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poru Author: me [연재] 표류공주 -1- 표류공주(漂流空舟) 1.각경권 (覺輕拳) 이제 막 불혹의 나이를 넘어선 용무관주(龍舞關主) 도학정(陶鶴亭)이 사람좋은 너털웃음을 연신 터뜨리며, 낯선 중년사내에게 포권을 취하고, 무어라 말하는 것을 모진위(毛眞衛)는 드디어 보고야 말았다. 더 정확히 말해서, 중년사내옆에 공손히 시립해있는 자신과 동갑 쯤 되보이는 어린아이를 보고 만 것이다. 순간 입이 마르고, 다리가 후둘거렸다. 아마도 옥봉산(玉峰山) 서편에 터를 잡 고있지만 이곳 신양(信陽)까지도 그위명을 떨치고 있는 옥봉산 목가장(睦家莊) 의 장주 목연탁(睦淵卓)대협과 그의 세번째 아들이리라.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도학정은 서둘러 거실로 안내하여 목연탁에게 상석을 양보하고, 하녀를 불러 차를 가져오도록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연탁에게 다시 예를 취하였다. "장주께서 친히 왕림하시다니요. 원로가 수월치 않으셨을텐데..." 목연탁으로 말할것같으면, 도학정에게있어서 몇 안되는 은인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년전만하더라도, 사실 용무관은 동네꼬마들을 가르치며 푼돈으로 연명하는 그저 그런 무술도장이었다. 신양성의 동문(東門)언저리에서나 겨우 알려져있던 용무관이 신양성은 물론, 신양성을 너머 그근동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된 계 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지방의 손꼽히는 고수 목연탁대협이 적지않은 은 자를 지불해가며, 그의 둘째아들을 용무관에 보냈기 때문이었다. 이후, 용무관주 도학정의 명성이 높아지고, 문하생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허어, 도선생께 미욱한 아들을 맡기어 다시 큰수고를 끼치는 마당에 감당키어 렵구료, 예를 거두십시오." 목연탁이 황급히 일어나 도학정을 제지하며 다시 자리에 앉도록 했다. 목연탁으로서도 도학정을 그리 경시할 입장은 아니었다. 우연한 기회에 용무 권을 면식하게 된것은 그에게 큰 다행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아이가 선민(鮮民)이로군요." 몇마디 의례적인 인사가 오고 간 후, 주학정이 목선민(睦鮮民)을 자애로운 눈 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서둘러 접대가 오가느라고, 목선민(睦鮮民)은 아직 인사도 못하고 있었다. "이런 인사가 늦었군요, 본좌의 변변치않은 삼남이외다. 민아야, 어서 사부께 예를 올리지않고 무엇하느냐?" 목선민이 황급히 일어나며 인사를 올렸다. "제자 목선민, 거두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도학정이 보니, 사지와 허리가 늘씬하게 곧았으며, 눈빛이 영명하고, 자세가 안 정된 것이 권법에 자질이 풍부한 듯하여 흐뭇하였다. 오년전, 그의 둘째형 목선립(睦鮮立)이 그랬듯이 목가장의 삼남 목선민은 용무 관의 문하생이 됨으로써 무공수련에 입문하려는 것이었다. 도학정이 일행을 데리고 연무장(練武場)에 들어섰다. 잡석으로 터를 다진 후, 열여섯개의 기둥위에 단지 지붕만 얹어놓은 정방형의 연무대에는 세개의 의자 와 탁자하나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용무관의 제자들이 탁자주위를 비워둔 채로 정중앙을 중심으로 넓게 둘러 앉아있었다. 도학정과 목씨부자가 들어서니 제자들이 분분히 일어서며 예의를 갖추었다. "사부님을 뵈옵니다. 목대협께 문안드리옵니다." "모두 좌정하여라, 해청(海靑)은 준비되었으면 거행하도록." 도학정이 제자들을 앉도록 하고는 탁자앞에 서있는 용무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제자로서 십삼세이하 문하생들의 수련을 돕고있는 이십이세의 나해청(羅 海靑)에게 엄숙한어조로 명하였다. 동도들사이에 앉아있던 모진위는 다시 가슴이 철렁하였다.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새로운 문하생을 받아드리는 통과의례(通過儀禮)가 바야흐로 시작되는 것 이었다. 이미 여러차례 있어왔는지라 대제자 나해청의 지휘에 따라 의식은 막힘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목선민의 사부에 대한 아홉차례의 배례가 끝나고, 도학 정이 용무권(龍舞拳)의 공동창안자들인 공경대사(空耕大師)와 진허진인(盡虛眞 人), 오추백(吳秋白)대교두(大敎頭)의 위패(位牌)가 있는 제단으로 가서 분향을 올리고, 세분의 위패에 각각 삼배를 하였다. 형식적으로나마 목선민에게로의 영 무권의 전수를 허락받는 것 이었다. 나해청의 절도있는 구령소리에 마춰 몇몇 제자들의 거룡십팔수(擧龍十八手)시 범이 이어졌다. 모진위는 정해진 순서가 끝나 갈수록 점차 호흡이 가빠지고, 머리가 어지러워 졌으며, 세상이 노랗게 변해감을 느꼈다. 공포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 다. 출운용무(出雲龍舞)가 끝나면 순서에 따라 다음엔 영무관의 어린 문하생중 무 공의 뛰어남에서 수위(首位)를 다투고있는 이부춘(李富春)과 소경광(蕭勁光)이 나서서 비무를 벌리게 되리라. 그리고 그다음이 바로... ... 모진위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부춘과 소경광이 아이들이 빙둘러 앉은 연무장의 중앙으로 나서고, 드디어 대련이 시작되었다. 제법 신형이 안정되고, 기운이 담긴 두소년의 박진감넘치는 격투가 무리들에게 흥미진진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지만, 모진위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않았다. 대결은 동도들 대부분이 예상한대로 또래중에 덩치도 제일 크고 힘도 센 이부춘의 승리였다. 두아이가 사부와 내방객에게 인사를 한 후,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의식이 사라진, 멍한 상태로 있는 모진위의 귀에 자신을 재 촉하는 대형(大兄) 나해청의 음성이 유령의 울음처럼 어렴풋이 들려왔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언제나 처럼 마지막 순서는 도장의 가장 권법이 약한 제자와 입문자와의 대련 이다. 도학정이 이 과정을 만든 이유는 외면적으로는 받아드리는 문하생의 소 질과 성향을 파악하는데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권법이라면 싸움이 붙 었을 때 어떻하면 그저 이기는데 도움을 많이 주는가로 권법의 효능을 따지는 대개의 신양성사람들에게 용무권을 익히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자기자식이 도 장의 가장 약한 아이에게 조차도 얻어맞는 것을 통하여 뼈저리게 통감시켜 그 의 자식을 안심하고 용무관에 맡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고육지책(苦肉之策)에 불과하였다. 또한, 부수적으로 도장의 수련생들에게 있어서는 초심자를 멋지게 쓰러트려 선 배로서의 위엄을 보이게 함으로써 용무관원으로서의 긍지와 보람을 느끼게 하 는 효과도 없지않아 있었다. 관원들은 그래서 이 대결을 각경권(覺輕拳)이라 부르며 좋아들하였다. 가벼운 주먹으로 깨달게한다는 의미였지만 생각보다는 가벼운 주먹질이 아니란 것을 관원들 모두는 알고있었다. 물론 가장 약하다고는 해도 아직까지 도장이 생긴 이래 권법의 권(拳)자도 모 르는 초심자와 싸워 패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해청은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걸어나오는 반쯤 혼이나간 모진위의 푸르스 름한 얼굴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용무관에서 가장 약한 제자를 고르라면 관 원들은 백이면 백, 모두 모진위를 꼽겠지만, 입문한 지도 벌써 육년이 넘은 문 하생임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모진위는 이번이 각경권에는 첫출전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신양성사람들은 도학정의 권유에 따라 아홉살 정도는 되어서 아 이들을도장에 내보냈으므로 겨우 서너살에 용무관에 맡겨진 모진위가 처음부 터 각경권을 치를수야 없었었다. 그러나 작년에는 모진위와 동갑내기인 고강(高崗)이 각경권의 선배로서 당당 히 자기보다 한살이 많은 열살짜리 후배에게 한 수 지도해준 바도 있었으니, 벌 써 열살이 된 모진위가 더 이상 나이가 어려서 출전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었 다. 그렇다고해서 작년에는 모진위가 고강보다 무공실력이 좋았냐하면, 그것은 아 니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모진위는 자신을 제외하고는 가장 약하다는 고강에게 조차도 맛좋은 먹이에다 가지고 놀기좋은 장난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해청은 모진위가 제법 나이를 먹은 작년에도 그를 각경권의 출전자 로 뽑지않았다. 비록, 겉으로는 실력이야 물론 최하위였지만 몇 살부터 출전시 키겠다고 못을 딱 박아서 정해놓은 것은 아니었기에 너무나 어려서 뽑지않았던, 그 동안의 관례에 따르는 척하였지만 기실은 아무리 무공을 접해보지 못한 초 심자라도 수준이 많이 떨어지는 모진위로서는 승리를 장담하기가 꺼림직하다는 나해청의 속셈이었다. 도학청사부도 따로 무슨 생각이 있었는지 그럴 때마다 그저 모진위를 힐끔 쳐다보고는 별 말 없이 넘어가고는 하였다. 그랬던 것이 어제는 도학정이 나해청을 따로 불러서는 모진위의 각경권을 지 시하였던 것이다. 나해청은 이제 막 도복으로 갈아입고 연무장으로 들어서는 목선민을 발견하고 는 마른 침을 꿀꺽삼켰다. 목선민은 균형잡힌 체구에 영특한 눈동자를 반짝이 며 차분한 걸음걸이로 나해청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약간 긴장한 듯하지 만 비교적 침착한 표정이었다. 나해청은 꾸부정한 등에 다리도 불품없이 휘였고, 어깨마저 삐딱한 용무관 최 악의 제자, 모진위의 정신이 반 쯤 나간 표정과 목선민의 기품있는 자세를 번갈 아 보다가, 무슨 불길한 생각이라도 지우는 듯 고개를 크게 뒤로 돌려서 주학정 을 쳐다보았다. 주학정이 나해청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해청이 다시 목선민과 모진 위쪽으로 돌아서서는 쥐어짜는 목소리로 시합개시를 명하였다. 나해청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힘껏 쥐었다. 도학정은 초조하였다. 목연탁이 그의 둘째아들을 용무관에 보내준 것이 당시 변변히 구색도 갖추지 못한 주학정의 용무관에 현판이 걸리도록 해준 것이라면, 셋째아들마저 보내는 것은 용무관의 도학정이 신양에 그의 이름석자가 새겨진 깃발을 날리도록 해주 는 것이었다. 이지방의 대고수 목연탁대협이 셋째아들마저 맡기다는 것은 둘째 아들 목선립의 삼년동안의 권법수련이 긍정적이었음을 의미했다. 풍문에의하면, 목연탁은 자신의 셋째아들을 용무관으로 보내기위해 상당한 고 심을 했다고 하며, 그래서 그런지 일년이나 미루워지고 뒤늦게야 이렇게 이미 열살이 되어버린 그의 아들, 목선민을 데리고 온 것이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작년에 벌써 입문했어야 했다. 어쨋든 입문의 절차는 밟아야 했고, 문제는 목 선민이 격투를 벌여야 할 각경권이었다. 목연탁은 이지방 무림의 유명한 고수다. 그런 그에게 용무권이 사람을 때려잡 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위해 그의 아들을 도학정의 가장 약한 제자 로 두둘겨 팰 필요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목연탁에게 누가 되어 그의 심기를 언짢게 할 것이다. 물론, 오년전 목선립이 입문할 적에는 이런 걱정은 필요가 없었다. 목선립이 용무관의 문하생이 된것을 시발점으로해서 도장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 했고, 제법 찾아오는 문하생도 많아졌다. 그때서야 비로서 생긴 절차였던 것이 다. 그런이유로 도학정은 목선민의 상대를 고민하였고, 그 결과가 모진위였다. 어 찌보면 모진위는 주학정이 삼십여년에 걸쳐서 익히고, 깨달은 용무권의 정수를 거의 대부분 이어받은 최고의 제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용무권의 정수는 커녕 간단한 초식조차 제대로 시전 하지 못하는 최악의 제자였다. 그의 비정상적으로 허약한 육체는 용무권을 아 예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의 손발짓보다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간단한 주먹질조차 제대로 못하는 녀석에게도 지난 육년간의 진저리가 나는 수련이 아무런 성과를 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권법, 본래의 기능은 아 니었지만, 단련과정에서 생기는 부차적인 효과들은 그의 내부에 구석구석 스며 들었다. 모진위의 간단한 움직임이나 가벼운 걸음걸이에도 용무권의 숨결이 담 겨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불구에 가까운 신체가 용무권의 도움을 받아 정상에 가깝도록 움직이고 있었다. 애초에 하상곤(賀尙昆)의 요구도 그아이를 강호무림의 쟁쟁한 고수들과 겨룰 수있는 무사로 키워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도학정이 나중에 가서야 모진위가 무림고수가 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고 그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 다. 하상곤은 용무권의 진수속에는 단순히 권법이 아닌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 는 것을 알고 그것을 모진위에 가르쳐달라고 한 것이었다. 일이년 정도만 더 깨우치면 모진위가 도학정의 도움없이 혼자서 용무권을 정 해진 법로에 따라 완벽하게 시전하게 할수 있게 된다. 용무권 최고의 절예인, 비룡삼장(飛龍三掌)의 정수마저 합쳐진다면 모진위의 출운용무는 완성되는 것 이고, 그것으로 하상곤과의 약조는 지켜지는 것이다. 그것이 기초가 되어 용무권이 그의 행동자체가 되느냐 마느냐는 모진위와 그 를 그렇게 만들려는 하상곤의 몫이다. 음식을 먹기위해 손을 든다거나, 걷기위 해 다리를 움직인다거나 하는 그의 행동자체가 용무권의 움직임이 되어 모진위 의 허약한 심신을 도와주는 것, 그것이 하상곤의 목적이었다고 주학정은 생각하 였다. 그런 모진위에게 각경권따위의 대결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모 진위의 손을 빌리기로 도학정은 다짐하였다. 모진위의 실력에 목가장의 위명에 폐가 될 정도로 목선민이 일방적으로 당할 가능성은 만에 하나도 없었다. 또한, 목연탁정도의 고수라면 모진위가 그리 뛰어난 자질과 조건을 갖추지 못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것이고, 그런 모진위의 모습속에서 도학정이 열과 성을 다 해 가르친 용무권의 진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으로 도학정이 모진위를 내세운 소기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었다. 주학정은 새삼스럽게 모진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6년전 네살짜리 모진위를 끌고 한사내가 도학정을 찾아왔다. 하상곤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사내는 모진위에게 용무권을 전수해주길 바란다고했다. 하상 곤의 요구조건은 어지간히 까다로웠는데, 한마디로 도학정의 인생중 서너해정도 를 완전히 소진시켜가며 병든 어린아이를 때려잡으라는 주문이었다. 겉모습만 흉내내는 일이 전혀 없도록, 호흡의 원리를 한숨도 틀림없이 지키게 하도록, 힘의 강약분배와 내기의 운용도 정해진 데로 조금도 어김없이하도록, 권법본연의 법도에서 벗어나서 역도에 들어가 자세를 망치는 일이 단 한순간도 없도록, 그리하여 마침내는 용무권이 몸에 베여 일상행동자체가 권법의 운용이 되도록 단련시켜 주어야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학정의 전인생을 바치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혼자 서 용무권의 모든 투로를 정해진 법로에 따라 완벽하게 시전할수 있게 될 때까 지만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자기혼자서도 그 엄청난 고난의 길을 향해 갈 수 있도록 준비만 해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도학정은 너무도 어이없어서 화살처럼 빠른 어조로 흥분하여 쏘아붙였다. "적어도 반년정도는 이 아이가 잠자는 시간이외에는 거의 눈길을 떼지않고 있 어야하고 그후로도 한두해 정도는 꼬박 세시진씩은 하루도 빠짐없이 이 아이 하나만을 위해 버려야하고, 아이가 사리를 제대로 분별하는 열한두살 내외가 될 때까지는 아이의 주위가 산만해지지 않도록 죽지않을 만큼은 두들겨패고 괴롭 혀야 할거요. 물론, 맨먼저 해야할 일도 먼저 내말이라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하게 될 때까지 이 세상모르는 꼬마녀석을 내손으로 거의 죽었다 살아나도록 두둘겨 패주는 일일테지만... ... 이녀석으로서는 사는게 사는것이 아니겠지요. 도대체 이 엄청난 일에 당신은 어떤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는거요? 아니, 당신 의 이 빌어먹을 요구조건이 얼마나 되먹지 않았는지 알기는 알고 이렇게 나를 찾아온거요?" 이에대한 하상곤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모진위는 본원진기가 극히 미약하고 경맥의 흐름이 원활치 않은 아이다. 용무 권의 이치에 따라 이 아이가 열심히 수련한다면 본원진기가 꺼져버리거나 기의 흐름이 끊기지않을 것이다. 어린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또한, 이 어린녀석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도 모자라는 체내의 기운을 보충 하기위해 하루의 반절이상은 그저 가부좌를 틀고 멍하니 앉아 있어야 한다. 점 차 그시간이 조금씩 줄어들기는 하겠지만, 한두해가 더 흐른다면 몰라도 그전까 지는 하루의 서너푼 외에는 그리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권법의 수련에의해 양생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녀석에게는 권법 수련이 고통을 줄이는 약이나 진배없어서 중독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 스스로 가 열심히 안하고는 못 배길 것이다.힘들기야 하겠지만 당신의 지례짐작보다는 비교적 수월할것이다. 하상곤의 간곡한 설득이었다. 당시, 도학정의 형편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서른네살의 도학정이 이십사 년의 오랜 군역을 마치게 되었을 때, 천애고아로 십삼세의 어린나이에 군역에 강제징집되어지난 생애의 대부분을 군졸로서 살아간 주학정으로서는 무엇으로 먹고살아야할지 막막할 뿐이었는데, 마침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상급무관이 권법선생의 자리를 주선해주었다. 도학정은 군사양성소에서 주력군의 기본무공인 용무권을 훈련받던 중, 단연 군 계일학(群鷄一鶴)의 빼어난 자세와 동작을 보여주어 용무권 권법교두(拳法敎頭) 의 눈에 띄게 되었다. 그리고, 양성소과정이 끝나고 보직이 정해질 때, 주학정은 용무권의 권법시범역으로 발탁되는 행운을 얻었고, 종내에는 하급교두까지되어 이십여년을 용무권을 배우고, 가르쳤다. 그의 성실함과 용무권에대한 깊은 이해와 권법을 바르게 가르치는 재주의 탁 월함을 평소 높이 평가하던 그의 상급자는 그가 비록 강호를 종횡하는 대단한 권법자는 아닐지언정 권법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는 권법의 대가보다도 더 훌 륭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차에 우연히 신양의 지인(知人)으로부터 권법에 능한 이를 수소문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도학정을 추천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도학정은 신양에 흘러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 모진위가 나타나기 서 너해전 쯤이었다. 그렇게 신양에 자리를 잡은 도학정은 몇년후 어찌어찌하여 권법도장이랍시고 자그마하게 용무관을 열었지만, 해를 거듭한 가뭄과 홍수로 지역형편이 곤궁하 여 권법을 가르쳐서는 끼니도 잇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모진위와 하상곤이 방 문할 즈음이 도학정에겐 특히 더 곤란했던 시기였다. 그것이 도학정에게 모진위라는 애물단지를 끌어안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 다. 일년에 물경 황금 열냥. 도학정은 알고있었다, 양생을 주목적으로 용무권을 전수한다는 것이 얼마나 번 거롭고 어려운 일인지를, 그것은 일체의 요령과 게으름을 허용치않는 오로지 원 리원칙그대로의 수련이란 것을, 그것은 네살짜리 어린아이에게도 그 어린것을 가르치는 사람에게도 피를 말리는 고련이란 것을. 그러나 하상곤이 번쩍이는 금원보를 소매속에서 꺼냈을 때, 도학정은 자기도 모르게 금덩이를 덥석 받아들고 말았다. 황금 열냥은 주학정과 모진위 둘정도 는 그럭저럭 일년을 지낼수 있는 엄청난 재화였다. 다음날부터 모진위의 혹독한수련이 시작되었다. 모진위의 생사가 걸린 데다가 조금만 방심해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 수련방법인 지라 도학정은 이를 악물었다. 일의 경중을 분별못하는 어린아이에게 무슨 설득이 소용있겠는가? 요령을 피우거나 속이지 못하도록 엄격히 주먹다짐과 징벌로써 다스릴 뿐이었 다. 거칠거나 훈련을 게을리하는 병사들을 다루워 본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됫음 은 물론이다. 모진위의 자질이 상상외로 형편없어서 낙담도 하였지만, 하상곤이 말한대로 생 각보다 수월한 면도 있었다. 모진위는 하루에 반이상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 어야했다. 주학정이 보니 토납호흡법이나 운지조식같은 내공수련법은 아니었다. 평소에 도 끊길듯 말듯 미약하던 모진위의 호흡은 모진위가 가부좌만 틀고 앉으면, 더 욱 더 가늘어졌다. 마침내는 아예 숨도 쉬는 것같지 않았다. 숨을쉬지 않는 내 공수련법은 주학정이 알기로는 없었다. 하상곤에게 듣기로도 모진위는 경락이 여기저기 막히고,뒤틀렸기 때문에 애초 부터 내공수련은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긴 내공수련이 가능하다면, 이렇게 어렵고, 힘든 권법수련의 방법으로 모진위를 구하려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모진위는 숨을 쉬는 듯 마는 듯 휴식을 취하곤하였 다. 이것은 한순간의 방심도 허용치않는 어려운 수련방법때문에 잠시도 한눈 팔 사이없이 모진위에게만 매달려있던 주학정에게도 적지않은 여유가 되었다. 처음에는 너무도 힘든 나머지 숨쉴 힘도 없어서 질식사한게 아닌가 걱정이 되 어 안절부절했었지만, 그럴 때마다 더욱 생기가 넘치며 멀쩡하게 깨어나는 모진 위를 보고 아무런 염려도 없이 도학정도 편안한 휴식을 취하였다. 용무권이 어떤 작용을 하여 모진위스스로가 고통을 줄이기 위해 요령피우지 않고 열심히 수련할 것이라는 말도 사실이었다. 모진위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시도 때도없이 사지와 허리의 통증을 호소하 던 모진위의 짜증이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시키지않아도 제스스로 부지런히 출운룡무(出雲龍舞)를 반복하였다. 비록 자세도 볼품없고 동 작도 약했지만, 주학정이 엄격하게 가르친 덕분에 고지식할 정도로 가르친 그대 로의 원리에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거룡십팔수는(擧龍十八手) 용무권의 기초이다. 그리고 출운룡무는 거룡십팔수 를 익히는 수련법이다. 출운용무에 용무권의 모든 것이 담겨있지만, 처음에는 단지 거룡십팔수의 법리(法理)만 익히도록 가르친다. 계절이 세 번 바뀌고나서야, 겨우 모진위의 기초를 바로잡고 도학정이 이제 한 고비는 무사히 넘겼음을 기뻐하며 겨우 안도하고 있을때, 위풍이 당당한 중년사 내가 아홉살짜리 사내아이를 데리고 주학정을 찾아왔다. 목연탁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사내는 자신의 둘째아들에게 용무권을 전수해 주길 바란다고했다. 하지만 목연탁의 요구조건은 하상곤과는 달리 그렇게 까다 롭지 않았다. 그저 한 삼년동안 무공의 기초를 닦아달라는 것이었다. 백수노계(白手老鷄)였습니다. #4151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2- 07/22 23:19 353 line 목연탁은 젊은 시절, 강호를 누비며 수많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고, 홍백장 (紅魄掌)과 풍뢰도법(風雷刀法)을 절기로 이미 일가를 이루웠지만 자신이 절정 고수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그리고 남은 여생을 다하여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결국 절정고수의 반열에 오르기엔 이미 늦었다는 것도 잘 알고있었 다. 문제는 목연탁 자신이 아니라, 이제부터 무수히 넘어야 할 강호의 풍파를 앞두 고 있는 그의 세 아들이었다. 자질이 따르지 않아 큰성취를 이룰 수 없다면 어 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자신의 무능으로인해 자식들의 대성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팔년전 어느날, 목연탁은 오성과 재질이 더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입 문한 사제(師弟) 유구림(劉九林)에게 추월당하고 있는 그의 장남을 보면서 경 악과 함께 자신이 극복하지 못했던 무공의 한계를 자신의 장남 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유구림은 눈에 띄게 비범한 재능을 가진 제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에 가 까운 편이었는데, 목연탁의 제자로 들어오기전에 권법을 이삼년 익혔다고 했다. 당시 중원천하는 이십여년간의 환란을 겪은 터라 많은 무림인이 죽고 멸문한 문파도 적지 않았다. 또한 대문파들조차 대란(大亂)으로 소진된 힘을 보충하고 자 특출난 재능이 발견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도의 가입을 억제하고 봉문 (封門)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약한자는 설움을 톡톡이 당했한 시절 인지라 세간에서는 자손들이 무술을 익히도록 권장하는 성향이 다른 시절보다 강하였다. 그러다보니 수요가 넘치고 공급은 딸리는 형편이라 시류에 따라 특별히 사제 의 연(緣)에 구애 받지 않고 그저 돈을 받고 삼류무사들이 육합권(六合拳)따위 를가르치는 무술도장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유구림도 그런종류의 도장에서 권법을 배웠다는 것이었다. 목연탁도 소문을 들어서 그런 도장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지라 대단치 않게 여기고 당시에는 유 구림이 펼치는 권을 주의깊게 보지않았다. 유구림의 무술을 습득하는 속도가 처음부터 그렇게 빠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 나 그의 진보는 막힘이 없이 꾸준하였다. 초입단계에는 기복이 심하기 마련인 내공수련도 순조로웠고, 십팔반 무기술을 익힐 때도 이것 저것 무기를 가리지않 고 잘 적응하였다. 대개의 경우는 적어도 한두가지 까다로워하는 무기가 있게 마련이었다. 어떤 무공이든지 일단 익히기만하면 숙련이 될수록 그위력이 무 리없이 꾸준히 강화되었고, 전혀 다른 무공과도 잘 조화시켜 자신에게 알맡은 운용방법을 소화해내었다. 어느 사이에 목가장의 장손 목선월(穆鮮月)에 필적해 있었다. 유구림의 기초는 의외로 탄탄하였던 것이었다. 목연탁은 어느 단계에 이르러 그의 무공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젊은 시절, 좋은 기본무공을 만나지못해 상승무공에 이르는 기초를 닦지 못했기 때문 이었다. 가령, 목연탁이 일찌감치 화산파(華山派)의 복호권(服虎拳)같은 것을 익 혔더라면, 그의 홍백장과 풍뢰도는 한단계 더 높은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유구림이 목선월을 마침내 무너뜨리던 날, 새벽까지 잠 못이루고 후원을 서성 이던 목연탁은 달빛에 젖어 이리 저리 번쩍이는 유구림을 보았다. 유구림이 새 벽부터 무공수련을 하고 있었다. 언뜻보니 한편으로는, 소림오형권(小林五形拳)과 비슷하기도하고 다른 한편으 로는 현문정종(玄問正宗)의 도인체조(道人體操) 같기도 한것이 근골을 강건하게 하고, 몸을 부드럽게 하는 일종의 체조나 권무(拳舞)같았다. 마치 용이 하강하 여 춤을 추는 듯 유구림의 동작은 막힘이 없고 허허로웠다. 넋을 잃고 바라보던 목연탁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것은 권법이었 지만 검을 쥐면 그대로 검법이었고, 도를 쥐면 그대로 도법이 되었다. 목연탁은 깨달았다. 유구림의 무예의 뿌리는 저 권법에 있었으며, 같은 풍뢰도 법의 죽엽육변(竹葉六變)이라도 오늘 유구림과 육선월이 서로 대적하여 펼쳤던 죽변육변은 서로 다른 것이었음을. 목연탁이 다급히 유구림을 불러 물었다. " 구림아, 네가 전에 익힌 그권법은 이름이 무엇이더냐?" 유구림은 예전에 이미 답한 바가 있어 의아해하며 대답하였다. "용무권이라하옵니다." 목선민이 단정하게 나한십팔권(羅漢十八拳)의 기수식(起手式)을 취하며 뻣뻣하 게 경직되어있는 상대방롤 주시하였다. 멍하니 서있던 사내아이가 화들짝놀라 며 화급히 방어자세를 취하였다. 아이들이 취청귀(醉靑鬼)어쩌고 소근대는 것을 목선민도 얼핏 들었었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목선민도 이제는 알 만 하였다. 마치 술에 취한듯 동공이 풀린 눈동자, 힘없이 늘어져있는 푸르죽죽하게 죽어 있는 얼굴근육들이저아이의 별명이 취청귀라는 것을 말해주고있었다. 목연탁은 막내아들의 깜찍한 행동에 고소를 금치 못하였다. 육선민이 지금 의 젓하게도 동자배불(동자拜佛)의 초식을 흉내내고 있는 것이었다. 육선민은 그의 세아들중 목연탁이 가장 기대를 걸고있는 아이였다. 육선민은 남달리 총명하고, 근골이 강건한 데다가 동작이 또한 유연하여 자신 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명문대파(名門大派)들이 자랑하는 기재들과 비교해도 전 혀 손색이 없었다. 목선민이 나한권(羅漢拳)을 펼칠줄 알아서 동자배불의 자세를 일으킨 것은 아 니었다. 용무권을 익히는데 방해가 된다해서 그의 아버지 목연탁은 그에게 어 떤 무공도 익히지 못하도록 했었다. 다만, 목선민이 언젠가 몇 번 그자세를 보고는 강호인들이 서로의 무공을 겨루 려고할 때 취하는 예의바르고 겸손한 태도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난생 처음 비 무(比武)에 나서게되자 어찌할지 모르다가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동작이었다. 그러나 목선민이 무공초식을 모른다고해서 모진위에게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 니었다. 목연탁은 자신이 이룰수 없었던 야망을 목선민이 실현해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받쳐 목선민의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목선민이 다섯살이 되자 호흡법을 꾸준히 수련시켜, 일곱살에는 가문의 비전(秘 傳)인 현진기공(玄進氣功)의 내공심법(內功心法)을 전수할 수있었다. 이미 육선 민은 진기의 운용을 느끼고 조절하는 단계에 도달해있었다. 아이들이란 본래 주의가 산만하고 잡념을 떨치기 어려운지라 가풍(家風)이 엄 하고 무공전수의 기틀이 잘 잡힌 명문대가의 자제들 조차 열살정도는 되어서야 호흡이 정제되어 내공수련에 들어간다는 것을 감안하면 목선민의 성취는 놀라 울 정도였다. 또한, 재화를 아낌없이 베풀어 귀한 약재를 모아서 육선민에게 복 용토록 하였다. 알고보면 도학정의 고민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준비가 늦어져서 목선민의 방문이 일년 늦어졌으니 헛된 풍문에 근심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고, 도학정의 그저그런 제자들에게 호락호락하게 당할 목선민이 아니고보면 그를 배려하기위해 각경권의 상대를 고민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목선민은 온몸에 긴장을 풀고 가벼운 상태를 유지하기위해 애썼다. 섯불리 공격해 들어가기엔 상대방의 권법수단이 염려되었다. 일단은 취청객이라는 아 이가 어떤 수법으로 나오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중심을 낮게 잡고 양손을 가슴근처에 놓아 방어에 유리하도록 했으며, 진퇴를 재빠르게 하기위해 어느 한 쪽에 무게가 실리지 않도록 양발의 균형을 잡고 섰 다. 용무관 어린제자중의 최고수이자 신양성 동문일대의 골목대장, 이부춘은 분통 이 터졌다. 목선민이 스님이 인사를 하는 것처럼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을 뿐인데도 저 퍼런 귀신몰골의 모진위녀석은 맞아죽을 듯이 놀래서 볼성사납게 허둥댔다. 이 부춘으로는 용무관의 당당한 제자가 초보자에게 진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었 다. 그런일이 벌어진다면 시장통 나부랭이자식들까지도 용무관아이들을 깔보고 업 신여길 것이다. 벌써부터 시장통 맹룡도장(猛虎道場)에다니는 노지달(魯芝達) 놈이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게다가 그렇지 않아도 세도가의 자식이라 고 으시댈 판인데, 저 밉살스러운 목선민이란 놈이 각경권마저 이겨버린다면 그 뻐기는 꼴을 이부춘은 도저히 두눈 뜨고 볼 자신이 없었다. 사부님도 야속하시지 그동안 가타부타 참견도 없더니 하필이면 이런 때, 꼭 저 멍청한 자식을 내보낸단 말인가. '이 시퍼런 귀신놈아, 이겨라 이겨. 육년을 꼬박 권법수련만 해댔으니 저런 생 초보는 한주먹꺼리다. 졌다간 팔다리를 분질러 버려서 다시는 각경권에 얼씬도 못하게 해주리라.' 그 때 막 모진위가 반궁탄시(反弓彈矢)의 수법으로 목선민의 가슴을 향해 일 권(一拳)을 날렸다. 목선민은 급히 숨을 들이쉬어 한줌의 진기를 끌어 올리고는 신속하게 옆걸음 으로 비켜갔다. 반궁탄시(反弓彈矢)는 힘을 응축하여 그 탄력으로 일거에 힘을 쏟는 수법으로 활시위를 당기듯 몸을 휘었다가 화살처럼 파고드는 주먹이 제법 기세가 있을 것 같았지만, 의외로 취청귀는 행동이 굼뜨고 예비동작이 컸던지라, 목선민으로 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방비할 수 있었다. 여력을 감당치 못하고 모진위는 비틀거렸다. 너무도 쉽게 목선민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목석민이 이미 물러나던 왼발를 돌려 모진위의 우측방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모진위가 허둥대며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 새, 눈앞에 커다란 주먹이 다가와 있 었다. 별안간 별이 번쩍이고, 모진위는 큰 대자로 벌러덩 자빠졌다. 순간, 용무관 문하생들의 입이 순간 쩍 벌어졌다. 하늘이 빙빙돌고, 땅이 울렁거렸지만, 모진위는 일어나려고 버둥거렸다. 턱이 쑤시고, 고통을 참을 수 없어 그냥 누워있고 싶었지만, 굳어버린듯 천장만 바라 보고 있는 나해청대형의 모습과 그 뒤로 참혹하게 일그러진 사부의 얼굴이 보 였다. 어떻해서든지 일어나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언제나 처럼 그렇게 힘없이 쓰러져 버려서는 안되는 시합이었다. 모진위 자신 만 생각한다며는 그저 이렇게 끝내고 말아도 그리 아쉬울 것도 괴로울 것도 없 는 너무나 익숙한 이미 버릇이 되어버린 패배이었지만, 자신의 두손에 맡겨져버 린 도장의 명예를 한 줌이라도 염려한다면, 자신을 이제까지 키워준 사부의 안 위를 손톱만큼이라도 걱정한다면, 동료들의 자랑스런 긍지를 생각한다면, 이렇 게 끝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자신이 이긴다는 생각 따위는 감히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 모진위는 승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다. 모진위에게 혹시 승리라는 의미가 있다면 그 것은 아마도 그저 전보다 한대라도 적게 맞고,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맞았다고 자위(自尉)하는 정도가 고작이리라. 그러나 이번 만큼은 그 것마저도 승리가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이기는 것 이외의 결과는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끔찍했다. 이제 열살짜리 모진위에게는 감내하기 힘든 중압감이 그를 질식시킬 정도로 내리 누르고 있었다. 어떻게하면 조금이라도 덜 맞을 것인가? 어떻게하면 약간이라도 덜 아프게 맞 을 것인가? 하는 것만이 그의 승부인생의 전부였던, 모진위에게 공격이나 반격 이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않았다. 그런데 이 엄청난 부담감은 모진위로 하여 금 생애최초의 선제공격을 하게 만들었고, 비참한 결말을 가져왔다. 머리는 어지러웠고, 사지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지만, 모진위는 안간힘을 다 했다. 끼-익! 모진위의 뱃속 깊숙한 어딘가로 부터 듣기에도 우스꽝스런, 이상한 소리가 새 어나왔다. 모진위가 기여코 일어난 것이다. . 목선민은 몇번을 버둥거리고 다시 자빠지다가 이제 겨우 일어서서 간신히 몸 을 지탱하고있는 자신의 적을 바라보았다. 상대의 입가에는 피마저 흐르고 있 었다. '많이 아픈가보다. 부들부들 떠는 거보면 어디 다친 모양인데...' 목선민의 착한 얼굴에 걱정스런 표정이 어렸다. 간신히 고개를 들었을 때, 모진위는 일찌기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이상한 표정을 목선민의 얼굴에서 보았다. 모진위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표정이었다. 그의 어린 생애의 대부분을 함께한 용무관 사람들이 그를 볼 때면 만들어내던 그런 표정, -사부님은 항상약간 화난 듯한 엄격한 표정이었고, 그외의 사람들은 불쾌함이 거나 경멸이거나 그게아니려면 무표정이 전부였다.- 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표정은 마치 '너 괜찮으니?'하고 묻고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모진위의 가슴에 따스함이 밀물처럼 흘러 들어왔다. 이부춘은 귀를 의심하였다. '아이쿠, 머리통을 되게 얻어맞더니 저녀석이 드디어는 돌아버리고 말았구나.' 생전 묻는 말외에는 말 한마디없던 녀석이 치열한 격전의 와중에, 그것도 계속 되고 있는 위기의 순간에, 게다가 자기의 안면을 강타한 자신의 생애최고의 악 적에게 난데없이 "나 모진위라고 해." 하고는 수줍은 어조로 인사를 하고 만 것이었다. 모진위는 자신의 앞에 당당하게 서있는 이 아이와 무엇이든 해보고 싶어졌다. 사람사이의 관계를 오로지 피하려고만 하던 모진위가 드디어 누군가와 무언가 를 함께하고 싶어진 것이다. 모진위가 할줄아는 것이라곤 단하나 용무권의 권법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상 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도 오직 그것 밖에는 없었다. 모진위는 생전 처음으로 무언가와 어울리 려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주먹다짐을 가지고.... 그 속엔 더이상 중압감도, 공포도, 승리도, 패배도 없었다. 모진위는 더이상 떨고 있지 않았다. 목선민은 모진위가 걱정되어 주춤거렸고, 난데없이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 모진위의 수작에 잠시 어리둥절하였지만, 모진위가 다시 방어자세를 갖추자, 선 기(先機)를유지하고자 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조금전 만해도 반 쯤 얼이 빠 진 것 같던 아이가 아까와는 판이하게 다른 기세로 그를 맞이 해주었다. 모진위는 목선민이 거세게 밀려오자 용무권의 유룡보법(遊龍步法)을 디디며 상대의 좌측으로 돌아 상대방의 등쪽으로 반격하려하였다. 모진위의 상체가 단단히 방어되어 있어서 다리를 기습공격하던 목선민은 자신 의 오른발이 다 닿도록 꼼짝하지않는 상대를 보고 '옳다구나' 생각했는데, 돌연 상대의 하체가 미끄러지듯 자신의 좌측으로 빠져버렸다. 목선민은 어찌된건지 가늠하기어려워서 당황했지만, 본능적으로 신형을 돌려 서 엉겁결에 후려오는 모진위의 오른 손주먹을 양손을 깍지끼듯 굳게 합쳐서 막으며 밀쳐버렸다. 모진위의 오른손은 허초(虛抄)였다. 벼락같이 오른손을 뒤집어 밀어오는 목선 민의 양손을 비키고는 왼손으로 어깨를 때려나갔다. 그러나 목선민의 양손의 힘이 의외로 거세서 손을 비껴내느라 기세가 죽었고, 버티는 어깨도 비교적 안정되어서 적중은 시켰지만, 목선민은 크게 휘정할 뿐 쓰러지지않고 버티었고, 때리던 모진위 자신이 오히려 약간 비틀거렸다. 목선민이 동작과 임기응변은 빠른 반면, 마구잡이였고, 모진위는 느리고, 반응 이 둔하였지만, 초식의 교묘함이 있었다. 모진위가 약간 우세한 상황을 만들 것 같았지만, 육선민의 아이답지않은 내공의 기초가 또한 이를 만회해내었다. 이러한 백중지세의 양상이 잠시 계속되었다. 모진위의 일방적인 패배로 곧 끝 날 것같던 형세가 놀랍게도 예상밖의 상황으로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도록 돌변해버린 것이다. 나해청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목선민은 예상보다 훨씬 강한 편이었다. 동작도 무공을 제법 닦은 아이에 못 지않게 민첩했으며, 상황판단도 빠르고 드물게 힘이 강하였다. 몇차례 수법에 걸리는 듯 했지만 재치있게 위기를 모면하였고, 주먹과 발에 맞 았을 때도 모진위의 위력이 약한 탓도 있었겠지만, 초심자답게 않게 중심을 잘 안정시켜 연타를 저지해 내는 때가 많았다. 놀랄만한 아이였다. 그러나 나해청이 정작 놀란 것은 목선민이 아니라 모진위였다. 무엇에라도 홀린 듯 시합에 몰두하고 있었다. 도무지 평소에 보아오던 그 모 진위가 아니었다. 반사신경이 둔하고 신체가 부실하여, 자세는 불안정하였지만, 그 수법의 절묘함이 제법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목선민의 위력있는 공격을 여러차례 견디어내었다. 양상은 서너 번, 모진위의 가벼운 성공에 목선민의 위력있는 견제타(牽制打) 한방. 이런 반복이였다. 모진위가 지쳐가고 있었다. 체력이 유난히 약한 모진위가 이렇게 온힘을 다해 치열한 격투를 버린 것이 처음이기도 했지만, 대결은 이미 백여초를 넘어서고 있었다. 숨돌릴 틈없는 일전이었다. 자신의 회심의 일격이 도저히 피하지 못할 것 같던 느린 동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상한 움직임에 따라 또 한 번 무위로 돌아가고, 모진위의 반격이 곧바 로 이어졌을 때, 모진위의 자세에서 목선민은 얼핏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이 도장에서 가장 강하다는 두아이의 비무도중에 한아이가 지금 모진위의 자 세와 똑같은 자세로 공격했었다. 그리고... ... 목선민은 무심결에 뒤로 피하려던 자세를 되돌려 오히려 모진위에게 비스듬히 다가서며 허리를 멋지게 젖히고는 날렵하게 모진위의 팔목을 나꿔채었다. 용각접응(龍角接應). 바로 이부춘의 공격에 소경광이 반격하던 거룡십팔수의 초식을 목선민이 그대 로 흉내낸 것이다. 모진위는 목선민이 용각접응의 수법으로 돌연 반격해오자 손목을 잡히고 말았 다. 그러나 모진위는 목선민이 용무권 특유의 수법으로 반격해오자 일순, 당황 했지만, 반사적으로 회풍선엽(廻風旋葉)의 자세를 취하였다. 목선민은 모진위의 손목을 잡게되자,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상대방의 자빠 트려 꼼짝못하게 눌러버리려고, 손목을 힘껏 잡아다녔다. 힘없고 느린 동작으로 도 묘하게 자신의 공세를 빠져 나가버리는 모진위를 제압하려면 넘어뜨리고 꼼 짝 못하도록 올라타서 공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진위가 끌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것을 느끼고 육선민은 더 욱 기운을 돋우어 힘껏 잡아채었다. 순간, 목선민의 몸은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목선민이 모진위를 마 침내 집어던지려는 찰나, 모진위의 손목이 이상하게 움직이더니,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버린 것이었다. 목선민은 발을 황급히 돌려 자세를 잡고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텼다. 목선민에게 절대절명의 위기가 찾아왔다. 목선민이 모진위의 바로 코앞에 엉덩이를 쭉 빼고는 앞으로 업어지며 넘어지 지 않으려고 두팔을 휘두르며 버둥거리고 있었다. 엉덩이만 힘껏 걷어차면, 목 선민은 땅바닥에 얼굴을 쳐박아버리고 회복하기 힘든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모진위의 오른 발이 목선민의 엉덩이로 힘차게 날아왔다. 목선민은 앞으로 몇차례 굴러서 다시 일어섰다. 어리둥절하였다. 어찌된 노릇인지 알 수 없지만, 모진위의 오른 발은 그의 엉 덩이에 부딪치지않고 그냥 스쳐지나가 그의 허리띠에 걸렸다. 그리고 목선민을 잡아당기고는 다시 허리띠에서 빠져나와서 엉덩이를 그냥 툭 밀어왔다. 모진위는 상대의 팔에서 풀려나와 쓰러지려던 몸을 목선민의 허리띠에 걸어 일으켜세우고는 다시 회풍선엽(廻風旋葉)의 수법으로 밀쳐버린 것이다. 회풍선엽은 상대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을 구하고, 그 힘을 되돌려 다시 상대를 제압하는 거룡십팔수의 구명절초(救命絶招)였다. 모진위가 회풍선엽를 두번 거 듭 펼쳐낸 것이었다. 두아이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엉켜들었다. 모진위가 또 목선민의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주위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저 유룡보법의 평범한 형태였지만, 권법의 이치를 모르는 목선민은 번번히 당하 고있었다. 모진위의 느린 동작에 목선민은 교만해져서 그의 진행방향보다는 초식의 형태 에 주의를 집중하여 미리 태세를 방비하고 반격을 노렸다. 그러나 모진위가 그 런 목선민의 의도를 간파하고는 먼저 허초(虛招)로 속이고 목선민의 사각(死角) 을 파고 들었다. 허초에 속는 바람에 목선민은 번번히 순간적으로 모진위를 놓치고 있었다. 또 한번의 모진위의 공격이 적중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목선민은 이미 여러번 당했는지라 생각한 바가 있어서 이를 악물고 왼 쪽 옆구리를 파고드는 모진위의 오른 손에 버티고 서서 중심을 잃지 않도록 견 디어내었다. 그리고 자세를 유지하는데 성공하자 왼손을 크게 휘둘러서 모진위 의 어깨를 가격하였다. 성공이었다. 상대의 유혹을 무시하고 움직임에 주위를 집중해보기도 했지만 그러면 모진위 는 얄밉게도 금방 알아내고는 허초를 쓰지않고 신속하게 공격해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선민은 이도 저도 포기한 채, 방어를 완전히 도외시한 채, 온 몸을 방 패로 삼아 마구잡이로 맞받아 치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목선민의 이 작전은 의외로 유력했다. 비록 아무런 장애도 없이 쏟아지는 상대의 타격을 그대로 받는 것이라 좀 더 충격은 컸지만, 본래 모진위의 공격이 그리 위력이 없는 터여서 그럭 저럭 내공 의 힘으로 견딜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이루워지는 반격이 손해를 보며 전개되 는 것이라 그 위력이 반감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맷집이 약한 모진위에게는 목선민이 당한 것에 못지않은 위력으로 발휘되어 만만치않은 보복이 되었기 때 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소위 강호에서 말하는, 살을 주고 뼈를 빼았는다는 수법과 같이 되 어버렸다. 실제로 강호에는 위력은 강하지만 동작이 둔한 무림인이 경공(輕功) 에 능한 상대를 만났을 때, 종종 이와 같은 방법으로 상대를 제압하기도 하였 다. 모진위는 쓰러질 것만 같았다. 팔 한쪽 들어올릴 힘도 없었다. 사실, 모진위가 목선민을 상대하는데 있어 특출나게 유리한 점은 바로 권법의 초식에의한 연타(連打)였다. 그런데 육선민은 자신의 공격이 적중되었음에도 곧 바로 역습을 가해서 자신의 연타를 원천봉쇄했을 뿐아니라 맞고난 후의 여력 에의한 공격인데도 모진위에게 견디기 힘든 충격을 주고있었다. 모진위는 이상태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남아있는 모든 힘을 끌어모아 마지막 한 수를 준비하였다. 모진위는 일단 두 팔을 번쩍 들어오리는 황룡탈광(黃龍脫光)의 자세로 상대방 의 시선을 손끝으로 끌어다놓고 석양동몰(夕陽東沒)이라는 수법을 펼쳐서 상대 방의 하체로 미끄러져 다가갔다. 그리고 양손을 합하여 육선민의 왼다리를 향해 힘껏 칼을 후리듯 쓸어나갔다. 짐작대로 목선민은 애써 왼다리를 버팅기고는 숙여져있는 모진위의 등판을 두 손으로 힘껏 내리찍었다. 순간, 모진위는 두손을 벌려 버티고 있는 목선민의 양발목을 잡고 몸을 최대한 끌어당겼다. 그리고 목선민의 양발사이에 쪼그려 앉고는 목선민의 양발목을 힘 껏 앞으로 밀어젖히며 냅다 들어올렸다. 모진위의 등을 내리찍으려던 목선민의 두손은 모진위가 몸을 움크리는 바람에 엉덩이 쪽을 후려칠 수 밖에 없었고, 상체의 무게중심이 아래로 쏠리게 되었다. 목선민은 두발을 허공으로 띄운 채, 턱을 바닥쪽으로 내밀며 급격히 무너졌고, 움크렸던 몸을 쭉 펼치며 목선민의 두다리를 밀어올린 모진위는 이미 각오하기 는 했지만, 둔부와 허리에 생각보다 훨씬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바닥에 쓰러졌 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뜬 모진위는 결국 도장의 자랑스러운 전통과 명 예가 땅바닥에 떨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목선민은 턱을 부여잡고 겨우 일어섰 지만, 자신은 그대로 기절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모진위는 그패배가 슬프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약간 미안한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진위로서는 최선을 다한 비무였 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흐뭇함이 있을지언정, 후회는 없었다. 모진위는 목선민과의 각경권을 생각해보았다. 어느순간 부터인가 고통도 근심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빠져든 무아의 경지였다. 세상이 오로지 지겹고, 고통스럽기만 하던 이 연약한 소년에 게 그것은 생애최초로 겪어보는 지겨움이 아닌 다른 감정이었다. 물론 고통은 있었지만, 그가 이제까지 겪어왔던 그저 괴롭고 아프기만 하던 그것과는 다른 가슴이 뻥 뚫리는 통쾌한 충격이었다. 각경권은 모진위가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짜릿한 순간을 그에게 가져다주 었다. 모진위는 어제의 격전을 상기하고는 다시 가슴이 설레기 시작하였다. 모진위가 연무대에 들어서니, 관원들이 여기저기 둘러서서 이야기하거나 권법 연습을 하고 있었다. 목선민도 있었다. 목선민은 그의 아버지옆에 서서 출룡운무를 연습하는 이부춘을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었다. 모진위는 목선민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목선민은 쭈빗 쭈빗거 리는 모진위를 보고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니?" 그리고 대답이 없자, 이내 다시 이부춘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모진위는 무어라고 대답할까 주춤거리다가 목선민이 고개를 돌려버리자, 어색 해져서 주춤주춤 물러서 버리고 말았다. 약간 섭섭했지만, 그것으로 좋았다고 모진위는 생각했다. 목선민은 자신에게 괜찮은 지 물어 보기까지 하였으며, 그러지 않았다해도 용 무관에서는 자신에게 염려의 표정을 보인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군 다나, 목선민은 모진위에게 새로운 것을 깨우쳐 주었다. 선배들이 신입자에게 가벼운 주먹으로 깨우침을 준다는 그 각경권(覺輕拳)에 서 신입자인 목선민은 그의 가벼운 주먹으로 선배인 모진위에게 무엇인가를 깨 우치게 하였다. 모진위는 자신마저 잊어버리고 몰입할 수 있는, 세상만사 괴로움이 사라지는 새 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각경권(覺輕拳)이 가벼운 주먹으로 깨우쳐 준 것이었다. 백수노계(백수노계)였습니다. #4168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3- 07/24 21:20 480 line 2. 천덕꾸러기 목선민이 용무관에 온 지 벌써 열흘을 넘어서고 있었다. 목선민의 권법수련은 목가장의 삼남이라는 신분에 걸맞게 아직까지도 용무관주 도학정이 직접 나섰 다. 도학정은 출운용무(出雲龍舞)를 천천히 시범보이며, 동작을 하나 하나 따라하 고 있는 목선민에게 자세하게 구결(口訣)을 설명해주었다. 출운용무는 흡사 용이 춤을 추는 듯 하다해서 용무권(龍舞拳)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던 용무권의 투로(鬪路)였다. 용무권은 거룡십팔수(擧龍十八手)와 등룡육권(登龍六拳), 그리고 비룡삼장(飛龍 三掌)으로 구성되어있고, 거룡십팔수로 시작된다. 거룡십팔수의 수련법은 열여덜가지 초식의 각각을 따로 연습하는 것이아니라, 내쉬고 들이쉬는 순서와 방법에 따라 호흡을 조절하며 고유의 보법에의해서 펼 쳐지는 열여덜수의 초식이 변형되고, 반복순환되는 삼천삼백이십사초(抄)로 이 루워진 출운용무를 반복연습하는 것을 근간으로 한다. 등룡육권이나 비룡삼장도 역시 출운용무속에 있는 것으로 출운용무로 거룡십팔 수의 이치를 모두 깨우치고나서 다시 출운용무로 등룡육권을 익히고, 비룡삼장 도 익히게 된다. 도학정이 또 한 차례의 시전을 마치고 목선민에게 말했다. "특히 주의 할 점은 한 번 펼치기 시작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반드시 끝 까지 마무리하여야 한다는 점이니라. 출운용무는 동작에 따라 내쉬고 들이쉬는 호흡이 정해져 있고, 신형(身形)마다 순응해야 하는 내기(內氣)가 정해져있으므 로 동작을 일으켜 끝마침까지 바르게 구결을 따른다면 내부의 기운이 모든 경 맥을 따라 탁기(濁氣)를 몰아내고 정기(精氣)를 충만시키는 한 차례의 순환을 이루기 때문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도학정이 고개를 끄덕이고, 신형을 부드럽게 갈무리하며 말했다. " 출운용무는 거룡십팔수의 열여덜가지의 초식이 변화하며 반복되는 것이다. 너는 그초식들을 구별해 낼 수 있겠느냐?" 목선민은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미 몇개의 동작은 같은 형태가 조금씩 바꿔서 반복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도학정의 앞에 나가 공손히 목례를 하고, 동 작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던가? ...아니, 이렇게하고요. ...또... ..." 어설프기는 해도 목선민의 동작은 분명히 쌍룡격공(雙龍隔空)이었다. "이런 동작... ...그리고... 맞다! 이 자세." 목선민이 두가지 초식을 더 시전하였다. "제자, 우둔하여 더 이상은 모르겠습니다." 이어진 초식은 회풍선엽(廻風旋葉)이었고, 마지막으로 취한 것이 잠룡충천(潛 龍沖天)이었다. 도학정은 놀랐다. 열흘 만에 초식을 구분해냈던 문하생은 아직 한 명도 없었 다. 그런데 목선민은 세가지 종류의 초식을 펼쳐보인 것이다. 거룡십팔수의 초식이란 본시 뚜렷한 형태에의해 구분되기보다는 그 원리에 의 해 이름지어졌다. 예를 들어, 각경권에서 모진위에의해 연속으로 발출된 회풍선 엽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상대방에게 잡힌 팔을 빼내며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상 대의 허리춤에 발을 걸어 비틀거리는 자신을 일으키고, 그 탄력으로 상대를 밀 치는데 사용되었다. 같은 초식임에도 전혀 다른 형태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단지 상대의 기운을 이용하여 자신을 구하고 상대를 쓰러뜨린다는 원리가 똑같이 적용됫을 뿐이었 다. 이와같이 출운용무속에는 각각의 초식이 미리 상정된 임의의 상황에 따라 적 절하게 대응되도록 계속적으로 변화하여 반복되므로 어떤 경우에는 같은 이름 의 초식인데도 전혀 다르게 보일 정도였다. 실제로 거룡십팔수는 그 이름만 십팔수(十八手)이지, 오히려 열여덜가지의 초 식이라기 보다는 열여덜가지의 원리라고 해야 옳았다. 그렇기 때문에 초식을 하나 하나 따로 연마할 수가 없고, 출운용무를 통해서 끊김없이 자연스럽게 연 결된 동작속에서 간접적인 수단으로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왠만한 무공고수들 조차 거룡십팔수의 그 난해한 이치를 쉽게 파악할 수 없을 터인데 목선민은 단지 열흘만에 맛?펼치며 물었다. "자신보다 높은 것을 취하거나 낮은 것을 피하고자 할 때, 유익하겠다고 생각 됩니다." "이 초식은 잠룡충천이라고 한다. 알겠느냐?" "예." "이 초식을 출수할 때는 숨어있던 맹룡이 갑자기 하늘로 날아오르듯 기세를 타야 할 것이야." 도학정은 신형을 바르게 세우며, 이어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너를 잠시 곤란하게 만들 터이니 너는 정신을 집중하여 잠룡 충천을 펼쳐서 대항해보도록 하거라." "예, 제자, 감히 맞서겠사옵니다." 목선민이 아이답지않게 시종 의젓하게 예의를 갗추며 황급히 자세를 취하였 다. "이리하면 어찌 하겠느냐?" 도학정이 강호에 널리 알려진 독벽화산(獨劈華山)이란 초식으로 목선민의 하 체를 비스듬히 갈라나갔다. 목선민이 공중으로 급히 도약하였다. 목선민이 자세를 바로하기를 기다려 도학정은 몇 번 더 방법을 바꾸어 시험해 보았다. 두번은 제대로 원리를 응용하였지만, 네 번은 그저 동작에 흉내내는데 그쳤다. "이렇게 자세를 해야 옳다." 도학정이 일일이 자세를 교정시켜주었다. "다시 잠룡충천을 펼쳐보거라." 목선민이 초식을 시전하였다. 이제까지 보다 훨씬 훌륭한 자세였다. "아니다. 다시 해보거라." 도학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목선민이 곰곰히 생각하여 다시 펼치니, 좀 전 보다 불필요한 자세가 많이 줄 어서 명쾌하고 단순한 초식이 되었다. "아니다. 다시...." 목선민이 다시 초식을 전개했고, 도학정이 다시 근엄하게 외쳤다. "아니다. 다시..." "... ..." 목선민이 어찌 할 바를 몰라서 식은 땀만 흘렀다. "조심하여라!" 도학정이 갑자기 공격해왔다. 목선민이 깜짝 놀라서 보니, 잠룡충천으로 대항해야하는 공격이라 반사적으로 잠룡충천을 전개하였다. 목선민은 어렵지않게 도학정의 급습을 피할 수 있었다. 도학정이 다시 말했다. "다시 한 번 펼쳐보거라." 방금 출수했던 동작에 도학정이 흐뭇해 하는 눈치를 보이자 목선민이 다시 그 대로 흉내냈다. "다시!" 도학정은 목선민의 출수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화가 난 목소리로 목청을 높 혔다. "... ..." 목선민은 고민에 빠졌다. '아니, 그렇게 마음에 안들면, 사부님이 시범이라도 보여줄 것이지. 어째서 사 부님은... ...'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 사부님은 한번도 잠룡충천의 자세를 보여주지 않았다. 무슨 까닭이 있 겠구나.' 목선민은 무언가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처음에 내가 그 동작을 보여 드렸을 때, 사부님은 잠룡충천이라고 하셨다. ...그 런데 사부님이 어떤 방법으로 공격하든지 잠룡충천만으로 대응하라 하시고는, 내가 정작 처음에 깨달았던 동작에 집착하니까 사부님은 상황에 따라 그에 알 맞는 자세로 고쳐주었다. 그 모양들이 달랐는데도 나는 모두 당연히 잠룡충천 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구나! 상대의 출수에 따라 모양이 다르니 밑도 끝도 없이 혼자서 초식을 전개한다는게 그야말로 고장난명(孤掌難鳴)의 이치와 같지 않은가!' 벌떡 일어선 목선민이 난데없이 출운용무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허어-!' 도학정은 마음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본시, 도학정이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어 차피 목선민으로서는 애초에 불가능할 초식의 전개를 강요한 이유는 간단한 방 법으로는 설명이 쉽지않은 용무권의 근본이치를 깨우치게하는 오랜 경험을 바 탕으로 얻은 일종의 수업방편이었다. 이는 선방(禪房)에서 젊은 선승(禪僧)에게 애매한 화두(話頭)을 던져놓고 고행 자(苦行者)들이 끝없는 좌선과 고행을 통해서 갖은 방법으로 고민하다가 결국, 좌절에 이르렀을 때, 화두를 던졌던 고승이 한 마디의 질타와 함께 툭 던지므로 써 선승이 무릅을 '탁'치며 깨달게 하던 방법으로써,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고 행은 일순간 전혀 쓸데없는 헛된 노력에 불과하게 되버리지만 그런 절박한 시 간과 정력의 낭비없이는 도달할 수 없는 깨달음의 방법을 이용한 것이었다. 며칠을 그렇게 목선민을 고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가, 목선민이 절망적이 될 무렵, 도학정이 마지못해 문재해결의 실마리를 풀어 놓는다는 식으로 어렵게 나가도 제아무리 영특한 목선민이라도 용무권의 진의(眞意)를 깨달을까, 말까 의문이었는데, 경악스럽게도 목선민이 벌써 그 한끄트머리를 붙잡아 버린 것이 었다. 도학정이 황당한 기색을 얼른 숨기고는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알겠느냐?" 목선민이 눈에 이채를 띄더니, 더욱 기운차게 출운용무를 이어나갔다. "나는 잠룡충천이라는 초식을 가르쳐 줄 수 없다. 그건 내가 아니라 용무권을 창안하신 세 분의 조사님들께서 다시 살아 오신다 해도 불가능한 일일께다. 다 만, 네가 그 초식을 이해한다면, 그 초식의 이름정도나 가르쳐 줄 수 있겠지. 거 룡십팔수의 열여덜가지의 초식은 그 이름은 분명히 정해져 있지만, 그 이름에 따라 해야할 동작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 동작에 이르는 흐름이 있을 뿐이지. 초식에 억메여 기억하는 동작이 있다면 잊어버려라. 그리고 흐름 에 몸을 맡겨라. 물이 흘러가듯..." 도학정이 출운용무를 펼치는 목선민을 잠시 바라보더니 내실로 들어갔다. 어느 새, 날이 저물었다. 목선민이 출운용무를 마치고 수건으로 땀을 닦고있는 데, 모진위가 눈에 띄었다. 모진위는 눈이 마주치자 몇 번 망설이고 주춤거리 더니, 잔뜩 긴장한 채, 목선민에게 걸어왔다. 문하생들은 이미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도장에서 기거하는 목선민과 모진위만 이 이제까지 연무장에 남아있었다. 모진위의 얼굴은 가뜩이나 흉칙한 몰골이 여기저기 멍이 들고, 상채기가 나서 더욱 볼품없었다. 모진위의 패배가 있고나서 관원들의 행패가 당연스럽게 더욱 심해졌다. 특히, 이부춘의 분노는 극에 달한 듯 하였다. 바로 다음날 대련시간부터 모진위의 고난은 시작되었다. 다른아이들을 거칠게 밀치며, 이부춘이 모진위의 상대로 나섰다. 그리고 모진 위를 원독에 가득 찬 눈으로 쏘아보더니, 이를 부드득 갈며 욕을 해댔다. "각오는 됫겠지. 지애미 붙을 귀신놈, 내가 한 수 가르쳐주마. 다시는각경권을 안해도 좋도록 분질러 줄테니 말 만 해라. 어디를 분질어 주랴? 이 빌어먹을 호로자식." 이부춘의 살기어린 권각(拳脚)이 날아왔다. 도학정과 나해청의 눈치를 피하며 벌어지는 대련을 빙자한 일방적인 구타였다. 관원들의 무차별 학대가 며칠 계속됫지만, 예전과는 달리 모진위는 잘 참아내 었다. 몇 년 동안의 각고의 노력 끝에, 유달리 맷집이 약한 모진위가 나름대로 덜 아프게 맞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 여전히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무엇보다도 모진위가 근본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이전에는 육체적 고통외에도 비무를 두려워하는 정신적인 고통까지 더해져 있 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움이나 공포가 모진위에게 큰 고통이 되지않았다. 모진위는 억지로 용기를 내어 목선민에게 한 번 접근을 시도하다가 무안을 당 한 후로는 목선민에게 열흘이 되도록 말 한마디도 건네보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목선민이 말을 걸어주었지만, 모진위는 자기같은 아이한테 그러리하곤 짐작도 못했기 때문에 당황해서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말았다. 모진위는 또 무시당해면 어쩌나 걱정도 됫지만, 짐짓 용기를 내어 목선민에게 다가갔다. 모진위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쳐다 봤을 때, 다행스럽게도 목선민이 친근한 미소로 답해주었다. 목선민은 자신의 아버지가 목가장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들을 생각했다. 아버지는 모진위를 무시하고 이부춘에게만 관심을 보였던 그 당시 자신의 태 도가 공명정대한 목가장 출신의 자세로서는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나보다. 아버지가 물었다. "민아야, 너는 부춘이가 진위보다 좋은 모양이지?" "그럼요. 물론이지요." "둘 다 처음 본 아이들인데, 어째서 그렇치?" 모진위는 자신과 치고 받은 애였다. 물론 무슨 말썽이 있어서 다툰 것은 아니 고 단순한 비무였였다지만, 그래도 일부러 악의를 품을거야 없더라도 친근감을 가지기는 힘든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녀석은 생긴 것부터가 기분나쁘다. 하지만, 이부춘은 그럭저럭 미운 구석은 없는 용모에다가 무술도 세다. "그애는 무술 실력도 좋으니 배울 점도 있을 것같고... 취청귀는 음흉한 데다가 무공도 형편없어서 봐줄 만한게 없어요." 목선민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대답할까, 한참 망설이는 것 같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애가 무술실력이 좋은지 어떻게 알았지?" "아버지도 보셨잖아요. 소경광을 멋지게 물리쳤어요. 취청귀라면 소경광이한테 도 어림없어요." "민아야, 너는 작년 가을에 목가장에 오셨던 섬서일검(陝西一劍) 진(秦)할아버 지를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 목선민이 잊어버렸을리가 없다. "그럼요, 태사부(太師父)할아버지. 저한테 잘드는 비도(匕刀)도 주셨는데..." 섬서일검 진청일(秦靑一)은 아버지의 스승이셨으므로 목선민은 태사부님으로 호칭하였다. "진할아버지의 무공이 이 애비 비해서 어떻다고 생각하느냐?" "그거야, 할아버지는아버지의 스승이시니, 아버지 보다 고명하시겠지요." "그런데 민아야, 태사부님은 이 애비를 이길수는 없다고 하셨을게다. 어째서 그렇다고 하시드냐?" "할아버지는 이제 늙으셔서 힘이 없고, 아버지는 한창 때이니 상대가 되지 않 는다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부춘이가 이긴다고 해서 진위라는 애보다 무공실력이 좋다고 단정 지어서는 안되겠지. 너의 태사부님에 비해서 아버지가 무공에 손색이 있음에도 싸움에는 유리한 것처럼..." "... ..." 아버지가 천천히 일어섰다. "얘야, 이리와서 이 앞에 서봐라." 목선민이 일어섰다. 아버지가 느닷없이 일장을 뻗어왔다. 목선민은 깜짝놀라서 엉겁결에 뒤로 물러서며 손을 저어 막으려했다. 그러나 팔목을 붙들리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민아야, 이 수법을 알아보겠느냐?" 목선민이 소경광을 흉내내어 모진위의 팔목을 잡았던 그 수법이었다. 목선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사부에게 알아보니 용각접응(龍角接應)이라는 초식이라더구나." 아버지가 이부춘이 소경광의 용각접응을 상대하던 것을 그대로 다시 해보였 다. "용각접응이라는 수법에 당했을 때, 이부춘은 이렇게 했다." 아버지가 다시 누가 팔을 끌어다니는데, 팔목을 슬쩍 빼내는 척하였다. "모진위는 이렇게 했지." 목선민은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엉겁결에 행한 동작은 이 취청귀나 이부춘에 비해서 형편없었다. "자아, 이젠 그애들의 수법을 흉내내서라도 다시 한 번 잘 막아보아라." 아버지가 다시 같은 수법으로 손을 내밀었다. 목선민은 황급히 피했지만, 다시 팔목을 잡혀 이부춘의 방법으로 버텨보았다. 하지만, 힘에 부쳐 이번엔 더 심하게 넘어지고 말았다. "왜 다시 실패했는지 느낀 점을 말해보아라." "아버지보다 힘이 모자랐었어요." "힘이 모자란 모진위는 어떻게 했지?" "그애는 내힘을 이용했어요." "그럼, 알면서도 어째서 그의 수법을 취하지 않았느냐?" "흉내내지못해요. 너무 어려워서." 아버지가 엄숙히 말했다. "모진위는 아주 열심히 수련을 한 모양이구나. 그렇게 어려운 수법을 그 짧은 찰나에 궁리하여 발휘한 것을 보면... ... 너도 이제 이곳에서 그런 것들을 배울 것이다. 너도 그애처럼 열심히 익혀야 하느니라." 아버지는 반대로 용각접응을 써서 자신을 공격해보라고 했다. 목선민이 그대로 하자 아버지는 이부춘의 방법으로 목선민과 엉켜서 넘어졌 다. 그런데 아버지의 다리가 꺽여져 목선민의 둔부에 깔렸다. 그리고 목선민의 팔은 비틀려서 아버지의 겨드랑이 사이에 깔렸다. 아버지가 사정을 보아주지 않았다면, 목선민의 팔은 부러져 버렸을 것이다. 또 한, 아버지가 이부춘이었다면, 아버지의 다리도 부러졌을 것이다. 모진위의 방법도 같이 해보았다. 그리고 목선민은 깨달았다. 모진위가 그대로 자신의 엉덩이를 걷어찼으면 자 신의 얼굴이 무사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런데 모진위는 자신이 이길 수 있 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틀거리는 둘 모두가 먼저 중심을 잡는 방법을 택했다. 몇가지 설명이 있고나서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용모와 마음은 같은 게아니라서 흉악하게 생겼다고 꼭 악인은 아닌게야. 강호 의 미녀가 때로는 전갈보다도 더 무서울 때가 있는 법이란다." 이것이 아버지의 결론이었다. 목선민은 조금 께름직하기는 했지만, 주저없이 모진위의 손을 잡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언제나처럼 예의바르고 조용한 어조였다. "저녁먹으러가자." 모진위가 당황하며 조심 조심말했다. "...미안해... ...뭐라고..." 목선민이 웃으며 좀 더 분명하게 말했다. "같이 저녁먹으러 가자고." 모진위가 더욱 미안해하며 손으로 귓바퀴를 만들었다. 목선민이 이번엔 손으로 밥먹는 시늉을 하며 크게 말했다. "배고프지 않아? 밥먹으러 가자. 저녁먹고 나서 내가 멋진 비도를 보여줄께." 목선민은 모진위가 가는 귀가 먹었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귀도 나쁘지만, 눈도 나쁘고, 게다가 코까지 안좋아 냄새도 잘 맡 지 못한다는 것을 목선민이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이게 무슨 냄새야?" 이부춘이 모진위 주위를 돌며 코를 킁킁거렸다. 아이들이 킬킬거렸다. 목선민이 돌아다 보니, 이부춘과 몇몇 아이들이 모진위를 둘러 싸고있었다. 무한표국(武漢표局) 표두(표두)의 아들이라며 평소 거들먹거리던 주보(朱寶)가 갑자기 모진위의 뒷통수를 힘껏 눌렀다. 모진위가 힘에 겨워 주저앉고 말았다. 주보가 모진위의 등에 올라타고 앉아서 모진위을 내리누르며 비아냥거렸다.. "니가 좀 맡아봐라, 무슨 냄새냐?" 모진위가 버둥거렸다. 그리고 간신히 무릅사이에 박혀있던 고개를 쳐들었다. 모진위의 얼굴에는 무언가 누렇고, 검은 진흙 같은 것이 묻어있었다. 모진위는 코를 킁킁거리다가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몇놈이 코를 감싸쥐고 킬킬거리며 웃었다. 이부춘과 주보의 눈길이 마주쳤다. 이내 두녀석의 얼굴에 야비한 표정이 떠올 랐다. 모진위의 뒷통수를 누르고있던 주보가 고개를 끄적이더니, 모진위의 양팔을 단 단하게 끌어 안았다. 그리고 이부춘이 달려들어 모진위의 바지를 벗기기 시작 했다. 바지에는 진흙 같은 것이 덩어리로 짓이겨져 달라 붙어있었다. 목선민이 다가갔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것은 똥이었던 것이다. " 앙탈부리지 마라. 이 자식, 도장의 명예에 똥칠을 하더니, 그것도 모자라 아 예 도장에다가 똥칠할 생각이냐?" 주보가 버둥거리는 모진위를 깔아뭉게며 말했다. 모진위는 당황했다. 도복바지외에는 아무 것도 입고 있는 것이 없었다. 집안일을 돌봐주는 하녀 추천금(醜千金)은 게으른데다가 모진위를 경시하여 빨래거리를 줄이려고 모진 위에게 도복바지와 도복상의 하나밖에는 주지않았다. 모진위는 격렬하게 반항했지만, 바지는 곧 아이들의 손에 들려졌다. "이 호로자식, 거기에 아무리 범벅을 해도 악취가 없어 사람들이 몰라주니, 억 울했던 모양이지." 이부춘이 덩어리가 묻은 부분으로 모진위의 콧등을 툭툭 건드렸다. "우리가 그 꼴을 그냥 보고있을 줄 알았더냐? 도장을 위해서라도 내 이 똥걸 레를 없애주마." "안돼!" 모진위가 평소 그답지 않게 빠른 동작으로 이부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부춘의 강한 주먹이 가만히 있질 않았다. 모진위는 똥범벅인 채로 코피를 쏟으며 나뒹굴었고, 이부춘이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의 손등을 모진위의 옷소매에 문질렀다. 이부춘은 연무장을 내려가 천천히 담장밑으로 다가가서 바지를 든 손을 치켜 들고 모진위를 돌아보더니 씩 웃었다. 모진위는 애가 탔다. 그러나 주보가 모진위의 손을 놔주지 않았다. 바지가 담 너머로 날아갈 순간이었다. 이부춘이 막 바지를 집어던지려는 찰나, 쏜살같은 인영(人影)하나가 이부춘의 등판을 향해 날아갔다. 목선민이었다. 목선민은 이부춘을 들이받고는 재빨리 모진위의 바지를 뺏어 들었다. "어-어, 이 자식이... 이 자식이...감히..."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던 이부춘이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사태를 파악하고 목선민에게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이 망할 녀석, 그렇지 않아도 언제 한 번 손봐줄 생각이었다. 덤벼라!" 이부춘이 엉덩이를 툭툭털며 다가서더니 이를 부드득갈며 뇌까렸다. "이부춘, 네가 그러고도 강호협객(江湖俠客)이 되기를 바라더냐?" 목선민이 재빨리 들고있던 바지를 끝부분으로 고쳐잡고 이부춘의 얼굴에 휘두 를 듯이 위협하며 앙칼지게 외쳤다. "내 너를 사부님께 끌고가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말겠다." 목선민이 다시 서슬 퍼렇게 외치며 이부춘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부춘이 기가 질린 듯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이부춘은 자칫하면 똥벼락을 맞 을 판인데다, 사부님을 들먹이자 더럭 겁이 나서 한풀 꺽인 것이다. 목선민이 모진위를 끌고 후원 우물가로 데려갔다. "진위야, 도데체 어떻게 된거야?" "으응, 저쪽에서 아까... ...포삼(包三)이가... 갑자기 떠밀어서... " 모진위가 내당(內堂)에서 연무장쪽으로 나있는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목선민이 생각한대로, 못된 녀석들이 모진위를 골탕먹이기위해 함정을 만든 것 이었다. "야, 그렇다고 그냥 연무장에 덜렁 덜렁 들어오냐? 바지를 갈아입고 왔어야지. 이게 안보여? 냄새도 안나?" 목선민이 바지의 커다란 얼룩자국을 가리키며 물었다. 모진위가 눈을 찡그리며 바지에 고개를 가까히 댔다. 그리고 한참을 들여다 보며, 코를 킁킁거렸다. "아깐 뭔지 몰랐어." 모진위는 커다랗게 얼룩이 있고, 냄새도 심했는데도 그것을 모를 정도로 시력 도, 후각도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이구, 이 바보야." 목선민이 두레박으로 물을 확 끼언졌다. 물을 뒤집어 쓴 모진위의 얼굴이 좀 묘하게 일그러졌다. 목선민은 아마 그게 모진위가 웃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목선민이 환하게 마주 웃어주었다. 그러고보니 모진위가 웃는 모습을 본 것은 목선민으로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목선민은 다음날부터, 대련시간이면 모진위와 짝을 이루웠다. 날마다 다른 아 이들에게 얻어터지는 것이 안되어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모진위를 본받 으라는 목연탁의 당부도 염두에 둔 계산이었다. 그런데, 목선민은 그 동안 거룡십팔수를 제법 익혔으므로 동작이 느린 모진위 의 수법쯤은 이미 눈에 익었다고 자신하고 있었는데, 그게아니었다. 목선민이 모진위의 수법에 번번히 당하고 마는 것이었다. 목선민이 저녁을 먹고, 어째서 눈에 뻔히 보이는 수에 번번히 당하는지 궁리하 고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도학정이 물었다. "민아야, 잘 안풀리는 것이 있는게구나. 무슨 일이 있었더냐?" "예, 사부님." 목선민은 마침 잘됫구나, 생각하며 동작을 펼쳐보였다. "제가 이렇게 홍로점설(紅爐點雪)로 공격하니, 상대가 이렇게 보법으로..." 목선민이 다시 몸을 돌려 등을 동그랗게 젖히며 어깨너머로 손을 뻣어 등뒤를 공격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초식을 변환하였더니, ...이렇게해서 반격했어요. 저는 꼼짝없이 이렇게..." 도학정이 인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홍로점설(紅爐點雪)에 회풍선엽이라..." 도학정이 회풍선엽에 대항하는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잘보아라, 이렇게 석양동몰(夕陽東沒)로 빠져서 다시 홍로점설이라면 어떻겠 느냐?" 목선민이 느끼는 바가 있어서 환하게 웃으며, 도학정을 향해 크게 읍(泣)하였 다. 다음날, 목선민이 도학정이 일러준 대로 하였더니 모진위는 그 한 수에 여지없 이 걸려들었다. 그러나 재차 붙었을 때, 또 다시 모진위의 회풍선엽이 빛을 발 하였다. 저녁이 되자, 목선민은 도학정에게 다시 물었고, 도학정이 다시 가르침을 주었 다. "회풍선엽이라고 다 똑같은 회풍선엽은 아니니라, 언제나 한결같이 석양동몰로 피하고 서산일출(西山日出)로 기습해서는 당할 재주가 없지. 자아, 이렇게 반 궁탄시(反弓彈矢)로 옆으로 비켜서 쳐낼 수도 있지 않겠느냐?" 본시 반궁탄시는 활의 반대모양처럼 몸을 뒤로 휘어서 힘을 응축하였다가 그 반동으로 화살처럼 쏘아나가는 초식이었다. 그런데, 도학정은 뒤로 웅크리지 않고 오히려 상대의 측면으로 다가서며 몸을 움추려 상대의 예봉을 피하고는 그대로 어깨로 받아버렸다. 거의 갈 지(之)자의 형태였다. 다음날도 전날의 재판이었다. 모진위가 한참동안 곰곰히 생각하며, 이리 저리 보법(步法)을 밟아보며 연습하고나서 다시 덤벼들었을 때는 다시 그 망할 놈의 회풍선엽이었고, 목선민은 크게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며칠동안 계속해서 그런 순서의 반복이었다. 목선민이 이리해보고, 저리해보고 혼자서 궁리도 많이 했지만,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모진위가 회풍선엽외에 몇 가지 초식을 더 동원했을 뿐이었다. 여전히 목선민은 저녁이 되자 도학정에게 가르침을 구하였다. 도학정도 이제 는 목선민이 모진위와 어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민아야, 진위는 이미 용무권을 배운지 육년이 넘었고, 거룡십팔수, 등룡육권을 넘어서, 비룡삼장을 구성(九省)이상 깨우친 아이다. 등룡육권만 해도 거룡수의 수법을 그 갈래로 활용하는 권법이다. 거룡수의 십팔초식이 등룡권의 여섯가지 에 응용된다면 선민이 너로서는 거룡십팔수가 아니라 거룡백팔수(擧龍百八手) 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초식의 변화만으로 진위와 맡선다면 어찌 열여덜이 백여덜을 이기겠느냐?" "... ..." "자신의 단점을 피하고 장점을 취하며, 상대의 장점에 맞서지 않고 단점을 찾 아가는 것이 승리의 필수요건이거늘, 네가 그 반대를 취하니 이길 수 없음은 당 연지사니라." 언제나 처럼 모진위와 마주선 목선민은 오늘따라 마음이 무거웠다. 날마다의 대련은 목선민이 상대해 주었지만, 내일은 달포에 한 번씩있는 특별한 비무(比 武)가 있는 날이었다. 모진위의 상대는 고강으로 결정되었다. 도학정이 정식으 로 그 동안 문하생들의 성취를 알아보는 자리였다. 목선민은 내일이면 또 다시 여기 저기 상처투성이가 될 모진위를 애처롭게 바 라보았다. 이미 목선민의 성취가 모진위의 무공수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목선민이 어느 새, 석양동몰과 서산일출만 가지고도 모진위의 회풍선엽을 능히 제압하게 된 것 이다. 경장차람의 사내가 용무관에 들어섰다. 사내의 등에는 장검이 매여있었다. 사 내는 날카로운 눈매를 반짝이며 연무장으로 올라섰다. 연무장에는 여러아이들 에게 둘러쌓인 채, 두명의 아이가 권법을 겨루고 있었다. 사내가 보았을 때, 체구가 큰 편의 아이가 작은 편의 아이를 몰아세우고 있었 다. 큰 쪽의 주먹을 작은 쪽이 피하려했지만, 동작이 늦어서 왼어깨를 얻어맞고 말았다. 작은 쪽은 아픔을 참으며 어깨에 부딪쳐오는 힘을 이용해서 반대방향으로 빙 그르 돌았다. 그와 동시에 주저앉으며 발을 뻗어 상대의 다리를 후려나갔다. 사 내는 멋진 한 수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도 동작이 너무 느려서 다리가 마저 펴 지기도 전에 큰 쪽이 허둥지둥 피해버렸다. 큰 쪽이 화가 났는지 씨근덕거리며 다시 일권을 날렸다. 그리 빠르고 날카로 운 공격이 아니었는데도 작은 쪽은 멍하니 피할 생각도 없는 듯이 서있다가 주 먹이 턱께로 다 다가와서야 겨우 대응자세에 들어갔다. 주먹이 간신히 턱을 스 치고 지나갔다. 큰 쪽이 내뻗던 힘을 거두지 못해비틀거리자, 사내는 작은 쪽 이 절호의 기회를 맞고도 어째서 가만히 있는지 갑갑해지기까지 했다. 큰 쪽이 겨우 중심을 잡고 역습을 걱정했던지 황급히 돌아서서 두손을 할키듯 내리쳤다. 하지만 작은 쪽은 상대가 그리 나오리라는 것을 알고있었는지 미리 부터 뒤로 두어발 움직이다가 기울어지는 상대의 가슴을 걷어찼다. 여전히 느 린 동작이었지만,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덕분에 큰 쪽이 꼼짝없이 맞았다. 사내는 이번에는 크게 감탄하였다. 작은 쪽의 애는 자신의 동작이 느림을 염 두에 두고 그 다음 행동마저 예측하여 잘 계산된 전술을 펼쳤던 것이다. 그러나 위력은 그리 없었는지 큰 쪽이 비틀거리면서도 작은 쪽의 가슴을 밀어 제꼈다. 우습게도 절호의 반격을 한 작은 쪽이 넘어지고 말았다. 사내는 천천히 탁자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도학정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낯선 무사를 바라보았다. 잘 날이선 콧날이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이었다. 사내는 곧바로 도학정에게 다가와 바로 앞에 멈춰서더니, 두손을 높이들어 포 권을 취하며 말했다. "도학정선생이시죠? 육년만에 뵙는군요." 도학정이 얼결에 답례를 취하였다. " ! ?" 사내가 뒤를 두리번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느녀석이 진위입니까?" 그제서야 도학정은 사내를 알아 볼 수있었다. 도학정은 말없이 손으로 비무를 벌이고 있는 작은 쪽아이를 가리켰다. 고강은 화가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금 저 못난 취청귀에게 얻어 맞 은 것이다. 고강은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예전 같으면 몇대 맞고는 그저 쭉 뻗어버릴 녀석이 수십여초를 드잡이질하고도 아직 버티고 있는데다가 벌써 자 신을 세 번씩이나 넘어뜨린 것이다. 맞는 수법이야 원래 고명하여서 정타를 맞아도 완전히 타격을 입는 일 없이 재주껏 완화시켰고, 대부분의 권장을 흘려버리는 재주가 있었지만, 감히 반격은 꿈도 못꾸던 녀석이었다. 고강이 화를 못이겨 모진위에게는 그야말로 최대의 약점인 철룡방벽(鐵龍防壁)의 초식을 시전하였다. 모진위는 목선민과의 각경권이후, 몰라보게 달라져가고 있었다. 그동안의 목선 민과의 단련에서 익히기만하는 권법이 아닌, 싸우는 방법으로써의 권법을 체득 해나가기 시작했고, 무엇보다도 다른 점은 모진위스스로가 고통스러워 하기만 하던 비무에서 자신의 무미건조한 삶에 짜릿한 자극을 주는 무엇인가를 발견하 고 이제는 그것을 즐기기조차 한다는 것이었다. 모진위는 자신에게 들이닥치고 있는, 자신이 넘어야 할 또하나의 파도인 고강 의 철룡방벽을 맞으며 두려움과 함께 가슴벅찬 설레임을 느끼고 있었다. 모진 위도 이제는 이겨보고 싶었다. 지금 당장이야 힘들겠지만, 언제가는 승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단 한 번만이라도 느껴볼 수 있기를 절실하게 갈망하고있었다. 사내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모진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바로 육년전에 모진위를 데려왔던 그 사내, 하상곤이었다. ============================================================== 주) 제목에 대해서 : 18번 연재이야기 란을 통해 물어오신 분이 계셔서 밝 힘니다. '흘러가는 빈 배' 라는 뜻입니다. 두가지의 모티브를 가지고 제목을 정 했는데, 그 하나는 사공이 없이 목적과 방향을 상실한 채로 흘러가는 배와같이 자신이 선택할 기회를 상실한 채 강호의 은원에 휘말리는 주인공의 인생역정입 니다. 또 하나는 라즈니쉬의 명상록의 한 구절- 마음을 비워라입니다. 복잡한 강변 부두에서 두배가 마주옵니다. 뱃길이라건 방향바꾸기가힘든 법 이라 서로 비키리고 버티다가 결국은 부딪쳐 두 사공이 싸웁니다. 만약 마주오 는 배가 빈 배였다면 아무런 갈등없이 사공들은 그 배를 피해갑니다. 사람의 마음도 배와 같은 것이라 마음을 비워 없앤다면 상대의 마음이 갈등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리만 된다면 강호의 끝없는 은원이 사라질 수도 있겠지요. 쓰고보니 별 볼 일없는 작품이 제목만 거창했군요. 죄송합니다. #4200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4- 07/27 00:14 464 line 3. 복수혈전(復讐血戰 "어떻습니까? 이제 진위를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콧날이 매끈한 사내, 하상곤이 물었다. "아직은 좀 더 지겨봐야 될 듯 싶습니다." 도학정이 오른 손으로 찻잔을 권하며 대답했다. "아니... 아주 데려가겠다는 것은 아니고... 한 두달 쯤 어디 데리고 갔다 왔으 면 합니다만...?" "글쎄요, 부득이한 사정이라면 굳이 붙잡아둘 정도는 아닙니다마는..." 도학정은 그냥 놔두는 것이 좋다는 뜻이겠지만, 하상곤은 데리고 가기로 마음 을 정했다. 염노선지(閻怒善指)가 당부했었다. 열살 쯤 되면모진위를 한 번 봐야겠다고, 어차피 죽을 놈이면 이때 쯤 이미 회생불능일테고, 용무권이 어느 정도 효과를 봤다면 비명에 죽는 일은 막아주어야 할테니 어쨋든 한 번 데려오라고... "제가 지키고 진위를 다구치겠습니다. 제가 알아야 할 것이 있으면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하상곤이 머리를 조아렸다. 하상곤은 모진위가 아직도 용무권에 미숙할터이니 어떻게 다스려야 할 지를 묻는 것이었다. "허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제가 오히려 송구스럽군요. 내버려두어도 진위 스스로가 알아서 할 정도는 됩니다. 다만,하루에 두번 정도는 시간이 만만치않 게 필요할테니 장정(長程)이라면 계획에 적지않은 차질이 있을까 염려되는 군 요." 도학정은 하상곤이 모진위를 데려갈 결심을 한 것을 깨달고, 걱정없도록 시원 하게 대답해주었다. 사실, 모진위는 이미 도학정이 손봐 주어야 할 단계는 넘어 있었다. 주의를 주지않는다고 해서 역도(易道)에 빠질 염려도 없었고, 형편이 달라졌다고 권법의 성취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단련을 게을리 할 성품도 아니 었다. 다만, 모진위가 마지막 단계를 성취하기위해서는 결코 노력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계기가 필요한데, 그런 순간이 닥쳤을 때, 자신이 지켜보며 상황에 따라 옳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도학정이 다시 생각해보니 두달새에 모진위가 그런 수준에 이른다는 것은 너무 성급한 염려였고 이번 출도(出道)가 오히려 모진위의 새로운 경지에 이르는 실마리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같기도 하였다. "진위의 외유기간은 진위의 수련시간도 염두에 두었지요. 그런데 태식호흡(胎 息呼吸)은 어떤가요. 아직도 많이 의존하는 편인가요?" "태식호흡이라뇨?" 도학정이 어리둥절하여 반문하였다. "진위가 가부좌하여 코와 입으로 하는 호흡을 멈추지 않습니까? 배꼽과 살갗 으로 숨을 쉰다는 군요. 아직도 적지않게 시간이 들지요?" "아, 예. 그것 말씀이로군요. 취침전에 반시진, 기상직후에 반시진, 정확하진 않 지만 그 쯤으로 사려되는 군요." 하상곤이 턱을 톡톡 치며 잠깐 궁리하더니 말했다. "정한대로 두달이면 차질은 없겠군요. 내일 떠나도록 허락해주십시요." 모진위는 용무관에서 살게 된 이후로 용무관 주위 십리밖을 벗어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모진위는 용무관 주위 십리안이라도 자세하게 기억 하는 주변은 거의 없었다. 사부는 모진위가 오고 이삼년 동안은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외출하는 경 우래야 용무관으로 배달이 되지 않아서 구할 수 없는 물건을 사러 가는 일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일년에 한두번 있을까 말까 였다. 모진위가 사부의 시야밖 으로 사라지는 것은 전혀 허락이 되지 않았으므로, 모진위도 당연히 사부의 외 출에 동행하였는데, 서있는 자세, 걸음걸이 하나만 잘못되어도 사부는 가차없이 일장을 날렸으므로 모진위로서는 조금도 한눈 팔 여가가 없었다. 그러니 가까 운 주변이라도 자세하게 구경해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모진위는 항상 사부의 눈길이 미치는 곳에 있어야 했다. 잠자리에 드는 마지 막 동작이 사부의 가르침에 어긋나면 얻어맞아야 했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일어나는 첫 자세가 용무권의 원리에 따르지 않으면 반궁탄시에서 탄시가 채 펼쳐지지 않은 자세인, 반궁마보(反弓馬步)의 자세로 반시진이상 벌을 받아야했 다. 활처럼 엉거주춤한 이 자세는 반각도 되지않아 모진위에게 극심한 고통이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자세는 다리와 허리, 그리고 팔을 단련하는 자세 로써, 대부분의 건강한 문하생들도 차 두잔 마실시간도 되지 않아서 픽픽 쓰러 지곤 했다. 일어나고 잠드는 순간도 그럴 정도니 깨어있는 온종일은 말 할것도 없었다. 만약 모진위 봉술을 배우는거라면 봉법으로 밥숟갈을 놀려 밥을 먹고, 창술을 배우는 것이었다면 젓가락을 창처럼 휘두르며 반찬을 먹어야 했을 판이었으니 그나마도 권법만 배우는 배우고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여덜살이 될 무렵에 모진위는 겨우 그런 생활에서 벗어났으나, 그래도 문밖출 입은 어림없었다. 사부가 부르면 바로 달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모진위에게 떠나기 전 날, 목선민이 말했었다. "위제(衛弟)가 드디어 강호(江湖)에 출두하시는 구먼. 경험이 일천한 소제(小弟) 에겐 좋은 경험이 될 것이야. 강호는 험난한 곳이니 조심하시게." 모진위가 물었다. "민제(民弟), 강호가 뭔가? 어디에 있는가?" 목선민이 어이없어 코웃음을 쳤다. "푸하하, 강호도 모르는가?" "이 우형(愚兄)은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거야. 현제(賢弟)는 이 우형의 명을 받 들어 얼른 대답해보게." 목선민이 막상 대답하려고 보니, 말문이 막히는지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가보면 알아." 하상곤은 그와 그의 어린 일행이 긴 여정의 첫날밤을 맞이하게 된 객잔(客殘) 의 뒷뜰에서 모진위가 권법수련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진위의 태도는 평상적인 무예수련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약간 정도에 지나친 감이 있었다. 어느 부분에선 흥분상태였고, 어느 순간에는 고민스러워 했고, 어 떤 동작에서는 절망적이었다. 하상곤은 한참을 지켜보고 나서야 모진위의 비정상적인 태도를 이해할 수 있 었다. 모진위는 지금 먼저번 하상곤이 보았던 그의 상대를 지금 가상의 적으로 삼아 출운용무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었다. 모진위는 도학정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켜서 하상곤에게 알려줄 때까지만 해 도 고강을 맞이하여 그럭 저럭 상대가 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로는 상대의 온몸을 이용한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다. 그러나 더 이상 일어나기는 힘들게 보이는 상황에서도 몇번이고 넘어졌다가는 다시 일어나는 투혼을 보여 주었다. 결국은 기절해버렸지만. "그 때 그애 이름이 뭐지?" 하상곤이 물었다. "... .." 모진위는 원래가 묻는 말에 짧은 몇마디로 대답하는 것이외에는말이 전혀없 는 아이였다. 목선민에게만은 그렇지도 않았지만. 하상곤 또한 말이 없는 사내 였다. 여정내내 필요한 말이외에는 서로 나눈 대화가 없었는데, 뜬금없이 하상 곤이 모진위에게 말을 건넨 것이었다. 하상곤이 다시 물었다. "내가 너의 도장에 들어가고 있을 때, 너와 비무를 하던 그애 말이다." "고강... 고강이요." "그래, 고강. 네가 하는 연습이 지금 고강이라는 애를 이기고 싶어서 그애를 적으로 가상하고 하는 거라면 지금 그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다." "... ..." "네가 하고있는 그투로엔 이미 다른 상대가 있다. 고강이에 대한 생각을 지우 고 조용히 느껴보아라. 네가 언제나 막고 때리고 하는 그 빈 공간에는 네가 그 투로를 처음 접한 그때부터 아주 강한 상대가 이미 있었다. 다만, 네가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 ..." "그리고 고강이 정도는 지금 네실력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 그 때, 고강이 철용방벽으로 공격해왔을 때부터 모진위는 속절없이 밀리기 시 작했다. 철용방벽은 온몸을 도구로 사용한다. 상대의 몸에 가까운 부분이면 등 이든 팔꿈치든, 엉덩이든, 그 어떤 부위든지 그곳에 기력을 집중하여 공격하는 수법이다. 심지어 내공이 심후한 상태라면 상대의 타격이 가해지는 복부와 같 은 타점조차 공격하는 상대의 권각을 내력을 집중하여 받아칠 수 있는 수법이 었다. 게다가 내공이 약한 상태라도 모진위와 같은 허약자가 상대라면 충분히 가능하였다. 모진위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아무리 어렵게 피해냈어도 팔목이나 어깨, 등, 심지어 허리로도 연타가 가능해서 동작이 느린 모진위로서는 계속 피하는 것이 무리였고, 반격을 한다해도 제스스로 반격을 받는 꼴이 되어버렸다. "...어떻게요? ...도, 도무지 방법이 없었는데...." 모진위가 마른 침을 삼키며 말을 더듬거렸다. 하상곤이 알기로는, 모진위는 절대 무술인이 될 수 없었다. 남달리 단순한 충 격에도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되는데다, 그냥 가만히 서있기도 힘겨운 선병질(先 病質)의 애였다. 그리고 도학정도 양생의 단련만 시켰을 뿐, 격투로써의 무공은 전혀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는 놀라운 투혼으로 자신과 싸우 고 있는 것이었다. 하상곤은 문득 호기심을 느끼고, 은근히 모진위의 의중을 떠보았다. "방법만 좀 바꾼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길 수 있다. 가르쳐주랴?" 다음날부터는 그전과 달리 하상곤은 계속 지껄여야만 했다. "이기는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일단 자기의 단점과 장점을 정확히 알아야한 다. 진위, 너는 그것을 일부는 알고 활용하는 것 같더구나. 알고있는 것을 말해 보려무나." "장점은 없어요, 형편없는 점 투성이예요." 모진위가 고개를 설레 설레 저으며 절망적으로 대답하였다. 하상곤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면도 네 장점에 일부분이지. 그외에도 네 장점은 아주 많다. 이 아저씨가 하나 하나 설명해 줄테니 잘 새겨들어라. 이것을 아는 것이 승리 의 첩경이다." "... ..." 모진위의 촛점없는 눈이 순간, 빛을 발하였다. "우선 네힘이 약하다는 단점을 잘 알고 상대의 힘을 아주 잘 이용한다." 모진위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였다. 회풍선엽이야말로 모진위가 가장 자주, 가장 자신있게 사용하는 특기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맷집이 없다는 단점을 잘 알고있어서 충격을 줄이는 재주도 아주 탁월 하더구나. 보통은 '흘리기'라고 하지만, 네경우는 '돌려 흘리기'라고 해야 할 정 도다." 이 부분도 모진위는 수긍하였다. 매 맞는데는 이미 달인의 경지에 다달았으니 까. 하상곤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이리 저리 동작을 섞어가며 설명하였다. "바람개비 같다고나 할까. 만약 좌측 어깨를 맞았다면 너는 오른쪽 어깨에서 좌측 엉덩이까지 회전축이라도 박아 놓은듯 타격에 밀리는 그대로 좌측 상체를 뒤로 돌리고, 그 추진력으로 오른 쪽 하체를 앞으로 돌리고, 또 그 회전력을 이 용하여 좌측 상체가 더욱 빠르게 돌아가 충격을 완화시킨다. 대개는 정통으로 적중되지않고 돌아가는 바람개비를 치듯 비껴져 버리더구나. 물론 가슴의 한복 판을 맞으면 배꼽을 수평으로 가르는 선을 회전축으로 상체가 물러나고 하체가 당겨오는 것이고..." 하상곤이 아무 것도 잡지 않은 채, 나무가지에 허리라도 걸친 듯 자신의 상체 를 툭치더니 그 힘에 밀리기라도 한 듯 빙그르 돌았다. 하상곤은 모진위의 입 이 헤-벌어지는 것을 보고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미흡한 점은 그 첫번째 장점과 두번째 장점이 서로 합쳐지지 않았다는 것이 지. 돌아가는 반대쪽 신체에 걸린 그 회전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넘어지던데, 네 가 잘하는 남의 힘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상대를 공격하고, 그 반탄력으로 몸을 바로 세운다면 어떨까?" 모진위가 곰곰히 생각해보고, 동작을 일으켜보았다. 상대방에게 얻어맞고 몸을 획 돌리는 것을 회풍선엽을 응용하여 움직여보았다. 몇 번을 실패하고나서야 어설프게 겨우 해낼 수 있었다. "오, 이 녀석. 아주 영특하구나." 모진위가 얼굴을 묘하게 일그러뜨렸다. 하상곤이 보니 묘하긴 했지만, 기분좋 은 눈빛이었다. '이 녀석이 이게 웃는답시고 짓는 표정이구나.' 하상곤이 그렇게 생각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또 한 가지. 신기하게도 허초는 아랑곳 않고 실제공격에만 대응하더구나. 네 반사신경이 둔하고, 행동이 느려서 허초에 현혹되었다면, 이어지는 초식엔 꼼짝 없이 당하고 말텐데... ... 무능한 신체를 보완하기위해 정신이 잘 분발하였는지, 네 본능적인 판단은 대단히 정확하였다. 그걸 흔히 육감(六感)이라고 하지. 어 떻냐? 이제 네게도 장점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알겠느냐?" "네, 아저씨." 하상곤이 모진위를 모진위의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뒤통수부터 크게 쓰다듬으 며 말했다. "오늘은 이만 하도록 하자. 날도 저물고, 피곤도 할테니. 녀석, 오늘은 여기서 쉬어갈 곳을 찾아보자." 모진위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진위는 신이 나서 하상곤이 내일 은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흐뭇한 조바심을 내었다. 모진위는 그의 십여년 인생 살이동안 내일이란 것을 기다려보기는 이번이 머리에 털나고 처음이었다. 모진위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언제나 처럼 출운용무를 연습하였다. 그러나 이 번만은 예전과 조금 다른 심정이었다. 하상곤의 지적을 염두에 두어 출운용무 속에서 자신을 상대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시전 해보니 누군가와 한 판의 비무를 벌이고 있는 듯한 출운용무였다. 그러나 몇 번을 반복해보았지만, 무언가 잡힐 듯 잡힐 듯하다가 사라져버렸다. 모진위는 가슴이 설레였다. 내일, 아니면 또 다음의 내일,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 지. 모진위는 이제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작이 느리다는 것과 힘이 약하다는 것, 이건 누구에게나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장점을 잘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고 할 수 있지. 이 아저씨에게 한 번 배워보겠느냐?" 하상곤의 강의가 다음날에도 계속되었다. "네, 하(賀)아저씨. 제발 부탁드려요." 하상곤이 느닷없이 일권(一拳)을 모진위에게 날렸다. "아앗!" 모진위가 무심결에 양손을 머리위로 포개어 막았다. 하상곤이 틈도 안주고 두개의 변화를 가지고있는 초식을 보여주며 다시 말했 다. "이번엔 이렇게 공격할테니 막아보아라." 하상곤의 공격이 바로 이어졌다. 모진위가 두개의 변화를 어떻게 대처할지 빠르게 궁리하고는 막아나갔다. 철썩-. 이번에는 하상곤의 커다란 손바닥이 모진위의 방어막을 통과하여 머리통을 철 퍼덕 갈겨버렸다. 모진위의 두눈에 불똥이 확 튀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첫번째는 기습이었는데도 막아내고, 두번째는 대비시켜주 었는데도 막지 못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 ..." "모르겠느냐?" "예." "허어, 이런 녀석봤나. 하나는 빨리 방비하였기 때문에 막을 수 있었던 것이고, 하나는 이미 손이 지나간 다음에 막았으니 막힐 턱이 있느냐?" "... ..." "처음에는 빨랐는데, 나중엔 왜 늦었는지 알겠느냐?" "... 먼저는 아무생각 없이 부지불식간에 막아서 손이 빨리 나갔고, 나중엔 어 떻게 막을지 궁리하다가 늦어버리고 말았어요." "그 이치는 아니 그래도 다행이구나. 이 녀석... 그 속에 느린 동작을 보완하는 방법이 있는것이야." 모진위는 알것 같으면서도 아리송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을 때, 대개는 그동작을 보고, 반응을 하여 방어방법 을 생각하고, 방법이 결정이 되면, 행동으로 나서지. 그것이 네가 이 아저씨한테 머리통을 얻어맞게된 이유다. 그러나 네가 그에 앞서서 머리통을 잘막아냈을 때는 머리로 생각하는 과정을 생략해버렸다. 너의 반응하는 시간은 남들이 반 응하는 시간보다 두 배이상은 오래 걸릴 것이다. 너의 동작속도 또한 그럴 것 이고. 그러나 생각하는 시간이라는 것은 보통 반응 하는 시간의 열 배는 더 걸 린다." 하상곤이 말을 멈추고 모진위의 반응을 살폈다. 모진위가 말을 알아듣은 듯하 자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게 실마리다. 생각하는 시간을 없애버리고 반사적으로 수법을 펼칠 수 있다 면 너도 남들 만큼 빨라지는 거나 마찬가지다. 물론, 반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서는 무공을 본능처럼 익숙하게 숙달시켜야하지만." 모진위의 얼굴에 희비가 엇갈렸다. "그렇게 실망할 거 없다. 내가 보기에 너는 다행스럽게도 어느 정도 그 기초가 닦여져 있으니까..." "그럼, 약한 힘을 보완하는 방법은요, 아저씨?" "녀석, 그렇게 서두를 것 없다. 어떻게 하면 무의식적으로 초식을 전개하는 방 법을 배울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느냐? 그 설명은 넘어갈까?" 모진위가 그답지 않게 애교를 부리며 졸라댔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제가 잘못했어요. 아저씨 말씀에 따를께요." 모진위를 아는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기절할 노릇이었다. 반사적인 초식전개의 연습방법은 간단하였다. 우선은 하상곤이 갑자기 어떤 행동을 취하면, 모진위가 재빨리 따라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손을 들어올리는 간단한 동작으로 연습하다가 시일이 흘러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왼손, 오른 손을 구별해서 따라하는 것, 그리고나서는 점점 더 복잡한 동작으로. 그것이 모두 제대로 된다면 하상곤이 갑자기 어떤 초식을 취하면, 모진위가 재빨리 방어하는 자세를 취해보는 단계로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하상곤은 여행 도중에 시도 때도 없이 갑작스레 자세를 취하곤 했고, 모진위는 열심히 대항하 였다. "주먹이 원추속을 움직인다고 생각하여라. 주먹은 바로 그 꼭지점에서 멈춰져 야 하는데, 의식적으로 멈추어서는 안된다.꼭 그 점에 정확히 닿도록 힘을 안 배하여야한다. 힘이 모자르면 꼭지점에 이르지 못하고, 힘이 넘치면 꼭지점을 지나친다는 생각으로..." 모진위가 마음속으로 점을 찍어놓고 그점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이 녀석, 네가 때려야 할 목표는 움직이는 인간이니라. 점만 염두에 두어서는 평생 타점을 잡지 못한다. 마음속에 원추를 그리고, 목표가 움직인다면, 그 원추 를 이동시켜라. 그리고 그 끝점을 때려야하느니라." 약한 힘을 보완하기위해 타력을 집중시키는 방법을 연습하는 것이었다. 하상곤은 창호지를 팽팽하게 당겨잡고는 물러났다, 다가섰다 하며 모진위에게 반복해서 때리도록 하였다. 힘이 모자라면 창호지엔 진동조차 없을 것이고, 넘 치면 창호지는 찢어 질 것이다. 밤이 되자, 하상곤은 벽에 사람크기 만한 범위안에다 마름모 꼴로 네개의 점을 그리고, 그 중앙에 하나의 점을 찍어놓고는 모진위의 타격이 가능한 각 신체부 위에 각각 다른 색깔의 물감을 칠하였다. 그리고 객실의 모든 구멍을 빛이 새 어 들어오지 않도록 밀폐시켰다. "뒤로, 상!" 하상곤이 외쳤고, 모진위가 뒤로 한 보 이동하여 윗부분의 점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좌로, 하!" 모진위가 옆으로 옮겨 오른 발로 찼다. "앞으로 좌!" 다가서며 팔꿈치로 쳤다. 수십번의 타격이 계속되고 다시 불이 켜졌을 때, 대부분의 물감자국은 점에서 떨어져있거나, 물감이 너무 많이 묻었거나, 적게 묻었다. 형편없었다. 낙양(洛陽)에서 남쪽으로 육십여리 떨어진 곳에 다다랐을 무렵, 모진위의 여정 은 이미 보름하고도 이틀을 지나고 있었다. 하상곤은 눈앞에 펼쳐져있는 가파른 고갯길을 바라보고있었다. 고개를 넘으면 낙양. 낙양을 지나서 황하를 건너면 드디어 산서성(山西省)에 도착하는 것이다. 황하를 도하(渡河)하여 이틀정도만 더 걷는다면, 황토구릉의 토굴촌(土窟村)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 곳에 염노선지 황경(黃敬)이 살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즈음, 모진위의 성취도 약간은 눈에 띌 정도가 되었다. 창호지도 하루에 세 장이상은 찢어지지 않았고, 벽에다 물감칠하기도 삼할정도는 제대로 적중되 고 있었다. 그리고 하상곤의 또 다른 수련법이 등장하여 모진위를 단련시키고 있었다. 하상곤이 둥근 나무고리를 모진위에게 발출하였다. 모진위는 손가락을 곱게 세워 준비하고 있다가 고리가 낯게 날아오는 지라, 수평으로 날아오는 고리를 내리찍어서 팔목에 꼈다. 모진위가 받아내는데 익숙해질수록 고리의 속도는 더 빨라졌고, 구멍은 작아졌으며, 무거워져 갔다. 이 훈련은 밤에도 물감찍기와 함 께 어둠속에서도 행해졌다. 둘이 산비탈을 내려왔을 때, 계곡에는 작은 주막이 있었다. 비교적 왕래가 뜸 한 산속이었지만, 호북성(湖北省) 무한(武漢)방면에서 낙양으로 여행하는 사람 들은 대개 이 곳을 지나가야 했고, 이 곳에서 다시 고개를 넘으려면 하루가 꼬 박 걸리는 형편인지라, 하룻밤 쉬어가기에 적당한 주막이었다. 마을도 없고 주 막 한 채 뿐이었는데, 하루에 두어명의 손님은 항상 있었다. 하상곤등이 주막에 들어섰을 때도 낯빛이 창백한 사내가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하상곤과 모진위가 탁자에 앉자, 주인여자는 청하지도 않았는데, 술 한병과 꿩 고기, 그리고 소채 몇 가지를 내어왔고, 그들은 배가 고팠던 참이라 군말없이 먹기 시작했다. 모진위는 식사를 마치고 출운용무를 연습하기위해 밖으로 나갔 고, 하상곤은 이왕 나온 술이라 마시기 시작하였다. "낙양으로 가시는 길이요?" 창백한 낯빛의사내가 물어왔다. "그렇소이다." "내일이면, 싫어도 동행해야 할 터이니, 우리 술이나 같이 합시다." "고소원 불감청(苦訴願 不敢請)이올시다." 사내가 술병과 잔을 들고 하상곤의 탁자로 건너왔다. 하상곤이 먼저 소매속에 두 손을 맞잡고, 자기소개를 하였다. "사천성(四川省) 금사강(金沙江)출신의 하상곤이라 하오. 남들은 금사천협(金沙 天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만, 받들기 어려운 허명(虛名)이지요." 사내도 역시 서둘러 포권을 취하며, 답례을 하였다. "허어, 금사천협 하대협이셨군요. 소생은 낙양성출신으로 낙양성 남쪽의 갈미 촌(蝎尾村)에 살고있는 윤차성(尹次成)이라 합니다. 하대협의 위명에 경의를 표 하는 뜻으로 소생이 먼저 한 잔 올리지요." 하상곤이 보니, 윤차성이 겸손하여서 크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모진위의 출운용무속에는 이제 상대가 있었다. 모진위는 작정을 하고 출운용 무에 대적하였다. 무형의 기운은 점차 뚜렸해지더니 이제 모진위 앞에 분명히 나타나 그를 위협하고있었다. 때로는 엄청난 고수였다가, 때로는 형편없는 잡졸 이기도 하더니, 언제부터인가 잡졸이 사라지더니, 하루가 다르게 엄청난 고수로 변하며 모진위의 권각을 가로막았다. 모진위는 필생의 숙적 앞에라도 선 듯 크 게 숨을 들이쉬며 경건하게 심기일전(心機一轉)의 자세를 취하였다. 낙양부(洛陽府)의 남쪽을 담당하고 있는 포두(捕頭) 여형수(余型秀)는 두명의 중년사내와 어린아이가 객잔으로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형수는 그 중 한 사내가 왕년에 진사까지 지냈고, 낙양의 수재로 성가를 높혔던 윤차성이 란 것을 이내 알아 볼 수 있었다. 여형수는 벌써 이틀째 객잔에 나와 윤차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형수가 그저 요령으로 하루하루를 때우는 형편없는 포도관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이틀씩이나 이렇게 일을 밀어놓고 있어도 괜찮을 만큼 한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번 만 큼은 지루함을 참으며 윤차성을 기다렸다. 새로 부임한 추밀사(추밀사)는 성격이 강직하여 무고한 사람이 살해당하는 것 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날엔, 담당포교는 범인을 밝혀 낼 때까지 추밀사의 등쌀에 며칠은 잠도 편하게 못 자고 재촉을 당해야 했다. 더구나 윤차성은 그의 아버지가 한때 무슨 대부까지 지냈던, 지금은 쇠락했다고 는 하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신분이고 보면, 아무리 강호무림의 일이라해 도 여형수가 그저 방관만 하고있다가는 며칠은 편치 못할 판이었다. 윤차성일행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여형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윤차성 에게 다가갔다. "갈미촌에서 오신 윤진사어른, 맞습니까?" 이른 새벽부터 고개를 너머 오시(午時)가 다 되어서야 낙양성에 들어 온 일행 이 이제 막 늪은 점심을 먹으려는 참이었다. 하상곤과 모진위는 점심식사를 한 후, 잠시 쉬었다가 황하강변에 닿을 때까지 여행을 계속 할 요량이었고, 윤차성은 이 곳에서 머물겠다고 했다. 그런데 왠 낯선 포교가 다가오더니 윤차성에게 말을 건넨 것이다. "포교나리께서 어인 일로...?" 윤차성이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여형수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차분하게 되물었다. "오늘 저녁, 유시(酉時)에 남문밖 벌판에서 추풍회(秋風會)의 천가(千家), 동가 (董家), 방가(方家)란 세 잡놈과 비무를 벌이겠다는 그 윤차성 이란 양반이 맞 소이까?" 포교가 제법 눈을 날카롭게 흘기며 언성을 높혔다. "그렇소이다." "대담하시게도 댁이 먼저 도발을 했다는데 사실이요?" "그렇소." "그놈들은 도리란 건 애초에 눈꼽만큼도 모르는 빌어먹을 놈들이요. 그 망할 놈들은 필경 끝장을 보려 할터인데..." 전날밤, 추풍회가 활동하는 보갑(保甲)의 보두(保頭)로 있는 화가장주(華家莊 主)가 추풍회에서 비무에 대한 기별이 있었노라고 알려왔는데, 보두에게 기별을 놓을 정도면, 그건 그저 단순한 비무가 아니었다. 추풍회의 녀석들은 상대를 없 애고야 말겠다는 심산으로 관청에 살인면허를 신청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인도 무림인이라오, 강호의 규칙에 따를 뿐이요." 허약한 서생놈 주제에 가당키나 한 일이냐는 투로 비아냥거리는 포교의 말허 리를 가로채어 윤차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더구나 관(官)에 발고할 일가친적도 없으니 포교나리를 거추장스럽게는 안할 테니 염려는 마시오." "내염려를 덜어 줄 생각이라면 그따위 객적은 소리는 말고, 보두어른께 통고라 도 해주시요. 화가장(華家莊)은 윗길로 쭉 올라가 물어보면 아무라도 알려줄께 요." "그리 하겠소." 윤차성은 이리 저리 다투기가 귀찮았는지 시원하게 대답해주었고, 반드시 확답 을 들을 태세로 자세를 고쳐잡았던 포교도 자세를 풀고 자리를 떠났다. 살인사건이라고 해도, 무림인들의 죽음은 대개 살인으로 치부되는 예가 드물었 다. 강호의 관례란 시비를 가리다가도 말로 안되면 그저 비무라는 명목으로 싸 움질을 벌렸다. 그래서 이기면 이긴 편이 무조건 옳은 것이었다. 더러는 비무 중에 죽음을 당하는 강호인들도 있었는데, 자청한 죽음이니 관청에서도 살인이 니 뭐니 떠들 필요가 없었다. 여형수야 윤차성의 사정을 대강은 줏어들어 알고있는 지라 그저 내버려두면 되는 것이었지만, 신임 추밀사는 그사정은 모르고 다만 윤차성의 옛 신분만 따 질 터이니 윤차성을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어서는 곤란한 일이었다. 그래서 만 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이 지역의 보두를 증인으로 삼을 생각을 하게되었다. 여 형수는 그것으로 됫다고 생각했다. 대부분 논란의 여지가 있거나, 비중있는 인물이 연루된 비무의 경우는 사람이 죽게되면 관에서 개입을 할 수도 있었으므로 치안이 안정된 지역의 경우는 대 개 보두에게 미리 기별하여 사람이 죽더라도 그것은 비무중에 생긴 사고라는 것을 보두가 관에 증명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여형수가 물러가자, 윤차성은 비탄에 찬 한숨을 내쉬더니, 한참동안 고개를 숙 이고 탁자 끝만 바라보았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서 자신을 말없이 보고있는 하상곤을 마주보고는 입을 열 었다. "하대엽께서도 저간의 사정이 궁금하신게로군요?" "무슨영문인지 제가 좀 알아도 되겠소.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미흡하나마 남 는 손을 빌려드리고 싶습니다만" "어찌 행로가 급하신 분의 발을 붙잡겠는지요. 대협께서는 괘념치 마십시요." "허허, 하루 이틀 여유는 있습니다. 그런 부담은 당치도 않습니다. 다만, 윤대 협이야말로 말씀하시기 곤란한 사연이면 제 주제넘은 질문에 괘념치 마십시요." 그때까지 하상곤은 그 단정하고 기품이 있는 태도에 윤차성을 문사로 지레짐 작하고 '윤선생' 이라 호칭하였었지만, 포교와의 대화를 듣고 윤차성도 강호인임 을 깨달고 대협이라고 호칭을 고쳤다. "아닙니다. 하대협과 같이 고명한 강호협객께 제 어찌 한치라도 숨김이 있겠습 니까? 말씀드리지요." "과찬의 말씀, 감당키 어렵습니다. 다만, 윤형의 고언에 귀를 씻고 경청할 따름 입니다." 윤차성이 장탄식을 터뜨리고, 잠시 감정을 억제하더니,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벌써 사년이 되었군요. 제 아내는 분에 넘치는 여자였지요. 현숙하고 아름답 기로 근동에서는... ...아! ...그런데 그 악마같은 작자들이..." 윤차성이 그토록 기억하기 싫었던 사년 전의 그날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내의 가슴이 도톰하게 솟아올라 달빛에 흔들리고 있었다. 사내의 털이 숭숭 한 손이 아내의 가슴을 우악스럽게 주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누워있는 상태에 서의 아내의 가슴은 원래 그리 큰 편이 아니었는데, 사내의 손이 이리저리 움직 이자, 손아귀의 틈새로 밀려나와 미어터질듯 솟아오르고, 팽팽하게 당겨져서 뚜 렷한 윤곽을 드러내었다. 그 와중에서도 윤차성은 아내의 가슴이 무척육감적 이라고 생각했다. 언뜻 언뜻 매끈한 곡선도 달빛을 받아 탐스럽게 번득였다. 아 내의 허벅지로 말할 것 같으면 원래부터 윤차성을 매혹시켰던 터였다. 이런 눈알을 파버려도 모자란 광경에 아내에게 정욕을 느낀다는 것은 정말 저 주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윤차성의 마음은 더이상 도피처를 찾지 못하 고 그런 저주속으로 밀려들어가고 있었다. 그럼 어떡하란 말인가? 세놈의 악마에게 무지막지하게 얻어맞고 허리가 부러 졌는지 모가지가 부러졌는지 꼼짝도 못하고, 한시진이상을 아내의 몸을 농락하 는 사내의 손길을 마치 자신의 신체에 스며드는 지독한 독액인양 괴로워하며, 가슴을 갈갈이 찢으며 바라보는 무력한 벌레같은 놈이 바로 자신 아닌가?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이 아니다.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윤차성의 정신적 황폐가 아내의 아름다 운 육체에 욕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아내는 겁탈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티끌하나 없이 깨끗한 아내는 한밤중에 들 이닥친 더러운 짐승 세마리에게 윤간을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입술을 악물었고, 입가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윤차성은 이빨이 아 니라 손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눈알이라도 파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금전의 저 교두가 그 때 저를 찾아와 물었을 때, 저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 았지요. 강호인들은 관에 발고하는 경우가 없지요. 힘을 길러 스스로가 복수하 는 법이지요. 십년이 걸리든 이십년이 걸리든... ..저는 그순간 강호인이 되기로 결심한 겁니다." 윤차성이 사건의 전말을 간단하게 요약해주고는 한참을 떨다가 다시 꺼낸 말 이었다. 동문밖, 벌판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모진위도 굳게 긴장한 채, 하상곤의 옆에 바싹 붙어서있었다. 핏기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의 윤차성이 검을 뽑아들었다. 첫상대는 암기를 잘 다룬다하여 비 도살귀(飛刀殺鬼)라 불리우는 방천석(方川錫)이었다. ============================================================== 주) 보두에 대해서 : 중국에는 보갑제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농민들을 통 제하기위해 활용해온 방법으로 보갑이란 '보증된 갑주'란 뜻이다. 갑은 대략 10 가구로, 보는 10개의 갑으로 이루워진다. 보갑에 속한 자가 죄를 지으면 그 보 갑은 연대책임을 진다. 특히, 보나 갑의 수장은 죄인을 보고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지주, 부농, 전당포주인등이 대부분인 보갑의 수장은 구성원이 의심스럽지 않은 인물임을 '보증'한다. 보증을 받지 못하면 의심스런 인물로 찍혀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수장들의 권력은 대단하다. 후일, 발전을 거듭하여 조세징수등의 지방관의 일까지도 도와주웠고, 관리와 최하부층간의 연결고리 역 할을 하였다. 그와 같은 것에 착안하여 '보두'라는 역할을 이용해보았는데, 보의 수장을 보두라고 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어 편의상 '보두'라 표현하였으니 틀 렸어도 양해바랍니다. 백수노계였습니다. #4206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5- 07/27 01:36 171 line 방천석의 비도가 먼저 윤차성에게 날라들었다. 윤차성은 검을 들어 황급히 비 도를 쳐냈다. 그러나 공력이 실린 비도의 힘에 못이겨 윤차성은 비틀거렸다. 검 을 쥔 윤차성의 손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단 한 번의 격돌로 벌써 윤 차성의 호구는 찢어져 버린 것이다. "클 클.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방천석이 비웃음을 터뜨리며 기고만장하였다. 그러나 윤차성은 손아귀의 피도 아랑곳 않고 검을 높히 치켜들어 그대로 방천 석을 향해 찔러들어갔다. "쯧, 쯔." 하상곤이 혀를 찼다. 상식밖의 수법이었다. 일검으로 찔러 들어가기에는 상대 가 너무 멀리있었고, 더구나 방천석은 암기를 절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방천석 의 손에는 이미 또 하나의 비도가 석양빛에 붉게 빛나고 있었다. 사실, 아무리 피나는 수련이었다고는 해도 사년남짓의 무공수련으로 가냘픈 서 생이 강호의 쟁쟁한 무뢰배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그 러나 윤차성에게는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스스로도 보통방법으로는 복수의 길은 요원하다는 것을 알고 무리하게 독공(毒攻)의 방법을 모색하다가, 독을 잘못 쓰고야말았다. 이제 윤차성의 몸은 더욱 악화되면 악화되었지 호전 되지 않는 상태였다. 그러나 복수를 하지 못한다면, 윤차성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윤차성 은 스스로의 죽음을 전제로 한 복수의 방법을 택했다. 윤차성이 어느 새, 방천석의 일장거리로 육박하여 금계독립(金鷄獨立)과도 비 슷한 자세로 도약하였다. 그 순간, 방천석의 비도도 번쩍 빛을 발하였다. 방천석은 승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경공이 뛰어난 고수라도 일장거 리의 비도를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더구나 저 어리숙한 책벌레녀석은 두손 으로 검을 높이 쳐들고 있는 상태였다. 비도는 윤차성의 가슴을 비집고 사라졌 고, 윤차성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순간, 방천석의 두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앞으로 쓰러지던 윤차성이 데구르르 구르 더니 자신의 세치앞에서 벌떡 일어나 검을 후려온 것이다. 방천석의 두다리가 윤차성의 검에 짤려 나가며 피분수를 뿜었다. 방천석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스르르 허물어졌다. 윤차성이 붉게 충열된 눈을 치켜뜨며 방천석의 가 슴 깊숙히 검을 내리 꽂았다. 전신에 온통 핏물을 뒤집어 쓰고 석양을 등진채 서있는 윤차성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이 섬뜩하도록 하였다. 마치 지옥에서 온 아수라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윤차성이 마침내 첫상대를 물리친 것이다. 윤차성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가슴 한 구석에 비수가 부르르 떨고 있었다. 엄 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그러나 윤차성은 그 고통이 달디 달기만 했다. 이 고통 이 윤차성의 전략이었다. 피할 수 없기에 당당히 맞아주었다. 그러나 스스로 맞기를 작정했기에 심장만 은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필사의 정신력으로 고통을 이겨내고 칼을 들었다. 체력으로 안되면 정신력으로 이기겠다는 것이 윤차성의 전략이었다. 윤차성의 전략은 그대로 맞아 들어갔다. 방천석은 자신의 투도가 윤차성의 가 슴에 박히는 것을 보고 일순, 방심하였다. 설사 죽지는 않는다해도 그 엄청난 고통을 참고 재차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윤차성은 가슴에 비도를 달고 방천석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 는 아픔을 이겨내며 움직였던 것이다. 윤차성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곧추세우며 뱃속 깊은 곳에서 써늘한 음성을 끌 어내었다. "다음." 윤차성의 눈은 동중삼(董仲三)을 쏘아보았고, 흑편(黑鞭)을 든 동중삼이 놀란 표정으로 서있다가 이를 부드득 갈며 앞으로 나섰다. 동중삼은 윤차성이 방천석을 이기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였다. 윤차성이 복수를 꿈꾸며 뼈를 깍는 수련이야 했겠지만, 방천석의 무공은 근년에 이르러 대단한 진보를 이루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중삼의 예상이 틀렸다. 무공실력이야 엄 연히 방천석이 월등했지만, 지고 만 것이다. 상대는 필사의 각오로 덤벼들었는데, 방천석은 사람사냥이라도 즐기듯 가벼운 마음이었었다. 동중삼은 그것이 승부를 갈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중삼은 경 계를 게을리하지않고 최대한 경각심을 돋구었다. 동중삼은 철가시가 둘러박혀 있는 채찍을 천천히 휘두르며 윤차성의 접근을 견제하였다. 윤차성은 몇번 접근을 시도해보았지만 여기 저기 몇군데의 상처만 더 추가하 고 말았다. 상대의 무기는 길고, 자신의 것은 짧으니 어쨋든 좀 더 가까이 붙지 않고는 뾰쪽한 수가 나올리가 없다. 그러나 동중삼은 방심하고 있지않았다. 윤 차성이 조금이라도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가차없이 채찍을 휘둘러 댔는데, 채찍 에는 날카로운 침들이 박혀있어서 스치기만 해도 윤차성의 피부를 갈갈이 찢어 버렸다. 윤차성은 정신이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대결을 시작한지도 이미 한식경(食更) 을 지나고 있으니 피도 꽤 흘러버렸던 것이다. 동중삼도 그것을 의식했는지 윤 차성이 헛점을 노출하여도 선제공격을 하는 일없이 접근만 못하도록 채찍으로 견제할 뿐이었다. 윤차성은 숨을 크게 드리쉬고 정신을 가듬었다. 이대로 쓰러져서는 저승에 가 더라도 아내에게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 번 땅을 힘차게 박차고 검을 들어올리며 동중삼에게 돌격했다. 동중삼은 채찍을 빳빳히 세워 찌르거나, 휘어감는 수법을 자제하였다. 단지 짧 게 휘둘러 감아당기며 윤차성의 몸을 훑어버리는 수법만 계속해서 사용하였다. 내공으로 편(鞭)을 세워 찌르는 재간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찌 르기의 초식인 옥녀천침(玉女穿針)이야말로 적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수 법이었고, 윤차성을 수월하게 찌를 기회도 몇 번 있었지만, 동중삼은 신중하였 다. 윤차성이 방천석의 비도에 찔리고도 역습을 하는 것을 보고는 그것이 윤차 성의 노림수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 바로 그 것이라는 것을 노련한 동중삼이 모를리가 없었다. 상대를 휘감아잡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녹사등목(綠蛇登木)의 방법이야말로 동 중삼의 절기로써 급박한 위기에서 동중삼을 여러번 구해준 초식이었다. 상대방 을 휘감고나면, 당기면 당길수록 편침(鞭針)들이 살속을 파고들기때문에 적이 꼼짝못하고 딸려오게 된다. 그런 다음, 상대를 채찍으로 내팽겨치고 이리저리 뒤집어놓으면 채찍에 감긴 신체부위는 요절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윤차성이 날아오는 채찍을 왼팔로 막으려는 태세를 보였음에도 동중삼 은 초식의 사용을 억제하였다. 충분히 성공시킬 자신은 있었지만, 상대방의 동 귀어진을 만에 하나일망정 조심하였기 때문이었다. 스치기만 해도 살갗이 터져 피를 줄줄 흘리고 있으니 그저 시간만 끌어도 제풀에 지쳐 쓰러질 것이다. 그 때가서 갈갈이 찢어죽이리라. 동중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 동중삼은 어이가 없었다. 윤차성이 막 오른팔을 구부려 들어올리고 내리칠 듯 한 자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본시, 채찍을 상대함에 있어서 그 상대자는 찌르는 자세조차도 극히 조심해야한다. 노련한 상대라면 채찍으로 검을 휘감으며 타고 넘어 손목을 죄어버리기 때문이다. 실전에 있어서 무기를 잡은 손목을 구속당 한다는 것은 자진해서 제 목숨을 갖다 바치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윤차성의 태도는 더욱 형편없어서 아예 팔뚝전체를 노출시켜버린 것이었다. 동 중삼은 더이상 주저하지 않고 녹사등목의 초식을 날렸다. 채찍이 팔목을 잡아채자 윤차성은 격렬한 통증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뼈속까 지 쑤셔대는 아픔이었다. 윤차성의 전신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윤차성은 서 서히 의식을 잃어가며 동중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동중삼의 얼굴에 탐욕스런 눈빛이 번쩍였다. 그 때 그 눈빛이었다. 자신의 아 내를 뱀처럼 훑어가던 그 때 그 눈길... 윤차성은 그날의 그 눈빛을 기억하면서 그 눈빛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그날의 쓰라린 가슴도 기억하였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불길같은 분노 가 치솟아 올라왔다. 그리고 그 분노의 힘으로 윤차성은 자신의 저 넘어에 있 는 힘까지 끌어내어 팔목을 잡아당겼다. 팔목은 전신이 떨리도록 아파왔지만, 그날의 그 고통에 비한다면 그 것은 윤차성에게 쓴웃음거리도 되지않았다. 허공에서 곤두박질치던 윤차성의 신형이 갑자기 방향을 선회하여 동중삼의 가 슴께로 날아갔다. 동중삼은 일순 당황했지만 재빨리 왼주먹을 들어올려 날아오는 윤차성에게 일 장을 내뿜었다. 윤차성도 피하지 않고 맞부딪쳤다. 두개의 신형이 엇갈린 채로 잠시 그렇게 서있다가 윤차성이 서서히 무릅을 꿇 었다. 그리고 윤차성의 가슴에서는 피가 냇물처럼 흘러내렸다.. 동중삼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무릅을 꿇고있는 윤차성을 내려다보았다. 그리 고 가슴을 움겨쥐며 쓰러졌다. 잠시후, 가래가 끊는 듯 힘겨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지옥과도 같이 깊은 심연에 서 흘려오는 듯한 음성이었다. "다음." 윤차성이 천병남(千炳南)을 쏘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천병남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검을 땅에 버틴 채, 흔들 흔들 서있는 저 피투성이가 도무지 사람같지 않았다. 윤차성의 가슴에는 석양 에 번득이고 있어야 할 무언가가 없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쓰 러져 죽어가고 있는 동중삼의 가슴에는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방천석의 비수였다. 천병남은 오해를 했었다. 자신의 신체, 어느 부위에 무언가가 박혀있다면, 천병 남은 눈앞에 닥친 상황이 종료하기 전에는 절대로 그 것을 뽑지않을 것이다. 뽑아낸다는 것이 엄청나게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것보다도 뽑아내고 빨리 치 료하지 않으면 그 구멍으로 피가 빠져나와 죽게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에 게 박혀있는 흉기조차 자신의 생명에 위협될 수 없는 물건으로 치부해버렸다. 동중삼도 자신과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윤차성은 그 비수를 뽑아내 어 동중삼의 가슴에 쑤셔박았다. 그리고 그것은 동중삼의 생명에 크나 큰 위협 이 되고 말았다. 천병남은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윤차성이 방 천석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고, 만에 하나 방천석이 별로 있을 것같지 않은 실 수를 하더라도 동중삼이 거푸 실수할 가능성은 티끌만치도 없다고 확신했기 때 문이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천병남이 윤차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쨋든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였다. 윤차성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겨우 검 에 의지해서 흔들 흔들 서있는 윤차성의 동공에는 생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러나 천병남은 검을 들었다. 앞서 간 두 동료의 복수는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 했다. 그저 검을 들어 윤차성의 목을 동강내버리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윤차성의 머리가 그의 몸에서 막 떨어져 나가고 있는 순간, 천병남의 얼굴에 역한 냄새의 액체가 쏟아졌다. 천병남은 그저 윤차성의 피려니 생각했는데, 좀 달랐다, 아니 달라도 많이 달랐다. 천병남은 저만큼 나동그라져 있는 윤차성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눈을 부릅뜨고 있는 윤차성의 입가에는 피라고 하기엔 지 나치게 검은 액체가 묻어있었고, 입주위도 시커멓게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천병남은 피를 뒤집어 쓰기 싫어서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했는데도 그 액체는 얼굴에 쏟아져 버렸다. 필경, 윤차성이 일부러 뱉어낸 것이리라. 윤차성은 사라져가는 의식속에서 기겁을 하며 얼굴을 감싸쥐는 천병남을 바라 보았다. 그의 얼굴에 묻어있는 아내의 시체도 바라보았다. 오랜 만에 찾아오는 안락의 순간이었다. 윤차성은 편안하게 눈을 감으며 하늘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아내의 얼굴을 상상해보았다. 이제는 편안히 눈감고 쉴 수 있으리 라. 윤씨부인의 시체는 시체랄 것도 없었다. 완전히 녹아버려 그저 한 봉지의 액 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썩어가는 그녀를 몇날 며칠이고 끓어안 고 살았다. 그녀가 거의 액체처럼 흐믈 흐믈 해졌을 때, 그녀의 남편도 조금씩 썩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가 완전히 액체로 변했을 때, 그녀의 남편, 윤차성은 그녀를 특수하게 만들어진 봉지에 담았다. 그리고 오늘, 그녀를 자신의 입속에 넣고 있다가 천병남의 얼굴에 뿌려버린 것이었다. 부시독(腐屍毒)이란 이름으 로. "까악, 까악." 석양이 벌겋게 물들어가는 벌판에는 이제 네 구의 시체가 뒹굴고, 피비린내를 맡은 까마귀떼가산 사람들이 물러가기를 기다리며 주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백수노계였습니다. #4245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6- 07/31 16:14 261 line 4. 강호무상(江湖無常) "강호가 도데체 무엇이길레... ..." 객잔에 돌아온 후, 모진위는 저녁수련마저도 잊어버린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설레 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하상곤이 검을 닦던 손을 멈추고, 모진위를 바라보았다. "나쁜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관청의 나으리들이 벌을 줄텐데, 왜 윤대협은 그 걸 마다하고 강호인이 되어야 했을까요? 아저씨, 도데체 강호가 뭔가요?" 잠시 모진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검을 문지르며 하상곤은 대답했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생각해 볼 문제로구나. 지금은 저녁단련을 해야 할 때지 그런거 물어 볼 때는 아닌 것 같구나. 냉큼 나서거라." 모진위가 연습하러 나가자, 하상곤은 하던 일을 멈추고, 타오르는 등심지를 바 라보았다. '강호가 도데체 뭐냐고... ...?' 그건 하상곤이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돌아오던 날, 어느 노승에게 했던 질문 이었다. 하상곤이 관일점홍(貫日點紅)을 살해한 이유는 단 하나, 그가 하상곤의 아버지 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관일점홍이 그의 아버지를 죽인 이유도 오직 하나,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강호라는데가 그런 곳이었다. 누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죽은 자의 연자(緣者)는 죽인 자에게 죽음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나서고, 그 아들이 죽으면 그 손자가 나선다. 그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자 자손손 끊임없이 계속된다. 쌍방이 그렇게 죽고 죽여야 한다. 강호가 그런 곳이었다. 강호인은 무엇보다도 명예를 중시하였고, 그 명예의 으 뜸은 부모의 피맺힌 원한을 복수하는 것이었다. 속으로는 재물에 대한 욕심, 색 정(色情)따위도 있을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엄연히 명예다. 그러나 하상곤의 아버지가 관일점홍의 아버지를 죽인 이유는 그의 아버지를 관일점홍의 조부가 죽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부친은 젊은 날, 수련차 강호를 유람할 적에 절강성(浙江省)에 한동안 머 무르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때 관일점홍의 부친을 살해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절강성일대에서는 제법 영웅호한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 데, 어느날 자신에 대한 묘한 헛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소문의 진 원지를 추적해 보고는 항주(抗州)에서 행세깨나 하는 어느 무림고수의 소행으 로 단정지었다. 아버지는 그 무림고수를 찾아갔다. 그 무림고수는 자신이 헛소문을 퍼드렸다는 것이야말로 헛소문이라고 콧방귀 를 뀌였고, 그것이 헛소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비무를 받아들였다. 아버 지는 물론 자신에 대한 소문이 헛소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위해 비무를 청하였 다. 아버지는 그 비무에서 승리하였고, 자신에 대한 소문이 헛소문이라는 것을 증 명했으며, 그 헛소문을 퍼트린 자를 처단하고 만 것이었다. 강호라는 데가 그런 곳이었다. 옳고 그름이 분명치 않은 시비가 발생하거나, 임자가 분명치 않은 물건이 나타났을 때, 싸워서 이기면 옳은 것이오, 주인이 었다. 그 고수가 진짜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지 그리고 그 소문이 진실이었는 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아버지는 다시 영웅호한임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강호는 그런 곳이었다. 겉으로는 강호협객이니, 정인군자니 하여도 알고보면 속으로는 그저 무공이 강한 자가 최고였다. "나는 상산검객(霜山劍客) 하안청(賀岸靑)이라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협객의 도리에 맞게 그의 아내와 아들에게 찾아가 자신의 출신내력 과 비무를 청해서 그를 죽게 한 이유를 당당하게 설명하고, 이의가 있어서 복수 를 청한다면 언제든지 받아줄 것을 약속하고 그 곳을 떠났다고 한다. 하상곤이 이러한 일화를 아버지에게 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후에 그의 아버지 가 고향인, 사천성 금사강으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하상곤을 낳고, 하상곤이 열 네 살이 되던 어느 날 밤, 한 사나이로부터 들어서 알게 된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빛을 꿰뚫을 정도로 빠른 데다가 단 일검으로 상대의 사혈(死穴)을 찍어 붉은 점하나 만을 남길 정도로 정확한 검법을 구사한다하여 강호에서는 관일점홍(貫日點紅)이라고 불리우는 자였는데, 그 사내가 자신의 부친이 죽은 이유를 하상곤에게 전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사내는 하상곤에게 협객의 도리에 맞게 정정당당하게 자신이 관일점 홍이라는 것을 밝혔고, 언제든지 복수를 하려 온다면 받아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그때가 마침 보름무렵이라 달빛이 무척이나 밝았는데, 사내의 검이 마치 달빛 을 가른 듯 느껴졌고, 그 검을 쥔 손등에는 열십자의 붉은 검흔(劍痕)이 있어서 어린 하상곤은 그후로도 한동안 그 사내의 별호(別號)가 관월십홍(貫月十紅)이 라고 착각하곤 하였었다. 그 날 밤, 아버지는 가슴에 새겨진 붉은 점 때문에 죽고 말았다. 십년의 세월이 흐르고, 하상곤도 드디어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무찌르기 위해 서 강호에 출도하였다. 하상곤은 강호가 정해준 숙명의 길을 걸어야 했다. 강호 는 그가 복수를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원한이란 것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재촉할 뿐이었다. 몇년 동안 강호를 전전하고도 하상곤은 관일점홍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삼 년 전만 해도 그의 행적이 있었으나, 언제부터인가 그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이었 다. 하상곤이 사내의 마지막종적을 쫑아 산서성(山西省)의 어느 산을 넘고 있을 때였다. 깊은 산중이었는데도, 사람이 살고있어 밭을 일구고 있었다. 하상곤은 고갯마루에서 잠시 땀을 식히던 참에 밭을 가는 중년사내를 지켜보았다. 중년촌부는 아주 편안해보였다. 이 더운 날, 땀을 뻘뻘 흘리며 밭을 가는 사람 이 왜 고생스러워 보이지않고 편안해 보이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하상곤 의 뇌리를 스쳤다. 원수를 찾아 헤매다 너무 지쳐서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 기도 했지만, 그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하루 두끼도 먹기 힘들 어 굶기를 밥먹듯이 하고, 온갖 세파에 시달리는 하류층민들을 보고 초라하고 불쌍하다는 생각은 할지언정, 그들의 생활이 편안해 보인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촌부가 잠시 허리를 피다가 하상곤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 다. 하상곤은 그제서야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속에서 보았던 하상곤에게는 너무도 익숙하 기만 한 그 눈빛, 그 이글거리는 탐욕의 빛이 없었다. 그 촌부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의 평화로운 미소를 보고있자니 하상곤 자신도 편안해지 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상곤도 얼떨결에 손을 흔들었다. 촌부가 무심코 비탈아래를 바라보고는 갑자기 그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상곤이 고개를 돌리니 아래쪽에서 가냘프디 가냘픈 여인이 커다란 대바구니 를 옆에 끼고 힘겹게 고개를 오르고 있었다. 촌부는 얼른 달려가서 여인에게 꾸짓는 듯한 표정으로 무어라 하면서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여인마 저 부축하더니 평평한 구석자리로 데려가 자리에 앉혔다. 여인의 얼굴에는 병 색이 그득하였다. 아마 저 농부의 아내이리라. 여인이 대바구니에서 주섬 주섬 그릇들을 꺼내놓는 동안에도 사내는 여전히 불만서린 표정으로 툴툴대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를 마주보는 두사람의 눈빛에 는 따듯한 정감이 넘쳐나고 있었다. 물이 담긴 그릇을 받아들던 사내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하상곤쪽으로 돌아서 서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였다. 그들의 소박한 점심식사에 하상곤을 청하려는 것이었다. 저들의 가난한 곡식창고를 자신까지 축낼 수야 없다는 생각에 길을 재촉하려 발길을 돌리던 하상곤의 눈길이 문득 사내의 손등에 고정되었다. 거듭 손짓을 하던 사내가 이제는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오는 동안에도 내내 사내의 손등만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손등에는 희미하게 십자모양의 흉터가 있었다. 사내가 다가 올수록 점차 뚜렷해지는 그 상흔은 세월이 흘러 무디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예리한 자국으로 검상이 분명하였다. "대협, 대협께서 드시기에 형편없는 음식이나, 근처에는 인가도 없고하니 마음 이 내키시지 않더라도 요기하는 셈치시고..." 초라한 농부의 사심없는 미소와 표정뒤에는 하상곤이 지난 십여년동안 단 한 번도 잊을 수 없었던 어떤 젊은 무림인의 살기어린 표정이 겹쳐 지나갔다. 하상곤이 억지로 싸늘한 어조를 끌어내며 말했다. "관일점홍의 명성이 종적도 없이 사라져서 몇년 동안 무던히도 애를 먹었소." 다감했던 농부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강랑(江郞), 천첩의 솜씨가 보잘 것 없음을 잘 아시면서... 어서 모시세요. 그 나마 식어버리기까지 하면..." 기다리다 못한 그의 아내가 부끄러운 듯 소근거렸다. 사내가 참담한 표정으로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가 흠짓 깨어났다. "강호의 기억을 잊은지 오랜지라 실례를하는구려. 존명대성(尊性大名)을 깨우 쳐 주셔야겠소." "십삼년전, 사천성 금사강변의 하가(賀家)를 방문한 적이 있을꺼요." 사내의 얼굴이 이제 체념으로 물들어갔다. 그 사내는 관일점홍이었던 것이다. "여보... ...?" 관일점홍의 아내가 그의 굳은 자세에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나보다. "시간을 좀 주시겠소?" 관일점홍이 부탁했고, 하상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 귀인께서는 시급한 중대사가 있으신가 보오." 관일점홍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아내에게 말했다. "제 남편이 귀하신 분께 무례한 청을 드렸군요. 소녀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고개넘어 좌측으로 보면 죽림(竹林)이 있소이다." 관일점홍이 소리를 죽여 소근거리고, 돌아서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대나무잎들이 바람에 서걱거렸다. 멀리서 아직도 잠 못 이룬 잔나비들의 울음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왔다. 하상곤은 그가 지나온 각고의 세월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허탈해졌다. 십삼년 을 다지고 다진 복수였지만, 전혀 후련한 것도, 개운한 것도 없었다. 사실을 말 하자면 오히려 가슴이 답답하였다. 바람에 대나무잎이 서걱거렸고, 하상곤 앞에 쓰러져 있는 관일점홍의 답답한 숨소리도 서걱거렸다. 관일점홍은 더 이상 달빛을 가를 정도로 빠르지도 않았고, 하상곤의 심장에 붉 은 점을 만들 정도로 예리하지도 않았다. 그의 검에는 일푼 살기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그렇게 검을 영 놓아버린거요. 언젠가 이리 될 줄도 몰랐던거요?" 하상곤은 비웃으려했다. 아니, 비웃고 싶었다. 하상곤으로서는 한때는 당당했던 무사가 강호를 버리고, 촌무지렁이로 살아간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강호에서는 무공이 폐지된 자들도 이렇게 벌레처럼 비참하게 사느니 그대로 자결해버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왠일인지 하상곤은 비웃지 못하 고 있었다. "후회하지 않네. 내가 정작 후회하는 건 강호를 떠난게아니라, 강호에 몸을 담 았던 거야. 이를테면, 자네 아버지를 죽게 만든 일 같은 것들... 쿨럭." 관일점홍이 핏덩이를 한 모금 토해내었다. 하상곤은 고통조차 못 느끼는지 고요하게 가라앉은 피맺힌 원수의 눈빛을 바 라보며, 날이 잘 선 검처럼 살기가 찌를 듯 했던 젊은 날의 관일점홍의 눈빛을 회상해보았다. 하상곤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사내의 과거와 현재였 다. 하상곤이 무너지듯 대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으며 물었다. "얘기나 좀 해보시구려. 어쩌다 그리 된거요?" "삼년전 만해도 여전히 피냄새를 쫓아다니는 강호의 이리같은 신세였지. 저 고 개너머 마을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기 까지는." 관일점홍이 스르르 눈을 감고 무슨 좋은 냄새라도 맡듯이 기분좋은 표정으로 정성스럽게 숨을 들이쉬었다. "나도 원래 아녀자란건 그저 스쳐가는 바람만도 못하게 여겼지. 내자(內者)를 만나기 전까지는... ..." "허어, 절강성의 일대호걸께서 사랑이라도 하게 되었단 말이요?" 하상곤이 짐짓 콧방귀를 뀌고 내뱉듯이 비꼬아 주었다. 결국 같잖은 사랑타령 이나 들어주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관일점홍이 힘겹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는 잔잔하게 미소지었다. "나도 자네 같앴지. 사랑따위는 없다고 생각했지. 귀신이나... 쿨럭... 유령 같은 거처럼...쿨럭." 각혈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사랑이란 강호의 뒷골목을 떠도는 유령같은거라서 봤다고 떠드는 책벌레들은 많아도 실제로 데려다 보여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 아내를 만나고 나서야 알았지. 그건 누가 설명해줄 수도, 보여줄 수도 없다는 걸. 느껴보지 않고는 그 게 무엇인지 조차 알 수 없다는 걸." 하상곤이 벌떡 일어나서 검을 고쳐잡았다. 그는 그런 이야기나 들어줄 정도로 한심한 무림인은 아니었다. 정신이 건전한 강호의 협객이라면 그런 뜬 구름잡 는 소리에 귀를 기우리느니 차라리 한시라도 빨리 숨을 끊어주어 고통을 줄여 주는 것이 옳바른 처사라고 생각하였다. 관일점홍이 급하게 숨을 고르고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네. 아내는 나도 모르게 임신을 했지. 내가 그걸 반대했었지. 어지간 히도 병약한 몸이라 애를 낳을 수가 없거든. 출산해내기도 어렵지만, 어찌 어찌 그리되어도 아내는 십중팔구 견디지 못하고 죽을 거라더군. 제발 내아내에게..." 하상곤의 검이 날았고, 관일점홍은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그래도 그 는 하상곤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으리라 믿고, 안도하며 죽었다. 물론, 하상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그의 아내가 충격을 받을테니, 자신의 죽음을 감춰 달라는 것일거다. 그러나 하상곤은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그의 아내에게 찾아갔다. 어찌 타락하여 무사의 정신인 꺽인 낙오자의 부탁에 따를 것인가? 강호의 협 객으로서 어찌 보복을 두려워하여 핑계를 대고 내력을 숨길 것인가? 강호협객의 도리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출신내력을 밝히고, 복수를 허락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상곤이 그의 부친이 죽던 날밤, 사건의 자초지종을 말해주 던 관일점홍 앞에서 자기도 원수의 자식앞에서 그렇게 해주리라 맹세하고 또 맹세했던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관일점홍의 아내는 털석 주저앉았다. 한참 후, 그녀는 흐느낌을 삭히느라 가늘 게 입술을 떨며 말했다. "소녀, 비천한 출생이라 분간이 없으니 하대인의 가르침에 따르겠습니다. 하오 나, 한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대협의 존친(尊親)들께 꼭 한 말씀만 해주십 시요. 입에 담기도 황송한 망언인 줄은 알지만 소녀, 황망중이오니 대인께서 은 혜를 베푸시어 아량으로 들어주시기바랍니다." 그녀가 말을 멈추고 방울 방울 이슬이 맺힌 눈동자로 하상곤을 애절하게 바라 보았다. "부인께서는 게의치 말고 말씀하시요. 이 마당에 못할 말이 뭐가 있겠소." "하대협이 혹여... ...만에 하나라도... ...비명에 돌아가시게 될 경우, 그것은 제 자 식의 소행이 아님을 미리 대인의 존친들께 분명하게 당부해주십시요." "... ..." "소녀의 바깥양반은 지병으로 세상을 뜬 것이지요. 제자식은 그리 알 것입니 다. 그리고 제자식은 절대로 강호인으로 키우지 않겠습니다. 하대인이나 하대인 의 영식(令息)에게 죽음을 당하도록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의 바깥양반은 지 병으로 돌아가신게지요. 잊지 마시고 꼭 그리 말씀해주십시요. 그리만 해주신다 면, 저승에서도 바깥양반과 함께 대인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겠사옵니다." "복수를 원치 않는다는 말씀이시요?" "어리석은 아낙네의 속좁은 소견으로는 대인의 영식에게나 제 자식의 자식에 게나 누군가에대한 원한과 증오보다는 부친의 사랑을 물려주는 것이 죄업만은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제 남편의 시신을 거두워야겠으니, 이만 물러나야겠습니다. 실례를 용서해 주 십시요." 그녀는 하얀 달빛에 휘미하게 흐느적 거리며, 휘적 휘적 걸어서 고개너머로 사 라졌다. '사랑은 유령같은 거라고 했던가?' 하상곤이 머리가 풀려 흩날리는 줄도 모르고 달빛속을 걸어가는 그녀를 보며 엉뚱한 생각을 했다. 하상곤은 밤새 미친사람처럼 산속을 헤매었다. 살인과 피냄새로 끊어올랐던 광분도 이미 진정되었지만, 하상곤의 머리속은 풀어진 실타래처럼 엉켜서 복잡 하기만 하였다. 미칠 것만 같았다. 먼동이 틀 무렵, 하상곤이 풍경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았다. 계곡을 면한 산기슭에는 작은 암자가 있었고, 허름한 노승이 앞뜰을 쓸고있었다. 노승이 하상곤에게 편한 웃음을 보내주었다. 하상곤은 노승의 따스한 눈빛을 보고 관일점홍을 떠올렸다. 하상곤이 급히 다가가서 관일점홍에게라도 따지듯 노승에게 물었다. "스님, 도데체 강호란 무엇입니까?" 노승이 말하기를, 불가의 이야기들을 엮어놓은 책에 나오는 이야기중에 하나라 고했다. 개울가에서 개구리 한마리가 놀고 있는데, 숲속에서 갑자기 전갈이 튀어나왔 다. 전갈에게는 급히 개울을 건너야할 사정이 있었다. 전갈이 겁에 질려 벌벌떠 는 개구리를 다구쳤다. 자신을 태우고 개울을 건너게 해준다면 살려줄 것이고, 아니면 독침을 쏘아서 죽여버리겠다고. 개구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지라 전갈을 등에 태우고 개울을 헤엄치기 시작 했다. 그 때, 급한 물결이 닥쳐와, 물살이 개구리의 등위로 넘쳐왔다. 전갈이 '움 찔'하고 놀래서 개구리의 등에 독침을 찌르고 말았다. 개구리가 죽어가며 물었다. "전갈아, 전갈아! 나를 죽이면 너도 죽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 왜 내게 독침을 찔렀니?" 전갈이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서글프게 대답했다. "두려워서 나도 모르게 찌르고 말았어. 미안해. 어쩔 수 없었어. 나는 원래 그 렇게 생겨먹은 놈이거든." 이런 이야기였다. 노승이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강호가 그렇지요." 백수노계였습니다. #4384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7- 08/23 01:51 453 line 모진위는 용무관밖의 세상과 교류가 거의 없는 아이였다. 면식이 있는 사람도 대부분 용무관주변이 고작이었다. 대부분이라고 할 것도 없이, 단 한 사람을 빼 놓고는 용무관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스승, 도학정은 하상곤 이 그를 용무관에 데려온 사람이라고 했지만, 모진위는 하상곤조차도 용무관에 서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그의 기억속에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긴 마찬가지였 다. 용무관이외의 곳에서 그가 기억하는 사람은 오직 한사람이었다. 이십여일간의 긴여정을 마치고, 산서성 남서지역 황토구릉지대에 도착했을 때, 모진위는 그의 기억에 남아있는 유일한 바깥세상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노인의 이름은 황경이라고 했다. 모진위는 나이가 들어감에따라 자기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세상돌아가는 것을 하나씩 이해하게 되면서, 그 만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늘어갔다. 남들에게는 낳아준 부모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부모란 것을 모르게 되었 고, 사람들은 제가끔 가야할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행로가 어디 인지를 모르게 되었다. 대개 사소한 것들은 그의 스승 도학정에게 물어서 알게 되었지만, 정작 중요한 것들의 대부분은 그의 스승조차도 의문을 풀어줄 수 없 었던 것이다. 모진위는 풀 수 없는 의문이 생길 적마다, 언제나 황경의 모습을 떠올리곤 하 였다. 황경이라면 그 질문들에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모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 자신이 왜 부모가 아닌 황경과 살아야 했으며, 용무관으로 보내졌는지,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 황경(黃敬)은 네살무렵에 비해서도 터무니없이 비참한 몰골로 변한, 세파의 모 진 물살로 말미암아 어둡고 캄캄한자기만의 세계속으로 숨어버린, 불쌍한 어린 영혼을 보았다. 이미 예견한 일이긴 하였지만, 막상 이렇게 모진위의 감정마저 상실한, 무표정한 모습을 보고있자니 황경은 가슴이 아팠다. 하상곤이라는 젊은이가 한 여인을 이끌고, 자신이 머물던 무학산의 깊은 계곡 을 찾아온 것은 벌써 십일년전의 일이다. 그들이 자신을 방문하게된 이유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하상곤의 품에 안겨 온 여인은 병색이 완연하였는데, 속세를 떠나 숨어사는 자신을 찾아올 정도면, 어지간해서는 고치기 어려운 병이란 것을 묻지않고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 다. 염로선지(閻怒善指)황경은 강호에서 손꼽히는 명의(名醫)였다. '염라대왕도 노 하게 하는 착한 손가락'이라는 그의 대단한 별호는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강호에는 지법(指法)과 점혈법(點穴法)이 뛰어난 고수들이 있어서, 추궁과혈(추 궁과혈)의 수법만으로도 내상을 치료하는 경지에 이른 고인들도 있다고 하는데, 황경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황경은 원래가 침술의 대가인데다가, 훌륭한 지공(指功)까지 익히고 있어서, 손가락에서 나오는 기운만으로도 병자를 치료하는 경지에 이르렀는데, 그로 인 해서 내상의 치료에 있어서는 가히 무림의 일절(一絶)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황경이 살펴보니, 여인의 상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공연히 헛수고 하셨구려." 황경은 그들이 자신은 만나려고 얼마나 고생했을 지를 생각하니 안쓰러웠지만, 자신이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상태임을 깨달고 말했다. "소녀의 하잘것 없는 목숨위해 어찌 대인의 존귀한 손을 어지럽히겠습니까? 다만, 이대로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은 자식을 가진 어미로서의 도리가 아니기 에... ..." 하고 여인이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여인은 임신중이었다. "... ...네 자당(慈堂)께서는 그렇게 네가 태어나자마자 기력이 쇠하여 돌아가시 고 말았지. 알겠느냐?" 모진위가 다시 물었다. "그럼, 아버지는요?" "흐음. 이 할애비도 네 부친을 뵌 적은 없단다." 하고 반쯤은 허옇게 변한 수 염을 쓰다듬으며, 황경이 말을 이었다. "존함이 모중강(毛中江)이라시던가... ...어떻든 선친께서는 네가 태어나기 반년 전쯤 지병으로 돌아가셨다지. 아마... 그건 나중에 하(賀)아저씨께 여쭈어 보거 라. 하아저씨는 선친과 왕래가 있었을테니까." 모진위는 황경의 자상한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황 경의 인자한 그늘아래서 지냈던 무학산에서의 네살까지가 얼마나 행복한 시절 이었는지, 용무관에서의 무수한 고난들이 너무도 분명하게 가르쳐주었다. 모진위는 그 동안, 한 번도 황경을 잊은 적이 없었다. 힘들고 괴로울 때면 항 상 황경을 그리워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보고싶던 황경을 다시 만났을 때, 모진 위는 그에게 달려가서 안기지도, 감격에 겨워 울지도 않았다. 오히려 경계의 기 색으로 황경의 주위를 배회하였다. 세상의 모진 풍파는 모진위를 더 이상 예전 의 다정다감한 꼬마로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이다. "할아버지, 왜 나를 용무관에 보내셨죠? 귀찮아서 버린건가요?" 모진위는 용무관으로 떠나던 날, 할아버지 품에 매달려 안 떨어지려고 버둥거 리던 자신의 어린 모습을 용케도 기억해냈다. "얘야, 너의 고생이 막심했음을 이 할애비가 어찌 모르겠느냐? 하지만 이 늙은 이를 너무 탓하지는 말거라. 너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음이니라." "... ...?" "이 할애비는 참 무능하구나. 네 모친을 구해내지도 못하고. 게다가 너의 모친 의 생명과 맞바꿔서 겨우 살려낸 너의 목숨마저 제대로 돌봐주지 못하는 형편 이니..." 모진위는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바탕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고 했다. 어머니 는 태아인 자신을 살리기위해 밥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숨쉬는 것도 포기해야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무위조식(無爲調息)이라는 호흡법을 익히고 하루 십이 시진 내내 무위호흡을 했다고 한다. 무위조식이란 입이나 코를 통하지않고 오로지 단전과 피부만으로 숨을 쉬는 호흡법이었다. 그것은 뱃속의 태아가 숨쉬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었는데, 그렇게 하므로해서 모진위의 모친은 자신의 신체에서 체독이 전달하는 경로를 피하여 태아에게 필요한 영양소와 진기를 보내고, 태아의 탁기를 모체로 빨아내고, 새 로운 정기를 불어 넣어줄 수 있었다. 황경의 설명으로는 모진위가 세상밖으로 나와서도 자궁속에서처럼 태식호흡 (胎式呼吸)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리하여 모진위에게 최소한의 생존수단을 확 보해주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고 한다. "네 모친은 범인으로서는 전혀 엄두도 낼 수 없는 정성으로 너를 출산하는데 성공하셨지. 그러나 너의 상태는 아무래도 그리 안심할 처지가 아니었단다. 태 어나서도 깨어있는 순간은 하루에 서너 다경도 되지 않았지. 하루중에 절반은 잠을 자고, 절반은 숨이 모자라 항상 무위조식으로 호흡을 보충하는 형편이었 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질식사하는 위험에 처하고는 했단다." 황경은 그 당시를 회상해보았다. 호흡기능조차 시원치않은 아이가 섭식기능인 들 제대로 될 까닭이 없었다. 우유나 양젖조차 소화시키지 못해서 황경은 복령 이라는 흔치않은 약재를 구해서 그것을 끓인 후, 표면에 뜨는 끈끈한 액체로 모 진위를 간신히 기아에서 구해내는 지경이었다. 모진위는 그 구하기 힘든 복령을 거의 주식으로 입에 달고 살았다. 황경과 하 상곤은 모진위에게 그의 체질을 보완하는데는 꼭 필요한 복령과 기타 영약들을 대주느라 무던히도 고생을 해야했다. 복령은 부러져서 고사한 소나무뿌리에서 자라는 일종의 균(菌)으로 이루워진 회색 덩어리의 영약을 말한다. 수령이 수백년에 이르는 소나무가 몸체를 잃어 버리면 뿌리주변에 양분이 고이게 된다. 그러면 균이 생성되고, 덩어리를 이루 는데, 상당한 세월이 흘러야 덩어리가 형성되므로 그리 흔한 약재라고는 할 수 없었다. 복령은 몸이 가벼워지고, 원기가 왕성하게 해주는 효능이 있다. 내공의 기초가 있는 무림인이 장복한다면, 내공이 증진되고, 특히 몸을 가볍게 하는 성 분때문에 경공에는 대단한 효과를 얻는다. 자신의 몸을 추스리기에도 벅찬 모 진위에게는 꼭 필요한 보약이었다. "그럭저럭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그래도 문제가 끝난 건 아니었지. 이 할애비 는 알고 있었다. 너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점차 신체의 기능이 약화되다가 결국 은 힘이 딸려 숨쉬기도 힘들어 머지않아 죽게 되리란 것을. 그래서 용무권을 생각하게 된거야." 황경이 용무권의 숨은 효능을 알고 있었던 것은 모진위에게는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었다. 용무권은 군문(軍門)에서 전해지는 권법으로 강호에는 전혀 알려지 지 않은 무공류였다. 또한, 도학정이 군문을 나와 권법도장을 차린 것도 모진위 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강호에는 용무권을 가르치는 사람이 전무했을 터이고, 게다가 도학정은 실전능력은 평범한 수준에 불과하지만, 용무 권을 누군가에게 가르치기에는 최고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황경이 용무권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까닭은 황경의 사조(師祖)가 용무권을 탄생시킨 일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개국(開國)초기의 통치자라면 대개가 그렇듯 이 미약한 황권을 보호하기 위해 태조는 친위대의 전력증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 태조는 당시의 손꼽히는 무림고수이기도 했던 대교두(大 敎頭) 오추백(吳秋白)을 불러 강호의 무공을 토대로 군대에 맞는 새로운 무공의 창안을 지시하였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용무권이었는데, 당시 강호의 손꼽히는 명숙(名宿)들인 소 림(小林)의 공경대사(空耕大師)와 무당(巫當)의 진허진인(盡虛眞人), 그리고 황 경의 사조로서 당대 최고의 명의인, 의선(醫仙)이 오추백대교두와 머리를 맞대 고, 최고의 노력을 쏟아부은 결과였다. 하지만 용무권은 적을 살상하는 능력배양이라는 당초의 황제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권법이 되어버렸다. 고도로 정신수양을 쌓은, 신선의 경지에 다다 른 강호의 명사들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회합은 살법(殺 法)이 아닌, 활법(活法)으로서의 무공의 정수를 집대성하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 문이었다. 불가(佛家)의 무공이 심신을 강건하게하는데 그 목적이 있고, 도가(道家)의 수 행은 내기(內氣)을 청결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잠재력을 극대화하 여 생존력을 키우는 것이 군문(軍門)의 숨겨진 비술(秘傳)이었다. 게다가 의술 (醫術)의 도리가 사람을 살리는데 있고 보면 이들 네가지의 정수가 합해졌으니 용무권이 활인무공(活人武功)이 되버린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사문의 내력에 기인하여 활법으로써의 용무권을 알고 있었던 황경으로서는 위 기에 처한 모진위의 생사를 용무권에 맡기기로 결심하고, 하상곤으로 하여금 수 소문을 하게 하였다. 그렇게해서 모진위는 용무관에 의탁하게 된 것이었다. 황경이 이것 저것 모진위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동안, 어느 새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황경은 고민에 잠겨들었다. 묻는대로 대답은 해주었지만, 생각이 짧고, 단순한 어린아이에게 그 것은 복잡함만 가중시켜줄 뿐, 그다지 도움이 되지않고 있음을 황경은 알고있었다. 겨우 절반 정도의 성공가능성으로 도움을 청했던 도학정의 용무권은 다행스럽게도 모진위를 살려내었다. 도학정은 예상보다 훌 륭한 선생이었고, 곧은 성품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황경은 모진위에게 모진위가 처한 현실을 분명하게 알려주기로 결심하였다. 황경은 모진위에게 눕혀 놓고는 옆에 있던 목함을 열었다. 목함에는 길고 짧 은 침들이 들어있었는데, 더러는 금빛으로, 더러는 은빛으로 반짝였다. "자! 이제 무위조식을 행하여 태식호흡에 들어가도록 해보아라. 누워있으니 능 하지는 않겠지만, 이 할애비가 일러주는대로 해보면 되긴 될게다." 황경이 모진위의 상태를 주의깊게 살피며, 도달하는 단계마다 알맞은 구결을 알려주어 모진위를 보다 높은 차원의 무위조식으로 이끌어 주었다. "지금 설명한 것들을 잘 새겨두면, 차후엔 수면중에도 태식호흡을 할 수 있을 테니, 열심히 수련해 보거라. 체질을 돌보는데 아주 도움이 될 터이다." 삼푼정도는 아직도 코와 입으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모진위가 어느 정 도 피부와 단전으로 숨을 쉬는 상태로 돌입하자, 황경은 정좌를 하고, 내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황경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손가락 끝으로 맑은 정기가 고 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경은 감았던 눈을 뜨고, 목함에 손을 뻗어 침 하나를 집어들었다. 황경의 치켜떠진 눈빛은 터질듯한 긴장으로 엄숙함이 그득하였다. 황경이 빠른 속도로 모진위의 경혈(經穴)에 침을 꽂아나가기 시작했다. 백회혈(百會穴), 상성혈(上星穴), 인당혈(印堂穴)... ... 처음에는 머리끝에서 부터 내려왔지만, 갑자기 방향을 바꿔서 엄지 손가락의 소상혈(少商穴)로부터 연달아 손가락끝에서 마디로, 다시 발가락으로 옮겨갔다. 일반적인 경로에 따른 순서는 아니었다. 모진위의 신체내부는 애초에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에서 시작하여 십이경맥(十 二經脈)을 순환하고, 다시 폐로 돌아가 상향하다가 백회혈에서 임독양맥(任督兩 脈)으로 갈라지는 십사경의 체계가 질서를 잡지 못했다. 모진위에게는 십이경 맥, 십오낙맥(十五絡脈), 십이경별(十二經別), 기경 팔맥(奇經八脈)따위의 기의 순환체계가 여기 저기 끊겨 버린 것이었다. 다만, 황경에 의해 막혀있던 기맥중, 자신의 의술로 가능한 가느다란 세락(細絡)들을 연결하여, 순환의 순서와 무관 하지만, 전체의 경락이 단전으로 통하는 길만 간신히 확보한 상태였다. 모진위 는 그저 피부에 근접한, 밖으로 통하는 혈이란 혈은 모두 동원하여 기를 빨아드 리고, 극히 미약한 선천진기의 힘으로 간신히 신체 각부에 기가 공급되도록 할 뿐이었다. 침은 가장자리부터 주위를 둘러쌓며 단전으로 좁혀오고 있었다. 모진위의 전 신에 침이 빽빽히 꽂히고, 마지막으로 단전 바로 밑의 관원혈(關元穴)에 백팔 번째의 침이 위치하자, 황경은 손을 멈추었다. 황경이 주입한 진기를 모진위가 수면상태에서의 무위조식으로 받아드렸고, 황 경은 그 진기들이 단전에 고이도록 침으로써 갈무리 한 것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모진위는 새로운 세계와 만났다. 생전 처음들어보는 아름다운 음률들이 그의 귓전에 맴돌았고, 창가로 스미는 아침햇살은 더할 나위없이 찬란 하였고, 뺨을 스치는 바람이 향기로웠으며, 사지가 하늘을 나를듯 가벼웠고, 가 슴은 내리누르던 돌덩이라고 치워진 양 상쾌하였다.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모진위는 허둥거리며 황경을 찾아나섰다. "아무소리도 묻지마라. 오늘은 그냥 아무거나 하며 지내도 좋다. 내일 다시 얘 기하자구나." 이 놀라운 변화에 대해 궁금해하는 모진위에게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귀찮다는 듯 내뱉은 황경의 대답이었다. 뒷짐을 지고, 황토구릉을 내려가던 황경이 문득 생각난 듯 뒤돌아서서 빙긋 웃 으며 말했다. "참! 기왕에 물은 것이니 한 가지만 대답해주마. 네녀석이 생전 처음 들어본다 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음률은 뒷뜰의 나무밑으로 가면 아직도 실컷 들을 수 있 을게다. 그건 그 나무가지위에서 우는 새소리란다. 저 놈들은 매일아침 저렇게 시끄럽게 소란을 떨지." 세상이 변해버렸다. 모진위는 모든 것이 신비롭기만 했다. 침묵하기만 했던 많 은 것들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시냇물은 귀엽게 졸졸거리고, 바람은 부드럽 게 노래하고, 들판은 다정하게 술렁거렸다. 숨어있던 많은 것들이 그를 찾아왔 다. 그저 칙칙하기만 하던 그 꽃이란 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였고, 아무것 도 보이지 않던 저 먼 곳에는 산색이 장엄하였다. 모진위는 마음이 상쾌하고, 원기왕성해졌다. 그저 생각만 해도 걸음이 저절로 옮겨졌다. 그저 생각만해도 젓가락이 움직였다. 평소처럼 그렇게 힘을 주었다가 는 엄청난 달음박질이 되어 벽에다 머리를 쳐박거나, 젓가락의 만두가 천장으로 날아가버릴 지경이었다. 하물며 전력을 기울인 주먹질은 어떻고, 발길질은 어떻 겠는가? 모진위가 출운용무를 시전해보았다. 모진위는 이것이 진정 자신의 권법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일권은 태산이라도 무너뜨릴정도로 강맹하였고, 그의 행보는 제비가 물을 차듯이 날렵하였다. 모진위는 그의 출운용무속으로 무형의 상대를 다시 불러내었다. 그리고 '이번 만은'하는 자신감으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라도 벌일 듯 달려들었다. 그 러나 그가 시전하는 출운용무를 타고 흐르는 무형의 기운 또한, 모진위가 강해 진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강해져 있었다. 모진위가 전심전력을 다했지만, 도저 히 어찌해볼 재간이 없었다. 모진위가 이길 수 있는 확률은 털끝 만큼도 없었 다. 그러나 모진위는 실망하지 않았다. 실망은 커녕, 온 세상을 얻은 듯한 희열 과 환희를 느꼈다. 그는 마침내 본 것이다. 사부 도학정이 엄청난 중압감으로 자신을 몰아부치던, 그래서 무의식속에서 조차도 쫑기며 찾아헤메던 그 것의 본모습을 모진위는 자 신의 출운용무와 맞서고 있는 무형의 기운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 것은 모진위 가 지난 칠년간 꿈속에서 조차 수련하던 자신만의 용무권이었다. 바야흐로 모 진위는 더 높은 단계의 용무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잡게 된 것이었는데, 이것은 모진위의 성취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황경조차도 계산에 넣지 않았던 망외의 소득이었다.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모진위는 불행하게도 다시 예전의 세계로 돌아와 있었 다. 새는 더이상 아름답게 지저귀지않았다. 많은 사물들이 다시 침묵하였다. 아 침햇살도 뿌옇고 침침하였다. 부드럽게 살랑이는 바람도, 향기로운 냄새도 없었 다. 많은 사물들이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어땠느냐? 진위야!" "할아버지... ..." 모진위가 황경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모진위는 어지간해서는 감정표 현이 없는 아이였다. 어떤 때는 아예 감정이란 것이 없는 아이처럼느껴졌다. 그 러나 황경은 보았다. 하루동안의 커다란 변화에 혼란속에 빠져버린 모진위의 온갖 감정에 휘싸인 눈동자를. 황경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얘야, 네가 튼튼한 신체를 타고났다면, 너도 보통사람들처럼 그렇게 고통없이 지낼 수 있었을게다." 모진위는 엄청난 충격에 몸을 떨었다. 사람들은 그런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 었다. 자기와는 전혀 다르게. 밝고, 빛나는 아름다운 세상에서... ... "나는 몰랐어요. 나는 몰랐어요." 모진위는 자신이 살아왔던 날들을 되돌아보았다. 모진위는 마음대로 숨쉴 시 간조차도 없었다. 언제나 힘들고 괴롭게 권법단련을 해야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가는 사부 도학정의 매서운 체벌이 뒤따랐다. 다른 아이들은 그렇지 않 았다. 적당히 요령피고, 적당히 한눈 팔고, 또 시간이 되면 집이라는 곳으로 돌 아갔다. 사부의 감시가 없는 그들만의 집으로... 그런데도, 그들의 권법은 모진위 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모진위는 부러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모진위에게 는 그럴 시간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모진위와는 분명히 달랐다. 모진위처럼 흉하게 생긴 아이도, 모 진위처럼 힘이 약한 아이도 없었다. 아이들은 모진위를 경멸하였으며, 심하게 괴롭혔다. 그러나 모진위는 반항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분노해보았자, 슬퍼 해보았자 엄청난 기운만 소비하고, 더 어려워질 뿐이었다. 모진위는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갔다. 어린 모진위로서는 감당 할 수 없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그를 외부와 차단된 내부세계로 쫑아버렸다. 모진위는 그렇게 밖을 향한 감정의 출구를 모두 봉쇄해버리고, 자기만의 누에고 치속으로 도피해버렸다. 그랬던 것이 목선민을 사귀고, 하상곤을 만나고, 황경과 함께했던 자신의 과거 를 되찾으며, 모진위의 단단한 세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막 슬픔, 고통, 증오, 괴로움따위가 새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너무 추워요. 너무 힘들어요. 숨쉬기도 힘들어요. 너무 아파요. 너무 피곤해요. 할아버지, 제발 나 좀 어떻게 해주세요?" "얘야, 그럴 수 없단다. 이 할애비의 능력으로는 어찌 해 볼 재간이 없단다. 너 는 그렇게 살아야 하느니라. 앞으로는 더 고생스럽고, 더 힘들게 살아야 할 것 이다. 그렇지 않으면더 아프고, 더 괴로워질테니까." "그럼, 할아버지는 내가 다른 사람과 틀리다는 걸 왜 알게 했나요? 안그러면 그냥, 이렇게 살텐데, 왜요? 왜 그랬지요?" 대여섯살 무렵에 성장이 멈춰졌던, 모진위의 미숙한 정서중에 먼저 터져나온 것은 증오였다. "할아버지가 미워요." "얘야, 울고 싶거든 울어라. 참을 필요없단다. 여기는 무서워할게 아무 것도 없 잖아. 하아저씨가, 그리고 이 할애비가 지켜주잖니?" 모진위는 참으려했다. 다시 어둡고 답답한 껍질속에 자신을 가두려고 기를 썼 다. 그러나 황경의 인자한 눈빛과 하상곤의 슬픈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뜨거운 무언가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이부춘이 그 나쁜 자식이 미워요. 사부님도 싫어요." 자신을 멸시하던 용무관원들, 그리고 자신에게 온갖 고통을 안겨준 도학정사부 에대한 증오였다. "할아버지도 싫어요. 아저씨도 싫어요." 그리고 자신을 용무관에 보낸 황경도 미워졌다. 하다못해 모진위는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자신을 이렇게 괴로운 세상을 남겨준 그의 모친까지 미워졌다. "다 싫어요. 싫어요." 이제 모진위는 막혔던 뚝이라도 터지듯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모진위의 통곡 은 한 시진 가까히 계속되었고, 결국에는 울다지쳐 그저 컥컥대는 비명으로 변 해있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비명소리조차 잦아들더니, 모진위는 혼절해버리고 말았다. 지나친 정력을 소비하는 격한 감정들이 미약한 모진위의 원기를 탈진 시켜버린 것이다. 하상곤은 당황했지만, 황경은 이미 알고있던 결과이기라도 한 듯 잠잠코 은색 종이에 쌓여져 있는 환약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물이 든 대접에다가 환약을 으 깨어 넣고, 조심스럽게 저었다. 이윽고 대접의 물은 옅은 청색이 도는 걸죽한 액체가 되었다. 황경은 엄지와 중지로 모진위의 식도를 개방하고는 대접을 모진위의 입에 대 고 약물을 모두 부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침통을 꺼내들었다. 모진위의 몸에 설 흔 여섯개의 침을 꽂은 후, 황경은 잠시 모진위의 기색을 살피더니, 재빠르게 여기 저기의 혈도를 주무르거나, 점혈하였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경과한 뒤에, 황경은 침들을 모두 제거하더니 이번에는 칠십이개의 침을 모진위의 요혈에 심었다. 몇 번에 걸쳐 침의 숫자와 경락의 위치를 바꾸어가며 그런 순서를 반복하였다. 그러자 서서히 모진위의 몸이 식 어가기시작했다. 그리고 급기야 전신의 피부가 푸르죽죽하게 변색되어 버렸다. 하상곤이 모진위의 변화에 깜짝놀라서 황경에게 물었다. "노선배님, 이게 어인 까닭이옵니까? 진위를 어떻게 하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애가 죽어가고 있질 않습니까?" 황경이 하상곤에게 고개를 돌리며, 급히 주의의 눈빛을 보냈다. 황경의 전신은 땀으로 범벅이었고, 피로의 기색이 역력하였다. 황경은 한동안 숨을 고르고, 품안에서 작은 옥병을 꺼냈다. 그리고 옥병의 마 개를 열더니, 길다란 금침을 옥병속에 담갔다. 그리고 그 금침으로 모진위의가 슴을 가볍게 찔러나갔다. 황경의 금침이 여러차례 움직이자 모진위의 가슴위에 는 문자로 된 문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신(屍身)을 개방으로 보내 주시요. 개방은 연자(緣者)에게 금 한 냥을 사례할 것이요. 염지(閻指). 문신을 모두 새긴 후, 황경은 계속해서 침술과 점혈법으로 모진위의 전신을 찌 르고 주물렀다. 모진위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전신의 피부가 점차 본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가슴의 문신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탈혼반시법(奪魂半屍法)이라하는 본문의 비전중의 하나이네." "진위의 상세가 그리도 위중하였단 말입니까?" 황경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잠이 든 모진위를 처연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허 허, 위중은 무슨, 그저 한잠 자면 아무렇지 않게 툭툭 털고 일어날 터인데, 탈혼법은 이 녀석의 상세를 치료하는 법이 아니라네. " "그럼, 무슨 연유이옵니까? 노선배께서 보통 고생한 것이 아니신 것같은데." "이제 녀석도 얼마 쯤은 제맘대로 살아봐야겠지. 제나름대로 오기도 생겼을테 니, 여태까지처럼 우리 생각대로 녀석을 좌지우지 하기가 그렇게 녹녹치도 않을 게고... ...한 번 쯤 사람답게 살아보는 것도 좋게구나 싶고." 하상곤은 처음에는 황경의 의도를 알 수는 없어 의아해 했지만, 모진위의 문신 을 보고 대충은 이해할 수 있을 것같았다. 한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는 하지만, 이렇게 평생을 고통속에 살아간다는 것은 모진위에게는 어쩌면 죽는 것보다도 못한 일일지도 모른다. 무공이 패쇄되어 범인으로 돌아간 사람은 내 공을 사용하는 편안함을 잊지못해 삶자체가 지옥처럼 불편해진다. 하물며 모진 위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게다가 모진위는 그나마도 더 악화되지 않도록 죽을 고생을 다하며 신체단련을 하여야 할 것이다. 황경의 생각은 모진위가 점차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갈등이 심해져서 결국은 예상치 못한 함정에 빠질 것을 염려했음이리라. 황경이 모진위에 대한 정이 깊 다고는 해도, 그의 시체를 배려할 정도로 속세의 정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니었 다. 황경의 탈혼법에는 필히 모진위가 장차에 겪을 위험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 책이 숨어있는 것이리라. "그래, 가셨던 일은 어찌되셨나? 적당한 것이 있겠는가?" 한동안 상념에 잠겨있던하상곤은 황경의 난데없는 질문에 잠시 어리벙벙하다 가 질문의 요지를 알아채었다. 모진위는 이제까지 그나마 왕성한 성장기에 있었기에 어느 정도 신체의 유연 성을 유지했지만, 서너살 더 먹는다면 신체발육의 성장세가 위축되고, 그러면 급격하게 신체가 굳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채 이십세도 되 기 전에 기본적인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근골이 경직되어 버릴 것이라는 것 이 황경의 예상이었다. 그래서 모진위는 근골을 유연하게 해주는 특별한 신체 단련을 해야하는데, 강호상의 무공으로는 불가능하였다. 모진위는 내공을 쌓을 수 없는 체질이었고, 유연성을 단련하는 대부분의 무공은 내공을 전제조건으로 연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황경과 하상곤은 궁리끝에 곡예를 하는 무리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곡예에는 인간의 유연성을 밑천으로 하는 신기한 묘기들이 많았는데, 그런 특별한 묘기들 을 익히기 위해서 곡예단에는 나름대로 신체를 유연하게 하는 단련법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예, 비연류(飛燕流)라고 대단히 뛰어난 기초무공이더군요." "하대협, 무공이라고 했는가?" "예, 묘하게도 검협전(劍俠傳)을 극으로 꾸며서 밥을 먹는 유랑패였습니다." "무공이라고는하나, 그래도 곡예단인지라, 강호의 전통적인 방식을 따른 것은 아니더군요. 꼭 내력을 필요로하는 신법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후배가 본 바 로는 제가 아는 강호의 절기들 보다도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문제는..." 하상곤의 망설이는 표정을 보고, 황경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맞장구를 쳐주었 다. "비인부전(比人不傳)이겠군." "예, 그 것도 아주 철저한... 진위의 진퇴(進退)가 만만치 않더군요... 입문도 입 문이지만, 진위를 다시 빼오기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서 철천지 원수가 되는 것 도 각오해야 할 판 입니다." "어떻든, 성사시키는 쪽으로 해보도록 하세. 한 사람을 살리기위해 여러 사람 을 핍박하거나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의 성사여부는 그 아이의 운명에 맡 기기로 하고..." 자기에 대한 표현이 거의 없던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 모진위의 표정은 아주 뚜렷한 감정과 의사를 나타내 주고 있었다. 그 것은 용무관으로 돌아가기 싫다 는 강력한 거부반응이었다. 황경은 모진위의 맞장구를 기다리다가, 설레 설레 고개를 젓고는 모진위가 대 꾸해주리라는기대를 포기하고 다시 설명해나가기 시작했다. 모진위가 용무관 으로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이 할애비의 얘기는 지난 일주야동안 잘 배웠을테니, 이 할애비가 없어도 열 심히 연습하란 게야. 그래서 평상시에도 무위조식으로 태식호흡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네가 살아가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게야. 알아들었느냐?" 모진위는 여전히 대답이 없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황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황 경은 이번에도 대답 듣기를 포기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원화촉발술(源火促發術)은 단 세 번뿐이다. 명심하거라. 세번째로 네 선천진기 를 격발시키고나면, 네 본원진기는 고갈되어 너는 죽고 만다. 촉발술에의해 장 애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네 평소상태보다 서너배는 더 원기 가 강성해질 것이야." 황경은 지난 일주일동안 모진위에게 무위조식의 마지막 단계와 원화촉발법을 전수해 주었다. 원화촉발법은 본원진기를 폭발시켜 잠재력을 끌어내는 비술로 써, 결국은 생명의 진기를 일순간에 고갈시키는 위험하기 이를데 없는 비정상적 인 의술이었다. 물론, 모진위같은 어린애에게 맡기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장난감이었다. 그러나 모진위는 이미 보호자들의 의사에 거스리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돌이킬 수 없 는 사태를 저지를 정도의 의식은 갖춘 나이였다. 황경은 그런 판단으로 세 번 의 촉발술이 모진위에게 세 번의 구명지책이 되기를 바라며, 최후의 방책으로 탈혼반시를 대비해둔 채, 원화촉발술을 전수해주고 만 것이다. 또한, 그 것은 황경으로서는 최악의 경우라도 최소한 삼사년정도는 모진위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보고, 그의 비극적인 인생을 마치게 해주겠다는 작은 사랑 의 표시이기도 했다. 모진위에게는 세번에 걸쳐서 삼사년간은 자신을 불태울 수 있는 본원진기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허어, 녀석, 돌아가기가 그리도 싫더냐? 용무관에서 도학정선생께 어지간히 고생을 한 모양이로구나. 그래도 네 사부를 오해해서는 안되느니라. 영사(令師) 께서는 네 둘도 없는 고마운 은인이시지." 모진위의 얼굴에는 거부반응이 더욱 짙어졌다. "이런 녀석 보게! 잘 들어보아라, 진위야." "... ..." "영사께서 네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인정사정없이 너를 때려주셨지? 그래서 스승을 미워한다면, 너는 배은망덕한 제자로다. 도선생이 어떤 방법으로너를 때리고 벌을 주시던? 한 번 잘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 모진위는 어리둥절하였다. '뭘, 어떻게 때리는가? 그저 그 빌어먹을 '유(柔)'자결의 격만파장(隔曼把掌)으 로 죽어라고 때렸고, 툭하면 반궁마보(反弓馬步)의 자세로 벌을 세웠지.'하고 비 웃으려는데, 모진위의 뇌리에 문득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사부는 언제나 모진위에게 타격을 가할 때에 비룡삼장중의하나인 격만파장(隔 曼把掌)을 등룡육권의 '유(柔)'자결의 내력을 실어 거룡십팔수의 철룡방벽(鐵龍 防壁)의 원리로 격출하였다. 손바닥에 적중당한 반경 한 치내에 있는 혈(穴)이 란 혈은 모조리 들끓게하여 경맥이 대부분 막혀있는 모진위에게는 극심한 고통 이 되었다. 사부는 어떠한 경우라도 똑같은 수법을 사용하였다. "격만파장, 유자결, 철룡방벽... ...어쩌면?" 모진위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래, 격만파장은 휘장 넘어에 있는 것을 잡는다는 말뜻 그대로 외부를 건드 리지 않고, 내부에 자극을 주는 장법이지. 거기에 유자결의 성질을 담아서 사용 한다면, 네 근골에 손상을 주지않고 너의 요혈들을 자극하는 방법이겠지. 철룡 방벽이야 네 쓸데없는 반탄을 피하는 것일테고..." 모진위는 비룡삼장을 배우고 나서야 비로서 도학정이 자기에게 어떤 수법으 로 공격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저 벌을 받지 않으려고, 익히는 데만 급급하여 무심코 생각없이 지나친 부분이 있었다. 그 것은 진기를 주입하 여 경락에 자극을 주는, 내부의 혈들를 단련시키는 내기단련법의 부분이었다. 모진위는 자신은 내공이 없는지라, 그냥 무시해버린 것이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 너의 스승은 너를 얼마나 많이 때려주었느냐? 그래서 너 의 사부는 얼마나 많은 자신의 진기를 너에게 베풀어 주었느냐?" 도학정은 양생을 위한 단련의 일환으로 일종의 추궁과혈법을 사용한 것이었 다. 용무권 특유의 그런 추궁과혈은 시전자의 진기를 상당히 소모시키는 것이 었다. 모진위가 다시 생각해보니, 사부는 벌주는 것조차 오로지 한가지였다. 반궁마 보(反弓馬步). 반궁마보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기는 했지만, 이자세는 다리 와 허리, 그리고 팔을 단련하는 용무권의 기초가 되는 자세로, 많이 하면 할수 록 무공의 근본을 닦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얘야, 네 주변에는 너를 아끼는 사람이 많다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네 어 머니는 너를 세상에 보내주기 위해 죽음보다 더한 고통도 참아내셨지. 네 어머 니는 곡기도 끊으시고, 잠자는 것도 포기하시고, 하다못해 질식해서 죽는 고통 까지 견디어내시며, 오개월의 긴 세월을 참아내셨다." 모부인은 전신의 피와 살이 모두 말라버려 해골에 그저 살가죽만 씌운 금찍한 형상으로 모진위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황경은 세상 의 인연에 연연하지 않는 탈속한 수행자였지만, 모부인의 그런 눈물겨운 정성에 감동하여 흔쾌이 모진위의 일생을 떠맡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이 할애비도 있고, 하상곤 아저씨도 있단다." 모진위는 아무런 말도 하지않았다. 새로운 세상을 본 그날 이후, 모진위 스스 로가 누구에게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예전 처럼 그저 말이 없는 아이로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하상곤의 기억으로도 그날 이후, 모진위가 무언가를 물 어온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제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이런 질문이었는데, 하상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관일점홍이란 명호로 천하에 위명을 떨쳤던 협객이셨지." 백수노계였습니다. #4413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8- 08/29 12:57 311 line 5. 풍운의 용무관 도학정은 출운용무에 열중하고 있는 모진위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하상곤 의 꼬임과 황금 열냥에 대한 욕심으로 고난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렸다. 그 구렁 텅이는 깊고도 깊어서 도학정에게 무려 팔년이라는 세월을 앗아가 버렸다. 그 러나 도학정은 모진위의 수련을 지켜보며 이제 그의 고난도 끝나가고 있음을 직감하였다. 모진위는 용무권의 최고경지에 달하기 위해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가장 어려 운 고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었다. 도학정의 비공식적인 수제자가 드디어 주 변의 기를 의식하기 시작하였다. 자연의 기에 순응하는 것, 그 것은 권법에 있 어서 최고의 경지였다. 그리고 도학정이 보기에 모진위는 이미 용무권의 완성 을 향하여 자신이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도학정이 그렇게 도 일깨워주고자 고심했던, 모진위 자신이 추구해야 하는 용무권의 요체(要體) 를 향해 모진위는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었다. 모진위가 산서성을 다녀온 지 벌써 석달을 넘어섰다. 모진위는 출운용무을 연습하며, 언제부터인가 가상의 적을 불러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출운용무의 동작마다 화답하는 무형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모진위는 그러한 외력에 억지로 맞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 운에 자신을 맡겨버리고, 자신의 동작을 보다 편하게 하였다. 모진위가 아직은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비룡삼장의 마지막인 빙어풍장(憑御風掌)을 이해하는 첩경이었다. 선천적으로 기가 약한 모진위로서는 본능적으로 힘에 의 존하는 것을 회피하게 되고, 미약한 주변의 기에 조차도 예민할 수 밖에 없다보 니, 의외로 기적같이 얻게된 용무권의 심득이었다. 또한, 모진위가 자신의 추구하는 용무권의 이상형을 무형의 기에서 발견한 이 후에는, 자신의 동작을 항상 그것과 비교하며 고쳐나가게 되었다. 도학정의 추 측대로 모진위는 용무권의 극의를 깨달기 위한 올바른 목표를 만난 것이다. 이 모두가 황경을 만나기위한 여행에서 얻은 행운이었다. 도학정은 다가오는 용무관 비무회 때, 모진위에게 대련을 시켜보기로 작정했 다. 산서성을 다녀온 이후로는 하상곤의 요청도 있고해서 일체 모진위의 대련 을 허용치 않았었다. 그러나 모진위가 목표를 달성했는지의 여부는 아무래도 권법, 본연의 모습인 격투에서 정확히 드러나는 것이니 만큼, 도학정은 비무중 에 나타나는 모진위의 용무권을 보고 자신이 진정 하상곤에의해 감당해야했던 그 해묵은 난제를 풀긴 푼 것인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목선민의 불전노승(佛前怒僧)에 모진위는 용각접응(龍角接應)으로 반응하였다. 그러나 주보(朱寶)는 이보(二步)를 후진하여, 튕기듯 잠룡충천(潛龍沖天)으로 반 격하였고, 모진위가 다시 그 것에 대응하여, 석양동몰(夕陽東沒)로 빠지며 우수 로 수비하기로 했다. 목선민은 단지 허리를 숙여서 슬쩍 피하기만 하고 주보를 노려보았다. 주보도 방비를 굳건히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목선민의 측면으로 이동하였다. 둘은 그렇게 잠시 대치상태를 유지하였다. 물론 대련자들의 초식이 중단되면 모진위도 잠자코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모진위는 가만히 두사람의 동작만을 예의 주시했다. 대련자들이 다시 격투를 벌이자, 모진위도 다시 동작에 따라 일련의 대응수법을 떠올리며, 반응하기 시 작했다. 용무관으로 돌아온 후, 모진위는 한 번도 비무에 참가해본 적이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의 사부가 모진위의 어떠한대련도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그 러나 모진위는 자기나름의 방식으로 격투훈련을 계속해나가고 있었다. 하상곤이 전수해준 생각을 없앤 채, 반사적으로 동작을 일으키는 훈련이었다. 황경을 방문하는 두달 반의 여행동안, 모진위의 반사신경은 착실히 다져졌다. 하상곤은 그 기간 내내 시도 때도 없이 모진위의 감각을 자극하였고, 모진위는 하상곤의 지극한 배려에 따라 착실히 단계를 거치며 반사감각을 성장시켜 나갔 다. 모진위가 용무관에 도착할 즈음에 이르러서는 이미 하상곤이 전혀 예기치 못한 시기에 난감한초식을 보여주어도 모진위가 즉각 수비자세를 취하거나, 반 격을 가하는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용무관에 돌아온 헤어진 후에도 모진위는 훈련을 계속해나갔다. 비록 하상곤 은 떠났지만, 상대는 무궁무진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아 어떤 권법동작이라도 있 으면, 닥치는대로 상대해보았다. 물론, 마음속으로. 오늘같이 비무라도 있는 날 이면, 쌍방의 동작을 모두 상대하였다. 두명을 겹쳐서 응전하느라, 따라잡기 힘 들었지만, 생각해볼 여지가 없으므로 모진위의 연습은 보다 효과가 있었다. "낙엽을 상대해보거라. 도움이 될 것이다." 하상곤은 떠나면서, 모진위에게 혼자서도 육감과 장권(掌拳)의 집중력을 기르 는 훈련을 할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주었다. 모진위는 밤이 되면 열자가 넘는 활엽수 밑으로 갔다. 그 나무가 도장에서는 가장 높다란 나무였기 때문이었다. 그 거목아래서 모진위는 하상곤이 일러준 타법을 연습하였다. 캄캄한 밤중에 떨어지는 낙엽을 하나 정한다. 그리고 그 낙엽을 목표로 원추 를 만들고, 꼭지점을 때린다. 이런 방식이었는데, 시력이 극도로 안 좋은 모진위 로서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하상곤과의 여정내내 나무고리를 손목에 끼는 훈련과 창호지 때리기, 어둠속에서 벽에 그려진 목표점 타격등으로 기초를 닦아 놓았으므로 어렵게나마 수련해갈 수 있었다. 석달정도 꾸준히 나뭇입을 상대하였더니, 이제는 눈을 감고 낙엽이 떨어지는 느낌을 쫑아가다가, 사정거리에 들어왔다고 느껴졌을 때, 눈을 뜨고 목표점을 정확히 타격하는 정도의 실력은 갖추게 되었다. 갑자기 목선민의 보법이 헝글어졌다. 연무장의 바닥에 균열된 틈에 발을 헛디 딘 모양이었다. 주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룡탈광(黃龍脫光)을전개하였다. 시의적절한 공격이었다. 주보는 도장의 수련생중에서도 서너번째에 꼽히는 강 자였다. 물론, 모진위의 머리속에도 멋진 자세의 황룡탈광이 빛을 발하고 있었 다. 다음 순간, 모진위는 바닥을 구르며 주보의 공격을 피해갔지만, 목선민은 당 황하였는지 어리숙하게도 용각접응(龍角接應)으로 주보와 대항하였다. 주보는 침착하게 그대로 기세를 살려 목선민을 압박해 들어갔다. 모진위는 승부가 결정났다고 생각했다. 내리치는 위맹한 기세에 자세도 안정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잡아채는 수법로 맞서려는 것은 목석민이 아무리 강한 힘 을 지니고 있더라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목선민이 상체의 방어를 도외 시하고 주보의 가슴을 파고 드는 순간, 모진위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 달았다. 목선민의 용각접응에는 등룡육권의 '접(接)'자결이 내포되어있었다. 목선민은 용무관에 입문한 지, 이제 일년도 안되었는데, 벌써 등룡육권의 파 (破)자결을 넘어 접자결까지 체득한 것이었다. 그 것은 하루 십이시진내내 한 숨도 쉴 틈없이 고련을 한 모진위가 자그마치 이년을 넘게 수련하고서야 비로 서 달성한 수준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어린 수련생중의 최강자인 이부춘조차 목선민에게 밀리는 형국이라고 했다. 이부춘은 등룡육권의 네번째인 흡(吸)자결 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어린 고수였다. 주보가 나동그라지고 있었다. 모진위도 예상치못한 반격에 별 뾰죽한 대책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모진위는 자신이 나뒹굴기라도 하듯 가슴이 서늘해졌 다. 처참한 기분이었다. 실전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칠년이나 죽을 고생을 한 자 기가 이제 일년밖에 안된 목선민에게 초식의 운용에서조차 지다니. 그러나 모진위의 생각과 달리 모진위의 육신은 아직도 격정의 기류에 휘말려 있었다. 육신의 기류가 잠시후, 냉정을 되찾은 모진위의 정신에도 전해져왔다. 모진위의 육신은 서산일출(西山日出)에 탄(彈)자결의 기운을 발출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 것이라면, 목선민의 '접'자결 조차도 튕겨내는, 모진위가 최소 한 손해는 안보는 수법이었다. 모진위가 당황하여 허둥대는 동안에도 그의 본 능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모진위의 반사감각은 바야흐로 본궤도에 올라서고 있었다. 당당한 목선민과 약간 풀이 죽은 주보가 상호간에 예를 취하고 물러갔다. "다음, 이부춘, 모진위!" 대사형, 나해청이 다음차례의 대련자를 호명하였다. "진위! 무얼 하고 있는게냐?" 어리둥절해있는 모진위를 나해청이 다시 재촉하였다. "예? ...옛." 모진위가 얼결에 대답하고, 대련장 중앙으로 나섰다. 이미 준비하고 있던 이부춘이 음흉하게 웃으며, 포권을 취하였다. 모진위도 얼 결에 화답하였다. 이렇게 용무관 최강의 이부춘과 용무관 최악의 모진위가 벌 이는 대련이 시작되었다. 이부춘의 왼발이 벼락같이 날라들었다. 모진위는 화들짝 놀라며 세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이부춘은 언제 그랬냐싶게 이전의 자세로 돌아가 씩 웃고 있었 다. 그저 장난삼아 왼발을 내밀어 본 모양이었다. 이부춘이 기본적인 방어자세 도 하지 않은 채, 건들건들 모진위의 좌측으로 몸을 움직였다. 반면에 모진위는 극도로 긴장하며 잔뜩 몸이 위축되었다. 하나는 먹이를 앞에 둔 배고픈 사마귀 였고, 다른 하나는 겁에 질린 맛있는 귀뚜라미에 지나지 않았다. 이부춘이 다시 장난이라도 걸 듯 손을 내밀었다. 물론, 모진위는 귀신이라도 만난 강아지마냥, 펄쩍 뛰며 뒤로 달아났다. 이부춘이 어깨를 움찔하며 양손을 넓게 벌리고, '호오'하고 입을 동그랗게 말며 감탄사를 내뱉았다. 여유만만한 자 세였다. 그리고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어슬렁 어슬렁 모진위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모진위는 하염없이 뒤로 도망가기에 바빴다. 이부춘이 다시 성큼 다가섰지만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밀리던 모진위가 왠일 인지 물러서지 않고 멈춰섰다. 이미 관원들이 빙 둘러앉은 구석까지 몰려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던 것이다. 강력한 일장이 모진위의 안면에 작렬하였다. 모진위가 크게 회전하며 바닥에 떨어졌다. 이부춘이 틈을 주지않고 달려들었다. 바닥에 쓰러진 모진위를 짓밟아 버릴 기세였다. 그러나 나해청이 얼른 다가와 이부춘을 끌어 안았다. "이부춘!" 나해청이 엄격한 표정으로 이부춘을 꾸짖으려 하였다. "하지만, 이미 연환식(連換式)이라서요." 쓰러진 상대를 공격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지만, 이부춘은 애초에 이연타를 구사 했다는 주장이었다. 나해청도 흉내일 뿐이지만, 연속기이기는 했기에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이부춘을 연무장의 중앙으로 보냈다. 이부춘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까딱까딱 모진위를 불렀다. 모 진위가 소매로 입술을 닦으며 일어났다. 다시 두 소년을 중앙에 마주세운 나해청이 도학정의 눈치를 살폈다. 도학정이 무언가 한 마디 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도학정은 평소에도 규칙준수를 엄 격한 편이라 관원들의 사소한 잘못에도 불호령을 내리곤 하였다. 그러나 나해 청의 예상과 달리 도학정은 이부춘의 위험한 행동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수염만 쓰다듬고 있었다. 나해청이 대련을 재개시켰다. 도학정은 다른 때와는 달리 오로지 모진위의 무공수준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제법 쓸 만 하군.' 도학정은 약간 흐믓해졌다. 모진위의 얻어맞는 재간이 대단한 수준에 올라있 다는 것이야 도학정도 이미 알고있었지만, 지금의 이 수법은 특히 의미가 있었 다. 예전 처럼 단순히 아픔을 줄이는 데 급급한 신체적인 반응이 아니라, 모진 위의 동작에는 이미 방어개념으로써의 철룡방벽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것도 생 각할 틈도 없는 찰라의 순간에 반사적으로 시전된 철용방벽이. 그동안의 노력으로 형성된 자신의 반사신경이 어느 틈에 철룡방법을 발출한 것도 모르고, 모진위는 이부춘의 위력이 자신이 두려워했던 것보다는 견딜 만 하다고 생각했다. 이부춘도 자신의 강력한 일격에도 불구하고 예상외로 빨리 일어나 버티고 서 있는 모진위를 보고 의아해졌다. 아직은 그대로 쓰러져서 버둥거리고 있어야 정상이었던 것이다. 이부춘은 의외의 결과에 화가 나서 십분 내력을 끌어올리 며 공격을 준비하였다. 이부춘의 잠룡충천(潛龍沖天)이 거의 모진위의 상체에 닿을 순간까지도 모진 위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생각만큼 엄청나지는 않았다해도 그것은 이부춘의 공격에 자신이 완전히 뻗어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뿐이지 모진위 의 충격이무시해도 좋을 만큼 약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부춘 의 주먹은 이제까지 겨뤄 본 어떤 아이보다도 강력한 것이었다. 모진위는 머리 가 울리고 다리가 흔들거려서 아직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잠룡충천으로 날아오른 이부춘의 양손이 모진위의 가슴을 강타하고 있었다. 모진위로서는 이미 피할 시간도, 방어할 여지도 없었다. 모진위는 눈을 질끈 감 아버렸다. 도학정도 이부춘의 잠룡충천이 모진위의 가슴에 적중하자,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이부춘의 이번 공격은 정말 강맹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근골이 약한 모진위이기에 이 일격으로인해 기여코 뼈가 부러지거나 목숨이 위 급해지는 지경으로 몰릴 가능성이 컸다. 도학정은 방금전 있었던 이부춘의 무 리한 행동에 제재를 가하지 않은 자신의 부주의를 한탄하였다. 그러나 곧 의자 에 주저 앉으며 다시 수염을 쓰다듬었다. '정말 쓸 만 하군.' 도학정은 대단히 흐믓해졌다. 모진위가 등룡유권의 '흡'자결과 '유'자결을 동시 에 활용할 정도로 일취월장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모진위는 철룡방벽을 가슴부위에 집중하고, 이부춘의 양손을 그대로 가슴에 맞 으며 '유'자결의 부드러운 기운으로 탄력을 일으키고, '흡'자결로 상대의 추진력 을 끌어들여 그대로 뒤로 밀려나갔다. 그와 동시에 등룡육권 '접'자결의 기운을 배합한 용각접응으로 이부춘의 양팔목을 잡고, 상대의 주먹에서 뻗어나오는 기 세를 약화시겼다. 그리고 엉덩방아를 찌려는 찰나, 회풍선엽으로 이부춘의 팔목 을 잡아당기며 신형을 일으켜세웠다. 덕분에 모진위가 엉덩방아를 찧는 대신, 이부춘이 바닥에 업어지며 콧방아를 찧고 말았다. 모진위의 정신이 방어할 엄두도 못내고, 체념해버린 동안에도 모진위의 신체는 제멋대로 신형을 일으켜 철룡방벽, 용각접응, 회풍선엽의 거룡십팔수 세초식을 그것도 등룡육권까지 응용하며 연달아 쏟아낸 것이었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이부춘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잠시동안 사태 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전개한 회심의 일격이 모진위에게 적중된 순간, 마땅히 전해져 와야 할 둔탁한 타격의 감촉은 없고, 마치 부드러운 천조각이라 도 친 듯 자신의 쌍장이 허전해지며, 모진위를 때린 것이 아니라 밀어주는 꼴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모진위의 양손은 자석이라도 되는 듯 강 력하게 뿌리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팔목에 철퍼덕 달라붙었다. 그리고 자신 은 꼼짝없이 땅바닥에 콧등을 쳐박고 말았다. 이부춘의 주먹만한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상을 파악한 이부춘은 말할 수 없이 수치스러워졌다. 그리고 엄청난 분노가 치솟았다. 도대체가 억울 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추한 귀신새끼! 너, 이젠 죽었어.' 이부춘이 이를 악물고, 내력을 끌어 올렸다. 이제까지는 녀석이 한주먹에 부서 져 버릴까봐 손속에 약간의 사정을 두었지만, 이제는 때려죽여버리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것이었다. 흥분은 하였어도, 이부춘은 역시 그래도 근동에서는 산전 수전을 다 겪은 싸움꾼이었다. 모진위가 어쩌면 한가닥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 계하여 용이주도하게도 철룡방벽을 준비한 것이다. 철룡방벽이라면, 아직도 모 진위로서는 거의 상극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정말 모진위가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할 판이었다. 나해청은 시합재개를 미루고 도학정을 바라보았다. 이부춘이 살기등등해졌다. 이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모진위가 요절날 판이었다. 모진위가 나해청도 감짝 놀랄 만한 뛰어난 한 수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아직도 이부춘의 상대는 아니라 고 나해청은 판단하고 있었다. 그것은 도학정도 마찬가지였다. 좀 더 모진위의 성취를 살펴보고 싶었지만, 이 부춘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비록 모진위의 용무권이 도학정조차 오 르지 못한 경지에 이르렀다고는 하지만, 실전이라면 이부춘의 한 주먹꺼리조차 못되는 약골이라는 것이 모진위의 현실이었다. 도학정은 이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칠년전, 하상곤이 부탁한 정도의 수준 에 모진위가 도달했음을 대체로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 모진위는 그럭저럭 혼 자서도 충분히 용무권을 완성시켜 나갈 준비가 끝난 것이다. 부단히 노력한다 면 언젠가는 모진위의 행동자체가 용무권의 원리로 이루워지는 그날이 올 것이 다. 도학정은 하상곤에게 편지를 보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용무관에서의 모진위의 그 수많은 고통도 이제는 끝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학정이 나해 청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해청이 외쳤다. "그만!" "흐음. 이공(李公)! 은 이백오십냥으로 그리 해주시겠단 말이지요?" 신양에서는 행세께나 하는 문파, 회주문(灰蛛門)의 문주인 진약천(陣藥天)은 신양성의 동문 언저리에서 고리대금업자로 악명이 자자한 이전삼(李錢三)의 말 에 적지 않게 구미가 동하였다. "그렇습지요.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헛소리를 하겠습니까? 문주님. 그저 은 이 백오십냥이면 되겠습니다요." 진약천은 날로 늘어가는 문도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문도가 늘어나 서 수입이 많아지니 좋은 일이긴 하였지만, 장소가 비좁았던 것이다. 마침 장원 옆으로 알맞은 터가 있어서 전각을 증축해볼까도 했지만, 땅주인인 이전삼이 터 무니없는 값을 불러서 흥정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 이전 삼이 이렇게 직접 자신을 찾아와 제법 싼 가격에 거래를 청한 것이었다. "용무관이라면 실력있기로 명성이 자자한 도장인데, 무슨 연유로...?" 물론 좋은 거래인 만큼 조건이 있었다. 이전삼의 아들을 회주문에 가입시켜달 라는 것이었다. "무슨 말씀을... 어디 무림의 정통문파인 회주문에 비할 수야 있겠습니다. 다만, 거리가 인접해있고, 자식놈이 어린 터라 집에서 내놓기가 염려되서... ..." 회주문과 같은 무림의 문파는 원칙적으로 입문 즉시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자 신의 집을 떠나 문파에 들어가 생활을 해야했다. "그런데 용무관주가 소인을 멸시하고, 제 자식을 학대하는 지라, 더 이상은 참 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문주님께 주제넘은 부탁을 하게 됫습지요." 이전삼의 늪동이 막내아들이 며칠 전, 코피를 흘리며 용무관에서 돌아와서는 다시는 용무관에 나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용무관주 도학정이 자신을 때렸다고, 그리고 평소에도 항상 이전삼을 형편없는 수전노라 멸시하며, 자신을 홀대했다고 그의 막내아들 이부춘은 말했다. 이전삼은 분노하였다. "허어, 그런 못된 작자가 있나? 옥봉산 목가의 자식들을 가르친다고 기고만장 하더니... 아주 간덩이가 부엇구료. 감히 이공 같은 분을 모함하다니..." 진약천으로서는 용무관의 도학정이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옥봉산 목연탁의 자제들을 문하로 두는 바람에 명성이 높아져서 원래는 신양 제일의 명문인 회 주문으로 와야 마땅한 제법 재력이 있는 집안의 자제들을 적지않게 빼앗아 갔 기 때문이었다. "내 이렇게 높은 은덕을 베푸신 이공의 신세를 갚기위해서라도 언제 한 번 걸 리기만 하면 쓴 맛을 보여주고야 말겠습니다." 이전삼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크게 한 몫 볼려고 땅값을 올렸다가 진약천 이 의외로 이재에 밝은 지라, 돈만 묶이고 전전긍긍하던 터였다. 그런데 이렇게 자식을 핑계로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기실, 회주문을 노리고 은 백오십냥에 사놓은 땅이니 결국은 적지않은 이익을 남기고 생색까지 내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이부춘까지 평민의 자식으로는 여간 해서는 발을 디디기 어렵다는 무림의 정통문파에 연을 맺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은 격이었다. "허 허. 자식을 위해서라면 천만금인들 아끼겠소이까. 문주님의 은혜에 비한다 면 이까짓 몇푼의 손해 쯤이야..." 그 날이후로, 용무관에서는 이부춘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모진위로서는 뜻밖에도 편안한 날의 연속이었다. 사부 도학정은 모진위에게 아침 저녁 두 번의 출운용무 수련외에는 전적으로 모진위에게 관여하지 않았 다. 오히려 이제는 바깥세상을 구경시키라며 목선민에게 모진위를 데리고 외출 하도록 당부하기까지 하였다. 구타와 체벌이 사라진지는 이미 오래였다. 모진위 가 철저하게 행동한 탓도 있지만, 이제와서는 모진위가 방심을 하여도 예전처럼 모진위의 주의를 환기시킬 의도가 없는 것같았다. 모진위를 그렇게도 끔찍히 괴롭히던 이부춘도 없었다. 그리고 그날의 비무이 후로는 다른 동료들도 모진위가 예전과는 다르게 보이는지 눈에 띄게 태도를 달리 하였다. "진위, 게 있느냐?" 그날도 모진위는 평온한 하루를 마치고, 목선민과 함께 히히덕거리며 숙소로 들어서는데, 사부 도학정이 부르는 것이었다. 도학정은 모진위에게 거의 잔정을 주지않았다. 오로지 엄격할 뿐이었다. 도학정이 모진위를 부르는 경우는 모진위 가 무언가를 잘못하여 질책할 때뿐이었다. 모처럼 밝아졌던 모진위의 기색이 대번에 어두워지며, 모진위는 내실로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찾아계시옵니까? 사부님." 내실의 탁자앞에 앉아있는 도학정의 태도에는 확실히 요근래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모진위는 어느 새, 철룡방벽으로 전신을 보호할 준비를 하고, 한편으로 는 거의 반궁마보에 가까운 태세를 취하였다. 모진위가 나이를 먹어가며 구타 는 점차 줄어들었으니, 사부가 벌을 준다면 그것은 반궁마보일거라고 모진위는 생각하였다. "가져 가거라." 도학정이 무뚝뚝한 어조로 탁자위에 무언가를 던져놓았다. '그러면 반궁마보는 아닌거 같고... 새로운 벌이로구나!' 모진위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그것은 비단주머니였다. 신형 을 뒤틀며 승천하는 용 한마리가 금실로 수 놓아진 비취색 비단주머니였다. "허리에 차도록 하여라." 모진위가 어안이 벙벙하여 금낭(錦囊)과 도학정을 번갈아 쳐다보니, 도학정이 어색한 태도로 재촉하였다. 문간에서 눈치를 살피던 목선민이 물었다. "하지만 허리띠에 메달을 끈이 없지 안사옵니까? 사부님." 도학정이 당황하였다. 본시 잡화점에서는 끈도 장식물이기에 취향에 맞도록 주머니와 따로 진열하는 것이었다. 도학정이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그건 선민이, 네가 사주도록 하여라. 저 녀석에게 생일선물을 해줄 생각이 있 다면..." 도학정이 허둥거리며 내실을 나가버렸다. 금낭속에는 동전 이십문이 들어있었다. 모진위는 생일같은 것은 모르고 살았 다. 그동안 도학정이 모진위의 생일따위를 챙겨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도학정자신의 생일도 챙겨 본 적이 없었지만. 하지만 어쨋든 오늘은 모진위가 태어난 지 열두 번째가 되는 날이었다. 백수노계였습니다. #4439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9- 09/03 17:26 239 line 이부춘은 동문일대에서는 가장 번화한 시장지대인 중와자(中瓦子)를 가로질러 서 가로(街路)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회주문에서의 하루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무림의 문파에 입문한 지, 이제 넉달이 채 안된 신출내기로서는 그리 흔한 경 우는 아니었지만, 이부춘은 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회주문주 진약천은 문파의 숙소사정이 여의치 않은 지라,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성내에 사는 문하생들은 새 숙소가 마련될 때까지 집에서 잠자리를 해결하도록 하였다. 동문으로 오려면 북쪽의 가도가 거리도가깝고, 한적한 편이었지만, 이부춘은 굳이 약간은 멀지만 중와자를 통과하는 길로 귀로를 정했다. 중와자는 각종의 일용품점, 기예를 보여주는 곳, 찻집, 술집, 기원(妓院)등이 집중해있는 신양성내 에서도 볼 만한 것이 많기로 정평이 난 방형시장(方形市場)이었으므로 재미있 는 구경거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막 취향루(趣香樓)의 담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단엿을 빨며 한가롭게 거리의 풍광을 즐기던 이부춘의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장신구따위를 파는 잡화점 앞에 서 떠들고 있는 모진위와 목선민을 발견한 것이었다. 목선민은 강제로 끌어내다시피 하여 모진위를 데리고 중와자에 왔다. 금낭의 장식끈이라면 용무관에 접해있는 저자거리에서도 구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목 선민은 생일선물을 하겠다고 작정한 것, 기왕이면 좋은 장식품을 구해주고 싶었 던 것이다. 목선민은 쑥스러워 하는 모진위를 닥달해서 나들이를 겸해서 중와 자까지 오게 되었다. 중와자라면 기루가 즐비한 곳이니 화려하고 멋진 수공품 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부춘은 재빨리 모퉁이를 되돌아가 몸을 숨겼다. 그리고 이런 천재일우(千載 一遇)의 기회를 만들어 주신 조상신께 감사들였다. 잘하면 모진위를 때려잡을 호기를 맞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부춘은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어느 한순간이라도 목선민이 모진위의 곁에서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 "위제! 이 것이 어떠하겠는가? 고아한 기품이 흐르지 않는가?" 목선민이 금색 수실방울이 맺힌 끈을 집어들고 느물거렸다. "민제! 어찌하여 안력조차 이 우형을 닮아가는가? 현제가 드디어는 눈이 삐었 나 보군." 모진위도 시침을 떼고, 어른들의 어조를 흉내를 내며 사양하였다. 너무 화려해 서 허리에 차고 있으면 남의 눈에 띨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위제! 동생의 취양은 정말로 독특하구먼. 그럼, 이 형님이 양보할테니 어리고, 미숙한 자네가 한 번 골라볼텐가?" "글쎄!" 모진위가 한두개 들석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으 으... 선민아! 난 도저히 못 고르겠다. 니가 아무거나 골라봐라. 그냥 니가 골라주는 걸로 만족할께." "여긴 맘에 드는게 없어. 진위야! 우리 저쪽으로 한 번 가보자." 목선민이 모진위의 소매를 끌고 복잡한 노점사이로 걸어들어 갔다.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기자,이부춘도 조심스럽게 모진위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두소년이 또 다른 잡화점앞에서 멈춰섰다. 다시 이것 저것 물건을 집어들고 키득거렸다. 목선민이 비취색 끈을 하나 들고, 환하게 웃었다. 모진위도 따라 웃 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장식끈을 든 목선민이 값을 치루려는지 상점안 으로 들어가 버렸다. 기회가 왔다. 이부춘은 단숨에 달려가 모진위의 목덜미를 나꿔챘다. 목각 동자 상(童子像)을 만지작거리던 모진위는 창졸간에 목을 졸리고 말았다. 이부춘은 뒤를 경계하며 서둘러서 복잡한 노점의 가판대사이로 숨어 들어갔다. 그리고 허리를 움크려서 몸을 숨긴 채로 가로에 늘어선 상점가의 뒷골목으로 모진위를 끌고 갔다. 주위에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이부춘이 모진위를 바닥에 내팽겨쳤다. "너... 너는 부춘이로구나." "그래, 나다." "도... 도대체 이게, 이게 무슨 짓이냐?" "지난 번엔 내가 좀 방심했다. 어디 다시 한 번 겨루어보자." "야아, 부... 부춘아!" 모진위가 후다닥 일어나며, 양팔을 휘저었다. "각오해라." 이부춘이 서슬 퍼렇게 달려들었다. 이부춘의 삼장이 연달아 날아들었다. 얼핏 보기에는 서산일출(西山日出)이나 홍로점설(紅爐點雪)처럼 생각되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모진위는 번번히 막아 내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부춘의 수법은 용무권이라고 하기엔 보다 잔인하고 인정사정이 없었다. "어떠냐, 비폭유천(飛瀑流泉)의 맛이?" 그제서야 모진위는 눈치를 챘다. 이부춘이 구사하는 무공에는 용무권뿐만이 아니라, 회주문의 독문초식이 포함되어있다는 것을. 용무권은 상대를 상하게 하는 무공이라기 보다는 수련자 자신을 단련시키는 활법에 가까웠다. 그러나 용무권에 실전기술이 접목되게 되면 이야기가 달랐다. 용무권을 익힌 자가 다른 여타의 무공을 접하게 되면 그 사람은 용무권을 근간 으로 해서 보다 빠른 속도로 무공의 진전을 이룰 수 있을 뿐아니라 그 평범한 수법조차 용무권에 의해 변용되어 대단한 위력을 발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부춘은 이제 회주문에 입문한 지, 넉달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눈 에 띄게 강해져있었다. 이부춘의 초식은 변화가 다양하였고, 동작마다 교묘한 속임수가 숨겨져있었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모진위가 이렇게 형편없이 밀릴 이 유는 없었다. 모진위도 이미 예전의 모진위가 아니었다. 하상곤과 지내는 기간내내, 모진위가 조금이라도 방심하기만 하면 하상곤은 여 지없이 기습을 해왔는데, 막판에는 모진위도 어느정도 단련이 되어서 나름대로 적절한 방어를 해내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하상곤의 그 기기묘묘하고 신기 막측한 수법에 비한다면 모진위가 고전은 할지언정 그렇게까지 당할 정도로 이 부춘의 재간이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이부춘의 일권이 모진위의 안면을 공격해왔다. 모진위가 허둥지둥 유룡보법(遊 龍步法)을 밟아서 좌측으로 비꼈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이부춘 의 오른발이 모진위의 허리를 향해 마중나갔다. 이부춘의 앞선 공격은 또 허초 였다. 모진위는 번번히 속고 있었다. 그래도 그동안은 그럭저럭 버텨왔지만, 이 번에는 진짜 위기였다. 하상곤이 그토록 칭찬했던 모진위의 얻어맞는 특기 '돌 려 흘리기'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퍼억-. 뚜렷한 격타음이 들려왔다. 이부춘의 강맹한 일격이 모진위의 허리에 제대로 적중하였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모진위의 예민한 반사감각마저도 작동되지 않고 있었다. 문제는 모진위의 정신상태였다. 이부춘은 모진위에게 있어서 저승사자나 다름 이 없었다. 오랫동안 이부춘에게 괴롭힘을 당하다보니 작금에 이르러서는 모진 위는 이부춘만 보아도 주눅이 들어버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용무관의 연무장도 아니었다. 치명적인 위협을 감시하고 보호해주는 도학정도, 나해청도 없었다. 피하기도 어려운 좁은 골목길인 데다가, 행동을 방해하는 잡동사니들도 여기저기 장애물처럼 널려있었다. 보호자가 없고, 환경조차 익숙치 않은 모진위 의 심사는 더 더욱 공포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이부춘은 노련한 거리의 싸움꾼이었고, 지금은 자신이 다소 비열한 수 법을 사용해도 행동을 제지할 방해꾼들도 없었다. 이부춘의 복수심은 극에 달 했다. 이러한 상황들이 일방적인 구타의 양상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 이러지 마!" 모진위가 간신히 벽을 붙잡고 일어섰다. "호오! 참을 만한가 본데...?" 이부춘이 철룡방벽과 유사한, 그러나 보다 파괴적인 수법으로 모진위를 덮쳤다. 벽에 막혀서 물러설 곳이 없는 모진위가 타력흘리기를 하지 못하고 심한 충격 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모진위는 벽속에라도 스며들어가 려는 듯 기를 쓰다가 그대로 복부를 채이고 말았다. 숨이 막혀왔다. 정신도 아 득해졌다. 모진위는 아픈 배를 끌어안고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러나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벽에 놓여있는 나무상자에 부딪치고 말았다. "일어나, 이 자식아!" 이부춘이 모진위의 멱살을 쥐고 일으켜 세웠다. "아악-!" 모진위가 다시 가슴을 부여안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이부춘의 공격은 두 손바 닥을 일시에 내미는 맹호신요(猛虎伸腰)라는 초식이었다. 모진위는 문득 죽음을 예감하였다.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모진위의 체력과 근 골은 정상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조잡한 수준이라도 내력이 실린 권장이 연속 적으로 적중한다는 것은 모진위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아직까지는 이렇게 내력 이 실린 강타에 적중되어 본 적이 없었다. 맞는 재간도 남다른데다가 벽과 같 은 방해물에 막혀 충격을 그대로 흡수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부춘으로서는 그걸 알 도리가 없었다. 이정도로 맞아서 죽는 사람은 보지도 못했을테고, 실상 용무관에서도 모진위를 왠 만큼 두들겨 팬 적이 있었 기 때문이었다. 뚜둑-. 이부춘이 건달패마냥 손마디를 꺽어서 기분나쁜 소리를 내며 모진위에게 접근 하였다. 이대로 계속 맞으면 죽고 말거다. 하지만 이렇게 개죽음 당하기는 싫어. 모진 위가 주위를 더듬거렸다. 그리고 잡히는대로 이부춘에게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나무조각, 돌맹이, 깨진 기와쪼가리... ... 더 이상 집히는 것이 없자 흙을 한웅큼 움켜쥐고, 뿌려버렸다. 이리저리 피해 내던 이부춘이 두눈을 감싸쥐었다. "이... 이 자식이... ..." 모진위가 이부춘이 주춤거리는 틈을 타서 큰길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가 로쪽으로만 나가면 목선민이 자신을 발견하기가 쉬우리라. 분명히 목선민은 자 신을 찾아다니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모진위는 안간힘을 다해서 기어가고 있었다. 목선민은 용무관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잔돈을 거스르느라 잠시 시간 을 지체하였다. 점포밖으로 나오니 모진위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근처를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있겠거니하고 주변을 찾아보았지만, 모진위는 근방 어디에 도 없었다. 