 드워프가 떠나버린 곳은 고블린이나 놈 같은 지하형 몬스터들이 차지하기 때문에, 자칫 그런 곳에 잘못 들어갔다가는, 미로에서 헤메서 죽는 것이 아니라 몬스터의 매우 특별한 식사거리가 되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드워프의 왕국으로 들어가려면 후길산맥 최북단에 있는 그레이트 하사둠의 입구, 드레탄 게이트를 이용하는 것이다. 드레탄 게이트는 드워프 왕국의 중요 도시를 이어주는 모든 길들이 묶여있는 곳으로, 드워프를 제외한 나머지 종족이 드워프의 왕국에 볼일이 있을 때 사용하는 길이다. 길은 꼬불꼬불하지 않도록 직선으로 나 있고, 샛길의 수는 최대한 줄이고, 갈림길에는 친절하게도 표지판까지 있는 길이다. 다른 종족, 특히 엘프에게 드워프의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곳이니 만큼, 그 화려함이나 웅장함은 다른 어떤 건축물보다도 뛰어나다. 엘프들은 아무리 드워프가 아름답고 뛰어난 건축물을 만들어 봐야 대자연이 빚은 최고의 예술품인 빛의 나무에 비할 수 없다며 빛의 나무를 자랑하자, 드워프의 시조들이 이 빛의 나무에 뒤지지 않는 드워프의 건축물을 만들자는 야심 찬 의도로 만든 건축물이 이 드레탄 게이트이다. 드워프가 이룬 건축 예술의 최대 명작을 뽑으라고 하면, 수많은 왕궁과 미궁등이 거론되겠지만, 그중에서도 드레탄 게이트는 지하왕궁 엘 하사둠과 함께 최고중의 최고로 꼽히는 작품이다. 80미터에 이르는 높이, 그리고 거기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들. 비록 신에 대한 믿음은 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신상이나, 인간의 상은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마법계에 있는 모든 동물들, 식물들을 조각하여 알맞게 배치해 놓았고, 그 외에도 기하학적인 조형물들이 감탄사가 나올 만큼 아름답게 이 웅장한 문을 꾸며주고 있었다. 수십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그레탄 게이트의 정상 부분은 일 년의 대부분을 신비로운 안개 속에 감추어 두지만, 아주 맑은 어떤 날엔 하늘과 지상을 이어주는 다리인양, 후길산맥의 가장 높은 곳에서 그것을 만들어 준 드워프들을 살펴본다. 천정까지의 높이만도 40미터에 이르고, 넓이는 100미터가 넘는 웅장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단한 길임에도, 실제로 드레탄 게이트를 이용하는 드워프는 없다. 드워프들은 마법적으로 만든 미로가 아니라면, 아무리 복잡한 미로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기 때문에 그냥 근처에 있는 다른 샛길들을 이용해도 충분하기 때문에 힘들게 드레탄 게이트까지 올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유신은 그를 위해 하누스 왕국에서부터 대륙의 최북단, 드레탄 게이트까지 날아온 그의 귀여운 니케에게 작별의 인사를 고했다. “니케, 이제 당분간은 야생에서 지내. 성으로 돌아가 봐야 창공의 제왕에겐 어울리는 옥좌를 내주지 않겠지. 모든 준비가 되면... 다시 한번 네 도움을 필요로 하면, 그때 꼭 다시 부를게. 잘 지내고, 새끼도 많이 낳고... 건강해야 해.” 드워프의 왕과 함선 건조에 대한 담판을 짓고 나면, 바로 이곳의 군사이동용 게이트를 사용해 미케드리안으로 갈 생각이기 때문에, 니케는 당분간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유신은 니케의 주인이랍시고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것도 없이 부려먹기만 한 것 같아 몹시 아쉬웠다. “구구구구” 니케도 유신과의 이별이 아쉬운지, 한동안 유신을 붙잡고 놔 주지 않았다. 유신은 그런 니케를 매몰차게 뿌리치고, 드레탄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니케는 그가 사라지고도, 한동안 창공을 선회하며 떠나가지 않았다. 유신은 귀여운 니케가 떠날 때 까지 입구의 안쪽에 몸을 숨겼다가, 니케의 코어가 느껴지지 않자 다시 나와서 니케가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굳이 드레탄 게이트까지 올 필요가 있었을까요? 제 센서를 이요하면 샛길에서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 텐데요?” 미스티는 일부러 드레탄 게이트까지 온 유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적길드의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기는 했지만, 이제 미케드리안 마법학교의 개학까지는 겨우 보름 남짓뿐이 안 남은 것이다. “서두르면 좋겠지만... 건축물이란 그 시대의 모든 기술이 드러나는 종합 예술이야. 그중에서도 드레탄 게이트는 마법계 드워프 기술의 정수를 모아서 만든 곳이지. 이것을 보면 드워프들의 기술 수준이나... 아니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종족인지... 그런 문화 전반에 대해 알 수 있거든. 그리고 솔직히 이런 명작을 보고 싶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니케의 등 위에서 살펴본 드레탄 게이트는 거대한 후길산맥 위에 놓인 정밀하고 아름다운 장난감 같아 보였지만, 그 진가는 지상에 내려서서 봤을 때 들어났다. 그 웅장함. 크면서도 미련하지 않고, 미려한 장식들이 제각각 아름다움을 뽐내면서도 결코 산만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래서 드레탄 게이트를 본 소감은 어떻지요?” “솔직하고 강건한 종족. 하지만 융통성이 없고 외골수라는 것이 느껴지네. 드레탄 게이트는 딱 드워프 그 자체야.”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제가 생명체가 아니란 것을 느끼게 되는군요. 추상적인 대화를 할 때, 떠오르는 생각들이... 단지 프로그램일 뿐인지, 아니면 저의 고유한 생각인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뭐가 됐든 상관없겠지. 고등 인격을 지닌 생명지성체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사는 존재는 많지 않아.” “그런가요?” “존재에 대한 물음은 네가 스스로 답을 내는 수밖에 없어. 영격체로 진화하는 존재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물질계의 인간들도 아직까지 답을 내지 못하는 문제니까. 하긴... 그런 상황에서 유사생체인공지능을 통제하지 않은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고는 해도 너무 위험했고 생각되지만...” “덕분에 제가 이렇게 유신님의 곁을 지킬 수 있지요.” “하핫, 그건 정말 인간 같은 발언이군.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만큼 오만하지 않다는 것은 ‘생명체’로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제 5 장 드워프 왕국 그레이트하사둠2화 미스티는 자신을 ‘생명체’로 인정해 주는 유신이 진정 고마웠지만, 그건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성계대전이 격렬해 지며, 미스티 같은 인공생명의 뛰어난 성능을 전투병기에 활용하기위해 그에 대한 제재를 줄이고, 대량으로 생산하였다. 하지만 이는 신의 영역을 넘나드는 연구. 천사들은 인간이 신을 흉내 내는 창조행위를 하는 것을 지옥의 악마만큼이나 싫어한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 그 말, 미카엘님이나 가브리엘님이 들으면 신성모독이라고 난리가 날 텐데요.” “그런가?” 유신은 별 관심 없다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했고, 미스티는 그런 유신의 태도가 너무나 고마웠다. “태어났으면 열심히 살아가야지. 당신의 뜻은 알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 우주를 올바르게 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그것이 태어난 이상 우리가 짊어지고 갈 축복이자 의무라고 생각해.” 드레탄 게이트에서 엘 하사둠까지는 삼일 정도의 거리였다. 엘 하사둠까지 이어지는 길 전체에 거쳐 아름다운 조각들과 장식들이 벽과 천정을 장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는 길 자체가 지루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잘 만들었다고 해도, 삼일이나 비슷비슷한 풍경을 보면 질리기 마련인데, 이 드레탄 게이트의 길만큼은 전혀 질리지 않았다. 그만큼 드워프들의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이리라. 이야기가 통하는 말동무도 있고, 아름다운 예술품이 가득한 곳을 걸어 다니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생각보다 엘 하사둠까지 거리가 꽤 되었기 때문에 음식이 떨어 질까봐 걱정이었다. 곳곳에 분수대와 광장이 있었기 때문에 식수는 모자라지 않았지만, 음식만큼은 어떻게 해도 구할 수가 없었다. 땅속이라 산짐승이 있는 것도 아니고, 햇볕이 들지 않으니 과일도 없다. 야광석이 사방에 밖혀 있어 결코 어둡지는 않았지만, 야광석에서 나오는 빛으로는 광합성을 할 수 없으니, 먹을만한 열매가 열리는 식물이 자라지 않는 것이다. “으으... 배...배가 고프다. 엘 하사둠까지는 너무 많이 남았고... 중간에 다른 드워프들의 마을에라도 들려 볼까?” “그러게 음식 충분해 챙겨 오자고 했잖아요.” 미스티는 드레탄 게이트에 들어설 때부터 계속 투덜거리는 유신 때문에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땅속이라 거리를 잡을 수 없어서 그랬어. 아무리 드워프들이라고 해도, 땅속에 이만한 크기의 인공 구조물을 만들 수 있으리라곤... 게다가 먹을 것도 구할 수 없게 만들다니! 대체 드워프들은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지?” 대충 규모가 크다는 것은 예상했지만, 이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질려버리게 넓고 큰, 웅장한 조각들, 높은 천정. 그런 속에 있자니 더욱 배가 고픈 것 같았다. 게다가 통행인이 많지 않기 때문에, 무슨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다. 덕분에 굶어죽을지도 모르는 곤란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드래곤 슬레이어, 천공의 기사 유신!! 드워프의 미궁에서 굶어죽다...’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에 스쳤다. ‘설마...’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죽으란 법은 없게 마련이다. “다음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300미터 정도 거리에 인간 5명이 포착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달라고 하는 게 어떨까요?” 미스티의 감지기에 정말 오래간만에 살아있는 생명체가 잡혔다. “그래! 어서 가보자. 설마 음식 약간도 안 나누어 주지는 않겠지.” 유신은 지금까지 지쳐서 빌빌거리던 모습이 거짓말처럼 사뿐한 걸음으로 뛰어갔다. 인솔자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 하나와 그의 학생이거나 자식 정도로 보이는 소녀 둘과 소년 둘이 드워프가 만든 정교한 그리폰 조각품을 감탄했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음식이 남는다면 조금만 나누어 받을 수 있을까요?” “우...우왓” 유신이 그중 한명에게 말을 걸자 깜짝 놀랐다는 듯, 들고 있던 그림도구를 와르르 떨어뜨렸다. 설마 그들 이외에 다른 사람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조금은 안돼! 조금은 안돼! 많이! 많이!’ 바램이라는 것이 있다. 강한 바램은 일종의 오오라로 볼 수도 있는데, 오감이 예민한 사람이면 느낄 수 있다는 육감의 일종으로, 다른 사람의 정신을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유신은 상대편이 육감에 뛰어난 사람이길 바라며 이런 오오라를 무럭무럭 발산했다. 초면에 음식을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은 무척 뻔뻔한 일이다. 하지만 여행자들끼리는 어려울 때 서로 도와야 한다는 어떤 공통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만 얼굴에 철판을 깔면 이런 부탁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신은 배가 고픈 것이다. “허헛, 드워프의 걸작을 관광하러 온 인간이 또 있었군. 그런데 대체 이 높은 산까지 올라오면서 그런 차림이라니...” 움직이기 간편한 바지와 셔츠, 재킷. 유신이 처음 마법계에 왔을 때의 차림이다. 음식도, 배낭도, 침구도 없는데 검만 네 자루나 들고 다니니 이상하게 여길 만도 하다. 유신이야 니케를 타고 왔으니 별 힘들이지 않고 드레탄 게이트가 있는 후길 산맥의 가장 높은 곳까지 쉽게 올 수 있었지만, 이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모두들 배낭을 메고, 여러 가지 등산용 장비들을 들고, 중요한 부분은 그려갈 생각인지, 그림도구도 챙겨들고 있었다. 다행이도 유신의 얼굴이 남에게 경계를 주게 생기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행객들은 그다지 껄끄러워 하지 않고 음식을 나눠 주었다. 같은 방향이면 동행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특별한 목적지가 있다기보다는 드레탄 게이트를 구경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누어 준 음식 덕분에 간신히 굶지 않고 엘 하사둠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제 5 장 드워프 왕국 그레이트하사둠3화 엘 하사둠에 도착한 유신. 이제는 뭘 봐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엘 하사둠 왕궁에 도착하기까지 보아온 드워프들의 다른 건축물과 조각품들에서 이미 드워프가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 하사둠은 처음 드리탄 게이트 앞에 섰을 때만큼이나 경이로웠다. 왕궁의 입구는 폭이 40미터에 달하고, 높이는 그 두 배 이상이었다. 거기에 새겨진 세밀하고 정교한 조각이나 문양들도 놀라웠지만, 그것보다도 지하에 이정도 크기의 공간을 무너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덕분에 지하라 답답하다거나 좁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입구를 지나가자 그곳에는 드래곤이 뒹굴어도 될만한 넓은 광장이 나타났고, 그 중앙에는 호수라고 불러야 할만한 크기의 분수대가 있었다. 도저히 이 안이 땅 속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수 아래에서는 야광석을 두어 마치 별이 뿌려지는 것 같은 연출 효과를 내었다. 호수의 가에 설치되어 있는 분수대가 물을 뿜을 때면, 그 물줄기가 호수의 반대편 까지 닿아 마치 하늘의 은하수를 그대로 옮겨온 것 같았다. 그리고 사방에는 작달막한 드워프 드워프 드워프 천지였다. 땅땅한 드워프와 웅장한 지하도시는 어울리지 않을 것도 같지만, 그런 이질감 따위는 전혀 없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수염 때문인가...’ 왠지 드워프의 웅장함은 혹시나 그 하얗고 나름대로 웅장하다 해도 좋을만한 수염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지만, 정말로 결론 없는 망상일 뿐이었다. 왕궁이라고는 해도, 하누스 왕궁이나 예메른 왕궁같이 지상에 있는 왕궁하고는 완전히 다르다. 지하에 있으니 당연히 외관이란 것이 없기 때문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샌가 드워프의 거주구가 나오고, 작업장이 나온다. 그래서 엘 하사둠 왕궁은 드워프의 왕이 머무는 이곳 근처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지, 인간들의 성처럼 ‘여기부터 여기까지’라는 경계는 없다. 왕이 살고 있으니 왕궁이라고는 해도, 근위병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문무백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유신은 대체 왕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몇몇 드워프를 붙잡고 물어봐서 간신히 왕의 알현실 까지 가 봤지만, 그곳은 썰렁하게 아무도 없었다. 잠시 동안 더 기다려 봤지만, 아무래도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직접 찾아 나서기로 하고 무턱대고 그 일대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끔씩 마주치는 드워프들에게 물어물어 드디어 왕이 있다고 하는 방 앞에 섰다. “뭐가 이렇게 엉망이지? 왕이라면 한 나라의 대표 아닌가? 신원조사도 없고, 방문 목적도 물어보지 않고...”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생각하자 허탈함과 황당함이 몰려들었다. “문화의 차이란 것일까요?” 사실 드워프들에게 왕이란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인간과는 달리 드워프들의 욕망은 그들의 예술작품에 한정되기 때문에 욕망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으며, 덕분에 분쟁이나 다툼이 적기 때문이다. 따라서 드워프의 왕국은 인간의 나라들과는 달리 ‘국가’라는 것이 그리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드워프의 왕은 인간의 왕과는 달리 특별히 발언권이 세거나 신하들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경우 왕이 죽으면 나라 전체가 휘청대지만, 드워프의 경우에는 왕이 죽는다 해도, 그와 친했던 친구들과 식구들이 조의를 표하는 정도에서 끝나고, 금세 새 왕을 뽑을 정도다. ‘왕’을 특별한 드워프라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를 위한 경비나 시녀들도 당연히 없다. 이 엘 하사둠 왕궁도 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드워프의 건축적 재능을 표현해 보기 위해 건설된 것이다. “하지만... 모르모인들은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물질계에서 있는 모르모 인들도 외골수이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제대로 된 정치, 행정 체계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모르모인들은 과학이 엄청나게 발달했기 때문에 국가간의 분쟁이 잦았고, 외계 종족과 경쟁하면서 우주 진출을 했던 터라 정치, 행정이 발달했을 뿐이지, 근본은 이들과 같다. “그만큼 마법계의 드워프들이 더 순수하다는 뜻이겠지요.” “아아... 우주는 넓어...” 유신은 단념했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누스 왕국에서 온 유신입니다. 드워프 왕께 드릴 부탁이...” 유신은 그 말을 끝까지 있지 못했다. 방 안에는 십여명의 드워프들이 전부 커다란 책상 앞에서 무언가를 만드는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 드릴 부탁이... 있어서... 왔는데요...” 도대체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 결국 하릴없이 방 문 앞에서 멀뚱멀뚱 구경하다가는 할 수 없이 그 드워프에게 다가가 그들이 만드는 것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배고프면 일어나겠지... 그때 물어보자...’ 지하 속이라 정확한 시간의 흐름이 지상과는 다르게 느껴졌지만, 인간에겐 배꼽시계란 것이 있다. 배가 고프면 꾸르륵 소리가 나면서 밥을 내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벌써 유신의 배에서 그 배꼽시계가 울기 시작한지 꽤 되었지만, 도대체 드워프들은 밥 먹는 시간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일어날 생각을 안했다. “저기요, 이곳에 드워프들의 왕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을까요?” 결국 기다리다 지친 유신은 그들 중 하나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인간 식으로 치자면 굉장히 무례한 질문일 테지만, 드워프들에겐 그렇지도 않은 듯 했다. 그 드워프는 왼쪽 눈에는 돋보기 안경알 같은 것을 끼고, 손바닥만한 정교한 말 조각을 만드는 중이었는데, 유신이 말을 걸자 길게 한숨을 쉬고는 안경을 벗고 목 뒤를 주물렀다. “후우...” 그 드워프는 얼마나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있었는지, 눈 전체가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제 5 장 드워프 왕국 그레이트하사둠4화 “하무타! 인간 손님이 찾잖아!” 그 드워프가 밑도 끝도 없이 하무타라고 해서 유신은 하무타가 무엇인지를 잠시 동안 생각해야 했다. 처음에는 ‘제기랄, 빌어먹을’ 같은 욕설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어쩌면 드워프 왕의 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들었다. 그 말에 한쪽 구석에서 무슨 탑으로 보이는 건축물의 설계도를 그리고 있던 한 드워프가 일어나자 그 조심스런 생각이 진실이었나 하는 확신이 들며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인가, 인간 손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하게 생긴, 평범한 복장의 드워프였다. “... 그러니까...그... 드워프의 왕... 인가요?” 매우 매우 무례한 말이었지만, 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네. 하누스에서 왔다면... 율리안이 보낸 사람인가?” “그건 아니지만, 흄 대륙과의 전쟁에 대해 의논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하누스의 국왕님이나 다른 귀족들과도 얘기를 끝냈으니 하누스 전체의 뜻으로 보면 될 겁니다.” “그거라면 이미 드워프 포병 2개 병단을 빌려주지 않았나? 그 얘긴 율리안과 끝냈네만...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면 돌아가 보도록 하게. 지금 좀 바쁘거든.” 유신은 그 갸날프고 귀엽게 생긴 율리안 왕자를 존경하기로 했다. 대체 무슨 마술을 써서 이 대책 없이 고지식한 드워프에게 드워프캐논을 빌렸을까?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무슨 말이든 할 것이 아닌가? “저... 일단 이야기는 들어 주셔야...” 하지만 드워프의 왕이라는 하무타는 이미 그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제도판과 씨름을 시작하고 있었다. 다시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던 유신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다는 듯, 그의 검들 중, 마에스트로 둔켈이 만들어 준 미스릴소드 리켈리아스를 뽑았다. “스르릉” 명검다운 시원한 소리를 울리며 미켈리아스가 뽑히자 그곳에 있는 모든 드워프들의 시선이 단숨에 모아졌다. 워낙 야광석이 촘촘히 박혀 있는 작업실이라 미스릴 검을 뽑았다고 하여 ‘태양이 떠오른 것 같았다.’는 상투적인 표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번쩍거리지는 않았지만, 드워프들은 검이 뽑히는 순간 미스릴로 만든 명품 검이 그들의 주위에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냄새로 아는 것인지, 아니면 검을 뽑을 때 나는 소리로 아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육감으로 아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귀신같이 알고 모여든다. 드워프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어디... 이런 명검을 보고도 무관심 한지 보자.’ 그의 생각처럼 모두들 벌떡벌떡 일어나 검 주위로 모여 든 드워프들은 ‘오오’하는 감탄사를 지르며 검을 살펴보았다. 그전까지 시체처럼 조용히 자기 일만 하던 드워프들이 소리도 없이 한꺼번에 모여들자 왠지 시체 주위에 모여드는 구울이 생각났다. “이 검!! 미켈리아스군! 헤카이론의 마에스트로 둔켈의 대작을 어찌하여 자네 같은 인간 젊은이가 가지고 있나? 설마... 자네가 드래곤 슬레이어 유신인가?” “하아...예. 이제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군요.” 하지만 이야기는 그 후로도 세 시간 쯤 후에야 시작될 수 있었다. 미켈리아스의 아리따운 자태에 취해버린 드워프들이 그 검을 구경하느라 또다시 유신은 잊혀진 존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허허... 과연 마에스트로의 칭호가 아깝지 않군. 명불허전이야. 대단해!” 마침내 구경을 끝마쳤다는 듯, 하무타가 말했다. “그... 그 정도인가요?” 유신은 끝났다고 안심한 나머지 쓸데없는 사족을 달았다가 엄청난 후회를 했다. 처음에 드워프들은 유신에게 검을 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핑계로, 다시 미켈리아스를 빼앗아 해부라도 할 듯 이리저리 뜯어보며 자기들끼리 토론과 토의를 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고 나자 의견이 갈리기 시작하며 서로 자기주장이 맏다고 우기며 싸움 해 대기 시작했다. 예술적 가치가 어쩌구, 밸런스가 저쩌구, 무엇을 형상화 한 것인지, 둔켈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등등 나중에는 미켈리아스가 코스믹블레스터 이상의 최강의 성검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도저히 토론은 끝날 것 같아 보이지 않았고, 배도 고프고 지쳐버린 유신은 방 한쪽 구석에 놓여져 있는 소파에 몸을 뉘이고 잠을 청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유신은 어디선가 솔솔 풍기는 닭고기 냄새에 눈을 떴다. “여, 마침 일어났군. 이리 와서 맥주 한잔 하게.” 맥주보다는 닭고기 요리가 먹고 싶었지만, 하무타는 유신이 눈뜨자마자 그의 얼굴 만 한 잔부터 척 내밀었다. “자, 일단은 피곤할 테니 쭉 한잔 들이키게. 무슨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지?” “이제 들어주는 겁니까?” “당연하지! 둔켈 정도의 마에스트로가 그의 회심의 역작을 맡겼을 정도면 드워프와 이야기 할 자격이 있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피곤하면 술을 마신단 말인가?’ 유신은 드워프의 특이한 사고체계에 관해 절망했지만, 이제 겨우 이야기를 풀어갈 실마리가 잡혔다. 접대용 술이란 말이 있듯이 술을 마셔야 할 때는 같이 마시고 함께 취해야 하는 것이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 후, 얼마나 마셨는지, 더 이상은 모르겠다, 될 대로 되란 생각이 들 즈음, 하무타는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그래, 또다시 인간들이 우리 드워프들의 힘을 필요로 한다고?” 이미 주변에 있는 다른 드워프들은 전부 뻗어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고, 오직 그와 드워프의 왕만이 대작하고 있었다. “흡! 하압!” 그 말을 듣는 순간, 유신은 알딸딸한 머릿속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놀러 온 것이 아니다! 그는 급하게 코어를 돌려 몸 안의 알콜을 강제분해하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일단 이것을 보아 주십시오.” 제 5 장 드워프 왕국 그레이트하사둠5화 유신은 그가 구상했던 배의 대략적인 스케치를 내밀었다. “흄과의 일전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해안 방어는 드워프캐논이 제 역할을 하고 있으니 튼튼하지만, 수비만 해서는 결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 흄 본토에 상륙을 하여 그곳을 쓸어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하무타는 유신이 그린 배의 그림보다도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흠... 자네는 얼마나 살았나?” “에?” “많은 경험을 한 것은 인정하겠네. 아마도 보기보다는 나이가 많겠지. 하지만 흄과 흄대륙의 마물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군. 그동안 흄의 그 빌어먹을 오크자식들을 쓸어내기 위해 인간들이 몇 번의 원정군을 보냈을 것 같나? 그때마다 우린 인간을 도와 흄과의 전쟁에 참전했지. 하지만 단 한번도 만족할... 만족은 고사하고 납득할만한 전과조차 가져오지 못했네.” “......” “물론 우리도 마물들을 쓸어버리고 싶은 심정은 같아. 게다가 이야기 듣기론 흄에는 아직까지 살아남은 우리 동포들이 있다고 하더군. 하지만 지금의 흄은 강하네. 과거의 그 어느 때 보다도 훨씬!” “하지만... 하지만 이번 전쟁은 다를 겁니다! 제가 반드시 승리하도록 만들겠습니다.” “하하핫, 자신만만한 젊은이군. 드래곤 슬레이어, 천공의 기사 유신! 자네가 강하다는 건 충분히 알겠네. 하지만 전쟁에서 개인의 힘이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이지.” “...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혼자 싸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도, 엘프도, 드워프들도 모두 하나가 된다면...” “진심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물론 자네 덕분에 드워프도, 엘프도 인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그뿐이네. 전쟁은 그것과는 달라. 자네가 아무리 유능하고 뛰어나다 해도, 혼자서 무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해야 믿어주시겠습니까?” “그건 내가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야. 내가 드워프의 왕이라고는 해도, 자네가 생각하는 인간의 왕 하고는 다르네. 내가 배를 만들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드워프들 전체가 ‘와’하고 배를 만들지는 않아. 난 단지 의견을 낼 뿐이야. ‘이봐 흄과의 전쟁을 위해 우리보고 배를 만들어 달라는데 어떻게 할까?’하는 수준으로 말이야. 하지만 막상 배를 만들기 위해서는 거기에 참여할 드워프들을 끌어 모으고, 그들을 하나하나 설득하여 일하게 만들어야하지. 그건 내 권한 밖의 일이야.” “그럼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흠... 다른 드워프들을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해. 배를 만드는데 드워프 한둘로는 어림도 없을 것 아닌가? 차라리 무슨 건축물이나...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을 만드는 사업이라면 쉽게 모여들겠지만... 배라니? 드워프는 땅의 종족이네. 배를 만들자고 하면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을게 뻔해. 그렇다고 드워프 하나하나를 찾아다니며 설득할 수도 없잖은가? 포기하게.” “그럴 수 없습니다. 무슨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절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하핫, 대단한 젊은이군! 자네 정도라면 다흐란 광산을 정리할 수도 있겠어!” “그게 뭐지요?” “아... 아닐세. 신경 쓰지 마. 그냥 드워프끼리 하는 말이네.” “가르쳐 주십시오.” 다흐란 광산... 드워프와 협상할 수 있는 마지막 실마리일지도 모른다. 유신은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확실히... 자네가 다흐란 광산을 드워프의 품으로 돌려준다면, 많은 드워프들이 자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지. 하지만 그건 불가능 해.” “......” 드워프는 다음 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는 눈치였지만, 유신의 진지한 눈빛에 질렸는지, 돌덩이 같은 입을 열었다. “알았네. 알았어. 가르쳐 주지. 다흐란 광산은 후길 산맥 중앙에 위치한 가장 풍요로운 광산이야. 하지만 어이없게도 거기에 놈들의 여왕이 둥지를 틀어 버렸어.” “놈... 이라고요? 놈들이 왜... 게다가 놈 같은 하급 몬스터 따위, 드워프들에겐 상대도 안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쓸어버리면 끝 아닌가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모여든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이 안 될 정도야. 게다가 좁은 곳에서의 싸움은 드워프들에게도 쉽지 않아. 녀석들은 그런 곳으로 유인해서 습격하거든. 그들은 벽도, 천정도, 심지어는 지하로도 다닐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포위된 채 싸워야 하지. 그건 힘든 일이야...” 똑같이 밀집한 진영끼리 부딫쳐 싸운다면 사실 앞 열만 싸움을 할 뿐, 뒤쪽에 있는 인원은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 앞 열이 지치면 교대해 주거나, 순간적으로 틈이 날 때 대처해 주는 식으로 싸우게 되는데, 만약 적들이 좁은 곳에서 정면 뿐 아니라 벽이나 천정을 타고 공격을 한다면 이런 진형은 순식간에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지하라는 조건을 생각해 본다면, 다수의 놈이 주는 압력은 오우거에 필적할 것이다. “그 녀석들을 쓸어버리면 드워프들이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줄까요?” 쉽지 않은 싸움이 되리라는 건 알았지만,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유신은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하무타에게 물었다. “그건 내 관할 밖의 일이라니까. 하지만 자네가 그 정도의 역랑을 보여준다면, 틀림없이 배를 만들자는 자네의 황당한 말에 따르는 드워프들이 나타나겠지.”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하자 한시가 아깝다는 듯, 유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지금 당장 가려고 하는 겐가? 준비도 없이? 가 봐야 소용없네. 혼자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너무 무모해!” “혼자서... 뭔가를 보여줄 수 있다면... 하무타님의 말씀처럼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드워프들이 생기겠지요.” “허어...” 유신은 기가 막혀 하는 히무타를 뒤로 하고 방을 나섰다. 마음을 정했으면 망설이지 않고 바로 행동하는 것이 유신의 장점이다. “하누스의 군사이동용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면 금방 갈 수 있습니다. 저랑 같이 가도록 하지요.” 미스티는 이미 유신이 생각을 굳힌 것을 알기에 말리지 않았다. “아니... 나 혼자 가도...” “1:1이라면 제가 유신님에게 상대가 되지 않지만, 놈들의 상대라면 제가 훨씬 강합니다. 전 그 정도 녀석들의 공격엔 상처를 입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으니까요. 유신님이 아무리 봉인이 세 개나 풀렸다고 해도, 체력이 무한하지도 않고, 아직까지는 놈들의 무른 칼도 그 몸을 침범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제 본체가 그리로 가면 센서를 이용해 놈의 여왕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제 5 장 드워프 왕국 그레이트하사둠6화 “알고 있었어?” “뻔하지요. 놈들 전체를 잡아 죽이는 무분별하고 피곤한 짓을 할리 없지 않습니까? 그보다는 여왕을 제압하는 편이 빠르겠지요. 마치 성계대전에서 루시펠님을 쓰러뜨려 전쟁을 끝냈던 것처럼...” “놈의 여왕을 비하할 생각을 없지만, 분명히 말해서 그따위와 루시펠님을 비교하진 마라.” “... 죄송합니다.” “아니, 됐다. 네 말에 틀린 점은 없으니까. 그냥... 기분학상의 문제야. 그럼 오늘 하루는 이곳을 관광이라도 하며 기다릴 테니, 하누스 왕궁에 제대로 보고 끝내고 와.” “네. 그리고... 일단은 마키와 미키도 데려가겠습니다.” “에엑? 왜?” “세라피님과 엘리시엘님은 어디 가신다고 없어졌습니다. 그렇다고 둘만 집에 놔두기에는 너무 위험하군요. 그 두 녀석이 오우거 이상으로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겠죠?” “골치 아프군.” “별로 걱정하실 일은 없다고 생각됩니다만? 그 둘은 강합니다. 둘이 덤비면 저도 못 당할 거예요.” “아아... 강하긴 강하지... 좋아. 데리고 와. 전력적으로도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아볼 수 있는 기회겠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지만, 만약 그 둘이 유신과 싸웠을 때의 절반 정도의 힘만 낼 수 있다고 해도, 놈 따위에게 다칠 일은 없을 것이다. 솔직히 버려두고 가자니, 그 녀석들이 사고 치면 수습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다음날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 미스티는 하누스와 연결된 엘 하사둠의 군사이동용 게이트를 통해서 나타났다. 하누스의 게이트가 지하에 있는 것에 비해 엘 하사둠의 게이트는 광장에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빛의 기둥이 솟아오르며 미스티가 나타나자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그 관심은 미스티와 미키, 마키에게 쏟아진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게이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기둥, 아니, 빛의 기둥이 생김으로 해서 순간적으로 다르게 보이는 광장의 모습에 관한 것이었다. 드워프들은 게이트가 가동될 때 나올 빛과 그림자까지 고려하여 광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순간적이긴 했지만 그것이 가동되며 그들이 의도했던 대로 아름답고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자 뛸 듯이 기뻐하는 것이다. “왁! 유신이다! 말썽부리지 않고 잘 지냈지?” 마키와 미키는 고양이처럼 재빠르고 유연하게 유신에게 안겨 들었다. “어이, 그런 인사는 대체 누구한테 배운 거야?” “엘리언니.” “아아...” “세라피 누나도.” “쿨럭” 미키와 마키는 사흘 정도 안본 새에 골격은 완전히 자리를 잡고, 푸르게 비춰 보이던 실핏줄도 완전히 투명할 만치 하얀 피부 아래로 들어가 굉장한 미인으로 변해 있었다. 미키는 종아리까지 내려오던 보라색의 머리카락을 묶어 올려서 거치적거리지 않게 했고, 마키는 타오르듯 붉은 머리카락을 과감하게 잘라서 등까지만 오게 했다. 미키는 보라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였고, 마키는 붉은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라 무슨 요염한 쌍둥이 마족 같아 보였다. 다흐란 광산까지 가는 길은 별로 지루하지 않았다. 두 호문크루스의 재롱이 워낙 귀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곳 놈들의 무리를 돌파해 놈들의 여왕이 있는 곳까지 돌파하려면 처절한 싸움을 해야 할 것이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벌써 놈들의 세력권에 들어왔기 때문에, 길이나 벽은 다른 곳처럼 제대로 손질이 되어 있지 않았고, 조금씩 무너지거나 망가진 곳도 있었다. 그런 유신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호문크루스는 즐겁게 깔깔거리며 사방으로 뛰어 다녔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물어보았다. “저건 왜 움직이지 않아?” 드워프가 만든 마치 살아있는 듯 정교한 요정 모양의 조각을 보고 둘은 뭔가를 생각해 내기 위해 애쓰는 듯 했다. 근처의 다른 조각들은 거의 대부분 여기저기 깨져 있었는데, 그 조각만이 상처하나 없이 유신 일행을 반겨주고 있었다. “저건 살아있는 게 아니야. 돌이라고. 저쪽에 있는 돌맹이하고 같은 거야.” 어쩐지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뭔가 자세히 이야기 해 주고 싶었지만, 딱히 뭐라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살아있는 것 같아.” 폐허처럼 되어 버린 곳에서 홀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그 요정의 조각은, 마치 그곳을 지키는 수호자처럼 금세 움직일 것 같았다. 미키는 잠시동안 그 조각을 바라보다가 훌쩍 뛰어 올라 미스티의 어깨 위로 휘리릭 올라서며 목에 착 감겼다.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 두 호문크루스는 아직도 유신에게는 쉽게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에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호문크루스가 유신을 무서워 한다기 보다는 미스티에게는 애들 보는 재주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 드워프들이 돌을 깍고 다듬어서 저렇게 ‘만든’거야.” “그렇구나... ‘만들어’진 것은 생명이 없는 거야?” “......” 마키도, 미키도, 미스티도 모두 ‘만들어진’ 인공 생명체다. 감히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 저 요정은 잠들어 있는 거야. 봐. 요정은 부끄럼쟁이라서 주위에 누가 있으면 잠자는 척 해. 아마 우리가 자리를 비켜주면 저희들끼리 재미있게 놀 거야.” 결국 신에 의해 ‘만들어진’ 유신이 대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 말에 미키는 기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미스티의 어깨 위에서 그대로 몸을 날려 유신에게 안겼다. 제 5 장 드워프 왕국 그레이트하사둠7화 “그럼 간질이거나 꼬집으면 일어나지 않을까?” 마키는 사내녀석답게 호전적으로 그 조각을 노려보다가는 슬슬 만지기 시작했다. “어이...” 당황한 유신이 말리려고 했지만, 그보다 미니가 먼저 나섰다. “마키! 남을 괴롭히는 것은 나쁜 짓이다. 세라피 언니가 가르쳐 줬잖아!” 막 손톱을 꺼내서 그 조각을 찔러 보려던 마키는 미키의 꾸중에 슬그머니 다시 손톱을 집어넣었다. “하아...” 어쩐지 맥이 풀리는 것 같아 유신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움직이는 생명체가 있습니다. 거리 440미터 숫자는 40,50, 90,120 계속 늘어갑니다.” “올게 왔군. 미키, 마키, 자. 선물. 덤벼드는 녀석은 주저 말고 베라. 그리고 절대 나나 미스티에게서 떨어지지 말고.” 유신은 그가 들고 있던 미스릴검 중 보라색 보석이 밖힌 것은 미키에게, 붉은 보석이 밖힌 것은 마키에게 주었다. “와! 선물이다! 나도 선물 받았다!” 유신은 그 말을 듣자 진작에 작은 장신구 정도라도 선물해 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처음 준 선물이, 사실 원래 그 둘의 무기였으니 선물이랄 것도 없지만, 어쨌든 그 선물이 생명체를 죽여 없애는 무기라는 것이 미안했다. 하지만 그 둘은 정말로 기뻤는지, 방금 유신이 한 말이 무색하게도 온 동굴을 뛰어다니며 칼을 휘둘러댔다. 하지만 점차 무언가 위험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날뛰는 것을 멈췄다. “온다.” “두두두두두” 동굴 전체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제1파의 놈들 무리가 달려들었다. 그 엄청난 기세와 숫자를 보니 드워프들이 밀렸다는 이야기가 이해가 되었다. 대체 그 많은 숫자가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벽, 천정, 바닥 할 것 없이 사방에서 밀려들었다. 변변한 갑옷은커녕 제대로 된 무기조차 갖추지 않고 맨손으로 달려드는 녀석도 있었다. 그렇게 용감무쌍하게 덤벼들던 놈들이지만, 미스티가 한발 앞으로 나서며 전용의 거대한 검을 뽑아들자 첫 번째 열에 동요가 일었다. 하지만 뒤쪽에서 밀어붙였기 때문에 떠밀리듯 해서 미스티에게 돌진할 수 밖에 없었다. “부우웅”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절대의 죽음이다. 인간이 쓰는 투핸드 스워드의 두 배 이상의 무게를 가진 검이 휘둘러지자 대여섯 마리의 놈이 얼굴, 팔, 다리, 몸통의 구별 없이 단숨에 쪼개져 나갔다. 군신. 전쟁의 신이라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리라. 발로는 놈들을 차고 짓밟으며 전진했고, 검을 휘두르지 않는 왼팔로는 몸에 엉겨 붙는 녀석들을 떼어낼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눌러 죽였다. 놈들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잠시 동안 미스티에게 빽빽하게 달라붙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고, 곳이어 조각난 고깃덩어리가 되어 흩어졌다.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호문크루스는 아직 죽음에 대한 개념을 모르고, 유신에겐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라 별다른 감흥을 느끼는 일행은 없었다. 놈들의 숫자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미스티 혼자 전부 막는 것은 무리였다. 미스티라는 거대한 벽을 돌파한 몇몇 놈이 유신과 호문크루스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피냄새를 맡고 흥분해 버린 호문크루스는 손톱과 발톱을 길게 뽑아 달려드는 놈들을 조각조각 잘게 썰어버렸다. 미스티처럼 힘으로 뭉개버리는 것이 아니라 20개의 길고 날카로운 손발톱으로 찢고, 썰어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호문크루스에게 걸린 놈들은 훨씬 처참한 꼴을 당해야 했다. 미스티와 미키, 마키의 세 콤비에게 걸러지고 나자 유신에게 떨어지는 놈들은 있지도 않았다. 잠시 첨예를 빼 들었지만, 그를 향해 날아오는 고깃조각을 쳐 냈을 뿐, 다른 일거리는 없었다. 십여분 정도를 싸우자 대체 얼마나 많은 놈들이 죽어자빠졌는지 알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들이 지나온 통로는 놈들의 조각으로 메워지다시피 했고, 일행은 놈들의 녹갈색 피와 살로 목욕을 했다. “이거, 생각보다 더 하군.” 마키와 미키는 서로의 몸을 핥아주며 청소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유신은 주변에 굴러다니는 놈의 잘려진 팔 하나를 들어올려 그 피를 마시며 수분을 보충했다. 어차피 식량을 가져 와 봐야 지금 같은 전투가 한번만 있으면 식량이나 짐보따리는 어디에 휘말렸는지 찾을수도 없게 되기 때문에 덜렁 무기만 들고 온 것이다. “젠장, 맛 없다. 영양분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유신은 먹던 팔을 집어 던졌다. “자, 다시 움직이자. 어차피 또 몰려올 테니 조금이라도 전진하는 편이 낳겠지.” 밤낮없이 치열한 전투가 사흘이나 계속되었다. 거의 20시간 정도를 잠시도 쉬지 못하고 싸운 적도 있었다. 이번 공격에 동원된 마지막 놈을 쓰러뜨리고 나자 미키는 지쳤다는 듯, 칭얼칭얼 보채며 울기 시작했다. “하아...나도 힘들어... 그러니 너도 울 힘이 남았으면 마키처럼 뭐라도 먹어.” 유신은 그런 미키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주고는 놈의 살점 중 먹을 만한 부분을 발라내어 건내 주었다. 처음 한두 번은 비록 맛없는 놈 고기지만 불도 피우고, 제대로 익혀서 먹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관두고, 마치 시체를 파먹는 구울처럼 놈의 머리를 가르고 가장 영양가가 많은 뇌부터 파 먹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저 아이들, 괜찮을까요?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않았는데 이런 대량 학살에 동원 되다니...” 미스티는 안타깝다는 듯, 미키를 집어 들어 품에 안아 주었다. “그러니까 돌아가고 나면 네가 잘 가리켜줘.” “또!!” “너도 좋잖아? 저 아이들도 너를 잘 따르는 것 같고.” 미키는 그대로 미스티의 품에서 잠이 들었고, 대충 허기를 채운 마키는 유신의 품으로 파고 들어가 잠을 청했다. “자, 이동하자. 이제 얼마나 남았지?” “직선거리로 30키로 미터쯤의 거리에 놈들의 기운과는 확실히 다른 기운이 느껴집니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아마도 7시간 후쯤이면 도착할 겁니다.” 적들은 끝없이 몰려들기 때문에 휴식을 한답시고 이동을 멈췄다가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된다. 제 5 장 드워프 왕국 그레이트하사둠8화 조금 쉬고 나면 병력을 재정비한 놈들이 다시 몰려들고, 쉬고 나면 다시 몰려드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얼마나 싸움이 격렬했는지, 몸에는 놈들의 피가 엉겨 더 이상 인간의 살색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옷도 거의 다 찢어져 있었다. 놈의 피냄새로 마비된 코는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입에선 비릿한 피맛 이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키와 마키의 옷은 벌써 다 찢어져서 알몸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고, 머리카락도 짧게 잘라서 싸움에 방해되지 않도록 해 두었다. 다행이 간간히 입는 상처는 둘이 서로 핥아 주어서 치료해 주었기 때문에 지친 것 외에는 그다지 큰 상처는 없었다. 미스티의 초대형 검은 놈의 뼈를 가르느라 이미 날이 다 빠져서 거대한 무쇠몽둥이로 변해 있을 정도였다. 더 이상 처참하다거나 끔찍하다거나 하는 사치스러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무언가 움직이면 베고, 베고 또 베면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다흐란 광산에서 유신 일행이 지나온 길은 이미 도살지옥이 되어 있었다. 아무런 작전도, 마법사의 지원도 없이 칼잡이 전사들만으로 몰아쳐서 이런 일을 해 내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봐도 참혹한 짓을 했군... 만약 마법사가 있었다면 투명 마법 같은걸 써서 놈의 여왕한테까지 잠입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독 안개를 풀거나...’ 아마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마법사라면, 아니 보통의 인간이나 어지간한 소드마스터라도 벌써 지쳐서 나가 떨어졌을 것인데, 마법사 따위는 몰려오는 놈 떼에 당황해 큰 마법 한두 번 쓰고는 사방에 널부러져 있는 살 조각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대 파괴의 끝에 유신 일행은 마침내 지옥의 끝에 닿았다. 드래곤의 레어 만큼이나 넓은 중앙의 홀은 끝을 알 수 없는 무저의 구덩이였고, 그 중앙에는 마치 거대한 섬처럼 놈 여왕의 레어가 있었다. 천장은 까마득하게 높아서 어둡게 보일 뿐이었고, 이곳은 드워프가 만든 곳이 아닌지, 벽이나 길이 제대로 닦여 있지 않고, 벽에는 야광석조차 없어 어둡기만 했다. 여왕에게로 다가갈 수 있는 길은 거미줄처럼 엉켜 있었지만, 워낙 좁고 위태위태한 길이라 미스티 정도의 덩치가 올라서면 그런 길쯤은 당장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어떤 것 같아?” “더러운 지형이군요.” 만약 놈들이 뒤에서 숫자로 밀어 붙이면 자칫 저 끝없는 지하 구덩이로 떨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왕이 있는 섬까지 함부로 접근했다가 길에 올라서는 순간 놈들이 다리를 무너뜨리면 그것도 곤란할 것이다. “탐지기는 반응은 어때?” “퀸이 틀림없습니다. 함정은 아니에요. 하지만... 적어도 일만 이상의 놈들이 이곳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레어에도 적어도 400마리 이상이 있고...” “흠... 퀸이란 말이지? 좋아. 이제 종착역이다. 그럼 여기서 기다려. 여왕과의 담판은 내가 지을 테니.” 유신은 잠들어 있는 마키를 미스티에게 안겨주고, 천천히 여왕의 레어에 이어져 있는 위태한 길에 발을 딪었다. “괜찮겠습니까?” “응. 미스티가 올라섰다간 당장 무너질거야. 그리고 저런 곳에서의 싸움이라면 놈들보다도 내가 훨씬 유리하다고. 미키와 마키를 부탁해.” 사실 길이라고 하기도 뭐한, 마치 무저갱의 입구에 걸쳐져 있는 오래된 거미줄 같아 보이는 정도의 아슬아슬한 길이였다. 발을 내딛을 곳은 겨우 한 뺨 정도의 넓이 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야말로 외줄 타는 심정이었다. “투두둑” 유신은 몸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음에도, 그가 딛었던 곳이 조금 무너져 내렸다. “하아... 괜찮을라나...” 굴러 떨어진 돌맹이가 지상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로 보아 굉장히 깊은 모양이다. 다리의 중간 부분에 도착할 때까지는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하지만 딱 중간 정도의 부분에 도착하자 놈들의 살기가 갑자기 커졌다. “크르르릉” 섬에 있던 놈들이 유신이 다가오고 있는 앞을 막아섰고, 다른 동굴 쪽에 있던 놈들도 벽을 타고 미스티 쪽으로 움직여 가기 시작했다. “제법 머리를 썼군. 두 패로 나누어 놓고 각개 격파하겠다니...” 놈들은 미스티라면 그 길을 건너오지 못하리란 걸 알고, 일부로 여기서 함정을 판 것이다. 놈들이 쏟아져 나오는 광경은 지금까지 수없이 보았지만, 이렇게 넓은 곳에서 한꺼번에 쏟아지는 모습을 보니 무슨 벌레 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캬아악” 그 시끄러운 소리와 살기에 살짝 잠이 들었던 마키와 미키도 눈을 뜨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미키나 마키도 지친 것 같고... 놈들도 더 이상 쓸데없이 죽여 봐야 좋을 것 없겠지. 여왕을 제압하는 게 급선무다!’ 유신의 앞을 막아선 놈들은 일반의 놈보다 덩치도 크고 생긴 것도 훨씬 흉악했다. “방해하지 마랏!” 지금껏 체력 소모를 막기 위해 검기는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면 쓰지 않았지만, 이제 마지막 싸움이니 굳이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할 필요는 없다. 유신은 단숨에 코어를 끌어올려 그의 앞을 막고 있는 놈들을 베어버리며 내달렸다. 제 일선의 놈의 방어가 뚫리자 녀석들은 주저하지 않고 유신이 선 곳의 다리를 무너뜨렸다. 다리가 무너지면서 많은 놈들이 같이 휘말렸지만, 그런 희생쯤은 아랑곳 하지 않는 듯 했다. ‘독한 놈들. 하지만 이 정도는 짐작 했다고!’ 제 5 장 드워프 왕국 그레이트하사둠9화 유신은 떨어지는 놈과 돌들을 발판삼아 다시 날아 오른 후, 다른 다리에 올라섰다. 그가 발을 내딛는 곳마다 놈들이 몰려들어 다리를 무너뜨렸지만, 놈들이 우왕좌왕 뛰어다니는 것은 유신의 가벼운 뜀박질에 비하면 기어다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신은 놈들이 몰려온다 싶으면 재빠르게 뛰어 오르며 다른 다리로 옮겨 타며 여왕의 레어를 향해 내달렸다. “하앗!!” 어느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유신은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끌어올릴 수 있는 모든 코어를 끌어올려 작렬하는 황금의 창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앞을 막아서는 놈들의 벽을 단숨에 뚫어버리고는 여왕이 있는 섬에 올라섰다. 한꺼번에 무리하여 코어를 돌리자 머리가 띵 했지만, 그 정도는 상관없었다. “물러서라. 너희들이 졌다.” 홀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살벌한 호통소리에 놀란 놈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상대가 여기까지 올라 온 이상 그들에게 승산이 없다는 것쯤은 놈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유신은 천천히 검을 옆으로 내리고 무거운 걸음걸이로 놈의 여왕에게로 다가갔다. 겨우 유신만한 체격. 지하의 캄캄한 세상을 보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는지, 눈이란 기관이 있던 자리는 퇴화되어 버린 채 무덤을 연상시키는 무거워 보이는 길죽한 눈꺼풀이 얼굴의 절반을 덮고 있었다. 하반신은 자궁과 하나가 되어 몸체 아래의 거대한 알주머니와 연결되어 있었고, 팔은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는지, 얇은 작대기나 곤충의 더듬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유신의 날카로운 첨예가 그녀를 겨냥하고 있었지만, 이미 폐쇄된 감각기관은 그런 위협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잠들어 있는 어린아이처럼, 아니면 이미 죽어있는 시체처럼, 그녀는 평온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투툭” 이 상황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 새로운 알 하나가 알주머니에서 굴러 떨어지며 놈 한 마리가 태어났다. “꾸르르륵, 꾸르르륵” 새끼가 태어나면 퀸을 보좌하는 다른 놈들이 그 몸에 붙어 있는 양수를 닦아 주고 여러 가지로 보살펴 주어야겠지만, 유신에게 그들의 여왕이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런 유모 놈들도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서글펐다. 어느 종족이든 성실한 우두머리란 이런 것이다. 아무런 자유도, 감정도, 행복조차 추구할 수 없다. 가능하다면 여왕을 설득하여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싶었지만, 이 상태라면 대화는커녕 어떠한 형태로든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 해 보였다. ‘죽여야 하나...’ “우우우우우” 여왕의 위기를 직감했는지, 놈들은 가래 끓는 듯한 신음 소리를 내며 섬 주위를 포위하듯 애워 쌓았다. ‘아리엘님... 미카엘님... 그리고 ... 그리고 루시펠님...’ 어째서인지 놈 여왕의 비참한 모습에서 그녀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유신은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왔다. 어느새 미스티와 미키, 마키를 포위하고 공격하고 있던 다른 놈들도 공격을 멈추고, 그들의 여왕이자 어머니의 최후를 지켜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리고 유신의 첨예가 높이 들렸다. “고통은 없을 겁니다. 이 약하고 불쌍한 종족을 저 강대한 드워프와의 경쟁에서도지지 않고 이만큼이나 번성시킨 퀸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목숨을 거둬가게 되서... 정말 죄송합니다.” 유신은 퀸에 대한 예의로 첨예가 다 타버릴 정도의 천상신검을 주입했다. 그녀를 위해 천상의 천사가 지하에 강림한 듯, 환한 빛이 홀 전체를 타오르도록 비춰 주었다. 이제 그 검이 내려가기만 하면 저 불쌍하고 가련한 퀸은 흔적도 안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퀸의 옆에 새하얀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뭐지?” 유신이 검을 든 채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마법진 안에서 사람 모양의 무엇인가가 소환되기 시작했다. 새하얀 발부터 들어나기 시작하더니, 몸 전체가 흐릿한 형상을 갖추어 가며, 마침내 13~14세 정도로 보이는 영리해 보이는 아이가 소환되어 나타났다. “멈춰요 유신!” 아이는 겁도 없이 천상신검이 조준되어 있는 퀸 앞에 양팔을 가득 벌리고 똑바로 유신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날카롭고 깊은 진초록의 눈빛은 아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서... 설마!! 마스터 카린카?” 유신은 어이없는 듯 중얼거렸다.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저 아이가 풍기는 향기로운 마나의 기운! 그것은 틀림없이 위시마스터의 마나였다. 대자연의 힘을 중계하는 역할을 하는 마나는 무속성이라 해도, 그것을 지배하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드래곤이 사용하면 광포한 기운이, 리치가 사용하면 사악한 기운이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처럼 마나 자체가 마치 그것을 지배하는 자를 따르는 듯한 향기롭고 포근한 기운을 뿜는 것은 마법계를 관리하는 위시마스터의 마나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오랜만입니다. 