목선민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모진위는 중와자의 지리에 익숙하지도 않을 뿐아니라, 설혹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자신에게 아무말도 없이 자리를 떠나버릴 아이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목선민은 그나마 모진위가 갈만한 곳은 아무래도 용무관밖에 없기에 도장으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동문으로 곧장 이어진 대로 로 접어들었다. 급한 마음으로 종종걸음을 치다가 모진위가 이부춘에게 끌려들 어간 골목도 지나쳐버렸다. 모진위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던 걷고 있던 목선민은 사람들의 놀란 시선이 어느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피로 범벅이 된 소년 하나가 골목을 기어나오고 있었다. 모진위였다. 목선민은 기겁을 하여 모진위에게로 달려갔다. 그 순간, 또하나의 인영이 골목에서 튀어 나왔다. 모진위의 등을 팔꿈치로 내리찍으려는 형상이었다. 목선민이 달려가서 막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목선민은 '악'하고 그자리에 멈춰버렸다. "죽여 버릴테다." 모진위는 문득 살기를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눈가에 흙먼지를 닦아낸 이부 춘이 공중으로 도약해서 모진위의 등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모진위의 시야 에 이부춘의 팔꿈치가 커다랗게 닥쳐왔다. 요절을 내고 말겠다는 기세였다. 죽여버리겠다니. 내가 무슨 그렇게 죽을 죄를 지었단 말인가? 오히려 힘없고, 비참한나를 이유도 없이 괴롭힌 것은 바로 이부춘 자기가 아니던가? 모진위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부춘에게 이렇게 당해야할 이유가 없었다. 이부춘이 때리면 반항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맞아주었다. 단 한 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최소한의 방어로써 그의 코피를 흘리게 한 것이 고작이었다. 모진위의 가슴속에서 그나마 익숙해있는 감정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증오였다. 모진위의 증오는 뭉치고 뭉쳐서 마침내 폭발하였다. 분노였다. 기진맥진해있던 모진위의 내부에 뜨거운 불기둥같은 것이 치솟아올랐다. 모진위는 신형을 뒤집 어서 자신을 향해서 맹렬히 추락하고있는 이부춘의 팔굽을 노려보았다. 모진위는 남아있는 기력을 몽땅 끌어올려 오른 팔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이부 춘의 팔꿈치를 향해 힘차게 주먹을 내뻗었다. 마치 치솟아 오르는 분노의 불기 둥을 가슴으로부터 어깨로, 어깨로부터 다시 주먹으로 쏟아내기라도 하듯. 모진 위의 눈앞에 원추뿔을 그려졌다. 우권(右拳)을 원추속으로 날려서 중지마디의 뾰족한 끝으로 그 꼭지점을 찔러갔다. 원추가 끝나는 꼭지점에는 이부춘의 팔 꿈치가 있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팔굽의 단단한 뼈사이의 연골부분에 그 꼭지점이 닿아있었다. "으악!" 칼날같은 비명이 귓전을 때리자, 목선민이 다시 달렸다. 목선민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부춘의 팔꿈치가 모진위의 등판을 짖져 버릴 눈감빡할 사이에 모진위는 돌아누워 있었고, 모진위의 주먹이 정확하게 이 부춘의 팔꿈치에 꽂혀버렸다. 이부춘이 비명을 지르며 모진위의 옆으로 데굴 데굴 굴렀다. 모진위는 죽은 듯이 꼼짝도 안하고 누워있었다. 모진위의 전개한 초식은 거룡십팔수중에 가장 위력이 강력하다는 용익파탑(龍 翊破塔)이었는데, 그속에는 등룡육권의 파괴적인 기세인 '파(破)'자결이 목선민 으로서는 엄두도 못낼 정도로 정교하게 얽혀있었다. 모진위에게 다가선 목선민은 끔찍한 광경에 몸을 떨었다. 이부춘은 고통을 견 디지 못해서 흰자위만 보일 정도로 눈이 돌아가 버렸는데, 부러져 버렸는지 팔 은 이상한 형태로 구부러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모진위는 코와 입에서 터져나 온 피로 안면을 온통 뒤덮은 채 호흡마저 거두고 기절해있었다. "용무관이라고...?" 회주문주 진약천의 얼굴에서 야릇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험난한 강호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회한 그의 얼굴에서 어떤 의도를 읽어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번만은 자못 심상치않았다. 사건의 자초지총을 고하고 있는 진약천의 두번째 제자 우염득(于廉得)이 식은 땀을 흘렸다. 문하의 신출내기 이부춘이 용무관의 문하생과 시비가 붙어서 팔이 부러져 버 렸다는 기별이 문주의 심기를 편하게 할 만한 성질의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 렇다고 그까짓 애송이의 부상이 문주의 심기를 어지럽힐 정도로 대단한 것도 분명 아니었다. 그런데 여간해서는 속을 드러내지 않은 진약천이 주위사람들이 눈치챌 정도로 감정의 기복을 보여준 것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용무관의 모진위라는 녀석이었습니다." "네놈은 뭐하는 놈이냐?" "옛?" "부춘이가 그리도 재질이 떨어지는 아이더냐? 게을러터져 가지고..." "하지만... ...그 쪽은 피떡이 되서... ...인사불성이라고 합니다. 사부님." "시끄럽다!" 진약천은 입맛이 썹다. 생각보다는 그리 만만치 않았다. 진약천이 판단하기에 이부춘의 진보는 대단한 것이어서 또래의 문하생중에는 거의 서너명정도가 승 리를 장담하였다. 그렇다면 이부춘의 팔이 부러졌다는 것은 용무관의 실력이 주변의 평판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일개 삼류도장을 폐문시키기 위 해 자신이 직접 나서기는 너무 위신이 떨어지는 일이었고, 그렇다고 제자들에게 만 맡겨놓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회주문은 신양에서는 최대의 방파였지만, 호북(湖北)지방에서조차 그리 변변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신양이라는 작은 지역에서 조차 일개 무술도장인 용무관과 명성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무림문파로서의 당당한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진약천은 이를 갈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일부러 시비를 걸어서라도 뽑아야 버려야 할 도학정이라는 가시를 이런 절호의 기회에 그대로 내버려둘 진약천은 절대로 아니었다. 체면을 불구하고 직접 나서서 용무관을 멸문시키기로 결심하 였다. "용무관에 통고하거라." 지필묵이 곧 준비되었다. "이유불문하고, 모진위란 녀석을 인계토록 요구하라. 회주문을 모독한 자는 누 구든 응분의 댓가를 치뤄야 하느니..." "...이의가 있을 시엔 백만 무림동도들의 규칙대로 비무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터이니 각별히 유의 해야 할 것이라고 전해라. 기한은... 남악(南岳)에 다녀 오려면 얼마나 말미를 주어야 겠느냐?" 제법 부지런하다는 평판이 있는 세번째 제자에게 물었다. "보름이면 가능하겠습니다. 남악은 어인 일로...?" "네가 좀 가주어야겠다. 태청이를 데려와라." "사부님, 그까짓 용무관따위에 태청이라니요. 가당치가 않습니다. 제 아이들만 으로도 문제될 게 없습니다." 진약천도 그렇게까지 어렵다고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 번일은 회주문이 신 양성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만큼 한치의 실수도 용납 할 수 없었다. "두말은 하지 않겠다. 시키는 일이나 제대로 하거라. 기한은 이십일일까지다. 이십이일엔 틀림없이 용무관에서 회주문의 보잘 것 없는 기예를 견식하게 될거 라고 전해라. 너희들도 그리 알고 차질없도록 준비하거라." 백수노계였습니다. #4519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10- 09/13 07:00 435 line 도학정은 강호인이 아니었다. 적어도 도학정 자신만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 다. 비록 무공을 가르쳐서 먹고 살기는 하였지만, 강호인과 지속적인 왕래도 없 었을 뿐아니라 강호의 규칙에따라 세상을 살아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회주문주 진약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진약천 뿐만아니라 대부 분의 신양사람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새삼 오십평생을 살아 온 이제와서야 도학정은 원치는 않았지만 자신도 결국은 강호인이라는 현실을 받 아들여야만 했다. 강호란 곳은 애당초 개인의 의지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정하게 인간의 운 명을 휩쓸어 버렸다. 도학정이 아무리 변명을 한다해도 강호에서는 그것이 통 하지 않았다. 오직 강호의 생리에따라 약육강식의 생존원칙을 충실히 수행하여 도발해오는 적에게 대항해야 한다. 아니면 도학정 자신이 강호인이건 아니건 강호의 규칙이라는 미명하에 강자의 먹이가 되어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는 상 황이었다. 연무장으로 향하는 도학정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용무관을 내주고라도 이 사태를 피해보고 싶었다. 단순히 도장의 현판만 내려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도학정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진약천이 원하는 것도 그것이리라. 그런데 그 빌어먹을 강호라는 곳은 일을 그렇게 만들어주지 않았다. 강호는 언 제나 피를 원했다. 강호는 진약천에게 대의명분을 요구했고, 진약천이 마련해놓은 구실은 바로 모 진위였다. 속으로야 당연히 용무관을 거저 먹겠다는 속셈이었지만, 그래도 겉으 로는 엄연히 강호의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기위해 무뢰배 모진위를 응징하 겠다는 훌륭한 명분이었다. 진약천은 모진위라는 명분으로 드디어 눈의 가시를 뽑아낼 기회를 잡았다고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명분은 진약천의 오산이었다. 어느 정도의 강압이었 다면 오히려 도학정은 회주문이라는 대문파에 지레 겁을 먹고 순순히 용무관을 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진위를 요구한 것은 실수였다. 그것이 도학정으로하 여금 목숨을 걸고 회주문에 대항케하는 가장 큰 변수가 되고 말았다. 연무장주변은 무슨 축제라도 벌어진 양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하긴 가끔 씩 행해지는 무술도장간의 대항전은 이미 이 고장사람들에게는 축제의 한마당 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변변치 않은 무술도장도 아닌 신양 최고의 무술도 장과 정통무림문파 회주문과의 일전이고 보니 신양일대가 들끓게 된 것도 당연 한 일이었다. 많은 무술도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번창하고 있는 지역인지라, 도장간의 경쟁이 치열한 이 곳에서는 크고 작은 분쟁들이 항상 발생하였는데, 그래도 제깐에는 강호문파입네하고 시비를 가리기 어려운 분쟁이 있으면 반드시 도장간의 비무 가 뒤를 이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 비무에도 나름대로의 격식이 갖추어졌다. 분쟁이 발생 한 도장에서는 쌍방간에 각각 일곱명의 수련생을 선발한다. 그리고 사전에 순 번을 정해서 대련에 나선다. 첫번째 승부가 결정되면 패한 쪽에서 다음 순번의 대기자가 승자에게 도전한다. 승자는 패배할 때까지 계속해서 비무에 임한다. 한 쪽의 일곱명이 모두 패배하면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속칭 연승전(連勝 戰)이었다. 대개의 분쟁의 내면에는 결국 도장의 잇속이 관련되어 있는 법, 그 연승전의 승패에의해 도장의 우열이 판명나기 마련이므로 분쟁은 그 시시비비와 상관없 이 그것으로 해결되고는 하였다. 손익이 이미 가려진 마당에 사건의 옳고 그름 을 가려봐야 한푼의 동전이라도 더 생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그저 연승전의 승패만으로는 문제가 해결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회주문은 처음부터 모진위의 양도를 단단히 못박아 놓은 것이다. 연승전의 승패만으로는... ... 도학정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굳게 다문 채,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온다!" 구경꾼들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도학정이 돌아보니 화려한 복장의 건장한 중년을 앞세우고 한떼의 무리가 보 무도 당당하게 용무관의 정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문하생을 잘못가르친 그 스승의 허물도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도관주의 혁 혁한 영명이 사해(四海)를 울리고 있는 것을 본좌도 모르지는 않는 바, 그 천둥 벌거숭이같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제자놈만 내어주신다면, 도관주의 죄는 묻지 않겠소." 진약천의 얼굴에는 조소의 빛이 가득했다. "불초가 우둔하여 제자를 제대로 건사못했음을 사죄드리오. 진문주께서 수고해 주셔야겠소이다." 도학정은 자못 진지한 표정이었고, 조소의 기색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내주시겠단 말이요?" "무엇을 말입니까?" "도관주의 그 포악스런 제자녀석말이요." "이미 보내드리지 않았소이까?" "... ...?"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천둥벌거숭이에다가... 게다가 포악스런... 쯔쯧. 진문 주께 심려를 끼쳐드려 민망하기 이를 데가 없구려. 그래 지난 석달동안 얼마나 노심초사 하셨소." "... ...?" "불초가 이렇게 사죄드겠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시오?" "부춘이 그녀석이 다소 거칠기는 해도 근본은 있는 녀석이니..." "이것보시요. 도관주!" "이제는 어엿한 회주문의 기명제자가 됫으니 좀 나아지겠지요. 고명하신 진문 주께 기대하겠소." 노회한 강호고수 진약천은 재빨리 마음을 가다듬었다. 심계가 깊기로 강호에 서는 제법 정평이 있는 진약천이었는데, 처음에는 도학정이 모진위를 순순히 내 주겠다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일순 당황하여 허둥대었다. 도학정이 순순히 모 진위를 내준다면 진약천의 음모는 허사로 돌아갈 판이었다. 그런데 이부춘이라 니.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고 분노가 치솟았지만 이내 화를 억눌렀다. 흥분해보았자 사태가 악화될 뿐이라는 강호에서의 오랜 경험이 그에 게 바로 냉정을 회복시켜준 것이다. "도관주의 언변은 능란하고, 날카롭기 그지 없구려.용무관의 무공도 그와 같 은지 본좌가 한 번 지켜보겠소. 얘들아, 무얼 꾸물대고 있는게냐?" "회주문의 이부춘!" "용무관의 소경광!" 공명정대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여 무술시합이면 단골로 꼽히는 참관인, 성순지 (成旬智)대협의 호명으로 시합이 시작되었다. "이부춘은 기권이요." 회주문의 둘째제자 우염득(于廉得)이 외쳤다. "그럼, 다음은 회주문의 장길(張吉)" 신양지방 연승전의 전통은 사고발생의 당사자들이 반드시 출전하게 되어있었 다. 그래서 모진위와 이부춘도 출전해야만 했는데, 사고자들이 부상이 확실할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출전자 명단에만 올리고 기권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모진 위는 더욱 심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세의 여부를 판정하기 힘든 내 상인지라 기권이 인정되지 않았다. 도학정은 그런 모진위를 마지막 순번으로 미뤄 놓을 수 밖에 방법이 없었다. 상호간의 예가 끝나자 마자 소경광은 철룡방벽으로 전신을 보호하고, 거룡십팔 수의 가장 강맹한 초식인 용익파탑으로 회주문의 제자를 압박해갔다. 철용방벽 과 용익파탑의 두수를 동시에 배합하여 사용하는 수법은 고도의 수련을 요구하 는 어려운 기교였다. 소경광이 용무관에서도 이부춘과 목선민을 제외하고는 가 장 무공이 뛰어났기에 그나마 이런 재간을 부릴 수가 있었다. 회주문의 장길도 신양성 제일문파의 제자답게 번개같이 방어자세를 취하고 소 경광의 일장을 피했다. 그러나 철룡방벽은 신체의 어느 부분이건, 어떤 자세건 시의적절한 공격으로 변환되는 수법이었으므로 소경광의 강력한 용익파탑이 여 전히 장길의 헛점을 파고들고 있었다. 장길은 삽시간에 수세에 몰렸다. 신양지방의 연승전은 오랜 전통이 있는 만큼, 발전을 거듭한 나름대로의 전략 이 세간에 전승되어져 왔다. 보통은 첫번째 주자를 도장에서 두번째로 강한 제 자를 내세우고, 마지막 순번에 강한 제자를 배치해둔다. 도학정도 이런 원리에 따라 소경광을 일번주자로 내세운 것이다. 그러면서도 상대가 상대인지라 첫대 결부터 상당한 고전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소경광이 대결을 쉽게 풀어 나가자 일말의 희망을 느끼기 시작했다. 쩔쩔매는 장길을 파고들던 소경광의 보법이 갑자기 급변하였다. 소경광이 돌 연 좌측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바꿨다. 순간, 상대를 잃어버린 장길이 허둥대며 사위(四圍)를 두리번거렸다. 어느 새, 소경광이 장길의 턱밑으로 가라 앉아있었 다. 장길이 간신히 소경광의 위치를 알아챘을 때는 이미 소경광의 잠룡충천이 장길의 턱을 강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절묘한 석양동몰과 서산일출이었다. 석양이 동쪽으로 지고, 일출이 서쪽에서 이루워진다는 이름 그대로 거룡십팔수중에서는 서로 짝을 이루는 기 습을 위한 상용수단이었다. 장길도 역시 회주문의 강자답게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그 와중에서 도 그런대로 자세를 갖추고, 최대한 충격을 완화시키며 버티어 내었다. 그러나 도학정이 보기에 승부의 추는 이미 소경광에게 기울어 있는 것 같았다. 장길이 주춤주춤 물러나며 방어태세를 갖추려하자 소경광은 숨돌릴 틈조차 주지않고 연속적으로 몰아부쳤다. 이번에는 삼초가 연달아 터지는 연속기였다. 관중들이 술렁거렸다. 예상외로 너무 일방적인 승부였다. 장길과 소경광의 대 전은 이후로도 삼십여수 더 계속되었지만, 장길은 변변히 반격조차 못해보고 무 너져 버렸다. 일반적인 예상대로라면 용무권은 방어와 임기응변에 강점이 있었 고, 회주문은 실전에 가까울 정도로 살기어린 공격과 교묘한 속임수에서 앞서나 갈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상황은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 용무관쪽에서는 처음에 다소 주눅이 들어있는 듯 하던 분위기가 사뭇 반전되 었다. 일부에서는 의기양양한 기색마저 돌았다. 그러나 회주문쪽에서도 그리 침 통한 기색은 없었다. 여전히 담담하고 안정된 분위기였다. 약간 당황하기는 했 지만 그래도 그게 대수냐는 표정들이었다. 마치 결과를 예측하기라도 한 듯. 회주문주 진약천의 전략은 역시 정통문파의 수장답게 일반적인 도장의 그것보 다는 훨씬 세련된 고등전술이었다. 진약천은 이부춘의 실력에 비추어 어느 정 도 용무권의 능력을 가늠하고 있었다. 이부춘은 회주문의 수련생을 통틀어 그 의 나이또래에서는 선두권에서도 사오위를 달리는 인물이었다. 이부춘이 자기 말로는 용무관의 최강자였다고는 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용무권은 일반 무술도장과는 격이 다른 높은 수준임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최강자라는 이부춘 이 모진위와의 우연한 드잡이질에서 뜻밖의 결과를 가져다 준 관계로 다시 한 번 용무관원들의 무공수준을 견주어 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진약천은 회주문의 일곱명의 선발자중에서 가장 약한 장길을 실질적인 첫번째 주자로 배정하였다. 전력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문하생들에게 상대의 수법을 탐색케하고 경각심도 일깨워주기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리고 진약천 스스로도 장길과 이부춘을 기준점삼아 용무관 일곱출전자들의 전력을 정확하게 탐색해보 겠다는 의도이었다. 진약천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첫번째 출전자 소경광은 용무관에서 일이위를 다투는 녀석이리라. 그렇다면 이부춘의 자랑도 그리 틀린 얘기는 아니겠지. 녀석은 이부춘에 비해서도 상당 히 손색이 있었으니까. 소경광정도로는 장길이외에 아무도 이길 수가 없을 것 이다. 더구나 가장 강한 녀석이 남아있다고 해야 이부춘의 무공과 큰 차이가 없다면 역시 남은 녀석들이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태청이까지 불러들일 정도로 법석을 떨 필요는 없질 않았는가?' 진약천은 이렇게 마음속으로 분석하며 승리를 확신하였다. 회주문의 세번째 순번이 나섰다. 이번에도 소경광이 먼저 기습공격을 감행하 였다. 소경광은 기선제압이 전제수단으로 펼쳐지는 삼초이상의 연속적인 기술 을 장기로 하는 공격적인 성향의 권법소년이었다. 그러나 이미 드러난 그의 수 법에 회주문의 제자는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회주문의 삼번 주자가 교묘하게 반격을 가했다. 소경광이 그것을 보고 신속히 신형을 비틀었다. 그러나 상대는 너무도 편안하게 자세를 바꾸어 흐트러진 소 경광의 헛점을 추궁하였다. 소경광이 허초에 속은 것이었다. 소경광은 기회가 잡히는 대로 석양동몰로 위기를 반전시켜 서산일출로 반격을 시도하였지만, 상대는 첫번째 상대였던 장길과는 차이가 있는 고수였다. 여유있 게 막아내며 소경광에게 타격을 가해왔다. 결국 소경광은 극심한 고통끝에 바 닥에 길게 눕고 말았다. 일방적인 패배였다. "포삼(包三)아!" 도학정이 겁에질린 채 비무대로 나서려는 포삼을 불러세웠다. 용무관의 두번 째 순번은 포삼(包三)이었다. "포삼아, 이 사부도 안다. 네가 저녀석을 이길 수는 없을게다. 꼭 이길려고 부 담갖지마라. 다만, 기권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다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라. 어느 순간이라도 철룡방벽과 석양동몰을 잊지말아라. 이 사부의 부탁은 단 하 나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힘이 다할 때까지 버티면 그것으로 족한 게야. 알 아 들었느냐?" "예, 사부님." 소심한 포삼이 마음의 부담을 덜고 홀가분하게 비무대를 향해 걸어나갔다. 도학정은 포삼이 방비에만 신경을 쓰며 오래 버텨주길 갈망하였다. 소경광이 뚜렷한 실력의 차이로 지기는 했지만, 대단히 끈질기게 시합을 끌어주었다. 아 직은 어린 수련생들인지라 체력의 문제가 승부의 큰 변수였다. 소경광의 끈기 로 인해 회주문의 삼번은 많이 지쳐있었다. 포삼의 실력으로야 이기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상대를 조금 더 지치게만 만들어준다면 다음은 체력이 강하고 침착한 주보였다. 상대의 반격을 잘 처리하는 주보라면은 이미 지쳐버 린 상대에게는 상당한 가능성이 있었다. 소경광의 다리가 부러졌다. 고통으로 끙끙거리는 소경광을 보며 주보는 전의 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승리가 이미 확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주문 의 그 망할 자식은 무방비상태로 넘어져있는 소경광의 다리를 꺽어버렸다. 포 삼이 이 모습을 못 본것이 다행이었다. 심약한 포삼이라면 담박에 겁에 질려 제실력도 채 발휘못하고 엄청나게 얻어터질게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주보는 틀렸다. 도장내에서도 성질더럽고 겁이 없기로 소문이 난 주보는 당장이라도 상대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포삼은 어느 정도 버티고 있었다. 시종일관 밀리고는 있었지만, 결정타들은 간 신히 모면하고 있었고, 몇 번의 강타에도 그럭 저럭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포삼의 얍삽한 행동에 흥분한 회주제자가 방심하여 무리한 공격을 퍼붓는 사이, 수차례의 반격마저 성공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명백한 실력의 차이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결국 포삼은 회주문의 절 묘한 변초에 속아서 결정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용무관의 세번째 주자, 주보가 살기등등해져서 대련위치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적의에 가득찬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침착한 주보는 이내 흥분을 가라앉 히고 냉혹한 승부의 감각을 불러 일으켰다. 주보는 반격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회주문의 권법에는 허초와 실초가 교 묘하게 얽혀있어서 용무권의 정상적인 운용으로는 방어에 어려움이 많았다. 더 구나 주보의 무공은 상대에 비하여 한두 수 떨어지는 상태였고, 상대만큼 재빠 르지도 못했다. 주보는 허초건 실초건 구분하지 않고 맞받아 쳐나갔다. 허초였 다면 이어지는 공격과 정면대응이었고, 속임수가 아니라면 적절한 반격이 될 것 이기 때문이었다. 반격에 주력하는 것은 선제공격의 기회를 포기해버린 것이나 다름없어서 비록 그럭저럭 감당해 나가고는 있었지만, 주보가 주도권을 상실하고 고전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일격을 당하고 비틀거리던 주보는 회주제자가 재차 허리를 노리고 일장을 가 해오자 방어를 포기한 채, 이빨을 악다물고 양손을 내뻗었다. 또 허초였다. 회주 문의 제자는 그저 가볍게 허초를 날려 주보의 반응을 탐색하고는 허리를 숙이 며 양손으로 수도를 만들어 주보의 복부를 찔러나갔다. '걸려들었구나!' 주보는 회주제자의 수도를 보자마자 준비해두기라도 한 듯 양손을 회수하며 팔을 굽혀서 양 팔꿈치로 상대의 수도를 내리찍었다. 주보의 도박이 성공하였다. 회주문의 제자는 소경광, 포삼과의 연이은 격돌로 상당히 지쳐있었다. 그래서 승부를 서둘렀다. 비틀거리는 주보를 보고 허초로 흔들어놓은 후, 결정타를 날렸다. 그 것이 실수였다. 선제타가 허초가 아닌 실제 공격이었다면 주보의 반격은 무위로 돌아갈 판이었다. 주보는 만약 상대의 공격이 실초라면 고스란히 맞아줄 각오를 하고 자신이 오 히려 허초로 반격을 전개하였다. 그저 상대의 공격이 허초이기만을 바라면서 무리한 도박을 감행한 것이었다. 강력한 결정타를 날리던 회주제자는 주체할 수 없는 여력에 휘말려 손을 회수 하지 못했다. 철룡방벽이 손등을 강타했다. 이어서 주보의 구부렸졌던 팔이 다 시 활짝 펼쳐지며 거룡십팔수의 최강초식 용익파탑으로 변환되었다. 두 주먹이 상대방의 턱에 묵직하게 꼿혔다. 순간 도학정의 얼굴이 희망으로 밝아졌다. 용무관의 삼번주자가 회주문의 삼 번주자를 꺽은 것이었다. 애초에 도학정은 자신의 제자들이 연승전을 이기리라 고는 일말의 기대도 갖지않았다. 다만 용무관의 일원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 습을 보여주면 다행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렇게 간단히 모진위를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강호의 명예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연승전을 빌미로 진약천이 모진위를 요구한다면 도학정은 진약천과 일전을 불사할 각오였다. 물론 강호의 전통을 무시하는 파 렴치한이라고 사람들이 비웃겠지만 오히려 도학정에게는 그 따위것에 연연하여 모진위의 안위를 포기하는 것이 더욱 더 파렴치한 짓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주보의 승리는 정말 행운이었다. 정상적이었 다면 주보가 패했을 확률은 십중칠팔이었고, 나머지 제자들도 모두 회주문의 세 번째 순번의 벽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목선민이 이겨낸다고 해도 지독한 연속 격투를 치루고 회주문에서는 가장 무공이 뛰어날 것임에 틀림없는 회주문의 마 지막 대기자까지 돌파해낸다는 것은 기대가 난망이었다. 하지만 기적처럼 주보 가 승리를 얻어내었다. 비록 목선민을 제외하고는 남은 녀석들이 그다지 신통치는 않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하나 쯤은 꺽어줄 것이다. 십사세이하의 아이들이 내공이 깊어봐야 얼 마나 깊겠는가? 요는 역시 체력이 승부의 관건이었다. 주보를 비롯한 세명의 제자들이 끈질긴 체력전으로 네번째 순번을 퇴치시켜주고 그다음 순번을 어느 정도만 괴롭혀준다면 그리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내공의 수위가 잘 단련된 청년고수의 수준에 육박해있는 목선민은 또래의 아이들과는 격이 달라 도 한참 달랐다. 용무관 아이들의 눈빛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회주문이라는 대문파를 맞이 하여 잔뜩 주눅이 들어있던 처음과는 천양지차였다. 이미 패배가 자명한데도 소경광의 다리를 분질러 버린 회주문의 만행에 분노하였고, 소심한 성격에도 불 구하고 자신보다 엄청나게 강한 상대에 대항하여 불굴의 투지를 보여준 포삼에 게서 긍지를 회복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만신창이가 되면서 승리를 엮어낸 주 보의 투혼에 전의가 폭발하였다. 주보가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회주문의 사번주자에게 엉겨붙었다. 주보의 동작은 더 이상 무공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쉽게 물러나지는 않겠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주보가 기력이 다하여 쓰러져 버렸을 때, 회주제자의 호흡은 가빠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고강이 달려들었다. 평소에는 약삭빠른 행동과 요령피우기를 동료들 의 눈총을 받던 고강조차도 오늘만은 달랐다. 현격한 실력차이에도 불구하고 얻어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엄청난 투혼을 보여주었다. 물론 오십여수의 초식이 오간 끝에 눈물겨운 투혼에도 불구하고 고강은 길게 뻗고 말았다. 그러 나 고강의 노력이 전혀 헛된 것만은 아니라서 회주문의 사번주자는 숨소리가 눈에 띄게 거북해져 있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단어가 도학정의 뇌리를 얼핏 스치고 지나갔다. 조 금전만해도 수십년을 쌓아올린 영화(榮華)가 한 낱 티끌로 돌아가버리는 순간 을, 어쩌면 생명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순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무던히 도 애쓰던 도학정이었다. 유광예(劉光裔). 상당한 재능을 갖추고 있음에도 수련 에 그리 열의를 보이지 않던 얌전한 아이. 마치 딴사람이라도 된 듯이 얌전하 기만 하던 유광예가 길길히 날뛰었다. "으이약, 따아!" 듣도 보도 못한 괴성까지 질러대며. 대전을 개시한 지, 예닐곱수도 되지않아 회주문의 제자를 핍박하여 궁지로 몰 아넣다. 거의 기력이 다한 회주문의 제자는 유광예의 살기등등한 기세에 거의 이렇다 할 반격조차도 엄두를 못내는 실정이었다. 유광예가 무난하게 상대를 제압해버렸다.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회주문의 다섯번째 순번이 나왔다. 유광예를 바라보던 도학정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빙의 승부였다. 회주문의 다 섯번째 주자는 분명히 유광예가 견디어 낼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유광 예가 예상밖의 저력을 과시하며 약간의 열세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격 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회주문의 승리였다. 체력이 유달리 약한 유광예가 결국은 버 티어내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대련은 격렬하였고, 상대의 기력을 적지않게 소 모시켰다. 드디어 목선민의 등장이었다. "용무관의 목선민!" 목선민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고 나서야 운기조식을 풀며 뒷쪽에 누워있는 모진위를 바라보았다. 모진위는 이틀전에야 간신히 의식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아직도 안심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모진위도 힘들게 고개를 돌려 목선민을 바라보았다. 두눈이 마주쳤다. '걱정마. 자식들 문제없어.' 목선민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목선민은 천천히 걸어나가 대련자 앞에 섰다. 상호간의 예의가 있고, 목선민이 멋들어진 기수식을 취했다. 마치 날렵한 청룡이 날아와 구름위에 걸터앉기라도 하는 듯한 깔끔한 자세였다. 회주문의 제자가 몇차례 수작을 벌였고, 목선민이 여유있게 회피하였다. 진약천의 두눈이 휘둥그레졌다. 목선민의 동작은 끊김없이 매끄럽게 흘렀고, 여유로웠으며 용트림을 치듯이 웅장하기까지 하였다. 이 권법이 어찌하여 용무 권(龍舞拳)이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었는지 목선민의 우아한동작이 새삼 일깨워 주고 있었다. 목선민은 마치 용이 하강하여 춤이라도 추는 듯 꾸밈없이 탁 트 인 동작으로 권법을 전개하였다. 진약천은 눈을 감아버렸다. 진약천은 삼류무술도장의 하류무공이라고 우습게 여기던 용무권을 다시 보게 되었다. 용무권은 조잡한 하오문의 권법이 아니라, 신양제일의 고수라는 자기조차 그 심오함을 예측키 어려운 높은 경지의 절예 (絶藝)였다. 목선민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봐야 이부춘이 보다 약간 나은 정도 겠지 하고 안심하고있던 진약천은 가슴이 써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회주문에는 목선민의 적수가 될 만한 문하생이 없을 것 같았다. 만약 태청이를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결과는 전혀 의도와는 다르게 되어버렸을 것이었다. 그야말로 회주문 의 패가망신이었다. 목선민의 발아래 널부러져 있는 회주문의 멍청한 제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진약천의 예상대로 회주문의 나머지 문하생들은 목선민에게 연달아 격파당했 다. 이제 회주문에는 단 한 명의 대기자밖에 남지 않았다. "회주문의 진태청(秦太靑)" 백의(白衣)의 귀공자가 비무대로 나섰다. 줄지어 대기하고 있던 회주문의 문하 생중에 단연 군계일학(群鷄一鶴)으로 빛을 발하던 미소년이었다. 마주서있는 목 선민은 기품도 과연 모자름이 없어서 두 소년이 마주서니 그 하나는 용(龍)이 요, 다른 하나는 봉(鳳)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약천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진태청은 그의 손자로서 일찍부터 무예에 남 다른 재능을 보여주었다. 회주문에 두고 가르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재목이었다. 진약천은 알고있는 연줄이란 연줄은 모두 동원하여 기여코 진태청을 천하대문 파로 위명을 떨치는 남악파(南岳派)에 입문시켰다. 과연 진태청은 영재로서 소 림, 무당과도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남악파에서 단시일내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 재능을 인정받아서 삼년전에 장로급의 직전제자(直傳第子)가 되었고 남악파 의 비전들을 전수받았다. 그런 진태청을 진약천은 용무관을 멸문시키는 강력한 비책으로 안배해 두었던 것이다. 진태청은 학이 날개펼치는 형상으로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두팔을 펼치고는 오른발을 왼발과 일직선이 되도록 뻗어서 살며시 바닥에 대었다. 그리고 한가 로운 눈빛으로 목선민을 바라보았다. 진태청은 목선민이 나서기 전만해도 할아버지 진약천을 원망하였다. 이런 한 심하고 조잡한 녀석들이나 상대하라고 자기를 불렀단 말인가? 어이가 없었다. 쌍방간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자니 따분하기 이를데 없었다. 하품이 나올 지경 이었다. 그러는 동안 목선민이 등장하였다. 비교적 자세도 안정되었고 동작에 기운과 절도가 있었다. 무림잡배들 사이에 이런 제대로된 권법수련자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제법 흥미있는 일이었다. 진태청은 잠깐 놀아보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긴장이 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물나게 접해본 남악 파의 문하생들과는 또 다른 색다른 맛이 있을 것 같았다. 진태청이 가볍게 좌수를 접어서 목선민을 향했다. 순간 목선민은 강력한 힘이 밀어부치기라도 한 것처럼 뒤로 주르르 밀려갔다. 목선민은 서둘러서 양팔로 앞가슴을 가리고 뒷다리에 힘을 주어 신형을 정비하였다. 진태청이 손을 움직여 이번에는 아래쪽을 가리켰다. 목선민을 밀어부치던 기 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목선민이 일순 균형을 잃은 채 앞으로 튕겨나갔다. 그러다가 간신히 여력을 추스리는 듯하더니 돌연 공중으로 도약하여 진태청의 상반신을 목표로 기습을 감행하였다. 진태청은 제법이라고 감탄하였다. 공간을격하여 목표물을 때리는 방법은 난 생처음 겪어 보았을텐데도 두 수만에 수법을 간파해내고 반격까지 해왔다. 원 래 진태청은 상대를 밀어부치던 기운을 살짝 뽑아내어 목선민을 업어지게 하고 머리통을 한 번 갈겨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목선민이 앞으로 넘어가는 와중에 도 대단한 기운으로 신형을 갖추고, 진태청이 격출한 두번째 격공을 공중도약으 로 피해내며 보기좋게 진태청이 파놓은 함정을 벗어났다. '기특한 놈이군. 그렇다면...?' 갑자기 진태청의 신형이 번쩍하고 목선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조금전 발밑 이 께름직해서 훌쩍 뛰어넘었던 정체모를 기운이 문득 목덜미에 근질거렸다. 목선민은 지체없이 허리를 굽히며 뒷발로 걷어차버렸다. 발끝에 감촉이 느껴졌 다. 진태청은 깜짝놀라서 투덜거리며 목선민의 발을 손가락으로 튕겨내었다. 녀석 은 상상도 못해봤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남악파의 독보적인 경신법으로 뒷통수 로 다가갔더니 놀랍게도 녀석이 정확하게 자신의 방위를 추적해냈다. 용수철같은 탄력이 목선민의 발을 튕겨냈다. 단순히 튕겼을 뿐인데도 목선민 의 다리가 견딜 수 없는 힘에 밀려서 허공을 회전했다. 그대로 뒤집혀서 바닥 을 굴러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목선민도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은 않았다. 전신을 지탱하던 반대발로 바닥을 차며 튀어올라 멋들어지게 공중제비를 돌고 지상에 내려섰다. 진태청은 목선민은 안중에도 두지않고 불쾌한 표정으로 목선 민의 발에 슬쩍 끌렸던 소매를 툭툭 털어내고 있었다. 목선민이 다시 달려들었고, 진태청이 번쩍하고 사라졌다. 목선민이 이번에는 옆을 후려쳤고, 목선민의 측방에서 나타난 진태청이 다시 스르르 사라졌다. 진 태청의 하얀 그림자가 계속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였고, 목선민 은 오로지 감각에만 의지하여 막아내거나 반격을 가했다. 마치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술레잡기를 하는 꼴이 되었다. 진태청의 동작이 갈수록 빨라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목선민의 주위에는 백색 의 인영(人影)이 자욱해졌고, 목선민은 방어에 급급하여 팽이처럼 회저해야 했 다. 목선민의 주위에는 온통 권각으로 가득했다. 수십개의 손발이 동시에 목선민 을 공격해오고 있었다. 목선민은 진태청의 신묘한 절기에 혼이 나갈 지경이었 지만 경탄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저 정신없이 밀려드는권각들을 막아내는데 정신을 집중하였다. 신형이 분간이 안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던 백색의 그림자가 돌연히 회전하 는 푸른 그림자밖으로 튕겨져나왔다. 진태청이었다.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진태 청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목선민도 숨을 헐떡이며 신형을 멈추었다. 목선민의 도복이 두어군데 찢겨나 갔고, 목선민의 입가에서 가느다란 선혈이 흘러내렸다. 목선민이 팔소매로 아무 렇치도 않은 듯 입술을 훔쳤다. 진태청도 멀쩡하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진태청은 얼굴을 찡그리고 팔목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목선민의 철룡방벽이 진태청의 팔목에 일침을 가한 것이었다. 목선민은 그 숨 쉴겨를도 없는 방어의 와중에서도 철룡방벽을 시전하였다. 철룡방벽은 신체의 어떤 부위로도 상대를 가격할 수 있는 초식이었다. 물론 목선민같은 경지에 이 르면 상대방에게 가격당하는 신체의 부분으로 바로 맞받아칠 정도의 위력을 발 휘할 수 있었다. 진태청의 수십차례의 공격중 가장 약했던 팔목치기가 맞받아 치는 목선민의 어깨에 반격당하여 버린 것이었다. 진태청은 화가 치밀어올랐다. 한주먹꺼리도 안될 것 같던 하수에게 한순간 방 심하였다가 어이없게도 깨끗한 한 수를 허용하고 말았다. 더 이상 우스운 꼴을 당하기 전에 본때를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진태청을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최고의 절초 화륜칠접(花輪七蝶)을 시전하였 다. 화륜칠접은 남악파의 유명한 절기로써 전부 칠식(七式)으로 이루워졌는데, 식마다 연속적인 일곱개의 초(抄)가 있었고, 또한 칠식이 모두 전개되고나서야 시전이 끝나는 사십구초의 권법이었다. 남악파가 설립된 이래, 모두가 인정할 만한 고수들외에는 이 사십구초식을 모두 받아낸 상대는 한명도없었다. 수레바퀴라도 도는 듯이 진태청의 초식이 연달아 목선민에게 쏭아졌다. 때로 는 허초였고, 때로는 숨겨진 초식이 있어서 두개의 공격으로 갈라지기도 했다. 목선민으로서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변화무쌍한 연속공격이었다. 그러나 목 선민은 물샐 틈 없는 방벽을 쌓고 일곱번의 연속공격을 모두 막아내었다. 일곱초의 공격이 끝나자 수직으로 돌던 수레바퀴가 축이라도 뒤집은 듯 갑자 기 수평으로 바뀌었다. 목선민은 결국 한 수를 놓치고 옆구리에 적중당하고 말 았다. 칠초후, 다시 수레바퀴가 방향을 바꿨다. 이번에는 두초식이나 모진위의 방어망을 뚫었다. 진태청의 수레바퀴는 더욱더 강하게 회전하였고, 목선민의 방어망이 와해되고 말았다. 목선민은 연속적인 공격에 난타당했다. 목선민이 비참하게 무너졌다. 회 주문의 마지막 주자 진태청의 압승이었다. 도학정은 앞이 캄캄해졌다. 믿었던 목선민마저 패했다. 도학정이 보기에 진태 청은 회주문의 문하생이 아니었다. 그의 무공은 도학정도 일견식조차 없었던 대단한 무공이었다. 아마 화산파정도는 되는 전설적인 문파의 신출귀몰한 절기 들이리라. 그러나 이제와서 이의를 제기해보았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진 태청이 진약천의 손자임을 참관인도 인정하지 않았는가? 승부는 끝났다. 마지막으로 모진위가 남아있었지만 그것은 당사자는 승부에 참여해야 한다는 규칙에의한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서있을 기운조차 없는 모진 위에게는 가혹한 형벌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태가 더 악화되지 않 고 무사히 패배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도학정은 이제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무슨 억지를 써서라도 진 약천에게 비무를 청해야 한다. 물론 진약천의 최종목표도 도학정이지 모진위가 아닐 것이다. 진약천은 당연히 비무에 응할 것이다. 이길 확률은 거의 전무했지 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자신이 진약천에게 패배한다면 회주문이 더 이상 모진 위를 걸고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진약천의 목적이야 어디까지나 용무관의 멸문일테니까. 하지만 도학정도 순순히 패배해 줄 마음은 없었다. 목숨을 걸고 라도 용무권의 정신을 분명히 보여주리라. 도학정은 이를 악물었다. 백수노계였습니다. #4566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11- 09/24 13:31 426 line 모진위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제대로 설 수도 걸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규칙 은 규칙이었다. 확실한 증거에의해 비무불가를 인정받지 못하는 한, 대련에 나 서야만 했다. 두명의 용무관원이 모진위를 부축하여 비무대의 중앙으로 데리고 나왔다. 진태청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의 할아버지 진약천은 그래도 한수가 있는 녀 석이니 방심을 하여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었지만, 이건 말이 안되도 너무 안 되는 경우였다. 촛점도 없이 멀뚱거리는 쾡한 눈, 자신의 나이또래라고는 믿을 수 없게 왜소한 체구, 마치 대들보라도 부러진 듯 이상하게 우그러진 체형, 게 다가 피부는 시커멓게 죽었고, 사지는 서있기도 힘에 겨운 듯 흔들거리고 있었 다. 그야말로 나병환자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심한 꼴을 기억해낼래야 낼 수도 없는 비참한 몰골의 녀석이었다. 싱글거리며 포권을 취하는 진태청을 향해 힘겹게 포권으로 답례하던 모진위는 목선민과의 각경권이 문득 생각났다. 그때 모진위은 각경권을 앞두고 견딜 수 없는 부담감에 거의 공황상태에 빠졌 었다. 하지만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 이르고 보니 그때의 부담이란것은 정말 아 무 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는 그저 도장의 명예와 전통정도였지만, 작금에 이르 러서는 자신과 도학정을 포함한 용무관의 생사가 걸려버렸다. 모진위를 더욱 견딜수 없게 만드는 것은 이런 절박한 사태의 원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데 있었다. 부축하던 동료가 조심스럽게 모진위에게서 떨어졌다. 모진위는 가까스로 버티 고 섰다. 동료들이 주춤 주춤 물러서 제자리로 돌아갈 때까지도 모진위는 버티 고 서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만 허물어지듯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모진위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연약한 애벌레가 마침내 성충이 되어 고치 를 찢고 나오려 기를 쓰듯이 모진위는 그렇게 버둥거렸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 으로 팔짱을 끼고 서있는 진태청의 등뒤로 도학정이 보였다. 도학정의 표정은 모진위로서는 생면부지의 얼굴처럼 낯설게만 느껴졌다. 모진위는 또다시 각경 권을 회상하였다. 그때 목선민의 표정이 그렇게 낯설었었다. 그렇지만 모진위는 이내 가슴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모진위가 언제나 보아왔던 냉정 하고 엄한 표정이 아니었다. 도학정의 표정은 쓰러진 모진위가 간신히 일어났 을 때 '너괜찮니?'하고 걱정해주던 그때 각경권에서 처음 만났던 목선민의 그 표정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모진위를 바라보는 도학정의 눈에는 안스러운 정이 담뿍 담겨있었다. 모진위는 자신이 이제 간신히 생사의 고비에서 벗어났음을 알고있었다. 더 이 상의 무리는 결국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부 도학정도 진태청과의 승부를 허락하지 않았다. 가장 가벼운 방법으로 패배를 인정하고 비무에서 물러나라고 했다. 그러나 모진위는 필사의 힘을 다하여 일어섰다. 나 방이 고치를 떨어버리듯 죽음이라는 공포를 훌훌 털어버리고 안간힘으로 일어 서서 진태청앞에 섰다. 진태청이 괜찮겠냐는 표시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또 한번 각경권이 생각났 다. 각경권때의 목선민도 그랬었다. 다만 그때의 목선민은 진심어린 걱정이었다 면 진태청은 그저 조소어린 경멸이었다. 모진위가 다시 목선민이 걱정어린 눈 으로 바라보던 그때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공포와 부담을 잊어버리고 목선민 과 우정이라도 나누듯 빨려들어갔던, 또 다른 세계, 그 가슴떨리는 비무의 세계 로 몰입해가던 그당시 자신의 모습도 그려보았다. 모진위의 전신모공(毛孔)이 열리고 단전이 숨을 쉬기 시작했다. 또한 세상만사 가 그의 뇌리속에서 사라졌다. 모진위의 열려진 세상에는 진태청과 자신이외에 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모진위는 목선민과 자기생애 최고의 명승부 를 벌였던 그때 그 심정으로 마침내 돌아가고 만 것이었다. 진태청이 조용히 손을 들어올려 손끝으로 모진위의 턱을 가리켰다. 출운용무 속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 모진위의 턱으로 덮쳐왔다. 모진위는 이상 한 무형의 기운이 자신에게 다가옴을 느꼈지만 피해낼 만한 기력이 모진위에게 는 남아있지 않았다. 달리 뾰족한 방도가 없음을 통감한 모진위는 억지로 좌수 를 들어올려 손바닥으로 맞섰다. 다만, 출운용무속의 무형의 기운과 그렇게 했 듯이 진태청이 펼쳐낸 지력에 맞서지 않고 그힘을 받아들였다. 진태청은 부드러운 기운이 자신의 가슴쪽으로 파고들자 깜짝놀라서 손가락으 로 그 잠력을 튕겨내었다. 진기는 한바퀴를 돌아서 다시 모진위에게 몰려갔고 모진위가 다시 좌수를 올려 막았다. 진태청의 반탄기가 이윽고 모진위의 손바 닥에 부딪치자 모진위의 좌수가 움찔하고 뒤로 밀리는 듯싶더니그 반동으로 튕겨올라가기라도 하는 듯 우수가 스스르 세워지더니 우수를 통해서 진태청이 쏘아보냈던 지력이 다시 진태청에게 밀려왔다. 이미 기세를 대부분 상실했기에 진태청은 소매를 흔들어 기운을 소진시켜버렸다. 진태청은 불신의 눈으로 모진위를 쏘아보았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 지금 벌어 지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수법으로 모진위가 자신의 지공을 되돌려보 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모진위도 어째서 이런 묘수가 가능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 가지였다. 모진위는 의식하지 못하고있었지만 상승의 경지에 이른 모진위의 용무권과 무위조식(無爲調息)이 반사훈련을 통해서 잘 발달된 모진위의 감각을 빌어서 놀라운 무공을 엮어낸 것이었다. 무위조식은 피부와 단전을 사용하여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조식법이었다. 유별난 신체조건으로 인해서 축기(蓄氣)는 불가능하였지만, 받아들인 기운을 본 원진기의 도움으로 사용할 수는 있었다. 남악파의 지법은 파동이 적어서 상대가 간파해내기 곤란하다는 데 그 오묘한 장점이 있었지만 이미 용무권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고, 남달리 외부의 기운에 민감한 모진위였으니 그 정체를 간파해내는 것은 모진위로서는 일도 아니었다. 다만 지력을 받아쳐낼 만한 기력이 없는 모진위는 무리인줄 알면서도 고통을 각오하고 등룡육권의 '접'자결과 '흡'자결을 이용해서 지공을 받아버렸다. 그것이 뜻밖에도 이런 결과를 낳았다. 만약 진태청이 경기(硬氣)를 발출해냈다면 그 파 괴력으로 인해서 모진위의 왼팔을 사정없이 분질렀겠지만 남악파의 지법은 내 부의 충격을 위주로하는 부드럽고 음유한 기운이었다. 모진위의 무위조식은 기특하게도 그 기운의 상당부분을 흡수해냈고, 내부의 충 격이 최소화되도록 재빨리 반대편 손바닥으로 충격파를 배출해버렸다. 또한 미 량의 기운이 모진위의 체내에 남아 원기회복에 일조했으니 이 또한 천우신조 (天佑神助)라 아니할 수 없었다. 잠시 망연자실해있던 진태청은 방금전에 벌어진 사태가 도무지 믿을 수 없었 던지 재차 지력을 쏘아보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모진위가 다시 거뜬하게 되돌려 보내주었던 것이었다. 진태청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려서 최대한 내력을 끌어올려 연달아 손가락을 휘저었다. 그러나 되돌려지는 잠력을 막아내느라 진 태청 스스로만 번잡해졌을 뿐, 오히려 그 진기는 모진위의 원기를 보충해주는 결과가 되었다. 모진위의 내부를 통과하던 진태청의 진기가 기력이 다하여 쓰 러지려던 모진위를 일으켜 세워주었던 것이었다. 진태청은 결국 방법을 바꾸어 남악파가 자랑하는 신출귀몰한 경신법으로 모진 위에게 달려들었다. 진태청은 재빨리 모진위의 후방으로 스며들어 회심의 일장 을 가했다. 그러나 허공을 가르는 일장이었다. 좌측방으로 돌아가서 또 한번의 일장을 가했다. 가히 번갯불이 튀듯 재빠른 신법으로써 느려터진 모진위로서는 도저히 피할 재간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완벽한 공격이었는데도 '날 때려줍쇼'하 고 무방비로 서있는 모진위를 진태청의 날카로운 일권이 또 비껴나갔다. 진태 청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연신 방위를 이동해가며 모진위를 핍박하였다. 그런 데 후면이건 측방이건 아무리 번개같이 이동하여 모진위를 공격하여도 어찌된 영문인지 모조리 헛손질이 되고 말았다. 진태청의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이쯤해서 진태청은 완전히 제정신 이 아니었다. 모진위가 아니라 제 아무리 고수라해도 일격을 가할 자신이 있는 완벽한 기회였다고 생각했는데 진태청의 장권은 모진위가 허공에 떠있는 가벼 운 깃털이기라도 한 것처럼 전혀 타격을 주지 못했다. 목선민은 온통 백색 그림자로 뒤덮혀있는 모진위를 보고 애가 탔다. 분명히 모진위는 자신이 진태청과 겨루웠을 때처럼 수십개의 권각에 갇혀있는 것이었 다. 철룡방벽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모진위가 그 모진 연타를 어떻게 감 내해낼 것인가? 목선민은 피투성이로 나뒹구는 모진위를 상상하고는 치를 떨었 다. 모진위는 심신이 상쾌하였다. 모진위는 주위을 휘감고 도는 기의 흐름에 전적 으로 스스로를 맡기고 흘러가고 있었다. 가만히 내버려둔다면 제풀에 쓰러져버 릴 모진위였지만 주위를 난무하는 진태청의 기운으로 신형을 유지할 수가 있었 다. 물론 긴장의 고삐를 늦춘 것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그 기운에 거슬렸다가 는 모진위은 뼈도 못추리게 될 것이었다. 모진위는 출운용무를 시전하는 마음 이었다. 출운용무속의 무형의 기운에도 거슬리지 않고 그 기운에 순응하여 그 힘을 이용했듯이 진태청이 휘두르는 노도(怒濤)를 타고 유유자적(悠悠自適) 밀 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남악파의 경신법은내공의 힘을 십분활용하는 신법이었다. 남악파의 고수였다 면 상대방의 오감을 속이는 남악의 경신법이 제 위력을 발휘하도록 기의 흐름 을 최대한 감추었겠지만 진태청같은 어린 문하생은 아직 그러한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진태청은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과 자신을 과시하려는 욕심이 어우러져 속도를 중시하여 더욱 방만하게 기를 표출시키는 우를 범하였 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의 기를 이용하는 것을 능기로 하는 모진위에게 있어서 는 그야말로 몸에 맞는 옷을 선사해주는 선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진태청이 제풀에 지쳐버렸다. 모진위를 둘러쌌던 백색그림자가 표연히 사라지 고 진태청이 모습을 드러냈다. 애처롭게도 진태청은 상아처럼 하얀 뺨을 붉게 물들인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반면에 모진위는 여전히 꼴불견이기는 했지만 처음 비무에 나섰을 때보다는 한결 그럴 듯해보이기까지 했다. 초조해진 진태청이 드디어 마지막 패를 뽑아들었다. 그냥 자신의 거친 숨만 진정시키고 있어도 그 동안에 힘이 다해서 쓰러져버릴 기진맥진한 모진위를 진 태청은 아직 숨도 가뿐 형편에 전력으로 짖져들어갔다. 진태청 최고의 절기, 화 륜칠접이었다. 화륜칠접도 다른 남악파의 수법과 같이 내공을 위주로 하는 초식이었지만 그 래도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화륜칠접은 그야말로 살과 살이, 뼈와 뼈가 부딪 치는 육박전의 초식이었다. 상대가 죽었든 말든 사십구개의 살초가 모두 전개 되어 마지막 일초까지 상대에게 가해지고 나서야 그 갈무리가 이루워진다는 살 기어린 잔혹한 권법이었다. "진위야, 쓰러져라!" 갑자기 도학정이 악을 썼다. "냉큼 엎어지란 말이다. 이녀석!" 모진위가 여전히 휘청거리며 버티고 서있었다. 도학정은 알고 있었다. 모진위 가 자신의 생명마저 돌보지 않고 있음을. 목선민을 난타하던 진태청의 그 마지막 권법을 모진위도 익히 보았다. 모진위 는 신체가 부실하여 무공이 형편없을지언정, 권법의 이치야 누구보다도 밝은 편 이었다. 화륜칠접의 그 패도적인 위력을 짐작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모진 위는 톱니바퀴속으로 뛰어드는 하찮은 벌레처럼 그렇게 흔들거리며 화륜칠접의 날카로운 이빨속에 빨려들고 있었다. 도학정은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두눈을 부 릅떴다. 수레바퀴가 돌고 강맹한 첫초식이 모진위의 우측 어깨를 강타하였다. 모진위 의 신형이 충격으로 휙 쏠렸다. 그러나 모진위가 채 쓸려나가기도 전에 연이은 제이초가 좌측옆구리를 후려갈겼다. 이어서 삼초가 등에 적중하였고, 사초가 이 미 한바퀴를 돌아버린 모진위의 우측 허리를 파고들었다. 도학정의 입이 벌어졌다. 진태청의 제칠초가 모진위의 좌측 둔부를 강타했을 때, 모진위는 이미 일곱번의 공격에 고스란히 전신을 난타당한 채, 두번째 회전 을 마치고 있었다. 진태청은 일곱초로 일회전을 마치고 수레바퀴의 축을 수직방향으로 변환시켜 나갔다. 바야흐로 진태청의 또 다른 일곱초가 모진위를 상에서 하로 짓이겨버 릴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와서는 바닥에 쓰러지는 것이 더 위험 하였다. 모진위가 기절을 해서 쓰러진다해도 진태청의 잔인한 톱니바퀴는 멈추 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도학정이 침을 꿀꺽 삼겼다. 그리고 똑똑히 보았다. 경력과 타력에의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통에 잔영(殘影)밖에는 보이지 않던 푸르스름한 모진위의 그 늘속에서 무언가가 불쑥 솟아오르며 이제 막 자세를 변환하느라고 넓게 헛점이 노출된 진태청의 우측허리를 파고 들었다. 으드득-. 무언가 둔탁하게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진태청은 옆구리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그대로 옆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거 의 일장이나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미 공중에서 기절해버린 후였다. 도학정은 분명히 보았다. 연달은 채찍질에 얻어맞아 세차게 돌아가는 팽이처 럼 놀라운 속도로 회전하던 모진위를, 최고의 얻어맞기 수법 '돌려 흘리기'에 상 대의 힘을 이용하는 회풍선엽으로 자신을 회전시키고 있는 모진위를, 그리고 마 침내 회전력의 무서운 기세로 진태청의 허리를 파고드는 모진위의 왼 무릅을 분명히 보았다. 거룡십팔수중 가장 어려운 수법인 회풍선엽의 원리에 따르고 등룡육권의 최고 의 기법이라는 '화(化)'자결의 기운을 실어서 비룡삼장의 마지막 한수 빙어풍장 (憑御風掌)을 모진위가 성공시켰다. 도학정의 두눈에 이슬이 맺혔다. 용무권의 궁극은 자연의 기운에 순응하는 것 이었다. 회풍선엽으로 주변의 외적인 힘을 다스리고, 그와 동시에 이른바 화경 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화'자결로 내적인 힘을 다스리고, 이 둘을 조화시켜 대자연의 흐름과 일체가 되는 빙어풍장(憑御風掌)을 이끌어내는 것, 이 것이야 말로 용무권의 마지막 초식이었다. 지난 사십여년동안 용무권과 더불어 살면서 도 도학정이 단 한 번도 견식조차 할 수 없었던 용무권 최고의 절초를 비록 초 보단계이기는 했지만 도학정이 사력을 다했던 제자, 모진위가 실제로 재현해준 것이었다. 진약천은 거의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젊은 날 강호를 떠돌며 숱한 강적과 대 전하며 죽음의 위기를 맞기도 하고, 예기치 못한 함정에 빠지기도 했지만 어느 것도 작금의 사태처럼 자신의 심계에 완전히 거슬리는 것은 없었다. 위기는 커 녕 도약을 위한 단단한 발판으로만 여겨졌던 용무관의 정복이 진약천의 공든 탑을 한순간에 무너뜨려 버릴지도 모르는 위기로 눈앞에 가시밭길을 펼쳤다. 더군다나 돌다리도 두드리듯 신중을 기하여 안배해놓은 자신의 보물같은 손자 진태청마저 망가뜨려버린 채. 진태청은 아마도 늑골이 서너대는 부러진 듯했다. 어쩌면 무림인으로써의 재 기조차도 불투명해질지도 모른다. 진약천은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이제 어떻게 이 난국을 수습할 지 도대체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진약천은 역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이었다.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을 것 같던 현실을 비통한 심정을 억누르며 인정하였다. 그 현실속에는 용무관의 기적같은 역전승이 있었고, 회주문의 믿을 수 없는 패배가 있었다. 그 러나 그 현실속의 내용물들은 아직도 채 진실을 드러내지 않고 혼란으로 들끓 고 있었다. 물론 노회한 권모술수의 대가 진약천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작금의 현실밖으로는 또 하나의 현실, 비정한 생존법칙이 있었다. 진약천이 매 달린 돌파구는 비열하기 이를데 없는 그 약육강식의 생존법칙이었다. "성대협! 본좌는 반드시 용무관의 모진위를 양도하여 무림의 기강이 살아있음 을 신양성의 여러동도께 확인시켜드리고 싶소. 수고스럽지만 부디 공명정대한 차후 조치를 주재해주시요." 대회의 참관인, 성순지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곤란한 지경에 빠져버렸다. 일 견해서 진약천이 억지를 쓰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간단하게 퇴짜를 놓을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사태를 이대로 정리하기에는 너무 의외의 결과였다. 이대로라 면 회주문은 그대로 파국이었다. 비록 수련생간의 대항전이었다지만 무림의 어 엿한 방파가 일개 무술도장에게 패하여서는 적어도 신양성내에서는 더 이상 문 파의 존립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진약천은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성순지에게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어영부영 넘어갔다가 는 신양성에서는 공정하고 강직하기로 으뜸간다는 자신의 명예가 땅바닥에 떨 어질 판이었다. 일단 삼지사방을 때려부술 듯 공포분위기를 조성해놓은 진약천은 어쩡쩡하게 서있는 성순지를 보고 제대로 한수가 들어먹은 것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수 순을 밟아나갔다. "본좌는 무림의 규율에따라 연승전의 결과에 승복하는 바이요. 그러나 그 결과 가 이 모양이니, 참관인께서는 어찌했으면 좋겠소?" 성순지는 진약천의 눈길을 따라 쓰러져서 동료들에게 들려나가고 있는 모진위 와 진태청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진약천과 눈을 마주쳤다. 진약천의 눈빛은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성순지는 순리에 맞는 판결로 진약천 을 파국으로 몰아넣을 수는 있겠지만 그리된다 해도 진약천은 마음만 먹으면 아직 성순지정도는 신양무림에서 충분히 매장시킬 수 있는 실력자였다. 성순지 는 자신이 이곳 신양땅에서 쌓아올린 헛된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진약천이 파 놓은 돌파구로 허겁지겁 발길을 돌렸다. "회주문의 진태청, 용무관의 모진위. 쌍방간이 교차된 공격에 적중되어 대전이 무승부로 종결되었습니다. 노부의 재간으로는 승패를 가늠할 길이 없으니 진문 주님과 용무관주님께서는 고견을 빌려주시기 바랍니다. 노부는 두분의 가르침 에 따르겠습니다." "본좌는 이미 밝힌대로 시종일관 한마음, 용무관원 모진위의 양도를 원하오. 도관주께서 여전히 세상의 바른 이치를 깨달치 못하고, 자기 제자의 안위만 고 집한다면 본좌의 손속이 여전히 자비만을 베풀고 있지 않을 것임을 명심해야 할거요." 성순지의 입에서 바라던 말이 떨어지자마자 진약천은 틈을 놓치지 않고 말꼬 리를 잡았다. 그리고 누구하나 관여할 겨를도 없이 숨도 쉬지 않고 제할말을 다해버리고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파국의 한 고비는 어찌 어찌 넘긴 셈이었다. 도학정은 어이가 없었다. 뜻밖의 승리로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는 제자들의 모 습을 뿌연 눈물의 막사이로 바라보고있는 그 한순간, 상황이 돌변해버렸다. 진 약천의 억지에 의해 누가봐도 명백한 용무관의 승리가 어이없게도 무승부가 되 어버린 것이었다. 도학정이 미처 손써볼 틈도 없이... "어쩌시겠소? 저놈을 내어주시겠소, 아니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시시비비 를 가려보겠소?" 도학정은 이미 항변해봐야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실 제로 누가 옳든지간에 어차피 막판에는 주먹다짐으로 자신의 정의를 증명하는 것이 강호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숙명이었다. 조금 전만해도 자신도 연승전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진약천에게 비무를 청할 심산이 아니었던가? "진문주야말로 과연 그 세치 혀가 요사스럽기 그지 없구려. 하지만 저 녀석을 데려가려면 당신의 주먹도 그 능란한 혓바닥에 참으로 손색이 없는지 보여주어 야만 할게요." 이제까지의 도학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거친 말투였다. 도학정은 이미 평정을 잃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온 것이었다. 도학정은 알고있었다. 자신의 패 배는 곧 자신의 죽음일 것이란 것을. 사태가 이 지경이고 보면 진약천은 다만 승리만을 노리고 비무에 나설리가 없었다. 도학정의 판단은 한치도 틀림이 없는 것이었다. 진약천의 가슴속은 벌써 살심 으로 붉게 물들었다. 이미 용무관의 명성은 연승전에서 결판났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니었다. 용무관은 무술도장이지 강호방파가 아니었다. 진약천이 설혹 도학 정을 일방적으로 물리친다고 해도 용무관의 치솟기 시작할 위세에는 거의 누가 되지않을 것이다. 용무관같은 도장에서는 훌륭한 무술선생이 필요한 것이지 반 드시 승승장구의 싸움꾼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제와 서는 도학정이라는 이름을 세상에서 완전히 말살시키지 않는 한, 용무관의 현판 을 흔적도 없이 뽑아버리지 않는 한, 회주문의 깃발이 강호에 존재할 명목은 없 는 것이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단 하나, 오직 도학정의 죽음이었다. 도학정이 없으면, 용무관도 없는 것이었다. 진약천은 그런 마음으로 처음부터 생사의 결전에서나 쓰이는 살초를 선택하였 다. 서서히 들어올려진 진약천의 오른쪽 수도(手刀)가 마치 비수처럼 음산하게 번쩍거렸다. "자아, 그럼 조심하시요!" 기수식이고 상호예의고 없었다. 진약천은 이미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살벌한 싸움터에 들어선 것이었다. 하지만 도학정의 태세는 그에 비하여 상당히 손색이 있었다. 도학정은 실전경 험은 커녕 설흔을 넘기고 나서는 비무조차 제대로 해본 경험이 없었다. 비무라 고해도 고작해야 어설픈 제자들과의 여유로운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진약천이 시합개시고 뭐고 없이 바로 본색을 들어내고 살인행각을 자행하리라 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도학정이 주워들은 무림인의 싸움이란 초반은 탐색전이고 서서히 열기를 더하 다가 막판에 비장의 술수로 결판나는 것, 도학정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전투능 력조차 삼푼정도는 숨겨둔 채로 방어동작을 일으켰다. 진태청의 서슬퍼런 수도가 도학정의 안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실전경험은 전무하다고 해도 도학정도 용무권과 평생을 같이 한 무술인, 그리 녹녹하지는 않았다. 가슴을 파고드는 손끝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음을 눈치채고 철룡방벽과 서산동몰을 한꺼번에 구사하며 등룡육권의 탄(彈)자결을 이용한 세련된 유령보 법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진약천의 왼발이 기색도 없이 도학정의 허리로 접근하였다. 그리 강맹한 기세 가 아닌지라 도학정은 용각접응을 격만파장으로 기동시켜서 진약천의 발목을 움켜쥐려하였다. 그러자 슬그머니 도약하던 진약천의 왼발이 인간의 체형으로 써는 대단히 곤란한 각도로 휘어지더니 돌연 방향을 틀어 흉맹한 기세를 일으 키며 도학정의 하초로 날아갔다. 낭심이었다. "으아악!" 도학정이 비명을 터트리며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졌다. 비무와 실 전의 가장 큰 차이는 급소공격에 있었다. 물론, 심상치않은 기색을 느낀 도학정 이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습관적으로 낭심에대한 방비만은 비교적 소홀히 했다. 비무에 있어서 낭심공격은 금기중의 금기였으므 로 도학정으로서는 결코 당해본 적이 없는 공격이었기에 자연히 방비에 익숙할 수가 없었다. 실전경험이 풍부한 진약천이 이미 살의를품은 마당에 그러한 헛 점을 놓칠 리가 없었다. 진약천이 살기등등하게 바닥에서 신음하고있는 도학정의 명문혈(命門穴)을 향 해서 일지(一指)를 세웠다. 지금의 도학정이라면 명문혈에 구멍을 뚫어버릴 수 가 있는 기회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중에 문제야 되겠지만 실수로 낭심을 걷어차게 되었다고 극구 변명한다면 어느 정도는 무마될 것이다. 강호의 어느 누가 두눈 시퍼렇게 뜨고 자기를 쳐다보는 생자(生者)앞에서 공공연히 이제는 한푼의 가치도 없는 사자(死者)의 손을 들어 주겠는가? 그저 확실하게 도학정 의 명을 끊어놓을 수 있다면 진약천으로서는 낭심이 아니라 그 어떤 대단한 것 이다도 걷어차줄 용의가 있었다. 진약천의 혼신의 힘을 다한 중지(中指)가 도학 정의 최후를 보장하며 힘차게 뻗어나갔다. 모진위는 막 도학정이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을 보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모진위의 머리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폭발하였다. 도학정이 없는 세상이 자신 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세상에서 도학정이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였는지, 도학정과 자신을 공존해왔던 이 세상이 또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등의 생각들이 모진위의 뇌리를 좌충우돌하였다. 모진위의 뇌리속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단어는 사랑이었다. 주변에서 그리도 흔하게 들어왔지만 자신으로서는 그 한조각조차도 이해되지 않았던 단어, 사랑 이라는 단어였다. 모진위는 이제 열두살을 넘어가는 길목이 되어서야 희미하게 나마 그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황경의 미소도 하상곤의 무덤덤한 표 정속에 이질적으로 보였던 그 눈빛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 은 근래에 와서야 모진위가 경험했던 다른 몇 가지의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머 리를 싸매고 궁리한다고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추리나 계산같은 것으 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스스로 느껴야하는 것이었다. 모진위는 이제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것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제까지 자신 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뿐, 실제로는 마음깊은 곳에 숨어서 은밀하게 자기자신을 사랑해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모진위가 자신의 일 부로서 도학정을 사랑하듯이. 모진위의 눈에 어디에서인지 따듯한 물기가 배어 나왔다. 실로 오랜만에 흘려보는 눈물이었다. 모진위의 눈썹에 맺힌 눈물방울에 오색영롱한 빛이 반짝였다. 그 찬연한 빛은 한줄기 무지개처럼 구경꾼들 속에서 튀어나와 도학정과 진약천의 사이로 쏜살 같이 파고들어가고 있었다. "어떤 놈이냐? 감히... ..." "인명을 귀하게 여기시어 손속에 사정을 두신 진문주님께 감복하였습니다. 하 긴 승패는 이미 가려졌으니 자비를 베풀어 출수를 거두는 것은 진문주님의 인 품으로 보아 당연한 일이겠지요." "...음..." 진약천은 홀연히 나타나 자신의 대업을 방해한 사내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마침내 도학정의 숨을 끊어놓으려는 그 순간, 진약천은 정체모를 경력이 자신을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설혹 자신이 부상을 입는다하더라도 도학정은 확실히 명을 끊어버려야한다는 생각에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강 력한 잠력은 도학정의 명문혈을 꿰뚫으려는 진약천의 손가락을 쳐내버렸다. 진 약천은 최후의 일격이 허사로 돌아간 마당에 하복부를 파고드는 경기를 그대로 맞아줄 인내심은 없었다. 내력을 끌어올려 공중에서 일순 신형을 정지시키고, 숨을 토해내며 신형을 틀어 도학정의 건너편으로 안착하였다. 사내는 우스꽝스럽게도 오색무늬로 치장된 치졸한 복색을 하고있었다. 그런 복장은 광대패들이나 하고다니는 행색이었다. 하지만 행색과는 달리 그리 만만 하게 볼 상대는 아닌 것같았다. 일합(一合)만으로도 상대의 무공이 과히 자신에 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진약천은 절감하고 있었다. 일이 쉬울 것같지 않음 을 깨달은 진약천은 갑자기 등장한 괴한의 응징은 뒤로 미룬 채, 용무관 문제부 터 깨끗하게 결말짓기로 작심했다. "성대협, 이제 모진위란 놈을 회주문에서 데려가도 되겠소?" 어쨌든 진약천은 도학정과의 일전을 회주문과용무관의 비무의 일부로 계산하 여 결국 진약천 개인이 아닌 회주문의 승리로 인정받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 었다. 유달리 회주문이라는 부분에 힘을 준 진약천의 의도를 성순지가 모를리 없었 다. 성순지는 이미 쏟아진 물, 다시 주워담기는 틀린 일이기에 자포자기하여 순 순히 진약천의 요구대로 해주었다. "회주문의 승리입니다. 데려가십시요." 바라던 대답이었다. 도학정의 몰골을 보니 다행스럽게도 거의 재기불능상태였 다. 살아나도 제구실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진약천은 이것으로 그런대로 최악의 위기는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 "모진위란 아이는 데려가실 수 없습니다." 또 그놈의 불청객이 나섰다. "무엇이 어쨌다고? 도대체 이 무슨 망발이요? 귀하가 무슨 억하심정으로 신양 의 회주문을 능멸하려는지..." "허어, 고정하십시요. 어찌 감히 보잘것 없는 불초소생이 회주문과 같은 대문 파에 시비를 걸 엄두를 내겠습니까. 다만, 모진위라는 아이가 본반(本班)의 소 속이라서..." "이 무슨 억지인가? 모가녀석이 용무관 소속이란건 신양사람들이 다 아는 일 인데, 이젠 아주 여기 모인 사람 모두를 우습게 보고 수작을 부리는 구려. 귀하 가 도대체 무얼 믿고 그렇게 방약무인(傍若無人)하게 헛수작을 부리는 지 어디 출신내력이나 들어봅시다." "강호를 떠도는 무명소졸이 어찌 대단한 사문이 있겠습니까마는... 지금은 신 검반(神劍班)에서 밥을 빌어먹고 있고, 성은 장(張)입니다." "그럼, 장형의 말씀은 모가녀석이 신검반의 무리들과 한패거리라는 말씀인데, 어찌하여 이 용무관 바닥에 누워있는지 설명 좀 해주시겠소? 대답여하에 따라 장형은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할거요. 나 이 진약천이 비록 실력은 대단 치 않치만 무림의 정의를 위해서라도 헛수작 부리는 시정잡배들은 도륙을 내고 말 터이니..." "소생, 감히 진문주님전에서 야바위를 벌일 정도로 배포가 큰 놈은 아닙니다. 이게 아니라면 꼼짝없이 죽을 뻔 했군요. 그나마 이렇게 모씨 아이가 본반의 반원임을 증명하는 문서가 있어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게 생겼습니다." 장이라는 사내는 대담하게도 진약천을 비웃는 기색도 숨기지 않고 소매속으로 손을 넣어 두루마리를 꺼냈다. "읽어 보시지요." 진약천이 마땅치 않다는 동작으로 두루마리를 받아들고 펼쳐보았다. 내용인 즉슨, 모진위를 신검반에 위탁한다는 것을 관(官)에서 확인해준 그런 보증서의 일종이었다. 진약천도 이런 형태의 문서들은 익히 알고 있었다. 흔히 유랑극단패따위에서는 주로 고아나 미아들로 후계를 이어나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시국이 안정되자 관에서는 유괴, 납치등의 문제가 그런 패들과 연관 이 있는 것으로 보고 방랑연예단들을 닥달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제도적으로 도 보완도 이루워져서 아이들의 소유권을 대개의 유랑패들은 문서로 입증하게 되었다. 진약천이 알기로 신검반은 강호야사를 극형태로 만들어 보여주는 단체였으므 로 장가가 보여준 문서는 분명히 모진위가 신검반의 일원임을 증명해주는 것이 었다. 모진위의 친권자로는 황경, 하상곤, 도학정 세명의 서명이 있었고, 신양성 의 행정수반인 지현(知縣)의 날인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끄응-. 일이 꼬여도 너무 꼬였다. 물론 장가라는 녀석이 모진위의 소유권을 주장하니 장가에게 모진위의 죄를 다시 시비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꺼림직한 것은 녀석 이 의외로 담대하게 나오는 것이 아무래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고, 강호의 정세 에 항상 귀를 기울리던 진약천이고 보니 염로선지 황경, 금사일협 하상곤등이 누구라는 것 정도는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모진위와 관계가 있는 것 같으니 잘못했다가는 졸지에 강호의 고수들을 적으로 돌려야 할 위험을 감수해야했다. 진약천은 다시 안간힘을 다해서 머리를 쥐어짰다. 모진위를 체포하여 사방팔 방으로 회주문의 명백한 승리를 알리는 것이 최상책이기는 했지만 실제의 잇속 은 어차피 도학정의 건재여부에 달려있는 만큼 모진위때문에 더 이상의 출혈은 불필요하다는 것이 진약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진약천은 두루마리를 다시 장이라는 사내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관이 개입된 일에 무림인들이 시비를 왈가왈부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나 모 씨 아이에게 옳은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각인시켜 주어야 할 것이니, 장대협은 각별히 유념하여야 할게요." 진약천은 곤란을 회피하기위해 이번에는 관을 팔아먹었다. 사실, 회주문이 모 진위를 데리고 갔다고 신검반따위가 아무리 문서를 들이대어봐야 신양의 아문 (衙門)이 그깟일로 회주문을 괴롭힐 리야 없을 터였다. 사정을 잘아는 사람이 들으면 그지없이 궁색한 변명이었지만 그래도 국법을 준수한다는 의미라도 있 는 허울은 좋은 명분이었다. "태산이 다 닳아 없어지고, 장강이 말라버리지 않는 한, 언젠가는 만나게 될 터, 회주문은 귀하를 언제까지라도 기억할 것이니 귀하도 회주문이라는 세글자 를 부디 잊지 마시기 바라오." "어련하시겠습니까." 회주문의 일파들이 물러갔고, 구경꾼들도 떠들석하게 지껄여대며 썰물처럼 용 무관을 빠져나갔다. 신양일대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회주문과 용무관 의 일전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백수노계였습니다. #4651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12- 10/09 11:59 297 line 6. 표묘공주(彪猫空主) 도학정은 그로부터 나흘 후,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직 쉬흔이 되지 않은 나이에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려 그리 되었으니 비명횡사라고 해도 좋을 만 큼 애석한 죽음이었다. 모진위는 도학정에게 무엇인가 설명하고자 애를 썼다. 제자들이 하나 둘 집으 로 돌아가고 목선민도 며칠은 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라며 나흘동안 한잠도 못 잤으니 눈이나 잠시 붙혀두자고 하던 그날 밤도 모진위는 그렇게 도학정의 침 상옆을 지키며 무엇인가를 말해주고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러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용무관 사람들은 도학정의 임종을 지켜본 유일한 제자가 모진위라는 말을 듣 고 모두가 애석해하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용무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도 학정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할 사람으로 가장 어색한 인물이 모진위였다. 용 무관을 드나든 지 칠팔년이 다 된 고참들조차 도학정과 모진위사이에 뭔가 그 럴듯한 대화가 오가는 것을 봤다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 대개의 관원들 이 제대로 된 유감의 표시조차 없이 어색하게 이별을 겪었을 사제지간의 모습 을 상상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 유산문제나 유언은 이미 정리가 끝난 상 태였으니 그런 사무적인 내용조차도 딱히 더 할 말도 없었을 것이고 - 하지만 도학정의 임종은 관원들의 상상처럼 그렇게 딱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도학정은 모진위가 무엇을 말하려고 그렇게 지독하게 애쓰고 있는지 알고 있 었다. 아니, 모진위는 이미 도학정에게 너무도 정확하게 그 것을 말해주었다. 모 진위의 입은 여전히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고, 가슴 은 답답해서 터질 지경이었겠지만, 모진위의 눈은 너무도 선명하게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도학정이 모르고 지나칠래야 칠수도 없을 만큼 그리도 절실하게 설명하고, 또 설명해주고 있었다. 도학정은 제자 모진위의 애간장이 다 녹아버리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할 수가 없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것은 용무관원들의 상상과는 다르게 그리 짧지 만은 않은 도학정의 마지막 유감의 표시였다. 어쩌면 모진위와 함께 나누었던 지난 팔년 삼개월의 지극히 간단하기만 했던 대화를 모두 합해도 모자랄 긴 이 야기였는지도 몰랐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이태 전이었으니까 이 사부가 진위, 너 보다도 두어살 어렸을 적이겠구나. 그해 겨울, 난 고양이라는 동물을 생전 처음으로 견식하게 되었지." "...?..." "우리 마을에는 고양이를 기르는 집이라고는 한 집도 없었으니까... 마을을 전 부 소유하고 있는 지주(地主)가 탐탁치 않게 여겼으니 정 고양이를 기르고 싶 다면 그 작자의 경계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까짓 고양이때문에 소작을 포기할 농부가 어디 있겠느냐? 그 작자의 땅이 마을에서 사방 수십리는 됐으니 먼밖 출입이 흔치 않은 어린 나이에 마을에는 기르는 집이 없다보니 그동안 그 짐승 을 볼 수없었던 것도 일견 당연한 노릇이었지." 도학정이 그때를 회상하는지 눈을 찡그리며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런데 우리집 헛간에 어느날 고양이란 놈이 나타났더란 말이야. 헛간에서 나 오신 어머니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시길래 그때 내가 무슨 일이냐고 여쭈었지. 곳간에 고양이가 있다고 하시는게야. 들은 말은 있어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호기심이 생겼지. 단숨에 헛간으로 달려갔지. 표묘 (彪猫)였어." "표묘...?" "고향에서는 야생고양이를 그렇게들 불렀느니라. 거기 들고양이들은 작은 범 (彪)처럼 유달리 사납고 날래서 표묘라고 불릴 만 했구. ...표묘가 우리집 헛간 에서 새끼를 난게야. 그당시 주변에 커다란 산불이 일어나서 몇날 며칠을 꺼지 지 않았는데, 아무리 거친 들고양이라고해야 새끼가 든 무거운 몸인지라 이것 저것 마땅치 않았던 게지. 인가로 피난 내려와 어찌 어찌 우리집에서 새끼를 낳은 모양이야. 그렇치 않아도 그 녀석을 본 다음부터는 부쩍 들고양이들이 마 을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었지. 집고양이들이 없는 동네이고 보니 쥐들이 극 성인 것은 당연했고, 먹을 것이 여의치 않은 산에서 고양이들이 집쥐들을 잡아 먹으러 몰려든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 아니겠느냐?" "... ..." "어머니는 고양이를 내쫑아야 한다고 하셨지만 내가 그리 못하게 억지를 썼던 기억이 나는구나. 어머니는 그 나이까지 고양이도 못보고 자란 내가 측은했는 지, 아니면 그토록 성가시던 쥐들이 종적을 감춰서 도움이 된다 싶었는 지는 몰 라도 지주에게 들킬까봐 걱정은 하면서도 일부러 고양이를 몰아내지는 않았느 니라. 때가되면 어짜피 산으로 돌아갈 야수였으니까. 그리 모질지는 못한 분이 신 지라 오히려 거동이 시원치 않을 들고양이의 끼니가 걱정됐는지 잔반(殘飯) 을 잘 건사하여 고양이 먹이까지 마련해 주시곤 했지. 고양이에게 그걸 먹이는 일은 물론 내 차지였고... 나는 좋아라고 먹이를 주러 갔다가 처음엔 실망도 했 었지. 물그릇과 접시를 고양이들이 숨어있는 볏집더미 앞에다 갖다놓고 아무리 기다려도 고양이들이 먹으러 나오지 않더구나. 그저 볏단속에서 눈을 파랗게 번득이고 크르릉거리며 말이야. 나는 기다리다 지쳐 그냥 헛간을 나와버렸지. 다음날 가보니 접시는 깨끗히 비워져 있더군." 도학정이 모진위의 쾡한 눈을 새삼스럽게 쳐다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세놈이었지. 어미는 끝내 얼씬도 안했는데 열흘쯤 되니 새끼 세마리는 그래도 내가 채 물러나지도 않았는데도 살금 살금 눈치를 보며 기어나와 밥을 먹더군. 자세만 바꿔도 깜짝놀라 도망쳐버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중 한놈은 다른 두 녀석보다 그래도 경계심이 덜 했었던 것 같아. 나중에는 나한테 다가와 콧등을 비비기도 했으니까. 나도 왠지 그놈에게 더 정이 들어버렸지. 셋중에선 행동도 느리고 약해빠진 녀석이었지만 제일 순했었거든." 도학정은 그 놈이 어떻게 생겼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도학정을 빤 히 바라보던 그 눈빛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 도학정은 다시 그의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단연 행동도 느리고 약해빠진 제자, 모진위의 쾡한 눈을 바라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어머니는 아무도 들고양이를 길들일 수는 없다며, 표묘들은 머지않아 떠나고 말거라며 내가 그 녀석들에게 매달려있는 것을 나무라셨지. 헛간에 있는 내모 습을 보실 적마다 그랬느니라. '얘야, 표묘의 주인이 될 수는 없는 거란다. 괜히 정 붙혀서 헛고생하지 말아라. 어느 때고 황야로 돌아가버리고 말 짐승들이란 다.' ...그리고 그녀석들의 다리가 제법 여물어진 어느날, 고양이들은 흔적도 없 이 사라졌지. 나는 어머니 말씀마따나 제 어미따라 죄다 황야로 돌아갔구나 그 렇게 생각하고 크게 상심했었지. 나도 모르게 제법 정이 들어버렸던 모양이야.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세상만사는 잊혀지게 마련이지." "!?" "산불도 꺼지고, 겨울도 지나자 고양이들은 대부분 들로 산으로 돌아갔지만 그 래도 밤이면 고양이 울음소리도 들리고, 길을 걷다보면 황급히 달아나는 날랜 녀석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지. 고양이들도 민가에서 편하게 먹이를 얻는데 맛 이 들어버렸거든.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음식을 훔쳐먹고, 집안을 온통 어지르 는 고약한 도둑고양이놈들도 생겨났지. 마을어른들이 하도 불평을 해대니 나라 고 그 고양이들이 좋게 보일 리 있겠느냐? 괜히 들고양이란 짐승이 싫어져 버 렸지. 그때부터 한 삼년 지나선가 드디어 말썽이 일어나고 말았지. 본시 그 지 주라는 작자가 고양이를 꺼린 이유는 그 여식(女息)때문이었다. 그 딸년이 고양 이한테 된통 혼이 난 적이라도 있는지 고양이라면 아주 질색을 했다는 게야. 그런데 하필이면 들고양이 한 마리가 그 계집애 식탁에 난입해서 소란을 일으 켰다지 아마? 계집애는 대경실색해서 다 큰 처녀가 오줌까지 질질 흘렸다니 지 주가 노발대발한 것은 당연한 노릇. 다음날로 들고양이 소탕령이 내려진게야. 그리고나서 표묘들이 줄초상나는 꼴을 나도 심심찮게 봤지. 삽시간에 마을에 들고양이들이 씨가 마르다시피 했느니라. 이상한 건 우리집 주위를 배회하는 고양이가 있더라 이거야. 온 마을에 고양이가 거의 자취를 감춰버렸는데도 말 이야. 당시 이 사부는 모친상을 당하고 혈혈단신 고아가되어버린 신세라 고양 이가 훔쳐먹을 만한 양식도 없었고... ...그런데 신경쓰고 다닐 경황도 없었는 지 라 되는대로 내버려두었지. 그런데 또 난리가 났지. 고양이가 다시 지주댁 귀하 신 따님을 면접하고 만게야. 우스운 건 알고보니 그 고양이가 먼저번 소란때의 그 녀석과 동일한 놈이라는 것이야. 알아듣겠느냐, 진위야?" "예, 사부님." "이번에는 현상금이 걸렸지. 지주는 그 들고양이를 잡아오는 사람에게 은 다섯 냥을 주겠노라 공언을 한게야. 마을사람들은 저마다 그 짐승을 잡겠다고 난리 가 났지. 하지만 그놈이 얼마나 영물인지 아무도 잡지를 못했구나, 글쎄. 상금이 은 열냥으로 대폭 인상되었고, 게다가 따로 돈을 풀어 타지에서 소문난 사냥꾼 들을 불려들였다는 소문까지 있었지. 그래도 그놈을 아무도 잡지 못했지. 그러 던 와중에... ..." 도학정이 지그시 눈을 감고, 마른 침을 삼켰다. "그날따라 무슨 일때문인지는 기억이 나지않지만 낫을 쓸 일이 생겨서 헛간에 갔다가 그녀석을 보고 말았지. 낫을 챙기다가 무슨 기척이 있는거 같애 쳐다보 니 커다란 들고양이 한마리가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게 보이더군. 그때 문득 생 각했지. 옳다구나! 이놈이 바로 그 은 열냥짜리 고양이로구나." "... ..." "하루 한끼도 버거운 고아녀석에게 은 열냥은 엄청난 것이었지. 무섭다는 생각 도 없더구나. 온통 '저놈만 잡으면 열냥이 생기는 구나.'하는 생각뿐이었지. 어떻 게 내리찍었는지도 모른다. 섬찝한 울부짖음에 정신을 차려보니 낫은 고양이 뱃가죽에 꼽혀있고, 그놈은 두눈을 시퍼렇게 뜬 채 나를 노려보고 있더라." 도학정이 감겼던 눈을 번쩍 뜨며 천장을 응시하였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같은 눈빛이었지... ...마을사람들이 의아해하더구나. 마 을장정들이 그렇게 설쳐대도 잡을 수 없었던, 용하기로 소문난 사냥꾼들도 고 개를 설레설레 저었던 그놈이 어떻게 열두어살 먹은 꼬마녀석의 서투른 낫질도 피하지 못했는지, 그 큰 칼과 창에 상처를 입고도 날래게 달아나던 녀석이 낫질 을 당하고도 도망가지 않고 그 헛간속에서 낫에 찔린 그대로 누워서 죽어갔는 지, 그 용맹한 놈이 왜 이 꼬마녀석에게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는지..." 한참을 숨을 헐떡거리다가 도학정이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노려보던 그 고양이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다는 생각을 했었지. 어 쩌면 산불이 있던 해, 우리집 헛간에서 태어난 그 약해빠진 녀석일지도 모르지. 그러길래 그 낡은 헛간에 살았고, 내가 낫으로 내리치는데 도망조차 가지 않고, 나를 물거나 할퀴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어. 아니,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 표묘에겐 주인이 없는 법이니 그 녀석이라해도, 더군다 나 나를 알아봤다고해도 내 낫에 방심하거나 도망도 안 간다는 건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그저 우연히 우리집 헛간에 숨어들었고, 지쳐서 내 낫질을 피하지 못 했고, 게다가 낫까지 찔리고 나니 도망갈 힘도 없어서 그렇게 죽었다고..." 도학정의 시선이 천장에서 모진위에게로 향했다. "진위야, 그 고양이가 우리집에서 태어난 그놈일것 같으냐?" "그럴 것도 같습니다. 사부님." "그렇다치고, 들고양이란 놈이 혹여 며칠 먹이를 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기억하고 알아볼 것같으냐?" 모진위는 대답할 수 없었다. 모진위가 알기에도 여간해서는 들짐승따위를 길 들일 수 없었다. 만약 길들이는 일이 있다해도 며칠은 커녕 수년은 족히 걸리 는 일일 것이었다. "이 사부도 그때 그 고양이였는지, 그리고 그 고양이가나를 잊지않고 내 주위 를 서성거렸는지 알 길은 없구나. 다만... 다만 낫으로 내리치고 그 들짐승과 눈 이 마주쳤을 때, 내가 아직 옛날의 그 새끼고양이를 잊지않고 있었음을 깨달았 다. 사람은 표묘를 길들일 수 없고, 표묘는 사람과 살기를 원치는 않지만 그렇 다고 서로가 정을 나눌 수 없는 것은 아닐테지... ...진위야?" "예." "사부앞에 그때처럼 다시 그 고양이가 나타나고, 이 사부가 낫을 들고 있다면 이번에는 사부가 어떻게 할 것같으냐?" "... ..." "낫으로 내리칠 것같으냐?" "아니옵니다." "하면?" "그 고양이가 옛날 그 고양이인지 생각해내려고 애쓰실 것같습니다." "바로 맞추었느니랴.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저도 사부님과 같이 할 것입니다." "지금 네가 바로 그 고양이니라." "?!" "녀석... 너를 그 고양이라 가정한다면 너는 우연히 우리집 헛간에서 마주친 낯 선 고양이가 아니라 바로 내가 먹이를 준 고양이, 그래서 이 사부가 낫으로 휘 들러도 피하지 않는 그런 고양이란 말이다." "사부님?" 모진위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서 되물었지만 도학정은 이미 모진위에게 서 눈길을 떼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고양이가 아직 살아있다면 말해주고 싶구나. 나도 널 잊지 않고 있었다고, 나도 너에게 정을 느끼고 있었다고..." "사부님?" "이사부는 그 고양이가 왜 자기를 죽이려는데 피하지도 도망가지도 않는지 잘 살펴보지 못한 걸 후회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안하겠다고 다짐했지. 그래서 진위, 네가 나에게 무얼 얘기할려고 그렇게 애쓰는지도 잘 살펴보았다. 그리고 잘 알아들었다. 이 사부가 죽기 전에 진위, 네가 꼭 나에게 알려주려고 하는 너의 마음이 무엇인지..." "...진위, 너도 이 사부를 죽어가던 그 고양이라고 생각하고 이 사부의 눈을 잘 들여다 보거라." 모진위가 언제나 피하기만 했던 도학정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녀석! 비록 이 사부가 너를 심하게 다구치기는 했지만 그것이 네가 미워서 그 런 것이 아니란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도학정은 아직 모진위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 만 어린 가슴속에 서려있는 저 복잡다단한 심정을 어찌 일시에 풀어줄 수 있을 것인가? 아쉽게도 도학정에게는 더 이상 어찌해볼 만한 시간이 없었다.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모진위도 자신의 의도를 알아주리라. 도학정 자신은 그렇게 오 랫동안 고양이에게 의문을 품었고 끝내 답을 못 찾았지만 모진위는 자신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괴로워하지는 않으리라. 그렇게 위안하며 도학정은 도학정을 사랑한다고 눈으로 절실하게 말하고 있는, 도학정도 그렇게 눈으로 대답해주고 있는 제자 모진위의 눈물속에서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어디로 갈거라구?" "무한(武漢)이라더라." 목선민이 묻고, 모진위가 답했다. "벌써 내일이면 떠나는 구나. 짐은 다 챙겼니?" 내일이면 모진위는장이라는 사람을 따라 무한으로 가게 되어있었다. 무한에 서 신검반이라는 단체와 합류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모진위는 신검반에 입문하 게 되는 것이었다. 모진위도 황경과 하상곤에게 들어서 이미 대충은 알고 있는 일이었다. 이제 모진위는 발육기가 끝나고, 더 이상의 성장을 기대할 수가 없게 되는데 그리되면 필경 근골이 급속도로 경직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체가 굳는 것 을 억제하기위해 유연성을 강화시키는 훈련을 해야하고 그 가장 좋은 훈련법으 로 신검반의 비전인 비연류(飛燕流)라는 무공을 전수받아서 단련하라는 이야기 였다. "짐이랄게 뭐 있니? 꼭 가져가야 하는 건 이것밖에 없어." 모진위가 조심스럽게 비단주머니를 보듬었다. "그 속에 뭐가 들었는데?" 목선민이 손을 뻗어서 모진위의 허리춤에 달려있는 금낭을 만지작거렸다. "어, 어..." 모진위가 황급히 금낭을 목선민의 손에서 빼내었다. "뭐야? 아무 것도 안들었구만... 꼭 깨지는 물건라도 든 것처럼..." 하지만 모진위는 여전히 깨지기 쉬운 귀중품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갈무리했다. 목선민이 계속해서 놀려댔지만 모진위는 게의치 않았다. 모진위의 금낭은 그 의 스승, 도학정이 준 것이었고, 금낭의 장식끈은 그의 둘도 없는 친구, 목선민 이 사준 것이었다. "진짜 뭐가 들긴 든거야?" "응." "뭐가?" "사부님, 그리고 너." 모진위는 주머니속에 도학정의 사랑과 목선민의 따뜻한 마음이 들어있는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모진위는 마치 고치를 깨고 나오는 나비처럼 자신의 유년시절을 두텁게 감쌌 던 장막을 벗어버렸다. 그리하여 이제 세상을 사랑하고, 원망하며, 기뻐하고, 슬 퍼하는 다정다감한 소년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모진위를 감쌌던 껍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단단하기만 하 던 것이 한없이 약해지고, 두껍던 것이 아주 얇아졌으며, 커다랗던 것이 아주 작아졌다. 작은 유리병처럼. 모진위는 자신을 담아두었던 이제는 작은 유리병같이 되어버린 그것에 다른 것을 담았다. 인간에대한 사랑, 자비, 환희 그런 것들을. 그리고 그 작은 알같기 도 하고, 주머니 같기도 하고, 유리병같기도 한 것을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 숨 겨두었다. 깨지기 쉬운 그 것을, 깨지기만 하면 일순간에 날아가버릴 것들을 담 고서... 신검반의 우두머리인 장가량(張伽亮)라는 중년사내와 같은 신검반 소속의 구연 기(丘燕崎)라는 노인을 따라 무한으로 가는 동안에도 모진위는 도학정의 마지 막 이야기에 골몰하였다. 예를 들어 '...유랑패들이 어린아이를 학대하고, 착취한다고 말들이 많지만 우리 신검반은 그렇지 않다. 입문하면 누구나 평등한 반원이지. 우리에게 주종(主從) 관계같은 건 없다. 하긴 천하를 주유하는 강호인들이 무엇에 연연하여 매일소 냐? 강호인들에게 황제의 주인노릇인들 대수겠느냐? 천하를 다 내집이다 생각 하면, 강호의 우리들이야 그야말로 훨훨 나는 새들이지.'하고 장가량이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는 '일반백성이 가금(家禽)이라면 강호인은 길들지 않은 날짐승. 들 고양이들처럼 주인이 없구나.'하고 생각했다. 또 이런 저런 이야기끝에 몇년전에 상처(喪妻)했다는 장가량에게 구연기가 재 혼 안하느냐 따위를 묻고 장가량이 이리 저리 궁색한 변명을 늘어 놓을 때도 모진위는 이렇게 생각했다. '장가량두령은 그의 부인을 사랑했을까? 장부인은 또 어땠을까? 장부인은 장 두령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죽었을까? 장두령은 자신의 부인이 자신 을 사랑하며 죽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알고 있을까? 도학정사부는 그 들 고양이는 끝내 알지 못한 채, 양쪽 다 죽고 말았는데... 사람들도 이렇게 사부님 과 고양이처럼 서로가 사랑하면서도 끝끝내 알리지 못하고 헤어져 못 만나는 일이 비일비재하겠구나!' 세사람이 무한의 어느 객점에 도착할 때까지 모진위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객점의 이층 창문에는 신검반(神劒班)이라고 쓰여진 금색 깃발이 펄럭이고 있 었다. 장가량등이 객점으로 들어서려할 때였다. 이층난간에서 자색물체가 날렵하게 모진위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모진위는 그만 깜짝놀라서 뒤로 엉덩방아를 찢고 말았다. "아빠!" "어허! 계집아이가 얌전치 못하게스리..." 장가량의 책망하는 소리에 모진위가 고개를 들어보니 이층에서 떨어진 것은 물건이 아니라 날씬한 자의소녀였다. "피이-" 소녀가 입술을 동그랗게 오무려 도톰하게 내밀었다. 두손을 허리뒤로 곧게 펴 서 맞잡고, 둔부를 뒤로 날렵하게 빼놓은 자세였다. 모진위는 그 소녀를 보며 봄날 햇살에 들판을 뒹굴며 윤기있는 털을 반짝이는 들고양이를 떠올렸다. =============================================================== 원래 작품전체를 네부분으로 나눠서 그 첫번째의 제목을 표묘공주로 제2부를 표심공주로 할려고 했는데 결국 표묘공주는 한장의 제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 이미지의 비약인 표심공주도 자연히 동귀어진. 지금까지 끌어온 서두부분이 애초에 의도했던 이미지의 배경으로써 실패를 했 고 그런 의도를 끝까지 밀어붙히기에는 어차피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호랑이를 그리겠다고 목표했으니 최소한 고양이라도 그려야했는데 계속 이러 다가는 어째 쥐를 그리게 되어버릴 것만 같군요. 전적으로 문장력부족과 경험속의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능력부족이라고 생각합 니다. 연재도중에 개작해보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작품속에서 토로해보고자 했던 속뜻을 좀 포기해야 할 것같습니다. 쥐보다는 그래도 고양이가 호랑이랑 비슷하게 생겼으니. 어쨋든 스토리의 아우트라인과는 상관없이 이미지만 축소시키는 방향전환이니 오히려 세세한 부분의 처리가 쉬워져서 연재속도는 빨라질 수도 있겠군요. 작품이 갈짓자를 걷고 있음을 눈치채시더라도 너무 욕하지 말아주시길. 백수노계였습니다. #4729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13- 10/21 10:52 403 line 스승 도학정은 마을 지주와 그의 딸때문에 열한살이 되서야 겨우 고양이를 보 게 되었는데, 그것도 기이하다면 기이한 축에 속하겠지만, 이경우에 모진위는 그런 기이한 경험을 스승에게 전수받는다는 의미에서 가히 청출어람(靑出於藍) 이라 할 수 있었다. 방원 십장이내에서 제 또래의 여자아이를 보게 된 것은 이 번이 생전 처음이었으니. 모진위의 이 생애 최초의 진기한 경험이 일어나는 시 점은 스승이 고양이를 처음 면식한 때 보다도 무려 모진위가 이삼년이나 세상 을 더 구경한 생후 십삼년후의 일이었다. 아무래도 고양이 보다는 여자를 견식 못한 것이 확률적으로 더 드물고 기이한 일인 것만은 분명하였다. "쯔쯔. 그정도에 놀라 자빠지다니... ...신양의 신입생! 사내대장부가 그렇게 물 러터져서야 어디... ...앞으로 고생깨나 하겠네." 모진위의 진기한 모험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모진위를 일별하기만 해도 그 흉직한 모습에 놀라 '빽빽' 소리지르며 달아나는 것이 모진위에게는 그나마 익 숙한 정상적인 아가씨들의 행동 전개방식이었는데, 이 자의소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놀라기는 커녕 모진위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말을 붙여왔으며, 더군다나 손을 내밀고 모진위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굴곡없이 가늘게 뻗은 하얀 손, 부드러운 감촉, 신비롭기만한 소녀의 달콤한 방향(芳香). 모진위는 부드럽고 아늑한 구름속으로 자꾸만 빠져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정체불명의 불길한 예감과 함께. "까르르. 아빠!" 자의소녀가 모진위를 물끄러미 살펴보더니 자저러질 듯 호들갑을 떨었다. "어디서 이렇게 훌륭한 추(丑)를 구하셨어요. 호호호. 이애는 외취(외取)도 필 요없겠어요. 얼굴 한복판에 회칠 만하면 그대로 최고의 소화검(小花瞼)이라구 요. 까르르르..." "허어, 닥치지 못할까?" 장가량이 짐짓 주먹이라도 휘두를 듯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야 자의소녀는 웃 음을 멈추고 샐쭉해져서는 객점의 입구로 들어섰다. "망아지만한 계집애가 아직도 천지분간 못하고 저렇게 날뛰니 원. 쯔즈... 진위 야, 왜 그리 넋이 빠져있는게냐? 냉큼 따라 들어오지 않구... ..." 멀리 광야의 끝에서 찬란한 백의를 걸친 준수한 청년이 자욱한 먼지를 헤치고 서서히 신위(神威)를 드러내었다. 천하의 짝을 찾을 수 없는 비범한 외모에 총 기로 빛나는 예리한 눈빛, 과연 대영웅의 풍모가 넘쳐 흐르는 대영웅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대지에는 일척(一尺)주위도 분간키 어려운 광풍(狂風)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잉 이잉 이잉 이잉 이잉-. 호궁(胡弓)이 그렇게 풍음(風音)으로 울었다. 광야의 또 다른 끝에는 흉흉한 흑의를 걸친 험악한 괴인이 간혹 어두운 창공 을 가르는 낙뢰(落雷)로인해 퍼런 빛깔로 번득이며 언뜻 언뜻 그 마각(馬脚)을 드러내었다. 지옥에서 온 악마인들 어찌 이 보다 더 흉험할 것이며, 어찌 이 보 다 더 사악할 것인가? 청천(淸天)에는 때아닌 뇌전(雷電)이 문득 천하가 종말을 맞이하기라도 하는 양 어두워가는 사위를 비춰주고 있었다. 치아아아앙- 치아아앙-. 나고(나鼓: 각종 징과 큰북, 작은 북)들이 일제히 뇌성벽력(雷聲霹靂)을 쏟아내 었다. 흑백 양인이 마주서자 광풍도, 뇌전도 긴장하여 숨을 죽였고, 일시에 사위(四 圍)가 고요속에 잠겨들었다. "아아! 월색(月色)의 그윽함을 자랑하던 시객(詩客)은 어디로 가고, 절경(絶景) 에 가무(歌舞)하던 가인(佳人)은 어디로 사라졌기에 천하는 온통 신음과 참상만 이 가득한 것인가? 내 천지에 창궐(猖獗)하는 마귀(魔鬼)들을 소탕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고, 세상의 본색을 돌려놓지 못한다면 어찌 먼저 가신 영웅호 걸의 면전에 고개를 바로 세울 수 있겠는가? 내 검을 받아라, 이 악적!" 백의영웅이 검을 높이 들고 천지를 뒤엎을 듯 청음(淸音)을 토해내었다. 영웅 의 의기가 가히 하늘을 찌를 듯 장엄하였더라. "핫핫핫.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천하에 가소로운 것! 내 네놈을 갈기 갈기 찢어서 계곡의 까마귀들에게나 대영웅의 은덕을 베풀어 주겠노라! 오너라, 이 애송이!" 흑의마인이 천근 만근의 중도(重刀)를비껴들고 광소(狂笑)를 터뜨리니 전율할 마기가 대지를 갈라놓을 듯 비장하였더라. 신검(神劒) 옥진강(玉眞岡)과 마도(魔刀) 초웅천(焦熊天)의 공전절후(空前絶後) 의 대결전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만화창천(滿花暢天)!" 신검이 하늘을 가르니 오색무지개가 사방 삼십장이나 퍼져나가 암석이 날아가 고, 거목이 뿌리채 뽑혔다. "수라천살참(修羅天殺慙)!" 마검이 대지를 덮으니 시커먼 그림자가 사방 삼십장을 뒤덮고, 그림자가 미치 는 넓은 대지가 온통 웅덩이로 화(化)해 버렸다. 이잉이잉 차아 앙 차앙 차앙 창창창창창창창! 사면 벽을 때리며 귀청을 울리던 호궁과 징의 울림이 끄트머리에서 점점 잦아 들었다. 그러나 울림이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여운이 남아 가슴을 울렸고, 심장 의 고동을 재촉했으며 사람들의 손에는 땀이 차올랐다. 백영(白影)이 우수를 휘둘러 '팟' 도는가 싶더니 우루루 땅을 차며 공중으로 날 아올랐다. 백영이 날아오르며 전신을 휘돌렸다. 일장높이에 올랐을 때는 찰나지 간임에도 거의 삼회전은 했을 것같았다. 백영의 사내는 용선풍이라도 되는 듯 계속해서 신형을 회전시키며 공중으로 도약했다. 흑영(黑影)이 당황한 듯 눈을 화등잔만 하게 치켜뜨며 한발 한발 뒷걸음을 쳤다. 이이이잉 이이이잉 이잉 잉잉잉- 차아아앙 차아앙앙 아창 창창창- 호궁과 징이 길고 강한 울림으로 시작되더니 점점 빠른 박자로 숨가쁘게 휘몰 아쳤다. 심장이 터질 듯 긴박하게 호궁과 징소리가 사면을 매우는 가운데, 흑영 이 일순 공중제비를 돌며 바닥을 박차고 도약하다가 공중 이회전후, 허공에 잠 시 멈추는 듯싶더니 믿을 수 없게도 공중에서 방향을 선회하여 바닥이라도 있 는 양 물구나무서기로 허공를 박차고 빙글빙글 돌며 백의의 사내에게 날라들어 갔다. 백의의 사내가 우아한 몸짓으로 허공을 제압하며 용선풍처럼 돌아가던 신형을 제지하고 허공에 멈추었으나 가슴만은 날아드는 흑의의 사내에게 헛점 을 노출시켰다. "아악-" "엇!" "으악-" 온통 숨이 막힐듯한 비명소리가 격전장에 난무하였다. 하지만 그 처절한 비명이 백의사내의 것은 아니었다. 백의청년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객석에서 비명소리가 울리자마자 세상에 비할 바 없이 우아한 동작으로 허공를 재차 차오르며 흑의장년의 일검을 마침내 피해내고야 말았다. 이잉이잉 이이이이이 이이이이잉 이이잉-. 차앙 차아아앙 차앙 차앙 차아창-. 귀를 찢을 듯 비명을 토하던 호궁과 징이 한동안 기승을 부리더니 쌍웅이 바 닥에 내려서는 속도에 따라 굉음을 줄여나갔다. 뜨악-. 모진위의 머리통에 불꽃이 튀고, 그제서야 모진위의 북채가 움직였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쌍웅이 대치한 가운데 고요한 작은 북의 소리만이 단절음을 토해내었다. 소고 (小鼓)의 헐떡이는 소리에 따라 방금 손에 쥐었던 땀을 털어낸 관객들의 호흡 이 또 다시 거칠어지고, 손에는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금서림(金西林)의 죽일듯한 눈빛을 받으며 모진위가 손목에 힘을 줄이며 소고 의 타음을 죽여나갔다. 모진위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배동삼(裵童三)도 겨우 안 도한 듯 단피고(單皮鼓: 반주를 지휘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한쪽 면만을 붙인 북)를 다시 '통통통' 두드렸다. 단피고의 가격을 신호로 다시 호궁이 울리고, 징소리가 작은소리로 시작되어 '칭칭칭-' 소리를 높여갔다. 호궁과 징이 소리를 높힌 것은 물론 쌍웅이 다시 일합을 부딪쳐 갔기 때문이었다. "끄응-." 나고의 합주에 어울리도록 소고를 두드리며 모진위는 또 다시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어느 틈에 또 무대위의 대결에 정신을 빼았기고 북이 들어갈 차례를 놓쳐버린 것이다. 다만, 다행히도 징이 먼저 들어가는 순서여서 금서림의 징을 두드리는 어마어마한 몽둥이에 머리통이 불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다. 흑의장년이 해일과도 같이 백의청년에게 밀려 들어갔다. 때를 같이 하여 하늘 의 번개와 천둥도 온통 천지를 뒤덥었다. 세상이 밝음과 어두움을 교차시키고 사위가 어두운 장막으로 감싸여져 버린 가운데, 뇌전만이 번쩍거렸다. 마치 세 상의 종말이 오기라도 했듯이. 흑의장년의 거의 반백근은 나갈 듯한 중도가 백의청년의 한복판을 찔러 들어 가는 순간, 다시 객석에서는 비명이 터졌다. 아무리 보아도 저 잘 생기고 선량 한 백의의 청년이 흑의장년의 천만근은 나갈 듯한 무시무시한 도(刀)의 공격을 모면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호궁과 징의 울림은 이제 천하만물의 고막을 찢어버릴 듯 극한의 소리로 악을 써대기 시작했다. 순간, 흑의장년이 무섭게 내리치는 장도에 불꽃이 일었다. 백의 청년이 너무도 아슬아슬하게 오색보검으로 막아낸 것이었다. 그러나 일순 힘겹게 튕겨냈던 중 도가 다시 백영의 인중으로 날아들었다. 백영의 검이 다시 중도를 막았다. 중도 가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호궁과 징이 소리를 죽여갔고 대고(大鼓)가 점차 소리를 높히기 시작했다. 뜨악-. 다시 모진위의 머리에 불똥이 튀었다. 모진위는 '아차' 하며 재빨리 북채에 힘을 주었다. 대고의 울림이 커지고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그 배경에는 소고가 빠른 속도로 보조하여 긴장감을 고조시켜나갔다. 백영의 보검과 흑의의 중도도 그 만큼 빨라져있었고, 검과 도가 부딪치는 불꽃 은 마치 불꽃놀이라도 되는 양, 무대위 여기저기에 화광를 뿌려댔다. 검과 도가 속(速)을 더할수록 모진위의 소고도 점차 빨라졌다. 대고가 절정을 이루자 다시 호궁이 작은 소리로 합세하고 징도 꼬리를 물었다. 단피고를 든 배동삼의 지휘가 점점 기세를 올렸다. 대고가 최대의 연타로 사방을 울렸고, 호 궁과 징소리도 급박하게 세를 키웠으며 모진위의 소고는 삼지사방을 날으는 중 도와 보검의 불꽃에 마춰 최대의 속도로 격타음을 울렸다. 흑의장년의 도공(刀功)이 노도(怒濤)처럼 강맹하였지만 흑의청년의 검식(劒式) 은 너무도 절묘하였다. 시작은 중도의 그림자가난무하는 가운데, 불꽃만 난무 하였지만 서서히 보검의 오색무지개가 점차 흑의괴마를 압도하더니 드디어는 빼어난 백의영웅의 검술이 흑의괴인의 중도를 몰아부쳤다. 모진위는 있는 힘을 다하여 소고를 두드리며 틈틈히 단피고의 배동삼을 예의 주시하였다. 순간, 배동삼의 어깨가 움찔하며 북채가 미묘하게 방향을 바꾸고 배동삼이 심 상치 않은 눈빛을 쏟아내며 단피고를 '텅' 하고 강하게 두드리더니, 그대로 동작 을 정지시켰다. 모진위도 그와 동시에 호흡을 멈추고 손동작을 중지하였다. 호 궁과 징따위의 각종 나고들도 일시에 멈춰졌다. 무대가 정적속에 잠겨들자 객 석도 이내 전염되었다. "이야!" 천지를 뒤엎을 듯한 지옥의 괴성이 울려 퍼지고, 무대와 객석의 정막을 깨뜨리 더니 흑의장년의 중도가 산이라도 허물듯 기세를 올리며 백의청년의 주위로 자 욱한 칼그림자를 만들어내었다. 단피고의 시작신호가 울리자, 모진위는 소고를 힘차게 두드렸다 물론, 호궁도 징도 동시에 소리를 높혔다. 서주(徐州)의 손꼽히는 세가(勢家), 산동(山東) 팽 가(彭家)의 팽가장(彭家莊)이 아무리 넓다고는 하나 이정도면 온통 호궁과 타악 기의 고조음으로 묻혀 버릴 것만 같았다. 객석에서는 각종 탄성이 터져나왔다. 특히, 여성들의 고음이 나고의 소리를 꿰 뚫고 천장을 맴돌았다. 백의청년의 입술을 타고 가느다란 선혈이 흘러내린 때 문이리라. '죽어라' 소고를 두드리던 모진위가 다시 고개를 돌려 배동삼을 바라보았다. 배 동삼의 시선이 무대위의 쌍웅에게 고정된 채로 단피고가 다시 '텅' 하고 울리더 니 배동삼이 다시 손을 놓은 채, 무대의 격전을 바라보았다. 모진위의 소고와 징, 그리고 호궁, 대북이 일제히 정적을 되찾았다. 그와 동시에. "얍" 청명한 젊은이의 정기어린 고성이 울리더니 무대위에서는 순식간에 다시 오색 무지개가 사방을 수놓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백의청년의 천하무쌍한 신기의 절 초가 직선의 오색무지개를 만들어냈고, 현란한 무지개는 흑의장년의 가슴을 꿰 뚫어버렸다. 객석의 갈채가 다시 장원전체를 들었다 놓았다. 부드럽게 흐르는 호궁의 연주를 들으며 모진위는 이마의 땀을 닦아내었다. 이 마뿐아니라, 모진위의 전신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이제 또 한번의 공연 이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무생(武生: 대개의 난투극에서의 남자주인공역)이 신검 옥진강의 마지막 독백 을 연기하고나면 무단(武旦: 무공을 주로하는 여자역)이자 화단(花旦: 발랄하고 색기있는 여자역)의 역할을 맡은 장가량의 외동딸 장여진(張麗珍)과 청의(靑衣: 규중처녀, 정숙한 아내의 역할)가 등장하여 즐거운 질투를 나누고 종막(終幕)이 리라. 막간에 나왔던 무추(武丑: '추'는 보통 광대의 역할로서 얼굴 중앙부분에 하얗 게 칠하는 분장을 하기 때문에 '소화검'이라고도 불린다.)가 다시 나와서 신검 옥진강의 검술을 재미있는 묘기로 흉내내는 대목에서 모진위가 대고를 잡아야 하지만 그때까지는 모진위에게 한동안 휴식을 취할 여유가 있었다. 그때, 누군가 모진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모진위가 고개를 돌려보니 대고를 치는 금서림이었다. 금서림은 잡아먹을 듯한 눈길로 고개를 까닥이며 후대(後 臺)쪽을 가리켰다. 후대로 나오라는 뜻이리라. "끄응!" 모진위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성을 토해내었다. 이번에도 온전히 쉬기는 다 틀 린 모양이었다. 모진위의 심사는 무추가 천천히 등장해서 좀 더 많은 휴식시간 을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심정에서 어느새, 무추의 외취(외取: 배우의 얼굴 표 정을 과장하기 위해서 쓰는 청색, 홍색등의 선)가 빨리 끝나서 한시라도 빨리 무대에 나서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바뀌어버렸다. 모진위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비실거리며 후대로 향했다. 용무관의 온갖 고초속에 자라난 모진위가 물론, 금서림따위의 시시한 끈적거림 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즈음, 모진위의 가슴속에는 새로운 감 정이 하나 더 등장하였다. 부끄러움이었다. 자신의 주제를 뼈저리게 절감하고있 는 모진위에게 부끄러움이란 것이 가당키나 하겠냐고, 더 이상 비참해질 무엇이 남았냐고예전의 용무관 동료들이라면 의아해하겠지만 모진위는 어쩐지 장여진 앞에서만은 남들의 놀림감이 되는 것이 죽기보다도 싫었다. 모진위는 최대한 행동을 지체하였다. 잠시 후면 장여진은 무대에 오를 것이었다. 그애만 보지 않 는다면 모진위는 아무리 놀림을 당하더라도 예전의 그 모진위로 돌아갈 수 있 었다. 더 이상 비참할 것도 억울할 것도 없는 모진위로. 분장을 새로이 고치고 외취를 다듬던 무추 구연기는 비틀거리며 금서림에게 잡혀 들어오는 모진위를 보고 혀를 찼다. '녀석, 또 신검과 마검의 대결부분에서 넋이 빠졌다가 실수했구먼.' 이제 신검반에서 반년이나 밥을 먹었으니 소고정도는 실수없이 해낼 법도 하 건만 모진위는 번번히 추혼십이절(追魂十二節)을 시연하는 대목에 이르면 얼이 빠져 관전에 몰두하다가 북이 들어가는 순서를 놓치고는 하였다. 신검 옥진강 의 독문절예, 추혼십이절에 어지간히 혼이 빠진 모양이었다. 금서림은 모진위보다 겨우 두살밖에는 더 먹지 않았으면서도 마치 사제지간이 라도 되는 것처럼 모진위를 닥달해댔다. 원래 약간 야비한 그늘이 있는 녀석인 데다가, 도무지 반항할 줄 모르는 모진위가 입문하고부터는 완전히 물만난 고기 처럼 의기양양해서 모진위를 뒤틀었다. 허긴, 그럴만도 한 것이 금서림은 제법 무공에 자질을 보여주어 이제 사오년만 더 수련한다면 당당히 신검 옥진강의 역할을 맡을 무생 후계자로서 우등생이었다. 반면에 모진위는 이도 저도 여의 치 않아 임시변통으로 구연기가 맡아서 무추라도 계승시킬 수 있을까 하는데, 그 조차도 별로 가능성이 안 보이는 열등생이었다. 신검반의 수령(首領), 장가량은 모진위에게 비연류(飛燕流)를 가르쳐보고는 구 연기에게 불평을 해댔다. "구노사, 용무권이 뭐고, 용무관 수제자가 또 뭐요? 저 녀석 노는 꼴 좀 보시 구려. 저래서 어디 밥값이나 제대로 하겠소?" 장가량이 툴툴거릴 만도 했다. 용무권이라는 무공이 옥진강의 신검을 익히는 기초무공으로써는 더할 나위없다며 구연기가 하도 반색을 하고나서는 바람에 신검반은 대운하를 따라 북상하려던 행로를 변경해서 그리 썩 흥행이 될 것 같 지도 않은 무한으로 여정을 잡았고, 게다가 장가량은 손수 구연기까지 대동하여 신양의 용무관을 방문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신양의 쟁쟁한 문파 회주문과 시비 까지 붙어버리고 자의반 타의반 모진위를 데려오게 되었다. 그런데... ... 제비가 날아가 듯 날렵한 비연류를 제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모진위는 제비는 커녕 느려터진 돼지보다도 날렵하지 되지 못했다. 잘해봐야 다리라도 하나 부 러진 돼지정도나 되었다. 신검반의 최연장자인 구연기도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장두령께서도 그렇게 열심히 회주문주와 사단을 벌일 필요는 없었겠지요." 그 정도에서 장가량과 구연기는 입맛을 다시며 서로 말다툼을 물려야 했다. 장가량은 진태청과의 비무에서 보여준 모진위의 그 놀라운 기량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셔야 했고, 구연기는 그 자신의 해묵은 난제를 풀어줄 것이라 단단히 기대하고 있는 용무권이라는 무공때문에 입맛을 다셔야 했다. 어째거나 도학정이 죽고, 용무관이 박살났으니 모진위를 되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계급이 계급이니 만큼 결국 직접적인 불똥은 구연기에게 튀고 말 았다. "여진이까지 그러지 않았소. 무추를 한다면 용모 만큼은 최고라고 오죽하면 외 취도 필요없다겠소?" 장가량이 그렇게 모진위를 구연기에게 떠넘긴 것이었다. 구연기는 난감했지만 달리 빠져나갈구멍은 없었다. 신검반에 손해가 안되게 하려면 시일이 얼마가 걸리든 모진위가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게 만들어 놓아야 하는데 구연기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은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무추가 모진위에게 생사를 걸 만큼, 그렇게 허술할 역은 아니었지만 구연기는 이미 후계자가 있어서 제법 극중에서도 무연(武演)이 되는 실력은 갖춘 지라, 아쉬운 대로 극중의 무추를 물려주고 자신은 한발 물러나서 까다로운 막간과 막후의 여흥(餘興)꺼리만 맡고 있는 처지에 무추의 중요성을 들어 모진위를 마 다하다는 것은 핑계거리가 되지 않았다. 구연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슬하에 있게 된 모진위가 장 가량의 후계자 금서림에게 수난을 당할 순간이었다. "서림아, 적당히 해두거라. 여흥 올라갈 참이다." 구연기는 그래도 제 밑에 있는 모진위가 고통받는 것이 안쓰러웠는 지, 이제 막 드잡이질을 하러 모진위를 구석으로 끌고가는 금서림을 제지하였다. "이제 들어가도 되겠지? 향관사." "그러시구랴." 서두르는 구연기를 보며 후대관사(後臺官事) 향이(向二)는 의미있는 조소를 흘 리며 말했다. "하지만 기억해두시구랴. 구어르신이 나보다 나이도 많고, 고참이시지만, 후대 관사는 이 향모라는 걸... ..." 무대로 나서려던 구연기가 향이를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울리지 않게 모진위를 역성들다가 결국 한방먹은 꼴이었다. 무대의 뒷편이기에 후대라고 불 리는 분장실격의 이곳 후대에서는 누구나 후대관사의 지시에 따라야했다. 후대 관사는 자못 무질서해지기 쉬운 후대의 단속뿐아니라 무대의 연출도 도맡아하 는 막강한 위치였다. 구연기가 아무리 고참이라지만 사소한 일로 찰나를 다투 는 후대관사의 신경을 거슬려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구연기가 나서자 객석에서 열화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미 막간에 나와 선을 보였던 참이라 구연기의 추혼십이절 시연에 대부분의 관객들은 적지않게 감탄하고 있었다. 무추는 툭 튀어나온 익살맞은 팔자수염을 달고 날렵하고 민 첩한 동작을 하지만 무생의 무공(武工)과는 달리 광대미를 발휘했다. 당시 난세가 끝나고 황권이 안정되자 성시(盛市)가 번창하고 상업활동이 활발 해졌다. 그러자 생활의 여유가 있는 시민들의 여가를 겨냥하여 각종 잡기와 기 예들이 오락꺼리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검반등이 실제무공을 시연하는 무술 극의 모태가 된 설화(設話)나 가무극(歌舞劇)도 그렇게 생겨났다. 설화를 구연하는 연예인의 대본을 화본(話本)이라고 하는데, 화본에는 대개 무 협의 성격을 띤 강호의 비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가무극의 대부분, 특히, 호북, 안휘의 예능인들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이황(二黃)은 조(趙)의 비가 (悲歌)에서 유래한 서파(西皮)와 합쳐져 가무극으로 발전하였는데, 나중에는 크 게 유행하여 강소(江蘇)지방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이황은 후일 가장 대표적인 전통연극인 경극(京劇)으로 발전하였지만 당시에는 희극풍의 상연물과 난투하 는 무극(武劇)으로 간소한 지방극에 지나지 않았다. 구연기는 팔십년전 약관의 나이로 홀연히 강호에 출도하여 강호를 독패(獨覇) 하려던 대악인 마검 초웅천과 맞서 싸워 악의 무리, 이백여명을 도륙내고 도탄 에 빠진 강호를 구해낸 신검 옥진강의 절예, 추혼십이절을 약간의 과장과 기기 막측한 동작을 섞어 그대로 재현하기 시작했고, 객석의 강호인들은 신검 옥진강 의 놀라운 무예에 다시 한 번 탄복하였다. 처음에는 강호인들도 일반인처럼 설화와 지방극을 즐겼지만 연기되는 무예의 허구성에 점차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림의 전설적인 영웅에대한 새로운 화본이 만들어지고, 이황의 형식을 모태로 하여 영웅호걸들의 보기드믄 절예를 실연(實演)하는 무극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신검 옥 진강의 일대기였다. 옥진강의 무예가 현세에 위력을 떨치지 못하고 겨우 강호인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해버린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신검 옥진강은 마검 초웅천과의 혈 전으로 일약 일세의 영웅호걸이 되었고, 그의 추종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삽시간에 문파를 이루게 되었고, 그 욱일승천(旭日乘天)의 기세로 보아 곧 천하 대방파가 될 것임은 명약관화(明若觀火)같았다. 그러나 신검문이 후세에 길이 남기에는 몇가지 극복하기 힘든 심각한 난제가 있었다. 천고의 기재, 옥진강이 창안해낸 추혼십이절을 옥진강이외의 어느 누구도 완벽 하게 익힐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 무도의 경지가 너무도 심오하여 그 십성 은 고사하고 삼사성의 단계조차 수련해내는 이가 드물었다. 또한, 추혼십이절을 제외한 옥진강의 무공은 그가 절대기재였기에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을 뿐, 그저 평범한 강호의 흔한 무공들에 지나지 않았다. 옥진강의 문하생들은 실망하였고, 세월이 흘러 옥진강이 서거하자 하나 둘씩 문파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미 추혼십이 절의 기초단계를 익힌 후에는 누구도 다른 류의 무공을 익힐 수가 없었다. 여 타무공이 추혼검에 융화되지 못하고 상극의 작용을 했던 것이었다. 한때는 제가끔 영특한 기재를 자랑하던 많은 영걸들이 절망에 빠졌다. 신검만 아니었으면 강호의 절정고수는 너끈히 가능할 그들이 평생을 수련해도 고작 삼 류나 잘하면 이류고수로 머물러야 할 운명에 쳐했다. 그러나 강호는 신검의 웅대한 신위를 그리워했고, 그의 무공을 다시 보고자 앙 망하였다. 강호의 당당한 영웅이고자했던 신검의 문하생들은 시대의 요구에 부 응하여 하나 둘씩 꿈을 버리고,시류에 편승하였다. 호구지책의 일환으로 전인 (傳人)의 무공을 밑천삼아 유랑극단패로 전락해버린 신검문의 검객들 덕에 옥 진강의 신검은 강호에서 가장 인기있는 감상용 무공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장가량의 신검반도 그런 연유로 시작해서 전해 내려온 무술극단의 하나로써, 신검의 본색을 현혹하는 사이비 집단들이 우후죽순처럼 떠도는 가운데서도 신 검의 무공을 기억하는 노강호인들에게 옥진강의 정통으로 인정받는 몇 안되는 유랑극단의 하나였다. 구연기는 투로의 후반부에 이르러 문득 대고를 치고있는 모진위를 바라보았 다. 볼수록 신기한 노릇이었다. 극을 반주할 때는 제일 쉽다고 할 수 있는 소고 조차 번번히 실수하는 녀석이 눈코 뜰 새 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구연기의 무연 (武演)도중에는 그 어렵다는 대고를 두드리면서도 전혀 실수가 없었다. 소고는 그저 단피고의 지휘에따라 시작과 멈춤, 속도의 변화밖에 없지만 대고 는 무공동작에 맞추어 적절히 대응해주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극과 독 립되어 무예시범을 펼치는 구연기의 동작을 반주하는 대고는 아무나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추의 무공형태와 순서를 정통한 자여야만 무예에 맞추어 반주를 할 수 있고, 그런 연고로 무추의 가르침을 얻은 무추의 후계자가 그의 대고를 맡는 것이 통 례였다. 그러니 모진위가 미덥지 않다고해서 다른 반원에게 자기무대의 대고를 부탁하는 것은 구연기 스스로가 자신의 후계자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음을 자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못했다. 그래서 자존심 강한 구연기는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모진위에게 대고를 맡겨 버렸다. 그런데 이럴 수가! 모진위의 대고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것이었다. 구연기는 이제 열번이 넘게 모진위와 손발을 맞 추면서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구연기로서야 도무지 신기할 따름이겠지만 모진위쪽에서 본다면, 대고를 치는 일이 오히려 뱃속 편할 수밖에 없었다. 추혼십이절은 처음 접했을 때, 모진위는 흡사 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모 진위는 그 때, 세상밖에세상이 있음을 깨달았다. 모진위의 출운용무가 달려가 는 저 끝에 도달해서 돌아다 보다면 그 피안(彼岸)에 또 다른 것이 존재하리라 는 것을. 모진위는 혼돈의 와중에서도 추혼십이절을 보면서 어떤 가능성을 발 견하였다. 그 것이 무엇인지는 그 형태도 의미도 전혀 오리무중이지만 그 존재 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모진위는 그날부터 공연중에 추혼십이절이 펼쳐지기만하면 그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자신의 소고가 울려야 할 순간도 잊어버리고... ...그러나 대고라면은 경우 가 달랐다. 모진위는 하상곤이 전수해준감각훈련을 그대로 대고에 적용할 수 있었다. 구연기의 신검재연이 아무리 변화무쌍하다 한들 그저 북 한번 두드리 는 단순한 동작으로 대응을 하는 것은 이제 감각훈련이 수준급의 경지에 다다 른 모진위로서는 그저 아무생각없이 두드리는 습관과도 같이 손에 익은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장가량과 구연기는 모진위에게 비연류를 전수해주고는 그의 수련정도를 확인 하며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였다. 그래도 너무나 성실하게 수련하는 모진위의 태도를 보고는 그 정도로 열심이면 돼지도 날아다닐 판인데, 어찌 그렇게 형편 없냐고 신기해 할 따름이었지만 모진위쪽에서 본다면, 그 것도 대단한 성과였 다. 모진위의 신체는 이미 비연류의 수련이 대단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던 것 이었다. 이미 성장세가 멈추어져 급속도로 경직되어야할 모진위의 근골이 굳어 지기는 커녕 미미하나마 오히려 약간씩은 유연해져가고 있었다. 그외에도 구연기가 신기하게 생각할 만한 구석이 모진위에게는 많이 있었다. 어설픈 신검의 무예동작하나 제대로 구사못하는 녀석이 엉뚱하게도 신검의 기 리(技理)를 파악하는데는 상당한 일가견이 있었다. 어떻게 그 허약한 체력으로 그렇게 신검의 무예를 익히는 수련에 열심일 수 있는지, 그렇게 고련을 쌓으면 서도 어떻게 기초동작하나 시원스럽게 표현해낼 수 없는지, 그런데 어떻게 육체 적으로 그 기(氣)와 역(力)을 경험해보지 못했으면서도 그 심오한 이치는 이해 하는지... 신기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게다가 묻는 말이외에는 입조차 안 벌리는 녀석이 가끔씩 이상한 질문까지 해 대고는 하였다. "사부님, 얼마나 대단했기에 만화창천을 시전하니 반경 삼십장씩이나 만물이 요동했고, 수라천살참을 시전하니 삼십장 넓이의 웅덩이가 패였을까요?" 자못 진지하기 까지하였다. "너 정말 극중의 대사를 믿고 있는거냐? 녀석아, 흥미를 돋구자니 화본을 그렇 게 꾸민거지 천하에 삽심장이나 위력을 떨치는 무공이 어디 있겠느냐?" "... ...?" "이건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원... ..." ================================================================ 주) 상기 서술한 중국의 연극에 관해서는 '중국의 놀이문화'라는 책을 참조하였는데 무차별 복사하는 가운데, 출판사와 저자를 기억 못하여 출처를 명기하지 못하는 군요.(그럼, 표절이 되는 건가?) 어쨌든 대부분 경극의 부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추혼십이절이라는 검법은 만화작가 고 이재학선생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그의 명저 '촉산객'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PS. 검무흔 이신훈님덕분에 드디어 한자를 볼 수 있게 되었군요. 한자파일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청산이 사라지지 않는 한, 땔감은 언제나 구할 수 있는 것, 하이텔에서 한자를 읽을 수있게 해주신 이 원한은 반드시 결자해지하고야 말겠습니다. 백수노계였습니다. #4752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14- 10/25 08:31 458 line 모진위가 순진한 것인지, 멍청한 것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은 구연기뿐만이 아 니었다. 신검반 수령 장가량의 금지옥엽 외동딸, 장여진도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해있었다. 같은 추혼십이절이라도 무추 구연기의 추혼십이절은 많이 달랐다. 객석의 분 위기에 따라 때로는 과장되게, 때로는 절도있게 객석을 조율하는 역할을 해야하 기에 미리 약속된 동작도 순서도 없었다. 그런데, 장여진에 보기에 입문이 반년 밖에 안된 모진위의 대고 반주는 거의 완벽하게 변화가 불규칙적인 구연기의 무예시범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장여진이 탄복하여 이제 막 후대로 들어서 는 모진위를 보고 말했다. "이얘! 너 대고 하나는 정말 신통하게 잘한다." 그런데 모진위는 대답은 커녕, 제대로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장여진을 피해서 쪼르르 달아나 버렸다. 장여진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여진은 또래의 사내아이들에게 있어서, 그야 말로 공주마마요, 왕비마마였다. 그 잘생긴 금서림마저도 장여진의 환심을 사려 고 갖은 아양을 다 떠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저 녀석만은 자신에게 티끌만큼도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물론 워낙에 말수가 없는녀석에다가 자신에게 감히 먼저 말을 걸어올 주제도 아니니 그건 그렇다 쳐도... 자신이 손수 칭찬씩 이나 해주는데도 황송해서 감읍하지는 못할 망정, 벌레라도 만난 것처럼 피해버 리다니. 장여진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장여진은 세상소년들이 모두 자기를 보기만 하면 두손으로 자기를 떠받들지 않고는 못 배길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경탄할 만한 소녀였다. 장여진은 모진위같은 녀석이 있을 거라고는 눈꼽 만큼도 상상치 못했다. 하지만 오해였다. 모진위는 분명히 너무도 황송해했고, 감읍하고 있었다. 다만 배우들에게 걸리적 거리지 않도록 재빨리 구석으로 서둘러 옮겨갔을 뿐, 그의 걸음은 마치 구름위라도 걷는 양, 한껏 들떠서 어떻게 걷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 이었다. 모진위 주제에 어떻게 말대꾸를 하고, 어떻게 감히 그 별같이 반짝이는 두눈을 마주 볼것인가? 어찌 감히 그녀의 안전에서 추한 몰골을 비추며 심사를 어지럽힐 것인가? 모진위는 고개 한번 쳐들지 못하고, 숨 한번 커다랗게 쉬지 못했다. 그저 서둘 러 장여진의 시야에서 물러났고 구석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녀가 밝혀놓은 마음속 깊은 곳의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불 꽃을 황홀하게 지켜보았다. 그날 이후로 모진위의 대고의 경지는 나날이 심오해졌다. 모진위의 혼신의 정 력이 깃들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모진위의 화음(化音)이 경지에 이르렀어도 장여진은 더이상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았다. 오로지 찬바 람만 싸늘하게 감돌 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장여진은 모진위에게 혐오의 눈길 이외에는 그 어떠한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정작 사건이 발생한 것은 모진위가 어느덧 그 열심이던 대고에 무덤덤해진 그 로부터 석달후였다. "얘, 너는 뭐든지 그렇게 열심이구나?" 막 출운용무를 마치고 자세를 정리하던 모진위의 가슴속에 '쏴아-'하고 상큼한 꽃비가 내렸다. 풍경을 부딪는 빗방울처럼 통통튀는 음률. 바로 장여진의 음성 이었다. "까르르-." 장여진이 매끈한 손으로 입을 반쯤 가리고, 싱싱한 웃음을 터뜨렸다. 길게 뽑 은 시원한 목이 날아갈 듯 눈부셨다. "얘! 뭘 그렇게 빤히 보니 부끄럽잖아..." 말꼬리를 가늘게 떨리며 도르르 감겼고, 티 하나 없이 투명한 흰자위를 활짝 드러낸 눈이 모진위를 예쁘게 흘겼다. 모진위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도 장여진은 싫지만은 않은 기색이었다. "어쩌면 한눈 한번 파는걸 못보겠네. 진위는 필히 우백(禹白)이나 엽설영(葉雪 英)처럼 훌륭한 배우가 될거야." 이제 막 잠을 깬 새들처럼 장여진은 꿈꾸듯 아련한 눈빛으로 재재거렸다. "...우백, 엽설영...?" "응. 신검무예의 찬란한 신성(新星). 우백, 엽설영. 그 멋진 무대를 또 볼 수만 있다면... ..." 장여진은 두손을 살포시 모아쥐고, 허공을 아득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모진위의 가슴속에 '쿵'하고 바위가 떨어졌다.우백과 엽설영은 신검무예를 연 기하는 유명한 배우들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유명한 배우라면 모진위에게는 그 야말로 천지지간(天地之間)이었다. 그런 훌퓽한 배우가 된다는 것은 감히 엄두 도 낼 수 없는 것이고, 모진위는 그저 장여진이 그렇게 발버둥치며 수련하면서 도 어째 그리도 실력이 형편없느냐고 핀잔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 고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진위야!" "... ..." "벌써 일년이 다 되가는데 우리 한번도 제대로 얘기 나눠본 적 없지?" "... ..." "난 네가 알고싶어. 너도 내가 궁금하지 않니?" "... ..." "저어... 저... 내일 공연끝나고오... 시간 좀 내주겠니?" "... ..." "아휴, 답답해! 얘,대답 좀 해라. 은밀히 할 얘기가 좀 있어." "... ..." "저녁먹고 유시(酉時)경에... 후대에서..." "... ..." 장여진은 손등을 둔부에 올리고 맞잡은 채, 허리를 틀어서 옆으로 숙인 자세로 고개를 들어서 모진위의 턱밑까지 다가와 얼굴을 빠꼼히 올려보며 속삭였다. "나올 수 있지?" 모진위는 장여진의 쌔근거리는 숨결에 기절해버릴 지경이었다. "자아, 약속." 장여진은 모진위의 손을 끌어당겨서 억지로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걸고는 그렇 게 말했다. "그럼, 약속한거다. 꼭 나와야 해. 꼭이다." "잘 될거 같애." "신통치 않아." 금서림이 물었고, 장여진이 대답했다. 하북(河北) 제남(濟南)의 거부 손광일(孫廣逸)의 팔순잔치에서 금서림과 장여 진은 예상치 못한 공연을 한차례 더 치러야했다. 참으로 고단한 하루였다. 미산 호(微山湖)를 건너는 대운하를 타면 넉넉잡고 사흘이면 제남에 오겠거니하고 서주일대를 돌며 여유를 부렸는데, 대하(大河)의 물줄기가 북으로 방향을 바꿔 운하가 끊겨있었다. 큰 낭패를 겪은 것이었다.장가량의 신검반으로 말하자면 근 사오년만에 황하(黃河)로 나온 것이니 사정을 몰랐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일행은 미산호의 북쪽에 이르러서야 사태를 깨달고, 오십리가 넘는 길을 쉬지 도 못하고 강행하여 손가장에 당도했으며, 겨우 공연을 마치고, 이제 막 늦은 저녁식사를 마쳤을 때였다. 금서림과 장여진을 호출하는 전갈이 왔다. 금서림이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 장여진을 기다리며 소근대고 있는데, 배동삼 이 다가와 소리쳤다. "녀석들, 또 무슨 말썽을 피려고 모여서 작당들이냐? 피곤들 할터이니 일찍들 쉬거라. 그리고 서림이는 도구를 갖추고 나서라." "무슨 일인데요? 악장(樂長)어르신." "특별공연이다. 두령님한테서 기별이 왔다." 장가량과 구연기가 손가장의 하객으로 초대되어 손광일의 팔순 주연에 참가하 고 있었다. 손광일은 젊은 시절, 신검 옥진강의 초웅천의 잔당을 토벌하는 제이 차 출정에 가담했었다고 했다. 그래서 당년의 옥진강의 위용에 크게 감명을 받 고 흠모해왔는데, 팔순을 맞이하여 이렇게 신검반의 공연을 청하여 추혼십이절 을 되돌아보게 된 것이었다. 손광일은 신검반의 연기에 옥진강이 다시 살아난 듯 감격하여 생애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신검의 무예를 다시 한 번 보게 해달 라고 부탁해왔다는 장가량의 전언이 있었다. 장여진은 금서림과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배동삼의 눈에 띄었다. 전갈 을 들은 장여진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 했으나 잠시후, 좋아라고 공연장으로 달 려갔다. 특별공연에는 의례히 푸짐한 상이 따른다는 것을 장여진은 기억해냈던 것이었다. "이렇게 다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장주님의 팔순을 감축 드립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십시요." 금서림과 장여진은 공손하게 손가장의 노장주에게 축원을 올리고 쌍검무(雙劒 舞)를 추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소년 소녀 한쌍이 화려한 검광을 펼치며 주변공 기를 뒤흔들었고, 여기 저기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금서림의 도는 흑학의 날개처럼 허공을 휘감았으며 검은 도광을 뿌렸고, 장여 진의 보검은 화려한 나비와도 같이 팔랑거리며 오색 검광을 그려내었다. 시전 자들의 물흐르는 듯한 유연한 동작을 바탕으로 도광과 검광이 허공에 흩어지자 그대로 한폭의 그림이었다. 마침내 검무가 끝나고 두 청춘남녀가 장읍을 올리 자, 사방에서는 우뢰와 같은 갈채가 쏟아졌다. 손광일은 크게 만족하여 아니나다를까 두 남녀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장여진 과 금서림은 피곤한 것도 잊고 미소를 함빡 지었다. 갈채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한사내가 심트렁한 어조로 말했다. "신검반의 추혼십이절은 묘기백출로 호북, 안휘일대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고 들었소이다." 제남 백안관(白雁館)의 관주 조안형(趙雁亨)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자였는데, 처음 장가량과 소개를 나눌 때부터 은근히신검반을 깍아내리던 작자였다. "과찬의 말씀이오이다." 사실, 신검반이 세인들에게 이름을얻게 된 것은 신검반이 신검무공의 난이도 높은 동작들을 가장 옥진강에 가깝게 흉내 낸다는 평가때문이었다. 신검반이 옥진강의 기기묘묘한 동작을 연기해낼 수 있었던 것은 독문비전 비연류가 도움 을 톡톡히 받은 터였다. 만약 신검반의 사람들이 그들의 독문절기 비연류를 익 히지 못했다면 신검반의 무연도 다른 유파와 그리 달라보이지 않았을 것이었 다. "과연 명불허전이요. 명불허전. 참내......" 조안형은 실망했다는 듯이 의자의 등걸이에 팔을 걸치며, 고개를 제꼈다. "부족한 점이 있으면 깨우쳐 주십시요. 무엇이 못 마땅하신지요?" "본좌가 연전에 동천장왕생진(桐川張王生辰)을 기하여 곽산(곽山)을 행궁조배 (行宮朝拜)했는데, 그때 보았던 배록사(排綠社:잡극)가 본받을 만 하더이다." 조안형의 말뜻은 기왕에 묘기로 이름을 얻었다는데, 배록사보다도 못하니 가 소롭다는 비아냥이었다. 장가량은 어이가 없었다. 묘회(廟會)에서 연기되는 묘 기라면 그야말로 곡예, 그자체이고, 신검반의 연기야 실제적인 무공의 재현이니 묘기적인 부분에서는 서로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조안형은 가 장 규모가 크고 명성이 자자한 이월 팔일, 곽산 동천장왕묘회에서의 배록사를 예로 들었으니 그것은 무공만을 연기하는 신검반으로서는 대단히 억울한 비교 였다. "이 장아무개는 게으른 탓에 그런 성대한 묘회는 일면식도 못한 바, 본받고 싶 어도 도리가 없으니 부디 지덕을 겸비하신 조문주께서 이 장아무개에게 가르침 을 주시어 안목을 높혀주시기 바랍니다." "서로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조문주께서는 명명백백하게 그 형평을 가려야 할 것이라 사료되오." 그렇지 않아도 조안형의 무례한 행동에 마음이 언잖던 손광일이 거들고 나섰 다. 조안형이 터무니없이 신검반을 경시한 것이 아니라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 한다면, 체면상 신검반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손광일은 축 복이 넘쳐야 할 자신의 팔순축하연에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키는 조안형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못할 것도 없소이다." 조안형이 두자 길이의 흑색 끈을 꺼내들었다. 놀랍게도 흑색끈은 마치 막대기 처럼 꼿꼿하게 하늘을 향해 섰다. 군중들의 감탄사속에 조안형이 씩 웃고는 손 을 툭 털어내자 막대기는 본래의 끈으로 돌아가 축 처져버렸다. 이번에는 조안 형이 끈을 잡지않은 손으로 끈을 쭉 훑었다. 끈이 다시 막대기 처럼 옆으로 누 워서 허공을 지탱했다. 조안형은 끈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끈은, 아니 끈으로 만 들어진 일직선의 막대기는 전혀 풀어짐이 없이 움직이는 조안형의 손에 자유자 재로 조종되었다. "허어-." "대단하군." 여기 저기서 다시 탄성이 터져나왔다. 지켜보던 장가량은 일순 긴장이 풀렸다. 물론, 끈을 막대기처럼 조종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단한 묘기라고까지 할 것은 없었다. 강호에 서도 채찍이나 연검(軟劒)을 능히 다루는 고수들이 내력을 불어넣어 편이나 연 검을 꼿꼿하게 세우는 수법은 드물지 않게 사용되는 수법이었다. 백안문은 제 남성에서도 손꼽히는 문파라고하니 그 문주라 칭하는 조안형이 그 정도의 실력 도 발휘 못해서는 오히려 체면이 깍일 터였다. 무공을 모르는 인사들이 탄성을 올렸을 뿐, 대개의 강호인들은 무덤덤한 표정 으로 조안형의 수작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장가량의 눈이 휘둥레졌 다. 그리고 무림고수들의 표정도 삽시간에 바뀌었다. "얍" 조안형의 짧은 기합과 함께 마구잡이로 허공을 가르던 흑선(黑線)의 진로가 법칙을 갖춘 순서를 만들어내었다. '저것은... 저것은... 끙!' 장가량이 불신의 표정으로 몇번이고 확인해보았지만 흑선이 움직이는 형태는 분명히 방금전 금서림이 펼쳐보였던 연기, 바로 그 것이었다. 청송곡에서 마검 초웅천이 신검 옥진검을 상대하였다는 바로 그 도법. 힐끗, 장가량과 눈이 마주친 조안형이 '피식'하고 냉소를 흘렸다. 장가량은 믿을 수가 없었다. 장가량의 상식으로는 아무리 내력이 심후한 자라 해도 금서림의 도법은 그대로 흉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초 웅천의 도법이라고는 해도 실제로는 추혼십이절의 원리를 따른 도법이었다. 신 검반의 무리들이 신검무공을 접하게 되면 다른 류의 무공을 익히는 것은 불가 능할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극의 형태이기에 보다 조화를 이 루기위해 추혼십이절에 그 바탕에 두고 새로이 조작된 도법이었다. 그저 겉모 습만 초웅천의 마도를 베껴왔을 뿐, 그 근간은 추혼십이절이었다. 다른 무공이 라면 몰라도 추혼십이절을 끈으로 시전한다는 것은 신검 옥진강이 다시 살아온 다고해도 그 검리(劒理)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조안형의 주먹은 끈의 끄트머리만 움켜쥔 채, 꼼작도 하지 않았다. 다만, 흑띠가 저 혼자서 금서림의 도연을 금서림보다 더 훌륭하게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장가량의 이마에 식은 땀이 흘렀다. "허어!" 이번에는 영문을 모르는 문외한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고, 넋을 잃고 흑띠의 움 직임을 주시하던 무림고수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탄성 을 외치던 입술을 채 닫기도 전에 고수들은 또 한번 입을 벌리고 경악성을 외 쳐야 했다. 난데없이 칠색의 빛무리가 조안형이 펼쳐놓은 흑영속으로 날아들었 기때문이었다. 구연기였다. 구연기의 중지와 검지 사이에는 무지개색의 그림자가 오색영롱하 게 흔들리고 있었다. 구연기가 손가락을 쭈욱 내밀자 찬란한 칠광(七光)이 돌연 조안형의 흑영(黑影)속으로 돌진하였다. "아! 추혼십이절." 누군가가 그렇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칠광의 흔들림은 추혼십이절의 검로를 따르고 있었다. 구연기의 칠광과 조안형의 흑영이 어울리니 상황은 기묘하게도 조금전 금서림과 장여진이 보여주었던 쌍검무을 그대로 다시 보여주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자세히 보니 구연기의 손가락사이에는 한자 반 길이의 칠보(七寶)젓가락이 끼 어져있었다. 칠보젓가락이 칠광으로 빛나고, 흑띠가 흑영을 이루니 흡사 옥진강 의 오광검(五光劒)과 초웅천의 흑왕도(黑閻刀)가 얽혀진 듯 절묘한 광경이 연출 되었다. 띠를 쥐고있는 조안형의 주먹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지만 흑띠는 미친듯이 기 세를 올렸다. 구연기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구연기의 손목도 전혀 움직임이 없 었다. 벌어진 손가락들만이 가끔 미동을 보일 뿐, 마치 구렁이가 나무를 휘감아 오르는 듯, 칠보젓가락도 구연기의 중지와 검지를 타고 넘으며 제멋대로 위력을 더하며 흑띠에 대항해나가고 있었다. 장가량은 조안형의 흑띠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이유를 도대체 알 수 없었다. 구연기의 칠보젓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이유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끈이라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었다. 어검술(御劒術). 추혼십이절의 검로(劒路)는 어검술을 전제로 구성되어있다. 물 론, 어검술을 단계적으로 습득해나가는 검리(劒理)도 전수되어왔지만, 옥진강이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 검리를 오성이상을 터득한 자가 없었다. 대부분이 손가 락의 움직임이나 손목의 반동으로 검이 손주위를 떠나지 않는 한도내에서 미숙 한 어검을 구사하는 정도였다. 그 정도만 해도 옥진강시절의 직전문하생이나 가능했던 것이지 작금에 이르러서는 각파마다 신검반의 비연류에 해당하는 나 름대로의 기술을 이용하여 거의 눈가림으로 위장된 어검술의 보여줄 뿐이었다. 그런데 비록 젓가락일지언정, 구연기가 어검을 유려하게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 었다. 구연기의 칠광이 점차 흑영에게 밀려나고 있었다. 어쨌든 흑띠는 조안형의 손 에 꽉 쥐어져서 든든한 뿌리를 확보하고 있었으니 기반이 취약한 젓가락이 불 리할 수 밖에 없었다. 손에 잡혀있는 흑띠에 반해서 젓가락은 손가락사이를 흘 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보다 결정적으로 판도를 좌우한 것은 그 길이였다. 한 자 반의 젓가락을 제 아무리 늘여봐야 두자가 넘는 흑띠가 찔러오면 구연기의 손은 그대로 절박한 위기를 맞고는 하였다. 마침내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구연기의 젓가락이 간신히 급습을 막아냈지 만 그것은 교묘한 허초였다. 젓가락이 조안형의 주먹을 향하는 사이, 어느새 흑 띠는 젓가락과 평행을 이루었다. 구연기가 요지부동으로 고정해둔 팔을 뒤로 빼내지 않는다면 흑띠는 그대로 구연기의 손바닥을 찌를 판이었다. 툭. 일순간에 칠광과 흑영이 사라졌다. 그리고 흑띠가 후줄그레 늘어진 채, 바닥으 로 떨어졌다. 조안형의 움켜쥔 주먹에는 단지 끊겨진 것으로 보이는 끈의 잔재 만이 남아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끈과 조안형의 주먹을 번갈아보던 군중들의 눈길이 이번에는 구연기의 손으로 옮겨갔다. 구연기의 손은 주먹으로 변해있었 고, 검지손가락만이 곧게 뻗어나가 조안형의 주먹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의 끝에는 마치 검지의 연장선이라도 되는 양, 칠보젓가락이 이어져있 었다. 잠시후, 허공을 지탱하던 젓가락이 부르르 진동하는가 싶더니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장가량이 '후우'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구연기를 바라보았다. 그 러나 구연기는 의문에 가득찬 장가량의 눈길을 무시하고 두팔을 높히 들어 포 권을 취하고 사방으로 허리를 숙였다. 사방에서 칭송과 갈채가 터져나왔다. 눈 앞의 광경은 분명히 구연기의 젓가락이 조안형의 흑띠를 끊어버렸다는 것을 증 명하고 있었다. 장가량은 놀랍기만 할 따름이었다. 젓가락에 검지손가락을 더했다하나 그것으 로 흑띠만큼 길어지지는 않았다. 구연기는 젓가락끝으로 검기를 내쏘아 부족한 길이를 보충했던 것이었다. 구연기가 검기를 사용하는 경지였다니... 물론, 검기 (劒氣)를 사용하는 것, 또한 추혼십이검의 중심원리이었다. 비록 젓가락을 손가 락과 일직선으로 놓고 가장 발출이 용이한 지공(指功)의 도움을 받았고, 가장 저급의 경지인, 검말(劒末)을 통해 내쏘는 형태이기는 했지만, 장가량으로써는 감히 상상도 못해본 검기를 구연기가 발출한 것이었다. 손광일이 기쁜 어조로 조안형에게 말했다. "조문주의 묘기도 놀라운 것이기는 하지만, 구노사의 묘기는 신기(神技)라해도 과언이 아니구려. 조문주는 끈의 뿌리를 잡고 내력을 불어넣어 연체(軟體)인 끈 을 제어하였소. 반면, 구노사는 단지 접촉만으로 연체보다 어려운 경체(硬體)를 능란하게 제어하였소. 이는 누가 보아도 신검반의 묘기가 손색없다는 것을 입 증하는 것이니 조문주께서는 신검반을 과소평가했음을 사과하시기 바라오." "손장주의 말씀은 일견 타당하오나 본좌는 승복할 수 없소이다. 장주께서 간과 하신 점이 한 가지 있사오이다. 어찌 재주의 고저를 가림에 있어서 승부의 결 과로 평가를 내리십니까? 본좌는 단지 일별하고 따라해본 미숙한 타인의 재주 로 그들의 재주를 대항해본 것에 지나지 않소이다. 흉내가 익숙치 않아 실수하 였을 뿐, 재주가 모자랐음을 패배 승복할 수는 없소이다. 오로지 비무라는 측면 으로만 논(論)해야 한다면 정식비무를 해야겠지요, 실제적인 대결이라면 어찌 본문의 무공이 무공의 기본에서조차 벗어난 한낱 구경거리의 허울뿐인 저 따위 무공와 비교가 되겠소? " 조안형이 후안무치(厚顔無恥)로 뻔뻔하게 억지를 써대자 장가량은 노기가 충 천하였다. " 일개 소일거리의 무공밖에 익히지 못한 필부지만, 상대해주신다면 이 장아무 개가 백안문의 장문인께 정식으로 비무를... ..." 구연기가 당황하여 재빨리 장가량의 노호를 가로막았다. 장가량이 젊은 호기 로 덤벼봐야 결과는 뻔하였다. 장가량이 신검반을 대표하는 고수라고는 하나, 조안형은 당당한 무림문파의 수좌(首座).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하하하. 조문주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은 아무도 당할 수 없겠구려. 정말 대단 하오이다." 조안형의 미간이 역으로 팔자를 그렸다. 일개 유랑극단원의 신분으로 무림방 파의 수좌에게 건네는 말로는 지나치게 무례한 언사였다. 실력이 모든 것을 대 변한다는 강호에도 엄연히 눈에 보이지 않는 신분과 관습은 존재하고 있었다. 불손한 언사를 빌미로 삼아 핍박한다면 손광일마저도 이를 막을 구실이 없었 다. 손광일은 일찍 나서지 못했음을 후회하였다. 사태가 자못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몰리는 듯 했다. "본좌의 어떤 점이 표리부동하다는 것인가? 분명히 말해보게." 조안형이 도를 힘껏 움켜쥐었다. 여차하면 내리칠 기세였다. "문주께서는 본문의 무공을 흉내낸 것 뿐이라고 하셨사옵니다. 그리 말씀하시 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그리 말했네." "그럼, 백안문이 절대로 마검 초웅천의 무공과 관계없다고 여기계신 하객분들 을 증인으로 분명히 말씀해주십시요? 흑염도법(黑閻刀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씀해주시겠습니까?" "... ..." "어서요?" 조안형은 대답할 수 없었다. 조안형은 자신이 큰 실수를 범했음을 깨달았다. 어찌되었든 자신이 펼친 무공은 흑염도법이었다. 문파의 뿌리를 부정할 수는 없는 법, 조안형은 진퇴양란의 궁지에 빠져버렸다. 옥진강의 무공과는 달리 초웅천의 무공은 세상에 널리 퍼졌다. 속성으로 무공 을 증진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익힌 만큼 그 위력도 대단하였기 때문이었다. 대개의 초웅천유파들은 드러내놓고 자신들이 흑염의 일맥임을 자랑하지는 않았 지만, 나름대로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백안문도 그중의 하나였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손광일이 제남의 명사 조안형을 초청했다. 초웅천의 흑염도에 뿌리를 둔 백안문의 문주 조안형은 연회장에서 사조의 숙적 옥진강의 무공이 환대를 받는 것을 보고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은근히 신검반에 모욕을 안겨주려는 생각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자신의 뿌리를 부정해버리는 대실수를 저지 르는 지경에 빠져들게 된 것이었다. 조안형의 묵묵무답에 손광일은 사태를 파악하였다. 백안문은 흑염도의 일파인 것이 확실했다. 초웅천의 후인이라해서 그들을 무조건 백안시하는 강호의 풍토 를 공명정대하다 할 수는 없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 전인들과의 일전에 참가 했던 손광일로서는 일부러 그 후인과 교류를 가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손광 일이 조용히 말했다. "조문주, 멀리 못나가오. 안녕히 가시요." 예의는 갖추었지만 냉정한 축객령(蹴客令)이었다. 조안형은 꼼짝 못하고 손가 장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장가량의 의문도 풀렸다. 추혼십이절만 아니라면 장가량도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었다. 조안형이 흐물거리는 끈으로 쌍검무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흑염도법으로 포장된 추혼십이절이 아닌, 진짜 흑염도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구 연기는 그 미묘한 차이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장가량이 다시 경이 의 눈으로 구연기를 바라보았다. 접객당(接客堂)으로 돌아온 구연기는 바로 수마(睡魔)의 품에 안겨버렸다.모 진위가 보이지 않았지만, 또 수련중이겠거니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달이 숨 는 밤이면 모진위는 의례히 고목나무아래서 낙엽을 치는 연습에 몰두하는 것을 구연기는 여러차례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유난히 피곤한 하루였기에 모두가 골 아떨어진 것같은데 하여간 지독한 놈이라고 생각하면서 구연기는 잠속으로 빨 려들어갔다. 일촉즉발의 긴장이 풀려서 인지 솜처럼 풀어져서 장가량도, 금서림 도, 장여진도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햇살에 눈을 뜬 구연기는 타는 듯한 갈증으로 모진위부터 찾았다. "진위야, 차 좀 대령하거라." 대답이 없었다. 이제까지 없었던 일이었다. 구연기의 아침시중은 당연히 모진 위의 몫이었고, 구연기의 기상에 대비하여 언제나 구연기의 기척이 들릴만한 장 소에서 대기하던 모진위였다. 간밤의 취기가 가시지않은, 지끈거리는 머리로 찻물을 준비하며 구연기는 생각 했다. '녀석, 어지간히 피로했던 모양이로군.' 미산호의 북안에서 손가장까지의 오십리길은 건장한 어른들도 초죽음이 되었 다. 남달리 체력이 약한 모진위에게는 무리가 갈 만도 한 강행군이었다. 한시진이 지나도록 모진위는 보이지 않았다. 참다못한 구연기가 있을 만한 곳 을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모진위는 없었다. 세안(洗顔)을 마치고 들어오던 장 가량이 물었다. "구노사 어인 일이시요?" "진위녀석이 안 보여서요... ...그러고 보니 어제밤에도 안보이던데..." 모진위의 행방불명으로 신검반은 발칵 뒤집혔다. 소식을 들은 반원들이 흩어 져 모진위를 수소문해보았지만, 어디에서도 모진위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비인부전의 절기, 비연류의 보전문제로 인해 구성원의 이탈은 언제나 신검반의 중대한 관심사였다. 전체 신검반원이 즉각소집되었다. 맨 마지막으로 장여진이 눈을 비비며 나타났다. "무슨 일이예요? 아빠." "진위가 없어졌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장여진의 얼굴에 짙은 의문의 기색이 서렸다. 수상히 여긴 장가량이 장여진을 닥달하였다. 장가량일행이 후대로 달려갔다. 무대가 손가장의 본당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에 신검반원들은 감히 그곳까지 탐색해보지는 못했다. 있었다. 간밤의 추위로 새파랗게 질려버린 모진위가 후대안에 흔들거리며 서있었다. 이제 막 후대로 들어서는 장여진을 발견하고는 모진위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 러졌다. 장가량이 장여진에게서 알아낸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사흘전, 아이들이 논 쟁을 버렸다고 했다. 그 논쟁의 주인공은 모진위였다. 모진위는 전혀 무리의 아이들과 어울리려 들지 않았다. 공적인 대화이외에는 농담 한마디 제대로 나누어본 아이들이 없을 정도이니 이것은 정도가 심했다. 물론 모진위가 무리에 끼어들려고 해도 그렇게 쉽게 상대해줄 아이들도 아니었 지만, 그래도 골탕을 먹이거나 귀찮은 잔일에 부려먹을 만만한 쫄다구라면 누구 나 모진위를 제일의 후보로 꼽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필요한 경우조차 모진위를 불러낼 수가 없다는 데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반시진이면 후다닥 끝나는 비연류를 연습하는데 두시진, 추혼십 이절도 마찬가지였고, 게다가 권법이라고 불러주기엔 너무도 가소로운, 거의 춤 이라고 불러야 옳을 이상한 권법수련까지 꼬박 꼬박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었 다. 녀석의 하루는 온종일 그렇게 흘러갔다. 아이들은 그래도 '쉴 때가 있겠지. 지가 아무리 그래도 인간인 이상 한 번쯤은 짬을 내겠지'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하지만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물론 그야말로 모진위도 인간인 이상 쉬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또 그 쉬는 방법이 문제였다. 모진위의 휴식은 오로지 하 나. 그저 숨도 안쉬고 앉아있는 전혀 토납법(吐納法)이라고 해서는 안될 것같은 토납법의 수련이 녀석의 쉬는 모습이었다. 모진위가 이런 방식으로 일상을 유지하는 한, 아이들이 강제적으로 모진위를 끌어낼 방법은 없었다. 무술시범과 연기를 밑천으로 하는 신검반으로서 반원들 의 자발적인 훈련은 가장 우선적으로 장려되는 사항이었다. 특별한 사유가 없 이 반원들의 무공수련을 방해하는 것은 절대 금기사항이었다. 참다못한 아이들은 잠시 짬을 내어 즐거운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게느 냐고 꾀어도 보고 그러다가는 재미없을거라고 협박도 해보았다. 특히, 아이들의 우두머리격인 금서림은 자신의 일사분란한 지휘체계에 흠집이 생기는 것을 막 기위해서 가장 적극적이었다. 나중에는 아예 오기가 생겨서 핑계거리만 생기면 모진위에게 고문에 가까울 정도로 잔인한 고문을 가하며 모진위의 복종을 강요 하였다. 그래도 모진위는 요지부동이었다. 과연 누가 모진위의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도 누군가 노숙한 계책을 들고 나왔다. 미인계였다. 아이들이 새로운 희망으로 그들의 절세가인, 장여진에게 시 선을 모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장여진은 기가 막혔다. '그냥 면상만 쳐다봐도 식욕이 떨어지는 판인데, 예쁜 표정으로 유혹씩이나 해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금서림을 필두로 반대 여론이 급등하더니 사태가 일변하였다. 여자애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이던데 장여진라고해서 별 수 있겠냐는 그런 의견들이었다 . "그런다고 그 녀석이 꼼짝이나 할거 같애?" "림(林)오빠! 그게 무슨 뜻이지?" 금서림이 고개를 살레 살레 흔들자 장여진이 발끈하고 나섰다. "아니, 아니. 진매(眞妹)때문이 아니라. 자식이 워낙에 괴상하잖아. 그 멍청이가 천하의 옥석인들 알아보겠니?" 장여진의 얼굴에 금새 홍조가 들었다. 그녀의 자존심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 음이 분명하였다. "그래, 아무도 그 녀석을 불러낼 수는 없어. 그건 아무리 진매라도 불가능한 일이야." 무정(武淨: 정의한, 악한, 신선, 요괴등 역할의 범위가 넓어 연기력을 요구하는 배역)의 후계자로 장래에 마도 초웅천의 배역을 맡게 될지도 모르는 험악한 인 상의 고동보(高冬寶)가 거들고 나섰다. 다른 아이들도 대부분 고동보나 금서림 의 의견에 찬성하는 기색이었다. "이 장아무개가 그렇게 우습게 보인단 말이지?" 장여진이 반기를 들고 나섰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있었다. "흐흐. 나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는데 동전 닷푼." "자식. 겨우 닷푼가지고. 나는 열푼으로도 자신있다." "좋아. 나는 열닷푼이다." "나도." "나도." "야, 반대쪽은 없어." "... ..." "이래서 내기가 되겠냐?" 가뜩이나 모진위라면 은근히 켕기던 장여진은 약이 바짝 올랐다. 그리고 드디 어 자존심강한 소녀의 열세살짜리 춘심(春心)이 폭발을 하고 말았다. "좋아. 내가 걸겠어. 무슨 수를 쓰든 꼬셔내기만 하면 되는거지?" 구연기는 장여진을 바라보는 모진위의 묘하게 구겨진 표정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만약 그것이 모진위가 제딴에는 따스한 미소랍시고 지은 표정이란 것을 알았다면 구연기는 또 그렇게 말했을 것이었다. '이건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원...' 하지만 구연기가 그것이 모진위의 웃음이란 것을 알았다해도 그 미소가 무엇 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구연기는 도학정의 마지막 유훈(遺訓), 가엾은 들고양이의 이야기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 흐음. 과연 원성이 자자하군요. 결국, 경진님의 원성이 나를 컴퓨터앞으로 이끌 고 말았습니다. 하룻밤 꼬박 새니 그래도 들고양이편은 끝나는 군요. 가능하면 삼일에 한편씩을 목표로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백수도 바뻐요. 뻔뻔한 흑수노계였습니다.(씨이, 백수 안해!) #4767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15- 10/28 07:39 167 line 7.신검대회(神劒大會) 신검반일행이 하북, 천진(天津)에 입성한 것이 칠월 열하루, 이제 여름의 절 정이었다. 지난 겨울, 절강(浙江)의 항주(杭州)를 출발한 지, 구개월하고도 열흘, 모진위가 신검반에 입문하고는 사계절이 바뀌고 나서야 그들 여정의 최북단, 천 진에 도착한 것이었다. 본시 장가량은 천진에서 보름가량 활동하고 낙양(洛陽)으로 남동진하여 여름 을 보낸 후, 양자강을 향해 남하할 요량이었다. 천하를 유랑하는 무리의 입장에 서는 여름은 대하의 북쪽도 그럭 저럭 지낼만 하지만, 아무래도 겨울은 장강이 남의 따듯한 복건(福建)이나 광동(廣東)이 고생이 덜한 법이었다. 그런데 장가 량의 그런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배동삼이 말했다. "어짜피 추워지기 전에 남하를 해야할 터, 조금 더 서두른다고 해서 큰 손해날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배동삼은 은근히 참가했으면 하는 눈치였다. "계획대로 갑시다. 여기까지 와서 낙양을 건너뛰는 건 무리가 있어요. 낙양은 대도시입니다. 잘 만되면 한동안 배곯을 걱정은 없을 겁니다. 형편을 잘아시지 않습니까? 여유가 없어요." 향이(向二)는 별로 탐탁하게 생각치 않는 것같았다. 그러나 장가량이 짐작하기 에 향이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참가를 원하는 기색이었다. 향이로서야 신검반의 재정을 맡고있는 입장에서 당연히 수입을 먼저 생각해야하니 그런 발언이었을 테고. 장가량은 구연기를 쳐다보았다. 장가량으로서는 구연기의 의중을 묻는 것이었 지만, 구연기는 그저 심트렁한 표정으로 묵묵히 앉아있을 뿐, 가타부타 대답을 하지않고 있었다. 잠시 구연기의 반응을 기다리던 장가량은 구연기의 묵묵부답 에 실망을 느끼며 눈길을 돌렸다. 이제 장가량의 결정만이 남아 있었다. 대부분의 젊은 반원들은 그 소문을 듣고 잔득 들떠서 주먹을 굳게쥐며 자신의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 게다가 장여진이란 계집애는 고양이쌔끼마냥 팔딱거리 며 드디어는 엽설영과 우백의 솜씨를 감상하게 되었노라 좋아라 날뛰었다. 양 주에서 신검대회가 열린다는 소문때문이었다. 헐레벌떡 소식을 전한 자는 향이였다. 무림세가와의 타협이 여의치않아 공연 이 마땅치 않은 터에 마냥 놀고만 있을 수도 없는 처지라, 마침 삼궁(三宮)의 제삿날이 칠월 십오일이라 삼궁의 제주에게 묘회의 참가를 흥정하러 향이를 삼 궁묘에 보냈다. 신검반이라고해서 매양 강호인들의 초청에만 목을 매달 수는 없었다. 일반적 으로 다른 무술공연단도 다음 공연약속장소와의 거리가 멀 경우에는 늘상 이동 도중에 묘우(廟宇)고, 타야아(打野아)고 간에 대체적인 규모의 연희(演戱)라고 생각되면 사양치않고 보통 유랑극단패와 함께 공연을 벌여 생활비를 충당하고 는 하였다. 유랑극단패들에게 대규모의 묘회는 공연무대일 뿐만 아니라 서로간에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로써의 역할도 하고있었는데, 천진의 삼궁묘회는 제법 규모를 자 랑하는 터라, 멀리 양주에서의 소문까지 전해져 있었던 것이었다. 향이의 전언을 듣고, 장가량이 사람을 풀어 수소문을 해본 즉슨, 내용은 이러 하였다. 양주(揚州)에서 사상최대의 신검제전(神劒際展)이 열리는데, 그 주관자는 양주 의 거상(巨商) 채소우(蔡紹禹)라했다. 채소우의 선친은 생전에 신검문하에서 검 을 익혔다는데, 그 신검무예는 그 부친을 통해서 채소우에게도 사사되었는데, 그런 채소우가 옥진강과 자기 부친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신검대회를 개최한다 는 것이었다. 참가자격은 이십세이하의 남아라는 것이외에는 제한이 없었고, 옥 진강의 추혼십이절로 기량을 겨루는 대회라고 했다. 장가량은 고민에 빠졌다. 대부분의 반원은 양주로 갔으면 하는 기색이었다. 양주는 양자강과 대운하를 끼고있어 소금무역이 성행한 요지(要地)로서 대상 인들은 왕후(王后)를 능가하는 호화스런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의식주에 관한 양주 대상인들의 사치스러움은 후대에까지 전해질 정도였는데 이런 경제적인 부유함은 자연히 양주를 가무(歌舞)의 소왕국으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자연히 각종 연극과 기예는 양주로 모이게 되었고, 경제적인 풍요속에서 더욱 육성되었다. 경제적인 실권을 쥐고 있던 소금상인들은 연극이나 기예의 공연에 있어 그 화 려함을 극도로 추구하였다. 이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는데 주로 의 상과 소도구류에 아낌없이 막대한 재화를 투자하였다. 후일, 공상임(孔尙任)의 걸작으로 유명한 도화선(桃花扇)이라는 경극을 상연하 기 위한 의상비로 16만 금을 투입한 일화가 전해질 정도였다. 신검연극의 총본산도 당연히 양주였다. 양주에는 신검무예, 유일의 도장인, 칠 주반(七珠班)있었고, 대부분의 유명한 배우들은 모두 칠주반에서 배출하였다. 물론 옥진강 일대기의 공연이 가장 성행하는 곳도 양주였다. "내년 십일월이라..." 장가량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회는 내년 십일월에 열릴 예정이라니 기 간은 일년하고도 다섯달이 남았다. 그러나 양주로 가려면 천진은 말할 것도 없 고, 낙양의 공연도 모두 포기해야했다. 적어도 사월까지는 양주에 도착해야 하 기 때문이었다. 그때 쯤이면 대운하의 해동(解凍)으로 상거래가 가장 활발해지 고, 전국의 상인들이 모여드는 시기로 개최일가 가까워진 신검대회에 대한 호기 심이 절정에 달할 시기와도 잘 맞아 떨어졌다. 사월보다 도착이 늦어지면 늦어 질 수록 좋은 흥행의 기회는 적어지는 것이었다. 향이가 장부(帳簿)를 들썩이며 장가량에게 시위하였다. 막바로 양주로 직행하 기에는 역시 자금이 문제였다. 현재의 자금사정으로는 중간 중간에 경비를 조 달해야했다. 비교적 시간을 아끼며 자금을 충원하는 방법은 대략 두가지 형태 의 연희였다. 대운하를 타고 여행하면서 운하연하의 대도시에서 그때, 그때 대 저택의 난간을 빌려 상업적인 즉석공연을 하는 것이 그 하나였다. 그리고 나머 지 한 방법은묘회연희에 참가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정확하게 계산된 여행 계획이 있어야했다. 궁관사묘(宮觀寺廟)의 묘회에는 저마다 정해진 기일이 있었 다. 관음묘(觀音廟)의 제사기일은 이월 십구일, 동악묘(東岳廟)는 삼월 이십팔 일. 그러니까 규모가 크고, 대운하에 인접한 묘우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시기에 운하연안의 대도시를 지나지 않도록 여행속도가 잘 조절되어야 하는 행로였다. 서둘러도 팔구개월은 걸리는 빠듯한 일정이니 양주로 가려면 지금이라도 당장 출발해야할 입장이었다. 향이의 생각은 양주에 가지않고 예정대로 천진과 낙양에서 공연을 하더라도 손해볼 것은 없다는 주장이었다. 다른 신검단체들이 모두 양주로 향했을 터이 니 낙양으로 갔다가 육반산(六盤山)방면을 경유하여 사천일대를 돌면 그야말로 경쟁상대가 모두 빠져나간 무주공산(無主空山)에서의 땅집고 헤엄치기로 오히 려 보다 실속있는 흥행이 될수도 있다는 계산이었다. 향이의 의견과 대치되는 쪽에서는 흥행의 대소차이는 차지하고라도 신검대회 자체가 평생 구경해볼까 말까한 대축제인데다가, 대회에 참가하여 입상이라도 하는 날이면 그 선전효과가 어마어마 할 터이니 어찌 그 기회를 마다할 것이냐 며 반박하였다. 장가량은 향이의 계획에 훨씬 구미가 당겼다. 사실, 신검반은 신검무공의 정통 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 아류에 가까웠다. 다만 그들의 비전, 비연류 의 덕택으로 당년의 옥진강을 방불케하는 그 동작과 자태를 실감나게 묘사하여 명성을 얻었을 뿐, 양주의 칠주반이 배출한 배우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타 비 슷하게 실력을 인정받고있는 단체들에 비해서도 추혼십이절 자체로만 놓고 본 다면 오히려 한 수 양보해야 할지도 모르는 수준이었다. 양주 제일의 거부, 채 소우가 확약한 상금 황금일만냥을 나누어먹는 십위이내의 입상은 고사하고 본 선무대의 진출조차도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러니 현 상태이상의 무슨 명성을 기 대할 수 있겠는가? 장가량은 다시 구연기를 쳐다보았다. 언제나 사려깊은 판단으로 장가량의 결 정에 도움을 주었던 구연기가 오늘 만큼은 무슨 이유인지 일언반구도 없었다. 장가량은 결국 구연기의 도움을 포기하고 단독으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도대체 우백이랑 엽설영이 누군데?" "자식은... 우백도 모르냐?" 아이들의 소란에 고동보가어리둥절해서 묻자, 금서림이 핀잔을 주었다. "칠주반이 낳은 최고의 명배우 우백과 그에 쌍벽을 이루는 엽설영." "그사람들 추혼검은 정말 끝내준다더라." "그 사람들도 참가한데?" "당연히 하겠지." "그렇게 유명하다면 나이가 많을꺼 아냐?" "열아홉살 동갑이래더라, 뭐." "와아-. 아직 그렇게 젊어?" "그럼 둘중에 하나가 우승은 따논 당상이네." 금서림이 눈을 부라리고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왜? 우리가 뭐 잘못말했어?" "임마, 내년이라면 나도 스물은 넘지않아 기껏 열여덜이라구. 그리고 나도 보 시다시피 남아대장부고..." "...그건 또 뭔 소리야?" 아이들의 눈이 일제히 금서림에게로 쏠렸다. "뭐긴 뭐야. 스무살아래고 남자라면 참가할 수 있다는 거지." "... ..." "우백이건, 엽설영이건 다 나오라 그래. 이 금서림대협께서 상대해줄테니까. 자 아, 덤벼라! 솜씨를 보여주마." 금서림이 멋지게 추혼십이절의 기본자세를 취하였다. "어! 그럼, 우리도 가는 거야?" "그래, 임마. 빨리들 들어가서 짐 꾸려." 아이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장가량은 결국 양주행을 허락하고 말았다. 몇몇 무림대파에서 신검대회를 개 최한 예는 있었지만, 이렇게 전국에 소문이 퍼질 정도로 성대한 대회와는 격이 달랐다. 양주는 신검연극의 총본산. 게다가 채소우는 양주제일의 거상. 잘하면 전국의 유명단체가 모두 총집합하는 대회가 될 것같았다. 단체의 미래를 생각 한다면 주판만 놓아보고 판단할 문제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신검반에는 이제 열아홉이하의 청소년들이 무려 아홉명이나 있었다. 이들의 야망과 기대를 전부 외면하고는 향후, 단체의 통솔이 아무래도 쉬울 것 같지 않았다. 골치 아픈 신 검대회였다. 다음날, 신검반일동은 천진을 출발하여 대운하로 향했다. 양주로 향하는 행로였다. ================================================================ 주)묘회연희: 송대에는 민간신앙과 불교가 많이 번창하였기 때문에 신위를 모신 관제묘나 사당인 묘우(무협지에 나오는 넓은 관제묘따위)에서 신을 노래하고 춤추는 문화가 발달했는데, 대규모 군중적인 축제형 태를 띤 연희로 발전했다합니다. 나라에서는 유명한 궁관사묘의 제사일에는 축제를 하도록 허락했 다는 그런 정기적인 페스티발의 묘사가 무림구사(武林舊事)라는 실존하는 문헌에 기록되어있답니다. 그런데 무림구사라는 책이 무 슨 내용의 책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뒷편에 묘우무대의 이야기를 전개할 예정인데, 글의 내용속에 넣기 가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라 이렇게 미리 적어놓습니다. 약속대로 사흘만에 올려니 분량이 너무 적어 부끄럽습니다. 그렇다고 미완성의 뒷단락까지 이어올리기는 싫고. 죄송합니다. 여전히 뻔뻔한 흑수노계였습니다. #4807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16- 11/04 14:50 344 line "이럴거라면 굳이 낙양을 포기할 필요도 없지 않겠어요? 내친 걸음이니 낙양 에서 한판 벌리고 개봉(開封)까지..." 향이가 여전히 미련을 못버리고 주억거리자, 장가량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관도를 따라 사나흘이면 석가장(石家庄)에 다다를 고개마루에서 였다. 일행은 천진을 출발하여 동쪽으로 계속나아가 보정(保定)에서 사흘을 머물렀 고, 석가장을 향하여 출발한 지, 일주일이 넘어 서고 있었다. 양주가 목적지이고 보니 서둘러야하는 여정이라면 대운하를 타기위해 제남으로 방향을 잡았어야 옳은 일이었지만, 장가량은 거리로 오육백리, 시간으로 일주일은 지체하며 보정 과 석가장을 경유하기로 결단을 내렸던 것이었다. 겨우 두어달 전에 지나왔던 경로를 그대로 다시 되밟아간다는 것은 유랑극단으로서는 특단의 경우이외에는 취하기 어려운 공연일정이었다. 이미 지나쳐 온 고장을 며칠사이에 다시 방문 한다는 것은 텅텅 빈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코 그럴 듯한 흥행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하긴 석가장을 통과하여 그대로 관도를 따라간다면 천오백리 쯤 떨어진 곳이 낙양이였으니, 향이가 불평을 내뱉을 만도 했다. 그러나 낙양에 개봉까지 돌아 간다면 어느 정도 수지타산이야 맞출 수 있겠지만, 양주까지의 여정에 적어도 한달반은 더 지장을 주는 것, 장가량이 향이를 다독거렸다. "허어 이사람, 또 시작이다. 우리 형편이야 자네가 제일 잘 아는 거 아닌가? 쓸데없이 너스레 떨지 말고 산신(山神)님께 기도나 잘 드리라구." 자금사정이 여의치 않은 가운데, 무작정 양주까지의 최단거리를 택하는 여행 은 무리이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돈이 되겠지 하며 무작정 지름길을 택할 수 는 없는 일, 장가량은 가장 확실하게 흥행이 보장되는 석가장을 경유해서 남하 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벌써 팔월 초순이었다. 석가장을 방문하기로 작정한 이 유는 8월 중순이 산신제사의 기일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지역에따라 하루 이틀 차이는 있었지만 해마다 8월 17일 근방이면 산신묘에 모여서 맹수에게 사 람이 다치지 않기를 산신에게 빌었다. 석가장이 그리 번화한 고장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곳에는 마침 비교적 규 모가 크기로 인구에 회자되는 평산산신묘(平山山神廟)가 있었다. 큰 돈까지는 기대할 수 없어도 확실한 수입이 보장되는 행사였으므로 시간의 손해를 감안하 더라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동남방향으로의 우회였다. 비교적 힘겨운 여정이었지만, 반원들은 별 불만없이 장가량의 지시에 따랐다. 특히, 말썽많던 소년반원들의 협조는 이제껏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 다. 저마다 활기가 넘치고 기운이 펄펄 나는 듯했다. 장가량은 너무 나이가 어린 두어명에게만 대회의 참가를 불허했을 뿐, 이십세 이하 소년반원이라면 특별한 제약을 가하지않고 신검대회의 참가여부를 본인의 재량에 맡겨주었다. 신검대회가 소년들의 무공훈련에 성취동기를 부여해주어 모두가 자발적으로 열심히 수련에 임하는 부수적인 효과가 있었기에 오히려 장 려하는 편에 속했다.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대회의 참가를 선언한 반원은 금서 림을 비롯해서 모두 여섯명이었다. 쉽게 말해서 현재 열아홉살이하의 남자반원 중에 모진위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양주 신검대회의 참가를 공표한 것이었다. 모진위는 아직도 신검대회의 출전을 표명하지 않았다. 아무리 장가량이라해도 모진위에게 까지 대회참가를 장려할 마음은 없었다. 아니, 장려고 반대고 모진 위는 아예 참가대상으로 염두에둔 일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반원 들도 마찬가지였다. 모진위로 말하자면, 신검대회는 커녕 묘우무대에도 서지 못 하는 유일한 구성원이었으니까. 일행이 석가장에 도착한 것은 산신제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산신묘의 묘회연희 를 겨우 사흘 앞두고 였다. 장가량과 향이등이 서두른 덕에 신검반은 산신묘우무대에 설 수 있게 되었다. 하북일대는 원래 만리장성을 넘나드는 이민족의 약탈이 심한 지역이라 그 일대 의 호족(豪族)이나 대지주들은 대체로 무예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유명세를 타 고있는 신검무예가 딱히 거절을 당할 염려는 없었다. 신검반의 출연은 보정의 북쪽에 위치한 낭아산(狼牙山)에서 왔다는 각저사(角저社-씨름)패거리의 다음 순서로 정해졌다. 드디어 신검반이 무대위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먼저 세명이 등장하였고, 나머 지는 후대에 모여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진위를 제외한 모두가 묘우위에있거나 후대에 있는 것이었다. 하다못해 이제 다섯살인 신검반의 막내 조차도 앙증스럽게 검을 휘둘러대는 공연자의 일인이었다. 그러나 모진위만은 객석에 남아있어야 했다. 뭐하나 제대로 구실을 못하는 모진위였다. 모진위의 어색하고 보기흉한 자세는 무공을 모르는 아이들의 막대기휘두르기보다도 볼품 이 없었다. 후대에서 시중이라도 들게 하면 좋겠으나 그나마도 동작이 꿈뜨고 말귀가 어두운 모진위는 그저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 전혀 도움되지 않는 터였 으니 그저 후대에조차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돕는 일이었다. 여섯명의 반원이 육자연방진(六子連芳陣)을 펼치는 현란한 합검술(合劒術)이 끝나자 이번에는 신검반 무예시범의 백미(白眉)이자, 마지막 순서인 구연기와 장여진이 나섰다. 모진위가 가장 좋아하는 순서였다. 검광이 난무하자, 장내의 열기는 후끈 달아올랐고, 경악의 탄성이 여기 저기서 터져나왔다. 장여진과 구연기의 검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인 것만 같았다. 쌍방이 모두 검경(劒莖)을 손으로 쥐는 일조차 거의 없었다. 간혹 크게 내리치거나 옆으로 베어나갈 때, 검경을 움켜잡았을 뿐, 대체로 검은 제 마음대로 시전자의 손목을 타고 넘으며, 때로는 손바닥으로 때로는 손등으로 이동하며 시전자의 지시를 알 아듣기라도 하는 양 서로가 격돌하였다.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는 신검 옥진강의 어검술이 바로 그러하였다고 했다. 세인들이 알기로 신검 옥진강 이후로 이와같이 능수능란하게 어검술을 구사하 는 이는 없었다. 물론, 신검반에도 그런 고수가 있을 리 없었다. 다만, 비연류로 단련된 유연한 동작을 이용하여 실전용이 아닌, 구경거리로써의 어검술을 어느 정도 구사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구연기나 장가량정도나 가능한 수 준이지 이제 열다섯살의 장여진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경지였다. 처음 이 공연을 보았을 때는 모진위도 장가량마저 불가능한 묘기를 장여진이 펼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입을 쩍 벌리고 망연자실했었다. 그런데 알고보 니 그것은 일종의 속임수였다. 장여진과 구연기의 손목에는 이중으로 된 팔찌가 끼어져 있었다. 그리고 자세 히 살펴보면 그 팔찌에는 가느다란 실이 달려있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은 도포 소매에 숨겨져있고, 소매와 똑같은 색깔이 칠해져 있어서 왠만한 고수가 아니고 서는 발견할 수 없겠지만. 팔찌에서 시작된 그 끈은 검격(劒格)까지 연결되어있 었다. 끈으로 손목까지 이어진 검의 손잡이는 특수하게 제작된 이중고리로 자 유롭게 회전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그렇게 해서 장여진마저도 능란하게 어검 술을 흉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묘회나 길거리에서의 공연은 무림세가에서의 무공시범과는 달리 신기한 묘기 동작이 호응을 받게 마련이었다. 신검 옥진강의 무예동작 자체가 신기 그 자체 인지라, 세인들에게조차 입에서 입으로 그 무공에 대한 그림같은 정밀한 묘사가 구전되어있는 터라 신검무술을 공연하는 무리들은 여간해서는 대중의 빈축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생겨난 고육지책이 검과 손목을 연결하는 눈속 임이었다. 그러나 그런 장비를 갖춘다고해서 모두 다 구사할 수 있는 연기는 아니었다. 신검반의 경우는 다행스럽게도 비연류가 있었고, 나름대로의 피나는 수련이 뒷받침을 했기에 가능한 묘기의 시범이었다. 모진위도 어검술을 수련하는 과정은 알고있었다. 추혼십이절의 동작을 모두 숙지하게되면 수련생들은 천정에서 끈을 내려 검경을 묵는다. 그렇게 검을 공 중에 매달아 놓은 채, 한편으로는 내력으로 검을 제어하고, 한편으로는 끈의 장 력에 의지하며 마치 꼭두각시 인형으로 동작을 만들어내 듯이 어검술이 가미된 추혼십이절의 형태를 익히게 되는 것이었다. 객석의 환성이 절정에 달하고, 모진위의 심장고동도 절정에 달했다. 환호와 탄성. 그것은 뿌리없이 세상을 떠돌며 갖은 역정을 이겨내는 유랑패들 의 유일한 보람이었다. 화려한 무대와 객석의 눈길. 그것은 배우나 기예가들에 게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권태와 지루함으로 바꾸어 버렸고, 그들을 세상밖으로 떠돌게 만들었다. 연예인에게 있어서 연기는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모진위의 마음이 무대위로 날아갔다. 그리고 모진위 자신이 구연기가 되어 정 신없이 추혼십이절을 시전하고 있었다. 두개의 검이 허공에서 교차하였다. 검의 충돌로 인한 불꽃이 주변을 감쌌다. 검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아차하면 둘중 하나는 예리한 검날의 제물이 되 어버릴 것같은 흉맹한 기세였다. 돌연 장여진이 손목으로 검을 튕겨주자, 손등 에서 나풀 나풀 춤을 추어대던 검이 빙그르 돌아서 장여진의 손아귀로 빨려 들 어갔다. 그리고 삽시간에 구연기의 앙가슴을 파고들었다. 구연기의 신형이 휘청 하였다. 여전히 허공에 남아있던 구연기의 검은 하릴없이 허공만 가른 것이었 다. 신검반 유사이래, 최악의 사고는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순간, 모진위의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하며 검을 내돌리는 자세를 재빨리 머리 속으로 그려내었다. 동시에 취해진 구연기의 동작도 바로 그러했다. 장여진의 검은 이미 구연기의 지척에 다가왔다. 허공을 내리가르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검을 다시 들어올려 막아내기에는 그만한 여유가 없어보였다. 긴박하고 위험한 순간이었다. 구연기의 눈빛이 긴장으로 번쩍였다. 검미가 파르르 진저리를 쳤다. 구연기의 전심이 칼끝에 집중된 것이었다. 모진위의 눈길도 칼끝으로 쏠렸다. 구연기속으 로 녹아들었던 모진위의 감정이 재차 구연기의 검미에 몰입되었다. 구연기도 그렇게 검미의 한점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장여진의 검이 세차게 바람을 가르자, 관중석에서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러 나 곧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정막속에 빠져버렸다. 장여진의 검도 정막의 한 부분처럼 허공에 정지하였다. 장여진의 검미에는 구연기의 칼끝이 이어져 있었다. 절대절명의 순간, 구연기 는 검을 들어올려 막아내는 대신, 그대로 자신의 검끝만 틀어 장여진의 검끝을 찔러버린 것이었다. 숨조차 끊고 정지했던 모진위의 의식속에 폭발하듯 터져나오는 환호와 갈채소 리가들려왔다. 그야말로 점과 점의 만남이었다. 모진위는 자신이 구연기라도 되는 양, 기쁨과 환희로 몸을 떨었다. 신검반 최고의 묘기, 천기합(天氣合)이 성 공리에 펼쳐진 것이었다. 천기합. 옥진강의 절예였다. 검끝으로 상대의 검끝을 완벽하게 찌르는 것, 도저 히 불가능할 것만 같은 그 절기를 구연기가 시전해냈다. 또 하나의 조작극이었다. 사실, 장여진의 검에는 멀리서 눈으로 식별하기에는 어려운 작은 홈이 파여있었다. 구연기는 그 홈속으로 검을 들이민 것이었다. 물 론 그렇다고 해도 구연기의 기술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옥진강과 같은 천재가 아닌 다음에는 그 정도만 해도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고난도의 묘기였다. 이제 곡예는 그 종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모진위는 전신경을 검미에 집 중하고 장여진을 가늠하였다. 구연기도 그리하였다. 장여진이 구연기의 기세에 따라 자신의 중심과 기운을 잘 조절하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차아-!" "합!" 구연기의 우렁찬 기합과 장여진의 야무진 음성이 울려퍼지고, 소녀가 노인의 머리위에서 정지하였다. 동시에 모진위도 마음속으로 격한 신음을 토했다. 장여진이 거꾸로 서서 양다리를 지평선과 수평이되게 벌리고, 공중에서 빙글 빙글 돌기 시작했다. 검을 하늘높이 치켜든 구연기가 밑에서 버티고 있었다. 구 연기와 장여진의 검이 이어져서 마치 기다란 봉을 가지고 둥그런 원판을 돌리 는 곡예에서 봉과 원판을 검과 인간으로 바꿔놓은 듯한 형상이었다. 지붕이 떠나갈 듯한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최고조에 달하자, 구연기가 안광을 번득이며 장여진을 바라보았고, 장여진이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마지막 순간이 었다. 이제 구연기가 힘껏 검을 튕겨주고, 그 탄력으로 장여진이 멋지게 공중제 비를 돌며 바닥에 내려서면 그만이었다. 모진위는 마음속으로 장여진의 호흡에 맞추어 검을 밀어올렸다. 그러나 구연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장여진과 호흡 이 달랐다. 사고가 발생하였다. 검으로 반동을 주려던 구연기의 손목이 움찔하였고, 팽팽 하게 직선을 유지하던 검과 검이 스르르 무너지더니 중심을 잃은 장여진이 바 닥으로 낙하했다. 그리고 검도 같이 낙하하며 구연기의 어깨를 뚫고 내려갔다. 구연기의 어깨에서 일시에 피분수가 솟구쳤다. 공연도중에 일어나는 사고중에 는 신검반 유사이래, 최악의 대형사고가 벌어진 것이었다. "사고가 없었더라도 이미 기력이 쇠하기 시작한 노인네였소. 내부 장기가 많이 상했으니 온전하게 회복되기는 틀린 것 같소이다." 석가장에서는 가장 용하다고 소문난 의원 낙우진(駱羽辰)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서너달 요양하면 간단한 활동이야 가능하겠지만, 걸을 수는 없을거외다. 또한, 위장과 간장도 손상되었으니 궁극적으로 온전한 소화작용도 불가능 할것이고... 상태가 만만치는 않은 것같소이다." "그래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요?" "... ..." 장가량이 불안한 어조로 물었지만, 낙우진은 누워있는 구연기를 힐끗 일별하고 는 짐짓 딴청을 부렸다. "얼마나 남은 거 같습디까?" 멀끔히 천장만 바라보던 구연기가 입을 열었다. "의원나리, 말씀해주시오. 일가붙이도 없이 떠도는 강호잡배요. 그래도 볼거 못 볼거 다 보고 지낸 놈이니 주책없이 소란 떨지는 않겠소. 게의치말고 말씀해주 시구려." "보신만 잘하면 그래도 삼사년을 견딜 수 있을겝니다. 너무 애석해마시요." "고맙소. 그럼, 나가들 보시오." 구연기는 무덤덤하게 축객령을 내리고, 그냥 천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특별히 애통하거나 슬픈 표정은 아니었다. 신검반 일행은 열흘후, 다시 양주행의 여정에 들어갔다. 뜻밖의 사고로 일행은 석가장에서 열흘을 지체했다. 구연기가 여행이 불가능한 처지였지만, 더 이상 구연기 하나때문에 일정을 늦출 수는 없었다. 구연기는 석가장에 남겨두기로 했다. 최고의 무추 구연기를 대동하지 못한다는 것은 큰 손실이었다. 그렇다고 전혀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구연기는 미진한 대로 그럭저럭 제구실 을 하는 후계자를 이미 양성해놓았고, 신검반의 골치덩이인 또 한명의 후계자, 모진위를 떼놓고 가는 소득을 안겨주었다. 모진위를 구연기의 시중이라는 명목 으로 석가장에 남기기로 결정됐다. "구노사, 그놈의 염주 좀 걷어치울 수 없소?" 출발준비를 마치고 구연기의 방에 찾아온 장가량이 투덜거렸다. 구연기는 언 제나처럼 손아귀에서 염주(念珠)를 돌리고 있었다. 그 염주는 검을 쥐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구연기의 손에 들려있었다. 장가량의 주장에 의하면 사단은 모두 저 망할 놈의 염주때문이었다. 사흘만에 혼절에서 깨어난 구연기가 '엄지손가락이 그만 삐긋했어.'하며 사고의 원인을 밝 혔는데, 그도 다 염주 탓이라는 장가량의 이야기였다. "아니, 구노사. 이젠 하반신도 여의치않은 터에 그 손가락이라도 온전해야지 아예 밥숟갈 내려놓으실 참이요?" 장가량은 세 손가락이나 마디가 짤려나간 구연기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그나 마 온전한 오른손 엄지마저 제구실을 못하게 된다면 양손이 모두 불구가 되어 젓갈질도 못하게 되는 형편이었다. 구연기가 신검반에 나타난 것은 사십년전의 일이었다. 그때는 장가량의 아버 지가 두령을 맡고 있었다. 어느날 거지 한명이 장가량의 아버지를 찾았다. 거지 도 아주 상거지인데가 왼손 손가락은 엄지, 검지, 중지가 한마디씩 잘려나간 흉 직한 꼴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 거지를 보고 대경실색하였다. 그리고 한참을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그 거지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날부터 그 거지는 신검반의 일원이 되었다.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신검반의 일원이 될 수 있었는 지, 아버지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다만 구연기라는 그의 이름만 알려주 었을 뿐이었다. 구연기가 신검반의 일원이 된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자는 없었다. 구연기 의 무공이 신검반에서도 첫손 꼽힐 만큼 뛰어나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 어린 장가량까지도 절감하게 될 정도였으니 구연기가 동료로서 환영받은 것 은 아주 당연한 결과였다. 구연기는 성품도 좋고 실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장가 량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장가량이 두령이 되고나서야 단 한가지 사소한 불만을 안겨주었을 뿐이었다. 어느날, 구연기는 이제는 자신을 후계자를 대신 무대에 올리겠노라고 장가량의 허락을 청하였다. 이유는 '엄지손가락이 말을 잘 안들어서'였다. 그놈의 염주가 사단이었다. 구연기의 염주는 묵주들이 모두 제대로 달려있어 도 엄지손가락으로 돌리기에는 그리 만만치 않을 정도로 알이 유난히 굵었다. 그런데 그나마도 알이 하나 빠져있었다. 엄지손가락이 불편하게 되는 것은 당 여한 일이었다.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틈만 나면 그놈의 염주알을 돌려대니 손 가락에 무리가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기적이라고 해야할 정도였다. 장가량은 구연기의 엄지손가락을 보호하기위해 별에 별 수단을 다 강구해보았 다. 그러나 구연기에게는 요령부득이었다. 알맞은 염주알을 구해다가 주어도보 고, 귀하고 좋다는 염주를 안겨주기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구연기는 엄 지손가락에 죽어라고 고통을 주는, 그 알이 모자란 염주를 보완하거나 바꿀 생 각은 추호도 없는 것같았다. "나도 모르겠소. 나중에 행여 나보고 숟갈들어달라는 소리는 마시오." 들은 체도 않고 여전히 염주를 굴리고 있는 구연기를 보고 장가량이 버럭 고 함을 질렀다. "내 서둘러는 보겠지만, 항주(항州)에서도 뵐 수 있을 지 모르겠구려. 장두령도 몸조심 하시구랴." 대운하를 타면 두어달거리가 항주였다. 의원 낙우진의 말로는 잘 요양해도 일 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했으니 구연기와 모진위는 양주 신검대회는 물론이고 그 다음 도착지인 항주에서도 신검반 무리와 다시 합류할 수 있을지는 기약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장가량은 구연기를 다시 돌아보았다. 도무지 출신내력을 알 수가 없는 사람이 었다. 제남성의 손가장에서 백안문주와 묘기를 다툴 적만 해도 그랬다. 사십년 을 같이 붙어다녔지만, 손가장에서 구연기가 펼쳤던 추혼십이절은 장가량이 일 찌기 구경도 못해본 대단한 경지였다. 자신의 아버지는 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듯하였지만, 무슨 말못할 사정이 있는지 구연기의 정체에 관해서 일체 입을 다 물고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진위야!" "......" 심한 갈증에 잠에서 깨어난 구연기는 마땅히 옆에 누워 자고 있어야 할 모진 위가 없어졌음을 깨달았다. 때는 벌써 초가을, 깊은 밤 삼경이었다. 밖에서 기척 을 느끼고 불러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 늦은 밤 무엇을 하나 싶어서 구 연기는 방문을 열어보았다. 모진위는 검을 높이 들어올린 채 서있었다. 달빛이 싸하게 내려와 검신에 고 였다. 검은 시리도록 푸르게 검광으로 울었다. 모진위는 한참을 그렇게 꼼짝않 고 서서 검을 바라보고있었다. 구연기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모진위는 검이 좋았다. 특히, 이렇게 달빛이 완연한 밤이면 검은 너무도 가슴 시리게 모진위에게 다가왔다. 하상곤이 말해주었다. 진위의 아버지 관일점홍 모 중강대협의 검이 그러했노라고. 달빛에 번득이는 관일점홍의 검은 빨려들 듯 아름다워서 문득 그 검에 베이고 싶을 정도라고. '그런데 왜 이렇게 나를 힘겹게 하니?' 맨손으로 지르고 때리는 권법도 팔이 무거워 그냥 저냥인 형편에 모진위에게 검은 너무도 힘겨운 것이었다. 추혼십이절은 커녕 그저 들고 서있는 것조차도 모진위에게는 힘든 노동이었다. 다정다감한 소년 모진위에게도 이제는 꿈이 있었다. 우백처럼, 엽설영처럼 그 렇게 우아하게 검술을 펼쳐 양주의 대무대에 서는 꿈. 장여진도 감격해서 자신 을 우러러보는 그런 훌륭한 신검연기자가 되는 꿈. 모진위가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모진위자신 조차도 믿지 않는다. 그래도 누 가 뭐라건 모진위도 이제는 한창 꿈을 먹고 살아야 할 열다섯살짜리 열정적인 소년이었다. 꿈조차 마음편히 꿀 수 없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눈물흘리는, 눈앞에 보이는 뻔한 미래에 한숨을 쉬는, 그러다가 잠을 이루지 못해 이렇게 검을 들고 알 수 없는 절망과 분노를 삭이는 열다섯살의 소년이었다. 모진위는 다시 이를 악물고 검을 들어올렸다. 그 주제에 과분하다고 비웃음을 살지언정, 모진위도 꿈을 가지고 싶었다. 희망을 품고 싶었다. 모진위가 검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간힘을 다해서 검의 속도를 높혀 갔다. 검은 곧 모진위가 제어할 수 없는 가속도로 회전하였다. 그러나 모진위는 검을 놓치지 않았다. 회풍선엽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검의 추진력을 빌어서 모 진위는 거룡십팔수의 회풍선엽을 시전하였고, 회풍선엽이 검을 조종하였다. 검이 회전력을 받아 공중을 떠다닐만한 기세를 얻자 모진위는 자신의 의지대 로 검을 움직여 보았다. 등룡육권의 '탄(彈)'자결을 발출하여 앞으로 찌르고, '흡 (吸)'자결을 이용하여 몸쪽으로 당기고, '유(柔)'자결로 반탄력을 죽여서, '접(接) ' 자결로 검을 받아내고, '화(化)'자결로 방향을 바꿔서 석양동몰로 내딛고 다시 '탄'자결로 검을 휘두르고, 다시 한 번 반복하고나서 이번에는 서산일출로 물러 서며 용각접응의 수법으로 나무를 후려치고... 달빛이 가득 녹아든 마당 한가운데에서 모진위는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모진 위는 자연에 순응하는 용무권의 기법을 빌어서 어느덧, 모진위자신이 검이 되어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용무권 최고의 절초, 비룡삼장의 마지막인 빙어풍장이 모진위의 완력으로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맹해진 검의 움직임을 따라 조 금도 거스름이 없이 표표히 흐르고 있었다. 땡그렁! 채 반시진도 못되서 기력을 탈진한 모진위가 검을 떨어뜨리고 주저앉았다. 구연기는 전율을 느꼈다. 사부 옥진강께서는 소림이거나 무당, 가장 좋기로는 용무권이라 하셨다. 사부께서는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천품을 타고나셨다. 문제 는 그런 연유로 사부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자신 보다 형편없는지 도저히 이해 를 못하시는 것같았다는데 있었다. 비극이 발생하였다. 사부 옥진강을 흠모하여 천하의 영재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고, 사부께서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무도 사부의 무예를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다. 사부의 수련방법은 사부로서는 궁리끝에 고안해낸 쉬운 방법 이었지만, 그래도 문하생들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수련법이었다. 사부의 천품은 시정의 하류무공조차 훌륭한 수련본보기였으나, 문하생들에게는 하류무공은 그 저 하류무공일 뿐이었다. 제자들은 추혼십이절의 정수를 얻지 못했고, 그렇다고 추혼검을 포기하고 다른 무예의 길을 갈 수도 없었다. 일단 추혼검에 길들여지 면 다른 무공은 익힐 수 없기때문이었다. 사부는 천하각파를 방문하며 오랜 세월을 연구한 끝에 그 원인을 깨달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해결책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추혼십이절을 익히기 위해 서는 나름대로의 기초를 형성해야만 했다. 사부는 천고에 드문 기연으로 그런 기초를 다질 수있었다. 사부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런 기초를 익힐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았다. 그러나 실패였다. 세상 모든이가 모두 익힐만한 훌륭한 기초무공은 그들의 빈곤함을 그들보다 더 이해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활인의 가슴을 지닌 성자나 창안할 수 있는 것이지, 범인의 재질을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사부님과 같은 천재는 불가능한 일 이었다. 천재를 위한 절정무공은 창안할 수 있을언정, 세상만민에게 골고루 혜 택이 돌아갈 그런 무공의 창안은 불가능하였던 것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부께서는 말씀하셨다. '좋다. 네가 그렇게 내 무공을 세상에 남기기를 원하니 말리지는 않겠다. 운이 닿는다면 소림이나 무당의 기초를 이어받은 동량을 얻을 수도 있겠지. 혹여 천 운으로 용무권의 수재를 만날 수도 있겠고... 비록 승려에, 도사에, 군인들이라 천에 하나도 어렵겠지만... 그래도 그리만 된다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지.' 구연기는 모진위의 검술에서 왜 자신의 사부 옥진강이 용무권을 권유했는지 그 이유를 발견하였다. 사부가 시범을 보이고 자신들이 따라했을 때, 도저히 흉 내낼 수 없었던 그 어떤 것, 정체모를 그 어떤 것이 모진위의 검법속에는 분명 히 있었다. 그것은 모진위가 이제까지 대부분의 인생을 소비하며 단련했다는 용무권이라는 기본기이리라, 그 뿌리로부터 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언젠가 추혼 십이절의 극의와 만나게 될. "진위야, 검은 그렇게 쥐는 것이 아니다. 또한, 검은 그렇게 마구잡이로 휘둘러 서도 안되느니라. 검에도 길이 있음이다. 네손에 검이 들려있는 한, 아무리 허공 이라도 검이 가는 길은 정해져있느니라..." 그날부터 모진위는 새로운 검법수련에 들어갔다. 이제까지의 구경거리로써의 추혼십이절이 아닌, 진정한 신검 옥진강의 추혼십이절을 구연기로부터 정식으로 사사받게 된 것이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4920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17- 11/09 10:34 468 line 모진위의 진척은 예상대로 형편없었다. 하지만 구연기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 짜피 처음부터 모진위의 재질에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최선을 다해서 수련에 임해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런 면에서 모진위는 오히려 구연기를 만 족시켜주었다. 모진위의 입장에서 보자면, 추혼십이절의 수련이 대단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체질과 신체적인 문제로 도통 진보가 없어서 문제지 하루 십이시진내내 한시도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고 밥먹는 것, 휴식을 취하는 것, 심지어 잠자는 것조차도 추혼십이절의 수련과정을 따라야 한다는 원칙은 그리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것은 이미 모진위가 용무권을 익히던 네살때부터 도학정의 혹독한 질타하에 습관이 되어버린 수련법이었다. "검을 들고 싸움에 임하여서는 마음으로 보아야한다. 견(見)이 아니라 관(觀)을 행함이다. 마음의 검으로 적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검을 상대해야 할 것이야. 적 의 표면적인 움직임에 현혹됨이 없이 진정한 적의 기세와 방향을 파악하는 것, 이것이 추혼십이절에서 가르치는 눈의 자세이다. 검의 경지가 높은 사람일수록 적의 검보다는 어깨를, 어깨보다는 적의 눈을 주시하는 법이다. 그러나 궁극적 으로는 적의 눈보다는 적의 마음을 주시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지. 우 선 눈알을 움직이지 않고 상하좌우를 보는 훈련부터 시작하자. 이제부터 관(觀) 자체가 완벽하게 습관으로 길들여질 때까지 한시도 관의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 다." 모진위는 그날부터 오로지 사물을 '관'하고자 했다. 과연 구연기의 지시에 한마 디도 어긋나지 않고, 생활자체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안목을 달리하였다. 구연기는 그런 면에는 모진위에게 감탄하였다. 수련자체를 생활화한다는 것, 그런 구도자적인 자세는 말처럼 그렇게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수행이 아니었다. 또한, 신기하게도 모진위는 근본이치에대한 이해가 빨랐다. 구연기는 전에도 몇 번이나 깜짝 놀라곤 하였다. 이상하게도 모진위는 초식이 시전되고 감각을 통 해서 느껴져야만 가능한 심오한 검리(劒理)들을 초식구사가 거의 불가능한 가 운데서도 몇 번 힘겹게 흉내내는 것만으로도 제대로 파악하였다. 관의 경지만 해도 그랬다. 모진위정도의 나이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물을 보는 방법이었는 데, 모진위는 그럭저럭 관의 이치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모진위가 검리를 쉽게 파악해낼 수 있는 것에는 그럴듯한 배경이 있었다. 용 무권에 있어서 모진위는 상당히 높은 경지에 이르러있었다. 심오한 철학이 담 긴 용무권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은 모진위가 무학(武學)이라는 측면만으로 비교할 때, 높은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였으므로 추혼십이절의 검 리를 무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여 그 의미를 깨달았다고 한다면 수긍못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물을 보는 눈이 견이아니라 관이 되어야 한다는 문제에서 는 달랐다. 관조는 무학이라기보다는 삶에대한 성찰의 문제였다. 삶의 경험이 일천한 모 진위가 쉽게 사물을 '관'할 수 있게된 까닭은 간단했다. 모진위는 시력이 아주 나빴다. 그리고 신경이 둔해서 반응도 느렸다. 그것이 모진위가 사물을 '관'하게 한 단초였다. 용무관에서 동료들과 비무를 하거나, 가상대련으로 감각훈련을 할 때, 모진위의 눈은 상대방의 재빠른 동작을 쉽게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대강의 윤곽에서 육감을 활용하여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는 습관이 생긴 것이었 다. 그랬던 것이 구연기의 가르침에 의해서 정밀한 안목으로 발전했다. 눈의자세는 그런 행운으로인해 모진위가 쉽게 진전을 이루웠지만, 그외에는 고전의 연속이었다. 검을 잡는 방법을 배울 때였다. 구연기의 설명대로 모진위가 조심스럽게 검을 쥐었다. 새가 알을 품 듯이, 옆이 아니라 위에서, 약지와 무명지는 죄는 기분으 로, 중지는 조이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엄지와 검지는 들뜨는 기분으로, 삐뚤어 지거나 오므라들지 않도록... 구연기가 툭치자 허술하게 들려있던 모진위의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검을 놓쳐서야 되겠느냐? 어떠한 경우든지 검을 놓아서는 안된다." 이번에는 제법 단단하게 쥐었다. 구연기가 다시 툭건드리자 어떻게 친 것인지 강한 진동이 일어나 모진위의 손바닥이 일순간 마비되고 말았다. "그래서야 어디 제대로 휘두를 수 있겠느냐? 그렇게 꽉잡았으니 여유가 없을 수 밖에. 검을 잡아서는 안된다." 잡아서도 놓아서도 안된다? 그럼 어찌하란 말인가? 모진위는 어안이 벙벙해져 서 멀뚱하게 구연기만 바라보았다. "검은 곧 팔의 연장이다. 명심하여라. 팔이 네 신체에 달려있음이지, 네 어깨가 팔을 잡고있음이 아니야. 검도 그와 같아야 한다." 구연기가 다시 손의 자세를 교정해주고, 요령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모진위에 게 검을 휘둘러 보도록 지시하였다. "베는 것이든, 찌르는 것이든 손안의 변함이 없어야한다. 그러나 손의 자세를 고정시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경직은 절대금기이니라. 흐름을 거부하는 것은 죽은 손이고,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은 살아있는 손이다. 이 이치를 깨달아 살아있는 손이 되어야만 한다. 심사숙고하여 잘 터득해두거라." 그날부터 모진위의 피나는 고행이 시작되었다. 모진위의 무딘 감각으로는 절대로 쥘 수 없는, 그러나 한시도 손에서 떠나있어 서는 안된다고 구연기가 엄명을 내린 물건, 그것은 탄구(彈球)라는 둥근 공이었 다. 탄구는 신검의 수련자들이 검을 쥐는 감각을 익히기위해 활용하는 도구였 다. 표면은 무슨 기름이라도 칠했는지, 미꾸라지보다도 더 미끌거렸다. 게다가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미약한 힘이라도 가해지면 공의 중심을 기준으로 압 력을 받은 쪽이 쪼그라들고 반대편이 삐죽 튀어나와 손에서 빠져버리고는 하였 다. 그런 탄구를 검을 쥐듯이 쥐고있으라니 모진위는 그저 떨어뜨리고 줏어들 기만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모진위가 탄구를 그나마 간신히 제어하기 시작한 것은 구연기에게 탄구를 받 아 든지, 거의 석달이 지나서였다. 무위조식이라는 태식호흡덕택이었다. 화로속으로 탄구가 떨어지는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모진위는 대경실색을 해 서 탄구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구연기가 탄구를 건네주며 말했었다. "이놈은 내가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단 하나남은 유물이다. 분실하거나 파손 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하거라." 모진위가 재빨리 두손으로 바가지모양을 만들어 탄구를 받으려했지만, 탄구는 아랑곳 않고 손바닥을 미끄러져 화롯불속으로 사라졌다. 그때까지 모진위는 단 한번도 탄구를 잡는데 성공한 적이 없었다. 탄구가 화로에 떨어져 불에 녹아버 릴 절대절명의 순간. 모진위는 가슴이 타들어갈 정도로 마음이 조급해져서 불 속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화기가 후끈거리며 모진위의 손등을 엄습했지만, 모진 위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화로속을 휘저으니 탄구가 손에 닿았다. '제발!' 모진위는 탄구를 잡을 엄두도 못내고 다만 조급한 마음에 어쩔줄 모르다가 불 길이 공을 태우지 못하도록 무의식적으로 탄구를 감쌌다. 그순간 탄구가 제 스 스로 손안에 감겨왔다. 모진위는 더이상 손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 고 손을 들어올렸다. 탄구가 딸려나왔다. 모진위는 얼이 빠져서 탄구를 바라보 았다. 모진위의 손등은 보기 흉하게 익어버렸지만, 탄구는 다행히도 멀쩡하였다. 모진위는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자신은 탄구를 잡으려하지 않았다. 그러자 탄 구가 손안에 잡혔다. 잡으려할 때는 요리조리 빠져나가던 탄구가 정작 잡겠다 는 의식을 놓아버리자 손안에 들어왔다. 모진위가 서서히 요령을 터득해나가기 시작했다. 억지로 잡으려하지 않고 자 연의 흐름에 순응하였다. 탄구가 모진위의 손에서 놀기 시작했다. 모진위는 선천적으로 기가 미약한 데다가, 태식호흡으로인해 피부에 접한 모든 혈들이 천지를 향해 열려있는 관계로 주변의 기를 느끼는 감각이 남달리 예민 하였다. 모진위는 손바닥의 모든 혈을 열어놓고, 탄구와 탄구의 운동으로 발생 하는 기운을 이용하여 손바닥으로 통하는 기의 출입을 조절했다. 그리고 등룡 육권의 '접'자결을 구사해서 탄구를 손아귀에 넣었다. 모진위가 의기양양해서 구연기에게 달려갔지만, 구연기는 그래도 마땅치않은 모양이었다. 거의 석달이나 걸려서검을 잡을 수 있게 된 셈이었다. 검을 잡게 되고나서는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검을 네 팔의 일부분으로 느껴야한다. 네가 마음으로 사지를 움직이듯이 그렇 게 마음으로 네검을 움직여라. 다만, 검은 마음이 되어 움직이되, 마음은 검이 되어서는 안되느니라. 검이 바쁘게 움직일 때도 네 마음은 고요하게 정지하여 검에 끌려다니지 말아야하며, 검이 정지하였을 때, 네 마음마저 정지하여 변화 의 흐름을 끊어서는 아니된다. 이성을 바로하고 감정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니라." 구연기의 설명에 따르면 검의 어느 한부분을 손으로 가볍게 찌르면 그것이 자 신의 육신인 것처럼 그 부분의 감각을 선명하게 느끼는 정도가 신검합일(身劒 合一)의 초보단계라는 것이었다. 모진위에게 있어서 검자체를 신체의 일부분처 럼 감각적으로 단련하는 과정은 참으로 어려운 난관이었다. 모진위처럼 오감이 한꺼번에 둔한 경우는 그 예를 찾아보기가 드물었다. 자신의 팔이나 다리조차 때로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조정이 마땅치않은 판에 검을 자신의 신체와 도 같이 단련한다는 것은 모진위에게는 무리에 가까운 임무였다. 이것은 모진 위가 얼마나 빨리 이 과정을 익히느냐가 아니라 아예 이 과정을 끝까지 맞칠 수나 있겠느냐의 문제였다. 모진위에게 문제는 쌓여만 갔다. "검의 강약과 빠르고 느림에 집착하지 말아라. 추혼십이절의 운용은 강함과 빠 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무리해서 강하고 빠르게 휘두르려 한다면 자세가 무너 지고 호흡만 거칠어질 뿐이다. 베어버리려는 목표물을 베어버리면 그만이지 강 하게 베고, 빠르게 베어버린다고 달라질 것이 무엇하나 있겠느냐? 검의 길을 찾아라. 검이 움직이는 길의 줄기를 찾아나가면 적은 힘으로도 강한 위력을 발 휘할 것이며, 멀리 돌아가는 빠름보다 가까히 질러가는 차분함으로 보다 앞서 가는 효과를 발휘하게 될 것이니라." 신체적인 결함으로 애초에 옳바른 자세를 기대할 수 없는 모진위로서 완벽한 자세를 유지하며 검의 길을 찾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반년이 다되갔지만 모진위는 아직도 본격적인 추혼십이절의 수련에 들어가지 못하고 준비단계에 머물러있었다. 그즈음해서 병세가 위중한 몸으로 무리라고 할 정도로 의욕을 가지고 모진위의 수련에 매달려있던 구연기가 급기야는 쓰러 지고 말았다. "어쩌자고 그러시는 게요?" 모진위의 전갈을 받고 달려온 의원 낙우진이 구연기를 진맥해보고는 호통을 쳤다. "이 상태로 나가다가는 금년을 넘기기도 힘들겠소. 내 말하지 않았소? 비록 상 세가 위중하긴 하지만 잘 보전해서 위기만 넘기면 십년정도는 희망을 가져볼수 도 있다고..." 낙우진은 구연기가 사태를 경시할 정도로 분별없는 사람이라고는 보지않았다. 그런데 사태의 진전은 그것이 아니었다. 가장 조심해야할 시기에 구연기는 무 리해가며 기력을 소진하고 있었다. 낙우진은 미리 약조한대로 상세를 살피기위 해 사나흘에 한번가량 구연기를 방문하였는데, 서너번째 방문무렵 낙우진은 기 겁을 하고말았다. 구연기는 모진위에게 무예시범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 만히 누워서 요양만 해도 모자랄 사람이 신형을 공중으로 날리며 내력을 고갈 시키고 있었다. 몇 번을 말려봤지만 번번히 허사였다.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는지 그 내력이나 들어봅시다." 처음 다섯달 가량은 내력을 탕진하면서도 구연기는 안광이 형형하고 활력과 희망에 가득차있었다. 오히려 병세가 호전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지경이었다. 그러던 것이 구연기의 기력이 급격히 하향세를 타고 만 것이었다. 대략 한달전 부터였다. 점차로 의욕을 잃기 시작하더니 구연기의 얼굴에는 절망의 기색까지 드리워졌다. "낙의원께서는 이 늙은이가 왜 그토록 진위의 검법수련에 집착했는지 궁금하 신 모양이구려." "그렇소. 구노사의 행동은 죽지못해 안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소. 어찌된 영 문인지 알아야 이사람도 당신을 고쳐보겠다고 밑빠진 독에 물 붓는 헛수고를 포기할 것 아니겠소?" 구연기는 침중한 안색으로 잠시 망설이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혹시 신검 옥진강대협이라고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무리 강호밖의 문외한이라지만 어찌 그 유명한 신검을 모르겠소이까? 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요." "제가 그 옥사부님의 직전제자였지요." "호오! 당년의 신검께서 일곱명의 제자들에게 직접 무공을 전수하셨다던데, 구 노사가 원래 그 한분이셨군요."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세상에 잘 알려져있다시피 우리 사형제들은 재질이 모 자라 사부의 진전을 백분지일도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지요." "그게 어디 구노사 사형제분들의 잘못이겠소. 그분의 기질이 너무도 뛰어나 범 인이 따르지 못할 경지에 다달았던 탓이지요." "그 당시에는 이 늙은이도 제법 갈등이 많았답니다. 나이는 들어가는데 무공의 진보는 시원치않고, 사부님은 언제 유명을 달리하실지 모를 정도로 기력이 쇠하 셨고... 처음에 입산하였을 때는 참 야망이 컸었는데, 허무하기 그지 없었지요. 그건 다른 사형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불만들이 대단하였습니다. 사부님만 돌아가시면 우리들의 변변치않은 실력으로는 당장 삼류문파로 전락해버릴 형편 이었으니까요. 결국 이런 근심이 저희제자들로 하여금 사부님 몰래 사후대책을 논의하게 만들었지요. 의견충돌이 생겼습니다. 한편에서는 어짜피 사부님의 진 전을 모두 물려받기는 틀린 노릇이니, 실전적인 효용만이라도 속성으로 전수받 아서 문파의 명맥이나마 유지하자는 의견이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부의 뜻을 거슬릴 수는 없으니 사부님의 사후에 다소 굴욕을 겪는 한이 있더라도 무학 본 연의 맥이 끊기지않도록 그 원리와 이치를 가슴속에 새기어 후일을 도모하기위 해서 기재가 뛰어난 후계자를 물색해보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사실, 두파로 갈렸다고 말할 것도 없었다. 구연기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제자는 실제 자신들의 수준에서 사용가능한 무공의 습득에만 몰두하였다. 실질적인 명 리에 눈이 어두워져서 구도적인 자세를 내팽개치고 자신의 실전능력을 조금이 라도 높혀보자는 욕심이었다. "어쨌든 추혼십이절이 이대로 실전되는 일은 없어야겠기에 제가 그임무를 떠 맡게 되었지요." 구연기는 실전에 사용하는 무공으로서의 추혼검을 포기하고 오로지 학문으로 서의 추혼검을 익혀나갔다. 옥진강도 전심전력으로 구연기를 단련시켰다. 덕분 에 그저 머리속의 지식으로나마 추혼십이절의 정수를 모두 물려받을 수 있었 다. 물론 나머지 사형제들은 실제 무공으로써의 추혼십이절을 일부분이나마 능 력이 닿는대로 물려받았다. "막중한 과제가 맡겨진 셈이지요. 언젠가 제대로 된 그릇을 찾아서 추혼십이절 을 물려주는 것..." "아니, 구노사. 설마, 저 병약하기만 이를데 없는 진위녀석이 그런 큰 그릇이란 얘기는 아니겠지요? 내가 보기엔 절대 아니요. 저녀석은 선천적으로 내공을 쌓 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외공조차도 지금 저 상태에서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호전될 리 만무요." "저도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구연기는 크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사십년 세월을 헤매었지만 신통한 녀석을 못 만났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초 조해졌지요. 다 제가 불민한 탓이지요. 결국은 이렇게 어리석은 부주의로 사고 를 당해서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는 줄도 모르고..."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하필이면 저 불구보다 못한..." 낙우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문밖에 귀를 기울였다. 모진위에게는 너무 심한 소리라 혹시 듣고 있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었던 것이었다. 다행히도 근처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기척을 못느낄 정도라면 귀가 어두운 모진위가 들을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모진위는 듣고 있었다. 정상적이라면 모진위가 앉아있 는 거리에서 낙우진과 구연기의 대화를 듣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지금 모진위는 무위조식을 행공중이었다. 기를 쌓을 수는 없는 체질이었으나 그래도 운기를 돌리고 있으니 평소보다 오감이 예감해진 터였다. "...양주에 칠주반은 구노사의 사형제들이 창건한 단체라 들었소. 대부분 운명 을 달리하셨다고는 하지만, 아직 생존해 계신 분도 있다는구려. 특히, 유일한 여 제자이셨던 두요접(杜妖蝶)이라는 여협은 지금도 왕성하게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는 소문이던데... 칠주반이 신검을 가르치는 유일한 문파나 진배없으니 그곳 에는 그래도 가르쳐볼 만한 영재들이 있지않겠소? 그곳의 재목이라면 하다못해 말석이라도 진위녀석보다는 나을게요? 그래, 칠주반은 둘러 보셨습니까?" 그말을 듣는 순간, 구연기의 안색이 침통하게 변했다. 낙우진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다. 평소 침착하기만 하던 구연기가 여태까지 이렇게 복잡한 표정 을 적라나하게 드러낸 적은 기억에 없었다. "구노사?" 낙우진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어오자, 구연기는 퍼득 표정을 갈무리하며 화제 를 바꾸었다. "이제 길어야 이삼년이면 생을 마무리해야할 몸, 새로운 제자를 찾아볼 형편도 안되거니와 진위에게도 나름대로의 기대는 있었지요. 천하의 어떤 영재라도 이 삼년내라면 추혼십이절의 연성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사부님의 무공이 이 놈에서 실전된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는 일, 그저 머리속에 지식이라도 전해주어 천운에 맡겨보려는 일념으로... 진위녀석을 선택하게 된데는 두가지 이 유가 있었지요. 신체는 형편없다하나 그 나이또래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없는 강인한 정신력, 그리고 천부적인 무학을 읽는 눈과 감각..."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기력을 잃은겝니까? 내가 아는 구노사는 육체 적인 고통때문에 필생의 숙원을 포기할 분이 아니신데..." "낙의원님! 제 여력이 얼마나 남았을 것같습니까?" "글쎄요... 원래는 이삼년, 운이 닿으면 십년도 바라볼 수 있었는데, 구노사가 몸을 돌보지 않고 진위녀석에게 매달리는 바람에 이젠 일년도 장담할 수 없을 겝니다." "그렇겠지요. 이 늙은이도 애초에 그리될 줄 알면서도 감행한 일이지요. 아무 리 마음을 다잡는다해도 정신이 육신의 한계마저 극복시켜주는 것은 아니더군 요. 특히 진위녀석에게는... 어떻든 초식 비슷하게라도 동작이 나와야만 다음단 계가 가능한 법인데, 진위의 기형적인 육신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 니다. 다 틀렸습니다. 다 틀렸습니다." 구연기는 신음같은 한탄을 늘어놓으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모진위는 머리에 바위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사부님은, 사부님은 이 형편없는 병신에게 그런 큰 기대를 품으셨던 것이 구나. 그저 단둘이 남았으니까 심심풀이로 무예수련을 시킨 것이 아니라 나라 는 놈에게도 희망을 가지셨구나. 대체 나라는 녀석이 사부님의 생명을 갉아먹 어도 될 정도의 그런 가치가 있는 놈일까? 아니지. 형편없는 놈이지. 사부님은 나에게 필생의 여망을 걸으셨는데, 목숨을 걸으셨는데, 나는 사부님께 생을 포 기하는 실망밖에 돌려드리지 못했구나. 그것도 모르고 상태가 호전되는구나, 잘 하면 신검대회도 구경하겠구나, 좋아하기만 하다니... 사부님은 나에 대한 기대 가 사라지자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셔서 그렇게 갑자기 기력을 잃고 쓰려지셨구 나. 이 죽일 놈! 이 형편없는 놈!' 낙우진에게 다시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구연기가 눈에 띄게 의욕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모진위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석가장에 요양하고나서도 거의 한 달이 지난 후였다. 그렇다면 그때까지는 모진위의 자질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제 살 날이 얼마남지 않은 처지에 어떻게 그렇게 일생을 간 직하던 숙원을 막판에 외면하고 이 한적한 석가장에 머물을 생각을 할 수 있었 을까? "말씀대로라도 부상을 당했을 당시는 모진위를 미처 고려하지 못했을 터인데 어째서 양주의 칠주반으로 가지 않았던게요? 그곳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볼 수 도 있었을 터인데... 더구나 그곳엔 당신의 사매도 있지않소? 사매도 가만히 구 경만 하지는 않을텐데..." "칠주반에서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기때문이지요." "그곳에 이미 가보셨단 말씀이요?" "아닙니다. 가본 적은 없지요." 낙우진은 갈수록 어리둥절해졌다. 장가량의 이야기로는 이번 신검대회가 양주 의 초행길은 아니었다. 