실버스타 장군. 6년... 만인가요?” 카린카는 면목 없다는 듯, 유신의 시선을 외면하며 작게 말했다. “다...당신은 분명히 아스모데우스와의 싸움에서 소멸했는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흄이 그토록 날뛰고 마법계에 수많은 이상이 생겼음에도 침묵하고 있던 위시마스터가 어째서 지금에야 이런 곳에 나타난 것일까? 게다가 카린카는 죽지 않았는가?’ 제 5 장 드워프 왕국 그레이트하사둠10화 카린카는 비프로스트 회전에서 마왕군의 기전장군 아스모데우스의 공격을 막기 위한 적층형 입체구조 마법진을 펼치다 그 강대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하였다. 그리고 유신은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았다. 아스모대우스는 루시퍼에게 악마 대공의 칭호를 받은 최강의 헬마스터로 힘으로는 루시퍼 이상이라 일컬어지는 마왕군 힘의 상징이었다. 루시퍼의 필살기인 혼돈의 브레스를 막았던 위시마스터의 허차원 결계로도 아스모데우스의 일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카린카는 봉인의 형태가 아닌 존재의 소멸을 당한 것이기 때문에 도저히 부활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자그마한 꼬마는 예의 정령왕 바르부스 때처럼 아직 아스모데우스에게 당한 힘을 다 회복하지 못하고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지만, 틀림없이 유신이 알고 있는 카린카가 맞는 듯했다. “......” “정말 위시마스터 카린카님 입니까? 그럼 아스모데우스와의 결전에서 소멸한 것은 대체 어떻게 된 거지요? 아니, 그런 것보다도 여기서 무얼 하는 겁니까?” 유신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 카린카가 맞습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당신을 막기 위해 온 것이지요.” 카린카는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라고요? 대체 왜 저를 막겠다는 겁니까?” “이곳에 놈의 여왕을 옮겨 온 것은 제가 한 일입니다. 이 아래에는 석유가 매장되어 있습니다. 만약 드워프들이 계속 땅을 파가다가는... 전 두렵습니다. 다른 우주처럼 오크와 엘프, 인간이 나누어 져 있지 않은 마법계에서, 기름을 손에 넣게 되는 종족이 갖게 될 힘이 너무나 두렵습니다. 과연 다른 종족과의 균형 잡힌 발전이 가능할지... 아마도 ‘석유’는 최강의 무기가 되어버리겠지요. 마치 인간들이 용신기를 만들어 냈던 것처럼... 그건 너무나 위험합니다.” “석유? 석유라고요? 겨우 석유 때문에 흄이 저처럼 날뛰고, 신성한 신의 실험장에 악마나부랭이가 굴러다니고, 종교가 퍼져나가기 시작해도 침묵하던 당신이 나섰다고요?” 유신은 황당한 심정에 화조차 나지 않았다. 애초 위시마스터들이 조금만 제대로 마법계에 신경을 썼으면 흄이란 존재가 이렇게까지 세력을 키우지 못했을 것이고, 베리알이 슬금슬금 껴들지도 못했을 것 아닌가? “......” 그의 질책에 카린카는 발끝만 바라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물론 석유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이대로 드워프들이 석유를 차지하게 되면 이백년 쯤 후에는... 물론 그들의 종족 특성을 봤을 때 더 빠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엄청난 과학의 발전을 이루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심각하고 급한 문제가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지금껏 침묵하다 겨우 석유를 지키고 있는 놈의 여왕을 살리기 위해 나타났다는 겁니까? 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카린카는 놈의 여왕에게 안기다 시피 기대어 조그마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유신의 혹독한 질책에 작은 입술을 달착달착 움직여 겨우 변명하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마법계와 같아요. 아니, 마법계 그 자체이지요. 보세요. 이 뒤틀어지고 불쌍한 모습을... 끝없는 희생, 희생, 희생, 단지 그 진저리나는 희생만 강요당할 뿐... 불쌍하지 않은가요? 이 아이도...그리고 마법계도... 이 아이는 자기의 자식을 위한 희생이니 차라리 낳지요. 마법계는 자기의 자식도 아닌 별계의 세계인 물질계를 위해 희생하기만 하고 있어요!” “별개라니요? 똑같이 신이 창조한 마법계와 물질계가 왜 별계라는 겁니까?” “그럼 똑같이 창조된 물질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마법계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겁니까?” 마침내 카린카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마주 고함을 질렀다.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신을 믿을 자유, 그것도 안 된다면 영혼의 자유라도 주거나, 그것조차 안 된다면 윤회의 고리에라도 넣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 유신은 카린카의 말투에서 이미 그녀가 빛을 등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멸한줄 알았던 당신이 살아있다는 것은... 아마도 위시마서터들 끼리는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군요. 만약 성계대전으로 마법계가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하면 당신만이라도 마법계로 돌아가 악마들을 지원하기로...”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일이다.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단지 인정하기 싫었을 뿐. 설마 마왕군의 편에 선 위시마스터가 카린카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지만, 위시마스터중 하나가 마법계를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닙니다! 다른 위시마스터들은 모릅니다.” 유신의 차가운 말에 카린카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말허리를 끊었다. 카린카 혼자라면 상관없겠지만, 위시마스터 전체가 연루된다면 미카엘이 이끄는 천사들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다. 마왕군과 빛의 군대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던 마법계는 그날로 끝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닐 리가 없겠지요. 물질계와의 연락이 전면 두절된 것도, 광무가 아무런 제재 없이 마법계에서 몇 년이나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위시마스터가 개입했다면 그 모든 의문이 풀리지요.” 유신도 마법계의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눈감아 줄 수는 없었다. “장군!! 이 모든 일을 꾸민 것은 저 혼자 입니다. 다른 마스터들은 상관없어요.” 마침내 카린카는 조금씩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미카엘님이 알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해 어떤 위시마스터들도 직접적으로 마왕군의 편을 들어준 적은 없습니다. 장군의 말대로 간접적인 지원조차 안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정도는... 장군만 눈감아 주시면 미카엘님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빛과 어둠의 싸움입니다. 그런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가는 양쪽 모두에게 버림받을 겁니다. 미래가 두렵다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당신이 진정 마법계가 물질계와 분리되어 독립적인 발전을 원한다면... 또 그것이 위시마스터들의 뜻이라면... 마법계를 그대로 내버려 두세요. 어떻게 발전하건, 어떻게 굴러가건 그냥 지켜보기만 하세요.” “......” “어찌 되었든 전 놈 여왕의 목을 가져가야겠습니다. 카린카님하고 싸우고 싶지는 않지만...” 유신은 첨예를 머리 위로 세우고 검 끝을 앞으로 하여 왼손의 검지와 중지로 잡았다. 마법사와의 승부니 만큼 일격필살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가 카린카에게 살기를 뿜자마자 유신 주변의 공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발아래의 지면은 불안하게 흔들거리고, 주변의 마나가 엉켜들면서 온 몸을 무겁게 했다. 마법계에서 위시마스터와 싸운다는 것은 온 세상을 상대로 싸운다는 뜻이다. ‘하지만 저 모습을 보니 아스모데우스에게 당한 것이 아직 낮지 않은 것 같군. 그렇다면 승산은 충분해!’ 다른 곳도 아닌 마법계 내에서 워프마법 한번 하고 헐떡거리고 있는 카린카를 보면 그녀의 상태가 얼마나 엉망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런 몸으로 천상신검을 사용할 수 있는 유신과는 싸움이 되지 않는다. “끝으로 한번만 더 물어 보지요. 당신은 나의 적입니까?” 유신의 말에 지쳐있는 카린카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 졌다. “... 장군도 흄과 같은 말을 하는 군요. 세상에는 적과 아군밖에 없습니까? 대답하지요. 전 실버스타 장군의 적이 아닙니다.” 그녀는 싸움 준비는커녕 마법을 시전하기 위한 기본적인 마나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아스모데우스에게 당한 상처가 컸기 때문에 싸운다 해도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마법계 전체가 그녀의 편이라 해도, 이 거리에서라면 유신의 천상신검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단지 카린카는 그 나름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듯, 가만히 놈의 여왕을 앞을 지키고 서 있을 뿐이었다. “......” 긴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드워프의 정교한 조각 같이 굳어 있던 유신의 입을 열렸다. “놈의 여왕과 함께 떠나십시오. 전 ‘위시마스터’ 카린카를 보지 못했습니다.” 유신은 카린카의 심장을 겨냥하고 있던 첨예를 천천히 거두었다. 제 6 장 전쟁의 시작1화 “쏴아아, 쏴아아” 뱃전에 부딛치는 시원한 파도 소리가 작렬하는 태양의 뜨거움을 식혀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기분 좋은 소리를 내었다. 화창하게 맑은 날씨, 시원한 바닷바람, 끝없이 펼쳐진 새파란 수평선. 아마도 배 아래를 위협하고 있는 저 초거대 생물만 없다면 모두들 갑판에 올라가 기분 좋게 썬텐이라도 하고 싶은 날씨였다. 하지만 호시탐탐 배를 감아서 바다 속으로 끌고 들어갈 저 괴물을 보고 있으면 이 더운 날씨에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4차 대 흄 정벌군 1군단 기함 더 월드의 제독실. 마법과 몬스터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공부해 온 율리안 왕자는 바다에서 크라켄을 만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덕분에 화창한 날씨를 즐기기는커녕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제독실 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흄에서 띄어 놓은 파수꾼이 확실하군요.” 하필 크라켄이라니... 유신은 불만스럽다는 듯, 바다를 노려보았다. 만약 저 교활한 크라켄이 흄의 파수꾼이 아니라면 잡지도 못할 사냥감을 사흘이나 따라올 리 없는 것이다. 덕분에 배의 승무원들은 사흘 동안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바다 괴물의 습격에 대비하고 있는 상태였다. “왕자님! 3군단 기함 이모탈 포트리스에서 신호탄이 올랐습니다. 크라켄 접근 중!” 붉은 색과 갈색, 녹색의 신호탄이 날아오르기가 무섭게 직경 220미터에 달하는 크림슨 글로리가 작아 보일 정도의 초대형 문어가 2군단의 기함 크림슨 글로리에 덮쳐들었다. 크라켄의 크기는 워낙 크기 때문에 자기의 배로 접근해 오는 크라켄은 오히려 보기가 힘들다. 그래서 옆에 있는 다른 배끼리 서로 상호간의 바다 밑을 봐주는 것이다. “망할! 관측병은 뭘 한거야! 신호가 늦잖아!” 사흘이나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한 채 크라켄의 습격에 대비했으니 저런 허점이 생기는 것도 할 수 없다. 마법계의 인간이 만든 배중에서 300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문어의 습격을 견딜 수 있는 배는 없다. 하지만 이번 흄 정벌군에 쓰인 배들은 전부 드워프의 작품이었고, 드워프들은 과연 그들의 이름값을 했다. 저 바다의 대 괴수조차 단지 따라오기만 할 뿐 격침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우우웅” 역시 이번에도 크림슨 글로리를 감싸 안았던 크라켄은 바다 전체가 쩌렁쩌렁 울리는 괴성과 함께 금세 물러서고야 말았다. 크림슨 글로리는 마치 바다에 떠 있는 고슴도치처럼 빽빽한 강철의 스파이크가 함선 전체에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드워프들이 만든 놀라운 이 함선은 2미터 이상 되는 스파이크가 배 밑바닥서부터 갑판 위까지 빽빽하게 박혀 있었다. 공격을 받으면 병사들은 갑판 위를 비워 버리고, 평소에는 함선의 3중벽 속에 내장되어 있는 이 강철의 스파이크가 배 전체를 뒤덮어 버린다. 덕분에 강철의 고슴도치를 끌어안아 버린 꼴이 된 크라켄은 저렇게 듣기 싫은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다. 크라켄은 조이기가 통하지 않자 긴 다리를 뽑아 크림슨 글로리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2군단 사령관인 뮬테인 백작은 당장 갑판위로 뛰어나와 검기를 내어 크라켄의 다리를 공격해 봤지만, 아무래도 저런 초대형의 괴물을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다른 배에서 드워프들의 자랑인 캐논을 사용하여 지원사격을 해주기에는 크라켄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크림슨 글로리와 주위에 있던 호위함에서도 화살과 창, 작살이 쏟아져 나갔지만, 저 연체괴수에게는 그다지 타격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괜히 갑판 위에 올라왔다가 괴물의 몽둥이 같은 다리에 맞아 찌부러지거나 바다로 튕겨져 나가기 일쑤였다. “칫!” 유신은 그 꼴을 보고는 재빨리 갑판으로 뛰어 내린 후, 크라켄과 상대하기 위해 갑판위에 내 놓아져 있던 창들 10여개를 엽구리에 끼고 날아올랐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 그는 바다에 떨어지기 직전, 들고 있던 창을 바다와 수직이 되도록 하나씩 던지며, 그 끝을 밟고 날아올랐다. 200여미터나 떨어져 있던 크라켄에게 단숨에 따라붙은 유신은 드디어 마법학교에서 배웠던 성과를 보여주었다. “에어윙!” 유신을 발견한 크라켄은 재빨리 크림슨 글로리에서 떨어지며 바다로 도망칠 준비를 했다. 사흘 전, 첫 번째 크라켄이 덮친 배는 당연히 가장 화려하고 커다란 더 월드였고, 그 싸움에서 유신에게 얼마나 호되게 당했던지, 회복할 때까지 사흘이나 걸렸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동안은 감히 덮치지 못하고 추격만 했던 것이다. 영리한 크라켄은 유신이 없는 배를 골라 습격을 한 것인데, 저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바다를 달려서 쇄도해 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본 크라켄이 바다로 잠수하려 하자 유신은 크라켄의 몸에 박혀 있던 작살 하나를 움켜쥐고는 그대로 같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아직이다! 조금만 더’ 크라켄은 유신이 붙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점점 더 깊은 바다 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순식간에 100미터 이상을 잠수해 들어가자 유신도 온몸이 조여 오기 시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얼마나 더 깊이 들어간 것일까? 마침내 유신은 첨예를 빼어 크라켄의 몸통 부분을 찔렀다. 하지만 워낙 거대한 놈이라 이 정도는 긁힌 상처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뒈저라 질긴 놈!’ 그리고 유신이 천상신검의 검기를 불어넣자 검기는 단숨에 4미터 정도를 솟아나 크라켄의 질긴 껍질을 찢어내었다. 유신은 첨예를 비틀어 4미터 정도 크기의 삼각형 모양으로 살점을 찢어내고는 그대로 크라켄의 몸통을 박차고 수면으로 향했다. 크라켄의 덩치를 생각하면, 유신이 낸 그 정도 크기의 상처는 수면 근처에서였다면 별것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압이 있는 바다 속 깊은 곳에서라면 얘기가 말라진다. 크라켄은 더 이상 떠오르지 못하고 끝없이 가라앉았다. 제 6 장 전쟁의 시작2화 파란... 끝없이 파란 수면이 보인다. 그 위로 하얗게 출렁이는 파도. 그리고 그 위에 보이는 새하얀 점.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 단지 그뿐이다. ‘찌그러진 거울 같네...’ 보통 사람이었으면 온몸이 찌부러 들어 즉사했을 수압을 받으며 싸웠기 때문에 머리가 멍멍했다. 출렁이는 파도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산소결핍과 수압을 받고 엉망이 된 머리 때문에 그런 것인지, 정신이 몽롱해 지는 것 같았다. ‘아... 거울에 부딫치겠다...’ “쏴아아아” 수면 위로 올라온 순간 지금까지 조용하던 차분한 세계가 거짓말 이었던 것처럼 혼돈의 세계가 펼쳐졌다. “어푸푸푸푸”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가슴 한껏 공기를 들이 마시자 멍했던 머릿속이 조금씩 정상으로 되돌아 왔다. ‘배는?’ 오감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자 입안에 느껴지는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짠맛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기 있습니다!” 수병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 정신없이 깃발을 흔들며 고함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바다 속은 육지와는 다르잖아! 제발 걱정 끼치지 좀 말라구!! 그리폰을 쓰자니까 고집을 부리고!!” 엘리시엘은 유신의 무모한 행동으로 골이 잔뜩 나서 시끄럽게 떽떽거렸다. “아아... 미안... 머리 울리는데 조금만 조용히 해줘...” “뭐야? 남이 이렇게 걱정하는데!!” 간신히 살아남았나 싶었더니 이번엔 엘리시엘의 잔소리다. 겨우 크라켄을 침몰시키기는 했지만, 유신 역시 급속한 수압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온몸의 근섬유 하나부터 최 말단의 신경섬유까지 비명을 질러대는 듯 했다. “왜 그렇게 무모하게... 개인보다는 집단이 강하다고 한건 유신이잖아요... 아니면 저희는 동료로서 부족하다는 뜻이에요?” 세라피가 눈물을 찔끔거리는 것에 비하면 차라리 엘리시엘이 시끄럽게 하는 편이 낳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크라켄하고 같이 바다속으로 잠수하다니... 세라피는 눈으로 봤으면서도 믿을 수도 없었고, 솔직히 믿고 싶지도 않았다. “수고 하셨습니다. 유신경. 이제 크라켄을 무찔렀으니 상륙전을 수행하는데 그다지 어려움은 없겠지요?” 유신이 두 엘프에게 당하기만 하는 것이 안쓰러웠는지, 율리안 왕자는 그의 노고를 칭해 주었다. 율리안은 첫 번째 실전이 바다의 대 괴수와의 싸움이었으니 죽다 살아난 유신보다도 훨씬 헬슥하게 질려 있었다. “작전회의를 소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만일 크라켄이 흄에서 심어 놓은 파수꾼이라면 이미 우리의 항로도 흄이 알게 되었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적들은 우리의 상륙지점을 예측할 수 있을 겁니다.” 몸에서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지만, 유신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이번 전투로 일단 지겨운 감시자는 떨궈 놓은 셈이니 새로이 작전을 수립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 그럴 것 같아서 일단 각 군단 사령관들과 참모들을 소집시켰습니다. 드워프나 엘프 분들은 어떻게 되든 별 관심 없는 듯 보였지만...” 점심시간을 이용해 1군 사령관 겸 총사령관인 율리안 왕자의 주최로 군 회의가 시작되었다. 2군 사령관은 예메른의 뮬테인 백작이 맡았고, 3군 사령관은 놀랍게도 미스티가 맡았다. 사실 3군단은 드워프나 엘프중에 한명이 맡기로 했었지만, 두 종족 모두 미스티에게 일임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3군단은 별동대 형태로 미스티가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근본도 모르는 미스티의 지휘를 받는 것을 못마땅해 했기 때문에, 3군단에 편성된 것은 용병들과 천민, 평민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귀족들이 없으니 지원이 좀 모자란다고는 해도, 이 속에는 유신과 미스티가 3년동안 피땀 흘려 키워 놓은 사냥개 부대가 포함되어 있었고, 기꺼이 미스티의 지휘를 받고 싶어 하는, 미스티와 유신이 교육시켰던 기사들이 포함되어 있어 갖가지 융통성 있는 작전을 구사하기에 가장 알맞은 부대라는 점에서 최고의 편재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미스티가 군단사령관이 된 대에는 율리안의 입김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것도 있는 덕분이기도 했고, 이런 대규모의 병력을 지휘해 본 인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도 한몫 했다. 게다가 미스티는 유신의 명령으로 하누스에서 작위를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별 무리 없이 3군단의 사령관이 되었다. 사실 미스티가 3군단 사령관이 되었다는 것은, 유신이 3군단을 지휘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귀족들의 반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 공포스러운 마물들과의 전쟁이라면 유신 이상의 적임자가 없기 때문에 억지로 구색을 갖추어 그에게 지휘권을 준 것이다. 1군 사령관 율리안, 2군 사령관 뮬테인, 3군 사령관 미스티, 드워프 포병대장 겔파, 엘프레인져 대장 이리엘. 이정도가 연합군의 사령탑이다. 포병대와 엘프레인져들은 독립부대가 아니라 각 군단에 배속되어 있지만, 보급과 전체적인 작전수립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대표를 둔 것이다. “이제 흄과의 거리는 겨우 일주일 남짓입니다. 크라켄이 죽었으니 아마도 그것을 조종하고 있었을 흄의 마법사도 느꼈겠지요. 이제부턴 우리의 진격로를 흄도 확실하게 알았을 겁니다. 이제부터 필요한 것은 적의 허를 찌르는 작전이겠지요.” 제 6 장 전쟁의 시작3화 어느새 이야기의 주도권은 유신이 잡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선 감히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뮬테인 백작이야 사막전에서 유신과 함께 싸워 봤으니 군말이 있을 리 없고, 엘프나 드워프들은 당연히 적극적으로 그의 편이니 두말할 필요도 없다. 가장 잔소리가 많았던 귀족들은 방금 전에 유신과 크라켄이 싸우는 것을 보고 침묵 할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로서는 그런 크라켄 같은 괴물과는 싸우고 싶지도 않을 테고, 싸울 능력도 없다. 무엇보다도 공포에 질려 있는 것이다. 220미터에 달하는 세상에서 가장 큰 드워프들의 함선보다도 더 큰 문어. 당연히 평범한 사람이라면 넋이 빠질 만도 하다. 아직 흄의 본토에 상륙한 것도 아닌데 이런 괴물이 등장했으니 당장 배를 돌리자고 하지 않는 것만 해도 신에게 감사할 일이다. 게다가 그런 문어를 칼 한 자루만 덜렁 들고 이기는 사람이라니... 귀족들은 이제서야 마물들과의 전쟁이란 건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의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일단 1군단과 2군단은 예정되었던 상륙지점에 배를 포진시키고 예정대로 포격을 개시합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니 정밀 사격뿐 아니라 사격 통제 역시 완벽해야 합니다. 이건 겔파님에게 맡겨도 되겠지요?” 땅의 대표적 종족이라 할 수 있는 드워프들을 바다까지 끌고 나온 것이다. 마법병단은 흄의 대규모 마법을 막아야 하고, 각 부대간의 통신이나 정찰에 쓰는데도 빠듯하기 때문에 화력지원용으로 돌리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지금껏 3차 정벌군 까지가 실패했던 결정적인 이유도 마법사들이 상륙전의 화력지원에 동원되어 너무 초반에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신은 지금껏 마법사들이 해 왔던 화력지원의 역할을 드워프들에게 맡기고 마법병단에게 숨통을 틔어 준 것이다. 사실상 이번 4차 정벌군이 감히 흄의 대군단과 싸움에서 승리를 점칠 수 있는 것도 이 드워프들의 포병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기대치에 못 미치는 성과를 내서는 작전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이다. “암. 그동안 얼마나 연습을 했는데 그 정도도 못하겠나?” 드워프들이 허풍이 세긴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종족은 아니다. 겔파가 이렇게 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믿어도 좋을 것이다. “좋습니다. 겔파님의 솜씨를 믿지요. 다음으로 사격 지점을 잡는 것은 이리엘님에게 맡기겠습니다. 엘프의 눈이면 배 위에서도 마물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겠지요?” 정확한 포격 목표를 관측하고, 효과적인 타격목표를 잡아주는 것은 눈이 좋은 엘프레인저의 몫이다. 드워프들도 꽤 훌륭한 망원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격통제를 하는 것이 불가능 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훌륭한 망원경이라 해도 감히 엘프들의 엄청난 시력에 비할 수는 없다. 망원경은 멀리 보이는 만큼 좁게 보이기 때문에 전쟁장터의 상황을 한눈에 살피는 것은 아무래도 엘프들이 빠르다. “쉬운 일이지요.” 이리엘은 생긴 것만큼이나 시원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좋아요. 이리엘님을 비롯한 사격통제에 동원될 엘프들은 마물들이 가장 많은 곳, 또는 사격했을 때 가장 적에게 피해를 많이 줄 수 있는 곳을 좌표화 해서 겔파님에게 알려 주시면 됩니다. 그럼 겔파님이 망원경으로 살펴보고 타격하면 됩니다. 첫 탄이 떨어지는 순간이 대포로 피해를 줄 수 있는 화력의 70% 이상을 담당합니다. 그러니 초탄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강력한 마법탄을 사용해 주세요. 그리고 초탄을 피해 엄폐물을 찾은 적들에게 대포는 별 효과가 없으니 그 다음부터는 탄의 조합을 해야 합니다.” 이미 모두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준 얘기다. 하지만 실전과 연습은 분명히 다른 이야기이다. 만약 돌발 상황이 일어나 우왕좌왕 했다가는 흄의 뭍에 발을 들여 놓기도 전에 괴멸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돌발 상황에 대한 대비책이라면,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여질 정도의 훈련밖에는 없는 것이다. “마법탄의 조합은 세레니엘님에게 맡길게요. 엘프들에게 적들의 움직임을 전해 듣는 대로 최고의 마법탄 조합을 내 주세요.” 사실 마법사와 드워프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다. 정직하고 환상을 믿지 않는 드워프에게는 마법사란 존재가 사기꾼처럼 보이게 마련이고, 마법사는 마법사대로 융통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주제에 먹는 것만 밝히는 땅딸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계속 연합훈련을 하면서 서로 간에 존중하는 마음이 들면서 으르렁거리던 관계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서로의 중요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드워프들의 대포가 없었다면 화력지원에 동원될 마법사들의 피로가 너무나 커진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마법사들이 잘 아는 사실이었고, 반대로 마법사들이 없다면 드워프들의 훌륭한 대포도 제 성능을 다 발휘하지 못한다는 건 드워프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프 마법사나 마법병단의 마법사 모두 동원해서 무엇보다도 적 관측에 총력을 다 해야 합니다. 일단 화력 제압은 마법보다 대포에 맡기면 되요.” 마법병단을 이끄는 세레니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여주었다. “좋습니다. 그럼 승부는 여기서부터 입니다. 1군단과 2군단은 예정대로 1,2,3차 정벌군이 상륙했다 실패했다는 미도우 해안에 전 화력을 집중해 주세요. 3군단 역시 기함과 포격전을 감행할 수 있는 대형 전함은 전부 그쪽으로 돌립니다. 그리고 3군단은 마물들의 모든 병력이 미도우 해안으로 몰린 사이, 소형의 쾌속선과 대포를 적재하지 않은 고속선으로 미도우 해안이 아닌 제페린 해안에 상륙을 개시합니다. 그리고 미도우 해안까지 육상으로 이동해 적을 포위 섬멸합니다.” 제 6 장 전쟁의 시작4화 과감한 작전이었다. 원정군에 동원된 병사들의 숫자가 일만이라 해도, 이중에 배와 대포를 움직이는데 동원되는 인원을 빼고 나면 실제 상륙전에 동원될 수 있는 숫자는 4000명 내외라는 뜻이다. 그 적은 부대를 또 나누어 후방에서 포위공격을 감행한다는 과감한 작전에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자칫 각개격파 당하면 내륙에 내려선 3군단의 경우 후퇴도 못하고 전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많은 병력이 아닌데 분산하여 상륙시키다니...” 사막전에서 몬스터 군단과 싸워본 뮬테인 백작은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그 전투에서 질릴 만큼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어차피 좁은 미도우 해안의 상륙전에 동원될 수 있는 병사의 수는 많지 않아요. 목표는 미도우 해안의 정리 및 본대와 보급물자의 이동을 위한 워프게이트의 구축입니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미도우 해안에 모여 있는 마물들을 섬멸시키는 것이에요. 만약 미도우 해안에 모여 있는 적 병력을 줄여놓지 않으면, 나중에 올 본대와 합류해서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적들이 몰려올 겁니다.” 상륙전이 성공한다고는 해도, 마법진을 그리고 여기에 충분히 마나를 공급하여 활성화 시킬 때까지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1만 정도의 병력으로 버텨야한다는 뜻이다. 보급물자도 딱 그 정도 밖에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는 없다. “워프게이트가 완성 되서 본국에 있는 병력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이 병력을 섬멸시키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해요.” 유신이 놈들의 여왕을 쫒차버린지 겨우 3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때부터 드워프들이 부지런히 배를 만들었다고는 해도, 배만으로 흄 정벌군 전체를 실어 나를만한 양의 함선은 만들 수 없었고, 그런 것은 효과적이지도 않다. 차라리 배로 상륙할 병력은 워프게이트 구축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고, 본대가 이동을 완료할 때까지 그것을 지킬 정도의 병력만 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3군단도 1,2군단과 함께 상륙하는 편이 낳지 않을까요? 그게 안전할 것 같고...” 율리안은 다른 귀족들이 유신의 작전에 이이를 제기하기 전에 먼저 질문했다. 유신에게 이 작전에 대한 계획은 진작부터 들어뒀었지만, 이것은 귀족들을 위한 베려다. 만약 귀족들이 이 질문을 먼저 하게 되면, 귀족들은 그들이 낸 작전대로 상륙전이 감행되었다는 명예를 얻기 위해 본대를 나누는 것을 반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만약 적들이 해안선 방어를 포기하고 대포의 사정거리가 닿지 않는 곳까지 이동해서 새로이 진지를 구축해 버리면 곤란해집니다. 미도우 해안이 지형 상 육지로부터 오는 공격을 막는 것이 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수비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진격해서 흄의 목을 베는 것까지가 목표입니다. 그러니 미도우 해안에 가쳐버려서는 안돼요. 게다가 좁은 해안에 한꺼번에 상륙할 수 있는 병력은 3000 정도가 고작입니다. 나머지는 전투에 참가조차 못하고 바다에서 구경만 할 바엔 적의 뒤통수라도 노려보는 편이 낳을 거예요.” 마물들과의 전쟁에만 전념하기도 빠듯한데 연합군 내부의 갈등까지 사전에 막기 위해 이런 유치한 연극을 하려니 맥이 빠지는 것 같았다. 한심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유신도 배우의 역할을 착실히 했다. 크라켄을 소환하여 흄의 바다를 지키던 소환술사는 지금 몸이 달아 있었다. 그가 풀어놓은 크라켄 중 한 마리가 전략요충지인 미도우 만과 겨우 일주일 거리에서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크라켄을 통제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가끔 크라켄이 그의 통제를 벗어나 사냥감을 쫒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크라켄이 이동하는 것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매일매일 크라켄이 어디 있는가를 체크하기 위해 마나를 쓰는 것도 힘든 일이고, 사실상 드래곤이라도 만나지 않는 한, 아니 단순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나서 그 드래곤을 화나게 하지 않는 한 바다에서 크라켄이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해도, 소환의식을 거행하여 종속의 계약을 맺은 크라켄이 죽게 되면 마법사가 모를 수는 없다. 크라켄이 소멸하게 되면 마법사에게도 타격이 가게 마련이고, 이것이 굉장히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환마법사도 겨우 크라켄이 소멸되었다는 것을 눈치 챘다. 하누스에서 파병한 부대와 크라켄이 만나 침몰한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환마법사는 더더욱 황당하기만 했다. ‘대체 어느 미친 드래곤이 먹지도 않을 문어 사냥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도망가는 크라켄을 삼일이나 쫓차가서 죽이다니...’ 흄 직속의 마법병단 닐케니언 소속 소환술사인 데무르는 그런 황당한 소행을 한 존재를 드래곤이라고 규정짓고 있었다. 드래곤 앞에서는 황당이고 상식이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래곤이 되었건 뭐가 되었건 크라켄은 죽었다. 틀림없이 죽었다. 그러니 눈앞이 깜깜해 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크라켄은 해군력이 전무하다 시피 한 흄으로선 대단히 귀중하고 강력한 해상 전력이고,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죽게 했다는 책임은 누군가가 져야 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아마도 자신이 될 거라는 불길한 생각에 소환마법사는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드래곤에게 죽었다고 해도 크라켄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3일 정도나 움직였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결국 죽게 될 때까지 방치했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어찌할까를 망설이다가 지금까지 보고조차 안했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설마 죽이기야 하겠는가? 내가 죽으면 그 많은 소환수들이 폭주할 터인데...’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흄에는 마법사가 많지 않고, 크라켄을 조종할 정도의 소환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일생동안 모아둔 모든 용기를 짜내어 흄에게 보고하였고, 그대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살아있는 시체가 되어 버렸다. 갑자기 소환마법사가 죽게 되면 소환수들이 폭주하게 되거나 지배를 벗어나 야생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흄은 데무르를 죽이지 않고 팔다리를 잘라내고 인격과 자아도 제거시켜 버린 채 소환수들을 움직이는 일종의 생체 제어장치로 만들어 버렸다. “후루엘! 후루엘!” 열이 오를대로 오른 흄은 닐케니언에서 첩보와 통신을 담당하는 다크엘프 후루엘을 불렀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아라. 저 얼빠진 소환마법사의 말처럼 드래곤에게 당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에게 당한 것인지 알아보고 즉시 대비책을 만들어 보고하도록 하라!” 바다 한가운데서 크라켄이 죽은 것이다. 상식적으로도, 비상식적으로도 해명할 수 없는 불가능 한일이 벌어진 것이다. 흄의 뇌리에 절대 틀리지 않는 예언과도 같은 확신이 스쳤다. 너무나 불가해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믿을 수도, 믿고 싶지도 않은 일이 벌어질 때마다 반드시 거론되는 이름. “유신 더 실버스타... 이번에도 네놈이냐?” 흄의 주위로 태양마저 피해갈 만한 사악한 죽음의 기운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제 6 장 전쟁의 시작5화 후루엘은 닐케니언 휘하의 마법사중 비젼 마법을 쓸 수 있는 모든 마법사들을 동원하여 크라켄이 소실된 지점을 중심으로 그 일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만약 드래곤이라면 이미 멀리 가 버렸겠지만, 흄이 걱정하는 것처럼 인간의 소행이라면 그 근처에 배가 남아 있을 것이다. 크라켄을 잡은 것은 당연히 마법사들일 것이고 그 마법사들을 옮기려면 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크라켄 정도의 초대형 괴수를 잡으려면 병단규모의 마법사가 없으면 어림도 없기 때문이다. 과연 비젼마법을 사용하자 흄의 걱정처럼 인간 마법사들의 소행이라는 것이 확실해 졌다. 크라켄이 소실된 시점에서 흄 방향으로 하루거리에 비젼 마법이 통하지 않는 대규모의 결계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대만이 유독 마법이 통하지 않아서 이미지가 잡히지 않고 짙은 안개 속을 보는 것 같았다. ‘저곳이란 말이냐? 겁도 없이 또다시 우리에게 칼을 들이대다니! 편하게 죽게 하지는 않겠다.’ 결계의 규모로 봤을 때 적어도 오천 이상의 병력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후루엘은 망설임 없이 흄에게 보고했다. “그렇단 말이지... 건방진 인간들이 감히 나에게 도전하다니! 벌레 같은 놈들! 젤더가인을 불러라. 그 멍청한 놈들은 두 번 다시 고향을 보지 못할 것이다!” 뱀파이어는 지능이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하다. 뱀파이어 로드 젤더가인이라면 몬스터들을 잘 통제하여 인간들을 효과적으로 물리치거나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생체실험이나 노예로 쓰려면 아무래도 전부 죽여 없애버리는 것보다 최대한 많은 포로를 확보하는 것이 좋다. “흐하하하하! 이 겁대가리 없는 녀석들을 전멸시키고 이번에야 말로 라일로스 대륙 전체를 쓸어주마!” 건방지게 인간들이 침공하고 있지만 흄은 과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막 제노비아의 사막의 요새에서 가져왔던 대형 몬스터들의 배양이 끝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노비아 요새는 유신에게 끝장났지만, 흄도 그 전에 제노비아한테서 숙성되지 않은 몇 마리의 대형 몬스터를 나누어 받았었다. 많은 수를 나누어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인간들의 군대를 상대하기에 부족한 숫자는 아니다. 멍청한 인간들의 침공은 요 삼년간 무사히 숙성을 끝내고 하나 둘 눈을 뜨기 시작한 이 몬스터들의 힘을 알아 볼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될 것이다 흄은 이번에 깨어나는 대형 몬스터들을 지금 쳐들어오고 있는 인간들의 군대를 상대로 테스트를 해 본 후, 그 여세를 몰아 바로 라일로스 대륙으로 역 상륙을 해버릴 계획이었다. “흄 폐하. 젤더가인 대령했습니다.” 흄의 앞에 있는 붉은 카페트가 솟아나는 가 싶더니 어느새 뱀파이어 로드 젤더가인이 서 있었다. 창백한 뱀파이어의 얼굴은 검고 큰 망토와 대비되어 더욱 하얗게 보였고, 그의 주변에는 불길한 검붉은 안개가 따라다니고 있었다. 강해보이는 인상이라기보다는 깔끔한 신사타입이었다. 하지만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불사의 몬스터들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뱀파이어, 그 중에서도 최강의 원조 뱀파이어가 뱀파이어 로드다. 육체적으로도 불사의 경지에 이른 무적의 몬스터이고, 7서클 마법의 마스터이자 소드마스터 정도의 검기를 다룰 수 있다. 박쥐나 안개로 변신하기도 하고, 반경 1백미터 안에 있는 인간들을 한꺼번에 트랜스시킬 수도 있을 정도로 굉장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당장 저 건방진 인간들을 박살내고 오너라! 그대로 라일로스 대륙까지 쓸어버리는 것이다!” 흄은 평소답지 않게 흥분하여 소리쳤다. 이번 전투로 유신을 잡게 되면, 마법계의 일개 리치에 불과한 그가 루시퍼의 원수를 갚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전공을 베리알에게 인정받으면, 어쩌면 헬마스터의 공석 중 하나가 그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 “마이 로드...” 젤더가인은 여느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하고는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젤더가인은 이 시점까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인간 연합군의 배들 중 일부가 미도우 만이 아닌 제페린 만으로 이동을 시작했다는 것과 드워프들의 배에 실려 있는 대포의 성능이 지금껏 그가 봐왔던 대포와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일주일 후, 미도우 만에 마물들의 배치를 끝내고 어느정도 적응 훈련이 끝났을 때 드디어 인간들의 함대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 미터가 넘는 대형 전함 세 척을 선두로 스물다섯 척에 달하는 배가 천천히 미도우 만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호오... 인간들이 제법 쓸만한 장난감을 만든 것 같군. 아니, 드워프들의 작품인가? 뭣이 되었던 상관없겠지.” 배가 아무리 거대하고 강력해 봐야 육지로 올라오지는 못한다. 어차피 육상부대가 상륙하려면 작은 배를 타고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니 두려워 할 것은 없다. 젤더가인은 미도우만에 일만 오천에 달하는 몬스터 대군을 준비시켜 두고 적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흄의 본성인 슈발츠둠에 있는 본대를 끌고 올 수는 없었지만, 겨우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새에 이정도의 병력을 끌어 모은 것은 그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증거다. 1,2,3차 흄 정벌군을 막은 것도 젤더가인이었기에 그는 별 두려움이 없었다. “인간이란 질릴 만큼 단순하구나. 세 번이나 실패했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 볼만도 하건만...” 보나마나 마법사들을 이용해 상륙할 해안에 공격마법을 쏟아 붓고 그 틈에 기사단부터 내려놓을 것이다. 세 번 모두 질릴 정도로 똑같은 방법이었다. 젤더가인은 언제나처럼 몬스터들 중 약하고 쓸모없는 녀석들을 뽑아 일부로 해안가에 늘어놓아 마법사들이 맞추기 좋도록 배치하여 주었다. 아마도 적들은 그 몬스터들을 잡기 위해 마법을 남발할 것이고, 그것을 승기를 잡은 것이라고 착각할 것이다. “잠시동안은... 이기는 꿈을 꾸는 것도 좋겠지...” 젤더가인은 마물군의 본대는 미도우 만의 숲 속에 숨겨두고 느긋한 마음으로 적들을 기다렸다. 제 6 장 전쟁의 시작6화 라일로스 연합군이 상륙작전에 실패하고 바다로 도망쳐 버리면 해군력이 없는 흄의 군대로서는 추적하는 것이 쉽지 않다. 젤더가인은 벌써 거기까지 바라보고 영리하게도 와이번 부대를 후방에 배치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단 한명도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함선 정렬! 좌 포전 준비! 좌 포문 개방!” 드디어 상륙 목표가 보이기 시작했다. 총사령관인 율리안의 명령에 따라 기함인 더 월드에서 신호탄이 오르자 스물다섯척의 함선은 천천히 오른쪽으로 회전하며 왼쪽의 포문을 전부 개방했다. 이미 수많은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 많은 함선이 정렬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새파란 바다위에서 스물다섯척의 거대한 전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대단한 장관이었다. 얌전한 율리안 왕자나 전쟁이라곤 하나도 모르는 겁쟁이귀족들조차 소름이 돋을 만큼 웅장한 기백이 느껴졌다. 하지만 마물들은 라일로스대륙 연합의 함대가 포격전 준비를 하고 있는데도 마치 시위라도 하듯 해안가에 죽 나와서 쏴 달라고 하고 있었었다. 율리안은 흄의 다크블러드 정도의 강력하고 절도 있는 상륙 저지군을 예상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해안을 지키고 있는 마물들은 그의 생각만큼 군기가 엄정해 보이지 않았다. 상륙저지군이라면 흄에서도 최정예의 막강한 군대가 맡아야 할 것인데, 마물들을 구성하고 있는 것도 오크나 고블린정도의 하급마물이 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무장도 형편없었다. 맹렬한 기백이 느껴지지도 않았고, 무섭게 생기지도 않은 비리비리한 녀석들이 무슨일인지 잘 모르겠다는 멍한 얼굴로 해안가에 모여 있을 뿐이었다. “저 정도면 이길 만 하겠군요.” 율리안 왕자는 드워프들에게서 얻은 망원경을 이용해 적의 진형을 살펴보았다. 다행이 적의 선봉은 별 볼일 없어 보이자 율리안은 크게 안심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마물일 뿐인가? 저거야 원, 죽여달라고 사정하는 것도 아니고...” 포격 준비를 하는 갑판 위에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 각 군단의 수뇌들과 지휘관들도 모두 나와 있었지만, 대체 적의 심중을 알 수가 없었다. 모두들 왠지 맥이 빠지는 듯, 배의 난간에서 혹시 무슨 함정이 있지 않을까 적의 진형을 살피고 있었다. 미스티도 해안에 늘어선 마물을 보자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상륙전을 시작하게 되면 물에서 뭍으로 나오는 순간이 가장 약점이 많이 노출되는 건 사실이다. 그때 화살공격을 하고 전투를 벌이면 분명히 유리한 싸움을 할 수 있겠지만, 저건 좀 이상했다. 아무리 적들이 유신쪽 진형에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력의 드워프 캐논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고 해도 마법사도 있는데 저렇게 마물들을 늘어놓는 것은 죽여달라는 소리 아닌가? 함정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해안가에 나와 있는 마물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함정일 것 같지 않습니까?” 율리안이 신중하게 말했지만, 이미 작전이 시작된 이상 지금 와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전쟁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간과 타이밍이기 때문이다. “무슨 함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망설일 필요는 없겠지요. 단순한 시간벌기일지도 모릅니다. 일단 작전대로 쓸어버리고 적들의 대응을 보도록 하지요. 그리고 포격전이 시작되기 전에 ‘아이들’을 깨워서 진정제라도 먹여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자칫 미쳐 날뛰게 되면 함대 전체가 치명타를 받게 될 겁니다. 어서 명령을...” 유신이 있었다면 적의 작전이 무엇인지 눈치챌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미도우만이 아닌 제페린 해안으로 향했기 때문에 이곳에는 없었다. 미스티는 기함인 더 월드에서 율리안을 보좌해 주고 싶었지만, 그의 함대를 지휘해아 하기 때문에 2군단의 기함인 이모탈 포트리스를 떠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답답하긴 하지만 통신마법사를 통해서 율리안을 재촉했다. “알겠습니다. 각 함대, 포격준비가 끝나면 신호탄을 올려 주세요!” 율리안의 명령이 떨어지자 본격적인 포격전 준비가 시작되었다. “포탄은 작열탄으로! 각 함대는 포격지점을 정확하게 구획하여 주십시오. 포탄은 격자형식으로 동시에 떨어지도록 최대한 조정해 주세요!” 엘프들의 시력이 동원될 필요도 없었다. 목표가 눈에 뻔히 보이고 엄폐물이나 은폐물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마법탄을 쓸 필요도 없이 보통의 작열탄으로 쏴대도 상관없을 것이다. 통신마법사를 통해 각 함대의 포격관제사에게 탄의 종류와 타격지점이 전달되자 공격 준비가 끝난 함부터 신호탄이 오르기 시작했다. 빠르게 포격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강한 부대라는 뜻이기 때문에 경쟁하듯 눈에 불을 키고 목표에 대한 조준을 했다. 흄 정벌군은 한나라만의 단독으로 구성된 군대가 아니라 대륙 전체의 연합군이다. 때문에 마물들과 싸우는 같은 편이라고는 해도 전공을 다투는 국가간의 명예는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역시나 가장 최정예인 미스티의 기함 이모탈 포트리스를 선두로 하나하나 진홍의 신호탄이 바다위를 수놓기 시작했다. “포격 개시!” 제 6 장 전쟁의 시작7화 마침내 율리안의 손이 높이 들리자 스물다섯척의 대형 전함에서 일제히 천둥소리와 함께 화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콰콰콰쾅” 이번 전쟁에 동원된 드워프들의 대포는 전장식 대포가 아닌 신형의 후장식 대포다. 명령에 따라 발사타이밍을 똑같이 잡는 일제사격이 가능한 이 신병기 덕분에 거의 칠백문에 달하는 포탄이 동시에 미도우만의 해안을 타격할 수 있었다. 마물들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기도 전에 고깃조각이 되어 푸르렀던 해안의 색을 바꾸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칠 새도 없었다. 귀청을 찢어내는 굉음과 폭풍으로 거의 천년을 살아온 젤더가인조차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마물들의 비명은 포성에 가려 들리지도 않았고, 충격파로 고막이 찢어지면서 균형감각 조차 사라져 아무렇게나 의미없이 내달릴 뿐이었다. “2파 장전! 타격목표 동! 제 2파 발사!” 더 월드에서 두 번째 신호탄이 오르자 다시 한번 천지를 뒤집는 포격소리와 함께 두 번째 탄이 날아갔다. 순식간에 해안에 배치해 두었던 오천에 달하는 마물들이 파도에 쓸려 내려가는 모래알처럼 힘없이 녹아내렸다. 단 두 번 일제사격일 가했을 뿐이었지만, 그 효과는 궁극의 마법이라는 메테오스트라이크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위력은 메테오스트라이크에 못 미치겠지만, 그 효과는 보고 있는 라일로스 연합군마저 두려울 정도였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적의 마법사들의 마나를 소진시키겠다는 계획은 완전히 물건너가고 만 것이다. 대포라는 특성상 바닥에 엎드리거나 포격을 받고 패인 구덩이 속에 들어가면 다음에 날아오는 포탄에 대해선 직격 받을 일은 없다. 하지만 이런 대포와 싸워본 적이 없는 마물들은 초탄의 위력에 질려버린 상태라 이미 지휘계통이 무너진 상태였다. 쇼크상태에 빠져 아무 의미 없이 무기를 휘둘러 옆의 동료들을 베어넘길 정도였다. 상대의 마나를 소비시키기 위해 내보낸 총알받이라고는 해도, 이렇게나 어이없이 무너질 줄은 젤더가인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처음에는 분노에 미쳐서 무작정 부대를 돌격시킬 뻔 했지만, 곳 냉철함을 되찾고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젤더가인은 포성에 의한 혼란이 가라앉고 전황이 조금씩 판단되기 시작하자 다시 여유를 찾기 시작했다. “흐흐 빌어먹을 인간들이 제법 하는구나. 생각보다 대단한 위력이긴 하지만 이정도도 안하면 재미없지.” 만약 섣불리 본대를 보여주었다면 저 무시무시한 포화의 직격을 받은 것은 그의 본대였을 것이다. 비록 희생이 크긴 했지만 틀림없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적의 작전이 무엇인지도 알았고, 화력이나 전력이 얼마만큼 되는지도 이 포격으로 짐작이 갔다. 적들은 아직 마물군의 본대를 보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저 대포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 화력이 너무 막강해서 일단 엉켜서 싸우기 시작하면 적이고 아군이고 할 것 없이 가루가 된다는 것이다. 본대의 지원이 없자 해안가에 있던 마물들 중 살아남은 녀석들은 바닥에 엎드리거나 바다 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혹시 물 속이라면 저 불가해한 천둥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미스티가 이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각 함선 탄두교환! 충격파탄 장전 끝나면 다시 신호탄 올려 주십시오!” 세 번째 일제사격은 어떻게 해서든 한번 살아보겠다고 바다 속으로 도망친 마물들에게 향했다. 다시 한번 불길한 붉은 신호탄이 하늘을 메우자 세 번째 일제포격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단 한번이었지만, 포탄은 해안가가 아닌 마물들이 뛰어든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쿠쿠쿠쿵” 굉장한 물기둥이 솟으며 충격파가 물속을 헤집어 놓자 산산조각이 난 마물들의 시체가 물보라와 함께 떠올랐다. 하지만 젤더가인은 참을성 있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지휘를 받고 있는 마물들도 적들의 끔찍한 화력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젤더가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뱀파이어가 마물들을 장악한 카리스마는 드워프들이 만든 불꽃놀이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젤더가인이 그의 힘을 퍼트리자 어둠의 오오라가 마물들에게 퍼져갔다. 공포와 경외. 그리고 미칠듯한 피에 대한 갈증이 퍼지면서 마물들은 거친 숨소리를 내고 인간들을 노려보았다. 마침내 기함인 더 월드에서 노란색 신호탄이 오르자 본격적인 상륙전이 시작되었다. 이백여척의 상륙용 보트가 내려지면서 가장강한 기사단을 선발대로 상륙이 감행되었다. “조금만 더 참아라. 적들이 육지에 완전히 올라오는 순간 뒤엉켜 싸워버리면 마법이건 대포건 대포는 쓸모가 없는 일이지.” 젤더가인은 혹시라도 적이 눈치챌까봐 마물들의 기척을 지우는 결계를 더욱 강화시키고 적들이 상륙하기를 기다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튀어나올 듯 쿵쾅거린다. 그것이 살아있다는 증거! 마물들과 인간들, 그리고 데미휴먼들은 이제 질릴 만큼 질펀한 피의 축제에 뛰어들 준비를 끝낸 것이다. 제 6 장 전쟁의 시작8화 가장 먼저 육지에 발을 딛은 것은 미스티였다. 몇몇 간신히 살아남은 마물들이 간간히 저항을 했지만, 미스티가 신경 쓸 정도로 저항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도 안 되는 허약한 마물들과 드잡이질 따위를 벌이는 것 보다는 온 신경을 집중시켜 매복한 적이나 함정을 찾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다. “까앙!” 땅바닥에 엎드려 있던 오크 한 마리가 커다란 도끼로 미스티의 복숭아뼈 부근을 후려쳤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아무리 두터운 갑옷을 입었다 해도 골절되었을만한 일격이었지만, 미스티는 그 육중한 발을 들어 별 감흥 없이 오크의 머리를 걷어 차 주었을 뿐이다. “퍼석” 이제는 너무나 흔해서 당연한 듯 보이는 뇌수와 눈알, 이빨 등이 붉은 모래사장 위로 흩어졌다.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이정도 쯤은 주위에 펼쳐진 지옥도에 비하면 정말 별것도 아니다. 사방 어디고 할 것 없이 널어져 있는 마물들의 조각과 피, 비명... 그야말로 지옥의 한 가운데 같다는 말을 실감하게 했다. 메케한 화약 냄새와 진동하는 피비린내 때문에 몹시 괴로웠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일단 주변에 미스티를 위협할만한 공격이 없다고 판단되자 그는 전 기능을 집중하여 그 일대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다행이 별다른 이상은 감지되지 않았고, 미스티는 본대의 상륙을 유도할 생각이었다. ‘지나친 걱정이었나? 아무것도 없다니... 응? 잠깐... 저 앞쪽, 정령들의 움직임이상한데? 뭐지? 설마... 결계?’ 젤더가인의 결계는 너무 완벽해서 미스티나 배 안에 타고 있는 마법병단의 마스터급 마법사 중에도 그 결계를 마법적으로 눈치 챈 자는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너무 완벽한 것이 탈이었다. 사방에 뼈와 살이 튀기고 폭음이 천지를 덮었는데 정령들이 너무 조용한 것이다. 당연히 놀란 정령들이 해안 일대에서 와르르 빠져나가거나 같이 흥분해서 날뛰어야 하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너무나 차분했다. 미스티는 정령사 만큼 정령을 느낄 수는 없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마물들이 숨어있는 숲 쪽으로 다가가며 녹색의 신호탄을 하늘로 쏘아 올렸다. ‘설마... 내 결계를 알아봤다는 것인가?’ 그 신호탄을 본 젤더가인은 혹시 적이 눈치 챈 것이 아닌가 하여 돌격해야 할지 말지를 머리털이 빠질 만치 고민해야 했다. 눈치 챈 것이라면 적들 대포의 사정거리 밖으로 부대를 물리고 와이번을 써서 지금 해안에 내려선 녀석들이라도 잡아야 했다. 하지만 적들은 별 변화 없이 해안에 상륙을 완료하고 있었고, 아직 그들이 매복해 있다는 것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냥 별 이상 없다는 신호인가? 하지만 저놈은 신경 쓰이는데... 더 다가왔다간 결계의 존재도 알게 될 것이고...’ 불안한 것은 굉장한 중갑옷을 입은 저 기사다. 상륙전이라면 해안가에서 싸움이라 바다 속에 들어가는 것도 어느 정도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도 저런 엄청난 갑옷을 입고 움직이다니. 그 강철의 기사는 마물들이 숨어있는 숲 앞에까지 왔다가는 기웃기웃 무성의 하게 한번 둘러보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들의 본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마법사라면 몰라도 저런 기사라면 젤더가인이 친 결계를 알 리가 없다. 