초행길을 커녕 소주, 항주, 양주의 일대가 신검반의 주활 동무대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같았다. 그렇다면 일부러 피하기 전에는 칠주반과 왕래가 없을 턱이 없었다. "아니, 알아보지도 않고 기대를 버리시다니요? 그럼, 일부러 칠주반을 피한다 는 말밖에 더 되겠소. 도대체 이유가 뭐요? 가장 가능성이 있는 곳을 고려하지 않다니, 파문이라도 당했단 말이요?" "...예. 부끄럽게도 그리 되었습니다." "옛!" "... ..." "... ..." "저어... 구노사!" "괜찮습니다. 의도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란거는 이 늙은이도 잘 알고있습니 다. 괘념치 마십시요." 낙우진의 의문이 순식간에 풀렸다. 풀려진 의문중에는 구연기의 부상에 대한 것도 있었다. 낙우진은 상처를 살펴보고 구연기의 부상이 너무 심하다는데 의 아해했다. 검수의 손에서 이탈되어 전혀 내력이 실려있지 않은 검에 그런 위독 한 내상을 입었다는 것은 무방비였다는 말이 되었다. 구연기정도의 고수가 그 렇게까지 아무 방비없이 검을 맞았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았다. 칠주반의 요 인들도 반드시 신검대회에 참가할테니 파문당한 구연기로서 그들과 마주치지 않기위해서 일부러 사고를 당했을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구연기는 자기의 의지 로 검을 맞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해결된 의문이 있는 반면, 새로 생긴 의문도 있었다. 두가지였다. 그 하나는 그렇다하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중상을 입었 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무슨 사연으로 파문을 당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물론, 왜 파문당했는지 물어보는 것은 실례였다. 낙우진은 자신의 쓸데없는 질문으로인해 발생한 어색한 분위기를 피하기위해 서 구연기정도의 고수가 일주러 저지른 사고에서 어떻게 그런 중상을 입었게 되었는지 그의 의중을 한번 떠보기로 했다. "양주로 가는 신검반과 헤어지는 구실로 일부러 부상를 당한게구려. 허나 목숨 이 경각에 이를 정도로 그렇게 어리숙한 사고를 저지르다니... 쯧. 쯧." 구연기도 낙우진의 날카로운 안목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는지, 씁쓸하게 미소지 으며 입을 열었다. "허허. 설마 목숨까지야 걸었겠습니가마는, 이 놈의 엄지손가락이 그만..." 구연기는 그말을 하는 와중에도 변함없이 염주를 놀리고 있었다. 낙우진이 어 이없는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했다. 자신이 미리 경고를 했다시피 조석지간에 구연기는 하반신 마비가 온다. 그리고 왼손은 이미 세손가락이나마디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놈의 염주때문에 다 망가져가는 엄지손가락을 가지고 여전히 염주 를 튕기고 있었으니 낙우진은 기가 막혔다. "본래 왼손으로 검을 잡으셨나보오." "예?... 아! 이거 말씀이시군요." 구연기가 마디가 잘려나간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파문을 당하면서 가 해진 형벌이었다. 문파의 검법을 회수한다는 의미의 형벌이었다. 낙우진도 그런 의미로 물어온 것이리라. "문파에서도 밥은 먹고 살라고 오른손만은 배려해준 모양인데..." 낙우진의 눈길은 염주에게 혹사당하고 있는, 양손 통틀어 하나밖에 안남은 구 연기의 오른손 엄지 손가락에 쏠려있었다. "하지만 이놈도 그때 이미 잘려나간거나 마찬가지랍니다. 여기서 빠져나간 염 주알과 함께..." 구연기가 칠주반때문에 발길을 멈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까짓 잘려 나간 손가락이나 파문의 조소따위에 부상까지 입어가며 행보를 멈춘 것은 아니 었다. 그런 비웃음때문에 저지될 정도로 구연기의 갈망이 박약한 것은 아니었 다. 구연기의 절박한 몸부림을 가로막은 것은 그의 사매, 아니 예전에 사매였던 두요접의 얼굴이었다. 천하를 떠돌며 추혼십이절을 전수해줄 비책을 연구하던 사부 옥진강이 문파로 돌아왔을 때가 구연기의 나이 열다섯, 문파에 입문한지칠년이 다 되가던 가을 이었다. 사부는 수많은 제자중에 여섯명의 소년들을 선발하여 산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삼년후, 마지막으로 사매 두요접이 합류하였고... 두요접은 아름다웠다. 속세와의 연을 멀리하고 냄새나는 사내들이 부대끼기를 어언 삼년, 그들은 승려나 도인이 되려고 산중에 억매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 로 그런 상황은 젊은이들의 열정에 화력좋은 기름역할을 할 뿐이었다. 육대일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출발당시는 구연기가 비교적 유리한 위치를 점 유하고 할 수 있었다. 강호의 사형제간에서 우열을 가리려한다면 첫번째로 꼽 히는 잣대는 당연히 무공실력이었다. 그런 면에서 구연기는 뽑힐 만하였다. 대 사형보다는 약간 처지지 않겠느냐는 것이 형제들간의 평가였지만, 거기에는 대 사형이라는 후광도 약간은 작용하였을테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대사형이 구연기보다 다섯살이나 연상이라는데 있었다. 게다가 외모면에서도 구연기가 빠질 것은 없었고, 그 기품으로 말하자면 단연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하지 만 시일이 지남에 따라 구연기는 자꾸만 뒷전으로 밀려났다. 적어도 구연기가 생각하기에는 그랬었다. 구연기가 가장 불리한 위치로 몰린 첫째이유는 자신의 위치를 과신한 자만심 을 들 수 있었다. 콧대높고 새침하기만하던 두요접에게 구연기도 자존심으로 대항하였다. 다른 사형제들은 달랐다. 두요접을 마치 여왕 모시듯 공경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요접과 사형제간의 관계는 돈독해져갔다. 별로 관심을 보이 는 일이 없어서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 소원한 상태인 구연기는 물론 해당사항 이 없었다. 둘째로는 정인군자의 길을 추구하는 구연기의 고지식함때문이었다. 세월이 흘 러서 그럭저럭 둘만의 어색함이사라진 후에도 구연기의 공명정대한 생활태도 는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애정쟁탈전에서 그저 무관심과 소극적인 자세로 빛추어지기 일쑤였다. 세번째로는 아직 정인군자로서는 미완성인 부족함에서오는 편협함과 미숙한 오해였다. 구연기에게는 자기를 제외한 모든 형제들에게 상냥하게 애교를 떠는 두요접이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서글픈 마음에 바람끼 가득한 경솔한 여자라 고 무시해버리는 과오를 저질렀다. 마지막으로 용기였다. 용기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을 수 있는 법, 대사형이 그 녀와의 약혼을 발표했을 때, 구연기는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비로서 깨달았다. 다른 형제들은 두호접에게 수없이 사랑을 고백했지만 구연기는 단 한번도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전해주지 못했다. 두요접이 대사형곁으로 떠나버리자, 구연기는 세상만사가 모두 부질없어졌다. 불타던 청년의 야망도 식어버렸다. 그래서 모두들 세상에 나가서 이름를 얻는 자 실질적인 추혼십이절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조차 별고민없이 명리를 버리고 학문으로써의 추혼십이절을 택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사부님이 돌아가시자 사형제들은 속세로 내려가 새로이 칠주검파 (七珠劒派)를 열었고, 구연기는 그대로 산에 남았다. 하지만 대사형이 문파를 재건하고 장문직에 오르는 날만은 구연기도 형제들과 함께 해야했다. 구연기가 마지못해 산을 내려온 날은 바로 문파의 재창건일이자, 대사형이 장 문인(掌門人)으로 취임하는 날이였고, 그와 동시에 두요접과 대사형이 혼례를 치르는 날이기도 했다. 그날밤,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누군가 구연기의 방문을 두드렸다. "오사형(五師兄)!"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두요접의 음성이었다. "소사매가 어인 일이야?" "긴히 할말이 있어요. 잠시 뵈어도 되겠어요?" "그래... ...잠깐 기다려." 혼례를 앞둔 신부를 방으로 들이기가 난처한 지라, 구연기가 문밖으로 나서려 는데, 두요접이 이미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게 무슨 짓이야?" 두요접의 아름다운 얼굴을 대하자 구연기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어떻 게든 잊으려 했던 얼굴이었다. 겨우 추스렸던 지옥같은 고통이 다시 고개를 쳐 들었다. 구연기는 자신의 그런 고통도 몰라주고 이렇게 일부러 찾아와서 자신 의 애간장을 녹이는 두요접이 너무도 야속했다. 구연기의 말투는 한편으로는 떨리는 속마음을 숨기려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야속한 마음에 신경질적으로 거 칠어져 있었다. "사형은 왜 저만 보면 화를 내죠? 제가 도대체 오사형한테 무슨 잘못을 했기 에 저를 그렇게 미워하시는 거예요? 사형이 오늘에서야 도착하셨다길래, 혼례 전에 인사라도 드려야 하겠기에 왔는데... 그래요. 반가울 리가 없겠죠.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이게 얼마만인데..." 두요접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굴러내렸다. 구연기는 당황했다. 소사매는 여 간해서는 울지않는 여자였다. 적어도 구연기앞에서만은. 그런데 그 냉냉한 여자 가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아니, 사매. 그게 아니라. 이렇게 으슥한 밤에 단둘이 있으면 남들이 오해하잖 아. 그래서 내가 나가려는데, 사매가 불쑥 들어오니 그만..." "옳아. 그게 걱정이시군요. 그러나 저를 그런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 은 이곳엔 아무도 없어요. 더구나 사형과 같이 이렇게 공명정대한 정인군자와 함께라면... 사형만 안그래요. 제가 아주 저속한 년으로 보이시죠?" "아냐. 그게 아니라..." "호호호. 사형은 언제나 그랬어요. 아주 노골적인 눈으로 저를 비웃었지요. 마 치 외갓남자와 사통한 유부녀라도 만난 것처럼..." "무... 무슨 소리야?" 하지만 구연기로서도 찔리는 바가 있었다. 사매는 아무 남자에게나 친절하게 굴었다. 사형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조차 심할 정도로 친밀하게 굴었다. 구 연기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구연기는 그때마다 가슴에 멍이 들었고, 깊은 상 처를 입었다. 왠지 분하고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 혼자만 티끌하나 없이 고결하군요. 세상에 둘도 없는 정인군자구요. 과 연 그런가요? 세상사람들도 그리 생각하는지 한 번 볼까요? 당신이 창년처럼 불결해하는 이 두요접을 어찌 생각하는지도 한 번 보구요." 두요접의 눈에서 불이 켜졌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시퍼란 안광이었다. 두요접 은 발작적으로 자신의 상의를 찢어 발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친듯이 외쳤다. "아악! 사람살려요!" 세인들의 평가는 사실과는 정반대로 스스로 옷을 찢은 두요접은 불행한 요조 숙녀였고, 평소 고결한 정인군자연하던 구연기가 파렴치한 호색한으로 낙착되었 다. 구연기의 파문이었다. 구연기는 손가락 세마디를 남겨놓은 채, 초죽음이 되 어서 칠주검파를 떠나야만 했다. 들리는 풍문에는 두요접과 대사형의 혼인은 이루워지지 않았다고 했다. 대사형이 떠났고, 오히려 두요접이 남아서 양주 칠 검반을 지키고 있다고 들었다. 구연기는 아직도 그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었다. 물론 두요접을 마주할 용기도 없었다. 모진위가 방문을 나서는 낙우진에게 다가섰다. "저어, 의원님!" "그래, 너무 걱정말거라. 당장 돌아가시지는 않을 모양이니까." "은두냥과 동전 팔십문입니다." 모진위의 전재산이었다. "그런데?" 구연기의 치료비는 이미 지불된 상태였고, 그것은 모진위도 알고있었다. "침을 좀..." "침?" 모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아프냐?" 모진위가 고개를 젓고는 누런 양피지를 한장 꺼내서 내밀었다. "이게 무어냐? 어디보자... 백회혈에서..." 낙우진이 놀란 눈으로 모진위에게 다시 물었다. "백회혈(百會穴)에다가 명문혈(命門穴), 기해혈(氣海穴)까지... 이게 무슨 침법이 냐? 특별한 경우외엔 침을 피해야할 치명적인 요혈들이 총망라돼있는데, 네게 이 순서대로 침을 놓아달란 말이냐? 어서 얘기 좀 보거라." 낙우진이 다구쳤지만 모진위는 묵묵부답이었다. 다만, 모진위답지않게 전혀 예 외적으로 몇번이고 계속해서 간절한 어조로 투침을 종용할 따름이었다. 종내에 는 뜻밖에도 모진위의 입에서 나오는 문장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여 러가지 단어가 낙우진의 귀를 울렸다. "의원님께서 허락치 않으시면 어쩔 수 없습니다. 저혼자서 바늘을 사용해서라 도 시전할 것입니다. 그러니 사정이 되시면 제발 부탁드립니다." 원화촉발술(源火促發術). 단전을 폭발시켜서 일시적으로 본원진기를 태우는 방법이었다. 모진위경우라 면 평소보다 서너배의 원기를 증진시킬 수 있었다. 황경은 모진위에게 원화촉 발의 씨앗을 세개로 나누어 심어주면서 말했었다. 변고가 발생하여 생명이 위 급해졌을 시에 사용하라고, 첫 촉발로 이년간의 약효가 유지되지만 수명은 삼십 세 이하로 단축될 것이고, 약효가 다한 후, 이전 보다 비교도 안되게 원기가 쇠 락할 것이라고. 황경도, 하상곤도, 도학정도 모진위의 모든 것을 자신의 생명유지에 맞추도록 배려하였다. 모진위도 심신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건강을 다스리는데 전심전력 을 기우려왔었다. 하지만 모진위는 그렇게 생활하면서도 자신처럼 하찮은 사람 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이율배반의 논리에 빠져있었다. 세상 그누구와 비교 해봐도 자신은 쓸데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구연기가 모진위에게서 뜻밖에도 어떠한 가치를 발견해주 것이었다. 구연기는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모진위에게 승부를 걸었다. 평생을 자신의 건 강만을 돌보다가 아무런 존재이유없이 속절없이 죽어갈 모진위였다. 그런데 그 런 그에게 구연기는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추혼십이절의 정수를 맡기 려하고있다. 모진위는 오로지 살아야하기에 살아가는 짐승이 아니었다. 모진위도 분명히 인간이었다. 모진위는 어쩌면 자신도 존재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 다. 그저 제 한몸도 못가누고 헤메다가 스러져버릴 이 하찮은 인생에게도 자신 이 존재하기에 부여되는, 가치있는 사명이 남겨져 있었던 것이었다. 모진위는 자신의 힘으로 이 세상에 존재시켜야 할 추혼십이절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과 고통을 담보로 원화촉발법의 결행을 선택하였다. 흑수노계였습니다. #4937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18- 11/15 14:26 275 line 고삼(高三)은 소계일(蘇鷄逸)의 바라보고있는 창밖을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소계일의 눈은 이제 열대여섯이나 됐을까싶은 소녀에게 머물고 있었다. 소녀라고는 하지만 그 탱탱한 탄력이 의복만으로는 감출 수 없을 정도 로 육감적이었다. 소녀의 새카만 눈망울이 교활한 고양이처럼 또르르 굴렀다. 발랄하다못해 색기(色氣)마저 흘러넘치는 것이 나이가 무색하게 요염한 기색으 로 눈부셨다. 고삼은 장부를 덮었다. 일일보고따위는 더 이상 소계일의 귀전을 자극하지 못 할 것이리라. "신검대회때문에 몰려온 무리인가 보군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고삼이 대단한 재능을 보이지 못하면서도 까다로운 소계일 밑에서 총관사(總 官事)라는 직함을 유지시킬 수 있게 해주던 비결이 이제 또 한 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유별나게 여자를 밝히는 편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미색을 즐기는 데 있어서 독특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소계일이었다. 양주사람들은 소계일에게 돈버는 일을 제외하고도 무언가 관심을 끌 만한 분야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람에게는 취미라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누가 주장한다면 소 계일로서는 그나마 마지못해 선택할 유일한 취미가 아마 미인사냥이 아닐까하 고 고삼은 추측하고있다. 물론, 소계일이 한번 찍은 여자에게 집요하게 집착하 는 이유를 단순히 색마적인 편집광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는 없었다. 여성편력이 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소계일 특유의 광적인 승부욕 으로 보아주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것이야 고삼은 알 바가 아니었다. 그저 소계일의 속내를 읽고 그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사냥감을 포획해서 바치면 그만이었다. 그것이 고삼이 가전회(哥典 會)의 총관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장가량일행은 가까스로 사월이 시작되는 무렵에 제대로 양주에 도착할 수 있 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것은 시기를 맞추어 도착했다는 것일 뿐, 어느 것 하나 신검반의 기대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고난의 연속이었다. 신검대회는 상상했던 것 보다도 엄청나게 대성황이 될 모양이었다. 유명하다 고 알려진 신검극단이라는 극단은 모조리 다 양주에 집합해버렸다. 채소우가 걸어놓은 무지무지한 상금이 위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흥행이라는 측면에서는 그야말로 유례가 없는 공급초과의 상황이었다. 대규모의 극단들조차 치열한 경 쟁상황속에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거듭하고 있었다. 장가량은 난감하였다. 신검반정도의 명성으로는 어찌해볼 재간이 없었다. 우왕 좌왕하는 사이 신검반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고, 이제와서는 양주를 멀리하고 새 공연장소를 물색할 여력마저 상실하였다. 그런 위기의 신검반으로 조내탁(曹 來鐸)이라는 사람이 방문해왔다. 조내탁은 일종의 연예중계업을 하는 거간꾼이었는데, 신검반에게 화우림(花雨 林)에서의 공연을 물색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장가량은 귀가 번쩍 트일 수 밖에 없었다. "화우림은 양주에서도 알아주는 도박장이지요. 칠주반에서조차 연을 맺지 못해 안달하는 곳입니다. 재미가 제법 쏠쏠한 곳으로 정평이 나있어요." 곡예나 연극으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무리들에게 최상급의 수입원이라면 역시 호화주루나 도박장의 무대가 첫손에 꼽힌다. 매일 매일 정기적인 공연이 가능 하였으므로 안정된 수입이 보장되는 자리였다. "저희 신검반으로는 언감생심이로군요." 사실, 지금의 이곳 양주에서 신검반이 일급단체로 대접을 받기에는 무리가 따 르는 터였다. 아무리 손꼽아보아도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있는 단체치고 양주로 오지않은 극단은 하나도 없었다. 신검반으로서는 왠만한 자리에는 감히 얼굴도 못 디밀 형편이었다. 그런데 양주 유수의 도박장이라니 장가량의 눈에는 조내 탁이 사기꾼으로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글쎄요. 어찌된 영문인지 그쪽에서 먼저 말이 들어왔습니다. 당장 쓰겠다고 결정난 건 아니고요 어느 정도인지 한 번 구경이나 하자더군요." "화우림에서 먼저요?" "예. 무대를 전체적으로 새로 구성할 모양입디다. 화우림사람들이야 실속있는 일솜씨로 정평이 나있으니 명성에 연연하는 편은 아닐겝니다. 진짜 실력을 따 지겠지요." "허어, 그렇습니까?" "예. 게다가 험한 꼴을 많이 당하게되는 도박장이다보니, 제법 행사께나 한다 는 연예인이라면 다루기 수월치 않아서 오히려 꺼리는 편이기도 하고..." "하게되면 대우나 조건은?" "섭섭할 정도는 아닐겁니다. 일단 그쪽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 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두르시는 편이 좋을 것같은데, 그사람들이 신검반에 만 선을 대지는 않았을테니..." "갑시다. 지금 당장!" 조내탁의 안내로 장가량이 도착했을 때는 양주의 손꼽히는 도박장, 화우림은 그 절정의 시간을 맞고있었다. 사람들이 품어내는 탐욕과 환희 그리고 절망이 혼재된 후끈한 열기가 장가량마저 야릇한 흥분속으로 몰고들어갔다. 그것은 절 세가인의 미모가 무색할 정도로 사람을 이끄는 본능적인 매력이었다. "천어르신 좀 뵈야겠는데... 어디 계시는가?" 조내탁이 입구의 안내원인 듯한 사내에게 물었다. "예, 방금전에 림주(林主)님께 올라가셨소." "신검반의 장두령님을 모셔왔다고 좀 전해드릴수 있겠나?" "기다려 보시구랴." 사내가 구석에 대기하고 있던 젊은이를 이층으로 올려보냈다. 얼마 안있어서 젊은이는 다시 돌아왔고, 사내에게 무언가 소근거렸다. 사내가 다시 조내탁에게 말했다. "림주님과의 면담이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구려. 천나으리께서 긴히 하실 말 씀이 있으시다고 기다려 주었으면 하는 눈치인가 보구려. 조형이 동행하신 분 께 양해를 부탁해보는게 어떻겠소?" 조내탁이 미안하다는 듯이 손을 비비며 장가량에게 말했다. "천어르신은 이곳의 여흥거리를 책임지시는 분이십니다. 무슨 곡절이 있어서 잠시 기다려달라시니 사정이 허락되시면 장두령께서 아량을 베풀어주시기 바랍 니다." 장가량으로서는 지금이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은 아니었다. "마땅히 기다려야지요. 공사다망하신 분이 저희같이 보잘것 없는 패거리에게 만날 기회를 주시는 것만해도 황송할 따름입니다." 일다경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천가라는 자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처음에 는 큰 일거리라는 생각에 마음을 조리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남에따라 장가량은 긴장이 풀어지고 기분이 느슨해졌다. 따분한 마음에 도박판을 두리번거렸다. 단 연 활기를 띠고있는 판은 그림종이가 난무하는 왼편의 탁자였다. "어떻습니까? 한 번 어울려보시겠습니까? 기다리기도 지루한 터에 이곳 분위 기라도 먼저 익혀둘 겸..." 장가량이 투전(鬪錢)에 관심을 보이자 조내탁이 권유해왔다. 노름과는 그다지 인연이 없는 장가량이었지만 그래도 그나마 알고있는 유일한 종류가 거기서 벌 어지고있는 투전이었다. 두꺼운, 손바닥만한 사각형의 종이위에는 호걸풍의 인 물화가 그려져있었는데, 대부분이 송강(宋江), 오룡(吳龍)등의 양산박의 영웅들 이었다. 투전중에서 가장 유행하는 방식인 수호전(水滸傳)이었다. 수호전이라면 신검반에서도 심심풀이삼아 가끔 어울렸던 터였다. "들어오시구려." 장가량의 맞은편에서 간간히 눈을 마주치던 텁석부리도 그림패를 다듬으며 한 마디 거들었다. 장가량은 모두가 흥분해서 열을 올리고 있는데 자기만이 떨더 름하게 서성거리는 것이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는 것같아서 어색하기도 하던 차였다. "까짓거 그럽시다." 마침 투전판에서 덥석부리의 권유까지 있고나자 장가량은 선선히 판에 끼어들 었다. 조내탁의 말마따나 미리 분위기를 익혀두는 것도 괜찮을 것같았다. 일거리를 부탁하러 방문한 처지에 인사치례로 얼마쯤 잃어주고 손을 털려던 장가량이었다. 그랬던 것이 생각보다 훨씬 오래동안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버렸 다. 애초에는 은두어냥정도는 잃을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반시진정도를 생 각하고 앉은 자리였다. 그런데 계획한 반시진이 지났을 때, 장가량의 앞에는 청 색전표만해도 다섯장이 남아있었다. 화우림이 환전해주는 투전용 전표는 청색 이면 금한냥에 해당했고, 홍색이면 은한냥이었다. 대단한 선전이었다. 장가량만이 거의 초보자수준이었고, 대부분은 고수들이었 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장가량앞에는 전표가 쌓여만갔다. 운수대통으로 금색전 표까지 확보하게되었다. 금색 한장이면 열냥짜리 금원보 열개를 받을 수 있다 고 했다. 누군가 흑선풍이규로 쌍도끼를 휘두르자 장가량이 송강의 양팔로 타일렀으며, 누군가의 손에서 서문경이 날뛰면 장가량의 손에는 무송의 패가 굳건하게 버텨 주었다. 양산박의 호걸들이 장가량의 손아귀에서 광분하였다. 장가량의 솜씨에 는 빈틈이 많았지만, 판이 요상하게 돌아가서 장가량은 언제나 작은 것은 잃고, 큰 것을 취하게 되었다. 장가량의 선전분투가 절정에 달할 무렵, 판도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최고의 물량이 투입되었다.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금색전표가 두장이나 필요한 판 이 되었다. 장가량은 대견하게도 얼추 넉장의 금색전표를 동원할 만한 색색의 전표를 무더기로 구비해놓고있었다. "빌어먹을! 죽었어." 툴툴거리며 패를 집어던지는 사내의 손길에 장가량의 눈이 번득였다. 얼핏 보 았지만 사내가 던진 그림종이중의 한장에는 팔십만금군교두 임충(林忠)의 초상 이 그려져있었다. 이제 장가량의 패는 불패(不敗)의 위력을 얻게되었다. 각자 두개의 그림을 가질 수가 있는데 장가량은 두명의 무송(武松)을 거느리고 있었 다. 두명의 무송이라면 오로지 두명의 임충이 합세하는 것외에는 상대할 적수 가 없었다. 장가량의 머리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대충 보아도 황금 천냥은 넉넉히 되어 보이는 판돈이었다. 끼니조차 근근히 이어나가고 있는 신검반식구들의 헐벗은 표정이 눈에 어른거렸다. 장가량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며 전표로 향했다. "전부 다 걸겠습니다." 장가량은 앞에 놓인 전표를 모두 모아서 탁자 중앙으로 밀어넣었다. 까딱거리 며 장가량의 눈을 어지럽히던 두개의 발이 당장에 정지해버렸다. 그때까지 판 을 주도하며 의기양양하던 덥석부리의 발이었다. 덥석부리가 턱을 괴고 장고(長 考)에 들어갔다. "에라! 모르겠다." 장고를 거듭하던 덥석부리가 그렇게 말하며 패를 조심스럽게 덮어놓더니, 장가 량이 밀어놓은 전표들을 천천히 세기 시작했다. "자아, 거기다가 다섯장만 더합시다." 덥석부리는 장가량이 내놓은 것과 같은 금액의 전표를 탁자위로 세어놓고는 거기에다 다섯장의 금색전표를 추가로 얹어놓으며 말했다. 순간, 장가량은 뜨금하였다. 너무도 기쁜 나머지 한가지 규칙을 간과해버린 것 이었다. 장가량의 수중에는 더 이상의 전표가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너무 덤벙댔구나! 그저 남아있는 판돈만 걸었어야했는데...' 마지막 순번의 장가량은 판돈의 금액에 맞춰서 수비만 취했어야했다. 장가량 이 공격을 가한 바람에 자신에게 주어진 한번의 공격기회를 이미 소모해버렸던 덥석부리가 반격의 권리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자금력이 적은 자가 많은 돈을 소유한 자에게 행하기 어려운 전략이었다. 덥석부리는 기회를 놓치지않고 자신 의 자금력을 이용하여장가량을 막판으로 몰아부쳤다. 장가량은 애석하게도 그 에 상응하는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장가량은 망설였다. "설마, 이제와서 물러서는 건 아니겠지요?" 등뒤에서 장가량을 응원하던 조내탁이 말했다. "제가 실수했나봅니다. 여력이 없어요..." "빛을 내서라도 결판을 보아야지요." "빛이요?" "예. 모자라는 끝전은 도박장에서 융통해주기 마련이지요." "허허. 그렇게까지 할 수는..." 원래의 작심대로라면 여기서 끝내는 것이 옳았다. 이대로 포기한다고해도 잃 은 돈은 겨우 은 세냥이었고, 그 정도는 잃어주리라작심했던 터였다. 장가량이 패를 접으려고 하자 조내탁이 황급히 만류하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요. 제가 이곳 사람을 데려오겠습니다. 들어보고 결정하 셔도 늦지는 않을겁니다." 장가량이 어물어물하는 사이, 조내탁이 방금전 안내맡았던 사내를 데리고 돌아 왔다. "만에 하나 승부에 패하시면 어떻게 부채를 탕감할 생각이십니까? 우리가 변 제능력을 확인할 만한 근거가 있어야만 합니다." 사내가 물었다. "신검반을 경영하고 있습니다만..." "그걸로는 곤란합니다." "이사람아, 천나으리께서 인정할 정도로 실력있는 신검반이네. 백번을 양보해 서 소유하신 재물이 하나도 없다고 치자구. 그렇다고 설마하니 신검대회 말석 하나도 차지하지 못하겠나? 말석만해도 삼백냥이야. ...그리고 슬하에 미색이 뛰 어난 여식도..." "그런 사정 다 봐드리다간 소생만 줄초상납니다. ...하지만 따님으로 보증을 해 주신다면야..." 조내탁이 난처한 얼굴로 장가량의 기색을 살폈다. 도박장이라면 어느 한곳 예외없이 부가적인 사업으로 고리대금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서 또 하나의 수지맞는 부업이 생겨났는데, 그것은 바로 인신 매매업이었다. 돈이 떨어진 도박꾼들은 판돈으로 자신의 가족을 걸어오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렇다고 모든 가족이 다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노예나 몸종으 로 팔아먹을 정도의 가치는 있어야했다. 물론 도박장에서 가장 환영받는 인신 매매의 품목은 용모단정한 처녀였다. 딸을 많이 가진 도박꾼이라면 도박밑천이 든든한 재력가로 인정받는데 전혀 하자가 없었다. 장가량이 천하의 도박꾼은 아니라해도 조내탁과 사내의 대화가 무슨 내용이란 것 쯤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평소의 장가량이었다면 그것은 당연히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당장 칼부림이 벌어졌겠지만 이번 만큼은 장가량도 망설이고있 었다. 물론 장가량이 딸자식이나 팔아먹을 형편없는 인간은 절대 아니었다. 하 지만 이번 만큼은... 임충이 빠져나간 두장의 무송이라면 절대 질 수가 없는 패 였다. 한쪽눈만 질끈 감으면 황금 이천냥을 거머쥘 수 있었다. 장가량은 갈등하 였다. 그리고 결국은 두장의 무송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화우림측에서도 장가량의 신분과 지위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터라 형식상으로 는 신검대회의 상금을 명분으로 하였다. 그러나 말만 바꾸었지 신검대회에 실 패할 경우 그 다음날로 신검반의 금지옥엽, 장여진을 화우림에 양도한다는 이면 계약이었다. 판돈이 모두 정리되고 덥석부리가 먼저 패를 펼쳐보였다. 한장은 무대, 한장은 반금련이었다. 패를 바라보는 장가량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해버렸다. 장가량이 너무도 기쁜 나머지 간과해버린 규칙은 판돈에 관한 것외에 한가지가 더 있었던 것이었다. 임충이 빠진다면 무송이 분명 어느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최강의 패였다. 절대 불패였다. 물론 무대와 반금련에게도 지지는 않는다. 다만 불행히도 무대와 반 금련이 합쳐지면 무송이 이길 수도 없었던 것이다. 시내암(施耐庵)이가 정리한 수호전속에서는 무송이 반금련을 때려죽여서 통쾌하게 자신의 형 무대의 복수 를 했지만, 도박판의 수호전에서는 무대가 살아있는 한, 무송이 자신의 형수 반 금련을 때려 죽일 수는 없었다. 유일한 무승부의 경우였다. 혼백이 날아가버린 장가량에게 꿈결같은 재대결이 지나갔다. 덥석부리는 청면 수(靑面獸) 양지(楊志)가, 장가량에게는 화화상(花和尙)노지심(魯智深)이 떨어졌 다. 수호전에서는 양지와 노지심이 막상막하로 승부를 가릴 수 없었지만,도박 장의 투전에서는 어찌된 노릇인지 노지심이 양지에게 이길 수가 없었다. 장가 량의 패배였다. "어떻게 되었는가?" "불초가 변변치못해서 시월 신검대회가 끝날 때까지 회주님의 심기를 어지럽 히게 생겼습니다. 벌로 다스려주시길..." 유월 어느날, 고삼이 자초지종을 고하고, 소계일이 끄덕였다. 소계일의 거실에 서 물러나온 고삼이 수하들을 불러모아 놓고 일장훈계를 하였다. "양주만 수배해서는 아니되는게야. 멀리는 소주(蘇州)까지 전장(錢場)이란 전장 은 하나도 빼먹지말고 기통을 넣어라. 그쪽으로 돈이 흐를만한 연줄엔 미리미 리 손을 써놓고..." 그날부터 가전회의 인원들이 모종의 영향력을 구사하며 양주일대의 자금원(資 金原)을 돌기 시작했고, 같은 날부터 장가량도 황금 오백냥을 빌리기위해 같은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모종의 영향력을 받은 황금 오백냥은 장가량에게 황 금 오만냥처럼 힘겨운 재물이었다. "뭐 다른 할 말은 없는가?" 시월 어느 날, 일일보고를 마친 고삼에게 소계일이 물었다. "신검대회 예선이 있는 날이지요. 신검반에서는 여섯이 참가했다는데, 오전 반 나절동안 세녀석이 올라가 모두탈락하고 말았다고 하옵니다. 유명단체들이 예 상대로 모두 출전했다는데, 신검반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고 하오니, 본선진 출도 엄두를 못내는 형편이라 하옵니다. 일부러 사람을 찾아다니고 재물을 풀 필요조차 없을 것같습니다." 고삼이 보고를 마치고 물러날 즈음, 신검반에서는 이미 두번의 도전을 행하여 서 두번의 실패를 만들어냈다. 이제 막 마지막 도전자 금서림이 심사대로 올 라서고 있었다. 금서림은 나머지 모든 세월을 모두 합져도 모자랄 만큼 많은 훈련을 지난 삼 개월에 쏟아부었다. 장가량이 그렇게 만들었다. 장가량은 혹독하게 신검반의 젊 은이들을 닥달하였고,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약속하였다. 신검대회의 입상자에 게 자신의 딸 장여진을 주어 자신의 사위로 삼겠노라고, 신검반의 후계자로 지 명하겠노라고... 삼개월의 지옥은 신검반이래 최고라는 금서림의 잠재력을 실제의 무공으로 바 꾸어주었다. 삼개월이 지난 후, 금서림은 구연기, 장가량에 이어서 신검반을 통 틀어 세번째로 어검을 구사하는 강자가 되었던 것이었다. 아직은 손바닥을 벗 어나지 못하고, 서너번을 시도해야 한 번 성공하는 정도였지만 운만 닿는다면 입상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 장가량의 평가였다. 심사대에 올라선 금서림은 아름다운 장여진의 얼굴과 신검반의 수장으로서 천 하를 호령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검을 뽑았다. 부드럽게 추혼십이절을 한번 가동해본 금서림은 눈을 부릅뜨고 검속에 내력을 집중하였다. 부르르 검신이 떨더니 검이 요동을 쳤다. 금서림을 숨을 집어삼킨 채, 중지를 튕겨보았다. 검격은 요지부동으로 손가락에 달라붙었고, 검병(劒柄) 이 꿈틀거렸다. 짧은 검병으로서는 가볍게 미동한 정도였어도 기다란 검신(劒 身)은 그것이 아니었다. 검신은 그대로 화려한 춤을 추었다. 금서림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차올라왔다. 상승검법의 어검술, 그 절묘 의 경지가 삼분의 일이라는 확률을 극복하고 금서림의 손에서 화려하게 춤을 추는 순간이었다. 예상보다도 훨씬 훌륭한 금서림의 예선무대였다. 그러나 결과 는 예선탈락이었다. 금서림은 세상밖에 세상이 있음을, 자신이 우물안의 개구리였음을 깨달았다. 결과에 승복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참가자는 검기만으로 삼장밖의 촛불을 삽 시간에 다섯이나 꺼버렸으며, 어떤이는 실제적인 어검술을 사용하여 일곱개의 대나무를 연속으로 베어버렸다. 금서림의 검에서도 검기는 나왔지만 금서림의 검은 코앞의 문풍지도 날릴 수 없었으며, 금서림의 어검술이 화려하기는 하였지 만 그 어검의 위력으로는 수수깡조차도 벨 수 없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4959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19- 11/25 22:13 450 line 장여진이 가볍게 하품을 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려도 우백이나 엽설영 은 아직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예선 통과자는 모두 설흔두명이라는데, 벌써 열 댓명이 무대에 연신 등장하였음에도 우백이나 엽설영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예선통과자들의 무예가 별 볼 일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가장 형편 없다고 생각되는 이까지도 최소한 금서림보다는 나았다. 출전자가 삼백명을 넘 었다는 말도 있고보면 그래도 열명중에는 최고로 꼽히는 인재들이었다. 하지만 서너차례가 지나고나자 호기심도 어지간히 풀렸다. 그후로는 대개가 도토리 키 재기식으로 거기서 거기였으니 특별히 인상적일 것도 없었다. 장여진은 슬슬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바보같은 금사형...' 금서림만 본선진출했어도 이렇게까지 맥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연 신검대 회 입상자를 정혼자로 맞이하느냐 마느냐의 기대감으로 등장하는 선수 하나하 나를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보았을 것이고, 온 신경이 짜릿짜릿하게 살아났을 것 이다. 이미 그림의 떡이었지만, 상상만해도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다시 새어나오는 하품을 참지못하고 입가로 향하던 장여진의 손이 갑자기 멈 춰버렸다. 남이 볼새라 조심조심 벌어지던 부끄러운 처녀의 입이 타인의 시선 따위는 잊어버린 듯 그야말로 아가리가 되어 찢어져라 벌어졌다. 봄 아지랑이 처럼 졸음에 겨워하던 가물거리던 두눈도 삽시간에 불꽃을 일으키며 초롱초롱 반짝였다. 장여진으로서는 현실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이제 막 무대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장여진의 북서방향으로 열장쯤 떨어진 곳에서도 비슷한 생리현상을 겪는 자가 있었다. 그곳에는 일장 높이의 화려한 누대가 세워져있었고, 누대의 호화스러운 가죽장식의자에는 화려한 복색의 장년사내가 게슴츠레 반쯤 감겨진 눈으로 무 대를 지루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라에서도 첫손 꼽히는 거상으로 바로 이 대 회의 주최자인 채소우였다. 반쯤 늘어져있던 채소우의 상체가 팽팽하게 당겨지 며 흐려있던 눈가에서 이채가 번득였다. 열여섯번째의 본선출전자의 검이 허공을 미끄러지며 흐릿한 빛무리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그 동그란 형체가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또 한차례의 검광이 새로운 무늬를 그려내었다. 흩어진 원형태의 잔상위에 싸늘하게 지나가는 칼그 림자. 첫번째 검광이 시들어가는 봄매화였다면 뒤따르는 검영은 그위에 맺힌 하얀 눈발이었다. 추혼십이절의 제사절(制四節) 춘매잔설(春梅殘雪)이었다. "보... 보셨소이까? 표장로!" 채소우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예... 예. 채대인..." 심사위원장격인 칠주반의 장로 표부약(表富約)이 신음처럼 대답했다. "내눈에 뭐가 쓰인게 아니라면 분명히..." "채대인, 잔상이 겹쳐진게 맞는 것 같군요." 표부약의 눈이 열여섯전째 출전자인 키가 작고, 구부정한 소년에게 완전히 고 정되었다. 매화를 그린다던가 잔설을 그린다던가 하는 것은 칠주반의 제자들도 여반장으로 해내었다. 뛰어난 제자들은 한꺼번에 서너송이의 매화까지도 그려 낼 수 있었다. 특히, 칠주반의 자랑, 우백과 엽설영이라면 보다 화려한 변초로 영롱한 매화를 만들어내고 보다 싸늘한 검기로 눈부신 잔설을 그려낼 수도 있 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매화가 사라지기전에 잔설을 얹어놓지는 못했다. 그런 데 무대위의 저 볼품없는 녀석이 비록 형편없는 변초에 엉성한 검기이기는 했 지만, 분명히 매화의 잔상위에 잔설의 그림자를 겹쳐놓았던 것이다. 열여섯번째 출전자인청의소년의 추혼십이절은 이제 제칠절 장미백변(薔薇百 變)에 들어서고 있었다. 표부약은 인정하기 싫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년의 팔이 검을 휘 두르는 것이 아니라 소년의 검이 팔을 이끌고 다니는 것처럼 착각될 지경이었 다. 심하게 이야기해서 소년의 팔은 그저 어깨와 검을 이어놓은 끈에 불과했다. 소년의 몸은 검이라는 말에 매달려가는 마차처럼 그렇게 물흐르듯이 검을 뒤쫑 고 있었다. 칠주반의 고수라면 대개는 어검술을 구사했다. 후기지수중에는 우백 과 엽설영도 어검술을 구사했다. 그러나 소년의검술은 아직 어검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어검술은 커녕 검을 제어하는 내력조차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옥진강조사의 추혼검이냐고 물어본다면 표부약은 인 정하기는 싫지만 저 청의소년의 검이 그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부약의 남동쪽 칠장거리에 앉아있던 금서림도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인정하 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금서림은 입속에 고인 침을 삼킬 생각조차 못하 고 눈을 껌벅거려서 재차 무대위의 청의소년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눈을 비비 고 보았지만 그 얼굴은같은 얼굴이었다. 금서림은 작금의 상황을 현실로써 인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침을 질질 흘리며 무대를 바라보던 금서림이 꿀꺽 침 을 삼켰다. 금서림의 동북방 십리(十里)밖에서 장가량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것 봐! 지금 누구 놀리나?" "아닙니다요. 소인이 이 두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요. 신검반 맞습니다." 장가량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신검대회장을 향해서 달음박질을 쳤다. 지푸 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여섯이 출전하여 여섯이 모두 탈락했으니, 전원탈락 이라는 것은 장가량이 여섯살짜리 애들적으로 돌아가도 알 수 있는 간단한 셈 이었지만, 장가량은 어이없는 희망을 새로이 품었다. 어쩌면 장여진을 넘겨주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장가량의 서남방으로 십리 떨어진 곳에 앉아있던 가전회의 총관, 고삼은 장가 량이 화우림에서 신검대회장로 질주하는데 반해서 거꾸로 신검대회장을 박차고 나서 화우림을 향해 줄달음을 쳤다. 이대로 나두었다가는 장여진을 넘겨받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장가량은 한달음에 대회장으로 들어서며 연무대를 바라보았다. 심장은 터질듯 이 뛰고있었고, 입술은 타는 갈증으로 바싹 말랐다. 무대위에는 청의소년이 검 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꾸부정한 등허리며, 휘어진 다리... 낯익은 모양새였다.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전부터 보아왔던 그 얼굴에 그 눈빛이었다. 장가량은 구름위라도 서있는 양, 두둥실 떠있는 자신을 느꼈다. 독주라도 마신 것처럼 머리가 빙글 빙글 돌았다. 척추의 가장 밑바닥 뿌리에서 뜨거운 열기가 불처럼 치솟아 올랐다. 닭똥같은 눈물이 주루루 흘렀다. 찬란한 무지개처럼 무 대를 환히 밝히고 있는 청의소년은 아무리보아도 신검반에서 늘쌍 자신의 골치 를 썩이던 그 못난이, 모진위였다. 장가량은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고있었다. 모진위가 추 혼십이절의 제칠절, 장미백변을 전개해서 크고 작은 장미들을 연신 그려내고 있 었지만, 장가량은 사십평생을 통해서 그렇게 멋진 장미백변은 본 적이 없었다. 도저히 장미백변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눈물로 흐려진 장가량의 눈에는 그것은 축포로 쏘아대는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가전회의 한 사업장인 화우림에서 황금 오백냥을 챙겨든 고삼이 삼십명의 수 하를 동원해서 다시신검대회장으로 돌아왔다. 오후 시합개시까지는 약 한시진 반의 휴식시간이 있었다. 고삼은 삼십명의 수하를 휘둘러 그 사이 오백냥의 황 금을 모두 소진할 심산이었다. 고삼일당은 반식경동안 무려 팔십명의 내외 관계자를 만났고, 팔십냥의 황금을 뿌렸다. 그 결과로 겨우 영향력있는 인사와 겨우 선을 댈 수 있었다. 한시진이 다 되갈 무렵에는 다시 이십명의 행사진행자와 만났고, 백오십냥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나서야 결정적인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두명의 칠주반 장로와 채소우의 인척에게 나머지삼백냥을 모두 건네주었을 때, 고삼은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후의 시합은 비무였다. 비무라고는 해도 실제적인 무공대결이기보다는 쌍방 이 그저 투로를 교환하여 비교하는 방식이었지만, 그래도 심사에 의해서 승패는 가려지는 만큼 참가자들의 입상여부를 가름하는 가장 결정적인 시합이었다. 미 리 산출된 점수에 의해서 높게 평가된 입상예상자들이 자리를 선점하고 저평가 된 약체참가자들이 도전하는 형식이었다. 모진위는 하위급으로 판정을 받았다. 일반적으로는 의외의 결과로써 받아들여 졌다. 특히, 모진위측의 진영에서는 거센 반발이 있었다. 냉정하고 계산적인 향 이조차 불만을 터트릴 정도였다. "심사위원의 삼분지이가 칠주반이라더군요." 배동삼이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우백이라면 평점에서 일이위를 받았을 터이니 그럼 진위가 꼴지에서 일이등 을 다툰다는 말인데, 아무리 낮게 잡아도 그 정도는 아니었지요." "이런 망할 자식들!" 장가량은 죽을 맛이었다. 모진위의 무위는 뜻밖에도 대단하였다. 낮추어 잡아 도 중간정도는 되어보였다. 자세나 위력에는 다소 손색이 있었지만 그래도 제 대로된 추혼십이절이라는 의미에서는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채소우의 대회취지 도 그런 것이었다. 점차 잊혀져가는 신검 옥진강의 뿌리를 되찾기위해 신검대 회를 준비했다고 하지 않던가? 처음에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상대가 우백이라면 이미 물건너간 상황이었다. 둘사이의 무공수 위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고있었다. 모진위가 우백에게 명백한 차이로 패퇴한 다면 십위이내의 입상은 바랄 수 없는 일이었고, 십중팔구는 모진위가 명백한 차이로 우백에게 패하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칠주반 짜식들, 진위녀석따위도 견제하는 주제에 천하제일의 신검문파라고 유 세를 부리다니. 알조다 알조." 모진위알기를 발톱에 때만큼도 여기지 않던 금서림마저도 역성을 들고나섰다. 모진위가 그런 정도로 하급이 아니란 것은 칠주반소속의 심사위원들도 잘 알 고있었다. 그렇다고 우승을 위협받을 정도로 경계하지는 않았다. 다만, 양주에서 는 무시할 수 없는 상권을 가지고있는 가전회와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 던 것이다. 가전회의 총관, 고삼이 어찌된 노릇인지 모진위의 입상을 저지하기 위해서 죽자사자 행사판에 매달렸다.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르겠지만 그렇더라 도 가전회에게 미운털이 박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은 모진위의 비참한 패배라는 특명을 안고 우백이 나서게되었다. 추혼검의 제육절 화개화사(花開花謝). 우백의 검끝에서 만화가 피어났고, 모진위의 전신요혈에서 꽃이 졌다. 화무십 일홍이라! 시들어 떨어지는 꽃잎이 어찌 슬프지 않으랴만은... 모진위도 분분히 검을 휘둘러 나비들을 날려보냈다. 나비가 날개를 휘저어대자 모진위의 주위로 몰려들던 꽃잎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우백의 지는 꽃에 대항하는 모진위의 초식은추혼검의 제구절 산화비접(散花飛蝶)이었다. 우백의 검에서 계속 꽃들이 피어났고, 모진위의 사방팔방에서는 계속해서 꽃이 지고 있었다. 모진위의 나비들도 여전히 허공을 난무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미약한 날개짓이었다. 초전(初戰)부터 모진위의 확연한 열세였다. 우백은 만발한 꽃송이를 한껏 모아서 일제히 날려보내더니 우아한 곡선으로 검을 거두며 신형을 풀었다. 재차 검을 내저었는데, 이번에는 도화점점(桃花點 點)이었다. 모진위가 사라져가는 꽃송이들을 채 흩날리기도 전에 새로운 꽃잎이 날아들어 모진위는 화려한 꽃밭에 파무치고 말았다. 몇개의 꽃송이가 나비의 몸부림을 피해서 모진위의 몸속으로 사라져갔다. 드디어는 꽃이 떨어져 흙속에 묻히듯 우백의 검화(劒花)가 모진위의 내부에 스며들어 제 삶을 마친 것이다. 과연 명불허전. 우백이었다. 기화요초들이 피었다 지고, 피었다 지고, 숨도 돌 리기 전에 수십송이의 도화가 허공에서 점점이 수놓았다. 꽃의 요정들이 우백 의 숨결을 타고나와 화려한 화계(花界)를 열어놓은 것이다. "아!" 두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있던 장여진이 가벼운 탄성을 질렀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갈망하던 우백의 추혼검이었다. 하지만 장여진의 탄성이 우백의 검법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우백의 신위따위는 장여진의 안중에도 없었다. 장여진의 관심사는 오로지 모진위의 위기였다. 우백의 현란한 화개화사를 감당 치 못해서 모진위는 삼초의 공격을 허용하였다. 게다가 모진위는 신형조차 제 대로 수습하지 못했는데, 설상가상으로 도화점점이 밀려오고있었다. 연거퍼 다섯절의 초식을 동원하며 도화점점을 막아냈지만, 모진위의 상황은 호 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백은 도화점점 다음에 다시 화개화사, 그리고 다 시 도화점점 하는 식으로 삼지사방을 뒤흔들었다. 모진위의 검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채소우가 경탄의 눈으로 우백을 바라보았다. 무대위에는 만화가 피고 지는 가 운데, 도화마저 점점이 떠다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화개화사, 도화점점, 화개화 사, 도화점점의 방식이더니 드디어는 그 꽃들이 만개하고 도화가 절정을 이루워 신검의 후기지수 우백의 손에서 화개화사와 도화점점이 쌍수겹장처럼 동시에 전개된 것이다. 모진위는 이를 악물고 진기를 끌어올렸다. 화개화사와 도화점점이 동시에 모 진위를 핍박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판사판이었다. 내공 한줌조차 없는 모 진위가 진기를 뿜어내는 방법은 단 하나, 무위조식이었다. 모진위는 자신의 몸 에 적중한 세개의 꽃송이를 무위조식의 방법으로 검을 쥔 우수에 집중시켰다. 예리한 기공이 모진위의 내부를 진탕하며 휘돌았다. 물론, 우백의 공격은 모진 위에게 내상을 입힐 수 없는 형식적인 공격이었다. 비무규정자체가 실제무공대 결이 아닌 투로를 보여주는 시범의 형태였기때문이었다. 그러나 모진위는 그 삼초의 검공을 스스로가 감당못할충격으로 받아들이는 모험을 하였다. 정상적 인 방법으로는 모진위에게 승산이 전무한 터였다. 모진위는 되든 안되든 최후 의 일초라는 심정으로 손바닥에 고인 한줌의 진기를 검으로 쏟아부었다. 모진위의 검끝에서 홀연히 매화 한송이가 피어올랐다. 이어서 매화송이위에는 잔설이 쌓였다. 매화가 날아올랐고 모진위와 우백의 검이 부딪쳤다. 모진위의 검세는 당장에 제압당했고, 우백의 검은 아직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우백의 검에서는 여전히 도화가 점을 뿌렸다. 모진위의 매화가 화개화사를 막 아냈지만 도화점점마저 감당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날카로운 화점(花點)이 무방 비의 모진위를 엄습했다. 아니 엄습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도화도 일순 힘 을 잃고 사라져갔다. 모진위의 매화에는 잔설이 남아있었고, 그 싸늘한 검기가 차가운 눈발처럼 도화를 베어버린 것이다. 모진위는 대실망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모진위의 춘매잔설이 우백의 화개화사 와 도화점점을 동시에 막아내었다. 하지만 역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 위 력이 너무 미약하였던 것이다. 장애물이 일시에 사라진 우백의 검이 다시 머리를 들었다. 움추렸던 독사의 머리가 기세를 타듯이 우백의 검세는 노도와 같았다. 막혔던 뚝이라도 터진듯 우백의 화개화사와 도화점점이 한껏 기세를 떨쳤다. 소용돌이처럼 허공으로 치 솟았다. "만화창천(滿花暢天)!" 누군가 경호성을 토하였고, 만인이 경악하였다. 추혼십이절의 마지막 십이절 만화창천이 우백의 손에서 전개된 것이다. 우백의 행운이었다. 춘매에 잔설이 쌓이는 제대로된 춘매잔설이 있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모진위의 춘매잔설이 조금이라도 약했거나 강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모진위의 검이 우백의 검세를 응축시키는 적당한 매개체의 역할을 해준 것이었다. 우백 생애최초의 만화창천이었다. 수백 수천의 꽃잎들이 모진위를 휘감고 돌았다. 모진위는 체념하였다. 모진위 는 그 꽃잎하나조차도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다. 모진위의 검끝이 천천히 바닥 을 향했다. 패배를 자인하려는 것이었다. 세상의 명리에 들떠있던 모진위가 그렇게 명리를 포기하는 바로 그 순간, 모진 위의 마음속에서 또하나의 모진위가 일어서고 있었다. 도학정의 채찍질에의해 서 이미 육신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용무권의 본체가, 하상곤의 배려로 이미 그 의 본능처럼 되어버린 반응감각이, 구연기가 머리속에 새겨 넣어준 추혼십이절 의 정수가 모진위의 이성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발동하기 시작하였다. 만화방창의 하늘을 만들어 관중들의 눈길조차 가려놓았던 꽃의 장막이 일순 걷혀버렸다. 그에 따라서 난전속의 비무자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우백은 여전 히 만화창전의 자세 그대로였고, 모진위는 추혼십이절의 제오절 봉사쟁화(蜂蛇 爭花)의 자세였다. 봉사쟁화. 꽃을 탐하려는 독사의 혀를 벌의 침으로 찌른다는 초식. 제아무리 많은 꽃들이 허공을 난무하더라도 실상은단 한자루의검에서 비롯 된 것, 마음속의 모진위는 본능적으로 그 독사의 혀를 찾았고, 벌의 침을 쏘았 다. 천기합(天氣合)이 이루워졌다. 모진위의 검과 우백의 검이 맞닿아있었다. 검 끝과 검끝이 만나는 전설의 절기, 천기합이었다. 우백이 넋을 잃고 서서 모진위를 바라보았다. 우백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영 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모진위에게 말을 걸듯 걸듯 입술을 들썩이다가, 고개 를 떨구어버렸다. 모진위의 표정도 우백과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하지만 모진 위는 고개를 떨구는 짓따위는 하지 않았다. 모진위는 승자였던 것이다. 세인들의 눈길이 하나라도 된듯 모진위에게 쏠려있어서 고삼에게 주의를 기울 이는 사람은 없었지만 누군가 봤더라면 고삼의 표정도 볼만했을 것이다. 고삼 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너무나 억울하였다. 자신의 계산으로는 도저히 있 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떻게 만화창천이 발출되고 그것을 막아내는 천기합이 구사될 수 있단 말인가? 옥진강과 초웅천이 다시 살아나기 전에야 어 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제 모진위는 탈락은 커녕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 로 부상해버렸다. 일체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소계일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 다. 고삼은 이제 보따리꾸릴 일밖에는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삼의 화급한 불길은 그렇게 꺼져버렸지만 그 불똥은 이제 칠주반으로 번져 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칠주반은 믿어의심치않던 자신들의 우승을 자신할 수 없게되었다. 아니, 이대로라면 우승은 당연히 모진위의 몫이었다. 표부약이 혀를 찼다. 실력대로라면 모진위는 중위권정도였다. 가전회가 들썩거 리지 않고, 그래서 우백과 맞부딪치는 일만 없었더라면 모진위는 잘해야 팔구위 의 입상을 바라보는처지였다. 그런데 모진위는 우백을 만났고, 믿어지지 않는 천기합으로 우백을 물리쳤다. 표부약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천재지변에 긁어 부 스름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칠주반에는 아직 엽설영이 남아있다는 것이었 다. 칠주반에서는 자신의 명성에 또 한번의 금칠을 더하기위해 행사일정을 조 정하였다. 최후의 두명을 선발하여 다음날, 결승전을 치루도록 시합의 대강을 정했다. 칠주반의 쌍웅, 우백과 엽설영으로 하여금 멋진 대미를 장식하도록 해 서 신검대회를 칠주반의 독무대로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그런 안배가 우습게도 모진위라는 뜻밖의 강적에 대항하는 마지막 기회를 제공해준 것이다. 표부약은 마지막비무가 생략되어있었던 원래의 대회계획 초안을 생각해보고는 상상하기 도 싫다는 듯이 진저리를 쳤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황금 삼천냥이네." 모진위를 끼고 둘러앉은 장로들은 진땀을 흘렸다. 대회우승 상금은 삼천냥이 고, 차석은 천팔백냥이었다. 우승상금이라고 해보았자 어차피 소속단체가 챙기 는 것이고, 우승당사자는 자신이 소속된 단체장의 재량에따라 미미한 포상금밖 에 기대할 수 없었다. 칠주반에서는 모진위를수소문하여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우승만 양보해준다 면 이등상금에 삼천냥의 일등상금을 얹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이등상금은 모 진위의 소속인 신검반에서 차지한다고해도 칠주반에서 따로 마련해주는 삼천냥 은 온전히 모진위의 차지가 되는 것이었다. 황금 삼천냥. 모진위정도면 평생을 남부럽지않게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재화였다. "... ..." 묵묵부답이었지만, 그것은 이전까지의 몇차례와 마찬가지로 분명한 거절의 표 시였다. 칠주반의 장로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정도라면 자신들은 눈도 깜 짝하지않고 칠주반을 배신할 만한 조건이었다. 장로들이 제풀에 지쳐 포기직전의 심정이 될 무렵, 모진위가 입이 열렸다. "한가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만..." 포부약이 반색을 하며 말을 받았다. "사양치말고 말해보게." "칠주반이라는 명칭을 얻게된 연유가 무엇인지요?"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포부약을 비롯한 일단의 장로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옥진강조사께서 임종직전에 일곱제자에게 일곱개의 정표(旌表)를 나누워주시 면서 말씀하셨네..." 포부약이 약간 맥빠진 어조로 칠주반의 유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진위에게 차가운 냉대와 무관심대신에 뜨거운 환호와 갈채가 쏟아졌다. 모 진위의 내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한때는 그의 추 악한 외모만 가지고서 그를 협오하였고, 이제와서는 신검대회에서의 활약만으로 그를 찬양하였다. 모진위를 아는 사람들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한때는 그를 멸시하고 학대하던 그의 주변사람들이 이제는 그에게 따듯한 환대와 친분을 표하였다. 아침에 깨어나보니 세상은 변해있었다. 어떤이는 모진위의 세안을 위하여 온 수를 대령해주었고, 어떤이는 깨끗한 건포를 준비해주었다. 이전까지는 아무리 엄동설한이라도 찬물에 젖은 수건도 감지덕지해야 했었다. 사람들은 상냥하게 웃어주었고, 결승전에 임할 모진위의 심사에 거슬리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을 써 주었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아침식사에서 천이 부드러운 의상까지. 시합장에 들어설때는 더욱 가관이었다. 사람들은 우렁찬 함성으로 그의 등장 을 축복해주었고, 존경과 사랑의 시선을 담뿍 보내주었다. 모진위의 상대자인 소영웅 엽설영조차도 경의를 담고 진심으로 예를 갖추어주었다. 모진위도 공손 하게 답례하고는 깊게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관중들의 얼굴 을 천천히 돌아보며 생각했다. '내 생애에 이런 날이 다시 올 수있을까? 언젠가 또 다시 세인들의 온정과 환 대를 누려볼 수 있을까?' 모진위는 최후의 만찬이라도 즐기는 듯 지금 자신앞에 놓인 세상 모든 것들을 천천히 음미하였다. 다시 깨어나면 잃어버릴 일장춘몽이라도 꾸는 듯이. 그리고 당당하게 패배를 감수하였다. 모진위는 일거에 전세를 뒤업는 무위조식의 운용도, 또 다른 자신을 불러오는 본능의 열망도 일체 도외시하고, 오로지 구연기의 추혼십이절로당당하게 엽설 영을 맞았다. 그리고 패배하였다. 모진위는 이 한번의 패배로 모든 것이 사라지 지라 생각했다. 세상의 환대도, 그에 대한 따스한 관심도 모두 사라지고 그저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리라 믿어 의심치않았다. 세상의 단맛을 보았기에 더욱 비참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하루전 과거였지만 모진위는 입술을 깨물고 유혹을 이겨내었다. 그리고 더 멀리 존재하는 또 다른 가치를 위해서 패배의 운명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생각만큼 패전의 결과가 그리 처참한 것만은 아니어서 모진위는 어안이 벙벙 해졌다. 대회의 주관자인 채소우는 오히려 우승자인 엽설영보다 모진위에게 더 관심을 기울였다. 채소우는 우승자 엽설영에대한 치하를 형식적으로 마치고, 모 진위의 두손을 꼭 부여잡으며 말했다. "모소협! 내후년 가을이 이 늙은이의 환갑이라네. 그때 다시 한 번 이 늙은이 를 위해 수고해주었으면 하네. 꼭 부탁하네." 신검옥진강의 일곱제자들은 이미 대부분 세상을 떠났거나 강호에 있지않았다. 강호에서 만날 수 있는 신검제자라고는 제칠제자 두요접이 유일하였다. 그 두 요접조차도 양주 칠검반의 깊숙한 곳에 유(留)하며 세인과의 접촉을 멀리한 채 고요한 노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두요접이 오늘은 일부러 객을 청하였다. 칠주반의 장로들은 두요접이 세속과의 연을 반기지않는 알고있기에 그저 보고를 통하여 허락받고자 했으나, 이번만큼은 오히려 두요접이 방문객과의 면담을 간절히 청하였던 것이다. "사조님! 손님이 당도하셨습니다." "어서 모시게." "노마님께 문안드리옵니다. 소생 모진위라 하옵니다." "어서오시오. 모소협! 소협께 번잡을 끼치게 되었구려. 이 노파는 예전에 두요 접이라 불리웠지요." "과분한 말씀..." "먼저 이 노파가 사죄드려야겠소. 우리 칠주문의 사람들이 그런 망발을 저질렀 다니 소협께 면목이 없구려. 너그럽게 보아주시길..." "아닙니다. 거래에 응한 소생도 매 한 가지... 탈속하신 노마님의 심기를 어지 럽혀드려 오히려 소생이 황송할 따름입니다." "그래. 우승을 양보하는 댓가로 우리사람들은 먼저 황금 삼천냥을 내놓았다던 데 소협께서 거절하셨다지요?" "... ..." "소협께서 분명히 황금 삼천냥의 조건을 들었는데도 이를 마다하고 돈으로야 은 한냥의 가치도 안되는 옥사조님의 신물(信物)을 요구하신게지요?" "노마님의말씀, 한자도 틀림이 없습니다." "이 노파가 그걸 가지고있지요. 그런데 모소협은 본파의 구상도(具霜道)사형과 어떤 연분이 있소?" "소생은 전혀 모르는 분입니다만..." "그럼, 무슨 연유로 그와같은 요구를 하셨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 ..." "휴우, 이 늙은 할망구가 주책을 부렸나보오. 어쨌거나 약속은 약속인 것... 어 리석은 제자에게 손속을 양보해주신 댓가로 소협께 드립니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는 없으나 소협이 요구한 것이니 거두어 주시오." 두요접은 신물을 건네주며 사형구상도를 건네주기라도 하는 듯, 가슴을 떨었 다. 두사람을 이어주던 유일한 인연의 끈이 떨어져나가는 순간이었다. '구사형...' 두요접은 마음속으로 구상도를 불러보았다. 두요접은 구상도를 사랑했었다. 사 형제중 가장 무예도 출중하고, 용모도 단정했던 구상도사형... 하지만 두요접이 구상도를 사랑하게된 이유는 그의 무공때문도, 그의 용모때문도 아니었다. 처음 만나던 날부터 구상도의 단아한 기품에 반한 것이었다. 하지만 구상도는 두요 접을 사랑하지 않았다. 다른 사형제들은 두요접을 마치 여왕 모시듯 공경하였지만 구상도는 콧방귀도 보내주지 않았다. 그저 무관심이었다. 두요접은 애가 탔다. 자신의 마음을 틀길 까봐 두려워 그녀도 짐짓 무관심을 가장하였다. 구상도가 앞에 있을 때면 두요 접은 유달리 더 다른 사형들에게 살갑게 굴었다. 마치 구상도만 싫어하고 다른 사형들만 좋아하는 것처럼. 구상도의 앞에서라면 사형들이 아니라 그 어떤 외 간남자들 앞에서도 오해를 무릅쓰며 싹싹하게 굴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정인 군자, 구상도사형은 그런 그녀를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볼 뿐이었다. 사내라면 사족을 못쓰는 창녀라도 바라보는 듯 노골적인 멸시와 협오를 담고서. 두요접은 가슴이 찢어졌다. 그리고 홧김에 대사형의 구혼을 받아들였다. 오로 지 구상도에게 복수하는 심정으로 자신을 불행속으로 몰아넣었다. 세월이 흘러 사부님이 돌아가시자 사형제들은 속세로 내려가 새로이 칠주검파 를 열었고, 구상도는 그대로 산에 남았다. 사부님의 유지를 이어받아 추혼십이 절의 정수를 이어가겠다는 것이었다. 구상도가 마지못해 산을 내려온 날은 바로 문파의 재창건일이자, 대사형이 장 문인(掌門人)으로 취임하는 날이였고, 그와 동시에 두요접과 대사형이 혼례를 치르는 날이기도 했다. 두요접은 대사형과의 약혼발표 이후, 한 번도 구상도를 만나지 못했다. 그런 구상도가 내일이면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될 바로 전날밤, 겨우 산을 내려와 그녀 가 거하는 도장으로 온 것이었다. 어떻게 왔는지도 무엇때문에 왔는지도 두요접은 기억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 려보니 어느새, 구상도의 방문앞에 당도해있었다 두요접은 가슴이 터질것만 같 았다. 자기도 모르게 구상도의 방문을 두드렸다. "소사매가 어인 일이야?" 구상도의 음성은 찬바람처럼 싸늘했다. "긴히 할 말이 있어요. 잠시뵈어도 되겠어요?" 두요접의 가슴은 무거운 달빛처럼 쿵쾅거렸고, 정신은 아득해졌다. "그래... ...잠깐 기다려." 구상도의 귀찮아하는 듯한 대답이 들려왔을 때, 두요접은 이미 방문을 열고 들 어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어리둥절해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구상도가 짜증난다는 듯이 거칠게 투덜거렸다. "사형은 왜 저만 보면 화를 내죠? 제가 도대체 오사형한테 무슨 잘못을 했기 에 저를 그렇게 미워하시는 거예요? 사형이 오늘에서야 도착하셨다길래, 혼례 전에 인사라도 드려야 하겠기에 왔는데... 그래요. 반가울 리가 없겠죠.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이게 얼마만인데..." 두요접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굴러내렸다. "아니, 사매. 그게 아니라. 이렇게 으슥한 밤에 단둘이 있으면 남들이 오해하잖 아. 그래서 내가 나가려는데, 사매가 불쑥 들어오니 그만..." 그 눈빛이었다. 언제나 두요접의 가슴을 발기발기 찢어놓던 그 눈빛. 마치 창 녀라도 쳐다보는 듯 구상도는 경멸에 가득찬 눈으로 두요접을 바라보았다. "옳아. 그게 걱정이시군요. 그러나 저를 그런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 은 이곳엔 아무도없어요. 더구나 사형과 같이 이렇게 공명정대한 정인군자와 함께라면... 사형만 안그래요. 제가 아주 저속한 년으로 보이시죠?" "아냐. 그게 아니라..." "호호호. 사형은 언제나 그랬어요. 아주 노골적인 눈으로 저를 비웃었지요. 마 치 외갓남자와 사통한 유부녀라도 만난 것처럼..." "무... 무슨 소리야?" 두요접은 구상도가 보는 곳에서는 아무 남자에게나 친절하게 굴었다. 사형제 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조차 심할 정도로 친밀하게 굴었다. 구상도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구상도는 그때마다 두요접의 애타는 속마음은 아랑곳않고 그저 얼음처럼 싸늘한 눈으로 두요접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두요접은 왠지 야속하고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 혼자만 티끌하나 없이 고결하군요. 세상에 둘도 없는 정인군자구요. 과 연 그런가요? 세상사람들도 그리 생각하는지 한 번 볼까요? 당신이 창년처럼 불결해하는 이 두요접을 어찌 생각하는지도 한 번 보구요." 두요접의 눈에서 불이 켜졌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시퍼란 안광이었다. 두요접 은 발작적으로 자신의 상의를 찢어 발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친듯이 외쳤다. "아악! 사람살려요!" 모진위가 자신의 스승 구연기에게 돌아왔을 때, 구연기의 참상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구연기의 하반신은 이미 마비되어 앉은뱅이가 되어있었고, 그나마 온전하던 오른손마저 엄지손가락은 이미 제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숟 가락을 잡는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없었고 제대로 구부러지지도 않았다. 그래 도 구연기는 염주를 돌리려 애쓰고 있었다. 모진위가 공손히 절을 올리고, 말없이 무언가를 두손으로 받쳐올렸다. "그게 무어냐?" 가물거리는 눈에 힘을 주고 자세히 쳐다보니 그것은 염주였다. 구연기가 모진 위의 손바닥까지 코를 들이밀었다. 분명히 그 염주알이었다. 사부 옥진강이 자신에게 물려준 그 염주알이었다. 옥 진강사부는 자신의 살생죄업을 참회하고자 내공을 뽑아내어 내단(內丹: 불교에 서 말하는 화장한 고승들의 몸에서 나오는 사리의 일종)으로 응고시켰다. 그리 고 일곱개의 염주알을 만들어서 일곱명의 제자에게 물려주었다. 못 다한 사부 의 속죄를 부디 이어달라고. 그로부터 삼개월후, 구연기는 엄지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제자모진 위에 의해서 본모습으로 복원된 염주가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구연기의 염주 는 그의 손안에서 원활하게 움직였지만 구연기의 목숨은 경각에 이르러있었다. 그 겨울의 어느날 밤, 모진위가 도학정이 운명하던 그날처럼 구연기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주었다. 도학정만큼이나 말이 없던 구연기였지만, 도학정이 떠나던 그날밤, 용무관원의 애석한 예상이 틀렸던 것처럼 신검반원들의 애석한 예상도 완전히 빗나간 것이 었다. 함께한 세월동안 사제지간이 나누웠던 대화보다 훨씬 긴 이야기가 하룻 밤사이에 오간 것은 그때나 이때나 마찬가지였고, 그 내용도 같았다. 다만 그 화자(話者)가 스승 구연기가 아닌 제자 모진위라는 것이 달랐다. 모진위는 용무관시절의 사부, 도학정이 어떻게 고양이를 만났고, 어떻게 헤어 졌는지 더듬더듬 이야기해주었다. 사부 도학정은 다시 재회한 표묘가 그때 그 고양이인지 아닌지 모르는 채 죽어갔다는 것도, 혹여 그 표묘가 같은 고양이였 다하더라도 그 고양이가 도학정을 먹이를 주었던 사람으로 알고 그렇게 죽음을 맞았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었으리라는 것도 이야기해주었다. 구연기는 모진위의 표묘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두요접 본인에게 조차도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적이 없음을 문득 상기해냈다. 구연 기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두요접에 얽힌 일화들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로써 모진위의 귀에 전해지지 않았다. 구연기의 긴이야기는 그저 단 한마디 단말마(斷末魔)의 신음이 되어 모진위의 귓전을 울렸을 뿐이었다. ================================================================ 네개의 마디로 이루워진 이야기중 한부분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제1부 완결어 쩌구하기에는 어딘가 좀 미흡한 것같아서부끄럽습니다. 저 이제정말 백수아니예요. 제발 독촉 좀 자제를... 저도 나름대로는 일주일에 한편은 꼭 올리려고 노력중이니까. 독촉만 받았다하면 초조해져서 아예 글이 안써집니다. 김병진님이 모진위의 우승을 예상하셨는데... 신경써서 읽어주시는 것같아서 무 척 고마웠습니다. 그러나 히히... 죄송하게도 우승은 못했네요. 격려보다는 뼈아픈 비평에 힘을 얻는 흑수노계였습니다. #4989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20- 12/06 11:29 343 line 8. 짐승만들기. '여기는 어디인가?' 의식이 돌아온 후에도 소년은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암흑이었다. 정막이 었다. 이미 깨어났음에도 소년은 자신이 아직도 꿈속에 있는가 착각할 지경이 었다. 음습한 돌바닥에서는 스믈스믈 기분 나쁜 냉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시간은 얼마나 흐른 것인가? 지금은 밤인가? 낯인가? 나는 왜 이 곳에 있는 것인가?' 소년은 무릅을 안고 쪼그려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저 검은 장 막에 둘러쌓인듯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움직일 기분이 나지 않았지 만,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너무 배가 고팠다. 도대체 몇끼나 굶으 면 이렇게 되지? 언젠가 십이시진이상을 세끼나 꼬박 굶은 적이 있었다. 그래 도 지금처럼 이렇게 배고프지는 않았다. 소년은 차가운 돌바닥을 손으로 더듬 으며 앞으로 기어갔다. 두어장을 기어가니 돌벽이 가로막았다. 소년은 거기서 돌벽에 의지하며 우측 으로 방향을 틀었다. 여전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무언가 느낌이 있었다. 희미한 공기의 파동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마 멀리서 울려온 소리이리라. 소년은 그 파동성이 울려온 방향을 향해 벽에 몸을 의지한 채 계속해서 기어갔다. 삼십장쯤 기어갔을까? 간간히 터져나오는 파동성이 점차 확실해졌다. 머리위 에도 옆에서도 소리가 울리는 것을 보니 벽과 천장이 막혀있는 실내인 것같았 다. 소년은 동굴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앞으로 다가감에 따라 소리가 점점 뚜렸 해졌다. 분명히 사람이 내지르는 소리였다. 소년은 조급한 마음에 진행속도를 높혔다. 날까롭게 찢어지는 소리가 꼬리를 길게 늘이며 사라지더니 다시 적막이 찾아 왔다. 그리고 비릿하고 역겨운 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비장이 뒤집힐 정 도로 역겨운 냄새였다. 소년은 어쩐지 꺼림직한 느낌이 들어서 행동을 멈추고 숨을 죽인 채 동태를 살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사방은 다시 어둠과 침묵속으 로 빠져들어서 미동도 하지않았다. 소년은 잠시 망설이다가 역겨운 냄새가 나 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꽤 많은 거리를 지나온 탓에 되돌아가는 것은 내 키지 않는 일이었다.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냄새가 지독하게 느껴질 쯤, 앞을 더듬어나가던 소년 의 손에 무언가 이질감이느껴졌다. 여태까지의 냉기가 흐르는, 딱딱한 것이 아 니라 온기가 있는, 부드러운 것이었다. 천의 질감, 그리고 천밑으로 느껴지는 살 덩이의 느낌. 순간적으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딘가 사람하고는 다른 점도 있었다. 소년의 손길이 느껴졌을텐데 전혀 반응이 없었고, 냉기가 없다고 는 하지만 사람같은 온기는 느낄 수 없었고, 딱딱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몸이 라고 믿기에는 지나치게 경직되어있었다. 깜짝놀라서 손길을 거두었던 소년은 아무리 기다려도 반응이 없자 용기를 내 어 조심스럽게 재차 손을 뻗어보았다. 감촉이 느껴졌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생명체는 아닌 것이 보자기에 담겨져있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긴장을 약간 늪추 고 서서히 천조각을 더듬어 올라갔다. 보따리는 묘한 모양을 하고있었다. 보따 리의 일부가 손에 걸려 툭하고 밀려 떨어졌는데, 그 끝은 여전히 천더미에 매달 려있었다. '밀려나온 일부분인가, 일부러 이렇게 만든 푸대자루인가?' 보따리가 끝나는 부분에 고기덩어리같은 것이 삐죽나와있었다. 뭉뚝한 고기덩 어리에서는 걸쭉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더듬고있던 소년의 손을 적셨다. 그 액체의 냄새를 맡아보고 나서야 소년은 역겹고도 비릿한 냄새가 이 액체에 서 비롯되었음을 알았다. 순간 소년의 뇌리에 문득 한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 다. 소년은 소스라치며 뒤로 물러났다. 뒤로 몸을 재치고 양팔과 양다리를 부지 런히 움직이는 게걸음이었다. 물러나던 소년의 손에 둥그런 물체가 밟혔다. 딱 딱한 물질을 부드러운 껍질로 감싸고있는, 그 일부분은 길게 헝그러진 털이 뒤 덥혀있는 한개의 뾰죽한 봉우리를 가진 물체... ... 소년은 발작적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구석에 몰려서 진행이 저지된 소년의 몸 은 심하게 경련하고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사람의 머리... 그렇다면 먼 저 만졌던 푸대자루 같은 것은 사람의 팔, 그리고 가슴, 마지막엔 사람의 목... 머리가 있어야할 그 부분에서 흘러나오던 그 액체는 사자의 선혈... 소년은 격렬 하게 경련하던 신형이 겨우 진동을 멎자 이번에는 뱃속 깊은 곳의 모든 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끔찍한 마수(魔獸)였다.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창살같은 이빨로 당장에 물어 뜯으려는 듯 내리눌렀다. 소년은 두팔에 한껏 힘을 주고 버텼다. 마수의 입천장 에서는 고약한 악취의 끈끈한 액체들이 흘러내려서 소년의 몸을 적셨다. 소름 이 끼쳤다. 동굴처럼 쾡한 내부 깊숙한 곳에서 끔찍스런 혓바닥이 날름날름 다 가오고 있었다. 그 혓바닥에 감겼다가는 그대로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고름덩 어리같은 혀가 드디어 온몸을 휘감았을 찰나 소년은 진저리를 쳤다. 미끌미끌 한 괴물의 혓바닥이 다가오고있다. 다가오고있다. ...무언가 다가오고있다. '위험하다!' 소년은 퍼득 잠에서 깨어났다. 의식이 머리를 채우는 동안, 소년은 상황을 완 전히 인식해냈다. 소년은 팔구일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빌어먹을 암흑의 동굴 에 위치해있었고, 선잠에 들었었지만 어떤 경계경보에 의해서 깨어났다. 정신을 집중하고 귀를 기울려보니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소년은 지난 팔구일동안, 시간조차 정지해버린 듯해서 정확한 시간개념이야 없 었지만, 어림잡아 팔구일쯤은 된 듯한 기간동안 네개의 통로끝과 한개의 커다란 광장을 정찰하였다. 그리고 몇몇 인간이라 불리우는 짐승들과 접촉했었다. 이곳 에서 움직이는 존재라고는 인간밖에 만나본 적이 없으니 지금 다가오고 있는 무엇인가도 십중팔구는 인간이리라. 가장 위험한 존재였다. 어둠도 무섭고, 고요 도 무서웠지만 제일 무섭기로는 역시 인간이었다. '저 짐승같은 놈이 내 기척을 알아챘을까?' 이 곳에 존재하는 인간들은 절대로 말을 하지 않는다. 말은 커녕 숨소리도 내 는 것 같지 않았다. 행동에 있어서도 거의 소음을 발생시키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것, 그것이 생존의 제일조건이었다. 이곳에는 코를 골며 자거나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자는 놈이라고는 없다. 전에는 그런 놈들이 있었겠지 만 이제는 아니다. 그런 놈들의 대부분은 이미 시체가 되어버려서 전혀 소리없 는 수면을 취하거나 시체가 안된 녀석들도 시체와 비슷한 정도로 온통 긴장속 에서 얕은 잠을 취하리라. 소년도 그런 식으로 할 수 있는 만큼의 긴장상태를 유지하며 짧은 수면을 취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소리나 냄새따위에도 악몽을 이끌어내어 어떻게든 잠에서 깨어나고는 하였다. 이번에도 그렇게 위험존재의 접근을 눈치채고 수마를 털어냈다. 얼마나 신속히 반응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접근해온 상대에게 자신의 위치가 노출되지 않았았다고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이었다. 자신이 미세한 온기와 미미한 냄새, 그리고 살랑거리는 공기의 움직임 만 가지고도 상대의 동태를 알아채듯이 아직까지 살아남은 녀석이라면 상대도 그런 정도의 능력은 가능할 것이기때문이었다. 소년은 전신을 바싹 움크리고 숨소리를 최대한 억제하였다. 한두장 거리나 떨 어졌을까? 인간특유의 냄새와 미세한 온기가 확연히 느껴졌다. 그순간, 주변의 공기흐름이 갑자기 정지된 듯 느껴졌다. 냄새나 온기의 강도도 더이상 변화가 없었다. 아마 놈이 행보를 멈춘 모양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소년은 안도감과 자 신감을 되찾았다. 멋모르고 접근하던 상대가 이제서야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고 행동을 멈춘 것이다. 이 정도의 거리까지 근접해서야 자신의 존재를 눈치챌 정 도면 그리 뛰어난 녀석은 아니었다. 이곳에서의 능력은 힘이나 빠르기보다는 육감이나 감각이 우선이었다. 지척도 분간이 안가는 이런 어둠속에서의 싸움은 위치나 거리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승부를 좌우하는 관건인 것이다. 소년은 일단 잠시 사태를 관망해보기로 했다. 장기전이 된다고해서 불리할 것 은 하나도 없었다. 소년이 휴식을 취하다가 적을 만난 이 지점은 소년에게는 전략적 요충지라고 할 수 있었다. 며칠간의 생존경험이 소년에게 이와같은 위 치선정능력을 일깨워주었다. 소년의 등뒤로 오장가량이면 통로의 끝이었다. 소 년은 이미 자신이 위치한 지점의 등뒤로는 어떠한 적도 없음을 이미 정찰해둔 터였다. 대치하고있는 적의 등뒤로는 이장쯤 떨어져서 통로가 두갈래로 갈라지 고 그중 하나는 광장으로 통했고, 다른 하나는 끝도 없는 미로로 이어지고 있었 다. 쉽게 말해서 적은 배후에도 신경을 써야하는 반면, 자신은 오로지 전방만을 집중해서 경계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상대는 위험해지 고 소년은안전해지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간의 대치가 있은 후, 다시 주변의 공기에서 움직임이 느껴졌고, 온기와 냄새가 약해졌더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상대도 예상외로 그렇게 미련한 녀석 은 아니었다. 짧은 순간에 자신의 불리함을 파악하고는 미련없이 안전지역으로 후퇴해버린 것이었다. 하긴 감각이 둔하면 총명함이라도 유별나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었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한숨을 내쉬고 자세를 풀었다. 물론, 하나라도 더 죽게 만 든다면 그것도 괜찮았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신을 죽이려는 적이니까, 게다가 한놈이라도 더 죽으면 그 만큼 식량사정도 호전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더욱 괜찮기로는 가능하면 손실을 입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이 죽이려하지 않 아도 서로가 죽이고 죽으며 미로속의 인원은 날마다 줄어들었다.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소년은 가능하면 상대와의 격돌을 피했다. 통로의 갈림길이 얼마나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광장은 유일하게 하나밖에 없는 듯했다. 광장으로 모여드는 아이들의 숫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현저하게 줄어갔다.살아남은 놈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비슷한 시간에 광장에 모여들었다. 일정한 시간간격으로 광장에는 식량과 식수가 놓여지기때문이었다. 전원이 허 기를 매꾸기에는 그 양이 보잘것 없었기에 때를 놓치면 상당수는 굶어야했다. 소년이 휴식을 취하기 전, 광장에 갔을 때, 아이들의 수는 대략 열댓명이 되는 듯했다. 소년이 처음 그 광장에 들어서던 날에는 삼사십명은 족히 되는 듯한 숫자였다. 광장에서 소년은 이 곳에 갇힌 놈들이 모두 자기또래의 사내아이들임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서로 모여서 대화도 나누고는 하였다. 그러나 점차 서로의 관 계를 단절시켰고, 뿔뿔이 흩어졌다. 떠들고 위치를 노출시키는 것은 바로 죽음 에 이르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죽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꾸만 살해되었다. 자신의 위치 가 노출되는 녀석들부터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서로에 대한 불신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차피 나눠먹을 식량도 부족한 터라 처음 시작한 원흉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다. 이제와서는 자기자신 이외에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게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피에 굶주린 짐승이 되어버렸다. 소년은 휴식을 마치고 조심스럽게 광장으로 나갔다. 극도의 긴장이 다시 소년 을 휘감았다. 광장에서는 아차하면 그대로 죽음이었다. 광장에서 들어서면 처음 얼마동안은 대부분 자신의 은신과 먹을 것 찾기에만 주력할 뿐, 누구도 상대를 공격하는데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체되면 상황은 급변했다. 이런저 런 이유로 먹을 것을 확보하지 못한 놈들이 생겨나게마련이고, 그놈들의 식량확 보수단이란 것은 다음 시간을 기다리거나 타인을 공격해서 탈취하는 것뿐이었 다. 소년은 최대한 자신을 은닉한 채로, 주변의 적의 위치를 가늠하면서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바닥을 훑어나갔다. 빠르게 먹을 만큼의 확보하여 빠르게 광장 을 빠져나가는 것이 생존의 확률을 보다 높게하는 상책이었다. 이번에는 평균작이었다. 다른 때에 비해서 그렇게 늪지도 그렇게 빠르지도 않 게 이것 저것 긁어모을 수 있었다. 소년은 재빨리 잡탕덩어리를 만들어 소매춤 에 갈무리하고는 중앙의 구덩이로 향했다. 구덩이를 휘저어보니 다행히 물도 몇모금 남아있었다. 번개같이 바닥을 함았다. 그리고 주위를 기울이리며 광장 을 빠져나왔다. 소년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그 통로입구에 접어들 무렵, 벌 써 광장에서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단단한 벽이나 바닥따위 에 또 누군가의 머리가 짓이겨지고 있으리라. 소년은 자신의 본거지로 기어들어가다가 흠짓 발길을 멈추었다. 느낌과 냄새 로 미루워 볼때 소년의 전방,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 인간이라는 짐승이 몸을 숨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소년은 머리털이 주삣 섰다. 음식냄새가 문제였다. 이 것은 본인자신의 후각에 의한 탐지활동을 저해함과 동시에 타인에게 자신의 위 치를노출시키는 결정적인 약점을 제공했다. 소년도 얼마전에 그 음식냄새로 상대를 살해하고 식량을 탈취한 경험이 있었다. 소년은 이를 악물고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애써서 지형지물을 탐색해놓은 자 신의 근거지였지만 포기해야만 한다. 더이상 미련을 가지고 주춤거렸다가는 생 명이 위태로워질 뿐이었다. 일단은 물러나서 후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피눈물을 흘리며 근거지를 철수하는 소년의 전방에 서있던, 또 다른 소년은 회 심의 미소를 지었다. 만사가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음식냄새를 쫑아 서 서서히 추적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식량이란 먹어버릴 수만 있다면 전투력을 상승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강화책이기도 했지만 먹기 전까지는 전투 력을 약화시키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다. 먹어버려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과 그 강렬한 냄새로 인하여 마비된 후각으로 말미암아 음식물의 소유자는 그저 군침도는 사냥감에 지나지 않았다. 감각이 예민하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총명한 또 한명의 이 소년에게도 나름대 로의 살아가는 방법이 있었다. 타인의 습성을 파악하여 그들이 은거할 만한 장 소를 탐색한다. 대체로 광장에 인접한 짧은 길이의 통로가 그것이었다. 상대를 탐지해내면 일단은 그곳에서 물러나서 상대가 식량을 구하러 광장으로 떠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빈틈을 타서 그 요지를 점령한다. 상대가 돌아와서 식 사에 들어가려는 즈음, 급습해서 상대를 죽이고 식량을 탈취한다. 은거지와 식 량을 동시에 확보할 수있으며 광장에서의 위험한 먹이탐색도 피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의 교책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번만큼은 상대도 제법 녹록치 않아서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발견하였 고 불리한 상태에 있음을 직시하고 서둘러 도망쳤다. 그러나 이미 꼬리가 밟힌 상태였다. 소년은 음식냄새를 따라 느긋하게 추적에 들어갔다. 자신에게 익숙한 지형에 안주하던 놈들은 안전한 곳을 빼앗기게 되면 보다 더 당황하기 마련, 승 부는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공포와 악몽의 사십일이 지나고, 석벽이 열렸다. 강렬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 자 살아남은 소년들은 구석으로 불이 나게 숨어들어가 부신 눈을 비비며 경계 의 눈으로 빛의 입구를 훔쳐보았다. 그들이 뚫린 석벽을 통해서 밖으로 기어나 오기까지는 석벽이 열리고도 무려 두시진의 시간이 걸렸다. 석벽이 다시 닫히 는 상황에 직면해서야 소년들은 결단을 내렸던 것이었다. 살아남은 소년은 모 두 세명,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살기에 가득찬 악귀 그자체로 이미 자 신의 이름도 과거도 모두 잊어버린, 인성을 상실한 짐승이었다. 불필요한 동작 은 일절 없었고, 행동을 전개할 때도 인기척을 내지 않았으며, 단 한마디의 의 사표현도 없었고, 숨소리조차 내지않았다. 십대중반의 살귀들이 빠져나온 지옥도를 방불케하는 그러한 석실은 그외에도 자그마치 스물두군데가 더 있었다. 총 오백오십삼 명의 소년들이 석실로 들어 갔으나, 고작해야 팔십여마리의 어린 짐승들만이 석실을 빠져나왔다. 적어도 두세차례의 살인경험을 얻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끈질긴 악귀들에게 각 각의 호칭이 주어졌는데, 혹자는 정일호(正一號), 정이호(正二號), 정삼호(正三 號)하는 식으로, 혹자는 별일호(別一號), 별일호(別二號)하는 식으로, 그리고 소 수의 나머지는 특일호(特一號), 특이호(特二號)하는 식으로 번호로 순서된 명칭 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에게 다시 정상적인 생활이 다시 주어진다면 얼마 지나 지 않아서 이들도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이름정도야 다시 기억해낼 수 있을 터 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년들은 끝내 자신들의 이름을 되찾지 못했다. 오히려 더욱 까맣게 잊어버리고 정해진 번호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더욱 비참한 지옥이 그들을 기대리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들은 어두운 미로를 벗어나서도 여전히 목숨을 위협받고 살인을 자행하는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살행이 장 려되는 환경에 빠져버렸다. 복면을 뒤집어 쓴 흑의인들이 소년들을 지배했다. 고된 수련을 강요했고, 많은 특별한 수법들을 훈련시켜주었는데, 그것은 모조리 살인에 도움이 되는 기술들 이었다. 흑의인 자신들이 통제하는 곳에서만 살인이 금지되었을 뿐, 그 이외에 는 어떠한 살업도 제제가 없었다. 오히려 흑의인의 감시가 없는 곳에서 동료의 수급을 베어 흑의인에게 가져다주면 흑의인은 살인자의 목걸이에 자그마한 해 골문양을 하나씩 추가시켜주었고, 해골의 숫자에따라 대접을 달리해주었다. 정십일호(正十一號)는 여섯개의 해골문양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럭 저 럭 수월하게 해골을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허 술한 녀석들은 이미 대부분 사라져버렸고, 남은 녀석들의 기량은 나날이 발전하 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훈련도중 부상을 당하는 녀석들이 더러 있었고, 운수 가 닿는 편이어서 한두개의 해골을 추가할 수 있었지만, 이제와서는 단하나의 해골도 쉽지 않았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수법이 노련해지기는 마찬가지라서 노 림을 당하는 쪽도 비장의 술책을 강구하기 마련이었다. 불리한 입장이라고 느 껴지면 오로지 동귀어진(동귀어진)의 강경책 일변도였기에 섯불리 모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십일호는 해골도 해골이지만 이제는 살인 그자체가 좋았다. 죽음의 공포와 지독한 고련밖에 없는 이 지옥에서는 그나마 살인만이 유일한 쾌감이었다. 가 끔 신참들을 때려죽이는 석실미로의 투입이 가장 짜릿한 피의 제전이었지만 그 것은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었다. 정십일호는 온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모처 럼 군침도는 사냥감을 발견하였다. '저런 약골이 다 아직도 남아있다니...' 황홀할 지경이었다. 새로 숙소에 배치된 특삼호(特三號)라는 놈이었다. 정십일 호의 생각에 '특'가 들어가면 뭐가 틀려도 틀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틀려 도 많이틀렸다. 척 보기에도 신체가 부실한 약골에다가 생존의 필수조건인 오 감의 감각마저도 별로 시원치않아 보였다. 저런 녀석이 어떻게 아직도 살아남 아있는지, 어떻게 석실미로를 통과했는지 그저 신기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정십 일호는 속전속결로 끝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녀석들도 군침을 삼키고 있 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였다. 정십일호는 특삼호가 들어온 그날부터 특삼호를 예의주시했다. 예상했던 것보 다도 특삼호는 훨씬 형편없었다. 살인전문가의 필수과목인 경공이나 잠행술마 저 익힌 기색이 없었고, 은닉술도 형편없었다. 당연하게도 숙소에서 잠을 청하 는 일은 없었다. 약자들은 숙소에서의 생활을 거의 회피한다. 숙소의 밤은 그야 말로 죽음의 전쟁터였기때문이다. 특삼호도 밤이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아침 식사시간이 되어서야 숙소에 모습을 들어내었다. 정십일호는 특삼호의 습성을 대충 파악하고는 지체없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 다. 다른녀석들이 기회를 잡기전에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정십일호는 저녁식사를 마친 후, 특삼호에 앞서서 관목숲으로 들어갔다. 물론, 특삼호는 특정지역에 구애됨이 없이 날마다 잠자리를 달리하였다. 그러나 놈의 행동방식에 비추어서 다음 대상지를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십 일호는 신중하게 예상지점을 탐지하고는 적당한 위치에 자신을 은폐시켰다. 그 리고 다가올 살육의 쾌감에 가슴을 떨며 특삼호의 등장을 기다렸다. 정십일호 의 추리는 과연 틀림이 없었다. 한식경쯤 시간이 흐른 뒤에 특삼호가 신혀을 드러낸 것이다. 정십일호는 이미 체온을 충분히 떨어트렸고, 체취까지도 주위환 경에 동화시켜놓은 터라 발각될 염려는 하지않았다. 으슥한 구덩이에 몸을 눠힌 특삼호의 가슴이 잠시후 규칙적인 율동을 바뀌어 졌다. 또래에서는 알아주는 도살자 정십일호가 특삼호의 수면정도를 간파못할 리가 없었다. 일각이 지나자 특삼호는 정십일호가 바라는 바로 그 상태에 돌입 하였다. 특삼호는 관목이나 풀들이 무성하게 자란 곳을 잠자리로 잡고있었다. 위급시 숨어들기 편한 장소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잠이든 채로 달아나서 숨 을 수는 없을 터, 정십일호는 잠속에 빠져들어있는 특삼호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지금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어느정도의 피로감을 회복한 특삼호가점점더 가수면상태로 복귀하게 될 것이다. 정십일호는 미끄러지듯 특삼호가 잠들어있는 구덩이로 거리를 좁혀나갔다. 정 십일호의 손에는 어느새 비수가 달빛에 번득이고 있었다. 사정거리에 이르자마 자 정십일호는 추호도 망설임 없이 비수를 내리꽂았다. 군더더기가 없는 매끈 한 연결동작이었다. 피잉-. 부드럽게 살갖을 파고들었어야 마땅할 비수가 단단한 바닥에 부딪치는 둔탁한 충돌음을 일으켰다. 비수는 특삼호의 가슴을 간발의 차이로 비켜서 겨드랑이를 통과해있었다. 특삼호가 어느새 바닥을 굴러서 저만치 떨어져나갔다. 정십일호는 자신이 너무 손쉽게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목표물인 특삼 호도 그 지옥같은 석실미로에서 살아남은 끈질긴 생명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간 과해버린 것이다. 특삼호는 쉽게 눈에 띌 만큼 오감이 둔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로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 특기가 있었음을 의미했다. 시력과 청력이 떨 어짐으로해서 어둠과 적막이 오히려 그의 신체적 약점과 둔한 감각을 보완해주 는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는 특이한 부류의 종자들을 정십일호도 석실에서 조 우했던 적이 있었다.오감이 약한 대신에 육감이 남달리 발달한 녀석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은 외부의 미세한 기운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신체를 보유하고있었 다. 정십일호는 일이 너무 수월하게 풀려가자 방심한 나머지 너무 일찍 살기를 표출해버린 것이었다. 특삼호는 육감으로 그러한 살기를 감지하고 간발의 차이 로 정십일호가 펼친 회심의 일격을 피해낸 것이었다. 정십일호는 그대로 밀어부치기로 작정했다. 물론, 특삼호쪽에서는 싸움이 내키 지않는 듯 빈틈만 보이면 달아날 기미였다. 그러나 이미 음모가 드러나고 만 것, 이후로 상대는 더욱 처철히 자신을 경계를 할 터이니 시간이 흐를수록 경쟁 자들보다 불리해질 뿐이었다. 다소간의 부상위험이 있더라도 살인을 강행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정십일호의 비수가 다시 허공을 갈랐다. 서너번의 칼질만으로 특삼호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십여초에 이르렀을 때는 거의 상대를 찌를뻔했었다. 특삼호는 이곳의 수련생이라면 누구나 구사히는 경 신법도 못 익혔는지 굼벵이처럼 흐느적거렸다. 하지만 정십일호는 긴장의 끈을 더욱 끌어당겼다. 위기속에서도 특삼호의 눈길은 전혀 흔들림없이 정십일호의 눈길을 놓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정십일호는 십성의 공력을 비수에 실어 최고의 절초를 펼쳐내었다. 드디어 특 삼호는 완전히 신형이 무너뜨릴 수 있었다. 정십일호는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최후의 일초를 찔렀다. 특삼호는 더 이상 피해낼 여력이 없어보였다. 비수가 목줄기에 파고들때까지도 특삼호는 신형을 정비하지못했다. 그러나 특 삼호의 눈만은 여전히 흔들림없이 정십일호의 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비수는 특삼호의 목을 단숨에 관통해버렸다. 적어도 정십일호가 느끼기에는. 씨잇-. 날카로운 파공음이 정십일호의 귓전을 때렸다. 정십일호의 시야에 빨간 실선 이 들어왔다. 특삼호의 목에 그어진 선이었다. 비수가 스치고 지나간 통과경로 를 그대로 나타내주고 있었다. 정십일호는 그제서야 자신의 비수가 아슬아슬하 게 빗나갔음을 알아챘다. 정십일호는 특삼호가 어떻게 자신의 비수를 피했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잠든 특삼호에게 펼쳤던 자신의 첫번째 공격도 지금 처럼 아슬아슬하게 겨드랑이에 걸렸고, 그때도 특삼호의 동작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음을 상기해내었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었다. 정십일호의 마음은 재공격을 시도하고있었다. 하지만 그의 전신은 마음과는 반대로 어떤 동작도 일으키지 못했다. 잠시후 정십일호가 고개를 꺽으며 쓰러 졌다. 특삼호는 경공도 잠행술도 배우지 못했다. 대신에 특삼호는 정십일호가 잡다 한 살인기술을 배우는 그 만큼동안 다른 것들을 익혔다. 그중 하나는 특삼호가 익히 알고있던 검법, 추혼십이절의 실전기술을 전수받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 는 상대의 검법을 파악하여 그 약점을 찌르는 비술이었다. 특삼호는 먹고자는 시간이외에는 오로지 그 두가지 기술을 강제적으로 전수받아야했다. 특삼호는 상대보다 빠르지 못했다. 그래서 거의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을 정도 의 최소한의 거리만을 이동하여 상대의 비수를 간발의 차이로 비켜냈다. 그것 은 그가 익히고 있는 한가지 비법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대방의 비수가 움 직이는 예상로를 변별해내고, 상대의 헛점을 감각적으로 감지해내는 비법이 특 삼호의 회피시간과 거리를 측정해주었던 것이다. 또한 특삼호는 자신이 익히고 있는 또하나의 기술로 상대의 심장을 찌를 수 있었다. 특삼호는 흑의인이 전수 해준 추혼십이절의 실전운용에 따라 추혼십이절의 제칠절 봉사쟁화로 반격을 가하였다. 무기를 잡을 여유가 없었던 특삼호는 단지 수도(手刀)만으로 추혼검 을 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특삼호가 이곳으로 잡혀오기 이전에 연성한 타력 법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기억할 여유가 없던 특 삼호가 자신의 수도를 발사시킨 힘이 비룡육권의 '탄'자결 이라는 것을 기억하 고 있었을 리는 없었고, 그 힘의 집점에는 하상곤의 원추뿔치기와 거룡십팔수의 용각접응이 있었음은 기억하고 있었을 리는 더 더욱이 없었다. ================================================================ 틀린 점을 모니터해주신 김병진님과 권선희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가뜩이나 흉칙한 내용이 더욱 흉칙해지는 것만 막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작품을 거의 다시 읽지 않는 편입니다. 으으. 다시 읽으면 너무 마음에 안들어서 가슴만 아프거든요. 앞으로도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류성원님 기발한 착상에 감탄하며 잠시 유혹을 받기는 하였지만 추후전개는 아무래도 4번의 방향이 유력할 것 같습니다. 역시 감사. 흑수노계였습니다. #5028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21- 12/14 22:35 319 line 누구나 할 것없이 이곳에서는 죽기살기로 사람죽이는 방법을 배우고 익혔다. 그것이 이곳에서 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터득시켜주는 가장 유력 한 길이기때문이었다. 생존기술을 터득한다는 면에서는 별자(別字)계열의 수련 생들이 정자군(正字群)의 살수후보생보다 좀 손해를 보는 감이 없지 않았지만 별군의 소년들이 특별히 불리할 것은 없었다. 정으로 시작하는 무리들과 별로 시작하는 무리들은 특별한 공통과목의 수련을 제외하고는 서로 마추칠 일이 없 었다. 활동반경이 달랐던 것이다. 정호는 정호대로 별호는 별호대로 저희들끼리 의 생존경쟁이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특자로 분류되는 유일한 구성원인 특 삼호는 아주 불리한 경우에 속했다. 정호는 글자그대로 정통적인 자객의 양성과정이었기에 오로지 인간을 살해하 는 기술들만을 집중적으로 익힐 수 있었고, 별호는 별호대로 자신의 장점을 십 분활용하는 특이한 살인비법을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특삼호는 달랐다. 자객 으로서의 살인술은 기본적인 것외에는 거의 익힐 기회가 없었고, 어찌보면 자객 술로는 어울릴 것 같지않은 강호의 정상적인 비무기술에 대부분의 정력을 할애 해야했다. 그러고서도 훈련외의 일상생활에서는 형편에따라 별군의 무리들과도 정군의 무리들과도 죽음을 사이에 두고 어울려야했다. 특삼호는 자신이 익히 알고있는 추혼십이절외에 어떠한 무공도 전수받지 못했 다. 두명의 흑의인에게 번갈아 끌려다니며 추혼십이절로써 상대를 암습하는 방 법을 갈고 닦았다. 한명의 흑의인은 특삼호에게 실전상황을 가상한 추혼십이절 의 운용비결을 전수해주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몰라도 그는 철두철미할 정 도로 실전적인 추혼검을 구사하고있었고, 특삼호는 딱 알맞게도 그 운용의 묘만 빠진, 기초가 잘 짜여진 기본적인 추혼검법과 그 검법의 완성에 필요한 안내지 도와도 같은 것을 머리속에 각인시켜놓고있었다. 흑의인이 추혼십이절의 열번째수법, 추국망동(秋菊望冬)으로 특삼호의 검을 받 아치고는 지체없이 장미백변을 발출하였다. '좌측에서 추국망동으로 시작해서 우상방으로의 장미백변이라... 그렇다면 우반 보(右半步)를 옮겨 화개화사로 대항하는 것이 적당하겠구나. 사화결실(死花結 實)로 변환을 구해온다면? 그때는 일란팔엽(一蘭八葉)이다.' 특삼호는 그렇게 대강의 형세를 예측해보고는 우측으로 비스듬히 걸음을 옮기 며 그 진행방향만 변화시켜 흑의인의 추국망동에의해 튕겨지는 검의 반탄력을 그대로 빌여다가 화개화사를 펼쳤다. 압박해오던 흑의인의 검영이 슬그머니 자 취를 감췄다. 순간적으로 대적하던 검세의 행방을 시야에서 놓쳐버린 특삼호는 상대가 사화결실로 변초했으리라 예상하며 황급히 일란팔엽의 자세로 돌입하였 다. 그러나 장미꽃송이 같이 화사한 검영이 일란팔엽의 방어망을 뚫고 특삼호 의 옷깃을 흔들었다. 흑의인은 아직도 장미백변이었다. 장미백변에서 변화된 초 식이 다시 장미백변이었던 것이었다. 흑의인이 검을 물리며 말했다. "화개화사는 적절했다. 그러나 너무 성급한 일란팔엽이었다." 특삼호도 자신의 실수였음을 곧바로 깨달았다. 일란팔엽은 검이 진행하는 방 위에서의 모든 기습을 막아내고 반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란팔엽은 변초가 이루워지는 그 시발점에는 헛점이 남기는 약점이 있었다. 흑의인은 장미백변을 다시 장미백변으로 변환시켰고, 변화하고서도 여전히 장미백변이었던 흑의인의 검은 특삼호가 펼친 일란팔엽의 출발점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일란팔엽이 만들 어놓은 헛점을 파고들어 특삼호의 피부를 건들이고는 멈추었다. 추혼십이절의 또 다른 운용인 이단전개의 기교였다. 특삼호가 말없이 봉사쟁화의 일점을 그려보였다. "그것이 옳은 방법이다. 장미백변으로 남아있건 다른 초식으로 변화하건 봉사 쟁화라면 그대로 관통해버릴테니 최소한 패배를 자초하는 일은 없었겠지. 추혼 십이절의 초식속에는 언제나 다단전개의 가능성이 있음을 새겨두거라." 이단전개에대한 효능을 단단히 깨달은 특삼호는 다음날, 자신을 가르치는 또 다른 흑의인에게 이단전개라는 새로운 기교로 덤벼들었다. 하지만 특삼호의 신 기술은 흑의인의 평범한 일검에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 다. 특삼호는 혈귀(血鬼)에게 당한 수법을 빙귀(氷鬼)에게 퍼붓고, 빙귀가 되받 아친 수법을 혈귀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시도는 빙귀에게도, 혈귀에게도 한번도 공격을 성공한 적이 없었다. 특삼호로서는 대단한 묘책이자 의욕적인 시도였지만 한마디로 아직은 역부족이었다. 혈귀, 빙귀는 특삼호가 자기마음대로 붙힌 자신을 가르치는 흑으인들의 별명이 었다. 모든 것이 비밀리에 이루워지는 이곳인지라 통성명같은 것은 어림도 없 는 형편이었으니 어차피 이름이나 내력따위는 알 수가 없었다. 특삼호는 그저 냉정하기 짝이 없는 추혼십이절의 전수자는 빙귀라고, 백이면 백 모두, 대결때 마다 약점을 파고들어서 자신의 피를 보고야마는 무공파해법의 전수자는 혈귀 라 부르며 증오심을 불태웠다. "그 수법의 맹점은?" 특삼호의 이단전개를 간단하게 격파하고 그 댓가로 그의 몸에 또 한번의 핏자 국을 남긴 혈귀가 물었다. 특삼호는 대답대신 검을 들어 장미백변을 기동시키고, 이단변화로 들어서기 직 전에 동작을 정지시키고, 혈귀의 표정을 살폈다. "그렇다. 초식이 변환되는 시점에 찰나의 멈춤이 있다. 같은 속도의 반격이라 면 선기를 빼앗길 수 밖에... ...다시!" 특삼호는 혈귀의 반격을 파해하기위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빙귀가 오로지 추혼십이절하나로 특삼호의 추혼십이절을 상대해주는 반면, 혈귀는 천하에 널려 있는 흔하디 흔한 검술로 특삼호의 헛점을 찔렀다. 그렇다고해서 혈귀를 상대 하기가 빙귀보다 유별나게 곤란한 것은 아니었다. 다수의 검법을 사용하기는 해도 특삼호에게는 한가지 검법만 상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특정검법 한가 지를 선택하여 특삼호를 상대하다가 특삼호가 그 검법에 완전히 익숙해지면 비 로서 검법을 바꾸었다. 게다가 특삼호가 파악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 검술의 원리와 방식을 상세한 설명이 있었고, 다만 그 파해법을 찾아내는 일만 이 특삼호의 몫이었다. 이번 검법의 경우도 이미 몇번의 설명이 있었고, 특삼호 가 열흘이상을 시달려온 검법이었으니 특삼호로서도 그 대체적인 요점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완전하게 분석하지 못하고 있음이 이 일전으로분명해졌다. 특삼호는 그동안 혈귀에게서 접했던 무공들의 기본원리와 공통점, 차이점따위 를 다시 한번 검토해보았다. 혈귀가 선보여준 검법들은 나름대로의 순서에 따 라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특징이 있었으므로 꼼꼼히 되집어보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궁리끝에 특함호는 그 검법의 파해법에 대한 새 로운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특삼호는 새로운 대책이 수립되자 다시 검을 뽑아 들고 혈귀를 찔러들어갔다. "다시!" 특삼호의 몸에 또 하나의 작은 상처를 안겨준 혈귀가 싸늘하게 말했다. 특삼 호는 가슴을 저미는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하나 하나 혈귀와 겨룬 몇합의 과정을 분석해보았다. 한번 실패할 때마다 상처는 하나씩 늘어갔다. 어김없었다. 이것은 특삼호가 이 검법의 약점을 찾아낼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었다. 혈귀가 납득할 때만한 약점을 특삼호가 발견할 때까지 특삼호는 새로운 시도를 해야하 고, 그 실패가 반복될 수록 특삼호는 위험해졌다. 혈귀가 치명상을 입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처가 많을수록 신체는 부자유스러워지고, 그것은 교육시간을 제외 한 모든 시간동안의 수련생들과의 암투에서 불리한 여건을 조성해주었다. 특삼 호는 두개의 상처를 더하고나서야 혈귀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일단, 그 검법의 구조만 정확히 이해하게되면 한동안은 그래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빙귀가 수단을 마련해주었다. 한가지 검법에대한 장단점을 파악하게되 면 특삼호는 그 장점을 추혼십이절에 대입하여 빙귀에게 시험해보았고, 빙귀가 그 파해법으로 특삼호에게 반격을 가했다. 이로서 특삼호는 빙귀의 약점추궁기 술을 자신의 추혼검에 대입하여 혈귀의 검법에 보다 적절히 대항하게 되는 것 이었다. 그러나 배우는 자세의 처절함은 혈귀의 경우나 마찬가지였다. 특삼호가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정확히 그 검술의 요지를 파악하여 빙귀를 시험하 느냐에 따라 보다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게되고, 보다 적은 상처를 당하며 혈 귀의 단련을 통과할 수 있게되는 것이기때문이었다. 처참한 낭패를 거듭하고 나서야 간신히 혈귀에게서 풀려난 특삼호는 숨돌릴 사이도 없이 빙귀에게 시험할 수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몇차례 실패한 후에 야 혈귀의 수법을 간신히 막아낼 수 있었다. 특삼호는 이렇게해서 희미하게 보 이던 혈귀가 펼친 검법의 단점을 좀 더 뚜렸하게 확대해내었다. 이제는 혈귀가 펼친 수법을 추혼십이절의 초식으로 응용하는 방법을 찾아야했다. 그 방법만 찾아낸다면 그 검법의 단점과 상통하는 추혼십이절의 운용상의 단점을 추혼십 이절로 공격하여서 그 단점에 대처하는 빙귀의 수법과 빙귀의 검이 자신을 격 퇴시키는 방법에의해서 발견되는 혈귀의 약점을 동시에 알아내게 되는 것이었 다. 혈귀가 이번에 문제로 내놓은 검법은 비교적 변화가 적고, 쾌검을 능기로 하는 유파의 검법이었다. 십여개의 상처를 통해서 얻어낸 두어개의 변화원리와 약점이 있었다. 그 원리들을 최선을 다해서 추혼십이절로 표현해는 것, 그것이 혈귀에게 당하는 상처를 하나라도 줄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특삼 호는 혈귀의 숙제와 추혼십이절의 결합에 머리를 집중시키며 빙귀의 수련실로 들어섰다. 빙귀는 돌문을 밀고들어오는 특삼호를 보며 다시 취랑(翠娘)의 마지막 눈빛을 떠올리고 말았다. 언제나 취랑을 생각나게 하는 녀석이었다. 살수에게 있어서 정(精)이란 독약보다도 위험한 것이었다. 특히 여자와의 애정은 더 더욱 그러했 다. 모름지기 살수는 무정해야하는 법. 검을 사용하는 자객에게 있어서 검도 그와 같은 법이었다. 검은 도구일 뿐이 다. 오로지 자신을 지키고 상대를 해치기위해 존재하는 도구일 뿐이다. 활검(活 劍)이니 하는 따위의 말은 검의 존재이유마저 부정하는 자가당착의 모순에 지 나지 않는다며 빙귀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의미에서 특삼호라는 녀석은 자신 과 같은 추혼십이절로 검법을 사용하면서도 자신과는 정반대쪽에 있는 모순의 존재였다. 아무리 겉멋만 들어버린 위선에 가득찬 칠주검파에도 특삼호와 같은 녀석은 없었다. 처음 특삼호를 상면했을 때, 빙귀는 졸지에 황금 백오십량이 손아귀를 빠져나 가버리는 실망감을 느꼈다. 살인청부업이라는 직업에 차츰 싫증을 느껴가던 빙 귀에게 황금 이백냥짜리 낯설은 청부가 들어왔다. 누군가를 죽여달라는 청부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추혼십이절로 살인을 하는 법을 가르쳐주라는 색다른 청부 이었다. 빙귀는 이제야말로 살수에서 은퇴할 절호의 기회라 반색하며 선금으로 황금 오십냥을 받고는 청부를 수락하였다. 그동안 모아놓은 재화에 황금 이백 냥을 보태면 그냥 저냥 여생을 무위도식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같았다. 그러나 특삼호를 만나고나서 빙귀의 소박한 꿈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이 청부는 그 야말로 단지 황금 오십냥짜리 이년간의 헛된 노동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 다. 빙귀가 보기에 특삼호는 자신이 알고있는 한, 최악의 자객재목이었다. 아무 리 악을 써서 가르친다고해도 특삼호같이 형편없는 놈에게 이년안에 추혼검의 숙련자를 이겨낼 만한 실력을 배양시켜준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 것만 같았다. 빙귀는 특삼호가 내공을 익힐 수 없는 불구의 몸이란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 다. 그것은 그런대로 참을 만 했다. 어차피 시범대련도중 목표를 암습하는 것이 라고 했으니 승부의 관건은 내공이 아니라 적절한 급소의 일격에 있었다. 하지 만 최소한도의 체력과 신체적 골격은 있어야 그 기술이라도 가르쳐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도 빙귀를 암담하게 만든 것은 특삼호의 검술이었다. 특 삼호의 검술이 분명히 추혼십이절이긴 추혼십이절이었는데, 빙귀가 보기에 그것 은 사람을 죽이고 해친다는 검 본연의 존재이유와 하등 상관없는 의미로 특삼 호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빙귀는 문득 칠주검파의 장로들이 특삼호의 추혼십이절을 보면 무어라고 말할 까 궁금해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키워낸 최상의 제자, 빙귀의 검법을 이단으로 몰아부쳤다. 도(道)도, 예(藝)도 없는 오로지 살기뿐인 악마의 검술이라고 비난 하였다. 그리고 빙귀를 칠주검파에서 내쫑아버렸다. 빙귀는 그런 장로들을 위선 자라고 조소하였다. 검이란 자신을 지키고 상대를 해하기위해서 만들어진 무기 가 아닌가? 빙귀가 듣기로는 애초에 칠주검파를 창건과정 자체가 그러했다. 옥 진강조사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명리를 위해 옥진강이 창안한 원래의 추혼십이 절을 불구로 만들어버렸다. 추혼검의 고절한 정수는 모두 내던져버리고 오로지 실용적인 면만을 숭상하며 부각시켰다. 그런 그들이 이제와서 빙귀의 검에 대 해 너무 패도적이니 잔인하니하면서 왈가왈부하고 있는 것이다. 아닌 말로 빙 귀는 자기자신이 오히려 칠주검파의 발생목적에 부합되는 유일한 인물이 아닐 까하고 의아해할 지경이었다. 추혼십이절의 실용적인 면만이라도 세상에 남기겠다던 칠주검파는 세월이 흐 르자 그 본연의 목적을 잊고 다시 우왕좌왕했다. 오로지 신검 옥진강의 추혼십 이절만을 그리워하고, 칠주검파의 추혼십이절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세인의 관심 을 쫓아 결국 구경거리에 지나지않는 검법으로 방향전환해버렸다. 이제는 실전 적 무술도, 궁극의 무도도 아닌, 그런 추혼십이절을 구사하는 그 칠주검파의 장 로들이 특삼호의 추혼십이절을 본다면 무어라고 할 것인지 빙귀는 쓴웃음이 나 왔다. 빙귀가 굳이 살수로써 일생을 살게된 이유도 어쩌면 칠주검파에 대한 그런 반 발심리였는지도 모른다. 검술은 살생을 하는 방법, 그러니 검법자에게 가장 어 울리는 직업이 바로 살인청부업이라는 자학적인 반항이었다. 여하튼 빙귀는 칠 주검파의 도덕자연 하는 태도를 경멸하였다. 그런의미에서 특삼호의 추혼십이 절은 칠주검파가 감히 고개를 들고 쳐다보지도 못할, 빙귀가 구역질을 참을 수 없는, 검,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검법이었다. 빙귀는 결국 잔금 백오십냥에 대한 미련을 툭툭 털어버렸다. 그러나 선금 오십냥을 이미 챙긴 몸, 어찌됐든 이년동안은 특삼호의 곁에 있어야했다. 빙귀는 이 할 일없는 이년동안 특삼호의 추혼십이절을 소멸시켜 보리라 작심 했다. 일종의 음모였다. 취랑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렸던 그 마음으로, 빙귀는 철 저하게 특삼호의 검에 살기를 심어넣기 시작했다. 검을 무슨 진리탐구의 수단 으로 느끼게하는 특삼호의 검법은 정말 싫었다. 빙귀는 노련한 살수답게 치밀 한 계획으로 특삼호의 검심(劍心)을 살기로 바꿔갔다. 빙귀는 누가 뭐래도 실제 적인 싸움에 있어서 추혼십이절에 관한 한, 현존하는 최고의 고수였다. 반면에 특삼호는 투사로서는 최악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상승 검법에 이르기 위한 내공은 고사하고라도, 제대로 자세조차 갖추기 어려운 기형적인 골격에다가, 기 초체력이 전무했으며, 일상적인 활동도 힘겨운 약질이었다. 특삼호의 추혼십이 절을 망가뜨리는 정도는 정말 자신있었다. 그랬던 것이... ... 확실히 특삼호의 추혼십이절은 눈에 띄게 달라져갔다. 검에 심어놓은 살기도 점차 그 빛이 뚜렸해져갔다. 그러나 빙귀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특삼호의 가슴속에도, 특삼호의 검끝에도 살기가 충만했지만 그의 추혼십이절 자체에는 여전히 티끌만큼도 살기가 없었다. 그의 추혼십이절도 변해가기는 했지만 그것 은 본질이 변화했다기보다는 숨겨져있던 본질이 더욱 뚜렸해져가는 변화임을 빙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빙귀가 취랑을 베어버리기는 했지만 자신의 마음속은 베지못했던 것처럼, 예전의 특삼호를 소멸시키기는 했지만, 특삼호의 추혼십이절은 소멸시키지 못했던 것이었다. 추혼십이절을 익힌 자는 다른 어떠한 무공도 익힐 수 없다. 빙귀도 그런 피해 자의 한사람이었다. 추혼십이절을 익히면 다른 무공을 익힐 수 없는 이유가 무 엇인지 많은 이들이 그 원인을 규명하고자 노력했으나 아무도 그 원인을 밝혀 낼 수 없었다. 신검 옥진강 본인마저도. 빙귀는 다시 한번 추혼십이절의 그 신 비스러움에 경악하고말았다. 특삼호의 진보를 지켜보고있자니 추혼십이절만의 티끌 한점없는 순수가 끝이 안보이는 낭떠러지처럼 빙귀를 압도하였다. 취랑을 죽였을 때도 그랬다. 빙귀는 자신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제거하기 위해서 취랑 을 죽였다. 그러나 그 감정의 발생점이었던 취랑은 사라지고나서야 빙귀의 가 슴속에 남아있던 그 끝모를 심연의 감정들이 그 본모습을 드러내며 이미 땅속 에 묻힌 취랑을 끌어냈던 것이었다. 빙귀는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의 철과 같은 신념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심 씩 균열을 일으키는 것같은 착각에 빠졌다. 무엇일까? 특삼호의 내면속에 숨어 서 그의 추혼십이절을 지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빙귀는 모르고 있었다. 특삼호의 가슴속에는 깨지기 쉬운 작은 유리병같은 것 이 숨어있음을, 그것은 특삼호에게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란 것을. 특삼호는 이미 인성을 상실한 짐승과 다름없었지만 그럼에도 무의식의 깊은 곳에 자리잡은 무언가가 그것을 놓지않고 있었다. 생존본능이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생명보다 소중한 그 유리병, 혹은 주머니같은 그것마저 빼앗아가지 는 못했던 것이었다. 빙귀는 모르고 있었다. 그 유리병, 혹은 주머니 같은 것속에는 도학정의 영혼 이, 황경의 미소가, 하상곤의 눈길이, 목선민의 온기가, 구연기의 열망이, 장여진 을 향한 애뜻한 마음이 들어있음을. 빙귀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던 그 무렵, 혈귀도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특삼호를 생각하고 있었다. 자객양성의 첫단계는 철저한 인성파괴였다. 그것은 폐쇄된 석 실에 입문자를 가두워놓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치밀하게 세밀화된 몇가 지 과정을 거쳐서 수련생들을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괴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수없는 실험을 통해서 체제가 확립된 후로는한치의 오차도 없었던 인성변화과 정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혈귀는 그 인성말살과정의 안전성에 회의를 던지고 있는 것이었다. 어딘가모르게 특삼호는 다른 자객훈련생과 다른 점이 있었다. 오로지 자신이 살기위해 상대를 죽이는 것만이 전부여야했는데, 특삼호에게는 생존이외에 어떤 다른 것이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혈귀는 최고의 자객양성 전문가였으며, 이 훈련소를 총괄하는 책임자였다. 그 런 혈귀가 자신의 시간중 절반을 뚝 떼내어 오로지 특삼호에게만 매달리고 있 었다. 그만큼 특삼호가 맞게될 임무는 중요한 것이었다. 혈귀도 처음에는 특삼 호를 활용하는 계획에 회의적이었다. 누가 보기에도 특삼호는 자객으로 쓰기에 는 기본이 안되어있었다. 실패의 부담이 너무도 큰 계획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돌변하였다. 고작 예비책에 불과하던 특삼호가 가장 유력한 무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목표물에대한 몇차례의 제거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더군다나 예 상밖으로 특삼호는 잘해내고 있었다. 거의 기적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 였다. 단순히 기술구사만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특삼호는 이미 추혼십이절의 고 수라고 불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특삼호는 혈귀가 과제로 내준 검법들을 단 지 육개월만에 칠곱가지나 독파해버렸다. 이제는 슬슬 본과정에 들어가도 될 만한 수준이었다. 혈귀는 특삼호에게 아주 특별한 비책을 전수해주고 있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전해져서는 안되는 자신만의 비기였지만, 아낌없이 특삼호에게 물려주고 있었 다. 별로 아까울 것은 없었다. 특삼호는 어차피 일회용 소모품에 불과하니까, 거 사를 치르고도 특삼호가 생존해있을 수 있는 확률은 전혀 없었다. 혈귀의 비술은 무공의 구조와 본질을 파악해내서본능적으로 그 약점을 꿰뚫 어버리는 수법이었다. 살수로써는 더 할 나위없는 특기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익히기가 대단히 어려운 기법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무학의 기본원리에 대한 이해가 빨라야 했다. 그리고 아주 예민한 육감을 보유해야하며, 인간의 심리에 대해 정통해야했다. 특삼호는 보기와는 다르게 이런 부분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혈귀는 우선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검법들을 선정해서 특삼호에게 그 원 리와 파해법을 익히도록 하는데 주력하였다. 특삼호는 기특하게도 반년만에 그 단계를 넘어섰다. 이제는 무학의 본질적인 핵심과 고급무공을 다루워 볼 단계 에 들어선 것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단 한가지만 빼고는. 특삼호는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개체유지본능이외에 무언가를 아직도 남겨두고 있는 것만 같았다. 혈귀는 아주 가끔씩 특삼호에게 서 알을 품고 있는 어미새와도 같은 분위기를 느끼고는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상이었지만 특삼호를 보고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고는 하였다. 혈귀로서는 께림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어미새는 자신의 생명에 우선해서 자신의 새끼를 돌본다. 새끼를 보존하기 위 해서 흉악한 맹금에게 자신을 먹이로 대신 투척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거미 란 놈은 아예 알에서 깨어나는 새끼들에게 자신의 육신을 먹이로 희생하지않는 가? 자객에게는 너무도 치명적인 감정이었다. 특삼호가 무언가 알같은 모양의 것을 가슴속에 품고다니는 것만은 사실이었 다. 그러나 누군가가 다가와서 '너 꼭 알을 품은 어미닭 같구나' 한다면 특삼호 는 대번에 '저런 미친 놈!'하고 비웃어버릴 것이다. 특삼호의 품속에 있는 것은 그저 평범한 비취색 비단주머니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부터 지니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오래전부터 지니고 있던 금낭이었다. 물론, 무슨 소중한 추억따위가 특삼호의 기억속에 남아있어서 그 비단주머니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살아가는데 조금이라도 지장을 준다면 특삼호는 조금도 미련없이 그것을 던져버렸을 것이다. 다만 무언가를 그 주머식속에 넣 어두었고, 그것이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었기에 지니고 있을 따름이었다. 우연히 목선민이라도 나타나서 '야! 나 그 주머니에 뭐가 들었는지 알어. 네가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들이 들어있지?'한다면 특삼호는 그런 기이한 추측 을 하는 녀석이 기가막혀 코웃음마저 못꿔주었을 것이다. 특삼호의 주머니속에 들어있는 것은 단단하고 동그란 차돌맹이였다. 주머니의 끈을 잡고 주머니를 휘둘러대면 그 자체가 훌륭한 무기의 역할을 했기에 특삼 호는 주머니속에 돌을 담아 휴대용 무기로 지니고 다닐 뿐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특삼호의 무의식속에는 분명히 알과 같은 무엇이 있었다. 모 진위의 가슴속에서는 투명한 유리병같았던 그것이었다. 모진위는 슬프고 힘들 때면 가슴속의 그것을 들여다보며 세상에대한 사랑을 다시 회복하고는 하였다. 그리고 악몽과 고통으로 자기자신을 잃었을 때조차 그 유리병같은 마음을 잃지 않고 자신의 본성이 사라진 특삼호에게 전해주었다. 물론, 특삼호는 더이상 모 진위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특삼호에게 그것은 이미 그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투명한 그것이 아니었다. 투과가 불가능한 각질로 둘러쌓인 열어볼 뚜껑조차 없는... 이를테면 알과도 비슷한 그것으로 변해있었다. 언젠가 껍질을 깨고 세상 에 태어날 그날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어떤 생명체의 태아처럼, 미미한 폭력만으 로도 순식간에 산산히 부서져 그 생명력을 잃어버릴 위태롭고 연약한 싹처럼 그렇게 특삼호의 가슴속에 담겨있었다. ================================================================ 2부에 대해서 실망이 많으신 것같군요. 벌써 아이디어가 고갈된 건가? 아니면 성의부족일까? 굳이 변명을 하자면, 추리적인 요소를 가미시키볼 마음에 1부에서 2부로 넘어오는 과정을 전부 생략해버렸습니다. 어쨌든 비평은 많은 도움이 됩니다. 몇분의 비평덕분에 다시 한번 곰곰히 작품방향을 검토해볼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앞으로도 전개가 좀 이상하면 지체없이 비판부탁드립니다. 그래도 굳이 1부에서 제가 의도했던 주제와 2부의 의도를 밝히기를 원하시는 분은 메일 주십시요. 간단한 해설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참, 한가지 광고를 하자면 좌백님의 혈기린외전이 6번. 작가연재란으로 옮겨져있습니다. 무림동 회원이 아니신 분들은 GO SG77 하셔서 2번란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면 바둑신문 왯사이트도 가능하고요. 그신문의 연재소설이니까요. 그 홈페이지때문에 무림동 혈기린의 조회수가 많이 줄었지요. 좋은 작품 연재중단되었다고 걱정하시는 분계실까봐 노파심에서 혈기린외전을 홍보하는 흑수노계였습니다. #5100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22- 12/30 02:56 239 line "검의 세력권에 드는 사정거리는 검을 중심으로 그려진 원으로 그려 볼 수 있 다. 마음속에는 항상 그 거리에 대한 계산이 반복되고있다. 그러다보면 본능적 으로 무형의 원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은 시전자의 주위에는 의식하지 않고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구형의 공간이 형성되는 것이지. 고수면 고수 일수록 그 공간의 존재에 익숙해져서 무의식중에도 항시 그 경계를 의식하게된 다. 그러다보면 더러는 고정관념으로 굳어져서 그것이 악습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소위 맹점이라는 것이지. 자! 보아라." 혈귀가 천천히 검을 움직여나갔다. 무질서하게 휘두르는 것 같았지만 여지없 이 크고 작은 동심원들이 무수히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예전이라면 특삼호의 형편없는 시력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동심원들의 출몰이었으나 지금 의 특삼호는 특별히 주의을 기울이지 않아도 그 동심원들의 퀘적이 저절로 눈 에 들어왔다. 특삼호도 이제는 제법 이력이 나서 왠만한 검법쯤은 한 눈에 그 숨겨진 본질을 간파 할 수 있게 되었다. 혈귀가 전개하고 있는 검법은 백학파(白鶴派) 고유의 상승절기였다. 백학파의 특징은원심력의 효과적인 활용에 있었다. 찌르기조차도 원심력을 이용하는 형 편이었다. "무엇이 문제냐?" "너무 넓게 검의 세력범위를 잡았습니다. 그래가지고는 후면이나 하단의 방어 가 어렵겠습니다." "하면, 검의 범위를 좁히면 되겠느냐?" "아니 되옵니다. 그리하면 길이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게 되니 단검의 어색한 사용과 다를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하면?" "방위에 따라 반경을 달리해야 합니다." "백학파의 검법에 그것이 가능한가?" "아무래도 무리가 따를 것 같습니다." "그럼, 백학검법을 상대할 때는 역시 후면과 하단을 노리겠느냐?" "... ..." 생각해보니 그렇게 만만치는 않았다. 백학파는 그 단점을 나름대로 신속한 신 형의 회전으로 보완하고 있었다. 하지만 혈귀는 검으로 만들어내는 공간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특삼호는 머리속으로 추혼십이절의 초 식을 바꿔가며 백학검법과의 대응을 그려보았다. '장미백변이면... 이렇게 나오겠고... 그럼 산화비접으로 털어내고, 봉사쟁화로.. . ...좌측으로 돌아 올려부치며 반격하겠군... 거기서 도화점점이라도 다시 뒤로 빠 져서 빙글 돌아 버리면 소용없고... 춘매잔설이라면...?' 특삼호는 일순 머리가 환해져왔다. 매화송이는 막아내겠지만 동시에 펼쳐지는 잔설은 방어하기가 일견 간단해 보이지는 않았다. "차이가 없다고는 하나, 동시에 이루워질 수는 없습니다. 특히, 후방은. 그런데 백학검법은 전면과 후면에 차이가 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 백학파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고수는 그런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무의식중에 검을 중심으로 등거리의 원을 상정하고는 그 미묘한 차이를 간과해 버리지. 그 미세한 틈새를 놓치지 마라.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백학검법을 잘 검 토해보도록." 혈귀가 밖으로 사라지고, 특삼호는 다시 백학검보(白鶴劍譜)를 펼쳐들었다. 숨가쁘게 돌아가던 특삼호의 일과에 뜻밖의 평화가 찾아왔다. 비록 하루의 사 분지일(四分之一)에 불과했지만 특삼호는 벌써 닷새정도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 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닷새전부터, 혈귀는 특삼호에게 상처를 입히는 악취미를 중단하고 특삼호를 이 서고(書庫)로 데려왔다. 각종 무예비급 으로 가득찬 서고였다. 그날부터 특삼호는 무공비급들을 탐독해나갔고, 혈귀와 각파의 무공에 대해서 토론을 벌였다. 특삼호로서는 이것이 무슨 횡재인가 눈이 휘둥그레해질 지경이 었다. 끊임없이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만 하는 이 지옥에서 이런 달콤한 휴식의 시간이 주어지다니... 특삼호는 며칠이 흐르자 오히려 불안해지기까지 했다. 지 옥야차보다도 더한 이 흑의인들이 자신에게 이런 긴장이 풀어지는 시간을 허용 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특삼호의 불안은 아니나다를까 다음날 바 로 현실로 증명되었다. 삼장남짓의 폭으로 된 사각의 철장안에 두명의 산발한 사내들이 서로 검을 겨 누고 있었다. 열일곱쯤된 젊은이는 숨이 가뿐 듯 헐떡이고 있었고, 곧 쓰러질 것처럼 기진맥진해있었다. 반면, 설흔 남짓의 건장한 사내는 숨도 고르고, 혈기 가 왕성있었다. 이제 승부는 누가 보아도 자명한 것 같았다. 나이가 들어보이는 사내가 결판을 내려는 기색으로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검을 세차게 휘두르며 돌진하였다. 철장속의 결투를 지켜보던 혈귀는 입맛이 썼다. 아무래도 특삼호에게는 너무 버거운 상대였다. 신용불(愼用佛)이라는 작자였다. 백학파의 중견고수라는 신분 에 도박빛때문에 시합에 나서야 할 정도이니, 그런 개망나니라면 대단한 실력은 아니겠거니 했는데, 생각보다는 물이 오를데로 오른 실력자였다. 특삼호는 이제 십여수도 더 견딜 수 있을 것같지 않았다. 입맛은 썼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공들여 키운 녀석이라고해서 예외는 없었다. 살아남을 녀석이라면 어떻게든 스스로 살아남아야한다. 들인 밑천이 아까워서 적당히 보호해주는 것은 자객의 양성에 있어서 금물이었다. 혈귀의 오랜 경험 이 그것을 터득시켜주었다. 운이든, 실력이든 제 스스로 난관을 극복해내는 자 들만이 살수로써 제구실을 해냈다. 암살자의 수준은 무공에 대한 소질이나 지 적능력따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도, 열도 살기의 단련이었다. 피습생 이 의식을 했든, 못했든 도움의 손길이란 것은 순수하게 정련된 살수의 육감에 돌이킬 수 없는 불순물로 작용하였다. 혈귀는 어떠한 경우에서든 예외를 인정 하지 않았다. 특삼호가 특별한 용도로 양성되는 단 하나뿐인 도구라해도 마찬가지였다. 아 무리 아까운 재목이라해도 조직자체의 근간을 뒤흔드는 편법을 사용하면서까지 살려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혈귀가 눈을 찡그리며 특삼호를 바라보았다. 신용불의 연속되는 공세속에서 허겁지겁 춘매잔설만 남발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특삼호의 백학검법에 대한 대 비도 그리 철저한 편은 아니었다. 닷새동안, 혈귀도 특별히 독촉하지 않고 내버 려두었었다. 살아만난다면 어차피 이번 대결로 따끔한 교훈을 얻게 될 터였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이어질 생사대련을 생각한다면 스스로 경각심을 가지게 될 것이고, 누가 시키지않아도 살아남기위해서 각파의 무공를 파악하기위해서 비급 연구에 전력을 기울릴 것이다. 특삼호는 춘매잔설이라면 그럭 저럭 백학검법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 다. 그리고 분명히 춘매잔설은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상대를 쓰러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상대의 검이 너무 강했다. 신용불은 특삼호와는 상대도 되지않는 빠 르기와 강함으로 특삼호가 노리는 미세한 시차의 틈새를 매꾸어 나갔다. 그래 도 그나마 백학검법과는 상극인 춘매잔설이기에 특삼호는 몇번이나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신용불의 검이 크게 반원을 그리며 특삼호의 하반신을 엄습하였다. 내공이 전 무한 특삼호가 신용불과 검을 맞부딪칠 수는 없었다. 허리띠를 스칠 정도로 아 슬아슬하게 검을 비끼고는 다시 춘매잔설로 적을 물러나게했다. 모진위시절 특 유의 '비껴흘리기'가 여전히 특삼호를 구해내고 있었다. 특삼호는 어떠한 공격이 든 여유있게 피하는 법이 없었다. 상대의 검이 거의 몸에 다다를 찰나에 이르 러서야 종이 한장정도 만큼 스치며 피해내고는 하였다. 상대의 빠르기를 상쇄 시키는 특삼호 특유의 전술이었다. 이번에는 거의 지체됨이 없이 신용불의 반격이 이어졌다. 이제는 춘매잔설의 수법이 눈에 익어서 신용불로써도 나름대로 대처방안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었 다. 특삼호는 그 자리에 그대로 넘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일단, 한숨돌리고 보자 는 심산이었다. 몇차례 바닥을 굴러서 반대쪽 철창에 몸을 기대고 일어섰다. 그리고 숨을 헐 떡이며 머리를 쥐어짰다. 이제라도 백학검법의 또 다른 파해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백학검보의 연구에 철저하지 못했던 자신 의 나태를 한탄할 따름이었다. 신용불이 어느새 서너걸음까지 접근해있었다. 다시 날카로운 반원이 특삼호의 목을 향해서 날아왔다. 봉사쟁화로 위협하며 간신히 피해냈다. 신용불의 검이 숨돌릴 틈도 없이 재차 날라들었다. 강철원반 이라도 되는 듯 전혀 끊어짐이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원을 그려내고 있었 다. 특삼호는 장미백변, 산화비접, 추국망동을 연속해서 내저으며 발악을 했다. 그러나 특삼호의 애처로운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싸늘한 검의 장막이 특삼호를 감싸버렸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춘매잔설을 남용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춘매잔 설도 소용없었다. 신용불은 너무도 여유있게 춘매잔설을 돌파했다. 오히려 춘매 잔설을 기다리기하도 한듯 검세가 더욱 흉맹해졌다. 당황한 특삼호는 최악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더 이상 상대방의 검로도 예측되 지 않았고, 그나마 숨통을 열어주던 백학검법의 사소한 헛점도 발견되지 않았 다. 검수(劍首)를 받치고있던 좌수(左手)가 풀어지며 힘없이 흘러내렸다. 양손으 로 검을 쥐고있던 특삼호가 단지 우수(右手)만으로 힘겹게 검을 움직였다. 특삼 호의 검세는 일시에 기세가 반감되어버렸고, 그 와중에 좌수는 무방비상태로 노 출되고 말았다. 신용불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신용불의 검미가 직선에 가 까운 반원을 만들며 특삼호의 좌측 팔을 찔러들어왔다. '끝장이구나!' 특삼호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렸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특삼호의 좌측 팔에서 불같이 뜨거운 통증이 일어났다. 특삼호의 우수는 특삼호의 통제에서 벗어나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춘매잔설이었다. 신용불이 여유있게 막아나갔다. 이제 춘매잔설이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익숙한 신용불이었다. 춘매잔설을 정면으로 맞받아쳐서 격퇴시켰다. 그리고 남은 여력으로 특삼호의 목을 찔러갔다. 그러나 신용불이 날려버렸음에 도 특삼호의 검끝에는 여전히 춘매잔설이 남아있었다. 아무런 의식이 없는 가 운데서도 특삼호의 육감과 감각은 의식상태에서 보다 더욱 자연스럽게 춘매잔 설의 이단전개를 펼쳐냈던 것이었다. 신용불이 황급히 방어했다. 창졸간에 휘둘러진 신용불의 검은 춘매를 막아냈 다. 그러나 잔설만은 막아낼 수 없었다. 신용불은 같은 반경의 검망을 펼쳤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방위에 똑같은 검세가 미칠 수는 없는 법, 신용불의 검로사이 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혈귀는 기뻐해야 할지, 실망해야 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신용불은 그 대로 절명하였고, 특삼호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특히, 왼팔에서는선혈이 줄기차 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분간 왼팔은 사용할 수 없을 것같았다. 기운이 모자라 양손으로 검술을 펼치는 특삼호에게 왼팔의 부상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이 상태로라면 다음번 대련은 커녕, 숙소의 동료들에게 조차 목숨을 장담할 수 없 었다. '걱정되는군!' 혈귀의 생각에 특삼호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진배없었다. 어찌 어찌 동료들의 마수를 피한다해도 닷새후는 정말 제삿날일 것만 같았다. 특삼호가 내일부터 검토하고, 파악해야할 검술은 무당의 소천검(小天劍)이었다. 그것은 닷새후의 상대가 무당파의 도사나부랭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적어도 무당파의 직전제자들과 비교해서도 결코 하위급이라고는 할 수 없는 실력을 지 닌 자와의 한 판 승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끊어버려야 할게다." 연습시간이 끝날 무렵, 빙귀가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마디했다. 특삼호는 온통 고열에 들떠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쑤셔대 는 통증에 신경이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단지, 팔 하나때문에 특삼호의 전심 신이 제 구실을 못하고 무너져 있었다. 특삼호의 팔은 썩어가고 있었다. 특삼호 스스로도 자신을 지독히도 괴롭히는 왼팔을 차라리 잘라버렸으면 좋겠다고 생 각하고 있었다. "그럼, 검(劍)은?" "두손 다 가지고도 별반 신통할 게 없었는데... ...포기하는게..." 빙귀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그나마 검마저 제대로 운용할 수 없다면 오래 버틸수야 없겠지. 그래도 그렇 게 팔이 썩어들어가 당장 쓰러져 버리느니 팔병신일 망정 검 없이도 살아나갈 방도를 모색하는 편이 조금이라도 목숨을 연장하는데 도움이 될테지." "자연 치유될 가망은 전혀 없나요?" "기대난망이다." 빙귀도 처음에는 특삼호의 상처가 그리 대단치는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데 시간이 흘러도 특삼호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회복속도가 더딘 것이 아니 라 아예 악화일로였다. 정상인이라면 있을 수 없는 경우였다. 언제부터인가 특삼호의 기력이 눈에 띄게 쇠잔해갔다. 더불어 감각도 점차 무 디어졌으며, 호흡조차 힘겨울 정도로 내기가 가라앉고 있었다. 특삼호는 쉽게 지치기 시작했으며, 사소한 상처조차 쉽게 치료되지 않았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작금의 팔의 상태가 회복이 어렵다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절단하겠느냐?" "... ..." "빨리 결정해라. 늦으면 그대로 죽는다." "... ..." 빙귀는 지그시 특삼호를 일별하고는 석문을 향해서 발길을 옮겼다. 특삼호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내일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날 그날 닥쳐지는 그 순간을 살아낼 뿐이었다. 팔병신이 되는냐, 마느냐하는 것은 문제 도 되지않았다. 우선은 지금 당장 생존해야하는 것이다. 당연히 지금 당장 팔을 끊어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특삼호는 이 지옥같은 곳에서 일년반을 견 디어낸 그 답지 않게 주저하고 있었다. 무언가가 특삼호의 결단을 가로막고 있 었다. 특삼호가 의식은 못하고 있었지만, 특삼호의 가슴속에는 특삼호의 생존보다 우 선시 되는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었고, 그것이 특삼호의 팔의 절단을 막고있었던 것이다. 특삼호에 있어서 왼팔이 없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만은 특삼호도 분명히 인식하 고 있었다. 그것은 지독하게도 균형이 잡혀있지않은 특삼호의 골격이 간신히 유지해오던, 아니 유지라고 하기에도 과분하게 간신히 그 존재감을 느껴오던 평 형감각과 조화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추혼십이절이 특삼호의 심신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균형감각 이 없이는 추혼십이절을 기억한다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특삼호의 가슴속에서 간절한 울림이 특삼호의 머리로 전해져왔고, 그것은 하나 의 절규가 되었다. 그것은 특삼호의 존재가치에 대한 회의였고, 생존이유에 대 한 각성이었다. 특삼호는 마음속의 외침을 외면하려 애를 썼다. 특삼호에게 있 어서 추혼십이절이라는 검법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라는 가치를 제외하고는 단 한푼의 가치도 없었다. '짤라버리리라.' 특삼호가 검을 높히 쳐들었다. 순간, 석실을 나가려던 빙귀가 걸음을 멈추고 그런 특삼호를 바라보았다. 특삼호는 왼팔을 향해서 힘껏 검을 내리쳤다. 특삼호는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살기위해 노 력할 뿐이었다. 하지만 모진위는 언제나 물었었다. 자신과 같은 쓸모없는 존재 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렇게 존재해야 하는지. 특삼호 는 추혼십이절이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인지 한 번도 회의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단지 생존을 위한 수단 일 뿐이었다. 하지만 모진위는 언제나 잊지 않 고있었다. 평생을 신체적 고통과 싸우다가 아무런 존재이유없이 속절없이 죽어 갈 자신에게 구연기가 자신의 생명과 맡바꾸며 안겨준 사명을. 추혼십이절을 세상에 실존시켜야 하는 자신의 숙제를. 특삼호의 왼팔은 여전히 특삼호의 어깨에 달려있었다. 마지막 순간, 모진위의 열망이 특삼호의 팔을 잡아끌었고 검은 헛되이 바닥을 때렸던 것이다. 특삼호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모진위와 모진위의 의식을 지배하는 특삼호가 극 적으로 타협을 보았다. 특삼호의 가슴속에서 모진위가 속삭였다. 추혼십이절의 계승을 위해서 여생의 안락을 도외시하며 원화촉발법을 시전했던 그날 밤을 기 억하라고. 특삼호가 자신을 혼돈속에 몰아넣는, 알 수 없는 감정들에게 대답했 다. 원화촉발법이면 혹시 팔을 절단하지 않고도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추혼십이절의 계승따위는 알 바 없지만, 어쨌든 자신의 생존 만은 보장받을 수 있을 거라고. 빙귀가 고개를 설레 설레 저으며 석실을 나서려하고 있었다. "자... 잠깐만...!" 특삼호가 다급히 빙귀를 불러세웠다. "혹시... 침술을?" "침술이라니?" "침을 놔주십시요." "침술은 모른다. 안다해도 여긴 침구도 없고." "침은 없어도 된다고 들었습니다." "점혈법 말이냐? 그거라면 어느 정도 안다만 혈도를 집어서 외상을 치료하는 방법은 없는 것으로 알고있다." 특삼호는 말없이 누런 두루마리를 빙귀에게 내밀었다. 두루마리에는 인체모형 이 그려져있었고, 화살표로 진행방향이 표시된 많은 혈도가 명시되어있었다. 특 삼호는 반년의 효력발생기간을 가진 두번째 원화촉발법을 발화시키려 하고 있 는 것이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5155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23- 01/08 10:35 344 line 9. 강호유정(江湖有情) 빙귀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취랑의 마지막 눈빛을 떠올리고 말았다. '어찌해서 일까?' 특삼호의 추혼검을 처음 접했을 때도 그랬다. 그당시 어이없는 회상에 잠시 당황하기는 했지만 빙귀는 이내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특삼호의 추혼검은 빙귀에게있어서 살수로서의 빙귀가 취랑에게 느끼던 감정만큼이나 역겨운 것이 었다. 빙귀는 뇌리를 스치는 취랑의 눈빛을 짐짓 그렇게 치부해버렸다. 빙귀에 게 특삼호의 검운용은 정말 역겨운 것이었다. 병신주제에 검 본연의 존재이유 마저 부정해버리다니! 취랑을 단칼에 베어버렸듯 특삼호의 위선적인 추혼검을 형체도 없이 파괴해 버리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그 마지막 순 간의 눈빛이란 말인가? 기왕에 떠올려야 한다면 자객으로서의 마음가짐을 흐트 러뜨리던, 그 많은 밤들의 빨려들듯한 눈빛이 합당한 것이 아니던가? 빙귀는 특삼호가 전개하는 추혼십이절을 보며 오늘따라 취랑의 마지막 눈빛이 더욱 또 렸하게, 더욱 강렬하게 심상(心象)으로 잡혔다. 특삼호가 상대하기에는 도저히 무리일 것만 같은 무당검객과 맞서나가는특삼호의 검법이 이전과는 비교가 되 지않을 정도로 그 역겨움이 심하기 때문일까? 빙귀는 심란해졌다. 특삼호는 정말 잘해나가고 있었다. 그가 살고있는 소단산(蘇壇山)일대에서는 제법 위명이 쩌렁쩌렁한 무당의 속가제자 진춘보(秦春寶)를 맞이하여 특삼호는 이해가 안될 정도로 대단한 선전을 벌이고 있었다. 무당고유의 내력이 음유한 탓도 있었다. 비록 특삼호가 공력이 없다고는 하나, 무위조식과 출운용무덕분에 주변의 기를 차용하는 재간을 부릴 줄 알았다. 특 히, 그 기세가 내부로 갈무리된 부드러운 기의 운용이라면 특삼호에게는 잘맞는 옷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이제까지의 특삼호와는 격이 다른 상대가 진춘보였다. 특삼호가 맞설수 있을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빙귀가 알턱 은 없었지만 이차 원기촉발술에 의해서 원기가 폭발하듯이 타오르고 있는 특삼 호가 아니라면 그말 맞다나 서너수만에 꼬구라질 특삼호였다. 특삼호의 검에서 자객과정에 입문한 이래, 어둠처럼 숨죽이고 있던 구연기의 추혼십이절이 뚜렷하게 제빛을 찾았다. 특삼호주위를 감싸고 도는 진춘보의 검 기를 타고 추혼십이절의 절기가 제물 만난 물고기처럼 매끈하게 흘러갔다. 진 춘보는 이렇다할 선기도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채, 삼십여수만에 치명적인 일격 을 당하고 검을 놓아야했다. 빙귀가 이를 악물었다. 취랑의 마지막 눈빛이 어쩐지 자신을 비웃는 조소처럼 느껴졌다. 칠주검파 장로들의 느끼한 비웃음이 귓전을 울리는 듯했다. 일갑자가 넘는 세월동안 자신을 지탱하던 신념마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빙귀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것을 인정하기에는 자신이 걸어왔던 육십년의 세 월이 너무도 허무했다.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내 기여코 그리하고 말리라. 특삼호의 심성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말리라. 그놈 의 역겨운 추혼검을 기여코 온통 살기로 채워넣고 말리라. 무슨 짓을 해서라 도... ...' 빙귀의 악다문 입술사이로 피가 베어나오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특삼호의 형편이 백팔십도로 바뀌었다. 혈귀와는 그럭저럭 지낼만 했다. 특삼호의 뼈를 깍는 노력이 있기는 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검이 돌아 가는 이치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닷새마다 등장하는 각양각색의 검수들도 특삼 호가 목숨을 걱정해야할 만큼 그렇게 위력적이지도 않았다. 수월하게 그들의 약점을 공략해나갔다. 정작 특삼호의 명줄을 위태롭게 당기는 것은 빙귀였다. 빙귀와의 수련은 이전과는 다르게 처절한 혈투의 연속으로 변해있었다. 빙귀의 검에서는 질식할 듯한 죽음의 냄새가 풍겨지기 시작했고, 그에따라 특삼호의 검 도 비정해졌다. 그리고 특삼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닷새마다 벌어지는 피 의 향연에 아찔할 정도의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살육을 향한 욕망은 점차 짙 어져만 갔다. 덕분에 혈귀의 계획도 탄탄대로에 들어섰다. 특삼호가 과정에 입문한지 이년이 다 되어가던, 더불어 두번째 원화촉발술이 시전된지 반년이 다 되어가던 어느날, 혈귀는 최상급 귀빈의 방문을 받았다. 귀 빈이 물었다. "시월 초엿새라고 하셨는가?" "예." "시월 초엿새라... 오늘이...? 중주절하고 사흘지났으니까... 아직 사십여일을 더 버텨야한다는 계산이구먼... 이거야 어디..." 귀빈의 얼굴에는 초조함의 기색이 가득했다. 혈귀도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 었다. 벌써 삼년이상을 끌어오고 있었다. 그동안 다섯차례의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였다. 그 삼년동안 귀빈의 피해는 실로 막심한 것이었다. 이제와서는 피해의 정도가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편에서 드디어 핵심을 간파하고 숨통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하루가 힘겨울 지경이니, 사십일이라면 견디는 측에서는 까 마득할 수밖에. 첫시도의 실패가 결국 일을 어렵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공연히 풀섭을 건드려 뱀만 잔뜩 경계시킨 형국이었다. 어차피 권력이 개입된 싸움, 어느 정도의 난관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위각(護危閣)까지 동원할 줄이야... 호위각도 호위각 나름이겠지만, 유진목(劉眞穆), 그 작자는 정말 골치아픈 존 재였다. 혈귀가 감탄해마지않는,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한 적수였다. 열 포교가 숨어드는 한 도둑 막을 수 없다는 말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암습에서 특정인 을 호위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고 불리한 임무였다. 그러나 유진목은 단 한치 의 빈틈도 없이 암살자를 색출하여 척살해나갔다. 혈귀의 조직이 뿌리채 흔들 릴 지경이었다. "그래, 성사 가능성은?" 귀빈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구할입니다." "호오! 믿어도 되겠소?" "예, 돌발변수까지 포함해서 구할입니다." 혈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자네만 믿네. 그런데 외인이라고?뒷처리야 자네가 어련히 잘 알아서 하시겠 는가만은..." 특삼호의 출신내력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정체가 드러나기라도 하는 날이면, 나라의 권력구조마저 뒤틀어지는 대란이 일어날 판이었다. "이번만큼은 제가 직접 나설 생각입니다." 혈귀는 특삼호의 성공을 자신하고 있었다. 더할나위 없는 미끼에, 더할 나위없 는 낚시줄이었다. 특삼호가 최근에 이룩한 진보는 정말 눈부신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녀석이 진짜 특삼호가 맞긴 맞는건가?'하고 의심할 정도로 상태 가 호전되더니 그후로는 일사천리였다. 특히,때마침 그 무렵부터 특삼호를 야 차처럼 닥달하던, 칠주검파가 배출한 유일한 자객, 신출귀몰(新出鬼沒)이라는 웃기는 별호를 가진 빙귀의 공로는 빙귀의 공식호칭이 신출귀몰이라는 것을 전 혀 반감없이 불러도 좋은 정도로 혁혁한 것이었다. 그랬던 것이 신출귀몰의 지 독한 단련시작과 함께 시작된 희망이 신출귀몰의 마지막과 함께 절망으로 바뀌 어버리는 비극을 혈귀는 맞이하게 되었다. 그날따라 특삼호의 신체상태는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입문한 이래, 그렇게 원 기왕성한 특삼호를 혈귀는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혈귀의 비법전수가 가장 힘겨운 마지막 고비에 직면했던 단계의 무렵이었다. 비록 좀 엉뚱한 방향이기 는 했지만, 특삼호는 그날 혈귀의 비법에대한 실전적인 극의(極意)를 마침내 깨 치고야만 것이었다. 말 그대로 실전적인 극의였다. 극의를 깨달은 진체(眞體)는 당사자에게는 애서하게도 구도자(求道者)로서의 특삼호가 아니라, 살인귀(殺人 鬼)로서의 특삼호였다. 검술의 근본이치에 대한 깨달음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 만, 어쨌든 검의 장점으로 검의 약점을 비집고 들어가 상대를 말살시켜버리는 본능적인 감각과지식은 터득했다. 혈귀는 그것으로 만족이었다. 특삼호가 그것 으로인해 사도(邪道)의 함정에 빠져버려 검의 궁극과는 멀어질 확률이 매우 높 았다. 하지만 혈귀는 상관없었다. 아니, 그것이 혈귀에게는 더 더욱 흡족한 일일 수도 있었다. 특삼호는 그렇게 오직 생사(生死)이외에는 존재할 것이 없는 검을 들고 또하나의 마지막 난관을 돌파하러 빙귀의 석실로 갔고, 혈귀에게는 이제 특삼호를 인간으로 되돌려놓는 마지막 과정만이 남은 것같았다. 특삼호를 맞이하는 빙귀의 심사(心思)중에 심(心)은 상쾌하기 이를데 없었고, 사(思)는 담담하였다. 빙귀는 상쾌하고도 담담하였다. 특삼호는 이제 살인귀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특삼호는 석실로 들어서서 빙귀를 발견하자마자 다짜고짜 검부터 뽑아들었다. 특삼호의 검속에는 생사 양자택일이외에 그 어느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 한 핏빛 살검이었다. 더 이상 구도의 검따위는 존재하지않았다. 빙귀로서는 그 것이 상쾌했다. 이제 위선에 가득찬 검법은 종말의 직전에 다다르고 있었다. 상 쾌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혈귀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무시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담담한 사(思)였다. '놀라운 사화결실이로군.' 등뒤에서 예리한 살기를 느끼고 돌아서는 빙귀의 코앞에는 어느새 특삼호의 검이 맹렬하게 닥쳐오고 있었다. 사화결실(死花結實)이었다. 근자에 들어서 한 결같이 당해온 기습이었기에 그다지 놀랄 것도 없는 특삼호의 암습임에도 빙귀 는 혀를 내둘렀다. 검이 등에 맞다을 지경이 되어서야 혈귀는 특삼호의 검세를 느낄 수 있었다. 추혼십이절중에서는 대비가 안된 적을 기습하는데 적절한 효 용이 있는 몇가지 초식중 하나가 사화결실이었다. 스스로의 가치를 다하지못하 고 저버린 꽃에서 예기치 못했던 열매가 맺히는 격으로 출검(出劍)이 돌연 검 로를 이탈하며 검세가 스러졌다가 목표점에 다달아서야 위력를 발휘하여 적수 의 무방비를 추궁하는 은밀한 변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특삼호 의 초식운용은 대단한 것이었다. 빙귀의 안목을 속인 채, 일순간에 삼장의 거리 를 압축하여서 빙귀의 턱밑까지 검을 들이밀었다. 그만큼 특삼호의 사화결실이 절묘했다는 증거였다. 허억! 빙귀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허리를 제쳤다. 매서운 칼바람이 턱을 스치고 지나 갔다. 뻣뻣한 흑사(黑絲)가 휘리릭 파공에 휩쓸러 허공에 흩어졌다. 빙귀의 턱 수염이었다. 특삼호의 검은 그대로 상방으로 치솟다가 돌연 빙귀를 향해서 검 화(劍花)를 뿌려댔다. 발검의 여유조차 주지않는 매끈한 연결이었다. 수도로 막 아내기에는 아무래도 단비 맞은 죽순처럼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특삼호의 위 력증대가 마음에 걸렸다. 빙귀는 허리의 탄력을 통제하지않고 그대로 그 여력 을 타고 뒤로 넘어졌다. 검화는 모두 네송이였다. 특삼호의 도화점점이 발전을 거듭해서 어느새 각이 선명한 네번의 변환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어디가 본맥(本脈)인가?' 빙귀는 검화에 눈을 고정한 채로 팔을 뻣었다. 어림짐작이었는데, 다행스럽게 도 벽면이 손에 집혔다. 덕분에 빙귀의 허리는 반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빙귀 의 두발이 바닥을 차고 허공을 떠올랐다. 쏟아지는 검화의 속도보다 빙귀의 왼 발이 미세하게 빨랐다. 빙귀의 왼발이 검의 넓은 면을 밀어내었다. 그것은 특삼 호의 네개의 검화를 흩어버림과 동시에 빙귀에게 또 한번 반탄력을 제공하였 다. 왼발의 버팀으로 즉각 빙귀의 오른발이 특삼호의 턱으로 날아갔다. 특삼호 는 주춤거렸고, 빙귀는 마침내 검을 뽑아낼 순간을 포착하였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빙귀의 손에 검이 들려졌다. 특삼호가 굶주린 승냥이처 럼 천천히 빙귀의 주위를 돌고 있었다. 특삼호의 턱에는 붉은 실선이 몇가닥 부어오르고 있었다. 빙귀의 신발이 긁고간 자국이었다. '겨우 체면은 유지한 셈인가?' 빙귀는 그제서야 특삼호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조용하게 목에 걸려서 간질거리 는 헛바람을 뽑아내었다. 빙귀가 이렇게 시달려보기는 특삼호를 주무르기 시작 하고나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빙귀의 눈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빙귀는 작정을 하고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리 고 빙귀의 검은 곧바로 특삼호를 추적해들어갔다. 바로 찔러들어가는 것을 보 면 봉사쟁화인 것만은 분명했는데, 검끝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마치 벌의 침이 아니라 뱀의 혓바닥인 것처럼 검미가 요동을 쳤다. 하긴, 빙귀의 검자체가 사두 (蛇頭)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특삼호는 석양동몰(夕陽東沒)로 바닥에 꺼지기도하고 서산일출(西山日出)로 허 공으로 내빼도 보았지만 빙귀의 검을 좀체로 떼어놓을 수 없었다. 살을 에일듯 한 예기가 여전히 특삼호를따르고 있었다. 아무리 용을 써봐도 별무신통이었 다. 특삼호도 입술을 질끈 깨물고 신형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양발을 바닥에 굳 건히 고정시켰다. 빙귀의 검이 지척에 달했는데도 특삼호는 요지부동이었다. 제법이었다. 추국망 동(秋菊望冬)은 글자 그대로 겨울을 기다리는 가을 국화, 불리한 위치에 놓였을 때, 연약한 밑천으로 강맹하게 거래에 응하는 수법. 이 시점에서 특삼호가 추국 망동의 수법을 선택한 것은 비교적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빙귀의 봉사쟁 화는 보통 봉사쟁화가 아니었다. 특삼호의 능력으로 요동치는 봉사쟁화의 촛점 을 파악해낸다는 것은 상대가 빙귀이고보니 난제중의 난제였다. 물론, 종횡(縱 橫)으로 검을 튕겨낼 수는 없었다. 손톱만큼의 내공도 없는 모진위의 처지로 그 것은 자살행위나 진배없었다. 신형을 조절하여 검을 피해내거나 검끝을 찾아내 어 검면을 비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빙귀의 입에서 비릿한 조소가 흘러나왔 다. 특삼호가 피해내기에는 요동치는 검두(劍頭)의 방향이 예측불허였고, 비껴 내기에는 흔들림으로인해 검두의 끝점이 너무 많았다. 시잇! 정작 독사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은 빙귀의 검이건만, 독사의 날카로운 요 성이 새어나온 것은 전혀 딴판으로 특삼호의 입술이었다. 눈빛조차 독사의 살 광이었다. 그러나 특삼호의 검만은 그렇지 않았다. 독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기세가 위축되어있었다. 특삼호의 검은 마치 패배의 인정하는 개구리마냥 잔뜩 풀이 죽은 채, 빙귀의 검을 향해서 고개를 숙였다. 빙귀의 검은 특삼호의 검마 저 관통시켜버릴 듯이 살기등등한 기세로 여전히 특삼호를 향해서 나아갔다. 그리고 요동을 치며 잔뜩 위축된 특삼호의 검과 충돌하였다. 하지만 마땅히 울 려야했을 검과 검이 쟁명(爭鳴)이 들려오지 않았다. 스르렁. 빙귀의 기대와는 달리 가볍게 스치는 금속음이 전부였다. 허억! 다시 빙귀는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오늘로써 두번째이자, 특삼호를 만난 이래 로 두번째인 화급성(火急聲)이었다. 특삼호의 검은 기세가 죽었다고는 해도 여 전히 추국망동의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추국망동의 요체는 강맹한 적의 기세 에 대한 효율적인 대처수단을 검 스스로가 자생시키는데 있었다. 하지만 원론 이 그렇다는 이야기지 그것은 신검 옥진강정도나 가능한 경지일 뿐, 기실 빙귀 마저도 효율적인 수단을 인위적으로 발생시키는 정도에 지나지않았다. 그런데, 특삼호의 검이 제멋대로 살아움직이고 있었다. 추국망동의 한수가 빙귀가 만들 어낸 휘오리같은 검기를 타고 거슬러올라갔다. 그것은 폭포를 오르는 강인한 연어와도 같은 자태였다. 물론, 특삼호의 추국망동이 스스로 자생력을 발휘할 만한 위력은 아니었다. 그 러나 특삼호의 무위조식은 빙귀가 만들어낸 검기를 배척하지않고 포용해냈다. 또한, 특삼호는 언제나 출운용무속에서 감지하고는 했던 무형의 기운에 잘 적응 하고 있었다. 거룡십팔수의 회풍선엽에 입각한, 등룡육권의 '화'자결로 운용되는 비룡삼장의 빙어풍장도 특삼호의 추혼십이절를 떠받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하 여 혈귀가 특삼호의 본능에 각인시켜준 검의 기본원리와 초식의 파해법, 그리고 빙귀가 단련시켜준 추혼십이절에 대한 실전적인 운용술이 있었다. 이 모든 점 들이 총체적으로 결합하여 특삼호의 추국망동을 거듭나게하여 검 스스로 움직 이게한 것이었다. 검이 격류를 헤치고 용솟음치며 빙귀의 흉부를 압박할 찰나, 검경을 움켜잡고 검의 진로를 막아야했지만, 특삼호는 그렇게 하지않았다. 빙귀가 스승의 입장으 로 검을 가르치는 비무가 분명하기에 마지막순간에는 검을 제어하여 사부된 자 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인데도 특삼호는 추국망동을 끝까지 전개 했다. 검은 특삼호의 손을 빠져나가 그대로 빙귀의 앙가슴으로 파고들어갔다. 특삼호는 이미 살욕에 눈이 멀어버린 악귀에 지나지 않았다. 빙귀도 상황은 직시하고 있었다. 자신이 죽지않으려면 그대로 검의 기세를 몰 아서 특삼호를 찔러야했다. 특삼호의 명줄을 단숨에 끊어버린다면 어느정도의 파탄은 감수해야하더라도 생명의 위협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빙귀는 그렇게 하지않았다. 특삼호자체만 살기로 가득했을 뿐, 추국망동에은 살기가 없 었다. 빙귀가 그렇게 역겨워하던 구도의 형상만이 오로지 넘쳐나고 있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빙귀는 자신의 봉사쟁화를 끝까지 감행하지 않았다. 그 댓가 로 특삼호의 검에 자신의 가슴을 허용하였고, 빙귀는 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 졌다. '어째서? 무엇때문에? ...그건 또 왜?' 재간이 신출귀몰하다기 보다는 칠주검문에서 추방되어 살수가 되었다는 이유 로, 신검 옥진강의 후예로 출발했지만 종내에는 사람이나 때려잡는 살인귀로 몰 락했다는 다소 자학적인 별호, 신출귀몰(新出鬼沒)로 불렸던 사내, 빙귀는 희미 해지는 의식속에서 많은 의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가장 큰 의문은 어이없게 도 취랑에 관한 것이었다. 아무 미련없이 단칼에 베어버린 천박한 창녀였는데 도 말이다. 특삼호녀석의 어느 구석이 취랑의 마지막 눈길을 상기하게 만들었을까? 그런 데 오늘은 왜 자신의 심사(心事)가 그리도 담담했던 것이었을까? 물론,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라는 것쯤은 빙귀도 알고있었다. 마지막이라는 것은 갈등을 심화 시키는 이유가 될 수는 있어도 심사가 담담하게 가라앉을 이유는 분명히 되지 않았다. 취랑은 창녀였다. 물론, 살수에게 있어서 여자라는 존재는 모두 창녀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뱃속에 쌓인 끈적끈적한 욕정을 배출해버리는 성 욕의 쓰레기통... 살수에게 여자와의 정이란 그저 어느 한가지도 도움될만한 요 소가 없었고, 또한, 살수에게는 여자와 정을 나눌만한 여유따위도 존재하지도 않았다. 빙귀도 그렇게 배설이나하자고 가끔씩 유곽을 드나들었으며, 살수가 갈 만한 유곽은 정해져있는 만큼, 이미 면식이 있는 창녀와 다시 동침하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취랑과도 그렇게 몇번 몸을 섞었다. 하지만, 어느결엔가 빙귀는 취 랑의 단골이 되었다. 주변에서 듣기로는 취랑도 빙귀이외에는 손님을 받지않는 다고했다. 물론, 빙귀가 비교적 씀씀이가 넉넉한, 인기있는 단골이기는 했다. 기 녀들쪽에서 보자면 빙귀하나만 물어도 평작은 유지할 수 있었다. 사람을 가리 기가 싫다면 빙귀만으로도 밥은 먹을 수 있었다. 빙귀도 처음에는 그러려니 혹 은, 그저 듣기좋은 소리로 하는 것이려니 생각했었다. 아무쪽이나 상관없었다. 빙귀의 짐작이 틀렸다해도 빙귀가 신경쓸 바는 아니었다. 신경쓸 문제는 빙귀 자신이었다. 딱히 의식한 적은 없다고 자위도 해보지만 취랑이 자리를 며칠 비우게됐다는 말을 듣고 그냥 발길을 돌렸던 찜찜한 구석 이 있었다. 빙귀가 취랑을 선호하는 특별한 이유따위는 없었다. 용모가 출중하 거나, 육덕이 흐벅진 계집이라고는 할 수 없는, 평범한 싸구려창녀였다. 그렇다 고 사내의 얼을 빼놓는 뛰어난 명기(名器)를 가진, 밤솜씨가 뛰어난 계집은 더 더욱 아니었다. 빙귀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저 취랑이 편안했다. 그저 편안할 따름이었다. 빙귀는 평건(平巾)때문에 취랑의 목을 베었다. 살행(殺行)을 떠나던 날, 빙귀는 습관대로 유곽을 찾았고, 취랑의 방에 들었다. 욕정을 쏟아붓고 나서려는 빙귀에게 취랑이 평건하나를 내밀었다. 빙귀의 평건 이 다 낡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고보니 다 닳아서 구차스러운 평건을 쓰고있었다. 빙귀는 별 생각없이 평건을 받아들었다. 그날밤, 빙귀의 살업(殺業) 은 그리 신통치않았다. 상대가 녹녹치않아서도, 예상못한 변수가 돌발해서도 아 니었다. 복면을 하기위해서 평건을 벗던 빙귀는 평건속에 수놓아진 자그마한 글자를 보게되었다. '취랑'이라고 씌여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꼼꼼하기는 해도 바느질이 일정치 않은 것이 전문적인 솜씨로 만들어진 두건은 아니었다. 취랑 이 직접 만든것이리라. 어쨋든 그날의 살업은 그리 신통치않았다. 목숨이 경각 에 달리는 위기마저 있었다. 왠지모르게 내키지 않던 심사가 문제였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심사의 근원에는 취랑의 평건이 있었다. 그후로 빙귀는 취랑을 찾지않았다. 그러나 심신은 여전히 안정되지 않았다. 위험신호였다. 궁리끝에 빙 귀는 문제의 근원인 취랑라는 존재를 이 세상에서 없어버리기로 작심했다. 살행이란 것이 물론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취랑의 경우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빙귀가 자신의 살업에 하나의 경력을 더 추가시키기위해서 취랑 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빙귀는 그 순간에도 너무도 당연히 언제나처럼 감정이 없는, 무심한 눈길이었다고 지금도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취랑의 눈길이 너 무도 당연히 언제나의 대상자처럼 공포에 가득차있었다고 확언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확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취랑의 눈길이 평소처럼 무심했던 것은 아니었다. 취랑의 눈빛은 그녀로서는 드물게도 희망에 부풀어있 었다. 언제나 싸늘히 식어있던 냉기마저 뜨거운 열망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희 미하게 처량한 슬픔도 깃들어있었지만. 그래도 빙귀의 손길에는 추호의 망설임 도, 떨림도 없었다. 취랑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취랑이 사라지고, 빙귀는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가 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낯선 감정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외로움이었다. 살수 는 언제나 혼자였다. 고독이 무언가 유별난 감정이 될 수는 없었다.공기처럼 일상적이고도 익숙한 감정일 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빙귀에게 외로움이라 는 감정이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세월이 흘러서 취랑이란 존재를 잊고, 그 경계심이 풀어지자 가슴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빙귀가 어떤 재간으로 도 존재를 소멸시킬 수 없는, 그런 취랑이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빙귀의 가슴 은 텅 비어버렸다. 그 어떠한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다. 결국, 빙귀는 살수고 뭐 고 다 시들해져서 황금 이백냥의 별난 청부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멀어져가는 빙귀의 의식속에서 이미 대부분의 의문들이 날아가버렸다. 이제 그가 희미한 의식으로 부여잡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무런 의심조차 없이 믿고 있던 여자와 검이라는 존재의미가 어딘지 모르게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 문이었다. 빙귀는 의식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어느 쪽으로든지 수긍할 만한 결 론을 내리고 싶어졌다. 빙귀는 인정하기 싫었다. 취랑이 자신에게 있어서 어떤 여자와도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결단코 싫었다. 빙귀는 남녀사이에는 성욕과 종족 보존이외에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다고 믿고있었다. 그외에 다른, 어떤 관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간과 검사이에 살생이외에 또 다른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이 그렇게 부정하던 위선적인 검법이 더이상 위선적인 검법이 아님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었다. 빙귀는 취랑 과 자신사이에 특별한 무엇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싶지않았다. 그것은 신검 옥 진강이 창안한 본래의 추혼십이절에는 살생을 위한 방법론만이 아닌, 다른 어떤 목적이 담겨져있음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이었다. "이봐! 난주에 가게되는 일이 있으면, 백탑산에 한번 둘러줄 수 있겠나? 그곳 에 취랑이라는... 아니지 백소금(白小琴)이라는 처자의 무덤이 있다네. 인연이 닿는다면 이걸 좀 그곳에 보내주게나?" 빙귀가 특삼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피가 낭자한 품속을 더듬어 이제는 다 바래버린, 누런 두건형상의 헝겊조각을 꺼내들었다. 어쩌면 빙귀자신이 취랑 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빙귀는 그것조차 인정하기 싫었 다. 여하튼 빙귀는 취랑에게 평건을 전해주기위해서 특삼호에게 부탁을 하고있 는 것이었다. 하지만 특삼호는 넋이 나갔는지 멍한 표정으로 묵묵히 빙귀를 내 려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빙귀는 결국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의식을 놓아버렸다. 결론은 커녕, 의문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절명의 그 순간까지 소멸해가는 빙귀의 의식을 어지럽혔다. '나는 왜 그 위선적인 추국망동을 찔러버리지 못했을까? 그 역겨운 겉멋따위 는 보기좋게 찔러버릴 수도 있었는데...' 혈귀는 빙귀의 죽음에 대한 보고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특삼호이지, 그 신출귀몰이라는 가당치도 않은 별호의 살수 나부랭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신출귀몰을보기좋게 꺼구러뜨린 특삼호가 대견 스럽기 그지없었다. 정작 혈귀가 반응을 보인 것은 특삼호의 상태에 대한 부분 이었다. 특삼호가 혈귀 앞에 대령했을 때, 특삼호를 일별한 혈귀의 반응은 평소 그답지 않은 것이었다. 놀랍게도 혈귀의 얼굴에 감정이란 것이 표출되었다. 비 록 특삼호가 눈치챌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특삼호가 왠일인지 이전의 다 죽어가는 특삼호로 돌아가버렸던 것이었다. 아 니 오히려 이전보다 더 원기부족으로 보였다. 이차촉발로 타올랐던 특삼호의 선천진기(先天眞氣)가 빙귀와의 대전을 마지막불꽃으로 꺼져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빙귀가 알턱이 없었다. ================================================================ 주) 심사(心思): 흔치않은 단어라 굳이 주석을 답니다. 사전에 따르면 마음을 쓰는 본새. 좋지않은 마음보. 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의미상 心과 思가 분리되는 것은 아닐테지만 문장구성상 확대해석을 했습니다. 한문이 없는 심사는 그저 보통말해지는 心事 라고 보면 될 것같습니다. 국어파괴의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흑수노계였습니다. #5223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24- 01/18 10:38 296 line "... ..." "이름?" "특... 특삼호..." "쯔쯔. 그건 네 소속과 번호를 말하는 것이지 이름이 아니지않느냐? 이름?" "... .." "그럼, 고향은?" "... ..." "됐다. 물러가거라." 특삼호는 밝고 깨끗한 방으로 돌아와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불은 물 기 한점없이 뽀송뽀송했으며, 실내의 공기는 청량하였고, 주변은 먼지 한점없이 잘 정돈되어있다. 또한, 하루 세차례 꼬박꼬박 준비되는 음식들은 하나같이 정 갈하고 기름진 것들이었다. 최소한 이 방안에서는 아무도 특삼호의 신경을 거 슬리거나, 귀찮게하는 자가 없었다. 이 방에서 만큼은 혈귀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혈귀를 비롯한 그가 아는 악다구니들은 어느 한명도 특삼호의 방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특삼호는 그만 이 예상밖의 상황변화에 불안해지고 말았다. 평온과 안락은 그 에게 불길한 예감이외에 그 어떠한 것도 될 수 없었다. 특삼호는 단 한순간도 경계를 풀지않았다. 무언가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도 위험신호는 감지되지않았다. 그에 따라서 불안은 점차 가중되었지만, 경계심은 조금씩 풀어져갔다. 특삼호의 내면에 변화가 일어 났다. 오로지 생명유지가 전부였던 짐승, 특삼호의 관심이 생존이외의 문제들을 향해서 고개를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름? 그러고보니 내게도 이름이란것이 있었던 것같은데...? 내이름은 뭐지? 내 고향은 어디지?' 방금전 자신에게 쏟아졌던 질문들을 되새겨보았다. 많은 의문들이 특삼호의 머리속에서 돌개바람처럼 휘몰아쳤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내가 지금 누워있 는 이곳은 어디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인가?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다음날, 특삼호가 빙귀에게 다시 불려갔을 때, 특삼호는 제법 많은 것을 대답 할 수 있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모진위" "고향은?" "하남 신양성." "부모이름?" "... ..." 특삼호, 이제까지는 특삼호라고 불렸고, 자신이 모진위임을 대답한 순간부터 모진위라고 불려지게 된 특삼호는 미처 거기까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알듯 모 를듯 가물가물하였다. 더군다나 부모의 얼굴은 전혀 기억도 나지않았다. 물론, 좀 더 생각을 더듬어보면 모진위도 알게되겠지만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부모의 모습이고보니 얼굴은 커녕 이름조차 기억에 떠울리기 수월치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모진위가 일다경이 흐르도록 대답을 찾지못하자 흑의인은 다른 질문으로 넘어 갔다. 몇개의 질문이 더해졌는데, 모진위는 그 일부는 답변할 수 있었고, 더러는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흑의인은 닥치는대로 질문해댔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모진위에게는 단 한마디의 질문도 허락되지 않았다. 모진위는 서서히 자신의 과거를 되찾아나갔다. 황경과의 살았던 시절, 용무권 에서의 어린 시절, 신검반, 신검대회. 기억은 항주(抗州) 평안객잔(平安客殘)에 서끝나고 말았다. 모진위가 잠이든 곳은 평안객잔이었지만 깨어난 곳은 지금 모진위가 생활하고 있는 이곳의 북쪽구석에 자리잡고있는 공포의 석실미로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모진위가 되찾은 것은 자신의 과거에대한 기억만이 아니었다. 특삼호가 되어서도 버리지 못했던, 가슴깊은 곳에 숨겨져있던 인간 모진위의 본 질이 비취색 비단주머니와 함께 다시 되살아났다. 모진위는 품속에서 금낭을 꺼내들었다. 요즘들어서는 버릇처럼 되어버린 행동 이었다. 이미 금낭이라고 불러주기에는 그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보잘 것 없는 헝겁조각으로 변해있었다. 물론, 변해버린 것은 금낭만이 아니었다. 악몽보다 더 한 세월은 모진위의 모든 것을 변화시켜버렸다. 모진위의 비단주머니에 담겨있 던, 아니 그의 가슴속에 담겨있던, 맑고 투명한 모진위의 본질도 예외는 아니었 다. 모진위는 이제 더 이상 도학정이 생일선물로 전해준 그 주머니속에 무엇이 담겨져 있는지 알고있지 못했다. 모진위의 내면이 세상에대한 적의와 의심이라 는 더럽고, 불투명한 각질의 것들로 포위되어버렸기때문이었다. 모진위의 내면이 불투명해지자, 혈귀의 외면이 불투명해졌다. 혈귀는 이미 변 수까지 감안한 구할의 성사가능성을 장담해버렸다. 그런데 모진위의 상태는 악 화일로로 급전해버렸다. 이미 업지러진 물, 혈귀는 조직의 여력을 최대한으로 가동해서 보완책을 찾아나섰다. 그러나 해결의 실마리는 거의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모진위의 심기마저 위태롭게 흔 들리기 시작했다. 혈귀는 모진위에게서 느껴지는, 알을 품은 어미새와도 같은, 찝찝한 분위기가 늘상 꺼림직했었다. 물론, 과거의 끈들을 쉽게 끊지 못하는 녀석을 모진위외에 경험 못해본 것은 아니었다. 혈귀가 그런 상황에 능란해질 만큼은 기회가 있었 고, 혈귀는 경험에의한 역량을 바탕으로 실수없이 문제들을 해결해나갔다. 모질 게만 마음먹는다면 모진위정도 녀석의 심보를 뜯어고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 다. 그러나 모진위를 그렇게 해서는 거사를 진행할 길이 없었다. 문제는 이번 암살을 행할 자가 반드시 모진위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삼호가 아닌 모진위로 복귀시켜야만 가능한 임무였다. 혈귀는 가능한한 특삼호를 바탕 으로 모진위의 껍질을 씌우고자 했다. 그랬던 것이 그놈의 어미새가 끝내는 말 썽이었다. 혈귀는 이제 모진위에게서 또 다른 어미새를 보았다. 자신이 품고있 는 알속에서 끔찍한 괴물이 탄생할까봐 전전긍긍해하는 혼돈속의 어미새, 그것 이 모진위였다. 쉽게 말해서 다 망가져버린 살수였다. 거사의 기일은 코앞으로 닥쳐있었다. 이대로라면 아무리 유리한 돌발변수가 발생한다해도 실패의 확률 이 구할은 넘을 것같았다. 그로부터 사흘간은 혈귀에게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바쁘고, 자존심 상하는 초 조의 연속이었다. 혈귀는 눈썹이 휘날리도록 삼지사방으로 뛰었다. 조직의 대부 분을 투입하였다. 혈귀의 휘하들이 사흘동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연관조직으로 사발통문을 돌리는 정도에 지나지않았으니 실제로는 천하각지의 연합체 전체가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먼저 가닥이 잡힌 것은 속근단(速根丹)이었다. 상문(祥門)의 비약이라는 속근 단은 선천진기를 자극하여 내부의 잠력을 일거에 폭발시키는 효용을 지니고 있 었다. 그것으로 모진위의 기력을 삽시간에 증폭시키려는 혈귀의 계산이었지만 속근단의 확보가 쉽지는 않았다. 혈귀가 속을 썩은 것은 상문의 후계자는 천지 간을 통틀어서 염노선지 황경인가 뭔가하는 의원나부랭이가 유일했는데, 어느 구석에 쳐박혀있는지 도대체 찾아낼 수가 없었다. 물론, 필요한 것은 황경이 아 니라 속근단이었지만, 이 속근단이라는 것이 인간의 수명을 일순간에 소진시키 는, 위험한 것이라서 상문밖으로 유출이 금지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속근단 을 확보했다는 전갈이 상부에서 내려왔다. 혈귀는 감탄하고말았다. 대단한 정보망이었다. 혈귀는 자신이 속한 조직의 막 강한 위력에 다시 한번 경악하고말았다. "허면, 며칠내로 도착한다는 것이냐?" 혈귀가 막 전갈을 알려온 흑의인에게 물었다. "그것이... 이리 보낸다는 말은 없고, 지금 하남(河南)에 있다합니다." 흑의인이 답했다. "이상하구나. 벌써 구월 중순인데, 서둘러야 할텐데..." 혈귀의 의문이 풀리기까지는 채 이틀도 걸리지 않았다. 혈귀가 자신의 동료집 단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연합의 또 다른 단체로 부터 두번째 문제의 해 결책이 통보받았다. 모진위가 심사를 가다듬고 훌륭한 살수로 복귀시킬만한 좋은 미끼가 암살대상자의 멀지않은 곳에서 속근단과 함께 인도되는 일석삼조 의 낭보였다. 혈귀는 모진위로 인해서 다시 한번 자신이 속한 단체의 비밀스러 움과 방대함을 절감하였다. 다시 말해서 모진위의 임무는 혈귀에게 조직의 진 면목을 밝혀야할 만큼 조직전체의 생사를 좌우하는, 절박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 는 것이었다. 혈귀는 다시 한번 모진위의 거사를 꼼꼼히 점검하였다. 마차가 멈췄다. 모진위는 '또 말을 바꾸려나 보다'하고 생각했다. 마차는 주야를 가리지않고 이 틀이나 달려왔다. 중간에 마차가 멈춘 것은 단지 세번뿐이었다. 그때마다 흑의 인들은 마차를 새로운 말들로 교체시켰고, 그 틈을 이용하여 간단한 음식으로 허기를 면했다. 마차의 틈새가 완전히 밀폐되어있어서 모진위는 밖을 내다볼 수는 없었지만, 히히힝거리는 말소리하며 털컹거리는 마차의 진동하며 말을 바 꿔매는 행색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모진위로써는 무려 일년 십개월만의 바깥 나들이였다. 바깥세상이라고는 하지만, 마차밖의 경관을 감상할 기회는 단 한번 도 없었으니 모진위가 남다른 감회를 느낄 기회는 없었다. 마차가 정지하자 주변의 소음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끼익- 끽. 철썩. 모진위는 그것이 노젓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가만히 귀기울여보니 다 른 소리도 들려왔다. 모진위도 예전에 이런 소음들을 들은 적이 있었다. 모진위 의 기억이 확실하다면 이곳은 나루터였고, 마차는 말을 교체하러 멈춘 것이 아 니라 강에 가로막혀 멈춘 것이었다. 옆자리의 사내가 두꺼운 헝겊으로 모진위의 눈두덩이를 단단히 감쌌다. 언제 까지라도 열릴 것같지않던 마차의 문이 열리고, 서늘한 바람이 마차속으로 들이 닥쳤다. 사내가 모진위의 손을 잡아끌었다. 모진위는 사내가 이끄는대로 마차에 서 내렸고, 서너장쯤 흙을 밟고 걸어가다가 다시 삐걱거리는 나무판들을 지나서 낮은 곳으로 내려섰다. 바닥이 점잖게 흔들리는 것을 보니 선상(船上)이었다. 모진위는 선실에 처박힌채로 이번에는 강물을 흘러내려갔다. 맞바람인데도 노 젓는 소리가 없는 것을 보니 배는 하류를 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디로 가는 걸까?' 모진위의 불안은 점차 가중되어갔다. 모진위는 혈귀의 요구를 자신도 모르게 거절하고말았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히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불길한 여행이었다. 무언가 위험한 일이 벌어지려하고있었다. 모진위가 다시 눈가리개를 하고 육지에 내린 것은 그로부터 나흘후의 칠흑같 은 어둠이 내려와있었다. 마차가 어둠속으로 질주했다. 마차속의 모진위도 불안 감이 짙어만가며 악마의 뱃속같은 공포의 어둠속으로 질주하고있었다. 마차는 오래지 않아서 멈추었다. 최소한 이삼일은 걸리리라 무심코 지레짐작 했던 모진위는 짧은 마차여행에 가슴이 털컹 내려앉고말았다. 모진위의 불길한 예감은 이곳이 종착지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 며칠동안 단 한마디의 대화도 없이 긴여행이 이루워졌다는 것 이다. 모진위는 그렇다쳐도 흑의인들마저 모두 벙어리인 듯 침묵으로 일관하였 다. 모진위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지 벌써 열흘이 지나고있었다. 모진위는 열 흘전, '싫소'라고 말했었다. '싫소'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게 된 후로 모 진위의 순수한 의지에의해 표현된 최초의 '싫소'였다. "싫소." 그들은 모진위에게 살인을 명하였고, 모진위는 분명히 대답했다. 도학정의 피 도, 눈물도 없는 무차별 응징에의해 오로지 복종 한방향으로만 길들여진 모진위 의 의사표현장치가 대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싫다고?" 혈귀는 의외의 결과에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느물거리며 되물었다. "그렇게는 못하겠소." "못하겠다?" 혈귀는 여유있는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묘하게 구부려서 턱밑을 두어번 끄적 거렸다. 그리고 경괘하게 턱을 튕기며 말했다. "도리없는 일이지." 혈귀의 여유가 모진위를 엄청난 공포속으로 몰고갔다. 사실, 모진위로서는 꼭 못할 일만도 아니었다. 모진위의 손은 이미 많은 영혼들의 피로 더럽혀졌고, 살 인은 오히려 쾌감의 원천이었다. 결정적으로 모진위가 불복하기에는 너무도 공 포스러운 존재가 혈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진위의 혼란한 심사가 모진위 로 하여금 기어코 후회할 짓을 저지르게 만들었다. 불복의 결과는 즉각적인 변 화를 가져왔다. 다음날, 모진위는 마차에 태워졌고, 이틀만에 배를 탔으며, 다시 사흘만에 마차를 타고 이곳까지 오게되었다. 문이 열리고 모진위는 끌려들어갔다. 얼마쯤 가다가 다시 문이 열리고, 모진위 는 끌려들어갔다. 모진위가 통과한 문은 그후에도 몇개가 더 있었다. 문의 숫자 와 도보시간만 따져보아도 엄청난 규모의 저택이었다. 하나씩 문을 통과할 적 마다 모진위의 전신감각은 긴장으로 터질듯 부풀어갔다. 모진위의 불안이 최고 조에 달할 무렵, 다시 문이 열렸고, 모진위는 순식간에 눈가리개가 풀려지는 것 을 느끼며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이년동안의 살수로써의 감각이 분명히 말해주고있었다. 모진위가 들어선 이 방안에 모진위가 느꼈던 불안의 끝이 자리잡고있음을. 모진위는 일시적으로 감 각이 마비된 눈을 비비며 불안의 정체를 바라보았다. 화려한 복장의 여인이었다. 모진위가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지극히 찬란한 색과 질감의 아름다운 옷을 걸친 여인이었다. "모가가(毛哥哥)! 드디어 오셨군요." 여인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넓은 창으로 넉넉하게 스며 드는 아침햇살이 여인의 눈가에서 오색 무지개를 그리며 부서졌다. 모진위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모가가라는 사람이 뒤에 서있는지 확인해보았다. 그러 나 실내에는 오로지 아침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는 여인과 모진위 자신뿐이었 다. 모진위는 다시 여인에게 눈길을 돌렸다. "저예요. 진매(珍媒). 못 알아보시겠어요?" 모진위는 눈을 찌푸리며 여인에게 시선을 집중하였다. 햇살이 너무 눈부셨다. 여인을 바라보는 동안, 모진위는 간신히 가가라는 단어의 의미를 해석해냈고, 가가앞에 자신의 성씨인 모(毛)가 붙었으니, 모가가가 자신을 지칭하는 말임을 알아채었다. "진매...?" "예. 진매예요. 모가가!" 모진위는 익숙지않은 호칭들때문에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모진위는 가가라는 호칭도 처음이었지만, 소저라는 점잖은 호칭조차 단 한번도 사용해본 경험이 없 는 처지였으니, 진매라고 불러야할 정도의 친밀한 호칭은 감히 엄두도 낸 적조 차 없었다. 드디어 눈부신 햇살에 익숙해지고 그녀의 모습을 똑똑하게 눈에 들 어왔다. "장... 장소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여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 그렁하였다. "어찌된 일이요? 두령님은? 반원들은? 그날밤, 평안객잔에서..." 모진위는 간신히 자신이 모가가라는 것을 인정하게되었고, 그녀를 진매로서 받 아들이게 되었다. 이젠 십칠세의 여인으로 몰라보게 성숙해버렸지만, 그녀는 분 명히 신검반의 장여진이었다. "천첩이 문안인사올립니다." 장여진이 먼길에서 돌아온 신랑이라도 맞이하는 듯 다소곳이 절을 올렸다. 모 진위가 이번에는 '모가가'와 '진매'에 이어서 천첩이란 단어의 낯설음과 싸워야 했다. 하긴, 장여진의 천첩이란 겸양이 전혀 택도 없는 비례는 결코 아니었다. 평안객잔의 그날밤만 없었어도 이미 일년 육개월전에 부부가 되었을 모진위와 장여진이었다. 장여진은 신검대회입상후, 장가량이 맺어준 모진위의 약혼녀였다. 모진위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황급히 맞절을 하고야말았다. "살아계실줄 믿고 있었습니다. 모가가만은 살아계실거라고, 언젠가는 반드시 만날거라고... 부처님께 기원드리고 또 기원드렸지요. 다 부처님의 은덕입니다. 살아계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자세를 바로잡은 장여진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장소저가 이곳을 어떻게...? 아니. 아니. 장두령님, 신검반분들은 모두 어디 계 십니까?" "그날밤, 돌아가셨습니다. 평안객잔에서 원흉들의 마수를 모면하신 분들도 모 두 객잔 사방십장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합니다. 하지만 모가가의 시신은 찾 을 수가 없었지요. 천첩은 생존해 계시리라 굳게 믿고있었답니다." "장소저, 평안객잔에서 무슨일이 있었길래... ...?" 소매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던 장여진이 의아스럽다는 듯 모진위를 응시 하였다. "모가가! 모가가께서도 그날 밤, 평안객잔에 계시지 않았단 말씀이십니까?" "아, 아니오. 분명히 객잔에서 잠이들었소. 그런데 깨어보니 소생도 모르는, 전혀 엉뚱한 장소에 있었소."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장여진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머리를 꺼냈다. 긴 이 야기였다. 항주에서의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신검대회 차석입상자를 배출한 후광이 신검 반의 탄탄대로를 보장해주었다. 신검대회후, 옥진강의 무예극을 업으로하는 모 든 단체가 양주의 주변으로 흩어졌지만, 신검반의 소식을 듣고는 감히 항주근처 를 얼씬거리는, 눈치없는 단체들은 없었다. 그리고 양주에서 그리 멀다고 할 수 없는 지방인지라, 신검반의 위명은 항주일대에서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사건 은 항주에서의 마지막공연이 끝난 날밤에 일어났다. 일행은 다음날, 장강을 타 고 천천히 서진(西進)할 계획이었다. 신검반은 수로와 육로를 동시에 접하고있어서 교통이 편리한 쌍연교(雙燕橋) 에 자리잡고있는 평안객잔을 통채로 빌려서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날밤 평안객잔의 주인과 가솔을 포함하여 일흔두명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소주에서는 '쌍연교의 대학살'이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로 끔찍한 사건이었다. 그 럴만도한 것이 열명이상이 떼죽음 당하는 경우는 삼십년만에 처음있는 대참사 였기때문이었다. 팔십먹은 항주토박이가 알고있는 최대살육전은 오십년전 무림 문파간의 시비에서 열세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호룡장(虎龍莊)기습사건이 고작이었다. 물론 그 기간동안의 양파벌의 희생자를 합치면 열세병보다는 더욱 많은 숫자였지만,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는 아홉명이 최고기록이었다. 관(官)이 발칵 뒤집혔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무림단체간의 분쟁도 이런 대 량학살극은 용납되기가 쉽지 않았다. 하물며 신검반의 경우는 무림인들과의 분 쟁으로 보기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많았다. 관은 범인색출에 총력을 기울 였고, 범죄의 일당들은 곧 검거되었다. 백골파(白骨波)라는 하오문의 무리들이 신검대회의 상금과 항주에서의 대성공으로 인한 재화를 노리고 평안객잔을 습 격했다는 것이었다. 기록상으로는 신검반의 대두령 장가량의 여식인 장여진이 유일한 생존자였고, 모진위는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었다. "천첩은 단 한명도 남김없이 신검반 전원이 살해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오로지 그날밤, 그곳에 없었음이 한스러울 따름이었습니다. 복수의 여망도 없었지요. 백 골파는 사건개입에 상관없이 전원이 참수당했으니까요. 관에서 인근을 수색하 여 시신을 수습하고, 천첩이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하였습니다. 끝내 모가가의 시신은 발견할 수 없었지요." 장여진의 설명을 들은 모진위도 자신이 어떻게 죽지않고 살아있는지 의문이 생겼다. 장여진은 그날밤 소주의 무슨 유명한 행회조직(行會組織: 상인길드조 직)의 초청을 받고 평안객잔을 나갔었다. 워낙 간절한 요청인데다가, 거액의 사 례비까지 제공되어서 장가량이 장여진의 공연을 허락하고 말았다. 여행채비때 문에 인원을 뺄 수가 없어서, 마차에의한 안전한 호송을 전제로 가까스로 장여 진 혼자만 연회에 참석토록 했던 것을 모진위는 기억해냈다. 하지만 모진위의 경우는 연결고리가 없었다. "만행을 저지른 놈들이 백골파란 게 확실히 밝혀졌소?"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모든 증거가 백일하에 드러났으니까요. 그런데 어인 연유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요?" "아, 아닙니다." 모진위는 미궁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자신은 어떻게 죽지않고 살아남았 으며, 어떻게 혈귀일당의 손아귀에 넘어간 것일까? 흉수는 백골파였고, 백골파 는 모두 참수당했다. 그러므로 혈귀의 패거리는 당연히 백골파가 아니다. 사전 에 백골파와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일까? 장여진이 자신을 찾아온 것도 그들 의 행적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곳에 오게 되었소?" "모가가를 만나게 해준다고 하더군요. 조심했어야했는데... 결국은 납치당한 것 과 매한가지의 결과가 되었지요. 모가가를 뵐 낯이 없습니다. 부디 괘념치 마시 기 바랍니다. 공연히 부담만 끼치게 되었으니..." 장여진이 무거운 안색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장소저, 그게 무슨 말씀이시요?" "아, 아닙니다. 천첩이 괜한 소리를..." 모진위는 장여진에게서 예사롭지 않은 기색을 눈치채고 독촉하였다. "자초지종을 밝혀주시오." 장여진이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어서요." 몇차례의 채근끝에 장여진이 마지못한 듯 말문을 열었다. "천첩의 목숨이 모가가의 손에 달려있다고 그들이 말하더이다. 지아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녀자의 몫, 천첩의 목숨은 모가가의 것이니 사소한 일에 연연하 여 대의를 그르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5396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25- 02/22 23:10 327 line 고영감은 이 생활만 삼십년이었다. 이제와서는 '쿵'하면 옆집 이화장(이화장)에 호박떨어지는 소리요, '척'하면 삼천리였다. 방문객을 맞이하는데 있어서 실수는 전혀 허용치 않는 이 계통의 권위자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그런 자부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 서있는, 십대후반의 초라한 청년이 고영감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고 있는 것이었다. 피죽 한그릇 제대로 못 얻어먹은 것같은 몰골의 주제에 감히 어르신의 알현을 주장하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은 일고의 가치도 없이 대번에 내쳐버렸을 터이 지만, 고영감은 주저하고 있었다. 삼십년간의 문지기로써의 파란만장한 경험에 의한 예리한 감각이 그의 축객령을 왠지 자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고영감은 다시 한번 청년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일견하기에는 어르신과 연(緣)이 있을 가능성이 전무해보였다. 비교적 단정한 옷차림새였지만, 옷과 신체가 따로 놀고있었다. 거적대기로 갈아입히면 영판 거 지로 딱 어울릴 얼굴과 몸매였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겉모습과 판이했다. 그 점이 고영감의 확신을 흔들어놓고 있었다. 고영감의 감각은 그 청년이 최소한 거짓말을 하고 있지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어르신이 정말 그 청년을 초대를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청년은 자신이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치않고 있음이 확실했다. 몇가지 수작을 부려보았지만, 아무리 시험 해봐도 그의 태도에는 연기나 속임수가 들어나지 않었다. "이 늙은이가 눈이 어두운데다가 배운것이 없어 명부(名簿)에서 소협의 대명을 제대로 확인치못하고 말았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곧 조처해드리겠습니다. 소협께 불편을 끼치게되었음을 양해하시길..." 고영감은 그렇게 말하고, 청년을 접객실로 안내한 뒤에 중원(中園)으로 향했 다. 고영감으로서는 축객령을 내리기도, 통과를 허락하기도 어째 좀 껄끄로운 점이 있었다. 원래 본격적인 출입감시는 중원부터 시작되는 지라 약간 미심쩍 은 인물들도 가급적이면 마찰을 삼가하고 통문을 시켜주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파락호나 시정잡배들까지 소란이 두려워서 통과시켜줄 정도로 녹녹한 고영감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번 방문객은 외견상으로는 시정잡배보다도 격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고영감은 일단 중문(中門)의 경호무사들과 상의해보 기로 마음을 정했다. 유진목(劉眞穆)은 바야흐로 최대의 고비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제 열흘남짓이 면 적들은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상을 입게될 것이고, 승부의 추는 뚜렷하게 이 쪽으로 기울 것이다. 비례적으로 유진목으로서는 가장 힘겨운 승부처에 들어섰 다는 것을 의미하고있었다. 이제 적들이 결정타를 모면할 길은 오직 하나, 천하 제일의 염상(鹽商) 채소우의 죽음뿐이었다. 어떻게든 채대인을 시해하기위해 적 들은 발악할 것임이 자명하였다. 이제까지 몇번의 도발이 있었지만, 유진목은 그럭저럭 적들의 기습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전례에 비추어볼때, 그리 호 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대규모 축하연따위의 특수상황의 틈새를 타고 침입 해온다면 유진목으로서도 불리한 위치를 감수해야만 했다. 특히, 금일과 익일, 이 이틀이 가장 위험한 승부처였다. 내일은 시월 초엿새, 바로 채대인의 환갑 일이었다. 유진목은 초청자명단과 내방객예상목록에 다시 코를 쳐박고 고심하기 시작했 다. 철저히 통제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미 사흘전부터 채가장을 출입하는 유동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주의 거상, 채소우의 환갑연은 예상외로 조촐하게 치루워지리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었다. 씀씀이가 대범하고, 사람사귀기라면 천하의 으뜸인 채대인의 환갑연에 그것은 어부성설이라고 대부 분의 주위사람들은 핏대를 세우겠지만, 사정을 아는 이들은 대체로 고개를 끄덕 일 것이다. 유진목의 강력한 건의가 채대인의 수연(壽宴)을 크게 위축시켜놓았 던 것이다. 유진목은 황실의 비밀경호단체인 호위각(護危閣)에서 채소우를 보호하기위해 서 특단의 조치로 파견된 고수였다. 황실의 비밀무사가 일반에 파견된다는 것 은 그 유례가 없는 일이었는데, 그만큼 채소우의 생사가 젊은 황제의 천하경영 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었다. 뒤집어 이야기한다 면 유진목의 최대목표는 채소우의 안전이지, 그의 명예나 체면이 아니라는 이야 기였다. 또한, 채소우로서도 유진목을 일개 호위무사로 대우할 수는 없었다. 황 실의 숨겨진 고수인 만큼 채소우도 유진목의 요구는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 한, 별다른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순응하는 편이었다. 근래의 일련의 암살기도도 그러한 흐름에 일조하였다. 유진목은 힘이 닿는 정재계(政材界)의 요로(要路)에 알력을 행사하여 경계대상 으로 지목되는 인물들의 회갑연참가를 최대한 억제시켰다. 요주의 인물이라고 는 해도 스스로 회갑축하를 빙자하여 방문한다면 문전박대할 구실이 없었기때 문이었다. 밝혀지지않은 적들의 정체가 유진목의 경계대상목록과 일치할 가능 성은 적었지만, 사태와 무관한 자라고 증명되지 않는 한, 사건발생시 수비력의 집중을 저해시키는 빌미가 될 수 있었다. 유진목의 처리는 유효적절한 것이어 서 성공적으로 무림인들의 방문을 대폭 축소시킬 수 있었다. 유진목은 내방객들의 성향과 출신을 재확인하고, 회갑연에서의 자리배정과 수 비위치에 빈틈을 다시 한번 검토해나갔다.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있었다. 예상 못한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보였다. 적어도 호경방(豪敬邦)이 찾아 오기 전까지는 발생가능한 모든 사태를 염두에 두고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유대협! 내문의 호가(豪家)올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내문의 책임을 맡고있는 호경방이었다. "호대장이 왠일로... 들어오시게." 유진목은 목록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두명의 경장무사가 방으로 들어섰다. 호경방과 대동한 인물은 중문소속의 사 내였다. 채가장은 모두 세부분으로 나누어져있었다. 일반담장으로 둘러쌓여진 외원(外 園)과 외원 안쪽에 어느 정도 요새화된 성벽으로 경계가 둘러진 중원(中園), 그 리고 중원의 내부에 철저히 방호시설이 갖추고 도사리고 있는 내원(內園)이었 다. 첫번째 채대인피습사건이후, 부랴부랴 급조된 장원구조라 아직 따로이 이름 을 정하지못하고 모두 그렇게들 부르고 있었다. 내문(內門)은 채대인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구역의 관문인지라, 내문을 출입 하는 인사들에 대해서는 유진목도 예의주시하고 직접 챙기는 터라 내문을 지키 는 무사들이 유진목을 찾아오는 일은 빈번하였지만, 중문의 무사가 유진목을 방 문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유진목이 중문무사의 내방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시요?" "자네가 말씀드리게." 호경방이 중문수비무사에게 말을 넘겼다. "그것이... 중문에서 통과을 불허(不許)하기에는 어쩐지 좀 거북한 손님이 있어 서..." "무슨 말씀이신지...?" "제 판단으로는 중원을 허락할 정도의 인물은 아닙니다만... 방문객쪽에서는 채 대인께서 직접 내방을 허락하셨다 말하고 있습니다." 중문무사가 대답했고, 이어서 호경방이 보충설명을 하였다. "서대협께서 직접 손님을 모시고 내문까지 오셨습니다. 수하(手下)도 아직 손 님을 직접 면식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유대협의 하명(下命)을 받고 조치하가 것이 무난할 것같아서..." 유진목은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당연히 초정자명단에도 없고, 중 문은 커녕, 외문도 통과하기 어려운 신분의 소유자일 것이다. 그런데 수문의 무 사들에게 현재까지는 속임수라고 증명되지않는, 그렇다면 거의 사실로 인정될 만한 방문이유를 가진 정체불명의 내방객이라는 이야기가 되었다. 순간, 유진목 의 뇌리에 복잡한 가능성들이 바람처럼 휘돌았다. 모든 발생가능한 사태를 대 비했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것이 정리정돈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방문객 으로 인한 새로운 가능성이 주변을 흐트러놓아버렸다. 아무튼 유진목 자신이 직접 처리해야할 문제인 것만은 분명하였다. "그래, 이름은 무어라하오? 그리고 출신내력은 알아보셨소이까?" "조부께서 년전에 돈황(敦煌)석굴 근처에서 얻으셨다고 하더군요. 신비로운 관 음상(觀音像)이지요." 모진위는 깜짝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여인이었다. 이제 열여섯살쯤 되어보이는 소녀티를 갓벗은 여인이었다. 모진위가 어색함을 드러내며 불편해함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전혀 동요하지 않 고, 편안한 태도로 방금전까지 모진위가 몰두하고 바라보던 관음상에 눈길을 주 었다. 그리고는 모진위에게 고개를 돌려서 싱긋 웃어주기까지 했다. 전혀 꺼리 김이 없는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모진위도 그 분위기에 감염이라도 된 듯, 그 답지않게 목소리하나 떨지않고 반 문을 했다. "이 석상이 관세음보살이라구요... 관세음은 본래 여자였군요. 뜻밖이로군요. 관음보살이 여승이었다니." 까르르- 여인이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렸다. "관세음보살이 여승이라구요? 푸하하..." 모진위는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모소협께서는 한번도 사원(寺院)에 가보신 적이 없나요?" 물론, 모진위가 전혀 사원구경도 못해본 것은 아니었다. 불상도 먼발치로 힐끗 보기는 했다. 그러나 차분히 감상할 여유따위는 언감생심이었고, 누가 따로이 자세한 설명을 해준 적도 없었으니 어느 석상이 무슨 보살(菩薩)이고 무슨 여 래(如來)인지 구별해낼 재간은 없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이라고 말은 들어봤기 에 그저 오래전에 살았던 훌륭한 승려려니 지례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본 적은 있습니다만, 이거 소생이 너무 무지해서... 어쨌든 참으로 신기한 여인상이군요." "수준높은 안목가지고 계시군요. 모소협." "그런데 소저께서는 저를 아십니까?" 모진위로서는 일면식도 없는 여인임이 분명했는데, 여인이 자신을 보고 대뜸 모소협이라고 부르자 모진위가 물었다. "아, 인사가 늦었군요. 소녀는 채경령(蔡慶齡)이라 하옵고, 이곳 채가장의 주인 이 소녀의 조부되십니다." 모진위는 채소우에게 직계가족이라고는 일점혈육(一點血肉)으로 오직 손녀가 하나가 전부라는 상황정도는 교육받았다. 그래도 적지않이 당황하였다. 너무도 소탈한 태도에 천하거부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 었던 것이다. 모진위는 황급히 예를 취하였다. "그렇군요. 필부 모진위, 소장주님께 문안드립니다." "과분합니다. 예를 거두워주십시요. 소장주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저 채소저 라 불러주세요. 모소협은 채가장소속이 아니시니 서로 평대가 온당하지요. 소녀 가 본의아니게 일방적으로 모소협을 견식하게 된 것은 소녀의 조부께서 체통도 잊으시고 허둥대시는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왠일인가하고 할아버지를 따라나섰 다가 먼발치에서 소협의 존안을 뵙게되었지요." 오시(午時)쯤이나 되었을까 태양이 중천을 가를 무렵이었다. 마침 채경령이 조 부 채소우의 처소에서 내일있을 회갑연에 대해서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조부의 안전을 담당하고있는 유진목대협이 건너와서 물었다. "혹시 모진위라는 자를 알고계십니까?" "누구요... 글쎄..." "전에 신검반에 있었다하더군요." "신검반? 쌍연교대학살의 그 신검반말씀이요?" "예. 신검반의 모진위라고 했습니다. 이년전에 대인께서 회갑때 꼭 방문해달라 고 하셨다고..." 쌍연교의 대학살이라면 채경령도 기억하고 있었다. 항주의 평안객잔이라는 곳 에서 벌어진 혈겁이었다. 흑의와 검은 복면으로 복색하여 온통 새카맣게 보이 는 정체불명의 무리들이 신검반과 평안객잔의 가솔들을 도살한 사건이었다. 멀 리 항주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조부 채소우가 그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여 기 저기 사람을 풀어서 알아보았기에 채경령도 어렵지않게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채경령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때의 일이라면 단 한명의 생존자도 없었다 고 들었는데, 신검반소속을 주장하는 이가 채가장을 방문한 것이었다. 조부의 얼굴에 대번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모진위라는 이름을 재차 확인하 더니 급하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대인... 대인." 조부의 돌연한 행동에 유대협도 대경실색하며 따라나섰다. 채경령은 혀를 찼다. 채경령은 유진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채가장은 이미 구중궁궐에, 철통같은 요새나 진배없었다. 채경령이 생각하기에 세상 어느 누구 도 감히 이 험로를 뚫고 들어와누군가를 해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었다. 그런데도 개봉에서 왔다는 저 유진목이라는 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어느 옛사람을 방불케할 정도로 유난을 떨고있었다. 하다못해 내 원에서의 산책마저도 미리 안배하고, 준비가 갖추어져야만 산책로에 조부를 나 서게 할 정도였다. 가히 중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감히 누가있어 할아버지같은 어진 분을 해할 생각을 품을 것이며, 설사 그런 미치광이가 있다해도 도대체 무 슨 방법으로 이 철통같은 채가장의 방비를 뚫겠는가? 채경령은 유진목의 어이 없는 호들갑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유유하기만 하던 할아버지의 호들갑은 뜻밖이었다. 채경령도 호기심이 동하여 유진목이 달려가는 방향으로 천하에 여유로운 자세로 걸음을 옮겼다. 내문의 접객실에서는 할아버지가 열여덜살이나 됐을까싶은 불쌍한 사내의 손 을 잡고 연신 '잘왔네. 자네가 살아있을줄은 정말 몰랐네'를 연발하고 있었고, 유진목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불쌍한 사내의 동작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채경령이 보기에 사내는 자신의 조부는 커녕, 닭모가지하나 비틀 힘도 없어보였 다. 조부는 이래뵈도 왠만한 무림인들에게는 전혀 꿀릴 것이 없는 강호고수급 의 무공을 가지고있었다. 하지만 채경령도 유진목의 조금도 지체없이 손을 쓸 수 있도록 준비된, 빈틈없는 자세와 진지한 눈빛에 대해서만은 감탄을 금할 수 가 없었다. 여하튼 신중하기로 소문난 채가장의 두 거물이 호들갑을 떨도록 만 든 당사자인 그 사내가 바로 모진위라는 작자로서 할아버지가 몽매에도 잊지못 하던 정통 추혼십이절의 유일무이한 계승자였다. 채경령은 예상밖의 모습에 실망을 금치 못하였다. 한주먹꺼리도 안될 것같은, 저 불쌍한 사내가 그 무지막지한 추혼십이절의 전승자라니... 추혼십이절로 세상 의 찬사와 환호를 한 몸에 받는 금색(金色)의 사내를 예상했는데, 그 추악한 용 모와 체형으로 온갖 질시와 천대를 받았을 것이 뻔한 사색(死色)의 청년이 애 처롭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채소우 당당한 풍채를 마주하여 움추러들고있었던 것이었다. 관음상은 누구라도 보듬어줄 듯 온유한 표정으로 어머니처럼 자애롭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마사(天馬寺)의 주지 관휴(貫休)스님은 이 관음상을 보고 '관음보살의 현신(現身)을 보는 것같군요. 이 관음상을 보니 다른 관음의 모습 은 상상할 수도 없소이다. 아미타불!' 하고 감탄을 해서 채소우를 깜짝놀라게 할 정도였다. 너무도 초라하고 평범해서 세인의 눈길을 끌지못하던 관세음보살 의 석상이었다. 오늘도 그랬었다. 하객들은 이곳의 호젓한 석림(石林)보다는 화려하게 장식된 정원을 배회하였고, 드물게 석림을 산책하는 이들조차도 관음상에는 눈길주는 이들이 없었다. 그런데 채경령이 석림에 도착해보니 놀랍게도 관음상에 빨려들 어갈 듯이 몰입해있는 인물이 있었다. 모진위였다. 채경령은기이함을 느끼고 모진위에게 접근해서 먼저 말문을 열었다. 모진위의 눈길은 마치 고정이라도 된 듯, 관음상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채경 령은 그런 모진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같았다. 관음상의 은근한 미소는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안쓰러움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험한 인생역정을 살아왔다고 얼굴 가득히 쓰여있는 모진위에게는 너무도 위로가 될 것같은, 애처 로움이 넘쳐나는 관음의 미소였다. "관세음께서는 힘센 이들보다는 약한 이들을, 아름다운 이들 보다는 추한 이들 을 더 사랑하셨다고 하지요?" "예...?" "인세에서 가치가 없는 사람일수록 관세음께는 가치가 높은 사람이고, 인간들 사이에서 관심을 끌지못하는 사람들에게 관세음은 더욱 관심을 기울이셨죠." "믿을 수가 없는 얘기군요." 모진위는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은 채경령의 말과는 다른 진리를 모진위의 뼈속 깊은 곳까지 각인시켜주었다. 추한 몰골은 죄악이라고, 약함 또한 죄악이 라고, 추하고 힘없는 자들은 당연히 가치가 없는 자이고, 그들은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모진위는 그것이 자신의 숙명이라고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채경령은 불신의 표정으로 가득한, 아니 신념에 가깝게 그렇지 않다고 믿고있 는 모진위의 기색을 보고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소협, 소녀를 보세요. 소녀의 미색이 어떠한가요?" "... ..." 모진위는 채경령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딱히 이쁘다고 할 수는 없는 용모였다. 단지 용모자체만 놓고 논한다면 오히려 평범한 여인보다도 오히려 손색이 있는 용모였다. "미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채경령이 쓸쓸하게 말했다. 분명히 미인이라고 할수는 없었지만, 채경령에게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무엇이랄까 빛과 같은 무엇이 있었다. "하지만..." "알아요. 모소협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소녀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는거지요? 그래요. 소녀는 소협께서 가지지 못한 것을 가 지고 있어요. 그러나 그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특별한 것은 아니지요. 외람된 말이지만, 소협도 노력만 하면 가질수 있는 것이지요. 관세음보살의 사랑도 마 찬가지지요. 받아들이면 받을 수 있는거지요." 모진위는 채경령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채경령은 있지만, 모진위에게는 없 는 것... 그때 모진위의 가슴속에 남아있던, 앙금같은 불안이 모진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모진위가 장여진을 만나기 직전까지 모진위를 압도하 던 극도의 불안감이 남긴 찌꺼기같은 것들이었다. 장여진을 만나고나서도 채 가시지않던 일말의 불안감들... 스스로를 모진위의 천첩이라고 불렀던 장여진. 정혼자를 면식함에 있어서 필요없을 것같은 무언가가 장여진의 내부에 있었다. 그것이 완전히 해소되지않는 불안감의 근원이었는데, 채경령과의 대화속에서 모 진위는 어떤 실마리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고보니 채경령에게는 정반대로 모진 위를 대면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표출하는 무언가가 없었다. 장여진에게는 없어 야 마땅한 무언가가 있었고, 채경령에게는 있어야 당연한 무언가가 없었다. 장 여진에게는 있었고, 채경령에게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그 정 체를 밝힐 수는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도 골똘히 하시는지요? 모소협." "... ..." "모소협?" "예? 아... 저기, 저거... 눈을 좀 보세요." 채경령은 모진위의 손짓을 따라 관음상의 안구를 주시하였다. "아니, 아니. 이렇게 소생처럼 걸음을 옮기면서..." 채경령이 모진위를 따라 위치를 바꾸며 관음상의 안구를 바라보았다. "아! 이럴 수가..." 채경령이 감탄성을 토해내었다. 그리고 속도를 빨리하며 관음상의 전방주위에 반원을 그리며 바쁘게 돌았다니기 시작했다. "신기하군요. 자리를 바꾸어도 관세음보살께서는 소녀에게 눈길을 보내고 계시 는 군요." "소저께서 보시기에도 그렇지요?" "그러니까...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동시에 이곳에 모여있어도 관세음께서는 모든 이에게 골고루 위로의 눈길을 보내고 계시는 셈이로군요." "원래 채소저께서는 이런 이유로 신비로운 관음상이라고 하신게 아니신가요?" 채경령이 볼을 붉게 상기시킨채,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건 소녀도 몰랐답니다. 모소협의 관찰력은 정말 예리하시군요. 감 탄했습니다." "하하, 소저께서 소생을 너무 높게 평가하셨군요. 관찰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오히려 소생의 시력이 너무 부족한 덕분에 이런 신기를 발견하게되었습니다. 그런데 채소저께 소저께서 신비로운 관음상이라고 말씀하신 연유를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무례한 질문이었다면 못들은걸로 해주십시요." "소협덕분에 기연을 얻어 경이로운 감상을 하게 되었는데 어찌 소녀가 답례를 생략하오리까.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채경령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바람에 실려가듯이 사뿐히 별당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채경령의 손에는 기다란 장대가 들려있었고, 장대끝에는 커다란 구슬이 매달려있었는데, 희미한 빛을 발하는 것을 보니 야광주(夜光珠)였다. 상 당히 귀한 야광주인지 아직 석양이 세(勢)를 다하지 않았음에도 야광주는 희미 하게나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본시는 밝은 태양아래서 긴 시간을 두고 관찰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소 녀는 시간여유가 그다지 많지않은 친인들을 위해서 종종 이런 여흥을 마련하고 는 했지요. 어둠이 가득찰 때까지 잠시만 더 기다려주십시요." 이윽고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어둠이 깃들자 채경령은 장대를 들고 관음상 옆 으로 갔다. "관세음의 표정을 잘 살펴보시기바랍니다. 소협." 채경령이 장대를 최대한 들어올려서 관음상의 머리위 전면으로 야광주의 빛을 흘려보냈다. 순간, 관세음의 미소에 힘찬 기상이 피어올라왔다. 마치 힘들고 괴 로운 중생들에게 기운을 돋구어주려는 듯이. "새벽녁의 관음보살이지요." 채경령의 야광주가 서서히 자리를 옮기었다. 장대는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동하고 있었다. 관음의 얼굴에는 점차 즐거움이 고이기 시작했다. 채경령의 음성이 다시 흘러나왔다. "아침나절의 관세음입니다. 희망이 넘쳐흐르지요?" 야광주가 이동함에 따라 관음상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이제는 기쁨 이 점차 잦아들고 편안함이 점차 짙어져갔다. 그렇게 관세음은 한낯의 편안함 에서 오후의 자애로움으로, 저물녁의 안쓰러움으로 변해가고있었다. 하루의 변 화가 모두 이루워지자 채경령은 밭은숨을 몰아쉬며 장대를 내려놓았다. "태양광속에서 보면 더욱 장엄하지요.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이걸로 양 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 모진위는 말을 잊고 있었다. 채경령은 생긋웃고는 한마디 더 보탰다. "하루의 경과에 따라서만이 아니라 계절에 따라서도 관음의 표정은 변화하지 요. 소녀는 가을 저물녁의 관음상을 가장 좋아한답니다." "... ..." "어머, 너무 늦었군요. 모소협께서 원로에 피곤하실텐데, 소녀가 그만 주책없 이...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채경령이 총총히 물러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모진위는 갑자기 둔기에 라도 얻어맞은 듯 두눈을 크게 떴다. 채경령의 모진위를 대하는 태도에는 응당 있어야할 것이 없었지만, 모진위 자신도 채경령을 대함에 있어서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무언가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시절 세상을 질시를 피하여 숨어들어갔던 보호막이자, 이제와서는 살수로 써 항상 견지해야 본능감각이 전혀 발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진위는 그가 기 억하는 한, 생애처음으로 마음속의 억압기제에서 해방되어 자연 그대로의 모습 으로 채경령과의 한때를 순수하게 즐겼다. 모진위도 드디어 한때나마 세상을 즐긴 경험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모진위는 그 즐거움의 여운이 채 가 시기도 전에 식은 땀을 흘려야했다. 살수가 살수로서의 본분을 망각하다니... 모진위는 멍하니 채경령의 맑은 미소를 되새겨보았다. 