그는 속이 타긴 했지만,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상륙한 무리들은 진지를 구축하는 것도, 그렇다고 마물들이 있는 숲으로 돌진하거나 배로 후퇴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온통 새빨간 피에 젖어 있는 해안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을 뿐이었다. 상륙작전이 무엇보다도 타이밍과의 시간싸움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저들의 움직임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주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라면 젤더가인의 결계를 눈치 챌 수 없을 테지만, 불길한 예감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설마?’ 일이 잘못되어 간다는 확신이 젤더가인의 머리 속을 스치는 순간 세 번째 포격이 시작되었다. “콰콰콰콰쾅” 포격음이 들리는 순간 그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신호탄도 없이 세 번째 포격이 시작되었고, 그 끔찍한 탄들은 정확하게 젤더가인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율리안 왕자는 선택을 해야 했다. 녹색의 신호탄은 틀림없이 뭔가가 잘못되었을 때 올리기로 한 긴급신호탄이었다. 하지만 해안가에 이렇다할 마물들의 움직임은 없었고, 마법사들도 마법적인 함정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미스티는 틀림없이 이상을 알리는 녹색의 신호탄을 올렸고, 이상이 있음에도 철수하지 않고 해안가에서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율리안은 미스티에게 통신마법사를 붙여 주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지만, 후회해 봐야 이미 돌이길 수 없다. 눈이라도 하나 파내고 미스티와 연결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을 지경이었다. 만약 그의 판단이 조금만 틀어지면 얼마나 큰 피해를 입게 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속이 바짝바짝 타고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은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다.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수록 적에게 유리해 지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부대를 일시 후퇴시키도록 해야 하나? 하지만 그랬다가는 유신 경의 3군단과 미스티경의 부대가 고립될 것인데...’ 이런 대규모의 작전을 지휘해 본 적이 없는 율리안은 움켜쥐고 있는 두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겁이 났다.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차라리 부대를 물리고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해안에 있던 거의 오천여 마물들 쓸어내었으니 무사히 철수하기만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율리안 장군님. 유신 경으로부터 통신 마법이 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하늘의 구원이라도 되는 듯 유신에게서 통신이 오자 율리안은 체통이고 뭐고 없이 달려들 듯 통신마법사의 마법구슬을 뺐었다. “오오, 유신 경. 그쪽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소? 이쪽은...” “시간이 없으니 짧게 말하겠습니다. 숲의 경계로부터 팔십미터 후방에 적 주력부대가 매복하고 있습니다. 더 월드에서 바라보았을 때 미스티를 가늠자로 삼아 숲 경계의 후방으로 마법탄을 쏴 주세요. 숲이라 일반 화약탄은 효과가 적을 겁니다. 세레니아님에게 조언을 얻어서 탄두 조합을 바꿔 주세요.” 미스티는 영리하게도 유신과 함께 있는 미니미스티를 통해 그에게 이 상황을 알려주고, 유신은 그에게 배속되어 있는 통신마법사를 이용해 타격목표를 가르쳐 준 것이다. 제 6 장 전쟁의 시작9화 첫 번째 떨어진 탄환은 별것 없었다. 단지 운동에너지만을 이용한 고전적인 탄인 듯, 해안가를 타격했던 그 포탄보다도 훨씬 못했다. ‘뭐지? 설마 그냥 위협사격을 해본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젤더가인이 잘 알겠지만, 워낙 최악의 상황이라 순간적으로 그 냉철하고 잔인무도한 뱀파이어로드의 정신이 혼미해져 버렸다. 하지만 젤더가인은 현실과 희망을 구별하지 못할 만한 한심한 수준의 저급 몬스터가 아니다. “전군 돌격! 해안가에 상륙한 녀석들을 잡는다.” 그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단숨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의 통제에 따르고 있는 일만에 달하는 마물들은 그들을 압도하는 뱀파이어의 무시무시한 피와 살의의 오오라가 퍼지기 시작하자 마침내 폭발하듯 내달리기 시작했다. 인간들처럼 신호탄을 쏘거나 깃발을 올릴 필요도 없다. 인간들이 의사소통을 위해 그런 것을 사용하는 것이 조잡해 보일 지경이다. 몬스터들이 지닌 야성의 본능은 그들의 지휘관이 무엇을 원하는 지를 그들의 심장에 직접 새겨 넣고 있는 것이다. 오우거 같은 준대형의 몬스터들은 그를 가로막는 숲의 나무들이 방해가 되자 그대로 들이 받으면서 무서운 속도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포. 광기. 절망. 분노. 그리고 절대적인 죽음의 행진이었다. 하지만 이를 보는 인간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숲 전체가 술렁이듯 요동치는 것을 보면 타격 위치를 잡기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제 이파 발사!” 다시 한번 율리안의 명령이 전해지자 본격적인 마법탄이 숲속에 떨어졌다. “푸화하하하학” 마법탄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아름드리 나무가 한순간에 타오를 정도의 엄청난 불길이 숲을 태우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던 첫 번째 탄은 압축산소를 발생시키는 마법탄이었고 두 번째 탄은 파이어볼 효과를 내는 화염마법 탄이었던 것이다. 숲 속은 그대로 강철조차 녹일 것 같은 염화의 화염지옥이 되어 버렸다. “꾸에에엑” 염화는 숲 전체를 삼키기 시작했고, 마물들은 속절없이 잿더미가 되어 갔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들! 이런 짓을 하다니!”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 아닌 인간과 마물들과의 싸움이다. 아무런 윤리도, 도덕도, 자비도 없다. 생명의 고귀함 같은 것은 모두 개나 줘버릴 잔인한 화공이 시작되었다. 정령들은 미처 날뛰기 시작했고, 타오르는 숲은 마물들과 함께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마물들의 부대들 중 일찍 돌격을 시작한 일부는 지옥의 숲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절반 이상의 병력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잿더미가 되었다. 일만에 달하는 최정예 군단의 육십퍼센트 이상이 적들에게 검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숲과 함께 재가 되어 버리자 젤더가인은 눈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후회. 뱀파이어로서 살아오면서 후회를 해 본적이 있을까? 하지만 바로 이 순간, 젤더가인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적들을 너무 깔본 것에 대해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지휘관으로서 방심이란 것은 단 한순간도 용서가 안 되는 것이다. 인간들의 공격을 안일하게 대처했던 젤더가인의 단 한번의 판단 미스로 숭고해보일 만큼 맹목적으로 그를 따르던 수많은 그의 자식들이 잿더미가 된 것이다. “와이번 부대를 올려라! 해안가에 있는 적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포격을 가하는 함선을 교란시켜!” 기왕 이렇게 된 것, 저 잔인무도한 인간들을 모두 죽여 없애는 것이 죽은 그의 부하들을 위한 위로가 되어 줄 것이다. 마물들조차 저런 잔인한 공격을 하진 않는다. 젤더가인은 냉철한 뱀파이어답지 않게 분노에 미쳐서 가장 선두에 서서 마물들을 독려했다. 원래는 적들이 달아나면 추적대로 쓸 예정이었지만, 이쯤 되면 카드를 숨기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상륙하는 적들을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칫 부대 전체를 잃고 상륙을 허용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굉장한 지휘관이 있는 모양이군요. 군세가 전혀 흩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미스티의 옆에 선 세이람은 달려드는 적들의 흉흉한 기세를 냉정한 눈으로 살펴보며 말했다.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었으니, 사실상 마물들의 부대는 파멸한 셈이다. 그럼에도 흩어지지 않고 달려드는 모습은 차라리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동정하지는 않았다. 인간들로서도 바다를 등진 배수진이다. 질수는 없는 것이다. 육십퍼센트의 병력을 잃었다고는 해도, 유신이 지휘하는 삼군단이 빠진 지금, 마물들의 숫자가 두배 가량 많다. 게다가 절망과 같은 죽음의 회색 구름이 미도우만 왼쪽의 야산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물군 비장의 카드인 와이번들을 보여준 것이다. “크르르르르” 와이번들은 낮고 음산한 포효를 지르며 그리폰보다도 두배는 더 큰 그 육중한 몸을 하늘로 띄어 올렸다. “인간 놈들아! 그 대단하다는 장난감이 하늘에도 통하는지 보자! 단 한 놈도 살려두지 않겠다. 전부 죽여 없애 내 부하들을 위로 하겠다!” 젤더가인은 흉측한 이빨을 들어내고 시뻘건 안개에 휩쌓여 인간들의 군대를 향해 쇄도해 갔다. 제 6 장 전쟁의 시작10화 “시작되었군. 생각보다 수가 많은데?” 마물들의 돌진하는 기세를 본 귀족들은 그들이 고집부리고 먼저 상륙하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무식스럽게 돌격하는 대군을 상대로는 아무리 일기당천의 상륙군이라 해도 잠시도 버틸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뒤는 바로 바다! 오갈 때 없는 배수진이다. 하지만 미스티는 당장 그들을 짓이겨 그 시체로 바다를 메우고 그대로 바다에 떠있는 배까지 돌진하기라도 할 듯한 마물군단의 질주를 보면서도 평소와 같이 덤덤할 뿐이었다. 여기까지는 유신이 세운 작전대로 되어 온 것이다. “아이들은 잘 일어났을까요?” 신시아는 흘끔 그들의 배를 바라보았다. 이제 싸움의 승패는 마지막 카드인 ‘귀여운 아이들’이 얼마나 잘 해주느냐에 달려있다. 떨리는 두 손은 그녀의 애검을 움켜쥠으로서 숨길 수 있었지만, 미도우 만 전체를 덮고 있는 마물들의 무시무시한 살기에 헐떡이는 가슴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해안에서의 전투를 위해 얇은 갑옷을 입었지만, 갑옷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보일 정도로 어깨를 들썩였다. 사막에서 싸웠던 것에 비하면 덥지는 않으니 기상 적 조건은 조금 더 낳은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재능있는 소드마스터라고는 해도 이제 겨우 두 번째 실전일 뿐이다. 게다가 그리폰 보다도 훨씬 큰 저 거대한 와이번이 살기를 가득 품고 하늘을 메우고 있는 모습을 보면 두렵다기보다는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포격전이 시작되었을 때 깨워서 진정제를 먹여 두도록 했어. 이제는 흥분제가 필요하겠군. 자, 저길 봐. 시작된다.” “후드드득” 천사? 아니면 솜씨 좋은 마술사가 선보이는 비둘기마술쇼? 마치 커다란 새장의 문을 열었을 때처럼 더 월드, 이모탈 포트리스, 크림슨 글로리 세척의 기함에서 깃털처럼 가벼워 보이는 그리폰 무리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폰라이더, 그리폰나이트 전기 탑승 완료! 제 1 갑판 개방!” 200미터가 넘는 더 월드의 갑판이 마치 거대한 곤충이 허물을 벗듯 좌우로 갈라졌다. 이런 배를 만든 드워프들도 놀라왔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갑판 안에 있는 존재들! “구구구구구” “께에에엑” 70여마리의 그리폰이 흥분제를 맞고 괴성을 질러대기 시작하자 그 거대한 함 전제가 요동쳤다. “절대 안돼요!” 엘리시엘은 그녀의 친구에게 부작용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흥분제를 놓으려고 하는 그리폰나이트를 거칠게 밀어냈다. 경장갑이라고는 해도 기사를 밀어 낸 것이다. 그녀의 작은 체구를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힘이었지만, 그 믿을 수 없는 괴력을 냈다는 것은 그만큼 화가 났다는 뜻이다. “수단방법을 가릴 상황이 아닙니다! 이 싸움에서 지면 모두 죽을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기사는 히야누의 뒷자리에서 굴러 떨어졌지만, 아픈 것도 모른다는 듯, 벌떡 일어서서 마주 고함을 질렀다. 포격전이 시작되면서 그리폰들이 흥분하여 날뛸까봐 미리 진정제를 먹여 두었었다. 하지만 이 야수들은 왠만한 양으로는 진정되지 않을 터이니 거의 치사량에 가까운 약을 주사했기 때문에 깨기 위해서는 흥분제가 필요한 것이다. 때문에 그리폰나이트들은 엘프들의 양해를 구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몰래라도 그리폰들에게 흥분제 주사를 놓을 참이었다. 당연히 엘프들이 찬성할 리 없고 엘리시엘도 방방 뛰면서 결사반대를 하는 것이다. “저 아이를 봐요. 저렇게 빌빌거리다간 날아오르기도 전에 밖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와이번의 먹이가 되고 말겁니다!” 그리폰라이더인 엘프들은 질색했지만, 그리폰라이더와 한조를 이루어 엘프와 그리폰을 보호해야 하는 입장인 그리폰나이트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리폰에게 흥분제를 놓아 버렸다. 하지만 엘리시엘과 한조인 이 기사는 흥분제를 주사하기 전에 눈치 빠른 그녀에게 덜미를 잡혀 버린 것이다. “크르르릉” 다행이 히야누는 흥분제 없이도 미도우만 전체를 덮고 있는 죽음의 냄새나 살기를 느꼈는지 하늘의 제왕다운 거친 포효를 내뱄으며 그 거구를 일으켰다. 하지만 사실 히야누는 그런 것보다도 그리폰 나이트가 그의 귀여운 엘리시엘을 괴롭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화가 난 것뿐이다. “캬아아악” 어쨌든 히야누는 그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괴성과 함께 그 거대한 부리를 슥 들이밀면서 불쌍한 기사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히이익” “적 와이번 접근 중!” 마침 그 기사를 구한 것은 상황 중계를 하는 통신담당 마법사였다. 마법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리폰들을 가려주고 있었던 함교가 걷히면서 눈이 아플 만큼 푸른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왜 아직도 명령을 안 내리는 겁니까? 당장 그리폰을 출격시켜 주십시오! 이대로는 전부 잡아먹히고 말겠습니다!” “조금만 더 참아 주세요. 지금 그리폰을 보여 줬다가 와이번들이 달아나 버리면 이 ‘항공모함’을 만든 이유가 없습니다.” 율리안은 두려움에 질린 귀족들을 달래기 위해 진땀을 흘렸다. 사실 진땀이라기보다는 그 역시도 두려움에 흘리는 식은땀이었지만, 총사령관으로서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와이번들이 미도우만에 불길한 먹구름을 드리우기 시작하자 귀족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고, 마침내 율리안의 손이 다시 한번 높이 들려졌다. “천공기사단 출격!” 그 명령이 떨어지자 각 군단의 기함에서 동시에 70여 마리씩 그리폰들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장관! 굉장한 장관이었다. 이백오십여마리에 이르는 그리폰과 백팔십여마리의 와이번! 미도우만의 창공은 그 순간 그리폰과 와이번으로 매워지는 듯 보였다. 시리도록 푸른 미도우만의 창공에서 하늘의 옥좌를 가르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제 6 장 전쟁의 시작11화 “발검!” 미스티의 명령에 따라 상륙군은 일제히 검을 뽑아 가슴 앞으로 모았다. “촤르르르륵” 기사단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자 검을 뽑으면서 들리는 서늘한 마찰음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사분란하게 들렸다. 나와 같은 검을 들고 같이 적을 쳐죽이고, 같이 죽어 줄 동료가 있다는 것은 사기를 높이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통일된 검과 복장, 부대 마크등을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이다. 이들은 이제 자기 혼자만의 검에 의지하는 개개인이 아니다. 그들은 ‘기사단’이라는 거대한 한마리의 파괴적인 육식동물이 된 것이다. 한명 한명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은 한 마리의 잔인하고 거대하고 강력한 맹수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단 하나의 선택! 강력하게 도전해 오는 적들을 갈기갈기 찢어서 먹어치우거나 먹히는 것이다. “콰콰콰콰쾅” 바다에서 지원해 주는 최후의 지원사격이 끝나자 마침내 마물들이 코앞으로 쇄도해 오기 시작했다. 대포를 맞아가면서 돌격했기 때문에 마물들의 수는 눈에 띌 정도로 줄어 있었지만, 그 기세는 전혀 죽지 않았다. 기사들은 포격음과 살기, 그리고 눈앞에 닥쳐오는 적들의 흉흉한 질주로 그 머리 속은 이미 하얗게 변한 후였다. 이제부터는 끝없이 검을 휘두르고 눈앞의 적을 베는 일에만 전념하면 되는 것이다. 두려움에 떨 필요도 없고, 다음에 일어날 일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없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일생동안 검을 휘둘러 온 것이 아닌가? “세워 검!” 흥분된 심장은 당장 튀어나올 듯 쿵쾅거리고, 겉잡을 수 없는 살의에 이미 인간성 같은 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미도우만에 ‘인간’이란 없다. 죽이거나 살해당할 잔인한 야수들밖에 없는 것이다. “돌격!” 적의 선봉이 이십미터 선까지 도달하자 마침내 미스티의 돌격명령이 떨어졌다. “으아아아아” 괴물들이 지르는 소리와 별로 다를 것 없는 괴성을 지르며 인간들도 돌격을 감행했다. 첫 번째 충돌은 마물들이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저돌적인 오크들을 중심으로 간간히 트롤이나 오우거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검에 찔리고 도끼에 찍히면서도 그 돌격속도를 늦추지 않고 기사단의 제 일열을 무너뜨린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기 시작하자 돌격의 효과는 사라지고 싸움은 완전한 난전 양상이 되었다. “죽어! 죽어! 죽여 버려!!” 인간들은 함성을 지르거나 욕설을 내뱉으며 마물들을 쳐대기 시작했다. 젤더가인으로서는 처음의 포격으로 미노타우러스나 오우거 같은 준대형 몬스터를 잃은 것이 너무나 뼈아팠다. 덩치가 큰 만큼 숲을 빠져나오는 속도도 늦었고, 빠져나온 약간의 대형 몬스터들도 그 큰 덩치 때문에 대포에 맞아 대부분이 전투 불능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상륙기사단이 유리한 것도 아니었다. 해안가라는 특성상 중갑옷을 입지 못했기 때문에 방어력도 떨어졌고, 마물들과의 무게 차이도 심하게 난다. 게다가 이미 엉망으로 엉켜 난전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마법사나 대포의 화력지원도 전혀 받지 못할 상황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쪽이 밀리기 시작하면 그 순간 밀리는 쪽은 후퇴하지도 못하고 전멸될 수밖에 없다. 인간들은 배수진이니 후퇴할 곳이 없고, 마물들은 섣불리 후퇴해서 인간들의 부대와 간격이 벌어지면 또다시 바다위에 떠 있는 악마같은 배들에게 포탄세례를 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함부로 후퇴할 수 없었다. 그러니 마물이건 인간이건 이를 사려 물고 최후의 사력을 짜내어 하나라도 더 죽이기 위해 악을 쓰는 것이다. “저놈들은 지치지도 않나?” 소드마스터인 신시아조차 팔에 쥐가 날 정도로 검을 휘둘러 봤지만, 적의 수가 줄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많은 적들을 베었는지, 오우거 셋을 포함해서 스무마리까지 세고는 포기해 버렸다. 하지만 적들은 아직도 광기에 미쳐 날뛰며 조금도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하누스의 자색기사단은 유신이후로 경갑옷에 가벼운 검 위주로 훈련을 쌓았으니 그럭저럭 사정이 좋아 보였지만, 예메른의 제노비스기사단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의 기사단은 그렇지 못했다. 중갑옷을 입고 싸우는 훈련을 해 왔던 이들에게 말과 갑옷이 없으니 아무래도 전력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비슷하게 싸워주고 있지만, 계속 이상태로 가다가 한순간만 틈이 나면 상륙군 전체가 한번에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제 6 장 전쟁의 시작12화 뜨겁고 붉은 바람이 해안가의 붉은 모래를 하늘 높이 띄어 올려 미친 춤을 추게 한다. 바람의 정령이 아닌 마나의 폭풍으로 만드는 붉은 바람. 혈풍. 젤더가인은 그에게 덤벼들던 또 하나의 인간을 붉은 바람의 일부로 만들어 버렸다. ‘제길! 무슨 소드마스터가 이리 많단 말인가? 벌써 넷이나 해치웠는데도 얼마나 더 있는 건지 알 수가 없구나.’ “하앗!” 방금전에 한명의 소드마스터를 없애버렸는데도, 또다시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새파란 검기를 품은 롱소드가 그의 망토를 찢었다. 그를 벤 것은 피범벅이 되어 어떤 생물인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의 기사였지만, 그 기사에게서 나는 냄새로 보아 여자, 그것도 틀림없는 처녀다. 전장터가 아니었다면 트랜스 시켜서 그의 권족으로 쓰고 싶을 정도로 뛰어난 솜씨의 여기사였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죽어라!” 망토의 일부가 채찍처럼 늘어나 그 여기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흥! 이정도 쯤은!” 신시아는 사력을 다해 검기를 끌어 모았다. 이 사악한 기운, 이 강력함! 적의 대장이 틀림없다. 이 녀석만 잡으면 이기는 것이다. 저 뱀파이어가 소드마스터인 그녀의 후배를 어린애 손목 비틀 듯 간단하게 찢어 죽이는 것을 봤지만, 그녀의 머리 속에 두렵다는 생각 같은 건 없었다. 피 냄새에 취해 이성이나 공포 같은 것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뱀파이어 로드 젤더가인의 공격은 풋내기 소드마스터인 그녀로서는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간신히 젤더가인이 날린 망토 자락 중 한 개를 퉁겨내었지만, 곳이어 대여섯개의 비슷한 공격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터엉” “서...선생님?” 날카로운 젤더가인의 망토가 신시아를 조각내기 직전, 언제 나타났는지 미스티가 그녀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함부로 죽으라고 명령한 기억은 없다. 자네들 같은 소드마스터가 얼마나 중요한 전력인지 또 다시 말해야 하나?” 하누스의 소드마스터들은 대부분 이제 막 검기를 낼 수 있게 된, 소드마스터라고 하기에는 한참 모자란 실력들이다. 전투가 시작되면 약한 다수의 적 보다는 조금씩 체력 안배를 해가며 준대형 몬스터부터 잡아 나가는 것이 올바른 전투 패턴임에도, 실전 경험이 없는 소드마스터들은 피냄새에 취해 아무렇게나 돌격하여 적진에서 난전을 벌이는 것이다. 미스티가 보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자폭일 뿐이었지만, 실전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만큼은 교육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번 전투에서 살아남는 소드마스터들이야 말로 진정한 소드마스터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강자로 다시 태어 날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쓸만한 전력이 되기도 전에 모두 죽어버리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생각한 것보다 일반 기사단의 피해는 적었지만, 그것은 아껴둬야 할 소드마스터들이 총알받이로 나섰기 때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네놈이 지휘관인가?” 젤더가인도, 미스티도 서로를 보는 순간 저 녀석이 적들의 지휘관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미스티는 젤더가인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그의 거대한 투핸디드 소드를 겨누었다. ‘리빙아머인가?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데...’ 불사의 정점에 서 있는 뱀파이어로드답게 젤더가인은 쉽게 미스티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물질계에 대한 지식이 없는 그로서는 미스티의 정체가 무엇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중차원 엔진 개방. 신성문자 개방. 대 마족전투모드 변환.” 마침내 미스티가 힘을 개방하고 대 마족전투 모드로 변화하자 그의 갑옷 전체에 새하얀 신성문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잔재주를! 이거나 먹어라!” 젤더가인은 다섯 개의 매직미사일을 쏘면서 미스티의 발 아래로 모래폭풍을 만들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였다. 신성문자가 발동하며 매직미사일은 맥없이 소멸되었지만, 미스티도 발아래가 불안정하여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어어어어” 뱀파이어의 피의 오오라가 퍼지기 시작하자 그의 부름을 받은 마물들이 미스티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젤더가인의 몸이 붕괴되는가 싶더니 그 속에서 시커먼 늑대 모양의 괴수 수십 마리가 달려들어 미스티의 갑옷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젤더가인은 뭔가 이상한 기운이 그의 공격을 가로 막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의 피로 소환해낸 강력한 괴수들이 미스티의 갑옷에 닿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소멸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뭔가? 무슨 마법이란 말인가?’ “푸욱” 젤더가인이 당황하여 잠시 집중력이 흩어진 새에 미스티의 거대한 투핸디드 소드가 그의 앞가슴을 헤집어 놓았다. 제 6 장 전쟁의 시작13화 “이 정도엔 무너지지 않는다!” 일반의 몬스터였다면 즉사할만흔 큰 상처를 내었지만, 상대는 뱀파이어 로드! 마법처리가 되어 있지 않은 미스티의 검은 젤더가인에게 먹히지 않았다. “터엉” 뱀파이어 로드답게 강력한 젤더가인은 미스티의 검을 몸통에 꽂은 채로 미스티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신성문자로 보호받고 있었기 때문에 후려친 손 부분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지만, 별로 개의치 않고 두버 세번 계속 내려쳤다. 그 공격이 효과가 있었는지, 마침내 거대한 강철의 요새 같던 미스티의 한쪽 무릎이 꺽였다. “사라져라!” 젤더가인이 마지막 결정타를 위해 거대한 암흑의 마력을 집중시키는 순간, 미스티는 젤더가인의 몸에 박혀 있는 그의 투핸디드소드를 위로 올려쳤다. 그리고 상처가 벌어진 틈에 그의 두터운 주먹을 밀어 넣었다. “끄아아악” 검으로 받은 상처는 별것 아니었지만, 그 상처가 미스티의 주먹에 새겨져 있는 신성문자에 반응하자 젤더가인은 넓은 미도우 만 전체를 울리는 핏빛 비명을 지르며 멀찌감치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스티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계속 머리에 충격을 받으며 몇 가지 센서가 파괴된 것인지 자세제어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 역시 중차원 엔진과 마나흡수식의 엔진을 다 사용하면서 허용범위 이내의 출력을 넘어선지 오래였던 것이다. 각 관절부위에서도 무리가 가기 시작했는지,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상대도 큰 타격을 받은 듯 했지만, 불사에 가까운 재생능력이 있는 만큼, 곳 힘을 회복하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설혹 여기서 죽더라도!’ 미스티는 제대로 제어되지 않는 몸을 추슬러 젤더가인에게 마지막 돌격을 감행할 생각이었다. 상대의 몸을 끌어안고 신성문자에 모든 에너지를 모으면 최소한 가치 죽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각오를 다진 순간, 처음의 포격으로 잿더미가 되었던 숲에서 보라색의 신호탄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와아아아아!” 그리고 전투가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조금광기가 가라앉기 시작하던 미도우만에 다시 한번 인간들의 함성이 몰아쳤다. “아슬아슬하게 만드는 군요.” 그 모습을 본 미스티는 그의 몸에 과부하를 주고 있던 두 번째 중차원 엔진을 정지 시켰다. 더 이상은 무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마침내 제페린만에 상륙한 유신의 3군단은 미도우만까지 우회하여 마물 군단의 덜미를 잡는데 성공했다. “여어, 미스티. 꼴이 말이 아니군. 좀 도와줄까?” 유신은 여전히 긴장감 없는 얼굴로 반쯤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미스티를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군요. 대체 무슨 마술을 쓴 거지요?” 제페린 만에서 이곳까지는 적어도 팔키로미터 이상! 혼자도 아닌 이천명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한시간만에 올만한 거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유신은 그 짧은 시간동안 상륙을 끝내고 이곳까지 병력을 투입시킨 것이다. “제페린 쪽도 나름대로 수비군이 있어서 좀 늦었어. 하지만 다행이 이쪽이 서둘러 줘서 마침 우리가 상륙했을 때는 부대 이동을 시작하던 참이더군. 그래서 쉽게 이겼지, 안 그랬으면 시간 내에 못 댈 뻔 했어.” 옆에 젤더가인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고 있었지만, 유신은 별 상관없다는 듯, 미스티를 일으켜 세웠다. “나의 대군이... ” 이미 후퇴 시기도 놓치고 말았다. 후방까지 완전히 차단당한 몬스터 군대는 도망도 치지 못하고 이곳에서 모두 죽게 된 것이다. “크큭... 크하하핫, 강하구나. 인간들이여. 천년의 삶 동안 가장 인상 깊은 하루였다.” 젤더가인은 뱀파이어로 살아오는 천년의 삶 동안 처음으로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피눈물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되었다. “생의 마지막 날이 가장 인상 깊었다니 다행이군.” 유신은 첨예를 겨누며 차갑게 한마디 했을 뿐이다. 우수한 지휘관이고, 강한 남자라는 것은 알겠지만, 신의 뜻에 가장 정면으로 배치되는 살아있는 시체에게 줄 동정 따위는 없는 것이다. 젤더가인은 광소와 함께 그의 몸에 있는 남아있는 피를 모두 짜내어 모래밭에 직경 십미터에 달하는 검붉은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아, 감사의 표시로 나와 같이 죽여주지.” 뱀파이어로드답게 피를 이용한 마법진은 순식간에 그 모양을 갖추었고, 도저히 시간 내에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흄이 나에 대해 조심하란 말 안하던?” 유신은 마법을 막기 위해 젤더가인을 치는 대신 그 마법진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자살할 셈인가?” 젤더가인은 상대의 어이없는 행동에 실소가 났지만, 유신은 그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다. “하앗!” 유신은 베일 것 같이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천상신검의 검기를 최대한 끌어올려 마법진의 정 가운데를 찔러 버렸다. 그의 강대한 코어가 마나의 흐름을 비틀어 버리자 마법진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붕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뱀파이어의 피가 천상신검의 정순한 코어와 부딪히며 순식간에 시커먼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시커먼 핏자국으로 변해 버렸다. “이... 이럴수가... 네놈은 대체...” 제 6 장 전쟁의 시작14화 “푸욱” 젤더가인이 끝까지 말을 읻기 전, 유신의 첨예는 이미 그의 정수리 부분을 뚫고 있었다. “살아있는 시체이니 죽고 자시고도 없겠군. 사라져라 부정한 존재여!” “콰쾅” 황금색의 광선이 지나가는 가 싶더니 어느새 젤더가인의 머리는 폭발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젤더가인의 몸뚱어리는 얼굴을 잃고도 쓰러지지 않고 그의 억울한 원념을 나타내는 듯, 모래사장 위에 유령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하지만 천상신검에 베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뱀파이어로드의 몸뚱어리는 발끝서부터 서서히 회색의 소금기둥으로 변해가더니, 결국 미도우만의 바닷바람이 한번 세차게 불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로써 두 시간에 걸친 미도우만의 상륙작전은 라일로스대륙 연합의 압승으로 그 막을 내렸다. 상륙교두보를 확보한 라일로스 대륙 연합군은 물자와 지원 병력의 원활한 이동을 위해 미도우만에 대규모의 군사이동용 게이트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제 보름정도 후면 게이트도 완성될 것이고 본격적인 흄과의 물량전이 시작될 것이다. 거의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무사히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율리안 왕자의 이름은 대륙 전체를 뜨겁게 달궜고, 전쟁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될 새로운 전술과 병기의 출현은 역사가들과 학자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평화로운 시기에도 늘 마물들이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대륙사람들에게 마물들과의 싸움이 결코 절망적이지만은 않을 거라는 희망을 주기도 했다. 이번 전쟁으로 마물들 전체를 쓸어버리고 ‘인간들’만의 새로운 신세계가 건설되리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의 승리 뒤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이게 대체 뭐야! 설명해 봐 유신!” “유신님이 엘핀서스에 베풀어주신 은혜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 엘리시엘은 엘프레인저의 대표인 이리엘과 함께 유신을 추궁하고 있었다. 숲 전체를 태워버린 화공, 마물들의 항복은 당연하다는 듯 받지 않았고, 부상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는 마물들조차 철저하게 수색하여 모두 죽여 버렸다. 와이번들이 각 기함의 코앞에 까지 덮쳐 와서야 비로소 그리폰 부대의 출격명령이 떨어진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폰을 일부로 늦게 띄어 와이번과의 전투에 한눈팔지 못하게 하여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신경 쓰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고귀한 엘프들은 인간들이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엘프들의 입장에선 이런 짓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 전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숲을 재생도 할 수 없도록 완전히 불태워버리고 기절해서 의식이 없는 마물들의 목을 베어버리고, 항복하여 살려달라고 하는 마물들을 한곳에 모아두고 모두 태워 버리는 인간의 행위는 엘프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잿더미가 되어버린 숲과 마물들의 시체. 처음 보는 전쟁. 그리고 처음 보는 대량 ‘학살’...엘프들 중 일부는 그 앞에서 오열하기도 했다. “유신, 제대로 설명해 줘. 이게 네가 말했던 라일로스 대륙이 나아가야 할 길이야?” 전쟁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는 이 엘프들을 어떻게 설득하면 좋을까? 유신은 대 흄 정벌작전 전체를 구상했을 때보다도 훨씬 골치가 아팠다.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는 이번 작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드워프들의 캐논을 이용한 공격이 어떤 효과를 낳게 될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물들의 전멸이 아닌 완전 섬멸을 위해 부대를 우회시켜 퇴로를 차단한 것 역시 유신의 작전이었으니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그만둬, 엘리. 유신님이 잘못한 게 아니잖아. 만약 지상부대가 밀렸다면... 어쩌면 저 시체들 속에는 유신님이나 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세라피... 언니?” 의외로 유신의 편을 들고 나선 것은 세라피였다. “이리엘, 너도 적당히 해. 저런 모습을 보고 이해하기 힘든 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엘핀서스 전투에서 유신님이 엘프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 줬는지 잊은 것은 아니겠지? 마물들에게 끌려가게 되면 엘프들이 어떤 고통을 겪게 되는지...” 그녀는 평소 자신의 의견을 내는 일이 적었고 늘 한발 물러서 관전하는 태도를 유지했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매우 흥분하여 유신의 편을 들어 주었다. 늘 조금 쳐져 있던 가늘고 귄 귀도 꽃꽃하게 서 있는 것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흥분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유신님이 자기를 위해 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잖아? 그리고 처음 작전을 구성했던 단계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다가 막상 전쟁이 시작된 후에 그 책임 전체를 유신님에게 떠넘기는 건 옳지 않다고!” “......” 그녀 덕분에 썰렁한 침묵이 이어지자 유신은 간신히 변명할 찬스를 잡을 수 있었다. “단지 지금은 지켜봐 달라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겠군요. 병권 전체를 미스티에게 맡긴 것은 사실상 제게 맡긴 것이라고 해석하고... 엘프 분들에게 작전의 핵심을 말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야기 했으면 반대했을 거고... 그렇게 되었다면 찬스를 놓쳤을 테니까요. 전쟁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기가 중요합니다. 바로 지금이 라일로스 대륙이 최고의 무력을 갖춘 시기이고, 마물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시기지요. 엘프들이 흄 정벌군에 합류한 시점에서부터 엘프들만 빠져나갈 여지는 없습니다. 만약 이 시점에서 엘프들이 라일로스 연합에서 발을 뺀다면... 남은 정벌군들 역시 오합지졸로 붕괴되어 버릴 겁니다. 그리고 마물들은 머지않아 라일로스 대륙을 쓸어버리겠지요. 이미 이번 전투로 쓴맛을 봤으니 인간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았을 테니까요. 공존할 수 없다면 이겨야 합니다. 일단 이기고 나서 뒷일을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유신은 엘프들이 아닌 자기 자신을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알고... 있었지? 처음부터 흄과의 전쟁은 어느 한쪽이 전멸하는 전멸전으로 구상하고 우리들을 끌어들인 거지?” 엘리시엘의 날카로운 추궁에 대해선 유신은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다. “짜악!” 엘리시엘은 그녀의 손이 얼얼해 질 정도로 세게 유신의 뺨을 후려갈겼다. “네 말이 옳으니 따르긴 하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널 용서하는 건 아니야. 전쟁이 끝나고 나면... 승리하게 되면 그땐 엘프들에게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거야.” 잠시동안 뺨을 어루만지던 유신은 와락 엘리시엘을 끌어 안았다. “고마워, 엘리.” “이거 놔! 바보!” 몇 번을 바동거려 봤지만, 그녀의 힘으로 유신의 팔을 풀어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유신은 한동안 엘리시엘을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제 6 장 뜻밖의 보물1화 가장 어렵다는 상륙전을 거의 아무 피해 없이 성공한 라일로스대륙 연합군은 안정적인 보급과 병력 보충을 받기 위해 대규모의 게이트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200여명의 마법사가 동원되어 4개의 거대한 게이트를 열어 하누스의 병참기지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병사들은 해자를 만들고 방책을 세워 혹시라도 있을 적의 역습을 대비했다. “조금 더 내륙 쪽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너무 해안가라 방어하기가 좋지는 않은 것 같소이다만...” 뮬테인 백작은 잿더미가 되어 버린 숲에서 방어진 구축을 지휘하는 유신에게 걱정스럽다는 듯 물어보았다. 이렇게 해안에 갇혀버리면 내륙 쪽으로 진출하기에는 문제가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조금 더 멀리에 방어선을 구축하려고 했지만, 마물들이 생각보다 너무 강합니다. 아직 우리 군은 실전 경험이 부족하고, 그래서 일단은 함선의 지원사격을 받을 수 있는 거리에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아서 이렇게 했습니다. 진출하기 시작하면 어차피 방어진이란 것은 필요 없으니까요.” 뮬테인 백작은 유신의 지휘를 보면서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마법사를 나누어 워프게이트 구축을 시작하고, 병사들은 방어준비를 시키고, 그리폰라이더들은 3기1조를 이루어 3개의 정찰부대를 편성해 끊임없이 일대를 정찰시키는 것이다. 낮에는 병사들의 지휘를 하고 밤이 되면 엘프들과 정찰을 하는 유신의 초인적인 체력도 놀라운 것이지만, 이정도의 지휘를 해 내면서 조금의 실수도 없는 것이 더 놀라왔다. 전쟁의 지휘는 경험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황판단력도 놀라울 정도로 과감하고 정확하다. 제페린만에 상륙한 부대가 그렇게 빨리 상륙전을 완료하고 미도우만까지 우회하여 적의 덜미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갑옷은 물론 방패까지 버리고 빠르게 이동했기 때문이다. 물론 미니미스티를 통해 미도우만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서두른 것이지만, 그것을 알리 없는 뮬테인으로서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유신 경, 정찰나간 C조 그리폰들이 늦습니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지...” 병사중 하나가 그에게 이상을 보고했다. “C조면 동쪽 숲을 살펴보기 위해 나갔던 부대 아닌가? 누가 지휘하고 있지?” “엘리시엘님입니다.” “에...엘리라고? 이거, 불길하군. 니케를 준비해 줘. 직접 보고 오겠어.” 니케를 불러오라는 말에 그 병사는 사색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 까지 신경쓸만한 여유가 없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그리폰 세 마리를 한조로 하여 운영한 것이다. 그리폰 세 마리면 그리폰라이더와 그리폰나이트까지 합쳐서 어마어마한 전력이 아닐 수 없다. 그중 단 한기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뭔가 큰 이상이 생겼다는 뜻이다. 정찰 반경은 300키로미터 내외! 그리폰의 가벼운 날개를 생각하면 빠듯하게 정찰시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상이 있다면 즉시 철수하여 보고했을 것이다. 흄의 창공이나 라일로스의 창공이나 별로 다를 것은 없었다. 시원한 바람을 타고 있으면 마치 몸 안의 모든 더러운 것이 빠져나가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유신은 일단 그리폰 부대에게는 출격 대기 명령을 시켜두고, 엘리시엘의 그리폰이 소실된 구역으로는 니케와 단 둘이서만 출격했다. 그리폰은 너무 귀한 전력이기 때문에 절대 잃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상이 있는 지역으로 함부로 투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유신은 그와 니케 정도라면 도망칠 자신이 있었고, 이상은 미니미스티를 통해 본진에 알릴 수 있으니 일단은 니케와 둘이서만 온 것이다. 대충 공중을 돌아보았지만, 하늘에서는 그리폰들의 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미스티, 뭔가 느껴지는 것 없어?” “본체가 왔다면 모르겠지만... 힘든데요? 숲 속이라 움직이는 생명체도 너무 많고 정령의 움직임도 활발합니다.” “일단 정령의 움직임이 활발한 것을 보니 무슨 결계 같은 것은 아닌 것 같아. 조금 더 수색해 보자.” 유신은 정밀한 관측을 위해 그리폰의 고도를 낮추었다. 엘리시엘이 맡은 정찰 반경의 끝부분에 이르렀을 즈음, 유신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흠... 뭔가 숲 속이 이상한 것 같은데? 생명의 기운이 너무 강해. 식물이 주를 이루는 숲이라기보다는 뭔가 동물 같은 느낌의...”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니케의 고도를 낮추자 숲의 모습이 자세히 보였다. 녹색의 양탄자를 깔아 놓은 것처럼 빽빽하게 자리 잡은 숲의 나무들 때문에 마치 내려서면 그 위를 그냥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니케가 일으키는 거친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몸부림 쳤지만, 맨 위를 덮고 있는 나무 아래로도 빈틈없이 다른 키작은 나무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 숲의 아래쪽에 엘리시엘이 있다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히야누라면 덩치가 커서 잘 보일텐데...’ 엘리시엘보다는 그녀의 그리폰을 찾는 것이 빠를 것 같아 혹시 히야누가 추락한 흔적은 없는지 고도를 높이려고 하였다. “슈슈슉” 니케의 발아래에 있던 나무덩굴 중 몇 개가 뒷발을 휘감아 버렸다. “캬아아악” 니케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급속히 날아오르려고 하였지만, 앞발과 날개에 까지 엉켜들기 시작하자 휘청거릴 수 밖에 없었다. “칫, 이게 대체 뭐지?” 미스티의 감지기에도, 유신의 초감각에도 걸리지 않은 기습이다. 유신이 첨예를 빼어 날개에 엉켜있는 덩굴을 쳐내자 니케는 그 괴력을 발휘하여 억지로 고도를 상승하기 시작했다. “야하하하하, 야우.” 하지만 니케가 안전한 곳 까지 날아오르기도 전에 장난기 어린 간드러진 목소리와 함께 양쪽에서 그물 이 네 개나 날아들었다. “니케! 하늘로 피해!” 유신은 니케의 등을 박차고 날아오르며 오른쪽에서 날아오는 두개의 그물은 그의 몸으로 막고 왼쪽에서 날아오는 두개의 그물에는 첨예를 던져서 막았다. 그 틈에 니케는 날아오를 수 있었지만, 유신은 그물에 엉켜 떨어져 버렸다. 제 6 장 뜻밖의 보물2화 “털썩” 유신이 떨어지자 그 주위에 십여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적들을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물도 끊지 않고 떨어졌지만, 상대는 제법 신중한지 숲의 그림자 속에서 쉽게 나오지 않았다. “먀후후, 야우우웅” 그물 같은 도구를 쓸 정도면 적은 지성체라는 뜻이다. 유신은 그의 목에 걸려있는 십자가 모양의 번역기를 이용해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적의 말을 해석하려고 하였다. “야묘족입니다. 골치 아프게 됐는데요?” 하지만 유신이 번역기를 쓰기 전에 미니미스티가 먼저 적의 정체를 파악하고 가르쳐 주었다. 고양이처럼 생겨서 야묘족이라고 불리는 이 수인족은 만약 적이라면 굉장히 골치 아픈 존재다. 유신이나 미스티 정도나 되는 녀석들이 그 존재감을 쉽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은신에 뛰어나고, 기척 역시 남기지 않는다. 고양이를 닮아서 그런지 굉장히 영리하고 재빠르며 교활하다. 파워는 소드마스터보다 못하지만, 스피드는 그 이상이며 전투에 대한 센스역시 발군이다. 성계대전에서도 뛰어난 야묘족 전사는 화랑단에 뽑혀갈 정도였다. 보통 야묘족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굉장히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는데, 특히나 어깨에서부터 시작해서 척추를 지나 꼬리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털은 세상의 그 어떤 모피보다도 곱고 부드러우며, 색도 화려하다. 대체적으로 날렵하면서도 풍만한 몸매와 큰 키를 가졌으며, 생긴 것 답지 않게 장난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이렇게 매력적인 종족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난폭하고 호전적인 녀석들이라 이 녀석들을 잡아서 어떻게 해 보려는 사람들은 물질계에서도 거의 없다. 게다가 변덕이 죽 끓듯 하기 때문에 운이 좋아서 잘 길들여 놓았다 해도, 수틀리면 달아나거나 잠자는 주인의 목을 베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예쁜 외모에 성격은 시궁창인 것이다. 그런 야묘족답게 눈치도 상당히 빨라서 유신이 일부러 그물에 잡힌 채 빠져나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음 그들의 공격에 대처하는 유신의 모습을 보고 상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버린 것이다. “칫, 이대로는 안 되겠군. 일단 나가자.” 유신은 손가락 끝에 약간의 코어를 집중하여 별로 힘들이지 않고 그물을 찢어버렸다. “캬아아악” 그 모습을 본 야묘적 전사들이 하나, 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유신을 포위했다. 야묘족은 남성이나 여성이나 그 전투력에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전사들 중에는 남녀가 섞여 있었다.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이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이 근처를 비행하던 그리폰을 잡지 않았어?” 다행이 유신의 번역기에는 야묘족의 언어가 들어있어서 의사소통에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야묘족들은 이방인이 그들의 언어를 알고 있자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렸지만, 쉽게 포위망을 풀지는 않았다. “흐음... 매우 매우 특이한 녀석들이네. 아까 그 녀석들의 동료야?” 리더인 듯한 야묘족 청년이 고양이 특유의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내며 유신에게 물어 보았다. “그래. 그러니까 혹시 아는 것이 있다면 가르쳐 줘.” ‘건방진 말투네. 감히 야묘적 전사들에게 포위당해 있으면서 고개를 빳빳이 들다니! 조금 놀려줄 필요가 있겠어.’ 건방진 유신의 태도가 마음에 안든 야묘족 리더는 엄청난 말을 하고야 말았다. “아아, 봤지. 네가 오기 한 시간쯤 전에 봤는데, 전부 잡.아.먹었다.” 리더의 말이 끝나자 사방에서 그의 말에 동조하는 듯한 킥킥거리는 낮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숲의 그림자 속에서 기괴하게 빛나는 야묘족의 눈동자와 숲을 가득 메운 살기. 언제 폭발해도 이상한 것 같지 않았지만, 유신은 덤덤하기만 했다. “거짓말 하지 마. 너희 몸에서는 피 냄새가 나지 않아. 정말 못 봤어?” 여기서 야묘족들은 인간의 코가 너무 좋은 것을 이상하게 여겼어야만 했다. 하지만 장난이 너무 쉽게 들키자 야묘족의 프라이드에 금이 가면서 그런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냐하? 야묘족이 시체를 찢으면서 피를 튀길 것 같아? 엘프 셋과 인간 셋, 그리고 그리폰 셋이었지?” 여기까지 알고 있다면 죽이지는 않았다고 해도, 정찰대와 조우한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약간의 폭력을 동반한 협박으로 일의 전모를 듣는 일만 남은 것이다. “하아...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고양이 제군들. 만약 네놈들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너흰 이곳에서 전부 죽어. 그리고 너희 마을도 씨도 안 남게 태워 버릴 것이고. 아직 감 안 잡혀?” “냐하하하 야우우우, 재미있는 인간이구나! 우리를 이기겠다고? 말만큼 뛰어난지, 어디 실력 한번 볼까?” 리더가 한쪽 팔을 가볍게 들자 그림자 속에 있던 야묘족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유신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지형의 이점을 이용해 나무 위에서 짙은 그림자 속에 숨어 기습공격을 퍼부으려는 것이다. . 제 6 장 뜻밖의 보물3화 “휘휘휙, 파팟” 야묘족들이 나무 위를 뛰어 다니는 소리는 바람소리와 거의 구별이 안 갈만큼 조용하고 은밀했지만, 그 속에 감춰진 예리한 살기는 금세 유신의 피부를 갈기갈기 찢을 것만 같았다. “하아... 나름대로 귀엽군.” 하지만 이 정도에 쫄 유신이 아니다. “캬아아악” 야묘족 전사의 첫 번째 공격이 유신의 머리 위에 떨어지기 직전, 유신은 봉인이 세 개 풀린 상태에서 낼 수 있는 모든 살기를 한꺼번에 내뿜었다. “고오오오오” 마나의 흐름이 이 작은 인간을 중심으로 심하게 비틀려져 아무렇게나 폭주해 버린다. 정령들은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질러댔고, 심지어는 땅으로 파고들거나 하늘로 도망쳐버렸다. “콰당탕” 나무 위를 가볍게 뛰어다니며 공격 찬스를 잡던 야묘족 전사들은 땅으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감히 몸을 일으킬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드래곤에 필적하는 광포한 기운이 이 작은 인간을 중심으로 사방에 휘몰아치자 꽤 강하다고 자부하던 야묘족들조차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위에 눌렸을 때처럼 겨우 움찔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바람의 정령이 제멋대로 날뛴다. 드라이어드들은 그들의 휴식을 방해하는 유신에게 감히 불평도 하지 못하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 폭풍이 끝나기를 빌며 나무속으로 숨어들었다. 야묘족은 과연 이정도의 상대를 만나본 적이 있었을까? 너무나 거대한 이 존재 앞에서 야묘족은 비참하다 못해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결국 호흡하기조차 곤란한 무거운 공기 속에서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것이 홀리크로스의 기전장군, 첫 번째 인간 유신 더 실버스타! 아직 완전하지 않은 몸으로도 이 정도라니!’ 미스티도 세 개의 봉인 풀린 유신이 풀파워를 내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다. 성계대전에서 싸우던 유신의 자료는 가지고 있지만, 직접 보는 것과 자료로 알고 있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성계대전에서 유신이 보여 주었던 위력은 너무 엄청나서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초월적인 무력이 아니라 직접 눈에 보이고 만져질 것 같은 위력에 훨씬 사실적으로 질려버리는 것이다. 강대한 미스티조차 그의 분신인 미니미스티를 통해 전해져 오는 감각만으로도 팔다리가 저려왔다. 야묘족은 영리한 만큼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는 반항하기 보다는 항복해 버린다. 게다가 유신이 내뿜고 있는 그 기운! 이건 싸워서 이기고자시고의 그런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요즘은 흥분의 연속이군. 하지만 이렇게 화가 나 본건 정말 오랜만이야. 그래서 엘프랑 사람들을 전부 죽였다고? 응? 제대로 설명해 봐!” 유신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야묘족 청년 하나의 목덜미를 잡고 집어 들었다. “퍼퍽” 드래곤 앞에 선 오크처럼 꼼짝도 못하고 오그라들어 있는 그 야묘족의 배와 명치를 첨예의 손잡이를 이용해 한대씩 쳐 주자 구토물과 함께 피도 한주먹 토했다. 엘리시엘을 잡아먹었다는 말이 머리 속을 맴돌자 평소 차분하던 그답지 않게 점점 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갔다가는 이성의 끊을 놓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이상할 만치 화가 났다. “왜? 지금까지의 당당했던 기세는 어디 갔지? 똑바로 말 안 해?” 다시 유신이 후려칠 기세였지만, 그 야묘족은 덜미잡힌 고양이처럼 꼼짝도 못하고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벌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반항이라도 하거나 꿈틀거리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패기도 쉬울 것 같았지만, 정말로 죽어있는 고양이처럼 온 몸의 힘을 다 빼고 날 잡아잡수 하는 한심한 폼으로 늘어져 버리자 유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거 더 때리면 울겠군. 사내자식이... 차라리 마키가 더 건강하겠다.’ 가는 체형에 탄탄한 근육질이 마키와 비슷한 느낌의 녀석이었지만, 마키는 의외로 독한대가 있어 어지간히 맞아서는 쉽게 울지 않는다. 너무 말을 안들을 때, 예를 들면 엘리시엘이나 세라피를 울릴 정도가 되면 마키와 미키도 유신에게 호되게 맞는다. 하지만 야묘족을 미키나 마키 패듯 팼다가는 당장 죽을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사정을 봐줄 필요가 있었다. 유신은 금세 죽을 것 같아 보이는 그 녀석을 내팽개치고, 대신 옆에 있는 다른 녀석을 집어 들었다. ‘어라, 뭐가 이렇게 부드럽지?’ 하마터면 뒷덜미를 잡으려다 미끄러뜨릴 뻔 했다. 처음 들어올린 녀석처럼 전신에 힘을 빼고 축 늘어져 있는 것은 비슷했지만, 신체적 특징이 다르다. ‘으윽, 이건 곤란하니 버려야 겠군.’ 유신의 크지 않은 손에도 잡힐 것 같은 가는 허리, 풍만한 가슴, 그리고 전형적인 야묘족 답게 약간 통통한 귀여운 얼굴. 별 생각 없이 마구잡이로 땅에 엎드려 있는 녀석들 중 하나를 들어 올렸기 때문에 그만 여자 야묘족이 걸린 것이다. 완전히 질려버렸는지, 눈을 꾹 감은 채 보라색이 된 얼굴로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유신이 막 그 여자 야묘족을 버리고 다른 녀석을 찾으려던 참이었는데,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더 이상 내 동족들을 괴롭히면 나도 참지 않을 거야!” 