흑수노계였습니다. #5452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26- 03/08 20:41 343 line 하늘에는 별이 없었다. 이미 묘시(卯時)가 지났다. 태양이 이미 지붕위로 올라 갔으니 별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도 모진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추어볼 때까지도 창천에는 온통 별빛이 반짝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별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모진위는 별들을 찾아보았다. 보이지는 않지 만, 하늘 어딘가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별들을... 모진위의 가슴에서 별하나가 피어나더니 이내 창천으로 날아올라가 한껏 빛을 발하였다. 모진위는 그것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라고 생각했다. 구연기의 눈 길. 또 다른 별하나가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무뚝뚝해보이지만, 따듯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이번에는 장가량의 눈동자일 것같았다. 별들은 계속해서 날아올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많은 별들이, 아니 수많은 눈동자들이 모 진위를 내려다보았다. 정겨운 신검반사람들의 눈망울이었다. 모진위가 하늘을 추어본 때는 신검반을 대표해서 벌이는 모진위의 생애 첫공 연직전이었다. 광대들의 단체인 신검반의 일원이면서도 단한번의 공연경험조차 없는 모진위, 그가 양주 제일의 거부 채소우대인의회갑연에서 가장 중요한 공 연의 주인공으로 신검반을 대표해서 무대에 서있는 것이었다. 모진위가 검을 빼들었다. 모진위는 조심스럽게 검두(劍頭)를 밀어올렸다. 내력 (內力)을 주입할 수 없는 모진위는 무위조식을 발동하여 등룡육권의 '흡(吸)'자 결과 '탄(彈)'자결을 동시에 운용해서 주변의 기를 손바닥으로 받아서 검끝에 주 입하였다. 기운이 점차 모여들자 검끝이 수줍게 떨기 시작했다. 기가 더해짐에 따라 검끝의 떨림이 검전체로 확산되어 나갔다. 모진위가 서서히 고개들어 하늘을 추어보았다. 그리고 하늘 어디선가 자신을 굽어보고 있을 신검반원들의 영혼들을 느껴보았다. 모진위는 구천을 떠도는 혼 령들에게 위령제(慰靈祭)를 올리는 심정으로 추혼검을 기동하였다. 검은 신명이 라도 들린 듯 안타깝게 몸을 떨었다. 미세한 검의 요동이 속도를 더해갔다. 검 은 스스로에 겨워서 참을 수 없는 듯 몸서리를 쳤다. 진저리치는 검의 떨림이 절정에 달하자 모진위는 '탓'하는 짧은 호성(呼聲)과 함께 내부경락을 떠돌던 잔여기운을 일거에 뽑아올렸다. 그리고 손목을 꺽어서 검을 제어하던 힘을 일시에 풀어버렸다. 돌연 수직의 검신(劍身)이 여러줄기의 검광으로 갈라져 나갔다. 갈라져나온 검영(劍影)들은 최초의 검체를 원형으로 둘러쌓며 넓고 부드러운 형상을 그려내었다. 마치 분신술처럼 흩어진 검면(劍 面)들은 여러각도로 요동치며 눈부신 아침햇살을 사방팔방으로 흩뿌려댔다. 화 뢰초개(花뢰初開)였다. 이제 막 꽃망울이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이라는 이름의 추혼십이절 제일절이 구연기를 위하여, 장가량을 위하여, 신검반의 영령 모두를 위하여 꽃으로 피어난 것이었다. 하늘의 눈동자들은 흐믓하게 웃고있는 듯했다. 어서 더해보라고 격려하고 있 었다. 이제는 모두 이승을 떠나 아무도 예전처럼 방해하거나 핀잔줄 사람도 없 으니 마음대로 흐드러지게 검무를 펼쳐보라고 격려라도 하는 듯 느껴져서 모진 위는 마음이 밝아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모진위는 다시 땅이 꺼질듯 의기소 침해졌다. 모진위를 제외한 신검반 모두가 떠난 것은 아니었다. 장여진이 남아 있었다. 그것도 모진위의 정혼자라는 신분으로 남아있었다. 모진위는 그녀의 유 일무이한 보호자로서 이제 그 책무를 다할 때가 온 것이다. 모진위 마음가는대 로의 춤사위는 화뢰초개 한소절로 종말을 고해야 했다. 더불어 신검반원들의 억울한 저승길을 배웅하는 작별의식도 끝을 맺어야 했다. 모진위가 따라야 할 각본은 따로 정해져있었다. 이 정도의 행로이탈도 모진위로서는 가슴 조릴 일 이었다. 이 연극의 각본자이자, 연출자가 모진위의 각본에 없는 행동에 자극을 받아서 장여진의 명줄을 움켜쥔 손에 힘을 증가시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 진위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제외한 신검반 유일의 생존자 장여진을 위하 여 원래의 각본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즈음 모진위의 각본을 정해준 사내는 채가장에서 날라오는 시시각각의 보고 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채가장에 공들여 심어놓은 간자(間者)들이 총동 원되었다. 수년전에 잠입시킨 내원의 간자가 중원으로 신호를 보냈고, 간신히 중원까지 침입한 대기자는 외원으로 기통을 놓았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외원의 외문출입자가 사내에게 전갈을 보냈다. 그렇게해서 올라온 보고는 그 시작부터 예정된 행로에서 벗어나있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예행연습을 반복했건만 모진 위라는 녀석이 엉뚱한 짓거리를 하고있는 것이었다. 모진위가 봤다면 '혈귀'라고 거명했을 흑의의 사내는 바위처럼 굳어버렸다. 주변공기마저 일시에 정지시킨 듯, 사내는 미동도 하지않았다. 사내의 기색은 다음보고를 읽고나서야 조금씩 풀려나갔다. 모진위가 다시 정상궤도로 회귀했다는 반가운 전갈이었다. 수하들의 보고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던 혈귀는 문득 그런 자신이 한심스럽 게 느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왔단 말인가? 살인에 관한한 혈귀에게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자신이 직접 나선 경우는 차제하고라도 하급암살자를 파견했던 수많은 살행에서도 실패는 없었다. 적어도 채소우를 목표로 하기전까 지는 한번의 시도에 반드시 하나이상의 생명을 거두워들였었다. 그랬던 것이 채소우라는 암초가 혈귀를 가로막았다. 세번의 시도에 수하들만 여섯명 손실하 는 대기록을 남겨준 것이었다. 혈귀의 살인경력에 치명적인 오점이 찍히고 말 았다. 혈귀의 티없는 전적에 흠집을 남긴 인물은 유진목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황실경호를 담당하는 숨겨진 단체가 있다고 했다. 흔히들 비각이라고 부르는 위사(衛士)들의 집단이었다. 그동안 파악되어진 정보에 의하면 유진목은 신진사 대부들의 입김에 의해서 황실에서 채가장으로 파견된 보표(補표)로 밝혀졌다. 유진목은 비각이라는 확인되지않은 단체의 일원일 확률이 높다는 추측이 전면 으로 부각되었다. 혈귀측에서는 그러한 대비책은 관료조직의 특성상 거의 불가능하다고 상대의 대항전력에서 제외시켜버린 작전변수였다. 그런데 신진사대부들의 조치는 그야 말로 신진답게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도록 파격적이고 신속하였다. 결국 보기 좋게 한방 얻어맞은 꼴이 되고말았다. 혈귀는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몇번의 기습으로 적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노 출시켰으며, 채소우를 비롯한 상대편 요인들을 더욱 견고한 요새속으로 안내해 주는 부작용을 발생시켰다. 유진목의 기량을 감안한다면 이미 혈귀는 자신이 직접 나설만한 기회는 날아가버렸다. 그렇게해서 갑자기 유력한 대안으로 부각 된 것이 계획패기로 내심 결정해두었던 최악의 방책, 모진위였다. 형편없는 하 급자질의 살수 모진위가 그나마 방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모진위는 유진목의 존재이전에 이미 채소우의 회갑연에 참가자격을 갖추고 있 었다. 채소우는 이미 이년전 모진위를 회갑잔치의 유일한 무술공연인 추혼십이 절 시범의 시연자로 내정했던 것이었다. 옥진강의 추혼십이절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있던 채소우는 사재를 풀어서 가창 한 신검대회를 개최하였고, 칠주반의 엽검영이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채소 우는 당년의 옥진강의 진전을 가장 정통적으로 이어받았다는 까닭으로 엽검영 을 제쳐놓고 차석입상자인 모진위를 자신의 회갑연에 초청하였다. 이제와서는 채소우의 충직한 경호무사 유진목을 제외하고는 무기를 소지한 채, 채소우의 면 전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모진위였다. 다시 기별이 날아왔다. 이미 이각전에 모진위는 추혼십이절의 초도무예시범을 마치고 각본대로 쌍검무를 시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쌍검무는 본시 마도 초 웅천과 신검 옥진강의 최후결전을 재현한 이인검무(二人劍舞)를 말한다. 추혼십 이절의 투로는 대부분 초웅천의 흑염도법(黑閻刀法)에 대항하는 형식이었다. 추 혼검 본연의 위력을 충분히 발휘할 만한 대항무공이 흑염도밖에 없었기 때문이 었다. 그러한 투로들이 극(劇)으로 발전해서 결국 초웅천과 옥진강이 벌이는 공 전절후(空前切後)의 대격전장면을 묘사하는 쌍검무가 되었다. 모진위는 계획대 로 순조롭게 각본을 소화하고 있었다. 우선 무위(武威)에 중점을 두어 초도무예 시범을 펼친다. 그리고 무위보다는 겉치레 형식에 치중한 쌍검무를 펼친다. 긴 박한 추혼십이절의 운용으로 채소우의 입맛을 돋군 후, 상대역도 없이 김빠진 쌍검무를 연출하여 채소우를 유혹하는 전략이었다. 채소우의 성향과 행동양식 은 이미 철저히 해부되어있었다. 지금쯤 채소우의 엉덩이가 들먹거리기 시작했 으리라. 혈귀의 예상대로 채소우는 애간장을 녹이고 있었다. 채경령은 그런 할아버지 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신검 옥진강조사의 혼이 느껴지네어쩌구하며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였지만 채경령이 보기에는 영판 아니었던 것이다. 볼거리 로 치자면 우백이나 엽검영의 시범과는 비교가 안 될 지경이었다. 할아버지가 원채 추혼검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지라 채경령도 몇번 칠주반따위의 공연에 따 라나선 적이 있었다. 우백은 기백이 넘치는 곡예적인 묘기가 압권이었고, 엽검 령은 세련된 동작으로 차라리 아름답기까지한 맵시를 보여주었다. 그에 비해서 모진위의 연기는 너무 보잘 것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어릿광대라면 그 우스꽝 스러운 동작이 재미라도 있지, 무슨 대단한 묘기가 펼쳐질 것같은, 엄숙하고 진 지한 표정에서 난데없이 꾸부정한 자세의 어정쩡한 동작이 펼쳐지니 채경령은 숫제 무슨 사기라도 당하는 불쾌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할아버지의 표정은 그야말로 감동 그자체였던 것이었다. 그래도 채경령이 할아 버지를 비웃지 못한 것은 모진위의 연기에 뭔지 모를 묘한 구석이 있었기때문 이었다. 마치 검 스스로가 허공을 노니는 듯 했다. 검을 쥐고있는 모진위의 팔 이 그저 검에 매달려있는 장식끈에 불과하다고 착각될 정도였다. 모진위의 신 체를 무시하고 검의 움직임만 본다면 그것은 그런데로 봐줄만한 광경이었다. 할아버지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전입가경이었다. '까딱하다가는 눈물이라도 흘리겠는걸...' 채경령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던 할아버지의 표정이 가라앉기 시작 했다. 모진위가 쌍검무를 시작하고나서는 어딘가 맥이 빠진 표정으로 바뀌었고, 그 신중하기 이를데없다는 양반이 안절부절 못하는 경망스런 심리상태가 되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처량한 외기러기신세로구나!" 할아버지의 쓸쓸한 탄식이 터져나왔다. 할아버지는 모진위의 쌍검무가 무척이나 허전해보이는 모양이었다. 모진위는 보조를 맞춰줄 상대도 없이 이름만 쌍검무라고 칭해지는 외검무를 펼치고 있었 다. 물론, 채경령도 신검반의 소식은 들어서 알고있었다. 그의 상대가 되어줄 신 검반원들은 모두 이름모를 고혼이 되어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갑자기 할아버지의 얼굴이 십년은 젊어진 것처럼 벌겋게 변했다. 엄청난 호기 가 할아버지의 전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회전이 빠른 채경령의 머리속에도 한 가지 가능성이 스치고 지나갔다.쌍검무라면 할아버지도 그럭저럭 모진위의 짝 이 되어줄 수 있었다. 아니 모진위에게 반드시 상대가 필요하다는 전제조건이 붙는다해도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중에 모진위의 짝이 될 만한 인물은 채경 령의 조부가 유일한 인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추혼십이절을 익 힌 사람이라면 누구나 흑염도법을 투로에 의해서 익혔고, 할아버지도 물론 잘 알고있었다. 가끔 흥에 겨울 때면 할아버지도 혼자서 쌍검무를 추고는 했었다. 채경령의 짐작은 옳았다.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할아버지의 초조 감이 어느새 할아버지를 그의 상좌에서 벌떡 들어올리고 만 것이었다. "모소횹, 짝이 없어 불편한 모양이구려. 괜찮다면 이 늙은이가 감히 나머지 한 쪽이 되어 장단을 맞추어볼까하는데... 그런 광영을 허락하시겠소?" "황송하옵니다. 소생이 재주가 미흡하여 대인의 귀하신 몸에 불편을 끼쳐 드리 게 되는군요. 감히 검을 마주하는 죄를 용서해주신다면 대인의 명에 따르겠습 니다." "어르신..." 유진목이 황급히 만류하였다. "허허. 유대협 무엇을 걱정하는가? 저아이를 보게..." "... ..." "검을 가져오너라." 유진목은모진위를 일견하고는 하릴없이 채소우의 행로를 터주고 말았다. 보 기에 따라서는 자신의 행동이 지나칠 수도 있었다. 전혀 내공을 쌓은 기색도 없고, 그나마 신체와 기력조차 정상인에 턱없이 모자라는 모진위였다. 채소우의 안전에 위협이 될만한 가능성은 전무해보였다. "....다만, 감히 대인의 면전에서 검을 놀리기에는 소인의 담력이 너무 보잘 것 없사옵니다. 소인을 이 자리에 설 수 있게해 준 신검반의 영령들도 달래고 마 음을 가라앉히는 의미에서 비례를 무릅쓰고 일배(一盃)의 기회를 간청하오니 소인의 방자함을 너무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허어. 이거 노부가 큰실수를 했구려. 어쩐지 모소협이 흥이 안난다했더니... 어 찌 마다하겠소. 당연히 이 늙은이가 먼저 잔을 청하여 흥을 돋우웠어야 했거 늘... 용서하시게. 아성(兒誠)아, 뭐하는게냐? 서둘러 잔을 대령하렸다." 열일곱번째 전갈을 받아든 혈귀는 희미하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채 소우가 함정속으로 기어들어왔고, 모진위는 그런 채소우에게 한잔술을 청하였다 는 전갈이었다. 모진위는 신검반의 영혼들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술잔속에 손 가락을 담궈서는 술방울을 튕겨서 허공에 날릴 것이다. 그 사이 모진위의 손톱 속에 갈무리되어있던 속근단(速根丹)이 술잔속에 풀려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모진위가 아무에게도 의심 받지않고 속근단을 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된다 는 의미였다. 채소우와 모진위의 쌍검무는 어느새 비무의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채소 우가 본래 연기자수업을 받은 일이 없는 지라 검무의 형식보다는 투로의 행위 에 익숙해있는 탓이었다. 유진목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별로 바람직한 흐름은 아니었다. 채소우가 자기도 모르는사이에 검무에서 비무로의 흐름을 전환시킨 것은 이해가 되었지 만, 비무보다는 검무의 습관이 강할 것으로 짐작되는 모진위가 너무도 자연스럽 게 채소우의 흐름을 받아들였기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진목은 그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지는 않았다. 비무라고는해도 채소우가 모진위를 충분히 제어하고 있었 기때문이었다. 채소우에게도, 모진위에게도 비무에 임하는 호승심은 없어보였다. 채소우쪽을 말하자면 오히려 재미있는 놀이라도 하는 양, 즐거워 어쩔줄 몰라하 고 있었고, 모진위쪽은 채소우의 다소 위험스러운 동작에 검로를 잡지못해서 어 쩔줄 몰라하고있었다. 그만큼 채소우쪽이 여유가 있다는 반증이기도했다. 열여덜번째 전갈이 도착하고나서 이각의 시간이 경과했을 무렵, 혈귀는 더 이 상의 전갈을 기다리지 않고 채가장의 내원쪽으로 시선을 고정하였다. 혈귀가 머룰러있는 곳에서도 탐지될 만한 채가장의 극심한 동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었다. 이제 거사성패의 여부가 가려질 순간이었다. 초웅천과 옥진강의 대결전을 재현한 투로, 톱니처럼 정교하게 얽매인 초식과 초식의 연결속에서 채소우가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혈귀는 이 암살행을 위해 서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절기를 모진위에게 아낌없이 전수해주었다. 그런 상 황에서라면 모진위는 채소우가 아니라 추혼고수라는 채소우의 애비라도 능히 약점을 간파해낼 만한 능력을 혈귀로부터 전수받았다. 약점을 응징하는 몫은 신출귀몰이 전수한 실전추혼검에게 있었다. 신출귀몰은 이런 상황에서 벌어질 가장 철처한 추혼검의 살인술을 모진위에게 전수해주었다. 멀리 난주(蘭州)에서 어렵사리 포섭한, 터무니없이 비싼 비용의 투자가 그 결실을 맺게된 것이었다. 일각전 즈음, 속근단의 약효가 발휘되기 시작했으리라. 그리고 그 약효는 모진 위의 본원진기를 폭발시킴과 동시에 장여진의 생사에대한 염려와 신출귀몰이 심어놓은 살기도 폭발시킬 것이다. 살기로 가득한 모진위의 추혼검, 어찌보면 그것은 망외의 소득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신출귀몰이란 놈은 모진 위의 검에 살기를 불어넣기위해서 기특하게도 자신의 목숨까지 버려가며 극성 을 떨었다. 장여진이라는 인질만으로는 안심을 못하는 혈귀에게 부지불식간에 본능적인 작동하는 모진위의 살검(殺劍)은 성공을 보장하는 이중고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혈귀가 주먹을 불큰 움켜쥐었다. 채가장의 내원은 겉보기에는 아무변화도 없 었다. 그러나 혈귀는 직감하였다. 채가장을 감싸고있는 공기가 격렬하게 요동치 고 있었다. 혈귀가 눈을 부릅뜨고 채가장쪽을 주시하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이 리뛰고 저리뛰는 인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소용돌이 치던 기세도 수그러들고 있었다. '실패인가?' 일말의 불안이 피어올랐지만 혈귀는 고개를 휘휘저어 불안감을 떨쳐버렸다. 실패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무근성화(無根盛花). 추혼십이절의 제십일절. 뿌리가 없는데도 꽃을 만들어낸다는 무근성화가 최후의 살격(殺擊)으로 준비 되어있었다. 혈귀마저도 감탄을 금치못했던 초식이었다. 이형환위(移形換位)라 는 전설의 경공(經功)을 연상시키는 기절초풍할 수법이었다. 물론 단지 검만 순 간이동시키는 방법은 몸전체를 순간이동시키는 이형환위보다는 수월한 수법이 었다. 그렇다해도 이형환위보다 쉽다는 말이지, 평생동안 강호를 떠돌아도 일견 식조차 어렵기로는 신체의 이형환위나 검의 이형환위나 매일반이었다. 정교하 게 구성된 각본에의한 무근성화, 이것이 바로 혈귀가 채소우의 죽음을 추호도 믿어의심치 않는 근거였다. 물론, 그 와중에 모진위도 온전치만은 않을 것이었 다. 혈귀가 바라는 바였다. 모진위는 조직의 안위를 위해서도 혈귀의 비전절기 보존을 위해서도 반드시 죽어야 할 인사였다. 오히려 혈귀는 모진위의 사로잡 힘을 염려하여 그 숨통을 철저하게 끊어놓을 몇가지 장치를 안배해놓았다. 혈 귀는 채소우뿐만 아니라 모진위의 최후도 믿어 의심치 않고있었다. 혈귀의 시 선은 영원히 그렇게 고정된 듯이 미동조차 없이 채가장쪽에 박혀버렸다. 사태는 유진목이 미처손 쓸틈도 없이 급전직하해버렸다. 얼핏 채소우가 피분 수를 뿜으며 뒤로 넘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모진위의 초식에 살기가 짙어지고 있음은 유진목도 눈치채고있었다. 그러나 그 렇다고해도 모진위가 채소우를 어떻게해 볼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모진위의 검이 채소우의 턱밑을 파고들고있었다. 너무도 뻔한 수법이어서 채 소우가 바로 방어해내고 반격을 가하리라는 것이 명명백백한 형국이었다. 갑자 기 턱밑에 스미던 모진위의 검이 사라졌다. 유진목이 모진위의 검의 행방을 다 시 찾았을 때는 이미 그 검은 채소우의 심장에 꼿혀있었다. 유진목이 벼락처럼 모진위와 채소우의 사이로 뛰쳐들어갔다. 모진위는 꺼져가는 채소우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문득 토하고싶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특삼호와 모진위는 전혀 상반된 인물이었다. 모진위는 살기어린 특삼 호가 살인을 했다고 우기고 싶었지만, 특삼호는 모진위가 얽매여있던 장여진의 생사를 상기시켜주며 싸늘하게 비웃어주었다. 모진위는 터져나오려는 욕지기와 오열을 씹어삼키며 미리 지시를 받은대로 중원담장쪽의 소나무를 향해서 힘껏 몸을 날렸다. 대리석처럼 창백하게 굳어버린 채경령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채경령도 모진위를 뚫어져라 바라보고있었다. 엄청난 충격이 모진위를 엄습했다. 있었다. 모진위를 향한 채경령의 시선속에는 마땅히 있어야할 그것이 돌아와 있었다. 모진위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눈길이었다. 혐오와 경멸, 그리고 근원모를 적의. 모진위를 첫대면한 누구나가 시선속에 포함하고있던 그것, 그런데 채경령 에게만은 없었던 그것, 그것이 다시 채경령의 눈빛속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모진위는 장여진의 눈빛속에는 당연히 없어야 했던 그것, 적어 도 그렇게 자신의 정혼자로서 공손과 존경을 표했던 그 자리에서는 없어야했던 그것에대한 해답도 찾아내었다. 정혼자라고 아끼는 여인에게는 너무도 어울리 지않는 적의와 모멸과 혐오가 장여진의 내부 은밀한 곳에 너무도 짙게 드리워 있었다. 그것이 바로 장여진을 만나면서 증폭되었던, 만나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던 살수적 직감으로서의 불안감의 정체였다. 모진위는 일순간에 폭발하여 용 솟음치던 본원진기가 맥없이 스러짐을 느끼며 충격과 혼돈의 나락으로 빠져들 어갔다. 모진위의 등줄기에 강맹한 타력이 충돌하였었다. 모진위정도는 즉사를 넘어서 내부의 근골을 모래처럼 부셔버릴 만큼 흉맹한 장력이었다. 서북방으로 도약하 던 모진위는 그 연장선상에서 후면을 강타한 장력에 떠밀려서 줄 끊어진 연처 럼 내원과 중원을 경계짓는 담장너머로 튕겨나가버렸다. 이 모두가 단지 숨 세 호흡이나 고를까말까한 순간의 일이었다. "뒤를 맡긴다." 스무번째 전갈을 접한 혈귀는 수하에게 그렇게 말하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자 리를 떴다. 채소우는 이미 절명하였다는 보고였다. 아직 모진위에 대한 뒷처리 보고가 남아있었지만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유일하게 내원까지 진입 할 수 있었던 맹(盟)의 동료, 소계일은 빈틈이 없는 작자였다. 지금쯤이면 그의 일장으로 모진위는 즉사정도가 아니라 아예 갈갈이 찢어져버렸으리라. 혈귀가 그렇게 추측하고있을 무렵에도 모진위는 여전히 질긴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비록 경각에 달해있기는 하였지만... 소계일의 일장으로 담장밖으로 나 가떨어진 모진위는 가물가물한 의식의 틈으로 연기처럼 다가오는 두덩어리의 검은 인영을 보았다. "허어... 아직 숨이 붙어있는데?" 어렴풋이 들려오는 경호성을 들으며 모진위도 놀라워하고 있었다. 당장 즉사 해야 마땅한 자신의 허약한 육신이 아직도 숨을 쉬고 있는 것이었다. 모진위는 잠시 신체의 반응을 되집어보았다. 기묘한 변화가 내부에서 벌어지고있음이 틀 림없었다. 폭발하던 선천진기가 어느 순간 둑에 막힌 물줄기처럼 흐름을 멈추 고 한곳에 고이더니 강한 외부의 충격을 받자 다시 폭발하며 외부의 경력에 대 항하였다. "그런 실수를 대비해서 우리가 있는게지." 한명이 무심하게 말했고, 나머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둘은 익숙한 동작으로 도를 뽑아들었다. 싸늘한 도기가 엄습해오자 모진위의 검이 힘겹게 마중을 나갔다. 모진위의 의 지는 이미 손가락하나 까딱할 기력이 없었지만 언제나처럼 모진위의 의지와는 별개로 그의 본능적인 반사감각이 발동했던 것이다. 쨍! 모진위의 손목에 견디기 어려운 충격이 전해져왔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검은 모진위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않았다. 둑에 막힌 듯 멈춰서 고이던 흐름이 충격 으로 둑이라도 터진 듯 기력을 폭발시켰다. 모진위는 그 힘을 이용하여 재빨리 몸을 세우고나서 담장을 끼고 달아나기시작했다. 추적자들은 신속하고도 정확하였다. 그리고 강하였다. 도주하는 동안, 모진위는 등뼈가 부러진 것같은 고통에 추가로 뼈를 에이듯 아려오는 서너개의 자상(刺 傷)를 보태고 있었다. 한명만 있었다해도 모진위의 적수로는 도가 넘쳤다. 모진 위는 겨우 삼십장쯤 달아나다가 다시 궁지에 몰렸다. 도(刀)가 반원을 그리며 모진위의 허리께로 떨어졌다. 주저앉는 것이 손쉬웠지 만 모진위는 발목에 또 하나의 자상을 남기는 것을 감수하며 공중으로 도약하 였다. 이제까지의 전례로 볼때 주저앉았다가는 어김없이 남은 한명의 계산된 공격을 받아야했기때문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모진위의 머리꼭대기에 있는 고 수들이었다. 모진위의 예비동작에서 벌써 그런 낌새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흑의 인의 도를 잡은 우수(右手)는 모진위의 하향도피를 대비하는 듯 하단공격자세 를 취하고 있었지만, 좌수(左手)가 또 다른 가능성을 대비하고있었다. 부드럽고 음습한 장력이 흑의인의 좌수에서 뿜어져나왔다. 허공중에 떠있는 모진위로써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의 무 리수라는 것은 알고있었지만 도리없이 장으로 맞받아쳐나갔다. 격렬한 통증이 다시 모진위를 휘감았다. 그러나 내부의 진탕은 또 한번 어김없이 한곳으로 고 이던 모진위의 진기를 폭거시켜버렸다. 내력이 쏟아져나오며 음습한 잠력에 항 거하였다. 또한 모진위의 반사전투력이 다시 한번 작동하였다. 모진위의 본능은 힘에 부치는 상대를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달아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다행히 상대의 장공(掌功)도 모진위의 체질에는 그나 마 다루기쉬운, 부드러운 기운이었다. 등룡육권의 '유'자결, '접'자결, '흡'자결 '탄'자결이 연속적으로 구사되었고, 등룡육권의 요결들은 차례로 상대의 경력을 완화시키고, 충돌보다는 접촉을 시도하고, 충격을 흡수하였으며, 그 반탄력을 최 대한 살려내었다. 모진위는 그 추진력으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모진위의 몸은 다시 담장을 넘어서 내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두 흑의인은 틈을 주지않고 연속적으로 장력을 발출하였다. 모진위가 날아간 곳은 내원의 석림(石林)이었다. 땅바닥을 서너차례 구르고나서야 모진위는 몸을 가눌 수 있었다. 모진위는 미리 염두해두었는지 신형을 틀어서 방향전환을 하 고는 전속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모진위가 달려가는 방향에는 관음상이 있 었다. 채경령과 대화를 나누던 그 관음상이었다. 내원과 외원의 이쪽 저쪽에서 몇몇무리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있었 다. 흑의인들은 이제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직감하였다. 두 흑의인은 담장위로 솟구치며 전력을 다한 쌍장을 모진위를 향해서 쏘아보냈 다. 모진위는 등뒤에서 강맹한 기운이 다가오고있음을 느끼고 마지막 남은 힘 을 쥐어짜서 관음상뒤로 몸을 숨겼다. 간발의 차였다. 장력은 목표를 잃고 관음 상을 때렸다. 관음상이 흔들거리며들려올라갔다. 연이어 날아온 장력이 재차 관음상을 때렸다. 이번에는 관음상이 마치 구덩이에라도 빠지듯 땅속으로 함몰 되었다. 함몰은 관음상을 거의 삼분지일이나 땅속에 파묻어버렸고, 관음상을 비 스듬히 기울어지게 만들었다. 강력한 파괴력에 견디지못한 관음상에서 파편이 튀었고, 돌조각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잠시후, 흑의인들은 채가장의 경호무사들에게 포위되고말았다. 흑수노계였습니다. #5463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27- 03/12 22:18 220 line 10. 복수유전(復讐流轉) 양주가 온통 들끓었다. 양주뿐이 아니었다. 삼주야가 넘어서기 전에 채소우피 살사건은 강서, 안휘지방을 넘어서 전강호로 퍼져나갔다. 채소우는 단 일검에 절명하였다. 살인범은 모진위라는 십구세의 청년으로 밝혀졌는데, 범인체포를 위해서 채가장의 인원들이 총동원됐음은 물론, 관(官)에서도 적극적인 개입을 했고,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또 하나의 은밀한 무리들이 모진위의 행방을 추적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도록 모진위의 종적은 발견 되지 않았다. 관, 채가장, 그리고 또하나의 무리, 이들의 힘을 감안한다면 모래 사장의 바늘 한조각이라도 놓칠 리 없건만, 모진위의 종적은 여전히 오리무중이 었다. "이근처에서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거예요?" 유진목과 함께 석림이 끝나는 담장밑으로 나선 채경령이 말했다. "예..." "장원내부의 어느 곳엔가 몸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은요?" "휴우. 애석하게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같습니다." 유진목이 깊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원과 중원, 하다못해 외원까지 샅샅히 수색해보았지만 모진위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미 배후자의 도움을 받아서 밖으 로 탈출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만큼 충분한 적의 세력이 채가장에 침투해있었다. 지금 자신이 서있는 곳에서 모진위의 배후자들로 추측되는 두명 의 흑의인이 발각된 이후, 유진목은 대대적인 용의자 색출에 들어갔다. 음으로, 양으로 채소우암살사건에 개입한 것으로 의심되는 인물은 모두 삼십이인에 달 했다. 유진목은 기절초풍하고야 말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정예요원들이 었다. 확실한 물증이 있는 십삼인은 모두 타살하였고, 나머지는 철처한 추궁후 에 장외로 추방시켜버렸다. 채가장의 경호체계는 잘 훈련된 것이어서 채소우의 피습사건이 발생하자마자, 경호무사들은 이미 채소우가 회생할 가망이 없다는 판단하에 탈출예상로의 봉 쇄작전에 들어갔다. 모진위가 담장을 넘어 중원구역으로 빠져나가자 무사들은 내원의 경계를 포기하고 중원 바깥담의 경계망을 보완하는데 주력하였다. 일단 외원쪽에서부터 넓게 포위망을 펼치고 점차 조여들어가 모진위와 일당들을 소 탕하려는 작전이었다. 그런데 모진위가 그 틈새를 파고들었다. 탈출로의 봉쇄에 중점을 두다보면 대개는 안에서 밖으로 도피하는 행동방식에 주의를 집중하기 마련이지 밖에서 안으로 후퇴하는 변칙행동에 대해서는 주의를 등한시하기 십 상이었다. 그런데 모진위는 애써서 중원까지 탈출한 노력을 허사로 돌리며 다 시 내원으로 밀려 들어가버리는 위험을 자초하고 만 것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채가장방어태세에 혼란을 야기시켜 채가장의 감시에서 일시적으로 모진위가 헤 어나는 단초가 되고말았다. "유대협께서 어련히 철저히 수색하셨을라고요..." 채경령의 얼굴에는 낙담의 기색이 짙게 내려앉았다. 모진위의 추한 쌍판을 끌 어안고 입이 찢어지게 웃고있는 흉악한 무리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 아서 채경령은 귀를 막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채경령이 상상한 대로 혈귀일파는 미소짓고 있었다. 다만, 모진위의 추한 쌍판 을 끌어안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일 뿐이었다. 모진위가 없었기때문이었다. 혈귀는 그것이 좀 께름직하기는 하였다. 설사 모진위를 수중 에 확보했다고해도 보듬어안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모진위를 채가장의 수중에 넘겨줄 생각도 없었다. 채가장에 잡히기전에 모진위는 죽어야 만 했다. 꼬리를 밟히지 않으려면 뒷마무리는 깨끗히 해야하는 법이었다. 계속 된 정탐에 의하면 모진위가 아직 채가장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진위가 채가장을 빠져나오지 못한 것만은 확실했다. 모진위를 제거하 는데 실패했다는 보고를 접하자마자 혈귀도 부랴부랴 수하를 총동원하여 채가 장밖의 퇴각로를 봉쇄했었던 것이다. 유진목은 그리 녹녹치 않은 인물이었다. 그 기량을 감안한다면 채가장내에는 모진위가 몸을 숨길만한 곳이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녀석은 어디로 사라졌 단말인가? 생각해보면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이미 팔일이 라는 시일이 경과하고 있었다. 혈귀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속근단을 복용하였으니 모진위가 아직도 생존해있을 가능성은 없었다. 아무리 내력이 충 만한 작자라도 반나절이면 기력을 모두 소진하고 비참하게 죽어버린다고 하지 않는가? 모진위같이 내력이 허약한 자라면 벌써 죽어도 열번은 더 죽었을 것이 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었다.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탈출하였을까요?" 석림사이를 잠시 거닐다가 관음상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채경령이 물었다. "어떤 방법으로 빠져나갔는지는 소인도 짐작되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철저히 준비해왔던 것만은 틀림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는지 동조자 전체가 마치 한 덩어리에서 나온 사지인양 일사분란하게 행동했던 것을 보면 뭔가 준비된 계책이 있었겠지요." 뒤를 따르던 유진목도 얼결에 걸음을 멈추며 황급히 대답했다. 놈들은 마치 정교한 기관의 부속들처럼 정교하게 시간과 장소를 유기적으로 엮어내었다. 그 야말로 잘 짜여진 연극과도 같았다. "이제 흉적의 체포는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군요." 채경령이 멍하니 관음상을 바라보며 독백처럼 되뇌었다. 관음상은 채경령에게 그날의 악몽을 상기시켜주었다. 장력에 격출당해서 여기저기 파손되었으며, 받 침대 대부분을 땅속으로 함몰시킨 채, 비스듬이 기울어져있었다. 그것은 모진위 라는 흉수가 그녀의 유일한 보호자를 빼앗아갔음과 동시에 그녀만의 은밀한 보 금자리를 빼앗아갔음을 의미했다. 관음상밑에는 어린아이가 겨우 들어갈만한 빈틈이 있었다. 어린시절, 채경령은 부모에게 심한 꾸지람을 당하거나, 울고싶은 일이 생겼을 때, 그 틈새로 들어가서 소리죽여 울고는 했던 동굴같은 틈새였다. 채경령만의 은밀한 안식처였다. 채경령은 모진위가 혹시 그곳에 숨어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의심해보았다. 그러나 모진위정도의 성인이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좁은 공간이었다. 게다가 격투의 와중에 구덩이가 무너져서 관음상의 하반부가 이 구덩이를 메우고있었다. 모진위는 거의 빈사상태에서도 채경령과 유진목의 대화를 듣고있었다. 혈귀의 예상과는 달리 모진위는 반나절을 지나서 열흘이라는 시간이 경과된 지금까지 도 죽지않고 생존해있었다. 그것도 채경령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믿는 관음상 밑에서... 모진위는 분명히 속근단을 복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본원진기는 아직 완전히 고갈되지는 않았다. 황경은 일찌기 모진위의 내부에 원화촉발법을 시술해놓았 다. 속근단도 황경이 그 비법을 전수받은 상문의 비방(秘方)이었다. 근본적으로 원화촉발법이나 속근단이나 같은 뿌리에서 나왔으며, 그 작용원리도 같은 맥락 에 있었다. 혈귀의 계산이 빗나가게한 것은 원화촉발술의 제어력에 있었다. 황 경은 모진위의 원기가 일순간에 폭발하지않고 세차례로 나누워져 촉진이 생기 도록 금제를 가해놓았다. 그 억제력이 속근단의 약효를 방해하였다. 모진위로서 는 불행중 다행이었다. 속근단에 의해서 증폭되던 힘은 일단 채소우를 격살한 후, 원화촉발법의 저항으로 인해서 모진위의 기해혈(氣海穴)에 고였다. 그후, 소 계일의 암습으로 충격을 받자 다시 터져나왔다. 소계일의 의도대로라면 모진위 는 당장에 즉사하고 피떡이 되어서 담장을 넘어야 했지만 오히려 소계일의 장 력으로인한 충격에 의해서 분출된 힘은 회풍선엽의 추진력이 되어서 결과적으 로 모진위를 장력으로부터 보호하는 반탄력이 되고말았다. 그 여력은 다시 속 근단의 작용은 통제당했고, 백회혈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원화촉발법과 속근단 의 상호작용은 계속되는 위기속에서 모진위를 구사일생시켰고, 결국 관음상까지 도달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미 관음상의 지하은거지는 채경령만의 장소가 아니었다. 채경령은 모진위와 관음상의 신비한 마력에 대해서 담소를 나누다가 추억에 젖어서 자신만의 비밀 장소를 발설해버리고 말았다. 흑의인의 일장이 관음상에 적중했을 때, 모진위는 그 호흡에 맞춰서 거룡십팔수의 금나수, 용각접응(龍角接應)의 수법으로 장력이 미치는 방향을 변환시켰다. 관음상이 일순 공중으로 들어올려졌다. 모진위는 그 틈을 이용해서 구덩이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좁은 통로로 모진위가 억지로 신 형을 밀어넣자 구덩이의 입구는 파괴되고 말았다. 급기야 추락하던 석상이 모 진위를 내리눌렀다. 천행(天幸)으로 석상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바람에 모진위 는 압사만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채경령의 짐작대로 모진위가 자리할 만한 공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모진위에게 비연류라는 신검반의 비전절기와 무위조식이 없었다면 모진위는 그대로 사지가 꺽이고 눌린 채 질식사하고 말았 을 것이었다. 비연류는 신체의 유연성을 극대화시키는 비법이었다. 모진위는 석 상이 추락하는 충격으로 가동된 내력을 끌어모아서 비연류를 시전하였고, 허용 된 공간의 형태에 맞춰서 몸을 접고, 구부렸다. 또한 무위조식을 이용하여 밀페 된 흙더미속에서조차 호흡을 유지할 수 있게되었다. "흠... 가전회건은 허락해주시는 겁니까?" 유진목이 괴로운 마음에 화제를 바꿨다. 회갑연에는 가전회의 회주 소계일도 참석했었다. 간자들을 색출하기위해서 필연적으로 하객들에대한 배후조사가 행 해졌는데, 고관대작등의 실력자들에대한 직접수사에는 난점이 많았다. 심한 반 발이 예상되었기때문이었다. 어느정도의 의문점이 있어도 가급적이면 노골적인 탐문은 자제하고있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꼭 조사해야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따로이 장주에게 사전허락을 얻도록 단서조항을 달아놓을 정도였다. 가전회의 소계일이라면 양주상계의 실력자였다. 가능하다면 소계일에대한 수사는 피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잘아는 유진목이 소계일에 대한 조사를 허 락해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소계일어른을 말씀하시는거지요?" 부서진 관음상만 물끄러미 바라보고있던 채경령이 되물었다. "왜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 소계일을 이르는 말입니다. 아가씨." "그 어른을 왜...?" "아니. 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확인해볼 것이 있어서..." 유진목은 잘 짜여진 연극과도 같은 일련의 피습과정을 순서에 맞춰서 다시 한 번 꼼꼼히 점검해보았다. 완벽한 협조체제였는데 어딘가 아귀가 맞지않는 부분 이 있었다. 소계일이었다. 소계일은 살인자 모진위를 쌍장으로공격하였다. 그런 데 그 암살자일당을 향한 적대적행위가 꺼꾸로 유진목측에게 해악을 가져다주 는 행위가 되었다. 되집어보면 모진위를 중심으로 행해진 연극에 딱 들어맞는 역할을 하고있었다. 소계일이 없다면 연극자체가 성사되지않을 정도로 중요한 배역이었다. "말씀해주세요. 유대협." 채경령이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 ..." 유진목은 망설였다. 확증도 없이 쉽게 말을 꺼냈다가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에 는 골치아픈 문제가 될 소지를 품고있는 사안이었다. 가능하면 관여하는 인원 을 줄이고 은밀하게 내사해볼 심산이었다. 특히, 현재 장주의 업무를 대리하고 있는 채경령까지 개입하게되면 소계일쪽에서 사태를 파악할 경우, 문제가 필요 이상으로 확대되기 십상이었다. "제발..." 망설이는 유진목을 보자, 채경령은 심상치않음을 눈치채고 재촉하였다. 미궁속 에 빠져들 사건에 새로운 실마리가 잡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진목은 대답을 회피할 수 없었다. 채경령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망각하는 유일한 도피처이기라도 한 듯 오로지 채소우의 복수만을 생각하고, 범인색출에 매달려왔다. 그러나 채경령의 의욕과는 암습자들의 정체는점점 미궁속으로 빠 져들고있었다. 단서라고 할 만한 것들이 전혀 없었다. 채경령은 거의 절망상태 에 빠져있었다. 유진목은 그러한 채경령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유진목은 절망속으로 빠져드는 채경령을 보며 그 녀에게 하나쯤 희망을 남겨주고 싶어졌다. "미심쩍은 구석이 있더군요." 소계일은 모진위의 돌발적인 행동에 가장 먼저 반응하였다. 채소우의 보호를 위해서 만전의 태세를 갖추고있던 유진목보다도 더 빠르게 모진위에게 열격을 가하였다. 유진목이 보기에 소계일의 실력은 백번양보를 한다해도 자신과 평수 를 이룰 수 있을 것같지않았다. 그런 소계일이 유진목보다 빠르게 반응했다는 것은 상황을 미리 예측해서 준비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소계일은 약속된 행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불특정방향으로 도약하고있던 모진위의 뒷등 한복판을 정확하게 겨냥했던 것이었다. 유진목은 소계일의 사전준비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검해보았다. 타당성이 있다는 결론이었다. 유진목은 소계일의 뒤 를 캐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유대협께서 처리해주셔야 할 문제군요. 그런데 남겨진 시간이 너무나... 너무 나 부족하군요." 채경령이 안타깝게 말했다. 유진목은 황실에서 파견된 무사였다. 성공이든 실 패든 임무가 끝났으니 이제 유진목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한다는 것을, 그리 고 이제 그 기일이 얼마 남지않았음을 채경령도 알고있었다. "아가씨께서 책임을 다하지못한, 이 무능한 놈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뒤수습이 라도 하게해주십사 상부에 청원을 드려볼 생각입니다만은... " 유진목은 자신의 손으로 사건을 완결짓고 싶어했다. 어차피 사태수습을 위해 서 누군가 다시 파견되어야 할 터였다. 현장목격자로써, 사건경과를 잘 알고있 는 유진목 자신도 내용적으로는 적격자였다. 간곡히 사정을 한다면 허락을 안 해줄 이유도 없을 것같았다. "대협의 은혜에 무어라 감사해야할지..." 채경령이 눈물을 떨구며 허리를 숙였다. "주인을 지키지 못한 죄인이 옳시다. 받들기 민망하오이다. 소저." 유진목이 황급히 소매를 부축하여 채경령의 반례를 만류하였다. "일기가 불순한데 내실로 드시지요." 유진목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음상에서 눈길을 떼지않은 채, 채경령이 야무진 입을 열었다. "대협께 가전회를 부탁드립니다." 채경령의 단호한 결의는 유진목에게도 전해졌다. 유진목이 자못 비장한 어조 로 대답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소저." ================================================================ 그 철통같은 채가장에서 모진위가 어떻게 빠져나오느냐가 저를 궁지에 몰아넣 었던 문제였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보아도 그럴듯한 활로가 떠오르지 않았 습니다. 거의 두달을 끌어온 난제였지요. 만족스럽든 불만이든 그 결과가 이번회의 내용입니다. 연재중단에 가까운 연재속도를 보이는 부작용도 있었지만, 덕분에 뒤에 전개될 내용은 구상이 대체로 매듭되었습니다. 디테일한 부분도 절반정도는 결정되었 을 정도로... 십여편정도의 분량이 남은 2부는 더이상 큰 난관없이 무난하게 진 행될 전망입니다. 이제 당분간은 타이핑속도와 게으름여부가 연재속도를 좌우 하게 될 것같군요. 휴우. 겨울이 가기전에 끝내고싶은 2부였는데, 싱그러운 봄날에 착잡한 스토리 를 이어갈려니 영 기분이 안 나네요. 어쨌든 봄이 무르익기 전까지는 2부를 끝 내겠다는 야망을 다잡고있은 흑수노계였습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5502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28- 03/18 01:04 382 line 환희루(歡喜樓)의 루주, 설매(雪梅)는 쓸만한 녀석을 잃게되었다고 생각했다. 환희루는 객점과 도박장을 겸한 고급주루로써, 소주의 거상들이 드나드는 태소 항(態沼巷)뒷골목의 노른자위치에 자리잡고있었다. 소주전체를 통틀어 세 손가 락안에 드는 고급요정으로 인정받고있었는데, 특히 상계(商界)의 인사들사이에 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교무대로 통하고있었다. 그런 환희루인 만큼 시 정잡배들이나 뒷골목세력들과의 시비가 없을 수 없었다. 사내는 그런 말썽들을 처리하는 해결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조용하고 신중한 사내가 지금 사직을 청하러 설매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설매는 사내에게 다른 의도가 있는지 잠시 의심하기도 했지만, 이내 생각을 고 쳐먹었다. 대우에 무슨 불만이 있어서 자리를 내놓거나 할 경망스런 인물은 아 니었다. 또한, 주루를 보호하는 책임자는 아니었지만, 설매는 오히려 책임자보다 도 더 후한 보수로 사내를 대우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주건달들에게 있어서는 특별히 하는 일은 없어도 보수는 대단히 후한, 그런 선망의 일자리였다. 그렇치 않아도 자리를 노리고 설매에게 줄을 대는 녀석들이 설매의 사무를 거슬릴 만 큼 번잡스럽게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설매는 소주에서는 이름만 대도 알만한 실력자가 자리를 지원해도 눈하나 깜짝하지않았다. 설매는 사내의 능력을 신용하고있었다. 기실, 설매는 한번도 사내의 솜씨를 확 인해볼 기회가 없었다. 하급모리배들의 말썽정도는 환희루의 수하들만으로도 충분히 요리할 수 있었으므로 사내까지 나설 필요는 없었다. 간혹 행세께나 한 다는 무림인이 행패를 부리거나 암흑조직간의 시비가 발생했을 경우에나 겨우 사내가 환희루안에 머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어떤 경우든 칼부 림으로까지 사태가 확산되는 경우가 없었다는데 있었다. 언제나 눈빛을 마주하 는 초반의 기세싸움에서 이미 승부가 나버리고는 하였다. 물론, 언제나 사내의 압승이었다. 사내가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기만하면, 아무리 기세등등하던 도발 꾼들도 삽시간에 꽁지말린 강아지가 되어 꽁지가 빠지도록 달아나버렸다. 그런 점이 더 설매의 마음을 끌었는지도 몰랐다. 설매의 입장에서 보면 일단 분란부 터 일으키고보는 호전적인 인물보다 품위있게 일을 매듭짓는 인물이 단연코 입 맛에맞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눈빛하나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하는 고수라면 주루의 해결사로는 너무 과분할 판이었다. 설매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사내의 퇴직을 허락하고말았다. 설매는 사내의 가슴속에 이미 잔뜩 헛바람이 들어가 있음을 눈치채고있었다. 저런 류의 사내 들은 대개가 그러하였다. 한마디로 바람이 불면 바람따라 흘러가는 부평초라고 할 수 있었다. 억지로 잡아두려고 노력해봐야 그것이 다 헛고생임을 설매는 오 랜 경험을 통해서 익히 알고있었다. 사내가 이상한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벌써 오래전이었다. 지난 쌍십절이후 사내는 달라져버렸다. 다음날, 사내는 미련없이 떠나버렸고, 설매는 '꽤 쓸만한 작자였는데, 한 번 더 만류해볼껄 그랬나?'하고 후회해보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해서 설매가 사내를 억지로 만류하지않은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설매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지난 이년간 기둥서방격으로 부려먹던 그 사내가 바로 한때는 사천일대를 호령 하던 금사일협 하상곤이라는 것을. 물론, 하상곤쯤되는 이가 그 보다 더 좋은 일자리가 없어서 환희루에 몸을 의 탁한 것은 아니었다. 자기나름의 계산이 있어서 하상곤은 일시적인 호구지책으 로 환희루에서 건달노릇을 하였다. 또한, 하상곤이 쌍십절의 화려한 향기에 잔 뜩 헛바람이 들었다는 설매의 추측도 터무니없는 억측이었다. 다만, 쌍십절날을 전후하여 하상곤의 심경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만은 사실이었다. 하상곤은 양 주거상 채소우의 회갑연이 있은지 나흘후, 정확하게 말해서 채소우의 환갑이 시 월 초엿새였으니까 시월 십일 쌍십절날, 채소우시해사건을 접하게 되었다. 그 살해범이 다름아닌 모진위라는 소식과 함께. 하상곤이 환희루에 몸을 맡긴 이유는 환희루가 쌍연교의 평안객잔과 같은 행 (行)소속이라는데 있었다. 상업과 관광의 도시, 소주는 동종업간의 협동조직인 행회조직(行會組織)이 특히 발전되어있었는데, 다행히도 객잔으로는 드물게도 평안객잔이 행조직에 가입해있었다. 행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동료인 평안객 잔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만행을 그대로 묵과하지않았다. 나름대로의 경로를 통 해서 사건의 내막을 파고들었다. 그 행의 구성원중 비교적 규모가 크고, 자금력 이 든든한 곳이 바로 환희루였다. 하상곤은 그런 환희루의 연락망을 통해서 모 진위의 행방을 찾아볼 계산이었다. 행은 일치단결해서 평안객잔사건에 얽힌 정보들을 모아나갔다. 그러나 좀체로 사건의 실마리는 잡히지않았다. 사건의 전모는 오리무중속에 빠져들고, 행이 의 욕이 점차 약해져갈 즈음, 채소우피격사건이 발발하였다. 행의 정보망은 아연활 기를 띄기 시작했다. 모진위와 채소우를 연결시키자 아무 관련이 없어보이던 정보의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채소우사건을 기점으로 표면을 겉돌던 행의 수집자료들이 제구실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 정보들이 흐 르는 환희루의 연락망은 더 이상 하상곤에게 아무런 소용이 되지않았다. 하상 곤이 환희루를 통해서 얻고자했던 것은 모진위의 행방이었다. 하상곤은 지체없 이 모진위의 종적이 발견된 양주로 떠나갔다. 이틀을 달려서 양주에 도착한 하 상곤은 일차로 찾아간 곳은 채가장이었다. 십일월의 매서운 북풍이 대륙전체를 휘감으며 남하하고있었다. 채소우피격사 건이 발생한 지 한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모진위는 십일월로 들어설 무렵에서 야 겨우 관음상의 구덩이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수색은 중지되었지만 경계는 여전히 삼엄하였다. 탈출을 시도해보았지만 여의치않았다. 감시의 눈길을 피하 여 모진위가 다시 쫑겨들어간 곳은 접객당의 변소간이었다. 그럴 경황도 없었 겠지만 회갑연의 하객들로 인해서 인분이 가득차버린 옹기통은 그대로 방치된 채, 채가장의 엄숙한 화장실분위기를 저해하고있었다. 채가장의 변소가 본연의 위엄을 되찾게 된 것은 모진위가 옹기통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숨을 죽인지 무 려 사흘이 경과된 후였다. 채가장의 인부들은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푹푹 썩은 인분들을 늪지에 쏟아 버렸다. 방류되는 인분덩어리중 가장 큰 덩어리는 단연코 모진위였다. 수풀속의 잡초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유진목의 철저함과 모진위라면 파란 안광을 뿜으며 덤벼들었을 하상곤의 절박함도 인분속의 모진위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모진위 가 늪지의 인분들과 허우적거릴 무렵, 유진목은 소계일의 가전회를 추적하고 있 었고, 하상곤은 그런 유진목의 뒤를 미행하고 있었다. 하상곤은 모진위의 행방 을 추적하는, 가장 훌륭한 사냥개로 유진목을 지목하였던 것이다. "혹시, 소주에서 활동하는 백골단이라는 무림방파를 아십니까?" 모진위가 야음을 틈타서 어렵게 묻고 다니던 몇가지 질문중에 하나였다. 하지 만 모진위는 이제 더 이상 이런 종류의 질문을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기 껏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라고는 백골단은 소주가 아닌, 바로 이곳 양주 의 뒷골목패거리라는 내용이 고작이었다. 소주 쌍연교의 대학살은 온통 흑칠을 한 정체불명의 무리들이 저지른 소행이며, 백골단으로 말할 것같으면 소주의 포 교들에의해 발본색원(拔本塞源)되기는 커녕, 이전보다 훨씬 더 기승을 부리며 양주거리를 활보하고있으니 눈이 있으면 보기 싫어도 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 들이었다. 어떤 이는 발본색원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차라리 모진위의 질문처 럼 본거지만이라도 소주였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심트렁하게 반문할 정도였 다. 모진위의 불길한 예감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있었다. 장여진의 진술이 모두 조작된 음모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했고, 장여진의 그 공손스런 태도는 자신을 진짜 정혼자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믿도록 겉으로만 정혼자연하 는 행위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했다. 모진위는 장여진의 간절한 표정속에 숨 어있던, 그 잔혹한 적의와 혐오를 다시 한 번 곱씹어보았다. 모진위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장여진의 음침한 표정을 따라서 전혀 상반 되는 표정이 하나 겹쳐졌다. 검은 속셈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채경령의 붙 임성있는 얼굴이었다. 이어서 불신과 고통으로 얼룩진 채소우의 마지막표정이 떠올랐고, 돌연 채경령의 얼굴이 무서운 적의로 가득 채워지며 전혀 다른 표정 으로 급변해버렸다. 모진위의 가슴속으로 텅 비어버린 겨울벌판같은 허전함이 밀려왔다. 살수로써의 모진 수련은 모진위에게 가장 본능적인 위험감지법을 감 각으로 심어주었다. 모진위는 이제 인식하고있었다. 장여진을 대함에 있어서 의 식적으로 그 위험신호를 무시했음을 이제와서는 분명히 인식하고있었다. 선의 를 가장한 적의를 무시한 댓가로 모진위는 가식없는 선의를 잃고말았다. 그 선 의는 가장 노골적인 적의로 변해서 모진위의 가슴을 찔렀다. "소계일어르신을 아십니까?" 백골단에 관한 질문은 이제 포기하였지만 그래도 아직 모진위에게는 많은 질 문들이 남아있었다. 그 중 쉽게 답변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질문이 바로 소계일의 거처에관한 탐문이었다. 모진위는 몇 번의 질문만에 가전회의 총단이라는 동정원(桐井院)근처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채경령과 유진목의 담화를 엿듣고나니 모진위도 집히는 바가 있었다. 모진위 의 배후조종자들은 모진위에게 채소우를 암살한 직후, 지체없이 커다란 소나무 가 보이는 좌측 담장을 향해서 힘껏 도약할 것을 지시했었다. 모진위는 그대로 지시에 따랐다. 그런데 뛰어오르는 자신의 등판을 누군가가 정확히 가격하는 사람이 있었다. 유진목에 의하면 그자는 소계일이라는 자였다. 그때 모진위는 즉사해야 옳았다. 그러나 영문을 알 수 없는 내력이 단전에서 치밀어올라 장력 에 대항하였다. 장력의 살상력은 그렇게 효력을 상실했지만 반탄력은 여전히 작용하였다. 모진위의 도약자세에대한 장력의 작용은 대단히 교묘하여서 모진 위의 신형을 미리 대기하고있던 또 다른 두명의 흑의인에게 인도해주었다. 그 들은 모진위가 그 자리에 그렇게 날아오리라는 것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음이 확실했다. 그들의 작태를 되돌아보건데, 그들의 임무는 모진위의 확인사살내지 는 시체에 대한 뒷수습이었다. 모진위가 생각하기에도 그것은 소계일의 사전조 치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계일 또한, 모진위의 행동지침을 미리 알기 전에는 불가능한 대응행동을 보여주었다. 모진위이외에 행동지침을 아는 사람 들은 모진위의 조종자들이었다. 소계일은 모진위의 배후자와 모종의 관련이 있 음이 틀림없다고 모진위는 생각했다. 어쨋든 모진위는 장여진을 찾아야했다. 당 사자들이 원하든, 원하지않든 모진위와 장여진은 정혼한 사이였고, 신검반의 한 식구였다. 모진위는 자신이 알고있는 유일한 단서 소계일을 찾아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소계일어르신을 아십니까?" 모진위가 담장 모퉁이를 돌아나오는 아녀자에게 물었다. 어느덧 모진위는 대 저택들이 늘어선 지역에 진입해있었다. 종종걸음을 재촉하던 춘단(春丹)은 짜증이 났다. 복거래(福去來)의 하인놈이 수작질을 걸어오길래 한마디 쏘아부친다는 것이 그만 꼬리에 꼬리를 물게되었 고, 녀석과 수다떠는 재미에 그만 시간을 지체하고만 것이었다. 조바심으로 그 냥 무시해버리려던 춘단의 발걸음이 딱 정지해버리고 말았다. 형편없는 몰골의 사내가 뜻밖에도 소계일이라는 지고한 함자를 입에 담고있는 것이 아닌가? 춘 단으로서는 모른체하고 지나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데요? 아저씨." 춘단은 짐짓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예. 다름이 아니오라 약간의 사정이 있어서 소대인댁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만... 귀찮으시겠지만 혹여 소저께서 소대인댁을 아신다면..." "글쎄, 무슨 일로 그러시는데요?" "저... 그것이..." 춘단이 실눈뜨고 바라보니 사내는 저으기 당황하고있었다. 가전회의 약삭빠른 인간들사이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잔뼈가 굵은 춘단이었다. 춘단은 사내가 세 상물정을 제대로 모르는 촌놈이란 것을 대번에 눈채챘다. 사내의 방문목적은 춘단이 일견하기에도 좋은 쪽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춘단은 사내를 유심히 살피보기 시작했다. "저... 저..." 모진위가 핑계거리를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춘단은 재빨리 갈피를 정하였다. 집히는데가 있었다. 춘단은 대번에 표정을 바꾸고, 간이라도 빼줄 듯, 공손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상공, 소녀가 모시겠습니다." "소... 소저, 저어... 어... 어디로...?" 춘단은 그저 고개만 돌리고 슬쩍 웃어보이고는 가타부타 대답없이 앞장섰다. 모진위는 엉겁결에 춘단을 따라나섰다. 춘단은 촌닭이 황망중에 자신을 따라오 는 기색을 느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춘단은 비록 가전회의 정식회원은 아 니었지만 가전회의 돌아가는 형편만큼은 왠만한 회원보다 정통하였다. 그녀는 다름아닌 회주의 몸종이었다. 당연히 수뇌부의 긴급사항에 대해서도 대외비가 아닌 이상에는 소상하게 알고있었다. 회주께서는 양주 최고의 부자 채대인의 살인현장에 있었다고 했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그 흉수에게 일격을 가했노라 고 크게 자랑했었다. 촌닭은 세간에 떠도는 소문속의 살인흉수와 흡사한 점이 많았다. "소회주님의 동정원이라면 천비(賤婢)도 잘 알고 있지요. 상공께서는 필시 소 회주님과 밀접한 연분을 쌓고계신 분이시겠지요. 마침 저희 주인님께서 소회주 님께 큰 은덕을 입지 않았겠어요? 동정원에 드시기 전에 수고스럽지만 저희 장 원을 먼저 들러주셨으면 영광이겠습니다. 저희 주인님께서는 상공께서 회주님 과 연이 있으신 분이시란 것을 아시기만 하면 크게 후사하실 것이 틀림없습니 다. 그리고..." 춘단은 계속해서 모진위의 얼을 빼놓았다. 가전회전체가 모진위의 행방을 찾 기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눈치였다. 춘단은 만일 이 촌닭만 동정원으로 끌어들 여 체포할 수 있다면 큰 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춘단은 사력을 다해서 모진위가 딴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설레발을 쳤다. 이런 얼치기하나 다루는 것 쯤은 요령쟁이들의 집합인 동정원에서도 여우로 통하는 춘단으로서는 그야말로 여반장이었다. 모진위는 빗발처럼 쏟아지는 젊은 처자의 수다에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 다.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할만한 여유조차 가질 수 없었다. 세상의 권모술수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모진위였다. 어쨋든 그녀를 따라가면 소계 일의 소재지정도는 알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춘단을 따라갔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이 자신이 찾아가는 소계일의 사람이고, 자신의 정체마저 눈치채고있 다는 사실을 모진위는 전혀 짐작도 못하고있었다. 모진위의 불운이고, 춘단의 행운이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모진위도 바보는 아니었지만 워낙에 교활한 춘 단인지라 조금도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고있었다. 춘단은 동정원의 정문에 도착할 때까지 쉴새없이 쓸데없는 설명과 질문을 난 발하였다. 실제로는 별로 관련이 없는, 시시콜콜한 문제를 들추어냈고, 뻔한 질 문을 해대며 모진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문자답하기도 하였다. 동정원 의 대문앞에 이르러서야 춘단은 상대가 눈치채지 않도록 크게 한숨을 몰아쉬었 다. "이곳입니다. 상공." "예? 예에." "어서 드시지요." 춘단이 대문을 통과하며 모진위를 재촉하였고, 모진위가 어색한 걸음으로 따라 들어갔다. 정문을 감시하는 이경오(李京五)는 자리까지 비켜주며 모진위를 멀뚱 멀뚱 지켜보고만 있었다. '저런 병신!' 춘단이 마음속으로 이경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춘단은 이경오가 모진위를 탐문하면 그 틈에 안으로 달려들어가 모진위의 정체를 밝혀서 대번에 체포하게 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그리도 거들먹거리던 문지기란 작자가 오늘따 라 왠일인지 낯선 내방객을 순순히 통과시켜주고있는 것이 아닌가? 어이없게도 통과하기 쉽도록 자리까지 비켜주고 있었다. 물론 이경오도 평소와 같았으면 춘단의 동행자에게 일부러 거드름을 피우며 춘단을 귀찮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경오가 살펴보니 춘단의 기색이 오늘따라 심상치않았다. 대단치않아 보이는 녀석에게 춘단답지않게 깍듯한 예의를 취하고있었다. 근래들어서 부쩍 신원불명의 인물들이 출입하는 횟수가 잦아지고있었다. 며칠전만해도 만만해보 이는 외다리사내에게 위세를 부리다가 크게 곤욕을 치른 이경오였다. 이경오는 춘단의 범상치않은 태도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모진위의 심기를 다치는 일이 없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 정문을 지나고 중문을 지나서 이미 전각으로 들어섰건만 오늘따라 춘단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이가 없었다. 평소에는 치근덕거리는 경호무사들이 귀찮기만 하던 춘단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눈치코치도 없이 자신을 몰라라하는 미련곰탱이 들이 야속하기만 하였다. 춘단은 식은 땀을 흘렀다. 상대는 채소우대인을 단칼 에 베어버린 흉악한 자가 아닌가? 섯부른 행동은 이로울 것이 없었다. 춘단은 궁리끝에 내친 걸음으로 모진위를 아예 소계일의 집무실까지 데려가기로 작정 하였다. 모진위의 태도나 소계일의 전언으로 미루워 볼때 모진위는 아직 소계 일의 용모를 파악하지 못하고있음이 분명하였다. 반면, 소계일은 모진위의 생김 새를 너무도 확실하게 알고있었다. 또한, 회주의 집무실앞에는 언제나 무장한 보표가 대기하고 있었다. 사전통고가 없는 신원불명의 방문객은 일단 보표에게 일차적으로 제지당해왔던 것이 이제까지의 통례였다. 춘단은 그 틈을 이용해서 모진위를 떨쳐버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생명의 위협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는대 로 모진위의 정체를 폭로하려는 심산이었다. 일견 그럴듯한 책략이었다. 춘단은 서둘러서 모진위를 데리고 회주의 집무실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회주님, 안에 계시죠?" "음 춘단이구나. 회주님은 방금 내실로 드셨는데... " 이제 막 지겨운 임무에서 헤어난 홀가분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보표는 무 성의하게 대답하고는 집무실을 떠나려했다. 춘단이 다급한 마음에 다시 보표를 불러세웠다. "저기요... 저 좀 잠깐..." "글쎄, 침소로 가보라니깐..." 무정하게도 보표는 뒤도 안돌아보고, 그대로 떠나가버렸다. '떡을 칠!' 춘단은 마음속으로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내실로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 다. 내실이라면 문제가 달랐다. 내실의 방문객은 춘단이 안내를 맡는다. 그러니 까 내실에서는 춘단을 동행하고있다는 것자체가 무사통행을 보장해주는 것이었 다. 일이 꼬여도 너무 꼬였다. 내실까지 출입하는 귀빈의 경우는 백이면 백, 출 입문으로부터 소계일에게 보고가 올라갔으며 춘단은 단지 소계일의 명에 의해 서 마중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이번 경우도 그렇게 보일 것임이 십중팔구였다.. 소계일의 처소에 도착한 춘단이 안으로 기통을 넣었다. "회주님!" "... ..."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다시 기통을 넣었다. 마찬가지였다. 일순 춘단의 얼굴 에 화색이 돌았다.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모진위가 춘단을 따라 내실로 들어섰다. 정면에는 팔선탁과 의자들이 놓여있 었고, 안쪽으로 비단장식에 쌓인 채, 화려한 주렴으로 가려진 침대가 있었다. "주인님께서 잠시 다른 내실에 드신 모양이십니다. 제가 모시고 올 터이니 상 공께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바랍니다." 위기의 순간이 지나갔다. 이제 밖으로 나아가 무사들을 불러오면 그만이었다. '너따위 촌놈하나 가지고 노는 건 일도 아니다. 요놈아. 이제 네녀석은 죽은 목 숨이나 진배없다.' 춘단은 승리감에 도취해서 쾌재를 불렀다. 자신의 처지를 어지간히도 곤란하 게 만들었던 모진위가 단칼에 피떡이 될 생각을 하자 한편으로는 시원하고, 한 편으로는 섬찝하기까지 하였다. 순간, 모진위의 살수적 감각이 작동하였다. 부지불식간에 춘단이 뿜어낸 살기 를 감지한 것이었다. 무시해버리기에는 너무도 짙고 뚜렷한 살기였다. 모진위는 주저하지않았다. 감각을 무시한 실수는 장여진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살수로서 의 뼈를 깍는 수련이 모진위에게 더 이상의 관용을 허락하지않았다. 모진위는 조금도 주저하지않고 춘단의 뒷덜미를 돌려감았다. 그리고 최대한 기력을 뽑아 내어 일시에 집중하였다. 으드득! 기분나쁜 파열음이 터져나왔다. 가전회가 알아주던 동정원의 여우, 춘단은 그 렇게 목이 부러져서 죽고말았다. 숨도 돌릴 사이없이 내실밖에서 예리성이 들 려왔다. 모진위는 황망중에도 서둘러서 춘단의 시체를 팔선탁밑으로 밀어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몸을 숨길만한 장소를 찾아야했다. 모진위의 눈길이 정원으 로 향해있는 육각형의 창틀위에서 멈춰졌다. 그곳에는 전서체로 쓰여진 대형편 액이 걸려있었다. 발소리는 어느새 문앞까지 당도해있었다. 모진위는 다른 장소 를 물색할 엄두도 못내고 창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창틀을 밟고 편액으로 기 어올라갔다. 비스듬이 걸려있는 편액과 벽사이에는 약간의 공간이 있었다. 모진 위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편액사이로 몸을 우겨넣었다. 모진위의 육신이 믿 을 수 없을 정도로 기형적으로 구겨지며 벽과 편액사이로 스며들었다. 일찌기 관음상에 깔리며 요행으로 터득했던 비연류의 또 다른 응용수법이 펼쳐진 것이 었다. 옷자락 끄트머리가 모진위의 손에 이끌려 편액뒤로 사라짐과 동시에 방 문이 열렸다. "호홋. 대인의 홍복이십니다." "허어. 아닐세. 모두가 자네덕이야. 자네가 복덩이로 굴러들어온게야." 편액의 각도로 인해서 정면의 문쪽은 볼 수 없었지만 음성만은 그대로 모진위 의 귀에 꽂혔다. 쇳가루가 걸린듯한 사내의 음성과 구슬이 쟁반을 굴러가듯 또 르르 구르는 여인의 음성이었다. 순간 쇠망치에 얻어맞은 것처럼 모진위는 전 신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옵니다. 대인. 천첩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왜 없는가? 자네가 그 모진위라는 병신을 회유하지 않았다면 이 일이 성사나 되었겠는가?" "호호. 대인. 그게 다 대인의 홍복이지요. 천첩이야 대인께 속한 것, 소첩의 그 것이 곧 대인의 그것이랍니다." 모진위는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여인의 입에서 천첩이란 단어가 튀어나올 때마다 모진위는 부르르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아무리 부인 하려해도 그 음성은 장여진의 음성이었다. "허허. 이 귀여운 것." 소계일은 흐뭇한 표정으로 장여진을 바라보았다. 여탐(女貪)에 대한 소계일의 병적인 집착이 뜻밖의 횡재를 안겨다주었다. 돌이켜보면 신검대회에서 장가량 을 옭아매는데 실패한것이 발단이었다. 소계일은 장여진을 얻기위해서 장가량 을 화우림으로 유혹하였고, 계획대로 장가량을 함정으로 몰고가서 결국 장여진 을 도박밑천으로 끌어내었다. 그런데 모진위라는 천둥벌거숭이가 나타나 소계 일의 함정을 온통 헤집어놓았다. 소계일은 모진위의 입상을 저지하기위해서 대 진표를 조작하여 강력한 우승후보인 우백으로 하여금 모진위를 상대케하였다. 그것이 오히려 모진위가 채소우의 눈에 띄는 빌미가 되고말았다. 실망스럽게도 우백은 모진위가 장여진의 몸값을 지불하고도 남을만한 상금을 받게해주는 지 렛대 역할을 하고말았다. 하지만 소계일은 그정도로 포기하지않았다. 원하는 것에대한 강렬한 집작, 이 것이 오늘날 소계일을 있게해준 원동력이었다. 소계일은 장여진을 얻기위해서 자신이 가입해있는 맹(盟)의 힘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양주지부의 수뇌부를 설 득하였다. 채소우암살공작에 모진위를 활용해보자는 표면적인 구실이었다. 채소 우의 암살은 맹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과업이니 이중의 대비책을 세워서 철저하게 준비함이 합당하다는 논지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사안의 중요성으 로 인해서 - 당시로서는 그다지 기대감을 주지못했던 예비책이었지만- 소계일 이 주장한 특삼호양성계획의 안건이 맹의 회의를 통과하였다. 채소우의 암살을 담당하는 부속조직에서 모진위의 납치와 교육임무를 떠맡았다. 그리하여 신검 반과 평안객잔의 전원이 살해되었고, 모진위는 살수단의 수중에 떨어졌다. 물론 소계일계획의 핵심에는 장여진있었다. 소계일은 자신이 직접 소주까지 출두하 여 평안객잔의 장여진을 빼돌릴 수 있었다. 소계일은 그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만족했는데, 사태가 의외의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소계일이 뜻밖의 횡재를 하게 된 것이었다. 예상치못했던 유진목이라는 변수로 인해서 수년간 준비해온 비장의 채소우암살계획은 무위로 돌아갔고, 모진위를 안배해준 소계일의 예지력아닌, 예지력이 크게 빛을 발하게 되었다. 게다가 특삼호작전이 큰 위기에 봉착하게되었을 때, 장여진은 소계일이 준비한 또하나의 안배아닌, 안배로서 그 위력을 발휘하였다. 모진위의 반항으로 계획자체가 무산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 이번에는 장여진을 맹으로 보내서 모진위의 마음을 돌려놓았던 것이다. 또한, 소계일은 그에 더하여 자신의 임무 마저 훌륭히 완수해내었다. 채소우의 수연을 맞이하여 채가장의 내원까지 초청 된 맹내의 유일한 인물이 바로 소계일이었다. 이제 맹의 수뇌부에서는 소계일 이라는 유능한 인물이 있음을 분명히 기억하게 된 것이었다. 소계일의출세가 도는 이제 탄탄대로였다. 장여진을 바라보던 소계일의 눈이 돌연 정염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마주보는 장여진의 눈빛도 더할 나위없이 요사스럽게 변했다. "이리오너라. 요 탱탱한 것. 흐흐흐." "아이 이러지마세요 대인. 체통을 지키시어요." 장여진의 코맹맹이 음성이 간들어지게 넘어갔고, 소계일은 후끈 달아올랐다. 차르륵! 침상을 가리고있던 주렴이 비명을 지르며 갈라지고, 그 사이로 두남녀가 한덩 어리가 엉켜서 모진위의 시야에 나타났다. 애석하게도 침상만은 모진위의 위치 에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아니 꼼짝도 할 수 없는 모진위로서는 눈을 감기전 에는 침상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소계일이 두터운 입술로 장여진의 입술을 내리누른 채, 허겁지겁 장여진의 옷 가지를 벗겨나갔다. - 이 부분부터 두어개의 단락은 쓰는 이의 의사에의해서 자진삭제되었음을 알립니다. - 모진위의 장탄식을 그대로 흘려버리기에는 소계일의 주의력과 내공이 너무도 훌륭하였다. "어떤 놈이냐?" 벽력같은 고함과 함께 소계일의 일장이 편액을 때렸다. 혼란에 빠진 모진위는 대처할 정신도 없었지만, 설사 방어를 하려한다해도 모진위가 자세를 갖추기위 해서는 편액의 틈새는 너무 좁았다. 편액은 산산조각났으며 모진위는 울컥하고 선혈 내뿜었다. 다시 소계일의 후발장력이 추락하던 모진위의 가슴 한복판을 강타하였다. 모진위의 상체는 장력에 튕겨나가며 창틀에 부딪쳤고, 창살들이 부 서져내렸다. 모진위는 창밖으로 넘어지며 정원으로 낙하하고 말았다. "잡아라. 침입자다." 벌거벗은 소계일이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외쳤다. "죽여요. 죽여버려요!" 옷자락을 들어서 겨우 안가슴만 가린 장여진이 표독스럽게 외쳤다. 옷자락사 이로 드러난 장여진의 어깨와 가슴언저리가 햇살을 받아서 하얗게, 아주 하얗게 반짝이고있었다. 모진위는 스르르 눈을 감아버렸다. 삽시간에 가전회의 상주무 사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모진위는 간신히 눈꺼풀을 열었으나 번뜩이는 검광 이 마치 장여진의 어깨처럼 눈에 부셔서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미처 상 황을 분간할 사이도 없이 검날이 날아들었다. 쨍-.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모진위의 육신을 파고드는 검은 없었다. 연이어서 검 과 검이 부딪치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모진위를 엄습하던 검기들도 마 찰음과 함께 스러져버렸다. 모진위는 다시 살그머니 눈을 떠보았다. 흐릿한 검 광을 가르며 찬연한 광채가 번쩍 빛을 발했다. 마치 장여진의 나신과도 같이. 그 순간 가장 지근거리에서 모진위에게 핍박을 가하던 장한이 짚단처럼 쓰러졌 다. 다시 빛이 번쩍이고, 또 한명의 대한이 쓰러졌다. 빛의 작렬이 몇 번 이어졌 고, 그때마다 대한들이 하나씩 나뒹굴었다. 모진위는 그 광채가 너무 눈에 시어 서 끝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몇번 더 빛무리가 떠오르자 모진위를 둘러쌓 던 인영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시작했다. 사내들이 물러감에 따라 모진위 의 의식도 점차 가물거렸고, 급기야 모진위는 의식을 잃고말았다. 흑수노계였습니다. #5555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29- 04/05 01:48 319 line 한 사내가 모진위의 시야에 들어왔다. 콧날이 멋지게 선 사내였다. 사내는 근 심스런 표정으로 모진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진위의 기억에 저만큼 멋진 콧 날의 가진 사내는 단 한명밖에 없었다. 모진위는 마음이 따스해 지는 것을 느 꼈다. 최근에 벌어진 일련의 상황들은 모진위의 마음을 북국의 벌판처럼 꽁꽁 얼려놓았다. 그런 모진위의 마음을 단숨에 녹여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천지를 통틀어 몇 명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코가 저렇게 잘난 사내라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아직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모진위는 어리벙벙한 가운데 사내 의 얼굴이 제대로 확인 할 수 없었다. "깨어났구나!" 사내가 말했다. 무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오고나서야 모진위는 자신의 눈앞에 펼펴진 광경이 꿈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는 틀림없는 하상곤이었다. 얼마후, 의식이 완전히 깨어난 모진위는 비로서 하상곤 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상곤은 언제 입을 열었나싶게 굳게 입을 다문 채, 모진위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모진위의 얼굴은 본래부터가 별로 봐줄만한 쌍판이 아니었던 데다가 설상가상 으로 잔득 부풀어올라와서 전혀 못봐줄 몰골이었다. 더 이상 흉칙해질래야 흉 칙해질 수도 없을 것같은 참담한 몰골이라고 하상곤은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모진위의 얼굴은 그런 하상곤의 확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처참하게 일그러 지기 시작했다. 하상곤은 일순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모진 위의 구겨진 표정에 화답하였다. 물론 하상곤은 그 괴상한 일그러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있었다. 그것은 모진위의 미소였다. 모진위는 극도로 웃음을 아끼는 아이였다. 모진위 스스로도 자신의 미소랍시고 만드는 표정이 미소는 커녕, 원숭이 하품하는 것보다도 더 멋대가리없음을 분명히 알고있는 것같았다. 그런데 그런 모진위가 하상곤을 발견하더니 웃는다는 행위가 거의 불가능하리 라고 짐작되는 근육상태에서 미소를 보내주었던 것이다. "하아저씨가 어떻게...?" 하상곤은 급히 손가락을 내밀어 모진위의 입을 막았다. 모진위의 목숨은 아직 도 경각에 달려있는 화급상태였다. 채가장에서 입은 부상만해도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한달 가까이 굶주림속에 방치된 상세가 치명적으로 악화되었다. 그런 비정상의 상태에 재차 가해진 소계일의 일격은 모진위를 사망 일보직전으로 몰 고가 버렸다. 하상곤은 애초에 황경에게 모진위를 데려가 치료시킬 작정이었다. 하지만 모진위의 상태가 너무 위태로웠다. 하상곤은 계획을 바꿔서 가장 가까 운 객점으로 모진위를 옮겼다. 추적자들에게 발각될 확률이 높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진위의 상태로는 장거리이동이 불가능했던 것이었다. 하상곤은 서둘 러 인근의 의원을 수배하여 응급조치를 하고, 탕제를 달여먹였다. 그러나 이틀 이 지나도록 모진위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던 터였다. "말을 삼가하고, 당장 돌아누워서 무위조식을 시전토록 하거라." 모진위가 무위조식에 들어가자 하상곤은 모진위의 명문혈에 장을 올려놓고 진 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무위조식이 본궤도에 오르고 내력이 모진위의 몸속에 본격적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하자 하상곤이 입을 열었다. 진기를 주입시키는 행위중에 말을 하는 것은 경력의 낭비가 극심해지므로 대개는 말을 자제하고 진기주입에 집중하는 것이 시전자에게 무리가 없는 조치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러나 궁금증으로 들떠서 모진위의 심기가 쉽게 가라앉지않자 하상곤은 모진위 를 안정시키기위해서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로 작심하고 입을 열었다. "소주에서 진위 네소식을 들었다. 하여 부랴부랴 양주로 왔지. 채가장에 유진 목이란 인물이 있더구나. 먼 발치에서 보기에도 눈빛이 형형한 것이 관록이 느 껴지는 작자였지. 네 행적을 찾고있는 눈치더구나. 그래서 그자를 며칠 미행했 봤다. 그자는 가전회를 심상치않게 주시하는 기미더라..." 유진목이 가전회를 조사할 것이라는 점은 모진위도 이미 알고있는 터인지라 하상곤의 설명이 어느정도는 이해되었다. "가전회가 평안객잔사건에 음으로 양으로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이 아저씨도 몇몇 경로를 통해서 익히 얻어들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이 아저 씨도 가전회의 총단이라고 알려진 동정원의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지. 아니나 다를까 네녀석이 난데없이 소계일의 침소창문에서 튀어나오는게 아니겠느냐?" 하상곤은 모진위를 발견하자 지체없이 동정원으로 뛰어들어갔다. 모진위의 상 체에 검이 떨어지려는 순간, 간발의 차이로 모진위의 곁에 당도했다. 하상곤은 자신의 안위도 돌볼 틈이 없었다. 하상곤은 기본적인 방어자세도 무시하고 검 을 뻗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적의 검을 막아내는 방어초식이 아니라 검자체 를 목표삼아 공격을 퍼붓는 기형적인 초식이 되어버렸다. 하상곤의 임기응변 은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또한 다행히도 모진위를 포위했던 가전회의 무사들의 무공이 그다지 고강한 편은 아니었다. 하상곤은 가전회의 무사들이 허둥대는 틈을 타서 정신없이 몰아부친 후, 여세를 몰아 모진위를 옆구리에 끼고 담장을 뛰어넘었다. 난데없는 하상곤의 돌입에 아직 사태파악이 안됐는지 가전회측의 즉각적인 추격은 없었다. 모진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오자, 하상곤은 긴 한숨과 함께 장을 거두웠다. 그리고 모진위를 편하게 눕히고는 잠시 상세를 살펴보더니 비로서 안도하였다. 쉬지않고 무위조식만 한다면 이삼일은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모진 위를 구출하게된 경위를 설명하고난 하상곤이 이번에는 모진위에게 물었다. "그래 어찌된 연유로 네가 그 지경이 되었는지 이제 진위 네가 좀 설명해주겠 느냐?" 하상곤의 질문에 모진위의 기억은 악몽의 석실미로로 되돌아갔다. 모진위 최 초의 살인이 그곳에서 벌어졌다. 그때만해도모진위에게는 어떠한 죄책감이나 자괴감이 없었다. 후회하였다해도 반성할 여유따위는 없었던 상황이었다. 단지 생존을 위한 몸부림외에는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채소우를 살해하기전까 지만해도 모진위는 그때의 피빛 만행들을 일제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쩌면 애 써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어쩔 수 없는 정당방위정도 로 자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와서는 그렇치 않았다. 그들은 모진위와 마찬 가지의 -모진위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자신보다 생존할 만한 가치가 훨씬 높은- 인간이었고, 고작해야 열서너살짜리 소년들이었으며 그들도 단지 살기위해서 모 진위를 위협했을 뿐이었다. 모진위의 기억은 혈귀의 강요에 의해서 상대해야했 던 무림인들의 얼굴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석실미로처럼 어둠속에 가리워진 무 형의 존재들이 아니었다. 공포와 고통에 괴로워하는 생생한 표정들이었다. 모진 위는 그 생생한 실체를 정시하며 일말의 자책도 없이 검을 쑤셔박았었다. 냉귀 의 얼굴도 있었다. 그나마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느꼈던, 과장해서 말하자면 스 승으로 받들었어야 마땅할 냉귀였다. 반드시 죽여야 할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 음에도 불구하고 모진위는 냉귀의 목줄기에조차 잔혹한 일검을 쑤셔박았다. 마 지막으로 후한 환대와 호의의 은덕을 살생의 악덕으로 갚아준 채소우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모진위는 참을 수 없는 욕지기를 느꼈다. 피라도 토해내고 싶을 정도로 비통한 구토증이었다. 돌이켜보면, 모진위가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모진위때문에 희생당한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첫번째로 그의 어머니가 피와 살을 모두 모진위에게 빨려버린 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으며, 도학정이 회주문으로부터 모진위를 보호하기 위해 비참하게 죽어갔다. 그리고 구연기는 추혼십이절의 전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다. 또한 신검반의 식구들과 평안객잔의 가솔들이 있 었다. 그들은 모진위덕분에 죽어야하는 이유도 모른 채, 허무하게도 진토가 흩 어져버렸다. 모진위는 팔다리라도 짤라내어 버리고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모진위는 가끔 이야기를 멈추고 숨을 고르기는 했지만 이를 악물고 자신의 사 연들을 하상곤에게 털어놓았다. 마치 악업을 회개하는 대역죄인처럼... 모진위의 긴 이야기는 소계일과 장여진의 침대에서 끝을 맺었다. 이야기가 끝 난 후에도 한때는 자신의 정혼자였으며, 이제는 그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을 지도 모르는 원수의 정부가 된 장여진의 하얀 육신이 모진위의 망막에서 떠나 지 않았다. 영원히 망막에 늘어붙어 괴롭힐 것만 같이 모진위를 비웃고 있었다. 모진위는 베게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모진위의 모친은 단 하나의 당부만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모진위만은 강호의 은원에 얽히지 않게 해달라고 남편의 복수는 원하지 않는다고... 하상곤은 그 단 하나뿐인 부탁을 지켜주지 못했다. 모진위의 부모도, 황경도, 하상곤도, 모진위 자신도 전혀 원하지는 않았지만 모진위는 이미 지독한 강호혈겹의 한복판에 내 동댕이쳐지고 만 것이었다. 받아야 할 부채는 하상곤이 떼어먹는다해도 갚아야 할 부채는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채가장은 결코 그들이 받아야 할 빛을 쉽게 잊어먹을 무리가 아니었다. 채가장은 우선적으로 모진위에게 그 빛을 청 구하려 할 것이다. 정작 빛을 청구해야 할 자들은 그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도대체 그 자들이 어떤 작자들이란 말이예요?" 이제까지의 채경령이 아니었다. 더 이상 채경령은 사랑과 기쁨만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녀의 말투에는 신랄함마저 베어있었다. 모진위가 가까스로 생사의 갈림에서 헤어날 무렵, 채가장의 본당(本堂)에는 중 요가신(家臣)들이 모두 참가한 회합이 열리고 있었다. 채소우의 장례식이후 가 장많은 인원이 참가한 회합이었다. 회의의 방향은 자연스레 흉수 모진위의 행 방과 그 배후조종자들의 정체에 촛점이 맞추워졌다. 가장 혐의점이 짙은 배후 조직으로 가전회가 용의선상에 떠올랐다. 가전회의 회주 소계일의 숨겨진 정부 의 출신내력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주었다. 소계일의 정부는 신검반의 두령 장가량의 무남독녀 외딸 장여진으로 밝혀졌다. 또한 조사에 의하면 쌍연교의 대학살 당시 가전회는 당시의 사건현장인 소주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상당규모 의 인원을 파견시켰던 것으로 드러났다. 모진위와 가전회사이에 모종의 관계있 음이 분명해졌다. 신검반이라는 연결고리가 가전회와 모진위의 사이를 이어주 고 있었다. 채경령은 가전회에 대한 정면대응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채경령의 그와 같은 주장은 곧바로 만만치않은 반대에 부딪쳤다. 채경령이 장주의 지위를 대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가신들은 그녀의 의견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주 었다. 가능하다면 직접적인 충돌은 피해야한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가전회는 조정관료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그 첫번째 이유였다. 표면적으로 행회조직은 동종업체간의 협력을 목표로 구성된 상인조합을 표방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당시 금권을 독점하고있던 사대부계층이 상품확보와 가격통제를 위해서 설립한 어용조직이 바로 행회조직인 경우가 비일비재하였 다. 행회조직은 관료계급이 매점매석을 목적으로 상인들을 통제하기위해서 만 든 제도적 장치라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행회에 정치적인 입김이 작용한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었다. 결국 가전회를 파고들어가다 보면 가전회와 연관된 정계의 실력자와 만나게되기 마련이고, 그러면 자신의 비 리를 은폐하려는 정치세력과의 충돌이 불가피해진다는 이야기였다. 채경령은 가신들의 염려를 얼핏 이해할 수 없었다. 관료와의 밀착관계라면 조 정의 전매품목인 소금의 상인들이 한수 위였다. 겨우 양주지역의 전장정도가 모여있는 가전회와 비할 바는 아니었다. 소금은 정부의 전매품목이었다. 전매품 이라고는 하나 정부가 직접 장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생산된 소금은 양주의 소금상인들에게 위탁되어 전국으로 배급되었다. 염상(鹽商)들이 다른 어느 계통 의 거상들보다도 정계와 밀접한 관계가 맺고있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더군다 나 채소우라면 소금에 관한 한, 천하제일이었다. 그러므로 당금천하에서 핵심경 제관료와 끈을 대고있는, 가장 정치적 영향력이 큰 상인은 채소우라고 할 수 있 었다. 그러므로 채소우가 별세했다고는 하나, 왠만한 권세가쯤은 일격에 날려버 릴 정도의 여력은 아직도 채가장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가신들은 채가장이 상 대할 수 없는 막강한 정계의 인사들이 배후조정자와 결탁되어있을 가능성이 크 다며 채경령을 만류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들이 어느정도의 실력자이기 에 그렇게들 겁을 집어먹고 있는냐는 채경령의 질문에 소금의 불하와 수집을 총괄 책임지고있는 포두결(浦頭結)이 대답했다. "구법당(舊法黨)과 천하의 거상, 대지주라 할수있는 도교, 불교의 명문대파 전 부가 일단 그 자들과 한패라고 보아도 무방할겝니다. 아가씨." 구법당과 상계, 종교계라면 신법당(新法黨)을 제외한 천하권력전체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포두결의 대답은 채경령에게 청천벽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채경 령이 기가 막혀서 물었다. "조부께서는 거상이라고는 하지만 일개 소금상인에 불과했어요. 조부께서 설마 소금은 팔지않고 역모를 꾀하기라도 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역모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다만, 그냥 소금만 팔고계시지는 않으셨다는 이 야기입니다."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휴우, 그리 간단치만은 않군요. 먼저 아가씨께 외람된 질문을 드려야겠습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포총관께서는 기탄없이 말씀하세요." "당금천하에서 나라전체에 영향을 미칠만한 전국규모의 거래품목이 무엇이라 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차, 자기, 비단을 위시한 옷감, 소금이지요." 채경령이 어린 나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오랜전통의 거상가(巨商家)의 자식, 대 체적인 상업계의 흐름은 그래도 줏어들은 바가 있었다. 채경령도 그 정도는 상 세하게 알고있었다. 당시의 상황여건을 살펴보면, 제한된 지역을 벗어나는 장거리교역은 거의 행해 지지 않고있었다. 장거리교역의 가장 큰 제한은 높은 운송비였다. 육로의 운송 비용이 높았기 때문에 저가이거나 무거운 상품은 성간교역이 거의 불가능한 형 편이었다. 예를들어 곡물을 우마차로 천오백리를 운반했을 때 드는 비용은 원 산지에서의 재배비용에 상당할 정도로 높았다. 정부의 정책 또한, 성간교역에 저해요인이 되었다. 조정은 교통의 요지마다 세 관을 설립하고, 요충지를 통과하는 상품에 대해 가격의 일정비율의 이금(이金: 상업세)으로 징수하였다. 한가지 상품이 목적지에 당도하기까지 세관이 있는 곳 을 통과할 시에는 몇 번이라도 계속해서 이금을 납세해야했으므로 지역간의 가 격편차로 이윤을 챙기려는 상인으로써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장거리 교역품목은 운송비부담이 없거나 필요불가결한 몇가지 품목로 한정될 수 밖에 없었다. 기후나 토양조건 때문에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생산될 수 밖에 없는 일부 생산품들이 주로 장거리 교역품목이 되었다. 또한 의식주에 관련한 필수품목을 제외하고는 높은 운송비의 문제로 부피, 무게가 부담되는 품목은 교 역품목이 되기 힘들었다. 소금, 자기, 섬유, 차등이 그러한 한계요인을 극복하는 대규모 물동량의 품목들 이었다. 에를 들어서 차 백근은 같은 무게의 곡물보다 대여섯배는 비쌌으며, 원 면(原綿)은 차보다 약간 더 비쌌다. 소금은 지역에 따라서 편차는 있었지만 대 부분 원면보다 높은 수준의 가격을 형성하였다. 또한, 이들 품목들은 소수지역 에서만 경제성을 갖고 생산됐다. 그러므로 천하를 주름잡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상인조직은 염상, 다상(茶商), 금상(錦商)이 전부라고해도 틀린 말은 아니 었다. 포두결이 고개를 끄덕여서 동의하고는 다시 물었다. "그중에서 하나만 고르신다면요?" "당연지사 소금이 으뜸이지요. 차나 자기는 소금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과연 채씨집안의 적통으로 손색이 없사오이다. 아가씨." 차와 비단, 그리고 도자기는 사치성 소비품이었다. 장거리교역품은 가격에 구 애받지않는 구매력을 보유한 대지주와 사대부의 수요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 다. 비교적 물동량이 큰 차와 비단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비단은 주로 부유층에 서 소비되는 상품이었다. 서민에게 있어서는 값싼 무명옷감도 감지덕지한 형편 이었다. 차가 일상음료라는 생활양식도 역시 주로 부유층에게만 해당하는 이야 기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뜨거운 물조차도 항상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자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면직류와 소금은 달랐다. 특히 소금은 아무 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없어서는 안되는 모든 음식의 필수품이었다. 그러므로 소금은 황실에서조차 무시할 수 없는, 나라전체의 민심을 좌지우지하는 상품으 로써, 장거리교역이 중시되는 유일한 품목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럼 천하상권을 좌우하는 성시(成市)는 어디이겠습니까?" "양주." "소금을 제외한다면?" "그래도 양주." 황하북부지역은 황궁이 있고, 인구가 밀집되어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주요 식량 의 생산량이 강남에 비하여 보잘 것 없었다. 물론 여타 생필품들도 수요가 공 급을 초과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규모의 생필품이 개봉을 중심으로하는 화북지 방으로 운송되었는데, 역시 막대한 운송비가 문제였다. 당연히 수로운송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었다. 양자강유역의 운송비는 비슷한 거리의 육로운송비에 비하 여 삼분지일이나 오분지일에 불과하였다. 양주는 양자강과 대운하의 교차지점에 위치하여 있었으므로 상품운송에 유리 한 입지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여타의 제반입지조건도 근방의 입지 조건보다 월등히 우수하였다. 일찍부터 소금의 집산지로 위치를 확고히하고 있 었기 때문에 자금유동성이 원활하였으며, 각종 거래의 관습적 기반도 확립되어 있었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며 양주는 물류의 중심지가 되었고, 천하의 물동 량의 태반을 처리하기에 이르렀다. "옳은 지적이십니다. 그런 이유로 양주에 발운사(發運司)가 설치된 게지요." "발운사라면...?" 발운사는 채경령도 알고있었다. 발운사는 신법당이 새로운 개혁을 위해서 황 제직속의 특별기관으로 설립한 삼사(三司: 원래는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 司)라는 명칭의 기관으로 줄어서 삼사라고한다. 왕안석의 개혁을 위해서 설립되 었던 송대의 임시정책기관으로써 왕안석이 승상으로 승진하자 필요성이 없어져 서 폐지되었다.)의 양주 출장기관이었다. 삼사가 설립되고 삼사에서 최초로 입 안한 정책이 바로 균수법이었다. 또한, 삼사는 균수법을 효과적으로 시행하기위 해서 당시 천하물류의 심장인 양주에 발운사를 설립하였다. "신법당은 현 조정의 참지정사(參知政事: 송대의 승상을 말함.) 왕안석(王安石) 을 중심으로 모인 개혁성향의 붕당을 말하는게다." 같은 시각, 하상곤도 채소우암살의 배후세력에 대해서 모진위에게 설명하고 있 었다. 채소우는 기본적으로 반(反) 운명론자였다. 모진위도 자신이 누구에 의해 서, 무엇 때문에 채소우를 살해하게 되었는지 알아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진위가 그들을 찾아가서 응분의 보복을 할 것인지, 말것인지는 모진위 스스로 가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상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모진위가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도 록 조언해주는 것 뿐이었다. 모진위는 그들의 정체를 알고싶어했고, 하상곤은 환희루의 정보망에서 수집한 정보들을 익히 살펴보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추론을 가지고 있었다. 하상곤은 모진위의 배후조정세력들에 대해서 자 신이 알고있는 바를 차근차근 설명해나갔다. "왕승상이 제일 먼저 펼친 정책이 균수법이야. 균수법이 어떤 법이냐하면... 진 위 너도 각 지방마다 지방의 산물들을 관리들이 거두워들여 개봉을 보낸다는 것 정도는 알고있지?" "예." 황제 황족과 중앙정부의 소비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정부는 필요한 물자를 지 방에 할당하여 납입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각 지역마다 납입해야 할 산물의 종류나 수량은 항상 천편일률적이라 문제가 많았지. 예를들어 같은 물자를 생산하는 곳이라도 그 해의 사정에 따라 어느 지역은 심한 흉작이고, 다른 지역은 풍작이 될 수도 있지 않느냐? 장강 일대가 흉년이고, 대하유역은 풍년이라면 당연히 강남의 곡물가격은 오르고 화 북의 곡물가격은 내리질 않겠느냐?" 모진위가 잘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정부가 거두워들이는 양과 종류가 그런 지역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항 상 고정되어있는지라 개봉에서 가까워 운송비도 적게들고, 값이 싼 화북의 산물 을 마다하고 값이 비싸고, 먼거리에 있는 강남의 물자를 개봉으로 운반하는 사 태가 생기는 게야. 게다가 강남사람들은 가뜩이나 부족한 물자가 정부에 징발 되니 더욱 부족하게되고, 많이 생산한 화북사람들은 오히려 더욱 더 물자가 남 아 돌아서 처치곤란이 되는 이상한 불평등이 생겨나게 되지. 균수법은 그런 불 합리한 현상을 바로잡고자 만든 제도란다." 왕안석은 이와 같은 불합리한 점을 해소하기 위해 매년 정부가 필요한 물자를 미리 삼사에서 예산화하고, 이를 양주의 발운사에 통지하였다. 양주의 발운사는 동남지방의 강, 절, 형, 회등의 여섯로에 지부를 설치하고 지부를 통해서 육로의 생산현황과 개봉황실의 수요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게하여 형편에 맞는 합리적 인 물자조달을 하였다. "발운사는 가능한 한 가까운 곳에서 사게 매입하도록 하고 불필요한 물자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지방으로 운송하여 매각시키는 임무를 맡고있지. '비싼 것 을 옮겨 싼 것이 되게 하고, 가까운 곳의 것을 써서 먼 곳의 것을 대체한다' 라 는 원칙이 발운사의 기본지침이었지." "발운사에서 할아버지를 필요로 했다구요?" 채경령이 포두결에게 물었다. "발운사에서는 당연히 천하의 공급상황과 수요상황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지요. 하지만 당시 관료의 능력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난제였지요. 자연히 발운사에서는 상인들의 협조를 구해야했습니다. 물동량의 변화와 가격동향에 가장 정통한 부류는 역시 상인들이었고, 그나마 대개는 자신이 다루는 품목과 지역에 국한된다는 한계가 있으니, 천하각지의 산물을 총괄하는 흐름을 가장 빠 르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상업유통망은 양주의 소금거상들 정도였으니까 요. 그 중에서도 천하제일의 염상인 장주님께서는 물량과 가격에 관한한 천하 에 모르는 것이 없다는 평을 듣는 분이셨지요. 천하의 물가정세에 관한 한, 장 주님의 혜안을 따라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바 였습니다." "그래서 조부께서 발운사의 일을 봐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예? 그럼 이제까지 할아버지가 발운사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채경령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균수법은 양주거상에게 있어서는 죽음의 법과도 같았다. 균수법 시행이전에는 부상대고들의 가장 짭잘한 수입원이바로 정부물자의 불하였다. 정부의 물자구매가 시세의 변화에 따라 현지나 정부의 실정에 맞지 않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애써 먼 곳으로부터 운송해 와도 정 부에서는 필요가 없어 상인들에게 헐값으로 불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반 대로 정부는 필요한 물자를 고가로 매입해야만 했으므로 이 과정에서 중간에 있는 어용상인들이 관료들과 짜고, 물품가격을 교묘히 조작하여 부당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균수법은 종래에 폭리를 위하고있던 어용상인들의 존립여지를 크 게 축소시켜 놓았다. 양주의 상계가 발운사를 곱게 볼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채소우라면 그런 어용상인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었다. 가장 선봉에 서서 균수 법이 폐지되고, 발운사가 제기능을 못하도록 진두지휘를 해야 마땅한 인물이 바 로 채소우였다. 포두결의 말이 사실이라면 채소우의 그런 행동은 겨우 십분지일도 못미치는 신법당의 관료들을 제외하고, 사대부계층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구법당과 거대상인계층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임이 명약관화였다. 정부물자의 불하는 정 부관료와 상인의 상호결탁에의한 부산물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할아버지는 그런 무모한 일에 개입하셨지요? 여러분은 왜 할아버지를 만류하지 않았나요?" ================================================================ 500라인이 넘는 관계로 부득이 둘로 나누었습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5556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30- 04/05 01:56 214 line "채소우에게는 채희당(蔡熙棠)이라는 아들이 있었지. 삼대독자였다지 아마...? 소문에 의하면 상당히 광명정대한 정인군자라는 평판이 자자했었지. 그러니 채 희당이 왕승상의 신법당을 지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구나. 채희당이 신법당의 열성분자가 되었으니 당시 정경유착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채소우가 가만히 있었겠느냐? 부자간에 심한 불화가 일어났고, 결국 채희당이 자기 뜻을 굽히지 않은 채, 채가장을 뛰쳐나오고 말았지. 균수법이 뿌리를 내리 는데 그의 활약은 절대적이었다고 하더구나. 그러다가... 사년전인가...? 채희당을 비롯한 전가족이 몰살당하는 횡액을 입었지. 딸년하나만 겨우 살아남았다고하 더구나." "딸... 딸이요?" "그래, 채경령이라고 채가장에서 너두 보았겠구나. 채희당가족들이 변을 당한 곳이 사천이었는데, 마침 그 당시, 이 아저씨도 사천에 머물고있었지. 당시엔 사 고였느니 타살이었느니 갑론을박 말도 많았었지. 타살이라는 축들은 채소우야 제자식이니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다른 상인들과 구법당의 사대부들이 그렇게 큰 피해를 입고도 눈에 가시같은 채희당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을 거라는 논지였지. 결국, 그 사건이 있고나서 채소우가 갑자기 돌변해서 열성적 으로 발운사에 협조하게된 걸 보면 타살쪽이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 모진위는 사건의 전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하상곤의 이야기대로라면 채희 당과 채소우의 살인배후는 같은 세력이라고 보아야 했다. 아마 거상들이나 구 법당에 속하는 무리들중에 암살배후조직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모진위가 생각하기에 균수법은 많은 백성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좋은 제도였다. 상인들 은 그렇다고쳐도 나라를 다스리는 관료들이 어째서 구법당으로 갈려서 그 좋은 제도를 반대하는 것인지 모진위의 짧은 견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리고 구법당이 신법당보다 열배는 더 세력이 강한 붕당이라면 어째서 신법당을 몰아내지 못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황아저씨, 신법당과 구법당은 왜 서로 반대하며 싸우는 것이지요?" "흠 그건 좀 복잡한 사연이 있지. 너도 알다시피 여러 차례의 전쟁과 반란으로 황실의 재정이 파탄에 빠지게 되었지. 황제는 당연히 황실의 재정을 풍요하게 해줄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지. 왕안석이 바로 그런 문제들의 해결책을 오래전 부터 주장하던 신진관료였지." 태조가 나라를 새로이 건국하는 어수선한 시기에 틈타서 거란족의 북방을 통 일하고 요(遼)나라를 열었다. 요나라는 호시탐탐 풍요한 남쪽지역에 욕심을 내 고 있었다. 요와의 크고 작은 마찰이 끊이질 않았다. 한편, 당항족의 수령 이계 천(李繼遷)이 조정에 반기를 들고, 하서(河西)지방에 하(夏)나라를 건국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나라의 영토는 거의 하서지방 이십이개주를 포괄하게되 었다. 황실은 하나라를 묵인할 수 없었다. 경제적인 요인만 따져보아도 서하국 (西夏國)의 점령지중의 하나인 영주(靈州)는 조정이 서부소수민족지역을 통제하 는 중심지였고, 서북변방의 말(馬)을 구매하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곳이었다. 또한, 섬녕(陝寧)접경지의 염주(鹽走)경계내의 오지(烏池)와 백지(白池)에서 나 는 청백염(靑白鹽)은 색깔과 맛이 모두 뛰어났으며, 가격이 싸서 관롱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소비되었는데, 당시 천하소금의 일할에 가까운 수요를 감당하고 있 었다. 조정은 요와 더불어 하국과의 길고긴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서하와의 칠년간에 걸친 오랜 전쟁으로도승리하지 못한 것이 이후 황실의 커 다란 문제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국가재정이 적자로 전락하여 해마다 그 양상 이 심각해 진 것이다. 적자가 된 최대원인은 물론 서하와의 전쟁으로 인한 군 사비 팽창이 결정적 이었다. 재정상황이 어려워지자 정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수입증대를 꾀하였다. 이에 따라 백성의 부담이 커져서 그들의 생활근간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정부 는 군사비와 인건비의 막대한 지출을 메우기 위해 해마다 새로운 형태의 가렴 주구(苛렴誅求)로 백성을 쥐어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자가 보전되지 않았다. 국가의 세입을 지탱하는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중소소유농계급이 몰 락하였고, 면세등의 각종 특혜를 등에 업은 사대부에게로의 토지와 금력의 집중 이 가속화되었다. 세금을 내는 계층이 몰락하고 면세계급에 경제력이 집중하였 으니 세수(歲收)가 늘어날 리 만무였다. 기록에 의하면, 사천지역의 토지집중현상만 보더라도 객호(客戶:소작농)의 수 가 전 경계내 인구의 팔할에 가까웠다. 주호(主戶:토지를 소유한 농가)의 구성 은 대부분 면세특권이 있는 관호(官戶: 관원이 있는 호)로 이루워졌고, 여타의 대지주나 무림세가도 승도호(僧道戶:불교나 도교의 토지, 역시 면세토지이다.)에 명의를 옮기고 명목상 그 소작인이 되어버리는 방법으로 교묘히 각종 세금을 횡령하였다. 심지어 수백의 방호(旁戶: 거의 농노에 가까운 소작농)를 거느린 대지주들은 노예주라고 해도 좋을 만큼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며 지주가 매년 정부에 납부해야 할 과세조차 방호에게 직접 부담하게 하는 불평등 사례마저 횡횡하는 형편있었다. 국가의 중과세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서하전쟁의 와중에 각지에서 소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사천의 왕소파는 '나는 빈부가 고르지 못한 것을 싫어하여 이 제는 너희를 위해 그것을 공평하게 하겠다.'는 선언하에 민란을 일으켰다. 이러 한 구호는 생산물자와 생활자료에 대한 농민의 요구를 잘 반영한 것이었고, 따 라서 백성들의 옹호와 호응에 힘입어 거사 열흘 남짓만에 수십만의 세력으로 팽창하였다. 왕소파의 기의군은 주현을 공략하면 부고를 모두 부수고 재화를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탐관오리와 흉악한 지주들을 참살했다. 호남 계양감(桂陽監)에 속한 요족(瑤族)들도 반란을 일으켰다. 계양감과 일대 의 산악지역에서는 소금이 나지 않아 정부의 전매기구에서 해염(海鹽)을 구매 해야 했다. 그들은 관염(官鹽)의 가격이 비싼 것을 꺼려서 무리를 지어 영남으 을 왕래하며 사염(私鹽)을 판매, 수송했으며, 이로 인하여 그 지역에 주둔하던 관군의 통제를 받게되자 반항투쟁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그밖에도 불과 몇 년사이에 반란에 의해 피해를 입은 주(州)가 삼, 사십개를 넘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수차례의 민란을 통해 조정의 최고통치집단은 사면초 가의 입장에 처하게 되었고, 따라서 계급모순을 완화할 수있는 대책을 마련하 여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왕안석의 신법당은 이러 한 시기의 계급투쟁의 부산물이었다. 왕안석은 황제의 중용을 얻자, 균수법, 청묘법(靑苗法), 모역법(募役法)등의 개 혁신법을 입안하여 추진해 나갔다. 그때마다 보수파 관료들은 번번히 반대하며 시행을 방해했지만 왕안석은 강한 의지로 이에 맞섰다. 청묘법은 춘궁기에 돈 또는 식량을 농촌주호들에게 빌려주고 수확기에 이푼의 이자와 함께 원금을 돌려받는 법이었다. 이 법을 시행한 목적은 농민들이 파종 과 수확시기에 종자와 식량이 부족하지 않도록 해주어서 농민들이 제때에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주고, 대지주로 하여금 농민들의 급한 틈을 이용하여 몇배 로 이자를 불릴 수 있는 기회를 원천봉쇄하는 것이었다. 대지주에게도 능력에 따라 강제적으로 일정액수를 빌려가고 이자를 갚도록 하였으니 부유층에서 많 이 취하여 빈민층을 구제하는 제도였다. 모역법은 종래 농민들을 괴롭혔던 차역(借役)의 불공평한 부담을 없애기 위해 부역을 전문적으로 담당할 사람을 모집하여 급료를 지급하고 대신 그 급료를 면역전(免役錢)으로 징수하여 충당하는 개혁법이었다. 면역전은 그동안 아무런 부담을 하지않던 관호와 도승호에게도 토지생산에 따라 역전을 내도록 규정하 였다. 면역전은 이전의 차역법의 모순을 개선하여 재산이 많을수록 누진제를 적용하여 가진자에게 부담이 크도록 하였으므로 역시 부유층에서 빈민층에게 재산을 분배하는 효과가 있었다. 당시의 사대부들은 관료가 된 후 그 특권을 이용하여 세부담으로 붕괴되는 중 소농의 토지를 매입해 들어간 결과 천하의 경지 가운데 절반이상을 소유하기에 이르렀다. 왕안석이 등장하기까지이들은 자신들이 자신들을 위한 정책을 입안 하였는 지라, 관료들의 부의 독점을 막을만한 대책은 거의 세워지지 않고 있었 다. 정책적으로는 거의 무방비상태라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회추세 는 관료가 되어 부귀를 도모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최대의 목표로 인식되고 있었 다. 왕안석을 중심으로 하는 신법당의 개혁에 대해서 사대부관료들은 맹렬히 반대하였다. 사대부의 특권이 침해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신법당을 제외 한 사대부의 전체가 구법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상곤의 대체적인 설명으로 채소우를 못마땅히 여기는 세력이 과연 무림과 종교계, 사대부전체라해도 과언이 아님을 모진위도 충분히 납득하게 되었다. 그 러나 그 범위가 너무 방대하다보니 모진위는 배후세력의 진면목에 대해서 도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배후조종자의 정체를 파악하려면 그야말로 만천하 를 뒤져야 할 노릇이었다. 모진위가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과연 구법당, 상인집단, 무림대파 모두가 채소우의 암살모의자로 의심받을 만 하군요. 누가 저를 이꼴로 만들었는지 찾을 수도 없겠구요? 하아저씨." "범위를 약간 좁혀 볼 수는 있지. 채대인에게서 가장 직접적으로 피해를 많이 본 이익집단을 알아보는 것도 그 한방법이 되겠고..." "그럼, 채가장에서는 채대인의 살인을 배후조종한 세력을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겠군요?" "그렇지는 않을게다. 채소우를 제외한 채가장의 관련인물들 모두가 한 목소리 로 발운사와의 협조를 강력하게 반대를 했었던 것으로 알고있다. 방침이 결정 되고도 채소우의 수하들은 진심어린 협조를 하지 않았지. 결국 뜻을 굽히지 않 은 채소우 혼자서 가신들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그일을 수행해야 했지.채소 우가 죽은 마당에 일에 돌아가는 형편을 제대로 알고있는 사람이 채가장에 남 아있을 것 같지는 않구나." 하상곤의 추측은 정확했다. 채소우가 반대파에의해서 숙청당한 것이 분명함에 도 채가장의 수뇌들은 어떤 조직이 암살을 주도했는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 고 있었다. 다만, 유진목의 활약으로 밝혀진 가전회가 유일하게 단서가 되어주 고 있었다. 채경령은 가전회를 물고늘어질 작정이었다. 그러나 가신들의 의중은 달랐다. 채소우는 양주의 기득권층과의 반목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실세인 신법 당의 보호하에세력을 크게 신장시켜나갔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세력이 보다 확장되어 천하 소금거래의 삼할을 담당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채소우의 죽음은 곧 소금공급권의 축소를 의미했다. 채소우의 별세로 인해 발운사와 연관된 활 동기반을 모두 상실한 채가장으로서는 발운사의 향후협조를 장담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고, 기존의 상인세력과도 융합할 수 없는 진태양란의 위기에 봉착해 있 었다. 오히려 발운사를 적대시하여 지속적인 특혜를 보장받지못하는 자신들의 실책을 후회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채소우의 후계자 선정에 있었다. 확실한 구심점을 상실한 채가장에서는 이미 변방조직의 이탈징 후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가능한 한 빠른 시일내에 채경령을 혼사시켜 서 채경령의 남편으로 하여금 장주직을 계승케하여 조직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 선무였다. 가신들이 회합을 요청한 주목적은 기실 채경령의 혼사에 있었다. 겉 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가신들에게 있어서 채소우의 복수따위는 이미 안중 에도 없었다. 그러나 가신들의 건의를 채경령은 일언지하에 묵살해버렸다. "불구대천지의 원수가 같은 하늘아래 숨쉬고 있는데, 채가장의 안위따위가 왠 말이요. 채가장을 모두 팔아먹는 한이 있어도 복수를 미룰 수는 없습니다. 유대 협! 가전회와 소계일건은 진척이 있나요? 보고해주십시요." "근 몇년간 가전회에 속한 전장들의 특이한 공통점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무엇입니까?" "한결같이 은을 팔아서 금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래요? 이상하군요." 물론 대부분의 전장에서는 금과 은을 일정한 수수료를 제하고 교환해주고 있 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도 그것은 그다지 좋은 수입원이 될 수 없었다. 전장의 주업무인 고리대금업에 비하면 일할도 못미치는 수익밖에는 기대할 수 없는 사 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일년간의 거래를 추적해보니 대략 오만관의 은이 풀려나온 것으로 추정 됩니다." 채경령은 은의 방출이 채소우의 암살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아무리 생각 해보아도 알 수 없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 좀 해주십시요." "삼년전에 지금의 참지정사 왕안석이 잠시 실각했던 적이 있지요. 시역법(市易 法)이 발단이었습니다. 시역법의 시행을 가장 반대한 것은 상인들이었습니다. 대상인들은 관료들과 후궁에까지 손을 뻗쳐 법안의 폐기를 획책했습니다. 고리 대금업자와 염상들이 주동이 되었지요. 고리대금업자들은 시역법으로 인하여 최대의 피해를 입게된 업종이었고, 염상은 정부의 관료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 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단히 체계적이고 용이주도 한 움직임이 있었지요. 지휘체계와 전문적인 역할분담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 니다. 왕안석의 하야를 위해 따로이 별동조직을 결성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 렇게 밀려난 왕안석승상이 다시 실권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분이 바로 채장주님이셨지요. 그 당시 정말로 관료와 상인의 연합조직이 존재했다면 왕안 석의 재집권을 위해 장주님이 맡은 역할은 그 조직에 대한 견제였을 것으로 사 료됩니다." 농민들을 위한 법이 청묘법이라면 중소상인을 위한 법이 시역법이었다. 신법 당은 개봉에 시역무(市易務)를 설치하고 정부에서 백팔십만관의 자금을 발부하 여 물건의 수매와 행상인의 대부금으로 활용했다. 시역무는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물건을 구매하여 시장의 수요를 기다렸으며, 상인은 시역무에 물건을 저당 잡히고 조금씩 꺼내다가 판매할 수 있었다. 대부금과 물건값은 반년 혹은 일년 후에 일푼 또는 이푼의 이자를 더하여 시역무에 돌려주었다. 시역법은 호상대 고(豪商大賈)들이 시장의 권리를 장악하는 것을 상당히 제한하였으며, 시장통제 의 주도권을 정부의 수중으로 이동시켰다. 소상인은 대상인들의 기만과 압력을 받지 않게 되었고, 인위적인 가격폭등과 폭락도 없어졌다. 특히, 대규모 고리대 금업 전장은 입지가 눈에 띄게 축소되었다. 그러나 대상인들이 생존을 위해 사 력을 다한 결과 반대의견이 너무도 비등해지자 황제는 왕안석을 하야시킬 수 밖에 없게되었다. 정계에 미치는 상인들, 특히 염상의 발언력을 여실히 보여주 는 사례였다. 채경령이 어림잡아 계산해보니 은 오만관이면 금으로 팔천관이었다. 어마어마 한 수량이었다. 그만한 액수의 은을 수시로 동원할 수 있는 단일조직은 천하 에 존재하지 않았다. 왕안석을 실각시키기 위해서 정말로 상인, 관료, 무림의 연 합조직이 구성되었다면 역시 전장등의 고리대급업계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참 가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협력동맹의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대량의 은을 유통 시킬만한 여력을 가진 단체로는 가장 혐의가 짙었다. 은이 동원된 배경을 조사 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은의 출처는 조사해보셨습니까?" "그것이... 금이 유츌되는 방향으로 역추적중이긴합니다만... 개봉에서 흔적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각지부에 연락하여 은을 전문적으로 방출한 전장들의 명단을 수배중입니다." "들으셨죠? 채가장의 평상업무에 지장이 있어도 좋아요. 각지부에 연락해서 최 우선적으로 지원해주도록 조처토록하세요." 채경령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가 상대했던 적을 지금까지 할아버지가 상대해주었다. 좋아.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제는 이 채경령이 상대해주리라!' 채경령의 두눈은 불같은 전의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 주) 송대의 왕안석의 신법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대부분은 역사의 기록에 충실 코자 했으나, 염상의 정경유착에 관한 부분은 본인의 상상에 의한 픽션이오 니, 역사상의 사실과 다른 점이 있음을 유념하여주십시요. 흑수노계였습니다. #5635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31- 04/20 09:18 384 line "천산북로요?" "그래, 천산북로." 모진위가 되물었고, 하상곤이 대답했다. 환희루를 비롯한 평안객잔의 동료조합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가전회의 행적 을 추적해왔다. 덕분에 하상곤은 이제 막 조사에 착수한 유진목에 비해서 가전 회에서 은과 교환되어 반출되는 금의 전달경로를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었다. 가전회가 거두워들인 금은 대운하를 따라 북쪽에 인접한 특정행회조직의 전장 에서 은으로 교환되었고, 그 흐름은 계속해서 개봉을 경유하여 낙양에 이르기까 지 같은 형식으로 반복되었다. 하상곤이 낙양까지의 양주 가전회에서 시작되어 흘러간 금의 경로를 설명해주 자, 모진위가 낙양이후의 경로를 물어왔다. 낙양에서 금의 행적이 끊어졌다. 낙 양의 전장으로 반입된 금은 거기서 모두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끈질긴 탐색 에도 불구하고 낙양이후의 움직임은 좀체로 발견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분석은 낙양을 최종기착지로 지목하고 있었다. 하상곤의 설명을 끝까지 듣지 않아서 전후사정에 무지한 모진위는 그저 막연히 금의 이동이 계속되었을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낙양 다음의 경로를 물어왔던 것이다. 모진위의 질문에 하상곤도 무 심결에 천산북로라고 대답하였다. 자료를 종합해보면 하서주랑을 제외한 모든 교역로에서 금이 모여들고 있었 다. 그러니 만약 낙양에서 어딘가로 금이 계속 이동한다면 단순히 금이 유입되 고 있지않은 천산북로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추리한 별 뜻 없 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별 이권도 없는 천산북로쪽은 가능성이 희박하구나. 오히려 그 보다는 개봉 중앙정부의 통제가 비교적 덜 미치면서도 이권이 많은 낙양쪽이 대량의 금을 처리하기에 백번 유리하겠지. 그 이유는..." 파앗-. 갑자기 등잔불이 꺼졌다. 순간 모진위는 허공으로 떠올랐고, 싸늘한 한기가 뺨 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진위는 허공에서 세찬 속도로 반원을 그리며 날았다. 등 불이 꺼진 것이 먼저인지, 싸늘한 한기가 먼저인지, 아니면 하상곤이 자신을 나 꿔채는 것이 빨랐는지 모진위가 제대로 분간조차 하지 못한 찰나지간의 일이었 다. 객실은 지척도 분간하기 어려운 암흑속에 파묻혔다. 하상곤에의해 휘둘려서 공중을 감아도는 와중에 모진위는 창문쪽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달빛이라도 있 어야 당연했는데 창문방향도 칠흑같은 어둠의 벽 뿐이었다.기습이었다. 습격자 들은 어느새 창문마저 장막으로 가려버린 모양이었다. 모진위는 뒤에서 잡아당기는 세찬 압력을 느끼고 황급히 하상곤의 등에 찰싹 매달렸다. 하상곤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바람에 모진위는 원심력을 이기지못 하고 하상곤의 겨드랑이에서 빠져나갈 뻔 하였던 것이다. 회전하는 하상곤의 어깨주변에서 파르스름한 광채가 서너갈래의 광선을 그려내었다. 째쟁! 쨍! 쨍! 소름끼치는 수차례의 마찰음들이 모진위의 귀를 멍멍하게 만들었다. 섬뜻섬뜻 모진위의 옷자락을 스쳐가는 한기도 있었다. 객실안을 어지럽게 휘돌던 하상곤 의 신형이 돌연 정지하였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급공을 모두 막아낸 것이었다. 위기의 순간이 지나갔다. "데체 어떤 놈들이냐?" 하상곤이 호통을 쳤지만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물론, 하상곤도 공손한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었다. 암습자들의 정체는 너무도 뻔했다. 가전회, 혹은 가전 회와 관련된 채소우암살한 배후조직임이 분명하였다. 하상곤은 이러한 위기를 자초한 자신의 부주의를 자책하였다. 모진위가 한고비를 넘겼을 때, 바로 은신 처를 옮겼어야 했다. 적의 세력권에서 너무 오래 머물러있었던 것이다. 모진위 가 가까스로 죽음의 문턱에서 회생하자 하상곤은 일시적으로 긴장이 풀어진 나 머지 상황을 너무 낙관한 것이 화근이었다. 하상곤이 적정를 파악할 시간을 벌기위해서 괜한 너스레를 떨었다. "선자불래(善者不來)라! 좋은 뜻으로 방문한 귀빈은 아니겠지." 암습자들은 기척은 커녕, 윤곽도, 소리도 없었다. 객실안에 하상곤과 모진위외 에는 어느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느 방향에서 압 박해오고 있는지, 몇명이나 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식은 땀이 흘러내려서 검병이 제대로 쥐어지지 않을 만큼 초조해졌다. 그때, 모진위가 말했다. "아저씨, 좌측으로 비껴서 정면에 한명, 우측에 둘, 그리고 우측후면에 또 한명 있어요. 우측에 있는 자가 가장 가깝게 접근해오고 있어요." 하상곤은 모진위의 충고가 믿기지 않았으나, 모진위의 음성이 제법 확신에 차 있는 것에 일말의 희망을 걸고 일단 모진위의 말에 따라 방어태세를 취하였다. 모진위가 일러준 방위를 따라 주의을 집중해서 살펴보았더니 경미한 반응이 느 껴졌다. 모진위의 상황판단은 믿을만한 것이었다. 하상곤은 주저없이 월령검법 (月靈劍法)의 제일식 월광출운(月光出雲)을 출수하여 우측을 견제하고 전면으로 넓게 반원을 그려낸 뒤, 대뜸 우후방으로 비검을 급선회하였다. 우후방에서 반 응이 왔다. 제법 질긴 근육이 반촌가량은 베여진 것같은 감각이었다. 크게 고무 된 하상곤은 득의양양해서 외쳤다. "네놈인 모양이구나!" 움직이는 기척도 없었다. 냄새도 없었다. 온기마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 만 모진위는 느낄 수 있었다, 그들에게서 전해오는 살육의 냄새를. 석실미로에 첫발을 디뎠던 그 순간부터 겪어야했던 처절한 지옥훈련이 모진위에게 그런 동 물적인 육감을 뼛속 깊숙히 간직하게 만들어주었다. 모진위는 살수양성소의 생 존경쟁자들에게 느꼈던 살기를 이 정체불명의 암습자들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모진위와 비슷한 수련과정을 거친 자들임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경쟁자 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감지하기 어려운 살기의 소유자들이었다. 모 진위는 그런 부류의 작자들을 알고있었다. 지난 이년간 모진위를 가르쳤던 혈 귀를 비롯한 흑의인들이 바로 암습자들과 똑같은 부류의 살인귀들이었다. "아니요 다섯놈..." 모진위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은밀히 하상곤의 손을 끌어당겼다. 하 상곤은 모진위가 이끄는대로 손을 맡겼다. 모진위의 신호는 좌측 후면의 구석 을 목표로 하고있었다. 하상곤이 알아들었다는 듯이 모진위의 손을 꼭 쥐어주 자, 모진위가 다시 손가락을 두개로 모아서 거듭 확인시키고는 창문쪽을 가리켰 다. 여전히 무언가에 밀폐되어 존재조차 느껴지지 않는 창문이었지만 하상곤도 어렴풋이 그곳에 창문이 위치하고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상곤이 다시 모진위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모진위의 판단이 정확하다면 이미 하상곤이 확 인한 네 놈외에도 뒷편 구석에 한 놈이 더 숨어있고, 창밖에 두 놈이 더 배치되 어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도합 일곱명이었다. 다시 차가운 한기가 두사람의 주위를 엄습해왔다. 급박한 공기의 파동이 느껴 지자 하상곤은 다급히 검세를 확장하였다. 하상곤이 검초를 전개하자 순식간에 가느다란 초생달처럼 검선(劍線)이 그려지고, 이어서 검은 혼이라도 빨려들 듯 어둠을 가르며 춤을 추었다. 그로인해 가장 가까히 위협해왔던 우측의 공격이 제지되었다. 월령검법의 제이초 반월탈혼(半月奪魂)이었다. 이어서 월령검법의 연속적인 초식이 꼬리를 물고 터져나왔다. 하상곤은 사방팔방에서 날아드는 열 세번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그에 덧붙혀 여섯초의 반격을 되돌려주었다. 하지만 적들은 칠흑같은 암흑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물샐 틈 없는 차 륜공격으로 하상곤과 모진위를 압박해왔다. 환한 대낯에도 쉽지않을 것 같은 정밀한 협공이었다. 하상곤은 후퇴를 거듭하였다. 잠시후, 모진위가 납작하게 눌 리는 느낌이 등으로 전해져왔다. 어느새 벽면까지 떠밀려나서 더 이상 물러설 곳조차 없었다. 하상곤이 숨돌릴 사이도 없이 어깨쪽의 급습을 막아내고, 모진위를 향해서 날 아오는 일격을 방어하러 검을 선회하였다. 그때, 갑자기 강력한 반탄력이 하상 곤을 밀어내었다. 하상곤은 신형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검의 선회를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끝내 모진위쪽을 파고드는 암격을 막아내었다. 덕 분에 하상곤은 추진력을 이기지못하고 전방으로 튕겨나오고 말았다. 한걸음 밀 려나자마자 섬찝한 검기가 하상곤의 둔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도포자락이 찝겨 나갔다. 간발의 차이였다. "빛을 지게되었구나, 아진(兒眞)." "당치않습니다. 하 아저씨. 아직 이자도 못 갚았는 걸요." 모진위가 흐뭇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하상곤이 급박한 차륜전에 정신이 팔린 사이, 암습자일당중 하나가 은밀하게 뒤로 우회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회심의 일격이 하상곤의 허벅지를 관통할 찰나, 모진위가 벽을 밀쳐내는 순간적인 기지 를 발휘하여 하상곤을 밀어내고 상대의 암습을 수포로 돌려버렸다. 때를 같이하여 하상곤을 압박하던 기세가 썰물처럼 뒤로 물러갔다. 계획된 암 습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진형을 정비하는 기색이었다. 일각이 지나지않아 재차 적들이 도발해왔다. 좌측과 정면에서 예리한 경기가 밀려오자 하상곤은 정면을 막아내며 우측을 쓸었다. 그렇게 우측공간이 확보되 자 하상곤은 우삼보(右三步)를 이동하였다. 다시 강력한 공격이 정면에서 터져 나왔다. 미처 신형을 안정시키지 못한 하상곤은 속수무책으로 후방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교묘하게 배합된 몇차례의 예공이 연속으로 펼쳐지자 하상곤 은 변변한 반격의 기회도 잡지 못한 채, 계속해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마치 하 상곤의 향후행동을 미리 계산한 듯한 한치의 오차도 없는 차륜공격이었다. 하 염없이 밀려가던 하상곤의 뇌리에 문득 일말의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시작은 창문이 나있는 벽의 반대방향이었건만 잠깐 사이에 창문에서 일장거리의 밑까 지 몰려와 있었다. '진위가 손가락으로 알려주기를 창밖에도 두명의 흉적이 더 있다고했다. 이 작 자들이 창가까지 밀어부쳐 배후를 불시에 기습할 심산이로구나.'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이대로 상황이 계속된다면 후면공격을 막아낼 뾰족한 수단이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할 판이었다. 이대로라면 자진해서 창가로 후퇴해 죽기살기로 도박을 감행하는 방법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주저할 시간 이 없었다. 하상곤은 모질게 작심하고 모진위를 향해서 은근한 목소리로 소근 거렸다. "진위야, 셋까지 세겠다. 셋에서 뛰어올라 내 어깨위에 올라타고 최대한 몸을 움크리거라. 할 수 있겠지?" "... ..." "하나!" 하상곤은 모진위의 대답도 기다리않고, 힘차게 외치며 정면에서 부딪쳐오는 한 기에 검을 박았다. 무리한 정면충돌이 엄청난 반발력을 야기시켰다. 하상곤은 반탄력에 항거하지 않고 그대로 주르륵 뒤로 밀려갔다. 짐작대로 우측에서 급 공이 날라왔다. 하상곤은 검으로 우측공격을 튕겨내며 외쳤다. "둘!" 다시 정면에서 세찬 기운이 엄습해왔다. 좀 전보다 한층 강력한 공세였다. 하 상곤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검을 들어 정면공격을 세차게 내리쳐서는 버티려 고하는 상대의 힘을 빌려 공중으로 도약하였다. "셋!" 동시에 모진위는 하상곤의 머리를 내리누르며 신형을 뽑아올렸다. 그순간 모 진위의 머리가 뒷부분에 충돌하였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파편이 난무하는 가 운데, 이제 막 하상곤의 등판을 기어오르는 모진위의 발아래로 검날이 불쑥 삐 져나갔다. 뜨근한 액체가 모진위의 등판에 후두둑 떨어졌다. 선혈이었다. 역겨운 피냄새가 모진위의 코를 찔렀다. 창호지조각이 붙어있는 창살의 파편들이 아직 도 공중을 날아다니며 모진위의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일시에 사위가 밝 아졌다. 교교한 달빛으로 환하게 세상을 내리비추고 있었다. 창호지조각들 사 라지자 이번에 느닷없이 검은 그림자가 내려와 모진위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온통 흑색복장에 두눈만이 빼꼼히 뚫려있는 복면인의 얼굴부분이었다. 싸늘한 두눈이 잔인하게 번들거렸다. 흑의인은 처마에 다리를 걸고 매달린 채 모진위 앞으로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코앞까지 접근했던 흑복면이 점점 멀어졌다. 하 상곤의 신형이 창문을 통과해나오면서 모진위가 뒤로 밀려간 것이었다. 하상곤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형상으로 창밖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이제 막 상체가 빠져나온 하상곤의 눈앞에 서슬퍼런 도가 삽시간에 확대되어왔다. 도를 든 사내의 몸은 처마끝에 매달려있었다. 흉흉한 도기가 온 몸을 압박했지 만 하상곤은 당황하지 않았다. 예상된 결과였다. 하상곤은 '셋'을 셈과 동시에 창문에 충돌하였다. 그리고 검병을 뒤집어잡고 겨드랑이 사이로 검을 힘껏 들 이밀었다. 하상곤의 위험한 도박이 성공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모진위가 하상곤 의 등판을 타고오름과 동시에 검날은 모진위의 신발바닥을 스치고 지나가 등뒤 에서 압박하는 흑의인의 심장을 관통하였다. 하상곤의 도박은 끝나지 않았다. 적이 대기하고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처마끝이었다. 처마끝에도 한명이 안배되어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하상곤은 등뒤의 상대를 찔러죽이자마자 지체없이 검을 회수하여 상체를 방비하고 있었 던 것이었다. 그러나 허공을 응시하던 하상곤의 눈이 일시에 절망으로 돌변하 였다. 창밖의 적은 단지 두명 뿐이 아니었다. 처마끝 사내의 도공에 발마추어 지붕 위에서도 세 덩어리의 흑영이 하상곤을 향해 하강해오고 있었다. 도를 막자니 급박하게 낙하하고있는 세 줄기의 공격에 무방비였고, 허공을 대비하자니 처마 끝의 도는 이미 지척이었다. 특히, 하늘에서의 기습은 방어할래야 방어할 재간 이 없었다. 세 방향의 공격을 모두 막다보면 어깨에 올라타있는 모진위의 사지 가 검초의 사정권내에 걸려들 확률이 십중팔구였다. 낙심한 얼굴로 힐끗 모진위의 안위를 확인하던 하상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모진위의 전신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고 납작하게 축소되어있었다. 모진위 는 최대한 웅크리라는 하상곤의 당부를 잊지않고 있었다. 신검반이 자랑하는 희대의 신체변형술, 비연류가 멋지게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하상곤은 모진위의 멋진 자세에 용기백배하여 새로운 결의를 끌어내었다. 하상곤이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악다물고 도를 노려보았다. 미동조차 하지 않 았다. 도를 피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같았다. 마침내 도가 막 심장를 파고들 찰나, 하상곤이 번개처럼 신형을 비틀었다. 시간상으로 도를 피할 여유는 없었 다. 그러나 하상곤의 행위는 도를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지만 어깨로 도에 받아 내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도가 하상곤의 어깨에 박혔다. 그러나 하상곤의 비상 식적인 행동에 흑의인의 도는 정확한 타점을 잡지 못해서 치명적인 결정타를 놓치고 말았다. 어깨가 불에 데인 듯 타들어갔지만 하상곤은 폐부를 저며오는 고통을 참아내며 검병을 회전시켰다. 검영이 일시에 하상곤의 머리위를 뒤덮었고, 수백개로 나뉘어진 검면들은 교교 한 월색(月色)을 받아 온통 달빛으로 물들었다. 모진위가 수백수천의 반사광속 에 휩싸였다. 전신이 달빛으로 반짝이는 달의 정령이 이제 막 지상으로 내려온 현신(現身)이 바로 모진위라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월령검법 최고의 구명초식 (救命招式) 월령강림(月靈降臨)이었다. 모진위가 피습을 당한 객잔에서 반 마장 거리에 위치한 고개입구에 검은 옷을 입은 장년사내가 바람을 등지고 서있었다. 잠시후, 또 한 사내가 나타났다. 새로 이 등장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금사영(金四影)이 대주(大主)께 아룁니다." 사내가 돌아다 보았다. "다녀왔는가? 그래 갔던 일은...?" 금사영이 대답했다. 금사영도 사내와 마찬가지로 온통 흑빛이었다. 다만 금사 영의 옷깃에는 금색 수실로 사(四)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하 지만 그 조그만 숫자새김도 자세히 보아야 간신히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희미 하게 새겨져 있어서 실제로 두 사람의 복장에서는 별 다른 차이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있습니다." 금사영이 밀봉된 두루마리를 흑의인에게 건네주었다. "금사일협 하상곤이라..." 두루마리를 펼쳐본 흑의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가전회의 총단인 동정원에 난입하여 모진위를 탈취해간 간덩이가 부은 작자가 바로 하상곤이라는 내용의 전갈이었다. 동정원에서 모진위의 행적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뒤늦게 전해들은 흑의장년 은 모진위를 구출해 간 자에 대한 출신내력을 파악하고자 현장목격자들을 통해 서 사내의 용모와 무공형태를 치밀하게 조사하였다. 그리고 그 내용을 각처에 수배하였다. 달아난 사내의 행로를 추적하는 일과 맹의 정보망을 통해서 사내 의 내력을 밝히는 작업이 동시에 착수되었다. 먼저 꼬리가 잡힌 것은 의외로 사내와 모진위의 행방이었다. 동정원에서 그리 멀지않은 객잔에 숨어있었으니 수색작전이 정체파악보다 쉽게 이루워진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결국 하상곤에 대한 인적사항은 하상곤과 모진위의 객실을 포위하고 암습을 감행하 고도 두 시진후이 지나고 나서야 혈귀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상곤이라면 흑의장년도 강호의 소문으로 알고있었다. 사천땅에서는 제법 위 명이 자자한 고수였던 것이다. "나머지 인원도 모두 객잔으로 내려보내게." 사내의 말에 금사영은 고개를 번쩍 들어올려 자신의 상관을 바라보았다. 객실 에 일곱, 복도에 둘, 지붕에 다섯, 후원에 다섯이 모진위와 그의 동행자를 쓰러 뜨릴 함정을 파놓고 있었다. 총 투입인원 열아홉명에 은영급(銀影級)고수만 해 도 다섯명이 포함되어있는 강력한 살행조(殺行租)였다. 그 정도의 전력이라면 강호의 약소문파 하나쯤은 암습이 아닌 정면공격으로 박살내라는 임무가 떨어 져도 불만이 없을 수준이었다. 금사영은 현재의 투입인원만으로도 지나친 전력 낭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 선발투입조의 포위망이 돌파될 위험이 있다고 염려하시는 건...? 그자가 그렇게 강합니까? 대주님." 대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일이 이지경으로 꼬일 줄은 사내는 상상도 못했다. 모진위에게 임무를 떠맡길 때만 해도 오로지 채소우의 암살이 골치아 픈 난제였지, 모진위의 제거는 문제거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채소우는 예상밖으 로 수월하게 처리된 반면, 정작 모진위가 속을 썩였다. 소계일의 전력을 다한 암격도, 일시에 내력을 탕진시켜버린다는 속근단도,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노 파심으로 안배한 고참살수 은삼영(銀三影)과 은오영(銀五影)도, 하다못해 유진 목을 비롯한 채가장의 고수들도 모진위를 죽이지 못했다. 게다가 제발로 죽으 러 찾아온 것이나 진배없는 동정원에서까지 엉뚱하게도 금사일협이라는 거창한 고수가 나타나서 모진위의 죽음을 방해할 줄이야... 사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아직 하상곤의 정체가 파악되기 전이라 상대의 전력을 가늠할 수 없었 기에 통상적인 경우보다 전력을 배가하여 포위망을 구성하기는 했지만 소문대 로라면 하상곤도 그리 만만하게 당할 인물만은 아니었다. "자네도 객잔으로 가주게." "속하까지..." 금사영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혈귀는 금사영의 불만을 애써 외면 하며 말했다. "하상곤같은 고수를 상대할 때는 어느 누구라도, 아무리 우세한 상황이라도 반 드시라는 장담을 해서는 안되는 법이지." 너무도 자신만만한 행보로 고개를 내려가는 금사영을 바라보며 흑의장년은 쓴 웃음을 지었다. 하긴, 하상곤에게 지나치게 과분한 대접을 해주고 있었다. 사내 는 모진위로 야기된 거듭된 실패가 자신을 너무 소심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 다. 하지만 더 오래 지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미 위험수위에 도달해있었다. 모진위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인해서 채가장에서도 가전회를 예의주시하는 낌새 였다. 사내는 금사영의 자신만만한 행보를 바라보며 어느 정도는 불안감이 줄 어드는 것을 느꼈다. 금사영은 이제 다섯 명밖에 남지않은 금영급(金影級)중에 서도 세번째로 강한 살수로서, 살수단전체의 서열 사위에 해당하는 고수였다. 이제 길어야 두어 시진 후면 금사영이 하상곤과 모진위의 수급을 들고 나타나 리라고 사내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내가 서있는 고개입구가 바로 포위망의 마지막 차단지점이었다. 고개를 내 려가면 관도가 나오고, 관도는 하상곤과 모진위를 습격하고있는 객잔으로 이어 져있었다. 만에 하나 하상곤이 포위망을 돌파한다면 이곳에 모습을 나타낼 가 능성이 십중팔구였다. 집요한 추적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객잔주위의 형세에 따르면 이곳 산중의 수풀속으로 숨어드는 방법밖에 없었다. 사내가 위치해있는 장소는 속칭 토끼몰이에서 사냥꾼이 지키는 길목과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객잔에 파견한 수하(手下)들이 몰이꾼이고, 자신이 사 냥꾼이라는 생각은 일순간도 한 적이 없었다. 투입된 수하들자체가 그 정도의 사냥감이라면 별 어려움없이 처리할 만한 숙련된 사냥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나서야 할 가0능성은 거의 없어보였다. 아닌게 아니라 이미 살수집단의 우두머리라는 사내의 전신에는 일푼의 살기도 베어있지 않았다. 먹이를 노리는 사냥꾼의 눈빛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래쪽 모퉁이에서 콧날이 오똑 한 사내가 키 작은 관목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사내를 노려보는 흑 의장년의 두눈은 어느새 사냥꾼의 매서운 그것으로 변해있었고, 질식할 듯한 살 기가 전신에서 베어나오고 있었다. 하상곤은 산그늘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가파르게 펼쳐진 고갯길을 올려다보 았다. 하상곤은 고개입구까지 오는 동안, 일곱 차례의 기습을 당했고, 열한 명의 흑살귀(黑殺鬼)들을 베어넘겼다. 물론, 하상곤 자신도 무사하지만은 않았다. 다 섯 개의 가벼운 자상은 무시하더라도 어깨의 상처는 아직도 출혈이 멈추지 않 고 있었고, 허리와 다리에도 운신에 지장을 줄 만한 꽤 깊은 상처를 얻었다. 고 개너머의 숲은 하상곤이 흡족해 할 만큼 제법 울창하였다. 마지막 고비였다. 숲 속으로 숨어들 수만 있다면 그럭저럭 추적에서 벗어날 수 있을것 같았다. 모 진위도 여전히 하상곤의 목덜미에 단단히 매달려있었다. 가느다란 떨림이 전해 오는 것을 보면 아직 정신을 잃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몇 차례의 충격 으로 모진위는 다시 생명이 위급한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고개를 천천히 걸어올라가던 하상곤은 중턱에서 검은 물체를 발견하고 안력을 집중하였다. 흑의인이었다. 지금껏 자신과 모진위를 괴롭혔던 그들과 같은 복장 의 사내. 하상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까지의 흑의인들과 같은 복색인것을 보니 목적도 동일할 것임은 자명했으 나, 이제까지의 흑의인과는 차원이 틀렸다. 엄청난 기도(氣陶)의 소유자였다. 아 직 오륙장의 거리가 남아있는 데도 예리한 살기가 하상곤의 폐부를 싸늘하게 얼려놓았다. "금사일협이라는 명호가 과연 허명은 아니었구려. 아니, 금사일협이란 명호가 오히려 부족할 지경이오. 쯧쯔. 하상곤의 진면목을 그렇게 몰라보다니... 강호의 호사가들은 장님이나 진배없소." 흑의의 사내가 하상곤쪽으로 걸어내려오며 말했다. 점차 거리가 좁아짐에 따 라 모진위의 시야에도 사내가 들어왔다. 모진위의 흐릿한 시력으로는 여전히 거므스름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진위의 머리속에는 이미 한 사내의 모 습이 떠올랐다. 너무도 익숙한 죽음의 냄새였다. 흑의인과의 거리가 두어 장 차 이로로 좁혀져 오자 모진위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혈귀..." 하상곤은 혈관이 팽창하고, 근육도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찔한 긴 박감이 하상곤의 머리속에서 어지럽게 난무했다. 난생 처음 맞이하는 강적이었 다. 하상곤이 마른 침을 삼키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과찬의 개수작! 객소리 집어치우고 길을 터주시던지, 검을 뽑으시던지 빨리 양자택일이나 하시지." 혈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혈귀도 결코 그리 쉬운 승부가 아님을 예 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혈귀가 진지한 표정으로 검을 뽑으며 말했다. "그럼, 한 수 부탁하오." 하상곤은 혈귀에게서 일순간도 눈을 떼지 않은 채, 모진위를 바닥으로 내려놓 으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달릴 수 있겠느냐?" "예? 예." "이 아저씨가 검을 뽑아듬과 동시에 산위로 달아나라." "하... 하아저씨?" "잔말말고 시키는 대로 하거라. 뒤도 돌아보지말고 죽을 힘을 다해서 달려야 하느니라. 알아듣겠느냐?" "하지만..." "허어! 낭비할 시간이 없느니라. 만만한 놈이 아니다. 네가 남아있으면 걸림돌 밖에 되지 못함을 왜 모르느냐? 너무 염려말거라. 일이 잘되면 고개너머 산기 슭에서 만나기로 하고..." 이제까지의 흑의인들도 그리 녹녹치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도 수 차례의 위기를 넘겨야 했다. 하지만 눈앞에 인물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상대는 아무 것 도 아님을 하상곤은 깨달고 있었다. 하상곤이 비장한 각오로 검을 뽑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모진위는 눈물을 훔치며 관목림을 향해서 달려갔다. 모진위가 수 풀 근처에 도달했을 즈음, 혈귀의 음성이 들려왔다. "과연, 금사일협! 당년에 관일점홍 모중강대협을 일검에 베어넘겼다는 소문을 듣고도 본좌는 믿지를 않았었는데, 그대의 멋진 발검술(拔劍術)을 보니 관일점 홍의 사망소식도 허튼 소문은 아니었군." 청천벽력이었다. 모진위는 심장이 멎어버린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모진위 의 머리속은 순식간에 하얗게 비어버렸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상곤 도 뜻밖이었다. 혈귀의 입에서 관일점홍의 이름이 튀어나올 줄은 하상곤도 예 상치 못했다. 그러나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하상곤은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을 씹어삼키며 모진위에게 쏘아부쳤다. "냉큼 달아나지않고 뭐하는 게냐? 진위야!" 여전히 모진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시 하상곤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달려라, 진위야! 제발..." 티끌 만큼의 사심도 느껴지지 않는 호소였다. 모진위가 무의식중에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빨리!" 간절한 울부짖음이었다. 혼백이 나간 얼굴이었지만 모진위가 달리기 시작했다. "더 빨리!" 차라리 절규였다. 모진위의 발걸음에 빨라졌다. 하상곤의 호통이 박차가 되어 모진위라는 넋이 나간 마차에 속력을 더해주고있었다. 가공할 고수였다. 하상곤은 단 삼합만에 자신의 패배를 직감하였다. 아니 최초 의 대면 당시부터 하상곤은 이미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고있었다. 일푼이라도 승리의 확률을 높히기 위해서라면 최초의 일합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어야 했다. 그러나 하상곤은 오로지 죽음밖에 기대할 것이 없는 장기전을 택했다. 일다경이 채 흐르기도 전에 하상곤의 전신은 피로 물들었다.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귓전은 온통 윙윙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눈앞 은 온통 꺼저가는 불꽃만 파닥거릴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숨도 턱까지 차올랐다. 이제 그만 쓰러져 쉬고 싶었다. 그러나 하상곤은 주저앉지 않았다. 모 진위가 추격권내에서 벗어날 시간을 벌어주어야 했다. 하상곤은 고개를 휘저어 핏방울을 날려버린 다음, 두눈을 부릅떴다. 약간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래 절래 젓으며 다가서고있는 혈귀의 신형이 흐릿하게 시야에 잡혔다. 하상곤은 젖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다시 한번 그의 검을 달빛속으로 보냈다. 월령검법 최 후의 절초, 월령강림이었다. 월령강림은 찬연한 월광으로 혈귀를 휘감으며 폭사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 시, 달빛이 산산히 부서졌다. 희미한 잔광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며 사라지자, 혈귀가 모습을 드러냈고, 푸르스름한 냉기가 하상곤의 목전에 난입하였다. 가물거리는 하상곤의 의식 뒷편으로 피눈물을 머금고 하상곤 자신의 복수를 다짐하는 모진위의 모습을 보았다. 하상곤의 표정이 곱게 펴졌다. 그런가하더니 이번에는 불구대천지의 원한을 대신 갚아준 혈귀를 은공(恩公)으로 공경하며 미소짓는 모진위의 모습도 보였다. 하상곤의 표정도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관 일점홍을 쓰러뜨리던 날밤만났던 어느 노승의 우문현답이 문득 생각났다. 개 구리가 전갈을 태우고 강을 건너다 전갈이 침을 쏘아 둘 다 죽었다. 노승은 그 것이 강호라고 했다. 하상곤은 머리가 어지러워 자신의 생애가 전갈이었는지, 개구리였는지 쉽게 판가름을 할 수 없었다. 드디어 혈귀의 검날이 하상곤의 목줄기를 관통했다. 혈귀가 홀가분한 표정으 로 검을 힘껏 뽑아내자 지탱할 것이 사라진 하상곤의 몸통이 흙바닥에 무너졌 다. 하상곤은 자신의 옷자락에 피로 얼룩진 검을 문질러 닦고있는 혈귀를 바라 보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자네는 전갈인가? 개구리인가?" 하상곤은 이내 자신이 부질없는 질문을 했음을 깨달았다. 강호에 사는 사람이 면 누구나 예외없이 전갈임과 동시에 개구리였다. 흑수노계였습니다. #5672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32- 04/27 00:11 303 line 11. 희노애락(喜怒哀樂) 팽덕(彭德)은 걸음을 서둘렀다. 양주일대는 대부분이 호수를 끼고도는 평야였 지만 드물게도 서남쪽 백리정도 떨어진 육합(六合)으로 가는 길만은 산길이었 다. 수로를 타는 것보다도 하오령(下烏嶺)이라는 작은 고개를 넘는 경로가 지름 길이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양주 형방의 그 날파리들이 비록 성가시다고는 하나, 그래도 하오 객잔에서 하룻밤 머무는 거였는데..." 팽덕은 그렇게 툴툴거렸다. 대단치않은 고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제법 수풀 이 우거진 터라 늦은 밤 달빛 하나만을 의지하고 넘기에는 그다지 만만한 길이 아니었다. 대낯이라면 두어시진에 넉넉히 넘어갔을 고개를 곱절이 넘도록 고생 한 것은 고사하고라도 나무등걸이나 풀잎따위에 여기저기 긁혀서 상채기투성이 가 되어버렸다. 제법 해가 남아있던 저물녁에 출발한 것이 벌써 인시(寅時)는 족히 지났을 것으로 짐작되는, 깊은 새벽이었다. 팽덕은 고개 반대편 하오객잔 을 그냥 지나친 것을 못내 후회하였다. 애초에는 하룻밤을 묵어갈 요량으로 하오잭잔에 들어갔지만 팽덕은 바로 도망 치듯 객잔을 물러나오고 말았다. 하오객잔은 온통 인상이 험악한 무림인들과 포교들로 와글거렸다. 이틀전인가 하오객잔에서 벌어졌다는 대참극이 관원들과 무림인들을 불러들였던 것이다. 엄청난 패싸움이 벌어져서 열명이 넘는 사상자 가 발생한 사건이라고 했다. 시신들은 하나같이 새카만 복면을 뒤집어쓴 흑의 인들이라고 했다. 그 말썽많은 양주에서도 보기드문 대사건이었으니 포교와 무 림인들이 몰려든 것은 당연하였다. 팽덕은 무림인이나 포교라면 질색이었다. 무 림인이라는 족속들은 하나같이 성질도 더러워서 그저 눈빛만 마주쳐도 다따고 짜 종주먹부터 들이대는 인간말종이었으며, 포교라는 족속들은 그보다 더해서 말도 안되는 시비거리로 돈을 뜯어가기 일수였다. 오히려 무림인보다 더한 개 잡종들이었다. 특히, 팽덕같은 보따리 장사꾼들은 그야말로 밥이라 할 수 있었 다. 팽덕은 자신을 불운을 저주하며 숙박을 포기하고 밤을 낯삼아 하오령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험악한 고개길이 끝나고 완만한 비탈길로 접어들었다. 평덕이 겨우 안 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시도하는 참이었다. 신음과도 같은 괴성이 들려왔다.팽덕은 기겁을 하였다. 그것은 섬찝할 정도로 듣기 거북한 음 성이었다. 팽덕은 지옥의 마귀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도... 도와주세... 요...!" 징그러운 웅얼거림이 다시 팽덕의 귓가를 스쳤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조심 스레 기척을 살피던 팽덕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무언가 사람 비슷하게 생긴 것 이 잔뜩 웅크린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흉칙한 괴물의 입가에는 걸직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핏물같았다. "으악!" 팽덕은 냅다 비명을 지르며 죽을둥 살둥 달리기 시작했다. 뒷쪽에서 다시 흐 느끼는 듯이 애절한 신음소리가 들려오자 아예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아버렸다. 들어보나마나 자신을 유혹하는 귀신의 호곡성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발... 제발... 도와 주 - 세 - 요..." 팽덕이 멀어짐에 따라 흐느낌은 점차 잦아들었다. 팽덕이 양손을 내리고 귀기 울였을 때는 이미 아무런 소리도 남아있지 않았다. 팽덕은 단숨에 고개어귀의 주점까지 달려갔다. 한번도 쉬지않고 그렇게 먼거 리를,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달려보기는 정말 난생처음이었다. 팽덕은 자신의 어 디에서 그런 놀라운 주력이 샘솟아 났는지 정녕 믿을 수 없었다. 아마 살아 생 전 다시는 이렇게 놀라운 달음박질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고개를 내둘렀다. 그 러나 정확하게 나흘 후,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보다 더 멀고 험한 길을 다시 달리는 비극적인 운명의 소유자가 되리라는 것을 그즈음의 팽덕으로서는 자신이 신이 아닌 다음에야 알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흘 후, 팽덕은 다시 하오령 입구에 도착하였다. 이번에는 양주로 돌아가는 귀로였다. 비교적 수지가 맞는 장사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음날 벌어지는 약시(藥市)에 늦지않게 도착했을 경우의 이야기였다. 저물무렵이었지만 약시의 개장시기를 맞추기 위해서 팽덕은 다시 야밤의 하오령을 넘기로 작정하였다. 사흘간의 좋은 거래가 팽덕의 간담을 키워주었다. 다소 께름직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황망간에 헛것을 봤음이 분명하다고 자 신을 독려하였다. 하오령을 넘나든 지 어언 십년이 다 되어갔지만 하오령에 귀 신이 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었다. 팽덕은 이번 거래에서는 제법 몫돈을 만 질 수 있다는 욕심에 두려움을 억누르며 산길을 재촉하였다. 얼마 후, 기분나쁜 헛소리를 들었던 나무그늘밑을 지나게 되었다. 팽덕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때의 그 나무밑을 살펴보았다. 그 순간, 팽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헛것을 본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무언가가 있었 다. 아직은 석양의 꼬리가 남아있는 지라 사물을 분간못할 정도로 사위가 어둡 지는 않았다. 흐끄무레하나마 확실한 윤곽이 존재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팽덕이 치를 떨었다. 비록 팔다리가 달려있고 옷이라고 짐작되는 헝겊쪼가리를 걸치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팽덕이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범주를 넘어서고 있는 흉칙 한 몰골이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괴물이 느릿느릿 고개, 혹은 목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들 어올렸다. 팽덕과 눈이 마주쳤다. 조립이 잘못된 기구라도 들어올리는 것처럼 거북하기 이를데 없는 동작이었다. 추물이 팽덕을 바라보았다. 촛점이 없는, 고 름덩어리처럼 혐오스런 눈깔이었다. 검불처럼 물기없이 말라버린 추한 입술을 들썩거렸다. 그러나 괴물의 입에서 쏟아져나온 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애절한 움직임이었지만 정작 쏟아져나온 것은 검붉은 핏줄기였 다. 팽덕은 말로만 듣던 지옥의 아귀를 이곳 하오령에서 보고야 말았다고 생각 했다. 너무 놀라서 발이 떨어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잠시후,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팽덕은 자신의 다리에 의한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 큼 엄청난 속도로 고개를 달려 올라가고있는 자신의 신기에 가까운 경공을 발 견하게 되었다. 지난 사나흘간 하오령의 괴물을 보았다는 사람은 팽덕이 유일한 것은 아니었 다. 하지만 하오객잔과 하오령을 사이에 두고있는 작은 주점에서 한사내가 들 은 괴물에관한 동향은 팽덕이 추리했던 지옥의 마귀라는 추론과는 상당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 사내는 구석탁자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제 막 두번째 잔을 들었을 때였 다. 돌연, 주점밖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쪽문이 벌컥 열렸다. 장사 꾼으로 보이는 사내 서너명이 주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물녁의 고요한 휴 식에 대한 기대가 순식간에 산산조각나는 것을 느끼며 사내가 못마땅한 시선으 로 장사꾼들을 바라보았다. 장사꾼들은 주점에 들어서는 잠시도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가장 목소리가 큰 녀석은 염소수염의 사내였다. "아 글쎄, 곧 돼질 놈을 데려다가 무슨 공덕을 받겠다고..." 딸기코의 목소리도 과히 듣기좋은 음성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염소수염에 비한 다면 차라리 귀에 거슬리는 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하긴, 그 지경으로도 아직 숨을 쉬고있다는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어. 분명 히 사람은 사람이었지?" 염소수염이 맞은편 탁자에 자리를 잡고 의자에 걸터앉으며 점소이와 딸기코를 번갈아 바라보며 짖어댔다. "이봐! 여기 술하고 요기거리 좀 가져와. 이 사람아, 그 녀석 말하는 거 자네 도 들었잖아? 그것도 찝어진 입구멍이라구 덜덜거리며 도-와-주-세-요 하던 거... 어이구 역겨워! 나도 세상 돌아다니며 별별 잡종 다 만나봤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런 지독한 추물은 세상에 나서 보다 보다 처음이었어. 그래두 사 람인건만은 분명해. 이봐! 뭘 꾸물거려! 빨리 좀 가져와!" 멀뚱거리며 딸기코와 염소수염을 바라보던 점소이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술과 요리는 무얼로 준비할갑쇼? 어르신네." "아무거나 빨리 되는 걸로... 자넨 뭐해? 냉큼 앉지않구." 일행이 모두 자리를 잡은 후에도 염소수염의 독촉에 딸기코가 떨더름한 표정 으로 생각에 골몰한 채, 염소수염의 맞은편에 착석하였다. 그것을 보고 염소수 염이 혀를 찼다. "쯔쯔. 자넨 맘이 너무 약해서 탈이야. 이사람아! 이리루 데려와 봤자, 무슨 뾰 죽한 수가 있었던 것도 아니잖나? 아마 도착도 하기 전에 십중팔구는 북망산행 이 되버리기 십상이었을 걸...? 어차피 그 추물은 이미 틀린 목숨인데 우리네 품에서 덜컥 죽어버리기라도 했어봐? 이리저리 관아에나 불려다니며 골치를 썩 을 게 뻔한데... 안그런가?" "그래두 그렇게 간절하게 애원하던데 무슨 다른 부탁이 있었는 지도 모르는 일이잖나?" "아따 이사람! 객적은 소리 관두고 목이나 시원하게 축이게. 자아, 자!" "하오령 다 내려와서 그 커다란 소나무근처 말씀하시는 거죠? 어르신네들." 술병이며 요리접시를 부려놓던 점소이가 말했다. "맞어. 어? 근데,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어?" "예에, 하오령쪽에서 내려오신 손님이 거기서 귀신을 봤다고 해서요..." "귀신은 무슨... 젊은 사내녀석이던데... 어지간이 담도 작은 양반이었구먼. 귀신 타령을 해대다니..." 염소수염이 껄떡거리자, 딸기코가 딴죽을 걸고 나섰다. "이 친구는... 얼핏 보면 그게 어디 사람으로 보이던가? 우리야 일행이 서넛은 되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었지. 자네도 혼자 그 광경을 목격했더라면 아직도 여전히 큰소리치고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을걸...?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자네도 가관이었을 게야. 기절초풍을 하고 혼백이 다 날라가서 오줌이라도 찔끔 저렸 을지 누가 알어? 푸하하하!" "아니 이 빌어먹을 친구가..." 고요한 휴식의 한 때를 빼앗기고 얼굴을 찡그렸던 사내가 넋을 잃고 두 장사 꾼의 수작질을 지켜보았다. 그의 얼굴에 남아있던 짜증의 기색은 언제 그랬냐 싶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이윽고 사내가 동전 몇 닢을 탁자에 올려놓고 황급히 일어섰다. 주점을 나서려는 기색이었다. "뭘 도와달라는 얘긴가?" "살... 려... 주세..." 순간, 사내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치솟았다. 노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화타가 다시 환생해오더라도 자네를 살릴 수는 없어. 그런 도움을 요구하는 건 남에 염장이나 지르자는 수작이란 걸 자네는 알아야하네." "그건 소인도 압니다. 다만... 다만..." 사내의 관자놀이가 다시 불큰 치솟았다. 사내는 눈앞에 업어져있는 청년이 힘 에 겨워 제대로 말을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청년의 더듬거림에 짜증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사내는 화를 삭히려는 듯 잠시 허공을 쳐다보며 헛기침을 해댔다. 그리고 짜증을 억누르기라도 하는 것 처럼 한자 한자 새겨가며 말했다. "다만 무엇인가?" "열흘만... 아니 닷새만이라도... 대인께서 도와만주신다면 제게 생명을 며칠쯤 은 연장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 그런 신비의 의술이 있다고? 그럼, 그렇다치고... 막무가내로 도움만 청 할텐가? 도와주면 무슨 댓가가 있나?" 청년은 참담한 눈물을 흘렸다. "제발... 제발... 쓸모없는 이 몸뚱이 하나밖에 없습니다만 이 몸뚱이라도 필요 로 하신다면 바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요." 사내의 힘줄이 관자놀이속으로 사라졌다. "흠... 자네가 어차피 살아날 수 없는 위중한 상세란건 자네도 알고있겠지?" "예. 은공." "그럼, 자네의 죽음을 우리에게 넘겨주게. 음. 쉽게 말해서 어차피 죽을 목숨, 우리가 마음대로 죽일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말이지. 그렇게만 해준다면 우 리도 가진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 자네를 도와주겠네. 그렇게 할 수 있겠나?" "예." "참기 어려운 고통이 따를지도 몰라. 그때 가서 자네가 딴 소리를 해도 소용없 어. 우리는 자네를 기여코 죽일테니까? 지금이라도 늦지않았어. 거부한다면 나 도 강요할 생각은 없네. 그래도 하겠나?" "예. 도와만주시다면..." "나중에 딴 소리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했네? 그때가서 후회해도 소 용없어? 알아들었는가?" "예. 기꺼히..." 청년의 표정에는 이미 생에 대한 집작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내는 그런 청년 을 보고 흡족해졌다. 사내는 작심을 한듯, 청년을 들쳐업었다. "일단, 자네의 그 신비의 의술에 관해서나 말해보게.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어디로 가야하지?" "침을 놓는 의원에게 가주십시요." "침술이라면 나도 제법 일가견이 있지." "제 주머니속을 뒤져보시면 쪽지가 한 장 있을 것입니다. 그 쪽지에 그려진대 로 침을 놓아주십시요." 사내가 모진위의 품을 뒤졌다. 과연 낡은 쪽지가 하나 집혔다. 쪽지를 꺼내들 었다. 사내가 쪽지를 들여다보더니 머리를 갸웃거렸다. 일견하기에도 상식에 어 긋나는 침술이었다. 하나같이 치명적인 급소라서 침을 놓는 그순간 죽이면 죽 였지 일분 일초는 고사하고 촌음의 순간 만큼이라도 사람의 목숨을 연장시켜줄 침술이라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이대만 침을 놓아준다면 분명히 자네가 기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건 가? 확실한 건가?" "예, 그렇습니다." "흠. 믿을 수가 없구먼." "소인이 그렇게 해서 이제까지 두 번을 살아남았지요. 이번이 마지막이지요. 제게 쪽지를 전해주신 어르신께서는 세번째 시술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씀 하셨지요. 그순간부터 석달을 넘기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석달?" "하지만 이상한 알약을 복용한 덕분에 내력이 이미 거의 바닥나버렸지요. 이제 는 길어도 열흘을 기대하기 어렵기는 합니다만..." "얼굴을 보니 열흘이라도 더 살고 싶을 정도로 세상사에 미련이 남은 사람같 지는 않고...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죽기전에 꼭 해결해야 할 무슨 숙원이라도 남아있는 것처럼 절박하게 부탁하는 걸보니..." "예." "그일에 필요한 기한은?" "삼일입니다." "그럼 상관없네. 그후로도 사나흘의 여유는 있는 셈이로군." 사내는 그저 이틀의 여유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이틀 이상 을 견딘 피실험자는 없었다. "그런데,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나?" "... ..." 청년이 우물거렸다. "반드시 밝힐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내의 얼굴에는 금새 노여움의 기색이 나타났다. 청년도 그런 낌새를 느꼈는지, 얼른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말씀드리지요. 은공께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은공이 아닐세. 은공이라는 호칭은 빼고..." "모... 모진위라고 합니다." 그로부터 사흘 후, 모진위가 양주의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저택들이 밀집해있었다. 그중에서도 웅장한 저택은 단연 가전회가 소유하고있는 동정원 이었다. 모진위는 전신에서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이제껏 이렇게까지 몸이 가뿐 하고, 혈기왕성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모진위를 즐겁게 하지는 않았 다. 빠르면 닷새후, 늦어도 칠팔일 후면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가장 기진맥진 한 상태로 최후를 맞이해야 할 자신의 운명을 너무도 분명히 알고있었다. 원화촉발법의 상반된 작용에 의해서 억압을 당한 채, 고여있던 속근단의 약효 가 마지막 원화촉발법의 폭발에 의해서 막혔던 둑이 터지듯 일거에 모진위의 본원을 불태우고 있었다. 불타는 장작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그런 상세한 약리작용까지야 모진위가 알 리는 없었다. 그러나 순수한 내력의 작동으로 보 기에는 지나치게 격렬한 진기의 격동이었다. 모진위가 내력의 분출을 통제해보 려고 애를 써봤지만 허사였다. 전신은 내력으로 충만하고있을 지언정, 단전은 이미 열기가 식어가고있음을 모진위는 느끼고 있었다. 기름이 다한 등잔이 꺼 져가듯, 모진위의 본원도 그렇게 꺼져가고있는 것이었다. 모진위는 문득, 두명의 정체모를 중년사내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 은 모진위에게 세번째 원화촉발법을 시술해주었으며, 탕재와 금창약을 물쓰듯이 소비해서 모진위의 내외상을 치료하여주었고, 거기에 더하여 무림인이라면 내력 을 손상시킨다는 이유로 직계가솔에게도 꺼린다는 진기요상법(眞氣療傷法)마저 동원하여 모진위의 회복을 도와주었다. 모진위는 그들의 모습을 상기시키며 마 음속으로 웃었다. 생긴 외모부터가 정반대라 한쪽은 기다란 말상에 비썩 말랐고, 다른 한쪽은 넓 적한 얼굴에 공처럼 동그란 몸집을 가지고있었다. 마른 사내가 하오령에서 모 진위를 구한 사내였는데 그는 늘상 화를 내고있는 반면, 사내가 모진위를 들쳐 업고 찾아간 곳에서 만난, 뚱뚱한 쪽은 무슨 일이건 즐거워하였다. 이를테면 모 진위를 치료할 때도 이런 식이었다. 둘은 사형제간으로서 화내는 쪽이 사형이 고, 즐거워하는 쪽이 사제인 것으로 보여졌다. "이봐, 사사제(四師第)! 다음은 어디야? 똑바로 안 살펴보고 또 그게 무슨 장 난질이야?" 사형쪽에서는 조금만 늦어도 화부터 버럭냈다. 하지만 사사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봐요. 이사형(二師兄). 우하하! 이거 재미있겠는데 명문혈이라니 말이야... 얼른 찔러봐요, 이사형. 어떻게 되나 궁금해죽겠네. 히히." 사사제가 우스워죽겠다고 키득거리자 이사형은 한층 더 핏대가 오르는 기색이 었다. "거 좀 똑바로 봐, 사제. 명문혈이 확실히 맞는거야? 거기는 살짝만 찔러도 급 살해버리는 치명적인 급소란 말이야. 정신 좀 차려, 떠그랄!" "아따! 나두 소시적에 문자께나 익힌 놈이라구요. 틀림없으니까 빨리 찔러봐 요. 그 다음에는 백회혈이요, 백회혈... 와, 이거 갈수록 점입가경인 걸... 보자. .. 다음은 어디야? 와하하하! 이게 뭐야..." "제길, 좀 조용히 좀 못해! 정신 사나워서 정말... 에익! 나 안해!" 마침내 인내력이 한계에 달한 모양이었다. 이사형이 울화통을 터뜨리며 사사 제쪽으로 침을 집어던졌다. 침은 사사제의 살집좋은 뺨에 꼽히고 말았다. 사사 제가 찔금해서 정색하려고 애쓰는 기색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 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가셔지지 않고 있었다. 바늘이 꽃혀서 피가 줄줄 흐르는 볼다구가 아프기도 하련만 고통마저 새로운 쾌감이라는 듯이 따끔거릴 적마다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이사형, 화났어요? 아따! 애들처럼 삐지기는... 알았어요. 알았어. 지금부터 정 신차리고 잘할께." 그리고는 이사형이 자신의 뺨에 난 상처에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 모습을 보고 또 깔깔거리며 말했다. "대사형한테 이를지 않을테니 걱정말아요. 이사형이 쩔쩔매고 대사형한테 혼나 는 꼴도 볼만하지만... 내가 그렇게 치사한 놈은 아니라우." 이사형이 노려보자 사사제는 애써 입을 가렸지만 여전히 쿡쿡거림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모진위가 보기에 사사제는 이사형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서운해하는 기색은 추 호도 없었고 오히려 그로 인해 어쩔줄 모르는 사형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것 같았고, 이사형은 여전히 화를 이기지 못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이번에는 사제 의 뺨에 생치기를 입힌 자신의 못남을 자책하며 자신에게 화를 내고있는 것임 분명하였다. 사흘내내 그러한 사소한 다툼이 계속되었으나 양쪽 어느 편에서도 진정한 악 의나 무시는 단 한번도 없어보였다. 처음에는 다소 의아해하던 모진위도 사흘 이 지나자 그들의 한결같은 태도에 무덤덤해지고말았다. 그들과 헤어져서 동정 원으로 출발하던 날에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죽이려고 이와같은 거래를 획책한 그들에게 거래가 아닌, 은혜로써 감사를 표하기까지 하였다. "동정원에 다녀오겠습니다. 그곳에 제가 이승에서 매듭지어야 할 일이 남아있 습니다." 동정원으로의 출도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진위의 요구를 들어 주는 댓가로 모진위의 남겨진 수명을 요구했다. 모진위 마음대로 죽어서는 안 되고 자신들이 죽으라는데로 죽어달라는 요구조건이었다. 모진위가 미리 죽어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모진위의 출도는 당연히 길보다 흉이 많은 행보였 다. 그러나 그들은 흔쾌히 모진위를 놓아주었다. "그게 자네가 좀 더 생명을 유지해야 할 이유였군. 별 수 없지. 약속은 약속이 니까... 자네도 사내대장부라면 노력도 안해보고 목숨을 포기하는 비열한 행위는 하지 않겠지? 아무튼 쉽지는 않겠지만 가능하면 죽지않도록 최후까지 노력해주 게. 약속할 수 있지?" 모진위는 굳게 맹세했다. 모진위는 동정원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기껏해야 열흘정도밖에 안 남은, 꺼 져가는 생명의 불꽃이었다. 그런 운명을 예감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생 애를 마감하는 준비를 해야 할 그런 며칠밖에 남아있지않은 시간이었다. 그러 나 모진위는 그 며칠의 여유조차 포기했다. 그에게 있어서 생을 마감하는 준비 란 바로 장여진을 만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설령 살아서 동정원을 빠 져나온다해도 모진위의 생을 마감할 여유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목숨은 이미 타인에게 팔려나가고 없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5745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33- 05/08 04:25 196 line 사위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거리의 소음이 점차로 잦아들었다. 자정이 넘 어서고 양주가 고요히 잠이 들고있었다. 그러나 양주에서도 몇 안되는 대저택 동정원만은 아직 잠들지못하고 있었다. 챙, 챙, 챙그렁! 밤이 으슥해지자 동정원내에서는 병장기의 마찰음들이 울려퍼졌고, 간간히 고 함소리와 비명소리도 들려왔다. 모진위가 동정원을 정탐하기 시작한 지 세시진 이 지나고 나서의 일이었다. 모진위는 돌연한 사태에 순간 당황하기도 했지만 곧 냉정을 되찾고 조심스럽 게 돌발적인 변화를 관망하기 시작했다. 동정원에 도착한 이 후, 줄 곧 잠입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모진위였다. 소란이 가중되고 동정원의 주변 경계태세가 제 기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새 정문마저 활짝 열리고 병장기를 든 장 한들이 동정원으로 스며들어갔다. 모진위도 혼란을 틈타서 담장옆에 서있는 고 목나무위로 기어올라갔다. 모진위는 담장 가까이로 늘어진 나무가지위에 걸터 앉아 장원 내부의 동정을 염탐했다. 기습으로 짐작되었다. 일단의 무사들은 어딘지 모르게 평정을 잃고 허둥거리 는 기색이었고, 그들을 공격하는 무리들은 하나같이 침착했으며 효율적인 진형 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공격측은 모두가 흑색복장이었다. 흑의인쪽이 습격자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는데, 모진위는 그 광경을 보고 의아해졌다. 흑의인들은 하 상곤과 자신을 암습했던 작자들과 똑같은 복색을 갖춘 무리들이었다. 모진위가 알기로는 저 살인귀들과 가전회는 한 통속이었다. 한동안 치열한 살육전이 벌어지던 뜰이 점차 한산해졌다. 흑의살수들이 압도 적인 우세를 보이고있었다. 흑의인들은 전혀 동요의 기색도 없이 냉정하게 가 전회의 무사들을 찌르고 베었다. 자신들이 베였을 때조차 어떤 동요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신음소리 하나없이 죽어갔다. 그에 반해 서 가전회의 무사들은 그런 흑의인들의 태도에 기가 질려버린 행색들이었다. 한식경도 못되서 정원에 포진해있던 가전회의 무사들은 대부분 죽음을 당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아직도 저항이 남아있는 전각안으로 흩어져 그쪽의 무사들과 합류하였다. 흑의인들도 각각 가까운 전각으로 모여들며 포위망을 형성해갔다. 중앙의 전각이 가장 완강한 저항을 보여주었고, 역시 흑의인들도 중앙쪽에 많이 모여들었다.소계일의 처소가 있는 전각이었다. 하지만 완강해보이기만 하던 중 앙쪽도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곳에서 가전회의 저항은 오래가지 않 아서 무너졌다. 흑의인들은 창문이나 지붕을 통해서 실내로 침입해들어갔고, 가 전회의 방어진은 와해되었다. '어째서 혈귀의 무리들이 소계일을 해하려하는가? 가전회가 채소우 시해세력 과 한 통속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장여진을 보내 서 나를 회유하는 일따위는 애초에 존재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모진위는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대체 가닥이 잡히지 않았지만 머리를 흔들며 애써 호기심을 버렸다. 그렇지않아도 동정원에 몰래 잠입할 묘책이 떠 오르지 않아 전전긍긍하던 모진위였다. 그런데 흑의인들이 사태를 반전시켜주 었다. 호기가 도래하였다. 혼란의 와중에 움직이는 것이 도리어 살아서 장여진 을 만날 확률이 높을 것 같았다. 게다가 시간이 없었다. 그들이 소계일을 노리 고 있다면 장여진의 목숨도 위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진위는 가전회와 흑 의살수들의 관계에 대한 의아심을 일단 접어두고 잠입을 감행하였다. 모진위는 지체없이 동정원의 담장을 타고넘었다. 그리고 담장그늘에 몸을 숨 긴 채, 살금살금 중앙전각의 지근거리까지 기어갔다. 소계일의 거처가 있는 중 앙전각은 바야흐로 아수라장으로 변해있었다. 그러나 중앙전각은 다른 곳에 비 하면 일방적 도륙이라기 보다는 도처에서 혼전을 벌이고 있었다. 채 복장도 갖 추지않은 무인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뒤늦게 소란에 의해서 깨어난 가전 회측의 호위무사들인 것 같았다. 게다가 소계일의 처소라는 이유에서인지 이 곳의 가전회무사들이 비교적 고강한 무예를 갖추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다른 곳에 비해서 형편이 낳은 정도일 뿐 시간의 경과에 따라 흑의인들쪽의 우세가 뚜렷해지고 있었다. 모진위는 숨을 크게 몰아쉬고 중앙전각을 향해서 맹렬하게 달려갔다. 더 이상 사태을 관망할 수는 없었다. 잠시 후면 흑의인들에 의해서 모든 소란이 진정될 형세였다. 시간을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모진위에게 불리한 환경이 되기 십상이 었다. 죽든 살든 이제는 몸을 내던져야 할 시기였다. 그러나 모진위의 맹렬한 돌진은 전각의 현관에 미치기도 전에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무심한 눈... 모진위는 치를 떨었다. 복면사이로 퀭하니 뚫려있는 두 개의 구멍 으로 두 개의 눈이 모진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전혀 따스하다고 말할 수 있는 눈빛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차가운 눈빛도 아니었다. 자애로운 눈빛이라고도 할 수는 없었지만 역시 잔인한 눈빛도 아니었다. 그저 무심하게 모진위를 노려 보고 있었다. 언제나 흑의인들은 그랬다. 모진위가 훈련을 받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인정사정없는 도기가 모진위의 안면으로 쏟아졌다. 지금은 모진위를 죽 이려는 것이지만 그래도 눈빛만은 변함없었다. 모진위는 치를 떨었다. 두달 전 만해도 모진위가 오로지 타인의 죽음과 자신의 생존에만 관심을 집중한 채 세 상을 바라봤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모진위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도가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진위는 흑의인의 도가 어느 각도에서 어떤 방법으로 날아왔는지 분간조차 하지 못했 다. 설혹 분간했다고해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지않았다. 어차피 흑의인은 모진위 정도 실력의 하수들이 두어명 한꺼번에 덤벼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 진위도 잘 알고있었다. 그러나 모진위는 흑의살수의 날카로운 일격에도 불구하 고 살아남아 있었다. 문득 애써 잊으려 발악을 했던 한얼굴이 떠올랐다. 하상곤이 또 모진위를 살 린 것이었다. 모진위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상곤은 모진위의 부친을 살해한 불 구대천의 원수였다. 하지만 그는 죽어서도 모진위를 구하고 있었다. 그가 체득 시켜준 반응감각은 모진위로 하여금 흑의인의 빗살같이 빠르고, 불길같이 강맹 한 일도를 흘려버리게 하였던 것이다. '세상의 도리란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원한이고, 무엇이 은혜인가? 나는 그에 게 무엇을 청산해야 하는가? 나는 그의 생명을 구해주어야하는가? 아니면 그의 생명을 빼앗아야하는가? 이미 죽고 없는 그에게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해주는 것 이 온당하단 말인가?' 피가 베어나와 모진위의 상의를 붉게 적시고 있었다. 간신히 피하기는 했지만 도가 가슴살을 베고 지나갔다. 그러나 정작 모진위는 가슴의 상처에서 어떠한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상처보다 더욱 자신을 아프게 하는 하상곤이 있었기 때 문이었다. 아버지처럼 믿고 존경하던 하상곤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이, 자신의 둘도 없는 정신적 지주였던 하상곤이 죽었다는 사실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대 신 희생시키며 연명되고있는 자신의 쓸모없는 목숨도 그들의 어이없는 희생을 헛것으로 돌리고 이제 곧 끝날 것이라는 사실이 모진위의 심기에 견딜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시 도가 허공을 가르고 모진위의 이마에서 피가 튀었다. 모진위는 멍한 눈 으로 부스스 날리고있는 자신의 머리카락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모진위의 무신 경과는 상관없이 모진위의 발은 부지런하게 흑의인의 도를 피해내고 있었다. 모진위는 흑의인의 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고, 자신 이 어떤 방법으로 그 도세를 피했는지도 잘 가늠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도학정의 얼굴이었다. 도학정은 모진위의 움직임 자체가 바로 용무권이 되도록 훈련시켜주었다. 그 러기위해서 도학정은 어린 모진위에게 생의 모든 쾌락을 빼았아갔다. 어린아이 에게는 너무도 모진 고련을 강요하였다. 단지 생존 그 자체를 위해서 인간으로 서 누려야 할 모든 것을 버리도록 강요하였다. 여하튼 그런 도학정의 용무권도 하상곤의 반응감각에 보태져서 흑의인의 공세로부터 모진위를 보호하는데 일조 하고있었다. 모진위가 의식을 하든, 의식을 못하든 용무권은 모진위의 무의식이 되어 출운용무속의 무형의 고수를 흑의인에게 대입하여 주변의 기에 대항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모진위를 키워준 또 하나의 아버지, 도학정도 죽었다. 쓸 모없는 모진위의 생존을 위해서 회주문주의 무서운 주먹에 구천을 떠도는 고혼 이 되었던 것이다. 여력을 추스린 도가 허공을 선회하고 다시 모진위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모진 위는 그런 도를 멍하니 바라만보고 서있었다. 도학정은 모진위에게 세상의 그 어떤 가치도 되돌아볼 여유를 주지않았다. 그런 삶이라는 것은 개, 돼지의 삶만 큼도 가치가 없는 삶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진위는 개, 돼지와 자신과의 차이점을 도무지 구별할 수 없었다. 초목이나 짐승들도 오로지 살기위해서 살 아가고 자신도 오로지 살기위해서 살아가고있었다. 세차레에 걸쳐서 흑살수의 도가 모진위의 상반신을 스쳐지나갔다. 모진위의 혼란스러운 머리속과는 상관없이 모진위의 몸통은 여전히 부지런히 움직이며 재간을 발휘하고 있었다. 모진위의 신형이 하나의 원을 만들어내었다. 도의 움 직임에 따라 허리가 뒤로 젖혀지고 상반신이 둥그렇게 뒤로 돌아갔다. 세차례 에 걸친 빈 틈 없는 공격이 각각 가슴의 옷깃, 턱끝,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을 때, 모진위의 머리는 발뒤꿈치에 닿을 지경이 되어있었다. 마치 곡예사와 같은 유연한 몸동작이었다. 신검반 고유의 비전절기, 비연류도 톡톡히 한 몫을 하고 있었다. 장가량도 한 몫 거들고있었던 것이다. 물론, 장가량과 신검반식구들도 죽었다. 그들의 몰살도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모진위는 분명히 알고있었다. 누가 죽 였는지도 잘 알고있었다. 장가량을 비롯한 신검반원들을 몰살시킨 놈들은 바로 눈앞에 서있는 저 흑의인들이었다. 흑의인의 도가 다시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모진위도 가만히 서있지만은 않았다. 모진위의 검이 싸늘한 검기를 일으키며 도를 향해 맞서 나갔다. 구연기가 전수해준 추혼십이절의 일검이었다. 흑한은 분명히 모진위보다 강했 으며 빨랐다. 흑의인의 강맹한 도가 모진위의 일검을 여지없이 튕겨내었다. 그 리고 그 기세를 그대로 살려 모진위를 쓸어나갔다. 검을 미처 회수하지 못한 모진위가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모진위는 질끈 눈을 감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 이었지만 너무 허망하다고 생각했다. 최초의 접전에 단 하나의 장애물도 돌파 하지 못한 채, 이렇게 최후를 맞이하는 자신이 너무도 비참하고 초라하였다. 문 득 구연기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구연기는 자신의 목숨을 밑천으로 모진 위에게 추혼십이절의 계승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남겼다. 그러나 모진위는 이미 그 사명을 다할 여력이 없었다. 구연기를 저승에서 만난다면 뻔뻔스럽게 고개 를 쳐들 면목이 없을 것 같았다. "?!" 모진위는 어리둥절해져서 눈을 떴다. 자신을 베어 버리고도 충분히 남을 시간 이 지나갔는데도 기척이 없었던 것이다. 모진위의 눈앞에는 흑한이 피를 흘리 며 주저앉고있었다. 춘매잔설이었다. 모진위의 검은 단 일합으로 튕겨나갔지만 봄매화가 채 스러지기도 전에 잔설이 내려앉아 흑의인의 옷깃을 적셔주었던 것 이다. 모진위는 하상곤, 도학정, 장가량에 이어서 구연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 출귀몰이라는 별호를 사용했던 빙귀의 모습을 떠올렸다. 구연기가 신검 옥진강의 이론을 전수해주었다면 신출귀몰은 그 실제를 전수해 주었다고 할 수 있었다. 구연기가 옥진강을 제외하고는 추혼십이절이라는 검법 의 운용술을 모두 머리속에 담고있는 유일한 후계자였다면 신출귀몰은 옥진강 을 제외하고 추혼십이절을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밀도로 정신과 신 체에 받아들여 자신의 류(類)로 소화해낸 유일한 계승자였다. 신출귀몰도 모진 위를 구원하는데 당당히 한 몫을 했음은 물론이었다. 모진위의 춘매잔설에는 그런 신출귀몰의 묘용이 담겨있었기에 실제의 검공으로써 흑의인을 꺼꾸러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신출귀몰도 죽었다. 신출귀몰의 경우가 더욱 심해서 모 진위 스스로의 손으로 불귀의 객을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하상곤, 도학정, 장가량, 구연기, 신출귀몰... 모두가 죽었다. 그러나 그들 하나 하나가 모두 모진위의 손발이 되어 흑한에게 절호의 일검을 가했다. 아니, 모두 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혈귀가 남아있었다. 혈귀는 모진위에게 천하각파의 무 공을 하나하나 해부하여 분석해주었으며, 그 파해법을 일깨워주었다. 더 나아가 서 모진위로 하여금 무예의 근본이치와 원리를 깨달도록 유도하였다. 혈귀도 당연히 한 몫을 했다. 혈귀가 전수해준 비결의 정수는 상대가 어떤 신기막측의 무공을 펼치던지 직감적으로 그 약점을 파악하여 상대의 동작에 따라 저절로 적절한 대응자세를 취하는 초식이전의 도리라고 할 수 있었다. 모진위는 그 비 결덕택으로 흑의인의 취약점을 찔렀던 것이다. 모진위가 살기를 원했던 이들은 모두 죽었고, 모진위가 죽기를 원했던 혈귀는 살아있었다. 구연기와 신출귀몰은 모진위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서 죽었고, 장 가량과 하상곤은 혈귀의 손에 죽었다. 그의 부하들인 흑의인들이 이곳에 있으 니 아마도 지금 그는 필경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 모진위는 생각했다. 하지만 모진위는 절망하고있었다. 혈귀는 모진위가 어찌해보기에는 턱도 없이 강한 사내였다. 더구나 혈귀를 맞 닥뜨린다해도 회피해야 할 입장이었다. 물론, 모진위자신이 편하게 죽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로인해서 희생된 그 누구보다도 고통스럽게 그 누 구보다도 장렬하게 최후까지 안간힘으로 죽어갈 각오였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 는 혈귀만이 아니었다. 장여진이 있었다. 어찌됐건 장여진은 모진위의 정혼자였 다. 또한 이제 곧 자신마저 죽게되므로 신검반의 마지막 생존자라 할 수 있었 다. 그녀는 장가량의 제사를 치러줄 일점혈육이었고, 더불어 구연기를 비롯한 수많은 신검반 식구들의 혼과 넋을, 위령해 줄 단 하나뿐인 제주(祭主)였다. 또 한, 그와 동시에 모진위가 자신의 짧은 생 동안에 관계가 얽혀버린, 이제는 풀 어주어야 할 단 하나의 매듭이기도 했다. =============================================================== 으... ... 너무 적은 분량이지요? 원래는 A4용지 한 8장 쯤으로 계획해놓았던 이번 회인데요... 장무웅이라는 한 사악한 무림악적이 치사스럽게 남의 약점을 무기로 협박을 하더군요. 이번주내로 한편은 올려야한다고... 장무웅군은 무림동의 사이비 마교인 뒷북교의 교주랍니다. 주말에 뜻밖의 약속이 연달아 생겨서 더 이상 쓸 시간은 없고, ...해서 약점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을 막기위해서 부득이 이렇게 짤라서 올립니다. 용서하십시요. 흑수노계였습니다. #5841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34- 05/26 04:16 379 line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은 아수라장이었다. 층계난간에는 아직도 피가 흘러내리 고 있는 시신이 걸려있었고, 층계에도 보기 흉하게 구겨진 시신들이 뒹굴고 있 었다. 검은색 무리들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었지만 아직도 서너 명 가량 가전회무사들이 힘겨운 저항을 하고 있었다. 계단은 병장기들의 난무로 비집고 통과할 여지가 없어보였다. 그래도 모진위는 기어이 이층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그곳에 소계일의 침실이 있었으므로 장여진의 처소도 그 근처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진위는 잠시 주저하다가 그대로 계단을 달려올라갔다. 이층에 이르는 중간 지점에서는 흑의사내 둘과 회의청년(灰衣靑年)이 서로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었 다. 회의청년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같은 상황이었다. 비교적 여유가 있는지 흑 의사내들은 힐끔 힐끔 달려오는 모진위를 바라보았다. 반 장 거리로 좁혀질 무 렵, 돌연 곁눈질로 동태를 살피던 아래 쪽 사내가 도를 비켜들었다. 그러나 그 저 도를 비껴들었다고 느끼는 찰나, 싸늘한 경기는 이미 모진위의 안면에 도달 해있었다. 부지불식간에 모진위의 신형도 이미 급회전을 하고있었다. 도는 모진 위의 어깨부분을 가볍게 베고 지나갔고, 모진위는 난간을 넘어서 계단밖으로 떨 어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모진위는 제정신으로 돌아와 돌아가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차하면 일층까지 곤두박질할 찰나, 황망히 두 손을 내뻣었다. 가까 스로 난간의 보조기둥이 손에 닿았다. 힘껏 움겨쥐었지만 두 손은 주르르 미끄 러져 내려갔다. 아찔한 충격이 손날에서 전해져왔다. 난간을 가로지른 막대를 미끄러져내리던 손이 가로막대가 끝나는 층계턱에 부딪친 것이었다. 모진위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던 도가 다시 방향을 틀어서 모진위쪽으로 돌 진하였다. 모진위는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격렬한 충격으로 팔과 어깨가 일순 간 마비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난간막대를 놓을 수도 없었다. 밑을 내려다보 니 새로운 흑복면이 이제 막 창문을 타고 전각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불행히 도 모진위가 추락하는 바로 그 자리였다. 두 치 옆으로는 둥그런 계단기둥이었 다. 모진위는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다리를 구부려 기둥에 붙혔다. 그리고 힘차 게 두발을 굴렀다. 반동력을 얻은 모진위의 하체가 공중으로 도약하였다. 모진위의 둔부가 양손 을 축으로반원을 그리며 상체위로 넘어갔다. 둔부가 정점에 이르렀다고 생각 되는 순간, 모진위는 재빨리 허리를 곧추세우며 무릅을 뒤로 구부렸다. 뒷꿈치 에 감각이 느껴졌다. 모진위는 발뒤굽에 느껴지는 것이 제발 계단난간이기만을 빌며 난간막대를 움겨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잠시동안 모진위의 신형은 아무 것도 닿지않는 허공에 머물렀다. 난간인지 아닌지 확인할 시간따위는 없었다. 그저 그곳에 난간턱이 존재하기를 바라며 발끝을 걸었다. 장가량이 항상 말했었다. "확인한 후엔 이미 늦는거야. 의심해서는 안돼. 반복된 연습으로 감각을 찾아 라. 그리고 그 감각을 믿어라." 신검반이라고해서 항상 무예시범만을 보일 수는 없었다. 추혼십이절이 안 먹 히는 곳에서는 곡예를 보여주어야했다. 나무막대나 그네, 줄등에 의지해서 공중 제비로 날아다니는 묘기가 주종이었다. 신검반원들은 비연류의 수법을 이용해 서 그런 묘기들을 보여줄 수 있었다. 모진위가 이미 두 손으로 검을 모아잡고 나서야 비로서 뒷꿈치에 무언가가 걸 렸다. 약간의 지지력이 생겼다. 모진위는 그 반력을 이용해서 상체와 팔을 들어 올렸고, 두 손으로 모아줘 검을 힘껏 내리눌렀다. 그리고 층계모서리에 검이 찍 히는 순간, 검이 지탱하는 힘으로 힘껏 허리를 끌어당겨 상체를 일으켜세웠다. 다행스럽게도 두 다리는 난간에 단단히 걸려있었다. 검을 내리눌러서 얻은 추 진력이 모진위의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주었다. 최대한 다리를 오무르면서 허리 에 힘을 가하자 모진위의 상반신이 크게 난간을 축으로 반회전을 만들었다. 거 꾸로 매달렸던 몸이 정상적으로 바뀌었다. 모서리에 박혔던 검을 뽑아서 신형 을 정지시켰다. 난간이 눈에 들어왔다. 모진위는 재빨리 오른손으로 검을 옮겨 잡고는 왼손을 뻗어 난간을 잡았다. 난간을 잡은 왼손으로 자세를 조절하며 모 진위는 안전하게 계단난간위에 걸터앉았다. 숨가뿐 상황이었지만 짧은 희열이 모진위의 전신을 감쌌다. 장가량이 보았다면 최고의 갈채를 보내줄 장면이었다. 신검반에는 제비가 폭 포를 차며 거슬러올라가는 형상이라 하여 비연등폭(飛燕登瀑)이라는 명칭이 붙 혀진 곡예가 있었다. 공중제비를 돌며 각각 사람하나길이로 떨어져서 수직으로 걸려있는 삼단의 봉을 타고 오르는 묘기였다. 비연류를 능수능란하게 익힌 단 원들만이 입문이 가능했는데 삼년을 익히고나서도 두 번에 한 번 가능한 단원 이 열에 한 명도 안될 정도로 지난한 절기였다. 모진위로서는 연습조차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그런 비연등폭을 절대절명의 순간, 층계난간에서 성공시켰 던 것이다. 난간막대만 하릴없이 우수수 베어버린 흑복면의 도가 덕분에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모진위가 신형을 추스릴 사이도 없이 소름끼치는 도명(刀鳴) 이 귓전을 찔러왔다. 모진위는 황망중에도 왼팔로 난간을 짚으며 하체를 빼내 었다. 무언가 떼주어야 한다면 왼팔이 가장 지장이 없었다. 오른손은 검을 쥐어 야했다. 다리도 내어 줄 수는 없었다. 아직도 두 다리로 걸어가야 할 곳에 도착 하지 못했다. "나 혼자 죽을 수는 없지." 회의청년이 처절한 고함을 내질렀다. 막바지였다. 흑의악귀의 강맹한 일도가 사정없이 회의청년을 파고들어갔다. 회의무사는 지쳐있었다. 이제와서는 막아낼 자신도 여력도 없었다. 그때, 왜소한 청년을 핍박하고있는 또 한명의 흑의사내 가 눈에 들어왔다. 무방비로 등짝이 노출되어있었다. 어차피 살아남기는 틀린 상황이었다. 회의사내는 한눈을 팔고있는 좌측 편의 흑영을 향해 철곤을 내리 찍었다. 모진위의 팔뚝을 내리찍던 돌연 방향을 바꿔서 도가 넓은 옆면을 보이며 겨드 랑이를 파고들었다.흑의살수가 후면에서 철곤이 날아오는 기색을 눈치채고, 신 형을 틀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흑살수는 철곤정도에 그렇게 위협을 받는 것 같 지는 않았다. 곤을 피하는 와중에도 모진위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피하는 방향에 따라 도법만 변화시켰을 뿐이었다. 하지만 도의 기세만 은 현저히 약해졌다. 모진위의 눈에도 도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모진위는 난간을 집었던 왼팔에힘을 가하며 하반신을 들어올렸다. 도가 겨드 랑이의 옷깃을 찢으며 지나갔다. 흑의인이 철곤을 회피하는 덕분에 모진위도 절대절명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전회의 대장부는 그렇지 못했 다. 무지막지한 도가 회의청년의 심장을 찔렀다. "크억!" 간신히 포착한 도의 움직임이었다. 모진위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상대편의 도법이 재공격을 위해서 변환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지체없이 신형을 전개하 였다. 눈 감빡할 순간이면 다시 도가 모진위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릴 순간이었 다. 모진위는 난간을 집고 신형을 옆으로 들어올린 그 자세에서 추혼십이절을 시전하였다. 모진위의 눈은 아직 넓은 도면을 놓치지않고 있었다. 모진위의 오 른발이 쏜살같이 도의 넓직한 부분을 밟았다. 그러나 추혼검이 시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른손의 장검은 미동도 하지 않고있었다. 모진위는 검대신 발을 사 용하여 봉사쟁화를 시전하였던 것이었다. 봉사쟁화는 벌의 침으로 독사의 혀를 찌르는 수법이라는 이름 그대로 점(點)을 가지고 움직이는 점(點)을 제압하는 묘용이 있었다. 모진위는 발을 한 점으로 하여 도의 한 부분을 한 점으로 찔렀 던 것이다. 흑복면은 본능적으로 내리누르는 모진위의 무게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당황한 나머지 도위에 올라탄 모진위를 떨치기위해서 도를 휘둘렀다. 모진위는 도의 기세에 밀려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모진위가 나뒹군 곳은 이미 계단이 끝난 이층복도였다. 모진위는 봉사쟁화를 펼쳐 상대의 도에 내려섰던 순간, 즉 시 거룡십팔수의 세가지 초식을 연속으로 전개하였다. 먼저 접촉을 유지하는데 효능이있는 용각접응의 한 수로 도면에 발을 붙힌 다음, 흑의자객이 도에 힘을 가중시키자 타인의 힘을 이용하는 수단인 회풍선엽을 전개하여 몸을 날리고, 방 향을 전환하여 튀어나가는 초식인 반궁탄시를 펼쳐서 이층으로 날아갔던 것이 다. 바닥을 구르며 모진위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길게 늘어선 회랑에는 시체와 피 묻은 병장기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복도의 우측에서 두 사람이 서로 칼질을 하 고있을 뿐, 이미 대부분이 시체였다. 모진위는 가까운 곳에서의 직접적인 위협 이 없음을 느끼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벽 안쪽에서 고함소리와 날카로운 금 속음이 간간히 들려오는 것을 보니 아직 사태가수습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시체중에 흑색복장이 거의 눈에 띄지않았고, 소란도 그리 심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모진위는 초조한 마 음으로 일전에 소계일과 장여진을 만났던 방을 향해서 복도 좌측으로 급하게 몸을 돌렸다. 소계일의 침실에 당도해보니 방문은 반쯤 열려있었다. 안에서 두런거리는 사 람소리가 들려왔다. "본좌에게 이래도 되는거요? 맹(盟)의 후환이 두렵지않소? 흑막대군(黑幕大 君)!" 금속이 갈리듯 칼칼한 목소리였다. "소회주(蘇會主), 맹주께서도 심히 애석해하셨소." 조용하고 무정한 목소리였다. 모진위에게는 양쪽의 목소리를 모두가 귀에 익었다. "뭐... 뭣이요?" "사지를 절단하는 아픔이라 통탄하셨다오." 절박한 반문에 차분하다못해 여유롭기까지한 대답이었다. 절박한 쪽은 소계일 인 것 같았고, 여유있는 쪽은 틀림없는 혈귀였다. 모진위는 벌렁이는 가슴을 진 정시키며 살그머니 방안의 기색을 정탐하였다. 소계일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 러지고 있었다. "무슨 이유요? 내가 배반이라도 했다고 합디까?" "채가장의 유진목이란 놈이 호시탐탐 노리고있다고 합디다. 소회주도 아시다시 피 채가장에 꼬리를 밟혀서는 곤란한 일이지요. 황궁에 계시는 요인들이 특히 걱정을 많이들 하셨소." "그러니까... 내가... 이 가전회가 꼬리밖에 안된단 말이지. 위기에 처한 도마뱀 이 꼬리를 잘라버리고 도망치듯, 가전회를 말살해서 증거를 없앤다? 내가, 이 소계일이가 꼬리밖에 안된다 이말이지." 소게일은 충격을 받은 듯 혼자 중얼거렸다. "맹주께서는 사지를 절단하는..." "그만두시요. 내 어찌 이리도 우둔했단 말인고. 맹에서 일을 정리할 때부터 진 작 알아봤어야 하는건데... 미련하게도 시키는대로 문서나 파기시키고, 우환거리 나 제거하고 있었다니..." 소계일의 얼굴에 분노가 일더니 이내 좌절의 기색이 서렸다. 이어서 혈귀의 무덤덤한 음성이 냉냉하지도, 따사롭지도 않은 어조로 흘러나왔다. "자결하시겠소? 아니면 내가 나서야 하리까?" 건장한 흑의인 둘이 모진위에게 등을 보인 채, 입구를 막아서고 있었고, 혈귀 가 좀 더 안쪽에 등을 보이고 있었고, 그 양옆으로 세 명의 흑의인이 도열해있 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새파랗게 질린 소계일이 서있었다. 장여진은 없었다.몇 구의 시체가 눈에 띄었지만 여자로 보이는 시신은 없었다. "곱게 죽을 수는 없지. 네 놈들 모두 때려죽이고, 맹주라는 작가 사지를 분질 러놓고, 고래고래 비명지르는 그 놈의 돼지같은 면상을 보게되면 한 번 생각해 보지. 맘대로 해봐라, 이 놈들!" 소계일의 악에 바친 절규를 들으며 모진위는 살금살금 기어서 방문 앞을 벗어 났다. 소계일의 처소에서 일장쯤 물러나와 간신히 허리를 펴고 안도의 한숨을 쉬던 모진위는 일순 내쉬던 한숨을 들이마셔야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가느다란 체구 의 흑의인이 모진위를 가로막고 서있었다. 그가 품어내는 예리한 살기는 모진 위가 마음대로 호흡하기도 힘겨울 정도로 지독하였다. 모진위의 짧은 식견으로 도 아래 층에서 만났던 살수들과는 격이 다른 고수였다. 벽면을 뚫고 여전히 싸움질의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지만 처음보다는 많이 진 정된 추세였다. 흑살수들의 기습은 성공을 목전에 두고 막바지로 치닺는 느낌 이었다. 쿵쾅거리던 모진위의 고동소리가 빠른 속도로 잦아들었다. 떨리던 손끝 도 차츰 진정되었다. 모진위의 눈빛에서도 흑의인과 같은 종류의 살기가 베어 나오고 있었다. 동정원 침투후, 삼 다경여만에 모진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흑의인과 같은 살수로 돌아가버렸다. 자신의 안위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된다면 살아움직이는 어떠한 것들이라도 사정없이 파괴시키던 짐승, 특삼호로 돌아간 것이었다. 이전의 특삼호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정신만은 아직도 모진위가 지배 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모진위는 장여진을 찾고있었다. '이미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살아있다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직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저 방들중 어느 한 곳에 있는 것일까?' 모진위의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빼액!" 뾰족한 여인의 비명소리가 흑의인의 등뒤로 우측편 어디선가에서 들려왔다. 그 순간 모진위의 초조는 극에 달했다. 장여진의 생존을, 장여진의 소재를, 더불 어 장여진의 위기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단 한 수의 기회밖에 없음을 모진위의 서슬퍼런진 생존본능은 직감하 고있었다. 적이 아직 이쪽의 숨은 힘을 가늠하지 못했을 때, 할 수 있는 최고의 수법을 동원하여 단 한 수에 승부를 결하는 것만이 그나마 티끌만큼이라도 가 능성을 높혀주는 것이었다. 모진위는 암암리에 내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마지막 원화촉발법에 의해서 촉발된 모진위의 진기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모 진위는 온 몸에서 힘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모진위가 이제껏 느껴보지 못 했던 강력한 기력이 모진위의 경락을 팽창시켰다. 모진위는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진기를 검을 쥔 오른손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활시위가 튕겨지듯 흑의인 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구연기의 이론에 냉귀의 실기가 더해진 신검 옥진강 본연의 추혼십이절이 모 진위의 손끝에서 재현되었다. 흑의인의 눈에서 뜻밖이라는 의미의 이채가 잠시 번득이더니 묵직한 도를 종이장이라도 펼치듯 유연하게 내밀었다. 순간, 싸늘한 도기가 소용돌이치며 모진위를 에워쌌다. 모진위는 휘몰아치는 도기에 밀려 검 을 제대로 겨누기도 버거워졌다. 예상은 했었지만 실제로 격돌해보니 무력의 차이가 너무나 확연하였다. 모진위는 안간힘으로 버텼다. 이미 모든 것을 각오 한 최초이자, 최후의 일격이었다. 모진위가 죽을 힘을 다해서 사정거리까지 검을 질러넣자 흑의인의 도가 마중 해주었다. 그리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자연스럽게 횡을 그리는 도법이었다. 그 러나 검법과 도법의 문제가 아니었다. 힘의 차이가 너무도 분명했다. 흑의인의 도력이 어찌나 강했던지 가볍게 검세를 무너뜨리고 모진위의 허리를 베어버리 고나서도 여력이 한참 남을 것 같은 위세였다. 도와 검이 충돌하려는 순간, 모진위의 검은 연기처럼 자취를 감췄다. 유일한 방해물마저 사라지자 예리한 도가 거칠 것 없이 모진위의 허리를 베어들어왔 다. 모진위의 허리에서 피줄기가 터져나왔다. 모진위의 연약한 허리쯤은 열두 개라도 베어버리고 남을 위풍당당한 도세였다. 그러나 흑의인의 도는 예상과 달리 모진위의 옆구리를 반 치가량 파고들다가 멈춰섰다. 흑의인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쪽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리고 모진위를 잠시 일별하더니 다시 자신의 가슴께로 눈길을 되돌렸다. 흑 의인의 가슴에는 모진위의 장검이 꽂혀있었다. 흑의인이 서서히 주저앉았다. 모 진위도 흑의인의 신형을 따라서 주저앉았다. 모진위의 왼손에는 허리를 파고든 상대의 도가, 오른손에는 상대를 찌른 자신의 검이 쥐어져있었다. 두달 전, 양주제일의 염상, 채소우를 절명시켰던 그 초식, 검에 의한 이형환위 라고 혈귀마저 감탄했던 그 검법, 사화결실이었다. 모진위는 정상적인 맞대응으 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예견하고있었다. 그래서 독한 마음으로 살을 주고, 뼈를 깍는 전술을 선택했던 것이다. 상대의 도에 대한 방어를 애초에 포 기하고 도를 막는 척 흉내만 내다가 사화결실의 수법으로 검을 빼돌려 흑살수 의 심장을 노렸다. 추혼십이절의 기상천외한 교묘함을 모르는 흑의고수로서는 쾌(快)보다는 중(重)에 치중하는 도법을 전개하였다. 상대의 예봉을 피하지않고 직접 부딪치는 것이 보다 고수들의 일반적인 하수 상대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최대한 쾌검의 이치를 살린 모진위의 사화결실이 먼저 상대의 심장에 도달할 수 있었고, 뒤늦게 허리에 도달한 도가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모진위는 이를 악물고 옆구리에 박힌 도를 잡아뽑았다. 참으려했지만 절로 신 음이 터져나왔다. 흑의인의 가슴에 박힌 검을 잡아당겼다. 팔만 부르르 떨릴 뿐 검은 뽑히지 않았다. 힘을 쓴 탓에 옆구리에서는 다시 핏물이 분수처럼 터져나 왔다. 장여진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방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모진위는 조바심에 가슴이 탔다. 팔꿈치로 상처난 옆구리를 사정없이 강타하였다. 격렬한 통증이 전신을 뒤틀게 만들었다. 겨우 양팔에 힘이 돌아왔 다. 두 다리로 흑의인의 배와 어깨를 밟은 채, 다시 힘껏 검을 당겼다. 검이 뽑 혔다. 모진위는 여력을 감당치 못하고 비틀거리며 뒤로 자빠졌다. 팔다리가 부 들부들 떨렸다. 잠시 쉬고 싶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모진위는 덜덜거리는 양팔로 바닥을 집으며 어렵사리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비틀비특 걸음을 옮겼 다. 장여진의 비명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서. "대협..." 사내의 혼이라도 빼어낼 듯싶은 달작지근한 음성이 도톰한 입술사이로 흘러나 왔다. 장여진이 무의식을 가장해서 상체를 비틀자 옷자락이 어깨를 흘러내리며 가슴이 살짝 벌어졌다. 그리 환하다고는 할 수 없는 실내조차 일순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부분적으로 드러난 탐스러운 젖무덤은 탄력을 자랑하며 한순간 출렁거렸다. 무심하기만 하던 흑의사내의 두 눈에 갈등의 빛이 역력해졌다. 장여진이 이번에는 무서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치마상단을 손으로 말아쥐며 다리를 구부려 앉았다. 잠자리 날개처럼 부드러운 치마자락이 스르르 다리위로 말려올라갔다. 이번에는 수밀도처럼 매끈하고 풍만한 허벅지였다. 뜨 거운 사내의 두 눈이 장여진의 나른한 시선과 얽혔다. 장여진이 짐짓 가뿐 한 숨을 내뿜었다. 상체를 뒤로 젖혀서 두 팔을 뒤로 뻣어 침상을 집었다. 상반신 의 옷자락이 시원하게 풀어 헤쳐졌다. 어깨마저 펼쳐지자 봉긋한 육봉이 돌연 옷깃을 헤집고 치솟아올라서는 견딜 수가 없다는 듯 파르르 떨었다. 흑의사내 가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장여진의 가랑이사이에 섰다. 장여진이 다리를 활짝 벌렸다. 그때, 모진위가 방문을 밀고 들어섰다. 모진위가 최초로 발견한 것은 남자치고는 허여멀건한 흑의인의 살집좋은 엉덩 이였다. 사내의 하의는 거의 무릅근처까지 흘러내려가 있었다. 사내의 허리와 둔부는 장단이라도 맞추는 것처럼 들썩거리고 있었다. 사내의 두 손은 여인의 가슴을 탐욕스럽게 틀어쥐고 있었는데, 손가락사이로는 뽀얀 속살이 삐져나와있 었다. 조금만 힘을 가하면 터져버릴듯 팽팽한 질감이었다. 그 너머에는 반 쯤 감은 눈으로 달뜬 콧소리를 토해내는 장여진의 얼굴이 있었다. 장여진은 두 팔 을 뒤로 뻗고 상체를 반 쯤 일으켜세운 상태였는데, 장여진의 고개가 사내의 하 체장단에 따라 꺼덕거리고 있었다. 모진위로서는 이미 한 번 경험한 일이었지만 장여진의 다리는 의복 겉에서 가 늠했을 때에는 짐작도 못 했을 정도로 길고 곧았으며 또한 알이 꽉 찬듯이 토 실토실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짧은 순간적인 단상이었고, 모진위의 머리 속은 다시 장여진의 피부색처럼 하얗게 비어버렸다. 장여진의 반 쯤 감긴 눈이 순간적으로 동그랗게 확대되었다. 모진위를 발견한 것이었다. "저... 저... 저기..." 장여진이 채 비음이 가시지않은 묘한 음성과 함께 섬섬옥수를 뻗어 허공을 가 리켰다. 흑의사내의 충혈된 눈망울도 장여진의 손가락을 따라나섰다. 장여진의 고개는 여전히 꺼덕거리고있었다. 사내가 여전히 하체의 왕복운동을 멈추지 않 았기 때문이었다. 사내가 왕복운동을 멈춘 것은 그의 얼굴이 온통 당황의 기색 으로 물들고도 한참이 흘러서였다. 당황한 흑의인이 마루바닥에 찔러둔 도를 뽑아들고, 바치춤을 잡아올리고 부산 을 떨며 모진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흑의사내는 달려드는 기세만큼 대단한 위력은 아니었다. 방금전 복도에서 일합을 겨뤘던 흑의고수는 말할 것도 없고, 아래층의 사내들보다도 무공실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는 편이었다. 더군다나 불 행히도 사내는 흘러내리는 허리춤을 붙잡고있어야했다. 그래도 모진위보다는 고수인지라 간혹 신랄한 일격을 가해보기도 했지만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바지춤이 문제였다. 덜렁거리는 물건이 들어나는 망신살은 문제가 아니었다. 다 급한 상황이라고 허리춤의 한 손을 게을리했다가는 어느새 무릅까지 흘러내려 가는 바지가 사내의 보법을 방해하였던 것이었다. 두 적수가 서로의 위치를 바 꿔서게 될 즈음에는 싸움의 주도권이 완전히 모진위에게로 넘어왔다. 드디어 흑의의 색골(?)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려는 절호의 순간, 화끈한 통 증이 모진위의 뒷덜미를 타고 넘어왔다. 모진위는 그대로 앞으로 엎어지며 뒤 를 돌아다보았다. 등뒤에는 득의의 미소를 짓는 장여진이 서있었고, 그녀의 손 에는 뻘겋게 피로 물든 비수가 들려있었다. 장여진은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아 이같은 표정으로 흑의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도 모진위에게서 눈을 떼어 장여진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두 눈에 서렸던 혼란의 기색이 사라졌다. 사내는 번개같이 허리띠를 묶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사내의 두 눈에서 사라진 표정은 단지 당혹 그 하나만이 아니었다. 그의 두 눈 에는 이미 색정도, 탐욕도 모두 사라져있었다. 물론, 장여진이 기대하는 칭찬의 기미는 더 더욱 없었다. 사내의 도가 팟-하고 허공을 갈랐다. 이번에는 모진위의 얼굴이 당혹으로 뒤덮혔다. 흑의인의 도는 너무도 뜻밖으 로 장여진을 향해서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모진위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낙 화유수(落花流水)라는 추혼십이절의 비검술(飛劍術)을 빌어서 검을 던졌다. 마 지막 잠력까지 쥐어짜낸 모진위의 검은 성공적으로 흑의사내의 등판을 꿰둠었 다. 그러나 불행이도 간발의 차이로 흑인의 도가 이미 장여진의 가슴을 관통한 후였다. 장여진의 얼굴이 그때까지의 흐뭇함이 채 사라지지도 못한 채, 괴상하 게 일그러졌다. 먼저 모진위가 물었다. "장소저, 어째서... 어째서...? 이 몸은 그대를 구하려고 온 것인데..." 장여진도 물었다. "대협, 왜지요? 저는 당신에게 몸을 허락했어요. 그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저 추귀(醜鬼)를 멸하여 당신을 구하고자했어요. 그런데 왜 저 추물을 내버려두고 저를 해하시는 거지요? 저 놈이 바로 모진위란 악적이란 말이예요. 당신들이 추살코자 그렇게 찾아헤맸던 그 악귀란 말이야. 이 못된 물건아!" 공손하게 시작된 장여진의 음성이 저주섞인 욕설로 끝을 맺었다. 여전히 바닥 에 쓰러져 죽어가는 흑의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흑의인은 아루런 대답도 하 지않았다. 흑의인들은 하나같이 여간해서는 말을 하지않았다. 죽어가는 이 흑의 사내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내가 모진위에게 눈길 을 돌렸다. 그것은 마치 모진위도 그 이유쯤은 알고 있을 것라는 무언의 표시 같이 보였다. 장여진이 모진위에게 눈길를 돌렸다. 그러자 모진위는 알 수 없다 는 표정으로 흑의사내에게 눈길을 보냈다. 의외의 결과로 이번에는 사내가 입 을 열었다. 장여진과의 정사가 아무래도 여운을 남겼던 모양이었다. "자네도 우리의 흑막(黑幕)출신이 아닌가?" 모진위는 잠시 의아해했지만 곧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소계일 은 혈귀를 보고 흑막대군이라는 호칭으로 불렀었다. 이 사내는 자신과 모진위 가 같은 살수집단에서 활동했으니 자기가 모진위보다도 장여진에게 먼저 살수 를 가한 내막정도는 알지 않는냐는 반문이었던 것이었다. 모진위는 수긍의 눈 빛을 사내에게 전해주었다. 사내는 이미 절명했있었다. "장소저, 이 사람이 받은 명령은 당신을 살해하라는 것이었소. 그곳 사람들은 살행에 임하게되면 살생대상에 관한 것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가치에도 구애받 지 않습니다. 부여받은 목표를 제거하기 전까지 다른 판단기준은 모두 유보하 는 것이 하나의 습관처럼 되어버립니다. 그게 최고의 살법이라고들 하니까요." 장여진은 허탈감과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 떨림은 목전에 다가온 죽음에 대한 공포로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장여진은 고통으로 일 그러진 얼굴을 피려고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 결과 그런대로 공손한 표정이 연출되었다. 장여진은 상황에 전혀 안 어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 을 열었다. "모가가, 천첩을 구하러 왔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장소저." "포위망을 뚫고 나갈 자신이 있나요?" "그건... 그건..." 모진위가 업어진 자세에서 고개만 들어 가로저었다. "그런데 왜 죽음을 자초하는 그런 행동을 하셨나요?" "자신의 내자를 보호하는 것이 사내의 의무라고 배웠습니다." 순간, 장여진의 눈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그리고 더할 수 없이 애처로운 음성 이 장여진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정랑, 지금 몸은 어떠신가요?" 장여진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담뿍 담겨있었다. "이미 틀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천첩을 살려주십시요. 모상공이 내세에서 평안하도록 평생을 기도하 며 수절하겠습니다. 제발 천첩을 불쌍히 여기시고..." 모진위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장여진이 자신을 죽이려했다는 것을 잊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별로 섭섭한 마음도 없었다. 어차피 며칠내로 죽을 목숨이 었고, 별로 살고싶은 세상도 아니었다. 게다가 모진위는 자신이 얼마나 쓸모없 는 인물인지 너무도 절감하고있었다. 또한, 장여진을 그냥 보내기에는 구천허공 을 방황하고 있을 신검반의 원혼들이 너무 안쓰러웠다. 그들의 넋을 달래줄 도 의적인 책임을 모진위는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죽고 장여진이 사는 것이 백번 옳았다. 그러나 작금의 모진위의 상태는 남을 구하기는 커녕 걷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애석하게도 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군요." "소녀에게 한가지 방도가 있습니다만..." "말씀해보십시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길이 남아있다면 무엇이든지..." "그만두겠습니다. 차마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괘념치마시고, 말씀하십시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기만 하다면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그것이... 저어..." "어서요. 시간이 없습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것 같군요." 장여진이 화들짝 놀라며 황망스레 입을 열었다. "천첩의 비수로 자결을 해주십시요. 저들이 이 방을 둘러보고 일련의 사정을 참작해준다면 혹여 소녀를 치료해서 살려줄런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만 해 주신다면 수절과부로 해마다 치성을 다하겠습니다. 제발... 흑." 모진위는 이미 생각하기도 귀찮은 상태였다. 아무런 선악개념도 머리속에 남 아있지 않았다. 또한, 장여진에 대한 호의적인 기대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 래서 모진위는 장여진의 그런 막 되먹은 이야기조차 오히려 그것이 당연하다고 착각할 정도로 거부감이 없었다. 간신히 장여진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장여진의 생존이라는 목표하에 육체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초인적인 의지를 불러일으킬 따름이었다. 모진위가 안간힘으로 장여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비 수를 잡았다. 왠 일인지 장여진이 비수를 단단히 거머쥐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기력이 쇠잔한 모진위는 휘청거리다가 얼결에 장여진의 가슴에 박혀있는 도를 붙잡고 말았다. 그리고 감짝 놀라서 손을 놓았다. 장여진의 가슴에서 핏물이 쿨 럭하고 쏟아졌다. 그러나 그녀는 도가 심하게 비틀렸는데도, 전혀 고통을 느낄 수가 없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장여진은 이미 숨을 쉬지않고 있었다. 상의를 풀어헤친 그녀의 탐스러운 가슴도, 치마자락이 흘러내린 통통한 허벅지 도 더 이상 생기가 흐르지 않았다. 모진위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던 허 벅지와 가슴이었었다. 그러나 모진위의 흐릿한 눈으로는 이미 옳바른 사태파악 이 불가능했다. 모진위는 천신만고끝에 비수를 빼앗아들었다. 그리고 흐려져가 는 의식을 억지로 끌어모아서 비수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자신의 목을 겨냥하 였다. 흑수노계였습니다. #6309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35- 07/18 22:48 340 line 모진위는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의 목줄기를 향해서 힘껏 비수를 꽂았다. 비수 가 모진위의 인후를 관통할 찰나, 부드러운 기운이 모진위의 팔목을 옭아매었 다. 순간적으로 암습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대항해보았지만 별 무 신통이었다. 물이 흘러나가듯 비수가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누가 네놈 마음대로 죽으라고 했어? 이 도리도 모르는 천둥 벌거숭이 같은 놈아!" 난데없는 노성에 모진위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길쭉한 말상의 사내가 버티고 서있었다. 몹시 화가난 표정이었는데 그의 손에는 모진위의 비수가 들려져 있 었다. 사내가 비수를 나꿔챈 것이었다. 모진위는 그제서야 말상의 호통과 비수를 빼앗아간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 었다. 얼마전, 고개초입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던 그 화 잘 내는 사내였다. 모진위 는 그제서야 자신의 목숨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저 사내의 것임을 기억해냈다. 