백팔십 센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야묘족 중에서도 큰 키, 손질 안 된 거친 암갈색의 머리카락. 선이 굵은 목소리와 잘 어울리는 굉장한 근육질의 야묘족 전사였다. 다른 야묘족처럼 섹시함과 애교가 줄줄 흘러내리는 모습이 아니라 거칠고 당당한, 정말로 야수같은 모습의 여전사였다. 제 6 장 뜻밖의 보물4화 “서...설마...” 머릿속을 번개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 부리부리한 큰 눈,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황금빛의 위풍당당한 모피, 그리고 야묘족 다운 길고 날카로운 손발톱. 매력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유신은 그 야묘족을 본 순간 완전히 굳어 버렸다. “차...찾았다!” 유신은 주변의 우호적이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잠시 동안 멍한 눈초리로 그 야묘족 여전사를 바라보다가 마치 홀린 듯 비척비척 다가갔다. “뭐?” 지금까지 믿을 수 없을 만큼 살벌한 기운을 내뿜고 있던 상대가 갑자기 나사 빠진 행동을 하자 야묘족 전사도 덩달아 나사가 빠지는 것 같았다. “뭐...뭐야? 네놈 대체 뭐야?” 어느새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마주서게 되자 야묘족 전사는 날카롭게 손톱을 뻗어 경고성의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유신은 고개만 살짝 꺾어 직격만 겨우 피했을 뿐이다. 덕분에 왼쪽 어깨가 길게 찢어져 피가 흘렀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너! 내 것이 되라!” 지금까지의 느릿한 동작이 거짓말처럼, 유신은 야묘족 전사가 손쓸 틈도 없이 빠르고 강하게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키는 야묘족 전사가 한참 더 컷기 때문에 유신은 옆구리 쪽이 완전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렸지만, 야묘족 역시 제정신이 아니라 그 틈을 노릴 수 없었다. “아니, 내 것이 아니라 아리엘님의 것이 되라!” 겁날 정도로 눈을 번쩍이던 유신은 그 보다도 덩치가 큰 야묘족 여전사를 이리저리 흔들며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야?” 새빨개진 얼굴로 어깨를 잡힌 채 흔들리던 야묘족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높은 키를 이용해 유신의 정수리를 들이 받고는 발로 차내버렸다. “퍽” 하지만 유신은 공격을 받고도 뒤로 조금 물러섰을 뿐, 시선을 거두지도, 그렇다고 적의를 보이지는 않았다. “뭐 이런 놈이...” 야묘족 전사는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것도 아닌데, 벌써 거칠게 숨을 헐떡거리며 유신을 쏘아 보았다. “아...이... 이게 아닌가?” 유신은 그 강력한 발차기에 맞고 나서야 약간 정신을 차린 듯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돼 먹은 녀석이야?” 그걸 맞고도 일어서는 유신을 보며 야묘족 여전사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너, 이름이 뭐냐?” 아무리 유신이라도 코끼리도 일격에 쓰러뜨리는 야묘족의 공격이 아프긴 했는지, 가슴팍을 문지르기는 했다. 하지만 호흡은 전혀 흩어지지 않았고, 언뜻 보기에도 크게 타격을 입은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 비얀. 네놈은 누구지?” “유신” 야묘족 최강의 전사 비얀은 이 자그마한 인간을 죽일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매섭게 손을 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고 일어설 줄은 몰랐다. “상관없겠지. 어찌 되었든 넌 날 따라와라!” 게다가 상대는 한술 더 떠서 따라오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닌가? 생전 처음 사랑 고백 같은 말을 들은 비얀은 사실 당황스럽긴 했어도, 그렇게까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에 번개가 번쩍이는 것 같았다. 상대는 야묘족은 아니었지만, 야묘족은 굳이 동족과 결혼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었고, 최고의 신랑감은 당연히 강한 야묘족이다. 그러니 야묘족 전사 십수명을 단신으로 제압한 저 이방인은 어쩌면 자신과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저 인간의 머리가 정상이 아닌 것 같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보아 자신을 반려로서 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웃기지마라! 혹시 미친 거 아냐? 잘도 지껄였으니 갈기갈기 찢어주마!”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 순진하고 얼빠져 보이는 얼굴로 자신을 놀린 것이 아닌가? 열 받은 비얀은 터질 것 같이 근육을 부풀리고는 한 수 한 수 급소를 노리는 살인적인 공격을 가했다. “요리조리 잘도 피하는 구나! 그런 건방진 말은 날 이기고서 지껄여라!” 비얀의 손에 점점 더 빨라지며 공격이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어? 하지만 지금 내 상태론...” 하지만 죽일 생각으로 공격해 봐도 상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만 지껄이며 싸움을 피하고 있었다. “싫으면 여기서 죽어라.” 먹이를 찢어 죽일 때의 야수 같은 눈빛이 된 비얀의 양 손톱에는 어느새 불새의 마지막 모습처럼 새빨간 검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비얀을 처음 본 순간 유신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법계에 와서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용신화랑! 유신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용신화랑의 자질을 갖춘 전사를 전 우주의 사각지대인 마법계에서 발견한 것이다! 제 6 장 뜻밖의 보물5화 한 자루의 검만 있으면 정진정명, 최대최강의 천사장급의 치천사와도 싸울 수 있고, 용신기를 얻으면 지옥의 헬마스터조차 꺾어버린다는 용신화랑! 비록 용신화랑으로 크기까지는 많은 시련을 견뎌야 할 것이고, 변덕스럽고 책임감 없는 야묘족으로선 그 경지까지 오른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일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재질을 갖춘 자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용신기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전사를 구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가? 육체적인 수술은 물론 유전자 조작이나 필요하다면 영혼에까지 손을 대서 자질 있는 전사들을 용신화랑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인위적으로 만든 용신화랑이 성공한 전례는 단 한번도 없다. 천부적인 자질이라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이 있다는 증거. 하늘, 즉 신이 준 것이기 때문에 ‘천부적’인 자질인 것이다. 이것만큼은 블랙홀을 극복하고, 영혼의 에너지까지 사용하는 마도과학의 절정에 선 인류조차 어떻게 하지 못하는 문제이다. “터엉” 비얀이 손톱이 첨예에 닿기 직전, 유신도 푸른색의 검기를 내어 방어를 했지만, 온 몸이 떨릴 정도의 충격이 왔다. 스승조차 없이 최강의 소드마스터라는 뮬테인 백작 이상의 검기를 쓰는 비얀! 아무리 유신이 천상신검의 검기를 발동하지 않은 상태라고는 해도 이정도의 충격을 준다는 것은 그녀의 검기가 붉은색의 검기 중에서도 굉장한 수준의 정순하고 순수한 검기라는 뜻이다. 이정도면 교육 여하에 따라 천상신검의 수준까지 충분히 바라볼 수 있다. 기뻤다. 유신은 너무나 기뻐서 첨예를 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물질계도 아닌 마법계에서 이정도의 상대와 싸워볼 수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었다. 검풍에 말려들까봐 질겁한 정령들이 도망친다. 폭발하는 습성을 지닌 비얀의 검기에 닿은 아름드리 나무가 번개에 맞은 것처럼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박살나 버렸다. 하지만 비얀의 공격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열개의 손톱을 조금씩 방향을 틀어서 사용했기 때문에 그 압력은 열명의 소드마스터와 싸우는 정도였다. 손톱은 모두 두개의 손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그 공격 방향을 예측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런 만큼 공격이 집중되기 때문에 방향을 예측한다고 해서 유리하지는 않았다. 손가락 열개를 마치 열 자루의 검처럼 모두 다르게 쓰는 비얀의 능력은 굉장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검지와 중지가 유신의 검을 막는 사이, 엄지가 몸통을 공격하고, 새끼손가락은 퇴로를 차단하며 신경을 분산시키는 꼴이다. 게다가 저 엄청난 스테미너! 열개의 손톱에 열개의 검기를 불어넣어 싸우면서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비얀의 공격을 받아내는 근육은 당장 찢어질 것 같았고 뼈는 마디 속 깊이까지 아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유신에게 있어 고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쾌감이다. “이놈, 잘도 피하는 구나! 그렇다면!!” 유신은 너무 신나고 기뻐서 기절할 것만 같았지만, 비얀은 그렇지 않았다. 비얀은 그녀의 공격을 이렇게까지 피하는 상대와 싸워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마물의 땅이라고는 해도 드래곤이 아닌 한 비얀의 일격을 받아낼 수 있는 괴수가 있을 리 없다. 오우거 같은 준대형 몬스터는 물론 코카트리스나 히드라 같은 대형의 몬스터와 싸웠을 때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비얀이지만, 지금 그녀와 엉켜 싸우고 있는 상대는 그런 몬스터들하고는 전혀 달랐다. 체계화 된 검술과 기술, 투지, 판단력, 시야, 그 모든 면에서 그녀가 이제껏 본 상대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게다가 아직까지 상대에게 여유가 있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조금씩 초조해 지기 시작하자 마침내 발톱에까지 검기를 넣기 시작했다. 비얀은 지금것 수많은 싸움을 해 봤지만, 손톱을 세 개 이상을 써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열개도 모자라 발톱까지 쓰게 된 것이다. 그런 모습에 유신조차 질려버리고 말았다. “허... 설마 이정도일 줄은... 굉장하구나!” 천상신검을 발동하지 않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싸움에 취한 유신이 마침내 천상신검을 발동하자 비얀은 숲 속에 또 하나의 태양이 떠오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태양은 모든 생명의 어머니인 자애롭고 포근한 그분이 아니다. 죽음과 파괴의 태양 ‘막을 수 있을까?’ 굉장한 압력이 느껴졌지만, 동족을 지켜야 하는 그녀로서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 태양을 향해 자신의 새빨갛게 불타오르는 손톱을 밖아 넣었다. 첫 번째 충돌의 순간, 그녀는 손톱이 부러져 나가는 줄 알았다. “캬아악” 결국 정면승부는 피할 수밖에 없었다. 비얀은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하나씩 쓰던 손톱을 모아 오른손 손톱으론 유신의 첨예를 막고, 나머지 왼손의 손톱과 발톱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하핫, 즐겁구나! 설마 이정도로까지 싸울 수 있다니!” 천상신검이 발동되자 체력이 급속도로 감소하기 시작했지만, 지금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 엘리시엘이 실종된 일도, 흄과의 전쟁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유신의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두근거리는 싸움이다! “더! 더! 더 날 즐겁게 해봐! 실력을 보여 봐라!” 마침내 유신은 두자루의 첨예를 모두 꺼내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이... 이런 미친...” 비얀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월등히 강하다! 제 6 장 뜻밖의 보물6화 비얀과 유신이 싸우는 장소를 중심으로 용권풍이 솟아나고, 검기가 스친 자리는 바위건 지면이건 나무건 할 것 없이 베어지고 쓰러지고 파괴되었다. 열개의 손톱과 열개의 발톱을 모두 쓰고 있었지만, 지금껏 이정도의 상대와 싸워본 적이 없는 비얀으로서는 이 싸움이 쉽지 않았다. 오른쪽에서 비스듬히 날아오는 첨예를 손톱 다섯 개를 모아 겨우 튕겨냈지만, 이번엔 왼쪽에서 다시 날아온다. 피하기만 하면 끝이 없을 것 같아 손톱 두개정도는 내줄 각오를 하고,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첨예를 막으면서 나머지 손톱을 뻗어 몸통을 공격하였다. 비얀은 그것도 모자랄 것 같아 발톱까지 이용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발목 부분을 공격했다. 하지만 유신은 처음부터 그녀의 손톱만을 노렸다는 듯, 얄밉게도 손톱만 잘라내고는 멀찌감치 몸을 날려 발톱의 사정거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간발의 차이로 조금씩 공격 타이밍을 놓치고 있는 게 너무나 분했다. ‘운이 안 따르는 건가? 몇 번이나 찬스가 있었는데...’ 그녀는 이 싸움에서 그녀에게 운이 없어서 기회를 잡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유신은 이미 그녀의 공격 흐름을 파악하고 그 속에 몸을 맡기고 있었기 때문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비얀은 경험이 너무나 적었다. 공격할 수단이 훨씬 많다는 점에서 결코 불리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해도 싸움의 주도권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비얀은 일단 유신과의 거리를 벌리고 나무 위로 도망쳤다. “냐아아아아아” 그녀가 길게 울음소리를 내자 그동안 몸도 못가누고 쓰러져 있던 다른 야묘족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어쩔 생각이냐? 설마 나 정도의 상대와 싸우면서 다른 야묘족 따위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유신은 다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야묘족 전사들을 보며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다른 야묘족들은 유신의 검을 보지 못한다. 야묘족의 동체시력이나 스피드가 인간에 비해 월등하다 해도, 단지 그뿐이다. 유신의 검을 막기는커녕 유신과 비얀의 검기나 검풍에 휘말리면 단숨에 고깃조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캬아앗” 다시 비얀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유신이 서 있는 자리로 쏘아져 나갔다. “퍼펑!” 하지만 유신은 그 검을 맏받아 치는 대신 슬쩍 몸을 돌려 피했다. 천상신검을 발동시킨 채 오랫동안 싸우는 것은 몸에 굉장한 부담을 주기 때문에 쓸데없이 힘자랑 하는데 코어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신의 뒤쪽의 사각으로 다른 야묘족 전사가 슬적슬적 신경을 건드리기 시작하자 손발이 아주 미세하게 흩어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앞에 나서서 싸우는 것은 비얀이었지만, 다른 야묘족들은 결코 유신이나 비얀의 공격거리에 들어오지 않으면서 유신의 신경을 분산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엔 우연히 타이밍 좋게 들어맞은 공격이 그의 신경을 분산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공격하는 타이밍이나 방향등이 미리 계획된 것이었다. ‘설마...이 녀석들, 진법을 쓰는 건가?’ 유신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는 야묘족이 그의 진로를 방해한다는 것은 그의 동작을 미리 읽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변화무쌍한 유신의 공격 방식을 야묘족이 알리 없음에도 그의 공격이 방해받는 다는 것은 야묘족들이 미리 짜여진 진법에 의해 사전에 그의 공격 루트를 차단한다는 뜻이다. “하! 하하하하!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구나!” 진법은 물질계의 기사단 중에서도 굉장히 실력 있는 유명한 기사단급 이상이 아니면 쓰지 못할 만큼 복잡한, 말하자면 집단 검술이다. 강력한 마족을 잡기 위해 고안된 방법 중 하나로, 진법을 가동함으로써 그 진법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진법의 중앙, 즉 머리의 명령에 따라 하나의 생물의 손, 발처럼 그 구성원들이 움직여 적을 치는 것이다. 따라서 진의 중앙에 서는 자는 상황 판단이 빨라야 하며 구성원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용을 얻어야 한다. 또한 그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카리스마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게다가 집단적인 싸움 방식인 만큼 구성원 간의 신뢰도 높아야 하고, 경우에 따라선 살을 주고 뼈를 치는 전법도 구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희생정신도 필요하다. 한 예로 진법 발동 시 좌익을 적에게 내주고 우익이 적의 배후를 치는 전법을 쓰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좌익에 선 병사들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적의 눈을 끌기위해 미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진의 중앙에 선 자는 이런 잔인한 명령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냉철해야 하고, 명령을 받은 자는 승리를 위해선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좋구나! 그럼 나도 답례를 해야 겠지! 그리드, 미러이미지, 다크니스” 유신이 마법을 시전하자 야묘족들은 빙판 위에 선 것처럼 발이 죽죽 미끄러졌다. 야묘족들도 뛰어난 전사이기 때문에 곳 땅에 발톱을 박거나 자세를 낮추어 균형을 잡았지만, 그 사이 유신의 모습은 다섯으로 불어나 있었고, 그것도 어둠 속에 숨어서 버려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마법적으로 어둠의 장막을 드리운 것이기 때문에 시력이 좋은 야묘족도 바로 코앞만 보이는 정도였다. 아차 하는 사이, 이미 유신은 비얀의 등 뒤에서 그 날카로운 첨예로 그녀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단지 짧고 무서운 악몽을 꾼 것만 같았다. 져서 분하다거나 싸움에 패해 죽을 거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하악, 하악” 비얀은 다만 거칠게 숨을 토하며 빠져 나갈 방법이 없을까하는 본능적인 생각이 들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태 같아선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목이 굴러 떨어질 것만 같았다. 제법 넓은 숲이었는데 마치 드래곤이 레슬링이라도 한 것처럼 엉망이 되어 있었다. 제 6 장 뜻밖의 보물7화 “왜 네가 진줄 아냐?” 이런 종류의 녀석들은 승부심이 워낙 강하고 명예나 신념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칼을 거둔 상대의 등 뒤에서 기습을 가하는 것에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유신은 감히 검을 치우지 못한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신은 비얀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용신화랑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비얀을 그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 “넌 경험이 없어. 넌 너와 비슷하게라도 싸울 수 있는 적조차 만나 본 적이 없었겠지. 하지만 난 나보다 강한자를 상대로 싸워 왔다. 그 차이야.” 만약 입장이 바뀌어 유신에게 붉은 색의 검기를 각각 낼 수 있는 열개의 손톱이 있었다면, 발톱 따윈 사용하지 않고도 천상신검을 쓰는 마법사 따위는 금세 갈기갈기 찢을 수 있었을 것이다. 비얀도 잘 싸우기는 했지만, 그런 노련함이나 강한자와 싸워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훨씬 강력하고 다양한 공격 패턴의 조합을 가졌으면서도 패하고 만 것이다. “......” “더 강해지고 싶지 않아?” “......” “지금 같은 설레이는 전투를 더 즐겨보고 싶지 않아? 더 강한 강자와 싸워 보고 싶지 않아?” 유신은 마치 악마가 유혹하듯 작지만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로 비얀의 삼각형의 뾰족한 귀에 대고 속삭였다. 더 강하고 즐거운 싸움이라는 말에 비얀의 근육이 엷게 떨리는 것이 보이자 속으로 웃음이 났다. 용족을 회유하여 용신기로 끌어들였던 바로 그 유혹! “지금보다 더! 더욱 더 강해지고 싶지 않나?” 이것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비얀의 턱 아래로 한 방울 두 방울 땀과 함께 침이 흘러내렸다. 너무나 맛있는 먹이를 두면 흘리는 군침과 비슷하다. 그녀는 동요하고 있는 것이다. “캬...캬아...” 흥분으로 몸이 떨린다. 아직 유신 만큼 육체의 컨트롤이 완벽하지 못한 그녀는 몸 안에 과다하게 분비되고 있는 아드레날린으로 머릿속의 퓨즈가 당장 끊어질 것만 같았다. “더... 강해진다...” 비오듯 땀과 침을 흘리던 그녀는 세빨갛게 핏발이 선 눈으로 유신을 돌아보았다. “그래, 지금보다 훨씬. 그리고 이 싸움보다 훨씬 즐거운, 그리고 ‘이기는’싸움을 즐길 수 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녀의 목을 겨누고 있는 첨예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이... 이기는... 신나는 싸움을... 캬... 캬아악” 마침내 흥분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비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핫! 그래! 바로 그거야! 몸 안의 코어를 쥐어 짜내라!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심장이 멈출 때 까지! 넌 아직 움직일 수 있잖아!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이것이 용신화랑의 자질! 심장이 멈출 때 까지, 마지막 코어까지 쥐어 짜내어 영혼이 파괴되고 소금기둥이 되어 버릴 때 까지 싸우는 것이다! “텅, 터터텅” 검과 손톱이 부딪히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둔탁한 소리가 숲을 울렸다. 비얀의 눈에는 두개의 작고 까만 검을 채찍처럼 부드럽게 사용하며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는 유신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미치도록 즐겁다. ‘이 정도라면! 이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어!’ 유신도 마법계에 와서 처음으로 이렇게 까지 흥분한 것 같았다. ‘이렇게 멋진 상대와 싸운다면 나도 더 강해질 수 있어! 그리고...그리고 쓸 수 있다! 나만의 필살기!’ 마침내 유신의 첨예를 중심으로 근처의 마나와 코어는 물론 자의식이 약한 하급 정령들까지 빨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첨예를 중심으로 용권풍이 일어나며 15미터에 달하는 빛의 기둥이 승천하는 황금의 용처럼 유신과 첨예를 감싸고돌았다. “섬멸뇌격! 썬더브레이크!” 마침내 유신이 첨예를 내려 긋자 그 힘의 덩어리는 그대로 비얀에게 내려 꽂혔다. “콰쾅, 콰콰콰쾅” 숲 전체가 요동치는 충격파가 흩어졌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야묘족들은 그 충격파로 내장에 상처를 입고 토사물과 함께 피를 토했다. 그리고 첨예가 조준되었던 자리는 지진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초토화 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비얀은 그 공격을 막기 위해 남은 손톱과 발톱에 그녀가 쓸 수 있는 코어를 전부 넣어 간신히 방어만 했다. 직격을 맞았다면 그따위쯤은 파도에 쓸린 모래성 같이 미약한 힘일 것일 테지만, 비얀은 그 순간 몸을 공중으로 날려 폭심을 벗어나면서 최대한 그 힘을 흘려 낸 것이다.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손톱과 발톱은 모두 부러져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너덜너덜해진 비얀은 폭심 왼쪽의 비스듬한 방향으로 십여 미터를 날아가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었다. 유신은 기절한 비얀의 목덜미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오른 손에 들고 있는 첨예는 그녀의 이마를 겨누고 있다. 찌르고 싶다. 피를 보고 싶다.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을 받고도 숨이 끊어지지 않은 강대한 야묘족의 붉고 진한 피를 보고 싶다. 하얗게 변한 머릿속에는 살육의 본능만이 꿈틀대고 있었다. “허억, 허억” 얼굴 가득 흘러내리는 땀이 입술로 스며들었다. 유신은 이를 악물며 징징 울리는 머릿속을 정리하고 살의를 억눌렀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제 6 장 의심1화 “짹짹, 꺄까까까까까” 원숭이 몸에 강아지 얼굴을 붙여 놓은 것 같이 생긴 자그마한 생물들이 나뭇가지 위를 뛰어 다닌다. 가늘고 짧은 털이 빽빽이 박혀 털로 짠 공처럼 보이는 둥그런 것들이 비슷한 소리를 지르며 그 뒤를 쫒는다. 영혼이 빨려 올라갈 듯 높고 푸른 하늘, 투명하고 맑은 공기. 화성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구와 흡사한, 아니 그 이상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환경이었다. 수백 년도 넘게 살아온 것 같은 아름드리 수목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크고 작은 이름모를 새들과 동물들이 아무 곳에서나 뛰어다니고 있다. 환경을 강제로 개조하여 만든 곳답지 않게 정령들의 흐름이 활발하고 마나의 흐름이 안정적이다. 화성 제일의 관광지구로 정해도 좋을만한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곳. 하지만 인간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곳. 이곳이 바로 전 우주 최강이라는 절대의 존재, 용성제 카론의 별장중 하나인 용의 호수가 있는 곳이다. 이 아름다운 자연, 정령들의 평화로운 움직임은 용제의 압도적인 마나지배력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거대한 탑을 연상시키는 고풍스런 모습의 건물의 가장 높은 테라스에 길고 아름다운 푸른 장발을 등까지 기른 키가 큰 남자가 있다. 남자는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작은 소리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흐음... 과연 유신 더 실버스타. 나의 용신화랑 답군. 그런 몸으로 썬더브레이크라니.” 카론은 주변의 경치가 한눈에 보이는 높은 방의 테라스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방 안은 주로 드래곤과 소녀를 소재로 한 아름다운 장식과 조각, 그림들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고, 특별한 조명기구 없이 벽과 바닥, 천정 전체에서 상아색 계열의 엷은 빛이 비추고 있었다. 열네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소녀가 침대에서 세상모른다는 얼굴로 자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방 안을 꾸민 주인의 취미가 매우 고상해 보였다. “음, 음 아주 좋아.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 그는 몸을 돌려 침대에 기어들어가 곤히 잠들어 있는 소녀의 머리를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었다. 그의 손이 볼에서 목으로, 그리고 가슴을 지나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려는 때에 방 안에서 하얀 빛의 기둥이 솟아나며 검푸른 로브를 뒤집어 쓴 인영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냐? 방해하는 것,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나?” 카론은 돌아보지도 않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부드러운 얼굴이 거짓말 같이 느껴지는 얼음장 같은 말투였다. 굳이 드래곤 피어까지 섞지는 않았지만, 그냥 듣는 것만으로도 온 몸의 털이 다 곤두선다. 지옥의 헬마스터 이상의 공포를 준다는 파괴의 벼락 카론. 이 환영받지 못한 불청객은 당장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폐하. 하지만 카린님이 오셔서...” 마법사 차림의 전령은 카론의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질려버린 것인지 부들부들 떨면서 간신히 말했다. 로브 위로 살짝 보이는 얇고 매끈한 긴 귀를 보면 카론의 취향에 맞추어 시라스인을 전령으로 쓰는 것을 알 수 있다. “음? 그건 정말 반가운 소식이로군. 그나저나 넌 처음 보는 얼굴이군. 누구지?” 카린이 왔다는 말에 카론의 냉정해 보이는 얼굴이 아주 잠깐이지만 무너졌다. 하지만 그 마법사는 바닥에 엎드린 채 감히 고개를 들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카론의 얼굴 표정은 볼 수 없었다. “저, 저는 여기서 카론님을 모신지 넉 달도 넘었는데요?” 물론 카론의 별장은 전 우주 곳곳에 흩어져 있고, 이런 우주의 변방 구석까지 오는 일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카론은 어디서 구했는지, 어둠의 마왕과 계약을 맺은 시라스인 소녀 하나를 구해와 이곳에서 거의 넉 달째 그 여자하고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어둠에 빠진 시라스인을 비도움이라고 부르는데, 보통은 사창가나 불법적인 마법사를 원하는 곳에 팔려가게 된다. 용제라면 주변에 널리고 쌓인 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미소녀 일 텐데도 이 불쌍하고 교활한 종족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든 것인지, 카론은 넉 달이나 실증내지 않고 총애를 주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시중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비도움 소녀가 들고 있었고, 카론은 그의 정식 수행원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누구지?” 하지만 카론은 그의 무심함 따위는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듯, 더 한층 차가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아세리크 데...” 아세리크는 넉 달이나 알게 모르게 카론을 돌봐주었는데 그녀의 존재조차 모르는 카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감히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기에 고분고분 다시 한번 자기소개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라스인의 풀 네임은 무척 길고, 그래서 그녀가 길게 이름을 말하려고 하자 카론은 말허리를 잘라 버렸다. “좋아 아세. 카린이 온다면 그녀의 취향에 맞춰 줘야지. 네가 시중을 들어라. 가장 멋진 옷과 최고의 요리를 준비하도록.” . 제 6 장 의심2화 카론은 침대에서 일어나 몸에 걸치고 있던 얇은 비단 가운을 벗고 가만히 눈을 감으며 양 팔을 조금 벌렸다. 큰 키, 보기 좋게 역삼각형을 이루는 넓은 어깨, 가늘고 날렵한 허리, 강철 같은 근육. 그리고 길고 푸른 장발과 오만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아세리크는 아주 잠깐 동안, 하지만 충분히 머릿속에는 넣어둘 만큼의 시간 동안만 그의 몸을 바라보다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간단한 주문을 외우자 바닥이 솟아오르며 자그마한 책상이 나타났다. 책상위에는 피아노 건반 같은 것이 있었고, 그 하나하나를 누를 때마다 카론의 몸에 여러 가지 의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마치 악기를 연주하듯 빠른 손놀림으로 순식간에 수십 개의 옷을 체크해 본 그녀는 카론에게 잘 어울리는 푸른 실크셔츠와 조금 더 진한 색의 바지, 그리고 어깨를 덮는 망토를 골랐다. “이정도면 좋을까요?” 하지만 카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세리크를 바라 볼 뿐이었다. 아세리크는 혹시 그녀가 골라준 옷이 카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서둘러라. 카린을 기다리게 했다간 네 값싼 목숨 정도로는 보상할 수 없을 것이다.” 놀란 그녀가 다시 주문을 외우자 다시 바닥에서 몇 개의 상자가 올라왔고, 그 안에는 그녀가 골라 놓았던 옷들이 어김없이 들어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입혀라.” 그녀는 떨리는 심정으로 허겁지겁 옷을 입히며 또 한명의 손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해야 했다. 손님은 만약 자기가 왔다는 것을 카론에게 말했다가는 편하게 죽게 하지 않을 거라고 협박 했는데, 지금의 분위기로 보아 말을 하지 않아도 어차피 카론에게 죽을 것이 뻔했다. 어느 쪽이 편안한 죽음이 될까 눈물이 날 만큼 절망적인 고민을 하던 그녀는 마지막으로 고향에 있는 식구들과 친구들을 떠올리며 각오를 했다. “저... 그리고 그림센발트님도 오셨어요.” “......” “......” “카악! 왜 말하지 않은 거냐?” 죽음과도 같은 불길한 침묵은 마침내 카론이 고함으로 이어졌다. “하... 하지만 그림센발트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당장 카론은 아세리크의 목을 움켜잡은 채 들어 올렸다. “하...하악!” 아세리크는 아주 잠시 동안 바동거렸지만, 곳 그런 미약한 저항도 멈춰 버리고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카론의 손에 달랑 들려 이리저리 흔들렸다. 카론이 막 그 가는 목을 비틀어 버리려는 참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의 로브가 벗겨졌다. 그러자 제법 예쁜 얼굴이 들어나는 것이 아닌가? 초록색의 큰 눈에 눈물이 가득한 것이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만한 대단한 미인이었다. 저 변덕스런 용제의 시중을 들게 할 여자를 고르는데 카론의 절망적인 성격이 고려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랬다가는 얼마나 많은 송장을 치워야 할지... 그 유가족을 위한 보상비를 계산해 보면 차라리 어떻게 해서든 능력 있고 똑똑하면서도 카론의 입맛에 맞을만한 여자를 찾는 편이 낳다. 그래서 전령은 주로 군사기술 연구원 중에서 생체병기에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는 ‘여자’중에서 고르게 된다. 상식적으로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대체 누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용제의 전령이 된다고 하겠는가? 하지만 용제에 대한 나쁜 소문은 대부분 군사기밀이기 때문에 아세리크처럼 멋도 모르고 지원하는 경우도 있다. 우주는 넓은 것이다. 그리고 유리한 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3년 정도만 고생하면 다음 인사배치 때는 낙하산 인사로 원하는 자리에 갈 수 있고, 무엇보다 ‘확률’이 꽤 좋은 것이다. 어쨌든 카론은 혼자고, 전 우주에 퍼져 있는 카론의 별장만 해도 세자리수를 가뿐히 넘기 때문이다. 보통 카론은 수련을 위해 명황계에 가 있거나 아니면 우주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성계대전이 끝나고 5년이 지났지만, 카론의 전령이나 수행원 중에 카론의 모습을 보지도 못한 자가 대부분일 정도다. 그러니 카론을 만나지 않고 3년을 무사히 보낼 거라는 ‘확률’에 거는 것이다. 게다가 카론의 별장은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위치하고 있으니 3년 동안 자연에 파묻혀 하고 싶은 공부나 취미생활을 원 없이 하다가 낙하산 인사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세리크는 그야말로 재수 없는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처음 화성으로 배치 받았을 때는 좋았다. 그 용성제가 이런 변방 촌구석 까지 올 리도 없고, 실제 4년 동안 단 한번도 온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부임한지 6개월 만에 갑자기 카론이 비도움 소녀를 데려 오면서 그녀의 평화는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고, 오늘을 기해 그 불행한 삶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게 생긴 것이다. ‘흑... 내가 미쳤지... 이런 곳에 지원하다니... 아직 연구해 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아직 200년도 채 못 살았는데 벌써...’ 특이하게도 아세리크는 연구원이 아닌 순수마법사 출신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마나의 흐름이 안정적이고 정령의 움직임이 활발한 이곳은 최고의 마법연구소이자 실험장이었다. 설마설마 그 용제를 보게 될까하는 심정으로 지원을 한 것이 이런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어렸을 적, 평화로운 시라스 본성에서 뛰어 놀던 일, 갑작스런 크놈과의 전쟁으로 피난 다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서서히 생각의 고리들이 흐려져 가고, 고통스럽다는 느낌도 사라져 갈 즈음 누군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았다. “... 정신 못 차리고... 실망을... ” 제 6 장 의심3화 전 우주 최강을 자랑하는 파괴와 욕망의 화신 카론은 지금 그답지 않게 후회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그는 후회해야 할 상황이 닥치면 약간의 폭력 만으로도 그 상황을 후회하지 않을 방향으로 뜯어고칠 수 있었기 때문에, 후회라는 감정은 무척 생소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림센발트가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딘가로 워프하여 도망쳤어야 했다. 카린을 보고 싶은 마음에 잠시 망설였던 것이 그림센발트와 마주치는 최악의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 그러니까 왜 정신 못 차리고 아무 때나 성질을 부려요? 용제면 용제답게 좀더 침착하고 차분하고 타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얼마나 많은 용들이 실망하는지... 연약한 시라스 소녀 하나 비틀어 죽이는 게 즐거워요? 우주 최강을 자랑하는 위대한 용족의 상징이라는 자각이 없나요?” 이 굉장한 존재를 보라! 지옥의 마신들조차 벌벌 떠는 절대의 파괴자 용성제 카론을 무섭게 압박하는 은백색 머리카락의 섹시한 누님을 보라! 그녀가 전 우주에 둘밖에 없다는 용제의 고삐 중 하나! 카론의 아홉 번째 딸이자 마지막 자식인 실버드래곤 그림센발트다. 오늘은 용제의 고삐가 둘이 한꺼번에 다 온 것이다. 아세리크는 점점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지만,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살벌한 공기 때문에 감히 일어나지 못하고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아세리크는 띵한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인지 파악해 보려고 애썼다. 상황을 종합해 보니 그녀가 기절해 있는 사이 그림센발트와 카린이 찾아왔고, 카론을 말려서 죽어가는 그녀를 구해준 것 같다. 하지만 그녀가 누워 있는 곳이 황송하게도 카론의 침대라는 것을 깨닫자, 저들이 돌아가고 나면 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 없을거라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게 아니고, 사랑하는 딸이 왔는데 어서 알리지 않은 저 녀석이 괘씸해서 그런 것이야.” 거기에 더해서 카론은 그녀의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닌가? ‘지금 죽을지도...’ 용은 거짓말을 하면 제약마법이 발동하여 굉장한 치명타를 입게 되지만, 카론은 그런 고통을 꾹 참으며 얼굴 색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중이다. 그림센발트는 의심스럽다는 듯 카론의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설마 아무리 용제라 해도 폴리모프한 상태에서 거짓말을 하면서 얼굴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거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난감한 상황은 카린의 부드러운 한 마리도 무마되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두 분 정말 사이 좋으네요. 정말 부러워요.” 카린은 부럽다는 듯 살짝 웃으며 다정해 보이는 두 부녀사이를 칭찬했다. 카린이 웃자 그림센발트의 살벌함 덕분에 꽁꽁 얼어붙었던 방안의 공기가 첫 번째 봄을 알리는 아침의 햇살에 녹는 눈처럼 사르륵 기분 좋게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 “......” “......” “... 저... 뭐... 뭐지요?” 두 부녀가 말다툼을 멈추고 똑같이 나사 빠진 표정으로 바라보자 카린은 완전히 당황해 버렸다. 멍한 표정으로 카린을 바라보던 그림센발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린의 앞에 섰다. “에?” 그림센발트는 제법 큰 키인데다 서릿발 같은 오만한 인상이기 때문에 아름답기는 했지만 감히 범접하기 힘든 무서운 인상이다. 그런 그녀가 내려다보고 있으니 카린은 조금 움찔하고 말았다. “어... 어쩜 이렇게 예쁠까!” 그림센발트는 잠시 동안 그 자세로 카린을 내려다보다가는 못 참겠다는 듯 그대로 덥석 끌어안아 버렸다. “어? 어?” 카론은 밥그릇 빼앗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했지만, 감히 그림센발트에게 떨어지라고 할 수 없었다. 아마 다른 존재가, 설령 유신이라 해도 그의 앞에서 함부로 카린을 끌어안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림센발트는 되는 것이다! 그림센발트는 사악하게 카론을 한번 바라봐 주고는 보란 듯 카린의 뺨을 부비거나 몸을 더듬었다. “어? 어!” 카린도 조금 부담스러웠는지 몸을 살짝 살짝 비틀었지만, 그게 오히려 말할 수 없이 요염하다. 그림센발트의 손은 점점 더 집요하게 그녀의 등을 더듬으며 아래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하악” 녹아내릴 듯 부드럽게, 때로는 고통스러울 만치 자극적으로, 최후의 경계를 넘을 듯 안 넘을 듯 움직이는 그림센발트의 마법같은 손길에 카린의 얼굴이 점점 발갛게 변하기 시작했다. “어때 카린? 저런 난폭하기만 한 변태 영감보다는 내가 수호용이 되는 게 더 좋지 않아? 응? 대답해봐?” 그림센발트는 카린의 긴 귀를 살짝 깨물며 유혹하듯 물어보았다. “아... 아아...” 하지만 카린은 뭐라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지 미약한 몸부림을 칠뿐이다. “사... 사랑하는 딸아... 아무리 그래도 그녀는 내 레이디야.” 마침내 카론이 미미한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림센발트는 잠시 썰렁한 눈길로 카론은 바라보았을 뿐, 다시 카린에게 집중했다. ‘요... 용족들은 죄다 변태들이야... 카린님 불쌍하다...’ 아세리크는 일어나지 않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모든 용족들이 환장해서 좋아하는 카린을 위해 묵념했다. 제 6 장 의심4화 “저... 저기 그림센발트님?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왔잖아요. 그러니 이제 그만 이야기를...”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작고 연약한 고양이. 그런 카린을 도망칠 구석 없이 몰아넣는 것은 너무나 쉬운, 그리고 참을 수 없이 즐거운 작업이다. 그림센발트는 그녀의 손길을 피하듯, 끌리듯 꿈틀거리는 가엾은 카린을 절대 뇌주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은 중요한 일 때문에 온 것이니 이쯤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흐음... ‘오늘은’이란 말이지? 뭐, 좋아. 내일도 있고, 모래도 있고, 시간은 많으니까 말이야. 귀여운 레이디.” 카린에게서 떨어지는 그림센발트를 보며 카론은 아쉬운 것인지, 아니면 안도감을 느끼는 것인지 긴 한숨을 쉬었다. 카린의 흩으러진 모습을 볼 기회는 절대 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아... 오늘은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 왔어요.” 카린 역시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긴 한숨을 쉬었다. 원망스럽다는 듯 그림센발트를 한번 노려보고는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림센발트는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다르게 조용히 뒤로 물러나 얌전히 듣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으음... 심각한 얘기는 싫은데, 마이 레이디가 하는 말이라면 들어 줘야지.” 닭살스런 말에 카린은 난처한 웃음을, 그리고 그림센발트는 노골적인 비웃음을 보냈지만, 카론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여자한테 하는 것의 십분에 일만 쿨하게 나가도 카린의 마음잡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일 텐데. 바보 같긴.’ 그림센발트는 그 유치한 대사를 뱉어내고도 냉정해 보일 정도로 이지적인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헤벌죽하며 좋아하는 카론을 보며 불쌍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은 유신님 때문에 왔어요.” 카론은 그의 용신화랑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자 비로소 용성제에 어울리는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카론님이라면... 알고 계시겠죠? 대체 어떻게 된 거지요? 벌써 사년이나 미스티로부터 연락이 없어요. 누군가 방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이건 고위급 천사나 악마의 개입이 없다면 불가능 한 일이에요.” “아니면 미스티가 파괴되었거나.” 그림센발트의 장난스런 말에 카린은 당장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엇차차 농담. 그 표정이 보고 싶었다고.” “하아... 며칠 전에 마법계에서 썬더브레이크의 반응이 있었어요. 이건 카론님도 느꼈겠지요?” 화내봐야 노련하고 능글맞은 그림센발트의 놀림거리가 될 뿐이다. 카린은 다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으음, 분명 규모는 미약하기 그지없었지만, 그건 틀림없는 유신의 썬더브레이크. 루시펠님을 꺾었던 필살기를 모를 리 없지.” 카론은 유신의 봉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카린에게 이야기 해 줄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유신의 봉인이 풀린다 해도 물질계로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 이상, 그녀가 알아봐야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엉망인 몸으로 그런 기술을 쓴 거예요! 만약... 만약 목숨을 걸고라도 그 정도의 기술을 써야 할 정도의 상대와 만났다면, 어쩌면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몰라요! 카론님이라면 마법계의 사정도 알 수 있지요? 마법계에는 드래곤들도 많고, 카론님의 끝없이 신에 가까운 신력이라면 틀림없이...” 유신을 봉인한 천사들의 봉인구조는 너무나 복잡하고 강력해서 도저히 물질계의 마법지식이나 과학지식으로는 풀 수 없었다. 그런 것을 아무리 유신이라 해도 자력으로 풀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카린은 초조한 것이다. “으음,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마법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물질계의 존재에게 함부로 말할 수는 없어. 그것이 설령 너라고 해도 말이야. 그건 매우 중요한 규칙이야.” “아... 알고 있습니다.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 하지만 실버스타군의 움직임은 미카엘님이나 아리엘님이 허가해 주지 않고, 저에겐 병권도 없어요. 다른 용신화랑 분들도 뭔가 알고 있는 듯하지만 저한테는 가르쳐 주지 않아고... 그래서... 그래서 사정하러, 아니 빌러 온 거예요. 제발, 제발 하다못해 유신님이 무사하신지라도 가르쳐 주세요.” 최강의 용신화랑인 바이올렛 미라쥬, 해모수가 유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군을 이탈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카린도 들었다. 해모수의 헬크로아 함대가 워낙 은밀한 부대고, 이야기하는 것조차 금기시 되는 그림자 같은 부대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해모수가 유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탈해 버렸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불길한 생각은 하루하루 그 무게를 더해갔고‘말’이란 형태를 통해 밖으로 나오게 되면 그 불안감조차 형체를 띄고 점점 더 무거워 지는 것이다. 생각의 고리가 깊어질수록 카린은 정신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하지만 카린이 초조해 하는 것과는 반대로 카론은 점점 더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평소 잘 따르던 강아지가 아무리 꼬리를 흔들어봐야 별다른 감흥을 느끼기 힘들다. 진짜 즐거운 것은 평소에는 냉랭한 고양이가 어쩌다 한번 보여주는 애교다. 그게 미치게 하는 것이다! 저 귀여운 존재를 보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저 귀엽고 아름답고 가련한 존재를 보라! 카론은 그의 레이디를 조금 더 놀려주어 난처해하는 표정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들었다. “사실 네가 유신에게 붙여준 호위인형도 문제가 있어. 단순히 호위라면 넘어갈 수 있겠지만, 그걸 이용한 통신으로 마법계에 간섭하는 것은 분명히 말해서‘절대’안될 이야기야. 그게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유한생명체인 넌 모르고 있어. 자칫 우주의 질서가 무너질 수도 있다고.” 틀림없이 옳은 말이고, 카론도 그런 대사에 어울리는 진지하고 비장한 얼굴로 말하고 있기는 했지만, 사실 카론은 그런 것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런 골치 아픈 문제는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다가 나중에 심각해지면 그때 힘과 폭력으로 한방에 해결해 버리면 되는 것이다. 단지 카린의 난처해하는 표정이 보고 싶은 것뿐이다. 제 6 장 의심5화 역시나 카론처럼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니지 못한 카린은 단숨에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카린은 우주라는 거대한 톱니바퀴는 아주 작은 나사가 하나 빠지는 것만으로도 무너져 내릴 수 있을 만큼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톱니바퀴를 건드리려 달라고 부탁하는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설혹 그렇다 해도 이제는 카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정말 무리한 부탁 드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믿을 수 있는 분은 이제 카론님뿐이에요. 그러니...” 잠시 동안 입을 다물고 발끝을 바라보고 있던 카린은 각오를 다진 듯 입을 열었다. “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게요. 그러니 유신님의 생사만이라도...” 마침내 듣고 싶은 말을 들었다. ‘뭐든지’한다고 한 것이다. 카론은 이 말을 듣고 싶었다. 뭐든지! 드디어 이 작고 귀여운 고양이가‘뭐든지’라고 한 것이다. 당연히 그가 뭘 원하는지 모를 리 없으면서도 결국 그 금기된 단어를 꺼내고야 만 것이다! 다른 천박하고 별 볼일 없는 유한생명체가 말하는 싸구려 같은‘뭐든지’가 아니다. 용성제 카이드리아 엘 엑시나에가 완전히 반해버린 긍지 높고 고귀한 레이디가 말하는 ‘뭐든지’이다. 저 고귀한 유신의 양녀가 그런 말을 할 만큼 절박한 궁지에 몰렸다는 것이 가슴 아팠지만, 그런 안타까움조차 사랑스럽다. 이것은 용제의 기나긴 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찾아온 행운이다. 놓칠 수는 없는 것이다. “꿀꺽”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귀가 좋은 시라스인이 아니더라도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가 들렸지만, 정작 카론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았다. ‘천박하긴...’ 그림센발트는 여자하나에 어쩔 줄 모르는 저 불쌍한 존재가 전 용족의 상징이라는 것을 떠나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가 어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카론은 강하니까. 그것도 다른 용들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뭐... 뭐든지 란 말이지?” 다시 물어보는 것이 카린이나 그림센발트의 눈에 어떻게 비추리란 것은 알고 있지만, 카론은 다시 한번 더 물어보고야 말았다. 다짐을 받아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귀한 레이디의 완전한 항복 선언. 피가 끓어오른다! 카린을 얻을 수만 있다면, 자존심쯤은 잠시 접어놔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카린에게만은 자존심을 세우고 싶지도 않았고, 설혹 드높은 자존심에 약간의 상처받는다 해도, 그것을 풀 대상은 전 우주에 널리고 쌓여 있는 것이다. “조... 좋아. 카린이 그렇게까지 얘기한다면, 그까짓 금기쯤은 깨주지. 뭐든 상관없어. 유신의 소식이 궁금하다고 했지? 그 녀석은 잘 지내고 있어. 너무 잘 지내서 질투가 날 정도로. 그 녀석, 이러느니 저러느니 해도 결국 봉인이 세 개나 풀렸어. 그렇다고는 해도 썬더브레이크를 쓴 것은 의외지만, 어쨌든 조금이나마 예전의 힘을 되찾았으니 별 걱정 없을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흑.” 한 방울 두 방울 점점이 흐르던 눈물은 하나의 선이 되어 카린의 하얀 뺨을 가로질렀다. 그 틈을 타 그림센발트가 카린을 위로하는 척 하며 이리저리 끌어안고 있었지만, 카론은 그다지 부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카론이 카린의 수호용이었지만, 이제 곳 카린이 카론만의 레이디가 차례이기 때문이다. 카린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주던 그림센발트의 손이 그녀의 목과 귀 근처를 쓸어주자 아주 조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정도는 승자의 여유로 참아주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그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참을 울고 난 카린은 이 방에서 잘 것을 청했다. “너무 멀리 오느라 많이 지쳤어요. 좀 쉬고 싶은데, 가능하면 ‘이방’에서 쉬어도 좋을 까요?” “무... 물론이지! 좋고말고! 언제까지 쉬어도 좋아. 그... 그럼 나도...” 카론은 그녀가 벌써 그녀의 ‘뭐든지’를 실천으로 옮기려는 줄 알았다. “두 분은 오랜만에 만났으니 오붓한 대화를 하고 싶죠? 저, 많이 피곤하니 이제 두 분은 ‘밖’에서 대화 나누세요.” 하지만 카린은 카론과 그림센발트를 싸잡아서 쫓아내는 것이 아닌가? 카론은 잠시 허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정도는 상관없다. 그림센발트의 말처럼 시간은 흘러넘치도록 많은 것이다. “자, 그럼 저랑 오붓한 시간을 보내도록 하지요. 아.버.님.” 그림센발트의 말 속에 가시가 들어 있는 것을 느꼈지만, 제정신이 아닌 카론은 간과하고 말았다. 오늘은 그 생에 최고로 기쁜 날이다. 사실 카린이 둘을 내쫓은 것은 침대에 기절한 척 하고 있는 아세리크 때문이다. 시라스인 치고는 둔한 편인 카린도 아세리크가 기절한 척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용성제와 그의 딸이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리 없다. 만약 카린이 자리를 비켜버리면, 그 순간 아세리크는 죽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카론도 카린이 침대 속에서 기절한 척 하고 있는 가련한 존재를 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런 것쯤은 당연히 상관없다. 죽여도 그만, 안 죽여도 그만인 저런 하찮은 마법사 따위를 살려주고, 덕분에 카린이 그의 침대에 누워 그녀의 채취를 묻혀주면 그건 비교자체가 안되는 행운이다. 그걸로 대 만족인 것이다. 오늘은 정말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위험천만한 두 부녀가 방을 나가자 비로소 카린은 몸속 깊은 곳에 있는 긴 한숨을 쉬었다.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서...” “아니요. 별것 아닌데요. 이정도로 동족 한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죠.” 이 따스함, 이 사려 깊음. 아세리크는 용족들이 그토록 카린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전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요? 틀림없이 아까 죽는 줄 알았는데.” 카린은 잠시 동안 고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좀 전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어떻게 말하면 아세리크가 충격을 덜 받을지를 고민했다. “... 듣고 싶어요?” 막상 입을 열려니 듣는 쪽은 물론 이야기 하는 쪽도 곤란한 이야기라 차마 말을 못하고 한 번 더 물어보았다. “... 아니요. 안 듣는 편이 낳겠군요. 수명이 줄 것 같아요. 