모진위는 자신이 신의 없고, 배은망덕한 놈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리고 진심으로 반성하며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말상의 사내와 땅딸보는 모진위 혼자서 동정원에 잠입하는 것이 못내 안심이 되지 않아 몰래 따라온 것이었다. 가전회의 무사들따위는 한손으로도 가지고 놀 자신이 있는 터였다. 그런데 사태가 자못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만만치 않아 보이은 강적들이 그들보다 먼저 동정원을 방문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허 어! 간신히 꿰매놨더니 또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버렸네. 이걸 어떻게 다시 고친다?" 고무공이 연상되는 동그랗고 땅딸한 사내가 모진위를 요모조모 살피며 탄식을 해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그의 얼굴은 근심스러운 표정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심심파적인 문제풀이가 생겼다는 기대감이 그의 얼굴에 충만해 있었다. 고무공을 바라보는 말상의 표정이 보다 못마땅한 쪽으로 우그러졌다. "사사제, 그렇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네. 서두르세." "이 놈 제대로 써먹을 수나 있을까 이사형? 길어야 두어 시진 후면 바로 황천 행이기 십상일거 같은데..." 사사제는 이사형의 채근에 밀려 모진위를 둘러매면서도 여전히 결과가 자못 기대된다는 듯 희희낙낙하며 한 마디 보태고 말았다. "이런 제길! 그 동안 애쓴 게 죄다 헛수고가 될 판인데도 웃음이 나와? 제발 아가리 좀 닥치고 빨리 빨리 움직여. 놈들이 몰려오잖아." 복도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제법 떨어져있는 것 같던 발소리는 채 한 호흡도 되기 전에 이미 지척으로 다가왔다. 빠른 속도였다. 다가오는 자들 이 범상치 않은 기도의 소유자임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잠시 귀를 기울 리던 사사제의 표정이 약간은 진중해 졌다. 사사제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모진위를 자신의 등판에 동여매는 동안, 이사형은 화섭자를 꺼내어 작은 불꽃을 만들었다. 불꽃이 피어오르자 지체없이 창가로 다가가 창 밖을 향해서 불꽃을 두어 번 흔들었다. 잠시 후, 동정원의 담장 밖에 서도 두어 번 불빛이 번쩍거렸다. 꽝-. 땅딸보와 말상이 부산을 떠는 사이에 문이 부서지며 일단의 흑영들이 실내로 폭주해 들어왔다. "사사제!" 말상이 외쳤고, 고함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땅딸보의 양손에는 이미 한 쌍의 동 발(銅 )을 위용을 드러냈다. 동발은 유난히 큰 것이었다. 겨우 오척(五尺)이 될 까말까한 땅딸보의 상반신을 대부분 뒤덮을 정도의 지름이었다. 위기에 직면한 말상의 두 눈은 적의를 드러내며 더욱 노한 기색이 짙어졌지만 땅딸보의 두 눈 은 무료하던 참에 소일거리라도 생겼다는 듯이 즐거움의 기색이 역력하였다. 흑복(黑服)의 무리들이 다짜고짜 흉기를 날려왔을 때도 땅딸보는 거침없이 도 광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말상은 힐끔힐끔 창 밖을 견눈질하며 분노의 표정을 키워나갔다. 지금쯤은 왔어야 할 것이 아직 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말상의 입장에서는 한가할 때조차도 기다린다는 행위자체가 분노의 대상있었으니 지금 같이 초조한 상황에서의 기다림이란 말할 것도 없었다. 떵-. 정원 어디선가에서 강궁이 날아와 창틀에 꽂혔다. 화살을 확인하고난 후에야 말상의 우거지상이 좀 풀리는 듯 싶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것이 온 것이었다. 말상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화살을 뽑아들었다. 화살대의 끝에는 굵은 밧줄이 매달려있었다. 말상은 밧줄을 풀며 격전장을 돌아다보았다. 그럭저럭 사사제가 잘 버텨주고 있었다. 사사제는 자신의 사형이 창틀에 밧줄을 묶는 동안, 상대를 막아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흑의인들은 모두 네 명이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아직 싸움에 합류하지 않고 있 었다. 팔짱을 낀 채 그저 입구만 가로막고 있었다. 아마도 무리의 우두머리인 듯 싶었다. 자신은 안중에도 없고 사사제만 핍박하는 것을 보면 역시 사사제의 등에 얹혀있는 저 다 망가진 녀석이 적들의 목표라고 말상은 생각했다. 그대로 라면 사사제가 충분히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안도의 한숨 을 내쉬는 순간, 흑도의 우두머리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돌연 팔짱을 풀더니 대 뜸 앞으로 나섰다. 일말의 불안감이 말상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불행히도 말상의 예감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놈의 도가 허공을 가르자 사 사제의 동발이 심하게 울었다. 더욱 불길한 점은 동발의 떨림에 그치지 않고 사사제의 등과 어깨에도 가느다란 혈선이 그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상의 눈에는 단 한 번밖에는 도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상대가 말상으로서는 평생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절정고수라는 것을 의미했다. 일합을 겨루고 물러선 사사제의 입가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사제 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말상은 도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사제는 여 간해서는 병장기에 내외상을 입지 않는 독보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강호에 널 리 알려져있는 철포삼( 鐵袍衫)이나 금종조(金鐘조)따위의 외가공부와는 차원이 다른 공부였다. 고무공처럼 탄력있는 신체와 잘 정제된 내공, 그리고 고도의 순 발력을 갖춘 경공이 이 세가지가 삼박자로 잘 조화되어야만 가능한 일종의 상 승무공이었다. 아무리 날카로운 물건으로도 질긴 고무공 같이 튕겨나가는 사사 제의 외피와 내단에 상처를 입히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놈은 그저 가볍게 그어대는 것 같은 일도(一刀)만으로도 사사제의 육신은 물론이요, 내공에까지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주고 있었다. 놈이 도를 고쳐잡고 다시 사사제에게 다가갔다. 사사제는 여전히 즐거운 표정 으로 흔쾌히 놈을 맞아주었다. 사사제가 씩 웃고 마주나가자 놈은 의외라는 듯 멈칫하더니 역시 빙긋 웃으며 사사제의 동발을 겨냥하였다. 말상으로서는 아직 자신의 사제를 도울 만한 여유가 없었다. 말상의 분노가 최고조에 달했다. 사사제는 죽음의 공포마저도 짜릿한 쾌감으로 즐기는 그런 유형이었다. 반면, 말상자신은 초조감도 분노로 전이시키는 그런 기질이었다. 초조감은 마음을 흔 들어 손을 서툴게 만들지만 분노는 그렇치 않았다. 분노가 말상의 손동작을 더 욱 빠르게 만들어주었다. 마침내 문제의 밧줄을 창틀에 단단히 동여 맬 수 있 었다. "됐다. 사사제!" 말상의 고함이 터져나온 순간, 흑복면의 도가 다시 동발을 울렸다. 하지만 동 발의 울림이 먼저번처럼 그렇게 탁하지는 않았다. 쇠붙이끼리의 충돌음치고는 어울리지 않게 경쾌한 금속음을 만들어내더니 사사제가 뒤로 튕겨 나갔다. 그 것은 말상이 언젠가 격구라는 희한한 공놀이에서 본 장면과 흡사하였다. 사사 제는 공처럼 그렇게 탄력있게 날아갔다. 사사제의 독보신공이 시의적절하게 구 사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말상은 너무 늦지 않게 일을 마친 것에 감사하 였다. 하지만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올라서는 사사제의 허벅지와 옆구리에 새 로운 자상이 두 군데 더 추가되었음을 발견한 말상의 핏대가 다시 심하게 도드 라졌다. 흑의사내가 번개처럼 말상의 시야에 확대되었다. 말상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 는 속도의 경공이었다. 참으로 소름이 끼치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말상 은 공포조차도 분노로 표출하는 사나이였다. 말상은 허리춤에 고이 모셔두었던 도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이빨이 부러져라 부드득 갈았다.그 동안 밧줄을 얽어 매기 위해서 억제되었던 쌓이고 쌓인 분노가 일시에 도에 집중되었다. 챙-! 사사제의 뒷덜미를 후려치려던 놈의 도를 간신히 가로막을 수 있었다. 엄청난 경력이 도를 통해서 말상의 팔목으로 전달되었지만 최고조에 달한 말상의 분노 는 어떠한 고통도 물리칠 수 있었다. 결국 흑의인의 도가 정지되었다. 말상은 망연자실하여 자신의 도와 팔목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들어올리려 해 도 팔목을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팔목이 부러진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깨를 들 어올리려 했지만 어깨도 꼼짝할 수없었다. 어깨마저 탈골된 모양이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도였다. 삼분지일 가량이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아니 있기는 있었 다. 말상의 좌전방 삼 장 어귀에 한 조각, 정면 두어 장 어귀에 두 조각...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절정고수들의 대결에서는 일 합만에 병장기가 산산조각 나 기도 한다는 강호의 풍문을 못들어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십평생에 단 한 번도 그런 장관을 실제로 구경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말상 자신의 도 에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얼이 빠진 말상의 목덜미 옷깃을 사사제의 발축이 낚아채었다. 잠시 후, 말상 은 자신이 밧줄 위에 올라서 있음을 발견하였다. "사사제, 고맙구나!" "이사형, 사돈 남 말하지 마시구려." 팔목과 어깨가 파열되고, 도가 산산조각나는 덕분에 단 한 번의 출도에 서너 번의 공격을 가하는 적의 도를 일 합으로 단축시킬 수 있었다. 덕분에 사사제 가 위험에서 벗어나고, 덕분에 사사제의 발등이 말상의 옷깃을 당겨서 말상도 위기에서 탈출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허공을 선회한 흑의인의 도가 다시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두 사형제는 꽁지가 빠져라하고 밧 줄 위를 달려 내려갔다. 서너 장이나 달려왔을까 갑자기 발 밑이 허전해진 말상은 그대로 허공으로 도 움닫기를 시도하였다. 허공중에서 뒤를 돌아다보니 흑의인의 도가 창가의 밧줄 을 끊어내는 것이 보였다. 밧줄을 잘라낸 도는 그대로 방향을 틀어서 사사제가 허공에 떠있는 방향으로 날아왔다. 공중에서 순간적으로 자리를 옮긴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말상은 크게 결심을 하고 자세를 바꾸었다. 그리고 사사제를 힘껏 밀어 올렸다. 지지력을 얻은 사사제가 여유있게 신형을 틀어서 도를 피했다. 자신의 사제를 밀어준 여파로 신형이 무너진 말상이 하릴없이 추락하며 아래 쪽을 바라보았다. 말상의 아래쪽에는 살기등등한 흑의인들이 가득했다. 말상은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자세를 바로잡은 사사제는 천근추(千斤錘)의 수법으로 빠르게 낙하하여 힘없이 절단된 밧줄의 끝자락을 잡았다. 그리고 떨어지는 속 도를 가속하여 이사형을 따라잡았다. "이사형!" 사제의 다급한 목소리에 말상은 눈을 뜨고 사사제를 바라보았다. 사사제가 왼 손으로는 밧줄을 끝을 잡고 오른손을 내밀고있었다. 말상도 한껏 진기를 끌어 올려 떨어지는 속도를 늦추며 손을 뻗었다. 이 장 높이까지 추락해서야 간신히 두 사형제의 손이 맞닿았다. "오늘 정말 희한한 구경 많이 하는구나!" 사사제가 쾌재의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말상은 사사제의 목소리가 어째 단 순한 쾌재라기보다는 절망의 탄식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사사제의 시선을 쫓아 서 앞쪽을 바라보았다. 말상의 이마에 또 다시 핏대가 치솟았다. 말상이 지은 분노의 표정에도 역시 절망이 서려있었다. 신기의 고수 흑복면을 쳐다보기 위해서 고개를 창가쪽으로 돌렸다. 흑복면은 이미 창가에서 뛰어내려 그들이 추락하는 근처로 달려오고 있었다. 말상이 보기에는 그저 밧줄을 잘라내려는 단순한 칼질이었다. 그런데 그 도는 밧줄을 절단하고 허공을 날아서 사사제를 공격했으며, 사사제를 지나치자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라도 되는 듯이 또 한 번 방향을 바꿔 두 사형제가 매달려있는 밧줄의 중간을 향해서 날아가고있는 것이었다. 드디어 도가 밧줄을 절단하고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말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도를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또 다시 무언가를 시도하기만 하면 지긋지긋한 저 놈의 검이 또 다시 고개를 쳐들고 기승을 부릴 것만 같았다. 발 밑에는 가공스러운 적들의 우두머 리를 필두로 흑의살귀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두 사형제는 더 이상 무엇을 해볼 만한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시체들처럼 전혀 동요라고는 없던 발 밑의 흑의인들에게서 뜻하지 않은 소요가 일어났다. "아!" 살을 도려내는 듯한 슬픈 여인의 탄식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줄이 다시 팽팽 지기 시작했다. "제길할! 삼사매(三師妹), 왜 이제야 나타나는 거야. 느려 터져 가지고는..." "푸하하! 삼사저(三師姐), 점잖은 아낙이라며 꼴이 그게 뭐야? 신나는 그네타 기라도 시켜줄 모양이구나. 헤헤헤!" 말상은 여전히 울화통을 터뜨렸고, 땅딸보는 여전히 재미있어 했지만, 방금 전 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속에 짙게 베어있던 절망의 그림자대신 희망의 빛줄기가 자리를 교대했다는 점이었다. "둘째 오라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소녀가 너무 슬프지요. 나름대로 애썼답니 다. 넷째 동생, 자네도 이 누이를 너무 슬프게 하는구나. 반말하지 말라고 이 누 이가 몇 번을 이야기했어? 아무리 창졸지간이라도 사형제 간에 예의범절이 땅 에 떨어졌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야!" 하얀 상복(喪服)차림의 여인이 대답했다. 여인은 말상과 땅딸보가 매달려있는 밧줄의 끝과 담장 밖 어딘가로 향하고있는 밧줄의 끝자락을 양손으로 나눠쥐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도에 의해서 끊어진 끈의 양끝을 두팔로 연결하며 대롱대 롱 매달려 있는 형상이었다. 그 모습은 땅딸보의 말마따나 점잖은 아낙으로서 취할 자세는 아니었지만 음성만큼은 여전히 뭇 사내의 애간장이라도 녹일 듯 너무도 처연하였다. 팽팽해지던 줄이일순 강력한 힘에 의해서 공중으로 딸려 올라갔다. 누군가가 반대쪽 끝에서 줄을 잡아챈 모양이었다. 바닥으로 추락하고있는 사사제와 삼사 매, 그리고 말상 자신 이렇게 셋에다가 사사제의 등위에는 모진위라는 녀석까지 있었다. 반대쪽에서 밧줄을 휘둘러서 이 네명을 한꺼번에 공중으로 띄울려면 보통사람의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상은 누군 가 분명히 사람이 반대쪽에서 줄을 당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천하에 그런 괴 력의 소유자는 그리 흔치 않았지만 말상은 그럴만한 사람을 한 명 알고있었다. 바로 자신들의 대사형(大師兄)이 그런 괴력의 소유자였을 뿐 아니라 지금은 밧 줄의 반대쪽에 대기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담장위에는 칠척거구의 덥석부리 사내가 힘줄이 불거진 팔뚝으로 밧줄을 휘어감고 있었다. 사내는 마치 거대한 철퇴, 혹은 마디가 긴 삼절곤이라도 휘두 르는 듯이 밧줄에 매달린 네 사람을 힘껏 당기며 말했다. "하하하! 사제들, 다시 만나게 돼서 정말 기쁘구나!" "대사형, 지금이 마냥 기뻐해도 될 때입니까? 사태를 경중을 직시하시고 제발 긴장을 늦추지 마시기바랍니다." "대사형, 보이시나요? 넷째가 온통 피투성이예요. 보아하니 둘째 오라버니도 오른팔이 온전한 것 같지는 않고요. 흑!" "대사형, 이거 정말 아슬아슬하군요. 하하핫!" 덥석부리 첫째는 사제들이 무사히 탈출한 것이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고, 말상 둘째는 사태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형제들에게 노하였으며, 삼사매 소복여인은 오라버니와 동생의 부상에 슬픔을 이기지 못했고, 넷째 땅딸보는 모진위를 빼내 오는 모험을 흥미진진하게 즐겼다. 모진위를 들쳐업은 네 명의 괴한들은 그렇게 담장을 넘었고, 바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동정원 사람 전체의 목숨을 삼켜버린 아수라장 같던 동정원 의 밤도 어느덧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장자기(張自己)는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경공을 발휘했지만 채가장을 출발 하고 채 한 마장 거리도 못 가서 새카맣게 뒤쳐지고 말았다. 유진목이 저렇게 서두르는 모습은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긴, 그 만큼 작금의 사태 가 중차대하다는 것을 대변해주는 모습이었다. 장자기는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한 것처럼 초조한 심정이 되었다. 두 마장 거리에 이르렀을 때는 유진목이 인 파속에 묻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휴우-." 장자기는 가슴이 터질 듯 숨이 가빠져서 결국 걸음을 늦추고 말았다. 동정원 에는 자신과 같은 조(組)인 고무삼(高毋三)이 대기하고 있으니 좀 늦는다고해서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장자기는 채가장 소속의 무사로서 보름 전부터 동정원을 정탐하는 임무를 맡 고 있었다. 정탐조는 총 육명으로써 삼교대로 돌아가며 십이 시진 내내 가전회 의 돌아가는 꼴을 감시하고 있었다. 오늘은 아침 순번이라서 고무삼과 함께 아 침 일찍 동정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염탐장소에 도착해보니 동료들이 없었다. 가전회 놈들에게 발각되었나보다 하고 괴로운 가슴을 쓸어내리며 동정원 내부 를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시체들뿐이었다. 온통 피투성이의 고기 덩어리뿐이었다. 장자기와 고무삼은 서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재촉해서 동료 들의 행방을 수색하였다. 장원외벽을 두 바퀴 돌고 나서야 겨우 자신들의 동료 라고 추측되는 한 구의 시체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한 구의 시체가 더 있어야 했지만 눈을 씾고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오랜 실랑이 끝에 고무삼에 비해서는 그래도 경공에 조예가 깊은 장자기가 긴 급보고를 위해서 채가장으로 돌아오는 행운을 잡게 되었다. 너무도 당연히 고 무삼은 사건현장을 감시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불쌍한 민대머리. 자기에게 딸린 가솔이 세 명이나 된다는 점을 그리도 강조 하면서 애걸을 하더니만...' 장자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만일 고무삼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딸린 가 솔들은 자신이 책임지겠노라고. 사실 장자기가 책임질 만한 것은 없었다. 채가 장에서 어련히 알아서 돌봐주지 않겠는가? 불쌍한 민대머리. 평소 경공 연습을 게을리 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자책했으리라. 장자기가 동정원 어귀에 도달했을 때, 유진목은 이미 고무삼을 대동하고 채가 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고무삼은 썩은 돼지간마냥 시커먼 얼굴이 돼서 땀 을 뻘뻘 흘리며 어른 크기 만한 푸대자루를 운반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의 동료였던 고(故) 호칠(胡七)대협의 시신이리라. 장자기를 발견한 고무삼이 빽 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뭐 꾸물거려? 이 의리없는 인간아! 냉큼 와서 이것 좀 거들어줄 생각않고..." 나중에 고무삼에게 듣기로는 유진목대인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형졸나부랑이 들이 좌악 깔려버려서 현장답사도 제대로 못한 채, 겨우 호칠의 사체만 빼돌리 고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평소에는 포교라면 질색이던 고무삼 도 이 날의 포교들에 대해서 만큼은 아주 반가워하는 듯한 표현을 썼다.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고무삼의 입에서 포졸들을 공경해 마지않는 그런 표현 이 나오다니... 장자기는 동정원을 감시할 필요가 없어진 덕분에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되었 다. 이번에는 흑막(黑幕)인가 뭔가하는, 빌어먹을 살수집단의 행적을 탐색하는 임무였다. 장자기로서는 아예 이 참에 주특기를 바꿔 버릴 것을 심각하게 고려 해 볼 지경이었다. 본분인 경호업무를 떠나서 연속적으로 정탐임무를 떠맡다보 니 무슨 특수임무에 종사하는 협객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장자기가 대우가 괜찮은 이런 보직을 맡게된 배경은 이러했다. 장자기는 근래 에 벌어진 혈겁중 쌍연교대학살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되는 동정원 혈겁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 유일한 정찰조의 조장으로서 채가장의 긴급수뇌회 의에 참석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그 회의에서는 하급무사들이 들어서는 곤 란한 일급 대외비(對外秘)들이 떼거지로 쏟아져 나왔다. 흑막의 정체에 관한 내 용도 그 중 하나였다. 회의석상에서의 유진목대인의 발언에 따르면, 가전회를 멸회(滅會)시킨 장본인 은 다름아닌 채소우장주님의 암살배후자들이라는 것이었다. 채가장측에 자신들 과 가전회가 관련이 있음을 꼬리 잡히게되자 마치 꼬리를 잡힌 도마뱀이 꼬리 를 자르고 도망가는 것처럼 그렇게 가전회라는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동정원의 무리들을 전원 몰살시켰다는 주장이었다. 그로인해서채가장의 추적자들은 힘들게 얻었던 단서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수사가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흑막이란 단체가 개입했다는 심증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 였다. 장자기는 유대인의 설명을 들으며 좌백(左柏)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꾼이 꾸며 낸 화본(話本), 생사박(生死博)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때때로 죽은 자가 더욱 많은 말을 해 준다, - 이 한 구절이 그렇게 실감날 수가 없었다. 유대인은 장자기의 동료 호칠의 시 신과 많은 대화를 나누웠던 모양이었다. 동정원 근처를 샅샅히 탐문한 결과, 몇 몇 사람들이 흑복면에 온통 흑의를 걸친 사내들을 보았다는 진술을 해주었고, 이와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흑복면중의 누군가가 호칠을 타살했을 것이라는 추 측에 타당성을 주었고, 유대인은 호칠의 상처를 유심히 조사해서 호칠과 흑복면 의 대결과정, 그리고 호칠의 무공전개에 대비되는 흑의악적의 무공형태를 추리 해 내었다. 이어지는 유대인의 발언에서 장자기는 유진목대인이 호위각(護危閣)이라는 단 체에 적을 두고있는황실의 비밀경호무사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되었다. 더 불어 황실에는 비밀경호조직은 물론, 비밀암살조직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되었 다. 장자기가 생각하기에도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하긴 황실이라고 해서 무조건 공개적인 사형만 해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눈에 가시같은 놈이 있다고해서 아무 죄목이나 갖다붙혀서 참수시키는 것은 백성들의 이목도 있고 하니 여간 꺼름직한 일이 아닐 것이었다. 각설하고, 그 암살조직의 명칭이 바로 흑막이었는데, 그 발생동기상, 흑막은 유 진목대인이 소속해있는 호위각과 서로 반목할 수 밖에 없었다. 호위각은 항시 흑막이 황제도 시해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흑막을 막아내기위한 무공수련에 열 을 올렸고, 흑막으로써는 호위각의 수비를 뚫기위한 수단을 모색하기에 불철주 야 노력했을 것이라고 유대인의 단언이었다. 흑막과 호위각의 무공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은 초식자체가 아니라 초식의 활 용에 있었다. 흑막은 천하 무공의 형태를 연구하여 초식과 투로를 형성하는 근 본이치를 깨우쳐 대전시에 초식을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상대 초식의 파 해법이 몸으로 발휘되어 상대의 약점을 찌르는 것을 그 근본으로 했다. 흑막의 최고급고수라면 왕왕 초식에 얽매이지 않고 상황에 맞는 초식을 그때 그때 창 출해내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쉽게 말해서 흑막이 추구하는 바는 신검합일(身 劍合一) 내지는 신도합일(身刀合一)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흑막의 수장인 역불기 (逆不基)가 거의 도검합일의 경지에 가까운, 가장 유의해야할 강적이라고도 했 다. 반면에, 호위각은 내공의 효율적인 활용에 역점을 둔다고 했다. 내공의 힘을 효과적으로 초식에 실어서 평범한 초식이라도 스스로 보다 심오한 변환을 일으 켜서 아주 강력한 초식으로 변화하는 묘용이 있었다. 호위각의 고수들이라면 하오문의 검법을 시전한다해도 전혀 다른 류의 검법처럼 발출된다는 이야기였 다. 장자기는 호위각이 추구하는 바는 바로 이기어검(以氣於劍)같은 것일 것이 라고 어렴풋이 추측했다. 회의도중에 유대인과 그 역불기라는 작자가 맞짱뜨면 누가 더 셀까하는 내용 에 대한 지극히 우회적인 표현의 질문이 채경령아씨에게서 나왔다. 유대인은 잠시 당황하다가 그냥 웃어넘겼지만 장자기가 보기에는 어째 좀 자신이 없는 것같은 표정이었다. 채경령아씨가 집요하게 채근하자 마지못해서 한 마디 덧붙 히기는 했는데, "소인이 흑막에 대항하기 위해서 제법 단련을 받은 당사자이기 는 합니다만..."하고 말끝을 흐리더니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일언반구도 없었다. 어쨌거나 너무 많은 비밀들을 알게된 덕분에 장자기는 어차피 그런 비밀들의 일부는 반드시 알고있어야하는 탐색임무를 맡게되었다. 한마디로 승진이었다. 장자기는 처음에 흑막의 잡종 살인마들이 상당히 은밀하게 움직일 것이므로 고생깨나 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탐색의 실마리가 쉽게 풀렸다. 무 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흑막측은 정체가 드러나는 위험부담까지 감수하며 상당히 무리를 하고 있었다. 흑적들의 동태는 곳곳에서 비교적 뚜렷하게 노출 되었다. 놈들은 주로 양주의 장강나룻터에서 남경부근까지의 범위를 이잡듯이 뒤지고 있었다. 놈들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움직이고있는 이유가 곧 채가장의 첩보망에 걸려들었다. 놈들은 한 명의 병자와 네 명의 정체모를 괴한을 전력을 다해서 추적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의 병자는 다름아닌 채장주님을 살해한 '천하의 오살할 악귀' 모진위라고 채가장측은 결론을 내렸다. 흑수노계였습니다. #6340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36- 07/22 19:51 309 line 12. 천도신경(天道神經) 육합에서 장강을 타고 서쪽으로 삼사십리쯤 거슬러 올라가면 남경(南京)을 못 미쳐서 유명한 절이 하나 있었다. 남제(南齊)의 명승 소(소)가 창건했다는 서하 사(棲霞寺)라는 사찰이었다. 서하사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당고종의 명장군비를 비롯해서 오대 남당의 고월이 건립한 기단(基壇), 회흑색 대리석으로 만든 팔각 왕층 사리탑등이었는데, 절 뒤편의 절벽에 위치한 남제 및 양의 석굴도 그것들 에 버금가는 구경거리였다. 절을 병풍처럼 둘러싸고있는벼랑에는 그 외에도 많은 석굴들이 존재하였지만 세인의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 보잘 것 없는 자연동굴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구경거리는 커녕, 그 음산한 분위기 때문에 아예 인적이 기피되는 황량 한 동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왠일인지 고요한 석벽을 때리는 사람 의 음성이 울려퍼졌다. 그것도 크고 작은 석벽의 돌기에 파묻혀서 사람들의 눈 길에서조차 숨겨져 있는 가장 후미진 한 석굴 안에서 였다. 인체의 정화를 끌어 올려 눈(眼) 속에 응축 시키는 것. 이것이 인체의 비밀을 여는 열쇠이니라. 단 일각의 시간의 명상으로 만천겁생을 제(制)할 수 있노라. 그리하여 만물은 고요함으로 끝을 맺는구나. 텁석부리 거한이 모진위에게 구결(口訣)를 불러주고 있었다. 모진위는 편한 자 세로 누워 텁석부리가 지시하는대로 운기(運氣)를 하기 위해서 정신집중을 하였 다. 세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인이 교대로 돌아가며 운기요령과 구결을 들려주 며 모진위가 그대로 행하도록 감시하였다. "첫번째 행(行). '인체의 정화를 끌어 올려 눈 속에 응축 시키는 것.' 여기서 눈 이란 양 눈썹사이의 정중앙부분에서 머릿 속으로 약 한치 반 정도까지 들어간 곳에 해당하느니라. 상단전(上丹田)을 일컸는 말이야. 첫행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겠느냐?" "... ..." 상단전이 어디라는 것 쯤은 모진위도 이미 알고있었으므로 텁석부리가 불러준 구결의 첫 행에 대한 설명을 대충은 이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타부타 대답 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연공(練功)에 들어가있는 관계로 들을 수는 있으나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사람의 사형제들은 그들이 임시은거지로 정한 석굴에 도착해서는 능력껏 모 진위의 내외상을 치료하였다. 그리고 땅딸보의 자상과 말상의 탈골을 응급조치 하였다. 말상은 어깨와 팔목에 나무가지를 대어 동여매고난 연후에는 찢어진 손 아귀가 약간 불편할 뿐 거동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땅달보는 내상이 그리 가볍지는 않았는지 석굴에 들어온 후,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지내야 했다. 급한 응급처지가 끝나자, 텁석부리는 모진위의 입안에 청심단(淸心丹)을 밀어 넣고는 곧바로 장심(掌心)을 모진위의 명문혈(命門穴)에 대고 내력을 불어넣었 다. 얼마 후, 모진위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청심단은 일시적으로 정신을 맑 게하는 환약일 뿐, 근본적으로 상세를 치료하는 약은 아니었다. 오히려 위급상 태의 환자에게는 독(毒)과도 같이 나쁜 것이었다. 하지만 사형제들에게 그런 악 영향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모진위의 상태를 볼 것 같으면 마냥 기다려보았자 깨어나기는 커녕, 그대로 불귀의 객이 될 가능성이 컸다. 이자는 고사하고 까닥하다가는 본전도 찾지못할 그런 형국이었다. 어쨋든 약발을 받은 모진위가 정신을 차리자 소복여인이 다짜고짜 물었다. "기본적인 토납법정도는 익히고 있느냐?" "예." "어떤 호흡법이지?" "무위조식이라고..." 중간에 말상이 끼어들었다. "무위조식?" 모두가 귀를 쫑긋이 세우고 관심을 보이는 지라 모진위는 무위조식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다행이구나!" 소복여인은 아주 다행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어조 는 다행스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모진위가 그런 토납법을 익힌 것에대해서 크 게 슬퍼하는 것같았다. 모진위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양 옆의 덥석부리와 땅 딸보의 표정이 뚜렷하게 다행스러움을 표시하고 있는 것에 미루워서 그녀의 어 조와 표정보다는 말의 내용이 그녀가 본래 전달하려고하는 의사표시임을 겨우 짐작할 수 있었다. 이 후로도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모진위도 그럭저럭 대략적인 상황판단은 할 수 있게 되었다. 모진위의 대답에 따라 그들은 일희일비(一喜一悲)했는데, 모진위의 기구한 과거에 대해서 덥석부 리가 기쁜 표정을 짓고 있더라도 나머지 셋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텁석부리 도 나름대로 슬픔과 위안을 표시하고 있음을 의미했으며, 학습능력을 점검하는 질문에 응하는 모진위의 답변에 말상이 못 마땅한 기색으로 감탄사를 표해도 나머지 셋이 만족하면 그것은 말상쪽도 그리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고 이해하면 되었다. 면접이 끝나자 모진위는 곧바로 무위조식에 임해야했다. 그리고 무위조식상태 에서 난해한 구결과 그 구결의 이해를 돕는 설명을 팔 시진 내내 일각도 멈추 지 않고 들어야했고, 그들의 지시대로 기(氣)와 정(精)을 움직여야 했다. 밥 한 그릇 먹을 시간 전부터는 말상에 이어서 덥석부리가 강론에 임하고 있 었다. 덥석부리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두번째 행. '인체의 비밀을 여는 열쇠이니라'에서 인체의 비밀이란 수련을 통 한 깨달음에서 얻게되는 새로운 경지... 그러니까 불교에서 내공수련을 통해서 도력 높은 고승들이 육신통(六神通)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 뭐어. 그런 것이 '인 체의 비밀을 열었다'겠지. 알아 듣겠... ...?" 덥석부리가 말을 멈추고 모진위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가뜩이나 실같 이 가늘었던 심장 고동소리가 더욱 약해진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뛰고있는 것 을 확인하고는 덥석부리는 안도의 기색을 지었다.그렇다고는 해도 알아들었는 지, 못 알아들었는지 영 대꾸가 없었으니 모진위의 상황이 이해는 갔지만 설명 하는 덥석부리로서는 여간 미심쩍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랴? 모진위는 이미 자신들의 요구대로 수련상태에 들어가있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단계 의 진전을 암시하는 상태변화가 생기는 것을 예의주시하며 심법(心法)을 강론할 따름이었다. 덥석부리가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훈시에 들어갔다. "제삼행. '단 일각의 명상으로 만천겁생을 제할 수 있노라.' 지금 네가 하고있 는 천도심법의 초월성을 의미한다. 강호의 일반 내공수련은 육신에 그 틀을 두 고있어서 시공(時空)의 제한을 받느니라. 다시 말해 알맞은 장소에서 오래 수련 할수록 그 깊이가 더해지는 것이야. 그에 반해 천도심법은 모든 한계를 초월하 는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지. 기운을 느끼는 즉시 그 기운을 사용할 수 있고... 이상한 말로 들리겠지만 그 제한 역시 없다는 이야기지." 덥석부리는 한 행의 설명을 마치고 다시 모진위의 가슴에 머리를 들이댔다. 맥 박이 아직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덥석부리는 모진위가 생존 한 상태에서 무사히 자신의 순번을 마칠 수 있었다. 정작 문제가 발생한 것은 덥석부리의 다음 순번인 소복여인의 차례였다. 흑막주 역불기의 두 눈이 복면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봉룡사(鳳龍寺)?" "그러하옵니다. 막주." 모진위가 혈귀라고 불렀던 사내, 그러나 역불기라는 엄연한 이름 석 자를 가지 고 있는 사내, 흑막주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모진위가 동정원에 다시 나타날 줄을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정말 필생의 골치 덩이하 아니 할 수 없었다. 번번히 미꾸라지처럼 역불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 다. 녀석에게는 행운이겠지만 역불기로서는 평생 처음으로 당해보는 악운이자, 최대의 치욕이었다. 역불기는 모진위를 생각하기만 해도 골이 빠개질 지경이었 다. 이제와서는 그저 단순한 임무의 차원이 아니었다. 이미 자신의 모든 명예를 담보로 하는 오기 싸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일견 미궁 속으로 빠질 것만 같았던 추적작업은 다행히도 그럭저럭 눈에 띄는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얼핏 보기만한 몰골들이어서 용모파기가 쉽지는 않았지 만 워낙 특징이 뚜렷한 인물들이였기 때문이었다. 다 죽어가는병자하나와 밤송 이처럼 덥수룩한 수염의 칠척거한, 오척단구의 동글동글한 땅딸보, 말대가리처 럼 길쭉한 하관을 가진 사내, 소복차림의 여인... 이런 괴상한 모양새의 일행이 라면 그저 스쳐지나가기만 했어도 사람들은 쉽게 기억을 해내었다. 먼저 장강 나룻터에서 그들을 보았다는 목격자가 나타났고, 이어서 왕복선을 타고가던 일 단의 무리가 남경근처에서 하선했는데, 그들의 쌍판이 용모파기와 흡사하다는 결정적인 증언이 접수되었다. 그리고 상기진술들은 강안을 왕래하던 몇 몇 목격 자들에 의해서 그 신빙성이 뒷받침되었다. 결국, 역불기는 남경일대에 수색대를 집결시켰고, 한편으로는 맹의 지원을 얻 어서 모진위를 나꿔채간 세 남자와 한 여자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나머지를 동 원하였다. 범인들에 관한 정보수집에 파견되었던 금삼호(金三號)가 돌아온 것은 동정원이 괴멸된지 닷새가 지난 저녁이었다. 조용히 기다리던 금삼호가 역불기가 이제 다시 이야기를 들을 채비가 되었음 을 알아채고 보고를 계속하였다. "봉룡사는 호남지방 남동쪽 설봉산(雪峰山)자락에 위치한 불도정진에 주력을 하는 절이었습니다.이제는 사라졌지만 적어도 사십년전까지는 그랬다고합니 다." "사십년전?" "예, 사십년전 어느 날, 천도신경(天道神經)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금삼호의 긴 설명이 이어졌다. 봉룡사는 당시의 혼란한 시류속에서도 속세의 환란에 연연하지 않고, 불심을 닦기에 전념하던 보기드문 사찰이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사십이년전 어느 날, 대웅전(大雄殿)이 와르르 무너지는 횡액을 당하고 말았다. 봉룡사의 승려들은 모두들 흉조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극심한 불안감 속에서 대웅전을 재건하던 승려들은 무너진 석가래 근처에서 다 낡아빠 진 불경 한 권을 발견하게 되었다. 대웅전은 삼백년전에 창건된 아주 오래된 전 각이었는데, 그 대웅전보다 오래되면 오래됐지 그 보다 나중에 씌여졌다고는 도 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낡은 고서(古書)였다. 범어로 쓰여진 천도신경이라 는 제목의 고서로써 대단히 난해한 불도수련법을 내용으로 담고있었다. 승려들 은 이번에는 이것은 흉조가 아니라 대단한 길조라고 환성을 질렀다. 봉룡사에서 도 손꼽히는 학승(學僧)들이 곧 경서번역에 착수하였다. 오래지 않아서 대략적인 경서의 내용이 밝혀졌다. 그것은 내공수련법의 일종이 었는데, 남방불교나 서역에서 전해져 온 밀교(密敎)의 심법과 유사한 형태를 취 하고 있었다. 유마경(유마經)에 그 자취가 전해지는 수행법, 이미 오래전에 실전 되었다는 원시불교식 정(情), 기(氣), 심(心)의 수련법이었다. 봉룡사의 승려들을 가장 기쁘게 한 천도신경의 효능은 우선 두 가지였다. 일반적인 내공심법과 달 리 천도신경은 삼분지일의 노력으로 세배에 가까운 내공수련의 효과를 가져온 다는 것이 그 첫째였고, 천이통(天耳通), 천안통(天眼通) 등과 같은 전설의신기 (神技)를 이 수련법을 통해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두번째였다. 다음날부터 봉룡사의 전 승려가 천부신경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하나 둘 쓰러 져갔다. 혹자는 칠공(七孔)으로 피를 쏟으며 뒤로 자빠졌고, 혹자는 광인(狂人) 이 되어 길길이 날뛰다가 앞으로 업어졌다. 주화입마(走火入魔)였다. 봉룡사는 단 삼개월만에 삼분지일의 인원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봉룡사의 승려들은 포 기하지 않았다. 부처님의 계시를 거역하기에는 그들의 신심(信心), 혹은 탐심(貪 心)이 너무 깊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간 동료들이야 잘못된 방법으로 수련했기 에 그런 것이고, 자기만은 제대로 된 방법으로 하고있기 때문에 아직 무사한 것 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었다. 더군다나 한두달의 수련만에 얻어진 천부신경의 위력은 너무도 황홀한 것이었다. 화려한 미래가 그들을 유혹 하였다. 대웅전의 붕괴는 길조가 아니라 역시 불길한 징조였다는 것이 결과로 증명되 었다. 이삼년이 흘러가자 봉룡사에는 단 한 명의 승려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모두 죽었다는 말인가? 도대체 그게 이들의 정체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 가?" 설명이 길어지자 역불기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모진위와 네 사형제들의 용모 파기를 흔들며 말했다. 그러자 금삼호는 화급하게 단도직입적인 결론을 끄집어 내었다. "유일하게 한 명이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봉룡사의 주지로 있던 자인데, 현재 는 황애자(黃涯子)란 이름으로 불린다고..." 금삼호는 한 호흡에 내뱉고는 잠시 숨을 고르며 역불기의 안색을 살폈다. "황애자는 승려의 신분을 포기하고 절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 후로도 천도신경 의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허나, 황애자란 작자도 이미십여년전 부터 이 세상사람이 아니더군요. 그래도 후계자는 남겼지요. 저 작자들이 그 제 자들이라고 합니다. 털보가 양희구(梁熙鳩)란 놈이고, 하관이 빠른 놈이 개천호 (介泉浩), 난쟁이가 오몽생(吳夢生), 계집년이 하가령(河佳玲)이라고 합니다." 금삼호가 초상화를 하나 하나 지적하며 말했다. 보고가 끝났다. 역불기로부터 몇 가지 자잘한 질문이 오가겠지만 굵직한 정보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즈음 채가장의 추격자들도 거의 흑막의 턱 밑에까지 도달해있었다. "그래, 알아보시었습니까?" 채경령이 다급하게 물었지만 유진목은 그저 고개만 설래설래 저었다. 흑막의 뒤를 따르던 탐색조에게서 흑막이 무언가 유력한 단서를 제공해줄 정 보제공자를 찾아낸 것같다는 전갈이 당도한 것이 이틀전이었다. 유진목이 부랴 부랴 달려나갔음은 물론이었다. 채경령이 불안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살인멸구(殺人滅口)?" 유진목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흑막이 정보제공자를 살해했던 것이다. 그 정 보제공자가 무언가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가까스로 따라잡았던 흑막이 다시 저 만큼 달아나고 있다고채경령은 생각했다. 흑막의 수색작업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는 패거리들을 염탐한 결과, 흑막은 역시 구법당의 무리들이 조종하는 하부조직이라는 심증을 굳히게 되었다. 구법당의 지지세력이라면 신법당을 제외한 천하 기득권층의 전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었 다. 이번 염탐을 통해서 채경령은 전국의 거상대부와 관료는 물론이고, 강호의 몇몇 유력문파들도 흑막에 협조하고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채경령이 허탈한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 깨물었을 찰나, 소금을 전국 지부에 분 배하는 회달륜(回達輪)으로부터 새로운 낭보가 날아들었다. 채경령은 흑막이 이미 저 멀리 달아나 버린 것처럼 허탈해했지만 기실, 한 발 앞서고 있는 것은 어쩌면 채가장의 정보망일 수도 있었다. 채가장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조직이었다. 물론, 전국적인 정부조직망과 채소우를 제외한 천하 염상의 전체가 흑막을 돕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염상 전체가 합쳐도 채가장보 다는 규모가 작았으며, 정부조직은 명령과 보고의 전달체계에 있어서 그 기동성 이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정보수집의 가장 중요한 원천인 하부구조의 협조에서 차이가 났다. 대부분의 거상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시역법 (市易法)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그 시행을 방해했지만 채소우만은 그렇치 않았 다. 시역법을 충실하게 지키며 중소상인들을 보호해주었다. 그것이 드디어 결과 로 나타나고있었다. 유진목은 전국으로 분배되는 모든 소금가마에 모진위를 탈출시킨 범인들의 초 상화와 협조사항을 첨부시켰고, 그것들은 소금가마와 함께 빠르게 전국으로 배 포되었다. 마지막 단계의 소규모 염상들은 소금지게를 지고 심중산골까지 구석 구석 소금을 팔러다녔다. 그들이 도매상에 들러서 소금을 재공급받는 것을 초상 화는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기다리던 초상화들이 시역법으로 인한 채가장의 인 기를 등에 업고 배포 열흘만에 임자를 만났다. 회달륜도 흑막의 금삼호만큼이나 요령있는 보고자였다. 두툼한 보고서뭉치를 올림과 동시에 간단하게 내용을 요약하여 보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천(四川)의 강안(江安)에서 이태전까지 그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 한 이삼년 그곳에서 은거했던 것 같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그들이 누구인지 알려 지지는 않았고요. 다만 그 근방에서는 희노애락(喜怒哀樂) 사괴(四怪)라고 불리 웠다고 합니다. 사괴라고 불리운 까닭은 놈들의 언행이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었 기 때문입니다. 거의 광인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노골적으로 미친 놈이라고 부르 기에는 경미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서로 사제, 사형으로 호칭했다는 것을 보면 넷이서 사형제지간이란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회달륜이 초상화를 하나씩 들어보이며 말했다. 먼저 털보였다. "이 놈이 제일 맏형인데 희권(喜拳)이라는 별호를 얻었었지요. 권법(拳法)을 주로 사용하였고, 밤낮 뭐가 그렇게 기쁜지 헤벌쭉해서 다니기에 그렇게 부른답 니다." 이어서 말상과 땅달보였다. "하관이 빠른 놈이 노도(怒刀)라고 둘째, 작은 놈이 낙발(樂 )이라고 막내입니 다. 둘째는 도를 주무기로 하며 그저 세상만사에 화부터 내는지라 노도, 막내는 동발을 무기로 사용하며 세상만사를 모두 재미거리로 즐기는지라 낙발이라고 이름 붙혔답니다." 마지막으로 소복여인이었다. "유일한 여자로서 세째 애검(哀劍)이라 합니다. 이 여자에겐 세상살이 자체가 슬픔 그 자체인 모양입니다. 또한, 검을 지니고 다니므로 애검입니다." 회달륜이 초상화를내려놓고 다시 보고를 계속했다. "강안에서 소문나기로는 그들이 사람을 재료로 무슨 실험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납치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어쨌든 그들은 도저히 살 수 없는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이나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에게 접근해서 거래를 했다고 하더군요. 일테면, 어차피 죽을 목숨 우리에게 달라. 그러면 능력한도내 에서 당신의 마지막 소원이 이루워지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 뭐, 그런 식이었 던 모양입니다. 여하튼 사괴들은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이나 죽고싶어하는 사람 들을 끌어모았고,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서 그랬는지 살아서 밖으로 나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사람의 생체(生體)을 가지고 무엇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 쪽 사람들의 추측으로는 무언가 무공을 연마하 는 것같다는 소문이 가장 유력하다고 합니다. 정파의 사람들이 그런 괴상한 짓 거리를 곱게 보아주었을 리가 없지요. 몇 차례 마찰이 생기고 사괴는 그 지방에 서 종적을 감췄다고 합니다. 이상입니다." "수고하셨어요." 채경령은 회달륜의 설명이 끝나자 치하를 하고는후속조치를 지시하더니 별다 른 질문없이 막바로 보고서를 꼼꼼히 살폈다. 잠시 후, 보고서는 유진목의 손으 로 넘어갔다. 유진목이 보고서를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채경령이 말했다. "이상한 일이군요. 일전의 보고가 맞는다면 그 원수놈은 금사일협과 함께 있을 터인데, 어째서 하가(賀家)가 아닌 사괴가 동정원에 나타났을까요?" "하상곤이 도움을 줄 수 없는 처지이라는 이야기겠지요." 금사일협 하상곤은 강호인들에게 하가라는 호칭으로 무시당하기에는 너무 광 명정대한 협객이었다. 그러나 채경령의 입장으로서는 불구대천의 원수와 한 패 이고보니 자연스럽게 하대가 나왔다. 다른 좌석에서의 유진목이었다면 하상곤대 협이라는 호칭이 당연했으나 자리가 자리인 만큼 유진목도 슬그머니 대협이라 는 꼬리를 목구멍으로 삼키고 말았다. 유진목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해대고는 다 시 말을 이었다. "아마 이미 하상곤은 죽어다고 보는 것이 옳바른 상황판단일지도 모르겠습니 다." "예에?" 순간, 실내에 모여있는 중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하상곤은 이십여년전 관 일점홍 모중강대협을 단 일검에 무찌르고 강호에 화려하게 무위를 드러낸 이 후, 십여년 동안 혁혁한 위명을 떨쳤고, 이제와서는 사천지방의 고수하면 가장 먼저 강호인의 뇌리에 떠오르는 유명고수였다.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기인이사 (奇人異士)가 많다고는 하나, 유명하면 유명한 만큼 톡톡히 제값을 하기 마련 이었다. "흑막의 살귀들이 그렇게까지 강할 수가... ...? 소녀는 진정 믿을 수가 없어요." 채경령은 불신이 가득찬 그러나 약간은 절망적인 어조로 말했다. "물론 흑막의 살수들중에 정면대결로 감히 하상곤같은 절정고수를 감당할 자 는 거의 없다고봅니다." 유진목이 빙그레 웃으며 채경령을 격려하는 의미로 한 마디 끼워넣었다. "... ...?" 그렇다. 유진목이 듣기로는 흑막에 하상곤같은 고수가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 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흑막이 능기로 삼는 기습공격이라면 말이 되지만 그 흔적은 분명히 정면대결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하상곤이 모진위를 빼돌렸다는 첩보를 접하고는 유진목도 하오령을 현장답사 한 바가 있었다. 하오령 입구에 어지러히 흩어져있는 발자국들은 누군가 단둘이 서 정정당당한 대결을 벌였고, 그 둘 모두 절정고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 다. 아마 하상곤과 흑막의 누군가이리라. 정황은 여러모로 하상곤으로 사려되는 발자국의 주인이 패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유진목이 알고있는 바로는 그 정 도의 고수라면 흑막에서는 단 한 명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유진목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마 흑막주 역불기가 직접 나선 것 같습니다." 흥분과 경악을 반복하던 대화가 흐르고 흘러서 사괴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하 였다. 사괴가 다 죽어가는 모진위와 흥정을 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 가 공감하였다. 그러나 사괴가 동정원의 그 아수라장을 침투하는 위험을 감수하 면서까지 모진위를 데려가야 했을까하는 점에 대해서는 반론이 많았다. 사태파 악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남는 것보다는 밑지는 것이 많은 거래라고 모두 공 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 나름대로 500라인을 맞추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왠일 입니까? 하이텔이 나보다 더하기는 잘할테니 맞겠지요. 어쨌든 둘로 나눠 올릴 수 밖에 없겠습니다. 쓸데없이 게시판을 두 줄이나 차지하는 점 양해해주십시요. 흑수노계였습니다. #6341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37- 07/22 19:53 247 line 물론, 사괴들도 그 점에 대해서는 모두 분명하게 공감하고 있었다. 죽어가는 자나 죽으려는 자가 아무리 구하기 힘들다고 자신들의 목숨까지 담보로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분위기가 모진위에 대한 포기쪽으로 기울어갈 무 렵, 난데없이 노도 개천호가 신경질을 있는대로 부리며 자기 혼자만이라도 가겠 다며 억지를 써댔다. 좀 괴상한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사형제간의 우애가 두터웠 던 사괴는 속수무책으로 개천호에게 끌려갔다. 모든 상황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개천호가 모진위를 구하는데 그렇게 긍정적 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였던 것은 개천호 나름대로의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천호도 예전에는 비교적 잘 나가는 부농(富農)이었다. 그러던 것이 요 모양 요 꼴이로 타락한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차역제도(差役制度)였다. 관동(關東)의 부석산(父石山)기슭에 위치한 상촌(桑村)이라는 작은 마을의 부유농 개천호가 아역(衙役)에 끌려나가면서부터 사단이 벌어졌다. 원래 차역법이란 농촌의 유산자(有産者)들이 재산정도에 따라 교대로 지방관아 에 나아가 조세의 징수 및 관리, 치안유지 등의 업무를담당하는 것을 말한다. 개국 초기만해도 이러한 직무를 담당하는 일이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으며 여러 가지 특전도 주어졌으므로 희망자가 쇄도하였다고 개천호도 전해듣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으로 재정이 피폐해져서 세부담이 높아가기만 하던 개천 호의 시대에는 그런 이야기는 꿈과도 같은 것이었다. 개천호가 부여받게되는 차역은 아역이었는데 아역은 대부분 조세를 위시한 관 물(官物)을 관리하고 수송하는 일이었다. 관물을 관리하고, 운송하는 일은 제반 비용이 너무 막대하게 들어가므로 보통 재산이 많은 일(一), 이등호(二等戶)에게 부과되는 역무였는데, 개천호는 이등호는 커녕, 삼등호도 아니었지만 아역이 떨 어지고 말았다. 개천호가 관아로 나아가 부당함을 호소해보기도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아역을 담당할 만한 자원이 너무 적었던 것이다. 재 산이 많은 일, 이등호의 특권층들은 모두 관호(官戶)나 사관(寺觀: 불사와 도관, 즉 불교 및 도교의 사원) 등 차역이 면제되는 곳에 명의를 옮기고 명목상 그 소작인이 되어버리는 등의 방법으로 교묘하게 차역을 회피하였다. 개천호같이 끝발이 없는 축들이 아역을 교대로 담당할 수 밖에 없었다. 관물의 운송중에 발생하는 제반손실까지 아역들이 떠맡아야 했으니 부담이 과 중한 일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개천호의 친구중에는 농사일 밖에모르는 주제에 차역의 부담을 견디다못해서 정든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나가 부재지주로 차역 을 회피하는 자도 있었다. 어떤 친구는 과중한 차역으로 파산하여 유랑자가 되 기도 하였다. 결국, 개천호의 마을에는 역을 담당할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서 개천호에게는 보다 빈번하게 순번이 돌아왔으므로 더욱더 차역의 부담 이 심해졌다. 그래도 개천호는 대대손손 이어온 가문의 대문을 자기의 손으로는 닫을 수 없다는 생각에 어려운 가운데서도 굳굳하게 버텨나갔다. 어렵게 버티던 개천호에게 결국 겁난이 닥쳤다. 관물을 운송하던 도중, 도적떼 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물론 개천호와 같이 아역에 나선 사람들중에 무림인이 있을 수 없었다. 명문정파라고 뻐기기만하는 그 작자들은 모두 소림사나 무당파 로 대표되는 사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므로 재산들을 모두 절과 도관에 위 장편입시키고 한 놈도 아역에 나서지 않았던 것이었다. 개천호 등은 속절없이 관물을 강탈당하고 겨우 목숨만 건질 수 있었다. 개천호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관물을 관리하다가 생기는 제반 손실에 대 해서는 이유를 막론하고 담당하던 아역들이 보전, 충당해야했다. 강탈당한 물품 을 배상하려면 개천호 재산의 열 배를 처분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파산이었다. 개천호는 어떻해든 관물을 찾아볼 욕심으로 일대를 방황하였다. 그 러던 개천호가 견디고 못해 결국 집으로 돌아갔을 때는 집구석은 이미 개차반 이 되어있었다. 연로한 개천호의 부친은 자살해버렸다. 부모생존시에는 호구분할이 안되므로 재산이 병합되어 호등이 높아지는 불평등을 당해야했다. 개천호의 부친은 기울 어가는 가세에 부담을 덜어주고자 궁여지책으로 황천길을 택한 것이었다. 개천 호의 모친도 오십이 넘은 나이에 개가를 해야했다. 역시 같은 이유였다. 남편따 라 죽음을 택하는 것이 도리였지만 아들의 생사를 확인할 때까지는 어떡해든 황천길을 연장하고 싶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모친은 괘씸한 집안으로 시집을 간 덕분에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개천호의 귀가 반년전에 굶어죽 고 말았다. 개천호 부모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친이 비명횡사한지 두 달만에 개천호가 운송하던 관물은 손실로 처리되면서 개천호의 전재산은 정부 로 그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럭저럭 반반하다고 평판이 자자했던 아내는 대역죄 인 개천호의 죄를 눈감아준다는 탐관오리의 사탕발림에 관리들에게 몸을 농락 당하는 관비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개천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반역이었다. 반역의 와중에 개천호는 자신의 아내를 꼬여낸 탐관오리의 목숨을 빼았는 대신, 아내의 목숨을 빼았기고 말았다.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천하를 떠 돌던 개천호는 어느 날, 황애자를 만나게 되었다. 황애자는 개천호의 그런 점, 즉 삶을 부질없음을 절감하고있는 점을 높이 사서 개천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런 개천호에게 차역법의 폐해를 완전히 뜯어고친 모역법(募役法)이란 실로 천지개벽의 변화나 마찬가지였다. 개천호의 인생은 그렇게 망가졌지만 제이의 개천호가 나올 가능성이 원천봉쇄된 것이었다. 개천호는 모역법이 시행되는 것 을 지켜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모진위는 그런 모역법을 반대하며 다시 차역법으로 돌아가고자 애쓰는 구법당 무리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모진위의 운명은 어차리 죽는 쪽으로 예정되어있었지만 개천호로서는 자신들에게 목숨을 판 모진위가 자신이 아닌 그들의 손에 죽도록 수수방관하는 것이 영 자존심이 상했다. 이런 저런 의논끝 에 모진위 포기로 결론이 내려질 무렵, 개천호는 갑자기 피가 거꾸로 솟구치고 이성이 마비되었다. 개천호가 이성을 되찾았을 때는 이미 자신의 사랑하는 사형 제들을 모두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로 합의가 끝난 후였다. 그때가서 후회 하며 사형제들을 만류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돌아오는 것은 퉁명스런 면박 밖에 없었다. 개천호가 왠만한 일에는 마음의 동요가 없을 것 같은 인물이라서 황애자의 눈 에 들었다면 애검 하가령은 실성한 여자이기 때문에 황애자가 거둬들인 경우였 다. 실성한 여자는 제멋대로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마 음의 동요가 없다는 것과 통하는 면이 있었다. 하가령이 생각하기에 이미 오래 전에 입문한 대사형 양희구를 제외하고는 모 두 상통하는 인성을 가지고 있었다. 막내 오몽생도 그랬다. 하가령이 입문하고 서너달이 경과한 어느 날, 사부가 얼빠진 바보 한 명을 데리고 왔다. 황애자사 부는 남방지방을 여행하다가 어느 작은 절에서 사미승이던 낙발 오몽생을 만났 다고 했다. 오몽생은 한 마디로 정신이 모자란 바보였다. 슬픔도 괴로움도 몰랐 다. 아마 그 점이 사부의 마음을 잡아끌었으리라고 하가령은 생각했다. 하가령은 잡념을 떨쳐버리 듯, 눈빛에 애절한 비애를 담아내며 모진위를 바라 보았다. 드디어 자신에게 배정된 강론을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신 후, 봉룡사에서 실패한 이유를 분석하기 시작하셨지. 먼저, 사부께서는 천도심법을 수련하기위해서는 육체단련과 부동심 (不動心)단련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으셨다. 봉룡사의 스님들은 부동심은 어느 정도 단련이 되어있었지만 몸상태는 그다지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었지. 그건 내공심법에 있어서 쌍벽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소림사와 무당파를 보면 알 수가 있지. 소림사나 무당파는 불(佛)과 선(仙)을 닦는 종교단체이지 무 림문파는아니야.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양곳에는 무림의 고수들이 용담호혈처 럼 득실거리지. 참선과 도를 닦기 위해서는 육체의 단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반 증하는 현상이지. 소림사의 스님들이라면 누구나 예외없이 역근경을 병행해서 수련하지. 비록 무승(武僧)이 아니더라도 말이야. 그러니까 소림이나 무당의 무 공은 참선을 위한 수행의 일부분으로 몸단련을 하던 도중에 얻게된 부산물이라 는 게지. 하지만 봉룡사의 스님들은 대부분 선승이나 무승이 아니고, 학승이었 어. 천도심법이 심화되자 결국 몸이 정신을 지탱을하지 못하게 된거지. 그럼, 육신의 그릇은 튼튼하지만 반대로 부동심을 위한 정신단련이 미약한 강호인들 은 어떨까? 강호인들의 경우는 좀 달라. 무림에 존재하는 심법의 대부분은 상단 전, 즉 신기(神氣)의 수련은 취급하지 않아. 하단전의 정기(精氣)를 단련하는 방 법이 전부야. 그러니 강호인들은 부동심이 없어도 위험할 것은 없지." 하가령이 잠시 강론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다음으로 사부님께서는 조력자가 없었던 것이 실패의 한 이유라고 생각하셨 지. 다시 강호의 예를 들자면 무공비급만 가지고는 무공을익히기가 곤란한 것 과 같은 이치야. '비급 백 보에 사부 한 보'라는 말도 있잖아. 비급을 보고 백 번을 걷는 것보다 사부의 가르침으로 한 보를 걷는 것이 무공 연성에는 더욱 도움이 된다는 뜻이지. 그 것이 사부님이 재질을 갖춘 제자를 백방으로 수소문 하신 이유야. 하지만 도력이 높은 도인도, 무공이 높은 고수도 천도신경 앞에서 는 모두 소용없었지..." 하가령은 즉시 말을 멈추었다. 또 실수였다. 이것은 심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 니라 심법을 익히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니 즉각 중단하라는 위협에 가까운 넋두리였다. 하가령은 때때로 감상에 젖은 나머지 그런 실수를 범하고는 하였 다. 그것은 시술자의 생명을 보다 단축시키는 역할 이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 었다. 천도심법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면 시전자는 마음속의 동요를 모두 가라 앉혀야 했다. 천도신경자체가 원시불교의 수련법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참선의 최 고경지인 삼매경(三昧境), 즉 무상무념을 요구하였다. 천도심법은 가슴속에서 일 고 지는 모든 잡념과 감정이 극심한 고통으로 변화시켰고 시전자들을 파멸로 이끌었다. 하가령의 경우는 슬픔이 문제였다. 육신이 파열될 듯한 고통이 엄습하며 하가 령을 주화입마로 몰고갔다. 하지만 하가령의 과거는 너무도 애통한 것이어서 하 가령은 그 슬픔을 어찌해 볼 여지가 없었다. 하가령은 될테로 되라는 심정으로 슬픔속에 파묻혔다. 육체의 고통은 그녀의 슬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자 슬픔이 그녀 자체가 되어버렸다. 슬픔의 힘으로 내기(內氣)가 경락을 따 라흘렀다. 하가령은 그렇게 주화입마와 죽음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살아남은 네 사람이 모두 비슷한 경우였다. 대사형 양희구는 기쁨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었다. 천하제일의 내공을 익히고 있다는 기쁨이 그에 게 모든 것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대사형은 강호의 무공이란 원래부 터 그 수련과정에 있어서 참지못할 고통을 동반하는 것으로 알고있었다. 고무래 놓고 정(丁)자도 모르는 상무식꾼 대사형은 고통이 커질수록 이제 자신이 보다 상승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라고 믿고 고통마저도 기쁨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사형 개천호의 경우는 너무도 당연히 분노였다. 엄청난 분노의 불길이 모든 것을 불태웠던 것이다. 아무 생각없는 사사제 오몽생은 내공수련을 위한 운기조 식이 너무도 심심했는지 마음속의 자극을 찾아내어 고통마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놀이감으로 취급하였던 모양이었다. 네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세상을 떠 났다. 사부님마저도. 살아남은 네명의 사형제에게는 아직도 문제가 산적해있었다. 개천호는 화를 내 지않으면 힘을 쓸 수가 없었고, 하가령은 슬픔을 동반하지 않고는 내력을 끌어 올릴 수 없었다. 모두가 그런 식이었다. 감정의 강도가 강할수록 내공은 더욱 위력을 발휘하였다. 또한, 심성자체가 그런 방향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양희구 는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고서는 감히 슬퍼할 엄두도 낼 수 없었으며, 오몽생은 보통 괴로운 처지가 아니고서는 괴로움을 표현할 수 없게되었다. 그 경향은 시 간이 경과하면 경과할수록 더욱 심해지기만 하였다. 감정의 포로가 되어 그들은 조금씩 미쳐가고 있었다. 삼매지경에 이르는 길은 오랜 수련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는 것으로 수년, 심 하게는 수십년의 수련해도 이루기 어려운 경지였다. 사실, 무상무념은 숱한 심 마들과 싸우며 잡념을 하나하나 없애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가령을 비롯한 사괴가 이룩한 것은 무상무념이 아니었다. 일종의 전이(轉移) 였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잊는 방법은 무념무상이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인 간은 감정이 극도로 흥분되었을때 자신의 존재를 잊게 된다. 사괴들은 자신들이 그러했음을 깨달게 되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서 필경 자신들이 미쳐버리거거나 죽게 된다는 사실도 깨달게 되었다. 그들의 감정은 이미 그들의 통제를 벗어나 버렸다. 천도신경에 있어서 수련의 요체는 바로 통제력이었다. 사괴는 곧 위기탈출을 위한 연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수많은 시체만 양산했 을 뿐 연구는 거의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인체실험은 그 전제조 건부터 피실험자의 희생이 불가피했다. 단계의 진전에 따라서 육체의 단련과 정 신의 수련이 동반되어야했지만 사괴는 시간의 경과를 고려치 않고 천도신경의 모든 과정을 한 덩어리로 함축시켰다. 일순간의 깨달음, 그것만이 해결책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 모진위에게도 같은 과정을 답습시키고 있었다. 아니, 생사 의 경계에서 허덕이고있는 모진위의 경우는 그나마의 여유도 없었으므로 그 함 축은 보다 더 압축되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하가령의 강론은 상쾌를 벗어난 것이었다. 자살을 확고히 결 심한 자라도 본능적으로 죽음의 길을 주저하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모진위는 자 살하려는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하가령은 객적은 소리는 집 어치우고 본격적인 과정으로 들어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하가령은 그렇게 슬픈 내용이 담긴 구절도 아니건만 사뭇 애조띤 가락으로 슬프고도 슬프게 구 결을 읆조렸다. 눈으로부터 시작된다. 인체의 정화는 위로 흘러 빈 공간으로 집중되어야한다. 빛은 몸 속에도 몸 밖에도 있는 것은 아니다. 해와 달이 산천 대지를 비추니 그 모든 것이 빛이다. 모든 사고와 명철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빛이 회전하면 하늘과 땅과 산과 강 일체도 동시에 회전하기 시작한다. 한껏 처량한 낭송을 마친 하가령은 약간은 슬픈 기분을 억누른 채 담담하게 설명에 들어갔다. "상기 구결에서 눈이란 상단전을 말하고, 빛은 기운을 말한다. 빛이 사물을 비 추는 것은 심법의 수련을 통해서 얻은 기운의 무한성과 자유로움을 말하는 것 이고...구결의 말미에 나오는 회전은 운기(運氣)를 말함이야. 운기를 소주천(小 周天), 대주천(大周天)따위의 단어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를거야. 천도심법으로 기운을 돌리다보면 기운이 경락을 통해서 육신을 타고 회전하다가 더욱 진행되 어서 육신의 주위를 감싸고 돌게되는데... 어느 단계에 이르면 기운이 점 점 신 체의 주위로 확대되어 나중에는 천하만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회전하고있다고 느낄 정도지. 내기와 주변사물의 회전을 느끼게 된 후 가속도가 붙으면 백회혈 (百會穴)에 압력감이 느껴지고 때가 무르익으면백회가 열리게 될 것이야. 임독 (任督)양맥이 합쳐지고 생사현관(生死玄關)이 뚫림을 말하는 것이야. 그 열린 통 로로 들어온 내기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와 회음부를 지나몸의 정중앙을 따라서 상승하여 백회로 되돌아오는 것이지.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냥 그 흐름을 느끼 라는 것이야. 일부러 그런 흐름을 만들려고 애쓸 필요는 없어. 이것이 소주천이 라는 것이지. 천도심법은 소주천이 이루고난 후에야 비로서 기운을 활용하게 되 는 것인데 이때부터는 강호에서 말하는 소위 내공(內功)이라고 할 수 있지." 일사천리로설명을 끝내고 모진위에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하가령은 기절초풍 을 하고말았다. 모진위의 온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으며 미미해서 거의 느끼기도 힘들었던 모진위의 맥동이 불규칙하게 발작하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좋지않은 상태 였다. 전형적인 회광반조(廻光反照)의 조짐으로 하가령에게는 느껴졌다. 하지만 꼭 그렇다는 자신은 없었다. 하가령은 다급하게 조언을 구하였다. "대사형! 큰 일 났어요! 이사형, 사사제! 얼른 일어나봐!" 사괴가 일시에 모진위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놀랍게도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으 로 통일되어있었다. 아마 이 광경을 모진위가 보았다면 감짝 놀라고 말았을 것 이다. 모진위는 사괴의 표정이 같은 감정상태를 전달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볼 기회가 없을 것이다. 사괴의 눈에는 아 무리 봐도 모진위가 임종의 순간을 맞고있는 것같았다. ================================================================ 주1.)육신통: 불가육통(佛家六通)이라고도 하며, 불경에 의하면 득도한 부처의 여섯 가지 신통력. 신족통(神足通),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 通),천안통(天眼通), 누진통(漏盡通)으로 열거한 순서대로 단계를 밟아 가며 발 전한다. 수행을 통해 얻는 훌륭한 능력이기는 하지만 수행의 목적은 아니다. 주2.) 천도심법이란 명칭으로 상기 사용된 수련법의 내용은 무림동 자료실에 있 는 '초능련 수련'이라는 제목의 자료(작자의 성함과 아이디는 지금 기억이 안나 므로 나중에 확인해서 정확한 출처를 밝히겠습니다.)가 출처임을 밝힙니다. 수 련과정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사실이 확인안된 본인의 창작인 경우도 있으나, 일 부 소설적인 상상을제외하고는 가능한한 인용처의 내용에 따랐습니다. 작자께서 실제로 경험한 내용을 서술하신 것이니 현실과 무관한 내공수련법이 아님을 상기시켜드립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용무권부분은 무예수련란의 태극 권을 참고하였고, 추혼십이절검법의 부분은 자료실에 있는 미야모도 무사시의 독행도에 나오는 수련법을 많이 인용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주인공 모진위의 수 련법은 가능한한 실현가능한 무예수련법에 기초한 것입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6400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38- 07/27 04:36 222 line 모진위는 사괴의 지시에 따라 천도신경의 수련에 들어갔다. 천도신경의 첫번째 장은 지감수련(知感修練)에 관한 것이었다. 지감수련은 시전자가 천도심법에 소 질을 가지고 있는지 시험해보는 면접시험과도 같은 것인 동시에 천도심법의 첫 단계라고 할 수 있었다. 지감수련은 남방불교에서 '위빠사나'라고 부르는 것으로 원래는 구도(求道)를 위해서 수련하는 것이지만 내공수련의 기초로 활용할 경우 대단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수련방식이었다. 일반적인 강호심법의 경우 기초적인 토납법을 터득한 수련자가 심법에 들어 득기(得氣: 기를 느끼는 것)에 이르기까지 보통 일년이상 걸리는 것에 비하여 원시불교식 지감수련은 열흘정도면 기감(氣感)을 얻을 수가 있었다. 사괴의 첫번째 수업도 역시 지감의 수련이었다. 모진위는 사괴의 지시에 따라 무위조식으로 호흡을 하면서 마음의 눈으로 자신의 몸을 지켜보았다. 여러가지 잡념과 함께 몸의 이곳 저곳이 가렵고 저려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감각이 점차 세분화하기 시작했다. 모진위는 사괴의 주의사항에 유념하면서 그런 몸의 감각에 반응해나갔다. 빰이 가려우면 빰이 가렵다고 마음 속으로 불러보았고, 종아리가 따금거리면 따금거린다고 불러보았다. 그렇게 자꾸 반복해 나가는 사이에 어느새 신체의 구 석구석을 모두 둘러보게 되었다. 사괴들은 지감수련을 하면 모진위자신이 자신의 몸이 얼마나 예민한 지 새삼 깨달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또한,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아마 닷새나 엿새정 도를 연습한 후에는 내부 구석구석의 경략을 부지불식간에 조금씩 느낄 수 있 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전신 지감의 시작이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기 의 흐름을 느낄 수 있게 발전되고 더 나아가서 자신의 마음까지도 볼 수 있도 록 발전되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어찌보면 사실 모진위는 지감수련에 상당히 불리한 육체적 특질을 가지고 있 었다. 모진위는 정상인에 비해서 지나치게 둔감한 오감(五感)을 가지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제대로 된 경락구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탄생시 만산창이로 끊어 져 있던 경락들을 염노선지 황경이 그저 단전까지 만이라도 통하도록 얼기설기 엮어놓은 상태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모진위가 아니라 세상에 없는 민감한 신경 의 소유자가 전심을 다해도 모진위의 몸속에서는 기를 느끼기가 불가능할 정도 로 모진위의 선천진기는 고갈상태에 빠져있었다. 사괴들도 모진위의 그런 약점 들을 알고는 크게 실망하고 어떤 대단한 진전을 모진위에게 기대하지 않고있었 다. 그러나 사괴의 그런 예상과는 달리 실제로 지감훈련에 들어서자 모진위는 지감훈련을 했다고 할 것도 없이 시작하자마자 월등한 경지에 도달해버렸다. 따 라서 진전을 나타내는 과정에 대한 반응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사괴 네 명 모두 모진위에게서 특별한 변화를 감지할 수는 없었다. 모진위는 오감이 발달하지 않은 대신 육감(六感)이 남다르게 발달해 있었고, 기감 또한 예민하였다. 그것은 모진위가 무위조식과 용무권의 높은 경지에 다달 아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무위조식은 뱃속에서 태아가 행하는 단전과 피부를 통한 호흡과 같은 방식의 호흡법이었다. 모진위는 끊임없이 발생하는 탁 기(濁氣)들로 인해서 내부의 상태가 혼탁해지면 무위조식을 통해서 정기(精氣) 를 빨아들여서 육체의 내부를 청소하였다. 이것은 본능적으로 내기의 상태를 감 지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진위는 모친의 뱃 속에서부터 모친의 무위 조식을 따라서 그 일을 수행해오고있었던 터였다. 용무권도 마찬가지였다. 모진위는 일찌기 출운용무를 통해서 주변의 기를 인식 하고부터는 언제나 주변의 기를 활용하는 방법으로 용무권을 시전해왔다. 용무 권의 그런 원리를 이용해서 내공이 한 줌도 없는 상태에서도 막강한 내공을 전 제조건으로하는 추혼십이검조차 연성했을 정도였다. 모진위에게는 천도신경에 적혀있는 지감수련의 초기과정을 모두 생략해도 될 정도의 훌륭한 기감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도심법의 제이단계는 축기(蓄氣)였다. 대체로 열흘가량의 지감 수련후 시작 되는 과정이었지만 모진위에게는 그 단계조차도 사괴의 설명속도가 그대로 그 의 수련속도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도심법에서 가장 중요한 수련이 바로 이 지감수련이었다. 천도심법은 지감에 서 시작되고 지감에서 끝나는 불도수행법이었다. 왜냐하면 지감이 극도에 이르 면 수행자는 자신의 본성을 볼 수있게 되고 그것이 불교의 득도(得道)요, 그것 이 선도에서 이르는 성통(聖通)이기 때문이었다. 강호의 뛰어난 영재라 해도 소 주천을 이루기까지는 적어도 삼사년이 소요된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지감이 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은데서 연유했다. 기가 아무리 충만해도 경락을 느끼지 못하 면 기는 흐르지 못하고 고여있게 되기 마련이었다. 의식을 단전에 두어라. 모진위는 그 설교가 떨어지자마자 단전에 의식을 형성 하였다. 양손을 단전위에 모아라. 소위 집단법(集丹法: 외부에 기를 끌어들여 축기함.) 이라는 것이었는데 모진위는 사지를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은 상태였으므로 마 음의 손을 단전에 모았다. 모진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본래 그럴 수만 있다면 마음의 손을 모으는 것이 더욱 훌륭한 방법이었다. 이 단계에는 천 도심법 고유의 호흡법을 병행해야 했지만 사괴들은 모진위에게 무위조식에 대 한 설명을 듣고는 호흡법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였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무위 조식은 천도심법의 최고 경지에서 얻어져야 마땅한 그런 높은 경지의 호흡법이 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모진위에게는 수련과정의 행운이었다. 새로운 호흡법 을 배우게 되면 호흡 자체에 신경쓰게 되기 마련이었다. 숨을 쉬는 자연스러운 행위에 대해서 신경을 쓴다는 것, 그것은 무념무상을 지향하는 수행자에 있어서 독(毒)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호흡보다는 의식집중이 실제적으로 축기의 양을 좌우하는 요소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모진위에게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과제가 떨어졌다. 모든 것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기를 순환시켜 몸을 정화하라. 기초적인 운기과정(運氣過程)이 시작되었다. 단 전에 형성된 의식을 일단 머리꼭대기의 백회혈(百會穴)로 이동시켜야했다. 집중 순서는 백회에서 얼굴로, 그리고 그 정중앙선을 따라 목줄기를 통과해서 중단전 인 가슴에 이르렀다가 복부를 경유하여다시 단전으로 돌아가는 순서였다. 단전에 도착한 의식은 다시 양 허벅지를 따라서 무릎, 종아리를 타고 내려가야 했다. 발바닥의 용천혈(用天穴)이 그 기착점이었다. 그와 같은 순서로 머리꼭지인 백회부터 우주의 맑은 기운을 받아서 머리끝에 서 발끝까지 자신의 몸을 씻어내리라는 사괴들의 지시였다. 또한, 호흡의 시작이자 마지막인 중단전 즉, 가슴에서 시작하여 양어깨로 그리 고 양팔을 따라서 팔굽, 팔목, 손을 통과해서 장심(掌心)을 출구로 해서 가슴에 맺힌 모든 화기(火氣)를 밖으로 배출시키라고 지시하였다. 정기를 받아드려 탁기를 몰아내는 것이야말로 모진위의 전공이라 할 수 있었 다. 그러나 모진위에게는 일반적인 기의 흐름이 존재할 수 없었다. 피부의 모든 모공(毛孔)이 입구였고, 출구였으며, 모든 기도(氣道)는 단전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진위에게 있어서 정상적인 방법의 축기와 운기란 애당초 불가능 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진위는 사괴의 지시대로 운기를 수행하였다. 그러자 외 부에서 흡입된 기운들이 갈 길을 잃어버리고 사납게 날뛰며 좌충우돌하기 시작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파국(破局)에 이르지 않고 있었다. 흥분만 하지않으면 비교적 사려깊은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개천호가 다음 과정을 맡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개천호는 지감수련만이 배움이 필요한 것일 뿐 스스로 수련하게 해서 스스로 다음 단계의 축기와 운기를 깨달게 하는 것이 진짜 수련과정이라는 신념을 가 지고 있었다. 물론, 다른 사괴들도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스스로 길을 찾아가기 를 기다리기에는 모진위를 위해서 마련된 시간이 너무도 촉박했던 것이다. 하지 만 개천호는 그것이 천도심법에서의 자신들의 한계를 극복하는 필수적인 조건 으로 굳게 믿고 사형제들과의 타협을 배신했던 것이었다. 개천호는 모진위에게 굳이 축기와 운기를 강요하지 않았고, 그것이 모진위가 천도심법을 계속 진행해 나가는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렇게해서 천도신경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는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개천호의 반란을 모르고있던 나머지 사괴들은 모진위에게 각종 부작용을 병 행시키며 진행속도에 채찍을 가하였다. 하가령이 드디어 모진위의 발작을 발견 하게 되기까지는 채 사흘도 경과하지 않은 시점일 정도였다. 모진위는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기운들을 억지로 참아가며 하가령의 설명대로 수련을 강행하였다. 고통을 참아내는데는 모진위도 일가견이 있는 청년이었다. 어차피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린 다음에야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모진위는 하가령의 지시에 따라 충실하게 구결대로 시전하고자 전력을 집중하 였다. "천도심법으로 기운을 돌리다보면 기운이 경락을 통해서 육신을 타고 회전하 다가..."까지 하가령이 말했을 때 모진위는 이미 자신의 주변까지 회전되고 있음 을 느꼈고, "더욱 진행되어서 육신의 주위를 감싸고 돌게되는데... 어느 단계에 이르면 기운이 점 점 신체의 주위로 확대되어..."까지 말했을 때는 이미 천하의 삼라만상이 모진위를 중심으로 회전하고있었다. 무위조식과 출운용무를 익힌 모 진위로서는 대자연의 기운과 합체되는 자신을 익히 경험했던 터였다. 문제는 모 진위의 몸속으로 유입된 기가 제대로 회전을 하지못하고 좌충우돌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내기의 충돌압력이 점차 강해졌다. 하가령이 "나중에는 천하만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회전하고있다고... ..."의 대목 을 지나서 "내기와 주변사물의 회전을 느끼게 된 후 가속도가 붙으면 백회혈에 압력감이 느껴지고 때가 무르익으면 백회가 열리게 될 것이야."라고 말하는 대 목에 이르러서는 백회혈은 물론, 절맥된 모든 혈마다 막힌 곳을 뚫고나가려는 내기의 압력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조되었다. "임독양맥이 합쳐지고 생사현관이 뚫림을 말하는 것이야. 그 열린 통로로 들어 온 내기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와 회음부를 지나 몸의 정중앙을 따라서 상승하 여 백회로 되돌아오는 것이지.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냥 그 흐름을 느끼라는 것 이야. 일부러 그런 흐름을 만들려고 애쓸 필요는 없어."라고 소주천의 완성을 설명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모진위의 육신이 폭발할 지경이 되었다. 그 러나 제삼차 원화촉발술로 인해서 선천진기가 거의 바닥난 모진위의 단전에는 단 한 줌의 축기도 이루워지지 않고 단 일회전의 운기도 이루워지지 않았다. 결 국 압력을 견디지 못한 모진위의 육신이 발작을 이르키고 말았다. 내력이 없는 모진위였으므로 주화입마는 아니었다. 주화입마가 아니니 사괴가 원인을 모르고 허둥대는 것은 당연하였다. "회광반조같지?" 모든 사물을 비관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애검하가령이 물었다. 그러자 모든 사 물을 낙관적으로 보는 낙발 오몽생이 반박하였다. "삼(三)누이, 회광반조는 꺼져가는 촛불이 마지막으로 반짝하고 환해졌다가 팍 하고 꺼져버린다는 것에 빚댄 사람이 죽기 전에 한 번 기력을 차리는 현상을 말하는거유. 저게 어디 원기를 회복하는 모습같수? 회광반조는 절대 아니야." 거기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은 당연히 모든 사물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노도 개천호의 몫이었다. "사사제, 회광반조든 아니든 이게 좋은 증상은 아니잖아. 곧 저 세상으로 떠날 징조인 것만은 분명한데 회공반조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지금이 그거 가지고 갑논을박할 때야?" 대미(大尾)를 장식한 것은 모든 사물을 긍적적으로 바라보는 사괴의 우두머리 희권 양희구였다. "사제들 진정하게. 앞으로 수십년은 넉근히 백년회로할 만한, 건강한 자들도 심법에 들어가서는 열흘을 견디었던 자가 드물지. 그런데 이 친구는 그냥 놔둬 도 한 시진을 버티지 못할 것같은 다 죽어가는 목숨이었는데 심법에 들어서는 벌써 사흘이나 지났는데도 멀쩡하게 살아있어. 어쩌면 심법이 제대로 먹히고 있 다는 반증일지도 몰라. 자아, 할 수 있는데까지 최선을 다해보자구." 대사형의 채근에 모두가 서두르기 시작했다. 대사형이 등위의 명문혈과 머리의 백회혈을 맡았고, 둘째가 양손의 장심을, 셋째가 쌍수를 모아서 단전을, 막내가 양쪽 발바닥의 용천혈을 맡았다. 네 사람이 모진위의 요혈을 쥐고 모진위를 둘 러싼 상태가 되었다. 모진위의 내력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 사괴들은 진기를 불 어넣고 사기(邪氣)를 뽑아내며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기에는 양기(陽氣)와 음기(陰氣)가 있으며, 양기에는 정기(精氣)와 신기(神氣)가 있었다. 양기가 생명의 기운이라면 음기는 죽은 자의 기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음기중 하나인 탁기가 많으면 생명체는 병에 걸리기 마련이고, 더 나아가서 음 기가 충만해지면 죽음에 문턱을 넘어서게 된다. 정기는 강호에서 말하는 소주 천, 대주천에 의해서 발생하는 기운, 즉 내공을 말한다. 신기는 정신적인 기운이 며 육신통과 같은 신적인 능력이 바로 신기라고 할 수 있었다. 대주천이 바로 상단전에 축기가 이루어지며 외부에서 신기가 유입되는 그런 경지의 운기조식 을 말하는 것이었다. 모진위는 양기가 거의고갈되고 음기만이 충만한 상태였다. 그러나 처음 모진 위를 대면했을 때, 사괴는 한편으로 실망을 했고, 한편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모 진위가 보유하고있는 양기의 대부분은 신기였다. 모진위의 생존본능은 험란한 인생의 방해물들을 직면하면서 자신의 정기가 부족함을 인식하고 그를 보완하 기 위해서 육감등의 신기를 개발하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하였다. 특히, 흑막에 서의 살수수련은 모진위가 신기를 배양하는 최고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바로 이 신기가 천도심법으로 수련하는 기운의 주체였다. 신기에 의해서 소주천, 대 주천을 이루게 되면 정기의 수련보다 열 배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원리 에서 비롯되었다. 사괴는 모진위의 몸에 양기를 보충하고, 음기를 몰아내기 위해서, 그리고 천방 지축으로 길길히 날뛰는 모진위의 내기를 제어하기 위해서 네 사람이 모진위와 한 몸이 되어 사투를 벌였다. 사괴가 모두 기진맥진하여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 되어서야 간신히 모진위의 내기를 제압되었다. 모진위가 위기를 넘겼음을 감지 하자 사괴는 모두 그 자리에 벌러덩 자빠져버렸다. 그리고 한참동안 꼼짝도 못 한 채, 숨을 헐떡거려야했다. 모두 초죽음이 되었지만 사괴의 눈에서는 새로운 희망의 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즈음해서 조정은 이례적인 포고령을 전국에 내렸다. 채소우대인의 살해범 모 진위에 대한 체포령이었다. 모진위의 포획령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건의한 무리 들은 신법당이었다. 구법당측에서도 갖은 핑계로 방해공작을 하기는 했지만 너 무도 뚜렷한 명분 앞에서는 구법당의 반대가 아무래도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래서 구법당쪽이 들고나온 의견이 모진위의 추살령(追殺鈴)이었다. 이번에는 신법당에서 불길처럼 일어나 반대하였다. 흉적 모진위의 배후를 밝혀야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골치를 앓던 황재가 양쪽의 의견을 조정해주었다. 생포를 전 제로 한 추살령이었다. 사실 말이 체포령이지 향후에 벌어질 구법당의 은밀한 뒷공작을 감안한다면 추살령이나 다름이 없었다. 만만치 않은 포상금이 전국 각지의 각종 정보업자와 인간사냥꾼들이 남경방면 으로 끌어들었다. 한숨을 돌린 사괴의 막내 오몽생이 식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서하사부근까지 내려왔을 때 체포령이 그 파급효과를 발휘하였다. 남경에서 오 십 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서하사가 그들의 수색의 범위 안에 들어있음은 너무 도 당연했다. 그중에는 흑막에서 정보를 전해받은 노련한 탐색꾼도 서너 명 포 함되어 있었다. 역불기를 비롯한 흑막의 일당들이 땅딸보 오몽생의 용모파기와 비슷한 자가 서하사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달음에 서하사로 달려갔다. 채가 장도 정보망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흑막의 일패가 양주를 떠난 지, 한식경 도 흐르기 전에 모든 채비를 갖춘 유진목의 일행이 그들의 가주 채경령을 모시 고 서하사로 떠났다. 한사코 만류해보았지만 아무도 채경령을 막을 수는 없었 다. 무공을 모르는 채경령이 모진위 체포에 걸림돌이 되면 되었지 도움이 될 턱 이 없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원수를 직접 처단해야 한다는 것이 채경령의 억 지는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 주1) '위빠사나'가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 원칙에 벗어나는 일이기는 하 나, 그냥 발음대로 인용하였습니다. 나중에라도 정확한 한자용어를 알게되면 수 정하겠으니 양해바랍니다. 적은 분량을 올려서 죄송합니다. 여기서부터 12장이 끝나고 2부의 마지막인 13 장 표상공주(表象空註)편이 시작되므로 편의상 여기까지만 올립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惻諛瓦늄윱求? #6441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39- 07/30 03:13 438 line 13. 표상공주(表象空註) 사괴는 마침내 모진위에게 천도신경의 마지막 단계인 신공수련법(神功修練法) 을 전수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신공수련이야말로 천도신경 최대의 난관이었다. 지금까지 사괴가 끌어들인 인원중 운기의 과정까지는 더러 통과한 사람이 있었 지만 마지막 천지신공(天地神功)을 익히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자는 하나도 없었 다. 사괴들 자신만이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단 네 명의 생존자였다. 그러나 사 괴 들마저 신공수련의 궁극까지 접근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신공수련은 천지에 흩어져있는 신기를 자신의 몸속으로 끌어드리는 작 업이었다. 몸속으로 유입되는 신기라고해서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중에 는 사기(邪氣)도 있었고, 귀기(鬼氣)도 있었다. 신공수련에 들면 허상(虛想)이 난 무하고 그 허상때문에 처절한 심리적 고통과 싸워야했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 몸단련과 마음의 수양은 필수였다. 몸이 신기를 담는 그릇이라면 마음은 사기와 귀기를 다스리는 해독제와 같은 것이었다. 그릇이 단단하지 못하면 육신이 파괴되어 그대로 주화입마에 들기 마 련이었고, 마음이 올곧지 못하다면 사기에 의해서 미쳐버리기 십상이었다. 물론, 너무도 당연히 모진위는 천도신경을 수련하기위한 몸단련도 마음수양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신공에 임한다는 것은 자살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그러 나 모진위는 어차피 수명이 다한 몸으로써 이미 자신의 영혼을 사괴들에게 팔 아버린 터였다. 개천호의 마지막 당부가 모진위의 귓전을 때렸다. "요는 믿음이다. 무조건 신기의 존재를 믿어야한다. 천하만상이 네 자신이고, 천지 허공에 흩어져있는 기운들이 네 자신의 것임을 믿어야한다. 또 하나의 요 체는 통제력이다. 허상과 악몽에게 자신의 본체(本體)를 빼앗겨서는 안된다." 모진위는 다시 천도심법에 들어갔다. 육신의 내부가 마음의 눈앞에 펼쳐지고, 정기가 유입되어 모진위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씻어내렸다. 그리고 주위의 모 든 것들이 모진위를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삼라만상이 회전하고, 우주전 체가 회전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모진위는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우주 본체에 내재되어있는 자기 자신을 부르기 시작했다. 대자연과 하나로 일체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활짝열어놓았 다. 그러자 마음 속 깊은 곳, 끝도 알 수 없는 무저갱 같은 암흑속에서 하나의 울림이 모진위의 부름에 대답을 했다. 잠시 후, 마음 속 또 다른 곳에서 다른 울림이 왔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서... 또 다른 곳에서서... 울림의 개체가 점 차 늘어나서 모진위를 포위하였다. 그 중에는 모진위를 아주 안락하게하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있는가하면, 모진위 의 애간장을 찢어놓을 듯한 호곡성도 있었다. 각양각색의 환청(幻聽)이 모진위 의 귓전을 울렸다. 이윽고 암흑 속에서 작은 불빛이 하나 떠올랐다. 불빛은 천천히 모진위에게 다 가왔다. 어느 새 하나의 형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또 다른 불빛들이 모 진위를 향해서 몰려왔다. 모진위가 둘러볼 새도 없이 순식간에 기기묘묘한 환영 (幻影)들이 모진위를 둘러싸버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환청과 환영들이 온통 난무하는 가운데, 여전히 갈 길을 못 찾고있는 모진위의 내기들이 격렬한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생사혈투의 서장이 막 그 문을 열고 있었다. 채가장의 임시본거지가 무거운 분위기로 가라앉았다. "무슨 임무를 맡고 계시던 분이신가요?" "일전 동정원 몰살사건의 목격자로 회의를 가졌을때, 아가씨께서도 만난 적이 있으실 겁니다. 장자기라고... 흑막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지요." "아! 기억이 나는군요. 그 장조장이... ..." 흑막이나 채가장이나 양 패거리들이 모두 서하사일대의 좁은 범위내에서 북적 거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마찰이 일어났다. 급기야 몇 차례 크고 작은 충돌도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양쪽 통틀어 최초의 희생자는 잰 걸음에 제법눈치가 빨라서 유진목도 신뢰하던 염탐 조의 장자기였다. "아가씨께서도 각오를 단단히 하심이... 이미 예상되었던 일, 앞으로는 흔하게 접하게 될 사고입니다." 유진목이 그렇게 말하고 채경령을 바라보았다. 채경령은 이내 안색을 바꾸고 야무진 표정으로 사후조치를 지시하기 시작했다. "가능하면 필요없는 희생은 피하고 싶어요. 적어도 모가놈을 만나기 전까지 는... 대원들을 단단히 단속해주시고... 장조장의 유가족들은... ..." 이미 그 옛날 세상을 온통 장미빛으로 바라보던 그 채경령이 아니었다. 채경령 은 빠른 속도로 당당한 채가장의 가주로 변모하고있었다. 유진목이 서하사의 뒷 벼랑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물어가는 석양이 석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군데군데 입을 벌리고 있는 석굴들은 마치 악마의 입속 처럼 음침하였다. 유진목은 핏빛으로 물든 석벽을 바라보며 흑막과의 피할 수 없는 정면충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예감했다. 실제로 양측의 주력이 맞부딪친 때는 그로부터 사흘 후, 석벽의 어느 후미진 석굴 앞에서 였다. 쌍방이 같은 용의자를 추적하고 있었다. 석굴에 먼저 도착해 있던 무리는 흑막의 흑복면들이었다. 유진목이 동굴어귀에 이르렀을 때도 모진위는 여전히 심마(心魔)와 전쟁을 벌 이고 있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환영은 점점 뚜렷하게 형상화되었고, 환청도 하나의 의미로써 전해져 왔다. 모진위를 보고 큰 소리로 울부짖는, 고통에 찬 채소우도 있었고, 원독이 가득한 눈으로 조용히 모진위를 바라보는 신검반원들 의 눈빛도 있었다. 모진위는 눈을 감고 싶었다. 귀를 막고싶었다. 그러나 원성과 비탄은 눈을 감아도 귀를 막아도 없어지지 않았다. 혈맥과 기맥이 근골을 파열시켜버릴 듯 소용돌이쳤다. 몸이 가루가 되는 듯한 고통이 모진위의 심신을 엄습하였다. 모진위는 그저 빨리 죽었으면하고 빌고, 또 빌 뿐이었다. 하지만 모진위는 신의있는 청년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고통을 받아들였다.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들여준 사괴 들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던질 수는 없었다. 천도심법은 충분한 몸단련과 정신수양을 전제로 하였다. 그러나 모진위의 몸상 태와 정신상태는 거의 바닥이었다. 때문에 사괴도 특별한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모진위는 사괴가 어리둥절할 정도로 잘 버텨나가고 있었다. 사괴들의 심정은 이제 어리둥절의 경지를 넘어섰다. 나아가서 혼란의 수준을 넘어 경악의 상태에 다달아 있었다. 봉룡사에서 심법의 책자가 발견된 이래, 이런 무리한 상 태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버텨낸 자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진위가 천지신공의 심마를 견디어내는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는 했다. 모진위의 육체가 근본적으로 약골 체질이라고는 하나, 출생 이래로 지속적인 단 련이 이어져왔다. 그것만이 모진위의 유일한 생존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충격의 파급효과도 다른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약간의 상처도 커다란 고통이 된다. 그러나 모진위의 경우에 있어서 어지간한 육신의 악화는 티도 나지않았다. 모진위의 자율신경체계는 통증이 느 끼는 상황을 정상적인 평소상태로 적응하고있었다. 천도심법이라는 파괴적인 내 용물을 담아내기에 나름대로 알맞은 재질을 갖춘, 보기보다는 질긴 그릇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모진위의 경락구조와 정서발달도 천지신공을 수련하기에 유 리한 조건을 갖추고있었다. 모진위의 본원진기는 거의 고갈상태였고, 모진위는 내공축적이 불가능한 절맥 체질이었다. 모진위가 무위조식으로 조달한 임시방편의 내기는 모진위 자체와는 분리된 기운이었으므로 내기의 파탄이 모진위의 본원진기를 파괴하는 수단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꺼져가는 원기에 입기을 불어넣어 불씨를 살려나가는 작용을 하고있었다. 모진위는 인간이 누려야 할 모든 가치를 뒤로 미루고 오로지 생존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살도록 사육된 인성체였다. 외부와 소통되는 세부적인 욕망과 감정들 이 거의 미발달 상태로 방치되어있었다. 그나마 목선민, 하상곤, 황경등과의 교 류로 겨우 껍질 속에서 빠져나왔던 그의 미숙한 감정표현들은 흑막의 살수수련 과정에서 다시 단단한 각질속에 감춰져버렸다. 모진위는 한마디로 자신의 의지 대로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는 젊은이였다. 그의 보호자들은 수시로 바뀌었지만 그들 모두 한결같이 모진위에게서 선택의 기회를 빼앗아갔다. 모진위의 이십평 생은 그저 세파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일엽편주에 불과했다. 심마는 모진위의 마음을 근원으로 하고있었다. 심마가 천지신공으로 유입된 귀 기와 사기들의 한 변형이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시전자 스스로가 만들어내 는 번뇌와 고민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모진위는 그러한 번뇌마저도 그저 자신 의 운명이려니 받아들였다. 심마의 유혹은 오히려 모진위로 하여금 또 다른 자 신을 만나는 색다른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다. 모진위는 마음속에 숨어있는 자신 들을 하나씩 불러내었다. '이리와! 괜찮아.' 마음의 골짜기 속에서 또 하나의 모진위가 빠꼼히 고개만 내밀고 모진위를 바 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매우 부끄럼을 많이 타는 녀석인 모양이었다. 맨처음 모진위에게 달려나왔던 녀석은 무척이나 놀기 좋아하는 녀석이었다. 모진위는 그 녀석을 오몽생에 빚대어 소낙발(小樂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두 번 째 로 찾아온 녀석은 분노의 화신이었다. 걸핏하면 핏대를 올리고는 하였다. 모진 위는 그를 소노도라고 정했다. 그 외에도 많은 녀석들이 마음 속 이 구석 저 구 석에서 기어나왔다. 하나같이 모진위보다는 어린 사내아이들이었다. '무서워할 거 없어. 어서 이리와 봐. 난 모진위라고 해!' 녀석은 아직도 쭈빗거리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부끄럼을 타는 녀석이었다. 모진위가 한참 부끄럼쟁이를 유혹하고 있을 때, 오몽생이 소란을 떨며 동굴속 으로 달려들어왔다. "사형, 사저! 이것 좀 보시우!" 오몽생의 손에는 두 자 폭의 천조각이 들려있었다. 오몽생이 천을 펼쳐보였다. 촛점없는 동공에 쭈글쭈글한 얼굴. 모진위의 용모파기가 천의 상단에 그려져있 었다. 지엄하신 황제의 칙령이었는데, 채소우 살해범이라는 죄명과 생포하는 자 에게는 은 오십량,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은 삼십량의 포상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거 골치아프게 됐구나..." 개천호가 투덜거렸다. "그런데 사사제! 사람들이 보는데서 이걸 뜯어오지는 않았겠지?" "나도 방을 훼손하는게 죄라는 것 쯤은 알고있수. 관원따위는 근처에 없는걸 확인했수다." "다른 사람들은 있었구?" "... ...?" 오송생의 긍정하는 듯한 표정이 개천호의 이마에 굵은 힘줄을 만들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벌겋게 상기된 개천호가 울화통을 터뜨렸다. "이런 바보 멍충이!" 하가령의 얼굴에는 불행을 직면한 슬픈 표정이 아로새겨졌다. 이미 한 떼의 흑 복면들이 동굴로 쇄도하고있었다. "저놈인가?" 양희구가 역불기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고는 개천호에게 물었다. 흑복면의 무리 중에 사괴가 모두 합공해도 결코 이길 수 없는 고수가 있다고 개천호가 주의를 준 적이 있었다. 역불기의 기도는 흑복면들 중에서도 단연 군계일학(群鷄一鶴) 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개천호가 말없이 수긍의 눈빛을 보냈다. 양희구가 대뜸 역불기에게 다가갔다. 사형제들을 위해서 희생할 기회가 온 것 을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그러나 양희구보다 동작이 빠른 사제가 있었다. 하가 령이었다. 사형제들을 위해서 먼저 나서기는 했지만 생애의 강적과 겨루게 된 불운을 하가령은 슬퍼했다. 아직 내상이 완치되지 않은 오송생이 자신의 주제를 십분 인정하고 모진위를 방비하러 뒤로 물러났다. 개천호가 분통을 터뜨렸다. 탈골된 어깨가 아직 굳지 않아서 왼손으로 도를 잡아야하는 처지였다. 자신의 처지로는 방해만 될 뿐이라 는 것을 개천호도 잘 알고있었다. 개천호가 양희구와 하가령의 뒤를 맡았다. 흑막에서는 금이호와 금삼호가 자신들의 상관을 보호하고 나섰다. 흑막에서는 단 둘 밖에 남지않은 금자계열의 고수들이었다. 금이호가 양희구를 가로막았고, 금삼호가 하가령과 어울렸다. 개천호가 양강(陽剛)의 도라면, 하가령은 음유(陰柔)의 검이었다. 개천호는 분 노의 불길로 도의 위력을 살렸다. 강력한 파괴력이 장점이었다. 그것에 비해서 위력은 떨어지지만 하가령의 검에는 천도심법때문에 발생한 귀기와 사기가 담 겨있었다. 위력이 보잘 것 없다고 업수히 여기다가는 크게 낭패를 당하게되는 표독스런 검기였다. 하가령이 가슴을 에이는 슬픔을 쥐어짜내며 음기를 부풀려 나갔다. 금삼호의 열세였다. 내공이 강하기로는 사괴들 가운데 양희구가 으뜸이었다. 하가령처럼 독살스럽 게 적을 몰아부치지는 않았지만 금이호에 비해서 한결 여유있는 상황이었다. 사인이 뒤엉켜서 이십여합을 주고받았을 때, 유진목과 채경령을 비롯한 채가장 의 고수들이 동굴속으로 난입하였다. 유진목이 나타나자 역불기가 불쑥 하가령 의 앞으로 나섰다. 하가령이 암암리에 힘을 나누며 역불기를 맞이하는 순간, 역 불기가 돌연 방향을 틀었다. 역불기의 좌반신이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하가령과 는 불과 한치 거리의 지척인지라 역불기에게는 위기일발의 순간이 아닐 수 없 었다. 하가령이 기회를 노칠소냐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또 하나의 인명을 살상 하게되는 자신의 기구한 처지를 한탄하는 극도의 슬픔을 끌어올린 상태였다. 역불기가 빙판을 타는 것처럼 석굴의 울퉁불퉁한 바닥을 쭉 미끄러져갔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역불기의 하반신은 전혀 미동도 하지않았으며 아무런 준비동 작도 없었다. 마치 등뒤에서 누군가 역불기를 밀고가는 것이 아닌가 착각할 지 경이었다. 하가령의 검이 부질없이 허공을 갈랐다. 개천호가 대경실색하며 왼팔로 가로막았다. 그러나 가로막은 것은 왼팔이 아니 라 마음 뿐이었다. 왼팔을 들어올리기도 전에 역불기는 이미 스쳐지나가 버렸 다. 개천호가 왼팔을 들어올렸다고 생각하는 시점과 거의 동시에 오몽생이 몸을 날려서 모진위를 가로막았다. 오몽생은 자신의 반탄기공이 역불기 앞에서는 거 의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모진위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임무였다. 오몽생은 즐거운 마음으로 몸을 던졌다. 최대한의 반탄지력을 끌어올렸음에도 격렬한 충격이 물결처럼 내부로 퍼졌다. 단숨에 사괴의 방어망을 돌파해버렸지만 역불기의 면도(面刀)도 정지했다. 도 는 한 쌍의 봉황이 수놓아져있는 쥘부채에 달라붙었다. 유진목이 바람처럼 나타 나서 역불기를 가로막은 것이었다. 역불기의 목적이 살인멸구라면 유진목의 목 적은 증거확보였다. 유진목은 모진위가 너무 빨리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모 진위가 아무 말도 없이 죽어서는 아군이 곤란해졌다. 끝내 작고 연약한 부끄럼쟁이는 상념의 나무 뒤로 숨어버렸다. 제일 만나고 싶 은 아이였지만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모진위는 마음 속의 편린들과 차례로 대 화를 나눴다. 어떤 녀석은 동정원의 어느 방문 앞에서 장여진의 매끈한 허벅지 를 바라보며 혼란에 빠져있었고, 어떤 녀석은 채가장으로 달려가 날카로운 검으 로 채소우의 명줄을 찌르고 있었다. 그 중, 소노도는 산서지방 황토벼랑의 토굴 로 황경을 찾아갔다. 그리고 황경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는 용무관으로는 다시 돌아가기 싫다고, 도학정도, 용무관동료도, 하상곤도, 황경도 다 밉다고 울부짖 고 있었다. 소낙발은 도학정의 엄한 감시하에 언제나 용무권 수련에만 매달려있 었다. 부모의 손을 잡고, 혹은 동무들의 손을 잡고 마냥 뛰어노는 동료들을 부 러워하며... 마침내, 황경의 품에 안겨있는 간난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간난아이는 자꾸만 작아지더니 한 여인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모진위는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 리고 그 여인이 자신을 낳아준 여인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만난 모든 사내 아이들이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임을 알게되었다. 아이는 여인의 자궁 속에서도 계속해서 작아지더니 끝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말았다. 무아지경 속에서 연령퇴행현상을 겪던 모진위가 퍼득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다시 아주 작은 모진위의 씨앗이 생겨났다. 모 진위는 자기도 모르게 절규하였다. '안돼요. 어머니!' 그러나 모진위의 절규에도 아랑곳하지않고 씨앗은 자라났다. 그와 더불어 여인 은 여위어가기 시작했다. 씨앗은 여인의 피와 살을 양분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씨앗이 날짐승의 알 만큼이나 커지자 여인은 피골이 상접한 처참한 모습으로 변했다. 모진위는 미칠 것만 같았다. '안돼요, 어머니. 제발...' 모진위가 피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타원형의 그것이 자궁을 통해서 여인의 몸 밖으로 나왔을 때, 여인은 이미 두 눈만 반짝이는 해골이 되어있었다. 해골은 불투명한 각질의 알을 품에 안고 마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해골은 곧 무너져 내렸고, 잠시 후, 먼지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모진위의 통곡이 극에 달했다. 알의 표면에 금이 생겼다. 금은 점차 여러 갈래 로 퍼져나갔다. 알속에서 무언가가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이 악적! 오늘에야 너를 만나게 되었구나." 어떠한 소리도 모진위의 환청을 깰 수 없었다. 그런데 한 여인의 음성이 두텁 기 그지 없는 상념의 장벽을 꿰뚫고 모진위의 궛전을 울렸다. 모진위의 눈이 번 쩍 뜨여졌다. 입술을 앙다문 여인이 눈물을 품고 모진위를 노려보고있었다. 채경령이었다. 모진위는 채경령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것은 어머니의 눈동자였 다. 모진위는 자신의 모친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환영속의 어머니상은 당 연히 모진위가 상상해서 그려낸 모습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자애로운 눈동자가 바로 채경령의 그것이었다. 채경령은 저주에 찬 눈으로 모진위를 바라보았다. 채경령은 세상 모든 것을 사 랑했던 소녀였다. 형상의 미추(美醜)만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편견을 거부했었다. 모진위에게도 그러했었다. 오히려 모진위를 동정해서 더 많은 호의와 관심을 베 풀어주었다. 세상 모든 것을 사랑으로 교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었다. 그런데 모 진위가 그런 채경령의 신념을 단 칼에 산산조각내버렸다. 격정에 사로잡힌 채경 령이 싸늘한 음성으로 저주를 토했다. 어머니의 눈동자. 모진위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역불기의 도는 아주 얇은 면도였다. 범인의 눈에는 그저 한 획을 그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좌우로 휘청거리며 일거에 세 수 이상의 타점(打點)을 만들 어냈다. 도법으로 말할 것같으면 특별히 어느 유파라고 꼬집을 만한 유형을 가 지고 있지 않았다. 그때 그때의 임기응변같은 도법이었는데 묘하게도 그때마다 상황에 어울리는 유효적절한 형태였고, 귀신같이 상대의 헛점을 파고들었다. 상 황은 대체적으로 유진목의 수세였고, 역불기의 공세였다. 공세라고는 하지만 역불기의 우세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한껏 펼쳐진 유진 목의 부채는 전신을 모두 가릴 정도로 여러 개의 원을 만들어냈고, 바싹 접혀진 부채는 때로는 봉(棒)으로, 때로는 검(劍)으로 자유자재의 변신을 구사하였다. 그저 평범한 초식에 불과했지만 역불기가 쉽게 깨뜨릴 수 없었다. 시작은 평범 한 초식이지만 끝은 상쾌를 벗어난 변화를 보여주었다. 눈이 달린 듯 자기 마음 대로 움직이는 부채의 궤도는 역불기로서도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상식 밖의 괴 초를 만들어냈다. 단 한 곳을 방어할 수 밖에 없는 초식을 시전하였음에도 전방 위의 위력을 발휘하였다. 갑자기 역불기의 공세가 가일층 험악해졌다. 짐짓 여유를 부리던 유진목도 허 둥거릴 수 밖에 없었다. 연속적인 퇴보를 밟으며 유진목은 역불기의 예봉이 수 그려뜨리려 하였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주도권을 잡았던 역불기의 도가 번개처 럼 방향을 선회하였다. 도가 빗살처럼 빠르게 모진위를 찔러갔다. 유진목이 저 지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하아!' 유진목의 입에서 대갈일성이 터졌다. 동시에 유진목의 엄지손가락에 의해서 튕 겨진 부채가 팽그르르 돌아서 손잡이가 하늘을 향하고 부채의 끝이 유진목의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유진목이 황급히 팔을 내뻗었다. 접혀져있던 부채가 크게 반원을 그리며 펼쳐졌다. 찡-. 부채가 역불기의 도를 후려쳤다. 유진목의 손 끝에 부채의 한 끝이 있었고, 역 불기의 도면에 반원으로 펼쳐진 부채의 나머지 한 끝이 있었다. 기껏 한자길이 에 불과한 부채가 날개를 펼치자 두 배의 길이로 늘어난 것이었다. 양 쪽의 수장들이 서로 다투게되자 졸개들도 덩달아 뒤엉켰다. 무공은 흑막쪽 이 강했고, 숫자는 채가장이 많았다. 장소가 협소하여 일견 채가장이 불리할 듯 했으나 의외로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현명하게도 채가장의 무사들은 좁은 통로를 이용해서 차륜전을 벌리고 있었다. 역불기가 도를 걷어들여서 수평으로 뉘였다. 일순, 역불기에게 정지상태가 이 루워졌다. 유진목도 잔뜩 긴장하며 진기를 뽑아올렸다. 역불기가 드디어 양단간 의 결정을 지으려는 기색이었다. 사태가 뜻밖의 방향으로 확대되자 사괴들이 기회를 잡았다. 희권 양희구가 모 진위를 들쳐업는 것을 신호로 사괴들은 냅다 동굴 안쪽의 어둠 속으로 달렸다. 동굴을 은거지로 결정하던 날, 하가령이 비관적인 전망을 발표했었다. "습격을 받으면 어떡하지? 퇴로가 없잖아?" 그러자 오몽생이 낙관적인 전망으로 맞섰다. "더구나 동굴 속을 조사해보지도 않았잖아요. 뒤로도 나가는 길이 있겠지요, 뭐." "사사제, 뒤는 아주 복잡한 미로야 들어갔다간 길이나 잃어버리기 십상이야. 뭔가 대비책을 세워야겠어요, 대사형." 개천호의 부정적인 견해가 이어졌다. "복잡한 미로라면 굴들이 서로 연결되어있을 가능성이 십중팔구지. 서로 통하 는 입구를 찾아보자." 양희구가 긍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사괴들은 그 날부터 틈만 나면 미련스럽기 그지없는 방법으로 동굴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끈을 풀고, 표식을 남겨가며 무 작정 동굴 속을 헤매었던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었는지 닷새 만에 다른 동굴 과의 연결통로를 찾을 수 있었다. 사괴들은 지금 그 길을 따라서 달려가고 있었다. 역불기는 유진목에게 가로막혀서 쫒아갈 수가 없었다. 유진목도 물론,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야흐로 역불기가 사생결단의 자세로 호시탐담 헛점을 노리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에 의해서 가로막혀있는 나머지 졸개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감히 가공할 고수들의 대결장을 통과할 만한 용기를 가진 자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속에서 깨어난 것은 흉칙한 괴물이었다. 동공에 촛점이 없고, 피부 빛깔은 퍼르스름했으며 쭈글쭈글한 주름투성이였다. 모진위는 그 괴물이 바로 자기 자 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부정했다. 아니 부정하고 싶었다. 황경이 알 속에서 태어난 추악한 괴물에게 욕을 퍼붓고 있었다. 자신의 생모를 잡어먹고 태어난 살모사같은 놈이라고. 하상곤은 잔인한 표정으로 한 중년사내 의 목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살해당한 자는 모진위의 아버지였다. 도학정의 주 먹이 수련에 지친 모진위를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있었다. 장여진이 징그러운 물 건이라도 피하듯 모진위에게 침을 뱉었다. 채경령만이 따스한 미소로 그를 위로 해주고 있었다. 모진위는 자신도 모르게 채경령을 향해서 한 걸음 내딪었다. 순 간, 채경령의 입가에 온정의 미소가 사라지고 싸늘한 조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원한에 사무친 눈빛이 모진위를 표독스럽게 노려보고 있었다. 엄청난 통증이 모진위의 피와 살을 꿰뚫며 휩쓸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모진위는 죽고만 싶어졌다. 죽으면 고통도 사라질 것이 기 때문이었다. 모진위가 막 의식을 놓으려는 찰나, 어둠 속 어디선가에서 어머 니가 외쳤다. "아진(兒眞)! 이 애미는 애미의 모든 것을 바쳐서 너를 탄생시켰단다. 이 애미 는 비록 허공속에 먼지로 사라졌지만 진정 사라진게 아니란다. 네 속에 이 애 미와 네 아버지가 살아 숨쉬고 있단다. 그걸 잊지말아라 아진아!" 모진위가 막 끊어지려던 생의 줄을 다시 잡았다. "너무 힘들어요, 어머니..." 모진위는 그의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생도, 사도 모두 부질없었다. 모진위는 어 머니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간난아기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점점 작아지더니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갔다. 어머니의 자궁 속은 너무나 따뜻하고 너무나 안락하였다. 자궁 속에서도 모진위는 자꾸만 줄어들었다. 의식과 감각이 점점 흐려지더니 끝내 사라져버렸다. 모진위의 흔적도 사라졌다. 모진위는 생명의 근 원인 우주로 돌아가 그 일부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양희구의 등에 업혀있는 모진위를 힐끔 돌아보던 개천호가 기절초풍을 하였다. "앗! 대사형, 잠깐 멈추세요." "왜?" 개천호가 양희구의 등에서 모진위를 안아내렸다. 모진위의 칠공으로 피가 흘러 내렸다. 바닥에 눕히고 살펴보니 전신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맥박도 엄청 나게 빨랐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 만 같은 상태였다. 양희구는 재빨리 모진위의 백회혈과 명문혈에 양손을 집고 내력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나머지 사괴들도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모진위를 둘러싸고 각 자 모진위의 요혈에 장심을 들이밀었다. 모진위의 상태는 먼저 번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사괴들이 전심전력으로 모진 위의 내기를 진압하기위해서 노력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발작은 더욱 심해졌 다. 사괴들이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 시진 정도가 경과하자 사괴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두 시진이 지나자 사괴들도 생명의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모진위의 요혈에서엄청난 사기와 탁기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때까지 사괴 들은 적극적으로 모진위의 음기를 뽑아내어 자신들의 경락을 통해서 몸 밖으로 배출시켰고 여력이 닿는대로 정기를 밀어넣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와서는 음기 만 받아서 처리하는데도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사괴들의 몸 속에도 탁기와 사 기가 쌓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모진위에게서 손을 때기에도 이미 늦었다. 사인의 내력이 모진위의 몸을 접합 점으로 한꺼번에 늘어붙었으므로 지금같이 지친 상태에서는 서로의 분리가 그 리 쉽지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음기나 흘러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보자. 내가 신호하면 사제들도 동시 에 음기의 흐름을 차단하는거야?." 양희구가 말했고, 나머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인은 양희구의 신호에 따라서 일시에 음기를 흡입하던 입구를 내기를 발출하는 출구로 전환하였다. 모진위에 게서 분출되는 힘도 강했지만 사인이 일치단결하니 그럭저럭 자신들에게 흘러 들어오는 음기의 유입은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무위조식은 피부의 모든 구멍을 입출구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역시 요혈을 주 된 통로로 사용하였다. 사괴가 요혈을 통해서 기를 뽑아내기 시작하자 다른 모 공들은 자연스럽게 유입구로 전환되었다. 그런데 일순간에 배출구가 막히게 되 자 내기는 밀려들기 만 하였고 압력이 증가일로에 있던 모진위의 내부경락들이 더욱 심한 압박을 받게되었다. 엄청나게 휘몰아치던 모진위의 내기가 갈 곳을 잃어버리자 경락의 절단된 지점을 세차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안간힘으로 모진위의 장심을 막고있던 하가령은 갑작스러운 파동에 모진위에 게서 튕겨나갔다. 다른 사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튕겨나가서 뒤로 나동 라져 버리고 말았다. 막혀있던 모진위의 경락들이 압력을 못 견디고 터져버린 것이었다. 하나가 뚫 리기 시작하자 모진위의 내부 절단점들은 둑이 무너지듯 한꺼번에 무너져내렸 다. 기경팔맥(奇經八脈), 십이정맥(十二正脈)은 물론이고 수백갈래의 부맥(副脈) 과 지맥(支脈), 세맥(細脈), 심지어 말단의 세세맥(細細脈)까지도 모두 하나로 연 결되어버렸다. "아미타불!" 오몽생이 극락왕생을 비는 염불을 외웠다. 항상 고통으로 일그러져있던 모진위 의 얼굴이 평온하게 펴져있었다. 그러나 전혀 움직임이 없으며 숨도 쉬지 않았 다. 절맥을 뚫어버리는 강력한 힘이 모진위의 영혼마저 잠재웠던 것이었다. 한 연약한 사내아이가 대우주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세요?" 우주가 대답했다. "넌 누구니?" "모진위라고해요." "누구?" "모진위요." "왜 그러는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 ..." 대우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삼라만상은 각각 대우주의 부분이었다. 지금 대우 주에게 대화를 요청하는 연약한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아이는 자기 스 스로에게 대화를 요청한 것이므로 자기 스스로가 이야기상대가 되어야하는 것 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당신이 바로 저예요." 순간, 대우주의 일부분이던 무념무상, 무소부재(無所不在)의 한 청년이 아이 앞 에 나타났다. "안녕? 너로구나! 내가 감빡 잊고 너를 놔두고 갔구나." 막 삶의 피안으로 건너가서 새로운 윤회를 기다리던 모진위였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리고, 마음 속에 편린들을 모두 거두워갔다고 생각했는데, 상념 의 나무 뒤에 숨어있던 저 부끄럼쟁이를 잊고 간 것이었다. 모진위가 그렇게 다 시 대우주에서 떨어져나와 자기에게로 되돌아왔다. "나를 만나려고 하지 않더니... 내가 무서웠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지금은 왜? 이제는 안 무서워?" 아이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왜 보자고 했니?" 아이가 품속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다 낡아빠진 비단주머니였다. 비 단주머니에는 화려한 금실로 용이 수놓아져있었다. 모진위도 알고있는 금낭이었 다. 그것은 사부 도학정이 열두 번 째 생일날 선물로 준 주머니였다. 아이가 비단주머니의 끈을 풀었다. 모진위는 그 끈도 알고있었다. 끈은 모진위 의 둘도 없는 친구 목선민이 사준 것이었다. 주머니 속에서 들고양이 이야기를 들려주던 도학정의 자애로운 미소가 나왔다. 뒤이어 염주를 받아들었을 때의 구연기의 눈물도 따라나왔다. 모진위의 뒷등을 두드려주는 목선민의 따스한 손길도 따라나왔다. 자그마한 주머니속에서 참 많 이도 튀어나왔다. 하상곤의 멋쩍어하는 헛기침, 황경할아버지의 맛있는 만두, 채 경령의 호의어린 눈동자... 모진위의 내면세계가 갑자기 환한 빛으로 밝아졌다. 모진위는 문득 아이가 누 군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눈동자가... 그것은 어머니의 눈, 더 나아가서 채경령의 눈이었다. 모진위가 자신있게 물었다. "네가 바로 사랑이구나?" 아이가 기쁨으로 발갛게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실개천을 흐르던 내기들이 세맥으로 흘러들어 내를 이뤘다. 냇물은 다시 부맥과 지맥에 모여들어 강물이 되어 주었고, 강물은 정맥으로 흘러가 대하(大 河)가 되었다. 그리고 대하를 흐르던 내기들은 기해혈(氣海穴)로 흘러 들어가 대해(大海)인 단전에 고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언제까지라도 방치되어있을 것 만 같던 모진위의 강들이 흐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모진위의 맥박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고, 가느다란 숨결이 입술을 적셨다. 모 진위는 긴 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싼 사괴들이 눈을 크게 뜨고 마주보고 있었다. 개천호는 예의 퉁명스런 표정이 아니었다. 하가령도 예의 슬 픈 표정이 아니었다. 오몽생도, 양희구도 전혀 어울리지않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귀신이라도 만난 듯, 얼이 빠진 모습으로 모진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진위가 사괴의 통일된 표정을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6632 최후식 (darkhope) [연재] 표류공주 -40- 08/15 03:37 486 line 모진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가장 뚜렷한 변화를 보이고있는 부분은 눈동자였다. 항상 초점없이 흐리멍텅하던 눈동자에 초점이 맺혔다. 그런 모진 위의 얼굴을 보고 하가령이 한탄을 했다. "어머! 눈빛 하나 만으로도 인상이 전혀 달라지네! 이렇게 선량하게 생긴 젊 은이가 여지껏 그런 역겨운 모습으로 험한 꼴을 당하며 살았다니... ..." 변화는 모진위의 육신 전반적인 곳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푸르죽죽한 피부에 도 윤기가 돌기 시작했고, 피부의 잔주름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전혀 필 수 없었던 어깨를 가끔씩은 곧추세우는 경우도 있었고, 곱추를 방불케하던 등줄 기도 특별한 경우에는 제법 정상인처럼 당당하게 일어섰다. 달걀모양으로 둥 그렇게 휘어진 다리도 날이 갈수록 직선형태로 변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오몽새의 커다란 머리통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는데 이제는 제법 안짱다리 정도로 봐 줄만 했다. 양희구가 그런 모진위의 변신과정에 너무도 흡족해져서 "이봐! 소사제(小師 弟). 좀 더 눈에 힘을 주고, 허리 좀 딱 피고... 좋아. 좋아. 앞으로는 계속 그 러고 다녀." 할라치면 모진위가 머쓱한표정으로 "항상 이렇게요?"하며 여간 곤란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사형, 석달만 기다리세요. 대형이 재촉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될거예 요." 곤란한 처지의 모진위를 구해주는 사람은 언제나 모진위덕분에 막내를 면하 게 된 넷째 오몽생이었다. 그래도 절밥을 이십년이나 얻어먹은 승려출신의 오몽생인지라 제법 들은 풍 월이 있었다. 모진위의 상태에 대해서 가장 그럴듯한 결론에 접근한 사람이 바로 오몽생이었다. 모진위의 급속한 변화에 대해서 사괴들은 갑론을박하였다. 그러기를 사흘만에 오몽생이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고함을 질러대며 즐거워 하였다. "환골탈태(換骨奪胎)!" 개천호가 즉각적으로 반박했다. "개뿔... 환골탈태는 무슨... 환골탈태라면 사람이 일순간에 홀라당 바꿔야지 저게 뭐..." "하하하. 이사형, 그건 잘못 와전된 것이고, 환골탈태는 사실은 그런게 아냐." "이것봐... ..."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달려드는 개천호를 제지하며 양희구가 말했다. "이사제, 잠깐. 사사제! 설명 좀 해보게." "흠... 그러니까... ..." 설명하기가 마땅치 않은지 오몽생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렇치! 이사형! 이사형도 손톱, 발톱이 자라고, 머리카락도 자라지?" "이 친구가 근데... 난 뭐 사람이 아니고 괴물이야?" "길게 자라면 어떻게 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깍아버리고 잘라버리지." "그래도 또 자라지?" "...사사제, 지금 누구 놀리는 거야?" "아니요, 이사형. 내 말 좀 들어봐요. 눈에 보이는 머리칼, 손톱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 속도 그렇다는 얘기유. 몸 속의 살과 뼈들도 새로 생겨나고 죽어가 고 하면서 교체된다고 큰 스님께 들었수." 오몽생의 설명은 인체의 각 부분들은 생리작용에 의해서 계속 교체된다는 것 이었다. 그러므로 기존의 근골이 수명이 다해서 모두 대소변이나 땀등으로 배 출되고 새로운 근골이 생겨나는 과정이 모두 이루워져야 환골탈태의 과정이 끝난다는 주장이었다. "더운 지방의 사람이 추운 지방으로 이동했을 때, 보통 감각적으로 적응하는 데 삼개월이 걸린답니다." "그럼 삼개월만 지나면 저 녀석이 완전히 딴 사람이 된다는 거야?" 삼개월 후에 두고보자는 투로 개천호가 윽박지르자 오몽생은 고개를 가로저 었다. "이사형은 이 곳 강남지방으로 온 지 반 년이 넘었는데, 더위가 견딜 만 하 우?" "... ...?" "석 달이면 표피적인 변화 밖에 이룰 수 없어요. 급격한 변화에 우선적인 부 분 만 적응하는 거지. 실제로는 삼 년은 필요한거야. 완벽한 조화를 이룰려면 한 십 년 쯤...?" 지금은 우선 표면적인 변화가 모진위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쨋 든 그렇다고 해도 모진위는 이미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달라졌는 데, 그것은 모진위가 깨어난 지는 아직 보름이 안되는 시점이었다. 사괴는 모진위가 깨어나자 이것 저것 캐어물었다. 너무도 놀랐던지 첫 질문 이 터진 것은 모진위와 멀뚱멀뚱 마주보기를 무려 한식경이나 흘려보내고 나 서였다. 그러나 일단 터지기 시작하자 글자 그대로 봇물이 되어버렸다. 모진위를 최후까지 닥달한 사괴는 모진위가 마침내 천도신경의 마지막 장을 몸소 체험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아직도 최후의 난관은 돌파하지 못했 다. 모진위는 단 한 줌의 신기도 보유하고 있지않은 상태였다. 다만, 신기를 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이제부터 실질적으로 천도심법 의 대주천과 싸워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모진위를 위한 새로운 계획들이 구성되었다. 천지신공의 수련을 뒤로 미루고 일단 몸단련과 정신수양을 선행시키기로 합의를 보았다. 문제될 것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모진위에게도 이제는 축기와 운기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단 한 가지의 문제란 바로 시간이었다. 시간단축을 위해서 사괴가 행한 조치 는 뻔한 것이었다. 애석한 것은 모진위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생존을 위해서 오로지 수련과 수련 속에서 삶을 보내야했던 모진위였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수련이 없 어도 삶을 지탱할만한 여유가 생겼음에도 모진위는 여전히 수련에 매달려야했 다. 모진위의 속성을 위해서 사괴들이 인정사정없이 모진위를 닥달했기 때문 이었다. 하긴 모진위로서는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생활환경이라서 특별히 불 편할 것은 없었다. 사괴들의 걱정과는 달리 모진위의 재질과 태도가 워낙 뛰 어나서 시간도 생각보다는 큰 문제거리는 아니었다. 보다 큰 문제는 따로 있 었다. 모진위의 체포령이 이미 전국으로 수배되어있어서 어디를 가나 포교들과 현 상금 사냥꾼들의 기습이 끊이질 않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위협은 역시 흑 막이었다. 그러나 사괴들이 이제와서 모진위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 불성설이었다. 모진위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돌파구임은 물론, 이제와서 는 그들의 당당한 마지막 사제였던 것이다. 사괴는 사형제를 위해서 자신들의 미래를 포기할지언정, 사형제를 팔아먹는 그런 위인들은 아니었다. "어디로 가야하나?" 하가령이 검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근방에서는 이름만 대고 금방 알 수 있는 현상금 사냥꾼 삼 인의 피가 그녀의 검을 뒤덮고 있었다. "천산으로 갑시다." 오몽생이 말했다. "왜 하필이면 천산? 천산에 가면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어?" "범죄자들은 대개 그쪽으로 도망가잖수. 우리 소사제도 현상금 액수로만 친 다면 아마 그쪽에서 최상급일껄?" 오몽생이 모진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놈들 실력이 어때? 사사제도 꽤 애먹었지?" 개천호가 방금 베어넘긴 시체를 발로 툭툭치며 물었다. 바닥에는 사괴들의 손발에 나가떨어진 시신이 칠팔 구는 되었다. "말도 마슈, 이사형. 꽤나 독종들이야." "그 쪽에 가면 인간사냥꾼 중 고수란 고수는 죄다 만나볼 수 있을걸? 워낙에 험한 꼴을 많이 당하는 곳이라 인간시장까지도 있다더군. 그래도 천산으로 갈 텐가, 사사제는?" 개천호가 비꼬자 양희구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가욕관(嘉 關)이나 옥문관(玉門關)만 넘으면 관원들은 피할 수 있 지. 사냥꾼이 많다는 건 그만큼 먹이들이 많다는 얘기도 되니까..." "먹이가 많이 모인다는 건 먹이감들도 그곳이 다른 곳보다는 살 만하다는 반 증도 되지." 오몽생이 기가 살아서 신나게 맞장구를 쳐댔다. 그리고 개천호를 향해서 혀 를 날름 내밀었다. 개천호의 이마에 다시 핏대가 치솟았다. "거기까지 갈려면 적어도 반 년은 걸릴 껄? 시간절약도 할 겸 가까운 곳에서 은신처를 찾아봅시다. 무공산(武功山)근처에 평향(萍鄕)이라는 곳에 친구가 하 나 살고있지. 아직 목숨을 신세졌던 은공을 잊어먹지는 않았을거야." 개천호는 이미 분통이 터져버렸고, 누가 뭐라든 꼴통을 부릴 태세였다. 양희 구는 개천호의 똥고집을 익히 알고있는지라 어지간하면 무공산 쪽으로 가리라 고 내심 낙착을 보았다. 그러나 당사자인 모진위에게 의사타진을 해보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되어 넌지시 형식적으로 한 마디 던졌다. "소사제는 어디가 좋겠어?" 모진위의 대답은 언제나 비슷했다. 평소대로 '정하시는대로 따르겠습니다.'라 는 대답을 기대했던 양희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모진위의 대답은 양희구 의 기대와는 달리 "천산으로 가고 싶습니다."라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어... 어디?" "하서주랑을 타고가다가 옥문관을 넘고 싶습니다." 언젠가 하상곤이 말했었다. 가전회가 걷어들인 금이 천산으로 갔을지도 모른 다고. 모진위는 사괴들의 대화를 듣다가 문득 그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천산 이 가고 싶어졌다. "이봐! 소사제." 결국, 개천호가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나 뒤이어 터진 양희구의 결단이 개천 호의 분노를 잠재웠다. "가자! 천산북로로... ..." 개천호는 이를 악물고 일행의 뒤를 잠자코 따랐다. 대사형 양희구는 항상 남 들에게도 기쁜 일을 행하려 노력하지만 말이 기쁜 일이지 지금과 같이 결의에 찬 어조로 무언가 결정한 다음에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만약 개천호가 고집을 부렸다가는 가차없이 개천호의 머리통을 날려버리고는 사제를 옳은 길로 인도 한 자신의 태도를 한없이 기뻐할 그런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채가장도 금의 유출경로를 내사하는데 전혀 소홀함이 없었다. 가전회는 흔적 도 없이 사라졌지만 금과 은은 계속 교환되었기 때문이었다. 채가장의 정보망 은 더욱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 결과 낙양에 이어서 또 하나의 거점으로 추 정되는 도시를 발견하였다. 채가장의 금전유통을 담당하고있는 보전당(保錢堂)의 백당주가 그 동안의 성 과를 채경령에게 보고하였다. 보고에 따르면 또 하나의 거점은 서안(西安)이었 다. "그럼, 중원의 서북부에서 모인 금은 서안으로 흘러가고, 남동부에서 수집한 금은 낙양에서 합쳐진다는 말이군요. 그럼 최종적인 장소는 어디라고 판단하 십니까?" 채경령이 백당주에게물었다. "그것이... 아마도 국경을 넘고있는 것 같습니다." "운룡표국(運龍표局)이 근 년에 들어서 무척 활발하게 낙양과 서안, 그리고 난주에 표행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군요." 운룡표국은 개봉을 거점으로 대운하 일대를 주 활동무대로 삼고있는 중원 제 이의 표국이었다. 황하(黃河)나 서역교역로가 주요 거래지역은 아니었다. "근래에 세력을 확장하려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상관이 없겠지요. 이상한 점은 표물에 비해서 지나치게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싣고 내리는 표물의 부피와 마차의 바퀴자국을 비교 해보건데, 금의 무게와 일치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운룡표국의 조아 성(趙芽惺)국주(局主)가 개봉대전장(開封大錢場) 금사윤(金思允)의 둘째 사위 라는 것은 아시고 계시지요?" 개봉대전장의 장주 금사윤은 대상집단중에서도 열렬한 구법당의 지지자이며, 고 채소우장주의 호적수이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가전회의 금이 최종적으로 머물은 곳도 개봉대전장의 낙양지점이었다. "국경을 넘는다...? 가욕관?" "아니 옥문관 같습니다." 채경령은 의아해졌다. 가욕관을 넘는다면 흉노의 땅, 옥문관을 넘는다면 가깝 게는 인근 소수민족국가, 멀게는 서역이나 안식국(安食國:지금의 아프가니스 탄), 대식국(大食國)이었다. 무언가 정치적인 속셈이 깔려있다면 의당 가욕관 으로 가야했고, 교역이 목적이라면 옥문관이 당연했다. 그러나 채경령이 생각 하기에는 서쪽의 색목인(色目人)과 거래를 하는데 일부러 은전(銀錢)을 금전 (金錢)으로 바꿀 필요는 없었다. 금이건 은이건 그들은 가리지 않았다. "옥문관이라고 추정하는 이유는요?" "아마도 금을 팔고 은을 사는 것 같습니다." 채경령의 머리는 점점 더 복잡해져갔다. 당시의 대외교역은 조공무역(朝貢貿 易)이었다. 외국의 사절단들이 향류(香類), 향신료(香辛料), 옥(玉), 진주, 상아 등의 외국 특산물을 조공으로 바치고, 도자기, 나사(螺絲), 서적, 금, 은, 동전 등을 답례품으로 받아갔다. 더불어 대외무역은 많은 이익을 낳기 때문에 조정 의 감시망을 피하는 민간 밀무역도 성행하였다. 그렇다면 흑막을 조종하는 무 리들도 밀수를 하고있다는 이야기였다. "이해가 안가는군요. 금을 팔고, 은을 산다니... ..." 채경령의 도리질에 백당주는 싱긋 웃더니 설명을 이어나갔다. "색목인의 지역은 우리와 비교해서 은의 생산량이 풍부하고, 금은 희귀한 편 입니다. 금 한 냥에 대략 은 팔구 냥에 거래된다더군요." 거기까지는 채경령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중원에서는 금 한 냥에 은 여섯 냥의 비율로 거래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당시의 교역상황은 남해의 항구를 통한 해상무역과 천산북로를 통한 육상무 역의 비율이 거의 칠 대 삼 정도로 해상교역이 전성기를 이루고있었다. 해로 (海路)의 경우, 아랍(阿拉)에서 남해안의 무역항까지 선박으로 대략 백여 일 거리였지만 계절풍과 역풍(逆風), 그리고 상품의 거래기간을 고려한다면 한 번 왕복에 이년 가량 소요되었다. 육로의 경우는 더욱 오래 걸리며 위험요소도 많았다. 그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특산물을 가져와서 금, 은으로 교환해간다 면 열 배 이상의 이익을 올리는 지라, 소요기간을 상쇄하고 남을 만큼의 이득 이 보장되었지만 금은은 달랐다. 여덜 배가 아니라 열 배라고 해도 이익을 남 기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금과 은은 쌍방간에 다소의 선호도차이는 있을지 언정 피차 팔고 사서 이익을 남길만한 장사수단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채가장 이 추적하는 무리들이 취급하는 것과 같은 대량의 금을 소화해낼 만한 유통경 로도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런 이유를 근거로 채경령을 비롯한 몇 몇 참석자 들이 반론을 폈다. "물론, 이익이 많이 남는 특산물을 구입하자면 너무 대규모의 금액이지요. 아 마 자금회전이 불가능하겠지요. 그러나 바꿔 말해서 금과 은을 직접 교환하는 것은 다르지요. 거래라고 할 것도 없지요. 자금과 운송기간 밖에 필요한 것이 없는 영업형태입니다. 문제는 강물의 흐름과 같은 상호연결망이 조직되어있느 냐에 달려있습니다. 금은을 소화할 수 있는 조직망만 완비되어 있다면 규모가 클수록 오히려 승산있는 장사지요. 한 번 계산해 보십시요?" 백당주의 답변에 중인들은 할 말을 잊었다. 그리고 결국 백당주의 의견에 동 의하고 말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구법을 복귀시키려는 무리들처럼 그런 거국 적인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이익보다는 안정적인 자금원이 필요했다. 그 런 의미에서 교역상의 헛점을 이용한 이와같은 거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금조달책이 되었다. 채경령이 생각에 잠겼다. 모진위의 추적은 서안을 기점으로 다시 미궁속에 빠져들고있었다. 사괴들도 특이한 용모와 복장을 하고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모 진위의 행색은 거의 변장이 불가능했다. 엄청난 인원이 일대에 들끓고 있었으 므로 그들의 눈을 모두 피해서 탈출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놈들의 행적이 서안 근처에서 묘연해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모진위의 인상착의와 같은 인물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연일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사나흘이 지나자 비슷한 인상착의로 바뀌더니 이제와서 는 약간 미심쩍은 인물을 발견했다는 잡정보가 주종을 이루고 말았다. 보고대 로라면 모진위의 형상이 시일이 지날수록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채경령 이 상상하기에 그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 몰골에 아무리 위장을 한다고 해도 오십보 백보였다. 근본적으로 그런 흉칙함은 숨길 수가 없었다. 다른 누군가가 흉내낼 수도 없는 비참한 몰골이었다. 더 이상 양주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처지가 되었다. 서안이라면 진 행방향으로 볼 때, 모진위일당이 도주할 방향은 동쪽과 서쪽이 유력했다. 하지 만 모진위가 지명수배범이라는 처지를 감안해볼 때, 치안상태가 안정되어있는 서쪽으로 향할 가능성은 적었다. 사건의 실마리는 천산북로 어디엔가에 있었 다. 채경령은 모진위도 천산으로 가고있을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모진위의 입 장이라면 흑막의 집요한 추적을 따돌리는 피신처로도, 흑막과의 문제를 청산 하는 복수의 장소로도 천산북로 이상은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은 채경령의 입 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진위의 추적을 위해서도, 채소우시해세력의 추적을 위해서도 천산북로 이상은 없었다. 드디어 채경령이 단안을 내렸다. "옥문관으로 가야겠어요." 말쑥한 백의청년(白衣靑年)이 하서주랑이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에서 무공수련 에 열중하고있었다. 천산북로로 나아가는 복도라고 할 수 있는 하서주랑에는 오늘도 많은 상인들이 왕래하고 있었지만 청년은 아랑곳 하지않고 땀으로 뒤 범벅이 되어서 열심히 손발을 움직였다. 맑은 눈빛을 가진 청년이었다. 하지만 체구는 가냘프기 그지 없었고, 체형도 어딘가 모르게 어색했으며, 병색이 완연 하였다. "소사제, 우리 먼저가네. 삼사매와 사사제가 오고있구먼." 수염을 파르스름하게 깍은 장년문사가 바위 뒤에서 불쑥 나타나 그렇게 말했 다. "예, 대사형. 원로에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이사형께서도..." "알았네. 다시 만날 때까지 자네도 조심하게." 이번에는 관운장처럼 긴 수염을 가슴까지 드리운 중년호걸이 역시 바위 뒤에 서 등장하였다. 중년사내는 산길을 내려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장년사내도 곧 중년사내를 따라서 산길을 내려갔다. 먼저 간 이가 개천호였고 뒤를 따른 장년문사가 양희구였다. 깍듯히 허리굽혀 인사를 한 청년은 바로 모진위였다. 사냥꾼들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서 사괴들은 변장을 해야했다. 모두가 특징 이 뚜렷한 행색들이라 추적자의 감시망을 피하기가 어려웠던 터였다. 몰골이 가장 기괴하기로는 아직도 모진위가 일순위였지만 오히려 모진위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물론, 이전에 모진위를 면식했던 사람이라면 알아볼 수는 있었지 만 생면부지의 자가 용모파기만 가지고 정체를 파악하기에는 이미 불가능할 정도로 용모가 달라져있었다. 양희구는 텁석부리 수염을 밀어버리고 문사가 되었으며, 개천호는 반대로 긴 수염을 달아서 안면의 길이를 짧게 줄였다. 하가령은 상복을 벗는 것만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가장 복잡한 것이 오몽생이었다. 승복을 벗는 것만으로는 어림 없었다. 궁리 끝에 발밑에 한 치 길이의 목발을 덧대고 긴 바지를 입혀 주었다. 그러고나니 원래 상체가 당당하고 다리가 짧았던 오몽생인지라 그럴 듯한 거한으로 변모하였다. 사괴들은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두 패로 흩어져다니기로 했다. 개천호의 심 보가 터지면 양희구 밖에는 다룰 사람이 없기에 개천호와 양희구가 짝을 이뤘 고 하가령과 오몽생이 한 조가 되었다. 양 패는 번갈아가며 교대로 모진위를 보호하기로 했다. 양인이 떠나가자 모진위는 다시 출운용무 수련에 들어갔다. 근자에 이르러 모진위의 출운용무는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출운용무 뿐만 아니 라 비연류와 추혼십이절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른 모 진위로서는 출운용무를 행함에 힘의 안배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기운조 절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운용능력이 날이 갈수록 점점 나빠졌다. 의도적으로 힘을 빼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예로 회풍선엽을 효율적으로 구사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기운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야하는데 작금의 모진위는 여력이 넘치는 나머지 남의 힘을 빌리는 것 은 고사하고 오히려 정반대인 철룡방벽을 구사하는 웃지 못할 사태를 초래하 기도 했다. 비연류로 말하자면 더욱 심했다. 경직성 밖에는 존재하지않던 모진 위의 육신에 유연성이 날로 증대되자 일회전의 공중제비가 일회전을 넘어서 머리통을 땅바닥에 쳐박는 경우까지 생겼다. 모진위는 끝내 크게 실망하여 고 개를 떨구었다. 그때 등뒤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쯔 쯔. 소사제! 애를 태워서 될 일이 아니야." 모진위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오몽생이 고개를 넘어오고 있었다. 모진위는 서 둘러 인사를 차렸다. "삼사형께 문안드립니다." "그래 그래. 이게 왠 미장부야? 여어! 그동안 몰라보게 달라졌는데? 그건 그 렇고... 자네는 지금 몸에 맞지않는 옷을 입고있는 것과 같이 어색한 상태야. 너무 실망할 것 없어. 부지런히 수련만 하면 점점 익숙해질거야. 물론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 "얼마나요?" "으음. 한 반 년? 완전히 익숙해진 상태가 되려면 한 오 년 걸릴 터이고." 사실 모진위의 상태는 알맹이가 지나치게 작은 껍질을 가진 열매와 마찬가지 의 상태였다. 내외공이열 걸음씩 도망가는데 운용능력은 한 걸음씩 따라가는 형국이었다. 속이 야무지게 찰 때까지는 이대로 버텨야할 처지였다. "근데 말이야. 소사제와 헤어져있던 열흘 동안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도저히 모르겠어. 자네를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렸지." "말씀하십시요, 사사형. 소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소사제! 난 도데체 모르겠어. 다시 한 번 그 때를 얘기해 봐. 천도신경에 이 르기를, 요(要)는 통제력과 믿음이라고 했는데... 먼저 통제... 자네는 심마(心 魔)를 어떻게 통제해서 물리친 거야?" "... ... 무얼 어떻게 해보겠다고 작정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럼, 심마가 그렇게 극성을 부리는데도 그냥 내버려두었단 말이야?" "그건 아니예요..." "그렇치? 뭔가 하기는 했지? 뭘 했냐고 묻는거야, 이 사형은." "무얼 했다기 보다 그냥 받아들였지요." "심마를 포용했다는 얘기야?" 모진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뭐를... ...?" "무엇을 수용했다기 보다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이었지요." "천하만물, 삼라만상 전체가 ...그러니까 우주 자체가 그대로 소사제가 되었다 는 거야?" "꼭 우주 그 자체라고는 할 수 없고... 전체가 모두 연결되어있는 그 한 부 분... ..." 오몽생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편으로는 알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도 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건 그렇다치고 '믿어야 마음의 문이 열리느니라'에서 그 믿음은?" "신(信), 불신(不信)은 염두에 없었어요. 그저 그대로를 받아들였지요." "또 받아드리는 거야? 우아아아!' 오모생이 머리를 감싸쥐고 비명을 질렀다. "도채체 소사제가 갔다온 마음의 바다는 어디야?" 그때 처연한 독경소리가 들려왔다. 천도심경의 구결이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섬이 있다. 나도 그 섬에 가고싶다. 양인이 돌아보니 하가령이 당도해있었다. "넷째 동생! 동생과 소사제 앞에 펼쳐진 마음의 바다를 잘 살펴봐." "삼사저께 문안올립니다." "그래, 막내동생. 잘지냈지?" 하가령이 안스러운 표정으로 오몽생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 섬에 가야만 소사제의 마음을 볼 수 있는거야." 오몽생이 문득 고개를 들고 모진위를 바라보았다. 마치 모진위와 자기사이에 막막한 대해가 펼쳐져있기라도 한 듯. 하지만 오몽생의 바다는 너무나 넓어서 오로지 모진위라는 수평선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오몽생 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문득 생각난 듯 다시 물었다. "어쨋든 소사제는 그 섬에 가보았겠지. 무념무상의 경지에 도달했던 것은 사 실이지? 소사제는 자기 자신도 없는 그런 상태에 한동안 빠져있었다고 했으니 까. 무념무상은? 무심(無心)인가?" "글쎄요. 염(念)과 상(想)은 사라졌지만... 마음 자체가 소멸한 것은... " "마음은 남아있다? ...그럼, 공심(空心)이구나! 마음 속에 있는 념과 상을 없앴 으니... ...?" "글쎄요... 마음을 비워도 그 빈 공간은 남아있으니... ..." "으아악! 그럼 도데체 뭐야? ... ...? ... ...!" "그 때는 우제(憂弟)가 의식도 감각도 없어서 뭐라고 말할 것이... ..." "... ... 하아! 이제 알았다. 무아(無我)... 무아구나? 그거지?" "글쎄요... ...?" "아이고, 답답해! 이것 봐, 소사제?" "그만 좀 해둬. 넷째 동생. 자기 자신조차 없는 공간 속에 있다가 왔는데 소 사제가 무얼 기억하겠어? 우선은 그냥 자신을 없애는 행위 정도라고 알아두 자. 심경에 나오는 주해(註解)들이나 다시 잘 읽어봐, 넷째 동생." "하지만 소사제가 무념무상에서 이르는 동안 느껴던 상념들에 대한 주해는 없지않수?" 오몽생의 퉁명스런 면박에 하가령이 쓸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넷째 동생, 그래. 마음 속의 상징들은 주해를 달 수 없지. 어디 이 삼누이가 천도심경의 주해 한 구절 더 ㅇ어주지." 내가 없으면 저 강을 건널 수 있을텐데 나를 없애는 방법은 죽기 아니면 사랑하기지 하가령의 처연한 구결 낭송을 듣고있던 오몽생이 다시 중얼거렸다. "무아로 가기 위해서 죽을 수야 없는 노릇이고, 사랑이라... ..." "동생은 사랑해봤어?" 오몽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사랑이 뭔지는 알어?" "삼사저! 누굴 바보로 알아요?" "알어? 그럼, 한 번 설명해봐." 발끈해서 입을 열려던 오몽생이 그저 입술만 몇 번 달삭거리더니 크게 한숨 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그것봐. 사랑도 마음의 표상이지. 사랑은 스스로가 느껴야하는 거지 다른 사 람이 설명해줘서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들에 주해 따위란 있을 수가 없는거야. 자! 그만 가자. 천산은 멀고도 멀다." 오몽생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하가령을 따르며 중얼거렸다. "표상에는 주해가 없다(表象空註)... ..." =============================================================== 주) 첫 번 째 구결은 정현종님의 섬이라는 시를 인용하였고, 두 번 째 구결은 황지우님의...(윽, 하도 오래되서 제목도잊어버렸군요) 시를 인용하였습니다. 이부를 마치면서 이부에서 못 다한 말들을 좀 해볼까합니다. 다음에는 이야기할 기회가 없을 것같군요. 가끔 표류공주에서 무엇을 쓰고있냐는 말을 듣습니다. 저는 그저 자기고백같 은거라고 대답하고는 했습니다. 그랬더니 모진위를 제자신으로 오해하시는분 들이 많더군요. 물론 가치있는 삶을 살고싶다고 희망하면서도 쾌락과 눈 앞의 이익만 따르다 가 가치가 무엇인지조차 망각한 자신을 발견하고는 생존만을 가치로 살아가는 모진위에게 그 생존이라는 가치를 베어없애는 검을 쥐어주며 이 무협은 시작 됩니다. 그러나 모진위가 제자신은 아닙니다. 제가 군생활을 할 때, 상병 쯤 ㄷ을까하던 어느 날, 신병 하나가 저희 소대에 배치되었지요. 키는 한 140센티나 될까하고 몸무게도 40키로는 죽어도 안 넘 을 것같은 그런 친구였습니다. 초점없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새커멓게 죽은 얼굴, 온통 주름투성이... 첫눈에 보기에도 정신박약아같았습니다. 그 친구가 상병이 되었을 어느 가을, 벼베기 대민봉사를 나갔지요. 점심시간 이 되어 오래간만에 맛있는 사제밥과 막걸리로 배를 채우고 오수를 즐겼습니 다. 집합시간이 되어 인원점검을 하는데 박상병(그 친구가 박상병입니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대원들이 찾아나섰습니다. 탈영이라도 했을까싶어서... 우리가 그를 발견했을 때 박상병은 어느 헛간 대들보에 나일론 끈으로 목을 맨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제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나중에 그가 남긴 군사수첩을 뒤적이던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정박아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비수같은 표현들이었지요. 그는 정신박약아가 아니라 자폐증환자였던 것입니다. 넓게는 우리 사회가 그를 죽였습니다. 군대가 그를 죽였습니다. 우리 소대가 그를 죽였습니다. 제가 바로 그를 죽였습니다. 누군가가 소계일이 되어 모진위를 흑막으로 내몬 것처럼 도저히 군대에 올 수 없는 박상병을 어느 누구대신 군대에 쳐밖아 죽였고, 중대원들은 금서림, 혹은 용무관의 동료가 되어 그를 놀리고 조롱하여 그를 죽였고, 소대원들은 냉귀 신출귀물이 되어 박상병으로 인해서 실추된 소대의 명예를 위해서 자신을 사랑한 여인을 베어버리는 냉귀처럼 그를 죽였고, 분대원들은 장여진이 되어서 박상병으로 야기된 단체기합을 짜증내며 그렇게 살려면 '나가죽어라 나가죽어라'독촉하여 그를 죽였고, 그의 동기들은 도학정이 되어 힘들고 상처입어서 자신을 찾아온 고양이를 낫 으로 찍어버리듯이 그의 손길을 외면하고 죽였습니다. 우리는 모두전갈이었고, 박상병은 개구리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살한 후, 우리가 불안과 죄책감에 떠는 개구리가 되었고, 그는 우리의 꿈 속을 헤집는 전갈이 되었습니다. 제대를 한 후, 세월이 흐르고 저는 박상병을 망각했습니다. 그러다 제 무의식 을 펼쳐놓은 이 놈의 빌어먹을 무협이야기에서 다시 그를 직면하게 된 것입니 다. 박상병이 바로 모진위였지요. 이부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박상병에 대해서 제대로 전달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천도신 경이라는 기연으로 정상인이 되어버린 삼부의 모진위는 더 이상 박상병이 아 닙니다. 개작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위해서 작업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후로도 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전히 무수한 살인을 저 지르고 다녔는지도 모릅니다. 평범한 가정의 건강한 소녀로 출발하여 우연한 사건으로 타락을 거듭하다가 결국 인생의 밑바닥에서 자살로 생을 마친 어떤 여인도 있습니다. 구상기와 두호접이 서로를 오해하여 끝내는 자신들의 삶을 망쳐버린 것처럼 그렇게 질투와 오해로 떠나보냈습니다. 도학정이 지치고 망가져서 찾아온 자신의 고양이를 못 알아본 것처럼 그렇게 아집과 무관심으로 떠나보냈습니다. 신출귀몰이 자객행에 방해된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베어버렸듯이 젊은 날의 야망에 방해가 되기에 떠나보냈습니다. 결국은 이미 사라진 사랑 때문에 자신과 사회를 파괴한 윤차성처럼 그렇게 평 생을 노총각으로 늙어죽는 죄업을 받았구요. 폐관수련이라는 미명하에 두달 쯤 지난 후, 무림동에 돌아왔습니다. 대화방을 들어갔지요. 나와 친한 분이 계신 것으로 알고 들어갔는데 뜻밖에도 다른 분 이 계시더군요. 대화방이라는 것이 그렇더군요.자주 대화방에 오는 고수분들 은 제가 모르는 화제거리가 많아서 대화에 끼어들기가 힘이 듭니다. 자연히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가 되기 십상이지요. 그래서 가능하면 그런 고수분들이 계신 대화방은 피하게 마련이지요. 그 날 만난 분도 그런 고수분들과 자주 어 울리는 분이셨지요. 본의아니게 그분도 피하는 결과가 되었지요. 사실 그분은 제가 처음으로 정모(작년도 송년모임)에 가서 소외감으로 어색 해하고 있을 때, '표류공주를 쓰신 분이지요?'하고 최초로 저에게 말을 걸어주 셨고 동호회원들에게 소개를 시켜주어 열렬한 환대 속에 저의 소외감을 일소 시켜주셨던 분입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대화방을 감쌌지요. 저는 무시당할 것같은 두려움에 침묵하고 있었지요. 그 분도 제가 자신을 피하고있다고 오해를 하셨을테니 쉽 게 말을 걸기 어려운 상황이었지요. 그런 소원한 관계의 단 둘이 대화방에서 만났으니 당연히 어색한 공기가 흘렀지요. 그런데 그 분은 그런 것에는 전혀 아랑곳도 하지않고 저에게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저도 기쁘게 응답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의 대화방에서 보리자루가 되는 제가 개구리고 그분을 포함한 그들이 전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분은 정모장소에 서 나를 업고 소외감이라는 강물을 건너다 주었는데 저는 그분을 피하며 그분 과 저를 소외감이라는 강물에 빠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전갈이요, 그분 은 개구리였고, 저는 모진위이자 박상병이고, 그분은 하상곤이자 황경이었던 것입니다. 이제와서는 대화방에서 저도 노력을 하는데... 으! 이미 불신의 골이 너무 깊어졌는지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더군요. 참! 결국 개작은 하지않기로... 아니 못했습니다. 무언가 엉킨것을 제대로 풀 어낼 능력도 없거니와, 아직 해답을 찾지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제 스 스로가 제 자신에게 던지는 하나의 질문입니다. 애써 외면해왔던 자신의 문제 를 직면하는 과정같은 것이지요. 결국, 여전히 조금은 답답하고 조금은 지루한 무협이 될 것이라는 말도 되는군요. 그저 심심풀이땅콩으로 읽으시는 것이 당연합니다만, 그래도 혹시 행간의 숨 은 뜻을 헤아려주시는 분이 계시다면 부탁드립니다. 무림동의 대화방이나 길 거리에서 누군가 어두운 낮빛으로 당신에게 말을 걸어왔을 때, 상처입고 지쳐서 자신을 찾아온 자신의 고양이도 못 알아본 도학정의 실수 를 범하지 마시고, 삶의 피곤한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베어버린 냉귀의 실수 를 번하지 마시고 그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그가 혹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죽이고있는 또 하나의 모진위이자 박상병일지도 모르니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3부에서 뵙죠. 흑수노계였습니다. 번 호 : 6971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8-10-10 22:29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41- 14. 맥산관(貊山館) 아치(兒 )가 여자를 본 것은, 정확하게 말해서 한족여인을 본 것은 근 삼 년 만의 일이었다. 물론, 장족(藏族)이나 회족(回族)여인은 여기서도 흔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가장 흔하기로는 몽고족이었다. 그러나 한족여인이라면 그렇치 않았 다. 적어도 난주(蘭州) 근방까지 가기 전에는 그 비슷한 특징의 여자도 만나볼 수 없었다. 더구나 이렇게 특이한 기품의 여인은 난주가 아니라 중원에서조차 노변에서는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부류가 아니었다. 하여간 아치로서는 그나 마 자주 접하는 이방인 여인네들을 포함시켜도 근 열흘만에 처음으로 구경하는 여자였다. 더군다나 지금 이 장소에서라면 거의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 간만의 일이었다. 하긴, 여자가 스스로 이 곳에 들어 온 것은 아치가 이 곳에서 일하게 된 이후, 최초의 일일지도 몰랐다. 그것은 주인 영감태기나 손님들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너나 할 것 없 이 시선이 한군데를 향하고 있었다. 주인영감이라면 몰라도 이곳의 단골들이야 직업이라는 것이 그 주제다 보니 제법 중원에 나가는 경우도 있어서 한족 계집 들을 못 품어본 것도 아니겠지만, 하여간 다른 곳도 아니고 이 곳에서 여인을 만났다는 것이 기가 막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참고로 주인이란 작자의 마누라조 차 회족 계집이었다. 그나마도 여기가 너무 살벌하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십여 리가량 벗어난 회족마을에서 기거하며 얼씬도 안하는 형편이었다. 아치는 나름대로 여자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아치가 이 곳까지 흘 러들어온 사연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하남땅에서 한참 잘 나갈 때는 유한 부인 들 등쳐먹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었는데, 아치보다 훨씬 잘 나가는 어느 고관 대작의 첩을 재산목록 일호로 취급하던 것이 결국은 사단이 되었다. 사건의 전 모가 백일하에 드러난 어느날, 아치는 졸지에 현상금이 걸린 흉악범으로 전락하 고 말았다. 세도가 대단한 고관대작이었던 것이다. 살아서 이 곳까지 도망온 것 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돌이켜 보면 직업이 직업이었던 만큼, 아치는 여인 감별 에는 도가 텄다고 자부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제버릇 개 못 준다고 숭고한 장인 정신을 발휘하여 즉각 쪽문을 밀고 들어서는 녹의여인을 놓고 냉철한 작품 감 정에 들어갔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아치는 최우선으로 재빨리 여인의 용모, 몸매, 피부의 보드라움 정도, 성적 감 응도 따위를 감정한 뒤,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정황분석에 들어갔다. 지나가 던 여인이 이곳도 객잔이라고 객고를 풀기위해서 들어온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곳 맥산관은 객잔이라고는 하지만, 일반적인 객잔처럼 사람이 여행하는 관도의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서 기련산맥자 락의 맥산 구석에 음산하게 쳐박혀 있었다. 그러면 이곳 맥산관의 용도를 정확 히 알고 찾아온 손님이란 말인가? 아치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인의 행색을 보건 데 그 쪽으로는 쉽게 상상이 가지를 않았다. 물론, 여자라고해서 살인청부나 공 갈, 협박에관한 청부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더 더군다나 보표(保 )의 고 용은 오히려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어울릴성 싶은 청탁이었다. 그러나 청탁하러 온 곳이 맥산관이라면 상황은 백팔십도로 달랐다. 맥산관이 근동의 다른 객잔들처럼 인간 시장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 지만, 그런 인간시장도 서너 부류로 나뉜다. 난주 등의 치안가능한 성 내의 표 국 밀집지역에는 주로 임시고용 표사나 안내인 격의 보표업무가 주종이었고, 성 밖이라도 관도의 주요길목은 현상금사냥꾼과 기타 그와 관련된 성격의 낭인 들이 주로 활동하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쪽 계통들도 살인청부 따위의 업무는 취급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쪽은 역시 인간사냥꾼들 덕분 에 드러난 범법자는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마지막으로 이곳 맥산관처럼 같 은 쓰레기 잡것들의 인간시장이 있었는데 한마디로 여자가 올만한 곳은 못 되 었다. 그녀가 제아무리 강호의 풍진여협일지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조정 관리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장족, 회족 등의 소수 이민족 지역에 모여 드는 이유부터가 벌써 그리 온당치 못한 인종들이라는 증거였다. 범법자들의 소 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살아온 전력이 대부분 그런지라 살인청부를 비롯한 온 갖 냄새나는 비리행각이 맥산관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아치는 복마전, 복마전 말은 들어봤지만 이 곳 맥산관과 같은 부류의 인간시장을 구경 못한 인간들이 복마전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 었다. 녹의여인의 방문에대한 아치의 결론은 이러하였다. 여로에서 강도를 만났거나, 길을 잃어버린 순진한 아가씨가 자신을 구원해줄 사람사는 곳이랍시고 찾아든 곳이 이곳 맥산관일 것이라는, 아가씨는 보금자리를 찾아왔지만 그것은 불행히 도 보금자리가 아닌 호랑이 아가리에 기어든 형국이라는 결론이었다. 그렇게 결 론을 짓고 보니 아치는 아가씨가 더 없이 불쌍하고 가련해 보였다. 정말 박복한 계집이었다. 길 잃은 어린 새가 찾아든 곳이 하필이면 호랑이 아가리 속이라니. 그러나 잠시 후 터져나온 녹의여인의 일성은 아치의 득의만만한 추리를 단 한 방에 박살내고 말았다. 아치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영웅들을 초빙하러 왔습니다." 일순간 장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거리가 생겼다는 설레임 같은 것은 아니었다. 아치가 보기에도 대단히 황당했다. 여인의 행색이 용병을 모집 하거나 청부를 맡기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며칠 을 두고 비참한 꼴을 당한 것처럼 아주 낭패스러운 몰골을 하고 있었다. 물론 청부업자들이라는 것이 몰골을 따지지는 않았다. 오로지 하나, 돈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문제는 녹의여인의 행색이 바로 여인에게 분명히 돈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는 데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불안한 눈초리로 여인이 문 쪽을 돌아다 보았다. "몇 명이나 쓰시려우?" 나서기 좋아하는 호서출신의 단고립(單古立)이 대뜸 물었다. 단고립은 이것 저 것 참견하기 좋아할 뿐아니라 여색도 밝히는 편이었다. 단고립의 목소리에는 약 간의 조소끼가 서려있었다. "많으면 많을수록......" "그럼, 여기 전부 다라도 좋소?" 여인이 잠시 당황한 빛을 띠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허어! 용병부대라도 창설하실 참이신가?" 단고립은 이제 아예 노골적으로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여인의 표정이 적지 않 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치의 보기에는 단고립은 아직도 참으로 신사적 인 편이었다. 정작 단고립이 본색을 드러낼 기폭제는 성질 급하기로 유명한 흑 표(黑豹)가 제공해 주었다. "조건은?" "두당(頭當) 하루에 은 한 냥드리지요. 우선 한달을 계약하겠습니다." 아치는 한숨을 내쉬었다. 흥정 첫마디부터가 잘못되었다. 청부거래라는 것이 무슨 도매상거래는 아니었다. 저마다 등급이 다른 만큼 거래의향이 있는 각각과 하나하나씩 면담을 하여 가격을 정하는 것이 통례였다. 물론 또 다른 상례도 있 기는 있었다. 대규모 모집의 경우, 대개는 서로 무리를 지어서 활동하는 지라 간혹 각 무리의 우두머리와 일괄타결을 하는 관례도 있었지만 그것은 고용을 하는 측도 예사아닌 전문가일 경우만 해당되는 이야기였고, 녹의여인으로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희망사항이었다. "선금부터 보여주슈." "... ..." 아치는 여인네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여인의 얼굴이 눈에 띄게 헬쓱해졌다. 누가 보기에도 '나 지금은 돈 한 푼도 없소.' 하고 시인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중인들의 얼굴에 흉흉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저래가지고 어떻게 돈버는 깡패짓을 한다는 거야?' 아치는 사내들의 사람보는 안목에 코웃음을 쳤다. 거래란 것이 그랬다. 생면부 지의 인간를 아무 담보도 없이 고용주로 모시는 놈은 없다. 하다못해 그날 그날 의 일당이라도 선불로 받는 것으로 조건을 단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제법 돈푼 께나 있어 보이는 놈에게 선금부터 보여달라고 대드는 놈도 없다. 요는 선금이 문제가 아니라 잔금을 제대로 치룰만한 능력이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그런 의미 에서 보자면 저 여자는 후자로 대접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아치의 감별결과로는 최소한 대갓집 외동딸 이상이었다. 아치가 여자를 보는데 있어서 최우선 항목은 우선 여자의 재력배경의 정도였 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것이 바로 과거 전성기적 아치의 부유함을 가름하 는 결정적인 척도였기 때문이었다. 거의 생사가 달렸다고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아치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여인의 귀천을 판단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제는 아예 버릇이 되어버렸다. 아치가 녹의여인의 분석에 심혈을 기울인 부분도 마찬 가지로 그녀의 출신성분과 그에 따른 예상 재력이었다. 재력적인 면에서 보자면 어느 모로 보나 녹의여인은 최상급이었다. 맥산관의 청부업자들은 그녀의 겉모 습만 보고 대충 지례짐작하는 애송이들 뿐이었다. 저런 안목을 가지고는 밥벌어 먹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아치는 혀를 찼다. 얼핏 보기에는 빈티가 자르르 흐르는 그저 그런 계집이었다. 그러나 그 내면에 흐르는 귀품은 천양지차였다. 두어달 전, 아니 며칠 전만해도 여인의 모습은 저 렇게 초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치는 장담할 수 있었다. 심하게 접혀진 눈두 덩이의 주름과 고귀한 여인계층이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푸석푸석하 고 주름이 많은 피부는 그녀의 현실을 소근거림과 동시에 그녀의 풍성한 과거 를 웅변해주고 있었다. 주름진 눈두덩이와 푸석한 피부에서 아치는 오히려 며칠 전만해도 달덩이처럼 부티가 넘치던 그녀의 본바탕을 보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극단적인 부적응이 초래한 결과였다. 전혀 생경한 재난에 며칠은 된고생을 했을 모습이었다. 너무도 고생모르고 자랐기에 오히려 갑작스러운 굶주림과 헐벗음이 더욱 심하게 육체적 부조화의 상태를 가져다 준 것이었다. 그 변화가 영구적인 몰락이 아닌 일시적인 재앙에 불과하다는 확신은 그녀의 눈빛이 대변해주고 있 었다. 투입되는 비용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아무 런 의심없이 서려 있었다. 눈빛대로라면 부자도 보통 부자가 아니었다. 사태는 아치의 조소와 경멸을 그래로 반영하여 신사적인 단고립이 개망니니로 변하는 파국으로 치닺고 있었다. 그러나 아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로 주 방으로 향해야했다. 성질 더러운 녀석의 음식주문이 아직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 이었다. 옆에 서있는 아구(兒龜)녀석을 몇 번 툭툭 치며 재촉해보았지만 별무 신통이었다. 녀석은 전혀 예상밖으로 이번 흥정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일부러 아 치의 채근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눈치를 못 채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하 였다. 무슨 거래흥정이 벌어진다고 해서 아구가 일을 게을리한 적은 한 번도 없 었다. 아구의 입장에서는 흥정상태에서만은 당연히 잔무를 거부할 권리가 있음 에도 불구하고 아구는 아치의 지시가 있건 없건 자발적으로 평소의 소임을 다 해왔었다. 아치는 기실 점소이가 아니라 청부를 얻기위해서 인간시장에 대기하 고 있는 무사였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당연히 그 시간만큼은 손님접대 업무를 거부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구가 이 곳 맥산관에 흘러 온 것은 삼 년 전이었다. 아구가 처음 이곳에 와 서 자신의 용건을 말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객잔이 떠나가라고 폭소를 터뜨렸 다. 지금 자신의 용건을 말하는 녹의여인에 못지 않게 그 용건에 어울리지 않는 몰골이었다. 사람을 향해서 칼질은 커녕, 닭한 마리도 제대로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반푼이가 바로 아구의 몰골이었다. 체형부터가 무공을 체득할만한 균형이 이루고 있지 않았다. 구부러진 등, 오그라진 다리, 휘어진 팔다리, 유연성이나 근력 따위는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반병신에 가까운 근골이었다. 아치마저도 아구같은 놈쯤은 너덧 명이 한꺼번에 덤벼도 자신있을 정도였다. 어째거나 자신 의 식비만 해결하면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객잔 맥산관인지라 아구는 이 곳의 단골손님, 즉 낭인무사가 되었다. 찾아주는 손님이 없는 것은 고사하고 툭하면 이놈 저놈 동료들에게 밥먹듯이 골탕을 먹는 처지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이곳의 낭인들은 만만한 장난감이 생긴 것이 좋았는지 시간이 경과할수록 쌍수로 그를 환영하였다. 그런 아치를 맥산관의 주인, 주백(酒白)이 점소이로 받아 주었다. 아구는 그의 명성과 외모에 맞게 거의 유명무실한 청부업자였다. 기껏해야 사람들의 손이 모 자랐을때 잔 심부름이라도 덜어보고자 몇 몇 패거리에서 잠시 빌어쓰는 경우가 있을 뿐, 고용주 스스로가 아구를 고용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신기한 것은 그런 와중에 드물게 얻어걸리는 일거리에서 제법 험험한 현장에 투입되고 도 아구는 언제나 생존자들에 섞여서 당당히 맥산관으로 귀환하고는 하였다. 일 부러 아구를 사지로 내모는 일이야 없었겠지만 그래도 흉기에는 눈이 없다는 일거리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모두들 굼벵 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고 혀를 내둘렀다. 당연히 마땅한 일거리가 없는 아구 는 굶기를 밥먹듯이 해야했다. 그런 아구에게 어느날 주백이 점소이노릇을 제의 했다. 말하자면 아치의 보조역 같은 것이라서 부하직원이 생긴다는 의미에서 아치로 서는 고소원불감청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주백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주백이 남의 사정을 돌보아주는 너그러운 인간이라는 생각은 눈 꼽만치도 하지 않았다. 전혀 어림없는, 씨도 안먹히는 이야기였다. 주백으로 말 할 것 같으면 사람보는 안목에 관한 한, 아치로서도 여자를 제외하고는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 했다. 객잔 주인의 입장만 가지고 본다면 아구는 무사보다도 점소이 체질이었다. 그에게는 점소이의 신성한 덕목인 요령피우기조차도 해당사 항이 없었다. 단, 스스로의 요구조건대로 전처럼 출퇴근하겠다는 것과 여전히 낭인무사로서의 자격을 유지하며 고용 흥정시에는 점소이에서 청부업자로서의 입장변경하겠다는 항목을 관철시키기는 했지만 그런 요구조건은 아구가 하는 짓을 보면 문제거리도 될 수 없었다. 그러던 아구가 오늘만큼은 전혀 다른 사람 처럼 거래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었다. 별 수 없이 재미난 구경거리를 뒤 로하고 아치가 주방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아치가 주방과 술청 사이의 배출구에서 술과 안주를 챙기는데 아구가 뒤따라 들어왔다. 그리고는 말없이 쟁반을 잡아 당겼다. '짜식!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보군.' 아치는 가벼운 안도감을 느끼며 별다른 거부감없이 쟁반을 넘겨주었다. 아치는 아구가 간만에 여자를 보고는 반쯤 넋이 나갔었나 보다고 새삼 자위하였다. 사 실 평소답지 않은 아구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던 터였다. 전 같으면 머리통이라 도 쥐어박아서 아구를 종용했을테지만 좀 전의 아구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왠지 감히 함부로 범접키 어려운,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래서 그냥 자신이 주문받은 음식을 나르려고 주방으로 온 것인데 아구가 따라 와서는 음식을 인계받은 것이었다. 아치는 자신이 과잉반응을 일으켜 잠시 착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아구 가 한족여인과 대면하는 모습을 본 것은 아구가 이 곳에 온 이래 즉 삼 년 만 에 처음이었다. 그런 만큼 평소 아구가 여자를 밝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 다. 하지만 남자라면 누구나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좀 이상한 녀석이긴 했지만 아구라고 별 다를 것은 없었다. 간만에 색다른 매력의 한인여성을 보니 반쯤 넋 이 나갔던 모양이라고 아치는 그렇게 자위하였다. 그리고 괜시리 겁먹었던 자신 이 약간 부끄럽기까지 하였다. 아구는 쟁반에 육안차(六安茶) 한 주전자를 더 얹어놓고는 청으로 걸어 나갔 다. 아마도 누군가 차 한 주전자를 추가로 주문하는 바람에 제 정신으로 돌아왔 나보다고 아치는 생각했다. 뜻밖의 사태를 겹쳐서 겪은 탓인지 여기서는 차를 주문할 정도로 고급입맛을 가진 이가 없었다는 것을, 특히 안휘지방의 육안차 같은 특산품이라면 더욱이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평소 같았으면 당 연히 차 주전자를 가지고 나가는 아구에게 주문사실을 재삼 확인을 했을 아치 였다. 아치도 서둘러서 대청으로 돌아왔다. 이런 보기드문 구경거리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꼴에...... 지가 무슨 포숙정(包叔貞)이라도 되는 줄아나보지? 참나! 생긴거하고 는 정말......" 귀퉁이를 돌아 나오는데 막 들려온 소리였다. 대충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 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포숙정은 이 일대 인간사냥꾼들에게는 강남출신 모진위 다음으로 유명한 인사 였다. 한때는 모진위가 근동 천리까지 쩌렁쩌렁 그 이름을 드높혔다. 모진위가 드디어는 서북 변방에 숨어 들었다는 소문때문이었다. 모진위가 이 곳 변방에 왔다는 것은 이곳의 현상금 최고금액 기록이 경신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 도 압도적인 차이로. 최고 금액의 현상범 모진위에 관한 화재가 서북일대의 인 간사냥꾼의 입에서 한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모진위는 한마디로 봉이었다. 풍문 에 의하면 무공도 별 볼 일 없는데다가 그를 보호할만한 배경도 보잘 것 없었 으며, 생긴 것조차 별나게 생겨서 어딜가나 쉽게 눈에 뜨인다는 군침도는 조건 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삼 년이 지나도록 모진위를 잡았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예 그 비슷한 놈을 보았다는 사람조차 없었다. 천하악적 모진위에대 한 관심은 곧 수그러들었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인간사냥꾼 사이에서 가장 유 명한 인물은 바로 포숙정이었다. 포숙정은 누구나 볼 수 있었고, 또한 누구나 그녀를 만져볼 수 있었다. 다만 만만치 않은 금전을 소비할 수 있는 사람에 한 해서였지만. 포숙정은 난주일대에서 첫손 꼽히는 절색의 기녀였다. 단지 어여뿐 기녀라는 사실뿐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인간사냥꾼들의 인구에 회자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 작으로 그녀를 유명하게 한 요인은 그녀가 기녀가 된 사연에 있었다. 남편의 원 수를 갚았다는 둥, 배신한 정부(精夫)를 응징했다는 둥 세간에 떠도는 저간의 과정이야 어떻든 정숙한 아낙을 일대기녀로 만든 것은 다름아닌 그들의 동료 인간사냥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값을 담보로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하였고, 그 청부를 이행한 살수가 그녀를 난주 최고의 기루에 팔아먹는 것으로 그 살행 대금을 회수했던 것이다. 아치는 다시 고소를 금치 못했다. 설령 돈이 없더라도 용모라도 반반하면 포숙 정처럼 팔아 치워서라도 청부비용을 회수할터인데 녹의여인은 한마디로 아니 라는 이야기였다. 아치는 물건 볼 줄 모르는 그런 안목이 가소로워 고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흥정상대를 판단하는 안목이 영 개판 들이었다. 아치가 판단하기로는 작금의 처지야 어떻건 청부만 제대로 수행된다면 여인은 분명히 그 금액을 지불할 능력이 되고도 남았고, 만에 하나 사태가 틀어져도 여 인은 청부금액 정도의 몸값은 충분히 되는 여자였다. 아치는 며칠만 정양하면 다시 되돌아 올 그녀의 본바탕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본바탕을 회복한다 하더 라도 물론 포숙정과 같은 눈에 확 띄는 미모는 아니었다. 오히려 수수한 용모거 나 그 보다도 약간 못 미치는 미색이었다. 하지만 아치나 주루의 노련한 여성감 별사 정도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만한 야릇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포숙정을 포함한 대부분의 미인들은 여체의 신비가 벗겨지는 순간부터 차츰차 츰 그 매력이 빛을 잃는다. 아무리 대단한 미색일지언정 그 내면이 받쳐주지 않 는 한, 횟수가 반복될수록 그 신선함 정도가 떨어져 간다. 하지만 극소수의 그 반대경우도 있다. 바로 지금의 녹의여인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한마디로 보면 볼수록 감칠 맛이 나는 여자, 깊고 은밀한 여인특유의 본성을 소유한 여자의 전 형이었다. 여색이란 것이 자주 볼수록 싫증이 나게 마련인 것이 일반적인 이치 지만 녹의여인의 외모는 보면 볼수록 새록새록 정이 드는 그런 깊이가 있었다. 아치는 장담할 수 있었다. 아치는 그저 이목구비와 겉모습의 윤관만 가지고도 숨겨진 여체를 탐색하는 남다른 재주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살펴본 이 녹의여인의 여체 또한 상상만 해도 아랫도리가 찔끔거릴 정도로 극상품이었다. 콧두덩이의 형태로 판 단하건데, 그 윤기와 풍부한 살집은 그녀의 가슴이 항아리처럼 볼록하고, 고무 공처럼 탱탱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모양과 탄력에서 최고일 것임에 틀림 없었다. 또한 날렵한 곡선을 이루며 양미간으로 뻗어올라간 콧등과 적당히 패인 미간은 날씬한 허리와 쪽 뻗은 다리 곡선이 더 할 나위없이 세련됨을 증명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풍성하게 도두라진 그녀의 양볼과 잡티없는 눈동자 는 그녀의 속살이 얼마나 풍만하며 매끄러운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빛 깔조차 상아빛으로뽀얗게 빛을 발하고 있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결정적 으로 입모양이 화룡점정이었다. 돌기마저 풍부한 아랫입술에 감싸여서 탐스럽게 또아리를 틀고 있는 그녀의 입은 천하요물이라고 할만한 명기(名器)의 원형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었다. 어지간한 사내가 아니면 삽시간에 허리가 녹아버리고 말 것이라 아치는 또한 장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루는 팔아넘기는 것은 고사하고 평소하는 짓거리대로 적당한 길목에서 강간 질을 벌이고 손털어도 크게 남는 장사였다. 목숨을 걸고 벌어드린 몇 건의 생명 수당을 단 하룻밤에 포숙정의 사타구니 속에 털어 넣던 작자들 아니던가? 잘하 면 가벼운 윽박질음 한 번으로 포숙정 서너 배의 재미를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 아치의 품평을 아는지 모르는지 객잔의 불한당들은 어림 반푼어치도 없 다는 태도로 여전히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여인의 표정은 점점 애절해갔고 청부 조건 또한 애걸조로 약화되었다. 단 한명이라도 좋으니, 보호가 아니라 그저 길 안내라도 좋으니 난주까지만 동행해준다면 그 은혜는 틀림없이 최고의 성의로 보답하겠다는 애원에 가까운 호소였다. 사내들은 한결같이 목석이라도 된 듯, 꿈적도 하지 않았다. 하긴 그럴만도 한 것이 하서주랑의 동쪽 입구라 할 수 있 는 이 곳 기련산맥의 동쪽 기슭은 유래가 없는 호황을 지금 누리고 있었다. 모진위라는 흉적이 나타나서 현상금 벌이꾼들이 천하각지에서 모여들어 공급 이 수요를 초과하는 삼 년 전의 대불황 이래로 이런 호황기는 없었다. 감숙(甘 肅)과 청해(靑海)일대가 흡사 무림의 중심지가 되어버린 듯 흥청대었다. 낙양표 국이 장안에서 난주까지 대규모 표행로( 行路)를 열었다. 그리고 때를 같이하 여 서북무림에서는 감히 감당키 어려운 중원의 절정고수들이 옥문관, 주천(酒 川) 그리고 천산북로와 하서회랑 등지에서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오대문파 니 육대문파니 기세등등하게 중원의 패권을 경쟁하던 대문파의 고수들까지 적 지 않았다. 그 위세로 산중호걸들의 포악질이 약해지고 교역로가 안정되자 남해 안 항구로 몰려갔던 국제교역의 대행회들마저 하서주랑과 천산북로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재화가 풍성해지자 반대여파로 다시 보다 강력한 녹림도들이 근거지 를 옮겨왔고, 범법자들이 몰려들고...... 그런 주위여건 속에 서북일대의 인간시장 폭등에 절정이 되어준 것은 역시 호신련(護新聯)과 복고맹(復古盟)의 암중혈투 였다. 호신련과 복고맹. 정말 그런 이름의 무슨 단체들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말하기 편하게 호사가들이 그렇게들 불렀다. 시정의 뜬 소문을 아치가 짐작하기 에 조정의 도당들을 말하기 편하게 신법당, 구법당으로 부르는 것처럼 그 도당 들에 빚대어 그렇게들 지칭하는 모양이었다. 복고맹의 면면은 알려지지 않았지 만 대체로 낙양표국이 그들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설이 무성했고, 호신련측의 뒤에는 천하제일의 염상조직 강남 채가장이 버티고 있다는 별로 근거없는 소문 들이 세간을 떠돌았다. 소문의 진위야 어째됐든 덕분에 중원과는 딴 판으로 서 북무림에는 난세가 도래하였고 인간시장의 낭인들은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제 세상을 만났다. 얼마전에는 은괴 육백관이 걸린 대대적인 쟁탈전이 벌어졌다는 데 그 후로 낭인들의 몸값은 금값으로 치닺고 있었다. 아치는 그 소문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은괴 육백관이라면 그냥 쌀이라고 쳐도 작은 푸대로 백 가마가 넘었다. 그 소문을 듣고는 소문이란 것은 정말 황당무계 할 정도로 과장이 심한 것이라고 아치는 낄낄거렸었다. 그러나 그 유명한 낙양 표국의 국주까지 이곳 감숙에 나타난 것을 보면 은괴 육백관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무슨 대사건이 일어난 것만은 틀림없는 모양이었다. 달포전에 낙양표국 주가 하서회랑에 들어가기 위해서 근방을 지나는 것을 일부러 관도까지 나가서 구경했던 아치였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빈털털이로 밖에는 안 보이는 녹의여인 의 청탁에 하나 같이 콧방귀도 뀌지 않음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아치 가 보기에는 이 여인만큼 확실한 손님도 없었지만. 아구에게 눈길을 돌리던 아치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저 주문한 탁 자를 잘못 찾았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아구는 여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인을 깨끗한 탁자로 안내하고는 주섬주섬 음식상을 차리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고작 해야 낭인을 고용하러오는 손님들에게 접대용으로나 쓰이던 비싼 찻주전자가 실려나간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구에게는 그 녹의여인도 훌륭한 접대손님이었 던 모양이다. 아치는 갑자기 아구의 콧등이라도 깨물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 다. 물론 아치가 판단하기에 녹의여인은 확실한 보증수표였다. 그러나 아치는 점소이지 낭인이 아니었다. 고용무사들에게는 보증수표일지 몰라도 점소이에게 있어서 그녀는 최악의 부도수표였다. 당장 돈이 없으면 만두 하나라도 주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폐점이나 다름없는 아구의 청부업으로 볼 때, 무사로서의 손 님감별법이야 아구가 하급일 수 밖에 없겠지만 점소이로서의 안목이라면 아구 도 그리 떨어지는 편이 아니었다. 적어도 여태까지 한 번도 이런 실수를 한 적 이 없었다. 아치가 서둘러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다. 몹시 갈증을 느끼고 있었는지 여인은 이미 찻잔을 비웠고, 몹시 굶주렸는지 이미 젓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갈증과 굶주림 앞에는 고귀한 품성도 소용이 없었다. 여인은 음식을 보자 넋이 나가버 렸던 것이다. 더구나 몇 번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아구가 무료제공을 보장하며 잔뜩 권하고 있는데야 체면이고 나발이고 무슨 걸리적 거릴 것이 있겠는가? 정작 체면이고 나발이고가 필요해진 사람은 아치였다. 흰자위를 확대시키고 입 술을 일그러뜨리며 최대한 험상궂은 표정을 만들어 아구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아치는 그만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 평소의 아구가 아니었다. 순간 왠지 섬뜩 해진 아치는 자신의 표정이 별로 적당치 않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잔뜩 구겨 진 표정을 아무런 조치도 없이 부드럽게 피는 것은 아치에게 어지간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맥산관 내에서의 사회적 지위와 체통에 관계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아치를 진퇴양난에 빠뜨린 것도 아구였지만 그런 아치를 구원한 것 도 아구였다. "제가 아가씨를 난주까지 모시겠습니다." 녹의여인은 물론 청 내에 자리잡고 있던 전원 모두가 일순 얼이 빠져버렸다. 그리고 잠시후에는 일제히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아치도 험악한 쪽에서 어이없 다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표정을 전환할 수 있었다. 아치로서는 실로 위기일발을 모면하는 순간이었다. 가장 어안이 벙벙한 표정은 녹의여인이었다. 그도 그럴만 한 것이 그쪽에서 알기로는 아구는 점소이었고 자신을 보호하는 보표는커녕 오 히려 자신이 보호해야 할 만큼 후줄근하고 어리버리한 몰골이기 때문이었다. 아치의 뒷통수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 호로 잡놈! 네놈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 어르신을 생짜로 굶기는지 내 한 번 따져봐야겠구나!" 아차! 성질 급하기로는 역시 남못지 않기로 유명한 백아검(魄芽劍) 남곤(楠昆) 이었다. 아구란 놈이 여인에게 가져다 바친 그 음식이 바로 남곤이 주문한 몫이 었다. 때려죽일 듯이 양팔을 걷어부치는 폼세가 단단히 열이 받은 기색이었다. "아이고 나으리! 이 아치놈이 잠시 정신이 나갔나봅니다." 평소라면 아구가 얻어 맞아야 마땅한 일이건만 오늘따라 어째 남곤의 짜증마 저도 아치의 뒷통수와 볼따귀가 책임지고 있었다. 아치는 싹싹 빌며 부리나케 주방으로 뺑소니를 쳤다. 겨우 위기를 면했나했더니 기어코 볼쌍사납게 체면을 구기고 만 것이었다. 아치가 허겁지겁 주방장을 재촉해서 음식을 챙겨나오니 사태는 의외의 방향으 로 진전되고 있었다. 여인은 출구쪽을 향한 채 엉거주춤 일어서 있었고 일장쯤 떨어진 우측편에 단고립이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여인의 탁자 맞은편에서 아구 가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구는 어느새 야영에 맞는 경 장차림으로 검집까지 틀어쥐고 있었다. 생전 처음보는 아구의 이상한 행색이었 다. 아치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겉저고리만 벗으면 언제나 경장차림이었으 니 복장이야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여간해서는 검 손잡이 근처에는 손길 도 안 보내던 아구였다. 아구는 여차하면 검을 뽑아들 기세였다. 상황을 보아하니 여인이 마지 못해서 아구의 자천을 받아들였테고... 사실 난주 가 초행이라면 아구라도 달고 가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여기서 애걸해 보 았자 더 이상 나올 것은 없었다. 용건을 마쳤으므로 당연히 객잔을 떠나려 했을 터이고... 하긴 어떤 미친 년이 이 험악한 곳에 한시라도 더 있고 싶으랴! 그런 데 의외의 방해물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단도립의 흑심이 발동했다고 밖에는 추 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세대로라면 여인은 출구를 향하여 내딛고 있었고 단도립이 여인의 퇴장을 가로막으려고 나서던 와중에 꼴에 보표랍시고 아구가 발검자세를 취한 형국이었다. 연전에도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다. 잘 못 찾아든 장족여인이 거의 걸레가 되 어 객잔을 기어나간 적이 있었으며, 어느 연약한 회족여인은 뭇사내들의 거친 손길을 견디다 못해 끝내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던 적도 있었다. 언제나 계집 밝 히는 단도립이 말썽이었다. 하급낭인들로서는 감히 그런 강간을 선도할 처지가 못되었다. 하지만 단도립은 그래도 네댓 명의 패거리쯤은 먹여살리고 있는 우두 머리였다. 설혹 못 마땅해하는 측이 있더라도 일부러 제지할 계제가 못되었다. 덕분에 다른 조무래기들을 막을 명분도 없어지는 터이고, 여자 맛보기에는 형편 이 좀 궁핍한 아랫것들이 그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언제나 정해진 것처럼 피가 낭자한 윤간이 자행되고는 하였다. 아치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안 봐도 뻔한 상황이었다. 아치가 눈을 뜨고 나서 보게 되는 광경은 피떡이 되어 널브러진 아구의 시신과 단도립 아래 깔려 있는 버둥거리는 허연 허벅지 뿐일테니까. 아구도 자신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 다는 것을 아는지 두 눈에 뚜렷한 죽음의 공포를 담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치는 감았던 눈을 호동그랗게 뜨고는 두 눈을 싹싹 비벼서 다시 아구를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구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뻔 히 알면서도 단도립에게 수작질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보표로써의 의무라고? 웃기는 개수작이다. 말이 좋아 보표지 즈이 애미애비가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 는 한, 그 누가 제 목숨 날아갈 것을 뻔히 알면서 나서겠는가? 아니 애미애비의 일이라도 제 목숨 내놓을 놈은 세상에 드물었다. 그런데 아구 자식은 갑자기 돌 기라도 했는지 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감히 단도립 어르신네 앞에서 발검자 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아치가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아구의 눈빛은 죽음 의 두려움이 짙게 서린, 이대로 죽는 것이 억울하지만 그래도 각오가 됐다는 듯 한 그런 눈빛이었다.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녹의여인이 아구의 애미일 리는 만무하였다. 생면부지가 아니던가? 아무리 봐도 서로가 초면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단도립도 그런 아구의 눈빛이 너무도 뜻밖이었는지 잠시 주춤거리고 있었다. 아구의 등 뒤에서 조면객(鳥面客) 이소(李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단도립 을 만류하는 표시였다. 둘 간의 관계를 보자면 이소가 단도립의 직속상관격이었 다. 낭인에게 무슨 소속과 계급이 있겠냐만은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그런 소리 가 나올 만큼 큰 건을 청부맡을 적마다 같이 손발을 맞춘 적이 많았다. 단도립이 잠시 더 주저하다가 이내 두어 걸음 후퇴했다. "킁!" 하릴없이 뒷짐을 진 단도립이 허공을 바라보며 크게 콧똥을 날렸다. 고개를 뻣 뻣히 하고 허공만 바라보는 폼이 애써 아구와 여인을 외면하는 기색이었다. 아구가 그대로 검수를 움켜잡은 채 조심조심 단도립과 여인의 사이로 파고 들 었다. 아구가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아치는 긴장감이 더해져서 거의 졸 도할 지경이 되었다. 숨이 가쁘고 식은 땀도 흘렀다. 드디어 단도립을 가로막은 아구가 여인에게 고개짓을 했다. 멍한 표정으로 아구와 단도립을 번갈아 바라보 던 여인이 갑자기 깨달은 듯 아구의 등뒤를 돌아서 출구를 벗어났다. 다시 아 구가 움직였다. 등부터 천천히 방향을 틀더니 조금씩 뒷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마침내 아구도 객잔을 벗어났다. '휴우-!' 아치는 마음속으로나마 비로서 큰 한숨을 내쉬었다. 아구가 지나간 흔적을 따 라 물방울이 이어져 있었다. 물방울을 남긴 아구 스스로가 부지런한 놈이었기에 평소 객잔바닥에 물기를 남겼을 리는 없었다. 아구가 둘러보니 술청은 물론 주 방근처에도 물기라고는 없었다. 아구를 따라간 물방울은 바로 아구 자신이 흘린 땀방울일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게 해서 맥산관 간판이 달린 이래로 가장 안 어울리는 고용주가 가장 안 어울리는 고용무사를 데리고 객잔을 떠났다. 반대의 의미로는 가장 어울리는 고 용주와 고용자의 만남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형님! 왜 말리셨수?" 단도립이 죽일 듯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 눈빛 때문이지." 이소가 대답했다. "눈빛이요? 내참 어이가 없어서... 형님! 이 놈이 형님의 눈치를 본 것은 그 놈 의 눈빛 때문이 아니라..." 단도립은 말을 끊고 거만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단도립이 주위의 동료를 둘 러본 이유는 아구가 비록 시덥지 않은 놈이기는 할 망정, 이곳의 무사이므로 그 런 아구와 계약한 녹의계집도 정식고용주로 인정한다는 표시였다. 거두절미하고 녀석의 눈빛이 꺼림직해서가 아니라 동료들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서 손질을 포기했다는 뜻을 전달하려는 의도였다. 이전에도 단도립으로 인해서 계집문제로 주변부락과 말썽이 있어 왔기에 맥산관 식구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반발이 있 었던 터였다. 단도립이 제 아무리 강심장이라고해도 이번만큼은 정식 고용주를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반발이 생길 경우 상당한 곤란을 겪을 것은 자명한 일이 었다. 결국 그런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손질을 멈춘 것으로 동료들이 이해해주 길 바라는 안배였다. "그 년도 정식계약자아니요? 다 대를 위해서 소가 희생하는 마음으로 내가 참 은 것이외다." 단도립은 자신의 말투가 어째 변명이 궁색한 듯하여 결국 말꼬리를 내리고 말 았다. 인정하기는 죽어도 싫었지만 녀석의 눈빛이 걸려서 손질을 멈춘 것만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눈빛이 묘하긴 합디다. 난 그런 꼴은 도통 본 적이 없어서...... 형님은 뭐 좀 집히는 게 있수?" 조면객 이소가 심각하게 주둥이를 내미니 정말 새부리의 형상이 되었다. 조면 객이라는 그의 별호는 그냥 생긴 것은 아니었다. 가히 명불허전이었다. 심각하 게 턱을 내민 이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동생도 아구란 놈을 단칼에 베어버릴 생각은 없었겠지? 그랬다가는 저 영감탱이 등쌀 이곳에서는 장사 다 해먹은거니까..." 이소는 슬쩍 맥산관의 주인 주백의 뒷통수에 눈길을 주며 말을 이었다. "아마 대충 몇군데 뿌러뜨리는 것으로는 아구녀석을 떨칠 수 없었을 거야. 사 지가 몽땅 잘려 나가면 몸뚱이만으로라도 덤볐을테니까." "설마요?" "아니야. 노부가 보증하지. 난 전에 그런 눈빛을 본 적이 있지. 세상에 가장 지 겨운 놈들의 눈빛이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뭐 그런거하고는 천양지차 야. 죽음을 두려워하지. 그렇게 허무하게 죽기도 싫어하지. 그런데 죽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댓가로라도 버텨야 한다고 절감하는 것일테지. 죽음보다 귀중한 무언가를 위해. 자기로서도 그러지 않고는 방법이 없는거지. 젠장, 젠장 푸념해가며, 자신의 몸을 불살라 가며 무언가를 지키는거야." 말없이 듣고있던 주백이 끼어들었다. "그게 이십 년 전 밀교 애들 도살할 때 얘기아냐?" 이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백을 제외하고는 이소가 맥산관에서 가장 오래된 단골이었다. "그 놈들 정말 지독했지. 헌데 말이야 아구놈 눈빛은 그 이상이었거든." 이소가 주백을 향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너무 오래간만에 올리는 군요. 청룡장 교정 본다는 핑계로 만판 놀았습니다. 흠. 그나저나 저도 서둘러 완결을 지어야 할 모양입니다. 만약에 청룡장 많이 팔려서 여력이 남으면 간소한 비용으로 빌어먹을 표류공주 간소책자로 만들어준답니다. 실은 청룡장 사은품으로 구상 중이지요. 이번에 선투자해주신 분에 한해서 청룡장 별책부록 삼아서 증정본으로 보내드린다는 계획입니다. 물론, 그 후진 청룡장이 그렇게 많이 팔릴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서둘러 완결을 해야겠군요. 흑. 청룡장 적게 팔리는 것을 극구 기원하고 있는 흑수노계였습니다. 번 호 : 7003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8-10-15 16:46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42- 녹의여인도 사내의 눈빛을 보았다. 그녀 또한 그 눈빛이 심상치 않음은 느 끼고 있었다. 막연하나마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그녀에게 닥 쳐던 위기가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도 몰랐고 사내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사내의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더 더구 나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마침내 그 눈빛의 의미를 확연히 깨달게 된 것은 그로부터 먼 훗날, 아주 먼 훗날이었다. 녹의여인은 점점 멀어지고 있는 맥산관을 돌아보며 한숨을 지었다. 당초의 계산은 이게아니었다.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저 묵묵히 걷고 있었 다. "이봐요! 이름이 뭐예요?" 여인은 그렇게 말해놓고 아차싶어 얼굴을 붉혔다. 아무 조건없이 따라나서 준 사내의 안면을 봐서라도 그런 건방진 말투는 온당치 않았다. 대협이니, 존명대성하는 거창한 호칭은 아니더라도 이봐요니, 이름이 뭐니 보다는 좀 더 공손한 표현을 골라 보았어야 했다. 불쾌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내심 조 바심을 치는데 사내가 선선히 대답했다. "아구라고 합니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불만스런 어조는 아니었다. 여인이 안도 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내가 영 미덥지 않았다. 추격해오고 있는 자들을 생 각한다면 절정고수가 열 명쯤 버티고 있어도 안심이 안 될 상황이었다. 여인 이 보기에 사내는 절정고수는 고사하고 쓸만한 삼류무사로 보기도 어려웠다. 아무리 뜯어봐도 쓸모없는 하수인 것만 같았다.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를 보고 있자니 왠지 밉살스럽기까지 했다. 여인은 그런 감정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도리깨질을 쳤다. 안내자를 얻은 것만해도 감지덕지해야할 처지였다. 하긴 그 객잔의 사내들 전부가 나선다 해도 적들의 상대가 될 수 없기는 마찬가 지였다. 여인은 애써 마음을 고쳐잡고 약간은 공손한 말투로 다시 물었다. "성(性)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내가 멈칫하였다. 무언가 갈등하는 듯한 기색이었지만 대답은 의외로 싱 거웠다. "근본도 모르는 놈이지요. 거북이처럼 굼뜨다고 남들이 아구라고 부르고 있 을 뿐 이름도...... 소저 편하신대로 부르십시요." 사내가 평탄한 길을 굳이 마다하고 산길로 접어 들었다. 자세히 보지 않고 는 발견하기도 어려운 형편없는 소롯길이었다. 가던 길을 따라서 곧장 반나 절을 나가면 난주로 통하는 관도였다. 여인은 그 길을 거슬러서 맥산관을 찾 아왔던 터였다. 여인은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서 걸음을 멈추었다. 소롯길 초입은 커다란 바위덩이 때문에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사내 가 비탈 상부의 나무가지를 붙잡고 경사면을 기어올라갔다. 그리고는 뒤따르 는 기척이 없음을 눈치챘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여인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내를 마주보았다. 잠시후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뜻밖으로 천진한 미소였 다. 여인은 사내의 미소에서 많은 것을 보았다. 이윽고 결심을굳히고 사내 를 따라 나서려던 여인에게 조심스러운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관도로 나가려면 반나절은 족히 걸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저 산줄기를 돌 아가려면 거기서도 하루는 더 걸어야 할 거구요. 조금 고생스럽겠지만 이리 로 간다면 해질녁이면 그 근방까지는 당도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하시겠 습니까? 관도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쪽은 밤이슬을 피할 곳도......" 여인은 미안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사내의 말허리를 자르고 말았다.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여인은 어색할 만큼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사내가 황송하다는 듯 어쩔줄 모르고 쩔쩔매었다. 여인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었다. 보표로써의 능력을 불신하다 보니 마침내는 안내자로서의 능력까지 불신해 버렸고, 기어코 그가 베푼 은덕마저 고깝게 여기고 그를 깔보고 무시했던 것이다. 여인은 사내의 미소를 대하자 그런 자신의 태도가 마냥 부끄러워졌다. 미소 하나만으로도 족했는데 덧붙혀 자상한 설명까지 선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까지의 적은 말수를 감안한다면 너무도 파격적인 배려였다. 여인이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비탈로 접어들었다. 사내가 왠일인지 그대 로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항시 일장 정도의 간격을 유지했던 사내였다. 여인이 다가서자 사내는 잡고 있던 나무가지를 바짝 구부려 주었다. 그제서 야 여인은 깨달았다. 사내는 그녀가 따라오지 않아서 돌아섰던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나무가지를 휘어주려고 돌아섰던 것임을, 또한 그동안의 거리 간격 도 우연이 아닌 인위적인 배려였음을. 여인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나무가지를 잡았다. 그리고 치마자락을 살짝 올려 잡으며 한쪽 발을 바위에 걸쳤다. 여인이 나무가지의 탄력을 이용해서 맵시있게 뛰어 올랐다. "...? ...!" 여인이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사내가 재빨리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여 인은 조금도 주저없이 사내의 손을 잡았다. 마침내 마음으로부터 사내를 안 내자로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한식경이나 걸었을까 충직한 안내자 아구가 걸음을 멈췄다. 여인은 잠시 의 아해 했다. 여인은 지금 목마르지도 배 고프지도 않았다. 휴식이 필요한 시 기도 아니었다. 직전의 휴식이 바로 한식경 전이었다. 아구가 걸음을 멈추는 것은 언제나 그랬다. 여인이 목이 마르다고 느끼는 순간사내는 행보를 멈추 고 어디선가 깨끗한 물을 길어왔으며, 여인이 배고픈 표정을 짓기만 해도 어 떻게 알았는지 음식을 내놓았다. 아주 맛있는 산적과 만두였다. 사내는 말라 비틀어진 육포로 허기를 때웠다. 여인이 만두를 권해보았지만 '됐습니다. 만 두와 산적이라면 신물이 납니다.' 하고 끝내 사양하며 육포로 식사를 마쳤다. 나중에 알고보니 만두와 산적은 그 일인분이 전부였다. 또한 여인이 힘들어 할 즈음이면 어김없이 휴식을 취하고는 하였다. 이 모두가 한마디 언질도 없 는 가운데 여인이 갈망하는 바로 그순간에 행해졌다. 여인으로서는 실로 오 랫만의 호사였다. 그런데 지금 사내가 다시 멈췄던 것이다.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내가 무엇을 해줄려고 하는지는 몰라도 현재로써는 딱히 필요 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설레는 마음으로 사내의 조치를 기다렸다. "봐라, 이놈아! 분명히 이리로 올거라고 했잖아. 이 형님 말 들어서 어디 손 해난 적이 있냐?" "흐흐. 고맙다, 동생아. 덕분에 몸 좀 풀게 생겼구나." 비릿하고 끈끈한 목소리였다. 여인의 기대는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여 인이 서둘러서 아구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여 와라, 귀여운 것!" 두 명의 사내가 평탄한 바위를 끼고 걸터 앉아 있었다. 한쪽은 어깨가 대단 히 우람했으며 다른 쪽은 뱁새눈이 특이했다.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아구는 고만 가봐라." 어깨가 자못 위엄 있게 내뱉은 말이었다. 아구와 안면이 있는 놈들인 모양 이었다. 그제서야 여인은 놈들의 정체를 알아챘다. 맥산관의 구석탁자에 쭈 그리고 있던 무사들이었다. '그렇구나! 아구란 놈이 이 놈들에게 나를 인도한 것이구나. 하지만 왜?' 도마뱀처럼 끈적거리는시선이 여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놈들의 의도를 대충 알 것 같았다. 여인은 가슴을 가리며 몸을 움추렸다. 애시당초 값나가 는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는 행색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내 들이 군침을 삼킬만한 것이 남아 있음을 여인은 그 순간 깨달았다. 바로 자 신의 몸이었다. 싸늘한 배신감이 여인의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생면부 지의 낯선 사내를 잠시라도 믿었던 자신이 못견딜 정도로 한심스럽다. 여인 의 힘껏 주먹을 쥐었다. 밉살스런 아구의 뒤통수에 매몰차게 일장을 안겨줄 심산이었다. "어쭈! 어르신 말씀이 안들리냐, 이 호로잡놈아!" 예상과 달리 아구가 물러서는 기색이 없자 이번에는 낄낄거리고 서있던 뱁 새눈이 우악스럽게 종주먹을 들이댔다. 순간 아구는 재빠르게 여인과 사내들 의 중간위치로 이동하며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종주먹을 들이대던 사내가 움찔하고 물러섰다. "이...... 이 자식이...... 좋은 말로는 안되겠구나." 뱁새눈의 손에 무언가를 번쩍거리는 것이 들려졌다. 자세히 보니 양쪽으로 날이 선 낫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낫의 중간 쇠대 부분에는 작은 고리의 쇠 사슬이 연결되어 있었다. 번쩍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쌍겸(雙鎌)이 아구를 향해서 날아왔다. 불시의 기습이었다. 여인은 속으로 헛바람을 삼켰다. 아구의 방어동작이 너무 늦었 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쌍겸을 막기에도 버거워 보였는데 아구는 쌍겸은 아 랑곳도 않고 옆에 서있는 어깨가 우람한 놈을 향해서 검을 날렸다. 순간 어 깨의 눈이 호동그랗게 변했다. 그야말로 기상천외의 역습이었다. 사실 뱁새눈의 급습은 허초였다. 뱁새로서는 아구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 다. 그저 낫으로 현혹하고는 다리를 걸어 넘길 요량이었다. 단단히 혼구멍을 내서 쫓아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구는 쌍겸을 무 시하고 어깨에게 일격을 보낸 것이다. 어깨가 기절초풍을 해서 뒷걸음을 쳤 다. 검이 아슬아슬하게 앙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구는 여력을 못 이기고 두어 걸음 밀려가며 상체를 굽혔다. 상대쪽에서 보자면 오히려 전화위복의 호기가 되었다. 뱁새눈이 때를 놓치지 않고 아구의 후미에 낫을 날렸다. 첫 공격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그야말로 요절을 내버릴 기세였다. 여인이 몸을 날려 뱁새눈을 짖져 갔다. 대단히 세련된 선풍각(旋風脚)의 자세였다. 여인이 무공을 익히고 있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던 뱁새눈이 옆구리를 감싸쥐고 나동그라졌다. 덕분에 아구는 자세를 수습하고 한숨을 돌렸다. 여 인이 뱁새눈 앞에 버티고 섰고 아구와 어깨가 대치했다. 어깨와 뱁새눈은 허둥거렸다. 지나가던 개취급도 안했던 아구의 한 수가 예 상외로 강력하고 날카로웠으며 여인의 자세가 제법 기틀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깨와 뱁새눈은 맥산관에서도 삼류로 분류되는 조무래기들이었 다. 돈으로 여자를 살 주제도 안되었고, 어쩌다 가물에 콩나듯이 얻어걸리는 겁탈도 너무 순서가 늦어서 시간(屍姦)과 다름없는, 김빠진 방사가 되기 다 반사였다. 단도립이 여인을 그냥 보내주자 둘은 눈빛을 마주치며 음흉한 쾌 재를 불렀다. 때가 온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손때 안 묻은 싱싱한 여체를 마 음껏 주물러 볼 기회였다. 맥산관 무사들은 난주출장시에 따로 개척된 통로 를 사용하고 있었다. 아구가 어디로 갈지는 안 봐도 훤했다. 땅집고 헤엄치 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은근히 열받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구에게 개망신을 당한 어깨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으니 계집에게 얻어터진 뱁새눈의 분노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어깨와 뱁새눈이 동시에 각자의 상대를 향해서 분노의 일격을 가했다. 여인은 당황하지 않고 뱁새눈을 맞아 나갔다. 직전의 접전에서 적들의 실력 이 그리 대단치 않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실전경험이 많지않은 그 녀였지만 저런 하수들에게 얻어맞을 수준은 아니었다. 주로 방어위주의 기법 을 연성했기에 단숨에 물리칠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여유있게 가지고 놀 정도는 되었다. 여인의 낙관대로 뱁새눈은 일류문파의 현란한 보법에 전혀 대처를 못했다. 연속되는 상대의 공격을 십여 초가량 피해내자 자신감이 붙 은 여인이 뱁새눈을 상대하는 와중에도 슬쩍슬쩍 아구에게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아구가 불시에 태도를 돌변하고 자신을 찔러올 것만 같아 저으기 불 안했던 것이다. 한 번 불붙은 의심의 불씨는 쉽게 꺼지지 않았다. 아구는 이제까지 무시했던 것처럼 마냥 쓸모없는 하수는 아니었다. 적어도 쓸만한 삼류무사는 되는 수준이었다. 힘의 수발(受發)이 미숙했을 뿐, 초식의 활용은 오히려 어깨보다 시의적절한 편이었다. 기법상의 미숙을 어깨는 오랜 실전경험으로 보완하고 있었다. 아구의 부적절한 힘조절을 응징하며 시종일 관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아구의 검이 다시 힘차게 어깨의 하반신을 파고 들었다. "어머!" 둘의 격전을 곁눈질하던 여인이 아연실색하였다. 아구는 반복되는 실수에도 불구하고 전혀 느낀 점이 없는지 또 한 번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었다. 이번 실수는 아무래도 치명적일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어깨의 쇠공이 다부지 게 아구의 등짝에 내리 꽂혔다. 어깨는 고슴도치처럼 못이 돋아난 쇠공을 봉 에 연결하여 무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쇠공이 여지없이 아구의 등짝을 내리 쳤다. 아구의 허리뼈가 그대로 박살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여인은 그제서야 비로서 아구를 의심했던 자신을 자책했다. 그녀의 여린 가 슴에 한없는 고통이 몰려왔다. 더불어 뱁새눈의 예리한 낫도 몰려왔다. 순 간의 실심이 여인의 보법을 어지럽혔던 것이다. 여인은 질끈 눈을 감았다. '아아!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마는구나.' 용담호혈의 하서주랑을 기적적으로 돌파해 낸 그녀였다. 막강한 호위무사들 이 목숨을 걸고 그녀를 지켜내었다. 적들의 추격은 집요하였다. 양주땅에서 는 적수가 없다던 강소사협(江蘇四俠)이 이슬로 사라졌으며, 절강제일의 문 파 형오문(形五門)의 수제자들도 허무하게 전멸하였다. 그러나 그런 희생 덕 분에 여인은 아수라장 같은 하서주랑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런 값비싼 희 생들이 어이없게 무위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 여인은 못내 가슴 아팠다. 불행중 다행이라면 뱁새눈은 여인의 시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뱁새눈 은 마지막 순간에 낫을 뒤집어서 여인의 무릅 근처를 내리갈겼다. 다른 재간 은 영 신통치 않았지만 희안하게도 점혈법(點穴法)만은 정통한 뱁새눈이었 다. 여유를 찾은 뱁새눈이 초식을 바꾸어 여인의 허리께로 낫등을 드리대었 다. 너무 심한 반항은 재미를 보는데 지장을 주게되므로 허리 정도는 분질러 줄 요량이었다. 여인의 허리뼈가 부러지려는 찰나 아구의 허리뼈는 급회전의 축이 되고 있었다. 어깨가 내리친 쇠공이 팽이채라면 아구는 팽이였다. 아구의 상체가 쇠공의 힘으로 팽이처럼 급회전을 하였다. 그 사이 간신히 통제력을 얻은 아구의 검 이 아구의 왼쪽 겨드랑이를 비집고 솟아올랐다. 어깨의 두툼한 목줄기에서 핏줄기가 솟구쳤다. 쇠공은 그대로 비껴흘렀고 아구의 등뼈는 간신히 파열을 면했다. 그것은 더 나아가서 여인의 등뼈도 무사하게 만드는 결과로 작용했 다. 쇠공의 반발력으로 한바퀴 돌아서 몸을 일으킨 아구가 그대로 날아가 뱁 새눈의 등판에 검을 쑤셔박았다. 아구가 물었다. "괜찮습니까?" 여인은 힘없는 눈길로 아구를 바라보았다. 아구의 우측 상반신이 피로 흠뻑 젖어들고 있었다. 쇠공에 찢겨나간 옷조각 사이로 너덜너덜해진 그의 옆구리 가 보였다. 여인은 마음 속으로 부르짖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여인이 아구를 의심하는 동안, 아구도 여인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 둘의 의 심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여인은 아구의 본심을 의심했고, 아구는 여인의 실력과 여인의 안위를 의심했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아구는 자기 스스로 를 함정에 빠지는 모험을 감행하면서까지 승부를 앞당겼다. 그야말로 팔다리 를 내주며 목숨을 빼앗는 고육지책이었다. 여인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염 려한 결단이었다. 아구는 옆구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도 게의치 않고 여인의 무릅을 끈질기게 주물렀다. 시정잡배의 점혈법이 대개는 상리(常理)에 벗어난 것들 이라 그대로 내버려두면 폐혈(閉穴)의 부작용으로 온전한 신체복구가 어려워 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구는 해혈법은 모르는 듯 그저 다급한 손길로 주 무르고 또 주무를 뿐이었다. 여인은 그 정도의 혈도법은 알고 있었으나 잠자 코 있었다. 다리가 병신이 돼도 마땅하다는 죄책감의 자학이 심지여린 그녀 의 마음을 온통 헤집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아구의 손 끝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쏟아져 들어옴을 느꼈다. 그것은 아주 온화하고 상쾌한 기운이 었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경과하자 여인은 무릅에 기가 통함을 느꼈다. "그만 되었습니다. 구무사의 상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여인이 아구의 팔을 밀치며 일어나 옆구리를 들여다 보았다. "구무사라니 감당키 어렵습니다. 그냥 아구라고 불러주십시오. 그게 불초는 오히려 편합니다." 여인이 품 안으로 다가오자 아구가 황급히 물러나며 말했다. 아구가 펄럭이는 옷자락을 찢어내어 옆구리를 대충 동여맸다. 그리고 털썩 주저앉아서 바위에 등을 기대었다.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하였다. 여인이 다가가서 바로 옆에 나란히 앉자 아구는 불에 덴 듯이 놀라며 화들짝 떨어 져 앉았다. 여인이 힘없이 웃고는 품속에서 자기병을 하나 꺼냈다. "이래뵈도 근동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비싼 약이랍니다. 소독과 지혈에는 특 히 탁월한 효과를 보인답니다." 여인이 약병을 들어보이며 방긋 웃었다. 여인이 다시 한번 아구에게 바싹 다가가 앉았다. 이번에는 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만 넋이 빠진 듯 멍청 하게 그녀의 미소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인인 겉옷을 조금 풀고 살펴 보더니 속옷을 북하고찢어내었다. 지저분한 겉옷과는 대조적으로 놀랄 만큼 깨끗한 속감이었다. 여인이 아구가 대충 감아놓았던 천조각을 풀어내더니 조 금도 주저 없이 아구의 속살을 닦아나갔다. 찢겨진 살점들을 얼굴 한 번 찡 그리지 않고 정성스럽게 여미더니 옥병에서 가루약을 쏟아부었다. 피부에 닿 은 약이 지글지글 끊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구의 표정이 입을 악다문 채로 이상하게 굳어졌다. 여인은 콧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구는 가루약 때 문에 아픈 표정을 짓는 것이 죄스러워 억지로 참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구! 참기 힘든 고통일 거예요. 게다가 아픈 표정을 지어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여인이 다시 한 번 살짝 웃었고 아구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구 는 순식간에 고통을 잊어버린 표정이 되었다. 가루가 끊어오르며 액체로 용 해되더니 피덩이와 함께 끈적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피가 새어나오지 않을 정도로 굳어지자 여인은 준비해둔 깨끗한 천으로 정성스럽게 상처를 감싸기 시작했다. 어느새 사위가 어둠이 깃들었다. 아구가 끙 하고 일어섰다. "서둘러야겠습니다. 산에는 밤이 빨리오지요. 지리가 익숙치 않으시니 편안 치는 않겠습니다만 한시진은 더 고생하셔야겠습니다." 충직한 안내자에다가 이제는 믿음직한 보표까지 되어버린 아구가 안스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성큼성큼 앞길을 열었다. 아구의 장담대로 한시진쯤 나아가자 아담한 초옥이 나왔다. 아구는 이미 와 본 적이 있었던 듯 익숙하게 초옥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초옥 안에는 사람 은 없었지만 숙식에 필요한 각종 도구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아마도 맥산 관의 용병들이 미리 안배해둔 장소인 듯 했다. 아구가 익숙하게 잠자리를 마 련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편안한 자리를 보자 긴장이 풀어지며 그동안 참아 왔던 피로가 여인을 엄습했다. 여인은 그만 체면불구하고 푹신한 자리 위에 풀썩 주저 앉고 말았다. "문은 이렇게 잠구게 되어 있습니다. 본시 이런 용도로 지은 것이라 잘 만 단속한다면 밖에서 들어오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 아구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문을 열었다. 여인이 서둘러 둘러보니 잠자 리는 하나였다. 모두 펼친다면 방안을 모두 뒤덮을만한 넓이였지만 자리는 충분히 푹신하도록 겹쳐져 있었다. 덮을 것은 여러 개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이미 아구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이봐요! 그쪽은...?" 여인이 질문을 던진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들었음이 분명한 데도 아구는 가 타부타 대답이 없이 그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그대로 나가려 하였다. "잠, 잠깐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인이 단호히 말했다. 그러나 아구의 대답은 더 단호했다. "내일도 하루종일 걸어야 할 겁니다. 불초가 한 지붕 아래 누워 있음에도 소저께서는 아무런 불안 없이 편히 주무실 자신이 있습니까? 모쪼록 오늘의 허례보다 내일의 실익을...... 일이 무사히 완료되면 은자나 두둑히 내려주십 시오." 아구의 극히 사무적인 대답이 여인의 입을 막았다. 할 말을 잃은 여인이었 지만 섭섭한 마음 가운데서도 근원을 알 수 없는 훈훈함이 아늑하게 감싸오 는 것을 느꼈다. 허전함 속의 포만감이었다. 아구가 나가자 여인은 그대로 잠 속에 빨려 들어갔다. 실로 오랫만의 단잠이었다. 여인은 아구가 그렇게 당부한 문고리 잠그는 것도 잊은 채 아늑하고 달콤한 몽중계(夢中界)로 스며 들었다. 지옥도를 방불케하는 광경이었다. 모두 여든세 명에 달하는 사내들이 각 가 지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고문은 무언가 얻고자하는 정보가 있을 때 그 위 력을 발휘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고문들은 그 대대 적인 규모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훌륭한 고문 이라도 그 답을 모르는 자에게서는 어떠한 결과물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 다. 지금의 여든세 명이 바로 그러했다. 단 한명을 제외하고는. 성과는 전혀 기대도 하지 않던 의외의 고문대상자에게서 나왔다. 질문은 주로 마차의 행 방에 대한 것이었지만 고문에 못 이겨 횡설수설 저것 지껄이던 사내의 입에 서 마차의 행방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제법 쓸만한 대답이 나왔던 것이다. 사내는 고통에 겨운 목소리로 쥐어짜듯 대답했다. "부탁을 받았수다." 사내는 종괴이( 怪伊)라는 이름의 뜨내기 용병이었다. 종괴이는 출신도 모 르는 고아로서 그 파란만장한 어린 날의 교훈대로 인간이라면 아무도 믿지 않는 사내였다. 남에게 어떠한 도움도 기대하지 않았고, 남에게 아무런 도움 도 주지 않았다.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그 한 번이 사단이었다. 종괴이는 살아남는데 비상한재주를 가진 용병이었다. 어떠한 사지에서도 끈질긴 생명 력으로 살아 남았다. 타인의 도움따위에 의지한 적은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남을 이용한 적은 있을지언정 남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도와준 적은 없다고 종괴이는 자신하고 있었다.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용병이라는 것이 원래 그랬다.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동료의 삶을 도모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 놈은 스스로를 절대절명으로 몰아 넣으면서까지 절대절명 의 종괴이를 구출했었던 것이다. 놈은 대개의 고용흥정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호신련이라고 세간에서 말하는 무리들의 용병계약에는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호신련이 말단조직처 럼 활용하는 용병시장이 바로 종괴이가 소속한 그곳이었다. 하지만 놈과 종 괴이는 공교롭게도 호신련과 고용관계를 맺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놈이야 호신련이 아니라 그 누구도 뽑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지만 종괴이는 어쩐지 음습한 죽음의 냄새를 호신련 속에서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그 예감은 이렇 게 현실로 증명되고 말았다. 종괴이에게 합당한 대우의 무려 세 배에 달하는 금액이 제시되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호신련 측에서는 새로운 임무에 얼굴 이 많이 팔리지 않은 능력자들을 적극적으로 수배하였다. 놈이 청부를 맡아 서 떠나는 종괴이를 붙들고 엉뚱한 부탁을 했다. 너무 어이없는 부탁인지라 종괴이는 실소를 짓고 말았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기회가 온다면 꼭 그 리해주겠노라고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무슨 부탁?" "그 계집에게 마지막으로 찾아갈 장소를 추천해주라고......" "거기가 어딘데?" "맥산관." "부탁을 한 놈은?" "아구." "부탁을 들어주었나?" 불행히도 종괴이는 우연한 기회에부탁을 전단할 수 있었다. '만에 하나 아무도 도울 수 없는 일엽편주의 위기가 닥친다면 맥산관이 있 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녀는 아랫사람의 지나가는 말이라고 무시하지 않았다. 시종 경청하는 태 도로 끝까지 들어주고는 웃으며 머리를 끄덕여주었다. 물론 그때 당시는 종 괴이나 그녀나 그런 상황이 오리라고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두 식경 후, 맥산관은 한무리의 낯선 방문자를 응대해야했다. 엄 청나게 살벌한 인간들이었다. 거칠기로 소문난 맥산관의 패거리들이 끽소리 도 못할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살벌해보이는 자가 아치에게 아구의 행방을 물었다. 아치는 오줌을 지릴 정도로 벌벌 떨리는 와중에도 놀라울 정도로 조 리있는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오전 중에 이미 한차례의 혹독한 예행연습 있 었기 때문이었다. 오전 중에 들이닥쳤던 두 사내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다짜고짜 있지도 않은 아구부터 불러제꼈다. "아구!" 그리고 아구에게 다가와 막무가내로 질문을 퍼부었다. "이봐! 아구 어디 갔나?" "댁들은 뉘슈?" 급하게 달려드는 말상의 사내에게 아치는 짐짓 딴죽을 걸었다. 말상은 대뜸 멱살부터 잡았다. 아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엉덩이가 근질거 리던 단도립이 이미 튀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나서기 좋아하는 단도립이었고 아치도 그런 단도립을 예상하고 있었다. "예가 어딘 줄 알고 감히 개수작들이야!" 단도립이 그렇게 부르짖으며 냅다 말상의 등짝을 후려쳤지만 정작 그 일장 을 얻어 맞은 것은 땅딸보였다. 아치는 땅딸보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지도 못했다. 단도립의 좌장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땅딸보는 고무공이라도 되는 것 처럼 묘한 동작으로 튕겨나갔다. 그리고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가슴을 툭 툭 털고는 "번거롭게 했다면 형장께서 이해하슈. 말썽피울 생각은 없수다. 아구녀석이 어젯밤 안 들어왔길래 걱정이 되서 이렇게 나왔수. 우리 형님이 좀 흥분했나 보우. 좋은 말로 물어볼테니 걱정마슈." 어정쩡하게 서있던 단도립도 만만치 않음을 느꼈는지 꼬리를 내렸다. "아! 알고보니 아구놈 보호자 분들이셨구먼. 식솔이 없어져서 형씨들도 많 이 놀랐겠구려. 저 놈이 잘 설명해줄테니 천천히 일보시구랴." 아치는 최대한 예의바른 태도로 아구 고용사건의 전말을 최대한 소상하게 진술하였다. 그런데 아치의 예의바른 태도에도 불구하고 말상은 뻑하면 벌컥 벌컥 분통을 터뜨렸다. 아치로서는 뺨따구 서너 대는 족히 각오했 터였지만 예상외로 단 한 번의 손찌검도 없었다. 그런 전력이 있었던 지라 오전의 두 사람과는 비교도 안되게 살기등등한 놈들이 노려보자 아치의 진술은 가히 예술이 되었다. 그러나 오전보다 몇 배는 훌룡한 진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치는 오전과는 달리 뼈다구가 울릴 정도로 심한 통증을 느껴야했다. "난주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 같습니다." "수배는 하셨는가?" "예, 난주에도 기통을 넣었습니다. 지금쯤이면 난주쪽에서 인원배치를 끝냈 을 것으로 사려됩니다." "이쪽에서는?" "일부는 이미 출발했고 좌총관은 맥산관에 남았습니다." "맥산관에? 왜?" "아구라는 놈의 용모를 잘 아는 맥산관 낭인들을 이용할까합니다. ......그런 데 아무래도 그 놈들이 맥산관에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그놈들이라니?" "증언대로라면 사괴와 용모가 일치합니다." "사괴?" "예, 희노애락 사괴." "뭐, 그놈들이?" "그럼, 아구란 놈이 모가놈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예, 아무래도 그런 확률이... 어쩌면 모진위 바로 그 놈일 수도..." "모진위라면 맥산관에서 모를 리가 없지 않나? 그 놈의 현상금 액수도 만 만치 않을텐데." "그것이......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그 놈의 용모가 전혀 다르게 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허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속하도 믿기지는 않습니다만 그 동안의 행적을 분석해보면 그것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놈이 전혀 딴 사람으로 변했다고 가정하고 추 리해보면 상황이 제대로 들어맞습니다. 남경에서 낙양까지의 행적에대한 보 고내용들을 그런 가정하에서 검토해보니 그럴듯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전혀 논외로 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정체가 드러날 워험이 있는 사괴놈들은 꼭꼭 숨어 있었고 대신 모 가놈이 나와서 활동을 한다?" "예, 채가장의 하부조직과 같이 쓰이는 곳이 바로 맥산관이죠. 모가놈도 우 리라면 이를 갈고 있을테니 우리를 알아내려면 아무래도 맥산관이 정보를 얻기에 유리했겠지요." "이번에는 자신 있으신가?" "빠져나갈 길은 없습니다." "언제는 장담 못해서 번번히 놓쳤는가? 삼 년 전의 모가놈은 말할 것도 없 고, 이번에 그 년도 마찬가지 아닌가? 독안에 든 쥐새끼도 처리 못하다 니......" "...... ......" "역불기를 불러 드리게." "예? 흑막대주를요? 그럼 흑막을 전부...?" "그렇네. 전부 이 쪽에 투입시키게." 한사내는 예를 취한 후 물러갔고 남아 있는 사내가 의자 속에 깁숙히 몸을 묻었다. 채소우의 암살로 한숨돌렸던 맹(盟)이 다시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채소우 처럼 경제, 정치 양면의 목줄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경제 한면에서 의 공격이었지만 채경령의 공세는 예상외로 끈질겼고 독랄했다. 오히려 채소 우의 경우보다 한술 더 떠서 채가장 자체를 도박판에 밀어넣었다. 맹의 양대 자금줄이던 소금밀매는 채소우 당시보다 더욱 비참한 경지에 몰려있었다. 장 사에 있어서 동귀어진보다 무서운 것은 없었다. 결정타는 맹의 또 하나의 자 금줄이던 은괴 수입사업에서 터졌다. 채가장의 주력이 청해, 감숙 일대로 몰 려왔을 당시부터 맹은 너무 안이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이미 가전회라는 꼬리를 깨끗이 처리한 다음인지라 그저 모진위를 추적해왔거니 편안한 방향 으로단정지어 버렸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은괴 수입작전에대한 대비를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니었다. 틈이 나는대로 미끼를 던져보기도 했다. 그러나 채가장은 미끼를 물지 않았다. 그러기를 이년 반, 은괴유입이래 최대의 거래 가 성립되었다. 지속적으로 보완되어왔던 세외거래망이 드디어 대성과를 올 렸다. 은괴 육백관의 거래를 성사시켰던 것이다. 보통 일회 왕복에 은 팔십 관, 많아야 백육십관이었으니 대형거래가 아닐 수 없었다. 채가장은 이년 반 동안 전혀 책동하지 않았다. 거의 위험의 요소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거 래는 미룰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맹은 일을 강행시켰다. 그런데...... 과연 천하제일의 염상조직 채가장이었다. 어리석은 수하 놈들이 마차를 채 가장에 헌납하고 만 것이었다. 결맹이래 최악의 위기상황이 닥쳐왔다. 으드득, 악다문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덕분에 대목을 맞은 곳은 맥산관이었다. 아구를 생포해 온다면 모진위의 목 을 뽑아온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흥정이 맥산관에서 벌어졌다. 맥산관의 사내 들이 땅을 쳤다. 어쩌면 삼 년 간 코를 맞대고 있었던 아구 그 녀석이 바로 모진위였을지도 모른다는 자책에 땅을 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녹의여 인을 생포해 온다면 호신련의 수장을 잡아온 것으로 친다는 또 다른 흥정도 있었다. 이번에는 사내들이 하늘을 보고 부르짖었다. 덩쿨채 굴러든 호박을 발로 차버린 꼴이었다. 흥정을 제시한 측은 세간에서 속칭 복고맹이라 지칭 하는 무리들로 짐작되었었다. 사실 호신련이나 복고맹이나 그 수장들의 목에 는 거금이 걸려 있었다. 서로 쌍방에 포상금을 걸어놓았던 것이다. 물론 그 림의 떡이었다. 누가 감히 그들의 목을 따러 호랑이굴로 기어들어간단말인 가? 맥산관의 낭인 전원이 그 즉시로 복고맹이라고 짐작되는 무리와 고용계약 을 체결하였다. 맥산관이 본시 호신련의 하부조직이나 진배없었지만 그런 의 리를 이유로 계약을 거절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용병의 의리란 오로지 하 나, 바로 돈이었다. 맥산관의 이들이야 말로 서북을 통털어서 아구의 진면목 을 아는 자들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은 또한 가장 최근의 녹의여인의 행색도 이미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둘의 도주로마저 빠삭 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감숙에서도 삼류 무명의 인간시장이라 할 수 있는 맥산관이 서북전체 인간시장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 청룡장 출판에 관한 소식은 7번 작은 무림란에 들어가셔서 4번 청룡장출판게시판을 방문하시면 됩니다. 무림동회원이든 비회원이든 누구나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번 호 : 8763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07-01 00:16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43- 15. 사랑의 힘으로 아무래도 독안에 든 쥐의 꼴임을 인정해야 했다. 아구는 새삼스레 녹의여인 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얼굴에도 절망의 기색이 스며들었다. 난주가 팔십리 는 족히 떨어져 있는 관도였다. 네댓 명의 괴한들이 난주 방면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선자불래(善者不來)! 이미 다섯 명의 저지자들을 돌파해 온 아구였다. 달려 오는 이들이 무엇을 노리고 오는 것인가 쯤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직 백장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거리였지만 아구와 여인은 달아날 엄두를 내 지 못하고 있었다. 아구가 위치한 관도 앞뒤로 십여리 근방에서는 빠져나갈 샛길이 없었다. 좌측은 인접이 쉽지 않은, 험악한 바위산이었고, 그나마 우측 은 돌산보다도 못한 절벽이었다. 샛길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맥산관으로 통 하는 그 길에는 이미 자신의 행적을 밟아온 맥산관의 추적자들이 가득차 있 을 터였다. 그 샛길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화약을 지고 불섭에 뛰어 드는 격일테지만 그래도 꼭 후퇴해야 한다면 차라리 그 편이 나을지도 몰랐 다. 관도의 후방을 차단하고 있는 복고맹의 무리들에 비한다면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세 갈래길의 어디에든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아구보다 강했다. 아구는 다시 여인에게 눈길을 돌렸다. 여인은 관도를 달려오고 있는 괴한들 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구도 여인이 바라보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사내들의 윤곽이 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아구가 잠시 주저하는 사이 상당한 거리를 좁 혔던 것이다. 하지만 여인의 눈길은 여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여인은 그 사 내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여인의 시선은 사내들의 흙먼지를 넘어서 지평선까지 닿아 있었다. 아마도 그 너머에는 난주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여인은 난주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리라. 여인의 갈망은 이내 절망으로 바뀌 었다. 아구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검을 받쳐들었다. 그리고 뚜벅 뚜벅 걸어 나갔다. "어... 어디 가세요?" "잊으셨습니까? 소생은 아가씨를 난주까지 모시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하... 하지만?" 아구는 천천히 괴한들에게 다가갔다. 여인의 갈망이 안내자의 임무를 상기 시켜주었으며 여인의 절망이 안내자의 투지에 불을 당겨주었던 것이다. 바야 흐로 아구는 난주를 향해서 진군하고 있었다. 여인의 절망에 짙은 공포가 추가되었다. 공포의 대상은 아구를 가로 막고 있는 청의거한이었다. 그녀의 충직한 수호자들인 강서사협을 적수공권으로 때려죽이던 청의사내의 흉포를 망각하기에는 너무도 흘러간 시간이 적었다. 여인은 이제 그만 포기하고 싶어졌다. 아구가 아직 버티고 서 있는 사실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넉넉히 잡아주어도 청의흉한은 커녕, 그에 게 일거에 피떡이 되어버린 강서사협 중 단 일인에게도 아구같은 하수는 서 너 명이 달라붙어도 될까말까할 정도였다. 여인은 두려움에 휩싸여 청의괴한 을 수행하던 흉적의 무리 두 명이 슬금 슬금 다가서는 것조차 알아챌 수 없 었다. 여인은 난데없이 냉기가 가슴 언저리를 싸늘하게 식히고 나서야 비로 서 비명을 질러댔다. 아구의 옆구리에서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겨우 아물어가던 상처가 다 시 터진 것이다.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청의거한은 전혀 서두르 지 않고 한가롭게 주먹을 내뻗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아구는 그 주먹 을 제대로 피할 수가 없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좁은 통로에서 커 다란 바위를 맞이하는 기분이었다. 권(拳)이 신체에 접촉하는 감각조차 없었 다. 그저 어떤 존재감이 느껴지고 그 감각은 어김없이 아구의 오장육부에 격 렬한 진동으로 이어졌다. 물론 그 진동은 격렬한 통증을 수반하고 있었다. 살이 찢어지고 뼈에 금이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감각이 마비되고 의식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암흑 속에 갇혀버렸다. 그때 어둠의 막을 꿰뚫고 한줄기 빛이 아구의 의식을 흔들었다. 여인의 급박한 비명소리였다. 적호붕권(赤虎鵬拳) 황무조(黃 祚)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이에 비해서 제법 내공은 중후한 편이기는 했지만 볼품없는 체형만큼이나 외공이 턱없이 약해서 내외공의 조화가 깨져 있었다. '적절한 반격이구나'하고 감탄해야 옳 은 수법임에도 발출되는 내력을 신체가 지탱하지 못해서 중심을 잃어 버리 기 일수였고, 내력을 회수할 때도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제 풀에 뒷걸음치 기 일수였다. 그러나 그런 형편없는 애송이가 자신의 성명절학인 적호권을 벌써 이십여 수나 버티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 만 황무조의 오해였다. 적호권은 우연으로 피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권법이 아니었다. 열흘 전의 격돌만 해도 그랬다. 강서사협이라면 강서지방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들이었다. 그러나 사 대 일 대결의 황망중에도 우 연으로 빗 맞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애송이에게는 이십여 초의 주먹 모 두가 하나같이 비껴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황무조 자신보다 뛰어난 고수라해 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녀석은 마치 가벼운 깃털과도 같았다. 권풍을 부서 지는 물체가 아니라 권풍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낙옆이었다. 자신의 적 호권이 사람의 피와 살을 뭉개는 권풍이 아니라 안락한 훈풍이 아닌가하고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적호붕권 황무조는 머리를 갸웃거리면서도 가일층 내력을 끌어올리며 권풍 을 휘몰아갔다. 그렇다고는 해도 적호권은 근본적으로 파동권(波動拳). 진동 의 여파에 의해서 녀석의 심맥은 이미 진기의 가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의외 로 승부가 길어지자 잠시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제는 조급할 것도 없었다. 계 집의 비명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수하들이 이미 목표물 을 확보했다는 신호음과 같은 것이었다. 뜻밖의 지구전이 다소 께름직하기는 했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맹(盟)의 수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과정이야 어떻든 자신은 이제 맹의 일등공신인 것이 다. 황무조는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순간 사태가 일변하기 시작했다. 여인의 비명소리를 기점으로 막 꺼져가던 애송이의 안광이 불꽃처럼 피어 올랐다. 여인의 비명소리를 기점으로 무너져 가던 애송이의 신형이 모양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아구는 단전으로부터 끊어 오르는 힘을 느꼈다. 그것은 아구 자신이 주체하 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아구는 그 힘의 근원을 따져 볼 겨를이 없 었다. 아니, 그 힘의 근원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질 경황조차 없었다고 말하 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인의 비명소리가 아구를 재촉하고 있었다. 힘이 왜 생겼는지는 따질 필요도 없었다. 있기만 하다면 지금 무조건 사용해야 했다. 질식할 것처럼 권풍에 신음하던 아구의 검이 용을 쓰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 리고 물살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황무조의 권풍을 갈라 나갔다. 황무조는 뜨끔하고 후위자세를 취했다. 적호권은 태산처럼 몰아가는 공간적 확장과 장대비처럼 몰아치는 시간적 연속을 그 장기로 삼고 있었다. 적호권 이 시전되면 하나의 강기막이 형성되고 일단 강기막에 휩싸이면 제 아무리 고수라도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 한다고 황무조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권막 사이를 하나의 검이 비집고 있었다. 괴멸 직전의 애송 이가 느닷없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황무조는 서둘러 권막을 풀어버리고 호흡을 가다듬고는 재차 적호권을 시 도하였다. 이번에는 아구가 움찔하였다. 그렇게 얻어 맞았건만 아직도 그 주 먹이 어디서 날아 오는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분간할 수 없었 다. 그저 주먹이 번쩍하는 순간, 아구의 몽뚱이에 불이 붙었다. 다만,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아구의 반사신경이 육체를 움직여서 치명타를 모면해 왔던 것이었다. 아구는 두눈을 똑바로 뜨고 황무조를 노려보았다. 간신히 권막에 서 벗어난 아구였다. 다시 권막에 휩싸인다면 때를 놓칠 것이 뻔했다. 더 이 상 여인의 화급을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구는 적호권의 파해법을 간파하기 위해서 두 눈을 부릅떴다. 수비를 도외시한 채 정면으로 맞서고 있 었다. 황무조는 다시 한 번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아구의 검이 정확하게 황무조의 정권을 찔러오고 있었다. 황무조는 그 상황을 납득할 수가 없어서 그저 우연 히 그렇게 들어 맞았다고 생각했다. 적호권의 확장성과 연속성은 권막을 형 성하는 특징과 함께 중심점과 출발점이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는 장점도 가 지고 있었다. 황무조가 적호권을 십성 터득하고 난 이후로 아직까지 단 한번 에 그 중심점을 찾아낸 자는 없었다. 황무조가 자신하건데 무학을 체계적으 로 연구한 일대종사가 아닌 다음에야 적호붕권의 허실을 가려내는 것은 원 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구가 대뜸 그 중심점을 찔러 들어오자 황무 조는 우연 이외에 다른 추측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황무조의 실수였다. 황무조는 정권을 펼치며 손목을 비틀어 찔러오는 검의 옆면을 밀어부쳤다. 검봉의 방향을 돌려놓고 다시 적호권으로 후려칠 심산이었다. 아구의 검은 황무조의 손바닥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돌연 방향을 선회하여 황 무조의 장심을 찔러왔다. 손바닥을 회수할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일대권사 황무조가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헛!" 황무조는 다급한 경호성을 토하며 번개같이 손집게를 형성하며 공력을 주 입하였다. 황무조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아구의 장검이 물려 버렸다. 그러나 검에 실려있는 공력이 이제까지의 애송이의 그것과 영 딴판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강한 잠력이 검지와 중지를 자극하며 강렬한 마찰을 일으켰다. 황무조 는 필사적으로 검을 튕겨내며 신형을 뒤로 뽑았다.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중 심이 무너지는 피해는 감수해야 했다. 찰나지간 황무조는 휘청거렸고 그 틈 새로 검광이 번쩍였다. 얼핏 매화송이처럼 보이는 검광이었다. 황무조는 반 사적으로 일권을 내뻗었다. 주먹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순간 황무조는 막아 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온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기 시 작했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가슴을 적시고 비린내가 풍겨나왔다. 가슴에서 울컥울컥 선혈을 샘솟고 있었다. 황무조는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다시 생각 해보니 검의 광채는 하나가 아닌 것 같았었다. 매화송이같은 광휘 윗 부분에 별빛같은 광휘가 하나 더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치 매화송이에 쌓여있는 눈 송이처럼. 아마도 애송이는 거의 동시에 두 번의 칼질을 했고 그 하나를 자 신이 놓친 것이라고 황무조는 그렇게 자신의 사인(死因)을 분석하며 죽어갔 다. 황무조의 장담처럼 적호권의 기리를 오로지 일견(一見)만으로 우연히 터득 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무조가 모르고 있는 사 실이 하나 있었다. 아구는 한때 혹독한 단련을 통해서 무공의 파해법을 연구 했던 일종의 전문가였다. 복태동(卜兌東)은 육각신마(六脚迅馬)라는 별호답게 경공이라면 맹(盟)에서 도 둘째가라면 서러워 하는 인물이었다. 덕분에 선봉 추적대의 임무가 주어 졌다. 복태동이 무위(武威)를 출발한 것이 이틀 전 진시(辰時), 영등(永登)을 통과한 것이 하루 전 오시(午時), 쉴새없이 강행군하여 방금 전에 난주 북방 백여리 근처의 병령곡(竝嶺谷)에 도착했다. 병령곡 입구에는 서너 구의 시체 가 나뒹굴고 있었다. 그 중에는 복태동과 안면이 있는 인물도 있었다. 물론 이름따위는 모르는 작자였다. 아마도 맹에 협력하는 어느 집단의 졸개였던 것으로 복태동은 짐작했다. 난주에서 마중나온 작자들임이 분명해보였다. "대부공도 제법 처리가 빠른 편이군!" 복태동은 시신을 살펴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대부공(大釜公) 주면세(朱免 稅)는 거대한 도끼를 애병으로 사용하는 고수였는데 그의 대부는 무려 백근 의 무게를 자랑한다고 들었다. 대부에 관한 한, 천하에 적수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세평이었다. 오죽하면 큰 도끼로 공(公)이라는 칭호를 얻었을까. 그 주면세가 난주에 배치된 맹의 책임자였는데, 상상외로 조직관리에 능숙한 모양이었다. 맥산관에서 난주로 연락이 전달된 시점으로 가름해 볼 때, 벌써 이 근방까지 포위망을 좁혀온 것을 보면 대단히 신속한 임시조치였다. 복태동은 조급해졌다. 사망 추정시간은 대략 두 시진 전, 전진할수록 방어 진은 강력할 것임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대부공이 일남일녀를 먼저 선점할 가능성이 높았다. 복태동은 가일층 내력을 끌어올리며 경공을 전개해 나갔 다. 그러나 산등성이를 채 몇 구비도 지나지도 않아서 다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이... 이런 적호붕권!" 복태동이 막 접어든 모퉁이는 선혈이 낭자했으며 다섯 구의 시체가 여기저 기 흩어져 있었다. 맨 뒤쪽이 적호붕권 황무조였다. 복태동은 고개를 갸웃거 렸다. 서북일대에 황무조를 능가할만한 고수가 있다는 소문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직위로 치자면 복태동보다는 한참 아래였지만 제법 무공이 쓸만해서 복태동 자신조차 백초 이내의 제압을 장담할 수 없는 재목이었다. '장차 맹을 위해서 긴히 쓰일 인재였는데...' 그런데 그런 황무조가 이렇게 가슴이 쪼개진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직속 수하는 아니었지만 많이 아끼던 터인지라 복태동도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복태동이 최대한으로 경공을 뽑았다. 아구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비릿한 조소를 날리며 어정어정 녹의여인에게 다가가는 세 명의 까까머리 사내들을 보면서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 지가 멀쩡하게 몸통에 매달려 있음에도 마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듯 전신 이 허전했다. 가슴이 빠개질 듯 쓰려오더니 기침이 터져나왔다. 목구멍으로 울컥 울컥 피덩이가 넘어왔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황무조와 그 졸개들을 베어 넘기고난 후, 주체할 수 없이 넘쳐 흐르던 아구의 기운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니, 일거 에 연료를 태워버린 난로처럼 스러져 버렸다. 아구는 황무조의 적호붕권에 의해서 내기가 진탕된 데다가 여인의 비명으로 솟구쳤던 기력이 다시 쇠잔 되자 일시에 기진맥진해져서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힘든 지경이 되었다. 그 래도 전진해야 했다. 난주로 통하는 길이 이미 적들에 의해서 봉쇄되었다는 것은 아구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산모퉁이만 돌면 샛길이 있었다. 주로 임하(臨夏)로 나가는 사람들이 왕래하는 교통로였는데 샛길만 통과하면 일대 가 비교적 비옥한 지역이라 일찍이 사람의 손길이 미쳐 빠져나갈 구멍이 많 았다. 그런데 그 샛길을 목전에 두고 마주한 놈들이 바로 저 이상한 삼인의 민대머리들이었다. 아구도 박치기를 능기로 하는 자들이 있다는 강호의 소문 정도는 들어봤지 만 실제로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차하면 머리통을 들이미는 놈들이었 다. 아무리 있는 힘껏 내리쳐도 검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팔목만 엄청난 충격에 진저리칠 뿐이었다. 발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발목만 아팠다. 결국 아 구는 애꿎은 오른 팔목과 왼 발목을 부러뜨린 채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퍼런 대머리가 쓰러진 여인을 들쳐매려 하고 있었다. 그때 뒤에 서서 물끄 러미 여인을 내려보던 나머지 두 대머리가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그리 고 퍼런 놈의 어깨를 툭툭쳤다. 아마 생각이 바뀐 모양이었다. 퍼런 놈도 싱 긋 웃더니 여인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시커먼 놈이 여인의 옷깃을 벌렸 다. 깨끗한 속옷이 드러났다. 약간 찢어진 속옷, 바로 아구의 상처를 동여매 기 위해 찢어냈던 그 속옷이었다. 아구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바 로 그 순간 단전으로부터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더불어 경맥을 졸졸거리며 흐르던 진기들이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아구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그의 왼 손이 덜렁거리는 오른손에서 검을넘겨받았다. 복태동은 멀리 흐뿌연 점들이 움직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오랜 경험으로 미 루워 볼 때, 그것은 사람의 움직임이었다. 복태동은 그곳을 목표로 쏜살같이 몸을 날렸다. 아구는 멀리 거므스레한 점이 점차로 확대되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의 속도 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빨랐지만 찰나지간에 확인되었다. 분명히 사람이었 다. 아구는 펄펄 뛰던 정체모를 기운이 다시 쇠잔해 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 리고 그 기운이 스러지면 이전보다 훨씬 더 기진맥진해질 것임을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아마기어다닐 힘조차도 안 남게 될 터였다. 아구가 힘없는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십시요." "예?" "서두르십시오. 제가 저 놈을 막는 동안..." "하지만 구위사(龜衛事)!" "위사는 무슨..." 황망 중에도 아구는 민망한지 머리를 극적였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피어오 르는 흐뭇한 미소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저 등성이만 지나면 샛길이 있습니다. 어서 그리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제발!" 한동안 치솟기만 하던 기운이 썰물이 빠져나가듯 아구의 몸통에서 빠져나 가기 시작했다. 아구는 풍선이 꺼지듯 그렇게 꺼져갔다. 적은 엄청난 속도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아구는 일찍이 그렇게 빠른 달음 박질을 본 적이 없었다. 아구가 알고있는 천하에서 가장 강한 두 사람, 유진 목과 역불기도 그처럼 빠르지는 않았다. 경공의 수준을 보아하니 대단한 강 적임에 틀림없었다. 일견하기에도 아구가 막아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여인은 여전히 꾸물대고 있었다. 아구는 애가 탔다. 여인이 주저하는 사이 복태동이 당도했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던 복태동 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이번에는 그저 열받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만 아연실 색하고 말았다. 일명 삼색대두(三色大頭). 마치 쪼개진 수박과도 같았다. 어이없게도 다른 어떤 신체부위도 아닌 머리통이 박살난 것이다. 삼색대두는 산동출신의 삼형 제였는데 대단한 철두공(鐵頭功)의 소유자들이었다. 막내는 그래도 미숙한 지라 언제나 머리가 퍼렇게 멍이 드는 관계로 청두(靑頭), 둘째는 그나마 멍 까지는 안 들고 시뻘겋게 부풀기만 해서 홍두(紅頭), 첫째는 그 중 제일 완 숙한지라 머리통이 새카맣게 단련되어 있어서 흑두(黑頭), 삼색대두라면 온 산동이 진동하던 괴물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머리에 피를 쏟고 쓰러져 있었 다. 다른 부위도 아닌 머리통의 파손이 치명타였다. 복태동은 고개를 들어 아구를 바라보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저런 애송이한테 황무조와 삼색대두가 당하다니. 복태동은 알아주는 무림고 수였다. 한눈에 상대의 내공과 무공수위 정도는 파악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 고 있었다. 복태동이 보기에 이것은 정말 아니었다. 상황을 납득하기 위해서 는 아무래도 한 두어 명 쯤 고수가 더 필요했다. 복태동은 눈을 비비고 또 다른 일행이있는지 살펴보았다. 애송이의 뒤쪽에서 한 무리의 인영이 모습 을 드러냈다. "과연 육각신마! 벌써 여기까지 당도했는가? 명불허전!" 복태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 당도한 일행은 대두공 주면세를 비롯한 난주의 주력부대였다. "당치 않으신 말씀... 복가(卜家)가 대인께 문안드립니다." "저 놈이 그랬는가?" 주면세는 뒷짐을 진 채로 대두 삼형제와 아구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흐음, 믿을 수 없구먼." 주면세가 여유있게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황무조는 어디 있는가?" "입구쪽에서 보았습니다만... 마찬가지입니다." 복태동은 턱짓으로 삼색대두의 시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허어! 답답한 노릇이 아닌가?" "예?" "저런 피래미를 잡느라고 삼대두와 적호를 잃었다고 보고한다면 상부에서 믿어주기나 하겠는가?" 주면세가 아구를 내려보며 말했다. 이미 다 잡아놓은 것 같은 말투였다. 하긴 절벽에 반쯤은 기대어 누운 채 숨만 헐떡거리고 있는 아구였다. "난감한 일이로군요." 복태동도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러나 신중하기로 소문난 복 태동은 그러면서도 곁눈으로 주면세의 일행들을 살펴보았다. 어쨌든 황무조 와 삼대두가 모두 주살당한 것만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저 다 죽어가는 애송 이에게 숨겨진 무언가가 없다고 장담할 수만은 없었다. 주면세가 대동한 일 행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었다. 적호붕권보다 한수 위라고 평가 되는 고수가 네 명이나 되었고, 나머지도 삼색대두 각각의 개인보다 못한 인 물은 하나도 없었다. 이 정도면 일개 문파가 달려들어도 끄떡없을 정도였다. 복태동이 고개를 돌렸을 때 아구가 장검에 의지한 채 억지로 일어서고 있었 다. 하지만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가누기도 벅찬 상태였다. 복태동은 천천히 아구에게로 다가갔다. 아구와 일합을 겨루어보기로 작심한 것이었다. 직접 확인해 보지 않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구는 용을 썼다. 뱃 속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를 불러내려고 애를 썼다. 몇 번의 위기에서 자신과 여인을 구해준 그 정체모를 힘을 불러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그 힘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구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아구 자신도 어찌된 영문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구위사, 이제는 되었습니다. 그만 물러나세요." 여인이 애절한 눈빛으로 아구에게 말했다. 그리고 이내 낯빛을 바꿔서는 주 면세 일당을 향해서 야무지게 말했다. "좋습니다. 하자는대로 하지요. 하지만 저 사람은 보내주세요. 임시로 계약 한 안내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저 아무 것도 모르고 돈에 팔려 온 사람이 지요. 우리의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구에게 다시 말했다. "미안해요, 사지(死地)인줄 뻔히 알면서 구위사를 끌어 들여서. 내 목숨이 귀한 만큼 구위사의 목숨도 귀하다는 것을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여인의 두 눈에 맑은 물이 아롱다롱 맺혔다. 아구는 목이 메어왔다. 그때 화산이 폭발하듯 무언가가 아구의 뱃 속에서 다시 치솟아 올랐다. 그 리고 단전이 들끊고 기경팔맥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아구는 모든 것 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내부에서 끓어 오르는 그 힘의 정체가 무엇인 지, 그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인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구의 가슴 속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남몰래 피워 올랐다가 사라졌다. 아구가 말했다. "아가씨,잊지 마십시오. 소인은 안내자로 청부를 맡은 것이 아니라 보표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괜히 청부금을 깍으려 하지 마십시오. 더구나 아가씨를 놓쳐 버리면 도대체 어디서 나머지 청부금을 받는단 말입니까? 소생은 포기 할 수 없습니다. 이제껏 고생한게 아까워서라도 죽어도 그 돈 포기 못합니 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 아구가 장검을 높이 들고 냉큼 앞으로 나섰다. 난주거리는 언제나처럼 평온해 보였지만 몇몇 사람에게는 꼭 그렇치도 않 았다. 특히 성내의 작은 암자에 모여있던 사람들에게는 난주성 전체가벌집 쑤셔놓은 듯 부산한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황실의 비밀경호대 출신으로서 유 독 숨겨진 이면에 민감한 유진목의 눈에는 더욱 그렇게 보였다. 겉보기에는 낙양표국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평온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런 수작에 넘어 갈 유진목이 아니었다. 유진목이 주시하던 일련의 무리들이 조심스럽게 난주 시내를 빠져 나가고 있었다. 하나같이 유진목의 용의선상에 올라있는 인물 들, 세칭 복고맹이라고 불리는, 이름도 알 수 없는 비밀집단의 무리들로 추 정되는 자들이었다. 방향은 양주 채가장의 새로운 장주 채경령의 예상 이동 경로로 예상되는 북쪽으로 향해있는 관도였다. 유진목은 잔여인원 전체를 소 집시켰다. 그리고 지체없이 북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유진목일행이 복고맹의 꼬리를 잡고나서 채 일다경도 되지않아 또 다른 무 리가 유진목의 꼬리를 잡았다. 약간은 기괴한 복색의 삼남일녀였다. 복고맹 이 아구를 따르고, 유진목이 복고맹을 따르고, 기묘한 삼남일녀가 유진목을 따르고, 바야흐로 ㅉ고 ㅉ기는 복마전이 그 막을 올리고 있었다. '역시!' 복태동은 내심 그렇게 감탄하며 판관필(判官筆)을 고쳐 잡았다. 별로 실용 적이지도 못한, 그저 구경거리로나 어울릴 것같은 검초식이건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펼치는 초식마다 실전적인 용도를 창출하였고 그 쓰임새가 적절했다. 공력을 내쏘고 거두워가는 분배가 허술해서 빈번히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지 만 그 또한 허초를 버리고 실초만 상대함으로써 그럭저럭 수비망의 공백을 매꿔나갔다. 그 허실의 분간이 너무도 정확하여 허실을 판별하는 동물적인 감각기관을 하나 더 가지고 있는 작자라고 믿고 싶을 지경이었다. 전략적 운 용이 미숙한 것으로 보아 실전경험이 많이부족한 것 같은데도 그런 경지에 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임기응변을 보여주었고, 어떤 난해한 초식을 들고 나와도 이삼 초만에 확실한 파해법을 찾아내어 약점을 파고 들어왔다. 복태동은 그제서야 삼대두와 황무조를 꺽은, 숨은 실력자가 다름아닌 저 애 송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저 그 정도나 가능한 실력이지 복태동 자신에게 위협이 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것은 복태동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아구에게는 큰 불행이었다. 더구나 아구는 이미 오른 쪽 팔목과 왼 발목 그리고 갈비뼈두 개가 부러진 상태였다. 그 외에도 무시할 수 없는 부상이 수두룩했지만 특히 우측 팔목뼈의 파손은 아구를 아주 서툰 좌검수 (左劒手)로 전락시켰다. '이제 할 만큼 한건가?' 아구는 이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비천한 목숨으로 대가를 치루 게에는 턱없이 부족한 죄업이었지만 그래도 속죄의 일념으로 힘껏 싸웠다. 남들이 뭐라든 마땅히 바쳐야 할 대상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므로 이 것으로 되었다고 아구는 생각했다. 그녀를 구해주지는 못하지만 그녀를 위해 서 죽을수는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아구는 그렇게 생각했 다. '또 그런 표정을 짓는구나!' 여인은 아구의 눈빛을 보았다. 맥산관에서 검을 뽑으며 뿜어내던 그 눈빛이 었다. 무언가를 간절히 말하고 있는 눈빛이었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여인 으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회한이 가득 담긴, 애절한 눈빛이라 는 것 밖에는. "이제 돌아가세." 복태동은 질끔하였다. '왜 그렇게 질질 끌고 있는냐'하는 주면세의 질책이었 다. 하긴 이미 끝장을 냈어야 할 싸움을 너무 질질 끌고 있었다. "생포해야 한다는 것은 자네도알고 있겠지?" "존명!" 물론 알고 있었다. 압송하는데 부담이 되지 않도록 사지(四肢)정도는 절단 해도 좋다는 지령도 알고 있었다. 또한 복태동은 압송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 더라도 팔다리 쯤은 기꺼히 절단할 작정이었다. 검을 쥐고 있는 왼팔과 비교 적 민활하게 움직이는 오른다리를 제물로 선정하였다. 왼팔은 삼색대두, 오 른다리는 적호붕권의 몫이었다. 복태동의 판관필이 번쩍하고 빛을 발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번 호 : 8772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07-02 15:46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44- 유진목은 힘껏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유진목 자신도 놀랄만한 엄청난 도약이었다. 궁을 산책하던 어린 황제가 비틀거리며 넘어지려는 다급한 순간 에도 이렇게 십이성으로 날아오른 적은 없었다. 생애 최고의 도약이었다. '하긴 그때는 지금처럼 무공이 완숙하진 않았었지.' 찰나의 순간에 주마등처럼 스쳐간 어처구니 없는 한상(閑想)이었다. 그러나 유진목의 육신도 그렇게 한가롭게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일시에 오륙 장의 거리를 격하고 연달아 다시 사장, 삼장 그리고 다시 남겨두었던 진기를 모두 끌어올려서 마지막 도약을 감행하였다. 마지막 비상의 정점에서 유진목은 먹 이를 내리찍는 매처럼 하강하였다. 활공하는 유진목이 노리는 먹이는 시작은 흑점(黑點)이었지만 점점 확대되어 어느 새 하나의 분명한 형체가 되었다. 반월도를 어깨에 걸쳐놓은 흑색도포의 사내였다. 이제 막 녹의여인의 팔목을 제압하려던 흑색도포는 뒷통수에 험악한 바람 이 몰려드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백영(白影)이 대단한 속도로 날아 들고 있었다. 언뜻 삼색으로 번뜩이는 그림자가 그 백영을 가로막는 모습도 보였다. 은발에 청색 피풍의, 혈광도포. 날아오는 자의 정체는 알 수 없었지 만 그롤 가로막은 자는 분명히 맹의 동료 고도광(孤刀狂) 현승(玄承)이었다. 한편 협곡의 다른 한 쪽에서는 흙먼지가 몰려 오고 있었다. 그것이 만약 사 람이라면 그리 만만치 않은 인원일 것같아서 흑색도포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직은 피아의 구분이 되지 않았다. 흑색도포는 맹의 동료를 믿기로 하고 고 개를 돌렸다. 오랜 강호경험이 올바른 결단을 내려 주었다. 이럴 때는 재빨 리 목표물을 제압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흙먼지를 일으키는 일당이 적일 수 도 있었다. 다시 이렇게 좋은 기회가 올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는 상황 이었다. 아구도 보았다. 백색 그림자는 정확히 흑색도포 사내의 등판을 겨냥하고 있 었다. 그의 정체가 무엇이든 지금은 백영이 성공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마침 난데없는 백영의 출현에 복태동도 주춤거리고 있었다. 아구는 이빨을 악다물 고 검미를 선회하였다.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찌를 것 같은 복태동의 판관필 은 아랑곳도 하지도 않는, 오로지 청색 피풍의만을 노리는 검초였다. 허공에 온통 꽃이 피어났다. 사실은꽃송이 송이가 모두 검초였다. 청색 피풍의를 걸친 은발의 사내, 고도광 현승은 잠시 망연자실해졌다. 후방에서 의 뜻밖의 암습이었다. 등을 돌려서 막아내기에는 너무 꽃송이가 많았다. 꽃송이들의 옆을 지나가는 유진목의 뇌리에 추혼십이절의 마지막 초식 만 화창천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유진목은 회상과 동시에 망각해 버렸다. 찰 나지간으로 판단해야 할 중요한 사항들이 너무 많았다. 애초의 의도를 포기 하고 방해자를 막아야 하는가? 유진목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날아가고 있 었고, 누군가 그런 유진목의측면을 암습했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방해자 를 가로막았다. 녹의여인은 거의 목표물의 수중에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유 진목의 도박은 여전히 최초의 의도를 그대로 밀어부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만화창천에대한 일말의 의혹들은 그 저 스치고 지나가는 주마등이 되고 말았다. 흑색도포의 동료 현승에 대한 믿 음은 유진목의 단 일초에 박살나고 말았다. 고도광 현승은 흑색도포의 위기 는 나 몰라라하고 오로지 자기 살 궁리에 골몰하여 공수를 마침내 전환하기 에 이르렀고 덕분에 유진목이 무사통과로 흑색도포에게 도착했던 것이다. "무사하셨군요." "유... 유대인!" 채경령은 비틀거리며 유진목의 등 뒤로 걸어갔다. 복태동은 아구를 포기하고 유진목에게 달려들었다. 중요한 것은 계집이었지 귀찮은 애송이놈이 아니었다. 이제와서는 확실해졌다. 용모파기에 비해서는 너무도 행색이 초라한 지라 반신반의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분명해졌다. 계 집은 천하제일의 염상, 채가장의 장주이자 호신련의 수뇌 채경령이 분명했 다. 그와 동시에 은괴의 행방에 대한 열쇠이기도 했다. 은괴를 되찾지 못하 면 맹은 붕괴될 형편이었다. 복태동만이 아니라 주면세를 위시한 일당 모두 가 유진목에게 달려 들었다. 아구도 예외없이 그 행렬에 동참하였다. 채경령과 위치적으로 가까웠던 아구가 제일 먼저 당도했다. 유진목은 아구 를 일견하고는 군말없이 자리를 내어 주었다. 절벽과 평행하게 유진목과 아 구가 등을 맞대고 섰고 그 틈새의 움푹 들어간 곳에 채경령이 위치했다. 십대이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전원이 상당한 수준의 고수였고 촌각을 다투 는 상황인지라 초전부터 격전으로 치달았다. 유진목 측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의외로 버텨내고 있었다. 유진목의 무공이 적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이 첫째 이유였다. 더구나 유진목의 무공 원류는 수비위주의 호 신공이었다. 출신이 경호무사이다보니 무공 자체가 보호대상을 적절히 지켜 내는 것을 근간으로 형성된 관계로 작금의 상황에서는 더 더욱 효과적이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가장 무공의 격이 떨어지는 아구였는데 신통할 정도로 잘해 나가고 있었다. 유진목은 새삼 아구에게 감탄했다. 자기 스스로가 아닌 경호대상의 방어를 근간으로 하는 무공인지라 유진목 의 무공체계는 항상 살수와는 상극적인 대응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살수무 공의 특징은 상대의 약점을 찌르는데 주력한다. 때문에 비교적 변(變)을 억 제하고, 쾌(快)를 위주로 했다. 살수는 대상이 정해지면 대상의 무공형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그 파해법을 습득한 후, 살해대상의 약점을 향하여 빠르고 단순한 암습을 감행한다. 당연히 내공보다는 초식에 치중하기 마련이었다. 반면에 유진목의 사문인 석전문(石田門)은 초식보다는 내공에 중점을 둔 기 법을 발전시켰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내공의 극한적 활용이라해도 과 언이 아니었다. 살수가 감행하는 불시의 기습은 방어자의 적시 방어를 와해 시키고 적재적소의 대응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석전문의 위사들은 적 시와 적재적소를 반드시 필요하지 않았다. 내공의 증폭을 통하여 지속적이고 다면적인 초식의 활용을 만들어 내었다. 아예 적시와 적재적소 방어의 효용 을 불필요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석전문의 비전절기 해우심법(海雨心法)은 초식 자체를 변화시키는 용(用)을 내포하고 있었다. 아무리 평범한 초식이라 도 석전 문하생의 손을 통하면 천변만화의 초식으로 변모했다. 유진목도 수 련생 시절 초식보다는 내공의 효과적인 활용에 주력했으며 이제와서는 그 방면에 일인자가 되었다. 내공에 의한 초식의 폭발은 초식을 동시다발로 다 초(多招) 분화시킴으로써 암습자에게 파해법 자체를 박탈하는 동시에 굳이 어느 한부분의 방어에 집착할 필요성을 없애주었다. 유진목은 쥘부채로 단순히 육합권(六合拳)의 초식을 전개했지만 발출되었을 때는 이미 평범한 육합권이 아니었다. 적이건 아군이건 예측불가의 수법이었 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아구는 적절한 호흡으로 보조하고 있었다. 유진목은 아구가 곤란한 지경에 빠지자 재빨리 태산압정(泰山壓頂)으로 원조하였다. 적들은 상당한 고수들임에도 불구하고 유진목의 진의를 몰라 허둥거렸건만 아구는 침착하게 주면세의 상단공격을 유진목의 태산압정으로 대신 막아내 고 하단의 방어에 치중하였다. 삼십여 초를 주고 받았을 무렵, 사태가 일변하였다. "막아라!" 주면세가 신경질적으로 외쳤고 다섯 명이 공격대열에서 이탈하여 남쪽으로 돌아섰다. 흑색도포의 사내가 보았던 흙먼지의 주인공은 채가장의무사들이 었다. 마침내 그들이 당도한 도착한 것이었다. 전세가 일시에 유진목 측의 우세로 돌아섰다. 아구의 혼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비교적 단순한 수 법만 구사해 오던 유진목이 아구의 대응을 예의주시하면 조금씩 초식의 수 준을 높혀 나갔다. 여전히 아구는 잘 적응하고 있었다. 유진목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다행히 그는 적이 아니라 아군이었다. 유진목이 고난도의 초식들을 구사하기 시작하자 방어가 원할해지고 유진목 과 아구는 다급한 상황에서는 벗어나 비로서 한숨 돌릴만한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이제 막 도착한 채가장의 무사들이 숫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었다. 하 지만 형세를 결정적인 우위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채가장의 무사들보다는 복고맹 측이 대체적으로 무공이 고강한데다가 유진목과 아구는 여전히 고립 된 상태였다. 그때, 북쪽에서 흙먼지가 일어났다. 이번에는 주면세 일당이 희 색이 되었다. 마침내 맥산관을 출발한 주력부대가 도착한 것이다. 유진목은 초조해졌다. '흐음, 그렇다면?' 유진목이 생각을 고쳐먹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였다. 처음에는 아예 자신의 수단을 제한하는 걸림돌로 치부했던 아구가 뜻밖으로 장단을 잘 맞 추는 것이 대견스럽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최대한으 로 초식을 폭발시킬 작정이었다. 아차하면 아구의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위험한 방법이었지만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아구의 운에 맡길 수 밖에. "미안하네, 젊은이. 살아서 다시 만난다면 죄값을 치르겠네." 유진목의 안광이 흉흉해지고 쥘부채가 파르르 떨었다. 바야흐로 유진목의 필 살기가 전개되려는 순간이었다. 인적이 사라진 폐묘(廢廟)의 내부였다. 유진목은 무슨 귀신이라도 감상하는 표정으로 아구의 상세를 살피고 있었다. 오른 팔목과 왼 발목이 부러져 있었 으며, 갈비뼈도 온전치 않은 것 같았다. 옆구리에도 가볍지 않은 상흔이 있 었고... 한마디로 상처의 만물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수없는 격전을 치뤄냈고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것이었다. 유진목이 포위망을 뚫기 위해서 태청파(太淸波)를 시전했을 때도 살아남았 다. 물론 아구를 겨냥한 공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진목을 마냥 아군으로만 믿고 있었다가는 무사할 수 있는 공격도 아니었다. 유진목은 아구가 동물적 인 생존감각을 지닌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유진목으로서는 아구가 무 학의 이치와 파해법에 관한 절정의 전문가라는 것을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 다. 무학의 극의를 깨달는데는 반드시 일정정도의 연륜이 필요한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구는 태청파에 분명하게 반응하 였고 정확한 대응을 하였다. 다만 자신의 방비는 도외시하고 합공을 한 것이 문제였을 뿐. 덕분에 아구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서있지도 못할 정도 의 치명상을 입었다. 천신만고로 주면세 일당의 포위망을 돌파한 일행은 밥 한끼 먹을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또 다른 적들과 조우했다. 난주에서 출발한 낙양표국 난 주지부의 잔당들이었다. "이리로..." 아구가 일행을 후퇴시켜서 샛길로 인도하였다. 임하로 빠지는 그 지역사람 들의 지름길이라고 했다. 사방으로 길이 흩어지는 곳까지 무사히 빠져나왔지 만 추적은 집요했다. 끝 모를 도피행각이 시작되었다. 개새끼들! 아니 개새끼보다 더 냄새를 잘 맡는 놈들이었다. 검은 복면의 사내들이 기척도 없이 다가와서 기척도 없이 막아섰다. 모두 베어 넘기고 따돌렸다싶어서 한숨이라도 돌리려는 참이면 어떻게 따라붙었 는지 다시 슬그머니 나타나고는 하였다. 흑막 살수들의 추종술은 정말 치가 떨렸다. 그 속에는 유진목 필생의 숙적 역불귀도 있었다. 유진목 일행이 끝 장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천운이었는지 역불귀에게만은 발각되지 않은 덕이었다. 기습전이 거듭되면서 수행하던 채가장 무사들이 하나둘씩 죽어 넘 어갔다. 유진목은 적들의 추격을 저지하면서 죽어가는 동료들은 뒤로 하고 그저 발걸음을 재촉할 따름이었다. 유진목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장주 채경 령의 생존이었다. 임하행이 좌절되고 대통산맥(大通山脈)의 남쪽 지류를 우 회할 즈음에는 채가장 소속이라고는 유진목과 채경령 밖에 남지 않았다. 채 가장 무사들의 전원 몰살이었다. 그때도 아구는 살아 남았다. 부러진 발목으 로, 덜렁거리는 팔목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음에도 아구는 살아남았다. 아무리 봐도 사람의 모습이었는데 하는 짓은 영 사람이 아니었다. 생명력의 화신이라고 해야 할까, 인내력의 화신이라고 해야 할까. 준비한 약을 모두 먹이고 발라주었지만 모든 상처를 조치하기에는턱도 없 이 부족했다. 나머지는 어쩔 수 없이 임시조치만 해주는 정도로 마무리를 지 었다. "참, 이해가 안가는 젊은이군요." 치료를 마친 유진목이 손을 닦으며 말했다. 채경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채경령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생면부지의 사내 였다. 그저 서북 변두리 객잔의 일개 점소이 겸 용병에 불과했다. 또한 목숨 을 걸어야 할 만큼 책무가 주어진 청부도 아니었다. 애초에 선금조차 주지를 못했다. 문득 옥문관에서 어느 고용무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데도 갈 곳이 없거든 마지막으로 맥산관을 찾아보시길...' 그때는 아무 생각없이 지나쳤는데 결국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맥산관 을 찾아갔고 아구를 만났다. 그 고용무사의 말에 내포된 의미가 아구였단 말 인가? 채경령이 다급하게 아구를 흔들어 깨웠다. "이봐요, 구무사! 예전부터 소녀를 알고 계셨습니까?" 순간 아구의 얼굴에 당황의 기색이 스쳐갔지만 채경령은 눈치채지 못했다. 아구가 부정의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무리한 청부를 따르고 계십니까? 생면부지의 아낙을 위 해서 목숨을 하찮게 여기시다니..." "낭인에게는 돈이첫째이고, 신용이 둘째지요. 돈이 필요해서 용병이 되었고 용병으로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신용이 필요한 법이지요. 소생은 아직 임무 도 완수못했고 돈도 받지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구무사가 지켜주신 신용은 이미 낭인의 몫을 넘는 것이었고, 돈 또한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니 만큼 당치 않지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으신 게 분명합니다. 말씀해주십시오." "... ..." 아구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유진목까지 합세해서 다구쳐 보았지만 아구에 게는 끝내 마이동풍이었다. 은근히 부아가 치민 유진목이 투덜거렸다. "젊은이, 우리는 난주로 되돌아갈 생각이 없다네. 자네는 영원히 임무를 완 수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문득 깨달은 듯 채경령이 아쉬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군요. 더 이상 구위사를 붙잡을 명분이 없군요. 청부금을 지불하겠습니 다. 만금을 내놓아도 부족하다는 것은 소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금 백냥입 니다. 구무사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이번에는 바위처럼 단단하던 아구가 당황했다. "아... 아닙니다. 은 오십냥이 제대로 된 계산입니다. 그 이상은 받을 수 없 습니다. 더구나 소인은 임무를 완수하지도 못했구요." 채경령과 아구가 옥신각신하자 다시 유진목이 끼어들었다. "중재를 하지요. 목적지가 바뀌었으니 청부내용도 변경되어야 마땅합니다. 더구나 애초에 구위사도 능력에 걸맞지 않는 손해보는 금액으로 계약을 한 모양새가 되었으니..." "... ..." "어차피 장주님과 구위사의 상세가 위중하니 당분간은 여기서 꼼짝도 못할 형편이구요." 유진목은 내심 탄식을 터뜨렸다. 당장 움직이는 것은 채경령에게도 무리였 다. 물론 아구처럼 장시간을 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칠팔일은 요양해 야 할 처지였다. 그 시간동안 포위망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 명약관화였다. 적들의 능력으로 가늠해 보건데 칠주야의 시일이 경과한 후, 포위망을 벗어 날 수 있는 확률은 족히 잡아서 삼할에도 못 미칠 것 같았다. 채경령이 다부지게 말했다. "유대인, 오월이 오기 전에 우리는 성도(成都)에 당도해 있어야 합니다." "역시 사천(四川)입니까?" 유진목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묻고 채경령이 고개를 끄덕였 다. 그리고 둘이 동시에 아구를 바라보았다. "제 걱정은 마십시오.오일이면 충분합니다. 소생의 몸상태는 소생이 잘 압 니다. 그럼 목적지는 성도, 금액은 금 백냥, 좋습니까?" 유진목과 채경령이 겸연쩍게 웃었다. 계약체결의 표시였다. 너무도 고마운 아구였다. 사실 지금으로서는 아구가 전체 전력의 삼분지일에 해당했다. 유 진목 등은 아구 없이는 탈출이 불가능한 형편이었고, 반면에 아구는 동행만 마다한다면 적의 최대목표가 채경령의 생포이므로 그 배후를 이용하여 얼마 든지 탈출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채경령으로서는 가히 후한무치의 요구사항 이라 얼굴이 화끈거렸지만감내해야 했다. 무슨 희생을 치루고라도 오월 이 전에 사천땅을 밟아야 했다. 은괴 육백관과 구법당 놈들의 명줄이 걸려 있었 다. "자아, 그럼 모두 결정된 거지요? 그럼, 저는 구위사와 일 좀 봐야겠습니다. 괜찮겠나, 구위사? 자네에게 할 말이 좀 있네만..."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이 후배 명심하고 유대협의 명에 따르겠습니 다." "황송한 부탁입니다만 장주께서는 바깥 동정을 좀 살펴주시겠습니까?" 유진목은 자신이 도와주는 입장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전을 부려먹는 것 같아서 정말 황송해졌다. 그러나 도리가 없었다. 며칠 후에 있을 적진돌파는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최악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만 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열흘 남짓이었다. "그리하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채경령은 싹싹하게 대답하고 입구로 다가갔다. "구위사, 이 늙은이가 이제부터 몇 가지 조언을 할 참인데 너무 고깝게 듣 지는 말게." "당치 않습니다." 유진목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결심을 굳혔다. '어차피 모든 무공의 공통점이 아닌가. 사문의 법도를 배신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유진목은 아구에게 무공을 전수해 줄 생각이었다. 아구의 무공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탈출의 성공확률도 높아졌다. 그리고 아구는 한가지만 추가된다 면 단기간내에 무공수위를 비약적으로 상승시킬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 었다. 또한, 아구에게 추가시킬 그 무언가를 공교롭게도 유진목이 가지고 있 었다. 아구의 두드러진 문제점은 내력의 수발(收發)이 전혀 외력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접전의 와중에 여력을 못이겨서 균형을 잃 어버리는 사태가 자주 발생하였다. 한마디로 힘조절조차 못하는 무공 문외한 수준이었다. 아구는 지금의 상태에서 자신의 신체만 제어할 수 있어도 눈에 띄는 진보를 이룩할 수 있었다. 유진목의 해우공(海雨功)이 바로 아구의 결점을 치료할 수 있는 명약에 해 당되었다. 물론, 해우공은 석전파의 절대적인 비인부전(非人不傳) 절기였다. 강호에서는 사문의 무공을 유출시키는 것을 최악의 배덕으로 규정하고 있었 다. 유진목은 깊은 갈등에 빠졌지만 결국 눈 앞에 닥친 현실에 초점을 맞추 고 말았다. 애써 사문의 절기가 아닌 그저 천하무공의 기본을 설명해주는 것 이라고 자위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자기합리화일 뿐, 유진목이 설명하고 자 하는 것은 엄연한 해우공의 핵심이었다. 주면세 일당을 물리치기 위해서 아구의 안위를 무시하고 태청파를 폭갈시켰다는 죄책감이 유진목의 그런 결 단에 막대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유진목의 파탄적인 공세로 인 해서 자칫하면 사리질 뻔했던 아구의 목숨값이기도 했다. "강호에서 말하는 십년 내공, 일갑자 내공하는 게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 하는가?" 아구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유진목에대한 존경심도 그에 못지 않아서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수련해서 축적한 내공의 양을 말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일갑자 내 공이라함은 육십년을 고련한 중후한 내공이라고..." 아구의 대답에 유진목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흔히들 그렇게 말하지. 그럼, 자네가 고인(高人)으로 뫼시던 분들 중에 그 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계시던가?" 아구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딱히 그렇게 가르친 사부는 없었다. 아무리 궁리 해 봐도 기억에 없었으므로 아구가 대답했다. "없었습니다." "그럴 것이네. 기(氣)는 축적하는 것이 아니네. 이미 존재하고 있지. 그저 알아듣기 쉬우라고 축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뿐이지, 기는 세상 모든 것에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네. 다만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노부가 알기 에 기는 양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네. 깨달음이라고나 할까. 일갑자 내 공이라함은 육십년 동안의 깨달음이라고 바꿔 말해도 무관하겠지. 지금 자네 의 몸 속에도 당연히 존재하고 있지. 양으로 따지자면 무궁무진이라고 할 밖 에. 결국 얼마나 느끼고 얼마나 익숙하게 용기(用氣)하느냐가 관건이지. 많은 사람들이 영물(靈物)을 이용해서 내공을 얻으려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 지. 영물의 약효가 기의 흐름을 민감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그것을 느껴서 얻 지 못한다면 영물을 복용하지 않음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네. 차라리 한 모금의 물과 한 주먹의 곡물(穀物)을 착실하게 내 것으로 만드느니만 못한 것이라네." 아구는 비로서 눈치챘다, 지금 유진목대협이 무엇을 하려는지를. "이제부터 정신을 집중하고 세이경청(洗耳傾廳)해주기 바라네." 아구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바짝 차린 채 유진목을 뚫어져라 응시 했다. 유진목의 설명은 계속되었고 어느 새 자정이 지났지만 아구는 밤이 깊 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다음날도 강행군이었다. 촌음을 아껴야 했다. 유진목이 검을 지면에 박았다. 단단한 석판이었으나 검은 두 치 가량이나 바닥을 파고 들었다. 유진목이 진기를 불어넣어 검병을 잡아당겼다. 검이 서 서히 휘어지며 반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검날이 부르르 떨 었다. 순간 유진목이 검병을 놓아버렸다. 검이 바닥을 차고 세차게 튕겨 나 갔다. 검은 한참을 날아서 소란스러운 굉음을 울리며 석벽에 충돌하고나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떤가?" "... ...?" "이 노부가 검을 던졌는가?" "예? 아... 아닙니다." "그럼 자네가 던졌는가?" "아닙니다." "그렇다네. 검 스스로가 날아갔다네, 아무도 던지지 않았는데도. 무릇 기 (氣)의 발출도 이와 같다네. 응축시키면 팽창하기 마련이지." 자잘한 설명이 좀 더 이어지고 유진목이 시범을 보였다. "자아, 잘 보았겠지? 의문가는 점은 없나?" "... ..." "요령을 잘 음미해보고 이제 자네가 해보게." 아구가 검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력을 끌어 올리고 그 기 운의 움직임을 주목하며 사념(思念)을 만들어 나갔다. 상상 속에서 진기의 원형체(圓形體)를 만들었다. 그리고 둥근 공모양으로 가정한 진기의 덩어리 를 점차 압박하였다. 원형체가 최대한 수축되었을 때, 일거에 기력을 풀어 놓으며 팔을 내뻗었다. 눌려 있던 진기가 순식간에 팽창하며 튀어 올랐다. 내력은 신기하게도 아구가 유도하는대로 오른쪽 어깨를 경유하여 팔을 타고 세차게 달려서 검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때다!' 아구는 진기의 관성을 그대로 검에 실어서 검초를 전개했다. 아구는 일직선을 내리 그었다. 그러나 검은 아구의 의지와는 다르게 제멋대 로 곡선을 그려냈다. 아구는 엉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차피 단번에 성 공하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아구는 재차 시도해볼 요량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그때 유진목의 탄호성이 들려왔다. "하늘이 내린 기재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그럴 수가!" 유진목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쉽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구는 직선을 내 리 그었지만 곡선이 형성되었다. 내공의 힘에 의한 자발적인 변초가 발생한 것이었다. 하루밤을 꼬박 새운 자세한 설명이 있기는 했지만 시범은 오로지 한 번 뿐이었다. 단지 그것 뿐인 아구의 첫 시도였다. 더구나 가장 기본이 되는, 내력에 적응하는 방법만을 전수해주었다. 초심자가 의례히 그렇듯 적 절한 힘 조절이 이루워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잉여잠력이 뜻밖에도 초식의 폭발을 야기시킨 것이었다. 아구는 기가 막히게도 내력에 대한 적응단계는 고사하고 내력의 활용단계까지 뛰어 넘어서 초식을 폭발시키는 경지를 보여 주었다. 우연의 산물이기는 했지만 사념의 지시가 없이는 불가능한 출수였 다. 아구가 본능적으로 해우공이 추구하는 바를 감지하고 있다고 밖에는 달 리 해석할 길이 없었다. 아구가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무리 봐도 천재로 보이지 않았다. 물 론 아구가 천재는 아니었다. 그것은 아구가 천하에서 짝을 찾기 힘들 정도로 기구한 팔자의 사내 모진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천지신공 수련 이전의 아구, 즉 모진위는 이미 그런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운명은 모 진위의 인생 자체를 무공수련의 과정으로 변모시켜 버렸다. 모진위는 타고난 허약체질과 무위조식의 효용으로 최고조의 기감(氣感)을 발달시켰으며, 용무 관의 도학정에 의해서 움직임 자체를 용무권의 초식이 바꿔 버렸으며, 신검 반의 비연류로 인해서 신형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릴 수 있었다. 또한 구연기 로 비롯된 추혼십이절이라는 고절한 검법은 아구의 안계를 최고점으로 높혀 주었으며, 흑막대주 역불귀의 비전절기 명부결(冥府訣)은 천하무학을 분석하 는 눈과 감각적인 무공 파해를 위한 신경조직을 배양해 주었다. 결정적으로 천하의 모든 심득을 포괄하는 천지신공을 팔성(八成)으로 연성한 상태였다. 유진목은 몰랐지만 아구는 이미 모든 준비가 갖추어진 구도자였던 것이다. 뒤집어 말해서 이 모든 준비된 과정이 교통정리를 못하고 부작용으로 남아 있어서 불균형을 이루고있는 상태가 바로 작금의 아구였다. 천지신공의 발동으로 환골탈태의 과정에 들어간 모진위의 육체는 빠르게 증대되는 내력과 외력에 거의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진위가 겨우 적응 할 즈음이면 힘의 증가는 벌써 저만큼 달아나 있었다. 보다 근본적인 점은 모진위의 적응방법이 잘못되었다는데 있었다. 동작 자체가 용무권의 초식이 고, 팔 자체가 아예 추혼십이절을 전개하는 검의 연장선이 되어버린 모진위 로서는 증대하는 힘에 대한 대처도 무학적인 방법이 적용되었어야 했다. 그 러나 고대 불가의 심신단련법에서 비롯된 천지신공은 자기보존의 활법이었 지, 타인 치료법이나 살상적 무공이 아니었다. 천지신공이 기록된 천도신경 에도 당연히 내공으로써의 활용이나 전이에 관한 내용이 하나도 수록되어 않았다. 그것은 모진위가 내공의 활용을 제대로 수련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어 주었다. 또한 모진위 특유의 방어법도 장애물이 되었다.둔한 감각과 굼뚠 행동을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하상곤은 모진위에게 육감단련법 을 전수해주었다. 그리고 무수히 얻어맞으며 터득한 비껴흘리기도 있었다. 모진위는 본능적 반사감각에 의해서 대결자의 초식에 대응하였으며 자신의 약점을 최대한 만회하기 위해서 최후의 순간에 적의 공격이 가장 근접한 상 태에서 아슬아슬하게 회피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신체가 억압된 상태에 서도 수비만큼은 절묘하던 모진위였다. 하물며 천지신공의 기연으로 변모한 다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지간한 고수라도 모진위에게 완벽한 정타를 날 리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필요가 수단을 만드는 법, 고절한 수비가 신체균형 의 필요성을 망각시켰고 모진위의 평형감각은 제기능을 상실해 버렸다. 유진 목의 해우공이야말로 무학적인 기력조절의 방법이었다. 마치 깨진 유리조각 들이 다시 만나 정확히 짝으로 맞춰지듯 해우공이 모진위에게 흡수되고 있 었다. "어찌 되었거나 힘이 넘쳐버렸네.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가장 적당한 힘의 양을 찾아내는 것일세. 마음 속으로 저 쪽 어느 허공에 점(點)있다고 상상해보게. 그리고 그 점을 자네의 진기로 찍어 보게. 덜도 더도 말고 바로 그 점에 딱 맞아떨어지도록 한 번 해 보게나." 모진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방법이라면 이미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하상곤은 수백장의 창호지를 낭비해가며 모진위에게 타점(打點)을 가르쳐주 었고, 모진위는 낙옆을 때리며 그 수법을 갈고 닦았다. 모진위가 신중하게 검을 들어올렸다. "어허, 누가 검끝으로 찍어 보라고 했는가? 우선 내력이 먼저일세. 검끝과 내 력을 일치시키는 것은 그 다음 문제일세." 모진위가 얼마나 칼질을 했는지 헤아리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야 모진위의 부끄러움도 약간은 진정되었고 유진목의 얼굴에서도 불만의 기색이 수그러 들었다. 드디어 검과 기가 어느 정도는 같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러나 휴식도 없이 수련은 다음 과정으로 넘어갔다. 모진위가 다시 일직선 긋 기에 들어갔다. "명심하게. 시위에 매겨진 화살이라고 상상해도 좋고, 고삐를 당기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도 좋네. 아무래도 좋으니 어떠한 경우라도 명확하게 상(像) 이 그려지도록 념(念)을 놓치지 말게." 모진위의 검이 보기 좋게 일직선을 그렸다. "쯔쯧. 조금 부족하였네. 하지만 이제는 이해가 가는 모양이군. 아까보다는 많이 좋아졌네." 모진위는 신이나서 칼질을 해댔다. 그저 좌수(左手)에 검이 쥐어져 있고 바 른 직립(直立)을 못하는 것이 거북스러웠다. 오른손에 검이 쥐어졌다면 보다 진보가 확실했겠지만 부러진 팔다리가 정상적으로 아물려면 한두 달은 족히 기다려야 했다. 정밀하지는 않았지만 균형은 무너지지 않는 가운데 공력의 수발이 이뤄지고 있었다. 완벽한 내외공의 조화는 요원하였지만 제법 통제력 을 되찾아가고 있는 과정이었다. 닷새째가 되었을 때, 유진목은 이미 밑천이 다 달아나 버리고 없었다. 유진 목 스스로가 정해놓은 한계에 도달한 것이었다. 더 이상의 과정은 석전문의 직전제자들에게도 쉽게 전수가 허용되지 않는 상승의 단계였다. 하지만 모진 위와 채경령은 그때까지도 출발할 수 있는 몸상태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 다. 반나절을 고민하던 유진목은 결국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모진위를 형 편없이 꼬꾸라뜨린 태청파의 죄업이 또 한번 사단이 되어주었다. 모진위의 회복을 늦추는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유진목의 태청파로 비롯된 피해였다. 모진위의 놀라운 진보가 가져다준 보람도 유진목을 유혹하는데 단단히 한몫 을 했음은 물론이었다. "직선으로 내리 그었는데 곡선이 되어 버렸던 원인을 알고 있는가?" "글쎄요." 모진위가 팔짱을 끼고 고민에 잠겼다. 그런 상태로 두 시진이 흘러 갔다. "아무래도 모르겠습니다." "기를 움직이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지. 용수철이라고 들어보았나?" 모진위가 고개를 저었다. "마치 뱀이 또아리를 튼 것 같은 모양의 쇠줄인데 아주 탄력이 좋은 물건 이지." "아아! 그 물건이라면 쇠뇌라는 기구에서 언젠가 본 적이 있군요." "기의 움직임을 그렇게 응용할 수도 있네. 일테면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잔 뜩 움크렸다가 똑바로 펼치지며 날아가는 것이지. 무림고수 중에는 실제로 그런 원리를 무공에 응용하는 자들이 적지 않지. 탄력과 회전력을 빌어서 기 를 증폭시키는 수법인데 흔히들 전사경(轉射勁)이라고 한다네." 유진목이 모진위의 검을 건네 받아서 다시 바닥에 꼽으며 말했다. "그저 한 예일뿐이야. 응용하기에 따라서는 방법은 무궁무진하지." 이번에는 검을 가볍게 휘었다가 놓아주었다. 검이 제자리를 찾으려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떤가? 검이 떠는 것이 보이지?" 그제서야 모진위는 무릅을 쳤다. "아, 그렇군요! 진동." "이제 알겠나?" 유진목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기를 증폭시켜서 변초에 이르게하는 가 장 알기쉬운 방법은 진동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감지해낼 수 없 는, 아주 빠른 진동을 발생시켜야 했다. 그런데 저 아구라는 놀라운 젊은이 는 그 진동을 감지했었던 모양이었다. 기리파악을 위한 난관이 극복되자 설 명은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그렇게 또 하루가 흘러갔다. 다음날부터 모진위는 초식의 폭발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백번이고 천번이고 거듭해서 검을 내리 그었지만 다시는 곡선을 만들 수가 없었다. 물론 보기좋 은 직선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유진목이 다시 말했다. "이보게. 편의상 물질로 비유해서 상상하지만 기는 물질이 아니지 않는가?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이 조화되어야만 비로서 가능한 법이라네. 하단전의 기(氣)가 순종하고, 중단전의 심(心)이 간절히 원하며, 상단전의 념(念)이 의 심하지 않아야 함을 어찌 자꾸 망각하는가? 곡선은 변초로 가는 중간점일 뿐이야.자네가 비틀려 있기에 자네의 검초도 우왕좌왕하는 게지. 자네가 반 드시 된다는 신념을 가지지 못하는데 기가 어떻게 념에 순종하겠는가. 물론 시전자 자신도 초식의 변(變)이 어떤 형태로 전개될 지는 알 수가 없지. 하 지만 의지만은 분명해야 한다네. 념이 확고하고 심이 간절해야만 비로서 기 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이네. 궁극적으로는 초식의 전개가 아니라 초식의 창출 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실현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 마음으로 초(招)를 전 개해야 하는 게야." 유진목이 검을 다시 받아 쥐었다. 그리고 그저 가볍게 내리 그었다. 단순 한 직선처럼 보였으나 그 직선은 아홉 번의 변화를 내포하고 있었다. 아홉 개의 변초가 형성된 것이었다. 그것이 유진목의 마지막 시범이었다. 그 후로 유진목의 입에서 이미 전수해준 것 이상의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 이상의 무공설명은 바로 본격적인 석전파의 무공전수와 직결되었 기 때문이었다. 모진위로 말할 것 같으면 그 후로도 삼천팔백 번의 칼질이 있고나서야 간신히 곡선을 만들어 내었다. 물론 그 곡선이 하나의 변초를 의 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아무리 모진위라해도 한두 계절 이내에 도달 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번 호 : 8776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07-03 19:39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45- 폐묘에서의 여덟 번째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채경령은 거뜬하게 눈을 떴 다. 청명한 새벽이었다. 맥산관을 떠나온 지 열사흘이 지났고, 난주 지척의 병령곡을 지나온 지도 열흘이 넘어서고 있었다. 옥문관의 은괴탈취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거의 두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고난의 연속으로 점철 되 었던 두 달간이었다. 구법당과의 투쟁이래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던 나날이었 지만 채경령 개인의 안위만 따진다면 생애 최악의 날들이었다. '후훗, 최악의 날들은 아니었는지도 모르지.' 진정한 최악의 날들은 이제 막 시작되려하고 있음을 채경령은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목전의 급박한 위기들로 인해서 냉철한 정세판단 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채경령은 채가장의 수장이자 반 복고맹파의 수 뇌였다. 지난 삼년간 장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결단들을 내려왔으며 전 체적인 포석을 스스로 구축하였다. 비로서 재회한 유진목에게서 최근의 동태 를 보고받은 채경령은 기실 작금의 형세를 가장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인물 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몇칠간의 소강상태가 그녀에게 냉철한 정세판단 의 기회가 되어주었다. 이제부터는 채경령이 결정내려야 했다. 채경령은 유 진목과 모진위를 불러들인 후 입을 열었다. 자못 진중한 어조였다. "구위사께서는 상세가 어떠신지?" "많이 좋아졌습니다." 단 칠일의 휴식였다. 부러진 뼈가 다시 붙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채경령은 안스러운 표정으로 모진위를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병색이 완연한 외인(外人)을 사지로 몰아넣는 철면피가 되어야 했다. 마음이 좋을 수가 없 었다. "휴우, 더 이상 늦출 수가 없군요.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 "소생은 괘념치 마십시오. 보십시오." 모진위가 왼발을 쿵쿵 구르기도 하고 오른손으로 검을 휙휙 내저어보며 자 신의 튼실함을 시위하였다. 고통과 불편함은 모진위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것 이었다. 환골탈태 이전의 모진위가 유지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보다 지금의 상태가 나으면 나았지 더 고통스러울 것은 없었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모진위는 의외로 상태가 좋았다. 기실 모진위의 몸은 정상인으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무위조식이나 용무권 자체가 활법인데 다가 모진위는 천지신공의 기연으로 환골탈태의 과정에 있었다. 환골탈태가 시작된지 이제 삼년정도 되었으니 모진위는 세 살짜리 아이에 비견되는 왕 성한 자연치유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환골탈태 자체가 부실한 세포를 제 거하고 정상적인 세포를 생산시키는 신진대사의 극단적인 진행이었으므로 상처가 있다면 그 부분부터 최우선적인 세포교체를 이루워지는 생체 순환체 계에 들어 있었다. 모진위의 부러진 뼈들은 이미 아물어가고 있었다. 경미한 충격은 그럭저럭 버티어 낼 수준이었다. "아마도 사는 길보다는 죽는 길이 많을 겁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니 구위사도 당연히 지금 우리가 처한 형편을 알아야겠지요. 부디 신중한 판단 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귀를 씻고 경청하겠습니다." "구위사도 맥산관의 무사이니 대강의 사정은 어렴풋이 짐작하시겠지만 저 희는 얼마전에 구법당의 전위세력이 세외에서 밀반입하던 은괴 육백관을 탈 취했습니다. 세간에서 복고맹이라고도 불리우는 무리들이지요. 그 은괴를 찾 지 못하면 아마도 그들은 막대한 타격을 입겠지요. 허나, 오월 이전에 사천 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은괴는 다시 그들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어 있답니다." 채경령이 판단컨데, 구법당의 무리들은 이곳에 모든 전력을 쏟아부었을 것 이 확실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폐묘에서 지체된 열흘이면 어지 간이 멀리 떨어져 있는 적도들조차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상대는 수백 명은 쉽게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조직이었다. 채경령은 이야기해도 좋 을 것은 하나도 숨김없이 모두 털어놓았다. "현재 은괴의 진정한 행방을 아는 사람은 소녀 혼자입니다. 여기 유대인을 비롯해서 아무도 모른답니다. 그것이 저들이 소녀에게 집중하는 이유랍니다. 그들은 거대한 조직이지요. 소녀조차 그들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해 하 고 있답니다. 그들의 모든 힘이 우리를 막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힘으로 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소녀를 제외하고 구위사, 유대인 단 둘 뿐이지요. 어쩌면 죽을 줄 뻔히 알면서 소녀가 고집을 부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 만 소녀는 가야만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많은 동지들이 죽어갔지요. 소녀 혼자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치기에는 너무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그 희생을 강요한 장본인이 바로 소녀입지요. 소녀에게는 백번 죽더라도 그 희 생의 대가를 외면할 수 없는 사명이 맡겨진 셈이지요." "미천한 졸자(拙者)입니다. 더 이상 설명하셔봐야 알아 듣지도 못합니다. 청 부업자에게는 신용이 생명입니다. 소생은 이미 약조했습니다.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요.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구위사가 이 지방 지리에는 가장 밝을 터이니 소녀가 여쭙겠습니다. 화정(和政)으로 빠져 나가는 길이 있겠는 지요?" 모진위가 답하고 채경령이 묻고 그렇게 몇 차례 근방의 지세에 대한 대체 적인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채경령의 작전은 우선 화정으로 가는 것이었다. 사천은 천하제일의 염정(鹽井)지역인 연유로 전통적인 채가장의 영역이었다. 사천 지역에 들어서면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천은 너무 멀 었다. 근동에서 채가장의 세력이 왕성한 곳은 화정이었다. 화정까지만 가면 그래도 한 고비는 넘길 수 있었다. 채경령은 일단 화정으로 들어가 전력을 정비해 볼 심산이었다. 드디어 작전회의가 끝나고 일행이 폐묘를 나섰다. "그럼 화정에서 뵙게 되기를..." 채경령이 정성스럽게 포권의 예를 취했다. 모진위가 황급하게 대례(對禮)를 갖추었다. 황송해서 어쩔줄 모르는 기색이 너무도 순진스러워 보였다. 채경 령은 코 끝이 찡해 옴을 느꼈다. 눈물까지 그렁거렸다. 십중팔구는 다시 만 날 수 없는 길이었다. 구위사가 죽던지 자기들이 죽던지. "유대협께 하직인사드립니다." 채경령의 기색에 모진위도 자못 비장한 기분이 들어 유진목에게 스승을 섬 기듯 대례(大禮)를 올렸다. 모진위가 먼저 발길을 돌렸다. 어차피 앞질러 가야 했다. 모진위는 일단 임 하가 목적지였고 유진목과 채경령은 화정방면이었다. 이른바 양동작전이었 다. 임하는 사천으로 가려면 당연히 경유하는 정상적인 여로에 해당되었다. 구법당의 앞잡이들도 그렇게 예상하고 임하로 가는 길목에 인원을 집중배치 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적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인물은 채경령 이었다. 그러므로 모진위가 임하로 나아가며 그들의 이목을 교란시키는 사 이, 채경령은 화정으로 빠져 나간다는 계략이었다. 합류장소는 화정이었다. 일견 모진위에게 부담이 많이 가는 작전 같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 다. 채경령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모진위를 배려하려는안배였다. 채경령이 알고있는 모진위는 아구였지 구법당의 또 다른 목표 모진위가 아니었다. 그 러므로 그들의 목표는 채경령이지 아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와 같은 채경령의 오판은 결과적으로 채경령과 유진목이 손에 피 한방울 안 묻히고 화정으로 무사히 탈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주었다. 채경령 생포작전의 현장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흑막대주 역불귀도 비슷한 오판을 하고 있었다. 한가지 다른 점이라면 역불귀는 아구가 모진위라고 분 명하게 단정짓고 있었다는 점이다. 역불귀는 채경령의 불구대천지의 원수인 모진위가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채경령의 곁에 머물고 있다는 점을 주목 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무언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추 정이었다. 아무래도 양동작전에대한 대비는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 밖에 없었 다. 또한 역불귀에게 있어서 모진위의 사살은 어쩌면 채경령 생포 이상의 중 요한 의미였다. 그런 역불귀의 오판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모진위와 더불어 발견된 삼남일녀의 존재였다. 삼남일녀라면 채경령과 유진목 그리고 채가장 의 무사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망할 자식! 도대체 어디 쳐박혀있는 거야? 벌써 꼬꾸라 돼진 건 아니겠지? 뒈졌으면 시체라도 나타나라! 이거 원 열불 터져서... 젠장맞을!" 네 명의 남녀가 임하에서 북쪽으로 오십여리 쯤 떨어진 산 속에서 계곡을 따라 저지대로 내려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기괴한 형색이었는데 그 중 말대 가리처럼 기다란 면상의 사내가 온통 핏대를 세우고 투덜거렸다. "이사제, 성질 좀 죽이라구. 그래봐야. 자네만 힘 빠진다네. 구석구석 표식을 남기고 있으니 제 놈도 눈이 달렸다면 보고 찾아오겠지." 앞서 걷고 있던 텁석부리 수염의 사내가 태평한 표정으로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소사제가 두 눈이 달려있는 것은 분명하나 죽었다면 두 눈이 있어도 영영 표식은 보지 못하겠지요." 여인의 처연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말뜻은 냉정했지만 목소리만은 슬프기 그지 없었다. 말대가리 뒤에서 걷고있는 소복의 중년미부였다. "흐음, 나무꼭대기가 잘 보일까? 아니지, 아니지. 소사제의 키가 비록 많이 자랐다하나 아직 육척장신은 아니지. 중간에다 붙혀야 자알 보이지!" 맨 후미에 쳐져있는 통통한 사내가 앞선 이들의 대화는 아랑곳 않고 노래 처럼 흥얼거리며 나무중턱에 무언가를 표시하고 있었다. 통통함이 지나쳐서 아예 고무공이라고 착각할 만한 사내였다. 기괴한 행색의 삼남일녀, 바로 희노애락 사괴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사제 모진위의 행적을 수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맥산관에서 아치를 윽박질러 모진 위의 행방을 알아낸 사괴는 곧바로 난주로 달려갔다. 그리고 유진목일행의 뒤를 밟아서 북쪽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 가다가 마침내 모진위를 발견했다. 그들이 막 도착했을 때, 모진위는 매우 다급한 처지에놓여 있었다. 성질급 한 개천호가 대뜸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지만 침착한 하가령이 만류했다. 채 가령과 유진목이 함께 어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나서서 모진위의 정체를 까발리는 것이 오히려 불리했다. 용담호혈의 와중에 피아 모두를 적 으로 돌려놓는 것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사괴들은 은밀히 모진위의 뒤를 따르며 엄호했다. 기실 따지고 보면 유진목 일행이 무사히 임하로 통하는 샛길로 빠져나간 것도, 그 악전고투 속에서 몸 이 성치않은 모진위가 살아남은 것도 사괴의 보이지 않는 후방지원 덕분이 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혼전의 와중에 사괴는 모진위의 행방을 놓쳐 버 리고 말았다. 나흘간 일대를 샅샅히 뒤져보았지만 어디에서도 모진위를 발견 할 수가 없었다. 사괴들은 궁리 끝에 모진위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길목마 다 사문의 독문표식을 남기며 임하로 방향을 잡았다. 이제 큰 산 하나, 작은 산 하나만 넘으면 임하였다. 앞서 걷던 희권 양희구가 버럭 경악성을 내질렀다. "어! 넷째 동생의 성취는 정녕 믿을 수 없구나! 내 넷째동생의 오성과 재능 이 이리 뛰어난 줄은 미쳐몰랐다." "왠 호들갑이슈, 대사형?" 노도 개천호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어슬렁 어슬렁 다가왔다. 오몽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괴 중에서도 둔하고 미련하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였다. 그나마 천지신공의 수련이 그의 오성을 조금 티어주었을 뿐, 어린시절의 오몽생은 말 그대로 바보였었던 것이다. "사부께서 왕년에 천지신공의 화두를 풀 사람은 진정 몽생이 뿐이다. 말씀 하실 때도 내 기어코 믿지를 않았건만 이제야 사부님의 혜안에 감읍하게 되 는군." 양희구가 여전히 감탄스런 어조로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나뭇가지를 물끄러 미 바라보고 있었다. 느닷없는 칭찬에 신명이 난 낙발 오몽생이 뒤뚱거리며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이것 봐, 넷째." 양희구가 나뭇가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는 분명히 저 만치 뒤에서 표식을 해 오고 있었거늘 이 우형은 자네 가 지나가는 것도 보지를 못했는데 언제 여기까지 앞질러 와서 표식을 해놓 고 갔는가? 자네 분신술이라도 익혔는가? 놀라우이!" 양희구가 가리키는 가지에는 복잡한 기형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바로 희노 애락이 암호로 사용하는 독문표식이었다. "어? 내가 이걸 언제 했지? 대형이 몰래 해 놓고 놀리는 거 아니우?" "아니야. 본인은 결단코 그런 적이 없네. 이사제도 봤지?" 개천호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개천호도 보았다. 양희구가 이제 방금 그 자리에 도착해서 놀라는 것을 개천호도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표식을 맡 고 있는 사람은 분명히 오몽생 하나였다. 오몽생은 자신의 놀라운 능력에 머 리를 갸웃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그때 아주 비통한 여인의 목소리가 세 사내 의 심금을 울렸다. "아! 자신의 암호도 몰라보는, 못난 사형들의 무분별을 소사제가 본다면 소 사제는 얼마나 상심을 할꼬." "... ...?" "아아, 그렇구나!" 오몽생이 넓다란 자신의 마팍을 찰싹 때렸고, 양희구는 자신에게 부여된 '희(喜)'자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기뻐 날뛰었다. 개천호도 나름대로 자신의 멍청함에 분노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 분노 속에는 어딘지 모르게 기쁨과 안도의 기색마저 숨어 있었다. 그것은 희노애락 사괴 들의 하나뿐인 소사제 모진위의 표식이었다. 가슴졸이던 소사제의 생존이 확 인되는 순간이었다. 폐묘를 빠져나온 모진위는 그리 오래지 않아 사문의 표식을 발견하였다. 그 만큼 삼지사방에 사문의 표기가 도배되어 있었다. 외인에게 쉽게 노출되는 위험을 무릅쓴 표식의 남발이었다. 사형들의 근심과 걱정을 그대로 대변해주 고 있었다. 모진위는 당장에라도 사형들을 찾아나설 마음은 굴뚝 같았다. 그 러나 불행히도 상황이 그렇게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판관필이 다시 표독스럽게 날라들었다. 모진위의 검끝을 제압함과 동시에 손목을 노렸으며, 그도 부족했는지 동시에 네 곳의 방위를 점하며 냉기를 쏟 아 내었다. 폐묘를 나선 이래 끈질기게 모진위를 따라붙는 육각신마 북태동 의 판관필이었다. 천지신공의 잠재력이 극한으로 복받쳤을 때조차 상대가 되 지 않았던 복태동이었다. 모진위는 허둥지둥 거룡십팔수의 초식중 철룡방벽 의 한수를 시전하여 치명적인 초식만 모면하고 나머지 이초는 그대로 가슴 과 다리로 충격을 흡수하며 맞아 돌렸다. 가슴이 쓰리고 다리가 시끈거렸다. 도처에 적들이 숨어 있었다. 복고맹의 졸개들이 들이닥치기도 했고, 흑막의 살수들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맹의 졸개들은 모진위로서도 충분히 상대할만 했다. 맹의 고수들이 몰려오기 전에 제빨리 치고 빠지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흑막의 복면인들이 강하기는 했지만 그도 견딜만 했다. 같은 수련을 거친 동 문과도 같은 이들이라 그들의 행동양태와 수법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 다. 이미 수법이 낱낱히 드러난 살수의 기습은 큰 위협이 될 수 없었다. 문 제는 복태동이었다. 아무리 구명절초를 남용하며 뿌리치고 달아나도 쉽게 따 라 붙었다. 모진위는 전력질주를 했지만 그의 경공에 비한다면 어린아이 걸 음마보다도 못했다. 경공만큼이나 그의 판관필 수법도 독랄했다. 모진위가 쩔쩔매고 있었지만 복태동도 그리 심기가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미꾸라지 같은 놈!' 복태동은 독이 바짝 올랐다. 칠주야 전에 자신을 놀래킨 애송이가 또 자신 을 경악시키고 있었다. 그 짧은 칠주야동안에 저 놈에게 도데체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더 이상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리거나 휘정거리지 않았다. 공수의 수발이 몰라보게 균형이 잡혔고 공력주입의 호흡도 전혀 어긋나지 않고 있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만취한 강아지마냥 비틀거리던 녀석이었다. 얄미울 정도로 빈틈을 파고들었고 정면대결인가 싶으면 복태동의 헛손질을 연출해내고 미꾸라지처럼 달아나 버렸다. 울창한 숲 속에서 쥐새끼를 사냥한 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온 산을 싸돌아다니며 다리 품을 팔고나서야 간신히 꼬리를 밟기를 벌써 십여 차례나 반복해 오고 있었 다. 어지간한 놈이라면 벌써 피떡이 되었을 상처투성이였는데도 멀쩡한 놈보 다 더 쌩쌩하게 약을 올리고 있었다. 복태동은 '천(天)'자결에 이어 숨돌릴 사이도 없이 '지(地)'자결을 집어 나갔 다. 판관필이 멋드러지게 춤을 추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이번에는아예 자신의 상승절초 천지현황(天地玄黃) 네 문자 모두를 녀석의 전신에 필서(筆 書)해 버릴 작정이었다. 모진위도 다급하게 추혼십이절의 도화점점을 연속으로 뿌려대었다. 복태동 이 그어내는 획 사이사이 도화같은 검광이 끼어들었고 허공에 흩뿌려지며 사라져 갔다. 복태동의 판관필은 모진위의 전신에 다시 다섯 개의 흔적을 남 겨 놓고서야 천지현황의 네 글자를 마쳤다. 모진위는 마지막 획을 맞받아 치 며 그 탄력을 이용하여 뒤로 몸을 날렸다. 이제는 완전히 선기를 잡았다고 잠시 방심한 복태동의 빈 틈을 타서 달아날 생각이었다. "거리필반(距離必反)이라... 헤어지면 언젠가 다시 만나기 마련이지." 관목을 헤치며 거구의 사내가 모진위의 등 뒤로 나타났다. 대부공 주면세였 다. 모진위의 등판을 노려보듯 거대한 도끼가 그의 어깨에서 번득이고 있었 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도 있지요.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는 법, 이번에 는 아주 저승과 이승 사이로 헤어지게 해주마. 놈!" 그리고 뒤를 이어 청색피풍의의 사내가 댓구를 낭송하듯 중얼거리며 나타 났다. 주면세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고도광 현승이었다. 현승은 모진위에 게 갚아야 할 혈채가 있었다. 일찍이 병령곡에서 모진위의 공격을 받아 내느 라 유진목을 저지하지 못한 죄로 주면세에게 혹독한 질책을 받은 바있다. 후 일, 맹의 징벌도 각오해야 하는 터였다. 주면세의 시커먼 얼굴과 현승의 핏 기없는 얼굴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현승은 이를 부드득 갈았고 그의 고도(孤刀)가 싸늘한 빛을 뿜었다. 일격이면 끝나는 상황이었다. 탄력을 받은 상태에서 뒷걸음질 중이던 모진위의 후면은 완전히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 일격이면 끝나는 상황이었다. 그때 뭇사내의 애간장을 녹이는 애절 한 여인의 탄성이 들려왔다. "아!" 이어서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주 상스러운 말투의 고약한 음성이 들려왔다. "허어! 돼지간 썩은 낯짝을 한 놈이 어울리지 않게 제법 문자를 쓰는군!" 상황에 전혀 안어울리는 희희낙낙의 목소리마저 들려왔다. "그 옆에 허연 귀신 낯짝은 어떻구? 참 생긴거 답지 않게 재미있는 놈들이 네요, 이사형. 키키킥!" "왠 놈이냐?" 등 뒤에서 난데없는 빈정거림이 들려오자 주면세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삼남일녀가 잡아먹을 듯 눈을 부릅뜨고 기립해 있었다. 그 중 말상 의 사내와 공처럼 동그란 사내가 키득거리고 있었다. "사형! 사자!" 모진위가 울먹이며 외쳤다. 새로 등장한 사인은 모진위의 사형들인 희노애 락 사괴였다. "망할 놈... 하고 있는 꼬라지하고는..." 개천호가 다시 핏대를 올렸다. "진위야, 다시 보게되서 이 사형은 말할 수 없이 기쁘구나." 양희구가 환희에 찼다. "흑흑, 장차 뭐가 될려고 그렇게 말을 안듣니? 어른들한테 일언반구도 없이 그렇게 멋대로 돌아다녀도 좋다고 누가 가르쳤든? 이 누이가 속이 다 썩는 다 썩어, 막내야!" 하가령의 목소리에는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슬픔 같은 것이 가득 베어 있었다. 오몽생도 빠질 수가 없었다. "소사제, 그런 재미난 일을 혼자서 몰래하면 못쓴다. 이 형님도 한 자리 끼 어다구." 기괴한 삼남일녀의 수작질을 보고 있자니 주면세 일당은 기가 막혔다. 보아 하니 모가놈의 일당들인 듯 한데 제 정신이라면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이 판 국에 저런 태평한 소리나 지껄이고 있겠는가? 안하무인도 유분수였다. "이런 천둥 벌거숭이 같은 놈들!" 주면세가 태산같은 기세로 대부를 휘몰아 들어갔다. 그러나 유유자적하게만 보이던 사괴의 대응도 지체 없었다. 주면세가 이해할 리는 없겠지만 그런 농 담 짓거리같은 수작이야말로 희노애락 사괴 특유의 전의를 불사르는 방법이 었다. "아니, 그러니까 삼사매의 말을 사랑이라는 거 아냐. 그렇다면 천도심법의 도리에 어긋나는 건 아니잖아. 그런 방식으로 천지신공을 연성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거 아니냐 이 말이야." 개천호가 흥분해서 단 숨에 내뱉었다. 그러나 하가령은 더욱 상심한 기색으 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봐아, 천도신경에도 그렇게 적혀있지? 왜 그거 사매가 좋아하는 거 말이 야." 개천호가 뜻밖에도 절구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오몽생과 하가령이라면 천도 신경의 시부 낭송을 즐겨했지만 평소 개천호는 질색을 하던 터였다. 비록 심 통스런 어투이기는 했지만 분명한 가락으로 절구를 이었다. 그만큼 개천호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한 심정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없으면 저 강을 건널 수 있을텐데 나를 없애는 방법은 죽기 아니면 사랑하기지. 그리고 숨도 안쉬고 덧붙혔다. "결국 사매 생각대로라면 소사제는 사랑의 힘으로 천지신공을 발원시켰다 는 말인데 뭐가 다르다는 거야?" 하가령이 다시 처량한 어조로 말했다. 언제나 하가령의 말투가 애절하기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 어떤 때보다 더욱 처량맞은 것 같았다. "사랑의 힘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정확하게 말해서 채가장 채경령 소저 의 힘이라고 해야 맞지요." "당치 않습니다. 삼사자! 채소저에게 소제는 불구대천의 원수입니다. 소제가 아무리 철면피로기소니 그런 분수를 외면하고 어찌 그런 가당치 않은 흑심 을 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지요." 모진위가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오몽생만 멀뚱거리며 양쪽을 번갈아 바라볼 뿐 이미 아무도 모진위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잠시 목에 굵은 핏 대를 세우고 부르르 떨던 개천호가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승복할 수 밖에 없었다. 개천호는 죄 없는 관목을 힘차게 걷어찼고, 양희구는 허공을 바라보며 허허허 웃었다. 언제나 그렇게 웃는 양희구였지만 이번만큼은 어쩐 지 하나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하가령의 애조띤 모습도 가히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다만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판단을 못한 오몽생만이 눈알을 멀뚱멀뚱 굴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ㅉ고 ㅉ기는 추격전의 와중에 약간의 소강상태가 벌어지고, 오랜만에 모인 사형제들이 망중한의 담소를 나누게 되었다. 사괴들은 즉시 모진위의 상태를 캐어 묻기 시작했다. 당년에 이르러 희노애락 사괴의 상태는 악화일로를 걷 고 있었다. 감정의 노예가 된 지 반평생, 해가 갈수록 심해지던 감정의 편식 이 이미 한계에 이르러 있었다. 머지않아 희노애락으로 미쳐버리거나 주화입 마에 들리라는 것을 사괴들은 예감하고 있었다. 그들의 희망은 모진위였다. 유일하게 아무런 제약없이 천도심법의 난관을 돌파한 모진위였다. 사괴들은 모진위에게 장애극복의 모든 것을 걸었다. 밤낯으로 모진위의 진보 정도에 촉각으로 곤두세우고 일희일비하던 사괴였다. 한동안 헤어져 있던 모진위이 고 보니 당연히 그동안의 진척여부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모진위의 입에 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하나는 낭보였고, 하나는 비보였다. 드디어 잠력으로 숨어있던 모진위의 신 공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는 소식은 낭보였고, 그 잠재력을 촉발시킨 촉매제 에 대한 소식은 비보에 해당했다. 그 비보는 낭보의 기쁨을 모두 쓸어버리기 에 충분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촉매제는 바로 채경령이었다. 모진위는 채 경령이 위기에 닥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강력한 내력을 발동시켰고 그 내 력의 본체가 바로 천지신공이었다. 그의 네 사형들이 각각 희노애락의 감정 을 매개체로 자신을 잊는 몰아의 상태를 만들었듯이 모진위 또한 애정이라 는 감정을 매개체로 몰아의 경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모진위도 사괴가 반평생을 노력했지만 결국은 극복하지 못했던 그 한계를 예외없이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절망이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번 호 : 8782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07-04 22:10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46- 16. 희노애락(喜怒哀樂)(2) 잠시의 소강상태가 끝나고 본격적인 토끼 몰이가 시작되었다. 희권 양희구 를 비롯한 사괴 일행은 사냥꾼에게 ㅉ기는 다섯 마리의 처량한 토끼 신세가 되었다. 개천호가 듣는다면 노발대발 핏대를 올릴 이야기였지만 모진위는 자 신들이 사냥꾼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사태를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달리 피해갈 방법이 없었다. 하상곤과의 마지막 밤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작금의 상황이 그때와 너무도 흡사했던 것이다. 하상곤은 육합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지만 결 국 역불기에게 자신들을 인도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 대가로 하상곤의 목숨 을 지불해야 했다. 순간 모진위는 부르르 치를 떨었다. 고개너머 어딘가에 역불기가 대기하고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흑막대주 역불기는 낙안평(落雁坪)을 굽어보는 비탈에 자리잡고 있었다. 낙 안평은 말이 평(坪)이지 그저 자그마한 구릉에 지나지 않았다. 온통 자갈과 모래로 뒤덥힌 황무지로 듬성듬성 잡풀이 돋아 있을 뿐, 은폐, 엄폐는 불가 능한 공터였다. 양쪽으로는 깍아지른 바위산이 버티고 있었고 역불기의 맞은 편으로 길같지도 않은 오솔길과 관목숲이 이어지고 있었다. 권태로 가득차 있던 역불기의 두 눈에 작은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역불기 의 권태를 잠시라도 잊게해 주는 것은 단 두가지, 도(刀)와 살인이었다. 역불 기는 도에 미친 사내였다. 그리고 그의 도는 오로지 살행을 위해서만 사용되 었다. 살인만이 유일한 삶의 쾌감이었다. 무심한 두 눈에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그것은 채 일다경도 지나지 않아서 전신을 감돌았다. 머지않은 곳 에서 인기척이 감지되었다. 사냥감은 그물을 빠져 나가지 못했고 포위망이 성공적으로 좁혀진 탓이리라. 역불기가 엉덩이의 흙을 털며 느릿느릿 일어섰 다. 이제 막 맞은편으로 사남일녀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흑복면의 사내와 두 눈이 마주친 젊은 청년 하나가 마치 고양이를 만난 새 앙쥐처럼 떨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미 감정의 차원을 벗어난 하나의 습관과 도 같은 공포였다. "역시 당신이었군?" 타는듯한 두 눈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모진위는 한 눈에 그 가 역불기임을 직감했다. 어찌 잊겠는가, 뼈를 깍는 지옥수련의 원흉이 바로 역불기 아니었던가. 같은 이유로 역불기도 청년의 정체를 단숨에 확인했다. "어서오너라." 전혀 딴판으로 변한 모진위의 모습이었지만 역불기는 이내 알아보았다. 모 진위가 어떤 모습으로 변모하든지 알아 볼 자신이 있는 역불기였다. "저놈이 누구야, 사제?" "저 자가 바로 흑막대주 역불기올습니다, 이사형." 역불기의 범상치 않은 기도에 자못 긴장한 개천호가 근심스럽게 물어왔고 공포에 질려있는 모진위가 대답했다. 그러자 희노애락 이외에는 어떠한 감정 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던 사괴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양주 동정원에서 역불기가 뿜어내던 그 악마적인 위용은 사괴를 혼비백산시키기에 충분한 터 라서 이미 골수에 밖혀버린 탓이었다. 희노애락을 대면하자 이번에는 역불기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러나 그것 은 두려움이 아니라 당혹스러움의 기색이었다. 전염병처럼 번져갔다. 가장 먼저 추격해온 육각신마가 굳었고, 주면세가 뒤를 이었으며, 흑막의 살수들 도 예외는 아니었다. 역불기의 시선이 복태동에게 옮겨졌다. 역불기가 눈짓으로 물었다. "없었소이다." 복태동이 고개를 저었다. 시선은 다시 주면세에게 돌려졌다. "우리 쪽도 아니요, 흑막대주." 흑막의 제이인자 금일호(金一號)를 비롯한 다른 방향의 추적자들도 고개를 가로젓기는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채경령은 포위망 속에 없었던 것이다. "성동격서(盛東擊西)로군. 모가놈이 미끼였소. 우리가 당했소이다." 머리회전이 빠른만큼이나 입도 가벼운 복태동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런 찢어죽일 놈들!" 주면세가 잡아먹을 듯 사괴를 노려보았다. 주면세로서는 그럴 만도 했다. 포위작전을 실패로 만든 가장 큰 사단이 바로 사괴 삼남일녀의 출현이었기 때문이다. 광범위 포위작전은 항상 연락 체계에 취약점이 있기 마련이었는데 난데없이 사괴가 등장하자 상황이 엉뚱한 방향으로 돌변하였다. 장거리신호 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빈약한 신호 전달로 인해서 희노애락 사괴들이 각각 채경령, 유진목, 채가장 무사로 오인되어버린 것이었다. 주면세가 사괴 쪽으로 달려들었고 그것을 발단으로 다시 난전이 벌어졌다. 애검 하가령이 부드러운 연검으로 주면세의 단단한 대부를 상대하였고, 노도 개천호가 쾌도를 바탕으로 복태동의 빠른 발에 대응했다. 피차일방적인 우 위를 점하지 못하는, 지구전 양사의 혼전이었다. 모진위의 몫인 고도광 현승 만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흑막의 살수와 주면세 일파의 졸개들은 만 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현승이 불 리해지자 우두머리격인 금일호가 나서서 현승을 지원하였다. 낙발 오몽생이 상대를 정하지 못하고 주춤대는 사이, 희권 양희구가 각오를 단단히하고 역불기를 막아섰다. 그 모습을 보고있던 오몽생이 얼어붙었다. 오금이 저려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양희구가 하룻강아 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 되어 버렸다. 양희구는 역불기와 직접 도검을 부딪쳐 본 적은 없는 반면, 오몽생은 개천호와 더불어 동정원의 한 침실에서 역불기의 악귀같은 손속을 이미 단단히 맛보았던 터였다. 양희구의 주먹이 손바람을 일으키며 역불기에게 날아갈 때까지도 오몽생은 어떠한 조치도 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는 강적을 맞이하는 대사형 양희구를 지체없이 도 와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발이 움직여주지를 않았던 것이다. 사태가 장기화의 조짐을 보이자 복태동은 조급해졌다. 반월도(半月刀)를 이 상스럽게 휘두르는 말대가리의 사내가 그리 여의치 않았다. 우선은 대단한 쾌검인데다가 쾌검수로는 드물게도 내두르는 칼질마다 중후한 내력이 담겨 있었고, 그 내력 또한 심히 정순하였다. 그렇다고 복태동 자신이 위험스러운 지경은 아니었다. 비록 이기지 못하는 상대라고 해도 여간해서는 지지않을 자신이 있는 복태동이었다. 가히 독보적인 경지의 경신술 덕택이었다. 하지 만 그것은 아주 뛰어난 장점임과 동시에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했다. 작금의 경우만 해도 그랬다. 촌각을 다투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패하지만 않아서 는 곤란했다. 얼마나 단기간내에 적을 제압하는냐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 러나 상대는 쾌검수였다. 복태동이 두세 배는 더 빨랐지만 열 걸음을 돌아서 기회를 만들어도 상대는 한 보도 안되는 걸음에 빠른 칼질로 막아내어 버리 고는 하였다. 언제나 이와 같은 상황이 복태동의 승진을 방해해왔다. 사실 바로 옆에 있는 주면세만 봐도 그렇다. 복태동은 절대로 주면세에게 지지 않 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주면세가 상급자였다. 죽지 않는 것은 출 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빠르게 많이 죽이는 것만이 능사였다. 남 달리 야심이 많은 복태동으로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힐끗 견눈질을 해보니 다행스럽게도 오늘만은 주면세도 지지부진이었다. 게 다가 주면세의 상대자는 일개 소부(素婦)가 아니던가. 하얀 소복의 아낙네는 대견스럽게도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적절히 아우르고 있었다. 하긴 강유(剛 柔)는 서로가 꺽기 어려운 상극이었다. 주면세도 복태동 못지 않게 조급해져 가고 있었다. "허억!" 바람이 빠져나가는듯한 사내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복태동의 등 뒤 역불 기 쪽의 대적자에게서 간간히 그런 웃음소리가 들려왔던 터였다. 그러나 이 번에는 조금 달랐다. 시작은 웃음소리였지만 끝은 차라리 비명에 가까웠다. 그때 말대가리가 갑자기 미친 듯이 도를 휘둘러왔다. 복태동은 황급히 몸을 움추리고 수세로 전환하였다. 순간, 말대가리가 그대로 복태동을 타고 넘었 다. 개천호는 복태동의 어깨너머로 나무토막처럼 자빠지는 양희구를 보았다. 그 저 버들가지처럼 낭창하게 한 번 스쳐간 면도(面刀)였다. 그러나 하늘을 향 하고 댓자로 뻗어버린 양희구의 전신에는 갈짓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저 도 가 한 번 흔들린 것 같은데 양희구의 어깨로부터 가슴을 거쳐 상반신을 휘 돌아 양 무릅까지 도흔(刀痕)이 아로 새겨졌다. 일견하기에도 치명적인 상처 였다. 어리둥절한 복태동이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개천호는 최후의 일격을 준비 하는 역불기에게 이장이내로 육박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주면세나 현승 의 처지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희노애락 사형제 년놈들이 하나같이 맡은 상대를 뿌리치고 역불기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당도한 것은 역시 손발이 놀고있던 오몽생이었다. 오몽생은 부끄 러움과 후회와 죄책감에 휩싸인 채로 몸을 내던졌다. 동그란 몸통이 하나의 고무공처럼 튀어나갔다. 자신의 망설임 때문에 대사형이 그렇게 되었다고 생 각하니 후회막급이었다. 이번만큼은 도저히 즐거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 즐거운 감정이 용솟음쳐야만 힘을 쓰는 오몽생이 비장과 비통의 지배를 받 고 있었다. 절박하고 희생적인 육탄공세이기는 했지만 그 위세는 그리 신통 치 않았다. 역불기도 오몽생의 육탄을 전혀 위협적으로 여기지 않고 그대로 밀어부쳤 다. 오히려 양희구의 명줄과 더불어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오몽생 의 돌진은 무계획적인 행동이었다. 한마디로 일석이조였다. 뒤이어 개천호의 쾌도가 들이닥쳤다. 이번에는 오몽생에 비해서 한결 계책이 담겨 있는 도발 이었다. 양희구에게 떨어지는 역불기의 면도를 대신 받아내려는 수작이었다. 그래도 역불기는 여전히 오불관언(吾不關焉)이었다. 아직도 양희구를 포기해 야 할 정도로 위험하게 보이지가 않았다. 개천호의 반월도따위는 그대로 튕 겨 버려도 충분할 것 같았다. 개천호도 양주 동정원에서의 악몽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때도 비슷한 상황 이었고,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었다. 당시 개천호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호구 가 찢어졌으며 어깨가 탈골되었었다. 거기에 더해져서 애도마저 산산조각나 고 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병장기가 부러지는 고수들의 혈전을 한낮 호사 가들의 개수작 허풍이라 치부하며 콧방귀를 뀌던 개천호였다. 회상하는 것만 으로도 머리털이 치솟고 오줌을 지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개천호는 힘차게 도를 드리 밀었다. 개천호는 분노했다. 자신의 무력함이 분노의 불씨였다면 양희구를 향한 역불기의 일도는 그 불씨에 부어지는 기름이었다. 그리고 그 분노가 개천호를 거세게 몰아 부치고 있었다. 세 번째 주자는 모진위였다. 모진위의 신형은 오몽생을 바짝 따르고 있었 다. 모진위까지 합세하고나서야 역불기에게 약간의 위협요소가 생겼다. 모진 위에게 상대무공을 파해하고 약점을 간파하는 기술을 전수해준 자가 다름아 닌 역불기이고보면 모진위이가 펼치는 대부분의 수법은 고작 하품꺼리에 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모진위가 기본적으로 동귀 어진(同歸於盡)의 계책을 들고 나온데다가 양희구를 처리하고오몽생을 베고 난 이후에 해당하는 순서에 끼어들어 왔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명을 돌보 지 않는 무리한 착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식으로든지 역불귀가 댓가를 지불해야하는 얄미운 발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역불기의 의도를 저 지하지는 못했다. 다만 약간의 효과로 작용해서 역불기로 하여금 면도에서 삼푼의 힘을 감소시키는 원인이 되어 주었다. 개천호의 반월도를 가볍게 튕 겨내고 양희구의 명줄만 끊어버리려는 심산이었다. 비축한 삼푼의 힘은 그 이후의 방어용이었다. 개천호는뼈가 울리고 내장이 뒤틀리는 아픔을 느꼈지만 감내하였다. 부릅 뜬 두 눈에 반월도가 들어왔다. 반월도는 부서지지 않았다. 호구가 찢어져서 선혈이 베어나오고 있었지만 반월도는 멀쩡했다. 그리고 그 위에 면도가 반 짝이고 있었다. 소실된 삼푼의 힘과 끊어오르는 개천호의 분노가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어느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하가령의 연검이 마지막으로 당도했 다. 하가령의 냉정한 두뇌는 이미 사태의 결말을 직시하고 있었다. 어차피 무게가 적에게 많이 기우는 싸움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승부의 추 는 단연 역불기였다. 냉정하게 보아서 다섯 형제가 모두 달라붙어도 역불기 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하가령은 전적으로 역불기의 배면을 노리고 들어갔 다. 양희구 한 명만 희생되는 것이 전멸당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다는 계산 이었다. 양희구의 목숨이 이미 날아가버렸다고 치부한 하가령의 연검은 비탄 에 잠겼고, 비탄은 연검의 위세를 가일층 배증시켰다. 급기야 역불기도 궤도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가령의 살기등등한 연검은 상식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틈새를 찔러오고 있었다. 아껴둔 삼푼의 힘이 오히려 악재로 작용했다. 그 여파로 개천호의 반월도가 역불기의 면도 를 막아냈으며 역불기의 자연스런 흐름을 무너뜨렸다. 애초에 계산해 두었던 방어의 여력마저 빼앗긴 셈이니 하가령의 연검을 막아내는 것은 언감생심이 었다. 역불기는 이를 바드득 갈며 신형을 뒤로 뽑을 수 밖에 없었다. 하가령 의 공격이 얼마나 신랄했는지 역불귀는 무려 십여보나 후퇴하고 말았다. "대사형은 어때요? 많이 위중한가요?" 질풍노도처럼 역불기를 몰아낸 하가령이 황급히 합류하며 말했다.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구먼." 개천호가 울분을 삼키며 말했다. 양희구의 숨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 지고 있었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린 양희구가 억지로 미소를 만들어 내 었다. 그 상황에서도 양희구는 기쁨을 토로하려 하고 있었다. 양희구의 부상으로 기세가 살아난 주면세가 재차 공세에 들어서려는 것을 복태동이 만류하고 나섰다. "왜 이러시는가? 일각이 아쉬운 마당에." "예, 그렇습니다. 대인. 저 녀석들에게 소비하기에는 일각도 아깝지요." "... ..." 잠시 어리둥절하던 주면세가 비로서 깨달았다는 듯이 이마를 쳤다. 정작 때 려잡아야 할 것은 채경령이지, 저 떨거지들이 아니었다. 떨거지들에게 신경 을 쓰고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채경령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어디로 갔을까?" "현상꾼들이 깔려있어서 난주행은 무리라는 것은 계집도 이미 알고 있을테 고... 파촉행이라면 이 길말고는 두 갈래밖에 없지요." 눈빛을 번득이며 급하게 논의가 오갔고 곧바로 가능성이 가장 높은 예상로 가 결정되었다. 소근거리던 주면세가 분이 안풀렸는지 모진위 일행을 향해서 냅다 고함을 질렀다. "네, 이 호랑말코 같은 놈들! 아직 명이 다하지 않았음을 천운으로 알아라. 장강이 마르고 태산이 닳아 없어지지 않는 한, 언젠가 오체분시의 날이 반드 시 올 터, 명심해 두거라." 결단이 내려지면 촌각도 낭비가 없는 행동파 주면세였다. 말의 서두는 바 로 지척이었으나 말미는 근처라고 느끼기 어려웠다. 역불기의 귀에도 들리고 남을 대성(大聲)이었다. 사실 주면세의 호통은 모진위보다는 역불기를 향한 전언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역불기는 맹의 동료라고는 해도 역불기와는 소원한 사이였다. 평소 면식도 없었던 터에다가 여간 거북살스런 인물이 아 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연락계통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채경령 을 놓치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면세는 여전히 원활한 의사교환을 경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 를 전달했던 것이다. 서로 지시를 내릴 입장도 아니니 피차 알아서 하자는 뜻이었다. "동천! 냉큼 따라붙지 않고 뭐하는 게냐?" "예, 흑막대주 나으리께도 행로를 아뢰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주면세의 재촉에 머뭇거리던 하급무사 동천(冬天)이 소리죽여 답했다. 본시 흑막과의 연락을 담당하고 있던 졸개였다. 주면세가 머리를 끄덕였다. 역불 기가 필요한 인물이기는 했다. 사실 유진목을 단신으로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역불기가 유일했다. 굳이 동천의 의견을 묵살할 이유는 없었다. "기다리지 않을 터이니 바로 전달하고 서둘러 합류하도록." "존명!" 주면세는 역불기도 주저없이 자신들을 따라 나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 으나 그런 기대와는 달리 역불기는 멀어져가는 주면세들을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주면세가 보는 관점대로라면 모진위는 손톱 밑의 가시였고, 채경령 은 목줄에 걸려있는 올가미였다. 그런 만큼 주면세에게는 모진위의 포기가 일고의 가치도 없었지만 역불기에게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았다. 맹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진위의 가치도 채경령 못지 않았다. 모진위는 천하 제일의 염상 채소우를 살해한 흉수였다. 그것은 바로 삼대신법의 하나인 균 수법의 성패를 가름하는 핵심 인물의 피살이라는 의미도 되었다. 그 배후 조 종자는 말할 것도 없이 구법당의 사주를 받은 역불기 자신이었다. 결국 모진 위는 정치적 음해공작의 결정적 증거와도 같은 인물이었다. 채경령의 은괴 육백관은 조직을 움직이는 필수요소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없다가도 다시 생 기는 것이 돈이었다. 그러나 모진위의 증거는 조직 자체를 말살할 수 있는 일종의 뇌관이었다. 젊은 황제는 신법의 신봉자였다. 모진위 하나로 인해서 구법당의 정치세력이 정쟁(政爭)의 패배자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역불기가 주면세를 따라 채경령을 추적하지 않았다고해서 맹이 질책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런 이유로 역불기가 모진위에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역불기는 완벽을 추구하는 인물이었다. 특히 도와 살인에 관한 한, 이미 완 벽의 경지에 거의 다달았다고 자부하는 터였다. 모진위따위에게 암살의 증거 를 남겨둘 정도로 허술하게 일을 처리하지는 않았다. 당장 잡아들여도 모진 위는 아무런 증거가 되지 않았다. 훈련부터 암살까지 모진위가 알고있는 사 건 정황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기실, 역불기는 맹의 존폐따위에는 하등 관심 이 없는 인물이었다. 역불기가 황실의 비밀살수였고, 지금은 구법당의 인물 이 역불기의 흑막을 지휘하는 책임자이기에 부득이 구법당의 행동대원 역할 을 하고있을 따름이었다. 그것이 불만은 아니었다. 도와 살인만이 유일한 쾌 락인 역불기로서는 오히려 구법당의 이기심이 삶의 위안거리를 제공하는 촉 진제였기 때문이다. 역불기는 일종의 허무주의적 편집광이었다. 그의 삶은 지극히 권태로웠다. 최초의 살인이 있기 전까지는. 숨막히는 긴장감, 공포와 경악의 얼굴, 살과 뼈를 가르는 아스라한 촉감, 비 릿한 피의 향기, 그것은 등골이 전율하는 흥분이었다. 이후 역불기는 미친 듯이 도와 살업에 심취하였고, 도와 살생이 없는 생활은 더욱 더 권태로워져 갔다. 권태는 그의 삶을 갉아먹는 독약이었다. 연속적인 살업의 성가로 마침 내 정부의 비밀살수로 등용되었다. 역불기는 가일층 도와 살행에 빠져 들어 갔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도를 연마했으며,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욕을 자 행했다. 획기적인 무공증진과 연속적인 암살의 성가로 마침내 흑막의 일인자 가 되었고, 드디어 흑막의 비전절기를 획득하였다. 이후 그는 닥치는대로 절 정고수들을 초빙하여 무공을 사사받았고, 닥치는대로 무공비급을 탈획하여 연구검토하였다. 황실의 권력이 없었다면 아마도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흑막의 비전절기를 발전시켜 명부결이라는 독창적인 무공을 창안 해 내었다. 본능과 감각으로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는 무공파해법이었다. 그 의 명부결은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여 어느새 십성의 단계에 이르렀고, 살행 에 나섬에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욱일승천의 기세였다. 그러 던 것이... 악연이었다. 악연도 이런 악연은 없었다. 채소우의 암살을 위해서 모진위에 게 명부결을 전수한 것이 사단이었다. 당시만 해도 발바닥의 때만큼도 여기 지 않던 모진위였다. 그의 목숨을 회수하면 자연히 명부결도 회수되는 것이 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모진위의 명줄은 고래심줄보다도 더 질겼 다. 티끌 하나 없던 그의 살행기록에 최초의 오점을 남겨 주었고, 그 후로도 번번히 좌절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었다. 역불기의 자부심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모진위를 숙명적인 과제로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역불기가 주면세를 따라나설 리는 만무했다. "놈!" 역불기가 성큼 나섰다. 양희구를 중심으로 빙 둘러 있던 사형제들의 가슴에 쿵하고 바윗돌이 떨어 졌다. 양희구의 위험스런 지경에 비장한 심정으로 각오하고는 있었지만 그래 도 한편으로는 역불기가 주면세를 따라가 주기를 바랬던 사형제들이었다. 심 연의 절망감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다섯이 모두 최고의 상태였어도 승 산이 거의 없는 판에 양희구는 전력에서 완전히 이탈했고, 개천호도 호구가 찢어진 관계로 삼할 가량밖에는 전력을 가동할 수 없었다. 삼십육계 중 최고 의 계책이라는 줄행랑이 모두의 뇌리를 공통적으로 스쳐갔다. 그때 오몽생이 앞으로 썩 나섰다. "넷째, 너 미쳤냐?" 개천호가 오몽생의 분수도 모르는 망동에 핏대를 올렸다. "이사형, 대사형이 위험해요.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힘들 것 같수. 빨리 안 전한 장소를 찾아야 할게유." 오몽생이 슬쩍 고개를 돌려 양희구를 보았다.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자신이 대사형을 죽게 했다는 자괴감이 다시 한 번 오몽생의 전신을 감쌌다. "누가 그걸 모르는가? 그렇게 까불다가는 자네가 대사형보다 먼저 세상 하 직하고 말걸, 아마...?" "그렇다고 이대로 있다가는 순서불문하고 다 죽고 말거유. 다 죽는 것도 재 미있겠지만 그래도 나 혼자 죽는게 더 재미있는 거 같은데. 이 몽생이가 재 미 좀 보는 동안 어서들 가보시구랴." "이, 이것 봐!" "대사형을 봐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제발! 누군가 하나는 남아 야 해요. 셋째 누이가 남는다면 누가 누이의 죽음을 슬퍼해주지? 둘째 사형 이 남는다면 누가 이사형의 죽음에 분노하고? 난 울어줄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어. 젠장! 난 그것마저도 즐거워해야 한단 말이야.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나는 형제들 대신 죽는 걸 즐거워 할 수는 있어. 아주 즐거워 할 수 있어." "... ..." 오몽생은 비장했지만 정말로 기꺼히 희생하는 것이 즐겁기 이를데 없다는 표정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시간이었다. 어차피 모두 전멸하는 것보 다는 하나만 희생하는 것이 명백하게 나은 일이었다. 실질적으로 가장 적합 한 인물이 오몽생이었다. 방어에 관한 한, 그래도 오몽생이 일인자였다. 커다 란 동발 두 개로 온몸을 감싸면 전면과 측면에는 거의 틈이 생기지 않았고, 그의 공처럼 동그란 몸체는 몸 자체가 공격무기였기에 충격에 대한 저항력 이 최대한도로 단련되어 있었다. 적어도 하가령, 개천호보다는 두 배이상 시 간을 벌어줄 수가 있었다. 결정은 빠를수록 좋았다. 대사형 양희구가 백척간 두에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시다." 슬픔 속의 여인 하가령이 단호하게 말했다. 최대한 감정을 억제한 목소리였 지만 그 속에 스며있는 비감은 뭇 사내들의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하였다. 뜨악!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쩔쩔매는 모진위의 머리를 개천호의 주먹이 강타 하였다. 질책을 보내는 그의 눈초리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물기마저 희뿌 옇게 맺혀 있었다. 하가령은 이미 연검을 빼어들고 흑막의 살수들을 노려보 고 있었다. 개천호가 양희구를 어깨에 둘러맸다. 부상당한 손으로는 별로 도 움이 안될 터이니 짐꾼이라도 하자는 심산이었다. 개천호의 행동이 사태의 절박성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평소의 개천호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죽 는 한이 있더라도 칼부림으로 화풀이를 해대는 것이 개천호다운 태도였다. 모진위도 오몽생을 애써 외면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모진위 일행이 물러가는 것을 보면서도 역불기는 여유만만이었다. 오몽생을 두 명은 더 처리해도 괜찮을 만큼 시간은 충분했다. 역불기의 면도와 오몽생 의 동발이 불똥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오몽생은 뼈가 울리고, 내장이 덜렁거리는 듯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뼈가 모두 금이가고 내장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 다. 역불기의 도력은 엄청났다. 오몽생은 단 일초도 허용하지 않고 잘 방어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발을 때리는 그 충격만으로도 기혈이 뒤틀리고, 살이 찢어지는 듯했다. 역불기도 굳이 다른 방도를 찾지 않고 동발을 두드리며 오 몽생의 고통을 즐기고 있었다. 물론 오몽생도 그 고통을 기꺼히 감내하고 있 었다. 대사형 양희구만 생각하면 그 고통은 참으로 즐거운 것이었다. 엄밀하 게 말해서 괴롭히는역불기보다 당하는 오몽생이 한결 더 즐거워하는 편이 었다. 몇 차례의 충격이 더 보태지자 오몽생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런 잠 시 후, 역불기의 도가 마치 단단하게 맞물린 조개의 틈을 헤집듯 동발 사이 를 꿰뚫어 버렸다. 오몽생은 동발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도를 보았다. 도라는 의식도 없었 다. '이제 죽는구나'하는 인식과 함께 그저 반짝하고 빛나는 광채를 보았을 뿐이었다. 문득 동광사(東光寺)에서 행자수업을 받던 시절이 떠올랐다. 도의 광채가 언뜻 유기그릇의 광채를 연상시켰던 것이다. 황애자의 손이 스치는 순간, 동광사의 유기그릇도 그렇게 반짝거렸었다. '정녕 실없는 놈이구나. 죽음의 순간에 하필이면 이런 회상이라니.' 오몽생은 동광사에서 유기그릇을 닦았다. 물론 유기그릇뿐만 아니라 식기도 닦았고, 불상도 닦았으며, 법당을 걸래질하고, 넓은 마당도 쓸었다. 오몽생 즉, 행자 만공(滿空)의 동광사에서의 일상은 주로 쓸고 닦는 일이었다. 동료 행자들은 언제나 만공을 놀림감으로 삼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만공은 일종의 정신지체아였다. 한마디로 바보였다. 그래도 시키는 일만은 전혀 요령피우는 일없이 언제나 열심이었다. 그것 또한 바보의 특징이기는 했다. 언제나 만공은 쓸고, 또 닦았다. 하지만 동광사는 너무 넓었고, 청소할 것 또한 너무 많았다. 정성스럽게 관리하자면 열흘이 걸려도 맡은 것을 모두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거리였다. 처음에는 잠도 못자고, 밥먹을 시간도 없이 청소에 매달렸다. 행자를 관리하던 인정많은 스님 하나가 그런 그를 가 엽게 여겨 일처리 요령을 알려주었다. "만공아, 무턱대고 그리해서는 안되느니라. 모두 다 닦더라도 다시 처음부터 반복되는 것이어늘, 그래서는 끝이 없느니. 차라리 순서를 정해줄테니 이렇 게 해보거라." 스님은 만공이 떠맡은 일을 열 부분으로 쪼개서 첫날은 법당, 둘쨋날은 부 엌, 셋쨋날은 후원, 넷쨋날은 앞마당하는 식으로 순서를 정해주었고, 만공이 또한 그렇게 한치도 틀림없이 일을 해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고귀한 신분의 신도 하나가 뭔가를 잘못 먹었는지 배탈이 나고 말았다. 공양도 아주 후하게하는 대갓집 마나님이었다. 엄하기로 이름난 원주스님(원주: 절의 안살 림은 총괄하는 책임자)이 민망하여 이 기회에 절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마음 을 먹었다. 원주스님이 행자들을 모아놓고 이르기를, "요즘 절 안팎이 너무 산만하구나. 특히 식기들이 전혀 청결치 못하구나. 행 자들은 대오각성하여 새로이 주변을 돌아 보거라. 천하만상을 쓸고 닦는 일 은 곧 자신의 업장을 닦는 일, 이를 게을리한다면 어찌 부처님을 모시는 자 라 할 수 있겠는가? 오후에 친히 살펴볼 것이니 게으름 피우는 일이 없도 록!" 한껏 게으름만 피워댔던 모든 행자들이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무엇을 중점 적으로 닦아야 할 지는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바로식생활 도구였다. 바보 만공만은 예외였다. 애초에 요령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화상이었다. 만공은 언제나 정해준 대로 일을 해나갔다. 동료들이 그릇을 닦으라고 채근했지만 공염불이었다. 그것들이라면 사흘전에 이미 닦아놓은 바가 있었다. 보다 더 러운 것은 그것보다 열흘이나 더 오래 방치했던 법당이었다. 만공은 동료들 의 성의를 무시하고 더욱 더러운 법당을 걸레질하고, 불상을 닦고, 제단을 정갈히했다. 드디어 원주스님의 검사가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부엌을 위시한 식기일체였 다. 행자들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만공은 어찌된 노릇이냐? 먼지가 묻어나지를 않느냐? 다른 행자들의 유기 가 보이지도 않느냐? 내 그리 일렀거늘 하루종일 무얼했단 말이냐?" 노한 원주의 일갈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그때 마침 곁을 지나던 동광사의 주지 청허대사(靑虛大師)가 고함소리를 듣고 나타났다. 주지스님은 오랜 친 구의 방문을 받고 절의 주변을 구경시켜주던 참이었다. 황애자라고 불리우는 주지스님의 친구는 주지스님과 함께 행자수련을 함께 한 동문도반으로서 남 쪽 지방에 있었던 봉룡사라는 큰 절의 주지였다는데 무슨 연고인지 봉룡사 는 폐사되었고, 황애자는 승복을 벗어 버렸다고 했다. "예, 아직은 깨끗하기에 법당을..." 어리숙한 만공이 어리숙하게 우물거렸다. 원주의 날카로운 추궁이 뒤를 이 었다. "무엇이 깨끗하냐? 동료들의 정갈한 유기가 보이지도 않느냐? 네가 보기에 정녕 네 것이 깨끗하단 말이냐?" 원주는 따가운 질책이었으나 원주의 진의를 파악못한 바보 만공이 글자 그 대로 해석하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예." 물론 동료를 시기하는 마음같은 것은 조금치도 없었다. 자기가 닦은 유기그 릇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저 보고 느낀 자신의 생각만을 대답했을 뿐이 었다. "뭐? 뭣이라고?" 원주는 기가 막혔다. 원주가 이제 막 만공을 향해서 삿대질을 하려는데 그 때, 황애자가 손 끝으로 슬쩍 만공의 유기를 문질렀다. 먼지가 닦여진 부분 이 오후햇살에 찬란하게 반짝였다. "허허, 청허는 좋은 불제자를 두었군." "?" "무릇 석존께서 이르시길, 쓸고 닦는 것은 업장을 닦아내는 것이니 그 일에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고 했지만 기실은 깨달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던가. 또 석존께서 이르시길, 본래부터 그것이 깨끗하다는 것을 깨달는 것이 중요하다 하셨으니 때에 따라서는 쓸고 닦음도 무용(無用)이지." 다른 행자들이 게으름을 피울 때도 본시 하루도 빼먹지 않고 정성을 들였 던 만공이었다. 대부분의 유기들은 너무 오래 방치해 두었던 관계로 아무리 열심히 닦아도 묵은 때까지 닦아낼 수는 없었다. 반면에 만공의 것에는 그저 사흘간의 먼지일 뿐, 묵은 때가 있을 리 없었다. 황애자의 소매에 닦여진 유 기그릇은 동료들의 그 어느 것보다 반짝거리고 있었다. 청허가 황애자의 말뜻을 알아채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만공은 이제 되었구나. 내일부터는 청소를 하지 않아도 좋다." 며칠 후, 만공이 앞마당을 쓸고 있는데 황애자가 다가와서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찌 아직 빗자루를 들고 계시오? 주지스님이 분명히 청소를 안해도 좋다고 했거늘..." 쭈빗거리는 만공을 붙잡고 황애자가 꼬치꼬치 캐어물어보니 대충 이런 뜻 이었다. 만공이 빠져버리자 행자들의 업무가 너무 벅차게 되어서 그때 그때 시의적 절한 청소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동광사의 신도들은 대개가 여인들이었다. 덕분에 객이 없어도 법당은 여인의 지분냄새가 가득하게 되었고, 일부 젊은 스님들의 잠자리 또한, 번뇌가 가득하게 되었다. 또한 깔끔한 여신도들은 법 당바닥이 더러우니 옷차림에만 신경을 쓰게되어 경배의 경건함이 줄어 들었 고, 불상이 빛나지 않으니 공경심이 덜해지더라. "허허! 그런 연유로 다시 걸레와 빗자루를 잡으셨구려. 허허, 만공스님께서 는 벌써 자기 수양의 경지를 넘어 중생구제에 나서셨구료." 만공이 보니 황애자는 진정으로 경탄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또 며칠후, 만공은 황애자의 손에 이끌려 산문을 나서게 되었다. 황애자의 간곡한 청으로 청허대사가 만공을 황애자에게 맡기게 되었던 것이 다. 황애자가 산문을 나서며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네 사부고, 너는 만공이 아니라 몽생이다. 원래의 성씨가 오 가이니 오몽생이로구나. 세상만물이 본시 깨끗하다는 그 마음, 부디 고이 간 직하고 살아 가기를 이 사부는 바란다." 그 날 이후, 만공은 오몽생이 되었고, 황애자의 제자이자 희노애락 사괴의 네 번째 사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이렇게 흑막대주 역불기의 일도 에 생을 마감하게 되는 운명의 고리이기도 했다. 오몽생이 마음의 빗자루를 들었다. 그리고 마음 속을 쓸어나가기 시작했다. 세상만사 근심걱정도 쓸어버리고, 희노애락도 쓸어버렸다. 마음의 잡동사니 들을 쓸어내다보니 절로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천지신공을 위한 즐거움이 아닌,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이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쓸어 버렸다. 그러자 아무 것도 없는 텅빈 마음이 되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기(氣)들이 제 마음대로 오몽생을 넘나들었다. 오몽생과 세상의 경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기(氣)는 바람이 되었다. 마음 속 깊은 곳 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세상의 소음때문에 한 번도 들 어본 적이 없던 마음의 울림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음악이었다. 구멍이 막힌 피리에서는 음악이 흐르지 못하듯 빈 곳에서만 음률이 존재할 수 있는 법이 었다. 세상의 기들이 바람이 되어 오몽생의 빈 마음을 넘나들며 소리를 만들 어 내었다. 오몽생이 마음의 귀를 열고 그것을 들었다. 형용할 수 없는 안락 함과 포근함이 오몽생을 감쌌다. 환한 빛이 다가왔다. '아아! 우리는 어찌 그리도 천지신공에 집착했던가? 자신을 잊는다면서 왜 우리는 천지신공을 버리지 못했던가? 몰아의 경지는 천지신공마저도 사라진 경지이거늘, 이 쉬운 이치를 우리는 왜 그동안 간과했던가?' 오몽생이 대오각성의 함성을 내질렀다. "동광사..." 그러나 머리가 둔한 오몽생의 실수였다. 원래는 동광사의 유기그릇부터 시 작해서 자신이 방금 깨달은 바를 사형제들에게 일깨워줄 생각이었지만 죽음 에 임박한 오몽생에게는 턱없이 긴 설명이었다. '동광사'에서 오몽생의 목청 은 힘을 다했다. 비로서 깨달은 오몽생이 한마디로 요약해서 황급히 외쳤다. 사형! 사저! 소사제! 천지신공을 버려라. 그러나 오몽생의 의식들은 이미 육신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느 한 마디도 인간의 소리로 존재할 수 없었다. 하가령, 개천호 그리고 모진위등 모두가 '동광사'라는 일갈을 들었지만 돌아 볼 수 없었다. 한결같이 오몽생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흑막의 살수들이 악귀같이 늘어붙어 한눈을 팔 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개천 호의 어깨에 반대방향으로 매달려 있던 희권 양희구만이 힘겨운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사제!" "힘을 아껴요, 대사형." "사제들아, 사사제가 죽었다.사사제가 죽었어." 퇴로의 봉쇄진이 거의 붕괴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역불기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죽어가는 오몽생의 표정이 그의 투지를 한줌도 남김없이 쓸어가 ㅂ 리고 말았다. 갑자기 살인조차 역겨워졌다. 살인이 없는 그의 삶은 권태 그 자체였다. 그런데 살인이 보다 더한 권태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서 무수히 죽어갔던 그런 얼굴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그런 또 하나의 얼굴임이 틀림없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희열도 주지 않고 있었다. 역불기는 달아나는 모진위 일당을 지켜보면서도 아무런 의욕이 생겨나지 않았다. "사사제가 죽었어. 근데 말이야. 사사제 표정이 말이야. 너무나 고요하고 평 화로워. 저렇게 편안한 얼굴은 생전 처음봤어. 아주 행복한 얼굴이었어. 단언 하건데, 내 오십평생에 저렇게 편안해 보이는 얼굴은 단 한번도, 정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양희구는 멀어져가는 오몽생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나머지는 그저 묵묵부답으로 달리고 또 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양희구가 기 쁘다는 듯, 정말 기쁘다는 듯 가가대소(呵呵大笑)를 터뜨렸다. 웃음으로 벌어 진 그의 입가에 물줄기가 흘렀다.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왕방울만한 두 눈에서는 닭똥같은 눈물이 연신 흘러 내리고 있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번 호 : 8785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07-05 21:42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47- "정말 대단하신 스승님! 정말 위대하시군!" 개천호가 흰자위를 희번덕거리며 심통사납게 말했다. 하늘을 찌를 듯 치솟 은 고목나무의 꼭대기였다. 유난히 가지가 성한 나무였다. 쓸만한 은신처를 물색하기에는 양희구가 너무 위급했다. 일행은 흑막의 살수들이 시야에서 사 라지자 급한대로 나무 위에 올라갔다. 양희구의 응급처치부터 서둘렀다. 모 진위, 개천호, 하가령이 내공을 끌어올려 정기를 주입하고 탁기를 몰아내었 다. 진기주입을 마친 하가령과 모진위는 그대로 지쳐 쓰러졌다. 그러나 개천 호만은 무쇠로 몸뚱아리가 만들어 졌는지 조금도 지친 기색없이 길길히 날 뛰고 있었다. "몽생이 녀석이 가장 먼저 심득을 얻으리라 자신하더니 딱 들어맞았군. 죽 은 놈이 슬픔이 어디있고, 기쁨이 어디 있어? 몽생이가 천지신공의 악업을 드디어 극복한 거 아니냐 이 말이야, 나는." 항상 아웅다웅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죽이 맞아서 늘 붙어다니던 개천호 와 오몽생이었다. 개천호가 흥분하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었다. 흰자위를 까뒤집는 모습이 너무 자 주 눈에 띄었고, 눈동자 또한 초점이 맞지 않았다. 불안한 듯이 두리번거리 기 일쑤였다. 시간이 흘러도 개천호의 흥분은 쉽게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 았다. 오히려 점점 더 행동이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모진위는 적에게 발각될 까봐 가슴이 털컥 내려갔다. 하가령이 힘겹게 일어나더니 난데없이 개천호의 혼혈을 찔러버렸다. "사자, 이게 무슨 짓입니까?" 모진위가 깜짝놀라서 만류해봤지만 이미 개천호는 나무토막처럼 뒤로 넘어 가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단단히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막상 닥치 고 보니 슬프기는 마찬가지군." 모진위의 제지에도 아랑 곳하지 않고 개천호를 제압한 하가령이 풀썩 팔베 개로 들어누우며 한숨처럼 내뱉었다. "무슨...?" "정말 모르겠어, 소사제? 이사형은 미친 거야." 달빛이 구름 속으로 사라지자 하가령의 얼굴에 음영이 짙어지고, 여인의 비 감을 강조하였다. 모진위도 하가령을 따라 힘없이 뒤로 누웠다. 천지신공으로 인한 감정의 고 조가 이미 한계를 넘어버렸던 것이다. 개천호의 실심은 하가령과 양희구의 주화입마도 머지 않았음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아하, 통재라!" 하가령의 처량한 비탄소리에 모진위는 벌떡 일어났다. 하가령은 언덕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덕 저편으로 도를 빙글빙글 돌리며 폭주하는 개천호가 보였다. 하가령과 모진위가 깜빡 잠든 사이 개천호가 다시 발작을 일으킨 것 이었다. 하가령이 말했다. "내려가자." 모진위가 양희구를 들쳐매고 하가령이 앞장섰다. 일행이 서둘러 언덕에 당 도했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개천호는 이미 흑막 살수들의 벽을 넘어서 역불 기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돌아 보지마라." 하가령이 그렇게 차갑게 내뱉고 서둘러 숲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평소 의 그들이라면 형제를 버려두고 가는 일은 없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 도 같이 사는 사형제들이었다. 그러나 양희구의 위급상태가 상황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갔다. 포기할 것은 포기하더라도 살릴 수 있는 쪽에 최선을 다 하는, 묘한 흐름을 연출했다. 모진위는 못내 아쉬운 듯 힐끔힐끔 뒤를 돌아 다 보았다. 개천호는 용맹스런 사자처럼 드높은 기개를 보여주고 있었다. 악귀같은 역 불기도 쩔쩔매고 있었다. 개천호가 살아가는 힘의 원천은 분노였다. 지금 개 천호는 그 분노를 최대한으로 폭발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삶을 망가뜨 린 악법, 차역법에 대한 분노였고, 더 나아가서 힘없는 자들을 억압하는 사 회의 부조리에 대한, 몸으로 부르짖는 절규이기도 했다. 역불기는 망연자실해졌다. 짜릿한 쾌감은 더 이상 없었다. 그저 지겨울 따 름이었다. 개천호의 얼굴에 오몽생의 얼굴이 다시 겹쳐지면서 살생의 짜릿함 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오몽생의 얼굴에서 무언가 보기는 보았다. 그런데 그 것이 무엇이기에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처 음보다는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오몽생이 눈에 밟혔다. 갈아 마셔도 시 원치 않을 모가놈이 바로 눈 앞에서 달아나고 있건만 아무런 의욕도 생겨나 지 않았다. 역겨울 따름이었다. '차차 나아지겠지.' 역불기는 그렇게 자위했다. 점차 호전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전날 같 았으면 개천호가 아무리 악다구니를 써도 선뜻 죽이지 못했으리라. "추적할까요?" 금일호가 물어왔다. "나둬라." "예?" 금일호는 경악했다. 다시 없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채경령부터 처리한다. 인원을 점검해라." 금일호는 무리들을 소집해서 인원파악을 했다. 졸개 하나가 명령을 무시하 고 슬금슬금 모진위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자세히보니 동천이 라는 이름의 주면세 수하의 인물이었다. 금일호는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그 가 흑막의 명을 따를 이유는 없었다. 결국 양희구도 두 사제의 뒤를 따르고 말았다. 작은 마을의 의원이 신통치 않기도 했지만 어차피 백약이 무효인 상태였다. 개천호의 근본이 분노였다면 양희구가 살아가는 힘의 원천은 기쁨이었다. 자신때문에 희생된 두 사제의 죽음을 보면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이 양희구의 입장이었다. 슬픔과 울분이 양희구의 생명을 갉아 먹어버렸다. 망연자실하여 넋을 잃고있는 하가령과 모진위 앞에 한 사내가 나타난 것은 양희구의 시신을 매장한 직후였다. 선자불래, 당연히 복고맹의 졸자였다. 어 린 티가 역력한 것이 아직 약관을 면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였다. 모진위가 검을 뽑아들고 나서려는데 하가령이 뜻밖의 태도를 보였다. "너, 너는 성하(星河)로구나?" "흥, 성하는 빌어먹을 놈의 무슨 성하. 성하는 죽었소. 이제는 동천이라는 이름의 산 송장이란 말이오." "어, 어떻게...?" "어떻게 여기를 찾았냐고? 당신이 떠난 그날부터 나는 당신을 찾아다녔지. 그러나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더군. 당신을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니 는 조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 난 그 조직의 힘을 빌리기로 했어. 덕분 에 이런 신세가 된거지. 세상사람들은 복고맹이라고 하더군. 우리는 그냥 맹 이라고 부르지. 그들이 당신을 찾아 주었어." "얘, 얘야! 그래도 그렇지. 복고맹은 악업을 일삼는 놈들인데..." "흥! 당신에게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을까?" "성하야, 이 에미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에미? 뻔뻔스럽게 아직도 에미라고 말하는가? 그렇군. 낳기만 하면 다 에 미니까." "성하야." "성하라고 부르지 마!" "좋아. 당신이 자신을 에미라고 부르는 것은 상관않겠어. 하지만 성하라고 부르지는 마. 성하는 이미 죽었어. 당신이 아버님을 찌르던 그날밤에." "이 에미를 죽여다오." "뭐, 죽여달라고? 꼴좋은 집안이군.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죽이고, 아내가 남 편을 죽이더니 자식마저 부모를 죽이라고...?" "제발!" "천만에 그럴 수는 없어. 아주 좋은 생각이 하나 있지. 어머니 쪽에서 보자 면 원수 집안의 자식을 죽여서 복수하는 것이고, 아버지 쪽에서 보자면 자신 을 죽인 원수의 자식을 죽이는 거니까 역시 복수가 되는 것이고, 내 쪽에서 봐도 당신에게 복수를 하는 셈이니까." 동천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청년은 그렇게 말하고 단도를 들어 자신의 목을 찔러버렸다. 피분수가 하가령을 적셨다. "성하야!" 하가령의 처절한 비명이 계곡을 찢으며 날아갔다. 하가령이 열두살 때 일이었다. 흑의의 두 사내가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었 고, 백의의 두 사내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죽어가는 자들은 부자지간이었 고, 죽인 자들 또한 부자기간이었다. 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였고, 아들이 아들 을 죽였다. 그 중에는 하가령의 가족도 있었다. 죽은 자들이 바로 하가령의 부친과 오라버니였다. 누가 뭐라든 인자한 아버지요, 누가 뭐라든 동생을 끔 찍하게도 귀여워하던 오래비였다. 누가 뭐라든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하가령을 죽이지 않았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죽을만한 악행을 저 질렀지만 하가령은 그런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믿을 수가 없었 다. 그렇게 인자한 아버지가 악인이고, 그렇게 자상한 오라버니가 죄인이었 다니. 하가령은 정녕 믿을 수 없었다. 하가령의 가정은 일순간에 풍지박산이 났고, 하루아침에 천애고아가 되어버린 어린 소녀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가령은 자신이 고초를 겪는 모든 원인을 백의의 두 사내에게 돌렸 다. 이를 아드득 깨물며 복수를 다짐했다. 하가령은 강호에 나아가 그들의 악행을 폭로하였다. 자신의 어진 아비와 자 상한 오빠를 죽였노라고. 강호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필시 네 아버지와 오 빠가 잘못했을 것이라고, 그들은 천하에 다시 없는 호협이자 영웅이라고, 그 들은 무림정의를 위해서 악한들을 소탕하고 있다고. 하가령이 가문의 내력을 말했을 때, 그들은 그녀에게 침을 뱉었다. 다시 없 는 악당의 여식이라고. 그러나 하가령은 믿지 않았다. 그렇게 인자한 아버지와 그렇게 자상한 오래 비가 악한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가령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들은 천하에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는 명문세가다. 때문에 세상 사람들을 매수해서 거짓조작으로 자신의 가문에 누명을 씌웠다고. 아닌게 아 니라 대단한 명문가였다. 그들 부자에대한 강호의 칭송은 침이 마를 날이 없 었다. 하가령은 그 사실을 알고는 그들의 조작극에 의해 자신의 가문에 누명 을 썼다고 굳게 믿어버렸다. 복수의 일념은 더욱 굳건해졌다. 하가령은 열넷의 나이에 기녀가 되었고, 열여섯의 나이에 세상남자를 유혹 하는 모든 기술을 정복했다. 그리고 열일곱의 나이에 하남(河南) 최고의 명 문자제 호선풍(胡善風)을 정복했다. 남편은 모두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정의호한이자 협객이었다. 그러나 하가령은 믿지 않았다. 모두가 속임수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마각을 드러내 리라 믿었다. 그러나 열여덜에 성하를 낳고, 스무살이 될 때까지도 그들의 마각은 드러나지 않았다. 하가령이 스무살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드디어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남편 호선풍이 잠자리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하가령은 남편의 바람기가 드디 어 발동했다고, 이제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러 나 사실은 '눈가리고 아옹'이었다. 기실 불편해한 것은 채경령 자신이었다. 남편과의 잠자리에서 포근함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고 말았다. 어찌 원수와 몸을 섞는 것이 즐거운 일이 될 수가 있겠는가. 하 가령은 들어내놓고 남편에게 협오의 감정을 표출하였다. 정인군자 호선풍은 그런 아내를 배려하여 일부러 잠자리를 피해왔던 것이다. 호선풍은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마치 짐승을 대하듯 모욕을 주 었지만 호선풍은 화를 내지도 자존심에 내세우지도 않았다. 당시의 하가령은 죽어도 인정할 수 없었지만 정작 남편이 멀어지자 서운함을 느끼며 자존심 이 상한 것은 하가령 자신이었다. 하가령은 홧김에 미뤄왔던 계획을 실행하였다. 드디어 꿈에도 잊지 못하던 원수 호명룡(胡明龍)을 독살했던 것이다.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독살하는 것 쯤은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였다. 당시의 하가령이 죽어도 인정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남편마저 독살할 기 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남편 호선풍에게 당당히 선언하였다. 자신의 출신성분을 밝히고는 '나는 당신의 불구대천지 원수다. 당신의 아버지를 독살했다. 나를 죽일테면 죽여봐라...' 그렇게 남편 의 면전에 당당하게 말했던 것이다. 원수 호선풍의 능력이 너무도 뛰어난 관계로 자신이 직접 죽이지는 못하지 만 자신의 아내를 죽이는 후안무치의 인물로 전락시켜 자신과 가문의 명예 를 송두리채 풍지박살낼 수는 있다고 하가령은 생각했다. 호씨 가문에서 사 는 동안 정인군자, 영웅호협들이 무엇을 중요시하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기에 그런 복수의 수단을 강구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호선풍이 정인군자, 영웅 호협임을 인정 안하는 자가당착의 하가령이었다. 호선풍은 그날부터 고통과 번뇌의 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하가령은 오 기하나로 버텼다. 기회를 엿보다가 시도 때도 없이 남편을 암습하였다. 그때 마다 실패였다. 호선풍의 능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하가령 의 암습이 어설펐던 탓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하가령은 그런 실수를 하기 에는 너무도 능란한 살수였다. 그래도 호선풍은 하가령을 죽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어이없게도, 너무도 어이없게도 그녀의 암습이 적중하고 말 았다. 아니, 호선풍이 적중시켰다. 사실 하가령은 호선풍이 그렇게 쉽게 당하 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않았다. 그것도 아들 호성하의 면전에서. 호성하의 장래희망은 아버지 호선풍처럼 강호의 영웅호협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호성하는 자신의 꿈을 접어야 했다. 어머니가 할아버지를 죽이고, 어 머니가 아버지를 죽이는 집안의 자식은 결코 영웅호협이 될 수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호성하의 나이는 아홉살이었다. 호성하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통곡을 했지만 하가령은 울 수 없었다. 그제서야 비로서 왜곡 되었던 진실이 제자리를 찾았고, 하가령은 자신의 본모습을 분명하게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가령이 긴 한숨으로 회상에서 깨어난 것은 모진위가 호성하의 무덤을 만 들어주고나서도한참 뒤였다. 하경령이 모진위의 옆으로 다가와 다리를 양손 으로 모아쥐고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소사제!" "... ..." "채소저를 사랑하는거야?" "... ..." "피해서는 안돼, 소사제. 자신을 똑바로 직시해야해. 설혹 그것이 도저히 사 랑해서는 안되는 대상일지라도, 심지어 불구대천지의 원수일지라도... 그건 말이지 그건..." 하가령이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아니 달빛을 쓸어올렸다. 그만큼 달 빛이 충만한 보름달이었다. "마음의 소리를 들어봐." 하가령이 물끄러미 모진위를 바라보았다. "알겠지?" 보름이었다. 달빛이 충만했다. 특히 소나무에 걸려있는 물체에 유난히 달빛 이 수북하게 고여 있었다. 보기좋게 굽은 소나무였다. 가까히 다가가 보니 그것은 하얀 소복이었다. 소복은 나무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극도 의 슬픔이 한계를 넘어 하가령마저 집어삼켰던 것이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번 호 : 8791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07-06 21:37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48- 17. 표자공주(瓢子空酒) 왠지 불편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난 몇 달간에 비해서 너무도 편안하게 호의호식하는 지금인데 왜 불편한가? 짜증마저 슬금슬금 피어올랐다. '피유, 그동안 궁핍과 고난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가?' 채경령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것은 말도 안돼는 소 리였다. 고생을 하면 할수록 호화로운 생활은 더욱 안락해지는 법이었다. 그 런데 어찌된 노릇인지 채경령은 조금도 편안하지 않았다. 포근한 침상에도 누워보고, 화려한 옷도 입어보고, 진수성찬도 먹어봤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 편하고 거북했다. 채경령 일행은 화정의 제일의 누각에 머물고 있었다. 채가장이 경영하는 안 가(安家)였다. 이미 사흘 전에 도착했고 모든 준비가 끝났지만 아직 움직이 지 못하고 있었다. 아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채경령과 유진목은 무사통과에 무혈입성으로 화정까지 당도했다. 예상밖의 사태에 맥이 풀릴 지경이었다. 그것은 아구가 기대 이상의 활약을 벌였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순간 채경령은 목이 메여왔다. 아구만 생각하면 눈물부터 쏟아지는 채경령이었다.십중팔구는 죽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부득부득 고집을 부려 화정에 머물렀다. 일종의 미련 같은 것이기도 하고, 아쉬움 같은 것이 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왠지 모르게 불편한 일상이었다. "아가씨!" 집사 오고복(吳高福)이 문가에서 인기척을 내었다. "무슨 일입니까?"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유진목 나으리께서 급히 전하라고 하셔서 이렇게..." "번거롭다니요. 건너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아닙니다. 예서 말씀올리겠습니다. 구위사란 분이 당도하셨다는군요." "예?" "그렇게만 전해 올리면 아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알다마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채경령은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마구 치하를 남발하였다. 낭보를 전해 준 오고복도 고맙고, 무사히 귀환해준 아구도 고마웠다. 오죽하면 오고복이 안으로 들지 않고 소식을 전하는 것도 고마웠을까.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려 오고복이 보고 있었다면 큰 낭패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어디 계시답니까?" "일단 영빈관으로 모셨습니다만..." "그럼, 이리로..." 채경령이 연신 소매를 들었다 내리며 어쩔줄 몰라했다. "아닙니다. 이 몸이 그리로 가지요. 당장 그리로 가지요." 채경령이 미처 의식을 못하고 있었지만 일상사의 불편따위는 이미 한달음 에 달아나 버렸다. 포근한 안도감이 온몸을 휘돌고 있었다. 화정 일대에서는 그래도 한 소리하는 용병, 정천(鄭天)만이 유일하게 그 미세한 변화를 감지 하고 있었다. 정천은 채경령에게 관심이 많았다. 같이 일할 동료를 소개하겠다는 전갈을 받고 영빈관에 들어선 정천은 채경 령의 모습에 잠시 넋이 나갔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여인으로 변해 있었 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무언가 하나 빠진듯한 허전함을 주던 여인 이었다. 그런 그녀가 두 시진만에 한껏 물이 올랐다. 자못 눈부신 안정감이 었다. 비로서 진정한 채경령을 만났다는 감격이 그를 잠시 멍하게 만들었다. 무엇이 그녀를 바꿔 놓은 것 일까? "소생은 무림말학 아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랬다. 정천이 보기에도 무림말학이라는 명칭이 거창할 정도로 별 볼일 없 는 청년이었다. 아구에 관해서라면 이미 들은 이야기가 있었기에 자못 진지 했던 정천은 한순간에 긴장이 풀려 버렸다. 부지불식간에 경시하는 어조가 되었다. "정천이라하오. 근동에서는 취중자(醉中客)이라고도 불리고." 바로 두 시진 전에 보았던 채경령이었다. 그 두 시진 동안 의미를 둘만한 사건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숙소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특별한 사건 이라면 지금 이 아구라는 초라한 청년가 도착한 것이 전부였다. 채령령이 변 화한 원인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도 부적절한 행색이었다. 물론 생사를 나눈 동료의 무사귀환이 안도감의 원인이 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일상사 의 불편을 편안함으로 바꾸는 그런 종류의 안도감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상 황은 아구의 귀환, 그것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 일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다고 믿는 정천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경령과 아구의 관계를 유심히 관찰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정천은 근동에서는 일절(一絶)로 알려진 특급용병이었다. 그런 부류의 인간 들이 대개는 그렇듯 정천은 피도 눈물도 없었다. 그 세계의 전형과도 같은 위인이었다. 검이 들려있을 때를 제외하고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술병, 여인의 가슴, 도박장의 주사위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장담해도 좋았다. 특히 사람의 손이 두 개였으므로 술병으로 말할 것 같으면 검과 함께 공존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오죽하면 별호마저 취중객이었다. 그런 정천이었으 므로 그가 알고있는 강호의 법칙도 확고부동하게 단 한가지였다. 아니 범위 를 조금더 확장해서 세상의 법칙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적자생존, 즉 죽 이지 못하면 죽는 것이요, 살기 위해서는 죽여야 한다는 것이 정천의 인생철 학이자 신념이었다. 그런 정천이 채경령의 청부를 받아들였을 때,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정천이 드디어 미쳤노라. 죽을 때가 되었노라.' 정천이 틀어박혀있던 도박장으로 한 사내가 찾아왔었다. 화정에서 왔다고 했다. 화정이라면 동쪽으로 이백여리나 떨어져 있었다. 정천은 잠시 어리둥 절했다. 자신에게는 청부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한 기도의 소유자였다. 정천이 보표를 해주기 보다는 사내가 정천의 보표를 해주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살인청부라면 더 말할 것 도 없었다. 시덥지 않은 상견례가 왕래한 후, 사내가 용건을 말했다. "사천까지 길안내를 맡아 주셨으면 하오." 아니나 다를까 살인청부도 호위무사도 아니었다. 정천은 발끈했다. 그래도 근방에서는 짝을 찾기 어려운 살수요, 보표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사람을 잘못 찾았수." "분명히 정천이란 분을 찾아왔소이다." "정천이란 놈이 어떤 놈인 줄은 알면서 그 놈의 엉덩이가 얼마나 무거운 지도 모르고 오신 게 아니요?" "선금으로 금 열냥이외다." "어, 얼마라구 했수?" "선금 금 열냥에, 일이 끝나면 다시 금 열냥 드리겠소이다." "금 이십냥? 사천까지 길안내만으로 금 이십냥?" "우리는 서진(西進)하여 대하(大河)를 건너고자 하오." 횡재라도 만난 듯 부풀었던 정천의 가슴이 일시에 꺼져버렸다. "돌아가시오." 정천은 그대로 일어나 침실을 박차고 나왔다. 금 이십냥이면 십년 용병 생 활에서 기록한 최고 금액의 청부금보다 네 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재 고의 가치가 없는 청부였다. 정천은 그대로 도박장으로 향했다. 주사위라도 던질 생각이었다. 정천은 밤을 꼬박 새우고 해가 중천에 이르러서야 다시 객실로 돌아왔다. 사내가 아직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여인이 함께하고 있었다. 여인의 얼 굴을 본 정천은 망치로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눈만 바라보고 있어도 괜시리 가슴이 두근거렸다. 화려한 미모는 아니었지만 묘한 매력의 여인이었 다. 정천으로 말할 것 같으면 술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도박보다는 윗길이 여자였다. 바꾸어 말해서 살아가는 재미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여자였다. 더구나 사내의 입을 빌린 여인의 이름은 정천의 입맛을 돋구기에 너무도 충분한 것이었다. 사내의 이름은 유진목, 여인은 채경령이었다. 천하 제일의 염상조직 채가장의 주인이었다. 부귀와 미녀가 한꺼번에 그를 유혹하 고 있었다. 정천은 자신의 야비한 근성을 숨김없이 들어내었다. 여자는 본시 거칠고 야비한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법이다. "평탄한 길을 나두고 굳이 서장(西藏:티베트)의 고원지대로 행로를 잡으시 다니 필시 관의 도망자가 아니면..." "범죄자가 아님은 보장하지요. 다만 오월이 오기 전에 성도에 당도해야하는 데 걸리적거리는 무리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정천은 입맛을 다셨다. 일대에서는 서장의 동쪽 경계를 통과한 유일한 인 물이었다. 정천은 본시 관중(關中)사람으로서 관(官)의 추적을 받게 되었다. 닥달을 견디다 못해서 만자족(蠻子族)의 국경을 추월하고 말았다. 시작은 오 십삼 명의 인원이었지만 민산산맥을 넘어서 서북의 황하(黃河)를 만난 사람 은 고작 세 명, 그나마 나머지 둘도 혹사의 여파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유명 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길을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만에 하나, 서장 동부의 호전 적인 유목민 서번(西番)의 미개지를 통과하더라도 만자족의 영토를 다시 관 통해야 했다. 하나같이 중원인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일치단결한 주민들을 보 유하고 있었다. 천하고수도 소용없었다. 굶어죽는데 고수나 하수가 따로 없 었다. 늪과 함정, 매복기관은 아무리 고수라고 해서 하수보다 더 대접해 주 는 종류의 것들이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행로를 다시 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외다. 여분이 있다면 몰 라도 이 놈의 목숨은 단 하나뿐이라오." "보수는 섭섭치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뭘로 귀중한 목숨값을 대신한단 말이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핫, 그만 두시오. 원하는 거는 뭐든지 준다구요? 소저의 그 고귀하신 옥 체이라도 내주시겠다는 말씀이시오?" 정천은 그렇게 되는대로 씹어돌리고 후회막급이었다. 완강한 거절의 표시였 지만 지나친 감이 있었다. 유진목의 안색에 노기가 서리고 있음을 보았다. 유진목은 자신이 감당할만한 고수가 아니었다. 그때 채경령이 뜻밖의 대답을 했다. "드리지요. 대협께서 그것만 고집하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사천에서 그리 하지요." 채경령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아무리 보아도 화용월태(花容 月態)의 미인은 아니었다. 여자보는 눈이 까다롭기로는 만만치 않은 정천이 었다. 그런데도 정천의 가슴이 심하게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요상한 마력 의 여인이었다. 꼭 다문 붉은 입술이 자꾸 시야를 가로막았다. 야무지게 다 물어진 입술은 그녀의 절박함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사태가 이상하게 꼬여버렸다. 정천은 여인을 희롱한 자신의 후안무치(厚顔 無恥)를 사과하는 뜻으로 채경령의 청부를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다. 미개 이 민족들의 지옥은 아직 멀리 있었지만 유진목의 주먹은 너무 가까히 있었던 탓이었다. 정천은 아구라는 놈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망할 놈의 비!" 늪지대에 들어선지 어언 사흘, 비는 그치지 않고 있았다. 민산(岷山)의 지류 를 통과하고 시작되는 대초원지대는 언제나 그랬다. 늪지대를 벗어나려면 아 직도 나흘은 족히 더 걸어야 했다. 내공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야트막한 관목 밑에 채경령과 아구가 앉아 있었다. 비를 막아주기에는 너무 초라한 가지와 잎사 귀였다. 그런데도 채경령에게는 그다지 비가 들이치지 않고 있었다. 정천이 보기에도 상당히 편안해 보였다. 아구와 채경령은 서로 등을 기대고 있었는 데, 아구의 위치가 절묘하게 비를 막고 있었다. 아니, 아구의 행위 자체가 비 를 막아내고 있었다. 남녀가 유별함이 분명한데도 그들의 자세는 조금도 어 색함이 없었다. 오누이가 등을 맞대도 이보다 더 자연스러울 수는 없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눈꼴이 시어서 쳐다보는 정천에게도 전혀 하자가 없어보였 다. 정천은 그것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놈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민산의 계곡에서만 해도 그랬다. '빌어먹을!' 죽립을 코 밑까지 눌러쓴 검은 옷의 사내들이었다. 유진목의 설명으로는 흑 막이라는 살귀집단의 졸개들이라고 했다. 밤의 음습한 길목에서는 흑복면을, 한낯의 대로에서는 두 눈만 네모지게 뚫어놓은 죽립을 쓰고 다니는 음흉스 러운 놈들이라고도 했다. '떡을할!' 정천이 쩔쩔매고 있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도의 물결 속에서도 재차 확 인해 보았지만 분명히 은(銀)자 계열이었다. 금색수실로 번호를 새긴 놈들이 금호(金號), 이 놈들이 가장 강하고, 똥색의 희미한 숫자가 동호(銅號), 이놈 들은 별 볼일 없고, 그 중간 쯤의 무공수위가 지금 상대하고있는 은자계열, 이 은육(銀六)이었는데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은'하고도 겨우 '육'자가 이 정도라면 '금'자는더 이상 말이 필요가 없었다. '썩을!' 정천은 슬그머니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이번은 어찌어찌 넘어간다해도 차 후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은자계열에 이 모양이라면 목숨이 열 개라도 충분 하지 않았다. 정천은 한껏 내력을 끌어올렸다. 벌써 숨겨진 한 수를 드러내 는 것이 여간 꺼림직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냥 참고 있기에는 심사가 많이 뒤틀려 있었다. 비장의 한 수, 맹호격살(猛虎擊殺)의 열여덜 초식을 폭풍처럼 쏟아내었다. 귀를 찢는 파공음, 병장기가 맞부딪는 굉음,그리고 소름이 끼치는 마찰음. '되었구나!' 감각적으로 쏟아내는 검초들을 모두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 찰음은 자신의 검이 상대의 무기를 타고 흐르는데 성공했다는 신호였다. 이 제 마지막 결정타였다. 서로의 병기가 마찰을 시작하면 신형이 흐트러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 자세가 무너졌다고는 해도 불시에 당하는 것과 미리 대비 해 두고 당하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정천은 중심을 바로잡기 위해서 구태여 힘을 낭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관성에 몸을 실어 그대로 일검을 날려버렸 다. 이것이 정천이 터득하고있는 필승의 공식이었다. 그때였다. 좌측의 아구가 느닷없이 태산압정(泰山壓頂)식으로 일검을 날려 왔다. 딴에는 한 수 거들겠다는 수작이었지만 오히려 상대를 도와주는 격이 되고 말았다. 중심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은육호는 등판으로 일검이 쏟 아지자 다급한 김에 그대로 주저앉아 흙바닥을 굴러버렸다. 치욕의 뇌려타곤 (뇌려타곤)이었지만 실속을 중시하는 살수에게 체통이란 것이 있을 턱이 없 었다. 정천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구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마음에 들지가 않는 놈이었다. 간신히 적들을 따돌리고 행장을 풀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행이 단 네 명이다보니 신분고하를 가릴 수 없었다. 모두가 한 가지씩은 일을 거들어야 했다. 이를테면 채경령이 식사준비를 하면 유진목은 잠자리를 준비했다. 채 경령은 여자였으므로 밥하는 것이 제격이었고, 안락한 잠자리에는 제법 경륜 이 필요하므로 주로 유진목의 몫이었다. 정천은 식수와 땔감을 준비한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그대로 잠겨드는 늪지대가 널려 있었으므로 당연히 정천 이 해야 했다. 미리 정해놓은 업무분담은 없었지만 자연스럽게하는 일이 고 정되었다. 문제는 아구였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떤 때는 부랴부랴 잠자리부터 마련했다. 덕분에 채경령은 식사준비마저 잊어버리고 그대로 나자빠졌다.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인지라 아무도 뭐라 고 할 수 없었다. 그저 고픈 배를 주려 안고 부랴부랴 음식을 준비해서 뒤늦 은 저녁을 먹을 수밖에. 그것이 다 마음에 안들기 이를데가 없는, 아구라는 놈 때문이었다. 어떤 때는 잘자란 관목을 찾아내어 멍하니 손놓고 앉아 있기도 했다. 웃기 는 것은 '저녀석 노는데 나라고 못 놀소냐'하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아구의 등에 기대는 채경령의 모양새였다. 정천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불평이 나 오지는 않았다. 정천이 보기에도 채경령은 너무 지쳐있었다. 하여간 아구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때로는 식사준비부터, 때로는 잠자리부터.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다짜고짜 불씨부터 살리고 물을 끓여댔다. 식사 준비는 아니었다. 건량과 볶은 곡물가루가 고작이었으므로 식사준비로 불을 피울 이유는 없었다. 또한, 적에게 위치를 파악당할 위험이 있었으므로 잠자 리나 휴식을 위해서 불을 피우는 일은 가능하면 억제를 함이 마땅했다. 무슨 짓거리를 할 요량인지 궁금해져서 정천이 다가갔다. "얼씨구! 이거 무이차(武夷茶)아냐?" 차(茶)는 귀한 기호품이었다. 더구나 작금의 상황에서는 차는 꿈도 꿔서는 안되는 사치품이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런 서북 변방에서는 차는 구하기 도 어려운 품목이었다. 더구나 무이차라면 인공재배하는 그런 흔한 차가 아 니었다. 절강 안탕산(安湯山)에서만 난다는 자연산 희귀종이었다. 정천은 너 무도 뜻밖의 물건을 구경하는 탓에 화를 내는 것도 잊어버렸다. 아구는 가타 부타 말도 없이 찻잎만 슬그머니 내려놓고 제 할 일을 찾아서 떠났다. "어머!" 잠시후, 모닥불을 스쳐가던 채경령이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삼년 만이라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차라고도 했다. 차를 마시는 그녀의 모습은 바로 지금 이 차 한 잔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적라나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귀한 차를 대접해 준 정천에게 치하의 말도 잊지 않았다. 물론 정천도 그 차 를 아구가 준비했다는 변명따위는 하지 않았다. 정작 가관인 것은 휴식 도중에 슬그머니 사라지는 아구였다. 한발만 헛디뎌 도 늪 속에 잠겨버리는 지독한 곳이었다. 모두가 정천의 발자국만 따라 걸었 다. 그런데 아구가 사라진 것이다. 한식경이나 지체하고 나타난 아구의 두 손에는 물통이 들려 있었다. 물통에는 근방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맑은 물 이 가득 담겨있었다. 채경령이 물통에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체면도 아랑곳 않고 벌컥벌컥 들이부었다. 사실 정천은 목이 마르지 않았다. 정천은 물론 아구도 마찬가지였으리라고 정천은 생각했다. 물을 마신지가 그리 오래지 않 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보니 먼저번 정천이 물을 구해왔을 때, 잠시 보이지 않았던 채경령이었다. 정천의 물이 한순배를 돌고나서야 발그래한 얼굴로 채 경령이 수풀사이에서 나왔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여인의 은밀한 생리작 용이 있었던 것이다. 여인의 남모를 부끄러움이었으리라. 까닭에 식수조차 얻어먹지 못했다. 그러나 정천이 정작 놀란 것은 아구였다. 그러고보니 아구 는 정천의 뒷그림자를 조심스럽게 따르던 기색이 없었다. 특이한 생존감각의 소유자였다. 무공에서는 비교도 안되는 유진목보다 먼저 적의 매복을 눈치챘 으며, 늪지에서조차 자신이 나아갈 길을 감각적으로 찾아나갔다. 그러나 이 미 한껏 찍혀버린 아구였다. 그것조차 정천에게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급 기야 정천이 폭발하고 말았다. 열흘 내내 비가 내리는 늪지를 간신히 벗어나 서 서번의 지역에 들어섰을 때의 일이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번 호 : 8807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07-07 18:58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49- "이 자식이 왜 이래?" 칠흑같은 밤이었지만 계속 강행군할 수밖에 없었다. 협곡이었다. 위험한 장 소였다. 야영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모두가 숨막히는 긴장감에 휩싸인 채 어두운 협곡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아구란 놈이 몸을 덥쳐왔 다. 정천은 아구의 돌발행동에 깜짝 놀라서 버럭 소리 질렀다. 피웅-. 귀를 찢는 파공음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팔꿈치가 따끔거렸다. 연이어 어 둠을 가르는 파공음들이 몰려왔다. 팔목 언저리가 부어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정천은 확인할 겨를도 없이 검을 휘두르고, 몸을 굴리며 화살을 피 해 나갔다. 까닭모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구가 적의 화살을 눈치채고 자신을 밀쳐주었는데도 상황판단이 늦어서 아구를 뿌리치다가 화를 자초하 고 말았던 것이다. 불의의 기습이었지만 잘들 대처하고 있었다. 유진목은 뺨으로 날아드는 파 리라도 뿌리치듯 그렇게 한가로이 화살들을 쳐내고 있었고, 아구도 풍차처럼 검을 휘돌리며 화살들을 튕겨내고 있었다. "끄응!" 정천은 고통을 참지 못해서 신음을 토해냈다. 그저 스쳐 지나간 것이 불과 한데도 불에 데인 듯팔목이 화끈거렸다. 순간 유진목을 쥘부채가 몇 번인가 펼쳐졌다가 접혀졌다. 희끄무레한 물체 서넛이 어지럽게 주변을 나뒹굴었다. 정천의 신음소리에 득의만만해진 기습자들이 돌격을 감행해 온 것이었다. 서장의 동부 접경지대를 주름잡는 서번의 야만인들이었다. 생각보다 강한 놈들은 아니었다. 아니, 이쪽의 유진목과 아구가 너무 강한 것인지도 모르겠 다. 유진목은 유장한 몸놀림으로 채경령에게 달려드는 서번의 무리들을 넘겨 뜨렸고, 아구란 놈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었다. 특히 아구에게는 어둠이라 는 환경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훤한 대낯처럼 거침이 없었 다. 채경령마저 장한 하나를 거뜬하게 상대하고 있었다. 혼자서만 허둥대었다는 자괴감이 정천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다행히도 얼굴빛이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정천이 검을 꼬나 잡았다. 구름 사이로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달빛이 우람한 상체 근육에 금속성의 반사광을 만들어내었다. 실타래같이 풀어진 머리에 상반신을 벗어제낀 반라 의 사내들이었다. 정천의 눈길이 뒤쪽 편에서 팔짱을 낀 채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사내에게 떨어졌다. 팔짱 사이로 도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머리 끝이 두 개로 갈라져 있는 귀두도였다. 아마도 일당의 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정 천은 이빨을 악다물고 놈에게 접근해갔다. 땅에 떨어진 체통을 다시 끌어올 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일당 중 가장 뛰어난 칼솜씨를 갖추고 있었다. 강인한 팔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귀두도의 힘은 정천의 팔목을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화살이 스친 곳이 왼팔이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검을 떨어뜨릴 뻔하였다. 귀두도 가 대각선을 그리며 정천의 상반신에 떨어졌다. 빠르고도 강력한 도초였다. 중원의 초식과 같은 일정한 격식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분히 실 용적이고 절도가 있는 칼놀림이었다. 의외로 까다로운 구석이 있었다. 정천 은 검으로 막아낼 생각을 포기하고 보법을 운용하여 물흐르듯 측면으로 빠 지며 검 끝으로 가볍게 찔러보았다. 일종의 견제타였다. 사내는 놀랍게도 내리가르던 귀두도를 그대로 끌어올려 다시 횡으로 타원 형을 그렸다. 기가 막힐 정도로 무식한 행동이었지만 용케도 귀두도는 진로 를 바꾸고 정천을 사정권내로 끌어 들였다. 엄청난 힘이 동반되지 않고는 불 가능한 수법이었다. 정천은 찌르기를 포기하고 검을 회수하였다. 어차피 그 냥 가볍게 찔러본 허초인 만큼, 초식을 물린다고 해서 손해볼 일은 없었다. 오히려 기선을 제압할 호기가 될 만했다. 정천의 검이 세련되고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방금 스쳐간 귀두도의 공백에 쑤셔박혔다. 당황한 귀두도가 다시 방향을 틀어서 거슬러 왔다. 역시 엄청난 힘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무식 그 자체의 도법이었다.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 고 힘차게 맞받아쳐나갔다. 외공에서는 다소 손색이 있었지만 방향과 기세면 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정천이었다. 물러설 까닭이 없 었다. 검과 도 사이에서 불똥이 튀었다. 끼기긱-. 힘의 열세로 인해서 뒤로 밀리던 귀두도가 도신(刀身)을 뒤틀기 시작했다. 정천은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역발산 기개세의 초패왕(楚覇王)을 방불 케 하는 폭발적인 힘이었다. 아무리 힘이 강하다한들 그 와중에 도신을 비틀 어 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정천이었다. 철커덕-. 귀두도의 두 뿔 사이에 정천의 검이 얼켜버리고 말았다. 다시 무서운 기세 로 도신이 회전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정천의 손목이 하릴 없이 꺽여져 갔다. 정천이 ㅈ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도의 회전을 막았다. 간신히 팔목은 고정되 었지만 정천의 신형이 그만 기우뚱하고 무너져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예의 무식한 방법이 다시 귀두도의 방향을 잡아주었고 정천의 관자놀이가 도풍으 로 써늘해졌다. 귀두도는 정천의 관자놀이에 실핏줄을 그려내고 바닥을 뒹글었다. 귀두도보 다 정천의 검이 약간 빨랐다. 정천의 검이 사내의 옆구리를 베어버렸던 것이 다. 정천의 구명절초 명호격살이었다. 사내의 힘은 중원의 상식을 초월하며 도의 방향을 수습하기는 했지만 정천만큼은 아니더라도 일시적으로 균형이 무너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억지로 중심을 회복하고 재차 이루워지는 반격보 다는 무너지는 관성을 그대로 타고 흐르는 정천의 맹호격살이 빠를 수밖에 없었다. 밤하늘을 진동하던 병창기의 굉음들이 어느새 사라지고 사위가 정적을 회 복한 상태였다. 유진목과 아구가 적도의 조무라기들을 이미 소탕해버렸던 것 이다. 정천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두 손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검미가 하늘 을 찔렀다. 상대의 머리통을 쪼개는 최후의 일격이었다. 채앵-. 하나의 검이 머리통 세 치 앞에서 정천의 검을 가로막았다. "이 자식이 정말!" 검의 임자는 아구였다. "저리 비키지 못해!" 그러나 아구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희끄무레한 물체 서넛이 부시시 바닥 을 털고 일어났다. 하나같이 머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아구의 행동반경에 속했던 서번의 야만족들이었다. 그제서야 정천은 깨달았다. 흑막 의 무리든, 서번의 무리든 아구는 단 한명도 살해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정 천의 살격을 저지한 것은 몇 번 있었다. 그때는 아구가 서툴러서 우연히 그 렇게 된 것이려니 정천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제는 정천도 분명히 알았다. 그것이 아니었다. 아구는 일부러 적도들을 구해주었던 것이다. 격전으로 잊 고 있던 팔목이 다시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정천은 머리 끝으로 피가 솟구치 는 것을 느꼈다. "이 호로자식! 비킬테냐, 아니면 기어코 본좌의 칼맛을 볼테냐?" "... ..." 아구는 끝내 비키지 않았다. 그 사이 우두머리를 수습한 서번들이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저 놈은 원래 저런 놈이우?" 채경령이 고개를가로저었다. 일부러 악귀처럼 상대를 따라다니며 추살하지 는 않았다. 그렇지만 죽여야 하는 상황이면 굳이 자비를 베풀지는 않았던 아 구였다. 맥산관의 두 늑대가 분명히 그의 손에 숨통이 끊어졌고, 심지어 네 마리의 대머리 늑대들은 머리통이 박살나고 말았다. "근데 왜 저 지랄이유?" 정천이 보기에 채경령도, 유진목도 그런 아구의 태도에 심히 당황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리 봐도 영 어리숙하게만 보이는 아구였다. 정천은 마음을 진정 시키고 설득해보기로 작정했다. 서번의 야만족들이야 그렇다쳐도 흑막의 살 수들은 도무지 말이 되지를 않았다. 살아만 있다면 언제까지라도 찝적될 놈 들이었다. 근자에 들어서 흑막 놈들의 자취가 묘연해진 것은 서번의 악다구 니 때문이었다. 서번에게 있어서 흑막이나 정천 일당이나 모두 외부인이기는 마찬가지였고, 대초원의 늪과 빗줄기 또한 흑막과 정천 일행을 차별하지는 않았다. 어쨋든 흑막의 무리들은 편안한 관도를 질러나가 이미 사천의 길목 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죽이지 않고는 결말이 날 수가 없었다. 정 천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용히 말했다. "이봐, 죽이지 않으면 자네가 죽는게 강호야. 그걸 모르지는 않겠지?" "... ..." "시커먼 죽립 속에 눈깔만 희번덕거리는 흑막인가 뭔가하는 그놈들... 그놈 들이 자네가 자비를 베푼다고 알아줄 것 같은가?" "... ..." "이봐, 뭐라고 대답 좀 해봐!" "... ..." "이놈에 자식이... 정말 말이 말 같지 않은가." 급기야 정천이 다시 울화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분위기가 다시 살벌해지는 조짐을 보이자 채경령이 끼어들었다. "구위사, 어찌된 영문인지 저도 모르겠군요. 혹여 저희와 떨어져 있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는지...?" 채경령까지 독촉하자 어쩔 수가 없었는지 아구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흑막의 살귀든, 세외의 야만족이든 가족은 있겠지요. 저간의 사정이야 어떻 든 그 누군가가 또 복수를 꿈꾸겠지요." "이봐, 겨우 그따위 이유로 너를 죽이려고 서슬퍼런 칼날을 들이대는 놈들 에게 나 죽어줍쇼 목을 내미는가?" 정천은 다시 복장이 터졌다. "여생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병약하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주변에 서는 불초보고 오직 살아내야만 한다고 강요했고, 불초도 오로지 그렇게 했 지요. 하지만 불초는 짐승과 하등 다를 바 없이 오로지 목숨을 구걸하기 위 해서 살았거늘, 남들은 그렇지가 않더군요. 타인의 생존을 위해서 당신들의 생존을 흔쾌히 포기하더군요.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큰 목적이 반드시 생존 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별, 개가 뜯어먹을 소리 다 들어보겠군. 자네가 뭘 착각한거야. 그런건 공 자님 말씀에나 나오는 순 거짓부렁들이지. 사십평생을 살아오며 수많은 인간 들을 보아왔지만 장담컨데, 인간이란 동물은 그렇게 생겨먹지를 않았어." 정천의 장광설이 계속되었다. "이 술병을 보게." 정천이 허리춤에서 표자(瓢子:표주박)로 만든 붉은 술병을 꺼내들었다. "이건 술을 담는 술병이야. 술병에 술을 담을 수 없으면 그게 무슨 술병인 가? 인생이란 것도 마찬가지야. 살아 있어야 소중한 거고, 뭐고 따질 수 있 는 거지. 죽고나면 그게 다 소용없는 거 아니겠어?" 묵묵부답의 아구였다. 그 문제에 관한 한, 그 누구도 더 이상 대답을 얻어 들을 수 없었다. 다만, 훗날 정천이 아구문제라면 완전히 포기한 어느 날, 문 득 아구가 이렇게 물었던 적은 있었다. "그런데 정대협께서는 왜 그 표주박을 버리지 않고 차고 계시죠? 그건 술 이 들어있지도 않고, 당분간은 술을 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데... 거치장 스럽지 않으신가요? 그게 그저 술병이라면 나중에 성내에서 다시 구입해도 될 터인데..." 정천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붉은 표자는 취중객 정천의 상징과도 같은 물 건이었다. 설상가상이었다. 유진목이 가장 심한 상태였다. 유진목은 찡그린 눈으로 두 통을 호소하며 잠시 멈춰섰다. 숨이 가빴을 것이다. 물론 멈춰 서서 숨을 몰 아쉰다고해서 회복되는 증세는 아니었다. 고산병이었다. 공기가 희박하여 채 소들의 생장이 빠른 고원지대였다. 호밀이나 당근도 대단한 크기였지만 특히 순무 같은 것은 거의 중원의 것의 스무 배 정도는 크게 보였다. 아무리 내공 이 화후에 이른 절정고수라 한들, 환갑이 지나도록 화북과 강남만 왕래한 유 진목으로서는 당해낼 수 없는 풍토병이었다. 정천을 제외한 세 명 모두가 정 도의 차이가 있을 뿐, 두통과 호흡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 중 가장 경미해 보이는 쪽이 아구였는데 오히려 가장 힘겨워하는 편이 아구였다. 아구의 등에는 정천이 올라타고 있었다. 화살이 팔목을 스쳐간 이후, 정천 은 온몸이 퉁퉁 부어오르고 고열에 휩싸였다. 독화살이었다. 잠시만에 껍질 이 벗겨진 돼지처럼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고, 삽시간에 눈이 감길정도로 눈 두덩이가 부어올랐다. 정천은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자신의 팔목을 열심히 빨아대는 아구를 느꼈다. 독이 옮아가는 위험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것 같 이 보이는 아구였다. 한동안 팔목의 피를 빨아대던 아구가 정천의 상채기에 자신의 장심을 가져다 댔다. 정천은 탁한 기운이 아구의 손바닥을 통해서 몰려나가고 있음을 짐작했다. 하늘을 향한 아구의 다른 한 손이 그 배출구이리라. 독기가 아구의 몸을 통 과해서 허공으로 산개되고 있었다. 그러던 잠시후, 아구의 장심이 정천의 명 문혈(命門穴)로 옮겨갔다. 이번에는 맑고 시원한 기운이 장심을 타고 흘러들 어왔다. 아구의 장심이 상채기와 명문혈을 옮겨다니기를 수 차례, 아구가 그 만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기력을 소진한 탓이었다. 반면 정천의 의식 은 조금씩 맑아지고 있었다. 이 후로 아구가 내내 정천을 업고, 끌었다. "잠시..." 아구가 손짓을 했고 일행이 멈췄다. 아구의 시선은 측면의 밀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천도 새삼스레 수풀을 살펴 보았다. 정천의 안목에는 아직 수상한 낌새가 감지되지 않았다. 아구가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제서야 정천도 사태 를 파악했다. 정천이 풀매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아구가 고개를 끄덕였 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도 없는, 잘 위장된 매듭이었다. 뒤따라온 유진목이 손가락으로 돌맹이를 튕겼다. 돌은 정확하게 풀매듭을 때렸다. 털썩-. 오솔길을 완전히 뒤덮을만한 넓이의 사각 격자틀이 벌떡 일어섰고 그 틀 사이사이로 날카로운 죽창들이 사나운 이빨을드러냈다. 덫이었다. "달려요!" 아구가 소리쳤고, 일행이 죽을 힘으로 달렸다. 사람 두어 명이 겨우 비켜갈 만한 좁다란 협곡이었다. 일행이 채 십장도 벗어나기 전에 절벽으로 크고 작 은 바위덩어리들이 굴러 떨어졌다. 절벽 위에는 반라의 구리빛 근육들이 바 위를 밀어내리고 있었다. 맞고 채이면서 일행은 간신히 협곡을 벗어났다. 그 나마 아구가 일찍 기척을 알아챘기에 중심부의 아수라장은 피할 수 있었다. "어떻게 알았나?" "모르겠습니다. 그냥 달려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는 아구의 등에는 정천이 매달려 있었다. 그 난장판 속에서도 아구는 정천을 내동댕이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게 진행되었다. 먼저 덫을 발견하는 것도 아구였고, 함정을 먼 저 발견하는 것도 아구였으며 등 위에 올라탄 정천이 아무런 언질을 안했는 데도 알아서 척척 늪을 통과해가는 아구였다. 이제와서의 정천은 더 이상 안 내자일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귀찮은 짐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일행들이 풍토병으로 비실거리자 서번들의 공세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대 체로 공세는 정천에게 집중되는 편이었다. 굳이 그렇게된 이유를 대자면 수 도 없었다. 병에 걸렸다고는 해도 가장 강한 인물은 아직도 유진목이었다. 유진목으로서는 아직도 서번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내었다. 더구나 그는 오로 지 채경령의 보호에만 주력했지 일장만 떨어져 있어도 ㅉ아가는 일이 없었 다. 하긴 걷기도 피곤한 형편이었다. 가장 만만한 쪽은 역시 정천이었다. 눈만 멀뚱거리고 있을 뿐, 사지를 움직 일 힘조차 없는 상태였다. 더구나 정천 쪽이 미운 털이 많이 박힐 수밖에 없 었다. 가장 잔혹하게 서번을 도살한 쪽도 정천이었다. 게다가 아구는 절대로 서번의 무리들을 죽이지 않았다. 서번의 무리 쪽에서 보자면 유진목을 상대 하는 것보다는 죽을 염려가 적었던 것이다. 무리들이 정천의 목숨을 노리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순리였다. 사태를 냉정히 판단해볼 때, 정천만 버리고 가면 서번인들도 순순히 물러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아구는 정천을 버리지 않았다. 두통으로 머리 속이 온통 들끓는 와중에도, 희박한 공기 속에 죽을 듯이 호흡이 막히는 와 중에도, 기진맥진하여 다리가 후들거리는 와중에도 아구는 정천을 놓지 않았 다. 자신의머리통으로 화살을 받아낼 지언정, 정천의 목덜미에 활이 박히도 록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아구의 꼴은 이미 말이 아니었다. 정천은 자신의 구차스런 처지를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이미 열 번도, 백 번도 더 내 동댕이쳐 버렸으리라. 정천의 거친 사내였다. 상대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에게 자비를 구하는 일도 없었다. 자신이 필요없 는 상황이라서 버려진다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다가 그렇게 죽어갈 용의가 있었다. 거친 광야의 어느 한 곳에서 이슬을 맞으며 썩어 들어가는 시체가 언젠가는 맞이해야할 자신의 운명임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고, 또한 당당하게 맞이할 각오도 되어있었다. 하지만 아구는 그렇치 않았다. 똥고집도 그런 똥 고집은 없었다. 서장의 동부 접경지대를 벗어난 정천 일행은 험준한 산악지역을 앞에 두고 섰다. 산악 밀림의 주인은 만자족이었다. 만자족의 여왕은 어떤 부류의 중원 인에 대해서도 무자비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기로 유명했다. 그녀는 이 지역 을 여행하는 중원인을 돕는 자가 있다면 누구든지 산 채로 삶아 죽이겠다고 만자족사람들에게 엄명을 내렸다는 소문도 있었다. 흉폭한 것으로 말하자면 호전적인 서번보다도 한수 위에 있었다. 다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번에 비 해서 전투능력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준비해온 식량이 바닥났지만 식량 의 추가 공급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들이 지나가는 행로 를 중심으로 길가 양옆의 십리 이내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접근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로를 인접해 있는 원주민의 마을은 그들이 통과와 때를 같이하여 아예 마을전체가 이동해버렸다. 아구로 말할 것 같으면 종내는 엉금엉금 기어야 했다. 오히려 의식이 멀쩡 한 쪽은 정천이었고 아구는 비몽사몽간의 실신상태가 되었다. 다만 아구는 사지가 꼼지락거렸고 정천은 손발이 마비되어 있었다.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서 마비증상이 차츰 풀려가기는 했지만 정천은 결국 아구의 등에 매달린 채 로 무공(懋功)의 정겨운 중원마을을 바라보게 되었다. 무공은 사천의 서북에 위치한 읍이었다. "그래, 어찌 하실 생각이시오?" 무공의 작은 주루였다. 한평생 거친 광야를 달려온 사내, 정천이 물었다. "일단은 모아개(毛兒蓋)로 나갔다가 성도(成都)로 향할 생각이네만." 유진목이 대답했다. "힘든 여정이군요. 남은 대설산이 막고있고, 서는 서하국이니... 선택의 여지 가 없을 터...?" 정천의 얼굴에 암운이 드리웠다. 적의 주력을 피하고자 험로를 돌아왔건만 오히려 적의 본진에 코를 들이미는 꼴이 되고 말았다. 정천은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대설산이요?" 뜬끔없이 아구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네." "신도곡(神刀谷)이 있다는 그 대설산...?" "왜 아닌가." 정천의 대답에 아구는 곰곰히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잠시 아구를바라보 던 정천이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말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아닙니다. 길(吉)보다는 흉(凶)이 많은 행로일 겝니다. 정대협은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채경령이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정천이 다시 간곡한 눈빛을 보냈지만 채경령은 야무지게 입술을 다물었다. 거절의 표시였다. 사단은 결국 정천이었다. 아구의 똥고집 때문에 정천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서 사천 땅을 다시 보았지만 일정이 무려 사나흘이나 지체되었다. 추적자들 이 전열을 정비하여 성도행을 가로막을 시간을 벌어주었던 것이다. 정천은 그것이 안쓰러워 다시 사지(死地)를 자청한 것이었지만 불필요한 희 생을 줄이려는 채경령의 의지도 확고하였다. 정천은 새삼스레 다시 아구를 바라보았다. 기실 따지고 보면 아구나 자신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피차 일 시계약의 고용무사였다. 그런데 채경령의 논리대로라면 아구는 죽어도 되는 것이고 정천은 죽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상한 것은 채경령은 물론이고 유진목도, 아구도 그런 논리적 모순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정천은 다시 채경령과 아구를 번갈아가며 돌아다 보았다. '아무튼 요상한 관계란 말씀이야.' 정천이 다시 한 번 고집을 부려보았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때 유진목이 끼어들었다. "허어, 정대협. 왜 이러시나? 아직도 받을 것을 다 못 받아서 그러시나?" 정천을 비롯한 일행은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유진목이 채경령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유진목의 느물거리는 표정을 바라보던 채경령의 얼굴이 이윽 고 붉게 물들었다. 그제서야 정천도 알아챘다. 그리고 정천의 가슴에 색정(色 情)이 파도처럼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평온한 바다가 되었다. 채경령이 끝내 참지 못하고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정천도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사건의 전말을 모르는 아구만이 여전히 어리벙벙한 채로 좌중을 번 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술잔을 들어 삼배를 거푸 마신 후에야 정천은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허허, 부끄럽습니다. 후배의 후안무치를 아직 잊지 않고 질책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이 후배가 죽지 못해 환장을 하지 않는 한, 어찌 다시 그 런 망동을... 그리고..." 정천이 은근한 눈빛으로 아구를 바라보았다. "그 보상을 누군가가 받아야 한다면그건 마땅히 저 친구의 몫이지요." 정천이 아구 쪽으로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그때 마침 자리를 피했던 채 경령이 돌아오다 그 소리를 들었다. 채경령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 되어버 렸다. 빙그시 미소짓던 정천과 유진목이 그런 채경령을 발견하고 머쓱해졌 다. 채경령이 규중처녀처럼 예의범절에 얽매이지는 않는 강호의 여인이라고 는 하나, 그래도 처녀 앞에서 할 말이 따로 있었다. "정대협께서는 어떤 당부의 말씀이신지. 이 후배, 미욱한 죄로 제대로 명을 따를 수가 없군요. 번거로우시겠지만 어떤 보상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자세한 설명을..."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한 아구가 좌중을 난망 속으로 몰고 갔다. 유진목 의 헛기침과 정천의 헛기침이 오랫동안 번갈아가며 경주를 벌였다.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결과적으로 유진목의 걸죽한 입담이 정천의 고집 을 좌절시킨 셈이었다. 아쉬운 석별의 인사들이 왕래하는데 아구가 문득 한 마디하였다. "정대협, 표자에 술을 받아놓지 않으셨군요. 한동안 술을 구하기 어려운 지 역을 지나실 터인데... 이리 주십시오. 후배가 냉큼 표자를 채워오겠습니다." "되었네. 나두게." 뜻밖의 거절에 유진목이 의아해서 물었다. "허어, 어찌된 노릇인가? 술병에 술이 없으면 술병도 아니라더니?" 그러자 정천이 아구의 허리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봐, 구위사." "자네의 그 낡아빠진 금낭에는 무엇이 들었는가?" 아구의 비취색 금낭은 텅 비어있었다. 사부 도학정이 동전 두 푼을 넣어놓 았던 이래로 금낭은 언제나 비어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주머니를 슬쩍 만져본 유진목이 말했다. "정말 아무 것도 없는가, 구위사?" 정천이 재차 채근을 했고, 아구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하하하, 구위사의 주머니 속에 무언가가 들어있다면 내 붉은 표주박 속에 도 무언가 있겠지요." 정천은 멀어져가는 아구의 허리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등에 업힌 채로 정천도 확인해 보았지만 분명히 금낭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아구는 언제나 그 금낭 속에 아주 소중한 무언가가 들어있는 것처럼 애지중지했음 을 정천은 알고 있었다. 정천은 표자에 술을 담을 수가 없었다. 술을 채우면 술병 속에 담겨있던 그 무언가가 꼭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무릇 검집은 검이 들어있어야 검집이고, 호리병은 술을 담아야만 술병이었다. 하지만 어 쩌면 검집에서 검을 비우고 나서야, 술병에서 술을 비우고 나서야 비로서 담 겨지는 그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정천은 이제부터 그것을 찾아볼 요량 이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번 호 : 8823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07-08 20:45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50- 18. 신도곡(神刀谷) 오히려 중원보다는 세외의 지역이라함이 옳을 지도 몰랐다. 중원으로 나가 려면 동북으로 수천리 길은 족히 되었다. 반면에 서(西)로는 서하의 국경이 바로 인접해 있었고, 남하를 한다해도 대리국(大理國)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런 대륙 변방의 외진 곳, 대설산(大雪山) 자락의 깊은 곳에 정체불명의 인간 들이 하나 둘씩 모여든 것은 지금으로부터 삼십여년 전, 이름도 없는 계곡이 었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서는 강호인들이 그 계곡을 이르기를, 신도곡(神 刀谷)이라 불렀다. 변방 외딴 곳의 무림 문파, 신도곡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강호의 소식통들이 호시탐탐 신도곡의 내실을 탐구하고자 무던히도 노력하 였건만 신도곡은 여전히 의연하였다. 그것이 오히려 신도곡의 명성을 높혀주 는 극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신비의 문파, 신도곡. 무당의 손꼽히는 고수, 몽진자(夢眞子) 도인이 신도곡을 찾은 것은 지금으 로부터 칠년 전이었다. 몽인자는 도반답지 않게 강직한 인물이었다. 무림정 의라는 기치 아래 악을 철저히 응징하는 의협으로 그 위명이 자자하였다. 정 체를 드러내지 않는 비밀스런 집단이라면 응당 구린 데가 있을 것이라는 몽 진자의 생각이었다. 몽진자는 신도곡이 혹여 강호의 우환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그 의혹을 밝혀보고자 신도곡을 방문하였다. "돌아가시오." 신도곡의 월석당주(月夕堂主)가 거두절미하고 그렇게 말했다. 월석당은 신 도곡의 접객당(接客堂)에 해당했다. 몽진자는 어의가 없었다. 그것은 머나먼 화북(華北)땅에서 험난한 촉도(蜀道)를 거슬러온 강호의 큰 어른에게 새파란 젊은 강호인이 할 소리는 아니라고 몽진자는 생각했다. "무량수불, 사해(四海)가 모두 동도라 하였소. 