배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망설이는 카린을 보면 기절해 있는 동안 어쩌면 많은 일이 벌어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세리크는 두 부녀의 변태적인 성향을 봤을 때 차라리 안 듣는 편이 낳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그보다 가능하다면 시라스 본성의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을래요? 전 크놈에서 자랐기 때문에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본성에 대한 기억은 없어요.”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방안에 썰렁한 침묵이 감돌자 갑자기 카린이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세리크도 거의 일년만에 본 동족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마침 잘 됬다고 생각하여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동안 카린과 이야기 하던 아세리크는 완전히 카린이 마음에 들고 말았다. 마법 외길인생을 걸어온 그녀와 마도과학의 외길 인생을 걸어온 카린은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세리크는 카린과 몇 마디를 나눠보고 그녀가 얌전하고 조용한 성격이지만 심성이 곧고 바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긍지 높은 삶을 살아온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깊고 따스한 기품이 느껴졌다. 아까 같은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아세리크를 베려할 수 있는 것만 봐도 카린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그런 변태드래곤한테 카린님을 줄 수는 없어요. 빠져나갈 길을 생각해 봐요!” 마침내 아세리크는 대책 없는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호기롭게 말 하면서도 자기가 미친 게 아닐까 고민하고 있었지만, 카린을 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설마 용성제씩이나 되서 그의 레이디가 있는 방을 감시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나중에라도 그녀가 카린을 부추긴 것을 알게 되면 어떤 꼴을 당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너무나 엄청난 일을 당할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상상력으로는 결말의 근처까지 다다르지도 못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공포감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두 순진한 시라스인은 이 위기를 타개할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B&M 제 6 장 의심6화 밤. 휴식과 재생의 시간. 하지만 음모와 어둠의 시간이기도 하다. 2군단의 야전사령부의 우울한 횃불을 피해 음침한 밤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듯한 인상의 한 남자가 찾아왔다. “크로움바우 경, 대체 이 시간에 보자는 이유가 뭐요?” 1군단의 부사령관인 크로움바우 백작은 은밀한 시간에 뮬테인 백작과 밀담을 나누기를 청했다. 1군단의 총사령관이 율리안 왕자기는 했지만, 사실상 유신이 지휘하고 있다는 것은 왠만한 고급지휘관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이 남자도 형식뿐인 부사령관일 뿐, 상륙작전이 시작되었을 때에도 안전한 배 위에서 소리만 질러대던 형편없는 남자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명색이 부사령관. 면회 요청을 했으니 거절할 수는 없었다. “상륙작전을 멋지게 이끌어주신 뮬테인 백작님께 감사합니다. 아직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정정하시더군요.” 전형적인 귀족. 강자에게 아부하고 약자에게 고압적이다. 작전회의 때면 가장 큰 목소리로 떠들면서 막상 싸움터에선 그저 검을 들 뿐, 입으로만 싸우는 비겁한 귀족들. 고귀한 신분이라는 긍지도, 자존심도 없다. 싸움은커녕 갑옷 입는 방법이나 아는 것일까? 뮬테인은 전쟁터에서 저렇게 화려하기만 한 장식용 갑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는 크로움바우가 꼴보기 싫었다. 뮬테인은 귀족이 특별한 이유는 그의 영민들이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무인이다. 입만 살아 나불거리는 이 남자가 마음에 들리 없는 것이다. “내가 한일이 무에 있겠소. 작전의 입안서부터 지휘까지 모두 유신경과 미스티경이 했는데. 나 같은 늙은이야 그저 젊은 영웅들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 바둥거렸을 뿐이지.” 크로움바우의 아부도 뮬테인에겐 비꼬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전쟁터의 최전선, 그중에서도 가장 선두에서 가장 강하고 두려운 적들을 쓰러뜨리는 유신과 미스티. 그들이 전쟁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군대의 사기가 오르고, 패할 것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이 냉철한 중년의 소드마스터조차 피가 들끓었다. 뮬테인은 진심으로 10년만 더 젊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단 일년만, 아니, 육개월 만이라도 이 영광스런 전쟁터에서 저토록 멋진 영웅들과 어깨를 함께하며 말을 달릴 수만 있다면 남은 인생을 전부 주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유신에 비하면 이 크로움바우란 귀족이 초라해져도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뮬테인의 시큰둥한 대답에 크로움바우는 잠시 당황하는 얼굴이 되었지만, 곳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다. “하핫, 여전히 겸손하시군요.” 귀족도 잘하는 것이 하나 있다. 버터 속에서 뒹군 것 같은 느끼함과 뻔뻔함. 뮬테인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찾아온 용건이 무엇이요?” 이런 작자는 빨리 쫒아 버리는 게 상책이다. 보급, 병력의 배치, 지형분석, 전사자들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한 인사배치. 해야 할 일은 태산이다. 쓸데없는 시간낭비를 할 틈이 없는 것이다. “하핫, 당분간 마물들의 침공은 없을 터인데, 무엇이 그리 바쁩니까? 천천히 다음 작전에 대해 상의라도 하고 싶어 온 것인데 너무 박하십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네놈하고 대체 무슨 작전회의를 한단 말이냐?’ 짜증이 머리끝까지 오른 뮬테인은 이 말이 목구멍 까지 나왔지만 꾹꾹 눌러 담았다. “사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번 작전도 그렇고... 근본도 모르는 뜨내기보다는 뮬테인백작님 같은 고귀하고 명망 있는 분이 지휘하시는 게 명분도 서고 저희들도 납득 할 수 있습니다.” 뮬테인의 표정이 과히 좋지 않자 크로움바우는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무슨 말을 하는 게요? 1군단의 사령관은 율리안 왕자 아니오? 경들은 왕자의 지휘가 불만이요?” “상투적인 이야기는 그만두도록 하지요. 저 뜨내기 놈이 왕자님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병권 전체를 쥐고 있다는 사실은 일반 병사들까지 아는 사실입니다.”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요?” “이번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같이 상륙전을 감행했는데 1군단의 피해는 거의 없었던 반면 2군단의 피해는 1군단의 두 배가 넘습니다.” “... 그거 미안하게 됐구려. 지금 내가 지휘를 잘 못했다고 비난하는 거요?” 가뜩이나 별 활약을 하지 못하고 피해만 컸던 제노비스기사단이다. 뮬테인은 괜히 더 화가 났다. B&M 제 6 장 의심7화 사실 아직까지도 무거운 갑주와 검에 의지해 훈련을 해온 예메른의 기사단에게 상륙전은 힘든 일이었다. 경무장 덕분에 몸이 가벼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익숙하지 않는 싸움 방식 때문에 큰 피해를 입고 만 것이다. 평소라면 갑옷을 믿고 무시해도 좋을 자잘한 공격도 치명상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아무래도 움직임이 소극적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반면 하누스의 군대는 유신 이후로 가벼운 검과 경무장을 위주로 한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피해가 훨씬 적었고, 그건 뮬테인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혹시라도 유신경이 2군단을 방패막이로 세웠다거가...” 어찌되었든 전사자 차이가 너무 났다. 기사단의 파괴력으론 하누스의 자색기사단보다 예메른의 제노비스기사단이 한수 위라는 것은 대대로 이어져 온 전통이자 예메른의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이번 전투를 계기로 완전히 바뀌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이 남자가 하는 말이 사실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지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확실히 이번 전쟁으로 마물들과의 전쟁도 다른 양상을 띠게 되겠지요. 이제 마물들은 인간의 적수가 되지 못해요! 굳이 지금이 아니더라도 저 강력한 포병대를 중심으로 언제든지 물리칠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흄을 정벌하고 평화를 가져왔다는 그 공을 저런 놈에게 주어야 할 필요는 없어졌지 않습니까? 게다가... 솔직히 의심스럽습니다. 인간이 저렇게까지 강할 수는 없지요. 갑자기 마물에 가까운 야묘족을 한편으로 끌어들이지를 않나, 그리폰 같은 괴수를 길들이지를 않나... 마물들의 스파이일지도...” 예메른과 하누스의 동맹은 물론 드워프와 엘프 동맹을 가능케 한 것도, 대포를 주력으로 한 상륙전을 구상한 것도, 그리폰을 통한 제공권 장악을 이루어 놓은 것도 모두 유신이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그런 사전 준비가 전부 공짜로 된 건줄 알고 있었다. “... 더 이상 지껄인다면 나도 참지 않겠소. 전쟁 중에 같은 편끼리 이런 얘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소이다.” 마침내 뮬테인은 노골적인 살기를 뿜으며 화를 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1군단의 귀족들은 근본도 모르는 뜨내기보단 차라리 타국일지언정 명망 있는 율테인 백작님의 지휘를 원하고 있습니다.” “당장 물러가시오!” 화를 냈다는 것은 동요하고 있다는 뜻이다. 크로움바우는 전형적인 무인답게 동요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뮬테인 백작을 보며 유신을 몰아내는 것이 의외로 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그런 소릴 하지만, 의심에 씨앗은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점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뿌리내리게 될 것이다. 소드마스터라고 거들먹거리는 것 밖에 할줄 모르는 한심한 늙은이.’ 크로움바우는 그에게 모욕을 준 저 노기사도 언젠가는 없애버리겠다고 생각하며 막사를 나섰다. 뮬테인으 하누스의 사정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일로스 전 대륙의 동경의 대상인 이자벨 공주가 결혼을 하지 않고 혼기를 놓친 이유가 유신 때문이라는 소문은 이미 정설로 굳어졌을 정도였고, 이미 은밀한 연인관계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싸구려 음유시인이나 로맨스를 좋아하는 수다쟁이들에게 이 이상의 이야깃거리는 없는 것이 다. 귀족이 아닌 떠돌이나 모험가가 대 영웅이 되어 아름답고 현명한 공주님과 결혼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인기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대로 유신이 큰 전공을 세워서 작위를 받고 이자벨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왕권까지도 바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설혹 그렇지는 않다 하더라도 대 귀족이 될 것은 뻔한 일이고, 그건 기존의 명문세가들에겐 너무나 반갑지 않은 상황이다. 유신이라는 용이 공주라는 날개를 얻게 되면 기존의 유약한 귀족들은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귀족들이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로움바우의 말처럼 뮬테인 역시 마물에 가까운 야묘족을 끌어들인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야묘족은 야만스럽고 강하고 매력적이다. 도덕이라는 개념도 없어서 야묘족 암컷들은 인간 병사들을 유혹하여 종종 군기를 흩으러뜨리기는가 하면, 심한 장난질이나 싸움박질을 해대는 것이다. 오죽하면 그 관능적인 종족을 보고도 병사들이 피해 다니겠는가? 야묘족을 한편을 끌어드릴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 것이지만, 저렇게나 엉망진창인 종족을 대체 어떤 수로 한편으로 끌어드린 것일까?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유신의 주위에 있는 인물들도 전부 의문투성이다. 우선 미키와 마키라는 젊은 소드마스터. 엘프가 소드마스터라니? 게다가 그 강함! 뮬테인조차 그중 하나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미스티도 의문이다. 인간인지는 고사하고 살아있는 생명체인지조차 의심스럽다. 무엇보다도 ‘유신’이란 인간이 의문투성이다. 대체 누구란 말인가? 처음 사막에서 보았을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스무살도 안 먹은 것 같은 애송이처럼 보였지만, 그게 더 무서운 것이다. 순진해 보이는 얼굴 뒤에 감춰진 그 깊은 연륜과 지혜! 그리고 사막에서 싸웠을 때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그 강함! 게다가 마법도 쓸 수 있으니 완전히 전설속의 마검사가 아닌가? 오죽하면 마법사들은 유신을 폴리모프한 드래곤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내었겠는가? 한번 싹트기 시작한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조금씩 조금씩 뮬테인의 마음속을 잠식해 갔다. ‘뭐든 상관없겠지. 지금은 그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 적만 아니라면...’ 뮬테인은 가슴 깊은 곳에서 싹트기 시작하는 여러 가지 의문을 애써서 눌러버렸다. 이런 당연한 의문점들은 이제껏 애써 묻어왔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크로움바우에 의해 열린 의심의 감정은 마음속 깊은 곳에 한 겹 쌓인 채로 떨어지지 않는 진득한 비린내를 남겼다. . . . . 이번화도 끝났습니다. 그리도 또다시 스토리분기에 따르는 잠수... 를 하고 싶지만 담달 10일이 마감이니 잠수탔다가는 빠듯할 것 같네요;; 그럼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B&M 제 6 장 죽음의 땅에서1화 흄의 땅에 라일로스군이 발을 들여 놓은지 일주일, 그리폰 라이더들의 정찰대는 미도우만을 향해 이동중인 흄의 대군을 발견하였다. 남쪽의 흄 본성과 연결된 중앙의 대로를 통해 진격중인 오크와 오우거로 편성된 주력군 약 일만 오천, 동쪽의 산악지대에서 이동중인 놈 이만, 그리고 서쪽의 늪지대 쪽을 횡단중인 고블린 일만 오천! 상당히 빠른 진격속도였기 때문에 이 상태로는 열흘이면 미도우 만 까지 들이닥칠 것 같았다. 마물들의 대군이 무시무시한 행진을 시작한 것이다. 그 숫자도 놀랍지만, 그보다도 두려운 것은 조합이다. 보고에 따르면 오우거 같은 준대형 몬스터는 물론 코카트라이스나 히드라, 자바웍 같은 초대형 몬스터도 간간히 껴 있었고, 상당수의 마법사가 마법지원을 해 주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특히 중앙군을 정찰하려던 그리폰 편대는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가 적 마법사의 마법에 두 기는 격추당하였고, 한기만이 간신히 살아서 복귀한 것이다. 지상군의 주력인 다크블러드는 미도우만 상륙전에서 전멸하였기 때문에 초대형 몬스터를 받쳐주는 적들의 주력은 다크블러드처럼 극강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저 초대형 몬스터다. 코카트라이스의 경우 석화가스를 내뿜고, 히드라는 강력한 브레스를 뿜으며 트롤에 버금가는 엄청난 재생능력을 가지고 있다. 소형 몬스터들이 화살받이를 하는 동안 대형 몬스터들이 본진에 돌입해 버리면 그걸로 라일로스연합군은 파멸이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그리폰 덕분에 제공권을 완전히 쥐고 있어, 미리 적의 대략적인 움직임은 알 수 있다는 것 정도다. 엘프들의 경이적인 시력이라면 사실상 적의 움직임을 손바닥 위에서 보는 것과 같다. 라일로스대륙군도 이제 막 워프게이트가 가동하기 시작해 보급물자를 중심으로 빠르게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낙관적으로 봐도 적의 병력이 도달하기 전에 완전히 준비가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전열이 갖추어 진다고 해도 그 엄청난 물량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적들은 이동하면서 그 수를 계속 불리고 있었기 때문에 막상 미도우만의 방어선까지 도착했을 때 그 총 병력이 얼마나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작전회의는 침울한 분위기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적의 대응이 너무나 빠르다. 상륙전에서 일만에 달하는 마물들을 처리했음에도 또 어디서 금세 저만한 병력을 모은 것이란 말인가? 마물의 땅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정도일 줄은...’ 백전노장의 소드마스터 뮬테인 조차 마물들의 기민한 대처에 놀라고 있었다. “엄청난 숫자군요. 대체 어디서 저렇게나 많은 병력을 끌어 모은 것일까요?” “흄 대륙 전체가 적들의 군사기지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군요.” 마물들의 기세에 질린 귀족들 사이에서는 별반 영양가 없는 얘기가 오갈 뿐이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개 정도 있을 것 같소. 첫째, 가장 약할 것으로 추정되는 산악지대의 놈 무리들부터 깨트리고 부대를 반전하여 미도우만을 지키며 남은 적 병력을 상대하는 것, 둘째, 차라리 부대를 이동시키지 말고 힘을 비축했다가 방어준비가 되어있는 이곳에서 한번에 깨버리는 것.” 뮬테인 백작은 이번에야말로 유신이나 미스티보다 먼저 회의의 주도권을 잡고 싶었다. 그래서 가장 타당한 일반론을 내 놓은 것이다. “그럼 마지막은 뭐지요?”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썩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귀족들은 뮬테인의 마지막 계책에 기대를 거는 것 같았다. 적들의 양과 질이 아군에 비해 너무 월등했기 때문이다. “뻔하지 않소? 이도 저도 다 싫다면 얌전히 워프게이트를 통해 돌아갈 수밖에.” 불길한 침묵이 회의실 안을 메웠다. ‘자, 유신경, 이번엔 어떤 마술을 보여 줄 것이요? 정말로 기대가 크외다.’ 귀족들은 누군가 총대를 메고 세 번째 의견이 가장 좋다고 하면 내심 그쪽을 밀어줄 생각인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뮬테인은 그런 한심한 인간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유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꼭 정공법으로 나가야 할 필요는 없겠지요. 지금 우리에겐 그간의 흄 정벌군이 갖지 못했던 새로운 무기가 있지 않습니까?” 뜻밖에도 입을 연 것은 율리안 왕자였다. “오오, 그럼 왕자님께는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대포알이 꼭 대포 속에서 나가야 적들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 말씀은...” “포탄을 미리 적들이 올 길목에 깔아두는 겁니다. 그리고 적들의 부대가 지나갈 때 폭파시켜 버리면 되지요. 적의 규모로 보건대 결정적인 타격을 주긴 힘들겠지만, 진격속도는 상당히 늦출 수 있을 겁니다. 한두 번 쓴맛을 보면 함부로 부대를 이동 시킬 수는 없겠지요. 그렇게 되면 본대가 뭉치기 전에 각개격파 할 수 있습니다. 적이 우왕좌왕 하는 사이 미스티장군의 부대가 동쪽 산악지역의 놈들을 쓸어버리고, 뮬테인 백작님의 부대가 서쪽 늪지대의 고블린들을 상대하면 됩니다. 마물들이 패퇴하면 좋고, 아니면 후퇴하여 이곳에서 전열을 재정비해도 좋을 겁니다.” “오오! 과연 율리안 왕자님이군요!” 비로소 참모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적들이 이동중인 그 넓은 길 어디에 대포알을 깐단 말입니까? 기껏 깔아뒀는데 다른 곳으로 지나쳐 버리면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가끔 이렇게 똑똑한 의견을 내는 녀석도 있는 법이다. 반대의견을 꺼낸 기사는 뮬테인 백작의 부관이었는데, 사실 이런 자리에서 일국의 왕자가 낸 작전에 딴지를 걸 만한 신분은 아니다. 하지만 그 남자의 말이 옳았기 때문에 모두들 다시 율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우리가 서둘러야 합니다. 유신경은 놈들이 산림지대를 벗어나기 전에 그곳에서 화공으로 태워버리면 되고, 늪지대에서는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을 것이니 뮬테인 백작님께서는 그저 적의 발목을 잡아두는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 같군요.” 그 말에 뮬테인은 그만 발끈하고 말았다. “아니, 나에게는 고작 적의 발만 늦추라는 얘기요? 예메른의 자색 기사단이 그렇게 우습게 보인단 말입니까?” B&M 제 6 장 죽음의 땅에서2화 뮬테인은 설마 이런 취급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전공을 다투고 싶지는 않지만, 이래서는 명색이 연합군이지, 예메른은 완전히 하누스의 들러리 화살받이가 아닌가? 뮬테인은 지금 유신에게 화가 나 있는 것이었다. 저런 작전을 전쟁경험이 전무한 율리안 왕자가 세웠을 리 없다. 틀림없이 유신의 작품일 터인데, 자기에게 이런 역할을 맏기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반면 유신은 유신대로 답답했다. 지금은 전쟁 중이 아닌가? 제노비스기사단 같은 귀중한 전력을 낭비하기 싫어서 병력을 아껴두라는 것인데, 소드마스터씩이나 되어서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한단 말인가? 하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율리안은 뮬테인의 불만을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바꾸도록 하지요. 3군단이 늪지대를, 2군단이 산악지대를 맡으면 불만 없겠지요?” ‘헉!’ 율리안의 말에 유신은 속으로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확실히 율리안 왕자가 유신의 꼭두각시 노릇을 잘 하고 있다고는 해도, 이런 부분에서 문제점이 들어나는 것이다. 작전의 구체적인 요지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니, 나름대로 조금씩 융통성을 부린다는 것이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유신이 생각한 이 작전의 요지는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산악지방으로 갈 경우 화공이 가능하긴 하지만, 그 후에는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 전투가 불가피하다. 그러니 병력의 소모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반면 늪지대에서는 계속 적의 발만 늦추는 것이니 크게 싸울 일은 없다. 그래서 일부로 3군단이 위험한 산악지대로 가겠다고 한 것인데 그것까지 알지 못한 율리안은 그냥 별 생각 없이 2군단과 3군단의 위치를 바꿔버린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유신이 껴들었다간 다른 귀족들이 어떻게 나올지 생각하기도 싫었기 때문에 그냥 이대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자세한 작전 입안은 유신경이 해 주시지요.” 비로소 유신에게도 말할 차례가 왔다. “잘 아실 거라 생각하지만, 이런 종류의 싸움은 타이밍이 제일 중요합니다. 각 작전지역까지 이동하여 적들을 치고, 반전하여 다시 미도우만으로 돌아온 후, 곧바로 적의 주력과 싸우거나 수비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병사들의 피로도가 상당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병사들의 체력 안배와 적의 진군속도를 고려한 시간싸움을 해야 합니다.” 유신이 막 구체적인 작전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그정도 쯤은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럼 대충 작전은 나온 것 같으니 2군단의 세부 작전은 내가 세울 것이오.” 하지만 화가 단단히 난 것인지, 뮬테인은 더 이상 유신의 설명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아... 저...” 당황한 율리안이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다른 귀족들도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유신의 설명은 듣기 싫다는 태도였다. “1군단은 어차피 이곳에서 주둔지 방어를 해야 할 터이니 서부 늪지대의 공격작전은 유신경과 미스티경이 알아서 하겠지요. 저희는 병사들이나 독려하도록 하겠습니다. 거만함. 이번의 압승이 자기네들이 잘 싸워서 얻은 것이라 생각하는 어이없을 정도로 한심한 무리들. 율리안은 하도 기가 막혀서 그만 말릴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유... 유신경, 미안하게 됐군요. 제가 대신 사과를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왕자님 잘못이 아닌걸요. 저에게도 다른 수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뮬테인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가 맡게 된 동부 산악지대의 지도를 면밀히 분석하고 있었다. 부대가 이동하기 쉬운 곳과 폭발이 일어났을 때 가장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곳을 찾는 중이었다. 큰소리 치고 나왔으니 이번 작전에서 전과를 올리지 못하면 예메른 전체의 수치다. 하지만 드워프캐논의 대포알의 정확한 위력이나 주의사항을 알지 못하는 뮬테인으로서는 답답하기만 했다. 똑. 똑. “사령관님. 부관 작센듀오입니다.” 어두운 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은 기운찬 목소리와 함께 그의 부관이 들어섰다.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것 같아 보이는 어린나이임에도 2군단 사령관인 뮬테인의 부관 역할을 할 만큼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내가 빼어나다는 뜻이다. “오오, 무슨 일인가?” 뮬테인은 듀오를 보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조금 전의 작전회의에서 율리안이 낸 작전의 허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도 바로 그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단순히 치기어린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럴 말을 타국 왕자의 면전에서 할 수 있을 만큼 배짱도 좋고 상황판단이 기민하다는 뜻이다. “네, 각하. 이번 작전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이 있어서 왔습니다.” “으음, 그래? 뭔지 말해보게.” 작센듀오는 그가 직접 기사학교에서 눈여겨보았다가 졸업과 동시에 그의 곁으로 끌고 온 녀석이다. 출신은 그다지 빼어난 것 같지 않지만,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신이 직접 고른 인재가 이렇게 훌륭하게 커 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뮬테인은 예메른을 이끌어 갈 이 젊은 인재에게 전쟁을 보여주고 싶었고 그래서 이곳까지 끌고 온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 건방진 부관의 말도 들어줄 의향도 있었다. “포탄을 매설하는 지역까지 가는 데는 그리폰을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숲에 바짝 붙어서 저공으로 날아가면 마법탐지에도 쉽게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리폰을 백여마리만 포탄의 수송으로 뺄 수 있다면, 두세 번 가량 왕복하는 걸로 적들에게 타격을 줄 만큼의 포탄을 나를 수 있습니다. 포탄은 미도우만으로부터 멀면 먼 곳에 매설할수록 더 많은 시간을 벌 수 있겠지요. 적들이 진군하면서 계속 발 밑을 신경 써야 할 테니까요.” “오오, 좋은 생각이구나. 허헛.” 원래부터 맘에 들어 하던 녀석이 좋은 안을 내 놓자 뮬테인은 마치 자랑스런 자식을 보는 것처럼 뿌듯하고 기뻤다. 하지만 뮬테인은 모를 것이다. 작센 역시 유신의 화랑1기생도 출신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리폰을 이용하자는 작전 역시 유신의 작품이라는 것을. B&M 제 6 장 죽음의 땅에서3화 다음날 아침, 뮬테인이 이끄는 그리폰 백이십여마리가 동쪽 산악지대를 향해 날아올랐다. 10kg 정도 나가는 무게의 포탄을 20개씩 짊어지고도 날아오를 수 있는 그리폰! 놀랍기만 할 뿐이다. 포탄을 매설하는 작업은 섬세한 엘프에게는 무리이기 때문에 그리폰라이더는 빼고 그리폰 나이트만이 출격했다. 포탄 무게도 만만치 않은데, 아무리 가볍다 해도 거기에 별 도움도 안 될 엘프들 까지 타는 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포탄을 하나라도 더 싣는 것이 낳다. 그리폰라이더가 빠진 이상 정밀하게 그리폰과 교감을 나누며 비행지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전투는 무리다. 하지만 어차피 전투를 목적으로 출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뮬테인은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해 이십여마리의 그리폰이 호위를 하고, 나머지 그리폰은 수송에만 신경을 쓰도록 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2군단 주력 병력도 산악 지대로 진군을 시작했다. “역시 예메른이 군사강국이란 말을 알 것 같군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미스티는 이동을 시작한 예메른의 2군단을 보면서 감탄을 하는 중이었다. 팔천에 달하는 예메른의 전투부대는 작전 명령이 떨어진지 겨우 반나절 만에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아아, 이제 우리도 시작해야지. 그리고 우리가 2군단의 그리폰을 이용한 포탄 수송 작전에 감탄해서 그 작전을 따라한다는 소문도 흘려. 이걸로 어느 정도 예메른의 사기도 오르고 체면도 세울 수 있겠지.” “과연... 점점 더 여우스러워 지는 군요.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만...” 미스티는 마법계에서 꽤 오랫동안 유신을 보좌해 왔지만, 그의 주인이 흄에 오고 나서 라일로스에 있을 때와는는 확실히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거나 전쟁이니까 말이야. 내 목숨만 걸린 일이 아니니 수단방법을 가리면 안 되지. 인간은 둘째 치고 엘프나 드워프들에게 미안하잖아.” 이것이 책임감이다. 진정한 지휘관이라면 어떤 불명예나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그로써 단 한명의 병사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그리고 전쟁의 능률을 올릴 수만 있다면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소모적인 장사에서 거래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살아있는 목숨이기 때문이다. “쿡, 지금 말씀, 다른 지휘관들도 들었으면 좋겠군요.” 미스티는 진정으로 존경할 만한 지휘를 하고 있는 유신을 보며, 겨우 이런 곳에서 썩고 있는 게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 “난 사양이야. 그 쓸모없는 놈들,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떠들어댈지 모른다고.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는 건 슬픈 일이야.” 그 사이 예메른의 보병부대는 물론 기사단까지 출발을 시작했다. 산악지대로 이동해야 하고, 많지는 않더라도 지원화기로 쓸 대포의 이동을 위해선 아무래도 말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사단의 말까지 보급물자 수송용으로 돌려졌다. 미도우만 방어에 필요한 병력과 무기를 중심으로 워프를 시작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본국에서 지원받은 말의 수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예메른의 기사단 내에서는 그에 대해 불평하는 기사가 없었다. 기사로서의 명예를 상징 하는 검과 말. 그중 하나인 말을 수송용으로 돌리는데도 불평하지 않을 만큼 승리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겠다는 각오다. 그리고 기사단은 산악지방에서도 싸울 수 있을 만큼 훈련되었다는 뜻이고, 말을 내려서도 그 전투력이 줄어들지 않을 절대적인 자신감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우왕좌왕 하는 모습 따윈 전혀 없었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전투준비를 끝내는 제노비스기사단을 보니 뮬테인 쪽은 그다지 걱정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뮬테인이 이끄는 그리폰들이 떠나고 나자 유신의 3군단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그리폰을 이용해 포탄 수송을 시작했다. “그럼 미스티, 본대를 부탁할게. 난 포탄 매설하는 걸 지휘하겠어.” 귀족들은 염치없이 유신이 뮬테인의 작전을 따라한다고 수군거렸지만, 그런 것쯤은 상관없었다. 그리고 만약 이런 지휘관들이 유신이 그리폰을 이용한 수송 작전을 실제 행하는 것을 지상에서가 아닌 공중에서 함께 보았다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신이 지휘하는 그리폰들은 겨우 지상에서 5미터를 벗어나지 않는 초저공비행으로 날면서도 진형을 흩으러 트리지 않는다. 선두의 정찰대에는 유신이 직접 탄 니케가 길안내를 하고, 후미에도 그리폰을 두어 편대 비행에 허점이 없도록 하고 있었다. 너무 지상에 붙어서 날기 때문에 기류를 탈 수 없다. 그래서 속도를 내기도 힘들고, 그리폰에게 가는 부담도 상당할 터였지만, 마법탐지를 피하기 위해선 할 수 없었다. 한편, 그리폰 주력부대는 초저공비행을 하면서도 조기경보를 위해 두 마리 정도는 높은 곳을 날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조금... 조금 더 남았다. 이번 한번만 더 막아내면 다음부턴 우리도 공세로 나가도 되겠지. 흄 네놈도 각오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발밑을 휙휙 지나가는 초록색의 나무들, 그리폰의 저공비행에 놀라서 흩어지는 작은 동물들과 새들. 틀림없이 라일로스의 그것과 비교해도 생명체의 숫자가 모자라는 것도 아니고, 그 아름다움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마물의 땅이라 해도, 대체 뭐가 인간들의 땅과 다르단 말일까? 오히려 생명체의 종류가 다양하단 점에서는 인간들이 머무는 곳보다 나을지도 모르겠어. 루시펠님의 말처럼 이들에게 약간의 빛을 나눠 줄 수만 있다면... 어쩌면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도...” . . . . 식충 식물을 샀습니다. 아마 내일쯤이면 도착할것 같군요. 으음... 그 파리지옥 같은거에 손가락을 집어 넣으면 정말로 아플지... 두근두근 하고 있습니다. B&M 제 6 장 죽음의 땅에서4화 포탄을 매설하는 작업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주변이 온통 습지이기 때문에 땅을 파는 게 힘들진 않으니 포탄을 매설하긴 쉬울 테지만, 피할 곳이 많은 늪지대에선 포탄의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니 지뢰로 쓰일 포탄의 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매설 지역의 선정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단 주변에 늪이 많기 때문에 주는 화약류의 무기는 별반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처음 미도우만을 공격했던 방식으로 늪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 정도의 강력한 화공을 가하지 않는 한 그다지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지형상 늪지를 가로지르는 길은 좁았고, 그 양쪽으로는 이동하기 곤란한 늪이기 때문에 이곳을 점령하고 싸우면 유리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뢰의 효과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지형은 아니다. 이곳을 통과할 수 있는 적의 병력 수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폭발이 일어나 봐야 길 위에 있는 고블린만이 휘말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신은 이곳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리폰을 내리고 주변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하지만 미스티로써는 아무리 살펴봐도 이곳에서는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다른 장소를 더 찾아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이런 곳에선 아무리 포탄을 지뢰처럼 쓴다고 해도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요?” 답이 없자 미니미스티 다른 곳에 포탄을 매설할 것을 건의 했다. “아니, 타이밍상 어쩔 수가 없어. 죽든 살든 이곳에서 승부를 봐야 해. 본대가 이 근처에서 전열을 가다듬을 정도의 타이밍이면, 적들도 아마 이곳을 통과할 거야. 이 앞으로는 포탄을 매설할만한 마땅한 곳도 없고...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여기서 끝장을 보는 편이 좋겠다.” 유신과 미니미스티는 일단 그리폰들의 날개를 쉬게 하면서 지형 하나하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흐음, 여기부터 환영결계를 치기 시작하면 저 앞쪽의 거대 늪지대로 적의 부대를 유도할 수 있겠다.” “오오, 좋은 작전이군요. 하지만 적의 수가 너무 많은데... 앞의 늪지를 메우고 그 위를 지나가면 될 것 같은데요?” “상관없겠지. 그러려면 어차피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하니까. 마물들이 빠진 늪지대에 진동충격파탄 하나만 쏴 줘도 그 속에 들어있는 마물들은 전멸이야. 그리고 늪지대 일대에는 독을 풀고 화공을 퍼붓자. 그럼 늪으로 도망쳐도 꽤 심각한 타격을 받을 거야.” 독이나 생화학 병기를 이용한 작전을 가장 잔인하고, 그만큼 확실히 적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확실히 말해서 인륜이라는 것에 반하는 것이다. “저... 정말 쓸 건가요? 그러다가 엘리시엘님이나 세라피님의 귀에 들어가면...” 화공도 아닌 독공이라니, 미스티로서도 말리고 싶은 과격한 작전이었다. “으음, 그래서 그리폰라이더는 안 데리고 왔잖아.” 그런 말을 하는 유신도 어두운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런 문제는 아니라고 보는데요. 세상에는 인륜이라는 것도...” “무슨 말인지 알아. 하지만 이대로 저 많은 수의 적들이 밀고 들어오면, 이번 공격은 막는다 해도 피해가 너무 커! 그래서는 기껏 이겨 놓고도 병력이 받쳐주지 않아서 진격할 수가 없다고!” 유신도 속으로는 이런 작전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미스티가 말리자 더욱 화가 나는 것이다. “하지만 정공법으로 조금씩 밀고 나가도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만. 굳이 이곳으로 지나갈 고블린들은 전멸시키지 않더라도 미도우만 회전에서 깨버릴 수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시간이야. 이봐! 나도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하고 내린 결론이야! 나라고 해서 마음이 편한 줄 알아?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흄을 쳐부수고 비얀을 물질계로 보내야 한다고. 그걸 위해서라면 독이든 화학병기든 쓸 수 있는 건 뭐든 써야 해. 독을 푼다고는 해도, 어차피 마법계에 있는 독을 이용하는 거잖아. 문제는 없어!” 이런 싸움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옳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유신은 몸속 깊은 곳에서 쓴물이 올라올 만큼 자신이 역겹고 한없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다. 유신은 이 전쟁을 한 달 이상 끌 생각이 없었다. 하루, 한시라도 빨리 비얀을 물질계로 보내야 하는 것이다. 단 한명의 용신화랑이 물질계에서 구할 수 있는 생명의 수는 이곳 마법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성계대전이 끝 난지 이제 오년. 아직 산발적인 마족들의 저항이 끊이지 않을 테고, 간신히 개척하기 시작한 식민 행성이나 유인행성에서도 슬슬 불만이 터져 나올 때가 된 것이다. 그러니 어떻든 강한 무력이 있어야 한다. ‘하루라도 빨리 비얀이 물질계로 가서 용신화랑의 역할을 해 줄 수만 있다면 아리엘님이나 샤피의 짐도 많이 덜어지겠지.’ 유신에게는 당장의 전쟁이나 마법계의 평화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역시 물질계가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 전 유신님의 그림자. 그게 유신님의 뜻이라면 따르겠지만... 솔직히 걱정됩니다. 물질계도 아닌 마법계에서 이런 행동이 어떤 부작용을 낳을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지금은 무엇보다도 이기는 것이 중요해. 그것만 생각하자.” 유신은 일단 그리폰나이트들을 모아놓고 포탄을 매설시 효과적인 곳과 주의사항에 대해 간단하게 가르쳐 줬다. “일단 한사람이 다섯 개씩의 일반 포탄을 매설한다. 개인이 가지고 온 포탄은 연동하여 한꺼번에 폭발할 수 있게끔 설치 해. 적을 최대한 포탄지대 근처로 끌어들이고, 머리와 꼬리는 잘라버리고 되도록이면 몸통이 통과할 때를 노려라. 포탄이 터지기 시작하면 마물들은 순간적으로 통제를 벗어나 내달리게 될 것이다. 그 사이 내가 환영결계를 발동하면 적들은 늪지대로 유인될 거야. 일단 그곳에서 적의 숫자를 어느 정도 줄여 놓고 제 2 방어선에 두 번째 포탄이 터지도록 해. 여기서는 일반 화약이 아닌 마법탄을 사용한다. 늪에 독을 풀어 놓으면 늪으로 후퇴하지 못할 거야. 미도우만 상륙전에 쓴 것과 같은 강력한 화공이 될 수 있도록 미리 압축산소를 발생시키는 마법탄을 뿌려두고. 이상, 질문 있나?” “없습니다!” “좋아. 작전 개시!” B&M 제 6 장 막간극. 카론&카린 “쿵! 쾅! 쿵! 쾅!” 카론의 본체가 잠들어 있는 명황계 드래곤 로어. 아침부터 들려오는 시끄러운 심장고동 소리에 돌아버릴 지경이다. “아악!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무슨 대포를 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 카론의 협박으로 그의 본체를 지키는 신세가 되어버린 웜급 그린드래곤 드미니테 록셀린은 그 짜증스런 소란 때문에 2년 만에 잠에서 깨서 주변에 눈에 띄는 것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는 중이었다. 그는 혼자서만 이 소란에 휘말리는 것이 억울했는지, 근처에서 드미니테를 지원하기 위해 주둔중인 인간의 부대에 사태 해결을 위한 소집을 명했다. 특별히 명령할 것도 없었다. 그가 날뛰기 시작하자 인간들이 알아서 모여든 것이다. 혹시나 용제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하여 용 전문 의사부터 과학자, 경비대장, 그리고 근처의 용족들까지 모두 모여들었다. 하지만 카론의 본채로 통하는 결계는 아직까지 강대하게 가동 중이었고, 다른 생명체의 출입을 철저하게 막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 근처에 있다가 소란을 듣고 모여든 열대여섯 마리의 용들이 결계를 뚫어보려 했지만, 용제의 힘은 너무나 강력하여 결계에 작은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결국 모두들 대책 없이 그 소리가 가라앉을 때 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화성에 있는 카론의 별장, 용의 호수. 카론은 분위기 있는 밤을 연출하기 위해 그의 별장은 물론 용의 호수 너머에 있는 인간들의 도시에까지 새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게 하는 중이었다. 붉으스름한 화성의 대기 위로 하얀 눈이 쏟아지는 장면은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인공으로 눈이 내리게 하는 것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화성 정부에서 인공눈을 뿌리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크리스마스 때 보다도 훨씬 굵고 탐스러운 함박눈이 펑펑 내리자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좋아 하였다. 용제의 별장 안, 호수 위로 눈이 내리는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아담한 방의 벽난로에서는 장작들이 탁탁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적당한 크기의 침대에는 몸의 굴곡이 다 들어나는 얇은 실크 잠옷만 걸치고 있는 굉장한 미인이 커다란 베개에 기대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후하! 후하!’ 카론은 일부로 그리 크지 않은 사이즈의 침대를 준비했다. 그녀의 채취를 구석구석에 다 베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카린을 도망 못 가게 꼭 끌어안고 자려면 이정도 싸이즈가 적당한 것이다. 아니, 그는 자지 않을 것이다. 무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절대 자지 않을 작정이다. “저... 카론님은 강하지요?” 카린은 그녀의 옆에서 절반쯤 몸을 일으킨 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있는 푸른 장발의 사내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어 보았다. “당연하지! 전 우주에서 나보다 강한 자는 없다!” 카론은 당장 심장이 튀어나와 죽을 것만 같았지만, 여유 있는 척 하며 그의 옆에 있는 카린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럼 저를 지켜줄 수 있나요?” 카린은 그의 뺨을 쓰다듬고 있는 카론의 손을 꼭 잡으며 진지한 눈빛으로 물어보았다. “당연하다! 넌 나의 레이디! 네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난 너를 지킬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카론은 그의 작은 새가 아직 두려워하기 때문에 무언가 확신을 얻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럴 때는 여유 있는 모습으로 확신을 주면된다. 절대 서두르지 말고 신뢰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밥상은 차려졌고, 입 안에 떠 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강한 적이 와도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이런 질문을 하는 카린이 참을 수 없이 귀엽다. 이렇게까지 흥분해 본 것은 정말로 처음인 것 같았다. “물론! 너를 위해 싸운다면 난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설혹 루시펠님이 돌아온다 해도 너에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해.” 설사 봉인된 최강의 헬마스터 아스모데우스가 온다 해도, 지금이라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는 지.금. 최.강.인 것이다. “그럼 안심이에요.” 카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등에 걸쳐 두었던 베개를 머리에 베고 누웠다. “그래. 그러니까 이제 나한테...” 멀고먼 여정, 용족에겐 어울리지 않는 극한의 인내력을 발휘해서 지켜온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그 말이 뜻하는 바를 감지하지 못한 카론은 얼떨결에 그녀의 옆에 누운 채 멀뚱멀뚱 천장만 바라보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대해 고민했다. “어?” 비로소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낀 카론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가장 강한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지요.” “......” “자... 잠깐, 그... 그럼 그냥 이대로 자자고?” “음? 뭔가 할 거라도...?” “그... 그게...” 카린은 다시 상체만 조금 일으켜 그녀의 작은 얼굴을 카론에게 내밀었다. “쪽” 카린의 부드러운 입술이 닿을 듯 안 닿을 듯 카론의 이마에 살짝 머무르다 떠났다. “아!” 그녀의 향긋한 살내음에 머릿속의 퓨즈가 당장 끊어질 것만 같았다. 카린의 그리 크지 않은 적당한 크기의 가슴이 눈앞에서 어른거리자 체면이고 자시고 당장 덮치고 싶었다. 카론은 뭔가 결심을 한 듯,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카린은 그의 양 손을 꼭 붙잡고 그녀의 배 위로 끌어 간 후, 그대로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안녕히 주무세요.” “.....” 조금쯤은 몸을 뒤척여 보려고 해도, 카린에게 양 손을 다 잡혀 있으니 도통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서운 번민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레이디에게 한 아무리 강한 적이 온다 해도 지켜주겠다는 약속! 이것을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눈 딱 감고 사고친후 뒷수습을 해야 하는 가? 하지만 설사 전 우주에 악당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카린에게 만큼은 악당이란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카론 최대의 행복하고 비참하고 기분 좋고 고통스러운 밤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쿠아아아아아아” 카론의 본체가 잠들어 있는 드래곤 로어 열대여섯 마리의 용이 덤벼도 상처하나 나지 않았던 수십 겹의 방어결계가 종이짝처럼 찢어발기며 용성제 카이드리아 엘 엑시나에의 강력한 썬더브레스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우... 우아아악!” 그 충격으로 일대에는 난리가 났지만, 카론의 절망에 비하면 이건 정말 작은 일일 것이다. . . . . 식충식물이 왔습니다. 생각보다 크기가 너무 작아서... 바퀴벌레의 삼분에 일 정도 합니다. 일단 파리가 들어가도 입을 닫을 수 없을듯 하네요. 다섯개의 덫이 있는데, 그중 한개는 뭘 먹었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고, 한개는 입을 절반쯤 닫았는데 그 속에는 하루살이로 보이는 곤충이 보이는 군요. 신기한 것은 그거 하나 두니까 제 방에 있던 집개미들이 전부 모습을 감추었다는 겁니다. 방정리를 해서 그런건지, 아니면 식충식물의 영향인지는 조금 더 관찰해 봐야 할것 같구요. B&M 제 6 장 죽음의 땅에서5화 “둥둥두둥두두두둥” 마치‘나 여기에 있소’라고 외치는 듯한 북소리와 함께 고블린들을 주력으로 한 마물들의 대부대가 전진하고 있었다. “캬아아악, 께에에엑” 늪지대를 가득 메우는 북소리, 각양각색의 괴물들의 의미 없는 고함 소리. 근처에 있던 야생동물들은 도망 친지 오래고, 포탄을 폭발시키기 위해 매복해 있는 3군단의 소드마스터들과 유신 직속의 사냥개 부대들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일반의 병사라면 감이 좋은 고블린이나 혹시나 있을지 모를 마법사에게 잡힐 수도 있다. 그러니 조금 위험하더라도 쓸 수 있는 소드마스터와 사냥개 부대를 전부 끌어 온 것이다. “빠르군. 예상보다 하루 반나절이나 빨랐어.” 고블린들의 진군속도는 유신이 넉넉잡고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빨랐다. 늪지대에 들어서면 속도가 떨어질 거라 예상했지만,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블린이 소형 몬스터라 해도 늪지를 뛰어다니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무 위를 달릴 수 있기 때문에 속도가 줄지 않은 것이다. 상대적으로 덩치가 큰 몬스터들은 뒤로 쳐져 버렸기 때문에 부대가 양분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3군단만으로 싸움을 걸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았다. “이거 좋지 않은데요? 처음 봤을 때 보다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늘었군요.” 진격해 오면서 다른 마물들을 흡수했는지, 처음 보고받았을 때 보다 그 수가 훨씬 불어 지금은 이만 오천에 이르는 대군으로 불어 있었다. 만약 지금 그 숫자를 줄여놓지 않으면 미도우만의 회전이 얼마나 끔찍해 질지 생각하기도 싫었다. 적의 주력과 뮬테인이 막으러 간 부대도 같은 상태라면 아무리 라일로스 대륙에서 지원이 온다 해도, 이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유신이 지휘하는 3군단이 1차 저지선에 도착도 하기 전에 고블린의 군대는 이미 지뢰지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할 수 없군. 1차 저지선은 지뢰만 폭발시키고 버린다. 주력부대는 2차 저지선에서 방어진을 갖추고 전투준비를 하도록!” ‘서두르지 말고, 하나, 하나, 하나’ 지뢰지대 깊숙이까지 들어온 것을 확인한 유신은 조금이라도 더 끌어들이기 위해 넉넉하게 타이밍을 잡았다. “좋아! 시작” 유신은 마물들의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신호탄을 하늘에 쏘았다. “콰쾅, 콰콰콰쾅” 마물들의 대군이 이동하는 중간 중간, 거의 이백여 군대에서 동시에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끼에에에엑” 마물들로서는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난 폭발이었다. 천여발의 폭탄이 한꺼번에 터진 화력과 소리다. 번개나 천둥 따위가 비교될 상황이 아니었다. 지휘체계가 확실하지 못한 마물들은 폭발과 동시에 잠시 바닥에 엎드렸다가는 곳이어 아무렇게나 폭주하듯 내달리기 시작했다. “좋았어! 죽어봐라!” 다시 녹색의 신호탄이 하늘을 가르자 중간 중간에 매복해 있던 야묘족과 소드마스터, 사냥개 부대들이 적의 준대형 몬스터나 마법사를 위주로 사냥을 시작했다. 지뢰 같은 하이테크한 공격은커녕 대포에 의한 공격조차 받아본 적 없는 고블린들은 완전히 혼비백산했기 때문에 옆에서 동료가 죽어나가는 것도 알지 못했다. 한번 달리기 시작한 마물들은 그 가속도 때문에라도 멈추지 못한다. 단지 달리고 또 달리고 아무 의미 없이 내달릴 뿐이었다. “좋았어! 지휘계통이 무너졌다. 이제 나도 시작해야겠군.” 그 근처의 가장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신은 재빨리 그가 미리 봐 두었던 늪지대로 달려갔다. “진실을 가리는 미혹의 장막이여, 어둠을 부르는 불안의 싹이여, 흉폭한자들의 눈과 귀를 가리울지니...” 유신은 주문을 외우며 동시에 여러 가지의 복잡한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그의 발밑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이 환한 광체를 내며 그 안에 그려져 있던 마법문자가 빙빙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법진이 완성되자 마물들이 통과할 길목부분 부분에 있는 랜드마크적인 바위나 나무들의 아래에 있는 마법문자들이 유신이 만든 마법진에 반응하기 시작하면서 결계가 발동되었다. “성공이다!” 입으로는 주문을, 손으로는 수인을, 머릿속으로는 마법을 발동시켜 그것을 연계하는 능력! 이것이 유신 더 실버스타가 쓰는 마법이다. 겨우 3서클 마법의 응용에 지나지 않지만, 넘쳐나는 마나를 이용해 반경 1km에 이르는 지역을 완전히 환영결계로 덮어버린 것이다. 결계가 완성되자 순간적으로 경치가 찌그러져 보이는가 싶더니 다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좀 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앞으로 한발 짝만 더 내딛으면 전후좌우도 구별 안 되는 상당히 지독한 환영결계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결계는 적을 헤매게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유신은 그 속에 하나의 방향성을 두어 적들을 거대한 늪 속으로 유도하도록 만들었다. 마침내 고블린들의 1파가 결계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뒤를 이어 셀 수도 없는 많은 수의 고블린과 몬스터들이 결계 속으로 빨려들어 갔지만, 결계 밖으로 빠져나오는 몬스터는 없었다. 그들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도 알지 못하고 계속 내달리다가는 늪 속에 빠져버렸다. 유신이 친 1km의 결계는 거대한 지옥의 입구가 되었다. 하지만 30분 정도 지나고 나자 마침내 하나 둘 결계를 뚫고 나오는 몬스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커다란 늪지대가 고블린의 시체로 메워져서 그 위를 달려서 빠져나온 것이다. “환장 하겠군. 대체 숫자가 얼마나 많은 거야?” 유신보다는 아마도 고블린들이 훨씬 환장할 것이지만, 당장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고블린들의 무리를 보자 암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냥개부대와 소드마스터들의 도륙을 피해 살아남은 마법사가 유신의 결계를 푼 것인지,‘지잉’하는 귀 울림과 함께 결계가 파괴되고 말았다. B&M 제 6 장 죽음의 땅에서6화 마물들의 수가 많은 만큼 그것들을 통제하는 고급 몬스터나 마법사들의 숫자도 상당할 터이다. 그런데도 늪이 메워질 정도로 고블린 주력군을 유인될 동안 유신의 결계가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은 소드마스터들과 야묘족, 그리고 사냥개 부대가 적의 마법사들을 잘 잡아 주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정도면 대성공이라 할만하다. 결계가 깨지고 보이는 늪지대의 모습은 처참했다. 늪이 얼마나 깊은지는 모르겠지만, 그 속으로 다이빙한 마물들 덕분에 늪이 넘쳐서, 예민한 유신이 봤을 때는 수위가 변했다는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늪의 밑바닥을 깔아준 마물들을 밟고 머리만 겨우 내민 채 조금씩 허우적거리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쓰는 안쓰러운 마물들의 모습이 수도없어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몇 마리는 마침내 동료들의 머리를 밟고 늪지대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좋았어! 지금이다!’ 유신은 이제 늪지대에 빠진 마물들이 포화상태라는 것을 알고 미리 늪지대 속에 넣어 두었던 마법 충격파탄을 폭발시키기 위한 주문을 발동시켰다. 발화만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별반 어려울 것도 없다. 하지만 그 효과는... “쿠쿠쿠쿠쿵” 육중한 폭음과 함께 피반, 살 반의 질척한 물기둥이 백여 개나 솟아올랐다. 순간적으로 솟아오른 물보라로 늪지대 전체에 새하얀 커튼이 쳐진 것 같아 보였다. 늪지대라 시체가 떠오르진 않았지만, 늪 안쪽은 속이 이미 지옥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폭발이 여파가 가라않고, 요동치던 늪이 점차로 잠잠해지자 점차로 그 일대가 고블린들의 검푸른 피 색으로 변해갔다. 간신히 늪지대를 빠져나온 고블린들의 재앙도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한숨 돌리기도 전에 고약한 냄새와 함께 조금씩 살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캬아아아아” 고통에 몸부림치는 마물들의 비명은 온 늪지대에 비참한 장송곡처럼 울려 퍼졌다. “발검!” 그리고 마침내 3군단의 돌격준비가 끝났다. “세워 검!” 워프게이트가 완성되면서 지원받은 하누스의 지원군 까지 합쳐져서 유신이 이끄는 3군단은 이미 팔천을 넘어서고 있었다. 팔천개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부르는 강철의 날이 일사분란하게 병사들의 가슴 앞으로 모아졌다. 이런 장관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지금은 그런 웅장함 보다도 늪의 가장 후미진 구석에서까지 풍기는 죽음의 냄새에 취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전군 돌격! 마물들의 씨를 말린다!” 마물들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우우우웅” 마물들의 비명소리가 무색해지는 웅장한 나팔소리와 함께 독에 중독 되어 아무렇게나 늪지를 굴러다니는 마물들을 향해 시리도록 새하얀 팔천 개의 죽음이 쏘아져 나갔다. “와아아아아” 완전한 전의 상실. 도망갈 퇴로는 독에 오염된 늪이고, 정면에서는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최정예 3군단이 거대한 강철의 벽을 이루고 있다. 이미 넋이 반쯤 빠져버린 고블린들의 머리 속에는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나 저항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 따위는 흔적도 없었다. 무섭도록 비죽한 형태의 강철들은 성난 노도 같이 질주하여 불쌍한 마물들의 몸뚱이를 내키는 만큼 유린했다. 짓밟고 유린하고 부수고... 느린 이동속도 덕분에 후미로 쳐져있던 대형 몬스터들은 주력부대인 고블린들의 파멸을 막기에는 너무나 느렸다. 결국 대형 몬스터 부대가 고블린 부대에 합세할 때 까지 유신이 이끄는 3군단은 잔인한 육식동물처럼 적의 육체를 탐하고 또 탐했다. 하지만 코카트라이어스와 자바웍을 앞세운 적들의 초대형 몬스터가 하나 둘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보병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좋았어! 주력군 후퇴! 지금부터는 무리하지 말고 그리폰에게 맡겨라!” 노란색 신호탄이 하늘에 오르자 유신의 3군단은 얄미울 정도로 일사분란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소드마스터나 야묘족이 아닌 일반 보병이 초대형 몬스터와 싸우게 되면 그 피해가 너무 크다. 코카트라이어스는 머리는 커다란 닭처럼 생겼고, 몸통은 뱀 비늘로 덮여 있는 초대형 몬스터다. 지능은 금붕어보다 조금 낳은 정도로 엉망이지만, 매우 난폭하고 높이는 10미터가 넘으며 석화브레스를 뿜기 때문에 바람 부는 방향에 따라 자칫 천문학적인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것이다. 코카트라이어스에게는 접근하여 공격하기도 뭐한 것이, 길고 강력한 꼬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못 접근했다가는 그 꼬리에 쓸려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자바웍은 숲이나 늪지대에 사는 대형 몬스터로, 얼핏 보면 드래곤으로 착각할 만큼 크고 위협적이다. 싸움은 주로 긴 팔을 이용하여 주변의 적들을 쓰러버리거나 커다란 날개로 폭풍을 일으켜 적을 날려버리는 방식을 쓴다. 마나를 이용해 중력을 극복할 수 없는 자바웍은, 날개의 힘만으로 날아오르기엔 그 덩치가 너무나 크다. 비록 이런 큰 날개를 가지고 있음에도 마나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비행은 할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그 두꺼운 팔과 날카로운 손톱만으로도 충분히 강한 것이다. 그런 덩치에 걸맏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고, 지능 역시 상당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선 코카트라이어스보다도 더 위험하다. 하지만 아무리 날고기는 코카트라이어스와 자바웍이라 해도 하늘을 나는 그리폰이 상대라면 완전히 이야기가 달라진다. 잔인한 한여름의 태양이 그 몸을 감추어갈 무렵, 사신이 뿌려대는 붉은 미소와도 같은 노을을 등에 업고 백여 마리의 그리폰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가끔 자바웍이 뿌리 채 뽑아 던지는 나무들이 위협적이긴 했지만, 하늘의 제왕인 그리폰이 이정도 공격에 격추될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평소의 날렵한 모습과는 다르게 뒤뚱거리며 천천히 날고 있었다. 아마도 마물들이 봤다면 간신히 추락하지 않고 떠 있는 그리폰을 우습게 볼 수도 있겠지만, 저 날렵한 녀석들이 대체 왜 뒤뚱거리는 것인지를 알게 되면 그런 비웃음은 사라질 것이다. 나는데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그리폰의 등과 배, 심지어는 다리에까지 포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 아닌가? 한두 마리 정도는 지상의 몬스터가 퍼붓는 공격에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 피해는 아주 경미한 것이었다. 그리폰을 상대할 수 있는 마법사들이나 마법을 쓸 수 있는 몬스터들이 너무 많이 죽었기 때문에 마물들은 단지 멍하니 그리폰을 바라볼 뿐이었다. 공중에 떠 있는 그리폰은 절망 그 자체였다. 그리고 붉은 사신들은 마침내 적 대형 몬스터들의 머리 위에 그들이 고생하여 들고 온 무거운 짐들을 떨구기 시작했다. B&M 제 6 장 죽음의 땅에서7화 한편, 유신이 이끄는 3군단이 처절할 정도로 고블린 부대를 유린하는 사이, 뮬테인이 이끄는 2군단은 놈들이 주력을 이루는 산악지대에서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지뢰를 이용해 적의 발목을 잡고, 강력한 화공까지 완벽하게 성공하여 놈의 중앙군에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주었음에도 전선이 교착되어 버린 것은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뮬테인도 마물의 땅인 만큼, 적들이 이동하면서 다른 몬스터들을 흡수하여 수를 늘릴 거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껏해야 오천 정도 더 늘어날 줄 알았지만, 그 수는 놀랍게도 처음 보고받았을 때의 두 배 이상으로 늘어서 뮬테인이 산악지방에 도착했을 때는 4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맞이하여 싸우게 됐다. 뮬테인이 지뢰를 이용한 발목잡기와 화공이 성공하여 적의 선봉 부대에 큰 타격을 주었음에도 후미의 부대에까지 그 공포가 전염되지 않았다. 놈들은 숫자가 숫자인 만큼, 전선이 워낙 길어져 후미의 부대는 전열의 부대가 얼마나 처참하게 박살났는지 아예 보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마물들의 지휘계통은 아직까지 살아 있었고, 그때부터 뮬테인은 쉽지 않은 전쟁을 해야만 했다. 놈 자체가 워낙 지능이 떨어지고, 각 개채의 독자적인 판단력이 없는 집단적 몬스터이기 때문에 지휘계통이 살아있는 놈들은 여전히 유기적 작전전개가 가능했다. 거기에 히드라와 맨티코어 같은 대형 몬스터가 가세하기 시작하자 더 이상 2군단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라고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전선이 교착 된지 삼일 째, 이제는 적을 괴멸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어떻게 해서든 병력을 잃지 않고 퇴각하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소모전을 펼친다면 막강한 제노비스기사단을 선두로 한 2군단이 확실히 이길 수는 있겠지만, 마물들의 숫자 하나가 줄어드는 것과 2군단의 병사 하나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그 무게가 다르다. 마물들은 시간만 조금 지나면 금세 병력 회복을 할 수 있지만, 예메른의 군대는 그게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더 시간을 끌다가 이곳에서 완전히 발목을 잡혀 버리면, 미도우만에선 라일로스 대륙군은 최정예인 2군단이 빠진 상태에서 회전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태가 점점 안 좋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뮬테인으로서는 쉽게 퇴각 명령을 할 수가 없었다. 산악지대에서 놈들의 이동속도는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덜미를 잡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히드라와 맨티코어가 없다면 전면전을 걸어 볼 수도 있겠지만, 저 대형 몬스터가 있는 한 힘들다. 히드라의 브레스는 파이어볼 정도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하고, 잘못 베었다가 그 피에 닿기라도 하면, 그 부분이 썩어들어 가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보통 골치 아픈 게 아니다. 아홉 개나 되는 머리에서 브레스를 뿜으며 돌진하는 히드라는 대포나 마법사가 없다면 잡는 것이 불가능 할 정도로 끔찍한 몬스터이다. 맨티코어는 히드라만큼 무시무시하지는 않지만, 전갈의 꼬리를 이용하여 가시를 내뱉거나 독을 뿜어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사자의 몸, 인간의 얼굴, 전갈의 꼬리를 한 것이 맨티코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자의 갈기 때문에 무서운 남자의 얼굴처럼 보이며, 이빨이 3열로 늘어서 있기 때문에 한번 물리면 살이 너덜너덜 해져 꾀메어도 소용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맨티코아의 공격방법은 주로 양 앞발의 발톱과 어금니를 사용하는 것인데, 가장 강력한 것은 역시 꼬리이다. 꼬리는 전후좌우로 소형의 화살 정도의 위력이 있는 가시를 발사하거나 코끼리라도 일격에 쓰러트릴 수 있는 독을 내뿜는다. 맨티코어의 형상이 워낙 무시무시하기 때문에 그것을 본 아군의 사기가 떨어진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거리다. 원래는 어두운 곳을 좋아하고 독립적인 몬스터이지만, 마수사들에게 길들여져 이렇게 전쟁터에 그 모습을 들어낸 것이다. 지능이 낮아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뮬테인에겐 맨티코어가 말을 하던 못하던 상관없는 문제다. 적의 진영에 저런 몬스터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부담이 되는 것이다. 반면 마물들의 군단도 이렇게 강력한 대형 몬스터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돌격하지 못했다. 그것은 저 저주스러운 드워프들의 대포 때문인데, 대포의 사거리가 워낙 길기 때문에 일단 자리를 잡은 대포를 깨기 위해선 그 대포를 맞아가며 돌격 할 수밖에 없다. 마물들은 몇 번의 돌격을 통해 이런 돌격의 피해가 얼마나 큰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접근을 하였다 해도, 그 앞에 겹겹이 늘어서고 있는 기사단을 해치우고 나아가야 하는데, 이게 또 보통 일이 아니다. 중갑옷으로 몸을 감싼 제노비스 기사단은 비록 말을 타지 않았다고 해도,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하고 공격적인 철의 벽이 된다. 제노비스기사단의 무장과 전투력은 놈들만으론 뚫을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고, 그렇다고 히드라나 맨티코어를 앞세워 뚫으려고 하면, 접근하기도 전에 대포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 버리는 것이다. 결국 2군단이 적들을 몰아붙이고는 있었지만, 결정적인 타격은 주지 못한 채 전선은 교착상태로 빠져 든 것이다. 하지만 마물들은 한 가지 꾀를 내었다. 기동성이 좋은 놈들을 예메른의 뒤편으로 크게 우회시켜 앞뒤로 포위할 준비를 끝낸 것이다. 2군단의 화력이 앞도적으로 강하다고는 해도 숫자 차이가 너무 크다. 첫날의 전투에서 놈들은 거의 일만에 달하는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아직도 2군단 보다 세배 가까이 숫자가 많은 것이다. 　 . . . 태풍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제껏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상당히 리얼하군요. 창문을 조금만 열면 바람에 날려가버릴 것 같은.... 이제 빠르면 열흘, 늦으면 이십일 정도면 블레이드 앤 매직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처음 써본 소설이 많은 분들께 사랑을 받았고, 출판까지 하게 되어 얼떨떨할 따름 입니다. 그럼 얼마 안 남은 기간이지만,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B&M 제 6 장 죽음의 땅에서8화 마침내 예메른의 군대에 걸리지 않고 포위진형을 완성한 놈들의 군대는 그날 새벽을 기해 공격을 감행했다. “캬아아아악” 밤은 마물들의 시간. 놈들은 귀청을 찢는 괴성과 함께 돌격을 시작했다. 뮬테인도 사막전에서의 경험으로 마물들이 밤이 되면 강해진 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2군단의 뒷덜미를 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때문에 뮬테인은 그들과 대치하던 놈들의 부대는 그대로이고, 후방에서 적의 증원군이 더 왔다고 생각했다. “전군 전투준비! 1,2대대는 적의 주력을 막고, 3대대와 5대대는 후방 부대를 섬멸한 후 전방부대를 지원한다! 기사단 앞으로!” 마물들이 새벽녘에 공격하는 걸 즐긴다는 것을 알고 있는 뮬테인은 마물들의 습성에 맞추어 그들 역시 밤과 낮의 패턴을 바꾸었던 상태라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사막전에서의 끔찍했던 경험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께엑, 께에에엑” 놈들은 날카로운 비명같은 소리와 함께 기사단이라는 강철의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어떤 놈들은 창칼에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면서도 철벽의 중간에 뛰어들며 진형을 흩어놓기위해 발버둥쳤다. 하지만 놈들이 가진 조잡한 무기로는 풀플레이트메일로 완전무장한 기사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창과 하드레더정도로 무장한 일반 보병부대가 뒤쪽에서 백업을 해 주는 것만으로도 제노비스 기사단은 절대 넘볼 수 없는 무적의 성벽이 되었다. 하지만 적의 수는 끝이 없었고, 마침내 하나 둘, 드워프 포병부대까지 적들이 난입하기 시작했다. “막아라! 포병대가 무너지면 대형 몬스터가 돌격해 올 것이다!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막아!” 이때 놈들이 한 가지 착각한 것이 있었다. 드워프라고 하면 단순히 대포밖에 쏠 줄 모르는 약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후하하하! 지저분한 얼굴 들이밀지 마라!” 당장 적들이 난입해 오자 드워프들은 광기에 찌든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인간들이 휘두르는 것은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의 거대한 대형 배틀엑스를 휘두르며 놈들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오크보다도 약한 것들이 감히 드워프의 상대가 될 성 싶으냐! 죽이고 또 죽여 버리겠다! 채를 썰어 아침식사로 먹어주마!” 드워프들로서는 시커먼 화약연기 맡아가며 대포나 쏴대는 것 보다는 마물들과 싸우는 것이 훨씬 즐겁다. 드워프가 인간에 비해 스피드가 떨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 터프한 방어력과 배틀액스를 롱소드처럼 휘두르는 파워는 놈들에겐 차라리 저주였다. 섣부르게 돌입한 놈들은 뒤로는 인간 부대와, 앞으로는 괴물 같은 드워프들과 싸워야 할 처지에 빠져 버렸다. 후방으로 우회해서 공격했던 놈들의 부대는 순식간에 전멸했고, 이제는 정면의 적들만 막아내면 놈들의 주력부대는 완전히 괴멸되는 것이다. 승리는 바로 코앞 이었다! “전군 돌격! 승리는 우리 것이다!” “와아아아아”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인간들은 심장이 터질 때까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러 적들을 베어 넘겼다. 이 순간, 각 지휘관부터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승리를 의심하는 자는 없었다.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뮬테인에게 쉽게 미소지어주지 않았다. “꾸어어어어어” 지금까지 듣던 익숙한 놈들의 귀청을 찢는 듯한 얇은 비명 명소리가 아니다. 지저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듯한 육중하고 거대한 울림! 휘두르던 검이 갑자기 천근같이 느껴지는 사형선고처럼 들리는 포효였다. 드워프들이 놈들을 상대하느라 잠깐 대포근처를 떠난 사이 히드라와 맨티코어가 돌입에 성공하고 만 것이다! “이... 이럴수가...” 놈이 전멸에 가까운 무식스런 돌격을 하여 시간을 버는 사이 저 거대한 몬스터들은 산악의 숲 속에 그 거대한 몸체를 숨기고 조용히 숨죽여 이동한 것이다. 전투중이 아니었다면 그 육중한 발소리로 알 수 있었을 테지만, 포위공격 당했다는 공포로 그것까지 신경 쓰지 못한 것이다. 결코 작은 키가 아닌 나무들이었지만, 그런 나무들이 우습게 보일 정도의 거대한 머리가 솟아오르면서 다른 나무들 틈에서도 하나 둘, 히드라의 거대한 머리통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우어어어어어!” 히드라가 절대의 죽음을 예고하는 듯, 불길한 소리로 포효하기 시작하자 3군단의 불타오르던 전의는 빠르게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 “쿠아아아아” 잠시 크게 숨을 들이키는 것 같더니 브레스를 쏴대기 시작했다. 큰 것은 열개, 작은 것도 세 개 이상의 머리를 가진 히드라는 각각의 머리에서 강철도 녹여버리는 불길을 뿜어대자 아무리 기사단이라도 더 이상 방패 역할을 할 수 없었다. 히드라는 그걸로 만족하지 못했는지, 큰 몸을 뒤뚱거리며 강철의 벽에 그 몸을 처박듯 돌입해 버렸다. “전군 진형을 풀어! 뭉쳐있지 말고 흩어져라! 드워프들은 대포로 돌아가!!!” 뮬테인은 미친 듯이 소리 질렀지만, 명령은 쉽게 전달되지 않았다. 대형 몬스터의 포효와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로 순간적으로 지휘계통이 마비되고 만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전사라도, 아무리 뛰어난 지휘관이라도 공포스러운 순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전쟁터에서 지금 처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때이다. 이것이 대형 몬스터의 공포! 드워프들의 대포에 맞아 퍽퍽 죽어나갈 때는 몰랐던 대형 몬스터의 진정한 힘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 . . . 오랜만의 연참입니다. 오늘은 밤 새울 각오로.... 배가 고픈데 밖에 나가서 뭔가 사오기에는 비바람이 너무 무섭게 몰아치는 군요. 그래도 내일 아침을 굶지 않으려면 나가긴 나가야 하는데...ㅜ_ㅜ B&M 제 6 장 죽음의 땅에서9화 지금껏 히드라같은 대형 몬스터는 접근하기도 전에 드워프들의 대포에 맞아 산산조각이 났었다. 덩치가 큰 만큼 맞추기도 쉽고, 속도도 그리 빠른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 별반 위협적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닥친 히드라는 거대했다. 긴 목을 빼더라도 어깨 높이만 6~7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리고 강력했다. 대형 몬스터들은 지금껏 아무런 활약도 못하고 사라졌던 것에 대한 처절한 피의 복수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미친 듯이 내달렸다. 수없이 창칼에 찔리면서도 돌격속도를 늦추지 않고 단숨에 기사단과 보병부대를 유린하고 몬스터의 악몽이라 불러야 할만한 드워프 대포를 목전에 두었다. “막아라! 그리폰과 마법사,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저 히드라들을 막아! 포탄이 폭발해 버리면 끝장이다!” 그리폰라이더들은 공중에서 히드라와 맨티코어를 막기 위해 쓸 수 있는 마법을 모두 동원했지만, 마법내성이 높은 히드라에겐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맨티코어는 어찌어찌 잡을 수 있었지만 히드라는 무리였다. 마침내 가장 선두로 돌격해 오던 가장 거대한 히드라가 탄약고 바로 앞에까지 돌격해 버렸다. “끄... 끝인가?” 뮬테인은 위급한 순간임에도 잠시 동안 지휘하는 것도 잊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떠오르는 아침햇살로 히드라의 모습은 더더욱 붉고 거대해 보였다. “흐으으으읍” 히드라가 화염을 토하기 위해 숨을 들이키는 모습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질 나쁜 꿈처럼 보인다. “슈우우우욱, 퍼억!” 히드라가 불을 뿜기 직전, 뮬테인에게도 낮이 익은 새카만 검 한 자루가 히드라의 두꺼운 목을 꾀 뚫고 그대로 등까지 파고들어 마치 대포로 쏜 듯한 폭발을 일으켰다. 불을 뿜을 준비를 하던 머리는 완전히 떨어져 나갔고, 나머지 머리통도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서서히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무리 천하의 히드라라도 등 부분에 직경 2미터가 넘는 구멍이 뚫렸는데 움직일 리가 없는 것이다. “첨예!” 뮬테인의 입에서 홀린 듯 흘러나온 그 말에 병사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유신 경이다...” 붉은 활화산 같아 보이던 거대한 히드라는 그렁그렁 힘겨운 숨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불길한 검붉은 피를 뿜어냈다. “......” 그 압도적인 파괴력에 미친 듯 돌격해 오던 마물들은 물론 인간들까지 움직임이 멈추었다. “와아아아아!” 마침내 정신을 차린 병사들의 함성 위로 유신의 니케를 선두로 한 그리폰 100여기가 찬란히 떠오르는 아침해의 축복을 받으며 그 아름다운 날개를 활짝 펴고 있었다. “적 대형 몬스터를 중심으로 폭탄 투하! 아끼지 말고 전부 쏟아 부어. 기동성이 살아나면 지상부대의 증원에 나선다!” 유신의 니케에서 공격개시를 알리는 붉은 신호탄이 오르자 각 그리폰들은 타격 목표를 잡기 위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지상에서도 난리가 났다. 히드라의 출현으로 곤두박질 쳤던 사기는 단숨에 치솟고, 병사들은 새하얀 거품을 뿜으며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이것이 유신...’ 소드마스터 뮬테인은 뜨거운 눈물이 마물들의 피로 범벅이 된 볼을 타고 흐르는 것도 알지 못했다. 하늘에 떠 있는 그리폰의 수는 전체적인 전투 국면에 비하면 그리 큰 수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녀석들이 매달고 있는 폭탄이다. 대형 몬스터 근처나 밀집해 있는 몬스터들의 주변엔 어김없이 끔찍한 천둥소리와 함께 포탄이 다발로 굴러 떨어졌다. 무기라고 해봐야 조잡한 수준의 몽둥이나 숏소드 정도인 놈들로서는 그리폰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포탄을 다 떨구고나자 그리폰나이트들은 그리폰의 위에서 화살을 퍼붓거나 마상용의 랜스보다도 두 배는 길게 제작된 그리폰용의 랜스로 적들을 꾀어대기 시작했다. 이런 대규모의, 그것도 산악지형의 전투에서 포탄이 떨어진 그리폰이 무서운 것은 아니었지만, 겨우 백여마리가 하늘에 떠 있는 것만으로도 마물들을 공포에 몰아넣는 것은 충분한 일이었다. 간간히 마물들이 날리는 별 볼일 없는 화살도 엘프들이 실피드의 힘을 약간 이용하자 그리폰의 근처에도 접근할 수 없었다. 어쩌다 한두 발 정도 맞아도 그리폰에겐 통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몬스터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아침 먹을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나자 일대는 마물들의 시체로 완전히 뒤덮여 버렸다. 미도우만 상륙작전에 이은 2차전도 라일로스대륙군의 완벽한 승리로 그 피비린내 나는 막을 내렸다. B&M 제 6 장 지옥의 문1화 흄이 머물고 있는 마물들의 본성인 슈발츠 둠. 이름처럼 온통 칠흑의 어둠 속에 잠긴 듯한 성은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하나의 거대한 돌로 만든 날카로운 흉기 같아 보였다. 사방 어디고 할 것 없이 석상처럼 보이는 가고일이 지키고 있었고, 그 일대에는 흉폭한 와이번들이 끊임없이 날고 있다. 마물들의 괴성과 비명이 끊이지 않는 곳. 바늘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천연의 요새이자 마법계 전체에서 가장 사악한 장소이기도 한 마물들의 성역! 그리고 그 지하에선 이 모든 악의 근원이 자리 잡고 있다.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와 서부 늪지대를 이동 중이던 고블린 부대의 연결이 완전히 두절되었습니다.” “......” 다크엘프 후루엘의 얼굴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땀방울이 떨어져 대리석 바닥에 점점이 검은 무늬를 찍었다. 그리고 후루엘의 앞에선 흄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그 흉보를 듣고 있었다. “그... 그리고 좀전의 보고에 따르면 동부 산악지대를 이동 중이던 놈들의 부대도 아무래도 전멸한 듯싶습니다.” 후루엘은 요즘처럼 살기 싫었던 적이 없었다. 통신 담당의 마법사란 이유만으로 중요한 소식을 흄에게 보고하는 것은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낭보를 전할 때도 흄의 앞에 서는 것이 덜덜 떨릴 정도로 무서운데, 하물며 흉보를 전하는 것은 수명을 300년 쯤 깍아서라도 피하고 싶은 일이다. 대형 몬스터 330여기, 준대형 몬스터 2800여기, 고블린과 놈들의 피해는 정확히 파악되지도 않을 정도로 절망적이다. 이런 보고를 해야 하니 언제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미 통신마법사를 통해 교전에 들어갔다는 보고는 몇 차례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나 빨리 전멸해 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어떻게 손써볼 새도 없이 그 많던 대군이 쓸려버린 것이다. 후루엘도 물질계 출신인 다크엘프인 만큼 유신에 대해들은 바는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 유신 더 실버스타라 해도, 무슨 요술을 부려 그 엄청난 양의 대군을 전멸 시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흄의 가장 큰 약점인 고급 지휘관의 부재. 단순히 교활한 몬스터들은 서큐버스나 뱀파이어등,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있지만, 교활함과 지혜로움은 다른 것이다. 지금 라일로스와 벌이고 있는 것은 싸움이 아닌 전쟁이다. 하지만 흄에는 다른 몬스터를 이끌어 전쟁을 수행할만한 현명하고 카리스마 있는 지휘관이 없는 것이다. 전쟁은 단순한 숫자놀음이 아니다. 병력의 차이도 중요하지만, 진형과 부대배치, 사기, 보급, 그리고 작전. 그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이루어 져야 가능한 것이다. 사실 흄에겐 미도우만에서 다크블러드의 정예를 잃은 것보다도 젤더가인을 잃은 것이 너무나 컸다. 이번 전투의 패인도 몬스터들을 소집시키고 진형이고 뭐고 없이 그냥 그냥 되는대로 이동시키다 허리를 잘려 전멸한 것이다. 전쟁 경험이 없는 흄의 수뇌부로서는 왜 그 압도적으로 유리한 병력으로도 이기지 못한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아예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이다. 후루엘은 흄의 불호령을 각오하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바닥에 엎드린 채 흄이 아무 말이라도 하길 기다렸다. 침묵은 오히려 불호령보다도 두려운 것. 후루엘은 변명할 타이밍 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흄은 불호령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자조적인 조용하고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역부족이란 말인가?” “폐...폐하?” 평소의 흄 답지 않은 모습에 후루엘은 오히려 더한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아무리 그 괴물이라 해도 본대가 괴멸해 버리면 방법이 없겠지.” 마침내 흄은 뭔가 큰 결심을 한 듯 그 불길한 몸을 일으켰다. 마침내 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과 살을 에는 듯한 살기! 도저히 뼈대만 앙상한 해골이란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공포스럽게 보였다. “의식을 준비해라. 헬게이트를 연다. 저 저주스런 신의 꼭두각시는 동부지대에서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지체하고 있을 것이다! 그사이 본대를 친다.” “하지만 폐하, 헬게이트를 열면 위시마스터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천사장들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뭐가 되든 상관없다. 이제 확실히 보인다. 설혹 우리가 이곳에서 전멸한다 해도, 유신만 잡을 수 있다면 그게 루시퍼님을 위한 충성이다. 유신 더 실버스타! 그 저주받을 존재가 있는 한, 어둠에게 희망은 없단 말이다! 수단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야!” “마이로드...” 후루엘은 흄의 분노가 뼛속 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병력이 많아도, 아무리 강력한 몬스터가 많아도 저 유신이 있는 한 소용없다. 이제 마물들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유신이 없는 곳을 노리는 것이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설혹 마법계에서 닦아 온 모든 기반을 잃는다 해도 네놈을 잡을 수만 있다면... 다음의 승리는 어둠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B&M 제 6 장 지옥의 문2화 세 개의 달이 덩그라니 떠 있는 하늘. 서로 경쟁하듯 교태로은 은빛 갈기를 뽐내는 달들은 게으름뱅이 아침 해보다 더 환할 것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숙녀들은 곳 모습을 감출 것이고, 그 후에는 두루뭉술한 아침해가 얼굴을 내밀 것이다. 벌써 나흘째 계속된 전투대기 명령으로 완전히 지쳐버린 라일로스 대륙군의 주둔지위에도 고단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해는 어김없이 찾아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투툭” 언 듯 평화로워 보이는 라일로스대륙군 주둔지 근처. 아침이슬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메뚜기가 메뚜기답지 않게 풀잎에서 굴러 떨어져 버렸다. 배를 뒤집은 채 여섯 개의 다리를 몇 번 허우적 거리던 메뚜기는 근처에 있는 다른 곤충들처럼 점점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율리안, 율리안 일어나, 빨리 일어나...” 1군단 사령실, 삭막한 전쟁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목소리가 라일로스대륙군 총사령관을 깨우고 있는 중이었다. 열 대여섯 살 정도 되었을까? 까만 흑단발이 유리인형처럼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으음, 아이린? 새벽부터 무슨 일이야... 어제 군 회의 때문에 밤샜단 말이야. 조금만 더 자게 해줘.” 율리안은 이런 시간에 깨우는 아이린이 못마땅한지 몸을 틀며 모포를 끌어올렸다. 2군단과 3군단이 없기 때문에 남은 1군단은 비상전투준비로 총사령관인 율리안조차 갑옷도 벗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유신과 뮬테인이 모두 자리를 비우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다른 귀족들이 이제 한자리 해볼까 하여 매일매일 쓸데없는 군회의를 열고, 회의도 질질 끌어 완전히 지쳐버린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흄 대륙의 영토를 어떻게 나누는가 하는 것 따위보다 훨씬 중요하고 시급한 현안들이 널려있는데, 귀족들에겐 그런 쓸데없는 것이 중요한가보다. 마치 전쟁은 이미 라일로스대륙군의 승리라는 듯, 벌써부터 전공을 논하는 것이다. “일어나, 율리안! 어서 도망쳐야해. 이곳 공기가 이상해.” 하지만 아이린은 율리안의 그런 사정쯤은 상관없다는 듯, 무려하게 왕자님의 머리를 툭툭 치면서 깨우고 있었다. “아이린?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끈질긴 아이린의 덕분에 비로소 율리안도 몸을 일으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다지 체력이 좋지 않은 율리안으로서는 이런 갑옷을 입고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바람빠지는 소리가 날 만큼 벅찬 것이다. 아무리 미스릴제 갑옷이라 해도 이런 것을 입고 자서는, 자도 자는 것이 아니다. 온 몸에서 찌그덕 찌그덕 듣기 싫은 비명을 질러대는 듯 했다. “하암, 무슨 일인데 그래?” 아직 제정신이 아닌지, 율리안은 멍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잘 모르겠어. 무슨 마법 같은데... 뭔진 모르겠지만 마나의 흐름이 미묘하게 달라. 이런 미묘한 변화는 인간 마법사는 느끼지 못해. 일단 이곳을 벗어나고 나서 생각하자.” 가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는 아이린. 아무리 흉폭한 맹수라도, 설혹 최강의 그리폰이라해도 이 아이에게만은 꼼짝 못한다. 아이린의 정체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껏 아이린이 진지하게 하는 말은 단 한번도 틀린 적이 없다. 그래서 율리안은 아이린을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예언자처럼 대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아무리 아이린의 말이라도 들어줄 수 없다. “그럴 수는 없어. 여기는 라일로스대륙군의 심장부라고. 갑자기 떠나자고 해봐야...” 워프게이트를 구축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동이 들어가는데 이곳을 포기한단 말인가? 설사 포기한다 해도, 배로 돌아가는 것 외엔 달리 갈 곳도 없는 것이다. “그럼 다른 사람들도 모두 피하라고 해. 어서! 시간이 없어!” 하지만 아이린의 태도는 강경했다. 늘 보여주던 싱글싱글한 천진한 웃음 대신 공포에 질렸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초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단 군회의를 소집할게. 이런건 혼자 결정할 수 없다고. 다른 장군들과 의논해 봐야겠어.” 아이린의 이런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터라 율리안은 얼떨결에 군회의를 소집한다고 했다. “그럼 미스티나 유신한테 알려. 그리고 조언을 듣도록 해. 뭐든 서두르라고. 시간이 얼마 없어!” 실버스타군의 이동군사연구요새 카린 사이언스 퍼실러티. 우주를 떠다니는 하나의 거대한 우주선이라 해도 좋지만, 일반적인 순양함이나 전투함처럼 특별한 전투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안에는 이 세상의 어떤 무기보다도 가치 있고 무서운 무기가 가득하다. 전 우주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모아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슈퍼브레인 집단! 그것이 카린 사이언스 퍼실러티다. “카린 소장님! 마법계에서 초대형 마나집적 시스템이 가동된 흔적이 나타났습니다. 6스피어급의 입체마법입니다!” 유신이 있는 마법계를 연구 관찰하는 담당부서는 근래 들어 갑자기 할일이 많아졌다. 얼마 전에는 모든 힘을 잃었다고 하는 유신 더 실버스타의 필살기가 감지되었고, 오늘은 고룡이상의 존재만이 겨우 사용할 수 있다는 스피어급마법, 그것도 6스피어급의 무시무시한 마법의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단순한 써클 마법이 아니다. 마도과학은 전혀 발전하지 않은 마법계에서 누가 이런 초대형의 스피어급 마법을 쓴단 말인가? 그런 만큼 공포스럽기도하지만, 즐겁기도 하다. 미지와의 조우! 과학자에게 있어 이만큼 신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뭐라고요? 마법계에서 스피어마법이라니요? 그것도 6스피어급이라니! 마법의 종류와 사용 목적은 판별 되었나요?” 카린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여러 가지 감지기에 기록된 마나의 흐름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아직...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이제 곳 알 수 있습니다.” 연구원들은 여러 가지 패널들과 기기들을 정신없이 조작하며 이 마법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대체 마법계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6스피어급의 마법이라니...” 지워지지 않는 얼룩 같은 불길한 예감은 조금씩 번지기 시작한 치명적인 암세포처럼 점점 카린의 마음을 잠식해 들어가자 카린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아무래도 가봐야겠어. 불길한 예감이 떠나질 않아. 다른 연구원들을 휘말리게 할 수는 없으니 몰래 라도...’ B&M 제 6 장 지옥의 문3화 카린은 모두가 정신없는 틈을 타 슬쩍 빠져나가려고 했다. “3번 도크에 콜벳급의 차원도약 시험기가 있어요. 무인 조정도 가능하니까 카린님 혼자라도 컨트롤 할 수 있을 거예요. 이봐! 이카루스 발진준비 시켜! 일대의 마나스트림 조사하고, 근처에 주둔중인 함대가 있나 도 조사해 봐!” 하지만 눈치 빠른 카린의 보좌관은 이미 그녀의 행동패턴을 예측 했다는 듯, 그녀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빠르게 이카루스의 출격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린님, 힘내세요!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우린 카린님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이건 뭐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겠다는데 막을 권리는 없는 거라고요!” “카린님 파이팅!” “와아아” 테스트실과 실험실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조용하던 배 안은 정말 오랜만에 환호성으로 떠나갈 듯 소란스러워졌다. “모... 모두들 정말 고마워요. 금방 돌아오도록 할게요.” 요즘들어 눈물이 많아졌다고 생각하는 카린이다. 아바돈 최외곽에 주둔중인 헬크로아 함대. “훗, 흄 녀석, 시작하는 건가?” 해모수는 기함인 네오코스모스의 제독실에 있는 긴 소파에 누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장군, 방금 마법계에서 5스피어급 대형 마법이 발동한 흔적을 포착했습니다! 출진 명령을!” 해모수의 부관 계백은 평소의 냉정한 그답지 않게 흥분하며 제독실 까지 덤벼들듯한 기세로 달려 들어왔다. 노크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지만, 해모수는 그런 것에 대해 별로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역시도 계백 못지않게, 아니 계백 보다도 몇 배나 더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소란 떨지 마라. 나도 알고 있으니까. 좋아! 전군 출격준비! 루시펠님의 원수를 갚는다!” ‘마법계에서 저런 초대형 마법이 실행되었다면, 더 이상 마법계만의 고유한 규칙이나 질서 따위 들먹일 상황이 아니지. 그렇다면 힘이다! 이제는 전쟁이야!’ 실버스타군 용신화랑 마젤란 장군이 이끄는 제5함대. 마법계를 감시하는 함대답게 마법계의 이상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마젤란 장군님, p274구역에서 6스피어급 대형 마법이 시전 되었습니다. 상부에서는 이에 대한 지시가 없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제 시작이로구나.” 마젤란은 그의 애검인 발뭉을 쓸어보며 기쁜 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기쁜 것이다. 미치도록 기쁜 것이다. “일단 보고를...” “아니, 아리엘님께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아. 페스비덴 장군이라면 보고 따윈 없어도 이미 알고 있을 테고. 괜히 지원 요청을 할 필요는 없겠지. 우리는 이곳을 지킨다. 천사들에게 알려야 할 의무 따위는 없으니까.” 보고 따위를 할 마음은 없다. 전 우주를 호령하는 강자들과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방해받을지도 모르는 그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고 싶었다. ‘유신 장군, 솜씨를 보여주시지요. 후후후, 어서 귀환하시길. 다들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군, 차원 워프게이트가 열렸습니다! 소형 콜벳급 전투함 한기가 빠르게 제한선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격추시킬까요?” “내버려둬라. 카린이라면 자격이 있지.” “네?” 마법계를 수호해야 할 함대가 소형이라고는 해도 차원 워프가 가능한 전함의 출입을 막지 않는 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더욱이 평소 꼼꼼하고 고지식할 정도로 빈틈없는 마젤란이 내린 결정이라곤 믿기 힘든 일이었다. “쓸데없는데 신경 쓰지 말고 전투준비다! 이제 곳 손님들이 몰려 올 것이야.”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존경하는 그들의 사령관의 명령이다. 5함대는 아무런 망설임이나 의심도 없이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 . . . 하루 걸르고 연참 했습니다. 5권 완결인데 써야할 분량이 좀 많아서 스토리 진행이 너무 빠르군요. 그럼 모두 좋은 밤 되세요^^ B&M 제 6 장 지옥의 문4화 “불쑥” 마물들의 시체를 묻어 두었던 구덩이 속에서 불타고 썩어서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흉측한 손 한 개가 올라왔다. “그어어어어” 손은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더니, 곳이어 머리와 몸통이 힘들게 솟아나왔다. 마치 빠르게 자라나는 기괴한 식물이 땅 속에서 순식간에 자라나는 것 같은 기묘한 광경이었다. 그 좀비 몬스터를 시작으로 하나 둘, 이미 한번 죽었던 것들이 신의 고귀한 율법을 무시하고 그 썩어가는 몸뚱이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6스피어급 범위마법 헬게이트. 시전 되는 곳의 땅, 공기, 물, 그 모든 것을 지옥의 그것으로 변화시켜버리는 최악의 범위마법이 바로 헬게이트다. 정말로 지옥의 문을 열어버리는 끔찍한 마법이었다. 미도우만 반경 10km는 오염된 지옥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마법사들은 뭘 하는 거야! 대체 이 많은 좀비들이 다 어디서 나타난 거지?” 율리안은 공포에 질린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지휘계통을 회복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나타난 좀비들과 언데드 몬스터들로 라일로스 주력 1군단은 난리가 났다. ‘하필 유신경도, 미스티경도, 뮬테인경도 없는 사이에 쳐들어오다니...’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죽어있는 것들이 덤벼드는 것이다. 율리안은 시체들이 내는 숨결조차 얼려버릴 것 같은 차가운 죽음의 공포에 당장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지휘관이 공포에 질려서는 아무리 유리한 전투도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은 풋내기 지휘관인 율리안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검을 들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언데드몬스터 따위, 별것 아니다! 두 번 다시 죽음에서 돌아오지 못하게 산산조각 내 버려!” 평생의 용기를 모두 쥐어 짜내듯, 율리안은 왕가의 보검을 높이 들어올려 병사들의 선두에 섰다. 종교가 발달하지 않은 마법계에서 언데드 몬스터만큼 귀찮은 것은 없다. 은제의 무기가 아니면 완전히 산산조각 날 때 까지 멈추지 않는 언데드 몬스터! 고통도, 두려움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죽은 자가 움직인다는 그 공포! 사기는 단숨에 저하되었고, 부대는 혼란에 빠져 율리안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진형을 유지하라! 느릿느릿한 언데드따위, 무서워 할 것 없다!” 다행이 율리안 덕분에 사기가 오른 것인지, 하누스의 자색기사단을 중심으로 전열은 빠르게 복구되었고, 일단 부대 정비가 되자 띄엄띄엄 있는 언데드 따위는 단숨에 기사단의 창, 칼 아래 무참하게 뭉개져버렸다. “마법사들은 언데드가 다시 움직이지 못하도록 불태워버려!” 언데드는 화살 같은 관통형 무기는 거의 통하지 않고, 은제 무기가 아니면 칼이나 창에도 별 타격을 입지 않는다. 하지만 워낙 느린 몬스터라,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죽은 존재가 내뿜는 공포와 엄청난 방어력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무서울 것도 없다. 진형만 제대로 갖추고 있다면 움직이는 목각인형 정도의 위협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헬게이트의 진짜 무서움은 단순히 죽은 자만 일어나는 것에 있지 않다. “롤라이안 경, 크로움바우경, 병사들을 지휘하지 않고 뭐하는 겁니까!” 율리안은 한심하게도 아직 그들이 지휘해야 할 병사들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우왕좌왕 하고 있는 두 지휘관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들의 상태가 영 이상해 보였다. 지금껏 그다지 싸움에 적극적이지 않기는 했지만,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훨씬 우세한 싸움인데 전공을 다투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게다가 입에서는 누런 침과 거품을 흘리며 눈도 허옇게 까뒤집고 있는 것이 아닌가? “크...크로움바우경?” 놀란 율리안이 그에게 다가갈 때였다. “그어억, 그억, 그어어어억” 크로움바우는 괴성을 지르며 율리안에게 달려들었다. B&M 제 6 장 지옥의 문5화 지옥의 땅에서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사기로 정신력이 약한 사람이라면, 설사 살아있는 상태라 해도 하나 둘, 좀비 화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헬게이트의 공포! 아무리 많은 병력도, 아무리 강력한 무기도 소용없다.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그것은 전부 지옥 군대의 일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채앵!” 율리안은 간신히 검을 뽑아 크로움바우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지만, 왕자를 지켜야 할 로열가드들도 하나 둘, 좀비화 되고 있었다. 강력한 정신력으로 아직까지 좀비 화 되지 않은 기사들도 왕자에게까지 신경 쓸 만한 정신은 없는 듯 했다. 다시 한번 죽음의 바람이 불자 인간들의 미약한 저항도 잠시였고, 곳 좀비 화 된 로열가드들까지 합세하여 율리안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좀비들이 느릿느릿하긴 했지만, 숫자도 워낙 많았기에 검술솜씨가 미숙한 율리안으로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율리안의 가드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좀비들이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검은 율리안의 갑옷을 두드려 대고 있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중 단 한발만 빛나가서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한 부위에 맞으면 그걸로 끝장이다. “물러서라 사악한 자들이여. 이 사람은 나의 것! 해치겠다면 용서치 않겠다!” 하지만 어느새 나타난 것인지, 아이린은 이상하게 변해버린 크로움바우와 기사들을 가볍게 날려버리며 율리안을 지키고 섰다. 그러자 아무런 지능도, 공포도 모르는 좀비화 된 인간들조차 감히 아이린에게 달려들지는 못한 채 멀찍이 떨어저 으으렁 거리는 낮은 소리만 낼 뿐이었다. “아... 아이린? 아이린이야?” 작은 아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당당하고 서릿발 같은 기백! 지금까지 율리안이 봐 왔던 작은 아이가 아니었다. 좀비 따위가 넘볼 수 없는 지고의 존재! 사실 율리안도 아이린의 강력한 수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좀비 화 되지 않은 것일 뿐이다. 아이린이 없다면 강력한 로열가드들마저 좀비화 되는 헬게이트 마법 앞에 율리안따위, 순식간에 움직이는 시체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아이린은 어떻게 해서든 율리안만큼은 모든 것을 포기해서라도 지키고 싶었다. “율리안,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 넌... 너만큼은 반드시 고향으로 돌려보내 줄께. 이번 맹세는 어기지 않아. 절대로...” 율리안은 슬픈 듯, 기쁜 듯 자조적인 웃음을 지어보이는 아이린을 보자 왠지 가슴이 메어지듯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자그마한 아이에게 이런 표정을 짖게 만드는 자기 자신이 한심했고, 아이린이 지키지 못했다는 맹세가 무엇인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이미 율리안의 주변에 살아있는 생명체는 없는 것인지, 온통 괴상한 소리를 질러대는 좀비들뿐이었다. 그리고 그 좀비들은 아직까지‘살아있는’율리안에 대해 무서운 적의를 불태우며 한 걸음 한 걸음, 느리지만 착실한 걸음 거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율리안은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로 무서웠지만, 아이린은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좀비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아이린의 눈은 좀비들이 아닌 그 너머의 무언가를 노려보는 듯 했다. 그런 아이린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율리안은 자기 몸 정도는 자기가 지켜야 했다. 지옥의 한가운데였지만, 율리안은 용감히 검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 해서든 아이린 정도는 그가 지켜주고 싶었다. “이잇” 결심을 다진 율리안이 막 좀비들을 향해 돌격하려고 할 때였다. “후훗, 감동적이군요. 설마 헬게이트 속에서 인간인 채 남아있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니... 마스터급 마법사와 소드마스터 인가요?” 비릿한 유황냄새와 함께 검은 아지랑이가 솟아오르는가 싶더니, 비웃음이 섞인 조롱과 함께 시커먼 로브로 몸을 가린 마법사 십여 명과 서큐버스 여덜 마리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서큐버스는 붉은 입술을 요염하게 핥으며 율리안을 자세히 관찰하는 중이었다. “처음 뵙겠소. 율리안 왕자. 인간 연합의 대장이라... 역시 보통 인간은 아닌 게요? 헬게이트를 견뎌 내다니... 그 앞의 아이는 왕자께서 지킨 것이요?” 마법사중 리더인 듯한 남자가 율리안 따위는 별 관심도 없다는 듯, 주변의 풍경을 휘휘 둘러보며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그 남자가 내뿜는 사악하고 어두운 힘은, 차라리 눈앞에 펼쳐진 지옥의 풍경이 친근해 보일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율리안은 검을 들고 있는 그의 손이 떨린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그 손은 마치 그의 몸이 아닌 다른 생명체처럼 그의 의지를 배반하고 있었다. 헬게이트의 결과가 만족스러웠는지, 리더인 듯 보이는 마법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결과를 확인하고 나서야 불현듯 생각난 것 처럼, 율리안에게 관심을 보였다. “인사가 늦었소. 흄 폐하 직속의 마법병단 닐케니언의 단장인 로베르토라 하오.” “크윽...” 저 앞에 있는 가장 하찮은 마법사중 단 한명도 율리안의 솜씨로 해치우지 못할 것이란 것 쯤은 율리안 자신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싸우는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을 것 같았다. 너무 기가 막혀서 공포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삼만에 달하는 병력이 한순간에 언데드 몬스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율리안은 이를 부드득 갈며 로베르토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할말은 없소?” 잠시 율리안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로베르토는 율리안에 대한 흥미가 다했다는 듯, 무심한 한마디를 던졌다. “뭐라고?” “없으면 죽도록 하시요.” B&M 제 6 장 지옥의 문6화 두려울 정도로 냉정한 한마디를 남긴 로베르토가 율리안 따위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몸을 돌리자 그의 옆에 있던 두 서큐버스가 율리안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그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퍼억” 하지만 두 서큐버스는 율리안에게 접근도 하지 못하고 아이린의 작은 두 손에 각각 한 마리씩 머리통이 박살난 채 쓰러져 버렸다. “응?” 그제 서야 로베르토는 뒤를 돌아보며 아이린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많이 건방져 졌구나. 로베르토 볼피드.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냐? 아니면 그동안 마룡 따위는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을 만큼 실력이 늘었다는 게냐?” 아이린은 눈에서 새파란 불똥을 튀기며 로베르토를 노려보았다. 그의 곁에 있는 수많은 마스터급의 마법사나 서큐버스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오만한 태도였다. “오오, 이건 또 오랜만에 반가운 분을 만나는 군요. 고귀하신 분의 마음에 들었다면, 저 허약한 인간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요.” 로베르토는 과장된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깊이 숙여 아이린에게 인사했다. “하지만... 저와 싸울 생각입니까? 그럼 저 인간 왕자는 틀림없이 죽을 텐데요?” 자못 걱정스럽다는 듯, 이죽이는 로베르토를 보자 아이린의 분노가 폭발했다. “건방진!” 아이린이 거칠게 두 손을 휘두르자 각각 2미터도 넘을듯한 시커먼 마나의 창 네 개가 소환되어 로베르토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러자 로베르토의 뒤에 서 있던 마법사중 네 명이 쏘아져 나가듯, 로베르토의 앞을 막아서며 마법결계를 펼쳤다. “파치치치칙” 그러자 놀랍게도 엄청난 소리와 함께 네 개의 죽음의 창은 소멸되어버렸다. “츳, 그런 몸으로 뭘 어쩌시겠다는 겁니까? 맹세를 지키지 못해 제약 마법에 당해버린 어린 마룡 쪼가리에게 당할 만큼 약한 마법사는 닐 케니언에 없습니다.” 로베르토는 한심하단 표정을 지어 보이며 팔짱을 끼었다. 그가 직접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태도였다. ‘강하구나. 역시 닐 케니언...’ 아이린은 이 싸움이 쉽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율리안?” 아이린은 긴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얼굴로 율리안을 돌아보았다. 아이린의 얼굴에는 매일 같이 지내는 율리안으로서도 처음 보는 황홀할 정도의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 아이린, 이게 대체...” “내가 누구라고해도... 어떤 모습으로 변한다고해도... 난 율리안의 친구지?” 그 사이 닐케니언의 마법사들은 불길하고 우울한 주문을 외우며 전투준비를 하기 시작했지만, 아이린은 개의치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이린, 도망칠 수 있으면 도망쳐!” 닐 케니언의 마스터급 마법사와 셀수없을 정도로 많은 언데드 몬스터들. 상황을 보건대 승산은 없이다. 하지만 율리안은 어떻게 해서든 아이린 만큼은 탈출시키고 싶었다. 그가 약간의 시간을 벌어주기만 한다면 아이린의 강력한 마법을 보건대, 혼자라면 어떻게 해서든 피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율리안 만큼은... 율리안 만큼은 항상 날 사랑해 줄 거지?” “일단 피하자. 미스티경이나 유신경이 도착하면 무슨 수가 있을 거야!” 율리안은 다급한 나머지 혼자라도 검을 뽑아들고 마법사들에게 돌진하려 했다. “그딴 건 상관없어! 어서 대답해! 율리안은 나의 친구지?!” 하지만 아이린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팔힘으로 율리안을 멈춰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조금전의 부드러워 보이는 얼굴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무섭고 처절한 모습이었다. “그래. 그래 아이린. 넌 내 친구야. 그러니 함께 달아나자.” 결국 율리안은 아이린의 작은 얼굴을 꼭 끌어안으며 검을 세워들었다. 그는 이제는 싸워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그 말이 듣고 싶었어. 그걸로 충분해.” 비로소 아이린은 율리안을 한번 꼭 끌어안았다가 놓아 주었다. “시시하군요. 라일로스 대륙의 비극이라고 까지 불리우던 분이 그런 약한 모습이라니... 불쌍해서 못 봐주겠습니다. 더 이상 그 이름에 먹칠하지 말고 어서 사라지도록 하시죠.” 로베르토가 가볍게 팔을 들자 떨어지자 다른 마법사들이 준비하고 있던 각종 끔찍한 마법이 아이린의 안타까울 정도로 작은 몸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나, 그라테우스는 용족의 신성한 맹세로써 영혼의 벗, 율리안 하누스를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그와 동시에 율리안이 어떻게 손써볼 새도 없이 워프게이트가 열리며 율리안을 집어 삼켰다. “아이린!!!” 