먼 길을 찾아온 빈도를 이리 도 박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구료." "돌아가시오." "밝혀야 할 것이오. 신도곡이 숨길 것이 없는 떳떳한 문파임을 밝혀야 할 것이오. 어두운 악의 무리가 아님을 증명해야 할 것이오." 거칠 것 없기로 천하에 쌍이 없다는 몽진자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밀고 들어 갔다. 결과는 어이없게도 몽진자의 처참한 패배였다. "돌아가시오." 신도곡의 월석당주는 선혈을 울컥울컥 토해내는 몽진자를 정성껏 치료해 주기는 했지만 마지막 한 마디는 언제나 같았다. 몽진자의 패배 이후, 많은 신진강호들이 신도곡의 월석당을 찾았다. 명목은 비밀스런 집단의 배후를 밝히고자하는 협사들의 사자후였지만 실질은 월석 당주를 제압하여 천하무림에 이름을 드날리고자 하는 무림인의 야망이었다. 그러나 젊은 월석당주의 패도를 꺽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도곡의 위명은 그때마다 한 계단씩 치솟아 올랐다. 사람들은 여전히 신도곡의 실(實)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신도곡의 명(名)만 은 세 살먹은 어린아이까지도 알게 되었다. 세상이 알고있는 신도곡이란 단 한 명의 젊은이, 신도곡의 문지기임을 자처하는 월석당주 설산소룡(雪山小 龍)이었다. 강호인들이 신도곡을 지키는 사내의 무공을 칭송하여 설산소룡이 라 별호를 붙혀주었다. "배첩(拜帖)은?" 신도곡주 초진양(焦陣陽)의 세 번째 제자이자 월석당의 당주인 설산소룡은 오늘따라 수하의 태도가 영 마땅치 않았다. 신도곡은 말을 아끼고 행동을 앞 세우는 문파였다. 그저 배첩만 올리면 될 것을 오늘따라 수하의 입이 너무 가벼웠다. 그러면서도 설산소룡은 애병 계령도(桂靈刀)를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랜만이로군.' 근자에 이르러 설산을 찾는 이들이 부쩍 줄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배첩은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신도곡이 아니라 당주님을 찾아 왔다고 하더군요." 설산소룡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도곡을 꺽어서 위명을 떨치고자 하는 부 나비라면 당연히 배첩을 보내고 신도곡의 이름에 도전하는 것이 상례였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약정은 없었지만 대저 강호인들은 호승심이 강하고 거창한 형식의 체면치례를 선호하였다. "비무를 청하는 무리는 아닌 듯합니다. 그 꼴들로 봐서는... 하여간 직접 나 와 보심이..." 수하의 말투로 봐서는 아주 한심스러운 몰골의 방문객임이 분명했다. 설산 소룡도 은근히 호기심이 생겨서 방문을 박차고 나섰다. 아닌게 아니라 산문 밖의 이남일녀는 패잔병의 형색이었다. 옷자락에 핏자 국이 낭자하였고, 땟물이 줄줄 흐르는 면상 또한 가관이었다. 도저히 비무를 청하러 온 야심가의 모습은 아니었다. "선민아." 설산소룡은 귀가 번쩍하였다. 근년에 이르러 월석당주 목선민의 이름을 그 렇게 직접대고 호명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마땅히 그렇게 불러주었던 부모 형제는 이미 유명을 달리하였고, 이제와서는 사부 초진양 정도나 그렇게 부 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선민아." 약간 마른 체형의 사내가 다시 그렇게 불렀다. 자못 감개무량하다는 어조였 다. 전체적으로 서글서글한 인상의 호감을 주는 얼굴이었지만 전혀 기억에 없는 청년이었다. "형장께서는 뉘신지?" "나 아구야, 아구. 모르겠어?" 청년은 자꾸 허리춤을 만지작거렸다. 목선민의 눈길도 자연스럽게 그리로 쏠리게 되었다. 주머니였다. 이제는 색이 바래서 그저 허옇게만 보이는 주머 니였다. 하지만 목선민은 그 주머니의 바탕색이 무엇인지 금방 기억할 수 있 었다. 특히, 그 주머니 끈에대한 기억은 너무도 선명했다. 목선민은 새삼스레 청년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동일인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또랑또랑한 눈망울이었다. 그러나 목선민은 보았다. 그것은 옛 친구의 초점 없이 흐리멍텅한 눈동자에서조차 감출 수 없었던 우정과 신뢰의 빛이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몰라 준다해도 목선민만은 반드시 알아 주어야 할 어린 시절 친구의 그것이었다. "너, 너...?" "그래. 구야 구. 내가 구라구." 청년은 황급히 목선민의 말을 가로막으며 자신의 이름이 구라는 것을 강조 하였다. 목선민도 양주 채가장의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누구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목선민은 청년의 일행인 일노일녀를 건너다 보며 무언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음을 눈치챘다. 그의 유일한 죽마고우(竹馬故友) 모진위는 용무 관 시절에도 이미 어른 못지않게 사려깊고 신중한 아이였다. 돌아가는 사정 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친구 모진위에대한 믿음을 능가하는 의심으로 자 리잡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조금도 의심치 않고 장단을 맞추어 나갔다. "구, 구로구나. 아구!" 월석당의 수석제자 고효기(高孝旗)는 기겁을 했다. 당주 목선민이 상거지꼴 을 사내를 덥썩 끌어안았는데 그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있었다. 자신이 모 시고 있는 월석당주 목선민,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날 것같은 그 목선민이 틀 림없는지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돌아가시오!" 목선민으로서는 월석당을 맡은 이래 가장 바쁜 날이 되고 말았다. 이번에는 코 밑까지 죽립을 눌러 쓴 음침한 사내들의 방문이었다. 역시 신도곡이 의례 적으로 치뤄왔던 의례적인 방문은 아니었다. 그들은 밑도 끝도 없이 이남일 녀의 인도를 요구했다. "신도곡은 무림의 일에 관여치 엄정 중립을 지켜온 공명정대한 문파라고 알고 있소. 부디 선처를 바라오." 그들은 방금 전, 목선민의 품에 안겨든 죽마고우와 그의 일행을 찾고 있음 이 분명했다. 자신들은 그들에게 반드시 받아내야 할 혈채가 있다고도 했다. 따라서 이곳까지 그들을 추적해 왔다는 설명도 있었다. 그들만 내놓는다면 물의는 일으키지 않겠다는 은근한 으름장도 있었다. 신도곡은 강호의 시비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걸어오는 시비를 굳이 마다하지도 않았다. 다만 일부러 시비거리를 만들지는 않았다. 방문객의 신 분나 명성을 따지지 않았다.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이 난데없는 불청객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돌아 가시오." 방갓으로 얼굴을 가린 추적자들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불공정한 대접이었다. 채경령이라고 자신들과 입장이 다를 것은 없었다. 오히려 행색으로보나 뭐로 보나 그들도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 게는 달리 피신할 만 곳이 없었다. 샅샅히 주변의 수색해온 터였다. 정황으 로 볼 때, 단 한 곳 신도곡의 영내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남일녀의 행방을 재삼재사 추궁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오직 하나 뿐이 었다. "돌아가시오." "비례를 무릅쓰고 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목선민의 건조한 가슴에 촉촉한 비가 내렸다. 목선민은 눈을 뗄 수가 없었 다. 흙먼지와 피자국을 닦아내고 정갈하게 옷을 갈아입은 채경령은 전혀 딴 판으로 변해 있었다. 이성의 호기심에 눈 뜰 나이도 되었건만 목선민은 아직 여자를 몰랐다. 부 친의 한맺힌 유명을 받들어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고자 오로지 한길만 정진 해온 사나이 목선민이었다. 여자따위에게 빼앗길 시간이 없었다. 그런 목선 민의 가슴이 야릇한 감정으로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사정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양주 채가장의 귀하신 분을 몰라뵈어 죄송합니 다. 누추한 곳이라 불편을 끼칠까 걱정스럽군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소생 신 도곡의 목선민이라고 합니다." "진작 출신내력을 밝히지 못한 점, 용서하시길. 이미 짐작하고 계시니 도리 가 없군요. 양주의 채경령이라 하옵니다. 설산소룡의 명성은 오래 전부터 귀 가 아프게 들어왔지요." "과분한 말씀." 목선민이 두툼한 입술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며 의젓하게 머리를 숙였다. 채 경령도 가슴 앞섭을 곱게 눌러 잡으며 맞대응을 하였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의 헌헌장부(軒軒丈夫)였다. 과연 출중한 용모였다. '일찌기 천하제일 후기지수, 무공도 제일, 용모도 제일이라는 소문을 들어왔 는데 그것이 명불허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구나.' 채경령의 가슴도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일남일녀는 서로 얼굴을 붉힌 채, 오래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대륙의 서남 변방에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 다. 굳게 닫혀진 장지문 사이로 훈풍이 스며들고 있었다. "대사형!" "삼사제인가? 들어오게." 목선민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방문을 열어제쳤다. 대사형 당유(唐酉)는 언 제나처럼 서류뭉치 속에 파묻혀 있었다. 같은 계곡의 같은 밥솥에서 밥을 먹 는 사형제간이건만 얼굴을 맞댄 지가 이미 두 달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 사 이 당유의 살집은 더욱 넉넉해진 것 같았다. 벌써 스물하고도 다섯이 넘은 당유의 살집이건만 목선민은 언제나처럼 젖살을 연상하였다. 여전히 뽀얗고 토실토실한 당유였다. "무슨 일인가?" "몇 가지 허락받을 것이 있어서..." "아! 그 난처한 방문객들 말인가? 어제 잠깐 이야기는 들었지." "... ..." "그래, 어찌할 참인가?" 당유가 느긋한 표정으로 목선민을 내려보았다. 목선민도 지지 않고 고개를 곧추세웠다. 사형제간에 불똥이 튀었다. 이미 삼년 전부터 곡(谷)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있는 당유였다. 신도곡주 초 진양은 언제부터인가 곡을 비우는 일이 많아졌다. 근자에 이르러서는 일년이 면 석달남짓 밖에는 곡에 머무는 일이 없었다. 자연히 대제자인 당유가 곡주 의 임무를 대리하게 된 터였다. 당유도 목선민 못지않은 야심가였다. 후삼도(後三刀)는 신도곡의 개파이래 단 한 번도 외인(外人)에게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곡내에서도 당유와 목 선민을 위시한 극소수외에는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다. '마검(魔劒) 옥진강이 되살아온다해도 후삼도에는 어림없다.' 신도곡의 백년 정화가 응축되어있는 세초식으로 이루워진 최후의 절초였다. 대대로 곡주의 후계자에게만 전수되는 비전절기였다. 사부 초진양에게는 아 들이 없었다. 그것은 당유에게도, 목선민에게도 하나의 가능성이 되어주었다. 당유는 엄연한 대제자로서 당당히 현 신도곡의 곡주 대리였다. 하지만 목선 민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홀홀단신으로 신도곡의 명성을 하늘꼭대기로 끌어올린 설산소룡이었다. 어쨌거나 흑염도의 손잡이는 하나였다. 둘 중의 하나는 인연을 접어야 했다. 신도곡의 꽃, 초명주(焦明珠)가 신도곡주 초진양 의 유일한 후사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목선민은 곡의 금기(禁忌)를 어겼다. 죽마고우가 아니라 부모형제라 해도 산문안으로 들이는 것은 절대로 허락되지 않았다. 당유로서는 목선민을 궁지에 몰아넣을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이 사형이 임시로 사부님을 대신하여 곡의 잡일들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우형이 능력이 모자란지라 월석당은 현제에게 맡겨놓은 형편이 아닌가?" 당유의 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전혀 없었지만 내용 자체는 그렇치 않았다. 곡주대리라고는 하나, 목선민의 월석당에 한해서는 별반 영향력을 미치지 못 하던 당유였다. 전혀 참견할 건덕지를 남기지 않았던 목선민이었다. 오늘에 야 비로서 꼬투리를 잡게 된 것이었다. 당유는 그저 지나가는 말을 빙자해서 은근슬쩍 월석당에 관한 지휘권의자신에게 되돌려 놓으며 책임의 소재만은 목선민에게 남겨놓았다. 한참 뜸을 들이던 목선민이 대꾸를 하려는데 인기척이 들려왔다. "사형!" "둘째인가? 들어오시게." 광대뼈가 도두라진 육척 거한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초진양의 둘째 제자 공손연(公孫燕)이었다. 성격이 불같이 급하고 행동이 앞서는 지라 다른 사형 제들에 비해서 사려가 깊지 못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공손연이었다. 피차간 에 목숨을 내놓고 도검을 맞대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비록 실전에서의 진정한 강약을 따질 수는 없었지만 나이나 수련기간으로 따져볼 때, 가장 진 척도가 늦은 편도 공손연이었다. 공손연이 목선민을 힐끗 쳐다보고 자리를 잡았다. 허세부리기 좋아하고, 호승심이 강한 공손연이었다. 오래 전부터 월 석당주의 자리를 탐내는 눈치였다. 당연히 목선민이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 었다. 당유는 빙그레 웃었다. 후삼도까지는 아직 염두에도 두고있지 않은 공손연 이었다. 그저 월석당을 차고 앉아 강호에 이름을 알릴 생각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당유는 이 기회에 그에게 그 떡을 쥐어주기로 작정했다. "어떤가, 둘째의 생각은?" "뭐가 말씀입니까?" "어제 월석당에 오신 귀빈들은 둘째도 인사했겠지?" "아! 귀빈은 무슨... 셋째, 곡의 내규는 잘 알고 있겠지?" "... ..." "그동안 목사제가 잘해왔지. 하지만 이번 경우는 이 우형으로도 어쩔 수가 없네. 우리가 가타부타 사제의 잘잘못을 가릴 처지는 아니고 사부님께서 따 로 말씀이 있으시겠지. 목사제의 업무가 너무 과중했던 모양인데 이 우형이 너무 소홀했구먼. 어떤가? 이참에 월석당에서 손을 떼고 잠시 쉬게 해주고 싶은데..." 뜻밖에도 목선민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제, 책임을 통감하고 물러나겠습니다. 단..." 목선민이 거기까지 말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얄미운 놈!' 당유는 혀를 내둘렀다. 이제 약관을 갓 넘은 목선민이었지만 뱃 속에 구렁 이가 열 마리는 넘는 듯 싶었다. 목선민의 반항을 예상하고 공손연까지 불러 들였던 당유였다. 잡음이 많아질수록 장차 곤란해지는 것은 목선민이었다. 여차직하면 곡주대리의 직권으로 강제처분도 불사할 각오였다. 사부 초진양 이 목선민을 어여삐 여긴다고는 하나 사안이 사안인 만큼 아무리 사부라해 도 들어내놓고 당유를 탓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소제의 부덕함으로 곡이 강호의 이전투구에 말려들지도 모르는 우를 범했 습니다. 소제에게 수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당유는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곡주가 부재중인 관계로 쓸데없는 일에 휘말 려서는 곤란했다. 목선민의 그런 요구마저 거절하고 독단으로 처리했다가 자 칫 문제라도 발생하면 오히려 덤태기를 쓸 수도 있었다. 두 사제가 물러가자 당유는 서둘러 지필묵을 준비하고 깨알만한 글씨들을 촘촘히 박아 넣은 후, 작은 대롱 속에 정성스럽게 말아 넣었다. 그리고 집무 실을 빠져나왔다. 최근에 이르러 몸이 더욱 불어버리자 시종의 손발이 자신 의 손발인양 늘어지기만 했던 당유였다. 그러나 이것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튼실한 비둘기를 골라내었다. 태어난 그날부터 전서구로 훈련된 비둘기였다. 대롱을 비둘기 다리에 단단히 묶었다. 잠시 후, 비둘기는 푸른 창공을 박차 고 날아올랐다. 천하의 소년영웅 설산소룡 목선민이 의젓한 자세로 앞서 걸었다. 늠름한 기 상이 햇살에 반짝거렸다. 약간 뒤쳐져서 아구가 종종걸음으로 따르고 있었 다. 목선민이 그런 아구를 돌아보고는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목선민이 보폭 을 좁히고 나서야 아구는 비로소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채경령은 그 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가뜩이나 볼 품 없는 아구가 더욱 초라해 보였 다. 정말 대조적인 친구지간이었다.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았다. 대설산 자락을 타고 내려오자 산 밑은 완연한 봄이었다. 목선민이 코를 킁 킁거리며 주위 경관을 둘러보았다. 상큼한 바람, 눈부신 산록이었다. 멀리 하 얗게 눈이 덮혀있는 대설산 정상마저 그렇게 새로울 수가 없었다. 십수년 넘 게 보아왔던 계곡의 주변이건만 이런 적은 없었다. 목선민은 새삼스러운 시 선으로 주변을 휙 둘러보다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채경령과 눈이 마 주쳤다. 채경령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목덜미가 빨갛게 물들어 있 었다. 사실, 목선민의 선택은 위험한 것이었다. 일견해서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 어보였다. 어찌되었건 신도곡의 손님이었다. 그것도 사흘간이나 머문 내빈이 었다. 수수방관하다가 채경령이 신도곡의 지역에서 불귀의 객이라도 되어버 린다면 신도곡의 위신이 땅에 떨어질 판이었다. 그런 말썽의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손님들을 신도곡의 관할 밖까지 안전하게 호송해준다. 이것 이 목선민의 표면적인 수습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사형 당유가 목선민의 목전에서 코웃음을 칠 정도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오히 려 강호의 복잡한 실타래에 점점 얽혀 들어가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할 가능 성이 더 높았다. 그러나 목선민은 자신을 속였다. 헤어지면 다시 만날 기약 이 없었다. 망망대륙을 떠도는 강호인들이었다. 목선민은 이것이 영영 이별 일 것만 같았다. 목선민의 꿍꿍이 속을 따져볼 필요도 없었다. 그저무작정 채경령을 따라 나섰다고 하는 편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웠다. 목선민의 메마 른 가슴에도 비가 내렸고, 그 비는 황무지를 적셔서 급기야 새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세상은 완연한 춘색(春色)이었다. 여정은 순조로웠다. 일행은 이틀만에 모아개로 나가는 관도에 접어들었다. 채경령을 노리는 잔당들이 기승을 부리기는 어려웠다. 신도곡의 관내였다. 감히 곡주의 직전제자에게 칼을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삼공자께서 어인 일로 예까지 납시셨습니까?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객잔 주인이 먼저 알고 버선발로 달려나왔다. "시장들 하실 터이니, 먼저 허기부터 달래야겠네. 간단히 준비해주게." "예, 예. 알겠습니다." 간단한 주문이었지만 상다리는 거창했다. 식사를 마치고 일행이 각자의 객 실로 돌아가는데, 주인이 목선민을 따로 불렀다. "저어, 삼공자님." "무슨 일인가?" 객잔의 주인이 공손하게 두 손을 떠받들었다. 두루마리였다. 목선민이 두루 마리를 펼치니 선명한 매의 문장이 드러났다. 바로 신도곡의 문장이었다. 두 루마리를 읽고난 목선민이 다시 객실로 향했다. "저어..." "왜 또 그러시는가?" "답변을 받아놓으라고 하셨습니다만..." "되었네." "하지만..." 목선민은 객잔주인을 무시하고 객실로 들어가 버렸다. 무시해 버린다고 해 결될 일은 아니었다. 이틀 후, 모아개 근방에 이르러 목선민은 다시 선택을 강요당했다. 이번에는 서찰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찾아왔다. 둘째 사형 공손 연이었다. 모두가 잠이 들었을 무렵, 공손연은 조용히 창을 타고 들어왔다. "사제, 그건 사부님의 분부와 다름없는 것이라네. 자넨 대사형이 지금 사부 님을 대신하고 있음을 진정 모르는 척할 셈인가?" "돌아가십시오." 공손연은 기가 막혔다. 그것은 월석당주가 신도곡을 넘보는 외부인들에게나 할 소리지, 셋째 사제가 둘째 사형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목선민 의 단호한 태도에 공손연은 은근히 위축이 되고 말았다. 겁먹은 공손연으로 서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네." 공손연은 공연히 그렇게 쏘아부치고 돌아섰다. 모진위는 한결같은 사내였다. '한결같은'이라는 관용어가 주는 의미와는 약 간 다른 의미의 어떤 것이었지만 굳이 단어를 고르자면 그것이 그래도 비슷 했다.살아오는 동안, 갈등도 있었고 방황도 있었지만 기실 그것은 한낱 희 망사항일 뿐, 그는 한결같이 살아왔고, 한결같이 세상을 대해왔다. 그의 생존 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만약 한순간이라도 방심했었다면 이미 살아있는 목숨이 아니었을 모진위였다. 그것은 모진위의 골수에 박혀서 하나의 습관이 자 삶의 방식이 되어버렸다. 그러지 않고는 생존해낼 방법이 없었던 모진위 였다. 그런 모진위가 전혀 새로운 자신의 상태에 당황하고 있었다. 한결같은 모진위가 이중적인 모진위로 변해버렸다. 인간이라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늘상 마음에 달고 다니는 증상, 바로 정신분열이었다. 모진위는 기뻤다. 그러나 그 기쁨은 분명히 기쁨이로되 가슴이 아리는 슬픔 이기도 했다. 모진위는 흐뭇했다. 그러나 그 흐뭇함은 흐뭇함이로되 가슴에 스산한 바람이 드나드는 허전함이기도 했다. 목선민과 채경령이 또 다시 눈을 마주쳤다. 얼굴을 붉히며 어쩔줄 몰라하는 선남선녀(善男善女)의 모습은 진정 아름다움이었다. 모진위는 '청춘은 아름답 다'는 세간의 통설이 이해될 것도 같았다. '다행이다. 선민이는 훌륭한 청년 협객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모진위는 진정으로 기뻤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목이 메어왔다. 한결같은 모 진위가 굉음을 내며 분열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형제 희노애락 사괴가 죽었 을 때, 이미 시작된 증상인지도 몰랐다. 아니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옛날 하상곤이 죽었을 때, 구연기가 죽었을 때, 도학정이 죽었 을 때... 아니 어쩌면 기억은 못하지만 자신의 어머니를 잡아먹고 세상에 태 어났던 그 순간부터, 살모사(殺母蛇)의 운명을 타고난 그날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불안정한 상태의 모진위였기에 급기야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싸늘한 예기가 모진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도(刀)였다. 시커먼 묵도(墨 刀)가 모진위를 얼려 버릴 듯 휘감아 돌았다. '당할 수가 없구나!' 첫 일합에 모진위는 그렇게 판단했다. 숱한 강호들과 싸워왔던 모진위였다. 고도광 현승 정도라면 그럭저럭 해볼만 했다. 육각신마 복태동 정도라 해도 어렵겠지만 버티어 볼 수는 있었다. 대부공 주면세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그 래도 한 수 정도는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유진목이나 역불기라면 이미 우연을 기대할 수 없었다. 지금 묵도를 들이미는 무표정의 사내가 그랬 다. 어찌나 무표정했는지 처음에는 강시나 귀신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했었 다. 마땅히 원조해야 할 유진목이나 목선민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역용술이로군.' 목선민과 유진목은 괴한의 무표정이 가면에 기인하고 있음을 한눈에 알아 보았다. 모진위가 인민면구의 적수가 못된다는 것도 한 눈에 알아 보았다. 먼저 도움의 손길을 뻗히려던 목선민이 움찔했다. 의미심장한 표정이었다. 몇 합 지나지 않아서 모진위는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섰다. 보다 못한 유진 목이 부채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그도 팔짱을 끼고 물러났다. 유진목 역시 목선민 못지 않게 의미심장한 표정이었다. 두 절정고수가 사태를 관망하는 가운데 상황은 점차 급박해져 갔다. 모진위는 땅으로 가라앉듯이 하반신을 접었다. 묵도는 뺨을 스치고 지나가 발꿈치 한치 앞에서 흙먼지를 일으켰고, 그도 모자라 좌측의 바위에 불똥을 만들고, 나무가지가 우수수 떨어뜨렸다. 이 모두가 거의 동시에 이루워진 것 처럼 느껴졌는데 모진위는 자신이 어떻게 그 연속적인 도초를 피해냈는지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날카로운 도초를 피하고 있 음은 언제나처럼 무의식상의 또 다른 모진위가 잊지않고 반사신경을 제대로 작동시켜준 덕택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별 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수준이 많이 떨어지는 모진위가 절정의 반사감각을 발휘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지만 고수가 그런 반사감각을 활용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물론 내공, 초식, 실 전운용은 말할 것도 없고 반사감각마저도 인피면구가 한수 위였다. 그러나 환골탈태 이후의 모진위도 육감과 반사감각을 어느 정도는 의식상에서 통제 를 가하고 있었다. 적어도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일은 없었다. 예각을 그리며 선회한 묵도가 허리와 목, 왼팔을 동시에 노리며 다가왔다. '허리가 먼저, 목은 허초, 왼 팔에서 다시 방향을 바꿔 가슴이로군.' 모진위는 상대의 도는 쳐다보지도 않고 허리께로 검을 돌렸다. 도검이 격돌 했다. 그러자 모진위는 생각할 것도 없이 막바로 가슴을 방비하며 우측 전방 으로 사선을 그리며 반보 전진했다. 그대로였다. 묵도의 소나기가 모두 아슬 아슬하게 튕겨나갔다. 반사신경만으로는 불가능한 방어동작이었다. 인피면구 의 초식은 그만큼 신기절묘했다. 인피면구의 초식 전개방향을 미리 숙지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공격들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모진위의 육감대로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공격은 가일층 심해졌고 모진위는 모든 것을 육감에 의존하였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목선민이 도를 꼬나쥐고 앞으로 성큼나섰다. 그러나 유 진목이 막고 나섰다. "조금 기다리게." "노선배,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지도 않은 것 같네. 조금만 기다려주게" 유진목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파도와 같은 도세가 모진위의 백회혈을 압박하였다. 태산처럼 거대한 도였 다. 뒤로 물러서면 찔러올 것 같았다. 옆으로 돌면 베어올 것 같았다. 차고 오르기에는 하반신이 너무 허전하였다. 또한 회피할 시간도 없었다. 그때 뜻 밖의 절묘한 수단이 뇌리를 스쳐갔다. 모진위의 검초가 화려한 변신을 시작 했다. 모진위의 검 끝에서 돌연 수십 개의 검화가 피워 올랐다. 마치 도화가 점점이 날리는 것처럼. 도와 검이 무수한 불꽃과 굉음을 만들어 냈다. 다시 선명한 검화가 피어올랐다.그리고 연이어서 또 하나의 검화가 겹쳐졌다. 마 치 매화 위에 쌓여있는 눈송이처럼. 숨돌릴 사이없이 도검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모진위는 점차 무아의 경지 에 빠져들었다. 묵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빨라졌고, 기기묘묘한 움직임을 보 여주었으며, 강도를 더해갔다. 그에 따라서 모진위의 검도 사방을 온통 검광 (劍光)으로 뒤덮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톱니바퀴처럼 도와 검이 맞물려 돌아갔다. 그것은 도검의 혈전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도검이 어우러진 한바탕 의 춤사위에 가까웠다. 모진위는 일순간에 피가싸늘하게 식어 버리는 것을 느꼈다. 모진위는 자 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게 되었다. 커다랗게 눈 앞으 로 다가오는 묵도를 보면서도 마음이 일어나지를 않았다. 수수방관하던 유진 목이 그제서야 부스스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흥!" 유진목이 거리를 좁혀오자 인피면구의 괴인은 귀신이라도 만난 양, 질겁을 하며 몸을 뽑았다. 그리고 바람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유진목도 애써 추격할 생각은 없었는지 몸을 돌려서 모진위에게 걸어왔다. 모진위는 가슴이 털컥 내려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평소의 자상한 유진목이 아니었다. 얼 음처럼 냉정한 목소리로 유진목이 물어왔다. "자네는 누군가?" 채경령의 표정도 파랗게 질려 있었다. 다만 목선민의 표정만이 별 다른 변 화없이 한결 같았다. 목선민도 '한결같은' 사내였다. 자신의 아버지 목연탁이 가문의 숙원을 그의 작은 두 어깨에 모두 올려놓은 그 날 이후, 단 한 순간도 빗나가 본 적이 없 었다. 오로지 천하제일 고수, 그것만을 바라보며 달려왔다. 어릴 적 친구 모 진위가 두 개의 자신을 놓고 당황하고 있을 때, 목선민도 두 개의 자신을 놓 고 갈등하고 있었다. 목선민의 가슴에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이십평생을 한결같이 달려왔던 목선민이었다. 적어도 채경령을 만나기 전까지는. 목선민은 지금 유진목이 하고있는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알고 있었 다. 더 나아가서 그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함정이 었다. 덫에 걸린 것은 모진위였지만 목선민에게는 모진위 자체가 하나의 덫 이었던 것이다. "대답해보게. 자네는 도대체 누구지?" "... ..." 채경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끼어 들었다. "신검반의 청송곡 도검무(靑松谷 刀劍舞)..." 신검 옥진강과 마도 초웅천의 마지막 결전을 청송곡의 혈투라고 했다. 그 유명한 결전은 후일 하나의 투로가 되었고, 추혼십이절을 공연하는 많은 무 극단(舞劇團)의 인기공연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장가량이 이끌었던 신검반의 도검무가 유명했다. 신검반원이라면 누구나 청송곡 투로라면 눈을 감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모진위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검반에 입문한 이래, 수천 번을 반복수련한 도 검무였다. 상대만 있으면 꿈 속에서도 저절로 대응할수 있을 정도였다. 인피면구의 암습자는 그 도검무의 흑염도법 부분을 실전으로 변용하여 공 격해왔다. 절대강자 초웅천의 절묘한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니만큼 한참 격이 떨어지는 모진위가 그 황망 중에 뾰족한 파해법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진위는 괴한의 도를 절묘하게 막아냈다. 절박한 위기에 빠지자 부지불식간에 이미 습관화되어버린 도검무를 전개하였다. 또 하나의 절대강자 옥진강의 파해법이었다. 모진위의 검 끝에서 너무도 분명한 추혼십 이절의 초식 장미백변, 사화결실, 도화점점이 전개되었다. 채경령의 조부 채소우는신검극의 광적인 애호가였다. 그의 단 하나뿐인 손 녀가 바로 채경령이었다. 청송곡의 도검무를 알아보는 것은 채경령으로서는 일도 아니었다. 무공을 읽는 안목이 일천한 채경령도 단박에 알아차릴 정도 였으니 예리한 유진목의 눈이라면 재삼, 재사의 확인마저 끝났음은 말할 필 요도 없었다. 마침내 유진목의 일갈이 비수가 되어서 모진위의 가슴을 찔러 왔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번 호 : 8832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07-09 21:25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51- "자네의 사부는 누구인가? 신검반의 구연기 노인이 자네 사부 맞는가?" "... ..." 모진위의 고개가 땅바닥을 향했다. 세간은 군사부일체를 말하지만 강호에서 그 으뜸은 스승이었다. 자고로 정사를 막론하고 스승을 부정하는 것은 패륜 중에도 패륜이었다. 모진위의 태도는 구연기가 자신의 스승임을 무언으로 시 인했다. 확신에 찬 유진목의 추궁이 뒤를 이었다. "네 놈은 천하흉살 모진위가 틀림없으렸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채경령은 장탄식을 했다. "내가 실성한 년이로구나." 채경령은 치를 떨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진위를 향한 분노인지 자기자신을 향한 분노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가거라. 다시 만나는 그 날이 네 놈의 제삿날이다." 유진목의 내심은 자꾸만 모진위를 단 칼에 쳐죽이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해 우심법은 석전문의 비전절기였다. 비록 기초의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모진위 에게 그 해우심법이 심어져 있었다. 유진목이 뿌린 씨이므로 유진목이 거두 워야함은 물론이었다. 유진목은 유혹을 뿌리치기라도 하듯 퉁명스럽게 내뱉 었다. "썩 꺼져라." 희미한 애원의 감정까지 담겨있었다. 모진위가 비틀거리며 어둠의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채경령은 가문의 원수 모진위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실 성한 여자처럼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위가 암흑이었지만 멀리 움푹 가라앉은 곳에서 불빛들이 보였다. 성도였 다. 목선민은 비탈에 앉아서 하염없이 성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이틀만 나아가면 성도였다. 목선민에게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인생행로의 전환점이 었다. 그토록 갈구했던 신도곡의 후삼도는 이제 모두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더불어 천하제일을 향한 그의 야망도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목선민의 심 사가 참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 다. 목선민이 돌아보니 채경령이 걸어오고 있었다. 강철같이 단단한 의지의 사내 목선민에게서 천하제일을 향한 의지를 꺽어버린 여인 채경령이 걸어오 고 있었다. "어인 일이시오, 야심한 밤인데. 피곤할 터인데 더 주무시지 않고." "공자께서는 어인 일로 잠을 못드시고..." 목선민이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소녀 때문에 파문까지 당하시다니 괴로울 따름입니다." 목선민이 또 다시 빙그레 웃었다. 목선민은 결국 파문을 통고받았다. 신도 곡이 목선민을 파문시킨 결정적인 이유는 모진위였지만 목선민이 파문당한 근복적인 이유는 결국 채경령이었다. 아구의 정체가 모진위로 판명되던 그 날, 채경령은 목선민과도 이별을 재촉했었다. 채경령과 헤어져야 한다고 생 각하니 목선민은 견딜 수가 없었다. "소생은 진위가 아니라 채소저를 따라왔습니다." 그렇게 말해놓고 목선민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입 밖에 내게 되라고는 상 상도 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본심이었다. 사실이 그랬다. 목선민이 채경령 일 행과 동행하는 것은 모진위에게 득이 되지는 않았다. 다만 모진위의 목적에 부합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모진위의 목적은 채경령의 이익과 직결되어 있었 다. 목선민은 자신의 이와같은 행동이 모진위에게 불이익으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채경령은 귀 밑까지 빨개졌지만 그런 목선민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유진목도 굳이 반대하지는 않았다. 청춘남녀의 애타는 심 정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터였다. 목선민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진정되자 걷잡을 수 없는 상실감이 몰려왔다. 이십년을 일도정진해왔던 천하제일의 길이었다. 꿈으로 가득찼던 한 시대가 이렇게 종말을 고하고 있다고 목선민은 생각했 다. 채경령은 그런 목선민이 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채경령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신도곡 이후의 여정은 편안하기 그지 없 었다. 신도곡을 출발한 이래, 모진위를 암습한 인피면구의 사내를 제외하고 는 단 한건의 분란도 없었다. 그러나 채경령은 불편했다. 그리고 불안했다. 알 수 없는 상실감이 그녀의 가슴을 가득 메웠다. 터무니없는 자기연민이 그 녀의 심신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목선민은 그런 채경령이 가여워 견딜 수 가 없었다. 향기로운 봄밤이었다. 채경령이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목선민이 얼결 에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여인의 체취가 훅하고 목선민의 코밑에 다가 왔다. 목선민의 가슴에 만화방초가 피어났다. 목선민의 황무지가 단 몇일 사 이에 화원으로 변해버렸다. 목선민의 단단한 근육이 채경령을 감싸고 있었다. 사내의 불같은 열기가 그 대로 채경령에게 전해졌다. 채경령은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 았다. 기절할 것처럼 아찔해졌다. 지금이 어느 때인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 차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하늘이 빙빙돌고 머리가 혼미하였다. 무언가 뜨거 운 것이 채경령의 입술을 내리 눌렀다. 채경령은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채 경령과 목선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그대로 풀섶에 쓰러졌다. 상실감에 몸 부림치던 두 남녀가 그렇게 서로의 빈 곳을 채워주고 있었다. 때는 봄밤이었 고, 피가 끊는 한쌍의 청춘남녀였다. 낙양표국 사천지국의 지국주(支局主) 성회윤(成回允)은 태부회(太富會)의 사 람이 찾아왔다는 전갈에 혀를 찼다. 그렇치 않아도 일간 태부회를 방문할까 어쩔까망설이던 중이었다. 이제 사월도 이틀 밖에 남지 않은 터였다. 옥문 관에서 보내졌다는 태부회의 표물이 도착한 것이 지난 사월 십삼일이었는데 표물을 인수할 태부회에서는 보름이 지나도록 감감 무소식이었다. 물경 십구 일간이나 공으로 보관해주었던 꼴이었다. 그동안의 보관료라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억하심정마저 생겼다. 사월 말까지도 회수해 가지 않으면 표국에서 임의로 처분해 버릴 수는 있 었다. 그러나 그 표물이란 것이 달랑 마차 한 대에 이곳 사천에서는 별로 유통되지도 않는 물건이었고, 태부회는 낙양표국과 마찬가지로 맹의 동료였 다. 마음대로 처분해버리기에는 껄끄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렇다고 태부회의 장원까지 표물을 운송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정도의 수고가 별스러 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책임소관의 문제였다. 표물의 운송계약은 분 명히 낙양표국의 사천지부까지라고 되어 있었다. 만약에 성회윤이 임의로 사 천지부에서 태부회까지 물품을 호송하다가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전적 으로 성회윤 개인이 책임을 져야했다. 운송계약상의 월권이므로 낙양표국의 책임이 아니었다. 물론 사천지국이 직접 운송하는 상태이므로 태부회의 책임 도 아니었다. 성회윤 혼자서 덤태기를 써야했다. 성회윤은 전 표국계의 웃음 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그 만큼 표물운송 조건의 준수는 사사로이 행해서는 안되는 철칙이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처분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쨋거나 맹의 그늘아래 같이 밥을 먹는 처지였다. 생기는 것도 없이 태부회 의 반감을 살 우려가 있었다. 골머리를 썩고 있던 성회윤 앞에 드디어 태부 회의 인수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래 어인 일이시오?" 전태극(全颱戟)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자에게 성회윤은 짐짓 너스레를 떨었 다. 골치를 썩힌 만큼은 대접을 해 줄 심산이었다. "국주께서는 별래무양하셨는지요? 격조했습니다. 반년만에 뵙는군요." "허어, 전형께서도 별 일 없으셨는지..." 성회윤으로서는 전혀 기억에 없는 인물이었지만 골탕먹일 생각에만 골몰해 서 곰곰히 따져보지도 않고 변죽을 울렸다. 태부회의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인 가. 시시껄렁한 인물까지 일일히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표물의 인수에 있 어서 인수자의 신원확인은 필수였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태부회 회주가 직접 찾아와 사정을 할 때까지 표물을 내놓지 않고 애를 먹일 심산이었다. 성회윤은 애써 딴청을 피웠다. "이렇게 찾아뵙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오라..." "왜요? 긴히 맡기실 표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근간에 일이 잘 마무리되어서 저희 회주께서도 여간 흡족해하시 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전태극이 옻칠을 한 나무상자를 꺼내놓았다. 성회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전태극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표사들의 목숨값으로 장거리교역의 이익을 챙기는 장사치들이었다. 큰일이 무사히 마무리되면 의 례히 그런 답례가 있었다. 물론 표국에대한 공식적인 답례가 아니라 각각의 표사들에게 돌아가는 뇌물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표물을 인계하러 온 것이 겠거니 지레짐작하고 있었는데 전태극의 행동은 전혀 예상밖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야 근자에는 기억에 남을만큼 중요했던 표행이 없었다. 서둘러 목 합을 열어본 성회윤은 또 한 번 놀랐다. 목합 안에는 칠십냥짜리 은원보가 무려 일곱 개나 들어있었다. 서로간의 커 다란 인사치례는 주로 연초에 이루워졌다. 아쉬운 쪽이 표국이다보니 금일봉 을 보내는 쪽은 주로 표국이었다. 그러나 연초라고 해도 표국에서 주요 행회 에 보내는 금액은 은 오백냥을 넘지 않았고 지역의 행회에서 거물 표두들에 게 전해지는 금액도 은 백냥을 넘지 않았다. 성회윤이 비록 지역의 거물 국 주라고는 하나, 녹림의 무리들에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뼈가 상하면서 표물 을 지켜내었던 지난 삼년 전의 피투성이 표행길에서도 그 위로금은 은 삼백 냥을 넘지 못했다. "이게 무엇이요?" "약소합니다. 국주의 은덕을 어디 돈을 환산할 수 있겠습니까만은... 회주님 께서도 따로 감사의 마음을 전해달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허허, 본좌가 무어 한 것이 있다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난 번 폭우로 장강 삼협이 위태로웠는데, 귀 표국에 서 목숨을 아끼시지 않은 덕분에 저희 사업이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니 벌써 가시려고요? 일부러 예까지 오셨는데... 이게 내가 대접이 너무 소홀했구먼. 술상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애초에 술상은커녕, 차 한잔도 생각이 없었던 성회윤이었다. 그러나 뜻밖의 횡재가 있고나자 입술이 귀까지 걸렸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대접받은 것과 진배없습니다. 아직 사무가 끝나지 않 았는지라 결례를 무릅쓰고 그만 일어나야 겠습니다." "허허, 이렇게 섭섭할 수가... 바쁘시다니 어쩔 수 없지요. 일간 한 번 모실 터이니 그 때는 꼭..." "허허, 말씀만으로도 황송합니다." 전태극은 정말 바쁜 일이 있는지 총총히 물러갔다. 성회윤이 흐뭇하게 바라 보다가 아차싶은 마음에 불러세웠다. "아참! 전대인." "무슨 일이시온지..." "표물을 잊으셨습니다. 그래 물표(物標)는?" "무슨 물표...?" "허허허, 옥문관에서 표물이 당도한 지가 벌써 보름은 지났습니다." "무슨 표물을 말씀하시는 건지?" "지난 삼월에 옥문관에서 맡겨주신 서역의 석재(石材)말입니다." "예에? 그 석재가 어찌하여 이리로 왔을까요? 그건 지금쯤 항주에 있어야 마땅한 물건이온데..." "항주요?" "예." "허허, 무슨 착각을 하신거나 아니신지... 지금 이곳에 잘 보관되어 있습니다 만은..." 전태극과 성회윤은 서둘러서 창고로 달려갔다. "허허, 이거 큰일이로군요. 저희 쪽에서 뭔가 단단히 잘못한 모양입니다. 이 미 항주에 당도해 있어야 할 물건인데..." 전태극은 낭패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겉으로는 자기 쪽의 잘못이라고 했지 만 전태극의 표정은 표국을 질책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표물이 되바뀌는 일이 왕왕 있었는데 대저 이런 실수는 표국이 저지르는 경우가 많 았다. 장사꾼들은 그런 일에서만큼은 실수가 없었다. 성회윤은 당황했다. 전 태극의 심각한 표정으로 보아서 아주 중요한 거래에 해당하는 물건임이 분 명했다. 성회윤 자신이 말썽의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거의 이십일동안 통고도 하지 않았으니 도의적인 책임은 면할 길이 없었다. 또한 거금의 사례금조차 받은 처지이고보니 더욱 민망한 노릇이었다. "하긴 궁벽한 사천땅에서 그런 호화스러운 석재가 가당키나 하겠소? 팔백 관이면 개봉에서도 어지간한 호화저택이 아니면 엄두도 못낼 터인데. 어찌 했으면 좋겠소?" 한참을 망설이던 전태극이 은밀하게 말했다. "다행히도 아직 여유가 좀 있군요. 서둘러 주시기만 한다면 기일내에 항주 에 당도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후인 오월 이일 오시(午時), 태부회의 마차가 낙양표국의 사 천지국을 나섰다. 목적지는 항주였다. 일이 잘되려고 했는지 마침 항주로 가 는 표행이 예정되어 있었다. 성회윤이 한 일이라고는 그저 태부회의 표물을 슬쩍 끼어넣고 일정을 사흘 앞당긴 것 뿐이었다. 성회윤과 전태극은 서로 단단히 약조하였다. 사실 태부회의 회주나 표국의 국주가 알아서 좋을 것이 없는 일이었다. 여차하면 답례금을 다시 토해내야 할 형국이었다. 전태극과 성회윤의 선에서 비밀리에 처리하기로 합의를 보았 다. 또한 일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당분간 성회윤은 태부회 쪽은 얼씬도 않기로 했고, 전태극도 표국의 출입을 억제하기로 했다. 채경령이 사천에 무 사히 도착한 것이 사월 이십팔일 축시(丑時)였으니 그로부터 꼭 사흘하고도 여섯 시진 후에 태부회의 소유로 알려진 마차가 성도를 출발했던 것이다. 묘 한 것은 항주에서 물건을 인도받을 인물이었는데 정체를 불문하고 무조건 '물표를 소유하고있는 자'였다. 전태극의 간곡한 당부로 새로 추가된 항목이 었다. 성회윤으로서는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채경령이 사천을 떠난 것은 낙양표국의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 이틀 후였고, 모진위가 당유를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당유로서는 모진위가 필요없었다. 모진위는 목선민을 얽어매기 위한 일개 덫에 불과했고 이미 그 역할을 십분 달성한 상태였다. 그러나 사태가 급변해 버렸다. 당유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모진위와 대면하였다. 문제는 사부 초진양의 급거 귀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초진양은 귀곡하자마 자 목선민의 행방부터 물었다. 그리고 사태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당유가 파 문시킨 목선민을 초진양이 다시 받아들였다. 오히려 사정하는 쪽은 초진양이 었고 버티는 쪽이 목선민이었다. 그러나 사부의 조건은 너무도 파격적이었 다. 목선민이 감히 거절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수중에 거의 들어왔던 후삼도와 신도곡 후계자의 자리가 다시 멀어졌다. 사 태는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당유는 포기할 수 없었다. 집념의 화신 당유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어쨌든 해보는데까지는 해보기로 했다. 돌파구를 모색하기 위해서 노심초사하고 있는 당유에게 모진위가 나타났다. 당유는 그 런 모진위를 놓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어인 일로 나를 찾았는가? 지금 쯤이면 장강에 몸을 싣고 있는 줄 알았는 데..." "장강이라니요?" "몰랐는가? 삼사제(三師弟)는 자네의 동행분들과 함께 장강을 타고 항주로 가고 있다네." "항주요?" "그렇다네. 그런데 무슨 긴한 일로 나를 찾았는가?" "근방을 지나다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무슨 소문?" "선민이가 소생 때문에 파문을 당했다는 말도 있고, 이곳 곡주님의 영애와 갑자기 정혼을 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모진위는 채경령과 헤어져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게 되었다. 화정으로 가서 희노애락 사인의 유골을 수습할 작정이었다. 그러던 것이 신도곡 근처 의 객잔에서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점소이는 목선민이 모진위 때문에 파문을 당했다고 원망의 소리를 늘어놓았고 반대로 객잔주인은 목선민이 곡 주의 고명딸과 정혼을 하게되었고 곡주의 정식 후계자로 결정되었노라고 축 하를 해주었다. 목선민과 함께 있었던 덕분에 객잔의 식솔들과는 약간의 안 면이 있는 터였다. 모진위는 그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고자 신도곡의 당유에 게 기별을 놓았던 것이다. "파문을 당했다는 것은 사실무근이고 선민이의 배후자가 결정된 것은 사실 이네. 선민이가 우리 곡의 차기 장문인으로 내정되었지." "그, 그럴 리가..." 당유가 보니 모진위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사부 초진양의 결정은 당유로서도 뜻 밖이었다. 뿌리를 따져보자면 신도곡의 개파조사는 신도(神 刀) 초웅천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현 신도곡주 초진양은 초웅천의 숨겨진 자 식이었다. 덕분에 초진양은 초씨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할 때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더불어 초웅천의 흑염도법(黑閻刀法)도 실전을 모면했다. 모든 서자가 그렇듯이 초진양도 톡톡하게 어둠의 쓴 맛을 보고 자랐다. 첩 의 자식들이 모두 그렇듯이 초진양도 정실자식들을 이기고자 무던히도 갈망 했었다. 초진양은 아버지 초웅천을 원망했고, 그의 배다른 형제들을 질투했 었다. 언젠가는 그들을 모두 누르고 보란 듯이 천하제일이 되겠노라고 맹세 도 했었다. 아버지 초웅천이 비명에 가자 그의 목표는 당연히 옥진강이 되었 다. 흑염도법의 마지막 삼초식이면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다. 아버지 초웅천은 그 후삼도가 없이도 옥진강과 대등한 접전을 겨루웠다. 그러나 초진양은 이 십년의 고련에도 불구하고 도를 접어야 했다. 희대의 천재라는 마도 초웅천 이 십년을 투자하고도 채 연성못한 후삼도였다. 초진양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결정적으로 옥진강은 초진양이 채 강호출도하기도 전에 저승길로 떠나버렸 다. 그래서 초진양은 새로운 신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신검마도(神劒魔刀) 의 강호역사를 다시 쓰기로 했다. 신도마검(신도마검)의 새로운 전설을 창조 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모진위와 목선민은 서로 교 류할 수 없는 불과 기름이었다. 당유는 몸보다는 머리를 주로 사용하는 모사꾼이었다. 자신의 경쟁자이자 막내사제인 목선민에 대해서도 전혀 소홀함이 없었다. 신양의 용무관에서부 터 대설산의 신도곡까지 그의 신상에 관한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도 놓치지 않았다. 따라서 신양 용무관에서 동문수학한 죽마고우의 이름이 모진위라는 사실도 이미 조사해놓은 터였다. 아구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 한 청년을 보고 당유가 추측할 수 있는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목선민이 모진위와 같이 계곡을 나서는 것을 보고 당유는 쾌재를 불렀다. 짐짓 모진위의 수상적은 행적을 들어 목선민에게 곡으로 귀환할 것을 재차 독촉하는 것도 잊지않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당유는 모진위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서 인피면구를 쓰고 기습을 감행하였고 모진위는 너무도 쉽게 당유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버렸다. 당유가 기습한 지, 십초도 지나기 전에 그 유명한 추혼검의 투로를 펼쳐주었던 것이다. 아마도 유사이래 가장 완벽 한 청송곡의 도검무였을 것이라고 당유는 흐뭇해했다. 당유의 흑염도법은 그 어느 신검 광대들 보다 뛰어났으며 모진위의 추혼십이절 또한 실전적인 투 로에 관한 한, 가히 일절이었다. 당유는 용의주도하게도 미리 별개의 미행자 를붙여놓은 상태였다. 당유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대의명분의 문제였다. 초진양 사부가 아무리 목선민을 아낀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파문은 기정사실이 었다. 당유는 사건발생 두 시진만에 목선민의 파문을 명하였다. 후삼도가 이 미 수중에 들어온 듯이 기뻐하였다. 그런데 사부 초진양이 만사를 제쳐놓고 곡으로 되돌아오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당유는 불신으로 가득찬 모진위의 표정에서 희미한 희망의 싹을 보았다. ============================================================= 일주일 동안 정신이 없었습니다. 알고보면 별로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날마다 맨정신을 유지해야겠기에 도통 일주일간 술한잔 못 마셔봤군요. 술이라도 들어가면 영 개발세발 글이 정리안되는 지라... 미리 써놓은 부분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올리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퇴고를... 그러다보니 날마다 서너시간은 비워 두어야 하는지라 그 좋아하는 쐬주 한 잔은 꿈도 꾸지 못했지요. 어쨌든 주말은 좀 쉬기로 했습니다. 흑, 워낙에 게으른 놈이라업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며칠 게길지도 모릅니다. 비록 시작은 제가 했지만 그 완결은 독자 여러분이 끌고 가는군요. 표류공주가 온전히 내꺼라고만 주장할 수는 없는 흑수노계였습니다. 『무림천하-창작연재란 (go MURIM)』 2741번 제 목:[연재] 표류공주 52회 -최후식- 올린이:하이문 (문홍일 ) 99/11/11 12:05 읽음:370 관련자료 없음 ----------------------------------------------------------------------------- 번 호 : 9712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11-08 14:07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52- 19.종횡강호(縱橫江湖) 장도기(張蹈崎)는 개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당유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 다. "저 친구는 앞서 출발한 어떤 작자들 보다 먼저 항주에 도착하고 싶은 모 양이네. 그 일당들이 장강 수로에 몸을 실은 것이 이미 보름 전이라네. 게다 가 여기서 금사강의 나룻터까지만 해도 족히 닷새는 걸리겠지. 상대는 제법 빠른 배로 최고속도로 달리고 있겠지. 이십일을 단축시킬 만큼 빠른 쾌속선 을 없다고 보네만." 장도기가 이번에는 마구간 쪽으로 턱짓했다. 그러나 당유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저었다. "말을 모르는 친구야. 이제부터 기마술을 가르치느니 차라리 배를 새로 제 작해주는 것이 속 편할 걸세." 장도기는 십년 가까이 신도곡의 일을 해왔지만 아직까지 이런 임무를 맡은 적은 단연코 없었다. 주로 문서 나부랭이의 배달이 대부분이었다. 언제나 무 언가 비밀스런 물건이나 문서를 받아 오거나 전해 주는 것이 장도기의 임무 였다. 신도곡의 비밀 연락원정도가 되는 처지였다. 물론 장도기의 입장에서 는 스스로가 한낮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장도 기에게 당유가 예상치 못한 심부름 품목을 가져왔다. 그것은 문서도 아니었 고, 물건도 아니었다. 바로 사람이었다. 장도기로서는 당연히 뜨악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신도곡의 똥구녁을 핥아대는 배달부였지 그 이 름도 거창한 호위무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유도 보표로써의 장도 기의 자질은 잘 알고 있었다. 당유는 자신이 데려온 청년을 어딘가로 배달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청년의 경공수련을 도와주라는 명령이었다. 장도기가 마침내 문제의 청년에게 눈길을 돌렸다. 장도기의 눈은 청년의 하 단전과 다리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제서야 당유가 고개를 바로 세웠다. "경공(輕功)은 따로 배운 적이 없어도 제법 내외공이 탄탄한 친구라네. 경 공 문외한치고는 달리는 재간도 제법이지. 열흘이면 되겠는가?" 장도기는 단단하게 뒷짐을 쥐며 하늘을 향해서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었다. 콧방귀라도 날려주고 싶었지만 그래도 당유의 체면을 생각해서 콧방귀만은 생략해주었다. "어쨌든 부탁하네." 사천의 서쪽 경계인 대설산에서 동쪽의 항구인 항주까지라면 일직선으로 긋는다 해도 일만리(一萬理)가 넘었다. 가장 속편한 이동수단은 역시 장강을 타고 가는 것이었다. 장강의 뱃길을 이용한다면 대략 석 달, 거기서 돈을 충 분히 투자한다면 두 달로 단축하는 것도 가능한 여정이었다. 기후 따위의 여 로 형편에 따라서 보름정도 늦어질수도 있겠지만 추격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의지해서는 안될 변수였다. 이미 보름 전에 배가 출항했다고 했으니 한달하 고 십오일 후면 배는 이미 항주에 있기가 십중팔구였고, 설상가상으로 청년 은 이제부터 열흘 후가 출발이었다. 그 짧은 기간동안에 장도기에게서 경공 의 기초를 익혀야 했다. 그 열흘마저 제한다면 경공의 문외한인 생초짜에게 대륙 횡단을 위해 주어진 시간은 고작 삼십 오일 남짓이었다. 장도기는 비록 당유의 면전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콧방귀를 참아낸 것은 정 말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장도기가 상관할 문제는 아니었다. 장도기로 서는 그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할 뿐이었다. 달려야 하는 당사자는 장고기가 아니었다. 부질없는 헛수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 조금 허탈하기는 했지만 마 냥 서운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늙은 다리를 이끌고 여기저기 꽁지에 불 붙은 개처럼 쏘다는 것보다는 이 편이 차라리 몸은 편했다. 물론 장도기가 일년 삼백 육십 오일을 날마다 달음박질만 하고 사는 것은 아니었다. 임무와 임무 사이에는 약간의 공백기는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 공백기간이야말 로 십이시진 내내 대기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차라리 임무수행중에는 밥먹고 잠자는 시간이라도 마음 편하게 쉴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경공 교관은 별로 손해날 것도 없는 한가한 임무였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도 자신이 콧방귀를 참아낸 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장 도기 자신이 직접 달린다 해도 한달의 시간 여유가지고는 그 성사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설사 성공을 한다고 해도 심신이 걸레처럼 너덜거리는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여정이었다. '그 교활하던 당유란 놈이 어쩌다 저렇게 망가졌지? 그래도 열흘은 편히 쉴 수 있겠군.' 하고 장도기가 짐짓 마음을 풀어놓는데 당유가 농담처럼 한마디 던졌다. 순간 그 농담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장도기의 심장을 찔렀다. "비웃을테면 비웃어도 좋네. 단, 댓가는 치뤄야 겠지." 장도기가 안면을 굳힌 채, 당유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당유가 조소를 머 금은 얼굴로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목숨을 걸어야 할 걸세. 할텐가?" 잠시 고민하던 장도기가 거만한 표정으로 당유를 쏘아보았다. 당유가 장도 기의 의도를 눈치채고 다시 물었다. "자네가 이기면 어쩔테냐고?" 장도기가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 자네지. 나도 자네를 걸겠네." 돌연 장도기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을 발했다. 장도기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떠올랐다. 경멸, 그 자체라고 할만한 최고 의 비웃음이었다. 그렇게 다시 내기가 성립되었다. 죽편(竹片)이 펼쳐졌다. 죽편 하나의 크기가 가로 석자, 세로 두자 반 정도 였는데, 펼쳐진 죽편은 벌써 열 편을 넘어서고 있었다. 제법 넓은 대청이었 으나 이미 삼분지일 이상이 죽편으로 점령당해 버렸다. 그래도 장도기의 손 은 멈추지 않고 새로운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두루마리를 단단하게 묵고 있는 끈을 풀어내자 죽편 속에 감춰져 있던 구불구불 복잡한 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감숙(甘肅)이로군. 이건 필요가 없고...' 장도기는 죽편을 다시 둘둘 말아서 끈으로 동여매고 한켠으로 밀어놓았다. 그리고 새로운 죽편을 꺼내들었다. 종횡으로 얽혀 있는 실선들을 찬찬히 들 여다 보더니 이미 펼쳐진 죽편사이의 빈칸에 잘 끼워놓았다. 그렇게 죽편 두 루마리들을 빼고 보태자 죽편들의 집합은 어느 새 직사각형이 만들어졌다. 대륙 중남부의 산맥과 강들이 제 모습을 찾았다. 사천에서 절강까지라면 이 미 눈을 감고도 그 행로를 그려낼 수 있는 장도기였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정작 대륙을 주파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아구라는 청년이었 다. 한 번의 도약으로 넘을 수 있는 협곡의 길이도 다르고, 단숨에 타고 올 라야하는 절벽의 높이도 달랐다. 대륙을 도보로 횡단하는 최선의 방법은 산맥을 따라가는 능선타기였다. 아 구의 경우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천분지만 끼고 돌면 바로 대파산맥 (大波山脈)의 지류에 들어설 수 있었다. 대파산맥의 서쪽 끝은 대별산맥(大別 山脈)과 연결되어 있었다. 대별산맥의 끝에서 항주까지도 그럭저럭 능선의 모양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설산에서 대파산맥까지는 사천분지가 가 로 막고 있었다. 또한 대설산 일대는 능선이 남북을 종단하는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동진(東進)을 위해서는 우회를반복하는 거리상의 손해를 감수해야 맘 했다. 장도기가 줄자를 들고 대략의 예상경로를 재어보니 출발지에서 대 파산맥의 동남쪽 지류의 끝자락까지만도 칠천여리에 달하였다. 전체거리의 거의 절반에 해당했다. 평균잡아서 하루 사백리의 험난한 능선 타기였다. 아 무리 생각해 봐도 장도기가 질 수 없는 내기였다. 장도기가 열흘 내에 해 내야하는 일은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 었다. 그 첫째는 하루에 팔백리를 달리는 장도기의 주법(走法)을 전수해 주는 것 이었다. 물론 장도기 자신은 하루에 팔백리를 달릴 수 있었다. 밥도 안먹고, 잠도 안자고 십이시진 내내 달린다면 팔백리 정도는 가능했다. 다만, 다음날 도 그렇게 달릴 수는 없었다. 다음날은 사백리, 또 그 다음날이라면 이백리 가 고작이었다. 그리고나서 또 다음날 다시 달릴 수 있는 지는 장도기도 보 장할 수 없었다. 여하튼 장도기가 그렇게 달릴 필요는 없었다. 그 방법만 전 수해 주면 되는 것이었다. 아구가 그렇게 달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 로 당유와 아구의 문제였다. 둘째는 수직으로 서있는 이십여장 높이의 절벽을 한 호흡에 타고 올라가는 벽호공(壁虎功)을 전수해주는 것이었다. 이 또한 전수만 해주면 되는 것이지, 몇장 높이까지 기어 올라가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아구의 능력에 딸린 것 이었다. 마지막으로 비월(飛越)을 전수해 주어야 했다. 적어도 오륙장의 협곡은 뛰 어넘는 비결을 넘겨주어야 했다. 물론 능선 곳곳을 끊어놓는 협곡중에서 십 여장의 넓이가 넘는 곳들도 왕왕 있었다. 그런 협곡마저 비월로 통과할 수 있다면 횡단거리는 획기적으로 단축되었다. 그러나 그런 협곡의 대부분은 이 미 이어진 능선이 아닐 경우가 많았고, 장도기마저도 범접할 수 없는 경지였 다. 새가 아닌 다음에야 다리나 나룻터가 있는 곳까지 우회하는 것이 합당했 다. 물론 열흘이내에 이 세가지 비법을 전수못한다고 해서 장도기가 내기에 지는 것은 아니었다.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가르쳐도 배우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아구가 못 따라온다면 내기는 당연히 무효였다. 그 반대도 성립했다. 아구가 아무리 배우고자 노력 해도 장도기의 불성실로 아구가 불합격한다면 역시 내기는 무효였다. '교활한 놈!' 장도기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것이 당유의 노림수였다. 열흘이면 빡빡한 시간이었다. 불철주야(不撤晝夜)로 노력한다 해도 가르치는 쪽이나 배우는 쪽이나 미지수였다. 하지만 장도기의 입장에서 손해볼 것은 없는 내기였다. 열흘동안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었다. 요행히도 아구가 대강 의 요결을 익히기만 한다면 내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고, 내기가 시 작만 된다면 승리는 따논 당상이었다. 장도기 자신이 최선을 다하는 것, 그 것이 바로 당유의 노림수라고 장도기는 생각했다. 만약 아구의 항주행이 장 도기라는 담보보다 훨신 중차대한 사항이라면 당유도 손해볼 것은 없는 내 기였다. 장도기 자신을 담보로 장도기 자신의 노력을 이끌어 내게 하는 고도 의 술수가 바로 당유가 내기를 유도한 참뜻일 가능성이 높았다. 승부의 열쇠는 아구의 오성(悟性)과 의지가 쥐고 있었다. 내기 당사자간의 차이점이라면 장도기는 아구의 뛰어난 학습능력만을 간절히 기원하는 소박 함을 근간으로 했고, 당유는 거기에 덧붙혀서 엄청난 실전 적응 능력까지 바 라는 억지스러움을 기본으로 한다는 데 있었다. 공통점이라면 양쪽 모두 아 구만 바라보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점이었다. 진인사(盡人事) 라는 면에서 장도기는 이미 실천에 들어가 있었다. 당유가 떠나자마자 아구 는 첫 번째 단계의 수련에 돌입해 있었다. 아구, 즉 모진위는 마음의 갈피를 정하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도 특유의 성 실성을 바탕으로 울퉁불퉁한 돌밭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의 지나온 생애는 그에게 게으름이라는 행동자체를 가르치지 못했다. 그러나 모진위의 머리 속 은 혼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채경령과 헤어짐은 모진위에게 목표상실을 의미했다. 일상의 목적을 스스로 결정하는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는 모진위였다. 최초로 모진위의 인생항로를 결정한 이는 황경이었다. 그러나 황경과 하상곤이 정해준 생존이라는 목표는 역불기의 흑막과 장여진이 박탈해 버렸다. 그 다음으로 모진위에게 삶의 의 미를 가르쳐준 사람은 구연기였다. 그러나 구연기가 정해준 추혼십이절의 계 승이라는 목표도 염상 채소우의 죽음으로 소실되었다. 희노애락 사괴도 모진 위의 인생여정에 한 몫 끼어들었다. 그러나 사괴가 정해준 천지신공의 완성 이라는 화두는 사괴 형제들의 죽음으로 무의미해져 버렸다. 마지막으로 채경 령이 있었다. 무작정 따라나섰던 목표 채경령은 그의 추종을 더 이상 허락하 지 않았다. 모진위라는 배가 목표를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도데체 항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들은 잘 어울린다. 그들은 서로 연정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선민이는 신도곡주의 외동 딸과 정혼을 하는 것일까? 그것이 선민이가 채소저를 위험 속에 몰아넣는 원인이 될 수 있는가? 과연 나는 항주로 가야하는 것일까? 이제 출발해서 제대로 때를 맞추어도착할 수 있을까? 설령 제 시간에 도착한들 무슨 소용 이 있는가? 과연 내가 가서 달라 질 것이 뭐가 있겠는가?' 모진위은 당유가 목선민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그러므로 당유가 권하는 항주행은 목선민에게 치명적인 함정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모진위는 당유와의 두 번째 대면에서 자신이 기억하 고있는 당유의 첫인상과는 다른 이질적인 무언가를 느꼈다. 당치않은 감정이 라고 실소해 버리기는 했지만 그 찝찝한 감정은 쉽게 모진위의 주변을 떠나 지 않았다. 그리고 당유를 세 번째 만났을 때, 모진위는 자신과 당유의 만남 은 이번이 세 번째가 아니라 네 번째 대면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찝찝했 던 감정의 실체를 보게 되었다. 상상 속으로 당유의 얼굴에 하나의 인피면구 를 씌워 보았다. 자신을 습ㄱ한 인피면구 괴한이 바로 당유였음을 확신하기 에 이르렀다. 인피면구의 정체가 밝혀지자 가뜩이나 혼란스러웠던 모진위의 머리 속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목선민에게 모진위의 안내를 허락한 장본인 이자 목선민의 대사형인 당유가 인피면구를 쓰고 모진위를 기습하였다. 그 기습전은 옥진강과 초웅천의 혈전으로 유명한 청송곡 도검무를 재현했다. 모 진위의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도검무는 분명히 아니었다. 형식은 청송곡의 도검무였지만 내용은 청송곡 혈투를 그대로 옮겨온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실전이었다. 인피면구가 구사한 도법은 흑염도법이었다. 본래의 흑염도법을 견식하지 못했지만 그 외양만은 신검반의 무대에서 수없이 보아온 모진위였 다. 당유의 도검무 속에는 단순한 흉내내기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무시무시한 마기(魔氣)가 서려 있었다.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목선민이 경호를 맡은 이래, 인피면구의 기습을 제외하고는 단 한건의 충돌 도 없었다. 복고맹의 자취가 씻은 듯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것은 신도곡의 영향권을 벗어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례에 비추어 보거나 사안의 중대성을 따져볼 때 뭔가 아귀가 맞지를 않았다. 복고맹의 잠적, 흑염도법, 당유의 변 장과 기습, 신도곡주의 급작스런 귀곡, 목선민의 돌연한 정혼, 마치 엉망진창 으로 뒤섞여버린 조각그림같았다. 분명한 것은 모진위의 항주행이 채경령에 게 도움이 될 확률은 극히 적고, 목선민에게 해가 될 확률은 대단히 높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진위는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 다. 결국 결정을 내려준 것은 언제나처럼 모진위 자신이 아닌 주변환경이었 다. 그 주변환경이라는 것이 대개는 모진위가 모셨던 사부들, 즉 하상곤, 도 학정, 구연기, 역불기, 유진목였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진위의 방 향타를 잡은 새로운 조타수는 바로 장도기였다. 모진위는 울퉁불퉁한 돌밭에서 쇠공을 힘껏 던져올렸다. 공은 완만한 포물 선을 그리며 날아올랐다. 스무 근은 족히 나가는, 애호박만한 쇠공이었다. 그 냥 들고 서 있기도 편치 않은 무게였으므로 힘껏 공중으로 던져진 쇠공을 다시 받는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바닥은 온통 불규칙 한 모양의 돌덩이 천지였는데, 자갈보다도 큰 것들이라 차라리 조그만 바위 투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뾰족한 돌덩이들의 불규칙성도 문 제였지만 보다 심각한 것은 지면의 불규칙성이었다. 여기저기 웅덩이와 봉우 리의 반복이었다. 게다가 평지가 아닌 비탈이었다. 그러나 모진위는 목적의 당위성과는 상관없이 부지런히 쇠공을 던지고 받았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준비는 필요한 법이었다. 성사여부와 무관하게 성실한 준비하는 자세, 그것 은 바로 모진위의 천성이었다. 공중에서 방향을 바꾼 쇠공이 점차 무서운 기세로 하강하였다. 순간적으로 낙하지점을 확인한 모진위는 돌뿌리들을 밟아 나갔다. 아차하는 순간 발가락 이 돌뿌리를 걷어찼다. 통증이 몰려왔지만 디딜 자리를 확인 확인할 시간따 위는 없었다. 자칫 한눈을 팔다가 쇠공에 얻어맞으면 발가락의 아픈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리 확인해둔 기억에 의거해서 그저 바닥의 상황에 따라 서 발 자체가 임기응변을 행할 수밖에 없었다. 돌 밭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 지도 않았는데 모진위의 발은 흥건히 피에 젖어갔다. 모진위가 크게 심호흡 을 하고 다시 쇠공을 들어 올리는데 손벽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진위가 돌아보니 장도기가 뒷전에 다가와 있었다. 장도기가 모진위의 쇠공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한쪽 발로 바닥을 몇 번 두 드리더니 자신의 발을 손짓하였다. 이어서 쇠공을 공중으로 던지는 시늉을 하더니 쇠공을 짐짓 외면하며 손을 휘저었다. 모진위가 영문을 몰라서 멍하 니 바라보기만했다. 장도기는 답답하다는 듯이 다시 한 번 이리저리 손짓과 발짓을 보여주더니 쇠공을 던지고 받기를 몇 번 반복하였다. 그리고 모진위 를 손짓을 했다. 마지막 손짓의 의미는 모진위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모진 위가 다시 쇠공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방금전 장도기가 보여준 신형을 흉내 내려 애쓰며 쇠공을 던지고 받았다. 강호에는 말수가 극도로 적은 사람이 많았다. 강호인들은 대부분 말을 아끼 는 편이었다. 그것은 사부제자간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모진위의 스승들이 그랬다. 일찍이 용무권의 도학정은 말보다는 주먹이 앞서는 수련방식을 극단 적으로 선호하였고, 추혼검의 구연기는 거기서 주먹질만 생략한 정도였다. 추혼십이절의 요령은 말로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 많았다. 깨달음의 검법이었 으니 말을 하고 싶어도 못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명부결의 역불기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복면으로는 얼굴을 감추고 침묵으로 목소리를 숨겼다. 절대 절명의 위기만이 무공증진의 정수라는 신념이 역불기의 교육철학이었던 모 양이었다. 오로지 생사불명의 위기를 통하여 모진위에게 무공의 전수하였다. 그런 모진위에게 장도기의 침묵은 하등 이상할 것도 없었다. 모진위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을 아낀다기보다는 말 자체를 제대로 못하는 편이었다. 그런 연 유로 첫 상견례 이후, 모진위는 묵묵부답의 장도기에게 묵묵부답으로 시종일 관했다. 장도기가 무언가 골똘하게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 태도가 하도 심상치 않 아서 모진위는 쇠공을 던지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런 장도기을 멍하니 지켜 보았다. 장도기는 도저히 내끼지 않는다는 태도로 몇 번 망설이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모진위를 불러세웠다. 자못 비장한 표정이었다. 모진위가손을 맞 잡을 거리까지 당도하자 장도기는 모진위를 끌어당겼다. 어찌나 바싹 잡아당 겼는지 서로 코 끝이 맞닿을 거리까지 접근하게 되었다. 순간 모진위는 기겁 을 했다. 장도기가 느닷없이 입을 벌렸던 것이다. 모진위의 머리통을 통채로 삼키고도 남을 만한 크기였다. 모진위는 장도기를 애써 뿌리치며 뒤로 물러 났다. 장도기가 손가락으로 자꾸 입 속을 가리켰다. 장도기의 눈망울은 붉게 충혈되었다.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호소하는 눈빛이었다. 모진위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서 장도기의 입 속을 들여다 보았다. 얼마나 크게 입을 벌렸는지 목젖까지 들여다 보였다. 모진위는 생전 처음으로 사람의 입 속을 감상하는 기회를 가졌다. 복잡하고 기괴한 형상이 었다. 인간의 구강구조는 마치 불에 그을린 듯 흉칙하기 그지 없었다. 냄새 도 고약했다. 다시 들여다 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모진위는 고개를 들며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 모진위를 바라보는 장도기의 얼굴이 점 차 일그러졌다. 장도기는 다짜고짜 쇠공을 빼앗아 들더니 힘껏 허공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 잘 보라는 듯이 모진위를 쏘아보더니 그대로 보법을 밟아나 갔다. 쇠공에는 눈길조차 주지않았다. 시선은 오로지 발에 집중되어 있었다. 돌밭을 평치처럼 밟아가는 매끄러운 보법이 전개되었고 장도기가 쇠공의 낙 하지점에 돌입하였다. 쇠공이 매서운 기세로 장도기의 머리를 향해서 낙하하 고 있었다. 그러나 장도기는 오불관언(吾不關焉)으로 발등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퍽-. 둔탁한 파열음이 모진위의 고막을 흔들었다. 장도기의 이마에서 핏물이 튀 었다. 쇠공이 머리통을 짓이기는 그 순간에도 장도기의 시선은 여전히 발에 고정되어 있었다. 쇠공이 바닥을 굴렀다. 그제서야 장도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모진위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마치 '이제는 알아들었지?'하고 묻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장도기가 지푸라기처럼 쓰러졌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모진위는 도대체 이해되지 않았다.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그런 어이없는 행동이었다. 모진위는 장도기을 들쳐업고 초옥으로 달려갔다. 이마 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여분의 지혈제를 소지하고 있던 참이었다. 급한대로 지혈제를 뿌리고 헝겁 조가리로 동여맨 다음, 모진 위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우선 물통부터 찾아내어 물이 길었다. 간단하게 지혈은 했지만 상처를 닦아내고 소독을 한 후, 꼼꼼히 다시 지혈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모진위는 물통을 들고 달음박질쳤다. 그러자 가득찬 물통에서 물이 넘쳐 흘 렀다. 모진위는 잠시 멈춰서서 물통이 안정되기를 기다리며 수면을 바라보았 다. 수면 위로 모진위의 얼굴이 나타났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파문이 가라앉자 모진위의 얼굴도 선명해 졌다. 모진위는 서둘러 운반을 재개하려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입을 크게 벌렸다. 장도기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자신의 구강 내부였다. 고개를 갸웃거리 던 모진위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진위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다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모진위가 입을 벌렸다. 이번에는 크게 벌렸다. 목ㅈ 이 다 보이도록 아주 크게 벌렸다. 장도기의 그것과는 약간 달랐다. 생각보 다 그렇게 흉직한 형상은 아니었다. 장도기의 그것은 불에 지져진 상처처럼 흉칙한 형상이었는데 모진위의 그것은 비교적 매끈한 편이었다. 결정적으로 다른점은 그 매끈한 표면의 뒤 편으로 느껴지는 존재감이었다. 모진위는 '으으음!'하며 목을 떨어보았다. 진동이 느껴졌다. 입을 다문 채 '아아'하고 소리를 내어보았다. 여전히 턱 밑에서 진동이 일어나며 소리가 울 려나왔다. 그것은 입 속 저 끝 어딘가에 존재하는 신체기관으로부터 울려나 오는 소리였다. 모진위에게는 매끈한 표면의 뒷부분이었고 장도기에게는 흉 직하게 일그러진 표면의 뒷부분에 해당했다. 그제서야 모진위는 깨달았다. 장도기의 그것이 본래부터 그런 형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 만 분명히 무엇인가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불에 지져진 자국이었다. 장도기에 게는 모진위가 가지고 있는 진동을 만들어내는 그것, 즉 사람의 입에서 소리 를 만들어내는 그것이 없음이 분명했다. 아마도 장도기는 모진위에게 그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자 입을 벌렸던 모양이었다. '장도기은 벙어리다. 게다가 글을 읽을줄도 쓰줄도 모르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모든 것이 백팔십도로 반전되었다. 모진위가 다시 물통을 들고 냅다 달렸다. 초옥에 돌아와보니 장도기는 이미 깨어나 있었다. 모진위는 떨리는 손으로 피를 닦아내고, 지혈을 하고,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물끄러미 장도기를 바라 보았다. 장도기도 말없이 모진위를 마주보았다. 일다경이 흐르도록 단 한마 디의 대화도 없었다. 처음 상면한 그 상태 그대로였다. 모진위의 판단은 이 랫다. 장도기는 벙어리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치고 진짜 나쁜 놈은 모진위 자 신이었다. 모진위는 자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본시 모진위는 일정분야에 관한 한, 천재적인 눈치꾼이었다. 도학정도 어지 간히 말이 없는 사부였지만 그럭저럭 눈치로 때려잡아서 의사소통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추혼십이절의 이치도 마찬가지 였다. 구연기의 요령부득에 맞서서 모진위는 아주 잘해왔다. 하다못해 최악 의 폭군에 해당하는 역불기와도 침묵의 대화가 가능했던 모진위였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장도기의 침묵은 단 한마디도 이해못했다. 벙어리인 장도기가 오히려 가장 뛰어난 무언의 의사소통체계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진 위가 경력과 재능을 겸비한 천하의 눈치꾼임에도 불구하고 장도기와 모진위 는 가장 기초적인 의사전달조차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대체로 강호의 의사소통에는 일정한 틀 같은 것이 있었다. 대의명분이라는 허례허식에 과도하게 무게를 두는 한편,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실리적인 측 면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깊은 심계와 위장된 허언이 발달되기 마련이었다. 겉으로는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뱉고 있는 것 같지만 속을 파보면 온갖 중상 모략과 권모술수외에는 아무런 진실도 없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말과 뜻이 따로 노는 것, 이것이 바로 강호 언어의 본질이었다. 사부와 제자간의 무공전수방식에서도 다를 것은 없었다. 사부는 제자가 정 신을 바싹 차리도록 함정을 파고 옳지 않는 길로 인도해서 질책을 가한다. 제자는 항상 위장된 사부의 술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정신을 집중하고 사 부의 숨겨진 속뜻을 파악하려 애쓴다. 사부제자 또한 강호의 이중적 대화구 조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모진위라는 제자와 그의 스승들도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모진위와 사부들쪽이 보다 복잡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 는 심오한 경지였다고는 할 수 있었다. 도학정에게도, 구연기에게도, 역불기에게도 모진위는 그리 탐탁치 않은 제 자였다. 결과마저 한결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시작만은 단연코 한결같았다. 도학정에게는 금 열냥의 족쇄였고, 구연기에게는 악질적인 모진위의 신체조 건이 좌절과 절망의 근원이었으며, 역불기에 이르면 따로 이유조차 필요없었 다. 고운 말이 오갈 수가 없었다. 그런 스승들에게서 구타와 모욕으로 점철 되는 제자 모진위의 생존전략은 너무도 당연히 의심과 경계를 통한 숨겨진 속 뜻의 파악에 있었다. 제자 모진위는 새로운 사부 장도기에게도 그런 풍부 한 경험으로 터득한 놀라운 대처능력을 보여주었다. 시작부터 단 한마디의 언질도 없는 것이 장도기는 이전의 사부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전혀 뒤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도기는 벙어리였다. 말을 안하는 것이 아 니라 못하는 것이었다. 또한 장도기는 무공전수를 위해서 거짓을 만들어낼 만한 시간여유를 애시당초에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 미묘한 전제조건의 차이가 무언을 통한 대화의 천재라고 자부하고 있던 모진위의 의사전달체계 에 심각한 왜곡현상을 만들어냈다. 모진위가 장도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오고가는 시선 속에서 오로지 진실만을 바라보았다. 장도기는 모진위가 드디어 벙어리를 벙어리로 보고 있음을 눈치챘다. 장도기는 다시 한 번 입을 크게 벌리고 손가락으로 입속을 몇 번 가리킨 후, 손바닥에 무엇인가 적는 시늉을 하더니 손사래를 휘휘 내저으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모진위가 멋적게 웃으며 고개를 끄 덕였다. 장도기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보면 너무도 쉽고 간단한 몸짓 언어였다. 장도기는 자기가 벙어리에다가 글도 쓸 줄 모른다고 참으로 알아 듣기 쉽게 말을 하고 있었다. 불신과 피해의식이 그런 단순한 신호조차 왜곡 시켰던 것이다. 순간 뼈아픈 자괴감이 모진위의 폐부를 찔렀다. 장도기는 근본적으로 좋은 사부는 아니었다. 벙어리라는 것은 누군가를 가 르치기에는 너무도 치명적인 결점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모진위가 더욱 나쁜 제자였다. 벙어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벙어리보다 더 답답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가 입을 먼저 여는 것은 기본 예의에 속했다. 예 의없는 제자라해도 모진위보다는 나았다. 사부에게 마땅히 질문하고 따졌어 야 마땅한 상황이 이미 골백번도 넘게 있었다. 모진위는 두꺼운 껍질 속에 웅크리고 숨어있는 자기 내면을 똑바로 바라보 았다. 항상 타인의 탓으로 돌려 왔었다. 흉칙한 몰골때문에 외면하는 동료들 을 원망하며 외로움에 몸을 떨었고, 귀신이라도 만난 듯 멀리 달아나는 여인 네들에게 부끄러워하며 수치감에 눈물을 흘렸고, 돌을 던지며 놀려대는 꼬마 들을 저주했다. 극히 일부의 몇 몇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에게 말조차 걸어 주지 않았다.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모진위는 생각했 었다. 장도기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모진위는 그런 장도기의 눈물에서 한맺힌 벙어리의 사연을 읽었다. 결코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였음이 분명 했다. 장도기는 그런 치부마저 기어코 내보이며 절실하게 대화를 모색했다. 아니, 그런 것을 따져 볼 필요도 없었다. 벙어리 장도기는 말을 할 수가 없 었다. 대화단절의 장본인은 따져볼 것도 없이 모진위 자신이었다. 모진위는 항시 대화단절의 이유를 타인에게서 찾았었다. 항상 타인의 탓으로 돌려왔었 다. 장도기가 머리가 터지면서까지 설명하려고 했던 내용을 이제야 비로서 이해하게 되었다. 장도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봐! 발바닥을 조금 더 아끼도록 하게. 본시 발바닥이 터지고 아물고, 터 지고 아물고 하면서 피부를 단련하는 것이 정도(正道)겠지만 시간이 별로 없 네. 미리 발바닥이 상하면 그 먼길을 어찌 가려나? 떨어지는 쇠공에 얻어맞 지 않으려고 그쪽에 신경을 집중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지. 그러니 최 대한 발바닥에 정신을 집중하도록 노력해 보게. 발바닥에 눈을 달아주는 것 이 바로 이 수련과정의 목적이라네.' 장도기가 벙어리임을 깨닫는 순간, 모진위의 세계가 새로운 틀을 만들기 시 작했다. 조금 더 분명히 말하자면 벙어리 장도기가 자신 치부를 내보이면서 까지, 머리통이 깨져가면서까지 모진위와의 의사소통을 위해서 애를 쓰고 있 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모진위의 발상이 대전환을 맞이하였다. 장도기의 눈동자는 여전히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모진위는 장도기의 눈에 서 깊은 외로움을 발견하였다. 꼭꼭 숨겨두었던 외로움들이었다. 그것은 그 대로 모진위에게 전달되었다. 장도기의 외로움이 순식간에 모진위의 작은 가 슴을 채우고 넘쳐 흘렀다. 모진위의 두 눈에서도 닭똥같은 눈물이 흘러 내리 기 시작했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마주보며 눈물을 흘렸다. 낙루의 원인은 각기 달랐지만 낙루의 결과만은 같았다. 모진위가 장도기를, 장도기가 모진 위를 위로하고 있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무림천하-창작연재란 (go MURIM)』 2742번 제 목:[연재] 표류공주 53회 -최후식- 올린이:하이문 (문홍일 ) 99/11/11 12:05 읽음:264 관련자료 없음 ----------------------------------------------------------------------------- 번 호 : 9722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11-09 13:23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53- 쇠공은 이틀 전에 비해서 두 배이상 무거운 것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장도 기는 모진위를 근처의 산비탈로 데리고 갔다. 이제까지 쇠공을 받아왔던 장 소보다 더욱 험난한 지형이었다. 바위들은 보다 날카로웠으며 지면 또한 보 다 굴곡이 심했다. 거기다가 상당한 경사의 비탈이었다. 이틀간의 수련과정 을 통해서 추가된 것은 그것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 신발이었다. 신발이라고 불러주기도 민망했다. 단순한 나무판에 불과했다. 판자 귀퉁이에 밋밋한 턱 이 달려있어서 발을 걸치게 되어있었다. 평탄한 평지에서조차 벗겨져 버리기 가 다반사였다. 모진위는 이미 하루전부터 그런 신발을 걸치고서 경공수련을 하고 있었다. 쉬익-. 뒷걸음질을 치던 모진위의 왼발이 돌뿌리에 걸렸다. 오른발은 이미 웅덩이 에 빠진 상태여서 왼발을 가지고 중심을 잡아보려던 와중이었다. 모진위는 쓰러지는 기세에 반항하지않고 그대로 탄력을 받아서 뒤로 나아갔다. 힘의 균형추가 허리를 타고 내려가 오른발에 추진력을 발생시켰다. 황급히 뒤로 빼낸 오른발은 장소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돌뿌리건 웅덩이건 되는대로 가 져다 붙히고 왼발이 돌뿌리에서 빠져나갈 시간을 벌어주었다. 눈과 두뇌의 도움을 받을 경황은 없었다. 발 스스로가 변화하는 바닥의 상태를 감지해야 했다. 두 개의 발은 연속적으로 상호교체되며 균형을 잡아갔다. 순차적인 임 기응변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간을 맞추어 쇠공의 낙하지점에 도착해야 했고 신발도 벗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가까스로 신형을 바로잡고 방 향전환에 성공했지만 여전히 바닥을 살펴볼 여유는 없었다. 눈은 허공을 맴 돌며 쇠공의 진로를 ㅉ고 있었다. 바닥은 발에 감지되는 감각만으로 위치를 찾아내야 했다. 몇 번의 반전 끝에 간신히 쇠공은 받아냈지만 신발이 벗겨져 버렸다. 실패였다. 장도기가 던져주는 쇠공의 변화는 가히 천차만별이었다. 가깝고 낮게, 어떤 때는 멀고 높았다. 전후좌우도 전혀 예측불가였다. 또한 잠시의 틈조차 허용 하지 않았다. 쇠공을 굴려서 장도기에게 되돌려준 모진위는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지체없이 공을 받는 준비자세로 되돌아갔다. 주변의 지세를 다시 확인 할 여유따위는 없었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쇠공을 받을 수가 없었다. 오 후가 되어서야 모진위는 그럭저럭 쇠공과 바닥에 적응을 하게 되었다. 그러 자 쇠공은 더욱 무거운 것으로 교체되었고 신발의 턱이 깍여나갔다. 눈코 뜰 사이도 없는 강행군이었다. "머리가 수직으로 밀어올리는..." 장도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저절로 밀려올라가는..." 장도기는 또 고개를 흔들어 대고는 손을 머리 위로 올려서 위로 잡아당기 는 시늉을 하였다. "몸 전체를 허공에 띄우는 듯한 자세를 말씀하십니까?" 장도기가 다시 단호하게 머리를 흔들고는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이즈음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가장 많이수다를 떨고 있는 모진위였다. 장 도기가 설명하려는 의도를 모진위가 하나하나 다시 말로 표현해서 확인하는 형식의 수업이었다. 장도기는 벙어리였고, 경신술(輕身術)은 달변으로도 설명 이 쉽지 않은, 난해한 수련과정이었다. 그러나 타인의 눈치를 살피는데는 최 고의 과정을 거친 경륜의 모진위였다. 일단 모진위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 자 정확한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장도기의 노력과 모 진위의 눈치가 서로 부응하여 놀라운 교감을 보여 주었다. 토론을 벌이는 학 자들보다 더 어려운 내용들이 둘 사이의 눈빛을 넘나 들었다. 장도기가 다시 몸을 움직였다. 목에 무언가를 칭칭 감아대는 동작을 펼치더 니 그 줄을 잡아 근처의 나무가지에 잡아매는 동작을 취하였다. 그리고는 익 살스러운 표정으로 눈동자를 한가운데로 몰더니 혀를 빼물었다. 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하는 동작을 흉내낸 것이다. "아아, 머리 위에 끈이 달려있어서 마치 허공에 매달린 듯이 그렇게 걸어가 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제서야 장도기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도명는 주의깊은 시선으로 줄 위를 걸어가는 모진위의자세를 살펴보았다. 보법(步法)의 기본이란 것이 원래 그렇기는 했지만 장거리 이동시의 보법과 주법(走法)은 특히 자세가 중요했다. 장거리의 승부는 지구력보다는 오히려 유연성이 성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면에서 장도기는 매우 흡족했다. 모진위는 빠른 속도로 장도기의 요령을 흡수해서 군더더기 없는 자세를 만들어 갔다. 모진위는 예상 밖의 좋은 기술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던 터였다. 비연류는 신검반의 독문비기로써 명문정파의 어느 비결과 비교해도 떨어질 것이 없는 고도의 신법(身法)이었다. 특히 유연성의 단련이라는 면에 서는 여타 신법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모진위의 비연류는 이미 경지에 이르 러 있었다. 모진위의 잘 닦여진 무공관이 또한 경공수련에 일조를 하였다. 모진위는 장도기의 자세를 흉내내는데 그치지 않고 그 자세의 본의를 파악 하는데 주의를 집중하였다. 장도기가 자세를 교정해주면 그저 자세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이전 자세의 잘못된 이유를 깨달고자 노력하였다. 추혼십이절의 관법(觀法)이 눈을 대신하는 모진위였기에 가능했다. 장도기 또한 수백 번도마다 않고 제대로 된 자세가 나올때까지 시범과 수정을 반 복하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오로지 흉내로만 그치기 쉬운 벙어리의 스승의 한계는 그렇게 극복되었다. 보법의 기본에 있어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첫번째 난관이 파죽지세로 돌 파되었다. 장도기는 다섯째 날이 다 가기 전에 다음 단계를 전수할 수 있게 되었다. 고무줄처럼 탄력이 좋은 줄이 허공에 매어졌다. 이름하여 외줄타기 과정이었다. 이 또한 천만다행으로 모진위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수련과정 이었다. 유랑극단 신검반은 필수적으로 기본적인 곡예를 공연 항목에 포함시 키고 있었다. 외줄타기도 물론 그 중의 하나였다. 물론 불구에 가까운 모진 위가 직접 줄에 오르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생면부지의 기술보다는 여러 가지로 유리한 점이 많았다. 아무리 그래도 외줄타기는 보통사람이 쉽게 익 힐 수는 없는 곡예에 해당했다. 모진위는 흔들거리는 외줄에서 전혀 균형을 잡지 못하고 진땀을 흘리고 있 었다. 낙상으로 시큰거리는 허리의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줄에 올랐다. '머리에 끈이 달려있다. 그 끈은 천장에 단단히 고정되어있다. 그러므로 나 는 그 줄만 의지하면 떨어지지 않는다. 떨어지지 않는다...' 모진위는 그렇게 마음 속으로 되뇌이며 다시 줄 위에 올랐다. 그리고 과감 하게 첫 발을 내딛었다. 끈에 매달려 있다고 상상하자 신기하게도 제법 균형 이 잡혔다. 모진위는 무려 세 걸음을 전진한 후에 균형을 잃고 지면으로 낙 하하였다. 허공에 발을 디딘 이래 사십칠번의 낙상 끝에 이룩한 세 발자국의 걸음마였다. 누군가가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 보았다면 백이면 백,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미친 놈들! 끈이 어디 있어? 놀고들 자빠졌네.' 물론 끈은 없었다. 모진위의 끈은 허공에 매달린 진짜 끈이 아니라 그 끈을 달아준 장도기에 대한 믿음이었다. 닫힌 마음으로 살아가던 두 사내가 마음 의 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그것은 경신술의 빠른 진전 이외에도 또 하나의 망외의 소득을 안겨주었다. 타인과의 의사교류가 불가능한 장도기는 뜻밖에 도 신도문에 대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모진위는 장도기를 통해서 신도문 에 대한 몇 가지 단편적인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 동안 채경령 의 동행에서 얻어진 기억의 편린들과 합쳐져서 장차 항주를무대로 벌어질 사건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되어주었다. 첫째로 신도곡주 초진양은 어떤 식이던간에 복고맹과 연결되어 있음이 분 명했다. 맹에서 상당히 높은 요직을 차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둘째로 항주와 은괴 육백관이 비슷한 시기, 혹은 같은 장소로 전달되는 장도기의 비 밀임무에 직간접으로 얽혀있는 경우가 많았다. 천하 대상(大商), 특히 양주 염상들의 동태도 항주와 연관지어져서 자주 언급되었다. 항주에서 은괴 육백 관에 관한 모종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셋째로 목선민의 파문 과 재입문 그리고 갑작스런 정혼이었다. 목선민은 애초에 사천의 성도까지만 동행하기로 했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항주로의 물길까지 채경령을 따라가 고 있었다. 신도곡주와 그의 삼제자 목선민간에 모종의 밀약이 있고, 그 밀 약은 채경령의 주변과 관계가 있다고 추정되었다. 채경령의 주변이란 것은 십중팔구 은괴 육백관의 행방일 것이다. 은괴의 행방을 알고있는 유일한 인 물이 바로 채경령이었다. 마지막으로 항주에 조만간 색목인(色目人)의 범선 이 들어온다는 밀담을 장도기가 들었다고 했다. 옥문관을 통해서 은괴를 조 달한 곳도 바로 색목인들의 땅이었음을 모진위는 잘 알고 있었다. 항주에서 의 은괴밀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장도기가 글을 읽지 못하는 관계로 정보는 단편적인 조각들에 불과했지만 모진위는 하나의 불길한 사건을 추리 해 낼 수 있었다. 추정해 본 사건의 개요은 대충 이러했다. 항주에서의 은괴밀수는 이미 오래 전에 약속된 거래였으리라. 채경령에게 얻어들은 풍월에 의하면 일당들이 상 대적으로 안전한 해상밀매보다 국경밀반입을 택한 이유는 그 회전률에 있다 고 했다. 뱃길은 정해진 대륙풍과 조류의 계절변화때문에 아무 때고 배를 띄 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준비기간까지 포함한다면 순전히 항해만으로 소비 되는 몇 개월을 포함해서 서역에 도착하려면 일년 가까운 기간이 걸렸다. 되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계절풍을 기다려야 했다. 거기다가 내국에 서 은괴를 팔아서 금괴로 수집하는 과정과 서역에서 금괴와 은괴를 교환하 는 과정을 추가시켜야 했다. 육상교역보다 적어도 서너 배는 더 시간이 걸리 는 장사였다. 장도기의 정보대로라면 복고맹은 항주에서도 은괴거래를 획책 하고 있었다. 시일을 추정해 볼 때 아마도 옥문관의 은괴 육백관 이전에 미 리 약정된 거래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양주 염상들의 항주이동이라는 전제를 더한다면 사건의 윤곽은 더욱 선명 해졌다. 역시 채경령에게서 들은 풍월이었지만 밀수된 은괴의 주거래 대상자 들이 바로 염상이었다. 염상들은 천하각지에서 소금으로 동전을 벌어 들이지 만 정작 조정에 결제대금으로 납부하는 것은 은원보였다. 정부가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서 동전의 시세가 판매의 손익분기점을 좌우하는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고는 하였다. 은원보와 동전의 환전비율에 천하 염상의 생사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항주에 색목인의 무역선이 들어온다. 은괴를 반입한다. 때는 공교롭게도 소 금값의 정산시기다. 그러므로 염상들은 은원보 확보에 비상이 걸려있다. 항 주로 염상들이 이동하고 있다...?' 불길한 예감이 모진위를 엄습했다. 해상밀수라면 대량거래였다. 호신련에 게 은괴 육백관을 강탈당한 복고맹에게 그런 자금여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채경령에게서 은괴를 되찾기 위해서 혈안이기는했다. 하지만 설사 은괴를 되찾는다고 해도 그 시기와 장소가 문제였다. 색목인과 거래를 하기위해서 정작으로 필요한 것은 은괴가 아닌 금괴였다. 그러므로 육백관의 은괴를 다 시 금괴로 교환하는 중간과정이 필요했다. '항주에 미끼와 함정을 만든다. 채경령의 은괴를 항주로 오게 만든다. 은괴 의 행방을 모르더라도 그것은 가능하다. 실제로 채경령은 지금 항주로 가고 있다. 은괴도 항주로 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제 은괴를 되찾 기만 하면 된다. 찾는 즉시 미리 수배된 염상들과 교환을 하여 색목인과 다 시 교환한다...?' 모진위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복고맹이 미끼만 달아놓고 마냥 기다 리고 있을리는 만무했다. 아니, 그 정도의 막강조직이라면 이미 미끼를 흔들 어 댈 낚시대정도는 마련해놓고 음모를 구성했다고 보는 편이 확실했다. 모 진위가 아무리 부정해도 모든 정황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목선민 이었다. 모진위는 알고 있었다. 은괴의 상실은 곧 채경령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일찍이 채경령은 은괴를 위하여 죽어간 동료들의 희 생을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감수해 내었다. 모진위는 알고 있었다. 은괴가 다시 복고맹의 손아귀에 떨어진다면 설사 복고맹이 채경령을 살려주더라도 채경령 자신이 스스로를 살려두지 않을 것임을, 거기에 목선민의 변심으로 인한 고통까지 더해진다면... ... 모진위의 가슴이 찢어졌다. 장도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집을 피우는 모진위를 바라보았다. "가야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장도기게 보법을 배운지 칠일만의 일이었다. 물론 그동안 모진위는 비약적 인 진보를 이룩했다. 턱을 모두 깍아버린 나무판자를 발바닥으로 끌고 가며 장도기가 전력을 다해서 던지는 사십 근의 쇠공을 한 번도 실수없이 받아내 었고, 흔들거리는 외줄에서 뛰어다니다 못해 누워서 잠을 자도 떨어지지 않 을 정도의 비약적인 성장이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단계는 아직 손도 못댄 상태였다. 무릇 상승무공이라 함은 한결같이 내공의 활용을 그 전제로 삼고 있었다. 장도기의 만파종(萬波從)도 마찬가지였다. 내공구결의 운용이란 것이 때개는 뜬 구름잡는 이야기처럼 애매모호한 것들이었다. 벙어리인 장도기로 서는 설명할 방도가 막막하기만 해서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벽호공, 비월술, 도약술 등의 상급기술은 내공이 수반되지 않고는 시전조차 불가능한 그런 상급 단계들이었다. 당연히 그런 고도의 숙련을 요하는 기술 들은 아직 전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진위가 지금 당장 항주로 출발해야만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장도기는 강력하게 고개를 저었다. "가야합니다." 모진위도 막무가내였다. 도상으로만 어림잡아도 일만 사천리라고 했다. 실 제로 달려보면 도상에는 직선으로 표시되어있는 곳도 대개는 구불구불한 능 선이라서 이푼의 거리는 더 보태야 했다. 모진위는 속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 았다. 일만 오천리가 아니라 뚝 짤라서 단 일만리라고 해도 어차피 십팔 일 의 시간여유가지고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모진위는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마 냥 발을 붙들어 매놓고 기약없는 보법만 익히고 있을 정신적인 여유도 없었 다. 온몸이 불타버릴 것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력감이 전신을 짓눌러 왔다. 채경령을 구하겠다는 욕심은 그냥 욕심일 뿐이었다. 어쨋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걸음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고만 싶었다. 장도기는 모진위와 그렇게 무언의 입씨름을 벌이다가 결국 손을 들고 말았 다. 열린 마음이 장도기에게 모진위의 그런 심정을 전달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도기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장도기의 결정은 당유의 몫이었다. "그놈이 그러겠다면 그리 해도 좋겠지. 보내게." 당유는 언제나의 경괘한 웃음으로 뜻 밖에도 선선히 허락해 주었다. 장도기 가 눈을 치켜떴다. "본좌가 허락했으니 내기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겠지. 걱정말게나."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는 당유였다. 장도기는 혼란스러웠다. 십년 가까이 보아온 당유는 놀라운 심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계산을 빗나가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하다는 계산만 서면 완벽 하게 해치워 버리는 재간을 가지고 있었다. 장도기가 허둥거리며 손짓발짓으 로 무언가를 전하고자 애를 썼다. "시간을 달라고?" 당유가 이내 장도기의 손짓을 알아듣고 되물었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비상 한 자였다. 장도기의 심중을 정확하게 궤뚫는 유일한 사내였다. 적어도 장도 기가 모진위를 만나기 전까지는. "일테면 휴가를 달라는 말인데... 그것도 좋겠지." 이번에도 당유는 선선히 허락해 주었다. 장도기은 세세한 협의가 끝나자 지 체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놈이라면, 그 놈이라면 중도에 포기할 놈은 아니지.' 당유는 다시 한 번 모진위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기와 투지로 똘똘 뭉친 젊 은이였다. 동기만 부여해 준다면 죽음도 불사할 의지의 화신이었다. 그만하 면 모진위의 동기는 부여해 준 셈이었다. 장도기의 행동양식도 예상을 빗나 가지는 않았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모진위를 단련시켰다. 물론 장도기의 휴 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화살은 시위를 떠나갔다. 얼마나 기간을 단축시킬지는 오로지 모진위의 정신력에 달려 있었다. 장도기가 초옥으로 돌아와 보니 모진위는 이미 출발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당유의 허락여부와 상관없이 무조건 떠나버릴 기세였다. 장도기가 모진위의 두 손을 잡고 마주 앉게 했다. 당유에게 다녀오기 전에 이미 내공의 활용에 대해서 축약된 요결을 전수해 놓은 상태였다.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 고 그동안의 성취정도를 마지막으로 정리해 볼 심산이었다. 모진위도 장도기 의 의도를 눈치채고 마지못해 따라 앉았다. "...하여 반항과 복종의 선택이 장형이 당부하신 주의사항이 되겠습니다. 발 의 신경으로 감지된 노면(路面)의 정도와 지형지물을 보고 순간적으로 판단 해야 합니다." 장도기의 기색이 불만스러워 보이자 모진위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물론 그것을 그때 가서 머리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몸과 발의 감각이 평 소부터 그런 대비가 하고 있어야 합니다. 돌뿌리라면 당연히 발이 돌발상황 에 복종하여 균형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축소시키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그것 이 풀잎이라면 반드시 복종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그냥 발로 걷 어차며 돌파해 버리거나 접촉면에 따라서는 그 탄력을... 으음... 그 탄력을 어떻게 이용하는지는 잘 이해가 안갑니다만... 하여간 최대한 힘과 추진력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합니다." 약간 부족한 감이 있었지만 장도기은 그냥 참고 넘겼다. 사실 이 부분은 매 우 미묘한 부분이었다. 신법 이상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힘이 자신있는 이 들은 다소의 장애가 있더라도 거리를 단축하며 그대로 돌파하는 주법을 사 용한다. 반면 유연성이 뛰어난 자들은 방해물들을 능란하게 빠져나가는 주법 을 몸에 익힌다. 무공기법보다는 타고난 근력과 유연성, 그리고 감각의 정도 가 좌우하는 문제였다. 물론 무공에 의한 보강이 효과를 극대화시킬 방법이 었지만 어지간한 적응훈련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모진위에게는 그저 대강 의 요령을 숙지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어느새 모진위의 담론이 끝났 다. 이정도로 대강은 마무리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가장 중요한 내공의 활 용과 벽호공, 비월의 세 가지였다. 모진위가 시범보일 수 있는 수법은 이제 더 이상 남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잘 암기했는지 확인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 았다. 어련히 잘 알아서 암기했겠는가만은 그래도 생략할 수는 없었다. 이해 가 되지 않는 부분의 질문을 다시 잘 설명해 주는 확인절차이기도 했기 때 문이었다. 모진위는 막힘없이 요결을 낭송해나가고 있었다. 간간히 낭송을 멈추고 의 문사항을 확인하기도 했다. "진기로 밀어서 신형을 끌어올리는 방법에서 말입니다. 우제가 무능해서 전 혀 갈피를 잡지 못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방법으로 어떻게 신체를 부양시키는지...몸안에서 기를 움직이게 하는 방법은 미숙하게나마 알고 있 습니다만 기를 움직여서 몸 자체를 움직인다는 원리는 우제로써는 요령부득 이었습니다. 우제가 알기로 기는 혈을 통해서 외부를 왕래합니다. 진기를 상 부로 밀어올려 보아도 몸을 부양시키지는 못하고 그저 혈을 통해서 몸밖으 로 빠져나가 버리더군요. 또 전면의 기운을 흡수하면서 신체내부의 기운을 후면으로 배출하여 전면의 마찰을 축소시키고 후면의 저항력을 강화시켜서 추진력을 얻는다. 이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배출되었건 흡입되었건 아무리 서로 충돌시키려 해도 외부의 기운과 내부의 기운이 서로 동화되어 서로 충 돌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어리석은 점을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도기도 난감해져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웅변가의 달변이 있어도 설명할 수 있을까 말까 하는 문제였다. 새털같은 많은 날을 가지고도 언제 깨달음에 이를지 모르는 대오각성과 직관의 문제였다. 설상가상으로 장도기 에게는 입도, 시간도 없었다. 장도기가 벌떡 일어나 문밖으로 나섰다. 모진위 도 서둘러 뒤를 따랐다. 여명이 그리 멀지 않은 신새벽이었다. 그래도 달빛은 조금 남아 있어서 사 물의 분간은 가능했다. 장도기가 불문곡직하고 풀밭을 달렸다. 모진위는 신 선한 새벽공기를 마시며 두 눈을 가늘게 모았다. 그것은 한 마리 새의 비상 이었다. 또한 가벼운 깃털의 하강이었다. 어쩌면 장도기은 새가 되고 싶어했 을 것이라고 모진위는 생각했다. 그만큼 간절한 기원이 그의 비상에 담겨 있 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깃털처럼 가라앉았다. 그것마저 하나의 갈망이었다. 모진위는 문득 자유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장형이 그토록 원하는 것은 자유인가?' 머리 속이야 어떻든 간에 모진위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장도기의 동작을 마음 속에 새겨 넣었다.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두 눈을 부릅떴다. 순간, 구름에 가리워졌던 달이 슬쩍 자태를 드 러 내었다. 사위가 일시에 밝아졌다. 모진위는 그만 숨을 멈추고 말았다. 숨 을 멈추고 두 눈을 비비며 다시 확인해 보았다. 장도기은 놀랍게도 풀잎 위 를 달리고 있었다. 재차 확인해 보았지만 풀밭을 두 번 왕복하도록 전혀 지 면에 발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초상비(草上飛)였다. 세인들은 입을 열어 능공 허도(凌空虛渡)와 답설무흔(踏雪無痕)을 말하지만 눈으로 보았다는 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강호에서 사람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경신술 최고의 단계 는 단연코 초상비였다. 장도기은 달빛을 받으며 풀밭을 날고 있었다. 어느 새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모진위는 동 녘을 향해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 막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는 그 곳 어디 쯤에 바로 항주가 있었다. ====================================================== ps. 흑흑, 너무 그러지 마시길... 연재이야기란을 보고 있노라면 안델센 동화에 나오는 '늑대와 소년'이라도 된 기분입니다. 장상수님같이 '작자와 독자는 금슬 상해라!' 하고 외치며 성질 돋구는 분도 계신데. 그에 비하면 양반입니다. 암, 그렇구말구. 하여간 이번에는 기어코 완결을 보고 말겠습니다. 사실 초고는 끝을 보았거든요. 잊지 않고 기억해 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무림천하-창작연재란 (go MURIM)』 2743번 제 목:[연재] 표류공주 54회 -최후식- 올린이:하이문 (문홍일 ) 99/11/12 12:23 읽음:286 관련자료 없음 ----------------------------------------------------------------------------- 번 호 : 9726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11-12 01:55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54- 모진위가 항주로 떠난 지 반나절이 흐른 후, 장도기도 채비를 갖추었다. 항 시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대비가 되어있는 사내였다. 딱히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저 옷을 갈아입고 벽에 걸린 등짐을 걸며 지고나니 그대로 여행길이었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지 불과 반다경만에 장도기는 이미 초옥 을 나서고 있었다. 장도기는 편안한 길을 마다하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초옥 뒷편이 그대로 능선의 연장선이었다. 장도기는 양팔을 도포 속에 마주 잡고 능선을 미끄러져 갔다. 자세는 산보라도 하는 듯 유유자적이었지만 속도만은 범인이 전력질주에 못지 않았다. '더 가야하는가?' 두 시진이 지나지 않아서 이미 향유봉(香游峰)을 넘어 남북으로 길게 늘어 선 산맥군에 접어들었다. 큰 줄기는 남북을 가르고 있었는데 멀리 동북으로 갈라져 나가는 곁가지가 희미하게 보였다. 잠시 능선을 바라보던 장도기은 땀을 식히고나자 지체 없이 다음 봉우리를 향해서 발길을 옮겼다. 날이 저물 어 갈 무렵 근동에서는 제법 큰 봉우리에 설 수 있었다. 북쪽의 다음 봉우리 가 발 아래 펼쳐져 있었다. 그 너머로 동북으로 갈라지는 곁줄기가 훤하게 내려다 보였다. 장도기는 마침내 원하던 것을 발견했다. 새카만 점 하나가 풀포기조차 없는 능선을 따라서 동북쪽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장도기의 예상 보다 백리는 족히 더 앞서간 지점이었다. 모진위가 질주하고 있었다. '무리하는군.' 장도기는 혀를 찼다. 애써서 가르쳐준 보법이 허사가 되어 버렸다. 물론 장 도기의 경공에는 주법도 있었다. 그러나 장거리 원정의 기본은 보법이었다. 저렇게 줄창 달려대어서는 일갑자의 절정고수라해도 사흘 이상은 달릴 수 없었다. 보법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걷는다고 능사는 아니었다. 최대한 체력 을 비축할 수 있는 도보, 그것이 최우선이었다. 제대로 된 보법이라면 익숙 해질수록 속도의 잇점도 얻을 수 있었다. 모진위의 경우는 그야말로 죽도 밥 도 아니었다. 저래서는 다음날조차 보장할 수 없었다. '이런... 이런!' 장도기가 북봉을 넘어서 동북의 지류에 들어썼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모 진위를 뒤따르게 되는 노선(路線)이었다. 어느 새 해가 지기 시작했다. 근방 에 끼니를 때울 곳이라면 바로 여기라고 장도기는 생각했었다. 다음 봉우리 를 넘어서는 것은 곤란했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가장 낮은 이 곳이 유 일하게 물을 구할 수 있는 장소였다. 장도기가 보기에 모진위는 제법 산세 파악도 잘하는 편이었고 산수(山水)에도 밝은 편 같았다. 사정을 몰라서 이 곳을 지나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산을 타고 내려가다보면 계곡이 있고 물이 있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물을 구하기 위해서 산을 다시 내려가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어차리 다시 능선으로 다시 올라와야 했다. 그것은 능 선근처에서 물을 구하는 것과 거리상으로 많은 차이가 있었다. '물도 안마시고... 밥도 안먹고...' 도데체 어쩌자는 심산인지 장도기는 은근히 걱정이 앞섰다. 어쨋든 장도기 은 길을 멈추고 자리를 정리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로 작심을 했다. 정작 장도기가 기절초풍한 것은 다음날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길을 달린 장도기은 다시 태양이 작열하기 시작할 무렵 도 당봉(嶋螳峰)을 넘어 고산(枯山)자락을 타고 돌았다. 과거에도 서너 번 왕래 했던 길이었다. 고산에서는 굳이 능선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산이 높기도 하거니와 중턱으로 질러가는 샛길이 있었다. 장도기가 능선에 서서 근처를 샅샅히 살펴 보았다.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인분(燐分)은 다른 동물 의 배설물과는 확연하게 다른 지독한 냄새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인적이 없 는 곳에서라면 얼마 지나지 않은 배변이면 족히 십리 정도의 반원내에서는 감지가 가능했다. 장도기는 냄새를 추적하여 배변을 조사해 보니 생각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미 서너 시진은 족히 지난 것 같았다. 장도기는 다 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모진위의 이동방식에 추가할 것이 하나 더 생겼 다. '물도 안마시고 밥도안먹고' 에다가 '잠도 안자고'를 추가시켜야 했다. 그 나마 대소변의 배설과정만이라도 생략하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울 따름이라 고 해야 할 형편이었다. 장도기의 예상보다 거리가 대폭 확장되었다. 장도기는 본격적으로 경공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천분지를 이백여리 남겨둔 시점에서야 겨우 모 진위의 꼬리를 따라잡을 수 있게 되었다. 모진위가 장도기의 초옥을 출발한 지 꼬박 하루에다가 여덜 시진을 넘겼으며 거리로 치자면 물경 사백 팔십리 를 초과해 버렸다. 다시 해가 지고 있었다. 밤길을 달리는 것은 경공 전문가에게는 지극히 낭 비적인 행동이었지만 내친 걸음으로 소몽산(素夢山)까지는 가보기로 했다. 소몽산을 지나면 장장 이백리의 바위산이 줄을 잇게 된다. 장도기는 모진위 도 이번만은 발길을 멈추게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장도기가 모진위의 꼬리를 따라잡은지 어언 두 시진이 지났다. 그 동안 단 한 번도 휴식을 취하 지 않고 있는 모진위였다. 휴식은커녕 도보를 택한 적도 없었다. 어제처럼 줄창 달리고만 있었다. 장도기의 기대가 또 한 번 박살나고 말았다. 모진위는 잠시의 망설임도없 이 소몽산을 지나쳐 바위산을 달리고 있었다. '어째서 쓰러지지 않는 걸까?' 상식이 통하지 않는 무리한 행군이었다. 설혹 내가(內家)의 진인일지라도 이틀을 굶으면서 잠도 안자고 달린다면 탈진해 버리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모진위는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장도기는 움푹 꺼진 장소를 발견하 고는 폭신할 정도로 풀더미를 깔았다. 마침 적당한 바위까지 나란히 위치한 장소였다. 그곳에 편안하게 자세를 취한 장도기는 아주 천천히 건포를 씹었 다. 시간을 두고 정성껏 씹어댔다. 아침과 점심은 곡식가루, 저녁은 건포였 다. 장거리 원정에 나설 때면 장도기는 언제나 그랬다. 이동 중 눈에 띄는 나무열매로 그때그때 수분과 양분을 보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루 다섯 끼의 식사를 반드시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장도기는 이미 여덜 끼의 식사를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모진위는 단 한끼도 먹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장도 기가 계속 관찰해 온 흔적이 틀림이 없는 것이라면 모진위는 시종일관 굶고 있었다. 장도기는 양 다리를 바위에 높게 걸치고 편안하게 누웠다. 산의 밤 은 빨리 찾아왔다. 벌써 별들이 하나둘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후로도 장도기는 모진위가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구경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질주를 멈추는 광경만은 보게 되었다. 나흘만의 일이었다. 끝 이 없을 것같이 늘어서 있던 능선이 마침내 끝을 보였다. 춘단하(春斷河)였 다. 이제 춘단하를 건너면 한동안 평야였다. 그대로 북으로 달리면 진령산맥 (秦嶺山脈)의 지맥을 만나고 그 지맥을 지나서 동북방면으로 나아가면 사천 분지를 끼고 돌아가는 산줄기를 만나게 되어 있었다. 진령으로만 갈 수 있다 면 그 다음은 비교적 순탄한 길이었다. 산맥군들이 대륙을 그대로 황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령산맥은 너무 멀었다. 북으로 기천리를 우회해 야 했다. 하지만 춘단하의 상류를 도하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저런 미친 놈!' 장도기가 기겁을 했다. 모진위가 돌연 옷을 벗어 제끼더니 등짐과 함께 머 리통에 둘러매었다. 그리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강폭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백장단위이하로는 셈이 되지를 않았다. 강을 수영으로 도하한다는 자체가 모 험이기도 했지만 설사 성공하더라도 엄청난 체력소비가 불가피했다. 장도기 는 초조한 마음으로 모진위의 자맥질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모진위가 피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강안을 엉금엉금 기어오르는 새카만 점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잠시후 작은 점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뭍에 오르자마자 그대로 쓰러져 버린 모양이었다. 아마도 지금쯤 터질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거친 숨 을 몰아쉬고 있으리라. 장도기는 혀를 내차며 남쪽으로 몸을 돌렸다. 물론 장도기도 저따위 개울쯤 은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수백리를 질주하는 경우보다 훨씬 힘의 낭비가 심했다. 나룻터까지는 기껏해야 팔십리길이었다. 어디서 강을 건너든 지 결국 합류지점은 관도였다. 모진위가 목숨을 걸고 절약한 거리는 겨우 오 십리나 될까 하는 정도였다. 모진위가 흙먼지를 휘날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장도기는 다시 한 번 감탄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정 모르는 이가 본다면 초라하기 그지 없는 땅강아지 의 몰골이었지만 장도기에게는 전율이 흐르는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 은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처음 출발했을 때의 그모습 그대로 모진위가 관 도를 달리고 있었다. 객잔이 바라다 보이는 산비탈이었다. 장도기가 굳이 비탈을 끼고 앉은 이유 는 이번만은 모진위가 반드시 객잔에 머무르리라는 거의 신념에 가까운 확 신 때문이었다. 모호령(母虎嶺)을 앞두고 있었다. 모호령은 하루가 꼬박 걸리 는 준령이었다. 물론 모진위가 모호령에 오를 공산은 없었다. 조금 더 동쪽 으로 진행하여 팔방대산(八方大山)의 능선으로 향하는 행로가 예상되었다. 당분간은 객잔같은 호사스런 잠자리는 꿈도 꾸기 어렵겠지만 장도기는 입맛 을 다시며 야숙을 작심했다. 그러나 정작 폭신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기름진 아침식사를 먹은 장본인은 장도기이었다. 모진위는 객잔마저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객잔의 현수막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관도를 빠져나가 동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의 등에는 밤이슬이 내려앉고 있었다. 장도기은 오래간만의 편한 잠자리, 좋은 음식이었지만 영 개운치가 않았다. 장도기가 질 확률은 거의 없는 내기였다. 종내에는 애꿎은 모진위만 탈진해 서 쓰러져 산중고혼(山中孤魂)이 되고 말 것임을 장도기는 잘알고 있었다. 물론 그때도 그랬다. 장도기가 질 확률은 절대로 없는 내기였다. 그런데도 장도기는 지고 말았다. 당유... 만파문(萬波門)은 일인문파임에도 불구하고 낭야산(狼野山)일대에서는 그래 도 꽤 알려진 문파였다. 만파문의 만파종은 경공에 관한 한, 호북을 통틀어 도 가히 일절이었다. 만파종은 일인전수의 절대비기(絶對秘技)였다. 그래서 문파의 인원이 가장 많았던 시기에도 총 네 명을 넘지 않았다. 아무리 오래 살고, 아무리 일찍 제자를 받아들여도 태사부, 사부, 일대제자, 이대제자가 고작이었다. 제 팔대 장문인 장도기에 이르러서는 결국 일인문파가 되고 말 았다. 스승은 요절하였고, 장도기의 게으름으로 아직 제자를 입문시키지 못 한 상태였다. 그래도 낭야산 근동에서는 제법 거들먹거리던 장도기였다. 이 렇다 할 결정타를 가지지 못해 상대를 때려 죽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맞아 죽는 일은 없었다. 호북사절(湖北四節)의 일인인 쌍독수(雙毒手) 매도파(梅禱 波)가 시비를 걸어왔을 때조차 전혀 물러섬이 없었다. 비록 단 일권도 적중 시키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매도파도 마찬가지였다. 장도기는 졸지에 호북의 절대고수와 동수를 만들어낸 낭야산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기고만장의 장도기를 진퇴양난(進退兩難)의 궁지로 몰고간 것은 황산파(黃 山派)의 당고민(唐鼓旼)이었다. 황산파는 멀리 안휘지방의 문파였으나 장도기 도 그 이름만은 알고 있었다. 마도 초웅천의 흑염류를 이어받은 일맥이라고 뒷골목에서 구설수에 오르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천하를 호령하는 거대세 력의 대파였다. 황산파의 신진고수 당고민은 제 아무리 장도기가 호북 제일 의 경공이라고는 해도 전혀 격이 다른 고수였다. 열 번을 때리면 팔구 번은 피할 자신이 있었으나 그 나머지 한두 번이 문제였다. 스치기만 해도 장도기 정도는 그냥 골로 갈 것임이 명명백백했다. 장도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고민 같은 천하의 후기지수가 왜 자신과 같은 시골의 허접문파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것인지. 여하튼 당고민은 온갖 꼬투리로 장도기의 목을 조여왔고 마침내 장도기가 걸려들고 말았다. 아니 기실은 걸렸다고 할 것도 없었다. 그것은 명백한 당고민의 억지였다. 장도기는 기가 차서 말도 안나왔다. "비웃고 싶은가? 비웃어도 좋네. 단, 그 댓가는 치뤄야겠지." 당고민이 그렇게 말했고 장도기는 그런 당고민의 면전에 노골적으로 조소 를 퍼부었다. 사해가 동도라고는 하나 강호는 엄격한 계급사회였다. 힘쎈 놈 이 장땡이었다. 감히 하수가 고수를 비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속으로는 음흉한 속임수가 오가더라도 겉으로는 엄연히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있었다. 고수의 명예를 먹칠하는 것은 온 강호가 당연시 여기는 죽어 마땅한 사유였 다. 그러나 장도기는 당고민을 비웃고 말았다. 당고민은 장도기보다 빨리 달릴 수 있노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것도 오천 리의 장도(長途)를. 어찌 가소롭지 않을쏘냐. 오십리도 아니고 오백리도 아닌 오천리를 장도기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고 허풍을 때리는데 어찌 가소롭지 가 않겠는가. 장거리 이동이라면 천하의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만파문이었고, 그것은 현 장문인인 장도기의 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 였다. 본래부터 만파문은 장거리를 달리는 것 하나로 이름을 얻었고, 그로 인한 수입으로 명맥을 이어가는 전통깊은 문파였다. 당고민이 아니라 황산의 장문인이라는 보룡거사(寶龍居士)가 온다고 해도 달리기 시합만큼은 자신이 있는 장도기였다. 더구나 당고민이 도발해 온 내기 금액은 무려 황금 백 냥 이었다. 물론 패한다면 장도기는 너무도 당연히 목숨을 각오해야 했다. 그러 나 장도기는 당고민의 면전에서 통괘하게 콧방귀를 날려주었다. 그렇게 내기 가 성립되었다. 장도기은 자신을 저주하였다. 자신의 천성적인 나태함을 저주하였다. 사부 의 다구침이 없다고, 체통을 차려야 할 제자가 없다고 수련을 게을리한 자기 자신의 오장육보를 뒤틀며 자책하였다. 당고민은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무리를 하다가는 완주조차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당고민은 쉬지 않고 달 렸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다. 오로지 달렸다. 뒤늦게전력을 쏟아부었지 만 술과 여자로 이미 뼈 속까지 썩어버린 장도기는 그렇게 달릴 수가 없었 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당고민은 반년을 하루같이 내기를 대비해서 몸을 만 들어 왔다고 했다. 철저한 계획하에 오천리의 자양분을 비축했던 것이다. 간신히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당고민은 장도기의 목을 대신하여 목젖을 잘라갔다. 장도기는 신도곡의 노예 가 되었다. 그리하여 삼백이십년을 이어왔던 유서깊은 만파문의 현판은 땅바 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당고민은 장도기를신도곡에 바쳤고 신도곡주 초진양 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당고민이 장도기를 입곡선물로 택한 이유는 간단했 다. 독보적인 경공의 소유자로서 일자무식의 까막눈이기 때문이었다. 벙어리 만 만들어버리면 기밀유지에는 아주 그만이었던 것이다. 일자무식의 경공고 수가 강호에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다. 초진양은 당고민을 첫 번째 제자로 받아들이며 당유라는 새이름을 하사하였다. 장도기은 가끔 쓰라린 추억으로 회상해 보고는 했다. '당유의 무엇이 그렇게 당유를 달리게 했을까?' 장도기는 모진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때를 회상하였다. 이제와서는 당유 가 왜 그렇게 달렸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모진위를 보며 장도 기는 다시 그때와 같은 의문에 사로잡혔다. 모진위의 무엇이 저렇게 달리게 하고 있는가? 야망? 천하제일을 향한 열 망? 아닐 것이다. 열망은 당유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유는 철 처한 계획과 준비가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열망이 인간의 한계까지 극복시켜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진위는 인간의 의지로써는 불가능해 보이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과연 무엇이 일개 미물에 불과한 인간을 저토록 달 릴 수 있게 만드는 것인가? 모진위는 의식이 모두 사라져버린 미망 속에서도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당 유를 달리게 하는 원동력이 천하제일의 열망이었다면 모진위가 달리게하는 원동력은 사랑이었다. 대사형 양희구가 기쁨으로 그랬듯이, 이사형 개천호가 분노로 그랬듯이, 삼사자 하가령의 슬픔이 그러했듯이, 사사형 오몽생이 고 통으로 그러했듯이 소사제 모진위는 사랑으로 천지신공을 끌어올려 영육(靈 肉)을 불태우고 있었다. 출발시부터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무리하게 강행했던 경공수련에서 비 롯된 팔일간의 상처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여기저기 돌뿌리에 채인 발 가락들도 좋지 않았고, 연일 불편한 각도로 이리저리 돌려지던 발목도 시원 치 않았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상태가 안좋았던 부위는 발바닥이었다. 굳은 살이 여기저기 갈라지고 떨어져나간 악조건이었다. 장도기의 안배대로라면 약간은 더 회복된 상태에서 출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진위의 타는 가슴 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사단이 난 곳은 뜻 밖에도 사타구니였다. 행군 이일째에 접어들 무렵부터 사타구니가 쓰려오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벅지가 서로 쓸리는 것이 사람 환장할 정도로 신경을 긁어댔다. 마치 허물이 모두 벗어진 듯 아려왔다. 처음에는 왜 허벅지가 그 모양이 되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 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지 겨드랑이도 쓰려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비 로서 모진위는 사태의 전말을 깨달게게 되었다. 쉼 없이 달리다보니 젖은 옷 가지들이 미처 마를 새가 없어서 허벅지를 물로 불게 만들었고 마찰로 인하 여 닳기 시작한 것이었다. 통증을 회피하려면 정지하는 수밖에없었다. 한걸 음을 옮기는 만큼 고통도 수반되었다. 그래도 달리고 있는 것이 모진위였다. 무릅관절이 버들가지처럼 느껴졌다. 겨드랑이가 쓸리는 정도는 감히 통증이 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허벅지가 쓸리는 아픔도 발바닥이 불덩이처럼 화끈 거리자 뒷전이 되어버렸다.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리고 옆구리가 결려왔지만 그것도 결국은 애들 장난이었다. 무릅관절이 바늘로 쑤셔대고 식초처럼 시어 오자 이전까지의 아픔들은 전부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달 렸다. 채경령의 쾌속선보다 먼저 도착할 자신은 없었다. 십중팔구는 이미 ㅈ 어담을 수 없는 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모진위는 달렸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어두운 길가에 채경령이 나타났다. 비스듬이 누운 채, 한손으로 턱을 고이고 모진위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모진 위에게 미소까지 보내주었다. 채경령은 아주 편안해 보였다. 모진위도 이제 그만 누워서 쉬고 싶었다. 한걸음 한걸음 채경령에게 다가갔다. 후드득-. 흙덩이가 쏟아지는 소리에 모진위가 미망에서 깨어났다. 발끝이 벼랑에 걸 려있었다. 어두운 심연이 지옥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늑한 풀밭도 채경 령도 없었다. 그저 끝을 알 수 없는 절벽이었다. 모진위는 가물거리는 의식 의 끝자락을 세차게 잡아다녔다. 쏟아지는 졸음을 밀어내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았다. 삭신이 쑤셔왔다. 그대로 누워버리고만 싶었다. 하지만 모진 위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와서는 채경령도 항주도 없었다. 달려야 한 다는 강박관념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장도기는 비호령(飛虎嶺)이 환히 보이는 그늘 밑에서 몸을 쉬고 있었다. 지 금까지의 추세대로라면 이제 모진위가 모습을 드러낼 시간이었다. 행로에 든 지 육일이 지났고 어느 덧 사천분지를 높은 담처럼 둘러싼 산줄기였다. 모호 령은 뱀처럼 구비구비 돌아가는 능선줄기의 허리를 동강내고 있었다. 봉우리 를 잇는 낮은 능선은 지정학상으로 고개가 되야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비호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비호령이 그저 작은 고개가 아니라 성도에서 중원으로 뻗어가는 관도의 연장선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많은 사람 을 동원해서 인위적으로 길을 넓히고 깍아낸 교통로였다. 능선을 달리는 자 에게는 이미 능선이 아니라 협곡이었다. 그것도 대단히 넓은 협곡이었다. 모 진위의 어리숙한 비월술로는 횡단이 불가능한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장도기 는 혹시나하는 불안으로 서둘러 모진위를 추월하여 먼저 모호령에 도착했다. 장도기에게 있어서 모진위는 이미 상식을 불허하는 인간이었다. 한마디로 미 친 놈이었다. 잠시 후, 모진위가 모퉁이를 돌아왔고 장도기의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되었다. 능선을 포기하고 모호령을 우회하는 것은 이틀의 거리가 추가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의 목숨 때문에 이틀의 손해를 감수할 수 있 다면 그것은 이미 정상인이지 미친 놈이 아니었다. 모진위는 장도에 나선 이래 두 번째로 발걸음을 멈춰야 했. 일전에 채경령 과 헤어진 곳이 바로 비호령이었다. 그때의 기억으로 대충 가늠해 보았었는 데 실제로 능선에서 다시 보니 실제의 폭은 생각보다도 훨씬 길었다. 십장은 안되어도 다섯 장은 족히 넘었다. 아무리 과소평가하려고 애를 써봐도 오장 보다는 십장 넓이에 가까워 보였다. 기억하기로 인접한 지역에 등정로는 없 었다. 고개를 내려가 길도 없는 산을 오르거나 아니면 북쪽으로 한참을 거슬 러 올라가야만 했다. 모진위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결심이 선 듯 모진위가 눈을 부릅떴다. 장도기가 전수해 준 비월술을 차근차근 머리에 떠 올려 보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때 우측 둔턱에서 자주빛 인영이 튀어나왔 다. 장도기였다. 장도기가 모진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능선을 포기하고 하산하자는 뜻이었 다. 그러나 모진위는 완강히 거부했다. 장도기가 크게 한숨을 내쉬고 소매를 놓아주었다.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지는 않았다. 단 한 번의 눈맞춤만 가지 고도 서로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모진위는 장도기의 간곡함을 충분히 알아들었고 장도기도 그 간곡함을 넘어서는 모진위의 절박함을 분명하게 느 끼고 있었다. 장도기가 모진위를 근처의 바위에 앉혔다. 그리고 앞뒤를 오가며 열심히 자 세를 취해 보였다. 온갖 손짓발짓이 동원되었다. 모진위가 장도기의 의도를 눈치채고 열심히 흉내내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자세교정을 거친 후, 장도기 가 벼랑으로 다가갔다. 장도기의 발걸음이 점차 속력을 더하였다. 드디어 최 고의 질주가 이루워지고 장도기가 벼랑 끝에 도달했다. 장도기의 오른 발이 벼랑을 지나쳐 허공에 이르렀다. 오른 발이 잠시 허공을 헤메는 듯 싶더니 돌연 방향을 선회하여 수직의 벽면을 힘차게 밀어부쳤다. 그와 동시에 왼발 이 벼랑의 끝자락을 차고 올라갔다. 시작은 쇠덩이처럼 무거워보였지만 그 추진력이 다하자 장도기의 몸은 점차 가벼워지더니 깃털처럼 부드럽게 허공 을 부유하였다. 잠시후, 정점에 이른 장도기가 서서히 하강하였다. 그리고 다 시 무게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무서운 기세를 타고 벼랑의 저편으로 날아갔다. 비호령의 건너편에서 장도기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잠시후 장 도기는 동일한 방법으로 모진위에게 귀환하였다. 그렇게 서너 번 쯤 장도기 는 협곡을 왕복하였다. 모진위의 차례가 되었다. 하지만 모진위를 무작정 협곡에 몰아넣을 장도기 가 아니었다. 예행연습이 선행되었다. 일차 시도는 협곡의 넓이에 반도 미치 지 못했다. 기실 모진위는 무리한 질주로 인해 내공과 자세 그리고 주법의 조화가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다. 또한 지금까지 비월술과 같은 고도의 경공 은 구사해 본 적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그냥 자살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 다. 장도기가 시범을 보이고 모진위가 따라하고 다시장도기이 자세를 교정 해 주기를 몇 번 반복하였다. 한 시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자세가 나오지 를 않았다. "어차피 단기간에 깨우칠 수 있는 도리가 아님을 장형께서도 잘 알고 계시 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한 한 번으로 안된다면 열 번, 백 번으로도 안되겠지 요. 이렇게 시간만 보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뛰겠습니다. 어찌 목숨 이 아까운 줄은 모르겠습니까. 저도 허무하게 죽을 생각은 없습니다. 필사의 각오로 임하겠습니다. " 속이 타는 모진위가 분연히 일어섰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렀다. 이틀 전에 단비가 온 탓인지 하늘을 맑게 게여 있었다. 뭉게구름도 티 한점 없이 깨끗했다. 뭉게구름 사이로 채경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진위는 외면하지 않았다. 불구대천의 원수건, 죽마고우의 애인이건 다 상관없었다. 모진위는 진실로 그리운 것을 그리워하였다. 지금 이순간 모진위를 도와줄 사람은 채 경령밖에 없었다. 그녀가 천지신공의 주인이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힘이 용솟음치듯이 모진위의 전신을 휘감고 돌았다. 기 경팔맥을 타고 힘찬 물살이 용트림을 쳤다. 모든 힘을 단전에 집중시켰다. 힘을 주체치 못하는 진기들이 단전을 팽팽하게 충만시켰다. 가볍게 발을 구 르고 달려나갔다. 벼랑 끝을 바라보며 서서히 힘을 끌어올렸다. 벼랑이 가까 워오자 억눌러 놓았던 단전의 기운을 일시에 쏟아내었다. 명문혈(명문혈)을 배출구로 힘껏 내뿜었다. 그리고 온 가슴을 벌려 전방을 대기를 흡수하였다. 모진위의 안면과 흉부를 압박하던 바람들이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이었 다. 모진위의 전면을 타고 흘러 들어온 기운들이 그대로 등판의 명문혈로 빠 져나가 배후의 외력과 충돌하였다. 모진위는 정면만 뚫어져라 주시하는 가운 데, 벼랑으로 돌진하였다. 힘껏 발을 뻗었지만 발 밑이 허전하였다. 지면을 찾지못한 앞발이 하릴없이 추락하였고 모진위의 신형도 벼랑 밑으로 고꾸라 져 갔다. 헛! 모진위는 마지막 진기 한모금을 입에 머금고 힘차게 발을 찼다. 허공을 맴 돌던 발이 수직으로 꺽이며 벼랑을 걷어찼다. 동시에 나머지 한 발도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모진위는 잔뜩 움쿠렸던 허리를 활짝 펼치며 사지를 일직선으로 펼쳤다. 하늘과 땅바닥이 양 끝에서 잡아당기는 듯 그렇 게 전신을 한일자로 곧게 세웠다. 명문혈이 봉쇄되자 배출구를 잃어버린 진 기들이 상단전을 향해서 충천하기 시작했다. 모진위가 하늘높이 날아올랐다. 정점에 달한 모진위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이윽고 힘이 다한 육신이 하강 을 시작하자 모진위의 사지가 스르르 큰 대자로 펼쳐졌다. 반원의 허리가 부 드럽게 굴곡을 펼치며 상체가 지면을 향하더니 양 다리를 하늘로 밀어올렸 다. 임맥(任脈)을 타고 상단전을 차고 오르던 기운이 백회혈에 이르자 독맥 (督脈)을 따라서 다시 하단전으로 방향을 틀었다. 진기가 임독 양맥을 강하 게 치솟고 부드럽게 타고 내리며 주천(周天)을 거듭하고 있었다. 행공(行功) 이되, 행공이 아니었으며, 운기조식의 일주천과 진배없으나 본질적으로 운기 조식은 아니었다. 천지신공의 활화산이 유진목의 해우공을 방향타로 삼아서 장도기의 만파종을 전개하는 순간이었다. 모진위가 두 팔을 힘껏 뻗어 반대 쪽 벼랑 끝을 부여잡았다. 장도기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그래도 입가 의 미소는 숨기지 못했다. 장도기가 눈빛으로 물어오자 모진위가 이내 감지하고 대답했다. "태식호흡(胎息呼吸)이라고 혹시 들어 보셨는지요?" 장도기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모진위가 태식호흡을 하고 있다는 것이 믿 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모진위와 장도기는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모진위 는 장도기의 자세를 그대로 모방하여 도포 속에 두 팔을 밀어넣어 팔굽과 직각이 되도록 가슴까지 들어올렸다. 그리고 허리를 편안하게 굽혔다. 한결 달리기가 수월해졌다. 다만 무릅의 각도만은 쉽게 되지 않았다. 아무리 똑같 이 자세를 취해 봐도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모진위가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도기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장도기는 모진위가 어떻게 먹지도 않고 잠도 안자고 그렇게 오래 달릴 수가 있는지 궁금했었다. 물론 모진위가 천하 무쌍의 호흡 법 무위조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모진위는 오래 전 양주의 채가장에서 한달 이상을 물만 마시며 견디어 낸 적도 있었다. 피 부와 모공으로 호흡하는 무위조식과 모진위의 의지가 만들어낸 합작품이었 다. 장도기은 불신의 표정으로 대답을 재촉하였다. "살모사같은 놈이지요. 제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악마의 종자라고 해야겠 지요. 무위조식이라는 호흡법이 있는데 태아 때부터 이미 수련에 들어가 있 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제 어미의 숨을 갉아 먹으며..." 모진위가 자신의 출생에 대한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진위는 자기 자신에 게조차도 차마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를 장도기에게 아무런 스스럼없이 털 어놓고 있었다. 자신에게 이야기하듯 그렇게 담담하게 털어놓고 있었다. 상 대가 다름아닌 장도기였고, 모진위도 더 이상 예전의 폐쇄적인 모진위가 아 니었기 때문이었다. 거칠 것이 별로 없는 평탄한 능선이 이어지고 있었다. 장도기는 속력을 낯 추며 뒤로처졌다. 장도기는 때로는 모진위의 앞으로도 나서기도 하고 때로 는 등 뒤로 물러나기도 하였다. 오랜만에 뒤로 물러설만한 기회가 찾아왔다. 뒷모습을 시범보이거나 옆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쉬지 않고 달리는 상태에서 도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앞모습을 보여주려면 뒤로 물러나야 했는데 그 것이 별로 여의치가 않았다. 앞을 보지 않고도 달릴 수 있을 정도로 곧고 평 탄한 길이 아니면 곤란했다. 장도기가 물러나자 모진위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뒤로 돌렸다. 장도기는 손짓발짓으로 설명하고 모진위가 확인하는 그런 전수 방식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다. 모진위는 여전히 밥도 안먹고 잠도 자지 않았지만 태식호흡을 익히지 않은 장도기는 그럴 수가 없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무위조식의 과다한 사용도 문 제는 문제였다. 무위조식의 위대한 묘용은 잠을 자면서도, 걸어다니면서도 운기조식을 할 수 있는 특이한 호흡법이었지만 그래도 근본은 휴식의 상태 를 전제로 하였다. 달리는 상태에서의 무위조식의 운용은 필연적으로 위험을 동반하고 있었다. 기혈을 깍아먹는 행동이었다. 모진위도 그것을 모르는 것 은 아니었다. 다만 그에게는 행복한 내일이 필요없을 따름이었다. 장도기는 숙식을 위해서 행군을 쉬는 동안에 나무껍질을 벗겨서 그림을 그리고 미리 약정된 기호를 적어나갔다. 모진위의 깨달음을 위한 일종의 지침서와 같은 것이었다. "느낌입니까?" 장도기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신념? 기 스스로가 그렇게 할 수 있음을 믿는 것 말입니다." 장도기가 고개를 갸웃하고 궁리를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꼭 들어 맞지는 않아도 비슷한 의미인 모양이었다. 그러자 모진위가 문득 무엇인가 깨달았는지 다시 물어나갔다. "상단전이 반드시 그렇게 됨을 확신하고 중단전이 간절히 기원하고..." 장도기이 다시 갸웃거렸다. "음... 그러니까 머리 속으로 안될지도 모른다는 의심가지거나 불안해 하지 말고 마음 속으로는 꼭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장도기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류귀종(萬流 歸宗), 역시 무공의 뿌리는 하나였다. 유진목이 사사해 준 해우공의 도리가 장도기의 만파종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음을 모진위는 깨달았다. 각성이일 어나자 모진위의 배움에 막힘이 사라졌다. 만사순탄이었다. 그러나 날마다 봄날은 아니었다. 천지신공의 조화가 몇날 며칠이고 계속되지는 않았다. 장 도기을 만난지 사흘째로 접어들면서 모진위는 다시 시름시름 죽어가기 시작 했다. 다시 미망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몽롱한 의식과 지옥의 고통이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서북쪽으로 아스라히 민산산맥(岷山山脈)의 산악군이 눈에 들어왔다. 민산 산맥의 동남쪽 끝단이었다. 그 동쪽 어딘가에 대망의 대파산맥이 있었다. 대 파산맥을 그대로 종단해 나가면 그 끝은 대별산맥과 이어지고 대별산맥의 끝자락은 절강으로 이어진다. 대륙의 남북을 가르는 산맥군이었다. 대파산부 터는 능선을 따라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행로였다. 장도기는 이 쯤에서 모진 위와 헤어지기로 마음먹었다. 새로운 깨달음으로 경지를 넘어선 모진위였다. 끼니를 챙겨먹고 잘 것 다 자면서 모진위를 따라잡는 것은 이제 힘에 부쳤 다. 마음만 먹으면 결말을 못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소간의 무리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장도기는 이번 한 번으로 달리기를 끝낼 수 있는, 한가한 처지 가 아니었다. 일년을 하루같이 달리고 살아가는 팔자였다. 장도기가 도울 수 있는 것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는 모진위 혼 자서도 충분히 주파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지간한 협곡은 어렵지 않게 월곡하였고 벽호공도 제법 물이 올랐다. 고비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불가사의 한 정신력으로 극복해낸 모진위였다. 만봉산(萬峰山)근처의 오장 협곡에서는 힘이 모자라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다가 소나무에 걸려 간신히 살아나기도 했고, 만장애(萬丈崖)에서는 벽호공으로 기어오르다가 굴러 떨어져 콧등이 깨지기도 했다. 그러나 장도기는 걱정하지 않았다. 칠장이 넘는 비호령을 단 숨에 건너뛴 모진위였다. 만봉산의 협곡에서는 사생결단의 의지가 아닌 약간 의 방심상태였던 것이다. 사람의 능력이란 것이 무한한 것이라 목숨을 담보 로 하는 도박에는 이 할쯤 능력이 추가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경공도 장도기가 애를 쓴 그 동안의 정성덕분에 그럭저럭 내공과 자세가 조화를 이루는 보법의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발가죽이 닳아서 피가 터 져나오는 상황에서도 보법다운 자세를 잃지 않았다. 서투르나마 초상비의 오 묘한 조화마저 터득하고 있었다. 궁하면 통하는 법. 고통을 줄여보려는 일환 으로 모진위는 지면에 닿기도 전에 발바닥을 옮기려는, 뜬구름같은 시도를 본능적으로 반복하였고 그것이 장도기의 가르침에 따라 초상비의 형태로 진 화하고 있었다. 탈진해 버린 육체와 그것을 극복하려는 정신이 또한 적절한 힘의 안배를 조절해 주었다. 무의식이 복종과 저항을 결정하였다. 수시로 나뭇가지등이 몸에 걸리고 돌뿌리와 풀뿌리가 발목을 잡았지만 그때마다 배워나갔다. 힘의 낭비를 없애기 위해서 치고 나갈 것은 그대로 돌파해갔고 힘에 부치면 미련 없이 흐르는 방향대로 몸을 맡겼다. 이미 연약한 풀에서조차 탄력을 얻어내 는 고도의 경지에 들어서고 있었다. 장도기가 지난 십년간 갈구하고 또 갈구했던 것은 자유였다. 그 절실한 갈 망이 지금 눈앞에 현실로 다가왔다. 이제 열흘 남짓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 다. 그리고 모진위가 시간내에 항주에 도착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것으 로 장도기는 내기에 이기는 것이고 자유를 되찾게 되는 것이었다. 자유이외 의 그 어느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노예상태의 장도기로서는 세상의 어 떤 가치도 자유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장도기속에서 또 다른 장 도기가 자라나고 있었다. 또 다른 장도기는 모진위가 늦지 않게 도착하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었다. 장도기는 그런 자신이 너무도 낮설었다. '미친 놈 모진위하고 붙어 있더니 나도 미쳐버린 모양이군.' 장도기가 다시 뒤를 돌아다 보았다. 이제는 울긋불긋한 점에 불과했다. 그 점 하나가 대별산맥의 첫 번째 봉우리를 오르고 있었다. 장도기가 초옥으로 되돌아 오고나서 사흘 후, 뜻밖의 손님이 장도기를 방문 했다. 당유였다. 당유가 직접 장도기의 초옥을 찾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장도기에게는 신도곡의 감시자가 딸려 있었고 그 감시자가 명령을 전달했다. 반드시 얼굴을 맞대야 할 필요가 있을 때도 대개는 장도기가 당유를 찾아갔 다. "항주에서 연락이 왔다네..." 장도기는 가슴이 뛰었다. 모진위와 헤어진 것이 바로 열사흘 전, 항주에서 의 소식이라면 내기에 관계된 것이었다. "칠월 열사흘 오후에 서천목산(서천목산)에 나갔던 우리 사람이 놈을 보았 다더군." '칠월 열사흘이라...' 장도기은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하루면 항주에 도착할 수 있는 위 치였다. 그렇다면 십구일만의주파였다. 모진위가 해낸 것이었다. 묘한 기분 이었다. 한편으로는 맥이 빠지는 일이었지만 의외로 기분이 마냥 더럽지만은 않았다. 자유보다 더 귀한 것이 자신에게 남아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성취감같은 것이 밀물처럼 장도기를 따듯하게 데워주었다. 노예의 삶이 었다. 밑바닥 쓰레기인생이었다. 항시 그렇게 생각해왔었다. 그러나 장도기는 어쩐지 지금의 자신이 제법 고귀한 존재처럼 생각되었다. 비록 그 댓가로 목 숨을 내놓아야 했지만 어쩐지 사뭇 가치있는 죽음같이도 느껴졌다. "호오, 생각보다 그렇게 풀이 죽은 얼굴은 아닌데...?" 당유가 이미 문밖으로 나섰는데도 장도기는 배웅도 잊어버리고 무언가 골 똘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떻게 자결해야 당당하게 보일 것인가?' 약속은 약속이었다. 장도기는 이미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다. 후환거 리를 남기고 싶지 않은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그때 문을 나서려던 당유가 일 순 어깨를 움찔하며 멈춰섰다. "아참!" 그제서야 장도기가 고개를 들었다. "잘가게." 장도기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설마 계속 신도곡에 남아있을 생각은 없을테고. 원한다면 본좌는 거절할 생각은 없네만." 장도기늠무슨 헛소리인지 종내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우리사람이 서천목산에 나간 것은 이미 배는 항주나룻터에 당도한 후였네. 내기는 자네가 이겼다네." 장도기의 머리 속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뭐야? 내기에 이겼다는데도 불만인가?" 당유는 싱긋이 웃고는 문을 박차고 나섰다. 장도기야 당유가 죽이고 싶도록 밉겠지만 당유는 그렇치 않았다. 오히려 약간은 미안하고 약간은 측은하다는 편에 가까웠다. 당유 자신이 펄쩍 뛸 소리지만 장도기에게 어느 정도 호감마 저 느끼고 있는 당유였다. 당유는 신도곡에 입문한 그날부터 전서구를 길들 이기 시작했다. 비둘기들은 이제 장도기가 필요없을 정도로 잘 자라주었다. 눈하나 깜짝 안하고 남의 목젖을 불에 지질 정도로 냉정한 당유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의 목숨을 파리처럼 때려 죽이는 잔혹한 인간은 아니었다. 살인멸구가 필요할 정도로 입이 가벼운 장도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만 자신의 삶을 살아가도록 놔주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무림천하-창작연재란 (go MURIM)』 2744번 제 목:[연재] 표류공주 55회 -최후식- 올린이:하이문 (문홍일 ) 99/11/15 12:59 읽음:253 관련자료 없음 ----------------------------------------------------------------------------- 번 호 : 9736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11-14 21:47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55- 20.종즉시시(終卽是始) "마차라..." "예, 마차라더군요." 어지간히도 속을 썩이던 은괴 육백관이었다. 두 사내는 그렇게도 애가 타게 찾아 헤메던 그 은괴 육백관의 행방이 드디어 밝혀졌건만 마냥 밝은 표정만 은 아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은괴 육백관은 지난 육개월동안 단 한번도 맹의 그늘을 벗어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씁쓸한 표정의 두 사내가 눈빛을 마주쳤다. 은괴 육백관은 작은 덩치가 아니었다. 맹은 오랜 준비를 거쳐서 나무대신 은괴을 재료로 마차를 제작하였다. 쉬운 작업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맹은 은 괴 육백관으로 마차 한 대를 완성할 수 있었고 은괴는 삼엄한 감시의 눈길 을 피해서 옥문관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채경령 일당의 눈길 마저 피하지는 못했다. 마차를 강탈해 간 채경령은 채경령은 어이없게도 그 마차를 다시 맹의 안 방이라고 할 수 있는 낙양표국에 맡겨 놓았던 모양이었다. 망할 놈의 낙양표 국이 그 마차를 옥문지국에서 난주지국으로 보냈고, 난주지국의 후레잡놈들 은 사천으로, 사천지국의 개잡종들은 다시 항주로 배달해 주었던 것이다. 멋 지게 뒷통수를 쳤다. 실로 대담한 채경령이요, 희대의 도박꾼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그것도 모르고 맹은 천지사방을 헤매고 다녔다. 기가 차고 코가 막히는 노릇이었다. "어디 있다는가?" "방금 전 항주를 벗어나서 북쪽 관도를 타고 있답니다." "이번에는 실수가 있어서는 안돼는데, 차질이 없이 잘될 것 같으신가?" "그리 되는 것 같습니다. 맹주님." "그래, 다음은?" "금형을 그리로 옮기겠습니다." "금형이라니?" "예, 은원보를 뽑아낼 형틀을 그리로 보내겠습니다. 채가장의 계집이 제련소 를 급조해놓은 모양입니다." 어렵게 빼내온 금형이었다. 모든 상거래에 있어서 공식적인 은원보 외에는 어떤 형태의 은원보도 거래가 금지되어 있었다. 조정에 납부하는 소금의 결 제대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맹은 공식 은원보의 형틀을 확보하 는데 총력을 기울렸다. 엄청난 반역행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 이 너무 촉박했다.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죽기는 마찬가지였다. 은괴 육 백관이 여전히 마차형태로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맹주와 총관이었다. 그 자책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총관의 대분발덕분에 다행스럽게도 제련 을 위한 금형만은 확보할 수 있었다. 두 사내가 눈빛을 맞추며 은밀하게 웃었다. 사태는 모진위의 짐작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모진위의 불안이 적중한 것이 었다. 채경령은 복고맹의 마지막 숨통을 조이고자 밤을 낯 삼아 항주로 배를 몰았다. 복고맹이 항주에서 대규모의 금괴를 수집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 다. 양주의 염상을 비롯한 천하대상들이 금괴를 동반하고 항주로 모여들고 있다는 첩보였다. 채경령은 결정타를 먹일 기회가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단 기간에 그렇게 많은 금이 필요한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해상을 통한 은괴밀수였다. 채경령은 금이 흘러오는 길목을 가로막을 계획을 세웠다. 복 고맹의 금괴 매입자금은 은원보일 수밖에 없었다. 은이라면 채경령도 있었 다. 가격경쟁이 된다면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공짜 은괴였다. 아주 싼 값에 은을 풀어놓으면 그만이었다. 복고맹이 금의 매입을 강행하면 그것은 그대로 적자였고 매입을 포기한다면 은괴밀수의 연결고리가 박살나는 판이 었다. 채경령은 은밀하게 항주근교에 제련설비를 건립토록 했다. 도착즉시 은마차를 은원보로 탈바꿈시켜야 했다. 이것은 채경령의 대담한 작전인 동시 에 복고맹이 파놓은 함정이기도 했다. 애시당초 복고맹에게는 금괴를 매입할 자금따위는 없었다. 그런 맹의 다급 함은 아랑곳하지 않고 은괴 밀수선과의 접선날짜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돌파구는 단 하나였다. 채경령의 은괴가 그것이었다. 복고맹은 금괴 를 사들이기 위해서 염상들을 불러 모았고 채경령도 그 금괴를 사들이고자 항주로 잠입하였다. 복고맹이나 채경령이나 금괴를 매입하려는 자금원은 똑 같았다. 반년 전에 옥문관을 통과해 온 바로 그 육백관짜리 은마차였다. 흙으로 만든 커다란 항아리 밑에서는 퍼런 불꽃이 끊임없이 혓바닥을 날름 거리고 있었다. 항아리 속에 마차바퀴가 들어가고 문짝이 들어갔다. 그것들 은 이윽고 본연의 형체를 상실하며 녹아들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천하제 일의 염상조직 채가장의 희망도 속절없이 녹아 없어지고 있었다. 챙챙! 병장기들이 차가운 금속음으로 충돌했다. 허억!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뒤를 이었다. 복고맹은 사대부와 대지주 그리고 무림 명문대파들이 결탁한 거대조직이었 다. 일개 상인의 개인조직이 정면대결로 승부를 가르기에는 너무도 벅찬 상 대였다. 남경의 어느 절터에서 모진위를 놓고 서로 칼 끝을 맞댄 이래로 채 가장은 언제나 치고 빠지기 전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조심스러 운 행보에도 불구하고 채가장은 옥문관에서의 마차를 탈취한 이후, 전력의 팔할을 소진하였다. 전력의 본체를 이곳 임시제련소에 집중시켰다지만 그래 봐야 예전의 이할, 정예라는 이름이 이미 무색한 지경이었다. 은괴 제련소를 불시 급습한 무리들이야말로 진정한 복고맹의 정예라 할 수 있었다. 채경령 은 넋이 나가버렸다. 기습당했다는 그 자체가 곧바로 채가장의 패배를 의미 하기 때문이었다. 유진목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가는 동료를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 었다. 감정에 휩쓸려서 본연의 임무를 망각할 유진목이 아니었다. 유진목의 임무는 시종일관 오직 하나였다. 바로 채경령의 보호였다. 덕분에 채경령의 근방을 어쩌다가 스쳐가는 맹의 무리들은 횡액을 맞았다. 일고의 자비도 없 었다. 예전의 그 유진목이 아니었다. 그의 살수 속에는 동고동락의 형제들을 대신하는 피눈물이 담겨 있었다. 채경령은 화들짝놀랐다. 뼈와 살이 얼어붙을 것같은 냉기였다. 하지만 그 냉혹한 살기는 미처 채경령의 살과 접촉해 보지도 못하고 스러져 갔다. 채경 령을 스쳐간 냉기는 길다란 도끼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무지막지한 도였다. 도를 쥐고 있는 사내를 따라서 눈길을 옮겨보니 그 앞에는 유진목의 부채가 펄럭이고 있었다. 채경령은 그제서야 비로서 자기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소 용돌이의 한복판에 서있음을 자각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채경령은 다 시 혼미 속에 빠져들어갔다. 경악으로 동그랗게 확대되었던 동공이 다시 잦 아들고 조금전의 멍한 표정을 회복하였다. 주변의 아수라장에는 조금도 관심 없는 방관자의 표정이었다. 채경령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목선민이 자못 비감한 표정으로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단단하게 틀어진 팔짱은 바 위와도 같았다. 채경령의 머리 속은 백지장처럼 텅비어 있었다. 어쩌면 의식이 마비되었다 기보다는 채경령 스스로가 돌아오려는 의식을 강제로 밀어내고 있는 것인지 도 몰랐다. 가끔씩 불신과 회의가 꼬리를 물고 안간힘을 썼지만 채경령의 완 강한 거부로 이내 다시 잠이 들고는 했다. 채경령은 생각하는 것조차 거부하 고 있었다. 채경령은 지금 목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가 왜 이 지경에 이 르렀는지 그 진상을 직시하는 것이 두려웠다. 이 사태가 어떻게 끝나게 될 것인지 그 결말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끔찍했다. 느닷없이 싸늘한 한기가 옷깃 사이로 스며 들었다. 채경령은 다시 한 번 화 들짝 놀라며 한기의 근원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색바랜 쥘부채가 한기를 가로막았다. '부채살이 정강(精鋼)으로 아마 제련되었다고 했던가?' 언젠가 채경령이 물었을 때도 유대인은 그저 너털웃음만 지었을 뿐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그것은 대나무라고 넌지시 말해 주었지만 채경령은 잘 믿기 지가 않았다. 아무리 무지막지한 칼날이 채경령을 핍박해 와도 유진목의 부 채의 부채를 돌파하지는 못했다. 그 엄청난 위력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가 느다란 대나무 부채살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긴 대나무 조각 이던 정강 막대기건 그것이 이제와서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고작 은괴나 녹이는데도 저렇게 시퍼런 불꽃이 필요할진데 정강이라면 얼 마나 사나운 불길이 필요할까? 그런 화덕이라면 내 뼈와 살정도는 흔적없이 녹아 버리겠구나. 아주 깨끗하게 흔적도 없이.' 채경령이 불쑥 은괴를 녹이는 화로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곤란 해진 것은 유진목이었다. 병장기의 충돌음으로 가득차 있던 작업장이 어느새 정적을 되찾아 가고 있 었다. 주위를 돌아 볼 필요도 없었다. 작업장의 고요는 유진목과 채경령을 제외한 채가장의 전멸을 의미했다. 화롯가에는 제련기술자와 인부들이 숨을 죽인 채, 떨고 있었고 습격자들이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채경령의 그 런 돌발적인 행동은 호시탐탐 먹이감을 노리는 맹수들에게 화약의 불씨가 되어주었다. 채경령의 일보전진을 신호탄으로 암습자들이 우르르 초식을 발 동하였고 그것으로 잠시간의 대치상태는 종말을 고하였다. 유진목은 미처 진기를 주천시킬 여유도 없었다. 남아있는 한 웅큼의 호흡만 으로 부채를 거칠게 말아 돌렸다. 무리한 내력운용으로 내기가 진탕되었지만 상황이 너무도 다급하였다. 채경령을 향해서 무섭게 날아들던 도검들이 일시 에 돌개바람에 휘말리며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유진목은 끌어오르는 욕지기 를 어렵게 가라앉히며 품(品)자형으로 확대일로에 있던 적들과 자신과 채경 령의 위치를 순식간에 일(一)자형으로 전환시켜 버렸다. 하지만 유연하고 넉 넉한 자세는 포기해야만 했다. 더불어 간신히 움켜잡았던 주도권마저 상대편 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유진목의 고충은 단지 주도권이나 무리한 내 력운용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채경령이 골치였다. 평소의 채경령이 아니었 다. 천하제일의 염상가(鹽商家) 채가장의 대소방회조직들을 이끄는 지도자에 게는 냉정침착이 첫손으로 꼽히는 미덕이었다. 채경령도 그 덕목에 따라 언 제나 신중하고 사려 깊었다. 보호대상자로서 첫 번째로 꼽히는 덕목도 역시 그와 같았다. 하나만 더 보탠다면 보표에 대한 깊은 신뢰를 꼽을 수가 있었 다. 그런 의미에서 채경령은 보표의 보호대상으로는 일가를 이루웠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협조적인 대상자였다. 어떠한 위기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고 유진목에게 진정한 용기와 믿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올바른 행동지침의 근간 이라고 할 수 있는 무수한 실전경험을 지겹도록 치뤄낸 그녀였다. 한마디로 쳐다보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그런 보표와 피보호자가 바로 채경령과 유 진목이었다. 그러나 작금의 사태를 직면한 채경령은 전혀 딴판이었다. 세상 의 대부분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도 않았고 위기를 맞으면 덤벙거리기 일수 였다. 그러나 그런 인물들조차 생사의 갈림길에서만은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서 최선을 다했다. 지금의 채경령은 자신의 목숨은 커녕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조차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골치덩어리는 절대로 없었다. 타인이 자신의 목숨을 지켜주는 일에도 방해가 되고 있었다. 간신히 한숨을 돌린 유진목이 내력을 재정비하여 회심의 한수를 날려 보냈 다. 어물쩡거릴 시간따위는 없었다. 유진목 단신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는 형국이었다. 더구나 어디로 튈지 감도 잡히지 않은 반쯤 미친 여인 채경령이 딸려 있었다. 유진목은 이판사판의 모험수를 연속 으로 전개했다. 유진목의 평소 인품으로 보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독수 (毒手)들이었다. 복고맹의 습격자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유진목의 한수한수에 맹의 졸개들이 가랑잎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부채가 한 번 흔들릴 때마다 많 게는 네 명 적게는 두 명이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이었다. 대부공 주면세를 비롯한 맹의 고수들과 흑막의 살수들은 이미 톡톡히 당해 본 경험들이 있는지라 유진목의 행동양식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다. 유 진목의 기본전술은 어디까지나 채경령의 보호였다. 초식과 수법의 선별에 있 어서 최우선의 고려대상은 채경령과 자신의 방어였다. 그런데 작금의 초식들 은 그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공격일변도였다. 채경령은 잠시 내버려두고 사 대방의 숫자를 줄이는데 전력을 주력하고 있었다. 주면세나 복태동은 유진목 이 그런 위험천만한 도박을 감행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오래지 않아서 유진목의 속셈을 간파해 내기는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유진목의 공세로 인하여 채경령을 포획할 거리까지 접근해 있던 동료들은 이미 세상을 하직하였고 유진목의 방어막이 다시 공고하게 틀을 잡았다. 목선민은 잠깐이나마 채경령이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자 자기도 모르게 주먹 에 힘을 가하였다. 책 한 권의 두깨나 될까말까 할 정도로 채경령을 압박한 치명적인 병장기도 있었지만 유진목의 출수는 섬광처럼거침이 없었다. 출수 당사자인 유진목조차 결말을 보기 전까지는 채경령의 안전을 확신못했을 아 슬아슬한 도박이었다. 한차례의 폭풍이 몰려가자 목선민은 경외 반, 두려움 반으로 유진목의 신위를 바라보았다. 목선민의 손아귀에 땀이 흥건히 고였 다. 목선민이 판단하기에 두어 시진 가지고는 턱도 없어 보였다. 상황은 복 고맹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장애가 되었다.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절박함이 없이는 유진목의 터럭조차 건들이기 힘들 만큼 쌍 방간의 실력차가 뚜렷했다. 목선민은 비로서 손아귀를 풀고 땀을 훔쳤다. 그 때 회색도포를 걸친 한 사내가 포위망을 가르고 나섰다. 그리고 태연스러운 걸음으로 유진목에게 걸어갔다. 그러자 맹의 무리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일 제히 뒤로 물러섰다. 흑막의 최고수 역불기였다. 역불기도 목선민과 같은 생각을 했다. 은이 모 두 용해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형틀에 부어서 은원보를 뽑아내는데 족히 반 나절이 걸렸다. 오래 머물르면 머물를 수록 말썽의 소지가 생길 가능성도 높 아지는 셈이었다. 가능하면 최단시간내에 유진목이라는 장애물을 제거할 필 요가 있었다. 유진목과 역불귀. 유진목은 황실 비밀경호조직인 비호각의 최고수였고 역불귀는 황실의 비밀 살수집단인 흑막의 최고수였다. 비호각과 흑막은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은 존 재였다. 유진목과 역불귀 모두 서로에 대한 소문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던 터였다. 창건이래 황실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시종일관 반목과 질시를 해 왔던 양측의 대표주자가 또 다시 만났다. 남경 언저리의 어느 동굴에서 모진 위를 놓고 피차 손속을 교환해 봤던 터이니 쌍방에 대한 탐색이 새삼 필요 한 처지도 아니었다. 유진목이 투지를 불살랐다. 드디어 바라던 판이 짜여졌다.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가 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시간 때문에 속타는 쪽은 아무래도 유진 목이 아니었다. 역불기만 꺽는다면 상대쪽에서도 못이기는 척 탈출구를 열어 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들에게 급한 일은 은괴의 처리였고 유진목에게 중 요한 것은 채경령의 안전이었다. 시간은 유진목의 편이었다. 역불기와의 일 대일 대결구도는 그 외에도 유리한 점이 많았다. 우선, 역불기는 오로지 유 진목과의 승패만을 가릴 것이라는 점이었다. 바꿔 말해서 이제까지와는 달리 유진목이 채경령의 안위를 걱정할 필요없이 전심전력으로 승부에 임할수 있 게 되었다. 또한, 역불기는 살수였다. 그의 전공은 정면대결이 아니라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기습공격이었다. 채경령이라는 혹을 떼어낸 홀가분한 상태에 서의 정공법이라면 아무래도 자신에게 부가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유진 목이었다. 유진목은 은밀하게 진기를 축척하며 부채를 부르르 떨었다. 역불기는 생애의 숙적 유진목을 앞에 두고 묘한 흥분에 휩싸였다. 문득 오 몽생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더 이상 투지가 사그러지는 일은 없 었다. 역불기는 낙발 오몽생의 살해 이후 빠져 들었던 그 깊은 수렁에서 이 제는 완전히 탈출했음을 직감하였다. 죽음보다도 따분했던 권태가 이제 종말 을 고하고 있었다. 오랜시간을 오몽생의 망령과 싸우며 끈기있게 살인에 대 한 의욕을 축적해 나갔다. 시일을 두고 조금씩 회복되어가던 살기가 최고조 에 이르고 있었다. 목전에 유진목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진목의 피 는 너무나도 황홀할 정도로 짜릿할 것만 같았다. 그의 죽음이 자신에게 생애 최고의 쾌감을 선사해 주리라는 것을 역불기는 예감하고 있었다. 역불기의 도(刀)가 절정의 순간을 앞둔 탕녀처럼 파르르 몸서리를 쳤다. 역불기의 연도가 날아들자 유진목은 황급히 부채를 펼치며 마중나갔다. 일 도일선(一刀一扇)의 충돌이었으나 서너 개의 굉음과 불꽃을 만들어내었다. 낭창낭창한 버들가지와도 같은 역불기의 연도가 혀을 날름거리며 세 개의 선을 만들어냈고 그에 맞서는 유진목의 부채가 내기의 증폭에 의한 진동으 로 네 개의 면을 형성하였다. 역불기의 얼굴색이 돌연 백지장처럼 창백해지 고 그의 입가에서 가느다란 혈선이 흘러 내렸다. 그러나 역불기의 연도는 아 직 꼬리를 보이고 있지 않았다. 세 개의 선이 다시금 다섯 개로 확대되었다. 해우공으로 내력을 증폭하는 특기를 지닌 유진목이 내공에서는 우위를 점 하고 있었다. 부채와 연도의 충돌만으로도 역불기는 내상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감각적으로 상대의 헛점을 찔러가는 명부결을 연성한 역불기가 초식 의 운용에서는 유진목와 차원을 달리하였다. 전면적인 내공의 약세를 부분적 인 기의 집중으로 대적해 나갔다. 유진목의 전면공세가 쉴새없이 쏟아지는 폭포수라면 역불기의 일점집중은 그 물살의 허약한 틈을 비집고 올라가는 연어의 자맥질에 비유될 수 있었다. 유진목이 재차 초식을 일으켜 역불기의 도세를 제지하였다. 부채와 연도의 격돌 하나하나가 반발력이 되어 역불기의 폐부를 파고 들었다. 그러나 네 개 의 선이 소멸된 댓가로 마지막 하나가 유진목의 허벅지에 가느다란 혈선으 로 살아 남았다. 역불기의 입술너머로 다시 선혈이 흘러 넘쳤고 유진목은 불 에 지진듯한 허벅지의 통증에 하반신이 잠시 마비되었다. 유진목은 가벼운 외상이었고 역불기는 후유증이 오래가는 내상이었다. 결과적으로 힘에 부친 연어가 폭포 중턱에서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한 형국이었다. 연어가 다시 힘을 끌어모아 세차게 폭포를 차고 올랐다. 그러나 장대한 폭 포의 물살이 다시 연어를 패대기 쳐버렸다. 역불기가 비틀비틀 물러서며 무 릅을 바닥에 대고 말았다. 내상은 더욱 악화되어 이번에는 울컥하고 피를 토 해냈다. 그러나 유진목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좌측 등에서 옆구리를 돌아 배꼽 언저리까지 붉은 띠를 만들어졌다. 게다가 허벅지에는 앞선 격돌로 발 생한 혈선을 가로지르는 또 하나의 혈선이 추가되었다. 보다 붉고 선명한 혈 선이었다. 억지로 무릅을 곧추세운 역불기가 머뭇거리지 않고 다시 연도를 갈라왔다. 더 이상 버들가지처럼 휘청되지도 않았다. 더 이상 뱀의 혓바닥처럼 날름거 리지도 않았다. 빗살처럼 곧고 빠르게 유진목의 부채를 갈라쳐 왔다. 유진목 의 부채가 두동강나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역불기의 연도는 부채를 양단하고 나자 힘이 다한 듯 스스르 머리를 숙였다. 역불기가 허리를 꺽고 숨을 헐떡 이며 유진목을 향해서 눈을 치켜떴다. 유진목이 눈을 부릅뜬 채 무너지듯 주 저앉았다. 쿨럭-. 유진목이 시커먼 핏덩이를 토해냈다. 그리고 벽을 맞잡고 일어나려 애쓰다 가 다시 털석 주저앉았다. 쿨럭-. 역불기도 핏덩이를 토해냈다. 역불기가 입가의 핏물을 닦아내며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잠시 비틀거리기 는 했으나 역불기는 마침내 일어났다. 드디어 연어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간 것이었다. "역천(逆天)인가?" 유진목이 물었고 역불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락을 거슬려서 정반 대 방향으로 기를 주천시킨다는 역천기공(逆天氣功), 어둠의 무리들이 마지 막 한 수로 펼쳐낸다는 역천기공은 심각한 내상을 감수해야하는 위험한 수 법이기는 했지만 일시적으로 내공을 폭발시키는 악마의 무공이었다. 역불기 는 유진목이 장기로 하는 내공의 대결로 유진목의 방어막을 정면돌파해버렸 던 것이다. 역불기가 천천히 연도를 치켜들었다. 극도의 흥분은 역불기를 휘감고 돌았 다. 심장이 거친 박동으로 날뛰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안돼요!" 벽에 기댄 채 숨만 쌔근거리던 채경령이 어느 틈에 달려나와 유진목을 얼 싸안았다. 역불기의 살광(殺光)이 더욱 짙어졌다. 미칠 듯이 피가 뛰고 터질 듯이 벅차 올랐다. '좋겠지. 단 일도에 두 연놈이라.' 잠시 아연했던 역불기가 다시 숨을 고르고 도를 치켜들었다. 흥분으로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역불기는 다시 한 번 한껏 끌어 올렸던 진기를 속 절없이 내뱉어야만 했다. "비켜라, 애송이!" 두 눈을 질끈 감았던 채경령이 살며시 눈을 뜨고 돌아 보았다. 늠름한 사내 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목상공..." 한일자로 입을 굳게 다문 목선민의 두 손에는 중단 자세의 장도가 빛에 반 짝이고 있었다. "베어버리겠다. 애송이놈!" "베시오. 이 몸을 베지않고는 단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을 것이오." 채경령이 돌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배신자! 이 색마!" 채경령은 비수를 뽑아들더니 발작적으로 목선민에게 달려들었다. 예기를 느 낀 목선민이 고개를 돌렸다. 두 눈이 마주쳤다. 채경령은 그만 맥이 풀리고 말았다. 목선민의 등판을 파고들던 비수도 그와 동시에 힘을 잃었다. 반치만 더 가면 심장이었다. 목선민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기가 막힌 채경령 이 그대로 피를 토하며 기절했다. 서천목산(西天目山)을 넘어선 모진위는 천목산맥(天目山脈)의동쪽 끝자락 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십여리 전방으로 마지막 봉우리가 보였다. 고개마루 에 올라서면 여항(余杭)이 시야에 들어올 참이었다. 이제 세상만사 모든 통 증이 마비될 때도 되었건만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갖가지 통증이 모진위 를 괴롭혔다. 뼈가 땅을 긁는듯한 얼얼함으로 시작해서 무릅은 관절이 서로 갉아대는 시끈함까지. 허리가 끊어질 듯 숨을 막았고 등골이 부러질 듯 쑤셔 왔다. 충격이라면 모진위의 모든 감각기능은 그저 회피하고자 하였다. 모진 위의 의지는 여전히 달리려고만 하고 신경조직들은 마냥 피하려고만 하니 발바닥은 자신이 지면에 닿기도 전에 발목, 무릅, 허리신경의 전방위적인 도 움으로 다시 공중도약을 시도하였고, 달리고자하는 무의식적인 의지가 도망 가는 발을 축으로 이미 뒷발을 차고 있으니 부조화의 연속이었다. 앞발은 땅 에 닿지도 않았는데 뒷발은 올라가고, 그 뒷발이 다시 앞발이 되면 그 또한 직전의 처지를 망각하였다. 사뭇 비능률적인 행보였지만 지면에 발을 붙히는 시간만은 최대한으로 단축시켜주었다. 만약 그의 경공 사부인 장도기가 보았 다면 이렇게 비웃었을 것이다. '쯔쯔, 기지도 못하는 것이 벌써 날려고 억지를 쓰는구먼.' 초상비도 아닌 답설무흔을 막무가내로 떼쓰고 있었다. 그러나 답설무흔은 누구네 집 강아지 이름이 아니었다. 답설무흔의 본모습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모진위의 걸음걸이는 무겁기 그지 없는 데다가 무흔(無痕)은커녕, 지면을 질 질 끌어대는 꼴인지라 발자국의 선을 그려대고 있었다. 게다가 속도는 거북 이 걸음이었다. 그러나 발바닥의 항의를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라서 그럭 저럭 고통의 축소에는 뛰어난 효능을 발휘하였다. 이른바 모진위식 답설무흔 이라 할 수 있었다. 모진위는 이미 열흘 전부터 반 가사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실제적인 의식과 감각활동은 모두 중단된 상태였다. 오로지 시신경과 시각두뇌만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최소한의 작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신경이 목전의 고갯마루를 찍어내었고 시각두뇌가 그 너머 여항을 기억창고로 부터 끄집어내었다. 여항 부터 번화한 관도였고, 그 관도를 따라서 동쪽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면 바로 항주였다. 고개마루에 다다르자 시원한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넓다란 평야와 대규 모 군락단지, 바로 여항이었다. 두 사내가 은밀한 실내에 마주 앉았다. "분명히 총관께서 당부하셨는데도 그 모양이란 말씀이신가?" "그것이... 삼공자께서 너무 완강하게 나오시는 바람에..." "선민이를 말씀하시는 게요?" "예. 삼공자님의 심정도 이해가 가는 것이..." "쯔쯔, 사내가 그렇게 잔정에 연연해서야 어디 큰 일을 하겠는고. 그 놈이 고집을 부린다고 마냥 후환거리를 남겨둘 수는 없는 일, 그 채가 계집을 어 찌 했으면 좋겠소?" "...해서 이번 배로 온 외인들에게 넘겨줄까 하는데, 대설산의 삼공자께는 맹 주님께서..." "흠, 서역인의 노리개라... 풍만한 계집이니 좋은 선물이 되겠군." 만복회(萬福會)의 본점(本店)으로 돌아온 성인탁(成仁卓)은 찝찝한 마음을 털어내듯 아침이슬을 털어내고 있었다. 도단강(導斷江)기슭에서 밤이 새도록 이슬을 맞았다는 것 자체가 찝찝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소금장사로 잔뼈가 굳은 몸인데다가 시국이 시국인지라 그 정도는 항시 각오가 되어 있었다. 잠 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비상대기 상태였다. 문제는 전날 저녁에 접선하기로 약속한 주인이 밤을 지나 아침이 오도록 나타나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조금 더 기다려볼까도 생각했지만 다른 경로로 회(會)에 무슨 기별이나 있지 않았 을까 하는 마음에 결국 발길을 돌려 본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대문을 들어 서자마자 닥달해 보았지만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성인탁은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회주어른." "들게." 만복회의 대소사를 주관하는 장집사가 장짓문을 열고 들어섰다. "나가셨던 일은 잘 마치셨습니까?" 기실 성인탁으로서도 지난 밤의 용무가 무엇인지는 딱히 알고 있지 않았다. 그저 접선장소에서 지시를 받으면 그대로 행할 따름이었다. 접선장소마저도 일급비밀로 취급되는 판이었으니 회주의 오른 팔이라 할 수 있는 집사에게 도 성인탁이 출타이유는 비밀에 부쳐졌다. 물론 대답을 해 줄려고 해도 대답 할 건덕지도 없었다. 성인탁은 그저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이고 화제를 돌렸 다. "그럭저럭... 그래 무슨 일인가?" "예, 입재행(入財行)에서 묘한 얘기를 들었는데 아무래도 보고드리는 것이 좋을 것같아서..." "묘한 얘기?" "어떤 미친놈이 죽어도 양주의 장주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생난리를 피웠답 니다." "뭐, 장주님을?" 채가장의 장주 채경령이 항주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장내의 인물들 가운데 도 극소수만이 알고있는 극비사항이었다. 만복회는 채가장의 항주지점이었고 입재행은 만복회의 하부조직이었다. 입재행주 서명수(徐明洙)조차도 채장주 의 소재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도데체 어떤 자이기에 장주의 행보를 따져 묻는단 말인가. "예, 이십대 초반의 사내놈인데 장주님을 꼭 만나야한다고, 장주님께서 무슨 음모에 휘말리는 아주 위급한 상황이니 자기가 꼭 만나야 한다고... " "출신내력은 밝혀졌는가?" "허허, 단번에 미친 놈으로 치부될 만한 행색인데 강호에 널리 알려진 자이 겠습니까? 난주에서 온 아구라고 하더랍니다." 아구? 왠지 비슷한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성인탁은 젖은 옷 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소재 파악은 되어 있는가?" "소재 파악이고 뭐고도 없습죠. 흠씬 두들겨 패서 ㅉ아냈다는데, 그래도 담 벼락을 붙잡고 통사정을 하길래 징징거리는 소리를 견디지 못한 행사람들이 번쩍 들어다가 서문 밖 갈대밭에 내버렸다고 합니다." "... ...?" "그래도 그 미친 놈이 물러나지 않고 인송전장(仁松錢莊)에 나타나서 소란 을 피우고, 복길상점(卜吉商店)에도 들어가서 생떼를 쓰는 모양입니다." 복길상점은 만복회의 직영상점이고, 인송전장의 채가장에서 직영하는 천금 전장의 항주지점이었다. "그만 나가봐도 좋네. 아참! 나가는 길에 청람당(晴嵐堂)에 들려 사람 좀 불 러주게." 청람당은 만복회의 호위무사들이 거처하는 별채였다. "누구를...?" "왜 있잖은가. 화정에서 왔다는 그..." "아! 용철량(龍鐵良) 말씀이십니까?" 성인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집사가 물러가고 차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용철량이 기척을 알렸다. "물어볼게 있으니 잠깐 들어오게." "예." "전에 고용무사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지 않았나?" "예?" "미안하네. 일부러 들으려 했던 것은 아니고, 우연히 청람당을 지나가다 문 득 들은 기억이 나서... 결례를 눈감아주게." "황송합니다. 결례라고 할 것까지도 없습니다. 그나저나 고용무사라 하심 은...?" "왜, 자네의 환영식인 걸로 아네만 청람당 식구들끼리 술을 마시면서... 그냥 지나가는 길이라 얼핏 듣기는 했네만 장주님의 난주 근황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자네 밖에는..." "그건 소인이 분명합니다만은... 고용무사라 하심은...?" "왜, 몇 번씩이나 장주님의 생명을 구해주었다고..." "아아, 구위사를 말씀하시는군요." "구위사라면?" "예, 아구라는 분인데, 성도 모르고... 그저 이름만 거론하기가 민망한지라 모두들 구위사라고 인사치례를 했지요." 갑자기 성인탁이 문밖을 향하여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밖에 누가 있는가?" "예." "장집사 좀 모셔오너라." 성인탁의 다급한 재촉에 득달같이 장집사가 들이닥쳤다. "자네가 대남로(大南路)에 좀 다녀와야겠네." "예? 대남로라면 입재행을 말씀하십니까?" "왜 아닌가. 아구라는 무사를 좀 찾아주게나." "예?" "시간이 없네. 즉시 움직여주게. 정중하게 모셔야 하네. 남에 눈에 띄지 않 도록 각별히 신경쓰고." "아... 알겠습니다." 세인들은 흔히 처참한 몰골의 사람 모습을 일컬어 산송장이라고들 했다. 먼 발치에서 성인탁이 접한 모진위의 첫인상은 성인탁으로 하여금 산송장이라 는 단어의 부적절함을 통감시켰다. 해골이었다. 그저 사람의 가죽만 씌워놓 았을 뿐, 살점이라고는 반에 반근도 붙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모진위와 마주 앉게 되었을 때, 성인탁은 해골도 최악의 단어가 아니라고 다시금 정정하게 되었다. 차라리 그냥 해골이면 나을 것 같았다. 피부란 피부는 모조리 갈라 지고 찢어지고 진물마저 흐르고 있었다. 그런 몰골로 살아서 숨쉬고 있는 것 이 자못 신기하기만 하였다. 보기만 해도 역겨운 모진위의 행색, 그것은 성인탁으로 하여금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진위를 협오하게 만드는 나쁜 요소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성 인탁이 모진위의 주장을 무시하지 못하게 하는 좋은 작용도해주었다. 왠만 한 사람이라면 바로 쓰러지는 것이 마땅한 그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진지 하게 호소하고 있는 모진위가 성인탁의 믿음에 일조하였다. 성인탁은 즉시 회의 모든 무사들을 동원하여 도단강의 접선장소로 출동하 였다. 간밤에 헛탕치기는 했지만 채장주가 직접 지시했던 접선처였다. 현재 로서 성인탁이 수색해 볼만한 곳은 그 일대가 유일했다. "목선민이라고 일행이 한 명 더 있을텐데..." 모진위가 묻고 성인탁이 답했다. "사흘 전에 같이 본점으로 오시기는 하셨는데, 장주님과 유대인과 먼저 떠 나셨네. 목공자님을 잘 모시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목공자께서도 무슨 급 한 용무가 생기셨는지 그 날 밤 급히 떠나셨네." 사방에 흩어져서 수색작업을 벌이던 무사중의 한 명이 달려오며 외쳤다. "회주님, 소롯길로 바퀴 자국이 있습니다. 제법 무거운 마차같은데요." 마차가 왕래할 만한 지역은 아니었다. 마차가 지나갔다면 이 근방에서 무언 가를 싣고 가기 위해서 일부러 들어온 것임이 분명했다. 성인탁과 모진위가 무사의 안내를 따라갔다. 바퀴자국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깊게 패인 것 이 대단히 육중한 무게였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두 대였던 모양이군요." 왕년에 표사일도 해보았다는 이가 아는 척을 했다. 사내의 말이 끝나기 무 섭게 모진위가 물었다. "두 마차를 합해서 짐의 무게가 육백관쯤 됩니까?" "글쎄요. 장담은 못하겠지만 그 정도는 되겠군요." 마차의 흔적은 몇 리쯤 나아가다 도단강과 비영정(飛靈頂)의 산자락의 절벽 사이에서 끊어졌다. 일대를 샅샅히 수색한 결과, 수상쩍은 동굴 하나를 발견 할 수 있었다. "대장간인가?" 누군가가 속삭였다. "예끼! 이 사람. 대장간에서 저렇게 큰 화로를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쇠덩 이같은 것을 녹이는..."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코를 감싸쥐었다. 역겨운 훈풍. 피냄새였다. 벽이며 바닥할 것 없이 선혈이 낭자하였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듯 끈적끈적 묻어나왔다. 왁자지껄하던 소음이 일시에 가라 앉았다. 모두가 침통한 표정이 되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갓 매장된 시체 구 덩이가 발견되었다. 시체는 대부분 모두가 익히 아는 낯익은 것들이었다. 성인탁이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인탁은 바로 자 신이 찾고 있는 인물은 발견할 수 있었다.모진위는 구덩이 바로 옆에 쭈그 리고 앉아 있었다. 성인탁이 다가갔다. "이보게!" "잠들었나 봅니다." "아니, 뭐? 이 판국에 잠을 자?" 성질 급한 이가 핏대를 올렸다. "일부러 잠을 청하기야 했겠는가. 보게, 기력이 다한 모양이네." "그렇군요, 처음부터 정상적인 몸은 아니었지요. 억지로 참아오다가 이 지경 을 보고 맥이 풀렸나 봅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무림천하-창작연재란 (go MURIM)』 2746번 제 목:[연재] 표류공주 56회 -최후식- 올린이:하이문 (문홍일 ) 99/11/16 20:56 읽음:277 관련자료 없음 ----------------------------------------------------------------------------- 번 호 : 9750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11-16 20:30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56- 21. 일월병승(日月幷昇) 바다 사나이 허정(許亭)은 멀리 항구가 보이기 시작하자 그쪽으로 방향타를 맞추어 놓고는 한시름 돌렸다. 탐스러운 근육이 구리빛으로 반짝였다. 이물 쪽으로 돌아나온 허정은 항구를 바라보며 똑바로 섰다. 점차 항구가 품안으 로 들어오자 언제나처럼 포근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실망스럽게도 오늘도 별 다른 수확은 없었다. 채가장측의 조사에 따르면 급작스럽게 항주에 모여든 양주의 염상을 위시 한 천하대상들이 다시 항주를 떠나기 시작한 것은 삼일 전이었다. 이틀전에 이르러서는 항주시장에 은이 넘쳐나고 금붙이는 품귀현상을 일으켰다. 은 육 백관에 달하는 금액이라면 아무리 준비가 잘되어 있어도 완전히 금으로 교 환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사흘은 걸릴 것이라는 것이 채가장의 분석이었다. 그러므로 채가장의 감시망이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이전에 금괴가 외부로 반 출되었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육로에 의한 금괴반출은 무시해도 좋았다. 이제 곧 방향을 바꿀 계절풍이 그 가능성를 배제시켜주었다. 복고맹으로부터 금괴를 넘겨받은 색목인의 밀 수선이 서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조만간에 항해에 들어가야 했다. 육로를 통한 타항구로의 이송은 모두 시간적 제약으로 불가능했다. 금괴가 나갈 수 있는 곳은 오로지 바다 뿐이었다. 일부에서 이의를 제기해 보았으나 전문가 들은 코웃음을 쳤다. 서역의 교역선의 입장에서 항로가 보다 연장되는 항주 이북의 항구는 이미 논외의 대상이었고, 남서쪽으로 갈수록 외국과의 교역항이 많았는데 그 남해 안의 교역항들이 만만치가 않았다. 대륙의 가장 번성한 무역항인 광주(廣州) 와 천주(泉州)는 모두가 남해안의 항구였다. 남해의 무역항에는 모두 여덟 곳의 시박사(市舶司)가 설치되어 있었고 무역항을 드나드는 모든 상선들은 시박사에 의해서 출입항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시박사의 세관관리들은 선원 의 신분과 적하 품목을 조사하고 출입항의 허가장을 발급해 주었다. 시박사 가 발급해 주는 출입항 허가장이 없는 모든 상선은 나포선으로 간주되었다. 원래 외국과의 교역자체가 정부의 전매사업이었다. 더군다나 밀수의 성행으 로 인해서 황금, 은, 동전의 다량유출이 정부의 재정위기를 초래하자 황제는 칙령을 통하여 상기 품목의 반출을 철저하게 단속하고 있었다. 반면에 항주 는 본격적인 무역항이 아니었기에 상대적으로 그런 위험부담이 적었다. 허정도 채가장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 다른 것도 아닌 바로 허정의 목 숨을 구해주었다. 의리의 바다 사나이 허정은 언제가는 목숨으로 그 은혜를 갚고 말리라 남몰래 맹세했었다. 이제 그 때가 왔다. 허정은 생업도 팽겨친 채로 이렇게 항주의 근해를 이잡듯이 헤집고 다녔다. 수상쩍은 배는 단 척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허정은 고개를 돌려서 갑ㄱ의 봉우리를 바라 보았다. 있었다. 한 사내가 언 제나처럼 묵묵히 항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항상 그곳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마 허정 자신도 그의 시야에 포착되어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항아리 모양의 천혜의 지형을 갖추고 있는 항구의 입구 한 끝이 바로 갑ㄱ 이었다. 갑ㄱ에 오르면 항구를 드나드는 배는 하나도 빠짐없이 관찰할 수 있 었다. 허정이라고 예외일 리는 없었다. 사내는 허정의 입항도 날마다 보고 있었으리라. 갑곳에 가까워짐에 따라 사내의 모습도 점차 뚜렷해졌다. 이제 는 허정에게도 하나의 낯익은 풍경이 되어 버렸다. 기껏해야 오육일 전부터 눈에 띄기 시작한 모습이었지만 하도 한결같은 모습인지라 허정은 하나의 풍경처럼 느끼게 되었다. 허정은 사내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허정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내가 갑자기 허리를 꺽었다. 뭔가 심상치않은 기색이었다. 허정은 배의 진로를 돌려서 서둘러 갑ㄱ으로 향했다. 모진위는 격렬한 고통에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양팔로 두 어깨를 감싸고는 그대로 쪼그리고 앉아서 이를 악물었다. 전신을 부르르 타고 도는 통증은 그 렇게 한참을 날뛰다가 점차 잦아들었다. 다리를 고쳐앉다가 그만 나무가지를 살짝 건드린 결과치고는 피해가 너무 막심했다. 모진위로서는 꼼지락거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항주항이 한눈에 보이는 갑ㄱ 고개마루는 비교적 바 람이 조용했다. 그러나 그 선선한 바람조차 모진위에게는 피부가 쑤셔대는 바늘과도 같았다. 모진위가 다시 통증에 대한 감각을 회복한 것은 도단강의 시체 구덩이를 발견하고 잠들어 버린 지 엿새가 지날 무렵이었다. 모진위는 물경 사흘 밤낯 을 자고 또 잤다. 계속 수면상태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깨어있던 시간은 모두 합해 보아도 서너 시진이 될까말까였다. 모진위가 의식을 되찾는 잠시동안을 기다려 성인탁을 비롯한 채가장의 일파들은 모진위가 토해내는 기억의 편린 들을 한 조각씩 맞추어 나갔다. 모진위는 심한 고혈과 각혈에 생사지경을 넘 나들고 있었다. 그러나 사안이 사안이었던 만큼 채가장의 수뇌들은 한시 바 삐 사건의 전말을 파악해야 했다. 비몽사몽간의 모진위에게 매달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모진위를 치료하기 위해서 특별히 초빙된 의원 서종락(徐鐘絡)은 그런 만복 회의 몰지각한 심문에 기겁을 했다. 의학적 견지에서 볼 때, 환자 모진위에 게 그런 요구는 너무 황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보다 황당한 것은 자신의 환 자 모진위였다. 의학적 견지에서 도저히 실현이 불가능한 상황을 그의 환자 가 현실로 연출하고 있었다. 환자는 인간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으로 밝혀진 혼미상태를 마치 의지적인 문제인 것처럼 인위적으로 탈출하였 다. 그리고 다시 기절하기 전까지는 혼미상태를 벗어나야만 했던 본래의 소 임을 충실히 수행했다. 서종락을 조롱하기라도 하는 듯 몇 번이고 반복하였 다. 인간이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목숨은 소중한 것이라고 아무리 타일 러도 소용 없었다. 서종락은 자신이 수십년 간에 걸쳐서 이룩한 의학적 확신이 송두리채 무너 지는 꼴을 목격하였다. 환자의 내부를 진맥할 필요도 없었다. 그 외부의 상 태만 가지고도 진단은 생사불명이었다. 환자를 둘러싼 피부전체가 풍화된 바 위와도 같았다. 가장 심하기로는 발바닥이었다. 외피, 내피는 물론 피하조직 까지 모두 닳아 없어져 발바닥을 지탱하는 뼈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 뼈조각은 맨발로 뛰어다닌 사람의 발바닥처럼 온통 흙, 먼지, 낙옆 부스 러기 따위가 군살처럼 박혀 있었다. 서종락이 알기에 바위는 생리조직을 가 지지 못한 비생물이므로 당연히 풍화되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생명체인 인간 은 새로운 껍질 조직을 지속적으로 재생되기 때문에 풍화될 이유가 없었다. 파상풍으로 썩어 들어 가기 시작한 피부를 전부 잘라내 버리고 나서 환자의 껍데기 전체를 약초 반죽으로 덧칠해 버렸다. 발바닥으로 말할 것같으면 어 쩔 수 없이 뼈를 갉아 내야했다. 발바닥의 뼈를 갉아내는데 그때 마침 환자 의 의식이 깨어났다. 그러나 환자는 자기 뼈를 깍고 있음에도 그저 남의 다 리 긁는 것을 바라보듯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서종락은 혀를 찼다. 진실 로 풍화된 바위 그 자체였다. 극한에 이른 육신가 통증 감각마저도 상실해 버린 것이었다. 명의(名醫) 서종락의 환자는 종락의 치료를 받기 시작한지 육일만에 비로서 아픔의 감각을 되찾았고, 그로부터 다시 이틀 후에는 자리 를 털고 일어났다. 미세한 접촉에도 극악의 고통을 감수해야하는 지옥의 상 태임에도 불구하고 잘도 싸돌아 다녔다. 항주에서 제일가는 명의 서종락의 엄숙한 권고는 오래된 고사성어, 마이동풍(馬耳東風)에, 우이독경(牛耳讀經) 의 전혀이 되었다. 채가장이 인원을 동원하여 도단강 일대를 몇 번이고 수색해 보았지만 채경 령과 유진목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채가장의 수뇌들은 이 미 채경령과 유진목을 죽은 목숨으로 치부하는 기색이었다. 모진위도 별 반 의견이 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체를 두눈으로 똑똑히 보기 전까지는 도 저히 포기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모진위였다. 채가장은 이미 복구불능의 파국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시작부터 복고맹과는 상대가 안되는 전력이었다. 복고맹과의 충돌 이래 채가장은 치열한 정치적 음해의 여파로 소금 판매권의 삼분지이를 잃었고 천하제일 염상의 자리마저 물려 주어야 했다. 수십 년을 쌓아온 비축자금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 으며 실제로 도검을 맞받아야할 전투조직은 옥문관에서의 은괴탈취를 시작 으로 소진되어 가다가 도단강의 은제련소에서 결정타를 맞고 완전히 와해되 고 말았다. 채경령은 복고맹의 자금줄 봉쇄에 모든 것을 걸었다. 복고맹은 뿌리없는 이 익집단이었다. 안정적인 자금원만 제거한다면 자금을 대는 쪽이나 받는 쪽에 서 불만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자금줄만 끊으면 저절로 공중분해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채가장이 찾아낸 복고맹의 이대 젖줄의 하나가 바로 은괴밀수였 다. 채경령은 그 고리를 절단하기 위해서 자신의 손발과 같은 수하들을 무자 비하게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런 은괴를 다시 빼앗긴다면 채경령은 살아서 하늘을 바라볼 명분도, 면목도 없었다. 모진위의 최우선 과제는 너무도 당연 히 채경령의 명분과 면목의 회복 즉, 은괴의 회수였다. 아니, 이미 금괴의 회 수로 목적이 바뀌어져 있었다. 허정이 갑ㄱ의 고개마루 정상에 다다를 때까지도 모진위는 허리를 피지 못 하고 있었다. "괜찮은가?" 힘겹게 상반신을 일으키고 있는 모진위를 서둘러 부축하며 허정이 말했다. 그러나 허정의 손이 허리에 닿는 순간, 모진위의 입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으허헉." 허정이 놀라서 황급히 손을 놓았다. "이런, 구위사의 온몸은 상처투성이란 걸 또 깜박했구먼." 모진위가 멋적게 웃으며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오늘은 좀 이르시군요." "응. 조금 일찍 들어왔네. 그나저나 걷기도 힘든 몸으로 뭐하러 이렇게 무리 를 하는가? 어느 놈이 '나 금괴밀수선입네'하고 깃발이라도 달고 자네한테 자수할 거 같은가? 우리에게 맡겨 놓게." 모진위는 쑥쓰럽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풀섭에 주저 앉았다. 여간 고집불통 이 아니었다. "배가 많군요." 허정은 모진위의 뚱딴지 같은 대꾸에 잠시 황당해졌다. "허허, 이 사람아. 그래도 항구인데 당연히 배가 많지." "아니, 그게 아니라. 아직 해가 중천인데도 항구가 붐비는군요. 여느때 같으 면 낯에는 한산했는데..." "아! 그건 날씨 때문일세. 보시게, 대낯인데도 모두 서둘러 입항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축축한 바람은 비바람의 징후이지. 머지않아 파도가 거세질 걸 세. 이 몸도 그래서 평소보다 서둘러 입항한거고. 아마 오늘은 들어오는 배 는 있어도 나가는 배는 없을 걸세." 아닌게 아니라 들어오는 배만 있었고 바다로 나가는 배는 없었다. 그것 보 라는 듯이 모진위를 돌아보던 허정은 모진위의 표정에서 무언가 게운치 않 다는 기색을 읽고 의아해서 물었다. "무슨 걱정스러운 일이라도 있는가?" "아, 아닙니다. 허형께서 입항하실 때, 출항하는 배가 하나 있었는데 혹시나 일을 치루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요." "상선인가?" 원해로 나가는 상선이라면 굳이 못나갈 것은 없었다. 시간을 다투는 교역이 라면 굳이 비바람을 사양하지도 않았다. 굳이 출항날이 아니더라도 장거리 항로에서는 어차피 한두 번쯤은 악천후와 싸워야 했다. "아닙니다." "커다란 여객선이던가?" 대형 여객선이라면 권력으로 밀어부치는 고관대부의 사정에 따라서 무리한 출항도 꼭 없지만은 않았다. "아닙니다. 중간 크기의 고깃배였습니다." "언제? 어느 쪽으로 갔는가?" 허정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배가 이 앞을 지나고 일다경쯤 지나서 허형께서 이리로 오르셨지요. 저 기 돌산을 돌아서 저쪽으로..." 허정은 모진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려서 모퉁이를 달렸다. 배 를 몰고 있었다면 못 봤을 리가 없었다. 아마도 허정이 배에서 내려 갑ㄱ을 오르는 바로 그 때, 배가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허정은 모퉁이를 돌아서자 바다를 휘휘 둘러보았다. 과연 배 한 척이 수평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그 외양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날렵하게 뻗어나간 뱃날로 볼 때, 고깃배 용도의 골격은 아니었다. 용도가 폐기되어 고깃배로 타락했거나 아니면 겉모양만 고깃배로 위장했거나 둘중의 하나였다. 너무 멀어서 확실하 게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허정은 서둘러서 모진위에게로 돌아왔다. "내려가세나. 서두르게." "왜 그러시는 지요?" "내려가면서 설명해 줌세." 산비탈을 내려오면서 허정은 몇 가지 의문점에 대해서 대충대충 설명해 주 었다. 설혹 진짜 고깃배라 해도 이런 기후조건에는 조업이 불가능했다. 대단 한 악천후가 아니라면 난파당하지는 않겠지만 겨우겨우 항해만 가능한지라 도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올리는 작업은 불가능했다. 망망대해의 비바람 속 을 단지 유람하기 위해서 배를 띄우는 미친 어부는 없었다. 또한 저 정도 규 모의 배를 몰 수 있는 정도면 머지않아 비바람이 몰아칠 조짐을 눈치못챘을 리도 없었다.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눈에 불을 키 고 수상한 배를 찾아다니고 있는 허정의 입장에서는 그 피치 못할 사정을 의심하는 것이 당연했다. 근자에 이르러 채가장은 엄청난 뇌물을 살포해가며 시박사의 배들을 근해 에 풀어놓았다. 정경유착이라면 복고맹측이 전문이었지만 워낙에 많은 돈이 일시에 풀렸고 대의명분에서 채가장이 앞서다보니 복고맹도 막을 도리가 없 었다. 은괴 육백관과 그에 상응하는 서역의 금덩이라면 승진은 따논 당상이 었다. 시박사의 장교들이 군침을 삼킬 만도 했다. 하지만 기후가 안좋은 날 에는 시박사의 배들도 귀항하기 마련이었다. 바다에서 관의 눈을 피해 무언 가를 해야만 한다면 이런 악천후의 조짐이야말로 천려일실(千慮一失)의 호기 라 아니할 수 없었다. 허정의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허정은 최 대한 신속하게 배를 출발시켰다. "아니 허형! 배는 저쪽으로 갔는데 어찌하여 귀항하십니까?" "이 사람 구위사. 자네는 몸도 제대로 못가누는 환자이고 나는 무공도 모르 는 초부라네. 만약에 우리들 짐작대로 저 놈들이 그 놈들이라면 단 둘이서 따라가서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사람들을 모아 봐야지." "너무 늦지 않겠습니까?" "... ..." 허정도 자신은 없었다. 부두를 경유해서 다시 나가봐야 그때는 정말 망망대 해밖에는 아무 것도 없기 십상이었다. 모진위가 재촉했다. "허형, 배를 돌리세요." 그때 시박사의 순시선이 허정의 눈에 들어왔다. 시박사의 전용부두는 출입 항의 감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항구보다는 바다쪽 입구에 위치하고 있 었다. "잠깐만 기다리게." 허정은 좌측으로 방향을 돌려서 시박사의 부표를 목표로 직진하였다. 배가 보였다. 다가가보니 내항을 감시하는 순시선이었다. '저건 틀렸고...' 허정은 순시선에 발각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서 뒤로 우회하여 감시초소쪽으 로 다가갔다. 또 다른 선박이 눈에 들어왔다. 허정은 배를 살펴보고는 다시 방향을 돌렸다. 마침내 원하던 배을 찾았다. 함포를 장착한 외항순찰용전함 이었다. 허정은 그대로 돌진해갔다. 그리고 갑판 위의 병사가 허정의 배를 발견한 낌새를 보이자 꼬리를 돌려서 도주하기 시작했다. 병사가 소리쳤다. "이봐, 뭐야? 멈춰!" 그러자 허정이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왜 그러는데?" "이 자식이 어따 대고 반말 짓거리야? 출입증 보여봐!" "그런거 없다. 이 호로자식아!" 허정은 돛을 펼쳐서 바람을 맞으며 최고 속력으로 미끄러져 갔다. 갑판 위 의 병사는 호각을 불고 난리를 쳤다. 잠시 후, 놀랍게도 정박중이던 전함이 닻을 올리고 있었다. "허형, 도데체 무슨 짓입니까? 관선이 따라옵니다." "따라오라고 그런 것이네." "예?" "하하, 저 놈들이 아마 밀수꾼들을 때려잡을게야. 어떤가? 놀라운 차도살인 지계(借刀殺人之啓)가 아닌가?" 허정은 항구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관의 전함을 꼬리에 달았다. 출입 허가증을 제시하지 않는 배는 이유를 불문하고 나포선으로 간주되었다. 나포 즉시, 조정의 재산에 귀속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황제의 입장에 서 그렇다는 것이지 관리들의 입장에서는 경우에 따라서 나포선이 곧 자신 들의 재산이될 수도 있었다. 특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지금 같은 악천후의 바다라면은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함선은 기를 쓰고 허정을 따라붙었다. 몇 시진을 달린 허정의 배는 이제 막항주만을 벗어나고 있었다. 함선도 포기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죽자사자 도망을 가는 허정을 보 고 더욱 구미가 당겼던 것이다. "찾을 수 있을까요?" "글쎄." 허정은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 다. 허정의 판단으로는 은괴수송선은 이미 항주만을 빠져나갈 것이 확실했 다. 서역의 불법교역선이 만내로 잠입하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렇다 면 접선장소는 항주만에 근접한 바다 한가운데밖에 없었다. 대해(大海)가 가 까워 오고 있었다. "틀렸나?" 이미 항주만을 벗어났다면 추적은 불가능했다. 망망대해였다. 어쨋거나 최 고 속도로 달리는 허정이었다. 그러나 만을 벗어나서도 배는 보이지 않았다. 파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거센 폭풍우일 가능성이 높았다. 위험했다. 그러나 내친 걸음이었다. 허정은 내친 걸음에 승사열도( 泗列島)들이늘어서 있는 한계선마저 넘어버리고 말았다. 독기가 오른 시박사의 함선도 여전히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하긴 당장 난파 를 걱정해야 할 것은 허정의 작은 배이지 전함이 아니었다. 함선은 아직도 끄떡 없었다. 비장한 표정으로 돛줄을 붙잡고 파도와 사투중이던 허정이 갑자기 돛줄을 팽개치더니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찔렀다. 멀리 비바람 속에 희미한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잠시 출렁하고 모습을 감춰 버렸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돛의 모양으로 볼 때 틀림없었다. 드디어 나아갈 방향을 잡힌 것 이었다. 허정은 뱃머리를 돌리고 다시 바다와의 전쟁에 돌입하였다. "찾을 수 있을까요? 배가 보이지를 않아요." 잠시 모습을 보였다가 사라진 배는 한 시진이 지나도록 다시 모습을 드러 내지 않고 있었다. "걱정말게. 바다에도 길이 있다네. 항로(航路)라고 하지 않는가? 어떻게든 잡아 봐야겠지. 그나저나 기특한 놈들이로군." 허정이 힐끗 뒷 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제 포기할 만도 하건만 정 말 기특하게도 함선은 여전히 허정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미 항해는 이틀 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허정은격려의 표시로 모진위에게 눈빛을 맞추어 주 었다. 웃음으로 답례를 하는 모진위였지만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하였다. 허정은 갑판을 들어내고 주섬주섬 옷가지를 꺼내들었다. "이거나 입고 있게. 빗줄기와 바람이 자네한테는 무슨 송곳이라도 되는 모 양이지?" 머리까지 눌러쓰는 넓다란 피풍의(皮風衣)였다. 옷깃을 여민 모진위는 푸대 자루 속에서 두눈만 빠꼼히 내다보고 있는 꼴이 되었다. 모진위가 마음에 든 다는 듯 눈망울을 굴렸다. "하하핫." 허정은 그 괴상망측한 꼴에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비바람은 점 차 거세지고, 제법 씨알이 굵어진 파도들의 고함소리가 점차 험악해지고 있 었다. 재수없게도 폭풍우의 조짐이었다. 두 번째 밤이 찾아왔다. '우선 살고 봐야겠지.' 허정이 추적하던 배도 허정을 추적하던 배도 모두 종적이 묘연했다. 이래서 는 추격이고 뭐고 없었다. 극심한 비바람 때문에 별조차 보이지 않았다. 시 간과 위치를 가름하기가 쉽지 않았다. 미리 짐작해둔 방향감각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송정도(宋頂島) 근처 어디 쯤으로 어림짐작이 되었다. 허정은 결단을 내렸다. 살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항주 시박사의 함선도 이런 폭우 라면 무사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전함도 송정도를 염두에 두고 있을 것 같 았다. 어쩔 수 없이 송정도에서 마주칠 운명이었다. 그들과 맞추친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나 진배 없었다. 그러나 서역범선이나 은괴운반선도 폭풍우를 앞 두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대에서 피난처는 송정도가 유일했다. 수상스런 서역 범선과 비교가 되는 상황이라면 답이 조금 달랐다. 아무래도 서역의 범 선이 허정의 배보다 크고 맛좋은 먹이였다. 생각해보니 은괴 교환장소가 반드시 바다 한가운데일 까닭은 없었다. 서역 의 교역선도 마냥 거래자만 기다리며 망망대해에 떠다니지는 않을 것 같았 다. 본래부터 악천후를 접선의 전제로 했다면 이쪽이나 저쪽이나 폭풍의 안 전지대를 교환장소를 합의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송정도는 그다지 크지 않은 무인도이기는 했지만 길죽하게 늘어진 소규모 군도였다. 비록 범선이 접안할 수 있는 장소는 없더라도 위치만 잘잡으면 그럭저럭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 는 방벽구실은 할 만한 섬들이었다. 허정은 과감하게 마지막 패를 던졌다. 이제까지 뒤를 밟아왔던 중형 고깃배가 은괴 밀수선이 틀림없기를, 그들의 범죄 장소가 자신의 피난처와 일치하기를 마음 속으로 경건히 기원하며 뱃 머리를 송정도로 돌렸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무림천하-창작연재란 (go MURIM)』 2747번 제 목:[연재] 표류공주 57회 -최후식- 올린이:하이문 (문홍일 ) 99/11/19 16:05 읽음:223 관련자료 없음 ----------------------------------------------------------------------------- 번 호 : 9770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11-19 01:13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57- 역불기는 그다지 심기가 편치는 않았다. 사실 지위로보나 체통으로보나 이 런 일에 끼어드는 것은 지나친 파격이었다. 그러나 기룡호에 승선하는 역불 기를 맹이 일부러 막지는 않았다. 비록 무리한 역천기공으로 내상을 입은 상 태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흑막의 최고수 역불기였다. 맹으로서는 생사가 걸린 막중한 사안이었으니 역불기의 승선을 오히려 반기는 편이었다. 역불기는 유 진목의 생을 기필코 자신의 손으로 마감시켜 주고 싶었다. 이미 폐인이 되어 버린 유진목의 목에 연연하는 것이 스스로도 자못의아스럽기는 했지만 나 름대로의 자기합리화는 있었다. 유진목의 목을 시덥지 않은 놈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호적수에 대한 예우가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적인 이유 는 낙발 오몽생의 살행으로 비롯된 그 죽음보다도 지겨웠던 권태의 찌꺼기 의 제거에 있었다. 유진목의 피라면 그것들을 말끔히 지워주지 않을까하는 은밀한 속셈이 깔려 있었다. 어쨋거나 채경령의 인수인계 이후에나 이루워질 소망이었다. 목선민이라는 애송이가 쓸데없는 똥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발생 한 거추장스러운 절차였다. 아무리흑막의 대주라고는 하나 안하무인으로 내 부적인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동안 지나치게 맹의 협력자들을 휘둘러 왔다. 그러나 모진위라는 쥐새끼와 채경령이라는 애물단지는 번번히 역불기의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급기야 맹주와 총관까지 개입한 연후에 은괴 의 회수가 마무리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한 번쯤은 양보해야 할 시기였다. 배는 무사히 접선장소에 도착했지만 아직 금과 은의 교환은 이루워지지 않 고 있었다. 마땅히 배를 댈 곳이 없는 궁벽한 섬인데다가 파도가 거세서 뱃 전도 서로 맞댈 수가없었다. 바다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모두 가 비바람을 피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잠잠했던 갑판이 갑자 기 술렁거렸다. 간간히 바람을 뚫고 고함소리마저 들려왔다. 잠시 후에는 역 불기의 선실문을 누군가 힘차게 두드렸다. "무슨 일이냐?" 금괴운반을 돕기 위해서 차출된 맹의 졸개였다. "큰일났습니다. 관의 순시선이 나타났습니다." 역불기는 자리를 박차고 갑판으로 달려나갔다. 갑판에는 맹에서 직접 파견 된 이번 임무의 책임자 곽대(郭大)와 기룡호의 선장 조주굉(曹柱宏)이 언성 을 높히고 있었다. "곡선장, 닻을 올리시오." "안됩니다. 곽단주, 보세요. 전부 암초란 말입니다." "여기 있어도 살아남기 어렵기는 매 한가지요." "어디 암초뿐입니까? 저 파도를 좀 보십시오. 왠만해야 말이 되잖습니까. 이 쪽도 죽을 길이긴 마찬가지요." 다시 목청을 돋구던 곽대가 역불기를 보더니 예의를 갖추었다. "소란을 떨어서 면목없습니다, 대주." "쾌념치 말고 일 보게." 역불기는 뒷짐을 쥐며 짐짓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본격적인 폭풍우였 다. 먼바다의 파도는 산더미를 방불케했다. 송정도는 대략 다섯 개로 군을 이루고 있는 섬이었는데 기룡호와 서역의 교역선은 이열로 이루워진 섬들 사이에 피신하였다. 서역 범선이 바깥쪽, 기룡호가 안쪽이었다. 그 뒤에 화포 를 장착한 관의 군선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군선이 한쪽 통로만 막고 있 다고는 하나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인 신세였다. 반대쪽은 암초가 군데군 데 잠복해 있는 가시밭길이었다. 서역범선은 그 덩치 때문에 아예 시도조차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기룡호는 한 번 해 볼만한 시도라고 역불기는 생각했 다. 맹의 생사가 걸린 은괴였다. 역불기가 힐끔 곽대를 쳐다보았다. 역불기가 상급자이기는 하지만 실무책임 자는 곽대였다. 어지간하면 역불기도 곽대의 처분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곽대가 돌연 장검을 뽑아들었다. 살벌한 검이 당장이라도 베 어버릴 듯 조주굉의 목덜미를 파고 들었다. "조선장, 그럼 앉아서 죽겠다는 말이오. 이판사판이오. 자아, 닻을 올리시겠 소, 목을 내놓으시겠소?" 그때 파도소리를 잠재울 만큼 강력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서역선이 군선 의 옆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고, 군선은 요지부동으로 버티며 화포를 쏘 아대고 있었다. 서역선의 탈출은 불가능해 보였다. 화포가 아니라 돌멩이를 던져도 명중할 만큼 근접한 상태였다. 조주굉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그 러나 바다사나이답게 전혀 위축되지 않은 태도로 검날을 손으로 밀어냈다. 