율리안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이린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아 보이는 환한 미소. 그리고 그 미소를 덮치는 불길하고 끔찍한 마법들이었다. “콰콰콰콰쾅” 그 위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아이린이 있던 자리에서는 마룡의 최후를 알리는 것과도 같은 시커먼 연기가 반경 300미터 정도를 완전히 뒤덮으며 솟아올랐다. “시시하군. 자, 시간낭비하지 말고 좀비들을 모아 병력 편제를 한다.” 로베르토는 가볍게 한마디 하고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이런, 이런, 로베르토... 로베르토 볼피드... 인간은 일찍 늙는다더니, 너도 늙은 것이냐? 네놈이 감히 싸움을 건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는 것이냐?” 연기 속에 어렴풋이 거대한 실루엣이 보였다. 정말로 생물의 실루엣인지조차 의심스러운, 거대하다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할만한 공포스러운 모습. 헬게이트로 만들어진 그 일대의 지옥이 초라해 질 정도의 존재! “그... 그라테우스? 대체 어떻게 본체를...” 로베르토는 말까지 더듬거리며 그 경이로운 존재를 바라보았다. “용과 싸워본 적이 없는 네놈들이 나에 대해 뭘 아나? 용의 강함에 대해 뭘 아나? 나의 강력함에 대해 무엇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있나? 이 벌레 같은 마법사 놈아!” “쿠아아아아아” 드워프 대포의 일제사격을 무색케 할 정도의 그라테우스의 포효가 미도우만 전체를 덮어버렸다. 하지만 연기가 걷히고 나자 드러난 그라테우스의 모습은 유신과 싸웠을 때처럼 완전한 용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미 유신과의 싸움에서 발동한 제약 마법 때문에 몸의 여기저기가 뭉게지고, 붕괴되어가는 모습이었다. 강력한 드래곤스케일도 바닥으로 툭툭 힘없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좋아! 아주 좋아! 다쳤다고는 해도 용은 용이다! 싸울만하지! 덤벼라 마룡아! 진짜 즐거움은 지금부터다!” “크크큭, 잊지 못할 마지막 즐거움을 선사해 주마 건방진 인간아!” 마침내 최악의 마룡 그라테우스와 최악의 마법병단 닐 케니언간의 사투가 시작되었다. . . . 이번 화도 이걸로 끝입니다. 하루 쉬고 3연참... 양도 조금 많았으니 이정도면 괜찮지요? 냐하.... 그럼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B&M 최종장 전설의 끝, 신화의 시작1화 한편, 용신화랑 마젤란이 이끄는 실버스타군 제5함대는 해모수의 헬크로아 함대와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함대의 규모나 화력은 헬크로아 함대 쪽이 조금 더 우세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별로 의미가 없다. 싸움은 전적으로 용신기끼리의 싸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질서는 반듯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강한 무력을 얻으면 얻을수록, 강한 권력을 얻으면 얻을수록, 질서와 법칙을 무시하기 쉬워지지만, 단지 강하다는 이유만으로도 남들보다 더더욱 엄격하고 자기자신에게 냉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최강의 용신화랑이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면 단순한 대량 학살자와 다를 것이 무어란 말입니까?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욕망을 억누르고 자신을 절제하려 해도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최강의 용신화랑과의 싸움! 매일 밤 기도했던 제 소망을 이루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께 등을 돌린 해모수 장군에게 베풀어 주실 마지막 자비로 해모수 역시 저와의 싸움을 즐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젤란은 용신화랑의 전투복을 단정히 입고, 함 내에 있는 교회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승리를 염원하는 간절한 기도라기보다는 해모수와의 싸움 자체를 감사드리는 기도였다. 그 옆에서는 찬란해 보일 정도의 화려한 황금빛의 금발을 짧게 자른 학자 타입의 남자가 깔끔해 보이는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흥분된 모습으로 서성대고 있었다. “레드드래곤의 전설이라고까지 불리는 제노하임 리케르트라면 상대하기 부족함은 없지. 이건 정말이지 설래이는 이벤트야. 난 너의 용신기가 된 것에 만족한다.” 마젤란의 용신기, 골드드래곤 사이카 발칸은 좀체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것인지, 출전기도를 위해 예배당에 들어간 마젤란을 따라다니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발칸은 학자타입의 인간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본체는 저 강대한 용황급의 에인션트 골드드래곤이다. 골드드래곤은 다른 드래곤에 비교하면 미칠 정도로 싸움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흥분이 안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바이올릿 미라쥬 해모수, 홍염의 심판 제노하임 리케르트! 그 이름을 속으로 되내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끌어 오르는 피를 주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직... 아직 인가, 마젤란? 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나의 힘을 보여줄 것이야! 최강의 레드드래곤 제노하임 리케르트를 꺾고 나의 강함, 나의 존재를 증명하겠다!” “조금만 참아. 이제 곳이야. 설마 이 황홀한 전투를 경솔한 행동으로 망치지는 않겠지? 그랬다가는 아무리 너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성호를 긋고 잠시 동안 그 자세로 앉아있던 마젤란이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하? 네가? 네까짓 게? 용서하지 않으면 어쩔 건대? 응?” 너무나 흥분해 버린 발칸은 이제 마젤란에게라도 덤벼들 듯한 기세였다. 하얗게 타오르는 눈에서는 불똥이 떨어지고 있었고, 넘쳐나는 살기로 함 내의 공기 전체가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졌다. “어쩔 거냐고? 은퇴해 버릴 거다. 나 없이는 아무리 다른 화랑을 파트너로 삼는다 해도 이런 멋진 싸움은 두 번 다시 할 수 없을 걸?” 협박 같지도 않은 협박이었지만, 발칸은 굳어져 버렸다. 이 고지식한 그의 용신화랑은 정말로 그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혼자서 용황계로 돌아가 봐야 수천 년이 지나도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또다시 지루하기만한 어린 용들의 도전을 받으며 한가한 마법연구나 하는 것은 이미 인간들의 용신기가 되어 심장이 터질 만큼 흥분되는 전쟁터를 헤쳐 온 발칸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이건 마약에 절어있는 사람에게서 그것을 빼앗는 것 정도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절대적인 중독이다. “아... 알았어. 얌전히 있을게. 하지만 너도 되도록이면 서둘러줘. 얼마나 더 기다리면 되지? 10분? 15분? 설마 30분은 아니겠지? 한 시간 이상이라고 하면 화낼 테다.” 어린애처럼 보채는 이 존재가 용황급 에인션트 골드드래곤 사이카 발칸이다. 용들은 강한 상대와의 싸움이라면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모두 팽개쳐 버리고 이렇게까지 미치는 것이다. 하지만 해모수도, 마젤란도 쉽게 용신기를 모함 밖으로 내지 않았다. 함대의 지원이 있긴 하겠지만, 이 싸움의 승패는 전적으로 용신기에 달려 있다. 용전기가 아닌 최강의 용황급 용신기의 격돌이다. 만약 용신기중 어느 한쪽이 밀리게 되면, 어떻게 해도 만회할 방법이 없다. 용신기의 패배는 함대의 전멸로 이어지는 것이다. 신중해 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단지 핑계일 뿐, 사실은 즐기고 있었다. 해모수도, 마젤란도, 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전율의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싶은 것이다. 살아있다는 증거! 존재한다는 증거! “함대를 전개시켜라! 헬크로아 함대를 상대로 돌격전은 소용없으니 함대를 넓게 편다! 방해는 용서치 않을 것이니 해모수와의 전투가 끝날 때 까지 각 함 대기!” “오오, 이제 시작하는 거냐? 이제야!” “좋아! 가자 발칸! 전설의 가장 처절하고 아름다운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단 한기만이 나왔다. 헬크로아 함대에서도, 그리고 마젤란의 5함대에서도 단 한기뿐이다. 전율의 시작! 홍염의 심판, 용신기 제노하임 리케르트, 그리고 황금의 진혼곡, 용신기 사이카 발칸의 우주를 가르는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B&M 최종장 전설의 끝, 신화의 시작2화 유신이 이끄는 그리폰 부대가 미도우만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헬게이트의 영향으로 미도우만은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본진과 연락이 되질 않아 부랴부랴 달려온다고 달려왔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이... 이럴 수가... 전기 고도 상승! 앞으로 나아가지 마!” 유신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1군단의 사령부를 중심으로 반경 10km에 거쳐 퍼져 있는 너무나 익숙한 모습. 지옥. 이제는 손 써볼 수도 없을 정도로 오염된 지옥의 땅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흄! 흄! 흄! 내가 이놈을 잊고 있었다니! 하지만 이놈이 미친 건가? 마법계에서 헬게이트라니!’ 너무 어이없는 광경에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미도우만은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까지 사악한 기운을 내뿜으며 회색의 말라비틀어진 미이라 처럼 변해 있었다. “미스티, 3군단의 위치는 어디쯤이지?” 유신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썩은 내를 풀풀 풍기고 있는 미도우만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미도우만에서 하루 반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미스티도 미니미스티를 통해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며 넋이 반쯤 나가버렸다. “3군단은 그곳에 대기시켜. 이곳에 와 봐야 적들의 전력을 늘려줄 뿐이야. 너랑 미키, 마키, 그리고 비얀 만 와. 소드마스터들이라 해도 위험해. 지휘는 신시아와 세이람에게 맞기고.” 시커멓게 죽은 땅에선 언데드 몬스터끼리 이리저리 합쳐져 버리며 더더욱 거대하고 강력한 괴물로 변하고 있는 녀석이 보였다. 나무 같은 식물들도 주변의 동물이나 인간 언데드들과 결합하여 기괴한 모양의 몬스터로 변하고 있었다. 아무런 질서도 상식도 통하지 않는 곳. 이곳은 지옥이다. “너랑 비얀이 도착할 때 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이라 해도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아직 살아남은 2군단과 3군단을 어떻게 해서든 라일로스 대륙으로 돌려보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비얀님의 주력이라면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합니다. 미키와 마키는 한 시간 반, 저까지 도착하려면 두 시간 이상 걸립니다.” 미키와 마키는 막 불러도 되지만, 용신화랑 후보인 비얀에게는 아무리 미스티라 해도 감히 반말을 할 수 없다. 미스티는 자연스럽게 비얀에게 존칭을 사용했다. “따로 움직이지 말고 함께 움직여. 이럴 때는 차라리 신중해 지는 게 낳겠다. 지휘는 네가 하고. 비얀은 아직 미숙해.”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움직이겠습니다.” ‘흄, 네놈을 용서치 않겠다. 위시마스터라는 영광된 자리를 버리고 리치가 되어 마물들의 편에 선 것도 모자라 이따위 짓을 하다니!’ 유신은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이를 갈았다. “유신?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엘리시엘은 히야누를 니케의 옆으로 바짝 붙이며 미도우만을 가리키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두렵고 무섭고 숨이 막히고 눈물이 흘렀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저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마법이야.” 달리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마법계의 일개 엘프에 불과한 엘리시엘에게 6스피어급의 대량학살 마법 헬게이트에 대해 뭐라고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게 무슨 말이야? 이런 마법이 어딨어? 저 아래에서는 정령들조차 없다고. 하지만 뭔가 움직이는 것이 잔뜩 보여.” 엘리시엘은 믿지 못하겠는지 히야누를 미도우만 쪽으로 비행시키려 했다. 엘리시엘은 미도우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볼을 타고 끝없이 흐르는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만둬, 엘리. 아직 마법의 효과가 남아있어. 너야 엘프니까 어떨지 몰라도 히야누는 오염되고 말거야.” 유신은 힘없이 엘리시엘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라피 언니가 있단 말이야!” 유신이 니케를 이용해 엘리시엘의 앞을 막아서자 그녀는 충돌하기라도 할 듯, 거칠게 니케를 몰아붙이며 고도를 낮추려 했다. “아차! 세라피가! 이런 망할!!” 그동안 너무 바쁘게 싸우느라 까맣게 있고 있던 이름.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이름. 그리폰을 갖지 못한 세라피는 본진의 마법지원부대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엘프기 때문에 좀비화 되지는 않을 테지만, 살아있는 것에 대한 무한한 적개심을 가진 언데드 몬스터 틈에서 그녀가 무사할거란 보장은 없었다. “이리엘님, 엘리와 그리폰 부대를 부탁해요!” “에?” 그리폰 부대의 대장인 이리엘이 뭐라 하기도 전에 유신은 니케에서 몸을 날려 그 아래로 뛰어 내리는 것이 아닌가? “유... 유신님? 대체 뭘 어쩌라고...” 이리엘은 황당한 마음에 점점 작은 점이 되어가는 유신과 엘리시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리엘은 엘리시엘이 유신을 따라가지 못하게 말려 달라는 뜻인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대체 언제 손을 쓴 것인지, 엘리는 히야누의 두꺼운 목에 기댄 채 얌전히 기절해 있었다. 예민한 히야누조차 엘리시엘이 기절했다는 것을 모르는 듯, 평소의 멀뚱한 얼굴로 그냥 하늘에 떠 있을 뿐이었다. 이리엘은 이 싸움에 엘프와 그리폰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음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 역시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아... 어쩔 수 없지. 전기 상승! 상공에서 대기!” 이리엘은 고도를 높여 그리폰이 기류를 타게 했다. 늪지대와 산악지대를 번갈아 날아다니며 포탄을 수송한 3군단 소속의 그리폰은 녹초가 될 만큼 지쳤을 테니, 조금이라도 그 부담을 덜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리폰들은 그들의 친구를 위해 기꺼이 조금 더 창공에 머물러 주었다. B&M 최종장 전설의 끝, 신화의 시작3화 “에어 윙” 유신은 지상에 떨어지기 직전, 비행마법을 시전하여 몸을 조금 띄운 후, 지상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헬게이트라 해도 이정도로 오염시키다니... 흄의 마력인가? 아니면 지옥의 힘이 더 세어졌다는 뜻일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세라피를 구하는 일이 최우선인 것이다. 유신은 그녀가 머물고 있었던 1군단의 마법병단 막사를 향해 내달렸다. ‘대체 이 기운은 무엇인가? 설마 그라테우스? 그 녀석이 날뛰는 것인가? 제약 마법이 걸린 몸으로?’ 그의 초감각에 마룡의 무시무시한 기운과, 그 기운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마법사들의 마나가 잡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도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세라피가 최우선인 것이다. “그어어억” 몇몇 좀비들이 그들과는 달리 강력한 생명력을 내뿜고 있는 유신을 보며 달려들었다. 마치 그 싱싱한 피를 조금이라도 나누어 받으면, 그들은 이미 잃어버린 생명체의 따뜻한 무언가를 나누어 가질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아직까지 마물들의 피가 지워지지 않은 풀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는 자색기사단의 기사도 보였다. 아마도 최후까지 헬게이트 마법에 저항하며 언데드몬스터가 되어버린 옛 동료들을 베어 넘기다 결국 자신조차 언데드 몬스터가 되었으리라. 낯익은 얼굴도 보였다. 유신에게 직접 검술을 배운 기사들. 한참 모자란 실력이었지만, 언젠가 유신만큼 훌륭한 기사가 되겠다는 꿈을 불태우며 미도우만까지 따라온 사랑스런 그의 자식들. 그들은 흉측하게 썩어가는 모습으로 한때 가장 존경했던 그들의 스승을 향해 의미 없이 검을 휘둘러 댔다. “비켜! 방해하지 말고!” 지키지 못했다. 전쟁터에서 자신의 부하를, 형제를, 자식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안타까움, 미안함, 그리고 분노. 타오르는 분노는 힘이 된다. 유신의 분노가 커질수록 특별히 검기를 넣지 않았는데도 첨예에서는 문뜩문뜩 푸른빛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유신은 첨예를 휘두르는 대신, 느릿느릿 움직이는 좀비들의 머리를 밟고 날듯이 그 일대를 벗어났다. 유신이 사라져 버리자 좀비들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잊어버렸다는 듯, 멍한 모습으로 제자리에 멈춰 섰다. “세라피! 어디 있어요? 대답해요!” 지옥의 마기가 너무 독해서 이럴 때는 오히려 초감각이 방해가 되었다. 너무 예민한 유신의 감각기관이 순간적으로 마비되어 지옥의 냄새에 익숙해 질 때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기 시작하자 감각도 돌아왔다. ‘저긴가?’ 유신은 친숙한 냄새, 최악의 지옥 속에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는 세라피 특유의 향긋한 냄새가 나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평소의 그였다면 근처에 언데드 몬스터가 없는 점이나, 마치 그를 유혹하듯 지나치게 선명하게 흘러나오는 세라피의 깨끗한 냄새에 긴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신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세라피를 내버려 둔 것이다. 가브리엘일지도 모르는 세라피를 전쟁터의 한 가운데에 내버려 둔 것이다. 그런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제발... 제발, 신이여. 그녀만은 무사하도록...’ 그녀의 기운은 마법병단 사령부 건물로 쓰이던 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라피!” 유신은 문을 찾아 가는 시간도 아까워 그대로 벽을 뚫고 그녀의 냄새가 스며 나오는 곳으로 뛰쳐 들어갔다. . . . 연참 광참 오늘은 좀 많이 써야 할듯 하군요. 이제 마감이 코앞인데... 페이지 조정하며 쓰느라 생각만큼 쓰는게 쉽지 않습니다. 으음... 이제 전부 결정적인 장면만 남았군요. 그라테우스와 닐케니언, 흄과 유신, 해모수와 마젤란.... 그리고 지브릴의 진정한 목적과 마법계의 비밀... 여기까지만 쓰고... 나머지는 책으로 봐 달라고 하면 돌맞을까요?ㅡ_ㅡ;; 2부는 내년 초에 시작할 생각이고, 그 전에 0부, 즉 성계대전 직전까지의 스토리를 두권 정도로 써 볼 생각입니다. 그럼 모두 좋은 주말 되시고요^^ 얼마 안남았지만 많이 사랑해 주세요. B&M 최종장 전설의 끝, 신화의 시작4화 검붉은 마법원, 시커먼 역 십자가, 기괴한 빛깔을 뽐내는 마법시약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재료들, 그리고 새하얀 나신의 세라피. 무슨 마법적 의식을 치룬 것인지, 세라피는 손과 발에 흉측한 대못이 박힌 채 역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애처로운 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흐르는 놀랄 만큼 붉은 피는 새하얀 그녀의 몸을 배경으로 선명한 피색 추상화를 그리는 것 같았다. “세라피, 세라피, 이게 대체... 괜찮아요?” 유신이 애타게 불러 보았지만, 세라피는 의식이 없는 것인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런 꼴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세라피의 작고 애처로운 하얀 손발에서는 아직도 따듯한 피가 쉼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세라피의 몸을 뚫고 있는 저주스러운 대못은 함부로 뽑을 수가 없었다. 함부로 뺐다가는 피가 쏟아져 출혈과다로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유신은 당장 부셔지기라도 할 듯 여린 숨을 몰아쉬는 세라피에게 감히 손도 대지 못하고 그녀의 이름만 속절없이 불렀다. “이렇게까지 빨리 올 줄은 몰랐소. 유신.더.실.버.스.타.” 낮지만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 이 지옥 자체가 내는 듯한 무겁고 처절한 소리. 유신조차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그의 등 뒤로 다섯 개의 어두운 그림자가 솟아나 있었다. 마침내 마주친 흄과 유신. 흄 대륙의 악몽이자 이 모든 사태의 원흉 흄을 만난 것이다. 흄이 다섯 중 가장 작았지만, 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사악한 마기는 그의 옆에 있는 다른 덩치들은 상대도 안될 만큼 압도적이었다. 흄은 양의 그것처럼 말려진 뿔이 두개 붙어있는 투구와 흉측한 해골을 가리는 새하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마스크는 광대의 그것처럼 과장되게 웃는 형상이었지만, 오른쪽 눈 부위는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진하게 화장되어 있었다. 그 모습이 보는 이의 심장에서 공포라는 감정을 직접 끄집어 낼 것 같이 무시무시했다. 중앙에 선 흄을 제외한 나머지는 두터운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고, 어깨 높이까지만 해도 3미터는 넘을 듯한 거대한 덩치들이었다. 망토 위의 어깨장갑에 부착된 대 마법용 실드는 거대한 뿔처럼 위협적인 모습이었고, 중력제어용 부스터가 달린 중갑주는 그들의 덩치를 훨씬 커 보이게 했다. 다섯 모두 대 우주전투용의 무시무시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무시무시한 흄을 등 뒤에 두고도 유신은 돌아보지 않았다. 단지 천천히 세라피의 얼굴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흥분한 상태에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유신은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분노로 타버릴 것 같은 머리를 식혔다. “네놈이 흄인가? 시시한 리치 따위가 감히 이따위 짓을 한 건가?”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에 묻어나는 처절한 살기는 이미 리치가 되어버린 흄조차 움찔하게 만들 만한 것이었다. “그렇소이다. 그 유명한 홀리크로스의 기전장군을 상대하려면 나도 나름대로 예의를 다해야 하지 않겠소?” 한순간의 방심도 용납되지 않는다. 흄은 리치답지 않게 이런 어마어마한 장비까지 들고 나올 정도로 만반의 준비를 다한 것이다. “예언하나 하지. 네놈은 쉽게 죽지 못할 것이다.” 유신의 손이 잠시 움직이는 가 싶더니 어느새 첨예가 뽑혀져 나왔다. 동시에 흄과 함께 나타난 네 개의 그림자가 흄을 보호하듯 그 앞을 막아섰지만, 첨예의 궤적은 흄을 향하지 않았다. 역 십자가의 맨 아래 부분을 깨끗하게 절단한 유신은 혹여라도 세라피에게 충격이 갈까봐 너무나 조심스럽게 세라피가 매달려 있는 역십자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쉽소. 조금만 더 빨리 오셨으면 저 엘프 계집의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을. 세속적인 욕망이 없는 내가 보기에도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몸이었소.” 그런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흄은 유신을 충동질하기 위해 세라피를 모욕했다. 지금도 도저히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저 괴물딱지 같은 인간은 지금같이 절망스러운 상황을 여상스럽게 해쳐온 남자다. 확실한 승리를 하려면 상대방을 동요시켜야 하는 것이다. “후우...” 긴 한숨을 내쉰 유신은 비로소 흄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는 분노도, 공포도 없었다. 그렇다고 동정이나 연민조차 없는 텅 빈 것 같은 눈이었다. 하지만 흄은 알 수 있었다. 끝없는 심연을 연상시키는 끝을 알 수 없이 깊은 칠흑의 눈동자! 그것은 최고의 전투준비를 마친 강력한 맹수의 그것이었다. ‘동요하지 않는 건가? 그렇다면 역효과군.’ “어째서 법칙을 어기는가? 이런 짓을 벌이면 루시펠님이 기뻐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번에는 유신이 흄의 동요시키기 위해 루시펠의 이야기를 꺼냈다. “법칙? 무슨 법칙을 말하는 게냐? 마법계만의 고유한 법칙을 말하는 건가? 하? 네놈이? 다른 놈도 아닌 법칙과 질서의 파괴자 유신 더 실버스타가 그딴 말을 하는 거냐?” 과연 루시펠의 이야기가 나오자 흄은 그러면 안 되지 하면서도 흥분하고야 말았다. “다른 곳도 아닌 마법계에서 6스피어급의 대규모 학살 마법을 썼으면서도 할 말이 있나? 난 적어도 네놈처럼 마법계의 상식을 깨버리는 짓은 하지 않았어!” “그래서 네놈은 법칙을 지켰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가증스런! 눈가림 같은 말을 하다니! 네놈이 한 일을 봐라! 미도우만에서, 늪지대에서 네놈이 한 짓을 보란 말이다!” 흥분한 흄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으르렁 거렸다. “그런 건 변명이 되지 못해! 정도란 것이 있는 법이다. 마법계의 지식과 물질을 이용해 거둔 깨끗한 승리였다. 위시마스터였던 네놈이 그 정도도 모른단 말이야?”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저 멍청한 해골바가지가 이성을 잃고 달려들 것 같았다. 그러면 카운터로 천상신검을 먹여주면 끝나는 것이다. “네놈이 마법계 태생이냐? 네놈이 쓴 작전이 마법계에서 쓸 수 있는 작전이더냐? 도대체 네놈과 나의 차이점이 무어란 말이냐? 이것 정말 재미있군. 빛이 쓰면 정의고, 어둠이 쓰면 천인공노할 저주받을 짓이냐? 그게 신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빛의 논리인가?” 한번 내뱉기 시작하자 주체할 수가 없는 것인지, 흄은 완전히 흥분하여 고래고래 떠들어댔다. B&M 최종장 전설의 끝, 신화의 시작5화 ‘좋았어. 허점을 보여라 흄, 아주 작은 틈이라도 좋으니...’ 하지만 유신이 타이밍을 잡기 전, 흥분하여 떠들어 대던 흄은 갑자기 뭔가 중요한 것이 생각났다는 듯, 지껄이는 것을 멈췄다. “좋다. 아주 좋아. 날 동요하게 만들 셈이었나? 절반쯤 성공했군. 85점주겠어.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될 말이지.” ‘치잇.’ 아깝게 타이밍을 놓친 유신은 이를 갈아붙였다. “틈을 보이기 싫은 모양인데,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보이게 해 주지. 저 계집을 이용해서 말이야.” 유신의 말에 놀아나 흥분해버렸다는 것이 화가 나는지, 흄은 엉뚱하게 그 분풀이를 세라피에게 하려고 했다. “세라피에게 손대지 마라! 너 따위가 넘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흄이 세라피를 노린다면 선택의 여지 따위는 없다. 이제는 싸워야 하는 것이다. “용아검!” 시동어를 외운 것만으로도 용아검이 소환되어 유신의 손에 들려졌다. 하지만 흄은 유신이 용아검을 들건 첨예를 들건 상관없었다. “저 계집도 루시펠님이 받는 고통의 천만분의 일이라도 받아 보라지!’ 유신이 용아검을 소환하는 사이, 흄은 아주 조금 손을 움직였다. “웃기지 마라!” 유신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흄을 두 쪽 내려 했다. 그가 사용하는 천상신검의 검기라면, 아무리 흄이 물질계 무기인 중갑주에 마법방어용의 실드를 쓰고 있다 해도 일격에 깨트릴 자신이 있었다. 무슨 짓거리를 할지는 몰라도, 마법을 쓰기 전에 끝내버리면 되는 것이다. 일대의 마나는 유신이 강제지배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흄이라 해도 마법을 쓰는데 약간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신의 공격은 세라피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으로 멈춰지고 말았다. “꺄아아악, 아파! 아파아!” 흄이 약간 손을 움직인 것만으로도 지금껏 죽은 듯 기절해 있던 세라피가 온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한손에 잡힐 것 같이 가는 그녀의 허리가 순식간에 부풀어 올라 당장에 터질 것 같이 되었다. “이런, 세라피! 네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세라피는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처참하게 대못에 박힌 손발을 마구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겨우 멎기 시작한 피가 다시 쏟아졌지만, 그런 고통쯤은 흄이 마법으로 주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지 발버둥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파... 너무 괴로워... 살려줘요... 유신... 어디있어요...” 하얗게 뒤집어진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 바로 옆에 있는 유신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이놈, 대체 세라피의 몸에 무슨 짓을 해 논 거냐! 당장 멈춰!” 세라피의 몸부림이 저렇게까지 심하지 않았다면, 유신은 이를 악물고 흄을 베었을 것이다. 세라피야 나중에 천천히 고쳐도 된지만, 흄에게 나중이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상태는 나중에 어떻게 한다고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5초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사이 세라피는 손발의 살이 다 벌어져 하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하게 몸부림치는 것이다. 게다가 대못에는 무슨 특수한 장치가 되어 있는지, 손발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몸부림치는데도 빠지지 않았다. “크크큭, 겨우 이정도 고통으로 저렇게 엄살이라니... 저건 코스믹블레스터의 무한 공간에 봉인된 루시퍼님의 고통에 비하면 먼지만큼도 안 되는 것 아닌가? “닥쳐라!” “아아... 말투에 조심을. 그렇지 않으면...” “아아아아악, 캬아악, 캬악” 다시 흄의 손이 조금 더 움직이자 세라피의 발버둥이 더욱 심해졌다. 목이 메이기 시작했는지, 갈라지는 쇳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손목은 기이한 각도로 꺾여져버렸고, 조금만 더 있으면 완전히 찢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세라피에게 남은 선택은 없었다. 그녀는 모든 힘을 쥐어짜내 혀를 깨물려고 했다. “그만둬요!” 다행이 유신이 먼저 보고 입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간신히 막을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런 것도 알지 못하고 유신의 손가락을 마구 씹었다. “원하는 게 뭐냐?” 유신은 결국 이를 갈면서도 용아검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 제서야 세라피의 발버둥이 멈추며 팽팽하게 부풀어 있던 배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악, 하악.” 흄이 주는 고통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견딜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곧바로 다시 기절해 버렸다. “유신... 어딨어요... 살려줘요...” 그녀는 기절한 상태에서도 끝없이 유신을 찾으며 경련을 일으켰다. ‘삼십분? 오래 버텨봐야 그 정도인가? 이런 출혈이라면...’ “흐흐, 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저 엘프 계집의 뱃속엔 혈사충이 가득 들어 있거든. 내 의식이 끊기면 다시 혈사충이 날뛸 거야. 지금은 뱃속에 있지만, 점점 몸의 다른 곳으로 퍼져가겠지.” “빌어먹을...” 유신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혈사충은 숙주를 쉽게 죽이지 않는다. 끝없이 새끼들을 불리며 숙주의 몸이 완전히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철저하게 양분을 빨아먹는 것이다. 보통 숙주는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게 되고, 그제 서야 혈사충들은 숙주의 몸을 뚫고 나와서 다른 먹잇감을 찾는다. 워낙 희귀한 벌레기 때문에 혈사충에 대해 연구된 바는 별로 없다. 때문에 그것을 막으려면 혈사충을 제어하는 마법사가 빼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 . . . 세라피의 고생은 언제 끝날지... 블레이드 앤 매직에서 가장 고생만 하는 캐릭중 한명이 아닌가 싶군요.ㅡ_ㅡ;; 이상태로 죽으면... 너무 불쌍할지... B&M 최종장 전설의 끝, 신화의 시작6화 마침내 흄의 옆에 서 있던 거대한 덩치들이 참마도 만한 검을 가슴 앞으로 세웠다. “무스칼과는 구면이겠군. 하찮은 오우거긴 하지만, 몇 가지 마법적 처리만으로도 네놈이 자랑하는 화랑단 이상의 파워를 낼 수 있게 되었지. 이 녀석들을 대량 복제하여 전쟁에 투입하면, 제2차아마게돈은 어둠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암담한 순간이었다. “네놈의 영혼에 루시퍼님의 가호가 있기를...” 강력한 리치의 마법지원을 받는 소드마스터급의 오우거 넷! 게다가 세라피라는 인질이 있는 이상, 실력을 발휘할 수도 없다. “죽어라!” 흉흉한 붉은 검기를 발하는 네 개의 참마도가 유신을 향했다. “쿠아아앙” 하지만 오우거들이 돌격하기 직전, 거대한 벽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흄과 오우거들이 있던 자리를 내려쳤다. “으윽, 뭐, 뭐냐?” 덕분에 유신과 흄이 있던 건물은 장난감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괴물 오우거들의 공격은 무산되었다. 흄과 무스칼의 클론들도 밖으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신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용아검으로 세라피를 보호하며 건물더미 속에 깔려 버렸다. “쿠웅, 쿠웅” 육중한 발소리와 함께 생물체의 그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였다. 살아있는 공포, 살아있는 절망! “흄, 흄, 불쌍한 리치여. 네 부하들이 왜 머리가 나쁜가했더니 아무래도 너를 닮아서 그런 모양이구나.” “그... 그라테우스? 아직도 살아있었단 말이냐?” 다 무너져 주저앉은 건물의 밖에는 그 건물이 장난감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검고 거대한 실루엣이 보였다. “크오오오오오” 귀청을 찢을 것 같은 드래곤의 포효와 함께 드래곤 피어가 퍼져 나갔다. “쉬운 싸움이었지. 별반 재미도 느낄 수 없었다.” 그라테우스는 그 긴 꼬리를 휘둘러 흄이 있는 곳을 내려쳤다. 하지만 흄은 가볍게 공중으로 피해 그 무시무시한 그라테우스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설마 혼자서 닐케니언의 마스터급 마법사를 모두 해치웠단 말이냐?” 설혹 흄 자신이라도 그 정도 수의 마스터급 마법사들을 혼자서 전부 처치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라테우스는 저런 엉망진창인 몸으로 그것을 해낸 것이다. “네놈은 바보냐? 아무리 내가 약해졌다 해도, 대체 어떻게 하면 드래곤이 마법사 나부랭이들에게 패할 수가 있단 말이냐? 그런 좋은 방법이 있다면 나도 배우고 싶을 정도구나!” 그라테우스는 큰소리치고 있었지만, 강철 같은 드래곤의 의식이 몽롱해 질 정도로 이미 많은 피를 흘렸다. 게다가 끝없이 뿜어져 나오던 마나도 바닥을 보이고 있는 중이었고, 강력한 용의 비늘은 절반 이상 떨어져 나갔다. “후... 닐 케니언. 소문만큼 대단하진 않더군. 그럼 이제 네놈의 목을 받기로 하자.” 그라테우스는 이제 한계가 왔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지금의 체력으로는 브레스 한번이나 궁극의 마법 한번 정도가 한계다. ‘하지만 아무리 지쳐도...설혹 내가 죽는다 해도! 흄, 네놈만큼은 살려둘 수 없다. 율리안에게 해가 될 네 녀석만큼은...’ 그라테우스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주변의 마나를 끌어드렸다. 동시에 그가 가진 모든 드래곤 하트의 힘도 짜내었다. “왜 유신이 아닌 나에게 덤벼드는가? 너의 적은 유신이 아닌가? 마신의 창이여!” “유신은 율리안의 친구. 그리고 난 이미 그에게 패했다. 하지만 율리안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네놈을 살려둘 수는 없다!” ‘나는 드래곤! 승리가 아니면 죽음이 있을 뿐. 승부다! 브레스라면 아무리 저 괴물이라도!’ “소멸 되거라, 율리안의 적!” 마침내 드래곤 최고의 필살기! 우주순양함조차 일격에 격침시켜 버리는 용의 브레스가 준비된 것이다! “푸욱” 하지만 브레스가 쏘아지기 직전, 네 개의 거대한 검이 정확하게 그라테우스의 목과 머리를 이어주는 급소에 꽂혔다. 네 개 모두 새빨간 검기가 타오르고 있는 엄청난 강검이었다. “크와아아아” 그라테우스는 급격히 코어와 마나가 흩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의식을 놓을 수는 없었다. 지금이 마지막 찬스인 것이다. “죽어라!” 그라테우스의 목에서 검기가 폭발하는 동시에 마신의 창은 발사되었다. 하얀 섬광이 곧고 아름다운 선을 긋고 지나간 자리는 지옥의 썩은 토양을 깨끗이 정화시키는 것 같은 열기와 함께 붉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암만이 남았다.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곳이어 지옥에 어울리는 열기가 일대를 덮었다. 그라테우스의 브레스가 작렬한 자리는 갑작스런 기온의 변화로 용권풍이 솟아나며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부연 먼지 속에 뒤엎여 버렸다. 그라테우스 일생일대에 있어 이렇게나 강력한 브레스를 써 본 적이 있을까? 그라테우스의 흉측하게 뭉그러진 얼굴에 만족한 듯한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긴... 건가? 율리안... 마지막으로 네 웃는 모습을...’ 그리고 그라테우스는 서서히 의식을 잃어 갔다. . . . 오늘은 여기까지... 늘 느끼는 것이지만, 마감의 힘은 위대하군요. 하루에 이만큼이나 써 낼수 있다니... 요 앞편이 너무 잔인했나요? 그럼 출판수정때는 묘사를 좀 줄여야 하나... B&M 최종장 전설의 끝, 신화의 시작7화 "마력장 35%침식, 오른팔 3번 근육의 조직붕괴 기준치 초과, 보조 추진기 출력다운, 메인엔진 최우선 복구 진행 중" 정신없이 기체의 파손과 회복을 보고하는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징징 울린다. 워낙 파손과 복구가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알리는 오퍼레이터의 말이 겹쳐져 알아듣기도 힘들다. 용신기의 파괴력도 놀라운 것이지만, 그 재생속도 역시 상상을 초월한다. 드래곤하트가 들어있는 용심이 파괴되거나 용신화랑과 용신기의 두뇌체가 모두 파괴될 때까지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사소한 파손쯤은 무시해도 상관없다. 오히려 용신화랑이 너무 세세한 것 까지 신경쓰다보면 전투의 집중도가 떨어져 일격에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해모수는 그런 사소한 것까지 모두 보고하도록 했다. 다른 존재도 아닌 같은 용신화랑과의 전투다. 이런 작은 요소까지도 소홀히 했다가는 틀림없이 패하게 되는 것이다. 해모수는 전투 중에도 제노하임의 아주 사소한 상처까지 신경 쓰면서 최적의 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생사를 가르는 파멸의 불꽃, 나의 손에 머물러 적을 쳐라!” 해모수가 기체를 조정하는 사이, 제노하임은 그의 특기인 7스피어급의 집중 파괴형 화염마법 마그나블레이드의 주문을 외웠다. 단독으로 쓸 때는 그 진가가 들어나지 않는 마법이지만, 용신기 상태에서 싸울 때 이만큼 무서운 마법도 없다. 이 마법의 무서운 점은 코어에 힘을 실어준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마나를 이용한 공격보조 마법은 코어와 융합하지 않지만, 이 마법은 마치 마나와 코어가 동화된 것 같은 효과를 주기 때문에 용신기급이나 마신급의 적과 싸울 때는 만큼 무서운 힘을 발휘하게 된다. 단순히 적에게 쐈을 때는 보통의 파괴마법이지만, 자기가 사용하는 무기에 걸었을 때는 상상할 수 없는 파괴력의 공격보조마법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마법이 발동되자 제노하임의 오른팔에 그려진 마법문자가 나선형으로 풀려나가며 용아검 위에서 둥그런 구형을 이루었다. 그 마법문자는 용아검의 안으로 빨려들어 갔고, 마침내 마법이 완성되자 제노하임의 어금니로 만든 용아검에는 작열하는 붉은 빛이 돌기 시작했다. 이제 마그나블레이드는 해모수의 천상신검의 검기와 동화되어 찬란할 정도로 환한 검기를 뿜어내는 것이다. 제노하임이 마법을 발현시키자, 그와 동시에 어깨의 수납부분이 열리며 성계대전에서 제노하임에게 패해 그의 종속마가 되어버린 세 마리의 마왕이 나타났다. 그들은 각각 얼음의 파괴마법 프로스트 카무이, 어둠의 방어마법 슈발츠쉴드, 무속성 결계해제마법 침묵의 열쇠를 완성시켰다. “이제 끝을 보자 마젤란! 내 상대는 유신과 카이드리아 엘 엑시나에다! 네 따위가 아니야!” 순식간에 네 개의 초대형 마법이 시전되자 일대 우주의 마나가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며 제노하임은 마나를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형상이 되었다. 하지만 마젤란과 발칸 역시 얌전히 당할 리가 없다. 해모수와 제노하임이 대형 공격주문을 준비를 위해 잠시 동안 수비에 치중하는 사이, 사방 천지는 발칸이 휘두르는 발뭉의 검광으로 메워지다 시피 했다. 과연 황금의 진혼곡이란 명성에 어울리는 화려하고 강력한 공격이었다. 빛의 춤이 끝났을 때는 제노하임이 마법 발동을 위해 모아놓은 마나 자체가 베어져 버리며 마법이 붕괴되고 있었다. 어지럽게 요동치는 스피어급 입체 마법진,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각도로 날아드는 발뭉! 그리고 잠시만 허점을 보여도 지독하리만치 집요하게 파고드는 용신기의 유사 의식체. “강하구나! 마젤란! 용신화랑의 이름이 헛되지 않아!” 해모수는 그 긴 전쟁의 나날동안, 오늘만큼 힘겹고 흥분되는 싸움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요툰하임의 상위 거인족들과 싸웠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순수한 실력이라면 해모수가 약간 위지만, 유신에게 쥬펜델을 잃은 것이 너무나 컸다. 마젤란이 들고 있는 신의 검이라고 까지 불리는 명검, 발뭉을 상대로는 아무리 제노하임의 강화드래곤본으로 만든 검이라 해도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아직 마그나블레이드는 남아 있었고, 그 공격은 저 강대한 용신기와 용신화랑을 상대로도 틀림없이 효과가 있었다. 발칸은 그 공격을 발뭉으로 간신히 막기는 했지만, 워낙 강력한 일격이었기 때문에 기체가 견디지 못하고 오버로드를 일으켰는지, 휘청 하는 게 보였다. 검에서는 마젤란이 앞선다 해도, 해모수가 워낙 백전노장인지라 싸움 자체는 백중세였다. 제노하임은 자잘한 상처를 입고 있기는 했지만, 치명타는 입지 않은 채 조금씩 발칸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더! 더! 더더욱 나를 즐겁게 만들어 봐라! 브레스 준비. 카운트 파이브. 제노! 마법곌계 강화해!” 벌써 30분 째 마젤란의 용신기 발칸과의 난타전으로 외장은 거의 다 박살났고, 추진제도 거의 다 소모했다. 이제는 제노하임의 무한에 가까운 마나와 해모수 자신의 코어에 의지하여 싸우고 있는 상태였다. 상대는 그들보다 더욱 힘들 테지만, 쉽게 이 싸움을 포기할 생각은 없는지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카운트, 5, 4, 3, 2, 1!” 순간 해모수는 왼발을 내줄 각오를 하고 거칠게 제노하임의 가슴을 걷어찼다. 과연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발칸의 분신과 같은 유사의식체 세 개가 달려들어 제노하임의 다리를 잘라냈다. 그냥 잘라낸 것도 아니고, 잘린 부분에 대 마법 처리를 하여 재생조차 막아버리며 잘린 다리는 원자레벨로 잘게 분해해 버리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해모수도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브레스!” 제노하임이 부리는 세 개의 유사의식체가 한곳으로 모이더니, 우주를 태울 듯한 홍염의 브레스를 뿜어내었다. “쿠아아아아아아” 이것이 홍염의 심판! 제노하임 리케르트의 최강의 필살기이다! 발칸의 용신기 본체는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그 공격을 피할 수 있었지만, 제노하임의 발을 공격하던 유사의식체중 두개는 흔적도 안 남고 증발해 버렸고, 한개도 간신히 피하기는 했지만, 형체만 겨우 남았을 뿐, 표면은 거의 다 타버릴 정도로 치명상을 입었다. B&M 최종장 전설의 끝, 신화의 시작8화 “결정타를 먹인다! 가자 제노!” 해모수는 이 승부를 결정짓기 위해 마나와 코어는 물론 모든 물리적 부스터까지 총 동원했다. “메인 마나엔지 오버히트! 4초만 기다려 주세요!” 그 순간 주엔진이 과열을 알리는 오퍼레이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노하임의 무지막지한 마나를 견대지 못하고 용신기의 메인엔진이 오버로드를 일으키고 만 것이다. 지나치게 빠듯하게 싸운 것이 실수였다. 모든 기체의 능력을 100% 이상 끌어내다보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이런 미스가 나오는 것이다. 용신화랑과의 싸움에서 4초면 승부를 결정짓고 함대로 돌아가 발 닦고 편히 쉴 만큼의 시간이다. 해모수는 순간 휘청댈 만큼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억지로 움직이려면 움직일 수 있지만, 같은 용신화랑과의 싸움에서 그런 모험을 할 수는 없다. 그가 생각하는 것과 타이밍이 조금만 늦게 움직여 버리면 그걸로 끝이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그사이, 발뭉을 크게 휘두르며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전부 쏟아 부은 발칸은 간신히 시간을 벌어 제노하임의 사정거리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덕분에 제노하임의 일대는 화려한 마법으로 수놓아 졌지만, 그 정도로는 제노하임의 결계를 뚫을 수 없었다. “하! 신나는구나! 유신 장군과 검으로 맏상대를 할 수 있다더니, 농담이 아니었어! 쥬펜델을 잃고도 이만큼이나 싸우다니!” 마젤란은 해모수의 공포로 몸이 떨리는 것 까지도 기뻤다. 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위는 아예 머릿속에 들어있지도 않았다. 얄미울 정도로 완벽하게 용신기의 모든 성능을 끌어내는 해모수! 아무리 용신화랑이라 해도, 이렇게 까지나 용신기와 호흡을 맞출 수 있으리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즐겁다. 단지 이런 상대와 싸울 수 있는 이 순간이 미치도록 즐거운 것이다. 앞으로 수련하는데 모델이 될 수 있는 존재! 마젤란은 이 싸움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마젤란 장군님, 미카엘님의 전언입니다. 사적인 싸움은 그만두고 적 본대에 대한 전면 공격을... 헬크로아 함대의 후미는 미카엘님의 은하수호함대가 치겠다고 합니다.” 한창 신나는 판에 모함에서 소금뿌리는 내용의 긴급 통신이 날아들었다. “빌어먹을! 웃기는 소리 말라고 해!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이기고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밀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저 고귀한 용신화랑의 입에서 빌어먹을 이라는 욕설까지 나왔다. 평소라면 승리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실버스타군의 용신화랑이 이런 말을 할 리 없겠지만, 마젤란은 그만큼 이 전투에 미쳐 있었다. 어떤 방해도 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웃기는 소리를 해서 죄송하군요. 마젤란 장군. 신출귀몰한 해모수의 헬크로아함대를 전멸시킬 수 있는 기회는 흔한 것이 아닙니다. 진격하세요!” 어느새 통신회선을 장악한 것인지 어이없어 하는 얼굴의 미카엘이 직접 끼어들었다. 그녀는 마법계 근방에서 메르카바로 변신할 생각은 없는 것인지, 함대지휘용의 전투복을 입고 있었지만, 여차하면 뛰쳐나갈 성격이란 것은, 그녀와 함께 싸워본 적이 있는 용신화랑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다. “죄송하군요. 방금 전의 싸움에서 메인 엔진이 당해서 진격은 무리입니다. 아니면 용신기 없이 해모수 장군의 제노하임 리케르트를 향해 함대를 진격시킬까요?” 평소 냉정침착하고 누구보다도 명령을 최우선시 하며 독실한 신자이기도 한 마젤란이 이만큼이나 화가 났다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 그 책임은 나중에라도 필해 묻도록 하지요.” 미카엘은 불의 대천사장에 어울리지 않는 절대영도 같은 싸늘한 얼굴로 한마디를 남기고 통신을 끊었다. “뜻대로...” 발칸의 시야로 보는 우주는 그냥 눈으로 보는 것 보다 훨씬 아름답다. 온갖 마나의 흐름과 코어의 흐름까지 선명하게 시각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워낙 형형색색이고, 미묘한 색변화까지 감지해야 하기 때문에 익숙해 질 때까지는 상당히 고통스럽지만, 일단 익숙해지기만 하면 매우 멋진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우주를 너머에서 무서울 만치 엄정하게 진형을 갖춰 퇴각 준비를 하고 있는 헬크로아함대를 보며 마젤란은 긴 한숨을 쉬었다. “잘했어.” 그런 마젤란을 향해 발칸은 위로인지 빈정거림인지 모를 한마디 했다. “뭐가?” “나도 아직 미진했거든. 홍염의 심판... 대단하긴 했지만, 우린 막아 냈다고. 그리고 아직 나의 진혼곡을 들려주지 못했잖아?” 싸움을 못낸 것은 아쉽지만, 어쨌든 해모수도, 제노하임도 살아서 돌아갔으니 훗날을 기양해도 좋을 것이다. 다음에 또 이런 싸움을 할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니 발칸은 마젤란의 결정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우리가 밀리고 있었어.” 세세한 용신기의 컨트롤, 전체적으로 싸움의 흐름을 보는 눈. 틀림없이 해모수가 한수 위였다. 마젤란은 그것이 분했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더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는 그렇지 않을 거야.” 발칸도 제노하임에게 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한쪽 다리를 자르기는 했지만, 덕분에 자식과도 같은 유사의식체 세 개중 두개나 잃고 말았다. 게다가 그런 빠듯한 싸움 중에도 스피어마법을 쓸 수 있는 마신급의 종속마를 세 마리나 컨트롤 한 것이다. “당연하지. 하지만 그 다음은 대체 언제일까...” 마젤란은 다음의 싸움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몸이 떨려왔지만, 대체 그 다음이 언제일지를 알 수가 없으니 가슴이 답답했다. “뭐, 유신이나 카론님이 돌아오시면 금방이지 않을까?” 발칸은 흥미 없다는 듯 무성의하게 대답했지만, 그 목소리 속에는 어쩔 수 없는 간절한 희망이 담겨 있었다. “으음... 그럼 난 기뻐해야 하는 건가?” 해모수와의 다음번이라면 이런 싸움이 아닌 전쟁터에서 검을 나누게 될 것이다. 수천만의 시체를 쌓아서 만들어지는 결투장. 설혹 기쁘다 해도 기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솔직해지면 되겠지.” “냉정한 놈.” “그래.” 어느새 해모수의 함대는 다른 차원으로 차원 도약을 한 것인지, 그 낌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 . 오늘은 좀 많이 썼습니다. 승부를 못낸 것이 아쉽네요. B&M 최종장 전설의 끝, 신화의 시작9화 “조금만 더...” 과연 전 인류의 과학의 정수라 불리는 카린 사이언스 퍼실러티제의 차원도약 전투함 이카루스는 대단하다고 할만했다. 콜벳급의 작은 크기로 차원도약이 가능할 뿐 아니라, 단독 대기권 진입도 가능하다. 게다가 카린 혼자서 컨트롤 했음에도 별 탈 없이 무사히 마법계까지 도착한 것이다. 기존의 함선과는 달리 유선형의 돌고래 같은 모양의 이카루스는, 마치 우주가 넓은 바닷속인 양 늘씬한 몸매를 뽐내며 유유히 헤엄쳤다 . “마젤란 장군 함대의 사정거리에 들어갑니다. 허가 없이 대기권 돌입을 시도하면 포격 받을지도 몰라요!” 카린을 보좌하기 위해서 카린사이언스퍼실러티의 연구원들이 전해주는 정보는 길고 긴 통신 중계 스테이션을 통해 들리기 때문에 실제와는 조금씩 시간 차이가 난다. 때문에 급박한 상황을 다툴 때는 뭔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상황이 닥쳐버리는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안의 짐만 유신님께 전해주면 그걸로 족해요.” “실버스타군 5함대의 주포들이 본 함을 락온 했습니다. 각 승무원들은 비상전투준비에...” 이카루스함 내에는 비상을 알리는 경보가 요란하게 울리며 붉은색의 전투 경보 등이 함 내를 긴장감 넘치는 붉은 색으로 물들였다. “카린님! 진정하고 일단 마젤란 장군께 양해를 구해요!” “그건 안돼요. 그렇게 되면 제멋대로인 제 행동에 대해 마젤란 장군께서 책임을 져야합니다. 이대로 돌입하겠어요!” “아악! 그러다 카린님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린 전부 빌어먹을 카론한테 살해당한다고요! 카린님, 제발 말 좀 들어요!!” 통신기를 통해 절망에 찬 연구원들의 비명이 들렸다. 카론의 정비는 카린 사이언스 퍼실러티에서 전담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카론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있고, 그런 만큼 그 최악의 변태용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카린은 예의상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어주었을 뿐, 내용은 깨끗하게 무시했다. “미안해요. 돌아가면 모두에게 저녁식사라도 대접할게요.” “그러니까 그랬다가는 카론한테...” “이런, 대기권 마나스트림에 이상이 있나 봐요. 통신이 잘 안돼요...” “그런 말도 안돼는...끄지 마요! 아아악” 카린은 통신기에 잡음을 몇 번 섞어 주고는 패닉상태에 빠진 연구원들의 비명소리를 뒤로하고 그대로 꺼 버렸다. “15분 후, 대기권 돌입 합니다. 전 승무원들은 안전한 자리에 위치하시고...” ‘이제 갑니다! 이제 곳!’ 카린은 작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마침내 이카루스는 무사히 마법계의 대기권에 진입을 성공했고, 이제 곳 유신이 있는 곳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용신기끼리 싸우나? 그렇다면 마젤란 장군님과 발칸님이겠네. 상대는 해모수 장군님일까?’ 용신기 끼리의 싸움이 아니면 우주의 마나스트림이 이정도로 비틀려 통신이고 뭐고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지는 않는다. ‘유선 통신위성이라도 띄어 놓을걸...’ 우주 쪽의 사정을 알 수 없는 것은 확실히 불안한 일이지만, 지금은 거기까지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마젤란 장군이라면 해모수를 상대로도 잘 싸워 주실거야.’ 카린은 애써 좋게 생각하며 일단은 유신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법계 입성을 쉽게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다시 함 내에 비상벨이 울렸다. “마법계 착함 예정지역에 강력한 코어집중 반응! 마신기입니다.” “마... 마신기?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마신기라니? 마전기도 아니고 마신기? 뭔가 잘못된 거 아냐?” 카린은 마신기라는 말에 심장이 멎을 만큼 놀라버렸다. 일반용이 인간형의 메카닉에 융합한 것이 용전기, 용황급의 에인션트드래곤이 융합하면 용신기가 된다. 마찬가지로 마신급의 마신과 메카닉이 융합하면 마전기, 헬마스터급의 상위 마신왕이 융합하면 마신기가 되는 것이다. 현존하는 마신기는 단 두 기뿐! 헬마스터 베리알의 것과 같은 헬마스터 메피스토의 것 단 둘뿐이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것이 나왔다 해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둘 다 1세대 마신기인 카론의 데드카피인 마큼, 너무나 위험한 기체다. 행성 대기권내에서 사용하는 것이 불가해 할 만큼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융합한 마신은 뭐지? 기종은?” 혹시나 컴퓨터의 분석이 잘못된 건 아닐까 하여 카린도 급하게 각 에너지 반응을 체크했지만, 저건 틀림없는 마신기의 반응이었다. “기종 판별! 헬마스터 아스모데우스의 마신기입니다.” 청천벽력 같은 말이다. “아...스모데우스라고?” 홀리크로스의 기전장군이 유신 더 실버스타라면 마왕군의 기전장군은 아스모데우스다. 성계대전이 한창일 무렵, 빛의 군대에게 있어 루시퍼보다도 더한 공포를 주는 이름이 바로 이 아스모데우스였다. 비프로스트 회전에서 유신에게 패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아스모데우스가 제대로 된 마신기가 없었기 때문이지, 결코 아스모데우스의 전투력이 유신이나 카론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메타트론이 빛의 군대를 배신하고 카론의 용신기 설계도를 악마군에게 넘긴 것은 비프로스트 회전 이후이다. 때문에 비프로스트 회전 당시에는 악마군에게 용신기에 필적할만한 마신기를 만들 기술이 없서 패배를 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반응은 틀림없이 용신기 급의 육체를 갖춘 제대로 된 아스모데우스의 마신기 반응이었다. “아스모데우스는 소멸되었는데... 봉인된 코어는 천계에서 관리하고 있고. 대체 어떻게 저 괴물이 나타난 거지?” 용신기의 기본 컨셉을 설계한 카린이다. 그러니 용신기의 데드카피인 마신기의 공포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이다. “하... 하지만, 도망칠 수는 없다고요! 이카루스 진격!” 카린은 각오를 다지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전 이카루스의 진로를 마신기에 맞추었다. 하다못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다면 마젤란 장군이 해모수를 물리치고 지원 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일말의 희망이 있는 것이다. 이카루스 따위, 아스모데우스의 일격이면 흔적도 안 남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등 돌리고 달아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리고 카린에게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유신님이 용아검을 들고 있다면... 아직 희망은 있어!’ 마침내 이카루스의 모니터에 마신기의 불길한 모습이 잡히기 시작했다. . . . 이제 등장할 수 있는건 다 등장하는군요...ㅡ_ㅡ;; 어쩌다 이렇게까지 스케일이 커져 버렸는지... 하지만 그냥 흄만 죽이고 끝내자니 뭔가 미진하여 기왕 등장할 것은 전부 등장시키기로 했습니다. 2부 홍보도 할겸..ㅡ_ㅡ;; 일러스트를 해 주시는 아그리어스에서 아랫쪽에 나온 세라피의 처참한 모습에 도전을 한다고 하네요. 5권 일러스트에 들어갈 예정인데... 심의상 옷도 입혀야 하고, 그림의 구도상 거꾸로 메달린게 아니라 똑바로 메달린 걸로 바꿔야 할듯 합니다. 이제 조금 덜 처참해 지겠네요...ㅡ_ㅡ;; 요즘 바이러스메일이 하루에 두세통씩 오고 있습니다. 대체 언넘의 시킨지... 식충 식물 확실히 효과 있습니다. 개미가 싹 없어졌어요. 문제는 매우 약하기 때문에 잘못하면 죽을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저런 식물보다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기르고 싶어요... ㅜ_ㅜ B&M 최종장 전설의 끝, 신화의 시작10화 마침내 그라테우스의 브레스가 쓸고 간 자리에 생겼던 용권풍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끝난 건가?’ 유신은 세라피를 보호하던 결계를 풀며 정신을 집중해 주변에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는지 감지하기 위해 애썼다. 다행이 그의 감각에 잡히는 적은 없었다. “그라테우스가 이긴 건가?” 하지만 막 유신이 몸을 일으키려는 때, 흄이 있었던 자리에 무언가 막혀 있던 것이 폭발하는 듯한 강력한 코어의 반응이 잡혔다. “이게 뭐지? 어떻게 이런!” 유신은 다시 그가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의 결계를 펴며 전력을 다해 세라피를 보호했다. 하지만 ‘그것’이 내뿜는 엄청난 코어의 폭풍에 비하면 유신이 펼친 결계는 그야말로 미약한 모래성이었다. 결국 전력을 다해 세라피가 마신기의 코어에 직접적인 해는 입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유신과 세라피는 폭풍 속에 휘말려 날아가고 말았다. “우오오오오오” 마법계 전체를 울리는 듯한 포효! 단지 ‘그것’이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상식이 뒤집힌다. 오염된 땅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사악한 언데드 몬스터를 쉴새 없이 마구 토해냈고, 언데드 몬스터들은 하나 둘, 합쳐져 점점 끔찍하고 거대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우어어어어어” 이렇게 태어난 마물들이 ‘그것’의 포효에 호응하듯, 같이 울부짖기 시작하자 미도우만은 비로소 완전한 지옥의 위용을 되찾아 갔다. “후하하. 어떠냐 유신이여? 이것이 마법계에서 연구와 실험에만 정진한 나의 성과! 이제 더 이상 마왕군은 네놈들이 자랑하는 용신기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흄은 마신기 아스모데우스의 흑마심에 앉아 미도우만을 내려다보았다. “그 잘난 눈으로 똑똑히 봐라, 빛의 수호자 유신 더 실버스타여! 그럼 우선 저 드워프들의 장난감에게...” 마신기의 손이 미도우만에 정박해 있는 드워프들의 함선을 향했다. 시커먼 빛기둥이 그쪽을 향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미도우만의 ‘만’이 드워프들의 배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쿠아아앙” 귀청을 찢을 듯한 소리는, 폭발이 있은 조금 더 있다가 전해졌고 곳이어 수백만 톤의 바닷물이 증발하며 생긴 뜨거운 열풍이 덮쳐왔다. 이것이 마신기! 비프로스트 회전에서 마왕군의 패배를 다시 만회시킬 뻔 했던 초병기이다! 곳이어 해일이 덮치며 미도우만의 근처에서 이제 막 태어난 언데드몬스터들을 쓸어갔지만, 이제 흄에게는 그런 것쯤, 전혀 상관없는 문제였다. “후하하, 설마 이정도의 파괴력일 줄은 몰랐다. 이제껏 위시마스터나 드래곤의 개입을 두려워하며 몰래 연구했던 것이 우습게 느껴지는군. 진작에 전부 날려버릴 것을!” 흄은 휘적휘적 사방을 둘러보며 유신을 찾았다. 하지만 아직 그가 방금 한 공격의 폭풍이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으음, 아직 세부 컨트롤은 무리인가?’ 워낙 강력한 마신기 안에 앉아 있으니 흄은 감각이 무뎌져 버렸다. 그의 마신기가 내뿜는 앞도적인 마나와 코어의 폭풍 때문에 다른 생명체가 내뿜는 사소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마신기를 컨트롤 해 보는 것이 처음인 흄은 아직 그런 미세한 사항에까진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후하하. 뭐가 되었든 상관없겠지! 난 최강이다! 설혹 신이라 해도 지금의 나를 막을 수는 없어!” 흄은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얻자 무엇부터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흐흐흐, 이런 힘을 주다니! 가브리엘 네년에게 감사해야겠구나. 비록 신의 창녀노릇을 했던 암퇘지지만, 우주에서 빛의 군대를 몰아내고 나면 그 공로를 인정해 네년만큼은 내 친히 귀여워해주마!’ 한편, 폭풍에 휩쓸린 유신과 세라피를 구한 것은 간신히 미도우만에 도착한 미스티 일행이었다. “세라피언니 정신 차려!” 미스티와 비얀이 주변에서 덤벼드는 사악한 언데드 몬스터를 상대하는 사이, 미키와 마키는 열심히 세라피의 엉망이 된 몸을 핥아주며 치료하기 위해 애썼다. “저놈, 다른 곳으로 갈 건가?” 미스티의 말처럼 마신기는 그 공포스러운 육체를 하늘에 띄운 채, 라일로스 대륙을 향하고 있었다. 비얀은 마신기의 영향으로 몇 배나 강력해진 언데드 몬스터들과 한참동안 미쳐서 싸웠지만, 시간이 좀 지나기 시작하자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살아있는 생물과의 싸움도 아니었고, 적의 목을 베어도, 사지를 찢어도 어쩐 일인지 아무런 희열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눈에 마신기의 황홀할 정도로 공포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이 보이자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비얀은 잠시 동안 싸움을 멈추고 홀린 듯 그 전율스러운 모습을 바라보았다. “캬아아아” ‘흥분된다. 왜 이렇게까지 흥분되는 것일까?’ 그 강대한 마신기를 보는 순간 몸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터진 듯, 끝없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이다. “비얀님, 아무리 비얀님이 강해도 저 녀석한테는 무리입니다. 근처에 접근하지도 못 하고 증발할 거예요.” 미스티는 이 위기상황에 말도 안 되는 투지를 불태우는 비얀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게 뭐지? 저 강한 것이 대체 뭐지?” 하지만 비얀은 미스티의 말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마신기만 바라 볼 뿐이었다. 강하다! 너무나 강하다! “마신기라고 하는 겁니다.” “마신기? 싸우고 싶다... 나! 저것과 싸우고 싶어!” “일격에 살해당할 겁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어떻게 하면 저런 것과 싸울 수 있지?” 비얀도 알고 있다. 지금 그녀의 실력으로 저것을 없앨 방도가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 매력적인 존재가 그녀의 눈앞에서 벗어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유신님이라면 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 유신님을 지키는 일에 전념해 주세요.” “그... 그래? 역시 이 녀석, 굉장하군. 이 녀석을 지키면 된단 말이지? 좋아! 그렇다면 지켜주지. 이런 죽다 만 녀석들 쯤, 아무것도 아니야!” 신이 난 비얀이 코어를 집중시키자 그녀의 손톱에서 새빨간 검기가 죽죽 뻗어 나가며 근처의 언데드 몬스터들을 사정없이 산산조각 냈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였다. 비얀의 코어반응은 마신기 컨트롤에 미숙한 흄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거기 숨어있었나, 유신?” 라일로스 대륙을 향해 날아올랐던 마신기가 천천히 유신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 돌아섰다. 저 괴물이 공격을 퍼부으면 비얀 정도라면 몰라도 나머지는 일격에 소멸할 것이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절대 절명의 순간, 지금 것 죽은 듯이 기절해 있던 세라피가 조용히 눈을 떴다. “세라피님, 몸은 좀 괜찮은 것 같습니까?” 미스티는 그에게 달려들던 대여섯 마리의 마물들을 베어내며 걱정스럽다는 듯 물어보았다. 하지만 세라피는 고통스러워 보이는 표정 대신, 뭔가 텅 빈듯한 처연한 미소를 주었을 뿐이다. “세... 라피님?” 미스티는 혹시 너무 큰 고통으로 그녀가 돌아버린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세라피는 그녀의 몸을 옥죄고 있던 대못과 날카로운 철사들을 별 힘도 들이지 않고 빼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세라피 언니?” 놀란 마키가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마키의 어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그녀의 옆으로 밀어내었다. “푸드득” 그리고 하얗기는 하지만, 천사들 특유의 광채가 나지 않는 여섯 장의 날개가 넓게 펼쳐졌다. “마... 맙소사... 가브리엘님.” B&M 최종장 전설의 끝, 신화의 시작11화 최고위급의 치천사이자 4대 원소천사중 물을 관장하는 치유와 회복의 대천사장 가브리엘. 다른 어떤 천사보다도 자비롭고, 우주의 모든 종족에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어 그만큼 덕망 높은 그녀다. 그 최고위급 천사 가브리엘이 금기를 깨고 마법계에 직접 현신한 것이다. “수고 하셨어요. 유신. 정말로.” 그녀는 기절해 있는 유신의 이마에 살짝 키스하고는 하늘에 떠 있는 시커멓고 사악한 기운에 휩쌓여 있는 마신기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아...” 그리고 뭔가 다짐을 한 듯, 아니면 포기한 듯, 긴 한숨을 내쉰 그녀는 아름다운 날개를 펼쳐 마신기를 향해 날아올랐다. “오오, 이게 누구신가? 고귀하신 대천사장님 아닙니까? 당신께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전해주신 헬마스터들의 봉인 코어 카피는 잘 썼습니다. 덕분에 이정도로까지 완벽한 마신기를 재생시킬 수 있었으니, 루시퍼님께서 부활하시면 당신의 공을 높이 평가하실 겁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지브릴님이 아스모데우스의 코어를 봉인한 카피를 넘겼다니?’ 치유와 회복의 속성인 물을 관장하는 대천사장 답게 가브리엘의 키스는 그 어떤 치유마법 보다도 효과가 컸다. 그 키스를 받은 유신은 단숨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써 봐도, 지금 흄이 한 말의 뜻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존재도 아닌 지브릴님이 빛을 배신할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저 마신기는 대체 뭐란 말인가? 마신기에 탄 흄은 그의 앞에 있는 대천사장, 물의 가브리엘을 보고도 별로 겁먹은 것 같지가 않았다. “역시... 이렇게 밖에 못 쓰는군요. 당신은 그릇이 작습니다.” 가브리엘은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변명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제가 생각한대로 움직여 주셔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단지 흄을 불쌍하다는 듯, 조용히 내려다 볼 뿐이다. “건방진 년! 화를 자초하는구나! 아무리 메르카바로 현신한다 해도, 지금의 나에게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이제 네년의 이용가치는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라!” 흄이 포효하자 마신기 역시 같이 포효했다. “쿠오오오오오” 그 검은 저주의 기운이 퍼지기 시작하자 언데드 몬스터들이 더욱 거대하게 뭉쳐지며, 완전히 미쳐서 날뛰기 시작했다. “미스티, 저 빌어먹을 자식이 지금 뭐라고 떠드는 거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유신은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그가 기절한 새에 일어난 일을 물어보았다. “가브리엘님이 현신한 것은 방금입니다. 저도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미스티도 얼떨떨할 뿐이라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마신기의 포효로 더더욱 강해지고 흉폭해진 언데드 몬스터들이 덤벼들기 시작하니 다른 곳에 한눈 팔 겨를이 없었다. “뭐가됐든 상관없겠지. 일단 저 아래를 기어 다니고 있는 벌레들을 눌러 죽인 후, 네년을 어떻게 할지를 고민해 보겠다. 아마도 내 귀여운 자식들의 노리개가 되겠지만... 하긴, 네년에겐 처음도 아니겠지? 크크큭.” 흄의 모욕적인 말에도 그녀는 분노하지 않고 여전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에게 그럴 기회는 없을 것 같군요.” “닥쳐라! 메르카바로 현신할 틈 따위는 주지 않겠다. 전투천사도 아닌 게 나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성 싶냐?” 동시에 마신기의 손이 가브리엘에게 향했다. “죽어라.” “콰콰콰콰쾅” 어둠과 절망에 빠진 미도우만. 그곳 전체를 태워버릴 듯한 황금빛의 불길이 하늘을 갈랐다. “크아아아아” 그리고 그 불길에 한쪽 팔이 완전히 증발해버린 마신기는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위험한 놈이군. 이런 것을 만들다니. 하지만 덕분에 조금쯤은 즐거울 수 있을 것 같다.” 하늘에는 태양보다 더 찬란한 황금의 성이 떠 있었다. 네 장의 거침없이 거대한 날개, 똑바로 바라보기 힘든 찬란한 황금빛 비늘. 모든 생명체를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하고 강렬한 존재감. 그리고 그만큼이나 아름다운 존재. 황금의 성 유메네스 프라임이 현신한 것이다. “겨우 드래곤 따위에게 이 몸이...” “겨우 드래곤 따위라... 설마 내 평생에 이런 말을 들어 볼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비록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곤 하지만, 네놈의 배짱은 인정해주지.” 유메네스의 목소리는 음파를 통해서가 아닌 영혼의 울림으로 미도우만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뇌리에 파고들었다. “네놈은 마신기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어. 갑작스레 주체할 수 없는 힘을 얻은 네놈에겐 개발의 편자란 뜻이지.” 유메네스는 저렇게나 강대한 힘을 얻고도 제대로 사용할줄 모르는 흄이 한심하기만 했다. 용신기의 특징은 드래곤 본체의 파워를 줄이지 않고 크기만을 줄여 약점을 줄이고 회피율과 스피드를 향상시킨다는 개념이다. 마신기 역시 마찬가지기 때문에 브레스 같은 마신기가 펼칠 수 있는 마법 결계나 자체 방어력을 훨씬 넘어서는 공격은 피해야만 하는 것이다. “웃기지 마라! 이 힘이 있으면 난 무적이다. 노랑 도마뱀쯤은 이렇게 해 주마!” 마신기가 팔을 휘두르자 검붉은 마법문자가 공중에 수놓아졌다. 그리고 마법문자가 사라지자 그 속에서 25미터에 이르는 검고 거대한 검이 나타났다. “죽어라, 유메네스 프라임!” 마신기는 유메네스의 큰 덩치의 사각을 이용해 품으로 파고들었다. “마법사 치고는 좋은 발상이다.” 하지만 유메네스는 피하지도 않고 그 긴 꼬리를 마신기의 등 뒤쪽으로 돌려 등짝을 후려갈겼다. “우오오오오” 다시 한번 마신기는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지상에 처박히고 말았다. 이것이 드래곤! 신이 창조한 최강의 전투생물이다! “왜! 왜! 겨우 드래곤 따위에게 당한단 말이냐! 이건 최강의 헬마스터 아스모데우스공의 코어를 이용한 것이란 말이다!” 흄은 절망했다. 이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마신기로도 저 저주스러운 신의 전투 병기를 잡을 수 없다면 대체 어둠의 군대에 무슨 희망이 있단 말인가? B&M 최종장 전설의 끝, 신화의 시작12화 “그건 당신이 바보기 때문이에요.” 흄이 눈치 채지도 못했는데, 어느 샌가 흑마심을 보호하는 수십 겹의 마법 결계가 깨끗하게 해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칠흑 같은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눈매가 귀여운 아름다운 소년이 흄의 옆에서 있었다. 소년은 마치 생물체의 몸속처럼 여러 가지 기관들과 근육들이 엉켜있는 흑마심 내의 중요해 보이는 이것저것을 함부로 만지고 있었지만, 너무나 익숙하다는 듯 손놀림에 망설임이나 흩어짐이 없었다. 그러자 마치 아스모데우스의 마신기 자체가 베리알의 황홀한 손길에 따라 반응하듯, 그의 손길이 쓰다듬는 곳마다 스륵스륵 감겨들었다. 하지만 흄은 그의 기체를 다른 존재가 함부로 만지고 있는데도 감히 어쩌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베... 베리알 폐하!” 음모와 배신의 헬마스터 베리알! 루시퍼를 보좌해 전 우주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지옥의 일곱 지배자, 세븐 헬마스터중 하나가 직접 강림한 것이다. 그는 조종간에 턱을 괜 채 몇 가지 용신기의 컨트롤 패드들을 건드려 보다가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훌륭한 장난감을 만든 공로는 인정해야겠군요. 이정도 공적이면 비어있는 헬마스터의 자리중 하나 정도는 차지해도 좋을 정도에요.” 왠지 장난기가 느껴지는 친근하고 부드러운 말투였다.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흄은 이 헬마스터가 얼마나 변덕이 심하고, 제멋대로인지를 알고 있기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런 다정한 말투는 상대를 죽이기 전에 보여주는 잔혹한 미소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바보 같았어. 이 기술이 실용화 될 때까지의 시간만 벌어주었으면 마왕군의 승리는 결정적이었을 텐데.” 역시나 베리알의 입에선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제가...” 그라테우스의 브레스가 날아드는 상황에서 마신기를 꺼내지 않고 무슨 수로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때는 흄도 살기위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않은가? “죽었을 거라고? 그래서요? 그게 무슨 상관이지?” 하지만 베리알은 아무런 동정도, 이해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눈빛으로 흄을 바라볼 뿐이었다. “베... 베리알 폐하.” “네놈의 하찮은 목숨 따위가 어둠의 승리를 위해 희생되어야만 한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망설여야 할 가치가, 혹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나?” “요... 용서를...” 용서할 리가 없다. 저 잔인무도한 지옥의 지배자가 그런 실수를 용서할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흄은 이정도로까지 마신기를 복원시킨 그의 공적을 인정받아 잘하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바보 같은 네놈의 짓거리를 더 이상 참아 줄 수가 없다. 비장의 카드를 이렇게 쓸데없이 보여주고, 그 약점까지 가르쳐 주다니. 도대체 그 텅 빈 해골바가지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심스럽구나!” 베리알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젓자 흄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수십 개의 촉수가 뻗어 나와 흄을 감쌌다. “베... 베리알님, 용서를!!” 흄은 마법이라도 사용하여 어떻게 해서든 도망치려고 발버둥 쳤지만, 베리알의 강력한 마나지배력 앞에서 겨우 리치 따위의 마법은 아예 발동조차 되지 않았다. “베... 베리...” 흄은 점차로 마신기 속으로 흡수되어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마신기의 흑마심 안은 처음부터 흄이란 존재는 없었다는 듯, 베리알만이 덩그라니 남았다. “후훗, 당신은 지나치게 위험하거든요. 차라리 적당히 복원하지 그랬습니까. 하지만 이 선물은 루시퍼님을 위해 고맙게 쓰도록 하지요.” 베리알은 조금 전까지 흄이 있던 흑마심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긴 한숨을 내쉰 그는, 마치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애틋한 손길로 마신기의 조종간을 어루만졌다.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스모데우스공? 당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군요. 여전히 강하고... 그리고 무심한...” 헬마스터의 그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맑은 눈물이 베리알의 하얀 뺨을 흘러내려 한 방울, 두 방울 흑마심을 적셨다. “장군의 원수가, 그리고 루시퍼님의 원수가 저 밖에 있습니다. 마왕군의 기전장군이었던 공의 힘을 한 번만 더 보여주십시오.” 비로소 마신기는 그 불길하고 위협적인 붉은 눈을 뜰 수 있었다. “흄이여, 겨우 그 정도 싸우고 벌써 끝내려 하는가? 그건 자네가 부활시킨 그 얼토당토않은 괴물에 대한 모욕이야.” 유메네스 프라임은 하늘에서 마신기를 내려다보며 천둥 같은 소리로 다시 싸울 것을 재촉했다. 겨우 브레스 한방을 먹였을 뿐이다. 왼팔을 날려버린 건 사실이지만, 아무런 마법적 처리를 하지 않은 순수한 브레스였으니, 그 정도는 마신기 자체의 힘으로 금세 재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벌써부터 싸움을 포기하는 건 유메네스 자신이 용서할 수 없었다. 단지 같은 전쟁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의 최종병기라고까지 불리던 용족에게조차 공포심을 심어주었던 최강 최악의 헬마스터가 저런 꼴로 쓰러져 있는 것은, 차라리 용족에 대한 모욕이었다. “검을 잡아라! 지옥의 불길을 토해내고, 우주조차 가르는 마법을 휘둘러라! 그리고 내 강대한 육체에 상처를 내 보란 말이다!” 온 천지가 울리는 쩌렁쩌렁한 고함을 지르며 유메네스는 마나를 끌어 모았다. B&M 최종장 전설의 끝, 신화의 시작13화 마신기의 으르렁거림이 멈췄다. 그리고 마법계 전체를 들끓게 하던 공포와 살육의 기운이 서서히 사그러들면서 미쳐 날뛰던 언데드 몬스터들도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조금씩 잠잠해졌다. 유신은 혹시나 마신기가 전의를 상실하여 살기를 거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낙관적으로 생각하기엔 뭔가가 이상했다. ‘기질이... 바뀌었다?’ “이런! 유메네스 피해!” 유신이 이상을 감지했을 때는 지상에 볼품없이 처박혀 있던 마신기가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거기냐?” 다시 나타난 마신기는 벌써 유메네스의 가슴팍 깊숙이까지 파고들어 있었다. 유메네스는 예측했다는 듯, 뒤로 슬쩍 빠지며 꼬리로 후려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았다. 마신기도 유메네스의 공격 방법을 예측하고, 검만을 뒤로 돌려 그 거대한 꼬리를 베어버리고만 것이다. 마신기는 그 여세를 줄이지 않고, 방금 전의 복수라도 하겠다는 듯, 유메네스의 오른 팔과 날개를 베어버렸다. “쿠아아아아악”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강력한 공격에 유메네스는 피의 비를 뿌리며 방금 전 마신기가 추락해 있던 바로 그 장소에 처밖혀 버렸다. 산이라고 해도 좋을만한 골드드래곤의 덩치가 떨어지자 그 일대는 지진이 휩쓸고 간 것처럼 쑥대밭이 되었다. “크르르릉, 다시 붙어보자!”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유메네스는 브레스를 준비하며 다시 싸울 준비를 하였다. 아직 인정할 수 없다. 한방 먹기는 했지만, 최강의 드래곤이 이렇게나 어이없이 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유메네스는 이를 갈며 마신기가 있던 자리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푸욱” 베리알은 용족처럼 쓸데없이 싸움을 즐기는 취미는 없는 것인지 유메네스와의 싸움에 시간을 끄는 대신, 유메네스의 등 뒤에서 그 거대한 대검으로 유메네스의 목을 베어내고 있었다. “휘휘휘휘휘휘” 유메네스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저 강하고 아름다운 생물은 자신이 패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도 전에 이미 그 목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마나와 코어의 집약체 답게 유메네스를 구성하던 황금빛의 마나와 코어가, 녹아내리며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황금의 분을 공중에 뿌린 것처럼 한동안 흩날리던 유메네스의 마나와 코어는 그 아름다운 최후의 시간이 끝나고 나자 황금빛 백골만이 남은 채 힘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이것이 마신기의 진짜 공포! 단 일격에 웜급 골드드래곤을 쓰러뜨리고 만 것이다. ‘이제 하나... 당신의 복수를!’ 마침내 저 공포스러운 마신기가 유신을 향했다. 유메네스의 브레스로 증발해 버렸던 왼팔도 거의 다 복구되어 있었고, 마법계에 익숙하지 않아 불안정해 보이던 기체도 완전히 적응된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조금씩 새어나오는 사악한 투기는 유메네스와 싸울 때 이상이었다. 베리알은 봉인당한 유신을 상대로도 최선을 다해 싸울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아직 베리알의 검은 유신에게 향할 수 없었다. “더 이상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제 충분하니 물러서세요! 헬마스터 베리알.” 가브리엘은 하얗고 밋밋할 뿐인 여섯 장의 날개를 편 채 유신을 보호하듯, 마신기의 앞을 막아섰다. 어떻게 된 것인지, 그녀의 날개에서는 천사다운 후광도, 그렇다고 타락의 증거인 검은 빛도 나지 않았다. “흐음... 제가 조종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바보가 아니니까요.” “차라리 모른척 하시지 그랬습니까? 그럼 이렇게 허무하게 소멸 않아도 좋았을 것을...” 베리알은 가브리엘의 소멸을 예언한 채 마신기의 검을 그녀에게 향했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마치 기도하듯 정성스러운 태도로 두 손을 모았다. 동시에 그녀의 온 몸에서 새하얀 빛이 폭발하듯 넘치며, 신성문자들이 그녀의 몸 주위에 결계를 치듯 둥근 고리를 만들었다. 가브리엘의 양 팔과 날개가 활짝 펼쳐지자, 그 신성문자들은 그녀의 몸을 감싸듯, 새하얗고 성스러운 갑옷 모양으로 변한 채 점점 커져갔다.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겁니다!” 마침내 빛의 고리가 풀리자 그 속에는 메르카바로 현신한 가브리엘의 모습이 보였다. “가브리엘님, 도망쳐요! 용신기 없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그녀는 유신의 말을 들은 것인지, 메르카바의 얼굴이 아주 잠시 동안 유신을 향하는 듯 했다. 메르카바는 양 손바닥 잠시동안 마주치자 그 위로 신성문자의 고리가 몇겹으로 생겼다. 그리고 그 손을 길게 옆으로 벌리자 그 속에서는 한자루의 물빛 창이 들어났다. “전투계열은 아니지만, 저도 4대 원소천사중 한명인 물의 가브리엘입니다.” 그녀는 창끝을 정확하게 용심기의 흑마심을 향해 겨누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천사장이고, 메르카바로 현신한다 해도,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은 최강의 헬마스터 둘 분의 몫이다. 유신이 가브리엘을 말리기 위해 날아오르려 했지만, 미스티는 죽을 각오를 하고 유신을 말렸다. “그만 두십시오! 대천사장의 메르카바와 마신기의 싸움입니다. 지금 유신님의 상태로는 끼어드는 것 자체가 가브리엘님께 방해가 될 뿐입니다.!” “놔! 하지만 이대로는 가브리엘님이...” 시간이 없다. 유신은 미스티의 팔을 자르고라도 날아오르려 했다. “콰콰콰쾅” 하지만 그 짧은 순간, 이미 가브리엘은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연이어 쏟아지는 흑빛의 검광에 갇혀 왼쪽 팔마저 잃고 있었다. B&M 최종장 전설의 끝, 신화의 시작14화 “새로 태어난 마신기의 실전 테스트! 그 상대가 대천사장님의 메르카바라면 부족함이 없겠지요.” 베리알은 광기에 물든 눈으로 가브리엘의 메르카바를 농락하듯 조금씩 망가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남에도 가브리엘은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패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증명하지 못했어요! 조금만 더... 조금만...’ 그녀는 왼쪽 팔을 내주며 긴 창을 크게 돌려 마신기의 흑마심을 노렸다. “좋은 선택이군요. 하지만!” 마신기는 어느새 재생을 완전히 끝마친 왼쪽 손으로 그 창을 움켜쥐었다. ‘창을 뺏기면 끝이다!’ 가브리엘이 창을 비틀어 빼어내려는 순간, 마신기는 믿을 수 없는 힘으로 창과 함께 가브리엘을 끌어 당겼다. “아차!” 그리고 그녀가 손써볼 새도 없이 마신기의 오른손이 메르카바의 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베리알은 그녀의 목을 잡은 채, 마신기의 얼굴 바로 앞에까지 끌어당겨 눈을 맞추었다. “당신이 선택한 ‘해답’은 저도 루시퍼님에게 들었습니다. 당신 덕에 마왕군에도 반격할 ‘찬스’가 생긴 건 사실이지만, 루시퍼님과 다른 답을 찾은 당신을 살려둘 수는 없습니다.” 가브리엘은 마신기의 손에서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 쳤지만, 파워 차이가 너무 심했다. 마침내 고집스레 들고 있던 창마저 놓아 버리고, 그녀의 목을 옥죄고 있던 손을 풀어내려고 애썼지만, 마신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베리알은 가브리엘에게서 빼앗은 창은 내팽개쳐 버리고, 그의 대검을 들었다. “끝이다. 가브리엘!” “콰쾅, 콰콰콰쾅” 베리알의 대검이 가브리엘을 두쪽 내기 직전, 네다섯 개의 빛다발이 마신기를 강타했다. “뭐냐? 이 간지러운 공격은?” 막을 필요조차 없는 어이없는 공격을 한 상대는 작은 콜벳급의 배로 보였다. ‘뭐지? 이런 걸로는 긁힌 상처조차 주지 못할 것인데, 설마 무슨 함정인가?’ 과연 음모와 배신의 헬마스터 답게 무슨 함정이 아닌가를 의심했다. 이카루스 정도면 일격에 격침시켜 버릴 수 있었지만, 혹시 그 안에 무슨 마법적 장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일단 조심하며 상태를 보려 했다. 그의 생각처럼 그 작은 콜벳급 배는 마치 마신기에 자폭이라도 할 것처럼 마신기를 들이받으려는 기세로 무섭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거나 먹어라!” 마신기는 들고 있던 가브리엘의 메르카바를 그 배를 향해 집어던져 버리고는, 마신기를 조금 상승시켜 거리를 두었다. “콰콰콰쾅” 메르카바와 충돌한 그 배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반토막이 나버린 채 메르카바와 함께 바다 속으로 침몰해 버렸다. 혹여 무슨 함정이 아닐까 하여 잠시 동안 더 기다렸지만, 바닷 속으로 빠져버린 메르카바와 그 배에선 감감무소식이었다. “뭐, 저건 좀 있다가 처리하도록 하지.” 마침내 모든 방해꾼을 제거한 마신기의 검이 유신을 향했다. “후우, 후우,” 카린은 두려움과 흥분으로 쿵쾅거리는 그녀의 심장을 달래기 위해 심호흡을 하는 중이었다. “마신기와의 거리 천 칠백. 전 승무원들은 대 마신 전투태세를 갖춰 주시고, 함 내가 오염되지 않도록 결계 유지에...” 이런 위급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컴퓨터 오퍼레이터의 나긋한 목소리는 어쩐지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카린은 그런 것 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그녀로서도 전투준비에 돌입한 마신기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카론을 비롯해 용신기는 몇 번 보았지만, 용신기가 그녀 앞에서 모든 힘을 개방할 리가 없으니, 사실상 카린은 저런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는 존재를 본 것이 처음이었다. 결계로 사악한 마기를 걸러내며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영혼을 빼앗겨 소금기둥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모니터에서는 메르카바로 현신한 가브리엘이 싸우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녀라 해도 저 괴물을 상대로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항로 변경! 적 마신기에게 돌진합니다. 전 포문 개방!” 설혹 이카루스를 잃는다 해도,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도와야 약간이나마 시간을 끌 수 있다. 카린은 그녀의 자식 같은 이 배를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것이 가슴 아팠지만, 작은 입술을 꼭 깨물며 돌격 명령을 내렸다. “‘짐’은 어떻게 하지요? 밖으로 떨어뜨릴까요?” 아마도 마신기에 가까이 가는 순간, 이런 작은 배는 흔적도 안 남고 파괴될 것이다. 메인 컴퓨터는 그녀가 운반해온 중요한 ‘짐’을 어떻게 할지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었다. “아니, 버리지 말아요. 자칫 마신기가 눈치 챌 수도 있습니다.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침몰하는 게 오히려 안전해요.” “알겠습니다. 카린님은 유신님의 옆으로 텔레포트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미안해요, 이카루스. 제가 너무... 이기적이지요?” 비록 영혼이 없는 컴퓨터라 해도, 카린은 그런 걸로 생명체와 무생명체를 나누지 않는다. 메모리란 형태로 추억을 간직할 수 있고, 그 추억, 즉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다면, 카린에게는 살아있는 그녀의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카루스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완전히 증발해 버리지만 않는다면, 메모리 정도는 남겠지요. 나중에 고쳐주시면 됩니다.” “꼭 그렇게 할게요.” “그럼 잠시 동안 이별입니다. 카린님.” 마침내 이곳까지 왔다. 성계대전이 끝나고 5년. 사무칠 정도로 긴 그리움의 끝에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다. 비록 최악의 상황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지만, 카린은 기쁘다고 생각했다. 카린이 환한 빛의 기둥이 그녀를 감싼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눈에는 꿈에도 잊을 수 없었던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유신...” B&M 최종장 전설의 끝, 신화의 시작15화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하늘에 떠있는 마신기의 공포도, 엉망으로 박살나고 있는 가브리엘의 메르카바에 대한 동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 설마 카린?” 당황한 듯한 가는 떨림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그녀의 연인이자 아버지는 헤어졌던 5년 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오랜만이에요. 유신.” 카린은 울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눈물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유신이 떠나는 날 보여주었던 눈물을 요 5년간 얼마나 후회했던가? 순간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오래도록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상처를 받는 것은 이제 정말로 사양이었다. 울지 않으려면 몸을 움직여야 한다. 카린은 유신의 손에 들려있는 하얀 용아검을 빼앗듯이 움켜잡았다. “카... 카린? 뭘 하려고?” 얼결에 용아검을 내주긴 했지만, 아무리 용아검이 강하다 해도, 카린이 그걸 들고 싸우는 것은 무리다. “비장의 카드를 가지고 왔어요. 아! 안녕, 미스티. 오랜만이야.” 살짝 물기어린 눈으로 한참동안 유신을 바라보던 카린은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 미스티에게 인사했다. “고마워, 미스티. 네가 잘 지켜준 모양이구나.” “마이 로드...” 미스티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의 대검을 가슴 앞에 세워 카린에게 인사했다. “카린,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곳을 피해. 용아검은 이리 주고. 저 녀석과는 내가 결판을 짓겠어.” 바로 유신이 보는 앞에서 가브리엘이 당하고 있다. 이제는 그 혼자 죽고살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널 만나서 기뻐.” ‘마지막 순간일지라도...’ 유신은 카린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용아검을 돌려받으려 했다. 하지만 카린은 고집스레 용아검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돌려줘! 지금 지브릴님이...” “잘 봐요.” 카린은 용아검의 검날을 손으로 감싸고 길게 잡아당겼다. “아야야...” “이봐, 용아검은 날카롭다고! 잘못하면 뼈까지 베여!” 새빨간 그녀의 피가 용아검의 하얀 검신을 타고 흘러 손잡이에까지 베어들었다. 놀란 유신이 말리려고 했을 때는 이미 용아검이 카린의 피맛을 본 후였다. “구오오오” 용아검은 흉측한 포효를 지르며 마치 그녀의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겠다는 듯, 탐욕스럽게 그 붉은 액체를 빨아들였다. “가련한 당신의 아이가 초라한 붉은 피를 바쳐 당신을 원합니다. 잊혀질 수 없는 맹약을 기억. 지금 그 힘을 빌려 주소서.” “기이이잉” 카린의 주문이 끝나자 용아검의 폼멜 끝에 있는 보석이 갈라지며 그 속에서 푸른색의 드래곤 하트의 조각이 나타났다. 조각은 마치 의지를 지닌 무언가처럼, 카린의 가슴 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천천히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느릿한 속도였지만, 나중에는 휙휙 작은 돌풍을 일으킬만한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드래곤 하트는 푸른 빛깔이 도는 마법문자를 토해내었고, 그것들은 드래곤하트를 둘러싸며 불규칙한 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구형을 이루던 스피어 마법문자들은 점점 더 커졌고, 마침내 폭발하듯 환한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속에는 세상을 내리 깔며 보는듯한 날카롭고 푸른 눈이 잘 어울리는 남자가 서 있었다. “카...카론!” 명실공히 전 우주 최강이라 불리는 파괴의 벼락, 용성제 카이드리아 엘 엑시나에가 그의 레이디와의 맹약에 따라 소환에 응한 것이다. 유신이 반갑다는 듯 불렀지만, 카론은 차가운 표정으로 인사조차하지 않았다. “한심하긴.” 카론이 쌀쌀한 한마디와 함께 팔을 크게 휘젖자 유신 일행의 머리 위로 거대한 방어결계가 만들어졌다. “텅, 터텅” 곳이어 둔탁한 충격과 함께 그 결계가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 몰아쳤다. “이게 무슨...” 그 충격파와 함께 몰려든 폭풍이 가라앉고 나자 유신은 할말을 잃고 말았다. 방금의 충격은 산산조각 난 가브리엘의 메르카바가 추락하며 카론이 만든 결계에 부딪히면서 생긴 것이었다. 하반신은 결계에 부딪혀 튕겨 나가 한참을 더 날아간 채 처박혀버렸고, 상반신은 결계의 바로 옆에 깊숙이 파묻혔다. 가브리엘은 더 이상 메르카바 본체를 유지시킬 힘도 없는 것인지, 추락한 메르카바는 마치 유메네스가 사라졌을 때처럼 새하얀 빛의 가루와 함께 사라져 갔다. B&M 최종장 전설의 끝, 신화의 시작16화 메르카바의 껍질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속에는 살아있는 것인지 조차 의심스러운 만신창이의 가브리엘이 쓰러져 있었다. 유신은 무너지듯,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카론님, 어서 유신님을 도와주세요! 마신기를 물리쳐야...” 유신이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보는 카린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아직 마지막 희망, 절대의 용성제 카론이 있다. 포기하기는 이른 것이다. “카린, 네가 아무리 나의 레이디라 해도, 세상에는 관여해서는 안 되는 일이란 것이 있는 법이야. 예를 들면 나와 유신의 문제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유신은 카론님의 용신화랑이잖아요! 카론님의 용신화랑이 저렇게까지 되었는데, 도와주지 않을 생각인가요?” “나의 카린이여. 안된 이야기지만 지금의 유신에겐 나의 용신화랑이 될 자격이 없다. 그건 유신 본인이 더 잘 알거야. 그런 몸으로 나를 움직여봐야 차라리 나 혼자 싸우느니만 못해. 방해만 될 뿐이다. 용족은 힘의 종족.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절대의 법칙이자 우주의 진리. 모든 힘을 잃은 유신에겐 ‘친구’이상의 것은 바라지도, 바랄 수도 없다.” “그... 그런...그렇다면 가브리엘님을 위해 싸워주세요! 가브리엘님은 카론님에게도 잘 해 주셨잖아요. 그러니 어서 가브리엘님을 구해 주세요!” 하지만 아무리 유신이 무력해졌다 하더라도, 정신이 나가버렸다 하더라도 카린은 유신을 포기할 수 없었다. “저렇게 얘기하는군. 나의 용신화랑이였던 자여. 가브리엘님의 복수를 내게 맡기겠는가?” 카론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땅에 무릎을 꿇고 있는 유신을 향해 물어보았다. “......” “그런가? 그 정도일 뿐인가? 잠시 동안 머리를 시켜라. 어떻게 되었든 카린은 내가 지킨다. 설혹 상대가 헬마스터나 마왕군의 기전장군이라 해도.” 최고로 교활한 헬마스터가 조종하는 최고로 강한 마신기와의 싸움이다. 카론은 유신과 함께 싸울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거절한다.” “뭐?” 막 카론이 본체를 들어내려는데 유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절한다고 했다.” 유신은 그의 옆에 떨어져 있는 용아검에 기대어 힘겹게 일어섰다. 이미 드래곤 하트가 빠져버린 용아검은 그것을 들고 있는 주인과 같이 힘겨운 모습이었다. “후우... 넌 아직 나의 것. 나만의 용신기다.” “헛소리. 넌 약하다. 내 미약한 한숨에 재가 될 정도로 약해. 약한자는 나의 용신화랑이 될 수 없다.” 카론은 이 인간이 이미 모든 힘을 잃은 주제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유신 더 실버스타. 창세신의 클론이자 모든‘인간’의 첫 번째 목소리. 설혹 이 몸이 다 찢어져도, 이 마음이 다 산산조각 난다해도, 난 승리할 수밖에 없다.” “휘이이이이잉” 마나의 흐름은 이미 메르카바와 마신기의 싸움으로 엉망이 되어 버린 마나의 폭풍이 유신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비참하군. 그런 몸으로 뭘 할 생각이냐? 겨우 메르카바와 마신기가 싸우다가 흘린 마나와 코어의 찌끄러기 따위 모아봐야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카론은 불쌍하다는 듯한 눈길로 유신을 바라보았다. 한때 전 용족의 수장인 자신에게조차 공포를 갖게 했던 유신 더 실버스타의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날이 올 줄은 생각지 못했었다. “넌 나의 용신기. 그러면서 나에 대해 아직도 모르나? 잘 봐라. 네가 인정했던 단 하나의 인간을!” 잠시 더 시간이 흐르자 마나 뿐 아니라 카론을 비롯한 주위의 코어까지도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넌 카린을 보호해 준다고 했지? 부탁하나 하자 친구여. 카린 뿐 아니라 이 근처에 있는 다른 친구들도 보호해줘. 나로부터... 내 힘에 코어를 빼앗겨서 죽지 않도록...” “네... 네놈 설마?” 유신은 빙긋 웃으며 그를 중심으로 몰아치는 마나와 코어의 폭풍에 그 몸을 맡겼다. “아직 가브리엘님도 소멸한 것은 아니야. 그리고... 저 녀석도 나와 싸우고 싶어서 아직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내 심장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카악” 유신이 힘을 개방하자 봉인이 발동되면서 그의 몸을 조이기 시작했다. 코어가 그의 제어를 벗어나 아무렇게나 뻗어 나가며 그의 몸을 파괴했다. “강제 봉인해제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카린과 미스티는 어떻게 해서든 유신을 말리려 했지만, 둘은 카론에게 제지당했다. “놔요! 저대로는 방형성을 잃은 코어가 단지 폭주할 뿐이에요! 죽는다고요!” 카린이 발버둥치며 그녀를 잡고 있는 카론의 팔을 물어뜯었다. 놔두면 카린의 이빨이 몽땅 부러질 것 같아 카론은 카린이 물어뜯고 있는 팔의 힘을 풀고 카린이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혹시라도 그의 피가 카린에게 흘러들지 않도록 육체를 세심하게 컨트롤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리 괴물 같은 용제라도 상대가 카린이라면 이렇게까지 자상하고 사려 깊어지는 것이다. “잘 봐라. 성계대전의 영웅, 유신 더 실버스타가 싸우려 하고 있다. 단지 지켜봐 주는 것이 그에게 은혜를 입은 모든 유한생명체중 하나인 너의 도리다.” 유신의 처절한 모습에 비얀도 흥분한 것인지, 귀와 꼬리를 빳빳이 곤두새운 채 흥분하고 있었다. “캬아아아아아, 나도, 나도 싸우고 싶다!” 아름다울 만치 처절한 자기 자신과의 사투는 용신화랑의 자질을 갖춘 그녀를 말할 수 없이 흥분시키는 것이다. “옳은 말이군요. 모두 다 싸워야 할 때 입니다. 잔인하신 당신의 뜻을 꺾기 위해.” 어느샌가 일어난 가브리엘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유신 일행이 있는 곳으로 위태위태하게 걸어왔다. B&M 최종장 전설의 끝, 신화의 시작17화 하얀 날개는 피투성이가 되어있었고, 세라피에게 빌린 몸도 한계에 이른 것인지, 조금씩 붕괴되고 있었다. “그건 신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그 대행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카론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잠시 호기심을 비췄을 뿐이었다. 카론은 창세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이 필요 없는 강력한 용족. 그들에게 있어 완벽한 절대자라는 존재는 그 존재 자체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유신을 도와주도록 하겠습니다. 카론님은 저에게 힘을 빌려주세요. 이 육체가 붕괴되지 않도록!” 가브리엘은 다 스러져가는 몸으로 조금씩 조금씩 유신이 만들고 있는 거칠고 위험한 코어의 폭풍 속을 향해 걸어 나갔다. “어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신성력과 상반되는 마나와 코어의 결정체라고.” “상관없습니다. 전... 더 이상 신에게 총애 받고 있지 않아요.” “그게 무슨...”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카론의 말을 듣지 않고 엉망이 된 그녀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유신 더 실버스타 장군, 당신은 이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증명해야 해요! 저도 당신에게 모든 걸 걸겠습니다.’ “하아아앗” 가브리엘이 모든 힘을 쏟아 붓자 그녀의 등에서 새로운 여섯장의 날개가 더 돋아나왔다. “서... 설마 루시펠님?” “아니요. 그분과는 다른 답을 얻은 저는 가브리엘입니다.” 그녀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성스러운 빛은 헬게이트와 마신기의 출현으로 오염된 주변의 사악한 땅을 순식간에 정화시키며 널리 퍼져나갔다. 이것이 진정한 대천사장의 힘. 아무리 인류가 우주를 가르고, 마왕을 파괴하는 용신기를 만들어도 그것은 단지 파괴하는 힘을 뿐이다. 천사들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힘이야말로 위대하고 아름다운 진짜 힘이다. 그리고 그녀는 유신의 정신공간으로 다이브해 갔다. 새하얀 공간. 빛도, 어둠도 시간도 느껴지지 않는 유신의 정신공간 속에서 가브리엘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녀의 앞에는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는 유신이 서 있었다. “누구보다도 신을 위했던 당신이 왜!” 가브리엘의 배신. 유신은 인정할 수가 없었다. 왜 하필 가브리엘이란 말인가? 마법계에서 마왕군의 싹이 자랄 수 있도록 비호해 주는 세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건 위시마스터들인 줄 알았다. 설마 그녀까지도 빛을, 자신을 배신하고 마왕군의 손을 들어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을 위하는 것은 자식이 부모를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 하지만 부모가 자식의 곁을 떠나려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어떠한 말을 한다 해도 변명일 뿐이겠지만, 유신은 그 변명이라도 듣고 싶었다. 설혹 그것이 거짓이라 해도 유신에게는 그 말을 믿는 것 밖에는 선택이 없기 때문이다. “신은 완전한 존재... 하지만 우주는 너무나 불완전한 곳이지요. 완전함과 불완전함이 공존할 수 있다고 보세요?” “그... 그렇다면?” “어느 한쪽이 멸망할 수밖에 없지요.” “그럼... 설마 신이 우주를 멸망시키려 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루시펠님이 반역했고, 지브릴님도 그 뒤를 따랐다는 말이에요?” 너무나 끔찍한 최악의 결론이라 감히 입에 담는 것조차 두려웠다. “... 차라리 그랬으면 낳았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당신께서는 이 우주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래서 이곳을 떠나기로 하신 겁니다.” “그... 그런...” 신이 우주를 파멸시키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신이 떠나버린 우주를 상상하는 것도 쉽지 않았기에 유신은 할말을 잃었다. “저희 셋은 각자 다른 결정을 내렸습니다. 루시펠님은 신이 떠나버린 우주를 위해... 미리부터 신이 없는 우주를 준비했고, 그래서 감히 반역하게 되었지요. 미카엘님은 신의 뜻이 무엇이건 끝까지 그분을 따를 것을 다짐했어요. 그분이 떠날지, 아니면 우주가 파멸할지는 알 수 없지만, 미카엘님은 단 하나의 의문조차 품지 않고 신께서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셨지요.” “그럼 지브릴님은 루시펠님의 뜻을 따른다는 건가요?” “아니요. 저는... 신이 없는 우주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여 신께서 우주를 버리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증명한다니요. 대체 어떻게...” 유신은 하도 어이없는 가브리엘의 결정에 힘이 쭉 빠지는 것만 같았다. “열쇠는 마법계입니다. 당신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실 때부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계셨겠지요. 마법계는 그것을 위한 실험장. 그분이 없는 우주의 모델. 하지만 저는 여기까지 해 내었습니다. 마법계의 혼란. 그리고 이번 전쟁은 마법계에 최초의 신마전쟁으로 기록되겠지요. 이제... 마법계에도 신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믿음. 당신께서 이 우주를 떠나도... 인간의,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의 믿음은 결국 또 다른 당신을 만들 것임을 증명했기에... 저는 만족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유신이 증명하기만 하면 됩니다. 창세신의 클론인 당신의 힘으로 저 헬마스터를 쓰러뜨리고 아직 우주에는 당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만 하면 됩니다.” 마침내 밝혀지는 우주의 진실. 그리고 루시펠의 반역의 진정한 이유와 마법계의 존재 이유. 유신은 경악 할 수밖에 없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인간을 창조할 필요는 없었겠지요. 아니, 애초에 완벽한 신이 불완벽한 우주를 창조할 수도 없었겠지요. 인간은, 아니 우주는 완벽하게 되어가는 존재입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이 우주가 신과 같이 완벽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이란 개념을 빼고 나면 언젠가 완벽해질 우주는 이미 신과 같아요.” 한동안 눈을 감은 채 생각을 정리한 유신은 가브리엘과 다른 결론을 내렸다. “언젠가 완벽해질 존재라면,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 때문에 싸우는 겁니까?” 유신의 말이 재미있다는 듯, 가브리엘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생각을 물었다. “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입니다. 유한생명체의 작고 미약한 힘. 언젠가는 이 작은 힘들이 모여 완벽한 우주를 구성하겠지요. 저는 최선을 다하는 매 순간을 보내기 위해! 창세신의 힘이 아닌 인간의 힘으로 헬마스터를 쓰러뜨리겠습니다.” “참으로 인간다운 해답... 부디 마지막까지 그 신념을 잃지 마시길 기원합니다.” 가브리엘 역시 만족한 듯, 유신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이미 신의 총애를 잃었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이 미소는, 유신이 여지 것 보아왔던 그 어떤 미소보다도 더욱 성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녀는 열두장의 아름다운 날개를 펼쳐 유신을 감싸듯 끌어안았다. “이제 당신의 신념을 증명하세요.” 그녀의 날개 위로 새하얗고 성스러운 빛이 쏟아지며 유신과 가브리엘을 감쌌다. B&M 최종장 전설의 끝, 신화의 시작18화 마신기의 앞도적인 파워로 메르카바와 함께 이카루스를 날려버린 베리알은 이제 루시퍼의 원수, 유신을 칠 생각이었다. ‘정말 오래 걸렸습니다. 유신 더 실버스타의 죽음을 당신이 기뻐할 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 베리알은 당신의 원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 피 값을 받겠습니다.’ 잠시 동안 증오스런 눈으로 유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던 베리알은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뭐지, 이 기운은? 이런 말도 안 되는 파워는... 설마 용성제?” 더 이상 망설일 틈이 없다. 어떻게 이곳까지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괴물이 온다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아직 아스모데우스의 기체에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카론과 싸우기는 싫은 것이다. “현신하지 않은 지금이 찬스! 꺼져버려라!” 베리알은 그의 대검에 그가 쓸 수 있는 모든 코어를 집중하였다. 그 순간, 메르카바와 이카루스가 추락했던 바다에서 한줄기 빛이 뻗어 나왔다. “뭐냐?” “물은 나의 힘. 사대천사 물의 가브리엘!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바다가 갈라지는가 싶더니 그 속에서 어느새 잘린 팔과 다리를 복원한 가브리엘의 메르카바가 한 자루의 새하얀 빛의 창이 되어 마신기에게 쏘아져 나갔다. 과연 가브리엘의 혼신을 다한 공격은 효과가 있었는지, 그녀의 창은 마신기의 어깨 깊숙이까지 박혀 들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날 막을 수 있다는 거냐?” 하지만 마신기는 그런 상처쯤 상관없다는 듯, 메르카바의 허리를 베어버렸다. 그리고 반 토막이 난 메르카바에게, 카론에게 쓰기 위해 모아두었던 코어를 전부 쏟아 부었다. “콰쾅, 콰콰콰콰쾅” 메르카바가 있는 공간이 잠시 찌그러지는가 싶더니 귀청을 찢는 폭발음과 함께 공간 자체가 완전히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 공간과 함께 파괴돼버린 메르카바는 힘없이 땅으로 추락했다. “이제 방해는 없다! 모두 소멸되어라! 죽음의 노래를 불러라! 루시퍼님을 찬양하라! 그 이름이 우주 전체에 메아리 칠 때까지! 나의 승리다!” 마침내 마신기의 대검이 유신 일행이 있는 곳에 겨누어졌다. 하지만 마신기는 공격을 퍼붓지 않았다. “이... 이게 무슨?” 당황한 베리알이 마신기를 컨트롤하기 위해 애썼지만, 마신기는 그의 명령을 거부했다. “훗, 그렇군요. 아스모데우스공은 다시 한번 싸우고 싶은 것이군요. 당신에게 최초이자 마지막 패배를 안겨주었던 유신과 용성제.” 베리알은 뭔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흑마심 깊숙이에 몸을 묻었다. “공의 뜻. 잘 알겠습니다. 이건 아스모데우스 공의 싸움. 저는 단지 전력을 다해 보좌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침내 이카루스가 추락했던 미도우만이 갈라지며 그 속에서 최강의 용신기 카이드리아 엘 엑시나에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동안 블레이드 앤 매직을 사랑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처음 써본 소설이지만, 크던 작던 앞으로의 제 인생에 큰 갈림길이 될 소설이었습니다. 그 블레이드 앤 매직이 마침내 그 막을 내렸군요.^^ 늘 최선을 다해 썼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에 이르러 예전에 쓴 글을 돌아보니 미숙한 점이 너무 많이 눈에 띕니다. 그 정도로 제가 성장했다니, 기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군요. 당분간은 조금 쉬면서 그간의 정리를 해보고, 앞으로 글을 쓸 것에 대한 자료조사와 공부를 해야할 것 같아요. 2부는 정말 좋은 작품으로 기억되는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거든요. 2부를 쓰기 전에 0권, 즉 성계대전 때 유신과 카론의 활약을 담은 내용을 두 권 정도의 분량으로 쓰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도 담고 싶은 내용이 너무 많거든요. 그리고... 2부는 내년 초에 선보일 예정입니다. 이제 곳 5권이 나오겠지요? 그래서... 추천 글 모집합니다. 책 뒤에 쓰는 추천글... 모두 아시죠? 그간 제 소설을 읽고 느꼈던, 좋은 내용이던 나쁜 내용이던 짧게 적어서 주시면, 그중에 좋은 내용을 골라 5권 뒤쪽 표지에 넣도록 할께요. 추천인의 메일과 아이디는 필수입니다. 꼭 좋은 내용이 아니더라도, 간략한 감상은 후에 글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미흡했던 점이나 고쳤으면 좋을점 지적해 주세요. 처음 써본 장편소설... 그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참 묘하네요. 미숙한 제 생각이 녹아 있는... 그런 글을 수많은 사람이 함께 보고 공감해 준다는 것... 참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다음에 더 좋은 모습으로 다시 여러분들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앞으로 블레이드 앤 매직이 나가는 방향을 따듯하게 지켜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