고개를 빳빳히 쳐든 조주굉이 선수를 향해 외쳤다. "뭣들 하느냐? 서둘러라. 출항이다." 선원들이 고함을 지르며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배는 조심스럽게 암초 사이 를 비집고 들어갔다. 바다를 알지 못하는 역불기였으나 폭풍우에 된통 당한 다음인지라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었다. 요행히도 섬의 끝자락까지 빠져 나왔던 배가 갑자기 심하게 요동을 쳤다. 방파제 구실을 하던 섬의 영향력 점차 약해지자 파도가 들이 닥쳤다. 와지직. 둔탁한 굉음과 함께 선원들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암초다!" 당황한 선원들이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하자 배는 걷잡을 수 없이 춤을 추 기 시작했다. 연속적으로 굉음이 터져나왔다. 암초의 난타였다. 갑판은 물에 젖어 매우 미끄러웠다. 배가 급속도로 후미쪽으로 기울자 선원과 수하들이 우르르 쓸려나갔다. 순간 역불기는 단숨에 진기를 품어 물고 선수를 향해서 경공을 시전하였다. 순식간에 선두의 용두상에 올라선 역불기는 사방을 둘러 보았다. 양쪽 모두 해안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이런 파도를 헤치고 섬에 상륙하기는 쉽지 않을 것같았다. 더군다나 수영에는 그다지 자신이 없 는 역불기였다. 여기저기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자들을 눈에 띄었다. 수 영이라면 달리기 만큼 우습게 생각하는 선원들도 별다를 것은 없었다. 역불 기는 더욱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유진목과 채경령의 모습도 보였다. 한 몸처 럼 엉켜 있었다. 소란의 와중에 포박한 줄을 풀고 탈출한 모양이었다. 순간 역불기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기룡호의 반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소형선박 하나가 암초밭도 아랑곳 않고 채경령쪽으로 돌진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소형선은 용케도 암초를 헤치고 채경령이 있는 장소까지 도달했다. 역불기는 거리와 방향을 가늠해 보았다. 거리는 대략 오륙 장, 지지대가 마 땅치 않아서 단번에 도달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어선과 기룡호의 좌중앙쯤 에 선원 하나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될 것도 같았다. 역불기는 크 게 숨을 들이 마시고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어렵지 않게 선원의 머리 위까 지는 날아갈 수 있었다. 역불기는 조금도 주저하는 마음없이 선원의 머리통 을 힘껏 걷어찼다. "과연 해왕신의 은총을 받은 천부의 어부로세." 허정은 자신의 귀신 같은 항해실력에 도취돼서 호연지기를 토해냈다. 그리 고 채경령에게 접근하자 노를 뽑아서는 수면으로 들이 밀었다. 시간이 촉박 했다. 허정은 바쁘게 움직여 채경령을 갑판으로 끌어올리고 막 가라앉고 있 는 유진목의 머리채를 낙아챘다. 모진위는 어찌된 영문인지 딱딱하게 굳은 석상이 되었다.그때 한 마리 붕조처럼 역불기가 날아들었다. 그제서야 모진 위가 마치 저주에서 풀려나듯 피풍의를 풀어제치며 장검을 뽑아들었다. 멍하 니 역불기를 바라보던 채경령이 그제서야 얼굴을 돌려 모진위를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하늘을 가렸고 사방에 빗발이 흩날리고 있어서 피풍의를 눌러쓴 모진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모진위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역불기도 마 찬가지였다. 그러나 역불기는 갑판에 내려서기 무섭게 온몸으로 살기를 뿜어 내었다. 상대의 발검이 범상치가 않았던 탓이었다. 뇌성벽력이 지상을 내리 치며 잠시 사위를 시퍼렇게 비춰 주었다. 역불기와 채경령은 동시에 헛바람 을 삼켰다. 활짝 벌어진 피풍의 사이로 벙거지를 눌러쓴 해골이 번개불에 반사되었다. 해골인 것만은 분명한데 눈알도 달려있고 살가죽도 붙어 있었다. 시커멓게 죽은 얼굴은 피부마저 온통 패이고 갈라져서 사이하기 그지 없었다. 번갯불 이 푸른 빛으로 색칠을 해버리고나니 더욱 가관이었다. 더구나 모진위의 얼 굴은 빗발과 바람의 송곳 때문에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내가 그런 것이 있다는 풍문을 듣고도 정녕 믿지를 않았는데 저것이 바로 그 말로만 듣던 강시란 놈인가 보구나.' 모진위의 얼굴을 본 순간 역불기의 뇌리를 스친 망상이었다.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든 모진위의 정체만은 감각적으로 간파해내는 역불기였다. 그러나 비 바람과 파도는 사람이 뿜어내는 본연의 냄새조차 가로막았다. 번갯불에 반사 된 모진위의 모습은 역불기가 오해하고도 남을 정도로 끔찍스럽게 삭막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경황없는 채경령이 모진위로부터 묘한 낌새를 감지하고 심상치 않은 눈길을 보냈다. "비켜라." 허정이 달려들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삭막하기로는 모진위 못지 않은 역불 기의 신위였건만 허정은 자신의 무지를 자랑이라도 하듯 역불기를 밀치며 방향타를 잡았다. 과연 천하제일의 배포라고 자타가 공인할만한 허정이었다. 온통 모진위에게 신경이 쏠려 있던 역불기도 얼결에 어정정한 자리바꿈을 허용하였다. 허정은 곁눈 한번 주지 않고 배를 출발시키는데 온정신을 집중 하였다. 한편, 모진위는 역불기에게 예기를 집중하고 있었다. 몇 가지 엉뚱한 오해가 당장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운명적인 원수들간에 기이한 소강상태 를 만들어냈다. 오월동주(吳越同舟)였다. 예기치 못한 공생의 관계는 그들을 일엽편주에 묶어놓은 채, 항해를 시작하였다. 해왕신의 축복이었는지 신기에 가까운 허정의 항해술 덕분인지 배는 암초 밭을 빠져나와 대양으로 흘러 들어갔다. 하지만 허정도 이번만은 해왕신에게 축원을 올리지 않았다. 두 개의 암초가 적지 않은 파손을 안겨주었던 것이 다. 방파제를 빠져나온 배는 본격적으로 널을 뛰기 시작했다. 파도는 허정의 애선을 십층탑 높이로 공중에 띄웠다가 바닥에 내팽겨치기를 반복하고 있었 다. 그것이 채경령과 역불기가 모진위의 정체를 분명히 알게 된 연후에도 어 쩔 수 없이 공존을 허용하는 핑게거리가 되어주었다. "돛대건, 용골이건 아무거나 붙들고 몸을 붙잡아 매십시오. 장주님." 허정이 밧줄을 풀어서 유진목을 모서리의 판자에 얽어매며 소리쳤다. 거동 이 불편한 유진목이었다. "단단히 묵으셔야합니다, 장주님. 천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구위사, 뭐하고 있는거야? 죽고싶어!" 채경령이 경련을 일으키며 모진위를 돌아다보았다. 모진위는 이리저리 고꾸 라지면서도 역불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네 놈이로군!" 역불기가 피식 웃더니 모진위와 마주노려보며 한쪽 팔목을 기둥에 고정시 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비로서 모진위도 밧줄을 집어들었다. 채경령은 애써 모진위를 외면하며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채경령과 모진위 의 은원관계를 모르는 허정이 채경령의 어두운 신색을 보고 위로했다. "장주님, 아직 절망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머지 않은 곳에 섬이 있습지요. 마침 물때도 좋습니다. 제 아무리 파도가 거세다하나 물길마저 거슬리지는 못할 것이외다. 힘을 내십시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허정의 내심도 마냥 편안한것만은 아니었다. 배는 아 슬아슬하게 곡예를 부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조류의 흐름만은 정말 좋았다. 게다가 밀물이었다. 문제는 과연 해왕 신이 축복을 내려주시는냐 천벌을 내려주시느냐였다. 허정과 그의 일엽편주 는 마침내 해왕신의 판결을 받았다. "보십시오!" 일제히 허정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비바람으로 뒤엉킨 바다는 수평선조차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일동은 허정의 확신에 찬 표정을 통해서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는 파도에 휩쓸려서 제자리를 맴도는 것만 같았는데 허정의 단언대로 물 길을 따라서 어디로인가 나아가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윽고 어두운 수평선 위로 작은 점이 윤곽을 들어냈다. 섬이 가까워오자 배는 점차 가속이 붙고 잇었다. 모진위는 고슴도치가 털을 곧추 세우듯 다시 바싹 긴장을 조이기 시 작했다. 오월동주가 끝나가고 있었다. 허정이 다소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쌍둥이섬이라고들 하지요." 언뜻 두 개의 봉우리를 가진 하나의 섬으로 보이던 것이 다가갈수록 명확 하게 두 섬으로 분리되었다. 모진위가 밧줄을 풀어헤칠 기미를 보이자 허정 이 질책했다. "이봐, 그대로 있게. 이제부터가 진짜 고비라네." 배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섬 사이로 끼어들자 파도는 잦아들 고 있었다. 꽝. 격렬한 충격과 함께 배가 요동을 쳤다. "여긴 아주 유명한 암초밭이라네." 허정이 잔뜩 긴장하며 투덜거리자 유진목이 질린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물살이 이해할 수 없게 빠르군." "밀물의 위세지요. 막대한 양의 물이 좁은 섬사이를 통과하려니 병목현상으 로 극성을..." 격렬한 요동이 허정의 입을 막았다. 뱃전으로 나무조각들이 튀어올랐다. 급 기야 갑판으로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암초들이 연 속적으로 배의 측면을 긁어대었다. 배가 죽어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다오." 허정이 식은 땀을 흘렸다. 모두가 무섭게 휘몰아치는 물살의 위세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역불기마저 완벽한 무표정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눈 앞 에는 악마의 이빨처럼 기괴한 암초들이 빽빽히 줄지어 있었다. 거칠 것없는 밀물의 노도였다. 배는 밀물의 위세를 타고 암초들의 방벽을 향해서 무모한 돌진을 감행하고 있었다. 끼기긱! 배는 암초에서 불과 일 장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힘겹게 정지했다. "갑시다." 허정이 단칼에 밧줄을 끊어버리고 유진목의 어깨를 부축하였다. 그리고 어 리둥절해 하는 일행을 재촉하며 암초를 바라보며 뛰어내렸다. 채경령도 서둘 러 뒤를 따랐다. 물컹거리는 감촉과 함께 양발이 바닥에 잠겼다. 갯벌이었다. 그제서야 채경령은 배가 갑자기 정지한 이유를 깨달았다. 갯벌은 완만한 경 사를 이루고 있었다. 배는 여전히 수면에 떠있는 듯 보였지만 기실은 수면이 얕아지자 갯벌에 박혀 버렸던 것이다. "구위사, 뭐하나? 지체해서는 안돼네." 허정이 유진목을 부축하고 갯벌을 달리면서 외쳤다. 그러나 모진위는 꼼짝 도 하지 않았다. 모진위와 역불기는 높다랗게 치솟은 암초를 하나씩 차지하 고 쌍방을 노려보는데 여념 없었다. 이윽고 해안가에 다다른 허정이 발을 동 동 굴렀다. "안돼! 그만두고 빨리 나오게. 곧 밀물이 암초를 삼켜버린단 말이야!" 모진위는 허정의 재촉에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일견하기에도 유진목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채경령은 부담이 되면 되 었지 도움만한 무공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무공과는 전혀 관련이 없 는 허정까지 있었다. 파도와 암초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역불기가 버티고 있 는 한,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었다. 모진위는 진기를 가다듬으며 검 끝을 꼿꼿히 세웠다. 귀가 있으니 역불기도 허정의 충고를 못들었을 리가 없었다. 역불기는 모진위의 사뭇 비장한 태도에 콧방귀를 뀌며 암초를 박차고 날아 올랐다. "이런, 이런!" 허정이 혀를 찼다. 험악한 조수가 갯벌을 모두 삼켜버린지는 이미 오래였 다. 쌍둥이섬을 교각처럼 이어주던 암초들마저 하나둘씩 물살에 잠기고 있었 다. 씨알이 굵은 암초 봉우리들만이 듬성듬성 흩어져 있었다. "빨리 칡넝쿨이나 나무껍질따위를 찾아봅시다. 급해요!" "넝쿨이라니...?" "최소한 십장은 되는 줄을 만들어야 합니다. 밧줄대용으로 쓸 수 있는 것이 면 아무거나 좋아요. 일대를 뒤져보세요. 늦어도 차 세 잔 마시는 시간이 되 기 전까지는 돌아와야 합니다." 모진위는 전력을 다해서 검을 밀어올렸다. 싸늘한 도풍이 모진위의 관자놀 이를 압박해왔다. 미친듯한 비바람이 무색할 도풍이었다. 모진위는 무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대로 맞받아갔다. 달리 도리가 없었다. 굉음을 울리며 도검이 마주쳤다. 뜻밖이었다. 모진위는 잠시 의아해졌다. 엄청난 기세로 내리누르던 잠력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공을 바탕으로하는 정면충돌이라면 모진 위가 완벽하게 역부족이었다. 어깨죽지정도는 내어주겠다는 각오의 모진위였 다. 그런데 각오한 만큼의 충격에는 어림도 없었다. 생각은 길고 행동은 짧 았다. 혼란의 와중에서도 모진위의 신형은 벌써 좌측 후방으로 날고 있었다. 이번에는 역불기쪽이 당황했다. 모진위를 찍어누른 역불기는 그 반탄력을 이 용해서 모진위를 타고 넘었다. 무엇보다 해변에 도착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 제라고 판단한 역불기였다. 일당의 척살은 그 이후라도 늦지 않았다. 모진위 를 추월하여 미리 보아둔 암초를 향하던 역불기의 신형이 엉거주춤 공중에 멈춰버렸다. 놀라운 신법(身法)이었다. 역불기가 알기로 모진위는 신법이나 보법에 능숙 한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동작들은 너무도 절묘 하였다. 천하 각지를 둘러봐도 그리 쉽게 볼 수 없는 심오하고도 고절한 경 신술이었다. 찰나지간에 역불기가 내려서려던 암초를 모진위가 점령해 버렸 다. 모진위의 검이 절호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역불기의 발바닥을 찔러왔다. 순간 역불기는 길게 휘파람을 내불며 몸을 말아올렸다.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가슴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윽고 힘이 다한 듯 상반신이 뒤로 넘어갔다. 허리가 뒤로 꺽어지며 한껏 뒤로 제친 머리는 수면과 수평을 이루며 자신의 발뒷꿈치를 향해서 꺽어졌다. 역불기의 몸이 완벽하게 하나의 원을 형성하는 가 싶더니 힘찬 반동과 함께 두 무릅이 허공을 차고 올랐다. 일회전의 역불 기가 낭창낭창한 도신을 흔들며 모진위의 상반신을 훑어나갔다. 모진위의 팔뚝과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믿음직한 자신의 연도가 모진위의 검을 힘차게 튕겨내자 역불기의 신형이 다시 반탄력을 얻었다. 역불기는 그 반탄력을 이용해서 최대한 후방으로 몸을 날려 보았다. 그러나 거리가 모자 랐다. 역불기는 남겨둔 진기들을 아낌없이 뿜어내며 비장의 경공을 시전하였 다. 몸을 최대한으로 접으며 수면을 걷어찼다. 돌팔매가 수면을 차고 나가는 그런 형태의 신법이었다. 그러나 수면을 박차는 순간 역불기는 그대로중심 을 잃고 말았다. 엄청난 물살이었다. 새찬 강물도 돌팔매처럼 차고 나가는 역불기였다. 삼장 높이의 폭포수도 문제 없었다. 그러나 밀려오는 조수는 터 무니가 없을 정도로 거셌다. 역불기의 상상 이상이었다. 역불기는 뇌려타곤 (뇌려타곤)을 방불게하는 동작으로 볼품없이 팔다리를 휘저어야 했다. 체통 이 땅에 떨어지기는 했지만 어쨋든 암초의 한귀퉁이를 붙잡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물살이 역불기를 놓아주지 않았다. 한참을 버둥거린 후에야 겨우 바 위 위로 기어오를 수 있었다. 모진위가 팔과 어깨를 감싼 채 노려보고 있었 다. 그 능글맞은 낯짝에 역불기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고 말았다. 그즈음 허정과 그 조력자들이 다시 해변에 모여들었다. "이걸로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허정이 초조하게 바다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모진위를 재촉해 볼 생각 이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말았다. 모진위와 해안 사이에는 이미 열 개의 암초도 남아있지 않았다. 새가 아닌 이상, 넘어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구위사는 틀린 것 같습니다. 유대인어른." "글쎄, 지레 낙담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가히일취월장(日就月將)이라네." 역불기와 허공에서 충돌하는 모진위를 바라보며 유진목이 말했다. "뭐가 말입니까?" "흑막의 저 괴물에 비해서 눈에 띄게 손색이 있는 친구였는데, 지금보니 그 다지 미흡하지도 않구먼. 저 괴물같은 작자의 경공실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천하의 일절이라고 봐도 무방하네." "휴우, 어르신. 강호에서 말하는 내공이나 경공의 문제가 아니랍니다. 저 물 살로 말할 것같으면 날아가는 새도 일단 걸리기만 하면 그대로 끝장납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는 없는 바다의 분노라 이겁니다." 섬 사이로 밀려드는 밀물의 기세에 말려들면 천근만근의 거선도 도리가 없 다는 것을 허정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허정은 지푸라기를 붙잡는 심정으 로 넝쿨을 연결하고 그 끝에 뿌리까지 파내버린 나무둥치를 붙들어 매었다. 허장의 장담은 곧바로 현실로 닥쳐왔다. 역불기는 일순간 무력감에 휩싸였다. 바다가 암초를 막 삼켜버리는 순간이 었다. 겨우 발 끝만 스쳐가는 물살인데도 역불기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모진위는 이미 맹렬한 기세로 파도에 떠밀려가고 있었다. 물밑 여 기저기에 날카로운바위들이 이빨을 감추고 있었다. 물살의 기세로 보아 스 치기만 해도 갈기갈기 찢어져 버릴 것이 뻔했다. 모진위가 안간힘으로 허둥 거리고 있었지만 역불기의 눈에는 전혀 가망이 없어보였다. 잠시 후 자신에 게도 닥쳐올 운명이었다. 수면이 무릅까지 차올랐을 때, 결국 역불기도 파도 에 항복하고 말았다. "던져요." 허정이 고함을 질렀다. 일행은 바다쪽으로 가장 들어가 있는 바위까지 진출 하여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막 모진위가 근처까지 떠내려오고 있었다. "밀어." 허정이 다급한 나머지 반말짓거리로 나섰다. "힘껏 밀어! 구위사, 제발..." 뿌리에 흙을 동반한 나무등거리는 제법 무거웠다. 바위틈에 뿌리가 끼었는지 영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모진위와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허정과 일행은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냈다. 허정의 뱃 속 깊숙한 곳에서 비명소리와 같은 구령이 새어나왔다. "여엉차!" 나무가 두둥실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 세 사람은 나무와 연결되어 있는 칡넝 쿨을 단단히 붙잡았다. "구위사! 정신차려! 나무를 봐!"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나무는 끈이 팽팽하게 당겨지면 결국 원심력에 의 해서 해안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우선은 모진위가 나무를 붙잡을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까이 접근하게 되는지의 여부가 문제였다. 다행히도 허정의 어림짐작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나무가 칡넝쿨에 당겨져서 방향을 바꾸려 는 찰나, 모진위가 나무쪽으로 밀려왔다. 그때 덩치 큰 파도가 나무와 모진 위를 들어올렸다. 다음 순간 파도가 포말로 부서지는 가운데, 나무와 모진위 는 물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잠시 후, 칡넝쿨의 탄력으로 나무가 다시 떠올 랐다. 그러나 줄기에도, 가지에도 모진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틀렸나?" 허정이 중얼거렸다. 내상을 입은 몸으로 지나치게 무리를 했던 유진목이 털 썩 주저앉았다. 채경령은 넝쿨을 단단히 잡은 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파도가 나무둥거리를 집어던졌다. 물 속에 잠겨있던 뿌리가 다 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한 쪽에 모진위가 엉겨 있었다. "당겨!" 허정은 자신의 반말짓거리를 의식도 못하고 있었다. 밥 한끼 먹을 시간의 사투 끝에 모진위가 상륙했다. 기력이 다한 유진목이 뒤로 넘어갔고 채경령 이 주저앉았다. 허정도 거친 숨을 내몰고 있었다. 그러나 한숨을 돌릴 틈도 없는 허정이었다. 간단한 인공호흡 후에 모진위를 들쳐업었다. 허정은 가지 가 촘촘하고 입이 무성한 나무 밑으로 모진위를 옮겨놓았다. 그리고 나무와 나무를 열심히 비벼댔다. 빗발은 눈에 띄게 가늘어졌다. 잘하면 불을 피울 수도 있을 것같았다. 아니, 반드시 피워야했다. "장주님, 비비세요." "... ...?" "구위사를 비벼주세요. 저대로 나두면 얼어 죽습니다." 채경령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서요." 그래도 채경령은 발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장주님, 무례한 요구라는 것은 이 놈도 잘 알고 있습니다. 벌은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무림인들이 우리 같은 상것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목숨이 질기다는 것 쯤은 이 놈도 알고 있습니다요. 하지만 구위사는 사천에서부터 항주까지 몇십 일간을 쉬지않고 달린 몸입니 다. 피부가 터지고 발바닥이 다 닳아버렸다더군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죽 고도 남을 상태랍니다. 거기다가 폭풍우의 바다에 시달렸구요. 물 속에 잠겨 서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은 장주님께서도 친히 보시지 않았습니까? 새파랗게 죽은 저 얼굴 좀 보세요." 채경령이 다시 보니 정말 곧 죽을 것만 같았다. 옆에 누워 있던 유진목이 몸을 일으키려는 듯 바둥거렸다. 모진위에게 기어가려고 애를 쓰는 기색이었 다. 그러나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고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딱하기 그지 없는 안간힘이었다. 채경령과 모진위의 관계를 잘 알고있는 유진목으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채경령이 지켜보려니 이대로 나두었다가는 모진위는 물론, 유진목도 잡을 판이었다. "구위사!" 허정의 다급한 경호성에 고개를 돌려보니 모진위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 다. 채경령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모진위를 얼싸 안았다. 그리고 열심히 비 벼대기 시작했다. 허정은 나무를 비볐고, 채경령은 외간 남자의 몸을 비볐다. 유진목은 어이없는 채경령과 모진위의 은원사(恩怨史)에 가슴을 쓸었다. 악몽의 밤이 지나가고 새날이 밝아왔다. 허정과 일행이 다시 어제의 그 자 리로 돌아왔다. 간밤의 악귀들은 종적조차 사라지고 바다는 갓난아기처럼 쌔 근거리고 있었다. "휴우, 그 난리를 쳤는데 배가 남아 있을 리가 없지요." 허정이 딱하다는 듯이 채경령을 돌아다 보았다. 그들이 타고왔던 배는 어디 에도 보이지 않았다. "밀물이 있으면 썰물이 있기 마련이지요. 이 곳은 밀물이 극성스러운 만큼, 썰물도 극성스럽지요. 소인의 배정도는 아마 산산조각나서 천리 밖으로 사라 졌을 겁니다." 그때 유진목이 독백처럼 되뇌였다. "썰물과 밀물이라. 하루 밤낯에 두 번씩 다리가 생기고..." 두 개의 봉우리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있는 지형이었다. 그 계곡을 바닷물 이 메우고 있었다. 유진목의 말대로 바다는 하루에 두 차례 썰물에 의해서 다리로 연결되었다. 암초로 길게 들어선 다리는 이를테면 두 봉우리를 잇는 능선이었다. 그것은 허정이 유진목에게 밤새 설명한 바가 있었다. 유진목의 신색이 너무 어두운 것을 보고 허정이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유대인어르신! 제가 모르는 무슨 또 다른 근심거리라도 있습니까.?" "아닐세. 아무래도 역불기란 작자가 걸려서..." "하하, 대인어른. 괜한 걱정이십니다. 바다는 소인이 잘 알고있습죠." "하지만 노부는 역불기를 잘알고 있지." 그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바닷물이 빠지고 갯벌이 드러나자 허정은 열심히 조개와 굴따위를 채집하는 한편, 엉성한 나무창을 가지고 물고기도 잡았다. 채경령도 부지런히 나무열매나 풀뿌리를 채집하였고 마실 물도 준비했다. 물 이 흔한 곳은 아니었다. 썩어 있는 나뭇잎 밑으로 흐르는 가느다란 물방울들 을 하루종일 모아야했다. 한편, 모진위와 유진목은 미안한 마음에도 불구하 고 꼼짝 못하고 누워서 몸을 추스려야 했다. 그들에게도 작은 임무가 있었 다. 둘은 불을 지키고 있었다. 허정은 봉우리 제일 높은 곳에 불을 피웠다. 유진목과 모진위는 꺼지지 않게 주의하면서 때때로 젖은 가지들을 불 위에 언져놓았다. 허정의 신신당부가 있었다. 지금으로써는 짙은 연기를 피워올리 는 것만이 지나가는 배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섬에 표류한지 사흘이 되었을 때, 모진위와 유진목은 비로서 조금씩 거동을 시작했다. 외양은 유진목이 훨씬 멀쩡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유진목는 무공사용이 불가능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언제나처럼 모닥불에 젖은 나무 가지를 언져놓던 유진목이 벌떡 일어섰다. 건너편 해변가에 한 사내가 모습 을 드러냈다. 일부러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보나마나 역불기였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무림천하-창작연재란 (go MURIM)』 2748번 제 목:[연재] 표류공주 58회 -최후식- 올린이:하이문 (문홍일 ) 99/11/21 01:47 읽음:229 관련자료 없음 ----------------------------------------------------------------------------- 번 호 : 9775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11-20 08:56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58- 역불기는 예상밖으로 모진위의 저항이 완강하자 약간 긴장하게 되었다. 모 진위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전의 수준보다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웠 다고는 하나 다소의 여유는 있었다. 모진위도 무리한 공격으로 손해를 몇 번 입더니 오로지 방어일변도로 나가고 있었다. 정작 역불기를 긴장시키고 있는 것은 바다였다. 역불기는 바다가 익숙치 않았다. 더군다나 이런 해괴한 환경 은 듣도 보도 못했다. 이미 물살의 호된 맛을 톡톡히 보았던 터였다. 이런 이유로 역불기는 승패에 전념치 못하고 수면의 높낮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빌어먹을!' 또 다시 밀물이었다. 제법 세찬 공격에도 모진위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어지간한 공격은 그냥 몸으로 때우고 있는 모진위였다. 물살이 어느새 암초 까지 잠식해 들어왔다. 어물어물 지체했다가는 다시 어제의 낭패를 되풀이 해야할 판이었다. 모진위는 전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모진위 의 어깨너머로 허정과 유진목이 밧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모진위의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역불기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건너편 섬으로 철수했다. 껑충껑충 뛰어오는 모진위를 바라보며 유진목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모 진위가 또 다시 역불기를 막아내는 것은 무리하고 생각했던 유진목이었다. 그러나 모진위는 아슬아슬하게 역불기의 예봉을 피하고 고비를 넘었다. 역불 기는 평소와 다르게 내력의 운용이 그리 신통치 않았다. 아마도 역천기공으 로 인한 내상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았다. 더구나 파도에 시달리며 암 초에 상처를 입었는지 사지의 놀림도 평소보다 거북해 보였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모진위의 선전은 의외였다. 이해할 수 없는 기량발전이었다. 불과 두달만의 재회였다. 유진목의가전무공인 해우공을 전수해 주었을 당시 와 비교해보면 천양지차였다. 그때도 물을 흡수하는 솜처럼 해우공을 빨아들 였다. 놀라울 정도의 빠른 속도로 해우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한계를 극 복하였다. 그런데 불과 두 달만에 다시 새로운 경지를 유진목에게 선보이고 있었다. "수고했어, 구위사." 허정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모진위를 맞았다. 무공의 문외한인 허정이 보기 에도 모진위의 고전이 역력했다. 그날밤 긴급작전회의가 거행되었다. "그러니까 내일 유시(酉時)경에 다시 바닷길이 열릴 겁니다." 허정이 바다가 갈라져서 섬 사이에 통로가 생기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주 었다. 허정의 설명대로라면 하루에 두 차례씩 바닷길이 생겼다. 하루에 두 번이라고는 하지만 시간이 꼭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의 주기보다 밀물과 썰물의 주기가 약 반시진가량 더 길었다. 그러니까 물때마다 한식경 정도씩 시간이 늦쳐진다는 설명이었다. "그 괴물같은 작자가 물때를 모르는 것은 정말 천운입니다. 오늘도 미리 겁 을 집어먹고 눈치를 살피다가 썰물때가 거의 다 되어서야 갯벌에 들어섰고, 반시진은 더 머물어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을텐데도 일찌감치 물러서더 군요. 하지만 그 작자도 점차 물때를 맞추게 되겠지요." "소조(小潮)가 팔일과 십삼일이라고 했던가?" "예, 그렇습니다." 유진목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허정은 보름간격으로 대조(大潮:사리, 조수가 가장 높은 때)와 소조(小潮:조금, 조소가 가장 낮은 때)를 반복한다고 했다. 칠월 보름이 되려면 아직 이틀이 남았다. 보름이 바로 대조였다. 만조 시의 수위가 점차 높아지다가 보름에는 최고조에 이르고, 보름을 기점으로 차츰차츰 수위가 낮아지다가 이십삼일이면 최저의 수위를 기록하는 소조가 찾아온다고 했다. 섬 사이의 통로는 만조와 간조는 물론이고 대조와 소조의 영향도 받는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상황을 정리해 보면 보름까지는 간조시 바닷길이 열려있는 시간이 점차로 단축되다가 보름날을 기점으로 점 차 연장된다는 이야기였다. 계절에 따라, 지역에 따라 간만의 차가 다르므로 소조시 섬 사이의 통로가 유지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허정도 직접 보 기 전에는 짐작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어쨋든 요 며칠간이 다리가 늦게 생기 고 빨리 잠기는 시기였다. 유진목의 진영에서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 다. 금일의 모진위는 한 시진 반 이상을 막아내야 했지만 내일은 한 시진 이 하만 막아내도 된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역불기가 밀물과 썰 물의 변화를 잘 파악하게 될 터이고 바닷물이 갈라지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 어 있었다. 유진목과 일동은 오로지 모진위의 선전분투에 목을 매야하는 입 장이었다. 모진위를 보고 있자니 한숨부터 새어나오는 유진목이었다. 그러나 마냥 모진위에게만 맡겨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보게." 유진목이 모진위를 불러 세웠다. "갯벌만 고집해서는 곤란하지 않은가?" 모진위가 멋적게 웃었다. 썰물이 절정에 이르면 암초로 이어진 능선들 주변 에 약간의 갯벌도 형성되었다. 모진위는 그 갯벌이 다시 밀물에 잠길 때까지 갯벌의 위치만을 고수하였다. 반면 역불기는 갯벌과 암초를 적절히 오고가며 모진위를 다구쳤다. 불리한 지형탓으로 초반의 모진위는 많은 손해를 감수해 야했다. 그 잘못된 점을 지적하려던 유진목은 모진위의 발바닥을 보는 순간,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발바닥을 보호하는 굳은 살이라고는 눈을 씻고 살 펴 봐도 없었다. 상처투성이의 발이었다. 사천에서 항주까지 경공으로 달려 왔다는 허정의 주장은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았다. 유진목은 은밀하게 한숨 을 내쉬며 화제를 바꿨다. "자네가 장미백변의 수법으로 이렇게 하단으로 변화하자 놈이 이렇게 갈짓 자로 휘저으며 도를 뿌려댔지? 그러자 자네가 다급한 김에 이렇게 검을 틀 어서 임기응변을 취했지. 그때 놈이 이렇게 도로 추궁해왔고. 거기서 자네가 약점을 찔리고 말았지. 이렇게 했을면 어땠을까?" 유진목이 역불기와 모진위의 대전을 다시 재현하고는 모진위에게 물었다. 모진위의 눈이 돌연 초롱초롱하게 빛을 발했다. "그렇군요. 그런 수가 있었군요." 유진목과 모진위는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논검(論劒)에 몰두하였다. 어찌 보면 모진위는 역불기의 직전제자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의 독분비법인 명 부결을 전수받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모진위가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명부 결의 숨은 의도를 설명해주면 유진목이 해우공을 바탕으로 대비책을 세우고, 모진위가 다시 명부결의 요령에 따라 그 헛점을 찾아내고, 유진목이 다시 해 우공과 접목하여 전술을 보완하는 식의 논검이었다. 모진위가 펼치는 추혼십 이절에는 이미 유진목의 해우공이 숨을 쉬고 있었다. 유진목의 설명은 어렵 지 않게 모진위의 검법에 적용되었다. 밤새 대비책을 마련한 모진위와 유진 목은 다음날 다시 간조때가 되자 바다를 둘로 가르는 능선으로 나갔다. 그러 나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전날은 한시진이 훨씬 넘게 열려 있던 물길이 반시진도 지나기도 전에 어 진간한 높이의 암초들은 모두 삼켜버렸다. 역불기는 당황했다. 다급한 마음 에 십이성의 내공을 모두 쏟아붓는 회심의 일초를 퍼부었다. 모진위가 절묘 한 검놀림으로 날름거리는 뱀의 혓바닥을 여유있게 저지했다. 그러나 뒤를 잇는 역불기의 원앙각(鴛鴦脚)에 속절없이 나가떨어졌다. 유진목이 절로 감 탄사를 토할 정도로 시의적절한 수법이었다. 모진위가 끈 떨어진 연처럼 바 다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누가 보기에도 치명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거센 밀물이 양쪽 섬의 중앙에 위치한 대형암초들이 상당부분 잠식해버린 관계로 역불기가 눈물을 머금고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다는 점이었다. 구사 일생으로 모진위를 구출한 일행은 참담한 심정으로 봉우리로 귀환했다. 저녁때가 되자 어김없이 썰물은 다시 찾아왔다. 일행이 침통한 표정으로 한 숨을 내쉴 때, 불굴의 사나이 모진위가 기적적으로 다시 소생하였다. 그리고 바닷가로 향했다. 물론 모진위도 그의 일행과 마찬가지로 내일의 태양을 기 약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모진위는 때가 되어 암초가 드러나자 역불기를 막아섰다. "하핫, 보세요. 물이 들어오고 있어요. 하하하!" 허정이 뛸 듯이 기뻐하며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차츰차츰 머리를 내밀던 암 초들이 다시 물 속에 잠기고 있었다. 과연 대조는 대조였다. 바다가 갈라지 기도 전에 다시 밀물이 밀려오고 있었다. "보자... 오늘이 열나흐레고, 내일이 보름이니..." 허정의 흐물거리는 미소가 다시 폭소로 변했다. "됐습니다. 적어도 이틀은 물길이 안열릴 겁니다. 하하하!" 유진목은 결심을 굳혔다. 허정의 말마따나 해왕신의 축복이라고 밖에는 달 리 설명할 길이 없는 이틀간의 여유였다. 이대로라면 이틀 후라고 달라질 것 이 없었다. 모진위의 백전백패였다. 수단을 강구해야만 했다. 유진목은 기진 맥진해서 쓰러져있는 모진위를 일으켜 세웠다. "자아, 힘을 내세나. 시간이 많지 않으니 용서하게." 유진목은 기경팔맥을 일일이 손으로 짚어가며 모진위에게 내공을 일으키는 방법과 손아귀에 그 내력을 집중시키는 방법, 그리고 검에 주입하는 방법을 설명해 나갔다. 비인부전(비인부전)의 해우공에서도 일급비밀에 해당하는 핵 심요결이었다. 사문인 석전문에 대한 배신행위임에는 틀림없었지만 달리 방 법이 없었다. 유진목의 천직이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었고, 그 소명의식이 네 사람의 목숨을 상기시켜주었다. 모진위에게 대강의 요령을 설명한 유진목은 다시 구석에 주저앉아 대책마련에 들어갔다. 역불기의 명부결은 초식을 초월 한 절기였다. 형(形)과 변(變)을 가진 초식은 약점이 없을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대조의 은덕으로 모두가 한숨 돌리게 되었다. 허정의 장담대로 다음날도 바다는 갈라지지 않았다. 겨우 몸을 추스린 모진위가 이른 새벽부 터 장검을 들고 검술수련에 들어갔다. 유진목도 모진위를 살피는 한편, 대응 수법을 보완하는데 궁리를 거듭하였다. 오후가 되자 허정이 나뭇가지에 줄줄 이 고기를 꿰어서 봉우리로 돌아왔다. 중턱 언저리에서는 채경령이 산딸기를 따고 있었다. 그즈음해서 나무열매를 채취하는 채경령의 수법도 제법 요령이 붙었다. 경 지에 오른 채경령이 실로 탐스러운 산딸기의 군집을 발견했다. 채경령은 콧 노래라도 부를 것처럼 기쁜 마음으로 딸기들을 치마폭에 담았다. 탐스러운 딸기라고해서 채경령에게 딱히 득이 될 것은 없었다. 그나마 좋은 음식들은 모두 모진위 차지였다. 나머지는 그날그날 사정에 따라 찌꺼기로 배를 채워 야 했다. 탐스러운 딸기의 적은 양보다는 오히려 형편없는 풍성한 양의 딸기 가 채경령의 고통을 덜어주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채경령은 그런 자신의 처 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기쁨에 들떠 있었다. 유진목의 바로 옆에 털퍼덕 주저앉아서 모닥불을 살피던 허정이 문득 고개 마루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장주님께서는 이런 고생은 꿈도 못꿔본 금지옥엽이시니 지금의 처지가 말 도 못하게 고생스러우실텐데도 의외로 견딜만 하신가 봅니다." 유진목도 힐끔 채경령을 내려다보고 말했다. "금지옥엽이라고는 해도 근년에 이르러서는 꽤 고초를 겪은 편이지." "그래도 지금의 모습은, 약간 불경스러운 표현이지만 원래 태생이 그런 것 처럼 평온해 보이시는 군요." "평온? 노부의 말은 채아가씨가 불편한 환경에 비교적 단련이 되었다는 뜻 이었네만. 아무래도 평온이란 단어와는 좀 거리가 있는 분이시지. 어린나이 에 힘에 부친 채가장을 이끌며 복수의 나날을 살아왔네. 귀한 신분이라 몸은 안락했는지 몰라도 마음이 평온할 틈은 없었을 걸세." "허허, 대인. 지금 우리 팔자가 몸이 편안해할 형편은 아니잖습니까? 콧노래 라도 나올 것 같은 저 장주님의 얼굴을 보십시오. 이 놈이 보기엔 장주님은 지금 분명히 몸은 고단하고 마음이 편안한 상태입니다요." 유진목이 모진위와 채경령을 번갈아 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그렇군. 그러고 보니 전에 노부도 채아가씨가 참으로 태평하게 느낀 적이 있었군. 그때도 지금처럼 편치 않은 형편이었었지." "언제요?" "저 녀석이 채아가씨의 보표로 있을 때." 유진목이 턱 끝으로 모진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틀간의 평화가 끝나고 다시 도발과 응전의 반복이 재개되었다. 바다길이 열리는 시간은 조금씩 늘어갔고, 그에 따라 모진위의 상태가 점차 악화되었 다. 모진위의 치료는 채경령의 몫이었다. 허정은 의술과는 무관한 사람이었 고, 유진목은 환자였다. 게다가 유진목은 그 날의 전투를 분석하고 대비책을 세워서 모진위에게 전수해야만 했다. 채경령은 모진위의 옷자락을 이리저리 들쳐보며 상처를 닦아내고 약초를 발랐다. '이런 곪아버렸구나!' 상처가 아물 새가 없었다. 철저한 소독만이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하는 유 일한 방책이었다. 자기딴에는 그래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모진위를 돌 보고 있었다. 그런데 미처 발견못했던 상처가 곪아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채경령은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아 못내 가슴이 쓰렸다. 정상적인 의료도구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채경령은 이빨을 옥다물고 단검을 들었다. 그 리고 눈살을 찡그리며 덧난 상처를 터뜨렸다. 누런 고름이 흘러나왔다. 채경 령은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머리칼에 상처가 쓸리지 않을 까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채경령은 고개를 숙여서 고름을 빨았다. 물길은 한 번 열리면 두어 시진이 넘도록 다리의 형태를 유지하였다. 무공 수준이 엇비슷한 적수였다고 해도 승부가 갈리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모진위는 하루에 두 번씩 사흘의 승부에서 아직 살아남았다. "새로운 청년고수의 탄생이로군." 역불기와 모진위의 치열한 혈투를 지켜보던 유진목이 언젠가 그렇게 말했 다. 예전부터 이미 잘 알고있는 모진위의 실력이건만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 인가 하고 채경령은 의아해했다. 그러나 유진목의 감탄은 의미가 틀렸다. 물 론 유진목도 원래의 모진위가 예사 실력이 아니었음은 잘 알고 있었다. 난주 의 폐묘에서 약간의 무공을 사사하면서 모진위가 익혀온 무예의 줄기와 뿌 리를 세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고수라고 칭하기에는 당시만 해도 부족한 점이 많았던 모진위였다. 힘의 수발(受發)과 안배가 능숙하지 못했고 보법과 신법에도 부자연스러운 점이 많았다. 그것은 극복하기 쉽지 않은 난관이었 다. 그러나 쌍둥이섬에 도착한 이래 모진위는 급속도로 자기만의 자세와 균 형을 찾아가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전수하기 시작한 석전문의 해우공이 일조 한 바도 있었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요인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모진위의 진보는 눈부셨다. 유진목은 대전이 끝나면 모진위와 그날의 전투과정에 대한 토론을 벌이고 가상대결을 벌였다. 명부결을 익힌 모진위가 역불기의 역을 맡았고 유진목이 해우공을 기초로 해서 모진위의 대역을 맡아주었다. 하루하루가 달랐다. 바 로 전날의 수준으로 모진위의 진도를 짐작하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심하게 말해서 유진목과의 비무에 있어서 비무 전의 모진위와 비무 후의 모 진위가 전혀 달랐고, 역불기와의 실전에 있어서 격투직전과 직후가 또 달랐 다. 그것이 모진위가 며칠간의 격전에서 살아남은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즈음의 모진위는 환골탈태가마지막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내부적인 변 화가 외부로 흘러넘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그동안 힘과 골격의 급진적인 변화에 전혀 적응을 못하고 있던 모진위가 자신의 육체에 서서히 적응해 나 가고 있었다. 내외공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의지와 감각이 화합해갔다. 용무 권, 추혼십이절, 비연류, 천지신공, 해우공, 만파종이 하나로 융합하면서 상승 효과를 발생시켰다. 곡식으로 치자면 알맹이가 영글어가는 시기였다. 모진위 의 그런 성장에 가장 훌륭한 자양분이 된 것은 역시 역불기였다. 역불기도 나날이 변모해가는 모진위의 모습에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역불기는 도 에 미친 사내였다. 더군다나 상호격돌은 모진위의 육신을 통한 유진목과의 대리전 양상을 띄고 있었다. 역불기는 무의식중에 본래의 목적인 살인은 뒷 전으로 미루고 무공 탐구에 몰두해 있었던 것이다. 모진위는 역불기와 유진 목 양자의 무공을 모두 전수받은 공동제자였다. 해우공과 명부결이 모진위의 앞뒤를 동시에 압박하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힘에 부친 강적 역불기 와의 혼신을 다한 혈투 그 자체가 완벽한 무공수련의 장을 제공해주고 있었 다. 역불기와 유진목이 모진위를 대상으로 공동실험에 임하는 것과 동일한 결과를 가져왔다. 양자간의 극성에 손발이 바빠지고 있는 것은 채경령이었 다. 나날이 늘어가는 모진위의 상처를 보고 있자니 채경령의 가슴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걸레가 되어가고 있었다. 채경령이 고름을 뱉아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술을 쓱 문지르더 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허정은 그런 채경령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 다. 허정은 그들을 만난 이래로 채경령과 모진위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먼 옛날 허정에게도 그런 여인이 있었다. 순진한 청년 허정은 그녀만 보면 괜시리 숨이 가쁘고 머리가 어지러워서 말도 나오 지 않았다. 여인도 허정만 보면 왠일인지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그것이 사람이면 누구나 겪게되는 열병이란 것을 허정이 깨닫게 된 것은 그후로도 아주 많이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 이미 그녀는 허정의 곁을 떠나고 없었 다. 나름대로는 애틋한 추억이었다. 허정이 자기 기분에 도취되어 기어코 한 마디하고 말았다. "보기 좋습니다. 마치 다정한 해와 달 같습니다그려. 혼례식에는 이 놈도 필 히 참석하여 술 석잔를 마시고야 말겠습니다요." 채경령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유진목도, 모진위도 말을 잊었다. 오랜 정적 끝에 채경령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해와 달? 이봐요, 허아저씨. 그래요, 해와 달. 저 치가 해라면 소녀가 달이 랍니다. 해가 뜨면 달이 사라지지요. 해가 져야만 달이 뜨고요. 저 치가 달이 라면 소녀가 해가 되지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사이랍니다. 혼례? 하늘이 두쪽이 나지 않는 한... 아니, 해와 달이 동시에 뜨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없 을 겁니다, 허아저씨." 채경령의 앙칼진 질책에 허정은 당혹스러웠다. 제 딴에는 그래도 중매꾼을 자처하는 좋은 의도였는데 채경령이 산통을 깨고 말았다. 머쓱해진 허정이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는지 끝내 한마디 보태고 말았다. "세상일이란 게 모르는 거지요. 혹시 압니까? 진짜로 해와 달이 동시에 뜨 는 그런 날이 올지..." 허정이 헐레벌떡 봉우리로 달려올라왔다. 소조를 닷새가량 남겨둔 칠월 십 팔일이었다. 모진위는 아직도 치열한 격전중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하 나의 섬으로 연결되는 시간이 둘로 갈라져 있는 시간보다 길어져 있었다. 모 진위가 날이 갈수록 힘겨워 했다. 역불기의 도에 쓰러지는 것은 이제 시간문 제인 것만 같았다. 허정은 가뿐 숨을 몰아쉬면 젖은 풀들을 모닥불에 털어넣 고 도포를 벗어제꼈다. 유진목도 헐떡이며 봉우리로 따라왔다. "이쪽을 잡아주세요." 허정과 유진목은 도포를 넓게 펴서 마주잡고는 모닥불을 덮었다. 길을 차단 당한 연기들이 도포속에서 아우성쳤다. "지금!" 허정과 유진목이 동시에 도포를 거둬버렸다. 한 덩어리 검은 연기가 허공으 로 날아올랐다. 허정은 다시 조심스럽게 도포를 덮어씌우고 연기를 모았다. 연기는 허정의 손놀림에 따라 일정한 형식으로 하늘에 그림을 그렸다. 멀리 수평선에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선이 아니라 점점이 뿌 려지는 형식이었다. 허정과 동일한 방식이었다. 어부들만의 독특한 통신수단 이었다. 허정이 구조요청을 보냈고 수평선의 배가 답변을 하고 있었다. "저런! 배가 떠나고 있지를 않는가?" 유진목이 발을 동동 굴렀다. "휴우, 암초가 많아서 배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구역입니다. 생면부지의 타인을 위해서 목숨을 걸기는 어렵겠지요." "그럼, 다 틀린건가?" "아닙니다. 아마도 항주의 만선회(滿船會)에 연락을 해줄 겁니다. 만선회에 서 동지들이 오겠지요." 연기를 이용한 의사전달은 간신히 허정이 항주의 어부라는 사실정도만 표 시할 수 있었다. 항주 어부들의 협동조직이 바로 만선회였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어부들에게 항주는 만선회로 통했다. 허정의 연기는 항주를 표시하 고 있었지만 전달받은 입장에서는 만선회에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 게도 만선회는 친채가장의 성향을 띄고 있었으며 허정의 오랜 동업자들이 만선회의 주요구성원이었다. "얼마나 걸리겠는가?" 허정이 근심스러운 눈으로 모진위의 악전고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부지런히 서둘러 준다면 사오일이면 이곳에 당도할 겁니다." "사오일 후이라..." 사오일 후면 가장 오랜 시간동안 두 섬이 합쳐지는 소조였다. 그날 저녁 허 정의 주제하에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안건은 탈출작전이었다. "암초가 많기로 소문난 지역입니다. 도착하자마자 섬으로 접근하지는 않을 겁니다. 수심이 깊어지는 만조를 틈타서 접근을 시도하겠지요. 만조라 해도 밤에는 감행하지 못할테고, 수심이 얕지 않은 곳까지 최대한 접근해서 작은 거룻배나 뗏목을 들여보낼 겁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구위사가 성공적 으로 역불기를 막아내고 섬 사이의 통로가 물에 잠길 때, 그때가 바로 만조, 썰물을 기다려 거룻배를 타고 구조선으로 귀환하는 것입니다. 시간여유가 별 로 없을 겁니다. 썰물이 시작되고 거룻배가 갯벌에 박혀버리면 그걸로 끝장 이지요. 물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는 모두 똑똑히 알고 계실테 지요?" 일행은 오랜만에 단잠에 빠졌고 다음날 전의에 불타는 모진위가 당당히 갯 벌로 나섰다. 희망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네 사람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네 사람의 목숨이 모진위의 두 손에 달려있었다. 모진위는 채경령과 유진목 그 리고 허정의 기대를 한 몸에 안은 채, 보무도 당당하게 역불기를 막아섰다. 일취월장의 모진위가 다시 사흘을 버텨주었다. "계동락(啓東樂)이 놈이로구나!" 때는 칠월 이십삼일,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있었다. 해면의 수위가 가장 낮 아진다는 소조였다. 수평선 위로 새하얀 돛이 펄럭였다. 허정의 그것이 그의 오랜 친구 계동락의 배임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서서히 해안으로 다가오던 배가 어느 시점에 이르자 닻을 내리고 그 자리에 정지하였다. 만조를 기다리 는 것이었다. 허정은 연기를 피워올려서 몇 마디 주고받고는 지체없이 해안 으로 내려갔다. 모진위와 역불기가 도검을 맞댄지 벌써 세 시진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날따라 역불기의 도는 거칠기 그지 없었다. 바다를 잘 모른다고는 하지만 역불기도 보름간격의 물때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역불기의 폭풍같은 공세 에 모진위는 그야말로 초죽음이 되었다. 역불기는 짐짓 여유를 부리며 주변 을 휘둘러 보았다. 전신을 땀으로 흠뻑 적셨는데도 물은 점점 불어만 가고 있었다. 아직은 썰물이었다. 그러므로 시간은 넉넉했다. 그때 섬을 돌아가는 모퉁이에서 배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역불기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제발 조금만 더 버텨라. 네 놈을 역가 놈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살아서 돌 아와다오. 그 목숨은 내 것이란 말이다. 이 원수놈아!' 채경령이 차마 눈을 들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동안에도 시간을 흘러서 이윽고 밀물이 몰려오고 있었다. 넉넉잡아 두시진 후면 만조 였다. 해안에 정박중이던 선박이 닻을 올리느라 부산을 떨고 있었다. 최대한 으로 해안에 근접할 채비를 차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배가 섬으로 다 가왔다. "준비해야겠습니다. 쪽배가 떴습니다." 수면은 어느새 갯벌을 모두 잡아먹고 치솟은 암초들을 향해 혓바닥을 날름 거렸다. 밀물이었다. 그 밀물을 타고 작은 쪽배 한 척이 섬으로 다가왔다. 모 진위는 섬에 표류한 이래 최고의 선전을 과시했다. 이미 쓰러졌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역불기의 맹공은 지독하였다. 섬의 다리는 예상보다 훨씬 오랫동안 연결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러는 만큼 모진위의 선전분투 도 계속되고 있었다. "아정아, 이 자식!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더니만 용케도 죽지않고 살아있었 구나." 선장 계동락이 친구를 위해서 친히 쪽배를 몰고왔다. "동락이 이놈! 세상 살다보니 이 형님가 네 놈의 덕을 보는 날도 다 있구 나. 잘왔다. 잘왔다. 고맙구나." 허정과 계동락은 반가워할 겨를도 없이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물때가 바뀌 기 전에 모든 준비를 끝내야 했다. 수면은 상승하고 있었다. 갯벌이 물에 잠 겼다. "시간이 없습니다. 속히 승선하십시오." 허정이재촉하였다. 채경령과 유진목이 머뭇거렸다. "일단 배에 올라가서 생각합시다." 계동락마저 거들고 나서자 둘은 마지 못해서 쪽배에 올랐다. 역불기의 두 눈에 살기가 짙게 피어올랐다. 점차 전신으로 번져가는 살기에 도포마저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모진위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연도가 천령개(天靈蓋)를 쪼개버릴 듯 날아들었고 모진위는 사화결실에 매화점점, 장미백변까지 동원하며 검을 휘돌렸다. 사방에서 불꽃이 튀었다. 도가 시작 되는 곳과 물러가는 곳이 눈으로 식별되지도 않았다. 그래도 모진위의 검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이기라도 한 듯 제멋대로 좌충우돌하며 도의 흐름을 차단해나갔다. 생각할 틈도 검세를 조절할 틈도 없었다. 무아지경에 파묻혀 서 손과 팔이 검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다시 일도가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 다. 고통을 느낄 시간도 없었다. 몇 갈래의 뱀 혓바닥이 그 뒤를 따르고 있 었다. 공력의 차이는 사랑이 가득한 천지신공의 광기로 매꾸어 나갔고 운용 의 차이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투지로 매꾸어 나갔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채경령이 기절초풍해서 비명을 질렀다. 계동락이 해안가에 결박시켜 놓았 던 줄을 풀고 있었다. "구위사를 기다려야 하잖아요? 이제 만조만 되면 바닷길이 막히고 구위사 가 돌아올거예요. 그런데 왜..." 계동락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결을 가리켰다. "만조는 지나갔어요. 이미 썰물입니다." "안돼요!" "장주님, 이러시면 안된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물이 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만조에도 불구하고 암초들은 수면아래로 가라 앉지 않았다. 이 상태라면 하루종일 섬은 하나로 뭉쳐있게 되는 셈이었다. 도리가 없지만 배를 출발시켜야 했다. 물이 완전히 빠지면 갯벌은 사방 십리 가 넘는 벌판을 만들어 내는 섬이었다. 갯벌에 놓인 쪽배를 들쳐업고 뛸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다려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채경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배는 서서히 물살을 따라서 섬을 떠나가고 있었다. 쪽배가 떠나고 있는 것을 역불기가 발견했다. 역불기가 돌연 눈을 감고 기 를 고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치켜 올라간 역불기의 두 눈에서는 시퍼런 광채 가 쏟아졌다. 역불기의 전신에서 폭음이라도 퍼지듯 발작적인 살기가 분출되 고 있었다. 역불기의 도가 빗살처럼 빠르게 공간을 좁혀왔다. 모진위도 건곤 일척(乾坤一擲)의 승부수임을 눈치채고 심기일전의 자세로 힘을 모았다. 천 지신공의 발현을 해우공으로 진동시키며 추혼십이절의 마지막 한수 만화창 천을 폭갈시켰다. 순간 검 끝에서 광채가 치솟았다. 오색광채이었다. '검기(劒氣)로군. 약관의 젊은이가 검기의 경지라고 말하면 과연 몇 사람이 나 믿어줄지... 나도 내눈을 믿을 수가 없구나.' 감탄도 일순간, 유진목은 스스르 눈을 감았다. 모진위의 심장을 빗살처럼 가르고 지나가는 역불기의 연도가 눈에 들어왔다. 역천기공이었다. 과연 괴 물은 괴물이었다. 역천기공을 시전한지 채 한달이 지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역불기가 다시 역천기공을 감행했던 것이다. 채경령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모진위를 바라보았다. 바람에 흔들거리던 모 진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두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이었다. 맥산관에서 처음 만난 날, 뒤로 물러서는 채경령을 바라보던 그 눈빛, 사천의 어느 길목 에서 불구대천의 원수임이 발각되었을 때, 힘없이 물러나며 돌아보던 그 눈 빛이었다. 그때는 몰랐었다, 그 눈빛의 의미를. 그러나 채경령은 이제는 알게 되었다. 모진위의 가슴 속에 은밀하게 숨겨져있는 그 만의 간절한 갈구를 보 고 말았다. 모진위가 두 눈을 부릅뜬 채 뒤로 넘어갔다. 이미 의식이 사라진 멍한 눈빛이었지만 여전히 채경령을 향하고 있는 그대로였다. 파도가 모진위 를 몰고 바다로 나섰다. 역불기는 전력질주로 해변을 달렸다. 배와의 거리는 오십 장 남짓, 잘하면 될 것도 같았다. 드디어 십 장 남짓. 그러나 그 십 장은 바다로 가로막혀 있 었다. 두 번의 연속된 역천기공으로 내기가 진탕된 역불기에게 십 장의 바다 는 망망대해와 진배없었다. "뭐하는 거예요. 어서 밧줄을 던지세요." 채경령이 울부짖었고 허정과 계동락이 쩔쩔매다가 유진목을 바라보았다. 유진목이 고개를 저었다. "늦었소, 아가씨. 이미 절명했소이다." 채경령의 눈은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는 모진위의 시신을 따르고 있 었다. 이미 사라져 버리고 형체도 없었지만 그래도 채경령은 하염없이 바라 보았다. 모진위가 죽었다. 불구대천지의 원수 모진위가 죽었다. 이제 세상 어 디에서도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채경령은 모진위가 떠난 빈자 리를 바라보았다. 모진위가 떠나간 후에야 채경령은 비로서 모진위가 자신에 게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텅빈 자리가 이미 떠나간 것을 비로서 보여주고 있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무림천하-창작연재란 (go MURIM)』 2755번 제 목:[연재] 표류공주 59회 -최후식 올린이:하이문 (문홍일 ) 99/11/23 11:03 읽음:155 관련자료 없음 ----------------------------------------------------------------------------- 번 호 : 9788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11-22 18:17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59- 22.마검출도(魔劒出道) 날이면 날마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곳이 인간세상이었다. 강호는 그 중에 서도 사람이 많이 죽어나가는 곳이었다. 오죽 죽어가는 사람이 많았으면 상 문(喪門)이라는 장의사들의 문파가 있고 얼마나 시체가 많으면 강시라는 괴 물까지 생산되었겠는가? 일반백성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 관(官)이 호들갑 을 떨어댔지만 강호인의 의문사에 있어서는 아무리 불미스러운 시체일지라 도 관은 하품만 해대었다. 강호는 혈사가 곧 일상사였기 때문이었다. 한가로 운 벽촌 다송촌(多淞村)에서조차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강호인이군." 누군가 심트렁하게 중얼거리자 술렁거리던 다송촌 사람들은 대번에 별 일 아니라는 듯이 호기심을 거두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심심해 있던 동네거지 구봉팔(具峰八)만이 밍기적거리며 시체를 싸고 돌았다. "나으리!" "왜? 이 놈아." 구봉팔이 잠시 기웃거리다가 발길을 돌리는 방초시를 불러세웠다. 말이 방 초시지 방초시가 실제로 초시(初試)에 나가 과거에 합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나마 글줄이나 읽을 줄 알기에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저기 뭐라고 써있는거유?" "모르겠다. 글씨는 글씨인가본데. 다 불어터져서 못 알아보겠다. 개방 뭐라 고 써있는 거 같은데..." "개방이 뭐유?" "이 놈아, 거지새끼가 거지새끼들 소굴도 못 알아보느냐? 네가 성내로 들 어가서 뒷골목 거지들 좀 불러오거라." "내가 왜요? 생판 모르는 물건인데..." "이런 염병할 놈 봤나. 개방이라면 네 놈하고는 동업자이니 딱히 남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않느냐? 게다가 써 있는대로라면 동전도 두어 푼 쯤 사례할 모양인가보다. 동네에서 빌어먹는 처지에 그 거지들이 냄새나는 시체를 치워 주면 마을사람들도 너에게 오죽 고마워하겠냐?" 봉팔은 방초시의 말씀이 모두 지당한 지라 현성으로 들어가서 소식을 전했 다. 개방의 거지들은 정말로 사례금을 지급해 주었다. 무려 금 한냥, 들어는 봤지만 본 적은 없는 진짜 금이었다. 봉팔이의 생애에 있어서 역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횡재였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가운데 한 남루한 사내가 으슥한 산길을 걷고 있었 다. 그저 남루한 정도가 아니었다. 거지치고도 상거지꼴이었다. 사내는 인적 이 드문 산속인데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왠지 모르게 음산 한 밤이었다. 백설처럼 하얀 머리와 주글주글한 얼굴은 사내가 이미 환갑은 충분히 지났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곧은 허리와 튼튼한 다리는 평범 한 늙은이는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그가 끌고 있는 검은색 나무 상자가 더욱 더 그런 심증을 확신시켜 주었다. 일견하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궤짝을 끌고 있으면서도 노인은 마치 평지라도 걷듯이 날렵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윽고 허름한 모옥을 눈 앞에 두고 노인이 걸음을 멈췄다. 크으윽. 노인이 목젖을 당기더니 목이 갈리는 소리를 만들어내었다. 캬악. 솔방울만한 가래침이 튀어나왔다. 지저분한 행색에 손색이 없는 지저분한 행동이었다. 그리고는 목청을 돋워서 돼지멱따는 소리를 질러대었다. "황가놈, 안에 있느냐? 냉큼 나와서 이 형님을 모시지 못하고 무얼 꾸물대 느냐? 이 영감태기... 빨리 안나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대문이라고 할 것도 없는 하나뿐인 쪽문을 있는 힘껏 걷어차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옥 안에서 점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허, 천하가 알아주는 천둥벌거숭이께서 무슨 바람이 불어 예까지 납시셨 는가? 잠시만 기다리게나. 문짝 다 부서지겠네." 목소리의 주인공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초옥의 주인 역시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었다. 가슴까지 드리워진 수염마저 백설처럼 하얀 것이 은근히 선 인의 품모마저 느끼게 했다. "느려터지기는... 망할 놈." "허허, 이게 얼마만인가. 살아있으니 만나는구먼." 손님이 으르렁 거리고 주인이 느물거렸다. "영감태기... 산속에 살더니 제법 사기(邪氣)가 많이 빠졌구나. 누가보면 도 사님하고 깜박 속아넘어가겠다,이 사기꾼." "허헛, 객쩍은 소리 그만하고 어여 들어오게나. 근데 그게 뭔가?" "죽을 때가 다 되었냐, 눈이 침침한 모양이구나. 보고도 모르겠냐? 옛다. 이 형님 선물이다." "아니! 이거 관짝이 아닌가?" "왜 아니겠냐, 냉큼 안으로 들여라." 모옥으로 들어온 두 노인이 관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도데체 이게 무슨 영문인가?" "자네 물건인데 내가 어찌 알겠는가?" "내 물건?" "그렇네. 열어보게. 열어보면 알 것 아닌가. 그나저나 무슨 대역죄를 지었길 래 이리도 깊숙히 쳐박혀 있는 게야. 찾느라고 고생 좀했네." 백발노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관뚜껑을 열었다. 관 속에는 처참한 시체 가 누워 있었다. 보푸라기처럼 허옇게 일어선 피부들 때문에 이목구비마저 구별이 불가능했다. 인간형상의 밀가루반죽을 방불케했다. "이게 누구인가?" "같은 말 반복시키지 말게. 자네가 모르면 누가 아나? 그 가슴께를 잘 살펴 보게나." 백발노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밀가루반죽의 가슴을 풀어헤쳤다. 그 순간 노인의 표정이 묘하게 변화했다. 자못 감개무량하다는 표정이었다. "자네 시체가 맞지? 곱게 늙게나 이 사람아. 다 늙어가지구 시체 수집이나 하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네. 도데체 이따위 시체를 어디다 쓸려고... 호, 혹 시 자네... 강시라도 제작하려는 겐가?" "... ..." "말 좀 해보게, 이 친구야." "시체가 아니라네." 성인후(成仁候)는 코를 활짝 벌려서 맑은 산공기를 한껏 들이 마셨다. 온몸 이 근질거렸다. 강호에 출도한 지 어언 석달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자신의 비 전절기를 만방에 떨치기는 커녕, 아직 이렇다 할 싸움조차 구경못한 성인후 였다. 천하가 미래의 대영웅을 아직 몰라주고 있었다. 제법 알아주는 검파(劒 派) 공사파(蚣蛇派)의 둘째 제자 성인후는 청운의 꿈을 안고 정의단(正義團) 에 입단하였다. 천하에 위명이 자자하기로는 역시 무림맹이었지만 성인후는 큰 고민없이 그에 대적하는 유일한 세력, 정의단으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 였다. 천하무적 거대세력의 촉망받는 후기지수도 무척 폼이 나는 일이기는 했지만 모름지기 영웅이란 고독하게 거대방파와 맞서 싸우는 그런 인물이라 고 많은 이야기책들이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런 저런 표면적인 이유만이 아 니었다. 기실 성인후의 진로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은 한 것은 정의단주(正義 團主)였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여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강호일절(江湖一絶)이라는 소문만큼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강호를 동경 하는 자라면 누구나 설룡백봉(雪龍白鳳)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으로 일남일녀 (一男一女)를 엄지손가락에 꼽았다. 혹은 북룡남봉(北龍南鳳)이라고도 했는데 북룡은 무림맹의 제일고수, 설산소룡 목선민을 일컫는 말이었고 남봉은 하얀 소복의 여인 정의단주를 이르는 말이었다. 성인후는 설산소룡을 단칼에 무찌르고 천하영웅이 되어서 강호제일미 정의 단주를 부인으로 맞이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강호에 뛰어들었다. 상하 복과 도포마저 녹색으로 통일했음은 물론이었다. 이른바 변색작전(變色作戰). 그녀의 한맺힌 원한을 풀어주고 하얀 소복을 벗겨낸다. 아름다운 청색미복 (美服)을 선물한다. 드디어 설룡백봉의 백색을 녹제청후(綠帝靑候)의 청색으 로 색을 바꿔서 온 천하에 길이길이 그 이름을 남긴다. 과연 빈틈없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성인후의 심오한 대계는 시작부터 난관 에 부딪쳤다. 석달이 지났건만 무림맹의 개뼉다구들은 꼬리를 들어 내지 않 고 있었다. 성인후의 입단소식을 접한 무림맹의 쥐새끼들이 공포에 질려 쥐 구멍 속으로 숨어버린 모양이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뜻밖의 변수가 성인 후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정의단의 여기저기서 소마검(小魔劒)이라는 피래미가 하찮은 이름을 얻고 있었다. 대영웅 성인후의 화려한 강호출현이 소마검이라는 햇병아리에게 빛을 잃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림맹의 개뼉다구들이 무시무시한 자신은 멀리하고 만만한 햇병아리만 노 리는 바람에 발생한 지극히 어이없는 결과였다. "적이다!" 선두의 동료가 급박하게 외쳤다. 성인후는 서둘러서 앞으로 나아갔다. 과연 수상쩍은 인물들이 진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무림맹의 잡종들이로구나." "흐흐, 잡종? 네 놈들은 정의단의 쓰레기들이 분명하군." 전면을 막고나선 적도들은 그다지 수가 많치 않았다. 정의단 사천지단(四川 支團)의 단주 홍우탁(洪牛鐸)은 세상의 부조리에 항거하며 잔뼈가 굵은 기의 군 출신답게 도리깨를 치켜들고 앞으로 내달리며 외쳤다. "쳐라!" 수하들도 적의 세력이 그다지 위협스럽지는 않은지라 용기백배하여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돌진하였다. 그때 계곡의 양 옆에서 괴한들이 쏟아져 내려왔 다. 일시에 대등한 숫자로 전환되었다. 또한, 계곡의 후미에도 몇몇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급기야 숫적인 열세로 돌변했다. 더구나 지형적으로 적들 이 극명하게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병장기의 충돌음과 함께 사방이 아수장으로 변하였다. 성인후는 도무지 다리가 떨어지지를 않았다. 자꾸만 후들거리는 것이 금방 이라도 주저앉고 말 것만 같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 는 동료의 얼굴은 고통으로 흉칙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검을 들어 올렸지만 그가 자랑하는 천하제일의 검법 구천제마뢰(九天制魔雷)는 그 기수식조차 생 각나지 않았다. 고약한 인상의 사내가 비웃음을 날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성 인후는 혼비백산하여 연신 뒷걸음질을 쳤다. 홍우탁은 주위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꼼짝없이 함정에 걸려들었음을 알았다. 정의단의 무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있었다. 수십년간 강호의 생사관문을 넘나든 사천지단주 홍우탁만이 고군분투하며 적도들의 머리통을 깨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불현듯 한 사내가 홍우탁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알고보니 사천지단의 홍대협이셨군. 시생은 무림말석 소찬중(蘇贊仲)이라 하외다. 한 수 부탁 드리겠소." 소찬중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내는 슬쩍 허리춤을 흔들었다. 순간 묵빛으 로 은은히 빛나는 도면이 눈에 들어왔다. '휴우, 이 난군을 어찌 타개한단 말인가?' 홍우탁의 미간에 짙게 암운을 드리워졌다. 묵빛의 장도는 신도곡을 상징하 는 신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소찬중이란 인물 은 정의단의 수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특별히 파견된 신도곡의 고수라고 봐야했다. 홍우탁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드디어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 다가오 고 있었다. 전체적인 규모는 물론, 개개인간의 무공에서도 무림맹과 정의단은 근본적으 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삼년 전, 젊은 황제가 설흔살을 채우지 못하고 비명에 가고나자 황실은 세 살짜리 어린 손자를 앞세운 늙은 태후의 손아귀 에 떨어졌다. 아기황제가 즉위하고 태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곧 신법의 폐지와 신법당의 몰락을 의미했다. 피의 숙청이 뒤를 이었 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젊은 사대부들은 산야로 흩어졌다. 더 이상 조정에 서는 의협심과 패기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역대로 왕조의 흥망과는 전혀 별개의 세계였던 무림도 이번만은 강건너 불 구경꾼으로 유유자적할 수 없게 되었다. 구법당을 수호하던 복고맹이라는 어 용단체가 강호의 전면에 부상하였다. 황제는 오랜 관례를 깨고 복고맹을 위 한 특단의 조치를 내렸고 복고맹은 무림맹이라는 현판을 내다걸고 화려하게 무림의 한복판에 자리를 잡았다. 초대 무림맹주의 영광스러운 자리는 뜻밖에 도 신도곡주 초진양이라는 무명의 인물에게 돌아갔다. 그러나어찌된 영문인 지 소림사와 무당파를 비롯한 강호의 거대문파들은 자진해서 신도곡의 깃발 아래 모여 들었고 초진양의 맹주등극을 적극 지지하였다. 기타 문파들은 대 세의 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감히 그들의 뜻을 거슬릴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반년의 짧은 시간만에 무림맹의 뜻이 곧 강호의 율법임을 의미하게 되었다. 독재는 반드시 반발을 만들어내는 것이 강호인의 속성, 무림맹이라는 존재 가 정의단이 탄생시켰다. 하얀 소복차림의 가냘픈 여인을 중심으로 뜻있는 강호인들이 하나둘씩 모여 들었다.그리고 정의단이라는 이름으로 힘겨운 투 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무림맹의 입장에서 보자면 굳이 단체간의 대립이라 고 하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전통적으로 강호는 무당, 소림을 무림의 양대 기둥으로 숭상하였다. 그 오 랜 전통과 깊은 뿌리를 높이 사는 점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무당과 소림의 무예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무당과 소림의 직전제자들이라면 손꼽히는 명문 세가의 유망주들에게도 두어 수는 양보하는 것이 상례였다. 하물며 기타 군 소방파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해당문파의 장문인이 직접나서는 비 무에서나 소림과 무당은 인심쓰듯이 직전제자를 맞상대로 내주었다. 평생을 강호에 몸담은 자들도 그런 직전제자는 구경조차 힘들었다. 무림맹에는 그런 각파의 고수들이 차출되어 있었다. 모래알처럼 흔한 것이 명문의 직전제자였 다. 한술 더 떠서 무림맹의 실세라는 신도곡의 제자들은 강호의 상식을 한순 간에 뒤엎어버렸다. 하나같이 묵빛 흑염도를 앞세운 신도(神刀) 초웅천의 후 예들은 그 실체를 드러내자마자 강호에 일대 충격을 안겨주었다. 마검(魔劒) 옥진강의 전설적인 검법 추혼십이절과 쌍벽을 이룬다는 흑염도법이 팔십년 만에 그 본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연속적인 비무에서의 패배로 소림과 무 당마저 한 수 양보를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정의단의 구성원은 대다수가 떠돌이 낭인들이었다. 무림맹으로부터 가족이나 문파의 목숨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홀가분한 신세가 아니면 곤란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낭인이라고 해서 모두 시정잡배들만 있는 것은 아니 었다. 그러나 자타가 공인할만한 고수는 열 손가락을 동원할 필요도 없는 극 소수에 불과했다. 몇몇 고수들의 힘으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는 정의단이 신도곡도의 혈기왕성한 고수들과는 애초부터 싸움이 되지 않았다. 흑염도의 맹위 앞에 정의단의 고수라는 단어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전력비교에 있 어서 신도곡 제자 한 명은 정의단 핵심 수뇌 한 명이라는 계산식이 성립되 었다. 정의단는 지난 이년 반동안 최선을 다해왔다. 그러나 그 활약정도를 보자면 투쟁이라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것이었다. 철저한 점조직의 비밀결사 단체 로써 적의 허술한 곳을 기습하고 은신처에 피신하는 전략 이외에는 다른 선 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습전조차 여의치가 않았다. 전혀 피해 를 입히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도살당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기습은 고사하 고 살아남으려고 도망만 다니기에도 바쁜 형편이었다. 그런 일방적인 양상이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성인후는 백리고, 천리고 계속 뒷걸음을 치고 싶었지만 좁은 계곡은 금방 한계를 들어내고 말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한걸음 한걸음 성인후에게 다가왔 다. 공포를 견디다 못한 성인후가 공황상태가 되어 급기야 발작을 일으키고 말았다. 괴성을 내지르며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으아아아아!" 수레바퀴를 돌리듯 무작정 휘둘러 대는 것 같던 성인후의 검이 어느 시점 에 이르자 놀랍게도 일정한 궤적을 만들어냈다. 그래도 제 딴에는 천하영웅 이 되겠노라 날이 새고 밤이 가도록 검을 수련했던 성인후였다. 하루가 서른 번을 넘어 한달이 되고, 그 한달이 열두번 지나서 일년이 되고, 또 그 일년 이 열 번에 이를 때까지 반복하고 반복했던 공사파 비장의 검법 구천제마뢰 였다. 공황상태에 빠져서 기수식조차 잊어버렸었지만 일단 발동이 걸리자 본 래의 검로(劒路)를 회복하였다. 무아지경으로 흘러가는 초식이 오히려 천의 무봉(天衣無縫)의 조화를 엮어내어 평소 성인후의 경지를 훌쩍 뛰어넘고 있 었다. 성인후는 황망중에 초식의 흐름을 자각하였고 점차 마음의 안정을 되 찾았다. 성인후가 생각하기에도 기특할 정도로 검의 운영이 자유로웠고 초식 의 전개가 원활하였다. 성인후 스스로가 자신의 검술경지에 의문을 표시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사파의 위대한 육십사초 검법 구천제마뢰 는 육십사초가 다하도록 상대의 털끝조차 건들이지 못했다. 마치 남의 일을 구경하듯 건성건성 성인후의 검을 흘리고 있던 무림맹의 무사가 피식 웃고는 수결(手決)을 지었다. 상대는 단지 손가락만 말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인후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쇳덩이에 부딪치는 듯한 충격이 었다. 머리통의 깨지는 듯한 아픔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성인후는 머리의 통증보다 가슴을 텅비운 듯한 무력감이 더욱 쓰라렸다. 차가운 검날이 코앞 까지 닥쳐왔다. '아, 성인후야. 성인후야. 너는 참으로 바보였구나. 저것이 바로 명문대파의 무공이거늘... 세인들이 명문대파, 명문대파하고 우러르고 추앙할 때도 죽어 도 인정하지 않았건만, 눈으로 접하고보니 진정 까마득한 하늘이로구나. 나 같은 천둥벌거숭이는 죽어도 싸다.' 성인후가 체념하고 눈을 감으려는 순간, 희지도 검지도 않은 광채가 우측으 로 스쳐갔다. 땡그랑! 성인후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금속음이 들려온 곳을 쳐다보았다. 지면에 부 러진 금속조각이 눈에 띄었다. 성인후는 다시 눈을 들어서 방금전까지 그 금 속조각이 하나의 부분으로 연결되어 있던 본체를 바라보았다. 성인후를 핍박 하던 일류 명문제자의 손에는 절반으로 줄어든 장검이 들려 있었다. 성인후 와 명문제자가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의 눈 앞에서 벌어진 일 이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성인후를 스쳐간 회색 그림자는 번쩍하는 찰나에 이미 저만큼 삼장 밖으로 날아가 있었다. 회색 그림자 속에서 형형색색의 오광(五光)이 뿜어져 나왔다. 반월도가 허공으로 튀었다. 그때만큼은 회색 그림자의 속도가 약간 감소했기 에 성인후도 그림자의 본체를 살펴보게 되었다. 믿기지는 않았지만 사람이었 다. 회색인영(灰色人影)은 다시 번쩍하고 앞쪽으로 날아갔다. 병장기가 튀고 사람이 쓰러졌다. 회의장한은 쉴새없이 계곡의 안팍을 좌충우돌하였다. 말 그대로 신출귀몰(神出鬼沒)이었다. 희의장한은 흑색 광채가 제지를 받고나서 야 비로서 신형을 정지시켰다. 흑색광채를 뿌리며 회의장한을 막아세운 것은 신도곡 소찬중의 흑염도였다. "왠 놈이냐?" "열심히 수련한 흑염도로군요. 좋은 도법이외다." 소찬중의 질타에 낭랑한 목소리가 응한 동문서답(東問西答)이었다. 성인후 는 입을 다물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회색무복(灰色武服)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칠척 장신의 사나이였다. 총기가 뚜렷한 눈에 해맑은 피부를 간직하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듯한 기상이 성인 후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성인후는 사내의 얼굴을 보며 관옥 같은 얼굴이라 는 표현이 전혀 과장이 아닌 적절한 비유임을 깨달게 되었다. 닳고 닳도록 읽었던 이야기책 속의 영웅을 그대로 닮은 회의장한의 품모였다. 성인후는 누를 수 없는 질투심으로 얼굴을 붉혔다. 소찬중은 성인후와는 다른 의미의 질투심에 입술을 찡그렸다. 회의괴한의 무공은 소찬중의 무공에 대한 개념을 뿌리채 뒤흔들고 있었다. '설산소룡 삼소주(三小主)라면 가능할까?' 소찬중은 칠성파(칠성파)가 자랑하는 칠성장문인 현월도장(弦月道長)의 수 제자 오송계(吳送械)의 손에 들려 있는 부러진 장검을 바라보았다. 절대로 두부조각이 아니었다. 오송계는 틈만 나면 자신의 보검을 자랑하고는 했다. 사부가 직접 하사한 송문고검(松紋古劍)은 칠성파의 보물이었다. 절단되어 버린 병장기가 일곱 개, 통째로 바닥을 뒹구는 것이 다섯 개, 병장기를 소지 한 채로 쓰러진 맹의 동료가 여섯 명, 모두 합해서 열여덜 개의 병장기가 주 인을 잃거나 기능을 상실하였다. 소찬중의 눈에는 분명히 단 아홉 수의 출수 밖에 보이지 않았다. 회의괴한의 손에는 평범한 검이 들려 있었다.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살펴보 았지만 별다를 것이 없는 검이었다. 시장통 대장간에 가면 누구나 쉽게 살 수 있는 싸구려 검이 분명했다. 절대로 오색보석(五色寶石)의 검이 아니었다. 수십 년전 무림의 패권을 놓고 신도 초웅천 조사와 마검 옥진강 괴수가 초 식을 교환했다. 세인들은 오광보검(五光보검)과 흑염도(黑閻刀)를 입에 침을 발라가며 침소봉대(針小棒大)했지만 기실 초웅천과 옥진강은 정강으로 만든 검과도를 들고 싸웠을 뿐이었다. 병기의 표면을 타고 발산되는 검기(劒氣) 와 도기(刀氣)가 그런 광채를 뿜어냈을 뿐이었다. 소찬중은 비로서 흑의괴한 의 정체를 짐작하게 되었다. "네 놈이 바로 상관보(上官報)로구나!" 괴한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공손하게 답했다. "대단치 않은 이름을 알아주시니 영광이외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으나 상부의 지시가 있었기에 소찬중은 입술을 깨물고 발길을 돌렸다. "돌아갑시다." 나머지 맹도들도 동일한 지시를 받았는지 별다른 갈등없이 쓰러진 동료를 부축하여 계곡을 빠져나갔다. 사방에서 정의단의 대원들이 상관보에게 달려왔다. "상관대협!" "과연 상관대협이셨니까?" "상관대협을 뵈옵니다." 성인후가 보고 있자니 가관이었다. 여기저기서 포권을 올리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개중에는 부상으로 거동이 불편했는지는 몰라도 한쪽 무릅을 꿇은 채로 검을 지면에 박고는 고개를 숙여 문안을 올리는 자까지도 있었다. 하지 만 성인후 자신도 왠지 코끝이 찡해지는 낭패만은 피할 길이 없었다. 궁지에 몰린 정의단에 일대 전기를 마련해 준 사건이 벌어진 것은 불과 두 달전이었다. 섬서(陝西)의 홍학산(紅鶴山)에서 정의단은 개전이래 최초의 승 리를 따내는 쾌거를 올렸다. 위기에 빠진 섬서 정의단을 홀연히 나타난 정체 불명의 청년이 구출해 주었다. 청년은 홀홀단신으로 신도곡의 제자 두 명을 포함한 명문세가의 소부대를 일거에 격퇴시켜 버렸다. 홍학산을 시발로 서너 차례 동일한 결과가 반복되자 무림맹과 정의단은 벌집이 쑤신 것처럼 동요 하기 시작했다. 상관보라고 자신을 소개한 회색옷을 입은 청년의 정체는 졸 지에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마검 옥진강의 유일한 혈육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사람들은 그래서 회의청년을 소마검이라 불렀다. 팔십년 전이었다 면 의당 소신검(小神劒)이라는 칭호를 얻었겠지만 강호란 곳이 원래 그랬다. 승자가 곧 선(善)이었다. 적자생존, 수천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강호의 불 문률이었다. "정의단 사천지단을 맡고있는 홍우탁이라고 합니다." "본래 사천의 홍단주님이셨군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런데 이 곳 섬서까지 는 어인 일로?" 사천은 무림맹과 정의단의 최전선이었다. 무림맹의 총단은 개봉에 있었지만 대설산 신도곡이 실질적인 지휘부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정의단의 본부는 장강의 구당협(瞿塘峽) 어디쯤이라는 것이 정설로 자리잡고 있었다. 산서의 대원이 사천에 파견되는 것은 그렇다고 쳐 도 사천에서 산서로 병력을 원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바로 상관대협을 찾고 있었지요." "예? 저, 저를...?" "저희 단주님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홍대협께서는 너무 노여워 마시길. 불초는 약초를 캐는 무지렁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강호와는 무관한 사람입니다. 그럼, 이만..." 상관보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잠깐!" 불과 말 한마디의 시간이었는데 상과보는 벌써 서너 장의 거리로 멀어지고 있었다. 홍우탁은 다급하게 외쳤다. "대협! 재삼, 재사 청을 거듭해야 하는 이 늙은이를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홍우탁은 사천에서 이곳까지 이동하는 동안 많은 수하를 잃어야 했다. 일부 러 '나 잡아잡수.' 하고 대로를 활보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상관보가 돌연 경공을 거두웠다. 홍우탁의 사천지단은 상관보를 만나는 방법으로 일부러 무 림맹을 도발시키고 있었다. 상관보가 이대로 떠나버린다면 홍우탁은 다시 그 짓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정의단의 사활이 걸려 있었다. 전원몰살의 그 날까지 무림맹의 코앞을 얼쩡거릴 참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행군이었다. 홍 우탁의 구차한 하소연은 제법 효력이 있었다. 홍우탁의 결연한 의지가 상관 보의 아픈 곳을 찔렀던 것이다. "아홉 수?" "예, 오로지 아홉 수였습니다. 칼등으로 기절시킨 것이 다섯, 검을 놓치게 한 것이 여섯..." "흠, 튕겨낸 것이 여섯이라." "아예 검을 절단해 버린 것이 오히려 많아서 일곱이었습니다. 소주님." "쉽지는 않겠군." "그래도 소주님의 상대는 소림의 철불(鐵佛)이셨습니다." 소찬중은 약간의 아부를 보태어 반론을 제기하였다. 무림맹의 개파대전(開 派大展)에서 목선민의 비무상대는 철불이었다. 철불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의 후기지수였다. 당시만 해도 보다 성세를 타고 있었던 것은 무당파였다. 후진양성에 성공한 무당은 기량을 인정받는 신예고수를 많이 배출하였다. 상 대적으로 약세에 처했던 소림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 斗)라는 칭호를 여전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철불이 버티고 있었던 덕택이었다. 무당이 그 숫자에서 우위를 보였을 뿐, 기량면에서는 막상막하 였다. 다만, 천하의 후기지수들 중에서 소림의 십대제자 철불이 그래도 반 수가량은 앞서 있지 않는냐는 평이 중론이었다. 그런 철불의 검을 목선민이 반토막으로 만들어버렸다. 소찬중은 쇠가 쇠를 잘라내는 진귀한 구경을 두 번이나 하게 되었다. 팔십 평생을 강호에 몸담은 노거두들조차 단 한 번도 그런 진경은 구경못한 이가 부지기수였다. 한 번은 삼년전 무림맹의 개파대전에서 목선민이 보여주었고, 나마저 한 번은 불과 삼일 전 소마검 상관보가 보여주었다. 비록 상관보가 일곱 자루의 검을 분지르기는 했지만 상대가 달랐다. 목선민의 상대는 철불 이었고 상관보의 상대는 격이 떨어지는 무리들 뿐이었다. 같은 절단이라해도 고수의 병장기라면 상황이 다를 것이라는 소찬중의 견해였다. "글쎄, 단지 잘라내기만 한 것도 아니고 튕겨내기라면 본좌도 장담은 못하 겠군." "예?" "고수를 상대하기에는 오히려 절단해 버리는 것이 손쉽겠지. 검을 튕겨내려 고 했다가는 손목마저 날려버리기 십상이니까. 그 친구들도 모두가 검에 목 을 매는 명문세가의 정예들 아니던가." ===================================================== 굳이 나누자면 이번 회부터가 4부에 해당하겠군요. 눈치채셨겠지만 4부는 분량이 딥다 짧답니다. 후다닥 올려버리고 끝내버리지요, 뭐. 저도 지겨워요. 흑수노계였습니다. 『무림천하-창작연재란 (go MURIM)』 2756번 제 목:[연재] 표류공주 60회 -최후식 올린이:하이문 (문홍일 ) 99/11/23 11:03 읽음:156 관련자료 없음 ----------------------------------------------------------------------------- 번 호 : 9789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11-22 18:19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60- 상관보는 오늘도 어제처럼 강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정(兒靜)이 아무리 말을 시켜보려고 애를 써도 별무신통이었다. 하지만 아정은 약간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상관보를 물고 늘어졌다. 섬서에서 구당협의 총단까지 상관보의 안내를 맡은 아정은 이제 열다섯 살의 호기심 많은 소년이었다. 근자에 이르 러 강호 최고의 관심사는 상관보였다. 그 당사자가 눈앞에 있었다. 상관보에 게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면 아정은 부처님으로 나서도 출세할 수 있 었다. 억지를 부려도 될만한 신분이 아닌 것 같아서 처음에는 제법 자제를 했던 아정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급기야 간덩이가 부어올랐다. 다행히도 상 관보는 불쾌한 기색도 없이 아정의 억지를 따듯한 미소로 응대해 주고 있었 다. 섬서의 평리에서 발원한 대녕하(大寧河)는 무산(巫山)으로 흘러서 장강과 합류하는 강이었다. 아정과 상관보를 태운 일엽주(一葉舟)가 어느새 '삼협은 아니나 삼협을 능가한다'라고 칭송되는 천하명소 소삼협(小三峽)의 풍경구에 들어서고 있었다. '두고보자. 용문협(龍門峽)에서도 입을 닫고 있을지...' 아정도 이번만은 상관보의 입을 열게할 자신이 있었다. 일엽주가 드디어 높고 웅장한 용문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은하탄(銀河 灘)에 접어들었다. 여울의 길이는 백 장도 채 되지 않았지만 상류에서 하류 까지의 낙차는 무려 넉 장이나 되어서 만송이의 눈꽃을 하상(河上)에 수놓은 듯 아름다운 물보라를 펼쳐 놓았다. "일찌기 마검 옥진강대협께서 이곳의 광경을 보고 추혼십이절의 마지막 초 식 만화창천을 창안했다고 하더군요." 아정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상관보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만화창천을 은하탄에서 창안했다는 말은 아정이 꾸며낸 말이었다. 옥진강의 후손이라해도 백년 전의 일까지야 어떻게 알겠는가 싶었던 것이다. 더구나 마땅히 신검 옥진강이라는 호칭이 예의였건만 마검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치 않았다. 안내를 맞은 이래 최강의 도발이었다. '참나! 필시 입에 곰팡이가 쓸었을 것이다.' 아정은 기가 막혔다. 상관보는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보내 주었던 것이다. 배는 이미 파무협(파무협)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 원숭이 울음소리 가 양안을 진동하는 적취협(적취협)만 통과하면 장강과 합류하게 되어 있었 다. 합류지점은 장강삼협의 하나라는 무협(巫峽)이었다. 불굴의 소년 아정의 도발이 결실을 맺은 것은 거의 구당협의 초입을 통과할 무렵이었다. 무산 어 귀에서 유람선으로 위장한 총단의 선박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정과 상관보는 일엽주를 버리고 유람선에 승선했다. 무협을 지나 구당협의 어귀에 이르렀을 때, 포기상태의 아정이 별다른 기대도 없이 심심파적으로 스스로의 적적함을 달래고 있었다. "우리 단주님이 왜 정의단을 결성하셨는지 아십니까? 그것이 무림맹의 설 산소괴(雪山小塊)와 깊은 연관이 있답니다." "설산소괴?" 뜻밖에도 상관보가 지대한 관심을 표하였다. "아, 있잖습니까, 신도곡의 목선민..." 아정은 신이나서 목소리를 낮추고 은밀하게 소근거렸다. "예전에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답니다." "그건 금시초문이로군." 상관보가 고개를 돌리며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자 아정은 신이 나서 할 말, 못할 말, 분간도 못하고 게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믿을만한 소식통으로부터 전해 들은 얘기인데요. 단주님과 그 소괴가 정을 통하고 몸을 섞은 사이랍니다." 정을 통하는 것이 무엇이고,몸을 섞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아 정은 열변을 토하였다. "근데 말입니다. 그 소괴란 작자가 백봉 단주님을 배신했다지 뭡니까. 여인 의 원한은 오뉴월에도 서릿발을 내린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상관보도 이번만은 미소짓지 않았다. 그제서야 아정도 사태의 심각성을 눈 치채고 황급히 입을 닫았다. 그 사이 배는 기착지인 풍도(風道)의 나룻터에 진입하고 있었다. 갈대로 엮은 발을 사이에 두고 남녀가 앉았다. "왜 그렇게 쳐다 보시는지요?" 발은 상당히 촘촘했다. 더구나 여인은 넓은 부채로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상관보는 여인의 눈이 오래도록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음을 느꼈다. 비록 발이 내려져 있다고는 하나 여인은 발에 바싹 다가 앉아 있었고 상관 보에게는 얼굴을 가릴 부채가 없었다. 여인은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 았는지 황급히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소녀가 대협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무례라고 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만, 이유는 궁금하군요." 일부러 밝히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상관보에게 큰 실례를 저지른 것이니 오해는풀어야 할 것 같았다. 다른 말로 돌려서 변 명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거짓말은 영 내키지가 않았다. 자신 의 실수가 못내 마음에 걸린 채경령은 내심을 털어놓고 말았다. "대협의 눈빛에서 예전에 소녀가 알던 분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상관보의 눈빛이 어쩐지 모진위의 그 눈빛과 많이 닮았다고 채경령은 생각 했다. 물론 상관보가 아니라 진짜 모진위라고 해도 그런 눈빛으로 마주 앉을 리는 없었다. 모진위의 표정은 언제나 채경령을 바라볼때만 그러했다. 발과 부채로 정체를 숨겼으니 설사 모진위라해도 알 턱이 없었다. 어쩌면 추혼십 이절의 유일한 후인이라는 소문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모 진위가 생각나는 채경령이었다. "허허, 대단한 미남자였던 모양입니다." 상관보는 기분좋게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채경령은 모진위의 초라한 모 습을 기억해 내고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상관보는 모진위와는 정반대로 보기드문 미장부였다. '외모와는 딴판으로 경망스러운 사내로구나.' 여인의 마음을 단번에 흔들고도 남을 미모의 소유자였으나 채경령은 오히 려 맥이 풀렸다. 채경령은 어이가 없었다. 상관보의 눈웃음을 다시 보고 있 자니 모진위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신도곡의 설산소룡이 단연 군계일학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니... 소생도 한 번 구경하고 싶군요." 채경령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서 이번에는 상관보의 이야기를 놓치고 말 았다. 채경령은 자신이 또 다시 실례를 범했음을 깨달았다. '이런 나쁜 일은 쌍으로 온다더니. 실수도 겹으로 오는구나. 막중한 사안을 목전에 두고 이 무슨 방심이란 말이냐?' 상관보는 결코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돼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더 이상의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다. 채경령이 황급히 응대를 했다. "예? 예에... 상관대협에 비한다면 달빛 아래 반딧불이겠지요. 그래도 한때는 운명을 같이 했던 분이시랍니다." 상관보는 목선민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채경령은 말을 놓친 나머지 그저 전과 연결되는 이야기려니 지레짐작하고 모진위에 대해서 간단히 대답했다. 떠올리기 싫은 가슴아픈 기억이었지만 채경령은 이미 거짓말로 둘러댈 기분 이 아니었다. "강호에 떠도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군요." "무슨 소문을 말씀하시는지...?" 의외의 침착한 태도에 채경령의 반응을 떠보려던 상관보가 도리어 당황하 고 말았다. 아직 규방처녀신분의 당사자 앞에서 입에 담기에는 거북한 화제 였다. 상관보는 말꼬리를 교묘하게 비틀었다. "그가 당신을 버렸습니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단주님께서 정의단을 조직한 목적이 그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라는..." 상관보는 대담하게 핵심을 찔러갔다. 정인군자라면 입밖으로 내뱉어서는 안 되는 후안무치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휴우, 복수심이 털끝 만큼도 없다고 부인하지는 못하겠군요. 허나 많은 동 지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몸, 공과 사는 구분하고 있답니다." 채경령도 상관보의 안하무인격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 코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정의단의 실낫같은 희망이 오로지 상관보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가 다시 돌아온다면 용서하시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오히려 용서를 구해야 할 쪽이 소녀입니다." 채경령은 상관보가 왜 그런 것들을 궁금해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러나 참을성을 가지고 성의있게 대답해주었다. "...이제와서는 용서고, 뭐고 다 소용없는 일이 되었지만..." 상관보는 여전히 목선민을 묻고 있었고 채경령은 한결같이 모진위를 대답 하고 있었다. "신검의 후예라고 들었습니다." "마검이겠지요." 상관보가 빈정댔다. "옥진강대협의 후손이 틀림없다면 당연히 신검의 명예를 되찾아야겠지요." 더 이상 채경령의 어조도 곱게 나가지 않았다. "목숨이 더 중요합니다." "제가 아는 신검의 전인과는 다르시군요." "... ..." "그분은 스승의 은혜조차 나 몰라라하는 망나니는 아니었습니다." "단주님. 소생을 보자고 한 용건이나 말씀해 주시지요." 그제서야 채경령은 아차 싶었다. 성미대로 막나가도 좋을 상황은 절대로 아 니었던 것이다. 채경령은 정의단을 결성한 이래, 단 한 번도 반격다운 반격 을 해보지 못하고 있었다. 힘 한 번 써보지 못한 채 정의단은 시름시름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애초에 그저 맹목적인 복수심만 가지고 무작정 동지들을 끌어모은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의 복안이 있었다. 무림맹의 급소를 정확 히 파악하고 승산이 있다는 가정하에 정의단을 조직했다. 그러나 그녀를 가 로막은 것은 신도곡이었다. 그들은 너무 강했다. 무의미한 희생만 늘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정의단을 이끌고 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채경령 이 마지막 결단을 종용당하고 있을 때, 상관보가 등장했다. 소문대로라면 상관보는 초절정고수였다. 대여섯 명의 신도곡 제자들쯤은 어 렵지 않게 상대한다고 했다. 한 번은 당주급에 해당하는 신도곡의 고수까지 물리쳤다는 보고도 있었다. 정의단 창단이래 일대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결정적인 희망사항은 상관보가 옥진강의 유일한 혈육이라는 설이었다. 옥진 강의 후손이라면 당연히 초웅천의 신도곡과는 대를 잇는 숙적일 수밖에 없 었다. 정의단과 같은 노선을 걷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절망의 정의단에 서 광이 비추기 시작했다. 상관보의 실력이면 그 단단한 무림맹의 급소도 흠집 이 생길 것이라고 채경령은 확신했다. 채경령이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상관보를 설득해야했다. '시체라...' 당유는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언뜻 생각해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였 는데도 당유의 머리 속에서 시체가 떠나지를 않았다. 하긴 이제와서는 실마 리고 뭐고 없었다. 오로지 시체 한 구만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상관보가 강시라도 되나?' 터무니 없는 생각이었다. 수하들의 보고에 따르면 상관보는 절대로 강시일 수가 없었다. 삼년 전, 모진위의 항주행을 도와준 것은 당유의 정치생명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목선민이 숙적의 무리와 내통했다는 올가미를 씌우기 위 해서 자신이 그 숙적과 내통을 했던 것이다. 모진위의 항주행이 곡과 맹에 치명타를 안겨주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으니 따지고 보면 당유가 맹의 역적에 해당했다. 그러나 그 부담은 당유의 계산대로 목선민에게 돌아갔다. 그 결과 당유와 목선민은 각자가 원하던 것을 얻었다. 목선민은 흑염도법의 마지막 세가지 도법을 얻었고 당유는 무림맹의 후계자 자리를 얻었다. 은자 림(隱者林)은 무림맹의 두뇌라고 할 수 있었다. 맹의 모든 정보와 비밀을 통 제하고 관리하였다. 그 은자림의 림주(林主)는 실질적으로 맹을 움직이는 실 무조직의 서열 삼위에 해당했다. 바로 당유가 은자림의 수좌였다. 은자림이 본연의 임무에 들어간 것은 기껏해야 석 달전부터라고 할 수 있 었다. 이제까지는 본래의 설립취지와는 벗어나게 맹의 각 구성원에 대한 내 부감찰이 고작이었다. 정보전을 벌여야 할 변변한 적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 일한 저항세력 정의단이 있기는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적이라기보다는 오히 려 맹의 존립기반이라고 해야할 형편이었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고 구법당이 정권을 잡게 되자 구법을 지지하던 고관 대작과 천하거상들은 일등공신 복고맹에게 무림맹이라는 상을 내렸다. 그러 나 신법당과 그 지지세력들이 말끔히 제거된 마당에 더 이상 무림맹의 존재 가 필요할 까닭은 없었다. 특히 맹의 자금줄 역할을 하던 대상들에게 있어서 맹은 거추장스러운 부담이 아닐 수가 없었다. 개맹 일년만에 여기저기서 토 사구팽(兎死狗烹)의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결국 무림맹이 내세우는 대의명분은 '정의단이 존재하는 한 물러날 수 없다'가 되었다. 양주의 염상들 은 '그까짓 정의단'하며 코웃음을 쳤지만 공개적으로 반대할 명분은 없었다. 결국 정의단을 향한 무림맹의 일방적인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소마검 상관보 라는 괴물이 등장하기 전까지 적어도 그랬다. 정의단은 무림맹의 위협요소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무림맹의 존재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전제조건이었다. 당유는 정의단을 그저 죽지 않을 정도로만 살살 어루만져주었다. 그런데 상 관보라는 돌발변수가 상황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당유는 가능한 잉여전력을 총동원하여 상관보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아직 상관보가 노골적으로 정의단과 손을 잡았다는 증거도 없었고, 맹에 대한 공 개적인 도발도 없었지만 그래도 최우선 순위로 처리해야 했다. 상관보는 옥 진강의 일점혈육으로 추정되는 추혼십이절의 고수였다. 상관보가 가만히 있 더라도 신도곡이 찾아나서야 했다. 상관보가 출몰하던 홍학산 일대를 이잡듯이 집중수색했다. 석달을 뒤진 끝 에 상관보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약초를 거래한 적이 있다는 약초상인을 만 날 수 있었다. "그러믄 입쇼. 아주 훤칠한 청년이었습죠. 일대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귀골 이었지요. 쉽게 잊을 수가 있나요. 틀림 없이 그 청년 맞습니다." "약초를 구입했다고 하던데... 그럼 산사람이던가?" "왠걸요. 산사람일 수가 없지요, 대가집 귀공자라면 몰라도. 정작 약초를 가 져다 주는 이는 허노인이라고 한 오육년 거래했던가? 하여간 그 영감과 함 께 홍학산을 산을 내려온 것을 먼발치에서 봤습죠." "그럼 허노인과 같이 기거하는 인물인가?" "아닙니다. 생전 처음보는 청년이었지요." "그 영감집에 가본 적이 있는가?" "예, 하도 산이 깊어서 몇 번 되지는 않지만..." "그 집에서 그 청년을 본 적도 없고?" "예, 혼자 사는 늙은이였지요.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것 같더군요. 지저분한 늙은 거지가 딱 한 번 허노인 거처를 소인에게 물어본 것을 빼놓고는..." "거지?" "예, 꼴은 거지꼴이었는데 눈이 부리부리하고 체구가 당당한 것이 전혀 거 지로는 안어울리는 쌍판이더군요." "허노인의 거처에 가장 최근에 가본 게 언제던가?" "한 일년 되었을 겝니다." 당유는 장사꾼 노인이 무언가 숨기고 있음을 눈치챘다. 당유는 은원보 두 개를 슬그머니 내밀고는 수작질을 부렸다. "우리는 관(官)도 아니고, 허영감에게 해꼬지하려는 것도 아니네. 다만 도련 님을 급하게 찾고자 할 뿐이니 걱정마시게. 아무리 하찮은 이야기라도 탓하 지 않겠네. 도련님만 찾게되면 어르신께서 필시 후한 상이 내릴걸세. 숨김없 이 말해보게." 약초상이 잠시 망설이다가 이윽고 결심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저... 한 이년 전부터인가. 약초를 파는 것보다는 사러 오는 일이 더 많아졌 지요. 허허, 그 영감 생각보다 엄청 부자더군요." "그래서?" "한번은 아주 귀한 약재들만 주문했는데 홍학산 일대의 벽촌에서는 구하기 쉬운 것들이 아니었지요. 다시 내려올 터이니 꼭 구해놓으라고 신신당부하더 군요. 운때가 맞은 건지 생각보다 쉽게 구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곧 온다던 영감이 보름이 다 되어도 소식이 없더라 이겁니다. 그래서 소인이 그리로 갔 지요." 노인이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분명히 시체였습니다. 껍데기가 온통 허옇게 일어났고 퉁퉁 불어있었지만 아무래도 사람의 시체가 아닌가 싶더군요." "시체?" "예, 커다란 들통에 잠겨 있었는데, 온통 향기가 가득한 것이 들통 속의 물 은 전부가 값비싼 약재들임이 분명했습니다요." "계속해보게." "그게 끝입니다. 그 영감탱구가 황급히 문밖으로 몰어내는 바람에... 아무리 물어도 대꾸 한 마디 안하고 ㅉ아내버리더군요." "일년전에 갔을 때도 있었던가?" "물론입죠. 그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하던 터라 하도 궁금해서 몰래 확인해 보았읍죠. 일어났던 보푸래기도 모두 사라지고 색깔은 괴이했지만 그때는 제 법 사람의 꼴이더군요." 홍학산 약장사의 증언에 따라 요원들을 급파했지만 이미 초옥에는 허노인 도 시체도 없었다. 잔뜩 쌓인 먼지들만이 인적이 끊어진지 이미 오랜 시간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시체라...' 허노인의 종적은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시체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허노인에게 있었던 시체가 아니었으니 잘만하면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시체, 시체를 감춘 관짝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흔히 돌아 다 니는 범상한 물건은 아니었다. 허노인의 행방을 추적하는 것보다는 쉬운일 일 수도 있었다. 상관보와 전혀 관련이 없는 시체일 가능성도 높았다. 그러 나 당유는 밀어부쳤다. 우선 관계가 없다는 사실만이라도 깨끗히 밝혀놓고 다시 조사에 착수하는 것이 개운할 것 같았다. "저 곳입니다." 저기동(姐岐桐)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상관보가 따랐다. 크고 작은 봉우리가 첩첩으로 늘어선 곳에 우뚝 솟은 첨탑이 보였다. "꽤 높군요." "사층으로 된 노(爐)입니다. 겨우 오십 척에 불과하니 높은 편은 아니지요. 참고로 우리 촉염회(蜀鹽會)에서 가장 높은 시추탑은 지상 백팔십척에 이르 는 것도 있지요." 상관보는 정의단주 백봉의 간절한 부탁을 받아들여 부순(釜順) 근처에 있는 염정(鹽井)을 시찰하러 가는 도중이었다. 사천제일의 염상조직 촉염회가 운 영하는 염정이었다. 안내는 촉염회에서 파견된 저기동이 맡고 있었다. 이윽 고 염정에 들어선 상관보는 생각보다 혐소한 장소라는데 놀랐다. 해염(海鹽) 을 생산하는 연안의 염전들은 엄청난 면적을 자랑했다. "얼마나 들어갔나?" 저기동이 시추탑을 올려다 보며 고함을 쳤다. "스무바퀴올시다." 사층 꼭대기에서 반라의 사내가 고개를 내밀고 대답했다. "이리로 오르시지요." 사층으로 올라간 상관보는 비로서 저기동과 염부(鹽夫)의 대화내용을 이해 하게 되었다. 커다란 수레바퀴에는 대나무로 꼬아 엮은 밧줄이 감겨 있었고 밧줄 끝에는 한 장이 넘을 것 같은 긴 철추가 매달려 있었다. 저기동이 철주 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놈의 무게는 사백 근이 넘습니다. 내리도록 하게." 저기동의 지시에 따라 염부들이 수레바퀴를 풀자 대나무 밧줄이 시추탑 아 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상관보가 마음 속으로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염부의 장담대로 스무바퀴였다. 바퀴의 원주길이가 대략 사오십 척은 되었 으니 스무바퀴면 천 척에 도달하는 깊이로 철주가 내려가고 있었다. 염부들 은 옆에 놓인 커다란 발판에 동시에 뛰어 올랐다가 뛰어 내리기를 반복하였 다. 그 일정한 간격에 따라 철추가 오르고 내리며 시추정(試錐井)을 뚫고 있 었다. 대략 한 시진이면 세 치가량을 파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일정 깊이에 이르면 가죽풀무가 달린 기다란 대나무관을 밀어넣었다. 풀무로 공기를 뽑아 내자 바닥의 흙이 빨려 올라왔다. 흙은 촉촉히 젖어서 진흙덩이가 되어 있었 고, 개중에 바위를 뚫고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는 돌가루도 눈에 띄었다. "이곳은 이제 개발중인 염정에 불과합니다. 저쪽 산을 넘어가면 제법 큰 염 정이 있습니다. 우리 회에서 운영하는 염정중에서는 두 번째로 규모가 큰 곳 입니다. 조금 더 걸으셔야겠습니다." 산은 그다지 높지 않았는데 산을 넘자 곧바로 산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 시 추탑의 숲이 눈에 들어왔다. "부운정(釜順井)입니다. 가마가 설흔 세 개이고, 소금의 일일 생산량은 백이 십 가마내외입니다." 사천은 내륙지방으로는 유일무이하게 소금을자급자족하는 지역으로써,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금생산량이 수요를 초월해서 대륙 남동부의 소금 공급 지를 자처했었다. 한때는 대륙전체의 일할 칠푼에 해당하는 소금을 책임지기 도 했다고 했다. 사천의 염정은 자분정(自噴井)을 그 시초로 하고 있었다. 염 수가 자연적인 압력으로 분출되는 샘을 우물로 개발하여 분출된 염수를 가 마에 끊여내어 소금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스 스로 분출될 압력이 없는 우물에서 염수를 퍼내기 위해서 고도의 염수 급출 법(汲出法)이 개발되었다. "저쪽이 염수 시추탑들이고 이 쪽의 큰 탑이 화기(火氣) 시추탑입니다." 얼핏 보기에도 백 척은 넘어가는 까마득한 탑이었다. 상관보는 혀를 내둘렀 다. 이런 고층탑이라면 톡톡히 감시탑 역할도 하게 마련이었다. 접근이 용이 할 것 같지 않았다. "대협께서 주의해서 보실 것이 바로 저 화기탑입니다. 염수개발자에 따라서 탑의 모양이 조금씩은 다를 것이니 모양으로는 쉽게 구분하시기 힘드실 겁 니다. 다만 저 연결관으로 구분하셔야 합니다." 상관보가 보니 염수탑은 칸막이가 제거된 대나무관이 거대한 가마솥 위로 연결되어 있었다. 대나무관에서는 소금물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화기탑은 대나무관이 보이지 않으실 겁니다. 지하에 묻힌 채로 가마의 바 로 밑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지하에 묻혀있든 지표면에 나 와있든 염수관은 가마 위, 화기관은 가마 아래입니다." 염정은 지하 백 척이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저기동의 설명에 따르면 대략 삼천 척 정도의 깊이에 염수층이 형성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시추공을 뚫 어서 염수를 얻는 것은 그리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뚫어놓기만 하면 염수는 거의 무한정으로 공급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적인 문제는 그 염수를 소금으 로 가공하는 과정이었다. 전통적인 소금 추출방법은 바다를 막아 염전을 만 들어 햇빛으로 소금 결정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천의 염정지대는 대부분 험악한 산간지역이라서 그런 거대한 평지를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 라, 설사 토지가 확보된다고 해도 간만에 차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염수가 공 급되고 소금으로 만들어지는 해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사천이 소금 생산지로 유명하게 된 이유는 바로 천연 화기(천연가스를 말합 니다. 천연가스가 한자어로 뭔지 모르니 양해를... -.-:;)에 있었다. 화정(火井) 은 대개 염수가 나오는 곳과 동일한 지역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았다. 염수 층과 동일층이거나 바로 윗층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 添花)였다. 염수를 증발시켜서 소금으로 만드는 연료로 염정에서 분출되는 천연화기가 사용되었다. 천연화기는 사천의 제염업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사천의 제염업자들은 거대한 양동이로 염수를 채굴하여 대나무관을 이용하 여 커다한 쇠가마로 운송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무게가 천근이 넘는 거대한 쇠가마도 있었다고 했다. 한편, 또 다른 시추탑에서 채굴된 천연화기를 가지 고 그 솥을 가열하였다. 일반적으로 삼천 척 지하의 대규모 염정에서는 육백 에서 칠백 개의 로(爐)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의 화정에서는 보통 천 개 이 상의 로를 가열할 수 있는 연료가 공급되었다. "촉염회가 채가장의 후신(後身)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상관보가 지나가는 말로 넌지시 넘겨짚어 보았다. 한때, 채가장은 사천 제 염업의 패자(覇者)로서 양질의 저렴한 소금을 기반으로 천하 소금을 제패하 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여 구법당이 득세하자 채가장은 몰락일로에 들어서고 말았다. "어디 촉염회 뿐이겠습니까. 왕년에 채가장 소유가 아니었던 염전이나 염정 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의 촉염회의 주인이 채씨가 아님은 천하가 알고 있 지요." 저기동이 짐짓 딴청을 부렸다.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버렸지만 사실 촉염회는 채가장의 마지막 보루였다. 저기동이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대협께서 찾아내야 하는 곳이 바로 저 곳입니다." 저기동이 화기탑을 향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상관보가 뒤를 따르며 염정을 둘러 보았다. 천근이 넘는 가마들이 오십 개가 넘었다. "장관이로군요." "전성기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요. 예전에는 천하 소금의 이할이 사 천소금이라고 했는데..." "흠, 염수가 고갈되었나요?" "아닙니다. 그게 다 구법당 놈들의 농간탓이지요." 정권이 바뀌자 날벼락을 맞은 곳은 사천의 소금업자들이었다. 조정은 사천 의 염정을 엄격히 제한하기 시작했다. 성도(成都)의 주현(洲顯)만 해도 삼백 여 개를 상회하던 염정이 단 백 개로 축소되었다. "무려 칠할에 달하는 염정이 봉인되었지요." 사천의 염정이 대폭적으로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천의 소금사정은 여 전히 흥청망청이었다. 관염 생산의 엄격한 제한은 곧바로 소금밀매의 번성으 로 이어졌다. 제염업자들은 너도 나도 사염(私鹽)생산에 뛰어들었다. 조정의 감독관이 나타나면 시추탑을 제거하고 우물을 감추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지 상에 시추탑만 없다면, 삼천 척 아래까지 깊은 구멍이 뚫려 있더라도 그 위 에 놓인 돌 아래에 숨어 있는 직경 몇 촌짜리의 구멍을 찾아낸다는 것은 쉬 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기존의 채가장이 운영하던 방식의 대규모의 불법 염 정은 위장하기가 용이치 않았다. 채가장으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사천에서 만큼은 그래도 명맥을 유지하던 채가장이었다. 그러나 염정의 제한 으로 인원의 이탈이 가속화되고 사염업이 들끓기 시작하자 채가장은 더 이 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이게 바로 새로 만들어진 화정의 시추탑입니다. 바로 이곳이 상관대협께서 예의주시해야 할 곳입니다." 시추탑이 서 있는 지면에서 지하 십 척정도 되는 곳에 커다란 목조방이 만 들어져 있었다.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였다. "본래는 밀폐된 방이지만 대협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임시로 해체한 곳입 니다." 목조방은 원추형의 통모양을 하고 있었고, 중앙의 큰 원추통에서 수많은 대 나무관이 뻗어나가 몇 개의 작은 원추형 방에 연결되어 있었다. "저기 지하의 관을 통해서 지상의 공기를 유입시킵니다. 저 작은 원추통들 에도 똑같은 지하관이 각각 매설되어 있지요. 자세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 하관들은 지상에서 개폐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드나드는 공기의 양을 조절해서 지하에서 올라오는 화기와 혼합한 연후에 이 방에 저장하는 것입니다. 전체가 하나의 기화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관은 무슨 역할을 합니까?" "충천관(衝天管)이라고 아무리 공기와 혼합을 잘해도 화기란 놈이 압력을 받으면 폭발할 염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분의 가스가 빠져 나가도록 배출 관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상관보가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보의 이해를 기 다리던 저기동의 설명이 다시 이어졌다. "저 밑의 관을 타고 아주 자극적인 냄새가 나는 기체가 올라옵니다. 위험한 놈이지요. 공기와 섞지 않으면 제멋대로 폭발을 하고 맙니다. 지금 보시고 계신 이 방정도만 해도 한 번 불이 붙으면 공중으로 수천 척의 불꽃을 뿜어 올리며 폭발을 합니다. 소인도 한 번은 저 천 근이 넘는 쇠가마가 하늘 높이 날라가서 산산조각나는 광경을 목격했지요. 대협께서는 그렇게 폭발을 시키 는 방법을 아시고 싶으신 게지요?" 상관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해 다송촌의 제법 부유한 거지 구봉팔은 어느날 뜻 밖의 손님을 맞이하 게 되었다. 언젠가 우연치 않은 행운으로 거금 금 한 냥을 거저 먹었던 구봉 팔은 이것이야말로 화(禍)는 쌍(雙)으로 오고, 복(福)도 그와 같다는 위대한 성현의 말씀이 그대로 시행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분수 모르는 구봉팔이 평소의 언행대로 거들먹거리고 나섰다. "본관이 그 시체를 전달해 준 장본인이 맞소이만 댁들이 왠 참견이슈?" 아차! 거지새끼 개방의 무리들이 당당한 무림인이라고 했을 때부터 알아 봤 어야 했다. 다만 개방은 자신이 동업자임을 어여삐 여겨 좋게 좋게 대접해 주었을 뿐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구봉팔은 강호의 뜨거운 맛을 보고야 말았 다. 구봉팔은 닭똥 같은 눈물을 연신 훔치며 사건의 자초지종을 고해 바쳐야 했다. 순세에 의해서 다음은 다송촌의 유일한 지식인 방초시의 차례였다. 방초시는 지식인답게 사태 파악이 빨랐다. "불초소생이 알아 본 것은 시신, 개방..." 방초시는 전력을 다해서 머리를 쥐어짰다. "한 냥... 맞습니다. 이 세 글자 이외에는 맹세코 더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닷물에 몇일이나 빠져 있었는지 온통 퉁퉁 불어터진 터라서, 맹세합니다. 맹세코, 맹세코 더 이상은..." 죽은 자들의 역사를 추적하던 당유의 발길이 마침내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고, 되돌아가는 길은 개방이 막 고 있었다. 당유로 하여금 정체모를 한 시체의 역사를 탐구하게 만든 연결고리는 홍학 산의 시체와 개방의 인물로 추정되는 거지노인이었다. 당유는 즉시 개방으로 요원을 파견하여 시체를 탐문해 보았다. 광활한 지역과 많은 인원을 자랑하 는 문파이다보니 시체도 많았다. 하나하나 시체의 신원을 확인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단 한 구의 시체를 제외하고는 모든 궁금증이 풀렸다. 미확인 시 체는 밀물을 타고와서 다송촌과 개봉을 경유하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구성요 소들은 각기 시체, 거지, 개방이라는 단순한 사실 뿐, 서로 연관성이 없을 수 도 있었다. '개방은 아닌가?' 무리한 탐문과 수사로 인해서 개방과의 마찰이 끊이지를 않았다. 그저 막연 한 시체 하나로 야기된 불화치고는 심각한 편이었다. 맹의 휘하문파에게 업 무관계상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던 은자림이다보니 입장이 더욱 난처 했다. 이쯤해서 깨끗이 포기하고 상관보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현명한 행 동인 것 같기도 했다. "림주님!" "무언가?" "석건정(石巾井)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무어?" 석건정은 무림맹이 불법으로 운영하는 염정 가운데 세 번째로 규모가 큰 염정이었다. "피해상황은?" "전파(全破)되었다고 합니다." 안전장치가 항시 작동하고 있었다. 폭발사고가 간간히 있기는 했지만 전파 는 불가능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작당을 하지 않는 한. "습격을 당했는가?" "그런 것 같습니다." "곡의 사람들이 있었을텐데?" 염정만큼은 신도곡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염정마다 적어도 중견급이 하나이상, 직전제자가 열 명은 넘게 파견되어 있었다. "그것이... " "상관보?" "예, 아무래도 소마검이라는 작자인 것 같다더군요." "... ..." "림주님, 맹주님께서 찾아계시옵니다." "알았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무림천하-창작연재란 (go MURIM)』 2757번 제 목:[연재] 표류공주 61회 -최후식 올린이:하이문 (문홍일 ) 99/11/24 11:39 읽음:117 관련자료 없음 ----------------------------------------------------------------------------- 번 호 : 9791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11-23 11:29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61- 23. 초혼환생(招魂還生). "뭐라고? 아직 신원조차 파악하지 못했다고?" "그것이 개방..." "개방과의 마찰따위나 신경쓰고 있을 때가 아니지를 않느냐?" "제자가 직접 개방으로 가겠습니다." "그리 해라. 상관보란 놈은 선민이가 맡고..." 구법당의 관료들은 사천의 염정개발을 철저하게 제한하였다. 칠할 이상의 염정을 봉인시켜 버렸다. 그로 인해서 대륙의 소금수급이 불안정하게 된다면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곧 정책 입안자의 실각을 의미했다. 그 러나 소금시장은염정제한 이전보다 훨씬 원활한 수급을 이루워지고 있었다. 사천에는 여전히 소금이 남아 돌았고 기존의 공급지역에도 예전과 다름없이 소금을 공급하고 있었다. 불법 염정들이 극성을 부리고는 있었지만 그것만으 로는 택도 없는 일이었다. 소규모의 염정이라면 몰라도 대규모의 불법염정을 개발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조정의 감시관들과 결탁이라도 하지 않는 한, 어림도 없었다. 양주의 염상들과 조정의 구법당 관료들이 결탁을 했다. 신법이라는 걸림돌 을 제거하기 위해서 권력과 금력과 무력이 힘을 합쳤다. 사상초유의 합작은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오로지 사리사욕을 위해서 뭉친 이익집 단이었다. 결속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방적으로 자금을 충당해야 하는 거상들의 불만이 가장 높았다. 수뇌부가 궁리 끝에 마련한 재원이 바로 밀염(密鹽)과 밀은(密銀)이었다. 구법당이 권력의 방패가 되어 주었고, 상인들이 경험과 초기자본을 빌려주 었으며, 무림인들이 칼과 주먹으로 그 운영을 맡았다. 모두에게 수익금을 분 배하면서도 무림맹의 재력은 날로 번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가장의소란 으로 옥문관과 항주를 통한 은괴의 밀매선은 완전히 차단되고 말았다. 이제 와서는 사천의 염정만이 무림맹의 유일한 자금원이었다. 염정은 은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채가장의 마지막 보루가 바로 사천 염정이었다. 무림맹은 사천의 소금시장 을 일거에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불법 제염업이야말로 적의 힘을 약화시키고 자신들의 결속력을 다지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사업이었다. 무림맹이 승리한 복고맹의 후신이라면 정의단과 촉염회는 패배한 호신련과 채가장의 후신이었다. 무림맹과 정의단의 사활이 바로 사천의 염정에 걸려 있었다. 무림맹이 사천의 염정을 쥐고 있는 한, 정의단은 그저 무림맹의 대 의명분을 위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염정이 깨지는 날이면 무림 맹도 무사할 수 없었다. 목적이 달성된 금력과 권력이 필요 이상의 돈을 지 원해도 좋을 정도로 무림맹의 매력이 특출난 것은 아니었다. 자금원이 바닥 나면 내부불화는 필연이었다. 그것으로 무림맹은 해체였다. 유서깊은 장사꾼의 후예답게 채경령은 정확하게 그 약점을 파고 들었다. 채 경령은 은괴 밀수선을 봉쇄한 소중한 교훈을 잊지 않고 있었다. 소금 밀매업 도 은괴 밀수와 하등 다를 것은 없었다. 대형사건으로 세간이 소란스러워지 면 제 아무리 구법당의 고관대작들도 무작정 눌러 막을 수만은 없었다. 황제 의 측근들도 눈과 귀가 있었다. 그러나 채경령의 필승전략은 시작부터 난관 에 봉착하고 말았다. 사방팔방 소문을 내고, 관에 제보를 해도 소용없었다. 방법은 하나였다. 사천의 모든 사람들이 수천 척의 불꽃을 바라보고 뇌성벽 력의 폭발음을 듣도록 만들어야 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기 때 문이었다. 그러나 신도곡의 수비대는 너무도 강했다. 정의단의 기습부대는 침투하는 족족 염정의 문턱조자 넘어보지 못하고 전멸해 버렸다. 신도곡 제 자들의 역습을 돌파하고 염정에 잠입해서 저장고를 폭발시킬 고수가 필요했 다. 소마검 상관보와 같은 고수가 필요했다. 개방에서의 당유의 고충은 무림맹 창설 이래 가장 가혹한 것이었다. 미리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개방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노골적인 푸대 접이었다. 특히, 몽천개(夢賤 )에게는 말도 붙힐 수가 없었다. 몽천개는 천 하제일의 대파 개방의 차석장로였고,무림맹 삼인의 부맹주 가운데 하나인 철혈개(鐵血 )의 사숙에 해당하는 원로였다. 함부로 쑤시고 다녀도 되는 인 물이 아니었다. 시체의 역사는 몽천개에 이르러서 다시 오리무중(五里霧中) 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고생한 보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글자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염지(閻指)라...' 시신, 개방, 금 한 냥, 염지가 시체에 가슴에 씌여져 있는 단어들의 순서였 다. 그 동안의 의견들을 종합해보면 염지가 마지막 단어였다. 당유는 나름대 로 문장을 정리해 보았다. 문장은 총 세 개였다. 첫 문장은 시신이 개방과 관련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 었다. 개방의 거지거나 개방으로 보내는 시체, 둘 중의 하나였다. 둘째 문장 은 금 한 냥이라는 단어가 있으니 보상을 명시하는 내역일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구봉팔은 개방으로부터 금 한 냥을 받았다. 그렇다면 첫 번째 문장은 개방으로 보내는 시체를 의미했다. 시체의 주인공이 개방거지가 아님은 이미 개방에서 확인해 주었다. 당유는 자신이 추리한 내용을 그대로 종이에 적어 보았다. 이 시신을 개방으로 보내 주시요. 개방은 연자(緣者)에게 금 한 냥을 사례할 것이요. 마지막으로 염지라는 단어가 남아 있었다. "도데체 염지가 무엇이란 말인가?" 당유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염(閻)자와 지(指)자에 관련된 모든 무 공, 문파, 인물, 기진이보(奇珍異寶)를 조사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뽀개질 것 만 같았다. 당유가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낸 것은 그로부터 닷새 후였다. "몽천개와는 아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하더군요." 당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의 역사가 다시 흘러가고 있었다. 확실한 연 결고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희소식이 분명한데도 당유는 그것을 낭 보로 해석해야 할지, 비보로 해석해야 할지 잠시 아연해졌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게." "지난 육년 전까지는 둘 사이에 왕래가 있었던 확실한 행적이 있습니다. 황 경이 워낙에 은거기인이라 그 이후의 행적은 추적이 불가능했습니다." 당유는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황경... 염로선지(閻怒善指) 황경(黃經)... 이쯤 되면 염지가 사람, 그것도 황경을 가리키고 있음은 분명해졌다. 문제는 시체 의 임자가 황경이냐, 아니면 황경과 관련이 있는 어떤 사건이냐였는데, 그것 도 잠시만 생각해보면 답이 분명했다. 시체의 임자가 염로선지라면 단지 염 지라고 표기했을 리가 없었다. 염지라고만 칭해도 알아들을 누군가가 개방에 있기에, 그리고 개방으로 시체가 전달되기만 한다면 언제나 전달받을 수 있 는 아주 직위가 높은 인물이 있기에 단순히 그렇게 표현했다고 밖에는 생각 할 수 없었다. 마지막 글자는 염자 단 두 글자뿐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전체적인 문장의 개요가 완성되었다. 작성자는 염지, 즉 염로선지 황경이고, 황경은 언제 어디서라도 시체가 회수되기를 원했다. 금 한 냥과 천하각지에 문도가 흩어져 있는 개방, 그리고 개방의 원로 몽천개가 친구라는 사실이 그 것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각주를 만나봐야겠네." 당유는 지체없이 녹류각(綠流閣)으로 향했다. 녹류각은 인간의 생로병사(生 老病死)를 전담하는 무림맹의 직속부서였다. "바닷물에 사람이 빠지면 어찌 됩니까?" 녹류각주 도차영(陶車榮)은 어이가 없었다. "건져내지 못하면 죽는 거지 뭐가 어찌 되겠습니까?" 그러나 당유는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익사하여 죽은 이후에는 어찌 됩니까?" "?" "망망대해에서 한달 이상을 떠다니다가 육지에 밀려오는 경우도 있습니까?"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요. 시체가 물에 불어서 살점이 떨어져 나 가지요. 그런 지경이면 물고기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뜯어먹기가 아주 좋을테니까요. 뜯기고, 먹히고, 파도에 쓸려서 남아나지 않기가 십상이 지요. 왜요? 그런 시체라도 발견하셨습니까?" 당유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도차영은 구미가 당긴다는 듯이 바싹 다가앉으며 물었다. "상세한 설명을 좀 해주시지요?" "치아의 상태로 보아서는 이십세 이하는 죽어도 아니고, 사십세는 넘을 수 없는 남자의 시신이라고 하더군요. 발견 당시의 상태로 말할 것 같으면..." 당유의 설명이 계속되었고, 도차영의 졸린 듯한 눈동자가 점차 생기를 되찾 아갔다. "살점을 뜯어내도 지워지지 않는 녹황색의 문자라면 집히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 수법을 사용하는 문파는... 문파라고 할 것도 없군요. 의원 나부랭이들 의 연구집단 같은 거니까요." "상문?" 도차영이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과연 은자림주. 상문은 또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염로선지 황경은 어떻습니까?" 도차영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저었다. "게다가 황경까지요? 하긴, 황경은 우리 의원나부랭이들만이 아니라 강호에 서도 알아주는 고수라지요?" 당유가 머리를 끄덕였다. "황경은 상문이 낳은 절세기재라고 할 수 있지요. 그 녹황색 글자는 금반조 (金返兆)라고 하는 것인데, 주로 불치의 병이나 발작증세가 있는 환자에게 사용되었답니다. 일테면 의원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발작이 일어났거나 생 명이 위급해진 환자에게 아무나 응급조치가 가능하도록 해주는 처방문 같은 거지요. 상세가 위중할수록 녹색이 짙어지는데 림주님의 설명대로라면 확실 한 녹금반조현상을 보였으니 회생불가능의 상태로 봐야겠지요." "어쨋든 시체는 아니란 말씀이지요?" "예, 보증합니다. 시체라면 어떠한 금반조도 나타날 수가 없지요. 금반조는 인체의 생리작용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니까요." "녹금반조가 회생 불가능이라는 말씀도 보증하실 수 있겠습니까?" "허허, 글쎄요. 본좌가 상문의 출신은 아니니... 탈혼반시법(奪魂半屍法)이라 는 전설적인 시술법이 상문에 있다고 하더군요." "탈혼반시?" "예, 아! 무림의 귀식대법(龜息大法)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쉽겠군요." 귀식대법은 살수들이 장기간 몸을 은닉하는데 주로 사용하는 사술이었다. 최대한 호흡과 기의 흐름을 억제하면 체력소모를 극도로 축소시킨 채, 수삼 일가량은 시체처럼 숨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당유의 상식으로 바다 를 떠다니면서 귀식대법을 시전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그럼 그 시체가... 아니 시체가 아니겠지요." 당유는 할 말을 잃었다. 도차영이 설명을 덧붙혔다. "허허, 본좌도 믿을 수가 없군요. 그러나 본좌가 알기로는 방법이 있다면 딱 그 방법 탈혼반시법뿐이겠소이다. 다만 이론으로 그렇다는 말씀이지요. 실제 로는 그것도..." "무슨 조건이 필요합니까?" "그렇소이다. 내력은 필요하나 단전이 잠을 자고 운기조식이 불가능하니 외 부와 내부의 경계가 없어야겠지요. 본좌가 내공 이갑자를 자부하는 도인들은 더러 보았지만 그들조차 그런 경지는 아니었지요. 또한 입과 코의 호흡기능 도 당연히 봉쇄되었을 터이니, 미세한 모공들이 피부호흡을 해야하지요. 게 다가 수중호흡이라니..." "탈혼반시법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면 상문에는 그런 호흡법도 있다는 말 이 아닙니까?" "물론 그것도 이론상으로는 존재합니다. 이른바 무위조식이라고 불리는 모 양입니다만... 글쎄요. 자궁 속의 태아라면 가능하겠지요. 아직 입과 코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태아의 단계에서는 피부호흡을 한다고 하더이다. 더군 다나 자궁은 물로 가득차 있지요." 당유에게 반드시 시체의 신원을 밝혀야 하는 지상목표가 생겼다. 어쩌면 상 관보 그 자체보다 시체의 신원이 더 중요할 수도 있었다. 전력을 동원해서라 도 시체의 역사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당유는 서류뭉치들을 밀어제치고 지 필묵을 꺼내들었다. 잠시 후, 늠름한 전서구가 하늘을 날았다. 다송촌에서 시 체 수색을 지휘하고있는 복태동에게 날아가고 있었다. "은자림에서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수하가 전해주는 대통을 받아들고 복태동은 치미는 부아를 억제할 수가 없 었다. 이것이 무슨 꼴이란 말인가. 은자림의 제 이인자로서의 체통이 말이 아니었다. 남들은 정의단이다, 상관보다 바삐 움직이고 있는데 고작 시체가 흘러온 쓰레기장이나 뒤지고 있어야 하다니. 하지만 복태동은 노기를 억누르 고 서한을 펼쳐 들었다. 육각신마라는 별호에 어울리게 쌍을 찾기 어려운 경 공술을 장기로 하는 복태동이었지지만 최강조직 무림맹에서는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하의 절정고수를 만나도 죽지 않을 자신이 있는 복 태동이었다. 그러나 맹은 힘의 열세를 겪지 않는 절대강자였다. 상대적으로 죽을 일은 드물었기에 보다 빨리, 보다 많이 죽이는 길만이 공을 세우는 첩 경이었다. 그런 복태동을 당유가 중용하였다. 치밀한 심계와 빠른 머리회전을 높이 사 주었던 것이다. 은자림에 배치된 복태동은 그때부터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 의 빠른 발은 은자림에는 제격이었다. 발만큼 빠른 속도로 고속승진을 거듭 하였다. 적어도 당유에게만은 불만을 가질 수 없는 복태동이었다. 서한을 읽 어나가던 복태동의 얼굴이 급변하였다. 잔뜩 찢어졌던 미간이 짙은 주름과 함께 한 곳으로 모였다. "배를 띄워라. 송정도로 간다." 복태동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남해로 내려온 이래 결코 다시 볼 수 없었던 복태동의 호연지기가 터져나왔다. 수하들의 가슴가슴마다 새로운 투지가 불 꽃으로 타올랐다. 송정도가 점차 가까워지자 복태동은 다시 기분이 씁쓸해졌다. 삼년 전, 맹 은 최고의 위기를 맞았다. 송정도가 바로 그 비참한 패전의 현장이었다. 은 괴 육백관도, 금 백관도, 서역과의 교역로도 일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간덩이가 별로 크지 못했던 항주 시박사의 소인배들은 기어코 은괴 밀수선 나포사건을 상부에 보고하고 말았다. 맹은 물론이고 그와 연관된 조정대신들 까지 목이 달아날 형편이었다. 때마침 황제가 비운에 가고 태후가 섭정에 들 어가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끝장났을지도 모르는 신세였다. 그러나 천운이었 는지 구법당의 그림자인 복고맹은 마침내 무림의 정복자가 되었다. 은괴 교 역선의 단절로 파탄으로 치닺고 있던 맹의 재정도 사천의 밀염이 시장을 지 배하게 되자 차고 넘치게 되었다. '이쯤이로군.' 복태동은 당시의 기억을 더듬으며 선로를 지시하였다. 정황으로 볼 때, 복 태동의 위치는 시박사의 전함이 정박해 있었다는 길목을 통과하고 있었다. 맹의 은괴 운반선은 더욱 약간 더 섬의 안쪽이라고 들었다. '빌어먹을 소마검!' 소마검 상관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만사형통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추혼 십이절의 후예라는 작자가 염정을 폭파시켰다. 강호 최고의 화제거리가 될만 한 구성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흑염도의 후예들이 모인 신도곡과 추혼 검의 후예라는 소마검. 당연히 염정이 구설수에 올랐다. 신도곡과 무림맹이 불법염정을 경영하고 있다는 공공연한 비밀은 무림을 넘어서 세간의 상식이 되고 말았다. '눈가리고 아웅'에도 정도가 있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방어가 불가능했다. 맹이 경영하는 염정은 오십 개가 넘었고 상관보가 어느 염정을 공격할 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무리 무림맹이 라도 오십 개가 넘는 염정을 모두 절대고수로 채울 수는 없었다. 상관보를 밝은 곳으로 끌어내야만 했다. 이제 그 열쇠를 찾는 일이 복태동의 손에 달 려 있었다. "부림주님, 여기 어디 쯤인 것 같습니다." 시박사의 관원들이 금괴 구십관을 건져 올린 곳, 바로 맹의 무덤이었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내 눈앞에 증거물을 들이대기 전에는 귀항은 꿈도 꾸지 말아라." 여러 경로로 확인해 본 결과, 송정도에서 시체가 다송촌까지 흘러갔을 확률 은 전혀 없었다. 송정도에서 어디론가로 배를 몰아가다가 난파되었다면 말이 되는 이야기였지만 이번에는 시간이 문제였다. 어떤 식으로 답을 만들어도 적게는 보름, 길게는 한달의 시차가 발생하였다. 그 동안 다송촌의 반경 수 백리를 샅샅히 뒤져보았지만 섬의 원주민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무인도는 너무 많았다. 조직을 모두 동원하여 낯밤을 가리지 않고 수색해도 한두달에 끝날 조사가 아니었다. 당유는 송정도의 해류와 다송촌의 해류가 서로 만나 는 지역을 중심으로 수색해줄 것을 당부했다. 당유가 제시한 근거들을 읽는 순간, 복태동은 당유의 권고가 없어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복태동은 조사선을 뒤로 물리도록 했다. 암초 때문에 배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복태동은 이빨을 드러내며 자신을 비웃고 있는 암초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만약 또 다른 배가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배가 후퇴하는 물길은 그다지 넓다고 할 수 없었다. 양쪽으로 섬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시박사의 전함과 서역의 교역선이 진로를 가로막고 있다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무리였다. 맹의 은괴 운송선도 결국은 돌파 를 포기하고 암초 속을 비집고 나가다가 침몰해 버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아 주 작은 배였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복태동은 생각했다. 복태동은 섬을 끼고 돌아서 다시 자리를 잡은 후, 배의 진로를 조류의 흐름에 맡길 생각이 었다. 배가 섬을 우회해서 다시 암초 뒤로 나왔다. 시간을 기다려서 당시의 물때와 일치하는 바람과 조류를 기다렸다. 이윽고 때가 왔다. "돛을 내리고, 노를 거두워라. 아예 방향타도 제거하도록 해라." 복태동은 숨을 죽이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아직 정확한 방향을 가늠할 수 가 없었다. "어떻게 되어 가는가?" "서남쪽에서도 남쪽에 가까운 방향입니다." "허면?" "대해로 마냥 흘러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뭍에 접근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굳이 선택하라면 그래도 육지로 다가가고 있다고 할 수는 있겠습 니다만... 이대로라면 남쪽 바다로 나가버리고 말겠군요." 복태동과 선장이 대화를 주고 받는 가운데, 배의 진로가 조금씩 변하고 있 었다. "다송촌과는?" 복태동은 그 동안의 수색결과를 종합해서 다송촌에서 시작되는 해류의 대 략적인 곡선을 확보해 놓고 있었다. 복태동은 그 분석결과를 근거로 한 다송 촌 해류와의 교차지점을 묻고 있는 것이었다. "물길이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지금 속도로 나아간다면 오륙 시진 후에 는 그 근방에 도착할 수 있을 것도 같군요." 복태동이 고개를 돌려보았다. 선원 하나가 예상진로를 커다란 목판에 반복 해서 그리고 있었다. 다송촌과 송정도 그리고 그 두 깃점에서 출발한 배들이 만나는 교차점이 형성되었다. 폭이 좁은 역삼각형이었다. "교차점입니다." 망루에 올라가 있던 선원이 갑판을 향해서 고함을 질렀다. 복태동의 눈에도 멀리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다송촌을 출발했던 배들이 미리 대기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배의 속도가 당초의 계산보다 약간 빨랐는지 다섯 시진 에 약간 못미쳐서 목표지점에 도착하였다. 다시 방향타가 장착되었고 돛이 올라갔다. 본격적인 수색작업이 시작되었다. 수평선 위로 두 개의 봉우리가 솟아났다. 다가갈수록 봉우리의 밑변 폭이 넓어지더니 두 개의 봉우리를 가진 하나의 섬이 되었다. "쌍동이섬이라고들 부릅니다." "쌍동이섬?" "예, 이쪽 각도에서는 하나의 섬처럼 보이지만 정면에서 보면 두 개로 나누 워져 있지요. 암초가 많아서 섬에 접근하는 배는 없지요. 속하도 이곳 바다 에서 이십 년을 살았지만 한 번도 상륙해 본 적은 없군요. 예서 배를 멈춰야 겠습니다. 만조를 기다려서 쪽배로 갈아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윽고 만조가 되자 복태동 일행은 세 척의 쪽배에 나눠타고 섬으로 향했 다. 우선 좌측의 섬부터 수색하기로 했다. "갯벌에 누가 있다!" 선두 배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저게 사람이야, 괴물이야?" 배가 나아갈수록 일동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해갔다. 봉두난발의 괴생물이 두 발로 서 있었다. 온몸은 갖가지 새의 깃털과 시커먼 털로 덥혀 있었다. 머리카락이라고부르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이는 잡동사니가 마치 버들가지 처럼 내려와 허리까지 늘어져 있었다. 진정 사람꼴로는 보이지 않았다. 복태 동은 수하들에게 병장기를 준비하고 위험에 대비하도록 일러두고 자신도 긴 장을 늦추지 않았다. 드디어 배가 갯벌에 닿았다. 괴물이 천천히 일행에게 다가왔다. 훤한 대낯임에도 불구하고 짙게 음영을 드리운 머리카락 사이로 흉흉한 안광이 뿜어나오고 있었다. 복태동은 손을 내려 판관필을 단단하게 잡았다. "복당주 아니시요?." 복태동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괴물은 분명히 자신을 바라보고 그렇게 말했 다. 복태동은 잠시 말문을 잊었다. 마른 침을 삼키고 나서야 간신히 말이 터 져나왔다. "누, 누구냐?" "흑막의 역불기외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무림천하-창작연재란 (go MURIM)』 2758번 제 목:[연재] 표류공주 62회 -최후식 올린이:하이문 (문홍일 ) 99/11/24 11:48 읽음:114 관련자료 없음 ----------------------------------------------------------------------------- 번 호 : 9792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11-23 11:31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62- 상관보는 달렸다. 누가 등을 떠밀면서 강요하는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약 속된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달렸다. 혈맥이 날뛰고 심장이 아 우성을 쳤지만 그래도 달렸다. 호흡이 가빠오고 머리가 멍해질 때까지 달렸 다. 지쳐서 고꾸라질 때까지 달렸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달리는 것 이 좋았다. 달린다고 해서 답답한 마음이 탁 트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강박관념이 그를 풀어주지 않고 있었다. 상관보는 야음을 틈타서 자하령(紫霞嶺)을 넘고 있었다. 자하령은 사천의 중심지성도로부터 동쪽으 로 이백 리 떨어진 남황산(南荒山)의 고개였다. 상관보는 대설산에서 항주까 지 스무 날 밤낯을 줄창 달려본 이후로 틈만 나면 달리고 또 달렸다. 답답했 다. 그것이 달리는 이유였다. "얘야, 진위야. 그건 이 할애비도 고칠 수 없는 병이지. 자신을 똑바로 보거 라. 그건 사랑이 아니야. 집착이야, 집착. 종내에는 그것이 네 육신을 좀먹고, 마음을 갉아먹고, 네 영혼마저 산산조각내고 말 게다." 황경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전 멈출 수가 없어요, 할아버지." "네 사형들을 봐라. 결국은 발작을 일으키고, 주화입마에 걸리고, 광기를 못 이겨 자신들을 태워버리고 말았잖니. 너도 그리 되고 말 것임을 왜 모르느 냐? 이 할애비 눈에는 너무도 분명하게 보이는데. 이 할애비가 도울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몽천개로부터 반쯤 죽어버린 모진위의 시신을 받았을 때, 황경은 이미 때가 늦었다고 생각했다. 심장이 완전치를 않았고, 내장마저 썩어들어가는 상태였 다. 그러나 오묘한 작용이 모진위를 지배하고 있었다. 태생부터 절맥되어 있 던 경락들은 어찌된 영문이니 정상의 상태로 돌아와있었고, 골격과 장기도 새생명처럼 탄탄했다. 모진위가 빠른 속도로 재생되었다. 개체의 재생속도는 범인의 서너 배에 해당했다. 비상식적으로 왕성한 신진대사였다. 환골탈태였다. 그것이 모진위를 살려내었다. 보푸라기처럼 일었던 피부를 제거하자 새순이 돋아났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뽀얀 속살이었다. 잇몸이 허 물어지고 치아가 빠져나가자 새로운 이빨이 자라기 시작했다. 어둡고 탁한 눈동자에 새로운 각막이 형성되며 아기처럼 티 없이 맑은 눈으로 변모하였 다. 역불기의 마지막 일격으로 발생한 탈혼반시 때문에 일시 중지되었던 환 골탈태의 최종과정이 황경의 정성어린 초혼환생법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 하자 막혔던 둑이 터지듯 빠른 행보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모진위가 탄생되었다. 천지신공의 위대한 힘이 모진위를 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양지 가 있으면 음지가 있듯이 모진위는 죽어가고 있었다. 천지신공의 무한질주가 모진위의 정신과 육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 황경은 모진위를 바라보면서 혀를 찼다. 천하명의 황경이 구원할 수 없었던 모진위를 천지신공이 구해주었고, 황경이 잠궈 놓았으나 황경이 풀 수는 없 었던 탈혼반시를 천지신공이 풀어주었다. 동시에 그 천지신공은 모진위에게 죽음을 향한 폭주를 강요하고 있었다. 모진위는 채경령에게 돌아가기를 원했 고, 황경은 그의 종말을 뻔히 알면서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새로 태어난 모진위, 즉, 상관보는 그렇게 채경령을 위한 기약없는 질주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한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던 상관보가 고개를 들고 동 녘을 바라보았다. 완만한 산의 윤곽을 파괴하는 기형의 그림자들이 어렴풋이 상관보의 시야를 자극했다. 시추탑이었다. 상관보는 첨탑을 등대삼아 다시 달렸다. 이윽고 산자락을 끼고 은밀하게 숨어 있는 대규모 염정단지에 도착 했다. 곳곳이 횃불이었다. 사방팔방에 치솟아 있는 시추탑들은 훌륭한 감시 탑 역할도 하고 있었다. 저 정도의 횃불이면 은밀한 잠입은 포기해야 했다. '어쩐다?' 필요없는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굳이 밤을 택한 상관보였다. 이런 상황이라 면 대낯에 기습을 강행하는 것보다 못했다. 복잡한 기관과 장비가 아직은 익 숙치 않은 상관보였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장치를 조작해야 지상의 피해 없이 파괴력을 공중으로 집중시킬 수 있었다. 더구나 숙소에 잠들어 있는 인 부들도 있을 것 같았다. 자칫하면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상관보는 혀를 차며 후회했다. 그러나 내친 걸음이었다. 이제와서 돌아설 수는 없었다. 점차 감시와 수색이 심해지고 있었다. 사천은 험난한 지역이었다. 불특정 목 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들이 두어 곳은 언제나 있었다. 그만큼 도망자의 추적이 쉬운 지역이었다. 경계가 심해질수록 상관 보의 운신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신속히 처리하고 중경(重慶)방면으 로 빠져나가 다시 거사를 도모할 계획이었다. 정의단의 보조공작을 감안했을 때, 일정에 차질을 빗어서는 곤란했다. 상관보는 결심을 굳혔다. '방법이 없군. 속전속결(速戰速決)이다.' 상관보는 정면돌파를 결심했다. 잠든 사람들이 모두 깨어나도록 소란을 부 려야 했다. 폭발로 인한 지상의 직접적인 피해는 고작해야 반경 사오 장정도 였다. 폭발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어린아이들도 미리 피할 수가 있 었다. 상관보는 미끄러지듯 그늘 속으로 스며 들어갔다. 상관보는 일단 목책 (木柵)을 넘어서자 횃불을 일부러 피하는 번거로운 행동을 생략하고 곧바로 화기탑을 향해서 달려갔다. "침입자다!" 어디선가 고함이 터져 나오고 연속적으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첫 번째보 다는 무림맹의 경계태세가 한층 강화되어 있었다. 석평(石平)은 화기탑의 목축에 등을 기댄 채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 타종과 함께 신도곡의 제자들이 달려나갔지만 전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면 어련히 이곳으로 안올까봐 그 난리들인가.' 부산떠는 신도곡의 제자들이 약간은 경망스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무림맹 이나 정의단이나 모두 그놈이 그놈 같아서 누구의 머리통이 깨지던 전혀 관 심이 없는 석평이었다. 물론 석평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청부업자가 일할 장소는 돈이 정해주는 법이었다. 석평은 갑자기 자지러지게 기침을 하며 허리를 꺽었다. '이런, 이런... 오늘은 소마검 상관보가 재수가 없는 편이군.' 시커먼 핏덩이가 석평의 입에서 지면으로 쏟아졌다. 한결 속이 게운해지고 가슴이 탁 트였다. 또한 머리가 맑아지며 기운이 샘솟았다. 폐병장이 석평은 하루종일 속이 답답하고 내기의 흐름이 일정치못해서 전혀 투지가 일지 않 고 있었던 참이었다. 석평의 동업자들은 다소 무리한 청부가 석평에게 맡겨졌을 때, 그의 성공여 부를 다음 질문으로 대신하기를 좋아했다. "석평이 각혈을 했는가?" 각혈 직후의 석평이라면 설사 설산소룡과 맞붙는다해도 석평에게 돈을 걸 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미 이년 전에 사형선고를 받았건만 하루밤 만 자고나면 숫자가 줄어드는 청부업계에서 잔병 하나 없는 수많은 동료들 보다 더 오래 살고 있는 석평이었다. 석평이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쾌검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유려한 검법이었 으나 어지간한 쾌검보다 빨랐다. 경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눈이 꽤 빠르다는 석평조차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았다. 석평이 이번에는 혀를 내찼 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신도곡의 바보들은 소마검의 그림자도 제대로 밟지 못하고 있었다. 소마검의 장검이 오색 광채를 번득이며 남의장한(襤衣壯漢)의 소매를 찌르 고 들어갔다. 질풍노도와 같은 일검에 남의장한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를 들어 올려서 검을 제지하였다. 그러나 소매를 가르던 오색광채는 이미 사라 지고 없었다. 다음순간 남의장한의 손아귀에서 파르르 다섯가지 색깔의 불 꽃이 튀어올랐다. 남의장한의 흑도가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저게 바로 추혼십이절의 제 칠초 사화결실(死花結實)이라는 유명한 초식이 로군.' 첫 번째 흑도가 땅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연이어 두 개의 흑도가 뒤를 이 었다. 흑도의 난무였다. 가관이 아닐 수가 없었다. 석평은 코웃음을 쳤다. 석 평이 입술에 묻은 핏자국을 닦기도 전에 소마검은 포위망을 빠져나왔다. 그 리고 소매로 입언저리를 막 문지르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벌써 코 앞까지 다다르고있었다. 석평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엉덩이를 털었다. 철이 들자마자 검을 들었 고, 그렇게 사십평생을 살아왔다. 세상인심이 너무도 각박하여 다른 것은 생 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제법 이름도 얻고, 마음에 드는 여자 도 얻고, 여유도 생겨서 다른 세상을 살아보고자 했다. 그런데 폐병이라는 것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살고자 했더니 의원 나으리께서는 이제 세상을 정 리하라는 진단을 내렸다. 석평은 어이가 없었다. 한평생을 검으로 살아온 몸, 기껏 폐병으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석평은 다시 청부업자가 되었다. 모두가 꺼리는 일도 석평은 마다하지 않았다. 기왕이면 폐병보다는 검으로 죽는 것이 근사할 것 같았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리 만만하지만은 않았다. 검으로 생을 마감시켜줄 고수를 만나는 것이 의원의 사형선고기간을 채우는 것보다 더욱 어려웠던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검객 석평이 다시 검 을 들었다. 상관보는 단숨에 화기탑까지 치고 올라가려던 생각을 고쳐먹고 석평 앞에 서 걸음을 멈추었다. 첫눈에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알 수 있었다. 홍학산을 내려온 이래, 가장강한 적수를 만나게 된 것이 분명했다. 무림맹은 모든 염정마다 초고수를 배치할 수는 없었다. 고수는 적었고 염정 은 너무 많았다. 성도를 중심으로 열한 개의 염정을 골라내어 고수들을 집중 배치하였다. 특히 가장 가능성이 높은 네 개의 염정에는 신분고하를 막론하 고 최강의 고수들을 급파하였다. 첫 번째 염정은 설산소룡 목선민이 맡았고, 두 번째는 둘째제자 공손연이 맡았다. 세 번째가 형산파의 장문인 목타진인 (鶩駝眞人)이었고 네 번째가 거금을 들여서 영입한 석평이었다. 상관보는 재 수없게도 하필이면 그 네 번째에 해당하는 남황산 자하정(紫霞井)을 목표로 정했고, 그리하여 석평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석평은 허허로운 중단자세였고, 상관보는 일도양단(一刀兩斷)의 직진자세였 다. 난처한 것은 상관보였다. 일도양단의 자세였으나 상관보는 석평의 생(生) 을 무시하지 않았고 허허로운 중단자세였으나 석평은 자신의 생(生)에는 전 혀 관심이 없는듯한 태도였다. 찌르고 들어가자니 석평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고 물러서자니 화정의 폭파를 장담할 수 없었다. 상관보가 망설이고 있 는데 느닷없이 석평의 검이 날아왔다. 석평은 이것으로 승부는 끝났다고 확신했다. 고수의 비무에 있어서 가장 중 요한 것은 쾌도, 초식도, 내공도 아니었다. 아무리 뛰어나다고해도 그것은 백 지 한 장의 미미한 차이였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호흡이었다. 상대방이 찔 러오려 할 때 먼저 찌르고, 상대가 맞붙기를 원할 때 뒤로 물러가고, 상대가 물러가려 할 때 먼저 다가서는 것, 그것이 호흡이었다. 자신의 박자를 잃지 않고 상대의 박자를 엇나가게 하는 것, 그것이 호흡이었다. 석평은 무섭게 질주하던 상관보를 정지시켰고 상관보가 주저하자단호한 결단으로 회심의 한 수를 날려보냈다. 상관보의 검이 고개를 쳐들었다. 마치 검 스스로가 의지와 실행력을 가지고 있는 듯 자연스럽기 그지 없었다. 상관보는 여전히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검은 아랑곳 않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외부의 기를 느 끼고 단전의 천지신공이 반응하고 있었다. 이어서 이제는 상관보의 본능이 되어버린 용무권의 초식이 상관보의 팔다리를 자극하여 추혼십이절을 끄집 어 내었다. 검이 오색의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해우공이 발동했다. 추혼 십이절을 십성으로 연마하면 발생난다는 오색의 검기(劒氣)가 삽시간에 석평 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석평의 검은 그만 허공을 쑤셔박고 말았다. 오색 검광이 어느 새 석평의 가 슴을 서늘하게 식히고 있었다. 그러나 석평은 물러나지 않았다. 검을 회수하 여 막아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차리 늦어버렸다. 석평은 검을 뒤집어서 그대로 상관보의 곡지혈(曲支穴)을 후려갈겼다. 동귀어진(同歸於盡)의 한 수 였다. 그러나 허울뿐인 동귀어진으로 석평은 목줄기를 내주어야 했고 상관보 는 기껏해야 팔꿈치였다. 그나마 석평이 상관보의 곡지혈을 적중시킬 확률은 십분지일도 되지 않았다. 상관보는 무리하게 신형을 비틀며 검날의 방향을 변경시켰다. 검은 아슬아 슬하게 목을 스쳐서 검면으로 어깨를 후려쳤다. 덕분에 석평의 검이 상관보 의 곡지혈을 적중되었다. 상관보의 팔굽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비록 검면으 로 내리친 것에 불과했지만 미처 회수되지 않은 검기들이 석평의 내기를 뒤 집어 놓았다. 석평이 다시 각혈을 하며 허리를 꺽었다. 이번 각혈만은 석평 도 그다지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 폐병의 심술과는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석평은 엉덩방아로 찍고 주저앉으며 담담하게 외쳤다. 미련이나 아쉬움따위 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어조였다. "찔러라!" 그러나 상관보는 석평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화기탑으로 달려 올 라갔다. "화정이 폭발한다. 모두 피해라!" 인부들이 너나 할 것없이 정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서로 눈치를 살피던 신도곡의 제자들도 잠시후, 그 대열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석평은 달아날 생 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주저앉아서 탑 주위를 날아다니는 상관보의 신형을 감상하였다. '알 수가 없군. 똑같은 사화결실이었는데...' 석평은 사화결실을 돌파할 자신이 있었다. 상관보의 사화결실은 앞의 것이 나 뒤의 것이나 전혀 다른 점이 없었다. 신도곡의 제자들이 막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며 자신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신도곡의 남의 장한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고수 석평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똑같은 사화결실에 똑같은 형태로 당해버렸다. 석평은 그 차이를 전혀 구분 할 수가 없었다. 상관보가 탑의 꼭대기에서 사람을 옆에 끼고 지면으로 낙하하였다. 화정을 틀어막고 배송관을 제거하려던 그 인부였다. 사뿐히 지면에 착치한 상관보는 인부를 내려 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힘껏 달리시오. 곧 불꽃이 치솟을 것이외다." 인부가 똥줄이 빠져라 줄달음질을 쳤다. 상관보는 빙그레 웃으며 인부를 바 라보다가 배기관을 모두 틀어막고는 시추정으로 통하는 발판을 모두 열어 제쳤다. 얼마후, 묘한 냄새가 주위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상관보는 신형을 뒤 로 한 채 송기관을 꺽어버리더니 허공으로 도약하였다. "나를 내버려두게." 석평은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상관보가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석평은 이미 허공을 날고 있었다. '이런 검에 죽을 팔자도 못되는 모양이구나.' 만금전장(萬金錢莊)의 수석호법(首席護法) 공손거(公孫去)는 낯익은 기침소 리에 고개를 돌렸다. 석평이 막 전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쩐 일인가?" "으응, 어제 밤에 소마검을 만났지." 석평은 태평하게 말했다. "각혈은 했나?" 사실 소마검 상관보 정도를 상대하는데 석평이 각혈을 할 필요까지는 없다 고 생각하는 공손거였다. 그러나 생사불문(生死不問) 석평에게 잔금을 지급 하려면 청부의 완료여부를 반드시 확인하는 것이절차였다. 공손거가 말한 각혈은 바로 그 확인절차로서 석평에 대한 경의의 뜻으로 그 유명한 일화들 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으응, 했지." "잔금을 받으러 왔구먼." "아니, 선금을 돌려주러 왔다네." "각혈을 했다며?" "분명히 했지.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런데 왜?" "시작하기 전에 한 번하고, 끝나고 나서 한 번 더했다네. 뒤에 것은 폐병이 아니라 소마검이 만들어준 거라네." 상관보는 사흘 길을 달려서 중경에 들어갔다. 서문을 통과하자마자 성벽을 끼고 들어가니 으슥한 뒷골목이 나왔다. "어머나! 어쩌면 저렇게 잘생겼을까. 간난아기처럼 초롱초롱한 눈하며, 관옥 같은 피부하며..." 홍등가(紅燈街)였다. 노류장화(路柳墻花)들이 몰려나와 상관보를 구경했다. 꿈을 꾸는 듯 몽롱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처자까지 있었다. 상관보로서는 도 대체 익숙해질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눈길이 마땅치가 않 았다. 위장을 한다고 했건만 눈빛과 얼굴빛만은 완전히 숨길 수 없었던 것이 다. 상관보는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상공, 이리로 드시지요." 평소에는 상스럽기 그지 없는 옥금(玉錦)마저도 최대한 교양으로 치장하였 다. 그러나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어느새 상관보의 소매를 잡아끌고 있었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동화정(銅貨程)이 어딥니까? 소생은 동화정에 볼 일 이 있어서..." "호호홋, 상공. 여기가 바로 동화정 골목이랍니다." "그럼, 명주(名酒)라는 주점이...?" 사방에서 까르르하고 폭소가 터져나왔다. 하긴 술을 파는 곳이니 주점은 주 점이었다. 상관보의 일천한 경험으로는 주루(酒樓)도 주점이었다. "공자께서는 어인 일로 저희 집을 찾으시는지...?" 상관보가 돌아보니 질문을 청한 여인의 바로 뒤에 명주라는 간판이 대문짝 만하게 걸려 있었다. "사조행(斜照行)의 조대인 어르신께서 운향(蕓香)이란 분께 이것을 전하라 하셔서..." 여인이 상관보를 안내했다. 세 개의 문을 지나 두 개의 층계를 오르자 운향 이 상관보를 맞이하였다. "조대인이 보내셨다고요?" "예, 보내주신 소금 대금에 착오가 있으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상관보가 두루마리를 전했다. 운향이 두루마리를 읽고 다시 물었다. "십구 일이 설흔다섯 냥이었나요?" "설흔다섯 냥은 맞사오나 십구 일이 아니라 이십 일이라고 하시더군요." "이리로 드시지요." 상관보가 화려한 방으로 들어서자 여인이 느닷없이 큰절을 올렸다. 상관보 가 깜짝 놀라서 맞절을 했다. "상관대협, 대공(大功)을 세우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듣기 민망합니다. 많고 많은 염정에서 이제 고작 두 개째인데요. 시작에 불 과하지요." "대협, 고작 두 개라니요. 상대는 생사불명 석평이었습니다. 무림맹 놈들도 이제는 발 등에 불이 떨어진 게지요." "예?" "모르셨습니까? 지금 강호가 온통 벌집입니다, 대협. 저희가 승기를 잡은 셈 이지요." 강호는 운향의 말대로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끄러웠다. 생사불명 석평은 불 패의 신화를 기록중이던 역사적인 청부업자였다. 이제까지 그의 손에 맡겨져 서 불가능한 일이 없었다. 설사 석평보다 뛰어난 고수라해도 석평을 찌를 수 는 없었다. 제 아무리 담이 큰 역전의 고수들도 죽음의 공포는 무시하지 못 했다. 석평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감히 죽음의 공포를 무시하지는 못했다. 석평은 자신의 심장을 담보로 상대의 심장을 가르는 그런 검객이었다. 설사 소림의 장문인이라해도 그에게 두 번의 각혈을 선사하기는 어려웠다. 소마검 상관보, 그가 그것을 해낸 것이었다. 새로운 청년고수의 출현은 강호의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소마검 상관보에 대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시간이 흘러도 소문은 가라앉 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점차 무성해지기만 했다. 무림맹에게는 치명타였다. 소마검의 소문에는 항상 무림맹의 염정이 부록으로 딸려 다니고 있었다. 무 림맹주 초진양은 사태의 심각성을 통감하고 대책마련에 부심하였다. "할 수 없구나. 모든 염정에서 일단 철수하도록 해라." 초진양은 결국 염정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염정을 방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석평이 막을 수 없다면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허면?" "모진위놈부터 처리해야겠지. 염정은 그 후에 다시 열어도 늦지 않는다." "이 참에 아예 발본색원(拔本塞源)을..." "글쎄..." 정의단의 발본색원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의단의 본거지와 백봉단주의 정체를 몰라서 잠자코 내버려두었던 초진양이 아니었다. 정의단 은 무림맹의 존립을 위한 필요악과도 같은 존재였다. 막상 정의단을 제거하 려니 걸리는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직은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은 계륵(鷄肋)이 바로 정의단이었다. "역시 채가 계집을 잡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당유가 끼어들었다. "이유는?" "모가놈은 쉽게 잡힐 놈이 아닙니다. 그 계집을 미끼로 쓰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될까?" "예전부터 채경령이라면 불섶을 쥐고 모닥불에 뛰어들는 부나방 같은 놈이 아니었습니까, 사부님." 채경령은 역모죄로 관에 수배된 몸이었다. 생포해서 관에 넘겨버리면 그만 이었다. 그것은 그 동안의 정황으로 보아서 모진위가 정면대결을 거부할 수 없는 미끼가 될 수 있었다. 당유의 계책은 이러했다. 정의단의 잔당을 소탕해 버리고 채경령을 생포한 다. 공개서한을 통해서 신도 흑염도법과 마검 추혼십이절간의 비무를 신청한 다. 물론 비공식 경로를 통해서 채경령의 안위에 대한 선택을 강요한다. 도 전에 응하면 채경령은 석방이요, 거절하면 채경령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신도곡에는 천하제일의 후기지수 목선민이 있었다. 추혼검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명예과 실리을 동시에 취할 수 있 었다. 더불어 모진위만 제거한 채, 채경령의 정의단은 그대로 유지시킨다는 장점도 있었다. "정의단을 쓸어버리고 계집을 잡아들여라." "비영(飛影), 거기 있느냐?" "예, 림주님." 회의실을 물러나온 당유가 심복을 불러들였다. "황경의 소재는 어찌 되었느냐?" "산동에서 단서를 찾았습니다." "그 늙은이가 있는 곳을 반드시 알아야 겠다. 언제까지면 되겠느냐?" "아무래도 사나흘은 더 필요합니다." 정체불명의 허노인을 찾아 헤매는 것과 강호명숙 염로선지를 추적하는 것 은 질적으로 달랐다. 허노인에 비하면 황경은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라 할 수 있었다. 추적을 시작한지, 이틀만에 이미 부분적인 행적이 드러나고 있었 다. 그로부터 사흘 후, 당유는 황경의 밥숟가락놓는 곳까지 알 수 있게 되었 다. "사후지시를 내려주십시오. 눈치를 보니 조만간에 다시 은신처를 이동할 낌 새였습니다. "죽여라." "존명." 당유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모진위라면 어느 정도 안다고 자부하는 당 유였다. 당유는 모진위가 절대로 피해갈 수는 대결을 만들고 싶었다. 단하나 뿐인 죽마고우 목선민이라는 이유로 모진위가 대결을 주저하게 만드는 불상 사를 제거해주고 싶었다. 그것으로 둘중의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했다. 그것 이 목선민이든 모진위든 당유는 상관 없었다. 승자, 패자 모두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으로 당유는 만족이었다. 당유는 모진위 에게 전달될 비공개서한에 항목을 하나 더 추가시켰다. 물론 서한 속의 사건 당사자는 목선민이었다. 내용이야 어떻든 비무대상자인 목선민의 낙관(落款) 으로 서명날인을 대신할 예정이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무림천하-창작연재란 (go MURIM)』 2759번 제 목:[연재] 표류공주 63회 -최후식 올린이:하이문 (문홍일 ) 99/11/24 11:50 읽음:148 관련자료 없음 ----------------------------------------------------------------------------- 번 호 : 9796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11-24 00:34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63- 24.신도마검(神刀魔劒) 목선민은 자신의 애도(愛刀)를 정성스럽게 닦았다. '도(刀)... 도는 무엇인가?' 도는 그저 도였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 길다란 쇠붙이에 지나지 않았다. 도 는 검과는 달리 무언가를 베는데 적합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무엇을 벤다 는 말인가. 나무를 벨 수는 있었으나 도끼보다 못했다. 헝겁이나 종이를 자 를 수는 있었으나 역시 가위만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을 베는데는 도는 이상 가는 것이 없었다. '한낯 쇠붙이에 불과한 사람 죽이는 도구와 무슨 대화를 나누라는 말인가.' 흑염도법의 후삼도를 담고 있는 비급의 첫 번째 장을 펼쳤을 때, 모진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에게 마음을 주어라. 이것이 후삼도의 세 부분중 첫 번째였다. 초웅천이 남긴 흑염도법의 마지막 삼도는 초식이 아니었다. 목선민은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고, 힘차게 도를 휘두를 수 있었다. 그러나 후삼도는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목선민은 첫 번째 석달을 오로지 하늘만 보고 살았고, 두 번째 석달은 벽만 보고 살았으며, 마지막 석달은 흐르는 물만 바라보았다. 목선민은 열달만에 다시 도를 잡았다. 그리고 나무를 깍고 돌을 깍았다. 무엇이건 손에 잡히는 대로 깍고 다듬었다. 쇠붙이나 보옥도 마찬가지였다. 사부 초진양이 물었다. "무엇을 조각하고 있느냐?" "제자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이윽고 목선민이 도를 멈췄을 때, 그의 작품목록에 동자상(童子像)이 하나 추가되었다. "동자상을 깍고 있으면서 어찌 모른다고 했느냐?" "제자는 정말 몰랐습니다. 그 동자상은 제자가 깍아낸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속에 들어 있던 것을 단지 도가 끄집어 낸 것뿐이지요." "원래 있었다?" "예." 초진양은 목선민의 작품들을 쭉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솜씨가 서툴기 그지 없었으나 정말 원래부터 나무토막이 아니라 동자상이나 부처상이었던 것처 럼 칼자국이 없었다. 초진양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신도합일(身刀合一)..." 수십년을 노력했지만 초진양이 결코 올라설 수 없었던 경지였다. 도의 마음을 얻어라. 이것이 두 번째였다. 목선민은 다시 하늘을 석달 바라보고, 벽을 석달 바라 보고, 흐르는 물을 석달 바라보았다. 첫 번째 일년과 한 가지만 빼고 모든 점이 동일했다. 첫 번째 수련때는 도가 없었고 두 번째 수련때는 도가 있었 다는 점이 달랐다. 후삼도를 잡은 지 이년이 되었을 때 목선민은 더 이상 나 무토막이나 쇠조각을 깍지 않게 되었다. 사부 초진양이 다시 물었다. "이제는 조각을 끝났느냐?"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부님." "흠, 그런데도 저 나무토막은 이 사부가 한달전에 보았던 그대로구나. 다른 것도 마찬가지고." "단지 도를 안들었을 뿐, 바람과 비와 세월이 대신하고 있지요." 초진양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의 제자 목선민은 이미 초진양이 이해 할 수 없는 경지에 들어서고 있었다. 목선민은 더 이상 도를 구속하지도, 방 해하지도 않았다. 이기어도(理氣御刀)의 경지였다. 도를 버려라.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목선민은 다시 하늘을 보고, 벽을 보고, 흐르는 물을 보았다. 그러나 도를 버릴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술에 만취해 보기도하고, 어느 날은 불상을 끌어안고 울부짖기도 하고 별에 별 짓을 다했다. 그러나 역시 도를 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삼년이 흘렀다. 목선민은 정성스럽게 도를 닦은 다음 후원으로 나섰다. 후원에는 바위가 있 었다. 오랜 세월 비바람으로 자신을 줄여 가는 바위가 있었다. '얼마나 걸릴까?' 바위는 세월을 먹으며 조금씩 자신을 줄여 나갔다. 바위가 마침내 자신의 모든 것을 없애고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려면 수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천 년, 이천년? 아니 수만년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바위는 서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줄여 나가고 있었다. 목선민은 바위 앞에 서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음의 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힘껏 베었다. 바위는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목선민이 다시 눈을 떴다. 바위는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목선민이 고개를 돌려 나무를 바라보 았다. 그리고 마음의 손을 뻗어서 가느다란 가지를 하나 꺽었다. 그리고 다 시 눈을 감았다. '베었다.' 가느다란 나무가지만 가지고도 바위를 자를 수 있었다. 목선민이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에는 풀잎이었다. 풀잎을 ㅈ어들고 마음의 바위를 서슴없이 갈라 나갔다. 풀잎만 가지고도 바위를 베어버렸다. 목선민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리고 마음의 도와 나뭇가지를 버렸다. 풀잎마저 던져 버렸다. 이번에는 바위 를 가를 수가 못했다. 목선민은 도가 없이는 바위를 자를 수가없었다. 바위 는 세월만 가지고도 자기자신을 지워 나가는데 목선민은 그까짓 도 하나를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목선민은 자기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모진위는 한 노인의 얼굴과 마주했다. 모진위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노인 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노인은 모진위를 보고 있지 않았다. 노인의 눈은 굳 게 닫혀져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모진위는 그렇게 생각했다. 눈, 코, 입을 찬찬히 살펴 보았지만 누군지 기억 이 나지를 않았다. 명주의 늙은 기녀 운향이 상자를 하나 건네주며 노인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상자 속에서 노인의 머리가 나왔다. 하지만 모진위는 결 단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생면부지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맹세해도 좋 았다. 어머니 뱃속에서 기어나온 이래 자신을 먹이고, 입히고, 길러준 아버지 이자 어머니이고, 할아버지이자 세상에 남아있는 그의 유일한 식구인 황경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도 좋았다.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상자 속 의 노인은 팔도 없고, 다리도 없고, 몸통도 없었다. 그저 목과 머리만 덩그라 니 남아 있었다. 모진위가 아는 사람 중에 팔도 없고, 다리도 없고, 몸통도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것은 모진위의 유일한 안식처인 황경할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도 좋았다. 모진위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모진위는 자신의 눈에서 왜 눈물이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리 속도 개운하고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담담한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눈꺼풀에 무슨 티가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모진위는 전혀 울어야할 이유가 없었다. 고로 지금 울지 않고 있 었다. 모진위는 지금 흘러내리고 있는 것은 절대로 자신의 눈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것이 모진위라는 이름을 가진 자의 눈물이라면 자신은 분 명히 모진위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 앞의 수급이 절대로 황경 할아버 지의 수급이 아니듯 울고있는 인간이 절대로 모진위는 아니라고 모진위는 그렇게 확신했다. 모진위는 이틀 밤낯을 쉬지 않고 달려서 구당협에 왔다. 모진위의 유일한 죽마고우 목선민은 단 한 번도 모진위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진실한 친구 목선민의 편지대로 구당협 어디에도 이미 정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모진위는 염로선지 황경이 죽었음을, 정의단주 백봉이 대설산 신도곡에 잡혀갔음을 믿게 되었다. 모진위는 빙글빙 글 돌기만하는 머리를 가지고 작금의 사태를 정확히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 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내가 무엇을 잘못한걸가? 내가 감히 무림맹에 도전한 것이 잘못인가? 아니, 아니, 내가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일거다. 나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죽는다. 나는 날 때부터 제 애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살모사 같은 놈이니까...' 모진위는 어지러웠다. 기억이 잘 나지를 않았다. 그래도 눈앞의 현실을 사 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꾸만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누가 죽였나? 내가? 아니다. 무림맹이 죽였다. 아버지도 무림맹이 죽였나? 아니지. 그는 하상곤이 죽였다. 하상곤을 죽인 것이 바로 무림맹... 그것은 참 잘한 일이다. 그렇고보니 무림맹도 좋은 일을 한 적이 있구나. 하지만 그것 하나만 빼고는 전부 무림맹이 죽였다. 황경을 죽였고, 장가량을 죽였고, 장여 진을 죽였으며, 신검반의 모든 식구들을 몰살시켰다. 회노애락 네 명의 사형 들도 모두 그 놈들이 죽였다.' 빙글빙글 어지럽게 돌아가는 혼란스러운 머리가 급기야 모진위에게 억지를 쓰기 시작했다. '무림맹은 채경령의 유일한 혈육 할아버지 채소우 장주까지도 모진위라는 못된 놈을 교사해서 살해해 버렸다. 용무관의 스승 도학정도 죽였다. 남악파 가 지금 무림맹 소속이니 당연히 무림맹이 죽인 거나 마찬가지다. 그것뿐이 아니다. 모진위가 사랑하는 여인 채경령을 빼앗아 갔다. 단 하나뿐인 죽마고 우 목선민도 빼앗아 갔다. 사부 구연기가 목숨을 댓가로 전달해준 신검의 명 예마저 약탈했다. 자기들이 신도(神刀)고, 추혼검은 마검(魔劒)이라는 것이었 다. 그 고약한 놈들이 모진위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모진위는 두 눈을 부릅뜨고 대설산을 바라보았다. 모진위가 제정신을 차린 것은 구당협의 총단을 무작정 달려나온지 나흘이 지난 후였다. '여기가 어디지?' 모진위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멀리 현판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신도곡(神刀 谷)이라는 멋들어진 글씨체의 금빛 현판이었다. 온몸이 물에 빠진 듯 흠뻑 젖어 있었고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다. 모진위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누구냐?" 위엄에 찬 고함소리가 모진위의 귓전을 때렸다. 모진위는 그냥 쪼그려 앉은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깨가 두툼하고 목이 유난히 짧은 사내였다. 사내가 모진위에게 다가왔다. 서슬퍼런 흑도가 햇빛에 반사되었다. 모진위는 눈이 부셔서 한 손으로 이마를 가린 채 그저 바라보기만 하였다. "누구냐고 묻지를 않느냐?" "사, 상관보..." "뭐라고?" "무림소졸 상관보가 신도곡의 설산소룡께 비무를 청하러왔다고 전해주시오. 이것이 비무첩이오. 좀 전해주시겠소?" "소마검 상관보?" 목선민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계단을 오르고있는 날렵한 체구의 사내가 눈 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상관보는 사내답지 않은 영롱한 눈에 수밀도처럼 뽀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모진위의 어떠한 흔적도 발견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늠름한 기도을 보고 있자니 목선민은 왠지 대견 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것이 도무지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모진위도 연무장 한가운데 버티고 서있는 목선민을 발견했다. 선이 굵고 뚜 렷한 이목구비가 한결 시원해 보였다. 이전에 비해서는 연륜마저 느껴지는 것이 영웅의 품모가 넘쳐 흘렀다. 심란하기는 모진위도 목선민 못지 않았다. 모진위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다구쳐 물었다. "왜 죽였소?" "무슨 말씀이시오?" "그 분은 이 일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왜 죽였소이까?" "도대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게요?" "염로선지 황경." "나는 모르는 일이오." "... ..." 목선민도 모진위도 말을 아끼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두 친구가 만났지만 서로를 외면하고 있었다. 자꾸만 약해지는 마음을 경계하여 목선민이 잘라 말했다. "비무에 응해 주신 것으로 알겠소." "먼저 확인을 해야겠소." "백봉단주말이요?" "그렇소." 신도곡의 입장에서는 이미 손안에 들어온 먹이, 굳이 확인시켜줄 필요도 없 었지만 목선민은 곡의 의사에 반하며 모진위를 뇌옥으로 안내했다. 뇌옥의 여인은 채경령이 분명했다. 모진위는 삼년만에 다시 만난 채경령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채경령은 삼년 전에 비해서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과연 강호의 백봉(白鳳)이라 불리울만 했다. 도톰하던 볼과 눈두덩이가 홀쭉 하게 여위어 눈동자의 명암을 보다 뚜렷하게 만들어주었고 입술을 도톰하게 강조해 주었다. 또한 한이 서린듯 슬픈 눈빛과 창백한 얼굴은 뭇사내의 애간 장을 바싹 태우기에 충분했다. "대협, 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와야만 했기에 왔습니다." "오시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채경령도 넋을 잃고 모진위를 바라보았다. 상관보의 눈빛은 모진위의 마지 막 그 눈빛과 너무도 흡사했다. "살아있으니 되었소이다." "... ..." "외람된 말씀이오만..." "말씀하시지요." "소생은 분명한 답변을 바랍니다." "그리하지요. 이제와서 무엇을 숨기리까." "그를 아직도 사랑합니까?" "예?" "전에 말씀하셨던 그 분 말씀입니다." "사랑하지요." 채경령의 확고한 신념이 모진위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모진위는 가슴이 저려와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만약에... 만약에 그가 다시 돌아온다면 받아주시겠습니까?" 채경령은 비감에 찬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참만에 채경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진위가 말없이 돌아서서 뇌옥을 나섰다. 채경 령은 찢어지는 가슴을 잠시 진정시키고 다시 말했다. "하지만... 해와 달이 동시에 뜨는 날이 오더라도 그는 돌아올 수 없답니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셨지요." 소복의 채경령이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모진위는 이미 뇌옥을 떠 나고 없었다. 두 사나이가 연무장 중앙에 마주 섰다. 하나같이 비장한 표정이었다. 때마 침 구름이 해를 가리고 스산한 바람마저 불어와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 듯 목선민이 도를 뽑아 들었다. 모진위는 아직 이렇다 할 준비자세도 없이 멍하니 목선민만 바라보고 있었다. 목선민이 도를 등뒤 로 하고 왼손으로 수결(수결)을 지어 예의를 표했다. 모진위가 허겁지겁 양 소매를 들어올리며 포권을 답례하였다. 이십년전 용무관과 모든 것이 너무도 흡사했다. 어쩔 수 없이 모진위도 발검의 자세를 취했다. 목선민의 도에서 도기(刀氣) 가 치솟았다. 그저 평범한 정강의 도이건만 도는 은은한 묵빛으로 빛을 발했 다. 모진위도 기를 끌어 올려 검에 주입하였다. 역시 평범한 검이건만 오색 의 광채로 번득였다. 팔십년만에 다시 재회하는 오광검(五光劒)과 흑염도(黑 閻刀)였다. 도를 들자 목선민은 그대로 무념의 상태가 되었다. 갈등과 고민이 사라졌 다. 목선민에게 있어서 도는 만사를 잊게하는 무심과도 같은 것이었다. 모든 무공이 그렇듯이 흑염도 또한 정신집중을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목선민은 친구도 잊고, 친구에게 도를 들이대야하는 천하제일의 야망마저 잊었다. 그 저 모든 정신을 도에 집중하여 상대를 베는 것만 생각했다. 그러나 모진위는 아직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친구도 소중했으나 구연 기의 목숨값도 업수히 여길 수는 없었다. 보복의 악순환에서 헤어나고자 했 으나 황경의 악다문 입술이 눈에 밟혔다. 대자연의 순리를 거슬리고 싶지 않 았으나 하상곤과 희노애락 사괴의 넋이 원망의 피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목선민도, 뒷배경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도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신도합일이었다. 잠시후에는 그 도마저 보이지를 않았다. 묵빛 광채가 스스로 허공을 점하고 흔들고 있었다. 이기어도였다. 모진위는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일단 검을 움직이면 반드시 둘중의 하나는 반드시 죽여야했다. 둘 모두가 사는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모진위는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채경령이 없는 세상이라면 나는...?' 모진위의 번민은 아랑곳 않고 무정한 흑염도가 시시각각 다가들고 있었다. '그럼 목선민이 세상에 없는 채경령은...?' 모진위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채경령이 없는 자신을 상상해보니 목선 민이 없는 채경령도 상상할 수 있었다. 무심한 흑염도가 날아들고 있었다. 모진위의 번민에 무심하기는 오광검도 마찬가지였다. 오광검이 주인 모진위 의 위험을 감지하고 주인의 본능에 의거하여 천지신공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모진위는 그래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쪽도 포기할 수 없었다. 검은 모진위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스스로가 흑 염도를 맞서고 있었다. 모진위는 적어도 이번만은 생존본능이 운명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한 번쯤은 자기가 자신의 문제를 결정하고 싶었다. 모진위는 오로지 생존해 가는 짐승이 아니었다. 본능이 검을 밀었고 의지가 강제로 검 을 막았다. 모진위의 검에서 오색광채가 사라졌다. 목선민은 마치 잠에 든 듯 고요한 모진위의 얼굴을 보았다. 흑염도법의 마 지막 장이 주마등처럼 목선민의 뇌리를 스쳐갔다. 그리고 마침내 흑염도법의 궁극, '도를 버려라.'를 보았다. 모진위의 얼굴에서 바로 그것을 보았다. 목선 민은 그 마지막 일도를 전개하였다. "죽었습니까?" 당유가 녹류각주 도차영에게 물었다. "아직..." 도차영이 고개를 저었다. "살아날 거 같습니까?" 당유가 다시 물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스스로가 자신의 내기를 역류시켜 버렸습니 다. 단전이 폐쇄되었고 내공도 모두 산화되었는데.... 세맥(細脈)까지 모두 엉 망진창으로 뒤엉겨서 만에 하나 깨어나도 쓸모없는 폐인에 불과하지요. 오래 된 지병이 있었던 것 같군요. 살기 힘든 병이지요. 전에 림주님께 말씀드린 것처럼 황경이 이 자에게 반금조와 탈혼반시를 시술한 이유가 바로 이 고질 병 때문이었겠지요. 본시 그런 것들이 다 죽을 병에 걸린 자에게나 시술하는 것이니까요. 결국 다시 재발할테니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지요." 모진위는 미망 속을 헤매고 있었다. 미망이라고는 하지만 아주 편안하고 안 락한 미망이었다. 천지신공이 사라진 마음의 텅빈 구석에서 아름다운 음악과 진리의 음성이 모진위를 위로하였다. "황경?" 목선민이 으르릉거렸고 당유가 웃었다. "대사형이 죽였소?" 당유가 또 웃었다. 목선민은 도를 뽑아 들었다. 그러나 내리칠 수 없었다. 목선민은 이미 도를 버렸다. 아니, 그의 오랜 친구 모진위가 자신의 생명을 내놓고 대신 가져가 버렸다. 목선민은 느닷없이 도를 집어 던지고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채경령은 자물쇠를 푸는 목선민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나오시오." "상관대협은...?" "죽었소." "... ..." "소마검과 약속을 했으니 보내드리는 것이오. 나오시오." 채경령이 옥문을 나섰다. "가시오." "파렴치한 놈! 네 놈에게도 약속을 지키는 신의라는 것이 있더냐?" "내 친구와의 약속은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소이다." "친구?" "몰랐소? 소마검이 내 오랜 친구 진위요." 유진목은 초조한 마음으로 신도곡의 정문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한참만 에 문이 열리고 채경령이 나타났다. 채경령은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대문을 나섰다. 유진목이 다가갔다. "미친년! 미친년!" 채경령이 흐느적거리며 중얼거렸다. "미친년, 정인(情人)을 목전에 두고도 못알아보다니... 두 눈을, 두 눈을 멀쩡 히 뜨고서도..." 채경령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유진목이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달 려왔다. "쓸모도 없는 눈알, 달고 다녀서 무얼 할고!" 채경령이 갑자기 두 손을 올려서 눈을 움켜잡았다. 유진목이 달려들어서 채 경령을 제지했지만 이미 무공이 전폐된 평범한 노인의 힘으로 어림없었다. 한 손만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구슬만한 눈알이 핏줄에 엉켜서 땅바닥을 굴렀다. "아니다. 아니다. 겨우 눈이나 가지고 이럴 것이 아니다. 사람하는 사람을 두 번이나 대신 죽여놓고..." 채경령이 유진목을 밀치며 휘적휘적 걸어갔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 번이나 대신 죽였으니 나는 무엇으로 죄값을 치를까. 한 번은 할아버지가 대신 갚았다치고나머지 한 번은 무엇으로 갚을고! 내가 죽일 년이지." 채경령이 바위를 향해서 그대로 몸을 던졌다. 이마가 깨지고 코뼈가 부러지 며 이빨이 사방으로 튀었다. 강호가 한 목소리로 목선민을 칭송하였다. 드디어 팔십년의 원한을 풀었다. 설산대룡 목선민이 마검 추혼십이절의 전인을 꺽고 흑염대도를 무림의 전설 로 우뚝 세웠다. 세인들은 설산대룡이야마로 천하제일 고수라고 침을 튀겼 다. 그러나 단 한사람 역불기만은 코웃음을 쳤다. 역불기가 아는 사람만 해 도 목선민 따위가 넘볼 수 없는 고수가 적어도 세명은 되었다. 그 중 하나 는 자기자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금 자기가 지켜보고 있는 모옥의 주인이 었다. 물론 모옥의 주인은 역불기의 손에 무공이 전폐되어버렸지만 그래도 그 고절한 경지만은 감히 목선민 따위가 따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은 이제 조만간에 모옥을 찾아올 사내였다. 역불기는 그가 반드 시 모옥을 찾아오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역불기가 끈기를 가지고 기다린 지 석달만에 드디어 그 사내가 모옥을 방문했다. 역불기는 말없이 주인과 손 님을 지켜보았다. "뉘시오?" 유진목이 말했다. "예전에 채가장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먼길을 떠나야겠기에 채장주님 의 존안을 뵙고자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초점이 없는 쾡한 눈에 썩은 돼지간처럼 시커먼 얼굴색을 가진 사내였다. 거기다가 온통 주름투성이였고 팔다리마저 이상하게 뒤틀려 있었다. 추악하 기로는 그 옛날 모진위라는 아이와 쌍벽이었다. "안됐구료. 만나실 수 없소이다." "한 번만... 부디 한 번만..." 사내가 더 할 수 없이 간절한 어조로 머리를 조아렸다. "채장주는 죽었소이다." "... ..." 사내가 갑자기 사부에게 대례를 올리는 듯 유진목에게 예를 취했다. 유진목 이 당황하여 얼른 팔을 잡았다. "왜 이러시오? 댁은 뉘시오?" "이름없는 촌부입니다. 부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사내가 아쉬운 눈길로 등을 돌렸다. "잘가시오." 그때, 쪽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나왔다. "누가 왔어요?" 산발한 머리카락이 얼굴 한쪽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그저 길을 묻더군요. 바람이 찹니다. 얼른 들어갑시다." 유진목이 문쪽으로 돌아서며 여인을 재촉했다. 여인이 유진목을 따르며 뒤 롤 돌아보았다. 멀어지고 있는 사내의 축처진 어깨가 보였다. 그때 바람이 불어와 여인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동굴처럼 휭하니 뚫려있는 동공, 거기 다가 코가 납작하게 주저 앉았다. 여인이 입을 벌리며 곱게 웃었다. 상아 같 이 새하연 치아였으나 듬성듬성 두어 개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사내가 역불기의 나무 밑을 지나고 있었다. 역불기는 나무에서 뛰어내리며 사내를 막았다. "놈, 오랜만이로구나." "... ..." "내숭떨지마라. 노부의 눈은 숨기지 못한다. 네 놈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간에 나는 네 놈을 알아볼 수 있다." 역불기가 번쩍하고 연도를 뽑아 들었다. 그러나 사내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역불기를 바라보고만 했다. 두려움도, 근심도, 갈등도 없는 아주 평온한 얼굴 이었다. "모진위 이 놈!" 역불기가 손을 부르르 떨었다. 문득 악몽이 떠올랐다. 투지와 살욕이 간데 없이 실종되고 권태의 나락에 떨어지던 그때의 악몽이 다시 되살아났다. 오 몽생의 그 고요하고 잔잔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때 왜 자 신이 그러했는지를. 사내의 얼굴이 그 이유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오 몽생의 얼굴이 사내의 얼굴에 겹쳤다. 역불기가 힘없이 도를 떨구었다. 다시 집으려 했지만 의욕이 일지를 않았다. 사내가 정감이 가득한 미소를 보내더 니 말없이 역불기를 지나쳐 갔다. 역불기는 오랫동안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가 언덕을 넘어서 사라진 후에 도 한참동안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역불기는 자신이 더 이상 도를 잡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다시는 살수로 돌아갈 수 없음을 절감했다. 흑수노계였습니다. 『무림천하-창작연재란 (go MURIM)』 2760번 제 목:[연재] 표류공주 끝 -최후식 올린이:하이문 (문홍일 ) 99/11/24 22:07 읽음:146 관련자료 없음 ----------------------------------------------------------------------------- 번 호 : 9800 게시자 : 최후식 (darkhope) 등록일 : 1999-11-24 16:13 제 목 : [연재] 표류공주 -끝- 25. 표류공주(漂流空舟) 종수(綜修)는 시정잡배였다. 그것도 아주 질이 안좋은 시정잡배였다. 하지만 지금도 잘나가는 건달인지에 대해서는 종수 자신도 의문이었다. 나이가 들어 기운이 떨어지자 남의 돈 뜯어먹는 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모름지기 남을 등 쳐먹으려면 힘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일이라는 것을 해보자니 배운 기술도 없고, 몸을 움직이는 노동은 영 체질에 맞지 않았다. 그러니 늘 쇳가 루가 딸릴 수밖에 없었다. 종수는 오늘도 껀수를 찾아서 동화가(冬花家)골목 을 빈둥거리고 있었다. "아직 죽고 않고 살아 있었냐? 짜식, 엄청 뻔뻔스럽네. 이놈아 하늘이 부끄 럽지 않냐?" 한때는 같이 뒷골목을 휘저었던 복태(卜台)였다. "야아, 너 잘만났다. 쩐(錢)이나 몇 푼 있으면 다구. 기집들 보고 있자니. 쏠 려서 못살겠다." 동화가는 성내의 싸구려 창녀촌이었다. 오늘따라 제법 삼삼한 가시내들이 종수의 아랫도리를 자극하고 있었다. "일해라. 일해. 이 망할 자식아! 아직도 남의 등쳐먹을 생각이나 하냐?" 복태는 이미 변절자였다. 복태도 한때는 땀 흘리는 것을 죽도록 싫어하는 불한당(不汗黨)이었다. 그러던 놈이 어느 날부터인가 날품팔이로 나섰다. 신 분에 전혀 안어울리는 천한 일마저 불사했다. "그러지 말구 좀 주라." "일없다." 복태는 어림없는 수작말라는 듯이 눈을 부라렸다. 종수는 섭섭했다. 그래도 불알친구가 아니던가. 잠시 후, 종수는 자신의 가슴에서 불덩어리가 치미는 치욕을 경험하게 되었다. 종수는 복태가 정말 복태인지 다시 한 번 쳐다보았 다. 한때의 인상 고약한 깡패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순한 얼굴이 되었 다. 종수가 온순한 강아지처럼 꼬리를 살랑거렸다. 동화가의 창녀 주월(晝月)이였다. 주월이가 제법 묵직한 보따리를 종수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러시면 안돼요. 아저씨도 어려우시면서..." "아니다. 간만에 돈 좀 생겼지. 너 많이 야위었더라. 제발 좀 엄한 놈들 퍼 주지 말고 몸보신 좀 해라. 너 쓰러지면 나도 끝장이다." 옥신각신하는 사이, 보따리가 살짝 벌어졌다. 종수는 눈알이 튀어나왔다. 분 명히 흰 쌀과 고기였다. 이윽고 다툼은 복태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복태 가 자신은 아직도 여유가 있다는 증거로 동전꾸러미를 꺼내보이며 동전마저 건네주려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주월은 손사래를 치면서 도망치듯 물러가 버렸다. "복태야, 이놈아. 네 놈이 드디어 실성를 하고 말았구나. 주월이 년과 정분 나다니... 세상에...! 그런 마귀 같이 흉칙한 년을 먹느니 차라리 딸딸이를 치 고 말겠다, 이놈아." 갑자기 복태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옛적의 명성을 생각케하는 고 약한 표정이었다. "아이고, 이 놈이 정말로 실성했구나." 복태가 불문곡직하고 종수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종수는 기선을 제압당 한 채, 좀체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과거의 무공수위로 논하자면 복태나 종 수나 피장파장이었다. 그러나 종수는 망할 놈의 쇳가루 부족으로 어제 아침 부터 시종일관 굶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복태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종수가 겪어보지 못한 극한의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었다. 종수가 쓰러 졌다. 그러나 복태는 아직도 분이 안풀린 듯 몇 마디 씨부렁거리고는 다시 복태를 짓이기기 시작했다. "이 개 같은 놈아, 네 놈이 내 어머니를 모욕했다." 한참을 얻어터지던 종수는 이제는 끝났는가 한숨을 돌리려는데 이번에는 복태가 누이를 들고 나왔다. "이 호로잡종아, 네 놈이 내 누이를 욕보였다." 누이뿐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여동생을 거론하더니 종내에는 결혼한 적도 없는 홀애비 주제에 없는 마누라까지 들먹이며 종수를 떡으로 만들었다. 종 수로서는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이틀 밤낯을 뜬 눈으로 지새운 종수가 드디어 복수의 칼을 들었다. 주월이 를 찾아나선 것이었다.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복태는 너무 강 했다. 시정잡배답게 만만한 주월이를 선택했다. 정말 밥맛떨어지는 시궁창 같은 얼굴이었다. 동화가 유일의 무료봉사 창녀 였다. 주면 받고, 안주면 안받고 화대(花代)는 손님 마음대로였다. 하긴 돈을 주고 자자고해도 종수같으면 마다할 판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거지고, 병자 고, 팍 삭은 늙은이고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배고프다면 밥을 지어 주고, 아프다면 약까지 사먹인다고 했다. 하긴 그쯤은 되야 그래도 가물에 콩나듯 사내가 얻어 걸릴 것 같기는 했다. 종수는 주월을 희대의 색녀라고 단정짓고 있었다. "드세요." 정말 밥맛 떨어지는 얼굴이었다. 실컷 얻어맞은 주월이 밥상을 들고 들어왔 다. 그저께 복태가 건네준 쌀과 고기가 아직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흘 을 굶은 종수였지만 도저히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밥맛 떨어진다, 이 년아. 돌아 앉아라." 종수는 똥이라도 피하듯 주월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지내던 터라 이번이 주월과의 첫 대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종수는 자기 마누라라도 되는 듯, 오지게 두들겨 패고는 거드름을 피웠다. 얼굴만 쳐다봐도 속에 든 것이 넘어올 것 같았지만 사흘을 굶은 처지이다보니 찬밥 더운밥 가릴 수가 없었 다. 예상외로 밥맛이 좋았다. 정갈한 소채와 잘 삶은 돼지고기였다. 요리솜씨 만은 생긴 것하고 딴판이었다. 이빨을 쑤시며 물러나던 종수가 주월의 뒷태(態)를 보았다. 뒷모습만은 전 혀 딴판이었다. 풍만한 곡선과 요염한 자태, 군침이 절로 넘어갔다. '에라이, 돼지 얼굴보고 잡아먹냐. 두 눈 딱 감고 뜨지 않으면 그만이지. 간 만에 객고나 풀어보자.' "어머!" 종수는 등 뒤로 주월의 어깨를 감아 안으며 그대로 자빠뜨렸다. 두 눈을 질 끈 감은 채로 허겁지겁 저고리를 벗어제꼈다. 놀랍도록 탄탄하고 매끄러운 가슴이었다. 살짝 눈을 뜨고 가슴만 바라보았다. 어깨를 활짝 젖힌 채, 누웠 음에도 주월의 가슴은 전혀 힘을 잃지 않고 도톰한 봉우리를 유지하고 있었 다. 티 한 점없이 새하얀 가슴이었다. 종수는 본격적으로 가슴을 주물럭거리 며 치마도 벗겨내었다. 곧게 뻗은 수밀도의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실로 악마의 얼굴에 천사의 몸매가 아닐 수 없었다. 종수는 머리통이 텅비어 버릴 정도로 황홀해졌다. 주월이 부드럽게 종수를 감았다. 또한 종수가 가장 편안한 자세로 자신의 육체를 탐닉하도록 한껏 자신의 몸을 개방해 주었다. 가슴을 만지면 가슴이 반응했고, 허벅지를 쓰다듬으면 허벅지가 반응했다. 종수가 엉덩이를 주무르 고 싶어하면 말을 안해도 허리를 틀어주었으며, 상반신을 세워서 가슴을 빨 면 어린아기를 받쳐주듯 두 손으로 머리를 받쳐주었다. 그녀의 손길은 너무 도 부드러웠고, 그녀의 품 속은 너무도 따스하였다. 그녀는 종수를 왕중의 왕으로 지극 정성을 다했다. 종수는 꿈속을 헤매이듯 혼미한 가운데 주월이 대응하는 반응에 신경을 곤 두세웠다. 종수의 손이 '추워.'하고 말하면 따스한 품으로 감싸주었다. 종수 의 시린 어깨가'외로워.'하고 말하면 그녀의 가슴이 '이리와.'하고 안아주었 다. 종수가 피부의 탄력을 즐기고 있으면 그녀의 허벅지가 '좋아?' 하고 물어주 었다. 만약에 종수의 허리가 '안좋아.'하고 대답하면 그녀의 허리가 완만한 곡선으로 품어 안으며 '이젠 괜찮아?'하고 물었다. 언제나 그랬다. 드디어 종수도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때?' '좋아. 편안해.' 종수는 헐벗고 외로웠던 어린시절을 기억했다. 종수가 슬퍼하며 가슴을 떨 면 그녀의 입술이 부드럽게 위로해주었다. 종수가 각박하고 몰인정한 세상에 몸서리를 치면 머리카락으로 간지르며 토닥여 주었다. 어느새 종수가 묻고 있었다. '좋아?' 그녀의 다리가 기쁨으로 부르르 떨었다. 아주 즐겁다는 대답이었다. 종수도 그녀에게 정성을 다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어느 왕녀보다도 더 존중했다. 종 수가 왕이고, 그녀는 왕비였다. 종수는 몰랐었다, 사람과 사람이 혀와 이빨이 아닌 몸과 마음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대화는 오로지 진실하다는 사실을. 종수는 몰랐 었다. 정말 꿈에도 몰랐었다. 종수는 울었다. 그냥 눈물이 쏟아졌다. 한참동 안 서럽게 울었다. 주월은 하얗게 밤이 새도록 그런 종수를 보듬어주고 위로 해주었다. 날이 밝았다. 종수가 주월을 바라보았다.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운 얼굴이었 다. 흉칙한 상채기에 동굴같이 뻥 뚫린 동공도 있었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 로 납작하게 뭉그러진 코도 있었고, 먹다버린 옥수수처럼 듬성듬성한 이빨도 있었지만 더 이상 종수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의 유리 처럼 맑고 아름다운 오른쪽 눈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종수는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졌다. 종수가 다시 생각해 보니 복태의 말은 사실이었다. 후레자식 종수는 자신를 낳은 어머니를 모욕한 것이고, 사 랑하는 누이를 경멸한 것이고, 귀여운 여동생을 욕보인 것이었다. 복태의 성 난 음성이 쟁쟁하게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보름 후였다. "이봐, 나도 일 좀 하자." 복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복태가 알기로 종수는 죽을 때까지 절대로 철이 들 놈이 아니었다. "니가 왜?" "부탁한다. 아무 거라도 좋다. 똥통에 들어가라고 해도 들어갈게." 마침 남겨진 일거리는 진짜 똥통 속으로 들어가는 잡일이었다. 종수는 복태 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하루종일 똥통 속에서 땀을 흘렸다. 기꺼이 아주 기꺼이 땀을 흘렸다. 사흘 후, 종수는 생애 최초로 일당이란 것 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종수는 동전을 손에 쥐자마자 저자거리로 달려가 감자와 보리와 야채를 샀다. 그리고 그런 것들보다 턱없이 비싼 지분까지도 샀다. 물론 주월이 지분을 반가워할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사고 싶었다. 종 수는 한달음에 달렸다. '까닥하면 주월이는 굶어 죽는다. 지 먹을 거 하나 없어도 온갖 잡놈들에게 온갖 것을 다 퍼다주는 년이다. 아차하면 굶어죽는다.' 종수는 숨이 턱에 차도록 동화가 뒷골목으로 달렸다. 종수는 모르고 있었지 만 주월은 여간해서는 굶어 죽지 않게 되어 있었다. 성의 시정잡배란 잡배는 모두 다 주월이 굶어죽을까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일터로 나갔으며 먹거리 를 퍼날랐다. 덕분에 동화가에는 굶어죽는 거지가 하나도 없었다. 종수가 죽을 상이 되어서 동화가를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왠 일이냐? 돈도 버는 놈이 사흘동안 피죽 한그릇도 못얻어먹은 쌍판을 해가지고는... 무슨 일있냐?" 복태였다. "없다." "근데 왜?" "저..." "말해봐라. 사내자식이 뭘 꾸물거리냐?" "주월이가 없어졌다. 벌써 닷세가 넘었다더라." "뭐? 너 그거땜에 그러냐?" 복태가 갑자기 배를 잡고 웃었다. "웃지마라. 나는 심각하다." "걱정마라, 구멍동서야. 겨울이 되기 전에 반드시 돌아올거다. 동네건달이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인데 왜 너만 모르고 있냐? 걱정마라. 해마다 이맘때면 꼭 짐싸들고 어디론가 떠나더라." "어디 가는데?" "난들 아냐? 입을 꼭 다물고 있는데." 소홍(素紅)은 그만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마을에서는 그래도 말 잘한다 고 소문난 아낙이었다. 오죽하면 수다장이 소홍일까. 반면에 소홍의 남편 황 충돈(黃忠敦)은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남정네였다. 부부간에 말다툼이 생기 면 거의 소홍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소홍이 신속무비한 속도와 현란한 초식 으로 속사포를 쏘아대면 황충돈은 일패도지였다. 무뚝뚝하기는 하지만 성격 이 나쁜 편은 아니라서 대부분 무난하게 아내의 타박을 받아주던 황충돈이 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승부에 임해서는 단 한 번도 소홍은 충돈을 이겨본 적이 없었다. 결혼생활을 통털어서 첫임신 이후 오년간을 제하고는 단 한 번 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신혼때는 아직 본색을 들어낼 수 없는 처녀적 부끄 러움이 남아서 그랬다고 치더라도 나머지 세월은 경험과 이론 양면에서 이 미 득도의 경지에 오른 그녀였건만 결정적인 승부에 임해서는 언제나 패배 의 쓴잔을 마셨다. "자기 새끼 잡아먹은 년이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남편 황충돈이 직경 십 척짜리 대못을 소홍의 가슴에 박아 버리면 그것으 로 끝이었다. 그 한마디로 소홍은 언제나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가슴 속의 피멍이 맺히고 속은 새카맣게 타버렸다. 십년전에 다섯 살짜리 외동아들을 잃고 맺혀버린 응어리였다. 물론 남편 충돈이 항시 자식을 들고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도 죽은 자식이야기만은 극력으로 피하는 편이었다. 다만 서로 가 물러설 수 없는 악다구니의 상황이 오면 그만 이성을 잃어버리고 비장의 무기처럼 소홍의 아픈 곳을 찔러오고는 하였다. 오늘도 그랬다. 소홍은 가슴이 답답하고 맥이 빠져서 아침도 거른 채 죽은 듯이 누워있었 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구보(龜甫)라도 만나볼 생 각이었다. 구보가 처음 마을에 나타났을 때, 소홍은 기겁을 했다. 세상에 못생겨도 그 렇게 못생긴 사내는 처음 보았다. 썩은 동태 눈깔은 그의 눈동자를 대신하는 말이었고, 썩은 돼지간은 그의 얼굴빛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굽은 허리와 뒤 틀린 사지에 이르면 더 이상 표현할 말도 없었다. 동네아이들이 돌을 던져대며 놀렸고 어른들은 발길로 걷어차며 경멸하였다. 그래도 구보는 웃었다. 그냥 빙그레 웃었다. 어느 집에서도 상한 밥 한 공기 내주지 않았고, 어느 처마 밑에서도 재워주지 않았다. 그래도 구보는 사람좋 은 미소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독버섯이라도 잘못먹었는지 구보는 개 울가에 누워서 끙끙 앓았다. 마을사람들은 시체가 나는 것을 꺼려서 식은 죽 에 흔한 약초를 다려먹였다. 기실은 시체를 꺼리기보다는 그의 미소를 다시 는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근심이 마을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것이었다. 언 제부터인지 아무도 그의 흉칙한 얼굴을 혐오하지 않았고 언제부터인지 아이 들도 그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다. 그가 웃으면 등을 돌리고 몰래 웃었다. 구 보의 흉칙한 웃음은 왠지 마을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허드렛일을 시키고 밥을 주었으며 공동묘지 근처에 오두 막까지 마련해 주었다. 겉으로는 '손이 모자라니 그 놈이라도 써야지. 부려먹 었으니 밥은 먹여야지. 꼴보기 싫으니 마을밖에 재우자'였지만 속으로는 모 두가 구보가 굶어죽을까봐, 구보가 얼어죽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이 다. 해가 거듭되자 구보는 마을 대소사면 빠지는 곳이 없게 되었다. 자식없 는 노인네가 병으로 누비라도하면 온동네에서 끼니를 걷어다 먹였고 울고있 는 아이라도 있으면 달래느라고 쩔쩔매기도 했다. 이윽고 마을의 궂은 일은 몽땅 구보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구보가 없으면 마을의 대소사가 엉 망진장이 될 판이었다. 구보는 공동묘지의 귀퉁이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러다보니 마을에서 누 가 죽으면 모두가 꺼리는 시신의 처리는 당연히 구보의 몫이 되었다. 구보는 사람이 죽으면 누구보다 슬피 울었다.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도 툭하면 눈가에 눈물방울을 달았다. 또한, 사람이 새로 태어나면 누구보다 기뻐했다. 길을 가다가도 문득 생각나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안심하고 아기 를 맡겼으며 돌아가신 부모를 맡겼다. 마을에 지독한 역병(疫病)이 돌게 되었다. 날마다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손 을 쓸 틈도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역병에 걸린 사람들을 구보의 움막 앞에 모아놓고 마을을 떠났다. 역병에 전염되었으니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 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왔을 때 구보의 움막에는 죽은사람보다 산사람 이 더 많이 보게 되었다. 대신 구보가 때늦은 역병에 걸렸다. 이미 역병은 물러갔는데도 구보만 병들어 있었다. 역병으로 남겨졌던 사람들은 구보를 버 러지 않았다. 구보가 자신들의 목숨을 구했는데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구보 를 버리겠느냐는 것이었다. 돌아온 사람들도 반대할 수가 없었다. 소홍은 눈물이 아른거려서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용케도 구보의 오두 막으로 가는 길만은 잘도 찾아갔다. 언제나 눈물범벅으로 오르던 길이었다. 구보는 언제나 말없이 들어주었다. 그리고 소홍이 울면 울어주었고, 소홍이 웃으면 웃어주었다. 진심으로 슬퍼해 주었고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다. 소홍 만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그러하였다. 마을사람들은 기쁜 일이건 슬픈 일 이건 구보부터 찾았다. 구보가 언제나 자기일처럼 진정어린 마음을 나누어주 었기 때문이었다. 오두막의 쪽문을 열고 와락 눈물바다부터 쏟아내려던 소홍이 놀란 토끼눈 을 하였다. 구보가 없었다. 잠시 밖에 다니러간 모양새가 아니었다. 잡동사니 들이 말끔하게 정리된 것이 아마도 먼 길을 떠난 것 같았다. '어머,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소홍은 허전한 마음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해마다 구월이면 구보는 어 디론가 여행을 떠났다. 어디가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여비를 주어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는 때가 되면 다시 돌아왔다. 단 한 해도 거르는 법이 없었다. 벌써 구월이 돌아온 것이었다. 주월이 항주에 도착한 것은 시월을 이틀 앞둔 저녁이었다. 수천 리길을 걸 어 왔으니 응당 그녀의 꼴은 거지중에도 상거지였다. 주월은 항주에 도착하 기 바쁘게 해임현(해임현)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항주에서 바다쪽으로 이 백여리 떨어진 곳에 응과정(응과頂)이 있었다. 구보는 주월보다 반나절가량 늦은 그믐날 오전에 이르러서야 항주에 도착 했다. 역시 상거지꼴이었다. 구보는 전단강(錢塘江)을 끼고 응과정과 이웃해 있는 봉황산(鳳凰山)으로 향했다. 응과정의 정상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 무화대사(無化 大師)는 강물을 내려다보는 있는 처자의 눈빛이 하도 고요한 지라 자기도 모 르게 말을 건넸다. "무엇을 그리 골똘히 보고 계시오, 여시주?" 여인이 고개를 돌리고 방긋 웃었다. 입 속이 허전한 것이 창살이 빠진 창틀 을 방불케 했다. 게다가 납작코에 애꾸눈이었다. 볼성 사나운 몰골이었지만 수양이 깊은 무화는 전혀 게의치 않았다. 무화대사가 잠시의 당황이 미안했 던지 한 마디 덧붙혔다. "허허, 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있누." 멀리 상류에서 빈 배가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지만 구월 그믐날, 그날 단 하루만은 전당강 하구가 불야성이 되었다. 그 불빛으 로 강물 위의 배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저 배임자가 아시는 분이시오?" "아닙니다. 스님, 저 배는 어찌 될까요? 그저 물결따라 방황하다가 좌초하고 말겠지요?" "허허, 아무래도 그럴 것 같구료." 주월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빈 배와 관련된 무슨 가슴아픈 사연이라도 있으신 게지요?" "아닙니다. 저 배를 보고 있자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 분의 생애가 꼭 저 빈배 같았답니다. 강호의 거친 세파가 그분을 사공없는 나룻배꼴로 만 들어 버렸지요." "아미타불! 어디 그 분 뿐이시겠습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가 아니겠 지요. 불가에는 삼불가지(三不可知)라는 말이 있지요. 불존께서 이르시길, 사 람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그걸 바로 삼불가지라 하지요." 빈 배가 산모퉁이를 돌아서 모습을 감추었다. 빈배가 이윽고 봉황산 밑에 이르렀고 구보가 그 배를 바라보았다. 배는 봉 황산을 끼고 하구의 나룻터로흘러갔다. 바닷물과 강물이 합류하는 곳이라 나룻터는 여간 번성한 것이 아니었다. 때마침 구월 그믐밤이라 더욱 배가 붐 볐다. 나룻터는 서로 빠져 나가려는 배들로 부산스럽기 그지 없었다. 사공들 이 서로 마주보며 양보를 하지 않았다. 하루종일 땀을 흘린 사공들은 피곤에 지쳐서 노를 젓기도 힘겨워했다. 설혹 맞은 편에 배가 오고 있더라도 노를 저어 피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가 피해주기만을 바랬다. 그러다 가 서로 충돌하는 배도 있었다. 사공들이 언성을 높히며 싸웠다. 급기야 주 먹다짐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아수라장의 나룻터에 빈 배가 흘러 들어갔다. 사공이 있는 배들은 서로 부 딪치고 싸웠지만 아무도 빈 배와 싸우지는 않았다. 사공이 없는 배와는 갈등 이 있을 수가 없었다. 사공과 빈 배는 싸우지 않았다. 봉황산도 응과정 못지 않게 사람들이 붐볐다. 전망이 좋은 자리에서는 소란 이 끊이지를 않았다. 늦게 온 자들은 틈새를 파고들며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 없었고 먼저 자리를 차지한 자들은 그것을 꺼려서 경계의 마음을 풀지 않았 다. 어깨를 나란히하고 서로를 밀어부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말 다툼이 벌어졌다. 서로가 경계하고 시기하였다. 아무도 구보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구보의 자리가 명당자리와는 거리가 멀 기도 했지만 꼬락서니가 남의 자리나 넘볼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 람들은 구보를 조금도 의식치 않았다. 마치 사공과 빈 배와 같았다. 어디선가 경탄성이 터져나왔다. "와아! 일월병승(日月幷昇)이다." 사람들은 일제히 항주만의 바다를 쳐다보았다. 수평선 위로 해와 달이 동시 에 떠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구보와 주월도 그들과 같았다. 해마다 음력 시월 일일(十月 一日), 단 하루만은 항주만에서 해와 달이 동 시에 떠올랐다. 그 진경을 볼 수 있는 곳은 항주에서도 단 두 곳, 봉황산과 응과정 뿐이었다. 항주를 모르는 자들은 서호십경(西湖十景)을 떠들었지만 항주를 아는 사람들은 음력 시월 일일의 일월병승을 이야기했다. 해마다 구 월 그믐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봉황산과 응과정에 올랐다. 구보와 주월도 어 김 없었다. 흑수노계 이만 물러갑니다.